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여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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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본 1년
A YEAR OF BIBLICAL WOMANHOOD by Rachel Held Evans Copyright ⓒ 2012 by Rachel Held Evans Original edition published in Nashville, Tennessee, by Thomas Nelson. All rights reserved. This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2018 by Viator, Paju-si, Gyeonggido, Republic of Korea.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Thomas Nelson, a division of HaperCollins Christian Publishing, Inc. through rMaeng2, Seoul, Republic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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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국어판의 저작권은 알맹2 에이전시를 통하여 Thomas Nelson과 독점 계약한 비아토 르에 있습니다. 신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무 단복제를 금합니다.
레이첼 헬드 에반스 지음 임혜진 옮김
성경이 말하는 대로 살아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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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자유분방한 여성 이야기
| 일러두기 |
본문에 인용한 성경은 대한성서공회에서 펴낸 새번역판을 따랐으며, 다른 역본을 인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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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에는 따로 표기했습니다.
$ 매년 모험을 하게 해 주는 남편 댄에게
그리고 아직 알려지지 않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가진 모든 용맹한 여성들에게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이것이 내가 지금껏 순종한 단 하나의 명령이다. - 에밀리 디킨슨
차례
머리말 009
10月 온유–여자, 고분고분해지다 11月 살림–마르다, 마르다
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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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月 순종–나의 남편, 나의 주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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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月 용맹–잠언 31장의 여인은 정말 있을까? 2月 아름다움–나의 가슴은 망대 같으니 3月 정숙–아미쉬 사람들과 훌라후프를 4月 순결–캠핑하기엔 최악의 시즌
7月 정의–초콜릿 골라 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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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月 출산–화살이 가득한 화살통과 젖병 6月 복종–내어주고 양보하기
120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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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月 침묵–난 여자다, 내 말을 더 이상 듣지 말라 9月 은혜–경외의 날
감사의 말 417 주註 420
382
340
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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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duction A YEAR OF BIBLICAL WOMANHOOD
A Year of Biblical Womanhood
머리말
자연 그 자체가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지 않습니까? 남자가 머리를 길게 하는 것은 그에게 불명 예가 되지만, 여자가 머리를 길게 하는 것은 그에게 영광이 되지 않습니까? 긴 머리카락은 그의 머리를 가려 주는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 고린도전서 11:14-15
나는 미용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있었다. ‘불과 1년 전 같은 의자에 앉아 있던 이 여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우선, 지난 368일 동안 머리를 자르지 않았다. 나는 마치 판타지 영 화 <윌로우>에 나오는 사람처럼 보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80년대 헤비메탈 그룹 ‘스파이널 탭’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윌로우>의 등장인 물 같았다.
현재 After
009
1년 전 Before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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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5킬로그램이나 몸이 불었다. 발효하지 않은 빵에 약간 중독 됐고, 30대가 되었고, 즐기는 옷차림이 달라졌다. 헐렁한 티셔츠에 고 무줄 치마가 좋아졌다. 예쁜 금발의 스타일리스트가 내 몬스터 같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칙칙한 갈색머리가 그녀의 손가락에 마구 얽힌다. “음, 어떻게 해 드릴까요?” 동부 테네시 억양에 상냥하게 물어보는 말투였지만 엄 청 끔찍해하는 기색이다. “머리 자른 지가 1년 됐거든요. 보시다시피 머릿결이 너무 거칠어서 답이 없네요. 어떻게 좀 해 주세요. 10센티 쯤 자를까요?” “아니 대체 왜 1년이나 머리를 안 하셨어요?” 스타일리스트는 깔깔 웃으며 물었다. “왜죠?”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게 물었다. 내가 기도하기 위해 머리에 스카 프를 두를 때, 남편을 ‘주인님’이라고 부를 때, 우리 집 지붕에 오후 내 내 앉아 있을 때, 사이버 아기를 입양했을 때, 생리 기간 동안 앞마당 에 천막을 치고 나앉아 있을 때, 그리고 욕실에서 빵 반죽 4킬로그램 을 부풀리고 있을 때. 또 펜실베이니아의 아미쉬 학교에 갔을 때, 볼리 비아 코참바의 돼지 농장에 갔을 때, 앨라배마 쿨만의 베네딕트 수도 원에 갔을 때. 나처럼 자유분방하고 집안일에 젬병인 여자가 갑자기 빵을 굽고 뜨개질을 하는 이유가 뭐냐고 그들은 물었다. 사정을 모르는 이 사람에게, 1년 동안 머리를 안 한 이유에 대해 설 명할 길이 있을까. 2천 년 전 어떤 유대인 천막장이가 고린도의 친구 들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여자가 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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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를 길게 하는 것은 그에게 영광이 되지 않습니까? 긴 머리카락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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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머리를 가려 주는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고전 11:15). 그러나 소도시의 미용실은 스토리텔링의 마지막 문화적 보루 아니 던가. 게다가 온몸이 비닐 망토에 싸이고 머리에는 집게핀을 수십 개 꽂은 채로는 어디로 도망갈 수도 없다. 하여 나는 처음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기로 했다. 헤어드라이어의 소음과 잡담을 배경으로 나의 ‘영광’이 한 움큼씩 바닥에 떨어지는 동안, 나는 성경적 여성의 삶을 실험한 지난 1년의 사연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남편 댄과 나는 오래전 합의한 게 하나 있었다. 독립할 정도의 돈을 모으거나 내가 30대에 들어서거나, 둘 중 하나라도 되는 그때에 아이 를 가지기로. 내게는 그럭저럭 괜찮은 합의였다. 2010년 6월 8일, 나 의 스물아홉 번째 생일이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실험을 시작하기 넉 달 전이었다. 생일이 지난 며칠 후, 나는 걸음마를 하는 꼬맹이들이 점령한 거실 바닥에 앉아 있었다. 포장지, 헬륨 풍선, 그리고 지친 엄마들과 함께였 다. 의구심이 들었다. 이렇게 되는 건가, 자유는 끝인가. 한 젊은 엄마 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는 두 살배기의 기저귀 속 수상쩍은 내용물에 대해 끔찍하도록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엄마들이 육아에 관한 무 시무시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나면 다음 수순은 뻔하다. 누군가가 친근 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는 거다. “그래서 레이첼, 아기는 언제 가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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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질문을 단순한 인사로, 일종의 권유로 좋게 받아들였다.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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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30대가 가까워지자 납득할 만한 대답이 궁해졌다. 그렇다고, 나는 엄마가 된다는 게 왠지 모르게 너무나 두렵다는 속내를 대놓고 말하기는 곤란했다. 대충 거짓말로 때워 볼까도 생각했다. 어깨를 으 쓱하고 눈물을 조금 글썽이면서, 우리는 노력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완 벽한 타이밍은 언제인지 모르겠다고 하는 거다. 누가 우리를 검사할 것도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그 대신 나는 이렇게 둘러댔다. “다음 책 을 쓰고 나서요.” 이러면 의도치 않게 좀 잘난 체하는 셈이 되었다. 댄은 아이 가지는 일로 압박을 주지는 않았다. 그는 효율성에 가장 큰 가치를 두는 사람이다. 7년의 결혼 생활 동안 우리는 2인조 특수기 동대처럼 살아 왔다. 암호와 손짓으로 대부분의 소통을 하고, 가사부 터 두 가지의 재택 근무 사업까지, 고도로 조직된 팀으로서 모두 척척 해치운다. 해야 할 일이 생기면 그것을 먼저 마칠 수 있는 사람이 암묵 적으로 맡는다. 그러므로 역할 분담이니 분업이니 하는 얘기로 시간 낭비할 일이 없다. 저녁 먹을 때가 되면, 누군가 준비한다. 돈이 떨어지 면, 누군가 일을 물어 온다. 싱크대의 수세미에서 썩는 냄새가 나기 시 작하면, 댄이 갖다 버린다. 그러나 기저귀 가방과 카시트가 생기면 이런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봐 왔다. 그래서 내가 아기 얘기를 꺼내면 댄은 어깨를 으쓱하 며 말했다. “서두를 거 없잖아.” 그럼 나는 재빨리 수긍하고 화제를 돌 렸다. 온몸에 전해지는 떨림이 생체시계가 알려 주는 분노의 신호가 아니라 다른 것인 양. 하지만 출산 압박을 주는 건 사실 친구들만이 아니었다. 교회였다. 나는 복음주의 문화에서 자랐다. 그게 무슨 뜻이냐면, 지옥 갈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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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처한 일부 인류를 안타까워하는 일에 인생의 상당한 시간을 보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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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거다. 우리 부모님이 이런 것을 직접 가르치지는 않으셨다. 목사 님, 주일학교 선생님, 그리고 교회 친구들로부터 자연스럽게 배웠다. “멸망으로 이르는 길은 넓으니”라는 구절을 반복해서 듣다 보면 불교 도들은 붓다를 예배해서 지옥에 가고, 가톨릭교도는 마리아를 예배해 서 지옥에 가고, 앨 고어는 자연을 숭배해서 지옥에 갈 것처럼 여기게 된다. 대학에 갈 때까지는 그 문제로 신앙의 위기를 겪을 거라고는 생 각도 하지 못했다. 조이스 마이어의 설교를 TV에서 처음 본 날, 나는 ‘저 사람도 지옥 에 가겠구나’ 생각했다. 그때 난 아홉 살이었다. 자줏빛 정장에 짧은 커트머리를 하고 커다란 금귀고리를 한 그 모습을 기억한다. 조이스 는, 한 손에는 마이크를 다른 손에는 성경을 들고 무대를 활보하며, 내 가 전에 본 적이 없는 확신 있고 긴급한 어조로 설교했다. 그 자신만만 한 모습에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죄 있는 인간이 어떻게 저토록 당당 할 수 있는지, 하나님 말씀에 의하면 여자는 설교해서는 안 된다는 걸 누구나 알 텐데 여자가 ‘주님의 자비’를 저렇게 말할 수 있다니, 의아 했다. 주일학교 선생님은 설교하는 것은 남자에게만 허락된 일이라고 하셨다. 그때까지 나는 집과 교회, 사회에서 여성의 올바른 역할에 대해 뒤 섞인 메시지들을 받았다. 하나같이, 세상 모든 여성들이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는 게 하나님의 완전한 뜻이라고 강조했다. 나의 세계에서 보면 조이스 마이어 같은 여자는 이교도였다. 디모데전서 2장 12절(“여 자가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나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조용해야 합니 다.”)에서 사도 바울이 금한 것을 어기고 강대상에서 설교를 했으니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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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반면 보수적인 메노나이트 교도들은 율법주의자였다. 그들은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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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도전서 11장 5절(“그러나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은 채로 기도하거나 예언 하는 것은, 자기 머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에서 바울이 가르친 대로 머리
를 가린다. 목사들은 베드로전서 3장 1절에서 베드로가 말씀한 것처 럼 결혼한 여성들은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런 데 같은 책 바로 세 절 뒤에서 남편을 ‘주인님’이라고 부르라고 한 말 씀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열두 살이 될 즈음 나는, 내 스커트 길이 와 민소매 블라우스 때문에 남자애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망칠 수도 있다고 배웠다. 그렇다고 외모를 가꾸고 예쁜 옷을 입는 일이 나쁜 것 만은 아니었다. 에스더 왕비는 그렇게 해서 자기 민족을 구했으니까. 제임스 돕슨에 따르면, 여성은 남성에 비해 열등한 것이 아니라 단 지 다른 역할을 위해 창조되었을 뿐이다. 그는 여성의 궁극적인 소명 은 집안에 있다고 한다. 우리는 집을 깨끗이 관리하고 6시에는 저녁상 을 차리며, 가장 중요하게는 아기를 낳음으로써 하나님을 섬기고 남편 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집을 떠올려 보면, 성 역할이나 위계질서 같은 개념이 거의 없 었다. 우리 엄마에게 있어서 복종이란 1976년에 단 한 번 했던 일이지 (이 얘기는 “6월-복종”에서 자세히 하겠다.)
날마다 실천하는 일은 아니었다.
전통적이고 엄격한 기독교 문화에 속했지만 자유사상가였던 엄마는 교회에서 돌아올 때면 질려 있었다. 만들어야 할 찜요리, 자모실 정리, 웨딩 샤워 계획 등등 때문에.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포트럭 파티 좋아하는 건 남자들밖에 없을 걸. 일은 여자들이 다 하지.” 포트럭 파티를 끔찍하게 싫어하셨지만, 엄마는 아내와 엄마 역할에 대해 불평하신 적은 없다. 엄마는 경력 단절 여성이다. 우리가 어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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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교사 일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셨다. 명석하고, 온화하고,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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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있는 분인 엄마는, 동생과 나를 둘러싼 율법주의 문화로부터 우리를 지키셨다. 너희는 나중에 자라서 원하는 건 뭐든지 될 수 있다고, 남들 이 뭐라고 하든 상관하지 말라고 하셨다. 부모님 두 분 다 성경을 사 랑하셨지만, 사람들을 죄책감으로 내몰고 소진시키고 혼란스럽게 만 드는 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게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아셨던 것 같 다. 내가 민주당에 투표하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지옥에 간다 는 걸 더 이상 확신하지 않음에도 여전히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이라 는 정체성을 지닐 수 있는 건 아마도 이런 부모님 밑에서 자랐기 때문 이 아닐까. 복음주의는 내 종교적인 모국어와도 같다. 화가 나거나 흥 분할 때, 혹은 내 언어를 알아듣는 사람들 틈에 있을 때면 나는 그 모 국어로 돌아간다. 그리고 나는 그 언어를 통해 소음을 뚫고 떠오르는 하나님의 음성을 종종 듣는다. ‘성경적 여성’에 대해 처음 생각하게 된 계기는 대학 때 겪은 일이 었다. 기독교 대학에서 여학생이 총학생회장 선거에 나가는 게 과연 하나님의 뜻이냐는 논란이 기숙사에 퍼졌다. 그런 일에는 엄연히 규 칙이 있다는 것이었다. 2천 년 전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 서 말한 규칙이 언급되었다. 성경적인 여성은 경건한 남성이 리더십을 발휘하도록 한 발 물러선다는 얘기였다. 기숙사 방방마다 밤늦도록 토 론이 벌어졌다. 어떤 학우들은 그런 지침은 교회 안에서만 적용된다고 주장했고, 그 와중에 어떤 친구들은 그해에 축제나 파티를 기획할 만 한 경건한 남자가 많지 않다는 걸 지적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한 여학생이 단독 출마하면서 이 논쟁은 무산되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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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몇 년간, 나는 이 주제에 점점 더 빠져들었다. 특히 연애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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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하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면서는 더 그랬다. 많은 이들이 복음 주의적 상호보완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이는 1960년대, 즉 2세대 페 미니즘 운동에 대응하여 생긴 운동으로 이디스 셰퍼(The Hidden Art of Homemaking, 1971)와
엘리자베스 엘리어트(Let Me Be a Woman, 1976)의
저술에서 그 초기 주장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아내와 주부의 본 보기로 칭송 받으며 개혁주의 전통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던 여성들이 다. “셰퍼 박사의 설교만큼이나 셰퍼 부인의 시나몬 빵을 통해 주님께 인도받은 사람들이 많았다”는 말은 널리 회자되었다. 하지만 이 그럴 듯한 말에는 타협하지 않는 확신이 깔려 있다. 고결한 여성은 순종하 는 아내로, 부지런한 가정주부로, 자애로운 어머니로 가정을 먼저 섬 긴다는 것이다. “여기는 여성의 자리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리를 알고 거기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속한 자리가 있다고 명하신다.”1 ‘성경적 남성과 여성 협의회(Council
for Biblical Manhood and Woman-
hood, 이하 CBMW)’는 이 운동의 신학적 수호자다. 보수적인 목사 존 파
이퍼와 신학자 웨인 그루뎀이 이끈 CBMW는 두 개의 중추적인 문 서를 발행하여 개혁주의 전통을 넘어 이 운동의 영향력을 확장시켰 다. 바로 “덴버 선언문”(1988)과 “성경적 남성성과 여성성 회복”(초안은 1991년, 개정안은 2006년)이라는 문서다. CBMW는 승승장구했다. 1억 6천
만 명 회원을 거느린 남부 성결교단이 신앙 선언문을 개정하면서 가 정생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조항을 넣기로 표결했는데, 이는 덴버 선 언문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즉 여성은 남편의 리더십에 ‘너그러이 순종’해야 한다는 조항이었다.2 덴버 선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면서 “성경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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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가 위협받았다. 말씀의 명확성은 위태로워지고 보통 사람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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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통하는 성경의 의미가 기술적 연구라는 제한된 영역으로 퇴보했 다”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의 여성은 유행하는 문화를 따르지 말고 ‘성 경적 여성성’을 추구해야 마땅하다고 한다.3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적’이라는 말을 마르틴 루터의 가운데 이름이라도 되는 듯 남용하는 위험한 버릇이 있다. 특히 뭔가 부담스 러운 말 앞에 ‘성경적’이라고 붙이길 좋아하는데 이를테면 경제, 성性, 정치 그리고 결혼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이 그런 것들에 대해 정확한 의견을 갖고 계시다는 인상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그 하 나님의 의견이 우연히도 우리 생각과 일치한다. 성경에서 어떤 부분을 진지하게 취해야 할지 ‘취사선택’하지 말라고 주장하면서, 이런 식으 로 ‘성경적’이라는 단어를 규범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거의 언제나 선 별적이다. 그렇다면 한번 따져 보자. 한 여성을 그 아버지가 팔아넘기는 것은 성경적이다(출 21:7). 여성이 자신을 강간한 사람과 억지로 결혼해야 하 는 것은 성경적이다(민 22:28, 29). 성경적으로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해 야 한다(고전 11:6). 성경적으로 여성은 머리를 가려야 한다. 일부다처제 도 성경적이다(출 21:10). 이런 이유에서 ‘성경적 여성성’이라는 관점은 나를 정말 당혹스럽 게 한다. 고대의 한 성스러운 텍스트 묶음이, 수천 년 동안 여러 문화 를 통해 모아진 다양한 장르의 그것이, 그래서 우리 문화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그 책이, 여성이 되는 방법에 대한 단 하나의 응집된 공식을 제공할 수 있다고?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모든 여성이 그런 거푸집에 들어맞는다고? 나도 그래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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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사람은 뭔가 정말 놀랍고 흥미를 끄는 게 있으면, 토끼 구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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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던 앨리스처럼 그 정체를 파야 직성이 풀린다. 가만히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나 하고 있는 건 불편하다. 그게 바로, 내가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뇌 구석구석에 불꽃을 일으키며 말도 안 되 는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이유다. ‘한번 해 보면 어떨까? 성경적 여성의 삶을 문자 그대로 살아 보면 어떨까?’
잘 찾아보면, 당신이 토끼 구멍에 뛰어들 수 있도록 비용을 지불할 의사가 있는 출판사들이 있다. 그 토끼 구멍이 시장성이 있다고 믿는 다면 말이다. 하여 2010년 10월 1일, 용감한 전문 출판팀과 남편 댄의 지원에 힘입어 나는 인생의 한 해를 ‘진짜’ 성경적 여성성을 추구하는 데 바치겠다고 선언했다. 이 모험에는 요구 조건이 있었다. 여성과 관련된 모든 성경 구절을 연구하고 세상 여성들이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삶에 적용하는지 알 아보아야 했다. 거기에 더해, 여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가능한 한 많이 내 일상생활에서 따르려고 노력해야 했다. 어떤 경우에는 극단적 일 만큼 문자적으로 접근하고 실천했다. 구약부터 신약까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레위기 규율부터 바울의 편지들까지, 내 마음대로 취사선택하는 건 금지사항이었다. 성 경적 여성으로 사는 1년 동안 나는 다음과 같이 해 보기로 했다. 동트 기 전 일어나고(잠 31:15), 남편에게 복종하고(골 3:18), 머리를 기르고(고 전 11:15),
옷을 손수 지어 입고(잠 31:21-22), 요리를 배우고(잠 31:15),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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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할 때 머리를 가리며(고전 11:5), 댄을 ‘주인님’이라 부른다(벧전 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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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잠 31:20), 온유하고 조용한 성품을 훈련하며 (벧전 3:4), 생리 기간에는 정결 예식을 치르는 것이다(레 15:19-33).
어떤 항목들은 한 번만 지켰다. 어떤 것은 1년 내내 지키려고 노력 했다. 그리고 각 달마다 좀 더 집중할 덕목을 정했다. 온유, 살림, 순종, 용맹, 아름다움, 정숙, 순결, 출산, 복종, 정의, 침묵 그리고 마지막으로 은혜다. 그 한 해 동안, 내가 정한 “성경적 여성의 십계명”은 일상생활의 지 침이 되었다.
1. 모든 일에서 남편의 뜻에 순종할지니라(창 3:16; 딛 2:5; 벧전 3:1; 엡 5:22; 고전 11:3; 골 3:18).
2. 집에서 해야 할 일에 충성할지니라(잠 14:1, 31:10-31; 딤전 5:14; 딛 2:4-5). 3. 어머니가 될지니라(창 1:28; 시 128:3; 딤전 5:14). 4. 온유하고 정숙한 성품을 기를지니라(벧전 3:3-4; 딛 2:3-5; 딤전 3:11). 5. 옷을 단정하게 입을지니라(창 24:65; 신 22:5; 딤전 2:8-10; 벧전 3:3). 6. 기도할 때 머리를 가릴지니라(고전 11:3-16). 7. 머리칼을 자르지 말지니라(고전 11:15). 8. 교회에서 가르치지 말지니라(고전 14:33-35; 딤전 2:12). 9. 뒷담화하지 말지니라(민 12:1-10; 잠 26:20; 딤전 5:13-14). 10. 남자에 대하여 권위를 가지지 말지니라(딤전 2:12).
나는 정말 진지하게 조사했다. 여성주의, 보수주의, 자유주의 주석 을 샅샅이 뒤졌다. 각 이슈에 대한 유대교, 가톨릭, 개신교의 관점도 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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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보았다. 고대 성경의 명령을 삶에서 실천하고 있는 현대 여성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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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 인터뷰도 했다. 일부다처주의자, 목사, 기독교 근본주의 운동의 하나인 퀴버풀Quiverfull 가정 출신의 여성, 정통 유대교인, 아미쉬 할 머니 등. 또 나는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뒤졌다. 어머니, 딸, 과부, 아내, 첩, 왕비, 여선지자, 창녀에 대한 구절을 모조리 찾아 따로 떼어 연구했다. 실험을 시작한 지 몇 주 되었을 때, 나는 성경적 여성성에 대한 무작 위적인 사실들을 들이대서 친구들의 짜증을 돋우곤 했다. 예를 들어 잠언 31장을 보자. 이 고대의 아크로스틱 시는 한 훌륭한 부인의 일상을 괴로울 정도로 상세하게 설명한다. 이 본문은 유대-그 리스도교 전통에 속한 거의 모든 여성에게 자신이 열등하다는 콤플렉 스를 3천 년 동안 주입해 왔다. 이 시는 르무엘 왕이 “그 어머니가 그 를 훈계한 잠언”(1절)을 기록한 것이다. 이 사실은 잠언 31장의 여성을 여성혐오적 상상의 비현실적인 전형으로 치부하려 했던 내 계획을 완 전히 무너뜨렸다. 잠언 31장의 여성은 날마다 해 뜨기 전에 일어나고, 매 끼니를 준비 하며, 팔을 단련하고, 시장에 가고, 먼 데서 이국적인 음식을 가져온다. 수익이 짭짤한 부업도 운영하고 남편과 아이들의 옷을 해 입힌다. 부 동산 투자도 하고, 가난한 이들도 돌본다. 남편을 치하하고, 몇 시간씩 베를 짜고, 한밤중에도 등불을 끄지 않는다. 그리고 다음날 이 모든 일 을 다시 시작한다. 이 잠언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이 한 남자가 아내에게 요구해야 하는 자질이다. 당연히 나는 르무엘 왕의 어머니가 그런 며느리를 정말로 원하지는 않았으리라 믿는다. (어깨를 으쓱하고 유대인 할머니의 말투로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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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했으리라. “이토록 고귀한 성품의 아내를 누가 찾을 수 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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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나뭇잎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고 성경적 여성으로 살기로 한 1년의 첫날이 눈앞에 다가왔다. 나는 왠지 모르게 잠언 31장 25절 말 씀에 꽂혀 있었다. “능력과 존귀로 옷을 삼고 후일을 웃으며”(개역개정). 대형 의류 매장 콜스의 여성복 코너에서 ‘능력’과 ‘존귀’를 찾을 수 없다는 것쯤은 알았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이 이런 시도를 한다는 것 의 부조리함을 생각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후일에 웃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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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묘한 해방감도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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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 타락한 여성
성경의 첫 구절부터 53절에 이르기까지 등장하는 화자는 하나님뿐 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생겨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그 생물을 내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라.” 창세기 2장 끝에 이르러서야 성경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간의 첫 목 소리를 듣게 된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
- 창세기 2:23
남자의 이야기는 한 여자를 향한 연가로 시작한다. 이 시는 창세기의 두 번째 창조 부분에 등장한다. 거기서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고,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그리고 그를 에덴동산 에 두어 동물들의 이름을 짓게 하셨다. 아담이 일을 해 보니 동물의 왕 국은 모두 조화롭게 짝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창조주는, 창조 세계 에 좋지 않은 부분이 하나 있음을 처음으로 발견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겠다”(창 2:18). 히브리어 ‘에제르ezer’ 혹은 ‘돕는 자’라는 단어는 다른 성경 구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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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나오는데, 간섭하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묘사할 때 쓰인다. 예 를 들면 고아를 도우시는 분(시 10:14), 다윗 왕을 돕는 자 또는 구원자 (시 70:5), 이스라엘의 방패와 도움(신 33:29)
등이다. 창세기 2장에서 이
단어는 ‘케네그도kenegdo’라는 말로 수정되는데, ‘그 자신과 비슷한 조 력자’ 또는 상대역을 뜻한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좋은 이야기들이 그 렇듯, 이 이야기도 남녀 영웅이 함께 시작한다. 이러한 신적 균형 상태를 우리의 영웅 커플이 얼마나 오래 누렸는 지는 명확하지 않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은, 만물이 타락하기 전의 상태 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악당이 등장해서, 더 좋은 삶이 있다고, 그걸 위해서는 창조주의 단 한 가지 규정을 어기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신비한 열매를 먹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보암직도 하고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창 3:6) 하다고 묘사된 그 열매는 우리 여자 주인공에게는 너무나 유혹적이었다. 그녀는 한입 베어 물고 그것을 남편에게 건네 그 역시 먹는다. 즉시 그들의 눈이 열렸고, 인간 의 의식 속에 처음으로 수치심이 밀려들어 왔다. 남자는 여자를 비난한다. 여자는 뱀을 비난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셋 모두에게 책임을 지우신다. 그 벌로 뱀은 평생 동안 배로 땅을 기어 다 녀야 하고, 남편은 거칠고 혹독한 땅에서 죽을 때까지 수고로이 일해야 한다. 여성은 해산의 고통과 남자에게 지배받는 아픔을 벌로 받았다.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16절, 개역개정). 이 암울한 상황에서 남자는 마침내 여자에게 이름을 지어 준다. 그 는 그녀를 하와라 불렀다. ‘생명’이라는 뜻이다. 그녀는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수 세기 동안, 하와라는 인물은 서양 미술, 문학 그리고 철학에서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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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흥미로운 주제가 되어 왔다. 남성은 여성에 대한 가장 본능적인 두 려움과 욕망을 그녀의 벗은 몸에 투사했다. 그래서 그녀는 요부와 어 머니, 둘 다를 대표했다. 고결한 야만인이자 가정의 수호자이고, 기만 하는 자요 기만당하는 자다. 노트르담 성당의 ‘성모 마리아의 문’에는 석조로 된 유혹 장면이 있다. 교활한 뱀이 여자의 얼굴과 가슴을 하고 있는데, 이는 하와의 거울 이미지다. 이 모티브는 중세의 성상에 반복 해서 나타난다. 원죄의 근원은 오로지 여성에게 있다는, 하와는 성경 에서 판도라와 같은 인물이며 상자를 부수고 열어 자신의 성에 영속 하는 수치를 가져왔다는 통념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대들은 악마의 출입문이다.”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리스도 인 여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 하나하나가 하와인 것을 모르 겠는가? 하나님이 그대들의 성에 내리신 형벌은 이 시대에도 살아 있 다. 따라서 죄책도 필연적으로 여전히 존재한다.”4 우리가 창조 서사를 읽는 방식은, 그 텍스트에 대해서 만큼이나 우 리 자신에 대해서 많은 걸 말하게 한다. 하와에 대한 비방은 유대-기 독교 전통에서 자란 여성들에게 재앙이 되어 왔다. 낙원에서의 사랑 과 상호성을 열망하도록 이끌 수도 있었던 이 이야기는, 그 대신 여성 에게 복종을 강요함으로써 수 세기 동안 영속적인 저주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사도 바울부터 마르틴 루터에 이르기까지 신학자들 은, 여성은 단지 생식을 위해서만 필요한 존재라는 못마땅한 태도를 보였다. 그렇게 해서, 적어도 상징적으로, 딸들의 혈관에는 하와의 피가 흐르 고 있다. 우리는 모두 생명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모두 불가능한 기 대와 남성들의 잔혹한 투사에 종속되어 있다. 우리는 모두 타락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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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난받고, 오해받는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무언가 새로운 것, 어쩌면 무언가 더 나은 것을 가져오는 과정에서 엄연히 필수적인 존재다. 어떤 의미에서 테르툴리아누스는 맞았다. 우리는 모두 하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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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ber: Gentleness A YEAR OF BIBLICAL WOMANH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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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月
온유 여자, 고분고분해지다
여러분은 머리를 꾸미며 금붙이를 달거나 옷을 차려 입거나 하여 겉치장을 하지 말고, 썩지 않는 온유하고 정숙한 마음으로 속사람을 단장하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값진 것 입니다. - 베드로전서 3:3-4
이 달에 할 일
•온유하고 정숙한 심성을 기른다. 심지어 축구 경기를 볼 때도(벧전 3:3-4). •뒷담화하는 습관을 끊는다(딤전 5:12-13). •예절 교육을 받는다(잠 11:22). •관상기도를 훈련한다(시 131편). • 잠언의 ‘다투는 아내’처럼 행동할 때를 대비하여 ‘맹세 항아리’를 만든 다(잠 21:19, 19:13, 27:15). •분란을 일으키는 행동을 하면 지붕 위에 올라가 앉아 속죄한다(잠 21:9).
내 첫 번째 실수는, 이 실험을 풋볼 시즌이 한창일 때 시작했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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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베드로전서 3장 4절에서는, 경건한 여성이라면 ‘온유하고 정숙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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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지녔다고 한다. 하지만 10월에 미국 남부에서 5분 이상 시간을 보내 보면, 남부 여자가 대학 풋볼 경기를 보면서 ‘온유하고 정숙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위대한 앨라배마에서 자랐다. 저널 리스트 워렌 세인트 존이 “관람 경기의 중요 성에 대해 건강한 관점을 얻기에는 최악의 장소”라고 말한 곳이다.1 앨라배마에서, “이 름이 어떻게 되시오?”와 “어느 교회에 다니 시오?” 다음으로 중요한 질문은 “앨라배마 요, 오번(Auburn, 앨라배마에 있는 또 하나의 풋볼팀)이요?”라는 것이다. 나는 성경을 믿지만 교파는 없는 그리스도인 ‘레이첼’이라는 정체성을 나 자신에게 부여했고, 그에 이어 앨라배마의 팬이라는 정체성을 터득했 다. 여동생과 나는 바비 인형을 가지고 놀기 전부터 의식적인 기초 교 육을 받았다. 어릴 때 우리는 엄마의 행동을 따라하곤 했는데, 엄마는 TV에서 중계하는 풋볼 경기에서 앨라배마 선수가 후퇴하여 달리면 TV 앞으로 바짝 다가가셨다. 그가 더 오래 버틸 수 있도록 응원하는 행동이었다. 그러다 그가 엔드존에 들어서면 온 가족, 엄마, 아빠, 동생 아만다 그리고 나는 TV 주위에서 얼싸안고 고개를 쳐들면서 환호성 을 질렀다. 그 와중에도 심판이 노란 수건을 던지지는 않는지 주시하 면서. 지금은 모두 테네시 주로 이사왔다. 우리는 토요일 오후면 여전히 부모님 집 TV 앞에 모여 앉아서 고함을 질러대며 어마어마한 양의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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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를 먹어치운다. 남편 댄도 결혼하면서 이 전통에 알게 모르게 익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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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져 이제는 좋아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엄마의 돼지고기 구이 요리 덕분이다. 댄은 허를 찔린 기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자기 아내가 추분 즈음 이 되면 매주 세 시간 반 동안 미쳐 날뛰는 상태가 된다는 걸 상상도 못했을 테니까. 그리고 투스칼루사와 앨라배마 풋볼 경기장을 뛰어다 니는 열한 명의 남자들이 그의 성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 을 깨달았을 때도. 그러나 그도 이제는 적응을 해서, 매 가을이 되면 처가집에서 보내는 토요일 오후를 무척 기다린다. 열린 창으로는 상쾌 한 찬 공기와 마른 낙엽 향기가 천천히 익어가는 돼지구이 냄새와 부 드럽게 섞여 들어오고, TV에서는 웅웅거리는 관중의 함성소리가 들린 다. 게다가 이번 10월의 경기가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건, 부모님 이 새로 사신 고해상도 42인치 TV 화면을 통해 앨라배마팀이 내셔널 타이틀을 방어하는 장면을 봤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망했어.” 풋볼 경기가 있던 날 부모님 집에 거의 도착할 즈음 내가 말했다. 발밑에서는 낙엽이 바스락거렸다. “음, 정말 멋지겠다.” 댄은 제대로 듣지도 않고 대답했다. “당신이야 그렇겠지. 하지만 TV 앞에서 소리 지르는 게 온유하고 정숙한 심성을 기르는 일은 아니잖아.” 내가 말했다. “내 모든 팬심을 억눌러야 한다고. 심판에게 소리 지를 수도 없고, 치어리더 품평도 안 되고. 응원도 안 되고 야유도 안 되고. 숨이 딱 막히네.” “어이구, 예수 님을 위해 제대로 고통 받으시는구먼.” 댄이 놀려댔다. 이번 시즌의 처음 몇 경기는 그럭저럭 상대적으로 얌전하게 잘 버 텼다. 앨라배마가 사우스캐롤라이나 게임콕스에게 35-21로 지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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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의 예외가 있기는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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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특별한 경기를 내슈빌에 있는 여동생 집에서 본 후 다 함 께 시내 로이터스에 가서 버거와 고구마 튀김을 먹었다. 컨트리 음악 도 함께였다. 나는 식사 기도 전에 머리를 가려야 한다는 게 생각났다. 여섯 번째 계명이었다. 10월에 이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는 게 장점이 되기도 했 다. 후드 티셔츠를 입으면 아무런 고민 없이 멋지게 머리를 가릴 수 있 으니까. 매 식사 때는 물론이고 교회 예배 때도 고린도전서 11장 말씀 을 지킬 수 있다. 사람들은 쟤가 추운가 보다 생각하지 광신도로 여기 지는 않을 것이다. 스카프나 니트 모자, 헤드워머로도 가능하다. “그런데 기도는 쉬지 않고 해야 하는 거 아니었어?” 아만다가 물었 다. 그녀는 주일학교에서 우등생이었고, 스물여섯 살인 지금도 그렇다. “그렇지. 그러면 항상 머리를 가리고 있어야겠네.” 댄이 끼어들었다. “음, 그럼 그건 ‘정숙함’이 주제인 3월에 시도해 볼게.” 내가 말했다. “아니면 랭커스터를 방문할 때 해 보든가.” 맹세코 나는 세심하게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때로는 아무도 나를 믿지 않는 듯 보였다. “코셔 규정을 지켜야지.” “수녀원에 방문해야 지.” “아기를 가져야 해.” “너 그냥 랍비가 되지 그래.”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이들이 있었다. 내가 알기로 랍비는 고용 기준에 맞게 일하는 직종이 아니다. 그리 고 아기 문제는 이미 댄과 정리해 놓은 상태였다. “실험을 위해 아기를 가지지는 않아.” 댄이 말했다. “말도 안 되지.” 그러나 가장 목소리가 큰 이들은 블로그에 있었다. 이 프로젝트를 공지하자 수많은 댓글들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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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무시한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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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군요.” “걱정이 돼서 속이 다 울렁거리네요.” “하나님 말씀을 그런 식으로 조롱하다니요.” “A. J. 제이콥스가 이미 한 프로젝트죠.” “제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창조적인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긴 하죠.” 3년쯤 블로거 생활을 했으면 얼굴도 별스럽게 두꺼워져 슈퍼파워 를 갖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댓글들을 읽고 있노라니 자신감 은 휘청거렸고 격한 뱃멀미를 하는 것처럼 속이 요동치는 기분이었다. 마구 쏟아지는 칭찬과 비판에 나 자신이 의심스러워졌다. 그다음 깨달 은 사실은 수요일 오전 10시 반에 내가 아직 이불 속에 있다는 거였다. 나는 작가가 된다는 건 너무 힘든 일이라며 울고 있었다. 창조적인 사 람들은 ‘제정신이 아닌 것’에 더해, 약간 우울질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 연민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나의 새로운 ‘성경 적’ 라이프 스타일이 가장 즉각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은 하루 일과였 다. 이메일을 확인하기 전에 침대 정리부터 하고, 페이스북을 보기 전 에 댄의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글을 시작하기 전에 빨래를 끝내야 하 는 거였다. 제2계명인 “너는 집에서 해야 할 일에 충성할지니라”를 지 키기 위한 시도는 우선순위에서 심각한 변화를 요구했고 우리 둘 다 적잖이 혼란에 빠졌다. 첫날 아침, 댄은 달걀 스크램블 냄새를 맡으며 깨어났다. 그는 반가 우면서도 떨떠름한 기색이었다. 마치 이게 마음껏 즐겨도 되는 상황인 지, 모든 게 덫은 아닌지 확실히 알 수 없다는 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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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여보.” 그는 오렌지 주스를 두 잔째 마신 후 말했다. “설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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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내가 할게.” “아냐. 안 돼. 이제 그건 내 일이라고.” 댄은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정말?” “그럼. 당신은 잠언 31장의 여인이 남편에게 설거지를 시킬 것 같 아? 맘 푹 놓으셔. 내가 치울게.” 댄은 신난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기름투성 이 접시 더미를 마주하고 있었다. 어제 저녁부터 쌓인 것들이라 식기 세척기에 넣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앞으로의 1년이 정말 긴 시간이 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댄의 일기 2010년 10월 15일
레이첼에게 내 점심을 준비하라고 말하는 게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런 식으로 대화를 하고 있다. 나: 점심 해 줄 거야? 레이첼: 오케이. 그거 블로그에 올리게 사진 좀 찍어 줄래? 나: 잠깐만. 지금 나한테 뭘 하라고 시키는 건가? 레이첼(미소): 음, 당신이야말로 나에게 시키고 있잖아. 나(미소): 그래. 하지만 그건 계약 사항이 아니었던가? 둘 다 잠시 침묵. 레이첼: 좋아. 점심 해 줄게. 그런데 머리부터 좀 말려도 될까?(사실 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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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 전부터 머리에 수건을 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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