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과 문화기반
성격과 문화기반
한성백제사1
성격과 문화기반 발행일 | 2008년 2월 20일 발행인 | 서울특별시장 오 세 훈 기획∙편집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연구원 이 상 배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이동 88-3 올림픽공원 전화 | 02-413-9622 팩스 | 02-413-9636 Homepage | http://www.seoul.go.kr 제작원가 | 24,800원 판 매 가 | 10,000원 디자인∙편집 | 경인문화사 T.02-718-4831 김소라, 장호희, 이경주, 김주희 인쇄∙제작 | (주)성신프린팅 T.02-2635-6796 발간등록번호 : 51-6110000-000491-01 * 본 책자의 저작권과 판권은 서울특별시에 있습니다.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발간사
서울고대사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밑거름이 될《한성백제사》 의 발간을 진심 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서울은 현재 역사와 문화를 기반으로 맑고 매력 있는 세계도시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습니다. 볼거리, 즐길거리가 풍부한 서울을 만들어서 외국 관광객 1200만이 찾는 문화관광도시로 거듭나고 서울의 브랜드가치를 높여서 세계 10 위권의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어 나가고자 합니다.
이러한 때에 한성백제박물관을 건립하고 그간 소홀했던 한성백제사에 대한 발간을 서둘러서, 조선 600년만이 아니라 493년간 백제의 수도였던 서울의 찬 란한 문화와 역사에 대해 재조명하게 된 것을 뜻 깊게 생각합니다.
E.H.Carr는, 역사란‘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습니다. 《한성백제사》 를 통해 과거의 서울과 현재의 서울이 끊임없이 대화하고 만남으 로써, 우리서울의새로운가능성을열어가는소중한토대가마련되기를바랍니다.
그동안 책자발간에 애써주신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위원님들과 집필진, 연구 원들께도 감사드립니다. 2008년 2월 서울특별시장
오세훈
서
문
천도하는 과정을 기술하였습니다. 제3권은 수도 하남위례성의 위치비정과 백 제 한성시대의 왕성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역사성을 발굴성과 를 토대로 기술하였고, 나아가 수도 방어를 위한 도성방어체계에 관하여 서술 하였습니다. 제4권은 백제가 건국된 이후 고구려∙신라는 물론 낙랑∙대방∙ 서진∙동진∙북위∙일본 등 동북아시아 여러 나라들과의 외교관계와 문물교류 를 내용으로 하였습니다. 제5권은 백제인들의 생활과 문화를 살펴보기 위해 당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는 수도 서울의 역사를 연구하고 사료를 정리 수집 하여《서울육백년사》10권을 비롯한 분류사∙사료총서∙연구논문집∙내고향
시의 기술산업∙사상과 신앙∙건축기술과 의식주∙장묘문화 등을 수록하였습 니다.
서울 시리즈 등을 발간하여 오고 있습니다. 그간 백제의 역사는 공주와 부여가 주 무대가 되어 일반인들의 인식속에 자 조선 왕조가 개창되면서 개성에서 한성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오늘날까지
리잡아 왔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678년간의 백제사 가운데 서울이 493년간,
600여년의 역사를 집중 조명하면서 고대사에 대한 역사 연구가 부족하여 늘 마
공주가 63년간, 부여가 122년간 수도로서 중심지 역할을 하였습니다. 결국 백
음 한 구석이 허전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때 비로소 고대하던《한성백제사》 가
제의 오랜 역사속에서 서울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매우 높음을 알 수 있습니
발간되어 아쉬움을 달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 초기의 사료가 부족하다는 것과《삼국사기》 와《삼 국유사》초기 기록의 신빙성 여부, 고고학적 자료의 부족 등을 이유로 한성백제
《한성백제사》발간은 2004년 발의되어 2008년에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그
의 역사상을 바로잡는데 소홀하여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비록 다소 늦은 감이
동안 조선시대 600년 도읍의 역사만이 강조된 나머지 2000년 고도인 서울의
있지만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가 주관이 되어 지금까지 학계의 축적된 연구
역사성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문제점을 공감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결과를 바탕으로《한성백제사》 를 통사로 집대성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
먼저 한성백제 493년간의 역사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데 인식을 같이 하여 이
다고 할 것입니다.
번에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발간으로 많은 서울 시민들이 서울 고대사에 대해 더욱 깊은 애정을 《한성백제사》 는 전체 5권으로 발간되었습니다. 제1권은《한성백제사》 의총 설로서 고대사에서 백제사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위상과 백제의 지리적∙인문
갖게 되길 바라며, 이 책이 발간되기까지 노고를 아끼지 않은 집필위원∙감수 위원∙시사편찬위원과 연구원, 그리고 서울시 관계자에게 감사드립니다.
적 조건, 그리고 선사시대 이래의 문화기반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2권은 B.C. 18년 백제가 건국한 이후 대외적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대내적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하면서 성장하는 과정, 그리고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으로 수도를 웅진으로
2008년 2월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이존희
일러두기
� 이 책은 선사시대부터 백제가 수도를 한성에서 공주로 옮긴 475년까지의 역 사를 총 5개의 주제로 나누어 통사로 편찬하였다. � 백제가 한성에 수도를 두고 있던 시대의 역사를 서술하였으므로 지역성을 강 조하기 위해 본 위원회의 심의에 따라 책 제목을‘한성백제사’ 로 하였다. � 본문에서는 B.C. 18~A.D. 475년의 시기를‘백제한성시대’ 로 통일하였다. � 원고는 고고학과 고대사 관련 전문가들이 집필하였고, 본 위원회의 검토를 거쳤으나 백제 건립 시기나 위례성의 위치 등 학술적 논쟁이 첨예한 부분은 필자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여 편찬하였다. � 원고 내용의 정확성을 위해 각주를 달았으며, 꼭 필요한 경우 이외에는 인용 문에 대한 사료의 원문 병기를 생략하였다. �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도면과 사진을 최대한 수록하였으며, 일부 유물사 진은 소장처의 협조를 얻어 함께 수록하였다. � 문장은 국한문 혼용으로 하되, 현행 문화관광부 규정 한글맞춤법과 국정교과 서 표기원칙에 따랐다. � 인명∙지명과 전문적인 학술용어, 잘못 전해지기 쉬운 용어는 한자나 원어를 표기하였으며, 필요한 경우 원어를 ( )에 병기하였다. � 집필자 이름은 원고 끝에 각 장별로 밝히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성 격 과 문 화 기 반
제1장 한성백제사 총설 … 21 │한국 고대사의 역사적 흐름 … 22
제3장 한강유역의 문화기반 … 129 │구석기문화 … 130
1. 한국 고대사의 범위 … 22
1. 자연환경 … 130
2. 한국 고대사의 특징 … 24
2. 중기구석기시대 … 137
3. 한강유역을 둘러싼 한국 고대사의 전개과정 … 35
3. 후기구석기시대 … 152
│한성백제사의 흐름과 역사적 의미 … 53
│신석기문화 … 184
1. 시기구분 … 53
1. 전신세(후빙기)의 자연환경 … 184
2. 건국과 성장 … 55
2. 개념과 시기구분 … 193
3. 중앙집권체제의 확립 … 60
3. 유적과 유물 … 202
4. 영역의 확대와 대외관계의 전개 … 70
4. 생업경제와 사회문화 … 215
5. 집권세력의 교체와 한성 함락 … 81
5.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 226
6. 한성시대사의 역사적 의미 … 85
제2장 한성백제와 한강유역의 지리환경 … 91 │한강유역의 입지 조건 … 92 1. 절대적 입지 … 92
│청동기문화 … 230 1. 시대 개념과 기원 … 230 2. 유적 … 233 3. 생업 경제와 사회상 … 256 4.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 280
2. 상대적 입지 … 95 │자연환경 … 99 1. 지질∙지형 … 99
부록 … 285 │한성백제 관련 저서 목록 … 286
2. 기후 … 106
1. 개인저서(박사학위논문 포함) … 286
3. 식생 … 113
2. 기관 발행 도서 … 295
│인문환경 … 116 1. 정치∙군사적 중요성 … 116
3. 일본 발간 도서 … 301 │한성백제 관련 논문 목록 … 302
2. 경제환경 … 122
1. 국내 논문 … 302
3. 사회∙문화환경 … 125
2. 외국 논문 … 358
건 국 과 성 장
제3장 한성백제의 정치∙경제 및 사회제도 정비
제1장 백제의 기원과 건국 │마한의 성립과 삼한 1. 삼한의 소국 2. 소연맹국의 존재 3. 마한 연맹왕국의 성립 │백제 건국설화의 분석과 그 의미 1. 현전하는 백제의 건국신화 2. 백제 건국신화의 본 모습 3. 백제 건국신화의 전승과 정착 │국가형성과 주민의 구성 1. 부여계 유이민과 토착세력 2. 백제 국가의 형성 3. 마한세력의 축출 │국호와 지배층의 변천 1. 십제에서 백제로 2. 왕실 지배세력의 변천 3. 고이왕 때의 제도정비
│통치체제의 제도적 정비 1. 중앙집권력의 강화와 국가체제의 제도화 2. 중앙통치조직 3. 지방통치조직 4. 군사조직 5. 사상∙종교와 제의체계 │경제와 사회제도 1. 경제제도 2. 사회제도
제4장 수도 한성의 함락과 웅진천도 │고구려의 남진과 백제의 대응 1. 고구려의 남진과 백제의 곤핍 2. 집권세력의 교체와 왕권의 약화 │개로왕의 왕권강화 추진 1. 개로왕의 즉위와 왕권 중심의 정치운영 추진 2. 대외관계의 강화
제2장 한성백제의 영역확장
│수도 한성의 함락 1. 개로왕의 실정 2. 고구려의 한성 함락 3. 고구려의 한강유역 지배
│낙랑ㆍ말갈의 남침과 백제의 대응 1. 낙랑의 침략과 그 실체 2. 말갈세력과의 대립
│웅진으로의 천도 1. 천도 배경 2. 문주왕의 국가재건 노력
│백제의 마한 병합 1. 백제 초기 마한과의 관계 2. 목지국의 위치와 성격 3. 마한의 병합과 지배 │근초고왕의 영역확장 1. 남부 마한세력의 복속 2. 고구려지역으로의 진출 3. 가야지역으로의 진출
제5장 고구려의 한강유역 장악과 영역 지배 양상 │4세기 말~6세기 대백제전과 정복지의 범위 1. 4세기 말~5세기 초 정복지의 범위 2. 5세기 초~6세기 중반 한강유역의 영역 변화 양상 │ 《삼국사기》지리지에 나타난 고구려 군현의 성격 1.《삼국사기》지리지의 고구려 군현과 지배방식 2. 한강유역 고구려 유적의 성격
王 都 와 방 어 체 계
제3장 몽촌토성
제1장 위례성의 위상과 위치 │위례성 관련 사료와 연구사 검토 1. 위례성 관련 사료 2. 연구사 검토 │두 개의 위례성 │위례성의 위치 │한성의 위치와 구조 1. 한성 관련 사료 2. 한성의 위치와 구조 3. 한성의 풍경
제2장 풍납토성 │풍납토성의 입지조건과 왕궁유적의 발견 1. 자연지리 환경 2. 고고학적 환경 3. 풍납토성 내의 왕궁유적 발견 │풍납토성의 구조와 출토 유물 1. 풍납토성의 구조 및 축조 기법 2. 풍납토성 내의 건축 구조와 시설 3. 풍납동식 무문토기와 백제 토기의 형성 4. 풍납토성 내 출토유물 │풍납토성의 왕궁 경영 1. 풍납토성 발굴을 통해 본 왕성 2. 풍납토성 축조시기 3. 풍납토성 내 건물배치 4. 都城制의 운영 │풍납토성과 한성백제사 1. 풍납토성과‘원삼국시대론’ 2. 풍납토성의 역사적 의의
│몽촌토성의 입지 1. 지세와 명칭 유래 2. 백제 이전의 한강유역 3. 한성시대 중심 묘역 석촌동고분군 │몽촌토성 유구의 분포와 성격 1. 발굴조사의 진행과 주요 발견 2. 몽촌토성 유구 분포 3. 주요 유구의 성격 │몽촌토성 출토 유물로 본 한성백제 1. 백제 토기와 기종 구성상의 특징 2. 몽촌토성 출토 백제 토기의 이해 3. 기타 백제 유물 4. 중국 문물 5. 須惠器 6. 고구려 점유기 유물 │몽촌토성의 시간적 위치와 역사적 성격 1. 백제의 국가 성립과 한강유역 성곽의 출현 2. 몽촌토성의 축조 시기와 변천 3. 몽촌토성의 역사적 성격
제4장 도성의 방어체계 │군사제도와 대외전쟁 1. 군사제도의 정비 2. 성곽 축성 3. 대외전쟁 │도성방어체계 1. 도성의 방어시설물 2. 주변 성곽 현황 3. 도성 방어체계 형성 │도성 외곽 방어체계 1. 성곽 현황 2. 성곽 특징 3. 외곽방어체계 형성
대 외 관 계 와 문 물 교 류
제1장 교통로의 확보와 운송 │교통로의 발달 배경
│북위와의 대외관계
1. 자연지리적 배경
1. 蓋鹵王의 북위 외교와 고구려
2. 정치∙군사적 배경
2. 魏虜의 백제 침입
3. 경제적 배경 │육로 1. 북방교통로
제4장 백제의 요서 진출 │요서 진출 관련 자료
2. 남방교통로 │요서 진출의 불신과 긍정 │수로
1. 불신론의 주요 논점
1. 내륙 수로-남한강-
2. 불신론이 지니는 문제점
2. 해로
3. 긍정론에서의 제논의
제2장 한반도에서의 대외관계와 문물교류 │대외관계의 역사적 성격 │백제 대외관계의 특질 │백제의 대고구려관계
│요서 진출의 시기 │요서 진출의 배경 및 성격 │요서 진출의 결말
제5장 대왜관계와 문물교류
│백제의 대신라관계
│백제ㆍ왜의 국교개시문제
│백제의 가야 및 낙랑ㆍ대방관계
│백제ㆍ왜관계의 성립과 전개
제3장 중국과의 대외관계와 문물교류 │魏와 西晉 1. 魏晋의 동방정책과 백제 2. 마한의 西晉 조공과 백제 │晋∙宋과 北魏 1. 대중교섭의 개시와 추이 2. 중국계 관인의 활동
1. 고구려의 남진과 백제∙왜 동맹관계의 성립 2.《송서》왜국전을 통해 본 백제와 왜 3. 개로왕대의 대왜관계 4. 한성의 함락과 왜 왕권 │문물교류의 양상과 성격
생 활 과 문 화
제1장 기술산업 │토기 1. 백제 토기 연구의 추세 2. 토기문화의 발달 3. 토기의 생산기술과 유통망 4. 토기의 각종 쓰임새 5. 토기에 나타난 대외교류 │기와와 전돌 1. 기와에 대한 기존 연구 2. 기와 출토 유적 3. 기와의 생산과 유통 4. 기와의 출현시기와 계보 5. 기와의 용도 │공예 1. 금속공예 2. 철의 생산과 철기제작 3. 유리의 생산과 사용 4. 칠공예와 목공예
제2장 사상과 신앙 │불교 1. 불교의 수용 2. 아신왕과 전지왕 때 불교 3. 내법좌평과 불교 4. 북조 불교와 개로왕 5. 불교의 수용 연대 6. 영광불법초전설 │유교 1.《서기》 의 편찬 2. 박사제도 3. 국가제사 4. 상장례의 도입 │도교 1. 도교 2. 산악신앙과 사방관념
제3장 건축과 축성기술 │주거지
1. 주거지 형태 2. 벽체시설 3. 출입시설 4. 화덕시설 5. 주거지 유형별 특징 │성곽 건축기술 1. 토성 2. 토성의 특징 3. 석성 4. 백제산성 축조의 특징
제4장 의∙식∙주 생활과 문화 │의생활 1. 백제 복식을 보는 주체적인 눈 2. 복식재료의 종류와 고유성 3. 복식의 유형과 전통성 4. 갑옷의 종류와 선진성 5. 백제 복식의 원형 │식생활 1. 전기(B.C. 18~260) 2. 후기(261~475) │주생활 1. 주거지의 지역별 양상 2. 주거지의 구조와 특징
제5장 장묘문화 │백제 건국 이전의 마한묘제 │한성백제의 묘제 1. 토광묘 2. 분구묘 3. 적석묘 4. 석곽묘 5. 석실묘 6. 서울지역 석실묘의 문제 7. 영산강유역권 옹관묘의 문제 │장묘문화의 역사적 의미 1. 장제의 특징 2. 묘제를 통해 본 백제의 건국과정
1
제1장 한성백제사 총설 한국 고대사의 역사적 흐름 제2장 한성백제와 한강유역의 지리환경 한성백제사의 흐름과 역사적 의미 제3장 한강유역의 문화기반
한국 고대사의 역사적 흐름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古代史라는 시대구분을 시도한 이는《東國史略》 을 쓴 玄采
23
(1858~1925)이다. 그는 한국사를 太古代(단군~삼한), 上古史(삼국~통일신라), 中
한 성 백 제 사 총 설
古史(고려), 그리고 近世史(조선)로 나누어 고대사를 고려시대까지로 파악하였다. 이후 崔南善(1890~1957)이 이를 계승하였으며, 黃義敦(1887~1964)과 安� (1886~1946)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申采浩(1880~1936)가 고대사의 범위를《讀史 新�》 (1908) 이후《朝鮮上古史》등에서 통일신라로 한정함으로써 이것이 정설화 한국 고대사의 범위 한국 고대사의 특징 한강유역을 둘러싼 한국 고대사의 전개과정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는 鄭寅普(1893~1965 :《朝鮮史硏究》 , 1947), 安在鴻 (1881~1965 :《朝鮮上古史鑑》 , 1947), �德星( 《朝鮮古代社會硏究》 , 1949), 孫晋泰 (1900~? :《朝鮮民族史槪論》 , 1948) 등으로 이어졌다.2) 해방 후 李丙燾(1896~1989)의《韓國史大觀》 (1948 : 上代) 이래 고대사 범위는 통일신라로 정리되었으며, �基白의《韓國史新論》 (1967), 韓 劤의《韓國通史》 (1970), 그리고 邊太燮의《韓國史通論》 (1986)에 이르기까지 그것을 기준으로 삼게
1. 한국 고대사의 범위
되었다. 현행 국사교과서에서도 통일신라까지를 고대사로 서술하고 있다. 다만 북한의 경우 唯物論을 바탕으로 한 主體史觀의 입장에서 고대사회를‘노예
한국 고대사는 그 범위가 위로는 선사시대로부터 아래로는 통일신라시대까지
소유자사회’ 로 규정하고, 檀君朝鮮에서 三韓社會까지로 하였으며, 삼국 이후를
포함될 수가 있다. 그러나 선사시대는 考古學으로 다루는 시기이며, 그 이후인 君
‘봉건사회’ 로 설정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조선통사》 (1977 및 1991) 이후《조선
長社會나 初期國家社會도 문헌의 한계 때문에 그 존속기간의 문제나 해석의 어려
전사》 (1979 및 1991)로 이어지고 있어 한국사의 內在的인 發展過程은 외면되고 있
움에 부딪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다루고 있는 한국 고대사는《三國史記》 가기
다.3)
록하고 있는‘삼국~통일신라시대’ 로 한정하고 이 시기의 역사적 성격부각에 초점 을 두고자 한다.
22 성 격 과 문 화 기 반
한국 고대사는 대체로《삼국사기》 에서 서술된 B.C. 57년의 신라 건국기부터 신 라가 멸망하는 935년까지 10세기간의 역사이다. 삼국이 성립되는 시기는 서양
이러한 근거는 百濟가 지금의 서울일대에서 출발하여 삼국의 한 축을 이루었다
[Rome]에 있어서 시저(Caesar)의 제1회 3두정치(B.C. 60~B.C. 44) 이후 로마帝
는 사실만은 아니다. 서울일대는 한반도의 허리로서 지리적인 좋은 조건과 역사적
政(B.C. 27~476)이 시작되는 때로서 예수의 탄생(B.C. 4)과 네로(Nero, 54~68)의
위상으로 볼 때 삼국시대의 爭處가 되어 이곳을 차지하려는 투쟁의 역사가 곧 한국
기독교 탄압이 격심했던 때였다. 그리고 로마 제정의 중흥기인 콘스탄티누스
고대사의 줄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지역의 확보가 한반도 통일의 바탕이 된다
(Constantinus)시대(306~337)와 동∙서 로마의 분열(395)이 있었던 4세기에는
는 사실에서 한국 고대사에 있어서 한강유역(하류)의 위치를 간과할 수가 없다.1)
美川王(300~331 : 고구려), 近肖古王(346~375 : 백제), 奈勿王(356~402 : 신라)
1) 申瀅植,〈한국 고대사에 있어서 漢江�域의 정치∙군사적 성격〉 《향토서울》41, 1983. 신형식,〈신라의 발전과 한강〉 《韓國史硏究》77, 1992. 신형식,〈신라의 영토확장과 北漢山州〉 《향토서울》66, 2005. �重國,〈4~5세기 백제의 성장 발전과 삼국의 각축〉 《향토서울》66, 2005.
�泰敦,〈고구려 漢城地域 倂呑과 그 지배양태〉 《향토서울》66, 2005. �基東,〈통일기 신라의 지방제도와 漢州〉 《향토서울》66, 2005. 2) 신형식,〈한국고대사의 범위와 특징〉 《韓國의 古代史》 , 삼영사, 2002, 70~71쪽. 3) 신형식,〈북한의 역사서술방향과 인식체계〉 《남북한 역사관의 비교》 , 솔출판사, 1994, 27쪽.
25 한 성 백 제 사 총 설
4~5세기경 세계지도
장수왕의 무덤인 장군총
의 재위시기였다. 5세기 廣開土王(391~413)과 長壽王시대(413~491)는 게르만族
일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이 시기는 삼국이 경쟁적으로 대립∙충돌하는 과정
의 이동기였고, 통일신라시대(676~935)는 프랑크왕국(481~843)의 전성기였다.
에서 고구려가 중국세력을 �河以西 지방으로 내몰았으며, 한반도에서는 한강유역
한편 삼국이 시작되고 발전하는 시기에 있어서 동양[中國]에서는 漢 武帝(B.C.
을 차지하려는 치열한 투쟁이 계속된 후 신라에 의해 통일되어 민족(전근대)이 결
140~87) 이후 後漢(25~220)을 거쳐 중국의 분열기(3국-5호16국-남북조시대 :
정되었다. 이로써 한국 전통사회의 原型은 확립되었으나, 한국사의 활동무대는 광
220~439~589)였으며, 삼국이 한강유역을 차지하려는 갈등의 4~6세기와 통일신
활한 滿洲를 상실한 채 한반도 이남으로 축소되었다.
라시대(668~935)에 이르는 7~9세기는 隋(591~618)와 唐(618~907)의 시기였다. 9세기 말 신라의 쇠퇴기에는 당도 혼란기에 빠지고 있었다.4)
한국 고대사의 특질은 첫째로 강력한 왕권의 확립이다. 이러한 절대왕권은 東方 專制政治(Oriental Despotism)의 전형적 모습인 이집트(Egypt)∙메소포타미아 (Mesopotamia)와 같이 거대한 방어시설(Huge defence structure), 수도를 향해 뻗어가는 도로망(Royal roads), 장엄한 궁궐(Colossal Palace)∙분묘(Tombs)∙신
2. 한국 고대사의 특징 24 성 격 과 문 화 기 반
전(Temples)의 축조 등을5) 통해서 그 실태를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에도《삼 국사기》백제 초기의 기록에서 다음과 같이 비슷한 유형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 고대사는 10세기에 이르는 장기간 지속되었으므로 그 성격이나 특질을 동 A-1. 온조왕 8년 7월에 馬首城을 쌓고 甁山柵을 세웠다.6) 4) 다만 북한의 경우 고구려의 건국을 B.C. 277년으로 소급하고 있어 북한의 견해로 삼국시대(고구 려)의 건국시기를 기점으로 한다면 240년이 소급된다. 이렇게 되면 한국 고대사(삼국~통일신라) 는 1230년이 된다.
5) Karl A. Wittfogel, Oriental Despotism, Yale univ. press, 1957, p.27. 6)《삼국사기》권23 온조왕 8년 7월.
A-2. 온조왕 11년 7월에 禿山城과 狗川의 두 柵을 세워 �浪과의 통로를 막았다.7)
助力者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
27
A-3. 온조왕 13년 7월에 漢山 밑에 柵을 세우고 慰禮城의 民戶를 옮겼다.8)
(capability of selecting good
A-4. 온조왕 15년 정월 宮室을 지었는데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하지 않았다.9)
helpers) 등을 가짐으로써18) 특
A-5. 온조왕 17년 4월에 사당을 세우고 國母를 제사 지냈다.10)
별한 존재가 된다.19) 특히 삼국
한 성 백 제 사 총 설
A-6. 온조왕 20년 2월에 왕이 大壇을 세우고 친해 天地에 제사 지냈다.11)
의 시조들은 예외 없이‘神의
A-7. 온조왕 22년 8월에 石頭와 高木의 두 城을 쌓았다.12)
아들’ 임을 강조하였으며 남다
A-8. 온조왕 36년 7월에 湯井城을 쌓고 大豆城의 民戶를 나누어 살게 하였다.13)
른 재능과 인품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삼국의 왕도 天子(중국)
이 기록은 溫祚王代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이때의 기록은 대체로 築
나 天皇(일본)에 대응할 수 있
城(fort)∙設柵(palisade)∙徙民(migration),14) 그리고 祭祀(sacrifices)15) 등으로
는 大王制를 통해 독자적인 天
왕의 직능을 나타냈으며, 특히 정복(conquest)과 巡幸(royal tour)의 기사가16) 주
下觀으로 각기 자아의식을 보
류를 이루고 있어 고대사회 王權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여주고 있다.20) 그러므로 우리
따라서 이때의 왕은 곧 人間神(man-god) 또는 公的 呪術師로서 하늘과 땅을 연
는 眞興王의 北漢山巡狩碑가
결하는 超人的인 존재이며 절대적 권한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왕은 특수한 신체적
拓境碑라기 보다는 그 지역을
특징(special bodily marks)은17) 물론 좋은 인품(good character), 그리고 훌륭한
확보한 사실을 하늘에 고하고 天恩에 보답하는 제사[封禪]를
26 성 격 과 문 화 기 반
7)《삼국사기》권23 온조왕 11년 7월. 8)《삼국사기》권23 온조왕 13년 7월. 9)《삼국사기》권23 온조왕 15년 정월. 10)《삼국사기》권23 온조왕 17년 4월. 11)《삼국사기》권23 온조왕 20년 2월. 12)《삼국사기》권23 온조왕 22년 8월. 13)《삼국사기》권23 온조왕 36년 7월. 14) 이러한 사실은 온조왕 13년의‘就漢山下立柵 移慰禮城民戶.’ 라든가 14년의‘築城漢江西北 分漢 城民.’ , 그리고 31년의‘分國內民戶爲南北部.’ 와 36년의‘築湯井城 分大豆城民戶 居之.’등에서 엿볼 수 있다. 15) 이와 같은 현상은 온조왕 원년에 東明廟를 세운 이후 17년에는 國母祭祀, 20년과 38년에는 大壇 을 세우고 天地에 제사를 지낸 기록에서 알 수 있다. 16) 巡幸의 기록은 5년(巡撫北邊), 10년(王出獵獲神鹿), 13년(子昨巡觀 漢水之南), 14년(王巡撫部落), 33년(王撫 安之), 38년(王巡撫) 등에 나타나 있다. 17) 삼국시대 왕의 신체적 특징은 儒理王(신라)이 이빨이 많았고(齒理多), 伐休王(신라)은 하늘의 변 화를 예견할 줄 알았다(豫知水旱及�之豊儉). 眞平王은 키가 11尺 이었고 內帝釋宮을 밟자 돌다 리 2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삼국유사》권1 기이1 천사옥대). 眞德�王은 키가 7尺이고 골상이 뛰어났으며, 손을 늘어뜨리면 무릎아래까지 닿았다( 《삼국유사》권1 기이1 진덕왕), 朱蒙은 善射 者였고, 故國川王(고구려)은 신장이 9尺으로 외모가 특이하였다. 仇首王(백제)은 신장이 7尺으 로 위엄이 당당했으며, 毗有王은 외모가 아름답고 口辯이 있었다. 東城王은 담력이 뛰어나고 활 을 잘 쏘았고, 武寧王은 신장이 8尺이었다.
북한산진흥왕순수비
올린 기념물이라는 견해를 받아들일 수 있다.21) 그러나 삼국시대의 절대왕권이 신성불가침의 성격은 아니다. 왕권은 항상 제도 화된 견제기구와 群臣會議(和白), 그리고 천재지변의 제약을 면할 수 없었기 때문 이다. 고대국가가 완성된 이후에는 정비된 관료조직이 있어 왕권을 보좌하고 동시 에 견제하였으며, �令이라는 법적기준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후대 왕도정치의 기본이 되었다.
18) Wolfram Eberhard, The Political Function of Astronomy and Astronomers in Han China, Chinese Thought and Institutions Fairbank(ed.), 1957, p.38. 19) 이러한 사실은 朱蒙이 再思(麻衣)∙武骨(納衣)∙默居(水藻衣)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과 沸流와 溫 祚가 烏干∙馬黎 10명의 보좌를 받은데 나타나 있다. 20) �起錫,〈4~5세기 고구려 왕자의 天下觀에 대하여〉 《호서사학》11, 1983. �泰敦,〈5세기 金石文에 보이는 고구려인의 天下觀〉 《한국사론》19, 1988. �文基,〈6세기 新羅大王의 성립과 그 국제적 계기〉 《신라와 주변제국의 문화교류》91, 1988. 21) 金台植,〈封禪大典, 그 기념물로서의 진흥왕순수비〉 《白山學報》68, 2003, 78~92쪽. �宇泰,〈북한산비의 신고찰〉 《서울학연구》12, 1999, 96쪽.
으로 王과 群臣간의 대립이 빈번하였는데, 國人(衆議 : 和白)에 의해서 왕의 교체
29
(즉위 및 폐위)가 신라의 경우 23회에 이르기까지 하였다.27)
한 성 백 제 사 총 설
하지만 이러한 일부의 견제와 제한에도 불구하고 왕은 武力(military power)의 합법적 사용과 徵稅權(taxation), 그리고 恩典을 통해 절대자로 군림하였다.28) 이 때의 군주는 專制的 權力(despotic power)을 행사하는 무자비한 폭군으로서 반대 자에 대해서는 가혹한 복종을 강요하는 동시에, 자신에 대한 충성과 복종의 대가로 자비로운 善君(benevolent despot)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고대사회의 군주가 지 니는 희열과 고독이 교차하는 양면성이 있으며, 자신(군주)에게 충성을 다하는 공 로자에게 후한 보상을 통한 재분배 기능(redistributional function)을 행사하는 이중성이 있게 된다.29) 광개토왕비의 비각
B-1. 왕이 群公을 불러 靺鞨 征服을 논의하였는데, 伊 雄宣이 불가하다고 건의하여 이를 그만두었다.22) B-2. 眞智王은 나라를 다스린 지 4년만에 政�荒淫의 죄 목으로 國人이 그를 폐위시켰다.23)
광개토왕비
한국 고대사의 두 번째 특질로 들 수 있는 것은 征服國家로서의 모습이다. 고대국 가는 주변 소국의 병합과정에서 나타난 결과이기 때문에, 그 사회는 생리상 주변 국가 와의 부단한 전쟁과 정복을 되풀이하게 된다. 삼국시대 각 왕조를 대표하는 近肖古王 (346~375)∙廣開土王(391~1413)∙眞興王(540~576)도 정복군주로서의 업적을 남긴 주인공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업적도 결국은‘한강유역의 유지와 정복’ 을 위한 싸움
B-3. 6년 2월 동북쪽에서 지진이 있었는데 그 소리가 우
이었으며, 廣開土王碑∙中原高句麗碑∙眞興王巡狩碑의 존재도 이를 뒷받침하게 된
레와 같았다. 5월에 유성이 �大星을 범하였다. 왕
다. 결국 백제는 한강유역을 고수하기 위해서, 고구려의 南進과 신라의 北進은 곧 이
이 돌아가니 諡號를 효성이라 하였다.24)
곳을 차지하려고 국력을 집중시킨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국왕은 정복지역을 확인하
B-4. 10년 2월 해에 3중의 무리가 생겼으며, 궁중의 큰 나무가 저절로 뽑혔다. 4월에 왕이 돌아갔다.25)
고 그 지역 주민을 회유하는 동시에 지역의 稅源 확보를 위한 巡幸이 필요하였다.30) 특히《삼국사기》 의 기록에 따르면 전쟁기사가 本紀 내용의 16.3%나 되고 있어 그 의미를 엿볼 수가 있다.31) 전쟁은 외침의 격퇴와 대외팽창[征服]을 의미하지만,
위의 사료 B-1과 B-2는 왕권이 國人(和白)에 의해서 제약되었음을 알려주는 것
그 내면에는 국민결속의 응집력 내지는 국가성장의 동력이 될 수 있어 왕권의 강도
이며, B-3과 B-4는 天災地變(하늘의 경고)에 의한 왕권의 제약을 의미한다.26) 그 러나 이러한‘國人의 合議’ 나‘하늘의 경고’ (천재지변)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음 28 성 격 과 문 화 기 반
22)《삼국사기》권1 일성왕 9년. 23)《삼국유사》권1 도화녀∙비형랑. 24)《삼국사기》권9 효성왕 6년 5월. 25)《삼국사기》권24 근구수왕 10년 2월 및 4월. 26) 신형식,〈天災地變記事의 개별적 검토〉 《三國史記硏究》 , 일조각, 1981, 184~209쪽. 신형식,〈한국고대사에 있어서 地震의 정치적 의미〉 《동양학》14, 1984.
27) 신형식,〈정치기사의 개별적 검토〉 , 앞의 책, 1981, 166쪽. 28) Karl Wittfogel, op. cit, pp.34~42. 29) Vladimir M. Tikhonov,〈삼국사기열전 김유신조가 내포하는 의의〉 《이화사학연구》22, 1995, 256~257쪽. 30) 신형식,〈巡幸을 통하여 본 삼국시대의 王〉 《한국학보》25, 1981. 신형식,〈순행의 유형과 그 성격〉앞의 책, 1981, 172~183쪽. 金瑛河,〈신라시대 巡守의 성격〉 《민족문화연구》14, 1979. 金瑛河,〈고구려의 巡守制〉 《역사학보》106, 1985. 노용필,《신라 진흥왕 순수비 연구》 , 일조각, 1995. 31) 신형식, 앞의 책, 1981, 358~359쪽.
와 권위의 상징으로 기능하였다.32) 따라서 왕권은 이러한 전쟁과 정복을 통해 자신
31
의 지위강화를 이룩할 수 있다. 동시에 정복이나 방어를 특징으로 하는 전쟁은 단
한 성 백 제 사 총 설
순한 군사적 행위로 설명될 수가 없다. 끊임없는 兵器의 개발, 戰術의 모색, 그리고 패배시 治者(국왕)의 정치반성과 승전시 권위의 강화에 따른 정치개혁 등 사회발전 이 수반되기 때문이다.33) 또한 전쟁 참여자의 포상이나 정치적 배려에 따른 일반 평민의 지위향상은 물론, 새로운 정복지 확장에 따른 異質文化의 접촉과 교류는 국 가 발전의 큰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 전쟁이 지니는 고대사회에서의 역사적 의미가 있다. 한국 고대사의 세 번째 특질은 불교 및 유교를 비롯한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존 재이다. 고대국가의 기반이 확립되면서 기존의 自然崇拜思想이나 애니미즘 (Animism)과 샤머니즘(Shamanism) 등 多神敎的인 재래사상은 왕권의 신성화과 정에서 큰 몫을 할 수가 없었다. 국민을 하나의 테두리 속에 묶어 줄 이데올로기가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 불교와 유교[儒學]의 수용이 있게 된다. 불교 수용에서 왕실 의 주도적 역할은 물론, 왕과 귀족간의 관계를 석가와 보살과의 相補的 존재가 갖 는 의미나34) 興王寺∙興國寺∙佛國寺 등 사찰의 명칭이 지닌 성격도 같은 맥락이 백제의 불교를 잘 보여주는 서산마애삼존불
다. 그러므로 신라의 경우 法空(법흥왕)∙法雲(진흥왕)∙白淨(진평왕)과 같은 佛敎 王名이나 신라왕의 葬地가 사찰 부근이라는 사실, 그리고 四天王寺나 感恩寺 등의 成典寺院의 조성 등은 국가와 불교와의 관련을 설명해 준다.35) 여기서 불교는 국왕 과 국민을 한데 묶어 고대국가의 이념과 방향을 제시하는 假橋가 됨으로써 종교와 국가(왕실)간의 연결 관계를 볼 수 있다. 불교의 역할과 국가(왕실)와의 관계를 설
나라가 영원히 평안할 것이다.36) C-2. 자기가 살려고 남을 죽이는 것은 승려의 도리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이 대왕의 땅에 살고 대왕의 水草를 먹고 사는데 어찌 감히 왕명을 거역하겠는가.37)
명해 주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보자. 위의 기록에서 C-1은 慈藏이 皇龍寺 9층탑을 세우게 된 과정과 그것이 지닌 의 C-1. 梵王의 명을 받아 護法龍이 그 절에 와서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거든 절 안
미를 나타낸 것이다. C-2는 圓光이 隋에 乞師表를 짓게 된 배경을 설명한 것으로
에 9층탑을 세우시오, 그러면 이웃 나라들은 항복할 것이며, 九韓이 와서 朝貢하여
당시 국가(왕)와 개인은 불교라는 公的 �理를 통해서 결합되었음을 보게 된다. 그
30 성 격 과 문 화 기 반
러므로 국가 최고 顧問인 國統(僧統∙寺主)이 승려였으며, 巡幸時에 隨駕臣 명단의 32) Morton H. Freid, The Evolution of Political Society, Random House, N.Y., 1967, p.213. Kent Flannery, The Cultural Evolution of Civilization, Annual Review of Ecology and Systematics, 1976, pp.96~118. 33) 신형식,〈삼국시대 전쟁의 정치적 의미〉 《한국사연구》43, 1983, 17쪽. 34) �基白,〈한국고대에 있어서 王權과 佛敎〉 《신라사상사연구》 , 일조각, 1986, 119쪽. 35) �泳鎬,〈신라중대 王室寺院의 官寺的 機能〉 《한국사연구》43, 1983.
최상부에 국통이 자리하고 있음은 불교가 지닌 정치적 의미를 보게 된다. 따라서
36)《삼국유사》권3 탑상4 황룡사 9층탑. 37)《삼국사기》권4 진평왕 30년.
이상인 王道政治를 위한 �∙�∙政∙刑의 經世哲學은‘도덕의 실천’ 을 통해 그러
33
한 도덕의 내적 기준인 仁과 외적기준인 �를 결합시켜 爲民政治의 실현을 강조하
한 성 백 제 사 총 설
였다.39) 따라서 이러한 유교정치의 이상 속에서 충효사상이 요구되었고, 그러한 관 점에서 국가의식이 나타난 것이다. 유교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충효사상은 고금을 통해서 계승∙유지된 인간의 정 신적 良識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인간의 도리를 표시한 고대사회의 대표적인 덕목 으로서 실천규범이 된 것이다. 황룡사 금당터
남의 신하가 되어서는 忠을 다해야 하고 남의 아들이 되어서는 孝를 다해야 하는데 위급한 일(나라)을 보고 목숨을 내 놓는 것은 忠孝를 함께하는 인간의 도리이다.40)
위의 기록과 같이 金�胤(金庾信 동생인 欽春의 손자)의 死生觀에서 고대사회 충 과 효의 관계를 엿볼 수 있으며,《삼국사기》열전에 보여진 21명의 殉國者 기록이 고대사회 유교의 역할을 말해주고 있다.41) 그러나 이러한 충효사상이 일방적인 사 상체계가 아니라‘王으로서 백성을 구하지 않는 것은 仁이 아니고, 臣으로서 諫하 지 않는 것은 忠이 아니다.’ 와42) 같이 양자간의 도리가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 다. 이와 같이 유교사상은 인간의 덕목을 강조함으로써 왕권의 정당성은 물론 국민 의 윤리적 규범을 제시하여 불교와 함께 고대국가의 이념으로 기능하였다. 끝으로 한국 고대사는 한국 전통사회의 원형을 이룩한 역사적 의미와 함께 민족 황룡사 모형도
문화의 根幹을 이룩한 시대였다. 한국의 전통사회 즉 전근대사회는 조선왕조에서 그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은 앞 시대인 고려왕조
奉德寺나 皇龍寺가 仁王道場이 된다든가, 나라가 어려울 때 왕이 寺刹(皇龍寺∙感 32 성 격 과 문 화 기 반
(918~1392)와 그에 선행된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에 존재했던 것을 계승∙발전∙
恩寺)을 찾아가면서 看燈과 百座講會를 행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 될 것이다.38) 한편 고대국가에 있어서 정치 이상과 국민의 덕목으로 기능한 유교는 종교보다 는 儒學으로서 인간의 보편적 원리와 국민교화의 수단이 되었다. 특히 유교정치의 38) 蔡尙植,〈통일신라기의 成典寺院의 구조와 기능〉 《釜山史學》8, 1984. 신형식, 앞의 책, 1981, 175쪽.
39) �初夏,〈孟子의 爲民意識과 그 性格〉 《민족문화연구》14, 1979. �完栽,〈유학의 정신〉 《�承國博士回甲�叢》 , 1983. �漢�,〈유교윤리의 본질적 구조〉 《�承國博士回甲�叢》 , 1983. 40)《삼국사기》권5 무열왕 7년. 41) 신형식,〈한국고대사에 있어서 충효사상〉 《한국고대사의 신연구》 , 일조각, 1984, 427쪽. 42)《삼국사기》권49 열전9 창조리.
변형시킨 것이다. 한국의 민족문화도 오랜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외래문화의 수용
또한 한국 고대사의 마지
35
이 큰 역할을 하였지만, 그 뿌리는 삼국시대 특히 통일신라시대로 소급할 때 이해
막 단계인 통일신라는 백
될 수 있다.
제∙고구려의 문화를 통합하
한 성 백 제 사 총 설
전통사회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발탁법인 과거제와 교육제도인 成均館은 그것
여 제∙려문화의 이탈과 붕
이 고려의 과거제와 國子監에서 연유되었으며, 다시 신라(통일)의 讀書三品科와 國
괴를 막고 하나의 민족문화
學(또는 고구려의 太學)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최고 外職인 觀察使
형성에 기틀을 마련하였다.
는 都事∙檢�∙審藥 등의 전속 보좌관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는 중국 것의
고구려의 다양한 石造文化와
모방이 아니라 고려시대 兵馬使가 거느린 監倉使∙分道將軍∙分臺에서 연유된 것
古墳壁畵, 그리고 신라의 찬
이다. 다시 그 기원을 찾아보면 신라의 軍主(都督)가 州助(州輔)∙長史(司馬)∙外司
란한 불교문화는 그대로 고
正 등의 보좌관을 거느린 데서 시작되었다.43) 이와 같이 삼국~통일신라시대인 한
려로 이어졌으며, 오늘날 민
국 고대사회는 고려∙조선시대의 전반적인 정치체제의 원형이 마련된 시기였다.
족문화의 원류로서 계승되어 온 것이다. 고구려 벽화[舞踊 塚]에서 보여진 手搏圖는 현 대의 택견이나 씨름으로 이 어졌으며,《東史綱目》 에서 나타낸‘삼국-신라(통일 이
4세기경 삼국의 형세도
후)-고려-大朝鮮萬萬歲’ 와 같은 東國�代傳授地圖의 표현은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특히 한국 고대사의 마 지막 단계인 통일신라는 비록 영토와 연구의 축소라는 한계가 있지만, 북방의 유목 문화와 남방의 농경문화를 결합시켰으며, 동해권과 서해권을 하나로 뭉쳐 한국사 의 새로운 도약을 이룩하였음은 큰 의미가 있다.
3. 한강유역을 둘러싼 한국 고대사의 전개과정 34 성 격 과 문 화 기 반
고구려 벽화의 해의 신∙달의 신
| 고구려의 발전과정 | 43) 신형식,〈신라 軍主考〉 《白山學報》19, 1975. 신형식,《신라통사》 , 주류성, 2005. 邊太燮,〈고려시대 지방제도의 구조〉 《국사관논총》1, 1989. 장병인,〈조선초기의 관찰사〉 《한국사론》4, 1978. 이존희,《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연구》 , 일지사, 1990.
한국 고대사 중 1~7세기까지는 삼국간의 주도권 쟁탈기였고, 7세기 후반 통일 신라 260여 년은 통일된 고대국가 발전과 그 유지를 위한 시련기였다. 그러나 백제 를 중심으로 본 한국 고대사 전반기(삼국시대)는 한강유역을 차지하려는 삼국의 한
반도 주도권 쟁탈기였고, 후반기는 東海圈과 西海圈을 하나로 묶는 민족문화의 건 설기라고 하겠다.
<표 1>
한국 고대사(삼국시대)는 압록강유역에서 성장한 고구려와 한강유역에서 터를 잡은 백제, 그리고 형산강유역에서 출발한 신라가 각기 한반도의 주인공이 되려고 전쟁을 한 역사였다. 그러나 북방의 고구려는 1~4세기까지는 중국세력을 막아야 하는 한반도의 防波堤로서 한강유역에로의 진출은 고려될 수가 없었다. 다만 �浪 郡과 帶方郡을 병합한 이후는 대 중국 투쟁에서 얻어진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농경 지 확대라는 측면에서 南進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서북방으로 진출은 거 대한 중국세력과의 충돌을 의미하기 때문에, 더구나 한반도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서는 한강유역의 확보가 불가피하였다. 여기서 故國原王(384~391)과 近肖古王 (346~375)의 충돌 이후 고구려와 백제간의 갈등이 격화되는 필연적 과정을 보게 된다. 고국원왕 39년(369 : 근초고왕 24)에 고구려가 백제를 처음으로 침략한 기록 이 전에 두 나라간의 충돌이 있었다는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고구려는 건국 후 4세기 후반까지 400년간 북방세력과의 싸움이 계속되었으므로 대동강 이 남지역에 관심을 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44) 따라서 4세기 후반까지 고구려사는 滿洲에서의 영토 확장과정이었으나 313년의 낙랑군 축출로 남진의 필요성을 느끼 기 시작하였다. 고구려 건국 이후 4세기간에 있어서 고구려사는 漢∙王莽∙魏 등 중국세력과 靺鞨∙鮮卑∙肅愼 등 북방세력을 비롯하여 扶餘∙�浪∙玄
등과 계
속적인 충돌사였다. 그리고 이러한 충돌이 요서∙요동지방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 며, 西安平과 新城 그리고 �東城 등이 주요 爭處였다. 당시 고구려의 대 북방 충돌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의 <표 1>과 같다. <표 1>에서 볼 때 고구려는 4세기 중반까지 漢(낙랑∙요동∙대방∙왕망 포함)을 비롯하여 부여∙옥저∙현토∙선비(전연)∙숙신 등과 40여 차의 전쟁(정복∙방어) 36 성 격 과 문 화 기 반
37
1~4세기 고구려의 대외충돌
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강유역에 대한 진출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중국이 삼국의 대립기(220~265)에 이르러서는 魏의 침입(�丘儉∙王ヶ)은 있었으나, 전반
44) 이 시기에 東川王 19년(245 : 신라 조분왕 16)에 고구려가 신라의 북경을 침략하였다는 기록이 하나가 있다. 기사는 고구려 본기와 신라본기에 나와 있으나,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국력이나 영역으로 보아 양국간의 충돌은 없었을 것이다.
연
대
B.C. 9 (유리왕 11) B.C. 6 (유리왕 14) A.D.12 (유리왕 31) 13 (유리왕 32) 14 (유리왕 33) 14 (유리왕 33) 21 (대무신왕 4) 22 (대무신왕 5) 28 (대무신왕 11) 32 (대무신왕 15) 37 (대무신왕 20) 44 (대무신왕 27) 49 (모본왕 2) 56 (태조왕 4) 105 (태조왕 53) 118 (태조왕 66) 121 (태조왕 69) 121 (태조왕 69) 121 (태조왕 69) 122 (태조왕 70) 146 (태조왕 94) 168 (신대왕 4) 169 (신대왕 5) 172 (신대왕 8) 184 (고국천왕 6) 197 (산상왕 1) 242 (동천왕 16) 246 (동천왕 20) 246 (동천왕 20) 259 (중천왕 12) 280 (서천왕 11) 293 (봉상왕 2) 296 (봉상왕 5) 302 (미천왕 3) 311 (미천왕 12) 313 (미천왕 14) 314 (미천왕 15) 315 (미천왕 16) 319 (미천왕 20) 319 (미천왕 20) 320 (미천왕 21) 339 (고국원왕 9) 342 (고국원왕 12) 345 (고국원왕 15)
충돌(침입 : 정복)한 나라 鮮卑 扶餘 王莽 扶餘 �貊 漢 扶餘 扶餘 漢(�東太守) �浪 �浪 漢(光武帝) 漢(北平∙太原) 東沃沮 漢(�東) 漢(玄 ) 漢(유주∙현토∙요동) �東 玄 城 扶餘 漢(요동) 漢(현토) 富山賊 漢 漢(요동태수) 漢(公孫度) 魏 魏 魏 魏 肅愼 鮮卑(모용외) 鮮卑(모용외) 玄 郡 �東 �浪 帶方 玄 城 鮮卑 鮮卑(모용외) 鮮卑(모용인) 前燕 前燕 前燕
결
과
扶芬奴의 활약(격퇴) 扶餘王 帶素 침입(퇴각) 嚴尤 침입 無恤(대무신왕)이 격퇴 烏伊∙摩離가 정복 高句麗縣 정복 정벌 怪由의 부여왕 살해 퇴각 崔理 투항 정벌 낙랑 정벌∙살수이남 병합 요동태수와 화친 정벌(영토확장) 약탈(패전) 화려성 공격 遂成의 격퇴 요동태수(蔡風) 살해 부여왕자(尉仇台)의 한나라 지 마한∙예맥 지원 (패배 : 부여의 요동지원) 西安平縣 정벌 현도태수 침략 優居의 富山賊 토벌 坐原에서의 승리 坐原에서의 격퇴 격퇴 西安平 공략 �丘儉 격퇴 관구검∙왕기격퇴(密友∙紐由) 尉遲楷 격퇴 達�의 격퇴 高奴子의 격퇴 퇴각 현도군 공략 서안평 공격 낙랑 멸망 대방 공격 현도성 정벌 모용황 침입 張統의 침입(如Я 납치) 요동에서의 싸움 모용황 침입 모용한 침입 모용각 침입
한 성 백 제 사 총 설
적인 중국세력의 분열로 한반도로의 진출이 약화되면서 고구려는 4세기 초 낙랑∙
D-10. 온조왕 41년 2월에 한수 동북지역의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수리하였다.55)
대방의 축출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정치적 진출이 확대된 영역과 국가체제 유지에 필요한 농경지의 확보 차원에서 남진으로 방향이 바뀌게 되었다. 여기서 한강유역
위의 기록은 溫祚王代(B.C. 18~A.D. 28)에 있었던 축성 기록이다. 물론 이들 지
의 확보를 위한 백제와의 싸움이 불가피하게 된다. 1~4세기 신라와 백제의 대외성장(충돌)
| 백제와 신라의 발전과정 | 한강유역에서 출발한 백제는 무엇보다도 이주한 북방계의 �民에 의한 정치적 주도권 확립이 필요하였다. 동시에 주변의 여러 나라(부족)들, 특히 북방의 말갈∙ 낙랑과 남방의 마한과 신라 등의 침입으로부터 한강유역의 보호가 우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백제 초기는 이러한 외적의 침입을 막고 한강유역을 지키기 위 해 방어시설의 축조가 불가피하여 조기에 국가성장이 이룩될 수 있었다.45)
D-1. 온조왕 8년 7월에 馬首城을 쌓고 甁山柵을 세웠다.46) D-2. 온조왕 11년 7월에 禿山柵과 狗川柵을 세워 낙랑의 통로를 막았다.47) D-3. 온조왕 13년 7월에 한산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들을 옮겼다.48) D-4. 온조왕 14년 7월에 한강서북쪽에 성을 쌓고 한성의 백성들을 나누어 살게 하였 다.49) D-5. 온조왕 22년 8월에 石頭城과 高木城을 쌓았다.50) D-6. 온조왕 24년 7월에 熊川柵을 세우니 마한이 사신을 보내어 항의하였다.51) D-7. 온조왕 27년 7월에 大豆山城을 쌓았다.52) D-8. 온조왕 38년 7월에 湯井城을 쌓고 대두산성의 민가들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53) D-9. 온조왕 38년 8월에 圓山城과 錦峴城을 수리하고 古沙夫里城을 쌓았다.54)
38 성 격 과 문 화 기 반
45) 신형식,〈백제 전기사회의 성격〉 《선사와 고대》19, 2003, 34쪽. 46)《삼국사기》권23 온조왕 8년 7월. 47)《삼국사기》권23 온조왕 11년 7월. 48)《삼국사기》권23 온조왕 13년 7월. 49)《삼국사기》권23 온조왕 14년 7월. 50)《삼국사기》권23 온조왕 22년 8월. 51)《삼국사기》권23 온조왕 24년 7월. 52)《삼국사기》권23 온조왕 27년 7월. 53)《삼국사기》권23 온조왕 38년 7월. 54)《삼국사기》권23 온조왕 38년 8월.
한 국 고 대 사 의 역 사 적 흐 름
<표 2>
연
39
대
63 (다루왕 36) 64 (다루왕 37) 66 (다루왕 39) 70 (다루왕 43) 74 (다루왕 47) 75 (다루왕 48) 76 (다루왕 49) 85 (기루왕 9) 105 (기루왕 29) 113 (기루왕 37) 125 (기루왕 49) 155 (개루왕 25) 167 (초고왕 2) 167 (초고왕 2) 188 (초고왕 23) 189 (초고왕 24) 190 (초고왕 25) 199 (초고왕 34) 204 (초고왕 39) 218 (구수왕 5) 222 (구수왕 9) 224 (구수왕 11) 240 (고이왕 7) 255 (고이왕 22) 255 (고이왕 22) 261 (고이왕 28) 266 (고이왕 33) 272 (고이왕 39) 278 (고이왕 45) 283 (고이왕 50) 286 (고이왕 53) 337 (비류왕 34) 366 (근초고왕 21) 368 (근초고왕 23) 369 (근초고왕 24) 371 (근초고왕 26) 375 (근초고왕 30)
충돌(침입∙정복∙방어)사실 신라를 공격 〃 〃 〃 〃 〃 신라가 침입 신라를 공격 신라와 和親요구 신라에 사신보냄 신라에 군사지원 신라가 침입 신라를 공격 신라가 침입 신라를 공격 신라와 전쟁 〃 〃 〃 신라가 침입 신라를 공격 신라가 침입 신라를 공격 신라를 공격 〃 신라와 화친요구 신라를 공격 〃 〃 〃 신라와 화친요구 신라가 사신파견 신라에 사신파견 〃 고구려가(고국원왕)침입 〃 〃
55)《삼국사기》권23 온조왕 41년 2월.
결
과
娘子谷城에 이름 蛙山城∙狗壤城 전투 와산성 패배
와산성 탈취 와산성 상실
말갈 격퇴 격퇴 1천명 나포 패배 母山城 공격 패배 와산성 승리 腰車城 탈취 獐山城 함락 熊谷 승리 烽山 패배 槐谷 승리 烽山成 패배 거절 봉산성 패배 槐谷城 포위
雉壤城 승리 평양성 공격(고국원왕 패사) 水谷城 함락
역의 소재가 불투명하지만 결론은 한강유역을 지키려는 노력의 표시였다. 그만큼
남방세력(마한∙신라)의 위협으로부터 한강유역(하류)을 지키려는 벅찬 역사였다.
41
백제 초기는 한강유역(하류)의 확보와 개발이 정치의 전부였다. 마치 이집트
그러므로 온조왕 때 10차의 축성 기록 이후 다루왕 29년(56)의 수곡성, 개루왕 5년
(Egypt)∙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의 전제군주(Oriental despot)나 秦∙漢代
(132)의 북한산성, 초고왕 45년(210)의 적현∙사도성, 구수왕 4년(217)의 사도성
의 군왕에게 치수가 곧 정치였던 사실과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왕의 빈번한 巡幸
부근의 二柵, 책계왕 1년(286)의 慰禮城∙阿旦城∙蛇城 수리, 그리고 비류왕 30년
한 성 백 제 사 총 설
을 통해 축성의 감독∙勸農∙徙民, 그리고 按撫를 통해 영역과 통치권 확인이 필요
(333)의 궁실 수리 등 계속된 축성과 궁성 수리는 한강유역 확보의 노력을 뜻한다.
하였다. 그러므로 백제는 전체 36회 순행 중에서 국초(1~2세기)에 12회가 집중되 고 있음을 보게 된다.56)
그러나 미천왕 14년(313)의 낙랑축출 이후 고구려의 남진정책은 중국의 정치적 변화와 맞물려 점차 그 속도를 가속화함으로써 백제는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결국 1~4세기의 백제사는 한강유역의 확보를 위한 축성과 주민들의 생활권 보
결국 이러한 과정에서 고국원왕의 敗死로(근초고왕 26년 : 371) 고구려는 커다란
호를 위한 외적 침입의 방어사였다. 多婁王(28~115) 이후 근초고왕까지 백제사의
시련을 맞았다. 따라서 고구려의 보복적 침략은 근초고왕 30년(375 : 소수림왕 5)
성장과정과 대 신라 관계를 정리하면 <표 2>와 같다.
이후 광개토왕의 등장과 더불어 빈번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더구나 이때 고구려는
<표 2>에서 볼 수 있듯이 백제는 근초고왕 30년(375) 水谷城 함락(고국원왕 패
백제를 고립시키기 위해 신라와 친선책으로 신라의 人質(實聖)을 받아들여 양국간
배에 대한 고구려의 보복)이 있기까지 40여 회 대외 충돌기사 중 대부분이 신라와
에 접근책이 모색됨으로써 백제는 더욱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이로써 4세기 후반
의 전쟁이다. 특히 1세기 중엽부터 3세기 후반까지 200여 년은 대부분이 신라와의
이후 삼국간에 한강유역 확보와 탈취를 위한 쟁탈전이 본격화되었다. 따라서 이러
싸움으로 전개된 것으로 보인다.57) 이러한 기록대로라면 당시의 충돌지역이 1세기
한 고구려의 군사적 위협(南進)에 직면한 辰斯王(385~392)은 우선 그 대비책으로
에는 娘子谷城(청주)과 蛙山城(보은)이였고, 2세기 이후에 이르면 母山城(진천)∙腰
關防(靑木嶺~八坤城~바다)을 설치하였다. 아마도 그 위치는 개성 부근에서 서해
車城(보은, 상주)∙沙峴城(공주)∙赤峴城(옥천)∙沙道城(연천)∙獐山城(경산)∙熊
를 낀 海邊地域(예성강∙임진강∙한강 하류~김포반도 북단)으로 추정되며 그 요충
谷(선산)∙烽山城(영주)∙塊谷(괴산)∙雉壤(배천)∙水谷城(신계) 등지로 되어 있
은 關彌城으로 생각된다.59) 그러나 관방설치 6년만인 진사왕 8년(392 : 광개토왕
다.58) 그러나 1세기에 양국이 청주∙보은지역에서 충돌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러
2)에 관미성이 함락되었다. 이 관미성은 여∙제간의 군사적 요충으로서 또는 서해
한 기록은 북방계 주민의 남하과정이나 마한과의 충돌, 또는 신라의 북방진출 과정
의 關門으로 그 중요성이 절대적이었다.
을 후대에 확대 서술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백제가 2~3세기에는 북방 말갈의 위협과 남방 신라의 북방진출로 큰 도전에 직면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변방에 築 城∙設柵 등 방어시설의 축조를 통한 한강유역 확보에 국력의 낭비를 강요받은 것 은 사실이다. 따라서 1~4세기(중∙후반)까지의 백제사는 북방세력(말갈∙낙랑)과
E-1. 관미성은 우리 북변의 요충지인데 지금 고구려 소유가 되었으니 이는 과인이 애석히 여기는 바이다. 卿眞武는 마땅히 마움을 써서 설욕하라.60) E-2. 관미성은 사면이 절벽으로 둘러 쌓여 있고 해수로 돌려 있는데 왕(광개토왕)이 군사 를 7도로 나누어 공격하여 20일 만에 함락하였다.61)
40 성 격 과 문 화 기 반
56) 신형식, 앞의 책, 1981, 181~182쪽. 57) 위와 같음. 58) 백제본기의 내용에서 多婁王 36년(A.D. 63) 이후 계속된 신라 공격 기사와 통교 기록이 빈번하 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기사는 신라본기에도 똑같이 보이고 있는 데, 1~2세기에 양국이 淸州 (娘子谷城)나 報恩(蛙山城)까지 진출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남하하는 辰國系의 對伯濟 戰으로 풀이하는 견해(千寬宇,〈三韓의 成立過程〉 《史學硏究》26, 1976 ;〈삼한의 국가형성〉 《한 국학보》2, 1976)를 참고할 수 있다.
59) 근초고왕 30년(375)의 고구려 침입(수곡성 함락) 이후 근구수왕 1년∙2년∙3년(10∙11월) 그리 고 진시왕 2년(386)에 계속된 고구려의 침입은 광개토왕의 등장으로 더욱 격화되었다. 이것은 고국원왕의 敗死에 대한 보복만이 아니라, 稻作 중심지인 한강유역의 확보를 위한 정치적 목적 이 컸다. 60)《삼국사기》권25 아신왕 2년. 61)《삼국사기》권18 광개토왕 1년.
F-3. 동성왕 17년 8월에 고구려가 雉壤城을 포위함으로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69)
43
은 것으로 왕조의 안위에 일대 적신호가 된 것이다. 이미 고구려는 신라의 대 백제
F-4. 武寧王 1년 11월 達率 優永에게 군사 5천을 주어 고구려의 水谷城을 치게하였다.70)
접근을 막기 위해 신라와 수교(實聖의 人質)를 꾀했음으로, 백제는 결국 국난 타개
F-5. 무령왕 3년 9월에 말갈이 馬首城을 태우고 高木城으로 진격함에 왕이 5천의 병사를
한 성 백 제 사 총 설
위의 기록으로 볼 때 백제의 관미성 상실은 한강유역 방어의 최종 요충지를 잃
를 위해 倭와 우호를 맺고
支를 볼모로 보내는 한편, 雙峴城을 쌓아 고구려의 침
보내 격퇴하였다.71)
략에 대비하였다. 동시에 東晋(전지왕 2)과 宋(비유왕 3)과도 외교관계를 맺는 한
F-6. 무령왕 7년 5월에 高木城의 남쪽에 두 개의 목책을 세워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였다.72)
편, 고구려의 정치적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신라와 나제동맹(433 : 비유왕 7 : 눌지
F-7. 무령왕 12년 9월에 고구려가 加弗城을 공취하고 圓山城을 깨트렸다. … 왕이 奇計로
왕 17)을 맺기까지 하였다.62) 신라 역시 고구려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새로 운 정치∙군사적 전환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蓋鹵王의 對魏 접근의 필요성이 있게 됨으로써 삼국의 �關係가 변하기 으로 일 시작하였다.63) 개로왕 18년(472)의 대 위 國書는 지나치게‘고구려의 비난’ 관되어64) 결국 고구려의 대대적인 보복 공격에 따라 한성함락(475 : 개로왕 21, 장 수왕 63)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로써 4세기간에 걸친 백제의 한강유역(하류)지배는 종언을 고하고, 이 지역은 고구려의 세력 하에서 새로운 정치질서를 맞게 되었다.65)
서 그들을 격파하였다.73) F-8. 무령왕 23년 왕이 한성에 가서 佐平 因友, 達率 沙烏에 명하여 한수 이북의 백성 15 세 이상을 징발하여 雙峴城을 쌓았다.74) F-9. 聖王 1년 8월에 고구려병이 浿水에 이르므로 왕의 명으로 左將 志忠이 步騎 1만을 거 느리고 물리쳤다.75) F-10. 성왕 7년 10월에 고구려왕이 북변 6성을 함락시키니 좌평 燕謨가 五谷原에서 步騎 3만으로 拒戰하였으나 패하였다.76)
따라서 475년 이후 551년까지 한성지역은 고구려의 郡制하에 편제되어 郡頭 또 는 守事 등66) 고구려의 道使와 같은 관직체제 하에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위의 기록들은 백제가 웅진 천도로 한강유역(하류)을 상실했다면 불가능한 내용
한강유역(하류)이 실질적으로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는
들이다. 특히 위의 F-1∙4∙5∙6∙8∙9∙10‘移漢北民戶’ (문주왕 2년),‘襲高句
기록이 보이고 있다.
麗水谷城’ (무녕왕 1년),‘�二柵高木城南 … 以備靺鞨’ (무녕왕 7년),‘徵漢北州郡民 年十五歲以上 築雙峴城’ (무녕왕 23년) 그리고‘高句麗兵至浿水 王命左將志忠 帥步
F-1. 文周王 2년 3월에 大豆山城을 수리하고, 한강 이북의 民戶를 이주시켰다. 3월에 사신 을 宋에 보내 朝貢하려 하였는데, 고구려가 길을 막아서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67) F-2. 東城王 4년 9월에 말갈이 한산성을 격파하고 300여 호를 획득하여 돌아갔다.68)
42 성 격 과 문 화 기 반
62) 종래 關彌城의 위치에 대하여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丙壽는 桐島, 김윤우는 오두산성, 박성 봉은 강화도, 그리고 尹明喆은 강화도 동북쪽의 奉天山 등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 수군을 저지하는 군사적 입장과《삼국사기》광개토왕 1년의‘四面 絶 海水環繞.’ 이란 기록으 로 보아 강화도 북방의 별악산 또는 봉천산으로 생각된다(윤명철,〈경기만 지역의 해양방어체 제〉 《고구려산성과 해양방어체제》 , 백산자료원, 2000, 495쪽). 63) 필자는 �濟同盟을 단순히 고구려의 남하에 대한 제∙라의 共守同盟이 아니라 신라는 고구려의 정치적 압력을 벗어나기 위한 自立運動의 성격이 있음을 밝힌바 있다(신형식,〈신라의 대당교섭 상의 宿衛〉 《역사교육》9, 1966, 106쪽). 64) �重國,〈고구려∙백제∙신라 사이의 역관계 변화에 대한 고찰〉 《동방학지》28, 1981. 65) 노중국,〈4~5세기 백제의 성장, 발전과 삼국의 각축〉 《향토서울》66, 2005. 66) �泰敦,〈고구려의 한성지역 병탄과 그 지배 양태〉 《향토서울》66, 2005. 67)《삼국사기》권26 문주왕 2년 3월.
騎一萬 出戰退之’ (성왕 1년),‘拒戰於五谷之原�克’ (성왕 7년) 등의 기록으로 볼 때 성왕 초까지 한강유역은 백제의 지배하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대해서 地名 移動說과 造作說이 있는가 하면,77) 성왕 때 이후 한강 북부지역을 일시 점령하였다
68)《삼국사기》권26 동성왕 4년 9월. 69)《삼국사기》권26 동성왕 17년 8월. 70)《삼국사기》권26 무령왕 1년 11월. 71)《삼국사기》권26 무령왕 3년 9월. 72)《삼국사기》권26 무령왕 7년 5월. 73)《삼국사기》권26 무령왕 12년 9월. 74)《삼국사기》권26 무령왕 23년. 75)《삼국사기》권26 성왕 1년 8월. 76)《삼국사기》권26 성왕 7년 10월. 77) 이기백,〈웅진시대백제의 귀족세력〉 《백제연구》9, 1988, 6~7쪽. 이도학,〈한성말 웅진시대 백제왕계의 검토〉 《한국사연구》45, 1984, 23~25쪽.
든가, 동성∙무녕왕 때 회복한 것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78) 또한 위의 기록으로 보아 백제가 이 지역을 계속 영유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79) 그러나 당시 고구려 군대의 위력이나 백제의 정치상황으로 보아 475년의 한성 함락으로 한강유역(하류)은 고구려가 차지하였으나 고구려가 복잡한 국제 정세(北 魏∙勿吉)에 대비하여 장기전이 어려운 상황이어서 주력부대는 철수한 것으로 보 인다. 따라서 한강유역 전 지역의 영역지배보다 母基地에서 교통로에 따른‘전략적
G-7. 나해왕 27년 10월에 백제병이 牛頭州에 침입하므로 忠萱이 가서 막다가 熊谷에서 패하였다.88) G-8. 나해왕 29년 7월에 �珍이 백제와 熢山 밑에서 싸워 이겼다.89) G-9. 沾解王 9년 9월에 백제가 내침하자 翊宗이 槐谷 서쪽에서 싸우다 패사였으며, 10월 에 백제가 烽山城을 쳤으나 실패하였다.90) G-10. 첨해왕 15년 3월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의를 청하였으나 거부하였다.91)
거점지배 방식’ 을 취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음도 가능하다.80) 이어 武寧王(501~ 523)과 聖王(523~554) 때는 백제의 왕권강화로 어느 정도 한강유역을 회복하였으
이러한 백제와 신라의 교섭 기사 외에도 味鄒王(261~284) 이후 백제와의 충돌
나, 553년 신라의 북진으로 다시 그 지역을 상실하였다고 생각된다.81)《삼국사기》
기사는 빈번하였다.92) 따라서 백제는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倭와의 交聘을 통해 婚
의 기사에서 보듯이
姻外交도 모색하였다. 그러나 4세기 이후 고구려의 남진은 백제에도 큰 위협이 되었으므로 �勿王
G-1. 伐休王 5년 2월에 백제가 母山城을 공격으로 왕이 波珍 仇道에게 명하여 막게 하 였다.82)
(356~402) 이후 백제의 대신라 친선정책이 나타나면서 삼국의 정세는 급변하기 시작하였다. 다시 말하면 4세기 중반 이후 삼국간에는 새로운 관계가 성립되면서
G-2. 벌휴왕 6년 7월에 구도가 백제의 狗壤에서 싸워 이겨 500여급을 살획하였다.83)
기존의 정치질서가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313년 낙랑 축출 이후 본격화된 고구려
G-3. 벌휴왕 7년 백제가 西境(圓山鄕)을 침입하였으나 … 구도가 蛙山에서 패하였다.84)
의 남진정책은 백제의 국가적 위기로 나타나 한강유역을 보호하기 위한 국가적 시
G-4. �解王 4년 7월에 백제가 국경을 침범하였다.85)
책이 요구되었으며, 그러한 긴급한 상황의 타개책은 근초고왕의 고구려 정벌로 나
G-5. 나해왕 19년 7월에 백제군이 國西(腰車城)를 쳐 성주[薛夫]를 죽임에 �音이 정병 6
타났다. 즉 근초고왕 26년(371)의 평양성 공격과 고국원왕의 패살은 빈번한 고구려
천으로 백제를 쳐서 沙峴城을 깨드렸다.86) G-6. 나해왕 23년 7월에 백제가 獐山城을 포위함으로 왕이 군사를 이끌고 쫓아버렸다.87)
의 공격에 대한 백제의 보복이었고, 백제는 고구려의 남침에 대한 대비책으로 靑木 嶺에 성곽을 축조하였다. 무엇보다도 백제는 고구려의 평양성[南平壤]에 대한 공세 를 강화하여 고구려의 남진기지에 대한 무력화를 꾀한 것이다.93) 이러한 시각에서
44 성 격 과 문 화 기 반
78) �起錫,〈웅진시대의 백제지배층 연구〉 《史學志》14, 1980, 22~23쪽. 박찬규,〈백제 웅진초기 北境문제〉 《사학지》24, 1991. 79) 신형식,〈백제의 성장과 발전〉 《백제사》 , 이대출판부, 1992, 164쪽. 박찬규, 위의 논문, 1991, 51~52쪽. 임범식,〈5~8세기 한강유역사재고 식민지 사학의 병폐와 관련하여〉 《한성사학》15, 2002, 28쪽. 80) 양기석,〈5~6세기 백제의 北界〉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제20회 정기연구발표회》 , 2005, 14쪽. 81) 양기석, 위의 논문, 2005, 15~24쪽. 82)《삼국사기》권2 벌휴왕 5년 2월. 83)《삼국사기》권2 벌휴왕 6년 7월. 84)《삼국사기》권2 벌휴왕 7년. 85)《삼국사기》권2 나해왕 4년 7월. 86)《삼국사기》권2 나해왕 19년 7월. 87)《삼국사기》권2 나해왕 23년 7월.
88)《삼국사기》권2 나해왕 27년 10월. 89)《삼국사기》권2 나해왕 29년 7월. 90)《삼국사기》권2 첨해왕 9년 9월. 91)《삼국사기》권2 첨해왕 15년 3월. 92) 미추왕 5년(266) 8월의 烽山城 전투, 11년(272) 11월의 변경 침범, 17년(278)의 槐谷城 침입, 22 년(283) 9월과 10월의 침입 등 미추왕 재위 23년간(262~284)에 6차의 충돌 기록이 있다. 93) 이때의 평양성은 현재의 황해남도 新院에 건설한 南平壤을 의미한다고 보인다. 여기에는 長壽 山城(북)이 있으며, 아양리와 원당리의 도시유적이 있어 평양천도 이전에 이미 고구려의 남진기 지로서 남평양이 건설되었다는 것이다. 채희국∙전제헌,〈신원장수산성을 찾아서〉 《고고민속》 , 1966-1. 안병찬,〈장수산 일대의 고구려유물∙유적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 1990-2. 손영종,〈남평양의 건설과 고구려 남부지방의 공고화〉 《고구려사》1, 1990.
45 한 성 백 제 사 총 설
고구려는 475년 한성함락 이후 일단 철수한 다음 재진출하였다가 다시 한강 이북
(248)
丘儉의 고구려 침입을 틈타 낙랑 변방을 탈취한 사실은 고구려에 대한 적
47
으로 후퇴하는 한편, 여러 개의 保壘를 통해 백제와 대치함으로써 6세기 중반까지
대행위였고, 汾西王 7년(307)의 낙랑습격과 왕의 피살로 신라 공격이 적극화될 수
결국 한강유역(하류)은‘군사적 공지’ 로 방치되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94)
없었다. 더구나 肖古系인 比流王(304~344)은 즉위 초 새로운 왕통 확립을 위한 시
한 성 백 제 사 총 설
한편 신라는 한반도 동남단에 偏在하여 초기에는 대체로 倭와 충돌기사가 많았
련을 극복한 후97) 근초고왕 등장의 바탕을 마련함으로써 백제사의 새로운 도약의
다. 다만 조선 유민의 남하, 왜와 낙랑, 그리고 가야와 백제의 충돌기사가 빈번하게
계기를 만들었다.98) 특히 이때 백제는 신라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고구려의 평
나타난다. 그러나 1~2세기에 있어서 백제와의 충돌은 전술한 바와 같이 양국의 충
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죽이기까지 하였다.
돌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는 가야와의 충돌과 押督∙比只∙多伐∙ 召文國 등 주변 소국의 병합과정에서 나타난 정벌기사가 큰 비중을 이루고 있다.
한편 이 시기에 고구려는 고국원왕의 비극적 피살 이후 소수림왕을 거쳐 광개토 왕과 장수왕의 극성기를 맞아 백제에 대한 국가적 원한을 풀 수 있었다. 이때 신라
그러나 阿達羅王(154~184) 이후 신라의 북방진출은 鷄立嶺과 竹嶺을 통한 영역의
는 나물왕(356~402)의 김씨왕권이 본 궤도에 오르게 되었으며, 당시 광개토왕의
확장과 沙道城(영덕)을 중심으로 한 동해안으로의 진출 등으로 점차 백제∙고구려와
위력을 직시한 신라는 實聖을 인질로 하여 고구려로 추방하면서 적극적인 친고구려
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다.95) 그러므로 나해왕(196~230)은 왕자의 인질로 가야와
외교를 추진하였다.99) 이러한 신라의 외교는 백제와 왜를 동시에 견제하려는 �端
의 친선을 통해 南邊의 위협을 극복하면서 대 백제전에 대비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策이었으며, 訥祗王(417~458)은 나제동맹(433~554)으로 고구려의 정치적 간섭을
나해왕 19년(214)에 백제의 腰�城 공격을 막으면서 공세를 취하기 시작하여 23년
벗어나는 한편 스스로 자립의 길을 통해 백제에 대한 방어도 게을리하지 않았다.100)
(218), 27년(222), 29년(224)에 각각 싸움이 이어졌다. 이러한 신라의 서북방진출로 助賁王 2년(231)과 7년(238)에 각각 甘文國(김천)과 骨伐國(영천)을 정복할 수 있었
| 5세기 이후 삼국대립과 정세변화 |
다. 이어 미추왕의 4차에 걸친 백제와의 전쟁이 계속되었으나, 儒禮王(284~298)∙
5세기에 이르러 삼국 판도는‘고구려 시대’ 로 바뀌게 되었다. 광개토왕은 391년
基臨王(298~310)∙訖解王(310~356) 등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중반까지는 백제와의
즉위한 이듬해 백제를 공격하여 關彌城을 함락시켰으며, 광개토왕비문에는 永� 6
충돌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왜와의 관계(和議와 전쟁)가 보일 뿐이다.
년(396)에 阿且城 등 58성을 정복하여 王弟 및 大臣(10인)을 납치하고 귀환하였다.
유례왕의 재위기간인 3세기 후반은 백제가 古훅王(234~286)이 즉위하여 肖古 王의 직계(6대 仇首王∙7代 沙伴王)가 단절되어 蓋婁王의 차남으로 왕통이 이어졌 으므로 이 시기에 정치적 파장이 있었으리라고 추측된다.96) 더구나 고이왕 13년
46 성 격 과 문 화 기 반
94) 서영일,〈5~6세기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경영〉 《박물관기요》20,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 물관, 2005. 95) 신형식,〈신라의 발전과 한강〉 《한국사연구》77, 1992, 36~41쪽. 96) 이러한 추측은 고이왕의 전왕인 沙伴王은 백제본기에도 기록이 없고‘幼少�能爲政’ 《삼국사 ( 기》권24 古훅王 卽位)이라고만 되어 있었으며, 古훅系를 優台 流系로 본다든가(千寬宇,〈삼한 의 국가형성〉下《한국학보》3, 1976, 134~137쪽) 또는 扶餘系로 본다 해도(노중국,《백제정치 사연구》 , 일조각, 1988, 78쪽) 분명히 왕통이 바뀐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분서왕이 낙랑태수의 자객에게 피살되어 비류왕이 계승했을 때도‘雖有子皆幼�得立’ 《삼국사기》 ( 권24 비류왕 즉위 년)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肖古系와 古훅系와의 갈등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비류왕의 기록에서 도 1~5년간은 공란으로 되고 있어 解氏의 지원하의 비류왕통의 확립을 위한 준비기간으로 보인 다. 이후 백제는 왕위계승이 정상화되고 있다.
97) 비류왕 다음에 등장한 契王(344~346) 역시 재위 3년만( 《삼국유사》 에는 2년)에 아무런 기록 없 이 사망한 기사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분서왕과 비류왕, 계왕과 근초고왕과 같이 두 왕통간의 충돌이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98) 신형식, 앞의 책, 1992, 153쪽. 99) 내물왕이 신라의 김씨 왕권세습에 큰 역할을 하였으나 그를 세습한 사람은 實聖(大西知의 아들) 이었다. 내물왕은 자신의 장자인 訥祗에게 왕위를 세습시키기 위해 당시 큰 세력을 지닌 실성 (閼智 후손인 大西知, 또는 미추왕의 동생 :《삼국유사》昔登保 사이에서 출생)을 고구려로 인질 로 보내어 추방시켰다. 대개 인질은 왕의 차남이 가는데 대한 불만으로 실성은 고구려의 지원하 에 귀국하여 내물왕을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 이어 실성왕은 내물왕의 차남의 未斯欣(美海 : 微 叱己智)을 왜로, 3남인 卜好(寶海)를 고구려로 각각 볼모로 보냈다. 이에 은거했던 내물왕의 장 남인 눌지가 실성왕을 죽이고 왕이 된 후 朴堤上의 도움으로 두 동생을 귀환시켰으며, 이때부터 왕위의 세습이 뚜렷해졌다(신형식,〈新羅王位繼承考〉 《유홍렬박사회갑논총》 , 1971, 78쪽). 100) 나제동맹이 시행되던 시기(433~554)에도 나∙제 양국은 상대국에 대한 방어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즉 신라는 慈悲王 13년(470)의 三年山城(보은), 17년(474)의 一牟城(청원)∙廣石城(영 동)∙沓達城(상주)∙仇禮城(옥천)∙坐羅城(영동) 등을 쌓아 백제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특히 東 城王 23년(501)에는 炭峴에 木柵을 세워‘신라에 대비’ 하였다.
이러한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계속 남진을 추진하여 國原城(충주)을 설치함으로
49
써 그 세력이 한강 하류까지 미쳤으리라 여긴다.101) 그러나 이 지역을 고구려의 통
한 성 백 제 사 총 설
치권에 포함한 것이 아니라‘군사적 거점’ 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한 것으로 보 인다. 이어 한강유역(하류)을 완전히 확보하기 위해 4세기 후반에 조성된 南平壤(신 원)을 후방기지로 하여 장수왕은 평양천도(427)를 단행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장수 왕 63년(475)에 백제의 한성을 함락시켜 한강유역을 확보하였으나 계속된 말갈∙ 북위의 관계 때문에 고구려의 남진에는 한계가 있었다.102) 한편 고구려의 적극적인 남하정책에 위협을 느낀 백제와 신라 양국은 기존의 나 제동맹을 통해 공동방어책을 마련하였으나, 신라는 이를 이용하여 고구려로부터 정 치∙군사적 자립을 꾀하면서 한강상류로 北進을 꾀하기 시작하였다. 영락 10년 (400) 고구려군의 신라 주둔으로 시작된 고구려의‘정치적’지배는 나제동맹으로 어느 정도 간섭을 벗어나면서 慈悲王(458~479) 때부터 자립의 길을 걸을 수 있었 다.《일본서기》雄略天皇 8년의‘盡殺國內所有高句麗人’ 이라는 짤막한 기록은 실제 로 고구려인을 신라 영토 밖으로 추방한 것이며,103) 백제도 장수왕의 공격에 대항하
중원고구려비
중원고구려비 비각
기 위해 신라군의 지원을 요청한 사실에서 당시 삼국간의 현실상황을 엿볼 수 있다.
48 성 격 과 문 화 기 반
그러나 신라는 장수왕이 백제를 공략할 때 고구려의 南境(盈德∙靑松∙店村) 등을
에 직면하게 됨으로써 백제에 대한 압박이 약해지자105) 백제의 武�王(501~523)
함락시키면서 한강유역(상류)에도 진출을 꾀할 수 있었다.104)
은 적극적인 북진책을 추진하여 한강(하류) 이북지역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 고구려의 군사적 위협과 웅진 천도 이후의 백제는 신라의 군사적 파트너
백제의 故土回復은 신라의 군사적 협조와 고구려의 계속된 내분이 큰 도움이 되
가 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구려는 中原高句麗碑에서 알 수 있듯이 國原
었다.106) 신라는 백제를 돕는 한편 기존의 남북통로인 계립령로(善山-尙州-聞慶-
小京(충주)을 군사거점으로 삼아 460~470년대는 소백산맥 이남을 포기하였지
鳥嶺-忠州)를 피해 안동-영주-풍기-죽령-단양으로 이어지는 죽령로를 통해 한강
만, 昭知王(479~500) 초까지 충주일대에 정예를 주둔시키면서 신라와 상하관계
상류지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107)
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신라는 고구려군이 주둔한 충주를 경유하는 鷄立
이러한 과정에서 단양을 거쳐 551년 충주를 확보한 신라는 �川-廣州를 거쳐 한
嶺路(鳥嶺路)를 피해 安東-榮州-豊基-丹陽으로 이어지는 竹嶺路를 택한 것이 丹
강 하류지역을 차지하며 진흥왕 14년(553, 성왕)에는 新州를 설치함으로써 백제에
陽赤城碑의 설치이다. 이와 같이 고구려가 북으로 말갈이나 북위와의 긴장관계에
의해서 회복된 이 지역을 탈취하는 동시에 554년에는 관산성 전투에서 聖王을 패사
따른 군사적 위협과 함께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넓은 영토를 유지하는데 어려움
101) �道學,〈永� 6년 광개토왕의 南征과 國原成〉 《손보기박사 정년기념 한국사학논총》 , 1988, 107쪽. 102) 노태돈,〈고구려 한성지역 병탄과 그 지배양태〉 《향토서울》66, 2005, 180쪽. 103) 신형식,〈中原高句麗碑의 성격〉 《사학지》13, 1979. 104) 신형식,〈신라의 발전과 한강〉 《한국사연구》77, 1992, 40쪽.
105) 노태돈,〈고구려의 한강유역 상실의 원인에 대하여〉 《한국사연구》13, 1975, 35쪽. 106) 安原王(531~545)代의 외척항쟁 예견, 陽原王 7년(551)의 대정란( 《일본서기》권19 欽明紀 7) 이 후 양원왕 13년(557)의 干朱理의 모반사건이 이어져 고구려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따라 서 양원왕 10년과 11년의 天災地變(日蝕∙虎入王都∙太白晝見)이 이를 반영하고 있다(신형식, 앞의 책, 1981, 108쪽). 107) 신형식, 앞의 논문, 1992, 40쪽.
위덕왕은 수의 등장(581) 이후 삼국 중에서 제일 먼저 朝貢使를 파견하여 고구
51
려(590 : 평원왕 32)나 신라(594 : 진평왕 16)보다 일찍 冊封을 받았다.110) 그러나
한 성 백 제 사 총 설
신라에게 西海直航路(赤山航路)를 빼앗긴 백제는 대 중국 진출이 어려웠으며111) 삼 국의 경쟁적인 對隋 접근으로 조공사의 파견 횟수도 삼국 중에서 가장 적게 나타 나고 있다.112) 이어 등장한 武王은 국난전환을 꾀하기 위해 무왕 3년(602 : 진평왕 24)에 신라의 阿莫城을 공략하였으나113) 실패함으로써 더욱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 다. 이후에도 무왕은 13차에 걸쳐 신라와의 전쟁을 일으켰으나 대부분이 실패하고 말았다. 더구나 당의 등장(618 : 무왕 18, 진평왕 40) 이후 삼국의 경쟁외교와 당의 견제 로 삼국(통일 이전)의 대당조공사파견은 신라가 주도하게 되었으며, 신라의 적극적 인 親唐政策은 수∙당과 고구려와의 전쟁에 따라 군사동맹으로 확대되었다. 따라서 백제는 倭와 왕족을 앞세운 救國外交까지 추진하였으나,114) 義慈王의 무모한 대 신 라 강경책은 신라의 친당책을 더욱 촉진시킨 결과가 되었다. 단양적성비
의자왕(641~660)의 재위 기간에 신라는 善德王(632~647)∙眞德王(647~
시킴으로써 나제동맹이 와해되었다. 한강유역(하류)을 점령한 진흥왕은 당시 북진
654)∙武�王(654~661)이 재위하였고, 고구려는 榮留王(618~642)∙寶藏王
의 주인공인 �武力(김유신의 조부)과 居柒夫 등을 대동하고 북한산에 올라 이 지역
(642~668)이 재위하고 있었다. 신라의 선덕∙진덕여왕은 각각 당과 12차의 조공사
의 통치와 제왕으로서의 王道政治�想을 하늘에 고하고 天恩에 답하는 북한산순수
를 파견하는 동시에 적극적인 친당정책을 추진하였으며, 고구려의 영류왕과 보장왕
비를 세웠다.108)
도 15~16회의 入朝使를 통해 당과의 친선을 모색하고 있었다.115) 그러나 의자왕은
이로써 백제는 한강유역(하류)을 완전히 상실함으로써 武寧王 이후 적극적으로
11차의 신라 공격을 감행하는 과정에서 大耶城의 함락(642 : 의자왕 2, 선덕여왕 11)
추진하였던 한강유역의 확보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에 성왕을 이은 威德王 (554~598)은 우선 국난극복을 외교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陳∙北齊∙北 周∙隋 등과 외교관계를 모색하였으며, 위덕왕 45년(598)에는 수의 요동 정벌 때 향도[軍導]를 자청하기까지 하였다.109) 그러나 신라의 진흥왕(540~576)은 562년 대가야 합병 이후 대백제 공세를 강화하였으며, 이어 眞平王(579~632)의 적극적인 50 성 격 과 문 화 기 반
對隋外交와 金�春(김춘추의 부친)∙金舒玄(김유신의 부친) 등의 지원으로 대 백제 전을 유리하게 이끌고 있었다. 108) 이우태, 앞의 논문, 1999, 96쪽. 김태식, 앞의 논문, 2003, 78~92쪽. 109)《수서》권81 열전 46 동이 백제.
110) 신형식,〈�唐間의 朝貢에 대하여〉 《역사교육》10, 1967. 신형식, 앞의 책, 1984, 312쪽. 111) 신형식,〈한국고대의 西海交涉史〉 《국사관논총》2, 1989. 신형식,《통일신라사연구》 , 삼지원, 1990, 281쪽. 112) 수에 파견한 조공사 회수도 고구려는 15회, 신라는 10회였으나 백제는 7회에 불과하였다(신형 식, 앞의 논문, 1967, 66쪽). 113) 阿莫城 전투는 무왕 3년(602 : 진평왕 24)에 있었던 백제와 신라의 대회전이었다. 현재 南原(雲 峰面)인 이곳에서 신라는 乾品과 武殷이, 백제는 解讐를 선봉장으로 하여 일진일퇴를 거듭하다 최후에는 신라가 승리하였다. 이 전쟁에서 신라 장군 武殷의 아들인 貴山과 項은 전사하였는 데, 이들은 圓光으로부터 世俗五戒를 전수받았다. 114) 연민수,〈백제의 對倭外交와 왕족〉 《백제연구》27, 1997. 김현구,〈백제와 일본간의 왕실외교〉 《백제문화》31, 2001. 김수태,〈삼국의 외교적 협력과 경쟁〉 《신라문화》24, 2004. 신형식,〈백제는 왜와 어떤 관계를 가졌을까〉 《백제의 대외관계》 , 주류성, 2005. 115) 신형식, 앞의 책, 1981, 45∙109∙143쪽.
으로 나∙제간에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으며, 金春秋의 訪問外交(왜∙고구 려∙당)가 나∙당간의 군사동맹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특히 대야성의 함락에 따른
한성백제사의 흐름과 역사적 의미
品釋(김춘추의 사위) 부부의 피살은 독일 통일의 단서가 된‘틸싯(Tilsit)의 굴욕’ 처 럼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단초가 되는 사건으로 확대되었다.116) 성왕의 치욕을 씻 기 위한 무모한 의자왕의 대 신라 도발은 결과적으로 백제의 멸망을 재촉한 것이 되 시기구분
고 말았다.
건국과 성장
(신 형 식)
중앙집권체제의 확립 영역의 확대와 대외관계의 전개 집권세력의 교체와 한성 함락 한성시대사의 역사적 의미
1. 시기구분 시기구분은 역사의 전개과정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작업의 하나이다. 시기 구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편타당성이 있는 기준을 설정하여 각 시기마다 사회구 조의 성격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백제사의 시기구분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제시되었다. 수도의 이동을 중심으로 하여 한성시기-웅진시기-사비시기로 구분한 견해,117) 왕위계승의 변화와 지배세력 내에서 왕족∙왕비족이 차지하는 비중 을 고려하여 5시기로 구분한 견해,118) 重臣을 중심으로 8시기로 구분한 견해,119) 좌평 을 기준으로 하여 4시기로 구분한 견해,120) 백제왕이 수행한 대외전쟁의 전개양상을 중심으로 4시기로 구분한 견해,121) 왕권과 권력구조의 변화 및 성격을 중심으로 하여 4시기로 구분한 견해,122) 왕통의 변화를 중심으로 하여 3시기로 구분한 견해,123) 국읍 1 성 격 과 문 화 기 반
116) 신형식,〈방문외교로 통일을 성취한 김춘추〉 《신라통사》 , 주류성, 2004, 571~577쪽.
117) 김원룡,《한국고고학개설》제3판, 일지사, 1986. 118) 이기백,〈백제왕위계승고〉 《역사학보》11, 1959. 119) 坂元義種,〈五世紀の百濟大王とその王侯〉 《古代東アジアの日本と朝鮮》 , 1978. 120) 이종욱,〈백제의 좌평〉 《진단학보》45, 1978. 121) 김영하,〈삼국시대 왕의 통치형태 연구〉 ,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8. 122) 양기석,〈백제전제왕권성립과정연구〉 ,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123) 신형식,《백제사》 ,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2.
53 한 성 백 제 사 총 설
을 중심으로 5시기로 구분한 견해,124)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백제 토기의 형성과정을 중심으로 5시기로 구분한 견해125)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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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제된 것이다. 이렇게 중앙집권체제가 갖추어진 이후 한성시대의 백제정치사는 크게 세 시기로
백제사의 시기구분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성립시키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
나누어 볼 수 있다. 전기는 왕족 부여씨와 왕비족 진씨가 중심이 되어 정치운영을
면서 동시에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변화를 종합적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상
이루어간 시기로서 근초고왕에서 아신왕 때까지로 볼 수 있다. 후기는 왕족 부여씨
부구조의 변화는 정치운영의 모습에서, 하부구조의 변화는 사회편제 단위의 변화에
와 왕비족 해씨가 중심이 되어 정치를 운영해 나갔지만 왕권이 상대적으로 미약한
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하부구조는 상부구조보다 변화 속도가 느리다. 따라서
시기였으며 전지왕에서 비유왕 때까지가 해당된다. 말기는 개로왕대로서 미약해진
하부구조의 변화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도기를 설정하는 것도 필요하
왕권을 확립하려던 개로왕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고구려의 공격으로 한성이 함
다. 이러한 관점에서 필자는 사회편제단위인 읍락의 변화를 기준으로 하여 백제사
락되고 개로왕이 죽음으로써 종말을 고하게 된 시기이다. 이로써 한성시대는 막을
의 전개과정을 크게 초기백제단계-부체제단계-중앙집권적 국가체제단계로 설정하
내리게 되었다.
기로 한다. 백제 초기는 읍락이 사회편제 단위가 된 시기로서 소국단계와 소국연맹단계로 세분할 수 있다. 소국단계는 온조집단의 읍락이 국읍으로 성장하여 주변의 읍락들
2. 건국과 성장
을 통합함으로써 十濟라는 소국을 형성한 단계이다. 이를《삼국사기》 의 연표와 연 결시켜 생각하면 온조왕 건국 이후 2세기 중반(개루왕)까지로 설정해 볼 수 있다.
| 건국과 지역연맹체의 형성 |
소국연맹단계는 십제가 인천에 자리한 비류집단과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형성한 지
백제가 위치한 한강유역은 청동기문화가 발달한 곳이었다. 이러한 청동기문화를
역연맹의 맹주가 된 이후의 시기이다. 이 시기는 2세기 중반(초고왕)~3세기 중반
기반으로 하여 백제국이 건국∙성장하였다.《삼국사기》백제본기에 의하면 시조 온
(사반왕)까지로 볼 수 있다. 부체체단계는 국읍이 수도로서의 성격을 가지게 되면서
조는 북부여에서 쫓겨 온 주몽이 졸본부여에 와서 졸본부여왕의 둘째 딸과 결혼하
중앙과 지방이 생겨나고 중앙귀족화된 족장들이 5부로 편제된 시기이다. 부체제 단 계는 소국-소국연맹단계에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단계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격 을 지니며, 사회편제단위도 읍락에서 성(촌)으로 변화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 시 기는 3세기 중반(고이왕)~4세기 전반(비류왕)으로 설정해 볼 수 있다. 중앙집권체제 확립기는 4세기 전반의 근초고왕대로서 백제는 일원적인 관등체 계를 만들어 중앙귀족들을 편제하였으며 넓어진 영토와 많아진 인구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관료조직을 정비하고 담로제라고 하는 지방통치조직을 만들어 지방 54 성 격 과 문 화 기 반
을 직접 지배하였다. 그리고 유교정치이념을 받아들이고 율령을 반포하여 왕실을 뒷받침하는 이념체계로 확립하였다. 이 과정에서 성(촌)이 사회편제단위가 되었다. 읍락이 자연발생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하면 성(촌)은 국가권력에 의해 인위적으로 124) 이도학,《백제고대국가연구》 , 일지사, 1995. 125) 박순발,《한성백제의 탄생》 , 서경문화사, 2001.
《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의 건국 내용
한 성 백 제 사 총 설
여 출생하였다. 주몽은 졸본부여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북부여에
그러나 한강유역에서 성립한 백제의 성장에 장애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부
57
서 결혼한 �氏 부인과의 사이에 태어난 �璃가 찾아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다. 이에
적으로는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왕성에 들어왔다고 한 것에서 보듯이 온조집단의
온조는 형 비류 및 10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으로 내려와 하북위례성에 정착하여 나
세력 강화에 반발하는 측도 없지 않았다. 외부적으로는 백제의 성장을 견제하기 위
라를 세웠다. 국호는 10명의 신하가 보좌하였다는 의미에서 十濟라 하였으며 성씨
해 낙랑군과 말갈이 빈번히 침략해 왔다. 이에 백제는 내부 결속도 다지고 외부의
한 성 백 제 사 총 설
는 부여씨를 칭하였다.
침입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하북위례성에서 하남위례성으로 중심지를 옮겼다. 그
비슷한 시기에 해부루의 서손인 優台와 召西奴 사이에서 태어난 비류는 유리가 고 구려의 태자가 되자 어머니를 모시고 남으로 내려와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자 리를 잡아 나라를 세웠다. 나라 이름은 분명하지 않으나 미추홀국으로 부를 수 있다. 미추홀은 오늘날 인천시 문학산 부근으로 비정된다. 비류집단은 해씨를 칭하였다.
시기는 초고왕대로 추정된다.128) 하남위례성은 북으로는 한강을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으로는 높은 산이 있고, 남으로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고, 서로는 바다가 막혀 있어 천혜의 요지였다. 《삼국사기》 에“가을 7월 한산 아래에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를 옮
십제를 세운 온조집단은 그 후 어느 시기에 한강 하류의 비류집단과 지역연맹체
129)에서 보듯이 초기의 하남위례성은 목책이었다.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는 겼다.”
를 형성하였다. 시조 온조와 비류가 형제라고 하는 始祖兄弟說話는 위례세력과 미추
풍납토성 내부를 발굴 조사한 결과 삼중의 環濠로 둘러싸인 공간이 나왔는데 풍납
홀세력이 연맹을 맺은 것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연맹을
토성의 토성 벽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삼중의 환호로 둘러싸인 공간
형성한 초기에는 비류가 형으로 나오고 있는 것에서 보듯이 비류집단이 연맹장의 지
은 바로 목책성으로서 초고왕대의 정치적 중심지가 아니었을까 한다.
위를 차지하였다. 그 후 온조집단은 위례지역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마침내 맹주의 지위를 장악하였다. 건국설화에서 비류가 죽자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모두 온조에게
| 마한의 병합과 5部 체제의 성립 |
歸附하였다는 것은 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지역연맹체의 맹주국이 된 것을 계기로
온조집단이 한강유역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우기 이전에 경기∙충청∙전라도지
온조집단은 국호를 십제에서 백제로 고쳤다. 백제라는 국호가“백성이 즐거이 따랐
역에는 이미 54국으로 이루어진 마한연맹체가 성립되어 있었다. 이 마한연맹체의
126) 또는“100家가 바다를 건넜다.” 127)로 풀이되고 있는 것은 백제의 성장을 보 다.”
맹주국은 직산∙천안 일대를 기반으로 한 目支國이었다. 온조집단은 마한의 맹주국
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온조집단이 주도권을 잡은 시기는 초고왕대로 추정된다.
인 목지국으로부터 100리의 땅을 할양받아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130) 때문에 건국
연맹체 단계에서의 정치운영은 연맹장과 左輔∙右輔를 중심축으로 하여 이루어 졌다. 좌보와 우보는 漢化된 명칭이며 본래의 모습은《삼국지》동이전 한전에 나오
56 성 격 과 문 화 기 반
후 십제는 마한연맹체의 일원이 되어 神鹿을 잡아 마한에 보내는 등 맹주국에 대해 일정한 예의를 차렸다.
는 左渠帥와 이로부터 유추되는 右渠帥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직은 연맹체를
이후 백제국은 미추홀의 비류집단과 지역연맹체를 형성하였고 후에는 이 지역연
구성한 國들 가운데 유력한 국의 수장이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직은 원칙적으로
맹체의 맹주국 지위를 차지하였다. 이렇게 세력을 키운 백제는 점차 마한연맹체의
종신이었으며 군사와 관련한 업무를 주로 담당하였다. 때문에 연맹장의 권한 행사
맹주권에 도전하려고 하였다. 그 기회가 된 것이 246년에 일어난 韓세력과 중국 군
는 제약을 받았으며 연맹장은 이들을 매개로 하여 연맹체에 참여한 국들을 통제해
현과의 싸움이었다. 이 싸움은 대방군이 진한 8국의 교섭 창구를 대방군에서 낙랑군
나간 것으로 보인다.
으로 바꾸려고 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일어났다. 이 싸움에서 마한은 대방군의 崎離營
126)《삼국사기》권23 온조왕에“百姓�從.”참조. 127)《수서》권81 열전46 동이 백제전에“百家濟海.”참조.
128) 노중국,《백제정치사연구》 , 일조각, 1988. 129)《삼국사기》권23 온조왕 13년에“秋七月 就漢山下 �柵 移慰禮城民戶.”참조. 130)《삼국사기》권23 온조왕 24년에“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참조.
풍납토성의 환호 모습
풍납토성 북벽 복원상태
성 격 과 문 화 기 반
몽촌토성의 목책
을 공격하고 대방태수 弓遵을 전사시키는 등의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지만,131) 결국
사권을 관장하게 하여 왕권 하에 군사권을 편입시켰다. 이로써 왕의 지위는 귀족회
은 패배하여 那奚國 등 수십국이 연맹체로부터 이탈해 나갔다.132) 이 패배로 목지국
의의 구성원들보다 한 단계 격상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5部長들은 비록 규모는 작
의 위상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러한 호기를 타서 백제국은 목지국을 공격하여 마침
지만 독자적인 지배기구를 가지고 있었고, 또 적이 쳐들어오면 스스로 나가 싸우는
내 그 국읍을 함락시키고 새로이 맹주국이 되었다. 그 시기는 고이왕 때로 추정된다.
등 군사권도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었다.134) 따라서 이 시기의 통치는 왕의 직할지
목지국을 병합시킨 여세를 몰아 고이왕은 주변국들에 대한 통합을 적극적으로
이외의 영역은 5部長을 통해 지배하는 간접지배가 행해졌다. 이러한 지배체제를 五
추진하여 마침내 북으로는 浿河(예성강), 동으로는 走壤(춘천), 남으로는 熊川(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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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촌토성 북쪽 성벽
部 體制라 할 수 있다.135)
천), 서로는 大海(서해)에 이르는 지역을 아울렀다. 그리고 영역 내로 들어온 소국
5부체제가 만들어지고 왕권이 강화되자 수도에 거주하는 인구도 늘어났다. 이
수장들의 일부를 중앙 귀족으로 전환시켜 동∙서∙남∙북∙중부의 5부로 편제하고
에 백제는 팽창하는 인구도 수용하고 방어체계도 튼튼하게 하기 위해 도성을 확대
이들 사이의 상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서 관등체계를 만들었다. 이때 만들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필요성에서 만들어진 것이 風納土城과 夢村土城이다.
어진 관등은 상위의 佐平∙率∙德과 하위의 左軍∙振武∙剋虞로 이루어졌다.
풍납토성은 평지토성으로 평상시의 居城이었다. 토성벽을 발굴한 결과 높이는
좌평은 종래의 좌보와 우보를 통합하여 설치한 것으로서 중앙귀족화된 족장 가
11m가 넘고, 저변의 폭은 40m를 넘으며, 둘레는 3.5km 정도 되는 거대한 규모의
운데 가장 유력한 족장이 맡았다. 그러나 후술하는 바와 같이 군사권이 제외되었기
성임이 밝혀졌다.136) 몽촌토성은 구릉을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일종의 비상시에
때문에 좌평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率은 유력 족장들에게 주어진 관
대비한 산성적 성격을 가졌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아울러 말할 때는 漢城∙慰
등으로서 이를 받은 족장들은 귀족회의체를 구성하였다. 이를 諸率會議體라 할 수
禮城∙王城∙大城이라 하였고, 개별적으로 말할 때는 위치에 따라 풍납토성은 북
있으며, 그 의장이 바로 좌평이었다.133) 한편 고이왕은 左將을 별도로 설치하여 군
성, 몽촌토성은 남성이라 하였다. 이리하여 백제의 도성은 南城 - 北城 체제를 갖 추게 되었다.
131)《삼국지》위서 동이전 한전. 132)《삼국지》위서 제왕방기 정시 7년. 133) 노중국, 앞의 책, 1988.
134)《삼국지》위서 동이전 부여전에“有敵諸加自戰 下戶俱擔糧飮食之.”참조. 135) 부체제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는 한국고대사학회 편,《한국고대사연구》17, 2000 참조. 136) 국립문화재연구소,《풍납토성》Ⅱ, 2002.
3. 중앙집권체제의 확립
루어진 것에서 보듯이 초고계의 왕위계승권을 확립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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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또 세자제를 제도화하여 후계체제도 안정시켰다. 이
한 성 백 제 사 총 설
| 중앙집권력 강화와 통치조직의 정비 |
과정에서 통치조직도 정비하였다. 먼저 중앙통치조직으
백제는 3세기 중반경에 비록 마한연맹체의 맹주국이 되었지만 서진과 교섭할 때
로 종래 5부 체제 단계의 이원적인 관등체계를 일원적
백제라는 국명을 사용하지 못하고 마한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이는 아직까지
인 관등체제로 정리하였다. 이 시기에 정비된 관등제는
백제가 연맹체적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4세기에 들어와 백
종래의 率을 달솔에서 나솔까지의 5등급으로, 德을 장
제는 마한연맹체의 여타 세력들을 완전히 장악한 후 대외교섭에서 백제라는 국호를
덕에서 대덕까지의 5등급으로 분화하고, 최하위에 좌
당당히 사용하였다.
군∙진무∙극우를 둔 14관등체계로 구성되었다. 따라
백제의 이러한 성장 토대는 비류왕 때 이루어졌다. 비류왕은 대외적으로는 고이 왕계의 책계왕∙분서왕 때와 달리 낙랑과의 충돌을 자제하여 북쪽 국경지역에서의
서 이 시기에는 文武를 구분하는 의미를 가지는 文督과 武督은 아직 마련되지 않았던 것 같다.
긴장을 완화하였고, 남으로 정복활동을 전개하여 전북지역까지를 영역으로 확보하
이 시기에 설치된 중앙 관청의 이름은 자료가 없어
였다. 정치적으로는 북한산성에서 반란을 일으킨 서제 우복의 난을 평정하여 왕권
알 수 없지만, 관직으로는 박사∙대부∙좌장 등이 확인
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세력을 제거하였으며, 진씨 출신의 여자를 아들 근초고왕의
된다. 박사는 전문적인 지식인이면서 교육을 담당하였
부인으로 맞아 세력기반을 확대하였다. 경제적으로는 김제에 거대한 벽골지를 축조
다. 이 가운데 박사 고흥은 역사서인《서기》 를 편찬하였
하여 농업생산력의 증대를 이루어 왕정의 물적 기반을 튼튼히 하였다.
고, 박사 왕인은《논어》 와《천자문》 을 왜에 전해주었다.
비류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근초고왕은 그의 이름이‘肖古’ 에‘近’ 를 붙여서 이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토기에 새겨진‘大夫’ 는 祭儀를 주관하는 직으로 추정되고 있다.137) 좌장은 왕명을 받아 군령권을 행사하였다. 한편 근초고왕은 영역 내에 편입된 지역을 중앙에서 직접 지배할 수 있도록 지방통치조직을 만들었다. 이것 이 담로제이다.138) 이 담로는 종래의 국을 재편한 것으
《양서》백제전의 담로 기사
로서 國邑은 담로의 治所가 되었고, 邑落은 城으로 편제 되었다. 이로써 족적 전통을 기반으로 하는 마한 소국들의 지배질서는 해체되었고 종래 읍락의 거수들은 재지세력으로 편제되어 지방관을 보좌하도록 하였다. 그 결 60
과 왕은 이 담로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각 지방의 생산물을 파악하고 노동력을 수월
성 격 과 문 화 기 반
하게 징발할 수 있게 되었다.
비류왕 때 만든 김제의 벽골지
137) 문동석,〈풍납토성 출토‘대부’ 명에 대하여〉 《백제연구》36, 2002. 138) 노중국, 앞의 책, 1988.
체계로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139)
63
한편 근초고왕은 대외적으로 동진에 사신을 파견하여 동진으로부터 鎭東將軍� �浪太守라는 작호를 받았다. 이를 통해 근초고왕은 대내적으로 왕실의 위엄을 높 일 수 있었다. 그리고 장군부에 장사∙사마∙참군 등의 막료를 두어 대외업무를 관 장하도록 하였다. 또 근초고왕은 왜에 우수한 문물을 전수해 주면서 왜를 諸侯國으 로 인식하였다. 369년에 만들어 371년에 왜왕에게 준 七支刀에 새겨진 명문에 백제 가 왜왕을 侯王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 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 儒∙道∙佛 사상의 수용 | (1) 유교사상의 수용 백제가 유학사상을 언제 수용하였는지 분명하지 않다. 유학사상을 받아들이기 위 해서는 먼저 한문자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한문자의 사용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유물로는 B.C. 1세기 후반의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발견된 붓을 들 수 있다.140) 백제 칠지도의 명문
의 경우 풍납토성의 경당지구에서 출토된 벼루와 大夫∙井이 새겨진 항아리와 直이
풍납토성에서 출토된‘直’ 명 전돌
근초고왕은 지방통치조직의 정비와 더불어 군사권도 왕권 하에 일원화하면서 군 사조직도 정비하였다. 군사권의 운용에서 군령권은 좌장이 맡았지만 군정권은 병관 좌평이 맡았다. 또 열병할 때 모든 부대가 황색 깃발을 사용하게 함으로써 왕실이 천하의 중심임을 과시하였다. 이 시기의 군사조직은 보병을 주력으로 하면서 기병 대와 궁수대로 편성되었다. 기병대 편성에 필요한 말은 섬들에 설치된 목장에서 공 급하였는데, 고이왕이 西海大島에서 전렵을 한 것은 牧馬를 살펴보는 목적도 있었 62 성 격 과 문 화 기 반
을 것이다. 이러한 체제를 법제화하기 위해 근초고왕은 율령을 반포하였다. 율령은 성문법
풍납토성에서 출토된‘井’ 명 직구단경호
풍납토성에서 출토된‘大夫’ 명 직구단경호
으로서 율은 형법이고 영은 민정법이었다. 근초고왕대의 율령은 진의 태시율령을 모법으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율령 반포 이전은 관습법 체계였는데 관습은 지방마 다 달라 일원적인 지배가 어려웠다. 이제 율령이 반포됨으로써 전국을 일원적인 법
139) 노중국, 앞의 책, 1988. 140) 이건무,〈다호리 유적 출토 붓(筆)에 대하여〉 《고고학지》4, 1992.
한 성 백 제 사 총 설
새겨진 전돌이141) 문자생활의 일면을 보여준다. 특히 칠지도에 새겨진 �象嵌銘文
문》 을 전해 주고 있는데, 이는 유교사상에 대한 이해가 일정한 수준에 이르지 않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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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백제에 한문을 구사할 수 있는 지식인층이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한문자의 보급
면 불가능한 것이다. 한편 근초고왕은 유교사상을 널리 보급하고 확대하는 조치들
은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유가의 경전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을 의
을 제도화하여 나갔다. 이를 짐작하게 하는 것이 박사이다. 박사는 유학에 대한 전
미한다.
문가이면서 동시에 교육을 담당하는 직을 말한다. 근초고왕대에 박사 고흥이라든가
한 성 백 제 사 총 설
백제가 유학사상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시기로 주목되는 것이 비류왕대이
박사 왕인의 존재는 유학교육기관이 설치되어 교육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
다. 그 계기가 된 것은 비류왕 24년(327)에 일어난 내신좌평 우복의 반란이다. 庶弟
다. 최근 인천 계양산성 동문터에 출토된 오각 목간에서《논어》公冶章의 내용이 쓰
우복의 반란에 충격을 받은 비류왕은 왕에 대한 충성을 높이기 위해 종래처럼 族長
여진 것은142) 유교경전이 실제 생활에서 학습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할
과 族員과의 유대관계에서 오는 충성이 아니라 변화된 사회관계에 맞는 이념으로서
수 있다.
의 충성이 필요함을 절감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이념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이
유학에 대한 이해는 역사서의 편찬을 가능하게 하였다.《서기》편찬의 목적은 군
바로 충효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유교정치사상이었다. 따라서 유교정치이념은 늦어
신의 선악을 기록하여 후대에 포폄을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143) 여기에는 왕실의
도 비류왕대에 와서 본격적으로 사회적 기능을 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계보를 현재의 왕실 중심으로 정리하고 종래 각 소국들이나 유력귀족들의 개별적
이 토대 위에서 근초고왕 때에는 유교사상에 대한 이해의 수준이 높아졌다. 근초
인 경험을 왕실 중심으로 연대기적으로 정리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또 이를 통해
고왕대에 아직기가 왜에 가서 유교 경전을 전하고 또 박사 왕인이《논어》 와《천자
왕에게 충성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어진 왕과 그렇지 못한 왕을 구분하여 기록함 으로써 감계를 주려고 하였을 것이다. 이 또한 유교사상의 현실적 적용이라 할 수 있겠다.
(2) 도가사상과 불교의 수용 백제가 언제 도가사상을 받아들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백제가 3 세기 후반 이후 서진 및 동진과 교섭을 가졌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 시기 동진에 서는 이른바 竹林七賢의 淸談思想이 유행하였는데 이러한 청담사상은 도가사상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런데 백제는 369년에 만든 七支刀에 泰和라고 하는 동진 연 호를 사용하고 있고, 또 372년에는 동진으로부터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작호를 받 았다. 이 과정에서 동진으로부터 도가사상이 들어왔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이리 하여 백제에서는 도가사상이 성행하였다. 이를 보여주는 사례는 다음의 몇 가지로 64 성 격 과 문 화 기 반
논어가 쓰여진 계양산성 출토 오각목간
141) 권오영,〈백제의 대중교섭의 진전과 문화변동〉 《강좌한국고대사》4,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2003.
142) 이형구,《인천 계양산성 동문지내 집수정 출토 목간 보존처리 결과 보고》 , 선문대학교 고고연 구소, 2005 참조. 이 5각 목간을 7세기 신라 목간으로 보는 견해도 있어서 앞으로의 세밀한 검 토가 필요하다. 143)《삼국사기》권4 진흥왕 6년에“國史者記君臣之善惡 示褒貶於萬代 �有修撰 後代何觀 王深然 之 命大阿 �居柒夫等 廣集文士 �之修撰.”참조.
은 진사왕은 穿池造山하여 奇禽異卉를 심었다는 사실이다. 진사왕의 행위는 도가적
67
첫째는 장군 막고해가 노자《도덕경》44장의“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침을
성격이 강하다. 더구나 장군 막고해가 노자《도덕경》 을 인용한 것에서 보듯이 이 시
알면 위태롭지 않다.” 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태자 근구수가 퇴각하는 고구려군을
기에는 도가사상이 지식인층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침류왕은 도가
추격하려는 것을 막았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지인들 사이에《도덕경》 이 널리 읽혀
사상이 성행하는 상황에서 불교공인을 강행하였다가 반대하는 세력들에 의해 제거
한 성 백 제 사 총 설
지고 있었다는 것과 동시에《도덕경》 에 대한 이해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시
되지 않았을까 한다.
들 수 있다.
사해 준다. 둘째는 칠지도의‘七’ 이라는 숫자는 도가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공인과정에서 이러한 진통을 겪은 불교는 진사왕이 죽고 아신왕이 즉위하면서
다. 칠지도처럼 특이한 칼을 만든 것도 도가사상을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
다시 장려되기 시작하였다. 아신왕은 진사왕을 제거하고 왕이 되었다. 왕이 된 이후
다. 셋째로 진사왕이 못을 파서 산을 만들고 奇禽과 異卉를 길렀다고 하는 것도144)
아신왕은 진사왕의 도가 중심의 사상정책에 반대하면서 아버지 침류왕의 불교진흥
도가사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넷째로 풍납토성 경당지구 제9호 토광에
정책을 계승하였다. 그래서 즉위 원년(392)에“불교를 믿어 복을 구하라.” 는 교서를
서 운모가 나왔다. 운모는 도가에서 선약을 만드는데 자료가 되는 귀한 약재라고 한
내렸다. 이렇게 왕실이 불교를 장려함으로써 백제 불교는 점차 그 세력을 넓혀간 것
다.145) 이것도 도가사상의 성행을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으로 보인다.
백제에서 불교가 공인된 것은 침류왕 즉위년(384)에 동진에서 온 승려 마라난타 를 궁중으로 맞아들임으로써 이루어졌다. 불교가 공인되기 이전의 백제에서는 각
| 제의 체계의 정비 |
지역별로 또는 정치집단 별로 재래신앙이 다양한 형태로 이어져왔다. 각 족단별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가 확립되기 이전 4세기까지 백제의 제의는 크게 넷으로 정
자기 조상을 섬기는 조상신앙이라든가 각 집단이 자신이 근거하고 있는 지역의 산
리해 볼 수 있다. 첫째는 汎扶餘族의 族祖로 관념된 동명에146) 대한 제사이다. 이는
천에 대해 기원하는 산천신앙이라든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신앙은 지역별
東明王廟의 건립으로147) 구체화되었다. 동명묘의 건립으로 백제는 범부여족의 정통
정치집단별 개성을 강조한 것이어서 분립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때문에 백제는 지
성을 확보하였다는 주장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는 천신에 대한 제사이다. 천신
역별 정치집단별로 만연되어 있는 개별의식과 분립성을 해체하고 국가 차원의 공동
에 대한 제사는 파종을 마친 후와 수확을 마친 후에 제사를 드렸는데 이는 농경의례
체의식을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동진으로부터 불교가 전
의 하나로서 행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는 자는 천군으
해졌던 것이다. 불교는 고차원적이고 보편적인 사상체계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
로 불리었다.148) 셋째는 蘇塗信仰이다. 소도는 別邑으로 취급되었고, 죄를 지은 자
라 재래신앙도 포섭하는 포용성이 강한 신앙체계였다. 이에 백제는 불교를 받아들
들이 이곳에 들어가면 문책할 수 없어서149) 일종의 신성지역이라 할 수 있다.150) 넷
여 공인하고 토착신앙도 포용함으로써 지역적 분립성을 극복하고 백제민을 국왕 중
째는 山川에 대한 신앙이다. 동예의 경우 산천을 중시하여 어떤 部分에는 함부로 들
심으로 결집하여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의 확립에 필요한 일원적인 사상
어갈 수 없도록 하였다.151) 이로 미루어 볼 때 백제국에서도 산천을 중시하고 산천
체계의 토대를 놓아주었다. 66 성 격 과 문 화 기 반
그러나 백제가 불교를 공인하는 과정에 일정한 갈등을 겪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를 짐작하게 하는 것이 불교를 공인한 침류왕이 재위 2년만에 죽었고 그 뒤를 이
144)《삼국사기》권25 진사왕 7년에“春正月 重修宮室 穿池造山 以養奇禽異卉.”참조. 145) 김창석,〈한성기 백제의 국가제사 체계와 변화양상-풍납토성 경당지구 44호, 9호 유구의 성격 검토를 중심으로- 〉 《서울학연구》22, 2004.
146) 노명호,〈백제의 동명신화와 동명묘-동명신화의 재생성 현상과 관련하여-〉 《역사학연구》Ⅹ, 전남대학교 사학회, 1981. 147)《삼국사기》권24 온조왕 원년에“夏五月 �東明王廟.”참조. 148)《삼국지》위서 동이전 한전에“信鬼神 國邑各立一人 主祭天神 名之天君.”참조. 149)《삼국지》위서 동이전 한전에“又諸國各有別邑 名之爲蘇塗 �大木懸�鼓 事鬼神 諸亡逃至其中 皆�還之.”참조. 150) 소도에 대해서는 송화섭,〈마한 소도의 구조와 기능〉 《한국종교》17, 1992. 151)《삼국지》위서 동이전 예전에“其俗重山川 山川各有部分 不得妄相涉入.”참조.
의 시조묘인 동명왕묘는 백제 왕국의 시조묘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국모를 모시는
69
국모묘도 격상되었을 것이다. 이는 고구려에서도 국모묘가 시조묘와 동등한 위상을
한 성 백 제 사 총 설
가지고 있는 것에서 추론할 수 있는 바이다.153) 한편 백제는 산천에 대한 제의도 왕실 중심으로 재편제하였다. 이 과정에서 백제 국과 관련된 산천은 그 위상이 격상되었지만, 지방 산천의 경우 필요에 따라 일부를 국가적 제의체계에 포함시켜 지방민을 위무하는데 활용하였다. 이 시기 제의의 대 상이 된 산천으로는 전렵지를 들 수 있다. 전렵지는 단순한 사냥장소가 아니라 여기 에서 잡은 짐승으로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행사였기 때문이다.154) 한성시대의 전렵 지로는 斧峴(온조 22), 牙山之原(온조왕 43), 橫岳(다루왕 4), 漢山(기루왕 27, 개루 왕 4, 비유왕 29), 西海大島(고이왕 3), 釜山(고이왕 5), 狗原(비류왕 18, 진사왕 6∙ 8) 등이 있는데, 이 중에서 가장 중시된 곳은 한산과 횡악이었다. 다른 하나는 중국의 제의체계를 받아들여 응용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사 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天地神에 대한 제사이다. 종래의 천신에 대한 제사는 소도 에서 천군에 의해 행해졌다. 그러나 중국으로부터 천지신에 대한 제의체계를 받아 들이면서 南郊에 壇을 쌓아 天神과 地祇에 제사를 드리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이렇 게 됨으로써 천군은 없어지고 소도도 소멸되었다. 천지신에 대한 제사에 사용되는 북한에 있는 동명왕묘
희생제물은 고구려나 신라의 예에서 미루어 볼 때 돼지∙소∙사슴 등이 사용되었고 이러한 희생물을 관장하는 관원도 두어졌다.
에 대한 제의가 행해졌을 것이다.
둘째는 불교식 제의의 거행이다. 백제는 침류왕대에 동진으로부터 전해진 불교
4세기에 들어와 백제는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지방에 대한 직접 지배를 관철하였
를 공인한 이후 아신왕은“불교를 믿어 복을 구하라.” 는 명을 내리는 등 불교의 확
을 뿐만 아니라 율령을 반포하여 일원적인 법체계에 의한 지배질서를 확립하였
산에 노력하였다. 한산에 사찰이 지어졌고 또 지방에도 사찰이 건립되었을 것이다.
다.152) 이로써 백제는 중앙집권 국가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그 시기는 근초고왕대이
이리하여 불교적 의례가 행해졌을 것이다. 불교적 의례의 구체적인 모습은 현재 자
다. 이 과정에서 백제는 제의체계도 새로이 정비하였다. 그 정비는 다음과 같은 방
료가 없어 분명히 하기 어렵다.
향으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종래의 제의체계를 왕실 중심으로 재정비하는 것이다. 68 성 격 과 문 화 기 반
이리하여 종래 각 소국들의 始祖神에 대한 제사는 각 가문의 조상신의 형태로 강등 되었으며, 천군을 두어 천신에 드리는 제사와 소도라고 하는 신성지역도 폐지되었 다. 반면에 백제국 중심의 제의체계는 확대 개편하거나 격상되어 그 결과 백제 왕실
152) 노중국, 앞의 책, 1988.
153)《주서》고려전에“又有神廟二所 一曰扶餘神 刻木作婦人之像 一曰登高神 云是其始祖扶餘神之 子 竝置官司 遣人守護 蓋河伯女與朱蒙云.”참조. 154) 김영하,《한국고대사회의 군사와 정치》 ,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2002.
4. 영역의 확대와 대외관계의 전개
한에 대해) 들리는 것이 없었다. 삼한은 모두 백제∙신라에 병탄되었다.” 라 한 기사
71
와“(백제는) 진 이후부터 제국을 병탄하여 마한의 옛 땅을 적거하였다.” 라 한 기사
한 성 백 제 사 총 설
| 영역의 확대 |
는159) 4세기 초 이후 어느 시기에 마한이 백제에 의해 소멸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1) 영산강유역 세력의 병합
다. 그 구체적인 시기가 바로 369년인 것이다.160)
백제가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어가고 있던 시기에 영산강유역에는 신미국을 중심 으로 20여 소국이 백제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었 다.155) 이 세력들은 본래 마한연맹체의 구성원들이었는데 3세기 중반에 백제가 목 지국을 병합하여 맹주국이 되자 백제에서 이탈해 나간 세력이었다. 영산강유역의 묘제를 볼 때 3세기대까지는 토광목곽묘가 중심을 이루었지만 3세기 말~4세기 초 에 와서 옹관묘가 주묘제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156) 신미국 중심의 세력이 독자 세력 화한 것을 반영해 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후 이 지역세력들은 마한이라는 이름으 로 중국과 대외적 교섭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백제로서는 영산강유역의 세력들을 독자적인 상태로 둘 수는 없었다. 백 제가 �彌多禮=新彌國을 南蠻이라는 卑稱으로 부른 것은157) 이 세력을 꼭 정복하겠 다는 의지를 잘 보여준다. 그래서 백제는 369년 이 지역에 대한 군사 작전을 전개하 였던 것이다. 木羅斤資가 거느린 백제군은 먼저 신라를 공격하고 가야 7국을 평정 한 후 군사를 서쪽으로 돌려 古奚津에 도착하였다. 한편 근초고왕과 태자가 거느린 군대는 한성을 출발하여 영산강유역으로 진군하였다. 고해진에 도착한 목라근자의 군대는 곧바로 심미다례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 함락을‘屠’ 라고 표현하고 있 는 것은 양 세력 사이의 전투가 매우 치열하였음을 시사해주는 것으로서 심미다례 의 저항이 그만큼 컸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심미다례가 함락되고 또 백제왕 이 거느린 군대까지 합세하자 比利∙�中∙布彌支∙半古158) 등 주변의 나라들은 대 세를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모두 항복하였다. 이리하여 영산강유역은 백제의 영역이 되었다.《通典》邊防에“진무제 함령중에 마한왕이 내조하였다. 이후에 (마
근초고왕 때의 백제 영역
70 성 격 과 문 화 기 반
155)《진서》장화전에“東夷馬韓新彌諸國等 依山帶海 去州四千餘里 �世未附者二十餘國 �遣使朝獻.” 156) 박순발,《한성백제의 탄생》 , 서경, 2001. 157)《일본서기》권9 신공기 49년. 158) 이를 비리∙벽중∙포미∙지반∙고사의 5읍으로 보는 견해(전영래,〈백제남방경역의 변천〉 《천 관우선생 환력기념 한국사학논총》 , 정음문화사, 1985)도 있다.
159)《통전》권185 변방1 변한 및 백제.“晉武帝咸�中 馬韓王�朝 自後無聞 三韓皆爲百濟新羅所呑 幷.” ,“自晉以後 呑幷諸國 據有馬韓故地.” 160) 근래에 영산강유역에서 이 지역의 특징인 전용옹관묘가 만들어진 것과 전방후원형고분이 확인 된 것에 근거하여 이 지역이 6세기 전반까지 마한이라는 독자적인 세력으로 존재한 것으로 보 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임영진,〈영산강유역 석실봉토분의 성격〉 《지방사와 지방문화》3, 2000). 그러나 이 지역세력의 존재 양상은 백제의 지배 하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지 독자적인 세력으로 볼 수는 없다.
한편 이 시기 백제는 고구려와 대립하면서 북쪽 방면으로도 영역 확장을 도모하
방군의 멸망은 동아시아에서 중국 군현 중심의 교역체계를 크게 변화시켰다. 상황
73
였다. 이를 위해 백제는 먼저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백제는 369년에
이 이렇게 변화하자 영산강유역을 제외하고 마한제국을 병합한 백제는 지리적인 이
남방지역에 대한 군사작전을 전개하였다. 백제는 먼저 신라를 공격하여 형제관계를
점을 이용하여 변화된 교역체계의 중심에 서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백제는 서해의
맺음으로써 신라가 고구려에 기울지 않도록 하였다. 다음으로 가야 7국을 평정하여
덕적도를 이용하여 산동반도로 가는 서해 직항로를 개척하였다.164)
한 성 백 제 사 총 설
부자로 표현될 정도로 영향권 내에 편입하였다. 마지막으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영산강유역의 심미다례세력을 정복하여 영역으로 편입하였다.
이러한 교통로를 이용하여 백제는 주로 남조와 대외적 교섭을 가졌다. 백제가 동 진과 교섭을 한 시기가 언제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대략적인 추정을 하는데 단서가
이렇게 후방의 안전을 확보한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남진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
되는 것이 칠지도에 새겨진 태화 4년이라는 명문이다. 태화(366~370)는 동진의 연
응하였다. 근초고왕은 369년 9월에 고구려 고국원왕이 친히 2만의 군대를 거느리
호이므로 태화 4년은 그 이전에 백제가 동진에 사신을 보내 동진의 태화 연호를 받
고 雉壤을 공격하자 태자를 보내 이를 물리쳤고, 371년 겨울에 친히 3만의 精兵을
아들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근초고왕이 동진의 연호를 사용한 것은 고구려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하여 평양성에서 고국원왕을 죽이는 등 대승을 거두었
와의 대결에서 동진의 도움을 얻기 위한 정책적 판단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다.161) 이 과정에서 백제는 황해도 신계지역까지를 영역으로 확보하였다. 태자 근구
이는 신라가 당의 도움을 얻기 위해 永徽 연호를 사용한 것과 궤도를 같이 하는 것으
수가 수곡성(신계)의 서북까지 진격하여 돌을 쌓아 경계를 표시한 후162) 돌아왔다고
로 볼 수 있다. 이후 근초고왕은 371년에 동진에 사신을 파견하여 진동장군영낙랑태
하는 것이 이를 입증해 주는 것이다. 이리하여 이 시기 백제의 영역은 북으로는 황
수의 작호를 받았다. 이는 현재로서는 백제가 중국 왕조로부터 받은 최초의 작호이
해도 신계지역까지 남으로는 영산강유역에 이르게 되어 최대의 판도를 확보하였다.
다. 이듬해에 근초고왕은 또 동진에 사신을 보내 동진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동진은 416년에 전지왕을 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으로 책봉하였
│ 대외관계의 전개 │
다. 동진의 뒤를 이은 송은 420년에 전지왕의 장군호를 鎭東大將軍으로 올렸고 백
(1) 중국 남조와의 관계
제는 424년에 장사 장위를 보내 조공을 하였다.165) 그 후 비유왕은 429년 사신을
백제가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어 가는 과정에서 낙랑군과 대방군과의 관계는 화호
송에 보냈고 송은 그 이듬해 비유왕에게 전지왕의 작호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송과
와 대립의 연속이었다. 책계왕은 대방 왕녀를 부인으로 맞았기 때문에 대방이 고구
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모색한 것은 개로왕이다. 개로왕은 457년에 자신이 신하들에
려의 공격을 받자 군대를 보내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163) 그렇지만 책계왕은 13년에
게 수여한 장군호를 정식으로 인정해 줄 것을 송에 요청하였고 송은 이를 허락하였
중국 군현과 맥인의 공격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고, 그 뒤를 이은 분서왕도 7년에 낙
다. 458년 개로왕은 行冠軍將軍右賢王 餘紀 등 11명의 작호를 제수해 주기를 요청
랑 서현을 공격하였다가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 의해 피살되고 말았다. 국가적 이
하자 송은 이를 모두 허락하였다.
익에 따라 恩怨이 교차되었던 것이다. 72 성 격 과 문 화 기 반
남조와의 교섭을 통해 백제는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였다. 근초고왕은 동진으로부
이후 백제와 중국과의 관계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낙랑군과 대방군의 소멸이
터 진동장군호를 받은 후 이러한 작호제를 이용하여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높였다. 또
다. 낙랑군은 313년, 대방군은 314년 고구려에 의해 멸망되었다. 특히 낙랑군과 대
전지왕은 將軍府를 열어 장사∙사마∙참군이라는 부관을 두었고, 개로왕은 자신의 신 하들에게 왕∙후∙장군호를 수여하고 이를 송으로부터 정식으로 인정받는 私假制度
161)《삼국사기》권24 근초고왕 24년 및 26년. 162)《삼국사기》권24 근구수왕 즉위년. 163)《삼국사기》권24 책계왕 즉위년에“高句麗伐帶方 帶方請救於我 先是 王娶帶方王女寶菓爲夫人 故曰 帶方我舅甥之國 �可�副其請 遂出師救之 高句麗怨 王慮其侵寇 修阿且城蛇城備之.”참조.
164) 인천광역시 남구청∙인하대학교 박물관,《문학산의 역사와 문화유적》 , 2002, 98~99쪽. 165)《송서》권97 열전57 夷蠻 백제전.
서쪽으로의 진출이 좌절되자 고구려는 남쪽으로 진출의 눈을 돌렸다. 이에 위협
75
이와 더불어 백제는 남조로부터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문화수준을 높였다. 이 시
을 느낀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강력히 대응하였다. 그리하여 근초고왕 24년
기 백제가 받아들인 문화에는 유학사상 뿐만 아니라 도가사상과 불교도 받아들였
(369)에는 보기 2만을 이끌고 온 고국원왕의 군대를 치양에서 물리치고 5천여 급을
다. 이러한 사상 이외에 백제는 송으로부터 易林과 式占과 腰弩를 요청하여 받았다.
베거나 포로로 하였다. 그리고 26년(371)에는 고구려군을 패하에서 급습하여 물리
한 성 백 제 사 총 설
식점판의 사례로는 낙랑 고분에서 발굴된 式點天地盤의 조각을 들 수 있다.166) 요노
쳤다. 그해 겨울에 근초고왕은 친히 태자 근구수와 더불어 3만의 정병을 거느리고
는 여러 개의 활을 동시에 발사할 수 있는 무기이다. 백제가 송으로부터 요노를 요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백제는 개로왕 국서에“신의 조상 근수
청하여 받은 것은 무기체계를 혁신하여 무장력을 강화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
구왕은 군대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나아가 기회에 맞추어 치니 돌과 화살이 잠시 교
라 할 수 있다.167)
차하는 사이에 쇠(고국원왕)의 목을 베었다.” 라 한 기사에서 보듯이 이를 크게 자랑
를 실시하였다. 이런 사실은 백제가 중국적 제도를 받아들여 실시한 것을 보여준다.
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고구려와 관계를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빠뜨렸다. 개로
74 성 격 과 문 화 기 반
(2) 고구려와의 관계
왕의 국서에 고구려 장수왕이“연(장수왕이) 일컫기를 옛날부터 여경과 원수짐이 있
백제와 고구려는 본래 부여족에서 갈라져 나와 건국하였다. 그래서 개로왕이 북
었다.” 라 한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위에 보낸 국서에“백제와 고구려는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다. 선대의 시대에는 사이
고국원왕의 전사로 위기를 겪은 고구려는 소수림왕대에 체제 안정책에 주력하였
가 돈독하였다.” 라 한 표현에서 보듯이 두 나라는 처음에는 돈독한 관계를 가졌다.
다. 이를 위해 태학을 설립하여 유교정치이념을 갖춘 관료를 길러내고, 율령을 반포
이러한 관계에 변화가 생겨나게 된 계기는 대방 왕녀를 왕비로 맞이한 책계왕이 고
하여 전국을 일원적인 법체계로 편제하였으며, 불교를 공인하여 초부족인 이념을
구려의 공격을 받은 대방군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 사건이었다.168) 백제가 이런
확립하였다. 안정된 국가체제의 기반 위에서 광개토왕은 사방으로 정복활동을 전개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은 대방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방과의 우호관계를
하였다. 광개토왕은 396년에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여 수도 한성을
가지는 것이 유익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을 것이다.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에 대비
포위하고 58성 700촌을 빼앗았다. 위기에 처한 백제의 아신왕은 고구려에 稱臣하
하여 아차성과 사성을 쌓았지만 중간에 낙랑군과 대방군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는 모욕을 겪고 나서 나라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는 백제로서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다.
는 매우 困逼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낙랑군과 대방군이 소멸되면서 백제와 고구려는 국경을 접하였다. 이후 백제와
이렇게 공방을 벌였던 두 나라의 관계는 5세기 전반기에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갔
고구려의 관계는 긴장과 충돌의 연속이었다. 무엇보다도 양국의 충돌을 야기한 것
다. 백제에서는 전지왕의 즉위를 계기로 해씨세력이 새로운 집권세력이 되었다. 해
은 고구려의 남진정책이었다. 낙랑∙대방군을 멸망시킨 이후 고구려 고국원왕은 요
씨세력은 세력 교체에 따른 정치적 불안을 해소하고 또 고구려와의 오랜 대결에 시
동지역으로의 진출을 추구하였지만 전연 모용황의 공격을 받아 왕도가 함락되고 왕
달려온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고구려에 대한 강경책과 같은 무리한 군사활
부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왕모가 포로로 잡혀가는 곤욕을 당하였다. 이에 고국원왕
동을 자제하였다. 한편 이 시기 고구려의 장수왕도 선왕이 정복한 지역들을 안정되
은 왕부의 시체를 돌려받기 위해 入朝稱臣하였고, 왕모를 돌려받기 위해 納質修貢
게 다스리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여 왕권의 전제화를 추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하면서 전연으로부터 征東大將軍榮州刺史�浪公高句麗王의 책봉을 받았다.
나온 것이 평양천도였다. 천도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장수왕은 정치적으로는 천도를 반대하는 세력들을 억압하고,169)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는데 필요한 막대한 재정을
166) 장인성,《백제의 종교와 사회》 , 서경, 2001. 167) 박윤선,〈5세기 중반~7세기 백제의 대외관계〉 , 숙명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168)《삼국사기》권24 책계왕 즉위년.
169)《위서》백제전에“今璉有罪 國自魚肉 大臣彊族 �殺無已 ….”참조.
확보해야 하였으며, 대규모의 토목공사에 많은 노동력을 동원하여야 하였다. 이 때
다는 사실에서 미루어 볼 때 이 화호관계는 369년의 군사활동의 결과로 파악하는
77
문에 장수왕은 대외정복 활동을 자제하였다. 이리하여 두 나라 사이에는 일정기간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한 성 백 제 사 총 설
동안 군사적 충돌이 없는 소강상태가 유지되었다.
이후 백제는 왜와 직접 교섭을 하고 남으로는 영산강유역을 영역으로 확보하고 북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여 황해도 신계지역까지 영역으로 하였다. 이러한 백제의
(3) 신라와의 관계
성장과 영역 확대는 신라로서는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가야지역에 대
4세기에 들어와 한반도 정세의 가장 큰 변수는 고구려의 움직임이었다. 백제는
한 백제의 영향력 확대는 신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 같다. 왜냐하면 진한
남진해 오는 고구려의 압력에 적극 대응하였지만 신라는 친고구려정책으로 전환하
지역을 통합한 신라가 영역을 확장해 갈 수 있는 곳은 아직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한
였다. 신라로서는 고구려와 국경을 접한 상황에서 고구려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가야지역뿐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신라는 점차 백제와 거리를 두려고 하였고 그 결
백제와 우호관계를 맺게 되면 고구려와의 관계가 악화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과 373년에 백제의 독산성주가 도망오자 그를 받아들인 후 송환을 요구하는 백제왕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제로서는 때로는 소극적이고 때로는 적대적인 신
의 요청을 거절하고 친고구려정책을 취하였던 것이다. 내물왕이 37년(392)에 고구
라의 이러한 태도가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초고왕은 368
려의 강성함을 보고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낸 것이171) 방증
년에 사신을 파견하여 �馬 두 필을 신라에 보냈지만 신라에서는 報聘使조차 보내
사례가 된다. 이후 삼국관계는 광개토왕비문에서 보듯이 백제-가야-왜가 하나의
지 않았다. 이에 백제는 신라가 고구려에 기울어지지 않도록 하고 또 對倭 교역을
세력권을 형성하고 고구려-신라 연합세력의 대결 형태로 전개되었다.
방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군사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427년에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 남진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
369년의 이 군사 활동은 백제 장군 木羅斤資의 주도 하에 이루어졌다. 백제군은
자 이는 백제뿐만 아니라 신라에도 압박으로 작용하였다. 이에 백제는 비유왕 7년
卓淳國에 집결한 후 저항하는 신라군을 격파하였다. 이후 백제와 신라 사이의 관계
(433)에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화호를 요청하였고, 8년에도 양마 2필과 흰 독수
를 추론하는데 단서가 되는 것이 내물왕 18년에 있었던 백제 독산 성주가 신라로 투
리를 보냈다. 이에 신라에서도 보빙사를 파견하여 황금과 명주를 보내었다. 이로써
항하면서 벌어진 사건이다.170)
양국 사이에 우호관계가 맺어졌다. 신라가 백제의 우호 요청에 응한 것은 신라 영토
이 사건은 시간적으로 두 개의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373년 이전에 백
내에 주둔한 고구려군이 왕위계승에도 간섭하는 등 신라의 성장에 큰 걸림돌이 되
제와 신라는“양국이 화호하여 형제가 되기를 약속하였다.” 에서 보듯이 형제와 같
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맺어진 백제와 신라의 우호관계의 성격은 455년에 고구
은 관계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373년 백제의 독산성주가 신라로 망명하고 그
려가 백제를 치자 신라에서 군대를 파견하여 도와준 것에서 보듯이 고구려의 공격
를 돌려달라는 백제의 요구를 신라가 들어주지 않자 양국의 관계가 소원하게 되었
에 공동으로 수비하는 이른바 共守同盟이었다.
다는 것이다.“양국이 화호하여 형제가 되기를 약속하였다.” 라는 표현은 양국이 긴 76 성 격 과 문 화 기 반
밀한 화호관계를 맺은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화호관계가 맺어진 시기에 대해 종래
(4) 가야 및 왜와의 관계
에는 366년과 368년에 근초고왕이 신라에 사신을 파견한 것과 연계시켜 본 것이 일
3세기 말~4세기 초의 한반도는 격변의 시기였다. 한편에서는 313년에 낙랑군이,
반적이다. 그러나《일본서기》신공기 47년(367)에 백제와 신라가 갈등관계에 있었
314년에 대방군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마한에서는 백제국을 중심으로, 진한에서는 사로국을 중심으로 통합운동이 적극적으로 전개되었으며, 변
170)《삼국사기》권3 내물왕 18년에“百濟獨山城主 率人三百�投 王納之 分居�部 百濟王移書曰 兩 國和好 約爲兄弟 今大王納我逃民 甚乖和親之意 非所望於大王也 請還之 答曰 民者無常心 故思則 來 則去 固其所也 大王�患民之�安 而責寡人 何其甚乎 百濟聞之 ��言.”참조.
171)《삼국사기》권3 내물왕 37년.
한은 가야사회로 전환되었다. 가야사회에서 중심적인 세력은 狗耶國∙安邪國∙半 路國∙古資國∙多羅國 등이었다.
시도하였다. 그래서 367년에 久 와 彌州流 및 莫古를 정식으로
군사활동을 전개하였다. 가야 7국의 기재 순서가 백제군의 군사 진격로를 보여주는
왜에 파견하였다. 백제 사신은 신라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왜에
것이라고 하면 백제군은 먼저 신라를 공격한 후 다시 卓淳國에 집결하여 창령의 比
도착하였는데, 왜는 백제의 사신을 크게 환영하였다.176) 이로써
自�國을 평정하였다. 다음에 김해의 南加�를 평정한 후 다시 卓國을 평정하고, 다
백제와 왜와의 교섭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되었고, 이후 백제는
시 함안의 安羅國을 공략하고, 다시 합천의 다라국을 친 후 탁순국으로 돌아왔다가
왜가 선진문화를 받아들이는 중심 창구가 되었다.
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러나 신라는 백제가 소백산맥을 넘어 낙동강을 통하여 왜 와 교섭하려는 것을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고 백제 사
이후 백제와 가야제국과의 관계를 짐작하게 하는 것이《일본서기》흠명기에 나오
신이 왜로 가는 것을 방해하였다. 때문에 백제는 왜와 통할 수
는 성왕의 회고담이다.173) 이 회고담은 성왕이 근초고왕대에 이루어졌던 일을 회고
있는 보다 안전한 교통로로서 多沙城路를 확보하였다.177) 다사
한 것인데 여기에는 백제와 가야제국과의 관계를 子弟와 父兄 또는 兄弟관계로 표
성은 섬진강 하구의 河東으로 남해안이나 서해안으로 통하는 뱃
현하고 있다. 이렇게 양국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 것은 369년에 있었던 군사활
길의 요해지이면서 또 섬진강을 통해 내륙과의 연결도 용이하였
동의 결과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근초고왕은 가야제국을 백제 편으로 확실하게 묶
다.178) 이 새로운 교역로를 통해 백제는 371년에 왜가 이제까지
어 둘 수 있게 되었다.
가져보지 못한 玩好珍物을 보냈고, 372년에도 七支刀 1口, 七子
한편 백제와 왜와의 관계는 4세기 중엽경에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 배경이 된 것이 낙랑군과 대방군의 멸망이다. 낙랑군과 대방군의 멸망은 동아시아에서 중국
鏡 1面 및 여러 가지 보물들을 보냈다. 이리하여 백제는 점차 對 倭 교역의 주도권을 잡아나갔다.
군현 중심의 교역체계를 크게 변화시켰고 이에 백제는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변
백제가 가야 및 왜와 가진 관계는 경제적∙문화적인 관계에
화된 교역체계의 중심에 서려고 하였다. 그 일환으로 백제는 對倭 교섭을 적극 추진
만 머문 것은 아니라 군사적인 관계로까지 진전되었다. 이는 당
하였던 것이다.《일본서기》 에 의하면 366년에 백제는 탁순국을 매개로 하여 온 왜의
시 한반도의 상황과 연계되어 나온 것이다. 4세기 이후 백제와
人 爾波移와 탁순인 過古 등 2인을 맞음으로써174) 백제와 왜
고구려와의 대립은 심각하게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신라가
의 교섭이 시작되었다. 백제는 왜에서 온 사람에게 오색채견, 각궁전, 철정 40매를
친고구려정책을 전개하자 백제는 고립에 빠지게 되었다. 이렇게
사신 斯摩宿Ь가 보낸
한 성 백 제 사 총 설
이후 백제는 탁순국을 거치지 않고 왜와의 직접적인 교섭을
4세기에 들어와 백제는 고구려에 대응하기 위한 방책의 하나로 가야세력에 대한
마지막으로 고령의 加羅를 평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172) 이러한 백제의 군사 활동
79
을 받아들이게 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칠지도
제공하고 또 여러 가지 重寶를 보여주었다.175) 이는 왜로 하여금 백제의 문화와 기술 78 성 격 과 문 화 기 반
172) 노중국,〈4~5세기 가야와 백제의 관계〉 《석헌 정징원교수 정년기념기념 사학논총》 , 2006. 173)《일본서기》권19 흠명기 2년에“聖明王曰 昔我先祖速古王貴須王之世 安羅加羅卓淳旱岐等 初 遣使相通 厚結親好 以爲子弟 冀可恒隆 … 乃謂任那曰 昔我先祖速古王貴須王與故旱岐等 始約 和親 式爲兄弟 於是我以汝爲子弟 汝以我爲父兄.”참조. 174)《일본서기》권9 신공기 46년. 175)《일본서기》권9 신공기 46년에“時百濟肖古王深之歡喜 而厚遇焉 仍以五色彩絹各一匹及角弓箭 幷鐵鋌四十枚 幣爾波移 便�開寶藏 以示諸珍異曰 吾國多有是珍寶 欲貢貴國 不知道路 有志無 從 然猶今付使者 尋貢獻耳.”참조.
176)《일본서기》권9 신공기 47년에“於是 皇太后太子譽田別尊大歡喜之曰 先王所望國人 今來朝之 痛哉�逮于天皇矣 群臣皆莫�流涕.”참조. 177)《일본서기》권9 신공기 50년 하5월에“千熊長彦久 等至自百濟 於是 皇太后歡之 問久 曰 海西諸韓 旣賜汝國 今何事以頻�來也 久 等奏曰 天朝鴻澤遠及弊邑 吾王歡喜踊躍 �任于心 故因還使 以致至誠 雖逮萬世 何年非朝 皇太后勅云 善哉汝言 是朕懷也 增賜多沙城爲往還驛路.” 참조. 178) 이와 비슷한 내용이《일본서기》권17 계체기 23년에 보인다. 그래서 신공기 47년의 기사는 계 체기 23년의 사실을 소급시킨 결과 중복 삽입된 것으로 보는 견해(이영식,〈백제의 가야진출과 정〉 《한국고대사논총》7, 1994, 189~190쪽)도 있다.
5. 집권세력의 교체와 한성 함락
81
부터 원군 파견을 요청하
│ 집권세력의 교체 │
였다. 이를 위해 아신왕은
근초고왕 이후 백제 왕실은 진씨 출신의 여자를 왕비로 맞이하였다. 이후 진씨 가
한 성 백 제 사 총 설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백제는 가야와 왜로
支를
문은 아신왕대에 이르기까지 5대에 걸쳐 왕비를 배출하여 정치운영의 핵심적인 지
왜에 인질로 파견함으로
위를 차지하였다. 근초고왕대에는 眞淨이 조정좌평이 되어 세력을 잡았으며, 근구수
써 倭軍을 끌어들였다. 또
왕대에는 眞高道가 내신좌평이 되어 정사를 위임받았다. 진사왕대에 眞嘉謀는 달솔
가야에 대해서는 가야의
의 지위에 올랐고, 아신왕대에는 眞武가 좌장이 되어 고구려에게 빼앗긴 관미성 탈
평정을 위하여 木羅斤資
환을 위한 북진군을 총지휘하
로 하여금 군사동원의 임
였다. 진씨세력이 집권한 동
무를 맡겨 소기의 성과를
안에 백제의 대고구려정책은
거두었다. 이에 백제는 가
매우 강경하여 일진일퇴의 공
야∙왜와 연합군을 형성
방을 벌렸다. 그렇지만 백제
하여 400년에 친고구려
는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아
정책을 전개하였던 신라
58성 700촌이 함락되고 북쪽
를 공격하였다. 위기에 처
의 요충지인 관미성도 고구려
하게 된 신라는 고구려에
의 영역이 되는 등 어려운 상
원병을 요청하자 광개토
황에 처하기도 하였다.
6년(397)에 왕자
무령왕릉 출토 환두대도
왕은 步騎 5만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였다. 국제전의 성격을 띤 이 전쟁에서 백 제∙왜∙가야군은 패배하고 말았다.
80 성 격 과 문 화 기 반
전지왕이 즉위하면서 집권 세력에 변화가 일어났다. 전
400년의 전투에서 비록 패배하기는 하였지만 백제와 가야 및 왜와의 관계는 깨
지왕은 아신왕 3년(394)에
지지는 않았다. 구이신왕대에 목만치가 가야를 기반으로 하여 백제의 실권귀족으로
태자로 책봉되었지만 고구려
행세한 것과 전지왕 이후 비유왕 때에 이르기까지 왜의 사신이 백제에 빈번히 파견되
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적인
었던 것은 양국의 우호관계가 변함없이 유지된 것을 보여준다. 한편 가야와 왜는 이러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397
한 우호관계와 군사적인 지원을 통해 백제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였다. 가야지역에
년에 왜에 인질로 파견되었
서 출토되는 장식대도는 백제의 영향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왜에 전해진 다양한 백제
다. 아신왕이 405년에 죽자
문화는 왜가 백제로부터 받아들인 문화의 내용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배세력들은 태자 전지를 지지하는 해씨 중심의 세력 과 왕의 季弟 �禮를 지지하
광개토대왕비문의 58성 700촌 함락 내용
는 진씨 중심의 세력으로 나뉘어 왕위계승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해씨세력이 승
구이신왕대에 와서도 정치운영은 실권귀족들이 장악하였다. 근초고왕대에 가야
83
리하여 전지가 왕위에 올랐다. 전지왕은 8년간 왜국에 인질로 가 있어서 국내에서
세력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목라근자의 아들 목만치가 王母와 결탁하여 전횡을
의 기반이 없었고 더구나 옹립된 왕이었기 때문에 정치운영은 해씨를 중심으로 하
한 것이180) 그 예가 된다. 구이신왕의 뒤를 이은 비유왕은 전지왕의 庶子로서181) 전
는 옹립세력에게로 넘어갔다. 解須가 내법좌평으로, 解丘가 병관좌평으로 된 것, 해
지왕이 즉위 후 맞이한 해씨 출신 妃의 소생이었다. 비유왕은 해씨 세력의 도움으로
한 성 백 제 사 총 설
씨 출신의 여자가 전지왕의 비가 된 것이 이를 보여준다. 특히 전지왕 4년(408)에
왕위에 올랐다. 때문에 그를 옹립한 해씨세력들이 정치운영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설치된 상좌평은 軍國政事를 위임받았는데, 이는 집권세력들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
비유왕 3년(429)에 餘信이 죽자 解須가 상좌평이 된 것이 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한 것이었다.179)
│ 개로왕의 왕권강화책 실패와 한성 함락 │ 비유왕이 죽은 후 개로왕이 즉위하였지만 실권 귀족 중심의 정치운영권은 여전 하였다. 개로왕 초기에 정치운영의 실권을 장악한 귀족들은 왕후호나 장군호를182) 假授받은 자들이었다. 신하들에게 작호를 가수하는 私假制는 당시의 유력 귀족들에 게 작호를 수여하고 이를 통해 왕실의 위상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행해진 것이 었다. 이 가운데 右賢王의 작호를 받은 餘紀와 左賢王의 작호를 받은 餘昆이 실세귀 족이었던 것 같다. 이로 말미암아 왕권은 이들에 의해 상당히 제약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道琳이 개로왕에게 선왕의 무덤이 제대로 조영되지 못하였다고 한 말이183) 이를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개로왕은 467년 이후 왕권강화책을 적극 추진하였다.184) 대내적으로는 駙馬都尉 餘禮 등 왕족과 長史 張威로 대표되는 중국계 관료들을 등용하여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대하였다. 한반도 내에서는 신라와의 共守同盟을 확고히 하면서 고구
용마봉에서 바라 본 아차산 제4보루 전경
82 성 격 과 문 화 기 반
고구려가 아차산에 설치했던 제4보루 복원투시도
179) 상좌평의 설치를 왕권의 강화와 연관시켜 이해하는 견해(양기석,〈백제 전제왕권 성립과정 연 구〉 ,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도 있다. 180)《일본서기》권10 응신기 25년에“百濟直支王薨 卽子久爾辛�爲王 王幼年 木滿致執國政 與王 母相 多行無禮 天皇聞而召之(百濟記云 木滿致者 是木羅斤資討新羅 娶其國婦而所生也 以其父 功 專於任那 �入我國 往還貴國 承制天朝 執我國政 權重當世 然天朝聞其暴召之).”참조. 181) 비유왕의 출자에 대해 구이신왕의 장자라고 하는 설과 전지왕의 서자라고 하는 설이 있는데 《삼국사기》 ( 권25 비유왕 즉위년) 구이신왕이 幼年에 즉위하였고 재위 연수가 8년에 지나지 않 았다는 사실 등에서 미루어 볼 때 전지왕의 서자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이기백,〈백제왕위 계승고〉 《역사학보》11, 1959 ; 이도학,〈한성말 웅진시대 백제 왕손의 검토〉 《한국사연구》45, 1984). 182)《송서》권97 열전57 夷狄 백제전. 183)《삼국사기》권25 개로왕 21년. 184) 김수태,〈백제 개로왕대의 대고구려전〉 《백제사상의 전쟁》 , 서경문화사, 2000, 226쪽.
6. 한성시대사의 역사적 의미
85
개로왕이 북위와 접촉한 것은 고구려를 포위하는 외교망을 구축하기 위한 것이었
백제한성시대사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
다. 그러나 북위는 백제와 고구려는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당위론만 내세우며 군
다. 하나는 한국 고대사의 전개과정에서 가지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백제사 자체
한 성 백 제 사 총 설
사 요청에는 끝내 응하지 않았다.
의 전개과정에서 가지는 의미이다. 한국 고대사의 전개과정에서 가지는 의미는 다
려와는 대립하여 469년에는 고구려의 남쪽 변방을 공격하였다. 나아가 중국 남조의 송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472년에 북위에 사신을 보내 원병을 요청하였다.
백제가 이처럼 고구려에 대한 포위망을 구축하려고 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고구
음과 같이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려 장수왕은 백제에 대한 공격을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 장수왕은 승려 도림을 간첩
첫째, 정치∙군사적 측면에서 볼 때 한반도에서 삼국 사이에 전개된 역학관계의
으로 파견하여 백제의 내부 사정을 탐지하도록 하였다. 바둑을 매개로 개로왕의 신
전개에서 백제는 고구려와 남북세력의 핵심 축을 이루었다. 이러한 축이 형성될 수
임을 얻은 도림은 백제의 재정을 고갈시키고 민력을 피폐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대
있었던 것은 백제가 중앙집권체제를 갖춘 후 고구려와 각축을 벌일 수 있었기 때문
규모의 토목공사를 일으키도록 유도하였다. 도림의 말을 따라 개로왕은 성곽을 새
이었다. 이후 이 축은 한반도의 세력균형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신라는 자국
로이 修葺하고, 宮室도 수리하였으며, 욱리하에서 돌을 가져다가 선왕의 무덤을 새
의 이익에 따라 때로는 고구려에, 때로는 백제에 가담하였다. 한편 백제는 신라에
로이 만들고, 백성들의 가옥이 강물에 떠내려가지 않게 하기 위해 崇山에서 蛇城에
대해 일정한 제제를 가하면서 한반도 내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가야와 왜
이르는 긴 제방을 만들었다.
의 세력을 끌어들였다. 가야와 왜세력을 끌어들이는 데는 선진문물의 전수라는 것
개로왕이 이런 대규모 사업들을 짧은 시간에 동시 다발로 추진한 결과 재정은 탕
이 매개체로서 작용하였다. 광개토왕비문에 백제∙가야∙왜가 한 세력권을 형성하
진되고 민력은 극도로 피폐하게 되었다. 백제의 이런 상황을 파악한 장수왕은 3만
고 고구려∙신라가 또 하나의 세력권을 형성하여 대결하는 모습은 한성시대의 이러
의 군대를 동원하여 친히 정벌에 나섰다. 고구려군은 개성에서 장단을 거쳐 瓠蘆河
한 역학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 七重河를 건너 積城을 통하여 楊州를 지나 아차산에 교두보를 확보한 후 한강을
둘째, 문화적인 측면에서 볼 때 백제가 자리한 한강유역은 내륙과 해양을 이어주
건너 북성, 즉 풍납토성을 먼저 공격하였다. 북성이 7일 만에 함락되자 남성 몽촌토
는 중요 교통로였다. 한강은 북한강을 통해서 동북지역과 남한강을 통해서 동남지
성에 있던 개로왕은 성을 나와 도망하다가 고구려군에 붙잡혀 아차성 아래에서 죽
역과 연결되며, 하류에서는 서해를 만나 중국 및 일본과 연결되었다. 이러한 교통로
임을 당하였고 남성도 함락되고 말았다. 한강유역을 점령한 고구려는 일차적으로 몽촌토성에 사령부를 두고 아차산에 보루를 설치하여 방어망을 구축하였다.185) 한편 왕성이 함락되기 전에 왕의 동생 문주는 신라에 구원군을 요청하러 가서 1 만의 군대를 이끌고 한성에 돌아왔다. 그러나 그가 도착하였을 때 왕성은 함락되고 왕도 이미 죽은 상황이었다. 이에 문주는 木 滿致와 祖彌桀取의 도움을 받아 한성 84
에서 즉위한 후 곧장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이로써 백제의 한성시대는 막을 내렸다.
성 격 과 문 화 기 반
185) 최종택,〈한강 유역의 고구려 요새〉 《특별전 고구려 기념강연회 발표요지》 , 서울대학교 박물관, 2000. 경강부임진도
를 통해 선사시대 이래 韓文化, 濊文化, 中國文化 등 각종 문화가 이곳에 만났고 이
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하나는 금속제 관모 문화이다. 백제에서 금
87
를 토대로 백제는 개성있는 자기 문화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화는 한강을 통
동관모가 출토된 곳으로는 천안 용원리, 공주 수촌리, 서산 부장리, 익산 익점리, 나
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따라서 한강은 바로 문물교류와 물류 이동의 大動脈이었
주 신촌리, 고흥 길두리 등이며 이 관모가 출토된 유적은 6세기를 넘지 않는다. 금
다고 할 수 있다.
속제 관모는 중국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금동관모는 북방문화적 성격의
한 성 백 제 사 총 설
셋째, 문화교류적인 측면에서 볼 때 한성시대의 백제는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성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백제의 금동관모제가 바뀌는 것은 웅진으로 천도한 후 무령왕
격을 지녔다. 사통팔달의 교통로와 해양의 이용으로 백제는 중국으로부터 선진문화
대에 와서 양나라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부터이다. 무령왕릉에서 출토
를 적극적으로 수입하여 문화의 선진화와 국제화를 이룩하였다. 칠지도에 새겨진
된 왕과 왕비의 금제관식이 이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관모도 천으로 만든 관에 금
금상감 명문, 풍납토성에서 나온 벼루,‘大夫’ 가 새겨진 토기 등에서 보듯이 백제는
속제 관식을 붙이는 것이므로 백제적 전통과 중국적 관모를 절충한 것이라고 하겠다.
한자문화를 받아들였고 이를 통해 유학사상과 도가사상 및 불교를 받아들여 그 이
다른 하나는 적석총의 사용이다. 백제지역에서 확인된 적석총으로는 서울 송파구
해 수준을 높였다. 이렇게 개성이 있는 자신의 문화를 만든 백제는 이를 주변지역으
석촌동의 적석총이 대표적이다. 이외에 남한강 수계에 속하는 제천 양평리와 도화리
로 전파하는 역할을 하였다. 백제 문화는 한반도 내에서는 가야에 전파되고 한반도
에서도 즙석식 적석총이 존재하고, 북한강 수계인 문호리에서 즙석식 적석총이 발굴되
밖으로는 일본열도로 전파되어 가야와 일본열도가 새로운 고대문화를 이루는데 기
었다. 이 적석총은 고구려에서 시작되어 유행한 지배계층의 무덤 양식이다. 백제 건국
여하였다. 가야지역에서 출토되는 권위의 상징인 장식대도는 백제로부터의 영향이 다. 일본열도에 전파해준 문화에는 유학사상과 같은 정신문화에서부터 칼과 화살, 철정 등 권위의 상징물과 오색∙채견 등 직조기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이렇 게 전수된 문화는 일본문화의 수준을 높이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넷째, 백제는 고대 동아시아 각국이 한 것과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세계관을 표방 하였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七支刀이다. 칠지도에 새겨진 금상감명문에는 이 칼 의 제작 주체를 백제 왕세자로 하고 이 칼을 받는 倭王을 侯王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는 백제왕이 왜왕을 제후왕으로 인식하고 자신은 제후왕 보다 한 단계 높은 위치 의 대왕적 존재임을 과시한 것이다. 더구나 이 칼의 모습은 나뭇가지 형태이며 온갖 兵難[百兵]을 물리칠 수 있는 신비한 힘이 있는 것으로 관념되었다. 나뭇가지 형태 는 곧 樹木 숭배와 연관시켜 볼 수 있는 것으로서 神樹에 신비한 힘이 있다는 것을 믿는 백제의 전통적인 신앙을 形象化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또한 백제의 86 성 격 과 문 화 기 반
세계관이 전통적인 신앙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다음으로 백제사의 전개과정에서 한성시대사가 가지는 의미를 몇 가지로 정리해 두기로 한다. 첫째, 백제는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백제와 고구려는 조원이 부여에서 나왔다.” 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부여족에 의해서 세워졌다. 그 때문에 이 시기의 백제는 북방문화적 성격을 다분히 가지고 있었다. 이를 보여주는 물적 증거
나주 신촌리 9호분 을관 출토 금동관
89 한 성 백 제 사 총 설
몽촌토성 출토 단지 석촌동 적석총 4호분 전경
다. 백제는 이러한 토목기술을 왜에 전하였다. 일본 九州지역에서 발굴된 椽城과 大
자인 온조집단은 고구려에서부터
阪지역에서 발굴된 狹山池의 축조에 부엽공법이 활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갈라져 나온 세력이어서 고구려
부엽공법은 바로 백제로부터 전해진 기술에 의한 것이었다.
적 성격을 다분히 가지고 있었다.
넷째, 한성시대의 지배세력은 왕족 부여씨와 백제의 건국 및 성장에 참여하였던
따라서 백제 왕실도 적석총을 무
진씨∙해씨세력이 중심축을 이루고 여기에 후대의 목씨 등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
덤으로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들의 세력기반은 주로 한강유역권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낸 문
둘째, 한성시대의 백제는 중
화적 성격도 고구려적인 것이 강하였다. 이는 웅진천도 이후 종래 변방지역이었던
국으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 여 자신의 문화수준을 높였다.
금강유역권이 수도권이 되면서 이 지역을 기반으로 한 사씨∙연씨∙백씨 등의 세력 연천 삼곶리 적석총 전경
그 예의 하나로 들 수 있는 것이 중국 도자의 수입이다. 중국 도자가 출토된 지역을
88 성 격 과 문 화 기 반
몽촌토성 출토 발형기대
이 새로이 중앙귀족으로 등장하였다는 것과 이들이 중국의 남조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보다 귀족적이고 세련된 문화를 만들어 내었다는 것과 대비된다.
보면 서울지역에서는 석촌동 고분군∙몽촌토성∙풍납토성 등이고 지방으로는 원주
다섯째, 한성시대의 묘제로는 적석총을 비롯하여 토광묘∙석곽묘∙옹관묘 등이
법천리, 오산 수정동, 천안 용원리와 화성리, 공주 수촌리, 서산 부장리, 금산 수달
있었다. 그러나 왕실의 묘제인 적석총은 주로 남한강∙북한강유역 등 한강유역권에
리, 홍성 신금성, 익산 입점리 등이다. 4~5세기에 중국산 청자가 백제지역에서 집
한정되어 분포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한성시대 귀족들의 폐쇄적 성격을 보여
중적으로 출토되고 있는 것은 백제 귀족들의 수요가 그만큼 컸다는 것과 그러한 수
줌과 동시에 중앙문화와 지방문화의 문화적 차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
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 만큼 물자 유통이 활발하였음을 보여준다. 또 백제는 이러한
한 문화적 격차는 변경지역일수록 강하며, 그 결과 변경지역에서는 지방색이 보다
수입 도자를 倣製함으로써 토기를 만드는 기술을 향상시켰던 것이다.
강하게 나타났다. 영산강유역에 만들어진 독특한 옹관묘문화는 이 지역의 문화적
셋째, 한성시대의 백제는 토목건축기술이 크게 발달하였다. 왕도가 위치한 한강
전통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문화적 수준의 낙차가 다른 지역보다 컸음을 보여주는
유역은 자주 범람이 있었고 이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토목기술의 발전을 이루었던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화적 격차가 극복되기 시작한 것은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
것이다. 백제의 토목기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풍납토성의 축조이다. 평지에
한 이후 영산강유역권이 개발되고, 그에 따라 이 지역의 세력들이 중앙귀족으로 등
만들어진 이 성의 길이는 3.51m이고 높이는 11m 이상이며, 밑변은 40m 이상으로
장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중앙문화의 지방으로의 확산은 지방문화의 질을 높이고 결
추정되고 있다. 이 성은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부엽공법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부엽
과적으로 중앙과 지방의 문화적 동질성을 이루는 바탕이 되었다.
공법은 김제 벽골제의 축조에도 사용되었고, 부소산성의 성벽 축조에도 사용되었
(노 중 국)
2
한강유역의 입지 조건 자연환경 인문환경
한강유역의 입지 조건
93 한 성 백 제 와 한 강 유 역 의 지 리 환 경
절대적 입지 상대적 입지
1. 절대적 입지 하천은 고대로부터 인간의 주거발달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요소 중 하나이 다. 왜냐하면 물은 인류를 포함하는 동∙식물의 생존에 필수 불가결한 자원이며 식 량자원을 조달해 주는 원천이고, 교통로의 역할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농업용수로 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는 하천유역을 무대로 전개하였다 고 말할 수 있다. 백제가 한강유역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운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 기초하였고, 한강은 그 역할을 충분히 해줄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는 하 천이다. 한강의 총연장은 481km로 남한에서 낙동강 다음으로 긴 하천이나 유역면적은 26,018㎢로 낙동강보다 더 넓다. 북한에 있는 한강의 유역면적까지 합하면 34,473 ㎢로 한강유역이 차지하는 범위는 매우 넓으며1) 한반도의 중앙부를 거의 모두 차지 92 성 격 과 문 화 기 반
하고 있다. 한강의 유역면적이 넓다는 것은 그만큼 한강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것이 며, 우리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하천의 하나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한강은 크게 북한강과 남한강의 수계로 분리하며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능내 한강유역도
1) 건설부,《한국하천일람》 , 1981.
리 부근, 일명 두물머리인 양수리에서 합류하여 한강의 본류를 형성하면서 수도 서
한 온대성 기후, 경작이 가능한 지역, 하천에서의 어로행위가 가능하다는 입지적 우
95
울을 관통하여 서쪽으로 흐르다가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에서 임진강과 합류, 서해
월성을 나타낸다. 더구나 이 지역은 한강 하류에 속하기 때문에 서쪽으로 바다와 가
의 강화만으로 유입한다. 북한강은 휴전선 이북에 위치하고 있는 금강산 부근에서
깝고 가항하천이므로 교통로로서의 우월성까지 지니고 있었다.
한 성 백 제 와 한 강 유 역 의
발원하여 금강천∙수입천∙소양강∙홍천강 등 크고 작은 지류들과 합류하여 흐른
한강이 지닌 이러한 입지적 특징은 일찍부터 인간에게 좋은 거주환경을 제공하
다. 남한강은 강원도 태백시 창죽동 검용소에서 발원하며, 정선부근에서 송천과 오
고 있었다. 따라서 수렵∙어로∙채집 경제체제를 영위하던 구석기시대부터 취락발
대천이 합류하고 평창강∙제천천∙달천∙섬강 등의 큰 지류를 합류하여 흐른다.
달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구석기시대∙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 유적이 한
이와 같이 한강은 한반도의 중앙부를 흐르는 대표적인 하천이다. 한반도는 유라 시아 대륙의 동안에 위치하며 동경 128。 에서 132。 까지, 북위 33。 에서 43。 상에 위치
강유역 곳곳에서 발견되는 것으로도 입증된다. 백제가 도읍을 정했던 지역에서 가까운 암사동에 선사시대 주거지가 발달했음도
하고 있다. 그 중에서 한강은 북한강의 근원지와 남한강의 근원지를 포함 북위 37。
이러한 절대적 입지의 중요성 때문이고, 취락이 발달할 수 있는 여건을 보유하고 있
에서 38。사이를 흐르고 있다. 현재의 서울지역은 대체로 북위 37.5。 를 지나고 있기
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배후습지의 발달과 구릉지의 분포, 풍부한 물 등
때문에 백제가 한강유역에 도읍을 정하고 머물렀던 시기의 한강은 대체로 동경
은 주거지로서 가장 적절하다는 입지적 특징을 나타낸다. 또한 서해안과 가깝다는
127。부근, 북위 37.5。부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위치적 특징은 외국과의 연계성을 높여주는 것이며, 따라서 백제시대의 도읍이 위
한강이 차지하고 있는 이러한 절대적 위치는 지질∙지형∙기후∙식생 등 자연적 인 현상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따라서 백제가 도읍을 정했던 493년간의 한강은
치하였던 한강유역은 일찍부터 문화가 발달할 수 있는 입지조건을 갖춘 지역이었으 며 우리 생활터전의 기초가 되는 지역이었다.
주변에 취락을 발달시킬 수 있는 평평한 지역과 구릉성 산지의 분포, 사계절이 뚜렷
2. 상대적 입지 절대적 입지는 취락의 형성과 농경 등 우리의 삶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으나 상대 적 입지는 취락의 흥망성쇠나 사회∙경제 체제 및 요건 변화에 영향을 미친다. 하천 은 두 지역 간을 흐르기 때문에 하천을 중심으로 두 지역을 분리시키는 기능도 있으 며 반대로 접촉의 기능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대체로 하천은 분리의 기능이 더 강 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과거 교통이나 통신이 발달하기 이전의 하천은 문화의 확 산을 방해하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한 지역의 문화는 하천을 넘어 확산 94
하지 못하거나 확산되더라도 천천히 이루어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 따라서 하천은
성 격 과 문 화 기 반
정치적으로는 국가의 경계를 정하기도 하며,2) 문화적으로는 문화 확산의 경계역할
인공위성에서 본 한강의 모습
2) 압록강∙두만강이 현재 북한과 중국과의 경계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리오그란데강은 미국과 멕시코의 경계, 잠베지강은 짐바브웨와 잠비아의 경계로 분리 역할을 하는 예이다.
지 리 환 경
전쟁과 화친의 반복은 한강이 지닌 지리적 위치의 중요성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한
97
강이 한반도의 중앙을 흐르고, 한강유역을 차지하는 국가가 한반도를 통일할 수도
한 성 백 제 와 한 강 유 역 의
있다는 인식이 팽배하였기 때문에 나타났던 결과로 보인다. 백제 초기에는 낙랑∙말갈∙신라와의 전쟁이 많았다. 고이왕(234~286) 때에 와 서도 신라와의 싸움이 잦았으나 고이왕 53년(286) 봄 정월에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기도 하였다. 낙랑과의 관계는 계속해서 좋지 않아 서로 침입하고 심지 어 분서왕의 경우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라와 의 관계는 고이왕 말기 화친을 청한 후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 다. 예를 들면, 근초고왕(346~375) 23년(368)에는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24 년(369)에는 사신과 함께 좋은 말 두필을 보내기도 하였다. 일찍이 한강유역을 차지한 백제는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당시 한반도에 위치하였던 백제∙고구려∙신라는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하였 다. 이는 궁극적으로 영토의 확장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나 국가간의 싸움과는 상관없이 민간인에게는 삶의 영위가 가장 큰 일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가뭄이 들 어 기근이 심해지자 한수3) 이북에 살던 주민들은 고구려로 도망가기도 하였으며, 신라로 도망가는 경우도 있었다. 《삼국사기》 에“온조왕 37년(19) 한수의 동북쪽 마을들에 흉년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해 들어간 이들이 1천여 호나 되니, 패수와 대수 사이가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 백제와 그 주변 국가들
4)라고 기록되어 있다. 1천여 호라 함은 1가구당 인구가 4명이라고만 고려하 었다.”
더라도 4,000명 정도가 고구려로 도망갔다는 것이 되므로 당시의 인구구성으로 볼
96 성 격 과 문 화 기 반
을 하기도 한다. 하천 자체가 지닌 자원으로서 경제적인 역할은 식용수∙농업용수
때 상당한 수가 백제에서 고구려로 이주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비유왕 21년(447)
로서 이용될 뿐만 아니라 교통로와 식량자원의 공급처이기도 하다.
가을 7월에 가뭄이 들어 곡식이 여물지 않았다. 백성들은 굶주려서 신라로 흘러 들
한강은 한반도 중앙부를 흐르는 하천으로 서해로 중국과 연결되어 있으며, 해상
5)고《삼국사기》 에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백제의 남동쪽에 어가는 이들이 많았다.”
교통을 이용하여 중국∙일본 등지와 직접적으로 연계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제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이 가뭄으로 인해 곡식을 수확할 수 없게 되자 식량부족현상
공해 준다. 이러한 예는 불교의 전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백제의 불교는 북방의
이 나타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굶주림을 이겨낼 수 없자 인접한 지역인 신라로 도
고구려를 통해 전래 되었다라고 하기 보다는 중국에서 서해를 건너 직접 백제로 전 파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백제는 한강유역에 도읍을 정하고 있는 동안 끊임없이 주변의 대∙소국가와 전 쟁을 하고 있었고, 화친을 위해 노력을 하기도 하였다. 493년간 이루어진 끊임없는
3) 한강을 부르는 이름은 시기와 국가에 따라 다양했으며 漢水, 帶水, 阿利水, 郁里河, 漢山河, 北瀆, 洌水, 京江라고도 하였다. 4)《삼국사기》권23 온조왕 37년. 5)《삼국사기》권25 비유왕 21년 가을 7월.
지 리 환 경
망간 것으로 판단된다.
자연환경
한 성 백 제 와 한 강 유 역 의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원인을 유추하면, 온조왕 때에는 국가의 형성이 확고하 지 못하여 국가관 또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약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 나 비교적 국가가 확고하게 자리 잡고 더구나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비유왕 때에도 기근이 심해지자 신라로 도망간 것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자신들의 삶을 더 중시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지질∙지형
한강은 한반도의 중앙부에 위치하며 남북을 연결해주기도 하며 경계의 역할을
기후
수행하기도 하지만, 해상교통을 통해 일본이나 중국 등에 분포하고 있는 나라들과
식생
연계를 꾀할 수 있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고구려는 육로로 북방에서 한반도로 들어오는 관문의 역할을 하였으나, 백제의 한강유역은 해상교통으로 한반도로 들어 오는 관문의 역할을 하는 동시에 바닷길을 통한 외교적인 우위를 점하고도 있었다. 따라서 한강이 지닌 상대적 입지는 과거와 같이 해상교통이나 육상교통만이 발달했 던 시기에는 그 중요성이 더욱 강조된다.
1. 지질∙지형 │ 지질 │ 한강유역의 지질은 화성암∙퇴적암∙변성암 등 다양한 암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오래된 암석들은 지각변동을 비롯한 주변지역과의 접촉과정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와 더욱 다양한 형태의 지질구조로 변화하였다. 선캄브리아기의 연천계는 암상에 따라 편암류와 준편마암으로 구분된다. 이들은 한강 이남지역에까지 동북방향으로 연장된 지층들로서, 이 지역의 중앙부에는 편마 암이 넓게 분포한다. 이러한 이유로 연천계는 서부와 남부로 분리되어 분포한다. 편 암류는 서부에서는 파주시 문산에서부터 금촌∙광탄지역, 양주시 백석읍, 양평군 양 수리 상류 북한강 연안에 분포되어 있다. 기타지역에서는 준편마암이 분포되어 있다. 화강암은 중생대 백악기에 약간 연속적이면서도 폭넓게 한반도를 횡단하여 동북
98 성 격 과 문 화 기 반
99
방향에 걸쳐 분포되어 있으며, 과거에 형성된 편마암이 관입되어 있다.6) 따라서 대 보화강암의 분포 범위는 거의 서울과 경기도지역에 걸쳐 넓은 분포를 보이고 있다.
6) 관입이란 암장이 다른 암석 안으로 뚫고 들어가 지구 내부에서 엉기어 굳어 새로운 암석을 만드 는 것을 말한다.
지 리 환 경
이렇게 지하 깊은 곳에서 형성된 암석을 심성암이라 한다. 이들 심성암이 현재 지표
백제한성시대 한강유역에 분포하였던 지질을 고찰하면 <표 1>에서 보여주는 바
면에 노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 지질의 역사는 아주 오래된 것으로 유추
와 같이 크게 퇴적암류와 화성암류로 분류할 수 있다. 제4기의 퇴적암류는 주로 충
할 수 있다. 따라서 지질적으로 보아도 한강유역은 노년기 지형이라고 할 수 있다.
적층의 부정합이 분포하며, 선캄브리아기의 퇴적암류는 연천계의 편마암류와 편암
이러한 화강암은 한강유역에 넓게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한강유역의 지형 형성 작
류가 있다. 화성암류는 대체로 중생대에 형성된 대보화강암류의 관입이 두드러지게
용에 아주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백악기의 화강암은 주변지역의 암석보다 쉽
나타난다. 한강을 중심으로 그 연변은 대체로 충적층이며 그 주변에는 편마암이 일
게 풍화되고 침식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 주로 낮은 구릉성 산지를 이루고 있다.
반적이고 그 사이에 화강암이 분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변성암지역은 쉽게 풍화와 침식이 되지 않는 암석으로 높고 험준한 산지 를 형성하고 있다.
이루고 있으며, 중생대의 백악기에 대보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는 지역은 구릉지로
한강 연안에는 또한 충적층이 탁월하게 발달되어 있다. 한강의 충적층 두께는 상
분포되어 있다. 그리고 하천 연안에는 두꺼운 충적지로 구성되어 있어 일찍이 농경
류지역에서는 5.24m, 중류지역에서는 5.97m, 하류지역에서는 6.95m로 나타나고
지로 이용하여 왔다. 주로 충적지는 자갈∙고운모래∙거친 모래∙점토∙진흙 등으
있어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감에 따라 한강유역의 충적층 두께는 점차 증가되어 가
한강 연안에 인접하고 있는 지형을 보면 양수리 부근의 능내리까지는 연천계의 변성암인 편암류지대이다. 한강 연안에는 다소의 충적지가 있으나 양수리에서 팔당
한강유역의 지질
부근은 위의 지역과 동일한 연천계의 변성암인 편마암으로 이루어진 산지가 연안까
<표 1>
시 기 제4기 중생대 선캄브리아기
퇴적암류
화성암류
충적층 부정합 대보화강암류 관입 연천계 편마암류, 편암류
지 접해 있어 하도의 협공지대를 형성하고 있고 하남시 창우동에서 광장동 아차산 까지는 편암의 고립구릉이 공격사면을 형성하고 있다. 아차산에서 서강까지의 지역은 화강암과 편암이 주를 이루고 있고 편마암이 다 소 분포되어 있는 지역으로서는 광장동의 워커힐과 잠실 부근이며, 동작동과 서강 에는 편암의 독립구릉이 공격사면을 형성하고 있다. 난지도 서쪽의 하류지역은 편 마암 구릉지대로 한강 이북은 편암, 행주산성의 고립구릉 이남은 화강암과 편암의 고립구릉이 역시 공격사면을 형성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남시 창우동에서 고양시 덕양구 신평동까지는 하도의 변천이 가장 심한 지역으로 고립된 구릉의 공격사면과 저평한 평지의 활주사면의 위치 관계로 하천이 사행에 따라서 당정∙미사리∙잠 100 성 격 과 문 화 기 반
실∙여의도의 하중도는 강남쪽에, 석도∙뚝섬∙난지도 등의 범람원은 강북쪽에 위 치하고 있다.8)
7)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한강사》 , 1995, 52쪽. 8) 이형석∙김주환,《한강》 , 빛깔있는 책들 301-7, 대원사, 1990, 57~59쪽.
한 성 백 제 와 한 강 유 역 의 지 리 환 경
선캄브리아기의 연천계 편마암류가 분포하고 있는 지역은 잔구성의 낮은 산지를
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7)
101
한강유역의 지질도
로 되어 있으며,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약 10m의 두께로 침식된 기반암 위
내고 있다. 즉, 한강유역의 동부는 대체로 급경사의 산지를 형성하고 있는 반면, 서
103
로 덮고 있다. 이러한 충적층에 피복된 퇴적물 가운데는 주위 산지의 화강암과 편마
부지역은 비교적 넓은 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한강유역의 전체적인 고도분포
암 등에서 공급된 둥그런 조약돌 등이 있다.
의 범위는 해발고도 0~1,700m 정도인데, 유역면적의 약 14%가 해발고도 800m 이
한 성 백 제 와 한 강 유 역 의
상의 높은 고도를 나타내며 약 28% 정도는 해발고도 200m 이하이다.
│ 지형 │
한강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여 현재의 팔당 부분에서 하곡이 갑자기 넓어
한반도의 지형이 현재와 같은 자연환경으로 이루어진 것은 B.C. 5,500년 전부터
지면서 여러 군데 하중도를 형성한다. 가장 대표적인 하중도는 당정리와 미사리 하
인 홍적세의 후빙기로 추정된다. 당시 서해안의 해면은 현재보다 약 7m 정도 낮아
중도이다. 토평리 부근에서는 한강과 왕숙천의 합류점을 중심으로 모식적인 범람원
해안선은 지금의 해안선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바다쪽으로 훨씬 나가 있었던
이 발달되어 있다. 한강은 여기서 구조곡의 방향을 따라서 남서류하여 아차산 아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지금의 인천 앞바다와 강화만의 간석지 등 주위의 많은 섬들
를 흘러 잠실 하중도에 이른다.
은 대부분 육지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제가 도읍을 정하고 있던 토평에서 잠실사이의 한강유역은 자연적인 유로의
한강은 한반도의 중심부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 서해로 들어가는 큰 강으로
변천, 퇴적작용과 침반의 현상에 의해 하상이 변화하여 온 대표적인 지역 중의 하나
수량이 풍부하고 지류가 잘 발달되어 있었으며 그 유역은 사람들의 주거지로 발달
이며 자연제방과 배후습지가 형성되어 있던 곳이다. 풍납토성은 대체로 5~6m 높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증거는 한강유역에서 구석기시대의 유적
이의 자연제방과 하중도의 퇴적단구와 범람원으로 구성된 지역에 입지하고 있었으
과 유물이 발견되는 것으로서도 확인할 수 있다.
며 풍납토성에서 남쪽으로 약 2km 내륙으로 들어간 낮은 구릉지지역에 몽촌토성
한강유역의 지형은 크게 범람원과 구릉 및 산악지대로 구분되며, 경작 가능한 지
이 입지하여 있었다고 판단된다.
역은 낮은 범람원과 구릉지대였던 것으로 사료된다. 이 지역의 산지는 대체로 북북 동에서 남남서 방향으로 뻗어 있으며, 해발고도 300~400m의 저산성 구릉지로 구 성되어 있다. 유로를 중심으로 주변 하안의 지형은 하부가 충적층으로 되어 있어 거 의 평탄한 것이 특징이다. 충적 하부층은 그 크기의 변화가 다양하며 산지와 평지가 접하는 지역에는 곳곳에 산록완사면이 형성되어 있다. 한강은 크게 남한강과 북한강 2개의 주요 지류로 구성되어 있는데, 현재 서울로 부터 약 35km 상류지역인 양수리에서 합류한다. 여기에서부터 한강의 본류는 서쪽 으로 흘러 현재의 서울을 관류하여 인천 북방의 서해로 유입한다. 한강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기 이전에 여러 방향으로부터 수많은 지류들이 흘러들어 유역 전체 102 성 격 과 문 화 기 반
로서는 나뭇가지 유형의 수지상을 형성하고 있다. 북한강의 경우는 합류점에서 휴 전선까지의 유로 연장이 약 180km로 측정하고 있으며 휴전선에서 북한강의 수원 까지는 80km로 간주된다. 남한강의 경우는 북한강과의 합류점에서 수원까지의 유 로연장을 약 330km로 측정하고 있다. 한강유역을 서부와 동부로 나누어 고찰하면 우리나라의 지형적 특징을 잘 나타
한강유역의 지형(1971년 이전)
지 리 환 경
20세기 들어 50년간 하도의 변화를 보면, 하폭도 축소되고 현재 광장동 부근 워
다루왕 10년(37) 11월에 있었던 지진은‘소리가 천둥 같았다.’ 는 기록으로 보아
커힐측의 공격사면이 암반으로 되어 있어 하도 전체가 약 250~500m 남쪽으로 이
약진이나 중진 정도의 지진이 발생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기루왕 13년(89) 6월에 발
동하고, 이곳에 합류되는 지류도 400m 동쪽으로 이동하였으며, 합류점 역시 약
생한 지진은“땅이 갈라지고 백성들의 가옥이 함몰되었으며 죽은 사람이 많았다.”
500m 남쪽으로 이동되었다.9) 이러한 점에 기초하여 보면 백제한성시대의 한강은
고 하였다. 이것은 현재의 지진계로 환산하여 보면, 진도 6 정도의 열진으로 간주되
현재 하천의 유로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고 판단되는데 대체로 지금보다 북쪽으
며 이는 인간이 체감할 수 있는 지진 가운데 아주 강력한 지진이다. 이에 비해 기루
로, 서쪽으로 한강이 흐르고 있었다고 파악할 수 있다.
왕 35년(111)의 봄 3월과 겨울 10월, 초고왕 34년(199) 가을 7월, 근초고왕 27년 (372) 가을 7월에도 지진이 있었다는 기록만 있고 그 정도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 지진 │ 지진(earthquake)이란 지구적인 힘에 의하여 땅속의 거대한 암반이 갑자기 갈라
따라서 이때는 미진이나 경진 정도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근구수왕 6년(380) 5월에는 지진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으나“땅이 갈라져서 깊
지면서 그 충격으로 땅이 흔들리는 현상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지진은 지구 내부 어딘가에서 급격한 지각변동이 생겨 그 충격으로 생긴 파동, 즉 지진파(seismic wave)가 지표면까지 전해져 지반을 진동시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지진은 넓은 지
백제한성시대의 지진기록 <표 2>
역에서 거의 동시에 느껴진다. 이때 각 지역의 흔들림의 정도인 진도(seismic
서기
intensity)를 조사해 보면, 갈라짐이 발생한 땅속 바로 위의 지표인 진앙(epicenter)
13
에서 흔들림이 가장 세고 그곳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약하게 되어 어느 한계점을 지
27 37
나면 느끼지 못하게 된다. 지진이란 진앙, 다시 말하면 흔들림이 가장 큰 장소 부근
89
의 땅속에서 어떤 급격한 변동이 발생하여 그 진동이 사방으로 전해져 여러 지역을 흔드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종을 쳤을 때 사방으로 울려 퍼지는 음파나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돌이 처음 떨어진 지역을 중심으로 시간이 지나갈수록 동심원을 그리며 커지나 동그라미의 모습은 점차 약해지는 것과 같은 현상으로 파 악하면 된다.
왕대
연
온조왕 다루왕
45 10
월 5월 6월 겨울10월 11월
현 상 지진이 있었다 지진이 있었다 지진이 있어 지진이 있었는데
13
여름 6월
지진이 있어 지진이 있었다 지진이 있었다 지진이 있었다 지진이 있었다
31
기루왕 199 372
초고왕 근초고왕
34 27
봄 3월 겨울 10월 가을 7월 가을 7월
380
근구수왕
6
여름 5월
111
35
결 과
백성들의 가옥이 기울거나 무너졌다 소리가 우레 같았다 땅이 갈라지고 백성들의 가옥이 함몰 되었으며 죽은 사람이 많았다
땅이 갈라져서 깊이가 5장이요 가로 폭이 3장이었는데 3일만에야 합해졌다
※《삼국사기》 에서 발췌한 자료임.
백제한성시대 지진은 온조왕 때부터 시작하여 근구수왕 때까지 약 350년에 걸치 는 시기에 꾸준히 있었다(<표 2>). 온조왕 때에는 세 차례 지진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지진은 강도를 언급하지 않고 단지 지진이 있었다는 104 성 격 과 문 화 기 반
기록만 있으나 세 번째 지진은‘가옥이 기울어지거나 무너졌다.’ 고 묘사한 것으로 보아 이때의 지진의 강도는 무척 강했던 것으로 유추된다. 이때의 지진을 현재의 지 진계로 환산하여 보면, 진도 510) 정도의 강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9) 김정혜,〈한강하류 하중도에 관한 고찰〉 ,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67.
10) 지진의 강도 즉, 진도에 관한 것을 일반적으로 다음 표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이 8단계로 나누고 있다. 진도 0 1 2 3 4 5 6 7
명칭 무감 미진 경진 약진 중진 강진 열진 격진
정 도 지진계에 의해서만 감지되며 사람이 느낄 수 없는 정도 민감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정도 창문이 약간 흔들리는 정도 집이 흔들리고 전등이 흔들리는 정도 집이 심하게 흔들리고 꽃병이 넘어지는 정도 벽에 금이 가고 건물이 다소 파괴되는 정도 집이 파괴되고 땅이 갈라지고 사람이 서 있을 수 없을 정도 산사태가 일어나고 단층이 생기는 정도
105 한 성 백 제 와 한 강 유 역 의 지 리 환 경
서울의 월평균 기온과 월강수량 (1908~2006)*
이가 5장이요 가로 폭이 3장이었는데 3일만에야 합해졌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땅이 갈라져서’ 라는 얘기는 지진에 의해 땅이 갈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지 진에 의한 땅 갈라짐 현상은 백제가 한성에 도읍을 정하고 있던 시기 중에서 가장 강력한 지진으로 파악되며, 이는 진도 7에 해당하는 격진이 일어났던 것임을 기록 하고 있다고 본다. <표 2>에 의하면 지진의 발생빈도는 일정한 간격으로 일어나는 것 같지는 않으며,
<표 3>
월
107 (기온: ℃ / 강수: mm)
1
2
3
4
5
6
7
8
9
10
11
기온
-3.8
-1
4.4
11.5
18.9
21.4
24.8
25.3
20.2
13.5
6.1
강수
21.2 24.6 45.4
80.9
92.5
152 368.3 285.2 139.9 42.3 45.6
12
@
-1
11.5
25 1,322.9
※ 위 기간 중에서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1950~1953년간은 제외하였으며, @기온은 연평균 기온을 나타내 며, 강수는 연강수량을 의미한다. 자료 : 기상청
특이한 현상은 온조왕 31년(13)과 기루왕 35년(111)에는 한해에 지진이 두 번이나 있 었다는 사실이다. 온조왕 때에는 5월과 6월에 계속 지진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어
는 겨울철인 12~2월이 가장 적어 25mm 이하이며, 온도도 1월이 가장 추워 -3.8℃
경우에 따라서는 한 번의 지진 이후 여진이 발생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기루
를 기록하였다. 관측이 이루어진 94년간의 평균 기온은 11.5℃이다.
왕 때는 그 기록이 봄과 겨울로 나타나고 있어 분명히 따로 발생한 지진으로 보인다.
백제가 한성에 도읍을 정하고 있던 시기의 기후는 범세계적인 현상과 맞물려 있 었다.12) 기후는 항상 그대로가 아니고 온난한 시기와 한냉한 시기가 서로 번갈아가 며 나타나는 현상을 보여주며, 건조했던 시기와 습윤했던 시기도 변화한다. 이러한
2. 기후
기후 변화는 자연적인 현상으로만 볼 수 없으며 인간의 생활에도 영향을 미치는 하 나의 요인이 된다.
우리나라는 일반적으로 4계절이 뚜렷한 온대기후지역에 속하며 여름은 덥고 겨
세계적으로 100~250년(2~3세기)과 750~950년(8~10세기) 사이는 한냉한 시기
울은 추운 한서의 차이가 심한 대륙성기후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계절풍이 계절에
였다. 따라서 100년 이전과 250~750년 사이는 온난한 시기에 해당한다. 한냉한 시
따라 다르게 불어오는데 겨울에는 북서풍이 탁월하나 위치나 지역에 따라 북동풍이
기에 속하는 2~3세기는 유럽에서는 로마제국시대로 유럽 알프스빙하가 발달했던
불기도 하며, 여름에는 남동풍 또는 남서풍이 탁월하다.11) 여름철에는 장마가 나타
시기이며 해면 수위도 현재보다 2.5m 정도나 낮았던 시기였다. 또한 중국에 전한시
나는 기후적 특징을 나타내며, 이러한 기후적인 특징은 과거와 현재를 비교할 때 큰
대(B.C. 221~A.D. 23)는 온난한 시기에 해당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아열대작
변화가 없다. 단지 세부적인 기후에 있어서는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물들의 북한계선이 현재보다 북쪽에 분포하였는데, 이때는 우리나라에서 삼국시대
더구나 서울이 위치하고 있는 한강유역은 여름에 집중강우가 내리는 지역이며 연평균 총강수량이 약 1,300mm로 다우지역에 속한다. <표 3>은 한국전쟁이 일어
106 성 격 과 문 화 기 반
초기에 나타났던 온화한 날씨와 일치되기도 한다. 온난한 시기에 백제는 한강유역 에 도읍을 정하였으며 또한 백제가 융성했던 시기도 온난한 시기에 속한다.
나 관측이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졌거나 관측되지 못한 4년 동안을 제외하고 서울에
전 세계적으로 기후가 습윤했거나 건조했던 시기를 고찰하면, B.C. 51~A.D.
서 관측을 시작한 1908년부터 2005년까지의 월별 기온과 강수기록을 평균한 것이
250년 기간은 습윤했던 시기에 해당하며, 201~450년간은 건조기, 그리고
다. 여름철인 7월과 8월에 368.3mm와 285.2mm의 가장 많은 강수량을 기록하였
401~750년간은 다시 습윤기에 해당한다. 따라서 백제가 한강변에 도읍을 정했던
으며, 온도도 24.8℃와 25.3℃로 년 중 가장 높은 온도를 기록하고 있다. 반면 강수
기간 중의 기후를 고찰하면, 백제가 처음 건립된 B.C. 18년에서 A.D. 100년까지는
11) 김연옥,《한국의 기후와 문화 : 한국 기후의 문화역사적 연구》 ,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85, 171쪽.
12) 김연옥,〈한국 고대의 기후환경 : 삼국사기 기후자료의 분석〉 《지리학의 과제와 접근방법 : 석천 이찬박사화갑기념논집》 , 1983, 234~247쪽. 김연옥, 위의 책, 1985, 362~367쪽.
한 성 백 제 와 한 강 유 역 의 지 리 환 경
따뜻하고 습윤한 기후였으나 100년에서 250년까지는 냉량하고 습윤한 기후였다.
한 기록이 가장 많아 20건이나 되며, 그밖에 비∙바람∙홍수∙서리∙우박∙온도∙
250년에서 450년까지는 따뜻하고 건조한 기후였고 그 후는 따뜻하고 습윤한 기후
천둥에 관한 기록도 나타나고 있다.14) 가뭄과 같은 기후현상은 과거 백제와 같은 농경사회에서는 강수량과 마찬가지로
로 다시 변화하였다. 백제 온조왕에서 21대 개로왕까지 493년간 나타난 이상기후에 관한 기록을《삼
매우 중요하였다. <표 4>에 의하면 가뭄의 현상을 표기할 때 크게‘가물어서’ 와‘크
에는 기후에 관한 기 국사기》 에서 찾아보면 다양한 현상이 나타낸다.13)《삼국사기》
게 가물어서’ 로 분류되며, 다른 경우에는 단순하게‘비가 오지 않았다.’ 로 설명하고
록뿐만 아니라 일식과 같은 천문이나 지진에 관한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가뭄에 관
있다. 초고왕 때는 모두 특이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22년(187)에는“왕도의 우물과
백제한성시대의 가뭄 기록
데”그 결과“곡식이 순조롭게 익지 않아 도적이 많이 생겼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표 4>
서기 B.C. 15 A.D. 15 19 27 90 108
왕대
온조왕
기루왕
187
연 4
월 봄/여름
현 상 가뭄이 들어
33
봄/여름
크게 가물어서
37 45 14 32
여름 4월 봄/여름 봄 3월 봄/여름
22 초고왕
208 227 246 248 257 326 341
108 성 격 과 문 화 기 반
한수가 모두 말라버렸다.” 라 되어 있고, 43년(208)에는“우박이 내리고 가물었는
43 구수왕 고이왕
비류왕
가물더니 크게 가물어 크게 가물어 가뭄에 흉년이 들자 왕도의 우물과 한수가 여름 5월 모두 말라버렸다 누리(우박)가 생기고 가을 가물어서
14
여름 4월
크게 가물어서
13 15 24 13
여름 봄/여름 봄 정월 봄
크게 가물어서 가물었다 크게 가물어 가뭄이 들고
28
봄/여름
크게 가물어서
375
근초고왕
30
가을
흉년이 들어
382
근구수왕
8
봄~6월
비가 오지 않아
402 417 433 447
아신왕 전지왕
11 13 7 21
여름 4월 봄/여름 가을 7월
크게 가물어 가물어 비가 내리지 않았다 가뭄이 들어
비유왕
결 과 굶주렸고 전염병이 돌았다 백성들이 굶주리다 서로 잡아 먹고 도적이 크게 일어났다 6월에 와서야 비가 내렸다 초목이 메말랐다 보리가 남아나지 못하였다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초고왕 22년(187)의 설명에서 보면 가뭄이 무척 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가뭄은 흉작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기근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가물어서“초 목이 메말랐다.” ,“보리가 남아나지 못하였다.” ,“벼의 모가 타 들어갔다.” ,“풀과 나 무가 마르고 강물조차 고갈되었는데 …” 라는 기록들은 흉년을 의미하며 이는 바로 기근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설명하는 것이다. 기근이 들면 도적이 많아질 뿐만 아니 라 심지어 서로 잡아먹었다는 기록도 나타나고 있다. 온조왕 33년(15), 기루왕 32년
곡식이 순조롭게 익지 못하니 도적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는 지라 왕이 동명묘에 가서 빌었더니 곧 비가 내렸다 보리가 남아나지 않았다 나무들이 모두 말랐다
(98), 비류왕 28년(341)에 인육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근구수왕 8년(382)에는 자식을 파는 일까지 있었다. 비록‘크게 가물어서’ 라는 표현이 없어도 가뭄의 결과 를 서술한 내용으로 판단하면 가뭄이 무척 심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전체적으로는 습윤한 시기였음에도 심한 가뭄이 든 경우가 많았고, 계절별로는 여름철이 가장 많 았으며 그 다음이 봄철이었다.
풀과 나무가 마르고 강물조차 고갈 되었는데 가을 7월이 되어서야 비가 내렸다. 이해에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백성들이 굶주려 자식을 파는 이까지 있게 되었다 벼의 모가 말라 타들어갔다 백성들이 굶주렸다 곡식이 여물지 않았다
가뭄과 가장 관련 있는 기후현상 중의 하나는 비라고 할 수 있는데 비에 관한 내 용은 특이한 현상, 홍수와 관련된 사항, 그리고 가뭄과 관련된 현상으로 분류할 수 있다(<표 5>). 비에 관한 내용 중에서 가장 특이한 현상은 물고기가 섞인 비가 내렸 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회오리바람 등에 의해 운반되어 나타났던 현상 이 아닌가 추측된다. 또한 하루 종일 흙비가 내렸다는 것은 현재에도 나타나는 황사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판단되는데 비가 내리기 때문에 흙이 비에 섞여서 나타난 것 으로 보인다.
13) 위와 같음. 김부식 저, 이강래 역,《삼국사기》Ⅱ, 한길사, 1988. 김부식 저, 최호 역해,《신역 삼국사기》Ⅱ, 흥신문화사, 2004 등에서 발취하였으며 번역은 주로 이강래의 번역을 이용하였다.
고이왕 6년(239)에는“비가 오지 않다가 4개월이나 지난 후 비가 내렸다.” 고되
14) 봄은 1∙2∙3월, 여름은 4∙5∙6월, 가을은 7∙8∙9월, 겨울은 10∙11∙12월을 의미한다.
109 한 성 백 제 와 한 강 유 역 의 지 리 환 경
111
백제한성시대의 비에 관한 기록
기를 설명하면서 그에 따른 현상도 설명하였다(<표 6>). 즉,“우박의 크기가 계란만
<표 5>
서기
왕대
연
월
116
기루왕
40
222
구수왕
9
여름 6월
239 379
고이왕 근구수왕
6 5
봄 정월 여름 4월
402
아신왕
11
여름
433
비유왕
7
봄/여름
6월
현 상 큰 비가 열흘 동안 이나 내려 왕도에서 물고기가 섞인 비가 내렸다 비가오지 않더니 흙비가 종일토록 내렸다
결 과 한강의 물이 불어나서 백성들의 가옥이 물에 떠내려가고 무너졌다
하여 까마귀나 참새들이 맞아 죽었다.” 든지,“밤톨만한 크기여서 역시 새들이 맞아 죽었다.” 는 기록들이 있다. 비유왕 28년(454)에는 곡식이 결실을 맺는 가을에 우박 이 내려 곡식을 해쳤기 때문에 흉년이 들었던 것 같다.
여름 5월이 되어서야 비가 내렸다 왕이 친히 횡악에서 제사를 지내자 곧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지 않았다
바람에 대한 내용은 세 번 기록되어 있는데 모두‘큰 바람’ 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두 번은 나무가 뽑혔고 한번은 기와가 날아갔다고 묘사되어 있다(<표 7>). 기온이 매 우 따뜻했음을 나타내는 기록은 기루왕 31년(97), 초고왕 46년(211), 비유왕 3년 (429) 겨울에 모두“물이 얼지 않았다.” 라고 표현되어 있다(<표 8>). 온조왕 3년
어있는 반면, 구수왕 14년(227)이나 아신왕 11년(433)에는 왕이 기우제를 지내니 비
(B.C. 16)에는 겨울임에도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에 꽃이 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표 4>와 <표 5>). 이 기록들은 비가 내리지 않기 때문에
이는 날씨가 매우 따뜻한 이상난동을 표현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가뭄으로 이어짐을 표현하는 것이며, 비가 오지 않으면 왕이 친히 기우제를 지내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우레에 관한 기록도 있는데 일반적으로 천둥은 여름에 나타나는데 기록에 의하면 모두 겨울에 나타난 현상이었다(<표 9>). 구름에 관하여는 <표 10>에서 보여
반대로“큰 비가 10일 동안이나 내려 한강의 물이 불어나서 백성들의 가옥이 떠
주는 바와 같이 특별한 색과 형상을 지닌 구름에 대하여만 기록하였다. 서리에 관한
내려가고 무너졌다.” 는 기록은 홍수와 연관된 기록이다. 10일 동안 내린 비로 한강
기록도 역시 두 번 나타나는데 기루왕 23년(99)과 진사왕 2년(386) 가을에 서리가
의 물이 불어났다는 내용은 지금의 장마철을 의미하는 것 같고, 한강의 물이 불어날
내려 콩을 죽이거나 곡식을 해쳤다 하였다(<표 11>). 서리는 겨울이 되어 내려야 하
정도면 기간이 길었을 뿐 아니라 한 번에 내리는 비의 양도 무척 많았음을 의미한다
는데 가을철 이른 서리가 내림으로 인해 콩이나 다른 곡식들을 수확하지 못할 정도
고 판단된다. 또한 홍수와 관련된 기록으로는 구수왕 8년(221) 여름 5월에“나라 동
로 해를 입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쪽에 홍수가 나서 산이 40여 군데나 무너졌다.” 라고 되어있다. 비가 많이 내렸다는 기록은 없이 홍수가 났다고만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비가 많이 내려 산사태가 났음 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눈에 관한 기록도 있다. 온조왕 18년(B.C. 1) 11월에는 낙랑의 우두산성을 습격하 려 출정하였으나“구곡에 이르러 큰 눈을 만나 그냥 돌아오고 말았다.” 고 기록되어 있으며, 아신왕 4년(395) 겨울 11월에는“한수를 건너 청목령 아래에 이르렀을 때 110 성 격 과 문 화 기 반
마침 큰 눈이 쏟아져 사졸들이 많이 얼어 죽으므로 군사를 되돌려 한산성으로 돌아 와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는 기록이 있다. 이들 기록은 모두 전쟁과 관련이 있으며 한강부근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보다는 한강보다는 훨씬 북쪽지역에 눈이 내 렸던 것으로 판단된다. 농사와 관련이 깊은 우박에 관한 기록은 단순히 우박이 내렸다는 것과 우박의 크
겨울에 물이 얼지 않았다는 기록( 《삼국사기》초고왕 46년)
한 성 백 제 와 한 강 유 역 의 지 리 환 경
백제한성시대의 우박 기록 <표 6>
서기 13 19
113
백제한성시대의 서리 기록 <표 11>
왕대 온조왕
연 31 37
월 여름 4월 봄 3월
100 227
기루왕 구수왕
23 14
겨울 10월 봄 3월
231
구수왕
18
여름 4월
454
비유왕
28
가을 8월
현 상 우박이 내렸다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계란만 하였으며 우박이 내렸다 우박이 내렸다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밤톨만큼 되어 우박(누리)이
결 과 까마귀나 참새들이 맞으면 죽었다
새들이 맞으면 죽었다 곡식을 해쳐서 흉년이 들었다
서기 99 386
왕대 기루왕 진사왕
연 23 2
월 가을 8월 가을 7월
현 상 서리가 내려 서리가 내려
결 과 콩이 죽었다 곡식을 해쳤다
지 리 환 경
백제한성시대 한강유역의 기후는 세계적인 경향과 비슷하게 나타났으나 가장 큰 이상기후 현상은 가뭄이었다. 이는 농경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고, 가뭄은 곧 기근으로 이어져 사회가 흉흉해지는 것과 연결이 되므로 더욱 기록에 충실했던 결
백제한성시대의 바람 기록
과가 아닌가 추측된다. 더불어 서리나 우박 등도 농사와 직결될 수 있는 이상기후이
<표 7>
서기 90 209 429
왕대 기루왕 초고왕 비유왕
연 14 44 3
월 여름 6월 겨울 10월 11월
현 상 큰 바람이 불어 큰 바람이 불어 큰 바람이 불어
결 과 나무가 뽑혔다 나무가 뽑혔다 기와를 날렸다
백제한성시대의 온도와 관련된 기록
므로 결국은 농업과 관련된 기후현상에 대한 기록이 제일 많았다고 판단된다.
3. 식생
<표 8>
서기 B.C. 16 97 211 429
왕대 온조왕 기루왕 초고왕 비유왕
연 3 31 46 3
월 겨울 10월 겨울 겨울 11월 12월
현 상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에 꽃이 피었다 물이 얼지 않았다 물이 얼지 않았다 물이 얼지 않았다
전 세계에는 일반적으로 약 35~40만 종의 식물이 서식하고 있다고 보는데 우리 나라에는 하등식물과 고등식물을 합하여 수 만종에 달하는 식물이 분포하고 있다. 한강유역에 분포하고 있는 식물상은 95과 387속 868종으로 간주되며 한강 연안을 대표하는 종은 55과 115속 148종이다. 초본이 35과 71속 88종이며 목본은 28과 48
백제한성시대의 천둥 기록
속 60종으로 집계된다. 한강유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공통종은 초본이 90종이며,
<표 9>
서기 B.C. 16 186 343
왕대 온조왕 초고왕 비류왕
연 3 21 30
월 겨울 10월 겨울 10월 겨울 12월
현 상 우레가 쳤고 구름도 없이 우레가 치고 우레가 있었다
목본이 47종이다. 한강유역에 나타나는 식물 종류들과 자생지를 나타낸 <표 12>에 의하면, 이들 식물 들은 대체로 백제한성시대 한강부근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식생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충북 제천 남한강변이 자생지인 조팝나무과의 넓은잎 산조팝나무나 남한강변
백제한성시대의 구름에 관한 기록
112 성 격 과 문 화 기 반
<표 10>
서기
왕대
연
월
261
고이왕
28
가을 9월
337
비류왕
24
가을 7월
현 상 푸르고 자줏빛 도는 구름이 궁궐 동쪽에서 피어올랐는데 마치 누각과 같았다 붉은 까마귀같이 생긴 구름이 양쪽에서 해를 끼고 있었다
한 성 백 제 와 한 강 유 역 의
용문산일대가 자생지인 박부가리과의 가지백미꽃, 강화일대가 자생지인 방동사니과 의 송이방동사니, 여주군일대의 남한강변이 자생지인 방송사니과의 뚝하늘지기, 가평 일대의 북한강변이 자생지인 포아풀과 청쌀새 등은 백제가 도읍을 정하였던 현재 풍
납토성이 위치하고 있는 부근의 한강주변에서는 분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한국생태학회에서 집대성한 자료에 의하면15) 한강으로부터의 위치 또는 구릉지 의 고도 등에 따라 식생이 달랐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으며 대모산과 아차산의 현존
의 식량작물로는 벼∙보리∙콩 등이 주로 경작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10
115
월에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에 꽃이 피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들 과실수도 보편적
한 성 백 제 와 한 강 유 역 의
으로 분포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식생을 참고로 하여 식생의 분포를 유추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건조한 지역은 상수 리나무 숲이 형성되고 아주 건조한 곳은 굴참나무 숲이 형성되기 때문에 산이나 구 릉의 남사면은 대체로 상수리나무∙굴참나무들이 많이 분포하였을 것으로 유추된 다. 특히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는 도토리가 큰 편이어서 가뭄 때 구황식물로 사용 되기도 하는데 암사동 선사유적지에서도 도토리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이들 나무 가 우세하였던 것 같다. 산의 북사면은 남사면보다 습도가 높아 참나무의 일종인 신갈나무 숲이 형성되 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이와 함께 팥배나무∙산벚나무∙때죽나무∙물박달나무 등 의 아교목이나 진달래∙참싸리∙붉은병꽃나무∙국수나무 등의 관목이 어울려 있었 을 것으로 보인다. 하천부근이나 저지대 저습지지역에는 버드나무∙오리나무 숲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삼국지》위지 동이전의 마한편에 굵기가 배 만한 밤이 난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토심이 깊고 비옥도가 높은 산의 저지대 북사면 또는 동북사면에는 밤나무 숲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최근 한강유역의 식물분포에 관한 조사에 근거하여 백제가 점유하고 있던 한강유역의 식생을 고찰하면,16) 버드나무∙능수버들∙뽕나무가 같은 교목이 우거 져 있고, 곳곳에 찔레꽃∙족제비싸리∙쥐똥나무∙누리장나무∙구기자나무가 자라 고 있다. 또한 좁은 수로 주변의 고운 모래톱 위에는 환삼덩굴과 가시박∙억새가 넓 은 군락을 짓고 있으며, 한강유역 전체에 서식밀도가 가장 조밀한 풀은 물쑥으로 일 부 모래언덕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지역에 골고루 분포하고 있다. 이밖에 환삼덩굴 이 넓게 분포하고 곳곳에 쇠무릎과 억새가 자라고 있다. 이러한 식생들은 백제한성시대에도 여전히 분포하고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114 성 격 과 문 화 기 반
일반적인 식생 이외에《삼국사기》 에 의하면 식용작물로서 벼∙보리∙콩 등에 대한 기록이 있다. 즉, 가뭄으로 인해 이러한 작물들이 말라버렸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15) 한국생태학회,《서울의 생태》 , 도서출판 당대, 2002. 16) 오병훈,《한강 밤섬의 관속식물》 , 한국식물연구회, 2006, 2~3쪽.
한강유역의 식생상
지 리 환 경
<표 12>
식 생 과 나도고사리삼과(Ophioglossaceae) 명아주과(Chenopodiaceae) 호도과(Juglandaceae) 꿩의 비름과(Crassulaceae) 조팝나무(Spiaeaceae) 피나무과(Tiliaceae) 물레나물과(Hypericaceae) 미나리과(Apiaceae) 박주가리과(Ascle piadaceae) 방동사니과(Cyperaceae) 방동사니과(Cyperaceae) 방동사니과(Cyperaceae) 방동사니과(Cyperaceae) 포아풀과(Poaceae) 포아풀과(Poaceae) 백합과(Liliaceae) 난초과(Orchidaceae)
식 생 종 나도고사리삼 엷은잎 명아주 당굴피나무 각시기린초 넓은잎 산조팝나무 좀피나무 물고추나물 지촌인삼 가지백미꽃 애기방동사니 송이방동사니 뚝하늘지기 푸른고랭이 청쌀새 넓은잎 물억새 참중의무릇 치마난초
※ 출처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한강사》 , 1985, 107쪽.
자 생 지 동작동일대에 야생 청량리일대 중랑천변에 야생 한강변 산지에 야생 한강상류 팔당에 야생 충북 제천 남한강변 서울근교 한강하류부 한강변 습지 서울부근 한강변 들판 남한강변 용문산일대 서울부근의 한강상류변 강화일대 여주군일대 남한강변 망우리 장자못 가평일대의 북한강변 중부 이북지방의 강변 경기도 광릉일대 경기도 광릉일대
인문환경
때 가장 중요한 지역의 하나이다. 이러한 한강이 지닌 이점은 한강을 지배하는 국가
117
가 한반도를 지배할 수 있다는 사고로 전환할 수 있고, 따라서 삼국시대에는 이 지
한 성 백 제 와 한 강 유 역 의
역을 지배하기 위한 투쟁이 지속되어진 것이다. 실제로 한강을 점령한 후 삼국을 통 일한 신라는 한강의 경영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고려시대에도 한강은 뚜렷 한 입지를 차지하지 못한다. 이는 한강을 두고 더 이상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고, 이러한 무관심은 조선시대 이 지역에 도읍이 정해질 때까지 그 중요성 정치∙군사적 중요성 경제환경 사회∙문화환경
을 잊게 하는 결과를 낳게 하였다. 백제가 도읍을 한강 남쪽의 하남위례성으로 옮긴 이후 주변국가와 전쟁을 치른 역사를《삼국사기》 에 기록된 내용을 중심으로 고찰하면, 백제한성시대는 전쟁보다 는 낙랑과의 화친을 꾀하기도 하였고, 낙랑∙말갈∙마한∙남옥저 등 주변국을 침입 하기도 하며 영토를 확장하였다(<표 13>). 반면 백제는 온조왕 때부터 다루왕 28년 (55)까지 말갈의 침입을 받았다. 그 후에도 4세기 말까지 빈도수는 훨씬 줄었으나
한강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흐르는 하천으로 하구부분에서 임진강과 합류하 여 서해로 흘러들어간다. 한반도의 가장 중심부를 흐르는 하천으로 한강유역은 한
그리고 1세기 중엽부터 3세기 말까지는 신라와의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같
반도의 중앙부를 거의 차지하고 있다. 가항하천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바다에서 하
은 기간 동안 서로 화친을 시도하기도 하였고, 신라가 백제의 도움을 청하기도 하였
천을 따라 배를 타고 온 사람들이 남한강과 북한강에 거주지를 형성하였고, 그 증거
다. 때로는 신라의 침공이 한강까지 이루어지기도 하였지만, 주로 백제가 신라를 침
는 이 지역에서 구석기시대부터의 유적이 발견되는 것으로 증명된다. 더구나 한강
공하는 일이 더 많았다.
의 하류부분은 인간의 거주가 적당한 낮은 경사도를 나타내고 있어 대규모 주택의 발달에 적정한 지역이었다.
백제의 책계왕은 한과 맥인의 침공 때 전사하였으며, 분서왕의 경우는 낙랑이 보 낸 자객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 시기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이 자리를 잡아
한강이 지닌 절대적 입지와 상대적 입지는 인간에 의한 해당지역 경영에 큰 영향
가던 시기였으며 한과 낙랑이 마지막으로 활동하던 시기였다. 4세기 중엽부터는 고
을 미칠 수 있었고, 이는 결국 그 지역을 경영하는 특정문화를 지닌 집단들이 경관
구려와의 전쟁이 많아지기 시작하는데 백제의 전성기인 근초고왕 때에는 고구려가
을 변화시키도록 허용하고 있다. 한강이 지닌 입지적 조건과 자연환경은 결국 인문
침입을 하였지만 오히려 백제가 대승을 거두기도 하였다. 특히 근초고왕 26년(371)
환경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특히 과거에는 이러한 환경적 조건들이 한강의 정치∙
에는 고구려 고국원왕이 먼저 백제를 침공하였으나 평양성에서 전사하였다.
군사적인 중요성이나, 사회∙경제∙문화적인 환경형성에 영향을 크게 미쳤다. 116 성 격 과 문 화 기 반
말갈은 끊임없이 백제를 공격하였다.
신라와는 화친정책을 수행하였으나 고구려와의 전쟁은 지속되었고, 말갈도 진사 왕 시절에 두 번이나 침입하였다. 4세기 말 고구려는 광개토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영토 확장을 꾀하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백제는 고구려를 자주 침공하였다. 그
1. 정치∙군사적 중요성
러나 백제가 고구려에 선공을 하였으나 백제가 크게 패하기도 하였는데, 특히 아신 왕 4년(395)에는 고구려가 한강을 넘어서까지 침입하기도 하였다.
한강은 한반도의 중심부를 흐르는 하천으로 절대적 입지나 상대적 입지에서 볼
고구려가 세력을 펼치던 5세기 초인 비유왕 7년(433)에는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
지 리 환 경
119
었다.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 백제한성시대의 정치∙군사활동
으로 옮기고 본격적으로 남 진정책을 시도하면서 개로왕 21년(475) 이루어진 고구려 의 침입은 백제의 운명을 바 꾸어 놓았다. 고구려의 침입 에 의해 한강유역의 한성이
B.C. 11
8
B.C. 9 B.C. 8
10 11
월 가을 9월 가을 8월 봄 2월 가을 7월 겨울 10월 여름 4월
17
봄 겨울 11월 가을 9월 겨울 10월
온조왕
연 3 4
자, 도읍을 웅진으로 옮기면
B.C. 1 4 8 9 22 25 30 31
18 22 26 27 40 43 3 4
34
7
이와 같이 백제가 한강유
역에 도읍을 정한 이후 영토쟁탈전은 끊임없이 있어왔는데 이는 주변 국가들의 변 화와도 관련이 깊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쟁과 화친의 대상도 바뀌었다. 전쟁은 한 강유역을 차지하려는 의도 때문에 일어났던 것이고, 화친 역시 국가를 존속시키면 서 당시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한강유역이 정치∙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백제는 한반도의 서안에 위치하고 있어 한강 하구와 서해를 통해 주변국가와 연 계를 가지면서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근초고왕 27년(372)에 사신을 晉에 보내 조 공하였으며 그 다음해 봄 2월에도 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였다. 그 후 근구수왕 5년(379)에도 진에 사신을 파견하기는 하였으나 바람이 심하여 되돌아온 기록이 있 으며, 침류왕 원년(384) 가을 7월에도 사신을 진에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같은 해 9월에는 마라난타가 한성에 도착하여 불교를 전래하였던 기록도 있다. 어느 정도 백제와 진과의 외교관계가 맺어진 후 아신왕 때부터는 왜와 외교관계 성 격 과 문 화 기 반
왕
B.C. 2
리게 된다.
118
서기 B.C. 16 B.C. 15
함락되었고 개로왕도 사망하
서 백제한성시대는 막을 내 고구려의 영토확장
<표 13>
를 맺기 시작하였다. 아신왕 6년(397) 여름 5월에“왜국과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냈다.” 는 기록이 있다. 또한 아신왕 12년(403)에 왜국의 사신이 왔는데 “왕이 이들을 영접하고 위로함이 특히 후하였다.” 는 기록으로 보아 왜와의 관계는 비교적 우호적이었다고 보인다. 전지왕 5년(409)에는 왜의 사신이 야명주를 가져오 자 왕이 융숭하게 대접하였고, 14년(418)에는 사신을 왜에 보내면서 흰 면포 10필을
55 64 66 70 74 75 76 85 105 108 113 125
다루왕
기루왕
28 37 39 43 47 48 49 9 29 32 37 49
167
2
170 188 189 190 199 204 210
5 23 24 25 34 39 45
초고왕
214
49
216 218
3 구수왕
5
가을 9월 겨울 10월 겨울 10월 가을 8월 가을 9월 겨울 10월 가을 8월
가을 8월 겨울 10월 가을 9월 봄 정월
침범당함 말갈
침공함
화친
기 타
낙랑 말갈 낙랑 말갈 말갈 낙랑 말갈
화친을 잃음 낙랑이 사주함 위례성을 불사름
낙랑 말갈 마한 마한
큰 눈으로 포기
마한 멸망
말갈 남옥저 말갈 말갈
항복
말갈 말갈 말갈 신라 신라 신라 신라 신라
나중에 다시 빼앗김
와산성 함락 와산성 뺏김
신라 신라 신라
가을 7월
말갈
백성을 약탈함 신라 신라
가을 7월 가을 8월 겨울 10월 가을 7월 가을 8월
겨울 10월 가을 9월 겨울 10월 가을 8월
신라가 도움을 요청
신라 신라
한수까지 엄습 신라 신라
신라
신라 말갈
신라 신라 신라
백제가 먼저 공격
말갈 말갈 말갈 신라
신라
백제가 승리 백제가 먼저 공격하자 신라가 반격
한 성 백 제 와 한 강 유 역 의 지 리 환 경
서기 220 222 224 229 240
왕 구수왕
255 266 272 278 283 286 286 298
22 고이왕
책계왕 분서왕
7
347 366 368 369
비류왕
34 21 23 24
371
근초고왕
월 겨울 10월 겨울 10월 가을 7월
침범당함 말갈
신라 신라 신라 신라 신라 신라 신라
신라 신라 신라 고구려
30
가을 7월
고구려
2
겨울 11월 겨울 10월 겨울 11월 가을 8월 봄 정월 가을 9월 가을 9월 여름 4월 겨울 10월
고구려
395
진사왕
아신왕
399 403 433 434
2 3 5 6 7 8 2 3 4 8 12 7
비유왕
8
475
개로왕
으로 자연스럽게 전파되었다. 고구려 고구려
중국과의 관계는 중국의 정치적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 관계도 변화되었다.
말갈 고구려
전지왕 12년(416)에 東晉의 安帝가 사신을 보내와서 왕을 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
고구려
겨울 11월 가을 8월 가을 7월 가을 7월 봄 2월 가을 9월
고구려 고구려
가을 9월
있다. 그 이후 백제는 왜와 우호적인 관계를 성립하였고 더불어 백제의 문화가 일본
고구려 고구려 말갈
가을 8월
21
東將軍百濟王으로 책봉하였으나 비유왕 3년(429)에는 사신을 宋에 들여보내 조공 백제가 크게 패함 한강 이남까지 반격 큰 눈으로 되돌아옴 백성이 신라로 도망 신라 신라 신라 신라 신라
동맹관계 성립 좋은 말 2필 선물 흰 매를 보냄 좋은 금과 빛나는 구슬을 보내 답례
고구려 고구려
백제의 영토확장과 해외진출
보냈으며, 비유왕 2년(428)에는 왜의 사신이 수행인원 50명과 함께 왔다는 기록이 고구려
고구려 고구려
가을 8월
좋은 말 2필을 보냄 백제의 대승 고구려가 패배 고국원왕이 전사 성주가 신라로 도망 다시 보복하려 했으나 흉년으로 포기
가을 7월
15
자객에 의해 살해 사신을 보내옴
고구려
겨울 10월 469
지 리 환 경
낙랑 (낙랑)
375
386 387 389 390 391 392 393 394
한 성 백 제 와 한 강 유 역 의
대방을 지원 왕이 전사
한과 맥인
겨울 가을 7월
3
121
백제가 패함
고구려
26
기 타
신라
28
근구수왕
화친
신라
가을 9월 겨울 10월 가을 8월 겨울 11월 겨울 10월 가을 9월 봄 정월 가을 9월 봄 2월 겨울 10월 봄 2월 봄 3월 봄 3월 가을 9월
침공함
신라 말갈
373
377
성 격 과 문 화 기 반
33 39 45 50 53 원년 13
304
376
120
연 7 9 11 16 7
한성 함락 신라에 구원 요청
하였고, 비유왕 4년(430) 여름 4월에는 송에서 사신을 보내 冊文으로 선왕의 작위 와 칭호를 주었다. 다시 비유왕 14년(440) 겨울 10월에 송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 다. 개로왕은 18년(475)에 魏에 사신을 보내고 고구려의 잦은 변방 침입을 막으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결연하였다. 이러한 백제의 중국이나 일본과의 외교적 교섭은 모두 해양을 통해 이루어졌다. 육로가 아닌 해양을 통해서도 중국과 통할 수 있다는 점은 이미 선사시대부터 이루 어진 것이었다. 가항하천이었던 한강의 하구를 통해 서해를 건너 바로 중국과 연결 될 수 있는 입지적인 유리함 때문이었다. 또한 일본과의 외교도 바로 해양을 이용한
것이었다. 이러한 주변국과의 관련성이나 한반도 내에서의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
구나 온조왕 14년(B.C. 4)에“왕이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을 위무하고 힘써 농
123
등으로 비추어 볼 때 한강의 정치적∙군사적 중요성은 매우 높았다고 할 수 있다.
사를 장려하였다.” 는 기록을 통해 백제 초기부터 적극적인 권농정책을 실시하고 있
따라서 백제가 선점하고 국가를 형성한 곳이지만, 고구려의 영토 확장에서 가장 중
었다고 판단된다.
한 성 백 제 와 한 강 유 역 의
요한 지점 중의 하나였고 신라 역시 중요한 지역으로 간주했던 곳이라 할 수 있다.
농사를 짓기 위한 농기구도 철제 농기구의 보급이 이루어지면서 구릉지대나 산 간지역에서 밭의 개간, 저습지를 이용한 논의 개발, 수리∙관개시설의 축조 등이 활 발히 진행되었다.17) 더구나 3세기 이후에는 수리시설이나 제언을 이용하여 새로운
2. 경제환경
토지를 개간하고 가뭄과 홍수로부터 전답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게 되었으며, 새로 운 영농법이 개발되면서 농업생산량은 크게 증가하였다.
한강은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여 정치∙군사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으며 가항
백제의 수공업은 초기에는 가내 수공업으로 자급자족적인 형태로 이루어졌으나
하천으로서 교통로로서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강은 식수와 농
국가의 지배력이 강화되면서 관영수공업의 형태로 운영하게 되었다.18) 철의 사용이
업용수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수자원으로서 중요하였으며 열목어∙누치∙쏘가리∙
늘어나면서 철은 부의 축적과 지배 권력의 유지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사회적 생산
은어 등 많은 어류가 살고 있어서 식량자원을 공급해주는 곳이기도 하였다.
력을 규정할 수 있는 철과 같은 자원이나 금이나 은과 같은 사치품은 국왕을 비롯한
특히 기후가 온난하고 배후습지가 발달해 있으며 산지보다는 충적층의 평평한
귀족들이 장악하게 되었으며, 중앙정부에서는 수공업 생산에 필요한 자원들을 특산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어 농경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배후습지를 개발하여
물세의 형태로 공납하도록 하였다. 이에 필요한 물품을 전문으로 생산하는 장인들
농사를 지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표 4>에 의하면 가뭄에 대한 기록과 함께 그 결과
을 육성하게 되었다. 금속을 소재로 한 가공 기술의 발달은 무기나 농기구를 비롯한
로서 초목이나 나무가 말랐다는 기록과 벼∙보리∙콩들이 말라버렸다는 기록들을
생산도구의 생산, 지배층의 사치품, 일반인들의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
볼 수 있다. 이는 쌀이나 보리∙콩
122 성 격 과 문 화 기 반
들이 주요 식량이었음을 나타내는
금속 가공업 이외에도 직조와 요업
것이다. 따라서 백제가 한성시대
이 발달하였는데 백제의 공복제가 세
에는 농경사회였으며 한강은 주요
가지 색으로 구분될 정도였으며, 마
한 수자원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리
한 때부터 직물 수공업이 발달되었던
라 판단된다.
것에 비추어 다양한 종류의 직물이
기근이 들면 백성들이 서로 잡
생산되었다고 판단된다.19) 또한 토
아먹든지 아니면 고구려나 신라로
기∙기와∙막새∙벽돌 등을 만드는
도망갔다는 기록이나, 흉년이 들
요업기술의 발달은 단순히 청동기시
거나 기근이 심할 때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들은 농경사회이며 식량생산이 매우 중 풍납토성 출토 U자형 삽날
품을 만들 수 있게 하였다.
요했음을 알려주는 사실이다. 더
은제귀이개 및 금제귀걸이, 달개
17) 양기석,〈한성백제의 사회와 산업〉 《서울역사강좌 : 한성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 서울특 별시사편찬위원회, 2004, 98~100쪽. 18) 양기석, 위의 논문, 102~103쪽. 19) 양기석, 위의 논문, 103~104쪽.
지 리 환 경
대 제작기술의 발전에 의존할 뿐만 아
3. 사회∙문화환경
니라 전통적인 제작 기법에 낙랑이나 고구려∙중국의 기술을 받아들여 새로
한강은 한반도의 중앙을 흐르기 때문에 북부와 남부를 분리시켜 주는 기능도 있
운 형태의 기술을 발달시켰다. 특히 백
었지만, 가항하천이었던 까닭에 동∙서문화가 교류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주기도
제의 토기는 40여 종이나 되는 등 매우
하였다. 따라서 한강은 백제가 고구려나 신라와는 다른 문화를 지닐 수 있었던 지리
다양하며 이를 만드는 사람들도‘와박
적 장점으로 등장하게 된다.
사’ 로 불리는 전문 장인들에 의해 만들 어졌다.
풍납토성 출토 대옹
성 격 과 문 화 기 반
함은 중국과의 연계가 북쪽의 육지를 통하지 않고도 직접적인 교류를 할 수 있었고,
철의 생산과 이용은 생활용품이나
역시 바다로 일본과도 교류를 할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한반도
무기 등 제작기술의 발달을 촉진하였
의 다른 지역과는 다른 사회∙문화적인 환경을 지니고 국가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고, 특히 요업기술의 발달은 건축자재
할 수 있다.
의 고급화 내지는 생활용품의 다양화로 이어졌다. 더구나 오랜 전통 속에서 발달해
《삼국사기》 에 의하면, 백제의 왕위계승은 경우에 따라 장자상속이 이루어지지 않
온 직조업은 원재료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복식문화의 발전으로도 이어졌을 것으로
은 경우도 있으나 처음부터 부자상속으로 이어졌다.20) 예를 들면, 고이왕은 개루왕
보인다.
의 둘째 아들이었으며, 비류왕은 구수왕의 둘째 아들이었고, 근초고왕은 비류왕의
농산품뿐만 아니라 공산품의 생산에 있어서 과잉생산 또는 수요∙공급의 부조화
둘째아들이었다. 백제한성시대 500여 년 동안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오른 것은 세 번
는 교환의 개념을 발달시키며, 지역 간 산물의 차이 역시 교역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밖에 되지 않는다. 또 다른 경우인 진사왕은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면서 침류왕의
하였다. 이는 곧 직업의 분화와 지역 간 교역, 시장의 발달로 이어졌다. 과거 백제가
아우였다. 그러나 이 경우는 침류왕이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죽었기 때문에 근구
주변국들과 교역을 행하였다는 흔적은 외교관계 수립을 위한 선물의 교환, 조공 등
수왕의 둘째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장자
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한강유역에서 중국의 물건이 출토되는 것으로도
상속이 일반화 되어있는 세습유형을 지니고 있었다.
증명된다.
124
백제가 처음 한강유역에 도읍을 정하면서 서쪽 한계를 서해라는 바다로 하였다
백제는 기본적으로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귀족과 관료 등의 지배층과 평민이나
백제시대의 한강이 지녔던 경제 환경으로서 가장 큰 장점은 수자원으로서 거주
노비와 같은 피지배층으로 구성된 신분제사회였다.21) 이들의 신분은 사람 자체의
민들에게 식수를 공급해주고, 농업용수로서 이용할 수 있도록 하며, 교통로로서의
자질이나 능력에 의해서라기보다는 혈연적인 유대나 출신 지역 등에 의해 결정되었
역할이 가장 컸던 것 같다. 수자원으로의 역할은 농업을 발달시켰고, 이는 농기구의
으며 이러한 계급관계가 법률로 고착되면서 혈연적인 영속성을 띄게 되었다. 이러
발달로 이어졌으며, 또한 그와 관련된 기술이 발달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
한 현상은 왕위의 계승이 장자상속으로 이루어진 것과도 연계되었다.
다. 교환의 개념에서 실질적으로 교역이 이루어지게 되고 상업이 발달하게 되는 것
백제의 지배층에서는 왕을‘어라하’ 라 하고, 왕비를‘어륙’ 으로 불렀으며, 일반
은 자연적인 현상이었다. 백제가 행하였던 주변국과의 교역은 한강이라는 교통로가
백성들은 왕을‘건길지’ 로 불렀다 한다.22) 이것은 백제가 계급사회임을 분명하게
있었기에 가능하였으며 이를 이용해 중국이나 일본과의 직접적인 교역으로 이어질 수 있는 장점을 가졌다.
20) 일반적으로 왕위가 백제 초기에는 형제상속이었고 5세기 초에야 부자상속으로 되었다고 기록 하고 있으나《삼국사기》 에 의하면 처음부터 부자상속으로 기록되어 있다. 21) 양기석, 앞의 논문, 2004, 93쪽. 22) 위와 같음.
125 한 성 백 제 와 한 강 유 역 의 지 리 환 경
표시하는 것이며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차이가 엄격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127
있다. 지배층은 주로 왕족∙왕비족과 왕도에 거주하는 귀족들이었으며, 피지배층인
한 성 백 제 와 한 강 유 역 의
평민층은 대부분이 농민이었다. 특히‘下戶’ 라 불렸던 일반 백성들은 각 소국의 수 장층과 호민층의 지배를 받는 동시에 국가에 대해서도 부를 통해 중층적으로 지배 를 받기도 하였으며, 대가 및 호민들에 의해 쌀과 양식, 생선과 소금 등을 가혹하게
지 리 환 경
수취 당하였고, 노비처럼 혹사당하기도 하였다.23) 이러한 계급사회의 구조는 백제 한성시대 동안 지속되었고, 정치∙경제∙문화 등 모든 권력이 왕을 비롯한 귀족층 에 집중되어 있었음을 나타낸다. 4세기 이후 사회∙경제적인 지위가 변화된 평민들은 농업에 종사하면서 토지세 와 부역 및 군역을 담당하는 공민으로 편입되어 국가의 주요한 물적 기반이 되었다. 평민들이 국가의 물적 기반이 되었다는 것은 국가의 운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 산이라는 의미이다. 이들이 없이는 국가가 운영될 수 없음을 명백히 알고 있었던 지 배층은‘전국의 토지와 백성들이 왕의 소유’ 라는 개념으로 그들을 묶어 놓고 있었 다. 이 속에서 평민들은 다시 계층분화가 일어나기도 하였으며 피지배계층의 최하 위는 노비였다. 이들 노비들은 처음부터 노비였던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평민이었 던 사람들이 자신의 토지를 빼앗기며 노비로 전락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 노비 양직공도에 있는 백제사진 모습
들은 대체로 주인의 소유로서 상속되기도 하고 매매되기도 하였다. 결국 백제한성 시대의 사회구조는 크게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으로 구성되었고, 지배계층에는 왕 을 비롯한 귀족이 피지배계층에는 평민과 노비들로 나뉘어 있었다. 백제의 문화환경은 대체로 온조왕의 근간이 되었던 부여∙고구려의 관습이나 법
성 격 과 문 화 기 반
의미하는 �이 있었으며, 투호∙바둑∙악삭(주사위놀이)∙구슬놀이들이 있었다.24)
률 등과 비슷하게 규정을 만들고 이행하여 왔으며 생활풍속에서도 많은 유사점이
백제가 지녔던 사회∙문화적인 환경은 고구려나 신라에서 지닐 수 없었던 한강
있었다. 그리고 백제는 중국과의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그 문화를 받아들여 일부 변
이 지닌 지리적인 장점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농경이 가능했던 넓은 한강유
화를 가져오게 되었으며, 백제만의 독특한 문화를 발달시켰다 할 수 있다.
역이라는 경제적 여건, 남북문화의 접촉을 가능하게 한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하고
백제인들의 옷은 색도 다양하였으며 지배층과 피지배층은 입는 옷이 달랐다. 또 126
수 있다. 백제인들이 즐겼던 명절은 설과 여름철의 伏, 한 해가 끝나는 12월 31일을
한 색에 맞추어 신분과 관등의 차이를 구분하였으며, 계절에 맞추어 홑옷과 겹옷을
있었던 한강의 상대적인 입지, 바다를 이용한 주변국과의 문화적인 접촉 가능성 등 은 다양한 문화환경을 발전시킬 수 있는 근간을 마련해 주었다. (이 혜 은)
입어 추위와 더위를 조절하기도 하였다. 또 말타기와 활쏘기 등의 풍습을 숭상하였 는데 이는 끊임없이 일어나는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무술의 연마에서 온 것이라 할
23) 양기석, 위의 논문, 94~95쪽.
24) 양기석, 위의 논문, 96~97쪽.
3
구석기문화 신석기문화 청동기문화
구석기 문화
소개하고 있다.2) 다만 북한강과 남한강유역의 구석기시대 유적은 중기부터 후기구
131
석기시대와 중석기시대(Mesolithic age)까지 해당되는 유적이 비교적 많다. 북한강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유역에서는 상무룡리(양구군 양구읍 상무룡리)유적과 하화계리(홍천군 북방면 하화 계2리) 등의 유적이 체계적으로 조사되었다. 남한강유역의 구석기시대 유적은 북한 강유역에 비하여 비교적 많고 자세히 조사되었다. 남한강유역의 구석기시대 유적의 연대도 중기와 후기구석기시대에 속한다. 그 대표적 유적으로는 강원도 영월군 서 자연환경 중기구석기시대 후기구석기시대
면 후탄리 뒤뜰과 옹정리, 충청북도 단양군 가곡면 여천리 구낭굴∙단양읍 도담리 금굴∙적성면 애곡리 수양개, 제천시 송학면 포전리 점말용굴∙한수면 사기리 창 내∙명오리 큰 길가,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법천1리∙법천3리 마을∙지정면 안창 리, 횡성군 둔내면 한천리∙갑천면 부동리 갈말,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병산리유적 등 16곳이다. 한강 본류의 구석기문화에 대한 연구는 북한강과 남한강유역에 비하여 대단히
1. 자연환경
빈약한 실정이었다. 여기에 대한 정리가《선사와 고대》 에 소개되었다.3) 1969년 손 보기에 의해 보고된 서울특별시 강남구 역삼동과 가락동, 1969년 이융조에 의해 보
한강은 강원도 삼척시의 태백산 줄기 대덕산에서부터 시작하여 흘러내리는 한강
고된 서울시 서대문구 무악과 송파구 가락동, 1970년 황용혼에 의해 보고된 서울시
원줄기와 강원도 금강군 덕포령에서 시작되는 두 줄기의 긴 강이 합류되어 서울, 개
중랑구 면목동 등 5곳의 지표면에서 석기가 채집되었다. 근래 서울역사박물관의 보
성시 판문군과 경기도 김포시를 지나 서해의 강화만으로 흘러가는 강이다. 한강 하
고서에 의하면 위의 5곳 외에 하일동∙세곡동∙오금동∙망우동 등지에서 채집된
류를 중심으로 강의 북쪽은 하북, 남쪽은 하남이라고 부르며, 하북은 삼각산, 하남
11점의 타제석기가 소개되고 있다.4)
은 관악산 줄기로 형성되어 있다.
130 성 격 과 문 화 기 반
최근에 한강 본류 유역의 주위에서 정식 발굴된 2곳의 중기구석기시대 유적으로
한강은 우리나라의 강들 중에서 지류가 제일 많은 강으로 평창강(149km)∙달천
는 여주 연양리와 용인 평창리가 있고, 5곳의 후기구석기시대 유적으로는 남양주시
(130km)∙북한강(323km) 등 1,030개나 된다. 유역 면적도 넓고, 물량도 대단히
호평동∙고양시 일산 대화4리∙일산 가와지∙일산 주엽리 새말∙서울 강남구 삼성
많다. 한강유역의 면적은 26,018㎢, 길이는 481km로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긴 강
동 등의 발굴 보고서가 출간되어 한강유역의 구석기문화 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시
이다.1)
하여 주고 있다.
한강의 제1지류인 북한강과 남한강의 분류를 보면, 북한강은 소양강∙홍천강∙
최초의 진정한 인류(Homo habilis 등)가 등장된 시기는 지질 제4기(Quaternqry)
수입천∙금천∙조정천∙가평천 등이 있고, 남한강은 송천∙동대천∙평창강∙주천
에 속한다. 제4기는 지질학적으로 신생대(Cenozoic)에 속하며 지역적으로 연대의
강∙제천천∙달천∙섬강 등이 있다. 한편 북한강과 남한강유역의 구석기문화에 관한 내용은 최복규가 비교적 자세히
1) 건설부,《한국하천일람》 , 1981.
2) 최복규,〈북한강유역의 선사문화〉 《서울문화연구》2, 1999, 73~99쪽. 3) 이융조,〈한강유역의 구석기문화〉 《선사와 고대》1, 1991, 9~53쪽. 4) 이경수,〈서울지역 선사유적의 조사현황〉 《서울특별시문화유적 지표조사종합보고서》제1권, 2005, 97~100쪽.
SH-19
차이는 있으나 일반적으로 B.C.
133
250만 년에서 B.C. 8,500년까지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이다. 이 사이 B.C. 100만 년 무 렵에 빙하가 발생하며 약 10만 년 간격으로 빙기와 간빙기(온대)가 반복되었다. 일산지역의 제4기 지층이 한 국선사문화연구소에서 조사되었 다. 일산 1지역, 고양군 송포면 대화리(현 고양시 일산서구 대화 동) 성저마을 일대의 작은 골짜 기가 발굴조사 되었다(<도면 1>). 이 지역의 골짜기는 서쪽 방향으 로 한강유역과 직선으로 연속되 었으며, 동서로 뻗은 언덕 사이 100m 내외의 골짜기에서 제4기 층위가 확인되었다. 시굴지점 SH19 제1지구의 중앙부위에 해 당된다. 이곳은 이 지역 층위의 기본 단면으로 보고 있다(<도면 <도면 2> 제1지역(한국선사문화연구소)의 제4기 퇴적층 표식단면
2>). 약 250cm 두께의 쌓인 층이 기반암을 덮고 있었다.
일산 2지역, 고양군 송포면 대화리 가와지 마을의 작은 골짜기는 충북대학교에서 발굴을 실시하였다(<도면 3>). <도면 3>의 CH16은 제2지역을 대표하는 단면 3의 중 132 성 격 과 문 화 기 반
앙부위에 위치하고 있다(<도면 4>). CH16 단면은 해발고도 약 4.5m 부근에서 약 2~3m 쌓인 층위이다. 제3지역의 제4기 쌓인 층 역시 제2지역 골짜기를 메운 제4 기 지층과 비슷하다. 이 지역 작은 골짜기 중앙 부근의 시굴 단면 DT8에 의하면(<도 <도면 1> 고양군 송포면 성저마을일대의 제1지역
면 5>) 약 3m 두께의 쌓임 층이 풍화 암반을 덮고 있다. 종합적 고찰에 의하면, 일산 신도시 개발지역은 남부지역에 위치하여 낮은 언덕
DT-16
DT-8
135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도면 4> 제2지역(충북대학교 발굴)의 대표적인 퇴적층서
<도면 5> 제3지역(단국대학교)의 제4기 지층 표식단면도
이 발달된 지형이다. 낮은 언덕 사이의 작은 골짜기들은 수지상 형태로 발달되어 한 강유역의 들로 이어졌다. 주변 지역은 선캄브리아기의 편마암류가 기반암을 이루고 134 성 격 과 문 화 기 반
있다. 편마암의 심한 풍화작용으로 토양화 되었다. 마지막 빙하기 12만 5천 년 전에 형성된 주엽 옛 토양이 기반암을 덮고 있다. 부분적으로 주엽 옛 토양 위에 갈색의 견고한 송포 옛 토양이 발달되었다. 송포 옛 토양상의 토양쐐기(soil wedge) 구조가 <도면 3> 고양군 송포면 대화리 가와지 마을 잔골짝 일대의 제1지역(핸드오거(CH), 시추지점(CB) 및 트랜치 의 위치도)
발달된 것으로 보아 마지막 빙하기에 형성된 토양층으로 보고 있다. 고양군 송포면 대화리일대와 일산읍 주엽리(현 고양시 일산구 주엽2동) 일부지역
의 단면에서 제4기 지질조사가 실시되었다. 층위는 아래서부터 대화리층
2. 중기구석기시대
137
(Daewhari Formation), 가와지 토탄(Gawaj ; Peat Member), 새말층(Saemal Formation)으로 나누고 있다.
│ 여주 연양리유적 │
대화리층은 굵은 모래(부분적), 청회색 찰흙질 뻘로서 시기는 1만 년 전후 토탄층
위치는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연양리 산 348-4번지로 아파트단지를 조성할 때
이 발달한 것으로 보이며, 대화리층 위의 가와지 토탄층은 작은 골짜기 안의 조간대
석기가 수습되면서 알려졌다. 조사는 2004년 5월부터 8월까지 2개 면적 약 2,575
고조지역의 소택지가 발달하여 주변 지역의 나무 편들과 토탄층이 혼합∙형성된 것
㎡가 시굴되었다. 그 결과 2004년 9월부터 2005년 4월까지 2개 지점이 정식 발굴
으로 보고 있다. 이 시기는 47,000~24,600년으로 보고 있다. 가와지 토탄 형성 이
되었다. 출토 석기는 1,784점으로 대부분 적갈색 점토(4지층) 상부에서 출토되었으
후에 해퇴(Marine regression)가 발생하면서 한강의 범람에 의한 홍수층이 그 위에
며, 지표에서 채집된 것은 9,379점이다.
쌓인 것으로 보고 있다. 문화층은 사면에서 무너져 내린 흙, 주엽 옛 토양과 송포 옛 토양층에서 석기가 출토되었다고 한다.5) 자연환경 조사의 하나로 일산지역 토탄층에서 출토된 목질 유물이 확인되었다. 조사결과 86점의 목편, 4개의 통나무와 몇 개의 잎 화석이 확인되었다. 1지역 49점
조사자에 의하면 여주군일대의 기반암은 쥬라기의 화강암과 흑운모화강암, 세립 질 화강암으로 조성되었으며 산골짜기의 저지대에 제4기에 형성된 충적층이 곳곳 에 발달되었다. 조사지역은 여주읍에서 남동방향으로 약 2km 지점, 해발 67m이 다. 유적의 북쪽과 동쪽으로 약 0.5km와 1.5km 지점에 남한강이 있다.
의 시편을 분석한 결과 오리나무∙두메오리나무∙개살구나무∙다룹나무∙갈매나
층위는 ① 표토층, ② 명갈색 점토층(7.5 YR 5/2 brown), ③ 암갈색 점토층(7.5
무류∙감나무류∙풀푸레나무∙활엽수 수피∙활엽수 뿌리 등이 확인되었다. 이 중
YR 3/4 dark brown), ④ 적갈색 점토층(2.5 YR 4/4 reddish brown), ⑤ 황적색
에서 오리나무와 두메오리나무를 합하면 26시편으로 53.1%가 넘는 優占種이며, 물
니사질층(5 YR 5/6 yellowish red), ⑥ 사질층, ⑦ 자갈층, ⑧ 기반암(대보화강암)
푸레나무가 10시편으로 20.4%, 다룹나무와 감나무류 및 뿌리는 각각 2시편으로
으로 구성되어 있다(<도면 6∙7>).
4.1%, 개살구나무와 갈매나무류가 각각 1시편으로 2.0%를 차지하고 있다. 2지역의 18점 시편은 오리나무∙두메오리나무∙물푸레나무 등이 식별되었다. 물푸레나무는 우점종으로 7시편(38.9%), 다음 오리나무와 두메오리나무가 6시편
그리고 유물은 4층에서 대부분 출토되었다. 연대는 Ⅰ 지점 Ⅱ ㄱ 칸의 4층 상부 퇴적물의 OSL 연대측정으로 63,000+4,000 B.C.와 67,000+3,000 B.C. 등이 산 출되었다.
(33.3%), 졸참나무류 3시편(16.7%), 가래나무와 사과속이 각각 1시편(5.6%)이다. 일산지역의 토탄층 출토 樹種은 한반도에 흔한 소나무류와 침엽수가 없는 오리 나무∙가래나무∙졸참나무∙다룹나무∙갈매나무류∙물푸레나무 등 온대 중부에서 온대 북부에 분포된 약간 추운지방의 수종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고 보고 있다. 토탄 층 형성 당시의 기후는 지금과 거의 비슷하거나 약간 더 추웠을 것으로 보고 있다. 136 성 격 과 문 화 기 반
이 중에서 가래나무와 살구나무 등은 집단생활의 식용열매나 과일 수확을 위한 가 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다.6)
5) 이동영∙김주용,〈지질환경조사-제4기 지질 및 퇴적환경연구- 〉 《자연과 옛 사람의 삶》 , 한국선 사문화연구소∙경기도, 1992, 41~108쪽. 6) 박상진,〈나무화석〉 《자연과 옛 사람의 삶》 , 1992, 155~176쪽.
<도면 6> Ⅰ지점 기준 중위도(가12ㄷ칸) 여주 연양리 유적
<도면 7> Ⅱ지점 기준 중위도(타2ㄴ칸)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 용인 평창리유적 │ 평창리유적은 용인시 북동부의 양지면에 속한다. 지번은 양지면 평창리 산 10614번지이다. 유적은 영동고속도로 양지인터체인지에서 남쪽으로 1.5km 지점의 17 번 국도 옆에 위치하고 범위는 500평 정도이다(<도면 8>). 유적일대에 8개 구덩이를 설치하여 시굴에 착수하였다(<도면 9∙10>). 작업은 1998년 6월 29일부터 7월 20일까지 지속하였다. 구덩이는 5m 간격으로 설정하고, 시굴은 가로∙세로 2m 구덩이로 시작하였다. 연양리 출토 각종 몸돌
연양리 출토 각종 외면찍개
층위는 ① 암반 풍화토, ② 적갈색 실트층, ③ 황갈색 실트층, ④ 표토층으로 구 성되어 있다(B Pit 층위도 <도면 11>). 유물은 B구덩이(5 5m)에서 많이 출토되었다. 유물은 석영제 유경첨두기(<도면 12>), 유경첨두기(<도면 13>), 접합석기, 화강암제 망치돌(<도면 14>) 등이다. D시굴 구덩이에서는 석영제 긁개, 석영제 돌날, 석영제 톱니날 새기개(<도면 15>), 석영제 찍개 등이 출토되었다(<도면 16>). 유적에서는 석영제 돌날과 정교한 새기개가 출토되고, 지표 채집으로는 최말기 구석기시대에 해당되는 호온팰스 및 반암제 돌날들과 세석인 석핵 등이 동일지역에 서 발견되었다. 종합하면, B와 D pits에서 최말기 석기가 황갈색 실트층에서 출토 되었다.8) 위에서 살펴본 유적 가운데 1998년 7월부터 10월 11일까지 본 조사가 실시되었 다. 평창리유적일대의 지형종단면이 제시되었다. 발굴구덩이 중에서 토적층이 양호
<도면 8> 평창리유적의 위치와 주변 지형
한 N2E5 구덩이, 남벽동쪽의 6개 층위는 ① 황회색 황갈색층, ② 황색층, ③ 갈색 층, ④ 암갈색층, ⑤ 황갈색층, ⑥ 적갈색층으로 구성되어 있다(<도면 17>). 6개 층
138 성 격 과 문 화 기 반
유물은 Ⅰ지점과 Ⅱ지점의 정상부에 집중되어 전체의 70%를 차지하였다. 석기는
위 중에서 ②층은 산소안정동위원소 제3단계(약 60,000~28,000년)의 종말기나 제
몸돌(core)∙격지(flake)∙돌조각(chips)∙망치돌(hammer)∙모룻돌(enclume), 찍
2단계(28,000~13,000년)의 초기 퇴적으로 보고 있다. 또한 ⑤와 ⑥은 제4단계
개(chopper), 주먹대패(cleaver) 등으로 자갈돌석기(pebble tools)와 격지석기
(75,000~60,000년)와 5a(85,000~70,000년) 동안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flake tools)로 구성되었다. 석기의 구성에 의하여 연양리유적을 석기제작지로 보
한편 퇴적층 절대연대를 위한 DSL 측정 시도는 ①∙③∙⑥에서 각각
고 있다.7) 이 유적은 비록 남한강가에 속하지만 서울 중심의 한강유역과 가장 근접 된 위치에 있다.
7) 김기태∙이정철,〈여주 연양리 구석기유적〉 《한국구석기학보》11, 2005, 25~34쪽.
8) 경기도박물관∙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용인 평창리 구석기유적시굴조사보고서》 , 1998, 1~42쪽. 이선복∙유용욱∙성춘택,《용인 평창리 구석기유적》 , 경기도박물관∙서울대고고미술사학과, 2000, 1~86쪽.
139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141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평창리 도구석기의 형식들 <표 1>
날의 성격
도구형식
정의/기술(전체 형태와 다듬기 성격)
둥글고 큼직한 자갈돌에 주로 양방향(bifacial) 으로 가격하여 지그재그날을 베푼 것 두터운 입방체형의 소재 한쪽에 찍는 날을 찍는 날 찍개(chopper) 입방체형(Blocky) 가진 석기 직사면체형 비교적 납작한 사면체의 한쪽에 조잡한 손질로 (Rectangular) 찍는 날을 베푼 석기 전체적으로 직사각형의 비교적 두터운 소재의 한쪽에 날을 가 자귀꼴석기/ 진 것(형태와 제작기법에서 직사면체 찍개와 긁개와 유사한 두터운 긁개 점이 있지만, 찍개보다는 크기가 작고 보통의 긁개보다는 잔 (rabot/thick scraper) 손질의 정도가 덜하다) 비교적 급한 각도로 잔손질된 단면의(unifacial) 날을 가진 석기 긁는 날 긁개(side-scraper) (날의 위치를 기준으로 할 때 옆긁개라고도 할 수 있겠다) 소형 긁개/밀개 주로 소재의 한쪽 끝에 긁는 날을 가진 것으로 크기가 작은 것 (small scraper) (보통 최대 길이 5cm 이하) 잔손질 또는 성형으로 오목하거나 홈이 패인 날을 가진 석기 흠날(notch) (보통 날은 급한 각도로 가공되어 있는 편이다) 보통삼각형의 박편 주변에 부분적인 손질을 가진 석기 뾰족끝석기(point) (삼각첨두기. 일본의 이른바“사축첨두기” 와 비교할 만하다) 뾰족 날 뚜르개(awl) 잔손질되어 송곳과도 같은 뾰족한 날을 가지게 된 석기 박편 소재의 끝부분에 새기개 잔손질을 가하여 전체적인 모양이 새기개(burin) 뾰족하게 된 것 (등손잡이)칼 등손잡이 잔손질(또는 자연스런 backing)로 주변의 날카로운 (backed knife) 부분을 날로 삼는 석기 작은 사다리꼴 또는 삼각형 박편의 한쪽 또는 주변에 잔손질을 사다리꼴석기 자르는 날 베푼 석기(경우에 따라서는 backed knife라 판단할 수 있는 (Trapezoid) 석기들도 있다) 톱니날석기 오목한 날의 잔손질이 반복되어 톱니모양의 날을 가지게 된 석기 (Denticulate) 자갈돌(Cobble)
※ 도구석기를 날의 성격을 바탕으로 네 군집으로 나눈 것은 다분히 편의적인 것이다. 찍는 날은 지그재그모양의 날(주로 양면, bifacial)을 가진 것이며, 긁는 날은 한쪽 면(unifacial)에 대체로 급한 각도(45� 이상)로 잔손질되어 있는 작업날을 가진 석기들 이며, 뾰족 날은 잔손질 또는 의도적인 성형으로 뾰족한 날을 형성하고 있는 군집이고, 자르는 날은 잔손질 또는 성형으로 날 카로운 날을 가진 집합이다.
140 성 격 과 문 화 기 반
<도면 9> 발굴지역과 발굴구덩이 배치도 *측량기준점(해발고도 149.87m)
※ 도구형식의 설정과 기술은 어디까지나 평창리 석기들을 토대로 한 것이며, 다른 유적의 유물에 적용할 경우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140,000+18,000 B.P., 220,000+48,000 B.P. 및 180,000+36,000 B.P.를 제시
※ 소평긁개의 석기들은 대부분 밀개(end-scraper)라고도 불릴 수 있겠으나 날의 위치에 따른 기준만으로는 긁개와 구분이 용 이하지 않는 것들이 많다.
하고 있다. 출토된 석기는 찍개(chopper), 자기꼴석기와 두터운 긁개(side-
※ 찍개류는 Clark and Kleindienst(1974)의 분류와도 같이 중석기(heavy-duty tool)의 범주에 넣어 다른 중소형의 석기들과 구분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제시된 도구형식들은 경우에 따라서 다른 이름으로도 불릴 수 있을 것이다.
scraper), 소형 긁개와 밀개(small scraper), 홈날(Notch), 뾰족끝 석기(point), 뚜 르개(awl), 새기개(burin), 등손잡이칼(backed knife), 톱니날 석기(Denticulate) <도면 18~22> 등이다. 평창리 석기의 형식을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143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도면 10> 평창리유적 주변지형 단면도
<도면 12> B pit 출토 석영제 유경첨두기(나이프형 석기)
A
B
C
142 성 격 과 문 화 기 반
<도면 11> 용인시 평창리유적 층위분포 모식도
<도면 13> B pit 출토 석영제 유경첨두기(화살촉) (A, B. 유경첨두기 C. 제작 도중에 폐기된 반제품)
145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A A
B
B
C
C
144 성 격 과 문 화 기 반
<도면 14> B pit 출토 석기 각종 (A. 접합 석기 B. 접합석기 이탈 상태 C. 화강암제 망칫돌)
<도면 15> D pit 출토 각종 소형 석기들 (A. 긁개 B. 돌날 C. 톱니날 새기개)
147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도면 16> D pit 출토 석영제 찍개
0
5cm
a
0
5cm
b
0
5cm
146 c
성 격 과 문 화 기 반
<도면 17> 평창리유적 층위 모식도
<도면 18> 평창리유적 출토 찍개류 석기들 -a : D-4, b : 지표수습, c : 시굴구덩이 B 출토 화강만제 사냥돌
149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a
b
a
b 148 0
5cm
성 격 과 문 화 기 반
<도면 19> 평창리유적 출토 자귀꼴석기류 -a : 표토출투, b : 지표수습
c 0
5cm
<도면 20> 평창리유적 출토 긁개류 석기들 -a : 지표수습, b : N2E4-38, c : N2E6-15(접합상태에서 좌측), N1E5-42(접합상태에서 우측)
151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a
b
c
b
c
d
d
150 성 격 과 문 화 기 반
a
e
f 0
5cm
<도면 21> 평창리유적 출토 홈날 및 톱니날석기류 -a : N3E4-32, b : D 표토, c : N1E5-30, d : 지표수습, e : D 표토, f : 지표수습
0
5cm
<도면 22> 평창리유적 출토 뾰족끝석기류 -a : D-10, b : N1E4-20, c : D 표토, d : N3E5-49
153
석재 취득은 규암질의 보편성에 의해서 강변 또는 근처 퇴적층에서 구하고, 두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번째는 풍화로 흘러내린 암석을 채취한 것으로 보고 있다. 암질은 석영암과 규암 등 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석기 제작의 기술체계는 3가지로 보고 있는데 첫째는 도구 제작의 다양성, 둘째는 제작시스템의 형성, 셋째는 적절한 박편 소재 선택이다. 평창리유적 조사의 의미는 25,000년 전 형성으로 추정되는‘무문화층’중심으로 위와 아래의 유물군 구성에 변화가 분명하다고 보고 있다. 특히 임진강유역의 주월 리 및 가월리 지점의 유물들이 평창리와 유사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 다.9) <도면 23> 호평동유적의 위치
3. 후기구석기시대 │ 남양주 호평동유적 │ 위치는 경기도 남양주시 호평동(<도면 23∙24>)이다. 2000년부터 2001년까지 2 년에 걸쳐 남양주시 호평동과 평내동 택지개발지구를 조사할 때 확인되었다. 이후 2002년부터 2004년 11월까지 3년에 걸쳐 발굴이 실시되었다. 이 유적은 전체가 4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유물은 1∙2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유적의 기반암은 화강암질 편마암으로 조성된 흑운모 화강암이다.
<도면 24> 호평동유적의 위치
제1지역은 남서로 해발고도 148~140m, 제2지역은 150~145m의 비교적 완만한 경사지역이다. 제1지역은 7개 층으로 나누어져 있는데(<도면 25>) 1층은 갈색사질
152 성 격 과 문 화 기 반
되어 있다.
점토로 20~30cm 두께이며, 2층은 각력질자갈과 점토 및 사질로서 40~50cm이
출토된 석기는 전체 10,607점이며, 그 가운데 층위 내에서 출토된 것은 9,332점
다. 3층은 40~50cm 두께의 층위를 2층으로 구분하여 3a는 갈색사질점토로 2문화
이고, 나머지 1,275점은 지표에서 채집된 것이다. 유물은 1지역이 83%, 2지역이
층(B.P. 24,000~16,000년)이 고, 3b는 암갈색점토로 1문화층 (B.P.
15%로 분포되어 있었다. 두 지역에서 출토된 석기는 9,090점이다. 유물은 3층의 갈
30,000~27,000년)이다. 4층은 쇄설층으로 1m 두께이고, 5층은 쇄설층으로 2.5m
색점토층에서 출토되었는데 1∙2지역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다. 갈색점토층 하부
두께이며, 수습 숯(B.P. 33,000~31,000년)이다. 6층은 담회청색과 암회색니사의
(3b 지층, 1문화층)에서 출토된 석기는 3,239점이고, 평면상 1지역 동부지역이
1m 두께로 유기질점토(B.P. 46,000+200년)이며, 7층은 화강암질 편마암으로 구성
58%, 2지역이 42% 등으로 분포되었다. 지층에서 출토된 석기의 석재는 석영제(96.8%)∙응회암∙유문암∙사암과 화강
9) 경기도박물관∙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용인 평창리 구석기유적시굴조사보고서》 , 1998. 이선복∙유용욱∙성춘택,《용인 평창리 구석기유적》 , 경기도박물관∙서울대고고미술사학과, 2000, 1~130쪽.
암 등이다. 석영 격지로 밀개 제작이 집중되었으며, 응회암과 유문암은 돌날 제작 및 긁개∙슴베찌르개∙밀개 등이 제작되었다.
155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0
3cm
<도면 28> 밀개 2(HP1-A9-3a-R1) 0
0
3cm
<도면 29> 밀개 3(HP1-AC8-3a-20)
3cm
<도면 26> 몸돌 1 (HP1-C11-3a-77)
<도면 25> 1지역 J36 북벽 층위단면도 (J/K, 36열 1~200cm)
3b 1문화층에서 출토된 석기는 몸돌∙돌날 석기∙격지∙돌날∙돌조각 중심으로 찍개∙긁 개∙홈날∙슴베찌르개∙밀개∙망치돌과 모루 등이다(<도면 26~33>). 또한 3a 2문화층인 갈 색점토층 상부에서 출토된 석기는 5,851점이
0 0
3cm
0
3cm
3cm
<도면 30> 새기개 1(HP1-SF-287)
<도면 31> 새기개 2(HP1-B11-3a-361)
<도면 27> 몸돌 2 (HP1-B11-3a-41)
며, 석재는 흑요석(17.6%)∙응화암∙유문암∙ 홈펠스∙세일∙쳐트∙역암∙옥수∙벽옥∙수정(19.5%) 등이다. 이 가운데 출토된 석기는 몸돌∙좀돌날몸돌∙격지∙돌날∙좀돌날∙돌조각 등을 비롯한 긁개∙홈 날∙밀개∙새기개∙뚜르개 등이다. 154 성 격 과 문 화 기 반
호평동유적에서 수습된 흑요석재 석기는 1,229점이며, 그중에서 출토 유물은 1,029점이고, 지표에서 채집된 것이 200점이다. 흑요석제 석기는 몸돌(0.4%)∙격 지(60.5%)∙돌날(0.2%)∙좀돌날(37%) 등이며, 석기는 긁개∙밀개∙새기개∙뚜르
0
3cm
0
3cm
개 등의 잔손질(1.7%) 등이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3b 제1문화층은 석영석재의 격지석기 제작과 밀개제작
<도면 32> 새기개 3(HP1-ABC8-3a-R7)
<도면 33> 뚜르개 1(HP1-B11-3a-40)
지이며, 응회암은 돌날 제작과 슴베도구 제작 등을 동반하였다. 주된 석기는 슴베찌
157
르개와 밀개 등이다. 그리고 3a 제2문화층은 흑요석을 중심으로 한 좀돌석기 제작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으로 밀개∙새기개∙뚜르개 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문화층의 상한연대는 24,000년으로 측정되어, 호평동유적은 가장 이른 시기의 좀돌날 제작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고 발굴자는 보고 있다.10)
돌날
│ 일산 1지역 │
좀돌날몸돌과 좀돌날
발굴은 1991년 5월 7일부터 2개월 동안 실시되었다. 발굴지역은 경기도 고양군 일산읍 대화 4리(현재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대화 4동, 북위 37도 41분, 동경 126도
긁개
44분)의 성저마을에서 실시되었다. 발굴구덩이는 토탄층이 발달된 장소(275-4답) 뚜르개
새기개
를 중심으로 동서로 100m 길이를 기준으로 삼았다(<도면 34>). 유적 주위의 제4기층은 기반암이 편마암이다. 이것을 부정합으로 덮은 언덕과 밀개
여러면석기
언덕 사이의 작은 골짜기를 끼고 발달하여 한강유역까지 이어졌다. 층위는 세 지역 이 공통현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두께 차이와 관계 구분이 어려울 정도라고 보고
호평동유적 2문화지층(3a지층) 출토 석기
있다. 제1지역은 위로부터 겉흙층-회갈색염토층-검은토탄층-갈색토탄층-청회색 뻘층-모래자갈층-기반암층으로 조성되었다. 대화리층은 바닷물에 의한 갯뻘층으로 보고 있다. 한강에서부터 발달하여 언덕 골짜기에 오면서 얇은 층으로 변질되었고, 그 위에 가와지 토탄층이 형성되었다. 가
좀돌날 몸돌 접합1
와지층은 약 2m 두께로 구성물질에 따라 2층으로 나누어져 있다. 검은 토탄층 위로 회갈색모래찰흙(새말층)이 지표 아래로 퇴적되었다. 석기는 ㄱ구덩이에서 최초로 발견되었는데, 모래자갈층(대화리층)에서 차돌로
격지 접합2
만든 뗀석기들이 발견되었다. 이 층위의 석기는 물길에 따라 2차로 쌓인 것으로 보 고 있다. ㄱ구덩이에서 출토된 석기는 흰색에서 회색으로 접근된 차돌 제품이다. 석기류
156 성 격 과 문 화 기 반
접합3
좀돌날
는 긁개∙찍개∙흠날연모와 격지 등이다. (1) 긁개(1-ㄱ -1): 차돌 몸돌에 거친 잔손질, 볼록날과 홈날 기능을 갖고 있다. 길 이 10.6cm, 무게 787g이다.
긁개
새기개
밀개
호평동유적 흑요석제 석기
뚜르개
접합4
호평동유적 접합석기
10) 홍미영∙니나코노넨코,〈남양주 호평동 유적의 흑요석제 석기와 그 사용〉 《한국구석기학보》12, 2005, 1~30쪽.
159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대화 1-ㄱ-3 격지
대화 1-ㄱ-1 긁개
대화 1-ㄱ-4 찍개
대화 1-ㄱ-2 흠날연모
대화 1-ㄱ-5 긁개
<도면 35> 일산 1지역 ㄱ 구덩 석기
158 성 격 과 문 화 기 반
<도면 34> 일산 1지역 발굴구덩 펼친 그림
(4) 찍개(1-ㄱ -4): 흰차돌 몸돌에 안팎날떼기, 끌찍개로 제작, 길이 6.2cm, 무게 85g이다.
(2) 긁개(1-ㄱ -5): 흰차돌 격지 등쪽에 거친 잔손질이 되어 있다. 볼록날 긁개, 길이 4.1cm, 무게 31g이다(<도면 35>). (3) 홈날연모(1-ㄱ -2): 회색 차돌격지, 한 번 떼기 홈날제, 길이 9.5cm, 무게 237g이다.
(5) 격지(1-ㄱ -3): 노란 빛이 도는 흰 차돌 격지로 등면은 거북이 모양이다. (6) 격지(1-ㄱ -6): 회색차돌에서 제거된 긴 격지로 길이 7.1cm, 무게 113g이다. 19구덩이에서 출토된 석기는 ㄱ구덩이 출토 석기의 재층을 찾기 위해서 언덕 쪽 에 구덩이를 설치하던 중 붉은 흙층에서 문화층이 발견되었다. 암질은 ㄱ구덩이 것
161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대화 1-ㄱ-6 긁개 대화 3-00-1 긁개
대화 3-00-3 찌르개
대화 1-19-4 긁개
대화 1-19-5 긁개
대화 3-00-2 긁개 <도면 37> 일산 1지역 3지구 석기
(3) 긁개(1-19-3): 모난 자갈돌 격지 긁개로 두 군데 제작되었다. 한 곳은 밑 잔손 질날이며, 다른 하나는 등쪽 잔손질 날이다. 홈날 잔손질로 인하여 톱니날이 대화 1-19-3 긁개
형성되어 있다. 길이 8.5cm, 무게 101g이다.
대화 1-19-2 주먹도끼
<도면 36> 일산 1지역 19구덩 석기
(4) 긁개(1-19-4): 흰빛의 고운 차돌제로 마름모꼴 격지로 제작되었다. 등잔손질 로 마주날을 제작하였다. 길이 7.5cm, 무게 60g이다.
들과 같고, 빛깔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차돌 자갈제로 제작되었으며, 석기는 팔매 160 성 격 과 문 화 기 반
(5) 긁개(1-19-5): 차돌격지로 등쪽이 잔손질 처리되어 있으며, 볼록 날과 곧은
돌∙주먹도끼∙긁개 등이다.
날이 제작되어 있다. 길이 5.3cm, 무게 60g이다(<도면 36>).
(1) 팔매돌(1-19-1): 차돌의 모난 자갈돌로 만들어 졌으며, 세 면이 떼어내졌고,
3지구 석기는 발굴지역의 북동쪽 언덕에서 큰 석기가 출토되었다. 누런 빛깔을
한 면에 자연면이 그대로 남아있다. 길이 9.1cm, 무게 596g, 소형 팔매돌이다.
띤 차돌 자갈돌로 제작되었다. ㄱ구덩이나 19구덩이 석기들과 같은 층에서 출토되
(2) 주먹도끼(1-19-2): 타원형의 흰차돌로 주위 안팎으로 떼어내졌다. 길이 10.8cm, 무게 638g이다.
었다. (1) 찍개(3-00-1): 차돌자갈제 글찍개로 손잡이 쪽을 편리하게 처리하였다. 길이
10.7cm, 무게 700g이다. (2) 찌르개(3-00-3): 모난 차돌로 끝 쪽의 양쪽처리로 찌르개가 제작되었다. 길 이 10.1cm, 무게 422g이다. (3) 긁개(3-00-2): 차돌 자갈돌제로 격지에 두 날을 제작하였는데, 하나는 등쪽 을 가파르게 잔손질하였고, 다른 하나는 밑 잔손질로 볼록날을 제작하였다. 격지 겉면의 자연면을 그대로 둔세모골형이다. 길이 12.2cm, 무게 498g이다. 대화 5-00-5 격지
(4) 긁개(3-00-4): 차돌 모난 돌의 두 날을 잔손질하여 제작하였는데, 등쪽 가파 른 날을 S날로 처리되었다. 길이 10.0cm, 무게 585g이다. (5) 밀개(3-00-6): 차돌맥을 이용하여 등잔손질로 콧등밀개 형식의 밀개날이 제
대화 5-00-4 흠날
대화 3-00-4 긁개
작되었다. 손잡이 부분도 처리되었다. 길이 5.9cm, 무게 141g이다. (6) 찍개(3-00-12): 모난 차돌의 끝 쪽에 외날떼기로 처리되었다. 크게 두 번 홈 날 떼기로 처리 되었다. 길이 14cm, 무계 1500g, 대형 석기이다(<도면 37∙ 38>).11)
│ 일산 2지역 고고학 조사(가와지유적) │ 일산 가와지유적의 위치는 경기도 고양군 송포면 대화4리(현재 경기도 일산서구 ㅅㅁ-00-1 긁개
대화동, 북위 37도 40분 30초, 동경 126도 45분)에 있다(<도면 39>). 유적의 면적은 크게 3개 지역으로 나누어 1991년 5월부터 7월까지, 1991년 8월부터 9월까지 2차 에 걸쳐 102일간 발굴조사 되었다. 전체 면적은 1,440㎡이며, 1지구 646㎡, 2지구 570㎡, 3지구 84㎡, 3-1지구 140㎡이다. 가와지 3지구와 3-1지구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은 Ⅲ층과 Ⅱ층에서 확인되었다. Ⅲ층은 전 지역이 발굴되었으며, Ⅱ층은 두 지역이 시굴과정에서 노출되었다. 층위 중간의 흙쐐기(Soil-wedge) 현상에 의해서 시기를 15,000~18,000년으로 추정하 고 있다. Ⅱ층은 퇴적 구조상 이보다 앞선 것으로 보고 있다. 출토된 석기의 빈약성
162 대화 5-00-1 찌르개 성 격 과 문 화 기 반
대화 3-00-12 긁개
에 의해서 유물의 시기 결정은 어렵다고 보았다(<도면 40>). 층위는 1문화층과 2문화층으로 분류되었다. 1문화층은 제Ⅱ지층인 자갈 섞인 붉
<도면 38> 1지역 언저리 지표조사 석기
11) 손보기∙신숙정∙장호수,〈일산 1지역 고고학 조사〉 《자연과 옛사람의 삶》 , 한국선사문화연구 소∙경기도, 1992, 213~234쪽.
163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165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164 성 격 과 문 화 기 반
<도면 39> 일산 2지역(가와지) 유적자리
<도면 40> 고양군 대화리 발굴지일대의 제4기층들의 층위관계 (잔골짝에는 제4기 퇴적층, 구릉사면에는 무너내린 흙이 발달하여 있다)
은 노란 모래층(5YR 6/8)으로, 몸돌과 3-1지구의 강자갈 격지 등이 출토되었다. 석
167
재는 석영이다. 2문화층은 제Ⅲ지층인 황갈색 찰흙층(10YR 5/6)으로 3지구와 3-1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지구에서 유물이 출토되었다. 석기는 후기구석기시대의 늦은 시기로 보았다. 가와 지 구석기시대유적에서 출토된 석기는 반암 2점 등이며, 전체 508점이 석영제이다. 가와지유적은 전체 224m가 발굴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508점이다. 두 지역에서 출 토된 유물은 니암제 2점을 제외하고 506점이 석영제이다. 3지구와 3-1지구는 긁개 와 밀개가 다수이며, 찌르개∙자르개는 그 다음이다. 3지구 후기구석기시대 석기는(<도면 41~45>) 찍개∙밀개∙뚜르개∙망치∙찌르 0
0
4cm
3cm
개∙홈날 등이다. 중기구석기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석기로는 찌르개와 홈날 등이다 (<도면 46>). 3-1지구의 후기구석기시대 석기는(<도면 47~52>) 주먹도끼∙망치∙
<도면 41> 찍개
<도면 42> 우뚝잡이 밀개
덜된연모∙새기개∙긁개∙찌르개∙밀개∙몸돌 등이다. 중기구석기시대의 것으로 는 몸돌(<도면 53∙54>), 격지(<도면 55>) 등이다. 문화 성격은 지층과 출토 유물의 성격에 의해서 Ⅲ지층은 10,000~18,000년, Ⅲ 지층의 1문화층은 중기구석기시대로 보고 있다. 성격분류는 Ⅲ지층 제4기 동안 추 운 상태의 흙쐐기통 바로 위층에서 출토되었다. 밀개∙긁개가 수량을 많이 차지하 고 있고, 격지 석기는 50~60%를 차지하고 있다. 찌르개를 눌러떼기 한 수법과 몸 돌의 존재 확인 등을 제시하고 있다.12)
│ 일산 3지역 고고학 조사(주엽리 새말) │ 단국대학교 중앙박물관 조사단은 일산 3지역의 지표조사와 시굴∙발굴 등을 실
0
3cm
<도면 43> 뚜르개
0
2cm
<도면 44> 찌르개
시하였다. 발굴은 1991년 5월 8일부터 7월 17일까지 실시되었다. 제1지구(<도면 56>)의 시굴지역은 답 680-1과 답 682-2 등이다. 위치는 새말에서 200m 지점으 로 약 3m를 굴착하였다. 지표에서 약 50cm 정도 지점에서 회색빛 뻘질찰흙층의 토 탄층이 확인되었다. 토탄층 퇴적지역을 제1지구라고 부르고 있다. 166 성 격 과 문 화 기 반
층위는 주엽 옛 토양과 송포 옛 토양으로 분류되었다. 주엽 옛 토양층 아래 부분 에서 석영질 조각이 굵은 모래와 함께 출토되었다. 굵은 모래와 석영질 조각이 나오
0
12) 이융조 등,〈일산 2지역 고고학 조사〉 《자연과 옛사람의 삶》 , 한국선사문화연구소∙경기도, 1992, 235~258쪽.
2cm
<도면 45> 홈날
0
5cm
<도면 46> 홈날
169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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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cm
<도면 52> 찌르개
<도면 51> 밀개
0
4cm
5cm
<도면 47> 주먹도끼
0
4cm
<도면 53> 몸돌 0
4cm
<도면 48> 덜된 연모
0
<도면 50> 긁개
168 성 격 과 문 화 기 반
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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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cm
<도면 49> 새기개
0
3cm
<도면 54> 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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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cm
<도면 55> 격지
171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170 0
성 격 과 문 화 기 반
<도면 56> 일산 3지역(주엽리 새말) 유적의 1지구와 2지구
<도면 57> 1지구에서 발굴한 구석기시대 석기
10cm
173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172 성 격 과 문 화 기 반
0
<도판 58> 백석3리에서 찾은 주먹도끼
10cm
0
<도판 59> 대화4리 장성마을에서 찾은 주먹도끼
10cm
는 자리에서 구석기시대 격지와 자갈돌 석기 등이 발견되었다. 제1지구에서 발굴된 석기는 모두 4점으로 찍개 2점, 긁개 1점, 격지 1점이다(<도
성동일대를 지나 북동~남서로 분포되었다고 한다. 특히 이 조사에서 제4기 (Quaternary)의 고토양(Paleosols)이 확인되었다(<도면 61>).
면 57>). (1) 찍개(262×156×138cm, 무게 6,130g): 석재는 개차돌(규암, quartzite)이며,
(a) 삼성동 유적탄천~한강 합류부에 위치)
찍개 윗 면을 두 번 크게 떼었다. 각은 70。 이며 전체 둘레 길이 738mm, 날 길 이 213mm의 비율은 0.29이다. (2) 마줏날 찍개(114×108×88mm, 1150g): 석재는 개차돌(규암)이며, 모루상타 격법으로 보고 있다. 아래 부분 바닥과 날 부분 각은 80。 ~85。 사이이고, 전체 둘레 길이 347mm, 날 길이 258mm의 비율은 0.74이다. (3) 긁개(80×46×28mm, 119g): 석재는 규암이며 격지로 제작하였다. 굽과 격 지 면각은 100。 , 잔손질로 세운 날의 각은 68。 , 날의 각은 85。 이다. (4) 격지(68×49×25mm, 96g): 규암제로 자연면이 남아 있지 않다. 잔손질한 흔적이 없다. 굽과 격지면 각 103。 , 맞은 점(타격점)과 혹(bulb)은 뚜렷하지 않다. 그 외에 주엽리 산 8번지, 주엽1리 윗말, 일산3리 밤가지, 일산11리 장구뫼, 일산 12리, 마두3리 설촌, 마두5리 모범마을, 백석3리, 대화4리 성저리, 대화4리 장성마
(b) 삼성동 유적(아파트 재건축 지점)
을 등에서 주먹도끼∙찍개∙긁개∙밀개 등이 채집되었다(<도면 58~59>). 일산 신도시 건설지역의 지표조사와 발굴에서 확인 채집된 석기의 석재는 석영 과 석영암(규암)이며, 석기 유형은 주먹도끼∙찍개∙다면석기 등이다. 석편석기로 는 긁개∙톱니날∙밀개 등이 확인되고, 시기는 전곡리유적의 것들과 닮은 것으로 보고 있다.13)
│ 삼성동유적 │ 삼성동유적의 위치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 50번지일대 37,739m(약 11,416평)에 대한 재건축사업부지의 시굴에서 확인되었다(<도면 60>). 이 일대는 선캄브리아시 174 성 격 과 문 화 기 반
기의 변성암류인 鎬�片磨岩이 동서남북으로 넓게 분포되었으며, 이 암석을 관입한 경기 변성암 복합체의 함석류석 화강편마암이 삼각산 서쪽 방향의 은평구일대에 드 <도면 60> 삼성동유적의 위치(a, b)
물게 분포되었다. 또한 이들과 부정합 관계의 춘천 누층군의 남양지역 편암류가 삼 13) 윤내현∙한창균∙신숙정,〈일산 3지역 고고학조사〉 《자연과 옛사람의 삶》 , 한국선사문화연구 소∙경기도, 1992, 313~357쪽.
175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고토양층 내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구덩이가 약 90cm 정도 남아 있었으며, 이 구덩이의 지표면은 東高西底로서 후대의 재 퇴적으로 보고 있다. 그 증거로서 출토 된 석영맥암들이 평면으로 분포되었다 한다. 즉 첫 번째 구덩이의 북쪽에 석기가 분 포되었다(<도면 62>). 유물은 모두 21점이 출토되었는데, 이 가운데 구석기는 18점이다. 석재는 대부분 석영맥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1) 몸돌(석핵, core)(<도면 63-1>): 석영맥암제로 격지 제거 수는 5개이다. 크기 는 6.6×6.7×7.2cm, 무게 300g이다. (2) 긁개(scraper)(<도면 63-2>): 석영맥암편으로 석기의 배면에서 등면으로 제2 가공되었다. 날은 직선날이며, 크기 5.5×4.2×2.8cm, 무게 80g이다. (3) 긁개(<도면 63-3>): 석영맥암제로 왼쪽 윗부분에 배면에서 등면으로 2번 정 <도면 61> 제4기 고토양층 토층도(S : 1/40) (1) 마 구덩 북벽 (2) 사∙아 구덩 동벽
도 잔손질이 되었다. 오른쪽 윗부분에도 배면에서 등면으로 잔손질을 하였다. 크기 8.5×6.0×2.8cm, 무게 182g이다. (4) 긁개(<도면 64-1>): 석영맥암편으로 왼쪽 날에 배면에서 등면으로 3번에 걸 쳐 잔손질이 이루어졌고, 등면에서 배면으로 1번의 잔손질이 되었다. 날은 진 선날이다. 크기 8.9×5.7×4.4cm, 무게 190g이다. (5) 격지(flake)(<도면 64-2>): 석영맥암제로 배면은 결을 따라 쪼개진 상태이다. 등면에 2번의 떼어진 면을 가지고 있다. 크기 4.4×5.1×2.0㎝, 무게 44g이다. (6) 격지(<도면 64-3>): 석영편으로 굽이 두 번 떼여졌다. 석편 끝은 절단면이다. 크기 5.5×6.0×1.7㎝, 무게 54g이다. (7) 격지(<도면 64-4>): 석영맥암편으로 굽은 깨진 면이며, 등면에 깨진면과 켜면 이 남아 있다. 크기 3.7×5.6×2.2cm, 무게 43g이다. (8) 망치(hammer stone)(<도면 64-5>): 석영맥암제로 표면에 암맥의 결을 따라 떨어진 면이 보존되어 있으며, 석기의 끝 부분에 둥근 흔적과 함께 비교적 큰
176
격지가 떼어졌다. 밑의 좌우에도 떼기가 나타나 있다. 크기 10.1×6.1×
성 격 과 문 화 기 반
6.9cm, 무게 413g이다. (9) 조각(debris)(<도면 64-6>): 석영맥암편으로 깨진 면이 남아있다. 크기 5.6 ×4.6×3.2cm, 무게 104g이다. <도면 62> 삼성동유적 대표단면(사∙아 구덩 동벽)의 층위변화
(10) 조각(<도면 65-1>): 석영맥암편으로 깨진 면과 암맥의 결을 따라 떨어진 면
177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179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178 0
5cm
성 격 과 문 화 기 반
<도면 63> 출토 유물(①
~③
)
<도면 64> 출토 유물(①
~⑥
)
위의 석기는 몸돌(core) 1점, 긁개(scraper) 3점, 격지(석편 flake) 3점, 망치 1점, 조각(부스러기, debris or chips) 5점 등 13점이다.14) 다만 아쉬운 점은 석기의 분류 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도면 등을 읽어 보기가 대단히 힘들다. 이상에서 중기구석기시대의 유적에 대해 살펴보았듯이 한강유역 제4기 (Quaternary)의 층위는 일산 1지역 층위 확인과정에서 그 퇴적현상이 뚜렷하게 제 시되고 있다. 위에서 아래로 겉 흙층(지표)-회갈색 염토층(새말층)-검은토탄층-갈 색토탄층(가와지 토탄층)-청회색 뻘층-모래 자갈층(대화리층)-기반암의 순서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산의 ㄱ구덩이의 모래 자갈층(대화리층)에서는 석기가 출토되 었다. 자연환경에 관해서는 일산지역 토탄층에서 발견된 樹種으로 나무 종류와 기후관 계가 제시되고 있다. 일산지역 토탄층의 출토 수종 내에는 소나무와 침엽수가 없는 오리나무∙가래나무∙졸참나무∙다룹나무∙갈매나무류∙물푸레나무 등 온대 중부 에서 온대 북부에 분포된 약간 추운지방의 수종이 주종을 이룬 것이 확인되고, 기후 는 지금과 거의 같거나 약간 추웠을 것으로 보고 있다. 중기구석기시대에 속하는 여 주 연양리유적은 층위가 6층으로 구분되었으며, 유물은 4층에서 대부분 출토되었 다. 연대는 Ⅰ지점 Ⅱ ㄱ칸의 4층 상부퇴적물이 OSL 연대측정으로 63,000±4,000 B.C., 67,000±3,000 B.C.가 산출되었다. 유물은 Ⅰ지점과 Ⅱ지점의 정상부에 집중 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전체 석기의 70%를 차지하였다. 석기는 몸돌∙격지∙돌조 각∙망치돌∙모룻돌∙찍개∙주먹대패 등으로 자갈돌석기(pebble stone tools)와 격 0
5cm
지석기(flake tools)로 구성되었다. 석기의 구성으로 보아 연양리유적을 석기제작지 <도면 65> 출토 유물(①
~⑥
)
로 보고 있다. 평창리 중기구석기시대 유적의 층위는 6개 층위로 나누어져 있다. 제 2단계 28,000~13,000년, 제3단계 60,000~28,000년, (5)와 (6)은 각각 4단계
이 유지되었다. 크기 8.6×7.4×5.2cm, 무게 334g이다. (11) 조각<도면 65-2>: 석영맥암편으로 암맥의 결을 따라 떨어진 면과 깨진 면을 180 성 격 과 문 화 기 반
가지고 있다. 크기 7.6×6.5×5.4cm, 무게 32g이다. (12) 조각(<도면 65-3>): 석영편으로 원래의 돌감에서 깨진 편이다. 크기 6.0× 2.7×1.8cm, 무게 244g이다.
75,000~60,000년과 85,000~70,000년 등이 제시되고 있으며, 출토 석기는 찍개 (chopper), 자기꼴석기/두터운 긁개(rabot/thick scraper), 긁개(side-scraper), 홈 날석기(Notch), 뾰족끝석기(point), 뚜르개(awl), 새기개(burin), 등손잡이칼(backed knife), 사다리꼴석기(trapezoid), 톱니석기(denticulate) 등이 제시되었다. 중기구석기시대의 석재는 석영암과 규암 등이며, 석기 제작 기술 체계도 3가지가
(13) 조각(<도면 65-4>): 석영편, 파편조각, 크기 5.7×2.5×2.9cm, 무게 32g 이다.
14) 상명대학교박물관,《서울 삼성동 영동차관아파트 재건축예정부지 문화유적 발굴조사보고서》 , 2006, 1~86쪽.
181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제시되고 있다. 그것은 도구 제작의 다양성, 제작 시스템의 형성, 적절한 박편소재
인되었다. 층위의 중간에는 흙쐐기(Soil wedge)에 의해 시기를 15,000~18,000년
선택 등이다.
으로 추정하고 있는 Ⅱ층은 퇴적구조상 이보다 앞선 시기로 보고 있다.
평창리유적의 의미는 25,000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무문화층’중심의
층위는 1문화층, 2문화층으로 구분하고 있다. 1문화층 출토석기(제Ⅱ지층)는 몸
상하 유물군 구성에 변화가 있다고 보고 있다. 즉 중기와 후기구석기시대 변화상을
돌, 3-1지구의 강자갈과 격지 등이며, 석재는 석영이다. 2문화층(제Ⅲ지층), 제3지
제시하고 있다.
구와 3-1지구의 출토 석기는 후기구석기시대 늦은 시기로 보고 있다. 3-1지구의 후
한편 후기구석기시대 초의 호평동유적은 전체 4개 지역으로 구분되는데 유물은 1∙2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유적의 기반암은 화강암질 편마암으로 조성 된 흑운모 화강암이다. 제1지역은 7개층으로 구성되었다. 연대적으로 2문화층(B.P. 24,000+16,000년)과 1문화층(B.P. 30,000~27,000년) 등의 산출은 호평동유적을
중기구석기시대 것으로는 몸돌과 격지 등이 제시되고 있다. 다만 석기가 아닌 몸 돌(Core)과 격지(flake) 등을 중기구석기시대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일산 3지역 주엽리 새말유적에서는 제1지구에서 4점의 석기가 출토되었다. 석재
암과 화강암 등이다. 석기는 석영제 격지(flake)∙밀개(end-scraper)가 집중적이
는 모두 규암재, 서기는 찍개 2점, 긁개 1점, 격지 1점 등이다. 그리고 지표에서 채집
며, 응회암과 유문암등으로 돌날 및 긁개, 슴베찌르개, 밀개 등이 제작되었다.
된 석영과 규암제의 주먹도끼∙찍개∙마면석기∙긁개∙톱니날∙밀개 등은 전곡리
찌르개∙밀개∙망치돌과 모루 등이 제작되었다. 3a 2문화층 출토 석기는 5,851점 으로 석재는 흑요석(17.6%)∙응회암∙유문암∙홈펠스∙세일쳐트∙역암∙옥수∙벽 옥∙수정 등이며(19.5%), 석기는 몸돌∙좀돌날몸돌∙격지∙돌날∙좀돌날∙돌조각 등과 긁개∙홈날∙밀개∙새기개∙뚜르개 등이다. 호평동유적에서 수습된 흑요석제 석기는 1,229점으로 그중에서 출토 유물은 1,029점이며, 지표에서 채집된 것은 200점이다. 흑요석제 석기는 몸돌(0.40%)∙격
유적의 것들과 비교하고 있다. 용인 평창리유적에서는 B 구덩이에서 석영제 유경첨두기, 접합석기, 화강암재 망치돌과 D 시굴구에서는 석영제 긁개, 돌날, 톱니날새기와 찍개 등이 출토되었다. 삼성동유적 출토 유물은 21점 출토인데 이 중에서 석기는 18점이며, 석재는 대부 분 석영맥이다. 석기는 몸돌 1점, 긁개 3점, 격지 3점, 망치 1점, 조각(debris, chips) 5점 등 13점이다. 이 13점 중에서 석기는 몸돌 1점, 긁개 3점과 망치 1점으로 볼 수 있다.
지(60.5%)∙돌날(0.2%), 좀돌날(37%), 석기는 긁개∙밀개∙새기개∙뚜르개 등의
결론적으로 한강 본류 유역에서는 북한강과 남한강유역과 마찬가지로 중기구석
잔손질(1.7%)로 제시하고 있다. 위의 2문화층(3a)과 호평동에서 수습한 흑요석기
기시대(B.P. 85,000~35,000년)로부터 후기구석기시대(B.P. 35,000~10,000년)까
등은 B.C. 10,000년을 전후한 시기의 것들로 후기구석기시대 마지막보다 중석기시
지 중단 없이 생활한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3b(제1문화층)는 석영제의 격지(flake)석기 제작 및 밀개∙새기개∙뚜르개 등이 성 격 과 문 화 기 반
몸돌 등이다.
후기구석기시대 초로 볼 수 있다. 석기의 석재는 석영(98%)∙응회암∙유문암∙사
3b 1문화층 출토 석기는 몸돌∙돌날몸돌∙격지∙돌날 등으로 찍개∙홈날∙슴베
182
기구석기시대 석기는 주먹도끼∙망치∙덜된연모∙새기개∙긁개∙찌르개∙밀개∙
다. 문화층의 상한을 24,000년으로 측정하여 호평동유적은 가장 이른 시기의 좀돌 날 제작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한다. 다만 흑요석제 석기는 일반적으로 10,000 년 전후한 시기에 널리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제2문화층의 상한이 24,000년이라는 주장은 이해하기 어렵다. 일산 가와지 3지구와 3-1지구에서 출토된 구석기시대 유물은 Ⅲ과 Ⅱ층에서 확
(최 무 장)
183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신석기문화
목도∙영종도 등 주로 경기도와 가까운 서해도서지역을 다루고자 한다. 나아가 광 주∙용인 등의 경기 남부와 경기 북부인 임진강유역도 포함될 것이다. 한강유역의 지형∙지리적 개관은 이 책의 앞부분에서 서술되므로 여기서는‘신 석기문화’ 를 살펴보기 전에 당시 사람들이 적응해간 배경 즉 자연환경을 기후변화 와 해수면 변동, 동∙식물상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전신세(후빙기)의 자연환경 개념과 시기구분 유적과 유물 생업경제와 사회문화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 기후의 변화 │ 팔당유역으로부터 한강 하류까지는 낮은 언덕과 넓은 충적평야로 이루어져 우리 나라 서해안일대에서 흔히 관찰되는 대표적인 지형을 띈다. 낮은 언덕들은 기반암 인 편마암이 풍화에 약하여 풍화∙침식작용이 계속 반복되어 나타난 결과이다. 한 강 하류 주변의 낮은 비탈지들은 소규모의 지류들이 모여 한강으로 흘러들고 있으 며 한강유역에는 넓은 충적평야가 발달해 있다. 산골짜기들은 樹枝상의 수계를 보
1. 전신세(후빙기)의 자연환경
이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찰흙질의 가는 입자 구성물질로 퇴적되어 있어 후빙기 동 안에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침식골짜기를 채워주어 현재와 같은 넓은 들을 이룬 것
백제한성시대의 문화기반이 되는 한강유역 신석기시대의 문화발달상을 알아보
184 성 격 과 문 화 기 반
이다.16)
려면 먼저‘한강유역’ 의 지리적 개념부터 한정할 필요가 있다. 한강은 하류로부터
풍화된 기반암 안에는 후기에 뚫고 들어온 석영맥이나 염기성 암맥들이 발달하여
거슬러 올라가면 남한강∙북한강으로 나뉘게 되며 그 상류는 백제한성시대의 주
있으며 여기에서 유래된 석영암편들이 지표에 많이 흩어져 있는 특징이 있다.17) 이
무대인 서울∙경기지역과 공간상 상당히 떨어진 곳이 된다. 그러므로 남∙북한강
러한 광물들은 한강유역의 선사시대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널리 활용되었다. 구석기
유역 모두를 살펴보는 것은 이 글의 주제에 비추어 의미가 적다. 물론 최근에는 남
시대에는 뗀[打製]석기의 재료로써, 신석기시대에는 토기 바탕흙에 넣어서‘비짐’ 으
한강유역의 원주 법천리에서도 백제계의 석실무덤 등이 발굴되어15) 초기 백제의
로서 활용된 것이다. 하남시 미사동유적의 빗살무늬토기18) 또는 일산지역의 빗살무
영역이 일반적인 예상보다 훨씬 넓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이를 근거로 신석기시
늬토기19)에 들어있는 비짐은 팔당 주변의 풍화암석들로부터 분해된 광물들을 가져
대의 서술까지 확장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남한강유역의 신석기문화
다 쓴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및 주변지역의 신석기시대유적은 대개 이러한 잔골짜
는 아직 단편적인 자료들이 대부분으로서 전체적인 발달상을 파악하기에 무리가
기의 낮은 언덕이나 넓은 충적평야, 또는 미사동 같은 河中島 등 사냥∙채집∙어로
있고, 나타난 자료로 볼 때 문화의 정체성이 한강 본류~하류의 것과 다소 다를 것
등의 생업활동에 좋거나 농업생산력이 뛰어난 곳에 자리잡았음을 보여준다.
으로 여겨진다. 여기서는 남∙북한강이 합치는 두물머리 지점 즉 양평~양수리~팔당지역부터 서울로 들어와서 다시 고양∙파주∙일산∙김포 등의 한강 하류지역과, 강화도∙삼
15) 국립중앙박물관,《법천리》Ⅰ, 2000.
16) 이동영∙김주용,〈지질환경조사〉 《일산 새도시 개발지역 학술조사보고》1, 한국선사문화연구 소∙경기도, 1992, 41~108쪽. 17) 위와 같음. 18) 최몽룡∙이동영∙신숙정,〈미사리유적의 지질과 출토토기의 분석〉 《미사리》1, 미사리 선사유적 발굴조사단∙경기도 공영개발사업단, 1994. 19) 이동영∙김주용∙신숙정,〈토기의 광물분석〉 《일산 새도시 개발지역 학술조사보고》1, 1992, 433~4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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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절의 주제인 후빙기의 환경변화로 들어가 보자. 알려진대로 후빙기란 마지막
한반도 주변의 신석기시대 기후 온난화 지시 자료와 해면변동 자료25)
빙하가 물러간 뒤의 시기이며 지질학적으로는 전신세(Holocene)라 불린다. 문화적
<표 1>
으로는 신석기문화가 시작되는 시기이며 대략 B.C. 1만 년 전부터이다. 빙하가 물
유적 궁산유적
기후 온난화 지시자료
해면 변동자료
분석자료들에 의하면 지금부터 약 8,000년 전(8,000 B.P.)까지 지속적으로 상승하던
목도 수가리
기온은 약 8,000~6,000 B.P. 사이에 기온극상기(Atlantic Optimum)를 맞아 지금
범방
보다 연평균 2℃ 가량 기온이 높았던 것으로 나타났다.20) 8,000 B.P.에 연해주 해안
세죽리
물소 붉가시나무(Cyclobalanopsis) 메밀잣밤나무(Castanopsis: 토탄층 현재 욕지도의 천연기념물), 산초나무속 등의 아열대식물 산소동위채비 분석으로 서해안 수온 25.8~35.8(현재 24~25) 물소 해저퇴적물인 silt층 산호 마모조가비층 고기조간대의 해수 작용(대상집적 양양 용호리) 산호 해성니질층
하며,21)
동삼동
말전복, 복작노루
러갔으므로 따뜻해지는 시기이다. 당시의 기후가 얼마나 따뜻해졌는가를 추정하는 데에는 후빙기 퇴적물의 꽃가루분석이 기준이 되며 유기물의 탄소동위원소 비율,
김포 일산
유황함량 분석 등도 자주 쓰인다.
서산 대죽리
서구에서 꽃가루를 중심으로 한 분석과 중국∙일본 등 우리나라와 가까운 지역의
쪽에서는 활엽수가 발달하고 연평균 온도가 현재보다 4~6℃ 정도 높았다고
서포항유적과 가까운 보이즈만(Boysman)유적에서는 난대성 굴이 확인된다고 한 를 넘는 黑龍江유역까지 낙엽광엽수림이 분포하였다.23) 다.22) 이 무렵에는 북위 50。 우리나라는 동해 영랑호의 유황함량분석 등으로 볼 때 고온기가 있었음이 확실
농포동 투박조개 용반리 패총 도미뼈 러시아 연해주 난류 서식의 굴 Ephedra(마황속) 함평 옥산리 (아열대성)
유적 층위내 자갈층
유기질 니층/ 바다조류 존재
참고문헌 도유호, 황기덕, 1957. 한국선사문화연구소, 1992. 임효재 외, 2000. 서광수, 조경수, 2000. 국립진주박물관, 1999. 부산대박물관, 1981. 하인수, 2002. 강원문화재연구소, 2002. 동국대매장문화연구소, 2001. Sample, 1974. 임학종, 2002. 橫山將三郞, 1934. 鳥居�藏, 1917. Popov et al, 1995. 김주용 외, 2001.
하다. 다만 고온다습한 해양성의 기온이 아니라 상당히 건조한 기후였다는 것이 최 근의 추정이다.24) 고온기의 기후 변화는 고고학적으로 여러 유적에서 그 증거를 남
가 많은 것에는 기후변화도 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26)
기는데 이를 모으면 다음의 <표 1>과 같다(해수면 상승 현상 포함). 기온은 약 5,300 B.P. 무렵부터 하강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청동기
│ 해수면의 변동과 토탄층의 형성 │
시대(대략 B.C. 3,500년 이후)는 전체로 저온기였다고 볼 수 있다. 철기시대인
빙하기에 낮아진 해수면이 후빙기에 기후회복이 되면서 다시 높아졌다는 것은
2,300~2,200 B.P.에는‘소빙하기’ 로 부를 정도로 기온이 많이 내려가는 현상이 나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원래 해수면의 변화를 가져오는 원인은 다양하며 해일처럼
타났는데, 이시기 역사에서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의 이동에 관한 자료(이주민 등)
순간적으로 해면을 높이는 힘(dynamic force) 등도 있으나 남∙북극 주변의 대륙빙 하가 얼고 녹는 것이 해수면 변동의 가장 큰 원인이다. 우리나라에서 해면변동의 증거는 지형적∙고고학적으로 많이 찾아진다. 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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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장호수,〈제3편 신석기시대의 전개와 발전 : 자연환경〉 《경기도사》제1권 선사시대, 경기도사편 찬위원회, 2002. 21) Vasilievsky, R.S., Late Pleistocene-Early Holocene sites in the Northeastern Asia《한 국상고사학보》18, 1995, 329~368쪽. 연평균 온도가 4~6도 정도 높다는 주장은 자료가 더 쌓인 다음 제시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22) Popov, A.N., N.B. Verkhovskaya & A.S. Kundyshe, The Boysman 2 site : the Neolithic Cultures and Palaeoenvironment《한국상고사학보》19, 1995, 469~490쪽. 23) 장호수, 앞의 논문, 2002, 96쪽. 24) 최기룡,〈한반도 후빙기의 식생 및 기후변천사〉 《한국 신석기시대의 환경과 생업》 , 동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2002, 1~12쪽.
해안의 여러 곳에서 현재의 高潮位보다 2~3m 높은 곳에 있는 옛 모래톱, 중부 동 해안에 연속되는 3~7m 높이의 해안단구, 한강 하류의 하안단구 등이 지형적 증거 이다. 고고학적으로 찾아진 증거는 <표 1>에 일부 실려있다.
25) 신숙정,〈호남지방 신석기문화의 연구 : 성과와 전망〉 《호남고고학보》20, 2004, 15쪽. 26) 장호수, 앞의 논문, 2002, 103쪽.
187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188 성 격 과 문 화 기 반
신석기시대 고온기에 인천 앞바다의 높이가 올라갔으며 바닷물은 현재보다 더
이것은 중국 동북지방의 토탄층 형성시기와 잘 대비된다. �東지역에서는 해수
육지쪽으로 밀려 들어왔을 것이다. 이를 해진(transgression)이라고 한다. 바닷물
면 상승의 결과로 나타나는 黑土層의 존재가 많이 보고되었는데, 6,000~5,000
이 드나드는 조간대의 위치도 현재보다 더 육지쪽으로 들어오고, 조간대에 사는 수
B.P.에 최고에 달했으며 현재의 해안선으로부터 약 10km 정도 바닷물이 육지쪽으
생식물이나 조개류, 동물들의 위치도 당연히 바뀌었을 것이다. 결국 해수면이 높아
로 들어왔다고 추정되었다.31) 요동지방의 해진기와 서해안 일산지방의 해진기가 같
지면 그곳의 자연환경 전체가 바뀌게 된다. 이 현상 때문에 해수면 변동이 모든 자
은 점이 중요하다.
연환경 변화의 원인이자 결과라고 하는 것이다. 물고기와 조개잡이를 하던 신석기
일산지역보다 먼저 해침되어 토탄화가 된 곳은 서해안고속도로 건설구간(안산~
시대 사람들의 생활도 육지쪽으로 많이 들어오면서 변화를 겪게 되었을 것임은 자
안중) 발굴에서 드러난 평택시 포승면 내기리와 희곡리일대이다.32) 내기리의 경우
명하다.
해발 0~1m 사이에 발달하여 있는 토탄층의 연대가 6,440±245 B.P.로 측정되었
신석기시대 후반에 전세계적인 기온 하강기가 오게 되자, 바닷물 높이는 다시 내
다. 즉 토탄층의 형성이 현재의 해수면 근처로서 그때까지 나타난 서해안일대의 토
려가게 되었고, 조간대에 살던 동∙식물들과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활동도 현재
탄층 가운데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며, 일산보다 더 일찍 형성된 토탄층으로서 기저
의 바다쪽으로 더 나가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를 해퇴(regression)라고 한다. 이
토탄층(basal peat layer)으로 이름지워진 바 있다. 희곡리의 경우 하위의 유기질
때 토탄층이 형성되는데, 높았던 바닷물이 빠져나갈 때 지형상의 요인으로 물이 갇
찰흙층(해발 4m)은 5,750±90 B.P.로서 내기리보다 약간 늦은 시기를 지시한다.
혀있는 지역에서 생겨난다. 서해안의 저지대는 모두 전신세(Holocene)의 신석기시
일산지역과 한강을 마주하고 보고 있는 김포시 가현리 토탄층의 연대를 보면33)
대 이후 퇴적된 충적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부분 토탄층의 형성과 관련있다. 예
하위 토탄층(해발 -1m)에서 6,410±120 B.P., 상위 토탄층은(해발 0~-1m) 5,710
를 들면 서해~한강 하류 가까이의 김포∙일산∙시흥∙부천∙부평∙평택 등 저평
±120 B.P.이다. 가현리 하위 토탄층은 내기리와 더불어 기저토탄층과, 가현리 상
한 평야가 자리잡은 지역들은 모두 토탄층이 집중 분포되어 있는 곳이다. 이 가운데
위 토탄층은 희곡리 토탄층과 대비된다. 가현리 분석자는 이것을 繩文海進에 따르
일산27)∙평택28) 등지의 토탄층은 발굴되어 많은 유물들이 출토된 바 있다.
는 현상이며 토탄층의 형성 이후 해수면 하강이 온다고 보아서 한국측 토탄 분석자
이 가운데 본격적인 발굴로는 처음인 일산의 토탄층을 보자. 이것은 기온 극상기
들의 해면변동 관점과 일치한다. 김포 가현리와 일산지역을 놓고 볼 때 한강을 사이
에 해수면이 높아져서 바닷물이 현재의 일산지역까지 들어왔다가 기온 하강기에 바
에 두고 해수면 상승과 토탄층의 형성, 그 이후 범람원층의 형성 등이 평행되어 나
닷물이 빠져나가면서 지형고도 6~8m 높이에 고여있던 습지지역이 매몰되고 탄화
갔음을 알 수 있어 매우 흥미롭다.
되면서 형성된 것이다. 이곳에서 나타나는 해수면 상승의 정도는 지질 및 퇴적분석
최근에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일원의 강매~원흥간 도로 개설공사 구간에서는
과 현재 일산 부근의 潮差를 고려할 때 3~4m 정도로 추정되었다.29) 토탄층의 형성
일산의 대화리층에 해당하는 유기니질층의 하부에서 9,080±40 B.P.부터 해침되
시기는 5,500~5,000 B.P.(보정연대)이며, 이보다 아래인 대화리층의 퇴적연대는
는 탄소자료(해발고도 -1m) 결과가 나왔다. 이 연대가 현재로는 한강 하류일대 해
6,000~5,000 B.P.로 나타난다. 이와 병행한 규조류 분석에서 이곳 골짜기의 최대
침현상의 상한이 된다.34)
해진기가 6,000~5,100 B.P.로 나타나서 같은 결과를 보여준다.30) 27) 한국선사문화연구소,《자연과 옛사람의 삶》 , 1992. 28) 충북대학교 선사문화연구소,《평택 현화리 유적》 , 평택시 공영개발사업소, 1996. 아주대학교박물관,〈평택 원정리 유적 발굴조사개보〉 《과기고고연구》2, 1997. 29) 이동영∙김주용, 앞의 논문, 1992. 30) 황상일,〈규조분석〉 《자연과 옛사람의 삶》 , 1992, 155~175쪽.
31) 楊文才∙朴景星,〈�東半島東南岸 全新世 海進的 認識〉 《地質科學》2, 1985, 199쪽. 32) 이동영∙김주용∙양동윤,〈서해안 고속도로 건설구간(안산~안중간)의 제 4기 지질 및 자연지형 조사〉 《서해안 고속도로 건설구간(안산~안중간) 유적발굴조사 보고서》(1), 1995, 18~94쪽. 33) 임효재∙�木三男,〈金浦泥炭層遺蹟とその 當時の古環境硏究〉 《한국선사고고학보》7, 7~39쪽. 34) 연세대 원주박물관,《한국 국제전시장전용 진∙출입도로 개설공사구간, 강매 원흥간 도로 개설 공사구간 시굴조사보고서》 , 2006, 240~267쪽.
189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지금까지 찾아진 해면변동 및 이와 긴밀히 관련되는 토탄층~유기질 퇴적층의 자
평택 등의 토탄층에서 나온 규조류(diatom)나 윤조류 등이 분석된 바 있다. 토탄층
191
료들을 연대순으로 차례지으면 강매~원흥간의 유기니질층→평택 내기리층, 김포
은 그 자체가 환경변화로 생겨났음을 보여주지만 유기물들이 썩지 않고 잘 보존되
가현리 하위토탄층→일산 대화리층→평택 희곡리층, 김포 가현리 상위 토탄층→일
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 나온 미세화석들의 분석을 통해 당시의 자연환경과 동∙식
산 토탄층의 순서가 된다. 이 자료들은 해수면 변화와 연동되는 한강 하류의 토탄층
물상을 잘 알 수 있다.36)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유기질 퇴적층의 연대로서 매우 중요한 기초자료가 될 것이며35) 앞으로 이들 사이 에 들어가는 많은 토탄층의 존재와 해발고도 자료가 찾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일산의 가와지 토탄에서는 꽃가루37)∙규조류38) 등 미세화석들과 나무화석39)∙ 곤충류40) 등 큰 화석(macro fossil)을 찾아내어 환경복원을 시도하였다. 흔히 플랑 크톤이라고 불리는 규조 분석에 의하면 바닷물에 사는 규조(염수성)가 90% 이상 검
│ 식물상과 동물상 │
출되어 이 토탄층이 바닷물에 의해 형성되었음도 증거하였다.
기후변화에 따라 해수면 변동이 일어나고 삼림한계에 변동이 오면 필연적으로 동∙식물상의 변화가 오게 된다. 이들을 알아내는 데에는 동∙식물화석이 요긴하 다. 동물화석은 짐승사냥 결과로서 남아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나 토양 속의 곤충류 도 환경지시 자료가 된다. 식물화석은 나무줄기∙잎∙씨앗∙열매 등과 탄화된 씨앗 류, 토기에 찍힌 낟알자국, 토기 밑바닥에 찍힌 활엽수 흔적, 목탄으로 알아내는 樹 種 등 다양하다. 이들 모두 육안으로 보므로 대형화석(macro fossil)이라고 한다. 지 금까지 찾아진 동물화석 분석에 의하면 한반도 전역에서 나타난 신석기시대 동물상 은 현재와 대략 같으므로 한강유역에서 특별히 달랐다고 하기 어렵다. 대형 동물화
6
8
10
12
일산 가와지 4지구에서 출토된 외양성 규조류41)
석은 적응력이 뛰어나고 이동성을 가졌으므로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 따라서 현미경으로 보는 미세화석(micro fossil)이 고환경 복원을 하는데 훨씬 중
일산지역의 꽃가루 분석에서 약 6,000~2,500 B.P.까지 토탄층 주변에서는 전통
요하다. 과거 기후 복원에 기준을 제시한 꽃가루가 가장 대표적이다. 그밖에 일산∙
적인 참나무~소나무의 우세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 이때 오리나무(Alnus)가 가장 우세하며 물푸레나무도 상당량 나오고 있는데, 이들은 유적 주변이 습지였음을 나 타내는 것이다. 이들을 제외하면 참나무가 우세하며,42) 6,000 B.P.부터 소나무 꽃
190 성 격 과 문 화 기 반
35) 일산의 장항동 국제전시장지역에서 찾아진 범람원성 퇴적(갈색 사질층)의 연대는 아래로부터 470±60, 480±60, 490±60 A.D.로 나타나 이 또한 흥미롭다. 오차의 범위를 고려하면 모두 같은 시기를 지시하는 것이며 분석자의 역년 계산으로는 430 A.D. 경이라고 한다.《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이 무렵 홍수관련 기사가 매우 많은데 연대측정 결 과로 보자면 당시에 한강의 범람 2.00M 이 잦았으며, 현재 대부분 논으로 AD490±60 경작되는 한강하류의 자유로지역 AD480±60 은 그 무렵 이후로 퇴적되어 나갔 AD470±60 다고 볼 수 있겠다(<사진 1>). 장항동 국제전시장 6-다 구덩 북 벽단면의 탄소연대 (연세대학교 원 주박물관, 위의 책, 2006, 181쪽)
가루가 일정한 비율로 나타나며 약 4,000년 전부터 늘어나고 있다. 대개 소나무는 원래 식생을 베어버리거나(농사짓기 위해서나 또는 어떤 이유로) 산불이 난 곳 등에
36) 토탄층에서 고고학적 유물도 많이 찾아진다. 37) 최기룡,〈꽃가루분석〉 《자연과 옛사람의 삶》 , 1992, 145~154쪽. 38) 황상일,〈규조분석〉 《자연과 옛사람의 삶》 , 1992, 155~175쪽. 39) 박상진,〈나무화석〉 《자연과 옛사람의 삶》 , 1992, 115~143쪽. 40) 김진일,〈곤충분석〉 《자연과 옛사람의 삶》 , 1992, 177~184쪽. 41) 황상일, 앞의 논문, 1992, 169쪽. 42) 최기룡, 앞의 논문, 1992.
2차림으로 잘 자라는 것이므로 약 4,000년 전부터 소나무가 우세한 것은 농사짓기
한편 곤충류의 분석에서는 주로 딱정벌레목의 종류들이 많이 나온다. 딱정벌레
또는 건조기후 탓이라고 볼 수 있다. 일산의 토탄층 및 대화리층에서는(5,000~
는 일반적으로 농경과 관계가 깊다고 말해진다. 곤충들의 서식환경을 추정할 때
4,000 B.P.) 볍씨가 출토되며, 벼과 또는 대형의‘벼속(Oryza)’속 꽃가루가 나온
4,300~5,000 B.P. 무렵에 일산의 저지대는 퇴적물이 축적되며 야산은 마모되어
다. 그리고 토탄층에서는 사과속∙개살구∙가래속∙감나무류 등의 나무화석이 출
농경에 적합한 평지로 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한다.45)
토된다.43) 여기에 대해서는 아래 생업의 복원에서 언급할 것이다.
퇴적상과 동식물상을 종합하여 일산지역의 환경을 복원하면 <표 2>와 같다. 대략 이러한 환경 아래에서 신석기사람들이 살아간 것이다.
일산지역의 홀로세 퇴적층 형성과정 변화44) <표 2>
해발고도 (M) 7.0
퇴적상
황갈색 실트
SⅠ
암회갈색 실트
MⅢ
GⅡ
부식된 토탄
FⅡ
GⅠ
흑갈색 섬유질 토탄
DⅠ
4.0 BⅡ
DZ 규조분대 Gr Gramineae
SA60
SⅡ
b2
성 격 과 문 화 기 반
FⅢ
경작토
DⅡ
192
구조환경 (%)
표층
6.0
5.0
DZ
b1
유기질 실트질점토
ZA80 SA98
DZ로 본 MSS
↑ ↑
SA98
MⅡb ZA70~100
형성 연대
상
하 강
b
NAP 우점
a
Spore 우점
Ⅱ
하
↓
강
Ainus b Quercus
↓
a4
승
1800
Gr, Ch, Ar, P1, Qu
Ⅲ
승
↓
실트질 점 토
a
유기질 실트층
BⅠ
하 부 실트층
PZ 화분분대 Ch Chenopdiaceae
MⅠ
ZA38 SA55 ZA50~54 SA44~48
-
정 체
Ⅰ a3
Ainus Quercus Fraxinus
a2 a1
신석기시대는 1836년에 만들어진 톰슨(C. Thomsen)의 삼시기 체제(석기시대~ 청동기시대~철기시대)에는 들어있지 않는 개념이다.46) 석기 중에서도 뗀석기와 구
2300 하
↓ -
강 정 체
별하여‘간[磨製]석기’ 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석기(Neo-lith)시대 개념은 루벅(J.
3200
Lubbock)에 의해 1865년 제창되었다.47) 1880년 무렵 다시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
4200
대 사이에 중석기시대(Meso-lith)가48) 설정되었다. 신석기시대 개념은 위의‘간석기’ 와 함께 그때부터 만들어진 토기를 중심으로 확
5000
립되었다. 즉 토기와 간석기라는‘도구’ 를 쓰던 시기가 신석기시대라는 것이다. 그
6500
러나 이런 도구들을 경제행위와 결부시켜 농사짓기에로 관심을 돌린 사람이 바로 차
7000
일드(G. Childe)49)이다. 일반적으로 신석기시대부터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농경의
회색실트 FⅠ
2. 개념과 시기구분 │ 신석기시대의 개념 │
강
상
MⅡd
PZ로 본 MSS
하
↓ ↓
MⅡd MⅡc
식생 환경
PZ
기원’ 에 대한 연구는 바로‘신석기시대에 대한 연구’ 와 같은 뜻을 의미하게 되었다. 차일드는 널리 알려진‘건조설(또는 오아시스설)’ 을 주장하였는데, 그 골자는 신 석기(지질학상으로 후빙기) 시작 무렵에 기후가 건조해지고, 동∙식물들이 오아시 스 근처에 몰려들어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서(juxtaposition) 사람들이 이들을 길들
MSS 해수면승강(↑↓-) SA 담수규조 Ar Artemisia P1 Pinus
43) 박상진, 앞의 논문, 1992. 44) 윤순옥∙연세대학교 원주박물관, 앞의 책, 1997, 58쪽에서 재인용.
ZA 염수규조 Qu Quercus
45) 김진일, 앞의 논문, 1992. 46) Glyn Daniel, A Short History of Archaeology, Thames & Hudson Ltd, 1981, pp.58~60. 47) ibid., p.62. 48) ibid., pp.102~103. 49) 이하 Childe부터 Rindos까지 신숙정,〈농경의 기원〉 《한국고고학 사전》상, 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222~225쪽에서 요약함.
193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일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동물사육과 식물재배를 신석기시대와 동의어로 받
주변지구(Marginal Area) 가설-핵지대가 아니라-또는 인구압(demographic
195
아들인 것이다. 농사짓기는 그로 인해 생겨난 잉여생산이 축적되는 과정에서 집단
stress) 가설이라고 한다. 빈포드는 문화변동의 중요한 촉진제로서 순환적인 인구
성원들 사이의 역할이 분화되어 사회내적∙외적 지위의 차이를 가져왔으며, 여러
압을 꼽았는데 이로서 선사시대의 사회도 항상 격변하고 있는 동적인(dynamic) 사
갈등을 유발시켜서 마침내는 계급사회로 들어가게 한 혁명적인 사건이라고도 생각
회라는 像을 제시해 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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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구미의 신석기 연구는 이 이후 온통 농사짓기의‘기원’ 과‘어떻게 그리고 왜
께 한동안 가장 유력한 가설로 각광받았다. 그러나 고고학∙생물학적으로 농경이
(how and why)’농사를 지었는지를 추구하는데 진력하였다. 연구사적으로 대표되
발생하는 곳은 다양한 야생종(wild variety)이 있는 가운데 재배종의 선조가 되는
는 학자 가운데‘비옥한 초생달지대(the Fertile Crescent)’ 가 있는 쟈그로스 산맥
야생종이 있는 곳임이 많은 야외실험과 함께 밝혀지게 되었고, 사회적∙이념적인
기슭의 쟈르모(Jarmo)와 제리코(Jericho)유적 등을 발굴한 브레이우드(R.
요인들이 농경의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도 대두하게 되면서‘인구’ 에 대한 관심도
Braidwood)가 있다. 이러한 곳에서 야생종을 길들이고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방법
점차 수그러들게 되었다.
을 배우게 되면 이들과 사람들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유지되며, 드디어는 야생종을
린도스(D. Rindos)는50) 식물학자답게 자연선택설에 입각하여 농경은 사람
시험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하여 원시 농경(incipient agriculture)이 이루어진다. 초
과 식물이 상호진화(coevolution)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생한 뒤의 연속적인
기의 농경공동체들은 정착을 하여 취락을 형성하고, 토기제작을 하고, 정교한 건축
단계(continuum)였다고 보았다. 그는 이 단계를 우연적 작물화(incidental
술도 이루어진다. 마침내는 이러한 농경마을 유형의 여러 특징들이 복합되면서 세
domestication), 전문적 작물화(specialized domestication) 그리고 농경적 작물화
계 각처로 퍼져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핵지구(Nuclear zone)’가설이다.
(agricultural domestication)로 나누었다. 그 뒤 프라이스(Price)와 게바우어
농경의 기원 연구에 전혀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 사람은 빈포드(L. Binford)이다. 그는 농경의 시작을 후빙기의 적응(post-Pleistocene adaptation)이라는 관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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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포드의 논의는 매우 신선하였고 그가 제창한 신고고학(또는 과정고고학)과 함
(Gebauer)는51) 위의 단계를 달리 정리하였는데, 작물화(또는 馴化 domestication), 재배(cultivation), 농경(agriculture)이 그것이다.
보았다. 그는 구석기 연구로부터 출발한 학자답게 농경이라는 현상을 따로 떼어 보
작물화란 야생종의‘동∙식물’ 이 처음에 사람에게 먹히고 대신 종자가 퍼뜨려지
지않고 구석기~중석기시대의 연속선상에서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수렵채집
는 상호관계(interrelationship) 속에서 점차 사람에게 길들여져 가는 동안‘유전
집단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이들이 일반의 예상만큼 그렇게 빈곤하지 않았다고 하
자∙형질상의 변화’ 가 일어나게 되는 과정을 말한다.‘재배’ 란 이들을 기르는 동안
였다. 이는 당시에 널리 알려지게 된, 농사가 사냥 채집보다 유리하기만 하지 않다
에 필요한 모든 활동-즉 밭을 개간하고 씨를 뿌리고 추수하고 갈무리하거나 집짐승
는 논의와 일맥상통한다.
을 기르는-과,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기술과 생계의 변화 등을 포함하는 문화적인
빈포드 논의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갱신세 말기, 즉 후기구석기로 오면서 사람
단계이다.‘농경(agriculture)’ 이라고 불리는 단계는 거듭된 재배과정을 통해 사회
들은 점차 작은 동물∙수산자원∙무척추동물∙식물채집 등의 전문화 등으로 식량
전체가 그런 시스템으로 변환된 결과물을 총칭하는 광의의 개념이다. 여러 나라의
자원을 광역화해가고(이른바 broad spectrum economy) 이러한 가운데 각 집단은
학자들이 주목하는 농사짓기의 공통 현상은 재배∙사육에 관한 지식 및 기술의 발
정착하여 차츰 인구를 증가시켜 나갔다. 인구가 증가하면 갈등과 스트레스가 생기
명과 보급, 삼림개간의 철저화(intensification), 토지 이용의 변화, 생산도구의 변
며 특히 그 주변부에서는 늘 순환적인 인구압이 발생한다. 이는 결국 식량위기라는 긴장을 가져온다. 이를 극복하려면 인공적으로 좀 더 효율적인 식량생산 수단을 강 구해야 하고,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농경이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을
50) Rindos, David, The Origins of Agriculture, Academic Press, 1984, pp.85~165. 51) Price, Douglas & A.B.Gebauer, Last Hunters First Farmers, School of American Research Press, 1995, pp.9~18.
화, 담을 것(container)으로서 토기의 광범위한 이용, 조리도구의 변화, 낟알 저장
출현이 가장 빨랐던 일본에서 시작된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1960년
197
기간의 장기화, 노동력 편성의 변화, 취락의 거대화, 사회구성과 조직의 변화, 계층
대부터 후꾸이[福井]∙센부꾸지[泉福寺]유적 등을 시작으로 갱신세(Pleistocene)까
분화의 촉진 등이 지적된다.52)
지 소급되는 토기들이 찾아졌으나 최근까지 일말의 회의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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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오면서 농경으로의 전환이 사회적인 요인이었다고 보려는 일련의 주장이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에 걸쳐 러시아의 시베리아∙아무르유역∙연해주지역
제기되었다.53) 이는 사냥 채집인들이 잉여생산물을 창출하려는 사회적 욕구에서 농
에서도 후기 갱신세~초기 전신세 지층에서 토기가 나오게 되었는데, 아무르 하류의
경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사냥채집집단 내에서도 노동의 분화,
가샤(Gasya)∙후미(Khummi)∙우스티노프카(Ustinovka)유적, 아무르 중류의 노
부의 축적, 높은 인구밀도 등으로 불평등구조가 생겨났음을 인식하게 되었고, 따라
보페트로프카(Novopetrovka)∙그로마뚜하(Gromatucha)유적 등이 유명하다. 러
서 사냥채집집단은 농경을 통한 잉여의 창출-부의 축적-불평등 구조의 심화라는
시아 측에서는 이들로 보아 동아시아 대륙 광대한 지역에 걸쳐 토기는 일찍 출현하
고리 속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상정하였다. 이 견해는 바바라 벤더(Babara Bender)
였으며, 중국과 한국의 출현 예도 곧 나올 것으로 전망하였다.54) 1990년대 이후의
로부터 시작되었고, 멕시코지역의 고고학∙민족지 자료를 볼 때 사냥채집인들 간에
논의는 구석기∙신석기시대의 경계가 토기의 출현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55)
경쟁적으로 시행되던 축제가 작물화를 일으킨 요인이었다고 한 브라이언 헤이든 (Brian Hayden)의 주장도 나오게 되었다. 후기과정 고고학의 대표주자인 이안 호더(Ian Hodder)는 농경의 원인을 상징 적∙이념적인 측면에서 파악하고 있다. 호더는 작물화 과정을 생계경제 양식의 측
중국에서도 같은 견해가 제시되었다. 즉 토기의 첫 출현이 구석기와 신석기를 가 르는 지표이며, 종래 구석기~신석기 사이에 세석기를 쓰던‘중석기’ 를 설정하여 왔 으나 세석기란 B.P. 30,000~20,000년으로부터 B.P. 1,000년까지 초원 생활을 하던 인류의 보편적 공구이기 때문에 중석기시대의 확립은 의미 없는 것이란 주장이다.56)
면으로 만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인간이 자연(야생을 포함한)을 길들이고 제어하는 과
신석기시대의 시작이 갱신세로 넘어감에 따라 중석기시대에 대한 논의는 자연
정의 하나로 정의하였다. 따라서 농경은 문화와 자연의 관계에 대한 인간의 관념이
부정된 것이며, 결국 동북아시아에서 중석기시대란 의미 없고 토기의 출현이 신석
변화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로부터 농경을 단순히 경제적 사건이며 변
기의 지표라는 것을 합의한 셈이다. 토기가 없는 유적은 구석기의 범주에 넣어져야
혁이 아니라 인간의식체계까지 변화시킨 사건, 즉 신석기문화로의 전환이라고 볼
하며 토기가 나온 유적은 신석기와 관련지어야 한다고 하였으니 신석기시대에 대한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신석기문화란 사회구성원들의 이데올로기가 변화된 결과이
정의가 매우 단순해졌다. 그리고 구석기∙신석기시대는 나란히 순서대로 시작하고
며 그 물질적 표상으로 집자리와 무덤 양식의 변화, 토기와 간석기의 등장, 농경과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역에 따라 다를 수 있고, 같은 시간대에 구석기∙신석기문화
목축 등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농경으로의 전환은 새로운 상징체계의 물
가 공존할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질적 표상의 하나인 것이다.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한국의 신석기문화는 어떤 위상을 가질 것인가? 한국의
그러나 위와 같이 다소 구미의 시각이 강한 신석기시대의 개념에 대해, 1990년대
신석기도 토기의 출현이 먼저, 그리고 농경의 시작이 다소 늦다는 점에서는 동북아
부터 동북아시아지역을 중심으로 다른 주장이 대두하였다. 이는 신석기시대의 토기
시아 전체의 흐름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현재 제주도 고산리 유적에서 B.P.
52) Price & Gebauer, ibid., 1995, p.6. 嚴文明,〈中國農業和養畜業的起源〉 《史前考古學�集》 , 1998, 358~411쪽. 嚴文明,〈再論稻作農業的起源〉 , 위의 책, 1998, 395~397쪽. 黑澤浩,〈彌生∙古墳時代の農業〉 《考古學による日本歷史 2 : 産業》 , 雄山閣, 1996, 43~49쪽. 53) 이하 Babara Bender부터 Ian Hodder까지 이준정,〈수렵∙채집경제에서 농경으로의 전이과 정에 대한 이론적 고찰〉 《영남고고학》28, 2001, 13~17쪽에서 요약 인용함.
54) Derevianko & Petrin.“The Neolithic of the Southern Russian Far East : A Division into Periods” ,《東アジア∙極東の土器の基源》國際 synposium(東北福祉大學), 1995, 7-9. 55) Kuzmin, Yaroslav V.“Chronology and environment of the Palaeolithic and Neolithic cultures on the Southern Russian far East” ,《제4기학회지》16-2 : 39-56 (한국제4기학 회), 2002. 56) 賈蘭坡,〈�舊石器與新石器時代的劃分〉 《環境考古硏究》第1輯, 科學出版社, 1991, 3.
196 성 격 과 문 화 기 반
10,000년에 해당되는 고식 토기와 구석기 제작 수법이 남아있는 돌날 등이 출토되
대연대 등을 종합하면 B.C.
199
었으므로 차후 정밀한 연구가 남아있으나 그 방향은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농경의
3,500~3,000년 무렵을 중심으로
연구 못지않게 석기∙뼈도구 등의 생산도구 연구가 중요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강유역유적들이 서해안으로 확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산하여 조개더미가 형성되어 나갔
│ 신석기시대의 시기구분 │
다는 것이다. 이 시기를 중심으로
중서부지역의 신석기 편년은 북한지역의 발굴성과를 참조하여 집자리∙토기∙
중서부 1기는 지탑리식 토기, 2기
석기∙뼈도구 등의 출토 유물들을 모두 고려한 한영희의 勞作이 있다.57) 이 작업은
는 금탄리 1식∙구분계 다치횡주어
현재까지 중서부지방 신석기시대 편년의 기초를 이루는 것으로 연구사상 중요하다.
골∙동일계 단∙다치횡주어골문이
이 무렵까지 한국고고학에 있어 유물의 형식학적 분류를 통한 편년이란 거의 토기
공존한다고 보았다. 동일계 무늬란
에 대한 진화론적 사고에 바탕을 둔 것(단순→소박한 데서 복잡하거나 세련된 것으
입술에서 밑부분까지 같은 무늬가
로, 그 뒤에는 퇴화하는 방향으로)으로서 형식학 및 편년에 대한 이론적 기반이나
베풀어진 토기를 말한다.
방법론 없이도 잘 전개되며,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도 그다지 수긍하기 어렵지 않았 다고 하겠다.
구분을 하는 것으로 이른바 文樣
되었다.58) 여기서 제기된 모순 즉 한강유역에서 B1식(동일계 전면횡주어골문)의 시
論이라고 한다. 현재 한국의 신석
기가 불분명하다는 점은 1990년대 이후에 들어서 보완되었다.
기시대 연구는 이와 같이 토기무
임상택은 서해중부지역의 무늬베푸는 수법이 단치에서 다치로 바뀜을 전제한 뒤, 무
늬를 가지고 分期를 설정해서 이
늬들을 선과 점의 낱낱의 요소로 분해하기보다는 전체적인 패턴, 시각적 효과 등을 고
해하는 방법이 가장 보편적이므로
려한 분류를 시도하였다.59) 신석기시대 전기는 세부위가 엄격히 지켜지는 구분문단계
소개한 것이나 사실 분기설정의
이며, 중기는 세부위시문의 축소화 그리고 띠대문(금탄리 1식 토기)의 등장, 후기는 서
기준으로 무늬만의 변화란 근거가
해안식 전면횡주어골문의 등장으로 구분지어졌다. 구분문이란 반쪽계란 모양의 토기
약하며, 장차 유물조합상의 변화,
를 입술부분과 몸체부분, 밑부분으로 나누고 세곳에 각각 다른 무늬가 베푸는 것이다.
집자리 및 이를 통해 본 사회구성
동안 반복되어 점유되었을 것이라는 점과 중기 설정의 애매성 지적에 핵심을 둔 작업 성 격 과 문 화 기 반
토기무늬에서 변화가 보이면 단계
1980년대 들어 방사성탄소연대와 기존의 편년을 종합한 임효재의 편년안이 제시
그 뒤 나온 김장석∙양성혁 등의 논의는 서해도서지방의 조개더미들은 짧은 기간 198
이상과 같은 시기구분 방법은
이다. 중서부지역 신석기시대유적의 평면적 분포∙유적의 성격, 각 무늬의 지역성, 절
구분계 빗살무늬토기
변화, 탄소연대 등이 종합된 시기 구분이 요청된다.
동일계 빗살무늬토기
이러한 관점에서 가장 최근에 이루어진 논의는 취락구조의 변동과정을 고려하여 중서부지역의 신석기시대를 4시
57) 한영희,〈한국 중서부지방의 신석기문화〉 《한국고고학보》5, 1978. 58) 임효재,〈토기의 시대적 변천과정〉 《한국사론》12, 1982. 임효재,〈편년〉 《한국사론》12, 1982. 59) 임상택,〈서해중부지역 빗살무늬토기 편년연구〉 《한국고고학보》40, 1999.
기로 구분한 것이다.60) Ⅰ기는 대동강유역과 동일한 토기전통을 가진 집단이 한강 60) 임상택,〈한국 중서부지역 빗살무늬토기문화 연구 문화변동과정을 중심으로〉 , 서울대학교 박사 학위논문, 2006.
하류에서 다소 늦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암사동, 또
러 물적 자료들에 앞서 무엇보다도 유적이 자리한 곳의 지형이나 지질적 고찰이 선
201
는 연천 삼거리유적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 시기는 대체로 B.C. 3,600년 이전이다.
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암사동을 예로 들면 이곳은 한강의 자연제방상에 입지한 취
Ⅱ기(B.C. 3,600~3,000)는 다양한 토기무늬를 가진 지역집단이 공존하며 빗살무
락으로서 물에 의한 운반물이 퇴적되어 자연제방이 안정화되는 단계는 물론 그 후
늬토기가 전국으로 확산하는 시기로서 삼목도∙오이도 등 한강 하류에 가까운 도서
로도 무수히 물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취락 형성 이후의 퇴적과정보다는 자연제
지방의 유적들이 포함된다. Ⅲ기(B.C. 3,000~2,500) 이후에는 지역에 따른 약간씩
방이 형성되어 처음으로 취락이 형성되는 시점이 암사동유적의 상한이 될 것이다.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의 편차는 있으나 동일계 어골무늬[魚骨文]가 주류를 이루게 된다. 즉 구분계 무늬
즉 암사동유적의 상한은 자연제방의 안정화 단계를 넘을 수 없을 것이다.
는 없어지고 동일계 무늬가 번성하는 시기인 것이다. 해안지역에서는 이 무렵부터
암사동과 가까운 미사동유적에 대해서도 이러한 고찰은 유효하다. 신석기~청동
조개더미가 많이 생겨난다. Ⅳ기는 소규모 유적들이 해안이나 내륙지방에서 산발적
기시대유적이 많이 찾아진 미사섬의 동북쪽 발굴성과에 의하면 유물들은 대략 현 지
으로 나타나며 동일계 토기들의 단순화와 난삽화가 진행되는(즉 퇴화현상) 시기이
표로부터 30~50cm 아래, 즉 자갈상의 단구퇴적층을 덮고있는 모래층에서 출토된
다. 한강유역 중심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다. 2단구 자갈층을 덮고 있는 가는 모래층은 전신세 동안의 범람에 의해 퇴적된 지 층으로서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는 것과 시대적으로 대비될 수 있고
중서부지역 신석기시대의 시기구분61)
적갈색의 사질점토층은 비교적 따뜻한 기후 아래 형성된 특징을 나타내고 있어 전신
<표 3>
주요특징 Ⅰ 전반 구분계 3부위 시문 구분계문양유지 동체부 타래, 후반 중호문, 점열 어골문 금탄리 1식, 2부위 시문, Ⅱ 구연한정시문, 동일계토기 등장 금탄리 2식, 서해안식 동일계토기 Ⅲ 유행, 구분계 쇠퇴, 소멸 Ⅳ
문양단순화, 난삽화
주요유적
절대연대(B.C) 4000?~3600
까치산Ⅰ패총, 삼거리, 암사, 미사 암사, 미사, 주월리, 삼목주거유적, 오이작 으로소라벌A, 가운데살막, 대부도흘곶패총 송산, 는들, 소연평도, 남북동, 오이도, 신포동, 원정리 용반리, 덕안리, 남산, 군량리, 제일리, 꽃뫼, 모이도, 을왕동Ⅰ, 오이도 뒷살막
3600~3000
세 중기(Mid-Holocene)로 해석될 수 있다. 그 상부에서 나오는 암갈색~암회색의 사질점토는 전신세 중기 이후, 즉 지금부터 약 5,000년 전후에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로써 암갈색 사질점토층(지표 하 50cm) 내에서 출토되는 빗살무늬토기는 약 5,000년 전후(B.C. 3,000년 무렵)의 것으로 우선 지질학적으로 추정된다.62)
3000~2500 2500~2000? /1500
시기구분은 대동강유역 및 황해도지방의 취락이 중심이 된 것으로서 신석기시대 의 취락 발굴 사례가 적은 한강유역만을 살펴볼 때는 자료가 매우 부족한 편이다. 그러나 후술하듯이 최근 들어 한강유역의 신석기시대 취락 발굴 사례는 점점 증가 하고 있어 취락중심 시기구분의 확립이 가능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에는 농경이 얼마나 진전되었는지에 따라 한국 신석기시대를 시기구분하는 200 성 격 과 문 화 기 반
논의도 활발한데,‘생업경제’ 에서 살펴보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아래 4장에서 다루 려고 한다. 신석기시대의 시기구분에 대해 필자의 생각을 덧붙이자면 시기구분에 필요한 여
61) 임상택, 위의 논문, 53쪽에서 발췌.
미사리 출토 빗살무늬토기 조각들
62) 이상 최몽룡∙이동영∙신숙정, 앞의 논문, 1994 지질분석 요약함.
장차 이러한 관점이 설정되어야 한다. 이 시기를 지질 및 지리학적으로 밝혀내는 것은 고고학적 발굴과 동시에 이루어져야 할 중요한 작업이다.
거나 고토양 위에 지은 집들
203
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로서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고토양을 활용했다는68) 당
3. 유적과 유물
연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 다.69) 한편 시흥이나 안산의
│ 신석기시대유적 │
경우 현재의 입지로는 바다
한강유역에서 최근까지 발굴된 대표적인 신석기시대유적63)들로는 연천 삼거리,
와 먼 듯 하지만 국토개발이
강동구 암사동, 하남 미사동, 일산 신도시, 평택 현화리∙원정리, 영종도 송산∙삼
되기 전, 그리고 과거의 해
목도∙젓개마을∙운서동∙는들, 오이도, 대부도, 용유도, 을왕동, 옹진군 시도, 대
수면 변동 요인을 고려하면
연평도, 소연평도, 남양주 호평유적 등과 2006년 11월 현재 발굴 중인 시흥 능곡
바다와 매우 가까울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70) 즉 취락의 형성은 사람들의 생계수단
과64) 안산 신길지구65) 용인 농서리지구66) 등이 있다.
과 밀접해야 함을 잘 알 수 있다. 또 영종도∙삼목도와 같이 서해안에 가까운 큰 섬
이들 유적은 유구의 종류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신석기시대의 유구와 유적
집지리 조개더미 야외 집석유구 토탄층 및 포함층
에서도 마을유적이 찾아진다. 섬이라도 면적이 크거나 식수원이 있는 섬, 육지와 가 까운 섬은 마을유적이 있음을 점차 확인해 가는 중이다. 종합하면 신석기시대의 사 람들은 1단구로서의 자연제방 위, 그리고 2단구 위의 구릉과 연결되는 고토양층 등
<표 4>
유구
암사동 선사주거지 재현 모습
유적 암사동, 영종도 는들67)∙젓개마을, 삼목도, 연천 삼거리, 남양주 호평, 을왕동, 시흥 능곡, 안산 신길, 기흥 농서리 시도, 오이도, 영종도, 용유도, 소연평도, 대연평도, 을왕동 시도, 암사동, 미사동, 삼목도, 영종도 송산∙는들∙젓개마을, 용유동, 남양주 호평 일산, 평택 현화리∙원정리
의 주변 환경을 모두 활용한 것이다. 인천을 중심한 바닷가지역에서는 조개더미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대 체로 서해 도서지역의 조개더미란 이른바‘한정행위’ 가 이루어진 지역으로 여겨지 고 있다. 그 의미는 특정한 자원을-주로 조개류를 따거나 사냥도 곁들인-획득하기 위한 제한된 행위가 이루어진 곳이란 뜻이다.
위의 분류는 유적이 입지한 지형상 분류와 대비시킬 필요가 있다. 즉 집자리유적
야외집석유구란 집자리 및 조개더미 주변이나, 집자리와 무관한 곳(미사동의 예)
가운데 한강유역에서는 암사동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나 영종도∙삼목도 등지와
에 쌓여있는 돌더미들인데 당시 사람들이 어떠한 행위를 한 뒤에 흔적으로 남은 것
남양주 호평, 시흥, 안산 등 최근에는 경기도 각 지역에서 신석기시대의 취락이 찾
이다. 아마도 집자리 바깥에서 요리하기 위해서이거나 토기를 만들기 위해, 또는 조
아지고 있다. 이 가운데 낮으막한 산의 구릉지대에 자리잡고 기반암을 깎아 들어가
개잡이 하는 곳에서 조개를 구워먹던 곳으로 여겨진다.
202 성 격 과 문 화 기 반
63) 여기서는 유적∙유물이 비교적 다양하게 출토된 유적, 집자리 조개더미유적들만 다루고 그밖에 지표조사 등으로 찾아진 유적들에 대해서는 생략하였다. 지금까지 찾아진 서울∙경기지역 신석 기시대유적은 약 161개소에 이른다. 64) 기전문화재연구원이 발굴 중임. 65) 고려문화재연구원이 발굴 중임. 66) 기호문화재연구원이 발굴 중임. 67) 는들유적에는 제사유구로 추정되는 유구도 있다. 아래 의식과 신앙 부분에서 소개함.
68) 신숙정,〈호남지방 신석기문화의 연구〉 《호남고고학보》20, 2004, 17~23쪽. 69) 구릉 정상부나 사면에서 신석기시대유적이 찾아지는 현상은 이제 전국적으로 확인된다. 보령 관창리, 공주 장원리, 대전 둔산, 옥천 대천리, 청원 쌍청리, 아산 풍기동, 함평 당하산 등 모두 열거하기 어려우며 장차 고토양과 관련되는 유적(주로 집자리)의 수가 강가 바닷가의 집석유 구∙조개더미 못지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70) 유적의 입지를 개관할 때 고지리(palaeogeography)를 고려해야함을 잘 알 수 있다.
제가 남아있으나 전면 발굴되지 않은 점을 감안하여 대략 50명 정도를 생각한다면
205
신석기시대 전기의 마을 크기로서 추산해 볼 만하다. 여기에 대해 대가족제도였을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것으로 추정한 견해가 있다.73) 연천 삼거리의 집자리는 임진강의 동쪽 자연제방에 있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으 로는 집자리 6기와 소형 유구 1기가 출토되었다. 집자리는 많이 파괴되어 부분적으 로 남아있으나 가장 완전한 5호 집자리(4.6×4.2m)의 구조로 볼 때 모두 말각방형 으로 추정된다. 5호 집자리 안에는 강자갈을 돌려 만든 불땐 자리가 있으며 기둥구 멍은 8개가 확인되었다.74) 토기들은 대체로 암사동의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정연한 구분문계 토기가 주로 나온다. 서울 암사동 선사주거지의 집터유적
구석기시대유적이 있는 연천 원당리에서는 신석기시대 추정 집자리 1기가 나온 바 있다.75) 크기는 540×460cm이며 말각방형으로 여겨진다. 기둥구멍이 6기, 아
(1) 집자리유적
무런 시설이 없는 원형의 화덕자리가 있고, 집자리 바깥 서북편에 130×120cm 정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신석기시대의 마을인 암사동유적은 여러 번 발굴되었다.
도의 부석시설은 주방용으로 추정된 바 있다. 출토된 빗살무늬토기는 입술에 밀집
현재까지 알려진 암사동 집자리는 28기이며, 집자리 평면형태는 지름 5~6m의 원
빗금무늬를, 몸체부분에 단치구를 이용한 세로 청어등뼈무늬가 베풀어져 중서부지
형이거나 1변이 4~6m인 말각방형이다. 집자리 바닥에는 냇돌∙깬돌 등을 돌려 만 든 불땐 자리가 있고 집의 남향으로는 출입시설이 있다. 저장구덩이가 있고 기둥구 멍은 집의 네 모서리에 1개씩이 일반적이나 10여개씩 나오기도 한다. 전체 집들은 대략 65×18m 범위 내에서 서로 가까이 있다. 특이한 시설로는 71-5호 집자리(크기는 7.9×6.6m)에서 집 안에 다시 지름 5m 정도의 움을 파놓은 것이 있는데, 이러한 구조는 평양의 남경 31호 집자리, 금탄리 11호 집자리에서도 보인다. 필자는 이것을 한 가족의 집이라기보다는 마을의 공동 창고 같은 것으로 본다. 75-2호(지름 약 4.5m) 집자리의 경우는 벽 주위에 통나무 를 얽어댄 듯한 시설이 남아있다. 71-5호 집자리는 가장 넓어서 52㎡가 되지만, 대부분의 집들은 12㎡부터 37㎡ 204 성 격 과 문 화 기 반
정도에 걸쳐 있다. 부속시설로 보이는 유구들을 제외하고, 한사람이 차지하는 면적 을 4.5㎡로
나누면71)
대략 52명 정도로
나타난다.72)
을왕동 집자리
이들이 모두 한 시기인지의 문
71) 이 기준은 김정기,〈주거지 및 분묘〉 《한국사》1, 1973으로부터 가져온 것이다. 72) 신숙정,〈남해안지방 신석기사회의 구성과 발전단계〉 《우리나라 남해안지방의 신석기문화 연 구》 , 학연문화사, 1994, 236쪽.
73) 정성희,〈암사동 주거지에 대하여〉 《마을의 고고학》 , 제18회 한국고고학 전국대회 발표요지, 1994, 92쪽. 74) 경기도박물관,《연천 삼거리 유적》 , 2002. 75) 경기고고학연구소,〈신석기시대〉 《연천 연당리 구석기시대 유적》발굴조사보고서(5차), 2003, 325~355쪽.
한강유역 신석기시대 집자리 시기구분
역 중기 이전의 것으로 편년되었다. 영종도 는들마을 A지구의 집자리는 4.1×4.2m 크기이며 말각방형에, 가운데 60 ×90cm의 타원형의 불땐 자리가 있는 것이다. 기둥구멍은 4쌍이며 나중에 집자리
시 기
의 바깥을 확대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B지구에서는 크기가 다양한 원형의 작은 움 9기가 확인되었는데 내부에서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었다.76) 젓개마을은 영종도의 중심부에서 뻗어 나온 구릉의 북서변과 동남변에 있는데 집자리 3기(파괴된 것 1기)와 야외노지 3기, 움구덩 18기가 발굴되었다.77) 집들은
Ⅰ 후 기
대개 경사진 풍화암반층을 파고들어가 만들었으며, 2호 집자리처럼 찰흙다짐 바닥 도 있다. 집자리 안에 불땐 자리는 없고 집자리 안과 밖, 유적 전체에 걸쳐 움구덩이 가 자주 나타나므로 발굴자들은 이를 저장시설이 발달한 것으로 보고, 이 지역에 풍 부하고 지속적인 식량공급원이 있었을 것으로, 따라서 이 지역에 살던 집단들이 활 발한 채집활동을 통해 2곳 이상의 거주영역을 확보하고 주변 도서를 장기간에 걸쳐
Ⅱ
이동하는 거주유형으로 추정하였다. 즉 인근의 삼목도 및 송산유적과 유사한 일종 의 임시 캠프나 계절적 이동행위의 한 근거로 본 것이다. 그러나 삼목도에서는 2003년 시굴에서78) 10채 이상의 집자리가 찾아져 영종도의 젓개마을과 마찬가지로 서해안과 근접한 섬에서는 집자리들이 많았음을 보여주었다. 을왕동유적 A구역에서는 해발 50m 안팎의 구릉 사면에서 조개더미가 노출되었 고 그 아래에 집자리 3기가 찾아졌다. 3호 집자리는 2단으로 구성되어 남경과 금탄 리, 암사동 등지에서 관찰되는 서해 중부지방의 특징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곳 에서 출토된 토기는 약간 바라진 입술을 가지고 있어 형태상으로 금탄리를 연상시 키는 점도 흥미롭다. B구역에서 찾아진 집자리 1기는 많이 훼손되어 있다.
(2) 집자리 이외 유구
207
<표 5>
Ⅲ
유구 삼거리 1 삼거리 2 삼거리 3 삼거리 4 삼거리 5 삼거리 6 오이도 가운데 살막조개더미 1 오이도 가운데 살막조개더미 2 오이도 가운데 살막조개더미 3 삼목도 1 삼목도 2 삼목도 4 삼목도 5 삼목도 6 삼목도 9 삼목도 11 성내 1 성내 2 성내 3 성내 4 영종도 는들 한1호 영종도 는들 한2호 영종도 는들 한3호 영종도 는들 서1호 호평 1 호평 2 호평 3 을왕 Ⅰ-1 을왕 Ⅰ-2 을왕 Ⅰ-3 을왕 Ⅱ-1 을왕 Ⅱ-2
평면 방형 방형 방형 방형 방형
길이
너비
365(잔) 305(잔) 305(잔) 175(잔) 455 130(잔)
345(잔) 445 270(잔) 175(잔) 425 145(잔)
출입구
노지 천석 천석
화재 입지 여부
원형 원형
1/4 잔존 반파 반파 일부잔존
화재 천석 천석
원형
화재
비고
충 적 지
대파
(장)방형
위석식 원형
(장)방형
위석식 원형
반파
(장)방형
위석식 원형
반파
방형 방형 방형 원방형 방형 원방형 원방형 방형 방형 방형 방형 장방형? ? 원형 방형 방형? ? 방형 원형? 방형? 원형? 장방형 방형?
340 290 410 580/420 310
500 500 580 700 300 330 420 350 400 325 500 600 ? 586 284
330 270 380 580/380 290
330 420 370 430
수혈 수혈 수혈 수혈 수혈 수혈 수혈 돌출형 수혈 수혈
원형 타원형 타원형 타원형 원형 원형 원형 원형 원형
반파
구릉 2단굴광 2단굴광 2단굴광 구릉
구릉 410 250(잔) 290(잔) 268(잔) ? ? ? 470 160(잔)
수혈 할석 수혈 적석 할석 할석 할석 수혈
1차확장 장방형 원형 장방형 원형 원형 원형
도토리 반파 구릉 반파 반파 반파
서해지역 조개더미의 성격을 추정한 최초의 작업은 장호수에 의해 이루어졌는 206 성 격 과 문 화 기 반
데, 시도를 내륙집단의 사냥터로 추정한 것이다.79) 이는 매우 흥미있는 지적이나 이
를 뒷받침할 자연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80) 최근에는 도서지방의 유적점유 형태주로 조개더미에 대한-를 근거지형과 야외캠프형으로 나누고 있다. 서해 도서에서
76) 서울대 인문학연구소,《영종도 는들 신석기유적》 , 1999. 77) 한양대박물관,《영종도 문화유적》 , 1999. 78) 서울대박물관, 2003년도 시굴, 보고서 미간임. 79) 장호수,〈조개더미 유적의 성격〉 《백산학보》35, 1988.
보자면 용유도∙영종도∙삼목도∙강화도∙백령도 등 섬이 상당히 크거나 연안과 80) 서해 도서라고 해서 동물화석이 전혀없는 것은 아니며 백령도 말등유적에서는‘강치’즉 바다포유류 가 나왔음을 확인하였다. 최삼용,〈백령도 말등유적의 뼈유물연구〉 《한국신석기연구》2, 2001, 53쪽.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가까우면 근거지형이 가능할 것 같다. 나머지 대부분의 섬들은 캠프형으로, 여기서
(1) 토기
발견되는 조개더미유적은 한정행위의 결과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
조개더미는 아니나 캠프형유적의 하나로서 하남 미사동유적을 들 수 있다. 1987
이며 생업활동에서 생겨난 양식
년 섬의 동북쪽 발굴성과에 의하면 신석기시대의 유적으로 수혈과 대형 또는 원형
을 저장하거나 조리하고 담아먹
의 야외노지가 주류를 이루는(야외집석유구 29기) 반면, 집자리는 1기로 추정되고
는 용기(container)이다. 한강유
있다. 저장움도 없다. 신석기시대의 유구에 비해 청동기시대에 들어서면 미사동에
역의 빗살무늬토기는 반쪽 계란
는 38기의 집자리와 저장공 34기가 찾아져 뚜렷이 대조된다.
모습으로 모양이 단조롭고, 입
필자는 미사동의 신석기시대 집자리를 청동기시대 집자리들이 대부분 파괴하였
술지름보다 높이가 길어 다소 좁
을 것으로 보는 기존의 견해와 달리, 암사동에 집이 지어지던 무렵 아직 미사동에는
고 긴 모양을 띈다. 이것은 높이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살만큼 사질퇴적층이 성숙되지 않았고 식생이 피복되지 않았
보다 입술지름이 넓은 남해안지
으며 따라서 취락은 거의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81) 이러한 예측
역의 토기와 비교된다. 아직 토
은 앞서 말했듯이 유적에 대한 지질 및 지형상의 고찰이 선행될 때 가능한 것이다.
기를 굽는 기술이 부족했다고 여
미사동의 도구조합(그물추∙화살촉∙갈돌갈판)과 자연환경을 생각하면 유적에서는
겨지는데, 토기의 색깔이 산화
사냥과 물고기∙조개잡이, 그리고 채집이 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대소
가 불충분하여 군데군데 검붉은
형의 야외노지 존재가 그와 관련될 것이다.
얼룩이 지며 색조가 고르지 않은
209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점에서 잘 알 수 있다. 아마 불기
208
│ 신석기시대 유물 │
가 고루 미치는 일정한 가마구
신석기시대의 유물은 당시 사람들이 생활을 위해 만든 토기∙석기∙뼈도구 등의
조가 없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미사리 출토 빗살무늬토기
문화유물(artifacts)과, 사람이 잡아먹고 버린 짐승의 뼈, 식물의 껍질 등 자연유물
한강유역 빗살무늬토기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토기를 잘 빚기 위해 혼입한 물질
(ecofacts)로 나눌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자연유물이라 하더라도 결국 사람에 의
‘비짐’ ( )이 유난히 많다는 것이다. 일반으로 선사토기에는 작업성을 좋게하기 위해
해 변형되고 버려졌으므로‘자연적’ 이라고 말할 수 있는 유물은 없으나 여기서는
석영 등의 비짐이 많이 들어가는 편이나 한강유역의 빗살무늬토기에는 특히 석영∙
편의상 그렇게 부르려고 한다. 자연유물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당시의 환
장석∙운모∙석면∙활석 등이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경을 지시하며, 다른 하나는 당시의 식료를 보여준다. 환경자료에 대해서는 1장 자
토기가 시기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은 주로‘무늬’ 를 통해 나타나며, 이것이 시기
연환경에서 서술하였으며, 식료로서는 아래 생업경제에서 언급될 것이기 때문에 여
구분의 지표가 된다. 다만 초기에는 뾰족밑의 토기가 많이 만들어졌으나 점차 신석
기서는 생략한다.
기시대 중∙후기로 가면서 둥근밑이나‘대야밑’ 으로 불리는 형태가 나타난다.
성 격 과 문 화 기 반
토기의 쓰임새는 일반적으로 저장용, 조리용과 개인용으로 구분하는데 한강유역 의 빗살무늬토기는 모양이 단조롭다보니 크기를 가지고 용도에 따른 구분을 하고 있 81) 신숙정,〈미사동의 선사문화〉 《동아세아에서 미사동유적의 위치》2002년 하남 미사동 국제학술 심포지움, 2002, 39~59쪽.
다. 즉 높이 30~40cm 이상의 것은 집안에 바로 또는 거꾸로 세워놓고 저장용기로 썼는데 일종의 뒤주 역할로 볼 수 있겠다(황해~평안도 지방의 지탑리, 궁산유적 등).
최근에는 토기의 제작과정을 밝히기 위한 과학분석도 자주 이루어지는데, 위의
암사동과 같은 취락유적에서는 다양한 석기들이 출토되나 중서부 도서지방에서
비짐들 대부분을 성분분석을 통해 확인하였으며, 그밖에 바탕흙인 점토광물로는 몽
는 석기의 수량이 매우 적으며, 나온다 하더라도 돌살촉이나 그물추 또는 갈돌/갈판
모리오나이트(montmorillonite), 일라이트(illite) 등이 있다는 점, 토기 구운 온도는
처럼 가공용의 석기들만이 출토되는 경우가 많다. 석기 출토상의 이러한 특징들은
600~800℃ 사이라는 점 등이 확인되었다.82)
중서부 도서지방이 잠깐씩 점유되어 생업행위(물고기∙조개잡이 중심)를 하던 장소 라고 보는 견해를 지지해준다.
(2) 석기
신석기의 상징인 간[磨製]석기는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에서는 아직 적고, 도끼류
신석기시대 석기의 대다수는 뗀석기이다. 뗀석기 분류방법에는 전통적으로 기능
는 날 부분만 간 半磨半打가 많다 보니 한강유역에서 돌살촉이 대표적인 간석기(약
분류와 형태 분류 두 가지가 있다. 그런데 도구들의 원래 기능에 대해 현대인이 알
간의 돌창과 함께)이다. 돌살촉과 돌창, 굴지구나 대패날 등은 얇게 켜로 떨어지는
기 어려우므로 대부분‘객관적인’형태 분류를 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석기는 한번
암질(shale 등의 퇴적암이나 schist 등의 변성암)을 선택해야 한다. 결국 신석기시대
용도에 맞게 제작되면 계속 그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므로 시기에 따른 변화의 모습
란 석기 제작수법 뿐만 아니라 이를 위해 먼저 암질 선택도 달라진 시대인 것이다.
을 비교적 찾아보기 어려운 유물에 속한다. 한강유역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의 석기에는 우선‘돌도끼’ 라고 불리는 다양한 석기 종류가 있으며 돌살촉∙돌창∙찔개살(작살)∙그물추∙돌낫∙돌칼모양 석기∙
돌도끼를 제외한 돌살촉과 돌창은 사냥에, 찔개살(작살)과 그물추는 물고기잡이 에, 낫과 돌칼은 곡식을 수확하는데, 갈돌과 갈판은 음식물 가공에, 공이와 망치는 공구로 각각 사용되었을 것이다.
갈돌/갈판∙공이∙망치∙원반형 석기∙여러 가지 격지[薄片] 등이 있다. 돌도끼류 를 제외한 대부분의 석기들은 모양만으로도 대략 그 기능을 짐작하게 한다. 찔개살 은 버들잎 모양의 긴 화살촉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으로 일종의 작살이다. 그물추는 납작한 자갈돌의 양쪽을 떼어내어 그물을 묶을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강가유적에 서 많이 출토된다.
미사리 출토 갈돌과 갈판, 돌그물추
가장 많이 논의되는 석기는 돌도끼이다. 한강유역 신석기시대의 돌도끼에는 단 면 타원형에 양날이 마주치는 조갯날 도끼가 있다. 이들은 떼어내거나 날 부분만 간 것들이 대부분이다. 자귀∙끌∙대패날 등은 형태가 약간씩 다르지만 모두 한쪽 날 210 성 격 과 문 화 기 반
만 있는 것이다. 조갯날 도끼가 벌채하는데 주로 쓰이는 것이라면 한쪽날 도끼들은 미사리유적 빗살무늬 토기박편 사진
목재를 2차적으로 가공하는데 쓰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일본에서는 이들을 묶어 서 일련의 농경활동을 위한 도구라고 보고있다.
82) 최몽룡∙신숙정∙이동영,《고고학과 자연과학》 ,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6, 43~45쪽. (사진 : 같은 책 316, 329쪽).
한편 보통 掘地具라고도 불리는, 땅을 일구는데 쓰였다고 보이는 석기들이 있다. ‘보습’ 이라고 불리던 것은 최근 따비로도 분류되는데, 삽과 같은 역할이라고 보는
211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것이다. 북한에서는 신발바닥 모양 보습이라고도 불렀고 큰 것은 60cm 정도나 되
(3) 뼈도구
기도 한다. 굴지구 가운데 폭이 좁고 길이가 길며 괭이처럼 사용된 것(자루의 길이
신석기시대 남해안지역
방향에 직각으로 붙게 되는)은 암사동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는 것이다. 이것은 뿌리
의 조개더미에서 출토된 뼈
식물 등을 채집하는데 주로 쓰였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도구와 충북∙강원일대의
도끼류와 굴지구는 대부분 농경 논의와 관련되며 가공구 등과 조합되어 나온다
석회암동굴에서 출토된 뼈
면 더욱 확실하다. 한강유역에서는 신석기시대 2기까지 따비와 괭이가 중심을 이루
도구는 매우 많으나 한강 하
며 돌낫도 사용되었고, 3기에는 도끼류가 작아지는 특징이 나타난다고 한다.83)
류에서는 드물다. 무엇보다
쓰임새가 명확한 석기류 이외에 격지류가 있다.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유적에서는
도 사냥해서 잡힌 짐승이 있
격지들도 많이 나오는 편이나 아직까지 매우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잔손질
어야 뼈도구의 재료가 확보
(retouch)이 이루어지지 않아 석기 명칭이 주어지기 어렵다 보니 그럴 수 있지만,
되는 것이다. 경기만일대의
무엇보다도 완성된 석기에만 관심을 가지며, 뗀석기를 잘 식별하는 연구자가 적다
서해 도서에도 조개더미는
는 점도 원인이다. 그러나 완성된 석기 외에 뗀석기를 만드는 중에 파생된 것 또는
많으나 남해안지역 등과 달
석기(stone tool) 제작 전단계로서의 격지를 모두 포함하여 분석하여야‘신석기시
리 뼈도구가 나오지 않는다.
대 석기’ 의 전모, 그리고‘이러한 도구를 가지고 어떤 생업에 종사하였는지’ 가 제대
서해안일대의 조개더미유적
로 드러날 것이다. 왜냐하면 신석기시대는 위에서 말한대로 간석기보다는 아직 뗀
이 대부분 조개나 물고기 등
석기 위주의 시기이며 따라서 완성된 석기보다는 격지류가 훨씬 더 많은 양을 차지
을 채취하기 위한 장소이며
하기 때문이다.84)
그밖에 별다른 행위가 이루
한강유역에서 격지류가 가장 많이 보고된 경우로는 미사동유적이 있다.85) 여기 서 밝혀진 신석기시대 격지들의 특징은 둥근 자갈돌의 원 표피를 떼어낸 것들로서
213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가능성이 있다.
자연면이 남아있는 1차 격지가 많고 길이 보다 넓은 옆격지가 많다는 점이다. 잔손
모이도 조개더미에서 출
질이 보이지 않는 격지류가 많은 원인은 망치의 사용 중에 떨어져나간 격지도 많았
토된 뼈도구를 보면 흔히 刺
기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 이같이 격지류에 대한 연구를 포함해서, 장차 신석기시
突具라고 불리는 것과 무늬
대의 생업 연구를 위해서 석기 연구가 심화되어야 할 것이다.
돋치개[施文具], 그리고 뼈 바늘류가 있다.
212 성 격 과 문 화 기 반
83) 임상택, 앞의 논문, 2006, 78~99쪽. 84) 뗀석기가 많이 보고된 함평 당하산유적이나 통영 상노대도유적 등의 예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85) 황용훈∙신복순∙김희찬, 경희대학교 고고미술사연구소 조사보고(1991년도)《미사리》제1권, 1994, 132~166쪽.
미사동유적의 격지류
4. 생업경제와 사회문화
215
│ 생업경제 │ (1) 출토유물의 검토 한강 하류의 식물화석에 대해서는 1장 자연환경 식물상과 동물상에서 살펴보았 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중서부 도서지역에서 동물화석이 나온 곳은 백령도∙소 연평도∙모이도∙을왕동∙오이도 가운데살막 조개더미유적 등이다. 이를 정리하면 <표 6>과 같다. 한강 하류에서 찾아진 동물화석86) <표 6>
맷돼지 강치 매가오리 농어 방어 참돔 넙치 복어류 참굴 떡조개 백합 말백합 대수리 댕가리 반지락 두줄돌조개 두드럭고둥 피뿔고둥 구멍밤고둥 개울타리 고둥 총알고둥 눈알고둥 새꼬막 가무락조개 동죽
214 성 격 과 문 화 기 반
모이도 조개더미에서 출토된 뼈도구들
백령도 ○ ○
소연평도
모이도
을왕동
가운데살막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86) 조개류는 아래 보고된 것 가운데 식용 가능한 것만 뽑았다. 최삼용,〈백령도 말등유적의 뼈유물연구〉 《한국신석기연구》2, 2001. 이준정,〈소연평도 패총출토 어골자료〉 《소연평도 패총》 , 국립문화재연구소, 2002. 이준정∙김은영,〈소연평도 패총출토 패각자료〉 《연평 모이도 패총》 , 국립문화재연구소, 2003.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2) 생업의 복원
가져온 것이다. 규소체(식물규소체)는 벼과 식물의 체내에 흡수 축적된 유리질의 세
신석기시대의 생업으로는 사냥∙채집∙물고기잡이∙농사짓기가 모두 이루어졌
포를 말한다.
다고 봄이 일반적이다. 채집은 도구가 필요 없고 식물자료가 남기 어려운 점에서 언
91) 또 현재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는‘기존의 채집경제에 소규모 원경이 포함되는’
제나 증거가 없으나 언제나 부정할 수도 없는 생업이다. 물고기∙조개잡이는 증거
는‘조∙기장 등의 재배도 포함되는 이른바 저차원 식량생산(low-level production)
가 가장 확실하다. 한강 하류 도서지방에서 위의 <표 6>과 같이 뚜렷한 증거가 나오
단계’ 라고92) 주장되고 있다. 한국 신석기시대의 분기 설정을 농경의 발전정도를 가
고 있다.‘강치류’등의 바다포유류잡이도 드물지 않다. 사냥의 증거는 한강유역에
지고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연구사적으로 획기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서 드물지만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유적에서 짐승화석이 많이 발견되며 돌살촉∙ 돌창 등의 존재로 의문의 여지가 없다.
조∙볍씨 등의 실물자료와 미세화석이 우리나라 전역에서 찾아졌으므로 이들을 잠깐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가 출토된 유적으로는 황해북도 봉산 지탑리(조 또는
<표 5>를 보면 다음과 같은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모이도∙을왕동의 경우 조개
피) 및 마산리, 평양시 남경, 진주 상촌리, 부산 동삼동,93) 옥천 대천리(규소체로서)
따기에 주력했음을 알 수 있는데 가장 일반적인 경우이다. 그러나 소연평도의 경우
유적 등이 있다. 볍씨는 일산(보정하지 않은 연대로서 4070±80, 4330±80 B.P. :
물고기의 뼈가 많이 출토된다. 분석자는 대형 토기와 함께 동물화석이 나온다는 점
보정연대 4,500 B.P.)과94) 대천리유적95)에서 나왔다. 창녕 비봉리유적에서도 탄화
에서 소연평도 조개더미는 이들을 잡고 가공하는 단기 거주지(residence camp)일
된 조가 출토되었다. 상촌리와 대천리유적에서 출토된 곡물을 종합하면 조∙피∙수
가능성을 주장하였다.87) 또 용유도의 집석유구에서는 지방산 분석 결과 어류를 가
수∙기장∙보리∙밀∙콩(대천리유적의 연대 4400±60 B.P.) 등으로서 이 무렵에
공한 장소라고88) 추정되고 있다. 백령도를 보면 돼지뼈도 출토된다. 이것이 사냥으
오늘날 주로 먹는 곡류 대부분이 찾아졌다고 할 수 있다.
로 잡은 야생종인지 사람들이 기른 돼지인지의 여부에 대해 분석자는 명시하지 않
위의 자료들을 보면 조가 농경 시작의 기준이 된다. 조로 인해 이것과 자주 공반
았다.89) 돼지의 경우 야생 여부를 뼈 감정만으로 알기 어렵다는 점과 전세계적으로
하는‘명아주’ 도 고려대상이 되었다. 명아주는 조와 유사하게 성숙기간이 짧고 척
신석기시대에 돼지기르기가 널리 행해졌다는 점이 고려된 듯하다. 우리나라에서는
박한 토양에도 잘 적응하며 종자가 밀집되고 알이 굵어 수확하기 편하다는 것이
신석기시대 말기에 함경북도 무산 범의구석에서 출토된 뼈가 집돼지라고 보고된 바
다.96) 신석기시대 전기는 견과류 등을 채집하는 한편 울산 세죽리유적의 명아주나
있으나90) 이것이 북한자료로써 아직 공개된 바가 없다. 어떻든 신석기시대의 집짐
창녕 비봉리유적의 좁쌀처럼 일년생 초본류에 익숙해져 가던 시기라고 보았다. 세
승기르기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시점에 당도한 것이다.
죽리에는 그 밖에도 마디풀속, 기장속, 보리족 잡초 등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물론
신석기시대의 생업에서 역시 가장 중요한 논의는 농경에 대한 것이다. 2장 신석
집약농경단계라고 할 수 없으며 주변 식물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재배화가 되지
기시대의 개념에서 언급했듯이 한국 신석기시대에 농경이 가능했겠는가라는 회의
않은 야생식물을 관리하는 단계 즉 초기 식량생산단계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다고
는 매우 뿌리가 깊은 것이나 최근의 논의는 이로부터 매우 발전된 것이다. 발굴에서 자주 출토되는‘조’ 와‘기장’및‘규소체’ 와 같은 식물화석의 존재가 논의의 발전을 216 성 격 과 문 화 기 반
안덕임,〈오이도 가운데 살막 패총의 패각층 분석〉 《오이도 가운데 살막 패총》 , 서울대학교 박물 관,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01. 안덕임,〈을왕동 패총 패각층 분석〉 《인천 을왕동유적》 , 중앙문화재연구원, 2006. 87) 이준정, 위의 논문, 2002. 88) 이준정, 위의 논문, 2002, 288~289쪽. 89) 최삼용, 앞의 논문, 2001. 90) 김신규,〈우리나라 원시유적에서 나온 포유동물상〉 《고고민속론문집》 , 1970.
91) 안승모,〈한국 남부지방 신석기시대 농경 연구의 현상과 과제〉 《한국신석기연구》10, 2005, 7~25쪽. 92) 이경아,〈식물유체에 기초한 신석기시대 농경에 대한 관점의 재검토〉 《한국신석기연구》10, 2005, 27~49쪽. 93) 하인수,〈동삼동패총 1호 주거지 출토 식물유체〉 《한국신석기연구》2, 2002, 41~49쪽. 94) 허문회,〈볍씨분석〉 《일산 새도시 개발지역 학술조사보고》1, 1992, 207~212쪽. 전희영,〈씨앗분석〉 《일산 새도시 개발지역 학술조사보고》1, 1992, 185~205쪽. 95) 한남대 중앙박물관,《옥천 대천리 신석기유적》 , 2003. 96) 이경아, 앞의 논문, 2005, 33쪽.
217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되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로서, 최초의 수전이 시작되는 곳은 보편적으
219
남해안 신석기 중기인 B.C. 3,360년 무렵 동삼동에서는 탄화좁쌀과 기장이 출토
로 습지 주변101) 또는 해안사구의 배후습지∙갈대밭102) 등이라고 한다. 꽃가루 분석
되었다. 이들의 재배 및 관리를 통해 한곳에 장기정착이 가능해졌다고 보고 있다.
에 의하면 엣文海進의 종말과 함께 바닷가의 해수~기수성 저습지가 담수화되어 벼
위에서 소개한 실물자료들의 해당시기도 대부분 이 무렵이다. 후기에는 조와 기장
재배에 좋은 지역이 확대되어 갔다고 한다. 즉 벼농사의 개시 시기는 염생 습지의
이 주자원이 되어 작물재배의 비중이 커져감을 보여준다고 한다.97)
담수화 시기와 일치한다는 것이다.103)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보았다. 해당 시기는 B.C. 5,000년 이전이다.
위의 분류에서 벼에 대한 논의는 빠져있다. 왜냐하면 벼는 현재 일산과 옥천 대
이것은 우리나라 일산지방과 같은 상황으로서, 일산의 신석기시대 토탄층에서
천리유적에서만 찾아졌기 때문이다. 두 유적은 대략 4,500 B.P. 전후라는 점에서
볍씨∙벼속의 꽃가루가 발견된 사실104) 또는 김포 가현리 토탄층에서 곡물∙도구가
같은 시기를 지시하며 예상보다 상당히 이른 시기임을 보여준다. 우리나라 신석기
나온 것이105) 환경상 확실한 사건임을 보여준다. 일산 뿐만 아니라 한강~임진강 하
시대 생업에서 농경이 이루어졌
류의 수많은 지류들에 접해있는 저평한 퇴적층 내지 토탄층은 대개 농사, 특히 벼농
는가에 대한 이론의 여지는 더
사와 관련이 깊다고 볼 수 있겠다.
이상 없겠으나 벼농사에 대해서
벼농사의 증거를 화분학적으로 찾을 때 벼꽃가루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같이 나
는 앞으로 논의가 심화되어야
오는 꽃가루들의 조합상에 주목해야 하는데, 일산의 꽃가루 조합상은 농사지을 때
한다.
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농사를 짓기 위해 벌채한 곳에 2차림∙황야식
끝으로 농학적∙지리적 견지
물의 꽃가루로서 주로 확산되는 소나무(Pinus) 꽃가루가 일산에 많이 분포하는 점,
에서 일반적으로 벼농사의 시작
화본과 가운데‘벼속(Oryza)’ 의 대형 꽃가루(즉 벼꽃가루의 가능성이 높은)가 각종
은 초목과 숲이 무성한 늪지대
벼과, 사초과(Cyperaceae), 국화과(Compositae), 명아주과, 쑥속 등의 꽃가루들과
를 개간하여 논으로 만들고 벼
공반되는 점 등이 그것이다.106) 벼과에 속하는 것들은 일반적으로 초지가 형성된 북
를 심었다고99) 말해지며, 벼농
반구 온대지방의 자연식물군이며 줄∙부들∙갈대 등이 공존하게 된다. 벼는 이러한
사의 기원이 B.C. 1만 년 가까이
종류가 공존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라고107) 하기 때문이다. 한강유역에 대한 필
올라가는 중국의 경우 물많은
자의 예상으로는 4,500 B.P. 무렵을 전후한 시기에 토탄층의 볍씨나 집자리 등의
低쾡地∙소택지 주변을 야생 벼
탄화벼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의 최적 번식지로 꼽고 있다.100)
한편 일산 토탄층에서는 사과속∙개살구∙가래속∙감나무류 등의 나무화석도
이런 곳에서 벼의 재배로 연결
출토되었음을 언급한 바 있다. 분석자는 이들이 자연상태에서 서로 공존하지 않는
일산에서 출토된 볍씨98)
218 성 격 과 문 화 기 반
97) 이경아, 앞의 논문, 2005. 98) 허문회, 앞의 논문, 1992, 212쪽. 99) 윤상욱,〈농업의 기원〉 《동국대 연습림 논문집》4, 1995. 100) 衛斯,〈試論中國粟作文化的起源, 馴化與 傳播〉 《衛斯考古論文集》 , 山西古籍出版社, 1998, 11~22쪽. 衛斯,〈中國史前稻作文化的宏觀透視〉 , 위의 책, 45~46쪽.
101) 佐原眞∙�關恕,《稻作の始まり》 , 雄山閣, 1975, 31쪽. 102) �關恕,〈總論〉 《彌生文化の硏究》2, 雄山閣, 1989, 5쪽. 103) 中村純,〈花粉分析による稻作史の硏究〉 《考古學∙美術史の自然科學的硏究》 , 1980, 204쪽. 104) 경기도∙한국선사문화연구소,《자연과 옛사람의 삶》 , 1992, 208~209쪽. 105) 임효재,〈김포반도의 고고학적 조사연구〉 《서울대학교 박물관연보》2, 1990, 1~22쪽. 106) 최기룡, 앞의 논문, 1992, 145~154쪽. 107) 전희영, 앞의 논문, 1992, 187쪽.
특성이 있으며 당시 사람들이 식용을 목적으로 이들을 한군데 심고 인위적으로 가
타원형의 불땐 자리를 만든 구조가 기본으로 나타났다.111) 집의 남향에 출입시설과
221
꾸었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108) 농경의 초기 단계에 이러한 행위는 흔히 있는 것이
저장구덩이 있다. 암사동이나 을왕동처럼 2단으로 집을 만드는 경우는 마을의 공동
며, 린도스(D. Rindos)의 이른바 우연적 작물화(incidental domestication) 단계 또
시설로 볼 수 있겠다. 2단움은 이후에도 금탄리 11호 집자리에서 보이며 궁산 4기의
는 일반적인 작물화(domestication) 단계에 해당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그리고 한
남경 31호 집자리에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국 최초의 과수재배 예가 될 것으로 흥미롭다.
Ⅲ기가 되어 가장 중요한 점은 일부 해안이나 도서지방에서(는들, 을왕동) 집 바 닥에 구멍이 많이 뚫려있고 기둥구멍도 벽가를 따라 배치되나 다소 무질서한데 비
│ 사회구성과 문화 │
해, 한강 이외 지역들의 예를 참고할 때 긴네모꼴의 집자리도 출현한다는 점이다.
(1) 사회구성
집자리의 내부시설도 정연해진다. 한편 암사동, 삼목도 등 취락규모는 전 단계에 비
사회구성을 추구하는 데에는 두 가지 종류의 자료가 있다. 첫째로 마을 �聚落�내,
해 축소되고 한편으로 대형의 긴네모꼴 집자리가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을 농경의
마을간의 취락구조와 배치를 통해 해당 사회의 위계와 조직을 알아보는 것이다. 두
확산과정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즉 Ⅲ기의 유적 확산은 초기 농경이 도입된 이후
번째로 무덤을 통해 이를 알아보는 것이다. 무덤에는 살아생전에 그 사회에서 받은
주민들이 타 지역으로 퍼져나가면서‘농경기술의 한계와 이에따른 취락 이동비용의
대접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 무덤의 위치(좋은 자리), 껴묻거리
증가를 해결하기 위해 취락 규모가 축소된다.’ 라고 본 것이다. 그 시기는 B.C.
등에서 죽은 자의 신분 등을 추론해 볼 수 있다.
3,000년 무렵이라고 보았다. Ⅳ기에는 집자리유적이 거의 없으며 서해 도서의 조개
최근까지 서울∙경기지역의 집자리 연구는 집의 형태와 구조에 대한 분석이 거 의 전부로서 마을 내 집자리 배치상의 특징 등에 대해서는 그다지 연구가 이루어지
성 격 과 문 화 기 반
고 하였다.
지 않았다. 더욱이 대부분이 소규모 마을 하나 정도의 발굴이었으므로 마을간의 분
위 견해는 취락 구조의 변동을 본격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앞으
포와 특징 등에 대해서도 말하기 어려웠다. 집자리의 숫자가 매우 적으며, 그 규모
로 변동의 제일 원인으로 지목되는 농경에 대한 연구가 다각도로 천착되어야 할 것
내에서도 집자리의 중복현상이 거의 없이 상당히 분산되어 있다는 점 등이 원인이
이다. 또 2006년 12월 현재 경기도 안산이나 시흥 등에서 대규모의 신석기시대 취
었을 것이다. 간혹 한 집에 사는 가족 수를 셈해보기도 하는데 성인 한사람당 필요
락이 발굴 중인데, 취락의 형성이 꼭 경제적인 이유로만 분포 확산되는 것이 아니라
한 면적(4.5㎡)으로 나누었을 때 대가족제도였을 것으로 추정한 견해 등이 전부이
자원 획득 행위와 이를 위한 입지상의 문제가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관점의 확
다.109) 한편 서해 도서상의 조개더미와 야외집석유구∙저장움 등을 통해 선사시대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사람들의 행위에 대한 추구나 계절성에 대한 접근 등이 비교적 활발하다.
220
더미들이 찾아진다는 점에서 초기 농경체제가 와해되고 취락의 쇠퇴 등이 엿보인다
사회구성을 추구하기 위한 자료로서 집자리 못지않은 자료가‘무덤’및 무덤에서
앞에서 경기도 및 한강 하류의 집자리 가운데 연천 삼거리, 삼목도, 오이도, 영종
나오는‘껴묻거리[副葬品]’ 이나 아직 중부지방에서는 시도 이외에 무덤으로 추정되
도 는들, 연평도, 을왕동, 호평 등의 마을이 있음을 보았다. 한강유역에서 삼거리 및
는 자료가 없다. 남해안지방 무덤을 통해 연구된 바에 의하면 당시는 신분이나 지위
암사동유적을 제외하면 Ⅰ기의 증거가 부족하다고 한 바 있으므로 Ⅰ∙Ⅱ기의 집자
의 출토 상의 차이가 인정될 만한 사회라는 추정이 있으며,112) 중요한 근거로는‘옥’
리를 합해서 보면110) 집자리들은 평면 네모꼴에 4기둥을 배치하고 집자리 가운데
를 들고 있다. 옥은 위신재의 하나로서 춘천 교동∙후포리∙범방∙연대도∙문암리
108) 박상진, 앞의 논문, 1992. 109) 정성희, 앞의 논문, 1994, 92쪽. 110) 이하 1~4기의 시기구분은 임상택, 앞의 논문, 2006의 분류임.
111) 이하 임상택, 위의 논문, 2006의 취락구조 부분에서 약술함. 112) 이상균,〈한반도 신석기인의 묘제와 사후세계관〉 《고문화》56, 2000. 임학종,〈남해안 신석기시대의 매장유구〉 《선사와 고대》18, 2003, 25~56쪽.
등의 신석기시대 무덤에서 출토되며, 동삼동∙주월리∙사촌리∙계화도∙평남 궁산
223
출토 유물은 다음과 같다.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유적 등에서도 옥이 나온 바 있다. 이런 부분은 흥미롭지만 사회구성을 심도있게 추 구하려면 계급이나 계층화, 신분, 지위 등의 용어에 대한 정의(합의)가 먼저 필요할
상시 : 투박조개(팔찌), 반지락, 종밋
정도로 아직 연구가 요원한 편이다.
금굴 : 투박조개(팔찌) 쌍굴 : 투박조개(팔찌), 굴, 담치류, 전복
(2) 교환(exchange) 신석기시대의 교환(교역)연구는 누구나 인정하듯이 어렵다보니 교환되었다고 여 겨지는 물품의 지적은 종종 있으나 교환의 원인 또는 현상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드 문 편이다. 여기서는 간단히 교환을 정의한 뒤, 교환의 증거가 되는 문화유물과 자 연유물을 일별해 보자. 신석기시대 교환의 단계는 호혜(reciprocity) 정도이며, 교환이 성립되는 전제조 건은 시간적 동시성과 서로간에 정체성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둘 이상의 집단이 될 것이다. 이들이 물자와‘정보’ 를 주고 받는 것이다. 교환연구를 심화시키려면 교환 이 상대방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상대방의 내부에서 보는 내부자 관점(emic perspective)에 대한 관심과, 교역 이후 상호 사회에 생겨나는 문화변용 (acculturation)을 고려해야 한다.113)
쌍굴 출토 굴 및 바다조개류115)
전국적으로는 신석기시대 교환물품이 증가하는 추세이다. 즉 그 지역에서 이질
222 성 격 과 문 화 기 반
적인 자연 및 문화유물의 확인이 일차적으로 교환현상을 지시할 것이다. 가령 내륙
한강 하류 신석기집단간의 교환의 증거를 토기 양식상의 변화(토기무늬)를 가지
깊숙이 남한강유역의 석회암 동굴인 금굴∙상시∙쌍굴 등에서는 종종 바다조개류
고 간접적으로 추론할 때 금탄리 1식 토기가 그 지표가 된다. 평남 금탄리유적의 토
가 출토되는데, 이들은 동해안 또는 남해안지역에서 가져왔음이 명확한 것이다.114)
기무늬가 암사동을 비롯한 한강하류유적에서 나타나는 것이 신석기시대 3기 무렵
특히 투박조개는 남해안의 껴묻거리로 유명한데, 위의 세 동굴(바위그늘)유적에서
(중기 이후) 교환망이 형성∙확대되어 가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충주 조
모두 나왔다. 이것들과, 교환하는 무엇을 담은 용기는 뒤에 그 지역에서 모방되어
동리유적116) 등지에서 암사동 양식의 토기가 나온다는 점에서는 한강 하류와 남한
복제되며 일종의 문화변용 현상이 일어났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남한강유역의 토기
강유역과의 교류도 인정된다. 중국 동북지방에서 자주 나타나는 石環이 영종도 송
들이 남해안 계통이나 봉계리식 등과 닮았다는 기존의 관찰에서 이를 찾아볼 수 있
산유적에서 나타났음도 교환의 일례라고 볼 수 있다.117)
다. 발굴시 微小 동물화석 출토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더 많은 증거들이 나올 것임에 틀림없다.
113) 신숙정, 〈강원 영서지방의 신석기문화〉 《한국신석기연구》11, 141~168쪽에서 재인용. 114) 이것이 동해∙서해∙남해의 어느 바다 것인지도 조가비 분석에 의해서 어느 정도 알아낼 수 있 을 것이다.
신석기시대의 교환 연구에서 가장 기대를 하는 분야는 과학적 분석이다. 흑요석 은 원산지가 일정하다는 점에서 교환을 가장 뚜렷이 지시하는 물품 가운데 하나이
115) 연세대학교 박물관,《연당 쌍굴 : 사람, 동굴에 살다》 , 2004, 54∙66쪽에서 인용함. 116) 충북대학교 박물관,《충주 조동리 선사유적》Ⅰ∙Ⅱ, 2001~2002. 117) 임상택, 앞의 논문, 2006, 136~137쪽.
225
에서 필요한 예술을 의미한다. 이들을 고고학적으로 어떻게 검증하는가, 제의적 측면을 어떻게 체험해서 복원 하는가에 대한 연구는 두가지 방향이 있다고 여겨진다. 하나는 암각화, 彫塑나 彫 像, 玉을 비롯한 각종 치레걸이 등의 가시적인 유물(예술품)들에 대한 연구이다. 해 석학적 측면이 많이 요구될 것으로 여겨지며, 실제로 최근의 후기과정 고고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고고 민족지적 연구로써 물고기잡이 사회의 풍어제, 농경사회의 곡물과 토지에 관한 제의, 장송의례 등에 접근해 가면 실마리가 제시될 것으로 여겨진다. 한국 신석기시대 연구에서 아직 후자에 대한 관심은 표명되지 않았다. 예술품 연 영종도 송산 출토 흑요석
구에서, 암각화 가운데 대표적인 반구대의 경우 해당시기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있 으나 고래잡이를 비롯하여 신석기시대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아마도 풍요와
므로 그 성분을 분석하여 원산지를 지정하고 출토지점과의 근∙원거리 교환을 추정
다산의 기원이라는 관점에서 볼 수 있을 듯 하다. 고령 양전동의 경우 태양신과 관
할 수 있다. 남해안의 흑요석에 대해서는 성분분석 결과 일본 큐슈지방의 고시다께
련 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치레걸이 또는 護身符는 가장 자주 나오는 것들인
에서 가져왔다는 것이 정설이다. 한강 하류에서는 영종도 송산, 영종도 는들, 오이
데 서포항, 동삼동, 농포동, 울산 신암리, 고성 문암리유적 등에서 출토되었다. 동삼
도 안말 조개더미 세 유적에서 흑요석기가 출토되었다. 이런 추세로 보아 앞으로 더
동의 국자가리비나 서포항의 사람얼굴 모습은 주술사가 쓰던 가면이라고 여겨지고
찾아질 가능성이 높다. 중부지방 흑요석기의 원산지를 규명하는 작업과 함께 이 무
있다. 서포항에는 뱀과 개 등의 호신부도 있다. 신암리나 농포동에서는 여성을 형상
렵 흑요석을 중심한 교역망 형성과정을 추구함은 매우 흥미있을 것이다.
화한 조각상이 나와 그야말로 풍요와 다산의 기원이라는 생각이 들게된다. 문암리
(3) 의식과 신앙, 예술활동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신앙은 그들이 기대고 살면서도 정체를 잘 알 수 없는 자 연에 대한 두려움, 천재지변의 공포, 풍요와 다산에 대한 기원, 가까운 이의 죽음으 로부터 비롯되는 슬픔과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들 등으로부터 형성된 것일 것이다. 그 형태는 동북아시아를 비롯하여 전세계에 광범히 퍼져있는 신앙 형태인 샤머니 즘, 만물에 정령이 깃들어있다고 여기는 애니미즘, 또 아이누족 등이 가지고 있는 224 성 격 과 문 화 기 반
곰 숭배 등으로부터 유추되는 토테미즘 등이 있다고 일반적으로 여겨져 왔다. 사실 이것들은 공감되면서도 본격 연구는 없었던 부분이다. 신앙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현되는 절차가 의식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예술도 탄생할 것이다. 예술감각은 토기나 아름다운 석기∙뼈도구 등 생활필수품을 만들 때에도 적용되나 여기서는 생활미술을 제외하고 신앙에 관한, 의식을 치르는 과정
영종도 는들집자리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무 잦음을 지적할 수 있다. 한강유역에서 미사리유적으로부터 팔당을 거쳐 양평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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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종도 는들유적에서는 구릉 정상부에 回字 모양으로 돌아가는 溝 1기를 찾은 바
근리,120) 앙덕리,121) 대심리,122) 양수리,123) 문호리,124) 양주 진중리125) 등 한강 중류
있다. 크기는 12.7×12.4m, 구의 폭은 1m, 깊이는 최대 50cm로서 대형이며 그 안
로 올라가면서 빗살무늬토기와 무문토기의 바탕흙이 서로간에 혼용되는 현상(무문
에서 지름 2m 정도의 적석시설이 찾아졌다.
토기의 바탕흙에 빗살무늬가 베풀어져 있는 등의)이 자주 지적된다. 미사리유적의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유적에서는 밑이 터져있는 옥 귀걸이[缺狀耳飾]가 찾아진 바 있다.
구 내부의 최하층에서 빗살무늬토기가 나와 신석기시대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
경우 발굴에 참가한 팀 대부분이 그 같은 토기의 출토를 보고한 바, 미사리 전 지구
다.118) 이런 유구의 발굴은 처음이나 바다를 내려다보는 구릉 정상부에 있는 점, 규
에 걸쳐 그 같은 예를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이다.126) 이는 편의적으로 신석
모가 대형이며 그 안에 적석시설이 있는 점 등으로 일종의 제사관련 유구일 것으로
기~청동기의 과도적 현상으로 언급되어왔다.127)
여겨진다. 이는 신석기시대의 의례와 관련해 매우 중요한 발견이다. 앞으로 비슷한 입지에서 이와 같은 유구의 발굴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위, 파주 교하리 집자리 내부, 강화 삼거리 고인돌 주변 등이 그러하다.130) 2005년
거리 등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한강 하류에서는 아직 본격적인 신석기시대의 무덤
발굴된 남양주 호평의 장방형 집자리 내부에서도 빗살무늬토기가 섞여 나타나는131)
이 나타나지 않았으나119) 남∙북한강유역에는 쌍굴, 상시 2바위그늘과 교동 등의
등 이러한 현상은 지속적으로 나타나며 점점 자주 지적된다.
이 나타나므로 빠른 시간 내에 이들에 대한 연구 진척이 이루어질 것이다.
5.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한강 하류의 신석기문화는 농경을 통한 경제규모의 확대, 취락의 확대나 개척, 교환 및 교역의 증가, 이로 비롯되는 사회구성의 복잡화 등으로 점차 다른 사회구성 과 제도를 향해 개편되어 갔을 것이다. 한강 하류 및 경기도 일원에는 농사짓기, 배 를 통한 주변지역과의 물류교환과 교환망 구축, 계층사회의 등장, 읍내와 변두리 마 을 간의 격차발생, 玉 장인의 존재 확인(미사동유적), 소도의 전신으로 여겨지는 기 구의 출현(고강동의 산상 적석유구) 등 청동기시대의 특징적인 현상들이 많이 찾아 성 격 과 문 화 기 반
발하는데, 평택 지제동,128) 흔암리 1∙3호 집자리,129) 옥석리 고인돌 무덤 아래와 주
신앙과 의례에는 역시 무덤이 중요하다. 장송의례에는 무덤과 무덤쓴 방법, 껴묻
동굴에서 찾아진 무덤이 적지 않다. 또 남해안의 조개더미유적에서 다수의 무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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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강 하류의 무문토기 집자리나 고인돌 하부에서 빗살무늬토기가 매우 빈
지는데, 이는 신석기문화 시기의 질∙양면에서의 확대라고 여겨진다. 우선 한강유역에서 신석기~청동기문화의 흔적들이 겹쳐서 나타나는 현상이 너
118) 임효재∙양성혁,《영종도 는들 신석기유적》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소, 1999. 119) 시도에 추정무덤이 있음은 앞에서 언급하였다.
이렇게 빗살무늬토기~무문토기의 교호현상, 나아가 유구와 유물의 뒤섞임 현상 이 너무 잦은데 대해 계속 우연적인 또는‘그저’과도적인 양상으로만 놓아둘 수 없
120) 손보기∙이융조,〈양평군 양근리지역, 앙덕리지역 유적발굴보고〉 《팔당∙소양댐 수몰지구 유 적발굴 종합조사보고》 , 문화재관리국, 1974, 115~169쪽. 121) 단국대학교 중앙박물관∙서울지방국토관리청,《양평 앙덕리 유적》 , 1998. 122) 김원룡 외,〈양평군 대심리 유적발굴보고〉 《팔당∙소양댐 수몰지구 유적발굴 종합조사보고》 , 문화재관리국, 1974, 171~282쪽. 123) 이호관 외,〈양평군 양수리 지석묘 발굴보고〉 , 위의 책, 1974, 283~325쪽. 124) 황용혼,〈양평군 문호리지구 유적발굴보고〉 , 위의 책, 1974, 327~378쪽. 125) 임병태,〈양주군 진중리 선사유적 발굴보고〉 , 위의 책, 1974, 401~425쪽. 126) 미사리 선사유적 발굴조사단∙경기도 공영개발사업단,《미사리》Ⅰ, 1994, 210쪽 ;《미사리》 Ⅱ, 1994, 31∙84∙346쪽. 127) 사실상 이런 현상은 경기도∙한강 본류 유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나타난다. 필자는 한강 본류~ 남∙북한강에서 나타나는 두 시기 토기의 무늬∙태토의 교환현상을 여러 곳에서 지적한 바 있다. 신숙정,〈중원지방의 빗살무늬토기 고찰〉 《손보기박사 정년기념 고고인류학 논총》 , 지식산업 사, 1987, 341~387쪽. 신숙정,〈신석기시대의 중원문화〉 《선사문화》2, 1994, 83~106쪽. 128) 최정필,〈평택 지제동 청동기시대 취락지유적에 대하여〉 《한국선사고고학보》6, 1999, 177~188쪽. 129) 서울대 박물관,《흔암리주거지》 , 1973. 130) 이상 김재원∙윤무병,〈옥석리유적〉 ∙ 〈교하리유적〉 ∙ 〈삼거리유적〉 《한국지석묘연구》 , 국립박 물관, 1967, 23~78쪽. 131) 서길덕,〈남양주 호평동유적 조사개보〉 《영서지방의 신석기문화》한국 신석기학회 학술대회 발 표요지, 2005.
는 것이다. 필자는 이것이 빗살무늬토기문화집단과 무문토기문화집단이 동일 지역
최근의 발굴성과는 이러한 예상이 타당함을 입증하는 쪽으로 드러나고 있다. 우
에서 살아가는 중에 생겨난 발전과정의 흔적으로 봄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한다. 옥
선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는 같은 레벨 상의 지형을 이용한다. 현재 발굴 중인 시
석리∙교하리유적을 예로 든다면 모두 김포~일산지역과 가깝다. 이미 일산지역에
흥과 안산지역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집자리가 풍화암반을 까고 들어가거나 고토양
서 보았으므로 이제 신석기시대 이래로 이들 유적의 생업 가운데 농경이 자리잡고
위에 집을 지어 신석기인들의 고토양 이용 현상을 확증해 준다. 그리고 신석기시대
있음을 의문시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집 주변에서 나오는 청동기시대의 장방형 집자리에는 예외 없이 빗살무늬토기들이
한강 하구에서 파주 옥석리-교하리-다율리∙당하리-야당리-김포-강화로 연결
끼어서 나오는데 이러한 예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한강 하류 및 경기도 일원의 장
된다. 옥석리는 고인돌 24기 이상과 집자리가 나오며 교하리에 고인돌 109기 이상,
방형 집자리와 그 출토유물에 대한 연구는 신석기와의 관련성 없이 고찰하기 어렵
다율리와 당하리에 30기 이상, 강화도 고인돌은 약 120여 기에 이른다. 아마도 농사
게 되었다는 상황이 신석기~청동기의 전환과정을 시사하는 것이다. 앞으로 이 주제
짓기가 본격화해 나간 김포지역에 무수한 고인돌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결국
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어야 할 것이다.
한강 하구 곳곳에 군집하는 이들 고인돌과 집자리는 신석기시대 이래로 이곳에 뿌 리박고 살면서 농사를 지어왔던 집단이 외부 집단과의 알력∙대립 속에서 점점 확 대되어 커져간 취락의 일부로 추론되는 것이다. 이들의 후예가 이곳에서 인구∙취 락∙생산력의 증가와 함께 새로운 문화, 청동기문화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저항하 면서 살아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132) 이러한 사실은 경기지역 주요 청동기시 대유적 분포도를 통해 알 수 있다.
228 성 격 과 문 화 기 반
1. 연천 삼거리 2. 강화 삼거리 3. 파주 옥석리 4. 파주 교하리 5. 파주 당하리 6. 인천 검단2지구 7. 부천 고강동 8. 시흥 계수동 9. 시흥 목감동 10. 군포 대야미동 11. 안양 관양동 12. 서울 역삼동 13. 서울 가락동
14. 시흥 율전동 15. 화성 고금산 16. 용인 봉명리 17. 하남 미사리 하남 망월동 하남 덕풍동 18. 여주 흔암리 19. 평택 토진리 20. 평택 현화리 21. 평택 지제동 평택 방축리 22. 평택 칠과동
■ 흔암리유형 ● 역삼동유형 ▲ 팽이형토기문화
◆ 가락동유형 □ 복합유형
경기지역 주요 청동기시대유적 분포도133)
132) 신숙정,〈청동기시대 전기의 농사짓기에 대한 이해〉 《동방학지》115, 2002, 40~43쪽. 133) 김한식, <경기지역 역삼동유형의 정립과정>《고고학》제5권, 2006.
(신 숙 정)
229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청동기문화
전까지 순동을 그대로 두드려서 간단한 꾸미개나 치레걸이를 만들다가 차츰 기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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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에 따라 단단한 금속인 청동을 합금하기 시작하였다. 청동은 구리에 주석이나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비소, 그리고 납을 섞어서 만드는데 주석의 합금 비율이 28%일 때 구리의 경도가 가장 굳게 되며 납은 주조한 다음 표면의 마감처리를 위하여 사용한다. 한편 우리의 청동기에는 유동성을 좋게하여 주조하기 쉬운 역할을 하는 아연이 제법 많이 포함 시대 개념과 기원 유적 생업 경제와 사회상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되어 있어 합금의 성분으로 보면 시베리아지역의 청동기와 비슷하다. 이처럼 합금기술을 터득하게 된 사람들은 처음에 동검이나 청동 연모보다는 청 동 손칼, 청동 단추, 청동 방울 같은 작은 제품이나 치레걸이를 만들었다. 이러한 이 른 시기에 만들어진 청동 유물이 발견된 곳은 용천 신암리∙나진 초도∙평양 금탄 리유적 등 주로 북부지방에 자리한다. 신암리유적의 위층(Ⅱ)에서 출토된 민무늬토 기와 청동 손칼∙청동 단추는 요동반도의 대련 于家村 위층과 上馬石 위층의 출토 유물과 비교된다.136) 금탄리유적의 Ⅲ문화층에서는 청동 끌이, 초도유적에서는 가
1. 시대 개념과 기원
락지처럼 청동판을 두드려서 만든 청동 단추와 청동 방울이 찾아졌다.137) 청동기문화의 분포지역과 청동기의 제작 주체에 관한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청
한국사에 있어서 청동기문화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 것은 광복 이
동기문화의 분포지역에 대한 구분은 대체로 銅劍을 標�遺物로 하고 있다. 우리의
후 우리 선사문화 연구에서 얻어진 중요한 성과 가운데 하나이다.134) 일제강점기 동
청동기문화는 전체적인 모습이 중국 옛 악기인 비파를 닮은 비파형(요령식∙만주
안에는 식민사관에 의하여 우리의 역사에 청동기문화(시대)는 없었고 석기와 금속
식∙고조선식∙부여식∙곡인검)동검이 많이 출토되고 있는 고조선의 영역인 요령
으로 만든 연모가 같은 시기에 함께 이용된 �石竝用期 또는 銅石器時代(Eneolithic
지역을 포함한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 전역을 그 범위로 인식하고 있다.138) 청동기
Age)의 문화단계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135) 이것은 광복 이후에도 상당기간 동
의 제작 문제는 크게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경우와 주조 기술이 들어와 독자적으로
안 설득력 있게 제시되어 왔다.
만든 경우로 구분이 되는데 최근에는 다른 지역에서 만들어져 유입된 경우에도 청
청동기문화는 청동을 이용하여 연모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살림을 꾸리던 文化相
230 성 격 과 문 화 기 반
동기문화로 인식하는 적극적인 해석이 보편적이다.
을 가리킨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민무늬토기[無文土器]와 간석기가 제작되어
청동기문화의 연대 설정에는 청동 유물만을 대상으로 변화과정을 검토한 견해와
이룩된 문화를 일반적으로 민무늬토기문화라고 부르면서 이 시기를 청동기시대로
같이 나오는 유물이나 유구를 비교하여 기준을 설정하려는 견해 등이 있는데, 일반
인식하고 있다.
적으로 비파형동검이나 한국식동검(세형동검)의 변천과정에 따라 시기를 구분하고
초기의 청동기 제작 방법을 보면 먼저 구리에 다른 금속을 섞어 청동을 만들기 134) 정백운,《조선 금속문화 기원에 관한 고고학적 자료》 , 과학원 출판사, 1957. 김정배,〈한국 청동기문화의 사적 고찰〉 《한국사연구》6, 1971, 1~34쪽. 하문식,〈한국 청동기시대 묘제에 관한 한 연구〉 《박물관기요》6, 1990, 29~31쪽. 135) 梅原末治∙濱田耕作,〈김해패총발굴조사보고〉 《대정9년도고적발굴조사보고》제1책, 조선총독 부, 1923, 45~47쪽.
있다.
136) 신의주력사박물관,〈1966년도 신암리유적 발굴 간략 보고〉 《고고민속》2, 사회과학원출판사, 1967, 42~44쪽. 137) 황기덕,《조선의 청동기시대》 , 사회과학출판사, 1984, 85~88쪽. 138) 김정학,〈한국 청동기문화의 편년〉 《한국고고학보》5, 1978, 1~15쪽.
한국의 청동기문화 상한 연대에 관하여 는 여러 견해들이 있다. 특히 청동기문화의
비파형 동검
문화의 대표적 유물인 桃氏劍이 발견되고 있어 서해안을 중심으로 한 문화 전파나 교류의 가능성도 시사한다.
시작에 관하여는 빗살무늬토기와 민무늬토
시베리아지역의 미누신스크 청동기문화는 안드로노보(Andronovo)기, 카라스크
기와의 관계, 청동기가 무기나 생산을 위한
(Karasuk)기, 타가르(Tagar)기 등으로 나누어진다.140) 안드로노보문화는 시베리아
연모로서 어떠한 기능을 가졌는가 하는 문
중부지역을 중심으로 이룩된 문화이고, 카라스크문화는 B.C. 13세기 무렵 남부 시
제가 밝혀져야 할 것이다. 현재 학계의 대
베리아 예니세이강 상류지역에서 형성되어 외몽골로 전파된 다음은 문화와도 교류
체적인 분위기는 B.C. 13세기 무렵으로 보
하게 된다. 그리고 점차 동쪽으로 옮겨와 한국 청동기문화의 뿌리를 이루게 된다.
고 있으나, 최근 조기단계를 설정하여 B.C.
농경생활을 바탕으로 형성된 카라스크문화는 넓은 판자돌로 만든 돌널무덤, 안으로
20세기일 가능성도 시사하고 있다.139)
굽은 자루에 짐승이 장식된 청동 손칼, 자루가 달린 동검, 뒤쪽에 꼭지가 있는 청동
이런 몇 가지 사항으로 보아 한국의 청동 기문화는 비파형동검이 출토되고 있는 중 국 동북지역까지를 포함하며 시베리아 청
단추, 여러 개의 청동 단추를 이어 붙인 �珠 모양 장식품이 특징이다. 한편 강계 풍룡동의 돌널무덤에서는 시베리아지역에서 찾아진 것과 같은 청동 단추가 출토되어 카라스크문화의 영향을 더욱 뚜렷하게 보여준다.
동기문화와 관련시키려는 적극적인 해석이 필요할 것으로 여겨진다. 한국의 청동기문화 기원에 대하여는 여
2. 유적
러 의견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동검을 비롯 한국식 동검
한 무기나 연모보다 먼저 제작된 청동 손칼 이나 청동 단추 등이 언제∙어떻게 생산되
여기에서는 백제한성시대의 기층문화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이해하기 위하여 주로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중요한 청동기시대유적과 그 성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었는가 하는 것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청동기문화는 대체적으로 중원의 殷의 영
│ 집터 │
향을 받았다는 견해와 시베리아지역의 미
(1) 화천 용암리유적
누신스크(Minussinsk), 스키트(Scyth) 청
화천군 하남면 용암리 북한강 언저리의 자연 제방 위에 자리하며 집터 169채, 구
동기문화에 북방 오르도스(Ordos)지역의 232 성 격 과 문 화 기 반
도씨검(완주∙재령∙평양지역에서 출토)
덩 유구 32기, 掘立柱 유구 13채, 돌널무덤 등이 발굴되었다.141)
청동기가 섞인 시베리아 청동기의 영향이
집터는 발굴 구역의 북서쪽에 밀집 분포하며, 평면 형태는 긴 네모꼴과 네모꼴로
미쳤다는 두 가지 의견이 있는데 대체적으
구분된다. 긴 네모꼴의 긴 방향은 대체로 강물의 흐름이나 주변 지세와 나란하고 대
로 후자의 영향이 더 많았던 것 같다. 하지
형 집터(9∙73∙93∙115호)를 중심으로 여러 집터가 밀집 분포하는 모습을 보이고
만 완주∙재령∙평양지역에서 중원 청동기
있다. 집터의 내부 시설은 구덩식[竪穴式] 화덕자리, 저장 구덩이, 작업 구덩이, 뒷
139) 최몽룡,《최근의 고고학 자료로 본 한국고고학∙고대사의 신연구》 , 주류성, 2006, 59~78쪽.
140) 최몽룡∙이헌종∙강인욱,《시베리아의 선사고고학》 , 주류성, 2003, 242~347쪽. 141) 강원문화재연구소,《용암리유적》Ⅱ, 2005.
233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채움 시설, 나들이 문, 기둥 구멍 등이 조사되었다. 화덕자리는 집의 크기에 따라
235
2~5기로 증가하는 것으로 밝혀졌고, 기둥구멍은 네 벽의 가장자리에서 일정한 간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격으로 찾아졌다. 그리고 집터의 바닥은 황갈색 찰흙을 깐 다음 다진 것과 불을 놓 은 것이 섞여 있다. 구덩 유구는 둥근꼴과 네모꼴이 있는데, 집터 옆에 있는 것은 저장의 쓰임새였던 것 같다. 굴립주 유구는 유적의 서쪽에서 조사되었으며, 대부분 집터를 파괴한 다음 만들었고 정면 1칸, 옆면 1~2칸의 크기인데 창고의 기능을 가졌던 것 같다. 출토 유물은 바리 모양의 구멍무늬토기, 항아리 모양 토기, 붉은 간토기와 여러 가지의 화살촉(1단 또는 2단의 슴베가 있는 것)과 간돌검(자루 있는 것, 마디 있는 것), 돌창, 반달돌칼, 대패날 도끼, 돌끌, 검 손잡이 끝 장식 그리고 여러 뗀석기가 있다. 이 유적은 청동기시대 마을의 변천과정과 구멍무늬토기문화의 전파 경로를 보여 주는데 있어 상당히 중요하며, 북한강유역의 청동기문화상을 이해하는데 여러 자료 를 제공하고 있다.
(2) 춘천 내평리유적 춘천시 북산면 내평2리에 위치하며, 소양강 수몰지역 조사 때 집터 1기가 발굴되 었다.142) 집터의 평면 형태는 모줄임 네모꼴이며, 집터 안에서 많은 숯기둥이 찾아졌다. 출토 유물은 독사 머리 모양 화살촉, 숫돌, 간돌검 조각, 반달돌칼, 빗살무늬토기 조 각 등이 있다.
연천 삼거리유적 출토 여러 토기
이 유적은 민무늬토기 집터 안에서 빗살무늬토기가 찾아졌는데 층위로 볼 때 구 분이 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두 문화가 서로 공존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또한
이쳐 흐르면서 큰 충적대지를 형성하고 있다.143) 발굴조사 결과 집터 4채, 소형 유
소양강유역의 초기 청동기문화 형성 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구 3기가 찾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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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터의 평면 형태는 긴 네모꼴이며, 기둥구멍은 긴 벽을 따라서 부분적으로 찾아 (3) 연천 삼거리유적
졌다. 화덕자리는 구덩식으로 깊이는 7㎝쯤 되어 얕은 편이며, 집터의 긴 방향을 따
연천군 군남면 삼거리 임진강 옆 모래언덕 위에 자리하며, 이곳에서 임진강이 굽
라서 2~3기씩 자리하고 있었다.
142) 한병삼∙이호관∙조유전∙지건길∙최몽룡,〈소양강수몰지구유적발굴조사〉 《팔당∙소양댐수몰 지구유적발굴종합조사보고》 , 문화재관리국, 1974, 457~486쪽(이하《팔당∙소양댐》 으로 줄임).
143) 송만영∙이소희∙박경신,《연천 삼거리유적》 , 경기도박물관, 2002.
출토 유물은 짧은 빗금무늬의 겹아가리토기, 빗금무늬가 있는 겹아가리의 구멍 무늬토기, 팽이 모양의 바리형토기, 구멍무늬토기 등 여러 가지 토기가 있다. 또 석 기는 段이 있는 간돌검∙화살촉∙돌끌∙반달돌칼∙갈판과 갈돌이 찾아졌다. 특히 간돌검은 검 몸에 피홈이 있고 자루의 양쪽이 결입된 것으로 봉산 어수구 돌널무덤 에서 출토된 것과 비교된다. 집터의 연대는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2,930±50 B.P.로 밝혀졌다. 이 유적은 임진강유역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 마을이며, 서북지역의 팽이형토기 문화와 밀접 한 관련이 있는 것 같다.
237
(5) 여주 흔암리유적 여주군 점동면 흔암리 흔바위 마을의 남한강 언저리에 해발 123m 되는 낮은 산 이 남북으로 뻗어 있는데 이곳의 경사진 곳에서 마을유적이 찾아졌다.145) 집터는 산 흐름의 방향과 나란하면서 산 경사면을 이용하여 안쪽을 파‘ㄴ’ 자모 습을 한 상태에서 집을 지었으며, 평면 형태는 모두 긴 네모꼴이다. 움의 깊이는 집 터마다 차이가 있고 같은 집에서도 서로 달라 지붕의 서까래가 땅에 닿지 않는 반움 집이었던 것 같다. 집터에서는 나들이 자리, 화덕 자리, 기둥구멍, 벽과 선반 등의 시설이 조사되었 다. 1호 집터에서 찾아진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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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파주 옥석리유적
자리는 드러난 쪽이 가운데이고
파주시 월롱면 덕은리 옥석마을에 위치하며, 이곳은 문산천을 따라 펼쳐진 해발
여기서 집터의 바닥 쪽으로 조
80m쯤 되는 낮은 구릉지대이다. 이 유적은 1965년 국립박물관에서 고인돌을 발굴
금씩 낮아져 경사를 이룬다. 8
한 다음 그 바로 아래에서 집터를 찾아, 고인돌과 집터의 관계 및 연대를 알 수 있어
호에서 찾아진 화덕자리는 찰흙
중요하다.144)
을 쌓아 만든 U자 모양으로 북
발굴된 집터는 긴 네모꼴이며 움의 깊이는 주변 지세에 따라 40~90㎝로 차이가
한지역의 무산 범의구석, 회령
있다. 기둥구멍은 상당히 작은 편으로 매우 정연하게 네 벽을 따라 가면서 촘촘히
오동, 봉산 신흥동 집터에서 찾
있었다. 집터의 바닥은 얇게 진흙을 깔았으며, 구덩식의 화덕자리는 한쪽으로 치우
아진 매우 드문 경우다.146) 13호
쳐 바닥을 오목하게 파서 만든 2기가 찾아졌다.
와 14호 집터에서는 흙 벽으로
출토 유물은 간돌검을 비롯하여 20여 점의 화살촉∙돌가락바퀴∙별도끼∙숫돌
이루어진 칸막이가, 14호에서는
등의 석기와 구멍무늬토기가 찾아졌다. 그런데 간돌검은 사용하다가 부러진 것을
바닥보다 20㎝쯤 높은 곳에서
다시 만든 것이며, 숫돌 5점과 간석기의 돌감인 슬레이트 조각이 발견된 것으로 보
석기들이 놓여 있는 선반이 찾
아 집안에서 석기를 만든 것 같다.
아졌다. 그런데 14호 집터는 칸
한편 이 집터에서 찾아진 숯의 방사성탄소연대를 측정한 결과 2,590±105 B.P.
막이를 경계로 출토된 유물이
로 밝혀져 집터와 간돌검의 祖型에 관한 연대를 알 수 있었다. 또한 종래 일본 학자
뚜렷하게 구분되는데 남쪽에서
들이 간돌검은 한국식동검[細形銅劍]을 모방하여 만들었다고 주장하던 견해가 잘못 된 것임을 밝히는 계기가 되었다.
144) 김재원∙윤무병,《한국지석묘 연구》 , 국립박물관, 1967, 23~49쪽.
여주 흔암리 7호주거지 수혈벽 및 토기출토 상태
145) 서울대박물관 엮음,《흔암리 주거지 1973년도》 , 1973. 서울대박물관 엮음,《흔암리 주거지 1974년도》 , 1974. 서울대박물관 엮음,《흔암리 주거지》3, 1976. 서울대박물관 엮음,《흔암리 주거지》4, 1978. 146) 김정기,〈한국 수혈 주거지고(1)〉 《고고학》1, 1968, 31~60쪽. 하문식,〈청동기시대 중원문화〉 《선사문화》2, 1994, 110~1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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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모룻돌∙숫돌∙덜된 석기∙다듬질된 석기가 찾아져 석기 제작 장소로 해석되며, 북쪽에서는 완전한 토기와 숫돌이 나와 살림을 꾸렸던 것 같다.
흔암리유적의 농경 자료는 12호와 14호 집터에서 출토된 탄화쌀(Oryzasativa L.), 조(Setaria talica B.), 수수(Andropogon sorghum B.), 보리(Hordeum
한편 12호와 14호 집터는 긴 네모꼴이면서 바닥에 찰흙을 깔아 다진 점, 화덕은
sativum L.)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쌀은 모두 단립형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되었지
바닥을 파거나 그대로 이용한 점, 바닥 안쪽에 3줄의 기둥구멍이 있고 또 벽쪽으로
만 껍질(왕겨)이 벗겨진 상태에서 계측된 것이라 정확한 측정값으로 보기에는 어려
일정하게 작은 기둥구멍이 있는 점 등은 팽이형토기문화의 집터와 상당히 비슷하여
움이 있다. 이렇게 쌀을 비롯한 여러 가지 곡식이 출토되어 혼합농경을 하였던 것
서북지역 팽이형토기 문화와의 교류 가능성을 시사한다.147)
같으며 평양 남경유적과 비교된다.151)
출토 유물은 다양한 석기와 토기, 그리고 탄화된 곡식 등이 있다. 석기는 간돌
흔암리유적의 연대는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와 출토 유물을 통한 상대연대가
검∙돌창∙돌화살촉∙반달돌칼∙가락바퀴∙돌도끼∙갈판과 갈돌∙바퀴날 도끼∙
있다. 일부에서는 유물을 통한 비교 연구를 통하여 B.C. 7세기 무렵으로 설정하고
모루돌이 찾아졌다. 간돌검은 1단과 2단 자루식이 섞여 있으며 12호 집터에서는 한
있지만, 방사성탄소연대 측정값은 3,210±70 B.P., 2,920±70 B.P., 2,150±60
꺼번에 5점이 출토되어 주목된다. 돌화살촉은 가장 많이 출토된 석기인데 1단과 2
B.P. 등 여러 가지가 있어 어느 한 시기에 형성된 유적이 아니고 상당히 긴 기간 동
단의 슴베촉, 원통 모양[圓筒形], 돌바늘 모양[石針形], 삼각형 만입촉 등 상당히 여
안 쭉 이어져 왔던 것으로 해석된다.
러 가지다. 그런데 삼각형 만입촉은 주로 동북지역에서, 2단의 슴베촉은 서북지역 의 팽이형토기유적에서 찾아지고 있어 두 지역의 문화전파나 교류관계를 이해할 수
(6) 남양주 수석동유적
있다.148) 반달돌칼은 형태로 보면 短舟形이 가장 많고 돌감은 점판암∙사암∙편암
남양주시 수석동 석실마을에 위치하며, 주변의 지세는 한강에 인접한 북쪽의 해
등으로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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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80m 되는 얕은 산 능선이다.152)
토기는 민무늬토기를 비롯하여 늦은 시기의 빗살무늬토기, 팽이형토기, 구멍무
집터는 산꼭대기 쪽에 3채, 산 능선에 3채가 분포하고 있었으며, 모두 경사면의
늬토기, 여러 생김새의 붉은간토기, 골아가리토기, 덧띠토기 등이 찾아져 동북지역
풍화 암반을‘ㄴ’ 자 모습으로 파낸 다음 만들었다. 집안에서 화덕자리는 찾아지지
과 서북지역의 문화요소가 섞여 있다고 판단된다.149) 토기의 특징에서 두 지역의 문
않았지만 구석에서 불을 피웠던 흔적은 남아 있었다. 3호 집터는 길쭉한 숯이 섞여
화 속성이 섞인 모습은 구멍무늬와 빗금무늬, 골아가리와 빗금무늬가 있는 독특한
있는 단단한 찰흙층이 바닥에 약 10㎝쯤 깔려 있었는데 이것은 습기를 막기 위한 하
것으로 '흔암리식 토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의 방법으로 해석된다.
한편 흔암리유적의 토기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기 위하여 암석을 분석하였는
출토 유물은 뗀돌도끼∙돌창∙갈돌 등의 석기와 여러 종류의 민무늬토기가 찾아
데,150) 바탕흙은 찰흙질 광물(clay mineral)이고 비짐으로는 석영∙사장석∙정장
졌다. 특히 강돌로 만든 뗀돌도끼가 여러 점 찾아졌고 돌화살촉은 한 점도 없어 주
석∙각섬석∙녹염석∙견운모 등이 쓰였지만 석영과 장석이 대부분으로 밝혀졌다.
목된다. 토기는 민무늬토기에 돋을 띠가 있는 것[突帶土器], 갈색의 목이 긴 단지[長
그리고 붉은 간토기의 바탕흙은 상당히 정선되었으며, 민무늬토기에 비하여 석영과
頸雙耳壺], 검은 간토기[黑陶長頸壺] 등이 있다.
장석이 많은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이 유적은 집터에서 출토된 토기로 보아 청동기시대 후기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 지며 특히 한강 본류역의 이 시기 문화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147) 한영희,〈각형 토기고〉 《한국고고학보》14∙15, 1983, 96~97쪽. 148) 최몽룡∙박순발,〈여주 흔암리 선사취락지 출토 석기류(Ⅰ)〉 《고문화》26, 1985, 1~27쪽. 149) 이백규,〈한강유역 전반기 민무늬토기의 편년에 대하여〉 《영남고고학》2, 1986, 33~44쪽. 150) 최몽룡∙박양진,〈여주 흔암리 토기의 과학적 분석〉 《고문화》25, 1984, 3~8쪽.
151) 김용간∙석광준,《남경유적에 관한 연구》 ,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4, 191~202쪽. 152) 김원룡,〈수석리 선사시대 취락주거지 조사보고〉 《미술자료》11, 1966, 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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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터는 긴 방향이 대부분 옆에 흐르는 강물과 나란하며 집터들 사이에는 5m 정 도의 일정한 거리가 유지되고 있어 같은 시기에 마을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집터는 평면 형태에 따라 긴 네모꼴과 네모꼴로 구분되며 토기와 집터의 구조가 조 금씩 다르다. 긴 네모꼴 집터에서는 주로 구멍무늬토기가 출토되며 움의 깊이가 약 간 깊다. 그리고 네모꼴 집터에서는 덧띠새김무늬토기[刻目突帶文土器]가 출토되었 고 강돌을 돌려서 만든 화덕시설이 있다. 집터의 크기는 넓이가 13.5~65㎡로 비교적 다양한 편인데 쓰임새와 가족의 구성 원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긴 네모꼴 집터 가운데에는 길이와 너비가 3:1에 가 까운 아주 기다란 것도 있는데 이런 것이 한강유역의 서울 역삼동, 파주 옥석리∙교 하리유적에서도 조사되었다.154) 화덕자리는 집안의 구석으로 치우친 곳에 자리하 며, 타원형이 제일 많고 둥근꼴이나 모죽인 네모꼴도 있다. 만든 방법은 바닥을 10 ㎝쯤 얕게 파고 2~4장의 납작한 돌을 깐 다음 그 주위에 길쭉한 돌을 돌려서 만들 하남 미사리 청동기시대 방형수혈주거지 전경
었다. 집터 가운데에는 일상적으로 살림을 꾸리기보다 석기나 토기를 제작하던 곳 으로 여겨지는 곳도 있다.
(7) 하남 미사리유적 강굽이 현상으로 만들어진 한강 본류역의 충적대지인 하중도에 위치하며, 동북
기, 덧띠새김무늬토기, 덧띠토기, 붉은 간토기, 갈색 간토기, 흑색 토기 등이 있고
쪽에 한강의 본류가 흐르고 서남쪽으로는 샛강이 있다. 미사섬 옆에는 당정섬이 있
흙으로 빚어 만든 그물추와 가락바퀴도 있다. 석기는 간돌검∙화살촉∙돌도끼∙돌
어 높지 않은 구릉으로 둘러싸여 있고 평야가 넓게 펼쳐진 모습이다. 그리고 강 건
창∙돌칼∙숫돌∙갈돌∙그물추 등 청동기시대의 연모가 대부분 찾아졌다.
너에는 배후 산지가 형성되어 있다.
성 격 과 문 화 기 반
토기는 동북지역의 구멍무늬와 골아가리토기는 많이 찾아지지만 서북지역의 빗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 이 유적은 서울 권역에 위치한 최대 규모의 청동기시대
금무늬토기는 그렇게 흔하지 않아 토기 제작에서는 동북지역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유적이면서 신석기시대부터 초기 삼국시대, 삼국시대 등 역사시대까지의 문화층이
것 같다. 덧띠새김무늬토기는 조각들이지만 대체로 입술 부분은 곧고 둥근 바닥으
층위를 이루고 있는 복합유적으로 밝혀져 오랜 기간 동안의 문화 변천과정을 살펴
로 추정된다. 이 토기의 특징은 입술 부분에 있는데 그 모습은 입술 부분의 바깥쪽
볼 수 있다.153)
바로 밑 부분에 1줄의 덧띠(돋을 띠)가 돌려지고 거기에 비스듬하게 새김무늬가 있
청동기문화층은 신석기시대에 해당되는 층위(황갈색 모래층) 바로 위의 흑갈색 240
출토 유물은 상당히 다양한 편인데 토기는 민무늬토기를 비롯하여 구멍무늬토
모래찰흙층에서 찾아지며 퇴적에 따라 차이가 조금씩 있다. 1988~1992년까지 실
는 것이다. 최근 이 토기의 출토유적이 증가하면서 그 성격이나 연대에 관하여 활발 한 논의가 진행 중인데,155) 대체로 초기 청동기문화의 확산과 관련시키고 있다.
시된 발굴∙조사에서는 청동기시대 집터 37채, 작은 움 유구 30기가 조사되었다.
153) 임효재,〈미사리 긴급발굴보고〉 《한국고고학연보》8, 1981, 10~13쪽. 윤세영,〈미사리 주거지〉 《사총》25, 1981, 175~188쪽. 미사리 선사유적발굴조사단∙경기도 공영개발사업단,《미사리》1~5, 1994.
154) 김양선∙임병태,〈역삼동 주거지 발굴보고〉 《사학연구》20, 1968, 23~51쪽. 김재원∙윤무병, 앞의 책, 1967, 36~49∙56~58쪽. 155) 김재윤,〈한반도 각목돌대문토기의 편년과 계보〉 《한국상고사학보》46, 2004, 31~69쪽 ; 천선 행,〈한반도 돌대문토기의 형성과 전개〉 《한국고고학보》57, 2005, 61~97쪽.
241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243
한편 미사리유적에서 발굴된 집터의 배치에 따른 공간 문제와 흔암리식 토기의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분석을 통하여 마을유적의 형성 과정과 공간 분포 관계, 집터의 성격을 밝히는 연구 가 진행되고 있다.156)
(8) 하남 망월동유적 하남시 망월동의 한강 옆에 위치하며, 집터 4채와 구덩 유구가 발굴되었다. 이 유 적은 미사리유적의 바로 옆에 있으며, 단독으로 이루어진 해발 54.6m 되는 낮은 야 산의 기슭에 자리한다.157) 집터는 산의 기울기를 고려하여 등고선과 나란하게 풍화암반층을 파서 축조하였 고, 평면 형태는 긴 네모꼴이다. 집터의 바닥에서 불탄 흔적이 찾아졌으며 화재에 의하여 폐기된 것으로 해석된다. 출토 유물은 민무늬토기와 대형의 구멍무늬토기, 흙과 강자갈돌로 만든 그물추, 슴베있는 화살촉, 돌도끼, 숫돌, 갈돌과 갈판 등이 있
서울 역삼동유적 출토(역삼동식 토기)
서울 가락동유적 출토(가락동식 토기)
다. 인근의 미사리유적과 문화상이 비슷하며 역삼동유적과도 비교된다. (9) 서울 역삼동유적 서울시 강남구 도곡동(옛 성동구 역삼동) 매봉역 북쪽에 있으며, 한강 본류의 샛 강인 양재천 옆의 해발 94.5m 되는 독고리산 꼭대기에서 집터 1채가 찾아졌다. 집터의 평면 형태는 긴 네모꼴이며 길이가 16m, 너비 3m, 움 깊이 70㎝로 상당 히 큰 집이었던 것 같다.158) 바닥에는 많은 양의 숯이 깔려 있어 화재에 의하여 폐기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네 벽면을 따라서 1~2m 간격으로 지름이 10~15㎝ 되는 기둥 구멍이 찾아졌으며 동쪽과 서쪽 벽에서는 높이 20㎝쯤 되는 숯 기둥이 서 있었다. 남쪽 벽에 밋밋하게 경사진 조금 높다란 곳이 있었는데 이곳이 나들이문의 역할을 하였던 것 같다. 출토 유물은 골아가리 구멍무늬와 구멍무늬가 있는 바리형과 항아리 모양 토기, 하남 망월동 1호 집터
하남 망월동 2호 집터
242 성 격 과 문 화 기 반
짧은 목의 붉은 간토기, 돌도끼, 돌끌, 슴베있는 것과 없는 화살촉, 반달돌칼, 숫돌, 갈판과 갈돌 등이 있다. 이 유적에서 찾아진 토기를 표지로‘역삼동식 토기’ 라고 부 르기도 한다.
156) 송만영,〈남한지방 농경문화 형성기 취락의 구조와 변화〉 《한국 농경문화의 형성》 , 2001, 96~99쪽. 157) 세종대박물관,《하남 망월동》 , 2004 참조.
158) 김양선∙임병태, 앞의 논문, 1968, 23~51쪽.
(10) 서울 가락동유적 서울시 송파구 가락동에 위치하는데 1961년 고려대학교에서 발굴조사를 한 다음 1975년 잠실지구 토지구획정리 사업 때 조사가 실시되어 6채의 집터를 찾았다.159)
돌검, 슴베있는 화살촉, 숫돌, 갈돌과 갈판 등이 있다. 이 유적 주변으로는 상일동 청동기 출토유적, 하남 망월동유적 등이 있어 청동기 시대 마을이 형성되었던 곳으로 판단된다.
유적은 해발 40~50m 되는 얕은 야산의 꼭대기와 기슭에 자리하며 현재 시가지가 형성되어 주변 지형을 전혀 알 수 없다.
(12) 서울 장지동유적
집터의 평면 형태는 대부분 긴 네모꼴이지만 타원형도 있다. 기둥구멍은 집터의 벽을
서울시 송파구 장지동에 위치하며, 유적 주변의 지세는 해발 50m 안팎의 나지막
따라서 부분적으로 찾아졌으며 바닥에 찰흙을 깔아 다진 흔적도 조사되었다. 화덕자리
한 구릉이 남북 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다. 최근 택지개발을 위한 문화재 조사과정에
는 특별한 시설을 하지 않고 바닥을 조금 움푹하게 판 다음 불을 땐 흔적들이 찾아졌다.
서 집터 1채와 움 유구 등이 발굴되었다.161)
한편 1975년에 조사된 2호 집터는 이곳의 다른 집터와는 차이가 있는 특이한 시설 을 갖추고 있었다. 집터의 가장자리쪽에 너비 60㎝쯤 되게 모줄임 모양으로 자갈돌을
집터의 평면 형태는 긴 네모꼴이며 긴 방향은 동서쪽으로 등고선과 나란하다. 출토 유 물은민무늬토기의몸통과바닥조각들, 간흔적이뚜렷한여러점의숫돌이찾아졌다.
깔아 놓았다. 이러한 특이한 모습의 집터가 조사되지 않아 그 성격을 정확하게 밝히기
이 유적은 제한된 발굴조사로 서울 권역에서 찾아진 많지 않은 청동기시대 집터
는 어려운 실정이지만 특수 집회 장소나 연모 제작소, 제사유적 등으로 해석하고 있다.
유적이며, 지세로 보아 주변에 더 많은 집터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바로 옆의
출토 유물은 겹입술에 빗금무늬가 있는 팽이형토기의 특징을 지닌 깊은 바리형 토
가락동유적과 비교된다.
기, 덧띠토기, 구멍무늬토기가 있다. 석기는 그 종류가 상당히 다양한 편인데 삼각만 입 화살촉, 돌칼, 돌끌, 가락바퀴, 숫돌, 덜된 석기, 모룻돌 등이 있다. 특히 깊은 바리
(13) 대모산 집터
형 토기는 지역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어‘가락동식 토기’ 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울시 강남구 일원동의 대모산성 안의 무선통신망 기지국 옆에 위치하며 집터 1
한편 이 유적은 출토 유물로 보아 아주 긴 기간 동안 사람들이 터전을 잡고 살림 을 꾸렸던 것으로 해석된다.
채가 조사되었다.162) 집터는 경사진 풍화암반층을‘ㄴ’ 자 모양으로 파서 만들었으며 평면 형태는 긴 네모꼴이다. 후대에 파괴가 심하게 이루어져 정확한 시설이나 크기는 알 수 없다.
(11) 서울 명일동유적 서울시 강동구 명일동의 해발 42m 되는 야트막한 야산에 위치하며 집터 1채가 조사되었다.
출토 유물은 덧띠토기의 입술과 바닥, 돌도끼, 갈판 등이 있다. 이 유적은 상당히 높은 지대에서 조사된 것으로 덧띠토기 문화기의 高地性 취락 의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집터의 평면 형태는 타원형이고 서쪽 벽을 따라 지름 10㎝쯤 되는 기둥구멍들이 244 성 격 과 문 화 기 반
찾아졌다. 집터의 가운데에서 숯이 집중적으로 출토되어 이곳이 화덕자리로 여겨진
│ 고인돌 │
다.160) 출토 유물은 토기와 석기가 있는데 토기는 가락동유적에서 출토된 것과 아주
(1) 연천 학곡리유적
비슷하지만, 조각들이라 전체적인 모습은 알 수 없다. 석기는 2단의 자루가 있는 간
연천군 백학면 학곡리에 임진강을 따라 5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지만 이전에 는 훨씬 더 많은 고인돌이 있었다고 전해온다. 이곳은 강을 따라서 야트막한 구릉이
159) 김정학,〈광주 가락리 선사주거지 발굴보고〉 《고문화》2, 1963, 11~25쪽. 잠실지구 유적발굴조사단,《잠실지구 유적지 발굴조사 보고서 1975년도》 , 1975. 160) 김정학,〈광주 명일리 주거지 발굴 약보고〉 《고문화》1, 1962, 26~30쪽.
161) 중앙문화재연구원,《송파 장지 택지 개발지구내 송파 장지동유적》 , 2005. 162) 한양대박물관,《대모산 문화유적 시굴조사 보고서》 , 1999.
245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포한다. 덮개돌의 긴 방향은 구릉의 능선과 나란하여 지세와의 관련성을 시사한다. 발굴조사 결과 탁자식 고인돌은 먼저 굄돌을 세우고 그 위에 덮개돌을 얹은 다음 무덤방 처리를 하고 마구리돌로 마무리를 하였던 것 같다. 출토 유물은 민무늬토기, 간돌검, 돌도끼, 숫돌 등이 찾아졌다. 고인돌의 무덤방 바로 밑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집터가 조사되어 서로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연천 학곡리 1호 고인돌
연천 학곡리 2호 고인돌
(3) 양평 상자포리유적 펼쳐져 있고, 그 옆으로는 충적대지 가 발달하여 일찍부터 사람들이 터
팔당댐 수몰지역 조사의 일환으로 발굴이 이루어진 이 유적 은 양평군 개군면 상자포리의 남한강 언저리에 위치한다.
전을 잡고 살기에 좋은 환경이다.163) 탁자식 고인돌인 1호의 덮개돌은
연천 학곡리 2호 고인돌 하부구조
① 국립중앙박물관 조사165)
현무암인데, 가장자리에는 손질을
5기의 고인돌이 조사되었는데 덮개돌의 크기는 상당히 작은 편
한 흔적이 뚜렷하고 평면 형태는 약
이며, 강물의 영향으로 대부분 묻혀 있었다. 무덤방의 주변은 유적
간 각이 진 육각형이다. 굄돌의 감은
의 지반 관계가 고려되어 강자갈돌이 가장자리에 깔려 있었다. 그
서로 다른데 남쪽 것은 현무암이고, 북쪽 것은 변성암이다. 2호 고인돌은 쓰러져 부분적으로 묻힌 상태였으며, 발굴 결과 탁자식으로 밝혀졌
리고 바깥쪽으로는 갓돌을 돌려 놓아 강자갈이 흩어지는 것을 막 음과 동시에 받침돌의 역할도 같이 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다. 굄돌 주변에는 20~30㎝쯤 되는 강돌을 2~3단 쌓아 놓았는데 이것은 고인돌을
한편 3지구의 경우 무덤방이 한 묘역 안에 같이 있어 묻힌 사
축조한 지점의 지반이 연약하여 굄돌이 쓰러지지 않도록 보강하는 기능을 하였던
람들은 서로 가까운 핏줄인 한 식구들로 해석되며, 이곳의 고인
것 같다.
돌은 가족무덤의 성격이 강한 것 같다.166)
출토 유물은 민무늬토기, 돌로 만든 가락바퀴, 반달돌칼, 흙으로 빚은 그물추 등
출토 유물은 뗀돌도끼와 구멍무늬토기 조각 등이 있다.
이 있다.
② 이화여대 박물관 조사167) (2) 파주 옥석리유적 246 성 격 과 문 화 기 반
파주시 월롱면 덕은리에 위치하며, 이곳은 한강과 임진강의 가장자리이다.164) 비
5기의 고인돌이 발굴되었다. 1호는‘ㄷ’ 자 모양으로 돌을 돌 려 놓아 무덤방을 만들었으며 껴묻거리는 무덤방의 뚜껑돌을 덮
양평 상자포리고인돌 출토 한국식 동검
교적 높은 구릉의 기슭에 탁자식 고인돌이 군데군데 몇 기씩 떼를 이룬 모습으로 분
163) 세종대박물관∙연천군,《연천지역 고인돌유적》 , 2003. 164) 김재원∙윤무병, 앞의 책, 1967, 23~49쪽.
165) 한병삼∙김종철,〈양평군 상자포리 지석묘(석관묘) 발굴보고〉 《팔당∙소양댐》 , 1974, 13~30쪽. 166) 하문식,〈금강과 남한강유역의 고인돌문화 비교연구〉 《손보기박사정년기념고고인류학논총》 , 지식산업사, 1988, 539~540쪽. 167) 진홍섭∙최숙경,〈양평군 상자포리 지석묘 발굴보고〉 《팔당∙소양댐》 , 1974, 37~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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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다음 돌을 쌓아 그 속에 넣었다. 출토 유물은 초기 형식의 한국식동검과 天河石 製 옥, 돌가락바퀴, 덜된 돌도끼 등이 있다. 특히 청동검은 비파형동검이 한국식동 검으로 변천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4호 고인돌은 무덤방 둘레에 강자갈돌을 깔아 놓았고 유물은 무덤방의 뚜껑돌 위
주검의 위∙아래에 뿌렸던 것으로 여겨지는 붉은 흙이 발견되었다. 출토 유물은 구멍 뚜르개와 쪼으개, 여러 점의 뗀돌도끼∙돌대패∙돌끌∙돌자 귀∙갈판∙긁개 등 상당히 다양한 기능을 가진 석기가 찾아졌다. 또한 고인돌의 축 조과정에 있었던 儀式 행위를 이해할 수 있는 새 모양을 새긴 예술품이 출토되었다.
에 있는 자갈층에서 찾아졌다. 화살촉은 3개층으로 구분되는 자갈층에서 11점이 발 견되었고 간돌검, 숯, 사람 뼈 조각도 함께 출토되었는데 껴묻은 모습이 영동 유전
(5) 양평 양수리유적
리 고인돌과 비슷하다.168) 이곳에서 찾아진 숯으로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2,170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두물머리)에 자리하며, 팔당댐 수몰지역 발굴로 5기의 고
±60 B.P.로 밝혀져 남한강 하류지역의 고인돌 연대를 설정하는 하나의 토대를 마 련하게 되었다.
인돌이 조사되었다.171) 1호는 탁자식 고인돌이며, 덮개돌 위에 구멍이 7개 파여 있었는데 이것의 의미에 관하여는 여러 견해가 있다. 무덤방 주위에는 강자갈돌이 깔려 있었는데 이곳의 지
③ 단국대 박물관 조사169) 6기의 고인돌이 조사되었는데 모두 서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묻힌 사람 은 친연관계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반 문제가 고려된 것 같다. 탁자식인 2호의 무덤방도 1호처럼 주위에 강자갈돌이 깔려 있었으며 굄돌은 북 서쪽으로 쓰러진 상태였다. 출토 유물은 바탕흙이 빗살무늬토기 계통의 민무늬토기
출토 유물은 간돌검∙화살촉∙돌도끼∙반달돌칼∙가락바퀴 등 상당히 다양한
조각과 밑이 편평한 민무늬토기 조각, 붉은 간토기 조각 등이 있다. 그런데 민무늬
편이다. 토기는 붉은 간토기의 조각들이 많이 출토되어 고인돌 축조 당시의 장제와
토기의 바닥 안쪽에서는 탄화된 물질이 조사되어 실생활에 이용하였던 토기를 껴묻
관련된 행위를 해석하는데 도움이 된다.
기하였던 것 같다. 한편 양수리 고인돌의 덮개돌 밑 15㎝ 되는 무덤방 안에서 찾아진 숯으로 방사성
(4) 양평 앙덕리유적
탄소연대 측정 결과 3,900±200 B.P.로 나와 상당히 이른 시기에 고인돌을 축조하
양평군 개군면 앙덕리에 위치하며, 팔당댐 수몰지역 조사 때 고인돌 1기가 발굴
였던 것 같으며, 이 연대는 고인돌의 상한 연대를 설정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되었다.170)
있다.
덮개돌의 감은 견운모편암이며 손질을 많이 하여 거북이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덮개돌 위에는 크고 작은 구멍이 많이 파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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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하남 광암동유적
무덤방의 크기는 길이가 1.6m쯤 되어 바로펴묻기를 한 것으로 해석되며 둘레에
하남시 광암동에 자리하며 3기의 고인돌이 발굴되었다.172) 유적이 위치한 곳의
는 강자갈돌을 쌓아 놓았고 받침돌이 둘려져 있었다. 그리고 받침돌을 튼튼하게 하
지세는 주변에 산과 계곡이 발달해 있으며, 계곡 사이에는 비교적 넓은 평지와 나지
기 위한 쐐기돌이 4점 찾아져 고인돌의 축조과정에 있었던 구조∙역학적인 부분을
막한 구릉이 펼쳐져 있다.‘廣岩洞’ 이라는 땅 이름이 알려주듯이 이곳의 남밖 마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다. 묻힌 사람의 머리 방향은 바로 옆의 강물 흐름과 나란하며
입구에는‘5형제 바위’ 라고 부르는 고인돌이 5기 있고, 500m쯤 떨어진 너분바위 마을에도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168) 김원룡,〈영동 유전리 지석묘의 특이 구조와 부장품〉 《역사학보》12, 1960, 123~137쪽. 169) 정영호,〈양평군 상자포리 지석묘군 발굴보고〉 《팔당∙소양댐》 , 1974, 77~113쪽. 170) 이융조,〈양평 앙덕리 고인돌 발굴보고〉 《한국사연구》11, 1975, 55~99쪽.
171) 이호관∙조유전,〈양평군 양수리 지석묘 발굴보고〉 《팔당∙소양댐》 , 1974, 289~325쪽. 172) 세종대박물관,《하남시 광암동 지석묘》 ,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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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 서쪽에 건물을 신축하면서 남쪽 구릉 끝에서 바둑판식 고인돌(?) 1기가 조사되었
251
다.173) 이 고인돌은 덮개돌 밑에 6개의 굄돌이 있었으며, 주변에서 돌도끼 2점이 찾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아졌다. 정릉동 고인돌유적은 서울지역의 많지 않은 고인돌유적 가운데 한 곳이며, 특히 산자락 끝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 지역의 고인돌 입지 조건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8) 서울 양재동유적 하남 광암동 1호 고인돌
하남 광암동 2호 고인돌 무덤방
서울시 서초구 양재동(옛 시흥군 신동 면 양재리)에 위치하며, 1958∙59년에 6
하남 광암동 3호 고인돌
3호 고인돌은 덮개돌 바로 밑에
기의 고인돌이 조사되었다. 유적은 양재
굄돌 구실을 하는 넙적한 돌이 놓여
천에서 남쪽으로 100m쯤 떨어진 평지에
있다. 이 돌은 덮개돌과 같은 화강암
자리하고 있었다.174) 이곳의 고인돌 형식
질 편마암이고 매우 얇으며 가장자리
은 모두 탁자식으로 마을 사람들은 이 고
에 손질을 많이 하였다. 발굴조사 결
인돌을‘괴바위’ 라고 부르며, 일년에 한
과 넙적한 굄돌은 처음부터 세워 놓
차례 산신제(도장제)를 지낸다고 한다.
지 않고 뉘어 놓아서 옆쪽과 높이가
1호 고인돌의 덮개돌의 크기는 4.5×
같게 균형을 이루었음이 밝혀졌다.
2.8×0.45m인데 서쪽 부분이 땅과 맞닿
이러한 예는 오산 외삼미동 고인돌과 화
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쓰러져 있었음
성 병점리 고인돌에서 조사되었다. 출토 유물은 숫돌과 갈돌이 찾아졌다. 4호 고인돌은 조사 당시 흙더미에 쌓여 있었는데 발굴조사에서 잘 다듬은 굄돌이
250 성 격 과 문 화 기 반
을 알 수 있다. 나머지는 대부분 땅 속에 묻혀 있는 상태였다.
찾아졌다. 무덤방의 서쪽 벽을 이룬 돌에 사람 얼굴이 새겨진 것이 발견되어 주목된
이 유적은 현재 파괴되어 없는 상태지
다. 이 바위그림은 매우 상징화된 것으로 눈과 입은 음각을 하였고 코는 돌의 모가
만, 양재천을 중심으로 한 서울지역의
진 부분을 그대로 이용하여 표현한 점이 돋보인다.
청동기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
이 유적은 축조된 일부의 고인돌이 파괴되었지만, 서로 다른 형식의 고인돌과 특 이한 구조가 조사되어 중요한 유적으로 여겨진다.
하남 광암동 2호 고인돌의 사람 얼굴
이다. 하남 광암동 2호 고인돌 출토 볍씨자국있는 민무늬 토기
(7) 서울 정릉동유적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옛 우석대학교 자리에 위치한다. 1968년 우석대학교의 본
173) 김기웅,〈한국 지석묘 소고〉 《우석사학》1, 1968. 174) 김무룡,〈경기 시흥군내 지석묘〉 《고고미술》2-11, 1961.
(9) 서울 우면동유적
(11) 서울 반포동유적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에 위치하며, 양재동 고인돌유적에서 보면 서남쪽에 자리
이 유적의 위치는 옛 광주군 언주면 반포리에 해당되며, 지금의 강남구 개포동
라고 부르며, 고인돌 위쪽에는 한 산기슭에 있다.175) 마을 사람들이‘고름장 바위’
부근으로 추정되는 곳이다.‘고인고개’ 라고 부르는 조그마한 고개 위의 편평한 솔
병풍같은 바위가 둘려져 있다. 탁자식 고인돌이며 덮개돌의 크기는 300×300×50
밭에 바둑판식 고인돌 4기가 분포하고 있었다. 조사 당시 덮개돌 밑의 굄돌은 대부
㎝이다. 높이 70㎝ 되는 굄돌 2개가 덮개돌을 받치고 있으며 긴 방향은 정남쪽이다.
분 흙 속에 묻힌 상태이고 주변에서 수습된 유물은 없다.177)
한편 2002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실시한 지표조사 과정에 우면동 갓배산 기슭 에서 파괴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인돌을 찾기도 하였다.
이 유적은 바둑판식 고인돌이 서울 권역에 분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의미 를 지닌다.
(10) 서울 고덕동유적
(12) 광명 가학동유적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의 가재골에 위치하는데 유적 주변에는 서북 방향의 한강
광명시 가학동 벌말 마을의 나지막한 야산에 연결되는 구릉의 꼭대기에 위치하
쪽으로 흐르는 야산이 자리한다. 개석식 고인돌 2기가 야산의 능선 위에 있으며 한
며, 10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특히 이 유적은 한강 이남의 경기지역에서는
강의 흐름과 거의 나란한 방향으로 분포한다.176)
보기 드물게 많은 고인돌이 한 곳에 밀집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178)
고인돌의 덮개돌은 크기가 작은 편이며 가장자리에는 손질을 상당히 많이 하였
마을 사람들은 고인돌을‘장사바위’ 라고 부르는데 탁자식 고인돌이 동서 방향으
다. 그리고 윗면에는 구멍이 파여 있다. 고인돌 옆에서 민무늬토기 조각이 찾아지고
로 2줄을 이루면서 자리하고 있다. 덮개돌은 길이가 2m 안팎으로 작은 편이며 평면
있어 주변에 집터가 있을 가능성이 많다.
형태는 긴 타원형과 삼각형 등 2가지가 있다. 출토 유물은 민무늬토기 조각을 비롯 하여 가락바퀴, 화살촉, 반달돌칼 등이 있다. 한편 고인돌 바로 밑에서는 4.6×2.8×0.2m 크기의 청동기시대 움집터가 발견 되어 이 유적의 문화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집터에서 바리 모양의 구멍무늬 토기와 민무늬토기, 간돌검, 반달돌칼, 숫돌 등이 출토되었다. 이렇게 청동기시대의 집터와 고인돌유적이 층위를 이루고 있는 것은 파주 옥석 리와 당하리유적에서도 조사되었다. 이것은 서로의 시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 며, 문화의 전파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 기타 │ 252 성 격 과 문 화 기 반
(1) 서울 상일동유적 1968년 서울시 강동구 상일동 15번지의 비닐하우스 건축 현장에서 한국식동검 1 서울 고덕동 1호 고인돌
175) 김무룡, 위의 논문, 1961. 176) 세종대박물관,《강동구의 역사와 문화유적》 , 2004.
서울 고덕동 2호 고인돌
177) 이병도,《두계잡필》 , 일조각, 1956. 178) 한양대박물관∙광명시,《광명 가학동 지석묘》 , 1997.
253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점과 검 끝 손잡이 장식 1점이 발견되었다.179) 이곳은 낮은 구릉지대가 펼쳐져 있는
한국식 투겁창의 크기는 길이 18.6㎝, 너비 3.6㎝이다. 원통형의 자루 투겁이 있
지역으로 이미 주변의 명일동, 하남 망월동∙덕풍동에서 청동기시대 유적이 조사되
으며, 창의 몸통 부분에서 날이 각을 이룬다. 자루 투겁의 가장자리에 돌대가 있고
기도 하였다.
바로 위에 둥근 고리가 아닌 못을 박아 고정할 수 있는 구멍이 있다.
한국식동검은 길이 30㎝, 너비 2.5㎝로 상당히 가는 모습이며 검끝 손잡이 장식 은 흑회색으로 단면이 6각형이다.
(5) 서울 당산동유적 서울시 영등포구 당산동 3가 456번지의 옛 영등포공고 자리에서 일제강점기에
(2) 서울 고덕동유적
한국식 동검 1점과 청동끌 2점이 출토되었다.183) 한국식동검은 길이가 31.3㎝이고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에 위치하며 바로 옆에는 명일동유적이 있다. 이곳은 한강
너비는 2.55㎝, 두께 1.1㎝로 단면은 마름모꼴이다.
의 언저리에 해당하는 곳으로 나즈막한 구릉지대가 펼쳐져 있다. 구릉지역에서 민무늬토기, 구멍무늬 토기, 간돌검, 돌도끼, 화살촉, 돌가락바퀴, 돌끌, 반달돌칼 등이 찾아졌으며 주변에 집터가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여 겨진다.180)
청동 끌은 같은 형식으로 크기에 있어 차이가 있다. 큰 것은 길이 10.7㎝, 투겁 지 름이 1.85㎝, 날 너비가 1.2㎝이다. 당산동유적에서 찾아진 동검과 청동 끌은 청동기문화의 후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주변에 무덤이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3) 서울 응봉동유적
(6) 용인 초부리유적
서울시 성동구 응봉동에 있는 응봉은 해발 120m로 왕십리 주변에서 제일 높은
용인시 모현면 초부리의 구릉
산이며 한강을 바라보는 언저리 지역으로 선사시대 사람들이 터전을 잡고 살기에는
지대에 위치하며 1965년 한국식
아주 좋은 지역이다.
동검의 거푸집 3매가 발견되었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학자 橫山將三郞이 조사를 하였는데 꼭대기 부근의 편평한 곳에서 불탄 흙층이 발견되었으며 공이∙화살촉∙돌도끼∙반달돌칼∙숫돌 등이 찾 아졌다.181) 현재 개발에 의하여 유적 전체가 파괴되어 없지만 이 유적은 한강 본류역의 청동 기문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다.184) 거푸집은 모두 활석으로 만들 었으며, 2매가 짝을 이루도록 되 어 있는데 이것의 양쪽에는 크기 가 다른 동검의 주형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거푸집을 맞출 때
254 성 격 과 문 화 기 반
(4) 서울 응암동유적
쉽게 하기 위하여 줄이 새겨져
서울시 은평구 응암동의 연서중학교에서 1975년 청동 투겁창 1점이 발견되었다.182)
있음을 알 수 있다.185) 또 2매를
179) 한병삼,〈새로 발견된 세형동검〉 《고고학》1, 1968. 180) 김정학,〈한국 무문토기 문화의 연구〉 《백산학보》3, 1967, 41~44쪽. 181) 김원룡,《한국 사전 유적∙유물 지명표》 , 서울대 출판부, 1964, 48쪽. 182) 국립중앙박물관,《한국의 청동기문화》 , 범우사, 1992.
용인 초부리유적 출토 거푸집
183) 서울역사박물관,《서울특별시 문화유적 지표조사 종합보고서》1, 2005, 109쪽. 184) 권오영∙한봉규,〈용인군 지표조사〉 《신암리》1, 국립중앙박물관, 1988, 84쪽. 185) 주조를 할 때 거푸집을 쉽고 정확하게 맞추기 위하여 기호나 줄을 새기는 것이 요령지역의 고 인돌(보란점 쌍방과 벽류하)에서 찾아진 거푸집에도 나타난다(하문식,《고조선 지역의 고인돌 연구》 , 백산자료원, 1999, 250~251쪽).
255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맞춘 다음 끈으로 묶고 한 쪽에 마련되어 있는 귀때[注口]에 청동물을 부어서 주조
257
를 하도록 되어 있다. 거푸집의 크기로 보아 동검의 크기를 추정하면 25㎝와 27㎝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쯤 되는 것 같다. 이렇게 청동기시대의 거푸집이 발견된 것은 청동기를 주조하였다는 직접적인 증 거 자료가 되므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3. 생업 경제와 사회상 청동기시대는 앞 시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살림살이가 다양하면서 삶이 복 잡∙다원해진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당시 사람들의 식량 생산방식이 종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진주 대평리유적의 밭유구
│ 생업경제 │
청동기시대의 경작지는 이 시기의 살림집이 거의 대부분 낮은 구릉지대나 얕은
(1) 농경과 목축
야산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논농사와 함께 밭농사가 같이 이루어졌던 것 같다. 이러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농경이 처음 이루어진 시기는 신석기시대로 인식하고
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은 볍씨와 조∙기장∙수수∙콩 등의 밭농사 작물인 잡곡이
있지만, 청동기시대가 되면 앞 시기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보편화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한꺼번에 출토된다는 점이다. 농경의 직접적인 고고학 자료가 되는 곡물은 벼농사에 관한 것과 잡곡으로 구분 된다. 탄화된 쌀은 북부지역의 평양 남경유적을 비롯하여 여주 흔암리, 부여 송국리 유적에서 찾아졌다. 벼농사의 직접적인 흔적 가운데 하나인 논 유구는 춘천 천전리, 논산 마전리, 부여 구봉리, 울산 야음동과 무거동, 밀양 금천리유적에서 발견되었 다. 발굴 조사된 청동기시대 논의 모습은 구릉 기슭의 끝 부분을 이용한 것과 비탈 면을 개간하여 계단식으로 만든 것이 있다. 밭 유구는 진주 대평리를 비롯하여 대구 동천동, 진안 여의곡유적 등에서 조사되었다. 대평리유적에서는 남강 옆의 충적대
256
지에서 당시의 집터∙무덤과 밭 터가 같이 발견되었는데 일정 범위에 걸쳐 공간 분
성 격 과 문 화 기 반
할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186) 또한 하남 광암동, 부천 고강동, 진주 대
여주 흔암리에서 출토된 불에 탄 벼, 보리
186) 이상길,〈남강유역의 농경〉 《진주 남강유적과 고대 일본》 , 경상남도∙인제대 가야문화연구소, 2000, 329~339쪽.
평리, 부안 소산리유적에서는 토기에 볍씨 자국이 찍혀 있어서 이 시기의 농경에 대
수수가, 5호 집터에서는
259
한 여러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조가 발견되었고, 오동유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얕은 야산의 기슭에 있는 흔암리유적의 12호와 14호 집터에서는 화덕자리 옆과
적의 집터에서는 탄화된
토기 안에서 탄화된 쌀을 비롯하여 보리∙수수∙조∙콩이 함께 발견되었는데,187)
콩∙팥∙기장이 찾아졌
이것은 남경유적에서와 같이 여러 종류의 잡곡이 재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 또한 석탄리의 39호
한 다양한 곡식과 함께 반달돌칼∙괭이∙보습∙갈판 등이 찾아져 그때의 농경 기술
집터에서는 조∙팥이 출
에 대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흔암리유적의 입지 조건과 출토 유물을 볼 때 경작
토되었고 옥방유적에서
을 어떤 방식으로 하였는지 밝히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탄화된 곡식이
는 탄화된 보리∙수수∙
출토된 12호 집터의 아래쪽 낮은 지대에 논과 밭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고 남한강과
팥∙조∙피∙녹두가, 어
인접하여 있다는 것은 모래질의 충적층을 이용한 밭농사의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
은유적에서는 보리∙
고 있다.188)
조∙기장∙콩∙밀∙깨 등이 찾아져 당시의 농경에 관한 자료가 되고 있다.
송국리유적에서는 탄화된 쌀이 54-1호, 54-11호, 54-13호 집터에서 출토되었
다음은 농사를 짓는데 사용된 연모를 보면 나무를 베거나 밭갈이에 쓰인 돌도끼,
다. 특히 54-1호 집터에서는 359g이나 되는 많은 양의 쌀이, 50-1호, 54-1호 집터
땅을 가는데 이용된 돌괭이, 이삭을 따는데 쓰인 반달돌칼, 그리고 곡식의 껍질을
에서 발견된 민무늬토기의 바닥에는 볍씨 자국이 찍힌 흔적이 찾아졌다. 이 유적에
벗겨내는 데에는 갈돌과 갈판이 이용되었다. 나무로 만든 농사용 연모의 이용은 당
서는 잡곡과 그물추 등의 물고기잡이용 연모없이 쌀만 발견되어 벼농사가 좀더 널
시의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는 끌∙대패∙자귀 등 나무 연모를 만들기 위한 공구가
리 퍼진 것으로 해석된다.189)
많이 출토되고 이어 이것과의 관련성을 연관시켜 볼 수 있다. 실제로 의주 주의리의
일산지역에서 볍씨(왕겨)가 발굴된 토탄층은 서해안지역 충적세의 퇴적 상황을
니탄층에서 발견된 후치는 보습 농사의 전통을 잇는 좀 더 발달된 갈이용 연모로 해
잘 보여준다. 즉 한강 하류는 바닷물이 들고 나가는 古期의 조간대가 형성되면서 기
자 모양이 되게 석된다.191) 이 후치는 자연적으로 구부러진 참나무를 이용하여‘ㄴ’
후와 해수면의 변화에 따라 낮은 골짜기에 토탄층이 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190) 이
다듬었는데, 땅에 닿는 앞 부분의 끝은 납작하고 뾰족한 보습날처럼 생겼으며 뒤는
러한 토탄층은 해발 고도가 10m 이내인 서해안의 저평한 일산∙김포∙시흥∙평택
손잡이를 꽂을 수 있도록 구멍이 여러 개 파여 있는 독특한 모습이다.
지역에 폭넓게 발달해 있으며, 선사시대의 농경(특히 벼농사)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해석된다.
청동기시대의 농경연모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반달돌칼이 있다. 이것은 곡식 의 이삭을 따는데 쓰인 수확용 연모로 전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곡식의 생태적인
청동기시대의 유적 가운데 잡곡만 나온 곳으로는 무산 범의구석, 회령 오동, 송림
면이 고려되어 만들어진 아주 뛰어난 농기구로 여겨진다. 그것은 벼나 피∙조는 낱
석탄리, 진주 대평리 옥방과 어은유적이 있다. 범의구석의 15호 집터에서는 기장∙
알이 익는 과정이 불규칙하여 한꺼번에 딸 수 없고 잘 흩어지지 않으므로 줄기를 자
258 성 격 과 문 화 기 반
부여 송국리 출토 마제석기
르는 낫보다 이삭을 따는 칼이 훨씬 효율적이어서 제법 널리 이용된 것으로 판단된 187) 서울대박물관 엮음, 앞의 책, 1978, 30~38쪽. 188) 신숙정,〈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생업경제-경기도를 중심으로 한 시론〉 《한국상고사학보》35, 2001, 19~20쪽. 189) 강인구∙이건무∙한영희∙이강승,《송국리》1, 국립중앙박물관, 1979, 139~140쪽. 190) 이동영∙김주용,〈지질환경조사〉 《일산 새도시 개발지역 학술조사보고》1, 경기도∙한국선사 문화연구소, 1992, 4~5쪽.
다. 또한 가끔 수확용 연모인 돌낫이 발견되고 있지만, 이것의 쓰임새에 관하여는 살림살이에 이용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191) 김례환,〈평북지방에서 발견된 원시유적〉 《문화유산》4, 과학원출판사, 1958, 91~93쪽.
한편 석기와 함께 나무 로 만든 농기구도 찾아졌
제시되고 있지만 개는 앞 시기인 신석기시대부터 사육되었다는 견해도 있다.193)
는데 김천 송죽리에서는
짐승 기르기는 청동기시대유적에서 찾아지고 있는 많은 짐승 뼈를 분석한 결과
타원형의 구멍에 자루가
를 통하여 집에서 길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길들여진 짐승은 주로 돼지∙개∙
달린 나무괭이가 출토되
소∙말이었던 것 같다. 개는 일찍부터 사냥을 위하여 기르게 되었고, 잡식인 돼지는
었다.
농경사회에서 기르기에 아주 알맞은 짐승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소는 농경의 발전
청동기시대의 농경에 관한 또 다른 자료는 農耕
농경문청동기(앞∙뒤)
들이 처음에 짐승을 어떻게 길들여 키웠는가 하는 문제에 관하여는 여러 의견들이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되는데 당시의 농기구로 쓰인 후치의 출토 로 보아 가축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을 뒷받침해 준다.194)
文靑銅器가 있다.192) 따
청동기시대의 유적에서 발견된 짐승 뼈 가운데에는 돼지 뼈가 가장 많은데 무산
비를 가지고 밭을 갈고 있
범의구석의 2문화층 집터에서는 무려 20마리분이 찾아져 가축화의 정도를 이해하
는 사람이 사실적으로 묘
는데 큰 도움이 된다. 또한 초도유적에서도 사냥된 토끼∙족제비와 함께 많은 돼지
사되어 있으며 현재 남아
뼈가 출토되었으며, 범의구석유적에서는 흙으로 빚어 만든 돼지 조소품이 나와 이
있는 크기는 길이가 12.8
시기에 돼지 기르기가 널리 퍼져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상당히 일찍부터 길
㎝, 너비 7.3㎝, 두께 1.5
러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개는 소와 함께 여러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다. 개 뼈가
㎜이다. 위쪽의 가장자리
찾아진 유적은 서포항∙오동∙범의구석∙초도∙미송리∙승리산∙고남리 등이다.
테두리에 구멍이 6개 있
소 뼈는 범의구석∙서포항∙초도∙승리산∙오동유적에서 찾아졌다. 그리고 말 뼈
는데 닳은 상태로 보아 끈
가 오동∙범의구석∙미송리유적에서 출토되어 청동기시대의 짐승 기르기는 상당히
을 매어서 달았던 것 같
보편적이었으며, 실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195)
다. 앞면의 양쪽에는 Y자 모양으로 갈라진 나뭇가지 위에 새(독수리?)가 앉아 있어
260 성 격 과 문 화 기 반
종교적 의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뒷면에는 밭가는 모습과 수확하는 모
(2) 사냥과 물고기잡이
습이 함께 표현되어 있다. 오른쪽 부분에는 머리가 뒤로 길게 뻗쳐 있는 남자가 따
청동기시대에 있었던 농경과 목축 때문에 사회 발전의 변화는 여러 부분에서 상
비로 밭을 갈고 있다. 따비 아래에는 10개의 줄을 그어 밭고랑을 표현하고 있으며,
당히 폭넓게 일어난 것 같다. 사실 이 시기의 식량자원에서 사냥이나 채집, 물고기
밭고랑 밑에는 사람이 두 손으로 괭이를 높이 받쳐들고 있다. 그리고 왼쪽에는 상투
잡이 등이 차지하는 역할은 얼마 정도가 되었을까? 하는 것을 밝히는 데에는 여러
가 달린 사람이 손을 내밀고, 그 앞에는 망을 씌운 그릇이 있어 곡식을 담은 모습을
가지의 어려움이 뒤따른다.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농경에 관한 여러 가지의 표현을 한 이 청동기는 씨앗을 뿌 리는 봄과 거두어들이는 가을철에 있었던 제사 의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시대에 농경이 정착되었다고 하여도 이것으로 모든 식량 문제가 해결되지 는 않았을 것이고 유적의 입지 조건에 따라 생업경제의 형태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청동기시대에는 이러한 농경과 함께 집에서 짐승 기르기를 하였을 것이다. 사람
192) 한병삼,〈선사시대 농경문 청동기에 대하여〉 《고고미술》112, 1971.
193) 신숙정, 앞의 논문, 2001, 15~16쪽. 194) 황기덕, 앞의 논문, 1984, 96~99쪽. 195) 장호수,〈청동기시대와 문화〉 《북한 선사문화 연구》 , 백산자료원, 1995, 267~268쪽.
261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것 같다.196) 그렇기 때문에 짐승을 사냥하고 물고기를 잡는 일도 식량을 얻기 위한
을 보편적으로 하였을 것이다.
하나의 수단으로 살림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을 것이며, 그 비중은 양질의 고기
한편 청동기시대의 사냥 목적은 거의가 식량자원의 확보 차원에서 고기를 얻는
를 얻는 문제와 가용 식량이 고려되어 계절에 따라 정도가 달랐을 것으로 여겨진다.
것이 1차적인 것이지만, 사냥된 짐승 가운데 오소리∙여우∙너구리 등은 당시 사람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사냥을 하였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주로 동굴유적이나 조개
들이 고기보다 털을 이용하기 위하여 사냥을 한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더미에서 출토되는 짐승뼈 화석과 사냥 연모로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의 짐승뼈 화
사냥에 쓰인 연모는 이 시기의 유적에서 많이 나오는 돌과 뼈로 만든 여러 형태
석이 출토된 유적은 의주 미송리 동굴, 회령 오동, 무산 범의구석, 덕천 승리산 동
의 화살촉으로 보아 활이나 창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여주 흔암리유적에서는 140
굴, 웅기 서포항, 나진 초도 조개더미, 안면도 고남리 조개더미 등이 있다.197) 이런
여 점의 화살촉이 출토되어 당시 사람들의 식량 획득 방법에 관하여 시사하는 점이
유적에서 출토된 짐승뼈는 멧돼지와 사슴科를 비롯하여 돼지∙소∙멧토끼∙산양∙
많다. 그런데 화살촉은 짐승을 잡는데 쓰일 만큼 날카로운 날을 가진 것도 있지만,
너구리∙오소리∙여우 등이 상대적으로 많다. 그런데 고남리 조개더미에서는 철새
어떤 것은 상당히 무딘 날을 지닌 것이 있어 그 쓰임새에 관하여 의문이 제기되고
(오리∙아비)의 뼈 화석이 출토되어 철새 사냥도 하였던 것 같다. 철새는 그 서식 조
있다. 이렇게 무딘 날을 지닌 화살촉은 당시 사람들이 화살촉 끝에 毒을 발라 사냥
건이 맞는 얕은 바닷가 근처의 늪지대에 주로 살았을 것이고 이러한 조건은 한강 하
에 직접 이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류와 같은 큰 강의 하구는 모두 갖추고 있어 청동기시대 사람들을 이런 곳에서 사냥
또한 사냥에 이용된 도구 가운데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자료를 보면 올가미∙그물∙덫 등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봉산 신흥동 3 호 집터에서 나온 불에 탄 사냥용 그물은 발달된 사냥의 기술과 수단을 엿보게 하여 당시 사람들의 혜안을 짐작해 볼 수 있다.198) 사냥과 더불어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식량원으로 고려한 것은 채집이었을 것이 다. 채집에 관한 여러 가지를 알 수 있는 자료가 현재까지 조사되지 않아 그 실체를 알기는 어렵다. 다만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는 도토리가 흔하게 발견되고 있어 그 대 개를 짐작해 볼 수 있고, 청동기시대의 보령 관창리유적에서 출토된 자료를 분석하 여 나무 종류를 판별한 결과 밤나무∙돌배나무∙잣나무∙산벚나무∙산뽕나무∙졸 참나무∙상수리나무 등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관창리유적에서 찾아진 이 나무들은 모두 야생의 열매를 맺는 것이고 이 열매는 식용(또는 약용)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 들이다. 당시 사람들이 이것을 먹은 것으로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199) 물고기잡이는 큰 강가나 바닷가 근처에 살던 사람들에게 사냥 못지않게 살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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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서 큰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물고기잡이에 관한 고고학적 증거 자료 진주 대평리 출토 마제석촉
196) 신숙정,〈생업경제〉 《경기도사》1, 경기도사편찬위원회, 2002, 248쪽. 197) 황기덕, 앞의 논문, 1984, 99~104쪽. 신숙정, 앞의 논문, 2001, 6~8쪽.
는 조개더미에서 발굴된 물고기뼈와 연모 등이 있다.
198) 서국태,〈신흥동 팽이그릇 집자리〉 《고고민속》3, 사회과학원출판사, 1964, 37~38쪽. 199) 김규혁∙김재진,〈관창리유적 출토 수로 목책의 수종 조사〉 《관창리유적》 , 고려대 매장문화재 연구소, 2001, 525~5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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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조개더미는 동해안의 초도유적과 서해안의 고남리유적
교역에 관한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 경향은 단순한 물품의 교환과 교류 차원을 넘
이 있다. 초도유적에서는 한류에 자라는 명태같은 회유 어족의 뼈가 많이 찾아졌고
어서 당시의 기술체계와 지식체계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정보나 이념에 대한
고남리유적은 가오리와 상어류 등 오늘날 서해안에 많은 어종이 대부분이다.200) 물
교환까지도 그 의미를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사회조직을 통한 사회구
고기잡이에 이용된 연모는 그물추와 낚시∙작살∙찔개살이 있다. 그물추는 강돌의
성의 문제까지도 접근할 수 있다는 인식 아래 상당히 폭넓은 의미를 지닌다.203)
끝을 간단히 떼어 사용한 신석기시대와는 달리 주로 흙을 빚어 만들었으며 여러 가
선사시대 사람들이 교역을 하였을 때 그 대상이 되는 것은 농∙수산 생산물, 제품
지의 크기와 생김새가 있다. 이것은 고기를 잡는 방법의 차이에 따른 것이며, 기술
을 만드는데 기본이 되는 원료, 수공업품, 상징적 권위를 가지는 위세품 등이 있다.204)
적인 변화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크기는 3~4㎝와 7~8㎝ 되는 것이 많
청동기시대의 교역품 가운데에는 청동기 제작과 관련된 몇가지를 생각해 볼 수
으며, 주로 내륙의 강 옆 유적에서 찾아진 것은 바닷가 옆에서 출토된 것보다 작은
있다. 청동기 제작에는 구리를 비롯하여 주석∙아연∙납 그리고 거푸집의 재질인
것이 특징이다.201) 그런데 평양 금탄리와 남경유적에서는 그물추가 한꺼번에
활석 등이 그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광물은 원산지가 아주 제한된 지역에서
600~650개씩 출토되어 주목되며, 이것으로 그물의 크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
만 채광이 가능한 것으로 제품의 특수성과 운반에 편리함 등이 고려되어 당시에 교
며 발달된 고기잡이 기술을 엿보게 한다. 한편 여주 흔암리유적에서도 흙그물추가
역(교류)이 빈번하였을 것 같다.205) 특히 청동기는 청동 단추와 청동 고리 등의 간단
80여 점 출토되어 당시 사람들이 살림을 꾸리면서 남한강 옆에 자리한 유적의 입지
한 제품에서 청동검이나 연모 등으로 점차 그 쓰임새가 꾸미개에서 권위를 상징하
를 최대한 고려하여 사냥과 함께 활발한 물고기잡이를 하였던 것 같다.
는 위세품으로 바뀌게 되어 그 수요가 증대되었고 중요한 교환의 대상이 되었을 것
뼈낚시는 무산 범의구석 15호 집터와 온성 수남 5호 집터, 안면도 고남리유적에
이다.206) 한편 청동기의 제작에 필요한 원료 이외에도 제작이 극히 제한적이고 수요
서 나온 갈구리모양이 있으며, 나진 초도와 웅기 서포항유적을 보면 바다 고기잡이
가 많지 않은 특수한 목적을 지닌 異形 청동기 등은 완제품이 교역품으로 이용되었
에는 결합식 낚시가 주로 이용된 것으로 해석된다. 초도 조개더미에서 나온 결합식
을 가능성이 있다.
낚시는 활처럼 휘게 깎은 2개의 뼈를 묶어 하나의 낚시가 되게 하였다. 이것은 바다 에 물고기가 떼를 지어 다닐 때 효율적으로 잡기 위한 연모로 판단된다.202)
다음은 생업을 위한 교역이다. 농경이 정착되면서 지역의 상황에 맞게 생업경제 의 유형이 점차적으로 분화되었고 이에 따라 생산품도 차이가 생겼다. 고고학적 조
한편 청동기시대의 조개더미유적을 보면 여러 종류의 조가비들이 있는 것으로
사 자료에 의하면 농경을 주로 하였던 강 옆의 사람들과 물고기잡이가 많았던 바닷
보아 이 시기에 조개잡이도 물고기 잡이만큼 중요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많이 잡은
가의 사람들은 상당히 활발하게 먹거리 교환을 하였던 것 같다. 종성 동관진, 회령
조개는 굴∙바지락∙여러 종류의 고둥∙꼬막 등이 있다.
오동, 무산 범의구석, 연길 소영자유적에서는 동해안에서 많이 잡히는 명태뼈나 밥 조개의 조가비가 출토되고 있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특히 소영자유적에서는
264 성 격 과 문 화 기 반
(3) 교역
50여 기의 무덤 가운데 19기에서 바다 조가비로 만든 팔찌가 찾아져 주목된다. 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농경이 이루어지게 되자 잉여생산물이 마련되
음은 두만강유역과 동해안의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는 연옥제 꾸미
었을 것이고 이에 따라 직업의 분화와 전문화가 보편화되었을 것이다. 이런 사회적 분화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가운데 하나가 교역이다.
200) 신숙정, 앞의 논문, 2002, 238쪽. 201) 고고학연구소,《조선고고학개요》 , 사회과학원출판사, 1977, 107~110쪽. 202) 신숙정, 앞의 논문, 2001, 9~11쪽.
203) 신숙정, 앞의 논문, 2002, 245~247쪽. 204) Chang, K. C.,“Ancient Trade as Economics or as Ecology”Ancient Civilization and Trade, Univ. of New Mexico Press, 1975, pp.216~217. Renfrew, C.∙Paul Bahn, Archaeology : Theories, Methods and Practice, 2000. 205) 김정배,〈청동기시대의 사회와 경제 : 생업경제〉 《한국사》3, 1997, 265~266쪽. 206) 황기덕, 앞의 책, 1984, 4~6쪽.
265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267
개가 있는데 이것은 그 원산지가 목단강이나 송화강유역으로 추정되고 있기에 그곳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사람들과의 교역 관계를 시사해주고 있다.207) 한편 북한 학계에서는 제품의 생산과 교역에 따른 교환의 방법으로 초기에는 현 물(곡식∙가축 등)을 통한 등가적 교환에서 점차 방법이 복잡∙다양하게 됨에 따라 석기의 감으로 이용된 돌돈이 그 역할을 하였다고 판단한다. 이 돌돈은 주로 서북지 역의 청동기시대 집터에서 출토되며 큰 것은 지름 60㎝, 두께 3㎝ 되는 것도 있다. 이처럼 청동기문화 단계에서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은 잉여생산물의 분 배, 교역품의 조정 등이 필요하므로 집단 내에서 재분배를 담당하게 될 존재가 있었 다는 견해가 있다.208)
│ 사회 │ (1) 집터의 특성
미사리유적 집터
이 시기의 집터는 대부분 초기에 강 언저리의 자연 제방이나 계곡이 내려다보이 는 구릉지대에 있다가 점차 낮은 구릉의 비탈면과 선상지로 바뀌는 입지 조건을 보 여준다. 드물게는 보령 교성리나 창원 남산유적처럼 산꼭대기에 있는 경우도 있다. 앞 시기보다는 크고 비교적 많은 집들이 한 곳에 모여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는 모 습도 하나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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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주로 움집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움의 깊이는 신석기시대보다 훨씬 얕고 일부에서는 반지상가옥으로 발전하였다. 집의 평면형태는 대부분 네모꼴이나 긴 네모꼴인데 크기는 지역과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이 시기의 큰 집은 대가족이 살던 집이거나 살림에 필요한 연모를 만
이러한 마을은 바람을 막아주는 작은 산을 뒤에 두고 앞으로는 작은 내가 있어,
들던 제작소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한강유역의 서울 역삼동, 하남 미사리, 여주 흔
살림에 필요한 자원(특히 물)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오늘날의 자연 마을과 비슷하다.
암리, 파주 옥석리유적에서는 긴 네모꼴의 집터가 조사되었는데 이를 통하여 당시
그리고 가끔씩은 연당 쌍굴, 금굴, 상시유적처럼 동굴이나 바위그늘을 이용하여 살
의 가족관계나 마을의 형성 문제 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림을 꾸리기도 하였다. 특히 진주 대평리나 대구 동천동유적은 집터-무덤-농경지
그런데 화성 천천리를 비롯하여 서산 휴암리, 부여 송국리, 광주광역시 송암동,
가 일정한 정형성을 갖추고 공간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져 당시 사회의 주거환
거창 대야리유적 등 전국적으로 松菊里型 집터인 둥근꼴의 움집이 찾아졌다.210) 이
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렇게 자리한 집터는 강이나 얕은 야산 등 주변 지
런 움집은 집안의 가운데 쪽을 긴 타원형으로 조금 판 다음 기둥이 배치되었으며,
세를 최대한 활용하여 식량 자원을 확보하였으며, 定住性 마을을 형성시키는 계기
화덕자리는 없고 저장 구덩이가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타원형 구덩이의 쓰임새는
가 되었다.209)
석기나 玉器를 제작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집터에서는 기둥을 세우기 위하여 팠던 기둥구멍과 화덕자리, 저장 구덩이, 물길
207) 사회과학원력사연구소,《조선전사》1, 1979, 216~217쪽. 208) 김정배, 앞의 논문, 1997, 266쪽. 209) 송만영,〈남한지방 청동기시대 취락 구조의 변화와 계층화〉 《계층사회와 지배자의 출현》 , 2006, 10~15쪽.
210) 김승옥,〈송국리문화의 지역권 설정과 확산 과정〉 《금강 : 송국리형 문화의 형성과 발전》 , 2006, 151~173쪽.
며 그 쓰임새는 농산물을 저장하던 창고시설로 해석된다. 청동기시대 집의 또 다른 특징은 한 곳에 10여 채에서 100여 채 이상이 모여 마 을을 이루는 것인데 미사리∙흔암리∙반제리∙대평리∙송국리∙휴암리∙남경∙석 탄리∙범의구석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이 가운데 석탄리유적에서는 약 10만㎡의 범 위에서 100여 채가 넘는 집터가 발굴되어 큰 마을을 이루면서 한 곳에 모여 지속적 으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마을이 형성되고 생산이 활발하여 잉여생산물이 발생하자 서로간에 갈등이 나타 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마을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로 환호와 목책이 설치되었다. 환호시설은 화성 동학산, 안성 반제리, 울산 검단리, 진주 대평리 등 전국적으로 조사되고 있다. 또한 진주 대평리 옥방 1지구와 부여 송국리유적에서는 통나무를 엮 어서 만든 목책시설이 발견되었는데 송국리유적에서는 지름 20㎝ 되는 굵은 나무 를 잇대어 세워 놓았다.
(2) 고인돌문화 안성 반제리유적 도랑시설과 집터 전경
백제한성시대의 기층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하나의 방법으로 한강유역의 고인 돌문화를 살펴보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것으로 판단된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이 찾아지고 있다. 기둥구멍은 집터의 가운데 쪽에 있는 것을 중심으로 집의 어깨선
유적으로 고인돌이 지니는 의미는 당시 사회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이
안팎을 돌아가면서 만들어 놓았다. 집터 안의 화덕자리는 강자갈돌로 만들거나 흙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으로 둑을 쌓아 놓은 것, 맨땅을 조금 움푹하게 파서 만들기도 하였다. 덧띠새김무
한강유역의 고인돌에 대한 조사는 1883년 영국의 칼레스(Carles, W. R.)에 의하
늬토기가 출토된 미사리유적의 집터에서는 바닥에 판돌을 깔고 그 가장자리를 돌로
여 포천지역에 대한 것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그 이후 고렌드(Gowland, W.), 보
둘러놓은 바닥돌 두름식[石床圍石式] 화덕자리가 찾아져 주목된다. 집의 바닥은 맨
우다렛(Emile Bourdaret), 鳥居龍藏 등이 포천을 중심으로 경기지역의 고인돌을
땅을 그대로 다지기도 하고, 찰흙을 4~5㎝ 두께로 깐 다음 불에 구워 단단하게 만
학술적으로 조사하였다.211)
든 것도 있다. 또한 바닥에는 짚이나 풀을 엮어서 깔았던 흔적이 찾아졌다. 268 성 격 과 문 화 기 반
고인돌의 분포관계를 보면, 현재까지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한 서울∙경기∙인천
청동기시대의 움집은 벽체와 지붕이 구분되어져 있어 벽체가 밖에서 보인다. 이
지역에는 760여 기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212) 입지를 보면 이 가운데 상당히 많은
렇게 되자 용마루와 도리 등 서까래를 걸 수 있는 천장 시설이 필요하며, 천장과 벽
고인돌이 서해안지역에 분포하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내륙지역으로는 한강을 중심
이 높아져 집의 구조가 복잡하게 되었다. 이러한 몇 가지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으로 한 임진강의 샛강 옆이나 주변의 구릉지대에 위치한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
의 사람들은 신석기시대보다 집안을 밝게 하였으며 실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 면적 도 훨씬 넓어졌던 것 같다. 한편 굴립주 건물터[掘立柱建物址]가 하남 미사리, 춘천 천전리에서 발굴되었으
211) 하문식,〈서울 경기지역의 청동기시대 연구 현황〉 《고고학》1, 2002, 60쪽. 212) 우장문,《경기지역의 고인돌 연구》 , 학연문화사, 2006, 15~16쪽.
269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271
는 파주지역이나 안산 선부동유적처럼 제법 높은 산꼭대기나 구릉의 꼭대기에 있는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고인돌유적도 조사되었다. 고인돌의 형식은 한강유역을 기점으로 탁자식의 분포가 구분된다는 기존의 주장 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한강을 기준으로 탁자식과 개석식 고 인돌이 같이 있는 경우가 많아 지역에 따른 형식 분류는 의미가 없으며, 앞으로는 이런 여러 형식의 공존 문제가 비교 검토되어야 할 과제로 여겨진다. 한편 한강유역의 고인돌 분포관계에서 특이한 점은 샛강의 높다란 구릉지대에 상당히 큰 대형 고인돌이 일정한 범위에 걸쳐 1기씩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 적인 유적으로는 연천 양원리와 차탄리, 포천 수입리와 자작리∙금현리, 강화 부근 리, 이천 수하리유적 등이 있다. 그런데 이들 고인돌유적은 주변의 다른 고인돌과 10㎞ 안팎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범위가 설정되고 있어 주목된다. 이와 같이 대 형 고인돌이 일정한 범위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당시 사회의 조직이나 집단세력 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많은 것 같다. 최근 이렇게 탁자식의 대형 고인돌이 지역 적으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점에 유의하여 小國의 지배자와 관련시키는 강화도 부근리 탁자식 고인돌
의견은213) 시사하는 점이 많다. 경기지역의 고인돌 가운데 그 구조에서 특이한 점이 몇가지 찾아졌는데 이것은 지역적인 점이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하남 광암동 3호 고인돌, 오산 외삼미동 고인 돌, 화성 병점리 고인돌은 덮개돌 밑에 있는 받침돌(굄돌)의 모습을 보면 탁자식과 바둑판식 고인돌의 중간 단계로 이해된다.214) 다시 말하여 판자돌의 굄돌이 세워져
검토가 어렵고 앞으로 관련 자료의 증가를 기대할 뿐이다. 위에서 설명한 이러한 특이 구조는 고인돌의 형식이 전이되는 과정에 나타난 것 으로 해석되며, 경기지역 고인돌의 변천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있지 않고 뉘어져 있는 상태는 두 형식의 과도기적인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덮개돌 밑에 무덤방이 여럿 있는 경우가 안양 평촌동 고인돌유적에서 조사되었
이러한 구조가 지상이 아닌 지하의 무덤방 구조 형태로 제천 황석리 충13호 고인돌
다.217) 이렇게 하나의 덮개돌 밑에 복수의 무덤방이 있다는 것은 먼저 덮개돌의 주
에서도 조사되어215) 앞으로 자료가 모아지면 형식의 변천과정을 밝힐 수 있는 중요
요 기능을 무덤방 보호보다 무덤의 상징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묘표의 성격이 강한
한 자료라고 여겨진다.
것이고, 무덤의 기능으로 볼 때 이곳에 묻힌 사람들은 혈연을 바탕으로 한 가까운
안산 선부동 가지구 1호 고인돌은 탁자식과 개석식의 무덤방이 서로 연결된 상태 270 성 격 과 문 화 기 반
로 조사되었는데,216) 지금까지 이런 것이 조사된 예가 없어 현재의 상황으로는 비교
관계일 것 같다.218) 이렇게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한 서울 주변지역의 고인돌유적은 지리적인 위치
213) 석광준,〈로암리 고인돌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1, 사회과학출판사, 1993, 6~7쪽. 하문식, 앞의 책, 1999, 165~166쪽. 214) 하문식,〈오산 외삼미동 고인돌〉 《비지정문화재 조사보고서》 , 경기도, 2002, 330~332쪽. 우장문, 앞의 책, 2006, 375~377쪽. 215) 이융조∙신숙정∙우종윤,〈제원 황석리 B지구 유적발굴조사보고〉 《충주댐 수몰지구 문화유적 발굴조사 종합 보고서 : 고고∙고분 분야》(Ⅰ), 충북대박물관, 1984, 391~464쪽.
216) 신천식∙엄익성,《안산 선부동 지석묘 발굴조사 보고서》 , 명지대박물관, 1991. 217) 신천식∙엄익성,〈지석묘유적〉 《산본지구 문화유적 발굴조사 보고서》 , 명지대박물관∙호암미 술관∙경기도, 1990, 149~207쪽. 218) 하문식,〈북한지역 고인돌의 특이 구조에 대한 연구〉 《선사와 고대》10, 1998, 67~68쪽.
관계를 잘 반영하면서 점이적인 특징을
과 자루 가운데에 홈이 돌려진 것[二段柄式 ; 홈자루]으로 나누어지며 검날은 몸의
273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양쪽에 세워져 있고 한 가운데에 세로로 모가 나 있다.219) 통자루식 간돌검은 주로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남부지역의 무덤에서 출토되는데 여주 흔암리유적에서는 집터에서 찾아져 의미가 (3) 유물
있다. 홈자루식은 한강유역에 있는 파주 옥석리나 여주 흔암리의 청동기시대 전기
청동기시대의 유물은 살림의 쓰임새
의 집터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다른 지역과 차이가 있어 주목된다.
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났으며 날카로운
이른 시기의 돌검은 날에 실제로 쓴 흔적이 발견되며 시기가 늦을수록 儀器的 성
날을 지닌 간석기가 널리 발달하였다.
격이 강하여 지나칠 정도로 크게 만들어졌다. 이러한 간돌검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토기는 찰흙의 바탕흙에 굵은 모래나
연해주나 일본 큐슈지역에서만 출토되고 있어 지역적인 특색이 뚜렷하다.
활석을 섞어서 구운 민무늬토기가 대부
돌화살촉은 생김새에 따라 슴베가 있는 것과 없는 것, 버들잎 모양 등으로 크게
분이며, 쓰임의 목적에 따라 여러 가지
나누며 몸통의 단면 모습에 따라서도 구분된다. 이 유물은 청동기시대의 유적에서
가 있다. 청동기는 제작의 어려움, 원료
가장 흔하게 찾아지고 있으며 한강유역의 청동기시대유적에서는 여러 종류의 돌화
의 제한적인 공급 때문에 드물게 만들
살촉이 모두 출토되고 있다.
어져 쓰였으며, 뼈 유물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한편 평안도나 황해도지역에서 주로 발견되는 바퀴날 도끼와 톱니날 도끼가 있 는데 이 석기의 쓰임새는 실용보다 특수한 목적에 이용된 것 같다. 바퀴날 도끼는 지름 10~20㎝ 되는 크기의 둥그스름한 돌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고, 둘레의 가장자
① 석기
리에는 돌아가면서 날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최근 경기지역의 파주 당동지구, 화성
청동기시대에는 늦게 청동기가 나타
동학산, 평택 소사동유적의 집터에서도 달도끼가 찾아져 지역간의 문화전파나 교류
나고 있지만 여러 사정 때문에 일반적으
관계를 해석하는데 도움이 된다.
로 널리 사용되지 못하고, 오히려 간석 기가 살림살이에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간석기는 쓰임새에 따라 농사를 짓는
청동기시대에 널리 쓰인 민무늬토기는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와는 달리 무
데 이용된 돌낫∙반달돌칼∙돌괭이∙
늬가 없고, 적갈색이나 황갈색을 띠며 낮은 온도에서 구워 흡수성이 강한 편이다.
돌보습과 나무를 자르고 다듬는데 쓴 돌도끼∙돌자귀∙돌대패날∙돌끌이 있으며
비짐으로 굵은 모래알이나 활석이 많이 섞여 거친 느낌을 주며, 바닥은 편평밑이다.
음식을 조리하는 데에는 갈돌과 갈판이, 사냥이나 무기로는 간돌검∙돌화살촉 등으
민무늬토기의 기능은 음식을 끓이고 저장하며, 담는 등 크게 3가지로 구분된다.
로 구분된다. 이 밖에도 석기를 다듬는 데에는 숫돌이, 실을 꼬는 데에는 가락바퀴
음식을 끓이는데 사용된 토기는 원통 모양의 깊은 바리 토기가 있고 토기의 바닥에
가 쓰였고, 특수한 목적에 이용된 톱니날 도끼와 바퀴날 도끼가 있다.
구멍을 만들어 시루와 같이 쓴 것도 있다. 곡식과 같은 것을 저장하는데 쓰인 것은 주
간돌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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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토기
간돌검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간석기로 집터나 무덤 등 여러 유적에서 찾아
로 목항아리, 단지가 있고 음식을 담는데 쓰인 그릇에는 대접∙접시∙굽접시가 있다.
지고 있다. 주로 점판암 계통의 돌을 재료로 만들며 생김새나 크기로 보아 사람이 지니고 다녔던 무기로 해석된다. 형식은 자루에 장식이 없는 것[一段柄式 ; 통자루]
219) 이영문,〈전남지방 출토 마제석검에 관한 연구〉 《한국상고사학보》24, 1997, 7~71쪽.
문 구멍을 뚫었거나 반쯤 뚫은 구멍이 특징이다. 이 토기에는 입술에 톱니처럼 금을
275
새긴 골아가리토기도 있으며, 이런 것이 서울 역삼동 집터에서 찾아져 주목된다. 대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체적으로 이 토기는 화분형 토기와 연결되며 한강 이남의 경기 남부지역에서 주로 발견된다. 점토띠토기는 입술 바깥쪽의 단면에 둥근꼴이나 세모꼴의 찰흙띠를 붙여서 입술 을 상당히 두텁게 만든 것으로 밑바닥에는 굽의 높낮이가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 토기는 청동기시대 후기에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경기∙충청지역에서 널리 발달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고양 일산지역의 조사결과 적어도 청동기시대 중기 이전부터 한강 본류역에서는 굽잔토기와 같이 살림에 널리 이용되었던 것 같다. 가락리식 토기는 서울 가락동 집터에서 출토된 토기 형식에서 이름을 붙인 것으 로 생김새는 팽이 모양 토기의 변형으로 깊은 바리 모양이다. 겹아가리에 짧은 빗금 무늬가 있는 것이 기본이고, 짧은 빗금무늬+골아가리 무늬, 톱니무늬, 톱니무늬+골 민무늬토기
아가리 무늬 등이 있는 경우도 있다. 한강유역의 여러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특 히 여주 흔암리유적에서 많이 찾아졌다.
토기의 생김새나 외형적인 모습에 따라 뚜렷이 구분되며, 출토된 지역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덧띠새김무늬토기, 팽이토기, 구멍무늬토기, 점토띠토기, 미송리식 토
한편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특수한 목적에 사용하기 위하여 토기의 겉면을 매끈 하게 만든 붉은 간토기, 가지무늬 토기 등도 만들었다.
기, 가락리식 토기, 송국리식 토기 등이 있다. 덧띠새김무늬토기는 입술쪽에 덧띠를 붙이고 그 위에 빗금무늬나 자돌무늬를 새 긴 독특한 모양이다. 남쪽에서는 주로 바리 모양 토기에, 북쪽에서는 항아리 모양
청동기는 출토되는 수가 매우 적고 살림에 넓게 쓰이지 못해서 일부 사람들만 가
토기에 이런 무늬가 장식된다. 이 토기는 이른 청동기시대에 해당되는 것으로 해석
졌던 특수품으로 여겨진다. 한국의 청동기시대는 처음부터 청동기가 제작되지 않았
되며, 하남 미사리유적의 네모꼴 집터에서 찾아져 한강유역의 초기 청동기문화의
고 한참 지나서야 나타나기 때문에 시대의 개념을 정리할 때 이것을 기준으로 하지
전파관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220)
는 않는다. 또한 실제로 살림에 이용된 연모가 아니기 때문에 그 성격을 밝히는 데
팽이형토기는 팽이 모양에 매우 좁은 밑바닥을 붙인 것 같아 그릇의 배가 부르고 밑으로 내려갈수록 뾰족하다. 아가리는 겹으로 되어 있으며, 바깥쪽에는 빗금이 평 274 성 격 과 문 화 기 반
③ 청동기
행되게 그어져 있다. 서북지역에서 대부분 출토되고 있으며 한강 본류역의 청동기 시대 유적에서 주로 찾아지고 있어 문화상을 살펴볼 수 있다. 구멍무늬토기는 대부분 깊은 바리 모양인데 아가리 바로 아래쪽에 1줄로 드문드
에는 어려움이 많다. 동검은 이른 시기의 비파형동검과 이를 祖型으로 한 늦은 시기의 한국식동검이 있다. 비파형동검은 날 가운데에 튀어 나온 부분이 있고, 동검의 손잡이 쪽으로 내려갈 수록 배가 팽창되면서 곡선을 이룬다. 마치 중국의 옛 악기인 비파를 닮았다고 하여 붙인 이름으로 길이는 대부분 30~40㎝이다. 출토지역과 생김새에 따라 여러 가지
220) 하문식,〈하남지역 선사문화 연구〉 《하남의 역사와 문화》 , 국학자료원, 2001, 26~27쪽.
이름이 있다. 다른 청동기에 비하여 구리를 많이 함유하고 있으며, 날의 돌기 부분
과 나란하게 등날에 있는 마디
① 믿음
는 다른 동검과 구분되는 특징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원초적인 믿음의 형태는 큰 나무, 큰 돌 등
이 있다. 최근 파주 운정지구의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자연 대상물이 주가 되었던 것 같다. 이러한 자연 대상
발굴조사 과정에서 늦은 시기의
물에 대한 믿음은 생업경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자연적인 여러 현상을 극
비파형동검이 출토되어 한강유
복해 가면서 농사를 지을 때,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풍요의 의미와 관련이 있을 것
역의 동검 문화를 이해하는데
이다. 농경을 생업으로 한 당시 사회에서 농경과 관련있는 의례의 행위는 곧 당시
도움이 된다.221)
사회의 믿음 체계에 전적으로 의존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이렇게 농경과 관련된 믿
청동 도끼는 시기에 따라서
청동 거울
277
음의 표현은 농경문 청동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222)
차이가 있는데 이른 시기는 부
고인돌의 입지 조건과 굄돌의 형태로 보아 처음부터 구조적으로 무덤방을 이룰
채꼴 도끼[扇形式銅斧]이고 늦
수 없게 만든 것을 '제단 고인돌'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절대적
은 것은 어깨가 있는 도끼[有肩
으로 믿고 있던 대상이나 자연의 힘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고인돌 사회에서 행해
式銅斧]이다. 날이 부채 모양을
지던 여러 가지 의식을 거행하였던 것 같다. 이렇게 여겨지는 제단 고인돌이 포천∙
하고 있는 부채꼴 도끼는 몸통
안양∙강화∙고창∙고흥∙진천 등 전국적으로 조사되었다.223)
이 긴 네모꼴이며 뒤 끝이 비어 있고 도끼 자루는 수평으로 끼워 넣는 자루투겁 도 끼이다. 어깨가 있는 청동 도끼는 자루를 끼우는 방식이 같지만 날 부분의 너비가 좁아지고 몸통에 어깨가 있는 점이 다르다. 청동 거울은 거친무늬 거울[粗文鏡]과 잔무늬 거울[細文鏡]로 나누어진다. 크기가 비교적 작은 거친무늬 거울은 줄무늬가 굵고 거칠며, 만든 수법이 조잡하다. 요령지 역의 정가와자유적에서는 지그재그 무늬의 거울이 나왔고 부여 연화리, 익산 오금 산, 대전 괴정동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잔무늬 거울은 거울의 면이 오목하게 되어 있 어 햇빛을 한 곳에 모아 반사시킬 수 있으며, 물체를 거꾸로 비치게 하는 쓰임새로 보아 종교나 주술적인 의식에 쓰였을 가능성이 많다.
(4) 믿음과 예술 276 성 격 과 문 화 기 반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주변에서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을 극복해 가 면서 살림을 꾸렸기 때문에 풍요와 관련이 많은 자연 대상물에 믿음을 가졌을 것이
하남 덕풍골 제의유적
다. 특히 이러한 믿음은 당시 사람들의 사유 형태의 표시인 예술 행위로 표출되었다. 221) 기전문화재연구원,《파주 운정(1)지구 문화재 시굴조사 1차(33~36지점) 지도위원회의 자료》 , 2005 참조.
222) 한병삼, 앞의 논문, 1971. 223) 이융조∙하문식,〈한국 고인돌의 다른 유형에 관한 연구‘제단 고인돌’형식을 중심으로〉 《동 방학지》63, 1989, 29~66쪽.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한편 최근 한강유역의 하남 덕풍골과 양평 신원리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의 믿음
체계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짐승은 사슴과 호랑이가 새겨져 있고 바위의 아래
279
을 알 수 있는 제의 유적이 조사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하남 덕풍골유적은 산꼭대
쪽에는 역사시대의 線刻된 사람 모습이 있다. 또한 여기에는 신라시대의 글씨도 있
기에 솟은 큰 바위에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손질을 하여 段 시설을 만들
어 후대에까지 연속적으로 특수한 의식이 거행되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고 제사를 지낸 흔적들이 조사되었다. 그 옆에는 구멍무늬토기와 골아가리토기가
대곡리 바위그림은 평면 그림과 선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평면 그림에는 고
출토된 긴 네모꼴 집터가 있어 제의와 관련 있는 사람들이 살았던 것 같다.224) 이렇
래∙거북과 같은 물짐승, 멧돼지∙사슴∙순록 등의 뭍짐승 그리고 성기가 달린 남
게 제사와 직접 관련이 있는 바위유적은 처음으로 조사된 것이며 청동기시대의 정
자가 있다. 선 그림에는 교미하는 멧돼지, 고래 고기를 분배하는 그림, 그물과 울안
령숭배(animism)와 관련시키기도 한다.225)
에 갇힌 짐승, 사람 얼굴 모습이 있다. 또한 바위의 왼쪽에는 새길 대상을 쪼아서 표
양평 신원리유적은 남한강이 바라다 보이는 산기슭에 위치하며, 자연석의 바위
현하였고, 오른쪽 부분은 선으로 새길 대상의 윤곽을 쪼았다. 특히 새끼를 가진 모
를 둘러놓고 그 안에 돌무지를 만들어 놓았다.226) 이렇게 인위적으로 만든 둘레돌
습과 내장이 표현된 투시법은 북부 유라시아지역의 바위그림에서 찾아지는 수법과
[環狀�石]은 당시 사람들이 제의를 진행하였던 대상물이었을 것 같다. 주변에는 고
비교된다. 대곡리 바위그림도 천전리유적처럼 당시 사회 환경이나 살림 방식을 교
인돌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육하던 장소나 의식을 집행하였던 곳으로 여겨진다.228) 고령 알터 바위그림은 동심원, 네모, 십자형 등 여러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져 있
② 예술
는데 이것을 가면과 태양의 상징으로 해석하며 당시 사회의 풍요를 기원하는 제단
예술은 당시 사람들의 사유 형태, 믿음 등과 함께 복합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문
이었던 것 같다.
제이지만, 자료의 부족 때문에 어려움이 많다. 청동기시대의 예술은 크게 바위그림, 집터에서 발견된 조소품, 토기나 청동기에 새겨진 무늬 등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나. 조소품
대표적으로는 울산 천전리와 대곡리, 고령 알터유적이 있다. 이들 바위그림의 제
이 시기의 조소품은 흙을 빚어서 형상을 나타낸 것이다. 신석기시대에는 개를 대
작 시기에 관하여는 여러 견해들이 있지만 주된 시기는 청동기시대로 여겨진다. 반
상으로 한 조소품이 대부분인데 비해 청동기시대에는 돼지와 남자를 대상으로 한
구대 바위그림은 태화강가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면 천전리와 대곡리에 있
것이 많다.
강 상류쪽에 있는 천전리 바위그림에는 탈을 쓴 사람 얼굴, 동심원∙마름모꼴의 여러 가지 기하학적 무늬와 짐승 등이 새겨져 있다. 마름모꼴의 기하학 무늬는 소용 성 격 과 문 화 기 반
촉, 가면으로 짐작되는 상징물 등의 바위그림이 찾아졌다.
가. 바위그림
다.227)
278
또한 영일∙함안∙여천 등지의 고인돌 덮개돌에서도 검집에 꽂힌 간돌검과 화살
돌이, 물결 무늬와 함께 추상적인 의미를 지닌 채 새겨져 있어 당시 사람들의 사유
무산 범의구석유적에서는 돼지를 표현한 것이 여러 점 출토되었으며, 여성의 가 슴을 뚜렷하게 표시한 조소품도 있다. 서포항에서는 사람의 형상 10여 점이, 연길 소영자유적에서는 뼈와 흙으로 만든 인형이 찾아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소품으로 만들어진 사람은 집단의 번성을 바라는 조상신으로, 짐승은 번식을 비는 주술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229)
224) 세종대 박물관,《하남 덕풍골유적》 , 2006 참조. 225) 최몽룡, 앞의 책, 2006, 180~181쪽. 226) 경기대박물관,《중앙선 복선화 전철 구간내 4-2∙3지구 문화유적 발굴조사 지도위원회 자 료》 , 2005 참조. 227) 황수영∙문명대,《반구대》 , 동국대 출판부, 1984.
228) 이상목,〈울산 대곡리 반구대 선사유적의 동물그림〉 《한국고고학보》52, 2004, 35~64쪽. 229) 김원룡,〈한국 선사시대 신상에 대하여〉 《역사학보》94∙95, 1982, 1~18쪽.
다. 무늬
심으로 경기지역에서 이 시기의 많은 여러 유적이 조사되어 백제한성시대의 기층문
281
무늬는 토기나 청동기에 새겨져 있으며 당시의 예술적인 측면을 이해할 수 있는
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연천 초성리, 가평 달전과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자료이다. 토기에 있는 무늬는 크게 번개무늬와 선무늬로 구분된다. 번개무늬는 압록강유 역의 용천 신암리와 쌍학리, 나진 초도유적에서 나온 토기에, 선무늬는 함경도지역 의 토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웅기 송평동이나 초도유적에서 나온 토기에는 점선과 실선의 곡선무늬가 있다. 청동기에 새겨진 무늬는 청동기 자체가 특수 성격을 지닌 연모이기 때문에 상징
대성리, 포천 금주리, 파주 갈현리와 당하리, 남양주 수석동, 양평 상석정, 광주 장 지동, 부천 고강동, 수원 율전동, 화성 기안리와 동학산, 오산 가장동, 안성 반제리 와 만정리, 용인 대덕골 등이 있다. 점토띠토기 문화로 특징지어지는 이 시기의 유적은 주로 산이나 구릉의 꼭대기 에 자리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의 조사결과 충적지와 같은 평지, 얕은 구릉지 대에서도 마을을 이루고 있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성이 강한 것 같다. 특히 대쪽모양 동기, 방패모양 동기, 가지방울 동기 등 이형 청
사회상을 보면, 기존 집단과는 그 성격을 달리 하는 초기국가 형태의 정치체가
동기에 새겨진 무늬는 동심원, 세모, 고사리 점줄의 기하학 무늬와 새, 사슴, 사람의
등장함에 따라 혈연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조직보다 정치적으로 훨씬 진화된 집단체
상징 무늬로 구분된다. 세모와 동심원, 集線 무늬는 주로 청동 거울에 있는데 이 무
가 등장하였다. 이에 따라 직업이 분화되고 차츰 전문직화되는 경향을 보이게 되면
늬는 비파형동검 문화권의 중요한 상징이기도 하다.230) 고사리무늬는 가지방울 청
서 복잡 다원화되는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특히 국가조직의 활발한 변화 양상을 보
동기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동작을 나타낸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상징무늬는 사람
여주는 무역(통상권)과 관련된 고고학 자료가 최근 많이 조사되고 있어 주목된다.
이나 새, 사슴 등의 짐승이 새겨진 것으로 농경문 청동기와 아산 남성리 출토 나팔
양평 상석정유적과 사천 늑도유적에서는 三翼有莖銅鏃이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진
형 동기에 있다.
시황의 무덤인 중국 서안의 병마용갱에서 찾아진 것과 거의 같다. 이런 점에서 B.C. 2~1세기 무렵 이미 중원지역과 국제적인 무역 관계에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 시기의 집터는 주변의 지형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며 둘레를 조망할 수
4.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있는 것과 평지에 마을을 이루고 있는 것이 섞여 있다. 또한 높은 곳에 집터가 있는 경우에는 대부분 당시의 의례 행위를 집행하던 제의 유적이나 환호가 있는 것이 특
B.C. 4~3세기에 이르면 청동기문화가 쇠퇴하고 새로운 문화 양상이 등장하면서 사회변화가 진행된다. 이 시기를 청동기시대 후기, 초기 철기시대, 한국식동검기 등 으로 부르고 있다.
280 성 격 과 문 화 기 반
징이다. 집터의 평면 형태에서 찾아지는 특징은 凸자형과 �자형이다. 무덤은 고인돌이나 움무덤에서 나무널무덤으로 바뀌게 되는데 관련 유적이 최근 수원 율전동, 화성 발안리, 파주 당하리, 안성 만정리와 반제리에서 조사되었다. 이
이 시기의 새로운 문화 요소는 비파형동검이 변화된 한국식동검을 비롯한 가는
시기의 무덤은 대체적으로 한 곳에 1~3기 정도가 있으며, 입지 조건을 보면 구릉의
줄무늬의 청동 거울, 청동 화살촉, 청동 도끼, 청동 투겁창 등의 여러 청동기와 쇠도
능선이나 평지에서 찾아지고 있어 특정 지역으로 제한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출토
끼 등 철기로 만든 농기구, 토기의 입술 부분에 점토 띠를 덧붙인 점토띠토기 그리
유물은 다른 지역과 차이가 분명한데 이 시기의 남부지방 나무널무덤에서는 거의
고 나무널무덤[木棺墓]이 대표적이다.231) 최근 활발한 고고학 조사결과, 한강을 중
청동기가 껴묻기되어 묻힌 사람의 신분관계를 시사하고 있다. 하지만 한강유역이나
230) 이청규,〈청동기∙철기시대의 사회와 문화〉 《한국사》1, 한길사, 1994, 285~286쪽. 231) 이청규,〈세형동검의 형식 분류 및 그 변천에 대하여〉 《한국고고학보》13, 1982, 1~36쪽. 박순발,〈한강유역의 기층문화와 백제의 성장 과정〉 《한국고고학보》36, 1997, 21~31쪽. 최몽룡, 앞의 책, 2006, 78~97쪽.
경기지역에서 조사된 무덤들은 주로 점토띠토기나 목이 긴 검은 간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그러나 안성 만정리 2-1호 나무널무덤에서는 청동 화살촉과 철촉이, 4-1호에 서는 한국식동검이 찾아져 이 지역의 다른 무덤들과 비교된다.
283
가능성도 많다. 유물은 대표적으로 점토띠토기와 청동기가 있다. 점토띠토기가 등장하게 된 배 경에 관하여는 여러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다.233) 이 토기는 점토띠의 단면 모양에 따라 원형에서 직사각형∙삼각형으로 변화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근 화성 동 학산과 안성 반제리유적에서는 원형에서 삼각형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 성격의 점 토띠토기가 발굴되어 주목받고 있다. 그리고 경기지역의 몇 유적에서는 특이한 형 태의 이 토기가 출토되었다. 용인 대덕골유적에서는 바닥이 편평하고 깊이가 얕은 바리모양 토기가, 안성 망이산성에서는 토기의 어깨에 혹이 붙어 있었다. 이 시기의 유물에서 찾아지는 또 다른 특징은 한국식동검을 비롯한 여러 청동기 가 보편화되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조사결과 한강유역에서는 남부지역과는 다 르게 청동 의기가 찾아지지 않고 대부분 청동 연모와 무기류가 출토되었다. 한강유 역에서는 서울지역의 상일동∙응암동∙당산동에서 한국식동검이나 청동 투겁창이 조사된 것을 비롯하여 양평 상자포리, 고양 원당리, 구리 동구동 등에서 청동 유물 이 찾아졌다. 그리고 최근 화성 동학산유적에서는 청동 끌의 거푸집이 발견되어 용 연천 학곡리 적석분구묘
인 초부리와 함께 경기 남부지역에서 청동기가 제작되어 다른 지역으로 보급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한편 후기가 되면 백제한성시대의 기층문화를 보다 뚜렷하게 보여주는 무덤이
(하 문 식)
등장하는데 그것이 임진강유역인 연천 삼곶리∙학곡리∙군남리에서 발굴 조사되고 있는 돌무지무덤이다. 이들 유적에서는 타날문토기, 중국제 유리 장식품이 찾아져 백제한성시대의 세력 이동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232) 이 시기의 유적 분포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특징 하나는 조망의 조건이 좋은 주 변보다 비교적 높은 지역에 자리한 몇 유적에서 당시 사람들이 행한 제의 유구들이 조사된 것이다. 이런 제의 관련 유적은 오산 가장동, 안성 반제리, 부천 고강동, 수 원 율전동 등인데 모두 환호와 관련되어 있다. 즉 당시 사람들이 의미를 두고 있었 282 성 격 과 문 화 기 반
던 장소(산봉우리, 큰 바위)의 주변 가장자리에 환호를 만들어 에워싸고 있다. 이러 한 제의 공간의 확보는 이 시기에 들어와 겪게 되는 사회변화 관계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며, 의례 행위(ritual ceremony)가 당시 조직체의 통합 수단으로 이용되었을
232)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연천 삼곶리 백제 적석총 발굴조사 보고서》 , 1994.
233) 서길덕,〈원형 점토띠토기의 변천 과정 연구〉 《선사와 고대》25, 2006, 327~356쪽.
한 강 유 역 의 문 화 기 반
제1장 한성백제사 총설 한성백제 관련 저서 목록 제2장 한성백제와 한강유역의 지리환경 한성백제 관련 논문 목록 제3장 한강유역의 문화기반
한성백제 한국 고대사의 관련 역사적 저서 목록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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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섭∙김연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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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섭∙김연민)
363 한 성 백 제 관 련 논 문 목 록
國邑
찾아보기 高木城
ㄱ
35
244, 274
고사리무늬
280
244
古沙夫里城
38
가뭄
108
고이왕
46, 58, 97
43
고인돌
245, 281
77
고인돌문화
269
136, 191
고인돌유적
270
加弗城 가야 가와지 토탄
娘子谷城
國子監
34
내법좌평
82
國學
34
내신좌평
64, 81
郡頭
42
내평리유적
234
群臣會議
27
논 유구
257
君長社會
22
《논어》
軍主
34
64
농경공동체
194 260
굴립주 건물터
268
農耕文靑銅器
掘立柱 유구
233
訥祗王
弓遵
40
47
58
늑도유적
281
123
는들마을
206
귀족회의체
58
는들유적
226
剋虞
58
권농정책
近肖古王
ㄷ
29, 36, 40, 45, 55 60, 61, 72, 75
가와지유적
163
古資國
78
금동관모
87
多羅國
78
가학동유적
253
古奚津
70
금천리유적
257
多婁王
40, 41
211
고흥
65
금탄리유적
223, 231
간[磨製]석기
곡선무늬
多伐
46
280
錦峴城
38
檀君朝鮮
46
崎離營
57
丹陽赤城碑
238, 241
基臨王
46
담로
共守同盟
77, 83
기우제
110
당산동유적
255
�丘儉
36, 47
기저토탄층(basal peat layer)
189
대덕골유적
283
關彌城
41, 47, 81
金武力
50
大豆山城
49
�舒玄
50
대륙성기후
106 245
간돌검
236, 272
간빙기
133
甘文國
46
골아가리토기
感恩寺
30
監倉使
34
蓋鹵王
42, 55, 75
개루왕
41, 46
개석식
270
관입
갱신세(Pleistocene)
197
관창리유적
骨伐國
관산성 전투
99
��胤
33
대모산 집터
263
��春
50
대모산성
52
帶方郡
23 48, 50 61
26, 38, 42
245
거수
61
廣開土王
29
�春秋
居柒夫
50
廣開土王碑
29
金石竝用期
230
대보화강암류
거푸집
255
85
껴묻거리
221
대부
61
꽃가루분석
186
대서지
77
大城
59
대수
97
건국설화
성 격 과 문 화 기 반
38, 43
가락동유적
가락동식 토기
364
古墳壁畵
61
56
광개토왕비문 광암동유적
249
건길지
125
塊谷
40
乞師表
31
교역
265
검용소
94
교하리유적
격지류
212
구멍무늬토기
겹아가리토기
236
ㄴ
228, 241 236, 238, 274
나무널무덤
구분문
198
나제동맹
46
구석기문화
131
那奚國
鷄立嶺路
48, 49
구석기시대
185, 193
낙동강
계양산성
65
鷄立嶺
계절풍
106
考古學
22
故國原王
51
281
대천리유적
217
42, 47, 50, 117
대평리유적
257
58
대형화석(macro fossil)
190
92
대화리층
狗耶國
78
�浪
狗壤
44
�浪郡
36, 57, 72, 74, 77
80, 83
南加�
78
구이신왕
101
26, 36, 40, 97, 117
덕풍골유적 덧띠새김무늬토기 덧띠토기
136, 188 278 241, 274 238
狗川
26
南城
59
도가사상
고남리유적
264
狗川柵
38
남옥저
117
《도덕경》
고덕동유적
252, 254
國原城
48
南平壤
48
道琳
83
國原小京
48
남한강
92, 102, 130, 184
道使
42
고등식물
36, 41, 75
大耶城
36, 57, 72, 74, 77
113
65 66, 67
365 찾 아 보 기
夢村土城
59, 88
보습
211
산천신앙
23
武寧王
44, 50
보이즈만(Boysman)유적
186
삼거리유적
234
26
武督
51
삼성동유적
174
禿山柵
38
三翼有莖銅鏃
281
讀書三品科
34
도씨검
232
《讀史新�》 禿山城
61
寶藏王
무령왕릉
87
奉德寺
32
무문토기
227
烽山城
40, 45
돌널무덤
233
武�王
51
扶餘
돌도끼
210
舞踊塚
35
부자상속
282
文督
61
부체제단계
231, 275
勿吉
44
북부여
돌무지무덤 銅劍 《東國史略》
23
東國�代傳授地圖
미사동유적
35
동굴유적
262
東明王廟
67, 69
283
루벅(J. Lubbock)
193
ㅁ
새말유적
56, 57
민무늬토기
230, 232, 238, 239
66, 118
92, 94, 102, 130, 184
分臺 分道將軍 汾西王
ㅂ 바람
111 236
65
34
서리
34
서산마애삼존불
31
西安平
36
47, 60, 72
111
67
서포항유적 西海直航路
51
석곽묘
89
붉은간토기
238
비류
61
比流王 比利
78
《서기》
136 30, 224
30
70 236, 238, 259
샤머니즘
183
佛國寺
半古 반달돌칼
새말층
82, 83
불교공인
박사
56 47, 60 70
석기 石頭城
186
210, 272 38
석실무덤
184
비봉리유적
217
석영맥
185
비옥한 초생달지대
194
석영암편
185
반제리유적
283
비유왕
55
石造文化
35
반포동유적
253
比自�國
78
석촌동 고분군
88
석탄리유적
방사성탄소연대
25, 38, 43
밭 유구
마한
40, 77, 117
198, 236, 239
比只
46
257
비짐
185
善德王
51
269
白淨
30
비파형동검
231, 232, 275, 280
선무늬
280
마한연맹체
57, 70
百座講會
32
빗살무늬토기
185, 201, 209, 227
선부동유적
270
막고해
66, 67
번개무늬
280
204
범의구석
216, 237, 258, 261, 264
빙하기
187
선캄브리아기
269, 279
뼈도구
213
�禮
81
成均館
34
靺鞨
36, 40, 97, 117
범의구석유적
242, 245
法空
30
망이산성
283
法雲
30
명일동유적
244
벽골지
60
망월동유적
성 격 과 문 화 기 반
상좌평
44
27, 50
馬首城
말각방형
366
59
北魏
北漢山巡狩碑
半路國
마라난타
北城
240, 242, 268
261
바리형토기
ㄹ
247
41, 60
42, 63, 73, 121
동학산유적
253
상자포리유적
185, 201, 212, 227,
199 266
상일동유적
북한산성
미추홀
동천동유적
54 55, 56
274
미송리유적
東晋
281
미송리식 토기
230 67
131
상석정유적
북한강
280
동일계 무늬
상무룡리유적
190
동심원
23
125
미세화석(micro fossil)
銅石器時代 동예
36
三韓社會
66
232, 234
ㅅ
鮮卑
36 99, 101, 135
성저마을
157
細文鏡
276
母山城
40, 44
�中
70
私假制
73, 83
모용황
74
변성암
99
沙道城
40, 41, 46
280
邊太燮
23
사로국
77
소도
68
병관좌평
82
斯摩宿Ь
78
蘇塗信仰
67
沙伴王
46
召文國
木棺墓 木羅斤資
70, 76, 80
목만치
80
兵馬使
34
目支國
57, 58
甁山柵
25, 38
木�滿致 몽모리오나이트
84 210
蛇城
保壘
46
四天王寺
報聘使
76
沙峴城
41, 84 30 40, 44
세죽리유적
217
세형동검
231
소빙하기 召西奴 소연평도 조개더미
46 186 56 216
367 찾 아 보 기
265
安邪國
78
우레
昭知王
48
安在鴻
23
우면동유적
孫晋泰
23
安�
23
右輔
58
암각화
225
우복의 반란
암사동유적
220
우연적 작물화
소영자유적
率 송국리식 토기
274
송국리유적
257, 258
松菊里型 집터
267
앙덕리유적 애니미즘
水谷城
40, 41, 43, 72
手搏圖
35
야외집석유구
46
長史 獐山城
40, 44
56
장수왕
48
64
張威
220
125 245
優台
56
장지동유적
248
右賢王
83
赤山航路
51
30, 224
욱리하
84
적석총
89
203, 208
움무덤
281
적현
41
42
양수리유적
249
熊谷
40
赤峴城
양재동유적
251
熊川
58
전곡리유적
수하리유적
270
巡幸 繩文海進
어라하
125
熊川柵
38
전신세(Holocene)
36
어륙
125
圓光
31
전연
40
어은유적
258
圓山城
189, 219
餘昆
83
시조묘
69
餘紀
73, 83
始祖神
68
餘禮
始祖兄弟說話
56
餘信
식생
113
여의곡유적
257
爲民政治
신라
97
역삼동식 토기
243
위신재
신미국
70
역삼동유적
243
신분제사회
125
연양리유적
신생대
131
연천 삼거리유적
185, 186
연천계 편마암류
101
唯物論
염기성 암맥
185
U자형 삽날
신석기문화 신석기문화로의 전환 신석기시대 新城
196
전지왕
186, 188 74 42, 55, 80
점토띠토기
274
36
젓개마을
206
83
威德王
50
정령숭배
278
83
慰禮城
26, 39, 41, 59
정릉동유적
250
征服國家
29
221
鄭寅普
23
유기물
186
제단 고인돌
137
儒禮王
46
諸率會議體
200
�璃
56
조개더미
23
조개더미유적
33
122
朝貢使
277 58 199, 262, 264 203, 208 51
184, 185, 193, 198
榮留王
51
유황함량 분석
186
鳥嶺路
48
36
濊文化
86
을왕동유적
206
粗文鏡
276
231
오동유적
261
278
五部體制
57, 59, 61
응봉동유적
236, 246, 267
응암동유적
新州
49
옥석리유적
申采浩
23
온대기후
41, 47, 77
심성암
194
40 174
魏
신원리유적
�彌多禮
38, 43
원시 농경(incipient agriculture)
신암리유적
實聖
83
장자상속
239
肅愼
34
252
수석동유적
守事
온조
읍락
54, 61 254 254
106
義慈王
51, 52
祖彌桀取
84
助賁王
46
조상신앙
66
《朝鮮古代社會硏究》
23
56
�基白
23
《朝鮮民族史槪論》
23
70
옹관묘
70, 89
�德星
23
《朝鮮史硏究》
23
李丙燾
23
《朝鮮上古史》
23
《朝鮮上古史鑑》
23
100
와박사
124
十濟
54, 56
蛙山城
40
일라이트
210
雙峴城
42, 43
王ヶ
36
일반적인 작물화
220
조정좌평
81
王道政治�想
50
임진강
94
졸본부여
55
王莽
36
잉여생산물
王城
59
368 성 격 과 문 화 기 반
押督
111
ㅇ
ㅈ
阿旦城
41
外司正
34
阿達羅王
46
腰�城
40, 46
阿莫城
51
�東城
아신왕
55
용암리유적
아직기
64
右渠帥
56
자연유물
阿且城
47
牛頭州
45
慈藏
36 233
196
左渠帥
56
左軍
58
左輔
56
左將
58, 61 53, 58
慈悲王
48
佐平
自然崇拜思想
30
左賢王
83
208
주몽
55
31
走壤
58
369 찾 아 보 기
州助
34
청동기시대
主體史觀
23
청동기시대의 예술
竹嶺
46
靑木嶺
竹嶺路
48
초고왕
41
竹林七賢
65
初期國家社會
22
86
초도유적
中國文化 중기구석기시대
131, 181, 183
중석기시대(Meso-lith)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단계
131, 182, 193, 197 54
278
風納土城
52 57, 59, 66, 88, 103
41, 45
261, 264, 280
초부리유적
255
崔南善
23
취락중심 시기구분
200
雉壤
40, 72
ㅎ 하남위례성
57, 117
하등식물 하북위례성 下戶
46 30
126
興王寺
30
104
七子鏡
79
지진파
104
七重河
84
《韓國史大觀》
23
眞嘉謀
81
七支刀
63, 64, 65, 66, 73, 79, 86
《韓國史新論》
23
眞高道
81
침류왕
66, 67
《韓國史通論》
23
眞德王
51
한국식 투겁창
255
73 63, 65
타날문토기
振武
58
卓淳國
76, 78
眞武
81
탁자식
辰斯王
41, 66, 67
진앙
104
탄소동위원소 비율 湯井城
131 245 92, 102, 130, 184
231, 236, 254, 280, 283
《韓國通史》 282
韓文化
23 86
漢城
59
270
韓퉜劤
23
186
解丘
26, 38
해면변동
82 190
眞淨
81
太學
34
해부루
56
眞平王
50
토광목곽묘
70
해상교통
98
眞興王
29, 50
89
解須
眞興王巡狩碑
29
集線 무늬
280
집자리유적
202, 204
토광묘 토기
209, 273
토탄층
188, 189, 190
토테미즘
224
퇴적암
ㅊ 차일드(G. Childe) 책계왕 《천자문》 천전리유적 天地神
ㅍ
193 41, 60, 72
八坤城
41
해퇴(Marine regression) 핵지구(Nuclear zone)
82, 83 188 136, 188 194
玄�
36
玄采
23
狹山池
89
瓠蘆河
84
護身符
225
64
패수
56, 97
鎬�片磨岩
174
279
浿河
58
호평동유적
152, 182
69
팽이토기
天河石製 옥
248
팽이형토기
철기시대
186
편마암
淸談思想
65
청동 거울
276
평양성
청동 도끼
276
평양성 공격
청동 투겁창
283
평양천도
청동기
275
평창리유적
청동기문화
99, 101
해진(transgression)
55, 230
편마암류
布彌支
274 236, 238, 244
婚姻外交
45
홍수
110
100, 185
홍적세
102
135
화성암
99, 101
72, 75 45 48, 75 139, 182, 183 70
환두대도 환호 皇龍寺
237, 258, 263, 264, 273
興國寺
학곡리유적
한국식동검
224 154, 182
56, 57
하화계리 한강
흔암리유적
194
訖解王
지진
鎭東將軍��浪太守
185, 186, 187
113
雉壤城
ㅌ
후빙기
흑요석재
61
104
131, 182, 183
흑요석
29, 48
43
후기구석기시대 후빙기의 적응
지방통치조직
鎭東大將軍
성 격 과 문 화 기 반
品釋
中原高句麗碑
진도
370
186
80 57, 282 32
皇龍寺 9층탑
31
黃義敦
23
371 찾 아 보 기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구성
감수∙교열∙집필위원
| 위 원 장 | 이존희(서울시립대 명예교수)
|감
| 부 위 원 장 | 신형식(이화여대 명예교수)
임효재 (서울대 명예교수)
: 제1권
|고
문 | 원영환(강원대 명예교수)
신형식 (이화여대 명예교수)
: 제2권, 제3권
|위
원 | 고혜령(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장)
노중국 (계명대 교수)
: 제4권
정영호 (단국대 석주선박물관 관장)
: 제5권
김영미(이화여대 교수)
수|
김홍남(국립중앙박물관 관장) 노중국(계명대 교수)
|교
박용옥(한국여성연구소 자문위원)
김덕원 (명지대)
열|
서중석(성균관대 교수) 신용하(서울대 명예교수)
|집
이배용(이화여대 총장)
신형식 (이화여대)
: 제1권 제1장 제1절, 제4권 제2장
이성무(한국역사문화연구원 원장)
노중국 (계명대)
: 제1권 제1장 제2절, 제2권 제3장
이원명(서울여대 교수)
이혜은 (동국대)
: 제1권 제2장
이은순(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최무장 (전 건국대)
: 제1권 제3장 제1절
임효재(서울대 명예교수)
신숙정 (한강문화재연구원)
: 제1권 제3장 제2절
정영호(단국대 석주선박물관 관장)
하문식 (세종대)
: 제1권 제3장 제3절
정옥자(서울대 명예교수)
김기섭 (서울역사박물관)
: 제1권 부록, 제3권 제1장
정효성(서울특별시 문화국장)
김두진 (국민대)
: 제2권 제1장
최광식(고려대 교수)
강종원 (충남역사문화원)
: 제2권 제2장
최무장(전 건국대 교수)
양기석 (충북대)
: 제2권 제4장
한영우(한림대 특임교수)
임기환 (서울교육대)
: 제2권 제5장
황선희(상명대 명예교수)
이형구 (선문대)
: 제3권 제2장
박순발 (충남대)
: 제3권 제3장
| 연구간사 | 나각순
백종오 (충주대)
: 제3권 제4장
|서
서영일 (단국대)
: 제4권 제1장
윤용구 (인천시립박물관)
: 제4권 제3장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 제4권 제4장
|간
사 | 이충세(문화재과장)
기 | 이형우(조사연구팀장)
| 전임연구원 | 정희선, 박은숙, 이상배, 강제훈, 박명호, 전승원
필|
연민수 (동북아역사재단)
: 제4권 제5장
권오영 (한신대)
: 제5권 제1장
조경철 (한국학중앙연구원)
: 제5권 제2장
심정보 (한밭대)
: 제5권 제3장
박선희 (상명대)
: 제5권 제4장 제1절
김상보 (대전보건대)
: 제5권 제4장 제2절
신희권 (국립문화재연구소)
: 제5권 제4장 제3절
임영진 (전남대)
: 제5권 제5장
유물 사진 협조처
국립중앙박물관
서울대학교박물관
경기도박물관
국립공주박물관
한양대학교박물관
복천박물관
국립부여박물관
한신대학교박물관
하남역사박물관
국립춘천박물관
공주대학교박물관
토지박물관
국립전주박물관
숭실대학교박물관
국립문화재연구소
국립청주박물관
연세대학교박물관
충청남도역사문화원
국립진주박물관
고려대학교박물관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서울시립대학교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