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과 소비는 하나다” 인농 박재일 선생 4주기 특별 강연회 및 추모의 밤
생명위기 시대, 농업살림을 통한 연대와 협동
차 례
인농 박재일 선생의 삶과 활동 _5 : 민주화운동가에서 생명살림꾼으로 특별강연 [참고자료]
생명, 농업, 그리고 미래 _14
야스다 시게루保田茂 |고베대학 명예교수, 고베학생청년센터 이사장 지정발언
생명농부의 바람과 포부 _18 김상기 |천지보은공동체 대표 “생산과 소비는 하나다” 회원생협에서 생각하는 한살림운동 _20 이유섭 |한살림경기서남부 이사장 국민농업의 실현과 한살림의 역할 _22 정기환 |국민농업포럼 상임이사 이야기마당 [참고자료] 생협운동에 대한 추억 _26
김성훈 | 전 농림부 장관 [참고자료] ‘마음살림’: 한살림 수행의 개념과 의의 _31
이병철 |한살림연수원 마음살림위원회 위원장 모심의 마음 살림의 생각으로- 한살림의 정신과 가공사업 생산지 운영 _40 유억근 |마하탑 대표
인농仁農 박재일
인농 박재일 (1938~2010)
1938년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에서 농부의 아 들로 출생 1960년 서울대 문리대 입학 1964년 6.3 한일협정 반대시위 주도 1965년 이옥련 여사와 결혼 1965년 한일수교협정이 조인되고 반대시위가 격 화되면서 구속됨 1969년 강원도 원주에서 무위당 장일순 선생을 만나고 진광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음 1971년 진광중학교 내 협동교육연구소 합류 1973년 가톨릭농민회 참여 1981년 일본 생활클럽생협, 대만 원주민소협 등 방문 1982년 가톨릭농민회 회장 역임 1985년 원주소비자협동조합 초대 이사장 역임 1986년 서울 제기동 한살림농산 설립 1988년 2월 소비자협동조합중앙회 3대 회장 역임 1989년 한살림모임 의장 취임 1991년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공동대표 1994년 환경농업단체연합회 초대 회장 역임 1997년 철탑산업훈장 수훈 2000년 서울 환경상 대상 수상 2009년 정일형 이태형 자유민주상 수상 2009년 일가상 수상 2010년 73세를 일기로 영면
4 인농 박재일 선생 4주기
인농 박재일 선생의 삶과 활동 : 민주화운동가에서 생명살림꾼으로*
어진 농부 仁農 박재일. 그는 1938년에 경북 영덕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면소 재지 장사長沙에서 20리 산길을 걸어올라 제일 끝에 있는 마을이 바로 박재일의 고향이다. 초등학교 1, 2학년을 왕복 16킬로미터를 걸어 다니다가, 아버지(박창근)가 마을사 람들과 함께 분교를 세운 뒤 먼 거리 통학을 그만둘 수 있었다. 6.25 전쟁이 나 기 직전에 고향을 떠나 대구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휴전 후 고향으로 돌아와 초 등학교 남은 과정을 마쳤다. 지역에 있는 흥해중학교를 졸업한 박재일은 홀로 대 구로 나와 경북고등학교를 다녔다. 졸업하던 해인 1959년에 서울대 상대에 응시 했으나 낙방하고 고향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재수한 후 1960년에 서울대 문리 대 지리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학업에 전념하기 어려운 시대였다. 박재일의 대학 생활 첫 해에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선거가 있었는데 이에 항거하는 4.19 학생 데모에 참여하게 된다. 이후 이승만의 하야가 발표되면서 공부에 전념하려 했으 나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학생운동 주모 자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박재일 역시 한동안 도피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해 가을 학교로 돌아왔으나 학교는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해 12월에 군에 입대해 강원도 인제에 있는 전방 21사단 65연 대에서 군복무를 하게 된다. 1963년 7월에 제대한 박재일은 고향에 내려갔다가 * 이 글은 2007년 7월에 당시 사단법인한살림 회장으로 있던 박재일과 세 차례 인터뷰 한 내용을 토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인농 박재일 선생의 삶과 활동 5
가을에 다시 학교에 복학하게 된다. 하지만 1964년에 한일협정반대 시위에 참여 하면서 주동자들에 대한 공개 수배가 내려지자 박재일도 도피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에서 박재일은 고향을 찾아 집안과 친척들에게 인사드리러 갔다가 어른 들 주선으로 선을 보게 되고, 1965년 3월 이옥련 여사와 결혼을 하게 된다. 하 지만 결혼생활 역시 혼란한 사회 상황으로 인해 순탄하지 못했다. 결혼 후 서울 로 올라왔으나 한일협정 조인 반대 시위가 벌어지자 여기에 함께하게 되고, 결국 계엄령이 내려지자 도망 다니다가 7월에 연행되어 40여 일간의 조사과정에서 많 은 고초를 겪고 결국 12년 형을 선고받게 된다. 1966년 출옥해서 나오니 첫째 딸은 백일이 지난 상황이었고, 학교는 65년 9월에 졸업된 것으로 되어 있어 가 족의 축하를 받는 졸업식도 가지지 못했다. 출옥 후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아 고향에 내려가 농사를 지어보았으나 오랜 시간 농촌을 떠나 있던 몸으로는 무리가 있음을 판단하고 1967년 무작정 다시 상경하 게 된다. 상경 후 아르바이트 등을 하면서 생활 방도를 찾았으나 운동과 투옥 경 력을 가진 그로서 일자리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당시 학생운동 경력을 가진 많 은 이들이 정치권으로 들어갔으나 박재일은 애당초 정치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고심 끝에 농촌 생활의 경험을 살릴 수 있는 농민운동의 길을 찾게 되었 다. 하지만 고향에 다시 내려갈 수는 없고 마땅한 활동 현장도 없어 고민하던 차 에 친구 김지하로부터 원주에서 일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연락을 받게 된다. 원 주는 김지하의 소개로 만난 적이 있는 장일순 선생이 있는 곳인데, 박재일은 맑 고 다정한 느낌을 준 선생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장일순 선생과 관계 가 깊었던 한기호 선생을 따라 기차 타고 원주에 내려간 그는 장화순 선생이 교 장으로 있던 진광중학교를 소개받고, 1969년 8월부터 1971년 말까지 2년 반 정 도 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게 된다. 학교 앞 마을 단구동에 방을 얻고 생활을 시 작한 박재일은 당시의 원주 생활이 가장 행복했다고 기억한다. 결혼을 하고 가정 이 있는 몸으로서 학교 교편생활은 봉급이 나오는 안정된 직업이었고, 정치적으 로 혼란스러운 시기였지만 중학교에서 학생 데모가 일어날 일도 없는 데다,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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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원주에는 장 선생 등 고마운 분들이 주위에 많았기 때문이다. 박재일이 원 주에 와서 가톨릭 신자가 된 것도 장일순 선생의 권유와 함께 지학순 주교와 반 듯한 원주교구 신자들에 대한 호감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재일은 2년 반 만에 교편생활을 그만두고 자청해서 1972년 3월부터 예산도 없는 협동교육연구소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다. 당시 책임간사였던 장상순 선생과 함께 지역을 다니면서 신협 교육을 하고 사람들을 조직하는 것이 주요 역할이었다. 그런 와중에 그해 8월 19일 남한강 유역에 대홍수가 일어나 극심한 피해가 발생하게 된다. 그때 이곳을 관할 구역으로 두고 있던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가 나서서 독일의 미제레올과 까리따스로부터 수해복구와 수재민 지원 사업 을 위한 자금을 지원받아 1973년 1월부터 교구 차원에서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꾸리게 되는데 박재일도 여기에 참여하게 된다. 재해대책사업위원회에서 박재일 이 주로 맡은 역할은 농촌지역을 지원하는 일이었다. 당시 재해대책사업위원회는 여타의 구호사업과는 달리 물질과 정신의 모든 면에서 사람들의 자발성과 자립성 을 높이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삼았다. 따라서 협동적인 방식으로 농토를 복구하 고 다양한 협동생산 조직들을 만들어 내는 데 힘을 기울였으며, 남성은 물론 농 촌 여성들이 활동의 주체로 참여할 수 있도록 다양한 교육활동들을 펼쳐나갔다. 1977년부터는 신협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비조합을 만들어 농촌지역에 필요 한 농자재와 생필품을 공동구매를 통해 값싸게 구입하는 일을 펼쳐나갔다. 한편, 박재일은 농촌 지역의 협동운동과 함께 농민들의 생존권 보장과 민주화를 위한 가톨릭농민회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전국 회원을 대상으로 쌀 생산비 조사 를 진행해 정부 주도의 가격결정 방식을 바로잡는 일, 함평고구마 사건에 대한 공동 투쟁을 통해 농협으로부터 배상을 받아낸 일 등은 가톨릭농민회의 대표적인 활동 이었다. 그러나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가 사망하고, 12.12사태로 권력을 장악한 신 군부가 1980년 5월 광주민주항쟁에 대해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등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 원주의 활동가 그룹들은 운동의 방향 전환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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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 이 과정에서 기획된 것이 해외연수다. 박재일은 1981년 7월에 재해대책사업위원회 실무자들과 함께 일본, 대만, 홍콩 3개국 견학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다. 당시 신원조회에 걸려 여권비자가 나오지 않자 지학순 주교의 보증으로 다녀올 수 있었던 해외 연수를 통해 박재일은 유 기농운동과 협동운동, 사회사업 등에 대한 안목을 넓히게 되었다. 특히 그는 일 본 생활클럽생협의 반조직 활동에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원주에서 농촌개발사업 관련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좋은 물품을 만들어도 가격이 폭락하고 판로가 막히 면 어렵다는 것을 절감했던 만큼, 도시 소비자들의 조직화 된 힘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박재일은 3년 후인 1984년에 사회개발위원회와 가톨릭농민회 지도자 21명이 일 본 유기농업을 시찰하는 프로그램에 다시 참가하게 된다. 그곳에서 일본의 유기 농운동, 도농직거래운동을 둘러보고 우리나라에서 농촌과 도시가 연대해 나갈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많은 아이디어를 얻게 된다. 일본 연수를 다녀온 후 이런 구상을 사회개발위원회 차원에서라도 시작해보자 해 서 준비 과정을 거쳐 1985년 6월 24일 원주에 소비자협동조합을 만들고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가톨릭센터 지하에 매장을 열고 활동을 시작했으나 당시 여건 은 쉽지 않았다. 박재일은 1985년 말에 원주의 사회개발위원회 활동을 정리하고, 1986년부터 생 계를 위해 이긍래, 선종원과 동업해 ‘천하태평’이라는 음식점을 준비하다가, 네덜 란드로 해외 연수를 떠나게 된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4.21-6.13) 인권포 럼에 초청을 받아 가게 된 것인데, 신원조회 등으로 여권 발급이 늦어져 포럼이 시작되고 며칠 지나서야 뒤늦게 합류하게 되었다. 박재일은 연수 프로그램에 참 여하면서 한국에서의 도농직거래운동에 대한 구상을 좀 더 구체화 할 수 있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포럼 막바지에 유럽을 여행할 기회를 얻은 박재일이 독일 의 아헨aachen 지역을 찾아 원주의 재해대책사업 활동을 지원했던 미제레올을 방문한 것이다. 1984년에 직거래 직판장 설치와 관련한 프로젝트를 직접 작성해 원주교구를 통해 미제레올에 보낸 것이 있는데 1년이 지나도 답이 없어 그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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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하기 위한 것이 방문 목적이었다. 미제레올을 찾은 박재일은 ‘지금은 사회개 발위원회 활동을 그만둔 상태이지만 그동안의 지원에 감사드린다’는 인사와 함께, ‘1984년도에 신청한 프로젝트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연수 프로그 램 참석차 유럽에 온 길에 들렀다’고 이야기했다. 그때 만난 미제레올의 아시아 지역 담당자는 ‘원주와 10여 년 사업을 진행해 왔 고 그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데, 접수 후 실무자가 인사이동 되면서 언 제까지 답해주라고 명확하게 말해주지 않아서 그냥 보류된 상태에 있는 것을 확 인했다. 전달 과정에 문제가 있어 일 년 이상 시간이 지나가게 해서 미안하다’는 답변을 듣게 되었다. 이에 박재일은 ‘그렇다면 원주 프로젝트 파일을 찾아서 조 만간 지원 여부를 원주교구로 알려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미제레올을 나 왔다. 그러고 나서 유럽에서 돌아와 보니까 벌써 미제레올에서 프로젝트는 유효하며 원 주교구에서 지원을 하면 사업을 추진하도록 하겠다는 연락이 왔음을 원주로부터 듣게 되었다. 당시 원주교구는 미제레올의 연락을 받고 사회선교국장으로 있던 최기식 신부를 중심으로 이것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논의를 하게 된다. 하지만 1986년 당시 원주교구에는 이 사업을 추진할 실무 인력들이 없는 상황이어서 사 업 기획안을 작성했던 박재일에게 연락을 하게 된다. 원주교구의 사업 제안을 받 은 박재일은 당시 상황에서 교구에 직원으로 다시 들어가기는 어려운 상황이고, 이 일은 기존의 활동들을 기반으로 하지만 새롭게 하는 성격이니, 원주교구가 법 적인 파트너가 되어주고 사업 추진과 관련한 모든 것을 위임해 주면 계획대로 열심히 사업을 추진해보겠다고 의견을 밝혔다. 박재일의 이러한 제안에 대해 최 기식 신부가 동의하고 원주교구가 수용한 결과 원주교구가 법적인 추진기관 역할 을 하고 박재일이 사업을 책임지고 추진하는 것으로 협약을 맺고 미제레올의 지 원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장 선생님께 지원을 받게 되었다고 말씀 드리니 무 릎을 탁 치시면서 “야 하늘이 도우셨구나, 정말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라고 하 셨다. 지원 확정 후 박재일은 서울로 올라와 직거래 판매장을 할 만한 공간을 물색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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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시작했다. 당시 여러 활동들을 통해 인연이 있었던 신부들을 만나 성당 내에 적절한 장소를 내어줄 수 있는지 문의해 보았으나 개인에게 성당의 공간을 활용 하도록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 수소문 끝에 결국 찾아낸 곳이 바로 제기동의 미도파백화점 뒷길에 있는 공간이었다. 바로 여 기서 1986년 12월 4일 ‘한살림농산’의 역사가 시작되게 된다. 박재일은 ‘한살림’이라는 말의 탄생 비화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원주 가는 길 에 지하철 1호선타고 종로 4가에서 5가 사이일 거야. ‘한살림’이라는 말이 딱 떠 오르는 거야. 가서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지하한테 얘기했더니 다 좋다 이거야. 그래서 ‘한살림농산’이라 이름을 붙이게 되었지.” 1986년 12월부터 1989년 12월까지 3년간 1억 2천7백만 원에 해당하는 미제레 올의 지원은 한살림농산 설립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농촌과 도시에 작은 협 동체 그룹을 만들어 직거래운동을 하려고 했던 기존의 구상을 미제레올의 지원을 통해 구체화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지원금 75%에 자부담 25%를 원칙으로 한데다 지원 종료 후 자립할 수 있는 방안을 처음부터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 래서 한편에서는 가톨릭농민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생산자를 조직하고 다른 한편 에서는 도시의 소비자들을 조직하는 일을 처음부터 하나하나씩 직접 해나갈 수밖 에 없었다. 따라서 박재일은 가톨릭농민회 홍보부장 역임 후 고향으로 귀농하려 던 이상국을 설득해 생산 부문 조직과 홍보 업무를 맡기는 등 다양한 사람들이 이 일에 함께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한살림농산은 단순한 쌀가게가 아니었다. 단순히 좋은 것을 나눠먹거나 판로를 개척하고자 출발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농촌과 도시, 생산과 소비가 분리된 채 따로 갈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한 한살림농산은 단순한 직거래운동을 넘어서 협동을 통해 서로를 살리고 함께 살아가는 길을 찾아 새로운 사회와 문명을 만 들어가고자 하는 야심찬 꿈을 품고 있었다. 그 내용은 한살림농산 문을 열고 박 재일이 직접 작성한 <한살림을 시작하면서>라는 문건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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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살림을 시작하면서*
박재일 (한살림 살림꾼)
오늘의 세상은 너무나 많은 물건을 대량으로 만들고 써버립니다. 많고 높고 빠르 면 좋고, 편리하면 더욱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좋은 듯 보이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안심하고 믿고 도우며 건강하고 만족스런 삶을 살게 하고 있는지요? 숨 쉬는 공기나, 마시는 물이, 농사짓는 땅이 살아있는 제 모습을 잃어 갈 때 우 리의 삶은 어떻게 될까요? 만듦이 있어야 쓸 수가 있고, 씀이 있어야 만듦이 필 요하고 계속되지요. 원래 생산과 소비, 생산자와 소비자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 요, 서로를 필요로 하고 돕는 사이인데, 현실은 서로 갈등하는 사이가 되어 버렸 어요. 소비자는 누가 어떻게 만들어 내고 생산자는 누가 어떻게 쓰는지 알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건강과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음식물(먹을거리)을 생산하는 농업의 경우, 농민은 자기가 생산한 것을, 어디서 누가 먹는지 또 사는 형편은 어떠한지, 반대로 소비 자는 자기가 먹는 것을 누가 어떻게 만들고 또 사는 형편은 어떠한지 알 수 없 습니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치는 양이 해마다 늘어만 가고, 물은 오염되고 땅은 토박해지 고 생명력을 잃어 가고 있지요. 농민은 농약중독으로 고통당하고 농산물은 독극 물에 오염되어 먹는 사람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어디를 가나 농 약, 방부제, 착색제, 각종 식품첨가제로 뒤범벅된 식품이 범람하는 속에서, 가족 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건강한 식탁을 꾸며야 할 어머니들은 어느 것 하 * 한살림 소식지.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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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믿을 수 없어서 불안합니다. 정말 안심하고 건강한 식품을 구해 먹을 수가 없을까요? 땅과 사람, 물건과 물건, 사람과 사람 사이가 갈라지고 못 믿는 사이가 되는 삶 이 살림의 삶일까요, 죽임의 삶일까요? 또한 농산물 값이 내려가면 농민은 울고 소비자는 좋아하고, 농산물 값이 올라가면 소비자는 울고 농민은 좋아합니다. 이 처럼 다른 이의 아픔이 나의 기쁨이 되는 삶이 옳은 삶일까요? 특히, 농산물은 유통과정이 너무 복잡하고 여러 손을 거치기 때문에 값, 품질, 수 량 등이 조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억울하지 않고 믿고 나누며 사는 길은 없을 까요? 땅도 살리고 자신도 살고 소비자의 건강과 생명을 보호하려고 퇴비를 하고 김을 매고 땀 흘리며 정성들여 농사 짓는 농민도 있고, 그런 농산물을 고대하는 소비 자도 많습니다. 다만, 서로 만나지 못하고 믿지 못하지요. 가족이나 친한 사람에게 줄 것은 정성들여 만들지요. 받는 사람 또한 고마워하지 요.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 만나게 되고 친한 사이가 된다면, 정성과 고마움이 나누어지지 않을까요? 한살림은 생산자와 소비자들 만나게 하고 친한 사이가 되도록 하여, 생산자는 소 비자의 생명을 보호하고 소비자는 생산자의 생활을 보장하는 사이가 되는 일을 하고자 합니다. 또한 농산물의 유통단계를 줄여서 과다한 유통마진을 줄이는 직거래활동을 펼쳐 서 농산물의 품질이나 수량을 믿을 수 있도록 하고 적절한 가격으로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땅도 살리고 건강하고 안전한 농산물이 생산되고 서로가 믿고 돕는 관계 가 되고 모두의 건강과 생명이 보호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합니다. 이 일은 한두 사람이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여러 사람이 더불어 해야 가능합니 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해야 가능합니다. 이 한살림운동에 많은 분들의 이해 와 성원과 참여를 고대합니다. 이 운동은 많은 농민(단체), 소비자(단체)가 협력하고 천주교 원주교구(지학순 주 교)가 뒷받침하여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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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강연 / 지정발언
생명, 농업, 그리고 미래
야스다 시게루 고베대학 명예교수 고베학생청년센터 이사장
3월 11일, 일본 동북 지역의 거대한 지진에 의해 미증유의 해일이 동북 해안을 덮쳤다. 역사적인 도시들이 쓸려나가고 2만5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해일에 희 생되었다. 게다가 후쿠시마 제1원전 폭발사고로 인해 후쿠시마 현 동부의 대지 와 바다가 방사능에 오염되어 많은 사람들이 대피하게 되는 용서하기 어려운 인 적 재해에 직면했다. 지진과 해일은 자연재해이므로 두어 달이 지나면 부흥의 망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원전 사고에 의한 방사능 오염은 손쓸 수 없는 인적 재해이며, 떠 나온 아름다운 마을로 돌아가는 건 몇 년 후가 될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지진 대국이며 해일 대국인 일본이 얼마나 위기 대비가 되어 있지 않은지 알게 되었 고, 원자력 발전소처럼 사고를 당하면 걷잡을 수가 없는 것을 만들지 말아야 한 다는 것도 재인식하게 되었다. 결국 생명을 경시하고 효율성과 이익을 더 소중 하게 생각해 온 데에 대참사를 초래하는 원인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재해만이 아니다. 국민의 건강도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 국민 의료비는 37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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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이라는 거액에 도달하여 몇 안 되는 젊은 세대에 큰 부담을 강요하고 있고, 암 사망은 실로 34만 명에 달하여 하루로 환산하면 약 1천 명의 사람들이 암으 로 목숨을 빼앗기고 있는 셈이다. 암 진단과 치료 기술은 크게 발전했지만 환자 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원인 규명의 노력이 결정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여 기에도 이익과 효율이 우선하고 생명을 지킬 준비가 경시되는 실태를 엿볼 수 있다. 지난 50여 년간 일어난 일들은 모두 알다시피 예상을 넘어설 정도로 대단한 것 이었다. 그러나 왜 이 정도의 기술 발전과 정보의 과다를 실현한 사람들이 오히 려 예전 사람들보다 마음의 따뜻함을 잃고 분노의 마음을 더해 가는 것일까. 아 마 사람은 물질과 마음을 동시에 풍요롭게 가질 수 없다는 숙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금세기 중반에 세계 인구는 90억 명 가까이 늘어날 것이라고 하며, 동시에 대 지의 사막화와 석유의 고갈이 진행된다면 확실히 사람은 지금의 풍요로움을 잃 고 가난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때 따뜻함을 잃고 분노의 마음을 늘린 금세기 사람들은 식량과 자원을 더 자신의 것으로 하기 위해 상상할 수 없는 싸움에 매일 몰두하게 될 것인가. 이렇게 미래에 대한 어두운 예견도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사람은 변하지 않는 다는 전제에 서있는 것이다. 나는 금세기가 사람들이 다시 따뜻하게 살아가는 힘을 닦는 가치 전환의 세기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예감한다. 물질과 마음을 동 시에 풍요롭게 가질 수 없다면, 분명 마음은 풍부해질 것이 틀림없다고 믿기 때 문이다. 물론 사람이 저절로 바뀌지는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험을 더 쌓은 지금의 어른들이 따뜻하게 사는 삶을 후대들에게 잘 가르치고 보여줄 필요가 있 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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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우리의 과제에 대한 각서 1. 21세기에 직면하는 과제 1) 인구 증가 현재 세계 인구 61억 명, 매년 7천만 명 증가, 21세기 중반에 90억 명 돌파. 세 계 농업은 그만큼의 인구를 부양할 수 없다. 그러나 인구 억제는 어렵다.
2) 식량 위기 21세기 중반에 도달하기 전에 심각한 식량 문제에 직면. 유엔을 중심으로 한 식 량 증산과 새로운 분배 시스템 추진. 그러나 세계 평화가 전제되어야 함.
3) 환경오염 지구 환경 오염 진행, 이상 기상이 빈발하고 건강 장해 및 식량 생산 혼란 확대.
4) 자원 고갈 21세기 중반에는 석유, 지하자원 및 생물자원의 고갈 예상. 그때까지 자원 가격 이 폭등하여 자원 소국의 경제를 직격.
5) 도시 팽창 세계적으로 도시는 팽창을 계속하고 세계적인 과밀과 과소 확대. 농업 인구, 농 지의 감소에 따른 식량 생산 정체. 지구 온난화 등 환경 파괴의 확대.
6) 고령 사회 선진국을 중심으로 한 고령화 심화. 노인의 일과 삶의 보람 창출 문제. 그리고 한 자녀 정책을 계속하는 중국이 극단적인 고령화 사회가 되어 세계 경제 교란.
7) 소년 문제 풍요로운 세대의 정신의 황폐화 현상. 사회적 연대 희석.
2. 자원 소국, 인구·재해 대국 일본의 과제 1) 다가오는 위기(자원 고갈 문제 등)과 갑자기 닥치는 위기(재해에 따른 식량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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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에 대한 두 개의 대책이 요구됨 2) 경제적, 종교적 이유로 세계적인 인구 억제는 어렵다. 세계적인 기후 변동과 도시 팽창도 불가피하므로 식량의 양과 가격 안정을 보장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즉 농림어업의 진흥이 중요하다. 3) 고갈성 자원에 의존하는 산업 사회는 지속성을 가질 수 없으며 재생 자원의 생산 이 대부분인 농림어업이 검토되어야한다. 4) 도시는 재해에 취약하고 갑자기 많은 시민들이 물과 식량을 잃고 농촌의 선의(물 과 주먹밥)를 필수적으로 한다는 것. 재해 대국 일본의 경우, 항상 도시 근교의 농촌을 풍요롭게 유지할 필요가 있다. 5) 20년 후, 고령자 비율은 25%에 달할 것으로 예상. 일과 삶의 보람을 어떻게 창 출하느냐가 큰 사회 문제. 농림어업에의 참여, 귀농귀촌은 하나의 가능성. 6) 젊은 세대의 마음의 교육, 연대감 조성의 장으로서 농림어업의 중요성
3 결론 ‘농’이라는 말을 농림어업의 총칭의 의미로 사용한다면, 21세기의 한국과 일본은 바로 농업을 기둥으로 한 사회 창조를 목표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 가치관 전환 에는 마찰이 수반되지만 그 길에서 더욱 큰 전망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별강연 17
지정발언1
생명농부의 바람과 포부 김상기 / 천지보은공동체 대표
생명농업의 방향을 일러주신 스승님 인농 박재일 선생님. 파주로 농사지으러 내려와 친환경유기농업을 실천하겠다는 단순한 마음이 한살 림을 만나게 했습니다. 한살림을 만나면서 한살림을 알아가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한살림다운 삶이며 공동체일까 생각하고 조금씩 실천하면서부터 한살림 나무의 뿌리와 기둥이 되신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과 그 나무의 꽃과 잎을 피우며 열매가 되신 인농 박재일 선생님을 만나고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한평생 오롯한 심경으로 한살림의 정신의 기초를 몸소 실천하시며 그 대의를 세 워주신 분이 무위당 장일순선생님이시라면, 그 사상과 정신으로 아이들을 키우 고 안정시키시며 살아가신 분이 인농 박재일 선생님이 아니실까 생각합니다. 마 치 어머니와도 같은 분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살림 생산자가 되어 그분들의 뜻을 나름대로 살리는 농사를 짓기 위해 실천하 고, 공동체 식구들과 함께 그 정신을 생활에 접목시키고자 노력하지만 쉽지 않 은 난관이 있음을 보고 느끼며 한살림 쌀가게로 시작해 지금의 한살림이 있기까 지 그분들이 들이신 노고와 정성을 가히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 인농 박재일 선생님과 직접적인 인연은 없었지만 한살림 어디를 가보나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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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숨결이 느껴지는 걸 보면서 저 또한 그 어른의 삶을 닮아가겠다 다짐해 봅 니다. 무위당 선생님께서는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있다고 말씀해 주셨으며, 그 뜻을 이어받아 인농 박재일 선생님은 “소비자와 생산자는 하나다” “생산자는 소비자 의 생명을 소비자는 생산자의 생활을”이라는 구체적인 과제로 그 가치를 한살림 을 통해 실천하신 것입니다. 2014년 지금.. 농사지으며 살고 있는 저는 선배 스승님들의 발자취를 온전하게 따르고 있는지 아니면 펼쳐 오신 경륜과 포부에 누를 끼치지는 않는지 돌아보며 반성합니다. 밥상. 농업. 생명의 가치가 농업을 통해 온전하게 드러나고 생산과 소비가 하나 로, 서로의 삶이 연결되는 관계가 실현되는 한살림을 꿈꾸는 농부로서 생산자로 서 그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신 박재일 선생님의 삶을 본받으 려 합니다. 제가 지금 실천하는 농업인 한살림농업이 생명농업의 시작이며 끝임을.. 제가 한 분 한 분 만나는 소비자님들이 생산과 소비를 하나로 엮어갈 위대한 분들임을.. 지금 여기서 저와 우리 생산자들의 실행과 실천을 통해 스승님들의 포부와 경륜 이 살아날 것이라 믿습니다. 스승님들의 정신과 뜻이 나와 우리 생산자들의 실행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을 알 기에 다시금 몸과 마음을 가다듬으며 살림의 정신을 바로 세웁니다.
지정발언 19
지정발언2
“생산과 소비는 하나다” 회원생협에서 생각하는 한살림운동 이유섭 / 한살림경기서남부 이사장
추모 행사에 참석하신 분들은 각 지역에서 활동이나 사업의 책임을 맡아본 경험 과 그 역할이 익숙해진 분들이 많으실 거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지역조직의 이 사장 역할을 겨우 한 해 넘기고 있는 활동가로 한살림의 활동 방향을 제안하기 어려운 자리입니다. 그동안 조합원 활동에 참여하면서의 느낌을 말씀드리고 지 원하는 입장에서 활동의 의미를 다짐하는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한살림 운동의 지향이 담긴 기본 활동이 지속되고 충실해지길 바랍니다. 딱히 봄나물을 캐러 다닌 기억도 별로 없는 서울 사람으로 농사를 처음 접해 본 것은 농활이 전부입니다. 그 농활의 짧은 체험을 추억으로 끝나지 않게 도와 준 것이 도농교류, 일손돕기 등 생산자와 함께하는 활동이었습니다. 이런 교류 를 통해 한살림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성장했다고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고 이 야기하는 활동가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체험학습으로 끝나지 않도록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 만나고 정을 나누고 삶을 공유하는 조합원활동이 지속적으로 이 루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직 및 사업의 규모가 커지고 조합원이 많아지면서 생산자와 소비자의 교류가 일상적인 업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또 활동이 둔화되거나 참여율이 떨어지더라도(생명학교나 논살림 활동) 가치가 있는 조합원 활동은 조직적인 관심이 필요합니다. 사회적으로 필요에 의해서 홍 보용처럼 쓰이거나 사업에의 이익 여부로 지원과 관심이 쏠리지 않도록 균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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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하면 좋겠습니다. 조합원 생활과 의식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조합원의 수만큼 다양한 의견과 요구들이 많아졌지만, 공동체 의식은 약해지고 마을모임이나 소모임 활동을 함께하려는 조합원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 다.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신뢰가 물품의 안정성이나 수치로만 계산되길 원하는 모습까지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라면 담담히 받아들이고 변화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봅 니다. 소비자ㆍ 생산자 조직 모두 한살림의 역사에 비해 체계화하는 것에 소홀 히 한 부분을 인정하고, 변화되는 모습을 보였으면 합니다. 우리의 가치와 경험이 짐이 되지 않도록 개인으로 볼 때 활동을 지원받는 입장이 아닌 지원을 해 주어야 하는 조력자의 입장에서 활동의 영역이나 방향을 제안하기 어려운 자리가 되었습니다. 제안이 나 의견이 곧 정책이나 사업의 방향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책임 자들의 활동 이력이나 경험이 현재의 활동가들의 활동을 제한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음을 경계하고 싶습니다. 안 해본 것이 없는 책임자도 너무 해본 것이 없는 책임자도 독이 되긴 마찬가 지입니다. 그래서 현재 한살림에 주어진 사회적 역할과 무게가 더욱 책임 있게 느껴집니다. 한살림이 균형감을 가지고 앞서나가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하나’라는 의미는 ‘나와 같음’만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삶을 서로 이해 하고 공감한다는 것 안에는 서로 다른 모습들을 인정하면서 함께할 수 있는 공 통점을 찾아가며 협력하는 것이 연대입니다. 연대와 협동은 사리 분별하는 이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삶을 공감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공감이 바탕이 되어야 ‘생산과 소비는 하나다’라는 말이 표어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생활을 변화시키는 실천운동의 지향이 될 것입니다.
지정발언 21
지정발언3
국민농업의 실현과 한살림의 역할 정기환 / 국민농업포럼 상임이사
지금 세계는 식량 위기, 에너지와 자원의 위기, 생태환경의 위기가 지속되고 있 다. 국제곡물가격의 상승과 국제유가의 고공 행진, 기후변화로 인한 재해의 속출 등이 함께 상승 작용을 일으켜 세계 경제는 물론 인류생존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부국과 빈국, 중심부와 주변부, 나 라 안의 가진 쪽과 그렇지 못한 쪽의 세계적인 사회적 양극화의 심화가 우리 삶 의 지속가능성을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 특히 경제와 인간생활의 세계화가 급속 히 진행되면서 각 지역과 사회의 문화와 생활양식, 농업과 환경 등 사회적 공통 자본이 파괴되고, 소수의 거대자본 중심의 강자독식형 사회경제 구조가 강화되고 있다. 우리 한국사회 역시 이러한 지속가능성의 위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절대 다 수의 국민이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심각한 사회적 양극화로 고통 받고 있다. 더욱이 24.3% 밖에 되지 않은 식량자급율과 3%밖에 되지 않는 에너지 자립도, 전 국토의 난개발 막개발로 인한 생태환경의 악화는 지구적 차원의 식량·에너 지·환경위기 시대에 오로지 속수무책일 뿐이다. 더욱이 이러한 위기를 심화시키 는 우리나라의 사회경제구조는 사회적 양극화와 동전의 양면구실을 하여 절대다 수의 사회적 약자에게 그 고통을 전가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류의 생존을 지탱하는 기반인 식량·에너지·환경문제가 지구적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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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에서서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지금까지의 주류 패러다임인 개발과 성장제일 주의, 시장지상주의, 효율주의 등을 재검토하고, 한 사회와 나라, 인류의 지속 가 능한 발전을 위한 진지한 국민적 논의와 대안을 모색하고 실천할 때이다. 희망적인 것은 우리사회에서도 신뢰와 협동, 나눔과 연대 등 공동체적 가치에 기 반한 사회적 경제가 주목받고 있으며, 최근 협동조합 설립 붐에서 알 수 있듯 ‘협동사회경제영역’이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공공급식운동, 귀농귀촌운동, 도시농업운동, 로컬푸드운동, 도농생활협동조합운동, 슬로푸드운동. 식생활교육운 동 등 농(農)적 가치와 먹거리를 연계한 시민사회 운동 또한 매우 활발하게 성장 하고 있다. 일찍이 자원 개발과 경제 성장에 집착하는 산업주의 세계관의 한계를 인식하고 자연과 함께 사는 길을 모색하고 개척해 온 ‘한살림’의 역할 또한 크게 작용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 사회의 지속가능 여부는 무엇보다 농업·농촌의 유지와 발전이 국민경제와 국 가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필수적인 최소한의 기본조건(National Minimum Requirement)임을 인식하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 이는 선진 각 국의 자국 농업· 농촌 보호와 육성에서 확인되는 역사적 사실이며 선진국 진입의 기본조건이다. 더욱이 앞서 언급한 식량, 에너지와 자원, 환경을 통합적으로 갈무리하는 산업이 자 공간이 농업·농촌이라는 점을 중시하여, 선진 각 국이 이 세 부분을 통합적 으로 지원 육성해 온 데서 여실이 증명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 농업·농촌은 매우 큰 위기에 처해 있다. 이는 이 땅을 일구어온 농부의 생존위기이며, 안전한 먹거리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아야 할 국민 의 기본권 위기이며, 자연과 조화롭게 공생하며 풍요롭게 살아야 할 인간 모두의 위기이다. 안전한 먹거리의 안정적 자급, 에너지와 자원의 지역 내 자립 순환, 생 태환경 친화적인 농업·농촌 시스템의 전면적 구축은, 사회와 나라와 국민을 살 리는 기본 과제임에도 신개발주의, 성장제일주의, 효율주의 세력과 정책들로 인해 많은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지정발언 23
따라서 농업·농촌의 지속가능성의 위기는 바로 우리사회·나라·인류의 지속가 능성에 대한 위기임을 인식하고 농업·농촌의 다양한 가치를 새롭게 재발견, 국 민 모두와 나누는 실천적 운동이 필요하다. 이는 국민과 함께, 국민 모두가 당사 자 주체가 되어, 국민의 사랑과 참여 속에 농업·농촌이 본연의 다원적 기능을 지속적으로 발휘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소비자 국민과 생산자인 농민이 이분되어 갈수록 멀어지는 것이 아닌 소비자와 생산자가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고 아껴주며 인간답게 사는 생활인으로서 상생하고 순환하는 도농 공동체를 만들어 야 한다. 이와 같은 노력을 통해 국민 모두가 풍요롭고 쾌적한 농업·농촌을 통 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한국사회의 길 은 농업·농촌에 있다. 한살림은 일찍이 산업문명의 폐해를 인식하고 자연과 사람이 함께 사는 생명운동 을 개척해 왔으며 눈부신 성장 또한 거듭해 오고 있다. 찬사를 아끼지 않을 일이 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지구적 차원의 위기는 날로 커져가고 있다. 이제는 그간 의 성과를 바탕으로 세계적 위기에 따른 문명사적 변혁운동으로 성큼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 생명존중과 공동체적 가치에 따른 철학과 신념체계를 재확인하 고 더욱 강화해야 한다. 생명의 세계관에 입각한 사회적 담론을 선도하고 형성하 여 새로운 주류 질서를 만들어 가는 데 앞장섰으면 한다. 특별히 농업과 먹거리 를 통한 지구생태계의 지속가능성 확보와 확장을 기조로 경쟁력과 시장지상주의 농정에서 지속가능한 생명농업으로 농정 패러다임과 정책수단의 변화를 선도해야 한다. 이미 전개하고 있는 식량자급, 먹거리 안전, 자연자원과 환경보전, 생물다 양성 증진, 에너지 자립, 지역경제활성화 등에 대한 보다 적극 활동을 통해 생명 (농업)운동이 우리 사회의 대표적 주류운동으로 나아가는 데 기여하였으면 한다. 내후년이면 한살림운동을 시작한지 3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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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마당
생협운동에 대한 추억* 김성훈 / 전 농림부 장관
‘국민의 정부’ 시절 제정·공표된 소비자협동조합법(1999년 2월 제정)에 기반하여 새롭게 재출범한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일명 ‘생협’)이 12년이 지난 2011년 말 현재 3대 연합체 산하에만도 약 56만여 가구가 조합원으로 참여하고 있고, 연간 매출 액이 6000억원대를 돌파하였다. 생협법 제정 이전 20년 가까이 임의조직으로 근 근히 연명해 오던 ‘한살림’과 ‘생협중앙회’ 시절에 비하여 문자 그대로 ‘눈을 씻고 다시 보자(刮目相對)’할 정도로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거의 비슷한 시점에 선포된 정부의 ‘친환경 유기농 원년’ 선언에 따른 친환 경 농산물의 생산자·소비자 직거래 실현에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다. 지금 대한 민국의 국민들로부터 생협만큼 신뢰를 받는 유통기관이 없다할 만큼 그 활동이 눈부시다.
신뢰받는 유통기관으로 성장 그 단적인 증거가 2010년 초가을 시중 대형마트와 농협 하나로마트에서 배추 한 포기가 1만5000원까지 치솟았을 때 생협 점포에서는 보통 때와 다름없이 포기당 1500원에서 2000원에 거래되었다. 생협 매장의 배추는 매일 아침 문을 열자마자 부리나케 동이 났었다. 친환경 농산물이라 더 비싸면 비싸야 했는데 왜 그랬을 까? 생산농민들이 생협 소비자들에 대한 감사의 뜻을 행동으로 표시한 것이다.
* 한국농어민신문, 농훈칼럼, 2012년 6월11일자(제2439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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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때 수확철 생산량이 몰려 가격이 폭락할 때도, 품질과 안전성을 믿고 지속 생산을 독려하기 위하여 소비자조합원들이 적정 생산비와 이문이 보장되는 가격 에 구매해준데 대한 생산자 농민들의 보은의 표시였다. 생협은 주주 자본가가 따로 없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주인이기 때문이다. 주주의 이익을 따로 계상할 필요도 없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상호신뢰와 공생, 그리고 지속가능한 경제가 핵심 목적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특징인 유통 이윤을 따로 떼지 않는다. 직거래유통에 따른 직접 비용을 반영해 생산자와 소비 자가 합의한 수수료만 내면 된다. 따라서 유통마진이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유통비용 중 인건비 비중도 대단히 낮다. 소비자조합원들의 자원봉사와 봉사수준 의 급여체제이기 때문이다. 대형 유통업체와 말 뿐인 일반 협동조합과는 크게 차 별되는 대목이다. 친환경 생산농민들은 생협이라는 팔 곳이 있어 안심하고 생산 에 전념하고, 소비자조합원들은 생협이라는 안전한 식품구매처가 있어 행복하고 만족해한다. 이렇듯 정부의 특별한 지원이 없어도 법정 생협사업이 쑥쑥 자라나 이제 대한민 국 소비자들의 희망 제1번지가 되고 있다. 유럽, 미국, 캐나다, 일본은 일찍부터 생협을 진정한 의미의 협동조합 운동이라고 하여 ‘COOPS(Cooperatives)’라고 부 른다. 오늘날 협동조합 운동의 모태라 할 수 있는 롯치텔 7대 원칙도 영국의 롯 치텔 노동자들의 소비자협동조합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생협법 제정됐지만 빗장 여전 이렇게 착하고 긴요한 소비자생활협동조합(생협) 운동이 한동안 법률적인 뒷받침 이 없어 표류되고 지리멸렬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전 농촌경제 연구원장 김동희 박사와 농업기술자협회의 정장섭 선생 등과 함께 생협법 초안을 만들어 정부기관을 찾아다닐 때 싸늘했던 당국자들의 반응을 새삼스럽게 떠올리 고 싶지 않다. 우리가 만든 생협법 초안은 담당국장의 서랍 속에 20여 년간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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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있었다. 슈퍼마켓과 수퍼체인협회 등 소매업체와 제조업체들의 극심한 훼방 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 다만 경실련과 정농회가 합작하여 “경실련·정농 생협”을 조직하여 그 책임자 자 리를 맡고 나서부터 필자가 겪었던 고통은 잊을 수가 없다. 아무런 법적인 뒷받 침이 없는 임의조직이다 보니 서울시 당국, 가락동 도매시장 상인들, 그리고 세 무당국으로부터 푸대접과 박해, 심지어 점포 습격을 받고 개점휴업까지 하였다. 1년간 실적을 결산해 보니 1억2000여만원의 순 적자와 농민들에게 밀린 농산물 대금이 겁 없이 늘어났다. 게다가 이사장 개인 명의(생협은 임의단체임)로 농협과 개인에게 4천여만 원 가까운 신규 부채까지 생겨났다. 다른 생협들도 정도의 차 이만 있을 뿐 모두들 고전을 면치 못하고 부침을 반복해 왔다. 그러던 중 1998년 2월25일 국민의 정부가 탄생하였다. 어마지두에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발탁되었다. 발령을 받은 다음날인 3월5일 김대중 대통령 주재로 첫 번 째 국무회의가 열렸다. ‘오늘은 첫 회의라 특별한 안건이 없으니 국무위원들이 돌아가면서 어떻게 하면 IMF 위기를 극복할 것이며 치솟는 서민물가를 안정시킬 것인가에 대해 자기 부처의 업무에 관계없이 장관들의 개인 소견을 개진해 보라’ 고 하신다. 내 차례가 왔다. 20년 가까이 뛰어 다녔던 좌절된 생협운동이 생각났 다. 당장 갚아야 할 생협 빚 생각도 떠올랐다. "저는 소비자생활협동조합법 제정이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개도국, 중진국, 선 진국을 막론하고 시장경제 국가 중에 생협법이 제정되어 있지 않은 나라는 아마 도 우리나라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생산자를 위한 농업협동조합법, 수산업협동조합 법, 중소기업 협동조합법은 있음에도 정작 협동조합 운동의 효시격인 소비자협동 조합법이 없어서 생산자와 소비자의 권익 향상에 실효성이 떨어지고 특히 친환경 유기농식품의 직거래가 어렵습니다. 기존의 생협단체들 모두가 임의조직이므로 행정·재정상 혜택은커녕 감시와 억압마저 받고 있습니다. 생산자와 소비자들도 잘 믿으려 않습니다. 물가안정 차원과 친환경 농산물의 직거래 촉진 차원에서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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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법이 조속히 제정 공포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소관부처는 어디요?” “예, 재경부(옛 경제기획원) 소관사항입니다만 농림부가 주도하지 못한다는 조문은 없습니다.”라는 문답이 오갔다. 재경부장관 차례가 되 자 “우리 부가 주관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여 끝을 맺었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재경부 담당국장이 농림부장관실로 필자를 찾아 왔다. 대 뜸 “생협법을 제정할 수 없는(소매업계의 저항)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 이 왜 우리(부서)를 괴롭히십니까”라고 항의하며 대든다. 화가 났으나 참았다. 답 변은 우리 부 담당국장을 시켜 당신네 장관에게 직접 하도록 하겠다며 물리쳤다. 그리고 한달 후쯤 열린 국무회의에서 다른 안건을 심의하다가 갑자기 대통령께서 “지난번 논의했던 소비자생협법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거요?”라고 물었다. 해당 장관은 태연히 “아직 검토 중입니다.”라고 대답했다. 20년 묵은 설움이 복받쳐 올라와 엉겁결에 그만 “20년간 저렇게 검토만하고 있습니다”라고 크게 외쳤다. 좌중의 국무위원들이 일제히 웃음보를 터뜨렸다. 대통령의 안색이 변했다. 총리님 표정 역시 굳어졌다. 발언권도 얻지 않고 덥석 고함을 친 필자의 무례한 돌출행 동에 대하여 정작 화를 내고 반격하여야 할 재경부장관이 벌떡 일어섰다. “즉시 법제정을 시작하겠습니다”라고 답변함으로써 분위기를 일신 시켰다. 그리하여 생 협 법조문이 그해 가을 완성되었다. 농림부의 의견이 거의 대부분 반영되어 만족 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큰 복병이 나타났다. 국민의 정부 때 IMF 위기극복 차원에서 총리실 산하에 새로 생긴 규제개혁위원회(기업체 회장이 의장)에서 모든 법률안과 행정법규 제도에 대해 국회에 제출하기 전 최종 심의하도록 되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의장님과 모여대 법률학교수 심의위원이 유통업체 편을 들며 제동을 걸었다. 주무부서도 아닌 농림부 직원들만 생협법을 옹호하고 방어하느라 동분서 주했다. 결과는 역부족이었다. 생협중앙회를 설립한다는 조항과 정부의 재정지원 조항이 잘려 나가고, 생협 매장은 친환경 농축산품목만 취급하도록 취급품목 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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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가 대폭 축소되었다. 또 생협조합원에 한해서만 생협 매장을 이용하도록 하고 제한적으로 비조합원 소비자들에게는 홍보기간 중에만 총매출의 5% 한도에서 판 매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후자의 일부 독소조항은 2010년 약간 개선되었으나 근본적으로 생협의 성장 발전에 발목을 묶어 놓고 있는 상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생산자·소비자 ‘큰 등불’ 확신 그런데도 생산자와 소비자들이 서로 존중하고 배려함으로써 생협은 갈수록 국민 들의 사랑과 신뢰를 받고 바야흐로 환경과 건강을 동시에 챙기는 착한 조합으로 성장하고 있다. 그 중 ‘아이쿱’ 같은 생협은 너무 잘나가 단시일 내에 사업규모와 범위가 대기업처럼 성장하였다. 자칫 일부 일반 협동조합처럼 관료화와 대기업화 되어 착한 생산자농민과 소비자로부터 거리가 멀어지지 않을까 걱정일 정도이다. 정부기구 다음으로 규모가 제일 큰 기관이며 민간 은행인 농업협동조합 조직이 지주회사체제로 바꿔짐에 따라 가뜩이나 협동조합 운동 본래의 정신이 점차 희미 해지고 있는 이때에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은 분명 우리 시대 생산자와 소비자의 큰 등불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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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살림: 한살림 수행의 개념과 의의*
1. 한살림운동과 수행 1) “자기 안에 모셔진 거룩한 생명” - [한살림운동의 지향-우리는 이렇게 살고자 한다]는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 다. “제1조. 우리는 우리 안에 모셔진 거룩한 생명을 느끼고 그것을 실현합 니다.” - 더불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사람은 자기 안에 모셔진 거룩한 생명을 공 경할 때 자기다움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나를 모시고 공경하 듯 다른 사람의 거룩한 생명도 공경합니다.” - ‘생명운동’이라는 말이 문자로써 최초로 나타난 [원주보고서: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1982)]에서도 ‘밥상공동체’와 더불어 ‘영성공동체’ 를 생명운동의 두 축으로 제시하고 있다. - 한살림운동의 출발점과 생명사상의 정수는 ‘정신’, ‘세계관’, ‘각성’ 등으로 표 현된 ‘마음’에 있다. [한살림선언(1989)]은 명확하게 “생명은 정신이다”라고 천명한다. 2) [한살림선언]과 '생활수양활동' - “이 위기 상황에서 인간이 먼저 해야 할 일은 소외된 본성을 회복하는 일이 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안에 모셔진 우주적 생명을 깨닫는 일이다. 이러한 각성된 깨달음이 있을 때 인간에게 새로운 희망이 열릴 것이고 참된 인간회
* 한살림 수행프로그램 개발 연구보고서(2013) 가운데 일부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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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과 인간해방의 길이 열릴 것이다.” -[한살림선언 5장 중에서] - [한살림선언]에 따르면, 한살림운동은 세 가지 각성에 기초해 전개된다. ①사 회에 대한 공동체적 각성, ②자연에 대한 생태적 각성, ③생명에 대한 우주 적 각성이 그것이다. - 또한 한살림운동은 이러한 각성에 기초해 세 가지 활동영역으로 구체화된다. ①생활수양활동(한살림정신운동), ②생활문화활동(한살림생활운동), ③사회실천 활동(한살림사회운동)이 그것이다. <[한살림선언]을 통해 본 한살림운동 개념도> 생명의 세계관 확립 생명에 대한 <우주적 각성>
자연에 대한 <생태적 각성>
사회에 대한 <공동체적 각성>
새로운 생활양식의 창조 자기실현 위한 <생활수양활동>
새로운 가치·양식을 지향하는 <생활문화활동>
생명의 질서를 실현하는 <사회실천활동>
새 세상을 창조하는 생명의 통일 자기실현·생태적 균형·사회정의의 길 새로운 차원의 민족 통일 물질/정신, 개인/사회, 민족/인류의 자아/우주생명의 합일
- 요컨대 한살림선언은 마음과 몸을 닦고 기르는 ‘수양활동’을 세 가지 활동영 역의 하나로 명시하고 있다. 특별히 한살림선언은 “한살림은 자기실현을 위 한 생활수양활동이다.”라고 언명한다. 3) 한살림운동과 ‘수양/수행’의 필요성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살림운동은 그간 밥상살림과 농업살림을 핵심 임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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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생활협동운동에 집중하면서 “새로운 인식과 가치를 지향하는 생활문화 활동”과 “자기실현을 위한 생활수양활동”에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 밥상살림과 농업살림을 통해 생명살림을 실현코자 했던 한살림운동이 이후 ‘지역살림’을 제안하며 한살림운동의 사회적 확장을 위해 노력해왔다면, 이제 [한살림선언]에서 밝힌 ‘수양(=수행)활동’을 창조적으로 발전시켜 더욱 깊어 지는 한살림운동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 협동조합의 성공을 위해서도 마음의 문제가 중요하다. 국제협동조합연맹(ICA) 가 제시한 협동조합의 정의에 따르면, 협동조합은 “공통의 경제적 사회적 그 리고 문화적 ‘필요(needs)’와 ‘열망(aspirations)’의 충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열망의 실현과 협동의 마음은 협동조합 활동의 기본조건이다.
2. 힐링 신드롬과 마음의 시대 1) 힐링 신드롬의 귀농귀촌의 숨은 뜻 - 힐링캠프, 힐링여행, 힐링농업 등 ‘힐링’이 새로운 사회 문화적 키워드가 되 었다. 힐링콘서트, 힐링농장, 힐링여행 등 가히 힐링 열풍이라 할 만하다. 상업적 마음수련 단체와 시설도 수없이 만들어지고 있다. - 귀(歸, 돌아옴)가 시사하듯이 귀농귀촌도 넓은 의미에서 힐링 신드롬의 연장 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황폐해진 영혼, 상처 입은 영혼, 분열된 영혼의 치유에 대한 열망, 삶의 근본자리로 돌아오고자 하는 열망의 표출로 이해될 수 있다. - 이런 흐름 속에서 정신적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발적인 탈종교적 수행공 동체(영성공동체)가 경향각지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깊은 마음의 평화에 대한 열망이 제도로써의 종교가 아니라 ‘종교성(영성)’ 그 자체에서 탐색되고 있으 며, 이는 요가, 명상, 마음공부 등 다양한 형태의 자발적 모임을 통해 나타 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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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적 행동주의 - 미국와 유럽에서는 ‘영적 행동주의(spiritual activism, subtle activism)’가 대안 적 사회운동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로 나타나고 있다. 2013년 6월 21일 뉴 욕의 하지명상축제, 9월 21일 ‘Be the peace’ 공동행동, 10월 24 전 지구 적 ‘하나됨의 날(Oneness day)’ 등이 그것이다. - 한국에서도 일찍이 새만금 삼보일배와 생명평화탁발순례, 오체투지 등을 통 해 영적 행동주의의 선구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 최근 생명평화 활동가들이 펼치고 있는 생명평화 1,000일 정진, 천제(天祭) 등도 한국형 영적 행동주의라 할 수 있다. 3) 마음의 시대 - ‘영성(마음)’은 ‘공동체’와 ‘생태’와 더불어 21세기의 핵심적 키워드가 되고 있 다.(이 셋을 아우르는 것이 넓은 의미의 ‘생명’이다.) - 바야흐로 21세기는 정신개벽의 시대, 깨달음과 영성의 시대라 할 수 있다. 문명전환, 후천개벽의 시대는 물질에서 정신(의식, 마음)으로의 전환을 가장 큰 특징으로 한다. ‘깨달음’과 ‘영성’은 새로운 문명과 새로운 생활양식의 징 표이다.
3. ‘마음살림’, 한살림 수행의 새로운 이름 1) 더 깊은 한살림운동을 위하여 - 한살림운동은 지난 30여 년 동안 ‘생활협동운동’을 중심으로, ‘사회실천운동’ 으로 넓어지고(확장) ‘생명문화운동’으로 깊어지고자(심화) 하였다. - 한살림의 생활협동운동은 “생산과 소비는 하나다”라는 모토 아래, ‘밥상살림’ 과 ‘농업살림’을 양축으로 ‘생산-소비 협동’의 새로운 협동운동 모델을 만들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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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살림의 사회실천운동은 환경운동, GMO반대, FTA반대, 탈핵, 돌봄 등 다양 하게 전개되어 왔으며, 최근 ‘지역살림’이라는 사회실천운동의 언어를 중심으 로 더욱 넓어지는 한살림운동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 한살림정신운동 혹은 생명문화운동은 [한살림선언]을 발표하며 큰 뜻을 가지 고 출발했으나 <한살림모임> 해소 이후 상대적으로 소홀해졌다. - 한살림운동 30년 2세대 한살림운동을 준비해야 시기에, ‘한살림 정신’ 혹은 ‘한살림 마음’을 키워드로 하는 더욱 깊어지는 한살림운동이 기대되고 있다. - 이는 또한 문명전환의 전망 속에서 이루어질 ‘의식의 전환’ 운동이며, ‘생명 의 세계관 확립’을 널리 사회화하는 제2의 사상운동이라고 말 할 수도 있다. <한살림운동의 세 가지 영역> 한살림운동 운동영역
한살림정신운동
한살림생활(협동)운동
한살림사회운동
운동언어
마음살림
밥상살림/농업살림
지역살림
전환의 기획
의식의 전환
생활의 전환
시스템의 전환
하늘
땅
사람
비고 (삼재론)
※ 운동언어로써 ‘생명살림’은 좁은 의미로 사용될 때는 ‘환경생태’ 살림으로 쓰 여질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포괄적인 생명살림운동 전체를 가리킨다. 2) ‘마음살림’이란 무엇인가? - 더 깊은 한살림운동을 위해, 한살림의 새로운 운동 언어로써 ‘마음살림’을 제 안한다. - ‘마음살림’은 한살림수행 및 한살림 수행프로그램의 이름이다. 모든 종교기관 과 수행단체에 각자의 수행법과 수행프로그램의 이름이 있듯이 한살림에는 ‘마음살림’이라는 수행의 키워드이자 이름이 있다. - ‘마음살림’은 일차적으로 아픈 마음, 죽어가는 마음을 되살리는 것이지만, 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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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으로는 자기 안에 모셔진 거룩한 생명을 깨닫고 실현하는 일이다. - ‘마음살림’은 무엇보다 한살림사람의 기본이 되는 ‘한살림마음’(혹은 ‘한마음’) 을 ‘모시고 기르고 살리는’ 일이다. 결국 마음살림은 한살림 사람을 기르는 일 이다. - ‘마음살림’은 밥상살림-농업살림, 지역살림에 이어 한살림운동의 새로운 활동 영역이다. 마음살림은 ‘마음’을 키워드로 하는 한살림 내 활동과 사업의 영역 을 지칭한다.(한살림이 물품사업을 하듯 ‘마음살림’은 사업으로도 기획될 수 있다. 물론 돈벌이 사업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와 열망의 충족을 위한 비영리 사업을 말한다.) - ‘마음살림’이 한살림 안에 갇혀 있을 필요는 없다. ‘마음살림’은 아프고 고단한 개인(혹은 집단)을 치유하는 ‘사회적 치유’ 활동이다. 또한 마음살림은 삶과 세 계의 전일성을 깨닫는 ‘사회적 영성’으로 확장된다. 또한 마음살림은 ‘가치 전 환’운동이다. 사회의 중심가치(사회적 마음)를 바꾸는 새로운 정신운동, 혹은 문화운동이다. 3) 마음살림의 내용 - 요약하면, 마음살림은 ‘치유’, ‘깨달음’, ‘자기실현’을 통해 한살림운동을 더욱 깊게 하고 널리 사회화 해야 할 핵심 활동 중 하나가 된다. - 첫째 마음살림은 ‘치유(힐링)’다. 죽어가는 마음, 상처입은 마음, 분열된 마음을 치유한다. 나아가 사회적 힐링, 사회적 영성의 관점에서 물질/황금 숭배로 병 들고 찢겨진 사회를 치유하는 활동이다. - 둘째 마음살림은 ‘깨달음’이다. 내 안에 모셔진 거룩한 생명에 대한 ‘이해와 발견’이다. 나와 우리, 온 생명이 ‘하나’라는 앎이다. [한살림선언] 식으로 말 하면, 공동체적 각성, 생태적 각성, 우주적 각성이다. 그리하여 “내가 곧 하 늘”이라는 깨달음, 결국 참 나, 전체로써의 나를 자각한다. ‘의식의 진화’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의식과 무의식과 초의식을 아우르고, 지성과 감성, 영성 조 화되는 깊고 넓은 마음을 깨닫는다. - 셋째 마음살림은 ‘자기실현’이다. 작게는 생활과 활동속에서 실천하는 것. 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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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혹은 전체로써의 나를 실현하는 것, 혹은 살리는 일이다. [한살림선언] 에서 제시하는 3대 목표, 생태적 균형, 사회정의, 자기실현의 그 자기실현이 다. 동학에서 말하는 ‘체천행도(體天行道)’처럼 내 안의 하늘을 구현하고 행하 는 일이다.
4. 마음살림 활동의 구조와 과정 1) 모심‧기름‧살림으로 본 마음살림 - 한마디로 ‘마음살림’은 내 안에 모셔진 거룩한 생명, 혹은 내 안의 ‘한마음 (一, 大, 全, 中, 多)’을 모시고 길러 살려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 안의 ‘한마음’을 알아차리고 키워내며 열매 맺는 일이다. ‘한마음’과 ‘내마음’이 둘 이 아님을 깨닫고 나를 통해 한마음을 실현하려는 것이다. - 모심(侍天): 한마음을 이해하고 느끼기. 자기 안에 곧 우주적 생명나무의 씨 앗이 있음을 자각하는 것. - 기름(養天): 내 안의 한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느끼고, ‘하나됨’을 연습하고 키 우는 것. - 살림(體天): 하루하루 생활과 활동 속에서 한마음이 꽃피고 열매를 맺는 것. - 그리고 다시 더욱 깊은 모심, 기름, 살림으로. 2) 일상적 마음살림 활동과 마음살림 프로그램과의 관계 - 마음살림은 기본적으로 일상의 활동을 중심으로 하되, 집중적인 과정과 프로 그램을 통해 특별한 계기를 만들 수 있다. - 마음살림 프로그램은 참가자의 기대와 조건에 따라, 모심과정과 기름과정 등 으로 나누어 참가할 수 있다. - 마음살림과 몸살림은 둘이 아니다. 일상에서도 프로그램에서도 몸살림과 마 음살림은 함께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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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음살림 프로그램의 구성 - 이런 관점에서 ‘마음살림 프로그램(한살림 수행프로그램)’은 기본적으로 다음 과 같이 구성된다. - 모심과정: ‘자기 안에 모셔진 거룩한 생명’을 발견하고 이해하고 느끼는 기본 과정. 몸과 마음, 지성과 감성과 영성적 깨어남을 통해 생명세계와 ‘한 마음’ 에 대한 전일적 각성의 계기를 만드는 마음살림 프로그램의 입문 과정. - 기름과정: 기본적인 이해와 느끼기가 이루어진 후, 보다 깊은 이해와 느끼기 를 위한 심화과정. 자기 안에 모셔진 거룩한 생명, 혹은 한 마음을 깊이 알 아차리기 위해 지성, 감성, 영성의 특성을 살린 영역별 심화 프로그램. 몸 중심의 ‘한살림행공’ 지성 중심의 ‘참뜻찾기’ 감성 중심의 ‘생태영성’ 영성 중심의 ‘마음닦기’ - 일상의 마음살림 활동: 개인적인 생활 및 한살림 활동 중에 이루어지는 일상 의 마음살림 활동. 다시 말해 일상의 ‘생활수행’ <마음살림 활동의 구조> 구분
목표
성격
모심과정
이해와 느끼기
통합적 기본과정
기름과정
깊은 이해와 느끼기
지성, 감성, 영성, 몸의 특징을 살린 심화과정
일상의 마음살림 활동
생활과 활동 속에서의 실천
생활수행
세부구분
참뜻찾기 생태영성 마음닦기 한살림행공
비고1
비고2
시천 侍天
자기 발견
양천 養天
자기 성장
체천 體天
자기 실현
※더욱 깊은 깨달음과 체험을 위해 2단계 모심/기름 생각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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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음살림 프로그램 개발의 고려사항 - 어떻게 규범적 ‘수행/수양’의 관성을 넘어설 것인가? 조합원/회원의 눈높이 맞 는 마음살림 프로그램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딱딱하고 무겁고 수직적인 수 행문화를 아침운동 하듯이 새로운 ‘라이프스타일’로 만들 수는 없을까? “즐겁 고 행복하고 기쁨이 샘솟는 생활속의 마음살림!?” - 깨달음, 혹은 영성 체험의 다양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앎, 깨달음, 각성에 이 르는 다양한 길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비체험의 대한 올바른 이해, 인지과학, 뇌과학, 양자역학, 생물학 등 새로운 과학에 근거한 세계 이해도 중요하다. 물론 지성, 감성, 영성에 대한 통합적인 관점도 필요하다. - 한국적, 혹은 동양적 마음살림과 서유럽의 마음살림의 접목을 어떻게 할 것인 가? 한국적 혹은 동양적 마음살림에 대한 편견과 오해, 과도한 열정을 넘어서 야 할 것이다. 동시에 서구적 마음살림에 대한 무지와 환호성을 넘어서야 할 것이다. - 프로그램형 마음살림 활동과 일상적인 마음살림 활동을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 가? 수행 프로그램은 생활수행의 계기라고 할 때, 프로그램 과정에서 어떻게 녹여내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마음살림 프로그램과 마음살림 생활/활동의 선 순환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핵심이 될 것이다. - 기타 진행자 혹은 교수 요원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프로그램 내부화의 수 준, 혹은 외부 프로그램과의 연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 등등 수많은 고려사항 과 과제가 있다.
[한살림 수행프로그램 개발연구 보고서] (2013.12.3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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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심과 마음살림의 생각으로 - 한살림의 정신과 가공사업 생산지 운영 유억근 / 마하탑 대표
경천애인敬天愛人을 넓게 해석하면 우주와 자연을 받들고 생명을 자비심으로 대 하는 큰 뜻입니다. 바로 모심과 살림이지요. 천년의 역사를 가진 신라인은 몸을 스승으로 받들고 마음을 주인으로 삼는 사상 을 일상에서 실천해 왔습니다. 우주와 자연인 몸을 경배하는 것은 모심이고 마음 을 살려내고자 하는 것이 한살림이지요. 인농 박재일 회장님은 이 사상을 실천하 기 위해 누구보다 농업을 사랑하셨습니다. 한살림은 80년대 중반 쌀을 중심으로 한 1차 농산물을 생산 기반으로 시작했습니다. 죽임의 농업에서 생명으로의 농업 은 마음을 살려내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앞장서서 늘 함께하셨으며 농업을 위해 고민하셨습니다. 생산자가 하늘을 받들어 생명력이 깃든 농산물을 생산해도 소비가 따라주지 못해 잉여 농산물이 남게 되 면 가공을 통해 재생산하여 일차 생산자의 생활에 안정을 기했습니다. 그리고 시 중의 모든 가공품이 첨가제가 보편화된 상황에서 건강한 가공품의 생산을 장려하 여 소비자의 건강을 함께 생각하는 것이 인농 박재일 회장님의 가공 정책이었습 니다. 생산과 소비가 하나되어 지역농업의 기반을 다지는 가공사업이 회장님이 꿈꾸신 한살림 식품입니다. 한살림 식품은 생산과 소비가 만들어내는 큰 그릇을 의미 합니다. 현재 한살림의 전체 회원은 45만 세대에 육박하고 2천1백여 생산 지를 두고 있습니다. 1차산지와 가공산지에서의 생산 인력을 합하면 5천여 생산 자가 있습니다. 이 정도의 큰 규모로 성장하게 된 중심에는 전국 각지에서 생명 농업의 선두에 서서 농업 살림을 위해 묵묵히 생산해 오고 있는 1차 생산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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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 놓을 수 없습니다. 1차 생산자와 축을 함께해온 가공 생산자들은 초창기에 과 잉 생산된 1차 농산물을 가공하는 수준으로 대부분 시작했기 때문에 시설이나 규모면에서 가내수공업 정도의 열악한 조건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솥단지 하나 놓고 시작한 셈이지요. 무허가 가공이 대부분이어서 관리의 대상이었지만 한살림 이 주창한 농업살림, 밥상살림, 생명살림을 실현하기 위해 함께 일하는 조직으로 인정하고 제도권 안에서도 별도로 관리하여 점차적으로 허가를 얻도록 편의를 제 공해 유예기간을 두도록 관계기관과 협의하여 가공 사업의 정체성을 만들어낸 분 이 인농 박재일 회장이십니다. 수익이 별로 없으면서도 한살림의 이념 실현을 위 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초창기 가공 생산자들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외부에서도 인정해준 결과입니다. 가공 생산지의 당시 생활은 어느 정도였을까? 한살림과 함 께하면 미래나 비전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거의 없었지만 수익은 적어도 한살 림 사람들이 좋아서 그들과 함께하면 마음이 늘 편해서 어울리다보니 소비자 조 합원이 점차 늘어나고 상대적으로 가공 생산자들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수익도 생 겨나고 시설도 개선해갈 수 있는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 90년대 초반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희망은 가공 생산자들뿐만 아니라1차 생산자 중에서도 대부분 힘 들었던 시기였기에 한살림은 모두에게 희망이었고 어려움을 극복하여 지속가능한 생산활동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신 분이 인농 박재일 회장입니다. 그분은 큰 형님과 같은 넉넉함을 주셨습니다. 그 덕이 오늘의 5천여 생산자를 만들어 냈 습니다. 인농 박재일 회장님의 눈으로 지금의 가공 상황을 점검해 보겠습니다. 기존의 가 공 산지에서 재정이 열악한 가공산지를 위해 물품을 이동시키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지역에서 나오는 생산물은 그 지역의 도시와 농촌이 힘과 마음을 모아 협업하여 소규모로 가능한 물품부터 각 산지의 특성에 맞는 가공시설을 만들 수 있도록 특화해 주는 것이 조직의 역할입니다. 전국 각지에서 협업이 이루어지고 그 기운이 많은 들꽃으로 피어날 때, 큰 장치의 가공사업에는 도시와 농촌이 함 께 힘을 모아 결집하여 한살림 식품으로의 큰 꽃으로 피울 수 있을 때 박재일 회장님의 뜻이 꽃을 피운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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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다가옵니다. 오래전에 박재일 회장님이 저희 산지를 방문하셨습니다. 윤태 수 상무가 부장이던 시절에 저희 공장 주변에 있는 들국화를 오포 물류센터로 옮겨 심자고 하셨습니다. 회장님은 소박한 들꽃을 사랑하셨습니다. 내년 5주기에 는 회장님의 묘역에 들국화를 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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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농 박재일 선생 4주기 특별강연 및 추모의 밤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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