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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인쇄 2020 년 5 월 26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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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보훈
갱생 부흥은 지속적인 과정이다. 우리 주님은 날마다 우리를 그분의 임재의 기쁨으로 초대하신다.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매일 우리를 위해 영적 만찬을 베푸신다. 우리가 날마다 그분의 보좌 앞에 조용히 무릎 꿇고 그의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의 혼은 살찌고, 우리의 영은 새롭게 되며, 우리의 마음은 되살아난다. 진정한 영적 갱신은 사고방식, 습관, 생활
방식의
변화로
이어진다.
우리는
이것을
‘개혁’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7~18). 개혁이라는 단어는 이와 같이 단순하게 ‘은혜 안에서의 성장’을 의미한다. 그것은 성령으로 하여금 내 삶의 각 부분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조정하도록 맡기는 것이다. 우리가 순종으로부터 떠난 영역에서 부흥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우리의 열망을 다시 일깨운다. 개혁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는 도전적인 결심으로 우리를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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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national Ltd. 개혁 된 책,변형 된 마음 New Covenant Publications International Ltd., Kemp House, 160 City Road, London, EC1V 2NX Email: newcovenantpublicationsintl@gmail.com
헌정의 글
하나님께 바쳐진
서문 새 언약 출판물 국제 하늘과 땅을 바인딩 신성한 계획과 사랑의 법의 영속을 강화와 독자를 다시 연결합니다. 언약의 방주는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백성과 하나님의 법의 중심 사이의 친밀감을 나타냅니다. [...]사실,새 언약은 구속에 증명,줄어들지 않은 투쟁에 의해 탄생과 혈액에 의해 밀봉. 수많은 세기 동안,많은 견디고 마모에 고통하고 이해할 수 없는 탄압의 계산을 없애는 진리입니다. 특히 암흑 시대에,빛이 있었다 크게는 궁지에 몰린과에 의해 가려는 인간의 전통과 인기있는 무지이기 때문에 주민들의 세계는 지혜를 멸시하고 배반하의 언약입니다. 대재앙의와 타협을 방지할 자극 악 이러한 재앙의 무한 퇴화 및 악마 같은 비인간적에는 많은 생명을 희생을 부당하게 거부,항복하심이 있으. 그럼에도 불구하고,잃어버린 지식은 특히 개혁의 시간 동안,부활했다. 16 세기의 개혁 시대는 반 개혁에 반영 된 진리,근본적인 변화 및 결과적 난류의 순간을 촉발 시켰습니다. 그러나,이를 통해 볼륨,하나의 재발견 명백한 의미의 이 유일한 혁명의 관점에서 본 개혁자 및 다른 용감한 개척자. 자신의 계정에서,하나는 황폐 한 전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이러한 놀라운 저항과 초자연적 인 개입의 기본 이유. 우리의 모토:"개혁 된 책,변형 된 마음"은 중요한 시대와 그 영향으로 구성된 문학의 독특한 장르를 강조합니다. 또한 개인 개혁,부활과 변화의 긴급 공감. 으로 구텐베르크 인쇄기와 결합에 의해 기관의 번역,전파의 원리,개혁 신앙을 약 500 년 전,디지털 압박과 온라인 미디어 통신 것이라 모든 언어로 진리의 빛에서 이러한 마지막 시간.
끝을 기대하면서
산상보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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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보훈
목차 1 장 - 산 위에서 ............................................................................................................................. 4 2 장 - 팔 복 ...................................................................................................................................... 7 3 장 - 율법의 신성성 ................................................................................................................. 36 4 장 - 봉사의 참 동기 ............................................................................................................... 60 5 장 - 주기도문 ........................................................................................................................... 76 6 장 - 비판하지 말고 행하라 ..................................................................................................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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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보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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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보훈
1 장 - 산 위에서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기 14 세기 전, 이스라엘 자손들이 평평한 세겜 골짜기에 모였다. 산 좌우 쪽에서 축복과 저주를 내리는 제사장들의 음성이 들려 왔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면)…저주를 받으리라”(신명기 11 장 27, 28 절). 축복의 말씀이 선포되었던 이 산은 이렇게 하여 축복의 산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죄와 슬픔이 많은 세상에 축복이 된 말씀이 선포된 곳은 그리심 산상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은 그들 앞에 제시된 높은 이상에 도달하지 못했다. 여호수아가 아닌 다른 누가 그 백성을 믿음의 참 안식처로 인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는 그리심 산이 아닌 게네사렛 호수 옆에 있는 한 이름 없는 산, 곧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과 군중에게 축복의 말씀을 주셨던 그 산이 축복의 산으로 알려져 있다. MB 1.1 상상의 나래를 펴고 당시의 그 곳으로 되돌아가 보자. 제자들과 함께 산상에 앉아 그들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생각과 감정 속으로 파고 들어가 보자. 예수님의 말씀이 이를 들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었는지 깨닫게 된다면, 그 말씀에서 새 생기와 미를 발견함은 물론 스스로 그 속에 담긴 더욱 깊은 교훈을 찾게 될 것이다. MB 1.2 구주께서 봉사 사업을 시작하시던 때에, 메시야와 그분의 사업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들은 그분을 영접하기에 너무나도 부적당하게 되어 있었다. 진정한 신앙 정신이 유전과 의식존중주의로 인해 상실당하고, 예언들이 교만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의 손에 의해 마음대로 해석되었다. 유대인들은 장차 오실 분을, 죄에서 구원해 줄 구주로서가 아니라 모든 나라를 유다 지파 사자의 권세 아래 복종시킬 위대한 왕으로 오시기를 기다렸다. 옛날 선지자들처럼 마음을 성찰케 하는 능력을 가진 침례 요한이 그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친 것도 허사가 되고 말았다. 요단 강가에서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지적해 준 일이 허사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가 예언한 고난의 구주를 그들의 마음에 지적해 주고자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것을 듣고자 하지 않았다. MB 1.3 만일, 이스라엘의 교사들과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변화시키는 능력에 굴복하였더라면, 그분께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을 당신의 사신으로 삼았을 것이다. 천국이 가까웠다는 4
산상보훈 기별과 회개하라는 호소는 유대 땅에 먼저 전파되었다. 예루살렘성전에서 신성을 모독하는 자들을 내어 쫓음으로써, 예수께서는 자신이 메시야, 곧 죄의 부정에서 심령을 정결케 하시며 당신의 백성을 주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만드시는 분임을 선언하셨다. 그러나 유대인 지도자들은 마음을 낮추어 나사렛에서 온 그 겸손한 선생을 영접하고자 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두 번째 방문하셨을 때 산헤드린 회의에 소환되셨다. 그때, 이들 회원들이 예수님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하지 못했던 것은 순전히 백성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 그분께서는 유대를 떠나 갈릴리에서 봉사 사업을 착수하셨다. MB 2.1 예수께서는 산상 설교를 하시기 전 몇 개월 동안 이 지방에서 당신의 사업을 계속하셨다. 그분께서 갈릴리 전역에 선포하신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태복음 4 장 17 절)는 기별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저들의 열렬한 소망의 불길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이 새 교사의 명성은 팔레스틴의 경계 너머까지 퍼져 갔다. 그리하여 성직자들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이분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구원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 모여들게 되자, 사람들의 열기가 점점 고조되었다. MB 2.2 그리스도와 매우 가깝게 지내 온 제자들에게는 바야흐로, 예수님의 사업에 더욱 직접적으로 연합하여 일함으로써 많은 무리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버림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때가 온 것이었다. 제자들 중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봉사 사업이 시작될 때부터 그분과 함께 해 왔으며, 열 두 제자가 거의 모두 예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 지내 왔다. 그러나 그들 역시 랍비의 가르침에 현혹되어 일반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 왕국을 기대하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하시는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분께서 제사장들과 랍비들의 후원을 얻어 사업을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시고, 세상 왕으로서의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것을 본 순간, 그들은 이미 혼란과 고민에 빠져 있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실 때 그들에게 맡겨질 거룩한 책임을 위하여 준비하기 전에 미리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일단 그리스도의 사랑에 반응을 나타낸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비록 더디 믿는 마음이 있긴 했지만, 예수께서는 당신의 위대한 사업을 위하여 훈련시키고 교육할 가치가 있는 자들을 그들 가운데서 발견하셨다. 이제 그들이 그분의 사명에 나타난 거룩한 특성을 어느 정도 5
산상보훈 확신할만큼 충분히 그분과 오래 지내 왔고 또 백성들도 의심할 수 없는 그분의 능력에 대한 증거를 보게 되었으니, 그분의 나라가 가지는 진정한 특성을 바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그 나라의 원칙들을 공포할 준비가 이루어진 셈이었다. MB 3.1 예수께서는 갈릴리 바다 가까이 있는 한 산 위에서 이들 택한 자들을 위해 밤새 혼자서 기도하셨다. 새벽에, 그분께서는 그들을 당신께로 부르셔서 기도와 교훈의 말씀을 주시고, 그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도하심으로 복음 사업을 위하여 그들을 구별하셨다. 그러고 나서 그들과 함께 해변으로 가셨는데, 거기는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많은 무리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MB 4.1 통상 볼 수 있는 갈릴리 지방의 사람들 외에, 유다와 예루살렘과 베뢰아와 반 이교 지역인 데가볼리와 유다 남방에 있는 이두매와 두로와 시돈과 지중해 연안에 있는 베니게 등지에서 온 사람들도 무척 많았다. 그들은 “그의 하신 큰 일을 듣고”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얻으려고” 왔는데,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마가복음 3 장 8 절; 누가복음 6 장 17~19 절). MB 4.2 그러나 그 좁은 해안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갈망하는 무리가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범위 안에 다 설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그들을 다시 산으로 인도하셨다. 그 많은 무리가 다 넉넉하게 앉을 수 있는 평평한 장소에 이르자, 그분께서는 풀밭에 앉으셨다. 그러자 그분의 제자들과 무리들도 그분을 따라 앉았다. MB 4.3 제자들은 무슨 특별한 일이 생기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선생님 곁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아침에 일어난 일도 있고 하여 어리석게도, 그분께서 당신이 미구에 세우실 왕국에 대해 곧 모종의 발표를 하실 것으로 기대했다. 무리들 중에도 무엇을 기대하는 듯한 기운이 농후하였다. 그들의 들뜬 얼굴은 그들이 깊은 흥미를 가지고 있음을 증명해 주었다. MB 4.4 푸른 언덕에 앉아 거룩한 선생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동안, 그들의 마음은 장래의 영광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 중에는 밉살스런 로마 인들을 지배하고 세계적인 대제국으로서의 부와 영광을 누릴 날이 오기를 학수고대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있었다. 가난한농부들과 어부들은 비참한 그들의 오막살이와변변치 못한 음식, 그리고 고역의 생애와 기근의 공포가 모든 것이 풍족한 저택과 안락한 생애로 바뀔 것이라는 보증의 말씀을 듣는 것이 소원이었다. 낮에는 의복이 되고 밤에는 이불이 되는 남루한 단벌 겉옷 6
산상보훈 대신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정복자들이 입고 있는 것과 같은 훌륭하고 비싼 옷을 주시기를 그들은 바랐다. MB 5.1 모든 사람의 마음은 멀지 않아 이스라엘이 주님의 택한 백성으로 만국 앞에서 존경을 받고 예루살렘이 세계적인 왕국의 머리로 높임을 받게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벅차올랐다. MB 5.2
2장-팔복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태복음 5 장 2, 3 절) 방랑하는 무리들의 귀에는 이 말씀이 신기하고 새로운 것으로 들린다. 이런 교훈은 그들이 지금껏 제사장이나 랍비에게서 듣던 것과는 판이한 것이다. 그들은 이 교훈에서 자만심을 높여 주거나 야심을 길러 주는 것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 새 선생에게는 그들을 완전히 사로잡는 능력이 있다. 거룩한 사랑의 향기가 꽃향기처럼 그분이 계신 바로 그 곳에서 흘러나온다. 그분의 말씀이 “벤 풀에 내리는 비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시편 72 편 6 절)같이 흘러나온다. MB 6.1 모든 사람은, 영혼의 비밀을 다 아시면서도 따뜻한 동정심을 가지고 그들에게 가까이 나아오시는 분이 계심을 직감한다. 그들의 마음이 그분을 향해 열려지고 그들이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성령께서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필히 배워야 할 교훈의 의미를 얼마간 알려 주신다. MB 6.2 그리스도 당시에, 백성들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영적으로 보화를 가진 부자인 줄 알았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과…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누가복음 18 장 11 절)고 한 바리새인의 기도는 그가 속한 부류는 물론 크게는 국민 전체의 생각을 7
산상보훈 나타내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둘러싼 무리 가운데는 자신들의 영적 빈곤을 느낀 자들도 더러 있었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능력이 엄청난 어획고를 올리는 이적을 통해 드러나자, 베드로는 구주의 발 앞에 엎드리며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누가복음 5 장 8 절) 하고 부르짖었다. 그러자 그 산 위에 모여 있던 무리들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순결 앞에서 자신들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요한계시록 3 장 17 절) 깨달은 사람들이 생겨났다. MB 6.3 그들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디도서 2 장 11 절)를 갈구하였다. 그리스도의 인사말은 이들 영혼들에게 소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들은 그들의 생애가 하나님의 축복 아래 있음을 알았다. MB 7.1 예수께서는 “부자라 부요하여”(요한계시록 3 장 17 절)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도 축복의 잔을 내미셨다. 그러나 그들은 조소로써 그 은혜의 선물을 외면하였다. 스스로 완전하다고 느끼는 사람, 다시 말해 자신이 꽤 선량한 줄로 생각하고 현 상태에 만족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에 참예하려고 하지 않는다. 교만은 아무 필요를 느끼지 않으므로 그리스도와 또 그분께서 오셔서 주시고자 하신 무한한 축복에 대하여 마음의 문을 닫는다. 이러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을 위한 자리가 없다. 스스로를 부요하고 존경받을 만한 인물로 여기는 자들은 믿음으로 구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 그들은 스스로 풍족하다고 생각하므로 빈손으로 돌아간다.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고 스스로 어떤 의로운 행동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실 수 있는 도움을 감사히 여기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며 그리스도께서 복이 있다고 하신 사람들이다. MB 7.2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당신이 용서하시는 사람을 뉘우치게 만드신다.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죄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을 받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선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지금껏 해온 모든 일이 이기심과 죄로 혼합되어 있는 것을 본다. 가련한 세리처럼, 그들은 멀리 선 채 눈을 들어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 못하고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누가복음 18 장 13 절) 하고 부르짖는다. 그들은 복 있는 자들이다.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용서가 주어진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한복음 1 장 29 절)이시기 때문이다. 다음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너희 죄가 주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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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보훈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야 1 장 18 절).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에스겔 36 장 26, 27 절). MB 7.3 예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에 대하여 “천국이 저희 것이요”라고 말씀하신다. 이 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 바라던 것과 같은 일시적인 지상 왕국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사랑과 은혜와 의를 가진 영적 나라를 개방해 놓고 계셨다. 메시야의 주권을 나타내는 기(旗)가 두드러지게 구별되는 것은 인자의 특성을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분의 백성들은 심령이 가난하고, 온유하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천국이 저희 것이다. 비록 아직 완전히 성취되지는 않았으나, 그들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성도의 기업의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골로새서 1 장 12 절) 할 사업은 이미 그들 안에서 시작되고 있다. MB 8.1 자기 심령의 처참한 빈곤을 느끼는 사람, 다시 말해 자기 자신에게 선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의와 능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태복음 11 장 28 절)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그대의 궁핍을 당신의 은혜의 부요함과 바꾸라고 명령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보증인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으신 것은 물론 당신에게로 나오는 모든 사람을 넉넉히 구원할 수도 있으시다. 과거의 경험이 어떠하든지, 그리고 현재의 환경이 아무리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연약하고 속절없고 낙담한 현 상태 그대로 예수께 나가면, 우리의 자비하신 구주께서는 멀리서부터 우리를 맞아 당신의 사랑의 팔과 의의 두루마기로 감싸 주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품성을 그대로 나타내는 흰 두루마기를 입혀 아버지께 소개시키신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간구하신다. 내가 대신 저 죄인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제 고집대로 하는 이 자녀를 보지 마시고 나를 보아 주십시오. 사단이 죄를 들추며 우리의 영혼을 크게 대적하고 우리를 자기의 것으로 주장하는 데 반해, 그리스도의 보혈은 더욱 강력하게 호소한다. 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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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보훈 8.2 “어떤 자의 내게 대한 말에 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의롭다 함을 얻고 자랑하리라”(이사야 45 장 24, 25 절). MB 9.1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 장 4 절) 여기서 애통이라고 하는 말은 진정한 마음으로 죄를 슬퍼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한복음 12 장 32 절)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사람이 십자가에 들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 분별하게 된다. 그는 영광의 주님을 징벌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는다. 말로 다할 수 없는 따뜻한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배은망덕과 반역으로 일관된 생애를 살아 왔음을 알게 된다. 그는 가장 좋은 친구를 버리고 가장 귀중한 하늘의 선물을 모독해 온 것이다. 계속해서, 그것도 직접,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상처를받아 피가 흐르는 그분의심장을찔러 온것이다. 그는 넓고 어둡고 깊은 죄의 심연(深淵)에 의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어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느낀다. MB 9.2 이런 애통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 죄를 드러내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로 피하여 그분을 통해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자유를 향유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는 진정한 회개를 통해 십자가 아래로 나아가며 그 곳에다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 MB 10.1 구주의 말씀에는 재난이나 사별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위로의 기별도 있다. 우리의 슬픔은 아무런 근거 없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다(예레미야애가 3 장 33 절). 그분께서 시련과 환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히브리서 12 장 10 절)기 위함이다. 감당하기 심히 어렵고 가혹하게 보이는 시련이라도 일단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축복임이 판명될 것이다. 세상의 쾌락을 앗아가는 혹독한 재난이 오히려 우리의 눈을 하늘로 향하게 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슬픔을 당하여 예수님 안에서 위로를 구하는 일이 없었더라면 결코 그분을 알지 못했을 사람들이 많이 있다. MB 10.2 인생의 고난은 우리 성품에서 불순물과 거친 것을 제거해 내는 하나님의 일꾼들이다. 이들에 의해 채석되어 깎이고, 끌로 새기어지고, 갈리고 다듬어지는 것은 고통스런 10
산상보훈 과정이다. 또, 회전 연마기(硏磨機)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 속에 들어간 돌은 하늘 성전의 제자리를 채우는데 부족함이 없게 준비되어 나온다. 쓸모없는 물건을 위해서는 주께서 그처럼 신중하고 철저한 작업을 하지 않으신다. 오직 그분의 보석만이 궁전의 식양대로 다듬어진다. MB 10.3 주님께서는 당신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일하실 것이다. 신실한 자는 귀중한 승리를 얻을 것이다. 가치 있는 교훈을 배우게 될 것이며, 고귀한 경험을 얻게 될 것이다. MB 11.1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슬픔을 당한 자들에게 결코 무심하지 않으시다. 다윗이 감람산에 올라가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며 행”(사무엘하 15 장 30 절)할 때, 주께서는 동정 어린 눈으로 그를 보고 계셨다. 다윗은 베옷을 입었으며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겉으로 나타난그의 겸비(謙卑)는 그의회개를 증거해주었다. 그는 울먹이는 말로자기의 사정을 하나님께 고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버리지 않으셨다. 다윗이 무한한 사랑이신 하나님께 가장 사랑스러워 보인 때는 생명을 구하기 위해, 그의 아들에게 선동되어 반역에 가담한 원수들을 피해 도망가면서 마음에 찔림을 받은 때였다. 주님께서는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요한계시록 3 장 19 절)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통회하는 마음에 힘을 주시고 슬퍼하는 심령을 고결하게 하심으로 마침내 당신께서 거할 수 있게 만드신다. MB 11.2 그러나 우리 중에는 환난을 당할 때 야곱과 같이 할 자가 얼마나 될까? 우리는 그것을 원수의 손으로 생각하고 어둠 속에서 힘이 다할 때까지 무모하게 싸우지만, 아무런 위로나 구원을 발견하지 못한다. 새벽에 천사에게 일격을 맞은 야곱은 지금껏 싸우던 자가 언약의 천사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속절없이 울면서 그의 영혼이 갈망하던 축복을 받기 위하여 무한한 사랑을 가지신 분의 품에 안겼다. 우리도 시련이 유익이 됨을 배우며, 주님의 징계를 경시하지 말고, 하나님께 책망 받을 때 낙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MB 11.3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11
산상보훈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욥기 5 장 17~19 절). 예수께서는 상처를 입은 모든 사람을 찾아 치료해 주신다. 사별과 고통과 고난의 생애도 그분의 황홀한 임재 앞에서는 환하게 될 수 있다. MB 12.1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 못할 슬픔과 아프고 상한 마음으로 짓눌려 있도록 버려두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눈을 들어 당신의 자애스러운 모습을 바라보게 하신다. 거룩하신 구주께서는 눈물로 앞이 가리워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 곁에 서 계신다. 그분은 우리의 손을 꽉 붙잡길 원하신다. 그리고 또, 우리가 단순한 믿음으로 당신을 바라보며 당신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했으면 하고 원하신다. 그분의 마음은 우리의 슬픔과 비애와 시련을 향하여 열려 있다. 그분은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애로운 손길로 우리를 감싸 주신다. 우리는 마음을 그분께 바치고 온종일 그분의 자애를명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할때, 그분께서는 우리의 영혼이 매일당하는 슬픔과 어려움에서 벗어나 평화 가운데서 살게 해주실 것이다. MB 12.2 고통과 슬픔 중에 있는 자녀들이여, 이것을 생각하고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한일서 5 장 4 절). MB 12.3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의 슬픔을 애달파 하고 그 죄를 슬퍼하여 우는 자들 역시 복이 있다. 이 같은 애통에는 자신을 생각하는 일이 전혀 개재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슬픔을 아는 분이시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을 당하신 분이시다. 그분의 마음은 사람들의 죄악 때문에 찢기고 상하셨다. 그분은 인류의 궁핍과 불행을 해결하기 위하여 무아(無我)의 열성으로 일하셨다. 그래서 생명을 얻기 위하여 당신께 나오기를 거절하는 무리들을 보실 때는 늘 애석함으로 마음이 무거우셨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다 이와 같은 경험을 맛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어 줄 때, 그들은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는 그분의 수고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장차 나타날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분과 함께 일하고 그분과 함께 슬픔의 잔을 마심으로 그분의 기쁨에도 참여하게 된다. MB 12.4 예수께서 위로의 봉사를 하신 것은 고난을 통해서였다. 그분은 인류가 당하는 모든 고난을 같이 당하신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12
산상보훈 도우시느니라”(히브리서 2 장 18 절; 이사야 63 장 9 절).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는 모든 사람은 이 봉사 사업에 참여할 특권을 부여 받고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린도후서 1 장 5 절). 주께서는 애통하는 자에게 줄 특별한 은혜를 가지고 계시며, 그 은혜의 능력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영혼을 구원하게 될 것이다. 그분의 사랑은 상하고 터진 마음에 통로를 열어 주며 슬퍼하는 자들에게 치유의 유향이 된다.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린도후서 1 장 3, 4 절). MB 13.1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 장 5 절) 팔복에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쌓아가는 길이 사방으로 나 있다. 그리스도의필요를 깨닫고, 죄 때문에 애통해 하고, 그리스도와 고난의 학교에 함께 앉은 사람들은 거룩한 교사에게서 온유를 배우게 될 것이다. MB 13.2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참고 온유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이 귀하게 여기는 특성이 아니었다. 모세가 성령의 영감을 받아 한 말, 다시 말해 그가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한 말은 그 당시 백성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연민이나 조소를 자아내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온유를 천국에 들어가는 첫째 조건으로 삼으신다. 그분의 생애와 품성 속에는 이 귀한 덕성의 거룩한 미(美)가 나타나 있다. MB 14.1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빌립보서 2 장 6, 7 절)기로 작정하셨다. 생애의 온갖 미천한 경험을 통하여, 그분께서는 사람들과 함께 다니시되 왕으로서 충성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는 자가 되기로 하셨다. 그분의 태도에는 고집이나 냉혹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세상의 구주께서는 천사보다 더욱 위대한 특성을 소유하셨으나, 그분의 신성한 존엄성에는 모든 사람을 당신께로 이끄는 온유와 겸손이 혼합되어 있었다. MB 14.2 예수께서는 자신을 비우셨다. 그래서 그분께서 하시는 일에는 어디에도 자아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하셨다. 지상에서의 사명이 거의 끝날 무렵, 13
산상보훈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할 수 있으셨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한복음 17 장 4 절). 그런 그분께서 이제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태복음 11 장 29 절).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마태복음 16 장 24 절), 자아를 물리치고 이것이 더 이상 영혼의 중심을 차지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MB 14.3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극기와 그분의 겸비한 마음을 쳐다보는 사람은 다니엘이 인자와 같은 이를 바라보았을 때 그랬던 것처럼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다니엘 10 장 8 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자랑으로 여기는 자립과 자존은 사단의 속박의 표로서, 참으로 비열한 것으로 나타난다. 사람의 본성을 보면 언제나 자기과시를 위해 애쓰고 투쟁을 위해 준비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해 배운 사람은 이기심과 교만과 지배욕을 멀리 한다. 그리하여 심령 속에 안정이 깃든다. 자아가 심령의 지배 아래 굴복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제일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전전긍긍하지 않게 된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밀어낼 생각도 품지 않게 된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발아래 앉는 것을 제일 높은 자리로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인도하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인 채 그분의 손이 우리를 이끌어 주기를 기다린다. 사도 바울은 이런 경험을 한 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 장 20 절). MB 15.1 우리가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거하는 손님으로 영접할 때,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안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과 뜻을 지켜 줄 것이다. 지상에서의 구주의 생애는, 비록 투쟁의 와중에서 보낸 것이라도 평화의 생애였다. 분노한 원수들이 계속해서 따라다니는 중에도, 그분께서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한복음 8 장 29 절)고 말씀하셨다. 어떤 인간적인 소동이나 사단의 분노도 이같이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통으로 14
산상보훈 얻어지는 안정은 깨뜨릴 수가 없었다. 그분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한복음 14 장 27 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태복음 11 장 29 절). 나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과 인류의 향상을 위한 봉사의 멍에를 메라. 그리하면 그 멍에가 쉽고 그 짐이 가벼움을 깨닫게 되리라. MB 15.2 우리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자아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언제나 그것이 굴욕과 모욕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방어 태세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죽고 우리의 생애가 그리스도로 더불어 하나님 안에 감추어질 때는, 무시나 경멸을 조금도 괘념치 않게 될 것이다. 비난에 대하여 귀머거리가 되고, 조소와 모욕에 대하여는 소경이 될 것이다. “사랑은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한다(고린도전서 13 장 4~8 절). MB 16.1 세속적인 근원에서 나온 행복은 그 행복을 이루어 주는 다양한 환경과 마찬가지로 변하기 쉽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평안은 변하지 않는 영속적인 평안이다. 그것은 생애의 어떤 환경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며, 세상 재물의 양이나 세상 친구의 수에 의해 결정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수의 근원이시므로, 그분께로부터 얻은 행복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MB 16.2 가정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온유는 집안 식구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다툼을 방지해 주며, 화를 내며 대답하지 않게 해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흥분을 진정시켜 주며, 그 매력을 감지할 수 있는 반경에 거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부드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온유는 그것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세상의 가정들을 하늘에 있는 큰 가정의 한 부분이 되게 해준다. MB 16.3 원수진 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고민하는 것보다는 무고(誣告)를 견디는 쪽이 훨씬 낫다. 증오와 복수의 정신은 원래 사단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정신을 품는 자에게는 불행이 초래될 뿐이다. 마음의 겸비, 곧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 얻는 온유는 진정한 축복의 비결이다.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시편 149 편 15
산상보훈 4 절). MB 17.1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우리의 첫 조상이 아름다운 이 지상 곧 그들의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권을 잃어버리게 된 것은 자아를 높이고자 한 욕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잃어버린 것을 속량하는 것은 자기희생을 통해서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그러신 것처럼 우리도 승리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요한계시록 3 장 21 절).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시편 37 편 11 절)게 될 때, 우리는 겸손과 극기를 통하여 그분의 후사가 될 수 있다. MB 17.2 온유한 자에게 약속된 그 땅은 사망과 저주의 그림자로 어두워진 이 세상과 같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그의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베드로후서 3 장 13 절).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요한계시록 22 장 3 절). MB 17.3 그 곳에는 실망도 없고, 슬픔도 없고, 죄도 없고, 병들었다고 말할 사람도 없다. 그 곳에는 장례 행렬도 없고, 탄식도 없고, 죽음도 없고, 이별도 없고, 마음 상하는 일도 없다. 단지 예수께서 거기 계시며, 평화가 거기 있다. 그 곳에서는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니라”(이사야 49 장 10 절). MB 17.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태복음 5 장 6 절) 의는 거룩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요한일서 4 장 16 절)시다. 의는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의 모든 계명이 의로우”(시편 119 편 172 절)며,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로마서 13 장 10 절)기 때문이다. 의는 사랑이며, 사랑은 하나님의 빛과 생명이다.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받아들임으로써 의를 얻게 된다. MB 18.1 의는 고통스런 투쟁이나 지치게 만드는 수고, 그리고 선물이나 희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얻고자 주리고 목말라 하는 모든 영혼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이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사라”(이사야 55 장 1 절). “그들이 내게서 얻은 의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이사야 54 장 17 절).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예레미야 23 장 6 절). 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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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보훈 18.2 인간의 어떤 힘도 영혼의 주림과 목마름을 채울 수 있는 것을 줄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 장 20 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6 장 35 절). MB 18.3 육체적 힘을 유지하기 위하여 식물이 필요한 것처럼, 영적 생명을 유지하고 하나님의 사업을 할 힘을얻기위해서는 하늘에서 온 떡, 곧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우리의 육체가 생명과 활력을 유지해 주는 양분을 계속적으로 받는 것처럼, 우리의 심령도 그리스도로 더불어 계속적인 교제를 나누고 그분께 순종하고 완전히 의존해야 한다. MB 19.1 피곤에 지친 여행자가 광야에서 샘을 찾다가 찾으면 기갈을 푸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그리스도가 근원이신 생명의 정수(淨水)를 갈급함으로 그것을 얻게 될 것이다. MB 19.2 우리 구주의 품성의 온전함을 깨달을 때, 우리는 완전히 변화되어 그분과 같은 순결한 모습으로 새로워지고자 갈망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알면 알수록 품성에 대한 우리의 이상이 더욱 높아지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나타내고자 하는 열망이 더욱 강해질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가서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시편 62 편 5 절)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하게 될 때, 하늘의 요소와 인간의 요소가 합해진다. MB 19.3 만일, 그대가 마음 가운데 어떤 부족을 느낀다면, 또한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 같은 생각이 든다면,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선물을 통하여 그대 스스로는 할 수 없는 것을 그대를 위하여 해주시고자 그대의 마음에 역사하고 계신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얕은 개울가에서 해갈하고자 애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큰 샘이 바로 우리 위에 있으며, 우리가 믿음의 길을 따라 조금만 더 높이 올라가면 그 풍족한 물을 마음껏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MB 19.4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샘이다. 그 생명의 샘을 찾으려고 노력할 때, 그대는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교통을 나누게 된다. 잘 아는 진리가 새로운 측면에서 그대의 마음속에 17
산상보훈 제시되고, 성경의 구절들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섬광처럼 마음속에서 작열할 것이다. 그리하면 그대는 성경의 다른 진리들이 구속 사업과 갖는 관계도 깨닫게 되고, 또 그리스도께서 그대를 인도하시며 거룩한 선생이 그대 곁에 계신 것도 알게 될 것이다. MB 20.1 예수께서는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 장 14 절)고 말씀하셨다. 성령께서 그대에게 진리를 제시해 줄 때, 그대는 가장 가치 있는 경험을 쌓게 될 것이며, 그대에게 계시된 위로되는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 주고자 갈망하게 될 것이다. 그들과 교제하게 될 때, 그대는 그리스도의 품성이나 사업에 관한 어떤 새로운 사상을 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들과 사랑하지 않는 자들 모두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에 대한 새로운 계시를 갖게 될 것이다. MB 20.2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누가복음 6 장 38 절). 이와 같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아가 4 장 15 절)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한번 맛본 사람은 그 사랑을 더욱 많이 받고자 끊임없이 부르짖는다. 그래서 나누어 주게 되면 더욱 풍성하고 더욱 많이 받게 될 것이다. 영혼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모든 계시는 깨닫고 사랑하는 능력을 증가시켜 준다. 영혼의 계속적인 부르짖음도 “더욱”이고, 성령의 응답도 “더욱”이다(로마서 5 장 9, 10 절). 이것은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에베소서 3 장 20 절) 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비우신 예수님에게는 성령이 한량없이 주어졌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도 그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도록 온 마음을 바칠 때는 누구나 그것을 받을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에베소서 5 장 18 절)고 친히 명령하셨다. 이것은 명령이면서도 이
명령
자체의
성취에
대한
약속이기도
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충만으로…거하게”(골로새서 1 장 19 절) 되고, “그 안에서 충만하여”(골로새서 2 장 10 절)지는 것이 아버지의 큰 기쁨이었다. MB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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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보훈 하나님께서는 땅을 소생시키는 소낙비처럼 당신의 사랑을 무제한으로 부어 주신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같이 듣게 할지어다 궁창이여 의를 부어 내릴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이사야 45 장 8 절). “가련하고 빈핍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자산에 강을 열며 골짜기 가운데 샘이 나게 하며 광야로 못이 되게 하며 마른 땅으로 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며”(이사야 41 장 17, 18 절). MB 21.1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한복음 1 장 16 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마태복음 5 장 7 절) 사람의 마음은 날 때부터 냉랭하고 어둡고 사랑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비와 용서의 정신을 나타낼 때는, 언제나 자기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마음에 역사하는 성령의 감화를 통해서 하게 된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 하셨음이라”(요한일서 4 장 19 절). MB 21.3 하나님은 모든 자비의 근원이시다. 그분의 이름은 “자비롭고 은혜롭”(출애굽기 34 장 6 절)다. 그분은 우리를 우리의 가치에 의해 취급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지 묻지 않으시고, 우리를 가치 있게 해주기 위하여 당신의 풍성한 사랑을 부어 주신다. 그분께서는 원한을 품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벌을 주려 하지 않으시고 구속하려 하신다. 당신의 섭리를 따라 나타내시는 엄격함도 실은 완악한 자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의 고통을 씻어 주고 그들의 상처에 향유를 발라 주고자 심히 갈망하신다. 하나님께서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출애굽기 34 장 7 절)으심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죄는 제거해 주시기를 원하신다. MB 22.1 긍휼히 여기는 자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 안에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이 나타난다. 무한한 사랑이신 하나님과 일치되는 마음을 가진 모든 사람은 남을 교화시키기 위해서는 힘을 쓰되 남을 정죄하지는 않는다. 영혼 속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는 결코 마르지 않는 샘이다. 그분께서 거하시는 곳은 어디나 자비가 흘러넘치게 될 것이다. MB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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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보훈 그리스도인은 잘못을 범하는 자들, 시험을 당하는 자들, 궁핍과 죄의 희생물이 된 가련한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을 때 그들을 도와 줄 가치가 있을까 하고 묻지 않고, 내가 어떻게 하여야 그들을 도와 줄 수 있을까 하고 묻게 된다. 그는 가장 가련하고 가장 비천한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면서까지 구원하려 하셨고 또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시켜 화목의 봉사를 하도록 하신 영혼들을 본다. MB 22.3 긍휼히 여기는 자는 불쌍한 자들, 고난 중에 있는 자들, 압박당하는 자들에게 동정을 보이는 사람들이다. 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는 내가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 줄 자 없는 고아를 건졌음이라 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로 인하여 기뻐 노래하였었느니라 내가 의로 옷을 삼아 입었으며 나의 공의는 도포와 면류관 같았었느니라 나는 소경의 눈도되고 절뚝발이의 발도 되고빈궁한 자의 아비도 되며 생소한 자의 일을 사실하여 주었으며”(욥기 29 장 12~16 절). MB 22.4 생애 자체가 고통스런 투쟁이 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늘 부족을 느끼며, 괴로워하고 불신을 나타낸다. 자신들에게는 감사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계속 투쟁하는 고독한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친절한 말과 동정의 표정과 감사의 표시는 마치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과 같을 것이다. 동정의 말 한 마디, 친절한 행동 하나는 피곤한 어깨에 무겁게 지워져 있는 짐을 치워 줄 것이다. 따라서 사심이 없는 모든 친절한 말과 행동은 잃어버린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표현이다. MB 23.1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언 11 장 25 절).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헌신적인 봉사의 생애에는 동정심을 가지는 데서 오는 만족스런 평안 즉 즐거운 만족이 있다. 영혼 속에 거하시고 사람의 생애에 뚜렷하게 나타나시는 성령은 딱딱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동정심과 자비심을 불러일으켜 준다. 그대는 심은 대로 거두게 될 것이다.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여호와께서 저를 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 저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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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보훈 41 편 1~3 절). MB 23.2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봉사로 생애를 하나님께 바치는 자는 누구나 우주의 모든 자원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분과 연결된다. 그의 생애는 변함없는 언약의 황금 고리로써 하나님의 생애와 하나로 이어진다. 주님께서는 고통과 궁핍의 시간에 그를 잊지 않으실 것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립보서 4 장 19 절). 긍휼히 여기는 자는 가장 어려운 시간에, 긍휼히 여기시는 구주의 자비 안에서 피난처를 찾게 되고 영원한 거처로 영접 받게 될 것이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태복음 5 장 8 절) 유대인들은 의식상 청결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하였기 때문에, 규칙들이 대단히 번거로운 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은 규칙과 제약과 외관상으로 드러나는 불결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이기심과 악의에 의해 심령에 얼룩지는 오점을 깨닫지 못하였다. MB 24.2 예수님은 이 의식상 청결이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들 중 하나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마음의 청결은 필요하다고 지적하신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야고보서 3 장 17 절)이다. 더러운 것은 아무것도 하나님의 성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 곳 거민이 될 사람은 모두 이 세상에서부터 마음이 청결해져야 할 것이다. 예수님에 대해 배우고 있는 사람에게는 부주의한 행동과, 무례한 말과 조잡한 생각을 멀리 하는 경향이 차츰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마음 가운데 거하시면, 말과 생각과 행동이 순결하고 고상하게 될 것이다. MB 24.3 그러나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는 더욱 깊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다만 항간에서 이해하는 의미의 순결, 다시 말해 감각적인 것에서 벗어나고 육욕에 더럽혀지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의 은밀한 목적과 동기가 진실하며, 교만과 자아 본위에서 벗어나 겸손하고 사심이 없고 어린애같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MB 25.1 성질이 같아야만 서로 이해할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의 품성의 원칙이 되는 자아 희생적 사랑의 원칙을 생애에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그대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사단에게 기만당한 마음은 하나님을 포학하고 잔인한 존재로 여긴다. 그래서 사람의 이기적 특성은 21
산상보훈 물론, 심지어 사단의 이기적 특성까지도 자비하신 창조자의 특성으로 간주된다. 그분께서는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시편 50 편 21 절)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섭리가 전체적이고 징벌적인 성질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분의 충만한 은혜의 보고(寶庫)인 성경 역시 그렇게 이해되고 있다. 이 때문에, 하늘처럼 높으며 영원에 이르게 하는 성경상 진리들의 영광을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로 비치고 있다. 그들은 그분을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이사야 53 장 2 절)는 분으로 생각한다. 예수께서 인성을 입으신 하나님의 계시로 사람들 가운데 계셨을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분에 대하여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요한복음 8 장 48 절)고 주장했다. 그분의 제자들까지도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이기심 때문에 완전히 눈이 어두워져서, 아버지의 사랑을 그들에게나타내기 위하여오신 그분을 좀처럼 이해하지못하였다. 예수께서 사람들 사이에서 고독하게 다니실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분이 완전히 이해될 수 있었던 곳은 오직 하늘뿐이었다. MB 25.2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오실 때, 악한 자들은 그분을 바로 쳐다볼 수 없을 것이다. 그분의 임재의 빛은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생명이 되지만 불경한 자들에게는 죽음이 된다.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 그들에게는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히브리서 10 장 27 절) 것이 된다.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 그들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돌아가신 그분의 얼굴을 피하게 해 달라고 간구하게 될 것이다. MB 26.1 그러나 성령이 거하심으로 정결하게 된 마음에는 모든 것이 바뀐다. 그런 마음은 하나님을 알 수 있다. 모세는 여호와의 영광이 그에게 나타났을 때 바위틈에 숨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보는 때는 그리스도 안에 숨겨져 나타나지 않을 때이다. MB 26.2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잠언 22 장 11 절).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믿음을 통해 왕이신 하나님을 바라본다. 매일의 경험 가운데서, 그분의 섭리에 나타나는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본다. 우리는 그분의 아들의 품성을 통하여 그분을 이해한다. 성령께서는 하나님과 또 그분이 보내신 분에 대한 진리를, 잘 이해하고 마음에 받아들일 수 있도록 공개해 주신다. 마음이 청결한 자들은 하나님을 그들의 구속주로 받아들이되 새롭고 절친한 관계를 바탕으로 그렇게 한다. 22
산상보훈 그리하여 그분의 품성의 순결함과 아름다움을 깨달음과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이 자신들을 통해 반영되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그분을, 회개한 아들을 포옹하고자 원하는 아버지로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이 늘 말 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으로 가득 차 있다. MB 26.3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의 위대한 손으로 창조된 업적과 우주를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사물들을 통하여 창조주를 식별한다. 그들은 그분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 그분의 자비와, 그분의 선하심과, 그분의 은혜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더욱 분명히 읽게 된다. 지혜 있고 현명한 자들에게 감추어진 진리들이 어린아이들에게는 계시된다. 진리의 아름다움과 귀함이 세상의 현자들에게는 식별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를 행하고자 하는, 믿음과 단순함이 깔린 열망을 가진 자들에게는 끊임없이 펼쳐지고 이해가 된다. 우리는 스스로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됨으로 진리를 분별한다. MB 26.4 마음이 청결한 자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주신 시간 동안 마치 그분이 눈앞에 계신 것처럼 생애 한다. 그들은 또한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고 이야기할 때 그랬던 것처럼 장차 불멸의 상태에서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고린도전서 13 장 12 절). MB 27.1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 장 9 절)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이사야 9 장 6 절)이시다. 그러므로 죄가 깨뜨린 화평을 이 땅과 하늘에 회복시키는 것이 그분의 사명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로마서 5 장 1 절). 누구든지 죄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기 위하여 마음을 여는 사람은 이 하늘의 화평의 참여자가 된다. MB 27.2 이 외에는 평화의 기반이 달리 없다. 마음속에 받아들여진 그리스도의 은혜는 적의를 제거하여 준다. 왜냐하면 분쟁을 완화시켜 주고 심령을 사랑으로 채워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동료 인간들로 더불어 화목하게 지내는 사람은 불행해질 수 없다. 질투가 마음속에 있을 수 없고, 좋지 못한 추측이 용납될 수 없으며, 증오가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과 조화를 이룬 사람은 하늘의 평화에 참예한 자이며 그 복된 감화를 사방으로 널리 23
산상보훈 퍼뜨리게 될 것이다. 화평의 정신이 세속적인 투쟁으로 피곤하고 거칠어진 사람들의 마음에 이슬과 같이 내릴 것이다. MB 27.3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평화의 기별을 가지고 세상으로 보내진다. 자신도 몰래 조용히 거룩한 생애의 감화를 끼치는 자는 누구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낼 것이다. 언행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죄를 버리고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게 하는 자는 누구나 화평케 하는 자이다. MB 28.1 “화평케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자녀라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평화의 정신은 그들이 하늘과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그리스도의 달콤한 향기가 그들을 두르고 있다. 생애의 향기와 품성의 아름다움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세상에 드러낸다. 사람들은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요한일서 4 장 7 절).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나,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로마서 8 장 9, 14 절). MB 28.2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중에 있으리니 그들은 여호와에게로서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인생을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며”(미가 5 장 7 절). MB 28.3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태복음 5 장 10 절).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세상의 영광과 부를 얻고 시련이 없는 생애를 맞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제시하시는 대신에, 세상이 그들을 알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함께 극기와 굴욕의 길을 걷는 특권을 가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MB 29.1 잃어버린 세상을 구속하기 위하여 오신 그분은 하나님과 인간의 적인 원수들의 연합 세력에 부딪히게 되었다. 악한 사람들과 악한 천사들은 단숨에 해치우려는 마음으로 동맹을 맺고 평화의 왕을 대적하기 위하여 대오를 가다듬었다. 그분의 모든 언행이 하나님의 자비심을 나타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같지 않은 그분의 모습이 더할 수 없는 적의를 품게 했다. 그분은 우리의 본성에 속한 악한 정욕이 발휘되도록 방종을 허락하지 않으심으로 가장 24
산상보훈 격렬한 반대와 적의를 불러일으키셨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도 그와 같다. 의와 죄, 사랑과 증오, 참과 거짓 사이에는 억제할 수 없는 갈등이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결의 미를 나타낼 때, 그것은 사단의 나라에 속한 백성을 빼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악의 왕이 그것을 대항하기 위하여 일어난다. 박해와 치욕이 그리스도의 정신에 젖어 있는 모든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박해의 성격은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그 원칙 곧 그 아래 깔려 있는 정신은 아벨 시대 이후로 지금껏 주님의 택한 자들을 살해해 온 바로 그것이다. MB 29.2 사람들이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고자 애쓸 때, 그들은 십자가에대한 공격이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정사와 권세와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 하늘의 법칙에 순종하는 모든 자들을 대항하기 위하여 대오(隊伍)를 벌이고 있다. 그러므로 핍박은 슬픔의 원인도 되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MB 29.3 주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시련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겠다고는 약속하지 않으셨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약속하셨다. 그분께서는 이런 말씀들을 주셨다.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신명기 33 장 25 절).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린도후서 12 장 9 절). 만일, 그대가 예수님을 위하여 시뻘겋게 단 풀무 속을 지나가도록 요구당한다면, 그분께서는 바벨론에서 진실한 세 사람과 함께 계셨던 것처럼 그대 곁에 계실 것이다. 구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그분과 함께 굴욕과 치욕을 당할 때마다 기뻐할 것이다. 주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그들은 그분을 위해 받는 고통을 달게 여긴다. MB 30.1 각 시대를 통하여,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해 왔다. 그는 그들을 고문하고 죽였으나, 그들은 죽음으로써 승리자가 되었다. 그들은 확고부동한 믿음으로 사단보다 더 강하신 분을 나타내었다. 사단은 고문하고 몸을 죽일 수는 있었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생명은 건드릴 수 없었다. 그는 감옥의 벽 속에 감금시킬 수는 있었으나 정신은 속박할 수 없었다. 그들은 어둠 저편에 있는 영광을 바라볼 수 있었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로마서 8 장 18 절).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25
산상보훈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린도후서 4 장 17 절). MB 30.2 하나님의 영광 곧 그분의 품성은 당신께서 택하신 자들에 의해 시련과 핍박을 통해 나타난다. 세상의 미움과 핍박을 받는 하나님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게 된다. 그들은 세상의 좁은 길을 걸으며, 고난의 도가니에서 정결하게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동안 쓰라린 투쟁을 경험한다. 그들은 극기를 감내해야 하며 처절한 실망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고통스러운 경험은 죄의식을 일깨워 주고 죄로 인한 비애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므로, 그들은 죄를 가증하게 보게 된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자가 됨으로 그들은 그분의 영광에 참예하는자가 된다. 선지자는 거룩한 이상(異像)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의 승리를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바다 같은 것이 있고…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 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요한계시록 15 장 2, 3 절).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요한계시록 7 장 14, 15 절). MB 31.1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 장 11 절) 사단은 타락한 이후 기만을 통해 활동해 왔다. 그는 하나님을 그릇되게 나타내 온 것처럼, 그의 대리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도 그릇되게 나타내고 있다. 구주께서는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시편 69 편 9 절)고 말씀하신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훼방이 미치게 된다. MB 31.2 대중과 함께 어울린 사람들 중에서 인자보다 더 혹독하게 비방을 받은 사람은 없다. 그분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원칙에 변함없이 순종하였기 때문에 조롱을 받고 모욕을 당하셨다. 그들은 까닭 없이 그분을 미워했다. 그러나 그분은 원수들 앞에 태연하게 서서 비난은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받을 유업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표명하시고,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악의 화살에 대항하는 방법을 가르치시며, 핍박을 당하더라도 실망하지 말도록 권면하셨다. MB 32.1 26
산상보훈 비방이 사람의 명예를 훼손할 수는 있으나 품성을 더럽힐 수는 없다. 품성은 하나님께서 보호하고 계신다. 우리가 범죄하고자 마음먹지 않는 한, 사람의 능력이든 사단의 능력이든 간에, 심령을 더럽힐 수 있는 능력은 없다. 심지(心志)가 견고한 사람은 가장 고통스런 시련과 가장 절망적인 환경에 놓일 때에도 번영 중에 있을 때 곧 하나님의 빛과 은총이 그에게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일 때와 동일하다. 그의 말과 동기와 행동이 잘못 전해지고 왜곡되게 알려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성패가 걸린 문제에 더 큰 관심을 두기 때문에 그런 일을 괘념치않는다. 그는 모세와 같이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보는 것같이하여”(히브리서 11 장 27 절) 참으며,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고린도후서 4 장 18 절)을 바라본다. MB 32.2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것들이 사람들에 의해 오해를 받고 누명을 쓰고 있는지 훤히 아신다. 그분의 자녀들은 아무리 심한 모욕과 경멸을 당할지라도 인내와 신뢰를 보이며 조용히 기다릴 만큼 여유가 있다. 그것은, 드러나지 아니할 비밀이 없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들이 사람들과 천사들 앞에서 그분께 높임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MB 32.3 예수님은 “사람이 너희를 욕하고 핍박할 때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셨다. 또, 그분께서는 당신의 청중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야고보서 5 장 10 절)으로 보여 주셨다. 아담의 자손 중 최초의 그리스도인이었던 아벨은 순교자가 되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다. 노아는 광신자요 민심을 소란케 하는 자라는 조소를 받았다.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히브리서 11 장 36, 35 절)다. MB 33.1 각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에 의해 택함을 받은 사자들은 욕을 먹고 핍박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국외로까지 널리 퍼져 나갔다.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은 이 대열에 가담하여 동일한 사업에 투신해야 하며, 그 사업의 원수들이 진리를 대항하지 못하고 오히려 진리를 위하여 일함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진리가 정면에 나타남으로 모욕을 받을지라도 그러한 일을 통해 그것이 연구와 검토의 주제(主題 )가 되기를 원하신다. 사람들의 마음은 동요되어야 한다. 따라서 모든 논쟁과 비난, 그리고 양심의 자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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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보훈 속박하기 위한 모든 시도는 깨우지 않으면 잠들 수밖에 없는 마음을 일깨워 주는 하나님의 수단이다. MB 33.2 하나님의 사자들의 역사에서 이런 성과가 있을 때가 얼마나 많았는가! 고상하고 웅변가인 스데반이 산헤드린 회의 충동으로 돌에 맞아 죽었을 때, 복음 사업에는 전혀 손해가 없었다. 스데반의 얼굴을 영광으로 물들게 한 하늘의 빛과, 그가 죽으면서 드린 기도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은 곁에 선 완고한 산헤드린 회원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는 예리한 화살과 같았다. 그리고 또, 핍박하던 바리새인 사울은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는, 택함을 받은 그릇이되었다. 오랜 후에, 노령의 바울은 로마의 감방에서 이런 편지를 썼다.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빌립보서 1 장 15~18 절). 복음이 바울의 수감을 통하여 널리 전파되었으며, 그 결과 가이사의 궁전에서까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썩지 아니하는”(베드로전서 1 장 23 절) 말씀의 씨는 오히려 그것을 없애려는 사단의 노력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에 뿌려진다. 그분의 자녀들이 받는 비난과 핍박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이 찬양을 받게 되고 영혼들이 구원을 얻게 된다. MB 33.3 비난과 핍박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들이 하늘에서 받을 상은 크다. 백성들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하늘의 상급을 가리켜 보이신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 상급을 전적으로 내세에서만 받게 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세상에서부터 받기 시작한다. 여호와께서는 옛날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세기 15 장 1 절)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의 상급이다. 사람은 여호와 임마누엘, 곧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고”,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골로새서 2 장 3, 9 절)는 분의 특성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마음을 더욱 넓게 열 때 그분과 조화를 이루게 되고, 그분을 알고, 그분을 소유하게 된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과 능력을 깨달아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부를 소유하며,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에베소서 3 장 18, 19 절) 하심을 더욱더 28
산상보훈 잘 이해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의 종들의 기업이요 이는 그들이 내게서 얻은 의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이사야 54 장 17 절). MB 34.1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밤중에 하나님께 찬미하고 기도할 때, 그들의 마음을 가득 채운 것은 이 기쁨이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 곁에 계셨으며, 그분의 임재의 빛은 하늘 궁정의 영광으로 어둠을 밝혔다. 로마에서, 바울은 복음이 널리 전파되는 것을 보고는 자기가 차꼬를 차고 있다는 것도 잊고 이렇게 기록했다.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립보서 1 장 18 절). 그리스도께서 산상에서 하신 바로 그 말씀이, 핍박을 받고 있는 빌립보교회에 보낸 바울의 기별 가운데서 “주안에서항상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립보서 4 장 4 절)는 말로 울려 퍼지고 있다. MB 35.1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마태복음 5 장 13 절) 소금은 그 보존성 때문에 가치가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소금이라고 부르실 때는, 그들을 당신의 은혜의 백성으로 삼으신 목적이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대리자가 되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전 세계 앞에서 한 백성을 택하신 목적은 그들을 당신의 자녀로 입양시키실 뿐 아니라 그들을 통하여 세상이, 구원을 주는 그 은혜를 받게 하시기 위함이었다(디도서 2 장 11 절).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셨을 때, 그 목적은 그로 하여금 단순히 하나님의 특별한 친구가 되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당신께서 만민에게 주고자 하시는 특권을 전하는 통로가 되게 하기 위한 것도 있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드린 마지막 기도에서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한복음 17 장 19 절)고 말씀하셨다. 이와같이 진리로 거룩함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처참한 도덕적 부패로부터 보존하는 구원의 특성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MB 35.2 소금은 첨가되는 물질과 섞여져야 한다. 그것은 또 보존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첨가물을 뚫고 들어가 그것을 절여야 한다. 이와 같이 사람들이 구원하는 복음의 능력과 접촉하는 것은 개인적인 만남과 교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들은 집단이 아닌 개인으로 구원을 얻는다. 개인의 감화는 일종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익을 주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야 한다. MB 36.1 소금의 맛은 그리스도인의 생명력, 곧 마음 29
산상보훈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생애를 가득 채우고 있는 그분의 의를 나타낸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파급적이며 진취적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우리 마음에 있으면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게 마련이다. 우리는 그들과 더욱 가까이 접촉하게 될 것이고, 그들의 마음은 우리의 이타적인 관심과 사랑에 의해 뜨거워질 것이다. 진실한 신자들은 목표로 하고 있는 영혼들에게 침투해 들어가, 새로운 도덕적 능력을 제공하는 생명력을발산한다. 변화시키는 일을 하는 것은 사람 자신의 능력이 아니고 성령의 능력이다. MB 36.2 예수께서는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는 엄숙한 경고를 덧붙이셨다. MB 36.3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동안, 맛을 잃어 쓸데없이 되었기 때문에 내어버림을 당한 흰 소금이 길바닥에서 반짝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의 상태와 그들의 종교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잘 나타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이 떠난 모든 사람들의 생애와, 냉랭하고 그리스도가 없는 상태에 놓인 사람들의 생애를 나타낸다. 그 신앙 고백이 어떠하든지 간에, 사람들과 천사들은 이런 사람을 맛이 없는 불쾌한 존재로 생각한다. 그리스도께서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요한계시록 3 장 15, 16 절)고 말씀하신 것은 이런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MB 36.4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는 산 믿음이 없으면, 회의적인 이 세상에서 감화를 끼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없다. 우리가 인류의 축복과 향상을 위하여 감화력을 발휘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 자신의 희생과 헌신에 비례된다. 현장에서의 봉사와 진실한 사랑, 그리고 실제적 경험이 없으면 도와 줄 수 있는 능력은 물론, 하늘과의 연결과 생애를 통해 발산하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가질 수 없다. 만일, 성령께서 예수님의 진리를 이 세상에 전하기 위한 대리자로 우리를 사용하실 수 없다면, 우리는 맛을 잃고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된 소금과 같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충분히 받지 못함으로 우리가 믿노라고 주장하는 진리에 거룩하게 하는 능력이 전혀 없는 양 세상에 증거하고 있다. 따라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무익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30
산상보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린도전서 13 장 1~3 절). MB 37.1 사랑은 마음을가득 채울 때 다른사람들에게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들로부터 받는 호의 때문이 아니라 사랑의 본질이 원래 활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품성을 개조하고, 충동을 억제하며, 적의(敵意)를 제거하고, 애정을 고상하게 해준다. 이 사랑은 우주와같이 넓으며 천사들의 그것과 조화를 이룬다. 마음 가운데 사랑을 간직하면 그것은 온 생애를 즐겁게 해주고 온 누리를 그 고유의 행복으로 덮어 준다. 우리로 세상의 소금이 되게 할 수 있는 것은 이 사랑, 바로 이 사랑뿐이다. MB 38.1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마태복음 5 장 14 절)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그들 주변에 있는 천연계에서 실례를 자주 듦으로써 당신의 교훈을 흥미롭게 만들고 청중들의 주의를 이끄셨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지만,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창공으로 점점 높이 떠오르는 광명한 태양은 산골짝과 산의 협곡들 사이에 숨어 있는 어두운 그림자들을 몰아내고 있었다. 동녘 하늘의 노을은 아직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태양 빛이 그 찬란한 광채를 대지 위에 쏟아 놓고 있었다. 잔잔한 호수의 수면은 황금빛을 반사하고 장밋빛 아침 구름을 잠그고 있었다. 꽃봉오리, 꽃,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 이 모든 것들이 이슬을 머금고 반짝거렸다. 천연계는 새날의 축복으로 미소 짓고, 새들은 나무 사이에서 즐겁게 노래를 불렀다. 구주께서는 앞에 있는 무리들과 떠오르는 태양을 차례로 바라보신 다음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태양이 밤의 어둠을 몰아내고 세상에 생명을 일깨워 줌으로 사랑의 사명을 다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도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나아가 오류와 죄의 암흑 속에 있는 자들에게 하늘의 빛을 널리 비추어 주어야 한다. MB 38.2 주변의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성읍들과 마을들이 찬란한 아침빛을 받아 아주 보기 좋은 모습으로 단정하게 서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것들을 가리키면서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또, 그분은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31
산상보훈 사람에게 비취느니라”고 부언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대부분 농부와 어부였다. 그들의 초라한 집에는 방이 하나밖에 없었으며, 그 방에 있는 등 또한 하나로 등경위에 얹힌 채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비치었다. 예수께서는, 이와 똑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보고 하늘에 계신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MB 39.1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오는 빛 외에는 그 어떤 빛도 일찍이 타락한 인류에게 비친 적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구주 예수님이 죄로 죽어 가는 세상의 암흑을 비춰 줄 수 있는 유일한 빛이시다.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으로 이런 것이 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한복음 1 장 4 절).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빛을 전하는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의 생명을 받음으로써였다. 영혼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과, 품성에 나타난 그분의 사랑이 그들을 세상의 빛이 되게 하였던 것이다. MB 39.2 인간 자체에는 아무런 빛도 없다. 그리스도를 떠나면 우리는 불붙지 않은 심지와 같고 태양을 등진 달과 같다. 우리에게는 세상의 흑암을 비출 수 있는 빛이 한 줄기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의의 태양을 향하고 그리스도와 접촉하게 될 때, 온 심령은 하나님의 임재의 빛으로 작열한다. MB 40.1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단순한 빛 이상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세상의 빛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너희는 자신을 나에게 바쳤고 나는 너희를 나의 대표자로 세상에 보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요한복음 17 장 18 절)다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나타내는 통로이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오, 그리스도인들이여, 우리 구주께서는 비록 광명의 대근원이시지만 인간을 통해 나타나신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라. 하나님의 축복은 인간을 방편으로 하여 주어진다. 그리스도 자신도 인자로서 세상에 오셨다. 신성과 연합한 인간이 인간과 접촉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교회 곧 주님의 제자 각 개인은 모두가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기 위해 하늘이 택한 통로이다. 영광의 천사들은 그대를 통해, 멸망 32
산상보훈 직전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늘의 빛과 능력을 전달하고자 기다리고 있다. 인간 대리자가 맡은 사업을 성취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아, 그 때는 세상이 그만큼 허락된 성령의 감화를 강탈당하게 되지 않겠는가! MB 40.2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 빛을 비추기 위하여 분투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다. 단지 “빛이 비취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거하시면 그분의 임재의 빛을 감출수없다. 만일, 그리스도를 따르노라고 공언하는 자들이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생명의 능력이 그들에게서 떠나갔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에게 비출 빛이 없다면, 그것은 그들이 빛의 근원 되는 분과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MB 40.3 각 시대를 통하여,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베드로전서 1 장 11 절)은 하나님의 진실한 백성들로 하여금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빛이 되게 하였다. 요셉은 애굽에서 빛을 전달하는 자가 되었다. 그는 순결과 박애와 효도를 통해 우상 숭배자들의 나라에서 그리스도를 나타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 허락의 땅으로 가는 동안, 그들 가운데 진실한 마음을 가진 자들은 주변 국가들에게 빛이 되었다.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세상에 알려졌다. 바벨론에서는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을 통하여, 그리고 바사에서는 모르드개를 통하여 밝은 빛이 왕궁의 흑암 속으로 뚫고 들어갔다. 그와같이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하늘가는 길에 빛을 비추는 자들로 세움을 받았다. 그들을 통하여, 아버지의 자비와 선하심이 하나님에 대한 오해의 흑암에 둘러싸여 있는 세상에 밝히 드러난다. 그들의 선한 행실을 봄으로써 다른 사람들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데, 그 이유는 찬송을 받고 본이 되기에 합당한 품성을 가지신 하나님이 우주의 보좌 위에 계신 것이 명확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마음속에서 불타는 거룩한 사랑과 생애를 통해 나타나는 그리스도를 닮은 융화의 태도는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하는 것으로, 그들에게 그 곳의 탁월함을 깨닫게 한다. MB 41.1 그리하여 사람들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알고 믿”(요한일서 4 장 16 절)게 된다. 그리고 한때 죄와 타락에 빠졌던 사람들도 순결해지고 변화되어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유다서 24 절)로 나타나게 된다. MB 42.1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구주의 말씀은 그분이 당신을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범세계적인 사명을 맡기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 당시에는 이기심과 교만과 33
산상보훈 편견이 거룩한 말씀의 수호자로 임명 받은 백성들과 지상에 있는 다른 모든 민족들 사이에 견고하고 높은 장벽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주께서는 이 모든 것을 바꿔 놓기 위해 오셨다. 사람들이 구주의 입술에서 들은 말씀은 그들이 지금껏 제사장이나 랍비에게서 들은 말과 같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벽과 이기심과 민족 차별의 편견을 헐어 버리시고, 모든 인간 가족을 위한 사랑을 가르치신다. 그분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기심 때문에 달라붙어 있던 좁은범위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모든 경계선과 사회의 모든 인위적 차이를 철폐하신다. 그분은 이방인과 이웃, 친구와 원수를 구별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모든 가난한 사람을 우리의 이웃으로, 세상을 우리의 일터로 여기도록 가르치신다. MB 42.2 태양 광선이 지구의 가장 먼 구석까지 비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빛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미치도록 계획하신다. 만일, 그리스도의 교회가 우리 주님의 목적을 성취할 것 같으면, 흑암과 죽음의 음침한 그늘에 웅크리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게 될 것이다. 한 곳에 모여서 책임과 십자가 지기를 회피하는 대신, 교인들은 온 세상에 흩어져서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며,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일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천국 복음”은 곧 온 세상에 신속히 전해질 것이다. MB 42.3 메소보다미아 평원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이 시대의 우리에게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부르시는 목적이 성취되려면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한다. 그분께서는 “네게 복을 주니…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세기 12 장 2 절)고 말씀하신다. 산상 설교에서도 울려 퍼지고 있는, 복음 선지자를 통한 그리스도의 말씀은 이 마지막 시대에 사는 우리를 위한 것이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이사야 60 장 1 절). 만일, 주님의 영광이 그대의 심령에 비치고, 그대가 “만 사람에게 뛰어 나고” “온전히 아름다운” 분의 미를 쳐다보고, 그대의 마음이 그분의 영광의 임재 안에서 빛나기만 하면 주님께로부터 오는 이 말씀은 그대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된다. 그대는 그리스도와 함께 변화산에서 본 일이 있는가? 그 아래 평지에는 사단에게 사로잡힌 영혼들이 있다. 그들은 그들을 해방시켜 줄 믿음과 기도의 말을 기다리고 있다. MB 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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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보훈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명상할 뿐 아니라 그분의 탁월함을 이야기해야 한다. 이사야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을 뿐 아니라 그분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다윗은 명상하는 동안 불이 타올라 자신의 혀로 말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명상하는 동안 보고 느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믿음으로 놀라운 구원의 계획 곧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고도 그것에 관하여 이야기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갈바리 십자가에서 죽음을 통해 나타내보이신 그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그 누가 상상할 수 있으며, 또 이것을 보고 구주의 영광을 찬양하는 말을 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MB 43.2 “그 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시편 29 편 9 절). 이스라엘의 종교 시인은 거문고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사를 나는 묵상하리이다 사람들은 주의 두려운 일의 세력을 말할 것이요 나도 주의 광대하심을 선포하리이다”(시편 145 편 5, 6 절)고 말한다. MB 44.1 갈바리의 십자가는 사람들 위에 높이 들려 그들의 마음과 생각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모든 영적 기능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는 거룩한 능력으로 충전될 것이다. 그리고 또, 주님을 위한 진실한 사업에 힘을 집중시키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일꾼들은 이 땅을 밝히는 산 대리자로서 세상을 향해 광선을 내뿜을 것이다. MB 44.2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 헌신하는 모든 인간 대리자들을 참으로 기쁘게 받으신다. 그분께서는 성육신(成肉身)의 사랑의 신비를 이 세상에 알려 주기 위하여 인간이 하늘과 연합하게 하신다. 이것을 이야기하고 기도하고 노래하라. 그분의 영광의 기별을 널리 선포하고, 지경 저편을 향하여 계속 전진하라. MB 44.3 꾸준히 참아 낸 시련,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은 축복, 용감하게 물리친 유혹, 온유, 친절, 자비, 늘 나타나는 사랑, 이 모든 것들은 생명의 빛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는 이기적인 마음의 흑암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품성에서 비치는 빛들이다. MB 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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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보훈
3 장 - 율법의 신성성 “내가…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태복음 5 장 17 절) 시내산의 우레와 불꽃 가운데서 율법을 선포하신 분은 그리스도이셨다. 하나님의 영광이 삼키는 불과같이 산꼭대기에 머물고, 주님의 임재에 산이 진동했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땅 위에 부복한 채 두려운 마음으로 율법의 거룩한 교훈을 들었다. 축복의 산에서 있었던 장면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오직 새들의 노래만이 적막을 깨뜨리는 여름의 하늘 아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나라의 원칙을 설명하셨다. 그러나 이 날에 사랑의 음성으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분께서는 시내산에서 선포된 율법의 원칙을 설명하고 계셨다. MB 45.1 율법이 주어졌을 때, 애굽에서의 오랜 속박 때문에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으로 감명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분께서 자신을 그들에게 사랑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셨다. MB 45.2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취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서 강림하셨고 그 오른손에는 불같은 율법이 있도다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아래에 앉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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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보훈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 신명기 33 장 2, 3 절. MB 45.3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의 귀중한 유산으로 간직되어 온 이 놀라운 말씀을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모세에게 나타내셨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출애굽기 34 장 6, 7 절). MB 46.1 시내산에서 주어진 율법은 사랑의 원칙을 반포한 것, 즉 하늘의 율법을 땅에 계시한 것이었다. 그 율법은 중보자의 손으로 제정되고, 사람의 마음을 그 율법의 원칙과 조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에 의해 선포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출애굽기 22 장 31 절)라고 말씀하시면서 율법의 목적을 드러내셨다. MB 46.2 그러나 이스라엘은 율법의 신성한 특성을 깨닫지 못하였으며, 너무도 자주, 그들이 공언한 순종은 사랑의 통치에 마음을 복종시켰다기보다는 형식과 의식을 따르는 것에 불과했다. 예수께서 당신의 품성과 사업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고 자비롭고 은혜로운 속성을 나타내시고 단순한 의식적 순종의 무가치함을 드러내셨을 때, 유대의 지도자들은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예수께서 율법의 요구를 너무 경하게 여긴다고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그분이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그들의 봉사의 중심이 되는 진리를 제시하셨을 때, 그들은 다만 외적인 것만 보고 그분께서 율법을 파괴하고자 한다고 비난했다. MB 46.3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조용히 말씀하셨으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열성과 능력으로 말씀하셨다. 그들은 랍비들의 생명 없는 유전과 부당한 요구의 되풀이려니 하고 들었으나 그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마태복음 7 장 29 절)에 놀랐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교수 방법과 그리스도의 그것에 큰 차이가 있음을 알았다. 그들은 진리의 위엄과 순결과 미가 그 오묘하고 부드러운 감화력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굳게 붙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구주의 거룩한 사랑과 친절이 사람들의 마음을 그분께로 이끌었다. 랍비들은 그분의 가르치심 때문에 그들이 사람들에게 가르친 모든 교훈의 취지가 무시되어 버린 것을 깨달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교만과 배타주의(排他主義)를 크게 만족시켜 온 격벽(隔壁)을 37
산상보훈 무너뜨리고 계셨다. 그들은 만일 허락만 하면 그분께서 사람들을 그들에게서 완전히 끌어갈 것이라고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단호한 적의(敵意)를 품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어떻게 하면 무리에게서 그분의 인기를 떨어뜨리고 산헤드린 회로 하여금 그분을 정죄하여 죽이도록 할까 하고 기회를 엿보았다. MB 46.4 산 위에서, 예수께서는 정탐꾼들에게 면밀한 감시를 받으셨다. 그분께서 의의 원칙들을 밝히실 때, 바리새인들은 그분의 가르치심이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주신 계명과 반대된다고 서로 속삭였다. 구주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주신 신앙과 제도에 대한 믿음을 동요케 할 말씀은 전혀 안 하셨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인 그가 백성들에게 전달해 준 거룩한 빛의 모든 광선이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셨다고 마음속으로 말하지만, 그분께서는 명백한 말씀으로 거룩한 계명에 대한 당신의 태도를 표명하신다. 그분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마태복음 5 장 17 절)고 말씀하셨다. MB 47.1 계명을 폐하는 것이 당신의 목적이 아니라고 선언하시는 분은 인류의 창조주이시며 율법의 시여자(施與者)이시다. 천연계 속에 있는 모든 것, 곧 광선에 비치는 티끌로부터 하늘에 있는 세계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다 법칙 아래 있다. 천연계의 질서와 조화는 이 법칙을 순종하는 데 달렸다. 그러므로 지성적 존재의 생애를 주관하는 의의 큰 원칙이 있으며, 우주의 안녕은 이 원칙에 조화를 이루는 데 달렸다. 이 지구가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의 율법이 존재하였다. 천사들이 이 율법의 원칙에 의하여 지배를 받기 때문에, 세상이 하늘과 조화되기 위하여서는 사람도 하늘의 법에 순종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욥기 38 장 7 절)할 때, 에덴동산에 있는 사람에게 율법의 교훈을 알려 주셨다.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사명은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의 은혜로 사람들을 돌이켜 율법의 교훈을 따르게 하는 것이었다. MB 48.1 산 위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오랜 후에 성령의 감동으로 영감의 기록을 남긴 사랑의 제자는 율법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마치 항구적인 의무에 대해 하듯 한다. 그는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한일서 3 장 4 절)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말한 율법이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요한일서 2 장 7 절)이라고 분명히 밝힌다. 그는, 창조 시에 있었고 시내산에서 다시 언급된 율법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MB 48.2 38
산상보훈 예수께서는 율법에 대해언급하면서 “내가…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여기서 “완전케 한다”는 말을, 침례 요한에게 “모든 의를 이루기”(마태복음 3 장 15 절) 위한 당신의 목적을 선언하실 때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셨는데, 그것은 율법이 요구하는 표준을 이루고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하는 본을 보이는 것이다. MB 48.3 예수님의 사명은 “교훈을 크게 하며 존귀케 하”(이사야 42 장 21 절)는 것이었다. 율법의 거룩한 특성을 보여 주고, 그 광범위한 영향력을 제시하며, 그 영원한 의무를 명확히 밝혀 주셔야 했다. MB 49.1 그리스도의 품성의 신성미를 두고 이야기하자면, 가장 고상하고 온유한 사람도 그분을 희미하게 반사할 뿐이다. 솔로몬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만 사람에 뛰어난다…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아가 5 장 10~16 절)라는 말로 그분에 관하여 기록하였다. 예언적 안목으로 그분을 바라본 다윗은 그분에 대해 “왕은 인생보다 아름”(시편 45 편 2 절)답다고 말하였다. 아버지의 본체의 분명한 형상이시며,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이시요 극기의 구속주이신 예수님은 지상에서 사랑의 순례자로 지내시는 동안 하나님의 율법의 성격을 생생하게 나타내셨다.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 하늘에서 난 사랑, 곧 그리스도 같은 원칙이 영원히 공정한 율법의 기초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MB 49.2 예수께서는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율법에 순종하심으로써 변경할 수 없는 율법의 성격을 증거하시고, 아담의 모든 자손이 당신의 은혜를 통하여 율법을 완전히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셨다. 산 위에서 그분은 모든 것, 즉 인류와 관계되는 모든 것, 구원의 계획과 관련되는 모든 것이 성취되기 전에는 율법의 가장 작은 일획도 폐하지 않으리라고 언명하셨다. 그분께서는 율법이 결코 폐지될 수 없다고 가르치시며, 또 우리의 시계(視界)를 최대로 넓혀 그 끝을 바라보게 하시고, 그 끝에 이르기 전에는 율법이 그 권위를 계속 보존하게 될 것이라고 확인하심으로써 아무도 율법을 폐지하는 것을 예수님의 사명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신다. 천지가 존속하는 한, 하나님의 율법의 거룩한 원칙도 남아 있을 것이다. “산들과 같”(시편 36 편 6 절)은 그분의 의는 계속 축복의 근원으로서 대지에 생기를 주는 시냇물을 흘려보낼 것이다. MB 49.3 하나님의 율법은 변경이 필요 없을 만큼완전하므로, 죄악적인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39
산상보훈 율법이 요구하는 표준에 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구속주로 오신 이유였다. 예수님의 사명은 사람들을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로 만들어 하늘의 율법의 원칙과 조화되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죄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받아들일 때, 율법은 높여진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로마서 3 장 31 절)고 말한다. MB 50.1 새 언약의 약속은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히브리서 10 장 16 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그분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가리킨 표상적 제도는 폐지되었으나, 십계명을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된 의의 원칙은 영원한 보좌와 마찬가지로 변치 않는다. 율법의 한 조목도 폐지되지 않고, 일점일획도 변경되지 않았다. 에덴동산에서 생애의 큰 법칙으로 인류에게 알려진 그 원칙들은 회복된 낙원에서도 변치 않고 존재할 것이다. 에덴동산이 다시 지상에서 꽃 필 때, 태양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을 순종하게 될 것이다. MB 50.2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시편 119 편 89 절) “그 법도는 다 확실하니 영원 무궁히 정하신 바요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시편 111 편 7, 8 절) “내가 전부터 주의 증거를 궁구하므로 주께서 영원히 세우신 것인 줄을 알았나이다”(시편 119 편 152 절). MB 51.1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마태복음 5 장 19 절) 말하자면, 이러한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것은 한 계명이라도 고의적으로 범하는 자는 다른 계명도 신령과 진정으로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야고보서 2 장 10 절). MB 51.2 죄를 이루는 것은 큰 불순종의 행위가 아니고 지극히 작은 것에서 하나님이 나타낸 뜻과 충돌을 빚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람이 아직 죄와 교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마음은 섬기는 바에 따라 나누어진다. 거기에는 사실상 하나님을 부인하는 일 곧 하늘 정부의 율법을 반역하는 일이 있다. MB 51.3 만일, 사람들이 하나님의요구에서 떠나 스스로 의무의 표준을 세울 것 같으면,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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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보훈 사람의 마음에 따라 여러 가지 표준이 있게 되고, 주권도 주님의 손에서 빼앗게 될 것이다. 사람들의 뜻이 최고의 것으로 여겨지고, 높고 거룩한 하나님의 뜻, 곧 피조물을 사랑하시는 그분의 목적은 업신여김을 받고 무시될 것이다. MB 51.4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의 길을 택할 때에는 언제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위치에 이르게 된다. 그들은 하늘나라에서 있을 자리를 얻지 못할 것인데, 그것은 스스로 하늘의 원칙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무시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의 원수인 사단의 편에 가담하고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한 말씀이나 여러 말씀으로 살 것이 아니라 그분의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말씀 하나라도 무시하면 안전할 수 없다. 율법 가운데서 이생과 내세에서 다 같이 사람의 유익과 행복을 위하지 않는 계명은 하나도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함으로써 울타리에 둘려 있는 것처럼 악에서 보호를 받게 된다. 하나님께서 구축해 놓은 이 방호벽을 한 곳이라도 무너뜨리는 자는 그를 보호해 주는 그 능력을 파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원수가 들어와서 황폐케 하고 멸망시킬 길을 열어 놓기 때문이다. MB 52.1 우리의 첫 조상은 한 가지 점에서 감히 하나님의 뜻을 경시함으로써 이 세상에 재난의 수문을 열어 놓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본을 따르는 사람은 하나같이 유사한 결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의 각 교훈은 그분의 사랑이 기초가 되어 있기 때문에, 계명을 떠나는 자는 불행과 멸망을 자초하게 된다. MB 52.2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5 장 20 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까지도 랍비의 의식과 관례를 무시했다는 이유를 들어 죄인으로 몰았다. 때때로, 제자들은 그들이 종교 지도자로 존경해 온 자들에게서 비난과 공격을 받음으로 난처해지고 곤란해졌다. 예수님은 기만의 정체를 폭로하셨다. 그분은 바리새인들이 매우 가치 있게 여기는 의를 무가치한 것으로 선언하셨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특별하고 충성된 백성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종교를, 구원하는 믿음이 없는 것으로 나타내셨다. 그들의 가장된 경건, 인위적고안과의식, 심지어 그들이 자랑하는 율법의 외형적 준수까지도 그들을 거룩하게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마음이 순결하지 못하고 품성이 41
산상보훈 고상하지도, 그리스도와 같지도 않았다. MB 53.1 율법주의적 종교는 사람을 하나님과 조화되게 하지 못한다. 바리새인의 까다롭고 완고한 정통, 즉 회개와 온유와 사랑의 결핍은 죄인들을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에 불과했다. 그들은 맛을 잃은 소금과 같았다. 그들의 감화는 이 세상을 부패에서 방지하는 아무런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일한 참 믿음은 심령을 정결케 하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라디아서 5 장 6 절)이다. 그것은 품성을 변화시키는 누룩과 같은 것이다. MB 53.2 유대인들은 이 모든 것을 선지자들의 교훈에서 배웠어야 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고자 하는 심령의 절규와 이에 대한 답이 여러 세기 전에 선지자 미가에 의해 기록되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 장 6~8 절). MB 53.3 선지자 호세아는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호세아 10 장 1 절)는 말로 바리새인의 본질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지적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섬기노라고 공언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그들의 의는 스스로의 사상에 따라 사리 사욕을 차리기 위해 율법을 지키려는 자신의 노력에 대한 열매였다. 그러므로 그 의는 그들 자신보다 더 나을 수 없었다. 스스로 거룩하게 되고자, 그들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끌어내려고 애썼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며, 그분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하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나타낸다. 사람의 본성은 타락하고 훼손되어 하나님의 품성과 전혀 같지 않으므로, 사람 스스로는 이 율법을 지킬 수 없다. 이기적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다 부정한” 것 같고,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이사야 64 장 6 절)다. MB 54.1 율법이 거룩한 것은 분명하나, 유대인들은 스스로 이를 지키는 것으로써 의를 얻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바리새인의 의와는 다른 성격의 의를 얻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완전한 율법의 의를 주셨다.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마음의 문을 활짝 열면, 바로 하나님의 생명, 42
산상보훈 그분의 사랑이 그들 안에 거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됨과 동시에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을 통하여 율법이 요구하는 의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로마서 10 장 3 절)함으로써 그분의 의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MB 54.2 예수께서는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곧 자신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품성을 재현하는 것임을 계속해서 가르치셨다. 그것은 그분을 통해 하나님이 매일 그들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이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마태복음 5 장 22 절)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통해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 말며…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위기 19 장 17, 18 절)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신 진리는 선지자들이 가르친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진리들은 마음의 완고와 죄에 대한 애착으로 흐려졌다. MB 55.2 구주의 말씀은 청중들에게, 다른 사람을 범죄자로 정죄하는 동안에는 그들 자신도 꼭 같은 죄인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악의와 증오를 품고 있기 때문이었다. MB 55.3 그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마주 보이는 바다 저쪽은 바산이라는 외딴 지역으로, 거친 골짜기와 나무가 무성한 언덕들 때문에 오래 전부터 각종 범죄자들이 잠복해 있기에 적합한 장소가 되어 왔다. 그 곳에서 자행된 강도와 살인에 대한 소문은 사람들의 마음을 섬뜩하게 했으며, 많은 사람이 열을 내어 그 행악자들을 공공연하게 비난했다. 동시에, 그들은 성미가 급하고 투쟁적이었다. 그들은 로마인 압제자들에 대하여 더할 수 없는 적대감을 품고 있었으며, 다른 백성들은 물론, 심지어 동포들이라 할지라도 모든 면에서 자신들의 사상과 맞지 않으면 마음대로 미워하고멸시할 수있다고생각했다. 이 모든 일을 통하여, 그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범하고 있었다. MB 56.1 증오와 복수의 정신은 원래 사단에게서 나왔으며, 그는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게 되었다. 적의(敵意)나 몰인정한 마음을 품는 자는 누구나 동일한 정신을 품게 되며 그 결과로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씨앗 속에 식물(植物)이 들어 있는 것같이, 복수의 생각 속에 악한 행동이 들어 있다. “그 형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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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보훈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한일서 3 장 15 절). MB 56.2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선물로 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각인의 영혼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시는지 보여 주셨다. 그분께서는 사람에게 서로 경멸하는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지 않으신다. 우리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결점과 약점을 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창조를 통한 소유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의 지불을 통한 소유, 곧 당신의 이중적(二重的) 소유로 주장하신다.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모든 사람, 심지어 가장 타락한 사람들까지도 존경과 친절로써 대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한 영혼을 모독하여 한, 한 마디의 말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책임을 지우실 것이다. MB 56.3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고린도전서 4 장 7 절).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로마서 14 장 4 절). MB 57.1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구약 성경에는 “미련한 놈”이란 말이 배교자 혹은 자기 자신을 악의 지배에 맡겨 버린 자를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형제를 배교자 혹은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라고 비난하면 그 자신 또한 동일한 정죄를 받기에 합당함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MB 57.2 그리스도 자신도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사단과 싸우실 때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유다서 9 절)셨다. 만일, 그렇게 하셨을 것 같으면, 사단의 뜻을 반영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방은 악한 자의 무기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사단은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요한계시록 12 장 10 절)로 불리어진다. 예수님은 사단의 무기를 하나도 이용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리라”(유다서 9 절)는 말씀으로 그를 대항하셨다. MB 57.3 그분의 모본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원수와 싸울 때, 보복의 정신을 가지고 말을 하거나 욕하고 비난하는 언사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대변자로 서는 자는, 하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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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보훈 주권자께서 사단과 싸우실 때 사용하지 않으시는 말을 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판단하고 비난하는 일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MB 57.4 “형제와 화목하고” (마태복음 5 장 24 절) 하나님의 사랑은 미미하고 소극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원칙, 곧 다른 사람들을 복되게 하기 위하여 항상 흘러나오는 살아 있는 샘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속에 거하면 우리는 이웃에게 증오심을 품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사랑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노력하게 될 것이다. MB 58.1 예수께서는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셨다. 희생 예물은 제물을 바치는 자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참예자가 되었다는 믿음을 나타냈다. 그러나 사람이 말로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사랑이 없는 정신에 빠지면 하나의 웃음거리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MB 58.2 하나님을 섬기노라고 공언하는 사람이 형제에게 잘못하거나 손해를 입힐 때는 하나님의 품성을 그 형제에게 잘못 나타내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그는 잘못을 고백하고 그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형제에게 잘못한 것보다 형제가 우리에게 더 크게 잘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의 책임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나갈 때, 다른 사람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면, 기도의 예물, 감사의 예물, 자원하여 드리는 예물을 거기 두고, 우리와 불화한 형제에게로 가서 겸손하게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MB 58.3 어떤 방법으로든지형제를속였거나손해를입혔으면, 보상해 주어야한다. 만일, 부지중에 거짓 증거를 했거나, 형제의 말을 잘못 진술했거나,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의 감화력을 손상시켰으면, 그 사람에 관하여 대화를 나눈 사람들을 찾아가서 우리의 유해한 허위 진술을 모두 취소해야 한다. MB 59.1 만일, 형제들 사이에 있는 어려운 문제가 다른 사람에게 공개되지 않고 당사자간에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정신으로 솔직하게 이야기된다면 얼마나 많은 악이 방지되겠는가! 뭇 사람을 더럽히는 쓴 뿌리가 얼마나 많이 제거되고, 그리스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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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보훈 따르는 사람들이 그분의 사랑 안에서 얼마나 밀접하고 부드럽게 연합될 수 있겠는가! MB 59.2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 장 28 절) 유대인은 자신들의 도덕성을 자랑하고 이방인의 관능적인 행위를 가증하게 여겼다. 로마 제국의 통치로 팔레스틴에 들어오게 된 로마 장교들의 존재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실족케 하는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 이방인들과 함께 이교의 습관과 음란과 방탕의 홍수가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가버나움에서, 로마 군의 장교들은 정부(情婦)와 함께 유원지에 나타나 산보하였으며, 그들의 유람선들이 잔잔한 물위를 미끄러져 갈 때 자주 환락의 소리가 호수의 적막을 깨뜨렸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엄중히 책망하는 말씀을 듣기를 기대하였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 자신의 마음에 있는 악을 폭로하시는 말씀을 들었으니, 그 놀람이 어떠했겠는가! MB 59.3 예수께서는 아무리 은밀한 중에라도 즐겨 악한 생각을 품을 때는 죄가 아직도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 사람의 심령은 여전히 심한 증오와 죄악의 속박 가운데 놓여 있다. 불순한 장면을 상상함으로 쾌감을 느끼는 사람, 악한 생각을 품고 호색적인 표정을 짓는 사람은 드러난 죄 속에서 그것으로 인한 수치와 마음을 찢는 슬픔의 고통을 느끼며 그가 영혼 골방에 감추어 둔 악의 참 특성을 보게 될 것이다. 사람이 유혹에 빠져 가증한 죄를 짓게 되는 때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악을 새로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숨겨 놓았거나 잠재해 있는 것을 나타내거나 명백히 하는 것에 불과하다.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잠언 4 장 23 절; 23 장 7 절)하다. MB 60.1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내 버리라” (마태복음 5 장 30 절) 병이 몸에 퍼져 생명을 빼앗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사람은 자신의 오른팔이라도 잘라내는 것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영적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더욱 즐거운 마음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MB 60.2 타락하여 사단에게 사로잡힌 영혼들은 복음을 통하여 구속(救贖)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려야 한다. 하나님의 목적은 단순히 죄의 필연적 결과인 46
산상보훈 고통에서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죄 자체에서 구원하는 것이다. 타락하여 훼손된 영혼은 순결해지고 변화되어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시편 90 편 17 절) 옷 입고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로마서 8 장 29 절)아야 한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고린도전서 2 장 9 절). 오직 영원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이 맞이할 영광스러운 운명을 드러낼 수 있다. MB 61.1 이 높은 이상에 도달하기 위하여, 우리는 영혼을 넘어지게 하는 것을 버려야 한다. 죄가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의지를 통해서이다. 의지를 굴복시키는 것을 눈을 빼 버리거나 손을 베어 버리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이 평생을 병신이나 절뚝발이로 보내기로 동의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자주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병신이 되고, 상처를 입고, 절뚝발이가 되더라도 생명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더욱 좋다고 말씀하신다. 그대가 재난으로 생각하는 그것이 최고의 유익에 이르는 길이 된다. MB 61.2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그분과 교통함으로써만 생명을 소유할 수 있다. 하나님을 떠나면, 목숨은 잠시 부지할지 모르나 생명은 소유할 수 없다.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디모데전서 5 장 6 절).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바침으로써만 그분께서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다. 예수께서는 자아의 굴복을 통하여 당신의 생명을 받아들일 때에만 당신께서 지적해 주시는 숨은 죄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죄는 마음속에 감추고 사람의 눈에서 숨길 수 있다. 그러나 그러고도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는가? MB 61.3 만일, 자아에 매달려마음을 하나님께 바치기를거절한다면, 사망을 택하고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죄가 어디에서 발견되든지, 하나님은 그것에 대하여 사르는 불이 되신다. 그러므로 죄를 택하고 죄에서 분리되기를 거절하면 그대는 죄를 사르시는 하나님의 임재에 의해 함께 불살라질 수밖에 없다. MB 62.1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는 것은 희생이 요구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더욱 고상한 것을 위하여 저속한 것을, 신령한 것을 위하여 세속적인 것을, 영원한 것을 위하여 사라져 없어질 것을 버리는 희생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지를 파괴하려고 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우리가 의지의 활용을 통해서만 그분께서 원하시는 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지를 순결하고 깨끗하게 된 상태로 다시 돌려받기 위하여,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며, 또 그분께서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47
산상보훈 사랑과 능력을 아낌없이 쏟아 부으실 수 있도록 그분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그것을 그분과 연결시켜 놓아야 한다. 강퍅하고 고집 센 자들에게는 이 같은 굴복이 참으로 쓰라리고 고통스러울지 모르나 “너희에게는 유익하니라.” MB 62.2 야곱은 절름발이가 되어 언약의 천사의 품에 속절없이 안기게 되었을 때 비로소 정복케 하는 믿음의 승리를 알았으며 하나님의 왕자의 칭호를 얻었다. 에서의 무장한 군대가 그의 앞에서 조용해지고, 왕의 혈통으로 난 교만한 후계자인 바로가 그의 축복을 받기 위해 허리를 굽힌 때는 그가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창세기 32 장 31 절) 때였다. 우리의 구원의 주께서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히브리서 2 장 10 절) 되신 것처럼, 믿음의 자녀들도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히브리서 11 장 34 절)였다. 마찬가지로, “저는 자도 그 재물을 취할 것이며”(이사야 33 장 23 절),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스가랴 12 장 8 절)다.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마태복음 19 장 3 절) 유대인들은 지극히 사소한 허물을 가지고도 아내를 버릴 수 있었으며, 버려진 여자는 그때부터 재혼의 자유를 허용 받았다. 이러한 풍습은 큰 불행과 죄를 초래하였다. 예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결혼 서약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을 때를 제외하고는 혼인 관계가 깨어질 수 없다고 분명히 선언하셨다. 그분께서는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MB 63.1 그 후에 바리새인들이 이혼의 합법성에 관하여 질문하자, 예수께서는 청중들에게 창조 시에 제정된 결혼 제도를 상기시키셨다. 그분께서는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마태복음 19 장 8 절)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만물을 보시고 심히 좋다고 선언하신 에덴의 복된 날들에 대하여 언급하셨다. 결혼과 안식일은 그때에 시작되었고, 이 두 제도는 하나님의 영광과 인류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 창조주께서는 거룩한 부부의 손을 혼인으로 연합시키실 때,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세기 2 장 24 절)는 48
산상보훈 말씀을 주심으로써, 아담의 모든 자손을 위한 결혼의 법칙이 마지막 때까지 유효함을 선언하셨다.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친히 좋다고 선포하신 것은 인류를 위한 최상의 축복과 향상의 법칙이었다. MB 63.2 인류에게 지키도록 위탁된 하나님의 좋은 선물들 중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결혼 제도도 죄로 말미암아 왜곡되었다. 그러나 그 제도의 순결과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것이 복음의 목적이다. 신구약을 막론하고, 결혼 관계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 곧 그분께서 갈바리의 희생으로 구속한 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우호적이고 거룩한 연합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 그분께서는 “두려워 말라…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이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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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4,
5
절),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예레미야 3 장 14 절)고 말씀하신다. “아가서”에서 우리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아가 2 장 16 절)라고 말하는 신부(新婦)의 음성을 듣는다. 그리고 신부에게 있어서 “만 사람에 뛰어난”(아가 5 장 10 절) 그분께서는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아가 4 장 7 절)라고 당신의 택하신 자에게 말씀하신다. MB 64.1 그 후에,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하면서, 마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와 신령한 몸의 구주가 되시는 것같이 하나님께서 남편을 아내의 머리로 삼으심으로써 그를 아내의 보호자와 또 가족을 함께 묶는 가정의 띠가 되게 하셨다고 선언한다. 따라서 그는이렇게 말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홈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몸같이 할지니”(에베소서 5 장 24~28 절)라. MB 64.2 그리스도의 은혜, 오직 이것만이 이 제도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인류의 축복과 향상을 위한 제도가 되게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의 가정들은 연합과 화평과 사랑을 통해 하늘의 가정을 대표할 수 있다. MB 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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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보훈 그리스도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사회의 형편을 보면 이 거룩한 관계에 대한 하늘의 이상이 제대로 펼쳐지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정과 기쁨을 바라던 곳에서 고통과 실망을 발견한 자에게도 그리스도의 복음은 위로를 준다. 그분의 영께서 나누어 주실 수 있는 인내와 온유는 비참한 운명을 호전시켜 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거하는 마음은 그분의 사랑으로 충만해지고 만족을 느끼기 때문에, 남의 동정과 배려를 바라는 욕망이 사라질 것이다. 또, 하나님께 마음을 굴복시킴으로써 인간의 지혜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지혜가 이루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를 통하여, 한때 냉랭하고 벌어졌던 마음들이 세상의 줄보다 더 튼튼하고 오래 견디는 줄, 곧 고난의 시험을 견디어 낼 사랑의 황금줄로 연합될 수 있을 것이다. MB 65.2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마태복음 5 장 34 절) 이 명령이 주어진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MB 66.1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받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피로 사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다.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이 십자가의 인이 찍힌 채,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귀한 피의 대가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그 피가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말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마치 무슨 권리를 가진 것처럼 맹세할 수 없다. MB 66.2 유대인들은 셋째 계명을 하나님의 이름을 불경스럽게 사용하는 것을 금하는 계명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다른 맹세들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는 맹세하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그들은 모세를 통하여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맹세로 인한 책임을 면하기 위하여 많은 계책을 고안해 냈다. 그들은 불경한 일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물론, 법률을 기술적으로 피하여 어떻게든 감출 수만 있으면 거짓 맹세 또한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MB 66.3 예수께서는 그들의 행동을 정죄하시고, 맹세하는 그들의 습관이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일이라고 주장하셨다. 그러나 우리의 구주께서는, 말하는 것이 진실이며 오직 진실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엄숙하게 부르는 법정에서의 선서는 금하지 않으셨다. 예수님 자신이 산헤드린 회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 50
산상보훈 맹세하고 증언하기를 거절하지 않으셨다. 대제사장이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했을 때, 예수께서는 “네가 말하였느니라”(마태복음 26 장 63, 64 절)고 대답하셨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산상 설교에서 법정에서의 선서를 정죄하셨더라면, 재판을 받으실 때 대제사장을 책망하시고, 당신을 따르는 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분 자신의 교훈을 강조하셨을 것이다. MB 66.4 아무 두려움도 없이 동료 인간들을 속이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도 창조주께 거짓말 하는 것이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배우기도 하지만 또 하나님의 영을 통해 늘 깨우침을 받고 있다. 선서할 때, 그들은 단순히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한다는 것과 또 거짓 증언을 하게 되면 마음을 읽으시고 정확한 사실을 아시는 그분께 하는 것임을 느끼게 된다. 이 죄에 따르는 두려운 심판을 알기에, 그들은 무서워 자제한다. MB 67.1 맹세를 하고 일관성 있게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있는 것처럼 생활하며, 우리를 상관하시는 분의 눈앞에 모든 생각이 공개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정한 방법으로선서하라는 요구를 받게 될 때, 말하는 것이 진실하고 오직 진리만을 이야기 한다는 것을 증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정당한 일이다. MB 67.2 예수께서는 맹세하는 것이 필요치 않다는 원칙을 세우기 위하여 계속 노력하셨다. 그분은 정확한 진실이 말의 법칙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MB 67.3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의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라 할 수 있는 모든 의미 없는 빈말과 어귀들을 정죄한다. 이것은 사교계와 사업계에서 유행하는 가식적인 인사, 진실을 떠난 속임, 아첨하는 말, 과장, 상업상의 속임수 등을 정죄한다. 이것은 또 자신의 본 모습이 아닌 것을 나타내고자 애쓰고, 감정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지 진실하다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MB 68.1 그리스도의 이 말씀에 유의하면 악한 추측과 불친절한 비평의 말이 다 점검될 것이다. 타인의 행동과 동기를 비평할 때, 그 누가 정확한 진실만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자만과 감정과 개인적 원한 때문에 얼마나 자주 다른 인상을 받게 되는가! 한 51
산상보훈 번의 눈짓, 한 마디의 말은 물론 음성의 억양까지도 거짓의 결정적인 방조자가 될 수 있다. 사실이 잘못 진술되어 본의 아닌 인상을 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참된 것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는 것이다.” MB 68.2 그리스도인이 하는 모든 것은 햇빛과 같이 투명해야 하다. 진리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나, 무수한 형태를 가진 악은 모두 사단에게 속한 것이다. 따라서 진리의 바른 노선에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떠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악한 자의 권세 아래 내어 맡기는 것이다. 그렇다고 정확한 진실을 말하는 것이 쉽거나 용이한 일은 아니다. 진실을 알기 전에는 진실을 말할 수 없다. 선입관념과 편견, 불완전한 지식과 오판으로 얼마나 자주 우리와 상관된 문제들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가! 우리의 마음이 진리이신 분의 인도를 끊임없이 받지 않는 한 진리를 말할 수 없다. MB 68.3 그리스도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신다. “너희 말은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골로새서 4 장 6 절).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선한 말을 하여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에베소서 4 장 29 절). 이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보면, 산상에서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농담, 실없는 소리, 상스러운 대화 등을 정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말씀은 우리의 말이 진실할 뿐만 아니라 순결하기를 요구한다. MB 68.4 그리스도를 배운 사람들은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예하지 말”(에베소서 5 장 11 절) 것이다. 그들은 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말에 있어서도 단순하고 정직하고 참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입에 거짓말이 없”(요한계시록 14 장 5 절)는 거룩한 자들과의 교제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MB 69.1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마태복음 5 장 39 절) 유대인들은 로마 군인들과 접촉함으로써 수시로 울화통이 터지는 일을 경험했다. 로마 군의 부대가 유대와 갈릴리의 여러 지역에 주둔해 있었는데, 이들의 존재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한 국가로써의 자신들의 쇠망을 생각케 했다. 그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나팔을 크게 부는 소리를 듣고, 군인들이 로마의 국기 주위에 도열한 채 그들 국권의 상징에 경례를 하며 경의를 표하는 것을 보았다. 백성들과 군인들 간에 충돌이 빈번하였으며, 이 일은 일반의 52
산상보훈 증오심을 격발시켰다. 로마 관리가 호위병들과 함께 급히 이동할 일이 있을 때는 흔히, 들에서 일하는 유대의 농부들을 붙들어다가 짐을 지워 산을 넘게 하거나 필요한 다른 어떤 봉사를 하도록 강요하였다. 이것은 로마의 법률과 관습에 따라 하는 일이었으므로, 그런 요구에 반항하는 것은 모욕과 학대를 초래할 뿐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로마의 멍에를 벗어 버리고자 하는 열망이 날이 갈수록 더 깊어 갔다. 대담하고 난폭한 갈릴리 사람들은 반항 정신이 특히 강했다. 국경 도시인 가버나움은 로마 수비대의 주둔지였다. 예수께서 가르치고 계시는 동안에도, 일단의 군인들을 본 청중들은 이스라엘의 굴욕을 생각하여 씁쓸해 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로마의 교만을 꺾어 주실 분이기를 바라면서 그분을 열심히 주목하였다. MB 69.2 예수께서는 슬픈 마음으로, 앞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는 얼굴들을 살펴보신다. 그들의 얼굴에 찍혀 있는 복수의 정신을 주목하시며, 그들이 그들을 탄압하는 자들을 타도할 능력이 나타나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알아차리신다. 그분은 슬픔에 잠긴 음성으로 그들을 향해, “악한 사람을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고 명령하신다. MB 70.1 이 말씀은 구약 성경의 교훈을 반복한 데 불과한 것이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지라”(레위기 24 장 20 절)는 말이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율법의 한 조목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국가적 법령이었다. 어떤 사람도 복수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잠언 20 장 22 절), “그가 내게 행함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 행한 대로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잠언 24 장 29 절).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잠언 24 장 17 절),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 하거든 물을 마시우라”(잠언 25 장 21 절). MB 70.2 예수님의 지상 생애는 전부가 이 원칙을 나타내는 생애였다. 우리 구주께서 하늘의 집을 떠나신 것은 원수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가져다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분께서는 비록 요람에서부터 무덤에 이르기까지 중상과 핍박을 쌓일 정도로 많이 받으셨지만 그때마다 용서와 사랑만을 나타내셨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를 53
산상보훈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이사야 50 장 6 절).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이사야 53 장 7 절). 당신을 죽게 한 자들을 위한 기도와, 죽어 가는 도둑에게 전한 소망의 기별은 갈바리의 십자가를 통해 각 시대로 전달되고 있다. MB 71.1 아버지의 임재(臨在)가 그리스도를 두르고 있었으므로, 무한한 사랑이 세상의 축복을 위하여 허락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그분께 닥치지 않았다. 여기에 그분의 위로의 근원이 있었으며, 이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감동되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된다. 이 사람을 겨냥한 강타는, 그를 당신의 임재로 두르고 있는 구주께로 떨어지게 된다. 그에게 닥치는 것은 무엇이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방벽이 되시므로, 그는 악을 대항할 필요가 없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그를 건드릴 것이 없다. 그리고 주께서허락하시는 것은 “모든것이 합력하여선을 이루”(로마서 8 장 28 절)게 된다. MB 71.2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자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MB 71.3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관헌들의 요구를 거절하는 대신에 그들이 요구한 것 이상을 하라고 명령하셨다. 따라서 제자들은 의무가 국법이 요구하는 것 이상일지라도 할 수 있는 한 그 모든 것을 이행해야 했다. 율법이 모세를 통해 주어질 당시에는 가난한 자들을 매우 따뜻하게 보살필 것을 요구했다. 가난한 사람이 전당물이나 빚의 담보물로 옷을 줄 때, 채권자는 그것을 받으러 그 집에 들어가도록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그가 받을 담보물을 거리에서 기다려야 했다.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해 질 때는 그 전당물을 그 소유주께 반드시 돌려주어야 했다(신명기 24 장 10~13 절 참조). 그리스도 당시에는 이 자비의 처사가 거의 무시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비록 법정의 판결이 모세가 인정한 율법 이상의 것을 요구할지라도 거기에 복종할 것을 당신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그것이 그들의 의복의 일부를 요구하는 것일지라도 거기에 복종해야 했다. 이에 더하여, 그들은 채권자에게 응당 54
산상보훈 치러야 할 것을 주는 것은 물론, 필요한 경우에는 법정에서 채권자에게 몰수해 가도록 권한을 부여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어야 했다. 그분께서는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오 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동행하라. MB 72.1 예수께서는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부언하셨다. 동일한 교훈이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다.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라”(신명기 15 장 7, 8 절). 이 성경 말씀은 구주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분명히 밝혀 준다. 그리스도께서는 동정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렇게 주라고 가르치지 않으시고,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이것은 빌려주는 것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선물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누가복음 6 장 35 절)려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MB 72.2 “구제로써 자신을 바치는 자는 자기 자신과 그의 굶주린 이웃과 나, 세 사람을 먹이게 된다.” MB 73.1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마태복음 5 장 44 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고 한 구주의 교훈이, 복수심이 강한 유대인들에게는 어려운 말이었으므로, 그들은 이에 대하여 불평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보다 더욱 강한 주장을 하셨다. MB 73.2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MB 73.3 이것이 바로 랍비들이 냉혹하고 까다로운 강요의 법전으로 그릇 해석하고 있던 율법의 참 정신이었다. 그들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것으로 여기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출생한 특권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용서해 주는 사랑의 정신이란 그들이 저희가 멸시하는 세리와 죄인들보다 더욱 고상한 동기로 행동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는 것임을 지적하셨다. MB 73.4 그분께서는 “우리 아버지”라는 새로운 55
산상보훈 이름으로, 청중들로 하여금 우주의 통치자를 주목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극진히 생각하시는지 이해시키려고 하셨다. 그분께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잃어버린 영혼을 돌보고 계신다는 것과,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편 103 편 13 절)신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성경의 종교 외엔 그 어떤 종교도 하나님에 대한 이 같은 개념을 소개한 일이 없었다. 이교(異敎)는 지존하신 분을 사랑의 대상자로보다 공포의 대상자로, 사랑의 선물을 자녀들에게 쏟아 주시는 아버지로보다는 오히려 제사로써 달래야 할 악독한 신으로 보도록 가르친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까지도 하나님에 대한 선지자들의 귀중한 교훈에 너무 눈이 멀어 있어, 아버지로서의 그분의 사랑에 대한 이 계시는 하나의 색다른 주제, 곧 세상에 주어진 새로운 선물처럼 되고 말았다. MB 74.1 유대인들은 주장하기를, 하나님께서는당신을 섬기는 사람들, 곧유대인들 저희가볼 때 랍비들의 요구에 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그분의 불쾌히 여기심과 저주 아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런 것이 아니고 온 세상이, 다시 말해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다 당신의 사랑의 햇빛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 진리는 누구나 다 천연계를 통해 이미 배웠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시기 때문이다. MB 74.2 해마다 지구가 풍성한 소산을 내며 태양의 주위를 계속해서 공전하는 것은 고유의 능력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손이 유성들을 인도하여 각각 자기 자리를 지키며 질서 있게 운행하게 한다. 여름과 겨울, 파종기와 추수기, 낮과 밤이 질서 있게 계속되는 것은 그분의 능력을 통해서이다. 식물이 잘 자라는 것은, 바꿔 말해 잎이 나고 꽃이 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이다. 우리의 수중에 있는 모든 유익한 것들 곧 햇빛과 소나기, 매끼의 식사, 매 순간 유지되는 생명은 사랑의 선물이다. MB 74.3 비록 우리가 사랑스럽지 못하고 호감이 가지 않는 품성을 가진 “피차 미워한 자”였을지라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셨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하셨나니”(디도서 3 장 3~5 절). 그분의 사랑을 받으면, 우리 또한 같은 모양으로 우리를 기쁘게 하는 사람들에게뿐만 아니라 가장 56
산상보훈 허물 많고 죄가 많은 사람에게도 친절과 온유를 나타내게 될 것이다. MB 75.1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분의 품성에 참예하는 자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세속적 계급도, 혈통(血統)도, 국적도, 종교적 특권도 아니다. 그것은 사랑, 곧 온 인류를 품에 안는 사랑이다. 비록 죄인이라 할지라도 마음이 하나님의 영에 대하여 완전히 닫혀 있지 않으면 친절에 반응을 보이게 될 것이다. 미움에 대해서는 미움을 나타낼지라도, 사랑에 대해서는 사랑을 나타낼 것이다. 그러나 증오에 대하여 사랑을 나타내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감사할 줄을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 친절하게 하고, 보수를 전혀 바라지 않고 선을 행하는 것은 하늘 왕족의 표 곧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들이 그들의 고상한 신분을 알려 주는 분명한 표이다. MB 75.2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복음 5 장 48 절) “그러므로”라는 말은 하나의 결론, 곧 이전까지 진행되어 온 것에서 얻은 결론을 함축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청중에게 하나님의 확실한 자비와 사랑을 설명하시면서, 그러므로 완전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분께서는 하늘 아버지께서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누가복음 6 장 35 절)며, 우리를 높이시기 위하여 자기를 낮추셨으므로 누구나 품성에 있어서 그분과 같이 될 수 있고, 또 사람들과 천사들 앞에 흠이 없이 설 수 있다고 하셨다. MB 76.1 영생의 조건은 은혜를 통해 에덴동산 시절이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그것은 곧 완전한 의, 하나님과의 조화, 그분의 율법의 원칙과의 완전한 일치이다. 구약에 제시된 품성의 표준은 신약에 제시된 것과 동일하다. 이 표준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명령이나 권고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약속 곧 매우 적극적인 약속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과 같이 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갖추어 놓으셨으며, 또 사악한 의지를 개입시키지 않고 당신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는 모든 자들을 위하여 이 일을 이루실 것이다. MB 76.2 우리 하나님께서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는 지식에 넘치는 이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에 관하여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될 때 그분에 대한 사랑이 움튼다. 그리스도의 매력적인 사랑이 계시되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57
산상보훈 우리에게 나타내신 그분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완고한 마음은 녹아지고 부드러워지며, 죄인은 변화를 입고 하늘의 자녀가 된다. 하나님은 강제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사랑은 그분께서 마음에서 죄를 제거하실 때 사용하시는 대리인이다. 사랑으로써, 하나님은 교만을 겸손으로, 적의와 불신을 사랑과 믿음으로 바꾸신다. MB 76.3 유대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완전에 이르고자 애를 쓰며 피곤해 했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의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이미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그분께서,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소유하게 될 의의 품성을 지적하신다. 산상에서의 설교를 통하여 그분은 의의 결과를 설명하시고, 지금은 또 한 문장으로 다음과 같이 의의 근원과 그성격을 지적하신다. 하나님의 완전하심과같이 완전하라. 율법은 하나님의 품성의 사본에 불과하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를 통해 그분의 나라의 기초가 되는 원칙이 완전하게 드러나는 것을 보라. MB 77.1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태양에서 나오는 빛줄기처럼, 사랑과 빛과 기쁨이 그분에게서 나와서 모든 피조물에게로 흘러간다. 이것이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본성이다. 그분의 생애 자체가 무아(無我)의, 사랑의 유출(流出)이다. MB 77.2 “그의 영광은 그 자녀들의 행복이며, 그가 기뻐하심은 자애로운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라.” MB 77.3 그분은 같은 방법으로 당신께서 완전하심과 같이 완전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분께서 우주에 대해 빛과 축복의 중심이 되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작은 사회에서 그렇게 되어야 한다.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분의 사랑의 빛이 우리에게 비췸으로 우리는 그 빛을 반사하게 된다. “그분의 선하심을 빌어서 선하게 되”며,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역에서 완전하신 것같이 우리는 우리의 영역에서 완전하게 될 수 있다. MB 77.4 예수께서는 너희 아버지의 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일 것 같으면, 그분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어 그분과 같이 될 수밖에 없다. 모든 자녀는 그 아버지의 생애를 본받아 산다. 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영으로 58
산상보훈 태어난 그분의 자녀일 것 같으면, 하나님의 생애를 따라 살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골로새서 2 장 9 절)시기 때문에, 그분의 생애가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고린도후서 4 장 11 절)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생애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고 이루어지던 동일한 품성과 동일한 업적을 드러낼 것이다. 마침내, 우리는 그분의 율법의 모든 조목과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시편 19 편 7 절)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통하여 율법의 이로움이,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로마서 8 장 4 절) 이루어질 것이다. MB 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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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보훈
4 장 - 봉사의 참 동기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마태복음 6 장 1 절) 산 위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그분께서 생애를 통해 말없이 가르쳐 오셨으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 교훈을 말로 표현한 것이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그처럼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도 그들이 가장 좋게 생각하는 것을 얻는 데 그 능력을 사용하시지 않자 어떻게 저럴 수 있는가 하고 의아해 했다. 그들의 정신과 동기와 방법은 예수님과 반대였다. 그들은 매우 열성적으로 율법을 존중했지만 실제적인 목적은 자신의 영광이었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자아를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범하는 자임을 그들에게 나타내시고자 하셨다. MB 79.1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중히 여기던 원칙들은 각 시대 사람들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 준다. 바리새인의 정신은 인간의 본성에 속한 정신이다. 따라서 구주께서 당신 자신의 정신과 방법이 랍비들의 그것들과 상이함을 나타내셨을 때, 그분의 교훈은 각 시대의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MB 79.2 그리스도 당시,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덕행의 보상으로 간주해 온 세상의 명예와 번영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자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들은 세인의 주목을 끌고 거룩하다는 명성을 얻기 위하여 사람들 앞에서 자선 행위를 자랑했다. MB 79.3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봉사를 인정치 않으신다는 것과 또 그들이 받게 될 상은 그처럼 추구하던 사람들의 아첨과 칭찬뿐일 것이라는 사실을 단언하시면서 그들의 외식을 책망하셨다. MB 80.1 그분께서는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고 말씀하셨다. MB 80.2 이 말씀을 하실 때 예수께서는, 친절한 행동은 항상 비밀로 지켜져야 된다고 가르치신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편지를 쓰면서, 마게도니아 교인들의 관대한 자아 희생의 정신을 숨기지 않은 것은 물론,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서 역사하신 은혜를 이야기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도 동일한 정신으로 물들게 하였다. 그는 또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쓰면서 “너희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느니라”(고린도후서 9 장 2 절)고 말했다. MB 80.3 60
산상보훈 그리스도의 말씀은, 자선이 사람들에게서 칭찬과 명예를 얻기 위한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그분의 생각을 분명히 밝혀 준다. 진정으로 경건하면 자랑하려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 칭찬과 아첨의 말을 듣기 원하고 그것들을 달콤한 음식으로 먹는 자들은 이름만의 그리스도인이다. MB 80.4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그들의 선행을 통하여 영광을 그들 자신에게 돌리지 아니하고, 그들에게 일하도록 은혜와 능력을 주신 분에게 돌려야 한다. 모든 선한 일은 성령을 통하여 성취되며, 성령은 받는 자가 아닌 주신 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주어진다. 그리스도의 빛이 심령 속에서 빛나게 되면, 입술이 하나님께 돌리는 찬송과 감사로 채워질 것이다. 그대의 기도, 의무 수행, 자선, 극기가 생각과 대화의 주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찬양을 받으시고, 자신은 숨겨질 것이다. 오로지 그리스도만이 나타날 것이다. MB 80.5 우리는 진실한 마음으로 주되 선한 행실을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생하는 자들에 대한 동정과 사랑으로 해야 한다. 목적의 진실, 곧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친절은 하늘이 귀하게 여기는 동기이다. 하나님께서는 진실로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여 헌신하는 영혼을 오빌의 순금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기신다. MB 81.1 우리는 보상이 아닌 봉사를 생각해야 한다. 이런 정신으로 나타내는 친절에는 필히 그 보상이 있을 것이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하나님 자신이 다른 모든 상급을 포함하는 위대한 상급이 되시는 것은 사실이나, 영혼은 품성 면에서 그분과 동화될 때만 그분을 받아들이고 그분으로 인해 즐거워 할 수 있다. 동류가 되어야 서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인류의 봉사를 위해 자신을 하나님께 바칠 때, 비로소 그분은 당신을 우리에게 주신다. MB 81.2 누구든지 마음과 생애에 하나님의 축복이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내면 자신도 반드시 풍성한 축복을 받게 된다. 산과 들은 산 속의 개울이 바다로 흘러가도록 길을 제공하지만 그것 때문에 피해를 보는 일이 없다. 오히려, 주는 것으로 인해 몇 백 배 보답을받는다. 노래를부르며 흘러가는 시냇물이 신록과 수확이라는 선물을 남기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기슭의 풀을 봐도 다른 곳보다 더 푸르고, 나무들도 더 싱싱하고, 꽃들도 더 탐스럽다. 대지가 여름의 폭염으로 바짝 말라 갈색으로 변할 때에도, 강줄기는 하나의 파란 61
산상보훈 선을 이룬다. 이리하여 산의 보화가 바다로 흘러가도록 가슴을 열어 준 들판은 생기와 아름다움, 곧 하나님의 은혜를 세상으로 흘려보내는 통로로 자신을 제공한 사람이면 누구나 받게 되는 그분의 은혜의 보상을 증거하는 것들로 옷 입게 된다. MB 81.3 이것은 불쌍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나타내는 사람들이 받는 축복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한다.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 하리니…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이사야 58 장 7~11 절). MB 82.1 자선 사업은 이중으로 축복을 받는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축복하기도 하지만 스스로 더 큰 축복을 받는다. 마음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은혜는 이기심과 반대되는 품성의 특성 곧 생애를 깨끗하게 하고, 고상하게 하고, 풍성하게 해줄 특성을 계발시켜 준다. 은밀한 중에 행한 친절한 행동은 마음을 하나로 묶어 주고, 이들을 모든 관대한 생각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의 마음에 더욱 가까이 가도록 이끌어줄 것이다. 꽃에서 풍겨 나는 향기처럼 생애 속에서 조용하게 흘러나오는 작은 친절, 곧 사랑과 자아 희생의 작은 행동은 생애의 축복과 행복을 나누어 가지는 일에 작지 않은 부분을 이룬다. 타인의 유익과 행복을 위한 극기가 비록 이 땅에서는 비천하고 칭찬 받지 못할 일로 취급될지 모르나 하늘에서는, 부요하였으나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영광의 왕이신 그분과 우리가 하나 된 것을 나타내는 표로 인정받게 된다는 사실을 결국 알게 될 것이다. MB 82.2 친절한 행동은 은밀한 중에 행해질 수 있으나, 그렇게 한 사람의 품성에 나타나는 결과는 숨겨질 수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성의와 관심을 가지고 일한다면, 마음이 하나님과 밀접히 상통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은 그거룩한 접촉에대한 응답으로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조화되게 하실 것이다. 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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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보훈 83.1 맡겨진 재능을 지혜롭게 활용한 자들에게 더 많은 재능을 허락하시는 분께서는 사랑하는 분을 믿는 백성들이 그분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행한 봉사를 즐겨 인정하신다. 선한 사업에서 그들의 재능을 활용함으로 그리스도인 품성의 계발과 완성을 위하여 노력해 온 사람들은 장차 올 세상에서 그들이 뿌린 씨를 거두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시작된 사업은 영원히 계속될 더욱 거룩하고 고상한 생애에서 그 극치를 이룰 것이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마태복음 6 장 5 절) 바리새인들은 기도하는 시간을 정해 두었다. 그래서 종종 일어나는 일로, 정한 시간에 밖에 있게 될 때는 거리, 시장, 혹은 바쁘게 다니는 사람들 사이 등 어디든지, 있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큰 소리로 그들의 형식적인 기도를 외웠다. 예수께서는 단순히 자기 영광을 위해 드리던 이런 예배를 심하게 책망하셨다. 그러나 공중 기도를 무시하신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신 스스로가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시고 대중 앞에서 기도하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개인 기도를 공중 앞에서 하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우리의 기도는 은밀한 중에 드려짐으로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귀에도 들려선 안 된다. 이런 간구의 내용이 호기심이 많은 귀에 들어가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MB 83.3 “너희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라.” 은밀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장소를 갖도록 하라. 예수께서는 하나님과의 교통을 위한 은밀한 장소를 가지고 계셨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는 때때로, 비록 훌륭한 곳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홀로 지낼 수 있는 장소로 물러갈 필요가 있다. MB 84.1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께 기도하라.”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신뢰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다. 그 어떤 사람도 중보자로 나설 필요가 없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알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열 수 있다. MB 84.2 하나님의 눈 외에는 그 어떤 사람의 눈에도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귀 외에는 그 어떤 사람의 귀에도 들리지 않는 은밀한 기도의 장소에서, 우리는 가장 깊이 감추어진 우리의 63
산상보훈 욕망과소원을 무한히자비하신 아버지께 쏟아 놓을 수 있다. 그리하면 인간의 필요의 부르짖음에 반드시 응답하시는 음성이 영혼의 고요와 침묵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향해 말씀하실 것이다. MB 84.3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야고보서 5 장 11 절). 그분께서는 지칠 줄 모르는 사랑으로 완고한 자들의 자복을 들으시고 그들의 참회를 받아 주시고자 기다리신다. 그분은 마치 어머니가 귀여운 아기에게서 엄마를 알아보고 웃는 미소를 기다리듯이 우리에게서 감사함에 대한 어떤 표시를 기다리신다. 그분은 우리를 향한 당신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고 부드러운지 우리가 깨닫기를 바라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시련을 당신의 동정으로, 우리의 슬픔을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의 상처를 당신의 치유로, 우리의 연약함을 당신의 능력으로, 우리의 공허를 당신의 충만으로 가지고 나오도록 우리를 초청하신다. 그분께 나온 사람은 아무도 실망을 맛보지 않았다.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시편 34 편 5 절). MB 84.4 은밀한 중에 하나님을 찾고 그들의 필요를 주께 아뢰고 도움을 구하는 자들은 그 간구가 허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너희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매일의 친구로 삼을 때 보이지 않는 세계의 능력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느끼며, 또 예수님을 쳐다봄으로 그분의 형상으로 동화될 것이다. 위를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변화된다. 품성이 천국에 합당할 만큼 부드럽고 세련되고 고상해진다. 우리 주님과 나누는 교제와 친교의 분명한 결과로, 경건과 순결과 열성이 증가될 것이다. 지능이 기도를 통하여 계발될 것이다. 우리는 신령한 교육을 받고 있으며, 이것은 근면과 열성의 생애로 실증된다. MB 85.1 매일 열렬한 기도로 도움과 지지와 능력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로 향하는 사람은 고상한 포부, 진리와 의무에 대한 분명한 이해, 행동의 고상한 목적, 그리고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심령을 가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의 연결을 계속 유지함으로써, 우리는 사람들과 나누는 교제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는 빛과 평화와 평온을 그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얻어진 힘, 다시 말해 마음을 사려 깊고 조심성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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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보훈 마음으로 훈련시키는 꾸준한 노력과 연합된 힘은 사람을 매일의 의무를 위하여 준비시키며, 어떠한 환경에서도 마음을 평안하게 지켜 준다. MB 85.2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입에 말씀을 주셔서당신을 위해 이야기하게 하시는 것은 물론 당신의 이름을 찬양하게까지 하실 것이다. 그분은 천사들의 노래에서 한 곡을 뽑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실 것이다. 생활 하나 하나에서 마음속에 거하시는 구주의 빛과 사랑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외부의 어려움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생애를 침범하지 못할 것이다. MB 85.3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 하지 말라” (마태복음 6 장 7 절) 이방인들은 그들의 기도 속에 죄를 속하는 공효(功效)가 있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기도를 오래 하면 할수록 공효가 더 커지는 줄 생각했다. 만일, 그들이 자신의 노력으로 거룩해질 수 있다면, 스스로 즐거워 할 수 있는 무엇, 곧 자랑할 어떤 근거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기도의 사상은 거짓 종교의 모든 제도의 기초를 이루는, 자력(自力)에 의한 속죄의 원리에서 생긴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기도에 있어서 이 이교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며,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 사이에까지 퍼져 있다. 마음에 하나님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틀에 박히고 습관적인 말을 되풀이하는 것은 이방인의 “중언부언”과 똑같은 성격을 가진다. MB 86.1 기도가 죄를 속하는 것은 아니다. 그 자체에는 아무런 효능과 공효가 없다. 우리가 멋대로 내뱉는 화려한 말은 모두 합해도 거룩한 소원 한 가지만 못하다. 가장 유창한 기도라 할지라도 마음의 진정한 뜻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면 무익한 말에 불과하다. 그러나 세상 친구에게 당연히 받을 것으로 믿고 은혜를 구할 때와 같이 진정한 마음으로 영혼의 단순한 소원을 아뢰며 드리는 기도, 이것은 믿음의 기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격식을 차린 찬양을 원치 않으신다. 그러나 상하고 억눌린 마음이, 죄가 많고 더없이 약하다는 것을 깨닫고 부르짖는 무언의 절규는 무한히 자비하신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을 발견한다. 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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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보훈 86.2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마태복음 6 장 16 절) 하나님의 말씀이 명령하는 금식은 형식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음식을 거절하고 베옷을 입고 머리에 재를 뿌리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죄를 진정으로 슬퍼하며 금식하는 사람은 결코 겉으로 과시하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MB 87.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금식의 목적은 심령의 죄 때문에 육체를괴롭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죄의 무서운 특성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겸손하게 하고, 그분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기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한 그분의 명령은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요엘 2 장 13 절)라는 것이었다. MB 87.2 우리가 스스로의 노력으로 성도의 유업을 사거나 공효를 미칠 것으로 알고 고행을 하거나 우쭐해 하는 것은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요한복음 6 장 28 절)라는 질문을 받으시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한복음 6 장 29 절)고 대답하셨다. 회개는 자신에게서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할 때, 선한 업적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MB 87.3 예수께서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마태복음 6 장 17, 18 절)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즐거움으로 해야지 슬픔과 우울한 기분으로 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에는 우울한 것이 없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슬픈 표정을 지으며 주님 안에서 실망당한 것과 같은 인상을 주게 되면, 이것은 곧 주님의 품성을 잘못 나타내고 그분의 원수의 입에 구실을 붙여 주는 것이 된다. 말로는 하나님을 그들의 아버지로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르나, 우울하고 슬픈 표정을 지음으로써 그들은 고아(孤兒)의 모습을 세상에 나타낸다. MB 88.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봉사를 사실 그대로 매력 있게 나타내기를 바라신다. 극기와, 마음의 은밀한 고통을 자비하신 구주께 내어 놓도록 하자. 짐을 십자가 아래 66
산상보훈 내려놓고, 그대를 먼저 사랑하신 그분의 사랑 안에서 즐겁게 갈 길을 가도록 하라. 사람들은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 은밀히 진행되는 일을 끝까지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활동의 결과는 모든 사람에게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분이 “갚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MB 88.2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마태복음 6 장 19 절) 땅에 쌓아 둔 보물은 오래 가지 못한다. 도둑이 구멍을 뚫어 훔쳐가고, 좀이먹고동록이 쏠기도 한다. 화재와 폭풍우가 소유를 쓸어가 버리기도 한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그러므로 땅에 쌓아 둔 보물이 마음을 빼앗아 하늘의 것이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MB 88.3 유대인 시대에는 사람들의 정열이 주로 돈을 사랑하는 쪽으로 쏠렸다. 속된 마음이 하나님과 믿음이 차지할 자리를 빼앗았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재물을 향한 탐욕은 너무도 매혹적이며 황홀케 하는 영향을 생애에 미치기 때문에, 고결함을 왜곡시키고 인간성을 부패케 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마침내 사람들을 멸망에 빠뜨리고 만다. 사단을 섬기면 근심과 번민과 피곤한 수고로 가득 찬다. 또, 사람이 세상에 쌓아 두려고 애쓰는 재물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MB 88.4 예수께서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 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MB 89.1 이 교훈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는 것이다. 하늘의 보물을 획득하는 것은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이들만이 진정으로 우리의 것이다. 하늘에 쌓아 둔 보물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 어떤 화재나 홍수도 그것을 없애 버릴 수 없고, 그 어떤 도둑도 그것을 빼앗아 갈 수 없고, 좀이나 동록이 그것을 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기 때문이다. MB 89.2 그리스도께서 모든 재산보다 더욱 귀중하게 여기시는 이 보물은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에베소서 1 장 18 절)함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분의 보배, 곧 그분의 귀중하고 특별한 보물로 불리어진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들이 면류관의 보석 같”(스가랴 9 장 16 절)다. “사람을 정금보다 희소케 하며 오빌의 순금보다 희귀케 하리로다”(이사야 13 장 67
산상보훈 12 절). 모든 영광의 발원지인 위대한 중심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순결하고 완전한 상태에 있는 당신의 백성을 당신의 고난과 겸비와 사랑의 대가로, 또 당신의 영광의 보충으로 바라보신다. MB 89.3 우리는 위대한 구속 사업에 그분과 연합하고 그분의 죽음과 고난으로 얻은부를그분과 함께 나누도록 허락 받고 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 2 장 19, 20 절)고 편지하였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노력하여 얻으라고 하신 보물이다. 품성은 생애의 위대한 수확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사람의 마음속에 하늘을 향해 가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언행, 곧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의 형성에 이바지하는 모든 노력은 하늘에 보물을 쌓고 있는 것이다. MB 89.4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 유익을 얻는다. 복음을 전하는 데 금전과 시간을 바치는 사람은 그 사업과 또 그 사업을 통하여 접촉하게 될 영혼들을 위하여 관심을 기울이고 기도하게 된다. 애정이 다른 사람들에게로 향하면서, 그는 그들에게 최대의 선을 행하기 위하여 더욱 하나님께 헌신하게 된다. MB 90.1 그리하여 세상의 재물이 소멸될 마지막 날,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둔 사람은 그의 생애에서 얻은 것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만일, 지금껏 그리스도의 말씀에 유의해 왔다면, 우리는 크고 흰 보좌 주위에 모일 때 우리의 활동으로 구원받은 영혼들을 보는 것은 물론, 저들의 면류관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놓고 세세 무궁토록 그분을 찬양하는 큰 무리가 우리의 노력의 결과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구원하고 구원받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식으로 하여 안식의 항구에 들어오게 된 사람들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한 자는 구속 주의 영광에 참예하는 구속받은 이 사람들을 얼마나 큰 기쁨으로 바라보겠는가! 영혼을 구원하는 사업에 신실했던 자들에게 하늘은 얼마나 귀중한 것이 될 것인가! MB 90.2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로새서 3 장 1 절). MB 91.1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마태복음 6 장 22 절) 68
산상보훈 오직 하나의 목적, 곧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은 우리 구주의말씀에 의하여제시된 조건이다. 이 목적에 더욱 신실하고 굳게 서서 진리를 식별하며 어떤 희생이 닥치더라도 그것에 순종하도록 하자. 그리하면 분명히 신령한 깨우침을 받게 될 것이다. 진정한 경건은 죄악과의 모든 타협이 끝난 후에 시작된다. 그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은 사도 바울의 말과 같을 것이다.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립보서 3 장 13, 14, 8 절)자 함이라. MB 91.2 그러나 자아를 사랑함으로 눈이 흐려지면 흑암만이 있게 된다.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유대인을 완고한 불신에 둘러싸이게 함으로써,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분의 품성과 사명을 분별할 수 없게 한 것은 이 무서운 흑암이었다. MB 91.3 마음이 요동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지속적으로 가질 수 없을 때, 시험에 굴복하는 일이 시작된다. 주께 자신을 완전히 바치려고 마음먹지 않으면 암흑 가운데 머물게 된다. 자신의 일부를 남겨 두는 것은 사단이 들어와 우리를 유혹하여 타락시킬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놓는 것이나 같다. 그는 우리의 시야를 흐리게 하여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만 하면 죄에 대한 방어벽이 없어진다는 것을 안다. MB 92.1 죄악의 욕망이 우세한 것은 영혼이 기만당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이러한 욕망의 온갖 방종은 하나님께 대한 반감을 강화시킨다. 사단이 택한 길을 따름으로써, 우리는 악의 그림자에 둘러싸이고 발걸음이 더 캄캄한 데로 끌려가며, 마음이 더욱 어두워진다. MB 92.2 천연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적 세계에도 동일한 법칙이 행해진다. 흑암 가운데 거하는 자는 결국 시력을 잃게 될 것이다. 그는 한밤의 흑암보다 더욱 짙은 흑암에 갇히게 된다. 그리하여 가장 밝은 대낮도 그에게는 아무런 빛을 가져다줄 수 없다. 그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요한일서 2 장 11 절). 죄인은, 끝까지 악을 간직하고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호소를 멸시함으로써, 선을 좋아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찾는 욕망과 하늘의 빛을 받을 수 있는모든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자비의 초청은 여전히 사랑으로 충만하고, 빛은 그의 영혼에 처음 비치던 당시와 69
산상보훈 마찬가지로 밝게 빛난다. 그러나 음성은 귀머거리가 된 귀에 떨어지고, 빛은 어두워진 눈을 비출 뿐이다. MB 92.3 어느 영혼이든지 구원의 희망이 조금이라도 있는 한,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로 하여금 방종케 하여 버림받은 자가 되도록 하지 않으신다.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돌아설지라도, 하나님은 사람에게서 돌아서지 않으신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더 이상의 기회와 특권이 소용없을 때까지, 자비의 호소와 경고와 보증을 가지고 우리를 쫓아오신다. 책임은 죄인에게 있다. 그는 오늘 하나님의 영을 거절함으로써 빛이 더 큰 능력으로 비칠 다음번에도 이를 거절할 길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거절의 단계를 하나씩 지나게 되어, 마침내 빛이 그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하는 상태에 빠져 하나님의 성령에 조금도 반응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네게 있는 빛”까지 어둡게 되어 버린다. 우리가 아는 진리도 완전히 왜곡되어, 영혼의 흑암이 더 심해진다. MB 93.1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마태복음 6 장 24 절)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않을 것이라거나 섬기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섬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 대한 관심과 재물에 대한 관심은 서로 일치되거나 상통하지 않는다. 세속적인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양심이 참고 극기하고 더 이상 가지 말라고 경고하는 바로 그 선을 넘어 들어가 이기적인 성향을 마음껏 충족시킨다. 따라서 그 선을 중앙으로 하여 한쪽에는 극기를 실천하는 그리스도의 종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유행에 앞장서고, 경박한 일에 빠지고, 금지된 오락을 마음대로 즐기고, 방종에 빠지는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선 저쪽으로 갈 수 없다. MB 93.2 어떤 사람도 중립적 위치에 설 수 없다. 하나님도 사랑하지 않고 의의 원수도 섬기지 않는 중간 계층은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인간 대리자들 안에 거하셔서 그들의 재능을 통해 일하시고 그들의 힘을 통해 활동하셔야 한다. 그들은 의지를 그분의 뜻에 굴복시키고 그분의 영과 더불어 활동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이제 사는 것은 더 이상 그들이 아니요 그들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세력의 지배를 받고, 완전히 상이한 성격의 제안을 하는 다른 음성을 듣게 된다. 반만인 봉사를 하게 될 때, 인간대리자는 흑암의 군대의 훌륭한 동맹자로서 원수의편에설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군사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사단과 동맹하여 그의 편을 들게 되면, 이것은 70
산상보훈 스스로 그리스도의 원수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들은 신성한 책임을 저버리게 된다. 그들이 사단과 참된 군사 사이에서 사슬 노릇을 하게 됨으로써, 원수는 이들 대리자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군사들의 마음을 빼앗는 활동을 계속한다. MB 94.1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악의 보루는 버림받은 죄인이나 타락한 부랑자의 부정한 생애가 아니라 밖으로는 덕망 있고 존경할 만하고 고상해 보이나 실제로는 죄를 품고 악이 깊숙이 침투해 있는 생애이다. 큰 유혹을 받고 이를 이기고자 은밀하게 투쟁하면서 절벽의 가장자리에서 떨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런 것이 죄를 짓게 하는 가장 강력한 미끼 중의 하나가 된다. 생명과 진리와 명예라는 숭고한 개념을 가진 자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하나라도 고의적으로 범한다면, 그것은 그분의 고상한 선물을 범죄의 유혹물로 잘못 사용하는 것이다. 재주와 재능과 동정은 물론, 관대하고 친절한 행동까지도 사단의 미끼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멸망의 절벽으로 유혹하여 이생과 장차 올 생애를 파멸로 이끌게 할 수도 있다. MB 94.2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한일서 2 장 15, 16 절). “염려하지 말라” (마태복음 6 장 25 절) 생명을 주신 분께서는 그것을 유지하기 위하여 음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몸을 창조하신 분은 의복의 필요성에 대하여 무관심하지 않으시다. 그렇다면 이제 더욱 큰 선물을 주셨으니 그 선물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것 또한 주시지 않겠는가? MB 95.2 예수께서는 아무런 근심이 없이 즐거운 노래를 부르고 있는 새들을 당신의 말씀을 듣고 있는 청중들에게 가리키시며, 그들은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지라도 크신 아버지께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이제 그분께서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고 물으신다. MB 95.3 “참새 한마리도 예수님 몰래 떨어지는 일이 없고, 그분 몰래 아무도 머리 숙여 기도할 수 없다. MB 95.4 그분께서 어느 곳에서나 71
산상보훈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MB 95.5 그러므로 흘러내리는 괴로운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을 다 주시하신다, 그분께서는 언제나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을 결코, 결코,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MB 95.6 언덕과 들판이 꽃으로 아름답게 덮여 있었다. 아침 이슬을 맞아 생기를 머금은 꽃들을 가리키시며, 예수께서는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고 말씀하셨다. 초목과 꽃의 아름다운 모양과 우아한 빛깔은 사람의 기술로 모사(模寫)될 수 있지만, 어느 붓이 꽃 한 송이, 풀잎 하나에까지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단 말인가? 길가에 있는 꽃 하나 하나도 하늘의 별 세계를 움직이는 바로 그 능력 덕택에 존재한다. 모든 피조물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심장의 맥박이 고동한다. 들의 꽃들은 그분의 손에 의하여 지금껏 세상의 그 어떤 임금이 입은 것보다 더욱 아름다운 옷으로 입혀진다. 그러므로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MB 95.7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새를 보라”고 말씀하시는 분은 꽃을 지으시고 참새에게 노래를 주신 분이시다. 천연계의 아름다움 속에서는, 하나님의 지혜를 학자들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이 배울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백합화의 꽃잎 위에 그대를 위한 기별을 불신과 이기심과 해로운 근심을 버릴 때만 읽을 수 있는 말로 기록하신다. 아버지의 마음에 흘러넘치는 사랑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분께서 생애의 여정을 밝고 즐겁게 해 주는 노래하는 새들과 피어나는 꽃들을 주시겠는가? 생존에 필요한 것만 생각하면 꽃들과 새들이 없어도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단지 생존에 필요한 것만 공급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그대를 향한 당신의 애틋한 마음을 알려 주시기 위해 땅과 공중과 하늘을 아름다운 것으로 채우셨다. 모든피조물의 아름다움은 그분의 영광의 빛을 반사하는것일뿐이다. 그분께서 그대의 행복과 기쁨을 위하여 천연계 위에다 이처럼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신 것을 안다면 그분께서 온갖 필요와 축복을 그대에게 주실 것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MB 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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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보훈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햇빛을 향하여 꽃잎을 펼치는 꽃들도 모두 별을 움직이는 바로 그 법칙에 순종한다. 그러니, 그 생명이 얼마나 단순하고 아름답고 신선한 것이겠는가! 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의 아름다움을 생각하게 하신다. 꽃을 그처럼 아름답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품성의 아름다움으로 옷 입기를 더없이 바라신다. MB 97.1 예수께서는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지, 다시 말해 그 식물이 어떻게 차갑고 어두운 땅이나 강바닥의 진흙에서 피어올라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향기를 풍기는지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신다. 누가 백합의 거친 갈색 구근(球根)에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안에 감춰진 하나님의 생명이 그분의 부르심을 받고 비와 햇빛 속에서 피어날 때, 사람들은 그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보고 감탄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생명은, 비와 햇빛처럼 만인에게 무상의 축복이 되는 그분의 은혜의 봉사 사업에 헌신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피어날 것이다. 꽃을 창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바로 이 말씀이 그대의 마음속에 성령의 은혜가 충만케 할 것이다. MB 97.2 하나님의 법은 사랑의 법이다. 그분께서는 그대가 이 세상에 있게 된 것은 단지 자신을 위해서만 탐구하고, 땅을 파고 집을 짓고, 수고하고 길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꽃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밝고 즐겁고 아름다운 삶을 삶으로써, 사랑의 봉사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생애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한 목적도 있음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그대를 아름다움으로 두르셨다. MB 97.3 아버지와 어머니들이여, 자녀들로 하여금 꽃에서 교훈을 얻게 하라. 그들을 정원과 들과 잎이 무성한 나무 아래로 데리고 가서, 천연계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기별을 읽도록 가르쳐 주라. 하나님을 새와 꽃과 나무와 관련지어 생각하게 하라. 자녀들로 하여금 온갖 즐겁고 아름다운 것에서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을 보게 하라. 스스로 즐거운 신앙생활을 하여 그들도 신앙을 가지게 하라. 친절의 법이 입술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 MB 97.4 자녀들에게그들의 본성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으로 변화되어 그분의 품성과조화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애가 꽃처럼 매력을 풍기는 아름다운 것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가르치라. 그들이 아름다운 꽃을 따 모을 때, 꽃을 만드신 분은 꽃보다 더욱 아름다운 분이심을 가르쳐 주라. 그렇게 하면 그들의 마음의 덩굴손이 그분을 73
산상보훈 감고 올라가게 될 것이다. “온전히 사랑스러우신” 분이 그들에게 매일의 동반자와 절친한 친구가 되실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생애가 그분의 순결한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다. MB 98.1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 (마태복음 6 장 33 절)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계속 조바심을 하며 이 세상 왕국에 대한 모종의 선언이 있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께서 하늘의 보화들을 소개하시는 동안,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는 먼저 우리가 그분과 연합하면 세상에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세상의 것들을 가장 많이 생각했기 때문에 주위에 있는 이방 민족들처럼 되었으며, 따뜻한 사랑으로 당신의 피조물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생활하였다고 지적하신다. MB 98.2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누가복음 12 장 30 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 장 33 절). 나는 너희에게 사랑과 의와 평화의 나라를 알려 주기 위해 왔노라. 마음을 열고 이 나라를 받아들이며, 이 나라를 위한 봉사에 최대의 관심을 쏟으라. 비록 이 나라가 영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현실 생애를 위한 너희의 필요가 돌봄을 받지 못할까 걱정하지 말라. 너희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열중하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께서 너희의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이니라. MB 99.1 예수께서는 우리가 노력하지 않고 살게 놓아두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가 모든 일에 당신을 처음과 마지막 그리고 최선으로 삼아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우리는, 품성과 생애를 통하여 그분의 의를 나타내는 데 방해가 되는 사업에 종사하지 말며, 그런 직업을 구하지 말며, 오락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무엇을 하든지 주께 하듯 마음을 다해서 해야 한다. MB 99.2 예수께서는이 세상에 계실 때 항상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드러내고만사를 아버지의 뜻에 맡김으로써 모든 세밀한 점에서까지 생애를 고상하게 하셨다. 그분의 모본을 따른다면, 이 땅의 생애에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리라”는 그분의 보증이 우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가난과 부, 질병과 건강, 우둔과 지혜, 이 모든 것들은 그분의 은혜의 허락을 통하여 제공된다. MB 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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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보훈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연약한 영혼이라도 당신께 도움을 청하러 돌아오면 영원한 팔로 감싸 주신다. 산에서 나는 보석들은 없어질 것이나,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은 그분과 함께 거할 것이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한일서 2 장 17 절). 하나님의 성은 황금문을 열고,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실패와 고난 중에서 인도하심과 지혜 그리고 위로와 소망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의지하는 법을 배운 자를 맞아들일 것이다. 천사들의 노래가 그 곳에서 그를 환영하며, 생명나무가 그를 위하여 열매를 맺을 것이다.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이사야 54 장 10 절).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마태복음 6 장 34 절) 만일, 하나님의 사업에 종사하기 위해 자신을 그분께 바친 상태라면, 내일을 위하여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대를 종으로 삼으신 그분께서는 처음과 끝을 다 아신다. 미래의 사건들이 비록 그대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전능하신 그분의 눈에는 환히 다 보인다. MB 100.1 해야 할 일들을 스스로의 손으로 처리하고 성공을 얻기 위하여 자신의 지혜를 의지할 때는, 하나님께서 맡기지 않으신 짐을 지며 그분의 도움 없이 그것을 나르려고 애쓰게 된다. 하나님께 속한 책임을 우리가 짐으로써 사실상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두는 것이다. 우리가 걱정하고 위험과 실패를 예측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런 일이 우리에게 분명히 닥쳐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유익을 주고자 하신다는 것을 진정으로 믿을 때는 장래를 위하여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어린아이가 사랑하는 부모를 의지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그리하면우리의 뜻이 하나님의 뜻에 삼켜지기 때문에 근심과 걱정이 사라질 것이다. MB 100.2 우리가 내일 일을 오늘 질 때, 그리스도께서는 도움을 약속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린도후서 12 장 9 절)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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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보훈 그분의 은혜는 그날의 필요를 위해 매일 주어진다. 순례 생활 중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도 아침마다 그날에 필요한 양만큼 하늘의 떡을 공급받을 수 있다. MB 101.1 우리에게 속한 것은 한 날뿐이며, 이 날 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이 한 날 동안, 우리는 성실한 봉사를 통해 우리의 모든 목적과 계획을 그리스도의 손에 의탁하며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겨야 한다. 그것은 그분께서 우리를 돌봐 주시기 때문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예레미야 29 장 11 절).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이사야 30 장 15 절). MB 101.2 매일 주님을 찾는 가운데 회개하고, 하나님 안에서 영적 선택을 자유롭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며, 그분의 영광스러운 초청에 기쁜 마음으로 응하여 그리스도의 멍에 곧 순종과 봉사의 멍에를 멘다면, 모든 불평이 없어지고, 모든 어려움이 제거되며, 현재 직면하고 있는 모든 복잡한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MB 101.3
5 장 - 주기도문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마태복음 6 장 9 절) 우리의 구주께서는 주의 기도를 두 번 가르치셨는데, 한 번은 산상 설교를 듣던 무리에게 하시고, 또 한 번은 그로부터 몇 달 후 제자들만 있는 데서 하셨다. 제자들은 잠시 그들의 주님과 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돌아왔을 때 하나님과 깊이 교통하고 계시는 그분을 발견했다. 그분께서는 그들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시는 듯 계속 큰 소리로 기도하셨다. 구주의 얼굴이 하늘의 빛으로 환하게 빛났다. 76
산상보훈 그분은 보이지 않는 분의 바로 면전에 계신 듯 하였으며, 그분의 말씀에는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사람처럼 강한 능력이 있었다. MB 102.1 경청하는 제자들의 마음은 깊이 감동되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한적한 곳에서 당신의 아버지와 교통하면서 오랜 시간을 보내시는 것을 흔히 목격하였다. 그분께서는 당신께로 밀려드는 무리에게 봉사하고 랍비들의 신빙성 없는 궤변을 폭로하는 일로 시간을 보내셨다. 이처럼 계속적인 수고로 극도의 피곤을 보이시자, 그분의 모친과 형제들은 물론 제자들까지도 그분의 생명이 희생되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그러나 그분께서 고된 하루를 마감하는 기도의 시간에서 돌아오실 때, 그들은 그분의 얼굴에서 평화의 모습, 곧 전신을 휩싸고 있는 듯 한 상쾌함을 보았다. 그분은 아침마다 하나님과 더불어 시간을 보낸 후에야 사람들에게 하늘의 빛을 전하기 위해 나가셨다.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과 사업의 능력이 그분의 기도 시간과 관련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제 그분의 간구의 음성을 들으면서, 그들은 마음이 위엄에 눌려 겸비해졌다. 그분께서 기도를 그쳤을 때, 그들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누가복음 11 장 1 절) 하고 부르짖은 것은 진정한 필요가 무엇인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MB 102.2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기도를 가르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전에 그들에게 가르치신 것을 반복하신다.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너희는 내가 이미 알려 준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것은 너희가 아직 깨닫지 못한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MB 103.1 그러나 구주께서는 이 기도문의 말씀들을 꼭 그대로 사용하라고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인성을 쓰신 분으로서 기도에 대한 당신의 이상을 제시하시되, 말은 어린아이가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장 명석한 사람들도 그 의미를 다 헤아릴 수 없는 포괄적인 것을 사용하신다. 우리는 감사의 찬사로 하나님께 나아가며, 필요를 아뢰고, 죄를 자백하고, 그분의 약속에 따른 자비를 구하도록 가르침을 받고 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누가복음 11 장 2 절) 예수께서는 당신의 아버지를 우리의 아버지로 부르도록 가르치신다. 그분은 우리를 형제라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히브리서 2 장 11 절). 구주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영접하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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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보훈 마음이 너무나 강하고 간절하셔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사용해야 하는 첫 번째 말로 거룩한 관계를 보증하는 “우리 아버지”라는 말을 사용하게 하신다. MB 103.3 여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신다는, 용기와 위로로 가득 찬 놀라운 진리의 선언이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한 당신의 마지막 기도에서 하신 말씀, 곧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요한복음 17 장 23 절)신다는 말씀이다. MB 104.1 사단이 권리를 주장하며 폭정을 일삼아 온 이 세상을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한 위대한 업적을 통하여 사랑으로 안으시고 다시 여호와의 보좌와 연결시키셨다. 그룹과 스랍과 타락하지 아니한 모든 세계의 무수한 무리들은 이 승리가 확정되었을 때 하나님과 어린양을 향해 찬양의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타락한 인류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 것과, 세상이 죄의 저주에서 속량될 것을 생각하며 기뻐하였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놀라운 사랑을 직접 받게 된 자들은 얼마나 더 기뻐해야 되겠는가! MB 104.2 어찌 우리가 의심과 반신반의의 마음을 가지며 자신을 고아로 생각할 수 있겠는가? 예수께서 인성을 취하신 것은 율법을 범한 자들을 위해서였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영원한 평화와 확신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와 같이 되셨다. 우리는 하늘에 중보자를 가지고 있으므로, 누구든지 그분을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의 죄짐을 스스로 져야 하는 고아로 버림을 받지 않는다. MB 104.3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요한일서 3 장 2 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로마서 8 장 17 절).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한일서 3 장 2 절). MB 104.4 하나님께 나가는 첫 단계는 그분께서 우리에 대해 가지고 계시는 사랑을 알고 믿는 것이다(요한일서 4 장 16 절).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사랑에 이끌려 그분께 나아가기 때문이다. MB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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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보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이기심을 버리게 된다.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부름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모든 자녀를 우리의 형제로 인정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이리저리 얽힌 거대한 인간 사회의 한 부분이며 한 가족의 구성원들이다. 우리는 무엇을 간구할 때 자신과 함께 이웃도 포함시켜야 한다. 자신만을 위하여 축복을 구하는 사람은 올바로 기도한다고 할 수 없다. MB 105.1 예수께서는 무한하신 하나님이 그대로 하여금 그분께 아버지라고 부르며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완전히 이해하라. 세상의 그 어떤 부모도 우리를 지으신 분께서 죄인을 위해 호소하시는 것처럼 열렬하게 호소한 적은 없다. 아무리 다정하고 관심이 많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이처럼 따뜻한 초청의 손길을 뻗은 적은 일찍이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도처에 계신다. 그분은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을 들으시고,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며, 각 사람의 슬픔과 실망을 맛보시고, 우리가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매와 친구와 이웃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는지 주시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고, 그분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는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끊임없이 넘쳐흐르고 있다. MB 105.2 그러나 그대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때는 그분의 사랑에 변함이 없음을 알고 자신을 그분의 지혜로 인도함을 받고 모든 일에 순종해야 하는 그분의 자녀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생애를 위한 그분의 계획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영광과, 그분의 품성과 그분의 가족과 그분의 사업을 최고의 관심의 대상으로 삼게 될 것이다. 그대가 가지게 된 하늘 아버지와 그 가족의 모든 구성원과의 관계를 기쁜 마음으로 인정하며 귀히 여기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한 가족이 된 자들의복리를 위한 것이라면, 비록 미천한 일일지라도 모두 즐거이 하게 될 것이다. MB 105.3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우리 아버지”로 바라보도록 명령하시는 이분께서는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시편 115 편 3 절)다. 우리는 그분의 보호 아래서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시편 56 편 3 절)고 말하면서 안전하게 쉴 수 있을 것이다. MB 106.1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태복음 6 장 9 절) 주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긴다는 것은 지존자(至尊者)에 대하여 79
산상보훈 이야기할 때 존경심을 가지고 하는 것을 말한다. “그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시편 111 편 9 절). 우리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하나님의 칭호나 명칭을 경솔하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기도로써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알현실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경외심으로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한다. 천사들은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가리운다. 그룹과 빛나고 거룩한 스랍들도 더할 수 없는 존경심으로 하나님의 보좌로 다가간다. 그렇다면 유한하고 죄 많은 존재인 우리는 한층 더 경건한 태도로 우리의 창조주이신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MB 106.2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긴다는 것은 이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에 대하여 외관상으로 최대의 경건을 나타내면서도 그분의 이름을 계속적으로 모독할 수가 있다. “여호와의 이름”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으며…“악과 과실(過失)과 죄를 용서”(출애굽기 34 장 5~7 절)한다. 그리스도의 교회에 관한 것으로,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예레미야 33 장 16 절)는 기록이 있다. 이 이름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유업이다. 가족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불리어진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심한 고난과 환란을 당할 때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예레미야 14 장 9 절) 하고 기도하였다. MB 106.3 이 이름은 하늘의 천사들에 의하여, 타락하지 않은 세계의 거민들에의하여거룩히 여김을 받는다.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라고 기도할 때, 그대는 그 이름이 이 세상에 의해서도 그렇지만 그대 자신에 의해서도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간구한다.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천사들 앞에서 그대를 당신의 자녀로 인정하셨으므로,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야고보서 2 장 7 절)손상하지 않도록 기도하라. 하나님께서는 그대를 당신의 대리자로 세상에 내보내신다. 그러므로 생활 하나하나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야 한다. 이러한 간구를 드리려면 하나님의 품성을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생활과 품성으로 하나님의 생애와 품성을 나타내지 않으면, 그대는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 없고 그분을 이 세상에 나타낼 수 없다. 그대는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를 받아들임으로써만 이 일을 할 수 있다. MB 107.1 80
산상보훈 “나라이 임하옵시며” (마태복음 6 장 10 절)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서 사랑하고 돌보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그분은 또한 우주의 크신 왕이기도 하다. 그분의 나라의 유익이 곧 우리의 유익이므로, 우리는 그 나라의 설립을 위하여 일해야 한다. MB 107.2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분의 영광의 나라가 즉시 임하기를 고대했으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당장은 그 나라가 건설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그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되 미래의 사건으로 알고 해야 했다. 그러나 이 간구는 그들에게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그들이 그 나라의 임함을 당대에 이루어질 사건으로 볼 것은 아니었지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일을 위해 기도하게 하신 것은 그 나라가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시간에 기필코 임할 것이라는 사실을 증거해 준다. MB 107.3 하나님의 은혜의 왕국은 죄와 반역으로 충만해 있는 마음들이 그분의 사랑의 주권에 날마다 굴복함으로써 지금 건설 중에 있다. 그러나 그분의 영광의 나라의 완전한 건설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재림하실 때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민에게 붙인 바”(다니엘 7 장 27 절) 될 것이다. 그들이 “창세로부터”(마태복음 25 장 34 절) 그들을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위대한 권능을 가지고 다스리실 것이다. MB 108.1 하늘의 문들이 다시 들리며, 우리 구주께서 천천만만의 거룩한 무리들과 함께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나타나실 것이다. 여호와 임마누엘은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스가랴 14 장 9 절),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요한계시록 21 장 3 절)실 것이다. MB 108.2 그러나 예수께서는 재림이 있기 전에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마태복음 24 장 14 절)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의 은혜의 기쁜 소식이 온 세상에 전파되기 전에는 그분의 나라가 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고 다른 사람들을 그분께로 인도할 때, 우리는 그분의 나라가 빨리 임하도록 하는 것이다. 오직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이사야 6 장 8 절)라고 말하면서 안 보이는 81
산상보훈 눈을 뜨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어둠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사도행전 26 장 18 절)기 위하여 그분의 사업에 투신하는 사람들, 이들만이 “나라이 임하옵소서” 하고 진실하게 기도한다. MB 108.3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태복음 6 장 10 절) 하나님의 뜻은 그분의 거룩한 율법에 표현되어 있으며, 이 율법의 원칙은 곧 하늘의 원칙이다. 하늘의 천사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가장 높은 지식을 얻는 것이며, 그분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 그들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가장 큰 봉사이다. MB 109.1 그러나 하늘에서는 봉사를 할 때 율법주의 정신으로 하지 않는다. 사단이 여호와의 율법을 거역하였을 때, 천사들은 마치 전혀 의식하지 않던 것을 갑자기 떠올리듯 율법이 있었던가 하고 생각했다. 천사들은 봉사할 때 종으로서가 아니라 아들로서 한다. 그들과 그들의 창조주는 서로 완전히 연합되어 있다. 그들에게 순종은 고역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봉사를 기쁨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영광의 소망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거하는 사람에게는 모두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편 40 편 8 절)라는 그분의 말씀이 울려 퍼진다. MB 109.2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고 간구하는것은 이땅에서 악의 통치가 끝나고, 죄가 영원히 소멸되고, 의의 나라가 건설되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그때에는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모든 선을 기뻐”(데살로니가후서 1 장 11 절)하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태복음 6 장 11 절)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전반부는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에 대한 것으로서, 그분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고 그분의 나라가 세워지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것과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사업을 첫째의 관심사로 삼을 때, 그대는 자신 있게 필요를 공급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만일, 자아를 버리고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치면, 그대는 하나님 가족의 일원이 되고, 아버지의 집에 있는 모든 것이 그대를 위한 것이 된다. 현세와 내세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모든 보화가 그대에게 열려진다. 천사들의 봉사, 성령의 선물, 그분의 종들의 활동, 82
산상보훈 이 모든 것이 그대를 위한 것이다. 세상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과 함께 그대에게 유익될 수 있는 한 그대의 것이다. 악한 자들의 적의까지도 그대를 하늘나라에 적합하도록 훈련시켜 줌으로써 축복이 된다는 것이 판명될 것이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 되면, “만물이 다 너희 것”(고린도전서 3 장 23, 21 절)이 된다. MB 110.2 그러나 그대는 아직 유업을 관리할 처지에 이르지 않은 어린아이와 같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이 에덴동산에서 최초의 부부에게 한 것처럼 교활한 방법으로 그대를 유혹하지 못하도록, 그대의 귀중한 재산을 그대에게 일임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께서 그대를 위하여 그 재산을 약탈자의 손이 미치지 못하도록 안전하게 붙들고 계신다. 그대는 어린아이처럼 매일 그 날에 필요한 것들을 받게 될 것이다. 매일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하고 기도해야 한다. 내일을 위하여 넉넉하게 소유하지 못할지라도 낙담하지 말라. 그대는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시편 37 편 3 절)라는 그분의 약속의 보증을 가지고 있다. 다윗은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편 37 편 25 절)고 말한다. 그릿 시냇가에 있는 엘리야를 먹이기 위하여 까마귀를 보내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실하고 헌신적인 자녀들 중 한 사람도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의롭게 행하는 사람에 대하여 이러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 양식은 공급되고 그 물은 끊치지 아니하리라”(이사야 33 장 16 절). “저희는 환난 때에 부끄럽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하려니와”(시편 37 편 19 절). “자기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로마서 8 장 32 절). 당신의 홀로 된 어머니의 걱정과 근심을 덜어드리고 나사렛의 가족을 부양하는 일에 어머니를 도우신 분께서는 자녀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애쓰는 모든 어머니를 동정하신다. “고생하며 유리”(마태복음 9 장 36 절)하는 무리를 동정하신 분께서는 지금도 고난 중에 있는 불쌍한 자들을 가엾게 여기신다. 그분께서는 축복하시기 위해 그들을 향해 손을 뻗치고 계시며, 또 당신의 제자들에게 주신 동일한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라고 가르치신다. MB 110.3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을 위하여서도 기도하게 된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만을 위한 83
산상보훈 것이 아님을 인정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믿고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굶주린 사람들을 먹일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그분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당신의 은택을 준비하셨다(시편 68 편 10 절). 그분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누가복음 14 장 12~14 절). MB 111.1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후서 9 장 8 절).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린도후서 9 장 6 절). MB 112.1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에는 육신을 지탱해 줄 양식뿐만 아니라 영혼에게 영양을 공급하여 영생하게 할 영적 양식도 포함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한복음 6 장 27 절)고 명령하신다. 그분께서는 또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한복음 6 장 51 절)고말씀하신다. 우리의 구주는 생명의 양식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그분의사랑을 바라보며 그것을 심령 가운데 받아들임으로써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을 먹게 된다. MB 112.2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 따라서 그 말씀을 우리에게 열어 보이고 이해시키며 말씀의 진리를 우리의 가슴에 새겨 주기 위해 성령이 주어진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그분께서 성령을 보내 그 말의 필요에 따라 우리의 심령을 강하게 해 줄 진리를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도록 날마다 기도해야 한다. MB 112.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의 축복과 영적 축복을 막론하고 필요한 것을 매일 구하도록 가르치시는 것은 목적이 있기 때문이며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것을 성취시키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변함없는 보호하심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라시는데, 그것은 우리를 이끌어 내어 친히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까닭이다. 우리는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위대하고 귀중한 진리의 연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이런 교제를 나눔으로써 굶주린 84
산상보훈 영혼처럼 배부름을 얻고, 목마른 자들처럼 생명의 샘에서 생기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MB 113.1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누가복음 11 장 4 절) 예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 줄 때만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신다.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어 가는 것은 그분의 사랑이며, 이 사랑에 마음이 감동되면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MB 113.2 예수께서는 주의 기도를 마치신 후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부언하셨다. 용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자비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를 끊어 버리게 된다. 우리는 우리에게 해를 끼친 자들이 잘못을 고백하지 않는 한 그들을 용서해 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물론, 회개와 고백으로 마음을 겸손하게 하는 것이 그들의 도리이긴 하나,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자들이 그 실수를 고백하든지 하지 않든지 간에 그들에 대하여 긍휼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 그들이 우리에게 아무리 심한 상처를 줄지라도, 불만을 품거나 상처를 받은 자신을 동정하지 말며,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한 것을 용서받으려 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잘못한 모든 사람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 MB 113.3 그러나 용서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널리 용서하시리라”는 약속을 주시면서, 마치 그 약속의 뜻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것처럼 이렇게 부언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이사야 55 장 7~9 절). 하나님의 용서는 단순히 우리를 정죄에서 면하게 해 주는 사법적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죄를 용서할 뿐 아니라 죄로부터 완전히 돌아서게 한다.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은 구원하는 사랑의 표현이다. 다윗은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편 51 편 10 절) 하고 기도했을 때 용서의 참 뜻을 깨달았다. 그는 다시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편 103 편 12 절)라고 말한다. MB 85
산상보훈 114.1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 자신을 주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고 우리를 당신께로 이끌기 위하여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죄악의 짐을 담당하시고,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에베소서 4 장 32 절)고 말씀하신다. 거룩한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그대 안에 거하시며 그대를 통하여, 소망 없는 자들에게 소망을 주고 죄로 병든 마음에 하늘의 평화를 가져다줄 천국의 사랑을 나타내시게 하라.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처음부터 가져야 할 조건은 그분에게서 자비를 받고 그분의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기 위해 자신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MB 114.2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나누어주기 위하여 우리가 필수적으로 해야 할 것 하나는, 그분께서 우리에 대하여 가지신 사랑을 깨닫고 믿는 것이다(요한일서 4 장 16 절).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그 사랑을 분별하지 못하게 하고자 그가 할 수 있는 온갖 기만을 부리며 활동하고 있다. 그는 우리의 실수와 죄가 너무 크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의 기도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우리를 축복하고 구원해 주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우리를 유도할것이다. 우리에게는 연약한 것 외에는 볼 것과 하나님께 내어놓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사단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곧 우리의 품성의 결함을 고칠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할 때, 사단은 다음과 같이 속삭일 것이다. 그대가 기도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그대는 악한 일을 한 적이 없단 말인가?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양심을 더럽힌 일이 없단 말인가? 그러나 우리는 사단에게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 장 7 절)라고 말할 수 있다. 죄를 범하여 기도할 수 없다고 느껴질 때가 바로 기도해야 할 때이다. 부끄럽고 매우 비참한 생각이 들지 모르지만 기도하고 믿어야 한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디모데전서 1 장 15 절). 용서 곧 하나님과의 화목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상급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죄 많은 인간의 공로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 근거를 둔 선물로서 주어진다. MB 115.1 변명으로 우리의 죄를 감소시키고자 노력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죄에 86
산상보훈 대한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야 하며, 그것은 실로 무겁다. 오직 갈바리만이 죄의 무서운 흉악성을 나타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의 죄를 담당해야 한다면, 죄가 우리를 눌러 뭉개 버릴 것이다. 그러나 죄 없는 분께서 우리와 입장을 바꾸셨다. 그렇게 할 책임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 장 9 절). 당신의 율법에 공의로우면서도,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의롭게 하시는 분,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진리인가!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미가 7 장 18 절). MB 116.1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마태복음 6 장 13 절) 시험은 죄를 짓도록 유인하는 것이므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사단과 우리 마음속의 악에서부터 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야고보서 1 장 13 절). MB 116.2 사단은 우리의 품성에 있는 악을 사람들과 천사들 앞에 드러내고 우리를 자기의 소유로 주장하기 위하여 우리를 시험에 빠뜨리고자 노력한다. 스가랴의 표상적 예언을 보면, 사단이 여호와의 사자의 바른편에 서서, 더러운 옷을 입은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비난하며 사자가 그를 위하여 하고자 하는 일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 나타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께로 이끌기를 원하시는 모든 영혼에 대한 사단의 태도를 나타낸다. 원수는 우리를 죄 가운데 빠지게 한 후 하늘 우주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 합당치 못하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스가랴 3 장 2 절). 그분께서는 또 여호수아에게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스가랴 3 장 4 절)고 말씀하셨다. MB 116.3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극진한 사랑으로 우리 안에 성령의 귀한 은혜가 나타나도록 하고자 애쓰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장애와 핍박과 난관을 허락하시되 저주로서가 87
산상보훈 아니라 우리 생애의 가장 큰 축복으로 허락하신다. 우리가 대항한 모든 시험과 우리가 용감하게 견딘 모든 시련은 우리에게 새로운 경험을 주며 품성 형성이라는 과업에서 우리를 전진하게 한다. 하늘의 능력으로 시험에 대항하는 사람은 세상과 하늘 우주에 그리스도의 은혜의 효능을 나타낸다. MB 117.1 그러나 우리는 시련이 아무리 심할지라도 낙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물론, 우리 자신의 악한 마음의 욕망이 이끄는 데로 가지 않도록 해 주시길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자신을 하나님의 지도에 맡기며 안전한 길로 인도해 주시도록 구하게 된다.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면서 스스로 택한 길을 가고자 결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를 인도하실 그분의 손을 기다리며,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이사야 30 장 21 절)고 하시는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MB 117.2 사단의 제안을 받아들임으로 얻게 될 유익을 생각하기 위하여 지체하는 것은 안전하지 못하다. 죄는 그 가운데 빠지는 모든 사람에게 불명예와 불행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본질상 눈을 현혹시키고 기만적인 것이므로 아첨하는 말로써 우리를 유혹할 것이다. 비록 사단의 영역 안으로 들어간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의 능력에서 보호의 보증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힘이 미치는 한유혹자가 우리에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모두 막아야 한다. MB 118.1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기도는 그 자체가 하나의 약속이다.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치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0 장 13 절)는 보증을 얻게 된다. MB 118.2 악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안전책은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그분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거하시게 하는 것이다. 시험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우리가 이기심을 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바라볼 때, 이기심은 가증하고 불쾌한 성질 그대로 우리에게 나타나게 되고, 우리는 그것을 마음에서 쫓아내 버리고자 갈망하게 된다.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실 때 우리의 마음은 부드럽고 88
산상보훈 겸손해지며, 시험은 그 힘을 잃고, 그리스도의 은혜가 품성을 변화시키게 된다. MB 118.3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위하여 돌아가신 사람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를 떠나가고 시험에 넘어질지 모르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속량물로 바친 그 사람을 결코 버리고 돌아서지 않으신다. 만일, 우리가 영적으로 눈을 뜬다면, 압박에 눌리고 슬픔의 짐을 진 사람들이 마치 짐 더미 아래 있는 마차처럼 깔려서 낙망 가운데 죽어 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시험을 당하여 마치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처럼 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하여 천사들이 빨리 날아다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늘의 천사들은 이들 영혼들을 포위하고 있는 악의 군대를 물리치고 그 영혼들을 인도하여 확실한 기초 위에 발을 디디도록 해 준다. 이 두 군대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은 세상의 군대들이 싸우는 것처럼 실제적이며, 그 영적 투쟁의 결과에 영원한 운명이 달려 있다. MB 118.4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누가복음 22 장 31, 32 절)라고 하신 말씀은 베드로에게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우리가 홀로 떨어져 있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자.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 장 16 절). 그분은 하나님과 사람의 원수와 대결하는 싸움에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누가복음 10 장 19 절)고 말씀하신다. MB 119.1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가운데 생활하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결코 놓지 않을 손으로 그대를 굳게 붙들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이해하고 믿으라. 그리하면 안전하게 될 것이다. 그 사랑은 사단의 모든 기만과 공격에 대해 난공불락의 요새가 된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언 18 장 10 절). MB 119.2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마태복음 6 장 13 절) 이 마지막 말씀은 주기도문의 첫 문장과 같이 우리의 하늘 아버지를, 모든 권세와 권위와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 나신 분으로 지적한다. 구주께서는 당신의 제자들 앞에, 그들이 89
산상보훈 꿈꾸어 온 것처럼 세속적 번영과 영광의 양지가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증오와 사단의 분노의 폭풍으로 얼룩진 흑암의 세월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보셨다. 국가적 분쟁과 파멸 속에서, 제자들은 발걸음이 위험에 휩싸이면서 때때로 마음이 공포로 압도당할 것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황폐되고, 성전이 무너지고, 예배가 영원히 끝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황량한 해안에서 파선된 것처럼 모든 나라로 흩어지는 것을 볼 것이었다. 예수님은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고)…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마태복음 24 장 6~8 절)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소망이 사라졌다거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버리셨다는 생각으로 두려워할 것이 아니었다. 권세와 영광은 위대한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의 완성을 위하여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고 꾸준히 움직이시는 분에게 속해 있다. 매일의 필요를 아뢰는 기도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모든 죄악의 권세와 지배를 초월하여 만유를 다스리는 나라를 소유하시며 그들의 아버지와 그들의 영원한 친구가 되시는 주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지시를 받았다. MB 120.1 예루살렘의 멸망은 이 세상을 무너뜨릴 마지막 파멸의 상징이었다.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부분적으로 성취된 예언들이 마지막 시대에는 더욱 직접적으로 적용된다. 우리는 지금 크고 엄숙한 사건 바로 앞에 서 있다. 세상이 한 번도 목격한 일이 없는 위기가 우리 앞에 와있다. 하나님의나라가 만유를 다스린다는 보증은 초기의 제자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기쁨이 된다. 다가오는 사건들에 대한 계획이 창조주의 손에 쥐어져 있다. 하늘의 주권자께서는 당신의 교회에 대한 이해관계와 마찬가지로 나라들의 운명도 친히 주관하신다. 거룩한 교사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성취함에 고레스에게 말씀하신 것과 똑같이 모든 대리자에게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이사야 45 장 5 절)라고 말씀하신다. MB 120.2 선지자 에스겔이 이상을 보았을 때, 그룹 천사의 날개 아래 손이 나타났다. 이것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성공을 가져다주는 것은 그분의 능력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자로 사용하는 자들은 그분의 사업이 그들에게 달려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막중한 책임은 유한한 자들이 지도록 되어 있지 않다. 졸지 아니하시는 분, 당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하여 끊임없이 일하고 계시는 분께서 당신 자신의 90
산상보훈 사업을 추진시키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악한 자들의 목적을 좌절시키시며 당신의 백성들을 해치려고 모의하는 자들의 계획에 혼란을 일으키실 것이다. 왕이시며 만군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고 국가들의 투쟁과 소요 가운데서도 여전히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신다. 하늘에서 통치하시는 분이 우리의 구주이시다. 그분은 모든 시련을 헤아리시며, 모든 영혼이 반드시 들어가 시험받아야 할 풀무의 불을 주시하신다. 왕들의 요새가 무너지고 분노의 화살이 하나님의 원수들의 가슴을 꿰뚫을 때에도, 그분의 백성들은 그분의 손에서 안전할 것이다. MB 121.1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역대상 29 장 11, 12 절). MB 122.1
6 장 - 비판하지 말고 행하라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마태복음 7 장 1 절) 자기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고자 노력할 때,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죄에 대한 방벽으로 인간적인 부당한 요구 조건들을 쌓아 올리게 된다.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스스로 규칙들과 규정들을 만들고 거기에 억지로 따르려고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 자기에게로 돌이키게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서 사라짐과 아울러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도 소멸된다. 많은 부당한 요구 조건을 가진, 인간이 고안한 제도는 그 주창자로 하여금 상술한 인간의 표준에 미달하는 모든 사람을 비판하게 한다. 이기적이며 편협한 비판의 분위기는 고상하고 관대한 마음을 억누르며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중심의 판단과 마음이 좁은 정탐꾼이 되게 한다. MB 123.1 바리새인들은 이런 부류에 속하였다. 그들은 스스로의 91
산상보훈 약점을 생각하고 겸손하게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큰 특권에 대해 감사하며 예배에 나와야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영적 교만으로 가득 찬 채 나왔으며, 생각하는 것이 그저 “내 자신, 내 기분, 내 지식, 내 방법”뿐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성취한 것들을 기준 삼아 다른 사람들을 비판했다. 그들은 화려한 관복을 입고, 비판하고 정죄하기 위하여 재판석에 앉았다. MB 123.2 백성들도 대부분 이와 동일한 정신을 가지고 양심의 영역에까지 끼어들며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문제를 놓고 서로 심판하였다. 예수께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러한 정신과 행동을 두고 하신 것이었다. 그것은 자신을 기준으로 삼지 말라는 뜻이다. 그대의 의견, 의무에 대한 그대의 견해, 성경에 대한 그대의 해석을 다른 사람들에 대한 표준으로 삼지 말고, 그들이 그대의 이상에 도달하지 않을지라도 마음속으로 그들을 정죄하지 말라.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지 말며, 그들의 동기에 관해 추측하지 말고, 그들을 판단하지 말라. MB 123.3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린도전서 4 장 5 절). 우리는 마음을 읽을 수 없다. 스스로 결점이 많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심판할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다. 유한한 사람들은 오로지 밖으로 드러난 것을 통해 판단할 수 있을 뿐이다. 행동의 숨은 동기를 아시고, 부드럽고 자비롭게 대하시는 분만이 각 사람의 사정을 결정하실 수 있으시다. MB 124.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로마서 2 장 1 절). 이와 같이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거나 비판하는 자들은 그들 스스로 죄가 있음을 공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똑같은 짓을 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을 정죄함으로써,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유죄 선고를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판결이 지당하다고 언명하신다. 그분께서는 자신에 대한 그들 스스로의 판결을 받아들이신다. MB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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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보훈 “투박한 발은 여전히 수렁을 헤매며 끝없이 꽃을 밟으며 가지만, 손은 거치나 온정을 머금고 친구의 가슴을 파고들어 심금을 울린다.” MB 124.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마태복음 7 장 3 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는 충고라 할지라도, 형제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사람의 죄의 과중함은 다 나타내지 못한다. 예수께서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셨다. MB 125.1 그분의 말씀은 타인의 결점을 잘 찾는 사람에 대한 설명이다. 품성이나 생활에서 결점을 발견했다고 생각할 때, 그는 그것을 지적하기 위해 몹시 안달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와같이 비 그리스도적인 행동을 통해 꼴 지워지는 품성의 특성은 비판의 대상이 된 결점과 비교할 때 마치 티에 대한 들보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신다. 침소봉대(針小棒大 )하는 것은 사랑과 용서의 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 완전히 굴복하는 회개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의 생애를 통해 구주의 사랑에서 나오는, 마음을 여는 감화를 끼치지 못한다. 이들은 복음의 따뜻하고 친절한 정신을 잘못 나타내며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돌아가신 귀한 영혼들에게 상처를 준다. 우리 구주께서 사용하시는 비유에 의하면 비판적인 정신에 빠져 있는 사람은 그가 비난하는 사람보다 더욱 큰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동일한 죄를 범할 뿐 아니라 거기에 자만과 비평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MB 125.2 그리스도만이 품성의 유일한 표준이시다. 그러므로 자신을 다른 사람들의 표준으로 삼는 자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위치에 놓게 된다. 그리고 하늘 아버지께서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요한복음 5 장 22 절)셨으므로, 사람들의 동기를 비판하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의 특권을 다시 찬탈하는 것이다. 이처럼 스스로 판관과 비평가의 위치에 서는 자들은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데살로니가후서 2 장 4 절)는 적그리스도 편에 자신을 두고 있다. MB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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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보훈 가장 불행한 결과로 이끌어 가는 죄는 바리새 주의의 특성인, 냉랭하고 비판적이고 용서를 모르는 정신을 가지는 것이다. 신앙 경험에 사랑이 없으면 예수님도 거기에 계시지 않으신다. 즉 그분의 임재의 빛이 거기에 없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부지런히 활동하고 그리스도와 무관한 열성을 아무리 낸다 해도, 이 부족을 메울 수는 없다. 타인의 결함을 찾아내는 데 남다른 지각과 예민함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에 빠져 있는 각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말씀하신다. 죄를 지어 켕기는 사람이 누구보다 먼저 죄를 알아챈다. 이런 사람은 남을 비난함으로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악을 감추거나 변명하려고 애쓴다. 사람이 악을 알게 된 것은 죄로 말미암아서였다. 최초의 부부는 죄를 범하자마자 서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그 본성이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있지 않을 때 필연적으로 이렇게밖에 될 수 없다. MB 126.1 사람들은 이 비난하는 정신을 가지게 되면 형제의 결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만일, 비교적 온건한 방법으로 그 형제에게 마땅히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시킬 수 없게 되면, 그들은 강제적 방법을 사용할 것이다. 그들의 힘이 미치는 한 사람들을 강요하여 그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당시에 유대인들이 한 일이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상실했을 때 언제나 해 온 것이다. 교회는 자체에 사랑의 능력이 없음을 알았을 때 교리를 강조하고 교령(敎令)을 집행하기 위하여 강력한 국가의권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여기에 지금까지 제정된 모든 종교적 법령의 비밀과 아벨의 시대부터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핍박의 비밀이 있다. MB 126.2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강요하지 않으시고 당신께로 이끄신다. 그분께서 사용하시는 유일한 강제 수단은 사랑의 강권이다. 교회가 세속적 권세의 도움을 구하기 시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 곧 거룩한 사랑으로 강권하는 능력이 부족한 증거이다. MB 127.1 그러나 문제는 교회의 각 교인에게 있으며 치유가 이루어져야 할 곳도 바로 여기이다. 예수께서는 비난하는 자들에게,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빼내고, 비난하는 정신을 버리고, 죄를 자백하고 버리라고 명령하신다. 왜냐하면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누가복음 6 장 43 절)기 때문이다. 그대가 빠져 있는 이 비난하는 정신은 악한 열매이며, 그 나무가 나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대 자신을 독선적으로 만드는 것은 94
산상보훈 무익한 일이다.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심령의 변화이다. 그대는 다른 사람들을 나무라는 위치에 서기 전에 먼저 이 경험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대개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마태복음 12 장 34 절)하기 때문이다. MB 127.2 어떤 사람의 생애에 위기가 닥쳐 그대가 조언이나 권면을 주고자 할 때, 그대의 말은 선을 위한 감화를 끼치되 평소에 그대 자신의 모본과 정신이 그대를 위해 확보해 놓은 정도만큼만 끼치게 될 것이다. 그대는 선을 행하기 전에 먼저 선하게 되어야 한다. 그대 자신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겸허하고 순수하고 부드러워지기 전에는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킬 감화력을 발휘할 수 없다. 그대에게 이런 변화가 이루어지면,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기 위하여 생애 하는 것이 마치 장미 덩굴이 향기로운 꽃을 피우고 포도나무가 자색 포도송이를 맺는 것과 같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MB 127.3 그리스도께서 그대 안에서 “영광의 소망”이 되시면, 그대는 다른 사람들을 살피며 그들의 잘못을 폭로하는 길을 걷지 않을 것이다. 비난하고 정죄하는 대신에, 도와주고 축복하고 구원하는 것이 그대의 목적이 될 것이다. 잘못한 사람들을 취급할 때,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라디아서 6 장 1 절)는 말씀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그대 역시 여러 번 잘못을 범했다는 것과 한번 바른 길에서 떠나게 되면 다시 그 길을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상기할 것이다. 형제를 더욱 어두운 곳으로 밀어 넣지 않고 대신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그의 위험을 알려 주게 될 것이다. MB 128.1 갈바리의 십자가를 자주 쳐다보는 사람은 자기의 죄 때문에 구주께서 그 곳에 달리셨음을 생각하고 그의 죄악의 정도를 다른 사람들의 것과 비교해서 헤아려 보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위하여 재판석에 앉지 않을 것이다. 갈바리의 십자가의 그늘 아래서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비판이나 자만의 정신이 있을 수 없다. MB 128.2 잘못을 범한 형제를 구원하기 위하여 체면은 물론 생명이라도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느낄 때 비로소, 그대는 눈에서 들보를 빼고 형제를 도와줄 준비를 갖추게 된다. 그제서야 형제에게 가까이 나아가 그를 감동시킬 수 있다. 어떤 사람도 책망과 비난 때문에 그릇된 처지에서 돌이킨 적은 없다. 도리어,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떠나고, 마음을 걸어 잠근 채 회개하지 아니하였다. 유순한 정신과 친절하고 마음을 끄는 행동이 실수한 사람을 95
산상보훈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가리워 줄 수 있다. 그대의 품성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그대가 접촉하는 모든 사람에게 변화시키는 능력을 주게 될 것이다. 매일 그리스도께서 그대 안에 나타나시게 하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그대를 통해 당신의 말씀이 가진 창조의 능력, 곧 우리 주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다른 영혼들을 재창조해 줄, 온유하고 설득력 있으면서도 강력한 감화력을 나타내실 것이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마태복음 7 장 6 절) 예수께서는 여기서 죄의 종 된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부패하고 부도덕한 것에 빠짐으로써, 그들은 성품이 너무 타락하여 악에 집착하고 그것을 버리고자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복음을 다만 논쟁과 조롱거리로 삼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방해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MB 129.1 그러나 구주께서는, 아무리 죄에 빠져 있을지라도 하늘의 귀중한 진리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지나쳐 버리지 않으셨다. 세리와 창기에게 그분의 말씀은 새 생애의 시작이 되었다. 주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낸 막달라 마리아는 구주의 무덤에 맨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사람이었으며, 그분께서 부활하신 아침에 제일 먼저 인사를 건넨 사람이었다. 복음의 가장 확실한 원수 중 하나였던 다소 사람 사울은 그리스도의 헌신적인 종 바울이 되었다. 증오와 경멸의모습 뒤에는 물론, 심지어 범죄와 타락의 이면에도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아 구주의 왕관의 보석처럼 빛날 영혼이 숨겨져 있을 수가 있다. MB 129.2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태복음 7 장 7 절) 주께서는 당신의 말씀에 대해 불신과 오해와 오역의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세 번에 걸쳐 약속을 주신다. 그분은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하나님을,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으로 믿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부언하신다. MB 130.1 주께서는 그대가 그분의 자비를 갈망하고, 그분의 권고를 바라며, 그분의 사랑을 열망하는 것 외에는 아무 조건도 붙이지 않으신다. “구하라.” 구한다고 하는 것은 필요를 깨닫고 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믿음으로 구하면 그대는 얻을 것이다. 주께서 당신의 말씀을 보증하셨으므로, 그 말씀은 허사로 돌아가지 않는다. 만일, 진정으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아간다면, 주께서 약속하신 것을 구하는 일을 주제넘은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96
산상보훈 그리스도와 같은 완전한 품성을 이루기 위하여 필요한 축복을 구할 때, 주께서는 그대가 반드시 이행될 약속을 따라 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증해 주신다. 그대가 스스로 죄인이라는 것을 느끼고 깨닫는 자체가 그분의 자비와 동정을 구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대가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조건은 거룩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그분께 그대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고 모든 죄악에서 순결하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리가 언제든지 간구할 수 있는 것은 그분과 그분의 구원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우리의 크게 부족한 상태 곧 우리의 속절없는 처지이다. MB 130.2 “구하라.” 하나님의 축복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구하라.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기 22 장 21 절). 구하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대를 찾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대가 하나님께 나아가고 싶어하는 것은 성령께서 이끌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이끄심에 순복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유혹받고 실수하고 믿음 없는 자들을 위하여 탄원하고 계신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당신과 교제할 수 있는 위치까지 높이시기 위해 애쓰고 계신다.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역대상 28 장 9 절). MB 131.1 “문을 두드리라.” 우리는 특별한 초청에 의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며, 그분께서는 우리를 알현실로 영접해 드리고자 기다리고 계신다. 예수님을 따른 최초의 제자들은 그분과 길가에서 몇 마디 나누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까.” 하고 물은 뒤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요한복음 1 장 38, 39 절)했다. 이와같이 우리도 하나님과 더없이 밀접한 친교와 교제를 나눌 수 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시편 91 편 1 절).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는 사람들로 하여금 확실한 보증을 가지고 자비의 문을 두드리고 기다리면서, 주여,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고 주장하게 하라. MB 131.2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모인 무리들을 보시고, 그 큰 무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식별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셨다. 그들의 필요와, 즐겨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에 대한 예증으로, 그분께서는 그들 앞에, 육신의 부모에게 떡을 달라고 97
산상보훈 요구하는 배고픈 자녀의 비유를 제시하신다. 그분께서는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겠는가”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부모가 자녀에 대해 본능적으로 가지는 따뜻한 애정에 호소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아버지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면 그 누구도, 배가 고파서 떡을 달라고 하는 아들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자녀를 소홀히 취급하며 자녀에게 기대를 가지게 하여 안타깝게 만들어 결국 실망하게 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자녀에게 훌륭하고 영양이 풍부한 음식을 주기로 약속해 놓고 돌을 주겠는가? 어느 누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의 호소에 응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상상함으로써 그분을 욕되게 할 것인가? MB 131.3 너희가 인간이며 또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누가복음 11 장 13 절). 하나님의 대리자이신 성령이야말로 모든 선물 가운데서 가장 큰 선물이다. 각양 “좋은 것”이 이 선물 안에 포함되어 있다. 창조주자신이라 할지라도이보다 더 위대하고 더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실 수 없다. 우리가 고통 중에서 주께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구하고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인도해 달라고 탄원하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시도를 결코 물리치지 않으실 것이다. 부모는 배고픈 자녀를 외면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필요해서 간절히 부르짖는 사람의 간구를 결코 거절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얼마나 놀라운 자비로써 당신의 사랑을 표시해 오셨는가! 다음 기별은 하늘 아버지의 심중에서 나온 것으로서, 암흑의 날에 그분께서 저들을 돌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이사야 49 장 14~16 절). MB 132.1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모든 약속은 우리에게 기도할 주제를 제공해 주고, 여호와의 약속의 말씀을 우리의 보증으로 제시해 준다.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 축복이 어떤 것이든지, 98
산상보훈 예수님을 통하여 구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단순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바로 그것을 주께 아뢸 수 있다. 우리는 현재의 형편을 이야기하면서 생명의 양식과 그리스도의 의의 옷은 물론 현세의 떡과 의복까지 구할 수 있다. 그대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대에게 이 모든 것이 필요함을 아시고, 그것들에 관하여 그분께 구하도록 그대를 초청하신다. 모든 은총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해 받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며 당신의 후한 선물로써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이다. MB 133.1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기고 나아갈 때, 그대는 그분과의 관계를 자녀로서 인정하고 있음을 잊지 말라. 그대는 그분의 선하심을 신뢰할 뿐 아니라 그분의 사랑에 변함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떤 일에든지 그분의 뜻에 순복한다. 그대는 그분의 사업을 하기 위해 자신을 바친다. 예수께서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요한복음 16 장 24 절)라는 약속을 주신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는 명령을 받은 자들이었다. MB 133.2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의 선물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저장되어 있다. 구주의 피라는 고귀한 희생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귀중한 선물, 마음의 가장 큰 소원을 만족시켜 줄 선물, 영원토록 계속될선물을 어린아이처럼 하나님께 나아가는사람은 누구나 받아 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 그대로 그분 앞에서 간구하라. 그리하면 그대는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마태복음 7 장 12 절)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증해 주신 후, 예수께서는 인간의 모든 교제 관계를 망라한 광범위한 원리로서,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신다. MB 134.1 유대인들은 그들이 받아야 할 것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들의 걱정은,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권세와 존경과 봉사를 받기 위해 애쓰는 데서 생겼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얼마나 받을지 염려하지 말고 얼마나 줄 수 있을지 염려하라고 가르치신다. 우리는 타인에 대한 우리의 의무의 기준을 우리에 대한 그들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찾는다. MB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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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보훈 다른 사람들과 교제할 때는 그들의 처지에 서도록 하라. 그들의 감정과, 그들의 고충과 그들의 실망과 그들의 기쁨과 그들의 슬픔에 들어가라.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라. 그리고 그들과 처지가 바뀌었을 때 그들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그대로 그들에게 행하라. 이것이 성실의 진정한 법칙이다. 이것은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 장 39 절)는 율법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은 선지자들의 교훈의 요지이다. 이것은 하늘의 원칙이므로 하늘의 거룩한 교제에 합당한 모든 사람에게서 계발될 것이다. MB 134.3 황금률은 진정한 친절의 원칙이며 예수님의 생애와 성품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아! 얼마나 부드럽고 아름다운 빛이 우리 구주의 생애에서 비쳐 나왔던가! 그분의 임재에서 흘러나온 향기는 또 어떤가! 이와 동일한 정신이 그분의 자녀들 가운데서도 나타나게 될 것이다.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자들은 거룩한 분위기로 둘러싸일 것이다. 그들의 순결한 흰옷은 여호와의 동산에서 풍기는 향기가 될 것이다. 그들의 얼굴은 주님의 얼굴에서 나오는 빛을 반사하고, 피곤하여 비틀거리는 발을 위하여 길을 밝혀 줄 것이다. MB 135.1 무엇이 완전한 품성을 이루는지 확실히아는 사람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동정과친절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은혜의 감화는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감정을 세련되고 순결하게 하며, 하늘에서 난 우아함과 바르게 처신하는 분별력을 줄 것이다. MB 135.2 그러나 황금률에는 한층 더 깊은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의 청지기가 된 사람은 모두 무지와 암흑 가운데 있는 영혼들에게 그 은혜를 나누어 주되 그들과 처지가 바뀌었을 때 자신에게 나누어 주기를 그들에게 바라는 만큼 할 것을 요청받고 있다. 사도 바울은 “헬라 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로마서 1 장 14 절)고 말하였다. 그대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또 이 세상에서 가장 형편없고 타락한 사람보다도 더 그분의 풍성하신 은혜를 입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대는 그 영혼에게 이 선물들을 나누어줄 빚을 지고 있다. MB 135.3 이 세상에서의 선물과 축복 또한 그러하다. 그대가 동료들보다 더 많이 가진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대는 은혜를 적게 받은 모든 사람에 대해 그만큼 빚진 처지에 놓이게 된다. 재산이 많거나 생활의 안락을 누리고 있다면, 우리는 병든 자와 과부와 100
산상보훈 고아들을 돌보되 그들과 처지가 바뀌었을 때 그들에게 바라게 될 정도와 똑같이 돌보아야 할 더없이 신성한 의무를 진다. MB 135.4 황금률은 산상 설교의 다른 곳에서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는 말로 동일한 진리를 암암리에 가르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것은 선한 것이거나 악한 것이거나 간에 축복 혹은 저주의 형태로 우리에게 분명히 되돌아온다. 우리가 주는 것은 무엇이나 다시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세상의 축복은 같은 방법으로 되돌아 올 수가, 아니 종종 그렇게 되돌아온다. 우리가 주는 것은 필요한 때에 종종 네 배의 가치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이 외에도, 우리는 하늘의 모든 영광과 그 보화의 총체가 되는 하나님의 더없이 풍족한 사랑으로 인해 이 세상에서부터 온갖 종류의 선물로 보답 받는다. 그리고 우리가 끼친 악 또한 다시 돌아온다. 정죄하고 낙심시키는 일을 거리낌 없이 해 온 사람은 모두 다른 사람들을 통과하게 한 그 땅을 자신도 지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동정과 친절의 부족 때문에 그들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MB 136.1 이렇게 되도록 정한 것은 우리에 대한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분께서는 우리로하여금 자신의 마음의 완고함을 미워하며 마음을 열고 예수께서 그 속에 거하시게 하도록 이끄신다. 그리하면 악이 선이 되고, 저주처럼 보이던 것이 축복이 된다. MB 136.2 황금률의 표준이야말로 바로 그리스도교의 참 표준이다.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다 기만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주시기까지 귀중하게 여기신 인간을 낮게 평가하며 사람들을 경하게 여기도록 이끄는 종교, 인간의 궁핍과 고난과 권리에 무관심하게 만드는 종교는 거짓 종교이다. 가난한 자들과 고난당하는 자들과 죄 많은 자들의 요구를 무시할 때,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자들임을 입증하게 된다. 그리스도교가 세상에서 이처럼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실제의 생활에서는 그분의 품성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이름은 이런 일로 인해 모독을 받는다. MB 137.1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이 신자들에게 비치던 희망찬 시대의 사도 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아무도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지 않았다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었으며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101
산상보훈 은혜를 얻”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사도행전 4 장 32, 34, 33 절, 2 장 46, 47 절). MB 137.2 하늘과 땅을 살펴보라. 우리의 동정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 대한 자비의 행동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보다 더욱 능력 있게 나타나는 진리는 없다. 이것이 곧 예수님의 진리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노라고 공언하는 자들이 황금률의 원칙을 실천할 때, 복음 사업에는 사도 시대에 나타난 것과 동일한 능력이 따를 것이다. MB 137.3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마태복음 7 장 14 절) 그리스도 당시에, 팔레스틴 사람들은 대개 언덕이나 산 위에 위치한 성벽으로 둘린 마을에서 살았다. 일몰 때 닫히는 성문이 가파른 바윗길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저녁 무렵에 집으로 돌아가는 행인들은 밤이 되기 전에성문에 도착하기 위하여 힘든 오르막길을열심히 서둘러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늑장을 부리는 자는 성문 밖에 남게 되었다. MB 138.1 예수께서는 가정과 안식처로 이어지는 좁고 비탈진 길을 그리스도인의 노정에 대한 인상적인 상징으로 사용하셨다. 그분께서는 내가 너희 앞에 제시한 길은 좁고 그 문이 들어가기에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황금률이 모든 교만과 자기 본위의 마음을 제거해 버리는 까닭이다. 물론, 넓은 길도 있다. 그러나 그 종말은 멸망이다. 만일, 영적 생애의 길을 올라가고자 한다면, 그대는 계속해서 올라가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오르막길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적은 무리와 함께 갈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많은 무리가 내리막길을 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MB 138.2 인류 전체가 온갖 세속적 마음과 이기주의와 교만과 부정직과 도덕적 타락을 가지고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을 갈 수가 있다. 각 사람은 자신의 의견과 주의에 따라 이기적인 마음이 지시하는 대로 무엇이나 할 소지를 가지고 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을 가는 데에는 따로 길을 찾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 문과 길이 넓어 발이 사망으로 끝나는 길을 향하여 저절로 가기 때문이다. MB 138.3 그러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고 그 입구가 험하다. 만일, 늘 따라다니는 어떤 죄를 가지고 있다면, 그대는 그 길이 들어가기에 너무 좁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만일, 주님의 길을 계속해서 가고자 한다면, 자신의 길과 자신의 뜻과 자신의 악한 습관과 행동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하는 자는 세상의 의견을 102
산상보훈 따르거나 세상의 표준에 맞출 수 없다. 하늘의 길은 높은 지위와 부를 그대로 가지고 들어가기에도 너무 좁고, 자기중심적인 야망을 불태우기에도 너무 협소하며, 안락을 즐기며 오르기에도 너무 험하고 거칠다. 그리스도의 몫은 고통, 인내, 자아 희생, 비난, 궁핍 그리고 당신을 대항하는 죄인들의 반박이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낙원에 꼭 들어가고자 한다면, 우리도 이러한 몫을 받게 될 것이다. MB 138.4 그러나 그렇다고 올라가는 길은 힘든 길이며 내려가는 길은 쉬운 길이라고 결론을 내리지 말라.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에도 줄곧 고통과 형벌이 있고, 슬픔과 실망이 있으며, 가지 말라는 경고가 있다. 부주의하고 완고한 사람들이 쉽게 자멸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사단의 길이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모두 기만이다. 악의 길에는 쓰라린 후회와 점점 깊어지는 고뇌가 있다. 우리는 교만과 세속적 야망을 좇는 것을 즐겁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종말은 고통과 슬픔이다. 이기적인 계획은 전도가 유망하게 보이도록 하고 즐거운 희망을 간직하게 해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자아 중심의 소망 때문에 행복이 깨어지고 생애가 비참하게 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내리막길은 그 입구가 꽃으로 밝게 빛날지 모르나 가시가 있다. 입구에서 빛나던 희망의 빛이 절망의 흑암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끝없는 밤의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가게 된다. MB 139.1 “궤사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 그러나 지혜의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잠언 13 장 15 절, 3 장 17 절).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모든 행동, 그분을 위한 모든 극기의 행동, 훌륭하게 견디어 낸 모든 시련, 유혹에서 거둔 모든 승리는 최후 승리의 영광을 향하여 나가는 행진의 발걸음이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도자로 삼으면, 그분께서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해 주실 것이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길을 잃어버릴 필요가 없다. 떨고 있는 어떤 구도자도 순결하고 거룩한 빛 가운데서 걸어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 비록 길이 너무 좁고 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죄가 용납되지 않을지라도,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비록 의심하고 떠는 영혼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지 않으신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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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보훈 MB 139.2 길이 험하며 오르막길이 비탈져 있고 우편과 좌편에 함정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여행길에서 겪는 고통을 견디어야 할 것이다. 피곤할 때에도, 안식이 그리울 때에도 계속해서 수고해야 하며, 연약할 때에도 싸워야 하고, 낙심될 때에도 계속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인도자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마침내 소망의 항구에 틀림없이 도착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보다 먼저 그 험한 길을 친히 걸어가셨고, 우리의 발을 위하여 그 길을 평탄하게 하셨다. MB 140.1 그리고 영생으로 인도하는 길은 비록 가파르지만 하나같이 피곤한 자들에게 생기를 주는 기쁨의 샘이 있다. 지혜의 길을 걸어가는 자들은 환난을 당할지라도 크게 기뻐한다. 왜냐하면 그들을 사랑하시는 그분께서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들 곁에서 동행하시기 때문이다. 위로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갈 때마다 그들은 그분의 손길을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되고, 매 발걸음마다 보이지 않는 분에게서 나오는 더없이 밝은 영광의 빛이 그들의 길을 비추어 준다. 그리고 저들의 찬양의 노래는 더 높은 곡조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천사들의 노래와 합하기 위하여 상달된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잠언 4 장 18 절). MB 140.2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누가복음 13 장 24 절) 해가 지기 전에 성문에 도착하기 위하여 서두르는 저문 길의 나그네는 길가에 있는 그 어떤 매력적인 것에도 한눈을 팔수가 없었다. 그는 오로지 성문으로 들어가는 한 가지 목적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 생애에도 목적에 대한 이와 동일한 열성이 필요하다. 나는 너희에게 나의 나라의 참 영광인 품성의 영광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세속적 권력에 대해서 너희에게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지만 너희가 최고의 욕망을 가지고 노력을 쏟을 가치가 있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세상의 대제국의 패권을 쥐기 위하여 싸우도록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싸워야 할 싸움이 없고 쟁취해야 할 승리가 없다고 결론을 내리지 말라. 나는 너희가 나의 영적 왕국에 들어오기 위하여 노력하고 필사적으로 싸우라고 명령하는 바이다. MB 141.1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하나의 싸움이며 진군이다. 그러나 얻어야 할 승리는 인간의 힘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싸움의 장소는 곧 마음이다.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 인류가 지금껏 싸운 104
산상보훈 가장 큰 싸움은 자아를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것, 곧 마음을 사랑의 주권에 바치는 것이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난 옛 본성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유전적 성향 곧 이전 습관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MB 141.2 영적 왕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은 암흑의 왕국의 세력을 등에 업고 있는, 거듭나지 않은 본성에서 나오는 모든 능력과 정욕이 자신을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기심과 교만은, 저희를 죄악적인 것으로 지적해 주는 것은 무엇이나 대항하여 싸우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배권을 쟁취하기 위해 애쓰는 악한 욕망과 습관을 스스로의 힘으로 이길 수 없다. 우리는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강력한 원수를 정복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 수 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자아와 또 자신의 의지와 습관을 정복하기를 바라신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의 동의와 협력이 없으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실 수 없다. 성령은사람에게 주어진 기능과 능력을 통하여일하신다. 우리의 정력은 하나님과 협력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MB 141.3 매 발걸음마다 열렬히 기도하며 자아를 낮추는 일 없이는 승리를 얻을 수 없다.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능력에 억지로 협력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발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성령의 감화보다 백배나 더 큰 강도(强度)로 그대를 강요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대를 하늘에 적합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단의 요새는 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대는 스스로의 힘으로 그대의 목적과 욕망과 성향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킬 수 없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이 그대를 위하여 그 일을 이루어 주시되 심지어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고린도후서 10 장 5 절) 하기까지 하실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빌립보서 2 장 12, 13 절)신다는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다. MB 142.1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하늘나라의 영광에 매력을 느끼고 있지만, 그것을 소유하는 데 따르는 조건들을 만족시키려고 하지 아니한다. 넓은 길에는 그들이 걸어가는 길에 완전히 만족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죄악의 속박에서 빠져나오길 열망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죄악적 습관에 대항하고자 애쓴다. 그들은 좁은 길과 좁은 문을 바라보나, 이기적 쾌락과 세상에 대한 애착과 교만과 성화되지 못한 야망들이 그들과 구주 105
산상보훈 사이에 담이 된다. 자신의 의지와 자신이 택한 애정의 대상, 혹 직업을 버리는 것은 희생을 요구하나, 그들은 이 때문에 주저하고 망설이며 돌아선다.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 하는 자가 많으리라”(누가복음 13 장 24 절). 그들은 선을 바라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어느 정도 노력을 하나 그것을 택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모든 것을 희생하고라도 선을 얻으려는 확고한 목적이 없다. MB 143.1 우리가 이기고자 할 때, 남은 한 가지 희망은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과 합치시키고 날마다 시간마다 그분과 협력하여 일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살리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만일 우리가 거룩하게 된다면, 그것은 자아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일을 통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교만과 자부심이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요구된 대가를즐겨 지불하고 있는가? 우리의 뜻을거리낌 없이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시키고 있는가? 기꺼이 그렇게 하기 전에는 회개시키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MB 143.2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은 믿음의 선한 싸움이다. 사도 바울은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로새서 1 장 29 절)고 말하였다. MB 143.3 야곱은 그의 생애의 큰 위기에서 기도했다. 그는 오직 한 가지 목적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것은 품성의 변화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을 때 원수인 듯한 자의 손이 그에게 닿았으며, 그는 밤이 맞도록 자신의 생명을 위하여 씨름하였다. 그러나 그의 영혼의 목적은 생명 자체가 위기에 놓였을 때도 바뀌지 않았다. 그의 힘이 거의 소진해졌을 때, 천사가 하늘의 능력을 발휘했다. 그분이 야곱을 치자, 야곱은 자기와 싸우고 있는 분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상처를 입고 속절없는 상태로, 그는 구주의 품에 쓰러져 축복을 구하였다. 그는 조금도 비켜나지 않고 간구를 계속하였다. 마침내,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힘을 의지하고 나와 화친하며 나로 더불어 화친할 것이니라”(이사야 27 장 5 절)고 한 당신의 약속에 따라 이 무력하고 회개하는 자의 간구를 들어 주셨다.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세기 32 장 26 절)고 하는 확고한 정신으로 간구하였다. 이 끈질긴 정신은 그 부조와 더불어 씨름하신 분에 의하여 심어졌다. 그에게 106
산상보훈 승리를 주신 분은 바로 이분이었다. 그분께서는 또 그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고치시고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 이니라”(창세기 32 장 28 절)고 말씀하셨다. 야곱이 자신의 힘으로 헛되이 씨름하여 얻고자 한 것이 자아의 포기와 확고한 믿음을 통하여 얻어졌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한일서 5 장 4 절). MB 144.1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마태복음 7 장 15 절) 거짓 교사들이 일어나 그대를 좁은 길과 좁은 문에서 떠나게 하고자 할 것이다. 그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있으나 속으로는 노략질하려는 이리이다. 예수께서는 거짓 교사와 참 교사를 구별할 수 있는 시금석을 주신다. 그분은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고 말씀하신다. MB 145.1 우리는 그들을 시험할때 그들의 훌륭한 연설과 고상한 말로하라는 명령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을 받아야 한다.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이사야 8 장 20 절).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지니라”(잠언 19 장 27 절). 이러한 교사들은 어떠한 기별을 전하는가? 그것이 그대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하고 두려워하게 하는가? 그것은 그대로 하여금 그분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일을 통해 그분을 향한 그대의 사랑을 나타내게 하는가? 사람이 만일 도덕상 율법의 중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교훈을 경하게 여긴다면, 하나님의 계명 중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그렇게 사람들을 가르친다면, 하늘에 의해 존중히 여김을 받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주장이 근거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흑암의 왕, 곧 하나님의 원수에게서 나온 일을 하고 있다. MB 145.2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하고 그분의 휘장을 달고 있다고 해서 모두 그분의 백성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나의 이름으로 가르쳐 온 많은 사람들이 마침내 부족함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MB 145.3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스스로 바르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도를 그들의 주라고 주장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큰일을 하고 있노라고 공언하지만 그들은 죄악의 일꾼들이다. 107
산상보훈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에스겔 33 장 31 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는 그들에게 이런 사람과 같다. “그들이 너를 음악을 잘하며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준행치 아니하거니와”(에스겔 33 장 32 절). MB 146.1 말로만 제자라고 하는 것은 아무 가치가 없다. 영혼을 구원하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제시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은 “믿어라, 믿어라, 그러나 율법을 지킬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순종으로 이끌지 않는 믿음은 가정일 뿐이다. 사도 요한은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요한일서 2 장 4 절)다고 말한다. 특별한 섭리나 이적적현상이, 하고 있는 사업이나 주장하는 이상의 진실성을 반드시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을 아무도 품지 못하게 하라.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하게 말하고 그들의 인상과 느낌과 행동을 거룩한 표준보다 높이 여길 때, 우리는 그들에게 빛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MB 146.2 순종은 제자가 되는 시금석이다. 우리가 사랑을 말할 때 이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가 받아들인 교리가 마음속에 있는 죄를 소멸시키고, 심령을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하고 성결의 열매를 맺으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진리임을 알 수 있다. 자비, 친절, 긍휼, 동정이 생애에 나타날 때, 의로운 일을 하는 기쁨이 마음속에 있을 때, 그리스도를 높이고 자기를 죽일 때,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바른 상태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한일서 2 장 3 절). MB 146.3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마태복음 7 장 25 절)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크게 감동되었다. 진리의 원칙들이 담고 있는 거룩한 미가 그들을 끌었으며, 그리스도의 엄숙한 경고가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음성처럼 그들에게 들렸다. 그분의 말씀이 그들이 전에 가졌던 사상과 견해의 뿌리를 뒤흔들었다. 바꿔 말해, 그분의 가르침에 순종하려면 모든 사상과 행동의 습관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종교 지도자들과 충돌케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랍비들이 여러 세대 동안 지켜 온 관습이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의 108
산상보훈 마음이 그분의 말씀에 반응을 나타내기는 하였으나, 그 말씀을 그들의 생애의 지침으로 받아들이고자 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MB 147.1 예수께서는 당신이 하신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놀랍도록 생생하게 보여 주는 일례를 들면서 산상에서의 교훈을 마치셨다. 구주의 주변에 모여든 무리 가운데는 갈릴리 바다 부근에서 생애를 보낸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산 중턱에 앉아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동안 계곡과 산골짜기로 흐르는 시냇물이 바다를 찾아 흘러내려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여름에는 종종 이 시내들이 말라서 먼지가 나는 바닥만 남긴 채 완전히 없어져 버리곤 했다. 그러나 겨울의 폭풍우가 언덕 위에 쏟아지면 강은 맹렬하고 사나운 물결로 바뀌는데, 때로는 골짜기를 가득 채우며 저항할수 없는 거센 물살로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가끔은 얼른 보기에 위험이 없을 것 같은, 농부들이 초원에 지어 놓은 농막들도 휩쓸려 떠내려갔다. 그런데 산 위 높은 곳에는 바위 위에 지은 집들이 있었다. 그 지역 어떤 곳에는 완전히 돌로 지은 집들도 있었다. 그 중 많은 수가 폭풍우에 천 년을 견디어 왔다. 이 집들은 수고와 고생을 하며 지은 것들이었다. 이 집들은 접근하기가 쉽지 않고, 또 위치가 초원보다 인기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것들은 바위 위에 지어졌으므로 바람과 폭풍우가 몰아치고 홍수가 닥쳐도 이상이 없었다. MB 147.2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품성과 생애의 기초로 삼는 자는 반석 위에 이 집들을 지은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여러 세기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이사야 40 장 8 절)고 기록하였다. 베드로도 산상 설교가 있은 지 훨씬 후에 이사야의 이 말을 인용하면서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베드로전서 1 장 25 절)고 부언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이 알고 있는 하나밖에 없는 불변의 것이다. 그것은 확실한 기초이다. 예수께서는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 24 장 35 절)고 말씀하셨다. MB 148.1 율법과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위대한 원리가 산상에서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 가운데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누구든지 말씀 위에 집을 짓는 자는 그리스도 곧 만세 반석 위에 집을 짓고 있다.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들만이 그분 위에 집을 짓고 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린도전서 3 장 11 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109
산상보훈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사도행전 4 장 12 절). 말씀이시며 하나님의 계시이신, 다시 말해 그분의 품성과 그분의 율법과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생명의 현현이신 그리스도께서만이 우리가 영구적인 품성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기초가 되신다. MB 148.2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그분 위에 집을 짓게 된다. 단순히 의를 즐기는 자가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의를 행하는 자가 의로운 사람이다. 거룩하게 되는 것은 황홀경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친 결과이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이 가까운곳에 장막을 쳤을 때 가나안에 대한 지식을 갖거나 가나안의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는 그 좋은 땅의 포도원과 감람나무 수풀이 그들의 소유로 주어질 수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시를 순종하는 가운데 그 땅을 점령함으로써, 조건에 응함으로써, 하나님을 믿는 산 믿음을 활용함으로써, 그분의 약속을 그들의 것으로 삼음으로써 이를 실제로 그들의 소유로 만들 수 있었다. MB 149.1 신앙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은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무 자격이 없는 우리가 그분의 사랑의 선물을 받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구원의 근거를 단순한 신앙 고백이 아니라 의로운 행동을 통해 나타나는 믿음에 두신다. 단순히 말만 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기대되고 있다. 품성은 행동을 통하여 형성된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로마서 8 장 14 절). 하나님의 자녀란 단순히 마음으로만 성령에 의해 감동을 받거나 가끔 그 능력에 굴복하는 자들이 아니고 성령에 의해 인도되는 자들이다. MB 149.2 그대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만 어떻게 시작할지 모르고 있는가? 그대는 암흑 가운데서 빛을 어떻게 찾을지 모르고 있는가? 그대가 가지고 있는 빛을 따르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에 순종하려는 마음을 가지라. 하나님의 능력과 그분의 생명은 그분의 말씀 가운데 있다. 그대가 믿음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일 때, 그것은 순종할 능력을 주게 될 것이다. 그대가 소유하고 있는 빛에 유의할 때, 더 큰 빛이 오게 될 것이다. 그대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집을 짓고 있으므로 품성이 그리스도의 품성과 같은 모습으로 형성될 것이다. MB 150.1 참된 기초가 되는 그리스도는 산 돌이시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그분 위에 집을 짓는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진다.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베드로전서 2 장 5 절). 110
산상보훈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에베소서 2 장 21 절) 간다. 돌들이 기초와 하나가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의 공통적인 생명이 모든 사람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어떤 폭풍도 그 건물을 무너뜨릴 수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MB 150.2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으면 모두가 그분과 함께 사느니라.” MB 150.3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은 전부 무너질 것이다.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인간적인 사상과 견해, 인간이 고안한 형식과 의식의 기초 위에 혹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상관없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어떤 활동 위에 집을 짓는 자는 품성의 집을 흐르는 모래 위에 세우고 있는 것과 같다. 맹렬한 유혹의 폭풍우가 모래로 된 기초를 휩쓸고 그의 집을 세월의 해변에 하나의 난파선으로 남게 할 것이다. MB 150.4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나는 공평으로 줄을 삼고 의로 추를 삼으니 우박이 거짓의 피난처를 소탕하며 물이 그 숨는 곳에 넘칠 것인즉”(이사야 28 장 16, 17 절). MB 151.1 그러나 오늘날 자비는 죄인들에게 호소한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에스겔 33 장 11 절). 오늘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발하는 음성은 주께서 사랑하는 성을 바라보실 때 마음의 고통을 안고 부르짖으시던 그 음성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누가복음 13 장 34, 35 절).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당신의 은혜를 거절하고 멸시한 세상의 표상을 보셨다. 아, 완고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여! 그분께서는 그대들을 위하여 울고 계셨다. 예수께서 산 위에서 눈물을 흘리고 계시던 당시만 해도 예루살렘은 회개하고 멸망을 피할 수 있었다. 하늘의 선물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잠시 동안이나마 그때까지도 예루살렘이 당신을 받아들이길 기다리셨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사랑의 111
산상보훈 음성으로 그대들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 장 20 절).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린도후서 6 장 2 절). MB 151.2 자신에게 소망을 두고 있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절박한 멸망을 피하는 데에는 아직도 영영 늦은 것은 아니다. 폭풍우가 몰려오기 전에, 확실한 기초로 피신하라.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이사야 28 장 16 절).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이사야 45 장 22 절).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 41 장 10 절). “영세에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욕을 받지 아니하리로다”(이사야 45 장 17 절). MB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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