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l 식순
3
l 약력
4
l 인사말
김호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5
l 인사말
정강자 참여연대 공동대표
6
l 추모사
박찬운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변호사
8
l 추모사
차병직 전 참여연대 집행위원장
10
l 추모사
이석태 전 민변 회장, 전 참여연대 공동대표
12
l 추모사
박영선 전 참여연대 사무처장
15
l 추모사
박원순 서울시장
18
l 추모사
정연순 전 민변 회장
19
l 추모시
박연철 민변 창립회원
22
l 기억하다(故 최영도 변호사 관련 글 모음)
23
식순
ㅣ사 Ÿ
회ㅣ 송상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무총장
ㅣ약 력 보 고ㅣ Ÿ
박정은
참여연대 사무처장
ㅣ추 모 영 상ㅣ
ㅣ인 사 말 ㅣ Ÿ
김호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Ÿ
정강자
참여연대 공동대표
ㅣ추 모 사 ㅣ Ÿ
박찬운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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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병직
전 참여연대 집행위원장
Ÿ
이석태
전 민변 회장, 전 참여연대 공동대표
ㅣ유 족 인 사ㅣ
약력 <故 최영도 변호사> Ÿ
출생 1938년 12월 17일, 서울특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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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서울 보성중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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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서울 보성고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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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서울대 법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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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서울대 대학원 법학과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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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제13회 고시 사법과 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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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육군법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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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대전지법 천안지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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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대전지방법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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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서울지법 수원지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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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서울형사지방법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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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변호사 개업(서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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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1994 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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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1995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이사 겸 인권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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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1996 한국방송공사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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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헌법재판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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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한국인권단체협의회 상임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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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2000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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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재)한국인권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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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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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2004 참여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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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공증인가 반도합동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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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변호사 최영도 법률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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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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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참여연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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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훈장 모란장(2001), 봉래상(봉래부완혁 출판문화재단, 2003), 명덕상(서울지방변호사회, 2018)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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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9일, 향년 80세 일기로 별세
인사말
김호철 ㅣ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우리 사회 큰 어른이신 고 최영도 전 회장님의 소천에 민변은 망연자실할 뿐입니다. 회장님은 엄혹한 군사독재를 인권과 정의에 대한 신념으로 이겨내시고 민변 창립을 주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소천하시는 날까지 민변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국가인권위원회가 독립기구로 탄생하는 데 산파 역할을 하시고 참여연대의 공동대표 를 맡으시는 등 시민사회에서도 큰 족적을 남기셨습니다.
걸어오신 어느 길 하나 가시밭이 아닌 곳이 없었지만 그 길에서도 회장님은 예술과 문화에 대한 남다른 사랑으로 향기로운 품격을 지니심으로써 이웃과 사회에 큰 감동 을 선사하셨습니다. 저 역시 애송이 변호사 시절 회장님을 뵐 때면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편안함을 느꼈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그 후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회장 님의 몸에 밴 품격과 향기에 취한 때문이었습니다. 그 향기가 아직도 저와 민변을 감 싸고 있는듯 합니다.
한반도가 평화와 공존으로 일대 전환하는 시기에 민변이 새롭게 나아갈 길을 밝혀주 실 회장님이 우리들을 떠나셨다는 현실은 참으로 애석합니다. 그 애석함을 달랠 길 없 어 오늘 우리는 한 자리에 모여 회장님을 추모하고 회장님이 남기고 가신 정신적 유 산과 교훈을 되새기고자 합니다. 회장님은 비록 몸은 떠나셨어도 오늘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미세한 침묵의 소리로 찾아와 우리를 만나시리라 믿습니다. 그 소리에 우리 는 슬픔을 딛고 일어나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을 것이라 믿습니다.
오늘 한 마음으로 자리를 함께 하시는 민변 회원님들과 참여연대 회원님들 그리고 외 빈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 모두 고 최영도 회장님과의 인연을 고이 간직하며 부디 건강하고 보람있는 삶을 사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아직도 천붕의 아픔 을 지니고 계실 유족분에게도 다시 한 번 심심한 위로를 드리며 이른 시일 내에 슬픔 을 이기시고 건강한 삶을 되찾으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인사말
참여연대는 변호사님의 사랑을 잊지 않겠습니다
정강자 ㅣ 참여연대 공동대표
최영도 변호사님
어찌 이렇게 저희 곁을 훌쩍 떠나셨나요? 문병을 간 참여연대 식구들을 일일이 챙기시며 손을 잡아주셨다지요? 그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한 저는 아쉽고 죄스러울 뿐입니다.
1972년 갓 입학해서 전태일, 언론자유수호선언, 사법부파동, 위수령 등 1.2년 전의 한 국의 사회운동에 대해 읽고 토론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글로 읽었던 사법파동 참여 로 변호사님께서는 법관 재임용에서 탈락하고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말씀 을 들은 건 국가인권위윈회 설립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활동을 함께 하던 때입니다. 변호사님은 민변을 대표하여 빠짐없이 인권위 설립논의에 함께 해주셨지요. 간간히 부 산 피난시절 얘기며, 토기수집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들려주시던 특유의 느린 템포의 음성과 모습이 지금도 손에 잡힐 듯합니다.
2004년 변호사님이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하셨을 때 상임위원이었던 저에게 변호사님은 커다란 언덕이었습니다. 그 후 2015년 뜻하지 않던 참여연대 대표직을 맡 았을 때도 변호사님은 참여연대 고문으로 제 앞에 서계셨습니다. 분기별로 진행된 고 문 모임에서 사법개혁, 정치개혁, 민생, 평화군축, 2016년 국정농단 대응 활동, 촛불행 동, 개헌논의 등 참여연대 활동을 보고드릴 때면 구부정하게 상체를 기울여 귀담아 듣 고 지지를 표해주시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이렇게 참여연대는 사회 개혁과제를 연으로 변호사님과 깊숙이 연결되어 있네요. 지금
이 시간 변호사님 가시는 길을 추모하면서도 변호사님의 생전 활동을 통해 소중한 교 훈을 얻고 있습니다. 참여연대는 변호사님께서 그렇게 지키고자 하셨던 민주주의와 인 권을 향한 걸음을 머뭇거리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맺게 되는 관계를 인연이라고 하지요. 참여연대는 변호사님의 사랑을 잊지 않겠습니다.
변호사님, 참여연대 최영도 대표님 편히 가십시오.
다시 한 번 이 자리에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특히 변호사님 유족들께 깊은 조의와 사랑을 전합니다.
추모사
겸산 최영도 변호사의 영면을 기원하며
박찬운 ㅣ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변호사
지난 9일 토요일 오후 적막한 연구실로 걸려 온 한 통의 전화가 제 평상심을 와르르 무너뜨렸습니다. 겸산 최영도 변호사께서 갑자기 세상을 뜨셨습니다. 변호사님은 1990 년대 초반 민변에서 처음 인연을 맺은 이래 제 인생의 길잡이였습니다. 아니, 이 시대 모든 법조인의 표상이었습니다. 황망한 마음을 감출 수 없지만 오늘 먼 길 떠나신 변 호사님을 추모하며 이곳에 몇 자 적습니다.
변호사님은 1970년대 초 폭압적인 박정희 정권에 의해 법관 재임용에서 탈락한 뒤, 재야 법조인이 되어 인권변호사로 외길을 걸으셨습니다. 민변 회장과 대한변협 인권위 원장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면서 인권옹호에 앞장섰고, 참여연대 공동 대표를 맡아서 인권문제를 시민운동의 지평으로 확장시켰습니다. 국가인권위 시절엔 저도 인권정책국장을 맡아 함께 힘을 보탰습니다.
그러나 변호사님의 삶을 법률가로만 한정할 수 없습니다. 변호사님은 법률가의 울타리 를 뛰어넘어 전인적 지식인의 풍모를 한껏 발휘한 분입니다. 참된 지식인이라 함은 자 신의 주업에 함몰되지 않고 인간과 자연 그리고 세계의 본질을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 와 정열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런 지식인은 생업과 관련된 공부만이 아니라 문학·역사· 철학·예술을 공부합니다. 제가 아는 변호사님은 법조계에서, 아니 우리 사회 전체에서, 그런 향학열을 누구보다 뜨겁게 품고 사셨습니다. 후배 법조인들에게 부족한 인문학적 향기를 물씬 풍겨주신 분이었습니다.
아마 이것은 변호사님의 남다른 어린 시절과 청장년 시절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겁니 다. 변호사님은 코흘리개 시절부터 ‘국전’ 관람을 하였고, 국립박물관을 무상출입하였 다고 합니다. 보성학교에선 간송 전형필 선생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우리 문화재의 아
름다움에 매료되었습니다. 판사 시절 일본의 민속학자 야나기 무네요시의 책을 통해 ‘한국 제1의 불교미술’ 경주 석굴암을 만난 다음 40년 이상 국내외의 불교유적을 답사 했습니다.
변호사님은 이 나라 최고의 토기 수집가로서 돈이 생길 때마다 아낌없이 투자해, 사라 져 가는 토기를 모았고, 그 전량 1700여점을 국가에 기증했습니다. 용산중앙박물관에 있는 ‘겸산 최영도관’을 찾아주십시오. 변호사님이 수집한 귀한 토기 문화재를 직접 관 람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겁니다. 변호사님의 미술과 음악 감상은 전문가 수 준을 능가하는 것이었습니다. 변호사님이 쓴 두 권의 책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 큼 느낀다>와 <참, 듣기 좋은 음악>은 미술과 음악에 얼마나 조예가 깊은 지를 알려 주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변호사님은 자타공인 문명여행가였습니다. 세계 곳곳의 문명 발상지 를 틈만 나면 직접 발로 밟았고 그것을 유려한 글로 남겼습니다. 지난해 말 출판한 800쪽의 책 <아잔타에서 석불사까지>(기파랑 펴냄)가 바로 그 결정판입니다. 타클라마 칸 사막에선 혜초 스님이 되었고, 둔황에선 소설 돈황의 주인공 조행덕이 되어, 아름 다운 명사산과 월아천을 뒤로 한 채, 불교미술의 보고 막고굴을 탐사했습니다.
고통 받는 사람을 보면 참을 수 없는 연민으로 밤을 새우고, 또 한편으론 예술을 알고, 문명 발상지를 찾아 세상을 주유한 이가 바로 최영도 변호사님입니다. 법조인들에게 품격 있는 지식인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신 진정한 스승이었습니다. 그분이 오늘 우리 곁을 떠납니다. 변호사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부디 영면 하소서! 당신의 삶 기억하 고 또 기억하겠습니다!
추모사
당신을 추억하며
차병직 ㅣ 전 참여연대 집행위원장
오늘 밤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모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워하는 마음 과 슬픔의 표현은 다릅니다. 오늘 이 자리는 지노귀새남의 마지막이 그렇듯이 생전에 함께 나눈 추억을 떠올리며 흔쾌히 보내드리는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당신의 뜻이리라 짐작합니다.
작년 연말 출판기념회에서 『아잔타에서 석불사까지』를 주시면서, 시간 날 때 서평을 하나 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서평을 쓰지 못한 채 오늘 이 추도사로 대신하게 되 어 황망합니다. 그래도 할 말은 하자면, 책을 넘겨 여기저기 읽기는 했지만 완독하지 못했기 때문에 서평을 쓰지 못했습니다. 못 읽은 이유는, 이 자리에서 시침 뚝 떼고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리 재미있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당 신께서 스스로 주지주의적 입장에서 쓴 여행답사기여서 재미는 없을 것이라 말씀하셨 으니 큰 결례는 아니겠지요. 정말 짧지만 그 내용은 엄밀한 고증학자의 기록 같습니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앞으로 두고 두고 여행을 떠날 때마다 필요한 항목을 찾아 확인하 며 당신의 지성을 떠올릴 것입니다.
금년 초에는 참여연대 임원 양윤재와 진영종을 자택으로 초대해 음악 감상회를 여셨 지요. 그런데 이름도 생소한 그레고리오 알레그리의 ‘자비를 베푸소서’(Miserere)를 틀 고는 불을 꺼 버리셨습니다. 바티칸에서 그 합창곡이 울려퍼질 때 촛불을 끄는 관행대 로, 캄캄한 데서 들어야 천사가 노래하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며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 전 슈베르트 곡을 들을 때 지쳐버린 진영종은 어둠을 이용해 졸았다 는 후문입니다. 그 사실을 모르신 채 보내드려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당신께서는 도덕성이나 정직성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음악가의 음악은 듣
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졸면서도 그 가르침은 잊지 않고 돌아왔습니다. 당신의 매 력은 그런 데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잊을 수 없는 일은 그 사건입니다. 상당한 오해로 포장된 사태였으 나 궁색한 변명을 하지 않고 기다리셨습니다. 참여연대는 긴급 회의를 거듭한 끝에 형 식상 잘못된 일을 지적하는 짧은 성명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즉시 국 가인권위원장을 사퇴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 관해서 단 한마디 언급 없이 그 이후의 참여연대 행사에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참석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당신의 모습입니다.
작년 연말 정연순, 백승헌 부부에게 인도네시아 보로부두르 여행을 가자고 하셨는데, 그만 약속을 지키지 못하셨습니다. 크게 도움이 되어 드리지도 못할 젊은 사람들은 잊 고 먼저 떠나가신 그곳에서 여행도 하시고, 조는 사람 없는 가운데 음악 감상도 하시 고, 말려도 서로 나서서 읽을 멋진 책도 쓰시기 바랍니다.
추모사
이석태 ㅣ 전 민변 회장, 전 참여연대 공동대표
우리의 선배, 1세대 인권변호사로서 두루 존경을 받아 온, 민변의 창립 회원이자 두 차례 회장을 역임하신 최영도 변호사님께서 지난 6월 9일 돌연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 다. 그것은 참으로 예상을 하지 못한 천만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그 슬픔, 애석함, 상실 감으로 몸을 가누기 어렵습니다.
2016년 겨울 촛불의 힘으로 우리는 권위주의 정권과 부도덕한 권력을 퇴출시켰습니 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새로운 도전은 어느새 우리 앞에 다가 와 있습니다. 그 일이 때로 힘들고 올바른 방향을 잡지 못해 비틀거릴 때, 그때 우리는 누구에게 의지 하고 조언을 구해야 할까요.
최변호사님은 법률가이면서 시민사회 일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셨습니다.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지내신 바 있고,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국가인권위원장으로 임명되어 국가 권력을 감시하는 인권 파수꾼의 수장이 되시기도 하셨습니다. 이 밖에 언론개혁시민연 대 공동대표와 한국인권재단 이사를 맡아 하시는 등 최변호사님이 공익과 인권 옹호 를 위해 진력하신 사회적 활동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또 우리 모두는 과거 지병의 흔적으로 몸이 불편하신데도 최변호사님이 최근까지 각 계 시민사회 단체가 주최하는 각종 집회나 시위에 빠짐없이 참여하여 맨 앞자리를 지 키셨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거기서 논리적이며 맑고 차분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음성 으로 우리를 깨우치고 격려해 주셨음을 기억합니다.
정직하게 말해, 최변호사님이 기꺼이 감당해 오신 이 모든 일들은 누구에게든 그 어 느 하나 제대로 따라 하거나 맡아 하기 힘든 것들입니다. 연배를 초월한듯한 그 에너 지와 능력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저는 최변호사님 특유의 인권과 사회정의의 실천을 위한 변치 않는 열정과 저희 후 배들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배려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최변호사님의 말 씀과 행동을 기치로 삼아 조금의 의심도 없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그 뒤에 서고자 하였습니다. 최변호사님의 언행이 공의와 연대의 나침반이자 이정표였 습니다.
돌이켜 보면 저는 단 한 번도 어떤 자리에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최변호사님이 노기 를 띠거나, 큰 소리로 누구를 비난하거나 언짢아하시는 모습을 본 일이 없습니다. 첫 사법파동 당시 불의한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다 부당하게 재임용에서 탈락하신 최변호 사님에게 고뇌가 없어서 그랬던 것일까요. 저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최변호사 님은 종종 어려운 시기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사회는 반드시 분단을 극복하고 민주 주의 발전을 향해 전진한다는 낙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최근의 남북관계, 북미관계의 평화적인 발전과 전쟁 위협의 해소 가능성은 평소 최변 호사님의 신념과 일치합니다. 최변호사님이 지난 6월 12일 마침내 싱가포르에서 북한 의 김정은 위원장과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만나 호의 속에 서로 악수하며 치켜세우 는 것을 보셨더라면, 그래 바로 저거야, 이제 제대로 하겠군 하며 손뼉을 치셨을 것 같습니다. 그 장면을 보지 못하신 게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그런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전망 속에서 최변호사님은 스스로 떠맡은 사회적 과제를 앞에서 이끄시고 세밀한 부분까지 치밀하게 살핌으로써 완성도를 높이셨습니다. 실로 최변호사님은 공익인권을 대하는 헌신성과 전문성에서 우리 모두의 참된 스승이셨습 니다. 최변호사님의 탁월한 리더십, 높은 도덕적 감화력과 판단력으로 우리가 속한 민 변은 몰라보게 성장하였고 참여연대는 한층 튼튼한 뿌리와 가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50여명으로 시작한 민변은 이제 1000명이 훨씬 넘는 대표적인 인권 변호사 단체가 되었고, 참여연대 또한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권력 감시 단체의 하나가 되 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민변 또는 참여연대의 회원으로서 평소 사소한 일로 갈등을 겪 거나 낙심하기도 하지만, 최변호사님의 가르침대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 한다는 보람과 자긍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최변호사님은 단순히 법률가로서만이 아니라 전통미술과 음악
에서 전문가 수준의 지식과 심미안을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마치 숙련된 탐험가처럼 세계 여러 곳을 두루 다니셨습니다. 최변호사님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조선조까지의 토 기와 도자기 등 1600여점을 수집하여 중앙국립박물관에 기증하셨습니다. 당신은 이들 예술 분야에 관한 서적들을 공을 들여 출판하셨고, 여행기를 출판하셨습니다. 한마디 로 최변호사님은 공익을 추구하는 변호사이자 르네상스적 지성인의 보기 드문 예이셨 습니다.
이 점에서 우리 모두는 최변호사님의 후예를 지향하면서도, 또 닮고자 하면서도 그에 미치지 못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욱 겸손한 발걸음으로 저 너머에 있는 스승의 뒤를 따르듯이 최변호사님이 인도해 온 길을 따라 배우고자 노력해 왔습 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우리의 앞길을 비추어 주던 빛, 용기와 덕의 원천을 잃었습니다. 마치 목자를 잃은 양떼와 같은 비통한 심정입니다.
불과 한 주 남짓 전까지 병문안 자리에서 곧 새로 출판할 당신의 저서에 대하여 말 씀하시던 그 초탈하면서도 잔잔한 미소를 앞으로 다시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요. 최변 호사님 자신의 그 주도면밀한 글쓰기가 끝내 당신의 생명을 소진시키고야 말았다는 생각을 하면 너무나 아쉽습니다.
인생무상, 삶과 죽음이 이토록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저희에 게 깨우쳐 주시려 그렇게 갑자기 떠나셨습니까.
최영도 변호사님, 진정한 우리의 스승, 인권과 정의의 참된 길잡이.
그 분의 영원한 안식과 명복을 기원합니다.
추모사
박영선 ㅣ 전 참여연대 사무처장
장례식장에서 대표님 영정을 보았을 때, 제일 먼저 솟은 제 감정은 뜻밖에도 대표님에 대한 원망이었습니다. 사고로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도 막내딸을 이렇게 세상에 버려두고 가도 되냐며 원망의 눈초리로 아버지 영정을 바라보곤 했었 는데.......
췌장암 말기라고, 병색이 깊어 보인다고, 면회를 다녀오기로 했다는 참여연대 후배들 의 얘기를 귀담아 듣지 않은 것은 그즈음 저의 각박한 형편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위암도, 국가인권위원회 2기 위원장 사임 건도, 사모님과의 사별도 견뎌내셨기 때문에, 저는 아무리 췌장암이 치유되기 어려운 암이라고 하더라도 대표님께서는 거뜬히 이겨 내리라는 믿음이 컸습니다. 얼마동안 병상에 계시겠지만, 곧 참여연대 고문모임에도 나오시고, 시국회의 기자회견장에서도 뵐 거라 생각했습니다.
대표님이 아슬아슬해 보이던 때가 있었습니다. 정확히 시기를 특정할 순 없지만, 아마 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사임 이후였던 거 같습니다. 안색은 파리했고, 몸피도 가냘 파 보이기만 했습니다. 때로 억지로 끌어내는 듯 대표님의 목소리가 힘겹게 들릴 때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대표님께서는 한국 사회 어른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 내셨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대표님의 입술 색깔이 다시 붉어졌지요. 목소리도 더 다정하고 강건해졌습니다. 다소 헐거워보였던 양복도 이제 제 주인을 찾은 듯 보였습 니다. 당시 참여연대 식구들과 대표님의 건강이 회복되어 가는 모습을 보며 어찌나 안 도했던지요. 참여연대 후배들과 기뻐하며 수다를 떨던 기억이 또렷합니다.
그랬기에 저는 대표님이 이번 병환도 잘 넘길 수 있으리란 기대를 품었고, 그 기대가 배반된 실증이라 할 수 있는 영정 앞에서 원망의 감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나 봅니다.
참여연대에서 많은 것을 얻었지만, 가장 귀하게 생각하는 것이 ‘어른’을 만난 것이었습 니다. 나이가 많다고 어른 대접을 강요하는 사회에 지쳐서인지 나이든 사람들은 질색
이었습니다. 하지만 참여연대에서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지는’ 분들을 많이 만 났습니다. 가외의 소득치곤 정말 큰 기쁨이었지요.
그 무시무시한 독재정권하에서 사법파동을 주도한 이래, 언제나 시국의 중심에서 키잡 이 역할을 도맡아 하시면서도 의연함만이 돋보일 뿐, 그 흔한 생색내기는 대표님과 거 리가 멀었습니다. 그 바탕에는 누구보다 본인에게 엄격하고 성실한 성정이 깔려 있었 겠지요. 매주 아침 7시 30분마다 열리는 참여연대 상집에 한 번도 늦는 일이 없으셨지 요. 지체되는 회의 시간을 기다리면서도 참여연대 활동가들의 게으름을 탓하는 대신 ‘경외’라는 표현까지 쓰시면서 항상 응원하고 격려해주셨지요. 참여연대 후원행사 모금 을 앞두고는 제일 먼저 후원금을 보내주시던 그 부지런함을 저는 대표님의 참여연대 가족들에 대한 사랑으로 받아들이곤 했습니다. 역할을 해야 하는 자리에선, 행사의 규 모와 상관없이 말씀하실 내용을 미리 준비해오셨지요. 차례가 되면 양복 안주머니에서 말씀내용이 정리된 종이를 꺼내던 대표님의 모습이 선연합니다. 가장 기억에 남아 있 는 것은 참여연대 10주년 총회 인사말이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에 분노하셨던 대표님의 결기에 찬 그 말씀을 많은 참여연대 식구들이 잊지 못할 것입니 다.
무엇보다 대표님이 제게 닮고 싶은 어른인 것은, 연륜만큼 더해가는 책임감과 더불어 전인적 인간의 표상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대표님과 인연을 맺은 후 처음 접한 대 표님의 저서, 《앙코르 티베트 돈황》은, 문화기행을 지식인의 호사인 줄로만 알았던 저 에게 충격이었습니다. 유작이 된 《아잔타에서 석불사》는 아시아고대문화유산답사기일 뿐 아니라, 대표님께서 일생 천착해오던 미감의 원형을 집대성했다는 점에서도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아시아 4대 역사문화유적 보로부두르, 아잔타, 앙코르와트, 둔황 답 사. 어떻게 소년기부터 품어온 이상을 일생동안 천착할 수 있었을까. 토기박물관 건립. 그냥 흘릴 수도 있었을 그 사회적 당위와 목표를 어떻게 평생 차곡차곡 이룰 수 있었 을까. 대표님이 이룬 성취는 문자 그대로 섭렵의 결과이기 때문에 온전히 대표님의 몫 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대표님의 성실함과 엄격함으로 빚어낸 빼어난 결과물보다도, 클래식 음악 이 없었다면 인생이 얼마나 삭막했을까 했던 대표님의 상상 아닌 상상과 처음 발레 공연을 보고서는 ‘인간의 몸이 그렇게 아름답고, 인간의 몸짓이 그렇게 환상적일 수 있는지 정말 몰랐다’는 고백을 하는 예술에 대한 감응. 바그너의 음악에 홀리면서도 바그너의 도덕적 타락과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함을 절대 용납하지 못하던 대표님의
인간적 태도에서 더욱 더 닮고 싶은 어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부고를 받았을 때부터, 대통령을 비롯한 여러분들의 진심어린 조사를 며칠 동안 접하 면서, 특히 추도사를 쓰는 이 순간까지, 대표님과의 크고 작은 기억들이 현재형으로 떠오르네요. 그 맑은 얼굴. 한참 어린 후배에게도 깍듯이 경어를 고집했음에도 배어나 오던 정겨운 목소리, 모두 생생합니다. 상집이 끝나면 고미술협회일로 인연이 깊었던 이상희 대표님과 다정하게 인사동으로 자리를 옮길 때의 그 경쾌한 행보, 오랜 재야민 주화운동을 함께 했던 김중배 대표님과 한 자리에 계실 때면 터져 나오던 호쾌한 웃 음, 이선종 대표님 은덕문화원 퇴임식에선 어느 때보다도 유머가 가득한 말씀을 해주 셨지요.
아버지와 할 일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는데 먼저 가버리면 어떻하냐고 철없이 투정하 며 장례식 내내 원망을 일삼았던 저에게 슬픔은 뒤늦게 엄습해왔습니다. 한 여름 땡볕 어딘가를 헤매다가도, 심지어는 자는 중에도 아버지의 부재를 느끼곤 울음을 터뜨린 적도 있었습니다. 아마도 대표님을 잃은 슬픔도 느닷없이 닥칠 거 같은 예감입니다. 아버지처럼 대표님과도 손 걸고 뭘 하자 약속한 적 없지만, 그래도 대표님께 제 맘대 로 바라고 기대하는 바가 많았던 거 같습니다. 대표님을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으 면서도 뻔뻔하게 바라기만 하는 후배가 야속하기도 하시겠지만, 대표님처럼 멋진 어른 을 여의고 싶지 않단 소망을 앞세우고만 싶습니다. 당장 대표님의 부재를 인정하고 싶 지 않은 맘뿐입니다. 거대한 파도처럼 슬픔이 급습하는 순간, 그때서야 제 인생의 어 른, 시대의 어른을 잃었다는 걸 실감하게 될까요.
문득 대표님을 굳이 보내지 않아도 될 거 같네요. 광화문광장에서, 학고재에서, 세종문 화회관에서……. 대표님을 자주 뵐 거 같습니다.
추모사
박원순 ㅣ 서울시장
돌이켜보면 저는 참 복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정법회와 민변 시절 정말 좋은 선배님들 을 많이 만났습니다. 선배들을 스승 삼아 따라다니며 그 어느 곳에서도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것이 저의 평생 자산이 되었습니다.
최영도 변호사님은 그런 선배 중에 한 분이었습니다. 진심으로 존경하고, 닮고 싶은 분이었습니다. 법조인으로서는 말할 것도 없고, 예술에 대한 심미안은 그를 더욱 멋있 게 보이게 했습니다. 돈이 생길 때마다 투자해 사라져 가는 토기를 모았고, 그 전량을 중앙박물관에 기증하셨습니다. 세계 곳곳을 여행 다니고 좋은 글을 남기셨습니다. 그 런 변호사님이 부러워 따라도 다니고, 어깨너머로 배우며 흉내도 내보았지만, 그 깊이 와 열정을 감히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그저 훌륭한 선배님 옆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 행복했고, 만족해야 했습니다.
괴롭혀드리는 일이 많았습니다. 참여연대 시절 대표직을 부탁드렸는데, 처음에 고사하 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제 청에 못 이겨 기꺼이 수락해주셨습니다. 본업도 팽개치고 시민운동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름으로 거드는 일도 안 하면 면목이 없지 않겠냐고요. 그러나 말씀만 그러실 뿐, 이름만 거는 일은 없었습니다. 직책과 상관없이 필요한 일 은 직접 나서서 꼼꼼하게 챙기곤 하셨습니다. 변호사님과 함께 일하면서 큰 철학에서 부터 일하는 스타일까지 적잖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황망히 가시다니요. 그 송구함을 어찌합니까. 시장한다고 제대로 찾아 뵙지도 못했습니다. 이번에 선거만 끝나면 찾아뵈려고 했던 이 못난 바람은 갈 길을 잃었습니다. 유일하게 보답할 길은 변호사님이 가시던 길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닐까 생 각합니다.
변호사님! 편히 쉬십시오.
추모사
최영도 변호사님을 기리며
정연순 ㅣ 전 민변 회장
추모의 글을 부탁받고 책상에 앉으니 민변에 가입하면서 처음 뵈었던 모습, 함께 했던 여러 일들과 함께 최변호사님에 대한 느낌이 하나씩 떠오릅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고인이 품으셨던 지식인으로서의 결기입니다. 민변을 세운 선배님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최변호사님은 선비의 기개가 살아 있는 분이셨습니다. 박 정희 독재의 서슬에 짓눌려 우리 사회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을 때에 사법 권 독립을 위해 분연히 맞서 싸우며 판사들의 성명서 초안을 작성하셨습니다. 그 때문 에 ‘평생 판사의 길을 걸을 줄 알았고 그러겠다 마음먹었던’
최변호사님은 판사재임
용에서 탈락되어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셨으나 변호사 활동을 하면서도 민변을 세우 는 일에 다른 선배님들과 하셨으니, 법조인으로서의 그 기개는 감히 따를 사람이 없었 다고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역시 문화 예술인으로서 감히 따라갈 수 없는 해박한 지식과 열정, 실천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고인의 문화 예술에 대한 사랑은 교양과 취미의 수준을 뛰어넘은 것이었습니다. 최변호사님은 세계 곳곳의 문화유적을 찾아다니시며 인간이라는 존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아름다움은 무엇인가를 탐구하셨습니다. 그에 대해 말씀 하실 때마다 목소리와 몸짓에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경이로운 것에 대한 감출 수 없는 애정’이 드러나는 것을 저로서는 부럽게 듣곤 하였습니다. 한번은 민변 후배들에게 강 연을 하셨는데, 전 세계를 다니시면서 가장 좋았던 문화유적을 3곳만 말씀해주십사 하 는 청에 그 중 하나로 인도네시아 보로부드르 석탑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제가 꼭 가보겠다 했더니 동지를 만난 듯 기뻐하시면서 당신을 가이드로 데려가 달라 고 하셨습니다. 꼭 그러겠다 약속했는데, 이 약속을 결국은 지키지 못해서 아쉽고 죄 송하기만 합니다.
그 외에 최변호사님이 보여주신 여러 면모를 떠올려 봅니다. 참여연대활동을 통해 시 민 사회를 바로 세우려 하셨고 사모님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신 남편이자 아버지이 셨으며, 평생 모은 토기 수천점을 기꺼이 우리 사회를 위해 내어 기증하셨으니, 이 짧 은 글에 최변호사님이 법조인이자 시민으로서 후배들에게 남기신 유산을 다 담기가 어렵습니다.
올해가 민변 30주년을 맞는 해라서 창립회원들의 육성을 녹음해 두는 사업을 진행하 고 있습니다. 1월에 최변호사님을 찾아뵙고 사법파동, 민변을 만들었던 일, 회원들에 대한 기억을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을 여쭈었더니, 잠 깐 머뭇거리셨습니다. 그리고는 ‘후배들이 너무나도 잘하고 있어서 그저 자랑스러울 뿐이다. 요즘에는 내가 변호사였을 때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들을 각 분야에서 하고 있는데 앞으로도 변호사로서 전문성을 키워가면서 공익활동에 헌신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하셨습니다. 얼마 후 최변호사님은 서울지방변호사회로부터 명덕상을 수상하셨 는데, 그로부터 며칠 지나 저에게 전화를 주셨습니다. 혹시나 몰라 수상소감을 준비했 었는데 발표할 기회가 없었다. 이 글은 민변의 후배들을 생각하면서 쓴 글이기도 하다, 지난번 인터뷰에서 제대로 답을 못한 것 같아, 이 글을 인터뷰에 보태어 꼭 남겨주면 좋겠다 하셨습니다. 흔쾌히 그러겠노라 약속드리며 연말에 발간될 ‘민주사회를 위한 변론’에 실어야겠다 마음먹었는데, 이렇게 추모집에 먼저 올리게 되어 애통한 마음 금 할 길이 없습니다.
최변호사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셨던 사모님과 천국에서 기쁘게 해후하시고 지상에 남 은 저희들을 자랑스럽게 계속 굽어 봐주실 것이라 믿으며, 저희에게 남기신 ‘명덕상 수상소감’으로 추모의 글을 마칩니다.
먼저 잘한 일도 없는 저에게 이렇게 큰 상을 주신 서울지방변호사회에 깊이 감사드 립니다. 그리고 제가 이런 큰 상을 받을 자격이 있나 하고 송구스러운 생각이 듭니 다.
저는 지금 제가 변호사로 일한 45년간 어떻게 살아왔는지, 저를 돌아보게 됩니다. 변호사법 제1조는 변호사의 사명을 한 줄로 천명하고 있습니다.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럼 저는 변 호사의 사명을 얼마나 성실히 수행 했을까?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지만 생각만큼 잘
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독재정권시절 탄압을 받아 구속되고 고문 받고, 무고한 죄명까지 씌워진 정치 범, 양심수들을 위해, 이른바 시국사건 변론에 뛰어들면서 인권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 독재에 저항하며 신체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 자유권적 기본권 옹호에 힘썼 고, 그 뒤에는 노동자, 도시빈민, 장애자, 여성 등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악법개폐를 위한 투쟁에도 나섰습니다. 그러나 너무 쉽게 생각했었는지 성과는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제가 자평하건대 60 점도 받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는 선배로서 사랑하고 존경하는 후배 여러분께 다음 두 가지 당부를 드리고저 합 니다.
첫째, 현실에 참여하시라는 것입니다. 수임사건을 성실히 수행하시면서, 한편으로는 법률적 조력이 필요한 사회적 약자에게도 눈을 돌리시라는 것입니다. 또한 반민주 적, 반인권적인 악법의 개폐, 나쁜 제도의 개선에도 동참하시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방관자가 되지 말고 시대가 요구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도리를 다 하시라는 것입니다.
둘째, 법조인으로서 부자가 되려고 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최근에 천문학적인 고 액 수임료를 받은 일부 변호사들의 행태가 알려져, 착하게 사는 대다수의 변호사와 국민께 충격과 허탈감을 안겨 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 악덕 변호사들은 의뢰인의 궁박한 상태를 이용하여 큰 돈을 갈취하는 범죄자에 다름 아닙니다. 이런 행태가 법 조인에 대한 신뢰를 땅에 떨어뜨리는 요인입니다.
저는 이렇게 당부 드리고 싶습니다. 법률사무를 통한 수입으로 부자가 되려고 하지 마시라. 수임료는 수고에 대한 사회 통념상 적정한 금액에, 조금만 더 보태서 받으시라는 것입니다. 제가 너무 외람된 말씀을 많이 드린 것 같습니다. 끝으로 서울지방변호사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8년
1월
29일
최 영 도
추모시
박연철 ㅣ 민변 창립회원
최영도님의 소천 (2018. 6. 9.)
내 마음의 고운 분들 내가 정말 존경하는 분들 한분 두분 세상을 떠나고 계시니 나에게도 죽음은 곧 찾아오리라 언제까지나 살 수 있을 것처럼 살지 말고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것으로 나의 운명을 받아들이자 죽음의 낯빛이 때때로 나를 스치는 것을 밀어내지 말자 이제 사는 것 자체를 몹시도 아끼는 작은 깃발은 거두고 하루 한순간이라도 진실과 사랑을 추구라면서 살줄 알아야 하겠다 고운 분 지척에 두고서도 오늘 가서 뵐까 내일 가서 뵐까 미루고 있다가 끝내 부음을 먼저 듣고 말았으니 어이하랴 허공에 낙엽 한 잎 느릿느릿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내 마음의 옅은 펄럭임과 짙은 허전함을.
기억하다
故 최영도 변호사 관련 글 모음
기억하다
ㅣ 문재인 대통령 페이스북 추모글
최영도 변호사님의 별세 소식을 듣고, 빈소를 찾아뵙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글을 올립니다.
선배님은 엄혹했던 독재정권 시대 1세대 인권변호사로서, 후배들에게 변호사가 걸어갈 길 을 보여주는 표상이셨습니다.
참여정부에서는 국가인권위원장을 역임하셨는데, 그것이 그 분께 큰 고통을 안겨드렸던 것 이 제게는 큰 송구함으로 남아있기도 합니다.
제가 선배님을 더욱 닮고 싶었고 존경했던 것은 클래식 음악과 미술에 대한 깊은 소양과 안목이었습니다.
특히 전통 불교 미술에 대한 조예는 전문가 수준이었습니다. 선배님은 평생 수집하신 원삼 국시대, 통일신라, 고려·조선시대의 문화재급 토기 1,500여점을 십수년 전에 국립중앙박물 관에 기증하여, 우리 토기 문화의 흐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귀중한 연구 자료를 사회에 남겨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우리 문화재가 국외로 유출되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 변호사를 하며 번 돈을 모두 거기에 쓰셨다니, 우리 전통 문화에 대한 사랑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좋은 법률가를 뛰어넘는 훌륭한 인격, 저도 본받고 싶었지만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경지 였습니다.
제가 정치에 뛰어든 후에는 늘 걱정하면서 한결같은 격려를 보내주셨고, 저의 당선을 누구 보다 기뻐하셨던 존경하는 선배님, 최영도 변호사님의 영면을 빕니다.
기억하다
ㅣ 참여연대 2004년 1월호 <참여사회> 인터뷰
"혼란한 사회의 '키잡이'가 됩시다"
신년호에서 만날 사람을 결정하는 데 고민은 필요없었다. 참여연대 대표와 회원들의 만남 만큼 자연스러운 건 없으니까. 하지만 지난해 12월 11일 인터뷰를 위해 사당동에 있는 최 영도 대표의 변호사 사무실로 찾아가는 동안 마음이 평온했던 것은 아니다. 매주 상임집행 위가 열리는 월요일 아침 7시30분이면 어김없이 미리 와 혼자 회의실을 지키고 있던 부지 런한 모습, 전화할 때마다 느꼈던 단정하고 간결한 말투, 한국 사람은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다는 돈황 막고굴을 찾아가서 여행기를 써낸 이력, 토기 수집에서 보여주던 열의와 심미안, 이 모든 모습에서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엄격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인터뷰어로 서 감당하기 어려운 상대일 것 같은 예감은 적중했다. “참여연대가 총회준비로 바쁘다며 허둥거릴 때인 2002년 3월에 대표로 취임하셨는데, 벌써 2년이 다 돼간다”며 말을 꺼냈더 니, 바로 정정이 들어온다. “3월이 아니고 2월입니다.” “ …. ”
최영도 대표는 그런 사람이다. 얼마 전 위암수술을 받고 투병생활을 하고 계시던 터라 건 강에 대한 질문부터 시작했다.
문화 심미안을 가진 사람
박영선(이하 박) 요즘은 활동하시기 좀 어떠세요? 몸은 어느 정도 회복되셨어요?
최영도(이하 최) 염려해준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그래도 이제부터 진짜 조심해야지요. 대개는 수술 받고 5년은 무사히 지나야 완치 선언을 받을 수 있거든요. 재발하지 않도록 의사들이 시키는 대로 하려고 합니다. 가급적이면 스트레스 받거나 두뇌 쓰는 일은 피하려 고 하는데, 쉽지는 않네요.
박 대표님의 건강상황을 알면서도 신년 인터뷰에 굳이 모신 이유는 지금껏 대표님이 회원
들에게 한 번도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었던 것 같아, 대표님의 다양한 면모를 알리는 자리 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회원들 대부분은 대표님을 인권운동가, 법조인 정도로 만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대표님이 쓰신 여행기 같은 책을 보면 놀라는 게 당연 하죠. 그래서 이참에 대표님의 ‘정체(ㅎㅎ)’를 낱낱이 밝혀보려고 합니다. 말 나온 김에 여 행기 이야기부터 해 볼까요? 대표님이 집필하신 『앙코르, 티베트, 돈황』을 두고 누군가 ‘탄 탄한 역사기행서’ 라고 평가하던데요. 거의 학술서적 수준이라고요. 여행기를 이렇게 꼼꼼 하게 자료 조사해 쓰신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최 초등학교 때부터 가장 흥미 있어 했고, 잘했던 과목이 바로 세계역사.지리였어요. 세계 인문지리에 대한 책도 많이 읽었고요. 십대 시절, 책에서 보고 상상만 했던 풍경을 직접 봤으니 얼마나 감격했겠어요. 제 성격 때문인지 가기 전에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감격을 단순히 감상 전달에 그치지 않고 정확한 사실을 토대로 알리고 싶었어요. 그렇 게 시작하게 된 거죠.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니 이제 여행에 대한 조언을 해 달라는 말도 듣게 되는데, 그 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총론 여행은 그만하고 각론 여행을 해라.”
박 여행만이 아니잖아요. 대표님은 20년 동안 토기를 수집해서 국립중앙박물관에다 기증 까지 하셨는데요. 토기에 대한 대표님의 관심은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알 정도니까요. 요 즘은 ‘토기이야기’란 글까지 쓰신다면서요? 글 쓰는 것도 꽤 힘든 일인데, 괜찮으신지요?
최 아. 그거요? 벌써 다 마무리했어요. 한 출판사에서 한번 써보라고 해서 준비한 건데, 그 런 종류의 일은 제가 즐겨 하는 일이니까 스트레스는 전혀 받지 않지요.
박 토기에 대한 관심은 어디에서 시작된 건가요? 어느 기사에서 보니까 아버님께서 미술 전시회에 꼭 데리고 다니셨다고 하던데, 대표님의 문화적 심미안을 아버님께 물려받았다고 봐도 될까요?
최 아마 그럴 겁니다. 아버님께서 제일 즐기시던 것이 한시였는데, 미술 쪽에도 관심이 많 으셨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것 같아요. 국전이 처음 열리던 해였는데, 우리 6남매 손목을 잡고 전시회에 가셔서 그림 하나하나를 설명해주셨던 기억이 나요. 아버님은 한마 디로 멋을 아는 분이셨습니다. 전통 한옥을 손수 지으신 후 백단향을 피우며 당시를 읽곤 하셨을 정도니까요.
인생의 스승, 아버지
박 대표님을 여러 가지 모습으로 규정할 수 있지만 문화적인 면에서는 애호가의 수준을 넘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신 것처럼 보이는데, 인문학을 하셨어도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법대에 입학한 특별한 동기가 있었는지요?
최 그냥 진학할 때가 되니까 주위 친구들을 따라 “법대 가보자”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정작 아버님께서 못 마땅해 하시는 거예요. “판검사나 되려거든 법대 가지 마라”고 하시더 군요. 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사상범으로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받고 죽기 직전에 석방되신 분이거든요. 이승만 독재정권을 몹시 싫어하셨죠. 성품이 강직하신 데다 반관료적이셨기 때문에 우리 형제들을 모두 공립학교가 아닌 사립학교에 보내실 정도였죠. 결국엔 법학을 학문으로 하는 법학자가 되라는 조건을 달아서 법대 진학을 허락하셨어요. 반면 저는 고등 고시를 치면 판.검사가 된다는 것도 모른 채 법대를 지원할 정도로 바보였어요. 참. (웃음)
박 아버님의 정신세계가 대표님께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생각이 드네요.
최 이런 일도 있었어요. 87년 6월, 아주 힘든 모습으로 앉아 계시기에 이유를 여쭸더니, 여든 둘의 연세에 글쎄 “아유, 이제 데모도 못하겠다” 그러시는 거예요. 일제 때 받은 고문 후유증 때문에 지팡이를 짚고 다니셨는데, 그 몸으로 경찰을 피해 하루 종일 학생들과 데 모하느라 돌아다니시다 보니까 기운이 다 빠져 버린 거죠. 그 해가 우리 애가 대학 신입생 이 됐을 땐데, 이 애도 매일 데모로 온몸에 최루탄 범벅이 되어서 돌아오고, 나도 ‘민변(민 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활동을 하게 되면서 최루탄 범벅이 되어 들어오고…. 3대가 데 모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한 일간지 전면에 실린 적도 있었지요.
박 ‘사법권침해사례’를 직접 기초하셨지요?
최 예, 초안을 아직도 가지고 있어요. 71년 사법파동이 있을 당시 ‘사법권침해사례’를 적어 제출했는데, 73년 3월 유신헌법 통과 후 대통령이 법관 임명권을 쥐고 흔들면서 법관 재 임명 과정에서 국가관이 없는 판사는 필요 없다며 쫓아내더군요.
박 86년 정법회를 결성하신 이후 88년 청년법조회와 함께 민변을 창립하셨는데, 아무래도 몸으로 직접 부딪히는 운동가로서의 삶은 이때부터가 아닌가 싶은데요.
최 그렇죠.
자기혁신 위해 끊임없이 긴장해야
박 참여연대 대표직을 수락할 때는 어떤 마음이셨나요?
최 박원순 변호사와는 정법회와 민변 시절부터 같이 일했던 인연이 있었는데, 어느 날 박 변호사가 한 번 만나자고 하더군요. 대표직을 맡길 줄은 전혀 몰랐죠. 처음엔 거절했지만 고미술협회 때문에 오랜 인연을 맺어 온 이상희 선생과 함께 공동대표를 맡으라고 해 수 락하게 되었지요.
박 그 소식을 접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던 생각이 납니다. 참여연대 운동이 아무래 도 법률을 바탕으로 하는 운동인데다 인권의 지평을 계속 넓히려고 하고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 대표님을 따라 갈 사람이 없으니까요.
최 2002년 총회 때 인사를 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어요. ‘밖에서 참여연대를 지켜보면서 어 떻게 저렇게 자발적이고 헌신적으로 할 수 있을까, 흐뭇한 마음으로 지금까지 지켜봤습니 다. 이제 저를 불러 함께 일하게 해주셔서 고맙고, 절망스러운 사회현실이지만 참여연대를 통해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저는 참 자랑스럽습니다’라 고요.
박 대표님께서 민변 회장을 맡고 계실 때 형식적인 직책을 벗어 던지고 직접 일을 챙기실 정도로 아주 엄격하셨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요. 그 때의 기준으로 현재 참여연대 활동 을 평가하신다면, 어떠신가요?
최 작년에는 제가 몸이 안 좋아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해 미안할 따름입니다. 대표직을 내 놓겠다고 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고요. 그런 처지에 헌신적으로 일하고 있는 간사들에게 제가 뭐라고 말하겠어요? 다만 한 가지, 이런 건 있는 거 같아요. 시민단체의 공신력 등에 대한 설문조사를 보면 모든 면에서 참여연대가 월등하게 높더군요. 그런 결과를 보고 참여 연대가, 시민운동이 권력화 되간다고 말들 하죠. 비방을 위한 비방에 우리가 매번 대꾸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런 비방 때문에 잘 모르는 시민들에게 오해를 사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있어요. 따라서 단체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우리는 자기혁신뿐 아니라 민주적이고
공평한 운동방식 정립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박 맞습니다. 참여연대 내부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는 게 필요한 거 같습니다. 참여연대 초 기 자료를 보니까, 스스로의 활동을 계속 객관화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는 구절 이 있더군요. 참여연대 사람들 모두에게 스스로 긴장하는 전통이 살아 있다면 많은 문제점 이 있더라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 물론입니다. 그것만 잃지 않으면 된다고 봅니다.
혼란할수록 중심을 잡아주는 운동 필요
박 지금 참여연대 대표로서 시민운동의 모든 분야에 관여를 하시고 계시지만, 그 중에서도 사법개혁 분야나 인권 분야에 가장 관심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사법이나 인권 분야에서 시급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무엇인지요?
최 전 국민이 통합되지 못하고 갈라져서 싸우는 남남갈등의 주범이 바로 국가보안법이라 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송두율교수사건 때도 국가보안법만 없었다면 진보와 보수 간의 갈 등이 그렇게까지 심하진 않았을 겁니다. 98년 11월 1일 국회 앞에서 국가보안법 장사를 지냈는데도, 이놈이 죽지를 않고 오늘도 맹위를 떨치고 있으니 큰일이죠. 또 국가보안법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92년 제네바 인권이사회에서 한국정부가 제출한 인권보고서에 대 해 18개국 위원들이 ‘세상에 이런 악법이 어디 있냐’며 한 목소리로 비판했던 때가 생각나 요. 국가보안법으로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범죄가 46개나 됩니다. 일반 국민들은 국가보안 법이 본인하고는 아무런 상관없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요. 하지만 아닙니다. 더군다나 노무현 정권이 인권에 역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지요. 아주 안타깝습니다. 소수 정권이고, 국회에서 힘 못쓰는 정권이 라는 한계도 있지만, 대통령이나 그 주변 참모들이 좀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정책을 추진 한다면 적어도 테러 방지법이나 집시법 개악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 다.
박 오늘 법안심사소위에서 통과되었다고 하던데요. 명색이 인권변호사라는 사람이 대통령 이 되었는데도, 유감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새해를 맞는 참여연대 회원여러분과 상근자들에게 한 말씀 해 주세요.
최 새해는 더욱더 건강하시고 복된 해가 되셨으면 합니다. 대선자금 수사, 대통령 측근 비 리 특검 등을 비롯해 내년 총선까지 정치상황이 매우 혼란할 걸로 보이는데, 그럴 때일수 록 사회의 중심을 잡는 운동이 필요할 것 같아요. 지금까지 정치, 경제, 사회 여러 분야에 서 열심히 잘 해왔지만, 내년에는 좀 더 심기일전하여 열심히 해보자는 말씀을 드리고 싶 습니다.
기억하다
ㅣ 『민주사회를 위한 변론』 1998년 5월호(통권 제20호), 최영도
인권옹호와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10년
존경하는 내외 귀빈 여러분, 그리고 사랑하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회원 여러분! 오늘 창립 10주년을 맞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10년 전 군사독재권력에 저항하 여 민주화투쟁을 하다가 구속된 정치적 양심수들을 변호하던 변호사들이 인권 옹호와 사 회 정의를 실현하고자 보다 조직적인 활동을 하기 위하여 만들었습니다.
우리 민변 회원들은 지나온 세월 정치범들의 변론을 거의 도맡다시피 하여 법정에서는 정연한 논리로 무죄투쟁을 하여왔고, 반민주적 법령과 제도를 조사 연구하고 발표하여 악 법 개폐와 나쁜 제도의 개선을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5.18 민주화운동 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할 때에는 가두시위투쟁도 하였고, 날치기로 통과된 노동관계 법과 국가 안전기획부법의 무효화투쟁을 할 때에는 철야농성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이 땅에 민주화라는 꽃을 피우기 위하여 온 몸을 바쳐 투쟁하다가 목숨을 잃은 젊은이의 주검 앞에서는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을 체험하였고,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 고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노태우를 법정에 세웠을 때에는 가슴 뿌듯한 보람을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민변은 10년 전 51명의 회원으로 출범하였으나 현재 240여 명의 회원을 가진 커다 란 전문가단체로 외적인 성장도 이룩하였습니다.
민변은 이렇게 정신없이 10년을 달려왔습니다. 우리는 10년 전 민변을 창립할 때에 군사정권만 무너트리면 인권상황은 크게 개선되어 우리가 할 일이 많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뒤 우리는 이른바 문민 정부를 거쳐 지금은 국민의 정부 아래 살고 있지만 아직도 수많은 정치적 양심수들은 사 면・복권되지 아니한 채 크나큰 고통을 받고 있고, 대표적 악법인 국가보안법의 독소조항은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서 맹위를 떨치고 있으며, 아직도 전향서를 쓰지 않으면 감형・석방・ 사면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고, 아직도 수사단계에서 가혹행위 시비가 그치지 않고, 노동 자들은 IMF체제 아래서 생존권마저 위협 받는 등 열악한 인권상황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 니다.
우리 민변은 앞으로도 정치범에 대한 변론과 사면 복권운동, 반민주적 악법과 제도의 폐 지 또는 개선, 인권침해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와 시정 촉구, 인권 현안에 대한 우리의 견 해 표명과 바람직한 여론 형성, 출판물 간행을 통한 인권, 특히 노동자의 권리 홍보와 교 육, 다른 사회민주단체들과의 연대사업, 그리고 국제적인 인권연대활동을 꾸준히 계속하고 자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 민변을 사랑하고 지원해주신 내외 귀빈 여러분께서는 앞으로도 계속하여 우리 민변을 지켜보시고 격려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민변 회원들은 한층 더 분발하여 인권 옹호와 정의 실현을 위하여 열심히 일할 것 을 이 자리를 빌어 굳게 다짐하겠습니다. (1998.5.29.)
기억하다
ㅣ 『민주사회를 위한 변론』 1998년 11,12월호(통권 제25호), 최영도
국가보안법, 50년이면 충분하다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지 오늘도 50년이 되었습니다. 50년 전 오늘 제헌국회는 많은 의원 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제시대의 치안유지법을 그대로 모방하여 국가보안법의 제정을 강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직후 그 법의 제정을 반대하였던 제헌국회의원 13명을 남로당 의 프락치로 몰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하였습니다. 그 후에도 국가보안법은 1958년 국가보안법 파동, 1961년 민족일보사건, 그 뒤 인혁당사건, 동백림사건 등 중요한 정치적 고비마다 맹위를 떨쳐 수많은 인사들을 체포, 구금, 고문하고, 사형시키는 데 이용되었습니 다.
우리가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주장하는 이유는,
첫째, 국가보안법은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양심과 사상의 자유, 그리고 학문과 표현의 자 유를 침해하는 위헌적인 법률이고, 세계인권선언에 반하는 반인권적 법률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국가보안법은 반국가단체, 이적단체, 국가기밀, 찬양고무, 이적표현물 등 그 구성요건 이 추상적이고 애매모호하여 죄형법정주의, 유추해석의 금지 등 형사법의 대원칙에 어긋나 기 때문입니다.
셋째, 국가보안법은 다른 형사범보다 수사기관에서 20일이나 더 구속할 수 있고, 광범위하 게 사형을 부과할 수 있는 잔인하고 가혹한 법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국가보안법은 권력자가 50년간 통일에 대한 자유로운 논의를 봉쇄 하고, 정부에 대한 비판을 하는 민주인사, 정치적 반대자를 탄압하고, 제거하고, 정권을 유 지하는 수단으로 악용하여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가보안법의 막대한 폐해를 지적하며 줄기차게 그 폐지를 주장하여 왔 고 국제인권단체들도 한국에 국가보안법이 있는 한 진정한 인권은 없다고 비난하여 왔습 니다.
국가보안법 존치론자들은 남북분단이라는 특수상황아래서 국가보안법은 국가의 안보를 위 하여 반드시 필요한 법률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형법상의 내란죄, 간첩죄 등에 몇 가지 보충입법만 한다면 국가안보에 필요한 제도 적 장치로서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국제적으로 공인된 형벌법규의 기준에 비추어 국가보안법은 그 내용 이나 적용에 있어서 대표적인 악법이므로 반드시 폐지되어야 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야당 총재 시절 처음에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자고 하였다가 민주질서보 호법으로 대체하자고 선회하였고 최근에는 법을 존치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는데 이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뒤 금년 10월 말까지 8개월간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맹위를 떨쳐 그 기간 중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사람은 300명이 넘었습니다.
한쪽에는 남쪽 인사들이 북한을 방문하여 북한 최고통치자를 만나 교류와 협력을 논의하 고, 수백 명의 남한 백성이 유람선을 타고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을 왕래하는데 다른 쪽에서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백 명이 줄줄이 구속되는 모순된 현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 어느 신문사가 국가보안법에 관한 여론조사를 한 일이 있습니다. 그 결과 변호사 의 92.9%, 법학교수의 99%, 일반국민의 78.2%가 국가보안법을 폐지 또는 개정·완화해야 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국가보안법 개폐에 대한 논의구조마저 철저히 막힌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기 힘들다면 그 중 가장 폐해가 큰 제7조 찬양고무죄, 제 10조 불고지죄, 제19조 구속기간 연장, 제21조 상금, 제22조 보로금 조항만이라도 먼저 폐
지하고 단계적으로 전부 폐지하는 방향으로 국가보안법의 개폐를 논의하는 마당을 열어야 합니다.
국가보안법은 이제 50살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더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인권대통령을 지향하는 김대중 대통령은 그 임기 중에 반드시 국가보안법에 대해 마무리 를 지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빠른 시일 내에 국가보안법의 개폐에 관한 논의의 마 당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국가보안법으로 억울하게 구속된 많은 분들 이 아무런 조건 없이 석방되고 그 분들의 명예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분투를 기대합니다.
1998. 12. 1.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최 영 도
기억하다
ㅣ 『민주사회를 위한 변론』 2000년 1,2월호(통권 제34호), 최영도
2000년 새해를 맞이하여
새해를 맞은 지도 벌써 달포가 지났습니다. 금년은 서기 2000년, 뉴 밀레니엄, 즈믄해라 하여 온 세계가 마치 열병을 앓는 것처럼 야단법석을 떨며 요란하게 맞이하였습니다.
우리는 매년 새해를 맞을 때마다 과거를 회고하고 미래를 설계하여 마음을 새롭게 다져 왔습니다. 우리의 현대사는 전쟁, 기아, 쿠데타, 군사독재, 학살, 투쟁 등 음울한 단어들로 점철되어왔고, 최근에는 대량실업과 도산을 몰고온 IMF 체제 아래에서 선량한 국민들이 신음하는 가운데 정치권은 여전히 부정부패, 지역주의, 1인 보스지배, 밀실정치, 돈선거, 당 리당략에 얽매인 끝없는 정쟁으로만 치달았습니다.
특히 20세기의 마지막 해라는 1999년에 다른 나라들은 새천년을 앞두고 국가경쟁력강 화를 위한 연구와 계획수립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탈옥수 신창원, 고관집 절도, 고 급옷로비, 조폐창파업유도, 도감청, 고문시비, 언론장악문건 등 우울하고 부정적인 사건들 로 아까운 세월을 허송하였습니다.
우리는 과거 이십여 년간 양심수변론과 석방사면, 반민주적 악법과 제도의 개폐, 부정부 패의 척결 등으로 인권이 존중되는 정의롭고 민주적인 사회의 실현을 위하여 노력하여 왔 습니다.
그러나 양심의 자유를 억압하는 준법서약제도는 아직도 엄존하고, 양심수에 대한 사면은 파렴치한 정치인과 고위공직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특별사면의 모양새를 갖추기 위하여 몇 명씩 포함되는 정도로 미흡하였고 아직도 수백 명의 양심수가 차갑고 외로운 감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탄압하고 죄형법정주의에 반하여 현대 문명사회에
서 가장 반인권적이라고 지탄받는 국가보안법의 폐지, 행형제도의 개선 등 반민주적인 법 령과 제도의 개선을 위하여 힘써왔지만 별로 이루어진 것이 없습니다.
인권기구설립에 관하여는 독립적인 국가기구로 그 위상과 권한이 명실상부한 인권위원 회를 만들려고 노력하여 왔으나 인권위원회를 특수법인 민간기구로 만들어 법무부가 장악 하려는 정부여당의 인권법안을 간신히 저지시키는 데 그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금년 연두에도 예년과 똑같은 희망을 가져봅니다. 그러나 금년은 정치권이나, 언 론, 국민들의 관심이 4.13 총선에 집중되어 우리의 관심사가 연초부터 선거열기에 매몰된 듯 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마저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금년에는 준법서약제도의 철폐 와 양심수 위주의 사면·복권, 최소한 국가보안법 제7조 찬양고무죄와 제10조 불고지죄의 완전철폐, 독립된 국가기관으로서의 인권기구의 발족, 부패방지법의 제정만이라도 이룩하 였으면 하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금년 연초부터 부패타락한 정치에 참고 견디던 국민 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시민사회단체에 의한 낙천, 낙선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습니 다. 이는 자정능력을 상실한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불신임선언이며 시민이 스스로 정치를 개혁코저 나선 유권자혁명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유권자운동이 4.19혁명, 6.10민주항쟁에 이은 또하나의 시민혁명으로 반 드시 성공하여 정치개혁이 이룩되고, 올해의 우리 염원이 이루어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 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억하다
ㅣ 1971. 7. 28. 제1차 사법파동 당시 최영도 변호사님이 쓴 <사법부의 독립을 침해하는 사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