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5
제20호
2015.5
오늘 노동자는 뭐 먹지?
www.laborparty.kr
값 10,000원
특집
오늘노동자는뭐먹지? 기획 ■ 2015년 정치개혁, 그 방향을 묻다 숨은 문화예술 당원 찾기 ■ 대중음악+힙합 평론가 김봉현 “가장 왼쪽 최전선에 적(籍)을 두고 싶었다”
표지 이야기
대중음악+힙합 평론가 김봉현
“가장 왼쪽 최전선에 적(籍)을 두고 싶었습니다”
미래에서 온 편지 제20호 발행인 나경채
“가장 직설적으로 이상을 외치는 진영, 가장 왼쪽 최전선에적(籍)을 두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거
편집인 이장규 위원회 김건담 김성현 노정 박권일 장석준 정정은 정철수
조윤호 최백순 홍원표
창한 무엇이 아니다. 김봉현은 스스로를‘탈-물질
교 열 정정은
성향’ 으로 규정한다. 천성적으로 물질에 대한 욕심
디자인 고미숙
이 없으며, 작은 집에서 먹고 살만하면 그만이라고 한다. 단지 자신이 실력으로 인정받고 타인을 실력
등록일 2013년 6월 11일 (등록번호 영등포, 라00407)
으로 존중하는 삶이면 만족한다. 이런 가치관이 꼭
발행일 2015년 4월 26일
시대 때문일까?‘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 은 아주 오 래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하나둘 늘어나는 중이다. 그리고, 그래야 한다. 사진 : 박성훈 홍보실장
* 김봉현 당원의 인터뷰 전문은 112~117쪽 <숨은 문화예 술 당원찾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주 소 서울 영등포구 국회대로 664 한흥빌딩 2층 노동당 전 화 02) 6004-2006, 2007 팩 스 02) 6004-2001 이메일 laborzine@gmail.com 홈페이지 www.laborparty.kr 인 쇄 인천시 계양구 계산동 973-15 원일컴 가격 10,000원
미래에서 온 편지
‘ 미래에서 온 편지’ 는 영국의 사회주의 사상가이자 작가, 미술가인 윌리엄 모리스가 1891년에 낸 소설 제목
News 『News from Nowhere』 을 우리말로 의역한 것입니다. from Nowhere
nowhere는 ‘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 이라는 뜻입니다. ‘ 유토피아’ 라는 말의 원래 의미도 ‘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 이라고 하지요. 이제 노동당의 기관지에 ‘ 미래에서 온 편지’ 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한국 사회의 답답한 현재에 햇살을 들이는 미래의 틈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러고 보니 nowhere는 now+here(지금 여기)이기도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미래가 되기 위해, 이 편지를 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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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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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띄우며 음식도 정치도 우리 모두의 일|<미래에서 온 편지>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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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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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여기 노동당 ■ 나경채 대표 담화문 노동당 동지 여러분께 드리는 글
특집 ■ 노동자는 오늘 뭐 먹지? 14 먹을거리와 정치 그리고 노동자|박상현 19 음식 저널리즘은 없다|이오성 23 2015년 라면 랩소디|정은정 28 나는 왜‘혼밥’ 을 두려워하나|이춘희 32 내일은 뭘 먹지? 정치가 정한다!|김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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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진보정치 열전 5|마포당협 대의원 이가현 “당을 지키는 마지막 사람이 되고 싶어요” |김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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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르포 불안한 삶들의 연대, 알바노조|서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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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포럼 학교운동장 인조잔디, 더 민주적으로 더 안전하게|김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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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현장에서 ‘노동당원’ 다운 삶을 살아가는 행복|김일규
2015년 5월 제20호
·목차
기획 ■ 2015년 정치개혁, 그 방향을 묻다 38
정치관계법 개정운동에 당의 생사를 걸어야|윤현식
42
2015년 정치개혁,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이지현
46
선거제도개혁과 개헌 논의에 관한 녹색당 내 논의 기류|김은희
78
먼 좌파 이웃 좌파 ⑭ 포데모스, 더 깊이 들여다보기|장석준
84
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버스냐, 지하철이냐” 를 벗어나야 제대로 된
도시교통 정책이 보인다|김상철 90
연속기획 한국 대학 체제의 형성 ⑤
7.30 조치가 빚은 혼란과 대학 정책의 전환|김예찬
삶과 문화 94
동아시아 시민운동사 재일조선인 문제는 좌파에게‘어떤’문제인가?|임경화
98
성정치칼럼 지지와 연대가 만들어내는 무지개 색 기적|류홀릭
102
오덕칼럼 시련에 내몰린‘소녀’ 들|김만하
108
오보로 보는 한국언론 민망했던 말 바꾸기, 종편의 5.18 왜곡보도|조윤호
112
숨은 문화예술 당원찾기 대중음악+힙합 평론가 김봉현
“가장 왼쪽 최전선에 적(籍)을 두고 싶었다” |나도원 118
불온한 서재 남성과 여성을 넘나드는 젠더의 자유|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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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의 꿈 오월의 노래 2|민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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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파견의 품격?|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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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접으며 싱가포르와 진보정치|박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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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띄우며
음식도 정치도 우리 모두의 일
이번 호의 특집은‘음식’ 입니다. 진보정당의 기관지에서 음식을 다룬다니 조금은 독특하다고 느끼는 분들도 계실 듯합니다. 하지만 음식은 우리의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며, 그 사회의 문화를 보여주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정치를 단순히 권력놀음이 아니라 이 사회를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꾸 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한다면, 사람들의 일상과 문화야말로 진보정치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영역입니다. 한국 노동자들의 일상에서 음식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요? 평소에는 집에서 밥 한 끼 먹기 힘들다가, 모처럼 시간이 나면 이벤트처럼‘맛집’ 을 찾아 외식을 하는 때가 많습니다. 싸고 맛있는 맛집 정보는 인터 넷에 넘쳐나지만, 그 식당 사람들의 장시간 노동은 거의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 자체가 돈을 벌기 위한 또 하나의 수단일 뿐이라 여기니까요. 음식은 원래 친한 사람들과 시간을 들여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먹을 때가 제일 좋습니다. 하지만 한국 의 장시간 노동체제는 이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이와 동시에 음식은 다른 사람의 장시간 노동에 의해 만 들어진 상품으로 취급받거나 불평등한 성역할에 기반을 둔 가사노동의 대상으로만 취급됩니다. 음식을 먹는 행위조차 철저한 자본주의 분업체제의 일부분입니다.
맑스가《자본론》 에서‘자유의 왕국’ 의 필수조건으로 노동시간의 단축을 이야기하고,《독일이데올로 기》 에서‘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며 밤에는 토론하는’사회가 이상적인 사회라고 이야기했던 이유는 결국 철저한 자본주의 분업체제가 가져오는 인간성의 파괴를 비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통 찰은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 더 절실합니다. 맹목적인 성장을 위한 톱니바퀴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 그 자체로 대접받는 사회가 우리의 꿈입니다. 이 찬란한 꿈을 위하여, 우리는 오히려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정치가 그 꿈을 이루는 수단이 되기 위해 서라도 우리는 현실의 제도개선 등 작은 전진에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개혁 논의를 담은 기획에도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여주시기 바랍니다.
관악을 보궐선거는 우여곡절 끝에 불출마로 결정되었습니다. 그 과정에 대한 글이 실리지만 그에 대한 당원들의 평가는 다양하리라 생각합니다. 그 평가를 가슴 속에만 담아두지 마십시오. 정치는 선거에 나가 는 후보자나 당 간부 등 일부만의 일일뿐 나와는 큰 상관이 없다는 생각 또한 자본주의 분업체계에 바탕을 둔 잘못된 생각입니다. 정치는 당원 모두의, 아니 우리 모두의 일입니다. 5월 광주가 가장 아름다운 정치 공동체였듯이. 2015. 4. 26 <미래에서 온 편지> 편집팀 드림 4
구독자 모집 오늘 우리의 한 걸음이 길을 엽니다. 미래가 됩니다. 우리는 길을 내는 사람들입니다. 노동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 사람과 자연이 공존 가능한 지구생태계, 차별과 소외 넘어 모두가 평등한 세상, …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밑그림을 그려나가면서 없는 길을 만들고, 스스로 길이 됩니다. 그래서 노동당의 꿈은 곧 <미래에서 온 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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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여기 노동당
나경채 대표 담화문
노동당 동지 여러분께 * 드리는 글
* 2015년 4월 14일, 노동당 홈페이지 당원게시판에 올라온 나경채 대표의 글입니다. 대변인실의 수정을 거쳐, 문장만 다듬은 전문 을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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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원 동지 여러분, 당 대표 나경채입니다.
지난 4월 10일, 관악을 선거구의 예비후보였던 저는 공동정책합의에 기반을 둔, 국민모임과의 후보단 일화 및 불출마 입장을 밝혔습니다. 여러모로 안타까운 마음이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이를 두고 불가피 한 결정이라고 여기는 분도 계시지만, 이견과 실망도 있다는 것을 압니다.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며 그 간의 과정과 판단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애초에 이번 4.29 재·보궐 선거에서 당 대표의 출마를 유력하게 검토하게 된 이유는 박근혜 정권 심 판, 제1야당 교체라는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몇 가지 현실적 조건을 고려했기 때문입니다. 관악(을) 출마를 막 추진하던 시기에 정의당의 이동영 후보가 출마했으나, 이는 양당의 호혜적 논의를 통해 단일화 합의에 이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습니다. 국민모임의 경우는 정동영 후보가 불출마 입장을 고수 중이었기에 출마 가능성이 낮았고, 노동정치연대는 후보 출마 계획이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출마한다면 지역 활동의 축적, 당협의 상황, 지역 내 인지도 등 여러 모로 볼 때 노 동당·정의당·노동정치연대·국민모임 4자 차원에서 노동당을 중심으로 후보단일화가 이루어질 가능 성이 높다고 판단했습니다. 저로 단일화가 이루어지면 관악(을) 선거구도는 새누리당 오신환·새정련 정 태호·노동당의 진보단일후보 나경채 3자 구도가 되고, 이런 경우 우리가 유의미한 득표를 얻을 가능성 이 높았습니다. 여론조사에서도 8% 정도의 지지율이 나왔고, 선거 기간에 당력을 모은다면 10% 이상 득 표도 가능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출마를 통해 국민의 눈과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는 선거구에서 노동당을 적극 알리고, 진보진영 선거연대의 모범을 만들고, 유의미한 득표를 얻음으로써 새로운 진보정치의 가능성을 국민 앞 에 확인시키는 일이 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제가 적극적으로 출마를 추진한 이유입니다. 실제로 출마 선언 이후, 정의당과는 호혜적 논의를 지속하고 국민모임과도 지속적으로 협의하며 노동당의 입장을 설 득하는 중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동영 후보가 출마하겠다며 기존의 입장을 바꿨습니다. 이로 인해 진보4자 선거연대 논의 및 우리의 선거전략에 큰 혼란이 발생했습니다. 저희는 이에 대해 강력히 항의했습니다. 그러나 국 민모임도 후보를 출마시킬 자격을 가진 하나의 정치세력이고, 현실적으로 정동영 후보 출마 자체를 원점 으로 되돌리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국민모임 정동영 후보가 출마한 상황에서 후보별 지지율에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정동 영 후보 지지율은 여론조사 기관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우리에게는 저와 이동영·이상규 진보성향의 세 후보 지지율이 모두 1~3%대로 떨어진 것이 중요한 변화였습니다. 정동영 후보의 출마로 새정치민주연합 지지 성향의 표가 갈라지기보다는 진보후보들의 지지율이 빠지는 현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더군다나 재·보궐 선거는 평일에 치러지는 선거로서 투표율, 특히 젊은 층의 투표율이 낮아 조직표를 지금+여기 노동당 7
4기 2차 전국위원회에서의 나경채 대표 (사진 : 박성훈 홍보실장)
가진 기존 정당과 보수 정치세력에게 유리하다는 사실이 여러 번의 선거로 증명되었습니다. 이를 감안하 면 여론조사 지지율보다 낮은 지지율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대략 지난 4일, 4기 2차 전국위원회 직전까지의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후보 출마를 진행하는 한편, 선거연대 또한 고려하지 않기는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러한 판단에 따라, 저는 필요 할 경우, 그리고 공동정책과 전망에 대한 합의가 가능할 경우에는 선거연대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2차 전 국위위원회 후보인준 과정에서 전국위원들께 밝혔습니다. 이런 내용은 전국위원회 전에 부대표들과도 공 유했습니다. 이후 저는 관악(을) 지역에서 열심히 선거운동을 진행하며 모든 가능성에 대비를 해 나갔습 니다.
그리고 4월 7일, 국민모임 쪽에서 중앙당을 방문했습니다. 국민모임의 김세균 대표, 정동영 후보가 당 사를 방문하여, 국민모임 내부 혼선과 정동영 후보 출마로 인해 심려를 끼친 일에 대해 정중히 사과하며 선거연대를 제안했습니다. 제안 내용은 공동정책뿐만 아니라 새로운 진보정당의 상-국민모임이 지향하 고자 하는 정당의 상-에 대한 상당히 진전된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관련내용 : http://goo.gl/vTS2p0) 저는 국민모임의 사과를 수용하고, 4자 선거연대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국민모임과의 후보단일화를 포 함한 선거연대 논의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권태훈 부대표를 실무협상 대표로 지명하여 실무협 상을 진행하도록 했습니다. 이에 따라 권태훈 부대표는 9일 11시에 국민모임 양기환 사무총장과 실무협의 8
를 진행했습니다. 실무협의를 진행하면서, 우리는 국민모임이 제안한 공동정책에 대표단회의에서 논의한 재·보궐 선거 5대 정책 및 노동관련 정책을 반영하고,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과 관련하여 2013년 3기 1차 전국위원회에 서 결의한 진보재건 4대 원칙을 반영하는 안을 제안했습니다. 이를 국민모임이 대폭 수용하여 실무협의 차원의 합의문이 도출됐습니다. 실무협의를 통해 국민모임의 제안에 추가하거나 수정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금 길더라도 그대 로 옮깁니다. 이 중 굵은 글씨로 표시된 부분이 추가 및 수정된 부분입니다.
[4.29 재·보궐 선거 공동정책] 1. 비정규직 문제 해결 및 노동 주도 경제 회생 •최저임금 1만원 실시 / CEO 최고임금제 도입 •동일업종 동일노동 동일임금 법제화 / 기간제 사용 사유 제한 도입 / 파견근로제 철폐 / 특수고용직 노 동자의 노동자성 인정
2. 보편복지 확대 •전면 무상급식 유지 / 공공보육 확대 / 진료비상한제 및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 노후안정을 위한‘노인 기본소득’제공 •사회복지를 위한 목적세 도입 / 개인소득세 및 법인소득세 최고세율 인상 / 대기업 세금감면 철폐 / 종 교인 과세 / 기업 이익분배법 도입
3. 민생 경제 및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실현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에 노동자 경영참가를 의무화 /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지원 •소득연동형 전월세 상한제로 임대료 통제 / 국민연금기금으로 투기주택 매입 등 통한 사회주택 확대
4. 핵발전소의 단계적 철폐 및 세월호 진상규명 •고리, 월성 등 노후 원전 폐쇄 / 신규원전 건설 중단 •세월호 사건 철저한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
5. 민주주의 되살리는 정치대개혁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확대 / 대통령 및 지방자치단체장 결선투표제 도입 •교육감 선거부터 단계적으로 선거권 연령을 인하
[새로운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의 원칙] 1. 진보재편에 따라 건설될 새로운 진보정당은 노동자와 서민, 특히 비정규직, 청년, 자영업자, 여성, 장애 인, 성소수자 등 가난하고 차별받는 소수자들과 함께 우리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추구하는 정당이다. 2. 새로운 진보정당은 진보정치의 독자적 성장을 전제로 신자유주의를 극복하고 대안사회를 건설하려는 지금+여기 노동당 9
다양한 사상과 노선이 공존하는 정당이다. 3. 새로운 진보정당은 대중과 함께 현실정치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정당으로, 노동운동 등 사회· 대중운동 및 지역 풀뿌리 활동에 뿌리를 두고 함께 성장하는 정당이다. 4. 새로운 진보정당은 당원의 책임과 권리를 이행하는 진성당원제를 바탕으로 패권주의를 배척하고 당원 들이 당직 및 공직후보 선출과 당의 주요사항을 결정하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정당이다. 5.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은 노동당·정의당·노동정치연대·국민모임 4자 논의를 기본으로 진행하며, 취 지에 공감하고 원칙에 동의하는 개인 및 세력과 폭넓게 함께 한다.
우선 공동정책과 관련해서는, 기존의 국민모임안도 우리 당의 입장을 많이 반영했지만 여기에 CEO최 고임금제, 노인기본소득, 기업 이익 분배법,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에 노동자 경영 참가 의무화 등 자본을 통제하고 노동자 서민의 권리를 강화하는 정책을 추가했습니다. 또한 세월호 사건과 관련한 철저한 진상 규명을 추가했고, 청소년 선거권 연령 인하에 대한 내용도 추가했습니다. 합의한 안은 기존 공동정책 합 의에 비해 노동당의 주장이 거의 반영된, 상당히 진전된 정책합의였습니다. 합의의 성격에 대한 오해가 있어 최종합의에서는 제외하기로 했지만,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의 원칙도 우리당의 3기 1차 전국위에서 결정하고 이번 4기 2차 전국위원회에서 진보결집의 원칙으로 재확인한 진 보재건 4대원칙인 ▶자본주의 극복, 사회주의의 이상과 원칙 계승하며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이념의 재 정립 ▶보수야당과 구별 정립되는 진보정당의 독자적 성장 발전노선 ▶확고한 대중정당, 현실정당으로서 활동상의 정립 ▶패권주의 일소와 민주적 절차 확립이 문구 그대로는 아닐지라도 내용 상 모두 반영되었 습니다. 이 합의문이 최종 결정된다면, 국민모임은 노동당의 진보결집 4대 원칙에 기반을 두고 노동당과 정책 적 동질성이 강한 정당으로 가는 이정표를 마련하게 되고, 국민모임의‘좌익화(?)’ 에 노동당이 의미 있는 역할을 했다고 할 만합니다. 다만 서울시당이 이 합의문(안)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정책합의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하지만 새로운 진보 정당의 원칙에 대한 내용은 선거연대의 범주를 넘는 안이라는 의견을 채택한 바, 이를 존중하여 결과적으로 선거연대 최종 합의문에서‘새로운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의 원칙’ 은 제외하고,‘4.29 재·보궐선거 공동정 책’ 만을 선거연대의 합의문으로 결정하였습니다. (관련 내용 : http://goo.gl/e7Nggp)
실무합의가 나왔다고 해도 정치적 판단은 여전히 남은 상태에서 10일 오전 대표단회의가 열렸습니다. 저도 그렇고 대표단 모두 참 고민이 많으셨을 겁니다. 여러 가지 의견과 질문이 나왔습니다. 최승현·문 미정 부대표는 후보 등록 및 완주가 필요하다고 주문하셨고, 김윤희·권태훈 부대표는 정책합의 내용을 살리는 방향으로 가는 쪽이 좋겠다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저는 10일 대표단 회의까지 어떤 방향으로든 확신 있는 판단을 유보한 상태였습니다. 전날 밤에 당원 10
동지들께 드리는 담화문의 방향을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두 방향의 글을 모두 쓸 수밖에 없기도 했습니다. 대표단 회의를 통해서도 어떤 확신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등록이나 후보 단일화 합의의 여부에 대해서 대표가 최종적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였고, 대표단회 의에서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당의 고문님들, 시도당 위원장님들, 이번 선거에 관심을 보여주셨던 여러 동지들과 한참 동안 전화상 으로나마 상의를 하고 얘기를 주고받았습니다. 관악(을) 지역의 핵심적인 지지자 주민들과도 통화를 했습 니다. 이 과정에서 고통스러웠지만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일단 완주가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선거전략과 외부 상황이 변해온 과정은 앞에서 자세히 말씀드렸으므로 다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간의 지역 활동 성과와 진보후보 단일화를 통해 노동당 을 알리고 의미 있는 득표로 정치적 성과를 얻으려던 계획은 목표 달성이 어렵게 됐다고 판단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여론조사 결과 추이와 재·보궐 선거의 특성, 그리고 현재 우리의 선거 준비 정도를 감 안하면 선거 결과가 좋지 않으리라 예상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한다고 해도, 불리한 구도에서 상대 후 보에 비해 열악한 준비와 상황을 극복하기에는 3주의 기간은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현실은 현 실이지요. 이런 현실에서 대표가 출마를 강행하여 좋지 않은 선거 결과가 나온다면 당의 위상이 더욱 추락하리라
국민모임이 제출한 4.29 재·보궐선거 연대 제안서 (사진 : 박성훈 홍보실장)
지금+여기 노동당 11
생각했습니다. 4자 연대를 추진했으나 4자 중 하나인 국민모임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도 바람직하지 않았 습니다. 성과는 없는 채로 감수해야 할 것들만 많은 상황이었습니다. 당원들의 바람은 완주를 위한 완주가 아니라 의미 있는 완주일 텐데, 완주 후 당에 대한 실망감만 쌓일 가능성이 높은 완주라면 대표단이 정치적 판단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현실 정치세력이므로 냉정한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완주를 하지 않는다면, 그동안 의 성과를 최대한 보존하면서 단일화를 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국민모임과의 정책연대의 성과가 결코 작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정체성을 분명히 하지 못한 국민모임이 대중적 진보정당 노선을 분명히 하게 만들고, 우리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가져올 만한 정책을 수용하는 데 노동당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향후 새로운 진보정당의 건설 과정에서 이는 유의미한 성과로 나타날 것입니다. 또한 일반 국민의 시각에서는 자칫 진보진영이 제각각 선거를 치르는 상태로 비쳐졌을지도 모르는 상 황에서, 관악(을) 단일화를 통해 진보세력이 연대를 지속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시키고 희망을 가질 만한 근거를 남겼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진보4자 연대에서 노동당의 노력이 일정 정도 인정받음으로써, 이 후 진보진영의 연대와 협력을 강화하는 국면에서 당의 정치적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증가하게 되리라 생 각합니다.
저는 이런 이유들로 국민모임과의 후보단일화 추진이 대승적인 차원에서 불가피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만, 저는 현 상황에서 이것이 노동당을 위한 최선의 결정이라고 생각했습 니다. 쓰다 보니 무척 긴 글이 되었습니다. 이상의 과정과 결과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지신 당원 동지들도 많 이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대부분 공감할 부분이 많은 말씀들이고, 이에 대해서는 이후에도 경청하며 토론 도 하고 의견도 드리겠습니다. 새순이 돋고 꽃이 핀 지 오랜데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합니다. 부디 건강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당 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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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노동자는 오늘 뭐 먹지? 2015년 한국을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밥상도‘시스템’ 의 산물입니다. 이 시스템은 누가, 어떻게 결 정할까요? 한국인의 끼니, 그 실체를 드러내고 오늘날의 음식문화 지형도 살펴봅니다. 궁극적으 로는 한국 노동자들의‘행복한 밥상’ 이 어떻게 가능할지 그 대안적 접근법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특집 노동자는 오늘 뭐 먹지? 13
특집 / 노동자는 오늘 뭐 먹지?
먹을거리와 정치 그리고 노동자 오늘날 한국에서 벌어지는 먹거리 문제의 대부분은 농민의 나라에서 노동자의 나라로 바뀌는 그 지점에서 발생한다. 대한민국은 노동자의 나라다. 대한민국의 음식은, 노동자의 음식이어야 한다.
박상현 맛칼럼니스트,《일본의 맛, 규슈를 먹다》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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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먹느냐’ 를 고민하는 시대의 도래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다.” 그렇다. 우리가 습관처럼 되뇌는 이 문장 속에 사실 모든 답이 있다. 인간이 힘겨운 노동을 감수하고 인 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최저)임금을 위해 투쟁하는 것은 모두 먹고 살기 위한 발버둥이다. 한때는 끼니를 때우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던 적도 있다.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해야 했던 시절의 노동 은 곧‘밥벌이’ 다. 나랏님의 가장 큰 과제 또한‘먹고사니즘’ 이었다. 세종대왕은‘나라는 백성이 근본이 고, 백성은 먹을 것이 하늘이다(國以民爲本 民以食爲天)’ 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이후로도《조선왕조실록》 에 이 말이 여섯 차례나 더 나온다고 한다. 결국 백성의 끼니를 살피고, 굶는 백성이 없도록 하는 것이 왕 의 역할이었던 셈이다. 독재자 박정희의 업적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통일벼’ 의 개발을 꼽는다. 1960년대까지 이 땅의 국민들에게는 쌀의 절대량이 부족했다. 박정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로지 수확량에만 초점 을 맞춘 벼 품종의 개발을 독려했다. 1971년 탄생한 통일벼는 기존 벼 품종 대비 40%나 높은 수확량을 자 랑하며‘기적의 볍씨’ 로 불렸다. 덕분에 쌀 자급률이 비약적으로 증가했고‘보릿고개’ 라는 말도 점차 잊혀 져갔다. 하지만 맛은 없고 오로지 생산량만 많았던 통일벼는 그 유일한 장점 때문에 오히려 애물단지로 전락한 다. 쌀 자급률이 높아지자 통일벼는 더 이상 소용이 없었다. 1991년을 마지막으로 통일벼라는 품종은 이 땅의 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아마도 통일벼가 사라지던 그 즈음을 전후해서였을 거다. 이제 사람들의 관심사는‘먹느냐 못 먹느냐’ 에서‘무엇을 먹느냐’ 로 발전하게 된다. 비로소 잘 먹고, 제대로 먹는 것을 고민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 다. 바야흐로 먹는 문제에 있어 인간의 기본권이 보장되고 개인의 선택이 존중되는 신세계가 열리는 줄 알았다.
자본의‘화장발’ , 선택을 강요하다 그런데 웬걸! 배고픔이 사라지니 의외의 복병이 나타났다. 식품산업과 외식시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 자 대기업이라는 자본이 적극적으로 끼어들기 시작했다. 식재료의 생산은 대량생산과 획일화라는 시스템 의 지배가 시작된다. 우루과이라운드와 FTA 체결 등으로 외국의 자본과 수입 식재료까지 무차별적으로 상륙하기에 이른다. 자본은 염치가 없고 시스템은 효율성과 수익성을 최고의 가치로 친다. 나랏님들은 백성을 위하는 시늉 이라도 했건만, 자본과 시스템에게 명분은 그저 거추장스러울 따름이다. 오로지 다양한 브랜드와 현란한 마케팅으로 소비자를 유혹한다. 마트와 편의점에 가면 먹거리가 넘쳐나지만 실상 그 본질을 헤아려보면 특집 노동자는 오늘 뭐 먹지? 15
반복과 변주를 거듭할 뿐 단순하기 그지없다. 선택의 폭이 넓어졌고 각자의 기호와 예산에 따라 합리적인 소비가 가능한 세상에 산다고 생각하지만, 이
선택은 소비자의 몫이 아니다. 브랜드 와 마케팅이라는‘화장발’ 에 속아 이를
는 착각이다. 오늘날 소비자는 염치없는 자본 과 효율성이라는 시스템에 의해 철저하게 걸러 진, 제한된 선택만을 강요받는다. 선택은 소비
인지하지 못할 뿐, 선택은 자본과 시스
자의 몫이 아닌 자본과 시스템의 몫이다. 브랜
템의 몫이다.
드와 마케팅이라는‘화장발’ 에 속아 이를 인지 하지 못할 뿐이다.
여기에 미디어는‘푸드 포르노’ 라는 말로 상징되는 화려한 요리프로그램과‘먹방’ 을 쏟아내며 자본의 나팔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포르노에는 서사와 의미가 없다. 보다 자극적인 영상과 사운드로 관객의 말초신경을 자극할 뿐이다. 관객을 얼마나 흥분시키느냐가 곧 포르노의 완성도가 된다. 푸드 포르노 역시 마찬가지다. 음식에 담긴 스토리와 사회적 의미 따위는 애당초 관심 밖이다. 그저 화려하고 먹음직스러운 화면과 진행자나 게스트의 호들갑스러운 리액션이 있을 뿐이다. 화면이 화려하고 리액션이 강할수록 소 비자의 반응은 즉각적이고 즉시적이다. 오늘도 이 땅의 소비자들은 마치‘파블로프의 개’마냥 그 자극에 이끌려 맛집을 찾고 긴 행렬의 끝에서 기다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 쌀의 90%가 혼합미? 아울러 정보는 독점되어 있고 권력은 자본의 편에 서있다. 소비자는 자신이 먹는 음식이 어떤 과정을 통해 생산되고 유통되는지 알지 못한다. 국민을 위하는 척 제정된 법률과 제도는 기실 자본의 이익을 극 대화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에게 가장 중요한 식재료는 쌀이다. 통일벼 이후 한국의 벼 품종 개발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에 올랐다. 현재 우리나라가 보유한 벼 품종은 260여 종에 이르고 그 중에서 매년 수십 종의 품종이 농가에 보급된다. 그럼에도 소비자는 각각의 품종의 특징은커녕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 이것은 소비자의 무관심이라기보다는 제도의 문제다. 양곡의 유통에 관한 제반 사항을 규정한 <양곡관리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양곡 포장지에 표시해야 할 ‘의무표시사항’ 을 법률로 규정하고 있다. 품목, 생산년도, 중량, 품종, 도정연월일 등을 의무적으로 표시 하도록 되어 있다. 이중‘품종’ 관련 표시사항을 보면“품종명을 표시하되, 품종명을 모르는 경우는 혼합 으로 표시하고, 품종을 혼합한 경우에도 혼합으로 표시한다” 라고 규정해놓았다.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이 규정이 뭐 그리 중요한 문제일까 싶지만 농협을 비롯한 양곡 유통업자에게는 수익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 제다. 만약 법률에서 품종을 의무적으로 표시하도록 하면 쌀은 그 보관과 유통에 있어 매우 철저하고 까 다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현재 시행중인 <양곡관리법 시행규칙>은 유통업자들이 이러한 부담으로부터 16
현재 시행중인 <양곡관리법 시행규칙>은 쌀의 까다로운 보관과 유통의 부담에서 유통업자들이 자유로울 수 있는 통로를 열어준 다. (사진 : KBS 소비자 리포트 방송화면 갈무리)
자유로울 수 있는 통로를 열어 준 셈이다.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날까? 현재 국내에는 1500여 개의 쌀 브랜드가 있다. 이중 10% 정도만 품종을 표시할 뿐, 나머지 90%는 혼합으로 표시되어 있다. 국가기관인 농업진흥청에서 아무리 좋은 품종을 개발 한들 유통단계에서 의미가 없어진다. 농민이 좋은 품종을 골라 애써 농사를 짓는다 한들 그에 합당한 가 격을 받을 수 없다. 무엇보다 소비자는 좋은 품종의 쌀을 선택할 기회를 박탈당한다. 법률이 이런 식으로 제정되는 이유는 농협을 비롯한 유통업자가 법률 제정에 압력을 넣을 수 있는 조직과 협상력을 가진 반 면, 소비자는 자신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국민에게 가장 중요한 식재료인 쌀의 상황이 이런 실정이니 식품산업 전체로 보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식품관련 법률이 생산자와 유통업자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을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대한민국의 음식은 노동자의 음식 결국 먹거리의 문제는 개인의 취향과 선택이 아닌 정치의 문제로 귀결된다. 언론 역시 푸드 포르노에 만 탐닉할 뿐 이런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유권자의 참여와 관심만이 정치를 바꾸듯 먹 거리 문제 또한 소비자의 적극적인 참여와 관심만이 답이다. 특집 노동자는 오늘 뭐 먹지? 17
우리시대 먹거리 문제에 관한 담론을 형성하고 올바른 식문화의 확산을 위해 만들어진‘사단법인 끼 니’ 는 그 창립선언문의 첫머리에서“대한민국은 노동자의 나라이다” 라고 선언한다. 이는 윤봉길 의사의 역사의식에 대한 오마주다. 농민운동가 출신이었던 윤봉길 의사는 그의 저서《농민독본》 에서 이렇게 밝 혔다. “우리 조선은 농민의 나라입니다. 과거 4천여 년 동안의 역사를 돌아볼 때 어느 때에 비록 하루라도 농 업을 아니 하고 살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역사의 첫머리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전혀 농민의 나라인 것은 감출 수 없는 사실입니다.” 1960년대 이후 4천여 년의 농민의 나라가 순식간에 노동자의 나라로 바뀌었다. 국민의 겨우 4%만 농 민일 뿐 절대 다수는 노동자다. 오늘날 한국에서 벌어지는 먹거리 문제의 대부분은 농민의 나라에서 노동 자의 나라로 바뀌는 그 지점에서 발생한다. 농민은 자급자족이 삶의 원칙이다. 스스로 먹을거리를 생산한 다. 먹고 남은 먹거리로 교환과 판매를 한다. 하지만 노동자는 먹을거리를 생산하지 않는다. 자신의 노동 력을 팔아 번 돈으로 먹을거리를 산다. 대
“대한민국은 노동자의 나라이다.”자본에게, 권력에게, 미디어에게 뺏긴 먹거리에 대한 선택권을 노동자가 가져야 한다.
한민국의 음식은, 그러니 당연히 노동자 의 음식이어야 한다. 먹거리 문제에서“대한민국은 노동자 의 나라이다” 는 선언은 그래서 중요하다. 자본에게, 권력에게, 미디어에게 뺏긴 먹
거리에 대한 선택권을 노동자가 가져야 한다. 결국‘먹고 살자고 하는 일’ 에 우리는 조금 더 치열하고 조 직적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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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가 만들어낸 맛집의 실태를 고발하는 영화《트루맛쇼》 의 포스터 이미지
특집 / 오늘 노동자는 뭐 먹지?
음식 저널리즘은 없다 음식 저널리즘이 뭘까. 난무하는 각종 요리 관련 프로그램에 대한 비 평? 먹을거리 문화 전반에 대한 고찰? 맛집에 대한 비평?
이오성 <시사IN>기자
특집 노동자는 오늘 뭐 먹지? 19
맛없는 음식을‘맛없다’ 고 말하는 게 음식 저널리즘? 음식 저널리즘 비평?《미래에서 온 편지》편집자로부터 이런 취지의 글을 써달라는 이야기를 듣고 한 참을 생각했다. 음식(또는 요리) 저널리즘이 뭘까. 난무하는 각종 요리 관련 프로그램에 대한 비평? 먹을거 리 문화 전반에 대한 고찰?‘맛집’ 에 대한 비평?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하자.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쯤, 한 매체에서 준비했던 기획이 있다. 이름하여‘작 심하고 떠나는 음식점 탐방’ . 얼굴에 철판 깔고 자화자찬하자면 국내 최초로 시도한 맛집 비평 기사였다. 나는 그 전까지 어떤 매체가 음식점을‘비평’ 하는 기획을 내놓는 일을 본 적이 없다. 죄다 맛집 탐방 일 색이었다. 비평을 한다 하더라도 아쉬운 점 한두 가지 양념처럼 살짝 뿌리는 수준이었다. 음식점을 정면 으로 비판하는‘획기적인 기사’ 를 쓰고 싶었다. 대학로의 한 유명 고깃집을 대상으로 첫 발을 뗀 그 기획은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 속에‘1회로’막 을 내렸다. 왜? 안타깝게도 공신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한 인터넷 식도락 동호회원을 섭외해서 기획을 진 행했지만, 아무래도 식재료나 조리기술에 대한 비평보다는 서비스와 공간 비평에 그쳤다. 음식점 비평이 라는 영역을 개척해줄 전문가가 없었다. 아니, 내가 찾지 못했다. 야심찼던 기획은 그렇게 용두사미가 되었다. 그것이‘한국적 한계’ 임을 실감하며 스스로 꼬리를 내렸 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자화자찬이 아
맛없는 집을‘맛없다’ 고 이야기하는 코너를 기획하면서 감히 저널리즘을 떠올렸다. 지금 생각하면 코웃음이 나지만, 그때 음식 문화에 대한 우리 언론의 수준이 그랬다.
니라, 부끄러운 고백이다. 그로부터 몇 년 뒤인가 한 레저 주간지에서 몇몇 전문 가와 함께 마침내 내 숙원사업을 지면화 시킨 것을 보았다. 배가 아프기보다는 대 견했다. 어쨌거나 나는 그때 그런 것이‘음식
저널리즘’ 이라고 생각했다. 맛없는 집을‘맛없다’ 고 이야기하는 코너를 기획하면서 감히 저널리즘을 떠올 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코웃음이 나지만, 그때 음식 문화에 대한 우리 언론의 수준이 그랬다.
찾아라 맛있는 TV! 푸드 포르노의 등장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의 음식 저널리즘은 없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손맛 좋고 인심 넉넉한 주인 장이 반갑게 맞는다’ 로 요약되는, 천편일률적인 주례사 비평 일색이었다. 맛 따라 길 따라, 한국의 맛집 100 따위 식당 가이드가 대다수였다. 한국에서 이 장르의 선구자이자 좌장이었던 백파 홍성유의 식당 소 개를 그대로 답습했다(그가 언론인 출신으로《장군의 아들》 을 쓴 소설가라는 사실은, 한국 음식 저널리즘의 태동 과 관련해 의미심장한 배경이다. 한국에서 음식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언론과 문학의 하위 카테고리에서 시작했다). 20
그도 아니면, 여행 정보의 부록 수준을 넘어서지 않았다. 1990년대 경기호황과 마이카 붐을 타고 쏟아 지기 시작한 여행 정보에서 빠지지 않은 내용이 여행지 맛집 소개였다.《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의 상당수 독자들이 유홍준 교수가 은근슬쩍 소개하는 음식점 정보에 더 열광했다는 얘기는 이미 두루 알려진 사실 이다. 전라도 시골 장터의 백반집이었던 해남 천일식당이 서울 강남에 으리으리한 분점을 낸 일은 그 자 체로 상징적인 사건이다. ‘먹는 이야기’ 에 방송이 숟가락을 얹으면서 흐름은 더욱 왜곡되었다. 2001년《찾아라 맛있는 TV》 가 전파를 타기 시작하면서 미디어는 본격적인 경쟁에 돌입한다.‘비주얼 경쟁’ 이었다. 당시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 씨가 들려준 이야기는 충격이었다. 방송 프로그램 작가들이 맛집을 섭외하면서 음식을 먹어보지 도 않고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푸드 포르노’ 의 시초였다. 이런 유의 맛집 프로그램이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혼돈이 극심해졌다. 검증되지 않은 정보들이 유통되 기 시작했다. 관광지, 유흥가마다 각종 언론매체에 소개된 맛집임을 강조하는 간판이 어지럽게 난무했다. 오죽하면‘TV에 안 나온 집’ 이라는 간판을 내건 음식점까지 등장했을까. 왜곡된 정보가 유통되면서 피해 는 시민에게 돌아갔다. 정보의 취사선택에 막대한 비용을 투자해야 했다. 한때 블로거의 등장으로 음식 정보가 차별화하기도 했지만, 몇 년 못가 그쪽 바닥도 어지러워졌다. 차라리 소수의 권위자들이 정보를 독점하던 시대가 더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뒤로 10여 년이 흘렀다. 이제는 좀 달라졌을까. 확실히 달라진 면이 있다. 미디어가 만들어낸 맛집 의 실태를 고발한 영화《트루맛쇼》 ( )가 나타났고, 맛집이 아니라 요리사에게 초점을 맞춘 보도가 쏟아졌다. 몇몇 요리사는 연예인 못지않은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심지어 나쁜 먹거리를 박멸하고, 착한 먹거리를 소개한다는 방송 프로그램까지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그뿐이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미디어는 보여주기에 치중한다. 음식의 데커레이션과 함께 클 로즈업한 요리사의 표정과 몸짓, 과장된 리액션이 화면을 점령했다. 나쁜 먹거리를 고발한다는 프로그램 조차 이런 공식을 따랐다. 사람들은 이제 이런 영상 자체에 쾌감을 느낀다. 저널리즘은 비평의 대상이 명확할 때 작
포르노를 비평하는 언론이 있던가. 그저
동한다. 포르노를 비평하는 언론이 있던가.
혀를 끌끌 차며 외면하거나, 어두운 곳에
그저 혀를 끌끌 차며 외면하거나, 어두운
서 탐닉할 뿐이다. 푸드 포르노라는 말의
곳에서 탐닉할 뿐이다. 푸드 포르노라는 말
등장은, 그러므로 퇴행적이다.
의 등장은, 그러므로 퇴행적이다.
음식 이야기,‘사진’ 만으로도 충분할까 SNS는 미디어 따라하기의 화신이다. 멋지게 찍은 음식 사진과 짧은 감탄이 타임라인을 장식한다. 정 특집 노동자는 오늘 뭐 먹지? 21
보가 넘치는 정도가 아니라, 정보에 의해 지배당할 지경이다. 최고의 쉐프, 최고의 식당, 최고의 음식 정 보가 날마다 시시각각 쏟아진다. 개인적으로 잊히지 않는 사건이 하나 있다. 몇 년 전 한 작가의 블로그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 작가가 서울시내의 한 초밥집 음식 사진을 장황하게 올렸다. 참 맛있게 먹었다는 자랑과 함께. 누군가 가격을 물 어봤고, 작가는 한 끼에 8천 원이라고 답했다. 어떻게 이런 정보를 아느냐는 부러움과 감탄의 댓글이 줄을 이었다. 그런데 얼마 뒤 그 집 음식 가격이 8만 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작가가 남의 사진을 가져다 자기 블로그에 올리면서 숫자를 잘못 본 것이다. 이 작가는 그 집에 가본 적도 없었다. 그저 자랑이 하고 싶었다 는 변명과 함께 그는 블로그를 닫았다. 해프닝이라기에는 뒷맛이 씁쓸했다. 현실을‘거세’ 한 정보 과잉의 이면이다. 음식과 재료, 임대료와 노동, 시장과 가격 따위의 실체적인 이야기들은 미디어에 없다. 오천 원짜리 10 첩 반상에 감탄할 뿐, 그것이 어떻게 가능
음식과 재료, 임대료와 노동, 시장과 가격 따위의 실체적인 이야기는 미디어에 없다. 오천 원짜리 10첩 반상에 감탄할 뿐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들여다보지 않는다.
한지 들여다보지는 않는다. 저널리즘이 외 면한 탓이다. 푸드 포르노는 팔려도, 그 포 르노 산업을 조명하는 이야기는 팔리지 않 는 탓일까. 아니, 어쩌면 그 반대는 아닐까. 이런 현실이 유독 우리만의 얘기일까? 아니다. 미식의 나라 프랑스에서는 이미 18
세기 때부터 벌어졌던 일이다. 여행 붐과 함께 도래한 먹을거리에 대한 폭발적 관심 → 가치 있는 정보를 얻고자 하는 욕구 → 미슐랭 가이드 같은 평점 매체의 등장 → 음식담론의 백가쟁명으로 이어지는 양질 전 환의 변화를 프랑스는 이미 겪어왔다. 프랑스가 200여 년 동안 겪은 변화를 우리는 지난 30여 년 동안 압 축해서 겪는 중이라 하겠다. 그 압축의 끝에 프랑스가 있을지, 아니면 아주 한국적인 어떤 퇴행이 있을지 모를 일이다.
다시 질문을 되돌려보자. 도대체 음식 저널리즘이란 뭘까. 내가 아는 한 우리 사회에서는 음식 저널리 즘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이뤄진 적이 없다. 아니, 음식 저널리즘에 복무하는 언론인이 존재하는지조 차 의문이다. 2000년대 이후 맛집 평가를 뛰어넘는 이야기를 내놓은 언론이 있었던가. 아이러니컬하게도 맛집과 셰프에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 더욱 넘쳐날 것이다. 왜곡과 미화, 현실을 거 세한 정보들이 미디어를 채울 것이다. 시민의 현명한 선택에 기대기에는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크다. 새로 운 물결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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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오늘 노동자는 뭐 먹지?
2015년 라면 랩소디 라면은 라면이고, 롯데는 롯데인 채로 파편화된 끼니 구조를 쉽게 용인하고, 우리 스스로를 호기롭게 내다 팔았음을 이제는 직면할 때다.
정은정 농업사회학자,《대한민국 치킨전》저자
특집 노동자는 오늘 뭐 먹지? 23
나는 오늘도 천국행 ‘보따리장수’ 라 부르는 우리 같은 비정규 강사들은 전국 팔도를 돌아다닌다. 요즘처럼‘먹방’ 이 넘쳐나 는 세상, 맘만 먹으면 실시간 맛 지도를 검색해서 먹을 만한 것들을 찾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다 남의 일이고, 아마도 나를 포함한 많은 보따리장수들이 가장 많이 먹는 음식은‘김밥’ 일 것이다. 가끔 햄 버거를 먹기도 하지만, 김밥이 그나마‘밥’ 이 들었다는 느낌을 주는지라 자주 씹곤 한다. 이동과 이동 사 이에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처지다 보니 어디 자리를 잡고 먹기가 쉽지 않다. 물론 시간이 남아 자리를 잡 고 먹어봤자 김밥에 라면.‘도찐개찐’ 이다. 기차나 버스에서 냄새를 풍기지 않으려고 종종 역과 터미널 벤 치에서 김밥과 물을 씹는다. 그럴 때면 가끔씩 딸아이가 전화로 엄마가 어디인지 물어온다. “엄마, 오늘도 천국. 김밥천국” 내가 떠들고 다니는 강의 내용이 보통‘식생활’관련한 이야기니, 이만한 존재의 배반이 어디 있을까. 집에 있는 아이들은 오늘 또 무엇을 먹을까? 너희들은 어떤 나라에 살고 있니? 혹시 김밥나라는 아니겠 지?
그 많던 매점 아주머니들은 어디로 갔을까? 개강을 하고 학교에 가니 가장 어리둥절한 장면은 단과대마다 있던 매점이 모두 사라진 풍경이다. 대 신 그 자리에‘CU’ 가 들어섰다. 통학버스표를 사거나 올이 나간 스타킹을 사러 가면 눈인사를 주고받던 인상 좋은 아주머니. 학생들에게‘어머니’소리를 듣던 매점 아주머니는 어디로 가셨을까? 그 자리에는 이제 CU유니폼을 입고 아르바이트 중인 학생들이 있다. 착잡한 마음으로 학교식당엘 가니, 이마트에서 팔다가 남은 식재료로 범벅을 한 건 아닐까 싶은‘신세 계푸드’식단이 오늘도 나를 맞는다. 한숨이 나올 뿐이다. 미역국에 미역줄기볶음을 반찬으로 주는 것까 지는 참곤 했다. 4천 원짜리 밥에 국하고 반찬까지 얹어주니 그냥 먹자는 심정이랄까. 던져주는 대로 먹는 다. 그럼 그것은 이미 식사가 아니라‘사료’ 다. 그나마 스리슬쩍 지난 학기부터 5천원으로 오른 직원식당 은 반찬 가짓수가 늘었지만 그게 고작 마요네즈에 비벼놓은 마카로니 따위니, 요즘엔 얼마나 더 망가진 메 뉴가 나올까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할 정도다. 어차피 필요한 칼로리만 충족시켜야 한다면 차라리 학생식 당이나 교내 분식점에 가서 라면이나 한 그릇 먹을까 싶었는데, 그 분식점도‘아딸’체인점으로 바뀌었다.
옛날 영화를 보러갈 수 있을까? 오랜만에 짬이 나 영화를 보러 갔다. 집 근처에 포진한 극장은 롯데시네마 아니면 CGV. 무감한 마음으 로 무인기계 앞에 서서 표를 끊고 각종 포인트 카드 적립을 하고 나면, 난무하는 팝콘 냄새에 허기가 몰려 24
카페와 결합한 형태로 변모한‘김밥천국 카페’ 의 프랜차이즈 홈페이지 (사진 : 해당 홈페이지 갈무리)
올 지경이다. 단관개봉관이 사라지고 이제 어느 극장을 가든 똑같은 영화가 걸려있으니, 보고 싶은 영화 를 본다기보다는 스케줄에 맞는 영화를 그냥 소비할 뿐이다. 이것도 안 되면 SK텔레콤이 만든 BTV에서 제공하는‘이번 주의 화제작’중에서 골라 보거나 말이다. 윤대녕의 소설《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 는 어쩌면 이 시대에 실현 불가능한 정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옛날 영화를 보려면 우린 또 국내 유수의 포털사이트에서 제공하는 VOD를 다운받아야 하니까.
요람에서 무덤까지? 삶의 프랜차이즈화 프랜차이즈 하면 보통 치킨점과 편의점이 떠오르곤 한다. 하지만 요즘엔 카페와 분식집, 하다못해 노 점음식점도 가맹회원을 모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요식업에서 가장 활발하게(을의 입장에서 본다면 가혹 하게!) 진행되긴 했지만, 사실 안경점부터 미용실, 세탁소에 이르기까지 프랜차이즈로 재편된 지 이미 오
래다. 프랜차이즈(franchise). 사전적 의미로는‘체인점 영업권’ 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 해석의 적용범위는 좀 더 넓다. 특정한 상품이나 서비스의 노하우를 가진 주체(본사)가 가맹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일정 지역 에서의 영업권을 주어 시장을 넓혀 나가는 방식을 말한다. 영업권을 주는 대가로 가맹비를 받는다. 그 가 맹비는 로열티를 말하는데, 로열티에는 말 그대로‘충성맹세’ 가 포함되어 있다. 충성맹세라 해서 별다른 게 아니라 본사의 지시에 따른다는 일종의 서약인데, 이 문제가 결국‘갑의 횡포’ 의 서막이 된다. 메뉴는 물 론이고 영업시간도 마음대로 조절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본사에서 수취해 가는‘물류 공급비’ 와‘홍보비’ 특집 노동자는 오늘 뭐 먹지? 25
의 명목이 발생한다. 본사에서 신 메뉴라도 개발해서 가맹점으로 내려보내면, 그 메뉴가 아무리 팔리지 않 을 것 같아도 그냥 팔아야 하는 것이 프랜차이즈 가맹점주들의 운명이다. 새로운 상품이 출시될 때마다 새 로운 포장지와 서비스 규준, 행사 사은품, 하다못해 광고모델의 교체비용까지 촘촘하게 명목이 하달된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프랜차이즈가 주는 유일한 미덕은‘예측 가능성’ 이다. 음식을 예로 들자면 그 맛과 서비스의 수준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서울에서 먹는 치킨이나 제주도에서 먹는 치킨이나 맛과 가격이 같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심리적 저항이 무너진다. 익숙함이 주는 안온함은 생각보다 힘이 세다. 하지만 이렇다보니 다양성과 우연의 기쁨을 기대하기 어렵다. 물론 이것도 주머니 사정과 시간이 넉넉 할 때의 얘기다. 이집 저집 들어가서 맛을 보고, 때로는 어이없는 맛에 분노하고, 또 행운처럼 걸린 맛집에 쾌재도 불러보는, 이런 게 사는 맛이라 한
태어날 때부터 이미 우리는 기업에서 만들어 낸 상품을 먹고 쓰면서 살아간다. 종당에는
다면 지금 우리에게 그런 삶이 허락될 수 있을까? 먹거리가 프랜차이즈화 되었다면 이미
프랜차이즈 상조회에 우리의 마지막 길을 맡
우리의 몸과 정신도 프랜차이즈화 되었다
길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게 사는 건가?
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음식뿐만이 아니 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우리는 기업단계
에서 만들어낸 상품을 먹고 쓰면서 살아간다. 종당에는 프랜차이즈로 운영되는 상조회에 우리의 마지막 가는 길을 맡길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게 사는 건가?
오래된 미래, 프랜차이즈 사회학자 조지 리처가 말한‘맥도날드화 현상’ 은 현대사회의 제도와 문화에 적용된 프랜차이즈 현상, 즉 세계적으로 동일화 되어가는 현상을 지적한 말이다. 비슷한 것을 먹고 그 주요 식료는 독과점 형태의 세계 10대 글로벌식품기업들1)이 주도하는 지금이야말로, 어쩌면‘위 아더 월드’ 의 삶 아니겠는가. 프랜차이즈화는 단순히 외식업계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이미 우리 밥상은 식품기업들이 생산 하는 양산식품으로 가득하다. 무조건 기업식품을 나쁘게 볼 일도 아니다. 양산식품 덕에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 점점 척박해져가는 노동현실에서 삼시세끼를 챙겨 먹는 일, 그것 자체가 고통이다. 우리 의 값싼 노동으로 기업은 값싼 식품을 만들어내고, 우리가 또 그런 식품을 소비하고, 또 그 덕에 기업은 이 윤을 축적하는 항구적 구조는 이렇게 가능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먹거리운동은 곧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의 맥락에서 다뤄져야 한다. 1) 1위 네슬레, 2위 유니레버, 3위 코카콜라 4위 펩시코 5위 마즈 등 10대 글로벌식품기업들의 식품공급체계로 전 세계의 식량과 식품의 시장가격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식품회사들인 CJ, 신세계, 롯데, 청정원, 오뚜기, 농심 등의 대기업 들이 직간접적으로 글로벌식품기업들과 연동되어 한국의 식품체계를 장악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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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차이즈화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재생산의 핵심인 의식주 영역을 기업에 내맡겼다는 데 있다. 물론 그렇다고 전근대 사회로 돌아가서 가정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자는 뜻은 아니다. 다만 굳이 기업단계에서 실행하지 않아도 되는 일상의 소소한 영역마저도 기업들에게 내맡긴 채 우리의 일상을 스스로 자본에 내 맡기진 않았는지에 대한 토의가 시작되어 야 한다. 고용안정성이 바닥인 한국에서 생계수단으로 선택하는 프랜차이즈 유형 의 자영업(창업) 문제는 사실 오래된 미래
그들은 우리를 잘 파악하고 있다. 각종 할인 행사와 포인트 적립, 원 플러스 원 행사, 쿠
였다. 이 글에서 그 문제를 반복해서 지적
폰으로 우리에게 돌아오는 500원에 우리가
하는 일은 지면 낭비일 뿐이고, 적어도 우
얼마나 스스로를 잘 팔아넘기는지를.
리의 삶을 어디에 내맡기고 있는지부터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그들은 정말 우리를 잘 파악하고 있다. 각종 할인행사와 포인트 적립, 원 플러스 원 행사, 쿠폰으로 우리에게 돌아오는 500원에 우리가 얼마나 스스로를 잘 팔아넘기는지를 말이다.
라면, 끊을 수 있을까? 대책 없이 늘어지는 업무 때문에 집에 돌아오니 반짝반짝 윤이 나는 라면 한 봉지가 눈에 들어온다. 밥 을 안칠 여력은 남지 않았다. 값싸고 간편하고, 맛은 또 왜 이리 좋은지. 이‘농약 같은(!)’라면의 칼로리 와 자극으로 지탱해 온 한국 사람들.‘한국인의 밥상’ 의 진정한 주인공은 아마도 라면이리라. 허나 우리가 지난 수십 년간 먹어준 농심 라면 덕분에 잠실의 저 높은 제2롯데월드 바벨탑이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그 연결성을 아는 노동자는 몇이나 될까? 라면은 라면이고, 롯데는 롯데인 채로 파편화된 끼니 구조를 쉽게 용인하고, 우리 스스로를 호기롭게 내다 팔았음을 이제는 직면할 때다. 그럼 지금 당장 라면을 끊을 수 있을까? 라면 애호가인 나부터도 불가 능하다. 다만, 왜 라면은 꼭 농심이어야만 하는지 정도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설마 농심의 대안을‘삼양’ 과‘팔도’ 로 여기진 않으리라 믿는다. 노동자의 라면, 민중의 라면은 왜 불가능한가? 인스턴트 라면만이 라면인가? 그렇다면 생협의 우리밀 라면은 대안이라 할 수 있을까? 퇴근 길 우리를 보듬어주는 덜 자극적이고 신선한 라면을 끓여주는 그런 협동조합을 상상해보면 안 될까? 같은 컵라면이라도 지난 학기까지 있었던 학교매점의 컵라면보다 CU의 라면 값이 조금 더 비싸다고 학생들에게 귀띔을 해주고, 라면에 물 부으러 일어나야겠다. 여기까지가 내가 부를 수 있는 라면 랩소디 의 도입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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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는 남자 연예인들의 생활을 다룬 MBC《나 혼자 산다》 의 한 장면
특집 / 노동자는 오늘 뭐 먹지?
나는 왜‘혼밥’을 두려워하나 1)
혼자 와서, 혼자 햄버거를 먹고, 혼자 정리하고 나간다. 누군가 힐끔대며 ‘어휴, 혼자 햄버거를 먹다니 왕따인가 봐. 불쌍하다.’할 것만 같은 망상 에서 자유로운 곳. 패스트푸드점이다.
이춘희 서울 구로 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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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티 플레저2) 미국 드라마《하우스 오브 카드》 의 주인공 프랜시스 언더우드에게는 자신만의 길티 플레저가 있다. 그 는 힘든 순간이 올 때마다 몇 십 년째 단골인 바비큐집에 찾아가 립을 먹는다. 내게도 그런 길티 플레저가 있다. 패스트푸드. 어제도 나는 버거킹에 가‘콰트로 치즈 와퍼’ 를 먹었다. 치즈가 4종류나 들어갔다니, 환장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학교에 버거킹이 생기고부터 하루에 두세 번은 그 곳에 간다. 나는 비만이다. 항상 살을 빼야 한다고 말한다. 안 그래도 몸에 안 좋다고 하는 패스트푸드가 비만에는 더 쥐약일 테다. 그런데도 간다. 기름지고 짠 맛에 중독되어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시청, 광화문, 신촌, 학교 등 서울 곳곳을 쏘다니며 롯데리아, 맥도날드, 버거킹 등의 패스트푸드를 섭렵하는 데에는 다 른 이유가 더 크다. 어딜 가든 먹고 나오는 데까지 15분이면 된다. 반찬 재활용 때문에 어디 허름한 식당에는 들어가기 무 서운 세상에서 애먼 곳에 들어가는 모험을 하기 보다는, 하향평준화 되었을지는 몰라도 평균적인 맛과 서 비스가 보장되는 곳이 낫다. 실은 더 큰 이유도 있다. 왜 그리들 다른 사람에 관심을 갖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여느 식당에 가 혼 자 밥을 먹으면 주위 사람들이 힐끔댄다. 자의식 과잉일지 몰라도, 어쨌든 악몽과도 같은 시간이다. 패스 트푸드점은 그런 악몽에서 자유로운 공간이다. 물론‘커플’ 들이 암약하는 터전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많 이들 혼자 와서 혼자 햄버거를 먹고, 혼자 잘 정리하고 나간다. 누가 힐끔대면서‘어휴, 혼자 햄버거를 먹 다니 왕따인가 봐. 어휴 불쌍하다.’할 것만 같은 망상이 절대 생기지 않는 곳이다.
나 혼자 먹는다 ‘혼자’ 가 대세인 시대다. 혼자 사는 여자들의 이야기는 이미 한 번 유행이 지난 지 오래고 이제는 혼자 사는 남자들의 이야기가 공중파를 장식한다. 혼자 사는 모습은 우리의 식생활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카페에 혼자 앉은 사람들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진 지 오래다. 편의점에서 홀로 서서 라면을 먹는 모습 또한 영화나 드라마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풍경도 있다.‘혼밥’ 이 다. 화장실 변기에서 홀로 도시락을 까먹거나 홀로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고깃집에서 고기를 구워먹는‘인 증샷’ 이 가끔씩 인터넷에 올라온다. 사람들의 반응은 극과 극이다. 혼자 도시락을 까먹는 사람에게는“어 휴 저 찌질이는 뭐야?” 라는 댓글이 달리고, 홀로 패밀리 레스토랑에 간 사람에게는“오오 용자 인정” 이라 1)‘혼자 먹는 밥’ 의 줄임말 2) 자신이나 타인의 행동에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순간적 과정이 너무 즐거워서 의지와 상관없이 항복하는 감정이나 남에게 보여주 긴 창피하지만 비밀리에 탐닉하는 무언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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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댓글이 달린다. 한때 혼밥에도 단계가 있다는 글이 유행했다. 총 9단계까지 나뉘어 있었다. 위에서 말 한 편의점 라면은 1단계, 패스트푸트점은 4단계다. 가장 어려운 7단계부터 9단계까지는 고깃집, 호프집, 패밀리 레스토랑이 차례차례 자리 잡았다. 혼자 밥을 먹는 생활은 집 바깥의 일만이 아니다. 케이블 방송에서 유행 중인 요리 프로그램에서는 이 런 저런 창의적인 요리들이 난무한다. 초콜릿 파우더를 이용한 파스타,‘간단하게’집에서 만들 수 있는 컵케이크. 하지만 이런 것들이 1인 생활자에게는 사치다. 파스타를 만들려면 제면기가 있어야 하고, 컵케 이크를 만들려면 오븐이 필요하다. 그런데 자취하는 친구들 집을 아무리 가 봐도 제면기는 고사하고 오븐 도 본 적이 없다. 아, 전자레인지는 좀 있었다. 이런 말을 하면 전자레인지를 이용한 요리들도 많던데 그런 요리는 할 수 있지 않느냐고 항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역시 내 대답은“글쎄요?” 다. 요리기구 문제 가 해결되더라도 우리에겐 식재료의 문제가 닥친다. 요즘은 1인용으로 잘린 두부, 1인용만큼만 덜어놓은 파 등 1인용 식재료들도 많다지만 여전히 대부분은 4인용 가구를 기준으로 포장해 진열한다. 물론 4인용 식재료를 살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주위 친구들의 자취방에는 그 많은 식재료를 들여놓을 만큼 큰 냉장고 역시 없다. 일단 그런 걸 들여놓을 공간이 없다. 그들 방에 있는 냉장고는 집에서 보내 온 밑반찬 몇 가지, 마실 생수 몇 개 들여놓으면 꽉 차고 만다. 넓은 원룸을 잡아서 넉넉한 사이즈의 냉장고를 들여놓았다고 하자. 그러면 이제 또 다음 문턱이 우리 의 발목을 잡는다. 시간. 우리에게 요리를 해 먹는 시간은 사치다. 그야말로 밥이나 제대로 챙겨 먹고 살면 다행인 세상이다. 고등학생들에게 아침밥을 챙겨주던 신동엽의 모습은 벌써 10년 전 이야기이지만, 지금 도 우리에게 똑같이 통한다. 요리를 할 만
“일요일엔 내가 짜파게티 요리사!”일요일 에도 우리가 요리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은
큼의 여유로운 시간이 우리에게는 별로 없 다. 바쁜 주중에 제대로 자지 못한 잠을 늦 잠으로 벌충하고, 밀린 빨래와 청소를 하고
물 끓이고 짜장 비비는 5분밖에 없다는 말
나면, 요리는 뒷전으로 밀린다. 그러다 결
처럼 들린다고 하면 너무 심한 비약일까?
국, 혼자 먹을 건데 그냥 대충 먹고 말지라 는 생각으로 가스레인지에 라면 물을 올린
다.“일요일엔 내가 짜파게티 요리사!” 라고 외치는 광고가 있다. 일요일에도 우리가 요리를 위해 쓸 수 있 는 시간은 물 끓이고 짜장 비비는 5분밖에 없다는 말처럼 들린다고 하면 너무 심한 비약일까?
나는 먹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는 말을 비틀어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나는 먹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우리가 먹는 것에 의해 우리는 정의된다. 혼자 먹는 일에 나는 점차 익숙해져간다.‘혼밥’ 에익 숙해지니 멀어지는 것도 있다. 혼자 갈 수 없는 곳들. 7단계, 8단계, 9단계의 음식점들. 누군가를 만날 수 30
‘혼밥족’ 에 대한 보도화면. 화장실 변기에서 도시락을 먹는‘혼밥 인증샷’ 이다. (사진 : YTN 뉴스&이슈 갈무리)
있는 저녁은 그런 곳에 갈 수 있는 시간이다. 하지만 나의 점심은 그런 곳과 멀어진 지 오래다. 먹는 곳에서도 계급이 읽힌다면 지나친 말일까. 대부분의‘고급’음식점들은 혼자 가기 꺼려지는 곳들 뿐이다. 혼자서도 편하게 갈 수 있는 곳은 편의점, 김밥천국, 패스트푸드점뿐이다. 과거에는 빼빼 마른 몸 이 가난의 상징이었다지만, 현대에 가난의 상징은 비만이다. 엄마의 심부름으로 찌개에 넣을 두부를 고를 때 나의 손이 향하는 곳은 유기농 두부가 아니다. 산포제를 쓰지 않았다고 써놓긴 했지만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건지 의문이 가는 가장 값싼 두부다. 나 의 점심은 간단하게 배를 채울 수 있는 김밥, 알밥, 도시락이지 좋은 재료로 정성들여 만들 어진 슬로우 푸드가 아니다. 혼자 사는 세상에서 좋은 먹거리란 나에게 먼 나라의 이야기만 같다. 그 먹거리를 되찾
어떻게든 누군가를 붙잡고 같이 밥을 먹어 야 할까?‘세상 혼자 사는 것’ 이라며 홀로 밥을 먹는 일에 익숙해지는 나를 받아들여 야 할까?
기 위해 어떻게든 누군가를 붙잡고 같이 밥을 먹어야 할까? 아니면‘세상 어차피 혼자 사는 것’ 이라는 명제를 받아들인 채 홀로 밥을 먹는 일에 익숙해 지는 나를 받아들여야 할까? 답을 찾지 못한 채 나는 오늘도 편의점에서 점심을 때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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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노동자는 오늘 뭐 먹지?
내일은 뭘 먹지? 정치가 정한다! ‘어떤 태도를 가지는가’ 가 완전히 다른 사회를 만든다. 태도는 선택을 이끌고, 그 선택은 결과에 차이를 드러낸다.
김이준수 노동자협동조합‘적정기업 ep coop’대표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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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식사가 도열해 있는 화사한 편의점 그녀는 평일 오전에 걸터앉아 하루 동안 견뎌야 할 중력을 가늠해본다 한 컵의 뜨거움, 수증기를 만들어 그녀의 얼굴을 가린다 컵라면을 먹다 말고 그녀는 국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채소를 바라본다 이제는 말라, 제대로 썩는 법조차 잃어버린 채소 그녀는 우걱우걱 즐거운 식사를 하고 있는 중이다 조동범 <즐거운 식사>
익히 눈치 챘겠지만, 이것은‘즐거운’식사가 아니다. 쓴웃음 짓게 만드는 지금-여기의 자화상이다. 우 리의 식사는 이렇게 컵라면 국물 위에서 표류한다. 방부 처리된 현대인의 노동과 삶을 대변하는 풍경일지 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일은 이 풍경이 바뀔 수 있을까. 절레절레. 에둘러 말하지 않겠다. 뭔가 획기적으 로 바뀌리란 희망은 가지지 않아도 좋다. 내일의 식사는 되레 더 나빠질 것이다.‘유연화’ (경영자 입장에서) 라는 명분으로 노동의 질이 악화되듯 노동자의 밥상도 이에 비례할 것이다.‘내일 뭐 먹지?’ 라고 고민할 필요도 없이 가축처럼 주어진 사료를 들이키는 시나리오는 끔찍하지만, 어느 날 내 밥상의 현실로 닥치지 않는다고 장담하지 못하겠다. 우리는 이미 먹거리에 대한 감각을 잃고 사료에 익숙해졌으니까.
노동자의 밥상은 왜 슬퍼졌는가? ‘먹는다’ 는 점에서는 같지만, 인간과 다른 동물의 식사는 차이를 보인다. 다른 동물은 배가 고파 먹지 만 인간은‘식사’자체를 위해서도 먹는다. 다른 이유는 없다. 인간은 음식을 먹는 것 자체를 즐긴다. 요즘 방송계의 가장 뜨거운 아이템인‘먹방’ 만 봐도 그것이 확연하다.‘푸드 포르노’ 라는 비아냥도 뚫고 나간 다. 오늘 무엇을 먹고, 지금 어떻게 먹는지가 궁금할 뿐이다(그래서 대부분의 먹방에서‘노동’ 을 제대로 보여 주지 못하는 점이 유감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먹방의‘이미지’ 만 소비된다.
좀 더 시간을 앞으로 돌려보자. 노동자는 산업화와 함께 가장 부각된 계층이었다. 스스로 만들어 먹던 음식이었지만, 이도 다른 이들의 손에 의존하게 됐다. 내 입맛을 내가 결정하기보다 주어진 것을 먹는 방 향으로 나아갔다. 산업화는 진전을 거듭했고, 이에 비례하여 노동자는 식품을 선별하는 감각을 차츰 잃었 다. (임)노동은 먹거리에 대한 감각을 앗아갔다. 식사는 사료처럼 변해갔다. 식사 그 자체의 목적이 아닌 노동을 위한 에너지 공급원으로서의 역할이 우선이 됐다. 그러니 내가 먹고 싶을 때 먹고 배가 고플 때 먹 특집 노동자는 오늘 뭐 먹지? 33
내가 먹고 싶을 때 먹고 내가 배가 고플 때 먹지 못하고 노동현장의 흐름에 맞춘 식사를 한다.‘삼시세끼’ 는 이렇게 산업 화와도 관계를 맺는다.
지 못하고 노동현장의 흐름에 맞춘 식사를 하 게 됐다. 삼시세끼는 그래서 산업화와도 관계 를 맺는다. 다른 누군가가 식사를 위한 나의 노동을 대 신해주는 것, 진짜 좋았을까. 그저 편안해진 것만은 아니었을까. 산업화가 도약대에 오른
20세기 안팎, 자본은 당대의 블루칩으로 먹거리를 지목하고 이를 놓치지 않았다. 미국에서 1870~1900년 에 저질 우유 문제가 불거졌다. 문헌에 나온 최초의 식품안전 논란이었다. 1880년대 여성들이 나서서 식 품안전 운동을 펼쳤다. 과학자와 탐사기자나 작가들은 식품과 거대산업체의‘아삼육’ 을 파헤치고 폭로했 다. 자본의 가두리 양식에 갇히지 않겠다는 저항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모든 것을 바꿨다. 모든 저항과 운동은 꺾이고야 말았다. 전쟁 통에 힘을 발휘한 것은 ‘대용식품’ 이었다. 감각은 무뎌졌고, 맛은 사치였다. 식품첨가물, 즉석식품 등이 순식간에 모든 사람의 입 맛을 사로잡았다. 항복 선언. 이 대용식품은 순식간에 영역을 확장했다. 다이어트식품, 영양강화식품 등 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거대 식품복합체의 입지도 커졌다. 생산에서 유통까지 모든 경로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먹거리는 자본에 철저히 종속되었다. 고된 노동을 견디기 위해 커피(의 카페인)가 필요했 듯 저질(이지만 이성을 마비시키는) 식품이 노동자를 버티게 했다. 자고로 부정·불량식품이 창궐할 때는 사
방송계의 뜨거운 아이템인‘먹방’ 은‘노동’ 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먹방의‘이미지’ 만 소비할 뿐이다. (사진 : 올리브TV《테이스 티 로드》방송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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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들이 좋은 것을 선별하는 능력과 감각을 잃는 시기다. 아니면 오랫동안 감각을 잃다 보니 좋은 것을 구 별해내는 방법을 모를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의 밥상은 햇반, 스팸, 컵라면으로 채워진다. 배는 충만하 고, 좋고 나쁨에 대한 감별은 불가능하다. 그야말로 처묵처묵, 먹는 즐거움은 없다.‘즐거운 식사’ 라며 억 지로 스스로를 위안하는 수밖에.
어떤 음식을 선택할 것인가 반드시 이런 질문이 따른다. 그럼 도대체 뭘 먹어야 하는가? 짜증 반 호기심 반.‘그래서 어쩌자고’ 와 ‘어떻게 하면 좋을까’사이의 간극. 해법? 이런 방법도 제시할 만하겠다. 원래 모양을 간직한 신선한 식품 을 구매하라. 그러나 쉽지 않다. 우리는 모양에 민감하며, 진짜 맛을 모른 채 인공의 맛에 길들여졌거나 감 각을 일깨우는 데 게으르다. 그런 식품을 사기에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어쨌거나 먹는 일은 중요한 문제지만, 일상에서는 무시당하기 일쑤다. 사색 대신 검색만 익숙한 우리 는 맛집(블로깅)만 들쑤시고 먹거리에 대한 진지한 사유는 시궁창으로 몰아넣었다. 식품안전, 좋은 재료 등 은 끊임없이 강조되지만, 식품 전반의 체계나 음식 철학에 대한 논의는 미약하다. 특히 음식에 대해서라 면 개인(과 가족)의 몫으로 돌린다. 과연 그럴까. 어떤 먹거리를 선택하는가는 정치의 문제다. 편의점에서 햇반과 컵라면을 계 속 먹을지, 아이들에게 좋은 재료로 만 든 보편적 급식을 먹게 할지를 결정하는
어떤 먹거리를 선택하는가는 정치의 문제다. 편의점에서 햇반과 컵라면을 계속 먹을지, 아 이들에게 좋은 재료로 만든 보편적 금식을 먹 게 할지를 결정하는 당사자는 우리 각자다.
당사자는 우리 각자다. 밥 한 그릇이 사 회권의 기본임을 인식하는 일과 맛있는 것만 찾아다니는 탐식에 몰두하는 일 사이의 간극은 엄청나다. 어 떤 태도를 가지는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사회를 만든다. 즉 투표와 비슷하다. 태도는 선택을 이끌고, 그 선 택은 결과에 차이를 드러낸다. 식품(먹거리)의 문제가 단순히 생존과 과학적인 논쟁으로 끝나선 안 된다. 그것은 정치·경제의 복잡한 쟁투에 놓여 있다. 음식의 의미가 단순히 맛, 다시 말해 텍스트 자체에 고정적으로 주어져 있다고 생각하 면 오산이다. 음식의 생산과 소비의 복잡한 순환을 통해 가변적으로 구성된다. 단순히 어떤 음식을 선택 하라는 말은 손쉬운 검색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중요한 지점은 교육과 실습을 통해 음식과 올바른 관계 를 맺는 것. 이를 통해‘음식시민’ 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이를 주변과 나누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내 입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알아야 한다. 생산과 소비는 가까워야 한다. 둘 사이를 멀게 만듦으로써 자본가는 혼자 배를 불렸다. 공동 생산자가 돼야 하고 거대 식품복합체의 분리주의에 저항해야 한다. 직접 만들어 먹는 일도 저항의 한 방법이다. 음식은 개인 특집 노동자는 오늘 뭐 먹지? 35
의 생존을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사회의 생존에도 영향을 미친다. 음식이‘사회적’ 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영화감독 봉준호는 이것을 꿰뚫고 있는 사람이다. 《괴물》 의 마지막 장면. 노점 노동자 송강호와 노숙자 아이는 따뜻한 밥 한 공기를 나눈다.《마더》 에서 되 풀이되는 장면이 있다. 김혜자와 원빈의 백숙 식사 장면이다.《괴물》 과《마더》 에 나온 그들은 밥을 같이 먹어야 하는 관계임을 함의한다. 따라서 행복한 밥상은 어떤 음식이 올라가느냐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함 께 하느냐 역시 중요하다. 다시 물을 수 있겠다. 희망은 있는 것인가. 독일의 화가 막스 베크만은 1913년 그의 일기장에 이렇게 쓴다.“인간은 1등급 돼지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100년이 넘은 지금, 막스가 일기장에 쓴 예언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아니, 어쩌면 인간은 1등급에서 등급이 떨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내일 먹을 것이 오늘보다 더 나아리리라는 보장은 없다. 되레 더 나빠질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먹어야 산다. 먹기 전에 이것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어떤 노동이 가미되었는지 생각해보라. 1등급 돼지가 인간으로 환생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다. 생산에서 유통까지 모든 과정을 장악한 거대 식품복합체의 자본질을 멈추기 위해 필요한 것이 정치다. 최초의 식품안전 운동이 거둔 성과는 단순히 안전에만 매몰되지 않는다. 그것은 자 본의 탐식을 막고자 했던 시민운동의 한 줄기였다. 나는 희망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전제가 달라진다면 결과 역시 달라진다. 명민한 좌파 영화감독 켄 로치의 말을 곱씹는다.
“유일한 희망은 새로운 경제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소수의 탐욕에 봉사하는 경제가 아니라, 다수의 경제를 안정시키는 그런 구조 말이다.” (켄 로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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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2015년 정치개혁, 그 방향을 묻다 국회가 정치개혁특위를 구성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습니다. 선거구획정 문제와 선거제도 개편이 핵심 주제로 떠올랐습니다. 국 회의원들의‘생존 게임’ 이 시작되었습니다. 정치관계법을 손질할 모 처럼의 기회일지도 모르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고민하고 준비해야 할지 물었습니다.
(사진 : SBS 뉴스 갈무리)
기획 2015년 정치개혁, 그 방향을 묻다 37
기획 / 2015년 정치개혁, 그 방향을 묻다
정치관계법 개정운동에 당의 생사를 걸어야
의원정수 확대가‘장난’ ? 지난 4월 6일, 새정치민주엽합(이하 새정연)이‘2015년 다 함께 정책 엑스포’행사를 열었다. 이 행사 중에 새정연의 문재인 대표는 기자들 에게 의원 정원이 400명은 되어야 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현재 국회의 원의 정원보다 100명이 늘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문 대표는 자신 과감하게 대중들과 소통하면서
의 말을 하루도 지나지 않아 뒤집어버렸다.‘장난’ 이었다는 말을 덧붙
제도의 변화가 왜 필요한지를
이면서.
알리고 사회적인 논란을 만들
당장 같은 당 내에서도 불만이 불거졌다. 국회의원 수를 100명 줄
어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정
이자는 대안을 제시하며 잠깐 바람을 일으켰던 안철수 의원부터 문제
치력의 발휘다.
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새누리당은 문 대표가‘장난스럽게’ 라고 한 발 언을 꼬투리 잡아 융단폭격을 가했다. 보수언론도 이 발언을 심도 깊 게 다루면서 문 대표를 힐난했다. 문 대표의 입장에서는 웃자고 한 이야기에 죽자고 달려드는 내외의 성토가 기분 나쁠지도 모르겠다. 물론 의원정수의 문제를 제기한 본인 이‘장난’ 이었다고 말을 뒤집을 만큼 우리 사회의 정치인에 대한 불신 이 크긴 하다. 하지만 그 불신을 초래한 장본인이 바로 이토록 중요한 사안을‘장난’ 이라고 얼버무리면서 넘어가는 정치인들이다. 어떤 면에 서든 제1야당 대표가 국회의원정수 문제를‘장난스럽게’다룬 경박함
윤현식 전 정책위원회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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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중선관위의 묘수 최근 정가에서 의원정수 문제가 상당한 비중으로 다루어지게 된 데에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계기가 되었다. 지난 2014년 10월 30일 헌재는 인구편차가 3:1을 넘어서는 현재의 선거구획정이 표의 등가성을 해치고 유권자의 평등권을 침해한다며 헌법 불합치판정을 내렸다. 이 결정에 따라 올해 안에 인구편차 2:1의 범위 안에서 선거구가 조정되어야 한다. 선거구획정에 따라 지역구를 잃을지도 모를 일부 의원들에게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새누리당 과 새정연 양대 보수정당의 입장에서도 곤혹스럽다. 선거구획정에 휩쓸려 지역구를 잃을 위험에 처한 자 당 의원들에게 다음을 보장해줄 방편을 마련하는 한편, 수도권에 집중된 지역구 의석 확대가 자당에 유리 할지 여부를 판단하는 계산기를 두드리는 건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니다. 2월 24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국회에 공직선거법의 개정방향을 제시하면서 논란이 가중되었다. 여 타의 내용은 차치하고, 중앙선관위의 제안에서 주목을 끄는 부분은 지역구의석과 비례의석을 2:1로 조종 하고, 전국단위 6개 권역별로 비례대표를 선출하는 방법을 제시한 부분이다. 더불어 중앙선관위는 석패 율제까지 개정방향에 포함시켰다. 중앙선관위의 제안은, 화들짝하는 겉모습과는 달리 보수양당의 입장에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명목상으로는 비례의석이 확대되면서 지역구 의석이 줄어들게 되지만, 실질적으로는 권역별 비례명부에 석패율제까지 포함해 밑지는 장사는 하지 않도록 설계했기 때문이다. 중앙선관위의 제안이 절묘한 이유 가 여기에 있다. 바로 이렇게 보수양당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개편안인 데다가, 보다 중요하게는 국회 의원정수를 건드리지 않음으로써 유권자들의 반발도 피해갔다. 하지만 바로 이 점이 중앙선관위 제안의 한계다. 중앙선관위의 제안이 확장력은 고사하고 실질적인 강 제력조차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가 공직선거법을 비롯한 정치관계법 전반의 모순을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 기 때문이다. 핵심은 국회의원정수다. 현재 300명 정원을 그대로 유지하는 선에서는 어떠한 발전적 대안 도 도출하기 어렵다. 이해관계가 첨예한 상황에서 차기를 기약하기 어렵게 된 개별 의원들은 물론 각 정 당들 역시 이 한계 안에서는 움치고 뛸 여지가 없다.
의원 숫자부터 늘리고 봐야 승자독식의 소선거구제 중심 현행 선거제도는 근본부터 뒤집어엎어야 한다. 찔끔찔끔 건드려봐야 효 과도 없고, 기득권을 가진 보수양당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별 탈이 없다. 군소정당들을 비롯해 새롭게 제도정치권을 향하는 정치세력들은 정치관계법의 변화에 생존을 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의당의 심 상정 의원이 의원정수를 360명으로 늘리고 지역구와 비례대표 비율을 2:1로 하자는 안을 제시한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다. 기획 2015년 정치개혁, 그 방향을 묻다 39
의원정수가 몇 명이 되어야 한다는 기준은 딱히 정해지지 않았다. 어느 나라든, 역사와 전통, 문화적 배경과 유권자의 의식, 정치경제적 상황 등에 따라 각각 자신에게 맞는 의회제도와 의원정수를 가진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의원수의 기준은 국민 전체 및 유권자의 수와 비례하여 조정해야 한다. 표의 등가성을 확보함은 물론 대의제가 가지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인구비례에 따라 최대한의 대표자를 선출하 는 것이 바람직하다. 북구유럽의 각국은 주로 비례대표제를 중심으로 의원선출제도를 구성한데다가 의원정수 역시 우리와 비교해 훨씬 많다. 인구 550만 수준의 핀란드가 200명의 의원을 두었고, 인구 천만이 되지 않는 스웨덴 또한 349석의 의석을 보유하고 있다. 독일만 하더라도 8천만 인구 수준에 672명의 의원을 두었다. 인구비례로 본다면, 핀란드와 비교했을 때 한국은 1800명 수준의 의석을 보유해야 한다. 프랑스와 비 교하면 465석 정도, 영국에 비하면 522명 수준이 되어야 한다. 독일하고 비교하더라도 364명은 나와야 하는 수준이다. 각국의 의원정수와 비교할 때 한국의 의석은 대단히 적은 수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의석수는 1987년 헌법체제가 등장하면서 정해진 299명에서 지난 제19대 총선에서 1석이 늘어나, 지금 300석이다. 1987년 당시의 인구는 약 4천 2백만이다. 당시의 인구비례에 따르더라도 현재는 356명 수준 은 되어야 하는 상황이다.
정치혐오를 부추기는 후진적 제도들 의석확대뿐만 아니라 의원선출의 방식도 획기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미 노동당은 2012년 총선에서 권역별 전면 비례대표제를 공약으로 제시했다. 그동안 일각에서 독일식 정당명부제를 도입하자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독일식 정당명부제는 지역구와 비례의석이 1:1로 맞춰진다. 중앙선관위의 제안에 따라 지역구 대비 비례의석이 2:1에 이르기만 해도 장족의 발전임은 분명하다. 물론, 각종의 대안이 효과 를 충분히 발휘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 전제는 의석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일이다. 정당법, 정치자금법, 공직선거법으로 대표되는 현행 정치관계법이 기득권을 가진 의원들에게는 무한 한 힘을 실어주고, 정반대로 군소정당의 제도권진입은 매우 어렵게 만들고 있음은 부언의 여지가 없다. 사실 이러한 제도가 아무런 도전도 없이 운영된다는 것 자체가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후진적 제도가 존속하는 이유는 그 제도를 만들어내는 입법부가 후진적이기 때문이다. 또 반대로, 후진적 제도가 존속하기 때문에 입법부가 후진성을 면치 못한다. 악순환은 이렇게 제 모습을 드러낸다. 기성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한없이 보장하는 현행 제도의 달콤한 마력을 버릴 이유가 없고, 그 속에 안주한다. 정치혐오가 거세면 거셀수록, 정치인 개개인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정치판 전체에 대한 불만이 커진다. 그러나 모두의 문제는 그 누구의 문제도 아니듯, 정치판 자체에 대한 혐오는 국회에 속한 의원들 각각의 문제를 덮어버린다. 후진적 제도가 기득권을 보장하고, 유권자들은 아예 정치에 관심을 끄 는 것이 장수의 비결이라 여기고 있는 마당에 현직 국회의원들은 손해를 볼 일이 없다. 40
정치관계법을 이대로 두어서는 다음을 기약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을 정치인들이 갖지 않는 한 변화는 요원하다. 3월 17일 발족한 국회의 정개특위가 예전과 마찬가지로 지지부진한 모습을 면치 못하는 중이 다. 이 과정에서 유권자들의 참정권은 제한되고, 헌법재판소가 비판한 표의 등가성 훼손과 국민주권원리 의 침해는 지속된다. 노동당을 비롯한 다수의 군소정당이 제시한 정치개혁안들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 는 가운데 사장된다. 이처럼 왜곡이 반복되는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당장 필요한 일은 유권자 자신에 의한 정치의 복원이 다. 정치혐오에 기대 정치 자체를 폐기하려는 정치인들에게 유권자의 힘을 보여줘야 한다. 물론 유권자들 이 갑자기 들고일어나 정치관계법의 체계를 흔들어 놓는 정치적 요구를 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크지 않 다. 그러나 노동당을 비롯한 군소정당과 제대로 된 정치기능을 갈망하는 시민사회가 그 가능성을 확대하 고 심화시킬 의무를 버려서는 안 된다.
사활을 걸고, 보다 과감하게 욕을 먹어야 노동당은 보수정당을 비롯해 일단의 기득권을 선점한 다른 정당이 할 수 없는 이야기를 과감하게 해야 한다. 국회의원정수 500명으로 증원, 전면적 비례대표제 실시, 대통령 선거를 비롯한 각종 선거에 결선투 표제 도입, 지방선거에서 광역선거와 기초선거의 분리 실시, 참정권 연령의 대폭 하향, 교섭단체제도 폐 지, 정당연합을 보장하는 정당법과 공직선거법 개정, 국고보조금제도의 변경, 지구당의 부활 등 민감하면 서도 구체적인 이야기를 계속 제기해야 한다. 정치혐오가 팽배한 대중들의 인식을 두려워할 이유도 없다. 오히려 과감하게 대중들과 소통하면서 왜 이러한 제도 변화가 필요한지를 알리고 사회적인 논란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이 정치력의 발휘이며, 노 동당이 사활을 걸고 진행해야 할 최우선의 정치사업이다. 원내에서 진행되는 정개특위의 논의에 우리의 말 한 마디가 올라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대중들과 함께하는 정치관계법 개정운동을 벌여나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 대중들에게 감당키 어려운 비판을 받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과정마저도 만 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할 수 있느냐를 판단할 시기는 이미 지났다. 비난이 두려워서 사활을 건 일을 자 꾸만 미뤄서는 안 된다. 때로는 살기 위해 죽음을 각오할 필요도 있다.
기획 2015년 정치개혁, 그 방향을 묻다 41
기획 / 2015년 정치개혁, 그 방향을 묻다
2015년 정치개혁,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모처럼 찾아온 선거제도 개혁의 기회 지난해 10월 헌법재판소가 현행‘3대 1’ 의 국회의원 선거구별 인구 편차 기준을‘2대 1’이하로 조정하라고 결정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 에 따라 246개 지역구 중 62개 지역구가 조정의 대상이 되었다. 인구 수 상한을 초과하는 선거구가 37곳, 인구수 하한을 미달하는 선거구가 헌법재판소가 현행‘3대 1’ 의 국회의원 선거구별 인구편차 기준을‘2대 1’이하로 조정하
25곳이다. 62곳의 선거구 경계를 바꾸다 보면 주변 선거구들까지 영 향을 받게 될 테니, 결국 정치권 전체에 걸친 선거구 개편 작업이 불가 피해진 상황이다.
라고 결정했다. 선거제도 전반
시민사회에서는 이 기회에 사표를 대량 양산하고 지지율이 의석에
을 손질할 수 있는 모처럼의 기
정확히 반영되지 않는 현행 승자독식 선거제도를 전면 개혁하자는 요
회가 도래했다.
구가 터져 나오는 중이다. 다양한 정치적/입법적 요구를 반영하고, 비 대해진 행정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적정 의원수의 규모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시작하자는 제안도 불거졌다. 선거제도 전반을 손질할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가 도래했다.
가능할까? 새누리당은 선거제도 개혁 방안에 대한 공식적인 당론을 아직 정하 이지현 참여연대 시민감시1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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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않았지만, 국회의원 정수를 현행대로 두고, 헌재 결정에 따라 늘 어나는 지역구를 비례대표 의석을 축소해 보전하자는 주장이 흘러나
오는 중이다. 새정치연합(이하 새정연) 또한 당내 정치혁신특위에서 문재인 대표가 대선 때 공약한 지역구 대 비례대표,‘200 대 100안’ 을 독일식 비례대표제로 운영하는 수정안까지 검토했지만, 마찬가지로 당론 은 아직 정하지 못했다. 현행 선거제도에서 크나큰 수혜를 입는 양대 기득권 정당이 선거제도의 전면적인 개혁에 나서기는 쉽 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와 선거제도에 대한 국민적 불만과 변화의 요구가 크다는 점에서 아주 불가 능한 일도 아니라고 본다. 우리는 지난 2002년 한나라당의 차떼기 등 불법대선자금 제공 사건이 불거진 이후 범국민적인 정치개 혁 요구를 일으켜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정치자금의 투명성’ 을 확보하고,‘돈 안 드는 선거’ 를 위한 제도 개혁을 이뤄낸 경험이 있다. 또 그 후 유권자의 선거 참여를 가로막는 규제 중심의 선거제도를 개혁하기 위해 입법청원, 헌법소원 청구, 각계 선언, 공론의 장 마련 등 수 년 간 다양한 활동을 벌여 온라인상에서나마 선거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도록 일부 법 개정을 이뤄내기도 했다.
2015 선거제도 개혁, 선거구획정위 권한 강화부터 지난 4월 1일부터 국회 정치개혁특위가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고, 특위는 여야가 이미 약속한 바 있는 선거구획정위의 독립기구화를 4월 8일 합의했다. 수 십 개의 선거구 조정이 예정된 상황에서 선거구 획정위의 독립화부터 추진하기로 한 점은 긍정적이지만, 개혁의 핵심이라 할 만한‘획정안에 대한 국회 수정권한 폐지’ 에 대해서는 이견을 나타내 우려도 따른다. 선거구획정이 선거 때마다 정당과 개별 의원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표류하고, 당리당략에 따라 국회에 서 왜곡되어왔음을 국민들은 기억한다. 올 상반기에 선거구획정 과정에서 정치인들의 이해관계를 배제하 는 개혁을 단행하지 못하면 올 연말에 심각한 게리멘더링(Gerrymandering 특정 후보자나 특정 정당에 유리 하도록 선거구를 획정하는 것-편집자)을 맞이할 수도 있다.
선거구획정위 개혁의 핵심은 획정위의 독립적인 운영과 더불어 획정위의 안을 국회가 수정하지 못하 게 제한하는 데 있다. 국회는 선거구획정위 운영에 대한 종합적이고 구체적인 개선방안을 논의해 4월 국 회에서 처리하겠다는 약속을 지킴으로써 선거제도 개혁을 시작해야 한다.
비례대표 확대로 선거제도의 비례성 높여야 우리 선거제도는 소선거구 단순다수제이다. 1등에게 지지한 표만 살고, 나머지 표는 사표가 돼 유권자 의 지지가 의석으로 정확히 반영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거기다 전체 의석에서 비례대표 비중이 18%에 불과해 소선거구제 하에서 발생하는 득표와 의석 간의 불비례성을 보정하는 효과가 미미할뿐더러 소수자 기획 2015년 정치개혁, 그 방향을 묻다 43
와 직능 대표성도 제대로 보장하지 못한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선거제도 개혁은 비례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최근 중앙 선관위가 제안한 바처럼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고, 비례대표 의석을 지역구 의석의 1/2로 확대하는 방안도 긍정적으로 검토할 만하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상당수의 의원들이 지역구 의석을 지키기 위해 비례대표 의석을 축소해야 한 다는 주장을 펴는 것도 사실이다. 이에 대해 시민단체들은 비례대표를 지금보다 더 축소하는 것은 명백히 ‘개악’ 이라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국회 정개특위가 선거구 조정 논의 과정에서 비례대표 확대 방 안도 함께 제시할 것을 지속적으로 촉구할 계획이다.
적정 의원 수에 대한 사회적 논의 시작할 때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정치적/입법적 요구를 수용하고, 거대한 행정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국민 의 대표인 국회의 기능을 활성화해야 한다. 이를 위한 방편으로 비례대표 의원을 지금보다 더 확대해야 하며, 국회를 구성하는 의원들의 숫자도 적정하게 확보해야 한다. 우리 국회의원 수가 다른 나라와 비교해볼 때 많지 않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현재 우리 국회의원 1인이 대표하는 인구수는 평균 16만 8000여 명으로, 프랑스 9만 3000명, 영국 9만 7000명, 독일 12만 명 등 주요 의회(양원제 국가는 상하원 포함)와 비교하여 차이가 크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200석이었던 제헌 국회 당시 의원 1인은 10만 명을 대표했다. 제헌국회보다 현재 인구수 기준 대표성이 더 낮아진 셈이다. 의원 1인당 대표하는 국민의 수가 이처럼 늘어나게 된 큰 이유는 급격한 인구가 증가했던 시기에 독재 정권이 집권하면서 국회로 하여금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의원수가 너무 적으면 행정부를 견제할 힘이 약해지고, 국민이 원하는 다양한 법을 만들 수 있는 힘도 줄어들게 된다. 다원화된 사회적 요구를 충분히 반영하고, 거대한 행정부와 선출되지 않은 사법 권력을 효과적으로 견제·감시하기 위해 의원 1인이 몇 명을 대표하는 것이 적정한지 사회적 논의를 시작할 때 다. 논의 과정에서 국회가 스스로 예산과 특권 축소를 위한 자구책을 마련해, 의원정수 확대에 대한 국민 적 동의 기반을 만드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정치적 기본권 보장을 위한 선거법, 정당법 개정 필요 유권자는 선거의 모든 과정에서 주체이다. 유권자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없는 선거는 그저 형식적 절차에 불과하며, 온·오프라인에서 유권자가 후보자의 자질과 정책을 검증하고, 자유롭게 정치적 의견 을 개진하는 것은 민주적인 선거의 기본이다. 44
하지만 우리 선거법은 규제 중심으로 이뤄져 유권자의 표현의 자유, 정책과 후보자에 대해 비판할 자 유를 충분히 보장하지 않는다. 국회는 유권자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선거법 개정에도 적극 나서야 한 다. 한편, 정당설립 요건을 과도하게 규정해 전국 정당만을 허용하는 법도 유권자의 자발적인 정치결사체 를 제한하는 규정이라 할 만하다. 정치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측면에서도, 특정 지역에서 특정 정당의 독점을 개선하기 위해서도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풀뿌리 정당, 다양한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의 등장을 허 용하는 정당법 개정이 이뤄져야 한다.
시민들이 정치개혁 논의의 주체 되어야 국회 정치개혁특위 구성에 즈음해 시민단체들은 앞서 정리한 정치개혁의 원칙과 방안에 대한 공동의 의견을 국회에 전달하고, 범국민적인 논의와 의견 수렴을 요청했다. 국회 정치개혁특위가 가동되기 시작 하면서 밀착 모니터링을 시작했고, 의원들의 발언과 논의에 대한 즉각적인 입장표명과 평가의견을 제시 하면서 여론을 전하는 중이다. 개혁에 반하는 태도를 취하는 의원들의 명단을 정리해 다음 선거에서 평가 의 근거로 활용할 예정이다. 시민단체들의 국회 대응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일은 정치개혁 논의를 시민사회로 가져오는 것이다. 더 좋은 정치 구조를 논의하고 결정하는 것은 국회의원과 정치인들의 전유물일 수 없기 때문이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시민들이 정치개혁 논의의 주체가 되도록, 정치개혁 방안을 시민들이 직접 토론하는 전국 순회 시민원탁토론 행사를 준비 중이다(서울 행사 4월 22일). 국민들이 느끼는 우리 정치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합당한 선거제도는 무엇인지, 의원정수는 어느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등에 대해 시민들이 직접 고민하고 토론 해 모아진 의견을 국회에 전달하고 압박할 계획이다. 올해 정치개혁 논의가 희망적이지만은 않다. 하지만 10년 만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시민 단체들도 최선을 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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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2015년 정치개혁, 그 방향을 묻다
선거제도개혁과 개헌 논의에 관한 녹색당 내 논의 기류 1. 한동안 정치권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던 개헌 의제가 헌법재판소의 선거구획정 헌법불합치 결정을 계기로 선거제도개혁 논의로 급격히 쏠리는 중이다. 선거제도개혁은 장기적 전망과 함께 당장 2016년 총선 을 앞두고 법정시한이 있는 숙제이다. 그러나 국회의원들에게 지역구 선거구획정이란 개헌에 대한 합의보다 더 결론을 이끌어내기 어려운 녹색당원들이 추구하는 민주주 의가 지배 없이 자유롭고 평등
사활이 걸린 싸움이라 마지막까지 이전투구가 될 상황이 불 보듯 뻔하 다. 각 정당의 셈법도 복잡한 상황이다.
한 상태인 이소노미아는 아닐
녹색당은 이제 창당 3년이 지났다. 창당 직후 어찌 치러냈는지도 모
까? 물론 우리가 마주한 정치
를 2012년 총선과 2014년 지방선거 경험을 거치면서 녹색당원들은 비
현실과는 너무 먼 꿈같은 이야
례대표 후보만으로는 무엇도 할 수 없는 선거와 기득권정당 중심의 선
기지만 말이다.
거공영제의 문제점을 절감해야 했다. 이에, 선거평가 과정에서“독한 녹색당이 되자” “선거제도개혁에 적극 나서자” 라는 당원들의 목소리 들이 적극적으로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가 돌아가고 논쟁 중인 지금, 녹색 당 내부 선거제도개혁 논의는 그리 활발하지 못한 상황이다. 솔직히 생애 첫 정당가입으로 당원이 된 다수 녹색당원들에게 정치관계법이 여전히 생소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재의 선거제도개혁 논의가 원
김은희 녹색당 공동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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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 소수정당은 끼어들 여지가 없고 평범한 시민들과는 거리가 먼 기득 권 정치인들만의 관심사인 탓도 크다.
지금은 달리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정당으로서 자리잡아가던 시기 독일녹색당은“법적으로는 정당, 구조적으로는 연합, 최소한 그들이 이해한 바로는 운동” (van H?llen, 1990: 6)이라 평가됐다. 한국 녹색당 도 비슷한 맥락 속에서‘작은 도토리 하나가 만들어낼 떡갈나무혁명’ 과‘반정당의 정당’ 을 선언하고 있 다. 개인적으로는 선거제도 개혁 논의에 덜 논쟁적인 녹색당의 분위기가‘정치적’ 이거나 지배권력 쟁취를 위한‘선거제도 자체’ 에 관심이 적은 녹색당원들의 성향이 모여 형성된 흐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도 한다.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H. Arendt)는 이소노미아(Isonomia)를‘비지배(no rule)’ 로 말하는데, 녹 색당원들이 추구하는 민주주의가 지배의 한 형태로서의‘인민(데모스)의 지배(크라시)’ 에서 나아가 지배 자 체를 거부하는, 지배 없이 자유롭고 평등한 상태인 이소노미아는 아닐까? 물론 우리가 마주한 정치 현실 과는 너무 먼 꿈같은 이야기지만 말이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색당은 강령에서 정치의 변화를 위해 근본적인 정치제도개혁이 필요하다는 입장 을 명확히 하고 있다. 선거구조정 문제를 넘어 유권자들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될 수 있도록 선거제도가 개선되어야 하며, 그 내용의 핵심을‘전면적인 비례대표제 확대’ 로 꼽는다. 또한 대표자를 뽑아서 일을 맡 기는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며 시민들이 참여하는 직접·참여 민주주의를 제안한다. 녹색당 강령에 명시한 기본원칙 외에, 당장 선거제도개혁의 쟁점이 되는 권역별 비례대표제와 석패율, 의원정수 확대 문제, 오픈프라이머리의 제도화 등에 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이와 함께 녹색당은 근본 적인 정치개혁을 위한 운동의 제기, 그리고 당장 2016년 총선을 앞두고 나름대로 선거제도개혁을 위해 부 당한 선거법에 관한‘한 맺힌 선거법 관련 위헌소송’등도 추진을 준비 중이다.
<정치제도 개혁의 최종결정 권한을 시민에게>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절차와 규율에 관한 정치관계법 개정의 최종적 권한을 당사자인 국회의원들이 배타적이고 독점적으로 행사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그동안의 정치개혁이, 늘 절실히 바라지만 실현은 불가능한‘고양이 목에 방울달기’ 였던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현재 선거구획정위원회의 상설·독립화 와 권한 확보 및 국회의 수정권한 여부에 관한 논의가 제기되고는 있지만, 제한적인 선거구획정만이 아니 라 정치관계법에 관한 사안 자체의 심의권한을 시민들에게 되돌리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권역별 비례대표제와 비례대표 의석수 확대> 비례대표 의석수 확대를 전제로 하는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은 현행 선거제도에 비해서는 진전된 방 안이지만, 국회 논의과정에서 여야 거대정당이 비례대표 의석수 확대라는 조건을 훼손할 경우 오히려 정 치적 소수자의 진입에 더 어려운 조건을 만들 수도 있다. 따라서 권역별 비례대표제는 중앙선거관리위원 회가 제안한 지역구:비례 의석비율 2:1, 최소 100석 이상의 비례대표 의석수 확보를 전제로 해야 한다. 기 기획 2015년 정치개혁, 그 방향을 묻다 47
득권 정당과 현역 국회의원 일부에서 언급하는 지역구 선거구획정 조정을 위한 비례의석 축소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정치개악이다.
<국회의원 정수 확대> 비례대표 의석수 확대를 위한 방안으로 국회 의원정수 확대가 논의된다. 녹색당은 시민들의 공론과정 을 통한 국회 의원정수 확대를 지지한다. 그러나 국회 의원정수 확대의 논거가 국회 통과 가능성을 고려 한 지역구 국회의원 기득권 보장이라는 식의 논리에는 동의할 수 없다. 정치개혁은 시민의 요구에 기반을 둔 것이어야지 기득권 지역구 국회의원의 입맛에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니다. 국회의원 특권 폐지는 그 자 체로 국회가 해결해야 할 숙제이지 국회 의원정수 확대와 거래될 사안이 아니다.
<정치결사의 자유와 유권자의 정치적 권리 강화가 우선> 거대 여야가 열세지역에 국회의원 당선자를 내는 일이 지역주의 정치를 극복하는 해결 방안인지, 석패 율 제도가 다른 어떤 정치제도 개혁에 앞서 여야가 합의해 추진할 사안인지 의문이다. 전면적인 정치개혁 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이며, 그 우선순위는 정치인이 아닌 유권자 시민을 위한 제도 순으로 정해져 야 한다. 지속적으로 요구되어온 유권자 표현의 자유 보장과 투표권 확보, 선거연령 하향조정을 통한 선 거권 확보, 교사·공무원의 정치참여 보장, 청소년의 선거운동 제한규정 삭제, 정당 설립요건 완화 등 광 범위한 정치결사와 유권자 권한 강화 제도개선이 선행되어야 한다.
<지역의 정치성 회복을 위한 과제를 미루지 말아야> 자치와 분권은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풀뿌리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지역과 주민들에게 권 한을 되돌려야 한다. 지방선거 직전에야 반짝 논의하다 촉박한 선거일정에 뒤로 미뤄온 풀뿌리 선거제도 개혁을 지금 논의해야 한다. 정당 설립요건 완화뿐만 아니라 지역정당을 허용하고, 정당의 중앙당 소재지 규정을 삭제해야 한다. 기호추첨제, 선거구 분할 조항 삭제를 통한 기초의원 중선거구제 실질화, 광역· 기초 단체장과 지방의원 선거시기의 분리 등의 제도개선을 미리 논의해야만 다음 지방선거를 제대로 치 를 수 있다.
<후보공천에 대한 책임은 정당의 기본> 상향식 공천개혁으로 제안되는 국민경선제(오픈프라이머리)는 그 범위와 방식을 각 정당 차원에서 합 의하고 실행해야 한다. 민주적 공천과정을 거쳐 후보를 선출하는 것은 정당의 기본적 소임이다. 내세울 후보를 결정하는 일조차 스스로 책임지지 못하는 정당에게 책임정치를 실현하기를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 이다. 기득권 정당은 이미 경상보조금과 더불어 막대한 금액의 선거보조금을 사용하는 상황에서 정당 차 원의 후보선출 과정까지 법제화 한다면, 유권자들이 이중적으로 세금부담을 지게 되는 문제도 발생한다. 48
다만 현재의 공직선거법이 정당의 후보선출에 관하여‘민주적 공천’ 이라는 원칙만을 선언하고 있으므로, 최소한 후보공천 확정시기를 앞당겨 법제화함으로써 유권자들의 선택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 또한 과도한 후보자 기탁금 액수 및 반환기준 및 선거비용 보전기준을 하향조정하여 돈 있는 사람만 선거에 출 마할 수 있는 장벽을 해체해야 한다.
3. 개헌 논의가 지금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다시 쟁점이 될 것이다. 반복적으로 제기되는 정치권 의 개헌 관심사는 주로 정부형태 권력구조개편 개헌에 있다. 시민들 모습에 눈 감고 시민들 소리에 귀 닫 은 무소불위 권력을 가능하게 하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한계에 공감하지만 과연 이것이 제도의 문제일까 사람의 문제일까는 여전히 질문으로 남는다. 녹색당은 섣불리 추진하는 권력 나눠 먹기식 개헌 논의에 반대하며, 헌법 개정 자체보다 개정과정에 대해 더 공을 들이는 일이 중요하다고 본다. 헌법은 변화하는 시대정신을 담기 위해 개정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충분한 공론과정과 숙의에 기반을 둔 민주적 절차를 통해 87년헌법이 가지는 절차적 정당성 이상 의 실질적 정당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헌법개정에 관한 진지한 시민적 합의가 만들어진다 면,‘살아있는 헌법’ 의 이상을 구현하는 개헌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멕시코의 경우처럼 헌법에 국가의 목적 규정을 상세하게 정하고 중요한 국가적 정책변경 때마다 개헌 을 해야 하도록 하는 사례도 없지는 않지만(멕시코 경우 1917년 이래도 2014년까지 300차례 이상 헌법개정이 있었다고 한다.), 개헌을 위해 보다 엄격한 조건을 요구하는 이유는 헌법의 절차적 구속에 공익에 기반을 둔
숙의와 토론이라는 여과장치를 만들어줌으로써 주권자인 시민들이 개헌과정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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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진보정치 열전 5
마포당협 대의원 이가현
당을 지키는 마지막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제가 보기엔 당이 위기가 아니었어요.‘내가 나서서 당이 위기가 아니란 걸 보여주지.’조금은 당돌하게 시작했죠. 공식적인 의사결정과정을 통해 제 활동과 전망을 인정받고 싶었어요.”
인터뷰·정리·사진 : 김영길 서울 종로중구 당원
청(소)년 진보정치 열전 51
청소노동자들과의 연대로 시작된 생의 첫 만남 “어떻게 지금까지 오게 됐냐고요?” 눈을 커다랗게 뜨며 질문을 되묻던 이가현 당원은 2012년 생명평화대행진 마무리 집회에 갔던 얘기부 터 시작했다. 그해 10월 강정에서 시작된 국토순례가 밀양, 평택을 거쳐 서울시청까지 왔다. 대학에서의 첫 학년이 마무리될 즈음이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용산참사 유가족들이 오열하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저 사람들은 저렇게 자기 생을 걸면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데, 나는 지금까지 뭐하고 있었나 싶었어요.”같이 갔던 선배가 들려준 긴 이야기를 오들오들 떨면서 들었다. 그날 집에 돌 아가며 그녀는‘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 는다 짐을 했다고 한다.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재학 중이던 이가 현 당원은 2학년 때 교내 청소노동자 연대단체인 ‘맑음’ 에서 활동을 시작한다. 청소노동자들에게 컴퓨터·한글·영어 등을 가르쳐주는 활동을 주 로 했다. 그러다 청소노동자들의 한 달 식대가 만 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러면 하루 한 끼 식대가 400원이 되는데, 400원 가지고 밥을 어떻게 먹어요. 먹을 수가 없잖아요.”뜻 맞는 이 들과‘밥은 먹고 일하자 연대(이하 밥먹일연대)’ 를 꾸려 청소노동자 식대인상투쟁을 시작했다. 발언 도 하고, 유인물도 뿌리고, 본관 앞에서 집회도 했다. 교내 잔디밭에서 청소노동자들과 함께 주먹밥을 만 들어 나눠줬던‘주먹밥대작전’ 은 무엇보다‘따뜻한 경험’ 으로 남았다.‘월 1만 원에서 10만 원으로 인상하 자’ 는 목표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식대인상투쟁은 그 해 봄 7만 원 인상이라는 성과를 얻어냈다.“힘이 없 는 사람도 뭉치면 이렇게 이뤄낼 수 있구나. 이때부터 뭔가가 시작된 것 같아요.” “그러다‘알바데이’ 라는 것을 가게 되었어요.”삼각김밥 모양의 탈을 쓰고 거리행진을 하고, 고용노동 청 앞에서 구호도 외치고, 문 앞에 진정서를 붙이던 그날이 이가현 당원은‘재밌었다’ 고 한다. 함께했던 사람들이 모두 자기 또래고, 이리저리 움직이던 사람들도 다 학교 선배들이어서 친근했다. 같은 학교의 당원들도 그때 처음 만났다.“행진하는 집회도 처음이고 탈을 써서 앞도 안 보이는데 옆에 딱 붙어서 이끌 어줬던 게 기억에 남네요.” 그리고 그해 여름, 친구가 읽는《공산주의 선언》 을 보고 홀로 찾아 읽었던《자본》해설서가 삶의 전환 52
점이 되어주었다.“읽어보니 세상이 너무 잘못되어 있다는 말이 이해가 되는 거예요.”제법 상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말하는 이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뭔가’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당시 알바연대 활 동을 하던 학교 선배 김윤영 당원에게 연락했다. 그렇게 아르바이트노동조합(이하 알바노조)에 가입했다. 노동당에 가입한 때도 이 즈음이었다. 생애 첫 노동조합과 첫 당과의 만남이었다.
알바들의 점을 이어 당의 선과 잇다 2013년 8월 7일 설립된 알바노조는 그해 10월 2일 악세사리 판매기업‘레드아이’본사와 첫 단체협약 을 맺는다. 이가현 당원은 바로 이 대한민국 첫 아르바이트 단체교섭의 당사자다. 그녀는 그해 4월부터 ‘레드아이’충무로역 지점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다.“알바노조에서 노동법 교육을 받으면 받는 대로 가서 항의했어요. 배울 때마다 하나씩.‘왜 알바들은 밥 먹을 시간이 없어요? 주휴수당은 왜 안 줘요?’하면서 요. 창고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카운터에 의자는 있는지, CCTV는 몇 개인지 몰래 사진 찍어가고.”이것 저것 항의하면서, 한편으로는 주변 알바들을 조합원으로 조직했다. 일하던 매장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매장까지 찾아다녔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점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해고 통지였다. 노조가 본사에 항의공
알바노조와 레드아이의 단체협약서. 이가현 당원은 이 대한민국 첫 아르바이트 단체교섭의 당사자다. (사진 : 알바노조)
청(소)년 진보정치 열전 53
문을 보내자 사장에게 전화가 왔다. 힘없는 알바 주제에‘당돌해서’해고했단다. 알바노조가 정식으로 설 립된 지 딱 한 달 만의 일이었다. 알바노조의 첫 단체교섭은 그렇게 이뤄졌다. 10월 2일, 레드아이 본사에서 열린 단체교섭 자리에서 사 측은 부당해고 철회·노동법 준수·전 매장에 휴게의자 설치·연 1회 전 직원 성평등교육 실시 등을 제시 한 노조측의 단체협약안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힘없는 알바노동자들에게 새로운‘무기’ 가 생긴 날이었 다. 그날에 대해 묻자 이가현 당원은“아르바이트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세워진 제 첫 노동조합을 알릴 수 있었던 건 뿌듯했지만, 사실 첫 단체교섭 당사자가 된 건 가장 먼저 잘렸기 때문인 거 같다” 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덕분에 집에서 그간의 활동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단체교섭 과정이 언론에 크게 나는 바 람에 집에서도 알게 됐지만, 보통의 우려와는 달리 어머니는 직장 동료들에게 자랑까지 할 정도였다고. 노조의 활동과 당의 활동을 어떻게 연결시켜 나갈 계획인지 묻자 이가현 당원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 렇게 답했다.“알바노조 활동을 하면서
“결국 당을 만드는 건 사람이잖아요. 사람에 게 다가갈 때는 그 사람에게 맞춰서 다가가야 된다고 생각해요. 면은 선을 이어서 만들고, 선은 점을 이어서 만드는 거잖아요.”
당에 가입한 건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들 이 다 얽혀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입당을 권유한 선배가‘당은 모든 문제 들의 전선을 만들어서 같이 싸우는 공 간’ 이라 말했었는데, 한편으로 조합은 ‘그 전선을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의 전선
과 잇는 공간’ 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당이 당장 다가갈 수 없는 공간에서 비정규 불안정 노동자들과 연대 하며 조직의 외연을 넓히고 전선을 이을 대중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대학생들이 당과의 직접적인 접점을 찾는 건 어렵지만, 알바는 직접 하는 거니까 접점이 생기기 수월해요. 아무리 말하는 가치들이 좋 아도 무작정 당의 이름을 내보인다고 당에 가입하진 않잖아요. 결국 당을 만드는 건 사람이잖아요. 사람 에게 다가갈 때는 그 사람에게 맞춰서 다가가야 된다고 생각해요. 면은 선을 이어서 만들고, 선은 점을 이 어서 만드는 거잖아요.”
학생과 노동자와 민중의 편에 서서 지난 3월 2일, 개강과 함께 이가현 당원은 정권과 경찰을 규탄하는 호소문을 대학가에 붙였다. 방학 중 이던 2월 4일, 서강대학교에 경찰이 진입하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근처에서 다른 일을 하다 소식을 접 한 그녀가 학교에 도착했을 땐 이미 버스 세 대 분량의 경찰병력이 대기 중이었다. 그날 서강대에선 마리 오아울렛 홍성열 회장에게 명예경제학 박사학위를 수여하는 행사가 있었다.“도착해서 보니까 수여식 플 랑 밑에 금속노조 플랑이 붙어 있고, 해고노동자 한 분이 그 앞에서 일인시위를 하고 계시더라고요. 그때 알게 됐어요. 마리오아울렛은 3억 6천만 원의 임금을 체불하고, 5명의 노동자를 부당하게 정리해고한 악 54
홍성열 회장의 명예경제학 박사학위 수여식 규탄 시위. 이날 경찰은 불법집회를 진압한다며 학내에서 학생들을 진압하고 노동자 들을 연행했다. (사진 : 이가현 당원 페이스북)
덕기업이라는 걸요.” 일단 식장 앞에서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학위수여식을 규탄하는 시위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날 경찰은 불법집회를 진압한다며 학교 안에서 학생들을 진압하고 노동자들을 연행했다. 그 사이 홍성열 회장은 수 여식장에 유유히 들어가 명예박사가 되어 나왔다. 심지어 나중에 알고 보니 경찰을 부른 게 다름 아닌 학 교였다. 사건은 점차 커졌다. 2월 11일, 구로경찰서 정보과 형사가 성공회대 학생처에 찾아가 사회과학부 학생회장인 이장원 당원의 연락처를 요구했고, 교직원이 이장원 당원에게 먼저 알려 사찰시도가 언론에 크게 공개되었다. 다음날 12일에는 총장과의 면담을 요구하던 청주대 총학생회장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경찰의 학내 진입과 공공연한 사찰이 계속되었다. “대학에 다니는 학생으로서 대학 안까지 경찰을 투입하는 정권의 자신감에 큰 문제의식을 느꼈고요. 또 한편으로는 아르바이트노동을 하는 당사자로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임금을 체불당하고 부당하게 해 고당하는 것이 남일 같지 않았어요. 두 개 다 제가 이야기해야 할 것이었어요.”이가현 당원은 개강과 함 께 서강대 사태를 알리는 호소문을 배포하고,‘가만히 있으라’카카오톡 사찰의 피해자인 용혜인 당원, 학 내 사찰의 피해자인 이장원 당원과 함께 경찰총장에게 전달할 항의서한을 만들기 시작했다. 서강대 학내 진입과 성공회대 학원 사찰에 대한 해명, 공개되지 않은 사찰 내역의 공개, 그리고 사건의 재발방지를 요 구하는 이 항의서한에는 121개 대학, 1344명이 연명했다. 하지만 전달하는 일 역시 녹록치 않았다. 경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마치고 항의서한을 전달하기 위해 청(소)년 진보정치 열전 55
경찰의 학내진입과 학원사찰에 대한 항의서한을 전달하러 간 이가현 당원. 실랑이 끝에 도착한 민원실에서도 항의가 이어졌지만 끝내 경찰청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사진 : 이가현 당원 페이스북)
움직이자 경찰들이 몰려왔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대표자 세 명만 나오라기에 갔더니 경찰청 정문이 아니 라 민원실 문이었다.“이 문제는 정권의 자신감과 연결된 문제다. 민원실에 그냥 넣을 게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다. 민원실에 가서도 항의를 했지만 끝내 경찰청장은 나타나지 않았어요.”
“야, 손호철 교수님 축사하는데?” 서강대 학내 진입으로부터 시작된 이 일련의 사건들은 이후 또 다른 국면을 맞는다. 국민모임 신당추 진위원회 운영위원장인 손호철 교수가 대학원장으로서 학위수여식에서 축사를 한 일이 알려진 것이다. “손호철 교수님한테 한국정치론 강의를 들었어요. 수업 때 종종 민주화운동을 했던 당시의 얘기도 해주시 고, 노무현 정권 당시에도 노동자들한테 부정적인 발언을 한 데 분노했었다고 하셔서 마음속으로 존경하 고 있었거든요. 정말 저 분은 노동자의 편인가보다 했는데.”수여식장 앞에서 시위를 하는데 친구에게 문 자가 왔다.“야, 손호철 교수님 축사하는데?” “명예 박사학위라는 거 사실 돈 받고 파는 거잖아요. 심지어 그 돈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서 빼앗은 돈인 거잖아요. 범죄자면 범죄자지 뭘 잘한 사람이라고 축사를 해요. 범죄자의 공적을 인정하고 축하하 고. 수업 때 보여준 모습과 너무 달랐고, 또 장그래 정당 만들겠다고 열심히 활동하던 시기에 그런 일을 하 셔서 안타까웠어요.”최근 이 사건에 대한 손호철 교수의 사과문이 언론을 통해 공개됐다. 일견 적절한 사 과다 싶었는데 그녀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56
“사과를 해서 해결될 문제였으면 애초에 시위도 안했겠죠. 알았다면 반대했을 거라는 사과보다는 책임 지고 나서서 잘못된 결정을 번복하고 철회하시기를 바랐어요.”국민모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만큼 이번 4.29 재보궐선거 관악을 후보단일화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전국위원회에서 의결한 우리의 원칙과 그들 의 행보가 맞을지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어요. 손호철 교수님의 경우도 사과는 했어요. 하지만 정말 그들 이 노동자 민중의 편인지는 앞으로 적극적으로 증명해야 알 일이겠죠.” 이가현 당원은 이번 학위수여에 책임이 있는 구성원이 사과까지 한 상황이니 만큼 실질적으로 이 학위 수여가 철회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진상규명을 위해 관련된 모든 이들을 끄집어내 야 한다는 입장이다.“홍성열 회장이 어떻게 명예박사로 선정된 건지부터 알아야 해요. 보니까 경제학부 에 장학금을 주고 있더라고요. 경영대학원을 나왔고요. 알게 모르게 암시장화 된 명예학위 수여에 공모된 부정행위가 있는지, 있다면 사 회적으로 고발하고 이제라도 제대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책당대회에서 청년대의원까지 2013년부터 지금까지 숨 가쁘게 달려온 이 가현 당원은 지난 1월 당직선거에서 마포당협 여성명부 대의원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지금은 재학 중인 학교를 중심으로 당 안팎의 여러 활동들을 해나가고 있지만, 불과 1년 전 까지만 해도 당에서 뭘 해야 할지 몰랐다고 한 다. 그런 그녀에게 지난해 말에 열린 정책당대 회는 당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보여준 하나의 사 건이었다. “처음으로 당 공식행사에 가봤는데, 사람도 많이 모였고 토론도 많이 했잖아요. 당의 전망 을 제시하는 여러 정책들을 들으며 의지가 생 겼어요.”특히 둘째 날 참여섹션의 청년파트가
“각자의 공간에서 열심히 활동하면서 자신의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각자의 공간에서
활동을 당의 성과로 연결시키려는 모습을 보
열심히 활동하면서 자신의 활동을 당의 성과 로 연결시키려는 모습을 보고 저도 그렇게 하
고 저도 그렇게 하고 싶다 생각했어요.” 청(소)년 진보정치 열전 57
고 싶다 생각했어요.”이때의 결심이 대의원 후보로 출마하는 계기가 되었다.“제가 보기엔 당이 위기가 아니었어요.‘내가 나서서 당이 위기가 아니란 걸 보여주지!’ (웃음) 조금은 당돌하게 시작했죠. 공식적인 의사결정과정을 통해 제 활동과 전망을 인정받고 싶었어요.” 청학위 회원이기도 한 이가현 당원은 청년세대가‘당의 미래’ 라고 생각한다.“아무리 당이 무너져도 청 년·청소년들이 당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으면 그 당은 살아난다고 보거든요. 지금부터라도 그런 재생산 의 역할을 하겠다고 공언하는 거고요.”청년세대들을 어디서 만날 생각이냐는 물음에 그녀는 자신이 다니 는 학교, 또 학교가 있는 마포에서부터 시작하겠다고 말한다.“가까운 곳부터 직접 찾아가면서 해나가고 있어요. 청년들이 계속 당으로 들어오고 있어요. 근데 전, 당의 전망이 특별히 밝아서라기보다는 주변 사 람들을 믿고 들어오는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사회의 변혁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이 그 당에 있기 때문에 들어가는 거죠.” 노동당의 청년당원들은 헌신적인 노력을 바탕으로 지난 2013년‘안녕들하십니까’ , 2014년‘가만히 있 으라’등 우리 사회 청년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만들어왔다.“그러니 실제로 자기 공간에서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다른 당의 청년당원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눈에 안 보이거든요. 반면에 우리 당의 청학위들은 어디서든 뭘 하고 있어요. 어쨌든 여기서 힘이 되겠다고 들어온 대단한 사 람들이라고 생각해요.”덧붙여‘진보 청년세대 육성’ 이라는 당의 과제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물었다. “올해 청학위가 새롭게 구성되고, 열성적으로 사업을 전개해나가고 있어요. 당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청년들을 조직하려면 당에서 세대를 막론하고 마음을 열고 청년들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해 요.”그녀는 여름 청년정치학교를 통해 청년당
“좀 더 보이는 자리에서 당을 지탱하도록 하겠습니다. 당을 지키는 마지막 사람이 되기 위해 열심히 살게요.”
원들을 다시 조직해보겠다며 결의를 다졌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당원들에게 하고 싶 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당 활동을 하면서 이 가현 당원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당을 지탱해왔단 걸 깨달았다고 한
다.“앞으로는 당의 대의원으로서, 또 청년당원으로서 좀 더 보이는 자리에서 당을 지탱하도록 하겠습니 다. 당을 지키는 마지막 사람이 되기 위해 올 한 해 열심히 살게요. 얼굴 크게 나갈 것 같으니 만나면 꼭 아 는 척 해주세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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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르포
불안한 삶들의 연대, 알바 노조
청(소)년 진보정치 열전 59
노동르포
불안한 삶들의 연대, 알바 노조 서분숙 기록 노동자
그에게 알바노조가 필요한 이유 대구 알바노동조합 창립을 준비 중인 창진 씨는‘알바’ 는 불안정한 삶을 상징하는 말이 라고 한다. 아르바이트가 학비나 생활비를 보조하기 위한 일시적 파트타임 일자리가 아니 라 이미 생계형 일자리가 되어버린 지 오래라는 말이다. 스스로를 대구 알바노조를 준비하 는 여러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창진 씨가 알바노조에 대해 기울이는 마음은 깊고 단단하다. 특수교육을 전공한 그가 알바노동조합의 준비 주체가 된 일은 우연이 아니다. 대학을 입 학하던 해, 특수교사 임용이라는 눈앞의 목적보다도 먼저 그의 마음에 다가온 건 1996년부 터 이어져오던 경기도 평택 에바다 학교의 투쟁이었다. 비리로 얼룩지고 교사와 장애인의 인권이 유린되는 특수학교의 현실을 보고 들으면서 그는‘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저런 현 실에 처해있는데 내가 그냥 교사가 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부터 그는 특수학교 교사라는 직업보다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는 일에 맘이 더 기울었다. 최 옥란 열사1)의 죽음은 그의 삶의 길을 결정하는 큰 사건이었다.
“내가 내 잘난 맛에 운동하는 게 운동이 아니구나. 이게 제대로 하는 게 아니구나. 그분 1) 최옥란 : 1966년에 태어남.‘생존권 쟁취와 최저생계비 현실화’ 를 위해 싸우다가 2002년에 운명. “의료비와 약값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액으로 살아내야 했던 장애인의 삶이 얼마나 처참했을지는 상상조차 힘들 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기초생활’ 은 고사하고 생존조차 보장해주지 못하는 빈곤악화 제도에 불과했다. 최 옥란 열사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잔인함을 알리고자 명동성당 농성 및 생계급여 반납 투쟁을 벌였지만 돌 아오는 것은 좌절뿐이었다.”(최옥란 열사 13주기 추모사 중에서. 2015년.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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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권 노동자대회에 참석한 알바노조 대구지부의 깃발 (사진 : 서분숙 제공)
이 그렇게 죽은 것도, 그분 스스로는 사회적으로 계속 문제를 제기하는데도 함께해주는 사람들이 너무 없 어서 그렇게 그런 길을 선택한 게 아닌가 하는 고민을 너무 많이 하게 되었어요. 그 다음에 난 이런 길을 걸으며 살아가야겠다 맘을 먹은 게, 그렇게 힘들게 싸우고 계신 분께 어떻게든 다가가‘나’ 라는 사람, 당 신을 지지하고 어떻게든 당신과 연대하고자 하는 사람이 당신 옆에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이 분들이 어떻 게든 다른 선택을 안 하고 계속 싸우겠구나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창진씨는‘알바’ 가 생존에 흔들리는 불 안한 모든 삶들을 위한 노동조합이라고 했
‘알바’ 는 생존에 흔들리는 불안한 모든 삶들
다. 흔들리는 게 생존뿐일까. 생존에 흔들
을 위한 노동조합이다. 누군가가 외롭고 고단
리다 보면 희망이 무너진다. 그래서 또 누
할 때, 그래서 무너지는 희망 앞에 무릎 꿇고
군가가 최옥란 열사처럼 세상을 떠나는 일 이, 그런 일이 되풀이되는 세상이 그는 불
싶은 날, 그 사람의 곁에 서고 싶었다.
안하다. 그래서 그 누군가가 외롭고 고단 할 때, 그래서 때로 무너지는 희망 앞에 무릎 꿇고 싶은 날, 그 사람의 곁에 서고 싶었다. 그 이유가 그가 알바노조를 세우는 일에 하나의 기둥으로 참여한 이유다.
노동르포 61
네 명의 알바 노동자, 네 가지의 꿈 2015년 삼월의 어느 날, 대구광역시 신천동에 있는 알바노조(준)에서 네 명의 알바들을 만났다. 그들은 모두 알바노조(준)의 조합원들이다. 사진 찍히고 이름 실리면 알바조차도 해 먹고 살기 어려운 세상이라 사진도 찍지 않고 실명도 묻지 않은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 명의 알바들의 사례를 차례대로 싣는다.
올해 스물 두 살의 은별은 지금 두 달째 프렌차이즈 치킨점에 서 야간근무를 하고 있다. 인터뷰를 한 날도 인터뷰가 끝나면 곧 야간근무에 들어가야 했다. 학교를 휴학하고 힘든 야간 알바를
밤이 되어도
해야 할 무슨 절박한 사정이라도 있냐는 나의 물음에 그는‘내 삶
일어나지지가 않아요
은 내가 스스로 꾸려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 이라고 답했다. 어려 서부터 부모님께 그렇게 교육을 받은 이유가 크다고 했지만 나는
은별 (22세, 치킨집 알바)
그에게서 얼핏얼핏 새어나오는 무력감을 읽을 수 있었다. 인문학 계열이 전공인지라 졸업을 해도 마땅히 취업할 곳이나 다른 진로 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은별에게 알바는 어쩌면 불안한 미래 를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단련시키는 과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이 들었다. 졸업을 해도 어차피 미래는 어두우니까 졸업보다는 스스로 독립할 수 있는 생활력을 우선 갖 추는 것이 은별이 알바를 하는 중요한 이유다. 은별은 지금 학교를 휴학한 상태다. 은별뿐만 아니라, 학업과 알바의 병행은 참 힘든 일이라는 게 대학 생 알바들의 공통된 이야기였다. 낮에 일을 하면 어차피 수업시간과 중복이 되어 공부를 할 수가 없고, 은 별처럼 야간알바를 하게 되면 다음날 졸음에 겨워 학교에 가지 못하거나 가더라도 제대로 수업을 듣기 힘 들기 때문이다. 학교수업도 듣고 밤 시간엔 공부를 하거나 쉴 수도 있는, 이른바 중간시간 알바는 그야말 로‘하늘의 별따기’ 라고 했다. 조건에 맞는 알바를 구하는 일도 취업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매니저와 단 둘이 야간 일을 하는 은별은 알바를 시작하고부터는 밤 시간에 잠시도 잠을 자지 못한다. 잠은커녕 휴게시간도 없다. 처음엔 야간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 잠을 자면 다시 저녁엔 눈이 떠지곤 했는 데, 이젠 그마저도 힘들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한번 잠이 들어버리면 눈을 뜨기 힘들다. 얼마 전엔 과 일 주스를 만들려고 토마토를 썰다가 손가락이 날아가 버릴 만큼 깊이 베였다. 칼질이 서툰 탓이라기보다 는 그간의 누적된 피로 때문인 듯했다. 피가 펑펑 흐르는 채로 손님의 신용카드를 들고 계산까지 해야 했 다. 자신을 대체할 인력이 없기 때문이다. 휴게 시간은커녕 이런 상황에서 흐르는 피를 닦을 시간조차 없 는 처지가 지금 은별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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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널드는 정말 박리다매로 먹고사는 기업인데, 그 수입이 얼마인지 몰라요. 유한회사라서 투명성이 없어가지고. 수익이 얼
속도를 내서 막 달려야 해요, 엄청 위험해요 노윤후 (27세, 맥도널드 배달직)
마인지는 몰라도 정말 엄청나게 흑자를 내고 있는데 그 수익을 노동자들에게는 돌리지 않죠. 맥도널드에서 일하는 사람들 보면 지금 정말 엄청 힘들게 일해요. 정말 기계같이 딱딱 짜여서. 레이 블 컨트롤이라고 컨트롤 기계가 있는데, 정말 그거에 의해 딱딱 짜여서 돌아가요. 그 시스템이 어떠냐면, 매출 얼마일 때는 노동 자 얼마 쓰고, 이렇게 조종하는 거예요. 정말 어떨 때는 그조차도 안 지키고 그거보다 더 적게 쓰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의 양은 더 늘어나는데 일하는 사람은 똑같이 하는 거예요. 걔들이
수익을 내면 낼수록 우리는 더 힘들어질 뿐이지 수익분배 같은 건 하나도 없죠. 그래서 임금을 최저임금 을 주는 게 너무 부당한 것 같고. 그리고 두 번째. 꺾기라고, 이게 손님이 없다고 집에 가라(는 거예요.) 이것 도 레이버 컨트롤의 일부인데, 꺾기라는 게 뭐냐면 하루에 일곱 시간에서 여덟 시간 일을 한다고 하면 그 시간을 지켜야 하잖아요. 근무자는 그 시간에 맞춰 일을 해야 하는데, 그래야 생계를 유지하는데, 레이버 컨트롤에 따라 이게 적자가 날 것 같다 그러면 세 시간이 되었든 네 시간이 되었든 이렇게만 일하고 집에 보내버려요. 가라, 집에. 그러면 일을 못해요. 꺾기도 단위가 주 단위 꺾기라고, 이미 스케줄이 나와 있는 데도 저희 지점에서는 일주일 단위로 스케줄을 신청해요. 신청할 때 만약 월화수목금 이렇게 신청을 하 면, 월화를 빼버리고 수목금 이렇게 넣어요. 원래 처음에 계약할 때 월화수목금 이렇게 계약하면 그 기간 안에 넣는 스케줄은 지켜야 하는데, 그걸 안 지키는 거죠. 그건 근로기준법을 위반하는 거죠. 그렇게 해놓 고 근무표 싸인 안 하면 은근히 압박하고, 어떨 때는 나도 모르게 싸인이 되어있는 경우도 있고. 그리고 비 트 레이트라고, 주문에서 배달까지 시간을 재는 기계(가 있어요.) 주문이 들어오면 벨, 모니터, 확인 버튼이 뜨는데, 음식이 만들 어져서 나오고 그걸 받아서 손님에게 전해 주고 돌아오는 시간이 30분 안에 끝나야 해요. 처음 배달에 성공하면 비트 레이트
“비트 레이트라고, 주문에서 배달까지 시간 을 재는 기계가 있어요. 음식이 만들어져서 나오고 그걸 받아서 손님에서 전해주고 돌아 오는 시간이 30분 안에 끝나야 해요.”
가 100 그대로 있는데, 두 번째 배달이 만 약 그 시간 안에 못 다녀오면 비트 레이트가 80이 되거든요. 그렇게 비례 수에 따라 배달이 되는데, 만약 100에서 두 번을 제 시간 안에 못 다녀오면 비트 레이트가 80이 돼요. 그런데 비트 레이트가 85 이하로 떨 어지게 되면 본사에서 지점에 고가 점수랄까 그런 걸 깎는가 봐요. 매장 정직원이 비트 레이트 올려달라 고 하면, 라이더(배달노동자)는 몇 명 없는데 배달할 건수가 많으면 여러 군데 배달할 걸 한꺼번에 묶어 배 달해야 해요. 맥도널드 배달 오토바이 규정 속도가 50인데 그 속도로는 절대 그 시간 안에 못 다녀와요. 노동르포 63
막 달려야 해요. 엄청 위험해요.”
파도는 지난 해 대구의 한 문화재단에서 해고를 당했다. 어느 날 갑자기 당한 해고였다. 근로계약서는 쓰지 않았지만 지난 해 6 월 1일에 12월 말일까지 일하기로 하고 시작한 일이었다. 그런데
성 상품화 되는 느낌,
갑자기‘짤렸다.’일당 5만 원이라고 해도 한 달씩 월급을 받는
기분 나빴어요
임금노동자였다. 지난 해 10월 17일, 여느 날과 다름없이 출근한 파도는‘이제 그만 나오라’ 는 해고 통보를 받았다.
파도 (23세. OO문화재단에서 해고)
“매일,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일했는데도 전 일용직이었어 요. 처음엔 제가 그게 불법인 줄도 몰랐는데 나중에 알바노조를 통해 들어보니 근로계약서도 안 쓰고, 일주일에 15시간 이상을 일했는데도 주휴수당을 주지 않았고, 그리고 당일 해고를 당했어
요. 이런 경우 해고 예고수당을 받을 수 있더라고요. 그런 거 관련해서 노동청에 고발을 했는데 검사가 전 화를 했어요. 돈 받지 않았냐고, 받았으니 고소취하 하라고 권유를 하더라고요. 전 그때 정말 화가 났어 요. 얘들이 놔두니까 정말 짜고 치는 건가, 그래서 바로 기자한테 전화를 해서 기사화를 시켰죠. 녹취록이 랑 근무상황표를 다 정리해 놨었고, 근무일지를 다 찍어 놨거든요. 싹 다 정리를 해놨기 때문에 고발도 할 수 있었고 검찰에서 전화 온 걸 기사화도 시킬 수 있었던 건데, 그 뒤에 더 들었던 말이 뭐냐면, 쟤 원래 근 무가 불성실하고 이상한 애였다. 사건의 원인은 근로기준법을 지키지 않아서 OO문화재단이 고발당한 일 인데, 잘못한 건 OO문화재단인데, 왜 공격의 대상이 내가 되어야 하는지 참 이해할 수 없었어요.” OO재단 에서는 처음엔 해고사유가 파도의 근무태도가 불성실했기 때문이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문화재단의 대표 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파도는 대표의 얼굴을 몰랐고, 대표를
OO재단은 나중에서야 해고사유가‘문화재단의
봤을 때도 여느 방문객들에게처럼 인사
대표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 이라고 했다. 대
를 하고 안내를 했다. 파도가 좀 더 상 냥했더라면, 대표를 만났을 때 좀 더 친 절하게 과장된 웃음으로 포장했더라면
표를 만났을 때 좀 더 친절하게 과장된 웃음으 로 포장했더라면 해고를 당하지 않았을까?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해고였다. 이런 부분들을 포함해서 여성 알바노동자들에게는 요구하는 것들이 더 많다고 파도는 말한다. “넌 왜 화장 안 해? 넌 왜 옷을 이렇게 입어? 옷차림을 요구하려면 차라리 유니폼을 제공하든가. 그리 고 하루 종일 서있거나, 100미터 200미터 걸어 다니는 일을 하는 알바생들에게 하이힐을 신을 것을 요구 하는 일도 있어요.” 일을 하러 왔으면 일을 잘하면 되는 건데, 알바노동자 자신을 성 상품화해서 내놓게 하는 요구가 그는 64
싫다. 가게에서 물건을 팔 때는 물건을 잘 팔면 되는 건데 왜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지, 그 또한 이해할 수 없다. 계약기간이었던 육 개월을 다 채우지 못하고 당한 해고. 근로계약을 위반한 고용주보다 먼저 해고당한 노동자를 공격하던 세상이었다. 이십대 초반이었던 그에게 지금의 세상은 어떤 곳인지 묻고 싶었지만 나 는 그 질문을 그냥 맘에 담아둔다. 파도에게는 세상이 어떤 곳인가 보다는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사는가가 훨씬 소중한 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저는 재수를 해서 대학에 왔는데, 알바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주욱 계속했어요. 저는 주로 일용직이었는데, 주로 몸 을 쓰는 일을 했어요. 일용직 같은 경우는 근로기준법이나 그런
알바, 그 자체가
것의 사각지대죠. 최근에 했던 일은 택배인데, 택배 같은 경우는
직업인 거죠
연락이 오면 그냥 가요. 원래는 하루를 일해도 근로계약서를 작 성해야 하는데 택배의 특성상 그냥 가서 신분증을 보여주고, 대
설민 (24세, 대학생)
구에서 대전으로 올라가서 밤에 주욱 일을 하고 그 다음 날 다시 대구로 와요. 전에 대구엑스포 할 때는 내가 거기서 창고관리랑 납품을 했는데, 거기서 일하다가 다쳐서 뼈에 금이 가가지고…. 근데 거기서는 이제 허리를 다쳤으니 일을 못 하겠네 나오지 마
라 그래서 나는 이거 문제가 있다, 일을 하다 다쳤으니 이건 분명 산재이고 내가 그냥 나갈 수는 없으니 피 해보상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해서 200만 원을 받은 적이 있어요. 졸업생의 이분의 일이 실직 상태고, 취업 을 한다 해도 칠팔십 퍼센트 이상이 비정규직 일인데 그마저 구하기도 힘들고, 학교 다닐 때도 학자금, 기 숙사비, 생계비 벌어야 하고, 일단 생활을 하려면 알바를 해야 하는 현실이죠. 알바는 더 이상 사회생활 경 험하거나 용돈벌이 정도 하는 게 아니라, 알바 그 자체가 이제는 하나의 직업인 거죠.”
최저임금 일만 원 맥도널드에서 배달 일을 하는 노윤후는 일주일에 야간 두세 시간을 포함해서 한 달에 백이십 시간을 일한다. 그렇게 일하고 그가 받는 임금은 백여만 원. 야간 일을 하지 않으면 임금은 더 줄어든다. 독립해서 살다가 도저히 생계를 잇기 어려워서 얼마 전에 다시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들어갔다. 치킨집에서 일하는 은별도 복학을 한다한들 졸업 후 별다른 전망이 보이지 않아 답답하다. 알바를 하려고 다섯 군데에 이력 서를 내도 잘해야 겨우 두 군데 정도 연락 오는 게 알바의 현실이라고 말하는 파도는 그래도 여전히 씩씩 하다.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가꾸어가고 싶어 한다. 대학을 졸업하는 안하든 여전히 생존이 암담한 현실 의 대안을 설민은‘노동해방’ 이라고 말한다. 노동르포 65
영남권 노동자대회에 참석한 알바노조.‘생활임금 보장하라!’ 는 구호를 적은 선전물을 들고 있다. (사진 : 서분숙 제공)
이들은 한결같이‘최저시급 일만 원’ 을 이야기한다.‘최저시급 일만 원’ 은 더 이상 하나의 구호가 아니 라 열악한 자영업자들이나 알바노동자들이 살아가게 하는 현실적인 대안이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시급이 낮을수록 노동에서 내몰린 자영업자가 늘어날 테고, 열악한 자영업자가 늘어날수록 알바노동자들의 생존 조건은 더욱 나빠질 것이다. 최저시급 일만 원을 법으로 정하는 일은 그나마 인간다운 삶을 위한 시작일 뿐이다.
점점 더 열악한 노동으로 삶이 내몰리 는 세상이다. 알바노동자는 가장 외롭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시간제 노동으로, 비정기적 불규칙 노동으로, 점점 더 열악한 노동 으로 삶이 내몰리는 세상이다. 이 세상의 수많은
고 열악한 생존의 지점, 그곳에서 버텨
알바들. 그들은 알바라는 이름의 옷을 입고 앞으
가는 모든 이들의 이름이다.
로 수십 년을 불안한 노동자로 살아가야 할 운명 앞에 놓였다.
알바노동자는 가장 외롭고 열악한 생존의 지점, 그곳에서 버텨가는 모든 이들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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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67
정책포럼
학교운동장 인조잔디, 더 민주적으로 더 안전하게 유해성 문제의 당사자가 구체적으로 알고 직접 결정할 권리 김한울 서울시당 사무처장
저 많은 인조잔디를 누가 다 깔았을까 운동장 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 입학식이었다. 그야말로 삭막하기 짝이 없 는 광경이 펼쳐졌다. 황사를 품은 3월 초의 봄바람은 생각보다 거칠었고, 어디서 날려 왔는 지 바람을 타고 굴러다니는 마른 풀들은 당장 찰스 브론슨이 숫자 열을 세며 권총을 차고 나와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어딜 가나 다를 바 없던 모래 운동장은 그날따라 유독 낯설었다. 그렇게 삭막하게만 느껴지던 모래 운동장이 시나브로 푸른빛을 띠기 시작한 건 불과 십 년 안팎의 일이다. 연중 뛰어다녀야 하는 운동장에 이를 도저히 견뎌낼 방도가 없 는 잔디가 들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인조잔디’ 다. 학교운동장 인조잔디는 2005년부터 교육부와 국민체육진흥공단이 적극적으로 나서며 보급되기 시작했다. 경륜, 경정, 스포츠토토 등을 통해 조성된 국민체육진흥기금 지원에 지 방자치단체 지원이 더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푸른 운동장이라니, 학교마다 두 팔 벌려 환영했음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월드컵 이후의 축구 열기를 잇는다는 명목까지 더해져 인조잔디 보급이 한창 탄력을 받 던 때였지만, 안전성을 의심케 하는 일은 당시에도 있었다. 2006년에는 인조잔디 고무칩에 서 발암물질이 검출됐고, 그 전 해인 2005년에는 이미 내구연한이 지난 야구장 인조잔디에 서 유해먼지 발생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잔디 운동장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식히기에는 역 부족이었다. 인조잔디 축구공원을 조성하던 공무원이 인조잔디 발암물질 검출에 관한 언론 인터뷰에서‘유해성 여부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인체에 해가 되지 않도록 조성하겠 68
다’ 고 답해도 문제가 없었을 정도이니 더할 말이 없다(<서.유성구.대덕구에 국제규격 축구공원> 중도일보, 2006.12.19).
사고가 생겨야 대책을 마련하는 어리석음은 인조잔디 문제에서도 반복됐다. 2007년, 인조잔디가 설치 된 지 두 달도 안 된 초등학교에서 학생과 교사들이 두통과 피부병 증세를 호소하기 시작했다.(<교육부‘인 조잔디 유해성’뒤늦게 실태조사> 한겨레, 2007.7.2). 2010년까지 1700억 원을 투입해 전국 1100여 개 학교에
인조잔디를 설치하기로 하고 한 달 남짓 지난 때의 일이다. 이후 속속 기준치 이상의 발암성 물질과 중금 속이 검출되면서 인조잔디 유해성 논란에 불이 붙었다. 교육부는 재시공을 약속했지만 급작스런 예산 확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해 인조잔디 대부분이 방 치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었고, 학교 교장조차 유해물질 검출 결과를 학교 구성원에게 알리지 못한 채 전 전긍긍한다는 보도가 나오기에 이르렀다(< ‘발암’인조잔디, 아직도 그대로...> 오마이뉴스, 2007.11.9). 구체적인 피해 발생에 따른 검사에서 기준치 이상의 발암물질과 중금속이 검출됐음에도 인조잔디 유 해성 문제는 엉뚱하게 흘러갔다.‘유해물질 없는 고급 인조잔디’ 나 유해물질 검출의 원인이 된 원료를 쓰 지 않고‘인조잔디 자체를 수입’ 하면 문제가 없다는 식의 설명이 붙기 시작 했다. 급기야 교육과학기술부는 국민 체육진흥공단, 지자체와 함께 2009 년부터 2012년까지 5000억 원을 추 가로 들여 1000개 학교에 인조잔디
사고가 생겨야 대책을 마련하는 어리석음은 인조 잔디 문제에서도 반복됐다. 인조잔디가 설치된 지 두 달도 안 된 초등학교에서 학생과 교사들이 두통과 피부병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운동장을 확대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유해성 논란 인조잔디 운동장 또 확대> 내일신문, 2008.7.7). 여름철 햇빛으로 74도까지 과열되는 인조잔디
로 인한 화상 우려까지 전해졌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뉴욕시, 무더위 속‘인조잔디 경고령’ > 내일신문, 2008.7.16). 발암물질과 중금속이 계속 검출되는 와중에도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인조잔디 설치는 계속
되었고, 신규 설치된 인조잔디에서는 다시 발암물질과 중금속이 검출되었다. 그리고 이 이해하기 힘든 악 순환은 아직도 끊이지 않고 진행 중이다.
인조잔디, 그 후 경제적인 측면에서 살펴보자. 인조잔디의 내구연한은 대개 7~8년 정도로 알려졌다. 2008년의 교육부 예산을 기준으로 보자면 인조잔디 설치비용은 학교 당 5억 원에 가깝다. 신규 설치이므로 내구연한이 끝 날 때마다 들어가는 철거비는 포함되지 않은 금액이다. 예산은 복권사업의 수익금으로 조성된 국민체육 진흥기금이 3억 5천만 원, 기초지방자치단체가 1억 5천만 원을 지원해서 총 5억 원의 비용을 충당하는 방 식이다. 정책포럼 69
생활체육활성화 차원에서 운동장 일반 개방을 조건으로 이루어지는 사업이라고는 하지만, 인조잔디 설치에 소요되는 비용과 각급 학교에서 교육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소요되는 비용을 견주어보면 그야말로 주객이 전도된 모양새다. 하물며 인조잔디의 안전성조차 검증되지 않은 상황에서 생활체육활성화를 위한 다니, 보다 많은 시민들이 안전성이 검증되지
인조잔디 설치가 생활체육활성화를 위 해서라니, 보다 많은 시민들이 안전성도
않은 인조잔디를 밟으며 건강한 삶을 누리기 바 라는 것 자체가 사리에 맞지 않는다. 문제는 이미 발생 중이다. 유해물질이 포함
검증 안 된 인조잔디를 밟으며 건강한
되었음을 뻔히 알면서도, 비용이 없어 철거를
삶을 누리길 바라는 건가?
미룬 채 운동장 사용을 중지하는 학교까지 나타 났다. 도봉구의 방학초등학교는 유해물질 검출
로 사용 중단된 운동장의 인조잔디를 걷어내고 새로운 인조잔디를 설치하기 위한 예산을 서울시 참여예 산사업으로 제안해서 2014년에 지원을 받기도 했다. 어찌어찌하여 방도를 찾은 셈이지만 일반적인 해법 이라고 보기엔 어렵다. 저 무수한 유해 인조잔디를 철거할 비용을 어떻게 마련할 테고, 새로 설치될 인조 잔디의 안전성은 어떻게 확보할지를 따져 물어야 하는 이유다. 인조잔디로 인해 학생과 교사가 두통과 피부병을 겪어야 했던 2007년으로부터 8년이 지났다. 그렇다 면 그 사이, 인조잔디의 유해성 문제가 해결됐을까.
인조잔디 유해성 점검 결과 (*21개교 중복)
2014년 세밑에 문화체육관광부가 내놓은 보도자료에 의하면, 2010년 이전에 인조잔디를 설치한 1037 개 학교를 전수조사한 결과 기준치를 초과한 납이 검출된 학교가 13%에 육박한다. 카드뮴, 6가 크롬, 발 암물질로 알려진 PAHs가 기준치를 초과하여 검출된 경우까지 포함하면 5개 학교 중 1개 학교가 기준치 를 넘는 유해물질이 확인된 안전하지 않은 인조잔디를 여전히 끌어안고 있는 셈이다. 전수조사 기준이 2010년 이전 설치 학교로 제한된 이유는 그나마 2010년에서야 인조잔디 유해물질 기준치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2010년 이전에 설치된 학교 운동장 인조잔디의 내구연한이 도래 중이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한 여름 70
서울시내 학교 운동장 인조잔디 연도별 설치 건 수
타는 듯한 햇볕에 달아오른 인조잔디는 직접 피부에 닿으면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겁다. 반복적인 수축과 팽창에 더하여 끊임없이 물리적 충격을 받아야 하는 운동장 인조잔디의 특성을 생각하면, 내구연한이 다 가올수록 급격하게 노후화되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다. 연한이 다가올수록 갈라지고 찢어지며 깊숙한 곳 에 있던 유해물질이 잔디 위의 사람에게 노출되는 빈도나 양 또한 함께 증가하리란 건 불 보듯 뻔하다. 기준치 또한 의심스럽다. 현행 납 검출 기준치는 공산품 기준을 빌려온 것이다. 노후화로 인해 더 많은 유해먼지가 날리는 상황에 대한 고려가 충분히 반영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공산품 기준의 유해물질 기준 치를 호흡 등을 통해 인체에 유입이 가능한 인조잔디의 기준치로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사용자가 만져도 안전한 기준 수치와 인체에 유입되어도 안전한 기준 수치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인조잔디의 유해성 여부에 대한 논쟁은 국외에서도 현재진행형이다. 극소량의 납조차도 어린이의 신 경인지 발달에 유해할 염려가 있으므로 어떠한 경우도 납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는 견해를 주목해 볼 만하다. 이에 따르면 기준치 자체가 무의미하다. 납은 어느 기준치 이하가 안전한 게 아니라 전 혀 검출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당사자 결정권과 알 권리에서 시작하는 유해성 정보 통제권 유해물질 검사 방법과 기준치의 신뢰성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문제는 유해물질이 인체에 미치는 영 향을 확인하고 안전성을 확보할 기준이 과학적인 근거에 따라 충분히 신뢰할 만한 수준으로 형성되기 이 정책포럼 71
서울시당에서 제작한 인조잔디 공보물
전까지 이 문제를 어떠한 기준으로 다루어야 할 것인가다. 지금까지 인조잔디가 설치되는 과정에서 학교 구성원이 인조잔디에 포함된 유해물질의 유해성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고 그에 따라 인조잔디 설치에 관한 판단을 스스로 내릴 수 있는 절차나 제도는 없었 다. 지금까지 학교운동장 인조잔디가 5억 원의 설치 지원금일 뿐, 결코 중금속과 발암물질을 포함한 위험 물로 고려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인조잔디
누구나 자신의 건강과 직결될 수 있는
를 직접 사용하는 학생과 시민을 비롯하여, 교사 와 학부모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그 유해성 여부
문제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고
와 기준에 대한 설명을 듣지 못한 채 그저 푸른
그에 따라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
운동장으로만 환영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
다. 이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주목해야 한다. 누구나 자신의 건강과 직결될 수 있는 문제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고 그에 따라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당장 우 리 동네 학교에 설치된 인조잔디가 과연 안전하다고 할 만한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근거를 요구하고 제 공받는 일은 가장 기본적인 권리 중 하나인 알 권리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에 근거하여 인조잔디를 택할 지, 아니면 다른 방안을 채택할지를 학교 구성원들이 직접 결정하고 책임지는 당사자 결정권은 당연하지 72
만 보장받지 못했던 자연스러운 권리다. 학교운동장 인조잔디의 문제는 바로 이 기준에서 출발해야 한다. 충분히 안전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의 마련은 전문가들의 몫이다. 그러나 당장의 판단을 위해 지 금까지 밝혀진 내용을 확인하고 판단할 권리는 인조잔디를 이용하는 누구에게나 있다. 더불어 이 권리의 맥락을 확장한다면, 우리는 우리 삶의 안전에 조건을 이루는 요소들에 대해 충분히 알 권리를 가지고 스 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또 다른 측면의 기본권을 강조하는 의미가 된다. 단순히 인조잔디가 안전한가 여부에 갇히지 않고 더 넓은 권리의 영역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 에 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안전을 둘러싼 문제에 대한 충분한 자기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시 작 중 하나가 바로 학교운동장 인조잔디에 관한 문제가 되기를 제안한다. 좀 더 민주적으로, 좀 더 안전하 게.
노동당 서울시당은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2013년 서울시교육청이 실시한 2010년 이전 가설된 인 조잔디에 대한 전수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학교인조잔디 중금속 검출 지도>를 제작하고 (http://goo.gl/EmQj23), 지역 당원들과 함께 해당 학교 앞 캠페인을 전개하고 관련기관과 연계해 학부모 강좌와 인조잔디 중금속 검사 등을 진행할 예정이다.
정책포럼 73
‘노동당원’ 다운 삶을 살아가는 행복
지역에서 현장에서
동양시멘트 하청노동자 간접고용 철폐 투쟁에 함께하며 김일규 강원 삼척시 당원
당비만 내던‘투명당원’ 이‘열성당원’ 이 되다 내가 노동당에 가입한 때는 노동당이 진보신당으로 불릴 때였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2011년 초쯤이었던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도 노동문제를 포 함한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아는 것도 관심도 없었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나를 사로잡은‘어 떻게 하면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나름대로 열심히 대답을 해나가다 보 니, 서른 초반에 노동당 가입이라는 결실(?)을 맺게 되었다. 모두가 행복해야 나도 행복하다 는 결론을 얻어 그 결론을 현실로 이끌어내기에 가장 적합한 정당이라고 판단한 노동당(당 시의 진보신당)에 가입은 했지만 정작 내가 노동당 안에서 뭘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잘 알
지 못했고, 잘 알기 위한 노력에도 게을렀다. 그래서 당원 가입 이후 비교적 최근까지도 매 월 당비만 내는 존재감 없는 당원 중 한 명으로 지내왔다. 당비 납부 외에는 당원으로서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던 내가 어떻게 지금 이렇게 노동 당 기관지에 실릴 글을 쓰게 됐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최근 내 삶에 일어난 중요한 일들 을 먼저 소개해야 할 것 같다. 첫째, 4년의 유학기간과 1년의 시골생활을 제외하고는 평생 을 인천에서 살아온 인천 토박이인 내가 작년 9월 삼척에 있는 대학에 취직을 하게 되어 아 내와 두 아이를 데리고 삼척에 정착했다. 둘째, 삼척으로 이사를 온 덕분에 지금은 전국적 으로 널리 알려진 삼척의 핵발전소 문제를 알게 되었고, 그 문제에 관심을 갖다 보니 우연 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내가 삼척으로 오기 훨씬 전부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심히 노 력해온 멋진 동지들을 만나게 되었다. 셋째, 이 동지들이 예전부터 소박하게 꾸려오던 공부 74
지난 4월 4일, 동양시멘트 지부의 투쟁 승리를 위해 열린 민주노총 강원지역본부 결의대회 모습 (사진 ‘동양시멘트 : 하청노동자 간접 고용 철폐 투쟁 승리’페이스북 페이지)
모임에 초대받았고, 나와 내 아내를 비롯한 몇몇 새로운 회원의 합류로 이 공부모임은“학습실천연대(이하 학실연)” 라는 이름을 가진 정식 조직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이 조직의 총 회원 수는 12~13명인데, 그 중 나를 포함한 세 명이 노동당원이다). 넷째, 학실연 회원 중 한 명이 동양시멘트 하청업체 노동자인데, 이 동지
를 통해 동양시멘트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작년 5월에 처음으로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노동자로서 그들의 당연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열심히 투쟁 중이라는 사실과 학실연 회원 중 일부는 이미 그들과 열심히 연 대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다섯째, 옆에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나도 동양 동지들과 연대를 해야겠 다는 결심을 했고, 올해 1월부터 본격적으로 그들의 투쟁에 함께해 왔다. 연대활동을 하다 보니 동양 동지 들과 연대하는 노동당원들을 자연스럽게 한 명 한 명 알게 되었다. 나에게 이 글을 써보는 것이 어떻겠냐 는 제안을 한 최종문 동지(노동당 강원도당 영동당원협의회 대변인)를 처음 만난 곳도 바로 동양 동지들과의 연대모임이 열렸던 삼척의 민주노총 사무실이었다. 이상이 내가 당비만 납부하던‘투명당원’ 에서 당 기관지에 글을 쓸 정도의‘열성당원’ 으로 변하게 된 대략적인 이유이자 계기다. 지금부터는 동양시멘트 사태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와 내가 노동당원 으로서 동양 동지들과 어떤 방식으로 연대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다.
지역에서 현장에서 75
동양자본과의 투쟁에서 승리하는 그날까지, 노동당의 이름으로 동양시멘트는 20년이 넘게 불법하청업체를 운영하며 하청업체 노동자들에게 저임금/장시간 노동을 강요해왔다. 하청노동자들은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길게는 20년 동안 월 평균 200시간의 잔업에 시달려 왔고, 전체 하청노동자의 60% 정도가 시급 5000원대를 받아왔다. 대부분이 한 가정의 가장인 이 노동자 들에게 주말이나 휴일은 그림의 떡일 뿐, 꼭두새벽에 나갔다가 밤늦게 들어오는 생활이 일상이다. 이런 비참한 삶을 견디다 못한 노동자들이 사람답게 살아보겠다고 작년 5월에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회사를 상대로 열심히 싸워왔고, 고용노동부에서도 동양시멘트와 하청업체의 관계는 위장도급이며 동양시멘트 는 신속하게 직접고용을 이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양시멘트는 직접고용은커녕 지 난 2월 설 명절을 앞두고 하청업체와의 도급계약을 해지해 버림으로써 101명의 노동자를 불법적으로 집 단 해고했다. 해고된 노동자들의 가족까지 합치면 약 400여 명의 동해·삼척 주민을 길거리로 내몬 셈이 다. 동양시멘트는 재정이 어려워 직접고용을 못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2012년 동양시멘트는 동양 하 청노동자들을 포함한 삼척시민들의 도움으로 화력발전소 사업권을 따내었고, 이렇게 따낸 사업권으로 자 산가치 200억 원이던 동양파워를 무려 4111억 원의 차익을 남기며 포스파워에 4311억 원에 되팔았다. 동 양이 챙긴 4111억 원은 삼척시 1년 예산과 맞먹으며, 비정규직노동자 420여 명을 정규직으로 고용하여 43년 동안 임금을 줄 수 있는 막대한 금액이다. 동양시멘트가 불법적으로 하청노동자를 착취한 이유는 돈 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더 많은 이윤을 남기려는 탐욕 때문이다. 다행히 힘들게 투쟁중인 동양 동지들과 연대하려는 지역사회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특히 내 가 속한 학실연과 민주노총 강원지역본부 동해삼척지부가 올해 초부터 적극적으로 연대해왔는데, 두 조 직 내에서 노동당원들의 활약이 매우 활발하다. 그동안 나는 동양시멘트 정문 앞에서 출근시간과 퇴근시 간에 열리는 동양 동지들의 집회에 참석하고, 피켓, 현수막, 유인물 등을 이용한 삼척시내 선전전에 참여 하는 일을 주로 해왔다.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지난 4월 2일‘동양시멘트 간접고용철폐 삼척동해 지역대책위원회(이하 지역대 책위)’ 가 새로이 출범했다. 동양 사태 관련 기자회견 개최와 격주로 발간하는 소식지의 제작, 탄원서 작성
및 서명 운동 등을 주로 맡아왔다. 동양 동지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현재까지 총 6개 의 단체가 참여 중인데, 노동당 강원도당 영동당원협의회도 그 중 하나다. 나와 최경민 동지(노동당 강원도 당 영동당원협의회 부위원장)가 노동당을 대표하여 지역대책위에서 활동 중이다. 이 밖에도 나는 투쟁 중인
동지들이나 그들의 가족들과 개인적으로 종종 식사와 술을 함께하며 끈끈한 유대관계를 다져가는 중이 다. 요즘 들어서야 뭔가 노동당원다운 삶을 산다는 느낌이다. 당비만 낼 때와는 확실히 다르다. 노동당에 서 추구하는 가치와 함께한다는 느낌, 그런 삶을 살아내고 있다는 느낌 덕분에, 몸은 피곤하고 힘들 때가 76
동양시멘트 지부 출근 투쟁에 참여해 발언 중인 김일규 당원 (사진 : 김일규 당원 제공)
많지만 마음만은 한없이 행복한 요즘이다. 예전부터 노동당의 이름으로 어떤 활동을 할 수 있길 바라긴 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전혀 어려운 일 이 아니었다. 노동당의 활동가가 되는 길은 매우 다양하다. 나의 경우는, 그저 주위의 아픔과 고통에 민감 하게 반응하려는 노력을 하다 보니 내 주위에서 열심히 활동 중이던 노동당원들을 우연히, 그리고 자연스 럽게 만나게 되었다. 굳이 노동당의 활동가가 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들과 함께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어느새 노동당의 이름으로 활동 중인 나를 발견하게 됐다. 동양 동지들이 동양자본과의 투쟁에서 승리하는 그 날까지, 그들과, 그리고 노동당과 함께 끝까지 연 대할 생각이다. 이 글을 읽는 당원들께서도 동양 문제에 관심을 가져주시고 연대와 후원을 해주시길 간절 히 부탁드린다.
■동양시멘트지부 후원계좌 농협 301-0161-6349-91 예금주: 민주노총 강원영동지역노동조합 동양시멘트지부 ■ ‘동양시멘트 하청노동자 간접고용 철폐 투쟁 승리’페이스북 페이지 https://www.facebook.com/ydunion?fref=nf
지역에서 현장에서 77
먼 좌파 이웃 좌파 ⑭
포데모스, 더 깊이 들여다보기 장석준 기관지 위원
스페인의 신생 정당 포데모스(PODEMOS)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져 가는 중이다. 그럴 만도 하다. 포데모스는 창당한 지 1년도 안 돼 당원을 20만 명 넘게 늘렸고 여러 여론조사에 서 지지율 1위를 기록했다. 기성 정당에서 갈라져 나온 정당도 아니고 완전히 기존 정치권 바깥에서 등장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놀라운 성과다. 스페인에서는 지난 몇 달간 포데 모스의 이러한 급성장 자체가 전례 없는‘대중운동’ 이었다. 포르투갈 정치학자 보아벤투라 데 수사 산토스는 포데모스를“운동-정당 아니 차라리 정당-운동” 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관심이 늘어나는 만큼 의혹 또한 쌓여간다. 포데모스가 구세대 좌파 정치를 비판하면서 전에 없던 실험들을 감행하는 중이기에 이에 대한 찬사뿐만 아니라 우려 역시 적지 않다. 그 래서 지난 1월호에서 포데모스를 이미 한 차례 소개했음에도 불구하고《미래에서 ( 온 편지》제
포데모스의 거리 시위
78
16호 <포데모스, 21세기형 정치조직의 등장인가?>), 다시 지면을 할애하고자 한다.
포데모스,‘좌파’맞나? 그리스의 급진좌파연합(SYRIZA, 이하 시리자)이‘좌파’ 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당명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데‘스페인의 시리자’ 라는 포데모스에 대해서는“정말 좌파 맞냐” 는 의문이 따라다닌다. 이유는 이렇 다. 포데모스는‘자본주의’ 나‘노동계급’ 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포데모스는 노동조 합과 별 관계가 없다, 오바마 선거운동 구 호에서 따온 듯한 포데모스(영어로 옮기면 ‘We Can’ )란 이름부터가 도대체 뭔가….
확실히 이 신진 정치조직에는 좌파 정치
포데모스에는“정말 좌파 맞냐” 는 의문이 따 라다닌다. 오바마 선거운동 구호에서 따온 듯한 포데모스( ‘We Can’ )란 이름부터가 도 대체 뭐란 말인가…
전통에 잘 들어맞지 않는 구석들이 많다. 하지만 포데모스의 창당 주역들과 등장 과정을 살펴보면, 그 뿌리가 분명 스페인 좌파 운동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창당 발기인들 중 소수파인‘반자본주의 좌파’그룹은 제4인터내셔널 통합서기국 (USFI) 계열의 트로츠키주의 정파다. 그리고 다수파인 콤풀텐세 대학의 교수, 강사들도 이전에 좌파 정당
이나 조직에 참여한 전력이 있는 인물들이다. 당의 얼굴인 파블로 이글레시아스만 해도 그렇다. 그는 그리스 시리자 정부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와 마찬가지로 10대 시절부터 공산당 청년 조직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는 대학 강사가 된 뒤에도‘대항 권력’ 이라는 명 칭의 독자 좌파 그룹을 만들어 이끌었다. 실은‘파블로 이글레시아스’ 라는 이름 자체가 스페인 좌파 역사와 뗄 수 없는 관계 다. 지금은 반민중적 긴축 정책의 충실한 집 행자로 전락했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스페인 좌파를 대표해온 정당‘사회주의노동자당 (PSOE)’ 을 1879년에 창당하는 데 앞장선 인
물이 다름 아닌 파블로 이글레시아스다. 이글 레시아스의 부모가 처음 만난 자리가 이 역사 포데모스의 대표, 파블로 이글레시아스
적 지도자를 기념하는 행사였고, 그래서 아들 먼 좌파 이웃 좌파 79
에게 이런 이름을 지어줬다고 한다. 좌파 운동의 일원이었던 포데모스 창당 주역들은 처음에는‘연합좌파(IU)’ 를 정치 활동의 발판으로 삼 고자 했다. 연합좌파는 그리스의 시리자와 비슷하게 스페인 공산당(PCE)과 여러 좌파 정파들이 함께 만 든 정당연합이다. 작년 유럽의회 선거 직전에도 포데모스 발기인들은 연합좌파가 오픈 프라이머리 방식 으로 유럽의원 후보들을 결정한다면 여기에 개인 자격으로 참여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연합좌파 측이 오픈 프라이머리를 거부하자 이들은 결국 독자 정당, 즉 포데모스 창당을 선택했다.
그렇소, 우리는‘좌파 포퓰리스트’ 요! 아무튼 스페인에서는 이런 저간의 사정이 잘 알려졌기에 포데모스가‘좌파’ 임이 당연시된다. 무엇보다 도, 아래와 같은 정책 대안을 내놓는 세력을‘좌파’외에 달리 뭐라 분류하겠는가. 다음은 작년 말에 포데 모스가 발표한 경제 프로그램 <민중을 위한 경제 계획>을 그 작성자 중 한 사람인 경제학자 비센테 나바로 (카탈루냐 출신이며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 교수)가 직접 요약한 것이다.
“위기의 핵심 원인은 불평등의 엄청난 확대이며, 이로부터 금융, 경제 및 정치 위기가 비롯됐다. 그 중 심에는 자본(금융 자본의 헤게모니 아래 있는)과 노동 사이의 갈등이 있다. 이로 인해 임금이 하락하고 실업 이 증가하며 사회보장 지출이 삭감됨으로써 내수가 급감한 것이다. 따라서 임금인상과 고용확대를 통해 내수를 증가시키고 사회보장 지출과 공공투자(특히 사회적 인프라 스트럭처에 대한)를 확대함으로써 불평등의 확대를 역전시켜야 한다. 그리고 금융 공공성을 확대해서 가계
와 중소기업에 신용을 제공해야 한다. 또한 노동시간을 주 35시간으로 단축하고 정년을 PP[현 여당인 우 파 인민당-인용자]와 PSOE가 도입한 67세에서 65세로 되돌려야 한다. 이는 자본에 맞서 노동의 역량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동시에 성별 불평등을 반드시 해소해야 하며, 이는 고용을 확대하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다. 이상의 정책을 실시하는 데 필요한 재원은 국가 예산 구조의 변경과 탈세 방지를 통해 마련한다.”
그런데도 스페인 바깥의 좌파 논평가들이 포데모스에 대해 의구심을 거두지 않는 이유는 이 조직(더 정 확히는 포데모스 내 다수파인 콤풀텐세 대학 활동가 그룹)의 독특한 노선과 전략 때문이다. 이들은 고전 마르
크스주의 계급 이론이 더 이상 현실 정치의 지침이 돼주지 못한다고 본다.‘자본가’ 를 비난한다고 그게 곧 광범한 공감을 얻는 것도 아니고‘노동자’ 를 부르짖는다고 다 자기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다. 대신 포데모스는 1970년대 민주화 이후 정치, 경제 권력을 독점해온‘부패’세력들(여기에는 우파인 PP 뿐만 아니라 PSOE도 포함된다)을‘카스트’ (우리말로는‘귀족’정도로 옮기는 게 적절할 테다)라 싸잡아 비판하 80
고 이들이 이끌어온‘78년 체제’ 의 전복을 주창한다. 중간층부터 청년실업자, 비정규직까지 아우르는‘서 민’ 이 직접 정치에 참여해 정치, 경제, 사회 전 영역에서 민주화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스페인 주류 언론은 이런 주장에‘좌파 포퓰리즘’ 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한데 포데
‘좌파 포퓰리즘’ 이라는 손가락질에 포데모
모스 지도자들은 이러한 손가락질에 오히려
스는 오히려 맞장구를 친다.“21세기의 정
맞장구를 치고 나선다.“21세기의 정치 구도 는 우파 대 좌파가 아니라 우파 포퓰리즘 대 좌파 포퓰리즘이 될 것” 이라는 벨기에 정치 학자 샹탈 무페의 진단이 곧 포데모스의 전
치 구도는 우포 대 좌파가 아닌 우파 포퓰 리즘 대 좌파 포퓰리즘” 이라는 샹탈 무페의 진단이 곧 포데모스의 전망이다.
망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글레시아스를 비 롯한 콤풀텐세 그룹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친 저작이 바로 무페가 남편인 고(故)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와 함께 집필한《사회주의와 헤게모니 전략》(국역본 : 이승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2)이다.‘포스트 마르크 스주의’ 의 효시로 불리는 이 책의 결론은 위에 요약한 포데모스 노선과 일치한다. 유럽산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만이 아니다. 라틴아메리카 좌파도 포데모스의‘좌파 포퓰리즘’ 에 큰 영향 을 끼쳤다. 게릴라 출신으로서 볼리비아 좌파 정부의 부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이론가 알바로 가르시아 리 네라는 좁은 의미의 노동계급을 넘어서 인디오 원주민, 농민을 포괄하는 plebes를 변혁주체로 제시한다. 번역하면‘평민’혹은‘서민’ 이다. 영락없이‘귀족 대 서민’ 이라는 포데모스의 담론 틀이다. 실은 이글레
포데모스를 신종 파시스트 세력으로 매도하는 신문 기사(오른쪽)와 포데모스와 파블로 이글레시아스를 비난하는 포스터(왼쪽)
먼 좌파 이웃 좌파 81
시아스와 동료들이 10년 전부터 집중 연구해온 주제가 다름 아니라 볼리비아와 베네수엘라, 에콰도르의 변혁과 사회운동 경험이다. 지난 세기 좌파 전통을 중심에 놓고 본다면 논쟁의 여지가 많은 입장이다. 그래서“좌파 맞냐” 는 이야 기까지 나온다. 그러나 포데모스의 이러한 발상의 전환이 좌파에게 오랜만에 대중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 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PSOE나 연합좌파에서 이탈한 좌파 성향 유권자들만 이 아니라 우파인 PP의 실망층도 포데모스 지지자의 상당수를 차지한다는 건 결코 예사로운 성취가 아니 다. 소 정파 활동을 넘어서 진짜 대중 정 치를 펼치길 바라는 좌파라면 이제 누구 도 포데모스가 제시한 가설과 실험을 외 면하거나 간과하기 어렵다.
포데모스의 우파 복사판, 시우다다도스의 도전 물론 방향 전환에는 항상 그에 따른 새 로운 한계와 위험의 대두가 불가피하다. 포데모스의‘좌파 포퓰리즘’ 도 예외가 아 니다.‘좌파 포퓰리즘’ 의 성공은 그에 맞 서는‘우파 포퓰리즘’ 의 등장과 성장을 부 추긴다. 유럽의회 선거 직후 포데모스 바람이 막 일기 시작할 무렵, 스페인의 금융 재벌 중 한 명은“우리에게도 일종의 우파 포데 모스가 필요하다” 고 부르짖었다.“우파 벌거벗은 몸으로 깨끗한 정치를 표방하는 시우다다도스의 포스터
포데모스” 는 얼마 안 지나 어렵지 않게 ‘발견’ 되었다. 그 주인공은 카탈루냐의 작 은 지역정당 시우다다도스(Ciudadados,
“우리에게도 우파 포데모스가 필요하다”포데모 스 바람이 시작될 무렵 스페인의 금융 재벌이 부 르짖은‘우파 포데모스’ 는 얼마 안 지나‘발견’ 되었다. 바로 시우다다도스( ‘시민’ )다. 82
‘시민’ 이라는 뜻)다. 시우다다도스는 카탈
루냐 분리 독립을 추진하는 좌파 민족주 의에 맞서기 위해 결성된 우파 정당이다. 2006년에 창당했으니 이미 10년 가까이 된‘중견’정당이다. 하지만 카탈루냐 이
외의 지역에서는 아직 낯선 정치 세력이다. 그런데 이 당이 작년 말부터 포데모스처럼 기성 정치권을 모두 부패 세력으로 몰아 공격하면서 또 다 른 바람을 일으켰다. 카탈루냐를 넘어 스페인 곳곳에서 시우다다도스의 지지율이 급상승했다. 급기야 최 근 몇 달 사이에는 여론조사에서 PP, PSOE, 포데모 스 그리고 시우다다도스가 엇비슷한 지지율을 얻으며 각축을 벌이는 양상이 나타났다. 중요한 점은 시우다 다도스의 지지율이 높아질수록 포데모스의 지지율은 정체되거나 하락한다는 점이다. 특히 포데모스 지지 층 중 과거에 PP를 지지했던 이들이 시우다다도스로 이동한다고 나타난다. 포데모스에 비판적인 논평가들은 이것이 포데모스 가 자초한 결과라고 진단한다. 포데모스가‘반부패’ 를 이슈화해 성장할 수 있었지만 이런 종류의 탈계급 적 쟁점은 쉽게 시우다다도스 같은 우파 포퓰리즘 정
시우다다도스 로고
당의 무기로 돌변할 수 있다는 말이다. 반면 포데모스 측은 여전히 자신감을 보인다. 똑같이‘반부패’ 를 외치더라도 시우다다도스는 신자유주 의나 긴축 기조를 벗어날 경제 대안을 전혀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에, 포데모스와의 차이가 조만간 분명히 드러나리라는 전망이다. 과연 어떠한 분석과 전망이 더 힘을 얻게 될까?‘좌파 포퓰리즘’ 은 새로운 가능성과 위험 중 어느 쪽으 로 더 주목을 받게 될까? 12월 스페인 총선까지는 아직 여덟 달이나 남았다. 이래저래 올해는 세계인의 눈 길이 남유럽을 떠나지 못할 것 같다.
먼 좌파 이웃 좌파 83
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버스냐, 지하철이냐” 를 벗어나야 제대로 된 도시교통 정책이 보인다 김상철 서울시당 위원장
서울시가 우리나라의 압축판이라면 지하철9호선은 우후죽순 들어서는 민자 지하철의 미 래라고 할 만하다. 2009년에 개통한 지하철9호선은 운송수익보장 제도를 통해 첫해부터 막 대한 보조금을 챙기며 이후 의정부 경전철, 김해 경전철 등 주요 민자사업의 효시가 되었다. 특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요금편성권이 민간사업자에게 있다는 소식이 알려진 2012년에는 지하철9호선 발 요금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지하철9호선의 민간사업자가 협약서 상의 권한을 근거로 500원 인상 공고를 내버렸기 때문이다. 민자사업이라 하더라도 당연히 서울 시가 관리하리라고 여겼던 서울시민들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2013년 협약 갱신을 통해 구조화가 진행되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민간투자자의 이윤 율을 보장해주는 방식에서 근본적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더구나 지하철9호선 사업은 애초 공사에서부터 비리덩어리였다. 감사원이 밝혀낸 건만 하더라도, 2001년 지하철9호선 건설 공사 7개 공구 중 5개 공구에서 입찰가 담합이 발생했다. 경쟁입찰 방식에 비해 30%가 높 은 낙찰가가 나왔는데, 이 차액만 3000억 원 수준이다. 사실상 민자사업은 기존의 토건사 업이 가진 관행에 공사 이후의 운영수익까지 보장해주는, 그야말로‘공공부문을 수익모델 로 하는 기업사회’ 의 극단적 형태에 가까운데, 지하철9호선은 이런 단면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이러던 지하철9호선이 최근 또 논란의 중심에 섰다. 지하철9호선 2단계 개통을 앞두고 불거진 혼잡문제 때문이다. 서울시는 부랴부랴 3월에만 두 차례의 대책을 발표하며 진화에 나섰다. 3월 5일 1차 발표에서는 열차 조기증차, 출근시간대 수요분산 및 수송력 증대, 대 84
시민 홍보강화 등을 골자로 하는 계획이 발표되었고, 뒤이어 3월 26일에는 가양에서 여의도를 운행하는 급행버스를 한시적으로 무료 운행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계획이 나왔다. 그럼에도 2단계 개통 이후, 무료 급행버스가 텅텅 비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지하철로 몰려들었다. 지난 2004년 버스중앙차로제 가 서울시의 서툰 조기시행 때문에 혼란을 겪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해결책은 서울시민 스스로 가 이런 무지막지한 시스템에 적응하는 방법 말곤 달리 뾰족한 수가 없어 보인다.
민자사업이라는 태생적 한계 지하철9호선이 지속적으로 논란의 가운데 놓이는 배경에는 이 사업이 민자사업으로 추진된 사업이라 는 이유 말고는 해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기본적으로 민자사업인 이상, 이용시민의 편리성이나 안전보 다는 투자하는 민간기업의 최소 투자와 최대 운영이익이 우선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획재정 부나 국토교통부가 마련한 교통 분야 민간투자사업 규정만 봐도 모두 민간투자사업 추진이 재정사업에 비해 더 쉽도록 만들어놓았다(대표적인 규정이 교통수단의 경제성 분석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혼잡비용 및 자가용 이용시간 대비 절약시간의 경제적 가치를 재정사업보다 2배 이상 크게 책정해둔 항목이다). 지하철9호
선만 하더라도 민자사업자의 수익을 보장해주기 위해 적절한 혼잡도를 염두에 두고 승강장 등이 설계됐 다. 현재 서울메트로나 도시철도에서 운행하는 전철은 최소 8량에서 10량에 달하지만 지하철9호선은 4량 에 불과하다. 추가 증차를 한다 해도 최대 6량까지 밖에 늘리지를 못하는데, 이는 승강장 자체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야 초기 건설비 부담을 줄일 수 있다. 더구나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무인역 사로 설계하려면 승강장 등 이 용시설의 규모가 작아야 한다. 반면 임대사업이 가능한 여타 공간은 매우 넓게 설계됐다. 이 런 이유에서, 영업시설 등을 설 치할 수 있는 통행로 등 부대시 설의 면적은 넓지만 정작 교통 수단으로서 가장 중요한 승강 장의 규모는 작은 역설이 발생 한다. 2000년 당시 서울시정개발 연구원의 <지하철9호선 민자유 치 타당성 조사보고서>를 보 면, 재정투자 방안, 민간위탁
2000년 서울연구원(당시 시정개발연구원)의 보고서부터 2005년 협약서와 KDI의 지하철9호선 타당성 보고서까지 모두 민자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논리로 점철되어 있다. 다시 말해, 민자사업 유치를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놓고, 다양하게 고려해야 할 공공적 가치들을 이 목적에 맞춰 옵션화한 것이다.
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85
방안, 민자도입 방안의 3가지 대안으로 기존보다 인력을 30% 줄일 수 있고 외국계 회사들이 참여할 동기 가 된다는 이유로‘민자사업’ 을 제안하면서도, 민간사업자의 과도한 리스크 부담을 막기 위해 부분적 민 자사업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결론을 제시한다. 그러니까 일단 비용을 줄이려면, 특히 비용 중 많은 비중 을 차지하는 인건비를 줄이려면 현재의 양 공사 체제 아래서는 힘드니까 민자사업으로 추진해야 하는데, 민자사업자의 위험부담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는 같은 노선의 일부를 1단계 사업으로 해서 추진해야 한 다고 서울시 산하 연구소가 제안했다는 말이다. 이 보고서의 어디를 봐도 대중교통의 공공성에 대한 언급 이나 시민의 안전성과 편리성에 대한 말을 찾기 힘들다. 그러다보니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2000년 당시에 추정한 2015년 수송수요는 연간 1억 5065만 명으 로 일일 수송량으로 환산하면 41만 명이다. 어제 서울시가 밝힌 지하철9호선의 3월 현재 일일 수송량인 44만 명과 비교했을 때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정작 민자사업자가 선정된 후 체결한 2005년 <실시협약> 에서는 2015년 추정교통수요가 25만 명에 불과하다고 나타났다. 사실상 과소추계인 셈이다. 당연히 시설 물과 차량의 크기는 이런 수요에 맞춰 조정되었다. 이런 사실은 지하철9호선 2단계 사업을 위해 KDI가 실시한 <서울지하철 9호선 2단계 건설사업> 예비타당성 보고서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2021년 기준 으로 1단계 사업은 25만 명, 잠실까지의 2단계 사업은 전 구간 기준 최대 42만 명으로 추산했다. 하지만 어제 서울시가 밝힌 바에 따르면, 2단계 개통 후 일일 수송량은 60만 명으로 추산된다. 지하철과 같은 시 설은 초기 설계와 시공이 매우 중요하다. 버스와 같이 배차를 늘리거나 노선을 다양화함으로써 즉각적인 대응을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0년 당시에 41만 명 정도로 예측했던 교통수요량을 25만 명으 로 축소하고, 다시 이를 기준으로 지하철9호선 2단계 사업을 추진했다. 그렇다고 해서 바로 차량을 늘리 지도 못하는 상황이고(차량 도입에 시간이 걸린다), 승객 안전을 이유로 승강장을 늘리지도 못한다. 결국 현 재 벌어지는 논란은 첫 단추가 잘못 꾀어진 서울시의 민자사업 탓이라고 보는 쪽이 타당하다.
“무조건 민자사업”뒤에 숨은 친환경성 논리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부분은, 이처럼 문제가 많은 민자사업을 추진하도록 하는 배경에 초기비용이 많 이 들어가는 지하철, 경전철 등 궤도교통수단에 대한 일방적인 옹호가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대중 교통 관련 토론회, 특히 지하철이나 경전철이 주제인 토론회에 가면 노상 듣는 이야기가“친환경 교통수 단인 지하철” 이라는 표현이다. 매연을 뿜으며 다니는 자동차에 비해 어떤 매연도 내보내지 않는 지하철은 언뜻 보기에는 매우 친환경적으로 보인다. 그러다보니 대중교통과 관련된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관 용적으로 버스보다는 지하철이 낫다는 선입견이 아주 강한 편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궤도교통 중심의 일방적인 환경성 옹호가 해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우리나라의 프로파간다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 철도 등 궤도교통수단의 친환경 교통수단으로서의 우월성을 언급할 때면, 대부분 정부 산하 연구기관인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의 2002년 연구보고서가 인용된다. 이에 따르면, 2000년 한 해 86
동안의 총 교통환경비용은 49조 원이며 이중 대기오염비용이 11조 6천억 원(24%)으로 가장 높고, 혼잡비 용이 11조 3천억 원(23%), 교통사고비용이 9조 2천억 원(19%), 토지이용비용이 9조 원(18%), 온실가스비 용이 5조 9천억 원(12%), 소음비용이 1조 9천억 원(4%) 순으로 나타났다. 또한 도로와 철도로 구분하여 산 출한 환경비용을 여객 수송량(인.km)과 화물의 수송량(톤.km)을 단순 가산한 수송량으로 나눈 결과, 도로 가 철도보다 대기오염비용은 3.1배, 온실가스비용은 3.6배, 소음비용은 2,1배, 토지이용은 1.0배, 교통사 고비용은 646배로 높게 산출되었다. 당연히 철도의 경우에는 혼잡비용이 없다고 가정하였다. 도로에서 한 대당 대기오염을 제일 많이 배출하는 차종은 대형버스고, 그 다음으로는 대형트럭과 택시 순으로 나타 났다. 대기오염비용은 단위여객(인.km) 기준으로는 택시가 가장 높은 24.5원, 그 다음으로는 자가용이 12.9원, 대형버스가 11.4원, 기차가 5.5원 순으로 나타났고, 단위화물(톤.km) 기준으로는 도로가 46원, 철 도가 10원으로 평가되었다. 온실가스 배출은 동일한 수송량을 가정하였을 때, 여객에서는 도로가 철도보 다 2배 이상, 화물에서는 도로가 철도보다 10배 이상 많이 배출한다고 나타났다. 2000년과 비교했을 때 총 비용이 7조 원 정도 높아질 것으로 전망되는 2010년에는 이 규모가 더욱 커 지게 된다. 당연히 도로교통수단 대비 철도교통수단의 우월함도 더욱 커진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자. 지하철은 공기로 다니는가. 그렇지 않다. 화력과 원자력으로 만든 전기를 사용한다. 당장은 매연이 눈에 띄지 않으니 친환경으로 보일 테지만 실제 그 에너지원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생각하면 다르게 평가해야 한다. 특히 승객 대비 운송비용은 대규모 이동에서나 경제성이 있지, 실제 승객수가 적으면 기대하기 힘 들다. 또 버스 등은 급격한 부동산 상승 등의 나쁜 부수효과가 적은 편이지만 궤도교통수단은 막대한 무 임승차를 불러일으킨다. 이 때문에 그 지역에 오래 살았지만 집을 가지지 않은 시민들은 교통이 더욱 나 쁜 사각지대로 밀려난다. 단위 수송량에 따른 수단별 환경비용 (단위: 원/천인(톤), Km) 기준 연도
대기오염 도로
철도
온실가스 철도
도로
철도
2000년 20,295 6,627 10,302 2,889
3,363
2001년 17,267
6,179
4,143
도로
소음
9,774
2,655
토지이용 도로
철도
교통사고 도로
혼잡비용
계
철도
도로
철도
도로
철도
1,566 15,033 15,057 16,440
25
20,154
0
85,588 26,164
2,075 24,337 17,366 9,733
7
31,127
0
98,417 26,245
* 출처 :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육상교통수단의 환경성 비교 분석, 2002.
정부 차원에서 특별히 철도에 대한 강조가 이어진 배경에는 고속철도(KTX)건설 붐이 자리 잡고 있다. 1989년 5월에 확정된 경부고속철도 건설 방침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때는 1992년이다. 고속철도 문제는 늘 정치권의 지역특혜와 연관되어 논란이 되어왔다. 특히 6년간의 공사기간이 12년으로 늘어나면서, 중 간에 지역 이해관계에 따라 역사를 증설하는 것은 물론이고, 열차 도입 국가 선정 과정에서의 로비 논란, 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87
문화재 훼손, 설계변경과 부실공사 등등 토건국가의 악습을 한 자리에 모아놓은 듯한 비리의 종합판을 보 여주었다. 2004년 경부고속철도 완공 이후 최근 호남고속철도가 완공되었고 수도권 고속선, 중앙선, 서 해선 등 각종 고속철도 계획이 줄줄이 예정되어 있다. 이와 별도로,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가 제안한 GTX 와 같은 수도권 급행 철도망 계획 역시 추진 중인 실정이다. 즉 철도는 친환경적이라는 말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셈이다. 물론 장거리 운송에 철도가 가지는 장점을 평가절하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애초 철도 가 만들어진 목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해에서 경전철을 유치할 때도, 서울시가 경전철을 지으면서도 내 놓는 이유는‘친환경’ 이다. 특히 서울시의 경우에는 지하철9호선을 지으면, 경전철을 만들면 버스를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 다. 하지만 지하철9호선 1단계 완공 후 이와 중복되는 노선을 가진 버스의 승객수요는 3분의 1 정도가 감 소했을 뿐이다. 거기다 기본적으로 지하 3층 이상의 깊이를 가진 지하철 9호선은 장애인을 비롯해 노약자 가 이용하기 불편할 뿐 아니라, 기존 지하철 사이에는 환승게이트라는 불필요한 시설물까지 만들어놓았 다. 더구나 노량진역과 같은 곳은 후불제카드 소지자만 환승이 가능하다. 이와 같은 사회적 비용을 도외 시하고 순수하게‘운행지역’ 만 한정해서 환경성을 따지는 일은, 교통수단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의 척도는 물론이거니와 환경성 자체의 기준에서도 편협한 방식이라 하겠다. 인구 200만 명의 미국 대도시권 지역 을 기준으로 산출한 20년 동안의 이산화탄소 배출량 감소치를 보면, 경전철이 22,700톤 인데 반해 40피 트 CNG 버스, 40피트 하이브리드 디젤버스, 60피트 하이브리드 디젤버스로 운행되는 간선급행버스 (BRT) 시스템은 654,114톤, 602,016톤, 508,854톤으로 나타나 간선급행버스가 이산화탄소 배출량 저감
에 더 효과적이라고 제시되기도 했다.
버스냐 지하철이냐를 벗어나자 주민들이‘가’ 에서‘하’ 까지 살고 있다. 여기서 속도가 빠르다는 이유로 이득을 보는 곳은‘가’ 에서 ‘자’ 까지라고 하자. 이럴 경우 버스의 장점이라고는‘가’ 에서‘마’정도까지의 범위라고 할 수 있다. 하지 만 여전히 남는 문제는‘자’ 에서‘하’ 까지 거주하는 주민들이고,‘다’정도에서‘나’또는‘차’ 까지 가는 주 민이다. 다시 말해 도시교통문제를 늘 출발지역과 목적지역 사이의‘직선’ 으로만 사고하면 실제 시민들이 오가는 움직임이 무시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도시교통의 네트워크가 무시된다. 결국 경전철이냐 버스냐의 양자택일 문제가 아니라 기존의 도시교통 시스템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그래서 ‘버스와 지하철을 효과적으로 연계하는 것’ 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현재 서울시를 비롯한 광역 지방정 부는 도시교통 문제를 늘 양자택일의 문제로 접근하는 경향이 크다. 하지만 최근 연구결과를 보면, 특히 도시공간에서의 교통수단은 서로 대체되기보다는 서로 보완하는 성격을 가진다고 보이야 한다. 서두에 꺼낸 지하철9호선의 사례와 지난 호에 다뤘던 버스준공영제 문제는 동전의 양면처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각각이 가진 선들이 연결되어야 도시의 교통망이 제대로 작동한다. 그런데 이제까지는 지 88
<버스와 궤도 교통수단의 메타 비교> •평균적으로 BRT는 거리당 건설비가 1990달러 든다. 이는 경전철의 절반 정도이고 일반 도시철도의 1/10 수 준이다. 그러나 어떤 조건에서는 BRT가 경전철보다 많이 들기도 하고 경전철이 일반 도시철도보다 많이 들 기도 한다. •경전철과 비교했을 때 BRT는 더 많은 토지비용이 든다. 덧붙여 폐쇄도로나 승강장 비용도 경전철이나 도시철 도에 비해 조금 더 비싸다. •버스는 거리당 운송비용이나 시간당 운송비용으로 따져도 제일 저렴하다. 반면 승객 1000명당 수송비용은 가 장 비싼 편이다. •BRT시스템의 경우에는 수송비용에 있어서 일반 버스체계와 유사한 비용이 들지만, 승객 1000명당 수송비용 은 24%나 절감된다. •경전철은 수단당 운송비용이 가장 높고, 승객 운송비용은 두 번째로 높다. •도시철도는 수단당 운송비용이 경전철보다는 낮고 시간당 비용은 가장 높다. 반면 승객 1000명당 운송비용은 가장 싸다. •버스는 단위시간당 노선 수송능력이 가장 낮다. 다음이 경전철이고 가장 큰 것이 일반 도시철도이다. *출처 : Zhang, Ming, Bus Versus Rail: Meta-Analysis of Cost Characteristics, Carrying Capacities, and Land Use Impacts, Transportation Research Record: Journal of the Transportation Research Board, Issue Number: 2110, 2009.
하철과 버스를 대체재로 보아왔고, 특히 2000년 이후부터는 광역도시 중심으로 도시철도 건설 붐이 일었 다. 하지만 실제로 도시철도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버스체계를 고려해야 한다. 특히 지하철은 한번 건설되면 도시의 형태 변화에 따른 탄력성을 갖추기 힘들기 때문에 일시적인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막대 한 건설비와 유지비가 드는 철도를 건설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일시적인 대중교통 수요관리에는 버스가 더 적합하다. 반면 중장거리망은 궤도교통수단이 유리하다. 시민들의 입장에서는 버스도 그렇고 지하철 도 그렇고 모두 동등한 대중교통수단일 뿐이다.‘버스 대 지하철’ 과 같은 대립항은 전혀 의미가 없고, 버 스 하나만, 지하철 하나만 다루는 대중교통정책은 완전하지 못하다. 특히 대중교통에서의 환경성을 고려 한다면 해당 교통수단이 외부화하는 비용도 고려해야 한다. 그래야 지하철9호선이나 각종 경전철의 문 제, 그리고 버스준공영제의 문제에 총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특정 교통수단의 도입이 정책의 목표가 될 수는 없으며, 어디까지나 도시 내 시민들의 이동을 저렴하고 용이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다양한 도구 중 하나로 취사선택해야 한다.
빨간 도시교통 이야기 89
연속기획
한국 대학 체제의 형성⑤
7.30 조치가 빚은 혼란과 대학 정책의 전환 김예찬 서울 강남서초 당원
공급통제형 교육 정책의 등장 잠깐 이전의 글들을 복습해보자. 이승만 정권 시기 대학 정책의 특징은 사학의 팽창과 대학 정원의 급증에서 기인했다. 당시 국민소득과 인력수요에 비해 과하게 많은 대학들이 등장했고, 한국전쟁 이후 마땅한 교육 재원 마련이 어려웠던 이들 대학들은 등록금 수익으 로부터 대학 재정을 충당하려 했다. 대학에 대한 정부 통제가 먹히지 않던 시기에, 대학들 은 정원 확대 뿐 아니라 청강생 제도(오늘 날의 편입), 야간대학, 수시 입학 등을 통해 정원 외의 학생들을 수용 능력을 넘어설 정도로 받아들였다. 대학생은 넘치는데, 대졸자와 같은 고급 인력을 필요로 하는 일자리는 많지 않았다. 많은 고학력 실업자가 양산되었고, 이는 정부의 입장에서는 사회 불만 세력이 늘어나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5.16 쿠데타 이 후 들어선 박정희 군부 정권이 대학을 통폐합하고 강력한 통제 정책을 통해 대학 정원을 줄 이려 든 이유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그뿐 아니라 국가의 필요에 따라 우수한 학생들을 이 공계열 기술 인력으로 교육하고 배치하면서 이른바‘조국 근대화의 기수’ 로 이끌려 했다. 이처럼 국가가 강력하게 대학과 학생들 모두를 통제하는 방식을 국가주도형 교육 정책이라 한다. 그렇다면 전두환 정권의 대학 정책은 어떠했을까? 전두환 정권기 대학 정책의 특징은 국가주도형 교육 정책에서 공급통제형 교육 정책으로의 전환이다. 박정희 정권이 수요와 공급 모두를 통제하면서 대학 졸업생의 과잉 배출을 막고 기술 인력을 확충하려 했다면, 전 90
두환 정권은 대학 응시의 기회를 전체 학생들에게 자유롭게 부여하면서 인력의 과다 공급을 막기 위해 대 학의 정원을 통제하면서 졸업생 전반의 질적 향상을 꾀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전두환 정권의 대학 정책 은 사회적 여론에 휘둘리면서 정책 혼란을 겪으며 완전한 공급 통제에 이르지 못했다. 그리고 이러한 혼 란은 대학 교육이 이전의 엘리트 교육에서 대중 교육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문제들을 빚기도 했다.
7.30 조치의 내용과 의미 1980년 7월 30일, 신군부는 과감한 교육 개혁 정책을 발표한다. 이른바‘7.30 조치’ 라 불리는 이 교육 정책은 대입 본고사를 폐지하고 내신 성적을 반영하며, 대학의 정원을 확대하는 대신 졸업 정원제를 실시 하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했다. 7.30 조치의 의미를 하나하나 따져보자. 먼저, 대입 본고사 폐지는 무엇보다도 과열 입시 교육과 사교 육 팽창의 주범이었던 본고사를 폐지하여 과외에 대한 교육비 부담을 줄이겠다는 뜻이었다. 1970년대는 대학입학 예비고사와 본고사가 병행되던 시기였다. 예비고사를 합격한 이들에 대해서만 대학 지원의 권 리가 주어졌으며, 또 이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다시 대학별 본고사를 실시하여 입학자를 선발했다. 그런데 당시 대학별 본고사에는 학교 교육 범위를 넘어서는 어려운 문제들이 자주 출제되었으며, 대학 별로 준비 해야 할 범위와 경향들이 다 달랐기 때문에 사교육 성행의 주범으로 꼽혔다. 이러한 대입본고사를 폐지하 겠다는 말은 예비고사 성적과 내신 성적으로 대학 입학생을 선발하라는 뜻이었다. 사교육 부담을 줄이고, 학교 성적의 대입 반영 비율을 높임으로써 공교육의 비중을 확대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조치와 더불 어 과외 금지령을 통해서 사교육 문제를 해소하겠다는 것이 당시 신군부의 생각이었다. 대학 정원 확대와 연동되어 실시된 졸업 정원제는 상당히 특이한 제도였다. 대학 진학이 계층 이동의 사다리로 여겨지던 당시 상황에서, 대학 진학은 전 국민적 열망이었다. 당시 심각한 문제로 등장한 사교 육 과열과 재수생의 누적 역시 이러한 열망 이 낳은 병폐로 여겨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적 지지를 획득하는 동시에 대학들의
국민적 지지를 획득하는 동시에 대입 본고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방안으로 대학
사 폐지로 인해 생겨날 대학들의 불만을 누 그러뜨리기 위한 방안으로 대학 정원 확대
정원 확대가 등장했지만, 학생 운동의 온
가 등장했다. 그러나 가뜩이나 대학이 학생
상인 대학 정원을 무작정 확대하는 건 신
운동의 온상이자 사회적 불만 세력의 양성
군부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소로 존재하는 상황에서 무작정 대학 정원 을 확대하는 것은 신군부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뿐 아니라 경제 성장이 둔화되는 상황에서 대학 졸 업자 확대로 인한 실업문제 역시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정책이 바로 졸업정 원제였다. 연속기획 91
졸업정원제란, 입학 정원을 기준으로 대학 정원을 정했던 그동안과는 달리, 졸업 정원을 기준으로 대 학 정원(졸업 정원의 130% 가량)을 선발하여 졸업 시까지 일정 비율을 강제 탈락시키겠다는 제도였다. 한 마디로 대학 정원을 확대하되 졸업 정원을 정해두어 대학생들의 경쟁을 유도하여 더욱 우수한 실력의 졸 업자들을 육성하겠다는 공급통제형 정책이었다. 여기에는 경쟁 풍토를 조성하여 당시 성행하던 학생 운 동을 억누르고자 한 정권의 의도도 존재했다. 사실 신군부에게 대학 정책이란 국가의 성장과 발전을 견인 하기 위한 백년지대계라기보다는 국면 전환과‘학원 안정화’ 의 기제에 불과했다고 보는 편이 낫다.
국민적 반발로 인한 정책 실패 그러나 7.30 조치를 통해 시행된 공급통제형 교육 정책은 1980년대 중반이 되면 오히려 국민들의 불 만에 부딪히게 된다. 대학 진학이 점차 대중화되고 중산층이 확대되면서 대학 교육의 성격이‘평등한 교 육’ 보다‘상징자본으로서의 교육’ 으로 굳어졌기 때문이었다. 본고사 폐지와 과외 불법화를 통해 사교육 이 억제되기보다는, 오히려 음성적인 사교육 시장이 확대되는 악영향이 드러났다. 대학 진학의 기회가 더 열린 만큼 대학 진학을 위한 경쟁이 더욱 과열되면서, 사교육에 투자하는 경향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내 돈으로 내 자식 과외 시켜서 좋은 대학을 보내는 것이 뭐가 문제냐?” 는 풍토가 등장한 것이다. 대학 진학에 대한 과도한 열망은 졸업정원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불만으로 연결되었다. 어렵게 대학에 진 학시켰더니 졸업장을 따지 못하고 강제 탈락
대학의 성격이‘평등한 교육’ 보다‘상징
되는 제도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인식이 확
자본으로서의 교육’ 으로 굳어지며 대학
산됐다. 대학에서의 제도 운영 역시 만만치 않
진학 경쟁은 더욱 과열되었고,“내 돈으로
은 일이었다. 학과마다 특성이 다른 상황에서 일률적으로 특정 비율의 인원을 강제 탈락시
내 자식 과외 시켜 좋은 대학 보내는 것이
키는 제도는 학문 연구의 장으로서 대학의 역
뭐가 문제냐?” 는 풍토가 등장했다.
할을 무시한 처사라는 비판이 이어졌다. 또한 중도 탈락자들에 대한 진학 및 편입학의 기회
가 거의 주어지지 않아 비효율적인 제도라는 비판도 존재했다. 결국, 국가의 통제 아래 일괄적으로 시행 되었던 졸업정원제는 1983년 8월 대학의 융통성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재편되었다가 1986년부터는 제도 가 폐지되고, 다시 입학 정원제로 회귀하게 된다. 과외 불법화 역시 국민 여론에 따라 1980년대 후반에 규 제가 완화되어 사실 상 합법화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처럼 전두환 정권이 7.30 조치를 통해 시도한 공급통제형 정책은 국민적 반발에 부딪혀 폐기되었고, 오히려 대학 정원을 급증시킨 주범이 되기도 했다. 1980년 기준 20만 명이었던 대학 입학 인원은 7.30 조 치 이후 30만 명 선으로 급증한다. 뿐만 아니라 졸업 정원제 폐지가 입학 정원의 재감축으로 이어지지 않 았기 때문에, 대학 정원이 전반적으로 확대되었고 대학 교육이 대중 교육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가지게 92
되었다. 이 같은 대학 진학의 대중화 현상은 역으로 대학 미진학자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성립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해서, 대졸자의 급증으로‘대졸 프리미엄’ 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지만 대학 미진학자들에 대한 노동시장에서의 차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89년부터 언론을 통해 등장한‘고졸 신화’ 라는 단어 는 역으로 이 시기부터 대학 미진학자들이 부딪히게 된 사회적 장벽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1980년대 중후반의 무역 수지 흑자 전환과 경제 성장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대졸 인력의 필요가 증대되 면서 7.30조치의 실패로 인한 대졸자 급증 문제가 당장의 사회적 악영향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국가주도 정책에서 공급통제 정책으로의 전환 실패는 한국의 대학 교육 정책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 다. 대학 정책의 방향이 정부통제의 방향에서 대학의 요구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선회했고, 이것이 김영삼 정권기에 들면서 급격하게 시장중심의 정책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러한 공급통제 정책으로의 전환이 대학 교육 환경에 대한 장기적이고 질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 기획된 것이 아니라,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의 여론 전환용 정책이었다는 점에서 실패는 이미 예견돼 있었다. 이처럼 국민 여론을 의식하여 정책을 도입하고, 부정적 여론에 부딪히자 정책을 철 회하는 상황은 교육 현장을 혼란에 빠트릴 수밖에 없다. 그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7.30 조치가 대학 정 원의 확대와 대졸자 증대로 이어지면서,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학력 인플레이션 현상과 대졸자 취업 난이 등장하게 되었다.
연속기획 93
동아시아 시민운동사
재일조선인 문제는 좌파에게‘어떤’문제인가? 임경화 경기 군포 당원
정영환 씨는 재일조선인 3세로서 일본의 한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가르치며 재일조선인 사를 연구 중인 연구자다. 2009년 5월, 그는 한국의 한 학술단체의 초청으로 심포지엄에 참 석하고자 한국행을 서둘렀다. 한국국적을 갖지 않은 이른바‘조선적’재일조선인인 그가 한 국에 입국하려면 한국총영사관에서 발행하는‘여행증명서’ 를 발급받는 다소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 사정을 이해하려면‘조선적’재일조선인이란 누구인가에 대한 설명부터 필요하다. 해 방 이후 GHQ와 일본정부는 일본에 잔류한 조선인들에게서 일본국적을 박탈하고 이들을 외국인으로 취급할 목적으로 국적란에 지도상에 없는‘조선’ 을 기입하게 한다. 이는 해방된 구 식민지민들에게 국적 선택의 자유를 부여했던 다른 구 종주국들과는 구별되는 식민지주 의적인 차별 조치다. 1952년 대일강화조약 발효와 동시에 정식으로 일본국적을 상실한 재 일조선인들은 이로써 사실상 무국적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후 한국국적을 취득하여 한국 적 재일조선인이 되는 사람들이 꾸준히 늘었지만, 한국으로 재외국민 등록을 하지 않은 사 람들은 계속‘조선적’재일조선인의 상태로 남았다. 이들 중에는 한반도의 통일을 고대하며 남도 북도 선택하기를 원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고, 대일/대미 추종적인 한국의 국가로서 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는 외국인등록의 국적란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일본정부는 북한을 국적으로 인정하 지 않았기 때문에 무국적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들의 태반이 조선 남부 출신이었음에도 불 구하고 이들은‘고향’ 인 한국에 가지 못했다. 일본정부가‘조선적’재일조선인에게 재입국 허가를 발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사실상 일본에 갇힌 상태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지 94
속적인 권리 투쟁을 통해 출입국관리법
재일조선인의 태반이 조선 남부 출신이었지만
이 개정되었고, 1991년에는 조선적/한국
‘고향’ 인 한국에 가지 못했다. 일본정부가‘조
적자를 포함한 영주자격인‘특별영주’ 가 부여되었다. 한편 한국정부는 이들 무국 적 재일조선인들을‘재외동포’ 에서 제외 했기 때문에, 이들이 한국을 방문하기 위
선적’재일조선인의 재입국을 허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사실상 일본에 갇힌 상태나 다름 없었다.
해서는 남북교류협력법에 기초하여‘여 행증명서’ 를 발급받아야 했다. 그나마 김 대중, 노무현 정권 시절에는 남북교류가 진전되어 이들의 입국도 허용되었지만 이명박 정권으로 교체된 이후에는 사실 상 금지되었다.
북한과 교류한 재일조선인은 종북세력? 서두에서 언급한‘조선적’재일조선인 연구자 정영환도“경찰청에서 신원증명 을 할 수 없다” 는 이유로 여행증명서 발 급을 거부당했고 당연히 심포지엄에도 참가하지 못했다. 그는 이 조치에 불복하 여 2009년 8월 여행증명 발급 거부 처분 취소를 요구하며 행정법원에 소송을 제 기했다. 당시 다수의‘조선적’재일조선
임시여행증명서 발급을 거부한 서류
인들이 여행증명서 발급 조건으로 한국 적 취득을 강요당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이를 심각한 인권침해로 보고 그 시정을 권고하기도 했지만, 2013년에 대법원은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여행증명서의 법적 성격을 여권의 대체가 아닌 비자에 준한 다고 규정하여 발급자(영사)의 재량권을 대폭적으로 인정한 후, 원고인 정영환이 국가안전보장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여 발급 거부 처분이 정당하다고 판결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무국적 재일조선인들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간주하기도 하기 때문에 여행증명서는 외국인들에게 부여되는 비자 와 동일하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원고가 조선학교 출신이고 대학 졸업논문에서 재일조선인 공산주의자 를 다루었으며 북한을 방문하여 범민족대회 등에 참가한 전력이 있다는 점 등을 들어, 원고를‘대한민국 동아시아 시민운동사 95
국체’ 를 인정하지 않는 종북세력으로 낙인찍은 일은 재일조선인 사회의 역사와 실체를 무시한 처사가 아 니라 하기 어렵다. 재일조선인 사회는 한반도처럼 분단선이 없이 총련계 사람들과 민단계 사람들이 함께 섞여 사는 사회 다. 서로 간의 접촉과 교류도 활발하다.‘조선적’재일조선인들 중에 북한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그 것이 반드시 이데올로기적 이유 때문은 아니다. 총련이 조선학교 등의 민족교육을 운영하고 동포생활 향 상에 힘쓰며 생활기반을 만들고 지키려고 했던 점이 더욱더 결정적인 이유다. 그리고 이들을 남한이 대한 민국 국민으로 간주하듯이 북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민으로 간주한다. 서류상 무국적자인 이 들은, 잠재적으로는 남북 모두의 국민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점이 국가보안법의 대상이 되어 지금껏 재일조선인들이 한국사회로부터 배제되고 탄압받은 원인이 되기도 했다. 지금까지 100명이 훨씬 넘는 재일동포들이 별다른 이유도 없이 갑자기 한 국의 공안기관에 연행되어 간첩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간 한국정부는 재일조선인들을 반공의 눈으 로만 보아왔고,‘조선적’재일조선인들 사이에서도‘종북’세력을 솎아내고 차별하여 한국국적을 취득하 도록 종용해왔다. 정영환은 이러한 한국정부의 움직임을 보며 정권이 바뀌고 남북의 긴장 국면이 완화될 때까지 기다릴까도 생각해보았고, 그러한 조언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조선적’재일조선인으로 서 자신이 한국에 입국하는 것은 한국정부의
“한국은 재일동포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 화국하고 함께 살아왔던 그 역사 자체를
관용 속에서 부여되는 허가가 아니라 코리안 으로서의 당연한 권리이며, 따라서 한국 외교 부가 지금까지 해왔던 조치들은 부당하고 불
인정해야 한다. 이는 분단 극복 문제이자
법적인 일들이었음을 당당히 주장해야 하며,
한국사회의 반공주의 극복 문제다.”
바로 그 속에 미래가 있다고 판단하여 결국 제소하게 되었다고 한다. 패소한 후 정영환은
말했다.“한국은 재일동포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하고 함께 살아왔던 그 역사 자체를 인정해야 한다. ‘조선적’조선인, 조선학교, 총련에서 일하는 사람들 다 포함해서 이것은 분단 극복 문제이자 한국 사회 반공주의 극복 문제라고 생각한다” 고.
재일조선인 문제 해결, 그들 역사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조선적’재일조선인들이 과거회귀적인 시간을 겪어내야 하는 상황은 이들이 생활의 기반을 둔 일본 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북한의 핵문제나 일본인 납치문제가 불거진 이후 대북 제재의 화살을 이들에 게 돌려,‘조선적’조선인도 북한국적으로 간주하여 차별하고 있다. 이는‘조선적’ 을 북한국적으로 인정 하지 않았던 과거와 대비된다. 이러한 한국과 일본 양국의‘조선적’재일조선인 차별 정책은 실질적인 효 과를 발휘해,‘조선적’재일조선인은 그 수가 해마다 줄어드는 중이다. 차별이 싫으면 국적을 취득하라는 96
국가의 논리가 관철되어 간다고 할 만하다. 이런 와중에, 바로 그 국가가 자행하는 차별의 부당성이야말 로 문제 삼아야 한다는 정영환의 주장에 기초한 재판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사회는 그의 싸움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남북통일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줄 어들고 좌우를 막론하고 탈 민족주의 경향이 심 화되어 가는 조류와 무관하지 않을 테다. 한데, 이러한 한국사회의 무관심을 탓하기에 앞서,‘조 ( 선적’ )재일조선인 문제가 도대체 어떤 문제인지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소수자로서 그들이 겪는 문제는 민족문제인가, 국가문제인가, 아니
‘조선적’ ( )재일조선인 문제가 도대체 어떤 문제인지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민족문제인가, 국가문제인가, 아 니면 인권문제인가.
면 인권문제인가. 재일조선인은 식민지 경험, 분 단, 전쟁 등의 근현대 역사적 경험 속에서 형성된 정체성이다. 재일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식민지주의 적 차별에 노출되어왔고 민족교육 등을 부정당해왔다. 이런 점에서 재일조선인이 겪는 문제는 명확히 민 족문제이다. 그런가 하면, 한국 안에서 한국인이라는 지위에 안주한 우리에게는 제대로 의식되지 않지만, 그들은 분단국가체제에 기반을 둔 한반도의 국가에 의한 부당한 폭력에 시달려온 존재이기도 하다. 그들 의 존재는 끊임없이 분단국가의 정당성에 이의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재일조선인의 문제 는 국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뿐 아니라 특정 민족으로서 민족교육을 받는 권리, 특정 소신 내지 정치적 의견을 표하거나 집회에 참석했다는 등의 이유로 입국을 통제받지 않을 권리, 국적에 관계없이 출신지에 돌아갈 수 있는 권리 등은 누구나에게 주어진 보편적인 인권의 영역이다. 그런 점에서 재일조선인의 문제 는 민족문제이기도 하고 국가문제이기도 하고 또 인권의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보편적인 차원에서 그 들의 인권을 존중하고자 한다면, 그들의 역사적인 경험의 고유성을 우선 인정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것이 식민지주의의와 분단 상황의 극복과 밀접하게 연결되었음을 자각해야 한다.
동아시아 시민운동사 97
성정치 칼럼
지지와 연대가 만들어내는 무지개 색 기적 류홀릭 비온뒤무지개재단 이사
성적소수자를 위한‘인권’ 은 없는 나라 2013년, 트랜스젠더 자녀를 둔 부모와 인권활동가들이 모여 1년의 준비 끝에 창립회원 340여 명과 1억 원의 창립기금을 모아 성적소수자들을 위한 비온뒤무지개재단1)을 만들었 다. 성적소수자들을 위한 재단이 세워진 건 한국에서는 최초의 일로, 이는 실로 역사적인 일이라 하겠다. 정부 또한 이에 역사적으로 화답했다. 2015년 2월, 정부는 국내 최초의 성적소수자 공익 재단으로 출범한 비온뒤무지개재단의 법인승인을 거부했다. 거부 이유는 다양하고도 뻔한 대답들이었다. 서울시는‘미풍양속에 저해되는 사안이라 등록되지 않을 것’ 이라고 말하며 ‘우리 소관이 아니므로 국가인권위로 가라’ 는 안내도 해주었다. 그래서 국가인권위원회에 법인등록 서류를 제출했더니‘상임위원회가 보수적이어서 통과가 안 될 것이다’말한다. 비 온뒤무지개재단이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법무부였다. 이쯤 되니 법무부는 뭐라고 답변할지 기대가 될 지경이었다. 법무부는‘보편적 인권을 다루는 곳이므로 한쪽에 치우친 주제를 허 가하기 어렵다’ 는 이야기만 할 뿐, 20일 내에 허/불허를 처분해 신청인에게 통지해야 하는 의무도 잊은 채 2015년 3월까지 3개월 동안‘윗선에서 검토 중’ 이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공 식답변을 주지 않았다. 비온뒤무지개재단은 사단법인 설립에 대한 처분을 통지하지 않는 법무부를 대상으로 행정심판을 청구하여 진행 중이다. 최근 몇 년 동안 국가기관은 성적소수자와 관련된 많은 일들에 빈번하게 거부를 표해왔
1) 비온뒤무지개재단 홈페이지 www.rainbowfoundati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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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온뒤무지개재단이 법무부를 상대로 낸 행정심판 청구에 대해 보도한 기사 (사진 : 2015년 3월 4일자 로이슈 갈무리)
다. 2014년 12월 27일 서울시립청소년미디어센터 대관 과정에서는 성적소수자 모임이라는 이유로 대관 신청을 반려했고, 1년에 한 번 개최하는 퀴어문화축제 때에는 서대문구청이 행사 2주 전에 일방적으로 퍼 레이드 장소 사용 불허를 통보했다. 이외에도 성적소수자에 대한 공공기관이나 국가기관의 차별 사례들 이 적지 않다.‘인권도시 성북’ 을 외치는 성북구는 서울시 주민참여예산 사업으로 선정된‘청소년 무지개 와 함께 지원센터’사업을 일부 개신교 목사들의 의견을 들어 불용 처리했다. 올해 겨울, 성소수자들이 시 청 점거농성을 한 이유도 서울시인권조례 제정 과정에서 시민의 힘으로 제정된 서울시인권헌장을 보수기 독교의 압력에 굴한 서울시가 성적소수자 차별 명시 등의 이유를 들어 폐기하였기 때문이었다. 지난해 12월 미국에서는 17살의 트랜스젠더 청소년 리라 알콘이 부모님과 학교의 강제적인 동성애자 전환치료에 대한 압박감 때문에 자살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4월 8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게이, 레즈 비언, 트랜스젠더 청소년의 성적지향성을 바꾸려는 전환치료 행위를 당장 중단해야 한다는 백악관 성명 을 발표했다. 성적소수자 인권을 보호하려고 노력하는 미국정부와는 반대로 한국의 상황은 총체적 난국이다. 오히 려 한술 더 떠 국회의원회관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탈동성애 인권포럼을 개최할 정도다. 앞서 말한 일련 의 사건들을 짚어볼 때 인권을 꿈꾸는 서울시나 인권도시를 외치는 성북이나 국가가 말하는 인권 안에 성 삶과 문화 99
적소수자는 없다. 흔히들 말하는 우리나라의 그‘우리’안에 성적소수자가 없다는 뜻과 마찬가지다. 성적 소수자들이 문밖으로 나가(커밍아웃) 공적인 영역에 발을 들이는 행동에 대해 우리 사회는 두려움을 느낀 다. 성적소수자의 존재가 드러나면 정말 미풍양속이 저해되고 사회의 근본이 흔들리는 양 성적소수자 그 자체를 위협적인 존재로 만들어 낸다. 성적소수자를 향한 국가의 압력과 공적인 차별이 성적소수자들의 숨통을 죈다. 이는 드러내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는 뜻이다.
함께 만들어가는 운동의 가치 성적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은 2008년 보수정권이 등장 이후 점점 더 세력화, 권력화 되어가는 중 이다. 성적소수자 인권운동 20년을 맞이한 지금의 현실에서 우리가 어떤 운동을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 서 시작해 만들어진 결과물이 바로 비온뒤무지개재단이다. 사회가 드러내지 말라고 할수록 성적소수자들 에게 공익적인 차원의 사회적 안정망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편견 없는 기부문화 확산과 다양성을 존중하 는 배분을 위한 공적인 재단이 더욱 필요하기 때문이다. 비온뒤무지개재단은 현재 이반시티퀴어문화기 금, 이창국기금 활동가생기충전기금, 연구지원기금 등을 배분하고, 부설기관으로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 락(www.queerarchive.org)과 성적소수자 전문상담기관 별의별상담연구소(878878.net)를 운영 중이다. 비온뒤무지개재단의 창립은 당시 성적소수자 당사자 뿐 아니라 트랜스젠더의 부모님, 친지, 가족들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지지하는 마음이 함께 모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혐오와 차별 덩어리 한국 사회가 마치 하늘에서 퍼붓는 폭우와 같다면, 이러한 변화의 발견은 그 폭우가 그치고 땅이 굳어진 뒤 내비치는 별의별 색의 무지개와 같다. 우리는 성적소수자 운동의 또 하나의 희망을 보았고, 이는 기적의 순간과도 같은‘비온뒤무지개’ 라는 이름과도 맞닿아 있다. 비온뒤무지개재단은 당사자 중심의 운동이 아니라 성적소수자 주변의 사람들의 지지와 연대가 모여 만들어낸, 모금과 배분이라는 새로운 운동의 모델로서 한국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셈이다. 재단이라는 이 름에 걸맞은 투명한 재정운영을 위해서도 사단법인 설립은 무엇보다 중요한 사안임에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비온뒤무지개재단은 성적소수자들을 위한 재단이라는 이유로 그 어떤 맥락과 법적근거도 없는 핑 계를 대며 사단법인 설립허가를 내주지 않는 지금의 사태에 대해 끝까지 공론화하고 함께 싸울 생각이다. 진보정당 운동은 성적소수자 운동에서 매우 중요하다. 해외의 역사적 맥락을 보더라도 성적소수자의 권리와 인권은 진보정치 위에서 발전하고 성장했다. 때론 중요한 사안 앞에서 성적소수자 사안이 걸림돌 이 되거나 후순위가 될 때가 있더라도 말이다. 이천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진보정당의 성소수자위원회/성 정치위원회는 성적소수자 운동을 진보정치 안에 녹여내려고 노력해왔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들이 성적소 수자 운동과 함께 맞물려 돌아갈 때, 성적소수자 친화적인 다양한 정책과 삶의 방식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진보정치의 가치를 만나게 된다. 재단의 가치에 동의하며 기꺼이 후원회원이 된 노 동당의 나경채 대표나 법인등록을 거부하는 법무부의 불합리한 처사에 즉각 성명을 내어 규탄의 목소리 100
를 함께 내준 성소수자차별반 대 무지개행동을 보며, 우리가 동의하는 가치를 함께 만들어 나간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계 속해서 되새기게 된다. 비온뒤무지개재단은 2015 년에도 다양한 배분을 통해 성 적소수자 운동과 문화가 더 크 게 날개를 펼칠 수 있도록 지 원할 예정이다. 그 날개를 떠 받쳐줄 바람을 일으키는 데 이 글을 읽는 모두가 함께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성적소수자와 연대할 수 있는 쉬운 방법 하 나를 소개하며 글을 맺을까 한 다. 소주 한잔 값으로 성적소수 자와 연대할 수 있는 쉬운 방
비온뒤무지개재단의 문자 후원 안내
법이 있다. 휴대전화의 문자메 시지 창을 열어 성적소수자들에게 보내는 응원의 메시지를 적은 뒤 #2540-1365로 보내면 건 당 3,000원 이 비온뒤무지개재단에 기부된다. 혹시라도‘동성애자 단체 기부’등의 표시가 요금명세서에 기입될까 걱정하실 필요는 없다. 기부내역은‘정보이용료’ 로 표기된다. 1년 365일, 생각날 때마다 편하게 기부가 가능하다. 후원이 곧 연대다.
삶과 문화 101
오덕 칼럼
시련에 내몰린‘소녀’ 들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본 일본의 변신소녀물 김만하 <미디어스> 기자
일본 애니메이션 중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장르는 로봇물이다. 마징가Z부터 에반게 리온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 로봇들의 고향이 일본이다. 이전의 글들에서 우 리는 일본 경제의 구조 변화에 따라 로봇들이 어떤 형태로 변화해왔는지 살펴봤다. 물론 일 본 경제의 특정한 상태가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로봇의 형태나 역할에 거의 그대로 영향 을 준다는 주장은 일종의 환원론적 사고로 오독될 여지가 있다. 그러니 당시의 글을 읽었던 독자들은 학적으로 엄밀한 주장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하나의‘거대한 농담’ 을 다룬다는 느낌으로 읽어주면 감사하겠다. 굳이 이런 이야기를 적는 이유는 이번 글에서도 역시 같은 맥락으로 주의를 환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마법봉 대신 총을 든 소녀들 전통적으로 로봇물은 남성인 아이들의 전유물이다. 이건 일본에서건 한국에서건 마찬가 지다. 사실 꼭 로봇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 나타나는 대다수의 내러 티브가 가부장적 질서를 옹호하고 재생산하는 전형적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테면《도라에 몽》 에서 노비타(진구)는 온갖 종류의 모험을 감행하지만 시즈카(이슬)는 단지 도구화돼 조연 의 역할만을 담당한다.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여성 캐릭터가 어느 정도 일반화 된 시기는 1990년대 초반이라고 봐야 한다. 이러한 현상에는 이른바‘변신소녀물’ 이 일익을 담당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대표적인 작품은 1991년 12월부터 연재된《미소녀전사 세일러 문》 이다. 세일러문 이전에도 우리나라에‘요술공주’ 란 이름으로 알려진《마법사 샐리》 ,《마 법의 프린세스 밍키모모》등의 변신소녀물 또는 마법소녀물이 존재했지만, 대개 이러한 작 102
《미소녀전사 세일러문》 의 엔딩 장면. 세일러문은 소녀들의 다소 전투적인 면모를 부각시켰지만, 변신 도구들의 ‘여성적’형태나 조력자‘턱시도가면’등 기존의 상투적인 여성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품들은 목가적인 분위기로 일관하거나 남의 고민을 마법으로 해결해준다는 에피소드 위주의 구성으로 전 통적 여성상을 그대로 따르는 내용이 대다수였다. 나가이 고 원작으로 알려진《큐티 하니》 는 앞의 예들에 비해서는 파격적인 내용을 다뤘으나 성숙한 성인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역할을 한 작품으로 기억된다는 점에서는 앞의 작품들과 유사하다. 그러나《미소녀전사 세일러문》 에 이르면 작품에 등장하는 소녀들의 다소 전투적인 면모가 부각되기 시작한다. 이 작품에서 소녀들은 신비한 힘을 활용해 지구를 침략하려는 외계인 등에 맞서고 미스터리를 파헤치는데, 이 과정에서 이들은 당연하게도 두들겨 맞거나 상처를 입고 쓰러지는 경험을 매회 반복한다. 이는 이전 변신소녀물의 일반적 문법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서, 비유하자면 소녀들이 훨씬 더 험난하고 기구한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할 만하다. 그런데 이런 내용에도 불구하고《미소녀전사 세일러문》 의 주인공들은 상투적인 여성상을 반복 강조하 거나 남녀 간의 연애감정 등을 소녀적(?) 관점으로 묘사하는 데 치중함으로써 기존의 캐릭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이들이 변신하는 데 사용하는 도구들의‘여성적’형태나 위험한 때에 결정적 역할을 해주는 조력자‘턱시도가면’등의 존재를 보면 이런 점들이 보다 명확해진다. 세일러문과 함께 국내에서 인기를 끌었던 1995년《애천사전설 웨딩피치》 에서 주인공들이 전투를 치르기 전‘사랑의 힘’ 을 증폭시키 기 위해‘웨딩드레스’ 를 입은 형태로 변신해야 한다는 점 역시 세일러문으로 대표되는 변신소녀물의 한계 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후 소녀들은 1994년《마법기사 레이어스》 에서 검과 메카닉을 이용해 적과 맞서는데, 앞서의 세일러 문에서 정체가 불분명한 광선 등을 사용해 적과 맞서던 때를 생각해보면 소녀들의 무기가 구체화된 상황 을 보여준다고 평가할 만하다.《마법기사 레이어스》 가 당시 맥락에서 특이한 작품이었음을 감안할 때 변 삶과 문화 103
신소녀물에서 소녀들이 보다 직접적인 타격수단을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시기는 이천년 대 초반이라 하겠 다. 2004년 방영을 시작한 애니메이션《두 사람은 프리큐어》 는 두 소녀가 다른 세계의 힘을 통해 악당들 에 맞서 싸운다는 다소 평범한 구도를 취한다. 이 작품의 특이한 요소는 소녀들이 악당들과 치고 차고 때 리는‘육탄전’ 을 벌인다는 점이다. 이런 요소는 이후 시리즈에서 다소 반감되지만 프리큐어 시리즈의 전 통이 되었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노상에서 변신소녀 캐릭터와 똑같은 가면과 의상을 착용한 스턴트맨 들이 서로 격투를 벌이는 쇼를 보여주는‘가면극’이벤트가 제작될 정도였다. 같은 시기 방영된《마법소녀 리리컬 나노하》 에서 이런 흐름은 더욱 노골적이 된다. 초기만 해도 SF적 요소가 가미된 변신소녀물의 전형적 흐름을 따르던 이 작품은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총격전이나 포격전을 연상케 하는 과격한 총탄발사 연출에 집중한다. 주인공이 사용하는 일종의 마법봉도 탄창을 교환해가며 총탄을 발사하는 사실상의‘총’ 으로 변화했는데, 여기에서 변신소녀물은 여자 어린이들에게 전통적 여성 상을 부여하기 위한 장르에서 성인 남성 마니아의 재미를 위한 장르로 변화하게 된다.
일본 정치의 혼란과 함께 찾아온 소녀들의 고난 이러한 일련의 변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런 변화를 일본 정치 환경의 변화와 엮어보면 흥미로 운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일본 정치는 1993년까지 소위‘55년 체제’ 라고 불리는 안정기를 겪었다. 55년 체제란 1955년 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이 보수합동을 통해 자유민주당을 창당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진보적 인 정책을 내세우는 일본사회당과 교착상태를 이룬 국면을 말한다. 여당인 자유민주당은 헌법을 개정할 수 있는 개헌선 만큼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고 야당인 일본사회당은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과반의석을 확보하지 못하는 상태가 1955년 이후 길게 이어졌다. 90년대에 가까워지면서 자유민주당 내의 파벌싸움이 가속화되고 거품경제가 붕괴하며 정계의 부정부 패를 드러내는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이를 기점으로 자유민주당은 분열하기 시작했고 일본사회당이 스스로를 혁신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1993년 중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그 결과 자유민주당에서 갈라져 나 온 신생당, 신당사키가케에 더해 일본신당, 공명당, 민사당, 일본사회당 등 7개 당이 비자민·비공산 연립 정권을 이루어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총리로 지명했다. 호소카와 내각은 1994년 4월 정책을 둘러싼 각 세 력의 분열과 호소카와 총리의 정치자금 문제 등으로 총사퇴한다. 하타 쓰토무가 뒤를 이어 총리로 지명됐 으나 일본사회당이 갈등 끝에 이탈하면서 64일 만에 다시 내각이 총사퇴하고 만다. 이후 6월에 자유민주 당, 일본사회당, 신당사키가케가 연립정부를 구성, 일본사회당의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총리가 된다. 무라 야마 총리는 일본사회당 노선의 우경화에 일정 부분 기여하면서도 자유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개헌 추진 세력에게 주도권을 넘겨주지 않는 과도기적 정권을 유지했다. 1996년 1월 하시모토 류타로가 총리에 취 임함으로써 만 3년 만에 자유민주당 소속 총리가 탄생했다. 이 모든 과정이 거품경제의 붕괴로 인한 경기 104
하강과 고베 대지진, 옴진리 교 사건 등으로 인한 세기말 적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일본 정치사에서 1990년대는 그야말로 혼란의 시기였다 하 겠다. 앞서 묘사한 변신소녀들의 처지 악화는 이러한 정치사회 적 변화에 맞물려 진행된 측 면이 있다.‘소녀’ 는 가부장적 질서로 무장된 사회에서 보호 와 배려의 대상을 의미하는 상징이다. 그런데 사회적 위 기가 대두되고 혼란스러운 상 황이 계속되면서 이 소녀들이 고난에 내몰리는 현상이 벌어 졌다. 소녀들이 위기를 직접 적으로 체험하는 세일러문에 서 프리큐어를 지나며 정도가 더 심해졌고 리리컬 나노하에
《마법전기 리리컬 나노하 Force》 의 일러스트. 일본 정치의 혼란기를 지나는 동안 고난 에 내몰리던 소녀들은 이제 직접‘무장’ 을 선택하는 데 이르렀다.
이르면 소녀들이 직접‘무장’ 을 선택할 정도가 되는데, 여기에 이르면 이제‘소녀의 무장’ 이라는 부분에서 지금까지와는 결이 다른 어 떤 증상이 발생한다는 걸 눈치 챌 수 있다.
무기가 된 소녀들 이천년 대에 들어오면서 일본 만화 애호가들의 일각에서는‘메카소녀’ 라는 하나의 분류가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여기에 해당하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표적인 작품이《최종병기 그녀》 다. 평범한 젊은 여성 과 실제 존재하는 무기 등을 뒤섞어버리는 게 기본 형태다. 비슷한 예로, 건담 등의 로봇과 여성을 뒤섞어 버리는 2차 창작물 등이 인기를 얻기도 했다. 특이한 점은 어느 시점부터 여성과 하필이면‘2차대전’때의 무기를 뒤섞는 게 유행이 됐다는 것이다. 2005년부터 연재가 시작되고 2008년에 TV판 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된《스트라이크 위치즈》 에는 외계인 삶과 문화 105
들과 싸우는 소녀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 소녀들은 그들이 공중에서 싸울 수 있도록 날게 해주는 특별한 장치를 양다리에 장착하는데, 이 장치의 디자인을 잘 보면 2차대전에서 활약했던 전투기들을 모 티브로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등장하는 소녀들 캐릭터의 대다수도 2차대전에서 전공을 올린 에이스 파일럿들을 모티브로 한다. 2차대전에 쓰인 무기와 소녀를 동시에 소재로 삼는 애니메이션이라면 2012년 10월부터 방영된《걸즈 & 판처》 를 빼놓기 어렵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세계에서 여고생들은 학교에서 전차를 직접 운용하는 가상 전쟁을 일상적으로 벌인다. 전차를 활용한 전술을 효과적으로 이용해 상대 팀의 전차를 전투 불능으로 만 들어 승리하는 이 스포츠의 이름은‘전차도’ 이다. 당연히 2차대전시에 활약했던 전차들이 주로 등장하며, 이러한 전차를 타고 소녀들이 거듭된 가상전쟁에서 승리하며 성장하는 이야기가 이 작품의 주요 내용이 다. 《함대 컬렉션》또한 유사한 소재의 작품이다.《함대 컬렉션》 은 2013년부터 서비스 된 웹게임인데 올해 부터는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돼 방영중이다. 이 작품에는 소녀 캐릭터와 뒤섞어버린 2차대전 때 활약한 군함들이 대거 등장해 일본 내에서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일부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이 덕분 에 태평양전쟁에 대해 새롭게 흥미를 갖게 됐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이런 작품들이 하필이면‘2차대전’ 을 떠올리게 하는 소재를 차용하고 소녀들이 본격적으로 유사-전쟁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 의 일러스트. 여기서 소녀들은 소멸하거나 고통을 영원히 반복하거나 괴물에게 죽는다. 그야말로 오늘날 일본이 직면한 문제 그 자체를 보여준다고 평가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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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동원되는 스토리를 그린다는 점에서‘우경화’ 와 관련한 논점을 제기해볼 만하다. 이러한 작품들의 전 조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이천년 대 일본 정치는 우경화의 시대였다. 특히 2000년 모리 요시로 총리가 등 극하면서 1955년 이전 일본민주당을 기원으로 하는 극우파의 입김이 강해진 것이 결정적이다. 이들은 이 후 2009년 민주당의 하토야마 내각의 등장으로 정권을 잃기 전까지 고이즈미 준이치로, 후쿠다 야스오, 아베 신조 등 총리를 배출하며 우경화를 주도했고, 2012년 12월 아베 신조 총리가 다시 등극한 이후에는 지금까지 지속적인 극우적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이들이 전후질서의 극복과 보통국가화를 추진하면서 개헌을 통한‘재무장’ 을 공개적으로 언급한다는 점은 익히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는 곧, 이들의 우경화 노선을 통한 사회적 영향력이 애니메이션 등에 서는 가부장적 질서 하에서 가장 약한 존재인‘소녀’ 들이‘무장’ 을 하고 시련으로 내몰리는 표현으로 이어 지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2011년에 방영돼 선풍적 인기를 끈《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 는 이런 흐름의 종합판이라고 할 만하 다. 이 작품에서‘마법소녀’ 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소멸하거나 고통을 영원히 반복하거나 괴물에게 머리를 물어 뜯겨 죽는다. 이 중 파국을 막기 위한 시도를 시간을 거슬러 영원히 반복하는 호무라 아케미는 목적 을 이루기 위해 박격포나 대물저격총 같은 현대적 무기를 동원하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 변신소녀물 초창 기의 평화롭고 한가한 분위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상황이야말로 오늘날 일본이 직면한 문제 그 자체를 보여준다고 평가할 만하다. 일본인들은 그들 자신이 믿는 가부장제의 논리에 따라 보호받아야 할 최후의 보루인 소녀들까지 강경한 투쟁의 장으로 내몰아야 하는 무의식적 부담에 시달리는 건 아닐까? 일본 정부의 우경화 노선에 미디어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민감한 문제다. 자칫 잘못하면‘마 녀사냥’ 의 대상을 양산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진격의 거인》 이라는 작품이 우익논란에 시달렸 을 때 많은 사람들은 만화책을 중고시장에 내다팔거나 불을 질러‘화형식’ 을 거행하는 행동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치사회적 맥락이 서브컬쳐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논의를 포기하지는 말 아야 한다.《걸즈 & 판처》 나《스트라이크 위치즈》 가 우익물이라는 의혹을 제기하자는 말이 아니다. 대중 으로부터 사랑받는 작품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동일한 코드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추적하고 논하는 작업이 늘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를‘비평’ 으로 부를 수 있다면, 그리고 이 비평이 작품을 둘러싼 사회적 맥락을 규명하는 데 역할을 다할 수 있다면 앞서의 만화책 화형식은 불필요한 일이 된다. 만화책 화형식은‘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좋아하는 만화책이 나를 속이고 우익사상을 주입하고 있었 다’ 는 정서 때문에 거행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비평을 통해 작품이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는 점을 규명하면서도 이러한‘속임수’ 가 실제로는‘거짓문제’ 였다는 점을 밝힐 수 있다. 설사 작품을 통 해‘속임수’ 가 시도되었다 할지라도 역시 그것을 무력화시키는 건 비평의 힘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비평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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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보로 보는 한국언론
민망했던 말 바꾸기, 종편의 5.18 왜곡보도 조윤호 <미디어오늘> 기자
대형 오보는 종종 언론사의 존립 위기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보도 내용을 스스로 부 정하는 민망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2013년 5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북한군이 개입한 폭동” 이라 보도한 TV조선과 채널A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은 보도 이후 후폭풍 이 일자 자신들의 보도를 부정했다.
반론도 의심도 없는 TV조선·채널A의 5.18 음모론 5.18 광주민주화운동 33주기를 앞둔 2013년 5월, 일간베스트저장소 등 극우사이트를 중심으로 5.18이 북한군 개입으로 일어난 폭동이라는 주장과 5.18 희생자들을 모욕하는 내용들이 쏟아져 나왔다. 문제는 극우사이트에서나 돌던 음모론이 전파를 타고 불특정다 수 대중에게 쏟아졌다는 것이다. 2013년 5월 13일 TV조선《장성민의 시사탱크》 는 5.18이 북한군이 개입해 일으킨 사 건이라는 주장을 여과 없이 보도했다. 탈북자 출신이자 전 북한 특수부대 장교 임천용은 이날 방송에서“600명 규모의 북한 1개 대대가 (광주에) 침투했다” “전남도청을 점령한 것 은 북한 게릴라” 라고 주장했다. 임씨의 주장은 반론도 없이 1시간 내내 방송됐다. 5월 15일 채널A에도 비슷한 내용이 등장했다. 채널A《김광현의 탕탕평평》 은 당시 북 한군으로 광주에‘남파’ 됐다는 탈북자 김명국(가명)의 인터뷰를 방송했는데, 김씨는“북 한 특수부대원들이 1980년 5월 21일 배를 타고 광주 인근 바닷가에 도착해 시민군 행세 를 했으며 작전을 마치고 후퇴할 때는 남한 특전사를 공격하기도 했다” “광주폭동 때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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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13일자 TV조선 장성민의 시사탱크 갈무리
가했던 사람들 가운데 조장, 부조장들은 (북한으로 돌아가) 군단 사령관도 되고 그랬다” 고 말했다. 본인을 탈북자라고 소개한 이주성씨도 채널A 방송에서“남파 북한군이 교전 중 3명의 남한 특전사 대원을 사살했다” “남파 북한군이 경상남북도와 태백산맥을 거쳐 북한으로 돌아갔다” 고 주장했다. 5.18 북한군 개입설은 1980년대 신군부가 처음 제기했다. 하지만 이미 학계에서도 몇몇 탈북자들 의 주장에만 근거한 음모론에 불과하다고 결론이 난 사안이다.‘광주사태’ 를‘민주화 항쟁’ 으로 규정 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음모론은 기각됐다. 조금만 의심하면 북한군 개입설은 허점투성이다. 1980년 당시 전두환 정권은 전국에 계엄령을 선 포했고 광주는 2만 명의 계엄군이 사방을 포위한 상태였다. 그런데 600명 규모의 북한군 1개 대대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광주에 잠입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말이다. 북한군이 철수 중 국군과 교전을 벌였다는 주장도 의심할 만하다. 간첩 한 명을 잡아도 대대적으로 선전하던 전두환 정권이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의심스럽다. 국군 내부 기록에도 이러한 내용이 없다. 채널A와 TV조선은 이처럼 조 금만 의심하면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닌, 역사적으로도 이미
채널A와 TV조선은 조금만 의심하면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닌, 역사적으로도 이미 기각된 주
기각된 주장을 마치 새로운‘팩
장을 마치 새로운‘팩트’ 인 양 떠들어댔다. 반론도
트’ 인 양 떠들어댔다. 반론도 받지
받지 않은 일방적인 음모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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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15일 채널A 김광현의 탕탕평평 갈무리
않은 일방적인 음모론이었다. TV조선‘시사탱크’ 의 진행자 장성민은“시민들이 빨갱이·폭도·간첩 으로 매도된 데 대한 의구심을 해결한 결정적 증거와 단서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북한의 특수게릴 라들이 어디까지 광주민주화운동에 관련되어 있는지 그 실체적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고 말했 다. 의심은커녕 진행자까지 음모론에 동조한 셈이다.
어이없는 TV조선의‘5.18 음모론’전면 부정 파장은 컸다. 5.18 관련 단체들과 야당은 일제히 채널A와 TV조선을 비판했고 해당 방송들은 방송 통신심의위원회 징계 대상으로 올라왔다. 5.18 단체들은 해당 방송과 출연자들을 고소했다. 내부에서 도 반발이 일었다. 채널A 공채 1기 기자들은 항의 성명까지 냈다. 채널A와 TV조선은 결국 자신들의 주장을 철회해야 했다. 방송 6일 만인 5월 21일, 채널A‘탕탕평 평’ 의 진행자 김광현은“만약에 이 방송 내용으로 인해 마음을 다친 광주민주화운동 피해자와 시청자 여러분이 있다면 사과 하겠다” 며“채널 A는 광주민주화운동의 본질은 존중하며 이런 자세를 지켜나 갈 것” 이라고 밝혔다.‘만약에’ 라는 조건을 붙인 사과는 5.18 단체들의 더 큰 반발을 샀다. TV조선은 5월 22일 메인프로그램인《뉴스쇼 판》 에서 1시간 20분에 걸쳐 5.18 북한군 개입설을 전 면 부정하는 내용을 내보냈다.《뉴스쇼 판》 은 북한군 개입설이 억지 주장이라며“근거 없는 루머 대신 역사의 진실만이 남겨져야 할 때” 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자아비판의 최고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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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22일자 TV조선 뉴스쇼판 갈무리
이어‘시사탱크’진행자인 장성민이 방송에 등장해“TV조선의 취재 결과, 임(천용)씨의 주장에 객 관적 근거가 없다고 결론이 내려졌다” 며“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과 거리가 먼 임씨의 주장이 제가 진 행하는 프로그램에 방영되어 관련 단체 여러분께 마음의 상처를 드린데 대해 깊은 사과를 드린다” 고 밝혔다. TV조선은 또한 보수논객으로 광 주민주화운동을 취재했던 조갑제를 출연시켜 5.18 음모론을 반박했다. 이 과정에서 조갑제 씨는“TV조선
“TV조선 기자가 작심을 하고 취재를 하니 하 루 만에 판가름이 났다” “조선일보와 월간조 선, TV 조선이 광주사태에 대한 보도를 가장
기자가 작심을 하고 취재를 하니 하
정확하게 했다”TV조선에 출연한 조갑제 씨의
루 만에 (루머가 사실이 아니라는 게)
말이다. 보는 사람도 민망한 자기부정이다.
판가름이 났다” 며“조선일보와 월간 조선이, 이번에 TV조선도 그렇고, 광주사태에 대한 보도를 가장 정확하게 했다” 고 칭찬까지 했다. 보 는 사람도 민망한 자기부정이었다. 이 두 방송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중징계를 받았다. 근거 없는 오보와 왜곡보도는 언론사에 치명타를 안겨줄 수 있다. TV조선은“진실 왜곡‘루머’악순환, 이제는 끊어야”한다고 전했다. 본인 들에게 되돌려주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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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문화예술 당원 찾기
“가장 왼쪽 최전선에 적(籍)을 두고 싶었다” 대중음악+힙합 평론가 김봉현 정리 ·인터뷰 : 나도원 문화예술위원장|사진 : 박성훈 홍보실장
제주도에서 온 한 통의 편지가 인터넷 음악비평 매체의 편집장에게 배달되었다. 신진 음악비평가들이 운영하는 웹진에 대학생 신분으로 글을 쓰다가 입대해 제주도에서 근무 중인 이십대 초반의 청년이 보낸 편지였다. 한국 비평문화의 전망이 어떠한지에 대한 심각한 질문이라든가, 왜 그동안 위문편지를 보내지 않았느냐는 사적인 섭섭함의 토로를 적은 편지가 아니었다. 편지봉투 안에는 무려 21세기에 종이 위에 직 접 써서 보낸, 음반평론이 들어있었다. 편집장 역시 많은 글을 써야 하는 사람이었지만, 인터넷 사용을 하 지 못하는 환경에서 군복무 중인 젊은 필자가 종이에 쓴 글을 컴퓨터로 다시 옮겨 적어 게시해야 했다. 인 터넷 시대를 맞아 효율적인 미디어로써 웹진을 운영 중이던 편집장은 독려하지도, 그렇다고 말리기도 어 려운 상황 앞에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21세기의 엉뚱한 평론가 1983년에 태어나 20여 년 후, 일본의 농구만화《슬램덩크》 의 한 장면처럼“편집장님, 글을 계속 쓰고 112
싶어요” 라고 외친 젊은 필자의 이름은 김봉현 이다. 그리고 다시 10년 후, 그는 지금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평론가들 중 한 사람이 되 었다. 힙합 장르를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면 서 여러 권의 책들도 펴냈다.《김봉현의 1st Class Hiphop 2012》 (2013)를 엮었고,《한국 힙합, 열정의 발자취》 (2008)와《힙합, 우리 시 대의 클래식》 (2009)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흑 인음악 스타들을 다룬《제이지 스토리: 빈민 가에서 제국을 꿈꾸다》(2011)와《더 에미넴 북: 앵그리 블론드》 (2012)를 번역하거나 자신 의 글로 소개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힙합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열다섯 개의 키워드로 풀 어 바로잡는 책《힙합: 블랙은 어떻게 세계를 점령했는가》 (2014)를 발표했다.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힙합전문평론가가 된 그지만-거기다 전업으로 활동할 정도의 능력을 갖춘 힙합전문평론가는 그리 많지 않 다-처음부터 힙합/흑인음악만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다양성과 음악성이라는 기준에서 한 국 대중음악의 전성기라 할 만한 1980년대 후 반부터 1990년대 전반기에 주로 활약한 음악 인들의 곡들을 많이 들었다. 예를 들면 김창 기(동물원)와 윤종신, 이승환과 푸른하늘 등이 다. 물론 지금도 힙합/흑인음악만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아이돌그룹 카라의 멤버인 강지영 을 열렬히 좋아하는 팬이라고 강조하고 다니 니까. (김봉현은 엉뚱한 장소에 간혹 등장하는데, 이를테면 카라 콘서트 VIP석이라든지, 옆자리에 초등학생들이 앉아있는 모 애니메이션의 극장판 상영회 등이다.)
《더 에미넴 북: 앵그리 블론드》 와《힙합: 블랙은 어떻게 세계를 점 령했는가》 의 표지. 지금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평론가 중 한 사 람인 김봉현은 힙합에 관한 여러 권의 책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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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주인공이 되고자 했지만, 내가 잘할 수 있는 길을 택했다 그러다가 힙합에 집중하게 된 계기가 생겨난다. 고등학생 김봉현으로서 공부에 열중하던 시절인 1990 년대 후반은 PC통신이 완전히 대중화되고 각종 동호회들이 번창하던 때였다. 서태지와 듀스를 즐기던 그 도 PC통신 나우누리의 블랙뮤직(흑인음악) 동호회인‘SNP’ 의 회원이 되었다. 이곳은 랩과 흑인음악 전문 가들을 상당수 배출한 모임이며, 대개의 PC통신 음악동호회가 그렇듯이 학습과 수련 그리고 연마의 장이 되어주었다. (이 글을 쓰는 사람도 PC통신 천리안 록 동호회, 일명 천리안 락동 운영진이었다.) 부모님에게 잔소리 한번 듣지 않고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할 정도로 모범생이었던 김봉현은 이른 바 남자들의 또래문화 또는 집단문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간단히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강한 척하 기, 우정과 의리의 강조 등을 저변에 깔고 있는 문화 말이다. 그래서 감성과 문화를 공유할 수 있는 친구들 과 어울렸는데, 그것이 대체로 음악이었고, 그중에
“랩은 소극적이고‘찌질한’구석이 있는 사람이 자신을 드러내는 무기이고, 또 그런 사람들이 잘할 수 있는 음악”
서도 랩과 힙합이었다.
“정의할 수는 없지만, 힙합은 자신 안에 있던 무 언가를 표출하거나 대리만족으로 삼을 수 있는 것 이기도 했죠. 누군가 그랬습니다. 랩은 소극적이고
‘찌질한’구석이 있는 사람이 자신을 드러내는 무기이고, 또 그런 사람들이 잘할 수 있는 것이라고요.”
그러나 김봉현은 음악인이 될 생각을 가지진 않았다. 모두가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고 저마다 래퍼가 되고 싶어 할 때에, 김봉현은 자기가 어느 쪽에 재능이 있고 어떤 쪽에 재능이 없는지를 일찌감치 깨달았 다. 글을 꽤 쓰는 편이고 힙합에도 전문성을 가졌으니, 이 장점들을 합해내는 길을 찾았다. 그것이 저널리 스트였다.
“한때 사람들이‘중국이 뜬다’ 고 하면 중문과로 몰려간다거나 하는 그런 시류에도 별로 관심이 없었죠. 제가 좋아하는 것을 계속하는 것, 그리고 잘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힙합에 대한 오해와 진실 힙합이 대중문화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얼핏 보면 한국에서도 그렇게 보인다. 어지간한 아이돌그룹마다 랩을 담당하는 멤버가 하나씩은 있을 정도다. 그러나‘레알-진 짜’힙합은 여전히 비주류이고, 랩을 하는 가수가 아니라 존경받는 힙합음악인이 대중에게 소개되는 기회 는 많지 않다. 힙합이라 하면 외국문화를 흉내 낸 옷차림, 거친 입담과 허세, 말로만 하는 음악 따위의 오 114
해와 편견이 여전하다. 다른 한편으로 는 흑인 노동자계급의 음악문화가 수입 되는 과정에서 집안 형편이 어느 정도 는 되어야 음악활동을 계속해나갈 수 있는 한국의 현실 때문에‘도련님’ 이나 연구자의 음악이 많이 들어왔던 것도 사실이다. 힙합은 빈민들의 거리에서 태어났 다. 기만에 허세로 맞서는 거친 입부림 역시 이러한 토양 때문이다. 또한 힙합 은 음악을 넘어서 넓은 범위의 문화를 이룬다. 간단한 예로, 벽과 건물에 자신 의 이름을 남기는 태깅(tagging), 이를 보다 발전시킨 그래피티(graffiti)는 미술 의 범주에 들어간다. 모두 힙합문화의 일부다. 또한 음악적인 면에서도 한국 어에 대한 연구를 집중적으로 진행하는 장르로 기능했다.
“힙합을 문화와 예술이 아니라 도덕
포에틱 저스티스의 공연 <시와 랩의 전격 소통 작전> 홍보포스터. 포에틱 저 스티스는 이를 통해 시와 랩의 다양한 접점을 찾는 새로운 형식의 공연을 선보였다.
과 윤리의 잣대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평론가이자 기획자를 자처하는 김봉현은 시인 김경주와 힙합음악인 MC메타와 함께‘포에틱 저스티스 (Poetic Justice)’ 라는 프로젝트 활동을 한다. 시와 랩을 함께 읽는 이벤트와 공연을 펼치는 작업이다. 시와
랩의 공통점을 교감한 시인 김경주와 외국서적(우리말로 직역하면《힙합의 시학》 )을 공동번역 중이기도 하다.
“랩에 대한 오해가 있어요. 사실 랩은 운율을 중시하면서 내용과도 연계시키는, 매우 과학적이고 문학 적인 장르입니다. 랩에는 시적인 요소가 많거든요. 랩이 지금 시대의 시 아닌가요?”
저를 반면교사로 삼아주십시오 2015년 4월 6일, 김봉현 당원은 노동당 문화팟캐스트 <컬쳐쇼크>의 출연을 위하여 노동당사를 처음 삶과 문화 115
방문했다. 평소 당사에 방문하는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이를 의도한 섭외였다. 진보신당과 사회당 합당 이전, 옛 진보신당의 당원들을 민주노동당 출신과‘촛불당원’ 으로 분류하는 이들이 더러 있 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내에서 특정 진영과 결별하고 진보신당이 창당하자 대거 입당한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단순도식화 하기는 어렵다. 기존 정당운동 내지 특정 분파와의 협력에 회의를 품었던 (강경)좌파와 자발적인 진보시민이 섞인 상황이었다. 김봉현 당원의 아버지는 이른바‘야당 성향’ 으로, 평생을 세무공무원으로 산 사람이다. 그런데 IMF 사 태와 김대중 정부를 거치면서 정년이 단축되어 일찍 퇴임해야 했다. 당시 공무원 사회를 비롯한 과거‘야 당 성향’세대가 구조조정으로 명예퇴직의 대상자가 되면서 그 반대로 돌아선 경우가 적지 않다. 그의 아 버지도 이후에 거대보수정당 지지자가 되긴 했지만, 경향 상 전통적인 반-새누리당 성향은 유지 중이다. 아들과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정도는 아닌 셈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라며 한때 기자를 염두에 두고 시사평론가 등과 교류하거나 인터넷신문 시민기자 로 활동하면서 세상을 보는 눈을 혼자 키우다가 정당을 선택했다. 옛 진보신당이다. 지금도 노동당의 당 원들을 어떤 사람들보다도 정의로운 사람들이라고 보지만, 당 활동에 적극 참여하진 못했다.
“저 개인의 삶을 챙기면서 가끔 SNS에 정의로운 이야기 하는 정도로 살고 있는데, 정말 열심히 활동하 는 사람들을 보면 난 비겁하게 살고 있구나, 비겁한 시민에 불과한가, 그저 당원이라고 생색만 내고 있는 건 아닐까, 혹은 자기만족은 아닐까, 그런 고민이 듭니다. 어떤 사람은 제게 노동당이면 대한민국 1%를 자임하는 정당인데, 그 당원이라면 적극성 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주더군요. 어쨌 든 무언가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솔직히 한 게 없어요. 사죄합니다. 저 같은 사람을 반면교사 로 삼아주십시오.”
그러면서 안타까움을 표했다. 많은 당원들이 당 상황을 보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거라고. 노동당 사람들이 더 많이 적극적이 되길 바란다 고 하면서도, 자신처럼 나름의 활동영역이 있고 생계에 매달리는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무언가를 할 여지를 찾기 힘들다고 아쉬워했다. 이런 말들 을 하기 전에 젊은 힙합평론가 김봉현이 밝힌 노 동당의 당원이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16
“가장 직설적으로 이상을 외치는 진영, 가장 왼쪽 최전선에 적(籍)을 두고 싶었습니다.”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 우리는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거창한 무엇이 아니다. 30대 초반의 김봉현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다. 서울 망원동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모두 보낸 그는 물난리가 나서 집 바닥에 물이 들어 차고 남의 집으로 대피했던 날도 기억한다. 그런데 짧은 시간 동안 동네가 너무 급하게 변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개발된 정도가 아닙니다. 고층빌딩이 막 들어서면서 강남 스타일로 변하는 모습을 보면 묘한 감정이 들죠. 젊은 나이인데도 망원동이 그리워요. 무언가 대단히 드라마틱한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니거든요. 그런데도 되돌아가고픈, 알 수 없는 감정이 있다니까요. 지금 은평구 신사동에 살 고 있으니까 택시비 5000원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김봉현은 스스로를‘탈-물질 성향’ 으로 규정한다. 천성적으로 물질에 대한 욕심이 없으며, 작은 집에 서 먹고 살만하면 그만이라고 한다. 고급 자동차를 타게 되어도 그 차의 상표가 무언지에는 관심이 없고, 크고 좋은 아파트에 살고 싶은 욕구도 없다. 단지 자신이 실력으로 인정받고 타인을 실력으로 존중하는 삶이면 만족한다. 이런 가치관이 꼭 시대 때문일까?‘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 은 아주 오래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하나둘 늘어나는 중이다. 그리고, 그래야 한다.
노동당 문화팟캐스트 <컬쳐쇼크> 11회 힙합평론가 김봉현 편 듣기 http://www.podbbang.com/ch/1858 *노동당 문화팟캐스트 <컬쳐쇼크> 김봉현 편에서 힙합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와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유머러스한 대화를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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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서재
남성과 여성을 넘나드는 젠더의 자유 보다 적극적/급진적으로 젠더 개념을 사유하기 위하여 젠더 무법자 케이트 본스타인 / 바다출판사 / 2015년3월 / 15,800원
강현주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팀, 서울 양천 당원
‘젠더 개념을 사유한다’ 는 말이 낯선 이들을 위해 저자에 대한 서술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저자 케이트 본스타인은 1950년대에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유년시절의 이름은‘알버트’ 였다. 케이트는 30여 년 전 성 기 재지정 수술을 통해 페니스를 질로 바꾸었다. 그러나 케이트는 스스로를 남성과 여성, 그 어느 쪽으로 도 정체화하지 않는다. 케이트는 스스로를 트랜스섹슈얼 레즈비언이라고 소개했지만, 케이트의 파트너는 현재 성별전환 순서를 밟는 중이니 케이트는 이성애자도 동성애자도 아니다. 어떤 이들은 지금 이 글을 읽으며 혼란이나 짜증을 느낄 법도 하다. 남성/여성, 동성애자/이성애자라는 이름표를 붙이기 어려운 이 사람, 스스로를‘젠더 무법자’ 라고 부 르는 케이트 본스타인은 미국 트랜스젠더/성소수자 운동의 살아있는 전설이며 연기자, 극작가, 저술가이 다. 올 봄에 한국어판이 출간된 이 책의 원어 초판은 20년 전에 출간되었으며 여러 국가에서 젠더 개념에 대한 입문서로, 강의 교재로 널리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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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아니면 여성? : 젠더의 이분법을 뛰어넘어라 스스로를 남성/여성이라는 두 성별 중 하나로 확신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며 그 확신은 어떻게 가능 할까? 케이트는 성별을 계급이라고 판단하고, 젠더 체계를 해체하기 위해 젠더 체계에 꼼꼼히 이름을 붙 이는 일부터 시작한다. 이름을 붙임으로써 젠더를 사회적 구성물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 화는 갓 태어난 아이의 성별을 의료학적으로 지정한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성별에 속한다고 느끼는지를 성별정체성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문화는 지정받은 성별과 자신이 속한다고 느끼는 성별이 같아야 자연스럽다고 믿으며, 그 성별의 범주에는 남성/여성 단 두 개의 성만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외모나 행동, 문자, 생물학적 성별 등의 젠더 귀인(gender attribution)을 통해 다른 이가 어떤 성별에 속하는지 판단을 내리곤 한다. 또한 어떤 사람과 어떤 형태의 성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지를 표현 하는 성적 지향을 통해 젠더를 파악하기도 한다. 케이트는 이러한 욕망을“이전에나 지금, 경험해보지 못 했거나 경험하고 있지 않은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경험하고자 하는 소망” 으로 정의한다. 이 정의에 따라 질문을 해보겠다. 당신은 자신의 욕망을 남성/여성이라는 단 두개의 변수만으로 이루어진 시불변함수로 표현할 수 있는가? 질문을 조금 비틀어보자. 당신은 정체성 없는 당신의 욕망을 상상할 수 있는가? 적어 도 이 사회는 정체성이 없는 욕망을 보여주는 데에 아주 서툴고, 이는 많은 개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다. 이렇게 꼼꼼히 이름 붙여놓은 젠더 체계에는 규정집이 존재한다. 이 규정집의 핵심은 젠더는 자연스럽 다는 믿음에 기반을 둔다. 세상에는 오로지 두 개의 성별만이 있으며 이 중 하나로의 귀속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성기는 성별을 보여주는 필수적 표지이며 성별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두 개의 성별을 제외 한 나머지는 농담이거나 병리적인 증상이니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그러나 케이트는 이러한 젠더의 비밀을 폭로한다. 그 비밀은 모호성과 유동성이다.
젠더는 모호할 수 있다는 것이 젠더의 또 다른 비밀이다. 성별의 관례를 위반할 방법은 많다. 그 사람이 세 계를 보는 관점에 달렸다. 위반 범위는 어느 정도 덜 완고하게 젠더화되는 것을 선호하는 데서부터 도무지 정의할 수 없는 이미지를 선호하는 데까지 이른다. (중략) 그리고 난 젠더는 유동적일 수 있고 이는 모호함 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모호함이 성별의 관례에 들어맞는 걸 거부하는 것이라면, 유동성은 이것 아니면 저것인 젠더로 남아 있길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모호하고 유동적인 존재로 정의함으로써, 견고하게 짜인 젠더 체계의 그물망을 미끄 러져나가 젠더 규칙들을 뛰어넘는‘젠더 무법자’ 가 될 수 있다. 이를 위한 가장 첫 걸음은 수많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기본을 뒤흔드는 일이다. 어떤 사람이 남성이라는 확신은 어디서 오는가? XY형태의 성염색 삶과 문화 119
체에서 오는가? 그러나 조류는 암컷이 ZW형태의 성염색체를, 수컷이 ZZ형태의 성염색체를 가진다. 그렇 다면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더 높기 때문일까? 그러나 호르몬은 약국에서 구입 가능하다. 하이에나의 암컷 은 테스토스테론의 수치가 수컷보다 높고 암컷의 성기는 페니스의 형태를, 수컷의 성기는 질의 형태를 띠 며 암컷이 수컷 뒤에 올라타는 형태의 교미를 한다. 그렇다면 법에서 오는 걸까? 그러나 사람들은 매번 법 을 바꾼다(그리고 많은 국가에서 법적 성별을 바꿀 수 있게 되었다).
젠더 수호자에 맞서는 어릿광대 : 침묵 대신 규범을 뛰어넘는 세 번째 존재가 되자 성별이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믿음은 몇 가지 질문과 반례로 무너지는 허술한 신화임에도 불구하고 사 람들은 남성/여성 이외의 성별을 두려워한다. 이러한 공포 때문에 사람들은 트랜스섹슈얼리티를 자신이 옳다고 느끼는 성별에 속하지 못한‘질병’ 으로 판단하고, 전문가는 트랜스섹슈얼에게 당신이 트랜스섹슈 얼이라는 사실을 타인에게 말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트랜스섹슈얼에 대한 수많은 문헌들은 비트랜스섹슈 얼이 서술했고, 이는 결국 트랜스섹슈얼을 둘 중 하나의 범주에 깔끔하게 끼워 맞추려는 비트랜스섹슈얼 의 세계관에 근거한다.
우리 자신에 대해 출판할 수 있는 건 그런 것이었다. 트랜스젠더는 오랫동안 고통받은 사람들이라는 이미 지를 고정시키는, 하지만 결코 지배적 관념에 도전하지는 않는 낭만적 저작들.
결국 이런 주장들은 얌전히 침묵하던 트랜스섹슈얼 당사자들이 만났을 때에 더 큰 혼란을 느끼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제 많은 트랜스섹슈얼 당사자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직접 이야기하기 시작했지만, 지 금도 여전히 젠더 모호성과 유동성에 대한 신화와 오해들은 -우리들은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잘 못된 몸에 갇혔다, 우리는 가장 학대받는 사람들이다 등-계속 생산되는 중이다. 케이트는 이 오해들에 대해 차분히 자신의 입장에서 설명한다. 트랜스섹슈얼에 대한 오해를 생산하는 세계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기 위해 공포를 조장하는 세력을 케이트는‘젠더 수호자’ 라고 명명한다. 이들 은 젠더 무법자에게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내고, 이들을 안 보이는 존재 또는 머나먼 존재로 만들기 위해 많은 애를 쓴다. 그들이 이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자주 사용하는 방법은‘모욕’ 이다. 이러한 모욕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케이트는 광대, 바보, 익살꾼, 마술사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들 은 세상의 규칙을 따르지 않고 비웃어버림으로써 자신을 농담거리로 삼아 문화에 각인된 거짓을 보여주 는 존재다. 120
우리는 억압에 맞서 분노할 자격을 갖고 있다. 그 분노는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가 적극적이어야 하고 무언 가 바꿀 필요가 있다는 메시지이다. 그래서 우리는 억압과 폭력에 저항한다. 우리를 웃음거리로 보는 이 문화의 경향에 저항한다.
젠더 수호자들이 젠더 무법자들에게 모욕을 휘두르지 못 하도록 스스로를 먼저 농담거리로 삼기 위해 서는 필연적으로 스스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침묵하지 않고 규범을 뛰어넘는 어릿광대, 익살꾼, 마술사 와 같은 세 번째 존재가 되어야 한다. 젠더 무법자들이 이 세 번째 존재가 되고, 세 번째 공간을 창조하기 전에 케이트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젠더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왜 사람들은 젠더를 또는 젠더 체제를 붙들고 있을까?’이는 허락을 받았든 안 받았든, 공간이든 사람이든 수단을 가리지 않고 차지할 수 있다고 상정하는‘남성 특권’때문이다. 남 성 특권은 남성이라고 모두 갖는 성질이 아니다. 소수의 여성들도 남성 특권을 실현한다. 다만 남성으로 양육됐을 때 이 특질을 갖는 경우가 많다. 케이트는 자신이 현재 성기 재지정 수술을 마친 상태라고 해도, 남성 특권을 단번에 버리지는 않았다고 서술한다. 그리고 성별/젠더가 정말 자연스러운지 되묻는다. 케이 트에게 젠더는 계급 체제이며, 그렇기에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의 억압과 권력차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결국 이러한 체제를 깨기 위하여 케이트는 현존하는 성별과 성 역할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궁극적으로는 남성과 여성을 넘나들자고 제안한다. 케이트에겐 연극이 젠더 이분법을 넘나드는 세 번째 공간이었다. 그래서 책의 뒷부분은 케이트가 왜 극작가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와 이 사람의 저작인《숨겨진 아 젠더》 의 대본으로 이루어졌다. 연극은 젠더의 모호성과 유동성을 보여주는 데에 극적인 장치가 된다. 극본 속의 배우들은 실제 자신의 성별을 넘나드는 연기를 보여주며, 어느 한 쪽의 젠더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케이트에게 이 세 번째 공간이 연극이었다면, 나에게 이 세 번째 공간은 퀴어퍼레이드였다. 많은 사람 들이 퀴어퍼레이드를 찾아오면 당황하곤 한다. 그 당황스러움은 아마 맨 첫 문단을 읽었을 때 누군가가 느꼈을 당황과 비슷할 테다. 정말 자연스럽다고 당연하게 믿었던 일이 사실은 허구임을 알았을 때에 느껴 지는 혼란에서 오는 당혹감. 당신이 그 혼란에 기꺼이 몸을 싣고, 그 누구도 당신의 젠더를 명명하지 않고 할 수도 없는 것으로‘전환’ 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젠더를 가지고 노는 자유를 만끽하기 를 바란다. 그리고 그 자유를 위한 세 번째 공간이 늘어나,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답답함을 느끼거나 원치 않은 괴롭힘을 받는 사람들이 활짝 웃을 수 있기를 바란다.
삶과 문화 121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 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T.S 엘리엇은 1차 세계대전 직후의 황폐화된 세상과 삶을 담은 <황무지>에서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 라고 노래했습니다. 낭만에 젖어있던 사춘기 소녀 시절에 읊조리다 잊었던 시를 2014년 4월 다시 중얼거 린 건 세월호 참사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해마다 활짝 핀 벚나무 아래에서 웃던 소년들을 떠올리며 이 시 의 첫 구절을 읊조리게 될 듯합니다.“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알뿌리로 가냘픈 생명을 키웠다” 라 는 시의 마지막 구절을 부끄러움 없이 읊조리는 그 날까지. 잔인한 달, 사월이 가고 오월이 왔습니다. 오월 역시 잔인한 달입니다. 오월은 한국인, 특히 80년대에 20대를 보낸 사람이라면 피의 달로 기억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월 광주의 피를 되새기면서 말입니다. 오월 광주를 몰랐다면 많은 이들이 이른바‘운동’ 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저 역 시‘전태일’ 과‘오월 광주’ 를 몰랐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지 않았을 겁니다. 많은 이들의 삶에 영향을 끼쳤 음에도 아직도 온전히 광주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에 오월을 맞아 광주에 관한 노래를 소개하며 다시 한 번 기억해보고자 합니다.
오월 광주를 노래하다 민중가요는 말할 것도 없고 대중가요 중에도 광주를 담은 노래는 꽤 많습니다. 대학에 들어가 광주의 진실을 알기 전에 그 뜻도 모른 채 잠시 좋아했던 노래가 있습니다. <바윗돌>과 <직녀에게>가 바로 그 노 래입니다. <바윗돌>은 아마도 대중가요 중에서 광주를 담은 최초의 노래라고 짐작합니다. 찬비 맞으며 눈물만 흘리고 하얀 눈 맞으며 아픈 맘 달래는 바윗돌 / 세상만사 야속 타고 주저앉아 있을쏘 냐 / 어이 타고 이내 청춘 세월 속에 묻힐쏘냐 / 굴러 굴러 굴러라 굴러라 바윗돌 / 한 맺힌 내 가슴 부서 지고 부서져도 / 굴러 굴러 굴러라 굴러라 바윗돌 / 저 하늘 끝에서 이 세상 웃어보자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는 격언처럼 청춘을 향한 격려인가 싶던 <바윗돌>은 1981년 MBC
노래의
꿈
오월의 노래 2 민정연 문화기획자, 꽃다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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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가요제 대상을 받은 노래입니다. 대학가요제의 영향이 꽤 큰 시절이어서인지 가요제가 끝난 후 <바윗 돌>은 방송에 심심찮게 나왔고 저도 으레 그랬듯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잊었습니다. 훗날 꽃다지에 들어 와“사실은 말이야 <바윗돌>은 5·18 당시 숨진 친구를 기리기 위해 만든 노래야” 라는 설명을 들을 때까 지. 그제야 왜 <바윗돌>은 여느 해의 대상곡과 달리 어느 날 갑자기 방송에서 자취를 감추었는지 알 수 있 었습니다. 잠시 대중의 이목을 끌다 잊힌 <바윗돌>과 달리 김원중의 <직녀에게>는 대중의 폭넓은 사랑을 받았습 니다. 광주의 음악인들이 함께 만든《예향의 젊은 선율》 이라는 옴니버스 음반의 수록곡으로 광주에서 먼 저 알려지다 전국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섬 / 인적 없던 이곳에 / 세상 사람들 하나둘 모여들더니 / 어느 밤 폭풍우에 휘말려 모두 사라지고 / 남은 것은 바위섬과 흰 파도라네
가요순위프로그램‘가요톱텐’ 을 통해 이 노래를 접했던 저는 오작교를 건너 만나던 견우와 직녀를 떠 올리며 애절한 연가로만 알고 좋아했었습니다. 대부분이 저와 비슷했을 겁니다.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노 래의 꿈이 아닌가 싶습니다. 광주를 담은 노래는 대중가요든 민중가요든 애잔하거나 힘찬 노래가 주를 이루는데 독특하게 록으로 표현한 노래가 있습니다. 록그룹 블랙홀의 <마지막 일기>라는 노래로, 블랙홀의 리더인 주상균이 1980년 5월 광주, 그곳에 있던 한 고등학생의 일기를 보고 만든 노래라고 합니다. 사실 두려워요 / 내게 다가올 시간이 / 아직 내겐 너무도 벅차요 / 먼저 떠난 친구들의 눈물이 생각이 나 요 / 아직도 내 가슴에 흘러요 / 이 어둠이 가기 전에 / 나의 짧은 시계 소리 멈추고 / 나도 잊혀지겠지
산자의 추념과 결의, 기억을 담은 광주 노래와는 달리 이 노래의 화자는 5·18 광주의 현장에 있던 고 등학생 당사자입니다. 옆에서 죽어가는 친구를 비켜볼 수밖에 없던 십대 청소년의 절망이 절규하는 목소 리에 고스란히 담긴 노래입니다. 앞서 소개한 노래 외에도 이선희가 부른 <오월의 햇살>과 <한바탕 웃음으로>가 광주를 담은 노래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확언하지는 못하겠습니다. 다만 창작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어도 부르는 이들이 달리 해 석하고 부른다면 그 노래 또한 광주의 노래라 하겠습니다.
잔인한 달, 사월이 가고 오월이 왔습니다. 오월 역시 잔인한 달입니다. 한국인, 특히 80년대에 20대를 보낸 사람이라면 피의 달로 기억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월 광주의 피를 되새기며 말입니다.
삶과 문화 123
추모의 노래가 투쟁의 노래로 민중가요로 시선을 돌리면 광주를 담은 노래가 상당히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오늘은 <오월의 노래 2> 를 소개하렵니다. 광주민중의 저항을 노래한 <오월의 노래 2>는 샹송에 노랫말을 붙인 노래입니다. 원곡 <누가 할머니를 죽였는가? Qui a tue grand maman?>는 1960년대 프랑스에 몰아닥친 재개발 바람 속 에서 재개발 예정지에 살던 자신의 집과 정원을 지키기 위해 철거반과 맞서 싸웠지만 결국 철거반이 정원 을 불도저로 밀어버리자 상심에 빠져 돌아가셨다는 루시엔 모리스라는 할머니를 추모하는 노래입니다. 할머니의 시절이 있었지 / 당신 뜰에 만발한 꽃들 / 그 시절은 가고 / 남은 거라곤 / 당신에 대한 생각뿐 / 할머니의 시절이 있었지 /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 나무엔 가지가지엔 잎사귀 / 이파리엔 노래하는 새들 / 불도저가 할머닐 죽이고 / 그녀 꽃밭을 짓밟았지 / 새가 노래할 곳은 이젠 없다네 / 그리운 당신 생각뿐 / 할머니를 누가 죽였단 말인가 / 세월이던가? / 무심한 사람들이던가?
이 노래를 만든 미셸 폴라네프는‘날아오는 파도에 역행하여 대항했던 수영선수’ 라고 말할 정도로 관 습에 저항하는 젊음과 자유를 상징하는 가수였다고 합니다. 그의 <Qui a tue grand maman?>는 착취와 억압에 맞서 싸우는 노래로, 애잔한 선율의 사랑 노래로 다양하게 변주되며 여러 나라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박인희가 <사랑의 추억>으로 번안하여 불렀으나 많은 인기를 얻지는 못했습니 다. 그러나 우리가 부르는 <오월의 노래 2>는 원곡보다는 박인희 노래의 느낌이 더 강하게 느껴집니다. 아 마도 원곡이 아니라 박인희의 <사랑의 추억>을 개사했으리라 짐작됩니다. 1980년대 한때 집회장이나 학 교 앞 선술집에서 아는 사람들끼리만 부르던 이 노래는 피아니스트 이루마의 연주곡이 드라마《겨울연가》 의 OST로 사용되며 대중에게 새롭게 다가가기도 했습니다. 또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오태호의 1집 수록곡 <기억 속의 멜로디>의 인트로와 간주에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추모의 노래가 사랑 노래가 되더니 다시 투쟁의 노래로, 또 다시 사랑의 노래로 변주되는 과정을 보노라면 사람들에게 남는 노래란 참 묘한 인연이다 싶습니다. 누군가는 다 해결된 오월 광주라고 합니다.‘광주사태’ 가‘5·18민주화운동’ 으로 명명되었고 국가공식 기념일로 지정되었으니 역사적 책무를 다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1997년부터 정부주관으로 기념식을 열 때마다 부르던 <임을 위한 행진곡>을 2008년부터 지금까지 부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실은 많이 밝혀졌 으나 제대로 기억하는 데에는 아직도 인색한 대한민국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아픈 광주이고 대한민국입 니다. 그래서 더 기억의 힘이 절실한 나라입니다.
진실은 많이 밝혀졌으나 제대로 기억하는 데에는 아직도 인색한 대한민국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아픈 광주이고 대한민국입니다. 기억의 힘이 절실한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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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노래 2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 날이 다시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디 갔지 망월동에 부릅뜬 눈 수천의 핏발 서려 있네 오월 그 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산 자들아 동지들아 모여서 함께 나가자 욕된 역사 투쟁 없이 어떻게 헤쳐나가랴 오월 그 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대머리야 쪽바리야 양키놈 솟은 콧대야 물러가라 우리 역사 우리가 보듬고 나간다 오월 그 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오월 그 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피 피
삶과 문화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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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접으며
싱가포르와 진보정치 박권일 기관지위원,《88만원 세대》공동저자
싱가포르의 전 총리 리콴유의 사망 소식을 알게 된 건 뉴스가 아니라 박원순 서울시장의 추모글 때문 이었다. 박 시장은 자신의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리콴유 전 총리님의 타계 소식에 삼가 깊은 애도의 뜻 을 표합니다. 고인은 가셨지만 청렴을 통해 일류국가를 만드신 그 뜻은 아시아를 넘어 세계도시 지도자의 모범적 전형이 되어 살아 있을 것입니다.” ‘국가 지도자’ 라는 말 대신‘도시 지도자’ 라는 말을 사용한 박 시장의‘노회함’ 에 쓴웃음이 나왔지만, 일단 제쳐두자.“세계도시 지도자의 모범적 전형” 이라는 상찬은 아무리 생각해도 내 상식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박원순 정도 되는 인물이 리콴유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을 리 없다.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해 도 리콴유가 민주주의를 압살한 독재자란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 이를‘모범적 지도자’ 로 추켜세 우는 소위‘진보성향 시장’ 의 모습은 모멸감과 더불어 모종의 섬뜩함을 안겨주었다. 싱가포르는 1인당 국민소득이 5만 달러인 부유한 나라, 길거리에 쓰레기 하나 보이지 않는 청결한 나 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 나라는 비슷한 경제력을 가진 국가들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가혹한 치 안국가다. 이 나라에는 아직도 고대의 형벌인‘태형’ 이 남아있다. 글자 그대로‘두들겨 패는 형벌’ 이다. 수 형자는 불시 방문한 집행관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채로 형틀에 묶인 다음, 항생제에 절여진 등나무 채찍으 로 흠씬 두들겨 맞는다. 싱가포르는 시민들의 섹스 라이프도 꼼꼼하게 감시하고 규율한다. 오럴 섹스는 2007년까지만 해도 싱가포르에서‘불법’ 이었다. 동성 간의 섹스는 예전에도 불법이었고 지금도 불법이 다. 싱가포르는 빈부격차가 어마어마한 사회다. 유엔개발계획(UNDP)이 2009년 발표한 인간개발보고서에 따르면, 싱가포르의 빈부격차는 홍콩에 이어 세계 2위였다(한국은 16위). 초대 총리 리콴유는 31년간 독재 자로 군림했고 아들 리셴룽은 2004년 3대 총리가 됐다. 리콴유는“아시아인에겐 민주주의가 어울리지 않 는다” 고 했다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논쟁을 벌인 적도 있다. 싱가포르는 독재국가일 뿐 아니라 언론·집 회의 자유가 질식된 나라다.‘국경 없는 기자회’ 가 발표한 2012년 언론자유도 순위에서 싱가포르는 135위 를 차지했다. 1위는 핀란드였고 일본 22위, 한국 44위, 북한 178위, 중국 174위였다. 문제는 한국의 많은 시민들이 이런 나라를‘살기 좋은 나라’ 로 여긴다는 사실이다. 몇 해 전 쓴 글에서 나는 이런 멘탈리티를‘싱가포르 판타지’ 라 불렀다.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든 힘도 상당 부분 여기에 있 었다. 그러나 진보정치는 리콴유 같은 자를 모범으로 삼는 박원순 시장의 정치와는 다르며, 또 달라야 한 다. 진보정치란 욕망을 좇기보다 더 인간적인 가치를 좇는 정치여야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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