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거리에서 체험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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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거리에서

오쿠 다 히 데 오

で 町 の 黙 沈

장편소설

최고은 옮김


CHINMOKU NO MACHIDE by Okuda Hideo Copyright © 2013 Okuda Hideo All rights reserved. Original Japanese edition published in Japan by Asahi Shimbun Publications Inc., Japan.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2014 by Minumsa Korean translation rights arranged with Asahi Shimbun Publications Inc., Japan through Imprima Korea Agency. 이 책의 한국어 판 저작권은 임프리마 코리아 에이전시를 통해

Asahi Shimbun Publications Inc.와 독점 계약한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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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교사 이지마 히로시가 수화기를 집어 든 것은 여름 해도 저문 7월 1일 오후 7시 10분경이었다. 구와바타 시립 제2중학교 교무실에 남은 열 명 남짓한 교사들은 저마다 기말고사 문제를 만드는 데 여념 이 없었다. 원래 외부에서 온 전화는 사무직원이나 신임 교사가 받지 만, 그날은 모두 퇴근하고 없던 까닭에 하는 수 없이 남은 사람들 중 에서 가장 젊은 서른 살의 이지마가 받게 되었다. 학교로 걸려 오는 전화는 대부분 좋은 소식이 없는 법이다. 더구나 이 시간에는. “2학년 B반 나구라 유이치 엄마입니다.” 수화기에서 흘러나온 어두운 목소리에 이지마는 반사적으로 흠칫 했다. 동시에 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수업을 담당하는 반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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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자그마한 덩치에 얌전해서 눈에 띄지 않았다. 나구라에 대한 인 상은 그게 전부였다. 서클 활동은 테니스 부라고 알고 있었다. “실은 아이가 아직 집에 오지 않았는데요, 따로 보충 수업이나 서 클 활동이 있나요?” “아뇨. 이제 곧 기말고사라 오늘부터 서클 활동은 쉽니다. 학생들 은 3시쯤에 모두 집에 갔는데요.” “그랬군요. 그럼 딴 길로 빠진 모양이네요.” “유이치가 휴대 전화를 가지고 있습니까?” 이지마는 사무적으로 물었다. 학교에서는 원칙적으로 학생들의 휴대 전화 소지를 금지하고 있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학부모도 많아 서 휴대 전화를 가지고 있는 현장을 적발했을 때만 주의를 주는 데서 그쳤다. 그런 형편이니 규칙은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였다. “네…….” 어머니가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전화도 안 받던가요?” “네.” 어머니는 아들이 지금까지 7시가 넘어서 집에 돌아온 적이 없고, 들를 만한 곳이 없다는 점, 그리고 휴대 전화 음성 사서함에 메시지 를 남겼는데도 답이 없다는 이야기를 걱정스레 털어놓더니 경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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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해야 할지 물었다. “글쎄요, 신고까지는……” 당황한 이지마는 일단 8시까지 기다려 보자고 한 다음, 교내를 둘 러보겠다고 약속했다. “뭔가 알게 되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죄송하지만 부탁드립니다.” 수화기 너머의 어머니는 미안한 듯 말했다. 전화를 끊은 이지마는 2학년 학년 주임 나카무라에게 통화 내용을 보고하고 교내를 살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난 김에 흡연 실에서 담배나 피우려고 마일드 세븐과 1회용 라이터를 바지 주머니 에 넣었다. 그리고 벽에 걸린 교내 시설 열쇠 다발을 집어 들었다. 교무실을 나서자 숨 막히는 열기가 살갗에 엉겨 붙었다. 예년대로 라면 장마가 끝나기까지 아직 보름쯤 남았다. 관동 북쪽 내륙에 자리 한 이 작은 도시는 여름이면 35도를 넘는 일이 잦았다. 기상청에서는 올해도 무더운 여름이 이어질 것이라 예보했다. 흡연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나서 먼저 2학년 B반 교실에 갔다. 인 기척 없는 교사에 샌들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만일을 위해 실습실과 화장실에 들러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다. 그리고 체육관과 비품실을 둘러보고 운동부 부실로 발길을 돌리려던 순간, 구름다리에서 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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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초를 발견했다. 교사가 버렸을 리는 없으니 학생 중 누가 여기서 몰래 피운 게 분명했다. 제2중학교는 전교를 통틀어 모두 12학급인 데, 2, 3학년 일부 학생 중에 불량 서클이 있었다. 지난달에도 밤중에 거리를 배회하다 몇몇 학생이 순찰을 돌던 경찰에게 주의를 받았다. 그 애들과 마주할 때는 교사들도 긴장했다. 이지마는 꽁초를 주워 근처 쓰레기통에 버리고 발소리를 내며 운 동부실 건물의 바깥쪽 계단을 올라갔다. 건물 2층에 늘어선 여섯 개 의 방에는 교정에서 연습하는 운동부가 제각기 둥지를 틀고 있었다. 이지마는 하나씩 열어 봤지만 모두 잠겨 있었다. 문단속은 각 부에서 하고 열쇠도 정해진 장소에 보관했다. 제일 안쪽 방이 남자 테니스 부였다. 문손잡이를 돌리자 오른쪽으 로 돌아갔다. 문이 열려 있었다. 나구라가 소속된 테니스 부 부실이었 다. 슬그머니 찾아든 불길한 예감과 함께 문을 열었다. “누구 있니?” 전기를 켜자 푸르스름한 불빛이 다섯 평 남짓한 실내를 비추었다. 네 트와 용구가 여기저기 널려 있을 뿐 사람은 없었다. 사내아이들의 짙 은 땀내가 코를 찔렀다. 불현듯 발치에 눈길이 갔다. 교칙이 지정한 검은색 책가방 하나가 벽 쪽에 놓여 있었다. 몸을 숙여 이름을 확인했다. ‘2학년 B반 나구라 유이치’라고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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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마는 가방을 열었다. 교과서와 노트가 들어 있을 뿐, 특별히 주의를 끌 만한 물건은 없었다. 나구라는 가방을 놓고 집에 간 걸까. 대체 무슨 사정이 있었지. 생각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기에 일단 교무실에 가져가기로 했다. 그리고 부실을 나와 바깥 복도 끝 난간에서 별생각 없이 아래를 내려다본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콘크리트 도랑에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어스름 속에서 하얀 셔츠 와 검은 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단번에 학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지마는 황급히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심장이 쿵쾅거리 고 순식간에 입안이 바싹 말랐다. 현장에 도착했다. “괜찮니?” 하고 물으며 학생의 얼굴을 들여다봤 다. 나구라 유이치였다. 눈을 감고 있었다. 낯빛이 창백했다. 이지마 는 앉아서 학생의 몸을 흔들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도랑에는 검붉은 피가 고여 있었다. 게다가 굳기 시작한 걸 보면 이미 시간이 한참 지난 것일까. 팔을 잡고 맥을 짚어 보려 했으나 싸 늘한 감촉이 부질없는 짓이라 말하고 있었다. 이미 숨진 것이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금니가 딱딱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이 렇게 동요한 건 난생 처음이었다. 사건일까, 사고일까. 이지마는 반사 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운동부실 옆에는 100년도 넘은 큰 은 행나무가 있었다. 그 가지가 하늘을 뒤덮듯 무성하게 뻗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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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학생들은 이따금 운동부실 지붕에서 이 나뭇가지로 건너뛰며 스릴을 즐겼다. 물론 학교에서는 못 하도록 막았지만, 몰래 위험한 도 전을 시도하는 학생들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나구라 유이치도 그러 다 떨어진 걸까. 아니면……. 이지마는 교무실로 달려갔다. 큰 파란이 일어날 것이다. 뒤죽박죽 인 머리에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교내에서 사망자가 나왔다. 그것도 학생이다. 교무실의 불빛이 밤바다를 떠도는 오징어잡이 배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구와바타 서 당직실에서 형사 도요카와 고헤이는 텔레비전을 보 며 배달 도시락을 먹는 참이었다. 경찰서 내에는 흡연 장소가 얼마 없기 때문에 흡연자들은 식사 시간이면 당직실에 모여 레지스탕스처 럼 몰래 식후의 한 대를 즐기고는 했다. 이날 도요카와는 ‘대기’라 불리는 당번이라 서 안에 있기만 하면 무엇을 해도 상관없었다. 형사과의 같은 팀 동료들은 장기를 두거나, 승진 시험 공부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오늘 밤에는 아무 일도 일어 나지 않기를. 도요카와는 당직실에 들어올 때 감실(龕室)에 두 손 모 아 기도했다. 얼마 전까지는 범죄와 무관했던 이 시골 마을에도 요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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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에는 절도나 상해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바로 지난주만 해도 편의점 강도 사건이 일어났다. 서에는 총 인원이 80명밖에 되지 않기 에 사건이 거듭되면 처리하기가 벅차다. 메시지 수신 소리에 휴대 전화를 보자 아내였다. 어차피 아기 사진 이겠지 하고 열어 봤더니 예상대로 태어난 지 4개월 된 아들이 웃는 사진이었다. “아빠, 조심하세요.”라는 메시지도 함께였다. 도요카와 는 눈을 내리깔고 쓴웃음을 지었다. “다이치죠? 정말 귀엽네요.” 당직실로 들어온 신임 형사 이시이가 뒤에서 사진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렇지? 자세히 볼래?” 휴대 전화 화면을 들이밀었다. 상대가 후배라 팔불출 같은 자식자 랑도 눈치 안 보고 할 수 있었다. “너도 얼른 좋은 짝을 찾아야지. 형사는 가족들 뒷받침이 없으면 해 나가기 힘들다고.” “그럼 선배가 소개 좀 시켜 주시죠. 여기로 발령 난 뒤로는 여자 만 날 새도 없다고요.” 덩치는 크지만 앳된 얼굴의 이시이는 샐쭉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리고 테이블에 앉아 도시락을 꺼냈다. 젓가락을 칼처럼 쓱 비비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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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기세로 먹기 시작했다. “아, 맞다. 전 직원은 이번 달 안에 무도 수련 열 시간을 채우라는 서장님 명이 떨어졌어요.” “누가 그래?” “아까 서면으로 내려왔다는데요? 갑자기 무슨 일인지…….” “본부에 점수 따려는 거 아냐? 부하를 출세의 도구로 삼으려는 거 지.” 도요카와는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나지막하게 말하며 웃었다. 이시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서장인 고마다는 지난 4월에 부임한 40대 후반 남자로, 현장 형사 들 사이에서는 벌써부터 좋지 않은 평판이 파다했다. ‘노력 목표’라 는 할당량을 세우고 실적을 올리는 데 급급했다. 현경 본부를 의식 한 행동이었다. 고참 형사들은 장기말에 빗대 ‘향차’┃일본 장기에서 앞으로 만 갈 수 있는 말.┃라는 별명을 붙이고 몰래 비웃었다. 위세는 등등했지만

앞으로밖에 나아갈 수 없는 인간이었다. 식사를 마쳤을 때 형사 과장 후루타가 샌들을 끌고 나타났다. “여기 있었군. 자네 둘은 지금 제2중학교에 좀 다녀와야겠어.” “사건입니까?” “모르겠어. 일단은 교내에서 중학생 시체가 발견됐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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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라고요?” 도요카와와 이시이는 저도 모르게 반쯤 엉덩이를 들었다. “야근하던 교사가 발견했는데, 19시 39분경에 119 신고가 들어와 구급대원들이 뛰어갔지만 이미 숨진 상태였어. 콘크리트 도랑에 머 리를 박은 걸로 추정되는 외상으로 봐서는 교사에서 추락했거나, 자 살로 보이지만 통화 내용만으로는 아직 몰라. 좌우지간 검시를 해야 하니 누가 가긴 가야지. 수고스럽겠지만 부탁해.” “사건성은 낮은 거죠?” “지금으로서는 그런 것 같지만 가서 잘 살펴보라고. 지금 학교 근 처 파출소에서 젊은 경관이 출동하긴 했는데, 시체를 보고 겁에 질려 서 아무 짝에도 쓸데가 없는 모양이야.” 후루타는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도요카와는 찻잔을 비우고 나서 피우다 만 담배를 끄고 일어났다. 이시이는 빨리 감기 버튼을 누른 비디오처럼 도시락을 입에 쑤셔 넣 었다. 그리고 차를 한 잔 마시고 가슴을 치면서 입안의 음식물을 강 제로 목구멍 너머에 넘겼다. 빠른 걸음으로 경찰서 밖으로 나오자 습하고 미지근한 공기가 기 다리고 있었다. 올해 여름도 더울 것 같았다. 두 형사는 수사 차량에 올라타 출발했다. 제2중학교까지는 채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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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도 안 걸렸다. 도요카와는 조수석에서 스쳐 지나가는 자동차와 자 전거, 행인들 중에 수상쩍은 이는 없는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형 사의 습성 같은 것이었다. 만에 하나 사고가 아니라 사건일 경우에는 현장에서 도망치는 범인이 있을지도 몰랐다.

중학교에 도착하자 제복 차림의 젊은 경관이 교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대충 인사를 하고 현장 쪽으로 차량을 안내했다. 헤드라 이트를 받은 옆얼굴은 창백했고,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안뜰을 지나 운동장에 차를 댔다. 외부 조명이 없어서 운동장은 어 둠에 뒤덮여 있었다. 축구 골대와 철봉이 헤드라이트 불빛을 받아 모 습을 드러냈다. 앞쪽으로는 2층 높이의 낡은 건물이 있고, 그 앞에 경 찰차가 서 있었다. 구급차는 교사 옆에 서 있었다. 파출소에서 나온 경관 두 명과 구급대원 한 명, 그리고 교사로 추정되는 열 명 남짓한 남녀가 두 형사를 맞이했다.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자 골프 셔츠 차림의 나이 지긋한 남자가 다 가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교장 시시도입니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구와바타 서 형사과의 도요카와와 이시이입니다. 학생의 시체가 발견됐다고 들었습니다. 최초 발견자는 누구죠? 그리고 장소는 어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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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 도요카와가 물었다. “이지마 선생님. 형사님을 안내해 드리세요.” 교장이 젊은 교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앞으로 나온 최초 발견자의 얼굴을 보고 도요카와는 “아!” 하고 외 쳤다. 상대방도 알아봤는지 순간 침묵했다 이내 “오랜만.”이라고 멋 쩍게 인사했다.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친하지는 않았지만 얼굴은 아 는 사이였다. 작은 동네라 이런 일은 일상다반사였다. 이지마가 앞장서 안내했다. 도요카와와 이시이는 손전등을 들고 뒤따랐다. “이 건물은?” “운동부 부실이에요.” 운동부실 뒤로 가서 학생이 쓰러져 있었다는 곳에 불빛을 비춰 보 니 콘크리트 도랑에 핏자국으로 보이는 검은 액체가 들러붙어 있었 다. 운동부실 복도의 형광등 불빛이 거기까지 닿아 한층 더 거무튀튀 해 보였다. “이 도랑에 쓰러져 있었어요?” “네. 몸이 반쯤 도랑에 걸쳐 있었죠.” 도요카와는 그 자리에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2층 높이의 운동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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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과 지붕이 보였다. 높이는 5~6미터쯤 될까. 그리고 머리 위에는 커 다란 은행나무에서 뻗어 나온 굵은 가지가 보였다. 지붕에서 떨어진 걸까.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걸까. 그게 아니면 다른 무슨 일이 일어났 던 걸까. “시신은?” “구급차 안에 있어요. 그전에는 양호실에.” “양호실? 거긴 왜요?” “학년 주임 선생님 지시입니다.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 각에…….” 도요카와는 그 설명을 듣고 납득했다. 교사라면 소중한 학생을 차 가운 도랑에 그냥 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이지마의 말에 따르면 시신을 발견하고 교무실로 달려가 그 자리 에 있던 모든 교사들과 함께 다시 현장에 와서 의식이 없는 학생을 살펴봤고, 교장을 비롯한 모든 교직원에게 연락을 하고서 구급차를 불렀다고 했다. 형사들은 학생의 이름과 학년, 그 밖의 정보를 알아내 수첩에 적었다. “학생 가족에게는 연락했습니까?” “아, 교장 선생님이나 교감 선생님이 하셨을 텐데…….” “교장 선생님, 학생 가족에게는 연락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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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이가 뒤에 있던 교장에게 물었다. “아뇨, 아직 안 했습니다.” 교장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소식을 들으면 학교로 달려오실 것 같아서, 아이를 병원으로 옮 긴 다음에 연락하려고 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러시죠.” 도요카와가 대답했다. 도요카와와 이시이는 시체를 살펴보기로 했다. 구급차에 타서 하 얀 시트를 걷어내고 시체와 대면했다. 우선 눈에 들어온 건 머리 우 측의 손상이었다. 쩍 벌어져서 뼈와 살점이 드러나 있다. 한눈에도 즉 사할 만한 충격임을 짐작하게 했다. 그 밖에 외상은 없었다. 그렇다면 추락사인가. 손목을 잡고 손가락을 살펴봤다. 나무 부스러기가 묻어 있지 않은 지 뚫어지게 보았지만 구급차의 조명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다. 얼굴은 지극히 평범한 생김새였다. 머리를 염색하거나 눈썹을 정 리하지는 않았다. 하얀 와이셔츠와 검은 바지. 복장도 평범했다. 키는 대충 150센티미터 전후로, 중학교 2학년치고는 꽤 몸집이 작았다. 전 체적으로 앳된 느낌의 소년이었다. “형사님, 이제 병원으로 옮겨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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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시죠. 어느 병원으로 가실 겁니까?” “아이토쿠 병원에 연락해 놨습니다. 그곳 원장님과 아는 사이입니 다.” “알겠습니다. 부검할 수도 있으니 그렇게 전해 주십시오. 경찰에 서도 사람이 갈 겁니다.” 도요카와는 구급차를 보냈다. 교장과 학년 주임이 구급차를 타고 떠나자 교정에는 교감과 나머지 교사들이 남았다. “다시 현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다리 있습니까? 운동부실 지붕 에 올라가 봐야겠는데요.” 도요카와의 말에 이지마와 젊은 교사 몇몇이 체육 창고로 달려가 긴 알루미늄 사다리를 가져왔다. “선배, 제가 올라갈게요.” 80킬로그램 나가는 이시이가 나섰다. “넌 밑에서 잡고 있어.” 말을 마친 도요카와는 손전등을 바지 뒷주머니에 넣고 사다리를 올라갔다. 알루미늄 사다리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바람이 불지 않아서 금세 구슬땀이 흘러내렸다. 사다리 끝까지 올라간 도요카와는 손전등으로 지붕을 비췄다.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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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 함석지붕이었다. 금방 발자국을 발견했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발자국이 여럿 있었다. 모두 운동화 자국이었다. 순간 마음이 급해졌 다. 단순 사고가 아닐지도 몰랐다. 사다리 위에서 고개를 돌려 은행나무 가지를 쳐다보았다. 지붕에 서 건너뛰기에는 용기가 필요할 것 같지만, 남자 중학생들에게는 둘 도 없는 담력 테스트일 것 같았다. 갖가지 상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일 날씨는 어떻대?” 도요카와는 밑에 있는 이시이에게 물었다. “글쎄요, 일기예보를 안 봐서 모르겠습니다.” “낮부터 비가 온대요.” 지켜보던 여교사가 대답했다. “이시이, 후루타 과장님한테 연락해서 감식반 보내 달라고 해. 지 붕에 발자국이 여러 개 있어. 비가 내리기 전에 채취해야 돼. 그리고 병원에 사람을 보내서 죽은 학생 손하고 옷에 나무껍질이 붙어 있는 지 확인하라고 전해 줘. 그리고 거기 자네, 출입 통제선을 치고 지금 부터 운동부실 및 그 주변 출입을 금지해.” 이시이와 파출소에서 나온 경관은 말이 떨어지자마자 움직였다. “교감 선생님. 내일 수업을 합니까?” “아뇨. 1교시에 전교 조회를 할 겁니다. 이번 일을 설명하고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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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집에 돌려보낼 예정입니다.” 한눈에도 고지식해 보이는 교감이 대답했다. “저기, 혹시 사고가 아니라 사건입니까?”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 봐야 할 것 같습 니다. 목격자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아마 경찰에서 협조 요청이 있 을 텐데, 잘 부탁드립니다.” 도요카와는 사다리에서 내려와 손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겨드랑 이가 흠뻑 젖었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20시 25분.” 그는 혼잣 말로 중얼거렸다. 교정 주변의 논에서 수많은 개구리들이 불이라도 붙은 듯 울어 대 고 있었다.

주오 신문 기자 다카무라 마오가 휴대 전화 벨소리를 들은 건 저녁 9시 정각이었다. 비번인 날이라 오랜만에 집에서 저녁을 지어 먹고 디저트로 키슈까지 구웠다. 그리고 와인 한 병을 따서 혼자 마셨다. 이제 느긋하게 목욕을 하고 좋아하는 외국 추리소설이나 읽으며 하 루를 마치려던 참이었다. 휴대 전화 화면을 보자마자 다카무라는 얼굴을 찡그렸다. 상사인 사이토였다. 좋은 소식일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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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나야. 쉬는 날에 미안한데 구와바타 시에 좀 가 줘야겠어. 시립 제 2중학교에서 학생이 시체로 발견됐어. 사건인지 사고인지는 아직 몰 라. 어쨌거나 학교 안에서 학생 시체가 나왔는데 기사를 아무렇게나 쓸 수는 없잖아.” “알겠습니다. 바로 출발할게요.” “하필이면 지금 지사에 아무도 없어서. 미안. 다른 날에 쉬게 해 줄 게.” 사이토는 성격 좋은 상사였다. 도쿄 출신이지만 자원해서 이곳 지 사에 영구 부임했다. 천식을 앓던 아이가 이곳에 오자마자 낫자 이대 로 시골에서 살고 싶다고 회사에 요청했다고 한다. 다카무라도 도쿄 출신으로, 작년 봄에 대학을 졸업하고 주오 신문 에 입사했다. 문화부에 지원했지만 신문사에서는 입사 후 몇 년 동안 지방 근무가 관례였기 때문에 이곳에 오게 되었다. 딱히 불만은 없었 다. 도쿄에서 전차로 두 시간 거리라 집에 오가기도 어렵지 않았다. “지금 알아낸 정보만 팩스로 보낼게. 아마 구와바타 서에서 오늘 밤에 기자 회견을 열 테니 가 보도록. 일단 사진부터 확보해.” “알겠습니다.” 사이토가 말한 사진이란 피해자나 피의자의 사진을 뜻한다. 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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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 집에 찾아가 사진을 빌리거나 복사하는 작업은 기자로서 가장 힘든 일 중 하나였다. 다카무라는 전화를 끊자마자 회사와 계약된 택시를 불렀다. 그리 고 부엌에서 세수를 했다. 조금이라도 술기운을 없애고 싶었기 때문 이었다. 옷도 바지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기자가 된 뒤로 일할 때 치 마를 입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내 택시가 집 앞에 도착했다. 숄더백에 노트북과 카메라, 녹음 기를 챙겨 집을 나섰다. 끈적거리는 공기가 살갗에 달라붙는 걸 느끼 며, 오늘 밤에는 목욕을 못 할 거라는 생각에 짜증이 났다. 택시에 타 목적지를 말하고 콤팩트를 꺼내 화장을 했다. 기자라도 여자는 여자다.

구와바타 시는 자연에 둘러싸인 인구 8만 명의 지방 도시다. 두 줄 기 큰 하천 사이의 비옥한 토지 덕에 메이지 이전에는 부농이 많은 농업 지대였다. 지금도 지역 이름을 딴 대파가 특산물로 알려졌고, 대 파 덕에 세운 궁전이라 할 수 있는 장엄한 전통 가옥이 수풀에 에워 싸여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농협 시설도 일류 기업 못지않았다. 옛 날부터 지연이며 혈연이 강세인 지역이고 사찰이 큰 영향력을 가진 까닭에, 전통 있는 단가┃檀家. 일정한 절에 속하여 시주를 하며 절의 재정을 돕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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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마을 유지로써 선거에서 캐스팅보트를 쥐곤 했다. 농협과 절, 그리 고 보수 정치. 전국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지방의 풍 경이다. 공무원 채용도 공정하게 이루어진 전례가 없었다. 선거법 위 반도 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헤이세이┃平成. 일본의 연호로 1989년이 원년.┃에 들어서면서부터 는 이 지역도 꽤 달라졌다. 국도를 따라 대형 쇼핑센터가 생겨났고, 시에서 벌인 유치 활동이 결실을 맺어 대형 공작 기계 회사 공장이 들어섰다. 거액의 보조금과 맞바꾸어 쓰레기 처리 공장도 생겼다. 대 부분 자영업에 종사하던 시민들은 월급 생활자가 되었으며 외국인 노동자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자연스레 지역 분위기 에도 변화가 생겨, 전체주의적인 풍조가 점차 옅어지고 있었다. 가을 축제 보조금은 벌써 5년 연속 최저액을 경신했다. 남에게 간섭하지 않는 세대가 늘어나면서부터 신축 아파트가 하나둘 생겨났다. 늦은 밤 편의점 앞에서 중학생들이 담배를 피워 대도 아무도 주의를 주지 않았다. 이 변화 또한 전형적인 지방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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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무라가 현장에 도착한 건 오후 9시 30분이었다. 교정 한 모퉁 이는 노란 경찰 통제선으로 둘러싸였고, 먼저 도착한 지역 방송국이 중계를 위해 눈부신 조명을 설치하는 중이었다. 학교 안이라 구경꾼 들은 없었다. 교사로 보이는 사람들 여러 명이 한곳에 모여 수군대고 있을 뿐이었다. 안에서는 경찰 감식반이 현장 검증을 하고 있었다. 부 실인 것 같은 2층 건물 지붕에도 사람이 올라가 손전등으로 뭔가를 찾는 듯했다. 기자 클럽이 준 연락에 따르면 이 중학교에 다니는 2학년 학생이 2 층 지붕에서 떨어져 콘크리트 도랑에 머리를 부딪치는 바람에 사망 했다고 한다. 그 이상의 경찰 발표는 아직 없었다. 다카무라는 왼팔에 신문사 완장을 차고 가방에서 필기도구를 꺼 냈다. 먼저 교사들을 향해 다가갔다. “주오 신문에서 나온 다카무라입니다. 학생의 시신이 발견됐다고 하던데, 자살입니까, 사고입니까?” 다카무라는 한 손에 노트를 들고 물었다. “몰라요.” 한 여교사가 매서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교장 선생님은 어디 계시죠?” “학생과 함께 병원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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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친 학생도 있나요?” “그러니까 죽은 학생의 시신을 따라서 병원에 가셨다고요.” 짜증스러운 태도에 다시 말을 붙이기도 조심스러웠다. 옆에 있던 중년 교사가 말했다. “취재는 내일 하시죠. 학교에서도 기자 회견을 가질 예정입니다. 교감 선생님은 지금 교무실에서 여기저기 연락을 하느라 바쁘고, 저 희도 호출을 받고 온 거라 아는 게 없습니다.” “그럼 최초 발견자라도…….” “이지마라는 선생님인데, 안에서 경찰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그는 손가락으로 제어선 쪽을 가리켰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안으로 들어가던 다카무라는 낯익은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하세 베라는 30대 중반의 남자로 잇코쿠 신문의 기자였다. “어, 자네 담당이야?” “네.” “구와바타 서 신임 서장은 의욕이 넘친다니까 분명 이번 일도 크 게 벌일 거야. 기자들에게 에워싸이는 걸 좋아한다나 봐.” 하세베는 듬성듬성 난 수염을 쓸며 웃었다. “사고가 아니라 사건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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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하지만 중학생이 학교에서 죽었으면 사람들 이목을 끌 테 니 경찰도 자연히 수사에 힘을 쏟겠지. 교내에서 죽었다는 게 포인트 야. 관리 책임도 불거질 테고, 보호자들도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하세베는 사회부 기자였지만 공격적이지 않고 어딘가 떠돌이 칼 잡이 같은 표표한 분위기의 인물이었다. 다카무라가 같은 대학 같은 학부 후배라는 걸 알고는 자주 말을 걸었다. 도쿄의 대형 종합 건설 사에 다니다 귀향해 기자가 된 괴짜였다. “사진은 교무실에 있는 앨범에 있어.” “감사합니다.” “그리고 죽은 나구라 유이치네 집은 이 지역에서 유명한 포목상이 야.” “죄송하네요. 하나부터 열까지.” “실은 여기가 내 모교거든. 이 동네 사정에는 훤하지.” “아, 정말요?” “응. 운동부실도, 은행나무도 옛날 모습 그대로네.” 하세베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커다란 은행나 무가 서 있었다. 감식반은 나무 아래서도 뭔가를 찾고 있었다. 분주히 움직이는 손전등 불빛이 흡사 반딧불처럼 잔상을 남기며 어둠 속에 여러 줄기의 선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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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카와 게이코는 야식을 만들며 남편이 퇴근하기를 기다렸다. 지역 공작 기계 회사에서 근무하는 남편 시게유키에게는 반 야근을 하는 날이 있어서 그날은 밤 11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공장에 서 저녁 도시락은 나오지만, 튀긴 음식이 많아서 저녁으로 알맞은 메 뉴는 아니었다. 올해 마흔둘인 시게유키는 요즘 배에 살이 붙기 시작 해 건강 검진에서도 주의하라는 진단을 받았다. 지금 게이코가 가장 신경 쓰는 건 가족의 건강이었다. 2년 전에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었 지만, 대출이 30년 이상 남아 있었다. 상황이 이러니 남편 건강이 가 장 중요했다. 그런 까닭에 남편이 먹을 야식을 만드는 건 일도 아니 었다. 지금 회사에서 출발한다는 메시지를 받고 야채와 돼지고기를 찜 통에 넣었다. 폰스 소스와 같이 먹으면 남는 기름을 걸러 내지 않아 도 된다. 바지락 된장국을 데우고 감자 샐러드를 준비했다. 부엌에 맛 있는 냄새가 솔솔 피어올랐다. 중학교 2학년 겐타와 초등학교 6학년 유키는 이미 2층에서 잠자리 에 들었다. 한창 자라는 두 아이의 엄마로서 게이코는 한시도 숨 돌 릴 틈이 없었다. 끼니마다 쌀 다섯 홉으로 밥을 지어도 남는 게 없었 다. 낮에는 마트 계산대에서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아이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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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이제 곧 아이들 여름 방학이었다. 방학이 되면 노토 반도로 가족 여행을 가기로 했다. 온천욕과 신선한 해물 요리를 즐길 생각만 해도 신이 났다. 게이코는 평범한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 오후 11시 15분에 시게유키가 돌아왔다. 항상 공장에서 샤워를 하 고 오기 때문에 오늘도 오자마자 식탁에 앉았다. 맥주 캔을 따서 감 자 샐러드를 안주 삼아 꿀꺽꿀꺽 마셨다. “겐타 학원 말인데, 사쿠라초에 있는 큰 보습 학원이 잘 가르친다 는 얘기를 들었어.” 남편과 마주 보고 앉은 게이코가 말했다. “벌써 학원에 보낸다고? 3학년 올라가면 보낸다며.” 시게유키는 텔레비전을 보며 대답했다. “그러려고 했는데, 겐타가 방학 시작하면 가겠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자기 친구들이 간다고 했겠지. 중학생이잖아. 저 혼자 빠지긴 싫 을 거 아냐.” “그래서 간다는 거야? 우리 아들내미는 귀가 얇은데.” “그럼 어때. 공부한다잖아.” 부부가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텔레비전 뉴스에서 젊은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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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운서가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하더니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오늘 오후 7시 반경에 XX현 구와바타 시 중학교에서…….” 가족이 살고 있는 동네다. 게이코는 이름이 불린 사람처럼 텔레비 전을 보았다. 대체 무슨 일인데 전국 뉴스에 나왔지? “이 학교에 다니는 중학교 2학년 학생이 머리에 피를 흘린 채 교정 구석의 도랑에 쓰러져 있는 것을 교사가 발견해 119에 신고했습니 다. 구조대원들은 신고를 받고 바로 출동했으나 학생은 이미 숨진 뒤 였습니다.” 학생이 죽었다고? “숨진 학생은 지역에서 포목점을 운영하는 나구라 쇼지 씨의 장 남, 열세 살의 나구라 유이치…….” “어머!” 게이코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나구라 유이치는 아들 겐타의 친 구였다. “현장 상황으로 미루어 운동부실의 2층 지붕이나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자세한 경위는 확인되지 않았으며, 사고 인지도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유이치는 겐타의 집에도 여러 번 놀러 올 만큼 친했다. 같은 테니스 부라 매일 붙어 다니는 사이였다. 지난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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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같이 어울리는 친구들끼리 집에 놀러와 게임을 했다. 현장 영상이 흘러나왔다. 조명을 받은 한밤의 교정에서 경찰들이 현장 검증을 하고 있었다. 운동부실, 큰 은행나무……. 이제껏 의식한 적은 없었지만, 그러고 보니 교정에 큰 나무가 있었던 것 같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게이코는 혼란스러웠다. 집에 올 때마다 나구 라 유이치는 항상 “안녕하세요.” 하고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아직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여린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었다. 뉴스는 금세 다른 소식으로 넘어갔다. 속보라 더는 정보가 없는 것 이다. “겐타 친구지?” 시게유키도 젓가락을 내려놓고 물었다. “응. 우리 집에도 몇 번 왔잖아. 당신도 아는 애야. 아사히초의 커 다란 포목상 집 아들 말이야. 덩치가 작고 얌전한…….” 게이코는 말을 이으면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중학생이 죽다니 이 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친구가 죽은 걸 알면 겐타는 얼마나 충격을 받을까. 한동안은 밖에 나가지도 못하는 게 아닐까. 이어서 아이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름은 히로코. 초등학교 때 부터 여러 번 학부모 회의에서 만났다. 항상 단정한 차림새에 장사꾼 특유의 사근사근함과 빈틈없는 분위기를 가진 여자였다. 겉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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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전해 보이지만 자기주장이 강했다. 겐타를 비롯한 많은 친구들이 중학교에 올라갈 때 나구라 포목점에서 교복을 맞춘 건 히로코가 물 밑에서 열심히 영업한 결과였다. 그 엄마는 지금쯤 어떤 심정일까. 게이코였다면 분명 정신을 잃었 을 것이다. 자식을 먼저 보내다니…… 그것도 어느 날 갑자기…… 상 상한 것만으로도 공포에 사로잡혀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겐타 깨울까?” 게이코가 말했다. “그냥 내버려 둬. 깨워서 어쩔 건데. 그리고 지금 일어나면 다시 못 자. 내일 아침에 말해 주면 돼.” “그래도…… 매일 붙어 다니던 친군데.” “굳이 지금 알려 줄 필요는 없다니까.” 시게유키는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내일 학교도 정신없겠군. 수업도 못 할 테고.” “그러게. 임시 집회를 연 다음에 휴교할 것 같아.” “보호자들한테는 따로 연락이 없는 건가?” “뭔가 알아내면 연락이 오겠지.” “자살인가.” 시게유키가 노골적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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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들 알겠어.” “오후 7시쯤이라고 했지? 겐타는 몇 시에 들어왔어?” “4시 지나서.” “그럼 겐타하고는 상관없겠네.” “당연히 없겠지.”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가슴속에서는 잿빛 감정이 부풀어 올랐다. 아들과 나구라 유이치는 매일 같이 집에 오는 그룹이었다.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거실 전화가 울렸다. 순간 가슴이 철렁해 자리에서 튀어 오를 뻔 했다. “누구지?” 남편의 말에 쭈뼛쭈뼛 발신자 표시 화면을 보자 겐타 친구 엄마에 게 온 전화였다. 엄마들끼리 사이도 좋았다. 수화기를 들었다. “밤늦게 미안해요. 저 에이스케 엄마예요.” 탁한 목소리가 들렸다. “겐타 엄마, 뉴스 봤어요?” “봤어요. 유이치가…….” “저도 얼마나 놀랐는지, 충격 받아서 지금 심장이 벌렁거려 요……. 겐타도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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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이미 잠이 들어서 깨우지 말자고 지금 남편하고 이야기하 던 중이에요. 에이스케는요?” “우리 애도 잠들었거든요. 자는 애를 깨워서 말해 주기도 그래 서……. 사고일까요, 자살일까요? 뭔가 짐작 가는 게 있으세요?” “아뇨. 없어요. 저도 불안해서 오늘 밤에 잠이 안 올 것 같네요.” 두 어머니는 잠시 불안한 마음을 토로했다. 에이스케네는 편모 가 정이라 뉴스로 사건 소식을 듣고 마음이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5분 쯤 이야기를 하니 조금 안정이 된 듯 목소리도 차분해졌다. 그녀는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고 전화를 끊었다. 뉴스를 본 이 동네의 중학생 자녀를 둔 어머니들은 오늘 밤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주변에서 사람이 죽는다는 건 엄청나게 사람을 뒤흔드는 일이다. 심야 영화를 보겠다는 남편을 두고 게이코는 먼저 잠자리에 들었 다. 캄캄한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오지 않 았다. 겐타는 오늘 유이치와 함께 집에 오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이야 기를 나눈 건 언제였을까. 이 일에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죽은 소년에게서 아들로 걱정이 옮겨 갔다. 우리 애와는 아무런 관 련이 없기를. 마음속으로 그렇게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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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들에게 피해가 갈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닐지, 아니면 아들이 뭔가 알고 있는 게 아닐지……. 두려워서 그 뒷일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게이코는 몸을 돌려 누우며 형언할 수 없는 불안에 휩싸였다. 내일 이 오는 게 두려웠다. 불길한 예감은 항상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자정이 넘어가던 무렵, 도요카와와 이시이는 후루타 과장의 호출 을 받았다. 급히 아이토쿠 병원으로 오라는 명령이었다. 안 보인다 싶 었더니 시신을 옮긴 병원에 있던 모양이었다. 규모가 큰 경찰서의 과 장급은 대부분 데스크 근무지만, 구와바타 서는 모두 합해 80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서였다. 두 사람은 교무실에서 교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서로 돌아와 조서 를 쓰던 중이었다. 현장 검증은 감식반이 이미 마쳤기 때문에 오늘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없을 터였다. 때문에 병원으로 오라는 말에 의아해했지만 명령대로 다시 차에 올라탔다. 이 시간에는 오가는 차도 거의 없다. 고요한 시골 거리에 이따금 폭주족의 굉음이 울려 퍼졌다. “선배는 추락 사고라고 생각하세요?” 운전대를 잡은 이시이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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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어. 지붕 위의 발자국이 누구 건지 밝혀져야 확실해지겠 지. 채취한 다섯 쌍의 발자국이 대체 누구 건지 말이야.” 교사들의 이야기로는 운동부실 지붕은 남학생들의 담력 시험장처 럼 쓰여 늘 누군가가 올라갔기 때문에 발자국이 있다고 딱히 이상할 건 없다고 했다. “죽은 애를 지붕에서 밀치고는 무서워서 도망친 거 아닐까요.” 이시이가 추리를 펼쳤다. “살인 사건이었으면 좋겠어?” “아뇨, 그 반대라고요. 솔직히 어린애들 심문할 자신 없어요.” 소년의 담임과 소년이 속한 테니스 부 고문에게 언제나 몰려다니 는 친구들 이름은 이미 알아냈다. 모두 평범한 아이들로 문제를 일으 킬 만한 학생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어른이 모르는 얼 굴이 있는 법이다. 다음 날은 학생들에게 참고인 조사를 할 예정이었다. 학교 측에서 특정 학생들만 부르지 말아 달라고 요청한 까닭에 전교 조회가 끝나 고 같은 반 학생들과 테니스 부원들을 만나 모두에게 이야기를 듣기 로 했다.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교사들은 제 할 일을 다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유서라도 나오면 모두 쉽게 해결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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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이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 “그게 경찰이란 놈이 할 소리냐? 그리고 2층 지붕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건 그렇지만…….” 사거리 옆에 있는 편의점 앞에 불량 학생들이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시계는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서두르는 길이 아니었다면 차에서 내려 한소리 했을 것이다. 대체 부모는 뭐하고 있는지. 도요카와는 요즘 부모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소년계 형사가 좀도 둑질을 하던 중학생을 붙잡아 부모를 부르자 우리 애 장래를 망쳤다 며 항의를 하는 일도 있었다. 30대인 도요카와조차 한숨 쉴 정도로 지방도시의 모럴은 땅에 떨어져 있었다.

병원에 도착해 지하 영안실로 내려갔다. 복도 벤치에 시시도 교장 이 초췌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도요카와와 이시이를 보고 “고생하십 니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아직 안 가셨습니까?” 도요카와가 물었다. “어머니가 유이치의 시신을 보고 정신을 잃어서 지금 위층 병실에 누워 있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돌보고 있고요. 이런 상황에서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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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갈 수는 없죠.” “그랬군요. 고생이 많으십니다.” “어, 다들 왔네. 안으로 들어와.” 영안실 문을 열고 후루타가 나왔다. 착잡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 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시신을 안치한 침대와 처음 보는 남자 둘이 있었다. 후루타는 의사와 본부에서 나온 검시관이라고 소개했다. “사인에 이상한 점이 있습니까?” “아뇨, 사인은 두부 손상에 의한 출혈사입니다. 아마 즉사했을 겁 니다. 손상 부위도 도랑의 모양과 일치하니 딱히 문제는 없습니다. 사 망 추정 시각은 오후 4시 전후. 추락사라고 단정해도 되겠습니다. 다 만…….” “다만?” “머리 쪽 상처에 정신이 팔려서 다른 데는 보지도 못했어. 덤으로 유족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통곡을 하는 바람에 자세히 들여다볼 새 도 없었지.” 말을 마친 후루타는 시체를 덮은 천을 벗겼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 지 않은 소년이 누워 있었다. 겉보기에 이상은 없었다. “나중에 와이셔츠를 벗겨 보니 이런 자국이 있더라고.” 후루타가 눈짓하자 의사와 검시관이 시체를 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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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소년의 등을 보고 도요카와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시꺼먼 내출혈 자국이 물방울무늬처럼 수없이 남아 있었다. “이게 뭡니까?” “꼬집힌 자국 같아요.” 의사가 조용히 대답했다. “모두 스물한 군데고요.” “대체 누가 이런 짓을…….” “모르지. 하지만 사인과 상관없어도 추락사와는 관련되었다고 봐 야 할 것 같아. 교내 폭력인지, 부모의 학대인지…….” 후루타는 콜록거리며 기침을 했다. “그리고 자네가 말한 나무껍질 말인데, 손바닥과 바지에서 그 비 슷한 게 나왔어. 아직 조사 중이라 자세히는 모르지만 나뭇가지에 매 달리거나 붙잡았다 끝내 떨어졌을 가능성이 커.” “그렇군요.” 도요카와는 중요한 증거를 놓치지 않았음에 약간 안도했다. 하지 만 이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직 몰랐다. 가장 위험한 건 속단 이다. “내일 날 밝자마자 서장님께 보고할 텐데, 이 일은 당분간 언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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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알리지 않을 거야. 이 멍 자국은 너무 파장이 커서 언론에서 알면 난리가 날 테니까. 부모가 학대한 게 아니라면 유족도 모르는 일이겠 지. 교장 선생님과 학년 주임 선생님한테는 들켰지만, 우리 수사에 협 조하겠다더라고. 본부에서도 지원이 나올 거야. 한동안 바쁘겠지만 진상을 밝히는 데 애 좀 써 줘.” “알겠습니다.” 도요카와는 허리를 똑바로 펴고 대답했다. 지금 다시 한 번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열세 살 나이에 강제 로 인생의 막을 내린 가엾은 아이를. 영안실의 냉방이 너무 세서 등줄기의 땀이 순식간에 말랐다. 옆에 서 이시이가 요란하게 재채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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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다 히데오(奥田英郎) 1959년 일본 기후 현 기후 시에서 태어났다. 잡지 편집자, 기획자, 구성 작가, 카피 라이터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1997년 『팝스타 존의 수상한 휴가』로 등단하였다. 인간 군상을 따스하고 유머러스하게 조명하면서 한편으로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치밀하게 들여다보는 그는 순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대표적인 일본의 크로스오버 작가로 꼽힌다. 2002년 『인 더 풀』로 나오키 상 후보에 올랐으며, 같은 해 『방해』로 제4회 오야부 하 루히코 상을, 2004년 『공중그네』로 제131회 나오키 상을, 2009년 『올림픽의 몸값』 으로 제43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 『공중그네』, 『남쪽으로 튀어!』, 『걸』, 『면장 선거』, 『스무 살 도쿄』, 『오 해피데이』, 『연장전에 들어갔습니다』, 『꿈의 도시』 등이 있다.

옮긴이 최고은

대학에서 일본사와 정치를 전공했고 대학원에서 일본 대중문화론을 공부했다. 현 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며 좋은 책들을 소개하려 힘쓰고 있다. 옮긴 책으로 『인간 의 증명』, 『부러진 용골』, 『64』,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등이 있다.



침묵의 거리에서 펴낸날 2014년 3월 5일 발행인 박근섭·박상준 편집인 장은수 펴낸곳 출판등록 1966. 5. 19. 제16-490호 주소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산대로1길 62(신사동)

강남출판문화센터 5층 (135-887)

대표전화 515-2000 | 팩시밀리 515-2007 홈페이지 www.minumsa.com 한국어 판 Ⓒ 비매품

, 2014. Printed in Seoul,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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