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문학

Page 1

2019

창립 30주년 기념 특집호

KOREAN LITERATURE OF NEW YORK

제29집 기획특집 1 기획특집 2 기획특집 3 기획특집 4

작고회원 9인 작품선 전임 회장들의 그 때 그 이야기 문학과 함께하는 우리의 여정 사진으로 보는 문협 30년

*특별기고 : 김언종 교수, 김종회 교수 <천년을 흐르는 사랑의 공식> *특별기획 : <회원 출간 작품집 모음> 72선


2020

제28회 뉴욕문학 신인상 작품 공모 미동부 한인문인협회에서 발간하는 <뉴욕문학>에서는 매년 잠재력있는 신인을 배출하고자 신인상을 제정하고

아래와 같이 작품을 모집합니다. 많이 응모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모집부문:

소설: 1편 (A4 용지 20 pages 내외) 수필: 3편 (편당 A4 용지 3 pages 내외) 한글로 응모할 수 있습니다.

접수마감:

2020년 3월 31일

입상내용:

각 장르별 당선작과 가작을 선발함.

응모자격:

미국 영주권, 시민권자.

심사위원:

당선자 발표 시에 함께 발표함.

입상자 발표: 접수마감후, 1개월 내외로 개별 통지 및 뉴욕에서 발행되는

한인 일간지에 공고함.

대우:

기성문인으로 대우하며 본 협회에 입회 자격을 부여함. 유의사항: 응모작품 겉봉(혹은 표지)에

<뉴욕문학 제28회 신인상 응모작품>

이라고 명기하고 작품에 주소,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

그리고 필명이면 본명을 명기 바람. 이메일로 응모 바람.

작품은 타 인쇄물에 발표되지 않은 순수 본인 작품이어야 하며

기타:

제출된 작품은 반환하지 아니함.

이메일로 응모 바람. E-mail: 2019newyorkmunhak@gmail.com

보낼 곳:

2

시, 시조, 동시: 5편 이상 (편당 A4 용지 2 pages 내외)

l 뉴욕문학 제29집

미동부한인문인협회 Korean American Writers Association of Eastern USA 71-40 242nd Street, Little Neck, NY 11362 Tel: 347-739-6502 E-mail: poethwang@gmail.com 회장 황미광


목 차 발간사

8

황미광

한글로 지켜낸 30년의 나이테

축사

10

박효성

서른 해의 뜻깊은 여정

11

찰스윤

열정과 노력의 결실, 30년

13

조윤증

「뉴욕문학」발간 기념 축사

14

이광복

모국과 모국어

16

손해일

미동부한인문인협회 창립 30주년을 축하드리며

18

김종회

이립(而立)의 경점을 넘어 빛나는 성좌

20

정국희

미국을 통해 한국을 보자

22

손용상

목마름 일깨워주는 디아스포라의‘광장’

24

이재홍

한국인의 정체성과 뿌리를 내리는 글짓기 대회

25

권지선

자랑스런 한글 백일장

사진으로 보는 지난 한해

26 시

36

고치완

아주 허름한 우주 / 봄밤. 섬진강

38

곽상희

살갗의 은유 / 시간의 목마름

42

김명욱

플로렌스의 찬 바람 / 바람이

45

김미숙

나무 고아원 / 원효로

48

김소향

그이의 나이 앞에 / 지금 어디에?

52

김송희

별에서 이름 찾기 / 하루살이

55

김영대

북촌에서 / 바이올린 협주곡

57

김정기

진달래꽃 / 물 감옥

60

김정혜

가을 숲 / 사막의 풀

63

박원선

먹을 갈며 / 아침 산책

65

변정숙

씨앗 이야기 / 소리화가

67

복영미

겨울바다 / 일일찻집

69

선우옥

어떤 사랑 / 창 밖에 눈은 오는데

4

l 뉴욕문학 제29집

73

손정아

못들의 수고 / 바늘 같은 친구 하나

76

송온경

빨래 / 윤동주꿏

79

안 영

삼월에는 새장의 새를 날리자 / 목포

83

윤관호

하얀 눈 / 어머니 1주기

86

윤금숙

관계 속에 / 세월

88

윤영미

잡풀을 함부로 뽑아 내던지지마라 / 강물이 왜 하류로 흐르는가

91

이광지

강아지 / 피아노 건반

93

이명숙

모과나무 야화 / 눈

98

이선희

남편의 도시락 / 갈릴리 바다에서-이스라엘 성지순례

102

이성곤

퇴근길 / 산다는 게

104

이정강

누구의 꽃일까 / 감람 새 잎사귀

107

이종비

봄의 찬가 / 희망사항

111

이 준

살다보면 / 어쩌다 핀 꽃

113

이혜란

노트르담 성당 지붕 위 펠리컨 / 텃밭을 일구며 2

117

임선철

뉴욕 하늘문 교회 / 별을 담보로

120

임혜숙

언어의 변신 / 가방과 소금

122

전애자

미숙아 2월 / 겨울비

125

정문혜

하와이 빅 아일랜드 코나 YWAM에서

129

정희수

멸치를 다듬으며 / 오래된 잠언

132

조성자

낙관을 찍다 / 4월이 들썩거린다

134

지인식

잿빛 마을의 시인들 / 포트 제퍼슨 석양

137

천취자

조각난 언어 / 문화가 주는 충격

139

최임선

비아 돌로 로사 / 탄자니아

141

최정자

베슬 Vessel / 입동 지나면

144

혜 성

홍시 / 고독

146

황미광

사해 바다 / 어느 늦은 밤

수필

151

김기훈

삶의 슬기 / 세계화 시대의 대학생

157

김명순

사색의 풍경 / 어느 날의 회고 回顧

164

김민정

세계 시인대회 / 오이지

목차 l

5


170

김영란

특집기고

기도와 찬양과 말씀으로, 또 한해를보내며 ,,,, / 미주전역탈북난민 영성훈련에 다녀와서 ,,,,,

369

김언종

다산 정약용의 로맨스

김종회

문학에서 첫사랑을 만나다

177

김옥수

Lime Bike (연초록 자전거) / 모국어 연습 장

384

181

김자원

고맙습니다 / 어느날 밥상

기획 특집

183

김희우

라듐온천과 타지키스탄 / 예루살렘의 들녘

396

기획특집 1 작고 회원 9인 작품

187

나정길

인간과 자연의 만남 2

426

기획특집 2 전임 회장들의 그 때 그 이야기

191

노 려

요양원 / 나 홀로 호텔방

437

기획특집 3 문학과 함께하는 우리의 여정

198

방인숙

4,19의 단상 / 버섯들의 속삭임

444

기획특집 4 문협 30년

209

소병임

그 와 나 / 내 공간

2019년 신인상 수상작과 심사평

214

양정숙

프레임 속 여백에 시공을 담고 /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457

함종택

부끄러웠던 왼손잡이

220

양주희

파타고니아 마라톤 / 짜깁기 인생

462

장삼수

턱시도 (Tuxedo) 역

225

연봉원

공포증 (-PHOBIA,- PHOBIC,- PHOBE) 잔치

465

이종길

보신탕

228

이경숙

반려견

2018 미 고교 한글백일장 수상작

231

이경애

12월, 다 가지 않은달 /‘젊은 그대’

470

김 솔

한글사랑

236

이춘희

체홉의 글을 읽으며 / 어느 일요일의 추억

472

박승희

나의 가장 소중한 것

242

전설자

희한한 조카

474

이한나

낙엽

248

전수중

카푸치노 / 제3의 고향

253

정은실

우리에게 주어진 두 가지 시간 / 뉴잉글랜드 문학여행

261

정재옥

뉴욕에서 띄우는 편지 / 모두 사라진것이 아닌 달 11월

268

차덕선

나이는 못 속여 / 나라걱정

478

연혁

275

최동선

마라케시로 가는 길 / 여름, 그 강을 건너다.

503

회원 출간 작품집 모음

280

한태격

獨逸사랑, 希臘사랑 / Internet 時代의 奇跡

515

광고

287

황정숙

꼭꼭 숨은 보물 찾아 나누리!

522

문협 조직도

소설

291

김도연

아르테미스 1. 통로

303

김영자

그는 외로운 이방인

312

변수섭

사건의 지평선 너머

335

임혜기

구구 팔팔 에구구

341

한영국

마르의 수기

356

홍남표

다행

6

표지화

477

전애자

부록

뉴욕문학 제29집 www.nymunhak.com

l 뉴욕문학 제29집

발행인: 황미광

발행처: 미동부한인문인협회

Korean American Writers Association of Eastern USA 71-40 242nd St., Little Neck, NY 11362 Tel: 347-739-6502 E-mail: poethwang@gmail.com

창간일: 발행일: 제 호: 표 지: 사 진: 편 집:

1991년 1월 20일 2019년 8월 30일 이근배 전애자 양정숙 이지현

인 쇄: Sunny Publishing

목차 l

7


발간사

발간사

고 싶었다면 2019년은“사랑”이다. 인류의 영원한 로망이며 문학작품 속의

한글로 지켜낸 30년의 나이테

본체라 할 수 있는 사랑은 시경의 첫 작품, 관저(關雎)에서부터 흘러 내린다. 시경의 요조숙녀 군자호구(窈窕淑女 君子好求)에서 출발하여 황순원의 소나 기에 이르기까지 3천년을 내려온 사랑의 이야기를 30주년 기획특집의 주제로 삼았다. 이 구도(求道)와 같은 강의를 김언종박사와 김종회박사, 두분의 석학

살아도 살아도 고향이 되지 않는 땅에서 모국어로 글을 쓸 수 있음은 감사와 축복이다.“가자가자 나도 가자”하며 미국 올때 따라온 한글로 버티어온 세월 이 쌓여 30년의 협회 나이테를 만들었다.

으로부터 출판기념회 당일 뉴욕에서 접할 수 있으니 풍성한 문학의 언어가 30 주년 잔치를 더욱 깊이있게 빛내 줄 것이다. 특집호를 준비하며 임원들과 참 많이 만났다. 사진 작업과 유고 회원 작품선 을 맡아 정성을 다해준 양정숙 부회장, 재무와 서기 역할을 하면서 편집위원 으로 이중 수고를 해준 정은실, 김정혜 임원에게 깊은 고마움을 전한다. 특별

황미광 미동부 한인문인협회 회장

서른살 되기가 어디 쉬운가.

히 유명(幽明)을 달리한 아홉분의 유고 작품, 회원들의 출간 작품집 표지, 전

사람도 유아기, 사춘기, 청장년기 다 지나야 혼자

직 회장 좌담회, 우리들의 이야기, 사진으로 보는 30년등은 심혈을 기울인 임

설 수 있다고 삼십이립( 三十而立 )이라 하거늘 하물

원들의 수고가 돋보인다.

며 개성 강하고 자존심 특별한 작가 선생님 군단(群

맨해턴을 중심으로 4계절의 야생화를 꼼꼼히 그려넣은 시인 전애자 표지작

團)으로 구성된 문인들이 걸어온 30년은 물어보지 않아도 지난( 至難)한 세

가의 작품 속 꽃들이 각양각색의 우리 삶을 이야기하듯 문인협회는 이제 더

월이었을 것이다.

욱 큰 그림을 향해 한글 문학의 세계화에 보폭을 맞추며 정진해 나갈 것이다.

우선 문협이 서른살을 맞도록 쉽지않은 마라톤을 이어온 전임 14분의 회장 님들과 그 먼 길을 귀한 작품들로 꽃길이 되게 하신 회원님들께 감사드린다. 미동부 한인문인협회 30주년에 임하여 회장이라는 중책을 맡은 것을 일복

올바른 길로 가야하는 것이 관리자라면 올바른 길로 가고 있다고 믿는 것은 리더의 몫이라 했다. 80여명의 출중한 회원들 격려 덕분에 올바른 길이라 믿 으며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이라고 생각했다. 넘치는 의욕만으로 다 잘 될 것 같았다. 풀타임, 오버타임

원근각처에서 축사를 보내주신 소중한 단체장님과 여러 선생님들의 격려를

직장을 가진 것처럼 임기내내 달리며 문협을 상징하는 깃발과 뱃지를 만들고

기억하며 이를 주마가편으로 미동부 한인문인협회의 아름다운 행보는 힘차게

회원 주소록 수첩을 제작하고 아마존에 책을 올리고 웹사이트 주소를 바꾸어

계속 될 것이다.

새단장을 하고 그리고 30주년 행사를 준비했지만 뒤돌아보니 이미 땀흘려 가 꾸어놓은 꽃밭위에 어렵지않게 뿌린 씨앗들이었다. 가장 소중하게 남는 것은

우리가 바라보는 만큼 별은 빛난다.

회장이라는 자리가 한분 한분 회원님들과 좀 더 소통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

미동부 한인문인협회와 뉴욕문학을 더 많이 바라봐주시면 좋겠다.

했다는 것이다. 2019년 미동부 한인문인협회 지난 해에는“뉴욕에 문학있다”는 슬로건으로 문학의 숨결을 뉴욕에 전하

8

l 뉴욕문학 제29집

회장 황미광 뉴욕문학 제29집 l

9


축사

서른 해의 뜻깊은 여정

축사

열정과 노력의 결실, 30년

해외 한국문학 창작활동의 구심점인 미동부한인

안녕하십니까

문인협회의 창립 3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뉴욕한인회장 찰스 윤입니다. ‘미동부한인문인협회’창립 30주년과‘뉴욕문

1989년 미동부한인문인협회는 미국으로 이주한 문

학’29집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인들을 하나로 결속시켰습니다. 이후 30년 동안 변

박효성 뉴욕총영사

함없이 문인들의 모국어 창작과 소통의 장을 마련하 고 다양한 문학 활동을 펼치며 동포사회에 예술적 반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찰스 윤 뉴욕한인회장

‘뉴욕문학’은‘미동부한인문인협회’회원분들의 시간과 열정, 노력의 결실로 그간의 주옥 같은 작품 들은 뉴욕 한인사회 정체성 확립에 문학으로 큰 역 할을 담당해 왔습니다.

문인협회가 발간하는 디아스포라 문예지 <뉴욕문학>은 미주 동포사회의 역사와 궤를 함께합니다. 그간 발간된 총 29권의 작품집에는 한국과 미국

또‘뉴욕문학’은 작가를 희망하는 많은 한인들에

이라는 두 나라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문인들의 삶에 대한 사유가 고스란히

게 꿈의 터전이 됐고, 문학을 사랑하는 한인들에겐

담겨 있습니다. 모국에 대한 애틋한 향수와 이민 생활의 애환이 담긴 작품

문학적 동반자가 돼 주었습니다.

집은 독자들의 깊은 공감을 이끌어 내며 한인동포사회의 화합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또한 문인협회가 개최하는 한국어 글짓기 대회는 한인 차세대들

흔히들 창작의 고통을 산고에 비유하곤 합니다. 이

에게 문화적 정체성을 심어줄 뿐만 아니라 한국어 세계화의 단초가 될 것

는 삶과 인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작가 내면의 치

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열한 자기화 과정을 거쳐야만 작품이 세상 빛을 발 할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이 지면을 빌어 서른 해의 뜻깊은 여정에 함께 하신 황미광 회장님과 모 든 문인들의 열정과 노고에 큰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아울러 문인협회의

문학이란,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적 노력의 위대한 성과라는 말을 기억합니다.

앞날에 정진과 문학적 성취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10

l 뉴욕문학 제29집

뉴욕문학 제29집 l

11


축사

축사

앞으로도 협회원 분들의 꺼지지 않는 부단한 창작 활동을 응원하며, 이 를 통해 아름답고 독창적인 한글이 보다 널리 알려지고 기억되고 남겨졌 음 좋겠습니다.

「뉴욕문학」발간 기념 축사

축사의 끝으로 이번‘뉴욕문학’29집 출판을 위해 헌신과 노고를 아끼

미동부한인문인협회의 창립 30주년과「뉴욕문

지 않으셨을 황미광 회장님과 협회 관계자 그리고 회원 여러분의 가정에

학」제 29집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과 사랑이 넘치시길 기원합니다. 미동부한인문인협회는 1989년 창립 이래 30년 감사합니다

동안 미국 한인 문단의 성장과 발전에 필력을 다하

조윤증 뉴욕한국문화원장

고 있습니다. 협회가 매년 발간하는「뉴욕문학」 은 새로운 가치를 찾아서 이방으로 온 문인들의 삶과 예술을 담아내는 소중한 작품집이자 이민 문 학의 산 역사입니다. 미국에서 한국어로 글을 쓰 고 읽는 것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입니다. 동포 문인들의 창작 활동은 개인적인 가치를 넘어 동포 사회에 문학적 풍요로움을 선사하고 나아가 미국 사회에 한국적인 가치를 확산하는 일입니다. 미동부 우리 문학 창작의 산실인「뉴욕문학」을 29집까지 이끌어 오는데 수고를 아끼시지 않은 황 미광 회장님과 모든 회원분들게 격려와 감사의 박 수를 보냅니다. 미국에서 모국어의 영토를 지키시 는 문인들의 고투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항상 건 필을 기원합니다.

12

l 뉴욕문학 제29집

뉴욕문학 제29집 l

13


축사

축사

모국과 모국어

이광복 소설가·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우리에게는 조국이 있습니다. 조상 대대로 살아

그분들 중에는 문인도 참 많습니다. 동부와 서부를 가릴 것 없이 도처에

온 우리나라, 그리고 우리 후손들이 자자손손 살

서 많은 문인들이 오늘도 주옥같은 작품을 써내고 있습니다. 남의 나라, 남

아갈 터전입니다. 우리에게는 겨레가 있습니다. 부

의 땅으로 진출한 분들이 현지에서 모국을 그리워하며 모국어로 문예작품

모형제를 비롯하여 정다운 이웃이 있습니다. 비록

을 창작한다는 사실이야말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높이 상

얼굴과 이름은 모를지라도 똑같은 말과 글을 쓰는

찬 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겨레야말로 한 핏줄을 이 어받은, 그리하여 영원히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 공동체입니다.

미동부 한인문인협회는 그동안 왕성한 문학 활동으로 눈부신 업적을 쌓 았습니다. 올해는 창립 30주년을 맞아 연간지『뉴욕문학』제29집을 발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모국과 모국어가 있습니다. 타국에서 갈고 다

우리 겨레는 지금 오대양 육대주 지구촌 곳곳으 로 뻗어 나가 활기찬 미래를 열어가고 있습니다.

듬는, 그러면서 격조 높은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그 뜨거운 열정에 우렁찬 축하의 박수를 보냅니다.

그중에서도 미주에는 가장 많은 동포들이 살고 있 습니다. 특히 미국의 경우 어느 지역을 가든 우리

끝으로,『뉴욕문학』제29집을 발간하기까지 노고를 아끼지 않으신 관계

한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 겨

자 여러분께 따뜻한 격려를 보내며 미동부 한인문인협회의 무궁한 발전을

레가 미국 사회 전역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삶의 기반을 닦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겨레는 강인한 의지로 세계 곳곳에서 인간승리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에서의 한인 성공 신화를 자주 접하고 있습니다. 14

l 뉴욕문학 제29집

뉴욕문학 제29집 l

15


축사

미동부한인문인협회 창립 30주년을 축하드리며

축사

한글은 세게 최고의 과학적인 문자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노 벨문학상 등 세계 최고의 문학에 근접치 못하는 것은 한국문학의 수준이 낮아서가 아니라 몇 가지 구조적인 문제에 기인합니다. 정부의 종합적인 지원시스템 자체가 미비하고, 우수작품의 번역 태부족, 번역된 작품마저 세계 우수 출판시장으로의 유통, 홍보 부족 등입니다. 1921년에 창립된 국제PEN은 전 세계에 154개 지부가 있는데 공식적으

손해일 시인, 문학박사, 국제PEN한국본부 이사장

미동부 한인문인협회 창립 30주년과 회원

로 노벨문학상 추천권을 가지고 있으며, 1954년에 창립된 한국PEN도 그

들의 주옥같은 작품집 <뉴욕문학> 제29집

중 하나입니다. 제가 제35대 국제PEN한국본부 이시장에 취임하여 9개

발간을 아울러 축하드립니다. 지구촌을 선

주요 언어권의 PEN번역원을 창립하고, 한영 대역으로 회원들의 대표작

도하는 미국의 심장부인 뉴욕의 한인문인

선집을 내는 것 등이 한국문학을 세계화하려는 노력입니다. 그런 면에서

협회인 만큼 창립 30년이 넘도록 회원들끼

모국어와 영어권의 2중 언어를 구사하는 여러분들이 더욱 유리한 위치에

리 서로 돕고 격려하며 오늘에 이른 자부심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민 2세 3세로 내려갈수록 모국어를 하고, 문학

을 높이 평가합니다.

을 하는 후계세대 감소로 한국문학의 맥이 끊기지 않을까 염려도 됩니다.

미국이 선진국이라곤 해도 이역만리 고국

미동부 한인문인협회 창립 30주년을 계기로 더욱 활기차게 발전하고

을 떠나 여기에 적응하여 자리 잡고 정착하

한국문학도 빛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의 행복과 건강 건필을 축

기까지 많은 어려움과 각고의 노력이 필요

원합니다.

했을 겁니다. 생업에 전념하고 이민생활의 애환과 난관의 와중에도 모국 어를 잊지 않고 그것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여러분의 노고를 치하합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입니다. “No publishing is perishing” 입니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잊혀지기 쉽고 문자로 기록돼야 장 구한 역사의 흔적으로 남습니다. 문학은 영혼의 양식이요, 세상을 비추는

손 해 일

거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 정신활동의 집약체인 <뉴욕문학> 제

1978년 <시문학>등단, 시집<떴다방 까치집> 등, 평론집<심리학으로 푸는 한국현대시> 등

29집 발간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한국문학의 세계화가 절실합니다. 한국은 오랜 역사를 가진 문화민족 으로 최단기간에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룩했다는 자긍심도 높습니다.

16

l 뉴욕문학 제29집

서울대, 홍익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1991 문학박사) 대학문학상, 홍익문학상, 시문학상, 서초문학상, 소월문학상 등 (전)농협대 교수, 홍익대 강사, 농민신문 편집국장, 시문학회 회장, 서초문협 회장 등 (현)국제PEN한국본부 이사장, 한국현대시협 평의원(제23대 이사장), 한국문협 이사, 서울대 총동창회 이사 등

뉴욕문학 제29집 l

17


축사

축사

이립(而立)의 경점을 넘어 빛나는 성좌 - 미동부한인문인협회 30주년에 즈음하여 고 그 분들에게 정말 고마웠습니다. 미국 뉴욕 미동부한인문인협회의 발족 30주 년을 마음을 다해 축하드립니다. 30년은 한 세 대가 경과하는 시간이요, 한 사람의 생애에 있 어서도 모든 준비와 수행의 기간을 마치고 하 나의 인격으로 책임 있는 역할을 시작하는 시

김종회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회장, 경희대 교수

기를 말합니다. 그래서 공자는《논어》에서 삼 십세에 자립하였다 하여 이를‘이립(而立)’ 으로 호명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미동부한인문 인협회는 출범의 돛을 올린 이래 이 지역의 문

인들을 하나의 연대로 묶으며 여러 문학 활동을 전개하고, 또 정기적으로 연간《뉴욕문학》을 발간하면서 작품 발표의 지면을 마련하는 등 많은 업 적을 쌓아 왔습니다. 그 줄기찬 노력과 지속적인 수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얼마 전 제가 실무 책임을 맡고 있는 이병주기념사업회에서는 이병주 작 가의 장편『허드슨 강이 말하는 강변 이야기』와 단편「제4막」을 한데 묶 어‘이병주 뉴욕 소설’이란 단행본을 출간했습니다. 소설 가운데는 뉴욕 의 풍광과 풍물, 이 세계 최대 도시의 의미와 사람들에 관한 서술이 손에 잡힐 듯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었습니다. 책을 만들면서 저는 벌써 20년 세 월에 가까운 여러 차례 저의 뉴욕 방문 기억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생각이 짧고 경험이 일천해서인지는 모르나, 제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뉴욕 에서 만나 친숙해진 동부문협의 문인들과 그 분들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리 18

l 뉴욕문학 제29집

모국어의 땅을 떠나 푸른 물결 출렁이는 8만 리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서 글을 쓴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여전히 우리 속에 잠 복해 있는 어린 시절의 기억, 잔뼈가 굵은 고향, 잊을 수 없는 가족·친지 들을 끌어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버릴 수도 벗 어날 수도 없는 우리 영혼의 일부인 이들을 현실의 삶 속에서 응대하는 일 이 아닐까요? 그러기에 우리에게 문필의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신 이 주신 축복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우리 선진의 후진이 듯이 우리 또한 우리 후진의 선진일진대, 그들에게 우리 정신의 결곡한 언 어를 담은 책 한 권을 물려줄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작지만 소중한 유산 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동부문협의 문학공동체는 한민족 디아스포라 문학의 뜻 깊 은 역할을 감당하고 있기도 합니다. 문학을 통해서 궁극에까지 남는 것은 결국‘사람’일 것입니다. 사람이 있기 때문에 한민족 디아스포라가 있고 우리의 조국이 세계 속에 그 위상을 지키며 존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 국 당대(唐代) 시인의 시에‘세세년년화상사 연연세세인부동(歲歲年年花 相似 年年歲歲人不同)’이란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흐르는 세

월 속에 인연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이제 와 깨닫기로는 작은 인 연과 불가항력의 운명은 그 상거(相距)가 그리 멀지 않아 보입니다. 그와 같 은 마음으로 여러분들을 오래 잊지 않겠습니다. 다시 한 번 30년 한 단계 를 탈각하는 미동부한인문인협회에 큰 성과와 발전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뉴욕문학 제29집 l

19


축사

미국을 통해 한국을 보자

축사

지는 않는다. 비록 누가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할지라도 글을 쓰면서 자 신이 행복하고 또 그 글을 읽는 사람이 힐링을 얻는다면 꼭 한국문단에 알

미동부 한인문인협회 창립 30주년을 축하하며

려지지 않아도 그것만으로도 삶에 밑거름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우리끼리만 오순도순 글을 쓰자는 것은 아니다. 꼭 본국의 문학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무엇이 우리들로 하

을 기웃거리지 않아도 미국 사회의 한 단면만으로도 얼마든지 특유한 소재

여금 글을 쓰게 만드는가. 거의 모든 글쟁이는

의 창법의 글을 쓸 수 있다는 뜻이다. 한국과는 달리 우리가 살고 있는 미

선천적으로 태어났거나 혹은 후천적으로 언어

국은 다민족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하게 살아가는 곳이므로 오히려 한

가 몸에 박혀 있다가 적출된 것이라 할 수 있

국보다는 글쓰기에 훨씬 더 풍부한 요소들이 많다는 뜻이다.

다. 물론 나처럼 이국의 외로움을 치유하기 위

정국희 LA 한국문인협회 회장

해 글을 쓰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개는 자신을

올해는 미동부 한인문인협회가 창립 30주년을 맞는 해이다. 참 많은 세

위한 작은 영역을 찾기 위함이다. 그 영역이란

월을 지켜온 협회에 박수를 보낸다. 그동안 꾸준한 유대감으로 서로 격려

그리움 일 수도 있고 자아 회복을 향한 심신 수

하고 자극하며 문학회를 이끌어 온 회원들의 수고가 있었기에 이렇게 30

련일 수도 있다.

주년이 되도록 굳건히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라도 그렇듯이 나 또한 처음에는 시를 쓸 엄두조차 못 냈다. 시는 나

29집을 발간하는 뉴욕문학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발전해 나갈 것을 믿

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어떤 철학적 지식과 세상적 지식을 다 꾀고 있는 사

으며 미주문학의 지평을 넓혀나갈 것은 물론 개인의 삶이 더욱 더 풍성하게

람만이 쓰는 특별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고

영그는 디아스포라의 문학이 될 것임을 확신하면서 축하를 보내는 바이다.

낯설음에서 오는 존재의 난감함에 자주 접하게 되면서 자신에 대해 깊은 연민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연민의 언저리들은 외로울 때마다 주위를 맴 돌며 내 삶의 이마에 맞대고 종종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정 국 희 미주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른 다. 더군다나 마음대로 글을 써서 발표할 데가 있다는 것은 사는 일 중 또 하나의 행운일 것이다. 혹자는 열심히 글을 써서 한국의 문예지에도 발표 하고 한국에서도 알아주는 작가가 되라고 하지만 필자는 꼭 그렇게 생각하 20

l 뉴욕문학 제29집

재외동포문학상 가산문학상 미주시문학회 회장역임 현 미주한국문인협회 회장 시집 : (맨살나무 숲에서), (신발 뒷굽을 자르다) (노스캐롤라이나의 밤), (로스앤젤레스, 천사의 땅을 거처로 삼았다)

뉴욕문학 제29집 l

21


축사

목마름 일깨워주는 디아스포라의‘광장’

축사

스스로 정리하고 또 남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작업을 합니다. 이들을 이름 하여‘작가’라 합니다. 따라서 본향에서 파종되어와 이민자문학을 지향하는‘디아스포라’작가들은 정말 귀한 사람들입니다.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뉴욕문학’제 29호 발간을 축하합니다.

잠깐 돌아보면, 북미주 대륙에는 동부의 뉴욕, 서부의 LA를 위시하여 군 집(群集)을 이룬 우리 한인 커뮤니티 속의 문학 단체들이 많습니다. 그러

먼저‘뉴욕문학’의 나이테가 4반세기를 훌

나 아직 두 지역의 기둥만으로는 무언가 조금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

쩍 넘겨 연륜이 30년에 이르렀음에 깊은 경의

러나 이제 새롭고 커가는 중남부 텍사스 달라스에서도 다리 하나가 세워

를 표합니다.

졌습니다. 이번‘한솔문학’이란 이름으로 문학 광장을 만들어 뉴욕과 LA

한 개인의 인생행로도 4반세기를 넘으면 세 대가 바뀌고 생각이 바뀌는 것일진대, 한 조직

손용상 소설가, 한솔문학대표

와 더불어 북미 대륙의‘삼발이문학마을’로 정립(鼎立)코자 기둥 하나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체가 그 세월을 뛰어넘으면 아마 세대교체도

이제 우리 디아스포라 문학인들은 이곳‘뉴욕문학’과 함께 자라면서도

적잖이 이뤄졌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모르긴

더불어 미주의 타주 작가님들과도 어깨 걷고 함께 교류하기를 기대해 마

해도 그동안 고(苦)와 그에 따른 상(傷)도 만만

지않습니다.

치 않았을 것이었습니다. 허나, 그러한 난(難) 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뉴욕문학’은 그 자양(自養)과 자양(滋養)으로 더

다시 한 번 뉴욕문학 29집 발간과 미동부 한인문인협회의 서른번째 돐 을 축하드립니다.

튼실해지고 알찬 결실을 맺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19. 6월 손용상 올림

특히 자의든 타의든 본향(本鄕)을 떠나 타향살이로 이민생활을 선택한 디아스포라 동포들에겐 꼭 무언가 목마름을 일깨워주는‘광장’이 필요했 을 것입니다. 왜냐면, 그것이 문학이든 음악이든 미술이든 또는 어떠한 색다른 예술 행

손 용 상

위라 할지라도‘판’을 깔지 않으면 이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

경남 밀양 출생(46년) / 경동고, 고려대 사회학과 졸업.

도 특히 문학은 우리에게 태아(胎兒)적부터 뿌리가 심어져 있는 우리말이

미주문학상, 재외동포문학상, 경희동포문학상

바로 표현으로 이어지고, 그리고 우리글로써 바로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장르이기에 어떤 무엇보다 모두에게 필요한‘광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내 삶’의 역정을 표현하고 그 아픔과 고난과 사랑을 22

l 뉴욕문학 제29집

조선일보신춘문예 소설 당선(1973) 고원문학상, 해외한국소설문학상 등 수상 장.단편 소설집, 운문집, 에세이 칼럼집 등 다수 미국 달라스 거주. 지역 신문사(KTN) 논설고문 / 한솔문학 대표. 이멜 ysson0609@gmail.com

뉴욕문학 제29집 l

23


축사

축사

한국인의 정체성과 뿌리를 내리는 글짓기 대회

자랑스런 한글 백일장

올해로 창립 30주년을 맞은 미동부한인문인

미동부한인문인협회 창립 30주년을 축하드

협회에 진심으로 축하의 마음을 전합니다. 공

이재홍 베이사이드 고등학교 한국어 교사

립니다.

립 고등학교의 한국어 교사인 저는 문인협회

그동안 바쁘고 삭막할 수 있는 한인사회에 문

와 고교 백일장 대회를 계기로 지금까지 소중

학이라는 예술로 미주한인동포들의 삶을 돌아

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지난 19년간 미

보고 위로와 감동을 전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동부한인문인협회는 매년 뉴욕과 뉴저지의 고

권지선

등학교에서 한글백일장 대회를 주최해 오고 있

프랜시스 루이스 고등학교 한국어 교사

습니다. 고등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

특별히 20여년동안 고교백일장을 학생들에게 상상력과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 고 각 학교별로 수상자를 뽑아 시상도 해주시고

에게 힘을 북돋아주고자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장학금의 기회도 제공해 주셨던 것에 감사함을

한글날을 전후하여 한글백일장 대회를 치러 오고 있는 것입니다. 고교 한글백

전합니다. 덕분에 문학에 취미가 없던 학생들까지 백일장을 통해서 진지하게

일장 대회는 한국계 학생들에게는 자신들의 정체성과 뿌리를 느낄 수 있는 더

자신의 생각을 글로 써 볼 수 있었고, 수상자로 뽑힌 학생들의 행복한 표정, 수

할 나위 없이 귀중한 시간이고 비한국계 학생들에게는 자신들의 생각을 모국

상자들의 글이 엮어진 책을 받았을 때 뿌듯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 또한 저

어가 아닌 다른 나라의 언어로 그려 보는 값진 시간입니다. 한국어 반 학생들

희 학생들이 자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에게 우리말로 생각하고 우리말로 글을 쓸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주시는 문인 협회에 깊이 감사 드립니다. 지금까지 이어온 공립학교의 한국어 반과 미동부한인문인협회와의 인연이 앞으로도 오래오래 지속되길 바라며, 아울러 미동부한인문인협회의 무궁한 발

30년을 한결같이 문학으로 한인동포들을 연결해 주셨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한인동포들이 문학이라는 언어로 소통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 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창립 30주년을 축하드립니다.

전과 번영을 기원합니다. 다시 한 번 창립 3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24

l 뉴욕문학 제29집

뉴욕문학 제29집 l

25


2019 뉴욕문학

2019 뉴욕문학

김유조 교수 특강

2018년 뉴욕문학 제28집 출판기념회(대동연회장)

26

신인상 시상식 왼쪽부터 김민정이사장, 김희우, 윤금숙, 김영대, 신인상 당선자

집행부: 황미광(회장), 양정숙(부회장), 정은실(재무), 김정혜(서기)

회장 축사

외부축사 (김문수 신부)

l 뉴욕문학 제29집

최종고 교수(펄벅연구회장)과의 간담회

김유조 교 수 특강 “미국 문학발전 사의 이 해”

시분과 모임에서 낭송중인 김송희 시인

사진으로 보는 지난 한해 l

27


2019 뉴욕문학

2019 뉴욕문학

문협 30주년 특집 좌담회에 참가한 전직 회장단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임혜기(10대), 김정기(4대), 정재옥(7대), 윤관호(16대), 최정자(6대) 김송희(11대), 이정강(9대), 김자원(13대), 황미광(현 17대) 제30차 정기총회를 마치고(금강산 식당)

1989~2019 창립 30주년 축하행사 “우리들의 이야기” 창립 30주년 자축모임, 김민정 이사장 자택

28

l 뉴욕문학 제29집

2018년 송년모임, 황미광 회장 자택

사진으로 보는 지난 한해 l

29


2019 뉴욕문학

2019 뉴욕문학

송온경 시인 출판기념회

송온경의 책소개

차덕선 수필가 출판기념회

차덕선 수필가 출판기 념회

정은실 수필가 출판기념회

30

l 뉴욕문학 제29집

2018년 뉴욕문학 출판기념회 작품 낭송을 위한 준비모임(중앙사무실)

사진으로 보는 지난 한해 l

31


2019 뉴욕문학

한글 백일장 시상식에서 프랜시스 루이스 고교 수상자들이 권지선 지도교사, 황미광 회장과 함께 했다. 1등 이한나, 2등 임세은, 3등 최서윤, 장려상 10명

2019 뉴욕문학

베이사이드 고교 관계자들과 심사위원 김명순, 양정숙, 황미광

고교백일장 심사(금강산 도서실) 김자원, 양정숙, 김명순, 임혜숙, 황미광 회장

베이사이드 고교 수상자들과 Daniel Tizol 교감, 이재홍 지도교사 1등 김솔, 2등 박지우, 3등 홍석영, 장려상 10명 Palisades H.S. 창관일 심사위원 교장 Frank Donohue, 이경희, 김민정, 조성자

Palisades H.S. 1등 박승희, 2등 이송희, 3등 김하나 장려상 10명 오른쪽 6번째 교장 Frank Donohue, 왼쪽 6번째 교감 Mrs. Krista Voorhis 오른쪽 7번째 외국어 수퍼바이저 Mrs. Amy Munn, 오른쪽 첫번째 황정숙 한국어교사

32

l 뉴욕문학 제29집

문학을 이야기 하는 만 남의 자 리

2019년 1/4분기 이사회

문학을 이야기 하는 만 남의 자 리

사진으로 보는 지난 한해 l

33


2019 뉴욕문학

한국문학 여행 길에서

오페라‘카르멘’관람후(링컨센터)

(Vessel) 맨해턴 베셀

길 떠나는 즐거움

펄벅기념관

34

l 뉴욕문학 제29집


시


아주 허름한 우주

봄밤. 섬진강

고 치 완

고 치 완

한 생애가 착실히 빠져나간 듯 허물 벗은 듯

무엇이

속물 덜어버린 옷 한 벌 벽에 걸려 있다

이리도 만방지게 하는가

오늘도 온몸 숙제 끝내고 덤으로 홀가분하다 이제 와서 내 면피용 사랑이 듬뿍 깊은 들

짐짓 물러난 산등성

더운 기 다 빠져나간 뒤 거듭나는 성자의 모습으로

왁자히 번지는 환한 한 때

놓아둔 그대로 저 만큼 숙연 할 수 있을까 한 때는 너를 빙자하여 내 세상인양 활보하였고

세상사 여기까지

깃 세우고 허세 부린 적도 있었건만 누구의 손길로도 위로할 수 없는 너덜해진 밑단

달빛 풀어 밑줄 긋다

축 쳐진 뒤에 따르는 순서가 꼭 후회스런 것이라면 근거 없는 동풍에 매달리고 서풍에 두서없이 고개 디밀던 나는, 고통 끝에 올려지는 깃발 하나 없이 불 때마다 너무 헤프게 나부끼지 않았나 문자 대신 향으로 설득하는 고전 읽듯 막무가내 보수로 빛 바래가는 헐렁한 처지 누군가 입혀준 따뜻한 가호 속에 고백 건데 한 쪽 열어둔 속내 자유 보다 꽉 낀 불편함이 내 밑천이었음을 들숨과 날숨 그 사이가 찰나였고 겁이었음을

고 치 완 제9회『뉴욕문학』신인상 당선.‘증명사진을 찍으며’외 다수의 작품 moenji@hotmail.com

벼랑 끝 나비 한 마리

36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고치완 l

37


살갗의 은유

물의 언어를 건져 올린다

곽 상 희

암. 청. 빛 - 푸른 물고기들

시인의 손끝에서 팔딱팔딱 뛰는

노을이 붉다! 살갗이 두껍다!

살갗이 터지고 슬픔이 익은 듯 발갛게

너무 두터워 바람이 얼씬 못하네

하늘. 땅. 바다.....

시인은 어둠의 빗장에 가려

나래를 번쩍이며 잔 물고기들이

바람을 기다리네

상승하네, 부시게, 화려하게

안개 같은 시간, 그 때 바람이 불었다 칼날 같은 향기의 바람도 있던가 하늘의 방언을 타고 내린다 결국 바람이 문제였던가 바람은 상수리나무 잎을 흔들고 고요의 뿌리가 길게 길게 숨을 내쉰다

심해의 암반에서 바람과 물이 훨 훨, 바람은 물의 꽃, 심해의 언어, 시인은 물의 옷을 입고 심해의 밭고랑을 뒤지며

38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곽상희 l

39


시간의 목마름

무당벌레들 어설피 깨어나고 초록빛 새순들 고개 들었을 때

곽 상 희 홀로 거닐며 내가 버린 시간들은 지금 어느 어두운 거리를 고아처럼 잊었던 건 정작 그게 아니었어

헤매고 있을까고 엉뚱하게 생각이 미칠 때

중요한 건 잊어버린 것을 모른 채 망각과 무의식의 거리를 접고 펴며

망각과 꿈의 꽃 더미에 쌓여 주렁주렁

아무렇지 않게 비가 내리는 거리를

아직도 담장줄기는 하늘로 뻗어가고

걷는 것이다

장미는 하늘을 넓히고 지우고 안개처럼 빨간 푸른 시간의 목마름이 떠오를 때

오래 동안 여러 잡지 안에 내 이름석자가 달고 있던 시들과, 산문 혹은 소설 혹은 평론 같은 것,

푸른 청 회 빛 집

부끄럽지도 않게 버젓 내놓은 어느 해변가의

기둥 사이 좁은 텃밭 너머

골동품 세일 같은 것

허영과 오만의 석가래 버티고

언제였던가, 복사꽃 한 줄 줄지어 피었던 거리

오늘을 세우는 것, 희미하게 보였을 때,

조막손만한 어린 아이 같은 시간의 자투리 재잘재잘 4월 웃음 같은 해 그름 커피향 기와집 온 동네 골목을 핑크안개로 어질어질 헤매던 시간

곽 상 희 현대문학지로 시등단, 시집8권 수필 3권 소설 장, 중, 단편, 영문소설 <Two Faces>·,

지난 해 가을 덮고 있던 낙엽의 이불 한 꺼풀 두 꺼풀 들추면 잠에 지친

<문학과 삶> 종합지 발행, 교육과 문학 분야에서 많은 후배 양성, 국제적 모임에 참 석 패널, 강연, 시낭송 등등으로 활동, 올림포에트리 시인 (스페인), UPLI 계관시인으 로 선정, 국내외의 여러 시인상 소설상 수상, 창작 클리닉(1984-)을 경영하며 영 한 시 워커샵, 미주교포사회에 치유의 문학 강의, UPLI Korea Affairs Dir. , Mov"t One Board. Mem. (<시가 있는 세상>담당 KCBN, 1990-현재까지) 인터네셔널곽상희서신 -‘시와 평론' 진행중(1914-) Kwaksanghee9@gmail.com

40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곽상희 l

41


플로렌스의 찬 바람

지금쯤 지갑속에 나타난 바보같은 동양사람의 얼굴을 보며

김 명 욱

"이 멍청한 동양사람아 지갑도 하나 잘 챙기지 못하는

얼마나 비웃음을 웃고 있을까 그리고 이럴꺼야

바보같은 사람아!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줄도 모르고" 4월 9일 2019년 4.19를 열흘 앞둔 화창한 날

그래 70평생 처음 와 본 이탈리아의 명소

20년 이상 왼쪽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지갑을 잃어 버렸다

세계인이 구름처럼 몰려 와 관광하는 플로렌스에서

그것도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도시 플로렌스에서

나같이 멍청하게 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지갑 안에는 드라이버라이센스 돈 300달러

생각하니 소름이 끼친다 플로렌스의 유명 성당에

건강보험카드 시니어를 위한 전철버스 이용카드

들어가 보니 예수가 달려 고통받는 십자가가

소셜시크릿 카드 자동차등록증 자동차보험카드

덩그러니 나를 반겨 주는 것 같아 더 안쓰러워진다

크레딧카드 현금인출카드 사진 한장이 들어 있었다 부활절을 앞두고서인지 플로렌스는 온갖 인종이 다른건 잊어버려도 상관없다 마음이 정말 아픈건

모여들어 인종박람회를 보는 것 같은 느낌

빛바랜 사진 한 장이다 그 속엔 아내와 어린 두 딸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이번처럼 거칠게 다가오기는

나의 젊은 날과 함께 환하게 웃는 모습이 들어 있다

처음이다 모두 다 플로렌스에서 날치기 당한

수십 년을 내 지갑 속에서 나와 동고동락한

내 지갑속 가족의 안부가 불투명해서가 아닐까

내 사랑하는 가족들 성스럽다는 도시 플로렌스에서

아내와 두 어린 딸들 지금쯤 어찌되고 있나

날치기의 손에 넘어가 지금 무슨 고초를 겪고 있을까

쓰레기통 속에 들어갔을까 아님 길가에 버려졌을까 가족이 사라져 버린 빈 주머니를 끌어 안고

그토록 아름다운 도시 플로렌스의 하늘은

뉴욕으로 향해야 하는 마음 한 저리가 횡하니

푸르게 빛나고 있지만 나에겐 검푸른 하늘로 변해 있다

뚫린 채 플로렌스의 찬 바람이 휘몰고 지나간다.

지갑을 허락도 없이 가져간 사람 어떤 사람일까 남자일까 여자일까 동양사람일까 서양사람일까

42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김명욱 l

43


바람이

나무 고아원

김 명 욱

우설 김 미 숙

바람이 바람을 밀고

너무 그리워서

날이 날을 세운다

떠나지 못하고

허벅지 꼬집어 아픈 허한 가슴에

떠날 수 없기에

휑하니 바람 들어와

기다리는.. 그 자리에

뚫어진 마음을 또 뚫는다

하늘이 닫히고 땅이 무너지어

언제가 되려나

울지도 못하고

둘이 하나 될때가

기다리는.. 그 자리에

아니 셋이 하나 될때가 셋도 둘도 하나도 아닌 바람이

낯선 손길이

그냥 스치우며 날을 세운 날에

나를 안아준다

바람을 흘린다.

이제는 버리지 않겠다고..

하남의 양지에서 이제야 울며 서로 안았다 김 명 욱 강원도 영월 출생. 남가주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 신학석사(M.Div.), 목회학박사(D.Min.), 목사. <시대문학> 시 부문 등단. <순수문학> 수필 부문 등단.

살아야겠다 나를 위해서

현 국제 PEN 한국본부 회원. 저서: 시집 <가슴깊이 구르는 소리 하나 있어>, 수필집 <꿈은 나이를 상관치 않는다>. 공저: <신대륙> 1,2,3권. myongkim49@gmail.com

44

l 뉴욕문학 제29집

이 글은 경기도 하남시에 나무 고아원이 있다는 영상을 보고 쓴 글입니다. 시 · 김미숙 l

45


원효로

그곳에 내가 있다

우설 김 미 숙

길모퉁이

울지도 못하고

꺼이꺼이 울음 삼키는 작은 여자 햇살이 부서지면

하나 보인다

그곳에 내가 있다 두 눈을 감으면 하늘에 떠있는 봄 향기보다 더 큰 웃음 짓는 작은 여자 하나 보인다

소나기가 감싸 안으면 그곳에 내가 있다 버스 정류장 남편을 기다리며 알록달록 꽃송이 같은 우산들 사이로 기다리는 작은 여자 하나 보인다

김 미 숙 1963년 서울출생 1991년 미국 가족이민 1999년 문학세계 시부문 신인상등단

함박눈이 쏟아지면

2000년 문학세계 소설부문 신인상등단

30년째

미동부 한인 문인협회 회원

현재 뉴욕에거주 미주 기독교 문인협회 회원 mscho424@daum.net

46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김미숙 l

47


그이의 나이 앞에

파마머리에도 익숙해지고…

김 소 향

서로에게 길들어지며 손잡고 가는 길목 내일도

그이의 나이 앞에

그 다음 다음날도 이렇게 가고 싶네

꺾인 외고집,“파마머리 싫어요”

단 삼 십여 분 만에 완성 미용사의 걸작인 곱슬머리

팔십 평생에 처음 만난 신세계 그이 더불어 신바람 난 세월에 앗겨 성글어진 머리칼

마흔 다섯해의 낯익은 미소 아니었다면 한참 생소했을 모습

“파마하고 싶다” 노래 부르기 몇 해 만이던가

뉘엿거리는 햇살 등지고 함께 행복에 빠져들었던 그날 이후 어느덧 두 해가 흘러가고

48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김소향 l

49


지금 어디에?

살아가는 것은

김 소 향

끝날까지 헤매는 과제

잠복한 행복의 전환점 찾아

나는 부엌바닥에 들러붙은

지금 어디에?

이제 쓰레기일 수밖에 없는

잘 찾아가고 싶은데

메밀국수의 변신

어떻게, 어느 방향으로?

지난 새벽 마을길을 달리다가 보았던 지렁이 닮았다

잔디밭에서 나와 하필 아스팔트 길로 결사적으로 기어가고 있었는데 정말 눈이 없나 보다

궁금한 마음 눌렀다 메말랐을 몸 새벽 이슬에 흠뻑 적셨으려니 흐뭇한 상상에 머무르고 싶었다

문득 떠오르던

김 소 향

소식 뜸한 막내아들

미주카톨릭문인협회 회원

1997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둥그러지는 바람) (바람의 예감) mk588@nyu.edu

50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김소향 l

51


별에서 이름 찾기

하루살이

김 송 희

김 송 희

기억의 숲 속

하루가 떠나면서 말한다

먼 나라에 살고 있는

잘 해내었나

그대 얼굴

걷다가 작은 돌부리에 비틀거리며

그대 이름

세련된 식당 앞에서 망설이다 굶고

별이라는 걸 왜 몰랐을까

한 달을 먹고도 남은, 일용한 양식의 현금 카드 서너 장 가방 깊숙이 보관 되어 있는데

밤마다 커튼 없는 창가에 와 속삭여 주는 그대 목소리 내 주소록에서 사라진 이름이라는 것을 왜, 깨닫지 못했을까

낙엽 지는 오후 덕수궁 돌담에 기대어 조용히 이별을 말하던 그대의 눈빛을 잡아두지 못한 파도여

어질어질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해매이다 버스정류장 차가운 벤치에 앉아 꿈이라는 것, 소망이라는 것 찾고 찾아도 보이지 않아 버릴 수 없는 팔순이라는 나이, 아무리 숫자에 불과 하다는 위로의 말도 순 위선이고 거짓 말 나는 혼자이고, 중얼중얼 지나가는 허술한 이국의 노인이나 영혼은 한글, 육신은 영어, 이중 언어를 혼합하여 중얼중얼은 영어나 한글이나

그리움의 아픔

늙는다는 것이나 영글어가는 것이나

가슴에 쏟아지는 슬픔의 빗줄기

그게 그것

낙엽 지는 서러운 바람에

모래성을 쌓듯 수천 번 수억 년 헛된 나의 꿈

나도 별이 된다

52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김송희 l

53


엎드려 통곡 한다

북촌에서

하루가 또 떠나면서 말한다

김 영 대 오늘도 잘 해내었나! 난로의 열기로 바글바글 끓는 싯귀가 부유물처럼 함부러 떠다닌다 소릉조를 읊조리며 부모를 그리지만 여비가없어 가지못한 불효자

담배연기와 막소주 그의 자리다 물구나무선 하루가 안주로 올라 젓가락에 해부를 당한다

끝이없는 골목길 토해논 사람들로 불안정 하다 저장당한 혼은 죄를 시인한 결과물이였기에 낮선 사람만 보면 속옷에 오줌을 지렸다 김 송 희 1963년 현대문학으로 문단에 등단 저서: 시집 ‘이별은 고요할수록 좋다’외 7권 외 공저 수필집 ‘ 시도때도없이 외로울땐 배가 고프다’외 다수 수상 : 재미 펜 문학상, 숙명여대 문학상, 미당 서정주 시맥상 표창: 문교부 장관상, 대통령 표창(2세 한국어 교육) 국제 PEN 한국본부 자문위원

그는 자신을 와송이라 했다 오래된 지붕에 씨앗이 내려앉아 바람과 물이 거져 키워주니 부끄럼없는 하늘의 꽃이라 했다

미동부 한인문인협회 회장 역임, 현재 자문위원 kimsonghi311@daum.net

54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김영대 l

55


바이올린 협주곡

진달래꽃

김 영 대

김 정 기

음율은 가을 낙옆처럼 떨어져

잠깐 잠든 사이

보도를 물들이는 깃발이다

우리집 울타리에 진달래꽃 피었네

낮게 읊조리는 이야기

눈길을 피하려다가 들키고 만 꽃송이가

활이 휜다

혼자서 귀뿌리를 붉히네

온몸에 풀어진 긴장감이 흰눈을 뒤집어쓴 산야를 오른다

며칠 후면 헤어진다 해도 돌계단에 떨어진 기억을 밟다가

넓은 등짝에 머문 햇볕은

소월의 바다에 익사해도

또다른 언어들을 버리고 다시 줍는다

오염된 대륙을 건너

감은 눈에 흐르는 침묵은

바람도 거센 사막도 지나서

무거운 바람처럼 내려 앉아

눈치 보면서 그 뒷모습 따라 가다가

휜 활에 모든 것을 건다 세월의 색깔로 눈시울 적시며 시월의 모퉁이에

고국 어느 산모통이에

바이올린 차이코프스키 D 장조

진달래로 피어 더운 숨을 쉰다네

하나 걸어둔다 봄의 무늬가 지워진다 해도 김 영 대 오산중학교, 휘문고등학교, 단국대학교 철학과 중퇴 1989년 도미

바람부는 계절의 틈새에 서서 꽃잎 되어 허공을 휘청이며 날아가네

일본식당운영 youngkim0921@gmail.com

56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김정기 l

57


물 감옥

언제까지 물 안에서

김 정 기

조금씩 잠들어가고 있는 의식세계에

대답하지 못하는 세월의 등마루에서

연두 풀잎 한잎 눈앞에 자란다 물속을 걷는다 집안에서도 어디를 가도 물 컴퓨터 앞에 앉아도 물이다

헤엄도 못 치면서 물에서 살다니 걷어 내야할 거품도 껴안고 헐벗은 말들만 뛰노는 광장에서 하루해를 적신다

허둥지둥 달려온 길만 햇볕을 쬐고 아득한 것들만 모여 사는 동네에 아직도 낯설기만 한 물 감옥의 주소를 쓴다

어디까지가 물길이고 바람길인지 분간 못하는 지점에 와 있구나 물결이 바람이 되어 밀어 닥쳐도 여기는 따뜻하고 온화하다

김 정 기 1970년“시문학지”추천완료로 문단 데뷔 1975년 시집“당신의 군복”출간 1979년 유엔 한국대표부 외교관 남편 임지로 도미

58

어둠의 척도도 잴 수 없는 물속

1995년 미 동부문인협회회장 역임

그래도 당신은 여기까지 따라와

“빗소리를 듣는 나무”수필집“애국가를 부르는 뉴요커”

내 등에 물기를 닦아주고 있다

제 13회 미주문학상 수상 5회 고원문학상 수상

l 뉴욕문학 제29집

시집“당신의 군복”“구름에 부치는 시”“사랑의 눈빛으로”“꽃들은 말한다” 현재; 뉴욕 중앙일보 문학교실 뉴욕 뉴져지 담당 [18년]

시 · 김정기 l

59


가을 숲

사막의 풀

김 정 혜

김 정 혜

숲은 빼곡하게 산등성이에 들어 앉아

드넓은 사막 한 귀퉁이

추운 거리를 헤매는 나무를 품어 안는다

한 뼘도 안되는 자리 웅크리고 앉아

숲속에 살고 있었다

한줌 바람에 하늘거리는 풀

세상 아무도 모르지만 몇몇 근처 나무들은 알고 있었다

언젠가 푸르렀던 유년기도 있었으나

어찌 어찌하여 뿌리만 서있는 틈에 비집고 나온 버섯

빗방울 맞아보았던 적 그 언제였나

얼마 남지도 않은 뿌리 드러내놓고

땅 속 깊이 가느다란 한줄기 물길

언덕배기 덩그라니 쓰러져 힘겹게 숨쉬는 나무,

꿈 속에서 시원하다

그 옆에 솜털 눈에 흔들거리던 밤나무 잎을 알고 있는 벤치, 금색과 붉은색 나무, 푸른 소나무, 잎이 하나도 없는 나무

계곡 너머 하루종일 햇빛 받아

전혀 어울릴 것같지 않은 것들이 어우러져 있는

하얗게 피어난 소금밭

숲속, 비바람에 누렇게 변한 잎새들

엎드려 소금이라도 피워냈건만

낙하할 곳을 찾다가 다른 덤불에 꽂히거나 땅에 내동그라진다

바싹 말라 색깔조차 희미한 풀

시끄럽고 뜻이 없는 언어와

온종일 햇빛 받아 무엇을 피워냈을까

살아온 하루 하루가 수북이 쌓여간다 나무는 허물 벗듯 그렇게 잎새를 떨구고

먼지와 모래 지금지금 씹히는 들녘

메마른 이웃 나무와 얼섞이어

직사광선 아래 햇살 모아 만든

푸른 눈동자만 가지고 허허로운 겨울을 지킬 것이다

오직 나만의 것이었던 풀씨 톡톡 떨어져 지평선 멀리 뛰어나가고

60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김정혜 l

61


헛헛한 벌판에 남아 항아리 가득 꿈꾸는 사막의 풀

먹을 갈며 박 원 선

새벽마다 향불 살라 마음으로 모으면서 먹을 갈아 시작하는 이 하루 밝아오고 흰 머리 무성한 내가 묵향 속에 젖는다.

먹물 듬뿍 화선지로 번져가는 한 세월 마음 속은 사각사각 붓질소리 담아내고 향내음 아련한 연기 한 수 시를 읊조린다

선인들 깊은 뜻을 내 어찌 헤아릴까 창밖의 새소리가 아침을 일러주고 김 정 혜 뉴욕문학 신인상 등단 시창동인 독어독문학 석사

햇살이 어느새 와서 하얗게 머문다.

Long Island Univ. Library and Information Science, Masters Degree APC of New York Inc. Consultant

62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박원선 l

63


아침 산책

씨앗 이야기

박 원 선

변 정 숙

안개 뒤덮여서

입구도 출구도 없는 방 한 칸 딱딱하고 둥근 알맹이 작은 우주가 숨을 고르고 있어요 생명이 귀를 세우고 바깥을 듣고 있어요 산실은 언제 열리나요

호수조차 안보인다

뛰는 사람 걷는 사람 나무등걸 안는 사람

내 발길 그중에 끼어 새벽길을 벗어난다.

박 원 선

왁자한 소리 들려요 벽을 두드리는 흙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껴요 쉬지 않고 빠르게 가는 바깥에 가고 싶어요 키도 한 뼘씩 키우면서 시간의 그네를 타고 싶어요 환하게 꽃도 피울래요 문은 어디에 있나요,어머니 내가 문이란다, 아가 나를 열어 주마 나를 열고 가거라 나를 디디고 가거라 나는 여기서 너를 받치고 있겠다 둥근 벽을 깨고 한 생이 걸어 나가는 소리 어린 뿌리가 땅으로 발을 내리는 소리 햇살 사다리 타고 허공을 오르는 줄기와 이파리들 웃음소리 봄날은 익어가고

아호: 현운. 2005년 <문학시대> 시인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미주한인 서화협회 회장. 대한민국 서예전람회 초대작가. 대한민국 서예전람회 심사위원 역임. 한국 문화미술대전 초대작가.

64

l 뉴욕문학 제29집

스스로를 허물어 한 생을 피워 올린 둥근 방 비로소 편안한 소멸에 들고 시 · 변정숙 l

65


소리화가

겨울바다

변 정 숙

복 영 미

나는 깜깜한 어둠 속에 살아요

나는 보았다

환한 바깥을 상상하면서

마라톤 선수처럼 수평선을 박차고

나만의 검은 캔버스 위에 소리를 그리고 소리를 보아요

뾰족 바위까지 달려가 제 몸을 산산조각 부셔버리는

마음을 켜고 촉수를 밝혀 바깥을 들입니다

하늘에 금을 내고 땅 끝에 서 있는 나를 흠뻑 지우고

어머니의 눈물 배인 따스한 숨소리를 그리고 검은 지팡이의 더듬거림도

하얀 포말이 되어 흔적 없이 저를 마셔버리는

그렸어요 흘러가는 구름의 부산한 소리를 그릴 때는 너무 먼 소리여서

철썩 철썩 자기를 때리며

아득한 색이라는 이름을 달아주었어요

한 마리 외로운 바다표범처럼 우는, 흔들리는 수평선

숲을 흔드는 바람의 발길질도 그렸는데요

나는 혼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자동차 바퀴가 시간을 밟고 가는 소리는 아직 색을 칠하지 못했어요

그런 줄 알았다

검은 허공 캔버스가 완성되는 날 까지 미완으로 남겨 둘 거에요

바다가 저를 때리며 운다는 것을 알기 전에는

나는 소리로 세상을 보는 어둠의 나라 백성입니다

나는 알았다 사는 것은 파도처럼 앞만 보고 달려가다가 너무 멀리 와버려 가물가물한 수평선 손짓하는 무지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

변 정 숙 국문학 전공, 창조문학 시부문 등단 한국문인 협회 회원 문학동인 글마루 동인 (서울), 시창 동인 시집: 아카펠라 공저; 비밀의 뜰 Jungsook.byun@gmail.com

66

l 뉴욕문학 제29집

하늘보다 깊은 청 빛 텅 빈 모래밭 반쯤 닳은 하얀 맨발 한 켤레 껴안고 쓰러지는 파도야 파도야 가지 마 시 · 복영미 l

67


일일찻집

어떤 사랑

복 영 미

선우 옥

광고지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차 한 잔 맛보세요’

숲 우거진

농아들이 달인 차 맛은 어떨까 호기심 반 동정심 반 구경 가본 지하 일

바위틈 으로

일찻집, 반 고흐의“감자먹는 사람들”처럼 컴컴하고 무표정 할 거라

알이

는 그림은 빗나갔다 나는 왈왈 수화소리 어지러운 농아들 곁으로 다가

머리를 들이댄다

갔다 소리 보다 촉이 빠른 여자가 맨손으로 빈 의자를 닦으며 양 손 검 지와 중지를 포갠다 그녀와 나는 지구별에서 처음 만난 호모사피엔스

벗기고 또 벗기워도

처럼 서로를 탐색하다가 -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차 한 잔 주실래

속 옷 속에 감춰진 삶의 비밀

요- 내가 차 마시는 시늉을 하자 창을 기웃거리는 해처럼 웃는다 나는 벙어리가 되어 어색한 손짓으로 그녀는 유창한 수화로 태어날 때부터

봄 여름 가을 겨울

농아였다 사랑하는 사람들 모습을 볼 수 있어 불행하다고 생각해본 적

한해

없다 ㅋㅋ 목구멍에 콱 걸린 듯 한 웃음소리, 그녀와 내가 행성의 아

잘 영글어진 씨앗은

찔한 벼랑에서 웃음의 색깔이 똑 같다는 것을 깜빡하고 우리들의 이야

뿌리 깊게 싹이 내리고

기는 오만가지 표정으로 무르익는다 사랑은 상처 받는 것을 두려워하

어둠을 헤치고 속아낸 생의 퍼즐은

지 않는 것 왜 사랑해야하는지를 아는 농아들의 모습이 말 잘하는 나

길게 펴진 길 한 복판에 서서

보다 행복해 보이는 것은 사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 그것 말고는

오로지 답인 하늘을 향해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퍼즐을 맞춘다

복 영 미 경남 울산 출생 2002년『한국문학평론』 시 부문으로 등단했으며

설레 설레 찾아온 그리움

시집으로 『우주의 젖이 돈다』가있다 2009년 한국일보 ㄴ.A.지사 문예작품 공모에 당선되었으며 2010년 재외동포 문학상 시 부문 대상 수상하였다 youngmee_b@hanmail.net

68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선우옥 l

69


봄 가지에 대롱히 매달려 힘겹게 기지개를 펴고

창 밖에 눈은 오는데 선우 옥

한 입 크게 벌린 꽃 봉우리에 몸 낮춰 인사를 한다 정월의 옷자락을 붙들고 똑딱이며 달려가는

가신 님이

추에 매달려

옵니다

사랑은 오늘도

몸을

분주히

흔들며

삶의 바턴을 전달한다.

가지를 흔들며 영혼을 흔들며

새 하얀 눈으로 옵니다

멀리서 들리는 종소리

흩어진 눈발사이로 까만 죄가 하나 둘 바람에 나부낍니다

70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선우옥 l

71


죄는 산을 넘고 들을 넘어

못들의 수고 손 정 아

요단강을 건너 옴니다

장독 위로 소복히 쌓인 눈은 비천한 몸 낡아 빠진 혼 곱게 담아 조용히

수많은 못들은 누구의 컴컴한 조형물 속에서 그리고 화려하고 무거운 그림틀 뒤에서 목에 걸린 외로움을 견뎌내고 있다

강 건너옴니다.

망치에 얻어맞은 세월도 맷집 키운 밤과 낮이라 천둥이 내려칠 때 놀라 솟구친 허리도 되잡히고 다시 얻어맞는 정수리 박힌 자리에 감추어진 붉은 진액이 벽속에 틀어박힌 못들의 호흡이다 세월의 장단에 가로질러간 얼굴들을 딛고 조용한 층계들과 바람과 숲과 묶인 공간들 그리고 절대 부자유한 건축물들의 이해 할 수 없는 절묘함이 이어지는

선우 옥 1991년 유학으로 도미, 한국방송공사, 시사영어사,

자유로운 끝과 끝

동아일보 근무, 사업체운영(미국) 순수문학 신인상 수상(2004년), 미동부문인협회이사

갈비뼈들의 수고로 거친 어제와 오늘이

m_groysman@yahoo.com

숨을 쉬는 것 시끄럽지 않은 평화와 사랑의 균형이다

72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손정아 l

73


바늘 같은 친구 하나

간지러운 입이 참지를 못하고 귀에 저녁을 넣는다

손 정 아

세월의 누더기도 탓 없이 입을 수 있었다는 것을

이런 바늘 같은 친구가 있어

귀한 친구 하나 그 귀에 옆구리 솔기를 꿰맨다

오늘도

겨드랑이가 닳아

구석구석 쌓인 먼지 같은 오라기까지 뜯어내고

시간의 껍질에 속살이 들어난다

하루의 푸념이

너무 낡아 버릴까 해도

배고픈 귀에 기도같은 수다를 꿴다

올올이 박힌 정이 나를 잡는다

같이한 시간들 그 속에 내 어깨를 또 집어넣게 하는 친구 같은 낡은 내의 얼기설기 손질을 하다가 한 땀질 가는 바늘에 찔려 엄지손가락 끝에서 피가 난다 잠시 한눈을 팔다가 실수한 것도 놀라 바로잡아 주는 친구

앉아 시침을 한다 그 성미가 급해서 간혹 내가 찔려도 찢어진 마음을 흠 없이 집어주는 녹슬지 않는 바늘 같은 친구 손 정 아 전남 해남 출생

찔린 손가락도 아프지 않다 해도

중앙 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

때론 얄미울 때가 있어서 몇 날을 뜸하다가도

시집 < 그의 발에 운동화 끈이 풀려있다 >가 있음.

2014년 <시문학> 하반기 우수작품상으로 등단. 현 뉴욕 중앙일보 문학동아리 회원으로 활동 jungsohn0610@gmail.com

74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손정아 l

75


빨래

윤동주

송 온 경

송 온 경

빙빙 거품을 내며 돌아가는 세탁기속에서

꽁꽁 얼은 만주 벌판에서 태어나

아픔도 걱정도 다 씻겨나간다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마디 못했던 부드러운 심성의 꿈많은 아이

따끈따끈한 건조기 속에서 제 모습을 찾아가는 셔츠, 바지 어머니의 분신같아 곱게 접는 손 행복하기만 하다

벽장속에 걸어드리고 빨래통 속을 들여다 본다 어머니의 체취가 남아있는 웃도리와 바지 입가에 웃음이 감돈다

명동소학교 시절, 마음속 그림에 글의 옷 입히고 용정 중학교 운동장에서, 발에 닿는 공마다 저멀리 하늘로, 그리운 조국으로 날려보내더니 빼앗긴 조국, 타국살이 설움, 어린 눈망울들 앞에 웅변으로 토해내고 미처 하지 못한 말, 말, 말, 흰 바탕에 검은 먹으로 찍어내더라 의술보다 붓을 따라

아파서 환자복만 입으실 때는

조선의 연희전문 문과로 진학

빨래통마저 울고 있었다

인왕산 정기아래

나의 텅 빈 마음처럼

우리말과 서양의 운율에 매료되더니

창문을 통해 들어온 한 줄기 햇살

조국에 힘을 보태기 위해 현해탄을 건넜을까

어머니 입가의 미소처럼

사랑하던 릴케의 시가 그를 불렀을까

따뜻하기만 하다

적의 나라에서 공부하기 위해 어쩔수 없이 그들의 식대로 바꿔야 했던 이름

76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송온경 l

77


그래서 쓰디 쓴 마음에 눈물로 쓴 참회록

삼월에는 새장의 새를 날리자

동지사 대학 교정

안 영

조선인이 조선말로 시를 썼다하여 차가운 빗장속에 갇혀진 몸 소리없는 눈물 비밀스러운 주사바늘에

검고 푸른 바다위에 배 한척 떠 있다

수려한 용모의 꿈많던 조선의 젊은 시인은

일몰인지 일출인지 불 분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붉은해가 떠 있다

해방을 목전에 두고 우리곁을 떠났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이 세상에 떠 있다는 것이 기적이다

많은 말을 남겨두고

기적을 믿지 않아 침몰하는건 순간이다 선로를 바꾸어 침몰하는 배처럼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도록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했던 그를 73년이 지나서야 동지사 대학에서 나는

주어진 시한부 시간이 불루노트를 꺼내들고 한장 한장을 넘기고 있다 흘러간다고 믿는건 인간의 몫 지금 이 자리가 영원으로 가는 교두보인것을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사랑의 힘으로 어느 행성으로 떠나기위해 대기중인 나그네들

만났다

과거 현재 미래가 한페이지인 신의 노트엔 시작과 끝이 손바닥 안에 있다 역사란 손바닥의 손금이며 송 온 경 '2019 년 Nassau BOCES 에서 테크놀로지 리더 (NASTAR) 상 수상’ 2017년 “영어 그림책을 통한 21세기 교육과 인성개발”출간 (하움출판사) 2017년 뉴욕문학 신인상 시부문 당선 (당선작: 갈대) 미동부 한인문인협회 회원, 뉴욕 시문학회 서기 고려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퀸즈칼리지 도서관학과 석사 LI 초등학교 사서교사 (현직), LI 공공도서관 사서 근무

손금을 들여다 보듯 운명은 결정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놀라고 슬퍼한다 순서도 없고 통보도 없는 이별을 믿지 않는다

미주 중앙일보 ‘송온경의 책세상' 칼럼니스트 미주 한국일보 교육칼럼 필진 한국 학교도서관저널‘미국학교도서관이야기' 연재 한국도서관협회‘도서관 문화’지에 다수 기고 NAACP‘올해의 우수 교사상’수상 onkjoo16@gmail.com

78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안영 l

79


목포

나는 한줌의 가루가 뿌리 깊은 나무를 키울 지도 모른다는 믿음으로 세상의 끝에 뿌려진 눈물을 통해

안 영

흐려지고 있는 삼월을 바라다 본다

분수 홀로 지키고 있는 바닷가 / 그 많던 똑딱선 다 어디로 갔나 / 동백꽃 떨어지는 다방에서 / 모닝 커피 한잔하고 / 박물관으로 남 은 구도시 한바퀴 돌아나오며 /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니야 / 유령 이 나오기엔 햇살이 너무 눈부셨다 /기차는 더 빨라지고 / 사람 들은 서울로 광주로 떠나 가고 / 사람 구경 하기 힘들어서 / 갓바 위에게 물어보았다 / 무엇이 변했단 말인가 / 떡갈비 맛은 그대로 인데 / 민어회 맛도 그대로인데 / 묵은지와 홍어는 더 이상 톡 쏘 지 않았다 / 천사의 섬으로 가는 다리가 보이는 유달산에서 / 케 이블카는 왔다 갔다 봄을 실어 날으고 있었다 / 개나리 벛꽃 흐 드러진 조각 공원에 꽃축제가 한창인데 / 저 멀리 춘의 뒷개

잃어버린 청

/ 바다가 보이는 운동장에는 / 까르르 아이들의 웃

음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아 / 선뜻 발길을 돌리기가 힘이 들었 다 / 선생도 없고 학생도 없는 학교에 / 목련이 지고 있었다 / 아 침 저녁으로 오르내렸던 계단은 / 앞날의 험난한 여정을 예고라도 하듯이 / 그때나 지금이나 숨이차고 / 그 많은 시간을 되돌릴 수 만 있다면 / 그때 부터의 인생은 낙제점을 면했을까 / 알 수 없는 일이다 / 소용도 없는 후회를 하게 만드는 곳 / 그런 곳은 찾아 가 지 말아야겠다고 / 내려오면서 다짐했다 / 시간 여행같은 것은 하 는게 아닌것이 / 모래시계에서 쏟아지는 모래는 모래일뿐 시간이 될리 없고 / 그저 흑산도 전복구이나 먹으면서 / 전복죽이나 먹으

80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안영 l

81


면서 세월따라 흘러 가면 되는, 맛집 여행이 정답같았다 / 완 행으로 가는 막차에 다시 몸을 싣게 된다면

하얀 눈 윤 관 호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얀 눈 바라보니 영혼이 깨끗해지고

쌓이는 눈 보노라니 가슴이 풍요로워지네

이 순간 부러울 것 없는 부자가 되었네.

안 영 본명: 안 영 애 전남 목포 출생 1979년 도미 1996년 뉴욕문학으로 등단 2003년 시집 ( 롱아일랜드에 부는 바람) 상재 국제 펜클럽회원 한국 문인협회회원

82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윤관호 l

83


어머니 1주기

우리가 들어갈 자리네 하네

윤 관 호

돌아오는 길 차창 밖 흐드러지게 핀 꽃들

어머니

어머니 메시지 전하네

돌아가신 지 1주기

참아라 견뎌내라

아내와 함께 산소 가는 길에

밝게 웃어라

차창 밖으로 활짝 핀

화평하라.

개나리, 벗꽃, 목련을 보며 꽃 좋아하시던 어머니 생각하네

산소에 가니 어머니 모습 보이지 않고 덩그러이 세워진 비석만이 우릴 맞이하네

비석 앞에 꽃 한 다발 놓고 기도 드리네 어머니 사랑과 은혜 회고하니 가슴에 비가 내리네

윤 관 호 휘문중고등학교졸업 고려대학교 졸업 고려대 경영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문예운동>으로 시 부문 등단 시집 누이 이야기 발간

아내가 어머니 산소 오른 쪽이

국제 펜 한국본부 회원 미동부한인문인협회 회장 역임 garyyun1001@gmail.com

84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윤관호 l

85


관계 속에

세월

윤 금 숙

윤 금 숙

너와 나 풍경을 이루는 세상에

너를 보면 짠내 나는 바람이랑

모음 자음 제대로 나열 되지 못한

부석거리는 먼지랑

말들

어떻게 한 통속을 이루어내는지

내 안의 내가 실종 되었다 햇살이 사막 한가운데 맨발로 걷고 있듯이

너에게 속삭일때

살가운 다정

얼마나 가슴이 벌렁 벌렁 거리는지

짐짝 처럼 구겨져 곡기 마저 제 몸에 뿌리 내리지 못한다

금가루를 뿌려준다 해도 멋적게 버티고 있는지

주고 받는 허물 용납치않아 분주한 낮 동안

후미진 곳을 볼 때 송곳 들이댈듯이

밤은 가지런히 발끝을 모으고 있을까

저 편에

견디어야 산다

웃음짓고 있는 고즈넉한 옛날

모난 마음 다름질해서

넓혀가고 싶지 않은 영역이 있는

눈빛으로 말 없이 나눌 때까지 윤 금 숙 1960년 경남 출생 한국 방송 통신대 중어 중문 3년 중퇴 2001년 도미 2004년 시맥 동인집 제 7집“나무는 말을 아낀다”회원으로 수록됨

86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윤금숙 l

87


잡풀을 함부로 뽑아 내던지지마라

강물이 왜 하류로 흐르는가 윤 영 미

윤 영 미 지금도 피가 흐르고 있다. 등지느러미에서 잡풀도 잘리어 나가며 뽑혀 던져져나가며

물속의 연어떼는 강을 타고 올라가야만한다.

먹이가 되고 거름이 되더라.

욕망의 크기가 거기에 있다.

잡풀을 함부로 뽑아 내던지지 마라.

어디선가 피 비린내가 난다. 새로운 냄새다. 미세한 파동이 느껴진다.

그 어떤 것도 생명을 함부로 빼앗을 수 없다. 강물이 왜 하류로 흐르는가?! 잡풀도 흙 보듬어 안고 살아온 세월 있더라.

연어가 살아가는 이유다.

잡풀도 삶의 애착이 있더라. 속이 깊은 강 일수록 흐름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강이 하류로 흐르는 건 연어를 거슬러 오르게 하기 위해서다 강물은 아래로 흐르면서 연어들을 가르친다. 자신의 물살과 체온을 그리고 길을 가르쳐 주고 있다.

희망이란? 삶이란? 보이지 않는 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다. 강은 아직 바다에 닿지 않은 길

88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윤영미 l

89


연어가 아름다운 것은 떼를 지어 거슬러 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강아지 이 광 지

강 물 위로 저녁노을이 지고 있다. 문앞에 서서 큰 소리로 나를 부르는 할머니 '우리 강아지!' 학교 가야지 오다 가다 만나도 찬우라는 내 이름 있는데 나는 강아지가 되네 머리 쓰다듬고 엉덩이 두둘기며 부르는 할머니 목소리 '우리 강아지' 귀엽다고 내게 준 새 이름 꿀이 떨어지고 마음이 따뜻해지네.

윤영미

삶터문학, 시대문학으로 문단데뷔. 첫시집으로 '질경이 풀꽃속에'. 세계시인협회 회원. 미동부 한인문인협회 회원/이사/시분과 위원장. 전 윤동주 문학사상선영회 지부장(뉴욕). 라디오 코리아 1480AM '시와인생' 진행담당자. KTV CH17 윤영미의 토요 초대석 진행 담당자. KNN TV "윤영미의 생각하는 오솔길" 진행 담당자. 현재 포코노 임마누엘 수양관, 청솔쉼터, 문학마을 원장. poet.yunyoungmi@gmail.com

90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이광지 l

91


피아노 건반

모과나무 야화

이 광 지

이 명 숙

하얀 친구

적멸에 든 흰발이 마음보다 먼저 어둠을 건너왔다

검정 친구

발끝을 적시며 들끓던 모든 길들이

외톨이 되기 싫어

무릎을 밟고 어깨 위

언제나 붙어 사네

빈 손마디들로 불거져 나오고

서로 아끼며

붉은 핏방울이 후드득 꽃이 피었다.

둘이 하나 잘 어울리는 친구

깊게 엎드린 꽃자루를 거머쥐고

노래를 터뜨리는

우물처럼 웅크린 그늘에는

아름다운 소리

보이지않는 풀벌레들의 울음을 길어올리는 길이 나있고

검정 친구가 빛나는 것은

길은 짧거나 또는 보이지않을 만큼 길어서

함께 소리내어

밤을 휘감아 춤추는 시방이 사라졌다

울게도 웃게도 하네 둘이 하나되어

머리 위로 떠도는 달빛 한줄기

걸음 옮길 때

어둠은 스스로 베이며 떠나는 길 끊어진

사랑 노래 들려오네.

찰라, 한순간의 단전으로부터 과거, 현재, 미래도 없이

이 광 지

밤을 가둔채 비추고 있는 거울은

교회학교 주일 공과, 성경 동화, 어린이 찬송가 집필 아동문학가 박경종 선생님 추천으로 등단 전 한국 크리스찬 문인협회 회원 목사 전 뉴욕 신앙 월간지“Diaspora”편집인 kwangjilee@gmail.com

92

l 뉴욕문학 제29집

꽃인지 마음인지 알 수 없어 손을 뻗으면 아직도 흐느끼는 어깨를 들썩이는 바람이 묻어와서 손 끝에 아련히 금빛의 알들이 잡혀지고 시 · 이명숙 l

93


답을 꺼낼 수 없는 공안들은 유리병 속에서 만개를 기다릴 때 꽃빛들은 여전히 피인지 어둠인지 모를 뿐

눈 이 명 숙

꿈을 꾸듯 무한의 꽃잎은 무한의 얼굴을 가두었다 뿌리며 한삼자락으로 흩어내는 것이 어디에도 들어 설 문은 없고

눈은

모든것은 문으로 연결된 달랑거리는 문고리들의 멀고 먼 행렬

내리는 것이 아니다.

空은 결코 안으로 잠기지 않은 채 밖에서만 열 수 있는 것

잠깐 나타나서 반짝이는 것이다 허공의

*한산의 손가락이 가르치는 달을 *습득은 발등에서 줍고

얼어있는 한 점이 보이는 것이다

꽃빛이 열렬히 터지고 난 뒤에야 한삼 뒤 손의 민낯의 표정은 드. 디. 어.

고요의 한가운데

마침표로 영글은 물음표와 느낌표의 과육을 벼랑에 올려놓고

가볍고 빠르게 두드리는

칼날 위에 목을 내미는

바람의 빗장 사이 엿보이는 공간의 피.

어제, 오늘, 내일의 한 점이 투망을 펼친 밤의 모퉁이 향기의 구름을 거두면

적멸에게로

뚜벅. 달빛에 든 나무 한 그루

거침없이 흘러가서 제자리에

어둠의 이름을 잃어버린채 오리무중으로 이르는 발자국마다

머물러 있는 눈은

벼리어진 누런 달들이 이지러질 듯 따라오고 있었다.

그친. 눈으로 우리 앞에 놓여있다

잔가지의 빈 집을 헐어 낼 때 나무는 말한다 *한산, 습득: 당나라 국청사의 선사

몸 밖의 눈을 지붕 위로 쏟아내며

94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이명숙 l

95


없는 소리를 건드려 보는것이

좁혀진 거리가 잠깐 보이는

눈의 소리를 드러내어

순간의 풍경

나무가 서 있는

눈 감지 못하고 따갑게

하얀 풍경이 되는 것이다.

뒤집어진 내. 안이다

춤추는 무한 허공이 아무 것도 없는것을 본다 손 바닥 위에서 눈물로 녹아내리는 동안

사라지는 우주 밖의 백혈구들이 하늘과 땅과 숲으로 돌아와서 한송이 꽃으로 지워지고

꽃이 피는 순간의 하늘에는 눈이 있다. 감을 수 없는 막막한 빛으로 돌아오는 눈은. 오는 것이 아니다.

부서진 영원이 신열의 뜨거운 몸으로 몇 천도 불꽃

이 명 숙 1988 불교문학 신인상 수상. 2016 뉴욕문학 시부문 가작 수상. myungsookji@gmail.com

혓바늘로 돋아나서

96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이명숙 l

97


남편의 도시락

얼음가루 섞인 칼바람 여전히 탁자 위에 맴돈다.

이 선 희

팔랑이는 연 꼬리 쫓아 달음질치겠지

오늘도 달려드는 바람 밀치며

언제까지일까, 정월 바람 사납게 창을 흔든다

중독되어 버린 지전(紙錢) 잡이 놀이는

새벽 별빛 잘게 썰어 준비하는 도시락

마음이 괜스레 조급해 진다

뜨거운 물에 데운 밥통 국통에

일 없이 쌓여 가는 세월 탓 인가

온기 한 사발 더 추가다 멈출 줄 모르는 정월 바람에 베고니아 꽃잎 달아 본다. 충혈 된 눈동자 마주보며 뻔한 소리 되뇌어 배웅하는 앵무새, 이제 좀 쉬면 안 돼요? 한숨 섞인 측은한 바람 희끗희끗 숱 없는 그의 머리 흩치고 달아난다

베고니아 숨 도는 따스한 실내, 한데인 듯 으슬으슬, 허기까지 스멀스멀, 보리차 끓이고 양푼에 밥 한 주걱 푹 퍼 김치 넣고 참기름 섞어 비빈다

붉은 밥알 입에 쓸어 넣으며 한 숟갈씩 나눠 먹던 그이 생각,

98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이선희 l

99


갈릴리 바다에서/ 이스라엘 성지순례

폭풍도 비바람도 순종하듯 잠잠해지고

이 선 희

거친 풍랑조차도 막대기 같은 내게 주신 십자가 사랑

귓전에 떠나지 않는 임의 음성 *네가 나를 사랑 하느냐?

비 그친 너른 하늘에 아련히 뜬 무지개 갈릴리 해변 다다른 그때,

그 약속 우러러 내 평생 감사하리.

바다는 먹구름 가득잠긴 황토 빛 이었다 사나운 파도 무리지어 달려들고 뱃머리 할퀴듯 내리치는 빗줄기

오직,

*로마서 5장 12절: -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

두 팔 벌려 기다리실 주님 바라

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 왔나니-

목마르게 올려 디딘 젖은 선창 주님은 보셨으리 번뜩이는 내 눈물

*요한복음 21장 16절: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멈출 줄 모르는 정월 바람에 베고니아 꽃잎 달아 본다.

처절하게 다그치는 성난 파도 가르며 배는, 깊은 데로, 깊은 데로, 되돌릴 수 없는 길 가야만 한다

빗물 고인 갑판 헤쳐진 옷 끌어 잡고 드리는 예배 나 *한 사람 풍랑 밀치고 요동 쳤다면 배는 뒤집혔으리 못 자욱 난 그 손에 온전히 의지하여 가슴 떨며 받아 쥔 거룩한 살과 피

100

l 뉴욕문학 제29집

이 선 희 문예사조 2005년 "나무를 만나기 위해" 외 2편으로 시인등단 크리스챤저널 창간25주년 공모 시 부문 "치유의 새벽" 외 2편으로 당선 미주한국기독문인협회 회원 뉴욕시문학회(창작클리닉문학회)총무 parksunhee0708@gmail.com

시 · 이선희 l

101


퇴근길

산다는 게

이 성 곤

이 성 곤

12월의 해는 너무도 짧아

시장에서 생선 좌판하던 김씨가

집으로 가는 길에

어제 갑자기 죽었다는데

살아 움직이는 건

왜 팔다 남은 생선이 궁금한 걸까

전조등 불빛뿐 아래께만 해도 찻길의 안과 밖 다리와 강물 파란불과 빨간불 경계에는 늘 삶과 죽음이 함께 잠복 중 어두운 길을 달려 도착한 집 불빛 한 점 없이 몸을 낮춘 채 어둠 속에 숨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활생선처럼 싱싱했던 사람이 그리 쉽게 가버리다니 그나저나 남은 생선은 괜찮은 걸까

한잔 술에 시장 골목을 어깨동무로 누비며 함께 불러제꼈던 노래가락들 이젠 혼자 남아 깡소주 몇 잔에 취해 웅얼웅얼 몇 소절 읊조리는데 왜 또 팔다 남은 생선이 궁금한 걸까

살며시 문 열고 들어가서 불을 밝히면 모습을 드러내는 낯 익은 것들 이곳은 경계 밖이다.

이 성 곤 용산고, 한양대 화공과 졸. 1975년, 1984년 미국 이민. 현재 뉴저지에서 전자 관련 사업중. sklee4262@yahoo.com

102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이성곤 l

103


누구의 꽃일까

감람 새 잎사귀

이 정 강

이 정 강

산홋 빛 장미 한 송이

콥틱 교회는“쓰레기 분리 수거”조건으로

몰래 꽃잎들 한잎 한잎 뿌려놓았다

카이로 쓰레기 마을로 내몰려도

소중한 누가 벌써 다녀갔을까

새 땅 모카탐 동굴과 언덕에

탐내던 미지의 향기는

만 오천명이 웅거하는“모카탐 동굴교회” 를 올렸다

그가 채갔을까

그들의 경배는 바위를 울리고 산골짜기를 깨우고

다음 꽃송이 기다린다

지하의 잠든 자도

그 무심한 바닷속 체취를,

하늘의 뭇새도 놀라 숨죽이고

아님 무명의 하늘의 목소리

지나가던 구름도 멈춰섰다

밤잠 설치는 날들을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에서

서툰 몸짓을

기도하시던 모습 지켜본

깊이 내뿜는 숨의 악보를

수령 2000 여년의 감람나무들/올리브나무들은

다음 꽃은

현장을 묵묵히 지켜보며

알아챌까

먹먹한 마음의 눈물을 은빛 감람나무 잎새에 흠치며 늠름히, 의연히, 무언의 함성으로 지금까지 증언한다

우리들을 저버리지 못하시어 마음의 깊은 낭떠러지도 건너

104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이정강 l

105


복숭아뼈에 못을 걸어박는 참혹함을 건너가셨을까…………… 그 심정 한 조각이라도

봄의 찬가 이 종 비

우린 담을 수 없다

굴곡진 고비 다 끌어안고

동쪽 산위에 떠오르는

우람한 감람나무 기둥과 뿌리의

아침해를 바라보리라

버팀과 증언과 발자국들……………

저 들판 넘어 불어오는 바람을 맞이 하리라

동굴같은 눈 먼 시간을 관통하는

잠든 나의 영혼 눈뜨고

잔혹함을 부숴낸 햇살의 쓰다듬는

어둠을 털고 일어나

속말을 어찌 알 수 있을까

밝아오는 창문을 열리라 지저귀는 새들의 합창

노아가 601세 되던 정월에

웅크린 가슴 활짝 열고

내보낸 비둘기가

봄눈 사이 졸졸 흐르는

물고온 감람 새 잎사귀가 얼비친다~~~~~~~~~~~~

개울물 소리에 맞추워 콧노래 부르리라!-

이 정 강 1970년 <월간문학>지 신인문학상 시부 당선. 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부 입선. 1968년 <시조문학>지 추천 완료. 1971년-1979년 이화대학교와 단국대학교 출강 및 덕성여자대학 전임교수(1972-1975년) 2001년 미주 시조시인협회 <시조월드> 문학상 대상 수상. 2015년 국제한국 펜본부 해외작가상 수상. 시집 <프시케의 바다>와 <그 바람결에 연은 뜨고> 출간. 미주시조시인협회 회장 역임. 미동부한인문인협회 회장 역임.

떠나지 못한 지나 회색 그림자에 손 흔들며 이별 하리라 땅의 모든 생명 일깨우고 그 생명마다 봄향기 실어 푸른대지 위에 가득 채우리라

미동부한인문인협회 자문위원/한국문인협회 회원/국제펜클럽 한국본부회원. 현재 국제 PEN 한국본부 미동부 지역위원회 회장. mkim99@nyc.rr.com

106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이종비 l

107


하늘과 땅이 맞닿아 아득한 저- 수평선 봄의 들판으로 미래가 머무는 곳

희망사항 이 종 비

우리는 그곳을 향하여 봄의 찬미 노래 부르며 함께 그 길을 걸어 가리라!

아침에 일어나서 허리통증이 없으면 좋겠다 흰빵에 버터와 쨈 밀크와 설탕 넣은 커피를 마시고 싶다 허리굽혀 발톱을 깍고 진분홍 네일을 칠하고 싶다 높은 구두, 긴 검은 머리에 날씬한 자켓을 입고 싶다 어머니에게 후회없는 딸이고 싶다.-

허리통증에 고생이다 나이 들어가는 것은 먹을 수 있는 것보다 먹을 수 없는 것이 더 많다 허리 구부려 발톱깍기 어렵다 몇년째 평평한 신발만 신는다 옷은 모양이나 색보다

108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이종비 l

109


그냥 몸이 편하면 된다 조금전의 일은 잊어도 어머니 생각은 날이 갈수록

살다보면 이 준

더 자주 난다

아- 나이 들수록

잠 못 이루는 밤

희망사항만 맴도는 구나!

벽 난로 옆에 앉아 연기와 불꽃에 몸을 녹이고

고구마를 구워내며 자켓을 벗어 던지고

양말도 벗어 버리고 냇물에 발을 담그며

지붕끝에 고드름 떨어지고 칼 바람 소리에 눈이 내리면

어머님 목소리가 그립게도 쌓인다

불꽃에 마음 잡혀 이 종 비 Nina.ChongBee@gmail.com

새벽잠에 삶을 얹어 옛 이야기로 지새운다

살다보면 이런 날도 …. 110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이준 l

111


어쩌다 핀 꽃

노트르담 성당 지붕 위 펠리컨*

이 준

이 혜 란

사진 한 장 찍어 순간을 기록한

긴 목을 꺾고

나만의 행복

제 가슴 쪼아대던 너의 부리가 검붉은 불꽃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걸

봄 가고 여름 오는 길목에서

망연히 바라보던 그 날

눈이 내리네

마른 뼈처럼 꺾이고 부서지며 무너져 내린

눈 속에 피어난 노란 개나리

노트르담 대성당 첨탑

꽃이 피고 있었다

그 아래로 탄식의 눈물이 세느강을 타고 흘렀다

보기 드문

팔백 오십년 영욕의 세월

눈 속에 가득히 핀 꽃

첨탑 지붕 위에 앉아 붙박이처럼 묵묵히 파리 시내를 지키던 너

지극히 짧은 현재에서 과거 미래를 겹쳐 보는 순간이지만

걷잡을 수 없는 화마 사이로 너의 하얀 가슴에

바람이 친구되어

피빛 노을 장엄하게 터지고

소중한 시간은 날아가고 있어라

일렁이는 불꽃 아지랑이 사이로 어룽어룽 매운 눈물 사이로

이 준 뉴저지 거주 2007년 10월 문학세계 시부문 등단

112

l 뉴욕문학 제29집

검게 스러지던 너의 심장

시 · 이혜란 l

113


아, 그 순간 나는 보았다 포드닥포드닥 날아오르던

텃밭을 일구며 2 이 혜 란

새끼 펠리컨들 잿빛 둥지 위로 긴 목 하늘로 곧추세우고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이라

퍼레이드 하듯 세상을 향해 날개짓 하던

흙을 만지면 따뜻하다

너의 아가들

두 손으로

하얗게 어둠을 가르던

뭉친 것은 풀고

너를 닮은 작은 몸짓들을

굳은 것은 갈고

바라보았다

모난 것은 고르고

눈이 부시게.

성난 것은 다독이며 파종 준비를 한다

* 어미 펠리컨은 어린 새끼들에게 줄 먹이가 없는 위급한 상황이 되

씨앗은 사랑

면 새끼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긴 목을 구부려 부리로 가슴을 쪼

사랑의 열매가 낳은 또 하나의 사랑

아 자신의 피를 새끼들에게 먹이고 자기 자신은 죽는다고 한다. 이

오랜 기다림 끝에 뿌려질 또 하나의 인연

런 어미 펠리컨의 모성애와 희생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여 오래

산고의 껍질을 깨고

된 성당들이나 교회들에서 펠리칸 조각상이나 그림들을 볼 수 있는 데, 2019년 4월 15일 화재가 발생했던 노트르담 성당 첨탑 지붕에 도 펠리컨 석상이 있다. 이번 화재로 노트르담 성당 첨탑 지붕의 일 부 유명한 석상들이 손상을 입었다고 한다.

제 몸보다 두터운 흙을 뚫고 말갛고 연한 얼굴 생명을 내민다 기지개를 켠다

텃밭에 웃음이 피고 사랑이 자라고

114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이혜란 l

115


꿈이 여문다 내 두 손이 더 바쁘게 따뜻한 흙이 된다.

뉴욕 하늘문 교회 임 선 철

할렘에서 옷장사 하던 태연이 아빠는 48세 어느 가을날 돌아갔다 목사님 은 곰 인형 품은 두 딸을 데리고 매주 문병을 다녔다

정미 아빠는 미국온지 5년만에 돌아갔다 목사님은 사춘기 정미 남매를 반 지하방에서 데리고 나와 자주 국밥을 먹으러 다녔다

김집사는 52세 되던해,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갔다 목사님은 집들이 한지 반년만에 아빠 문상을 하는 연희 앞에서 말을 잊지 못했다

재영이는 스물둘 꽃피는 봄에 흩어졌던 친구들을 다 불러 모았다 목련처럼 까맣게 타 누워 있던 재영이 앞에서 목사님은 한참을 서 있었다

최집사는 유방암이 재발해 돌아갔다 붉은 벽돌 원 베드룸 아파트 거실에 걸려 있던 30년전 사진 속 맨해튼의 봄은 참 예뻤다

왕만두를 잘도 쪄 오던 세라 할머니가 돌아갔을 때보다, 열여섯 세라를 혼 자두고 세라 엄마가 돌아갔을 때 교회는 더 많이 모였다 이 혜 란 《뉴욕문학》《문학세계》《한글문학》으로 등단. 도미 전 한국교육방송(EBS) 방송작가 및 문화, 홍보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5년간 활동. 〈컴퓨터 디렉토리〉외 다수 작품. hyeranleeyu@yahoo.com

116

l 뉴욕문학 제29집

함께 사과도 따고 국화도 심던 어느 가을날, 아빠 신발들고 병실 떠나던 열 일곱 딸을 두고 목사님은 인사도 없이 훌쩍 돌아갔다

시 · 임선철 l

117


혼자 누워 바라봤을 푸른하늘, 죽통처럼 입다문채 말이 없었다 결혼반지와 피아노를 팔때도 씩씩하던 아내가 풀처럼 무너졌다 일어섰다

별을 담보로 임 선 철

서둘러 겨우 발을 넣은 기차에서 내가 하는 일은, 간밤의 소식이나, 쓰다만 편지, 혹은 매출실적 따위, 즐비한 E-메일이 오늘의 할 일을 보고하는 아 침, 나는 눈을 감고 주황색 날개를 만지작 거린다 단풍잎 엽서처럼 날리는 숲을 돌아 기차는 하늘로 올라가고

하늘엔 은하철도 몇 량 연기 없이 멀어진다, 긴 꼬리 달린 슬픔처럼, 내가 오랫동안 살았던 행성엔 오늘 비가 오겠다 때때로 외로운 저 별들은 고독 할까, 기다리는 소식도 없이 너는 전화기를 만지작거리고, 로커의 절규처 럼 메아리, 귓가에 때리는 이 행성은 아프다 조용히 짐을 들고 자리를 뜨는 승객처럼 때때로 오늘의 할 일은 침묵 속에 침을 삼킨다.

가끔, 별을 담보로 돈을 빌리리라, 강을 담보로 약속하리라 말하는 승객도 있었지만, 쓰다 버린 건전지처럼, 잊히면 그뿐, 어느 행성과 행성은 1분도 안되었지만, 어느 별은 100만 광년쯤 떨어진 곳에 혼자 산다, 기다림에 지 친 바람은 식어가는 철길에서 잠을 자고, 이 행성엔 겨울이면 모두 검은 옷 만 입는 어느 부족이 산다, 많아야 고작 100년이 영원한 줄 알고

임 선 철 1972년 함평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자랐다. 2015년 뉴욕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sunchulnyc@gmail.com

118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임선철 l

119


언어의 변신

가방과 소금

임 혜 숙

임 혜 숙

눈을 감으면 몇 개의 그림이 어른거렸다

소중한 것은 잘 보이지 않아요

골목길과 물에 잠긴 신전

가방을 내보이며 그녀가 말했다

회색빛의 치타와 닫힌 철문 어울리지 않는 불협화음, 공포증의 잔상이었다

모양도 빛깔도 다른

눈을 뜨면 알 수없는 괴물이 버티고 있었다

살아가는 속내와 욕망의 자국이 담긴 가방

생존이 박살나고 들리지 않는 언어와

그녀의 가방은 눈부신 소금을 담았다

말할 수 없는 단어들이 소용돌이쳤다 모국어를 떠나 온 대가였다

나도

불편한 진실을 찾아 산과 강을 떠돌아다녔다

가끔은 가방을 바꾸고 싶다

물이 주는 평화를 찾고 싶었다

송곳 같은 말과 찢겨지고 터진 몸띠

두 눈을 담그면 심장이 죄어왔다

내던져버리고 싶다

두려움의 끝, 물밑 어디선가 또 다른 우주가 보였다

스스로를 녹여 누군가를 살리고

따뜻한 그 우주를 붙잡아야했다

드러내지 않으나 끝내 살아있어

언어는 보이지 않는 불화와 화해하고 싶은 몸짓, 본색대로 펼칠 수 없다면 감출 수밖에

남루한 일상과 보이지 않는 흉기 대신

썼다가 도려내고 지웠다 다시 덧붙이며

빛나는 소금을 담고 싶다

변신이라는 이름을 빌려 목숨의 줄을 이어가고 있다 임 혜 숙 순천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했다 시문학 <신인우수작품상>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피지섬에 갈까>(2019), 수필집 <때에 따라 다른 바람소리>(2014)가 있다 국제펜한국본부 회원, 계수회동인 celiz2@naver.com

120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임혜숙 l

121


미숙아 2월

겨울비

전 애 자

전 애 자

다른 달보다 이 삼일이 적은

무엇을 잘못해서

2월 마지막 날에

무엇을 감추려고

빈 가지에 바람 한 점 건너간다.

울음소리 죽이고 달리는 차창만 더듬어

결정 못한 두 마음을

흐르고 있는지

김밥 말 듯 둘둘 말아서

한 해의 마지막 달 초 하룻날

허드슨 강물에 띄운다.

가랑비가 내린다.

긴 시간 겨울에 시달리니

일 년 내내 빗장 쳤던

어머니 손맛이 묻은

마음이 열리고

봄동 겉절이가 먹고 싶다.

오만가지 생각이 순서없이 쏟아지고

3월이 스치니 흙들은 새싹들에게

삶의 무게에 심신이 괴로워

길을 비켜주고

오면 오는대로

나무들은 꽃봉오리를 내민다.

가면 가는대로 부딪히면 부딪히는대로

미숙아 2월은

체념하고 살아야지,

3월 그림자 되어 붙으니

숨 한번 크게 쉬어 보는데

내 마음은 봄단장을 하고 앞장선다. 122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전애자 l

123


하와이 빅 아일랜드 코나 YWAM에서

벌써 크리스마스 캐럴이 빗줄기 따라 흘러 더욱 심란한 마음이다.

정 문 혜

하나: 선생님과 학생들

48개의 나라에서 온 1000여 명이 아침 점심 저녁 한 솥 밥을 먹는다 여린 새 순 같은 아기 질기디 질긴 칡넝굴 같은 주름깊은 교수 나이 차이도 엄 청나고 피부색 다르듯 취향도 같을 수 없는 생면부지 어디서건 마주치면 치아를 들어내 환하게 웃어준다 알로하 (그분의 숨결 앞에서) 플로매리아 꽃향기는 퍼져서 꽃이 걸어 가는지 향수로 샤워를 하는지 공부는 쩔쩔매고 기분은 구름타고 날아오르고

둘: 일 해야 해

학생은 어느 누구나 하루에 두시간 노동을 해야한다 음식준비, 설겆이, 교 실청소, 정원가꾸기, 풀뽑기....나의 일터는 뷰틱이다 필요로 하는 것이 다 전 애 자 *미국이민(1979년) *아시아 이중언어 개발센터(시튼홀 대학) 근무 *미주동아일보(뉴욕) 편집기자로 근무 *뉴저지 YWCA 한국어 교사로 근무 *한국수필 신인상 당선(2003년) *미주 중앙신인문학상 시부문 당선(2005년)

있는 만물상이다 어느새 단골이 늘어났다“물안경 필요해요”“썬크림 있 나요”“커피포트가 있으면 좋겠는데요”“딱 맞는 옷 골라주어서 감사해 요”“어머! 새팬티 사려고 했는데”... 모든 물건은 그냥 내놓고 공짜로 가 져간다“더운데 아이스크림 드세요”“기도해 주어서 마음이 편안해요”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랑나무들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가는 숲

*삼성줌인포토리그MAJOR ACE 회원 *공저: 21세기 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하여1,2,3 annieree123@hotmail.com

124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정문혜 l

125


셋: 산책

...빗물 먹지 않으려 솔방울이 저절로 닫히듯 마음 닫아 버린건가? 마음 빗 장 닫아 건 그녀에게 우리네 46년 세월 비바람 맞고 눈보라 친 인생학교

쿠아키니(khakini) 길을 건너 키이키아 오솔길엔 쿠쿠이 열대나무에 감탄

이야기...해넘이 풍경이 금빛으로 물든 분위기 있는 식당 탓인가 뉴욕에서

할 색깔의 꽃길. 비밀스런 동화가 펼쳐지는 파스텔의 초록바다 에메랄드

도 최고였던 이름난 쉐프 요리에 풀어졌는지...날 개이면 고슬고슬 벌어져

보석이 부끄러워 질 거다 파도소리랑 함께 마시는 구하바 쥬스 토속 하와

솔씨 날리는 솔방울 같이 활짝 웃으며 속엣말 보자기에 활짝 펴놓고 맛나

인안 집 무대에선 알로아 알로아 경쾌한 리듬으로 관광객들 반갑게 맞이한

게 먹는 내 딸과 동갑내기 동급생

다 어느덧 떡가루 흩뿌려 놓은 듯 별들은 쏟아져 내려오고 여섯: 오하나 강단 넷: 만남 고양이가 쓰다듬어 달라고 종아리 비벼댄다 새들은 찬송을 들으며 친구새 “어디서 오셨어요?”“호주에서 왔어요”“내 시동생 가족도 호주에 사

들을 모아와 내 발치에서 아무 두려움없이 먹이를 먹는다 이 곳은 변화무

는데--- 혹시 홍병숙 권사님 아셔요?”“어마나! 전설적인 믿음의 권사

쌍한 바람의 놀이터 바람이 불때마다 몸에서 달콤한 사랑냄새가 난다 화산

님을 어떻게 아셔요?”“제 시어머님이셔요”“애들레이드, 시드니에 교회

돌 같은 도마뱀도 장난꾸러기 상대가 되어주고 노인도 아이가 되고 아이

를 세우신 분이시죠? 그 분의 이야기는 들을수록 양식이 되고 자손들은 어

들은 천진 무궁한 나라를 재미있게 만들어간다 매 순간 나를 휘감는 열대

떻게 사실가 너무 궁금했는데--- 이 곳에서 뵙게되다니 꿈만 같아요”매

의 상큼 발랄한 초록 잎들은 모두 겸손한 헌신자들에게서 물려받았다 늦은

일 힘차게 솟아오르는 태양은 지구의 저 끝자락에서도 일을 만드시네 물

밤 상대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진지한 모습 노을 닮은 신비에 젖는다 새벽

과 바람과 세월을 밀고 당기며 큰섬 코나에서 같은 반으로 같은 꿈을 가지

엔 별들과 대화하다 잠든 풋내 나는 청춘 풍경이였던 열대의 숲도 선교사

고 만나는 신묘한 섭리

들의 삶의 일부가 되는 홀로 걸어도 전혀 무섭지 않는 여긴, 태초의 에덴

다섯: 나이를 먹는다는건

일곱: 집 밥

결석이네요 문 열어주지 않아요 간사도,리더도 간곡한 부탁을 한다 이혼

“우..하..아...된장국!!”기숙사의 음식도 한달이 지나니 간장 냄새 그립

의 아픔을 견디고 어렵게 다시 합친 아내의 권유로 내키지 않는 하와이 섬

다 김치 생각하면 비행기 타고 떠난 집 가고싶다 배달의 피가 같은 우리

의 단절된 생활 사업 때문에 비행기 타고 나갔다 돌아오긴 했다 사랑은 하

는 된장 냄새로 모여든다 슬며시 뒤로 내가 물러나 주면 머리를 맞대고 코

면서 표현에 서툰 남편 아내는 아내 뜻대로 따라 와 주지 않은 남편 땜에

박으며 꿀맛처럼 먹어대는 된장에 인 박힌 어쩔수 없는 한국인 때로는 고

126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정문혜 l

127


민이나 슬픔에 젖어있다가도 긍정의 햇볕에 널어 말리는 지혜로운 우리반 학생들 매일 먹는 샐러드 재료로 김양금집사님이 담가준 서리태콩 웰빙된 장, 가루멸치, 가루새우 풀어 끓인 국 한 그릇에 마주치면 깊숙히 배꼽인

멸치를 다듬으며 정 희 수

사 싱글벙글

여덟: 깨어진 유리

멸치를 다듬다 보니 살보다 똥이 더 많다 은근히 약이 올랐으나

어느 누구에게도...엄마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아픔 그녀가 소설처럼 풀어

이내 측은지심이 든다

놓았다 뒤이어 우리반에서는 감추고 싶었던 ... 새 영화가 한 편씩 상영되

약육강식의 세상살이 날로 치열한데

었다 잘 닦여진 유리창으로 구름이 지나가면 새들이 하늘인 줄 날다가 유

저 험한 바다 속은 오직했으랴

리벽에 부딪혀....나도 깨진 유리조각에 피 흘린적 있었지 누가 위로해 주

고래, 상어 떼 우굴 거리는 거기서

나? 부자는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 가는 것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가기

요 쬐그만 것들이 살기 위해

가 어렵다는데<마:19:24> 아픔을 딛고 견디어 낸 자들의 새벽이슬 같은 순

얼마나 필사적이었으면

전한 위로

똥색깔이 이토록 숯 검댕이 인가

주님이 잡아준 손 잡고 멋지게 일어나 날개를 펴는 힘찬 비상

게다가 인간의 탐욕으로 심각하게 오염되고 있는 바다에서 생존을 위해 얼마나 몸부림 쳤기에 내장이 흔적도 없는가 지금은 깡말라 볼품없지만 너희도 한때는 은색비늘 반짝이며 유영하던 시절 있었으리

정 문 혜 "서서 버티는 나무" (1989 초판, 시문학사 20172판 "사랑" (1995 시문학사) 화가 김옥지 "빛(Light)" 화보와 함께1993 "내 마음의 풍경(Landscape in my Heart)" 화가 윤심주와 시와 화보 2012, 2017 제작 moonhae713@gmail.com

겁 없이 날개 쳐 오르던 내 푸른 시절 떠올라 주름진 손등에 고인 세월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잠시 후, 허기진 식구들이 반길 칼국수를 위해 펄펄 끓는 물속에서 또 죽어야 할 비운을 눈치 챘나 멸치들이 모여 궁리가 한창이다 눈물조차 말라버린 눈 똥그랗게 뜬 채

128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정희수 l

129


오래된 잠언 정 희 수

소중한 세월 탕진해버린 비루한 생의 저물녘에서야 네 묵언을 겨우 알아듣는다

길가다 문득 올려다 본

정신 줄 꼭 잡고 깨어있으라는

까마득한 교회 첨탑 끝

오래된 잠언을 뼛속에 새긴다

구름도 조심조심 빗겨 간 허공에 완벽한 곡선이던 너

키 큰 미루나무 우듬지에 잎인 듯 그리움인 듯 아득한 점이던 너 새야 새야 이름 모를 작은 새야

고소공포증을 앓고 있는 나를 무참히 탄식시키는 너에게 오래전부터 묻고 싶었다

네가 가장 두려웠던 순간은 비상의 때 인가 추락의 때 인가 네가 그토록 경계하는 것이 적인가 너 자신인가

정 희 수 (정 레지나) 창조문학 시부문 신인 문학상으로 등단. 미 동북부 문인 협회 회원. reginatjchung@hanmail.net

-어떤 새는 외다리로 서서 잠을 잔다지130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정희수 l

131


낙관을 찍다

4월이 들썩거린다

조 성 자

조 성 자

몸을 침대에 눕힌다

땅의 누선을 건드리며 바람은

낙관이 선명하다

건들대는 골목의 사내애들처럼 술렁거린다

하루를 훑고 온 육신은

삐딱하게 눌러쓴 모자를 벗어던지고

툭툭 털어내도 잔털이 남게 마련

바람의 돌기 사이에서 용틀임을 하는 애송이들

어제보다 조밀해진 화폭이다

까까머리가 더부룩하다 빛의 군락지에서 요염해지는 아지랑이

모든 채색은 물감이 마르고 나면

지열을 끌고 솟아오른다

어느 곳은 더 선명해지고 어느 곳은 좀 탈색이 되곤 한다

오른다라고 했다

끊어진 길들을 이어 붙이며 내가

상승은 순간의 충돌로 날개를 얻는다

탐닉한 생의 보폭은 멀고 느리다

솟구치려는 안간힘, 막다른 곳으로 내몰리던 생이

어제가 이식되어 오늘이 튼튼해지리라는

제 귓불을 잡고 흔드는 손 떨린다

묵은 말씀을 택하고

미간 깊어진 개울물 멋에 겨워 흐르고

그런 날의 좌골신경은 통증이 컸으나

돌미나리 갸웃이 개나리 발등을 덮는다

수시로 던지는 객쩍은 수작들을 받아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말자

하늘과 꽃들에게

한바탕 흥건하게 놀아보자고 온 걸

무른 몸을 헌납하는 저녁

여기, 지금, 나와 네가 흐드러질 모양이다 모두가 일어서서 노래를 따라 부르는 공연장처럼

저녁은 미완의 지점이어서 나는 낙관한다 낙관을 자구책으로 삼는 나는 낙관론자

여기, 지금이 들썩거린다 조 성 자 2002년『미주중앙일보』신인문학상 당선과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기어가는 것은 담을 넘을 수 있다』, 『새우깡』, 수필집으로『바늘의 언어』가 있다. 『뉴욕중앙일보』에『시로 읽는 삶』을 십여 년 연재하고 있다. jbbyoo@hotmail.com

132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조성자 l

133


잿빛 마을의 시인들

포트 제퍼슨 석양

지 인 식

지 인 식

부르클린에서

하루가 지는 풍경이

퀸즈와 연결된

너무 아름다워서

J. 로빈손 파크웨이 양쪽 담벼락따라 고요히 숨쉬고 있는

아쉬움 보다는 또 다른 희망이 느껴지는

잿빛 숲 마을 구부러진 길 따라

롱아일랜드 포트 제퍼슨

죽음으로 질주하는

바닷가 저녁 노을 빛

산자들의 차 바퀴 긁는

그리워하던 사람들과

쉿소리 왼종일 소란해도

함께 걸었던 해변에

누구하나 삿대질 않는 너그러움은 그들 모두가

짙은 사랑과 우정의 발자욱만 남겨놓고

시인이 되었기 때문이라는데, 그네들의 시어는 침묵.

다시 돌아온 분주한 삶의 시간속에서도

목숨 남은 산자에게 화강석 비석 하나로 말하고

언제든 끄집어 내어

살아 몸부림쳤던 이름들도

듣고싶은 교향곡처럼

푸른 이끼로 덮어버렸다. 134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지인식 l

135


추억의 앞페이지에 정열해놓은 이유는

조각난 언어 천 취 자

아쉬움 보다는 또 다른 희망이 느껴지는 맷돌 속에 하루가 지는 풍경이

숨겨진 조각들이

너무 아름답기에...

가루가 되었다 갈려서 흩어진 밀가루 알갱이 손끝 촉각에 다가온다

형상들이 무의식에 감겨 헛된 꿈들을 깬다

조각난 가루를 모아 다시금 새롭게 변형의 모습으로 자아의 거울에 반사한다

잠복했던 지 인 식 2007년 창조문학 등단 경희대 해외문학상 수상

말뭉치가 터져 나온다

현, 쿠바선교사

136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천취자 l

137


문화가 주는 충격

비아 돌로 로사

천 취 자

최 임 선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모든 만물이 잠든 새벽

문화의 혼혈아

찬 밤 이슬을 밟고

피부 색깔이 서로 다른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감당코자

뒤섞인 인생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걸어 가신 비통의 돌계단을 걷는다

가깝고 먼 거리에서

죄인의 마음으로 무릎 꿇고

도시인으로 취한 걸음

통회의 눈물로 한계단 한계단 올라 간다

그 속에 사는 생각하는 혼혈들

세번씩 넘어 지신 곳에는

수혈을 거부한다 두 문화를 이고 지고 새롭게 태어나는 이국 속의 이방인 태양이 작열해도 덧옷을 입으려 한다

샤론의 꽃 향기가 머물고 움푹 파인 벽 거룩한 손 짚었던 곳에 손을 대니 피 끓던 예수님의 고통이 전율을 타고 느껴 진다 이민 광야 40년 동안 꺽여 지던 좌절과 통곡의 굴곡 시절

천 취 자

뉴욕 L.I.U 대학원 미술석사(F.A). 동대학원 교육학 석사. 숙대 국문과 졸업. (F.D.C) 가정상담. 시문학 등단. 시집 [낮에도 꿈이 있다]. 공저 [영혼의 불]외 다수. 경희 해외 동포 문학상 수상. 대한민국 전통미술 대전수상. 주미대사 대한민국 표창. 뉴욕신관 한성한국 학교 교장역임. 미주 숙대총동문회 회장역임. 현 천문화센터 대표. 한국문인회원 세계시인협회 (U.P.L)회원.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회원. chiechun1004@gmail.com

138

l 뉴욕문학 제29집

지금은 은혜의 십자가에 나를 못박고 하루 하루 그 빚진 사랑을 갚아 나가고 있다 시 · 최임선 l

139


탄자니아

베슬 Vessel

최 임 선

최 정 자

빅토리아 호수에

그가 거기 서 있다.

의료선 살림호로

풀 한 포기, 물 한 모금,

많은 자들의 영, 육을 치료하고 계시는

꽃 한 송이,

긍휼의 하나님

꿀 한 방울 없는 텅텅 빈 벌집, 2500개의 계단으로 서 있다.

만 삼천개의 쏠라 램프로 밤을 밝히어 복음서를 읽는 램프 빛보다 더 밝게 빛나는 수 만개의 눈동자 기적 같은 일곱개의 우물물 앞에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어린이들의 천진한 모습 마실 물이 없어 절박 했던 저들 삶의 아픔이

나는 왜 그가 거기 서 있는지 모른다. 내가 한 때 아무리 걷고 걸어도 그 자리에 서 있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을 뿐이다. 사방이 막막하던 때, 끝없는‘뫼비우스의 띠’를 걷고 걸었을 뿐인 기억을,

프러미스 교인들 가슴에 박혀 사람들은 앞 다투어 거기로 갔다. 이 모든 것 이루어 주신 하나님께

2500개의 계단을 올라갔다.

감사 영광 찬송을 올려 드리나이다

올라가고 또 올라가 보았지만 되돌아서야 하는 계단,

최 임 선 뉴욕 Pratt Institute, Art College 졸업. 『조선문학』, 『문학세계』에 등단. 성화전 2회 개최. 저서: 시집 '깊은강', '정신병동'

140

l 뉴욕문학 제29집

헐레벌떡 오르고 올라도 닿는 곳이 없는 돌아서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시 · 최정자 l

141


그들은 모두 어디에 닿고 싶은 걸까?

입동 지나면

나는 그를 믿지 않는다, 절대로,

최 정 자

결심을 하면서 헉헉거리면서 오른 벌집 꼭대기 그는 없고 하늘만 있다.

유리창 밖 번개같이

* vessel : 맨해튼 hudson yards의 벌집모양 계단 건축물.

세월이 지나간다.

영국의 건축가 Tomas Heatherwick의 작품.

초록 잎 패거리들 새 떼처럼 날아가고

숨죽인 나뭇가지들 삭정이로 서성인다.

최 정 자 시집<별 사탕속의 유리 새>등 9권. 시선집<늘 있으면서 하나도 남지 않는 바람>등 2권. 산문집<멀미 없는 세상> 문학상<4회 천상병시상> <13년 PEN해외작가상>

142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최정자 l

143


홍시

고독

혜 성

혜 성

나를 위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외로운 것은

이토록

꽃들 만발한 꽃밭에 앉아 있어도

붉게 피 흘렸나요

결코 꽃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나를 위해 이토록 벌거벗었나요

나를 위해 이토록 외로웠나요

시푸른 하늘 자락에 걸린 선홍빛 홍시처럼

내 텅 빈 가슴에

혜 성 1988년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박혀 버린

2002년 Alliance Theological Seminary 신학석사 졸업

당신의 사랑

2012년 New York Theological Seminary 목회학박사 졸업

2008년 창조문학 시부문 등단 현 Church Support Org. General Director 시집 <길> <들겼으면> haesung69@gmail.com

144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혜성 l

145


사해 바다

죽은 바다 위에 솟아 사해보다 더 독한 삶을 확인한다.

황 미 광

*요단강 : 팔레스타인의 시리아에서 발원하여

바다가 둥실 나를 안았다

갈릴레아 호수를 거쳐 사해로 흘러들어가는 251Km길이의 강.

갖고 온 모든 시름이 함께 떠올랐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약속의 땅, 가나안과 경계를 이룬다. 요단강을 건넜다는 것은 약속된 복된 곳에 들어갔다는 뜻으로

해저 420미터, 지구에서 가장 낮은 곳

천국 즉 죽음과 연결된다.

사막 한 가운데 바다에 내가 떠 오른다.

가라앉아야 할 모든 것들이 부끄럼없이 솟아오른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어라

당신의 품에 안겨 죽어야 할것이 소금이 된다

약속된 날 건너갈 *요단강 위에서 삶도 죽음도 소금이 된다

물고기가 머물 수 없는 지독한 소금밭에서 둥실 살아 떠 있는 나는 독종

146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황미광 l

147


어느 늦은 밤

가가 나가 되고

황 미 광

바로 그 시간,

나가 다가 되어도 괜찮다고 생각되는

무수한 별들 어느 늦은 밤

이름은 하늘에 걸어두고

모든 것이 뒤섞여

그냥 반짝이며

꼬인 실타래처럼 엉켰다면

내 가슴에 내려온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라

가는 가이고 나는 나일뿐

두드리는 대로 치는대로 명확하고 분명하다

길 위에 내 아픈 다리를 세워두고 생각만 앞질러 다니다 집에 돌아 온 늦은 밤

황 미 광 문학박사, 현 미동부 한인문인협회 회장, 국제펜 한국본부이사, 재외한인사회연구재단이사, 동서희곡문학회 (1981 발기인), 시맥동인 (1983), 한국문인협회, 한국연극협회 회원, 미주한인이민백년사 출판위원장, KCB 가톨릭방송 사장, 미주동아, 세계일보 취재부장, 한인 여성네트워크회장, CUNY Queens College Adjunct Professor (1994-2012) , L.I.U. Korea

가와 나 사이에 쉼표를 찍고 나와 다 사이에

Center 부소장 역임, 대한민국 국민 포장(2018), 대통령상 (2007, 2016), 올해의 한인상(2014), 뉴욕주 여성교 육자상 (2009), 창조문학 신인상(2002), 서울시 교통부 시입상, 경희해외동포문학상, 뉴 욕대한체육회 체육대상 (2019) 시집‘지금 나는 마취중이다’외 논문집, 공동저서 다수 poethwang@gmail.com

느낌표 하나 있는게 뭐 그리 대수인가

148

l 뉴욕문학 제29집

시 · 황미광 l

149


삶의 슬기 김 기 훈

우리네 삶에는 즐거움, 노여움, 슬픔, 기쁨이 반복되고 있다. 적극과 소 극, 행복과 불행, 만족과 불만, 낙관과 비관, 이해와 오해, 소망과 실망 등 이 쌍곡선을 이루는 현실에 직면한다. 이들 대조는 단지 글자 하나만 다를

수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신년에 서로“새 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는 인사 를 나눈다. 편지의 끝맺음에는“건강”을, 결혼식 때 신랑/신부에게는“행 복”을, 문병 가서는 환자에게 빠른 회복을 각각 기원한다. 출산, 백일, 첫 돌을 비롯하여 생일, 입학, 졸업, 취직, 승진, 퇴직, 개업, 회갑, 고희, 팔순, 장수 등 등 격려와 축하, 그리고 감사가 항상 보완해준다. 이와 같은 인정 과 사려 깊은 대인관계가 인간의 도리요 본분이며 아름다운 마음씨까지 담 겨있다.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기쁨은 더하고 슬픔은 빼며 사랑은 곱하 고 행복은 나눌 수 있는”가르침을 실천한다.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초안하고 제3대 대통령으로 시무한 제퍼슨이“인 간은 모두가 평등하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라고 명시하였다. 제 16대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의 와중에 1863년 민주주의의 기본이 된“겟 티즈버그 연설”에“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라고 거듭 강조했 었다. [이 연설의 전문이 워싱턴 소재 링컨 기념관 왼쪽 벽에 새겨져 있다.] 뿐만 아니라 역사에 남은 노예 해방을 감행한 용단도 내렸다. 비록 어려운 삶일지라도 모두가 어느 방향으로 전진해야 되는지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 것은 천부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인터넷에 따르면 영어의 자모 ABCD 에서 평생을 상징하는 B(irth, 출생)와 D(eath, 사망)사이에 C(hoice, 선택) 가 존재한다는 사실로 수긍이 된다. 선과 악이 공존하지만 수필 · 김기훈 l

151


전자를 택하는 것은 우리의 이성, 양심과 도덕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

관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비관자들 보다 수명이 8년이나 길어지고 면역체계

다.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 길로 돌아간다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의 교훈을

가 튼튼해져서 질병에 잘 걸리지도 않을뿐더러 비록 걸려도 쉬 낫게 된다고

선조들이 남겨 주었다. 여생을 즐긴다는 것은 곧 자타가 공인하는 값진 결

한다. 백 년을 즐겁게 살다가 작고한 미국의 희극배우 조지 번즈는 그가 팔

산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가 맡은 임무가 아닐까. 무엇

순을 넘겼을 때“난 이제 내 혈압을 높이는 상대가 거의 모두 세상을 떠났

을 가져가느냐 보다 얼마나 인류에게 유익한 유산을 남기고 갈 것인가 하

기 때문에 절로 낙관적인 삶을 즐기고 있다.”라고 소신을 밝혔다. 동감이다.

는 사명이 각자가 목표로 하는 인생관이라고 믿는다.

희극 피아니스트 보거(Victor Borge)는 웃음은 두 사람 사이의 최단거리”라 고 추가하였다.“밝게 웃으세요, 슬플 때에도!”라는 가르침도 의의가 깊다.

땅에 누워있는 수박과 머리 위의 덩굴에 매달린 포도는 생성될 때부터, 하늘에는 보름달과 태양이 두루 원만을 가르쳐준다. 고인 물에 빗방울이

소외되고 천대받은 인도의 불우한 최하층 빈민자들을 위하여 평생을 헌

떨어지면 예외 없이 둥근원을 그리면서 합류된다. 해변의 돌들은 모가 없

신하고 최선을 다해서 돌보아 주어 1979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마침내

다. 오랜 세월 동안 온갖 풍파에 시달리고 단련이 되어 원만한 모양새로

2016년 9월 성인(Saint)으로 승화된 마더 테레사(Mother Teresa)를 잊을 수

바꿔졌다. 우리의 생애도 고생 끝에 낙을 만끽하는 기회를 찾게 된다. 나

가 없다. 남긴 교훈도 새롭다.“폭탄과 총 대신에 사랑과 자선으로 세계를

는 이것을 고생과 대조되는 낙생(樂生)이라고 부른다. 둥글둥글하고 지혜

정복하기 바랍니다. 평화는 웃음으로 시작합니다. 비록 웃고 싶지 않는 사람

와 덕망이 충만한 인격자가 된다. 나아가서는 몸담아 있는 사회에도 가진

이 있을지라도 하루에 최소 다섯 번씩 웃으십시오. 평화를 위하여!”

것을 기꺼이 베풀고 공헌하여 만인의 존경까지 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 삶 의 슬기이다.

김수환 추기경은“웃는 연습을 실행하십시오. 웃음은 만병의 예방이요, 치료약이며, 노인을 젊게 하고, 젊은이를 동자로 만들어 줍니다.”라고 권했 다. 웃음은 심신이 젊어지고 쾌활하며, 노래가 뒤따르고, 미운 마음이 차지

인생은 언제나 오르막과 내리막의 연속이다. 하지만 어떠한 심정과 태도

할 여백이 없어진다.

로 마치 좋은 책을 읽거나 영화/연속극을 보는 것처럼 스스로가 심판이 되 어 좋은 점을 택하여 교훈삼아 값진 삶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내재한다.

어느 건달이 석가모니에게 욕을 했지만 그저 빙그레 웃고 지나갔다. 제자

아무리 힘들고 낙심이 되는 난관에 부딪치더라도 굳세게 일어나서 전진하

들이 욕을 듣고도 웃음이 나옵니까 라고 물었다.“누가 금덩이를 준다고 내

는 것이 우리의 인생 철학이다.“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가 받으면 나의 소유이지만 안받으면 준 사람의 것이 아니냐. 저 사람이 나

라고 선조들은 격려해 준다. 뚜렷한 목표와 함께 성실한 대인관계와 특별

에게 욕을 했지만 내가 안받으면 원래 말한 자에게 돌아가느니라.”라고 태

배려가 삶의 보람을 안겨주는 기초석이다. 돈, 명예, 지위, 학벌, 빽 등으

연히 답하였다. 푸치니 작곡의 유명한 오페라“나비부인”의 서곡에“웃음

로 번뇌의 스트레스를 받는 것보다 마음의 평안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도

은 우울증으로 얽힌 마음의 타래를 멋지게 풀어주는 단서”라고 노래해준다.

깨닫게 해준다.“누가 뭐라고 하든 인생은 즐겁다.”라고 괴테 (Johan W.

성경에도“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

Goethe) 는 언명하였다. 팔십여년 체험한 나의 인생관은 어느덧 낙관적이요, 적극적인 태도로 여 생을 즐기겠다는 길을 택한 것을 고백한다. 전문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낙 152

l 뉴욕문학 제29집

씀이 있다. [새 번역판 영어 성경에는“범사”를“어떠한 환경에 처해 있던 지”라고 표기.] 즐거운 인생, 보람 있는 삶을 위하여! 수필 · 김기훈

l

153


세계화 시대의 대학생

대학과 학생/교수의 교환과 함께 상호의 학점 인정과 수용이 체결된 것이 상례이다. 간혹 외국대학에서 수강한 과목의 학점이 자기 대학에서 인정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미리 확인하고 수강신청을 하는 것도 현명하다.

김 기 훈

3. 미국과 영국 대학생들은 외국인이나 유학생들이 영어를 배워 사용해 주기 때문에 외국어를 배우려는 의욕이 별로 없다. 하지만 현재의 세계화 시대에 최소한 외국어 하나는 배우라고 필수과목에 포함하는 경향이다. 일

컴퓨터와 인터넷에 이어 매일같이 새로운 휴대전화, iPad 등 고성능 전

상생활에 별 어려움이 없을 정도의 실력이면 더욱 바람직하다. 오래전 프

자제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실정에 우리들의 일상 생활도 빠른 속도로

랑스 정부는 외국에서 수출하는 각종 상품과 서비스에 대해서 발행하는

바뀌고 있다. 이러한 문명의 이기(利器)와 각종 교통수단의 발전이 겹쳐서

Invoice를 불어로 제출하라는 결의를 시행하고 있다. 만약 중국이 이것을

세계는 계속 좁아지고,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 지금 우리는 가속도로 달리

본받아 모든 서류를 중국어로 제출하라면 그야말로 벌집을 쑤신 것처럼 요

고 있는 세계화 시대의 삶을 감사히 영위하고 있다.

란한 결과가 되리라. 4. 한 때 일본 학자의 평이 기억난다. 일본 회사의 대표가 미국에 와서

따라서 우리의 처세도 이에 알맞은 변화와 적응, 수용과 용기가 요구된

무역 상담을 하는 경우, 공용어는 영어, 식사도 양식, 토론 방법까지 미국

다. 특히 소수민족은 조금이라도 남보다 앞서서 전진해야 되는 세상이다.

식이다. 하지만 미국대표가 일본에 오면“왜 일본말, 일본식 식사 등을 하

대학에서도 세계화 시대에 적합하는 전공이나 부전공을 권장한다. 미국대

지 않고 역시 미국에서 하는 방식 그대로를 따라야 하느냐?”고 반문한 적

학에서 43년간 가르친 경험을 기초로 아래에 요약한 지침이 장래의 계획

이 있다. 일본에서는 통역까지 제공하며, 영어 위주의 회합은 너무나 일방

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여 소개하는 바이다.

적이요 비용도 크다고 지적하였었다. 한 번 생각해 볼만한 발언이다. 5. 경우에 따라 군에 입대하여 외국에 주둔하는 부대에 배속되는 것도 어

1. 먼저 대학의 국제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책임자를 만나서 각종“국

떨까? 국비로 여행을 하며, 외국에 있을 동안 그 나라의 언어, 풍속, 습관,

제”관계의 과목이나 전공분야의 검색과 함께 자기가 나아갈 장래의 계획

식사, 사회제도 등 배울 기회가 많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평화시대의 혜택

을 상담하는 것이 좋겠다. 가능한대로 국제화 또는 세계화에 관련된 과목

이며, 전쟁 중이라면 이런 사치를 추구하기 힘들다.

을 택하는 것을 추천한다. 거의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Catalog (지금은 컴

6.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국 유학생들에게 부모들이 희생하여 송금

퓨터로 되어 있지만)에 이런 분류와 전공, 부전공이 명시된 것이 보통이다.

한 돈으로 비싼 공납금을 지불하기에 부디 강의에 빠짐없이 출석하기를 강

동시에 대학에서 주최하는 각종 국제관계의 특강, 세미나, 컨퍼런스 등에

력히 권한다. 각 과목마다 누진적(Cumulative)이기 때문에 한 번을 결석하

참석하여 과외의 지식을 습득하는 것도 권장하고 싶다. 대학마다 정해진

여도 따라가기가 힘들다. 마치 치아 하나가 빠지면 음식을 씹는데 뭔가 부

학과목과 요구되는 학점을 상세히 검토하고, 담당직원이나 선배의 조언을

족감을 느끼듯! 그리고 학기말 시험 공부는 미국 학생들과 여럿이 함께 모

받아 결심하는 것이 상책이다.

여 공부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임을 알리고 싶다. 당사자가 모르던 것도

2. 가능하면 최소한 한 학기 이상을 외국에 유학 가는 것도 좋겠다. 어 느 대학이나 외국 대학과“자매대학 협약”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 154

l 뉴욕문학 제29집

다른 학생들이 보완해줄 뿐만 아니라 영어 단어의 가장 적절한 용법도 배 우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수필 · 김기훈

l

155


동시에 각자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 대사로 가능한한 지식을 동원

사색의 풍경

하여 미국 학생들을 비롯하여 다른 외국 유학생들에게도 각종 정보를 제 공해주는 임무를 감당하는 것이 보람을 체험하리라고 믿는다. 이런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아주 적합한 책을 소개한다.

김 명 순

[서울: 한림출판사, Inside Korea: Discovering the People and Culture, 한영대조, 초판 2012. 최신판을 추천함. 우리나라 지리, 역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한미문화의 비교, 종교와 전통 문화, 과학 기술과 산업.

하나 · 숲속에서 - 나무의 말

부록으로 다방면의 통계, 명절과 공휴일, 간단한 영어 회화, 주요 에티켓, 한국의 유네스코 세계 유산, 역사 연표 등 한국의 전반을 총망라한 책자임.] 7. 공부란 두뇌의 발전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염두에 두고 여러 가지 과

네가 나를 대함에 있어 진지하고 진실하게

외 활동과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는 것을 강조하는 바이다. 먼저 고국에 계 시는 부모님과 가족, 친척에게 문안 편지를 자주 쓰도록 부탁. 효자/효녀

내 안의 푸르름 숨지 않도록

유학생은 비록 입원 중에도“저는 건강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라는 편지

내 안의 숨결 끊이지 않도록

를 올린다. 편지가 배달될 무렵에는 퇴원했을 때가 되려니. 요즈음은 컴퓨 터, 카톡, e-mail, 휴대폰 등 너무나 간편하게 소식을 전할 수가 있는 세

네 손가락 떨림에 애원하고 있는 거란다.

상이 되었다. 각종 운동을 관람할 뿐만 아니라 직접 참여하는 것이 심신의 건강에 좋은 법이다.

숲길을 거닐다 나무 앞에 서면 나무의 말이 들린다. 파르르, 잎사귀를 떨 며 애원하는 목소리.

부디 강의실 안팎을 막론하고 인생은 어디나 배움의 터전임을 인식하여

“나는 네가 무서워! 가까이 오지 마!”몸에 새겨진 아픈 상처의 기억 때

다방면에 걸친 지식을 풍족히 습득하고, 평생동안 공부하여 훌륭한 인재로

문에 사람이 무서운 나무. 땅속 깊이 뿌리박힌 나무는 도망갈 수도 없어 애

온 인류에게 공헌하는 귀중한 인간자본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바이다.

만 태운다.“나무야, 두려워하지 마! 세상에는 나쁜 사람만 있는 게 아니란 다. 너를 흠모하고, 진실로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도 있지. 자, 내 손을 봐!

김 기 훈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졸업. 1957 도미. 비브리칼 (현 뉴욕) 신학대학원 졸업, 클라크 대 (경제학 석사), 커네티컷 주립대 대학원 졸엄 (경제학 박사). 세트럴 커네티컷 주립대학교 경제학 교수(1967-2009). 동 대학 명예교수. 중앙일보 (뉴욕), 한국일보(뉴욕), 월간 인포코리언 (전 미주생활) 칼럼니스트 (1997-2013). 저서:“물, 불, 돌과 우리의 신앙,” “인생은 비빔밥, 맛있게 드세요,”“인생은 냉면, 맛있 게 드세요.”

텅 빈 손!”나는 두 손을 활짝 펴 보인다. 나무를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그 제야 산소를 내뿜는 나무. 나무는 이제 바람이 흔들고, 동물이 구멍을 내 고, 벌레들이 갉아 먹어도 당당히 하늘을 보며 허허, 파랗게 웃는다. 도끼 들고 서 있는 당신에게도 의연하게 서서 하는 말,“당신이 부디 도(道)의 사람이기를…….”

감수 및 집필 한 편:“Inside Korea: Discovering the People and Culture”(한영대조). 학술논 문 다수. 미국과 영국발행의“세계저명 인사록”에 수록 됨. 미동부 한인문인협회 회원. kimk@ccsu.edu

156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김명순

l

157


둘 · 숲속에서 - 착각의 묘유(妙有)

고, 혀끝에 감도는 맛의 기억에 흐뭇하고, 즐겁고, 풍족하다. 이 날의 슈퍼마켓 사람들의 인상(印象)은 외면보다는 내면의 세계가 잘

숲속의 긴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다. 6월의 바람이 살랑 지난다. 허공에

드러난다. 무방비 상태로 물건을 고르는 사람의 심상(心象)이 적나라하게

서 나비 한 마리가 나풀거리며 내려앉는다.“오, 예쁜 나비!" 반갑게 다가

얼굴에 쓰여 진다. 어떤 이들은 행복한 장보기를 하고, 어떤 이들은 화풀이

가 주워 본 노란 이파리 하나. 나비는 나비가 아니다. 그래도 소중하게 책

라도 하듯 과일들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여린 파나 상추를 이리 저리 뒤적

갈피에 끼우고 하는 말, "나는 너를 영원히 간직할게. 언제까지나 예쁜 모

이다가 휙, 집어 던진다. 바나나를 한두 개쯤 쭉 찢어 가지고 간다. 그 사람

습으로 바스러지지 않기를…….”낙엽 되어 일찍 떨어진 나뭇잎에 약속하

의 얼굴에 여과 없이 스치는 탐욕과 무자비의 인상(印象). 자신도 미처 깨

는 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 하면서도 저지르는 실수. 내가 나에

닫지 못하는 타자(他者)의 거울에 비친 욕망의 그림자.

게 속아 어설픈 미소로 위로 하는 말, 세상사는 이치가 다 그런 것이겠지.

한 개의 과일이 나무에 매달려 알찬 열매가 되기까지 비바람의 시련을 거치고, 누군가의 손길과 노동에 의한 정성과 사랑, 희생과 노력이 의미 없

셋 · 숲속에서 - 니체의 연인

이 스러지는 순간, 교회나 법당에서 올렸을 그 사람의 기도가 가식처럼 추 락한다. 그 사람의 삶과, 그 사람이 속해 있을 단체와 사회의 모습이 보인

십 년간 산속에서 고독한 생활을 보낸 니체. 숲은 그의 사색을 깊은 내면

다. 나는 심호흡을 한다. 더 늦기 전에 참된 기도의 무늬를 내 얼굴에 새

세계로 이끌어 초인의 이상을 설교하게 했다. 사람들에게 니체의 초인 사

기자하면서……. 내 가족의 건강을 지켜줄 장보기만이라도 무상무념(無想

상은 너무 높고 새로운 주장이어서 이해되지 못했다. 니체는 다시 산속으

無念)의 정성으로, 맑은 기운(氣運)으로 하자 하면서……. 나의 거울로 나

로 들어가 고독한 숲속 생활을 하며 이상적인 벗, 차라투스트라를 창조했

를 본다.

다. 그는 니체의 유일한 벗, 우정, 이상, 환희, 환멸, 고뇌 등 내적 경험의 역사를 털어놓을 수 있는 자신이며, 연인이다. 냉철한 사고와 예리한 감수 성, 성스러움을 겸비한 니체의 숲속 생활이 빚어낸 이상향이다. 숲은 나에 게도 위로를 주는 연인이요, 평안을 주는 마음의 고향이다. 넷 · 물질의 숲속에서 - 타자(他者)의 거울 일요일 날 오후, 슈퍼마켓은 사람들로 붐빈다. 저마다 짊어졌던 무거운 짐을 교회나 법당에 내려놓고 나온 듯 홀가분한 표정들이다. 남자들은 대 부분 깨끗한 정장차림이고, 여자들의 옷차림 또한 말쑥하다. 사람들은 풍 성한 물질의 숲속을 거닐며 구경하고, 고르며 유쾌하다. 푸르고 싱싱한 채 소, 맛깔스럽게 만들어 놓은 나물들, 마른 반찬, 생선까지 카트에 챙겨 담

158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김명순

l

159


어느 날의 회고 回顧 - 이 계향 선생님과의 하루

깥 공기를 마시고, 음악도 듣고, 밖의 풍경도 감상하며 느긋하게 달렸다. 몇 년 동안 브리지포트와 스탬퍼드에 있는 학교에 다니면서도, 중간 지 점에 살고 계신 선생 댁에는 딱 한 번밖에 들리지 못했다. 그것도 누군가

김 명 순

의 심부름이 아니었나 싶다. 선생께서는 온 거실에 전집 출판 교정쇄를 나 란히 펴놓으시고, 작업에 열중하고 계셨다. 문학에 온 세월과 정성을 바치 는 모습이 감동적이었고, 인상 깊었다.

미 동부 한인 문인협회 창립 30주년을 맞이하고 보니, 지난 기억들이 소 중하게 되돌아봐 진다. 그중 어떤 기억은 그리움이다.

선생은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러 다니니 참으로 장하다."라는 말씀을 몇 번이나 해주셨다. 새로운 용기가 솟게 하는 격려였다. 뉴욕문학 제13집에

현재, 미래의 뿌리가 되는 그 기억의 시작에 문단의 대선배였던 이 계향

실린 기행 수필 '잉카를 찾아서'를 읽으셨던 선생께서는 "참 잘 썼더라."는

선생님이 계신다. 그분과의 기억은 여러 가지나, 어느 날 같이 보낸 하루

칭찬도 해주셨다. 문인협회에 수필가란 이름만 걸어 놓았지, 문학에 대한

가 그리움의 강물로 흘러와 반갑게 미소 짓는다. 기억이 아름다우면 추억

식견의 가난함이 부끄러웠던 시절이었으므로, 선생의 칭찬은 과분하였다.

이 된다고 했던가. 그때는 희미했던 빛깔이 기억의 푸른 추억으로 반짝이

하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을 간직하게 해주신 소중한 기억이 됐다.

며, 지난날의 회상에 젖게 한다. 고전문학의 대가셨던 선생의 수필 속에는 높은 감성과 촉촉한 정서, 미 2005년 8월 19일 금요일 아침, 베이사이드 집에서 출발하여 이 계향 선

문(美文)이면서도 지적 깊이를 느끼게 하는 품격 높은 작품들이 많았다. 나

생 댁으로 향했다. 뜨로그스 넥 브리지를 통과하여 뉴헤븐 방향으로 달렸

는 선생의 수필을 읽으며 감탄하고는 했다. 독자의 감정을 들뜨게 하지 않

다. 선생께서는 맨해튼으로 이사하신 최 시인 댁에 가시길 원했고, 나도

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글, 그런 수필을 쓰고 싶게 하였다.

최시인님을 뵙고 싶었던 터라 이 선생님을 모시러 라치몬트로 운전해 갔

“책이 출판되어 세상에 나오면 언제까지 남아 있게 되므로 신중해야 한

다. 직업상 바쁜 일들을 미리 처리하느라 부산했으나, 기쁨의 정신적 여유

다.”던 선생의 말씀이 화석처럼 가슴에 박혀 있던 내게 책을 출판해 보라는

가 있던 시절이었다.

권유가 큰 용기가 됐다. 오랫동안 선생의 그 말씀을 기다리지 않았나 싶다. “수필가가 많은 시대에 수필 문학가가 되기는 어렵다. 문인이라면 글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조차 감지하지 못하고 운전해 갔던 95

로 세상에 알려져야지 자꾸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선생의 금싸라

번 도로는 추억의 거리였다. 남편의 사업이 더 잘 되기를, 해린 이와 영우

기 같은 말씀도 내면 깊숙이 간직했다. 수필가에서 수필 문학가의 길로 격

가 더 성장하기를 기다리다 보니 만학(晩學)이 되었고, 부동산 일과 공부를

상시켜 주려는 선생의 노력과 정성이 크게 느껴지는 은혜로운 대목이었다.

병행해야 했기 때문에 한가롭게 달려 보지 못했다. 운전 중에도 영어 단어 를 외우거나 영어 테이프를 들었고, 시험 기간에는 암기했던 문장들을 잊

최 시인님께서는 들깨죽 칼국수를 손수 만드셔서 점심으로 대접해 주셨

지 않으려고 열중한 탓에 과속 티켓을 받기도 했다. 나는 창문을 열고, 바

는데, 고소한 맛이 그만이었다. 요리를 못하시는 분인 줄 알고 먹을 것을

160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김명순

l

161


약소하게나마 준비해 가지고 갔는데 뜻밖이었다.

처럼 생생하게 다가온다. 선생은 가시고 안 계시나, 선생과 같이했던 기억

문득 저세상에 계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운 기억이 스쳐 지났다. 명절이

속의 하루는 그리움이 되고, 추억이 됐다. 그 추억 속에 흘러오는 선생의

나 제사 때면 들깨를 갈아서 말려 놓았던 호박, 가지, 고구마 순 등을 넣어

문학 혼이 푸른빛으로 다가와 나를 적신다. 선생이 남기신 글들에 밑줄을

만드셨던 탕은 기억 속의 손맛, 그리운 음식이었다.

그으면서, 나도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에 젖는다. 선생과의 하루가 기 록된 일기를 펼쳐 보며 회상(回想)의 언덕에 올라 그날을 그리워한다. 선생

이 선생님과 최 시인님이 나눈 대화 또한 흥미진진하였다. 보통 아녀자

이 심으셨던 '미동부 한인 문인협회'라는 한 그루 나무. 그 나무에서 무성

들 같으면 살림살이나 남편, 자식 자랑에 불과했을 텐데 문학 얘기로 꽃을

하게 피어오른 나뭇잎들이 보기 좋다. 그 나무에 열린 알찬 문학의 열매들

피우는 두 분의 모습이 참 좋았다. 책에서만 접할 수 있었던 여류 문인들,

이 밤하늘의 별처럼 찬란하게 반짝이는 것도 아름답다.

[랜의 애가]로 유명했던 모윤숙 선생, 언니, 동생 하며 지냈다던 전 숙희 선 생, 조 경희 선생과의 추억담, 춘원 이광수 선생의 글 등, 한국 문단의 산

지난 30년 동안 그렇게 성장해 온 문인들이 그러했듯, 앞으로의 세월 속

증인들에 대한 대화를 듣다 보니 문인들의 멋은 저런 데에 있구나 싶었다.

에서도 무궁무한(無窮無限)의 문학이 문인들 사이에 파도치리라. 선생이

그 기억들이 아직도 나를 푸른 문학의 길에 세워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실천해 주셨던 문학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후배들을 앞으로 나아가도록 채 찍 해주는 노(櫓)가 되리라. 내 영혼 안에서 계속 살아가리라.

문인의 품격을 느끼게 하는 이 계향 전집, 6책 9권을 볼 때마다 높은 산 이 눈앞에 우뚝 서 있는 듯하다. 문학의 길로 당당하게 가서, 문학의 무게 를 당당하게 지켰고, 문학인으로서의 자존감을 당당히 심어 주시며, 명예 롭게 오르셨던 자리. 나는 감히 오를 수 없는 그 자리가 존경스러워 하늘 을 본다.‘수필 문학가라면 그 정도의 문학적 성과는 있어야 하는 게 아닐 까’라는 생각에 의기소침(意氣銷沈)해진다. 문인들과 모임에서“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로 시작되는 '짝 사랑'을 곧잘 부르시곤 했던 선생은 그날, 돌아가는 운전석 옆자리에서‘ 가래스스끼’라는 일본 노래를 부드럽고 구슬프게 부르셨다. 한국어로 다 시 불러 주길 간청하지 못했던 아쉬움이 남았으나, 선생께서는 자필로 노 래 가사를 자상하게 적어 주셨다. 지금도 내 귓전에 선생의 그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김 명 순 90년, 뉴욕한국일보 현상 신춘문예 수필당선, 95년, 한국수필신인문학상, 무궁화 문학상 공 모전 은상(수필부문 1등), 한국수필 해외문학상, 원종린 수필문학상 외. 현 한국문화 편집장, 본회 창립- 현재까지 이사,부회장 역임, 수필집[뉴욕, 삶과 사랑의 풍경 1, 2] 길벗 동인지 다

이 계향 선생님과의 하루를 되돌아보니, 그 시절, 그 기억이 푸른 하늘 162

l 뉴욕문학 제29집

수, 브리지포트대학 졸업, 경사대학원 문예창작과 수료. myongskim@hotmail.com

수필 · 김명순

l

163


세계 시인대회 김 민 정

은 영어로 소통을 했다. 그러나 문제는 영어로 해석한 시는 그런대로 이해를 했지만 나라마다 본 인의 언어로 시 낭송을 할 때는 마치 코메디 쑈를 보는 듯 가관이 아니었다. 예로서 필리핀 시인은 애인에게 보내는 사랑의 시라고 여인 앞에서 시 를 읽는데 우당탕당 우당탕당 하는 것 같고 타일랜드 여인은 전통음악에

세계 평화를 의미하는 월계관을 증정하는 세계 시인대회는 그 유래부터

맞춰 시를 낭송 하는데 마치 우리나라 판소리같이 에…. 아 하며 코맹맹

평화와 사랑이 가득 담겼다.

이 소리를 냈다.

그런 세계 시인대회를 창설한 분은 아마도 유존인 필리핀 사람으로 동기 는 당뇨로 입원 했을 때 (1961년) 고통 속에 헤매는 환자들을 보고 막연히

그 중에서 일본 작가 고리야마는 가득이나 피골이 상접하듯 깡 마른 체 구에 민속춤과 함께 시를 읊는데 마치 괴물이 온몸을 비트는 것 같았다.

의학과 신앙에 의존하는 것도 좋지만, 정신 세계에서 인과 관계를 보다밝

다행히 부산에서 오셨다는 한국 시인은 한복 차림으로 우리나라 창을 하

고 사랑을 느끼며 희망과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생각한 것이

듯이 노래가락에 맞혀 시원하게 읽었지만 그들도 우리처럼 무슨 소리인지

세계 시인대회를 창설하는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알아 듣지못하고 괴상한 소리로 들었으리라 믿는다.

그당시 아마도 유존의 아들이 (Dr.Ronald Shafer) 대를 이어갔고, 세계

그렇게 일주일 동안 같은 기숙사에서 자고 먹고 구경하면서 정을 키웠

시인 대회는 2년에 한 번씩 여러나라를 순회하면서 일주일간 시인들과 담

고, 틈틈이 영국 민속 춤인 모리스 댄스와 컨추리 음악을 들려주고 밀톤

소도 나누고 작품 발표를 하면서 친교를 갖는 것이다.

별장 구경과 지역 주지사의 특별 초대로 하프 연주를 들으면서 융숭한 점

내가 처음 세계 시인대회를 참석할 때는 15차 대회로 (1997년) 컨퍼런

심 대접을 받았다.

스 장소는 영국 히드로 공항에서 몇 시간 떨어져 있는 Buckinghamshire

마지막날에는 버킹햄 왕궁도 (Buckingham Palace) 방문했는데 백여명

College로 셰익스피어 생가가 있는 에이본이었다. 그때 초대시인은 Don-

이 넘는 시인들이 삼삼오오 짝을 짓고 시내 구경을 하다가 어쩌다 거리에

ald hall, Robert Pinsky Michael York 이었다.

서 만나게 되면 마치 동창생을 만난듯이 서로 끌어 안고 방방 뛰던 때가 바

그 당시 모인 시인들은 대충 백여명으로 한국, 필리핀, 일본, 타일랜드,

로 어제 일같이 눈에 선했다.

중국, 홍콩 말레시아, 브라질, 미국, 영국, 독일, 이태리, 불란서, 캐나다,

그당시 나는 운이 좋아서 지역 컨테스로 시, 수필 소설 중에 단편 소설

소련 등등 으로 시인들만 참석한 것이 아니라 가족 또는 친지, 친구들도 함

을 펄이라는 상을 받는 영광을 얻게 되었고 따라서 우먼스 펜 클럽에 들어

께 참석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모두 화기애애한 모임이었다.

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펜 클럽에 가입할 수 있는 조건은 영어

컨퍼런스는 아침 7시 식사 시간부터 시작하여 중간에 브런치 시간에 친 교를 나눴고, 낮에는 곳곳의 명소를 둘러 보고 저녁 시간에 모여 시 낭송과 여러가지 행사를 진행했다.

든 본인 나라 글로 쓰던 세권 이상의 책을 출간하거나 두명 이상의 추천서 를 받아야 가능했다. 그 후 나는 펜 회원으로 컬럼비아 대학에서 여성 해방이라는 세미나에

사실 세계 여러나라에서 참석을 했기에 우선 언어 소통이 가장 큰 문제

초대를 받았고, 때 마침 하와이 대학에서 동양학 박사 과정에 있는 딸아이

였지만 나름대로 서로 눈인사와 미소로 친교를 나누었고, 웬만한 말은 짧

가 초대되어 한국인으로 여성해방에 관한 세미나로 신경숙에 대한 강의를

164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김민정

l

165


오이지

해서 여간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편 부끄럽고 좌절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아무리 펜클럽에 들어간 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싶게 나의 영어 실력이 너무도 한심했기 때문이다.

김 민 정

그와같이 영국 세계 시인 대회에 참석한 한국에서 온 시인들이 번역한 시를 전달하고는 여행을 가는지 언제나 사라진다는 부산에서 온 시인의 말 이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세상에 하나뿐인 나 선택 받은 존재였다 그러나 세상은 받은 만큼 내 놓으라고 한다 한 평생 사는 것 결코 공짜도 없지만 거부 할 수도 도망 갈 수도 없다 오히려 잔인한 채찍과 고난이 기다렸다 나는 기어이 소금 항아리에 내 동댕이 쳐 졌고 그것도 모자라 묵직한 돌로 짓눌러졌다 얼마가 지났을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디선가 구수한 냄새와 함께 영광스럽게도 행복한 깃발을 달고 있었다.

166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김민정

l

167


십여년 전에도 그 전에도 한국을 방문할 적마다 웰빙 소리가 귀에 들렸 다.

재료로 음식 만들기란 시간이나 금전적으로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하기에 그 럴 수 밖에 없는데 나같은 경우는 나이를 먹을수록 옛날로 돌아가려는지

이유는 중국산은 안좋고 한국산은 좋고 안전하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왠 지 귀에 거슬리는 것은 자연으로 키운 식물이나 동물이 어째서 다르고 음 식 재료에 문제가 되는가 의문이 갔다. 오히려 옛날 우리 조상들이 즐겨 만 들어 먹었던 음식이야말로 웰빙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옛날 친정어머님은 해마다 농사꾼이 농번기에 무언가 심고

순수한 음식을 선호했다. 그래서 여름 철에는 짜디짠 오이지에 물을 넣고 파와 식초 한방울 띄우 고 굴비를 살짝 구워 참기름을 발라 먹는 것이 일미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곧잘 손맛이 좋아야 한다고 하지만 알고보면 옛날 어릴 때 먹어 본 입맛이 바로 손맛이 아닌가 싶었다.

가꾸듯이 어머님은 계절마다 무언가 먹거리를 준비 하셨는데, 그렇게 하도 록 부추기며 식재료를 열심히 날라다준 친정아버지는 식도락가로 리어커 나 용달차로 음식재료들을 열심히 날라다 주셨기때문이다. 고향이 개성인 어머님은 김장때는 보쌈 김치, 동치미, 갓김치 등 여러가 지 김치를 담구셨고, 겨울 간식거리로는 엿을 은은한 화롯 불에 녹여 콩강 정, 깨강정, 땅콩강정을 만들어 항아리에 차곡차곡 넣어주셨다. 그리곤 밑 반찬으로는 간장게장, 오이지, 황새기젓, 꼴두기젓, 조개젓, 어리굴젓 그리 곤 조기, 호박고지, 씨레기, 곶감, 무 등을 말려서 장독 아래 서늘한 곳에 보관 하셨기에 그날그날 음식 장만에 그렇게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 당시 우리 집은 양옥, 한옥집에 종업원에 일가친척이 내 집 드나들듯 했기에 어머니도 어쩔수 없었겠지만 나로서는 그런 어머님의 수고는 생각 치않고 짜고 큼큼한 냄새 나는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그런 먹거리를 먹고 자랐기에 알러지는 물론 잔 병 치레를 안한 것 같은데, 어쩌다 한국을 방문해서 음식 대접을 받고 보면 복통과 토사로 견딜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음식 알러지로 형제나 친구들 에게 제발 식당음식 보다 조촐하게 집에서 먹겠다고 했고, 아니면 아예 맥 도날드나 버거킹에 가겠다고 해서 난감하게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인스탄트 음식에 익숙해 있는지 무조건 손님 대접 을 식당이나 부페로 갔다. 그나마 고급 부페는 그런대로 속이 편했는데 알 고 보니 소금과 설탕까지 화학 첨가물이 원인이었다. 그러는 한국에서 손님 대접을 바깥음식으로 대접하는 이유는 그 많은 식

168

l 뉴욕문학 제29집

김 민 정 월간 에세이 추천완료. Centenial Letter Contest (단편소설 당선). 한미현대 예술협회 회원. 수필‘밤이 어두울수록 별은 빛난다’,‘누구나 마음의 풍 경이 있다’. 소설‘떠나는 연습’,‘청계천’,‘끝나지 않는 강’. greenartschool@yahoo.com

수필 · 김민정

l

169


기도와 찬양과 말씀으로, 또 한해를보내며 ,,,, 김 영 란

번 새 삶을 살고싶어 뉘우침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그들을 위해 주님께 엎드렸습니다 . 목이 말라 애타는 그들에게 기도에 생수가 넘치게 하옵소서, 다시 한번 즐거운 삶을 위해서 마음껏 소리쳐 주님을 찬양하며 기쁨을 느끼게 해주옵소서, 다시는 불의한 길로 가지 않기 위해 하늘의 양식으로 그들의 마음을 채 워주소서,,,,,

주여! 온 - 우주 만물과 공간과 시간을 당신의 뜻대로 주관하시는 영원의 조

“기도하는 이 시간 주께 무릎 꿇고

물주 하나님 세상에서 죄악으로 물든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살아온 한해를

인자하신 얼굴로 귀 기울이네

돌아보며 주님 앞에 겸손히 무릎꿇고 기도합니다

우리 자신 버리고 그 발아래 꿇면

주야로 우리의 삶을 굽어 살피시는 주님! 미련하고 연약한 인간들은 주님 께서 전 우주에 산재에 있는 인간들의 모든 행위를 은밀하게 살피시는 것을

기도하는 이 시간 주께 엎디어서

하루속히 깨닫고 죄악의 길에서 방황하지 않게 도와주소서!

은밀하게 구할 때 곧 응답받네

주여!

잘못된 것 아뢰면 측은히 여기사

우리의 연륜이야 어떻든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와 사랑과 도의심을 깊이 감사하며 깨닫게 하소서 지난날 크신 축복으로 건강도, 명예도, 재물도, 가정도, 자녀들도, 사랑

후렴 크신 은사를 주네 거기 기쁨있네

하는 이들도, 하나도 모자람 없이 차고 넘치게 주셨는데 미련한 인간들은

기도시간에 복을주시네

하늘의 축복인 줄 망각하고 자신들의 힘으로 모든 것을 얻은 줄로만 착각하

곤한 내 마음속에 기쁨 충만하네”(찬송가 480장)

고 자만하고, 교만하고, 눈앞에 이익만 보고, 이해타산에만 깊이 빠져 지난 세월 속에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면서 죽어가는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거리를 방황하며 헤메이는 이들도 수 없이 보았습니다 주여!

“이 땅위에 험한 길 가는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있나 우리 모두다 예수를 친구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지난 한 해도 수많은 이들이 여러가지로 많이 힘들어하면서 가정도, 건강도, 자녀들도, 다 잃어버린 이웃도 있었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고독과 외로움에 좌절하며, 가난과 아픔에 절망하는 것을 보면서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도다

너무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리하여 마지막이라는 절망 끝에서 다시한 170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김영란

l

171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미주전역탈북난민 영성훈련에 다녀와서 ,,,,,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로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 23편

김 영 란

한 주간 뉴저지 그레이스 처치에서 열린 탈북난민 수양회 및 통일기도 집회가 은혜롭게 열렸다 전국에서 수고하시는 이사님들과 탈북형제 자매들이 몇 시간씩 비행기 를 타고 또는 운전하여 와서 모두 모인 장소에서 반가운 얼굴로 우리는 모 두 서로서로 얼싸안고 기뻐하였다 벌써 우리가 두리하나 USA 전국 영성훈련이 시작한 지가 13번째로 열 렸다 지난 2005년 5월에 워싱턴 본부에서 발족해 미주두리하나 USA가 어느 듯 13번째로 해마다 미주 각 지역에서 흩어져 각자가 이곳 저곳에서 살다 가 이때만은 아무리 먼 곳에서 자리 잡고 지내다가도 모두 기쁨의 얼굴로 모여들곤 한다, 우리가 해마다 돌아가면서 미주에 산재에 있는 교회들의 초청을 받아 교회당이나 수양관을 기꺼이 3박 4일을 내주시며 음식도 최 선을 다하여 탈북자매들과 이사님들을 섬기는데 그분들의 손길에 우리는 넘치도록 감사와 감격을 하고 있다. 이렇게 며칠간씩 은혜롭게 기쁨으로 잘 끝내곤 하여 각주에 장소 제공하 는 교회와 교우님들께 감사하지만 특히 이 모든 왕복 여비와 호텔비는 미 주두리하나USA 이사장(조영진목사님) 그리고 모든 전국에서 수고하시는 이사님들의 헌신과 사랑에 손길로 아주 은혜롭게 열리곤한다 올해 우리를 초청하여 며칠간 찬양과 식사로 풍성하게 대접해준 뉴져지 그레이스 처치는 주로 1.5세 2세들이 대부분 교회를 섬기고 있고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두리하나 탈북청소년들을 초청하여 미국전역에 관광도 시켜 172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김영란

l

173


주고 특히 대표이신 천기원목사님과 한국두리하나 이사장님이신 김진홍

기도 하고 탈북선교에 몸담기를 잘했구나 하는 마음이 들어 나의 가슴 하

목사님을 존경하며 신뢰하고 있다, 한국 사단법인 두리하나와 돈독한 유대

나 가득히 환희가 넘쳐흐른다, 그새 세월이 얼마나 흘러갔는지 머리가 희

관계를 맺고 있는 1.5세 젊은 박반석 목사님은 대단히 신앙이 돈독하고 많

끗희끗 중년을 넘어선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휘황찬란

은 어려운 나라에 선교에 손길도 펴고 있다고 그 젊은 2세 교인들은 목사

한 나라에 와서 낯설고 물설고 언어 조차도 소통하기 어려워 낮에는 일하

님을 대단히 자랑하고 있었다

고 밤에는 교회에서 무료 영어회화반에서 영어에 매달렸다가 집에 돌아와

이곳 미주 USA 두리하나에서는 10년이 훨씬 넘게 열리고 있는 영성훈

잠시 눈을 붙이고 다시 새벽버스를 타고 직장에 가는 그렇게 톱니바퀴처럼

련 회이기 때문에 각 미주 지역에서 모인 탈북 가족 중에는 처음 참가하는

일상을 보내다가 일년에 한번 있는 전국탈북수양기도회에 모이면 우선 하

이들도 있었고 해마다 참석하여 같은 북한 고향사람들을 만나는 기쁨도 느

나님께 울면서 감사기도부터 드린다 그리고 삶의 고달픔도 있어도 서로 고

끼고 또는 서로 며칠간 마음이 통하면 결혼까지 이루어 질수 있는 독신 형

향 사람 만나 반가운 눈물도 있었고 여러가지로 힘들었던 설음이 다 한꺼

제자매들의 좋은 기회가 되기도한다

번에 터져 나와 울음바다가 되곤한다

그러기에 이들은 이날을 설레이는 마음으로 일년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많이들 말하고 있었다

나는 이들이 어떤 의미로든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면서“하나님 저들에게 위로의 손길을 기쁨의 나날이 되게 하시고 범사에 감사에 삶을

지금까지 이영성 훈련회를 아무 걱정없이 이끌어낼 수 있음은 하나님

살게 하시옵소서”매일 새벽으로 밤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 그 뿐만

의 도우심이었지만 이사장 조영진 목사님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수고하시

아니라 이렇게 전국에서 수많은 탈북자들이 모여서 영성 수양회를 할 수

는 이사님들의 헌신의 손길로 해마다 미주 전국 구석구석에 흩어져 있는

있는 것은 전적으로 이곳 뉴욕에서 해마다 봄가을 두차례씩 가곡협회와,

탈북 형제자매들은 가까이서 오든 멀리서 오든 관계없이 매해 이들의 왕

두리하나 USA 대표인 나와 뉴욕에서 큰 사업을 하시면서 탈북자들 구출

복 여비를 다 도와줄뿐 아니라 호텔비는 물론 마지막 날은 항상 대형버스

음악회와 학구열에 열정있는 탈북형제자매들의 등록금을 전담하시는 J&A

를 대절하여 미국에서 가장 볼만한 지역을 택하여 하루를 관광하며 기쁘

USA (대표 김윤호) 이사장 내외와, 이곳 뉴욕에서 5월 첫주와 매회 일년에

게 해주곤한다

두차례씩 열리는 음악회에 한번도 거르지 않고 음악회에 참석하여 사랑의

마지막기도회에는 성찬예식으로 은혜스럽고 감격한 모습으로 모두 끝 내곤 한다

손길을 펼치시는 많은 후원자들과 탈북자들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마음들 이 있기에 19년이라는 세월을 한결같이 음악회를 할수 있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우리 이사님들과 수많은 사랑의 손길이 끊임없이 이

그동안 기쁘고 슬펐던 생생한 간증들을 하며 앞으로 삶의 현장에서 서로

뤄지다 보니 어느새 탈북형제 자매들은 이곳 미국생활에 뿌리내려 신앙생

꿈과 소망을 잃지 않고 살기를 다짐하며 아름답고 좋은 마지막 밤을 보냈다

활도 향상되어 깊어졌고 각자 섬기는 교회에서 전도사로 집사로 성가대로

그러나 좋은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남몰래 눈물을 찍어내며 한참씩 우

봉사도 하고 가정에도 꽃을 피우고 열매맺어 많은 수확을 거두어 명문대학

는것을 보게되었다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들과 어린 동생들이 배고프다고

을 나와 직장도 든든하고 그동안 결혼도 하여 가정도 이루고 남편과 함께

우는 모습이 자꾸만 눈에 선하여 아직도 굶고 있을 가족들을 생각하면 가

아이들을 안고 엎고 머나먼 곳에서 비행기를 타고 또는 긴 시간 운전도 하

슴이 찢어져 견딜 수 없다고 한다

면서 각 곳에서 영성훈련에 꾸역꾸역 모여드는 모습을 보면서 감개무량하

174

l 뉴욕문학 제29집

저 북한 땅에서 살고있는 사랑하는 부모, 형제들이 굶주림과 슬픔 속에

수필 ·김영란

l

175


서 울부짖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며 울고 있는 것이었다 LA 금란교회 목사님을 비롯한 성도님들의 헌신적인 수고와 사랑은 이루

Lime Bike (연초록 자전거)

말로는 할 수 없으리 만큼 우리가 모두 감격스러워했다 뉴욕에 돌아온 지 김 옥 수

금까지도 그들에게서 주님을 닮은 샤론의 꽃향기가 내 가슴에 하나 가득 충만함으로 넘쳐나고 있다

딸 아이의 강아지를 돌보는 일로 아파트에서 바깥을 자주 들락이는 편이 다. 하루에 세번은 기본이다 이 견공과 산책을 나가고 부터는 늘상 자동차 로 휭하니 지나던 동네의 그만 그만한 식당이나 가게들도 천천히 걸으면 서 살펴서 볼 수 있는 혜택도 생겼다만 내가 사는 화잇플래인즈 이 중소도 시의 시네 풍경이래야 일 주일이 미처 되기도 전에 싫증이 나게 단조롭다. 그러던 어느 날 연초록과 노란색이 복합된 말끔한 자전거가 우리의 산책길 에 세워져 있는 것이 나의 시선을 멈추게 하였다.“자전거가 사람이 다니 는 길 위에 잠금장치도 없이?”라며 모퉁이를 한 바퀴 돌아오니 그곳에는 3 대가 나란히 정거하고 있었다. 호기심에서 우선 자전거 뒤에 쓰여 있는 간 단한 내용의 글을 읽었는데 자전거 골격의 색깔을 따라서 이름하여“Lime Bike”라 되어있다.“스마트 폰의 엡(APP)으로 작동이 가능하며 한번 타는 요금은 $1 인데 자기의 목적지에 도착하면 그곳 인도에다 그냥 세워놓고 떠나면 된다고 한다. 참신한 연초록 색갈이나 간단한 디자인이 우리 행인 들의 눈에도 부담감을 주지는 않는것 같다. 몹시 궁금한 맘으로 집에 돌아 오자 곧바로 인터냇 검색을 하였더니 다행히 많은 정보가 올라와 있었다. 굳이 번역을 하자면“무 정거장 나누어 쓰는 자전거?”(Dock less Bike Share)라는 이름으로 2017년에 태어났다고 한다. 최첨단 기술에 능통한 김 영 란 숙명여대학교,1974년 이민 1978년( 한국일보)제1회 수기 수필 최우수작당선 (라일락 가득한 뜨 락에서 ), 1978년 인터네셔날 꽃꽂이 정회원, 1979년 미동부지역 문인협회정회원1985년 아시 안 꽃꽂이 협회회장,1993년 1480라듸오 (장미선 여성싸롱에서 김영란의 주말요리, 1995년 뉴 스 코리아 (꽃과수필이 있는 김영란의 주말요리 컬럼연재, 1995년 KCBN 미주 기독교방송“사 랑이 샘솟는 초원”진행, 1995년 한국수필 문학협회정회원, 1997년“사랑이 샘솟는 초원”시 집 출판, 1999년 한국 사단법인 두리하나 지부장 (북한탈북자를 위한 선교회), 2005년 미주두리 하나 USA 상임이사 뉴욕대표(김영란선교사) 현재 꽃도매상 경영

중국계의 젊은이 세 사람이 창업을 하였다. 캘리포니아의 실리콘 벨리에서 시작을 하였지만 미국 전역의 도시나 또 대학가에서 인기가 대단하며 유럽 등으로 사업이 크게 확장하는 추세라고 하니 스마트기기에 잘 어울리는 신 세대 자전거임에 틀림이 없다. 며칠전 치적이던 가을비도 걷히고 화창하게 햇살이 좋은 오후였다. 그나

thereseyoungkim@earthlink.net

176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김옥수

l

177


마 갓길에 잡풀과 잔디가 있어서 강아지가 특별히 좋아하는 산책길로 들 어서니“Lime Bike”한대가 서 있었다. 앞자리에는 나의 손녀개(Grand

모국어 연습 장

Dog. 실제로“I have a grand dog”이라 한 자동차 스틱커도 있다)가 앉 아도 될만한 바구니에 반려견 그림도 달려있어서 둘이서 동네를 벗어나서

김 옥 수

더 긴 산책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하였다만 자전거 타는 일을 한번도 배 운적이 없으니 그냥 그림의 떡일 뿐이다. 간혹은 이렇게 날씬한 자전거를 무슨 심보인지 완전히 넘겨놓은 것들도 종종있다. 이럴때는 나의 노파심이

비디오테잎으로 한국 연속극을 보던 때가 그렇게 오래전일은 아니다. 이

작동함인지 왠만큼 바쁘지 않으면 그것을 바로 놓기도 한다. 넘어진 자전

제는 드라마는 물론 셀 수 없이 많은 오락, 다큐, 시사 뉴스등이 인터냇으

거를 반듯하게 세워놓고 집으로 오는 날은 그냥 기분이 좋다. 혹“오지랍

로 실시간 우리의 안방으로 들어왔다. 70-80년대의 고단한 이민생활에서

이 넓은 할머니”라 할지도 모른다만 하루에 같은 길을 3번 이상 걸으려면

모국의 드라마는 돌아가지 못하는 그곳의 그리움을 조금이나마 안아주는

나만의 변화를 추구해야 되는 지경인데 요즈음은“Lime Bike”가 주는 시

위로제(?)의 역활을 하였다는 생각이다. 한 작품의 분량인 25회분 테잎을

가지의 변화에 마냥 고마울 따름이다.

몽땅 빌려서는 며칠사이에 다 보는 분이 종종있기도 하였다. 수면부족으 로 그 다음날의 일에 지장을 주었을 것임은 분명한 일이다. 우리도 한국에 서 방문오신 시고모님을 위하여 처음으로 2회 분의 테잎으로 시작을 하였 는데 한 달이 채 되기도 전에 한 작품을 다 보았던 적이있다. 시간으로 환 산하면 엄청난 분량인데 모국어의 편안함과 두고온 문화에대한 결핍증 같 은 심리인지 참으로 달콤한 유혹이 있었다. 나와 같이살던 옛 동네의 지인 은 유난히 드라마를 즐겨서 고정적으로 두어개를 빌려오곤 하였었다. 시간 이 좀 지나자 남편이“지금부턴 비디오 절대 보지마. 어디 할 일이없어서 테잎앞에서 멍청히 세월을 보낼것인가!”라는 극단적인 지청구까지 들어야 했었다. 그래도 몰래 빌려와서는“남편이 외출하면 본다”고 하니 미국 생 활을 더 오래 한 어느 친구왈“비디오 드라마가 정신과 의사 보다 훨씬 싸 게 먹히니 계속하시라”고 조언을 하기에 같이 크게 웃었던 기억이있다. 나 도 이젠 은퇴를 하여 시간이 조금 느긋해지고 때 맞추어 인터냇으로 쉽게 이것 저것 골라서 클릭만 하는 때가왔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차를 타고 비 디오가게를 가야되었던 일은 나의 손자 손녀세대는 물론 모르는 일이다. 요즈음 나의 일상은 일일 연속극과 주말 드라마 하나를 부지런히 챙긴 다. 아니 꼭 빠지지않고 보고싶은게 사실이다. 인터냇에 올라오는 시간이

178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김옥수

l

179


무척 기다려지는 수준이니 중독성이 다분히 생긴지도 모른다. 남편이 듣는

고맙습니다

TV가 시끄러워 나의 렙에다 이어폰을 끼고서 드라마 삼매경에 빠진채 마 시는 아침 커피는 더 꿀맛이다. 나머지 조반도 술술 잘넘어가니 소화가 잘

김 자 원

됨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최근 한류의 열풍에 힘입어 한국드라마, K-POP 등은 국경과 민족이나 인종을 초월해 사람들이 함께 감동하고 즐기는 문화가 되고 있음도 현실 이다. 한국문화를 접하면서 한국말을 배우고 한국식 옷차림을 따라하고 한

고맙습니다. 모진 세월 견디시고 이렇게 저희 곁에 와 주신 당신이여!

국식당을 찾는 것은 이런 부류의 사람에겐 자연스런 일상이 되고 있다. 그

아프고 아파서 견딜 수 없었던 그 세월 뒤로 하시고.

래서 이런 외국인에게는 한국어는 경쟁력이 되고 있는게 사실이기도 하다.

당당하게 이렇게 저희 곁에 와주신 당신이여

한국사람들이 영어를 잘하면 경쟁력이 되는것과 같은 이치이다. 언어관련

사람이길 포기한 폭악한 것들 인간 상실의 중증 환자 무리들 속에서

정보를 제공하는 국제적 사트인“에스놀로그”에 한국어는 현재 전 세계

두렵고 서러운 허탈의 세월 그 긴 어둠의 터널 건너 이렇게 저희 곁에 와

적으로 많이 쓰이는 언어의 순위에서 13번째라고 한다. 더구나 외국인들이 한국어 학습에서 빼놓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한국드라마를 보면서 연습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며칠전 이곳의 큰 행사인 오스카 상 수상식이 있었는

주신 당신이여 역사를 올곧게 보고 바른 인간의 모습이 무엇인지 삶은 어찌 살아야 하는지 당신 인생의 고비 고비 가르침 주시며 저희 곁 에 와주신 당신이여 고맙습니다.

데 그 다음날 신문기사를 보고“아! 내가 이 큰 프로그램까지 보지 않았구

높은 건물벽에 붙여진‘우리를 잊으셨나요?’그 현수막…

나!”하는 맘으로 그 시간에 내가 시청한 한국 드라마 장면을 떠올려 보기

가슴에 비수되어 꽂혔습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감히 잊을 누가

도 하였다. Oscar Night을 놓친 그 일은 지금 내가 두어달 째 푹 빠져 있

잊을 수 있을까요?

는 한 시간 짜리 주말연속극을 보다가 생긴 이변? 이다. 하지만 큰 후회는

그런데… 바쁘게… 살아가기 위해 잊었던. 잊고 있었던

하지 않으려 한다. 타향살이가 길어질수록 모국어에 대한 거리감과 두고온

당신의 서러운 일생을 가슴으로 느끼며 울었습니다. 몇날 며칠을 눈물

문화에 대한 향수가 깊어져가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나에게 한국드라마

흘려 정화시켜주신 은혜

는“모국어 연습장”이다. 시간이 허락하는한 꾸준히 계속하려고 한다. 넓

두 손 불끈 쥐며 불의에 가슴뛰게 해주신 당신의 은혜.

은 의미의 귀소본능인지도 모른다.

고맙습니다. 오늘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김 옥 수

일본군 성 노예 피해자 할머님 뵙던 날 2019년 6.15남북공동선언 기념식에서

경북 달성 출생. 계명대학교 간호학과, 영문학과 졸업. 『한국수필』 로 등단. 수필집 “허드슨강도 바다로 흐르고” oaksookim@gmail.com

180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김자원

l

181


어느날 밥상

라듐온천과 타지키스탄

김 자 원

김 희 우

산골짜기 흐르는 물줄기가 있는 곳에 주말에 가서 쉬며 지내려고 마련한

2003년, 아프가니스탄의 전후 복구 사업을 돕기 위해 현지에 근무하던

집. 주말에 내려가 그녀가 직접 돌을 골라내고 밭을 일궈 가꾼 채소를 가지

남편의 휴가였다. 타지키스탄을 향발하는 12명 정원 탑승의 유엔기를 타고

고 왔다. 상추쌈에 허브를 하나씩 섞어 쌈을 먹는 맛이 별다르다고 허브도

아프간 산악지대를 비행 때엔 긴장과 초조함이 극에 달했다. 아프가니스탄

몇 잎 상추 사이에 넣었다며 웃는다. 운전해 오는 시간이 서너시간 걸리기

과 파키스탄 접경에 빈 라덴이 숨어 지내던 시기였다. 로켓포로도 저격할

에 가지고 오는 길에 시들까봐 별장을 떠나면서 뽑은 상추란다.

수 있는 저공 비행에 새삼 두려움이 앞섰다.

비닐봉지를 여니 약간 눅눅한 신문지가 나온다. 뿌리채 뽑은 상추를 가

타지키스탄의 수도인 두샨베(Dushanbe) 공항은 매우 작고 한산했다. 두

지런히 뉘여서 스프레이로 물을 살짝뿌려 신문지에 포장하여 비닐로 마무

샨베 시내를 구경하고, 다음날 소개받은 구 소련군 출신 보디가드와 함께

리한 상추.

택시를 타고 유명한 라듐온천으로 향했다. 타지키스탄은 아름다운 산들과

뽑힌 뿌리에 흙이 그대로 남아있다. 가능한 싱싱힌 상추로 보존하여 주 고싶은 마음쓰임이 엿보인다. 전해 준 정성만큼 받아서 씻는 마음도 조심스럽다.

호수로 유명한데, 라듐온천으로 가는 겨울 길은 쓸쓸하고, 빈 계곡에 조약 돌들은 추운 표정으로 서로를 의지하고, 옷 벗은 나무들도 외로워 보였다. 높은 산중에 자리한 국영호텔은 너무 크고 퇴락해서 오래된 성 같기도

작은 칼로 뿌리에 묻은 흙을 살살 긁어낸다. 뿌리는 자르지 않고 잎사귀

하고, 도시의 흥망성쇠를 가늠해 보는 슬픈 돌무덤 같았다. 한때는 공산당

를 뜯어 맑은 물에 살랑살랑 씻는다. 갓난 아기 목욕시키는 것처럼 손끝

서기장들의 휴가지였다는 그 호텔은 구조가 묘한 미로 같았다. 짧은 해는

이 부드럽다. 밭에서 금방 뽑아온 상추와 허브를 곁들인 밥상이 화려하다.

지고, 목욕을 하려고 세면실에 들어간 나는 경악했다. 흐릿한 조명아래, 탕

손바닥 가득 상추를 올리고 중간에 허브를 가로질러 놓고 큰언니가 만들

옆쪽의 쥐 덧에 걸린 쥐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호텔방에 쥐 덧이라

어준 쌈 된장을 듬뿍 넣는다. 혀끝이 간지러울 만큼 부드러운 상추잎. 입안에 가득 번지는 허브향. 사 랑을 먹는다.

니,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현실이었다. 온천욕은 차치(且置)하고, 빨리 그 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밖은 벌써 어둠이 짙었고 다른 장소로 이동 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저녁 식사를 하러 간 이층 식당도 어둡기는 매 한가지였다. 다행히 메뉴

김 자 원 『시대문학』 으로 등단. AM 1660 라디오코리아 “물같이 바람같이”. 뉴욕 불교방송 제작 및 진행. 전 미동부한인문인협회 회장. 저서: '세상을 자유롭게 사는 여자', '오늘을 사는 사람들', '물같이 바람같이'. jawonyoga@hotmail.com

182

l 뉴욕문학 제29집

에는 영어 표기가 되어 있어서 간단히 저녁식사를 마치고 호텔 방으로 돌 아왔는데, 문제는 침대였다. 너무 낡고 스프링이 튀어 올라와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면서 옛날의 화려했던 호텔의 명성 을 상상해 보았다. 이른 아침, 남편은 보디가드와 함께 마을로 내려가 새 수필 · 김희우

l

183


예루살렘의 들녘

호텔을 찾았다. 단 하룻밤의 으스스하고, 암울(暗鬱)한 호텔의 악몽은 오래 된 기억처럼 뇌리에 남았다. 아담한 동네의 호텔은 깨끗하고 사람 사는 온기도 느껴졌다. 보이지 않은

김 희 우

전쟁중인 아프간을 벗어난 심신은 라듐 온천 욕과 함께 평온을 느끼며 무장 해제되었다. 그 곳 식당에서 일하는 작고 가냘픈 소녀의 순진하고 수줍은 모 습이 청량감을 더해 주었다. 밤새 내린 함박 눈으로 마을은 온통 은빛 찬란하고 아름다운 세상이 되었 다. 차갑고 하얀 눈은 욕망과 탐욕, 거짓과 시기가 단절된 세상, 오염된 점 하나까지도 묻어버리는 피안(彼岸)의 세계로 변모했다. 사람은 환경의 변화 에 적응하고 동화되어 가는 것 같다. 티없이 맑아지는 마음과 영혼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뢰 밭, 아프가니스탄의 일탈(逸脫)을 해소하기에 충분했다. 4일간의 아쉬운 일정을 마치고, 임지로 향하는 길은 예측 불허였다. 좁은 길 위에서 아래로 내려 다 보이는 아득한 낭떠러지와 길의 경계선이 눈 때문 에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곡예를 하면서 산길을 내려오는데, 택시가 산 밑 눈 속에 박히고 말았다. 운전기사가 눈장비를 전혀 준비하지 않아 우리 일행은 원시인처럼 눈 위에 엎드려 맨손으로 차 바퀴를 파냈다. 기쁨도 잠 시, 끝없이 쏟아지는 눈 송이에 갇혀 길은 지워지고 가시거리는 1미터 정도 였다. 할 수 없이 보디가드와 남편은 자동차의 길잡이가 되어 눈길을 달리 는데, 마치 두 개의 눈사람이 언덕 위를 달리는 애니메이션 영회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자동차 안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우습기도 하고 측 은하기도 하여, 웃다가 눈가가 촉촉히 젖어 있음을 알았다. 타지키스탄의 공항은 위압적이고 생경(生硬)했다. 군복차림의 세관 직원 이 짐검사를 하다 골프공을 발견하고, 위협적인 눈빛으로 무엇이냐고 물었 다. 황당하고 웃음이 났지만 정색을 하고, 골프공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골 프공에 흥미 있어 하는 것 같아서 공을 그에게 주었다. 냉전 종식의 동시대 에 살면서 봉쇄정책이 가져다주는 문명의 충돌을 심각한 편견(偏見)으로만 간주할 것인가? 4반세기 동안 전쟁을 치르며, 곳곳에 탄흔으로 피폐해진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을 향하는 두 사람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184

l 뉴욕문학 제29집

여명의 새벽 공기를 가르며, 알라후 아크바르 하는 구성진 기도소리가, 유엔 빌리지에도 전파를 타고 흘러 든다. 이스라엘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비유되는 팔레스타인의 제2차 인 티파다(팔레스타인들의 반 이스라엘 저항 운동)가 끝나고, 2005년, 남편 은 팔레스타인들의 원조를 위해 유엔에 파견 근무를 하였다. 동 예루살렘 의 팔레스타인 거주지역인 서안지구 유엔 빌리지에 집을 얻었다. 들판에 홀로선 우리 집은 평화스럽고 조용했다. 서안 지구의 길목에는 체크 포인 트라고 하는 이스라엘 군인들이 검문 검색하는 초소가 있고, 그곳 높은 망 루에서는 기관총을 들고 지나는 차마다 감시를 한다. 가슴 서늘한 체크 포 인트를 지나서 유엔 빌리지 동네 어귀에 들어서면 아늑한 분위기에 안도 감을 느낀다. 지중해 연안의 따뜻한 미풍에 민들레 홀씨처럼 바람에 날려 무리 지어 피 는 꽃, 아네모네가 집 앞의 들판 가득히 피었다. 봄이면 들녘에 융단을 깔 아 놓은 듯, 군락을 이룬 아네모네는 바람결에 붉은 꽃잎의 파도를 만든다. 아네모스(Anemos: 바람 꽃)라는 어원을 가진 아네모네는 아프로디테의 연 인인 미소년 아도니스가 죽을 때 흘린 피로 피어난 꽃이라는 그리이스 신 화로 더욱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는 꽃이다. 예루살렘 들녘의 해질 무렵이면 히잡을 쓴 팔레스타인의 여인들이 삼삼 오오 짝을 지어 산책을 나온다. 담을 타고 넘어오는 여인들의 웃음 소리는 높고 낭랑하다. 재미있게 떠드는 소리와 키득대는 웃음소리가 노을 진 들 녘에 메아리 되어 고요를 깨치며 생동감을 일깨운다. 태양 빛을 머금은 아 네모네가 고혹적인 자태로 손짓하며 여인들을 부른다. 행복한 향기에 취해 여인들은 아네모네 꽃을 꺾어 히잡 사이의 머리에 꽂기도 하고, 손에 든 몇 수필 · 김희우

l

185


송이 꽃은 여인들의 즐거운 산책길에 마스코트가 되기도 한다. 산책이 끝 날 무렵이면 벌써 애달픈 꽃 아네모네는 시들고, 여인들은 그 애처로운 모

인간과 자연의 만남 2

습에 상처를 받는다.

나 정 길

집 밖 들녘에는 평화의 상징인 키 큰 올리브 나무들이 서 있다. 밤이면 푸르스름한 정기가 달을 감싸고, 탐스러운 은빛 꼬리를 가진 여우가 달빛 에 반사된 아네모네 꽃 가득한 들판을 가로질러 올리브 나무사이로 사라지 는 모습은 동화속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여우는 낮에는 굴이나 바위틈에 숨어 지내다 밤이면 활동하는 동물이다. 이스라엘에서 여우 서식지는 자연 보호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라마단 기간이면, 해돋이에서 해넘이까지 무슬림들은 금식을 한다. 금식 해제의 방송이 모스크에서 흘러나오면, 집 안주인인 산드라는 커다란 쟁반 에 그들의 음식을 고루고루 담아서 우리 집에 나른다. 그녀의 정은 깊고, 어릴 적 동구 밖 종손 댁에서 제사를 지낸 후, 정성 드린 음식을 반기지어 나르던 아름다운 풍습이 회상된다. 흰색 바탕에 검정색으로 커다랗게 UN이라고 쓰여진 지프 차를 타고 예 루살렘 시가지에 들어 섰는데, 앞서 가는 피아트 차 뒤 편 유리창에 UN GO HOME이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다. 예루살렘의 아네모네 들녘에도 유엔 없 는 평화스러운 자치지구가 하루 빨리 이루어 지길 소망한다.

6월 6일 아내와 함께 두번 째 서부 관광 길에 나섰다. 지난 2004년 서부 여행의 감동에 이어 이번에는 Yellow Stone까지 볼 요량으로 일주일간의 계획을 세웠다. 우리의 여행은 사막의 오아시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Las Vegas에서 시작했다. 여전히 화려한 호텔들이 즐비하고 여행객들의 눈을 끌었다. 이 도시는 밤이 낮처럼 활동적이고 낮이 밤처럼 휴면하는 도시이다. 많은 관광객들을 유혹하여 Nevada 주에는 경제적 도움이 됐을지 모르나 메케한 담배 연기속에서 잭팟을 꿈꾸며 밤을 세우며 기계 앞에 메달려 있 는 사람들의 황폐해지는 영혼은 누가 책임질지 서글퍼 진다. Utah 주에는 5개의 국립공원이 있다고 한다. 53명을 태운 우리 관광 버 스는 Zion Canyon의 꼬불꼬불한 언덕길을 올랐다. 10여년 전에는 남에서 북으로 통과 했는데 이번에는 북에서 남으로 지나니 새로운 경관이였다. 우람한 산세는 여전한데 그 옛날에 별다른 장비도 없이 산밑 터널을 뚫 을 수 있었던 것이 경이로웠다. 그랜드 케넌 가는 길 양편은 산불로 많이 훼손되어 있었다. 1m 안팎의 어 린 나무들이 촘촘이 자라고 있었다. 산불은 낙뇌나 나무끼리의 마찰로 자 연발생하여 새로운 나무들이 자라는 거름이 되어진다고 한다. 성숙한 나무 는 씨앗을 미리 뿌려 땅속에 숨겨져 있다가 싹이 터 오른다고 한다. 자연의

김 희 우 2018년 뉴욕문학 신인상 수상 중앙일보 15기 주부통신원 전직 고등학교교사

신비스러움을 또다시 느끼게 한다. Grand Canyon 북쪽 벽끝에 섰다. 14년 전에는 남쪽 벽끝에서 올려다 보 는 경관의 웅장함에 감탄했다. 이번에는 북쪽에서 내려다 보니 또 다르게 보였다. 시야가 좁아 케넌 전체를 볼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데려다 주는

186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나정길

l

187


대로 보여주는 대로 보는 것이 단체 여행의 결함인가.

조용하고 깨끗한 도시는 어쩐지 통제된 도시 같았다. 우람한‘몰몬교’

태양은 이글거리며 셋째 날을 열었다.

사원의 뽀쪽한 첨탑이 눈에 들어왔다. 안내자는 그들이 그리스도교의 십자

Antelope은 땅위에서는 잡초들이 자라는 평평한 모래벌로 보였다. 원주

가를 거부하여 이단으로 몰렸다고 설명했다.

민 남자의 안내를 받아 15명씩 짝지어 사다리를 타고 땅속으로 내려갔다.

신도인 듯한 아가씨들이 출신국가 별 국기를 가슴에 달고 있는 것이 이

아- 하고 경탄의 함성을 토했다. 붉은색 바위들의 기기묘묘한 모양에 놀

상스러 보였다.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몰몬교를 설명하는 아가씨에게‘구

랬다. 그 옛날에 지하수가 흘러가며 깍고 녹이고 다듬어서 인간이 흉내 낼

약과 신약 성경을 인정 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인정 한다’고 대답했

수 없는 작품을 만들어 놓았다. 한국 말을 곧잘하는 원주민은 1달라씩 받

다.‘화려한 성전은 어떤 재정으로 건립되었는가 다시 물었다.‘신도들의

고 사진 찍어 주기에 바빴다.

헌금으로 지워졌다’고 대답했다. 석연찮은 뒷맛을 남기고 우리는 다시 버

점심은 Kanab 이라는 마을의 작은 식당에서 스테이크로 대접을 받았다.

스에 올라 Yellow Stone으로 향했다.

뉴욕에서부터 인사를 나누고 함께 온‘김 선생님’내외와 한 테이블에서

Yellow Stone 국립 공원은 와이오밍 주 북서쪽에 자리한다. 북으로는 몬

식사를 하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긴 여행 길에 말벗

태나 주에 뻗어 있고 서쪽으로는 아이다호 주까지 광범하게 펼쳐져 있다.

이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안내자는 공원 내 도로가 8 모양으로 View Point가 널려 있고 동서남북 4

이곳은 옛날에는 영화 촬영을 하려 배우와 스텝들이 몰려와‘Little

개소에 출입구가 있다고 했다.

Holly wood’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그 집

우리 버스는 서쪽 입구로 들어가 서편 북쪽에 위치한 Mammoth Hot

딸인듯한 여인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한국가요‘만남’을 정확한 발음으로

Spring 이라는 간혈천을 맨 먼저 구경하기로 했다. 여기는 일정한 시간 간

멋드러지게 불렀다. 우리 일행은 열광의 박수를 보냈다. 그녀는 한국 가요

격을 두고 땅속의 수압 때문에 물을 공중 높이 품어낸다고 했다.

를 좋아 한다며 또 부르겠다 하는데 우리는 일정에 쫓겨 아쉬움을 남기고 차에 올랐다. ‘싸이’나 아이돌 그룹들을 시작으로 한국의 가수와 가요가 세계를 휩 쓸 날이 올지도 모르겠구나 하고 혼자 생각 했다. Bryce Canyon은 14년 전보다 많이 달라져 보였다. 세월의 비 바람 속에 훼손 되어져 가는 걸까. 자연도 인간도 긴 세월 속에서는 스쳐가는 것인가. Utah나 Idaho 길가의 풍광이 비슷 했다. 길 양옆에는‘알파파’라는 소

자연이 만든 쇼 시간이 임박하여 점심으로 먹던 빵을 집어 던지고 달려 갔다. 벌써 많은 구경꾼이 몰려 다른이의 어깨넘어로 볼수 밖에 없었다. 엘로스톤 도처에 열탕, 부글거리는 진 탕, 뜨거운 온천수가 나오는 곳이 널려 있었다. 뜨거운 물과 찬 공기가 부딪처 김이 피어올라 시야를 가리었 다. 어느 곳은 유황 냄새가 코를 찔렀다. 북쪽 출입구로 나가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겨울 날씨같이 차가운 아침공 기에 떨며 가방에 넣었다가 빼버린 오리털 자켓이 그리웠다.

먹이들이 잔디처럼 자라고‘스프링 쿨러’로 물을 뿌려 주는 광경이 보였

오늘은 동쪽 View Point를 따라 남으로 내려가는 일정이다. 엘로스톤은

다. 방목하는 검은 소들이 어스렁거리며 한가로워 보였다. 큰 나무들이 없

고산 지대라 맑았다 금새 어두어져 눈이 내리고 다시 개이고 햇빛이 반짝

는 민밉한 산들이 멀리 떨어져 줄을 잇고 산 밑으로는 사막지역의 작은 관

거렸다.

목들이 자라고 있었다. 넷째날 아침 버스는 Salt Lake 시내에 들어섰다.

188

l 뉴욕문학 제29집

깊은 계곡 사이로 폭포가 떨어지는 Tower Fall은 절경이였다. 중국인 관 광객이 너무 많아 사진도 제대로 찍지 못하고 돌아섰다. 남으로 내려가는

수필 · 나정길

l

189


길 따라‘엘로 스톤 강’도 흘러 호수로 내러갔다. 호수의 끝이 가물거렸

요양원

다. 둘레가 2,357 미터, 깊이는 131 미터라 했다. 엘로 스톤에 물이 이렇게 풍부한지 미쳐 몰랐다. 물이 풍부한 곳에는 모든 생물이 풍요로워 진다. 이

노 려

땅에 살아가는 동물들에게는 여기가 천국 일지도 모른다. 내러가는 차창 우측으로‘압살롬’산맥의 거봉들이 하얀 모자를 쓰고 ‘Teton’까지 늘어서 있었다. 여기서 잠시 머물러 가기로 했는데 공교롭 게도 차가 고장이 났다. 엘로 스톤 한 가운데서 고장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눈 덮인 높

요양원 몇 군데를 가봤다. 이제 정말 감행을 할 때야, 동생들과 함께 요 양원을 찾으려고 한국에 갔다.

은 산들을 감상하며 휴식을 취했다. 매점에서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챙기 고 내 후드 자켓도 장만했다. 차 고장으로 케이블 타기로 한 일정이 취소 되었다.

주황색으로 또렷하게 쓰여진 <요양원>라는 글자에 가슴이 덜컹했던 것 같다.

우리의 마지막 밤은 Idaho 주 인디언 보호구역에 있는‘Shoshone-

건물 뒤에 차를 세우며“주차장도 제대로 있구나. 좋네.”했다. 젊은 여

Bannock’Hotel에서 묵었다. 여기는 인디언 Shoshone 족이 자치적으로

자가 반갑게 우리를 맞이했다. 면회실이 있는 지하실을 먼저 구경하고 2

운영한다고 했다. 원주민들의 이 작은 자각이 먼 훗날에 그들에게 더 큰 희

층으로 올라가서 실제로 휠체어를 탄 노인들 모습을 보자 또 가슴이 덜컹

망을 가져다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다. 이거구나.

‘당신의 열매로 우리가 살 찌우고 우리의 눈물로 당신을 키웁니다.’ 자연을 사랑한 인디언들의 기도문을 되새기며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를 타려 Salt Lake 공항으로 향했다.

멀뚱한 얼굴의 할머니들, 밝고 큰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하는 직원들. 이 렇구나. 요양원이라는 데가 이런데 구나. 원장 여자는 두꺼운 서류철을 꺼 내며 지금 대기자가 여러 명 있는데, 자리가 나는 시간도 예측할 수 없고, 자리가 나더라도 대기자가 또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 일이니, 차례가 되 면 연락해주겠다고 했다. 우리 엄마 빨리 가야하는데, 마음이 급해졌다. 카톡으로 언니동생 사이에 오해만 오고 갔다. 팔팔하던 엄마가 지팡이를

나 정 길 제11회 『뉴욕문학』 신인상 수필부문 당선. 미동부한인문인협회 부이사장, 부회장 역임. 수필집: '우리를 유혹하는것들'. jungkilna@yahoo.com

짚을 때까지 보살핀 둘째 동생이 입을 꼭 다문지는 오래다. 어느 요양원엘 보내느냐 조차도 결국 동생들의 몫이지만, 그래도 얼굴 맞대고 의논이라도 하려고 비행기표를 샀고 엄마 집이 아닌 동생 집 근처 AIRBNB를 정할 때 부터 내 생애에 일어나는 큰 변화가 느껴졌다.

190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노려

l

191


그러나 이 정도까지는 생각 못했다. 동생들이 큰 언니인 나를 향해 쌓아

비어 있는데 이따가 또 누가 방문 오겠다고 했거든요.”한다. 문을 나서면

놓았던 원망이 분노로 폭발했다. 30년 넘게 엄마 아파트 바로 옆에서 살아

서 둘째가 말한다. 저 여자 완전 장사꾼이네.”“휴지같은 거 싼 거 쓰는

온 둘째 언니를 해방시켜 주느라, 엄마를 자기 아파트로 데려간 막내. 내

거 아냐?”“그러게 좀 그래 보이지?”라는 동생들 말에, 나는“그래도 이

어찌 상상이나 하랴.‘그래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렴.’

런 곳이라면 엄마가 어디 누구네 집에 온 거 같지 않을까.”했다.

이번에 본 엄마는 1년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아니, 몇 달 전 전화

다음으로 가파른 언덕길과 좁은 골목길을 돌고 돌아 찾아가 보니 어느

할 때만 해도 명랑하게‘야, 나 여기서 호강한다.’하던 그 엄마도 아니

불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시설이었다.“여긴 눈이라도 오면...”벌써 틀렸

다. 막내 집에 와서 두 번이나 넘어지고는 시니어 센터도 갈 수가 없게 되

다. 그런데 중년의 남자 원장님은 아주 서글서글했다. 교외에 농장이 있

자, 동생네 생활이 엉망이 되어갔다.

어 그 곳에서 식재료를 가져 온다고 했다. 어둠침침한 실내에 음식냄새가 진동했다. 아, 네 네… 웃으며 인사하고 나와서는‘저 남자 사람은 좋은

막내가 마구 따진다. 내가 미국에 산 세월이 거의 40년인데 이제 와서 따

데’했다.

진다. 어째 맏딸이 미국엘 갔냐는 거다. 상식적으로 도덕적으로 틀린 일이 라는 거다. 둘째 동생은 여전히 아무 말도 안하고 앉아있다.“그러구 말이

“그래, 보니까 이 세 군데 다 뭐, 그런대로 괜찮네. 요양원이 이런 정도

야, 언니는 엄마를 양로원 보내야겠다고 하면서 막 울었잖아, 그러니 어떻

라면 어디에 가도 나는 괜찮을것 같애.”라고 말했다. 마치 동생들에게 큰

게 엄마를 보내냐구….”엄마가 막내 집으로 가기 전에 내가 양로원 소리

언니의 의견이 필요하기나 한 것 처럼.

를 하긴 했었다. 누군가는 먼저 그 말을 꺼내야 할 것 같았다. ‘아, 엄마 요양원 보낼 생각에 눈물이 나는 건 당연한 일 아니냐.’라는 말이 속에서 맴 돌았다. 물론 좀 울먹거렸을 텐데 그걸 막 울었다고 받아드린 동생은 또 뭔가.

요양원이 어딘들, 엄마에게는 결국 다 마찬가지다. 생명을 이어가는 상황 에 싼 휴지 좋은 휴지가 무슨 문제인가. 농장직송이건 레디메이드이건 무 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내 어린 시절,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난 6.25 를 겪은 사람이야.’라며 6.25 생각하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던 엄마다.

내가 원장에게 말했다.“저의 어머니 이름을 맨 위에 적어주세요.”건

어디든 빨리 가셨으면 했다.

물을 나서며 둘째가 말한다.“저 사람 조선족 같지?”“ 아, 그래?”“말투 가…”‘뭐, 조선족이면 안돼나.’

90세 생일 케익에 촛불을 꽂고,“엄마. 웃어, 웃으라고…”사진도 찍 고 미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되어 동생에게서 카톡이 왔다.“엄마 어제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은 아주 복잡한 거리에 있는 건물 한 층을 쓰는 곳이

요양원으로 갔어. 언니랑 가본데가 아니고 그 근처야.”며칠 후 카톡에는

었다. 정원은 9명이고, 보통 아파트의 큰 리빙룸을 연상시키는 분위기다.

“엄마 잘 있어”사진 속 환한 방안에 빨간 스웨터를 입은 엄마가 가느다

방방을 기웃거리며‘엄마 여기 와 있으면 좋긴하겠다.’말이 나오는데, 또

란 삼각형 케이크 조각을 앞에 놓고 앉아있다. 엄마 얼굴은 무표정이다.

울컥한다. 동생도 눈이 뻘개진다. 눈치 빠른 원장여자는“지금 한 자리가 그리고 며칠 후엔 작은 삼춘이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엄마를 찾아갔고 엄 192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노려

l

193


마가 반가워했다는 소식, 이어서 막내네 가족이 제주도로 여행 갔다는 소

나 홀로 호텔방

식이 왔다.‘그래 잘 되었어’ 달력을 둘치며 엄마를 보러 갈 날짜를 찾는다.

노 려

한 며칠 나 홀로 살아보고 싶은 것이 나의 소박한 꿈이었다. 아니 절박 한 소망이었다. 줄 넘기 하다가 빠져 나올 순간을 번번히 놓쳐서 계속해서 뛰고 또 뛰는 삶을 한참을 살았다. 더 이상 지속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는, 그 느낌은 뭉크가 잘 그려냈다. 나의 일상의 연장선같이 평범한 곳 그러나 나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그런 곳이라면 어디라도 좋을 것 같았다. 아침에 슬슬 동네로 나가 카페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발 닿는 곳으로 어슬렁거리다 집에 들어와, 냇플릭스 영화도 보고, 이메일도 쓰고, 물론 카톡도 한다. 비싼 와인 한잔 마시며 책 을 읽고 따끈한 물 받아 목욕을 한다. 잠이 올 때 평온하게 잠자리에 든다. 뭐 어려운 일이라고, 아 여행을 가지? 실현이 안된다. 남편에게는 말을 못한다. 소리 없는 절규를 하게 한 장본인이니까. 사실 남편이 나에게 딱히 잘못한 것은 없다. 오히려 누구에게나 잘 해주는 좋은 사람이다. 웬만한 일에‘뭐 그럴 일이 있겠냐’ , 아니면‘뭐 다 그런거지’ 두가지 반응으로 큰 고민없이 쉽게 산다. 바로 그 점이 날 꽉 막히게 한다 고 하면, 아마 그 누구에게도 먹히지 않는 이론일지 모르겠다. 유관순 언니가 감옥에서 숨지면서까지 외친건 인간 본연의 자유였던가. 열린 방 안에 스스로 갇힌 듯 살아온 세월이 일제 강점기 만큼이다. 해방을 맞고 싶은 마음이었나. 혼자 있을 궁리를 해 보는 것 만으로도 숨통이 트이 194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노려

l

195


듯해서 자주 그 꿈을 꾸곤 했다.

경복궁 길을 홀로 걸으며 아직도 쏘다니는 데는 자신이 있음을 확인했다.

그러다가 나의 꿈이 실현된 것은, 엄마 땜에 가슴이 꽉 막혀있던 때다. 엄마를 요양원에 보냈다는 소식에, 이제 니네들 고생은 끝. 동생들을 향한

요양원 직원들이, 아이고 할머니, 좋네. 미국서 딸이 오고, 누군지 알지?

맏 딸의 그 오랜 마음 고생, 이것도 끝. 할렐루야다. 하면서 가슴이 저렸다.

하자 얼굴을 콱 찡그리는 엄마는 옛날 내 엄마 그대로다.‘어따대고 반말

몇 달 전 한국에 가서 보고 온 요양원들이 눈에 어린다.‘언니랑 같이 가본

을. 날 바보 어린애 취급하나. 아이, 참 싫다.’하는 그 모습. 말이 입으로

곳이 아니야..’ 라고 했지? 과연 엄마는 어떤 곳에 누워있을까. 지난번 가

나오지를 않아 표정으로 답을 하는 엄마, 엄마가 중학교 때 쳤다던 파데레

보았던 그런 방에 단체로 누워있을 엄마.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다. 내 두

오스키의 미뉴엣, 내 어린시절 항상 듣던 피아노 곡을 핸드폰 app으로 들

눈으로 확인을 해야했다. 엄마는 안전하게 잘 있다는데, 한국 다녀온 지 얼

려주자 손가락을 움직이고 고개도 까딱까딱하는 엄마가, 잠시 후엔 자고

마 안되어 또 간다는 말을 남편에게 꺼내기가 어려웠다. 피가 진하다.“여

싶어했다. 엄마 누울래? 고개 끄덕. 엄마를 뉘우고, 곧 나지막한 크르르 소

보 나 엄마 보러 갈꺼야.”

리가 들리고, 나는 요양원을 나왔다.

이번에 가면 내 맘대로 다녀야지. 엄마 집 목동도 아니고 동생이 사는 강 남도 아니다. 구 서울에 있고 싶었다. 요양원에 가는 지하철이 있는 을지로

환한 대낮의 거리로 선뜻 나서지를 못하고 건물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한참을 서있다가 나온다.

3가에다 호텔을 잡았다. 도착한 날 동생이랑 엄마 보러 갔다가 을지로 4가 우래옥에서 냉면을 먹고, 호텔로 와 한참 이야기하다 동생이 가고 나니…

마지막 밤, 호텔 로비 옆에 있는‘세븐 일레븐’에서 2천원쯤 하는 청아

갑자기 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이메일을 체크하고, 카톡하고 뜨듯한 물 받

한 병을 사들고 올라와 못 다한 통곡을 터트렸다. 울면서 생각했다. 아 정

아 목욕을 하고 시차도 없이 잠을 잤다.

말 좋다. 혼자 있으니, 막 크게 울 수도 있네. 실컷 울어야지. 아아 좋다. 내 가 바라던 것이 바로 이거잖아. 내가 언제 이런 사치를 누렸었나. 호텔 방

하루 건너 엄마를 보러 갔다. 남은 시간엔 오랜 친구를 만나고, 동생들

에서 나홀로… 이렇게 자유를 누리다니.

과도 엇갈린 감정을 맞추어 보면서, 시간에 쫓기는 일 없이, 팽팽하게 맞 서는 일 없이 지내다가 밤이 되면 새하얀 시트가 깔린 반듯한 침대에 눕는 다.“아 참 좋다!”소리 내어 좋다고 하는 나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게 웬

아, 그렇구나. 엄마가 준 선물이네. 나의 간절한 꿈을 엄마가 이루어 준 것이다.

일인가. 창으로는 미세먼지 나쁨 수준을 알리는 빨간 불이 켜진 남산 타워 가 보인다. 이렇게 좋아도 되는 건가.

노 려 2008년 한국수필 등단 2009년 미동부한인문인협회 가입

조금만 걸어가면 명동이고 광화문이고 인사동이다. 이 거리를 쏘다니던 때. 그 땐 정말 사과처럼 동그란 얼굴로 싱그러운 때였지. 미세먼지 뿌연

2015년 수필집‘그랜드센트럴 역에서 달리기’출간 2016년 국제 PEN 한국본부 미동부지역 위원회 가입 현재: 뉴욕 한국일보 웨체스터 지국장 nohryo@gmail.com

196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노려

l

197


4,19의 단상

복도에 있는 창문으로 뒤쪽의 경기고등학교를 보니까, 학생들이 떼를 지어 우르르 몰려나오는데, 열기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 학생들도 데모하러 나간다는 거였다. 재동네거리로 나왔는데, 애들이 버스가 안 다

방 인 숙

닌다고 큰일 났단다. 겁이 나서 아버지가 근무하시는 화신 뒤에 있는 한전 으로 갔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미 퇴근하신 후였다. 모든 회사가 일찍 끝 난 모양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집으로 가야할지 막막해서 멍하니 서있는

4월이 되면 사람들은 봄의 찬가부터 음미하게 된다. 나 역시 봄을 좋아하

데, 광화문에 있는 서울 신문사 빌딩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건너 신신

다보니 봄의 노래를 부르지만, 그 전에 먼저 4,19혁명부터 떠올린다. 4,19

백화점 앞은 사람들로 아수라장인데다 화신 앞의 종로통은 더 인산인해였

가 하도 오래돼서, 유가족이나 직간접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 외엔, 모두

다. 할 수없이‘버스노선을 따라 걷다가 버스를 만나면 타야지’하고 마음

에게 색깔바랜 흑백사진처럼 희미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아무

을 다잡으며 걷기 시작했다. 대로를 피해 화신 뒷골목과 종로2가 뒷골목으

런 상처가 없음에도, 그 날에 대한 영상이 여태껏 생생하게 살아있다. 내겐

로 해서 단성사 극장까지 갔다.

여러 가지로 결코 잊을 수가 없는 날이기 때문이다.

‘여기쯤은 괜찮아서 버스가 다니겠지’하고는 종로3가로 가보니까 더

그 4,19날이 내게는 낯선 지역에 대한 두려움대신, 초면의 길 찾는 재미

난리였다. 성난 데모대들이 종로 쪽을 향해 전진 중이고, 연도에 있는 사람

를 갖는 계기가 된 날이기도 하다. 전후무후 제일 많이 걸었던 날이기도 하

들은 그들에게 양동이로 물을 떠다주고 했다. 그때 나는 두 눈으로 똑똑히

다. 처음으로 혼자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해서 최대난관을 돌파한 날이었

보았다. 데모대의 선두 쪽을 저지하던 경찰들이 총을 쏘기 시작하자, 앞에

다. 그럼으로써 내 생애에 무슨 일이나 새로운 어려움이 닥쳐도 은연중에

있는 데모대들이 픽픽 쓰러지는 걸...

자신감을 갖게 됐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따져보면 내 인생에서, 한꺼번 에 가장 많은 변화를 유발시킨 날이었는지도 모른다.

너무 무섭고 기겁하게 놀라 다시 당선사 뒷골목으로 뛰었다. 겁에 질린 채 가까스로 종묘 앞까지 갔는데 난감했다. 큰 길로는 도저히 나갈 엄두가

1960년 4월, 나는 내 인생의 첫걸음이랄 수 있는 중 1이었다. 청량리 밖

안 나는데 앞은 종묘로 막혀있으니 인제 어디로 가야 되나? 공포에 질려

홍릉구석에서 살아 시내지리도 잘 몰랐다. 버스종점인 홍릉에서 버스를 타

어쩔 줄 모르고 서있는데, 사람들이 종묘 정문의 왼쪽으로 가고들 있었다.

고 종로 2가에서 내려, 재동에 있는 학교길만 이제 겨우 익혔을 때였다. 매

따라가 보니 담으로 막혀있는 줄 알았던 곳에 아주 좁은 골목길이 숨어있

일매일 라디오로 신문으로 데모가 연이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

었다. 놀랍게도 사람하나 다닐 틈새 길이 뚫려있을 줄이야. 무작정 사람들

런데 그날은 반애들이 우왕좌왕 우르르 웅성웅성 떠들었다.

을 따라 꼬불꼬불 길을 끼고 가니까, 신기하게도 원남동 사거리가 나오는

“옆에 있는 중앙 하고 휘문 애들도 데모하러 나갔대.”

거였다. 살았다 싶었다. 그곳은 창경원 앞쪽으로 가는 길이니까. 창경원은

모두들 덩달아 술렁술렁 댈 때, 선생님이 어두운 얼굴로 들어오셔서 걱

홍릉에서 살기 전, 돈암동과 안암동에 살 때, 가족끼리 낮에도 왔었고 밤

정스레 말했다. “오늘은 오후수업이 없으니까 절대 돌아다니지 말고 빨리 곧장 집으로 가야 된다.” 198

l 뉴욕문학 제29집

벚꽃놀이도 와봐서 잘 아니까. 하지만 지금은 누구에게 물어 볼 수도 없고 응원을 청할 수도 없는 완전 사면초가였다. <전화가 없던 시절 이었다>곰곰 생각한 결과, 종로통과 동

수필 · 방인숙

l

199


대문을 피하자니 천 상 지리를 알고 있는 돈암동 쪽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

그 날 이후론 무제한 휴교라서 신나게 놀았다. 자전거포에서 배달자전

다는 판단이 섰다. 명륜동, 혜화동, 삼선교, 돈암동으로 돌아서 혼자서 타

거를 빌려 자전거를 배웠다. 그리고 동네 아저씨가 우리 또래 몇 명에게

박타박 끝도 없이 걸었다.

배구를 가르쳐줬다. 그래서 자전거를 봐도 그 날이 떠오르고 배구를 봐도

어느 새 날은 저물고, 그 와중에도 배는 정신없이 고파왔다. 안암동으

그렇다. 배구는 그때 배운 실력으로, 교내 반 대항 배구 시합 때면 배구선

로 꼬부라져서 가까스로 신설동까지 갔다. 그쯤이면 버스가 다닐 거라는

수로 뛰곤 했으니까. 4,19는 내게 너무 악몽 같은 미로 속을 헤매게 했지

희망 속에 겨우 아픈 다리를 끌고서. 맙소사! 버스는커녕, 신설동 네거리

만, 그 밤 후론 한국의 역사가 달라졌듯이, 나도 여러모로 달라지게 만든

의 파출소가 불에 훨훨 타고 있었다. 깜깜한 거리엔 완전 인적이 끊겨 사

밤이기도 했다.

람커녕 개미 한 마리 없었다. 할 수없이 죽자고 또 걸어 용두동까지 왔다.

지나고 보니 그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이 많다는 것을, 차츰차츰 깨달았

거긴 그래도 내 아성이었다. 종암 초등학교를 다닐 때, 제기천의 징검다리

다. 아무리 어려워 보이는 일이라도, 꾸준히 노력하면 된다는 점을 은연중

로 건너다녔다. 그런데 비가 오면 제기천이 급류에다 물이 불어 징검다리

터득됐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쉬지 않고 걸었더니, 결국엔 집에 당도했으

를 건널 때 좀 어질어질했다. 할 수없이 용두동 큰길로 걸어 나와 남자차

니까. 또 생판 모르는 길도 찾아가면 된다는 확신도 갖게 됐다. 나아가 낯

장 아저씨한테“태워주세요!”해서 버스를 얻어 타곤 했었다. 그런데 그

선 길과 환경, 변화에, 두려움 보다는 생경 감을 즐기며 보람도 갖게 됐다.

곳 까지도 버스가 안 다니고, 지나다니던 용두 파출소마저 불길에 휩싸여

그런 근원도 그날 일로 심어진 자신감에서가 아닐까 싶다. 늘 힘든 일도 부

있는 게 아닌가.

닥치면 된다는, 무슨 일이던 혼자 해결한다는 의식이, 잠재적으로 형성됐

점심, 저녁 꼬박 굶은 채, 무서움에 떨며 죽을 고생 끝에 청량리까지 왔 다. 그곳은 할머니랑 허구한 날 시장을 다니곤 했던 곳이라, 비로소 한 숨

다고 봐야하니까. 그런 도전의식이야말로 이질적인 환경과 문화와 싸워야 하는 해외생활에, 참 많은 도움이 됐다.

이 놔졌다. 드디어 홍릉에 있는 집까지 당도한 시간이 밤 10시 30분이었

6,25는 너무 어려서 기억에 없지만, 4,19만은 피 맺힌 항거를 생생하게

다. 공포에 가득 찬 얼굴로 들어서는 나를 보고, 할머니와 부모님은 죽은

지켜보았기에 더 잊을 수가 없다. 어떤 숭고한 단어로도 표현이 부족할 그

자식 돌아온 듯 반기시며 가슴을 쓸어내리셨다. 혼자 제대로 찾아온 나를

죽음들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으면서도, 무섭다고, 나만 살겠다고, 뒷

무척 신통히 여기셨다. 아버지는 일찍 퇴근하셨고, 언니는 여학교가 보문

골목 뒷골목으로 해서 집까지 도망쳐 왔으니까. 그 점이 양심상 떳떳하지

동에 있어서 일찌감치 고대 옆의 뒷길로 왔단다. 밑의 동생들이야 동네 초

못하다. 피를, 총을 보고도, 그 역사적인 정의투쟁의 현장에서 도피했던 객

등학교니 문제될 게 없었던 것. 결국 시내에 학교가 있던, 그것도 다닌 지

관적으로 본 내 모습이 아무래도 찔린다. 죄송하고 부끄럽다.

얼마 되지 않았던, 나만 문제였던 것이다.

당시엔 그 날이 그렇게 귀중하고 값진 희생의 투쟁이었다는 것 까진, 미

혼자서 길도 모르면서, 어림짐작으로 고생고생 하며 끝도 없이 걸었던 그

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려서 몰랐다고 합리화시키려 해도, 솔직히 아

밤길은, 정말 너무너무 외롭고 힘든 밤이었다. 엄청 끔찍하게 겁나고 막막

주 모르지는 않았다. 아니 신문을 보고 다 꿰뚫고 있었다. 그때의 내 일기

하고 다리 아팠던 날이었다. 그런 무지막지한 고행 길은, 내 생애 처음이자

장을 보면, 나도 뭔가 울분을 느꼈던 걸 알겠으니까. <최루탄이 박혀서 마

마지막일 거였다. 그러니 내가 그 날을 어찌 잊겠는가! 물론 대한민국 국민

산 앞 바다에 떠 오른 김주열>이란 학생에 대해 안타까움과 분노에 섞인 글

이면 당연히 잊어서도 안 되는 날이긴 하지만.

을 써놓았으니까. 어린 마음과 눈에도 그 당시의 시국이 꽤나 충격적으로

200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방인숙

l

201


비쳤나보았다. 그럼에도 피의 현장에서 나는 철저한 방관자였고, 나 살길

버섯들의 속삭임

만 찾았던 도망자였다. 그러고도 4,19희생자들에게 죄의식을 느끼기 시작 했던 것도, 한참 후 대학생이 되어서였으니...

방 인 숙

그 후론 백운대나 도봉산에 갈 때면, 꼭 수유리 묘지에 들려 묵념하곤 했었다. 아직도 잔인한 사월이 오면, 그 날 광경이 어제일 인양 더 떠오르 고, 영령들한테 죄스럽고 빚진 기분이다. 양심선언 하는 기분으로 이 글을 쓰면서도 뜨끔하다. 새삼 수유리 묘지를 떠올리며, 가만히 명복을 빌게 되 는 이유다.

내가 버섯음식을 좋아하다보니 버섯에 관심 또한 많다. 버섯은 개성만점 의 신비한 모양새들이‘꽃보다 버섯’일 만치 예쁘고 다양하다. 특히나 비 온 후면, 자생으로 더 잘 태어난다. 또 빨리 자라는 속도는 우후죽순 이상 이라 신비할 정도다. 밤송이자루접시버섯은 가시 돋친 밤송이에서 나고, 쇠똥에서 태어나는 노란소똥버섯도 있다. 그걸 보면 버섯은 태생지를 안 가리는 소박함, 숨은 듯 안 나서는 겸손함, 또 강한 생명력까지 겸비한 셈이다. 더해서, 꽃을 파고들지만 절대 꽃엔 해를 입히지 않는 꿀벌처럼, 자기만 살겠다고 무엇에게나 누(累)를 안 끼친다. 선하고 배려심이 커서겠다. 못 된 돌연변이인간처럼, 예외의 버섯도 있긴 하다. 죽은 벌이나 파리의 위( 胃)에서 솟는 벌동충하초, 노린재성충에 기생하는 노린재동충하초, 번데기

의 사체나 유충에 사는 동충하초 말이다. 사체(死體)에 기생하면 유기물부 식(腐蝕)을 돕지만, 생물체에 기식하는 동충하초는 이기적인 돌연변이 생 태겠다. 하여간 모든 버섯들은 아주 짧고 아쉬운 삶의 여정을 누린다. 그럼에도, ‘가시는 걸음걸음’조차 한 치의 미련이 없다. 생의 흔적조차 말소하는 완전소멸이니까. 고로 버섯의 일생이야말로 참으로 담백하고 깔끔한 삶의 양태라고 하겠다. 한국에선 1000여종의 버섯이 자생하는데 식용가능버섯은 대략 100여종 이란다. 그중 인공재배가능버섯은 12종류쯤 된다나. 대부분의 식용버섯은 맛과 향기 외에 고단백이고 항암효과가 있단다. 예로부터‘신의 선물’이 란 찬사 속에 사랑 받을 자격이 차고 넘친다.

202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방인숙

l

203


미국사람들은 버섯에 덜 매료하는 것 같다. 양송이, 표고, 느타리, 팽이

내가 혼잣말로 자평하길,‘작고 젊은 바위얼굴에 있는 건 죽은 깨고, 늙

등을 파는 한국슈퍼와 중국슈퍼와는 달리, 서양슈퍼에선 양송이와 Porto-

고 큰 바위얼굴엔 저승점이네.’했다. 아! 그러고 보니 노인들 얼굴에 생

bello란 버섯 딱 두 종류만 판다. 밤색의 포토벨로버섯은 사먹어 보진 않았

기는 저승점이 일명 검버섯이다. 그럼 혹시 검버섯이란 어원유래가 석이버

는데, 꽤 크고 두툼해서 먹음직스럽긴 하다.

섯? 글쎄다. 그런 추론이 가능한지, 또 맞는지 모르겠다..

영화‘Under the Tuscan Sun’에서 보면, 이태리의 토스카나 주민들

언젠가 한국TV에서 석이버섯 따는 걸 봤다. 어떤 남자가 자일에 대롱대

이 축제마냥 떼를 지어 산등성이를 내려오며 버섯채취하는 장면이 있다.

롱 매달려 산골바위절벽에 붙은 석이를 따고 있었다. 암벽등반가처럼 아슬

얼핏 봐서 포토벨로버섯 같았다. 이태리사람들의 버섯사랑을 나타내는 장

아슬 목숨 걸고 따는, 위험부담이 충분히 가늠되는 장면이었다. 석이가 얼

면이었다. 언젠가 산행하다, 자루를 들고 버섯 따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역

마나 구하기 어렵고 귀하신 몸이면 저럴까!

시 이태리인이었다.

반면 여긴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이 정도면 석이의 천국이다. 어떤 산행

내게도 버섯 따본 추억이 제법 있다. 거의 30년 전 일인데도 버섯을 채취

길엔 만나는 바위마다 생선비늘마냥 촘촘히 새카만 석이가 덮여 있다. 따

하던 순간의 희열이 지금도 새록새록 하다. 뉴욕 주 북쪽 캐츠킬(Catskill)

기도 쉽고 장비도 필요 없다. 손으로 갓을 쥐고 중심에 힘을 실어 살짝 비

의 심산유곡휴양지에서 머물 때였다. 산책 중에 무심코 접어든 곳이 소나

틀면, 바위에 흡착돼있던 버섯배꼽이 떨어지니까.

무 숲이었다. 평지였는데 송이버섯을 진짜 밤나무 골에서 밤 줍듯 주웠다.

겉보기엔 죽은듯한 무생물 같아도, 바위에 붙은 채 있는 걸로 봐선 생명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산등성이 초입에서, 누워있는 고사목등걸 안

을 놓지 않고 있다는 증거겠다. 그나저나 도대체 뭘 먹고사는 거지? 갈증

팎으로 잔뜩 돋아난 자연산 생 표고들의 손짓을 척 알아봤던 것이다.

이야 빗물로 해결한다고 쳐도 참 불가사의다. 바싹 마른 바위표면에선 영

생선마냥 버섯도 신선도에 따라 식감과 향의 등급이 다르다는 걸, 그때 시식 후 확실히 느꼈다. 그 날부터 버섯은 내 기호식품 상위권으로 등극했 고, 버섯채취재미에 푹 빠지게 됐다. 그 후부턴 산에 가면 버섯들을 허투루 안보고 유심히 관찰하게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양분은 물론이고 미생물조차 생존불능일거고. 그걸 보면 바위에 기(氣)라 는 게 확실히 있긴 있나보다. 석이가 비온 후나 처음 돋아난 즉시엔 바위에서 미역 꽃 잔치를 연다. 버 섯이 갓 앞면은 검푸르고 뒷면이 흐린 연두 빛 비슷한‘미역 짝퉁’이니

버섯 따는 기쁨을 담뿍 안겨줬던 석이버섯얘기도 해야겠다. 내가 사는 롱

까. 촉감조차 야들야들한 비로드처럼 미끌미끌해 꼭 미역만지는 기분이니

아일랜드는 애초엔 바다였던지 산악지대나 높은 산이 없는 모래땅이다. 그

까. 그러다가 강한 햇빛에‘쨍’말라가면서 풀 먹여 말린 까만 종이꽃처럼

래선지 고갯마루만 있는 산등성이나 공원에도 바위란 존재는 전멸이다. 반

얇고 빳빳해진다. 끓는 물에 데치면 다시 미역처럼 보들보들해지지만. 그

면 뉴저지나 뉴욕 주 위쪽의 산들은, 애팔래치아(Appalachians) 산맥의 줄

걸 볶거나 무치면 뒷맛과 보드라운 식감은 예술이다. 언급을 회피할‘타

기들이다. 자연 우람한 바위산과 절벽바위들을 풍족히 품고 있다.

의추종불허’다.

그렇게 거대한 바위들이 많은 데로 원정산행 갔을 적이다. 멀리서 보니

그다음 단골 산길에 내가 아끼는 상황버섯이 있다. 상황버섯은 뽕나무줄

바위들 표면이 거뭇거뭇한 점들로 마치 다닥다닥 개미떼다. 좀 가까이서

기나 그루터기에서 자생하는 다년생으로, 약용이고 항암치료제다. 산행 길

보면 미역귀들이 너풀너풀 바위에 잔뜩 붙어있는 듯하다. 처음엔 믿기지

반환점에 나만의 이정표인 큰 뽕나무가 있다. 왔다간다는 인사차, 뽕나무

않았지만, 그게 다 석이버섯이란 사실에 엄청 놀랐다.

를 터치하며 손도장을 찍는다. 그리곤 나무를 안고 잠시 숨을 고르며 나의

204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방인숙

l

205


소망을 염원한다. 그럴 때면 저절로 손이 가는 위치에 상황버섯이 만져진

가을 산행 때 버섯으로 파생된 사고의‘탄생비화’도 있다. 사건의 전말

다. 처음엔 조그만 진흙덩이가 뭉쳐 마른 것 같더니, 반원형의 버섯이 동글

은 이렇다. 전신주만큼 키가 큰 고사목 등걸에 커다란 자연산 산느타리버

게 솟아났다. 융단같이 부드럽게 잘 자라는 그 버섯을 쓰다듬으며 조우(遭

섯이 층층이 달려있었다. 작년에도 땄던 그 나무 그 자리였다. 버섯대가 아

遇)의 기쁨을 속삭이곤 했다.

주 짧거나 없어 쥘부채를 서너 개씩 펼친 자태의 산느타리버섯들이, 고목

그러던 어느 날, 나무를 안았는데 손가락이 허전하다. 겨우 살구만치 자

에 착 붙어있는 거였다.

란버섯이 뜯겨져 나간 채 진흙덩이만 붙어있다. 심술궂은 누군가의 손길

오이스터(Oyster Mushroom)라 부르는 굴 버섯이다. 즉 작은 갓에 비해

에 그만 땅바닥에 내팽개쳐졌다. 마음이 휑할 정도로 허무하고, 방황하는

대가 굵고 긴데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느타리버섯과는 확연히 다르다. 원

손가락이 헛헛해 정말 울고 싶었다. 얼마 후 가상하게도 버섯은 오뚝이처

래가 느타리는 갓에 비밀이 있단다. 콜레스테롤을 제거해주고 신경강장제

럼 다시 돋아나 인사를 했다. 어찌나 신통하고 고맙던지. 내겐 반환점의

에다 항암작용이 탁월한 베타글루칸과 셀레늄 등이 바로 그 갓에 숨어있다

지표를 되찾은 기적이자 행운이었다. 그런 연유 끝에 비로소 한숨 돌리게

니까. 그런데 저 산느타리는 갓 끝이 마치 너풀너풀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

된 스토리다.

은 듯하니, 진가가 보증되는 최상품이다.

상황버섯보다 더 값져 일명 불로초인 영지버섯 얘기다. 도서관 가는 길

긴 나뭇가지를 장대삼아 맨 아래 달린 버섯뭉치를 떨어뜨렸다. 장대가

가 가로수들이 참나무다. 여름이었는데 나무 밑에 영지 비슷한 것들이 여

내 키보다 길고 무겁다보니 힘이 곱 배기로 든다. 그 옛날 여름방학숙제

기저기 뒹군다.‘설마 귀한 영지가 이리 흔하고 쉽게 눈에 띌 리가 없지’

하느라 매미채 휘두를 때랑 천양지차(天壤之差)다. 그 위엣 것은 까치발로

하면서도 미심쩍어 보고 또 봤다. 분명 오래전 비싼 돈 주고 샀던 영지모양

기를 써서야 겨우 장대 끝이 버섯에 닿아 간신히 땄다. 더 위에 버섯은, 큰

에다, 똑같이 거북의 등껍질처럼 반짝이니까. 그렇지만 한국에선 약용으로

돌멩이를 놓고 디딤돌 삼아 펄쩍 펄쩍 뛰어 오르며 장대로 쳐야 닿을까 말

최고라며 귀족 대접받는 몸인데, 이렇게 사람들 발길에 채이고 개 오줌 세

까다. 꽤 여러 번 휘두른 시도 끝에 가까스로 일부만 뗐다. 맨 꼭대기는 별

례 받는 길가 그루터기에 막 널려 있겠나? 아마추어 눈으론 도저히 확신이

따기나 마찬가지라 깨끗이 기권했다. 되게 식용버섯만 밝히는 개미와 달팽

안 서 그냥 발길을 돌렸다..

이 밥으로 남겨둘 밖에.

영지와 비슷해 보이나, 약용커녕 식용가치조차 없는 아까시재목버섯 이

그래도 갓들의 드레스주름이 얼마나 풍성한지, 산행 팀 5명의 한 끼 보양

려니 했다. 그런데 버섯 책에 찾아보니 영지는 원래가 나무 등걸이 아니고,

식은 됐다. 모두들 저녁메뉴로 살짝 데쳐 초고추장에 무치거나 살짝 볶아

여름철 활엽수뿌리 밑동이나 그루터기에 생겨난다고 했다. 또 소나무영지

먹을 테니, 흐뭇하고 기분 좋다. 발걸음에 절로 콧노래가 실릴 만큼.

와 달리 참나무 영지는 붉단다.

그랬는데 즐거웠던‘버섯따기운동’의 나비효과가 엉뚱한데서 나타났

도서관 가는 길, 다시 참나무 밑의 영지들을 관찰했다. 역시 붉다. 그럼

다. 다음날, 서있는 자세에서 무심코 90도정도 뒤돌아보는 순간, 허리 속의

이게 다 영지가 맞는 건가? 참말로 헷갈리게도‘나 영지예요!’하고 속삭

뼈가 5cm정도 옆으로‘삑’하는 느낌이 왔다. 단지 그것뿐이었는데, 허리

이는 듯싶다. 잠시 또 갈등이 일었다. 아무리 그래도 영지라 부르기 민망할

를 펼 수도 걸을 수도 없고, 누워서는 돌아눕지도 못하겠다. 허리에 살짝만

정도로 지저분한 몰골이라, 끝내 그냥 돌아섰다. 만약 쓰레기장에서 핀 꽃

힘이 들어가도 비명이 절로 나올 정도니, 증세가 자못 심각했다.

이 장미였다 해도, 예쁘다며 코를 박고 향기를 맡게 되진 않을 터. 206

l 뉴욕문학 제29집

그제야‘무면허 주치의’인 내게도 감이 왔다. 어제 안 쓰던 허리근육을

수필 · 방인숙

l

207


무리해서 늘리고 곧추세웠다. 더해서 힘에 부치는 장대까지 막 휘둘러댔

그와나

다. 아무래도 그 여진 탓이 주원인(主原因)이겠다. 결국 소염제론 어림없 어, 한약 먹고 침까지 맞으며 무려 한 달 반이나 고생했다. 영영 원상복귀

소 병 임

안 될까봐, 고질병으로 굳을까봐 꽤나 겁먹었던‘버섯사태투병기(?)’다. 코앞에 일어날 일도 모르고 생고생을 자초한 버섯소동을 반추해봤다. 욕 심에 휘둘려 분수를 모르고 불나방마냥 설쳐댔다. 매사에 과욕은 절대 금 물인 나이와 몸의 실상을, 하얗게 망각했다. 나 자신에 대한 미련스런 착각

밤 사이 도둑 눈이 내렸다. 부엌창살에 배배꼬인 담쟁이 덩쿨에 작은 참

이자 오만이었다. 여직 내가 그토록 대책 없는 욕심쟁이란 산 증거였다. 수

새 한쌍이 앉아 부엌을 기웃 거리며 무어라 지꺼리다 날아간다. 앉았던 가

양부족으로 욕심을 이기는 게 아직도 요원한 사실이 부끄럽다. 머리론 수

지위에 하얀눈이 솜덩이처럼 소르르 떨어진다. 남편이 그 장면을 보고 빙

긍해도, 막상 욕심과 마주한 순간엔, 통제력상실로 멈추지 못한다. 완전‘

긋이 웃는다. 자유스런 몸짓으로 그들이 허공을 가르며 높이 날으는 순간

욕심조절불능’의 중증이다.

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의 얼굴 방향은 새들이 날아간 뒤에도 바뀌지 않

이번 일로 톡톡히 수업료를 지불한 대신, 앞으론 욕심이 솟구치는 순간

는다.

에도 제발 제어되면 좋겠다. 움트려는 욕심의 싹도 감자 싹처럼 독이다. 감

썰물처럼 아이들이 빠져나간 아침. 우리 시니어 두 사람은 부엌에 있는

자의 싹 부분을 도려내듯, 아예 내 욕심의 싹도 싸악 도려낼 수 있으면 좋

작은 식탁에 마주앉았다. 나에게 이 시간은 새벽부터 움직이던 두 다리를

을 텐데...

쉬게하고 오늘 조간신문을 둘이서 펼쳐든다. 시력이 약한 나와 남편은 커

쏘크라테스가 그랬던가.‘자신을 이기면 모든 걸 다 이긴다.’고. 그런데 나는 여태도 그게 안 된다.‘가야할 길’이 너무도 멀다.

다란 활자로 된 타이틀만 우선 훑어보고 신문을 접는다. 다음엔 우리 두 사람의 식사가 준비된다. 아이들 점심으로 김밥을 말아 싸 주면서 여분으로 김밥 두줄을 남겼다. 뽀얀 접시에 맛깔스레 썰어 놓은 김밥 두줄, 남편이 좋아하는 나무젓가락,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일본된장(미소)국에 파란 파 몇 조각이 띄워져 깔끔 하게 국그릇에 담겨진다. 게다가 말갛게 보이는 나라즈께 (일본 장아찌) 몇 조각은 우리 둘 다 좋아하는 밑 반찬이다. 남편은“아침부터 웬 김밥?” 하면서 식사할 태세로 어줍게 의자를 앞으로 잡아 당긴다.

방 인 숙 1995 ; 뉴욕 라디오코리아 에세이 장원. 1996 ; 한국수필로 등단. 1999 ;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 가작. 2003 ; 재외동포 문학상 대상. 2004 : 한국무역협회 해외동포 수필공모 최우수상. 2011 : 경희해외동포문학상 입상 작품집 : 2009 : 뉴욕의 미루나무 길을 달리며 한국 문인 협회 회원. 미 동부 한인 문인 협회 회원. 미주 한국 문인 협회 회원. insookbang@gmail.com

208

l 뉴욕문학 제29집

그리고 김밥 한 개를 젓가락으로 힘겹게 집어 올리다 젓가락이 틀어지는 바람에 바닦으로 떨어졌다.남편은 계면쩍게 웃으며“내가 말뚝남편이 돼 버렸군!”하며 나를 바라 보았다. 지금부터 십 여년 전 이른 아침 이었다. 멀정했던 다리에 힘이 빠진다며 주저 앉아 움직이지 못했다. 당황한 식구들이 도움을 주었지만 남편에게는

수필 · 소병임

l

209


별 도움이 못 되었고 혼자만의 힘으로는 여타의 거동이 점점 어려워지게

내 공간

되었다. 그후 2개월 여의 병원입원은 끝났지만 잦은 병원 통원치료, 담당 의사의 철저한 처방약의 투여, 음식조절, 보험사에서 파견된 간호사의 도

소 병 임

움 이런 환경들이 그나마 지금의 그를 만들 수 있었던 조건이 된 것이다. 그가 사회생활 했던 과거 60년대나 70년대의 사회문화는 술과 담배는 떨어질 수 없는 무대였다. 그렇게 오랜 찌든 생활의 축적된 결과물이 뇌졸 증 이라는 오늘의 현실로 자리 매김 된것이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고전음

아파트에 작은 공간.

악감상, 또는 고전 서적을 좋아한다. 앉으면 듣거나 읽는다 그럴때마다 운

공간이라 하기에는 어설픈 말이다. 국어 사전에 공간이란, 시간과 더불

동 좀 하라는 내 잔소리가 계속되곤 한다. 어느날 내게 이런글을 슬며시 내밀고 윌체어를 밀며 걷기운동을 시작했 다.

어 물체계(物體界)를 이루는 기초형식이라 했다. 어찌됐건, 우리 여러식구 가 부대끼며 살아가는 곳이다. 이런 곳에 특별히 내가 원고지를 펼쳐 놓을 수 있는 흔히 말하는 나를 위한 공간은 물론 없다.

송곳같이 찔러대는 아내의 잔소리, 굴비두름처럼 주엄주엄 엮어 메고,

때때로 문득 떠 오르는 문장이나 단어가 생각나면 메모지를 들고 내가

곤두박질 치듯 문밖을 나서니, 지고나온 아내의 지청구는, 가벼운 깃털이

편하다고 생각 되는 장소에 앉는다. 그곳이 내가 생각하는 내 공간이기 때

었네, 마음을 비우고 하늘을 보니, 구름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름질하네,

문이다. 어떤 때는 부엌식탁에, 또 어떤때는 거실 찻상앞에 앉아 쓰기도 한

아서라, 서운타 하지말자, 아내와 나는 저 떠 다니는 한 덩이 구름, 우리들

다. 하지만 그것도 만만한 자리는 아니다. 이층에서 몸이 불편한 아이들 할

도 삶의 한 조각인것을.....

아버지가“여보”하고 불러대면, 펜과 쓰던 원고지를 들고 이층으로 올라

난 고런 남편을 바라보며 박완서씨의 어떤 수필의 끝자락이 생각났다. “나를 어머니처럼 느꼈고, 그를 생전 어른이 될 가망이 없는 어린애 처럼 느꼈고, 그런 느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그 글은 나를 향한 말처럼 내 마음에 와 닿는다. 오늘도 아침식사 후엔 그를 향해 운동이란 단어를 수 없이 내 뱉어야 하겠지.....!

간다. 그리고 방 한쪽에 자리잡고 그가 원하는 것을 도와 주기도한다. 그 사람 보다는 내가 좀 건강하니까, 하는 생각에서다. 남편은 십 여년 전 고혈압과 당(糖)이 심하다는 의사의 진찰 결과를 받았 지만 의사의 지시 사항을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같은 생활이 계속되었다. 급기야는 술과 담배로 평생 안고 살아야하는 몸에 불편함을 얻어 감수 해

그는 젊었을 때의 당당함은 찾아볼 수 없다. 먹는 것, 입는 것, 출입하는

야만 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당이 심하여 시력이 약해지고,치아가 빨리 손

것 모두가 자기가 아닌 또 한사람의 손이 필요로 한다는 것이 마치 땅에 깊

상되어 소화력에 까지 치명타를 준다. 그로인해 남편이 하루 복용하는 약

이 박혀있는 말뚝처럼 느껴지는 모양이다.

의 숫자가 무려 십 여 가지나 된다. 모두 내 손이 가야 복용이 끝난다. 불 편한 자기몸이 뜻대로 움직여 지지 않을때 나를 부르는 남편은 미안해 하 는 마음의 표시는 빙긋이 웃는 모습으로 때운다.이런 환경에서도 글을 쓰 겠다고 버둥거리는 내가 때로는 웃긴다는 생각도 든다. 결혼해 새댁시절 일이다. 외출했다 돌아와 방에 들어선 나는 의야했다.

210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소병임

l

211


커다란 소파가 놓여 있었다. 사회생활하던 나를 배려하시고 침실에 편한

야기를 하고 싶어 쓰는 경우도 있다. 물론 어떤 삶의 의미를 꼭 찍어 부여

의자를 넣어 주시며 책 읽다 잠이오면 기대 앉아 편하게 쉬어라 하시며 시

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 다른 환경과 기대치의 무게가 있기 때문에 그 의미

할머님까지 모시고 사는 대 가족 속에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 주셨던 시아

부여는 또 다를수 있다. 고단한 삶, 희열을 느꼈던 삶이었기에 어느 한쪽에

버님의 아껴주심의 상징물이었다.

치우침 없이 적당히 잘 버무려진 비빔밥처럼 어우러진 삶이 되었으면 하는

그때는 왜 아버님, 감사합니다 하고 한마디 말씀도 못 드렸는지 후회가 되기도 한다.

마음에서다. 당장 고단한 삶이라 하지만 아마도 지금 살고있는 삶의 모두 가 내 자신과 타협한 내 공간이 아닐런지 .... !

그렇게 층층시하의 대 가족속에서 틈틈이 쓰여진 글들을 십여 년 전 책 으로 엮어 보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들춰보면 자신이 부끄러워 얼굴 이 붉어짐을 느끼게 한다. 수필가 박양근씨는 문학은 실존적 체험에서 나오거나, 글은 쓰는 것이 아 니고 디자인 즉 빌딩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나는 글을 쓰면서 새상을 바라보고 혹평을 하거나 질곡의 세상이라고 한 탄하고 불평을 늘어 놓치는 않는다. 그런 속에서도 가끔은 가슴이 찡하게 느껴지는 일이있어 보탬이 되기도한다. 잔잔하게 살아온 나의 삶의 이야기 를 바탕으로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서 수필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 이 읽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어찌보면 사사로운 이야기로 신변잡기로 읽혀 질런지 모르지만 7~8십 년대, 문학의 장르에서 당당하게 수필문학의 독립성을 부르짖던 수필가 박 연구씨는‘모든 생활속에 문학(수필)이 산재되어 있다는 사실에 고마음을 느낀다’고 했듯이 그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삶의 버팀목이된 남편, 그밑에 아이들의 순탄한 성장과 각자 자기들의 패턴으로 독립된 삶 속에서 정의롭게 살아가는 그들 하나하나가 수필의 소 중한 소재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쓴다는 것은 기출(己出)하기 위해서다 라 고 말한다. 기출, 즉 자신의 문학적 신기를 내 뿜는다고나 할까? 다시 말해서 삶에

소 병 임 전 중, 고등학교 교사

그림을 그리고 그속에 인간의 향기를 불어 넣어주는 그런 글을 쓰는 것이

미 동부 문인협회 회원 (수필부)

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생각을 하고 또 내 아이들이, 아니면 내가

월간 한국수필 등단

알고 있는 모든 이들이 살아가는데 올곧은 목표를 바라보게 하기 위한 이

한국 창조문학지 등단 작품집 "지금 어떻게 지내니" 공저; 한국수필 97인선 " 천년숲 서정에 홀리다" sohbn234@gmail.com

212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소병임

l

213


맏며느리인 내게 온화한 모습으로 버팀목이 되어 주시던 어머님, 96세의

프레임 속 여백에 시공을 담고

고령의 몸을 휠체어에 의지하고 너싱홈에서 생활하신지도 여러 해가 되었 다. 당시 함께 오셨던 시아버님은 한국서 배로 부친 이민 짐이 3개월 만에

양 정 숙

뉴욕에 도착하자, 자식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홀로 한국으로 가셨 다. 그리고 뜻밖에‘판코스트 종양’이란 희귀병을 앓아 의사인 셋째아들 곁에서 오랜 투병생활을 하시다 생을 마감하셨다.

누군가 굵직한 붓 터치로 그려놓은 것 같은 구름형상들이 살갑기만 하다.

여섯 형제의 맏인 남편은 아버님을 떠올릴 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지곤 한

뒤뜰 노송도 길쭉한 솔방울을 매달고 묵언수행중인 오후, 분신 같은 그림

다. 몇 해 전 아버님의 유골을 뉴욕으로 모셔와 가까운 묘지에 안치했다.

자와 함께 9월 보도위로 들어섰다.

남편과 오고가는 길에 잠시 들러 인사도 드리고 때론 연륜 깊은 묵언의 말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가 뭍으로 나와 휘익 몸 한번 휘둘러 낸 것 같은 S 자 모양의 길 위엔 우람진 나무들이 일렬로 서서 여백의 길을 안내하고 있 다. 마치 유예된 시간들을 불러 내 듯, 어디선가 정적 깃든 보도위로 카디 날의 청아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씀에 귀도 기우려보곤 한다.“삶이란 천지가 읊은 한 옛 이야기 소란하고 복잡하지만 그 속엔 아무것도 없다.”는 구절이 문득 스쳐 지나간다. 20여년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롱아일랜드 집을 정리하고 이곳 베이테레 스(Bay Terrace)로 옮겨와 남편과 단출하게 살고 있다. 휘영청 밝은 보름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뉴욕에 첫발을 내디딘 지도 37년이란

달이 떠있는 한가위가 열흘 앞으로 다가온다. 가로수마다 감나무가 심어

시간이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최선

져있는 고향 영동엔 지금쯤 튼실한 감들이 가을정취를 자아내며 붉게 다

을 다하고 나서 하늘의 명만을 기다린다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

투어 물들어 가겠지.

란 겸허한 구절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때론‘아메리칸 드림’이란 명분을

어느 핸가 가게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차안에서 유난히 크고 붉은 빛

앞세워 릴레이 경기에 나선 사람마냥 배턴터치하기 바쁘게 지내온 것 같

을 띤 보름달과 마주했다. 순간 뭉클하게 전신을 휘감아오던 그리움, 울컥

기도 하다.

북받쳐 오르는 자신을 토닥이며 집으로 향한 적이 있다. 의료사고로 예기

어떻게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하는 디아스포라의 삶은 종종 빗나간 화살처럼 따라와 주지 않았다. 한동안 진지한 물음이 계

치 않은 죽음을 맞이한 젊은 엄마의 얼굴이 환영처럼 보름달 속에서 빙긋 이 나를 보고 미소 짓고 있었다.

속되던 어느 날, 나는 병원에 취업하려던 간호사의 길을 접고 장사의 길로

“장인을 닮아 선비적인 구석이 있는 반면 이상하게도 외로움을 잘 탄

들어섰다. 두 곳의 가게를 운영하며 존재마저 잊고 살았던 오체투지와도

다.”는 말을 남편으로부터 들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외로움이 깃든 시

같은 삶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기, 아마도 짝사랑처럼 품어왔던 문학이 내게 태동할 즈음이 아니었나 생

언젠가 딸의 페이스북에서“나의 어릴 적 기억엔 엄마는 늘 부재중”이

각이 든다.

라는 글을 들여다 본 순간, 가슴 한편이 뭉클해져 온 적이 있다. 생업에 종

틈틈이 도서관을 드나들며 문학 서적에 몰입했던 시간들, 오가는 길에 필

사하느라 늘 바쁘게 살아야만 했던 엄마. 40이 다 된 딸아이의 기억 속엔

연처럼 만난 벗들, 나란히 앉아 시문학공부에 혼신의 힘을 기우리던 소녀

아직도 엄마의 부재를 간직하고 있다.

같은 감성을 지닌 문우들과의 설레고 달콤했던 시간들, 스미고 싶으면 스

214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양정숙

l

215


스로 물이 되라 하시며 문학의 길로 디딤돌을 놓아주신 K시인, 시도 때도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없이 불현듯 누군가 그리워질 땐 자주 올려다 본 밤하늘의 달과 별, 고국과 8만 리 상거相距를 두고 있는 이곳 뉴욕에서 처음만난 벗으로부터 시작하

양 정 숙

여 나와 인연이 되었던 선한사람들, 모두 잘 지내고 계시는지. 타임머신을 타고 시공을 가르는 과거로의 여행을 하듯, 선명히 펼쳐지는 지난 상황들이 애틋하고 그립고 그립다.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시간처럼 광속으로 달려갈 미래에게 나는 비손이 되어 길을 묻는다.

열흘 붉은 꽃 없다. 소멸하지 않고 피는 꽃도 있을까, 허공 꽃이 아닌 산

내게 문학은 시공을 초월한 그리움의 연서와도 같다. 아픔까지도 관조하

사람의 가슴에 오래토록 기억될 불씨 같은 기氣로 피어나는 꽃. 누구에게

듯 써내려 가야하는 수필은 어머니 품속 같은 무한한 사랑과 사유 깊은 인

나 죽음은‘낯섦’으로 다가온다. 모든 종교의 목적은 죽음에 대한 구원

내가 깃든 몸말 같은 행위인지도 모른다. 겸허한 마음으로 한민족의 얼과

이 아닐까, 유한인 삶을 부여받은 인간은 생명의 기원인 별의 먼지에서 태

같은 유려한 한글 벗 삼아 수필처럼 살다가길 염원해본다.

어났다. 소멸의 때는 알 수 없지만 죽음이란 명징한 진실이 공식처럼 자 리하고 있다. 뫼비우스의 띠 같은 안과 밖의 구별이 없는 삶과 죽음의 공 존은 끊임없이 순환을 반복하는 우주와 같은 시간의 궤도를 밟고 있는지 도 모른다. 어릴 적 할아버지를 따라다녔던 조선시대향교鄕校가 집 가까이 위치해 있었다. 조부께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실 때까지 또래 아이들과 은행나무 아래서 소꿉장난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멜빵바지에 짧게 단발한 흑백사진 속 아이는 영락없는 남자아이로 기억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유교적 전통을 중시했던 조부께서는 무엇보다 조상의 제사를 중히 여겼다. 유교의 죽음은 제사의식을 통해 자손과의 감응으로 이어지는 끈 같은 파장의 기氣로서 생명의 연속성을 갖는다고 한다. 장남으로 종가宗 家의 살림을 꾸려온 친정 부모님은 4대 봉사는 물론, 아들이 없는 외갓집

제사까지 정성껏 지내주셨다. 이틀 전 남편과 너싱홈에 계신 시어머님을 찾아뵈었다. 어머니의 첫마디 가 “어젯밤 꿈에 아버지가 돈을 주면서 제사음식비로 쓰라고 하셨다.”라 고 하신다. 나도 모르게 뭉클한 마음에 어머니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백 수(99세)를 바라보는 시어머니께서는 돈독한 불교신자이셨다. 여든이 되시 216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양정숙

l

217


던 해에 어머니는 기독교로 전향을 하였다. 80평생 지내왔던 제사를 멈추

다. 살아 있을 때에는 그대들 생존해 있으므로, 죽었을 때에는 그대들 벌써

신 어머니는 종가맏며느리로써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 잠재의식을 치매를

이 세상에 없음으로, 아무도 그 마지막 때가 되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 그

앓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간직하고 사셨던 것 같다. 자고 일어나면

대가 남겨놓고 가는 시간은 그대가 출생하기 전의 시간과 마찬가지로 본래

누군가 보이지 않는다는, 피고 지는 꽃 같은 소멸을 예감하시는 어머니, 화

그대의 것이 아니었다. 그 둘 다 그대의 것이 아니다.”

양연화花樣年華 같은 시절도 다 무無가 되는 죽음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보름간의 일정으로‘인도와 네팔’을 다녀왔다. 어머니젖가슴 같은 지 형을 갖고 있는 인도는 세계 4대문명인 인더스문명을 발상시킨 곳이기도 하다. 인도종교의 85%가 불교보다는 윤회를 믿는 힌두교가 지배하고 있 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신을 믿고 숭배하는 그들은 엄격한 신분제도인 카스트(cast)제도로 상층계급인 브라만(승려)에서부터, 계급조 차 갖지 못한 하층인‘불가촉천민’의 사람들로 운명에 순종하며 살고 있 다. 영혼이 육체와 함께 업業에 의하여 다른 생을 받아 끈임 없이 생사를 반복한다는 윤회는 무한인 신의 시간으로 내딛는 그들만의 영혼불멸의 시 간이기도하다. 바라나시엔‘어머니의 강’이라고 불리는 성스러운‘갠지스 강’이 있 다. 갠지스 강가 주변 화장터인 가트에는 수천 년 동안 꺼지지 않은 불씨로 장작에 불을 지펴 시체를 화장한 후 갠지스 강에다 재를 뿌린다. 저녁엔 힌 두교가 생긴 이래 단 하루도 멈춘 적이 없다는 아르띠 뿌자(Arti Pooja)의 식이 치러지고, 배를 타고 강가로 나가 꽃불접시 디아(dia)에 불을 붙여 소 원을 빌고 갠지스 강으로 띄워 보내는 사람들, 모든 종교의 근본은 같다. 수 천년동안 지켜온 종교문화를 위로와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모 독이라는 가이드 아들스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나마스떼!”- 내 안

양 정 숙 충북 출생, 전직개업조산원

의 신神이 당신에게 경의敬意를 표합니다. 두 손을 모으고 밝은 모습으로

2003년<문예운동>수필등단

인사를 하는 그들을 뒤로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국제PEN한국본부뉴욕지역위원회 감사

한국문인협회, 국제PEN한국본부회원 미동부한인문인협회 부회장. 총무 재무역임 수필집<마음 밭에 뛰노는 빗소리>출간

“죽음은 그대가 살아 있을 때나 죽었을 때나 그대에게 관여하지 않는

제11회 원종린수필문학상 수상 jsyang279@gmail.com

218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양정숙

l

219


파타고니아 마라톤 양 주 희

언덕을 돌고 돌아도 반득한 길은 나오지 않고 달팽이 속으로 기어 들어가 는 느낌이다. 바람이 앞으로 불어 허리를 굽혀 걸으니 다리보다 허리가 아 프다. 드디어 내리막길이다. 내리막길은 달렸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언덕 과 내리막길. 어디쯤 왔을까 얼마를 더 가야하나 앞에 사람이 보인다. 조 금 힘을 내어 앞에 가는 사람을 만났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젊은 여자 다. 연습 부족으로 다리에 쥐가 나서 뛰지 못하고 걷고 있었다. 함께 걸으

마라톤 경주가 있는 날이다. 훌은 9시30분 하프는 10시30분 10k는 11시

니 힘이 생겼다. 걷다 뛰다를 반복하면서 또 앞에 가고 있는 사람이 보였

에 출발이다. 바람이 불고 춥다. 35-36도 될 것 같다. 200명이 신청했는

다. 내가 달려가 그 사람을 만났다. 조지아에서 온 젊은 아가씨다. 조금 몸

데 150명 되는 것 같다. 참가 번호표에 한국 국기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고

집이 컸다. 미국 사람들은 매사에 계획 적이다. 이 아가씨는 3명의 친구와

텍사스 어스틴에서 온 한국 청년이 아는 체를 한다. 반가웠다. 출발 신호와

같이 왔다. 세계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는 취미를 가

함께 춥고 바람 때문에 앞으로 총알 같이 나간다. 뒤에는 몇 명밖에 남지

졌다. 세계 큰 경기에는 거의 참석해서 아는 것이 많아 이야기 들으면서 몇

않았다. 그 몇 명 뒤에서 주최 측 버스가 우리를 보호하며 따라오고 있다.

마일은 쉽게 뛴 것 같았다. 또 보스턴에서 온 중년 남자를 만났다. 그 사람

흙과 돌이 섞여진 자연 도로다. 돌에 치여 넘어질까 봐 조심스럽고 한발 한

은 뛰면서 사진을 찍는 사진작가인 것 같다. 인사만하고 가는 곳곳 풍광이

발 뛸 때마다 먼지가 일어난다. 아무도 보이지 않고 반듯한 길만 내 앞에

멋있는 곳은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눈이 하얗게 쌓인 산속에서 눈을 밟으

놓여있다. 얼마를 왔는지 그냥 앞으로 나갈 뿐이다. 바람이 등 뒤에서 불

며 뛰는 맛도 일품이다.

어오면 좋겠는데 앞에서 세차게 부니 뛰는 자체가 2배 이상 힘들다. 토레

주최 측에서 7시간을 주었다. 그 안에는 들어가야 하는데 마음이 급하

스 강을 따라 간다. 세차게 부는 바람으로 파도가 일어나 나를 덮칠 것 같

다. 있는 힘을 다해서 뛰어 보지만 제자리에서 점프하는 느낌이다. 5km

은 무서움이 들었다. 그 높은 산중에도 새소리가 들리고 가끔은 토레스 강

싸인 이 보인다. 거의 다 온 것 같은 기분이다. 힘이 거의 빠져 무척 힘들

물이 바람 부는 속도에 따라 머리카락 풀어 놓고 다니는 사람 모양 파도가

다. 어느새 내 뒤에는 주최 측 버스가 에스코트한다. 행여나 어떻게 될까

출렁인다. 그 깊은 산속에 차하나 사람하나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새롭고

봐 아니면 길을 안내하는지 모르겠지만 많은 배려가 고맙다. 이 대회에 훌

신비한 곳이 있을까. 양쪽 산봉우리에는 하얀 눈이 쌓였고 산 밑에는 봄여

은 200명 하프는 400명 10k는 100이 참가 했다. 참가자 중에 우승자는

름 가을 겨울 표시가 있는 것 같다. 오늘 날씨도 아침은 안개가 끼어 어둑

단상에 올라 메달 수여식이 열리고 있었다. 나도 박수를 받으며 종점에 발

했고 햇볕이 나더니 바람이 불고 한 방울씩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몹시 춥

을 찧었다. 시간을 보니 7시간 1분. 정말 기뿐 순간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다. 하루에도 변덕이 심하다.

최대의 힘을 발휘했다. 감격을 만끽하고 있는데 메달을 걸어주고 같이 며

나에게 지금까지 지나온 세월의 굴곡만큼 아무도 없는 길을 터벅터벅 걸

칠 동안 지냈던 사람들이 환호해 주었다. 모든 경기에서 1등은 굉장히 어렵

어온 삶의 여정을 말해 주는 것 같다. 반쯤 달렸을까 길이 아스팔트로 바

다 하지만 꼴등은 더 어렵다. 시작부터 뒤쳐져 76세 백인 남자와 나는 힘

뀌어 졌다. 굴곡진 언덕을 오르는데 45도 경사는 되는 것 같다. 다리가 후

들게 시작했다. 다 떠나버린 길 한복판에서 뒤쫓아 가는 어린아이처럼 묵

들거린다. 바람도 앞에서 세게 분다. 언덕을 오를수록 바람이 더욱 세차고

묵히 달렸다. 그래도 4사람 따돌리고 꼴지는 면했다. 꼴지에게 이득도 있

220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양주희

l

221


었다. 시상대를 독차지 하면서 사진을 찍고 주최 측 웹페이지에 얼굴을 장 식하는 영광도 있었다.

짜깁기 인생 양 주 희

손님이 아주 오래된 양복 상의를 가져 왔다. 좀이 먹어 구멍이 났다. 짜 깁기를 해야 된다고 시무룩한 얼굴 표정이다. 지금은 짜깁기하는 사람이 없으니 가지고 가라고 했다. 손님은 놓고 가겠으니 알아봐 달라고 했다. 지 금 양복은 날씬하고 모양도 좋아 새로 구입 했으면 좋겠는데 굳이 짜깁기 를 해달라고 하는 것은 좀 지나친 올드 생각이 아닐까 의문을 던졌다. 아 마 값도 비싸 새 옷이 저렴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손님은 그 옷이 꼭 필 요하다고 하니 어쩌겠는가. 짜깁기는 바짓단이나 허리춤에서 천을 오려내 어 구멍 난 부분을 날실과 씨실로 엮어 원단을 재생하는 작업이다. 요즘은 짜깁기해서 입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 손님 때문에 짜깁기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불과 얼마 전까 지만 해도 조문이라면 동년배의 부모였고 결혼식은 동년배의 자녀 혼사였 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동년배 장례식에 참석하는 기회가 늘어났다. 평균 수명이 길어졌다고 하지만 이승을 하직하는 사람이 하나 둘씩 생겨난다. 장례식장에서 고인의 얘기를 나누다 순탄하게 살다 가는 사람이 드물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겉보기에는 성공한 사람이요 부족한 게 없을 것 같았는 데 갖가지 상처로 아프고 애태우며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위로해 주지 못한 걸 후회하기도 한다. 살다가 어려움이 있고 마음에 들지 않은 일이 생 겨도 현재 가진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 각으로 부족한 부분을 조금씩 개선해 나가는 짜깁기 인생을 살다 보면 희 망이 생겨나게 된다. 인생의 좌우를 균형 있게 다스려 인연을 잘 갈고 닦으 며 사랑과 용서의 실을 튼실하게 하고 베풂과 배려의 끈을 잘 여며서 두루 화목을 도모하면 좋겠다. 씨실과 날실을 잘 엮어 인생의 흠집을 짜깁기 한

222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양주희

l

223


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잘 산 사람일 것이다. 이렇게 잘 산 사람을 가리켜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이거나 흔히 이름깨나 알려진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 하기 쉽다. 그러나 유심히 살펴보면 평범함 속에 진리가 있듯이 평범한 사

공포증 (-PHOBIA,- PHOBIC, - PHOBE) 잔치

람들의 씨줄과 날줄이 더 곱고 알차고 견고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어느 교인의 장례식에서 젊은 목사님의 말씀이었다. 인간은 태어 날 때

-다시 영어로 돌아와서

는 가족이 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그러나 눈을 감을 때는 혼자인 사 람도 있다. 목사님께서 그 사람의 아들 딸 친구에게 연락을 누차 했는데도

연 봉 원

장례식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문득 훗날 뒷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평가할까 싶어 조심스럽다. 마음에 남은 인생을 내 역량 안에서 최선을 다 해 살아야 한다는 다짐을 해본다. 하는데 까지 하다가 내 힘으로 부족한 것 내가 못하는 일은 남에게 도움을 받으면 된다. 내게 도움을 준 사람에게 나 도 다른 방법으로 갚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혼자 사는 게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남편이 없는 것보다 마음 터놓 을 친구가 없는 게 더 견디기 어렵다며 오래 사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 라고 했다. 친구들과 푼푼하게 정을 나눌 기회를 많이 만들고 이웃과 정담 하며 지내려고 노력해야 갰다.

영어 만큼 공포증, 기피증을 나타내는 -PHOBIA가 발달한 언어가 없다 이 방면 연구에 자타가 인정한 언어학자 Charles Harrington Elster의 최 신 발표에 의하면 약 600개를 찾아냈는데, 광산 개발처럼 계속해서 발굴 하는 중이라고 한다. -PHOBIA는 Greek 의 φόβος (phobos)에서 유래한 어미(語尾)로써 본래 뜻은“공포심”을 의미하는 접미사(接尾辭)다. 의미가 광범위해지면서 공 포 뿐만 아니라, 비정상, 심리, 의학, 정신학으로 까지 쓰게 되었다. 현재 발견한 600개 중에서 독특한 심리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 몇개를 골라보자. agoraphobe는 공공장소나 넓은 공간에 나서기를 무서워하는 사람이다. 옛날 그리스의 아테네에 Agora 라는 오늘날 영국의 London에 있는 Hyde Park 처럼 아무나 연설을 할 수 있는 광장이 있었다. 이런 곳에 죽어라고 가기 싫어 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런 사람은 혼자 극장이나 백 화점에도 못간다.“공황장애”도 이런 증상의 일종이다. 그러가 하면 집에

양주희 1975년 이민. 1998년 『한국 수필』 등단. 길벗 문학동인.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미주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뉴욕 중앙일보 오피니언 칼럼니스트 저서: '세상에 던진 그물', '그대 숲속을 거니는가', '솟아 나누는 샘물'. jooheeyang9@yahoo.com

혼자 있는 것을 죽기보다 더 무서워 하는 oikosphobe도 있다. 이런 사람은 하루종일 하릴없이 집 밖으로 쏘다녀야만한다. 저녁에 할 수 없이 집으로 가야 하면 집을 창살 없는 감옥으로 생각한다. 한편 비행기고 놀이동산이 고 높은 곳이라면 까무러치는“고소공포증”환자를 일컫는 acrophobe도 있다. 이번 평양에서 하노이까지 비행기로 4시간 걸리는 거리를 근 70- 시

224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연봉원 l

225


간 기차로 왕복을 한 김정은도 고소공포증 환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 아

하는데 이 단어를 분석해 보면 tris는 3을 나타내고 kai 는 and 라는 뜻이

버지 김정일도 20여일이 걸려 러시아를 기차로 갔으니, 고소공포증도 유

고 deka는 10을 그리고 phobia는 공포증을 나타내는 접미사다.

전을 하나?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런가 하면 공부를 죽기보다 더 싫어하

지하철 타는 것을 죽기 보다 싫어 하는 사람은 bathysiderodromapho-

는 sofophobe도 있다. 이런 사람은 책만 보면 머리가 띵해지고 울렁증이

bia 라고 하는데 이 단어도 잘라서 분석해 보면 bathy는 헬라어로“깊숙한

생기는 사람이다. 드라큘라처럼 십자가만 보면 기절하는 staurophobia도

곳”을 의미하고 sidero는“강철”을, dromo는“길”을 의미하고 phobia

있다. 이런 사람은 교회 근처에도 못간다.

는 공포증을 의미하는 헬라어 접미사다.

여러분은 amomaxiaphobia란 말을 들어 보신 적이 있는가? 이런 사람 은 카 섹스를 절대로 못한다.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이나 특히 서양에서

기이한 단어는 philophobe“남에게 흠뻑 반할가 봐”무서워서 전전긍

진가를 발휘하는 pentheraphobia 란 말이 있다. 이런 사람은 장모님이라

긍 하는 사람이고, euphbia는“좋은 소식 기피증 환자”란 뜻이니 믿을 수

면 10리는 도망가는“장모 공포증”이 있는 사람을 말한다. 어느 코메디

있겠는가? metrophobia는 시(詩) 라면 질겁을 하는 사람 보고 하는 말이

프로에 행길에 나가서 아무나 붙잡고“우리 장모님이 돌아가셨어요. 축하

고, chorophobe는 댄스라면 10리는 도망가는 사람을 부르는 말이다

해 주세요”하는 사람이다. 그런가 하면“장인 공포증”환자는 novercaphobia 라고 부른다. 한수 더 뜨는 말로 syngenesophobia 란 말도 있다.

보통 사람은 믿을 수 없는 단어도 있으니 venustaphobia는 미인을 죽

이른바“친족 공포증”환자로 친척이라면 촌수를 따지고 말고 할 필요도

어라고 싫어하는 사람 보고 하는 말이고, chrematophobia는“돈”을 아

없이 무조건 싫어 하는 사람이다.

주 싫어 하는 사람을 보고 하는 말이니 참, 세상에 기묘한 일도 많이 있다.

eremophobe는 혼자 절대로 못 있는 사람이다. 하다못해 강아지라도 옆 에 있어야 안심하는 사람이다. automysophobia 는 지나친“결벽증 환 자”보고 말한다. 손이나 발, 심지어 옷에 실오라기 하나가 묻어도 신경질 을 내는 사람이다. 여자에게 많은지 몰라도 수염있는 사람만 보면 10리는 도망가는 사람 보 고 pogonophobe 라고 한다. 수염은 고사하고 털 한오라기도 못 참는 사람 은 pteronophobe 라고 한다. 창녀라면 기겁을 하는 사람은 cypridophobe 라고 부른다. 그런가 하면 금요일이 한 달 중 13일과 겹칠때는 겁이나서 방문을 나가지 못하는 사람보 고는 triskaidecaphobia 라고 부른다. 예수님을 포함해 13번째 자리에 앉 은 사람이“가롯 유다”란 설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날이 금요일이

연 봉 원 서울대 문리대, 브라질 상파울로 FMU 법대졸. Boston University, Law School 졸. 1983-1998 브라질 변호사. 2000-현재 뉴욕 변호사. 브라질 "열대 문화" 동인. 2012년 한국일보 문예 공모전 생활수기 부분 당선. yeonbw@hotmail.com

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물론 모든 -phobia는 헬라어(그리스어) 에서 유래 226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연봉원 l

227


반려견 이 경 숙

샤워 후 타올로 온몸을 닦는다. 그렇게 하라고 가만히 서 있고 심지어 자 기 몸을 내 다리에 은근히 기대며 접촉의 정을 쌓는다. 몸을 말린 후, 향기 좋은 크린징 타올로 몸 구석구석을 닦고 쓸어 내준다. 개는 허연 배를 드러 내며 발랑 누워 모든 방어기제를 해체하고 엄마와 아기의 까꿍놀이를 즐긴 다.“아유, 귀여워.”를 연발하며 부비고 쓰다듬고 꼭 끌어안는다. 개는 입

“작은 아들, 작은 아들, 작은 아들.”속수무책이 되는 아들의 전화는 언

을 벌리며 내 손을 물었다 놓으며 애정을 뿜어낸다. 아기였던 아들이 목욕

제나 설렌다. 키우는 개를 주말에 돌봐 달란다. 수시로 있는 일이다. 아들

후 말간 모습으로 바둥대며 누워 있는 듯 하여 못내 일어서질 못한다. 개

얼굴도 볼 수 있으니 거절할 이유는 없다. 단지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사료보다 더 좋아하는 소고기를 구우면 다소곳하게 앉아있다.”, 스테이,하

가진 지 몇 달이 되지 않았고, 게다가 아파트에 살면서 덜컥 큰 개를 입양

이파이브.”말을 알아듣고 하는 양이 부모의 금지의 목소리를 그대로 복종

한 것이 나로서는 마뜩잖다. 동물 애호가 여친의 입김이 입양센터 나들이

하는 듯 하여 뿌듯하게 미소를 날린다.

로 이어져 마음에 든 개를 품은 거다. 출근 시 데이케어 센터에 맡기고 퇴 근하며 데려온다. 직장을 가진 아이 엄마의 하루 스케쥴이다. 첫 사회생활

아들이 개의 새 보호자를 찾는다. 유기견 센터를 거쳐 온 아들 개는 이미

적응과 그에 따른 많은 변수등에 익숙해지고 난 뒤, 보호자가 되었더라면

버려짐에 의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어 아들은 무던히도 안정을 찾아 주려고

하는 나의 바램은 이미 비켜나 있다.

수의사에게 데려가 멘탈 약도 먹이며 사랑을 주었다. 하지만 직장을 가진 아들은 많은 시간을 같이 있을 수 없다. 결국 넉넉해 보이고 이미 개 한마

작은 개는 산책이나 목욕이 쉬울 게다. 아들 개는 세인트 버나드다. 생후

리가 있는 백인 중년 여성에게 개를 보낸다. 누군가가 옆에 하루종일 같이

10개월인데 이미 큰 개다. 아들은 큰 개가 좋단다. 그래도 그렇지…아파트

있는 것은 마음의 안정에 큰 도움이 된다. 애써 가벼운 마음으로 개를 보

에 살면서… 나와는 달리 큰 개 사육이 가능한 아파트이긴 하다. 산책을 할

낸다. 보내기 전 2-3일 전부터 개는 설사를 한다. 불안을 설사로 좍좍 쏟

때 개가 흥미있는 곳으로 부지불식간에 내달으면 개 목줄에 의해 나는 낚

아내며 이별의 아픔을 그려 낸다.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서로 정이

시대에 휙 낚이듯 몸이 쏠려 넘어질 뻔하며 식겁한다. 또 목욕을 싫어하는

듬뿍 들어 한쪽 구석이 텅 빈 감정적 허기에 시달린다.

개를 먹이로써 욕조로 유인하는 것에 실패하면 그때부터는 낭패다. 개가 앞발을 버팅긴 채 뻗대기 시작하면 몸집이 큰 개를 욕조에 집어 넣는 건 씨

개를 보내며 개의 용품과 개 옷을 같이 보냈지만 썼던 타올, 매트등을 한

름판의 씨름꾼을 붙잡고 있는 느낌이다. 쓰다듬고 곁에 두려면 씻겨야 한

동안 버리질 못한다. 개가 누워있던 카페트에서 개의 털을 뽑아내며 개를

다. 일단 욕조에 들어가 따뜻한 물로 샤워를 시키면 얌전하다. 가끔 온몸을

그리워한다. 개와 걸었던 산책길을 걸으며 개의 이름을 부른다. 아들 개와

기를 쓰며 흔들어 내 몸까지 흠뻑 적시는 것으로 작은 복수를 하는 듯 하

같은 크기의 개를 보면 다가가 말을 걸게 된다. 아들 개와 같은 행동과 습

지만, 몸을 맡기고 있는 것이 기특해 그것으로 퉁친다. 아들의 만족해하는

관을 보이는 다른 개들이 이제야 눈 안으로 들어온다. 나한테만 한 짓이 아

모습을 보는 것도 개 샤워의 목적이 될라나.

니라 보통 개가 다하는 동작, 버릇임을 알게 되니 그리움을 삭이는 데 한결 도움이 된다. 입양된 새 주인 집을 한번은 가 보리라 벼른다. 그러면 개가

228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이경숙 l

229


있던 자리에 끈적하게 매여있는 마음의 끈을 놓을 수 있으려나. 어느 화창한 날, 그 새 주인이 허락한 날, 아들의 개였던 그 그리운 개를 보러 간다. 보자마자 그리움이 눈물로 쏟아진다. 알아보고 겅충겅충 달려

12월, 다 가지 않은달 이 경 애

든다. 입을 꺼억꺼억 벌려 내 손을 물며 매달리고 힘차게 꼬리를 흔든다. 발라당 자기 허연 배를 내놓고 잔디위에 눕는다. 함께 한 추억을 보여주고 있다. 내 손에 쥔 손수건을 킁킁한다. 그 냄새와 했던 것을 기억하는 것이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시작도 끝도 모르는 시간이 지나갑니다. 시간

몹시 뭉클하다. 재회의 기쁨은 과거의 시간을 선물한다. 산책의 승낙을 받

은 한 번도 그친적 없이 흐르는데 사람들이 그어놓은 시간의 경계에 12월

고 함께 걸으니 옛 생각이 나서 걷다가 다시 얼굴을 맞대고 걷기를 반복한

이 도착해 있습니다. 인디언의 어느 부족은 1년을 열 세달로 나누어 카운트

다. 그 새 주인의 집과 어느 정도 떨어진 잔디밭에 앉는다. 내 곁에 바짝 붙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12월을‘다 가지 않은 달’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어 있지만 개의 눈길은 새 주인 집 쪽으로 향해 있다. 개는 이미 그 새 주

순박하고 여유로운 그들은 나이도 우리보다 천천히 먹을 것 같습니다. 아

인의 개됨을 인지한다. 그저 쓰다듬으며 잘 지내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새

마존 밀림의 어느 부족은 나이를 모르고 사는 부족도 있다고 하는데, 우리

주인 집에 도착하니 개는 나를 한번 보더니 냉큼 같이 사는 다른 개에게 달

도 나이 세지말고 살아 볼까 하지만 세월은 정직하게 젖은 신작로에 우마

려간다. 투둑 뭔가 떨어지는 느낌이다. 뭐?…. 개가 나를 안 떨어지고 따

차 지나간 자국처럼 나이테라는 살아온 흔적들을 남깁니다.

라오기를 기대했나?

벗은 나무에 새소리 사라지고 채마밭도 차가운 빈 땅입니다. 향기롭던 여름, 풀잎에 맺히던 새벽 이슬방울꽃도 이제 하얀 서리꽃으로 바뀌어 피

돌아오는 길은 여전히 가슴 한쪽이 서걱거렸지만, 또아리를 틀고 있던 그

어내고 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방문 유리창에도 피어있던 허연 서리꽃을

리움의 커다란 타래가 한결 풀어진 느낌이다. 모든 감정적 경험은 반드시

호~오 불어 손가락으로 하나씩 지우던 내 유년의 겨울... 개골창에 팽팽하

겪고 넘어가야 하는 과정임을 알고 그런 감정들을 푸르르 치러 낸다. 개를

게 언 얼음을 밟아 쨍그렁 그 시원한 겨울을 부숴트리며 가던 어릴적 그 소

입양할 시는 적어도 개 평생을 함께 할 생각이 기본이 되어야 함을 확실히

리도 먼 추억으로 그리운 겨울입니다.

배운다. 첫눈에 반해 앞뒤 없이 휘몰아치는 사랑은 한번으로 충분히 족하 다. 오늘도 개와 산책했던 길을 걸으며 불러 본다.“샤일로-- ”

지나 온 한 해를 돌아보며 참 감사하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매일 다니는 그 복잡한 출퇴근 길에서, 억수로 내리던 어두운 빗길운전에서의 아찔한 사고위험에서, 예상치 못하게 폭설에 갇혀 꼼짝할 수 없었던 때에도 무사 히 헤쳐나올 수 있었던 일들… 등교한 아이의 선생님으로 부터 받는 가슴

이 경 숙 Blanton-Peale Institute 상담 대학원 졸. 미술학원과 유치원 원장 SAT 학원 카운슬러. 다수 유화 개인전과 단체전. lee236to@hotmail.com

철렁한 긴급전화, 건강 검진에서 통보받은 질병의 유, 무 등, 온 가족이 한 해를 무사히 살아냈다는 것은 어찌 우리의 힘만이었겠냐는 생각이 듭니다. 우툴두툴 거친 소나무 등을 오르던 개미가 두꺼운 벽앞에 갈길이 막히더 라도 멈추지않고 요리 조리 매끄러운 골을 찾아 계속 오르던 모습을 보았

230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이경애 l

231


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지나온 세월들, 또한 살아갈 오늘을 주신 것을 축복

‘젊은 그대’

으로 생각하며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드는 12월입니다. 다 마치지 못한 일, 계획 했던대로 성공하지 못한 일도 있습니다. 마음

이 경 애

과 달리 서운함을 남긴 관계도 있고, 감사를 잊은 일도 많습니다. 또한, 찾 아뵈어야할 사람도 생각나는 달입니다. 그래서 12월은 마음이 바쁘고 모두 일어나 서성이게 되는 어수선한 달인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아직‘다 가지 않은 달’이 남아있다는 것은 살아 온 한 해를 정리할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새 해가 되어 그동안 적조했던 고국의 지인이나 친지들에게 전화문안 을 했다.

덴마크의 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동화‘성냥팔이 소녀’가 떠

많은이들이, 자녀에 대해 묻기가 주저스러울만큼 자녀문제로 깊은 시름

오르는 계절입니다.“성냥 사세요, 성냥 사세요”시린 발을 참으며 소리

속에 애를 태우고 있었다. 어릴때 보았던 그 아이들의 얼굴 모습이 거의 기

쳐 보지만 아무도 성냥을 사 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바쁘게 지

억이 나지 않지만 얼마나 똘똘하고 귀엽던 아이들이었다. 뒤쳐질새라 남

나다니는 도시의 어느 건물 벽에 기대어 앉아 팔지 못한 성냥을 태워 추운

들하는것 빠지지 않으려 힘들게 과외다, 학원이다, 뒷바라지 했던 부모들,

몸을 데우고 그 불빛속에서 자신의 바램을 그려보며 행복한 상상속에서 얼

그 희망과 기대가 무색하게 취업은 너무나 어렵다한다. 놀 틈 없는 경쟁속

어죽고 마는 소녀의 이야기가 슬픕니다. 이 맘 때에라도 한 번 거리로 나가

에서 학업을 마치고, 수많은 곳에 이력서를 내어도 불러주지 않는… 그 초

아직 팔지 못한 성냥을 들고 도시의 찬바람속을 헤메는 소녀를 만난다면

조하고 답답한 본인들은 얼마나 더 힘드랴. 삼포세대, 오포세대라는 말을

소녀가 팔지 못한 성냥을 하나라도 팔아줘야할 것 같습니다.

들어는 봤으나 이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절망하고 포기하는 줄은 몰랐다.

이런 저런 연말모임의 시즌입니다. 화려한 파티의 시끄러운 음악속에 질 탕한 음식으로 배 불러 몸을 가누지 못하는 취한 도시의 불빛은 꺼지지 않

결혼도 못하고 이제는 꿈도 잃어버린 모든 것을 다 포기해 버린 N포세대 가 되었다한다.

고 화려한데… 정작 구원자로 오신 아기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파티에 예 수는 설 자리가 없어 바람부는 찬 길에 서 있습니다.

한국이 이렇게까지 된데에는 한국의 교육과 국가정책이 현 시대를 따라 가지 못하는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비교되어 스스로 움츠러드는 상 대적 빈곤감에 놓이게 되는 현 시대의 분위기와 부모의 과보호로 인한 독 립심이 결여된 유약한 성인으로 키워지는 사회현상도 문제인 것 같다. 미 국 아이들, 특히 미국 여자아이들을 보면 놀라울 때가 많다. 우리는 보통 무섭고 낯선 것을 만나면 숨거나 도망가기 바쁜데, 여기 여자애들은 그 공 포의 원인에 흥미를 느끼며 다가가서 끝장을 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혐 오스러운 곤충이나 동물들도 척척 만지며, 가지고 논다. 한마디로 많은 경 험을 통해 창의력이 길러 지고, 강한 아이로 키워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32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이경애 l

233


많은 경제학자들이 지금은 디지털 정보혁명시대라한다. 초연결, 초지능 의 빅데이터로 기계가 스스로 판단하여 인간의 판단을 대체하는 4차산업 혁명 시대에 이미 돌입했다고 한다. 싱가폴에서는 운전자 없는 자율 자동

망과 자신감을 읽을때 난 가슴 가득한 배부름을 느낀다. 러시아의 사실주의 소설가 N V고골리는‘청년은 미래가 있다는 것만으 로도 행복하다’라고 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차가 상용이 되고 있고, 얼마 후엔 조종사 없는 우버 비행기가 지구의 가 고자하는 어디든 사람을 태우고 하늘을 날게 될 것이라 한다. 우리 구세대 가 희원希願하던 직업들이 사양길로 들어서게되고, 눈만 뜨면 새로운 것들 이 등장하는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살고있다. 국가는 미리 몇 십년을 내 다보는 창의적인 교육과 인재 양성을 앞서 실행해야한다. 세상은 뛰어가고 날아간다. 뒤쳐지면 그 만큼 먹거리를 뺏기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조선말 기의 어리섞은 쇄국정책이 없고 개방하여 일찍 서양의 신문물을 받아들였 다면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젊은이들을 4차 산업혁명을 위한 디지털정보통신, 반도체, 전자 상거래, 바이오 산업, 나 노산업 등, 이공계쪽으로 창의적인 교육을 시키고, 훌륭한 기업가들을 많 이 육성해야 할 것이다. 젊은이여, 다시 일어서라. 비록 지금 서 있는 환경이 어둡고 옹색할 지라도, 그대에겐 아직도 많이 남은 시퍼런 젊음이 있다. 우리 세대에는 지금 그대들보다 훨씬 더 어려웠 던 맨땅에서 젊은시절을 지나왔다. 어디 기댈데도, 원망할 데도 없었던… 두려움에 맞설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세상이 변화하듯 기성의 인식도 바뀌게됨을 깨달아 다시 가슴에 새 꿈을 꾸라. 높은 가치를 식별할 눈을 가 지고 먼 미래를 바라보라. 맡은 바는 최선을 다해 책임을 다하고, 뱉은 말 은 반드시 지키는 것이 명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너를 높이는 것은 고 가의 사치품이 아니라 타인을 배려하는 뜻을 가진 따뜻한 인격인 것이다. 이 경 애

젊음은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이냐. 젊음의 이름은 열정, 포부, 사랑같은 젊은이를 수식하는 낱말들은 맑고도 밝다. 무엇을 걸쳐도 어울리고, 꾸미

미동부한인문인협회 부이사장.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저서, 『물안개 너머로 봄은 다가와』 kyungaelee9018@hotmail.com

지 않아도 싱그럽고 예쁘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눈빛에서 미래에 대한 희 234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이경애 l

235


체홉의 글을 읽으며 이 춘 희

들은 러시아의 대초원을 몇 주간 여행하게 된다. 양모를 팔기 위해 기업가 를 찾아 다니는 일로 다른 것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삼촌, 비즈니스 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히려 여행하면서 나누는 이야기나 마차에서 잠을 자는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 신부, 이들과 함께 여행하면서 소년은 할머 니와 아버지가 누워 있는 눈에 익은 마을의 공동 묘지를 지나갈 때 슬픈 마

러시아의 극작가이며 단편소설가인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은 나에게는 사상이나 감정을 통일하는 공통이념이 없다 진정한 예술가라면 화학자처 럼 객관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는“내가 두려워 하는 사람은 나를 자유주의자니 보수주의자니 아니면 무신론자니 하면서 확고하게 나를 어 떤 틀속에 가두어 넣고 규정지으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단지 자유로 운 예술가이고자 한다. 나는 거짓과 모든 형태의 폭력을 혐오한다. 나에게 가장 신성한 것은 모든 형태의 거짓과 폭력으로 부터의 자유, 절대적인 자 유이다. 이것이 내가 위대한 예술가라면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강령이 다.”라고 했다. 후대의 독자들에게 자유로운 예술가로 기억되기를 희망했던 체홉! 그의 절대적인 자유를 다시 떠 올리며 지난 가을 북 클럽에서 읽었던 그의 중편 소설‘초원’을 되돌아 보고자 한다. 1888년에 발표된‘초원’은 중요한 문예지에 오른 그의 첫번째 소설로서 같은 해 체홉은 푸시킨 문학상을 수 상한다. 자신의 고향인 아조프해에 면한 항구도시 타간로그에 잠시 돌아가 순수하고 자유로웠던 유년을 그리며 썼다고 전해지는 이 이야기는 체홉의 자서전적인 소설이기도 하다. 소설‘초원’은 9세의 소년, 예고 루슈카가 여행을 시작한 날로 부터 키 예프에 도착하여 여행을 마무리 짓는 날까지 어린 소년의 눈으로 본 순수 한 여행 이야기 이다. 뜨거운 7월의 어느 날, 키예프에 있는 큰 학교에 입 학하려는 예고 루슈카는 그의 삼촌이고 상인인 쿠즈 미쵸 프와 집안 식구 이며 은퇴한 신부인 크리스토퍼, 그리고 시장에 가지고 갈 양모를 마차에 가득 싫고 마부와 함께 집을 떠나는 장면에서 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236

l 뉴욕문학 제29집

음을 가누지 못해 눈물을 흘린다. 단조롭고 무료한 우크라이나의 대초원 지대를 지나면서 들판 한 가운데 ‘위시 위시’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풍차, 헤론(heron) 처럼 가늘고 긴 다 리를 가진 젊은 처녀가 곡식의 낟알을 고르고 있는 강인한 모습, 구름이 한 가득 몰려왔다 곧 흐트러지곤 하며 수시로 변하는 하늘등을 감상하면서 쏟 아지는 태양 빛 아래 소년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막막하게 펼쳐져있는 대초원의 신비스러움과 아름다움을 보고 표현 못하는 어린 소년의 느낌과 생각은 저자의 네레이트를 통해서 전해 진다. 그들은 작은 호텔에 묵게 되고 삼촌과 신부는 양모를 팔려고 다른 길을 택한다. 소년은 그곳의 캬라반들에게 잠시 맡겨진다. 캬라반들과 함께 여 행을 계속하면서 자신을 손자처럼 보살펴 주는 할아버지와 같이 친절한 마부를 알게 되고 캠프 화이어에 둘러 앉아 황당무개한 그들의 얘기를 듣 기도 하고 저녁으로 생선 스튜를 함께 들기도 한다. 소설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나온다. 자기중심적인 삼촌, 비지네스 에는 관심없는 착하고 어리석은 신부, 친절한 할아버지, 아이들을 끔찍히 아끼는 유태계 엄마, 아름다운 백작부인, 부랑자 마부등이 조금도 미화되 거나 덧붙여 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마치 타페스트리에 수를 놓듯 자신 만의 자리에서 당당히 존재하고 있었다. 영웅도 악당도 없는그 들의 삶의 진솔한 모습에서 오늘날의 우리들을 본다. 주인공 소년, 예고 루슈카는 갑자기 천지를 흔들어 대는 대 폭풍을 겪으 면서 두렵고 아픈 시간을 보낸다. 얼마 후, 삼촌과 신부와 재회하게 되고 그들은 목적지인 키예프에 도착하여 가슴 아픈 이별을 한다.‘나의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라고 소년이 생각하는지점에서 이야기는 끝난다. 크나

수필 · 이춘희 l

237


큰 사건이나 클라이 맥스 없이 조용하게 대초원은 저물어 간다.

주인공은 바로 자연인‘대초원’이다. 밝은 노란색 카펫처럼 끝없이 펼쳐

작가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체홉은 주인공도

진 밀밭, 먼 거리에서 작은 남자가 팔을 흔들고 있는것 처럼 보이며 돌아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이야기가 끝난다. 초기의 단편인‘관리의 죽음’에서

가는 풍차, 햇빛을 받아 반짝 반짝 빛나며 부드럽게 불평하며 흐르는 물줄

갑자기 죽어버리는 주인공, 19세기 러시안 귀족계급의 인텔리와 냉정한 과

기, 수평선과 맞닿아 있는 진홍색으로 물들어 있는 하늘등 바로 눈앞에서

학자의 서로 다른 두 주인공 사이에서 벌어지는‘결투’, 죽음을 앞두고 무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선명하고 아름답다.

엇인가를 새롭게 깨닫는‘주교’등 에서 보면 분명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

9세의 소년, 예고 루슈카와 함께 여행하는 동안 나도 어린 시절로 돌아

은 불분명한 상태에서 의문으로 이야기가 끝이 난다. 우리네 삶처럼. 그래

가 캠프 화이어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함께 들었고 스튜도 함께 먹었다. 체

서 일까?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도 오랫동안 생각을 하게 된다.

홉의 예리하고 집중력있는 관찰은 황폐한 갈색으로 뒤 덮여 있는 단조롭

러시아 사람들의 일상을 주로 그린 체홉의 글은 당대의 대 문호 톨스토 이 나 도스토예프스키 처럼 종교나 죽음, 인간 존재에 대한 심오한 철학을

고 무료하고 보잘 것 없는 대초원을 생생한 아름다움과 신비스러움으로 가 득 차 있게 했다.

다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시점에서 무엇인가 생각하게 해 준다.

소설‘초원’은 작가가 지나간 고국 러시아를 향해 보내는 사랑의 대 서

평범하고 단순하고 가장 전통적인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그의

사시 이다. 수년 전 러시아를 방문 했을 때 맑고 쌀쌀한 가을 날, 자작나무

글을 읽는 동안 참 자유의 놀라운 의미를 곰곰히 생각케 되었다.

로 가득 찬 들판이 눈부시게 빛났던 러시아 특유의 풍경이 떠 오르며 다시

‘초원’을 읽으면서 특히 인상깊었던 부분은 낡은 마차에 대한 그의 묘 사이다.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덜커덩 덜커덩 삐거덕 삐거덕 거리는 소리 를 내는 오래 된 마차, 그 뒷 꽁무니에 달랑달랑 매 달려 있는 넝마같은 가 죽 끈을“애처로운 가죽 끈”이라 표현했다. 수백만년이 흐른다 해도 아무

한번 그곳에 가 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게 했다. 교훈적이지 않고 비판적이 아닌 체홉의 글은 따스하고 깊고 넓으며 무엇 보다 지극히 인간적이다. 그의 글을 통해서 겸손함을 배웠다.

도 눈치 채지 못할 그 가죽 끈! 사랑받지 못하고 주목받지 못하는 애처로 운 것에 우리의 동정을 구할 수 있게 변형시켰다. 체홉은 과연 어떤 사람일 까? 나하고 관계없는 사람에게 무관심하고 냉정하게 대하기 마련인데 하 물며 무생물은 말해 무엇하랴 하는 통찰과 함께 마음이 아파 왔다. 늙어가 는 과정은 무엇이나 관계없이 다 비슷하게 애달프건만.

창문 너머로 보이는 가로수의 잎은 어느 사이 빨갛게 노랗게 물들어 가 고 있었다.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가, 체홉을 만났던 지난 해 그 가을은 유난히 슬프 고 아름다웠다.

러시아 문학강의에서 소설가 나보코프는 체호프의 소설은 유머러스한 사람을 위한 슬픈 책들이다. 유머와 센스가 있는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 다고 했다. 나는 유머러스한 사람은 못 되나 44년의 짧은 생을 뜨겁게 살 다 간 그를 삶의 고비를 다 겪은 늙은 나이에 만나게 된 것을 참으로 축복 으로 생각한다. 자연을 향한 신비와 감사는 이 소설의 반복되는 주제로서 소설의 진짜 238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이춘희 l

239


어느 일요일의 추억 이 춘 희

영수증에는‘Paid in Full with One Glass of Milk.’라고 썼다. 얼마나 가 슴뿌듯해지는 아름다운 이야기인가. 사소한 일상의 친절이 한 사람의 하루를 행복하게 만들기도 하고 한 사 람의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뉴스를 보면 살인과 유괴와 전쟁이야기 일색 이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만 있는것 같다. 그러나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비치는 햇살도 잠시 어느 새 부슬부슬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11월의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성당 파킹장에 도착하여 미사 시간에 늦을까 서두르느라 우산을 잊은 채 그냥 내렸다. 미국 본당의 신자들의 미사가 막 끝이나 많은 신자들이 한꺼번에 성당을 나오고 있었 다. 비를 피하기 위해 손으로 머리를 가리고 부지런히 앞만 보고 가고 있는 나를 향해서 똑 바로 걸어오는 미국인 교우를 보았다. 그는 느닷없이 우산 을 나에게 씌워 주면서 성당 문 앞까지 함께 가 주었다. 그리고는‘Happy

따스한 눈길, 환한 웃음, 친절한 말 한마디로 주위를 환하게 하는 사람들 이 많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들을 보면서 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 진다. 행 복도 전염되는 것인가? 종교와 영성철학을 연구한 영국출신의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헉슬리는 인 간을 변화시키는 가장 큰 힘은 조금 더 친절한 것에 있다고 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한마디의 친절한 말과 행동이 삶의 힘을 주고 희망을 준다. 인 간의 선함 만큼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다.

Sunday’라고 속삭이듯 말하며 떠났다.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시선을 돌릴 수 있는 그 여유는 어디서 나온 것일 까?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11월의 우중충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하루종일 눈부시게 빛나는 햇빛 아래 서 있는 기분이었다. 미국 어느 시골에서 일어난 일이다. 집집마다 다니면서 물건을 팔러 다 니던 가난한 어느 소년이 있었다. 어느 날 배가 너무 고파서 거의 쓰러질 지경이 되었다. 다음번 집에 가서는 꼭 음식을 좀 구걸해야 겠다고 그는 마 음먹는다. 그러나 그 집에 도착하자 마자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 소년은 물 한컵만 달라고 부탁한다. 젊은 주인집 여자는 많이 피로해 보이는 소년을 보며 물 대신 밀크를 한가득 따라 주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소년은 존스 홉킨스 병원의 암 전문 의사가 된다. 위독한 상태의 어느 중년 여인이 어느 날 입원했다. 환자의 차트를 자세히 들여다 보던 그 의사는 그녀가 수십년전 허기로 쓰러지기 직전의 자신에

이 춘 희

게 밀크를 따라 주었던 그 친절한 젊은 부인임을 알아본다. 그리고 엄청난

<창조문학 > 수필 등단, 창작 클리닉 회원

수술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는 그녀를 대신해서 치료비를 대신 내어 준다.

The New York Province of the Society of Jesus, 영성훈련 program 2년 수료

M.S. in Gerontology , Hofstra University, New York (노인학 석사) monicachunelee@gmail.com

240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이춘희 l

241


희한한 조카

야 할 중요 순위라 근무하는 병원에 연락을 하게 되었고, 의사란 직업이 따

전 설 자

제 본 것처럼 살갑게 대했다. 이런저런 안부 겸 타진 끝에 오가기 어려운

로 시간 내기 만만찮아 먼저 가서 만나기로 했다. 잊을만한 세월인데도 어 길이니 몇 가지 일정을 취소 하드라도 입원을 해서 종합 검사와 더불어 치 료받고 돌아가기를 권했다.

결혼으로 빚어진 조카다 시가 친가 통 털어 스무 명이 넘는 조카들 중 실적이 단연 독보적이다.

이미 용지를 들고 여기저기 검사실에 예약사정을 알아보고 나름 진행 중 이다. 대부분 그렇겠지만 나 또한 옆을 돌아볼 새 없이 앞만 보고 걷느라 몸 돌

TV 예능프로그램 에서 유재석 부인 임신 소식을 들은 동료들의 이런저

볼 여유 없이 지냈던 터라 어디가 얼마나 상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증폭

런 축하 말속에 터져 나온 우스갯소리‘와 태어나 보니 아빠가 유재석이

하기도 하여 따르기로 했다. 다행히 위급한 문제는 없었다. 뭐 한 가지라

래’흙 수저 금 수저를 논하는 세태에 들어맞은 놀림 말에 순간 나도 모르

도 해 보내고 싶은 마음을 알기에 소소한 몇 가지 치료를 병행하면서‘비

게 피식하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염수술’을 받게 된 것이 시작이다.

그렇다. 나 또한 혼인과 동시에 희한한 조카를 얻게 되었기에 백분 공감 이 가는 대목이라 인용해 적었다.

[다리수술]

골골거리는 딸의 안위(安危)를 위한 결혼 조건 중 몇 대독자, 외아들, 장

몇 년 후 겨울 두 번째 방문 중 함께 높은 고가도로를 오르락내리락 하

남, 등은 기피 1순위였다. 이런저런 인연들을 지나쳐 보내다 어머님의 첫

게 되었다. 여담 끝에 내려갈 때나 겨울에 이증세가 좀 더 심하다고 가는

째조건을 충족시킨 끝머리의 배필이 되었다. 그날로 굴러들어온 조카들이

말로 흘렸었다.

열 명이 더 되고 그중 현재 의사가 일곱 명이다. 이들이 내게 대하는 예우

어느새 귀담아 들었던 것 같다. 나이 들면 회복도 성과도 기대에 못 미

는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을 지키는 정도다. 이 글의 주역인 조카딸은

친다고, 마침 병원으로 향하던 길이니 사진을 병행한 각종 검사를 하자고

그중 둘째 시 아주버님의 큰딸이다.

나섰다.

의과대학 수석입학에 수석졸업으로 큰 병원을 두루 섭력한 후 개인병원

역시 수술이 필요한 상태였다. 나로선 그 어떤 것 보다 요긴한 사안이라

을 운영하고 있는 재녀다. 지금까지 내게 종합병원 주치의 몫을 넘치게 해

다른 구구한 생각들 밀치고 고맙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회복기간중 거동이

내어 주고 있다.

불편해 각각 나누어 해야 하는데 잠깐 다니러간 상황이라 두 무릎을 한꺼

대학 졸업 전에 이민을 오게 되어 명의로 활약한다는 소식만 듣고 지내 다 한국을 방문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번에 할 수 밖에 없었다. 일어서기도 눕기도 혼자 할 수 없었고 얼마간 목 발을 집는 모양새를 연출 하여 힘들었지만 친지들의 도움과 빠른 회복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수술한지

[비염수술]

20년도 더 되었는데 통증 없이 잘 걸어 다니고 있으며 트랙을 돌아도 앞

이민 와 십 수 년 만에 첫 방문이라 처리할 일이 빼곡했지만 만나보고 가

서 나갈 정도다.

242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전설자 l

243


[팔 수술]

치지 않아 자세히 봐야 실낱같은 자국이 보일 뿐이다.

숨 가쁜 일상에서 벗어나 롤러스케이트를 구르며 싱그러운 벗들을 찾아

수술 후 바로 손목은 가눌 수 있었고, 엄지손가락만 겨우 펴졌다. 의사

Central Park으로 빨려들었다. 곧 눈물 뺄 일을 예측 할 수 없는 중생이

선생님의 소견에 따라 기다린 수일 후 조금씩 서서히 모두 움직이기 시작

라 기분에 취해서 씽씽 고고 미끄러지듯 달리다 한순간 내 동댕이쳐 벌러

했다.

덩 나자빠졌다. 아픈 건 뒷전이고 창피한 생각에 시침 뚝 떼고 벌떡 일어나 롤러를 벗어

(위로 받지 못할 일이라 계단에서 굴렀다고 둘러 되어, 모두들 그렇게 알 고 있다.)

들고 집으로 향했다. 다행히 접질린 손목이 약간 부어오르는 것 같았다. 워낙 충격이 컸었기에 이만한 게 다행이라 여겼다. 그렇게 2~3일을 넘긴

[어깨통증]

아침 손목이 널브러져 아예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병원들의 각종 검사에

60줄에 들어 아주 자연스럽게 한쪽어께에 이상증세가 생겼다. 단연 50

도 알 수 없다는 대답들이었다. 어디든 알만한 곳은 다 들려봐야겠기에 한

견이란 자가진단으로 매듭짓고 견뎌갔다. 점점 가중되어 뒤로 돌릴 수도

의원을 찾았으나 풍이 왔다는 어이없는 진맥 결과만 듣고 돌아와야 했다.

없는 상태에 이르자 옆에서 보다 못해 남편이 연락을 취한 것 같았다. 전

병원에서도 어떻게 해 볼 수 없다는 결론은 절망을 안겨주었으며 한쪽

화 한 번에 바로 줄줄이 사탕처럼 엮은 약을 두둑이 보내왔다. 솔직히 완

팔을 못 쓰게 된다는 참담함이 흉악한 악재로 돌리기엔 가혹해 말을 잃고

화정도 기대했었는데 거짓말처럼 완쾌되었고, 지금은 등마루에 양손이 닿

있었다.

을 정도로 유연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의학회 참석차 왔다고 절실 한 순간에 문제의 주인공이 코앞에서 방글방글 웃고 있다. 멀쩡한 팔을 한

[담석수술]

순간 부주의로 병신이 된 긴박한 순간에, 나로선 하늘이 점지한 기적 같은

명치를 후벼 파는 가슴통증이 간간이 왔다. 소화가 안 된다는 섣부른 짐

상황이 도래된 것이다. 집 바로 옆에 뉴욕에서도 손꼽는 마운틴 시나이 종합병원이 있어 이미 제 일 먼저 들렸었지만 원인을 찾아 내지 못했었다. 재차 함께 가서 의사로서

작으로 이런저런 소화제와 탄산수로 버텼다. 점차 통증이 잦아져 초음파 검사를 하게 되었고 결과 담석이란 걸 알았다. 상태는 담낭제거 수술을 서 둘러야 하는 위급상태였다.

소견을 들어보기를 원했다. 다시 진찰과 신경검사를 하였으나 역시 그 어

뉴저지 쪽에서는 외과의사로서는 꽤 유명세를 내세우는 분이시라 믿어

떤 이상도 발견해 내지 못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 신경외과 선생님께 상

의심치 않고 수술에 임했다. 회복 감을 채 누리기도 전에 다시 극심한 통

담 드린 후 연락하기로 하고 떠났다. 만만찮은 여정과 시차에도 기대에 부

증이 시작되었다.

응하듯 신속한 처리로 모든 준비를 해 놓았다는 연락이 왔다. 하루빨리 오

밤을 꼬박 새고 꼬꾸라져 병원으로 갔다. 진단 결과 돌이 담도에 내려가

지 않으면 팔을 영영 못쓰게 된다고 의학적으로 누누이 설명하며 오히려

있다고 했다. 이 무슨! 도로무공이다. 돌이 없는 담낭을 잘라낸 것이다. 진

재촉이다. 초조히 기다리던 터라 만사 접어두고 향했다.

주가 아니다.

팔꿈치로부터 아래 위 합해 5인치 정도를 열어‘신경 수술’을 받았다. 그 와중에도 성형외과 선생님께 마무리를 의뢰 하는 세심한 배려까지 놓 244

l 뉴욕문학 제29집

움직이는 것이 자명한데 명의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이 수술 전에 그 새 돌이 담도로 내려가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수필 · 전설자 l

245


수술이라는 위압감에 시달리고 돈은 돈대로 몇 천불 날리고 말았다. 용의주도하지 못했던 의사는 미봉책이 늘어지고 덧붙여 빨리 담도에 있

그간의 사연과 행적을 듣고 봐온 지인들은 자식보다 낮다는 말들을 아 끼지 않는다.

는 돌을 제거해야 한다고 사설이 길다. 거기다 전문기술을 요하는 시술이

나이 들어감에 더더욱 든든하다.

라 비용도 지난번 보다 더 들어가는데 자기는 어렵고 그 분야에 명성이 있

작은아빠 돌아가신지 4년여 지금까지 한결같다. 병원일 가정사 쉴 틈 없

는 분을 소개 하겠다고 떠벌렸다. 한번 속은 터라 믿음이 가지 않았다. 실

는 일과인데 때맞추어 의약품 식료품을 보내오고 있다. 이변이 없는 한 요

수가 자칫 화근이 될까봐 전화재촉으로 며칠째 성화다. 아예 상종도 하기

원할 것 같다. 누구나 할 수 없는 대단한 정성과 끊임없는 보호를 받아오

싫어 두 번 다시 연락 못하도록 돈이 없어 재수술 어렵다고 잘라버렸다.

기에 글이라도 남겨 전하고 싶어 시작했는데 큰 덩어리들만 적은 것이 이

특별한 수술도 아닌 흔히들 하는 담석 수술결과가 이지경이 되리라고는 전

에 이른다.

혀 예상 못했었다. 완전 밥이 된 꼴이라 정황상 그냥 넘어가기 힘들었지만

작은엄마라는 호칭으로 대우만 받으면서 특별히 해 준게 없다. 공부를

소개한 분을 봐서도 그렇고 병원을 운영하는 가족들이 있어‘역지사지’

하느라 객지생활을 하게 되면서 잠시 돌보며 기거를 함께한 것과 대학진학

와‘실수’라는 낱말을 곱씹으며 재수 옴 붙은 내 운으로 돌려야했다.

문제에 관여를 하면서 가까워 졌던 것이 전부다. 누구든 방문 소식을 접하

작은아빠로부터 그동안의 경위를 소상히 전달받은 조카의 부름으로 서둘 러 한국으로 갔다. 우선 완전히 믿고 의지하는 터라 편안한 심신으로 수술 받고, 더하여 검안에 안약과 새 안경까지 받아 들고 돌아왔다. 역시 지금까 지 그래왔듯 소화기능에도 아무런 이상 없이 무사히 지내고 있다. 주위 분들 보면 다리수술 결과가 좋지 않아 재수술을 해도 그렇고 다친 곳들의 예후가 좋지 않아 오랜 기간 치료받으며 힘들어 하는 사례들을 듣 고 보아왔다.

면 걱정부터 앞서는데 얜 어쩌다 연락이 오면 기특하고 대견한 마음이 앞 서 쉬이 보고 싶어 기다려진다. 성격이 다정다감하지 못한 내게 누구든 쉽게 다가올 수 없음을 감안하 면 만사 예사롭지 않아 세속에서 연연하는 깊고 미묘한 인연의 굴레가 엮 어놓은 작품 같다. '골육지친'도 아닌 시조카이기에 하 기이해 진심 많이 궁금하나 삼생을 지 레 채 가늠하며 매 순간 앞에 숙연해진다.

매번 단번에 완치된 나로선 신비스러울 지경이다. 적시에 조치를 취해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한쪽 팔은 못쓰고, 무릎은 통증으로 걷기 힘들어 하며, 어깨는 오십 견으로 불편해하는 장애자가 되 어 있을 것이다. 특히 담도는 난관이라고들 했다. 자칫 잘못 처리되었더라 면 가슴 쓸어내릴 사건들이였다. 이 모든 어려웠던 문제들을 완벽히 해결 해 준 건강지킴이다. 몇 년에 한 번씩 들리는 터라 볼 때마다 전신을 세심히 점검해서 돌려보 낸다. 해서 여기선 일 년에 한번 혈액검사와 예방주사 맞는 것이 전부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알아서 먼저 마음을 써 주었으며, 비용도 일체 함구 해 오고 있다. 고마움을 과분해하는 나에게 형편이 되니까 한다는 식이다.

전 설 자 한국수필로 등단 경희사이버대학 재외동포재단 주최 한국학교 교사 체험수기 수상 디지털 서울 문화예술대학 주최 한국학교 교사 체험수기 수상 미동부한인문인협회 수필분과 위원장 현 미동부한인문인협회 감사, 이사 전통문화예술 강사 snowsjk@yahoo.com

246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전설자 l

247


카푸치노 전 수 중

거실의 소파에 앉아 TV를 틀었다. 가마솥을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장인 이 반드시 좋은 흙을 찾아야 한다며 정성들여 만든 모형에 녹인 쇳물을 들 이 붇는다. 불똥이 튀고 위험해 보인다. 아내와 한국의 부엌과 가마솥에 대 해 얘기를 나누었다. 가마솥 에다 소죽도 끓이는 일을 아내가 알 리 없다. 영문 방송을 돌리니 선거관련 뉴스가 이어진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미에서

늦가을 이른 밤 아내와 집을 나섰다. 꽤 먼 곳의 케이크 가게로 운동 삼

미국국경으로 향하는 이민자 행렬을 부각시켜 유권자들에게 겁을 준다는

아 가기로 했다. 땅거미는 드리운 지 오래고 가로등 불빛에 의지하여 둘은

주장이다. 그래서 특검에 찌든 공화당 지지율이 오르고 있단다. 사노라면

말없이 걷는다. 군데 군데 낙엽들이 발길에 차인다. 가끔 와보고 싶던 가게

“좋아라!”할 만한 때도 있어, 세상이 공평하다고 해야 하나.

였다. 이름이 좋아 오며 가며 쉽게 외운 곳이다.“오아시스(oasis)”라고.

갑자기 잠을 깨니 자정 즈음이다. 앉은 채 잠든 게다. 머릿속에 들어있는

‘일가친척 없는 뉴욕은 그땐 나에게 오아시스가 없는 사막 같은 곳이었

시계도 가끔 유용할 때가 있다. 소파에서 자던 아내를 깨워 방으로 잠자리

지…….’참 오래전의 일이다.

를 옮겼다. 아내는 금시 잠들었지만, 나는 정신이 말똥말똥하다. 눈은 붙이

치즈와 시금치를 버무린 케이크와 치즈 케이크로 보이는 것과 카푸치노

고 생각은 내버려두었다.‘잠이 오겠지…….’생각이 머릿속에서 발레리

(cappuccino) 커피 작은 것으로 하나 샀다. 가게 안은 우리 부부만 앉았다.

나처럼 춤을 춘다. 예쁜 발뒤꿈치를 곧추 세웠다가 내렸다가, 종종걸음을

가끔‘투 고우(to go)’손님들이 들락거린다. 어제가 할로우윈 데이(Hal-

치는가 싶더니, 어느새 돌려서 살짝 내리고. 아니 마치 건반 위를 휘몰아치

loween Day)였으니까 뒤편 술 마시는 곳으로 향하는 입구에 아직 해골장

는 피아니스트의 가늘디가는 뽀얀 손놀림 같다. 과거를 향하다가 훌쩍 튀

승이 흐느적거리며 달려있다. 미국에 좀 살았으니 이제는 그런 것들은 무

어 돌아오고. 또 펄쩍 뛰어 코흘리개 시절로 돌아간다. 동창들의 얼굴이 떠

섭지도 않다. 보기에 불쾌하기는 해도. 아내가 잘라놓은 시금치 케이크를

올랐다가는 휙 지워지고 새로운 화면으로 확 채워진다. 하긴 6.25 동란 중

먹어본다. 늘 먹던 그 맛이다. 그런데 치즈 케이크로 알고 산 것은 생각 보

에 강원도 산골에 태어난 어린 생명이 오죽 사연이 많았으면 이역만리 뉴

다 훨씬 부드러웠다. 마치 연두부 같고 적당히 단맛이었다.“음, 좋은데.”

욕의 하늘아래 지금 누워있으리…….

가끔 카 푸치노를 홀짝이며 마신다. “그 케이크 이름이 뭐죠?”점원 아가씨가 대답한다.“과일 나폴레온 (fruit napoleon).”가게를 나서며 아내가 말했다. 과일도 안 들었는데 무

한글을 갓 배운 작은 아이가 어릴 적에 자기만 써야한다며 우겼던 말이 다.“아, 참 나!”그래 오늘 숙면하기는 틀렸다. 나가서 글이나 써보자. 자 판을 두드리며 생각의 흐름에 글을 맡겨본다. 정리되지 않은 글을 써내려

슨 이름이 그러냐고. 소리 없는 내 대답이‘아니면 그만이지…….’복잡

가고 있자니 그럴듯한 마무리가 될 리 없다. 그런데‘그렇구나!’하고 문득

한 세상에 내 머릿속에다 그런 잡것들로 채울 수는 없다. 흐흐. 밝은 길을

깨달은 것이 있다.“카푸치노”가 문제였구나.‘너 이 짜식! 감히 내 안면

택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에 들어와서야 생각난 쎌 폰(cell phone)을

을 방해하다니…….’저녁 커피는 내 잠과는 아무 상관관계가 없다는 자

먼저 세워둔 차속에서 다시 찾았다. 당연하기보다는“오아시스”가게 까

랑은 이제 그만 두어야 할까보다. 나도 이제 나이가 좀 들었나. 수면시간도

지 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마음으로 돌아왔다.

점점 짧아지고 수필 길이도 덩달아 짧아지는 듯하다. 새벽 다섯 시가 다 가 온다. 쪽잠이라도 청해볼까. 오늘 하루의 활기찬 삶을 위하여!

248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전수중 l

249


제3의 고향 전 수 중

마치 범죄자인 양 친구들 몰래 고향도 방문하여, 코흘리개 시절에 놀던 정 든 집에도 가보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에서 연상되는 수많은 정답고, 그립고, 슬픈 기억들이 순간순간 영상으로 재현되었다. 그런데 그토록 오 래된 것들이, 왜 그렇게 서먹서먹하고, 또 그 규모가 너무 작아서 그렇게 초라하게 느껴졌을까. 나중에 뉴욕으로 돌아오는 비행기가 JFK 공항에 착

누구에게나 다시‘만남’을 약속할 수 없는‘헤어짐’은 슬픈 일이다. 사 랑하는 연인들의‘헤어짐’ 이 그 중에 가장 가슴 아프지 않을까. 둘 중에 한 쪽이 뿌리쳐야 하는 이별을 상상해보라. 생활영어를 가르치면서,“사랑하지 만 헤어진다.”는 세언 같은 표현이, 영어문화권에도 있는 것을 보고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학업이 주된 이유였지만, 나도 적지 않게 이별을 하면서 살 아가고 있는 중이다. 바다가 멀지 않은 산골에서, 여름이 찌는 듯한 도시로, 그 후에야 꿈에도 그리던 서울로 입성했었다. 고대하던 학업이 끝나고,‘이제야 그 지긋지긋한 시험지옥에서 해방되었 구나!…….’ 라고 기쁨에 들떴던 나에게,‘생존’ 이라는 더 큰 시험이 기다리 고 있지 않았었던가. 그 후 다시 배움을 빌미로 뉴욕으로 늦깎이 유학길에 오 른 것은 엄청난 도전이었다. 학업과 가정이 어우러진 내 유학생활은 경제적 인 어려움으로 더욱 그러했다. 가족, 친척, 친구들에게‘만남’ 을 굳게 약속 하고 유학길에 올랐지만, 결국 이민의 길이 되어 버린 셈이다. 호기로운 내 약속을 믿어준 분들에게 새삼 용서를 빈다. 사람의 일생을 서른 살씩 나누어 정리해 본 적이 있었다. 처음 서른 살까 지 자신을 가꾸고, 그 다음 서른 살은 결혼을 하여 예순이 되기까지 가정을 돌보고, 마지막 서른 살은 자녀들이 출가한 후에 아흔까지, 타인들을 도와 가며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 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백세 인생이 가능 해졌으니까 해본 말이다. 이미 공자님 말씀에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이를 이기(利己), 이가(利家), 그리고 이타(利他)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그러 다 보니 어언 태어난 고향집을 떠난 내 나이가 이타(利他)에 자라잡고 있다 는 것이 새삼 서럽다. 겨우 사오 년 간에 미국 영주권을 얻어, 고국을 처음 방문한 적이 있었다. 250

l 뉴욕문학 제29집

륙했을 때의 편안함은, 마치 고향에 돌아온 듯한, 내가 상상했던 그 느낌 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속에는 뉴욕이 고향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이상하게도 나의 삶이 유난히 숱한‘만남’과‘헤어짐’으로 점철되지 않았었나 되돌아 본다. 내 소중한 학창생활이 그러했고, 내 조국과 미국의 직장생활이 그러했고, 내 뉴욕의 교회생활이 또 그러했다. 학창생활이야 예정된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었지만, 직장생활과 교회생활은 그렇지 않 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내가 합병이니, 흡수니, 통합이니 일컫는 단어들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이유다. 그 속에는 항상 사람간의 어색한 만남이 있고, 서로간의 알력이 있고, 다툼이 있고, 헤어짐이 계속된다. 교회도 예외가 아 니었다는 것이 나는 슬프다.‘돈과 명예와 권력의 영향력을 사회로부터 온 전히 차단할 수만 있다면, 교회가 더욱 많은 성도들을 교육시켜 천국에 입 학시킬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제 또 다른 헤어짐을 준비하고 있다. 예로부터 한곳에 오래 붙어 있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사람을‘역마살’이 끼었다고 했던가. 나의 모 든‘헤어짐’은 어쩔 수 없었다고 짐짓 남들에게 항변하겠지만, 이 나이에 야 누가 탓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래도 이번의‘헤어짐’은 학업이 이유가 아니므로, 당연히 이타(利他)가 변명이 되어야 할 터이다. 그러고 보니“이 대로 뉴욕에 살다가 천국에 가고 싶다.”라고 써 본, 내 등단 수필“뉴욕에 살리라”가 마음에 걸린다. 철없는 아이처럼 뉴욕과 다시‘만남’을 스스 로에게 약속해야만 할 것처럼. 내 이럴 줄 모르고 글을 마구 썼으니……. 30년을 너머 살아온 뉴욕에 왜 정든 사람들이 없겠는가. 손을 잡아보고 싶고, 포옹해보고 싶고, 또 서로 눈물을 글썽거려보고 싶은 사람들도 있다.

수필 · 전수중 l

251


그러나 지나온 내‘헤어짐’의 체험이 그런 감정적인 내 행동을 용납하지 않을 뿐이다. 찌든 가난은 주어진 운명으로 여기고, 억제 할 수 없는 슬픔

우리에게 주어진 두 가지 시간 정 은 실

에도 눈물을 감추며, 애써서 당당히 얻은 기쁨에도 마음껏 웃어보지 못했 다는 그런 삶이 이해가 되는가. 지키지 못할‘만남’을 서럽게 약속하지 않 으려고, 차라리 말없는‘헤어짐’을 또 선택하려고 한다. 연약한 마음에서 나오는 비겁한 변명이라고 비난받을 수도 있겠으나.

이제 2019년 기해년이 밝아왔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근처의 존스비치로

“인생이 사기나 도박과 같다.”고 누가 주장하면 반론을 제기해야 하는

해돋이와 일몰을 구경하러 가는 사람도 있고 또 작게는 교회나 성당, 사찰

것이 반듯한 생각이다. 그러나 좀 더 나은 삶을 위하여 내린 결정이라면 그

등도 송구영신의 의미를 크게 부각시킨다. 마치 2019년에는 무슨 큰 변화

에게 동정이 가지 않을까. 누구나 유리한 결정에는 서슴없어도, 불리한 결

가 있을 것처럼 지구 반대 편에 있는 사람들과도 수 통의 인사를 주고 받는

정에는 머뭇거리는 것이 당연하다.‘헤어짐’을 준비하는 사람도, 가는 곳

다. 우리가 21세기를 살고 있는 게 확실하다는 증표라도 되는 것처럼 하룻

이 지금 사는 곳보다 못하다면, 발이 차마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다

밤에도 여기저기서‘카톡 카톡’소리가 귀를 찌른다.

행스럽게도 가려는 곳이 미국사람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곳이란다.‘생 음악(Live Music)의 성지(Mecca)’라고 불리기도 한단다. 덧없는‘만남’

빛을 낮이라 부르고 어둠을 밤이라 칭했던 태초, 그 시절에도 하루를 24

과‘헤어짐’의 굴레에서 클래식 음악과는 서로 담을 쌓고 살아온 나에게

시간이요, 일년을 12달로 정했다는 기록은 없다. 해시계와 물시계를 사용

무슨 변화가 있으려나. 음악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야말로 내 인생에서

하던 고대 이집트에서 12개의 별자리의 움직임을 이용하여 각각 밤낮으로

풀어야할 마지막 숙제라고 믿고 살아온 세월인데.

길이대로 12로 등분하여 24시간을 만들었다. 일년 12달도 역시 천문학적

처음 어머님 품을 떠나 유학길에 올랐던 그 어린 소년처럼, 또 다시 한

변화에 민감했던 고대 농경사회를 거쳐 고대 이집트의 태양력, 메소포타

껏 용기를 내어 보련다. 2019년 새봄을 따라 새로운‘만남’을 위해 남촌

미아의 태음력, 율리우스력 그리고 현재 가장 많이 사용하는 그레고리력

으로 떠나보련다. 여태껏 쌓아온 나만의‘만남’과‘헤어짐’의‘노우 하

으로 진화되어 온다. 그리고 1월부터 12월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을 살펴보

우(Know How)’를 거기서 십분 발휘해 보련다. 내가 추구하려는 이타(利

면 결혼과 출산을 관장하던 여신 주노(Juno)의 이름을 딴 6월(June)이나 미

他)의 삶이 거기서 장미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났으면 좋겠다. 마치 마지막

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의 이름을 딴 4월(April)등, 고대 로마시대

인 것처럼‘제3의 고향’을 거기서 아름답게 가꾸어 보련다. 그곳 텍사스

의 이름을 그대로 쓴 것을 알 수 있다. 다시말해 인간의 편리함을 위해 우

오스틴(Austin, Texas)에서.

리 자신이 만든 것이다. 날(Day)이 모여 달(Month)이 되고 달이 차서 해(Year)가 되는 시간을 그

전 수 중 경북 울진 출생, 한국항공대학교 (학사), 서울대학교대학원 (석사), NYU (MBA), 2005년 뉴욕문학 신인상, 수필 '곡예사' 당선으로 등단. 미동부한인문인협회 총무 역임. 저서, '한글꼴 발음기호에 따른 영어없이 영어배우기', '미국시민권시험', '미국영어발음', '영어나무 1000'. smpchun@gmail.com

252

l 뉴욕문학 제29집

리스 철학에서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 크로노스 (Chronos)라 부르고 이 어 원에서 연대기 (Chronological)등의 단어들이 파생되었다. 즉 지구의 공전 과 자전을 통해 얻어지는 시간, 인간의 생로병사를 통해 기계적으로 가는 생물학적인 시간이다. 내가 노력해서 얻어지는 주관적인 시간도 아니고 또 수필 · 정은실 l

253


한 맞고 싶지 않다고 뿌리칠 수도 없는 철저히 객관적인 시간이다. 바로 그

뉴잉글랜드 문학여행

시간으로 치면 올해가 2019년 기해년인 셈이다. 과거로 부터 현재에 이르고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이 바로 크로노스의 시간이다.

정 은 실 그런데 시간에는 크로노스의 시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마 이 세상에 크 로노스의 시간만 있었다면 인생은 참으로 허무하고 의미없는 기계적인 날 들이었을 것이다. 흔한 비유로 우리가 심하게 고통을 느끼는 10 분과 사랑

서론

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의 10 분은 크로노스적으로는 같은 수치이지만 그 질

뉴잉글랜드는 지역 이름만 들어도 벅찬 설레임과 함께 잔잔한 감동이 동

적인 면에 있어서는 엄청난 큰 차이가 있다. 그것은 바로 카이로스(Kairos)

시에 이는 곳이다. 미국의 역사 중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청교도운동

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신의 막내 아들인 카이로스

이 시작된 곳으로 미국의 역사, 문학, 정치, 철학, 학문등 모든 방면에 걸

의 모습은 조금 기이하다. 앞 머리는 길고 숱이 많은데 뒷머리는 완전히 벗

쳐 시발점이 되었던 곳이다. 따라서 미국의 첫 13개 주안에 이곳 6개 주가

겨져 있고, 양 발꿈치 뒤에는 날개가 달려 있고 한손에는 칼, 다른 한손엔

모두 속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뉴욕의 윗 지역에 해당하

저울을 쥐고 있다. 그리고 그 동상 아래에는‘나를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는 6개 주, 즉 커네티컷, 로드 아일랜드, 뉴 햄프셔, 메사추세츠, 버몬트,

앞 머리가 길고 지나고 나면 다시는 잡을 수 없으므로 뒷머리는 대머리다.

메인주를 지칭한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 우리가 향한 곳은 헨리 데이빗 소

나를 만났을 때 냉정하게 결정하라고 저울과 칼이 달려 있고 빨리 지나가므

로우의 윌든호수였다.

로 발 뒷꿈치에 날개가 달려 있다. 나의 이름은 기회(Opportunity) 이다’ 소로우의 윌든과 시민불복종 우리는 누구나 유한의 삶을 살고 있다. 100세 시대라고 말하지만 이 말

윌든에서

자체도 역시 우리 인생의 유한함을 말하는 것이다. 크로노스적 시간으로 보

“나는 자유롭게 살기 위해 숲속에 왔다

면 짧던 길던 한정된 시간 속에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한정된 크

나는 사려깊게 살고 싶다

로노스의 시간을 어떻게 영원한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보내느냐는 우리 각자

삶의 정수를 빨아들이고 싶다

에게 달려 있다. 신은 참으로 공평해서 인생 모두에게 똑같은 질량과 부피

삶이 아닌 것의 종지부를 찍기 위하여

의 크로노스적 시간과 카이로스적 시간을 주셨다. 단지 이 시간 개념을 제

죽음에 임박했을 때 살아온 삶을 후회않기 위해”

대로 활용해서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덕이 되고 자신도 기쁨을 누리는 인

-헨리. 데이빗. 소로우-

생이 되는지 아니면 잘못 사용해서 허망한 인생을 보낼 것인지는 순전히 우 리 자신의 몫이다.

위의 글은 소로우의 에세이집 윌든에 나오는 첫 귀절이고 또 유명한 영 화,‘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선생이 아이들에게 들려준 귀절이기도

이제 우리 앞에 주어진 2019년, 서서히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면서 크

하다. 2년 2개월을 윌든 호숫가에 몸만 눕힐 수 있는 작은 오두막을 짓고

로노스의 오늘 하루를 카이로스의 기쁨으로 시작하기를 소원해본다. 254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정은실 l

255


칩거하면서 삶을 관조했던 소로우, 비록 한 사람 가까스로 들어갈 작은 곳

에서 만난 소로우 소사이어티의 한 교수의 말을 빌면 소로우 집안의 비지

이지만 그 안에서 그가 꿈꿨던 세상은 얼마나 크고 원대했을까 상상해본

니스였던 연필심(pencil lead)으로 인한 폐병이 아니었나 하는 조심스런 이

다. 또한 작은 모형(replica)의 오두막에 들어가 잠시 그의 기운을 느껴보면

야기도 덧붙였다. 곧 이어 일행은 주홍글씨의 저자이며 에드가 엘런 포우,

서 우리의 삶 중에‘deliberately(자유롭게)’살 수 있는 나의 윌든은 과연

하멜 멜빌과 함께 미국이 인정하는 3대 소설가의 하나인 나다니엘 호오도

어디에 있는가 생각해보았다. 랄프 왈도 에머슨과 함께 자연주의자 또는

온의 고향 셀럼으로 향했다.

초절주의자로 알려진 소로우는 결혼하지 않고 홀로의 몸으로 평생을 단순 하고 금욕주의자의 삶을 살았던 작가다. 목수, 석공, 조경, 토지측량, 강연

일곱 박공의 집과 주홍글씨의 셀럼(Salem)

에 이르기까지 시간제로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산책하고

미국여행을 하다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미국은 짧은

독서하고 글 쓰는 데 할애하며 보낸 사람이다. 그가 자연과 얼마나 깊이 교

역사 때문인지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엔 별 것도 아닌, 어찌 생각하면 하챦

감하면서 살아왔는지는 아래의 글을 보면 좀 더 또렸해진다.

게 보이는 것들에 큰 비중을 두면서 역사적으로 랜드마크를 삼고 있는 경

‘물은 새로운 생명과 움직임을 끊임없이 공중에서 받아들이고 있다.

우가 많이 있다. 그래서 처음엔 코 웃음을 치면서 그냥 지나치기도 했는데

물은 그 본질상 땅과 하늘의 중간이다. 땅에서는 풀과 나무만이 나부끼지

곰곰 생각해보니 미국이 하는 일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대한민국의

만, 물은 바람이 불면 몸소 잔 물결을 일으킨다. 나는 미풍이 물 위를 스

역사, 멀리 고조선까지 올라갈 필요도 없이 이조 말기만 보아도 그렇고 또

쳐 가는 곳을 빛줄기나 빛의 파편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 안다. 이처럼 우

경제를 살린다고 역사는 전혀 뒤돌아보지도 않았던 한국동란 이후의 60년

리가 수면을 내려다 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도 그러하다. 그리고는 뒤늦게야 부랴부랴 간도가 우리땅이라고 부르짖

『월든』중에서)

어도 동북삼성을 움켜쥐고 있는 나라에 말 한마디 못하는 게 사실이다. 언 젠가 중국여행을 하고 온 친구로부터 광개토왕비를 그냥 집앞의 무덤 정

시민불복종을 기억하며

도로 방치를 해 놓은 걸 보고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렇게까지

부당한 시민 정부에 대한 합법적인 개인의 저항을 주장한 에세이『시민

장황하게 서두를 꺼내는 이유는 이번 여행에서 주홍글씨의 저자 나다니엘

불복종』(1849)은 1846년 7월 멕시코 전쟁에 반대하여 인두세 납부를 거

호오도온의 고향 셀럼에 가 보고 적쟎이 놀랐기 때문이다. 심지어 셀럼 시

부하여 투옥을 당한 경험을 생생히 그린 작품이다. 이 책에서 소로우는 노

정부 수입원의 대부분이 나다니엘 호오도온 박물관관광이라는 느낌이 들

예 해방과 전쟁을 반대하는 그의 신념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훗날, 시민불

정도로 한 사람을 크게 띄워 놓았다. 거의 일인당 20불에 달하는 입장료

복종은 20세기 마하트마 간디의 인도 독립운동과 마틴 루터 킹목사의 흑

는 물론이고 많은 여행가이더를 교육시켜서 15인 당 한 조로 일곱 박공의

인 민권운동에도 영감을 준 것으로 유명하다. 멕시코 전쟁과 노예제도에

집을 설명과 함께 구경시키고 끝에는 꼭 선물센타로 향하게 한다. 너무 상

반대하여 인두세(人頭稅) 납부를 거부했던 소로우는 이 때문에 감옥에 수

술이 섞인 게 아니냐며 툴툴거리고 나오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미국이 하는

감되기도 했다. 1859년에는 노예제도 폐지 운동가 존 브라운을 위해 의회

일이 맞다. 자국의 작가들, 특히 청교도시대의 작가들을 영웅시하는 것은

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노예제 폐지 운동에 헌신하며 활발한 강연과 저

어떤 의미에서는 미국의 자존심을 세우는 일이다. 내가 내 나라 사람들을

술 활동을 펼치다 1862년 콩코드에서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번 여행

칭찬하지 않고 업수이 여기거나 가볍게 생각하면 타국에서는 말할 것도 없

256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정은실 l

257


이 더 우습게 볼 것이기 때문이다.

가지 않은 길의 로버트 프로스트 한국인에게 잘 알려진 외국 시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로버트 프로스트

나다니엘 호오도온의 고향인 세일럼은 원래 히브리어로 평화(shalom)를

의‘가지 않은 길’을 꼽을 정도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인이 로버트 프

의미한다. 그러나 명칭과는 달리 수십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악명 높

로스트이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정확한 이름은 로버트 리 프로스트이다.

은 마녀재판, 그 어두운 역사의 상흔이 배어 있는 곳이다. 1630년 6월12

로버트 프로스트는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는

일, 존 윈스롭이 주축이 된 식민지 본진이 당도했으나 인근을 둘러본 윈스

뉴잉글랜드 태생이었으며, 어머니는 스코틀랜드 여자로 에든버러에서 이

롭은 땅이 척박하고 식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세일럼에 정착하길 포기했

주해 왔다. 어머니 Isabelle Moodie Frost는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에서 상

다. 남쪽 해안을 계속 답사해 내려간 윈스롭 일행은 찰스 강어귀를 주목하

당한 교육을 받은 교사였고, 펜실베니아주 루이스타운에서 교편을 잡고 있

다가 그 곳 또한 식수가 충분치 못함을 알고서 최종적으로 강 건너 반도 쪽

을 때, 그 곳에서 같이 교편을 잡고 있는 William Prescott Frost와 결혼

을 정주지로 정하고, 링컨셔에 있는 그들의 고향 도시 이름을 따서 보스턴

했다. 이사벨은 시 쓰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아들의 이름을 시인 로버트 번

이라 명명했다. 이후 세일럼은 어업과 무역에서 보스턴과 경쟁을 벌이면

즈의 이름을 따서 로버트라고 지었고 아버지는 남부의 탁월한 장군 로버

서 항구도시로 발전해 나갔다. 그 곳에 가서 주홍글씨의 첫 장에 등장하는

트 E. 리의 이름을 따서 아들 이름의 가운데‘리’자를 넣었다. 로버트 프

단두대를 찾아보기도 하고 나다니엘 호오도온이 잠시 근무했다는 세관을

로스트의 두서너 곳의 농장 중 프랑코니아는 색다른 묘미가 느껴지는 곳이

둘러보기도 하면서 그 시절“A”를 붙이고 살아야했던 헤스터를 그려보았

다. 두 팀으로 나뉘어서 번갈아서 한 팀은 앞이 트인 목조건물에서 로버트

다. 나다니엘 호오도온은 미국의 소설가로 매사추세츠 주 세일럼에서 선장

프로스트의 생애와 그의 작품을 스크린으로 감상하고 나머지 한 팀은 농장

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났다. 보

을 둘러보았다. 산책로처럼 생긴 오솔길 중간에 마치 길을 안내하는 표지

든대학교에 입학해 나중에 시인이 된 롱펠로우와 미국 대통령이 된 피어스

판처럼 살포시 붙어있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정말 어느 귀절은 그 자리

등과 사귀었다. 그의 가정은 엄격한 청교도의 전통을 지닌 가문으로, 그의

에서 외우고 싶을 정도로 한참을 머물다 가곤 했던 오솔길의 한 가운데서

조상에는 유명한 세일럼의 마녀 재판에서 가혹한 판결을 내린 재판관도 있

가지 않은 길의 나머지 길을 생각해 보았다. 특히‘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러한 가문의 배경은 그의 우울한 성격에 큰 영향

서서’의 마지막연에서 두 번 반복되는‘잠들기 전에 가야 할 먼 길이 있

을 주었으며 <주홍글씨> <일곱 박공의 집> 등 작품의 분위기를 결정한 것

다(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는 구절은 이 시의 절정이다. 새로운

으로 보인다. 그래서 마녀재판의 재판관중의 한 사람이었던 조부를 대신해

삶을 각오한 한 사람이 구두끈을 고쳐 매듯 엄숙하고 황홀하기만 하다. 그

후대 사람들에게 사죄하는 심정으로 원래‘Hathorne’이었던 성에‘w’

길은 누구에게나 지워진 가야만 하는 길에 대한 고뇌와 숙명 같은 것이다.

를 첨부했다고 알려져 있고 한때 영국 리버풀의 미국 영사로 근무하기도

그 길이 아름다운 운율 속에, 내려 쌓이는 눈발 속에 슬며시 감춰져 있다.

했었다. 이제는 아예 대명사가 되어버린‘주홍글씨’를 떠올리며 그 옛날

결정을 제대로 못했다고 생각할 때, 또는 어떻게 결정할 지 모를 때 흔히들

해스터 프린이 겪었을 치욕과 또 그를 감내하며 오히려 신앙으로 승화시

가지 않은 길 (The Road not taken)’을 비유하곤 한다. 그런데 정작 생각

켰던 그녀를 기억해본다. 그리고 끝으로 이번 여행의 대미를 장식하는 가

해보면 우리의 망설임 때문에 또는 일찍 되어진 결정 때문에 우리의 인생

지 않은 길의 작가 로버트 프로스트의 농장으로 가벼운 발걸음을 옮긴다.

이 잘못되어진 경우가 정말 많았던가, 사실 그렇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든

258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정은실 l

259


다. 그보다는 오히려 내가 아직 가 보지 못한 길에 대한 바램과 염원과 소 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인간의 속성 중, 항상 가지 않은

뉴욕에서 띄우는 편지

길, 해보지 못한 일에 대한 후회를 시로 표현한 글이다. 로버트 프로스트

정 재 옥

(Robert Frost: 1874-1963)의 시가 미국 독자들의 시선을 끌게 된 것은 그

의 나이 40세였던 1914년이고 그 후 나머지 긴 생애 동안 그의 명성은 끊 임없이 더해만 갔다. 1914년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미국에서 가장 잘 알려지고 가장 사랑 받았던 시인이었다. 1961년 대통령에 당선된 존 F.

선생님 안녕하세요.

케네디가 취임식에 그를 초청하여 축시 낭독을 요청했다는 사실은 당시 미

조경희 선생님의 배려로 한국수필과는 오랜 인연을 맺어 왔습니다. 지

국문단에서 그의 위치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연희 선생님에 이어 선생님이 이사장님으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은 한국수 필을 통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한국방문시 문학기행을 하면 서

결론

옛 가야국이였던 성주를 거쳐 대구에까지 내려오게 되었고 마침 선생님이

이번 뉴잉글랜드 문학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면서 못내 미국에 대한 부러

대구에 사신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만나뵙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

움을 감출 수 없었다. 작가 한사람 한사람 떠올리면서 미국의 저력을 다시

습니다. 이번 여행을 주도하신 강교수님에게 부탁드렸고 마침 시간을 내어

한번 느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고 현재 우리의 자리에서 내가 해야

와 주신 선생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할 일이 무엇인가 다시 되짚어보는 기회가 되었다. 미국은 시작부터 평범 치 않은 나라이고 그 중에서도 미국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뉴잉글랜드지역

점심 후 이상화시인의 고택과 청라언덕등 직접 우리일행을 가이드 해주 신 선생님 발걸음을 따라 관광하면서 정말 기뻤습니다.

은 참으로 특별함이 있는 곳이다. 언제 시간이 허락하면 다시 한번 와서 역

조용하고 과묵하신듯 하면서 다정하신 선생님 인품에 쉽게 매료 되었습

사를 재조명해보는 역사여행의 테마를 스스로에게 약속하면서 아쉬운 발

다. 그날 길지 않은 만남 이후 선생님은 문학 세미나로 홍콩에 가신다 했고

걸음을 뉴욕으로 돌렸다.

저도 한글 작가 대회 참석 차 경주에 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시간엔 또 제주도 관광길에 올랐고 제한된 시간에 쫓기면서도 선생님을 한번 더 만나고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러질 못하고 한국을 떠나 왔습니다. 11월 20일 돌아와서 감사하다는 인사말씀을 서둘러 올립니다. 뉴욕은 벌써 한차레의 폭설이 내렸고 기온은 떨어져서 한 겨울만큼 춥 습니다. 한국에선 남으로 남으로 제주도까지 햇빛맑고 하늘 파란 가을을

정 은 실 서울에서 태어남. 국립의료원간호대학 졸업. 86년 2월에 도미. 2005년도 5월에 “보통사람의 삶”으로 문학저널 수필부문 등단. 2015년 1월 처녀작 “뉴요커 정은실의 클래식과 에세이의 만남” 출간. 핸드폰총판 에어링크 경영. 뉴욕일보 프리랜서 필진. eunsilchung@hotmail.com

260

l 뉴욕문학 제29집

만끽했는데 여긴 이제 가을을 더 이상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한국의 가 을은 유독 노오랗다 느꼈습니다. 은행잎이 떨어진 가로수길도 온통 노랗 고 골프장의 금잔디도 노오래서 참 이색적이고 멋지고 환상적이었습니다. 정말 잊고 있던 추억속의 실체가 생소하기도 했지만 흘러간 옛 명화속

수필 · 정재옥 l

261


의 주인공처럼 회상아닌 현실 속의 아름다운 재회를 할수 있음에 많이 행

파전을 먹는 사람도 막걸리를 마시는 사람도 없는걸 보니 어설피 향수에

복했습니다. 모처럼 한강변을 마음놓고 걸아 보기도 했습니다. 늘 한번 걸

젖어 보고 싶은 나같은 사람을 유혹하기 위함인 것 같아 자조적인 웃음을

어보고 싶었던 길이었는데 쉽게 그 소원을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제가 묵

속으로 웃습니다. 있어도 혼자 먹을 용기는 없었을텐데….! 그래도 그냥 허

었던 여의도 호텔 11층에서 반쯤 제쳐진 커텐 사이로 밖을 내다 보던 나는

전한 마음에 뭔가를 꼭 먹어야 될것 같아 서성이고 있는데 젊은이가 라면

아! 하는 탄성을 지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강이 바로 발아래 있었기 때

한 봉지, 계란 한 개를 사들고 안으로 사라집니다. 나도 따라 합니다. 사각

문입니다.

알미니움 그릇을 곤로위에 올려 놓으니 자동으로 불이 켜지고 뜨거운 물

높이서 조감도를 머리 속에 그린 후 큰 길하나를 건너서 오른쪽으로 계

도 채워지고 있습니다. 뜨거운 물과 센불과 얇은 알미니움 그릇으로 라면

단을 내려오니 바로 한강에 닿았습니다. 모래사장은 없고 시멘트로 말끔이

은 순식간에 열정을 다 해 끓어 오르고 있습니다. 요리 시간은 3분, 물이

포장된 한강변은 넓고 깨끗한 시민들의 공원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아이들

더 필요하면 물을 더 부으라하고 라면을 더 끓이고 싶으면 더 끓이라 써

은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연인들은 줄지어 서있는 조그만 텐트 속에서 한

있습니다. 나는 물도 더 붙고 더 연장을 해서 요리 시간을 길게 느립니다.

강의 매력에 취해있습니다. 삼삼오오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모여앉아 점 심을 먹으면서 소리 내어 웃고 재잘대기도 합니다. 그리고 더러는 혼자서

새로운 라면 문화가 참 놀랍습니다.

더러는 둘이서 사람들은 한강변을 따라걷고 있습니다. 나도 그들 속의 하 나가 되어 희열에 젖어 발걸음을 뗍니다.

후후 불며 이제는 어둠에 쌓여 캄캄한 한강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혼자 서 라면을 먹습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이쪽에도 저쪽에도 높이 솟은 하얀 고층 아파트들이 아

그런데 왜 자꾸 선생님 생각이 나는 걸까요….!

름다운 스카이라인을 만들어내고 있고 이 두 도시를 잇는 많은 다리가 강

누군가와 함께 걸어보고 싶었던 한강 산책길에 다시 뵙고 싶었던 선생님

위에 그림처럼 떠 있습니다. 서울에 있으면서 파리를 생각하게 합니다. 미

을 떠 올린건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이라 생각되면서도 어쩐지 일방적인

라보 다리, 알렉산더 다리 수많은 다리들이 세느강 이쪽과 저쪽 도시를 이

제 생각에 송구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아무쪼록 나무라지 말아 주셨으

어주고 있고 에펠탑을 떠 받치고 있는 세느강가에도 넓디넓은 공원이 조성

면 합니다. 다시 한국을 방문하게 되면 다시 여의도 호텔 11층에 숙소를 정

되어 있어 수많은 관광객의 물결로 부산합니다. 이제는 이 아름다운 기적

하고 그땐 선생님과 함께 한강 공원을 걸으며 사는 이야기, 문학 이야기를

의 한강 공원에도 관광객이 그곳처럼 모여들기를 기원해봅니다.

맘껏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혼자 또 합니다. 그냥 제 버켓 리스트의 하나

저녁 황혼이 어느덧 사라지고 어둠에 하나둘 네온이 밝혀집니다. 지친 다리를 쉴겸 햇빛 없는“햇빛카페”에서 카푸치노 한잔을 놓고 주위를 살

이니 이 점도 나무라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내내 건강 하시길 바라면서 짧은 인연의 아쉬움에 몇자 안부 드립니다.

핍니다. 젊은 외국인 남녀가 등을 지고 앉아서 식은 커피를 앞에 두고 한 강을 굽어보고 있습니다. 우리도 외국인 관광객이 있기는하네 한편으론 반

뉴욕에서

가웠습니다. 밖에 세워둔 해물파전과 막걸리 메뉴를 보고 들어 왔는데 없다 합니다.

262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정재옥 l

263


모두 사라진것이 아닌 달 11월

라진 지금 주위는 텅비어 있어 계절이 주는 허전함을 비껴 갈 수가 없다. 한 여름 아름다운 향기를 뿜어내며 곱게 피어나던 나의 사랑하는 장미도 어느날 밤 내린 서리로 지금은 얼음이 박히고 그대로 숨을 죽이고 시들어

정 재 옥

버렸다. 활짝 피어있던 꽃송이도 아기의 입술처럼 조그맣고 어여쁘던 꽃 봉오리도 꺼먼 멍자국을 상처처럼 안고 고개를 들지 못한채 풀 죽어 있다 장미피는 기쁨에 늘 즐거웠는데 이젠 위안 받을 그 무엇도 없는 11월이다.

아직은 모두 사라진 것이 아닌 달 11월에 아직은 모두 잊어버리지 못한 사연들이 망각 속을 헤집고 수면위로 떠오른다.

텅비어있는 뜰이 어느날 갑자기 못 견디게 싫증이나 백장미 열 그루를 심었는데 내 정성을 먹고 건강하게 잘자라 주었다. 그리고 매해 오월부터

삶을 위해 일년을 열심히 달려온 우리 모두에게 그 결승지점이 멀지 않

찬서리가 내릴때까지 우아한 꽃과 품격있는 향기로 정원은 벌 나비를 불

았다는 초조감 때문인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론 운동 선수처럼 온 힘을 다

러 모아 축제의 향연을 벌렸다. 화려한 축제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 축제

해 질주해 온 자신을 위해 축제를 하는 전야제의 달이기도 하다. 수확을 거

의 향연도 끝이 났다. 어쩔수 없이 지금은 모든걸 보내야 할 때 인가 보다.

둬드린 농부의 넉넉한 가슴을 안고 모두가 멀리 그리고 가까이 있는 식구

힘을 잃어 꽃잎 하나도 지탱할수 없는 꽃가지를 차마 볼수없어 미련없

들을 만나는 기쁨에 들떠있다.

이 잘라냈다. 잘라낸 자리에서 더 이상의 새싹을 올해는 볼수 없을것 같다.

11월이 주는 이해의 첫 명절은 추수 감사절이다. 머지 않아 다가올 성탄

눈 속에서도 견뎌낼 튼실한 가지만 남겨두고 이렇게 나는 장미와도 철이

절 그리고 모든 것을 거두어갈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또 다시

른 작별을 한다. 한 여름 내내 아삭이 고추를 잉태하며 자신 만만하던 고

숨가쁜 이 해를 마감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날들에 대한 희망에 부풀어

춧대도 미처 따 주지 못해 얼어서 마일갛게 속을 비운 고추 몇개를 매달

다시 힘을 낼 것이다.

고 숨죽어 있다.

젊은 시절 커다란 칠면조를 오븐에 넣고 친지들을 만나는 기쁨에 늘 설 레였는데 이젠 벽난로의 훈훈한 입김도 없이 썰렁한 집을 나와 식구들이

아직은 남아 있는것 들에게서 아픈 흔적을 본다.

다 모인다는 큰애의 집으로 방향을 잡는다. 아직은 남아있는 이해의 마지 막 날들을 위해 사람들은 제각기 분주하다

감성적인 식물은 자신을 살펴 주는 주인의 마음을 헤아릴줄 안다 하는데

길은 차들로 꽉 막혀있다.

장미도 고춧대도 나의 이 비애를 감지하고 있는걸까. 주인이 슬프면 따라

차들은 그리움을 안고 줄지어 길위에 서있다. 오랫만에 이 다리도 건넌

서 슬퍼한다는 동비증, 同悲症 ..... 정말일까?

다. 그를 태우고 항암 치료를 받으러 다니던 서러웠던 나날들이었는데 .. 그랬었는데 … 세월의 갈피속에 퇴색해 버린 내 아픈 상처를 숨기고 의연하다.

사람과 사람의 맺지 못하는 인연을 애달파 하는 애절한 노래, 同心草도 그렇다. 그러고 보면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동물이건 식물이건 감성이 란게 있는것같다. 한갓 풀잎에 까지도…….

11월은 이래 저래 감상에 젖게 하는 달인것 같다. 차창을 스치고 지나가

“아직은 모두 사라진것이 아닌달 11월”법정스님의 이 짧막한 글에서

는 풍경도 단조롭다. 단풍이 물들고 또 그 물든 단풍이 다 떨어지는 스산

우주의 이치를 생각한다. 주위를 둘러본다. 정말 11월은 아직은 모두 사라

한 달에 조락의 비애가 우리의 마음을 적시기도 하고 싱그럽던 녹음도 사 264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정재옥 l

265


지지 않은체 흔적을 남기고 있다. 마치 생동하던 젊음을 다 보내고 이제

의 말씀에 감탄하면서 수긍한다.

는 주위가 적막한 황혼길에 서 있는 우리의 자화상과도 같은 쓸쓸한 모습 이다. 아직은 사라진 것이 아닌 우리모두………그리고 떨어지다 남은 단풍잎

이젠 아플론적인 역동성은 몸의 무게에 눌려 힘을 잃었고 파도처럼 출렁 이던 내 열정도 어느새 물여울 하나없는 호수가 된지 오래다.

몇개 매달려 있다. 모든것을 휩쓸고 지나간 태풍의 황량함에 비해 그래도 얼마나 정겨운 달 11월 인가 !

모두 사라진것이 아닌달 11월에 아직은 남아있는 나를 위해 비우고 가벼 워지는 연습!

이제 남아있는 이 해를 마감하기 위해 그리고 남아있는 내 생을 위해 무 엇을 해야 하는걸까?

오직 디오니소스적인 긍정과 편안함에 익숙해지려 한다.

젊은 스피드도 젊은 건강도 그리고 젊은 아름다움도 모두 모두 과거라는 무서운 괴물에 저당 잡힌지 오래다. 무엇을 하기위해 필요한 용기도 욕망 도 다 잃어버렸다. 아니 마음은 지금도 강렬하게 솟구칠 때가 더러 있긴 하 다. 그런데 맥없이 주저앉게 하는 몸에 달린 브레이크가 더 힘이 세다. 그래 서 나는 몸과 마음은 별개라는 이원론적인 듀엘리즘, Dualism의 신봉자다. 마음은 하고 싶은데 내 몸은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젊은 시절엔 몸 은 뭔가를 하고 싶어 용트림을 쳤는데 마음은 상대적으로 게으름을 피웠 던 것같다. 그러니까 나를 형성하고 있는 몸과 마음은 마치 분단된 조국처 럼 늘 이렇게 상반된 반응을 보이고 있어 한평생 합의점을 찾지 못해 해놓 은게 별로 없다. 연암 박지원 선생은 연경에서 열하까지 그 험난한 여행길에도 몸과 마 음을 하나로 다잡아 문체의 대향연이라 할 수 있는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 기>를 써 냈는데 몸탓 마음탓만 하는 내가 한심한 지경에 이른지 오래다. 지금은 몸이 완전 주인이다. 마음 같은건 힘을 쓰지 못한다. 오늘은 해치 우지 못한 일을 하자 마음 먹지만 무거운 몸이 거부반응을 보이면 하고 싶

정 재 옥

었던 마음은 금새 꼬리를 내리고 만다. 그래서 몸이 편한대로 산다. 그런데

수필집: <나 할말 있다면 그대 사랑한다는 말 뿐이네> <뉴욕의 황진이> <별하나의 나 별하

도 내 몸 구석구석에선 불평이 많다.

미동부 한인 문인협회 7대 회장 나의 당신> <여름이 되면 티티새는 울지 않는다> <티티새연가> 수상: 해와 한국 수필문학상 연암 기행 수필문학상

“네가 몸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 우환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노자

펜문학 작가상 해외 동포 문학상 우수상 esteesong@optonline.net

266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정재옥 l

267


나이는 못 속여

떤 분이“젊은이 자리를 양보좀 해 드리지”하고 얘기를 하더란다. 그러니 그 젊은이 하는 말이“누가 늙으라고 했나?”라고 말을 하더란다. 그분이 서울을 다녀온 다음 서울에서 당한 그 일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오래

차 덕 선

동안 뇌리에 남아 마음도 우울했다고 했다. 어떻게 하다 아이들 교육이 그 모양이 되었는지 한탄을 하는 말을 들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내가 살고있 는 이곳 하와이는‘알로하 정신’이라는 전통이있다. 그 전통은 상대방을

아플 시간도 없이 앞만 보고 달리던 시절이 있었다. 일에 파묻혀 달력을

먼저 생각하는 아름다운 정신이다. 타주나 다른나라에서 관광을 많이 오는

넘길때 마다 내가 늙고 있다는 것을 실감 하지 못했다. 이제 은퇴를 하고

곳이 하와이다. 지리를 잘못알아 헤메일때도 친절을 다해 알려준다. 또 어

내가 꿈꾸던 일들을 하나하나 하면서 이런 일들을 할 수 있는 시간도 나에

떤 어려운일이 발생했을때도 상대방을 걱정해주고 도와주고 상대방을 참

게 주어지는구나. 하며 감사의 생활을 하고 있다. 건강도 정기 검진을 받

편안하게 해준다. 대체적으로 마음들이 착하다.

아 특별히 큰병없이 생활하는데 불편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다. 나는 운

미국에선 보편적으로 모르는 사람을 부를 때 젊은 여자를 미스(Ms), 또

동하면서 사귄 미국 친구들이 많다. 대부분 은퇴를 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결혼한 여자는 미세스(Mrs.) 라는 말을 부쳐 그 사람의 성을 부르기도 한

잘 나오든 사람이 안 보일 때가 있다. 들리는 소리는 병원에 입원했단다.

다. 중년 이상의 나이든 여자는 멤(Mem), 하고 부르는 것이 상례이다. 남

집에서 넘어져서, 또는 갑자기 쓰러져서 거동을 못한단다. 중풍이 온것이

자들은 주로 미스터(Mr.)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화 되어 있다. 하와이에서

다. 어저께는 같이 에어로빅을 하든 사람이 갑자기 쓰러져서 구급차가 와

처음 만나는 사람을 여자는 엔티(Aunty), 남자는 엉클(Uncle)로 부른다. 내

서 병원에 실려갔다. 이런 상황이 가끔 일어난다. 나는 우리들의 이런 모습

가 처음 하와이에 와서 처음 보는 사람이 나를 엔티라고 부르기에 내가 그

들을 보면서‘나이는 못속여’라며 혼자서 속으로 중얼거린다. 대부분 나

리 가까운 사람도 아닌데 어째서 나를 엔티라고 부르는지 이해가 가지 않

이많은 어른들은“작년이 다르고 올해가 달라”하면서 몸이 말을 안 듣는

았다.

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나를 내 또래의 친구들 중에서도 건강해 보인다며

엔티는 아줌마라는 뜻도 있지만 고모, 이모, 숙모 등의 뜻도 있어 친밀

내 나이보다 젊게 본다. 나도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살고 있는 편이다. 그

감을 느끼게 하는 말이다. 엉클 역시 남자를 부를 때 쓰는 말로서 삼촌,

런데 가끔 버스를 탈일이 있어 버스를 탈 때가 있다. 버스 앞 좌석은 노약

아저씨라는 뜻으로 친밀감을 느끼는 말이다. 그런데 이곳에 오래 살다 보

자나 장애자 또는 늙은 사람들이 타는 지정석이다. 때로는 젊은 사람이 앉

니 이제는 이곳 풍습을 알게 되었고 어떤 모임이든 모르는 사람들을 만났

아 있을때도 있다. 그럴때는 벌덕 일어나서“엔티”라고 부르면서 자리를

을 때 여자는‘엔티’남자는‘엉클”로 불리운다. 대체적으로 마음이 선

양보 하는 것이다. 내 스스로는 늙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살고 있는데 여

하고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는 풍습이 몸에 베여있는 좋은 습관을 보면서

지없이 버스만 타면 내가 늙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기분이 참 좋다.

오래전 시카고에 살 때 들은 얘기다. 70세 넘은 분이 서울을 가서 지하철

내가 한국에서 살때만 해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어른을 존경하고 보

을 탔단다. 그런데 노약자 자리가 표시가 되어 있는 자리에 젊은이가 앉아

살피는 것이 덕목으로 도덕이라는 과목은 사람의 인성을 바로 가르치는 교

눈을 지그시 감고 일어나지 않고 있었단다. 그래서 가만히 보고있으니 어

육이었다. 언제부터 이 과목은 없어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인간이 살아가

268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차덕선 l

269


며 인간의 가치를 서로 존중하며 배려하는 풍조는 우리삶을 더 풍요롭게 하며 사회를 행복하게 만든다. 경제적으로 아무리 잘 살아도 인간의 인간 됨을 버리고 물질에만 눈이 가는 나만 아는 이기적인 삶은 자신은 말할 것 도없고 주위의 사람들도 불행하게 만드는 요소가 된다. 내가 살때보다 경

나라걱정 차 덕 선

제적으로 더 부강해져서 잘 사는데도 도덕이나 의식 구조는 그리 좋은 것 같지않다.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물질은 풍부하지만 인정은 메말라가니 안타깝다. 풍요로운 환경속에 인정도 풍부해서 서로 배려하고 존경하고 사

나는 미국에서 산지가 한국에서 산것보다 더 많다. 세계 어느나라를 여

랑한다면 지상천국이 따로없다. 내 조국이 그런날이 오기를 고대한다.“누

행해도 내 여권이 미국 시민임을 증명해준다. 그런대도 내 조국 대한민국

가늙으라고했나?”라고 말을한 젊은이는 평생 늙지않고 사는지 궁금하다.

때문에 요즘엔 밤잠을 설칠 때가 많다. 1977년도에 미국에 왔을땐 백화점 에선 한국 제품을 찾아보기가 힘 들었다. 한번은 백화점에 마이크로 웨브 오븐을 사려갔다. 한국 제품을 찾으니 고장이 잘 나므로 고장없는 일본 제 품을 사라고 세일즈멘이 일본 제품을 추천해 주었다. 그런데도 나는 고장이 잘 난다는 한국 제품을 샀다. 그 이유는 한국 제품 을 많이 팔아주므로 점점 좋은 제품을 생산 할 것이라는 내속에 잠재해있 는 내 조국 사랑하는 마음에서다. 나는 미국에서 33년을 사업을 하면서 한 국제품을 수입해서 미 전국에 팔았다. IMF가 왔을땐 고국의 친척에게 달 라 보내기 운동과 팀을 이루에 고국 상품 수입도 했었다. 한때는 계절마다 돌아오는 수재피해 지역에 성금을 모아 보내기도했다. 대한민국을 떠나와 서 미국에 살아도 내 조국인 대한민국이 부강한 나라가 되어 국민들이 잘 살아야 된다는 마음은 변치않고있다. 그 때의 대세는 일본 제품이 최고로 꼽힐때 였으므로 어느집에 가도 자동차를 비롯해 TV, 가전제품 등 일본 제 품이 없는 집이 없었다. 그런데 세월이 많이흘러 이제는 미국 백화점 제일 좋은 자리에 한국 제품이 자리를 차지하고있다. 가격도 제일 높으며 세계 최고의 상품으로 소비자들의 인기리에 판매되고있다. 한국산 가전 제품은 이곳 여성들의 최고 인기를 독차지 하고있다. 미국에서 가난한 나라 코리 아라는 나라로 각인되어 있던 대한민국의 위상이 지금은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알려저있다. 70년대 이민와서 고장이 잘난다는 한국제 마이크로 웨브오분을 샀던 나는 40년이 지난 지금 모든 가전 제품을 한국제를 애용

270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차덕선 l

271


하며 내 나라 사랑에 푹 빠져있다.

릇인가? 해외 언론은 문재인 대통령을 김정은 수석 대변인 이라는 말까지

G20같은 국제회의에서 세계정상들과 유창한 영어로 자유롭게 대화하

듣고있다. 김정은은 핵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것이 이번 베트남 하노이

며, 유엔에서영어로 연설하며,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고급 영어를

회담에서 확인되었다. 아직도 현실을 부정하며 살인마 독재자 김정은을 짝

쓴다는 칭찬까지 받은 여성 대통령이 자랑스러웠고, 내 조국의 높은 위상

사랑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모습에서 환멸을 느낀다. 김정숙 씨도 경인선에

에 행복했다. 그런데 오늘날은 정반대로 나라걱정에 잠을 설칠 때가 한 두

가자며 두루킹의 은혜에 보답하는 동영상을 국민들이 다 보았다. 문재인대

번이 아니다. 요즘 유튜브를 통해 한국의 실정을 보고 있노라면 양심을 가

통령은 지금까지 변명과 거짓으로 그때 그때마다 용케도 쇼를 하며 피해

진 인간으로서는 할 수없는 일들이 벌어지고있다. 전 정권의 나라를 지키

왔다. 그러나 이제는 국민들은 더이상 속지않는다. 인간으로서 양심이 있

기위한 반공투사들을 적페청산이란 이름으로 감옥에 가두고 상상을 초월

다면 조용히 그 자리에서 내려와 그동안 저지런 죄에 대해 천주교 신자라

한 어머어마한 회수로 드루킹, 킹크렙, 경인선이라는 여론조작팀을 이용하

는 문재인 대통령 신부님 찾아가 고해성사 하고 국민앞에 용서를 빌고 법

여 거짓으로 여론을 조성해서 국민들을 선동했다. 국민들이 정당한 선거로

의 심판 받기 바란다. 자신의 양심을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았다면 양심의

뽑은 대통령을 탄핵해서 감옥에 넣었다. 동네 반장도 아니고, 나라를 이끌

소리에 귀를 기우리기 바란다. 사람하나 잘 못뽑아 국민들이 치루는 대가

어갈 대통령을 거짓의 달인인 무식한 사람인지 모르고 여론조작으로 탄생

는 삶에 직결이 되어 너무도 고통스러운 것을 볼때 안타깝기 짝이 없다.

시킨것이다. 탈원전 정책으로 세계적인 우수한 원자력기술로 수출의 길을

대한민국은 우물안에서 허우적거리며 사는 나라가 아니다. 진정성 없는

열어둔 것도 무산이 되었다.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국

정책으로 쇼를 하며 국민들을 속이는 정치를 국민들이 알아버렸다. 대한민

민들의 삶이 무너지고 있다. 문재인대통령의 오른팔 역활을 한 김경수 경

국은 글로벌 시대에 세계를 이끌어가는 선진국 대열에 서서 선진국들과 함

남지사가 법정 구속 되었다. 드루킹 여론조작 팀을 이용하여 문재인 씨를

께 어께를 나란히하며 세계를 이끌고 나가는 나라가 되어야한다. 미세먼지

대통령으로 당선 시키는데 공을 세운 것이다. 김경수의 법정 구속을 통하

가 국민건강을 좀먹고있다. 세계적인 기술을 자랑하는 원전을 폐세해서 이

여 그 거짓은 더이상 숨길 수가 없게 되었다. 언론, 노조, 교육계, 사법부를

북에 밀수로 석탄을 수입해서, 또 태양광을 설치해서 오염된공기를 만들고

문재인 대통령의 수하로 넣어 대한민국을 망하게 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있다. 미세먼지도 재앙이고 여러곳에 불이나 고통을 당하는 국민도 재앙에

실력이 없는 문재인 대통령은 세계정상들이 모인 G20 모임에서도 꾸어다

시달리고있다. 홍삼을 다려 국차럼 마신다고 해도 매일 숨쉬며 마시는 공

놓은 보리자락처럼 귀퉁이에 두 부부가 서서 알수 없는 둘만의 멋적은 웃음

기가 발암물질이 섞여있는 공기를 마시고 산다면 홍삼도 헛것이다. 옛말에

을 웃고 서있는 모습에 창피하고 울화통이 터졌다. 해외에 나오며 망신하

나라의 지도자는 하늘이 내린다는 말이있다. 국민의 의사는 무시한채 청개

고, 높이올려논 국격을 땅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행동을 더 이상 그만 보면

구리가 되어버린 지금의 지도자는 하늘이 버린것같다. 앞으로 대통령을 뽑

좋겠다. 해외에 사는 동포들은 문재인 대통령이 해외에 나온다는 뉴스만

을때 글로벌 시대를 이끌고 나갈 수 있는 실력있는 사람을 대통령과 영부

나오면 이번에는 무슨 망신을 하고가나? 걱정거리가 하나생겼다. 외교라며

인을 뽑아주기바란다. 국제 대회에 참석해서 기자의질문에 동문서답하는

국고를 탕진하며 하고있는 해외 여행은 김정은의 경제제재를 풀어달라고

무식과 A4 용지들고 정상들과 대담하는 대통령, 천방지축으로 품위를 저

세계정상들에게 협조를 요구했다. 모두 거절을 당하는 수모를 보며 더 분

버린 영부인 이런사람은 더 이상 뽑지 말기를 바란다. 국제망신을 하는 추

통이 터졌다. 대통령이 해야할 의무가 세계를 다니면서 김정은 앞잡이 노

한 꼴은 더 이상 보기싫다. 아니나 다를까 동남아 3개국을 국빈 방문한다고

272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차덕선 l

273


요란을 피우더니 또 어김없이 국제 망신을 하고 돌아왔다. 말레이시아에 가서 사이가 좋지않은 인도네시아말로 인사를 해서 망신을 당하고, 체코

마라케시로 가는 길

를 방문한후 26년전의 체코슬로바키아라는 이름을 사용하다 망신을 하고,

최 동 선

발틱을 발칸이라하고, 캄보디아 앙코러를 방문하고선 대만의 건물을 청와 대 사이트에 올려 망신하고, 아침에 만난 정상에게 그 나라 말도아닌 다른 나라말로 저녁 인사를 하고, 술을 마시지않는 이슬람 국가 부루나이 국왕 에게 건배를 하는 외교결례로 국제적 개 망신을 당했다. 외교참사 금 메달

아이들이 결혼하기 전에 함께 배낭 여행을 하자는 아내의 제안이 저녁

감이다. 정말 창피해서 못살겠다. 국내에서도 A4 용지를 들지않고는 대화

식탁에서 화제로 올려졌을 때만 해도, 그 여행이 실현 되리라고는 예상치

를 못하는 무식하다는 것을 이제 국민들은 다 알고있다. 국고를 낭비하면

못했었다. 다만 그런 계획을 듣는 것 만으로도 아주 오래전 어느 작은 레

서 특별한 성과도없는 해외순방을 자처해서 해외에 나가서까지 문재인 대

스토랑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젊은 날처럼 마음이 설레였다. 그런데 아내

통령 자신이 망신하며 무식하다는 것을 세계에 알릴 필요가 있는지 묻고

는 이미 이동 수단은 물론 숙박까지의 모든 여행 일정을 꼼꼼하고 구체적

싶다. 세계를 다니면서 내가 무식하다고 선전 그만좀 하고 다니면 좋겠다.

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개 망신을 하고도 부끄러운줄 모르니 더 기가 막힌다. 제발 해외에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모로코의 마라케시였다. 눈을 뜨면 온 세상이 붉

나가 망신좀 그만하고 가만히 있으면 좋겠다. 사람마다 그릇의 크기가 다

은 빛이라는 낯선 땅, 미지의 세상에 발을 딛어 보는 일은 생각만으로도 기

르고 자신이 가지고있는 탈렌트도 다르다. 하루속히 문재인 대통령은 주제

대가 되었다. 영화‘인디아나 존스’에서 스치듯 지나갔던 장면속에 마라

파악 하기바란다.지금의 문재인 대통령은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는 대통령

케시가 있었다는 것도 뒤늦게 알았다.

직에서 해방되기 바란다. 미국에 살고있는 동포들도 나라걱정 하지않고 다

우리가 탄 모로코행 비행기는 이런 저런 이유로 출발이 지연되었다. 물

리펴고 잠 잘 수 있도록 문재인씨 대통령직 내려놓고 그동안 어마머마 하

론 안내 방송도 없었으며 두 시간여가 지난 후 승무원으로 부터 첫 비행기

게 지은죄 법적으로 심판받기 촉구한다. 행복한 국민은 못 만들어 줄지라

탑승 기념 증서와 작은 선물을 받고서야 우리가 처음 비행하는 항공기의

도 안보불안,경제파탄, 문재인자신의 법치파괴로 점점 힘들어하는 국민들

승객이 되었음을 알았다. 승무원이 건넨 빵은 굳어 있었고 커피도 식어 있

이 안스럽고 안타까워 잠 못 이루고있다. 제발 잠 좀 자자.

었으나 붉은 도시에 대한 기대나 설레임은 막지 못했다. 여덟 시간 남짓의 비행 끝에 모로코에 도착했으나 활주로에서 입국장까지 버스로 이동해야

차 덕 선 부산 출생. 약사. 현 미국 하와이 거주 그린에세이 등단 뉴욕문학, 하와이 문인회 신인상 한국 산문 작가협회 회원 미 동부 한국문인협회 회원 재미수필 문학가협회 회원 미주 한국 문인협회 회원 그린에세이작가회 회원 저서: 수필집‘여자로돌아와서'

하는 불편함도, 불친절한 입국 수속도, 여행의 과정일 뿐이었다. 오히려 이 런 강화된 입국 절차가 이슬람 국가에 처음 발을 내딛는 우리에게는 최근 빈발하는 IS테러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덜어 주었다. 자국민 인듯 보이 는 이들에게는 여권 만으로는 부족해서 비행기 탑승권이나 여행 증명서까 지 요구하며 까다롭게 하는 것을 보며 오래전 내 조국에서 처음으로 외국 으로 나갈 때 긴장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Gloria.d.cha@.gmail.com

274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최동선 l

275


마침내 마라케시 공항 밖으로 나왔으나 시간은 이미 자정이 가까워져 있

운데를 질러가면 광장 안의 온갖 소리가 들려왔다. 불빛조차 새어 나가지

었다. 우리가 여행 전 숙지한 예비 지식에는 택시의 바가지 요금을 항상 조

못하고 갖힌 그 광장 안에서 빛이 모이고 소리가 모여서 탄성이 되고 환호

심해야 한다는 주의 사항이 맨 앞장에 나와 있어서 주눅 든 마음으로 택시

가 되는 순간이었다.

운전사와 가격을 흥정할 수 밖에 없었다. 어느 누구는 여행이 끝났을 때 기

그 한 가운데에서 그들이 즐겨 먹는 스프를 맛 볼 때였다. 열살도 채 넘

억에 남는 것이 곤란한 경우를 겪었을 때라고 해도, 막상 마주한 현실에는

어 보이지 않는 소년이 우리가 앉은 식탁으로 와서 가이드의 말이 끝나기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낯선 이들에 둘러싸여 눈빛과 몸짓으로 상황을 판

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이드는 열심히 스프에 대한 설명을 하였으나 우리

단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황스러웠으나 두 아이들이 나서서 흥정한 끝

들의 관심은 온통 아이에게 향해 있었다. 한참을 지나서야 아이가 있음을

에 우리는 적당한 가격에 택시에 탈 수 있었다. 모로코 전통 가옥인 리아드

안 가이드에게 소년은 남겨진 스프를 먹어도 되는지 물었다. 가이드는 익

(Riad)를 경험해 보자고 첫 숙박지로 정했으니 주택가 한복판 어디쯤에 숙

숙한 표정으로 남겨진 스프를 아이 앞으로 밀어 주었고 그 아이는 인사도

소가 있을거라고 예상을 했었지만, 택시는 도심의 불빛이 점점 멀어져 가

없이 스프를 먹었다. 일행중 독일 여인이 자신이 채 먹지 않았던 스프를 아

는 작은 골목 입구에 우리를 던지듯 내려놓고 다시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이에게 건냈으나 익숙함이 고마움을 앞선 듯 아이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며

동양인 가족을 낯선 눈으로 바라보는 가게 앞에 모여 있던 이들이 가르키

마음이 무거웠다. 소년은 광장으로 걸어 들어가고, 아이를 품은 광장은 다

는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섰다. 길은 보이지 않았고, 순간, 어디에로도 닿지

시 아무일 없는듯 북적거렸다. 가이드가 말을 이었다.‘우리의 신앙은 아

않는 작은 미로에 갇혔다는 생각이 들어 경계심을 늦출 수 없었다. 그 길에

주 간단합니다. 자정 이후 남은 음식은 저 소년처럼 필요한 이들에게 모두

는 닫힌 문만이 있었고, 문을 열지 않는 한 문은 다만 벽일 뿐이었다. 온통

나누어 줍니다.’광장으로 걸어 들어간 소년과 가이드가 말하는 그네들의

벽은 벽으로 이어져 길을 만들고, 그 길이 끝나는 막다른 길에서 몇 번을

신이 있는 나라, 나는 지금 그 광장에 서 있다.

돌아 나와야 했다. 가로등인들 제대로 갖추어졌을리 없었으므로 가장 밝은 빛이 달빛이라고 생각해도 좋은 그런 벽 속에서 사람이 나왔다. 우리가 끄 는 캐리어 소리를 듣고 마중나온 리아드의 주인이었다. 주인을 따라 그 벽 속으로 들어가서야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밤에 본 붉은 도시의 낯설음은 아침 햇살 아래 친근하게 모습을 드러냈 다. 지난 밤에 헤매던 길 위에는 아이들이 나와서 공을 차고 놀고, 남루하 지만 작은 좌판에서 파는 음식도 눈에 들어왔다. 무턱대고 시도하는 것이 여행이라지만, 우리는 맛을 기행하는 투어를 신청했다. 가이드를 따라 그 도시의 음식에 대해 설명을 듣고 시식을 함으로써 그들의 삶과 역사를 조 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빵을 굽는 공동 화덕을 보고, 그 화 덕에서 구워낸 빵을 시식하고, 올리브를 종류별로 맛보고, 그들이 마시는 차를 마시며 후식을 즐겼다. 가이드를 따라‘제마 엘 프나’광장의 한가

276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최동선 l

277


여름, 그 강을 건너다. 최 동 선

이제 작은 도시는 휴가에서 돌아 온 사람들로 다시 생기를 찾았다. 여름 내내 따가운 햇살만 머물던 타운 센터의 주차장에는 빈 자리를 찾는 자동 차들이 꼬리를 물고 서 있다. 옷가게는 늦은 시간까지 오픈 사인을 내 걸 었고 가을 옷으로 갈아 입은 마네킹은 말갛게 빛나는 유리창 너머에서 손 님을 기다린다. 평소 빈 가게처럼 조용하던 이발소는 옆집의 피자가게 만

새벽녘 창틈으로 들어 오는 바람이 마치 목덜미에 찬물이 닿은 것처럼 느껴졌다. 여름이 강을 건너나 보다. 몸을 웅크려 이불을 끌어 당기며 내일 에는 한 뼘쯤 열어 둔 창문을 닫아야 겠다 고 생각했다. 산 아래로 내려오니 한나절 걸음이면 들이 닥칠 거리에 가을이 고개를 내 밀고 있다. 나는 아직 몸에 붙은 여름 찌꺼기를 모두 털어 내지 못한 까닭 에 마음이 조급해 진다. 오랫동안 미뤄 왔던 화해. 서푼 짜리의 관용, 비루 했던 오만. 얄팍한 인내 같은 구차한 언어들로 포장하며 간신히 이어가던 나의 하루는 오늘도 여름을 따라 강을 건너지 못한 채 길을 잃었다. 어쩌면 모르는 척 놓아두고 싶은 마음 또한‘나’일지도 모르겠다. 미국에 와서 처음 내 집을 마련했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낯선 땅에서 힘들게 마련한 첫 보금자리 였기에 마당에 피는 이름 모르는 꽃 한송이, 나 무 한 그루에도 마음이 쓰이고 정이 갔었다. 휴일이면 아내와 꽃을 심기도 하고, 아이들과 뒤 뜰에서 숲 사이로 보이는 작은 연못까지 가는 오솔길을 만들기 위해 어설픈 삽질로 땀 흘리던 시절이었다. 오랜 시간 사람의 발길 이 닿지 않은 숲에는 자작나무가 쓰러져 뒤엉키고, 잡풀이 우거져 흔적으 로만 남은 길이 있었다. 그 길이 연못과 한 걸음 씩 가까워 질수록 숲으로 가는 길은 그만큼 신비로웠다. 생을 마친 나무 밑둥에서 새 순이 올라오고 햇살이 머물고 지나간 자리마다 꽃이 피었다. 그리고 시간은 그 어린 나무

큼 많은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리며 핸드폰 속 세상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 고, 피자가게 창밖으로 들려오는 소녀들의 웃음 소리가 하늘만큼 푸르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피자 가게로 들어가고, 꽃을 한 다발 안은 중년의 사 내가 환하게 웃으며 그 옆의 꽃집을 나선다. 마주 오는 그 사내와 눈인사를 나누며 나도 따라 웃는다. 이제 여름은 사람들의 감성속에서만 뜨거운 계 절로 스멀스멀 기어 다닐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오늘도 여름의 끝을 잡고 익숙한 산책길로 향했다. 지평선 끝까지 키를 늘린 그림자 하나가 나를 따라 나섰다. 낯선 고요속에 잠겨도 보고 내가 딛는 발자국 소리에 화들짝 놀라기도 하며 강가를 서성거린다. 순해진 햇살이 적당히 빛 바랜 의자에 시치미를 떼고 앉아 있다. 나도 그 옆 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며 허수아비 처럼 팔을 벌려 남은 여름 빛을 안는다. 멀지 않은 곳에서 큰 새 한 마리가 참나무 숲으로 급하게 내려 앉았다. 가려진 나뭇잎 사이로 날카로운 울음 소리가 들려오고, 숲에 들어간 큰 새 가 다시 하늘로 날아간다. 비명소리 들리던 숲으로 성급히 들어가는 어미 새가 안쓰럽다. 대부분의 아픔은 잊혀지고 엷어 지겠지만 그것 마다 내성 이 생기는데 필요한 시간의 길이와 폭이 다른 거라고 위로해 본다. 그 어 미새도 나도 오늘은 이 강가에서 여름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 여름 은 끝내 강을 넘어가 버렸다.

의 작은 잎도 붉게 물들이며 가을이 왔음을 알게 하고, 다시 발 밑에 그 잎 을 내려놓아 양분으로 삼게 했다. TV에서 방송되는 다큐멘터리에서나 본

최 동 선

듯한 풍경이 날마다 창 밖에 펼쳐지는 것을 바라보며 계절의 변화를 제일

성균관 대학교 대학원 졸업

먼저 받아 들였던 때이기도 하다. 순환은 지극히 평온했고, 모든 생명의 신

뉴욕 한국일보 칼럼 필진 (2010-현)

비가 같은 무게로 존귀하다는 것을 배운 시간이었다. 278

l 뉴욕문학 제29집

뉴욕문학 수필부문 수상 (2016년) 미주 한국일보‘주말 에세이’필진 (2018-현) dschoi0808@hotmail.com 수필 · 최동선 l

279


獨逸사랑, 希臘사랑

하고 오라는 인사 발령을 내렸다. 78년 독일로 떠났다. 41년 전 일이다! Commerzbank 연수(硏修)프로그램에 따라 현지 Goethe학원에 다시 등

副題: 그리스映畵祭에 出品된 最新作 “80年 만의 歸去來辭”를 中心으로… 韓 泰格

록하였다. Goethe에는 미국에서온 고교(高校) 독일어 교사에서부터 방그 라데쉬 은행원, 아프리카 가나에서 온 의사에 이르기까지 현지 독일어와 언어습관을 배우기 위해 온 직장인들이었다. 인종 박물관 같았다. 그 학생 중 가장 가까이 지냈던 Last Name의 철자가 열개는 족히 넘어보이는 希臘 즉 그리스친구였다. 그는 그리스 문교성이 파견한 체육교사였다. 필자와 그리스(希臘)와의 인연(因緣)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필자는 학창시절 제 2외국어로, 울고 들어가 웃고 나온다는 독일어를 선 택하였고, 졸업 후 취직한 명동(明洞)소재 한 은행근무 중에도, 근무 후 종

시공(時空)을 뛰어넘어 2019년 뉴욕…

합상사 Nego(수출환매입 輸出換買入)계 직원들의 강요(强要)에 못이겨 명 동 뒷골목 유흥업소(遊興業所)를 밤마다 누비며 곤드레 만드레 취하느니 이미 발디딘 독일어를 갈고 닦는 것이 더욱 생산적일 것같아 명동에서 돌 을 던져도 닿을 거리에 있는 남산뒷편 Goethe Institut를 다니다, 말다를

필자의 고객 중 절반은 그리스인들이다. 자부(自負)컨데 이젠 그리스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을 제외하고, 그리스친구를 필자만큼 다수 갖고 있는 한국인도 흔치않을게다..

거듭하고 있었다. 각설하고..그러다보니 Greek Community에서 개최되고 있는 행사에 관 당시 사회분위기는 모든 국민들이 일치단결(一致團結)하여 조국의 경제 성장을 위해 박차(拍車)를 가하고 있을 때였다.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 힘입 어 금융계에서도 종합상사들의 수출을 측면지원하기 위하여 해외 점포망 을 확충해 나가고 있었다.

심이 지대(至大)하다. 특히 2016년~2017년 대한민국에 몰아닥친 탄핵사 태 이후에는 대한민국과 뉴욕한인사회와 절연(絶緣)하고 살고 있으니, 그 동안 대한민국에 쏟아왔던 애정과 열정은 Greek Community로 전이(轉移) 되지 않았나 싶다. 그들 행사 중 매년 4~5월 경에 개최되는 영화제(映畵 祭) 출품작중 4~5편 정도는 꼭 섭렵(攝獵)한다. 올해 상영된 9편의 영화 중

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은행에서도 금융시장의 다변화(多邊化)를 목적 으로 유럽대륙으로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제 2 외국어를 선택해

가장 인상적인 영화는 제일 마지막날 마지막회에 상영되었던“Last Song to Xenitia”였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왔던 직원이 없었는지 은행에서는 필자를 재독(在獨)광부들과 간호사들 의 급료을 담보(擔保)로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차관(借款)을 제공한 독 일 Frankfurt 소재 Commerzbank로 파견하여 선진금융기법을 터득(攄得)

280

l 뉴욕문학 제29집

그리스 산간벽촌(山間僻村)에서 태어나, 학교라곤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 던 10대 후반의 촌뜨기 Vasiliki Papachristou Skouleta양은 세계적인 대

수필 · 한태격 l

281


공황(大恐荒)이 몰아치던 1931년, 몇년 전 이민온 Greek청년 Mr. Scortes

열(隊列)에 합류하였다. 필자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의 초청을 받고 단신(單身) 대서양을 건넌다. 두 사람은 뉴욕에서 그리 멀 지 않은 펜실바니아주 Harrisburg에서 백년해로(百年偕老)의 연(緣)을 맺

“작품 속 주인공은 꿈에 그리던 조국을 80년만에야 귀향(歸鄕)하였다.

고 Diner을 경영하며 아이들을 키운다. 아이들이 성장한 후, 100세가 되던

그리스인들도 유태인들처럼 Diaspora (고향떠나 사는 민족)인 것같다. 제

해 기억을 더듬어 340편을 담은 옛 시(詩)와 민요(民謠)를 모아“A Weft

가 독일에 살 때 그리스인들이 독일에 많이 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미국

of Memory: A Greek Mother's Recollection of Folk Songs and Other

에서도 뉴욕 뿐만아니라 대도시에 Greek이 없는 곳이 없다. 심지어 오세

Poems”라는 시집(詩集)을 1975년부터 1978년 3년간 아라비아반도 남단

아니아 주에도 많은 그리스인들이 살고 있는 것을 보았다.‘배(船)가 닿는

Yemen국 주재 미대사(美大使)를 역임한 아들 Thomas의 도움으로 세상에

곳’이면 그리스인들이 살고 있는 것같다. 그리스 본토(本土) 인구가 9백

선보인다. 103세되는 해, 드디어 팔십 여년만에 꿈에만 그리던 고향을 찾

만내외로 알고 있는데 해외거주 그리스계(系) 인구는 몇 명정도이며, 몇 개

는다. 고향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Karolos Papoulias 대통령까지 그녀

국에나 흩어져 살고 있는지요?”

를 극진히 영접(迎接)한다. 감독인 딸은 국무성에 오랫동안 근무하였던 외교관 츨신인 아버지에게 당시 Populism(인기영합주의)과 선심(善心)성 정책남발(濫發)로 국가재

마이크를 넘겼다. Thomas 대사의 답변은“아마 국내 인구의 2배는 훨씬

정을 거덜낸 그리스 좌파 사회당 정부는 IMF당국으로부터 구제금융 제공

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해외거주 그리스계는 줄잡아 2천만은 되지 않을

을 조건으로 긴축재정을 요구받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불만에 가득찬 시위

까요? 그런데 그리스인들은 유태인처럼 눈에 크게 띄지 않습니다. 성격들

대들은 연일 시 중심부를 장악(掌握), 진압경찰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한

이 유순(柔順)해서 그럴런지도 모르지요…..”

쪽에서는 돌팔매질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최류탄을 쏘아대고 있는 상황 이 전개되고 있었다…

영화관을 꽉 메웠던 관객들은 다음 Hellenism 문화를 체험할 기회를 기대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앞사람을 따라 출구 쪽으로 나가고 있는

다큐멘터리 Last Song to Xenitia는 국내의 경제전망이 밝지 못해 젊은

데 낯모를 Greek관객 몇 몇이‘유일(唯一)한 타인종(他人種)’에게 다가와

이들의 국외탈출이 감행(敢行) 되고 있는 상황에서 차세대들에게 삶에 대

질문이 좋았다고 치켜세워 주었다.‘대단한 내용도 아닌 것을 가지고..’

한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소멸(消滅)위기에 처한 구전(口傳) 시와 민요를 전

마치 Greek사랑이 보상(報償)을 받는 듯한 기분이었다…게다가 그들에게

달하는 과정을 영상에 잘 담고 있다.

‘내 영어로도 전달이 되었구나’하는 조그마한 자긍심을 느끼게 해 주었 다.‘오늘 관람료는 공짜다!’… 영화관 밖은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늘

특히 이 다큐멘타리는 주인공 Vasiliki 여사의 손녀 즉 Thomas Scortes 대사의 딸인 Athena가 감독(監督) 하였다는 것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의 기쁨은 다민족(多民族)이 함께 사는 뉴욕에서만 만끽(滿喫)할 수 있는 특권(特權)같았다…..

영화가 끝난 후, 감독과의 대화시간이 주어졌다. 필자도 질문자들의 대 282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한태격 l

283


Internet 時代의 奇跡 副題: 雙方向 疎通追究 韓 泰格

번 검색하여 보았더니 한선생께서 2017년 8월21일에 쓰신‘건국, 건군의 산 증인을 모시고’*라는 칼럼 속에 김세원대사님이 등장하시더군요. 칼 럼 말미에 선생께서 적어놓으신 연락처를 보고 한선생이라면 김세원대사 님의 연락처를 알고 계실 것으로 확신하고 미국이 편한 시간에 이렇게 연 락을 올리는 것입니다. 한태격선생님의 배려로 이렇게 이역만리에 사시는 김대사님을 찾을 수 있게됨에 진정 감사드립니다. 제 전화번호를 김대사님

꼭 1년 전 일이다. 2018년 5월 어느 화창한 주말, 정오시간이 다 되어

께 알려 드려주십시요. 제게도 김대사님 전화번호를 카톡으로 알려주시기

가는 시간에 한국의 전화번호인듯한 010-2546-28XX가 휴대폰에 떴다.

바랍니다. 성사가 되면 저희 수수료로 4 그리고 지주께 6을 드립니다. 순

“ 선생님이시지요?”“예, 그렇습니다만…”“여기는 서울입니다. 김세

조롭게 진행되면 제가 한태격선생님을 섭섭치 않게 뫼시겠습니다”“제 역

원 전 스웨덴대사님을 알고계시지요? 아직 생존(生存)해 계십니까?”“그

할이 있나요?…제 몫은 고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양측 성사가 잘 되기를

럼요, 정정하십니다. 어제도 통화했습니다.”“저는 김대사님을 오랫동안

기원하겠습니다. 카톡으로 김대사님 연락처를 남겨놓겠습니다. 현재 김대

백방으로 찾아 헤맸습니다. 아직 살아계시다니 천만다행입니다. 아흔이 넘

사님은 Florida에 계십니다. Florida는 뉴욕과 시간대가 같습니다. 시간대

으시지요?”“예. 그러십니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저와 대사님이 가깝게

를 감안하여서 연락드려보시지요. 기뻐하실 것입니다.”

지내고 있는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서울은 한밤중일텐데요? 무슨 일로 이 야심(夜深)한 밤에 전화를 주셨습니까?”

물론 기동력으로 살아가는 필자는 서울과 통화가 끝난 직후 Florida Port St. Joe 소재 하기(夏期)별장에 머무르고 계신 김대사님께 보고드렸

“아 참 제 정신봐라.. 제가 드디어 대사님을 찾았다는 사실에 흥분되었 던 모양입니다. 소개를 드리지 못했군요… 저는 서초동 법원근처에 있는

다. 마치 위관장교가 제독님께 보고드리듯…김세원대사님은 필자의 해군 대선배이기도 하다….

성낙일법률사무소에서 사무장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조상땅을 찾 아주거나 그와 결부된 부동산을 처분해드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위 실례(實例)는 Internet시대 글을 쓰면서 경험한 하나의 에피소드다…

전화를 드린 이유는 김대사님께서 석주일이라는 분과 공동명의 소유로 되 어 있던 영등포구 상도동 소재 부동산을 75년도 중반경 매각한 사실이 있

그러나 Internet이 없었던 시절 학창시절을 보낸 필자는 글쓰는 문인들

으십니다. 그때 반듯한 땅은 매각하고 별로 쓸모가 없었던 자투리땅은 팔

이나 신문사기자들에게 답답함을 느꼈고 불만이 많았다. 그들의 글이나 말

지 못하셨습니다. 얼마 전 그 자투리 땅에 관심을 보이는 임자가 나타났습

이 소설이 되었건 시가 되었건 신문기사가 되었건 또는 방송이 되었건 인

니다. 아마 2억정도는 족히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대지소유자를

쇄매체나 방송매체의 일방통행(一方通行), 일색(一色)이었기 때문이다. 자

찾을 수 없어 차일피일하고 있었습니다. 석주일씨는 이미 세상에 계시지않

기들의 이야기만 전달하려고하고 자기들의 주장만 내뱉곤 사라지는 것에

고, 그 분의 상속자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안타까움을 느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아무리 독자로서, 시청자로서, 반론을 제기하고 싶어도 그들과 연락할 방도(Access)가 없다는 것에 안타

우연한 기회에 인터넷을 통하여‘김세원’이라는 이름 석자를 다시 한 284

l 뉴욕문학 제29집

까움을 느끼곤 하였다 수필 · 한태격 l

285


나중엔 그런 답답함, 안타까움 또는 불만은 체념화되었다. 그러던 중 십 수년전 우연한 기회에 글 쓰기를 시작하면서 최소한 내 글 을 읽는 독자들에게는 언제나 나와 소통(疎通)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하여 주

꼭꼭 숨은 보물 찾아 나누리! -미동부한인문인협회 주최 고교백일장 대회를 감사하며-

어야겠다는 평소 소신을 실천에 옮기기로 하였다. 글 말미에 반드시 필자의 전화번호와 E-Mail 주소를 적어놓기로 하였다. 언제라도 반론이 있으면 용이(容易)하게 글쓴이와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팰리세이즈팍 고등학교 교사 황정숙

나의 주장, 나의 뜻만 일방적으로 전개하고 사라지는 그런 무책임한 행동 은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런 취지로 연락처를 써 놓은 것이 위와 선행(善行)으로까지 이어졌다. 후기(後記): 김대사님께서는 두 달 후 7월 몇 십년만에 귀국, 지난 40년 간 뇌리(腦 裏)에서 사라졌던 영등포구 상도동 토지소유권을 행사하고 미국으로 돌아오셨다. 하마터면 한태격의 칼럼에 독자반론용 연락처를 적어놓지 않았더라면, 김대사님의 그 짜투리 땅은 무주물(無主物)이 되어 국고로 귀속될 뻔했다!!! 김대사님도 까맣게 잊고 계셨던 땅 하물며 따님들이야! 미국인 사위들은 말할 것도 없고…. 두 분께서는, 필자는 전혀 기대치 않았던, 두툼한 흰봉투까지 전달해 주셨다! 부기(附記): 본 칼럼의 주인공이신 金世源(김세원) 전 스웨덴 대사님께서 이 원고 를 교정보는 날(2019.6.18) 밤 11시11분에 뉴욕주 Upstate에 소재한 Gilford자택 에서 영면(永眠)하셨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冥福)을 빕니다.

미국에 와서 맞이한 따뜻한 봄날이 어느새 스물하고도 다섯 해를 넘기 고 있다. 2010년 3월 정규학교 한국어 교사 자격증을 발부받고 그해 9월 첫 주부터 고등학교의 한국어 교사로 일을 하게 되었다. 2010년 9월, 고등 학교에서의 첫 한국어 수업은 10년간의 럿거스 주립대학에서의 한국어 지 도 경력이나 20년간의 토요 한국학교에서의 지도 경력을 가진 내게도 결 코 녹록치 않은 현장이었다. 다양한 민족의 학생들이 다양한 수준의 차이 로 한국어 반을 찾았다. 첫해는 30여명의 학생들이, 1년 후에는 100여명 의 학생들이, 그리고 2019년 현재 중학교까지 합쳐 300명 이상의 학생들 이 한국어 반을 찾고 있다. 첫 해 2개 반이었던 한국어 반이 다음 해 5개 반으로, 2013년 가을부터는 7학년과 8학년까지 합쳐 총 7개 반으로 늘었 으며, 2019년 현재는 5학년과 6학년 까지도 한국어 수업이 확산되고 있다. 고등학교 한국어 수업 커리큘럼에 한국 문화 체험도 넣어서 김밥 만들 기와 호떡 만들기, 붓글씨 배우기, 전통 민화 그리기, 나전칠기, 사물놀이

註* 는 2018 뉴욕문학 제 28 집에 게재되어있다.

韓 泰 格

등을 하며 미국 고등학생들에게 한국의 다양한 문화를 알렸다. 또한, 떡 국 만들기, 녹차 마시기, 부채 만들기, 윷놀이와 제기차기 그리고 투호 등

서울高, 高麗大 商大卒. 大韓民國 海軍 中尉 豫編. 韓一銀行 Frankfurt

의 전통 민속놀이 배우기, 추석 대잔치 행사, 태권도, K-pop 소개 등을

事務所 次長 勤務. New York Daily News, Bank of America 勤務.

시도해 보았다.‘Beautiful Korea’란 주제로 티셔츠 디자인 공모전을 해

Bridge Enterprises (架橋販促物社: 뉴욕市政府 調達品 納品 指定業體­) 運營中. NYC Food Consulting Group 運營中. 朝鮮日報 姉妹紙 '月刊朝鮮' 뉴욕通信員 (2004年 以來). 2004年 隨筆 “詩人과 淸掃婦”로 文壇 登壇. 2009年 慶熙大學校 制定 海外同胞 文學賞 受賞 “뉴욕에서 바라보는 早期留學”.

서 입상자에게는 아이패드를 선물하고 한국어반 티셔츠를 만들어 모든 한 국어반 학생들과 교사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또한, 한국어 시낭송 대

navyofficer86201@yahoo.com

286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황정숙 l

287


회 및 한국 시/수필 쓰기 대회 등도 실시해 보았다. 학기 중에 뉴욕의 박물 관으로 현장학습 체험을 다녀오기도 했고, 한국 식당에서 한국 음식을 주 문해 먹고, 김치 담그기와 만두 만들기도 체험해 보는 시간도 가졌다. 또 한, 뉴욕의 The Korea society 로 가서 한국의 전통 탈을 만들고 봉산탈 춤을 배워보기도 하고, 민화와 서예도 배워 보았다. 뉴욕한국문화원의 후 원으로 예술 강사의 지원을 받아‘전통 나전칠기’만들기 시간도 가져보았 고, 뉴욕의 대학 교수님들을 모시고 남북한의 문제에 대한 진지한 토론의 포럼 시간도 가져보았다. 이런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학생과 동료 교사에 게 자연스럽게 우리의 전통 문화를 알리고 나누는 소중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언어’는 결국 삶을 나누는 것이기에 문화를 함께 익히면서 상대 와 마음을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 큰 결심을 갖고 한국 어 반에 스스로 문들 두드리고 찾아온 고마운 학생들인 만큼, 진정한 보람 을 얻고 돌아가게 해 주고 싶고, 수업을 통해 그네들의 영혼과도 교통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러한 한국어반 수업의 지원 행사로서, 몇년전부터‘미동부한인문인 협회’에서 주최하는 한글날 기념,‘고교백일장대회’를 우리 고등학교 학 생들도 치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협회에서는 해마다 푸짐한 장학금 과 상품을 준비해 주셨다. 평상시에는 수업에 집중하지 않은 학생들까지도 글짓기 대회날은 사뭇 진지했다.‘친구’,‘인연’,‘가을’,‘낙엽’,‘가 장 소중한 것’,‘꿈’‘사랑’등의 다양한 주제로 1시간 안에 시나 수필을 써 보는 시간이었다. M 학생은 평상시 작곡을 하고 싶어했는데 그날 멋진 시로 장학금을 받게 된 이후 작곡가의 꿈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고, 매사에

인협회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교사인 나로서는 아이들의 고운 시심을 엿보거나 아픈 상처를 살짝 들여다 볼 수 있는 감동의 시간이었음을 고백 한다. 자신을 내려놓고 조용히 글을 써보는 그런 시간들은 각자 아이들 안 에 숨어있는 또다른 아이들을 만나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꿈은 그렇게 자라고 아이들은 그렇게 자라는 것 같다. 40여년전, 경기도 파주 동패리 산골의 노오란 개나리 그늘 밑에서 어린 동네 꼬마들을 모아놓고 한글을 가르치던 초등학생 아이가 어느새 커서 이 국 땅에 와서 외국어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몇 년 전에는 인도네시아 에도 갔고 몽골에도 갔다. 작년에는 아프리카 가나에도 가서 한국어를 가 르치면서 아이들 속의 아이들을 만나고 왔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돈 도 별로 없고 뭐하나 내세울 것 없어 마땅히 남에게 줄 것들이 없다. 하지 만 오래전에 내 안에 간직했던 한국어와 한글의 보배를 가지고 그네들에 게 나의 것을 나눌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 도 내일도 그 보물들을 꺼내어 나눔의 현장에 있고프다. 지친 일주일을 마 무리하는 토요일, 갑자기 어린시절 뛰놀던 동패리 산골의 개나리 그늘 밑 에 숨어들어가 살랑거리는 봄바람 이불덮고 낮잠이라도 실컷 자보고 싶다. ‘봄’은 내 마음의 추억을 꺼내보는 계절같다. 곧 여름이 올 것이고 가을 과 겨울이 올 것이다. 바라건대, 그때도 나이 들어가는 나는 여전히 내가 가진 소중한 한국어와 한글이라는 보배를 꺼내어 필요로 하는 누군가와 그 것을 나누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흩날리는 벚꽃 그늘 아래 앉아서 다가오는 또다른 새 계절을 설레는 맘으로 기다리고 있 는지도 모른다. 여름이 온다.

자존감을 잃고 있던 P학생은 그날 이후로 어깨를 활짝 펴고 교실과 복도 를 누비는 자신감 넘치는 학생으로 변했다. J 학생은 수상을 한 이후에 작 가나 기자가 되겠다며 자신의 미래를 차근차근 준비하기도 했다. H학생은 언제 다시 글쓰기 대회가 있는가를 물으며 선발되지 못한 아쉬움으로 다음 해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은 여물지 않은 풋풋한 아이들에게 소 담스런 열매로 나타날 계절을 준비하도록 귀한 기회를 주신 미동부한인문 288

l 뉴욕문학 제29집

수필 · 황정숙 l

289


아르테미스 1. 통 로 김 도 연

왼쪽 팔에 분홍색 꽃 다섯 송이가 만발한 화분을 감아들고, 오른 손은 기 내용 사이즈의 진 회색 수트케이스 핸들 위에 사뿐하게 놓여 있었다. 디트 로이트 공항 지하의 무빙 워크에 서 있는 명연의 시선은 앞을 향하고 있

소설

었지만, 실제로 그녀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그녀 는 밝은 회색 베낭을 메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그녀의 컴퓨터 랩 탑과 충 전기, 삼분의 일 쯤 읽은 소설 한 권, B5 크기의 얇은 스프링 공책, 연필과 검은 색 펜, 칫솔과 휴대용 사이즈 치약, 휴대용 사이즈의 폼 비누와 로션, 다른 작은 크기의 화장품 샘플들, 상당한 현금이 들은 지갑이 들어 있었다. 디트로이트 공항 지하의 무빙 워크는 두 개의 큰 터미널을 이어주는 역 할을 하고 있는데, 조명이 매우 어둡고, 소란스런 음악과 여러 색의 움직 이는 조명으로 공간과 시간의 개념을 혼란스럽게 했다. 그녀가 서 있는 워 크 웨이가 자동으로 움직이지 않고, 사람들이 끊임없이 걸어 양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이 공간은 마치 우주의 어두운 공간 어느 곳처럼, 아 무도 찾지 못할, 여기 있어 본 사람이 아니라면 존재 여부조차 의심스러운 그런 곳이었다. 비행 시간이 바짝 다가온 사람들은 무빙 워크 옆을 짐을 들고 뛰어가고, 어떤 사람들은 무빙 워크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퀴 달린 수트 케이스 를 끌고 서둘러 그녀의 옆을 지나갔다. 그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자신 이 타야 할 비행기를 정확하게 알고 게이트를 향해 가는 듯 했고, 그들의 삶은 저 게이트 너머에 있는 비행기가 데려다 줄 그 목적지에 속해 있는 듯 했다. 이 공간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진짜 삶과 진짜 사람들

소설 · 김도연 l

291


전에 존재하는, 어떤 관련도 없고, 관련도 없을, 그런, 존재하지만 그저 공

다렸다. 그러나 숨소리가 사라지기는 커녕 더 거친 숨소리로 바뀌었고, 그

항의 일부에 녹아있는 그런, 만나지만 어떤 의미도 부여할 필요를 느끼지

녀는 그녀의 팔목을 큰 발바닥으로 흔드는 것을 느끼고는 눈을 다시 떴다.

않은 그런 배경과 같은 사람들로 서로에게 존재했다.

커다란 갈색 곰이 털이 북실한 발로 그녀를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우는 것 이었다. 그녀가 눈을 뜬 것을 확인하자 곰은 큰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를

워크 웨이가 반 쯤 지나는 시점에서 명연은 큰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의

깨웠던 발바닥을 두세 번 핥고는 그녀를 향해 웃음을 지었다. 아니 웃음을

옆으로 땋아 내린 긴 머리가 그녀의 가슴과 같이 움직였다. 오늘 아침 그녀

지었다고 명연은 그 순간 느꼈다. 곰의 젖은 숨결에서 무언가 달콤한 냄새

는 다섯 번째 이 무빙 워크에 서 있는 중이었다. 삼 일 전 그녀가 타야 할

가 났는데, 지난 삼일 동안 맞아보지 못한 냄새, 봄철 시장에 과일 가게 앞

비행기를 놓친 후에, 갑자기 그녀는 어딘가로 향하고 싶은 욕구를 잃어버

바구니에 가득 담긴 딸기같은 냄새였다. 명연은 그녀가 어디 있는지 순간

리고, 아니 잃어 버렸다기 보다는 그녀의 목적지가 진짜 그녀가 가야 할 곳

잊어버리고는 몸을 일으켜 곰과 마주해 앉았다. 곰은 바닥에 앉아 있었지

인지를 의심하기 시작하고, 공항에서 이 무빙 워크를 한 터미널에서 다른

만 덩치가 워낙 커서 의자에 앉은 명연과 얼굴 높이가 거의 같았다. 명연

터미널로 왔다 갔다 한지 몇 시간이 지나고, 밤이 되고, 공항 의자에서 밤

은 순간 누군가가 그녀를 놀리려고 곰처럼 분장하고 그녀의 앞에 앉아 있

을 보내고, 내일은 공항 카운터에 들려서 비행기를 다시 찾아야겠다고 생

는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앞에 앉아 있는 곰은 의심할 여지 없

각했지만, 아침이 되면 그 의지를 잃어버리고, 정작 어디로 가야 할 지, 어

는 커다란 갈색 곰이었다.

느 게이트 너머 비행기가 그녀의 진짜 삶으로 안내해 줄 지를 생각하기 시

둘은 한참이나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명연은 아직도 잠에서 덜 깨어난

작하고, 그러면서 하루가 지나고, 저녁이 되고, 다음 날은 꼭 비행기를 찾

몽롱한 놀라움에, 곰은 명연을 자세히 관찰하듯이 그녀의 얼굴, 손, 옷, 다

아 탈 거라 다짐하고, 그녀의 길고 마른 몸을 공항 의자에 접어 잠이 들고,

리, 발, 그녀의 가방, 그녀의 화분을 차례로 바라 보았다. 그리고 커다란 앞

그 다음 날이 되면 그녀의 목적지가 더 모호해져서, 마치 이 공항의 지하

발로 그녀의 화분을 가리키고는 그녀가 보기에는 약간 미안한 표정을 짓

무빙 워크가 그녀의 새 집이라도 되는 양 그녀의 화분을 왼팔로 꼭 안고,

는 것 같았다. 명연은 화분을 들어 곰에게 내밀었다. 곰은 고개를 숙여 코

이 움직임이 어디론가 안내해 줄 것 같은 어리석은 믿음 속에 하루가 가고,

를 바짝 들이대고 꽃송이 하나씩 차례로 냄새를 맡았다. 곰의 코가 마치 살

저녁에 다시 다음 날은 그녀에게 꼭 맞는 비행 편을 찾을 거라 다짐했다.

아있는 하나의 동물처럼 움직였다. 곰은 그녀를 한 번 더 바라보더니 제일 키가 큰 분홍색 꽃을 입에 베어 물고는 천천히 씹기 시작했다. 한참을 씹고

삼일 째 되는 밤 명연은 B Terminal 43번 게이트 앞에서 밤을 보내기로

꿀꺽 삼키더니 혓바닥을 입 밖으로 길게 내어 놓고는 발바닥으로 여러 번

마음 먹었다. 형광등 하얀 불빛이 너무 밝지 않은 의자를 택해 팔걸이 밑

문질렀다. 꽃은 곰이 좋아하는 맛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이번에는 명연이

으로 가늘고 긴 몸을 누이고 잠이 들었다. 몇 분이 지났을까, 그녀는 그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곰은 명연을 다시 쳐다보고는 한 마디를 던졌다.

의 이마 위에 누군가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있는 느낌에 눈을 떴다. 커

“아르테미스.”

다란 갈색 곰이 그녀의 앞에 앉아 얼굴을 들이대고 검은 눈으로 그녀를 바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큰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며 걸어서 공항의 복도

라보고 있었다. 명연은 다시 눈을 감았다. 마치 꿈에서 덜 깨서 환상이라

저편으로 사라졌다. 명연은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고, 화분을 그녀의 다리

도 본 듯, 그녀는 다시 눈을 감고 그녀의 얼굴 앞의 숨결이 사라지기를 기

위에 놓은 채 앉아있었다.

292

l 뉴욕문학 제29집

소설 · 김도연 l

293


어느 순간 그녀는 잠이 든 모양이었다. 이른 아침 공항 바닥을 청소하는 진공청소기 소리에 그녀는 잠이 깼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곰은 없었다.

Tampa Washington D.C.

모든 것이 그녀가 곰을 만나기 전 전날 저녁과 같았다. 다만 그녀의 화분 에 제일 키가 큰 꽃이 사라지고 곰의 이빨 자국이 남은 꽃대가 덩그러니 네 송이의 꽃들과 서 있었다.

명연은 목적지 안내 전광판에서 각 도시를 하나씩 머리 속에서 읽어 내 려갔다. 글자 너머의 그 도시, 그 지역의 삶을 알아내기라고 하려는 듯이 천천히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세 곳을 기억하고는 시간 순서대로

Atlanta

그녀가 마음에 적은 첫번째 행선지의 비행기가 출발하는 게이트로 천천히

Baltimore

걸어갔다. 두 개의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고는 지하 무빙 워크에 서 있는

Boston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사람들은 여전히 부산스레 그녀의 옆을 바쁜 걸음

Charlotte

으로 지나쳐갔다.

Chicago Dallas

Houston, Texas

Fort Lauderdale

Boarding Time: 8:10 am

Honolulu

Departure Time: 8:50 am

Houston Ionia

현재 시간 7시 40분. 많은 사람들이 게이트 앞 의자에 앉아 있거나, 어

Los Angeles

떤 사람들은 게이트 앞에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두 세명의 사람들이

Miami

카운터에 기대고 비행사 직원들에게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었고, 공항 직

Minneapolis

원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주변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면서 무전기로 명연이

New York

알아듣기 힘든 말을 주고 받고 있었다. 명연은 그녀의 수트케이스를 끌고

Orlando

화분을 들은 채로 유리 벽으로 다가가 여기서 대기 중인 사람들을 싣고는

Phoenix

Houston으로 날아갈 비행기를 바라보았다. 큰 비행기가 날개를 펼치고 있

Portland

는 모습이 자신감에 넘치는 듯 보였다. 그녀는 갑자기 기운이 쑥 빠지는 듯

Salt Lake City

그 자리 바닥에 주저 앉았다. 저 비행기에 몸을 싣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San Diego

Texas의 큰 도시로 가볼까 했던 마음이 공항의 생명 없는 바닥으로 빨려

San Francisco

사라지는 듯 했다. 그녀의 눈에 닿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은 그녀와 거리가

Seattle

먼 외계인, 아니 그들이 외계인이 아니라 그녀가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알

St. Louis

수 없는 지구에 착륙한 외계인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비행기를 향해 시선

294

l 뉴욕문학 제29집

소설 · 김도연 l

295


을 다시 돌리고, 유리 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Boarding Time: 2:30 pm Departure Time: 3:10 pm

St. Louis, Missouri Boarding Time: 11:45 am Departure Time: 12:20 pm

옷차림이 달랐다. 게이트 주변 대기 중인 승객들의 옷차림, 무언가 가벼 운, 비가 지나간 봄 날 아침같은 냄새, 커다란 침엽수림 사이에서 오랫동안 걸은 듯한 그런 냄새, 그런 냄새가 났다. 중형 크기의 비행기가 게이트 밖

명연은 걸어서 마음에 둔 다음 행선지로 갔다. 비행기 보딩 시간이 되 려면 아직 한시간 십오 분이 남아 있었다. 비행기는 그 전 출발지에서 도

에 서 있었고, 공항 직원들은 출발이 임박한 게이트에서 보는 것과 똑같이 카운터에 두 명, 분주히 무전기를 들고 움직이는 사람들 두 명이 있었다.

착하지 않았는지 창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주변의 가게들을 둘러보

서 있는 사람들, 앉아 있는 사람들, 핸드폰을 보고 있는 사람들, 책을 읽

다가 간단한 음식과 음료를 파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은 모두 자리

고 있는 사람들, 헤드폰이나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듣거나, 어린 자

가 차 있어서 바에 앉아서, 카프레제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했다. 오늘의

녀들을 주시하고 때로는 이런 저런 주의를 주는 사람들. 명연은 의자 중간

첫 식사였다.

빈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신도 이 비행기에 몸을 싣고 떠날 한 사

세인트 루이스. 한 번 가보지 않은 도시였다. 그녀는 항상 그 도시가 궁

람이라도 되는 듯, 기분이 좋았다. 목적지가 생긴 것 같았다. 존재하지만

금했었다. 누구라도 그 도시를 방문하는 사람은 무언가 의미심장한 이야

존재하지 않는, 속하지만 속하지 않는 이 공간을 떠나 갈거라 생각했다. 작

기 거리를 하나는 가지고 나올 것 같은 그런 도시였다. 가끔 우편엽서나

은 두려움이 마음 한 구석에 피어났지만 그녀는 고개를 들어 주변 사람들

다른 사람들의 소셜 미디어에 나오는 사진들을 보면서 그녀는 그런 생각

을 하나씩 다시 바라보았다.

을 했었다. 뭔가 끈끈하고, 달달한, 그런 기억을 만들 것 같은 도시, 죽음

그녀와 맞은 편 대각선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체크 무늬 낡은 셔츠에 카

이 가까이 왔을 때 자주 생각으로 돌아가게 되는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 내

키색 바지, 무언가를 읽고 있다가 그녀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고개를 들었

는 도시, 그러나 슬픈 결말로 끝나 마음 아픈 이별을 고하게 되는 그런 도

다. 눈이 마주쳤다. 명연은 급하게 시선을 떨구었다. 그녀의 땋은 머리가

시처럼 그녀에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도시로 가는 비행기는 전 공항에서

그녀의 어깨 밑으로 떨어졌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는 그 남자의

아직 출발 하지도 않은 모양이었고, 한 두 시간 계속 연착으로 안내가 되

시선과 다시 마주쳤다.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처럼 보였고, 책을 많이

더니 결국에는 취소되었다. 게이트 주변에 모인 대기 승객들의 절망스러

읽은 분위기가 나는 사람이었다. 그가 웃었다. 그녀도 살며시 미소를 지었

운 한숨들이 포기함으로 바뀌고, 하나 둘씩 다른 비행 편을 찾기 위해 공

다.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화분을 가리켰다.

항의 큰 카운터나 라운지로 사라졌다. 게이트의 안내 모니터에 다른 목적

“무슨 꽃이 에요?”

지로 가는 비행편이 표시되었고, 명연도 걸음을 옮겨 세 번째 행선지로 마

“사이클래맨요.”

음을 둔 게이트로 향했다.

“공항에서 꽃을 보니까 신기하네요.” 그녀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사람에게 편안한 안정감을 주는 그런

Portland, Oregon

296

l 뉴욕문학 제29집

힘이 있었다. 포트랜드의 커다란 침엽수 같은 사람이라고 그녀는 생각했

소설 · 김도연 l

297


다. 그는 다시 웃고는 포트랜드로 가는지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그렇다

한, 세상의 모든 시간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자체의 시간은 비 지속적이거

고 대답했다. 하지만 이 비행 편이 아니라고. 그러자 그는 그녀에게 왜 여기

나 행선지에 대비해 상대적으로만 존재하는 그런 공간, 이 곳에서 저 곳을

에 있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녀의 비행 편을 놓쳐서 다시 탈 비행 편을 기다

이어주는 곳이지만, 저 곳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곳 자체로서의 존재만

린다 말했다. 그리고 그가 읽고 있는 책을 가리키며 무슨 책이냐고 물었다.

으로는 어떠한 효용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공간, 임시적인 만남을 제

“무라카미의 단편집이에요.”

외한 지속성을 전제로 한 인간적인 교류와 관계의 성립이 무시된 그런 공

그가 말하면서 책을 건넸다. 그녀는 무라카미의 책을 꽤 읽었다고 생각

간에서, 명연은 4일째의 밤을 맞이하고 있었다.

했는데 처음 보는 책이었다. 그녀는 책 속의 단편 제목들을 살펴본 뒤 그 에게 책을 돌려주었다. 보딩 시간이 되어서 안내 방송이 나오고 대기 승객

공항 화장실에서 이를 닦고, 세수를 한 후, 짐을 다시 챙겨 명연은 Jo-

들이 게이트 앞에 줄을 서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를 한 번 더 보더니, 가

seph이란 남자에게 책을 받은 게이트가 있는 곳으로 갔다. 같은 의자에 앉

방에서 연필을 꺼내 책 마지막 페이지에 무엇인가를 적고는 그녀에게 책

아서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를 정성스럽게

을 건넸다.

읽어 내려갔다. 그녀가 읽었던 장편 무라카미의 책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

“시간이 있다니 읽고 포트랜드에 오면 돌려줘요. 나는 아직 다 못 읽었 으니 꼭 연락해서 돌려줘야 돼요.”

이 났다. 두 번째 단편을 다 읽었을까? 졸음이 몰려와 그녀는 책을 그녀의 가슴에 안고는 배낭을 베고 옆으로 누워 잠이 들었다.

그녀는 얼떨결에 책을 받아 들었다. 그는 일어서서 가방을 들고 그녀를

꿈에 그녀는 금 화살과 활을 들고, 큰 뿔이 달린 사슴을 타고는 반투명한

향해 손을 흔들고는 게이트로 걸어갔다. 그녀는 그가 게이트 너머로 사라

하얀 드레스를 여신처럼 입고, 사냥을 다니는 꿈을 꾸었다. 잠이 깨자 그

질 때까지, 그가 탄 비행기가 게이트를 떠나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같은 자

녀는 그녀가 꿈에서 본 자신이 전 날 갈색 곰이 이야기한 아르테미스의 모

리에 앉아 책과 화분을 꼭 들고 있었다. 그리고 책을 펴 마지막 페이지에

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다. 혹시 곰이 다시

그가 적어 놓은 것을 보았다.‘디트로이트 공항의 꽃 화분을 안은 그녀에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불안감으로… 공항은 조용했고, 아무도 보이

게, Joseph.”그리고 전화번호. 그 글자들을 읽는 순간 그녀와 게이트 너

지 않았다. 맞은 편 의자 아래 쪽에 아주 작은 반짝이는 물체가 눈에 띄었

머의 세상에 작은 끈이 하나 드리워진 것 같았다.

다. 마치 그녀에게 발견되기를 기다리기도 했다는 듯, 그녀의 시선이 바로 닿는 편에… 가는 금줄에 조그만 두 개의 날개가 펜던트로 달린 목걸이였

그 날 오후에서 저녁까지 그녀는 서쪽으로 향한 공항 유리 벽 가까이 바 닥에 앉아 몸을 유리 벽에 기대고 있었다. 그녀의 화분이 햇살이 필요할

다. 그녀는 주워서 한참을 세심하게 바라본 후, 고리를 열어 목에 걸고, 배 낭에서 물을 꺼내 마시고는, 아침까지 곤히 단잠을 잤다.

것 같아서였다. 서쪽 하늘이 옅은 분홍빛에서 짙은 주황색으로 바뀔 때까

지 그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자연의 법칙이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공

아침 8시의 공항은 벌써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 게이트에서 저 게이트

간에서 매일 하늘은 붉게 물들고, 석양이 지고, 밤이 되고, 동쪽의 해가 다

로 움직이는 사람의 물결 속에서 명연은 잠을 깨고, 세수를 하고, 거울 속

시 세상을 비추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녀가 속한 현실은

의 자신을 바라본 뒤, 베낭을 메고, 화분에 물을 주고, 수트케이스를 끌고,

24시간 내내 같은 형광등이 같은 공간을 비추는 움직이지만 멈춰있는 듯

비행기 출발 편이 안내되어 있는 공항 안내 스크린 밑에서 이 공항에서 갈

298

l 뉴욕문학 제29집

소설 · 김도연 l

299


수 있는 목적지를 하나씩 머리 속으로 그려 보고, 게이트에서 게이트로 한 참을 걷다가 피곤해지면 무빙 워크에 서 있거나, 간단한 음식을 먹으며 책

“네가 할 줄 아는 다른 말은 없는 거야. 나에게 해 줄 말이 있어서 나에 게 나타난 거야?”

을 읽거나, 바쁘게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상상

명연의 물음에 곰은 대답하지 않고, 빤히 쳐다보았다. 명연은 용기를 내

해 보면서 어디로 가야 할 지 뚜렷한 확신이나 의지를 찾지 못한 채, 그녀

어 손으로 곰의 털을 만져보았다. 부드러웠고, 따뜻했다. 살아있음이 느껴

의 목에 걸린 금색 작은 날개를 만지작거리며, 화분의 4개의 꽃송이를 바

졌다. 살아있음이… 무언가 죽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리지 않고 존재

라보면서, 공항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토록 확실해 보이는 삶이, 방향이, 왜

하는 부드러움이 곰의 털에서, 곰의 딸기 향내나는 숨에서, 곰의 젖은 혓바

그녀에게는 이리도 불분명한지를 의아해 하면서, 보고, 생각하고, 또 보고,

닥에서 느껴졌다. 명연은 바닥에 앉아서 곰의 이 곳 저 곳을 조심스럽게 만

의문하고, 그리고 밤이 되었다.

져보았다. 밝은 색의 털로 감싸진 가슴과 따뜻하고 말랑한 배, 무섭게 생긴 검은 발톱이 달린 앞발들, 검게 윤이 나는 코, 그녀의 손이 닿자 살짝 움직

명연은 곰을 보았던 게이트로 가서 밤을 보내기로 마음 먹었다. 그 곰

인 귀… 곰은 그녀가 만져주는 것이 좋은지 고양이가 낼 만한 가르랑거리

을 다시 만나게 되면, 길게 대화를 해보리라 마음 먹었다. 같은 의자에 가

는 소리를 내었다. 명연은 곰에게 기대고 눈을 감았다. 곰이 숨을 쉴 때마

서 배낭을 누이고, 그 위에 머리를 얻은 채, 화분을 가슴 가까이 팔로 두르

다 가슴과 배가 오르락 내리락 했다. 부드럽고 규칙적인 움직임에 아기처

고 잠이 들었다.

럼 잠이 들었다. 따뜻했다.

딸기 냄새, 코 끝을 간질이는 딸기 냄새에 잠에서 깨어났다. 곰이 얼굴을 첫 날 만났을 때보다 바짝 들이대고 그녀의 얼굴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녀

다음 날 아침 청소기 소리에 잠이 깼을 때 그녀는 공항 의자 밑 바닥에

가 눈을 뜬 것을 보자 곰은 천천히 몸을 뒤로 기대어 앉았다. 그녀도 천천

누워서 잠든 자신을 발견했다. 곰은 없었고, 그녀의 짐과 화분, 책이 그녀

히 일어나 앉았다. 둘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한참을 마주 보고 앉아 있었

의 곁에 놓여 있었다. 화분에 꽃 4 송이 그대로 있었고, 그녀의 날개 달린

다. 곰이 그녀의 목걸이를 가리키며 먼저 말을 꺼냈다.

목걸이도 그녀의 목에서 반짝였다. 그녀에게 남은 곰의 흔적은 그녀의 옷

“아르테미스.”

에 심하게 붙어 있는 곰 털들… 그녀는 조심스럽게 곰 털 들을 떼어 냈다.

명연을 다시 목걸이를 만져 보았다.

다 떼어내니 거의 한 주먹이 되었다. 두 손을 몇 번 문지르자 털들이 서로

“너는 이 목걸이의 주인을 아니?”

엉켜 작고 얇은 펠트 뭉치처럼 되었다. 그녀는 Joseph에게 받은 책을 펴서

곰은 대답하는 대신, 커다란 앞 발로 그녀를 가리키고는 핥았다.

곰 털 뭉치를 책갈피 가운데 넣고는 배낭에 집어 넣었다. 따뜻하게 잔 덕인

“너는 어떻게 이 공항에서 살게 된 거야?”

지 그녀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명연은 심한 시장기를 느끼고는 이도 닦

그녀가 물었다. 곰은 대답하지 않는 대신, 그녀의 옷과 가방, 수트 케이

기 전에 식당 가로 향했다.

스, 화분을 차례로 살펴 보았다. 명연은 화분을 들어 곰에게 내밀었다. 곰 은 고개를 저었다. 명연은 가방에서 Joseph에게 받은 책을 곰에게 내밀었

8시 45분, 겨울잠에서 깨어난 곰처럼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명연은 다시

다. 곰은 킁킁 거리며 냄새를 맡은 후, 혀를 내밀어 책의 겉장을 핥았다. 명

출발지 안내 스크린 밑에 서서 여러 도시의 이름을 하나씩 바라보았다. 어

연은 재빨리 그녀의 셔츠로 곰의 침을 겉장에서 닦아 냈다.

제나 그제와 거의 같은 스케줄의 출발 시간과 도착지들… 이름만으로 이미

300

l 뉴욕문학 제29집

소설 · 김도연 l

301


친숙하게 느껴졌고, 이름 너머의 도시를 생각해보는 그녀의 상상력이 지쳐 가는 듯 했다. 오직 포트랜드만이 다른 의미를 가진 도시로 그녀에게 기억

그는 외로운 이방인

되었고, 게이트 너머 저 도시에 그녀가 기대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 실이 그 도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김 영 자

그녀는 포트랜드 행 비행 편을 예약하려고 공항 카운터로 갔다. 그러나 선뜻 사지 못했다. 이 공항에 끝내지 못한 일이 그녀에게 남겨져 있는 것 같았다. 곰과 목걸이와 아르테미스. 그녀는 곰이 뜯어먹은 화분의 덩그런

그때는 이 저자의 미국 이민생활이 약 20년쯤 되는 1900년대, 지금 생

꽃대를 바라보았다. 곰, 아르테미스, 날개, Joseph, 책. 이 공항에 도착하

각하면 까마득 하면서도 어제 같이만 느껴지는 사건이 하나 있다. 그 무렵

기 전 그녀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 명연은 하루만 더 머무르기로

미주 한인 이민역사가 1세기를 넘고 있었으나 이국에서 뿌리를 내리며 생

결심하고, 이 공항의 모든 곳을 그녀의 발로 속속들이 밟아 주리라 생각했

존하고있는 교포들의 뼈아픈 투쟁과 고난은 그칠줄을 몰랐다. 이 소설은

다. 머무름이 허용되지 않는 통로같은 이 공간에 관심을, 시간을 더 주기

저자가 통역인으로 일하면서 목격한 잊지못할 이야기를 우리 거룩한 민족

로 마음먹고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공항의 단단한 바닥에 그녀의 발

사랑하는 마음으로 엮어 드리는 이야기이다.

자국을 남기기라도 할 듯 그녀는 힘있게 한걸음 한걸음 내디뎠다. 그녀의 목 뒤에 목걸이의 가는 금줄이 창문으로 들어온 아침 햇살에 반짝이고, 그

유월 어느날 집에 와보니 통역중개사무실에서 나의 전화 녹음기에 메시

녀가 왼팔로 꼭 안고 있는 화분에 아주 작은 새 꽃 봉오리 세 개가 돋아나

지를 남겼는데 C텔레비전 방송국에서 한국 전문통역인을 이틀간 필요로

고 있었다.

하니 즉시 전화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이 중개사무실의 영국태생인 Mira의 우아하고 고풍스런 영어는 나의 존경의 대상이었는데, 지난 5개월간 브루 클린 어느 한인 청과상이 흑인 주민들로 부터 불매 운동 대상이 되고있었

<2019, 봄>

다는 사실이 번듯 상기되었다. 이 사건은 몇 개월이 지났음에도 뉴스를 떠 나지 않았고 그 사건의 배경은 한 하이티 여인이 물건을 사는데 1불이 모자 라 말다툼이 생기면서 분노한 여인은 브루클린 검찰청에 그 한국인을 고발 했고 적지 않은 숫자의 흑인들이 동조하여 하루도 누그러지지 않고 계속해 김 도 연 (金到演) 본명 김신희(金信希), 1972년 出生

서 그 상가 앞에서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화여자대학교 학사, 석사 (1994, 1996) Cornell University, Ph.D. (1999) 가톨릭대학교 교수 (2003-2010) Cornell University, Visiting Professor & Lecturer (2007) Cornell University, Research Scholar (2010-2012) 2012년 뉴욕문학에 마음의 초상으로 등단하여 단편소설과 수필을 꾸준히 게재 저서로는 <그림자 떼어 걷기> (2015), <코끼리의 귓속말과 고래의 뜀박질> (2016) 이 있음 현재 미국 뉴욕 주에서 <Solid> 영문 장편 소설 집필 중.

TV가 비춰주는 한국인은 몇 마디 서투른 영어로 자기 입장을 밝히는 것 이 었으나 그의 말보다는 텅비어가는 가게와 일그러진 얼굴표정이 애처 럽게만 보였다. 한편 TV영상에 비추이는 흑인 데모자들은“Go Home, Korean!”을 외치며 발을 굴렀다. 한국상인의 무언적인 대꾸에 더욱 오기

sk127@cornell.edu

302

l 뉴욕문학 제29집

소설 · 김영자 l

303


에 찬 흑인들의 얼굴들, 그들은 그 무엇이 한이 되어 이렇게 목에 핏대를

하는 한국인들은 부지런한 정신으로 미국의 식생활에 필요한 야채를 다듬

올려 목청을 뽑고 있는지? 한편, 간단한 영어 몇 마디와 단단한 팔목 그리

고 과일을 씻고, 꽃을 둘러놓고 어두운 거리에 밝은 등을 밝혀줌으로써 뉴

고 움켜진 주먹이 그의 모든 자산이었을 한국인의 모습은 다행히 한참 떠

욕 시민들에게 생활의 편의를 주고있는 청과상들 …

들썩하고 있는 독일 통일문제와 정계문제등에 압도되어 TV 뉴스에 잠깐 눈에 비치다 사라지곤 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기자가 말하기를 기사 내용이 충분히 준비되었으니, 시간문제로 오늘 청과상 방문은 취소하고 다시 질문이 있으면 전화 하겠다

우연히 Mira의 전화를 받기 2주 전에 나는 뉴욕 잡지사의 한 기자로부터

며 나를 중도하차시켰다. 그 한 달 후에 발간된 뉴욕 잡지기사에는 한국인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의 말은 다음날 브루클린 사태에 대한 전반적

에 대한 기사 내용이 우호적인 입장으로 나왔음에 나를 기쁘고 놀라게 했다.

인 스토리를 모을 계획이니 통역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한 30대의

그 기사는 한국인의 복잡다단한 재정거래와 계의 놀이를 다루기보다는 한국

목소리로 퍽 공손하고 짤막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그의 신중한 태도

인의‘정’이라는 즉 한국인의 사고방식과 행동은‘정’으로 인해 노고를

에 끌려 쾌히 응락하였다. 그 당시 나의 심정은 뉴스에서 몇 번 보았던 브루

견디고 또‘정’에 쏠려 이 외지에서 투쟁한다는 내용도 나왔다. 아마도 잡

클린 사태를 실제로 답사하고 장본인들과 대화를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지기자 자신도 그의 뜻하지 않은 한국인의 다른 우아한 인간사회 상을 느

무엇인가 통역인으로서의 기여를 할 수 있겠다는 결단이었는지도 모른다.

끼게 되었음인지도 모른다.

다음 날 그 뉴욕 잡지사 기자는 자그만한 개인 승용차를 몰고와 우리는

통역중개사 Mira로 부터 C 방송국 취재를 위한 통역인이 필요하다는 메

찬란한 태양 속에 퀸즈쪽으로 향했다. 나의 선입견이 틀리지는 않았는지,

시지를 받았을 때 나는 Mira에게 감사를 표하고 그가 불러주는 번호를 돌

그가 묻는 질문들은 한국인에 대한 불이해와 관습적이고 편파적인 입장에

려 C방송국 코디네이터 Lisa를 찾았다. Lisa는 브루클린에 현재 보이코트

서 나오는 그의 호기심이 엿보였다.

를 당하고 있는 청과상 주인집에 새벽부터 출두하여 그의 하루일과를 사진 에 담고 싶다는 것이었다. 가게에 물건을 풀어놓고 하루를 지내는 장씨의

“한국인들은 거의 대학교육을 받고 미국에서 많이들 청과상을 한다고

모습을 모두 카메라에 담고 그와 대화를 나누어 보고자 하는데, 장씨는 어

들었는데요, 사실인가요? 한국인들은 계를 만들어 돈을 저금한다는데 그

느정도의 영어는 하는 것 같지만 만반의 안전과 이해를 위해 통역인이 필

것은 비공식적인 은행거래가 아닌가요?”등의 질문이 연달았다. 우선 나

요하다는 것이었다.

는 어디까지나 그의 인터뷰 대상자가 아닌 통역인이기 때문에 그의 역질문 에 구태여 대꾸할 의무는 느끼지 않았다. 아니 될 수 있으면 그 질문에 구

다음날 약속한 대로 새벽 4:30분에 C본사 앞에서 만나 그들 밴을 타고

체적으로 답하느니 방향을 돌려 우선 우리 한국인들의 긍정적이고 자랑스

브루클린으로 향하였다. 밴에는 방송 취재인 Peter, 카메라맨, 밤색 머리를

러운 인간적 관계와 풍습에 연관 시키려 시도했다. 나는 부드러운 말씨로

길게 느려뜨린 젊은 사운드워먼, Lisa, 그리고 내 자신이 동승했다. 그 밴

우리의 고유한 풍습, 즉 믿고 존경에 쌓인 젊은층과 노년세대의 유대감, 식

운전기사는 중년 남자로 프로펠라 비행기도 하나 소유하고 있어 비행운전

구하나가 쓰러지면 가족 전체가 뻗쳐주는 재정지원, 그러므로 미국에 거주

도 한다고 했다. 운전사 옆에 묵묵히 앉아있는 취재인 Peter는 약간의 대

304

l 뉴욕문학 제29집

소설 · 김영자 l

305


머리가 벗겨지고 중간 키에 누르끼한 싸파리식 복장차림이었다. 내 앞 좌

문이 열리면서 장씨는 이미 카메라에 몇 번 대면한 적이 있는양, 반갑지

석에 앉아있는 카메라맨 K는 신체가 건장하게 보이는 아이리쉬 계통의 혈

도 싫지도 않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아파트 문을 열어주었다. 너무나도 평

색 좋고 굽슬거리는 밤색 머리로, 한아름되는 대형카메라가 옆에 있었다.

범한, 아니 평범 이하의 초라한 살림방 두 개가 있는데 작은 침대가 하나씩

그 옆에 앉아있는 사운드워먼 S는 전 날 밤에 텍사스에서 왔다고 한다. 서

모퉁이에 들어앉아 있었다. 카메라는 삭막한 고독에 젖어있는 방들을 구석

글한 까만 눈동자에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에다 화장기 하나 없으나 조용

구석 둘러가며 필름에 담았다. 카메라맨과 사운드 걸은 서로 한 쌍의 팔다

하고 자연스런 미를 갖고 있었고 자기 직업의식이 투철하고 진지한 태도의

리같이 다니며 기막힌 스토리가 어디 숨어있는양 열심히 찍어댔다. 장씨는

젊은 여인이었다. 맨 뒷 좌석인 내 옆에 앉아있는 Lisa는 깡 마르고 늘씬

마침 낡은 냄비에 아침 식사로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그것도 신기한지 카

한 키에 금발머리를 어깨까지 기른 멋쟁이 코디네이터였다. 나보다 더 짙

메라가 그 라면 냄비에 바짝 다가가서 부글부글 끓는 뭉그런 냄비소리, 장

게 화장한 모습이고 마스카라를 까맣게 칠하고 왔다.

씨가 젓가락을 꺼내 끓는 라면을 한 두번 휘젓는 장면, 그것을 둥그런 사 발에 담아 탁자 위로 가져가 젓가락으로 후루룩 먹기 시작하는 장면들….

오월 초여름 새벽 5시경 브루클린 다리에 먼동이 휘장처럼 물들고 어느 덧 따스한 햇살이 눈부셔왔다. 마천루의 미끈한 모습이 고요한 꿈의 숨결

그런데 그는 라면을 들이키다 깜박 생각난듯이 탁자 위 선반을 휙열어

에서 방금 깨어나 안개빛 홑이불을 걷어 제치고 하이웨이에 길게 그림자

깡통 하나를 따서 마늘 덩이를 입에 넣고 아삭 아삭 깨문다. 카메라맨이 곧

지으며 기지개 한다. 미끄러지듯 달리는 우리 밴 차속은 거북스러울 만치

그의 깡통으로 카메라 렌즈를 돌린다.“미스터 장, 지금 잡수시는게 무엇

조용하였다. 모두들 새벽밤부터 집을 나서느라 아직 잠에 겨워 눈들이 감

입니까?”하고 취재인이 묻는다.“라면!”하고 장씨가 대답한다.“지금 여

기는 것은 당연한 듯이 구태여 그 누구도 침묵을 깨려고 하지 않았다. 말을

신 깡통에는 무엇이 있죠?”하고 취재인이 또 묻는다.“마늘조림이요”하

잘못 열면 잠꼬대로 들릴까 두려워해서인지 아니면 초면에 서로를 경계함

고 장씨가 말한다. 취재인은 마늘이라는 소리에 자기 귀가 의심스러운 듯

인지, 또는 앞으로 일어날 하루가 초조함이었는지…. 나는 반은 졸면서 화

이 나를 쳐다보며 다시 말해달라고 한다. 나는 영어로“통조림된 마늘”

려한 아침의 전경에 조용한 감탄을 씹고 있었다.

이라고 거듭 말해준다.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침밥을 마늘과 겸하다 니 하는 놀라움이었다. 나는 작은 미소를 짓고 그에게 조용히 일러주기를

이제 우리 밴은 브루클린 플랫부쉬에 거의 다다르고 있었다. 그 곳은 중

“통조림된 마늘은 그리 맵지도 않고 냄새도 덜 나죠”하고 덧붙였다. 그래

류층의 평범하고 조용한 아파트 구역, 생각보다는 안정되고 평화스럽게 보

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는 장씨를 또 한번 힐끗 쳐다보고 그가 먹는 동

이는 동네였다. 우리 밴이 한길가에 정차되자, 우선 취재인 Peter와 Lisa

안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카메라는 열심히 장씨의 전경을 주어담

는 먼저 아파트쪽으로 향하고 카메라맨 K와 사운드 워먼은 무거운 기계덩

는다. 장씨의 라면 들이키는 소리가 계면쩍고 처량하게만 들렸다. 이 모든

이를 걸머지고 그들 뒤를 따랐다. 나는 묵묵히 그들을 따라서 좁고 허술한

전경이 그리도 신기한 것인지 혹은 냉소를 하는 것인지, 카메라는 한 치도

엘리베이터에 들어섰다. 3층에 도착하자 우루루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장

빼지 않고 모두 훑어간다.

씨 아파트를 노크하였다. 나는 생각했다. 한때 조용한 아침의 나라였던 코리아를 뛰쳐나와 더 새 306

l 뉴욕문학 제29집

소설 · 김영자 l

307


로운 삶의 터전을 위해 이 외롭고 황량한 이국땅의 브루클린 방 한 구석

문제로 마음이 언짢아서 저리 심통나게 보이니 이해해 주라”는 말이었다.

에서 인스턴트 라면으로 아침을 메꾸어야 하는 장씨, 그러면 나 자신은 그

자기도 함부로 그에게 말하지 않고 있으니, 그의 기분이 풀어질 때까지 조

고국을 등지고 왜 이렇게 카메라뒤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지….“What is

심하고 이해하자는 말이었다. 즉시 나의 느낌은“아, 프로듀서와 취재인과

your American dream?”누가 영어로 묻는 말이 나를 몽상에서 일으켰

의 갈등이 없지않아 존재하고 있구나”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Peter는

다.“What is your American dream?”인터뷰 기자가 탁자에 맞대고 앉

아예 이 취재 문제에 그리 큰 관심을 갖고 오지 않았으며, 신통치않은 여자

아 장씨에게 거듭 묻는다. 장씨는 라면 먹다가 언뜻 받은 질문이라선지, 또

문제로 하루종일 침통할 것은 사실이었다.

는 그 질문이 혼동 스러웠는지 나를 멍 하니 쳐다만 보았다.“장선생님, 미 국에 대한 꿈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바라고 왜 이렇게 …?”나는 직역해

이제 우리는 다시 차를 타고 헌츠포인트로 향하는데 하루종일 심통난 취

준다. 통역은 했지만 그 누가 언뜻“당신의 꿈은 무엇이요? 아니 당신의

재인 Peter와 덤덤한 장씨를 거닐고 몇시간 배겨내야 할 생각을 하니 나

미국에 대한 꿈은 무엇이요?”하고 질문하면 몇 사람이나 대뜸 대답을 할

는 아찔했다. 이제 해는 동쪽 하늘에 높히 올라와 헌츠포인트 도매시장을

수 있을까? 가장 평범한 질문 같으면서도 알고도 모를 말이다. 장씨는 플

눈부시게 쪼아댔다. 시장에서는 주로 새벽 장사진과 배달인들의 복작이는

라스틱 그릇에 남은 라면국물을 다 들이키고 한국말로 무어라고 중얼 거

장면이기에 나는 아예 건물벽에 쌓인 상자들 더미에 기대서서 눈을 감은

렸다. 나는 그 중얼거리는 대답을 영어로 거듭했다.“American dream?

체 따끈한 햇살을 얼굴에 듬뿍 담아두기에 만족하였다. 장씨는 거대한 창

I don’t know what I can say about the dream. But I’d like to work

고 속에 몇 구역으로 갈라진 도매상가를 구역 구역 들르며 과일이며 채소

as hard as I can and hope everything will turn out to be alright.”

류를 골라 짐수레에 쌓아 올렸다. 카메라는 그를 그림자같이 따라다니며,

말을 바꿔서 해석해 준 것도 아닌데 어쩐지 한국말 어휘보다는 영어가 좀

그가 짐 수레를 끌고다니며 물건 상자를 쌓고 우반하는 일 등을 열심히 찍

더 부드럽게 들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인터뷰 기자의 반응을 기다리며 그

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 도매상가 지배인이 우리에게 접근하였다. 대형

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실망한 표정이었다. 그의 푸른 눈길에는 도대

카메라를 동반하고 있는 우리 모두가 눈에 띈 모양이었다.

체 무슨 꿈이, 무슨 버리지 못할 꿈이기에 이렇게 고독한 인생을 치루며 살 아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깃들여 있는듯 했다. 그뿐이랴, 이 인터뷰를 하

그 지배인은 60세 쯤 보이는 갈색 머리에 배가 튀어나온 전형적인 브룩

기 위해서 플로리다에서 뉴욕까지 올라왔다는 사실을 완전히 후회하는 눈

클린 이태리 토박으로 보였다. 영어 악센트도 부르클린 냄새가 물씬 풍긴

치였다. 그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하기를 우선 장씨를 이렇게 만

다. 그는 상습적으로 몸에 배인 외향적이고 두꺼운 목소리로 인사하며 흥

나게 되어 고맙다고 말하고 곧 그를 따라 헌츠 포인트 시장으로 가서 취재

미스럽다는 듯이 누구를 취재하느냐 한다. 현재 브루클린에서 보이코트 당

하겠다고 알려주라 한다. 그리고 그는 아랫층으로 내려갔다.

하고 있는 청과상 주인 장씨가 장을 보는 것을 취재한다고 Peter가 대답했 다. 그 지배인은 한 발짝 다가서며“아! 그래요? 코리안 말이죠? 물론 한

카메라맨과 사운드걸은 아직도 장씨를 따라다니며 그가 문을 잠그고 아

국인 청과상을 말하겠죠? 여기 장보러 오는 구매자가 80%가 한국인이니

파트를 나서는 전경까지 찍느라 우리보다 늦게 내려왔다. 로비를 나서는

까요.”하고 덧붙인다.“아, 그래요?”하고 Lisa가 맞장구친다.“그럼요!

데 Lisa는 나에게 멈칫 말한다.“Miss Kim, 지금 Peter가 개인적인 여자

여기 한국인 없으면 장사 안될 거예요. 이 건물 관리일은 우리가 맡아하지

308

l 뉴욕문학 제29집

소설 · 김영자 l

309


만, 사실 물건 받아가는 사람들은 한국인들이 대부분이고 그들은 물건값

룩한 발자취를 의미했을 것이라는 나의 생각…. 그래서 나는 후자를 택하

을 제 때에 충실히 지불합니다. 참 그들과 일하기 좋아요. 근데 이번 브루

기로 하여 취재인 Peter를 향해 입을 열었다.“Some time ago, my wife

클린 항의 문제로 한국상인들이 고충을 겪고 있어요. 어떻게 아느냐구요?

left me with our 12-year-old son to another State. My American

요사이 물건 받아가는 양이 퍽 줄었거든요. 참 안됐어요. 한국인들이 장사

Dream is to leave him a proud legacy as his father one day.”내 통

에 타격을 받으면 우리에게 즉시 그 영향이 옵니다. 그걸 알아야 될 겁니

역이 끝나자 모두들 고개를 떨구고 오직 취재인 노트에 미끌어져가는 펜소

다.”그 지배인의 말투는 길거리 왕초같은 거친감이 있으나 한국인에 대

리만 들렸다. 장씨는 눈물을 삼키듯 등을 돌리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해서 퍽 우호적인 태도는 나의 눈시울을 적셔주는 기분이었다. 우연중에

때 Lisa는 카메라멘을 향해“Cut!”하며 손짓했다.

이 헌츠포인트 도매상 주인으로부터 이 언급을 들은 취재인과 Lisa는 뜻 하지 않던 그 무엇을 인식했다는 듯이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한 후 Peter는 작은 노트에 급하게 무엇을 기입하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한 이태리계 지 배인의 말을 듣고 한국인 청과상들에 대한 흥미를 새삼스레 느낀 듯하였 다. 한 뉴스를 보도하는 데는 우선 흥미를 갖고 있어야 그에 대한 집중력 과 과제를 조성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서야 Peter의 눈에 활 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장씨가 나를 향해 손짓한다. 나는 Lisa에게 미스터장이 할 말이 있는 것 같다 하니 모두들 그에게 우르르 다가갔다. 장씨가 나에게 말 하기를“아까 저에게 American Dream 이 무어냐고 물었죠?”한다. 나는 취재인에게 그 말을 전했더니 이제 장씨가 대답할 수 있는지 묻는다. 그 말 을 전해 받은 장씨는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한다. 응시하면서

김 영 자 서울 출생, 1965년경희대 영문과 수료 1972도미, 미 연방 법정 및 국제회의 통역사로 25년간 활동 1996영문 단편소설 “A Certain Story of War”

머뭇 머뭇 말하기 시작하면서 눈에는 눈물이 솟아난다.“제 아내는 얼마

Infinity문학잡지에 등단

전에 저를 떠나 12살짜리 아들과 타주로 가버렸어요. 내 American Dream

2007/2015 두 편의 스토리 미 문학잡지 Rosebud에 게재

2006 9월호 한국 문예사조에 수필“앨러지와 친절”게재

은 내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나의 훌륭한 유물을 남기고 가는 것입니다.”

2010 12월호 한국 문예사조에 시“망향”신인상 수상

모두들 장씨의 글썽이는 목소리에 어리둥절하며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2017-2018 국제 온라인 잡지인 Poetry Pacific과Tuck Magazine에 다수의 영시와 스토리 게재

들에게 당장 무어라고 통역을 해야 할 나였지만 장씨가 언급한“유물”

영시 “Arirang Lament” 게재

2012 서울 지구문학 제 57호에 단편소설 “하얀 밍크 두른 여인”신인상 수상 2018년 카나다 영문잡지 The Journal of Baha’i Studies에

이라는 단어를 무어라고 해석해야 할 지, 그 단어는 하나의 물질적인 재산

YouTube: “Memorizing ‘Arirang Lament’"아리랑애가 암송하기”

이나 유산을 의미할 수도 있고 또 하나는 사랑하는 자식을 데리고 집을 떠

뉴욕문학에 다수의 시, 수필, 단편소설 발표

난 아내에 대한 뼈아픈 심정에 훗날 아들에게 남기고자 하는 아버지의 거 310

l 뉴욕문학 제29집

http://www.youtube.com/watch?v=PfZI961tZDU Website: http://yoursentimentalstranger.com

소설 · 김영자 l

311


사건의 지평선 너머 변 수 섭

가 가렵기조차 한다. 현존하는 의학서적 중에 가장 오래된 황제내경소문(黃帝內徑素問) 이라 는 3,500년 전 기백(岐伯)이라는 의사가 황제에게 노령에 대한 설명이 마 치 나에게 하는 소리 같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뼈는 말라 부서지기 쉽고(骨肉腫), 피부는 탄력을 잃

1 세월 앞에는 장수가 없는 모양이다. 그래도 칠십일 때 까지는 느끼지 못 했던 피로감이 팔순이 되니 빈둥대는 데도 기운을 차릴 수 없다. 더욱이 초 상집에 갔을 때는 남다른 감상에 젖는다. 주일 교회 친교시간 또한 마치 먼 저 이승을 떠나는 대기자처럼 나이 순서로 테이블상석을 차지하고 있다. 맞은편에 앉았던 닥터 김은 담낭 암 때문에 지난해에 그리고 그 옆자리 의 박 장로는 뇌경색으로 몇 달 전에 소천하고 그 앞자리 이 선배는 노환으 로 출석을 못하고 있다. 그들은 교회 창립 때부터 그 곳에 앉았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아는 교인은 그들이 앉았던 그 자리에 앉기를 꺼렸다. 그러나 출석 교인이 많아 앉을 자리가 없을 때는 개의치 않고 그 자리를 메웠다. 그런 징크스는 신심이 있다면 그냥 웃을 일이다. 단지 다른 사람들보다 나이가 많으니 먼저 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쨌든 고령인 교우도 앉기를 꺼려하는 것으로 보아 자기 주제는 생각하지 않고 불운의 당첨을 원하지 않은 것 같다.

어 늘어지며, 가슴에는 공기가 많아지고(肺氣腫), 위장에는 통증이 오고(晩 成消化不良), 심장에는 답답한 기운이 돌게 되며(狹心症이나 晩成心不全 症), 목덜미와 어깻죽지가 죄어드는 동시에 뜨거운 열기가 전신을 흐르고 (尿道鏡塞), 피골이 상접해지고(筋肉損失), 눈은 부풀어 처져 보지 못하게

되면(白內障), 죽음에 뒤따른다. 사람이 병을 이겨내지 못할 때 그의 삶은 종지부가 찍히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죽음이 찾아온다고 한다. 하긴 체조직이 마모가 되든, 프로그램 된 유전인자에 의해 진행되든, 모 든 생명에는 한계점이 있고 각 생물의 종은 각각 정해진 수명이 있어, 인 간은 대략 100년 내외로 주어진 질환을 모두 이겨낸다 해도 1세기 그 이 상을 살 수 있을까? 그러니 80인 나는 잘 살아봐야 20년 내외인 셈이다. 더욱이 노후의 하루 일과는 자고 깨면 전광석화처럼 흐르니 죽음이 콧 등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보람 있게 이용하다가 내가 사랑하고 또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추억들을 간직한 채 헤어질 것이다. 그리고 남은 시간동안 미지의 사후세계로 새로운 삶을 살 아야 하겠다고 마음을 다져 먹는다.

과연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이 있다면 노령으로 인한 고통을 빨리 벗어나

2

려 할 텐데 그렇지 않은 것으로 믿음이 약한 것인지, 생에 대한 애착인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인지 모르겠다. 나는 요즘 혈압이 오르락 내리락 하고 혈당이 떨어지지 않아 인슐린 주 사를 맞아야 할지, 그리고 백내장 녹내장 판정으로 안약을 매일 투약해야 하며, 소변이 자주 마려워 방광 약을 복용하고 있다. 머리털은 빠질 대로 빠졌고, 남아있는 모발은 서리가 앉은 지 오래다. 면역이 떨어지는지 피부

312

l 뉴욕문학 제29집

기어코 노환으로 교회 출석도 못하던 이 선배가 지난밤 소천해서 3일 후 교회 본당에서 장례예배를 드린다고 구역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예 상했던 일이어서 부조를 얼마나 해야 하는가 만이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장례를 어떻게 진행하는가? 봉분을 하는 것인지 화장을 하는 것인지? 궁 금하다.

소설 · 변수섭 l

313


장례예배 다음날은 비가 예상되어 장지에 참석하기가 꺼려져 나는 어떻

보다 못한 건데!”

게 해야 할 것인지? 마음에 갈등이 생겼다. 아내는 그런 내 마음을 알기라

그는 초점 잃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도 하듯 묻는다.

“괜한 질문을 했군요! 나이를 먹으니 자연히 사후정리를 어떻게 해야

“선배님 가시는 길인데! 어떻게 하실래요? 마지막 배웅을 해드려야지 않겠어요?” 많은 교인들이 예배에 참석했다. 그러나 조객을 맞는 가족은 딸 내외와 손자 손녀 그리고 한국에서 온 선배 동생 등 5명에 불과해 고적감을 주었 다. 나는 그와 달리 호상이라고 생각했다. 40년 전 동생들을 이민 초청해 서 지금은 20여명의 대가족이니 조객 문상을 제대로 할 수 있어 고적감을 버릴 수 있을 것 같다.

할지 신경이 쓰여서…,하긴 봉분은커녕 화장을 해서 문중 납골당으로 옮겨 봐야 15년 더 연장된다는데! 그래봐야 60년 세월에 누가 기억해 주겠습니 까? 이곳은 이웃 얼굴도 모르고 함께 살고 있는데! 선배님에게서 한수 배 우려고 했더니, 참! 삶도 죽음도 너무 허무합니다.” “교회에 다니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결례가 안 되는지 모르겠습니 다.” “글쎄요!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마실 다니는 거라고 하면

고인의 운구는 묘지로 가는 것이 아니라 화장장으로 가고 있었다. 화장

어떨까요. 마누라 등쌀에 교회에 끌려 다니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선배님

이 될 때까지 음침한 실내에서 환송예배를 드렸다. 조객들은 인근 한식점

도 만나고…, 타향살이! 아니 타국살이를 하다 보니 정이 그리웠다라고 하

에서 마지막 해후를 하게 되었다. 딸은 테이블을 돌면서 조문에 답례 인

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나약한 인간에게는 서로 기댈 곳이 있어

사를 했다.

야 하니, 하긴 교회도 교회 나름이니 말입니다.”

나는 그를 왜 화장을 하는지 궁금했다. 생전에 선배가 유언을 한 것인지

“한 박사님 대단하십니다. 그래도 다시 신앙생활을 하실 수 있다니 정

딸이 그렇게 하도록 했는지, 그와 오랫동안 함께 했지만 한 번도 그의 사

말 다행입니다. 형님께서 한 박사님 이야기를 자주했지요! 어릴 때 입은 상

후관을 들어본 적이 없다. 나는 가족석에 앉은 선배 동생을 찾아가 인사

처가 쉽게 아물지 않을 텐데! 더욱이 교회에서…, 그 받은 상처가!”

를 했다. “이렇게 형님을 보내서 얼마나 슬프십니까? 선배님과 직장생활을 오랫 동안 함께 했습니다. 교장 선생님 이야기를 많이 합디다. 이렇게 만나 뵈 어서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IBM의 한 박사님 맞으시지요? 형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 니다.”

“선배님이 못할 이야기까지 다했군요. 하긴 선배님 바람에 다시 신앙 생활을 하게 된 것이지만! 아직도 종교 자체에 회의를 느끼게 할 때 많습 니다.” “그래도 이곳 이민 교회는 이성을 가진 믿음의 집성촌이니, 그리고 박 해받았던 개신교 이민자들이 건국한 자유국가이니 다르겠지요.” “역시 교장 선생님 아니랄까봐 잘 아십니다. 장로님 장로님 대통령 장

“참! 형님을 여기에 모십니까? 한국으로 모셔 갑니까?”

로님, 목사님 목따님 대형 교회 교주님! 아직도 초등학생 시절 그때 수난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형님이 그렇게 원하시니! 죽으면 끝인데!

을 잊을 수 없습니다.”

유골을 가져가 봐야 수목장이나 납골당에 15년 단위로 두 번 연장하면 45

“그러시겠지요! 4,50년대 해방과 남북분단의 그 시절 지식인은 좌우 갈

년으로 끝인데…, 그렇다고 가까운 친척이 많아 형님을 찾을 분도 없는데!

등으로 피를 흘려야 했지요. 한 박사님 부친께서는 당시 공산당원으로 몰

살아생전에 이웃사촌으로 함께 해야지! 피붙이라도 멀리 떨어져 살면 남

려 옥고를 치루시다가 옥사를 하시고, 이를 빌미로 거주하던 적산가옥은

314

l 뉴욕문학 제29집

소설 · 변수섭 l

315


자신이 다니던 교회에 뺏겨 어머님과 동생들이 길바닥에 앉았다니 시험에 안들 수 없지요. 형님 이야기가 맞는 것이지요?”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어쨌든 어머님이 너무 고생을 하셨습니다. 눈 만 감으면 그만인데….”

20세기 종교의 자유는 교인의 수를 줄게 해 교회운영이 힘들게 되어 회 당이 비어 풀밭이 되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 하긴 그 덕에 이민사가 일천 한 한인들이 폐허된 교회에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과 연 다음 세대는 어떻게 될지 궁금해진다.

“그렇겠지요. 더욱이 화장하고 나면 육체는 한줌의 재밖에 안되니, 그

믿음의 공동체로 이민 온 개척자들도 종교 교리와 과학적 사실의 괴리로

조차 곧 사라져야하니, 정말 죽으면 그만인 것 아닙니까? 종교에서는 그래

재판까지 벌이는 사건으로 교회를 떠나게 했다. 바로 성서의 창조론과 과

도 사후세계란 꿈을 주는데 말입니다.”

학의 진화론이 많은 교인들을 방황하게 만들었다.

“그렇습니다. 존재를 육으로만 한정한 것 같습니다. 사실 삶은 물질이

성서의 창조론과 찰스 다윈의「종의 기원」인 진화론 이론이 상반되어

정신과 함께 하는 것인데, 칼 융이 말한 것같이 육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융합하려고 노력했으나 격돌이 거세지자, 급기야는 보수적인 미국 테네시

은 감각기관을 통해서 투영된 영혼의 이미지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까. 과

주에서 1925년 다윈의 진화론 교육을 금지하는「버틀러 법안」을 통과시

연 죽음은 영혼과 함께하는 것일까요?”

킨다. 결국 기독교 근본주의와 맞물린 진화론 논쟁은 법정싸움까지 벌어져

나는 오늘따라 걷잡을 수 없이 오싹함을 느꼈다. 망자에 대한 것이 아닌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희대미문인「스콥스 원숭이 재판」이 벌어졌다.

자신의 몸이 불구덩이 속에서 타오르는 그런 기분 때문이었다. 오래전부

고등학교 생물선생인 존 스콥스가 진화론을 가르쳐 주법을 위반했다는 혐

터 생각하고 있었던 일이지 않은가. 수천 년 동안 쌓아두었던 미이라가 어

의로 벌금형에 처해진 것이다.

느 하나 살아 돌아왔다는 기록은 없다. 단지 역청으로 굳은 시신들이 불쏘

거의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는 더더욱 종교 교리가 과학적 사고로 인

시개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단지 무덤에서 나온 귀신이나 드라큘라는 납

해 믿음이 이완되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 과연 종교의 창조론은 진화론으

량영화일 따름이다.

로 폐기되는 것일까? 과학에서 말하는 우주 창조의 빅뱅(大爆發) 이론은

나는 너무 서두르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내일 일도 모르는 판인데 사후 문제를 미리 걱정하다니 비정상적이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종교에 대한 회의감 때문인지 모른다. 과연 신은 존재 하는가? 현대인의 몇 퍼센 트가 신을 믿을까?

137억 년 전 매우 높은 에너지를 가진 작은 물질과 공간이 거대한 폭발을 통해 우주가 되었다는 것이 아닌가. 이에 따르면 폭발에 앞서 오늘의 우주가 작은 점 이었다는 사실이다. 바 로 이 작은 물질과 에너지가 계속 팽창하여 은하계와 내부의 천체 그리고

과연 나는 하나님을 믿는 걸까?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며 교인으로 등

다중우주를 형성했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오늘날 과학이론

록했으니 신자라 할 것이다. 글쎄 내가 진정한 믿음의 교인일까? 신심이

이다. 그러면 우주를 창조한 그 작은 물질과 에너지는 무엇인가? 종교에서

깊은 아내의 운전수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말하는 신(神)인가? 신이 아니라면 그 무엇인가?

나는 물리학자이다. 내가 15세기에 태어났다면「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을 하든지 광장의 장작더미에 조르다노 브루노처럼 결박당한 채 종교재판

3

으로 화형을 당했을 것 같다. 아마 내가 모슬렘이었다면 지금도 그에 준하 는 형벌을 받을 것만 같다.

316

l 뉴욕문학 제29집

아인슈타인은‘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어

소설 · 변수섭 l

317


느 유명목사가 부흥집회에서 그 말의 진의도 모른 채 신은 인간에게 그런

작된다는 뜻이다. 사건의 지평선 그 너머에 4차원에서 다른 차원의 칼루자

허접한 짓을 하지 않는다고 열변을 토했다. 우리시대 최고의 과학자가 잘

와 클라인 여분 차원의 통로인지, 어쩌면 종교에서 말하는 육체를 떠난 의

못한 말을 성경의 말씀처럼 인용한 것이다.

식세계의 혼령이 거처하는 곳인지? 모른다.

세계 최초의 물리학회인 솔베이회의가 1927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5번째 로 전자와 광자에 대한 주제로 개최되었다. 막스 플랑크, 닉스 보어, 하이

4

젠베르크, 슈뢰딩거, 아인슈타인, 디랙, 로렌츠, 퀴리부인 등 당대 물리학 계 거물 29명 중 17명은 노벨상 수상자였다.

과학이 발달했다고 해도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생명에 대

양자물리학 태동과정에 아인슈타인은 보어와 자연이 인간의 측정을 막

한 애착이 강할수록 죽음을 두려워한다. 의학이 발달했다 해도 수명을 얼

는다는 생각에 양자의 불확정성 원리를 반대했다. 이 회의 논쟁결과 아인

마간 연장할 수 있지만 죽음 자체를 막지 못한다. 죽음을 경험만 할 수도

슈타인은 완패했다. 결국 화를 삭이지 못해 내뱉은 말이‘신은 주사위놀이

없다. 죽음은 우리의 모든 것을 함께 가져가기 때문이다.

를 하지 않는다.’이었다. 이에 보어는‘아인슈타인! 신에게 명령하지 말 게!’라고 답한다. 최고의 과학자들도 신(神)을 인정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거시세계의 상 대성이론과 불확정성 미시세계의 구성입자는 속도와 위치라는 고전적인

죽음은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도 모른다. 반드시 오고야 마는 이 죽음을 극복하는 문제는 종교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바로 종교의 존재 이유이 기도 하다. 그래서 인간이 죽으면 저 세상인 천국과 지옥으로 간다고 한다. 과연 사후세계가 있는 것일까?

물리량을 파동함수로 대치되었다. 전자기력과 약력, 강력은 양자역학적 체

만약 그 세계가 있다면 누구나 다녀오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 존재는

계 속에서 하나로 통일시킬 수 있었지만, 중력은 미세입자에는 수용되지

아직도 실증되지 않았다. 과학으로는 그런 세계가 있을 수 없다며, 죽으면

않았다. 이에 입자가 아닌 초끈이라면 11차원 시공간에 초중력이 있어 그

모든 것이 소멸되어 끝이라는 것이다.

러면 거대세계의 상대성이론의 중력과 하나의 이론체계로 대통합할 수 있 는 수학적인 해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세계 각처의 신화나 전설, 종교 등의 내용에서는 사후세계가 예 외 없이 인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살아있으면서 사후세계를 다녀

빅뱅이 일어나면서 3개의 공간차원과 1개의 시간 차원만이 커다란 스케

왔다고 증언한 사람도 있다. 바로 몇 달 전 이 장로가 노령에 26시간 암수

일로 확장 우주가 되었고, 나머지 차원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는 바로

술을 받으면서 임사체험을 했다는 것이다. 강 건너 꽃밭에서 건너오지 말

칼루자와 클라인의 여분 차원이 미세 공간 속에서 감겨진 채로 남아있다.

라고 손짓을 하던 그의 어머니를 보았다고 했다. 노령에 노망든 소리는 아

그리고 두 번째 미스터리는 블랙홀 중심부의 시공간 문제이다. 시간의

닌 것 같다.

종착점이라는 것이다. 즉‘사건의 지평선(spacetime singularity)’을 넘어

하긴 사후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고래로부터

선 물체는 무조건 블랙홀 중심부 쪽으로 사정없이 빨려 들어가기 때문에

현재까지 무수한 것도 사실이다.「이집트 사자의 서(書)」는 원명은 이집트

다른 우주(Parallel World, Multiverse)로 통하는 통로(Wormhole) 일지도 모

어로 「페르엠 루」의미는 (낮으로부터 탄생한 책)으로 이집트인들이 인류

른다는 것이다.

역사상 최초로 꽃피운 거대한 문명의 정신적 모태였다. 문자가 발명되지

우리가 속한 우주의 시간이 끝나는 그 지점에서 다른 우주의 시간이 시

318

l 뉴욕문학 제29집

않은 구전의 시기부터 프톨레미 시대까지 약 3천년에 걸쳐 기록된 것이다.

소설 · 변수섭 l

319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의 영혼은 어떠한 현상을 경험하게 되며, 사후세계

면 주위 사람들이 바울과 예수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는 것도 납득이 된다.

는 어떻게 펼쳐지는가? 환생의 굴레를 벗고 영원한 해탈에 이르는 방법은

바울은 이와 별도로 다시 한 번 임사체험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바울의

무엇이며, 환생하는 자는 어떠한 선택을 할 수 있는가? 신비로 가득한 고

고린도 후서(12:2-4)에 다음과 같은 기적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대의 경전이 그 해답을 던져준다. 1,200년 전에 씌어 진 티벳 최고의 경전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14년 전에 셋째 하

「바르도 퇴돌」제목의 의미는(듣는 것만으로도 영원한 자유에 이르는 가

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

르침)이다. 이 경전은 1927년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를 통해「티벳 사자의

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

서」라는 이름으로 서구세계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 그 반향은 엄청난 것이

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 그가

었다. 현대의 의학과 정신분석학이 이제 겨우 그 입구를 들여다보았을 뿐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

인 사후세계, 삶과 죽음, 환생과 해탈의 문제를 이 동양의 경전이 모순 없

르지 못할 말이로다.”

는 언어로 이미 풀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심리학자 칼 융은 서구

여기서‘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하나’란 것은‘바울 자신’을 말하는 것

의 철학과 종교가 따라갈 수 없는 가장 차원 높은 정신의 과학이라고 평가

이다.‘셋째 하늘’이라는 것은‘최고의 하늘’‘낙원’을 말한다. 당시에

하며 장문의 심리학적 해설을 쓰기도 했다.

는 하늘은 삼층 구조로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정신 병리학자 엘리자베스 큐브라로스 박사가 일단

결국 바울은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이끌림을 받고 천국에 가서, 거기서

죽은 후에 기적적으로 소생한 100여명의 임사체험자를 찾아 인터뷰하고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내용은 신성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말할

그 자료를 기초로 해서 연구 종합한 결과「사후세계는 존재 한다」고 단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로 이끌려 올라갔을 때 그가 살아있는 몸 그

했다. 이들 임사체험자 거의 모두가 영혼이 육체로부터 이탈해 나오는 감

대로 올라갔는지 아니면 육체와 혼이 분리되어 혼만 올라갔는지 자기도 모

각을 느꼈고, 그 순간 말 할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르겠다는 것이다.

또한「사후세계」의 저자 레이몬드 무디 박사도 50여명의 가사 체험자 를 면담, 거의 모두가 같은 내용을 보고하고 있다. 기독교 성서에서 바울의 빛의 체험으로 회심을 일으킨 것은 도대체 무엇

한편 영혼을 믿는 사람들은 사후세계가 실재하며, 그 증거로 여러 가지 심령현상, 강령(降靈), 폴터가이스트(騷靈), 유령, 요괴(妖怪)등을 과학적으 로 연구하고 있다.

일까? 성서에 기록된 대로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는 원리주의적인 해석을 하겠지만, 기적을 부정하고 과학적 합리화로 해석하면 바울이 임사체험을

5

했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성서의 다른 부분에서 자신은 만성 지병을 앓 고 있었고, 가끔 악화되어 육체적으로 큰 고통을 느끼고 있음을 고백하고

과연 종교 교전이나 신화 전설에서는 사후의 세계를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 병이 원인이 되어 죽음에 처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임사체험을 했

있을까? 사자의 장의서(葬儀書)인「이집트 사자의 서에서 본 사후세계」

던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종교에서는「불교에서 본 사후세계」기독교 대신 환상문학인「신곡(神

그렇게 되면 빛의 체험도 예수와 이야기를 나눈 것도 객관적인 현실에 일

曲)에서 본 사후세계」20여년 이 세상에 육신을 두고 영계를 넘나들며 경

어난 체험이 아니라 임사체험 중에 일어난 사건이 된다. 그렇게 생각해 보

험한「스웨든보그가 본 사후세계」그리고 현재 우리는 어떤 사후세계를

320

l 뉴욕문학 제29집

소설 · 변수섭 l

321


가질 것인가 유추해본다.

천국은 태양신이 이룩한 파라다이스로 평화의 땅이라고 불린다. 이곳

이집트의「사자의 서」는 사후세계로 가는 죽은 자의 안내 역할을 하는

은 구름위에 있는 거대한 공중도시로 궁전과도 같은 장엄한 건물이 서있

책으로 시신을 매장할 때 함께 묻는 장의서이다. 거기에는 현세에서 사후

다. 지평선 너머로는 웅장한 신전이 있다. 그 광경은 현세와 별 차이 없으

세계에 도달하는 방법, 내세의 여러 가지 위급함을 대응하는 기도문과 주

나 그 아름다움이 도원경(桃源境)과 같다. 고통이라고는 존재하지 않고 모

문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 원본은 제18왕조시대(BC1567∼BC1304)년 집

든 즐거움만 있다.

대성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대 이집트인은 영혼이 불멸이며, 육체가 움직임을 멈추면「바」라고

6

불리는 새(鳥) 형상이 날아가 내세에서 영생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 바」는 자신의 죽음을 확인한 후 공중으로 날아올라 장례식 광경까지 내려

불교에서 본 사후세계는 교리의 밑바닥에 흐르는 우주관인 육도윤회(六

다본다. 매장이 끝나면 바는 하늘로 높이 올라 저 세상으로 날아가 영원

道輪廻)의 사상과 해탈(解脫)의 사상이다. 삶을 지닌 모든 것은 죽은 후에

한 삶을 영위한다. 이집트인이 시체를 미이라로 만들어 보존하고 여러 가

도 육도의 세계인 지옥계, 아귀(餓鬼)계, 축생계, 아수라(阿修羅)계, 인간

지 부장품을 함께 묻는 것은 이「바」가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 함께 살 것

계, 천상계로 계속 윤회를 거듭한다.

으로 믿기 때문이다.

인간은 여러 형태의 전세(前世)를 거쳐 현세(現世)에는 인간으로 살고 있

그래서 내세의 일이나 영계를 다녀왔다는 아니(BC 5000∼4000년경의

는 것으로 내세(來世) 또한 육도(六道)의 세계 중, 어느 한 세계에 다시 태

왕실 서기)를 비롯한 영계를 다녀온 경험담을 토대로, 그것을 무덤의 벽이

어난다. 그것은 자신의 업(業)에 의해 다시 육도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날

나 석관에 그림이나 상형문자로 조각을 했다.

수가 없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선을 쌓아야 육도윤회의 순환

사자는 영계에 들어가기 전에 심장의 무게를 달아서 생전에 범한 죄의 정도를 심판받게 된다. 심장은 양심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신

에서 벗어날 수 있다. 바로 해탈한 사람은 불타(佛陀)가 된다. 그래야 열반 (涅槃)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이 세계가 극락정토(極樂淨土)인 것이다.

아누비스가 저울 한 쪽에 죽은 자의 심장을 올려놓고 다른 한쪽에는 정의

불교에서는 죽은 자를 어떻게 심판하는가? 먼저 죽음의 선별회의를 해서

와 진리의 상징인「마하도도의 깃털」을 올려놓는다. 그 양쪽이 다행히 균

선정된 자를 죽음의 사자가 사후세계로 데려온다. 죽음은 육체에서 혼(魂)

형을 이루면 영계로 들어가지만, 그렇지 않고 가벼우면 흉령의 나라(지옥)

의 이탈현상이다. 임사체험자는 혼과 시신 사이의 가는 실이 끊어지지 않

로 추방된다.

은 경우이다. 일단 실이 끊어지면 사후세계로 가야한다.

영계는 신들이 사는 하늘, 일반 영이 사는 땅과 흉령이 사는 지하의 세계

개중에는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혼이 있다. 불의의 죽음이 찾

이다. 일반 영이 사는 곳은 현세의 지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흉령의 나라

아왔을 때 그러한 착각에 빠진다. 현세에 원한을 품은 채 이승을 서성거

는 지하에 있고 심장이 없는 자가 살고 있다. 흉신(凶神)이 지배하는 암흑

리게 된다. 흔히 말하는 유령현상이나 빙의망상(憑依妄想)이라고 해서 산

의 나라이다. 발밑에는 오물이 넘쳐 악취가 진동한다. 어둠 속에 갇혀 서로

사람에게 죽은 자의 혼이 달라붙는다는 부처가 되지못한 혼이 돌아다니기

엉겨 붙어 수족이 떨어져 나간 자나 구더기나 뱀이 몰려와 흡혈하거나 육

때문이다.

체가 뜯겨 먹혀 비명소리가 진동한다.

322

l 뉴욕문학 제29집

저승으로 가는 길은 내세에는 어디로 갈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한 여정이

소설 · 변수섭 l

323


다. 그 세계는 현세와 내세의 중간에 위치하므로 중유(中有)의 세계라고 하

상화한 것이니 그래서 나는 육체를 떠난 혼(魂)인 의식의 세계가「사건의

며 전체 여정은 49일간이다. 7단계로 7일마다 법정에 서서 생전에 행한 일

지평선 저너머」로 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픽션화 해볼 생각이디.

을 심판받아 내세에는 어디에서 태어날 것인가를 결정한다.

불교에서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을 하기 위해 악행 한자가 가는 지하의

태어날 세계는 1)천상계 2)인간계 3)아수라계 4)축생계 5)아귀계 6)지옥

지옥은 팔열지옥과 팔한지옥으로 기상천외의 형벌이 처해진다. 위로부터

계 여섯 분야로 나누어지며, 마지막 날인 49일에는 7회에 걸친 심사결과를

등활(等活)지옥, 흑승(黑繩)지옥, 중합(衆合)지옥, 규환(呌喚)지옥, 대규한

종합판단해서 태어날 곳이 결정된다.

지옥, 초열(焦熱)지옥, 대초열지옥, 무간(無間)지옥, 그리고 8개의 팔한(八

저승길에 오르면 황천(黃泉)이 가로막아 흐르고 있다. 이 강을 건너면 다

寒)지옥이 있다.

시는 되돌아 갈 수 없다. 강을 건너는 것도 생전에 한일에 따라 쉽게 어렵

예를 들면 간음한 자들은 보수일절고뇌처(普受一切苦惱處) 지옥에서 피

게 업보가 시작된다. 황천을 건너면 그 기슭에 의령수(衣領樹)라는 나무

부를 벗겨낸 다음 철판구이를 만든다. 생전에 거짓말을 하는 자는 수무변

가 서있다. 그 나무 밑에는 두 명의 탈의파(奪衣婆)와 현의옹(懸衣翁)이라

고처(受無邊苦處)에서 불에 달군 집게로 혀를 빼낸다. 생전에 유부녀와 간

는 노인이 기다리고 있다. 옷이 필요 없다며 옷을 벗기는 탈의파, 그 옷을

통한자는 인고처(忍苦處)에서 나무에 매달아 아래에서 불을 지펴 온몸이

받아 의령수 나무 가지에 거는 현의옹은 가지가 휘는 정도에 따라 죄의 경

타들어가게 한다. 이런 경범죄의 지옥이 128개가 된다. 하물며 중범죄는

중을 심판한다.

상상 이외의 형벌을 받는다.

2주째 제2법정에서 심판을 받고 도깨비 성 업관(業關)을 지나 제3법정,

불교에서 천국인 극락정토에는 고통이나 괴로움이 전혀 없다. 풍경의 아

열탕의 업강(業江)을 건너면 4주째 4법정에선 저울에 서게 되어 죄의 경중

름다움도 극치이다. 그러나 이곳엔 여성은 없다. 생전에 신앙심이 깊었던

을 단다. 5주째 제5법정 염마청(閻魔廳) 내에는 수정(淨玻璃)으로 된 거울

여인은 사파(裟婆) 세계에서 이곳으로 오는 도중 모두 남성으로 탈바꿈을

이 걸려있어 생전에 했던 악행을 보게 된다. 6주째 철환소(鐵丸所)라는 강

했기 때문이다. 현대 여자들이 이런 사실을 안다면「아미타불(阿彌陀佛)

을 건너 제 6법정에 서게 되어 재심한다.

」에게 미투 운동을 벌일 판이다.

마지막 7법정을 가기위해 암철소(闇鐵所)라는 어둡고 좁은 철벽 길을 통 과 49일간에 걸친 고난의 여정이 끝난다. 이리하여 중유의 세계와는 작별

7

을 고하고 저승길의 종합판단으로 내세의 육도 중 한 계(界)가 결정된다. 1) 지옥계 2) 餓鬼계 3) 축생계 4) 阿修羅계 5) 인간계 6) 천상계, 최종의 판 결에 따라 법정을 나서면 지정된 내세로 가게 된다.

환상문학의 걸작인 단테의 신곡(神曲)은 영혼이 육체를 떠나 다른 세계 를 경험하는 내용이다. 단테 알키엘은 1265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

그런데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은 이제껏 육체를 떠난 혼이 중유의 세계를

났다. 그가 9살 때 동갑내기 베아트리체를 만나 연모하게 된다. 다시 9년

거칠 때 육체적인 고난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수미산(須彌山) 위는

후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나 그녀는 결혼한 여자였고, 그리고 24살에 요절

천국이고 산속 지하는 지옥이라는 것이다. 2500년 전 종교적인 픽션이라

하고 만다, 그녀에 대한 그의 애정의 고뇌와 갑작스러운 죽음이 주는 슬픔

고 하면 할 말이 없다.

이 단테에게 잊지 못할 정신적인 충격을 주었다. 그녀는 신곡에서 연옥에

이런 내용을 소설화 한다는 자체가 허구이지만, 하긴 전래된 이야기를 구

324

l 뉴욕문학 제29집

서 천국으로 가는 안내역을 맡게 된다.

소설 · 변수섭 l

325


단테는 라틴문학, 수사학, 철학, 법률학, 천문학, 신학 등을 섭렵하며 종

인 아케론테이다. 강기슭에는 알몸의 죽은 자들이 무리지어 있다. 이윽고

교적 시적 사상을 키워 나간다. 그 당시 이탈리아는 내란과 분열을 반복하

강 건너에서 흰머리를 나부끼며 거인이 배를 저어 온다. 지옥의 뱃사공 카

고 있어 조국의 통일을 염원 정계에 투신한다. 그래서 한 때는 피렌체 시

론이다.

의 행정장관이 되어 정치적인 불안을 해소했으나 반대파의 음모로 추방당 하는 비운을 1302년 맞는다.

“나는 너희들을 강 건너편에 있는 영원한 암흑의 세계인 불길과 얼음의 세계로 데려가기 위해 왔다.”

이렇게 추방된 단테는 그 후 20여 년에 걸쳐 방랑생활을 하게 된다. 이

카론은 이렇게 말하며 죄인들을 배위로 몰아세운다. 우물거리거나 빠져

비참한 방랑의 경험과 베아트리체와의 만남과 그녀의 죽음이라는 두 개의

도망가려는 자는 사정없이 노로 매질을 하여 꼼짝없이 배에 실려 공포의

사건이「신곡」을 쓰게 되는 원동력이 된다. 신곡은 단테가 엿볼 수 있는

세계로 끌려간다. 바로 이 강에서부터 지옥의 형벌이 시작된다.

사후세계의 여행기이다.

몇 가지 지옥의 이야기를 한다. 불교와 달리 형벌이 약하다. 제1원주에

이 작품은 지옥편, 정죄(淨罪)편, 천국편의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는 기독교를 모르는 자가 간다. 별다른 형벌이나 고통은 없으나 한숨소리

각 편은 33장으로 나누어져, 지옥편의 서장이 추가되어 모두 100장으로

만 토해낸다. 제7원주 제3환에는 신을 비난한자가 열탕처럼 뜨거운 대지

되어 있다.

에 떨어진다. 제8원주 제2 구덩이는 아첨을 일삼는 자는 분뇨의 늪에 빠진

그곳에서 수백 명의 신화상, 역사상 인물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기독 교 신앙에 바탕을 둔 죄와 벌 구원에 관한 철학적 윤리적 고찰로 중세시

다. 제9원주 제4원은 지옥의 가장 아래에 위치해 있으며, 배반자가 떨어지 는 곳이다. 얼음에 쳐박히며 얼굴이 3개인 악마의 먹이가 된다.

대의 신학과 천문학적 세계관을 전하고 있다. 특히 이슬람교 창시자 무함

정죄계는 천사의 인도에 따라 큰 배가 나타나고, 그 배가 기슭에 닿자 기

마트가 지옥에, 예수 이전의 유명한 사람 즉 플라톤 호메르스 등이라도 천

다리던 많은 사람들이 배에 오른다. 정죄계는 지옥처럼 특별한 형벌은 없

국에 가지 못한다는, 그 시대의 가톨릭 신앙에 근거한 세계관의 한계를 보

으나 각기 마음속의 참회, 죄의 고백 및 행동으로 속죄를 한다. 죄의 경중에

이고 있다.

따라 제1대지에서 제7대지까지 더럽혀진 전생을 뉘우치며 죄를 씻어낸다.

지옥계는 북반구의 정점 그 지하에서부터 전개된다. 지옥의 입구는 암흑

제7대지 위 정죄산 정상에 지상의 낙원이 10천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테

의 숲 가운데 있으며, 단테는 숲에서 길을 잃어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

의 연인 베아트리체가 정죄계에서 천국계로 인도한다. 제1천인 월천, 2 수

는다. 지옥문에 들어서면 문 위에 「이곳을 지나는 자는 고뇌의 거리에 이

성천, 3 금성천,4 태양천, 5 화성천, 6 목성천,7 토성천, 8 항성천, 9 원동

르며, 영원한 환난을 겪게 되나니…」란 글귀가 적혀있다. 그리고「이곳

천, 제10천인 지고천은 천국의 최고 정상에 있다. 이곳은 신과 천사와 성

을 들어선 자는 모든 희망을 버려야 한다.」

자들이 산다.

문 안으로는 살아생전 악행을 저질렀던 자들이 알몸으로 긴 열을 지어 서 들어가고 있다. 쇠파리와 벌이 달려들고 피가 흐르는 발바닥 속으로 구

8

더기가 파고든다. 별도 없는 캄캄한 하늘에는 울부짖는 소리와 신음소리 가 메아리친다. 지옥의 문을 지나 얼마동안 걸어가면 큰 강이 흐르고 있다. 지옥의 강 326

l 뉴욕문학 제29집

죽은 자가 아닌 산자인 엠마누엘 스웨든보그가 본 사후세계를 보자. 그가 20여 년 동안 영계를 드나들었다면 과학적으로 검증되는 일이다. 그렇지

소설 · 변수섭 l

327


않고 신화나 전설을 합리화 한 것이라면 공상소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영계의 단체는 무수하다. 특히 이 단체는 특이하다. 원형의 마을을 이루

그는 1688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출생,「사상 최고의 영매(靈媒)」「오

고 있는데 그들의 집은 모두 얼음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도 부락 주변은 물

컬트(초자연)계의 거인」으로 불리는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허황된 신비주

론 집안도 살이 무를 정도로 덥다. 그런데도 얼음의 집은 녹지 않는다. 수

의자는 아니다. 그는 물리학, 천문학, 생리학, 철학, 경제학 등의 분야에서

목의 모양도 기이하다. 하늘과 맞닿을 정도로 거대하다. 이곳의 영들은 나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한 초인이다.

비처럼 나무와 나뭇가지 사이로 넘나든다.

그가 영계로 마음 내키는 대로 출입하게 된 것은 1744년 56세 때부터라

그리고 영계의 태양은 동쪽 하늘에 비스듬히 걸린 채 움직이지 않는다.

고 한다. 그 이후 1772년 84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약 20여 년간 견문한

그런데도 영들이 얼굴을 돌리더라도 태양은 그 영의 얼굴 정면만을 비춘

바를「영계저술」이란 책을 발간한다. 그 내용은 영계에 가보지 않고는 쓸

다. 영들은 인간과 같은 육신을 가진다. 그러나 그들의 몸은 인간과 같은

수 없는 구체성을 띠고 있는 기서(奇書)이다.

물질적인 육체가 아니다. 그래서 그들은 벽이나 바위를 뚫고 다닐 수 있

그런데 그의 영계 탐방기는 다른 타계관에 비해 극적인 내용이 없이 이 웃으로 놀러가는 기분이다. 마치 스웨덴 협곡 속의 분지에 인간계와 영계 의 중간지점인 정령계가 있다. 그 풍경은 인간계와 거의 같아서 숲도 있고 강도 흐르며 집과 도로도 있다. 정령들의 모습도 인간과 같다.

다. 그들을 차단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강을 건널 때도 물위로 사뿐히 걸어갈 수 있다. 영들은 텔레파시 능력이 있다. 상대방의 눈을 서로 들여다보는 것으로 대화를 나눌 수가 있다. 그리고 남녀가 영적인 마음이 하나로 겹쳤을 때

그래서 그들은 자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한다. 그러나 정령계

인연을 맺게 된다. 결혼은 같은 단체에 속하는 사람에게 한한다. 결혼이라

에서 생활하는 동안 영적 성격이 닦이고 점차 영으로 순화되는 과정을 밟

고 해서 육체적인 결합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마음이 되어 지복감이

는다. 정령은 영계로부터 내려온 영의 검사를 받아야 한다. 영은 정령의 얼

극치에 달한다.

굴을 주시한다. 이렇게 전신을 끝까지 훑어보고 나면 정령의 머리 위에 구

지옥계는 영계의 지하에 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흉악한 영이 살고 있

름이 피어오르고, 그리고 그의 발밑에 한 권의 서책이 나타난다. 그것은 정

다. 너무나 추악한 흉령들이 한데 어울려 서로를 욕하고 싸움을 벌이고 있

령이 인간계에 살고 있던 동안의 소행이 기록된 문서이다. 영은 그것으로

다. 지옥에도 취향에 따라 모인 무수한 단체가 있다. 섹스로 지새우는 단

그 정령의 과거를 심사한다.

체, 바위산속을 굶주린 이리 떼처럼 헤매는 단체, 더러운 오물통 속과 같

정령이 진정한 영이 되면 마침내 영계를 향해 떠난다. 거대한 두 개의 산 이 서로 좌우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영계의 통로가 열린다. 영은 공중을 날

은 늪속에서 구더기를 먹고 사는 단체 등 하나같이 추악한 면에서는 공통 적이다.

아 산과 산 사이를 통과하면 눈 아래 강이 보이고, 바다가 나타난다. 비행

그리고 각 단체가 무리지어 사는 마을 위에는 반드시 검은 구름이 떠돈

을 계속하면 어두운 시야에 작은 발광체가 보이기 시작한다. 바로 목적하

다. 이것은 흉령들의 상념이 모여 응집한 것이다. 그들 흉령은 태양의 빛을

는 영계인 것이다.

직접 받으면 형용할 수 없는 고통 때문에 햇빛을 멀리하기 위해 상념으로

그곳은 인간계와 비슷해서 숲 사이로 강이 흐르고, 강 언덕에는 농장이

검은 구름을 만들어 떠돌게 하는 것이다.

있어 곡식이 자란다. 그리고 마을이 있어 거리마다 즐거운 표정의 영들이 오고간다. 328

l 뉴욕문학 제29집

9

소설 · 변수섭 l

329


사후의 세계는 7천 년 전의「이집트 사자의 서」나, 2천 5백 년 전의 불

영혼이 본질적으로 일련의 원자와 전자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한

교에서 본 사후 세계, 7백 년 전 신곡에서 본 사후세계 그리고 275년 전 스

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주의 법칙은 이러한 원자 분자가 물리적인 종말

웨든보그가 본 사후세계가 지옥과 천국 그리고 연옥의 3부작으로 구성되

이후에도 존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션 박사는 사후세

었다는 점과 죄지은 자의 형벌이 후기로 올수록 가벼워진다는 사실 외에는

계가 없다는 증거로‘양자장’론을 언급했다.

한결같다. 실제로 그렇게 체험한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하긴 현대인은 사후세계를 어떻게 의식할까? 의식은 육체를 떠나 상존 할 수 있을까?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사후세계를 어떻게 생각할

양자장론은 한마디로 설명하긴 어려운데 각각의 입자들은 하나의 장(場) 을 가지고 있다. 션 박사는“실제로 영혼은 죽음이후의 삶을 믿기 위해서 는 기존의 물리학을 뛰어넘는 모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까? 더욱이 그는 루게릭병(筋肉無力症)이라는 불치병에 걸려 전신이 마비 10

된채 휠체어에 평생 몸담아 살면서 우주의 비밀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이 시대 최고의 이론 물리학자로 영국 캠브리지대의 루커스 수학 석좌교수이 다. 그는 특히 블랙홀이 있는 상황에서의 우주론과 양자 중력의 연구에 크 게 기여했다.

21세기 과학이 급발전했다고 해도 아는 것만큼 기하급수적으로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진 것이 아닌가. 종교의 허구성이 과학으로 인해 인식변화를

그런 그가 영국 언론「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천국은 없다. 사후세

하듯이 과학 또한 불확실하지 않은가? 더욱이 사후세계는 임사체험이니 하

계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만들어낸 동화일 뿐이다.”라고 했다. 그는

지만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 없다. 단지 잠재의식에 의한 환영이 아닌가

“삶의 마지막 순간 뇌가 깜빡거림을 멈추면 그 이후엔 아무것도 없다.”

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런데 21세기 석학들이 사후세계가 없다고 하니 사

며“인간의 뇌는 부속품이 고장나 작동을 멈추는 컴퓨터이다. 그런 고장

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자못 궁금하다.

난 컴퓨터를 위해 마련된 천국은 없다.”

먼저 션 캐롤 박사의 사후세계가 없다는 그의 주장을 보자. 현실세계는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은 심리학 분야만 아니라 현대의 학문과

물리법칙이 적용되는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적용되는 4차원 세계이다.

사상 전반을 이해하는데 빠뜨릴 수 없는 대상이다. 그런 그가“종교는 환

우린 육체와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뇌 과학이 발달했다고 해도 의

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 사후관(死後觀)은 논의 대상이 되

식의 세계를 완전히 아는 것이 아니다.

지 않는다.

독일의 과학자 그룹의 연구에 의하면 육체에서 빠져나온 영혼의 중량은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우주과학과 물리학을 연구하는 션 캐롤

35g이고 그것은 미립자와 같은 것이며, 이것은 때와 장소에 따라 물질화

(Sean Carroll)박사 또한“사후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Express지에

된다고 한다. 더욱이 이런 영혼에는 살아 있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의식도

서 주장한다. 그는 현실세계에서는 일상에 벌어지는 모든 현상을 물리법

있다고 한다.

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며, 그리고 모든 일이 가능성의 영역 안에서 벌어진 다고 했다. 만약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면 우선 우리의 영혼과 신체가 완벽하게 분리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 물론 불가능하지만 션 박사는“그렇지 않으면 330

l 뉴욕문학 제29집

미립자세계는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원리의 세계이다. 바로 위치 운동량 에 대한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을 뜻 한다. 즉 위치가 정확하게 측정될수록 운동량의 퍼짐은 커지게 되고, 반대 로 운동량이 정확하게 측정될수록 위치의 불확정 도는 커지게 된다.

소설 · 변수섭 l

331


죽음이후의 삶은 육체는 소멸되고 정신의 미립자인 양자는 차원이 다른 세계에서 자신의 업보에 따라 홀로그래피를 그릴 것이다. 그것이 사후세계 가 아닐까? 션 박사의 사후 관에 대한 불확정 된 반론이다.

인 육체는 단지 땅속의 분묘에서 썩든지 그렇지 않으면 화장장에서 불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양자적인 영혼은 어디로 갈 것인가? 전술한 이집트의 사자의 서, 불교에서 본 사후세계, 신곡에서 본 사후세

스티븐 호킹은 블랙홀이 있는 상황에서의 우주론과 양자 중력의 연구에

계, 스웨든보그가 본 사후세계에서 죽은 자가 갈 수 있는 곳은 달이냐? 행

기여했다. 그런 그가‘삶의 마지막 순간 뇌가 깜빡거림을 멈추면 그 이후

성이냐? 은하이냐? 어디일까? 임사체험자들이 다녀왔다는 시공은? 아무

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정신의 미립자인 양자가 방출하여 바로「사건

래도 사후세계가 없다고 주장한 스티븐 호킹이 밝힌 빛과 시간조차 흡입한

의 지평선(Event Horizon) 너머」블랙홀로 흡입된다. 블랙홀에서는 시간

다는 블랙홀 이외는 사후세계의 필요조건을 갖춘 곳이 없다.

도 정지하기 때문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빛이 블랙홀 가까이 접근했을 때 빛이 빠져나가려는

11

힘과 블랙홀이 끌어당기는 힘이 평형을 이루는 지점, 바로 외부에서는 물 질이나 빛이 자유롭게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내부에서는 블랙홀의

지난 3월 나는 급성복막염으로 응급실에 실려가 수술을 받았을 때였다.

중력에 대한 탈출속도가 빛의 속도보다 커지므로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그때 나는 전신마취를 해서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정신을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 바로 죽음의 세계가 아닐까?

차리고 보니 천장 부근에 떠다니면서 내가 수술을 받는 장면을 볼 수 있었

또한 그는‘인간의 뇌는 부속품이 고장 나면 작동을 멈추는 컴퓨터다.

다. 그런데 수술에 문외한인 내가 의사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고장 난 컴퓨터를 위해 마련된 천국은 없다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이제 메스를 들고 자르려고 하고 있구나, 하고 그런걸 알 수 있었다. 자르

만들어낸 동화일 뿐’이라고 했다.

려는 부위에 작은 동맥이 감춰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의사는 그

그런데 그는 사건의 지평선 너머 블랙홀에서 벌레 구멍(wormhole)으로

걸 모르고 그 동맥을 잘라 버리려고 했다. 나는 중지시키려고 고함을 쳤다.

떨어져서 우주의 다른 구역 즉 다중우주 또는 평행우주로 나올 수 있다고

“거길 자르면 안 돼! 거기에는 동맥이 있어!”

했다. 바로 동화가 아닌 그의 우주론이다. 사건의 지평선 너머의 블랙홀은

그러나 그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동맥을 잘라버리고 말았다. 피가

어떤 것도 돌아오지 못하는 만물의 무덤이다. 빛과 같이 영혼이 가서 돌아

분출 해 천장까지 솟아올랐다. 나는 그 순간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올 수 없는 곳이다.

터널은 캄캄하고 아무것도 없었다. 맞은편에 빛이 보였다. 가까이 갈수록

그러나 웜홀을 통해 다른 우주로 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과학 이론이

빛이 차츰 밝아져 눈이 부셨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앞에 꿇어앉았다.

다. 빛처럼 영혼도 웜홀을 통과해 다른 우주로 간다면 어떤 사후세계가 펼

내가 사후세계를 경험한 것일까? 이제껏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 것의 발

쳐질까 궁금하다. 동화의 세계일까? 종교에서 말하는 사후세계일까? 과학

현일까? 그렇잖으면 터널 체험과 빛의 세계로 들어가는 체험이 출생 시의

으로 증명할 수 없는 일이니 말이다. 그래서 스티븐 호킹은 단말마로 사

기억이 되살아나는 게 아닌가? 그런데 마취된 내가 공중에 떠서 수술하는

후세계는 없다고 한 것인가? 지난해 사망한 그의 영혼은 어디 있을까? 아

광경을 보았다는 사실과 고함을 쳤다는 것은 체외 이탈한 것이 분명하다.

예 없어졌을까?

그렇다면 나도 사후세계를 체험한 것인가?

영혼이 있다면 그리고 육체에서 이탈했다면 어디로 갈 수 있을까? 3차원 332

l 뉴욕문학 제29집

윌리암 제임스(미국의 심리학자, 철학자, 초현실적 현상의 과학적 연구

소설 · 변수섭 l

333


자)법칙이 생각난다.‘아무래도 초현실적 현상의 증명이라는 것 자체가 본

구구 팔팔 에구구

질적으로 그런 한계를 가진 게 아닐까 생각한다. 왜 그런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초현실적 현상을 믿고 싶은 사람에게는 그것을 믿기에 충분한 증

임 혜 기

거가 있는 반면, 믿기 싫은 사람에게는 그것을 부정할 충분한 애매함이 남 아 있다. 꼭 그런 수준의 증거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 초현실적 현상이다.’

그녀는 최여사의 사남매중 막내딸이다. 막내의 특권은 집 마다 다르겠지 만 가족의 사랑과 관심을 많이 받는다는 것인데 그 관심은 잔소리나 참견 과도 통하는 것이어서 그녀가 그걸 막내의 특권으로 생각한 적은 전혀 없 다고 보아도 좋다. 그러나 막내는 자신이 누렸던 막내의 특권을 굳이 들라면 엄마라고 부를 수 있었던 호칭이라고 생각했다. 손 위의 오빠와 언니들은 어려서부터 어 머니라고 부르며 존대어를 하도록 교육을 받았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어머 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라고 인사했고 밤에는 어머니 안녕히 주무십시오, 라고 소리 높여 외친 후 자도록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막내는 존댓말을 하 지 않아도 괜찮은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 학교 에 다녀왔습니다, 하는 대신 엄마 나 왔어, 하며 당당히 엄마를 찾았다. 그 것은 위 형제들이 전혀 할 수 없는 말버릇이었다. 그런 특권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넷째에게도 그런 걸 적용할 만큼 엄 마의 철저한 존대어 방침이 있었던 것이 아니어서 막내가 반말하는 걸 훈 육하지 않고 내버려 둔 것같다. 그냥 막내니까 응석을 받아주며 키우고 싶 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녀가 막내라는 특권을 뼛속깊이 느낀 것은 엄마가 세상을 떠났 을 때다. 졸지에 장례식 준비로 바쁘고 힘들게 뛰어다녀야 할 일이 전혀 없 었다. 위 형제들이 모두 알아서 해결했다. 손님처럼 장례식에 참석했고 식 변 수 섭 소설가, 수필가, 소설집: 들쥐새끼들(상.하) 장군의 딸들 뻐꾸기 둥지, 나비의 꿈(한·영판) 기타 전문서적 다수 soosufb@verizon.net

334

l 뉴욕문학 제29집

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이것이 형제 많은 집의 막내로 태어난 편안함이라는 수긍을 했다. 이런 면에서 외동 자식이 부모상을 치뤄야하는 어려움을 동 정하는 마음도 가졌다.

소설 · 임혜기 l

335


막내는 어머니가 운명하시는 자리에도 함께 하지 못했다. 멀리 한국에서

딸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옷 갈아입기와 목욕하기를 싫어하는 것이었

작은 오빠가 오고 아들을 알아보신 것같다는 다른 형제들의 위로담긴 추

다. 큰 딸이 어린아이 달래듯 예쁜 옷을 사다가 어머니 이거 예쁘지요, 입

측을 들으면서도 곧장 달려가지 못할 거리에 있었고 좀 더 버티실 것이라

어 보세요, 하면 무조건 싫은 내색을 했다. 싫어하는 정도가 심했다. 떼를

는 나름의 예상도 했다.

부리듯 탓을 했고 화를 내면서 힘들게 갈아 입으셨다. 옷을 금방 갈아입었

막내의 어머니는 일백세를 일 년 앞두고 세상을 떠나셨다. 소위 일반 사

다고 안갈아 입어도 된다는 억지도 부렸다. 그럼 빨래는 어디 있어요? 물

람들이 꿈처럼 소망하고 바라는 구십구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 삼일만

으면 못들은 척 했다. 절대 거짓말은 못하는 엄마의 궁색한 변명과 망가진

앓고 세상을 떠나면 좋겠다는 소망의 빈칸을 거의 숫자적으로 맞추고 가

모습이 그렇게 딸들을 슬프게 했다.

셨다.

나중엔 딸들이 오는 걸 싫어하기까지 했다. 반가워서 얼굴이 훤해지는

구십구세까지 살았지만 팔팔하게 살았을까?

순간이 오분도 가지 않았다. 옷을 갈아 입히려는 큰 딸에게 너희들 오지마

마지막 몇 년은 그냥 할 수 없이 살았던 것같다. 삶의 희망을 접고 즐거

라, 오기만 하면 나를 힘들게 한다. 오지마 다신 오지마, 화를 냈는데 갈

움을 포기하고 서서히 죽어가는 생활이었다. 혼자 살던 아파트를 정리하고 양로원으로 가면서 지니고 있던 모든 살림

때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쓸쓸한 얼굴로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와 배웅 을 했다.

과 재물에 아무 관심도 두지 않는 것이 삶의 포기 신호였던 듯하다. 그 몇

막내는 엄마가 편히 세상을 떠나시게 해달라는 기도를 시작했다. 일년

주일 전에도 작은 예쁜 밥솥을 새로 사고 싶다던 어머니는 돌연 모든 물질

전 부터다. 엄마가 죽기를 기도하는 것같아 차마 나오지 않던 기도를 시작

적인 욕망을 거짓말처럼 팽개치고 양로원으로 가셨다. 냉면 한 그릇을 먹

한 것은 엄마의 행복이 이 땅에서는 이제 가능하지 않다는 판단을 해서다.

기 위해 코앞의 식당에 갈 때도 목걸이와 반지를 챙겨서 치장하고 내려오

편하게 눈감으셔야 그 싫어하는 일들, 목욕하기, 머리 자르기, 옷갈아 입

던 분이었는데 아무 미련없이 모든 걸 알아서 처분하라며 양로원으로 가

기, 등을 중단할 수 있다는 수긍을 했고 엄마에게 사는 낙이 전혀 없다는

신 것이다.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90세에 들어간 양로원에서는 윌체어에 의존하지 않고 걷는 유일한 노인 이었다. 기억력도 거의 잃지 않고 살았지만 수 년 전부터는 외출을 싫어하

저 아름다운 세상 주님이 약속하신 천국으로 편하게 더 이상 고생하지 않 고 가시도록 불러 주세요, 라는 기도를 시작했다.

고 붙박이처럼 의자에 앉아서 지냈다.. 절대 낮잠을 자지 않는 철칙이 있어

뭔가 죄송스러워서 처음엔 나오지 않던 그 기도를 입 밖으로 내놓자 그

서 대낮에 침대에 눕는 적이 없으니 하염없이 의자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

건 당연한 효도의 기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기도 시간마다 빼놓지 않

다. 카페테리아에 앉아 있다가 침실까지 걸어가서 화장실을 쓰는 것이 참

고 했다. 아프지 않고 고통 받지 않고 편하게 가시는 길 꼭 열어 주세요,

힘들다고 할 정도로 몸이 쇠약해졌지만 눕는 적이 거의 없었다.

간곡하게 기도했다.

귀가 어두워도 듣고 싶은 것 없다고 보청기를 거절했고 방의 티브이도 별

그래도 자식을 볼 수 있는 이 세상이 좋은 것이라는 것도 자식들의 입장

로 보지 않았다. 가끔 화면을 보면서 뉴스를 짐작하는 정도로만 티브이를

이고 어머니가 음식을 먹지 않으려하는 것을 보면서 삶의 욕구가 정말 없

켜고 보았다. 끝까지 독립적인 고집 때문에 옷을 갈아입는 걸 도와주는 것

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도 싫어했다. 힘들고 어려워하며 혼자 옷을 입으려고 고집했다.

336

l 뉴욕문학 제29집

식탐은 커녕 식욕이 전혀 없으셨다. 음식을 가져가면 반가워하지 않았다.

소설 · 임혜기 l

337


도로 모두 가져가라고 성화여서 아예 가져갈 필요도 없게 되었다. 틀니를

을 좀 뒤로 잡고 있었다. 물만 마셔도 훨 나을 것이라는 의사의 조언을 듣

잃어 버려서 새것을 해드렸지만 편했던 틀니가 아니라고 음식을 먹을 때는

고 형제들은 어떻게 해서든 영양이 될 만한 걸 먹게 하려는 생각만 했다.

오히려 그걸 빼고 먹으니 밥알 몇 개와 국물만 떠 먹는 상태였다. 영양 보

이런 경우 링거는 줄 수 없는 거라는 걸 배웠다. 소화할 수 없는 약한 몸에

조품이 생명을 이어주는 것같았다.

링거액이 들어가면 복수가 찬다는 것이다.

막내가 엄마를 이젠 천국으로 불러 주세요 라는 사망의 간구를 시작한지 일년 만에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가 고통을 느끼시듯 미간을 찌푸리는 걸 보고 큰 딸이 진통제를 부 탁해서 맞게 한 후 아주 편안해진 모습이었다고 한다. 주무시는 걸 보고 저

몸에 병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스스로 지탱할 수 없도록 몸이 쇠약해 있

녁에 집으로 돌아왔다는데 아침에 연락이 왔다고 한다. 혈압의 수치가 너

었다. 뼈만 남은 몸이 스스로 지탱을 하지 못하고 무너지면서 골반 뼈가

무 떨어지고 있으니 오라는 전달이었다. 아침 9시 반 경이었다고 한다. 형

부러진 모양이다. 응급실에 실리어 갔고 어디에 부딪친 모양이라고 의사

제들이 연락하고 달려가는데 한 시간을 지체했다.

는 진단했지만 어머니는 부딪치거나 넘어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냥 힘겹

도착하자 숨이 끊어진 것이 열시 경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아무

게 몸을 버텨주던 뼈가 결국 툭 부러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했다. 진통제

도 지켜보는 자식없이 혼자 떠나신 것이다. 뭘 지켜보고 있느냐, 나는 그냥

로 고통이 없게 한 후 뼈를 붙이는 수술이 가능한지를 살피고 수술을 결

혼자 갈란다. 그렇게 떠나셨을 것같다. 엄마라면 그렇게 하고도 남을 분이

정했다. 그냥 회복될 수는 없는 것이어서 99세 연세에 수술을 받았다. 수

다. 오지마 난 괜찮아 난 편해, 평소에 엄마는 늘 자식들에게 그렇게 늠름

술 후 하루 만에 일어서서 두어 걸음 걸었고 의사는 와우 스트롱 워먼, 이

하게 괜찮다고 했다. 너희들이 편해야 내가 편하다, 아, 나도 자식에게 그

라며 놀라워 했다.

런 독립적인 부모가 될 것이다, 막내의 결심이 그렇다.

수술 회복을 기다리는 동안 어머니는 음식을 거부했다. 퇴원 후 작은 요 구르트 한 병 마신 후 이튿날부터 음식은 커녕 물도 입에 대지 않으려 했 다. 정신이 있어서 큰 딸이 옷장 문을 열어놓았다고 저거 닫으라는 잔소리 까지 하면서도 음식은 싫다 했다.

엄마는 아주 편안하고 고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고 한다. 막내는 열시 반에 연락을 들었고 편히 가시기를 기도하던 자신의 기도가 응답 받았다고 생각했다. 혼자 감사와 슬픔의 기도를 드렸다. 어머니가 가신 날 막내는 창문을 열고 구름 속에서 유난히 크고 붉게 떠

안 먹어야 내가 다시 산다, 안 먹어야 내가 이 지옥을 떠난다. 안 먹어야

있는 보름달을 바라보면서 엄마와 이별을 했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서울에

내가 천국에 갈 수 있다.라는 판단이었까? 아님 물 한 모금 마실 기운도 소

서 사온 모자를 씌워드렸더니 귀찮다며 던져 버리는 어머니에게 다시 사정

멸한 것이었을까?

하듯 쓰게 했으나 또 휙 벗어 던지는 것이 야속해서 함께 모자를 내팽개친

수술 후 통증을 느끼지 않도록 큰 딸은 진통제를 주도록 부탁했고 계속 음식은 거부하고 잠만 자는 시간이 사흘 계속 되면서 작은 아들이 한국에 서 왔다. 눈을 뜨고 머리를 끄덕여 주었다는 걸로 알아보았다고 모두들 안 심했다. 막내는 아침에 예약된 약속이 있는 날을 지내고 사태를 보려고 했고 거 의 의식이 없는 엄마가 음식을 잡숫고 기운을 차릴 것으로 예상해서 갈 날

338

l 뉴욕문학 제29집

지난 겨울이 마음에 걸렸다. 엄마 보러 나 이제 안 올테야, 협박을 한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며 울었다. 달을 바라보며 이제는 하늘에 계신 엄마에게 하소연도 했다. 엄마 내 맘 알지 그거 내 진심 아니고 너무 속상해서 한 말이야. 그 모자 찾느라고 여 기저기 기웃거려서 특별히 구해 온건대 그렇게 팽개치는 것이 섭섭했단 말 이야, 라는 변명도 늘어놓았다.

소설 · 임혜기 l

339


어머니는 다 안다. 넌 원래 꽥꽥 거리고 말버릇 나쁜 거 잘 알아. 내가 그 렇게 키웠는데 네 행패를 잘 알고말고, 하실 것이었다.

마르의 수기

다음날 미팅을 마치고 곧 떠나도록 비행기를 예약했고 아무 차질없이 준

한 영 국

비된 장례식에 갈 수 있었다. 막내를 참 많이 사랑했다는 것을 계속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하던 일을 중단하고 오도록 하지 않았고 차질이 나지 않도 록 계산해서 가신 것같았다. 추운 겨울 날씨 와중에도 눈폭풍을 살짝 비껴 서 장례와 안장을 마칠 수 있었다. 평소에도 자식이 편하면 내가 편하다던 그 배려가 가신 날짜도 정하신 듯하다. 막내가 버릇없어도 모두 눈감아 주던 어머니의 모습은 곰곰 생각하면 사 랑이라기 보다는 동정이 아니었는가 싶다. 위 형제들이 누리던 호사와 호 강을 누리지 못하고 사느라고 챙겨주지 못한 보상일 수도 있다. 여유롭게 해줄 수 없어서 함부로 굴어도 용서하는 관용과 배려로 대신한 것이 아닌 가 싶다. 그렇게 막내의 엄마는 4남매가 모두 무고한 상태에서 구구 팔팔 일주일 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막내는 분명 깨달은 것이 있었다. 결코 그렇게 오래 사는 것이 축복이고 행복이고 만사오케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구구 에구구 가 옳다는 것이다.

요즘 들어 안경을 자주 닦는다. 작년에 맞추었으니 오래 된 것도 아닌데 자꾸 뿌옇게 앞을 가려서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요즘은 간편하게 사용하던 안경 티슈 대신 종전 대로 설거지 용 세제로도 닦아 보지만 그리 신통치 않다. 새벽에 일어나 라디오를 틀어 놓고‘새벽’이라는 세제를 안경에 살살 묻혀 거품을 내고 있는데 문득“팩트가 나의 친구다. …… 그것 만이 나 의 위안이다”라는 말이 들린다. 나는 놀라서 거품이 묻은 손을 멈추고 가 만히 귀를 기울인다. 시간이 이르니 아마도 재방송일 것이다. 귀에 익은 아나운서의 목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사람은 마이클 슈미트(Michael Schmidt), 뉴욕 타임즈 기자다. 트럼프 대통령의 러시아 스캔들, 그리고 힐

러리 클린턴의 이메일 스캔들을 파헤친 경험에 대해 주고받다가 나온 얘기 다. 노, 노, 노! 정치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팩트가 유일한 위안이고 방 패고 희망이라는 발언에 내가 놀란 것이다. 아마도 그는 젊을 것이고, 자신 만이 자신의 유일한 아군인 모양이다. 굳이 듣고 싶지 않았던 팩트. 그걸 기 사화하려고 사람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면서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자괴감 이 몰려오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곁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음을 인식할 때 에는 외롭기도 했겠지. 하지만 종일 인간의 전장터를 뛰어다니며 쫓고 쫓 기다가 썰렁한 아파트로 돌아와 불을 밝히며 그는 중얼거린다지 않는가.“

임 혜 기 미동부한국문인협회 9대 회장 역임. 국제 한국 펜 이사 저서출판: *장편소설: <셋은 언제나 많고 둘은 적다>, 사랑과 성에 대한 보고서>, <사랑에게 묻는다>, <열 려라 레몬> 맨해튼 불루스 *수상집: (결혼한 여자의 자유) (여자가 왜 술 마셔?) (사람들은 자꾸 그곳을 바라본다) (교과서

그래도 내가 말한 건 팩트니까,”라고. 그게 그의 유일한 방패며 위안이었 다니 그는 복이 많은 사람이다. 행복하여라, 팩트를 말하는 사람들…… 하 늘나라가 저들의 것인지……. ‘팩트’가 나의 방패인 때가 있었다. 엄연히 있는데 없는 것처럼 감추어

를 탈출한 미국영어) haeky33@yahoo.com

340

l 뉴욕문학 제29집

소설 · 한영국 l

341


진 사실들을 들추어내 진상을 바로잡고자 했다. 때로는 드러내지 않으려는

퀸즈 한인 가정상담소 최애영 이사장이 방과후 학교에 다니던 꼬마 하나를

사람들을 다독이고 의식화시켜서 사실을 햇빛 아래 내어놓아 바람을 쏘였

입양한 사실이 화제가 됐었다. 60여 세의 할머니가 5살 꼬마의 엄마가 된

다. 그게 정의라고 생각했고, 그게 정의였다. 그건 지금도 정의다.

것이다. 부모가 잘못돼 자식을 키울 수 없게 되자 아이의 장래를 위해 내

하지만 이제 자신이 없다. 자신이 없어져서 생각다 못해 은퇴까지 했다. 아직도 사람들은 이런 저런 행사가 있으면 한 마디 부탁한다든가, 아니면

린 용단이었다. 그 정신을 본받자고, 우리도 뉴저지에서 세상을 좀 바꿔보 자고, 여섯 여자들이 의기투합해 일을 저지른 것이다.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 달라고 좋게 말하지만, 나는 나가지 않는다. 나간다

시작은 여섯이 했지만 그 창립 멤버 중 오늘날까지 남아있던 건 이래저

고 큰 일이야 생길 리 없다. 그게 더 문제다. 나는 혼자서, 남몰래, 머리가

래 나 혼자다. 여러 가지 이유와 사정이 있었다. 이사 간 친구도 있고, 지

어질어질해지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감당해야 한다. 자욱한 회한에 시

쳐 나가떨어진 친구도 있고, 스스로가 너무 불행해진 친구도 있고, 비대해

달리기도 한다. 때로는 내 생애가 흐물흐물 무너져 내릴 것만 같고, 과거

진 조직에서 초심의 뜻을 못찾겠다고 그만 둔 친구도 있었다. 지금이야 비

를 싹 쓸어버리고 싶기도 하다. 창피하고 아프고 무섭다. 나는 이제 팩트

슷한 기관들이 많이 있지만, 그때는 정말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돼 미련스

의 포로다.

럽게 끝까지 붙들고 늘어진 게 우연히 나였다. 내 성격 탓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오래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영문학을 전공해서 서류를 좀 X

X

X

볼 줄 안다는 점 때문에 그저 몇 년만 하려니 했었는데…… 어느새 내 인 생이 거기에 다 기대어 있다!

지난 20여 년 간의 나의 흥망사.

점차 알려지면서 극적인 케이스도 들어왔다. 주머니를 털어 하는 일이라

'세이프 호라이존(Safe Horizon)’은 우리 여섯 명의 여인들이 처음 시작

한국 신문에 광고는 내지 못하고 기사 한 꼭지가 드문드문 선전 대신 나갔

해 지금은 권위(?) 있는 비영리 기관이 된 단체 이름이다. 낯선 땅에서 살

다. 누가 이런 걸 보랴 싶었는데,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이런 걸 오려 둔다

아내야 하는 한인 가정을 위한, 특히 여성과 아이들의 안녕을 위한 모임 정

는 걸 알았다. 위치가 편해 내 아파트를 아지트로 썼는데, 주소를 묻는 사

도로 생각하고 처음에는 우리들끼리 세이프 존(Safe Zone)이라고 불렀다.

람들도 생기고 상담을 원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아무나 집으로 오라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다 보니 하도 갈 길이 멀고 또 세월이 가도 달라지는 게

할 수가 없어서 만남은 주로 밖에서 이루어졌다. 우리는 서로 시간을 짜서

없는 것 같아서 그 실망을 감추기 위해 Zone에서 Horizon으로 이름을 바

전화를 받았다.

꾸었다. 결과가 보이지 않아도 천천히 한 발 한 발 가자는 의미도 있었고,

어느 날 미션 임파서블처럼 보이는 건이 들어왔다. 어느 아가씨가 남몰

우리와 같은 일을 하는 미국 기관의 이름이 알고 보니‘안전한 수평선’이

래 우리에게 전화를 걸어와 자신을 구해 달라고 했다. 통화가 몇 번 오가다

기도 했다.‘지평선’이라고 하지 않고‘수평선’이라고 하는 이유는 세례

드디어 날을 잡았다. 한국을 뜨는 순간부터 깡패들에게 저당 잡혀 남자들

처럼 물로 거듭나라는 뜻이었다.

을 상대하고 있는 아가씨로, 맨해튼 차이나 타운 근처의 건물 이층에 산다

우리가 처음 이 일을 시작한 20년전쯤에는 이 분야에 관해 요즘만큼의

고 했다. 외출은 아래층에 있는 델리겸 잡화상에 내려가서 담배나 간식을

관심과 기준도 없었다. 그땐 우리들이 모두 젊었고 패기 왕성했고 정의롭

사는 시간이 전부였다. 대개는 가게에서 나와 담배를 한 대 피우고는 다시

고자 했더래서 멋 모르고 덤벙 뛰어 든 셈이다. 계기는 있었다. 그 즈음에

위층으로 올라간다는데, 그 잠깐이 중요하다고 했다.

342

l 뉴욕문학 제29집

소설 · 한영국 l

343


물론 우리도 겁이 났다. 그래서 시간 약속을 하고는 사전 답사까지 하고

음아 날 살리라고 뛰었다고 한다. 가게에서 다른 두 아가씨가 나오는 걸 백

플롯도 짰다. 근처의 골목길과 경찰서와 시간대별 교통 상황까지 파악해

미러로 봤지만 금방 지워졌다. 곧바로 가지 않고 우회전을 했으니까. 우리

두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건 경찰에 신고하고 사건을 의뢰하지 않은

가 떠나고 경희가 차를 빼는데 전혀 악당같이 생기지 않은 두 명의 남자들

것이다. 물론 그녀가 불법체류자라서 싫다고 했지만, 그때는 그런 것보다

이 이층에서 내려와 그녀를 쫓아왔다고 한다. 한통속임을 직감한거다. 하

는 인권을 더 따지던 시대였는데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지만 그녀는 속으로는 덜덜 떨면서도 아무 것도 모르는 척 경찰서 쪽으로

경희와 나, 그리고 영애가 나서기로 했다. 차도 세 사람 차를 모두 몰고 가서 실수가 생기면 어떻게든 만회해 보려고 했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영 애는 조카까지 동원해 운전을 시켰다. 멋모르는 청년 하나가 끼었다는 사 실이 우리에게 큰 위안을 주었다.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차를 몰았다. 아주 차분한 모습이 그녀의 강점이고, 그들은 천연덕스러운 그녀의 차분함에 의심을 거두었을 것이다. 아가씨는 뒤를 돌아보다가 아예 시트에 누워 몸을 숨겼고, 나도 달리면 서 자꾸 백미러를 확인했다. 터널을 지나 고속도로로 들어서고도 여전히

디 데이. 막상 가보니 델리 앞에는 계획했던 것과는 달리 내 차를 세울

불안했다. 나는 아가씨를 뉴저지에 있는 어느 성당으로 데리고 갔다. 원장

주차 공간이 없었다. 나는 당황해서 입술이 타들어 갔다. 앞길이 일방통행

수녀가 우리를 기다리며 마당을 서성이고 있었다. 신문 기사에‘기독교 정

이라 한 바퀴를 빙 돌아서 다시 델리 앞으로 가기 위해 천천히 서행을 했

신’운운했기 때문에 불안해서 일부러 교회를 피한 것이었다. 그때는 어리

다. 경희는 일찌감치 길 건너에 주차를 하고 누굴 기다리는 척 앉아 있었

숙한 우리들을 모두들 잘 도와주었다. 아마도 어리숙해서였을 것이다. 요

고, 영애는 건물에서 내다볼 수 없는 교차로에 차를 세우고는 조카와 함께

즘은 그런 도움을 기대하기 힘들다.

델리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아가씨 셋이 델리 옆 시커먼 문에서 나오는 게

들킨 것 같지도 않은데, 괜히 불안한 시간이 흘러갔다. 한동안은 밤낮없

보였다. 약속 대로 회색 라운지 웨어 차림에 빨간 슬리퍼를 신은 게 그 아

이 커튼을 치고 살면서 집 밖으로 나가는 게 무섭고 싫었다. 차량이 노출된

가씨다. 영애가 내가 아직 주차를 하지 못한 것을 보고는 잠깐 당황하는 것

경희는 더 심했다. 그녀는 차고에 넣어 둔 차를 좀처럼 꺼내 쓰지 못했다.

같더니, 이내 그냥 델리 앞에 서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계획 대로 하자

아가씨를 어디로 보내야 할지도 우리의 고민거리였다. 우리는 서로 만나

는 뜻이었다. 그녀는 우리들 중 가장 대담하고 창의적이다.

지는 못하고 전화로 밤낮없이 설왕설래를 했다. 아가씨는 한국으로는 가지

나는 주차공간을 기다리는 척 하면서 델리 앞에 이중주차를 하고 멈춰

않겠다고 우겼다. 썩 이해가 가는 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의견을 존중해 주

섰다. 영애가 가게로 들어가더니 전화를 걸었던 아가씨 곁에서 그녀를 붙

기로 했다. 영애가 제일 못마땅해했지만, 그래도 점차 우리들끼리 인권 차

잡으며 슬쩍 넘어졌다. 그리고는 아가씨와 조카가 양 옆에서 영애를 부축

원의 원칙을 세워 나가고 있던 시기였기에 그에 따랐다. 로스앤젤레스 같

해 가게 앞으로 나와 섰다. 괜찮으세요?, 라면서. 내가 올려다보니 이층에

이 한인이 많은 곳은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현대 공장이 들

서 내려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영애를 붙들고 있던 아가씨가 이중으로 주

어선 앨라배마 같은 곳은 일자리는 많겠지만 이동인구가 많아 노출될 확률

차된 내 차를 봤다. 하지만 담배를 피울 시간이 아니었기에 당황하는 것 같

이 높아 보였다. 결국 우리는 그녀를 버지니아 리치몬드로 보내기로 결론

았다. 그러자 영애가“가!”라고 말하며 그녀를 내 차 쪽으로 떠밀었다. 나

을 내렸다. 한인 인구가 적은데도 한인회가 조성돼 있고, 타지역에서 유입

는 얼른 잠금 장치를 풀었고, 그녀가 냉큼 뒷좌석에 올라탔다. 나는 문부터

된 사람들을 기꺼이 도와주는 교회도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에 전화를 했

잠그고는 무조건 내달렸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영애와 조카도 바로 걸

더니 임시 숙소까지 제공해 주겠다고 했다. 아가씨가 좀 안정을 취한 후 의

344

l 뉴욕문학 제29집

소설 · 한영국 l

345


논을 해서 일자리도 마련해 보겠다고 하니 더 바랄 게 없었다.

을 받아야 한다면 상대방 아이의 병원 진단서와 반 아이들의 증언과 이 사

그레이하운드를 누가, 어디서, 몇 시에 태워 보낼 것인가가 또 문제였다.

안이 인종적 편견이 아닌지 정식으로 조사를 받아봐야 겠다고도 했다. 결

혹 아가씨를 다시 낚아 챌 남자들이 나타날지 누가 알겠는가. 남의 생각을

국 파워 게임에서 비긴 아이들은 어색한 악수를 나누고는 각자 뛰어서 교

헤아려 잘 피해 다녀야 하는 이런 순간에는 교실에서 열심히 배운 교육이

실로 올라갔다.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독심술이 더 아쉬웠다. 새벽이나 밤이 안전

피곤해 보이는 아이 엄마가 다시 네일 가게로 돌아가 일을 해야 한다고

할 거라고 생각하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어느새 행인이 가장 많은 대낮이

해서 우리는 교문을 나서면서 헤어졌다. 하지만 드물게 쿨한 그 엄마가 마

도리어 눈에 덜 뜨일 것 같았다. 저들의 본거지가 맨해튼인 만큼 뉴왁에서

음에 들었던 나는 아이도 격려해 줄 겸 저녁에 아이의 집을 찾아 갔다. 큰

태워 보낼까 하다가도, 혹 등잔 밑이 더 어둡지 않을까 싶어 결론을 내리지

아파트 단지라 찾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나도 피곤해서 지하까지 포함해 3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우리는 생각다 못해 영애 조카에게 아르바이트 비용

층짜리 벽돌 건물 사이를 동수를 확인하며 천천히 걸었다. 이미 날이 어둑

을 지불하고는 필라델피아에서 그녀를 태워 보냈다.

어둑해 불을 켜 놓은 집들은 안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창문이 땅에서 2피

전화를 받다 보니 사람들의 불행의 저변에 깔린 진짜 문제들은 성이거나

트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반지하 방들은 더더욱 잘 보였다.

돈이거나 폭력이거나 파워 게임이었다. 이것들이 서로 뒤섞이고 흐르고 엎

무심코 어느 동을 지나가는데 귀에 익은 아이의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질러지고 불이 붙어서 갖가지 팩트를 만들어냈다. 뭐든지 많아도 문제고

나는 소리가 나는 반지하 방을 들여다보았다. 세 쪽짜리 창문 안이 거실이

적어도 문제였다. 한 사람의 자아를 온통 점령하게 된 이런 것들이 시간에

고, 거실 저 안쪽에서는 아이 엄마가 미니 부엌의 아일랜드에 서서 부두를

따라 이합집산을 하면서 문제를 일으켰다.

자르고 있었다. 그녀 뒤편에 놓인 스토브 위에서는 무언가 보글보글 끓고

한번은 내가 사는 동네의 초등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한국 남자 아이가

있는 것이 보였다. 살짝 열려 있는 창문으로 된장찌게 냄새가 났다. 거실

점심 시간에 다른 아이를 밀쳐 넘어뜨려서 학부형 면담을 해야 한다며 통

옆 두 쪽 창문 안은 침실인데, 아이는 롤라 스케이트를 타고 거실과 침실을

역이 필요하다고 했다. 가서 보니 상대 아이의 엄마는 목소리도 드높은 백

다 누비고 돌면서 넘쳐나는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가끔은

인이고, 자기 아이 손에 1밀리짜리 상처 하나만 생겨도 그것이 타인으로 인

거실 창문 바로 앞에 놓인 책상 위의 공책에 무엇인가를 쓰고는 다시 스케

한 것이면 병원에 데리고 가면서 송사를 벌일 사람이었다. 선생은 해결이

이트를 신나게 타고 돌았다. 그렇게 숙제를 하는 모양이었다. 침실을 한바

늦어지면 아이들만 손해라는‘매우 교육적이고’합리적인 이유를 내세워

퀴 돌아 다시 책상 앞에 나타났을 때 녀석이 나를 보았다. 아이는 롤라 스

서류에 빨리 사인을 받고 싶어 했다. 그런데 다행히 산전수전 다 겪은 한

케이트를 신은 채 의자 위로 해서 책상 위로 냉큼 올라서더니 창문을 활짝

국 엄마는 강하고 비상했다. 그녀는 우리 아이가 떠밀기 전에 먼저 저 녀

열어젖혔다. 나는 웃으면서 들고 있던 케이크 상자를 내밀었다.

석이 젓가락으로 김밥을 먹는 애를 놀렸다고 통역하라고 했다. 김밥은 절

현관으로 해서 B4에 도착하니 아이 엄마가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

대로 포크로 먹을 수 없는 거라고도 덧붙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물리

아이는 그 새를 못 참고 복도로 나와 스케이트를 타고 다녔다. 인사를 하는

적 힘을 행사하면 안된다는 대답이 돌아오자 그녀는 그러면 좋다, 정학 조

아이 엄마도 치마 밑에 롤러 스케이트를 신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놀라

치를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아이들 둘이 다 교장실 한 구석에 앉아 자습하

는 시늉을 하자 그녀는 아이 뒤를 따라 복도를 한바퀴 돌고는 나를 집안으

도록 하자고‘매우 교육적으로’웃으며 말했다. 만일 자신의 아이만 벌

로 안내했다. 그 아파트는 모자가 저녁마다 빌려 쓰고 있는 체육관이고 놀

346

l 뉴욕문학 제29집

소설 · 한영국 l

347


이터고 생활관이고 여관이었다. 반지하여서 가능한.

그녀는 타고난 팩트마저 자신의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 기꺼이 바꾸었다. CEO가 된 후 그녀의 목소리는 바리톤으로 바뀌었는데, 실수하는 법도 없

X

X

X

이 어디서나 그 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티브 잡스를 경애한 나머지 그가 마시던 커피점에 가고 그가 입던 검은 터들넥을 입었다. 이쯤 되면 자

나는 아직도 황우석의‘나의 생명 이야기’책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을

기 내부에서마저 가짜와 진짜의 구별이 힘들어져서, 그녀는 자신이 토마스

펴내고 난 후의 그의 행적를 잘 알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 나

에디슨에 버금가는 발명가이자 여자 스티브 잡스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

중 팩트를 까맣게 잊는 날이 올까봐 이 책을 버리지 못한다. 이 책 속의 황

다. 오늘 그녀가 화제거리가 된 이유는 이 사기 사건이 재판 중이어서 20

우석 부분의 대미에 써 있는 글은 처음엔 일종의 요식용 마무리 같았지만,

년 형을 살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도 그녀가 결혼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무서움증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이렇게 썼다.‘앞으로도 나는

그녀는 어느 호텔 재벌 집안의 8살 연하 20대 청년과 결혼을 한단다. 남자

아무리 바빠도 어린 꿈나무들을 찾아갈 것이다. 그리고 참으로 상투적인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지만, 또다른 회사의 CEO가 되겠다는 그녀로서는 당

말을 반복할 것이다. 그 상투적인 말(국가와 인류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과

연한 행보다. 그녀에게는 폼 나는 후원자와 폼 나는 지역에 있는 폼 나는

학자가 되라는)에 진심이 실리면 묵은 때가 벗겨지고 가장 숭고하고 아름

회사 건물과 폼 나는 CEO자리가 있으면 그 내용이 무엇이든 상관이 없다.

다운 말로 변신한다. 내 말이 어린 친구들의 영혼에 각인되기를 바란다.’

법을 넘나드는 그런 큰 사기 사건들은 그렇다 치고 도처에 널려 있는 게

그와 공동 집필한 최재천, 김병종 교수는 사건이 터지고 난 후 무슨 생각

그냥 속수무책 두고 보아야 하는 가짜들의 행렬이다. 세이프 호라이존도

을 했을까? 요즘엔 가짜가 더 진짜 같다. 그래서 팩트가 그냥 자연스런‘

그 가짜들의 행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실’이 아니라 자신이 사실임을 입증해야 한다. 현란한 레토릭이 사실보

‘안전한 수평선’은 세월 따라 많이 커졌다. 6인 체재는 끝나고 나는 다

다 먼저 사람들을 홀려 놓아서일 것이다. 플라톤이 레토릭을 건강하지 못

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풀 타임 회장이 됐다. 조직상 필요한 부회장 자리는

한 음식에 잔뜩 친 조미료라고 경계했던 것도 이해가 간다.

창립 6인 중 한 명인 지수가 맡았다가 도저히 못 하겠다고 해서 외부에서

미국판 유사 사건도 있다. 테드에서 보고 나도 검증없이 반했던 테라노

모셔왔다. 빵빵한 이사진도 만들어졌다. 사무실도 마련하고 커뮤니티 룸

스(Theranos)사의 CEO 엘리자베스 홈즈(Elizabeth Homes), 그녀가 오늘

도 운영했다. 이사 중에는 변호사가 많아서 법률 문제를 도와주고, 교육 프

신문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스탠포드 대학을 다니다 그만 두고 손가락 끝

로그램도 개발해 심리상담가나 의사, 목사, 전도사들이 탄탄한 네트워크를

에서 뽑은 피 한방울로 암을 포함해 200여 개의 검사를 할 수 있다던 실리

형성해 참여해 주었다. 주로 많은 케이스가 가정폭력이고 자녀 문제고 이

콘 밸리의 여성 창업자. 클린턴과 키신저와 슐츠 등 오직 백인 남성으로부

민 문제여서 법적이나 정신적, 심리적 지원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세

터 9억 불의 투자를 받아내고, 800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전국에 8천 개

월이 쌓이다 보니 재정 지원도 많아지고 회원수도 늘었는데, 그 중에는 정

의 매장을 가진 월그린에서 의사 처방 없이‘에디슨’으로 피검사를 하자

부에서 받는 것도 있었다. 그만큼 내실이 증명되었다는 증거다.

고 법을 고치려 한 여자. 그녀가 이름을 붙인‘에디슨’이라는 기계는 제

여기까지라면 내 인생은 그런대로 보람된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될 가능

대로 작동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회사 지하에는 종전의 방식으로 피검사를

성이 높았다. 첫 걸음이 순수한 봉사였으니 끝까지 그렇게 되길 바라는 건

하는 수많은 기계와 직원들이 감추어져 있었다.

당연했다. 하지만 조직이 비대해지자 처음의 열정과 간절함이 사라진 곳

348

l 뉴욕문학 제29집

소설 · 한영국 l

349


에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자동 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감독

못한 내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그런 종류의 일을

자인 내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금 간 틈새들이 생겨났고, 거기서 내 패착

내가 어쩌랴 싶어 모른 척했다. 하지만 K이사가 계속 이사회에 나오지 않

의 길이 시작되었다.

아 내가 연락을 취해야 했고, 그가 막상 아무 이유도 대지 않고 이사 자리를

연전 12월1일, 청소년 문제가 급증하는 연말이라 우리는 특별히 신경을

내려 놓겠다고 했을 때에는 기분이 상했다. 나는 알겠노라고, 그간 감사했

쓰고 있었다. 그날 청소년 상담을 맡기로 한 심리치료사는 C씨였다. 전화

노라고 하며 전화를 끊었지만, 그때서야 이건 뭐지?, 라는 흥미가 솟았다.

가 여러 통 걸려 왔는데, 그 중 한 통화가 특이했다고 사무실 아가씨가 내

나는 사무원 아가씨와 함께 12월 1일의 전화기록을 다시 살펴보았다. 우

게 일러주었다. 발신인은 C를 찾고 있는 남성이었고, 아가씨는 어느 청소

리 사무실에 들어오는 모든 전화는 그 정보가 기록된다. 우리는 그날 C가

년의 아버지려니 생각하고 전화를 바꾸어 주었다. 어딘가 귀에 익은 남자

전화를 받은 것이 K이사의 휴대전화 번호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메시

목소리였다고 한다. 그들은 다음 날 C가 운영하는 상담센터에서 만나자는

지로 넘어 간 바로 그 다음의 전화는 K이사의 집 전화번호라는 것도 확인

약속을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아가씨로서는 약속 장소도 그렇고 분위기도

했다. 나는 이 일에 개인적인 흥미를 느꼈다.

그렇고 좀 의아한 통화였단다.

나는 아가씨가 퇴근하고 나서 지난 몇 년 간의 전화 기록을 뒤져보았다.

전화를 끊고 났는데 금방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아가씨가 받으려 하자 C

그리고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2년 전까지 K 부인은 우리에게 여

가 받지 말라며 책상 위의 전화기를 손으로 눌러 저지했다. 신호음이 끝나

러 번 전화를 했었다. 왜였을까? 나는 한 해 전 봄 갈라에서 그녀를 처음

고 녹음기가 돌아갔다. 그러자 좀 다급하게 들리는 여자 목소리가 녹음을

만났을 때 그녀가 좀 심하게 내향적이면서 별로 말을 트고 싶어하지 않는

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전화 건 남자의 아내라며 급히 상의할 일이 있으

다는 인상을 받았던 걸 기억한다. 갈라 이후로 그녀는 쭉 전화를 하지 않

니 꼭 리턴 콜을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C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

다가 거의 1년이 다 되 가는 12월 1일에 통화를 시도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지 않았다.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우리는 곧 이 일을 잊었다.

나는 그녀에 관한 모든 상담기록을 뽑아 보았다. 상담원은 여러 명이었

몇 달이 지나고 C가 인사를 한다면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큼직한 새 다

고, 그녀가 직접 찾아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그녀의 상담 내역을

이아 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간 한국에 다녀온다며 자신의

읽고 깜짝 놀랐다. 남편의 의처증과 그에 따른 폭력이 그녀의 고민거리였

봉사 시간을 빼 달라고 했기 때문에 궁금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재

다. 무수한 일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아무나와 연계해 그녀를 의심하고, 밀

혼을 했으며, 이제 자신이 운영하는 상담 센터에 전념해 건물도 마련하고

쳐 넘어뜨리고, 때리고, 모임을 못 가게 하고, 강간했다. 그가 정신과 의사

본격적인 프로그램을 시작할 거라고 했다. 그러니 시간이 없어서 더 이상

의 치료를 받고 있지만 약을 먹지 않는 한 증상이 호전되지 않는다고 그녀

봉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유능한 청소년 상담사를 놓치는 것 같

는 하소연하고 있었다. 기록을 읽어 내려가던 나는 손이 벌벌 떨렸다. K는

아 섭섭했지만, 어차피 다 좋은 일을 하자는 것이니 그녀의 앞날에 축복이

‘안전한 수평선’의 이사였다. 이곳은 정말 안전한 곳일까? 그는 왜 이곳

있기를 바란다는 말을 해주고 보냈다.

에 이사로 들어온 것일까?

하지만 곧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녀의 새 남편이 우리 이사 중 한 사

마지막에서 두 번째 기록에 그 답이 있었다. 그는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

람인 K라고 했다. 나는 그를 잘 안다고는 할 수 없어도 웬만큼은 알고 지

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의 전문직을 유지하는데 불리하게 작용할 거라고 생

내왔다. 그의 부인과도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이런 일을 미리 눈치채지

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상담기관에 운영자로 적을 두어 자신의 입

350

l 뉴욕문학 제29집

소설 · 한영국 l

351


지를 유지하겠다고 했단다. 더불어 그간 치료를 받았던 의사가 무능해 상

“앉을 데가 없어서 어쩌죠?”

담자를 바꾼다면서, 정신과 의사가 아닌 심리치료사에게 다니기 시작했다

그녀가 무안해하며 말했다. 거실에는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의자도, 책

는 것이다. 이때까지 K 부인은 그 심리치료사가 C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

상이나 밥상도, 하다못해 텔레비전 한 대도 없이 그저 비어 있었다. 책 몇

는 듯했다.

권이 창틀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내가 그녀를 만난 갈라 두어 달 전의 마지막 기록에는 별 말이 쓰여 있지

“바닥이면 어때요.”

않았다. 이유는 대지 않았지만, 그녀가 이제 전화를 하지 않게 될 것 같다

나는 놀라긴 했지만 그걸 감추고 예사롭게 창 아래 마루바닥에 주저앉아

며 가능하면 자신의 기록을 삭제해 달라는 부탁이 전부였다. 아마도 자신

벽에 기댔다. 그녀가 남비에 커피 물을 올렸다. 남비에 끓이는 커피물은 미

의 남편이 이곳에 이사로 들어온 것을 알고 한 전화 같았다. 그녀가 그때

국에 와서 처음 보았다. 물이 끓자 그녀는 인스턴트 커피를 잔에 넣고는 수

C도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저로 저었다. 그리고는 커피잔을 내게 건네 주며 내 곁에 와서 벽에 기대

나는 그때부터 그들 세 사람에 대한 얘기를 유심히 들었다. 소문도 귀담

앉았다.“나 혼자 마셔요? 같이 마시지!”했더니 그녀는,“잔이 하나밖에

아듣고 SNS도 가끔 뒤져 보았다. C는 K가 하도 졸라서 결혼을 했다고 말

없어요. 조금 전에 마시기도 했고요.”했다. 그녀는 전혀 내향적으로 보이

하고 다녔고, 소문으로는 C의 아이들이 엄마보다 더 이 결혼을 원했다고

지 않았다. 나는 세이프 호라이존의 상담에 대한 의견을 말해 달라고 했지

했다. K는 아내의 정신병 때문에 도저히 함께 살 수 없었노라고 하면서, 그

만, 사실 그보다는 개인적으로 알고 싶은 게 더 많았다.

녀가 어려서 성폭력을 당해 치료를 받고 약을 먹지 않으면 정상 생활이 불

그녀는 12월 1일 집을 나왔다고 했다. C에게 전화를 걸고 기다렸지만 리

가능하다는 말도 은근히 흘리고 다녔다. 그 가운데 나는 흥미로운 점 하나

턴 콜이 없자 K가 퇴근하기 직전에 집을 나왔다. K가 다음 날 음악회 표

를 발견했다. 재혼을 했는데도 K의 주소는 예전과 동일했고, 도리어 C의

를 사 놓았으니 그녀도 반드시 가야 한다고 직장에서 그녀에게 전화를 걸

주소가 K의 집으로 바뀌어 있었다. 보통 이혼을 하면 남편이 집을 나가고

었다. 그녀는 치료를 제대로 받지 않는 한 동행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

아내가 집을 지키게 마련인데……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갔던 나는 K부인

자 K는 급히 C와 약속을 잡고는, 아내에게 그녀에게 즉시 전화해 상담 일

을 직접 만나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정을 확인하라고 했다. K부인으로서는 상담 약속의 확인보다는 C를 설득

K부인은 전화번호를 여러 번 바꾸었고 주소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접근

해 남편이 다시 의사의 진료를 받게 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10년 넘

금지명령을 가지고 있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의 근황을 알 수 있는

게 그를 치료한 의사가 의처증은 심리상담만으로는 조정하기 힘들다고 했

유일한 길은 그녀의 사촌들을 찾아내는 방법밖에 없었다. 나는 교회를 통

기 때문이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아침을 먹다가 망치를 휘두르는 난동을

해 어렵게 그들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그녀는 남편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

부리기까지 했다. 증상은 그녀가 기대하는 것과는 반대로 점점 더 도를 넘

가 있는 사람은 만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나는‘세이프 호라이존’의 입장

어갔다. 망치 사건 이후로 K부인은 어떤 일에도 그와 동행을 하지 않고 있

에서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었다. 그녀에게는 그와 둘이서 한 차를 타고 하루를 함께 보내야 한다는 사 실 자체가 두렵고 고통스러운 지옥이었다.

X

X

X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기시감을 가지고 들었다. 똑같은 사례를 무수히 보아 왔다. 폭력을 쓰는 남편들은 일을 저지른 후 그 모든 일을 없던 일로

352

l 뉴욕문학 제29집

소설 · 한영국 l

353


치기를 바란다. 그래서 주위에‘우리는 이렇게 사이가 좋다’는 것을 과시

다. 어쩌면 앞으로는 그녀보다 내 길이 더 어두울지도 모른다. 숨겨야 할

해야만 한다. 그래서 여자들이 그‘과시의 행사’를 치르게 되고,‘조용한

것이 많은 C와 K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어둠 속을 걸으면서 은퇴를

절망의 삶*’을 계속한다. 그녀는 그것을 끊고 싶었다. 그것을 끊는 유일

생각했다.

한 방법은 치료를 제대로 받거나 헤어지는 것, 그 둘 중 하나밖에 없었다. 치료라고 해도 완치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조정만이라도 절실했다.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점점 자괴감에 빠져들어갔다. 그녀가 아니라 내가 그랬다. 여자가 여자의 적이라는 말도 들었고, 사람은 본래가 악해서 그 선

나는 방패를 잃었다. K부인의‘팩트’가 그녀의 방패이듯, 바로 그 똑 같은 팩트가 이제 나와 C와 K의 치명적 허물이 되었다. 팩트는 아무리 그 럴듯한 레토릭으로 포장하고 감추어도, 거기, 그렇게, 그대로, 있기 때문 이다.

함은 인위며 작위라는 순자의 말씀도 안다. 세상엔 살인이라는 것도 있으 니 지상에는 온갖 일들이 가능하고 또 실제로 벌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월든> 에서

렇다고 내 코 앞에서 봉사와 종교와 상담의 갑옷을 껴입고 벌어지는 이런 일들에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나는 내가 너무도 무기력하다는 것을 깨닫았다. 어떤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만 무기력한 것은 아니었다. 모른 척하며 눈을 돌리고 싶어서도 무기력했다. 상담 사례였다면 적극적으로 나 섰을 텐데, 내가 감독하는 기관의, 그것도 이사와 봉사자의 일은 같은 자 세가 나올 것 같지 않았다. “C가 하는 기관 말이에요, 이름을 잘 지은 것 같지 않으세요? 패밀리 터치 센터(Family Touch Center), 정말 터치는 터치잖아요!”그녀가 웃으 며 말했다. 나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Safe Horizon’의‘horizon’을‘수평선’이라고 소개하면서, 내 이름도 그냥 기억하기 쉽게‘마르(Mar) 회장’이라고 하라고 해 왔다. 스 페인 어로 마르가‘바다’인데다 예전에 내가 좋아하던 영화가 생각나서 기도 했다. 하지만 뒤에 알고 보니‘마르’는 아람어로‘신(Lord)’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내가 곧 정의인 신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영어로는‘망친 다’는 의미였지만 그것까지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망칠 일은 없다고 생 각했으므로. ‘신’은 K부인의 운명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채 그녀의 텅 빈 방 을 빠져나왔다. 그 방은 비었기 때문에 이제부터 채워질 일만 남아 있을

한 영 국 뉴욕문학 소설 신인상. 뉴욕한국일보 시 신인상. 제1회 해외동포문학상 대상 (소설). 저서: <동글동네 모돌이> (바오로 딸 출판사).

것이다. 해는 졌는데, 싸구려 아파트촌이라 그런지 길은 어둡고 불확실했 354

l 뉴욕문학 제29집

소설 · 한영국 l

355


다행

렸다. 뭔가를 밟았구나! 확실한 느낌. 순간 뒷덜미가 목을 옥죄는 듯 느껴 졌다. 무서웠다. 덜커덩 소리는 연이어 들렸다. 나는 열려있던 창문을 모두

홍 남 표

닫았다. 좌회전을 하기 위해 신호등 앞에 섰을 무렵 덜컥하며 소리는 멈췄 다. 혹시 너구리 사체가 뒷바퀴에 낀 것은 아닐까? 신호등이 좌회전 신호 로 바뀌는 동시에 차의 액셀을 굳게 밟았다. 차에 속력을 더했다. 쫓아오

밤 열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습도가 높고 찬 공기 때문인지 짙은

는 너구리를 떼어 내려는 심정이었다. 공포심은 더욱더 커져 목덜미에 너

안개가 드리워진 밤이다. 차의 속도를 빠르게, 느리게 반복한다. 평소 낯설

구리의 입김이 닿는 듯 했다. 그리 멀지 않았던 집에 도착했다. 주차를 시

지 않은 길이 생소하게만 느껴진다. 숲에 가려진 호숫가를 지나고 있었다.

켰지만 바로 차에서 내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이 먹고 지금 뭐하는 짓인

운전대를 잡은 손에 무리하게 힘이 간다. 낮에 있었던 김 사장과의 마찰이

가 하는 자괴감이 든 후에야 차에서 뛰어 내릴 수 있었다. 차 뒤쪽을 확인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사실 그 마찰이라는 것도 어떻게 시작됐는지 조

해 보려는 마음은 아예 없었다. 도망치듯 집으로 들어왔다.

차 모르는 그런 것이었다. 몇 살은 어린 후배가 말끝마다 내 얘기에 토를 달았다고 생각해서 생긴 언쟁이었다. 나이 먹어가면서 성격도 둥글둥글 해

부엌의 비상등만 켜져 있고 집안의 불은 모두 꺼져있다. 마누라야 텔레

지고 대충 넘어 가는 게 좋을 텐데 김 사장은 나이를 먹을수록 할 말 다 하

비전 보다가 잠들었을테고 아들놈의 방에서도 불빛은 새어 나오지 않았다.

는 모습이 밉상 맞아 보인다. 해야 했을 말, 하지 말았어야 할 말로 인해 운

평상시 같으면 방안을 확인해 봤겠지만, 오늘은 먼저 욕실로 향했다. 샤워

전에 집중이 안 됐다. 안개 때문인지 몽환적 느낌마저 드는 밤이다. 빨리

하는데 피투성이 너구리가 계속 연상됐다. 나는 너구리의 피를 씻어 내기

차를 몰고 집으로 가 누울 생각뿐이었다.

라도 하듯 정성 들여 비누칠을 했다. 평소에 쓰지도 않던 때수건으로 몸 구

롱 아일랜드 대학을 지나 낮은 고개를 오르고 내리막길로 막 접어들 때

석구석을 닦았다. 살갗이 빨갛게 달아 오른 후에야 수건질을 멈췄다. 더운

였다. 눈앞에 갑자기 너구리 몇 마리가 눈에 띄었다. 가족이 틀림없다. 큰

물로 오래도록 몸을 헹궜다. 살갗의 따가움이 마음을 진정시켰다. 재수가

놈 한 마리에 작은놈 둘. 너무 갑작스러워 머릿속 생각이 하얗게 사라져 버

없으려니 별일이 다 있네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렸다. 너구리 가족은 놀랐는지 가던 길을 숫제 멈추어 버렸다. 그중 큰 녀 석은 헤드라이트 뒤의 내 눈만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속도를 줄일

등이 보이는 마누라 옆으로 조용히 누웠다. 아들 녀석의 방문은 끝내 열

수 없었다. 그리 높지 않은 언덕이었는데도 내리막길 탄력을 받았는지 가

어보지 못했다. 내 몸에 부정한 게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속이 붙어 있었다. 그 찰나에 너구리들과의 거리는 급격히 가까워졌다. 중

어둠 어둠 보이는 천장을 바라보며 몇 번이고 되뇌었다. 이런 게 로드 킬 이

앙선을 넘어 너구리를 피해 볼 양으로 왼쪽으로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그

구나. 그 전까지 가장 큰 짐승을 죽여 본 것은 병아리뿐이었다. 그것도 죽이

리고 내 눈에 밟힌 건 또 한 마리의 너구리. 키 작은 가로수 밑에서 나를

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사촌 집에 놀러 갔다가 그 집에서 키우던 조금은

보고 있다. 그 야광 같은 눈과 마주친 나의 눈. 나는 속도를 줄이기는 커녕

컸던 병아리를 옥상에서 던졌다. 나는 그 병아리가 날 수 있을 줄 알고 던

너구리를 앞서가려고 가속 페달을 더 깊이 밟았다. 홱 하고 지나치고 다행

졌다. 그렇게 땅으로 내동댕이쳐질 줄은 정말 몰랐다. 사촌 누나가 울고불

히 너구리들을 피했다고 생각될 때, 오른쪽 뒷바퀴에서 덜커덩 소리가 들

고 난리가 나고 나를 애써 외면하던 외숙모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356

l 뉴욕문학 제29집

소설 · 홍남표 l

357


운전을 하다 보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 그냥 재수가 없었다고 생

장고 문을 연다. 입맛이 없는데 먹을 것이 눈에 들어 올 리가 없다. 멍하니

각하자. 그런데 내가 죽인 너구리는 어떤 놈이었을까? 바퀴가 덜컥거렸을

허리 숙여 냉장고 안을 들여 보다가 우유를 집어 들었다. 우유를 잔에 따르

때의 충격으로 봐서 새끼는 아니었던 거 같고 어미? 아비?..., 길 건너의 너

고 단숨에 마신다. 너구리 새끼들이 젖은 뗐으려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리는 분명 큰놈이었는데...., 중요한 건 너구리 네 식구 중 한 마리를 내 가 죽였고 단란했던 한 집안을 파탄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내가 죽인 것

집을 나섰다. 집 앞에 서 있는 차를 보니, 어제의 공포감이 밀려왔다. 나

이 아비였다면? 졸지에 가장을 잃은 세 모자는 어떡하나? 이런 일이 우리

는 애써 오른쪽 뒷바퀴를 외면한 채 운전석에 올랐다. 다른 생각을 할 겨

가족에 닥친다면 어떡하나?

를도 없이 세차장으로 차를 몰았다. 너구리 사체가 아직도 뒷바퀴에 끼어 있으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에 어깨가 움츠러든다. 혹시 붙어 있을지 모를

앞서가는 사람을 쫓고 있다. 언제부터 이 자를 쫓고 있었을까? 쫓김을

사체를 떼어 내려고 차를 과격하게 운전했다. 과속방지턱에도 속도를 줄이

알고 있는 듯, 앞선 이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나의 걸음도 빨라진다. 숨이

지 않았다. 세차장은 멀지 않았다. 속도를 내서인지 웅성거리 듯 나와 있는

턱에 차올라 숨을 멈추고 걸음을 빨리한다. 걸음은 달리기가 된다. 참았던

직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세차장에 도착했다. 뒷바퀴에 끼어있을 너구리

숨을 몰아쉰다. 거리는 좁혀졌고 그의 뒤통수, 어깨, 등이 선명히 보인다.

때문에 욕먹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생겼다. 눈치를 보며 차에서 내리는

짧은 머리, 갈색의 가죽 재킷. 이제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다. 달리기

데 조금 전에 있던 직원들이 안 보였다. 사무실 쪽으로 가 안을 살펴보는데

를 멈추고 걷기 시작한다. 걸음의 속도는 그 사람에게 의존하고 있다. 깊이

한 직원이 나오며 무슨 일이냐는 듯 쳐다본다. 나는 긴말 안 하고“카 와쉬

숨을 들어 마시고 그를 향해 손을 내 뻗는다. 손이 닿을만할 때 다시 벌어

스페셜”이라고 한다. 나를 쳐다보던 직원이 내가 들어 온 진입로를 손가락

지는 거리. 벌어지는 거리를 만연해 보려 걸음을 재촉한다. 그자의 걸음도

으로 가리킨다. 뭐지? 하며 나는 밖을 쳐다보고 다시 직원을 쳐다본다. 직

빨라진다.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이때 등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원이 다시 밖을 가리킨다. 나는 순간 화가 나“왓!”하며 다시 밖으로 시선

뒤돌아본다. 아무도 없다. 앞서 가던 사람이 저만치 가고 있다. 나는 뛰기

을 돌린다. 제법 굵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비가 내린 걸까? 나와

시작한다. 뒤에 있던 인기척이 가까워진다. 목덜미에 서늘한 느낌이 전해

마주친 직원의 눈은 무심함에서 비웃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창피함으

진다. 돌아볼 용기는 없고 달리기에 속력을 낸다. 쫓고 있던 사람이 갑자

로, 내 차는 비로 젖고 있었다. 운전하며 내가 와이퍼를 작동시켰었나? 언

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내 뒤의 인기척도 더는 없다. 숨이 차올라 더 이상

제? 갑자기 헛것과 실체가 구분이 안 됐다. 나는 상관없으니 세차를 해달

달릴 수가 없다. 멈춰서 허리 숙여 숨을 몰아쉰다. 허리를 숙인 채로 뒤를

라고 했다. 비웃음에서 모멸감의 눈으로 바뀐 직원은 나 하나 때문에 세차

돌아본다. 순간 노란 불덩이가 내 오른쪽 눈을 때린다. 너무 강한 충격에

장을 오픈 할 수도 없고 다른 직원은 모두 퇴근해서 세차할 수 없단다. 비

몸을 가눌 수가 없다. 머리와 몸이 분리된 느낌이다. 고통을 느끼기 전의

가 그친 후 다시 오란다. 나는 긴말없이 차를 돌려 세차장을 빠져나왔다.

그 찰나. 피범벅 된 몸을 본다. 고통을 눈으로 느낀다. 크게 내지른 비명은

조금이라도 물이 고여있는 쪽으로 차를 몰았다. 제발 좀 씻겨 나가라 하

나에게 조차 들리지 않는다. 내내 뒤척이게 만들던 밤이 이렇게 물러났다.

는 심정이었다. 세차장에서 네일 살롱까지의 거리가 짧게만 느껴졌다. 네

눈을 뜨니 아침 아홉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마누라는 당연히 나가고 없

일 살롱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이번에도 의도적으로 뒷바퀴 쪽을 외면하

다. 나는 대충 세면을 하고 나갈 준비를 한다. 뭔가 먹어야 할 것 같아 냉

며 내렸다. 도어의 딸랑 소리와 함께 네일 살롱으로 들어섰다.“꼬모 에스

358

l 뉴욕문학 제29집

소설 · 홍남표 l

359


따!”언제나 제일 먼저 반겨주는 스페니쉬 엘리자베스.“꼬모 에스따!”나

다. 엷은 비. 괜히 시야에 방해만 된다. 쇼핑몰 코너를 돌아 교차로를 지날

도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때였다. 신호등 색깔은 노란색. 속력을 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감시 카

왼쪽으로 늘어 선 페디큐어 체어와 오른쪽으로 늘어선 네일 테이블을 지

메라 무서워 운전도 편히 못 한다. 졸보가 되어버린 나에게 억지웃음을 지

나 마누라에게 다가간다. 몇 명의 손님이 페디큐어 체어에 앉아 있었는지,

어 보인다. 횡단보도 왼쪽에서 흑인 남자가 내 쪽으로 걸어온다 . 한쪽 다

몇 명의 손님이 네일 서비스를 받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관심을 회피하고

리를 절며 걸어온다. 발보다 훨씬 커 보이는 운동화를 신고 있다. 구멍 사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

이로 엄지발가락이 보였다, 안보였다 한다. 회색인 것으로 추측되는 낡은

카운터에 앉아있던 마누라가 읽고 있던 신문으로 고개를 감춘다. 오늘 아

바지를 입었는데 한쪽은 무릎에 걸려있고 다른 한쪽은 기장이 길어 땅에

침이 특별한 건 아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것이 연애 때부터 결혼한 지

끌린다. 늦여름 날씨 아랑곳하지 않는지 청색의 오리털 조끼를 입었다. 조

이 십 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애교하고는 담을 쌓고 사는 여자. 슬그머니 마

끼의 생채기로 오리털이 삐죽삐죽 보인다. 내 쪽으로 오는 게 나에게 적선

누라가 앉아있는 카운터로 가서 캐쉬어의 서랍을 연다. 은행에 입금할 체

을 원하는 게 틀림없다. 그자의 손은 때 끼가 가득하고 손등은 나무 옹이

크를 챙기고 공과금 낼 것을 확인하고, 다시 한번 마누라 눈치 살피고 다녀

를 닮아있었다. 모양새가 잔돈을 건네주고 싶어도 건네주기 힘든 상황이

올 거라며 가게를 나선다. 처음 네일 살롱을 운영할 때부터 이런 관계는 아

다. 내 손을 잡기라도 하면 어떡해? 나는 시선을 빨간색 신호등에 고정한

니었다. 필요한 물품이나 기술자를 구하는 건 내가 할 일이었고 마누라도

채 공기 마실 만큼 열려있던 차창을 슬며시 닫았다. 잠겨있을 도어락 버튼

내 의견을 존중했었다. 하지만 네일 살롱 일이라는 게 여자 직원에 여자 손

을 확인 차 눌러본다. 버튼 소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져 놀란다. 이제는 됐

님들, 내가 설 자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좁아져 있었다. 이상한 일은 나

어라는 만족감. 신호등을 보다가 계기판으로 시선을 낮추며 그자의 눈치를

에게 셔터문이 점점 무겁게 느껴 짐에 비례해 마누라의 힘은 점점 세졌다.

살핀다. 그자가 뭐라고 한다. 시선만 돌려 쳐다보니 그 자가 "니하오?"라고

청소 일도 눈치 빠른 엘리자베스가 맡게 되니 내가 가게에 붙어 있을 이유

한다. 그자의 얼굴을 슬쩍 보고 다시 신호등을 쳐다본다. 제기랄 이곳 신

는 점점 사라져 갔다. 나의 입지가 작아져도 미련은 없었다. 나 자신의 변

호등은 왜 이리 안 바뀌지 하는 원망. 차 안의 미러로 뒤쪽을 보니 내 뒤로

화를 알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조정 가능한 것이 점차로 소멸하여

는 차 한 대 없다. 그자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갔다. 드라마 보다가 흐르는 눈물을 주체 못 하는 것은 애교에 가깝다. 미

뻑킹 차이니즈라는 고함이 들린다. 가운뎃손가락 마저 들이댄다. 난데없이

처 털리지 않는 소변 때문에 노란색으로 팬티를 물들인다. 조정됐었고 조

욕을 먹었지만 나는 한국 사람이니까 괜찮아 하고 만다. 내 얼굴에 미소가

정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조정 안된다. 마누라 눈치를 볼 즈음, 나의

지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갑자기 퉤 소리와 함께 내 창에 무늬를 새긴

모든 팬티는 검은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서랍에 꽉 차 있는 검정 팬티를 보

그 자의 침 덩어리. 그자는 더는 절룩거리지 않으며 내 오른쪽을 지나쳐 간

며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때쯤 나는 아예 조정 할 수 없는 것에 집

다. 그렇지 않아도 뒷바퀴에 끼어있을 너구리가 신경 쓰이는데 옆 창에는

중을 하기로 했다. 정치인 걱정, 연예인 걱정, 지구 온난화나 세계평화 걱

침 뭉치가 새겨졌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아까 창문을

정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기로 했다. 다행이다 싶다. 지금

닫기 잘했지 하는 마음에 안도감이 밀려온다. 다행이다 싶다. 언제 왔는지,

은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가게 문 닫는 일을 하고 있다.

뒤 차가 경적을 울린다. 나는 브레이크에서 발을 뗀다. 창문의 침 덩어리는 바람에 밀리며 나비를 연상시키는 모양으로 변해간다. 안개비에 반사되어

와이퍼를 작동시켜야 할지 말지를 고민해야 할 정도의 비가 내리고 있 360

l 뉴욕문학 제29집

횟빛이었던 침이 무지갯빛으로 보인다. 차를 달리다 보니 침의 무늬는 퍼 소설 · 홍남표 l

361


져가고…, 어이없는 웃음이 내 입가에 번진다.

모든 상황이 내 일 같지 않았다. 한국행 비행기 삯은 얼마일까? 급하게 구 매를 하게 되니 할인이 안될 텐데…, 입맛은 없었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해

은행에 가려던 계획을 미루고 근처 한국 빵집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고

라며 냉장고로 향했다. 그렇게 나는 끼니를 걱정하고 있었다.

보니 아침부터 점심시간이 넘은 지금까지 커피 한 잔 못했다. 커피를 떠올

빵집 창밖은 신호등에 맞춰 규율 있게 움직이고 있었다. 눈치를 보듯 서

리니 커피 생각이 더 간절해졌다. 한국 빵집, 한국말로 인사하고, 한국말로

있는 차들, 바쁜 척 서 있는 사람들, 서성이는 비둘기들. 하늘은 흑백에서

주문을 했다. 뜨리 달러 화이브 센츠 영어로 대답한다. 눈도 마주치지 않는

칼라로 바뀌고 있었다. 거무스러운 눈 주위, 유난히 짧은 팔다리 너구리가

여자아이에게서 커피를 전달받았다. 문득 화가 치밀다가 내 자식 교육이나

연상되다가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 기억 속 아버지 얼굴은 미국 올

잘 시키자고 다짐을 해본다. 하늘이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하늘 한 번 쳐

때 헤어졌던 그때 나이에 멈춰있다. 지금의 나보다 어려 보이는 얼굴이다.

다보고 커피 한 번 쳐다보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 커피 한 번 쳐다보고…,

나는 국민학교 입학 무렵까지 아버지를 아범이라 불렀다. 지금도 뚜렷이

잔뜩 흐린 하늘이 커피와 닮아 보인다. 흐린 하늘이라 하늘을 볼 수 있다.

기억나는 아버지와의 첫 만남. 몇 살이었는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검은 얼

평소 같으면 눈이 시려 하늘로 눈길조차 못 주었을 거다. 갑자기 코 끝이

굴에 더 검었던 눈 주위를 잊을 수 없다. 그 남자를 가리키며“동현아! 니

맵다. 콧물이 나오고 눈앞이 먹먹해진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 못 한다. 남

아범이다.”하셨던 할머니. 나는 처음 보는 그를 아범이라 부르기 시작했

이 볼까…, 냅킨을 코로 가져가는 척하며 눈물을 찍어낸다.

다. 월남에 갔던 아버지는 그렇게 내 앞에 나타났고, 나는 아버지와의 첫 대면을 기억하는 아이가 되었다. 중학교 담임에게 종아리를 맞고 온 날, 안

봄날이었다. 꽃샘추위도 물러가고 습기 없는 공기가 허파까지 닿는 듯

티푸라민을 발라주던 아버지의 짧은 손가락, 낮술에 취해 들어온 아들에게

한 느낌이 좋았다. 이불 말리기 좋은 날. 이불 뭉치에 눈앞이 가려 더듬더

박카스를 건네던 아버지. 미국에서 아빠가 되어 돌아온 아들에게 칼국수를

듬 현관으로 나오는 중이었다. 유난히 날카롭게 들렸던 거실의 전화벨 소

끓여 당신 자식과 그의 자식을 먹였던 아버지. 그 아버지가 작년에 돌아가

리. 들고 있던 이불 때문에 뒤뚱거리며 전화기로 다가간다. 이미 끊어진 벨

셨다. 오늘 보지도 못했던 해가 기울어간다. 배고픔은 안 느껴졌다. 하지

소리. 주머니의 휴대폰이 진동한다. 휴대폰이 몸 전체를 뒤흔든다. 번호를

만 먹어야 한다. 하늘 한 번 보고, 식은 커피 한 번 보고…, 결심을 해본다.

보니 한국에서의 전화였다. 전화를 받기도 전에 나쁜 소식임을 알았다.“ 아버지 방금 돌아가셨어!”라는 동생의 건조한 말. 올 것이 온 거 같았지만

은행이고 뭐고 집에 돌아가 밥이나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빵집을 나왔

그 어떤 준비도 없었던 쉰 넘은 장남. 그제야 들고 있던 이불을 소파로 던

다. 차를 주차해둔 곳으로 와 보니 옆의 차가 너무 가까이 주차되어 있었

져 버린다.“내가 다시 전화 할게”라며 전화를 끊는다. 소파 밑에 기대앉

다. 차 문을 가까스로 열고 내 몸을 구겨 넣듯이 해서야 차에 오를 수 있었

아 한숨만 쉬어 됐던 정오 무렵이었다. 아버지 수고 많으셨습니다. 하늘나

다. 바짝 붙어있던 차 때문에 짜증이 났다. 시동을 거는데 주차 자리를 찾

라에서 편히 쉬세요…, 혼잣말이었는데도 무척 생소했다. 이럴 때는 어떤

던 차가 코를 들이민다. 가뜩이나 짜증 나 있는데 도도해 보이는 운전석의

기도를 해야 하는 거지?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려 보려 했다. 아이였던 내

긴 머리가 보인다.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벤츠의 방향등. 돈 많은 어느 집

기억만 떠올랐다. 그 아이가 나였나? 그 아이가 지금 나인가? 부모와 떨어

마나님인가 보다. 비싼 벤츠 타면 다인가! 기다림의 미덕은 전혀 없는 인

져 지낸 중년의 나는, 아니 그 아이는 제삼자의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간. 조심스럽게 차를 움직이며 눈이라도 마주치면 빤히 쳐다볼 요량으로

362

l 뉴욕문학 제29집

소설 · 홍남표 l

363


벤츠 운전사를 봤다. 그녀였다. 내가 아는 그녀였다. 한동안 내 마음을 설

낡은 가방 줄 가방이 마누라 어깨에 걸려있다. 벌어진 어깨에 믿음이 간다.

레게 했던 그녀. 나는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녀는 그 때나 지금이나 나를

다행이다 싶다.“영미야 사랑해!”한 손들어 손짓하며 돌아섰다. 마누라가

모른다. 아들 녀석을 데리고 YMCA의 수영장을 다닐 때 마주치던 여자. 단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돌아 볼 용기가 없다.

발머리 사이로 보이던 하얀 목덜미가 나를 부끄럽게 했던 그녀. 긴 다리와 허리 곡선에 뒷모습마저 아름다웠 그녀였다. 운동신경이라고는 전혀 볼 수

맑은 밤이다. 밤안개가 주단처럼 깔려있던 어젯밤이 헛것이지 않았나 라

없었던 그녀 옆의 딸아이. 그녀가 지금은 긴 머리를 하고있다. 한국 사람

는 생각이 들었다. 길 가장자리로 차를 세웠다. 길을 건넌 너구리가 있던

일까? 중국 사람일까? 그녀에게 한 마디 말도 못 붙여 봤던 나. 가끔 만나

자리쯤이었다. 멀찌감치 주유소의 불빛이 보인다. 띄엄띄엄 규칙적으로 서

사는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었다면? 차를 달리며 말 한마디 못 건네 본 나

있는 가로등은 밝지 않다. 고개를 너무 높이 쳐든 듯 보인다. 긴장 탓인지

를 한탄한다. 그리고 말을 건네 보았다면 어쩔 건데? 라는 생각을 해본다.

귓가가 간지러웠다. 긴 숨을 한 번 내쉬고 차에서 내렸다. 풀냄새가 난다.

그래 어쩔 셈인데? 한동안 나에게 YMCA 가는 기쁨을 주었던 그녀. 말을

자동차 헤드라잇을 끄니 바깥은 생각보다 어두웠다. 전화의 라잇 기능을

못 건네봐 다행이다 싶다.

보려고 다시 차에 오른다. 전화기에서 빛이 나온다. 차에서 내린다. 전화기 라잇은 생각보다 밝았다. 차를 등 뒤로하고 동쪽을 보고, 서쪽을 봤다. 지

냉장고에서 콩나물국 냄비를 꺼낸다. 대충 데우고 밥을 말아 넣는다. 국

나다니는 차는 없다. 트렁크를 열고 목장갑을 찾아 낀다. 신문뭉치를 꺼내

이 있으니 반찬은 김치로 족하다. 그런데 김치가 시었다. 신 김치는 딱 질

고 비닐봉지도 챙긴다. 그때서야 부삽이라도 가져올 걸 하는 생각을 한다.

색인데..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냥 먹는다. 온종일 인내심을 시험

종일 외면했던 오른쪽 뒷바퀴로 간다. 바퀴는 깨끗했다. 전화라잇으로 타

하는 하루 아니 인내심을 시험하는 나의 인생. 콩나물과 김치와 밥을 씹으

이어의 홈까지 살핀다. 핏자국이 없다. 오른쪽 바퀴가 아니었나? 왼쪽 바

며 결심을 되새긴다.

퀴로 가서 빛을 들이댄다. 타이어 바꿀 때가 됐네! 라는 것만 확인할 수 있 었다. 이번에는 과감하게 코를 들이대고 냄새를 맡아본다. 타이어의 온기

마누라가 영업 끝낼 시간에 맞춰 가게로 갔다. 뒷바퀴쪽을 외면하며 차

가 코로 전해진다. 너구리의 체취는 없다. 천천히 일어선다.

에서 내린다. 도어의 딸랑 소리와 함께 네일 살롱으로 들어섰다.“꼬모 에

다시 한번 동쪽을 보고 서쪽을 본다. 중앙선까지 냅다 뛴다. 한정된 시야

스따!”이번에도 엘리자베스. 나는 눈인사를 건넨다. 가게에는 손님 한 사

를 전화기 빛으로 넓혀 보려 한다. 너구리 사체를 찾는다. 사체의 조각이

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나가야 가게 문을 닫을 수 있다. 오늘 매상이 괜찮

라도 찾아보려 한다. 하지만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차 세워진 곳으로 후딱

았는지 마누라가 방글방글 웃고있다. 나를 보고 웃는 건 아니다. 마누라에

뛰어온다. 여기가 아니었나? 차에 올라 기억을 되새긴다. 그러니까 학교를

게 가게 문 닫고 잠깐 들를 곳이 있다고 말한다. 밖에서 쓸데없는 짓거리

지나치고 고개를 넘어서 막 내리막길로 내디딜 때였는데…, 차에서 내려

하지 말라는 마누라의 잔소리. 잔소리에 리듬이 있다. 매상이 높은 게 틀림

고개 숙여 길을 살피며 내리막길을 걷는다. 사체 아니 사체 조각이라도 찾

없다. 기다리던 손님이 나가고 대충 뒷마무리를 한다. 마누라와 종업원들

아서 곱게 묻어줘야겠다는 계획이 쉽지 않음을 알았다. 오늘 몇 번이나 결

이 밖으로 나가고 나는 자물통을 들고 따라나선다. 꼬챙이 들어 셔터문을

심했는데…,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할 거 같아 세운 거사였는데 오밤중에 헛

내린다. 내가 문을 잠그고 마누라가 확인을 한다. 곁눈질로 마누라를 봤다.

짓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핏자국이라도 찾으면 그 자리에서 기

364

l 뉴욕문학 제29집

소설 · 홍남표 l

365


도나 해야겠다는 것으로 마음 정리를 했다. 이 근처가 틀림없는데 왜 안 보 일까? 익숙해진 전화기 빛으로 차가운 아스팔트를 비춘다. 낮에 왔어야 하

Memo

는 건데 라는 후회가 밀려온다. 길 건너편을 한 번만 더 보고 돌아가야겠 다. 길 건너로 후딱 내딛듯이 뛰었다. 그때 눈앞이 확 밝아진다. 거대한 불 빛에 몸은 얼어붙었다. 동공이 빠르게 축소된다. 트럭의 거대한 화통 소리. 굉음. 섬광이 머릿속을 뒤흔든다. 어깨가 움츠러든다. 전화기를 떨어뜨리 고 손을 귀로 가져간다. 이렇게 끝나는구나. 그 찰나 트럭은 내 옆을 홱 지 나친다. 거의 의식을 잃을 뻔했다. 라잇이 켜진 전화기를 주워든다. 전화가 깨졌고 안 깨졌고는 안중에도 없다.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고 그 자리에 주 저앉으려던 다리를 질질 끌며 길가로 되돌아온다. 길 가장자리에 다다라서 야 털썩 주저앉는다. 물이 고여 있었는지 엉덩이에 냉기가 전해진다. 다리 가 풀려서 일어나질 못한다. 눈물이 나기 시작한다. 하늘을 쳐다본다. 비죽 비죽 별이 보인다. 별 바라보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반복한다. 흐르 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엉거주춤 일어난다. 젖은 바지를 쥐어 짜본다. 방금 비명횡사할 뻔한 곳으로 시선을 옮긴다. 길 건너에 너구리가 보인다. 눈물에 가려진 시야를 문질러 닦는다. 한 마리, 두 마리, 셋, 넷…, 네 마리 다. 눈앞을 닦고 다시 센다. 큰놈 두 마리, 작은놈 두 마리. 웃음이 났다. 웃 음, 눈물…, 콧물이 흘러 내린다. 살아있어 고맙다. 너굴아…. 몇 시나 됐을까? 전화기를 꺼내 본다. 전화기는 멀쩡했다. 다행이다 싶 다. 풀벌레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온다. 내일은 날씨가 좋을 것 같다. 낮에 본 거지 양반에게 인사라도 건네봐야겠다. 진흙이 묻고 질퍽하게 젖어있는 바지를 털어본다. 그나저나 영미에게는 뭐라고 하지?

홍 남 표 뉴욕 시립대 영화과 졸업 전 문화방송 뉴욕지부 카메라 감독 전 뉴욕 KTV 방송 연출 2016년 뉴욕문학 소설부문 가작 수상 현 프리랜서 비디오그라퍼 nampyohong@hotmail.com

366

l 뉴욕문학 제29집

뉴욕문학 제29집 l

367


Turn static files into dynamic content formats.

Create a flipbook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