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정류장,
이야기
차례
소설 이은실│숨바꼭질을 하다 .. 9 임종빈│잃다 .. 27 정윤선│두 사람 .. 55 김대식│연분홍 펄 립스틱 ..79 김선욱│은둔자의 데이트 .. 97
후기 이은실 .. 117 임종빈 ..118 정윤선 .. 119 김대식 ..120 김선욱 .. 121
이제와 항상 영원히, 그리고 처음과 같이
소 설
숨바꼭질을 하다
이은실
숨바꼭질을 하다
창문을 열고 테라스로 걸어갔다. 비 온 뒤 남은 촉촉함의 잔상을 한껏 느꼈 다. 검게 칠한 캔버스에 찍어 놓은 색색의 도트같은 여름의 별자리. 부지런 히 태어나고 소멸하는 별들이 부서져 내리는 투명한 하늘. 일주일 내내 장마 로 구름이 별을 가리고 있었다. 비가 내린 이후로 바람이 한층 선선해졌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동네의 작은 산과 비교적 가까이 있다. 다른 장소에 비 해 어둠이 짙고, 나무들의 향기도 만져질 듯 느껴지는 공간이다. 테라스에서 거실로 들어와 다시 붓을 들었다. 유난히 큰 보른달이 뜬 밤하늘 아래 잔잔한 물결의 바닷가. 그리고 빛나는 백사장 한켠에 그리려하는 것. 윗집 아이가 또 다시 운다. 묻지도 않았는데 이웃집 소문들을 떠들어대는 옆집 아줌마에게서, 윗집에 살고 있는 여자가 얼마 전 아이를 출산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아이 때문에 밤과 함께 하는 순간이 처음으로 괴로워졌다, 방해가 밤을 지배해버렸다. 나 보다 어려 보이던 윗집 여자는 벌써 첫 아이를 낳았는데, 나에게는 모두가 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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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기만 했다. 아주 오래 전 어린 눈에 가득 차있던 아버지의 옅은 미소 같은, 그런 막연함. 산발적인 아이의 울음소리에 붓을 쥐고 있던 손이 결국엔 멈춰 섰다. 한숨 이 새어나온다. 요즘 들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오늘도 오래 그리지를 못했다. 좀 전까지 쓰던 대 여섯 개의 붓을 깔끔하게 닦아내었다. 그림에 집중하느라 긴장했던 마음이 풀리니, 라디오 소리가 귀에 들어왔 다. “다음으로 들려드릴 곡은 슈베르트의 <자장가>입니다. 이 곡은 1816년 슈 베르트가 19세 때 작곡한 것으로 독일의 서정시인 matthias claudius의 시에 슈베르트가 곡을 붙였으며, 브람스, 모차르트의 자장가와 더불어 가장 널리 사랑받고 있는 자장가 중의 하나입니다. 클래식 기타 버전으로 들려드리겠습 니다.” 노래가 흐르는 동안 신기하게도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윗집 에서도 라디오를 듣고 있을까. 라디오를 통해 온 방안을 가득 채우는 기타의 선율을 듣자니 살며시 눈이 감겨왔다. 자장가가 끝나고 깜빡 잠이 들었는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얼핏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밤이 저만치 멀어지고 새벽 이 다가와 있다. 해가 떠오르는 하늘 아래에 모든 것이 따듯한 하품을 해댈 무렵, 점점 무거워지는 몸을 이끌고 침대로 걸어갔다. * 경복궁 맞은편에 있는 갤러리 거리. 독특한 모양새를 한 건물들 사이를 유 유히 걸어갔다. 여름의 뜨거운 태양이 정수리를 날카롭게 찔러댄다. 쓰고 있던 선글라스 너머로 자동차 지붕 위에 흔들거리는 공기의 움직임이 보였 다, 아니면 내가 중심을 잡지 못하는 것인지. 전시회를 기획중인 갤러리 앞에 멈춰 섰다. 잠을 얼마 자지 못하여 머리가 지끈거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탁한 여름의 공기는 어느새 사라졌다.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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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 피부에 살짝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서늘하고, 습기가 없었다. 온통 하얀색의 벽에 밤을 배경으로 한 그림들이 십여 점 전시되어 있다. 문 에서부터 오른쪽방향으로 전시된 그림을 하나하나 확인해갔다. 어긋나있지 않은지, 그림의 상태에 이상이 있지는 않은지. “선생님 그림을 정말 좋아해요.” 마지막 그림을 멀찌감치 바라보고 있던 내 옆에 다가온 누군가가 말했다. 금방이라도 흩어져버릴 것 같은 목소리, 긴 여운.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니, 검은색 슈트를 말끔하게 차려 입고 머리를 위 로 단정히 틀어 올린 30대 남짓의 여성이 서 있었다. “누구시죠? 아직 전시회 시작 전이라 외부인은 출입하지 못하는데요?” 그녀는 다소 신경질적인 어투의 물음에 전혀 상관하지 않고는, “선생님의 그림, 어떤 마음으로 바라봐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오랜 시간 고민했는데요.“ 여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벌써 가을이 온 것만 같은 서늘한 그녀의 눈망울. “그냥 제 생각이에요. 제 눈에는 그렇게 보이거든요. 그림 안에 있는 사람 을 향한 따뜻하고 간절한 사랑이 느껴져요.” 정말 그런가, 그녀와 내가 보고 있던 그림 속에는 한 아이가 있었다. 밤하 늘, 한 점의 구름 위에 앉아 있는 아이는 내리는 비에 맞아 잎사귀 하나하나 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을 것만 같은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웃고 있을 까, 아이는 아주 작아서 표정을 알 수 없다. 그림에 잠시 눈길을 주었을 때, 나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 뒤돌아서는 그 녀,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가장 눈에 띄는 곳은 유난히 길고 깔끔한 목선, 그리고 갸름한 턱선을 타고 시선을 옮기면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배꼼 얼굴을 내민듯한 작고 동그란 귀. 그녀의 뒷모습은 높은 힐 때문 일까, 무너져버릴 듯 위태로움을 지니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듯 존재감마저 흐릿했다. 알 수 없는 먹먹한 감정에 목이 매여 왔다. 온 공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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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풀어 오른 듯 나는 그 속에서 숨을 쉴 수가 없었고, 그녀는 어느 샌가 공기 의 틈으로 사라져버렸다. * “선생님 모르세요? 요즘에 활동하는 신인작가예요. 주위에서 평가도 아주 좋고. 이번에 미술대전에서 특선도 수상했다고 들었는데요.” “이름이…….” “정다은인가. 혹시 작품 실린 책이 있으면 찾아봐드릴까요?” 정다은. 얼마 알지 못하는 동료들의 이름을 떠올려보았지만, 그 안에 존재 하지 않았다. “아니예요. 근데 어떻게 들어온거죠?” “여기 갤러리 관장님하고 친하세요. 오늘 관장님 잠시 뵈러 오셨던 거 같 아요.” “네…….” 무슨 기대를 했던 것인지, 평소보다 조금 더 빨리 뛰었던 심장이 직원의 이 야기를 들으며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림 속의 사람에 대해 말하던, 가 을의 눈빛을 지닌 그녀에게는 특별한 것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는지. 이제 잠시 생겼던 호기심을 접기로 했다. 같은 공간에서 짧은 시간 동안 내가 느꼈던 묘한 감정은 그저 피곤함에 잠시 지끈거렸던 머리가 일으킨 착각이 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나 정말 그것뿐일까, 낯설지 않았던 그 뒷모습 은. * 다행히도 아이는 한동안 울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전시회 일정에 치어 밤을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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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시간도, 밤을 마주할 시간도 없이 잠들기 일쑤였다. 피곤함에 지쳐서 꿈도 꾸지 않은 채 5시간을 자고 눈을 떴을 때가 새벽 4 시, 창밖에는 빗방울을 한가득 안은 바람이 파도처럼 다가와 창가를 두드리 고는 부서져 내렸다. 그대로 문을 열면 비와 바람이 이루어 내는 풍경에 취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혹에 이끌려 창문을 열까 생각해보았지 만, 반쯤 일으켰던 몸을 다시 침대에 뉘이고 잠을 청했다. 감상에 젖어버리 기엔 너무 현실에 익숙해졌다. 전시회를 마칠 동안만. 아주 잠시 동안만 그 렇게 밤과 멀어져 있어야만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늦었네요.” 시계를 보니 약속시간보다 30분이나 늦어버렸다. 욕조 안에서 맥주를 한 캔 마시고 잠이 들어버린 것이 원인이었다, 방심한 탓이다. 미리 와 있던 기자가 일어나서 꾸벅 인사를 했다. 이 여자는 내가 인터뷰하 기 어려운 상대라는 것을 직감한 듯하다. “시아씨, 커피요.” 의자로 다가가 앉아 기자를 바라보았다. 쌍꺼풀 수술이 완전히 자리 잡지 못한 어색한 눈, 잔뜩 상기된 볼, 오른쪽으로 치우친 콧대. 가장 인상적인 것 은 입술이 아주 얇고, 그 양끝이 살짝 올라가있다는 것이었다. 가식의 웃음 을 짓기에 가장 적합한 입술모양이다.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만나게 해달라고 제가 관장님한테 얼마나 사정했는지 몰라요.” “그러셨군요.” 매우 곤란한 얼굴 표정으로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커피가 많이 달다. “시아씨, 커피 좀 다시 만들어 와요. 너무 달아. 다른 사람한테 시킨 거예 요?” 바쁘게 책상 위에 문서를 정리하던 그녀가 얼른 달려와서 잔을 받아들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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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선생님, 다시 만들어오겠습니다.” 잔을 받아들고 뒤돌아선 직원의 표정이 좋지 않았는지, 직원과 눈이 마주 쳤던 기자가 헛기침을 했다. “전시회 잘 봤습니다. 밤과, 풍경과, 아이. 다양한 풍경을 멀리서 바라보는 아이의 모습. 저는 개인적으로 그림이 참 포근하고 아늑하다는 느낌이 들었 습니다. 아, 그냥 개인적인 제 생각입니다. 그럼, 인터뷰 시작하겠습니다.” 본격적인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개인전에 대한 감상을 말하던 사람은 어딜 가버렸는지, 그녀는 주로 나의 약력과 수상 경력에 대한 찬사를 쏟아내었다. 형식적인 칭찬과 함께 시작한 질문,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인터뷰를 진행하고 싶었겠지만 오히려 역효과였다. 질문에 대해 머뭇거리며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기자는 점점 얼굴이 굳어져갔다. 그녀는 키보드에 얹혀 있던 왼쪽 손 을 바지에 슥- 문질렀다. “그림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표현 하신 다면요?” 한 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어, 질문을 듣고 난감해졌다. 그 대답에 대해 잠 시 고민하고는 입을 열었다. “ ‘숨바꼭질을 하다’ 랄까요.” 알 수 없는 문장을 내뱉었다. 마치 다른 이가 된 것처럼. 모처럼 제대로 된 대답을 듣게 된 기자는 내게 보이지 않게 안도하는 표정 을 지었다. “이유는 뭔가요?” “잡을 수가 없어요. 낮에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 그 존재를, 그 흔 적이나마 볼 수 있는 공간은 그림뿐이고, 밤뿐이거든요. 떠나보내야 하는데, 내 맘은 그렇지 못해요. 계속해서 찾아가고, 보고 싶어 해요. 떠나야만 하는 사람인데, 내가 그걸 허락하지 않는 거예요.“ 이 때, 커피를 다시 끓여온 직원은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다가 내 얼굴을 바라보고 멈칫했다. 그녀와 내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란 그녀는 재빨리 문을 닫고 나갔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다. 이런 모습이 의외였는지. 나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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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이런 내 모습이 낯설었다. 기자는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펜을 놓았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은요?” “없습니다. 수고 하셨고요, 기사 나가면 연락 주세요.” 기자는 민망한지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노트북을 닫고 가방에 넣고 일 어섰다. 나에게 인사를 하고는 돌아서서 문을 열고 나가는 그녀를 멍하니 바 라보았다. 생각지도 않던 말을 한 내 자신에게 증오심이 밀려왔다. 아무에게 나 감정을 보이지 않았던 나인데 꽉 조여 있던 나사가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 “그림인거 같은데, 선생님 앞으로 왔습니다.” 갤러리 직원이 종이에 쌓여 붉은 끈으로 꽁꽁 묶인 물건을 건네주었다. “그림이요?”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 진동이 느껴졌다. 모르는 번호, 다시 주머니에 넣 으려다가 폴더를 열어 핸드폰을 살며시 귀에 가져갔다. “네, 김영림입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그림 받으셨나요?” 모르는 여자의 목소리이다. 안면의 근육이 미세하게 떨리고 머리가 지끈거 렸다. “누구시죠?” “저번에 선생님 갤러리에서 얘기 나눴었는데, 선생님 그림 정말 좋아한다 고요.” 내게서 돌아서던 그녀의 뒷모습, 걸어가면서 들리던 구두소리가 불현 듯 떠올랐다. 흐릿한 존재감이었던 그녀인데. “마지막 그림이에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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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남긴 마지막 그림.” 이 여자,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선생님이 간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오빠도 그걸 원하고 있을 테니까 요.” “오빠라니요?” 설마, 제발. “정은호, 잊지는 않았겠죠.”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리는 그녀. 얼이 빠진 표정으로 핸드 폰 폴더를 닫았다. 불안한 눈빛을 하고 옆에 서있던 직원이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갔다. 아직 뜯지 않은 그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조심스럽게 종이를 뜯어 내었다. “이게 뭐지……”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있는 여인, 레드 와인 빛깔의 커튼 틈새로 빛이 세 어 들어온다. 그 자리에 요람이 있다. 아이가 자고 있는 걸까. 그림을 바라 보고 있자니 나의 의식 너머로 아이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져왔다. 이건 아닌 데, 생각하면서도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 정은호. 내가 어떻게 그 이름을 잊을 수 있을까. 그와 나는 같은 대학교의 회화과 선후배 사이였다. 1학년, 그야말로 대학 교에서는 새내기. 서툴고 어수룩하던 나는 자주 실수를 해서, 그 날도 작업 실에 두고 온 물건을 찾으러 늦은 시간에 학교에 갔었다. 그는 아무도 없는 작업실에서 탁한 물감의 냄새 안에서도 아랑곳 않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한 채 붓을 놀리던 그의 옆모습을 멍하니 바라보 다가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갔다. 그 날 이후, 그림 속에나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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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한 그 남자를 아무 말 없이 지켜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는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그림에 대한 열정과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 림을 그리는 행위가 단순하게 눈으로 바라보고 붓으로 칠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상기시켜주었고, 나도 그만큼이나 그림을 그리는 일에 애정을 갖 게 되었다. 그를 몰래 바라보며 그려나가던 마음의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그림 속 그 는 슬픈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를 향한 감정을 감추는 것은 메마 른 나무 뒤에 숨어 부끄러운 그림자를 내보이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이었다. 유난히 손이 고왔던 남자. 팔과 다리의 선이 곧은 그림 같은 남자, 하얗고 긴 목 위로 작고 둥근 귀를 가진 아이 같은 남자, 유난히 감수성이 풍부했던, 그 런 남자. 그의 아이를 갖게 된 것은 하늘이 한층 높아진, 알알이 맺힌 포도가 보라 빛으로 물들어가던 초가을 무렵이었다. 그의 얼굴을 계속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이를 낳는다면 그 이후 벌 어질 일들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낙태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사 랑하는 사람을 꼭 닮은 아이를 낳고 싶다는 욕망이 이런 상황에서조차 나를 지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저주스러웠다. 어쩌면, 생명을 죽여야만 한다는 것 에 대한 두려움이었을까. 아이의 존재를 확인한 다음날, 퉁퉁 부은 눈으로 옷을 챙긴 가방을 힘겹게 차에 실었다. 연신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아래로, 아래로 몇 시간째 운전을 했는지 모르겠다. 바다를 향해 떠났던 여정의 끝은 뜻밖에도 저수지였다. 저수지는 강이나 바다처럼 움직이지 않고, 그저 고요히 물을 한 움큼 감싸 안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 하루 종일 고요한 물 위를 배회하는 여러 철 새의 무리들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들의 길고 애처로운 울음소리 와, 하늘 위에서 아래로 내려올 때 유연한 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리는 날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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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 물가에 있는 돌 위에 걸터앉아 오랜 시간 새들을 관찰했다. 이름 모를 새 의 주위로 또 한 마리가 다가오고, 둘이 함께 날아올라 내게서 더 먼 곳으로 사라졌다. 유난히 날개가 크고, 부리가 긴 한 마리 새의 호젓한 몸짓. 주위에 떨어져있는 긴 나뭇가지를 손에 잡고 흙이 촉촉하게 젖어있는 바닥을 캔버스 삼아 날아가 버릴지 모르는 새의 모습을 그려갔다, 자꾸만 미완성이 되어버 리는 그림을. 겨울이 다가오는 저수지, 철새들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두려움에 휩싸인 채 입술만 깨물어댔다. 자꾸만 떠나간다, 내가 아니다. 나는 이곳에 있는데 내게서 모든 것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마저 나를 떠나고 말았다……. 이별에 익숙한 나에게, 한번 안아보지도 못한, 자궁 속에 꿈틀거리던 아이 는 하혈로 흘려보낸 적은 양의 붉은 흔적처럼 당황스럽고 거북스러운 외딴 존재였는지 모른다. 아이의 존재를 확실히 깨닫기도 전에 한 이별은 아버지 의 죽음처럼 눈물이 멈추지 않았던 생생한 슬픔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 고 위로하려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는지. 매일 밤을, 철새의 날카로운 부리에 온몸이 뜯겨 나가는 꿈을 꾸고 땀에 흠뻑 젖은 몸으로 새벽을 맞이했다. 세상에 나와 숨 한번 트이지 못한 그 아이는 살아있음이 지옥 같았던 그때 내 마음을 알고 있 었을까. 저수지에 머무르다 떠나는 철새들의 이별이 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 지던 운명이었다면 나와 아이의 이별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이곳에 왔고, 그 아이를 놓쳐버린 것도 모두 운명은 아니었는지. 새들의 먹이가 되어 다 떨어져나간 심장의 흔적들을 간신히 추스르고, 다 시 집으로 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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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아파트를 바라보니, 새벽의 빛을 받아 서늘한 창문 들이 있었다. 그 안에 누군가 나를 바라볼까 두려운 마음에 가까운 공원으로 향했다. 이른 시간부터 조깅을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혹시 저 사람들은 밤 새 공원을 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저들의 온 생 이 담긴 푸른 숨결은 부러우면서도 역겨웠다. 주인 옆에서 달리고 있는 덩치 큰 개의 생동감 있는 움직임과 그 개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힘을 내는 주인. 그들이 지나갈 때마다 우뚝 멈춰 서서 그 뒷모습을 흐릿하게 바라보았다. 생 동감 넘치는 새벽의 공원, 이제 내게는 저런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나 홀로 숨도 쉬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었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어디 갔다가 이제서 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를 간절히 기다리다가 피곤에 지친, 무거워진 눈꺼풀을 간신히 움직이고 있는 그. 계단에 앉아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지. 손에 들고 있는 작은 물건은 무엇인지. “들어와.” 그를 집 안으로 이끌었다. 저수지로 향하기 전까지 그리던 그림들, 아이의 존재를 알기 전에 그린 그 림들이다. 지금의 내 마음과 대조를 이루는 밝은 색채에 눈이 부시다. 행복 한 빛의 그림들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가 옆에 있어 참아 야만 했다. 내가 그림을 그리지 않았더라면 그와 만날 수 있었을까. “아이…… 가진 거지?” 이 남자, 정말 무엇이든 숨길 수가 없다. 아름다운 남자가 한숨을 쉰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아 맑은 눈동자를 덮었다. 나를 한번만 또렷하게 바라봐 주었으면…… 내 아픔이 얼마나 컸는 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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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지웠어.” 부르르 떨려오는 입술을 깨물며, 간신히 눈물을 삼켰다. 그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조그만 입을 벌려 훅- 하고 짧은 숨을 내쉬었다. “난, 책임지고 싶다는 말을 하러 온 거였는데, 벌써 그렇게…… 나랑 상의 도 없이.” 그는 일어나서 내 손에 작은 종이 가방을 쥐어 주었다. “이게 뭐야?” 나의 물음에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선물.” 창가에 서서 새벽의 푸름을 가득 안고 걸어가는 그의 외로운 뒷모습을 바 라보았다. 그것이 내가 그를 볼 수 있던 마지막 뒷모습이었다. 그 이후부터였다. 낮에게서 아예 등을 돌리고 밤에만 눈을 떴다. 그림 속은 다시 우울함으로 채색되었다, 내 마음을 온전히 지배해버린 밤의 배경으로. * 이동욕조에 물을 가득 채웠다. 보름달이 환하게 뜬 창가 아래에서 그의 이 름을 크게 불렀다. 내안에 남은 마지막 그의 모습마저 사라져 버릴까봐 차마 부를 수 없었던 그 이름을 이제는 찾지 않겠다고. 밤새 욕조에 몸을 담그고 캔 맥주를 하나 둘 비워내고, 저 어둠 속 나를 바라보고 있을지 모르는 그의 이름을 마치 술에 취한 행인의 노래처럼 불렀다. 살아만 있어달라고 간절히 바랐는데. 내가 받은 그림은 그의 유작이 되었다. 그게 벌써 십 년도 더 지난 일인데 죽는 그 순간 까지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바보같이. 처음으로, 어두운 밤하늘 안에 그 사람의 뒷모습을 그려보았다. 환한 보름 달 아래에는 수북하게 눈이 쌓여있다. 그는 눈 위를 유유히 걷는다. 그의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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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두 사람의 발자국이 있고, 그가 걷고 있는 방향으로 이미 떠난 한 사람 의 발자국이 있다. 아주 작은, 그 한 사람. 이제는 다시 보지 않았으면 좋겠 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먼저 떠난 이와 뒤이어 떠난 이를 찾지 않아야겠다 고. 눈이 황량한 들판을 덮어버린 따스한 밤을, 비가 소로로 내려 가로등 아래 부서지는 밤을, 가을의 크고 작은 단풍들이 바람에 휘날려 사라진 쓸쓸한 밤 을, 낮이 아니면 볼 수 없었던 두 사람을. 이제는 찾지 않으리. * 갤러리에서 일을 보고 집에 오는 길, 주차장에 똑바로 차를 대는 것이 오늘 따라 힘겹다. 내 차에서 멀지 않은 오른쪽 자리에 차가 한 대 멈춰 섰다. 운 전석 문을 열고 나온 남자가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윗집에 사는 여자인가, 그녀가 품에 작은 아이를 안고 있다. 또 한사람이 문을 열고 나온다, 그녀의 어머니일까. 그 옆을 스쳐 지나가는데 그녀들이 하는 말들이 유난히 크게 들 렸다. “엄마 그 동안 고생하셨어요. 내가 몸만 좋았어도, 은별이 이렇게 오래 엄 마한테 맡기지 않았을 텐데.” “아니다, 네가 고생이지. 앞으로도 몸조심할거 잊지 말고.” ” 우리아가, 못 본 새에 많이 컸네?” “그럼, 벌써 두 달이 다 되었는데.” 두 달? 전시회는 보름이 넘게 진행 중이었고, 그녀가 아이를 낳았다는 말을 들은 것은 내가 마지막 그림을 그리고 있던…… 아,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다. 당황한 나는 서둘러 집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 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문을 걸어 잠글 생각도 하지 못하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자꾸만 내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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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가 꿈틀거렸다. 변기를 붙잡고 헛구역질을 했다. 오랜 시간 일어서지 못하고 있던 때에, 또다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선가, 이번에는 내 자궁 안에서부터 들리는 소리인가. 심장은 더욱 빠르게 뛰었고, 헛구역질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손으로 배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눈물로 뿌옇게 흐려진 시야,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 아 있다가 고개를 들어 신발장을 바라보았다. 무엇에 홀린 듯이 일어나 신발 장 문을 열고 가장 아래 칸에 있던 물건을 꺼내들었다. 그가 나에게 주었던, 아기 신발. 손에 든 신발을 가슴에 가져갔다. 간신이 새어나오는 목소리. “이제는 네가 나를 놓아 주렴…….” 침대로 걸어가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여전히 아이는 울고 있었고, 나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아이의 신 발을 두 손으로 움켜잡고 그렇게 지쳐 잠이 들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숨을 차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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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씨는 의자에 앉아 헤드폰을 썼다. 의자는 그의 몸을 모조리 품고도 아직 어린 아이 한명은 족히 앉을 만큼의 공간이 남아있었다. 담배 한가치를 꺼내 든 그는 가만히 의자를 틀었다. 그의 몸이 등받이에 가려 서재에는 아무도 없 는 것 같았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담배를 손가락 사이로 옮기는 동안, 다른 손은 오디오 재생버튼을 눌렀다. 얼굴을 반쯤 덮은 헤드폰이 베토벤 교향곡 9번을 토해냈다. 음악을 들으며 S씨는 좀 더 의자 깊이 몸을 묻었다. 창문 너 머로 새들이 자신을 향해 지저귀는 듯 했지만, 그의 귀에는 와 닿지 않았다. 그는 새를 바라보던 시선을 가만히 창문 위로 옮겼다. 맞은 편 벽에 걸어둔 사진이 창문 위에 어렸다. 소중한 것을 다루듯 두 손으로 지휘봉을 잡고 있 는 백발의 지휘자.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모습이 엄숙하다 못해 신성해보이 기까지 했다. S씨는 손가락에 끼워두었던 담배를 엄지와 검지로 옮겨 잡는가 싶더니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모아 지휘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볍게 박 자만 맞춰 꼼지락되던 동작들이 점점 크고 빨라졌다.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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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해서야 그는 손을 내렸다. 그의 입술이 나지막이 움직였다. “프뤼데 쇠네르 괴테푼켄 토흐크테 오우스 엘리시움, 위르 베트리텐 퐈이 어투룽켄 힘리셰 다인 하일리툼.” 억양 없는 어눌한 한국식 발음 때문에 가사가 일종의 주문인 듯 느껴졌다. ‘환희여, 아름다운 신의 광채여, 낙원의 딸들이여. 우리 모두 정열에 취해 빛이 가득한 성소로 들어가자.’그는 가사의 뜻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자 신에게서 청각을 앗아간 신을 증오하긴 커녕, 오히려 찬미했던 베토벤. 30년 이라는 시간을 받쳐 작곡한 작품도, 청중들의 기립박수도 듣지 못했던 그는 과연 어떤 환희에 차있었을까. 합창이 절정에 다다르자 다시 한 번 담배 지휘봉이 춤을 췄다. 잠시 후, 그 의 다른 손이 힘껏 주먹을 쥐자 그 격렬했던 춤사위도 이내 잠잠해졌다. 상상 속 관객들의 우렁찬 박수 소리까지 음미한 S씨는 헤드폰을 벗고 소매로 땀을 훔쳤다. 끼익S씨가 몸을 돌렸다. 언제 들어왔는지 그의 딸이 발끝을 든 체 문고리를 잡 고 서있었다. “아빠가 서재에 들어오지 말랬지.” “종이가 다 떨어져서 프린터 좀 쓰려구. 있는지 몰랐어요.” 문고리를 잡은 체, 살며시 발끝을 내린 딸은 S씨를 흘겨보며 대답했다. S 씨는 다시 몸을 돌려 오디오를 껐다. “있든 없든, 서재에는 들어오지 말아라.” “예.” 퉁명스러운 딸의 대답과 함께 문 닫는 소리가 들리자, S씨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창밖에 있던 새들은 이미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출구를 찾지 못 한 담배연기가 창문 앞을 맴돌다가 이내 옅게 흩어졌다. 그가 서재를 나온 것은 8시가 넘어서였다. 거실에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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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일이 끊긴 후, 그에게 아침식사는 철침 위에서 철근을 씹는 일, 그 이상이었다. 출근하는 아내와 등교하는 딸을 마중하는 일도 도무지 익숙해지 지 않았다. 그렇다고 문 앞까지 배웅을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시선을 피하 고 신문이나 TV뉴스 따위에 빠져있는 척 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가 족들이 일어나기 전에 서재로 도피하는 편을 택했다. 그 후로 아내는 간단한 음식과 음악을 준비해두고 출근을 하기 시작했다. 홀로 식사를 해야 할 자신 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후, 그는 거실로 가 오디오를 껐다. 악보들이 거실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아내가 출근을 하기 위해 현관문을 열었을 때 바람에 날린 것 이리라 생각했다. 악보에는 학과명, 학번, 이름이 쓰여 있었다. 프리랜서 작 곡가인 아내는 얼마 전부터 대학 강의를 시작한 것 같았다. 후계 양성에 관심 이 없었던 아내가 돌연 강사를 자청한 것은 자신의 탓이었다. 여덟 시, 오 십, 팔 분. 알람시간입니다. 핸드폰이 건조한 목소리로 시간을 알렸다. 그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8시 58분. 부엌에서 물을 한 컵 받아 들고 거실 한 켠, 볕이 잘 드는 공간에 마련된 자신의 책상으로 향했다. 서랍을 열던 그는 잠시 멈춰 책상 위 에 놓인 제도판을 들여다보았다. 컴퓨터를 미지의 도구로 여기는 사람은 아 니었지만, 제도판이 더 좋았다. 계산기를 두드리며 척도를 계산하고, 옷소매 가 까맣게 되도록 도면을 그리는 것이 더 좋았다.‘머리가 아닌, 몸으로 손으 로 그리는 것이 가장 좋은 설계’ 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의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S씨는 말 그대로 잘나가는 건축 설계사였다. 유학도 다녀왔고, 수상경력도 많았다. 취직 후에도 능력을 인정받아 좋은 대우를 받으면서 일했다. 몇 가 지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업계에 이름을 알렸고,‘사람의, 사람에 의한, 사 람을 위한 건축가’ 라는 닉네임도 얻었다. 대기업 회장님의 부탁으로 그의 별 장을 디자인했던 경력도 있었다. 그야말로 탄탄대로. 풀을 잔뜩 먹인 와이셔 츠마냥 그의 미래는 굴곡 하나 없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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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서랍에서 병을 꺼내 손바닥에 대고 살짝 털었다. 노란색 알약이 손바 닥 위를 굴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무릎을 굽혀 약을 주웠다. 몸을 일으켰지 만 그의 바지에는 무릎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안녕. 그가 반십년이 넘도록 몸담고 있던 회사를 나와 차렸던 설계사무소 의 이름이었다.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건축 설계를 하겠다는 의미였 다.‘안녕 건축’ . 능력 있는 어린 친구들을 직접 뽑아 함께 일했다. 트렌드에 맞는 디자인, 젊은 건축 설계사무소라는 소문이 퍼져나가 계속되는 업계의 불황 속에서도 사업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이름이 문제였다. 정비사업 전문 관리업체들이 사업권 수주 과정에서 재건축 조합 추진위 간 부를 대상으로 치열한 로비를 벌이고, 사업권을 따낸 정비 업체들은 공사 수 주에 나선 건설사들과 개발 사업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추진위원회, 조합 사 이에서 다리 역할을 하며 각종 이권을 챙긴다. 흔한 일이다. S씨의 건축 사무 소와 같이 자그마한 회사는 끼어들 틈도 없는 치열한 수주 전쟁. 그 고래 싸 움에 S씨의 새우등이 터지고 만 것이다. 비리의 한복판에 있던 시공사가 주 민들이 공동으로 사용할 건물을 한 설계 사무소에 맡긴 것인데 그 뒤로 오간 돈이 특집 기사에 의해 파헤쳐져버렸다. 그 설계 사무소의 이름은‘안영 건 축’ . 대표이름도 S씨와 성이 같아 S씨. 웃기지도 않은 우스운 얘기다. 남의 이야기였다면. 사람을 위한 건축이네 어쩌네 하면서 뒤로는 뇌물을 주고 일을 따냈다는 소문이 그가 회사를 차렸다는 사실보다 빨리 퍼져나갔다. 일은 점점 줄어들 었고, 경력이나 쌓아보겠다고 취직한 어린 직원들은 하나, 둘 씩 사직서를 냈다. 유지비를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사무실을 정리했다. 나이 도 나이였거니와 이미 바닥으로 떨어진 평판으로 재취업도 쉽지 않았다. 결 국 집에서 아내의 CD만 돌려듣다보니 이제서는 자신의 본업이 음악인 것만 같았다. 핸드폰에서 교향곡 9번이 울렸다.‘설계팀’ 이라는 글자가 액정 위로 반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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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S씨가 근무했었던 회사에서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팀장님. 접니다. 잘 지내셨어요? 가족들도 다 건강하시구 요?” 딱히 떠오르는 얼굴은 없었지만, S씨는 신경 쓰지 않았다. 손에 쥔 알약을 잠시 내려 보며‘잘 지내고 있는가? 건강한가?’ 를 자문해볼 뿐이었다. “아. 아드님은 어떻게, 대학은 잘 들어갔구요?” 아들도 없거니와 딸은 이제 중학생이다. S씨는 대답을 미루고 용건을 물 었다. 인수인계는 확실히 하고 나왔다. 혹 누락된 점이 있었다하더라도 이제 와서 자신을 찾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인가?” “회사일은 들었습니다. 유감이네요.” 상대방은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체, 신경을 벅벅 긁어댔지만 S씨는 여전히 담담하게 대답했다. “인사치례는 그만하지.” 잠깐의 정적 끝에 상대방은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자세를 낮췄다. “여전하시네요. 다름이 아니라 저희가 중요한 프로젝트 때문에 손이 부족 한데요. 팀장님이 저번에 별장 설계해준 그 회장님 있지 않습니까. 그 별장 옆에 조촐한 건물 하나를 더 지으려고 한다던데 팀장님만 계속 찾으시더라구 요. 팀장님 입장도 있으니 제멋대로 팀장님 일을 말해드리기도 뭐하고, 저희 로서도 중요한 고객이니 무시를 할 수도 없구요. 그렇다고 프로젝트를 미룰 수도 없는 노릇이구요. 그래서 말인데요. 도면만 좀 부탁드릴 수 없을까요?” ‘당신 사정이 딱해 이쪽에서 선심써주는 것이니까 잔말 말고 고맙다고나 해라.’ 라는 식의 대화를 기대했던 상대방은 진로를 급히 틀었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빨리 고개를 숙여야 할지는 몰랐다. “그러니까 결국은 일은 내가 하고 돈은 그쪽에서 받겠다는 건가?”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하죠. 팀장님. 지금 혼자 일하시는 거 다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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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면 그리는 것만 해도 버거우시잖아요. 도면에 대한 베이는 두둑이 드리겠 습니다. 팀장님이 도면 넘기실 때 즈음이면 저희 프로젝트도 마무리 단계니 까 그때부턴 저희가 맡을 거구요.” 잠시 말을 않던 S씨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제도판, 무릎 나온 바지, 노란 알약을 번갈아 보았다. * “자, 여기있다.” 두둑한 서류봉투가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여자는 서류봉투를 집어 들었 다. 수십장의 악보위로 빨간 색 글씨가 어지럽게 적혀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흡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수고했네. 고마워.” S씨의 아내는 의자에 앉아 잔을 들었다. 한 모금 입에 대려던 그녀의 안경 에 김이 서려 앞을 가렸다. 그녀는 커피 잔을 내려놓고 안경을 닦는가 싶더니 빈 잔을 들어 물을 따라 마셨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와 커피 한잔으로는 지난 자신의 고충이 채워지지 않았다. “몇 장인지 알아? 400장이 넘는다구.” “그렇게 빡빡하게 굴지마. 작업실 대여료가 그렇게 쌀 줄 알았니?” 하루 종일 집안에서 빈둥거리는 남편을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대 화가 많던 사이는 아니었지만, 한낮에 집안에서는 더했다. 눈이라도 마주칠 때면 마치 낯선 사람과 마주한 것처럼 어색했다. 딱히 갈 곳도 없을 남편을 닦달하기도 싫었고, 그렇다고 그런 어색한 상황을 더 겪기도 싫었다. 결국 자신이 집을 나와 일하기로 했다. 수소문 끝에 그녀는 친구의 작업실을 빌렸 다. 연신 비싼 값을 불러대던 친구는 헐값에 내어주는 조건으로 자신이 가르 치는 학생들의 과제 평가를 맡겼다. 달리 더 부탁할 때도 없어 하릴없이 거래 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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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세는. 별로 좋지도 않던데 뭐.” S씨의 아내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한 쪽 벽면을 지키고 서 있는 스피커 하나만 팔아도 자신이 갖고 있는 오디오를 살 수 있었다. 무엇 하나 자신의 작업실에 비해 빠지는 것이 없는, 월등히 좋은 고가의 장비들이 었다. “어이구. 그러세요. 그럼 댁에 가서 하시지.” “그럴 거야. 이제 니 학생들 과제는 니가 봐야겠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놀란 여자는 들던 커피 잔을 도로 내려놓으며 말했 다. “응? 남편 때문에 집에서 음악도 제대로 못 듣는다며?” “그러니까 말이다. 별 수 없이 거실에 있는 싸구려로 들어. 내가 집에 작업 실 두려고 들인 돈이 얼만데. 자기 서재인 줄 안다니까. 문외한 음악 감상실 로 쓴 거 생각하면……. 돈이라도 받아야지.” “이제 괜찮은 거야?” 물 한잔을 모두 비운 S씨의 아내는 커피 잔을 만지작거렸다. 김은 모락모 락 끊임없이 올라왔지만 잔은 그리 뜨겁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며칠 전부터 낑낑대면서 도면 그리는 거 보면 일하 나 잡았나봐.” “그래도 집에 있을 거 아냐.” “종종 도면 챙겨서 나갈 때도 있고, 집에 있어도 거의 매일 밤새면서 도면 만 그려. 작업실에는 안 들어오고, 거실에서.” 몸을 뒤척이는가 싶더니 S씨의 아내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소리 없이 요란스럽게 떨고 있는 핸드폰 액정 위로 숫자 몇 개가 움직였다. “전화 온 거 아니야?” 여자와 핸드폰을 번갈아 쳐다보던 그녀는 핸드폰을 그대로 테이블 위에 올 려놨다. “모르는 번호라. 급한 일이면 다시 연락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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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의 정적, 그 틈 사이로 아득한 진동음이 밀려들어왔다. 커피가 잔 안에 서 작은 원을 만들며 퍼져나갔다. “이 뒤에서 하수도 공사하는 모양이야. 아침부터 저러네. 점심시간이었나 보지. 끝났나 했더니 또 시작이네” 여자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두 손으로 잔을 쥐었다. 잠시 커피 잔 안 을 쳐다보는가 싶더니 말을 이었다. “……잠은 자니?” “잠? 나야 뭐. 그이는……, 낮에야 자는지 뭐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니. 섹스 말이야.” S씨의 아내는 마시던 커피를 내려놨다.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자신이 대 화하고 있는 상대가 누군지를 새삼 떠올리고는 담담해졌다. 그동안의 남자편 력만 정리해도 전화번호부 하나는 거뜬히 만들 그녀였다. “나이가 몇인데. 섹스는 무슨. 애도 다 커서 하고 싶어도 못해.” “대화도 없고, 잠자리가 만족스러운 것도 아니고, 정 때문인 거 같지도 않 고…….” “그냥 사는 거지, 뭐. 그러는 넌 어떤데?” “나?” 손에 쥔 커피 잔을 흔들대던 그녀가 손동작을 멈춰 S씨의 아내를 쳐다보며 생긋 웃었다. 제나이보다 5살은 족히 어려보이는 그녀는 대학시절과 비교해 도 손색이 없을 미모를 자랑했다. 초로의 나이에 주름살도 간간히 자리 잡고 있었지만, 눈웃음과 보조개가 그와 어울려 오히려 그녀의 얼굴을 돋보이게 했다. “나야 좋지. 이 남자도 만나고, 저 남자도 만나고. 요즘은 24살짜리.” “24살? 양심도 없네. 사람도 아니다. 그래서, 결혼은 안 할 거야?” “그냥 이 사람한테 이해되는 면만 사랑하고, 저 사람한테 이해되는 면 또 사랑하는 게 더 인간적이야.” 테이블 위에 있던 핸드폰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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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공사가 심하네.” “문자 온 거 같은데?” S씨의 아내가 그녀의 말에 대답하며 핸드폰을 주워 열었다. 가만히 액정을 들여다보던 S씨의 아내는 서둘러짐을 챙겨 일어났다. “나 가봐야겠다. 남편이 쓰러졌대.” “응?” “병원이라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고.”S씨의 아내는 신발을 신으며 그녀 에게 말했다. “어쨌든 이제 니 학생은 니가 봐. 난 이제 집에서 작업할 거니까.” 현관문을 열자 공사 소리가 온 집안을 울렸다. S씨의 아내는 뒤를 돌아 벽 을 덮고 있는 흡음폼을 한번 보고는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외상도 없고…….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이네요. 요즘 매일 밤을 새셨다 구요?” “예.” S씨의 아내가 죽은 듯이 누워있는 S씨를 쳐다보며 말했다. “과로로 인한 일시적인 증상인 것 같네요. 링겔 맞으시면서 하루 푹 쉬시 면 나아질 겁니다.” “감사합니다. 별 일도 아닌데 요란을 피운 거 같네요.” 그녀의 눈이 의사를 향했다. 유난히 큰 키와 몸짓, 웃음을 머금고 있는 얼 굴이 영락없는 산타클로스였다. 하얀 의사가운보다는 빨간색 솜털 옷이 어울 릴 듯 했다. “과로를 우습게보시면 안 됩니다. 누적되면 큰일날수도 있어요.”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려 S씨를 살피던 그녀가 의사에게 물었다. “제가 알아둬야 할 게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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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주름과 함께 짓는 눈웃음. 친구의 그것과는 사 뭇 다른, 편안함이 느껴졌다. “편안하게 해주세요. 아무리 일이 많아도 밤새시고 그러시면 안 됩니다. 당분간은 휴식을 취하시는 게 좋아요. 두 분이 휴가라도 다녀오시면 좋겠네 요.” “저기…….” 걸걸한 목소리. 쇳소리와도 비슷한, 적어도 10년은 담배를 피운 사람에게 나올 법한 목소리가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의사와 S씨의 아내는 뒤를 돌아 보았다. 한 노인이 자신의 손을 다른 손으로 부여잡은 체 한편에 누워있는 여 인을 가리키며 의사에게 말했다. “저기 저 환자 병문안 온 사람인데, 오늘 집에서 나올 때부터 손에 감각이 없어서 말이야. 혹시 바쁘지 않으면 좀 봐줄 수 없겠수?” 의사는 특유의 웃음을 한껏 지으며 노인의 손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손목이 안 좋으신가요?” 노인은 자신의 손목을 보며 허탈한 웃음이 보였다. “이 나이가 되면 관절이란 관절은 다 아픈 법이지.” “특별히 손목이 더 아프시지는 않은 거네요?” 노인의 손목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보던 의사는 노인의 손목에 묶여있던 시계를 풀었다. “이제 어떠세요?” 시계는 이미 손목을 떠났지만, 그 자국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노인은 쥐었 다 폈다를 반복하더니 얼굴이 붉어졌다. 고맙다는 인사는 하는 둥 마는 둥 서 둘러 자리를 피했다. 의사가 S씨의 아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속삭이듯 말했 다. “저런 분들은 양반이죠. 어제 남편분과 똑같은 증상으로 입원한 사람이 있 었거든요? 아내 되시는 분이 인터넷에서 봤는지 간질이며 동맥경화증이며 저혈압증이며 무슨, 자율신경실조증이며 일시적으로 의식 불명을 일으킬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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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병이란 병은 다 알아가지고 오셨더라구요. 의사보다 인터넷을 믿는 시 대예요.” S씨가 살며시 눈을 떴다. 연신 눈을 껌뻑이던 S씨는 시선을 가린 하얀 물 체를 쳐다보았다. 동글동글하고 하얀, 폭신폭신하고 차가워 보이는 반구를 따라 시선을 옮기자 그것보다 작은 반구가 보였다. “눈사람?” S씨의 말에 아내와 의사가 S씨를 내려다보았다. “정신이 들어요?” 아내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S씨의 눈동자가 그녀를 향하는가 싶더니 다시 눈사람에게 옮겨갔다. 눈사람의 손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내려와 눈을 가렸다. “이제 기운만 차리시면 되겠네요.” 눈사람이 빛을 거두며 말했다. “기억나요? 당신 의식불명이었어요. “이 눈사람 같은 건 뭐야?” S씨의 시선을 따라 눈을 옮기던 아내의 얼굴이 붉어졌다. 옆을 지키던 간 호사가 웃음을 참지 못해 킥킥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를 나무라는 아내를 말리며 의사가 말했다. 의사의 얼굴에는 아직 웃음 이 어려 있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봐도 가끔은 그렇게 보이는데요. 남편분이 유머감각이 뛰어나시네요.” 아내는 S씨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매사에 너무 진지해서 우스울 때가 있으면 있었지, 그런 실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이, 정말 이상 없는 거죠?” “제가 눈사람 같다고 해서요? 오히려 훌륭한 연상이지요. 뇌가 아주 잘 작 동하고 있나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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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S씨는 눈사람을 다시 살펴보았다. 그가 의사라는 사 실을 듣고 나니, 그는 영락없는 의사였다. 목에 감고 있는 청진기하며, 가슴 팍에 붙은 명찰, 그 아래로 꽂혀있는 펜들. 그저 유달리 하얀 피부를 가진, 덩치 큰 의사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잠깐 나갔었나봅니다. 실례를 했습니다.” S씨가 공손한 말투로 사과를 전하자, 의사는 손사래를 쳤다. 큰 덩치 때문 에 과장된 몸짓처럼 느껴졌다. “아닙니다. 몇 분간 의식이 없었는데요. 당연한 거지요. 푹 쉬세요. 곧 퇴 원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의사가 자리를 떠난 뒤에도 S씨는 한참을 그가 서있던 공간을 바라보고 있 었다. * 현관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S씨의 딸이었다. 소녀는 신발을 벗 기가 무섭게 방문을 열었다. 몸이 반쯤 문턱을 지났을 때, 소녀는 문고리를 잡은 체 동작을 멈췄다. 뭔지 모를 위화감을 느껴졌다. 귓가에 거슬리던 연 필소리, 음악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소녀는 S씨가 앉아있던 자리를 쳐다보았 다.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않던 S씨가 보이지 없었다. 소녀는 고개를 돌려 현관을 확인했다. 자신의 신발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소녀는 자신의 침 대 위로 가방을 집어던짐과 동시에 부엌을 향해 몸을 돌렸다. 식탁 위의 토스 트와 커피는 자신이 남기고 나간 그대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요즘 들어 부쩍 늘은 몸무게 때문에 아침은 먹지 않았다. 하지만 소녀의 어머니는 변함 없이 딸의 몫을 준비했다. 소녀는 토스트를 쓰레기통에 부어버리고서는 커피 잔을 씻어 음료수를 담았다. 목을 축인 소녀는 싱크대 서랍에서 나무젓가락 을 하나 챙기고서는 서재로 향했다. 소리라도 들릴까 조심히 문을 돌린 소녀 는 문틈사이로 고개만 내밀었다. 혼자 앉기에는 너무나 큰 의자 위에는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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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소녀는 창가로 걸어가 의자 에 몸을 안겼다. 의자의 품속에서 눈을 감고 잠시 좌우로 몸을 틀어보던 소녀 는 손을 뻗어 담배 한가치를 꺼내들었다.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꽂아둔 나무 젓가락 사이를 조심히 벌려 담배를 끼워 넣은 소녀는, 창문을 열어 고개를 내 밀고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깊게 한 모금. 머리가 어지러웠다. 새삼스레 근 래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흡연의 욕구보다 S씨에 대한 거부감이 더 컸다. 그가 서재에서 시간을 보 내던 몇 주 동안은 담배 생각이 들지 않았다. S씨가 서재에서 나와 거실 한 켠, 자신의 작업 공간에서 밤낮없이 도면에만 매달리자 그때서야 지금껏 눌 러졌던 욕구가 한 번에 터져 나왔다. 소녀는 집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서재만을 생각했다. 아무 일도 잡히지 않았고, 심지어는 변비까 지 걸렸다. 담배 한 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만 같은데 좀처럼 기회가 나지 않았다. 자신의 방에서, 혹은 밖에서 필 용기는 나지 않았다. 서재만이 이 세 상에서 자신에게 허락된 유일한 흡연실이었다. 부모 모두 서재에서 담배를 피웠기 때문에 서재에는 언제나 담배 냄새가 배어 있었다. 거기에 자신의 담 배 연기를 조금 더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고, 몸에서 담배 냄새가 나도 서재에서 프린트할 게 있었다고 말하면 그만이었다. 소녀는 지난 몇 일간 자신의 인내심을 치하하며 한 모금 다시 내뱉었다. 바 람을 타고 담배 연기가 서재 안쪽으로 밀려들어왔다. 연기를 따라 시선을 옮 기던 소녀는 노을빛에 비친 담배 연기를 감상했다. 마치 잉크 한 방울을 물 위로 떨어뜨린 듯, 수없는 선들이 뒤엉켜 퍼져나가는 모습은 노을빛보다 더 아름다웠다. 선들이 공기 중으로 흩어져 희미해지자 소녀는 다시 한 모금 연 기를 더했다. 아까보다 더 짙은 선들이 바람을 타고서 춤을 췄다. 자신도 선 을 따라 손을 저어 그 춤에 합류했다. 끼익소녀와 S씨의 눈이 마주쳤다. S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자신의 딸을 응시했다. 퍼져나가는 연기를 응시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런 S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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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가 소녀를 더 불안하게 했다. 소녀는 자신이 아직도 담배를, 나무젓가락 을 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몸을 돌려 창문 사이로 던져버렸다. 하지만 S씨가 그것을 보지 못했을 리 없었다. 변명이라도 해야 했다. “아빠, 그게…….” 움찔. 마치 그런 소리가 들릴 듯이 S씨의 몸이 순간적으로 움직였다. 소녀 는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 체 말을 이었다. “프린트하러 들어왔다가……, 음악숙제가 있어서 기타를 좀 쳐볼까했는 데……. 그게 잘 안돼서…….” 소녀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어떻게든 엮어 이야기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학교에서 지휘라도 하는 거냐?” 뜬금없는 물음에 소녀는 눈을 껌뻑거렸다. S씨는 담배 연기가 거미줄이라 도 되는 냥, 손을 저어 틈을 만들고 그 사이를 비집고 걸어왔다. “지휘 연습, 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소녀의 눈에 S씨의 어깨너머 벽에 걸린 지휘자의 사 진이 들어왔다. 담배를 끼워두었던 나무젓가락을 지휘봉이라고 생각했던 것 일까. 하지만 담배를 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담배를 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담배연기까지 보지 못하진 않았을 것이다. “응. 아니, 음악 숙제가 악기하나 연습해서 시험 보는 건데 박자가 잘 안 맞아서.” S씨가 무슨 의도에서 다른 소리를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소녀로 서는 서둘러 자리를 피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소녀는 그 말을 끝으로 서재에 서 나갔다. 8시 반이 넘어서야 소녀는 방에서 나왔다. 되도록 아버지와 마주치기 싫었 다. 그것은 다른 때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오늘은 더욱 더 그랬다. S씨가 언제 마음이 바뀌어 호통을 칠지 두려웠다. 점심에도 빵 한 조각밖에 먹지 않은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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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에게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는 가혹했다. 결국 그를 이기지 못하고 한술이 나마 먹을까 방을 나온 것이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S씨의 아내는 그윽한 클래식 음악을 곁들였다. 된장 찌개 냄새와 그것과는 너무도 이질적인 음악과 오고가는 수저소리가 빽빽하 게 공간을 채워나갔다. “이거는 왜 안 먹어요? 이게 마지막이에요. 먹고 치워버리게 어여 드세 요.” 아내는 S씨의 앞으로 게장을 들이밀었다. S씨는 가만히 게장에 젓가락을 가져갔다. 젓가락으로 껍질을 건드리는 S씨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마치 미지의 생물을 탐구하는 과학자의 모습처럼 보였다. 껍질을 누르자 부드러운 속살이 그를 이기지 못해 틈틈이 삐져나왔다. 살과 양념이 살짝 묻어난 젓가 락을 입으로 옮겨 쭉 빨았다. 입을 오물거리며 쩝쩝거리던 S씨는 그제야 본 격적으로 게장을 먹기 시작했다. 문득, 자신을 의아하게 쳐다보는 아내와 딸 의 시선을 느낀 S씨는 고개를 들었다. 그가 고개를 들자 아내와 딸은 가만히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 음악 숙제라는 건 뭐냐?” S씨의 뜬금없는 말 한마디에 공간을 메우고 있던 모든 것들이 날아가 버 렸다. 소녀는 S씨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제 와서 자신을 나무라는 걸까. 아 니, 그랬다면 단번에 담배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자신의 빤한 거짓말을 들 쳐 내는 이유를 소녀는 알 수 없었다. “음악 숙제라니?” S씨의 아내가 둘의 대화에 끼어들자, 소녀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악기 하나 연습해서 시험 보는 거야.” “뭐 할 건데?” 소녀는 S씨의 눈치를 슬쩍 보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기타.” S씨의 아내는 게살 한 점을 밥 위로 옮겼다. 어딘가 모르게 실망한 기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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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아빠한테 가르쳐달라고 하면 되겠네.” 식사를 마친 뒤, 뒷정리를 하던 아내가 제도판을 향해 걷는 S씨에게 말했 다. “오랜만에 한 곡 쳐봐요. 애한테도 들려줄 겸.” 무리하지 말고 편히 쉬어야한다는 의사의 말이 생각나서도 이었지만, 오랜 만에 그의 연주를 보고 싶기도 했다. 아내와 S씨는 연주 동호회에서 처음 만 났다. 아내가 바이올린 연주자로, S씨는 클래식 기타 연주자로 같이 연주를 했던 것이 인연이 되어 3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사실 말은 안했지만, S씨가 처음 동호회에 들어온 순간부터 아내는 그에게 빠졌다. 건축학도였던 S씨의 기타실력은 전공생에 못지않았다. 연주는 물론이거니와 기타를 칠 때, 버릇 처럼 내밀던 입술이며, 목에 선 핏줄까지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건축일을 시작하면서 그는 기타를 거의 손에 대지 않았다. 손도 거칠어지고, 손톱도 깨지고, 부러지는 일이 잦았다. 자연히 기타와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 까먹었어.” 퉁명스럽게 대답한 S씨는 다시 제도판을 향했다. 아내는 S씨에게 말하는 대신 방으로 들어가려는 딸에게 물었다. “아빠 기타 치는 거 들어본 적 없지? 한번 보여 달라고 해봐. 저래 뵈도 꽤 잘 친다. 음악 숙제 도와주실 지도 모르잖아.” 소녀는 관심이 가지 않았지만, 자신이 벌린 일이라는 생각에 걸음을 멈췄 다. 이 꼬리에 꼬리를 문 이야기를 깨끗이 잘라놓지 않으면 담배 이야기가 흘 러나올 것만 같았다. 딸이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쳐다보자, S씨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거참. 다 까먹었대도.” 그렇게 말하면서도 S씨는 서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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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S씨는 서재에서 나왔다. 그의 손에는 기타 대신 아내의 바이올린 이 들려있었다. 바이올린을 들고 기타 연주 자세를 취하는 그의 모습을 딸은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쳐다봤다. 계속 쓰러지는 바이올린을 억지로 무릎 위에 걸치고, 현 위로 손을 올리는 모습이 귀엽기까지 했다. 딸은 자기도 모르게 킥킥거렸다. 설거지를 하던 아내는 딸의 웃음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건 내 바이올린이잖아요.” 잠시 바이올린을 쳐다보던 S씨가 말했다. “아, 어쩐지 좀 작다 했어.” 딸은 더 이상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음악만이 감돌던 집에 간만에 터져 나온 웃음이었다. 멋쩍은 S씨도, 어이없는 아내도 함께 미소를 지었다. 아내는 고 무장갑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서는 바이올린을 들고 서재로 들어갔다. 그 리고는 그의 기타와 발판을 챙겨 거실로 나왔다. “기왕 할 거면 제대로 하라구요.” 발판을 펴 S씨의 발 춤에 내려놓은 아내는 딸에 옆으로 가 앉았다. 잠시 줄 을 맞춰보던 S씨는 조율이 끝났는지, 깍지 낀 손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당신이 관리하고 있었어? 생각보다 상태가 좋네.” 아내는 대답 대신 살짝 미소를 지었다. “신청곡 받아요? 바덴재즈 1악장.” 그가 동호회에 처음 들어갔던 날, 연주했던 그 곡이었다. “기억이 날 지 모르겠네.” 그는 중간 중간 멈칫 거리기는 했지만, 머리는 기억하지 못해도 몸은 기 억하는 듯, 점점 속도를 붙여 연주했다. 삐죽이는 입술, 퍼렇게 올라오는 목 의 힘줄. 그때보다 조금 늙기는 했지만, 아직도 그는 그대로였다. 아내는 그 를 보며 오랜만에 마음이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곡이 중반으로 치닫자, 한 층 빨라지고 강렬해졌다. 그의 손이 지판 위를 내달리고 보사노바의 리듬이 거실을 가득 채우자 소녀 역시 그에게 빠져버렸다. 집구석, 후미진 곳에서 담배에 쩔어 도면을 그려대던 아버지의 모습은 없었다. 흰머리가 살짝 섞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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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긴 머리. 우수에 찬, 조금은 무덤덤해 보이기까지 하는 표정, 호리호 리한 체격. 그 전까지 부정적으로 보이던 아버지의 모습이 멋진 중년의 기타 리스트로 보이기 시작했다. S씨의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하던 두 모녀는 조 용히 연주가 끝이 나자 자기도 모르게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어때? 꽤 멋지지?” 아내가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응. 멋있다. 의외야.” 딸의 넋 나간 표정을 지켜보던 S씨는 쑥스러운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빠. 다음 달 즈음에 부모님 일일 교사. 내 차롄데 아빠 올 수 있어요?” 서재로 들어가는 S씨를 향해 소녀가 말했다. 소녀의 머릿속에 담배 사건은 이미 잊혀졌다. 밤늦게야 S씨는 침실로 들었다. 조금만 더 그리면 도면도 완성이었다. 오 늘은 일찍 자라고 엄포를 놓던 아내는 제풀에 지쳐 잠이 들었다. 언제나처럼 오른편에 누우려고 했던 S씨는 자신의 자리에 무언가가 있는 것을 알고는 놀 라 일어났다. 찬찬히 어둠 속을 들여다보았다. 아내, 인 것 같았다. 얌전히 자는 편인 아내였지만, 오늘은 왠지, 이불도 다 차버리고 다리 사이에 베개 를 끼워 끌어안고서는 S씨의 자리인 오른편까지 굴러 와서 자고 있었다. S씨 는 하릴없이 아내의 왼쪽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한참을 뒤척이던 S씨는 잠을 이루지 못해 눈을 떴다. 딸의 웃음소리가 귓 가에 맴돌았다. ‘일일교사라.’ S씨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건축 일로 망가질 대로 망가진 손을 보며 자신 이 제대로 연주를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무엇보다 악보가 다 기억나지 않았 다. 그가 자주 연주했던 <바덴재즈>도 감으로 움직이는 대로 연주했을 뿐이 었다. S씨는 악보를 찾아보고자 스탠드가 있는 곳으로 손을 뻗어 버튼을 눌 렀다. 스탠드는 켜지지 않았다. 스탠드가 켜지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버튼의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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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감촉에 놀란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한 번 버튼을 눌렀다. 물컹한 느낌이 그의 손가락을 타고 흘러왔다. 그는 손을 더듬거려 버튼의 주위를 살 펴보았다. 버튼은 유선형의 부드러운 뭔가의 정점에 위치해 있었다. 침실 스 탠드는 이런 식으로 생기지 않았다. “……왜 그래요?” 스탠드가 말을 했다. 아니, 스탠드가 아니었다. 아내의 목소리였다. 아내는 그의 손을 따라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그 시선은 자신의 가슴에서 멈췄다. “당신, 오늘 좀 이상해요.” 아내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아까 기타 치는 거 보니까 연애할 때 생각나더라.” S씨는 혼란스러웠다.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입 술을 포개오는 따뜻함에 S씨는 정신이 들었다. “오랜만에 분위기 좀 내볼래요?” * S씨는 아내와 함께 출근했다. 혼자가도 된다고 했지만, 아내는 극구 자신 의 차로 회사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간만에 가족 모두가 함께 아침도 먹었 다. 토스트와 커피가 아닌, 제대로 된 차림이었다. 딸은 어색하게나마 웃으 며 다녀오겠다며 인사를 했다. 용돈도 얼마 쥐어줬다. S씨는 회사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아침을 회상했다. 기분 좋은 아침. 마치 신혼 때로 돌아온 것 같았다. 오늘, 도면에 대한 간단한 프레젠테이션을 하 고 나면 더 이상 출근할 일도 없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그 기분도 이내 사그 라졌다. “어머, 팀장님. 오랜만이에요.” 동그란 안내 표지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인사를 해왔다. S씨는 당황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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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다. 다만 누구인지 알아 볼 수 없음이 불편할 따름이었다. “아. 그래.” S씨는 간단히 인사를 하고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설마, 저 기억 못하시는 거예요?” S씨는 상대편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그렇다할만한 특징은 없었다. 이 회사에서 자신에게 불편함 없이 말을 붙여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기에 S씨 는 애써 누군지 떠올려보려고 했다. “진짜 모르시는 거예요. 섭섭해요. 팀장님.” 콧소리가 들어간 그녀 특유의 말투가 들려오자 S씨는 비로소 그녀의 모든 것을 기억해냈다. “이대리. 기억하네만.” “이제 기억해내신 거 같은데요?” S씨는 그녀에 대해서 떠올렸다.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붙임성 있는 그녀 였지만, 그 정도가 심해 불편해하던 직원이었다. 아마 자신이 기억못했다고 한다면 그 섭섭한 마음을 다 표현해내는데 반나절 이상이 걸릴 지도 몰랐다. “머리 바꾼 거 같은데? 그래서 못 알아봤나 보구만.” 자신이 회사를 관둔 지도 1년이 넘었다. 보통의 젊은 여직원 머리는 분기 에도 몇 번씩 바뀐다. 많게든, 적게든. “예? 이번에 좀 잘랐거든요. 젊게 보일까해서요. 그나저나 의외네요. 팀장 님이 그런 걸 알아보시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요?” S씨는 잠시 말을 멈추는가 싶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요즘 변했다는 소리를 꽤 많이 듣고 있지.” “커피 한잔 하실래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그녀는 S씨에게 물었다. S씨는 시계를 들여다봤다. 9시 50분 남짓. 아직 여유가 있었다. “그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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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기 앞에선 그녀는 온갖 주머니와 핸드백을 뒤적거렸다. 잔돈이 없는 모양이었다. “죄송해요. 팀장님. 분명히 동전 몇 개 있었는데.” “아, 괜찮아. 내가 사지.” S씨는 가방을 열어 동전 지갑을 찾았다. 오늘 아침 서재에서 찾은 것이었 다. 다섯 개의 조그마한 주머니로 나누어져 있는 형태였는데 무엇에 쓰는 물 건인지 몰라 한참을 고민했다. 각 주머니마다 길이와 굵기가 다른 것을 발견 했을 때, 각각 다른 동전을 구분해서 넣을 수 있게 고안된 동전주머니라는 것 을 깨달았다. S씨가 찰랑거리며 동전주머니를 꺼내자 그녀는 자지러지게 웃었다. “팀장님. 그런 데에다가 동전 넣어가지고 다니시는 거예요?” S씨가 동전주머니를 흔들면서 대답했다. “편리할 거 같더라구. 괜찮지 않나.” 그녀는 배를 쥐어 잡고 넘어가는 숨을 붙잡았다. “진짜 많이 변하셨네요.” 아홉 시, 오 십, 팔 분. 알람시간입니다. 핸드폰이 건조한 목소리로 시간을 알렸다. 그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9시 58분. 가방에서 약병을 꺼내들은 그는 손바닥에 대고 약병을 털 었다. 하얀 알약이 그의 손바닥 위로 굴러 떨어졌다. “자, 시작하겠습니다.” S씨의 말에 모두가 화면을 쳐다보았다. “일단 전체적인 외관부터 보여드리겠습니다.” 회장은 고개를 내민 체, 테이블 위로 턱을 괴었다. “예, 일단 지난 해, 완성된 별장의 모습입니다. 전체적인 외관은 이와 통일 감을 주기 위해 비슷한 느낌으로 설계를 했습니다.” 화면 속 별장 옆으로 새로운 건물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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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괜찮은 느낌이구만. 좋아. 좋군 그래.” 회장의 거친 얼굴이 밝게 펴졌다. S씨는 그의 반응을 지켜보며 대답했다. “그 속은 더 만족스러우실 겁니다. 제가 설계한 것들 중 단연 최고라고 자 신할 수 있습니다.” “기대되는구먼.” 주름진 얼굴 가죽 속에 묻힌 회장의 눈이 껌뻑거렸다. “예. 다음이 내부의 모습입니다.” 수수하지만 세련된 내부의 모습이 화면에 가득 차자 회장은 고개를 뒤로 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거, 이거. 조촐한 건물 하나 더 짓겠다고 한건데. 별장보다 더 멋진 걸 만들려고 하는구만.” “별장 쓰시면서 불편하다고 하신 것들을 수정하다보니 그렇게 됐군요. 죄 송합니다.” 회장은 손사래를 치며 다른 손으로는 커피를 들었다. “아닐세. 아주 만족스러워. 화면 그대로만 만들어졌으면 좋겠구만.” 프레젠테이션은 아주 원활하게 흘러갔다. 회사 고위급 간부들은 S씨의 실 력에 혀를 내두르며 그를 영입할 생각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부 설계 도면 이 화면 위로 비춰지자 그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회 의실 안에 제대로 돌아가는 머리는 S씨의 것 뿐이었다. “저게 뭔가.” 회장이 S씨의 설명을 가로막았다. “이 부분으로 말하자면.” “아니, 저 도면 말일세. 누가 봐도 어린애 낙서 아닌가. 자네 나랑 장난하 자는 겐가!” 회장의 역정에 S씨는 도면을 살펴보았다. 자신이 지금껏 작업한 것 중 최 고의 도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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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자네 평판이 왜 그렇게 떨어졌는지 알만하군. 난 가보겠네.” 회장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자 간부들은 회장을 따라 나섰다. 그 모습을 멀 뚱히 바라보던 S씨의 멱살을 누군가가 휘어잡았다. “이게 뭐하시는 겁니까! 팀장님 망했다고 우리도 망해봐라 이겁니까!” S씨는 혼란스러웠다. 누가 뭐래도 이번 설계는 며칠 밤을 새면서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역작 중에 역작이었다. “두고 봅시다!” S씨를 밀쳐 넘어뜨리자, S씨의 주머니 속에서 장갑 한쪽이 찰랑거리는 소 리를 내며 동전을 토해냈다. * “시각실인증입니다.” 눈사람이 말했다. “시각실인증이요?” 아내의 목소리였다. “간단히 말해서 물체는 볼 수 있지만, 그것을 인식할 수는 없는 병이죠. 그 저 단편적인 선이나 면으로서만 인식하는 겁니다. 눈에 도드라지는 특징이나 청각, 촉각에 의존해서 인식할 수는 있지만 그런 게 없다면 눈앞에 있는 게 뭔지 알 수가 없는 거죠.” “치료는 가능한가요?” 아내의 목소리가 떨렸다. “남편분의 가방에서 약이 하나 나왔어요. 이 약에 대해서 알고 계신가요?” 눈사람이 주머니에서 약병을 꺼냈다. 하얀 알약 몇 개가 그 안에서 서로 부 딪히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무슨 약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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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도 모르는 약입니다. 아마 남편 분께서는 임상 실험에 참가하고 계 셨던 게 아닌가 싶네요. 약의 부작용으로 일시적으로 병에 걸리신 거 같습니 다.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투약을 정지하면 증세는 나아질 겁니다.” “임상실험이요?” “예. 종종 실업하신 분들이 의약회사에 넘어가서 그러시는 경우가 있거든 요.” 아내는 S씨를 내려다보았다. S씨는 눈을 뜨지 않기로 했다. “괜찮은 거죠?” “지금으로서는 확답을 드리기가 뭐하지만, 괜찮을 겁니다. 걱정마세요.” 의사가 가벼운 목례를 하고 나가자 아내는 S씨의 손을 잡고 말했다. “어쩌자고 그랬어.” S씨는 그녀의 속삭임을 들으며 생각했다. 딸의 웃음소리를 생각했고, 아 내와의 잠자리를 생각했다. 따뜻한 아침밥을 생각했고, 일일교사에 대한 걱 정도 했다. 그리고 제도판이 놓인 책상 서랍에 들어있는 노란 알약을 떠올렸 다. 하나만으로도 효과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S씨는 끝으로 <환희의 송 가> 가사를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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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정윤선
두 사람
그는 손을 뻗어 창문을 조금 열었다. 에어컨 바람으로 가득한 차내의 휘발 성 향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작은 틈 사이를 비집고 드는 5월의 미적지근한 바람이 얼굴을 감싸 안았다. 한결 나았다. 버스는 텅텅 비어있었다. 그는 두 어 명의 승객이 자리한 곳에서 되도록 떨어진 뒤쪽에 홀로 앉았다. 그쪽이 마 음이 편했다. 오늘은 H의 생일이었다. H와 만나기 시작한 이후 두 번째 맞는 생일. 창밖 으로 시선을 두며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던 그는 문득 H와 마지막으로 만난 날을 떠올렸다. 아니, 떠올리기 위해 애를 썼다. 쉽게 떠오를 것 같았던 그 순간이 눈앞을 스쳐 지나는 창밖의 풍경처럼 흐릿했다. 불과 몇 주가 채 지나 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애써 기억을 더듬어 나갔다. 기억을 더듬어 나갈수록 가깝지 않은 과거의 기억만이 또렷해왔다. 애석하게도 오늘은 J의 생일이기도 했다. 애석하게도 그는 그 사실을 떠올렸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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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어릴 적부터 그림을 곧잘 그렸다. 건설업체에 근무하시는 아버지는 현장의 업무로 자주 집을 비웠고, 조그마한 식당을 운영하시는 어머니도 해 가 지고서야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잦을 수밖에 없었던 그는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가 교내 사생 대회에서 수여 받은 상장이나 전국 대회에서 입상해 받아 온 상장과 트로피 등으로 거실의 벽면 이 채워지던 때였다. 그에겐 그림 그리는 일이 무엇보다도 즐거웠다. 처음엔 그저 그의 그림을 경탄의 눈빛으로 보는 친구들이나, 주변 어른이나 부모로부터 칭찬을 듣는 그 자신이 사뭇 대견스러워 그러했으나 이제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온전히 선을 긋고 그 위로 색을 칠해나가는 과정이, 그로 인해 드러난 실체가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림을 통할 때만은 모든 것이 새로웠다. 눈에 보이면서 도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담아내는 일이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창조주가 되 어 세계와 공감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고, 어린 그에게 있어 말로는 형언하 기 힘든 경험이었다. 중학교에 다닐 무렵 그는 이미 예술고로의 진학을 다짐했다. 그의 부모는 내심 그런 그의 결심을 아쉬워하는 듯도 했으나 나서 반대하지는 않았다. 성 적도 꽤 우수한 편이었기에 언제든 안정적인 진로로의 전환이 가능하다고 믿 었기 때문이다. 괜한 트집으로 민감한 시기의 그를 자극하는 것을 오히려 조 심하며 전에 없는 격려를 더했다. 톱니바퀴가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그가 중학교 졸업을 얼마 앞두었을 무렵 이었다. 세계적인 경제 불황은 이렇다 할 예고 없이 침입해 들었다. 그의 가족은 이 무자비한 폭력에 알몸으로 내던져질 수밖에 없었다. 요식업의 침체는 피부로 느껴질 만큼 확연해서 그 자그마한 식당을 찾는 손님도 뜸해졌다. 부동산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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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의 악화는 더욱 심해져 시공 아파트의 청약률이 예년의 평균치에 한참 못 미치는 등 자체적으로 몸집 줄이기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불필요한 지방을 제거하듯 실직자들이 불어났고, 그의 아버지는 한 순간에 지방덩어리로 전락 했다. 가세는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는 다시금 직장을 구해보려 애를 썼지만 아랫배가 볼록한 중장년의 그에겐 어려운 일이었다. 무기력하 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의 어머니는 퇴직금에 지금 있는 가게를 팔아 새 가게 라도 차려보자고 남편을 구슬렸다. 그나마도 돈이 부족했다. 직장을 잃은 그 에게 대출은 허울뿐이었다. 헐값에 집을 팔아야했다. 더 이상 그들에게 선택 권은 없었다. 아버지는 그때부터 깊은 신음을 내었다. 졸업이라도 하고 가야 되는 건데…, 이사를 가던 날 그의 얼굴을 쓰다듬던 어머니의 붉은 눈시울. 삐걱거리나마 톱니바퀴는 돌아가야만 했다. 좁고 습기 찬 방에서 나는 퀴 퀴한 곰팡이 냄새와 테라핀 냄새가 뒤섞이기는 했지만 그는 크게 개의치 않 았다. 다만 한참은 늙어버린 부모의 얼굴과 자주 새어나오는 한숨을 견디는 일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다행일까. 그는 예고로 진학했다. 비록 보다 낮은 등록금을 찾아 간 차선의 학교였지만 그렇게 서운할 상황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애초와는 달리 진지하 게 인문고로의 진학을 요구했지만 그의 확고함과 어머니의 협조가 아버지를 설득시켰다. 아버지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친구들과 전학을 통해 자연스레 헤어졌다. 옮겨 간 학교에선 얼마 다 니지 않아 졸업을 했다. 넉넉하지 못한 건 친구를 사귈 시간뿐만이 아니었 다. 고등학교를 입학하곤 누군가와 말을 나누기도 버거웠다. 그가 또래의 아 이들과 나누는 것은 대화가 아닌 대꾸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의 유일한 소통 은 그림을 통해야만 했다. 하지만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의 그림 은 괴상했다. 그림 속 인물은 어딘가가 삐뚤어졌던가, 음울했다. 풍경은 괴 괴했고, 형태는 모호했다. 교사들은 일관되게 그의 그림 속 폐쇄성을 지적했 다. 기본에 충실하지 못하고 겉멋을 부린다는 지적도 빼먹지 않았다. 또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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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역시 그와 그의 그림을 조롱하거나 힐난했다. 그를 제외하고 그의 그 림을 사랑하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괴로운 멍에를 짊어진 시간은 그렇게 흘 러갔다. 그는 어느새 아득히 깊은 동굴에 자리하고 있었다. “쓸쓸해 보여…….” 그는 갑작스런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하마터면 붓을 떨어트릴 뻔했다. 들리지 않게 숨을 내쉬고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은 자신과 같은 교복을 입은 하얀 피부의 여자 아이에게서 멈춰 섰다. 이 아이를 본 적이 있 던가? “네 그림 말야.” 그는 선뜻 말문을 열지 못했다. 입안의 말들이 서로 엉켜 포화 상태를 이루 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황급히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 역시 별다른 내색 을 하지 않은 채 은은히 그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낡아 버려진 학교 주변의 창고는 방과 후 종종 그가 들려 그림을 그리곤 하던 장소였다. 모두에게로부 터 잊혀진 이 비밀스런 공간에 그는 이끌렸다. 지금도 수업을 마치고 이곳에 들려 깨어진 창을 향해 드리우는 불그스름한 노을을 캔버스 위로 담아내는 중이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그토록 낡았던 창고는, 모두에게 잊혀졌던 그 곳은, 온전히 그의 공간이었다. 그는 조심스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입을 작게 움직여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뒤로 찬란하게 노을이 드리웠다. J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H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아직 약속시간이 5분여 남아있었지만 앉은 자 세가 꽤나 오래 전에 도착한 듯한 인상을 주었다. “미안.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아냐. 나도 금방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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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이 조금 움츠러들었음을 느꼈다. 에어컨 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들 었다. 카페는 휴일의 여유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북적였다. 그는 자신이 이방 인처럼 여겨졌다. “뭘 좀 마실까?” “내가 사올게. 아메리카노?” “응.” H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향했다. 그의 눈은 H의 뒷모습을 쫓았다. 청바지에 면 티셔츠를 걸친 수수한 차림의 그와는 대조적으로 코발트블루의 실크블라우스에 블랙스커트를 맞춰 입은 H는 세련되고 화려했다. 그는 지나 치게 치장한 여성들에 대해 이유 없는 혐오감을 품었는데, H의 경우만은 예 외였다. 순전히 독단적인 오해일 수도 있는 것이었으나 H의 치장은 남을 의 식한 경우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철저히 자신 을 위한, 자신을 감추기 위한 가면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조금 뒤 H가 커피를 들고 오는 것을 그가 받아 들기 위해 일어섰으나 H의 앉는 동작이 더 빨랐다. “이렇게 일찍부터 돌아다녀도 되는 거야?” H가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신 후 물었다. “괜찮아. 오늘은 쉰다고 말해뒀어. 네 생일이니까……” “……고맙네, 그거.” H가 그를 빤히 쳐다봤다. 그는 문뜩 자신이 조그마한 선물조차 준비하지 못했음을 알고 난처해졌다.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되어 H를 쳐다보았다. 커 피를 마시려 고개를 숙인 H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와 H는 같은 와인 바에서 근무했던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 는 진학을 포기한 채 돈을 벌어야만 했다. 고등학교 졸업장으로 구할 수 있 는 일자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아르바이트 수준의 일들이 대부분 이었다. 호프집 아르바이트 같은 일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수위 가 턱밑까지 차오른 때였다. 그림을 조금 그릴 줄 아는 꼬마 예술가가 해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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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는 일이란 고작 그 정도였다. 오랫동안 한결같은 그의 성실함이 인정받 아 이름뿐이나마 매니저의 직함을 얻고 인근 사장들의 눈에 띄게 되었는데, 마침 새로이 와인 바를 창업하려던 사장으로부터 바의 매니저 직을 요청받았 다. 현재의 월급에 두 배 이상을 약속한 제안이 반가울 수밖에 없던 그는 기 꺼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소믈리에의 자격으로 H가 근무하게 되면서 둘의 인 연이 시작되었다.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신경 쓰지 마. 피곤한 거 알고 있어. 것보다,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 “어디?” “시립미술관. 아마 오늘일거야. 고흐 특별전.” “고흐?” 그의 표정엔 명확하게‘의외’ 가 나타나 있었다. H에게 그런 취미가 있었다 고는 생각 해본적도 없었다. 다만 낯빛이 다소 일그러진 듯한 H를 보자 자신 의 반응이 부족한 관심을 드러낸 것만 같아 씁쓸해졌다. “왜. 안 내켜?”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몰랐는데. 그런 취미가 있을 줄은.” “앞서 나가지 마, 아저씨. 그저 고흐가 특별할 뿐이야. 예술적 취미니 뭐니 할 만큼 고상한 사람은 아니니까.” 그는 가볍게 웃으며 식은 커피를 마저 마셨다. 주말의 시립미술관은 활기찼다. 아이들 손을 잡고 나온 가족들, 한껏 무리 지은 또래의 학생들과 연인들, 홀로 구경 나온 관람객들로 가득했다. “고흐의 인기가 이렇게 좋았었나?” 조금은 퉁명스러운 어투로 물어오는 H를 향해 그는 어깨를 들썩였다. 어쩐 지 그의 표정은 조금 무거워져 있었는데, 학교를 졸업한 이후 억누를 수밖에 없었던 그림에 대한 아련한 감정이 막연하게 불편한 형태로 피어올랐기 때문 이다. 일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찾아 온 미술관의 감회란 반갑잖게 마주친 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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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 같았다. “우연찮게 고흐의 평전을 읽은 적이 있어.” 과녁을 잃은 화살 같던 그의 시선이 H에게로 향했다. “그가 한때 성직자를 꿈꿨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그는 그 역시 한때 미술을 꿈꾸던 미술학도였음을 H가 알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H에게 자신의 얘기를 꺼낸 기억이 없었다. “우습지. 그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가 말이야. 아마 그가 그대로 성직자가 되었더라면 우리는 저토록 빛나는 그림을 볼 수 없었겠지.” H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그윽이 바라보았다. 검푸른 밤하늘을 무리지 어 나는 까마귀 아래로 세찬 바람에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밀밭. 생과 사의 공존이 자아내는 묘한 기운. H를 따라 그림을 쫓던 그는 어느새 바람을 맞으 며 황금빛 밀밭을 거닐었다. “가끔씩 고흐를 떠올릴 때면 언제나 그에게 묻곤 했지. 사촌누이와 매춘부 를 사랑한 화가, 광기로 얼룩진 화가, 일생동안 단 한 점의 그림을 팔았을 뿐 인 화가…… 당신은 어째서 그림을 그렸어야만 했느냐고…….” 밀밭을 거닐던 그는 그악한 까마귀 울음소리에 눈을 떴다. “……너무 감상적이 되어버렸나? 슬슬 배가 고파 오는데……. 아저씨, 근 사한 저녁 정도는 대접해주겠지?” “응? 아, 물론이지. 그럼 이제 나가볼까.” 뒤돌아 나가려던 그는 고개를 돌려 그림에 시선을 주었다. H가 재촉하는 소리의 끝음절이 귓가에 닿을 때까지 그의 시선은 어깨를 너머에 머물렀다. 당신은 어째서 그림을 그렸던가. 고흐를 향했다던 H의 물음은 왜인지 그에 게로 던져져 파동을 일으켰다. 마지막으로 붓을 잡아본 게 언제였더라. 미술 관을 나선 그는 슬며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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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J는 동급생이었지만 학교에서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그와는 다르게 J는 성악을 전공하고 있었다. 그 날도 J는 홀로 연습할 공간을 찾다 우연찮 게 그를 만난 것이라 했다. 냇가에 잠긴 흰 조약돌처럼 매끈매끈한 피부와 강 아지의 눈망울을 옮겨 놓은 듯한 J는 아름다웠다. J의 모습은 사춘기 또래의 남자아이들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도 적잖이 인상적으로 J의 첫인상 을 기억하고 있었다. 몇몇의 아이들이 그렇듯 남학생들의 입소문에 오를 만 도 했으나, 2년이 넘도록 J의 이름을 들은 기억은 없었다. 그는 아이들과 쉬 이 어울리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떠올렸다. 그의 그림에 관심을 가지는 이는 이제 그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가 창고 에서 그림을 그릴 때면 어김없이 나타났다. 방과 후 창고에서 그녀를 만나는 일은 어느새 일상이 되어 버렸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 그를, 혹은 그림을 바라보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했다. 그는 그녀의 노래가 듣기 좋았다. 체구 와는 다르게 풍부한 성량은 좁지 않은 창고의 천장을 가득 메웠다. “그 노래는 귀에 익숙한데?” 그녀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던 그는 붓과 팔레트를 내려놓고는 그녀에게로 돌아앉았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야.” 그녀는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청력을 잃어가던 베토벤이 신의 은총을 찬양하기 위해 프리드리히 쉴러 의 시를 빌려 곡을 입힌 거야. 혹시 다음 주일에 약속 있어?” “약속? 약속, 이랄 거까지야 없지만…….” “다행이다. 사실 교회에서 성가대 활동을 하고 있거든. 다음 주일에 합창 교향곡을 공연 할 예정이야. 보러 와줬으면 해.” 그녀는 윗옷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찾아 꺼내었다. 그리곤 그에게 바싹 다가가 안는 듯이 양 손을 그의 등 뒤로 넘겨 몸을 포개는가 싶더니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숨이 가빠지며 한철의 복숭아 같은 얼굴 이 되어버린 그는 자신의 목덜미에 매달린 나무로 된 십자가 목걸이를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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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았다. 소리를 죽여 숨을 가다듬던 그를 향해 슬며시 웃어 보이는 그녀에게 어떻다 말을 하지 못한 채 그는 돌아앉아 붓을 집어 들었다. 그림 속 진분홍 꽃들은 길가를 따라 화사하게 만발해 있었다. 째깍째깍. 그의 눈길은 바쁘게 시계를 쫓았다. 주방에서 나오는 어머니를 힐끔 쳐다보았다. 아버지가 나올 시간은 한참이나 남았다. 식당사정은 좀처 럼 나아지질 않았다. 당장의 임금이라도 줄이려면 학교를 쉬는 날엔 그가 식 당에 나와 도와야만 했다. 요즘 같아선 개인 레슨은 상상할 수도 없어서 혼자 연습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주방을 나온 어머니는 비질을 계속했다. 혼자 있는 쪽이 편했던 그도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녀는 분명 예쁜 소녀였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외로움과 쓸쓸함, 고 독의 쓰라림을 그녀도 느끼는 듯 했다. 그녀도 자신과 같은 공간에 머무는 듯 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보다 더한 어둠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의 그 림을, 혹은 그를 바라보는 눈빛을 통해 그는 확신했다. 그 안에서 빛나는 그 녀는 그에게 크나큰 위안을 주었다. 그는 그녀를 원했다. “어머니, 저 잠시만 나갔다 올게요.” 어디 가니, 묻는 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앞치마를 벗어던지고는 내처 달렸 다. 이미 교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생전 처음의 낯선 장소와 사람들 틈새에서 그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 서둘러 그녀를 찾아 주위를 살폈 다. 공연을 하는 성가대원들은 아직 자리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단상의 복판 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상이 벽에 걸려있었다. 앙상한 육체의 외로운 몸 짓. 그는 옷깃에 숨겨진 십자가 목걸이를 꺼내어 들여다보았다. “못 보던 학생인데. 처음이세요?” “예? 예. 전 그냥…….”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진 중년의 여성이 가만히 그를 앞쪽으로 잡아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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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오셨어요. 여기 앉으세요. 임 집사님 자리 좀 만들어 주세요. 오늘 처 음 나온 학생이래요.” “어마. 잘 오셨어 잘 오셨어.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백발의 노인은 그의 손을 덥석 잡고는 한껏 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곧 관현악단을 비롯한 성가대원들이 단상 우측에 마련된 무대로 들어섰다. 그는 쉽게 그녀를 발견 해내었는데, 하얀 가운을 걸친 그 모습이 광활한 설경 가운데 눈부시게 피어난 백합 같았다. 그녀도 그를 알아보았는지 생긋 웃어 보였다. “다음은 가브리엘 성가대의 찬양이 있겠습니다. 박수로써 청해 듣겠습니 다.” 지루했던 몇 차례의 의식이 치러진 후 기다리던 순서에 이르렀다. 우렁찬 박수가 실내를 가득 메우더니 조명이 어두워지고 성가대원들이 일어섰다. 무 대의 조명이 밝아지면서 지휘자의 지휘봉과 함께 일사분란하게 관현악단들 이 준비동작을 취했다. 숨소리마저 죽인 그에게 심장이 재촉해대었다. 나비의 날갯짓처럼 살랑이는 지휘봉을 따라 흐르는 목관악기의 경쾌한 선 율. 자그맣게 한 바퀴를 돈 선율을 뒤따라 나오는 남성의 장엄한 노랫소리. 경쟁하듯 내달리며 기교 부리는 현악의 율동. 뒤이어 찾아 든 폭풍전야의 정적. 지휘자는 한껏 몸을 웅크렸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숨소리 새어나오 듯 은밀한 호른에 이어 솟구친 지휘봉과 함께 폭발하듯 합창이 뿜어져 나왔 다. 환희의 송가. 높다란 교회의 천장에 이르도록 실내는 환희로 가득 찼다. 온 몸 구석구석 강렬한 전류가 흘렀다. 그는 왈칵, 눈물을 쏟을 뻔 했다. 공연이 끝나고 난 뒤에도 가시지 않은 감동으로 그의 몸은 질끔거렸다. 눈 을 감으면 좀 전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했다. 누구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여러 사람이 있었지만 그것은 그녀의 목소리였고, 그녀의 노래였다. 눈을 감 으면 그녀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오래 자리를 비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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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어머니에게 대강의 목적지도 얘기하지 않고 나왔구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녀를 만나고 싶은 충동이 다리를 무겁게 했다. 지금 그녀 를 만나게 된다면 금세 헤어질 수는 없을 터였다. 모래무덤을 뚫고 나오듯 힘 겹게 몸을 일으켜 자리를 빠져나왔다. 때어내는 발걸음마다 미련이 묻어났지 만 그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 “뭐? 프랑스로 떠난다고?” “응. 미리 말했어야 하는데…… 미안해.” H의 급작스러운 발언에 그는 손에 쥔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돌연 입맛이 가셨다. H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래, 그러려고 일도 그만두면서까지 프랑스어를 배우러 다닌 거야?” “그냥, 이래저래……. 미안해. 나도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어. 그래서 말 못 했던 거야. 그냥 한국에서 너와 이렇게 지낼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지만, 그 럴 수가 없더라. 나도 힘들었어.” 그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H가 재빨리 다음 말을 이어갔다. “일하면서부터 생각해 오던 일이야. 지체할수록 갈등만 더해지더라. 2주 후에 떠나. 그래서 말인데…….” 2주라. 그는 담담한 얼굴로 2주를 곱씹었다. “같이 가자, 우리. 너에게도 좋은 기회일거야.” 그는 H의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H의 얼굴엔 미안함과 안타까움과 미 련의 덩어리가 제자리 없이 섞여있었다. 초점을 잃은 그의 눈이 H를 향한 것 인지, 그 너머 아득한 무언가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샤워를 마치고 누워서도 그의 머릿속 혼란은 잦아들 줄 몰랐다. 같이 마신 술 탓만이 아니었다. 함께 프랑스로 가자는 H의 말이 그에게는 이별의 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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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럼 들렸다. 천장으로 아스라이 펼쳐지는 잔상에 마음이 무거웠다. ‘같이 가자고? 프랑스로? 우리가 그럴 사이라도 되나?’ 그는 눈을 감은 채 지난 시간을 더듬어 내려갔다. 직장 동료인 H의 첫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업소의 식구들이 자리를 마련 했다. 사장이 간단히 마련한 자리로 마무리하려는 것을 몇몇 동료들이 2차를 고집하여 자리를 옮겼다. 사장은 이미 선약을 이유로 자리를 뜬 뒤였다. 어 울릴 만큼 어울렸다고 생각한 그 역시 적당한 핑계거리를 찾아내어 벗어나려 했으나, 매니저님이 이런 자리에 빠지면 단합이 되겠느냐는 알바생들의 끈질 긴 권유에 귀가를 체념했다. “야, 아까 사장님이 준 와인 있잖아. 그거 어디다 뒀냐? 잘 챙겨왔어?” “그거 니가 들고 왔잖아, 빙신아. 매니저님 옆에 있네. 저 또라이.” “아, 저기 있네. 헤헤. 누나. 저것 좀 따도 되요? 소주만 마시니까 질리는 데, 헤헤.” H는 흔쾌히 허락하며 종업원을 불러 사람 수대로 잔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 했다. “뭐야 이거. 마주앙 아냐? 주려면 좀 좋은 걸 주지, 있는 사람이 더 한다니 까.” “어쩐지, 내 목구멍이 호강 한 번 하나 했다. 신이시여, 저에게 로마네 꽁 띠는 언제쯤 허락할 작정이십니까!” 자리한 모두가 두 악동의 과장된 익살에 소리 내어 웃었다. H는 직접‘마 주앙’ 을 들어 잔에 따라 주었다. “꼬맹이들. 마주앙이 얼마나 맛있는지는 알고 하는 소리야? 신이 있다면 아마도 로마네 꽁띠 따위 만들어 내지도 않았을 거야. 상처 받은 마주앙을 위 해서, 건배!” “어이쿠. 마주앙 예찬론자인 누나의 생일을 다시 한 번 축하하며, 건배!” 또 다시 자리에선 시원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웃음 뒤에 남겨진 H의 황량한 얼굴을 담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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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집을 나와 각자의 방향으로 헤어지고 나자 얼마간 방향이 같은 그와 H만 이 남게 되었다. 그는 적당히 술기운이 오른 상태였지만, 얼마 남지 않은 독 을 가득 채우고 싶은 아쉬움이 남았다. “아마 아직도 신이 존재한다면 그건, 로마네 꽁띠 같은 것이겠지?” 그가 택시를 기다리는 H의 쪽으로 붙어서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것 참 안됐네요. ……저처럼.” H와 눈이 마주친 그는 가슴 속 어딘가가 저며 옴과 동시에 강렬한 욕정을 느꼈다. “괜찮다면, 조금만 더 마시지 않을래?” 두 사람은 한 침대에서 나란히 햇살을 받으며 눈을 떴다. 그는 반쯤 잠긴 H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를 향해 멋쩍게 웃어 보였기 때문인지 지 난밤의 황량함은 온데간데없었다. 그 역시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이고는 스르 르 눈을 감았다. 그 뒤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비밀스러운 시간을 가졌다. 업소의 사람들 은 둘 사이의 변화를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다지 유별 난 것도 아니었다. 어쩌다 휴일이 겹치는 날에서야 같이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고, 잠을 잤다. 적어도 그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 수시입학전형이 가까워 오면서 그녀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 다. 느지막이 찾아간 창고엔 달빛이 홀로 노닐 뿐이었다. 억눌릴수록 강하게 반발하는 용수철처럼 그의 마음은 사정없이 그녀를 향했다. 빼먹지 않고 교 회를 나가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구덩이처럼 파인 아버지의 두 뺨을, 끄물거리는 하늘을 인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와 눈길과 미소야말로, 연신 단상에서 떠들어대던 신의 무한한 사랑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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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짬짬이 시간을 내어 얼마 남지 않은 그녀의 생일을 위한 그림을 그렸 다. 청명한 하늘 아래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소녀의 몸짓. 당장이라도 소 녀의 노랫소리가 허름한 창고의 창을 타고 넘어 밤하늘을 성스럽게 적실 것 만 같았다. “광채가 나는 그림이네.” “와, 왔어?” 그녀에 대한 반가움을 느낄 새도 없이 그는 서둘러 이젤의 캔버스를 뒤집 어 가렸다. “뭔데 그렇게 감추는 거야. 자세히 보고 싶어, 보여줘.” “별거 아냐. 학교 숙제야, 학교 숙제. 완성이 덜 된 거라 좀 그래. 완성되면 보여줄게. 꼭 보여줄게.” “후훗. 알았어. 그러니 더 기대되는데.”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물감이 엉기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문득 들었지만, 그는 되도록 그녀를 놀라게 하고 싶었다. 달빛에 반사된 그녀의 모습이 그림 속 소녀와 꼭 닮아있었다. “이렇게 보는 건 오랜만이네. 무슨 일이야?” “혹시 내가 방해라도 된 건가?” “아냐, 아냐. 늦은 것 같아서 마침 들어가려던 참이었어. 같이 갈래?” “좋아.” 유난히도 달이 밝은 밤이었다. 곱게 퍼진 달무리가 포근하니 달을 감싸 안 았다. 냇가를 따라 거니는 발밑에도 선명하게 달이 떠올라 있었다. 그녀와 좀 더 있고 싶은 마음에 그는 걸음을 멈추고 난간에 몸을 기대어 섰다. “이렇게 달이 밝은 밤이면 집에 들어가고 싶지가 않아.” “부모님이 들었다면 서운해 하시겠는걸?” 그녀 역시 난간에 기대어 서며 웃음기 띤 얼굴로 달을 올려다보았다. “내 방에선 달이 보이지 않거든.” 순간이나마 밤이 정지했다. 낮게 불어오는 바람에 물결이 일렁이며 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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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그러졌다. “그러고 보면, 나는 너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어.” 그가 슬며시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빛이 아득하니 멀었다. 곁에 있으면서도 완전히 분리된 공간에 서로가 존재하는 기분이 들었다. “네가 아는 그대로가 나의 전부야. 그 이상은 없어.” “그렇게 말해봤자…….” 애써 시선을 정면으로 거둔 그의 볼에 따듯하고 보드라운 감촉이 전해졌 다. 그는 턱하니 숨이 막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여기 응급실이 어디예요? 응급실이 어디냐구요!” 데스크의 안내원은 돌연한 남성의 재촉에 다소 신경질적으로 응급실을 가 리켰다. 적막을 요란스럽게 깨트리며 걸려온 전화는 병원에서 걸려온 것이었다. 남 편의 사고소식. 어머니는 놀란 가슴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곤히 자는 아들을 깨워 황급히 뛰쳐나갔다. 아버지의 몰골은 처참했다. 그의 눈앞으로 어느 전쟁영화에서 본 적이 있 는 부상병동내 패잔병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병원으로 가는 동안 피가 나 도록 입술을 깨물며 감정을 억누르던 그의 어머니는 참혹한 광경 앞에 정신 을 잃고 쓰러졌다. 그는 석상이 된 듯 눈물마저 잊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커브 길의 난간을 들이 받고 굴러 떨어진 대형 사고였다. 졸음운전이 그 원 인이었다.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수입에 그의 아버지는 대리운전을 시작했 다. 늘 피곤해하는 아버지를 보면서도 그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괜한 걱 정이 늘어나기 밖에 더 하겠느냐며 쉬쉬하라고 했다. 어머니에게 그 말을 전 해 듣고는 앉은 자리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며칠 뒤 동승했던 차주의 의식이 간신히 돌아왔을 때, 그의 아버지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고야 말았 다. 장례식장의 공기도 처음이었다. 장례절차도 몰랐다. 상주복을 갖춰 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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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엔 솜털이 사라지지도 않았다. 아버지에게 선물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가슴에 꽃아 드린 몇 송이의 카네이션이 전부였다. 영정 사진 양측에 자리한 국화를 보면서 그는 서럽고 또 서러웠다.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반 친구들의 얼굴도 보인 듯 했다. J의 얼굴은 보 이질 않았다. 아니, J의 얼굴을 본 듯도 했다. 그는 무언가를 본 듯도, 보지 않은 듯도 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강물에 아버지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그 날, 그의 방에서 소녀가 그를 맞 이했다. 여전히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소녀는 그곳에 어울리지 않았다. 쾌쾌 하고 거뭇거뭇 얼룩진 벽지. 짙은 어둠에 삼켜진 실내. 웃을 기력조차 없는 육체. 그림을 갈가리 찢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문을 박차고 나 갔다. 대리운전 중의 사고를 이유로 아버지의 보험금은 지급되지 않았다. 피해자 의 형사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해 또 다시 빚을 져야했다. 아버지의 부재로 인 한 슬픔은 생활고의 고통으로 잊혀졌다.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그를 말린 것 은 어머니의 간절한 호소 덕분이었다. 대신 그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식당으 로 달려왔다. 지는 듯 받아들인 어머니는 소리죽여 흐느꼈다. 교회에 나가는 일도 그만두었다. 주말엔 새로운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 당장 그의 삶 을 유지해 주는 것은 기도가 아닌 노동이었다. 그 사실을 그는 절실히 깨달았 다. 뜻밖에도 쉬는 시간에 J가 그를 찾아왔다. 수업이 끝나면 예의 그 창고에 서 볼 수 있겠냐고 물어왔다. 그는 무어라 대꾸하지 않았다. 기다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J는 돌아섰다. 그는 식당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거두어 창고를 향해 달렸다.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낡은 의자에 앉은 J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왜 J를 피하려 했었는지 그제야 알 것만 같았다. 달빛을 받아 더욱 빛나는 J는 고결해 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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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까지 했다. 자신과 J를 동시에 그리는 것. 그것은 마치 현실과 비현실의 공 존을 목격하는 것과 같은 모순이었다. 그는 고통스러웠다. “……바빴어.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거든……. 일찍, 가 봐야 해.” J로부터 멀찍이 선 채 그는 의도하지 않았던 변명조의 말들을 늘어놓았다. J는 몸을 일으켜 달빛에 미끄러지듯 그에게로 다가섰다. 둘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의 심장이 작은 옷을 껴입은 듯 조여왔다. J의 눈은 앙상한 나뭇가 지를 담고 있었다. 어둠의 깊이는 끝이 없었다. 이대로 J를 안고 싶은 충동이 거세게 이는 순간, J의 손이 그의 목 언저리를 향했다. “목걸이…… 하지 않았구나” 눈뭉치로 맞은 듯 차가운 기운이 그의 머리를 감돌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 야 할 것만 같았지만 서로가 밀리고 밀치는 상념 속에 말은 실체가 되지 못했 다. J는 한참을 머뭇거렸다. J의 얼굴은 광채를 잃어가고 있었다. “……미안해.” 나직이 의미 불명의 한마디를 건네며 스쳐지나가는 J를, 그는 어쩐지 잡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미안할 것은 무어란 말인가. 다만, 그것이 긴 이별을 고 하는 작별의 인사이기도 하였음을 나중에서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 비에 젖어 무른 흙길. 바람 소리 하나 없는 고요. 아득히 높은 언덕. 거대 한 십자가를 인 그녀가 나를 지나쳐 간다. 들리지 않는 것일까. 소리 내어 불 러도 멈춰 서질 않는다. 뒤를 쫓아. 가파른 언덕길. 얄궂은 진창길. 무거운 십자가. 맨발의 그녀. 맨발의 나. 뒤를 쫓아. 어디를 가. 소리쳐 물어도 대답 이 없다. 썩어 문드러진 시체를 벗 삼아 오르고 또 올라. 도와줄게. 큰소리 쳐봐도 십자가의 꽁무니조차 들지 못했다. 썩어 문드러진 시체를 벗 삼아 오 르고 또 올라. 십자가 세워진 이곳이구나. 저기 저 십자가에 매달린 당신은 누구. 환하게 빛나는 당신은 누구. 그녀일까. 그녀다. 여기야 여기. 소리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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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도 대답이 없다. 썩어 문드러진 시체를 벗 삼아 오르고 또 올라. 그제야 내 어깨 위 십자가를 쳐다본다. 가파른 언덕길. 얄궂은 진창길. 무거운 십자 가. 맨발의 그녀. 맨발의 나. 썩어 문드러진 시체를 벗 삼아 오르고 또 올라. 그것은 꿈이었을까? * 참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니, 실제로 많이 참아왔던 일이었다. 손님과의 사소한 시비가 주먹다짐으로 번진 것은 그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일 로 인해 그는 해고되었다. 사장은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좋은 자리 를 소개해 주겠다고 달랬다. 괜찮다며 거듭 사양한 쪽은 오히려 그였다. 그때 그는 J를 찾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완성된 그림을 J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J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학교에서조차 J의 행 방을 알지 못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상할 만큼 더 이상 붓을 들지 않았다. 시간은 J의 기억을 비켜 흘렀다. 그는 J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아니, J를 기억하기 위해 몇 명의 여자를 만나고 헤어졌다. 그들은 하나같이 속물적이 고 이기적이었지만, 누구 하나 J만큼 이기적이질 못했다. 그는 점점 허무의 일상에 침잠해 들어갔다. H는 그에게 바라는 것이 없었다. 프랑스로의 동행은 이별통보가 아닌, H 의 유일한 요구사항이었다. 오히려 무언가를 바라고 경계하는 쪽은 그 자신 이라는 생각이 들자 씁쓸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2년 전, 건강의 악화로 병원 신세 지던 어머니를 보내고 혼자가 된 그로서는 이 땅에 대한 미련 같은 것이 남아있지 않았다. 식당을 처분하고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합하면 외지에서 의 생활도 당분간 큰 무리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H의 경제력은 자신보다 나으면 나았지 덜하지는 않을 터였다. H의 얘기에 따르면 그녀의 집안은 필 요 이상으로 부유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사채업으로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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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알았을 때부터 H는 아버지를, 그의 가족을 증오하기 시작했다. “와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거짓말을 하는 것은 인간들이야. 쇼비뇽은 쇼비뇽의 맛을, 샤르도네는 샤르도네의 맛을 내. 와인을 만든다는 건 쇼비뇽 을, 샤르도네를, 피노 누아를 존중할 줄 아는 태도에서 시작하는 거야. 거기 에 멋대로 가치를 부여하고, 허세를 부리기 위한 도구로, 달콤한 쾌락을 위 한 소모품으로 이용하는 건 인간들이야. 네가 일하고 있는 곳의 말이지. 흐 흐. 질색이야. 꼴도 보기 싫다구! ……프랑스로 갈거야. 보르도나 부르고뉴 가 아니어도 좋아. 외딴 시골마을이어도 상관없단 말이야! 좋은 와인을 만들 거야. 내가 말이지. 내가 직접…….” 그 날의 H는 꽤나 취했던 것 같다. 같이 가자, 라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 다. 그는 핸드폰을 열어 날짜를 확인했다. 3일 후였다. H와 함께 떠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는 눈을 감으며 되뇌었다. “여보세요.” “바빠?” “아니. 이것저것 가서 쓸 것 좀 샀는데, 정리하는 중이었어.” “응, 그래. 나 짤렸어.” “안 그래도 요 전에 인사도 할 겸 가게에 들렀다가 들었어. 왜 그랬어? 멍 청하게…… 너 그럼, 설마…….” “너 먼저 가 있어야겠어. 프랑스에.” “정말? 진짜야? 아니, 잠깐. 나 먼저는 뭐야? 넌 언제 오겠다는 건데? 무슨 일 있어?” “나도 잘 몰라. 그리고 무슨 일이 있냐니. 나도 개인의 사정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거든.” “후.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그래, 그 사정이라는 게 뭔데?” “…….” “여보세요. 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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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릴 거야.” “그림?” “그래, 그림. 그림이 완성되면 갈게. 프랑스.” “후훗. 술 먹고 그렇게 통곡을 하더니…….” “뭐? 무슨 얘기야?” “아냐. 나 전화 왔거든? 있다가 연락하자. 끊는다.” “야. 야!” 다소 어리둥절했지만 그는 오랜만에 웃음이 나왔다. H에겐 금방 뒤 따라 갈 듯이 얘기했지만 정작 그는 기한을 두지 않았다. 아직은 아니었다. H와 함께 하기엔 그의 벽이 아직도 단단했다. H는 스스로의 길을 택했다. 그는 자신이 방황하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했다. 어려운 길은 이제부터일지 모른다. 레드와인의 붉은빛이 도는 하늘 아래 포도밭은 자줏빛 색이 감돈다. 수수 하지만 건강한 미녀가 포도나무 그늘을 이불 삼아 달콤한 휴식을 취하고 있 다. 선뜻 팔을 베개로 내어준 남자가 그윽이 여자를 바라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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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분홍 펄 립스틱
김대식
연분홍 펄 립스틱
아침 「일어나세요. 일어나세요. 아침입니다…」 요란한 소리가 방에 퍼져 나간다. 고여 있던 공기가 흔들린다. 하늘색 이불 속에서 하얀 손이 나와 춤을 춘다. 요란한 소리와도. 흔들리는 공기와도. 어 울리지 않는 춤. 느리고. 부드럽게. 툭! 침대 옆 탁자 위에서 춤을 추던 손이 시계에 걸려 멈춰 섰다. 하얀 손이 시계를 감싸 안는다. 살며시. 시계 정수리에 있는 버튼을 누른다. 요란한 소 리가 그치고, 흔들리던 공기도 이내 차분해진다. 재영은 힘겹게 눈을 떴다. 군데군데 묻어 있는 어둠. 고요한 새벽 공기. 쥐 고 있던 시계를 보니 6시 35분이다. 월요일 아침은 늘 힘들지만 오늘은 유독 피곤하다. 이불 밖으로 나오기가 쉽지 않다. 탁자 위에는 입식액자 두 개가 있다. 한낮의 돌담길을 배경으로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머금은 남자. 화려한 밤거리를 배경으로 해맑게 웃는 한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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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액자를 하나씩 차지하고 있는 두 사람의 사진. 여자의 사진에 눈길이 머 문다. ‘윤희 때문인가?’ 어제는 윤희에게 하루를 고스란히 바쳤다. 신이 난 윤희는 좀처럼 스스로 를 컨트롤하지 못했다. 충실하게 즐겼다. 감정에. 즐거움에. 환희에. 그 때문인가. 재영은 쉽사리 일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 했다. 다음번에는 조금 더 자제를 시켜야겠어. 오랜만에 시간을 준 것이 미 안해 그냥 두고 본 것인데. 다음날 까지 지장을 준다면 곤란하다. 다음엔 조 금은 제어해줘야겠어.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윤희의 옷가지들이 어지럽게 흩어져있는 바닥. 힘겹게 일어나 침대에 걸터 앉은 재영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어제, 윤희는 정말 아름다웠어.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끔거릴만큼. 몇몇 아저씨들은 지나가다가 고개를 돌려 볼 정도였으니까. 덕분에 공짜 술도 제법 마실 수 있었지. 그래도 너무 피곤하다. 출근하기 싫다. 반지 재영은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온몸에 는적이던 피로감은 제법 옅어졌다. 월요일 아침. 서늘한 공기. 옷깃을 파고 들어와 몸에 닿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정류장에 섰다. 출근 하려는 사람들. 학교 가려는 학 생들. 시간에 쫓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그 틈에 재영도 스며든다. 사 람들은 모두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다. 모두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모 습. 왼쪽에서 오는 버스를 타고 오른쪽으로 가기 위해 사람들은 모두 왼쪽을 바라본다. 당연한 일이겠지. 버스는 왼쪽에서 오고, 오른쪽으로 가게 되어있 으니까. 외롭다. 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검은 뒤통수를 바라보면서 재영은 문득 외 로움이 느껴졌다. 사람들의 검은 뒤통수. 그것은 월요일을 시작하는 기다림 이다. 그들의 한결같은 기다림 속에서 전해지는 답답함. 그리고 외로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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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들 틈에서, 사람들처럼 서있지만 재영은 외로웠다. 어째서 앞을 볼 수는 없는 걸까. 어째서 모두 검은 뒤통수의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는 걸까. 윤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니, 윤희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늘 당당한 그 녀. 이렇게 불쑥 생각 속에 나타나는 그녀가 조금씩 무서워진다. 161번 버스 창가자리에 앉았다. 창틀에 올려놓은 손. 하얗고. 가늘다. 길게 뻗은 손가락에 금색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윤희가 골라준 반지. “저 반지, 정말 예쁘다.” 그날 밤. 쥬얼리 샵을 지나면서 윤희는 말했었다. 진열되어 있는 반지를 보 며, 진열되어 있는 반지보다 더 빛나는 눈으로. 다음 날 홀린 듯이 쥬얼리 샵 을 다시 찾았다. 한참을 망설이며 서성였다. “어떻게 오셨어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머뭇머뭇 손가락으로 반지 하나를 가리켰다. 윤희 가 예쁘다고 했던 반지. 떨리는 손으로 반지 케이스를 받아 나왔다. 윤희에 게 처음으로 사주었던 선물이다.
햇살에 반짝이는 반지를 조심스럽게 뺐
다. 하얀 손위에서 금색 반지는 여전히 빛을 반짝인다. 천천히 주머니에 넣 고 손을 뺐다. 윤희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다시 고개를 드는 생각. 땀이 배어나온 손을 손 수건에 닦는다. 무서운 입사동기 “어이! 윤재영씨!” 굵은 목소리와 그에 어울리지 않는 발랄한 말투. 보나마나 인수다. 입사동 기 박인수. 인수가 저렇게 부를 때, 이유는 단 하나다. 술집 아가씨가 새로 왔으니 보러 가자는 것. 무시하고 그냥 갈까 하다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아침부터 뭘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걷는거야?” 인수가 어깨동무를 하며 말을 이었다. 나보다 두 배쯤은 더 큰 덩치의 주인 에게 어깨가 잡힌 채 길을 걷는다. 저녁이었다면 불량배에게 끌려가는 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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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애인이 돈이라도 들고 날랐나?” 월요일. 아침부터.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이 녀석의 머리를 언젠가 한 번은 열어 보고 싶다. “좀 피곤해서 그래.” “하긴, 윤재영이한테 돈 들고 나를만한 애인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지. 빼어 난 용모에, 잘나 가는 S사 사원인데.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는 몹쓸 병에만 안걸렸어도 내가 나서 줄 텐데 말이지. 아까워. 그저 아까워.” 침묵으로 대답한다. “그건 그렇고, 오늘 저녁에 시간 어때?” 본론이다. “어제 신 마담한테 문자가 왔는데 말이지. 죽이는 아가씨가 하나 들어왔다 는데. 보러가자. 응? 보러가자!” “혼자 가.” “알잖아. 내가 생긴게 남자들이 좋아할 타입이지, 여자들이 좋아할 타입은 아니잖아. 니가 있어야 테이블이 살지. 꽃미남 친구 덕 좀 보자구!” 아마 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갈 때까지 이렇게 조를 테니까. 그 쪽으로 는 나름대로 끈기와 인내를 갖춘, 지독한 놈이다. 무서운 녀석을 동기로 뒀 다. “알았다. 알았어. 그럼 수요일 저녁에 가자.” 윤희의 모습이 스쳤다. “좋아! 너 약속한거다!” 좋냐? 회전문을 통과해 로비로 들어서면서 인수를 째려봤다. 있는 힘을 다 해서. “좋은 아침입니다!” 수위 아저씨가 힘차게 인사를 한다. 고개만 숙여 인사를 받았다. 그다지 좋 은 아침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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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좋은 아침입니다. 별일 없으시죠?” 안부까지 묻는 인수. 좋냐? 째려봤다. 아까 보다 더 힘껏. 밤의 삶 새로 왔다는 아가씨는 제법 예뻤다. 인수는 입이 귀, 아니 뒤통수에 걸렸 다. 지치지도 않고 떠들어댄다. 술도 따라주는 대로 마신다. 벌써 테이블세 팅을 세 번째 하고 있다. 신 마담의 입도 점점 뒤통수로 간다. 이 가게 안에서 입이 점점 작아지는 사람은 나뿐이다. 다음 월급이 나올 때 까지 점심값이 두 배로 들것을 생각하면 내 입은 도저히 뒤통수 쪽으로 가지 않는다. 저 자식은 다음 월급이 나올 때까지 내게 전화를 할 것이다. 점심시 간에 맞춰서. 무서운 놈. 정말이지 무섭고, 거지같은 놈을 입사 동기로 뒀다. 나는. “나 아직 하나도 안취했어! 우리 김양이. 오빠하고 2차갈거지?”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저런 말을 서슴없이, 200데시벨은 됨직한 목소리 로, 줄창 뱉어낼 수 있는 용기가 존경스러워서. 그리고 창피해서. 하나도 취하지 않았다를 프랑스사람보다 더 불어스럽게 말하는 인수를 택 시에 구겨 넣었다. 기사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아저씨의 눈빛에 험악한 기 운이 돌았다. “죄송합니다. 수유2동 동사무소 앞에 던져주세요. 집은 제법 잘 찾아가 요.” 웃음으로 아저씨의 눈빛을 받아냈다. 비굴하게. 5만원을 건네면서. 평소 나오던 택시비의 3배쯤 된다. 거지같은 입사동기.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택시가 떠나고 함께 나온 김양이 인사를 했다. 뭐가 감사한 걸까. 다시 가 게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스산했다. 여자의 뒷모습에서 문득 윤희가 스친다. 저 아가씨에게도 삶은 밤에만 있을까. “내 삶은 언제나 밤이지. 당신이 그렇게 용기를 내지 않으면. 난 이렇게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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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을 밤에 묻힌 채 살게 될 거야. 언제쯤 내게도 햇살을 주겠어?” 술에 취한 윤희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녀의 눈물. 처음이었다. 항상 강하고, 당당해 보이던 윤희가. 눈물을 보였다. 늘 참기만 했던. 참아야 했 던. 윤희의 슬픔.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원망하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행복이 우리에게도 허락되어 준다면. 우리는... 행복할...수...있을까... 걸음을 빨리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윤희. 갇혀 지내고 있는 그 녀의 갑갑함이 느껴진다. 어서 그녀에게 자유를 주고 싶다. 그녀는 내 안에 서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그녀를 가둬두기엔 내가 너무 작을지도 몰라. 윤희 는 답답함을 더 많이 느끼고 있었고, 나는 윤희의 답답함을 감당할 만큼의 용 기를 갖지 못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빨리 집으로 들어가 그녀에게 자유를 주는 일 뿐이다. 첫 만남 고등학교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겨울. 윤희를 처음 만났다. 벌써 15년이 훌쩍 넘었으니 질기다면 질긴 인연이다. 쇼핑몰 여성의류 코너에서였다. 여 자친구에게 선물할 옷을 고르기 위해 들어선 그 곳. 거기에서 윤희는 하얀색 코트를 보고 있었다. 희고.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코트를 만지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고, 그녀는 웃으며 다가왔다. 당황스러웠고. 혼란스러웠다. 도망쳐야 했는데.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의 미소 앞에서 나는 저항할 방법 을 알지 못했다. 그 때 도망쳤다면 그녀를 만나지 않았을 수 도 있었을까. 어 쩌면. 그녀와의 만남이 운명이었다면. 도망칠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 에게서 벗어날 길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을지도. 이미 오래전부터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그녀는 때를 기 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서로에게 운명일 수밖에 없는 그 시기. 그 타이밍.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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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에게는 처음이 아닌. 나에게는 처음이었던. 그 날. 우리의, 만남. 그렇게 그녀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혼란스러움은 더해 갔다. 윤희는 영리했다. 영악하게 나를 괴롭혔다. 그리고 또 집요하게.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후 윤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또 어디선가 나를 지켜 보고 있는 것일까. 혼란스러움에 발목이 잡힌 나는 그 여자 생각에서 벗어나 지 못했다. 그 여자. 윤희. 그녀에게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결국 고교시절의 풋내기 첫사랑은 쉽게 끝이 나버렸다. 혼란에 혼란을 더한 채 나는 떠내려가 고 있었다. 윤희가 다시 모습을 나타낸 것은 대학교를 입학하고 혼자 자취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였다. 이제 막 시작한 대학생활과 봄의 싱그러움에 잔뜩 취해 있는 내게 그녀는 다시 다가왔다. 당당한 눈빛. 마법과도 같은 미소. 그 때부터 삶은 전쟁이 되어 버렸다. 그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끝도 없이 허우적거렸지만 소용없었다. 그녀에게서 단 한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확인 할 뿐이었다. 대학 졸업장을 받아 들 때쯤 모든 것을 체념했다. 그녀에게 무릎을 꿇었고, 윤희는 내 삶의 일부가 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녀를 눈치 챌까 두려운. 그래서 더 그녀에게 의지하는. 아주 묘한 마법 같은 삶. 사진 그녀를 받아들이고 나서는 사람들을 피해야 했다. 그녀는 떳떳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당당하고 떳떳하게 그녀를 내 보일 수 없었 다. “뭐가 그렇게 두려워?” “당당해져봐.” “적어도 자신을 속이지는 마.” 적어도 자신을 속이지는 마. 사람들에게 떳떳하게 자신을 보여주지 못하는 내게 윤희는 말했다.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 것보다 나 자신을 속이는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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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힘든 일이라고. 윤희는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지쳐 가고 있다는 것을. 이 미 그녀에게 굴복해 버린 나를. 윤희는 영리했고. 영악했다. 조금씩. 천천히. 그녀는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윤희 때문에 지쳐가는 삶을 윤희에게 위로 받고 있었다. 늘 당당했지만. 윤희도 지치기는 마찬가지였을까. 언젠가 보았던 그녀의 눈물. 돌담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날씨 좋다. 이런 날 거래처나 돌고 있어야 하다니. 회사원 하기 싫어진 다.” 인수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윤희 생각을 급하게 지웠다. 긴장의 끈 을 잠시만 늦추면 어김없이 윤희 생각에 빠져들고 만다. “야, 거기 서봐. 사진 한 장 찍어줄게. 이 좋은 날씨에, 돌담길에, 너무 아 깝다.” 거래처 창고에 물품상태를 찍기 위해 가져온 카메라를 눈에 대고 인수가 말했다. 찍지 말라는 말이 미처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인수는 셔터를 눌렀 다. “이야, 잘 나왔는데!” 인수가 말했다. 카메라를 들여다보며. 얼마 후 건네받은 사진은 인수 말처럼 잘 나왔다. 윤희도 사진 찍으면 잘 나올텐데. 그러고 보니 윤희 사진이 한 장도 없네. 햇살 좋은 한 낮에 예쁜 돌담길 앞에서 사진 한 장 찍을 수 없는 윤희. 그녀가 안쓰러웠다. 그날 밤 윤희는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내 마음 때문이었는지, 그녀 의 자존심 때문이었는지. 그녀는 전 보다 더 발랄하게 행동했다. 보란 듯이. 지나가는 남자에게 카메라를 내밀었다. 그리고는 해맑게 웃으며 카메라를 바 라봤다. 작은 입식 액자 두 개를 샀다. 하나에는 내 사진을. 다른 하나에는 윤희 사 진을 넣었다. 사진 속에 윤희는 예뻤고, 어딘가 서글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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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밥 서류를 검토하는데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탁탁 두드린다. 흠칫 하며 돌아 보니, 인수다. “어제는 정말 고마웠다. 역시 넌 내 친구다. 오늘 감사의 뜻으로 내가 한 잔 살게.” 아서라. “됐어! 정말 괜찮아! 진심이야! 마음만으로 충분해!” 진심이다. 그 마음만으로도 나는 현기증이 난다. “그래도 내가 머리검은 짐승으로 태어나 은혜를 갚지 않으면 삼강오륜 에…” 농담에 진심을 얹은 이 녀석의 덫에 걸려들었다. 술이 아닌 밥을 먹는다는 조건으로 인수를 돌려보냈다. 조만간 저놈을 퇴 사시키거나 내가 사표를 쓰거나. 결론을 내야 할 것 같다. 결재를 받기 위해 서류를 챙겨들었다. “강부장 그 새끼,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그 사람도 많은데서 사람을 쪽을 줘도 유분수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만하면 기획안치고 완벽한거 아냐? 안그래? 그렇게 보는 눈이 없어가지고 어떻게 부장씩이나 됐는지. 개 새끼…” 한 시간째다. 늦은 저녁. 인수는 퍼먹고 있는 국밥의 밥알보다도 많은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말이 강부장을 욕하는 말이다. 어제 그렇게 술을 마셨으니 기획안이 잘 나왔을 리가 없다. 제대로 깨진 모양이다. “에이 나쁜 새끼. 기분도 더러운데 김양이나 보러갈까?” 어떻게 저렇게 결론이 나오는걸까.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다. “너도 갈래? 같이 가자!” “됐어.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쉴래.”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머. 나도 일찍 들어가야지. 기획안이나 만들어야겠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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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이 처량해 보인다. 고개를 들려는 동정심을 억지로 뭉개버렸다. 오늘 은 정말 일찍 들어가고 싶다. 엄밀히 말하면 집에 일찍 들어가고 싶은 것은 아니다. 화장품 가게가 문을 닫기 전에 들리고 싶을 뿐이다. 화장품가게 오후에 잠시 거래처에 들릴 일이 있었다. 햇살은 맑고 따사로웠다. 사람들 의 모습이 깔끔해 보일정도로. 밝고. 맑았다. 사람들 속에 묻혀 거리를 걸었 다. 한 손에는 가방을 남은 손에는 커피를 들고. 얼마나 걸었을까.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화장품가게 쇼윈도에 붙어있는. 화사하게 웃고 있는 여자. 쿵. 쿵. 쿵. 쿵. 심장이 울리기 시작한다. 걸음을 빨리했다. 빨대로 차가운 커 피를 입 안 가득 빨아 올렸다. 거래처에 도착해서도 심장의 울림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어떻게 일 을 진행시켰는지도 모르겠다. 거래처 신임 본부장이라는 사람과 탁자를 사 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쿵. 쿵. 쿵. 쿵. 서류를 꺼내놓고 말을 이었다. 스스로 도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탁자 위로 쏟아져 내린 말들은 이내 제각기 흩어 져 버렸다. 말들이 달려가는 곳마다 화장품 가게의 그 여자가 있었고, 윤희 가 있었다. 간간이 안경 너머 마주치는 본부장의 눈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말 들은 더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갔고, 의식은 시간의 흐름을 쫓지 못했다. “네, 알겠습니다. 검토해 보고 연락드리죠.” 그의 말에는 표정이 없었다. 몇 장의 서류를 남겨두고 서둘러 사무실을 빠 져나왔다. 아마 마지막 인사는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건물 로비 한쪽에 전신 거울이 있었다.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안에 서있는 남자에게서는 쓸쓸함이 묻어났다. 눈에서 생기가 점점 사라지는 것 같다. 툭. 툭. 잔뜩 묻어 있는 쓸 쓸함을 털어냈다. 어깨도. 팔도. 다리도. 거리에는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어슴푸레하게 저녁 빛이 도는 거리를 걸었다. 간판의 화려한 모습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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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 화장품가게 앞에 섰다. 연분홍 펄 립스틱. 걸음을 멈추고 바 라보았다. 쇼윈도에 붙어 있는 광고표지. 그 속에는 립스틱을 바르고 웃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들어 있었다. 윤희가 바르면 저 여자보다 더 예쁠거야.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여자의 입술을. 연분홍 펄 립스틱을 바른. 그 입술을. 문자메시지 지잉.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윤희~오늘시간어때?만나고싶은데」 윤희를 찾는 문자다. 누굴까? 지난 주말에 만났던 남자인 것 같은데. 그 날, 윤희는 많이 취해 있었다. 모처럼 맞이한 자유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해 방감에 들떠 있었고, 가벼워진 가슴에 술을 담아 넣었다. 그리고 많은 남자 들을 만났다. 그 와중에 내 휴대폰으로 번호를 교환한 모양이다. 처음 있는 일이다. 그녀는 늘 나와의 생활을 분리해왔다. 어쩌면 내 쪽에서 더 적극적으로 분리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그녀를 내보일 용기가 없다. 우리는 서로의 생활에 함부로 뛰어들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요즘 들어 내 생활 속에 불쑥 나타나고는 한다. 그녀는 영리했 고. 영악했다. 조금씩, 천천히 나를 잠식해 오고 있다. 나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들로 나를 무너트리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거울에 쪽지 하나 가 붙어 있었다. 낯익은 글씨. 가지런하고 바르게 늘어서있는. 글씨. 당신은 너무 쓸쓸해 보여. 조금은 더 용기를 내도 좋잖아. 당신은 항상 나 를 원망하려고 하지만, 그런다고 진실이 가려지지는 않아. 내가 비정상인지. 당신이 비정상인지. 어쩌면 우리 둘 모두 비정상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적어 도 난 쓸쓸하지는 않아. 풀 수 없는 갈증을 안고 평생 살 수 있을까? 우리 둘 은 이렇게 평생을 살 수 있을까...?」 그 날 이후 거울 앞에 서서 쓸쓸함을 털어내는 일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그녀는 내 생활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점점 더 자주. 점점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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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게. 주말에 내 휴대폰 번호를 남겨 주었던 것처럼. 그녀의 아름다움에 취한 그들에게 술에 취한 그녀는 내 휴대폰 번호를 남 겼다. 오늘밤12시이태원사라진에서」 답문을 보내고 주머니에 있는 립스틱을 만지작거렸다. 어제, 결국 사지 못 했던 분홍색 펄 립스틱. 이렇게 일찍 문을 닫으면 장사가 되나라고 생각하 며. 어둠에 묻힌 그 여자의 입술을 오랫동안 바라보다 돌아섰다. 그리고 오늘 점심시간을 이용해 다시 다녀왔다. 점심시간에 맞춰 걸려오 는 인수의 전화를 무시하고. 점심도 포기하고. 연분홍 펄 립스틱을 사기 위 해. 윤희에게 아주 잘 어울릴 립스틱. 그걸 바르고 있는 윤희의 모습을 상상 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사서 주머니에 넣었던 그 립스틱. 을 만지는 손에 땀 이 배어났다. 묘한 긴장감. 윤희를 찾는 연락은 처음 있는 일이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으며 거울을 들 여다보니, 어딘가 들뜬 듯한 눈빛의 남자가 쳐다보고 있다. 정복 57분. 58분. 59분. 10시. 이제는 정말 일어나야 한다. “자자, 오늘은 부서 회식을 합니다. 모두 참석해 주세요!” 퇴근 시간이 다 돼서 강부장이 말했다. “부장님, 저는 오늘 참석할 수 없겠습니다.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입안에서만 돌던 말. 결국 꺼내지 못했다. 그렇게 끌려와 앉아 있는 이 자 리. 들려오는 노래 소리가 멀다. 1분 동안에도 몇 번씩 보던 시계. 이제는 아 예 시계만 보고 있다. 정말 일어날 준비를 해야겠다. 몰래 빠져 나가도 괜찮 을 것 같다. 다들 술과 노래와 춤에 흠뻑 취해 있으니까. 어떤 남자일까. 윤희를 보자고 한 그 남자는. 어디서 만났을까. 그 날 윤희 는 너무 많은 곳을 다녔고. 너무 많은 남자를 만났고. 너무 많은 남자에게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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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를 남겨줬다. 도무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만나보면 알겠지. 일단 나가 보는거야. 윤희는 왜 내 휴대폰 번호를 남겼을까. 당당히 자신을 드러내 보이라는 뜻 일까. 그녀는 내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너무나 잘 이용하고 있다. “도대체 왜 날 선택했니?” 그녀는 말없이 웃기만 했었다. 그녀의 웃음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이제 그만두자. 떠나줘.” “나 없이 살 수 있어? 그런 삶, 견뎌낼 수 있어?” 그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를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하 지만 여전히 당당하지 못했고, 떳떳하지 못했다. 인정한다면서. 받아들였다 면서. 윤희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못했다. 그녀의 삶과 분리하려고 버둥거 렸다. 그녀는 영리했다. 영악하게 나를 잠식해 나갔다. 천천히. 눈치 챌 수 없도 록. 그녀가 나를 완전하게 정복 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아 보인다. 어쩌면 오늘 이 그 날인지도 모른다. 문자메시지 한 통. 남자와의 만남. 모든 것이 윤희의 계획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곧 윤희는 정복자가 될 것이 라는 생각을 한다. 나의 패배. 윤희의 승리. 어쩌면. 예정된 결말대로. 연분홍 펄 립스틱 점점 걸음이 빨라진다. 택시 안에서도 줄곧 시계만 보았다. 택시비를 던지 듯 주고는 뛰다 시피 집으로 들어왔다. 10시 35분. 약속 장소까지는 아직 시 간 여유가 있다. 걱정할 거 없어. 충분해. 그러나 재영은 차분하게 행동하지 못한다. 시간에 쫓기고 있는 것이 아니 라 긴장감에 쫓기고 있다. 충분해. 충분해. 스스로를 달래보지만 효과는 없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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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영은 급하게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하얗고 매끈한 피부에 파고드는 따 뜻한 물의 감촉이 좋다. 시간이 흐를수록 머릿속은 진정되는데 반해 가슴은 점점 더 떨린다. 휴. 우.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면서 크게 숨을 쉬어 본다. 방에 돌아와 거울 앞에 선다. 하얗고, 가는 남자가 있다. 마법에 빠진 눈빛 을 하고. 미소를 짓는다. 재영은 윤희의 옷장을 연다. 떨리는 손길로. 윤희의 속옷을 꺼내 입는다. 오늘은 검은색이 좋겠어. 쿵. 쿵. 쿵. 쿵. 서랍 한쪽에 있는 스타킹을 꺼내 신 고. 검은색 롱치마와 자주색 블라우스를 입는다. 쿵. 쿵. 쿵. 쿵. 윤희의 가발 중에 짙은 갈색의 웨이브머리를 골라 자신의 머리에 쓴다. 조심스럽게. 꼼꼼 하게. 도수 없는 검은색 안경을 끼고 거울을 본다. 눈이 빛난다. 당당하고. 생기있게. 어딘가 허전해. 맞다. 낮에 샀던 연분홍 펄 립스틱. 옷 주머니에서 립스틱 을 꺼내들고 화장대 앞에 앉는다. 고마워, 재영. 이 립스틱 정말 맘에 들어. 여유로운 손길로 립스틱을 바르며 거울을 본다. 거울 안에는. 화장품 가게의 광고표지. 안에서 연분홍 펄 립스틱을 바르고. 웃고 있던 여자. 보다 더 예쁜 윤희가 웃으며 립스틱을 바르고 있다. 연분홍 펄 립스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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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자의 데이트
김선욱
은둔자의 데이트
날은 눈부시게 화창하고 이따금씩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소년은 자신의 곧은 이마 위에서 하늘거리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봄치고는 꽤 더운 날씨였 다. 흐드러지게 날리는 벚꽃에 눈이 핑핑 돌 지경이었다. 소년은 파란 포터 한 대가 자신의 자취방이 있는 녹색대문집 골목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는 걸음을 멈추고 호기심 있게 멀찍이서 포터를 봤다. 검은 피부에 다부진 몸 을 한 청년이 포터 위에서 화분을 내리자 여자가 그걸 받아 사뿐히 바닥에 내 려 놓고 있었다. 소년이 자취하는 녹색대문집은 이 근처에 지어진 여러 자취 방형 빌라처럼 처음부터 세놓기 위해 지어진 집은 아니었다. 두 층으로 된 집 의 위층에는 주인댁이 살았고 원래 한 집이었던 아래층은 세놓기 위해 약간 의 보수 공사를 해서 두 채로 나누어 놓았다. 소년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순 수한 궁금증으로 이웃하게 될 사람의 얼굴을 훔쳐 봤다. 날렵한 몸매의 한 소 녀. 짐을 내려주는 청년의 얘기를 차분히 들어주는 두 눈, 밤바다 같이 까만 머리칼 위에 초생달 같이 뜬 흰 머리띠. 웃을 때마다 하얗게 환해지는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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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오랫동안 자신의 마음속에 간직해 온 인물화의 주인공이 여기 있음을 느끼며 놀랐다. 소년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빠르고 크게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소녀 옆을 빠르게 지나 자신의 아래층 반지하방으로 들어가는 문고리 에 열쇠를 비집어 넣었다.
뜻밖에도 옅은 쥐색 현관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생각지도 않게 문고리가 돌아가자 왠지 빈집을 터는 도둑 같아 무안했다. 장형의 어둡고 퀴퀴한 자취 방 안쪽에서 오래된 젖은 빨래 냄새와 희미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늦가을이 어서 날씨가 청명하고 쌀쌀했지만 그의 자취방 안 공기는 덥고 눅눅하기만 했다. 바깥보다 한 계단 낮은 현관에 내려와서 방안을 향해 그를 불렀다. “장형, 집에 있어?” 곧 어두운 자취방 깊숙이 장형의 대답소리가 들려 왔다. 그건 꼭 짐승의 신 음소리처럼 들렸다. 아주 오랜만에 입을 열어본 사람의 목소리가 그렇듯 낮 고 거칠었다. 나는 신을 벗고 자취방으로 들어섰다. 곧 벗겨질 것만 같은 노 란 종이 장판이 깔린 비좁은 부엌 겸 거실을 지나 방으로 걸어갔다. 불도 켜 지 않은 어둑한 방안에서 장형은 손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컴퓨터를 붙 잡고 있었다. 모니터에서 나오는 화려한 빛 뒤로 그의 그림자가 어른 거렸고 방바닥에는 어둠에 가려진 여러 물건들의 실루엣이 어지럽게 배치되어 있었 다. 대낮에 이렇게 방이 어두울 수가 있을까 놀라 창가를 보니 크지도 않은 작은 창은 청 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인 검은 머메이드지로 가려져 있었다. 모 든 것이 지독히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의 풍경 속에서 나는 철저히 소외 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 비현실의 사 물들은 나의 등장에 어떤 동요도 일으키지 않고 눈길 한번 안줬다. 다만 방구 석의 전기밥솥만이 빨간 외눈을 깜빡이며 나를 주시하는 게 고작이었다. 나 는 선뜩하여 형광등 스위치를 찾았다. 스위치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스위치를 올리고 어둠과 알 수 없는 물건들의 실루엣이 벗겨지자 방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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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들은 순식간에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이미 마른지는 꽤 됐지만 아직 추스르지 못한 빨래가 잔뜩 걸려있는 작은 빨래건조대, 끝이 누렇게 변색된 누비이불, 빈 패트 병들, 먹다 남은 닭과 뼈, 바로 옆의 싱크대에 가지 못해 쌓여있는 그릇들에는 모두 선홍색 라면 기름이 잔뜩 묻어 있었다. 불이 켜져 사물들의 모습은 익숙해 졌지만 서로 뒤엉키고 어질러진 모습은 여전히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장형, 이게 무슨 꼴이야 이게 방이야? 이게 사람 사는 꼴이야?” 장형은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눈을 단 일초도 모니터에서 떼지 않았다. 몸은 그의 자취방에 있지만 정신은 20인치의 네모 안에 붙박여있는 듯했다. 그래서 이곳의 어떤 소리나 어떤 변화도 감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머쓱 한 채 말을 이었다. “며칠간이나 여기에만 처박혀 있었던 거야? 이틀? 사흘?” “오일. 그래봤자, 오일 전에도 라면 사러 슈퍼 들린 거니까. 일주일은 박혀 있었어.” 장형은 기지개를 켜며 내 쪽으로 몸을 곧추 세우곤 말했다. 오랫동안 사용 하지 않은 목소리는 필요이상으로 낮고 음울했다. 얼핏 두 눈이 새빨갰는데 자세히 보니 가느다란 핏줄이 수없이 뒤엉켜있는 것이었다. 난 그 핏줄들이 살아있는 실지렁이처럼 느껴졌다. 하얗고 둥근 눈 위에 빽빽하게 자신들의 몸을 비벼대는 수많은 실지렁이들...... 소름이 돋았다. 그의 눈을 똑바로 쳐 다보기가 힘겨워서 빨래 건조대로 시선을 돌리자 장형의 투엑스라지 사이즈 의 트레이닝복들이 보였다. 건조대 위는 트레이닝복 외에 옷 종류가 거의 없 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통이 넓은 흰 셔츠 한 장이 눈에 들어 왔다. “뭣 때문에 일주일 간이나 집에만 있었던 거야? 손님이 와도 정신 없고.” “바빴어.” 나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왔다. 그를 안지 십년이 다 되간다. 그는 일반적인 의미로 말한다면 하나도 바쁘지 않았다. 컴퓨터 쪽으로 어깻짓을 하며 말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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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저것 때문에?” “진짜로 바빴어.” 장형의 동그란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피어 올랐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집안에 앉아서 이러고 있는 게 도대체 뭐 그리 바쁜 일이라는 거야. 하루 라도 안하면 무슨 일이 생겨?” 장형은 잠시 주저하는 듯하더니 정색을 하며 입을 뗐다. “내가 공격대장이야. 공격대는 하루 두 번 모이는 데 저녁반 새벽반으로 나눠서 던전을 돌지. 저녁반은 오후 7시에 모여. 학생이 대부분이야. 새벽반 은 대부분 직장인들이야. 저녁반이 11시에 끝나거든, 새벽반은 11시부터 2시 까지 돌아. 한 텀도 쉬지 않고 바로 돌려야 해.” “그래, 그걸 하루라도 쉴 순 없어?” “말했잖아.” 장형은 흥분해서 연신 땀을 닦으며 말했다. “내가 공격대장이라고, 던전이 좀 어려운 곳이 아니라서, 한 명이 실수하 면 스물다섯 공격대 전원이 몰살하는 곳이야. 유능한 공격대원이 한 명이라 도 구멍 낸다면 그 구멍 메우기도 벅차. 근데 난 공격대장이야. 하루라도 빠 지면 스물다섯 명의 공격대 인원이 하루를 공치게 돼. 말했잖아. 새벽반 공 격대는 대부분 직장인들이 많고 그 중에는 마흔 살 드신 분도 있어.” “그래서, 네가 빠지면 공격대가 돌아가지 않는다. 대단하군.” “한번 불참하면 뭐라고 하지도 않고 바로 포인트를 깎어. 개인은 개인마다 포인트가 있어. 포인트는 나중에 아이템을 얻었을 때 사용을 할 수 있는데, 공격대 전원에게 입찰을 하고 경매 희망자에 한에서 포인트로 경매를 하는 거야. 당연히 꾸준히 참석하고 공헌도가 높은 사람이 많은 포인트로 아이템 을 가져가지, 그렇게 낙찰이 되면 그만큼의 포인트를 깍고 포인트를 다시 모 아서 아이템을 얻고 다시 포인트를 모으고......” 그는 어릴 적부터 컴퓨터 게임을 즐겼다. 아니 즐기지 않았다. 몰두했다. 초등학교 때 많은 아이들이 수업 후에 공을 차거나 백 원짜리 떡볶이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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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가는 대신 그의 집으로 몰려갔다. 컴퓨터가 귀했던 시절, 집에 컴퓨터가 있는 아이가 한 반에 한 명꼴로 가뭄에 콩 나듯 있었다. 장형의 방에 서너 명 의 아이들이 모여들면 그는 투명한 상자 안에서 네모난 플로피 디스크를 꺼 내 컴퓨터에 넣었다. 네모나고 단단해 보이는 그의 286컴퓨터는 개가 간식을 삼키듯 플로피 디스크를 날름 삼켰다. 잠깐 동안 왜앵하는 소리가 나고는 검 은 모니터 화면에는 마법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외워야 하는 주문 같은 하 얀 알파벳이 떴다. 이 모든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아이들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침조차 함부로 삼키지 않고 숨을 내쉬지도 않았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던 친구들의 끈질긴 고요는 나에게 매번 마치 그 방의 시간이 정지 된 것만 같은 인상을 주었다. 아니 진짜로 그 시간동안 시간이 정지했었는지 도 모를 일이다. 나는 가만히 있기만 해도 머리끝에서 짜릿짜릿 했다. 게임 이 시작 되, 모니터가 화려한 화면으로 도배가 되면 그제야 아이들은 모두들 휴 하고 방의 정지 상태를 예전으로 돌려놓았다. 게임 안은 별세계였다. 우 리가 운동장에서 고작 할 수 있는 공차고 달리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우리 는 그곳에서 괴물을 물리치고 하늘을 날았다. 나라를 구하기도 하고 수 천 수 만 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였다. 불가능해 보이는 아슬아슬한 언덕을 뛰어 넘을 때마다 우리의 눈과 입은 하나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또 모두 무모하고 열정적인 탐험가로서 그 세계를 뛰놀았다. 그 모험과 바꿀만한 것은 아무것 도 없었다. 그리고 장형은 그 중심에 있었다.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나이를 먹어가면서 우리는 한 명 한 명 장형의 방을 서서히 떠나게 되었다. 몇몇은 다른 중학교로 갔고 몇몇은 자신의 새 컴퓨터 앞으로 갔고 몇몇은 다시 운동장으로 돌아갔다. 마지막까지 남은 건 다름 아 닌 나였다. 집에 컴퓨터를 장만하기에 가정 형편도 여의치 않았고 누구보다 그 별세계에 가장 매혹되어 있었으니까. 그래서 난 끝까지 장형의 곁에서 그 를 지켜보았다. 그는 아이들이 떠나간 뒤로도 자신의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286 컴퓨터는 386으로 386에서 486으로 그리고 64비트짜리 펜티엄이 등장 했다. 펜티엄은 또 펜티엄2가 되었고 펜티엄2는 펜티엄3가 되고 펜티엄4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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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다. 컴퓨터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빠르게 발전 했고 컴퓨터가 발전 할수록 모니터안의 세계는 더 화려하고 복잡해져서 점점 바깥세계와 구별되지 않게 되었다. 장형은 이전보다 몰두했고 어느 순간 아무리 내가 애를 써도 닿을 수 없는 곳까지 가버렸다. 그가 모니터 안의 세상에 몰두하면 몰두할수록 그의 모습은 왠지 비현실적으로 변했다. 몸은 끝을 모르고 뒤룩뒤룩 쪘고 눈은 눈 두덩사이로 파고 들어 갔다. 얼굴은 부풀어 오르며 동그래졌는데 그 모습은 마치 설탕을 입힌 도넛 같았다. “학원에서 연지를 만났어, 장형 잘 지내냐고 물어보더라.” “연지가 아직도 그 학원에 다녀?” 대답 대신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장형의 얼굴색이 바뀌었다. 네모난 플로 피 디스크를 꺼낼 때의 색. “창은 언제부터 가리기 시작한거야? 무슨 동굴 같잖아” “필요 없어서 막아 뒀어, 연지가 여전히 날 기억 하고 있어?” “물론 기억하니까 잘 있냐고 물어 봤겠지.” 검은 머메이드지로 가려진 창을 보니 몹시 답답했다. 이래서야 밖의 날씨 가 맑은지 흐린지 혹은 낮인지 밤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난 창으로 가서 머 메이드지를 떼려고 종이를 고정시킨 청 테이프 끝을 손톱으로 갉작댔다. “종이 떼지 마.” “왜?” 장형의 표정은 자못 진지했다. “말 했잖아, 필요 없다고.” “이런 종이 쪼가리를 창문에 붙여놓고 답답하지도 않아? 지금이 낮인지는 알아?” 장형은 다시 모니터로 눈을 돌리며 무신경하게 변명했다. “어차피 밤이든 낮이든 상관없어, 우리 길드가 주로 밤에 던전을 도니까 낮에 햇빛 비치면 자는데 방해만 되. 동네서 아이들 놀거나 그러면 바깥 소리 도 시끄럽고 막상 이렇게 해 놓으니 따뜻하기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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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시 내 머리에 손을 대고는 장형과 눈을 마주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의 붉은 눈은 모니터 위의 인물들을 보며 빠르게 움직이기만 했다. 한참을 그러다 스스로 한심해져서 본래의 기능을 상실해 버린 검은 종이 창문을 멍 하니 바라 봤다.
아무리 창밖을 바라봐도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무표정한 표정의 수많은 인간들이 그의 눈 안에 들어왔다가 이내 사라졌다. 소년은 고개를 돌 려 하얀 보드판을 바라봤다. 강사는 누가 봐도 가장 전문가다운 모습이었다. 그의 말, 행동, 제스처 하나하나 모든 것이 전문가였다. 백 명이 넘는 학생들 의 얼굴을 모두 보는 동시에 누구의 얼굴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누구의 반응도 바라지 않았다. 그의 검은색 붉은색 파란색 마카를 통해 각각 다른 항 목으로 묶이게 되는 기호들이 그려졌다. 흩어지는 기호들 사이로 보이는 보 드판에는 소녀의 얼굴이 있었다. 그녀의 차분한 두 눈이 있었다. 이틀째 결 석이었다. 소녀가 학당을 다닌 기간은 겨우 일주일 남짓해서 그녀를 아는 사 람도 없었다. 만약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소년이 유일할 것이 다. 소년은 그 사실에 두렵기도 하고 한편으로 고무되기도 했다. 수업이 끝 날 때까지 소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소년은 자발적인 마음과 의무감을 동 시에 안고는 자신의 자취방이자 그녀의 자취방인 녹색대문집으로 갔다. 그녀 의 자취방 문은 잠겨있었다. 문을 여러 번 두드려 봐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 았다. 소년은 하릴없이 그녀의 방문에서 물러나왔다. 여행을 간 것일까. 예 의 그 까무잡잡한 피부의 남자는 그녀의 애인이 아닐까. 그녀와 그는 지금 여 행을 떠난 것이 아닐까.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가 싶어 소년은 보는 사람 하나 없이 머쓱해졌다. 하지만 소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그 만의 공상 으로 그녀의 절체절명의 위기를 예감했다. 위층의 주인집 벨을 누르자 스피 커에서 나직이 기계적인 목소리가 들려 왔다. 총각 왜? 아, 아주머니 옆집 사 시는 분이 학당에 안 나와서요. 혹시 어디 간단 말 없었나요? 그런 말 없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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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걸쇠가 풀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보푸라기가 조금씩 인 싸구려 가디건을 둘러 입은 주인댁 아주머니가 나왔다. “혹시 아래 새로 온 아가씨한테 무슨 일이 있는거?” “글쎄요,” 소년은 당황해서 연신 머리를 쓸어 넘겼다. 땀이 삐질 거렸다. 그래도 해야 할 것은 해야 했다. “사실은 그 분이랑 저랑 같은 학당엘 다니거든요 저기 사거리 건너서 있는 oo 학당 있잖아요. 근데 이틀이나 나오시지 않아서 무슨 일이 있나 해서요. 만약 사정 때문에 집이라도 비웠다면 아주머니께 얘기 한 줄 알았는데요.” “그런 말 없었는데 어디보자 총각, 잠시만 기다려.” 주인댁 아주머니는 오래되 거뭇거뭇한 나무 신발장 위 칸에서 열쇠 꾸러 미를 꺼내고는 소녀의 자취방으로 앞장서 갔다. 문을 두드리며 아가씨, 아가 씨 소리를 치는데 역시나 아무런 반응이 없다. 분명히 어디 간단 말은 없었는 디, 이상하네. 아주머니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열쇠꾸러미에서 열쇠를 찾 았다. 열쇠가 구멍에서 돌아가자 아주머니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유리문 안쪽에 달린 종이 딸랑 소리를 내자 잘 훈련된 미용사 두 명은 동시 에‘어서오세요’ 라고 소리쳤다. 오전에 미용실은 생각만큼 한산했다. 은근한 비누 냄새와 머리카락 냄새에 나는 기분이 한결 가벼워 졌다. 그러는 와중에 미용실에서 만큼은 결코 만날 일이 없을 것 만 같은 사람을 뜻밖에 만났다. 짧은 머리의 미용사의 안내를 받아 푹신한 의자에 앉아 거울을 보니 바로 옆 의자에 장형이 떡하니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장형도 나름 낮은 콧노래를 부 르는 것으로 보아 기분이 꽤 좋아보였다. 미용사가 머릴 자르기 시작한지라 고개를 돌아보지 못한 채 거울을 보며 서로 안부를 물었다. “장형, 이게 무슨 일이야? 얼굴 보기 전까지 장형이라고 상상도 못했어.” “글쎄, 뭐 머리 자를 때가 되기도 하고 그래서 왔지.” 장형의 둥글고 기름진 얼굴이 화색으로 반들거리는 것이 며칠 전과는 전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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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아주 오랜만에 밝은 햇빛 아래서 보는 것이기도 하기에 그런지도 몰랐다. 표정 하나하나가 왠지 이전 의 표정보다 훨씬 생동감 있게 느껴지는 게 막 잠에서 깨어난 거대한 아기 같 은 모습이었다. 내가 누워서 머리를 감고 긴 수건으로 머리를 털 때 장형은 이미 계산하고 난 직후였다. 장형은 불안한 표정과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다가, 내가 계산 하러 나오는 모습을 보고 이내 안심했다. 아무래도 그냥 가기엔 뭔가 할 말 이 있는 거 같았다. 미용실을 나와 얼마 멀지 않은 동네 편의점 앞 야외용 플 라스틱 탁자에 앉아 그간의 일들을 물었다. 날씨는 이제 제법 춥다고 느껴졌 다. 장형은 한손에 편의점에서 산 캔커피를 홀짝거리며 떠듬떠듬 별것도 아 닌 자질구레한 자신의 근황을 짚어갔다. 집에서 보내주는 부족한 용돈에 대 한 불평이나 학비가 비싸서 올해도 복학하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 한탄 같은 쓸잘데기 없는 것들을 쭉 늘어 놓더니 슬슬 지루해서 딴 생각에 골몰할 때쯤 눈치를 보고서는 조용히 오늘 미용실에 간 진짜 이유에 대해 말했다. “실은 나, 내일 연지 만나기로 했어.” 나는 어제 끝까지 보지 못한 영화의 결말과 이번 주의 로또 번호 사이에서 퍼뜩 놀라며 되물었다. “연지랑 밥 먹기로 했다고, 내일 저녁에. 그래서 머리가 지저분해 보일까 봐 조금 쳤어.” 장형, 이연지. 이건 정말로 이상한 조합이었다. 붕 떠있는 것처럼, 같이 읽 게 되면 무언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단어들처럼. 이건 분명히 천성이 착 하고 대놓고 거절하지 못하는 연지의 온순 덕분에 짜여 진 그런 부조화이리 라. 지난 여름에 보았던 나풀거리는 연지의 하늘색 원피스 치맛자락과 그 아 래로 귀엽게 쭉 뻗은 두 다리가 눈에 아른 거렸다가 장형의 조잡스럽고 기름 진 얼굴을 보자 기분이 착잡해 졌다. 아무리 장형과는 10년이나 된 친구라지 만 연지가 안됐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네가 우리 집에 와서 연지 얘기를 했었잖아. 연지가 날 기억한다고. 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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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뒤로 자꾸 그 생각이 나더라고 연지가 날 여태껏 기억한다면 나에게 아무 감정이 없는 건 아니지 않을까 생각했지. 최소한의 감정 말이야. 가능성이 있는 최소한의 감정. 그래서 한 번 만나 보는게 어떨까 생각 했어. 그런 것에 대해서 정확히 물어봐야 걔도 편하고 나도 편하고 그럴 거 같아서 말이야. 며 칠간 고민하다가 결국 전화를 걸었지 다행히 번호가 남아 있더라고 시간되면 밥 한번 먹자고 했더니 좋다더군. 어쩌면 생각보다 잘 될 수도 있을지 모르겠 어. 밥 먹고는 뭐하는 게 좋을까? 물론 영화를 보는 게 좋겠지?” 단순한 호의로 한 행동을 어떻게 저렇게 짜고 짓고 이어놨는지 기가 찰 일 이었다. 보통 연애감각이 현저히 떨어지는 사람이 쉽게 저지르는 일종의 자 기 공상임이 분명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이전의 연지와 장형의 관계는 만나 면 인사하고 가끔 이런저런 애기나 나누는 관계 이상의 무엇이 전혀 아니었 다. 그날 내가 장형의 방에서 아무 생각 없이 던진 얘기가 그 어둡고 눅눅한 방에서 서서히 반질반질한 알을 배고 새끼를 치고 방구석 음지에서 습기와 철저한 외면과 비현실을 먹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몸을 불린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본다면 이게 장형만의 착각이든 부질없는 망상이 든 확실한건 장형을 그 어둡고 습한 방에서 기어 나오게 한 점에서 대단히 잘 된 일이었다. 설사 그가 진실의 잔을 홀랑 마셔버린 채 엎어져서 쓰라려 한다 해도 최소한 햇빛이 비취는 곳에서 이뤄질 것이 아닌가. 생각이 여기까지 진 전되자 나는 조금은 만족스러워져서 장형을 바라 봤다. 장형은 작은 눈을 반 짝이며 연지에 대한 공상을 떨다가 내 표정을 보았는지 나를 의아한 눈빛으 로 훑기 시작했다.
소년은 잠들어 있는 소녀의 옆자리를 한 시간 내내 지키며 그녀를 천천히 훔쳐봤다. 가느다란 팔다리와 날씬한 몸매의 소녀는 막 꺾어다 놓은 꽃 같았 다. 잘못 손을 대기만 해도 바스러질 지도 모른다. 감기 열 때문에 땀을 너무 흘린 나머지 하얀 홑이불 위에는 자국이 선명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의 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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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내리는 듯한 검은 머리카락과 그 위 흰 머리띠는 그녀가 아파서 누웠다기 보다 아련하고 포근한 잠을 자는 것으로 느껴지게 했다. 소녀는 약을 먹은 지 열 시간이 지나 열이 내렸고 꼬박 한나절이 돼서야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 다. 주인댁 아주머니가 문을 따고 소녀의 이름을 불렀을 때만해도 자취방에는 아무도 없는 듯 인기척이 없었다. 소년은 부득이하게 방안으로 들어가 보겠 다고 억지를 부렸다. 주인댁 아주머니는 소년의 지나친 열정과 관심에 적잖 아 당황했지만 이내 자취생들의 번거로운 요구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예의 습관대로 그가 하는 일에 관심을 끊고 그래보라고 했다. 소년은 방에서 소녀 를 발견했다. 소녀는 지독한 감기 때문에 이틀이나 변변찮은 음식조차 먹지 못한 채 앓고 있었다. 이마에 손을 대보니 열이 심각하게 높았다. 소년은 아 주머니에게 소녀를 잠시 맡기고 문을 박차고 달려 나가 골목을 네 번 돌아서 약국을 찾아 해열제를 샀다. 소녀는 그저께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고 했다. 충분히 쉬고 나면 괜찮아 질 거라 생각한 게 화근이었다. 자고 일어나니 몸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차라 리 조금 아팠을 때 약을 사 먹었으면 좋았으련만 자고 일어난 뒤로는 머리가 어지러워서 화장실까지 걸어가기도 벅찼다고 한다. 토는 어제 저녁부터 시작 했는데 심하게 토하고 나서 나중에는 토할 게 없어 변기를 붙잡은 채로 위액 과 침을 뱉었다. 자취생활을 하기 오래전부터 몸이 허약했기에 환절기 감기 에도 벌벌 떨었다. 이곳으로 온지 일주일도 채 안돼서 아는 사람, 부탁할 만 한 사람 하나 없다. “그럼 이사 온 날 그 남자는 누굽니까?” “저희 오빠예요. 대부분 하나도 닮지 않았다고 오해하죠. 오빠는 오래 전 부터 일을 시작해서 거칠긴 하지만 저를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해 주는지 몰 라요.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집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가장 노릇을 해 왔어 요. 그 날도 제가 말렸지만 오빠는 끝내 이사하는 걸 도와주겠다고 했죠.” 집은 여기서 멀다. 가장 빠른 기차를 탄다 해도 3시간은 걸리기 때문에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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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일이라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올 오빠를 부르는 것은 그녀에게 적잖은 부담이었다. 모든 애기를 들어보니 실로 그녀는 사소한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해 심각한 위험에 처할 뻔 했다. 자리에 누워 앓았지만 상황은 악화되기만 했고 연락할 방도 없이 서서히 무너져 갔다. 그 순간 한줄기 빛의 계시를 받 은 사람처럼 소년이 그녀의 자취방으로 들어선 것이다. “오빠가 아니었으면 전 정말 어떻게 돼 버렸을지 몰라요.” “절 아세요?” 소녀는 조용히 쿡쿡 웃었다. “물론이죠. 이사 온 첫날부터 알았어요. 전 제게 인사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냥 절 힐끔 보고는 가버리더라고요. 게다가 같은 학당엘 다니는데 제가 왜 모르겠어요.” 소년은 자신이 그녀를 몰래 지켜본 행동이 들킨 것 같아서 무안한 마음에 관자놀이 근처를 긁적였다. 소녀는 소년에 대해 생각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소년으로서는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이제 얼굴 보면 인사해도 되겠네요.” “예. 가끔 심심하시면 연락하시고 놀러오세요. 정말 이 주변에는 아는 사 람이 한명도 없어서 많이 외로워요.” “저도 그래요. 이 도시에서 오갈 데 없는 외로운 사람들끼리, 이웃사촌 된 거. 정말 엄청난 우연인데요?” “그러게요.” 소년과 소녀는 마주보고 조용히 웃었다. 둘 다 가식 없는 담백한 웃음이었 다. 시계를 보니 잊었던 약속이 떠올랐다. 지금부터라도 서둘러 준비한다면 늦 진 않을 테지만 왠지 떠나고 싶지 않다. 지금 이 순간이 좋다. 뭐가 그렇게 중요한 약속이란 말인가. 이곳은 이토록 즐거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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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형의 자취방문은 여전히 잠겨있지 않았다. 뭔가 불편한 기분이 드는 걸 어쩔 수 없다. “장형.” 기다려 봐도 아무 대답이 없다. 가지고 온 튀긴 닭과 캔맥주라도 냉장고에 집어 넣고 가려고 부엌으로 가자 어두운 방안에서 아른거리는 빛줄기가 보였 다. 내가 전에 찾아 왔던 적이 언제였을까. 방안은 전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창까지 가려 컴컴한 방, 구석에서 나는 음식 썩은 내. 그리고 방안에서 유일 하게 빛나는 모니터. 그 앞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장형. 그의 데이트는 완벽 하게 실패한 것일까. “사람이 오면 아는 척을 좀 해라. 닭 사왔어. 맥주랑.” 장형은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모니터만 붙잡고 있었다. 나는 익숙한 솜씨로 불을 켰다. 불을 켜자마자 더러운 식기와 먹다 남은 음식이 쌓여있는 방구석 에서 서너 마리의 바퀴벌레가 빠르게 냉장고 뒤로 도망쳤다. 빨래 건조대 위 에는 이미 말라서 주름진 트레이닝복과 예의 거대한 흰 셔츠가 단 한치도 움 직이지 않고 며칠 전에 봤던 그 자리에 붙박여있었다. 나는 잠깐 동안 이곳의 시간이 정지 됐던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했다. “장형, 나왔어. 미용실에서 본 이후로 잘 지냈지?” 장형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기묘한 신음소리 같은 대답을 했다. “어, 나름.” 나는 조금은 조급해 하며, 묻고 싶은 말을 바로 물었다. “연지는 잘 만났어? 상심이 생각보다 큰가본데?” “상심...... 웬 상심?” 다시 한 번 그의 목소리는 기묘하게 울렸다. 이 방 때문일까? 이 방안의 구 조가 소리의 공명을 일그러뜨리게 되어 있나. “뭐야? 그럼 연지랑 잘 됐어? 밥 먹고 뭐하고 놀았어?” 언제나 예상치 못할 결과는 있는 법이다. 장형이 뭐라고 말하기 전에는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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떤 짐작도 억측이다. 편의점 앞에서 본 장형은 생각보다 마음의 준비를 많이 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자른 머리가 연지에게 기막히게 먹혀들어갔을 수 도 있다. 어쩌면 연지는 비정상적으로 비대한 남자를 선호할지도 모른다. “내가 약속을 깼어.” “왜?” “바빴어.” 장형은 뒤돌아 보지도 않은 채 열중하며 성의 없이 말했다. 나로서는 도무 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연지와 만나 잘하든 못하든 그녀와 한 번 만나는 것 자 체로 그에게 과분한 행운이었다. “그런 천금 같은 기회를 왜 날려버린 거야?” 그는 조금도 반응 하지 않았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바쁘냐고.” 나는 그에게 다가가서 그를 거칠게 잡아채며 소리 쳤다. 그는 겁먹은 꼴로 낑낑대며 자리에서 나가 떨어 졌다. 그의 거대한 엉덩이를 든든하게 받치기 에는 의자가 너무 작았다. 그는 볼썽사납게 드러누운 채로 나를 올려다 보았 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상황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우발적인 상황에 당 황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안한 마음에 나는 그를 일으켜 세워주기 위 해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는 내 손을 잡지 않고 겁먹은 공벌레처럼 몸을 더욱 웅크리기만 했다. 한 쪽에서는 손을 내밀고 한 쪽에서는 슬금슬금 몸을 꼬는 야릇한 정적을 깬 건 나도 아니고 그도 아닌 아주 오래전 비좁았던 방에서, 그 화려했던 환상의 방에서 우리를 맺어준 컴퓨터였다. 스피커에서 세상모를 정다운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는데 호기심에 모니터를 보니 그 안에 는 이가 가지런하고 흰 머리띠를 한 소녀가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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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기
이은실/숨바꼭질을 하다
짧은 시간 ‘정·류·장’에 머물면서, 내 인생에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 다. 버스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떠나는 것이 두려운 곳. 원래 의 정류장이란 떠날 준비를 하는 곳이라면, 우리가 만든 ‘정·류·장’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버스에서 내려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라고 생 각한다. 다른 학교에서 경영을 전공하다가 종착점을 모르는 버스를 타고 ‘한성대 학교’라는 정류장에서 내리게 된 나는,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낯설었던 환경에 너무나 외로웠던 때, ‘정·류·장’을 만들었 고 그것이 내 삶의 전환점이 되었고, 영양분이 되었다. 힘든 환경 속에서도 푸른 잎을 하나, 둘 피워낼 수 있었던 것은 내게 촉촉한 비가 되어준, 따스한 햇살이 되어준, 바로 ‘정·류·장’의 사람들 때문이었다. 눈물이 흐르려한다. 정말로. 나와 같은 길을 걸으려 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인생에 작은 소망이었던 내가, 지금은 그들과 영원하길 바라는 조금 더 큰 소망을 가지고 있다. 영원 이라는 것이, ‘정·류·장’이라는 모임의 유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류장 사람들과의 소통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 소망이 너무 큰 욕심은 아니길 바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들이 바라는 간절한 꿈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그 것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그 꿈을 이룰 때까지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 고, 축하해 주는 것이 내가 ‘정·류·장’에 있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 다. 수영, 선욱, 종빈, 윤선, 대식, 동규. 오빠들, 친구, 모두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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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빈/잃다
한번 해볼까요? 구구단을 거꾸로 외우기. 구구 팔십일, 구팔 칠십이...구칠에... 혹시 지금 눈을 위로 치켜뜨고 계시지 않나요? 종종 그러잖아요. 계산을 하거나 뭔가 기억해내려고 할때. 우리는 눈을 위로 치켜뜨죠. 복잡한 생각을 할때 그렇다네요. 가까운 주변을 보면 집중력이 흩어지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허공으로 시선을 옮기게 되는 거라네요 아무 것도 없는 곳이지만 그렇게 그렇게 가다보면 무언가에 가 닿겠죠. 우리들의 정류장에서 첫차가 떠났습니다. 저 어딘가에 있을 그 무엇을 향해 나아갑니다. 훗날, 먼 길을 돌아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올 때를 기약합니다. 그 때,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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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선/두 사람
소설을 읽는다는 건 무엇입니까. 모두가 조금씩은 다르지만 결국은 같을지도 모를 희망을 바라보는 것, 아픔을 통해 행복을 찾아가는 것, 인간의 아름다움을 잊지 않게 하는 것, 그로인해 가슴이 저려오는 것. 내게는 그러한 것입니다. 소설을 쓴다는 건 무엇입니까. 조금은 또 다른 이가 자신의 아픔을 얘기하는 것, 희망을 찾아가는 것, 은밀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 일부이자 전체인 것, 자신의 가슴이 타 인과 함께하길 바라는 것. 그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서툴지만 내게는 소중한 옹알이를 시작했습니다. 이제 나는 또 다른 말을 배우고 있습니다. 가슴을 말하고, 신념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어렵 고 힘든 길이라고 합니다. 가보지도 않은 나는 지레 겁이 나는 것도 사 실입니다. 함께하는 이가 없었다면 가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 정.류.장>의 모두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언젠가는 올 그 날의 버스를 함께 기다리고 싶습니다. 이 세상의 모두에게 감사합니 다. 당신들로부터 배워 나가겠습니다. 하늘이, 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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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연분홍 펄 립스틱
0.01g도 되지 않는 잉크가 하나의 글자를 만들었습니다. 아주 작은 바람에 도 공기 속으로 흩어져버릴 만큼 미세한 무게. 위태로웠습니다. 언제 바람에 날려 버릴지 모를 글자들이 애처로웠습니다. 그러나 글자들은 어떤 바람에도 날아가지 않았습니다. 미동도 없이 그 자 리에 있었습니다. 0.01g도 되지 않는 잉크. 하지만 글자가 되는 순간 그 안에 는 가늠할 수 없을 만큼의 무게가 생기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시간과 공 간을 넘어서는 그 무게를 알았을 때 글자들은 늪이 되었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밟아 나갈수록 점점 더 깊게 빠져들어 갔습니다. 이 불행한 행복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글을 쓴다는 것. 글을 쓰고 싶다는 것. 글을 쓸 수밖에 없다는 것. 이렇게 불행한 일인 줄 몰랐습니다. 너무나 불행한 이 꿈이 행복이 될 줄은 더욱 몰랐습니다. 희망과 절망, 상처와 치유가 공존하는 세상. 그 이면에 자리한 진실(眞 實)... 진실을 향해 한 글자씩 내딛을 때마다 가슴에 스미는 고통은 아픔이면 서 기쁨이었습니다. 스물일곱 해를 지나왔습니다. 운이 좋으면 앞으로 그 두 배쯤 되는 시간을 더 지나가게 되겠지요. 조금 더 운이 좋으면 지나가야 할 시간 중에 3분의 2 쯤은 이 불행한 행복에서 허덕일 것입니다. 그럴 수 있기를 꿈꿔 봅니다. 꿈을 가진 나 자신에게 고맙고, 그런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께 진심으로 감 사드립니다. 꿈을 키워 주신 한성대학교 한국어문학부의 모든 은사님들께 진 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꿈을 향해 힘든 걸음을 마다하지 않는 정. 류. 장 여러 분. 여러분이 있어 꿈을 잊지 않고 살아갑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많 은 친구들, 그리고 선후배님들. 때로는 멀어졌고, 때로는 가까워졌지만 그 모두 소중한 인연이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모든 감사를 좋은 글로 보답할 수 있기를 감히 바랍니다. 어느 전직 대통령의 선택이 가슴에 남는 5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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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욱/은둔자의 데이트
스콧 피츠 제럴드의 위대한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 니다. ‘개츠비는 해가 거듭될수록 우리 앞에서 멀어지고 있는 녹색 불빛의 존재 를, 그 격정의 미래를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미 우리들의 손안 에서 빠져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내일 우리는 더 빨리 달려가 길게 팔을 내뻗을 것이기에, 그 어느 해맑은 아침에... 이렇게 우리는 물살에 휩쓸려 과거로 떠내려가면서도 노젓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저는 사랑하면 안될 것을 사랑해 왔습니다. 지킬 수 없는 것을 지키려고 눈 물 지었습니다. 그 어느날 아침에 피는 들꽃 만큼만 행복하길 바랍니다. 저는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저는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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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정류장,
이야기
│발행일 2009년 5월 28일 │지은이 이은실, 임종빈, 정윤선, 김대식, 김선욱 │펴낸곳 아날로그 │디자인 Nia project │내용문의 010-5236-3098 │구입문의 010-2619-3515 값 희망가 ⓒ 정류장 2009 잘못된 책도 잘 보관해주세요. 라면 받침 용도의 사용을 금지합니다. http://club.cyworld.com/bookc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