여덟쪽 bookl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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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30일 국립국어원

쉼표 ,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 ‘바탕화면’과 ‘배경화면’ ‘오리의 추위’? 날씨 표현에 담긴 프랑스인의 생활과 문화 도회점경-룸펜, 백수, 백조

。 마침표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 시인 김경주 편

어떤 새도 인간의 상상력보다 높이 날 수는 없다. 테라야마 슈지寺山修司,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 중

한 권의 책은 그 사람의 운명을 바꾸기도 한다는 믿음에서 우리는 독서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 한 권의 훌륭한 책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아름다운 문장의 복도들로 드나드는 경험이다. 작가가 빚어낸 문장이라는 그 복도를 돌아다니다 보면 문득 저 혼자 남겨지는 공포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는데 그때 그것은 경이에 가까운 감동이거나 공포에 가까운 환희일 확률이 크다. 위의 문장은 테라야마 슈지의 책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에 실려 있는 구절이다. 일본 독립 예술의 시초가 된 테라야마 슈지의 자전적 에세이의 한 토막이다. 새로운 실험과 예술의 전위에 대해 우리가 오마주를 바치지 않을 수 없는 한 예술가의 책, 국내에 유일하게 번역된 그의 책이기도 하다. 저 문장의 영역으로 탐사를 떠났던 일은 내가 가진 독서의 경험 중 가장 황홀한 것으로 꼽을 수 있게 되었다.

글_김경주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기담>, <시차의 눈을 달랜다>가 있다. 김수영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등을 수상했다.


언어의 흔적

도회점경 – 룸펜, 백수, 백조

실업자의 심경心境은 그가 아니면 모른다. 아츰에

백수는 무엇이고 룸펜은 무엇인가. 둘 다

뜨는 해도 보기 실코, 밤에 뜨는 달도 보기 실코,

실업자거나 무직자라는 것은 같다. 그러나

모-든 색채 모-든 움즉이는 물체, 아모리 조흔

백수가 그냥 놀고 있는 사람이라면, 룸펜은

소리라도 다- 듣기 실코, 도대체 사는 것이 실타.

어딘가 사연이 있는 사람의 분위기를

집안에 잇스면 처다보고 바라다 보고, 무에 나올가

풍긴다. 룸펜 프롤레타리아거나 룸펜

하고 기대리는 집안 식구가 가엽고, 밧글 나아오면

인텔리겐치아라는 단어를 들어 본 적이 있을

맛나는 사람마다 “요새 무얼하시우” 하는 말을

것이다. 각각 무산자無産者 룸펜이거나 지식인

드르면 주둥이를 쥐여박구 십고

룸펜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룸펜이 나오는

* 어쨌든 그날의 그 해는 지내 버려야 할 터이니 돈

소설을 알고 있다. 염상섭의 《삼대》에 나오는

십 전만 잇스면 찻집이 조타고 드러가나 컵피차

할 수 있다.

조병화 같은 인물을 룸펜 프롤레타리아라고

한 잔만 먹고 왼종일 안저잇슬 수는 업스니, 길로 헤맨다. 이래서 양복쟁이 룸펜이 된다. 그러나

룸펜Lumpen. 직업이 없는 사람이라는

찻집에는 무위도식군의 출입도 만타. 부랑녀와

뜻의 독일어다. 이 어원을 알기 전에 나는

부랑자도 여긔서 맛나 가지고는 암흑면으로 다러

룸펜이란, ‘방room’에서 빈둥대며 ‘글pen’을

간다. 쪽쪽 드리 마시는 찻물이 사람에 따러 맛이

쓰는 사람을 한심하게 여기는 말이라고

다르고, 먹을 때의 그 순간의 생각이 다- 다를 것이다.

생각했다. 백수의 뜻을 알고도 다소 놀랐다.

*표기는 원문의 것을 그대로 인용하되,

시적이라니

띄어쓰기는 일부 수정함 안석영安夕影, 도회점경都會點景, 《조선일보》1934. 2. 9.

백수白手. 손이 흰 사람이라는 뜻이다.이렇게 김기진의 시 <백수의 탄식>1924에는

‘너희들의 손이 너머도 희고나!’라는 구절이 총 네 번 나온다. 정지용의 시 <카페 프랑스>1926에는 ‘남달리 손이 희여서 슬프구나!’라는 문장이 들어 있다.


소설 속 새말

나의 일상으로 바로가기 ‘바탕화면’과 ‘배경화면’

문득 엘피판의 선율이 그리워진다면, 그것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인터넷 창을 닫았다. 바탕화면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누군가를 기다리던

속에서 딸아이를 안은 아내가 세상을 다 가진 듯

설렘이며, 빨간색 공중전화기, 그 앞에서

웃고 있었다. 《김경욱, 고독을 빌려 드립니다》

10원짜리 동전을 들고 몇 번이나 머뭇거리던 망설임이다. 그런 설렘과 망설임을 뒤로 하고, 지금 컴퓨터의 ‘바탕화면’을 마주하고 있는 우리는 엘피판 대신 ‘바탕화면’의 아이콘을 클릭하여 음악을 듣고, 다른 노래를 듣고 싶을 땐 그저 또 한 번의 클릭이 필요할

핸드폰으로 찍어 놓았던 그녀의 뒷모습을 컴퓨터의 바탕화면에 깔아 놓았지만, 컴퓨터로 옮겨 놓은 사진의 해상도는 핸드폰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형편이 없었다. 《장정일, 구월의 이틀》

우리가 흔히 컴퓨터나 스마트폰 등에서

뿐이다. 먼지가 켜켜이 쌓인 책꽂이를 뒤지지

예쁜 그림이나 가족사진으로 꾸미는 것은

않고도 한 번의 클릭으로 원하는 책을 찾아

‘wallpaper’, 즉 ‘배경화면’이다. 말하자면

읽고, 며칠의 기다림 없이도 한 번의 클릭으로

위 소설 작품에 나오는 ‘바탕화면’의

편지를 주고받는다. 이 모든 일들이 ‘바탕화면’

정확한 표현은 ‘배경화면’인 것이다. 실제로

덕이다. XT, AT286, 386, 486 그리고 펜티엄,

‘배경화면’은 ‘바탕화면’보다 더 먼저 쓰이기

컴퓨터의 진화와 함께 1990년대 중반에

시작했다. 그러나 문학 작품 속에서는 그

등장한 ‘윈도Windows나’ ‘맥Mac OS’의 작업

용례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 아래에서 보듯,

공간인 ‘그’는, 아날로그 문화가 디지털 문화로

신문 기사로는 쉽게 검색된다.

바뀌는 전환 선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바탕화면’이 문학 작품 속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이후부터이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영화 포스터부터 시작해서 멋진 사진들을 많이 보게 된다. 이 그림들을 자기 컴퓨터의 배경화면으로 깔고 싶을 때…… 《경향신문, 1996. 10. 14.》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영화 포스터부터

컴퓨터를 켜고 바탕화면에 바로가기를 해 두었던

시작해서 멋진 사진들을 많이 보게 된다. 이

파일을 클릭했다. 한글 화면이 떠오르기 무섭게 흰

그림들을 자기 컴퓨터의 배경화면으로 깔고 싶을

여백 위로 글자들이 쏟아졌다.

때…… 《경향신문, 1996. 10. 14.》

《권정현, 굿바이 명왕성》

평범한 스마트폰 초기 배경화면을 폰 꾸미기 앱을

‘바탕화면’은 ‘책상 위’라고 하는 3차원의

통해 사용자 개성이 담기도록 다채롭게 바꿀 수

물리적 공간을 2차원의 평면 속으로

있다. 《한국일보, 2013. 4. 18.》

끌어들인 것이다. ‘바탕화면desktop을 여는’

엄밀히 말해서, ‘배경화면’은 ‘바탕화면’을 구성하는 한 요소이다. 가령 윈도나 맥 등을 운영 체제로 쓰고 있는 컴퓨터의 부팅이 끝났을 때 나타나는 첫 화면이 ‘바탕화면’이다. 윈도의 ‘바탕화면’은 사용자들이 마음대로 바꾸거나 꾸밀 수 있는 ‘배경화면’, 문서 작성, 그래픽 작업, 인터넷 접속 등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다양한 응용 프로그램의 ‘아이콘’, 컴퓨터를 켜고 끌 수 있는 ‘시작 버튼’, 현재 어떤 작업이 진행 중인지를 보여주는 ‘작업 표시줄’, 작업하고 있는 일을 저장하거나 출력할 수 있는 ‘폴더’ 등으로 구성된 작업 공간 혹은 ‘작업창’을 통으로 일컫는 말이다. ‘바탕화면’을 영어에서 ‘데스크톱desktop’이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데스크톱’은 ‘데스크톱 메타포desktop metaphor’ 즉, 책상

위의 환경을 그대로 컴퓨터

화면 속에 구현한 작업 공간을 의미하는

것은 책상이 있는 어떤 공간 속으로 자신을 끌어들이는 것이며, ‘바탕화면wallpaper을 갈거나 바꾸는’ 것은 자기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거나 꾸미는 일이다. ‘바탕화면’이나 ‘배경화면’ 모두 우리 생활에 깊숙이 자리를 잡은 말이다. 그러나 아직 북한이나 중국 동포 사회에서 간행된 문헌에서는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 아직 그들 사회에서는 ‘바탕화면’이나 ‘배경화면’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지 않거나, 아니면 아직 우리가 알고 있지 못한 다른 용어를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디지털 방식의 빠르고 편리함이 몸에 밴 우리에게는 이제 아날로그 방식이 불편할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오늘은 사랑하는 이에게 연필로 꾹꾹 눌러쓴 편지 한 통 보내는 여유를 가져 보는 것은 어떨까?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우리나라에서 ‘바탕화면’이라는 뜻보다는 ‘데스크톱 컴퓨터’, 즉 ‘개인의 책상 위에 설치할 수 있는 작은 컴퓨터’라는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글_이길재

대부분이다.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새어휘부 부장.

그는 그 소리들로 윈도를 읽는다. 아이콘이 없는 빈

책임연구원, 호남문화정보시스템 책임연구원 등을

바탕에서 마우스가 정지하면 바탕화면이라는 기계음이 반복된다. 《박금산, 귓속의 길》

전북대학교 대학원 국어학 박사. 전북대 인문과학연구소 지냈으며 논문으로는 <전이지대의 언어 변이 연구>, <전라방언의 중방언권 설정을 위한 인문지리학적 접근> 등이 있고, 저서로는 <언어와 대중매체>, <지명으로 보는 전주 백년> 등이 있다.


우리말 편지 프랑스 편 -

‘오리의 추위’? 날씨 표현에 담긴 프랑스인의 생활과 문화

한국에서는 장마철에 내리는 비를 보고

날씨가 매우 좋지 않을 때 ‘고약하거나

‘하늘에 구멍이 뚫렸다’라고 이야기한다.

엄청 나쁜 날씨’를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영어권 국가에서는 비가 많이 내리는 것을

여기에는 ‘개는 더러운 짐승’이라는

개와 고양이에 빗대어 표현하고It rains like

고정관념이 깔려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cats and dogs, 프랑스어권에서는 줄에 빗대어

‘개’가 들어간 표현이 비속어로 많이

표현한다Il pleut des cordes. 이처럼 날씨와

사용되었음을 생각해 본다면 쉽게 이해할

관련된 표현들은 나라 또는 언어에 따라 그

수 있을 것이다. 현대에 와서 ‘개’를 단순히

표현이 다양하다. 이러한 표현들을 이해하기

동물이 아니라 삶을 함께하는 존재로 여기는

위해서는 그 나라의 문화에 대한 이해가

등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선행되어야 한다. 이번 시간에는 프랑스어로

우리가 사용하는 표현에는 부정적인 것이 많다.

된 날씨나 계절과 관련된 표현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런 표현들은 이미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프랑스어에 깊숙이 들어와 있고, 어원을 통해 프랑스인들의 생활과 문화도 엿볼 수 있다. Il fait un temps de chien 개처럼 고약한 날씨

이 말은 비가 오고 춥고 구름이 끼는 등

Il fait un froid de canard 오리의 추위

이 표현은 ‘지독한 추위’라는 의미로, 가을과 겨울에 행해졌던 오리 사냥이 그 기원이다. 추위가 찾아오면 오리가 살고 있는 연못이 얼게 되고, 오리는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사냥꾼은 움직일 필요


없이 강가에서 기다리면서 이동 중인 오리를 포획할 수 있었다. 추위가 찾아온 것도 오리에게는 크나큰 시련이 아닐 수 없는데 이동을 하는 도중 사냥꾼에게 잡히게 되는 오리의 처지를 추위에 빗댄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Pleuvoir comme vache qui pisse 소가 소변보듯이 비가 온다

이 표현은 ‘억수같이 퍼붓는 비’를 묘사한 것이다. 이 말은 인간의 소변 줄기보다 더 센 소의 소변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면 코끼리, 하마 같은 동물의 소변 줄기가 더 인상적일 수도 있겠지만 굳이 소에 빗대어 표현한 것은 프랑스 시골에서 다른 동물들보다 소가 더 친근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글_지영호 프랑스 아비뇽 대학교에서 문화예술경영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파리3 소르본 누벨 대학교에 같은 전공으로 박사 과정 재학 중이다. 프랑스 사회문화 연구 기관 CERLIS 연구원이며, 파리에서 열리는 다양한 문화 행사의 코디네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백조. 우아한 백수라는 의미의 이 말은 어떻게 쓰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백조는 온 몸이 하얀 새다. 그러니 손만 하얀 백수를 능가하는 잉여의 상징이 되고도 남는다. 돈 십 전으로 ‘왼종일’ 카페에서 ‘무위도식’하는 룸펜은 일제 강점기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시대의 백조들은 오천 원 남짓한 돈으로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인터넷 서핑을 하고, 보고서를 쓰고, 작업을 한다. 카페는 그런 데가 아닐까. 물 아래에서 발버둥을 치고 있는 백조의 다리는 보이지 않는.

판권 쉼표, 마침표. 2013년 5월 발행인 민현식 편집인 어문연구팀 정호성, 이대성, 곽현설 기획 및 제작 채널원투원 국립국어원 157-857 서울특별시 강서구 금낭화로 154 (방화3동 827) 대표전화 : 02-2669-9775 © 2013 쉼표, 마침표.의 저작권은 국립국어원에 있습니다. 외주 필자의 의견은 국립국어원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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