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Phiên tòa hòa bình của nhân dân
về tội ác thảm sát thường dân do quân đội Hàn Quốc gây ra trong chiến tranh Việt Nam
People's Tribunal on War crimes by South Korean Troops during the Vietnam War
2018. 4.20(금)- 4.22(일) 마포 문화비축기지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Phiên tòa hòa bình của nhân dân
về tội ác thảm sát thường dân do quân đội Hàn Quốc gây ra trong chiến tranh Việt Nam
1.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
People's Tribunal on War crimes by South Korean Troops during the Vietnam War
6
한위 을명규상진 살학인간민 한의 에군국한 기시 쟁전남트베
2018. 4.20(금)- 4.22(일) 마포 문화비축기지
2. 인사말 강우일 ㅣ 시민평화법정 공동준비위원장
10
박영립 ㅣ 재단법인 화우공익재단 이사장
11
홍익표 ㅣ 국회시민정치포럼 공동대표
12
김복동 ㅣ 일본군성노예제 생존자, 인권운동가
13
nâd nâhn aủc hnìb aòh aòt nêihP
c3. ốu국제학술대회 Q nàH iộđ nâuq od nâd gnờưht tás mảht cá iột ềv
4. 시민평화법정
maN tệiV hnart nếihc gnort ar yâg
노근리의 기억에서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생각하다 ㅣ 하민홍
18
재판부·서기단, 원·피고 및 각 대리인 소개
23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시민평화법정 헌장
75
가해 경험을 말한다는 것: 일본 중국귀환자연락회의 사례 ㅣ 후지이 다케시
36
소장 요약본
82
법정에서 하지 못한 이야기 1 - 왜 법정에서도, 법정 밖에서도 이야기해야 하는가 ㅣ 이경빈
54
재판진행경과보고
법정에서 하지 못한 이야기 2 ㅣ 장한길
57
sem<베트남 irc raW no lanubirT s'elpoeP 전쟁>의 동시대성: 베트남 새로운 세대의 전쟁기억 ㅣ 심주형 raW manteiV eht gnirud spoorT naeroK htuoS yb
22.4 -
02.4 .8102
- 참전군인 A와 ‘함께 말한다’는 것 ㅣ 심아정 )일우리가 ( 만난 참전군인)금 ( 어떤 ‘참전군인’ 상을 만들어나갈 것인가? ㅣ 장원아
지기축비화문 포마
60
74
168
5. 준비위원회 소개 및구성, 준비과정
68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소개
170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구성
177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일지
180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Phiên tòa hòa bình của nhân dân
về tội ác thảm sát thường dân do quân đội Hàn Quốc
gây ra trong chiến tranh Việt Nam
People's Tribunal on War crimes by South Korean Troops during the Vietnam War
1.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
1.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 ㅣ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
김성락 김성보 김성태 김성홍 김성훈 김세 은 김세일 김세철 김소영 김수 목 김수안 김수 진 김수현 김슬기 김승 미 김승 석 김승 준 김승희 김시우 김신형 김여경 김여운 김연성 김영길 김영대 김영란 김영석 김영신 김영옥 김영주 김영찬 김영철 김영혜
시민평화법정은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문제를 공론화하고자 하는 시민
김옥 순 김완 병 김완 중 김용 태 김우 재 김운 선 김유미 김유 석 김유 진 김육 훈 김윤 경
들의 힘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평화의 연대를 해주신 많은 개인과 단체에 감사드립니다.
김윤자 김율희 김은수 김은숙1 김은숙2 김은영 김은주1 김은주2 김은형 김의철 김인곤 김인수 김인식 김인호1 김인호2 김자 연 김재민 김재선 김점구 김정건 김정숙 김정아
단체 준비위원
김정옥 김정우 김주 숙 김주학 김주형 김주 훈 김주희 김준 성 김준혁 김준 화 김준회 김지웅 김지유 김지현 김지환 김진규 김진숙 김진아 김진웅 김진철 김진혜 김창규 김창록 김창식 김철완 김초원 김춘 동 김태정 김태형 김학 준 김해 윰 김해일 김해진
국회시민정치포럼 교육공동체_벗 금호고_역사탐구반 노동당평화주의자모임_도망자들 녹색연합
김헌주 김현숙1 김현숙2 김현아 김현우 김형근 김형배 김형석 김형수 김혜영 김호원
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 민들레_국가폭력피해자와함께하는사람들 민족문제연구소
김호철 김홍 석 김홍 탁 김효선 김효주 김희 곤 김희 순 (오 지우) 김희연 김희 준 김희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주주의법학연구회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법무법인도담
나갑헌 나건호 나 단비 나승호 나 해니 나 현웅 남경민(박소영) 남궁 광선 남순태 남 연이
베트남과한국을생각하는시민모임 베트남스토리 베트남평화의료연대 사단법인함께하는빛
남윤 국 남홍 근 노경태 노미숙 노순 택 노승 범 두 은미 류 구 완 류 선영 류영숙 류 지원
성프란치스코평화센터 수유너머104 시민평화포럼 아시아의친구들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_아디
류혜정1 류혜정2 류 후남 마 숙진 마 연정 마조은 맹경숙 맹주일 맹행일 문명숙 문미정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역사문제연구소 연꽃아래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문 성 재 문 수 문영 수 문영일 문 재 혁 문지 혜 문 창 재 미 류 민경 수 민 승 준 밀 알 병 무
예수회인권연대연구소 원곡법률사무소 원불교인권위원회 이주민센터_친구
박강성주 박경희 박규 훈 박금 숙 박금순 박나해 박노율 박대윤 박동 숙 박두상 박면기
인권과평화를위한국제민주연대 작은책 전국대학노동조합 전국대학노동조합_인덕대지부
박목 우 박 미영 박 미정 박 민택 박 민호 박 민희 박 병한 박봉 숙 박봉재 박상식 박상천
전국대학노동조합_포항공대지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쟁없는세상 제주평화인권센터
박선아 박선영 박성남 박성미 박성수 박성진 박성 호 박성훈 박세 권 박세민 박세영
참여연대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평화바닥 평화작가연대 포럼진실과정의 피스모모
박소영 박소율 박소현 박수 미 박순 규 박순 복 박순 성 박순 정 박순제 박시환 박 연 자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한국평화교육훈련원
박 연정 박 연희 박 영서 박 영지 박 영희 박 예지 박옥 주 박용희 박윤 경 박재현 박정숙
한베평화재단 호평중_평화기행졸업생 호평중_평화愛사회리더스쿨 화우공익재단 Legatus_de_Hana
박정준 박종 길 박종 민 박종 찬 박준 규 박준호 박지연 박지영 박지은 박지현 박진아 박진우 박진현 박창호 박치현 박코 치 박 해영 박 해일 박 현주 박 현희 박 형진 박 혜경 박훈 순 박희용 방동 준 방수인 방승재 방종 환 배수 판 배예성 배용호 배은 주 배은지
개인 준비위원 강 다 연 강동 렬 강 명 회 강 미 애 강 민경 강 민 정 강 민 협 강샘 강성 구 강성만 강수 현 강요 L 강은 경 강은 정 강을 미 강제 숙 강진명 강 현명 강효석 강 희 섭 강 희 중 고 대경 고동 주 고명철 고민경 고민석 고우 정 고은지 고인애 고 태진 고현 주 고형 종 고혜경 고혜정 고 희진 공 강 일 공 성숙 공 용 대 곽경란 곽보천 곽희경 구 정모 구 해수 권기홍 권다 영 권명희 권미경 권민지 권백진 권 석린 권 세희 권영미 권오성 권오영 권오현 권 위 자 권 윤 덕 권 윤 홍 권인 순 권 정 은 권 혁 은 권효신 금 창기 기 찬 종 기현 길래 현 길원옥 김경미 김경수 김경훈1 김경훈2 김경희 김고종호 김광란 김광우 김광일 김규린 김규 환 김기민 김기언 김나 연 김덕훈 김동 현 김두범 김명정 김명종 김명진 김명호 김명훈 김무겸 김미경 김미라1 김미라2 김미란 김미선1 김미선2 김미애 김미정1 김미정2 김미형 김민정1 김민정2 김민정3 김민호 김범영 김법성 김복 동 김상범 김상윤 김상진 김상희1 김상희2 김서경 김서분 김선도 김선애 김선혜 김선호 김선화 김성근 김성덕
6
배지현 배진아 백미란 백민령 백승 화 백용 현 백종 진 백지선 변강훈 변승 철 변정민 변진영 사유 진 서광선 서여진 서은 미 서은영 서지민 서 채 완 석미화 석민주 성소 윤 성승현 손민경 손 상수 손양수 손 우헌 손재욱 손 정호 손 하 늘 손현경 손 혜인 송 두범 송 상욱 송 용 석 송 우 창 송 은 하 송인욱 송재우 송 준호 송 찬섭 송 태웅 수민맘 신가 현 신광 혜 신미진 신민주 신봉 철 신상 환 신선옥 신성현 신성호 신성희 신세인 신승호 신영화 신옥 경 신우열 신유 선 신유 식 신윤 경 신정화 신정희 신지희 신현규 신현춘 심 근 원 심원 보 심 윤 철 심 재 창 심 현 아 아 네 스 안건모 안 병 우 안 악 희 안 영내 안 온 안용모 안정민 안정애 안 태연 안 혜경 안 혜정 양경숙 양경애 양 기수 양 동 훈 양 슬기 양 여옥 양우 용 양 재식 양 지민 양 지혜 엄수현 여혜경 오근 수 오대석 오명진 오 세령 오수 미 오승 환 오영주 오윤희 오은 주 오 의석 오인정 오 재 성 오준호 오 지은 옥 승호 왕 현숙 우말순 우 승민 위성헌 위언혜 위혜진 유 근 필 유기훈 유 선근 유 선미 유 승 윤 유연휘 유 은화 유일상 유 진석 유 진옥 유철원 유 하 진 유현미 유형식 유 혜원 윤 경회 윤 경희 윤도경 윤명숙 윤명훈 윤미경 윤 성준 윤 여현 윤 예림 윤 원정 윤재은 윤 정임 윤지영 윤지현 윤 택중 윤희 섭 이각 희 이거오 이경락 이경빈 이경순 이경우 이경은
7
이경이 이경진 이경화 이광세 이규 봉 이근모 이기순 이기정 이기철 이나 영 이대 화 이대훈 이덕규 이동권 이동열 이동현 이동환 이두희 이명숙1 이명숙2 이무송 이민찬 이범윤 이보람 이봉 규 이부영 이삼용 이상철 이상 현 이상호 이상 희 이새 롬 이석호 이선경 이선영 이선정 이설야 이성만 이성호 이세 규 이소현 이수 복 이수호 이숙 경 이승 렬 이승 민 이승 용 이승 화 이신혜 이연경 이연주 이연지 이연호 이영란 이영미 이영신 이영아 이영행 이영화 이용석 이웅규 이원 이유경 이윤미 이윤수 이윤정 이은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이은 수 이은 정 이재 성 이재욱 이재천 이정선 이정인 이정훈 이정희 이종 원 이종 직 이종 진 이종형 이주 옥 이주헌 이주형 이주화 이준 규 이준영 이준 용 이준표 이준형 이지수 이지영 이지은 이지호1 이지호2 이진복 이진애 이진용 이진이 이진하 이창훈1 이창훈2 이철수 이철우 이청원 이태수 이하 연 이해강 이향 숙 이현경 이현빈 이현아 이현 재 이형준 이혜린 이혜연 이혜영 이화 정 이희동 이희영 이희옥 이희욱 임미경 임미정 임방호 임소현 임우남 임인 자 임 재리 임 재 수 임지원 임지은 장기문 장 명호 장 미 라 장석 우 장성민 장성 봉 장성 봉 장수 희 장 예 진 장 오경 장 용 인 장 윤 장 재 병 장정 아 장 종 균 장 혜 옥 장호 장 회 경 전나 미 전대 근 전 문 갑 전 성 훈 전 세 환 전 수 진 전영석 전영신 전우 제 전유 미 전재민 전정현 전정호 전종 섭 전종 화 전지영 전혁구 정강자 정광섭 정교문 정귀순 정금 옥 정다 운 정동 식 정두영 정명호 정미경 정미영
Phiên tòa hòa bình của nhân dân
về tội ác thảm sát thường dân do quân đội Hàn Quốc
gây ra trong chiến tranh Việt Nam
People's Tribunal on War crimes by South Korean Troops during the Vietnam War
정민경 정병무 정설경 정성욱 정성원 정소영 정소현 정수 진 정승 섭 정승호 정연호 정영은 정영훈 정유 정 정윤 아 정은형 정인영 정재 숙 정재 훈 정종 덕 정종 은 정주열 정주 은 정지원 정하 경 정해 관 정호간 정희성 제 용 순 조건일 조경애 조경희 조난주 조미린 조백기 조병훈 조서연 조석현 조선웅 조성대 조성우 조수경1 조수경2 조수영 조수현 조여진 조영신 조영실 조 용 진 조인희 조일건 조 재 화 조정호 조 준연 조찬 연 조 한 일 주 성 호 주 시 우 지경필 진보 희 차 등 남 차 민 지 차 윤지 차재 원 채 은 천 사 빈 최경은 최경자 최경훈 최경희 최계영 최권옥 최권행 최권행 최금지 최남 현 최도욱 최동 성 최명지 최미옥 최민섭 최민식 최병일 최 상 아 최선화 최수영 최연희 최영 삼 최영애 최영옥 최영재 최우림 최유 석 최윤 경 최윤 수 최윤 진 최은 경 최은 래 최은 숙 최은지 최인경 최 재 호 최지연 최지은 최진수 최진회 최천환 최태성 최하 나 최해 성 최현석 최현선 최홍 규 칭따오앤청양 편경희 하 금 철 하 미선 하 영기 하 온 이네 하 원배 하 정호 하 주희 한 동호 한림화 한석주 한 승미 한 아 름 한 익승 한정우 한지연 한 필두 한 혜 선 한호선 함성옥 함 승 용 함정범 허강 일 허성재 허용 만 허유림 허은 진 허정원
2. 인사말
허진 허태강 허혜선 허혜정 현무암 현상권 현수연 현우석 현지현 홍 홍기웅 홍민경 홍 석경 홍 세화 홍 수 정 홍 운 식 홍 유 찬 홍 이 홍인식 홍 진규 홍 태권 황보인경 황용 은 황인수 황인휘 황재연 황정미 황정인 황진수 황혜정 mkkim Q-min YJ ^~^
강우일 ㅣ 시민평화법정 공동준비위원장 박영립 ㅣ 재단법인 화우공익재단 이사장 홍익표 ㅣ 국회시민정치포럼 공동대표 김복동 ㅣ 일본군성노예제 생존자, 인권운동가
8
2. 인사말 ㅣ
강우일 (시민평화법정 공동준비위원장)
진실의 법정을 엽니다. 50년 침묵과 망각의 세월이 부끄러워 시민이 함께 나섭니다.
박영립 (재단법인 화우공익재단 이사장)
대한민국 정부는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모두 32만5천여명의 한국군을 베트남에 파병하였습니다. 한국군의 첫 해외 파병으로 기록된 베트남전 참전은 이념, 안보, 경제 등의 명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실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 이 긴 제목은
목으로 추진되었습니다. 그러나 참전 한국군 가운데 5천여명이 전사하고 많은 수의 부상자와
우리가 인지하지 못했던 역사를 오늘로 불러내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침묵의 범죄를 저지르
고엽제 피해자가 발생하였으며 바로 이번 시민평화법정을 통하여 다루고자 하는 민간인학살
지 않기 위하여, 시민이 만든 법정에 대한민국을 피고로, 베트남 민간인 피해자를 원고로 세
문제까지, 베트남전 파병에 얽힌 그림자가 지금껏 길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워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려 합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베트남전 참전 한국군 주둔지였던 꽝남, 꽝응아이, 빈딘, 푸옌, 카인호아 등 5개 지역에서 80여건의 민간인 학살 사건이 벌어졌고 그 결과 9천여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
우리는 후손들에게 거짓과 꾸밈으로 연출된 역사가 아닌 진실된 역사를 밝히고 남겨야 합
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들 지역에는 전쟁 범죄를 기록하고 희생자를 추도하는 위령비, 한국군을
니다. 밝은 면은 밝은 대로, 어두운 면은 어두운 대로 드러내고 고백할 줄 알아야 후손들이
향한 증오비가 곳곳에 세워져 있습니다.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한 지 올해로 45년의 시간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야 후손들 또한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흘렀지만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하여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인 조사나 발표, 배상 등의 조치 는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제주 4.·3 70주기를 맞는 우리가 4·3의 비극 속에 감추어진 우리 자신의 일그러진 모습을 직
이번 시민평화법정은 보편적 인권과 평화, 연대의 기치 아래 시민사회가 중심이 되어 진실,
시함으로써 증오와 대결에서 화해와 상생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처럼, 과거 베트남에서 벌인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하며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이끌어내려는 시도
전쟁의 참상에 대해 이제라도 피해자들이 토로하는 뼈아픈 기억을 통하여 진실에 다가가면 좋
입니다. 뒤늦게라도 외면의 장막을 걷어내고 실타래를 풀고자 하는 뜻 깊은 자리입니다. 시민평
겠습니다. 시민평화법정을 통해 수많은 베트남 민간인의 희생을 부른 역사의 비극을 기억하고,
화법정을 준비하고 후원하며, 나아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모든 개인과 단체는 법정을
우리로 인하여 짓밟힌 인간 생명의 존엄과 숭고함과 평화의 의미를 찾아 나서길 바랍니다.
통하여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위한 어떤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직시(直視), 곧 사실을 바로 볼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많은 시민들이 뜻을 모아 주셨지만 법정을 준비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과정
이번 시민평화법정은 그러한 용기와 지혜가 모여 만들어졌으며, 이는 한국과 베트남이 진정한
속에서도 헌신적으로 법정을 준비해 주신 모든 분들과 준비위원으로 참여하신 여러 개인, 단
평화의 길로 가는 초석이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이는 시민사회단체가 중심이 된 국제 연대활
체에 고마움을 전합니다. 깊은 관심으로 함께 해 주신 많은 시민 여러분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동의 일환으로 피해자들의 아픔과 고통에 공감대를 넓혀 나감으로써 피해자들에게 치유의 계
이 땅에도, 베트남에도 평화를 빕니다.
기가 되고, 나아가 사회적 합의와 입법청원 활동으로 이어지는 큰 걸음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진실규명과 정의실현, 평화의 길을 위하여 시민평화법정의 문을 여는 모든 분들의 용기와 헌 신에 박수를 보냅니다. 승리는 언젠가 진실과 정의의 편에 설 것입니다.
10
11
2. 인사말 ㅣ
홍익표 (국회시민정치포럼 공동대표)
안녕하십니까? 국회시민정치포럼 공동대표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의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열리는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을 찾아주신 내·외빈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김복동 (일본군성노예제 생존자, 인권운동가)
저는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김복동입니다. 저는 약 27년 전이었던 1992년 봄, 고통스러웠 지만 제가 일본군의 전쟁터로 끌려다니며 겪었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나의 이름으로, 나의 목 소리로 일본군‘위안부’로서 겪었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는 것에 대해서 반대를 했던 가족도 있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문제는 그 동안 ‘베트남 정부가 원하지 않는다’
었지만 일본정부가 범죄를 부정하는 것을 뉴스를 통해 접하면서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며, 피해자들에게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는 여론이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한국군에 의한 베트
세상 사람이 다 알게 되면 내가 고개를 들고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되고 두렵기도 했습
남 민간인 학살은 피해자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현재까지 추산된 피해인
니다. 하지만 용기를 내서 “내가 피해자다!”라고 소리를 내게 되었습니다.
원만 약 9,000여명에 달합니다.
그 때 저는 부산 다대포에서 식당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고를 하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피해자의 국가에서 원치 않는다고 해서 제대로 된 진상규명과 사죄를 하지 않는다
서울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사무실에서 간사를 하고 있던 윤미향 씨가 집으로 찾아왔
면, 전쟁범죄를 인정하지 않고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는 일본의 태도와 다를 것이 없습
습니다. 서울에서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설명도 해주고, 다른 할머니들 사정도 알려주었습니
니다.
다. 일본정부의 반응에 대해서도 알려 주었습니다. 일본정부가 범죄사실을 부정한다는 소리를
지난 3월 문재인 대통령은 베트남 방문 당시 ‘마음에 남아있는 불행한 역사에 유감’을 표했 습니다. 더 늦기 전에 이 문제에 대하여 제대로 된 진상규명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는 한국 사회가 마땅히 져야할 책임을 다하기 위해 오랜 기간 시민평화법정을 준비해왔습니다. 준비위와 수많은 전문가들이 이 법정을 위해 애써주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듣고 저는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일본대사관 앞과 청와대 앞에서 데모를 한다는 소식 을 들으면 부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까지 갔습니다. 집회가 끝나면 서울에서 하룻밤 묵고 그 다음날 집에 내려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싸우느라 자연스레 식당 문은 닫게 되었습니다. 이왕 시작한 거, 멈출 수는 없었지요. 93년도에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세계인권대회가 개 최된다고 해서 갔습니다. 세계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제가 겪은 그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무엇보다도, 피해자 분들께서는 그 간 한국 정부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조차 받지 못한 채 살
다 쏟아냈습니다. 사는 곳이 다른데도 제 이야기에 공감하며 눈물 훌쩍거리는 소리도 났고, 한
아오셨음에도 한국 사회가 내미는 손을 기꺼이 잡아주셨고, 먼 길을 와주셨습니다. 깊이 감사
숨소리도 났습니다. 수많은 눈동자가 저를 지켜보고 이야기를 들어주니 힘이 났습니다. 그렇게
드립니다. 아울러 고통의 세월을 살아오신 피해자들께 대한민국 국회의원의 한 사람으로서 진
시작하여 일본으로, 유엔으로, 미국으로, 유럽으로 지난 27년 동안 저는 참 많은 나라들을 찾
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아 다녔습니다.
시민평화법정은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과 사죄를 위한 첫걸음
그러나 여전히 일본정부는 아직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고, 진정한 사죄도, 배상
입니다. 법정에서 나오는 모든 증언과 증거를 깊이 새기겠습니다. 한국 국회와 정부가 우리로 인
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후세대들에게 올바른 역사교육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해 상처받고, 고통 받으신 피해자들께 마음의 평화를 드릴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
향해 강제가 아니었다, 증거가 없다고 하며 역사의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세계 각
니다.
지의 시민들이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자들의 역사를 기억하고, 평화를 기리기 위해 세우는 평화
시민평화법정의 정의로운 판결을 기대하겠습니다.
비, 기림비 등을 철거하라고 압박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일본정부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베트남에서 우리나라 군인들에게 인권침해를 당한 피 해자들, 죽임을 당한 분들과 그 가족들의 아픔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저처럼 성폭력 피해를
12
13
입고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온 여성들이 얼마나 참담했을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생각하 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대협과 함께 나비기금을 만들어서 지원을 시작했습니다. 나도 아팠지 만, 내 아픔이 깊은 만큼 베트남 피해자 분들의 아픔이 하루속히 회복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하 루 빨리 한국정부가 잘못을 인정하고, 베트남 피해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사죄하길 바라고 있습 니다. 저도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이지만, 한국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베트남 사람들에게 제 사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죄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한국군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정말 사죄드립니다. 이번에 서울에서 개최되는 베트남시민평화법정이 한국정부와 한국사회가 베트남 피해자들 에게 제대로 된 사죄를 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시는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 도록 하는 소중한 교훈으로 새기고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위해 저도 제 작은 힘이지만 함께 하겠습니다. 이 일을 위해 노력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리고, 베트남에서 먼 길 오시는 피해 자들과 관계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Phiên tòa hòa bình của nhân dân
về tội ác thảm sát thường dân do quân đội Hàn Quốc
gây ra trong chiến tranh Việt Nam
People's Tribunal on War crimes by South Korean Troops during the Vietnam War
3. 국제학술대회
14
3. 국제학술대회 ㅣ
국제학술대회 순서
10:00~10:30
개회사 및 기조발제
국제학술대회 자료 목차
1. 노근리의 기억에서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생각하다 _하민홍
발표 ㅣ 하민홍 (호치민시 인문사회과학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2. <베트남 전쟁>의 동시대성: 베트남 새로운 세대의 전쟁기억 _심주형 10:30~12:30 제1부 베트남전쟁의 동시대성 - 새로운 세대의 전쟁 기억 발표 ㅣ 심주형 (서강대 동아시아연구소 HK연구교수)
3. 가해 경험을 말한다는 것: 일본 중국귀환자연락회의 사례 _후지이 다케시
사회 ㅣ 이지은 4. 법정에서 하지 못한 이야기1 - 왜 법정에서도, 법정 밖에서도 이야기해야 하는가 _이경빈 12:30~14:00
점심시간 5. 법정에서 하지 못한 이야기2 _장한길
14:00~15:45 제2부 가해경험을 말한다는 것 - 일본의 경우 발표 ㅣ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6. 우리가 만난 참전군인 - 참전군인 A와 ‘함께 말한다’는 것 _심아정
사회 ㅣ 장원아 7. 어떤 ‘참전군인’ 상을 만들어나갈 것인가 _장원아 15:45~16:00
휴식
16:00~18:00 제3부 우리가 만난 참전군인 - 법정에선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 발표 ㅣ 시민평화법정 준비위 조사팀 사회 ㅣ 배상미 종합토론
16
17
3. 국제학술대회 ㅣ 노근리의 기억에서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생각하다
노근리의 기억에서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생각하다
아버지가 노근리학살의 진상을 세상에 알렸으며, 자신 또한 그 뒤를 이어 노근리의 진실을 규 명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문득 베트남으로 건너와 베트남전 쟁의 진실을 연구하며 평화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구수정이 떠올랐다. 한국 뿐만 아니라 전쟁을 겪은 세계 여러 나라의 지식인들은 모두 실질적인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진실 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는 공통된 소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민홍 (호치민시 인문사회과학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1994~1995년 학기 때의 일이다. 한 주가 시작되던 어느 날, 사학과 학과장인 호시코악 교수 가 나를 불렀다. “이쪽은 구수정이에요. 한국에서 왔는데, 베트남 역사학을 전공하며 베트남전 쟁을 주제로 석사논문을 쓰고 싶다네요.” 한국인 학생을 제자로 두게 된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 다. 통성명을 하는 자리에서 내가 나이를 묻자 구수정은 아직 유창하지 않은 베트남어로 대답
그해 2014년, 나는 처음으로 한국땅을 밟았다. 외국에서 열리는 학술대회에 참가한 것도 처음
했다. “1966년생입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내 입에서 불쑥 다음과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그해
이었다. 내가 찾은 곳은 노근리 마을에 있는 평화공원이었다. 나의 눈에 들어온 노근리의 첫인
에 우리 남베트남에 4만5천 명의 한국군이 있었지!” 구수정은 내 말을 분명히 알아들었는지 정
상은 국화과에 속하는 코스모스가 내뿜는 보라, 분홍, 노랑, 하양의 빛깔들이었다. 베트남에도
확히 베트남 스타일로 짧게 답했다. “네.”
이 꽃이 많지만 코스모스가 그렇게 무리지어 아름답게 피어난다는 것은 한국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아마도 그때 코스모스의 알록달록한 빛깔과 소박하면서도 아름답고 평범하지만 특별 한 그 꽃잎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던 것 같다.
베트남 역사학과 대학원에 합격해 수학한 지 1년쯤 되었을 때, 구수정이 ‘한국군의 베트남전 개입 연구’라는 주제로 논문을 쓰겠다고 제안했다. 나는 고민스러웠다. 당시 베트남에서는 그 주제와 관련한 자료들이 아직 “열려” 있지 않은 상태였고, 베트남전쟁 당시 미국의 동맹국 군대
노근리평화공원은 한국전쟁(1950~1953) 초기인 1950년 7월 말, 노근리학살이 발생했던 바로
에 대한 연구는 사학계의 관심 밖이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군에 관한 연구 역시 거의 찾아보기
그 지역에 건립되었다. 베트남전쟁 중에도 학살은 많이 발생했다. 예를 들어, 꽝응아이성에서
어려웠으니 말이다. 무엇보다도 베트남전쟁이 끝난 1975년 이후 국교가 단절된 지 17년 만에 베
발생한 선미학살 1)의 경우, 미군 11여단에 속한 찰리중대 소속의 병사들이 1968년 3월 16일 단
트남과 한국이 막 수교를 한 직후라서 이 주제가 양국관계에 미칠 영향에 대해 민감하게 받아
하루 동안 182명의 여성과 173명의 어린아이, 그리고 60명의 노인을 포함하여 모두504명의 주
들여지던 시기였다. 하지만 구수정은 뜻을 굽히지 않고 진심을 다해 말했다. “한국의 우리 세대
민을 학살했다. 두 경우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이제 노근리와 선미가 모두 전쟁의 증거
는 바오닌 작가의 『전쟁의슬픔』과 쩐딘번 작가의 『불멸의 불꽃으로 살아』를 즐겨 읽었고, 전후
가 된 것만은 확실하다. 선미에는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역사유적지가, 노근리에는 평화공원이
베트남 사회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는 베트남전쟁의 진실이 무엇이었는지 너
들어섰다.
무 알고 싶습니다. 특히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어떤 일들을 했는지를요.” 나는 전쟁의 진실을, 베
내가 참석했던 제8차 INMP(국제평화박물관네트워크) 국제컨퍼런스 ‘전쟁의 방지와 기억, 역사적
트남에 있었던 한국군의 진실을, 전쟁 이후 한국군의 주둔지였던 베트남 중부 곳곳에 남겨진 진실을 알고 싶다는 구수정에게 설득당하고 말았다.
진실, 화해의 증진을 위한 평화박물관의 역할’에서 노근리평화재단의 정구도 이사장은 “자신의
이 대목에서 다음의 사실을 언급해야 할 것 같다. 한국은 한국과 베트남의 전쟁이 아닌 미국 의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것이다. 1) 역자 주: 베트남전 당시 대표적인 미군의 민간인 학살. 세계적으로는 ‘밀라이학살’로 널리 알려졌지만 베트남에 서는 ‘선미학살’로 부르고 있다.
18
19
3. 국제학술대회 ㅣ 노근리의 기억에서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생각하다
① 1954년부터 1975년까지 베트남에서 있었던 전쟁은 미국이 자신의 세계지배 전략을 실현 하기 위해 베트남에서 벌인 침략전쟁이었다.
(미국은 베트남 남부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식민주의와
침략전쟁을 실시했고, 북부에서는 공군과 해군을 이용한 파괴전쟁을 일으켰다.)
은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피의 학살이 최소 43차례 이상 발생했는데, 그중 100명 이상이 사망한 학살
은 13건에 달한다.)
③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약 5,000명의 한국군이 목숨을 잃었고, 11,000명이 부상을 당했 ② 미국은 자유 우방25개국에 참전요청을 했지만 그중에서 한국, 필리핀, 태국, 호주, 뉴질랜 드 등 5개 국가만이 군대를 투입하는 방식으로 직접 전쟁에 참여했고, 나머지 국가들은
으며, 100,000명이 고엽제 후유증을 앓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도 수많은 한국 참 전군인들이 정신적 고통과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베트남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에 지지를 보내며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1954년부터 1975년까지 베트남에서 벌어진 전쟁을 되돌아보면, 과거야말로 우리에게 깊은 한국은 특정한 정치적, 경제적 목적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교훈을 줄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미국의 세계전략의 야망에서 비롯된 피할 수 없는 전 쟁이었다.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은 한국과 베트남 양측 모두에게 커다란 손실을 남긴 과오였다.
① 경제적 목적: 원조, 발전자금 차관, 남베트남에서의 투자 계약, 남베트남으로의 물자 및 인력 송출 등의 방법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국가 건설과 발전을 위한 원조와 지원을 받기 위해 참전했다.
한국에 머물던 며칠 동안 서울에서도 임진각에서도 늘 하늘 위에서 우르릉거리는 비행기 소 리를 들어야 했다. 제트기 소리를 들으니 베트남 북부에서 미국이 파괴전쟁을 일으켰던 당시의 기억이 떠올랐다. 1965년에서 1968년까지, 그리고 1972년에, 베트남 남부에 지상군을 파견해 전
② 정치적 목적: 미국의 동맹국이자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의 동맹국이었던 한국은 미국의 반공전쟁에 이바지함과 동시에 한국군의 현대화, 주한미군의 지속적인 유지, 한미동맹 관
쟁을 수행하던 미국은 B52를 포함한 각종 전투기를 동원해 폭탄을 투하하여 역사, 철도, 다리
와 도로, 가옥, 학교, 병원 할 것 없이 베트남 북부를 초토화시켰다. 우리 가족을 비롯한 많은 민
계의 공고화, 박정희 정권의 대내 위기상황 탈피를 위한 돌파구 등의 목적을 가지고 참전
간인들은 폭탄과 총탄을 피하기 위해 도시를 떠나 깊은 산속으로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
했다.
다. 비록 나라는 분단되었지만 베트남 남과 북의 인민들은 한민족이었다. 우리와 같은 청년들은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 자원입대하여 조국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했다.
한국은 3개 사단 규모의 전투부대를 파병하는 방식으로 미국의 편에 가담해 전쟁에 참여하 여 베트남 인민들에게 수많은 죄악을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씻지 못할 상처와 후유증을 남겼다.
열일곱 살이 되던 해에 나는 항미구국전쟁에 참가했다. 그것은 베트남과 미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매우 격렬하게 계속되었다. 당시 내게 참전은 자부심이자 명
①한 국은 보병사단 ‘맹호’와 ‘백마’부대, 해병여단 ‘청룡부대’ 등 각종 전투부대를 남베트남
예, 그리고 외세에 침략당한 조국에 대한 책임감으로 다가왔다. 나는 1972년부터 서부고원 전선
에 파견했다. 1966년 말에는 45,660명, 1968년에 이르면 50,003명의 한국군이 남베트남
에서 싸웠고, 1975년 4월 30일 전쟁이 끝나는 순간 사이공에 있었다. 그 직후, 나는 군복을 벗고
에 주둔하게 된다. 한국군은 꽝남성, 꽝응아이성, 빈딘성, 푸옌성, 칸호아성 등 주로 베트
호찌민종합대학에서 베트남 전쟁사와 평화에 대해 연구와 강의를 병행하게 되었다.
남 중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미국의 지휘 아래, 한국군은 주로 군사활동을 담당 하는 한편으로 민사-심리전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조국의 평화를 되찾기 위한 투쟁에 참여했던 참전군인으로서, 나는 어린 시민들인 우리 학 생들에게 ‘우리가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전쟁의 역사는 우리 민족의 평화를 되찾고 지키기
② 1 965년 10월부터 1973년 1월까지 한국군은 1,170회에 걸친 대대급 이상의 대규모 작전과
위한 투쟁의 역사, 즉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한 전쟁’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
556,000회 이상의 소규모 부대 단위의 작전을 실시했다.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은 수많
20
21
3. 국제학술대회 ㅣ <베트남 전쟁>의 동시대성: 베트남 새로운 세대의 전쟁기억
1975년 이후 베트남에 찾아온 평화로 분단의 아픔은 빠르게 아물어 갔고, 국토는 다시 하나
<베트남 전쟁>의 동시대성: 베트남 새로운 세대의 전쟁기억1)
로 연결되어 북과 남도 하나로 통일되었다. 어디를 가든 푸른 산과 들판이 펼쳐지고 파릇파릇 한 나무들이 자라났다. 다만 과거 북위 17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남북이 갈라졌던 분단의 상징 적인 장소인 히엔르엉 다리만이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남쪽 강변에 서 있는 나 심주형 (서강대 동아연구소 HK연구교수)
뭇잎 모양의 통일열망탑에는 호치민 주석의 가르침인 “베트남 국가도 하나, 베트남 민족도 하 나”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언젠가는 우리 베트남처럼 하나의 산과 강이 되어 이어질 임진각 에 남북 대치의 상징인 대형 아웅산 순국 위령탑이, 이편과 저편의 어디서든 그 모습이 보일 만 큼 위무당당하게 서 있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구수정이 석사논문을 쓸 때는 내가 부지도교수를, 2002년 박사과정에 입학해 ‘베트남 전쟁
글을 시작하며
을 전후로 한 한베관계사’를 주제로 논문을 쓸 때는 정지도교수를 맡게 되었다. 그는 논문을 준 비하는 과정에서 “뜻한 바대로” 베트남 전쟁의 진실, 그리고 베트남에 있었던 한국군의 진실과
이글은 베트남 전쟁 종전 43년을 맞는 오늘날 베트남 사회의 관점에서, 전쟁의 ‘동시대성’에 관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는 용기 있게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를 논문에서 다뤘을 뿐만 아니라
한 문제를 이른바 ‘전후세대’로 지칭되는 새로운 세대의 전쟁에 관한 기억경관 (memoryscape)에
기사로 써서 한국과 베트남 사회에 알렸다. 구수정은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베트남에서도 이 주
대한 분석을 통해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베트남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에서 장기
제로 논문을 쓰고 이 문제를 공론화시킨 최초의 연구자이다. 그는 또한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간 동안 벌어진 두번째 대규모 국제전이자 전장의 상황이 기록되고 동시적으로 외부세계로 “중
지금까지도 이 진실을 규명하고 해결해 나가기 위한 실천적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계된” 본격적인 미디어 전쟁이자 “최초로 텔레비젼으로 방영된 전쟁(the first televised war)”이 었다. 이러한 전쟁의 특성은 직접 참전하거나 전쟁상황에서 생존해야 했던 베트남인들, 즉 현지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역사의 어둠 속에 암장된 진실을 드러내려 노력해 온 한국의, 아니 세
인의 관점과는 별개로 외부세계에 알려진 정보 혹은 타자화된-특히 서구화된-관점을 중심으
계의 수많은 구수정들이 결국 평화를 열어온 것이었다. 이제 더 이상 감출 수 없을 때, 얼굴을
로 전쟁을 이해하고 사고하며 때론 소비할 수 있는 지평을 열었다. 전쟁에 관한 담론과 서사 그
드러낸 역사의 진실들은 비로소 오늘의 화해와 평화, 우호의 구심점이 된다. 오늘 이 자리가 그
리고 이미지들의 전세계적 범람과는 또 다른 측면에서, “냉전체제”가 만들어 낸 이데올로기적
변화가 시작되는 역사적인 현장이 되길 빌며 한국의 수많은 구수정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
양극화는 베트남과 외부세계간의 상호적 이해 가능성을 오랫동안 제한하였고, 그에 따라 전쟁
한다.
에 직접 관여하거나 사후적으로 연루되는 관계들과 개개인의 ‘위치’에 기반한 ‘앎’과 ‘해석’의 조 건에 따라 기억경관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날 베트남 사회에서 전쟁의 동시대성 이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지난 반세기 동안 전쟁에 대해 서로 “다른 이 해”를 해왔던 경험의 차이가 만들어낸 결들을 추적해 보는 것이자, 진정한 의미에서 “탈-냉전” 적 소통과 상호이해 가능성을 모색해 보는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의 “종전(終戰)”은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의 대통령궁에 “390 탱크”가 정문을
1) 이 발표문은 미완성된 상태입니다. 학술대회 발표에서 추가/보완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내용 혹은 인용 등과 관련한 문의 혹은 코멘트가 있으면 jhshim@sogang.ac.kr 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22
23
3. 국제학술대회 ㅣ <베트남 전쟁>의 동시대성: 베트남 새로운 세대의 전쟁기억
부수고 진입해 공식 항복을 받은 사건으로 상징화 된다. 종전은 “남부해방”의 의미도 가지고 있
전쟁을 바라보는 동시대적 관점들
었는데 그러한 정치적 목표에 동의하지 않는 남베트남 정권과 미국을 따르던 약 20여만명 이상 이 재교육 캠프(trại học tập cái tạo)에 보내졌고, 약 80여만명의 사람들은 보트를 타고 베트남을 떠났다. “승전”은 곧 다른 한편의 “패전”을 의미했고, “냉전상황”은 그러한 이분법적 종전 서사 를 제외하고 다른 종전의 서사를 꿈꾸기 어렵게 했다. 1978년 캄보디아와의 전쟁, 1979년 중국 과의 잇따른 전쟁은 전세계 사회주의 동맹체제의 해체를 의미했고, 전후 복구 작업의 더딘 진 행과 사회주의 경제정책의 잇따른 실패는 “전쟁시기 보다 열악한” 빈곤과 혼란상황으로 사람 들을 내몰았다. 결국 당-국가는 1986년 이른바 “도이머이(Đổi Mới)”정책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 장경제의 재도입과 대외 개방정책에 나서게 되었다.
“전승(Chiến thắng)”과 “남부해방”과 “통일” 40주년을 맞이하여, 베트남 공산당 총비서 응우옌
푸 쫑(Nguyễn Phú Trọng)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하는 기념사를 발표했다.
“1975년 봄의 총진공과 봉기는 인민과 군대의 위대한 항미구국전쟁(Chiến tranh chống Mỹ
cứu nước)을
완전한 승리로 끝 마치고, 민족의 역사에 전환점(bước ngoặt)을 만들었으며, 독립
과 통일 그리고 전국이 사회주의로 발돋움하는(đi lên) 새로운 시대를 열어냈습니다.”2)
푸쫑의 기념사는 오늘날 베트남 당-국가의 전쟁에 관한 공식서사를 잘 보여준다. “완전한 승 리”이며, 역사의 “전환점”이자 “새로운 시대”의 시작점으로 전쟁을 규정하는 것은, 전쟁을 이끌
“도이머이” 정책 추진에 있어서, 특히 대외 개방정책-문자 그대로 “문을 여는 정책(chính sách
었던 당의 지도성을 재확인하고 전쟁의 사건사적 종료를 선언하는 것임과 동시에 “새로운 정치
승전국으로서 적대적 관계의 국가들에 책임을 묻지 않고, “과거를 닫고 미래로 나
적 시간”을 설정하려는 시도이다. ‘승전’, ‘민족사의 전환점’ 그리고 ‘새로운 시대’는 전쟁경험과
아가자”라는 기치 아래 추진되었다. 총구를 마주했던 과거의 적국들과 과거사 정리과정을 생략
기억의 ‘상호참조성’을 통해 정치적 의미를 생성하는 기표들이다. 따라서 “그 전쟁이 어떤 전쟁
한 채 급속히 추진된 외교관계정상화는 세계 사회주의진영의 붕괴라는 국제질서 변화에 대응
이었는가?”라는 물음은 역설적이지만 동시대적 삶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데 불가피하게 되돌아
하는 것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기존의 “승리적 서사”를 제외한 전쟁의 기억들과 “닫아 둘 수 없
오는 질문이 된다.
mơ cửa)”-은
는” 고통들을 주변화 혹은 개인화하고 공론의 장에서 배제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오늘날 베
“베트남 전쟁” 이라는 명칭은 앞서 인용한 푸쫑의 기념사에서도 드러나듯, 베트남에서는 “항
트남사회의 전후세대들로부터 흔히 듣게 되는, 전쟁은 “부모세대의 이야기”라든가 “전쟁 이야
미구국전쟁”, “미국과 괴뢰에 맞선 전쟁” 혹은 “남부해방 (통일)전쟁”등으로 불린다. 김동춘(2000)
기만큼 지루한 이야기가 없다”라는 반응들은, 전후 베트남사회의 이러한 급격한 변화과정과
은 전쟁의 명명법이 전쟁의 성격과 의미를 규정하려는 정치적인 의도와 관련되어 있고, 특정한
당-국가가 관리 통제해 온 전쟁서사의 단성성(單聲性)에 관한 비판적 접근을 통해 이해할 필요
명명법-예를 들어 “6.25 전쟁”과 같은-은 전쟁의 책임을 특정화하고, 대중의 기억을 통제하는
가 있다.
기제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베트남 전쟁”이라는 명칭 또한 유
이 글에서는 먼저, 베트남전쟁을 바라보는 베트남 사회의 관점을 다른 외부자적 관점들과 비 교를 통해 이해해 보고자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세계사적 사건으로서 “베트남 전쟁”과 민족사
사한 문제로 인해 최근까지도 혼란과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전쟁을 어떻게 호명할 것인가하는 문제는 동시대적 기억의 발화에서 일차적인 문제와 시각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적 사건으로서 “항미구국전쟁”의 동시대적 위상차(位相差)와 담론적 지형을 가늠해 볼 수 있을
베트남 사회의 관점에서 보자면, “베트남 전쟁”이라는 명칭은 서구적이며 지극히 외부자적
것이다. 다음으로 오늘날 “전쟁의 유산”으로 남아 전후세대 삶의 일상성을 구성하고 있는 문제
인 관점을 반영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아메리카”에서 벌어진 미국과 영국 사이의 전쟁을 “독
들에 관해 논하고자 한다. “정처”로 돌아오지 못 한 죽음들, 삶과 환경에 새겨진 상흔들 그리고
립전쟁” 혹은 “혁명전쟁”이라고 명명하는 미국이 베트남에서 자신들이 주도한 전쟁을 “베트남
여전히 삶을 위협하는 죽음과 죽임의 흔적이 드리운 그늘들을 살펴보며, 출몰하는 기억으로써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도의적으로 또한 논리적으로도 옳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이라
전쟁경험의 동시대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전후세대의 전쟁기억경관이 처한
는 명명법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국제연합체제 하에서 연합군의 참전이 이루어
문제를 기억의 재현과 서사들이 처한 동시대적 상황들을 통해 논해보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이 글은 베트남전쟁의 동시대성은 민족-국가적 전망과 변화하는 세계질서에 대한 지배적 대응 담론이 베트남 전쟁의 기억을 참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재구성된다는 것을 밝히고 그 과 제들을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24
2) “1975년 4월 30일 전승에 관한 총비서의 글 전문” (2015. 4. 24.) http://baodatviet.vn/chinh-tri-xa-hoi/tin-tuc-thoi-su/toan-van-bai-viet-cua-tong-bi-thu-ve-chienthang-3041975-3265152/
25
3. 국제학술대회 ㅣ <베트남 전쟁>의 동시대성: 베트남 새로운 세대의 전쟁기억
진 국제전이라는 점을 참작할 수도 있겠으나, 미국이 자신의 동맹국을 용병으로 참전시키며 주
트남전쟁 (Chiến tranh Việt Nam)”이라는 명칭을 받아들이자는 제안이 등장하고 있다.4) “냉전시
도한 베트남에서의 전쟁과는 그 의미와 인식론적 측면에서의 차이가 크다. 설령 탈냉전 이후
대”에 발생한 수많은 사건과 전쟁의 여러 명칭들이 이데올로기적인 가치 혹은 정치적 당파성의
의 세계 질서 하에서 “베트남 전쟁”이라는 명칭의 일반성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호치민과 사회
관점을 근본화하며 여전히 경합 중인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양극적 정치와 상징적 정복의 정
주의 세력이 주도한 “1945년 8월 혁명”의 성공직후인 1946년에 발발하여 1954년 “제네바 협정”
치를 초월하는 방법”(권헌익 2012:294)으로써 일면 설득력이 있는 주장으로 보인다. 그러나 “베트
을 통해 ‘종전’하게 된 베트남과 프랑스-미국이 원조를 제공했던-간의 전쟁도 ‘베트남 전쟁’으로
남전쟁”이라는 동일한 명칭을 사용해 온 미국과 한국 등 참전국들과 베트남인들 사이에는, 전
부를 것인가하는 문제도 있다. 무엇보다 베트남 당-국가의 입장에서는, “미제국주의 Mỹ)”와
“괴뢰(ngụy)” 그리고 “주구(走狗, tay sai)”들의
3)
(đế quốc
쟁의 의미 그리고 경험의 시간성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전쟁책임을 회피하고, 특정지역에서 발
무엇보다 베트남인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베트남 전쟁은 시기적으로는 미국이 인도차이나
생했던 단순 사건으로 받아들이게 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베트남 전쟁”이라는 명칭에 배태되
문제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는 1954년 제네바 협정 체결 직후 고착화된 분단 상황부터
어 있다고 바라본다. 즉, ‘베트남’이라는 지명과 사건으로써의 ‘전쟁’을 단순 조합하여 명명을 할
미국의 지원을 받던 남베트남 정권이 붕괴한 1975년 4월 30일까지 지속된 전쟁을 의미한다. 반
때, 전쟁의 원인과 책임 및 주체들을 망각시키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면, 미국인들의 관점에서는 대체로 1964년 이른바 “통킹만
한편, 이러한 “내부자적” 시각에는 또다른 입장들도 존재한다. 먼저 대표적인 것으로 “베트 남 공화국
(남베트남)”의
관점이다. 남베트남 정권을 추종하거나 그 이데올로기적 자장(磁場)내에
서 전쟁을 치르고 경험했던 이들-특히 해외교포(Việt Kiều)들-에게, 전쟁은 “공산세력의 침략” 에 맞서, “자유를 수호”하고자 했던 “내전”이다. 해마다 4월 30일이면 한쪽에서는 “위대한 승 전”을 기념하는 반면, 베트남 해외교민 사회에서 “국가의 한 (Quốc hận)의 날”을 기억하는 시위
가 벌어지는 상황들(심주형 2017 참조)은 베트남인들의 상이한 역사적 관점의 차이에 바탕을 두
(the Gulf of Tonkin; Vịnh Bắc Bộ)
사
건” 이후 전투병이 파병된 시점부터 전투병이 철수한 1973년 까지를 “전쟁기간”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으며, 참전국인 한국의 경우에도 비슷한 시기인 “참전 기간”만을 중심으로 베트남 전 쟁을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외국군대”로서 지닌 “타자성”은 전쟁을 이해하고 반추하는 특정 한 조건하에서 “상황성(situationality)”과 “사건성(eventuality)”을 중심으로 전쟁을 파악하고 인 식하려는 경향을 낳는 반면, 베트남인들의 경우에는 전쟁의 당사자이자 주체로서의 사회적 삶 의 불안정성과 일상적 폭력에 노출되는 경험이 지속되었던 과정, 다시 말해 삶과 죽음이 겹쳐진
고 있기도 하다. 다음으로 민족주의적 시각에 기반하여, 한국전쟁이후 아시아에서 강화된 “체
불가항력적 시공간에 놓인 주체의 단절과 소멸, 파괴와 뿌리뽑힘의 직접적 경험으로 직조(織造)
제 경쟁”의 대리전으로 전쟁을 바라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러한 입장은 탈-냉전시대에 들어
된 맥락하에서 전쟁을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서면서, 중국, 구-소련 그리고 북한 등 베트남의 사회주의 동맹국들이 직접 참전했다는 사실이
오늘날 상대적으로 “평평해진(flatten)” 동시대적 기억의 경관 내에서 “베트남 전쟁”을 통해
드러나며 제국주의와 외세에 맞선 민족주의 전쟁이라는 논리에 균열이 생기고, 베트남 공산당
재호명(re-interpellate)하는 것이 적의의 재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승전”과 “패전”의 상징성이
내부에서도 전쟁 확전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설득력을 더하게 되었다. 냉전
아닌 것은 분명하다. “패전의 한”을 여전히 상기하고 있는 듯해 보이는 이들 조차도 민주주의와
시대 아시아에서 벌어진 체제와 이데올로기 경쟁의 희생양으로서 베트남인들을 상정하는 이러
인권 등 “새로운 시대의 가치”가 지닌 중요성을 통해 베트남 전쟁의 의미를 호명하고 있기 때문
한 관점은 “베트남 전쟁”이라는 명명에 보다 친화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다. 오히려 베트남 전쟁의 명명을 둘러싼 차이는 “부름(hailing)”의 문제라기 보다는 탈냉전시
전후 수십 년이 지난 상황에서도 전쟁에 대한 명명법을 두고 진행되는 논쟁과 반목은 여전
대 하에서 전쟁에 연루된 주체들을 “호명하기(interpellation)” (Althusser 2001)와 관련되는 것이
히 진행형이다. 이러한 반복적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최근 들어 국내외 베트남인들 사이
며, 주체들의 상호적 관계를 재구성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문제이다. 베트남 사회 내에서 당-국
에서는 이제는 전지구적 “탈냉전” 시대정신에 입각해 “비정치적”인 역사기술의 전략으로써 “베
가에 의해 반복되는 “승전”의 서사가 민족과 탈냉전시대의 동반자들(đối tác)을 호명하기 위해 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3) 주 구 (tay sai; 따이 사이)라는 베트남어 표현은 한국군에 의해 자행된 학살의 기록이 담긴 “증오비”에도 “남조 선군대”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새겨져있다.
26
4) 레 수언 코아(Lê Xuân Khoa)의 “삼십년간 전쟁을 무엇이라 불렀는가?” 라는 글 참조. (BBC Vietnamese, 2015년 2월 15일)
27
3. 국제학술대회 ㅣ <베트남 전쟁>의 동시대성: 베트남 새로운 세대의 전쟁기억
전쟁의 유산(遺産)– 정처없는 출몰의 기억
정처를 잃은 수많은 죽음들, “열사”가 되지 못한 죽음에 관한 기억들은 오늘날 급속한 근대 화 과정에 놓여 있는 베트남 사회에서 “유령 이야기”의 서사로 전화되어 유통되고 있다. 치열한
전쟁은 그것이 ‘전환점’이 되거나 ‘새로운 시대’를 열기 이전에, 수많은 죽음과 잊어버릴 수 없
전투가 벌어졌거나 죽음이 뒤덮었던 거리에는 주인 없는 제단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정처를 잃
는 상실 그리고 복구 불가능한 파괴의 깊은 골을 살아 남은자들의 세상에 긴다. 제2차 세계대
은 죽음-유령-이 출몰한 곳으로 알려진 곳에는 누가 피워 놓았는지도 모를 향불이 타오르고
전 기간 동안 사용된 폭탄보다 4배가 많은 폭탄이 베트남 전쟁기간 동안 사용되었고, 전국토의
있다. 당-국가가 주도하는 매년 7월 27일 “열사와 부상병의 날”에 진행되는 공식 추념행사에서
18.7%에 해당하는 지역에 지뢰가 매설되었다. 인명피해의 경우 베트남 정부 추산 2백여만명의
자리를 찾지 못한 죽음들은, 불교의 영향을 받은 민간전승 의례인 음력 7월 15일 “죽은자의 죄
민간인들 그리고 북과 남을 합쳐 130만명이상의 군인들이 사망했다. 또한 2백만명 이상의 민간
를 사하는 날”에 집 밖과 거리에 제사상을 마련하고 향불을 태우며 비공식적으로 추념되기도
인들이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할 부상을 입었고, 200만명 이상이 치명적인 고엽제등 화학독극물
한다. 때로는 전통 무속 의례인 “렌동 (Lên Đồng)”도 전쟁기간에 발생한 “원한을 지닌 죽음”들의
에 노출되었으며, 6십여만명의 북베트남군이 병을 얻거나 부상을 당했다. 이러한 막대한 규모
넋을 달래기 위해 연행된다. 이처럼 전쟁과 연루된 죽음을 관리하는 민간의례들은 직접적으로
의 인명피해뿐만 아니라, 전 국토가 전쟁의 포화 속에 황폐화 되었고,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
살아있는 삶들의 일상세계와 죽음의 세계를 잇는 연행(권헌익 2016)이자 전쟁이 할퀴고 지나간
은 고향을 떠나야만 했으며, 그 가치를 가늠하기도 힘든 문화유산들-예를 들어, 베트남의 고
흔적들을 치유하며 상기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도(古都) 후에성 등-이 파괴되거나 잿더미로 변해 소실되었다.
위치를 확증할 수 없는 불발탄 (unexploded ordnance; UXO)들의 존재와 위험을 가늠할 수 없
사랑하는 가족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사람들, 삶의 애환을 함께 나누던 친척, 이웃과 친구
는 고엽제-화학 독극물 오염 문제는 베트남 사람들의 일상적 삶과 생태계를 지속적으로 위협
들이 서로 살육의 총부리를 겨눌 수 밖에 없었던 공동체들, 이른바 “전략촌”로 강제이주 하거나
하는 “베트남 전쟁의 치명적 유산”5)이다. 이 두 문제는 그 실체가 변형되거나 불분명하고, 망
피난을 떠나며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불타버린 마을들, 그리고 그 이유를 도무지 설명할 수 없
각했거나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불시에 모습을 드러내며, 일상 세계와 삶에 놓인 “죽음의 덫”이
었던 학살의 기억 등은 베트남 사람들에게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겼다. 전투가 끝나고 포
되고 있다.
성이 멈추고, 화약 냄새는 희미해져 갔지만 베트남 사람들의 삶은 일상성과 정상성을 회복하기
추정에 따르면, 종전 이후에만 “4만 명 이상”6)의 베트남인들이 불발탄에 의해 목숨을 잃었 다. 2017년 11월 24일,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의 상징으로 간주되는 홍강을 가로지르는 롱비엔
위한 또 다른 전투를 치러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살아있는 삶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전쟁이 초래한 수많은 죽음들은 “전 후 질서”에 따라 재분류 되었다. 베트남 국방부의 2012년 통계에 따르면, 당-국가가 공식적으
다리 교각 아래에서 “수상한 물체”가 발견되었다는 신고가 접수되었다. 군부대가
출동에 조사한 결과 전쟁기간 동안 미군이 투하한 무려 1.5톤에 달하는 폭탄으로 밝혀졌고, 최
세운 열사 (liệt sỹ)의 수는 전국적으로
초 신고가 접수된 지 4일만에 제거되었다. 베트남 당-정부에 따르면, 아직도 8십만 톤 이상의
849,018 명에 이른다. 이들 대부분은 당-국가 그리고 지방정부가 관리하는 열사 묘지에 안장되
폭탄과 지뢰가 베트남 전역의 땅밑과 물속에 묻혀 있고, 현재의 제거 속도라면, 모두 제거되기
어 있고 공식 추모 의례의 직접적 대상이 되고있다. 그나마도 수 천 명에 이르는 “열사”들의 주
까지는 한세기 이상의 시간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한다.7) 이러한 상황은 일상생활의 도처에
로 인정하는 “조국이 기억하는 공
(Tổ quốc ghi công)”을
(Long Biên)
검은 아직 채 수습이 되지 못 한 상황에 놓여있다. 한편 남베트남군인들의 희생은 그 자취를 찾 기 힘들 정도로 공적인 공간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그리고 상당수는 당-국가의 관심에서 벗어 난 죽음으로 남겨져 있다. 전쟁 중 발생한 민간인 희생자의 경우는 그 죽음의 원인이 대체로 불 명확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외국 군대에 의한 학살이거나 남베트남 군에 의한 피해는 그나마 일부 ‘기록’으로 남아있거나 추모비가 세워지기도 했으나, 북베트남 군 혹은 공동 체 내부 구성원들이 이념으로 나뉘어 상호적으로 행사했던 폭력들은 그 사실에 대한 언급 자 체가 여전히 금기시 되고 있다.
28
5) The Nation (2015. 3. 2.), “The Lethal Legacy of the Vietnam War” https://thefern.org/2015/03/ the-lethal-legacy-of-the-vietnam-war/ 6) The New Yorker (2016. 3. 20), “The Vietnam War Is Still Killing People” https://www.newyorker. com/news/news-desk/the-vietnam-war-is-still-killing-people 7) Báo Điện tử Chính Phủ (2018. 3. 31), “Cả nước còn 800 nghìn tấn bom mìn chưa nổ sau chiến tranh” http://baochinhphu.vn/Hoat-dong-Bo-nganh/Ca-nuoc-con-800-nghin-tan-bom-min-chuano-sau-chien-tranh/333176.vgp
29
3. 국제학술대회 ㅣ <베트남 전쟁>의 동시대성: 베트남 새로운 세대의 전쟁기억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전쟁의 유산이 있다는 공포 감각을 구성하고, 전통적인 베트남인들의
새로운 세대의 전쟁기억경관 – 망각과 기억의 사이에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전쟁에 관한 기억 속에서 재편한다. 전쟁기간 중 사용된 고엽제와 화학 독극물 피해의 경우, 남베트남 지역의 4분의 1지역을 오 염시켰고, 오늘날 약 4백 8십만 명의 베트남인들이 고통을 받고 있으며 그 중 약 30여만명이 직 8)
접적인 노출에 의한 피해를 입은 이들이다.
환경호르몬으로 작용하는 다이옥신과 같은 독성
2016년 1월의 통계에 따르면, 베트남 전체인구의 약 70%가 1975년 종전 이후 출생자로 추정된 다. 오늘날 베트남 사회에서 7X(70년대생), 8X(80년대생) 그리고 9X(90년대생) 등으로 불리는 “새로
운 세대”들은 전쟁보다는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시기에 성장했으며, 사회주의 정책 보다는 자
물질은 2세대, 3세대의 몸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실제로 고엽제-화학독극물 살포가 집
본주의 시장경제를 경험하며 생활해 온 세대이다. 최근 진행된 전세계 44개국 성인을 대상으로
중적으로 이루어졌던 남베트남지역 여성의 모유에서는 북베트남 지역과 비교하여 약 50배가
한 인식도 조사 9)에서, 베트남은 자유시장체제에 대한 지지(95%)와 다음 세대의 삶에 대한 낙
넘는 다이옥신이 검출되었다고 한다. 연구에 따르면 베트남은 앞으로도 100여 년 이상 이러한
관적 전망 (94%) 두 항목에서 그 어떤 국가보다도 가장 높은 긍정적 답변을 내놓았고 이러한 인
피해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식을 주도하는 세대가 바로 이 세대들이다.
고엽제와 화학 독극물에 의한 환경호르몬 문제는 전후 “인구폭발”을 경험한 베트남 사회에
개혁개방 정책 추진시기 전쟁의 기억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담론 속에 강력하게 살아있던
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근대적인 위생 체계와 보건의료 체계의 정비만으로는 해결할 수
“적의”가 새로운 시대에는 낡은 것이 되었음을 강조해야 했던 베트남 사회는 과거는 잠시 닫아
없는 전쟁으로부터 기인한 고통과 건강에 관한 위협은 단순한 “승전”의 기억서사로 포괄할 수
두자는 정책을 펼쳐왔다. 그러나 이제는 젊은 세대의 “역사에 대한 무관심”에 대한 사회적 우려
없는 전쟁에 관한 “몸의 기억”이자 “육체의 재현”으로써, 현재적 해석을 지속적으로 강제한다.
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2016년에는 하노이의 여러 고등학교 졸업시
불발탄과 고엽제-화학 독극물 피해는 직접적인 전쟁의 유산으로 구성된 동시대적 문제가 되
험에서 단 한 명의 학생도 역사 과목을 선택하지 않은 상황이 벌어졌고,10) 대학입시에서는 역 (2007년 기준 10점 만점에 2.09점)
어왔고, 생산자와 사용자 그리고 피해자의 시공간적 및 상황적 분리라는 전후상황속에서 제기
사과목 평균 점수가 수험생 평균 점수 중 가장 낮은
되어 왔고, 역설적으로 전쟁의 주체들을 재소환해 전쟁-환경-인간-기억-지식/기술을 다시 연
준 지 오래 되었다. 이러한 역사에 대한 무관심은 급격한 사회변화,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작동
결시키고 있다. 주지하는 것 같이, 불발탄과 고엽제 문제의 경우에 미군과 한국 등 외국군대가
하는 “탈역사화” 및 “망각의 정치”와 더불어, 당-국가가 여전히 역사기술의 정당성을 독점하고
작전 중에 사용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정보를 미국과 한국 등 외국군대가 가지고 있는 반면, 구
역사 재현의 방식과 서사를 통제하고 있는 상황에도 상당부분 기인한다.
체적인 경험의 기억은 베트남인들이 지니고 있다. 수습되지 않은 전쟁 희생자 문제 또한 전투의 기 억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 서로의 정보와 기억을 나누면서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수준을 보여
베트남 전쟁의 종전 이후 베트남은 캄보디아와 중국 등 “사회주의 형제국”들과의 전쟁을 치 러야 했고,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했던 냉전질서 하에서 고립되었다. 전후 복구와 사회주의 정책
여전히 생과 사를 넘나드는 삶이 도처에서 지속되고 있다는 의미에서, 베트남 전쟁은 끝나지
의 추진을 동시에 진행하며, “통일 베트남”에서 당-국가의 정치적 지도력과 통제력을 형성하는
않았다. 베트남인들의 일상세계에는 끊임없이 전쟁의 유산과의 마주침과 정처없는 죽음들이
것이 정치적으로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이러한 과업의 추진과정은 그러나 관료제적 사회질서
출몰하고 있고, 오늘날 점점 더 강화되는 개개인의 삶과 안전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돌봄의 정
의 구축과 공적 담론 공간에서 다성성(多聲性)의 배제로 특징화 된 정치과정을 결과하고 말았
치담론 속에서도 전쟁의 유산에 대한 인식과 관리는 스스로에 대한 직접적인 배려가 되기도 한
다. 역사는 곧 당-국가의 역사로 등치되었고, 따라서 보존하고 존중되어야 하는 “대상”이 되었
다. 이와 같이, 베트남 전쟁은 그 실재성을 동시대적으로 삶에 재생산하며 기억의 경관을 구성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8) Nhân Dân (2016. 8. 12), “Khắc phục hậu quả chất độc da cam ở Việt Nam” http://www.nhandan. com.vn/xahoi/tin-tuc/item/30385302-khac-phuc-hau-qua-chat-doc-da-cam-o-viet-nam.html
30
9) P ew Research Center (2014. 10. 9.), “Emerging and Developing Economies Much More Optimistic than Rich Countries about the Future” http://www.pewglobal.org/2014/10/09/ emerging-and-developing-economies-much-more-optimistic-than-rich-countries-about-thefuture/ 10) Z ing.vn (2016. 3. 2.), “Hàng loạt trường không có học sinh chọn thi Lịch sử” https://news.zing. vn/hang-loat-truong-khong-co-hoc-sinh-chon-thi-lich-su-post630739.html
31
3. 국제학술대회 ㅣ <베트남 전쟁>의 동시대성: 베트남 새로운 세대의 전쟁기억
다. 당건설과 “통일국가” 건설에 기여했던 전쟁세대들은 “역사적 권리”를 가질 수 있었지만, 새
기도 어렵고, 리얼리즘적인 자료에 바탕을 둔 인문적 서사 등을 발굴하기도 쉽지 않으며, 또 감
로운 세대에게는 상대적으로 제한적 역할만이 부여되었다. 가부장제적 국가관이 부활하면서,
동적인 연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12). 더 큰 난관은 오늘날 세계화된 대중문화 시장에서, 단지
새로운 세대는 양육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특히 베트남 전쟁의 역사는 “베트남 사회
“베트남 국내 상영용”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한다는 것이 그 ‘투자’ 가치를 인정받기도 어렵다
주의 공화국”11)의 건설사이자, 당-국가와 부모 세대가 독점하는 역사로 간주되면서, 새로운 세
는데 있다. 이미 헐리우드의 베트남 전쟁 영화들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게, 당-국가가 고수하고
대의 발언권 자체가 동시대적으로 상당부분 제한되어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있는 “항미구국전쟁”의 애국주의적 서사는 낯섦을 넘어 낡은 것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또한
개혁개방이후 크게 확장되고 발전해 온, “새로운 세대”가 주도하고 있는 대중문화의 영역에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해외의 베트남 교포사회들이 자신들의
서도 이러한 경향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전쟁관련 문학작품들의 경우에, 최근 들어 영
“재현”문제를 여전히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도 해결해야할 문제이다. 결국, 베트남에서
웅주의 서사의 반복에서 벗어나 개인의 고뇌와 슬픔 그리고 사랑 등의 주제가 수용되고, 과거
제작되는 전쟁관련 영화와 서사들은 베트남인들의 기억경관이 국제적 소통 가능성을 획득할
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전통의 이완이 시작되고 있으나, 여전히 전쟁체험세대 작가들의 작품
수 있는가의 문제와 더불어 베트남 전쟁에 관한 초국적 기억경관의 형성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이 주를 이루고 있다. 사실상 당-국가가 출판 활동 전반을 여전히 통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작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품의 소재와 주제가 전쟁의 “정당성(tính chính đáng)”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작
탈냉전시대 지구화된 질서는, 당-국가가 주도하는 민족국가의 기억경관에 대한 재구성만을
품들은 검열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오늘날 문제는 제한된 표현의 자유에 관한 문제뿐만이 아니
요구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늘날 새로운 세대들이 주도하고 있는 디지털 기반의 일상과 인터넷
라, 회고 중심의 개인화된 전쟁 서사와 과거의 ‘이데올로기적 집단기억 표상’들의 반복적 등장
문화 (육수현 2017 참조)는, 역설적으로 민족주의적 기억경관을 강화시키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모바일 게임 “Call of Duty Black Ops Mobile”과 “Vietnam ‘65”가 앱스토어에 공개되
이 동시에 이루어지면서 베트남 독자들로부터 ‘진부한 서사’로 외면당한다는 데 있다. 영화의 경우, 베트남 당-국가가 이미 50년대 말부터 다른 사회주의권 국가들처럼 그 유용성
었던 지난 2015년, 베트남의 게임 커뮤니티는 술렁이기 시작했다13).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대중 기억의 생산과 통제에 사용해 온 장르예술이다. 매 2년마다 개최되
하는 이들 온라인 게임이 베트남 전쟁의 역사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는 베트남 청년세대의
는 베트남 영화제에서 수여되는 작품상에는 늘 전쟁영화가 빠지지 않을 정도로 국가적인 홍보
분노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베트남 인민해방군이 미국과 ‘괴뢰’들의 관점에서 여전히 “베트
가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에도, 점차 전쟁영화는 상업영화와의 경쟁에서 외면 받는 장르가
콩
(VC)”이라는
멸시적인 명칭으로 설명되어 있고, 게임은 그들의 시점에서 베트남 인민해방군
(Những Người Việt Huyền
을 사살하고 임무를 환수하는 스토리라인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전쟁이
전후세대가 감독을 맡고, 베트남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하여 새로
야기를 진부하다고 생각하고, “탈역사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던 세대들이지만, 게임
운 세대의 베트남 전쟁영화의 등장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정작 배급처를 찾지 못하고 상영
속 “역사왜곡”에 대해서는 격렬히 반응하는 모습은 탈냉전 지구화시대에 아시아 각국에서 재
관을 찾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국가가 제작을 지원한 저예산 전쟁영화에 대한 ‘영화 시
활성화되고 있는 ‘민족주의적 정체성’의 강화 양상을 보여준다. 즉, 냉전시대에 강력하게 작동
장’의 냉담한 반응이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었다. 더 나아가, 오늘날에는 더 이상 대중문화 영역
했던 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을 대신해, 주체의 관계적 정체성은 혈연, 인종, 민족 등과 같은 보다
에서 당-국가 주도의 전쟁기억서사의 생산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기도 했다.
역사적이고 근본적 가치체계로 간주되는 요소들에 기반하고 이에 대한 물신화를 통해 ‘민족-
되고 가고 있다. 정부지원으로 제작된 전쟁영화 “전설을 만든 사람들 thoại, 2013)”은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 베트남 대중문화 영역에서 전쟁기억에 바탕을 둔 재현물이 겪고 있
국가’ 체제하의 새로운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는 한계와 문제에 대한 성찰의 문제를 제기한다. “전쟁은 잔인하고, 등장인물은 반드시 영웅”이 어야 한다는 도식화된 원칙은, 갈수록 대중적인 전쟁영화 제작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러한 원칙 하에서는 오늘날 “문화 소비자”가 된 관객들을 불러모아 새로운 철학과 메시지를 전달하
11) 1976년 베트남의 ‘통일 국회’에서 국호변경이 의결되었다.
32
12) Thanh Niên (2013. 9. 25), “Phim chiến tranh: Đường mòn đi mãi ?” https://thanhnien.vn/vanhoa/phim-chien-tranh-duong-mon-di-mai-14494.html
13) G ame4V (2015. 6. 13), “Người chơi phẫn nộ trước game chiến tranh lịch sử Việt Nam” http://game4v.com/game-mobile/nguoi-choi-phan-no-truoc-game-chien-tranh-lich-su-vietnam-210565.g4v
33
3. 국제학술대회 ㅣ <베트남 전쟁>의 동시대성: 베트남 새로운 세대의 전쟁기억
세대적 경험의 차이로 인한 갈등,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탈역사화” 경향, 그리고 “민족-국가
한 해외 언론들은 오늘날 베트남 사회에서 전쟁의 기억은 희미해져 가고 있고, 베트남의 새로운
적 정체성”의 물신화 등이 베트남만의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베트남 전쟁에 연루된” 사
세대들은 이제 ‘전쟁’이 아닌 새로운 ‘정체성’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다는 기사를 연달아 내보냈
회와는 달리, 베트남전쟁에 관한 기억경관의 재구성-기억/망각의 변증법-과정이 구체적 사회
다.14) 외부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4반세기전 베트남 당-국가가 급하게 “닫은 과거 (khép lại quá
변화 양상과 맞물려 있고, 개인적 욕망의 주요한 내용을 구성하기도 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
khứ)”는
요가 있다.
하는 의구심도 든다.
그대로 망각의 깊은 골짜기 아래에 놓이거나 닫혀 있는 채로 물신화되는 것은 아닐까
전후 베트남의 새로운 세대들은 과거 ‘전쟁세대’가 자신들의 정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며 소
그러나 탈냉전시대의 동시대적 기억경관은 베트남전쟁의 주체들을 경계를 넘어 소환하고 있
통할 수 있었던 상황과는 전혀 다른 조건 속에서, 새로운 관점과 서사적 전략을 통해 전쟁을
고, 기억의 서사들은 전쟁에 연루된 새로운 관계들을 구성하며 상호경합하고 있다. 베트남 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떠안게 되었다. 하노이 소재 베트남 인문사회과학대학 정문
쟁과 관련된 기억의 정치가 펼쳐지는 장에서 민족-국가간의 정치적 관계만이 고려되고 작동하
에 새롭게 각인된 표어-“과거를 존중하고, 미래를 포용하라 (Trân trọng quá khứ, nắm giữ tương
거나, 과거의 위치를 재확인하는 것에 머무르는 것은 탈냉전시대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에 다
역설적이지만 이 두가지 임무를 동시에 수행한다는 것이 새로운 세대의 삶의 조건하에
름 아니다. 중요한 문제는 각자의 자리를 어떻게 무엇을 통해 재설정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lai)”-는
서는 결코 쉽지않을 것이며 단일한 방식도 아닐 것임을 암시한다.
성찰에 있으며, 더 나아가 어떻게 베트남 전쟁으로 상징되는 냉전시대의 잔혹한 폭력으로 점철 된 죽음과 죽임의 역사를 극복하는 “공통 기억”의 가능성을 열어낼 것인가에 있다. 베트남 전쟁
결론을 대신하여 – “베트남 전쟁의 동시대성”을 새롭게 구성하기
의 동시대성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은 결국 희생을 함께 애도하고, 폭력을 성찰하고 반성하며, 상호적 관계를 구체적 실천을 통해 구성하는 것일 터이다.
2018년 3월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이 베트남에 지난 과거사에 관한 사과의 뜻을 표했으며, 베 트남의 쩐다이꽝 (Trần Đại Quang) 국가주석도 그 사과에 진심이 느껴진다는 의견을 표했다는 내용이 한국언론에 보도되었다. 그러나 정작 베트남의 언론에서는 그 사과와 관련된 내용이 단 한 줄도 소개가 되지 않았던 상황에 대한 의문이 이 발표문을 구상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이다.
참고문헌
국가 정상간의 대화, 그것도 국가를 대표해 표명한 사과가 왜 언론의 관심사가 되지 않았을까? 혹시, 베트남 사회가 한국정부의 사과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베트남 사
Althusser, Louis. 2001 (1971). Lenin and Philosophy, and Other Essays.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회는 전쟁의 기억을 이제 그저 지우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질문들은, 비록 ‘가해자의
권헌익. 2016. 베트남 전쟁의 유령들. 박충환, 이창호, 홍석준역. 부산: 산지니.
위치’에 서있지만, 베트남 사회의 전쟁에 관한 동시대적 기억경관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
권헌익, 2012. 학살, 그 이후. 유강은 역. 서울: 아카이브.
에 이르렀다. 단순히 베트남 전쟁의 현재적 의의를 사고하기 보다는 먼저 “동시대성”이 어떻게 상이하고 이질적인 경험들, 출몰하는 기억들 그리고 낯선 도전들 속에서 구성되고 있는지를 밝 히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도 있었다.
김동춘. 2000. 전쟁과 사회: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서울 돌베개. 심주형. 2017. 정처없는 애도, 끝나지 않은 전쟁: 1968년 ‘후에학살’에 관한 기억의 정치. 한국문화인류학 50 (2):135-187. 육 수현. 2017. 제한된 문화자본으로서의 한국어: 베트남 청년세대의 사회이동과 혼종적 주체성, 고고문화인류학과, 전북대학교 전주.
탈냉전적 세계질서의 재편과 더불어, 베트남전쟁에 연루되었던 참전국의 사람들도 베트남 전쟁에 관한 기억들을 조심스레 확인하고 그 상처를 함께 치유하고자 하는 희망을 지니고 베 트남을 방문하고 있다. 베트남 현지에서 사람들의 ‘관용’적 태도에 감복하면서 베트남의 “기적 같은 승전의 역사”를 다시금 되새기기도 하지만, 전후 세대의 무관심과 ‘자본주의화의 실상’을 접하고 실망하거나 냉소적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종전 후 40여년이 지난 베트남 사회를 취재
34
14) The Atlantic (2015. 4. 30), “How Young Vietnamese View the Vietnam War” https://www. theatlantic.com/international/archive/2015/04/youth-vietnam-war-fall-saigon/391769/ Los Angeles Times (2017.2. 2.), “Their parents’ lives were defined by war. Now Vietnam’s youth are pushing the country toward a new identity” http://www.latimes.com/world/asia/la-fgvietnam-future-2017-story.html 등.
35
3. 국제학술대회 ㅣ 가해 경험을 말한다는 것: 일본 중국귀환자연락회의 사례
가해 경험을 말한다는 것
걸쳐 석방되어 일본으로 귀국한 뒤 자신의 가해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리며 반전평화와 중일우
: 일본 중국귀환자연락회의 사례
호를 위해 꾸준히 활동을 해왔으며 중귀련이 공식적으로 해산된 2002년 이후에도 개인 차원 에서 증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번 발표에서는 이들의 경험을 살펴보면서 ‘가해자’의 변화 가능성에 대해 우리가 고민할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1. ‘가해자’들이 입을 열기까지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나중에 중귀련을 구성하게 된 이들은 크게는 두 가지 그룹으로 나뉜다. 하나는 만주에서 관동 군 군인으로 또는 만주국 관료 등으로 있다가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로 이송된 약 60 만 명의 이들(거기에는 수천 명의 ‘한국인’도 포함되어 있다) 가운데 1950년 7월에 중국으로 인계된 969 명의 일본인들이다. 스탈린의 비밀지령에 따라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에서 강제노동을 하게 된 이들 대부분은 1949년 12월까지 귀국했지만 전범 혐의를 받은 이들은 계속 억류되었고,1) 그
들어가며: 가해자들의 ‘me too’
1664명 가운데 중국에서 죄를 지은 자들 971명을 소련이 중국으로 넘기기로 한 것이다. 직전에 2명이 사망해서 실제로 중국으로 넘겨진 전범은 969명이었고, 그 구성은 장성급 15명, 영관급
한국에서 미투운동이 벌어진 지도 이제 두 달 정도가 지났다. 일상 속 깊숙이 퍼져 있는 성폭 력이 공개적으로 논의되면서 ‘정치’나 ‘예술’에 비해 성과 관련된 일들을 ‘사소한 것’으로 간주해 가려왔던 위계는 분명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이제 본격적으로 한국의 민주화운동 이 시작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을 어디까지나 ‘공인의 도덕성’의 문제로 환 원하려는 이들도 많고(그래서 ‘자연인’을 운운하기도 한다), 아마도 그런 의식이 수많은 ‘가해자’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피해자’들의 미투가 이어져도 그에 대응해 ‘가해자’들의 미투가 나타나는 일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25명, 위관급 84명, 병사 514명, 만주국 관리 가운데 특임관 (친임관) 및 간임관 (칙임관) 12명, 그 이
하 관리 41명, 경찰, 헌병, 특무 가운데 경좌 (警佐) 이상 110명, 경위 이하 168명으로 구성되었다.2)
이들은 1936년에 만주국이 만든 푸순(撫順)감옥을 개조한 푸순전범괸리소에서 지내면서 교육
을 받게 되었다. 또 하나는 산시(山西)성에서 패전 이후에도 그 지역에 남아 일본의 부흥과 반공
을 위해 국민정부 산시성정부 수석인 옌시산 (閻錫山)과 협력해 인민해방군과 싸우다 포로가 된
‘북지(北支)파견군’ 제1군 출신 등 140명 정도의 일본인들로 그들은 1952년 11월에 산시성에 있는 타이위안(太原)전범관리소에 수용되어 푸순전범관리소와 기본적으로 동일한 교육을 받았다.3)
이는 베트남전의 민간인 학살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피해자’들의 증언은 20년 전부터 계속되었지만 적지 않게 생존하고 있을 ‘가해자’들의 증언은 여전히 드물다. 물론 죄를 지은 사 람이 그것을 숨기려 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보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자신의 행위를 충분히 성찰하고 가해 사실을 공개적으로 또 집단적으로 이야기하며 다시 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노력한 이들이 실제로 존재한다. 일본에서 1957년에 결성된 ‘중국 귀환자연락회’(이하, 중귀련으로 줄임)에 소속된 이들이다. 이들은 중국 동북부(만주) 및 산시(山西)성 에서 일본군 또는 만주국 관료 등으로 활동하다 패전 때 소련군 포로가 됐다가 1950년에 중국 으로 인계되어 전범으로 교육을 받다가 자신의 과거를 뉘우쳐 1950년대 후반~60년대 전반에
36
1) 小 林昭菜, 「「シベリア抑留」研究の現状と課題」, 『異文化』11호(東京: 法政大学国際文化学部, 2010), 267~268쪽.
2) 齐雪, 『新中国政府改造日本战犯研究: 以抚顺战犯管理所为例』(北京: 中共中央党校 博士論文, 2016), 33 쪽. 3) 豊田雅幸・張宏波, 「「認罪」への道」, 岡部牧夫・荻野富士夫・吉田裕編, 『中国侵略の証言者たち』(東京: 岩波新書, 2010), 5~7쪽; 張宏波, 「日本軍の山西残留に見る戦後初期中日関係の形成」, 『一橋論叢』1342(東京: 岩波書店, 2005), 193~203쪽. 타이위안전범관리소에서의 구체적인 경험에 대해서는 張宏波・石田隆 至, 「加害の語りと日中戦後和解」, 『PRIME』30号(東京: 明治学院大学国際平和研究所, 2009) 참조.
37
3. 국제학술대회 ㅣ 가해 경험을 말한다는 것: 일본 중국귀환자연락회의 사례
이 천여 명의 전범들이 어떤 경험을 했는지 이제 살펴보겠는데, 그들 가운데 대다수가 지냈던
그 대부분은 우리와 비슷하게 일본 통치계급의 압박과 착취에 시달리는 인민의 자제들임을 명
푸순전범관리소의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시하면서 포로가 되거나 항복한 그들을 결코 모욕해서는 안 되고 위반한 경우에는 처벌할 것
전범관리소에 수용된 이들이 먼저 격하게 반응한 것은 ‘전범’이라는 규정이었다. 그들은 방
을 명시했다.9) 전쟁 과정에서도 이와 같은 기본 원칙이 있었기에 이미 승리한 뒤에 그들을 굳이
에 붙은 ‘감방규칙’ 마지막에 적힌 ‘푸순전범관리소’라는 말에 분노를 폭발시켰다. 어떤 이는 그
학대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원칙상 그렇다는 것과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는 데에는 큰 차이가
것을 찢어버리기도 했다. 그들의 인식으로는 ‘전범’이란 전쟁을 일으키고 지휘한 거물들이며, 자
있을 수 있다. 직접 전범관리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조치는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
신들은 단지 그들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 ‘하빠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4) 그래서 어떤 이는 직
다. 한 간수는 일본군에 의해 가족 8명 가운데 본인을 제외한 나머지 7명을 잃은 경험 때문에
접 소장에게 가서 항의하기도 했다. ‘우리는 직업군인이 아니라 징병으로 입대해서 전쟁에 참여
전범관리소에서 일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이제 보복을 할 수 있다고 좋아했으나 결코 그들
했다. 전쟁은 내 의지로 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전범이라면 사단 소속 2만 명 모두가 전범이 되
을 구타해서는 안 되고 인격을 존중해야 한다는 상부 지시에 오열하며 괴로워했다고 한다.10) 또
는 것이 아니냐. 당신네는 일본인을 모두 전범으로 보는 거냐’는 식이었다. 이 말을 한 인물은, 화
취사반에 소속한 이들도 왜 적들에게 잘해줘야 되냐며 초기에는 쌀이나 채소를 제대로 씻지도
가 난 소장이 자신을 바로 감금시킬 것이고 그러다 먼저 처형당할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지만
않고 조리하는 경우도 있었다.11) 초기에 부소장이었던 취추(曲初) 역시 처음에는 고량밥을 거부
어차피 조사를 하면 자신이 전쟁 중에 한 행위가 드러나 처형당할 거라는 거의 자포자기 심정 으로 이런 행동에 나선 것이었지만, 뜻밖에도 소장은 그 마음도 알겠다며 자신이 무엇을 왜 했 는지 잘 생각해보라고 조용히 타이를 뿐이었다.5) 직접 침략을 한 것도 아닌 소련의 시베리아에
한 일부 전범들에게 분개해 그냥 무시하려 했다. 하지만 상급기관을 통해 전해진 저우언라이(周 恩來)
총리(전범 관리의 총책임자는 저우언라이였다)의 지시는 전범들의 민족적인 풍속, 습관까지도 존
중하라는 것이었고, 관리소 내부에서 토론과 학습을 거듭한 결과 그들의 자세도 달라졌다.12)
서 거의 인간취급을 받지 못하다가 6) 침략을 직접 당한 중국에서 인간적인 대우를 받게 되자 그
전범들에 대한 대우가 좋았다는 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들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식사도 시베리아 시절과는 딴판이었다. 절대적인 굶주림이 지
아주 많은 시간이 주어졌다는 점이다. 시베리아에서는 원래 노동력으로 사용하려고 연행된 것
배하던 시베리아 수용소와 달리 식사는 넉넉히 제공되었으며, 처음에는 고량으로 지은 밥이었
이었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번 쉬는 것 빼고는 영하 30도의 강추위 속에서도 강제노동을 시켰
지만 쌀밥을 요구하자 금방 쌀밥으로 바뀌었고 반찬투정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대응했다.7)
지만 여기서는 노동을 시키지 않았다. 관리소의 일과는, 아침 5시에 일어나 7시 반까지 아침체
이런 대우가 가능했던 데는 항일전쟁 당시부터 이어져온 전통이 있었다. 일본과의 전쟁이 발
조, 7시 반부터 8시까지 아침을 먹고 8시부터 11시 반까지 학습, 11시 반부터 13시까지 점심 및
발한 직후인 1937년 10월부터 공산당계 군대인 팔로군(八路軍)의 총지휘관 주더(朱德)는 일본군
휴식, 13시부터 15시까지 다시 학습, 15시부터 17시까지 운동, 17시부터 18시까지 저녁 식사18시
포로는 결코 죽여서는 안 되고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이에게는 여비를 주도록 지시했고,8) 1940년
부터 20시에 취침할 때까지 오락 시간으로 정해져 있었다.13) 하지만 학습은 강제적이지 않고 본
10월에 다시 내려진 명령에서는 일본군의 일반 사병은 우리 군대의 진정한 적이 아니라 오히려
인이 읽고 싶은 책을 읽는 정도였기에14) 거의 다 자유시간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대해 어떤 이
4) 中国帰還者連絡会編, 『私たちは中国でなにをしたか』(東京: 三一書房, 1987), 20~21쪽. 이 책은 중귀련에서 관리소 시절에 관한 회고록을 출판하기 위해 모은 회원들의 수기 75편을 토대로 작성된 것이다.
9) 같은 책, 323쪽.
5) 같은 책, 22~23쪽.
6)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포로들이 얼마나 학대를 받았는지 많은 증언들이 존재하지만, 어떤 이가 취조관에게 했다 는 “만약 당신이 인간이라면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내가 인간이라면 당신은 인간이 아니다”라는 말은 그 상황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石原吉郎, 『日常への強制』(東京: 構造社, 1970), 211쪽. 7) 中国帰還者連絡会編(1987), 앞의 책, 25~27쪽. 전범들이 일본식 어묵인 가마보코가 먹고 싶다고 하자 제조법 을 물어가면서 만들기까지 했다고 한다. 8) 中央档案馆编, 『中国共产党抗日文件选编』(北京: 中国档案出版社, 1995), 203쪽.
38
10) 吳 浩然, 「尉官級以下の日本戦犯改造」, 中国帰還者連絡会訳編, 『覚醒: 撫順戦犯管理所の六年』(大阪: 新風書房, 1995), 129쪽. 이 책은 1990년에 中國文史出版社에서 간행된 『震撼世界的奇迹: 改造伪滿皇帝溥 仪暨日本战犯纪实』 가운데 일본 전범과 관련된 부분을 발췌해서 번역한 것이다. 11) 黄国城, 「戦犯の食生活」, 같은 책 179쪽.
12) 曲初, 「戦犯改造への周恩来総理と史良司法部長の関心」, 같은 책, 34~36쪽. 13) 齐雪, 앞의 논문, 73쪽.
14) 中国帰還者連絡会編(1987), 앞의 책, 32, 218쪽.
39
3. 국제학술대회 ㅣ 가해 경험을 말한다는 것: 일본 중국귀환자연락회의 사례
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때까지 살았던 인생 가운데 이만큼 자유로운 시간을 넉넉히 받아
에 따라 전범들에게는 더 다양한 책들이 제공되었다. 한국전쟁에서 인민지원군이 ‘세계 최강’
서 자기 자신이나 인생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죠. 군대 시절에도 시베리아 시절에도 사는
이라고 생각했던 미군에 전혀 밀리지 않는 것을 보면서, 또 이 전범관리소에서 받는 좋은 대우
것만으로 버거웠으니까.”
15)
난생 처음으로 주어진 자유로운 시간. 처음에는 주로 그 시간을 장
에 놀라면서 중국에 대한 인식이 변하기 시작한 그들은 이제 많은 것을 흡수할 수 있는 상태가
기, 바둑, 화투 등 오락으로 보냈지만, 점차 밤 시간에는 각자가 자신의 생애에 대해 이야기하는
되어 있었다.22) 『마오쩌둥선집』 같은 것도 있었지만, 고바야시 다키지(小林多喜二)의 『게공선(蟹
데 시간을 쓰게 되었고 자기 경험을 토대로 소설을 쓰기도 했다.16) 1950년 하반기에는 아직 한 국전쟁의 연장선상에서 미군이 만주까지 쳐들어와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지 않을까 기대를 하는 이들도 많았고 그들의 사상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고는 보기 어려운 상태였지만
17)
넉넉한 시
간 속에서 자신에 대해 말하고 쓰는 시간을 가진 것은 뒤에 그들이 자신의 가해 행위를 돌아보 게 되는 밑거름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工船)』을
비롯한 일본 프롤레타리아문학이나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소설도 있었고, 가이조(改
發達史)』,
일어판 맑스엥겔스전집 등 만철 조사부에서 소장했던 사회과학 서적들도 대여되었다.
造)사에서
나왔던 경제학전집, 노로 에이타로(野呂榮太郞)의 『일본 자본주의 발달사 (日本資本主義
전범들은 그런 책들을 필사해가면서 읽었다.23) 이러한 학습은 단순히 지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런 이론을 바탕으
중국인민지원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1950년 10월경부터 전범들의 본격적 학습이 시작되었
로 실제 일본 사회에 대해 분석, 토론하는 과정이 잇따랐다. 관리소 측에서 제시한 주제는 ‘두
다. 그들을 회개하게 만들기 위해 관리소 지도부가 선택한 것은 제국주의에 대한 이론 학습이
가지 상이한 사회제도 비교’라는 것이었고, 비교적 가난한 집안 출신의 전범들 몇몇을 골라 자
었다. 우선은 학습을 원했던 80여명을 조직해 6개 학습반을 만들었고, 그들에게는 레닌의 『제
기 가족들의 생활 실태, 집안 내력 등에 대해 이야기하게 했다. 그리고 그것을 소재로 분석과 토
국주의』 일어판과 일본공산당에서 만든 여러 학습 자료가 주어졌다.18) 전범들에 대한 제국주
론이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어떤 이는 가난 때문에 팔려가듯이 성냥공장에서 여공으로 일하
의 교육의 중요성을 지적한 이는 일본 유학 경험이 있는 장멍스(張夢實)19)였는데, 일본 제국주의
게 된 누나가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몸이 상해 죽게 되었고 아버지도 그 충격으로 쓰러져 죽게
의 본질이 대내적 압박, 착취를 대외적인 확장, 침략과 결합시킨 데 있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며 오열했고, 다른 전범들도 따라 울기 시작해 그 방이 눈물바다가 되는
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20) 그렇게 이론을 배우게 하고 또 그것을 자신들이 겪은 실제 일
일도 있었다.24) 제국주의에 대한 학습은 그들을 ‘일본군’, ‘일본인’이라는 단위로 환원시키지 않
들과 연결시켜 토론하게 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지도원들이 그들의 토론을
고 오히려 각자가 지녔던 고유성을 되찾게 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그들의 인간성은 회
지켜보면서도 결코 답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도원들이 학습지도 원칙으로 삼은 것은,
복되기 시작했다.
무슨 명칭이나 개념에 관한 질문에는 대답할 책임이 있지만 실제 문제에 대한 인식에 관해서는 그들 스스로 토론하면서 한걸음 한걸음씩 이해하게 한다는 것이었다.21) 그렇게 학습이 진행됨
이런 과정을 거친 다음 1953년에 들어서면서는 탄바이(坦白) 학습이라 불리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백하는 과정이 시작되었다. 그 직전에 중국에서 전국적으로 전개된 반 부패 캠페인인 삼반오반 (三反五反)운동에서도 비리에 연루된 이들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자
15) 熊谷伸一郎『なぜ加害を語るのか』(東京: 岩波書店, 2005), 11쪽. 16) 中国帰還者連絡会編(1987), 앞의 책, 48~49쪽. 17) 같은 책, 43쪽.
18) 吳浩然, 앞의 글, 132쪽.
아비판을 하는 방식이 많이 활용되었는데 전범관리소에서도 비슷한 방식을 채용한 것이다. 그 래서 전범들에게도 과거 중국에서 무엇을 했는지 빠짐없이 써보라는 말과 함께 종이가 10장씩 주어졌다. 자기 방으로 돌아간 모두가 머리를 싸매고 고민에 빠졌지만, 도쿄제대 출신의 어떤 이는 범죄를 자백하면 되는 게 아니냐는 생각으로 포로 살해 등 자신의 범죄 행위를 하루 만에
19) 장멍스는 만주국에서 총리를 지낸 장징후이(張景惠)의 여섯 째 아들로 1921년에 태어나 1940년에 일본 와세 다대로 유학을 갔다가 맑스레닌주의를 접하고 중국공산당의 외곽조직인 東北留日靑年救亡會에 가입하게 되 었다. 1943년에 귀국한 뒤로는 총리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만주국 및 관동군의 기밀을 빼돌리는 역할을 했다.
22) 富永正三, 『あるB・C級戦犯の戦後史』(東京: 影書房, 2010), 55쪽. 이 책은 1977년에 출판된 책을 다시 펴 낸 것이다.
21) 吳浩然, 앞의 글, 134쪽.
24) 吳浩然, 앞의 글, 135~138쪽.
20) 金源, 「歴史上経験のない偉大な実践」, 中国帰還者連絡会訳編, 앞의 책, 11쪽.
40
23) 中国帰還者連絡会編(1987), 앞의 책, 69쪽.
41
3. 국제학술대회 ㅣ 가해 경험을 말한다는 것: 일본 중국귀환자연락회의 사례
깔끔하게 정리해 다음날 아침에 제출했다. 그날 오후에 그는 지도과장의 강한 질타를 받게 되
해자 입장에서 피해자 입장으로 한발 들어섰다. 자신이 서 있는 좌표가 바뀐 것이다.”30) 탄바이
었다. 탄바이는 고뇌에 찬 자기와의 싸움 끝에 심각한 반성 위에서 가능한 것이지 한두 시간 만
학습의 성과는 이와 같이 자신이 서 있는, 그 시선의 위치가 바뀌는 경험이었다. 그 때까지 최대
에 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안이한 태도는 오히려 다른 사람이 탄바이를 하는 데
한 숨기려 했던 강간과 같은, 명령 탓으로 돌릴 수 없는 가해행위에 대해서도 전범들이 입을 열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그는 독방으로 옮겨져 거기서 매일 ‘반성일기’를 쓰게 되었고,25) 그런 과
기 시작한 데에는 이러한 변화가 크게 작용했다. 중국에서 ‘런쭈이(認罪)’라고 표현되는 자신의
정을 거친 다음 다시 탄바이를 할 기회가 주어져 이번에는 1주일을 들여서 20장에 이르는 글을
죄를 인지하는 행위는 구체적인 ‘피해자’의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작업이었고, 그것은 동시에
쓸 수 있게 되었다.26) 그런데 이렇게 직접적인 ‘지도’를 받는 경우는 대체로 예외적이었다. 어떤
자신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도쿄제대 출신 장교였던 도미나가 쇼
이는 한 달을 들여서 글을 썼지만 지도원들은 더 진지하게 반성해야 된다는 식으로 일반적인
조(富永正三)는 1977년에 펴낸 회고록에서 중국에서 받은 ‘사상개조’란, “설사 전쟁터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할 뿐, 어디가 틀렸다거나 이렇게 써야 된다는 그런 구체적인 지도는 없었다.27) 그래서
일이더라도 비인도적 행위는 용납될 수 없고, 명령에 대한 복종 여부는 본인이 선택하는 문제로
계속 본인이 스스로 고민할 수밖에 없었는데 여러 번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들은 자신이 쓴
스스로 선택한 행위에 대해서는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고방식으로 변한 것을 말한다
글이 작전 뒤에 본부에 제출했던 ‘전투상보’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28) 몇 년
고 지적했는데,31) 여기에는 군대와 같이 개개인의 주체성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생각되기 쉬운
몇 월 어디서 누구의 명령으로 어떤 범행을 저질렀다는 식의 서술은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영역에서도 사실은 개인의 주체성은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마치 그런 것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
과거에 ‘전과’로 표현됐던 것이 ‘범행’으로 말이 바뀌었을 뿐 상황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대로라
는 사고방식이야말로 무책임한 조직을 재생산시킨다는 점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있다. 그들은 전
는 것이다. 여기에는 ‘가해자’가 그 시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단순히 ‘객관적 사실’을 인지하
쟁이나 군대를 ‘특수한 영역’으로 타자화시키지 않고 성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1952년에
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핵심적인 깨달음이 있다. 그것을 깨닫게 된 뒤, 그들은 ‘피해자’의 눈
작가 노마 히로시(野間宏)가 군대 내무반을 일반사회에서 완전히 격리된 ‘진공지대’로 그려낸 것
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기 시작했다. 밀을 약탈했을 때 안 뺏기려고 매달리는 할머
에 대해 당시 평론가였던 오니시 교진(大西巨人)이 ‘속정(俗情)과의 결탁’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던
니의 모습, 억지로 빼앗았을 때 맞아서 피를 흘리면서 자신을 쏘아보던 할머니의 눈빛이 떠오른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당시 노마는 일본공산당 주류파 (‘소감파’) 계열의 문학잡지 『인
다. ‘명령이어서 어쩔 수 없이’라는 변명은 ‘피해자’ 입장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그들은
민문학』 편집에 관여하는 등 누구나 ‘진보적’ 작가로 인정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고 『진공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증오를 느끼면서 자신의 행위를 썼다. 어떤 이는 그 과정을 다음과
대』라는 작품 역시 ‘마이니치(每日)출판문화상’을 받고 곧바로 영화화되는 등 높은 평가를 받고
같이 회고했다. “이제 쓰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었다. 피해자인 중국 인민이 나로 하여금 쓰게
있었는데, 오니시는 군대를 타자화시킴으로써 개개인이 져야 할 책임을 모두 군대 탓으로 돌리
하고 있는 것이다.”29) 또 다른 이는 그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리고 미지의 세계로 뛰어드
게 만드는 무책임의 논리를 예리하게 간파했다. 하지만 당시 오니시의 주장은 잘 받아들여지지
는 기분으로 단숨에 고백했을 때, 그들은 중국인의 마음과 입장에 결정적으로 한발 다가섰다.
않았으며,32) 전쟁이나 군대를 타자화시켜서, 즉 그 구체적인 경험을 외면하면서 이루어지는 전
그 순간에 다시금 자기 손에 죽은 중국인의 삶의 분노, 원한, 통곡, 욕설이라는 것이 마치 무성
후의 ‘평화’ 감각은 오래 지속되었다.
영화가 갑자기 유성영화가 된 것처럼, 격류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중략] 이 시점에서 그들은 가
또 이러한 탄바이가 본격화되는 데 남들 앞에서 자신의 범죄행위를 말하는 것도 중요한 역 할을 했다. 1954년 4월에 39사단의 중대장이었던 미야자키 히로무(宮崎弘)가 관리소의 모든 전
25) 富永正三, 앞의 책, 62~67쪽. 26) 같은 책, 76쪽.
27) 中国帰還者連絡会編(1987), 앞의 책, 103~104쪽. 28) 같은 책, 122쪽.
29) 같은 책, 126쪽.
42
30) 같은 책, 154쪽.
31) 富永正三, 앞의 책, 4쪽.
32) 大西巨人, 「俗情との結託」 및 「再説 俗情との結託」 『俗情との結託: 大西巨人文藝論叢(上)』(東京: 立風書房, 1982). 오니시의 비판에 대해 노마 본인이 반론하기도 했지만 오니시가 무엇을 비판하고 있는지 파 악하지 못한 듯했다. 나중에 오니시는 ‘진공지대’가 아닌 군대 내무반의 양상을 장편 『신성희극』이라는 소설 로 형상화시켰다.
43
3. 국제학술대회 ㅣ 가해 경험을 말한다는 것: 일본 중국귀환자연락회의 사례
범과 직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이 저지른 잔학행위를 낱낱이 고백한 것이 그 시작이었는데
생(前半生)과 결별하여 전범관리소 생활 속에서 체험한 인도적 대우와 중국의 평화정책을 일본
이에는 거의 모든 전범들이 충격을 받았다. 무엇보다 중국인들 앞에서 그들의 증오심을 자극할
국민들에게 알리며 일중 우호를 실현하기 위해 힘을 모아 노력할 것.”36) 일본으로 돌아와 자유
수 있는 잔학행위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큰 용기와 각오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
로운 몸이 되었다고 그들은 결코 과거를 잊으려고 하지 않았다.
다. 그것은 “용암처럼 불타오르는 원한의 불길 속으로 살인마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자신의 몸
그러나 그들의 앞길은 험난했다. 경제기획청이 “이제 ‘전후’가 아니”라고 선언한 것이 바로
을 내던질 수 있느냐는 것, 그리고 어디까지 자기 몸이 견딜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목숨을
1956년이었는데, 자유당과 민주당의 통합에 의해 자민당이 생겨나고 사회당 좌우파도 통합해
건 ‘태도’의 문제”였다.33) 그래서 처음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금방 비슷한
오래 지속된 소위 ‘55년 체제’가 형성되었고 일본공산당이 6전협을 통해 폭력혁명 노선 포기를
방식으로 모두들 앞에서 자신의 행위를 고백하는 이들이 뒤따랐다. 말하자면 가해자들의 ‘미
천명하고 또 재일조선인 사회에서도 조선총련이 결성되어 패전 직후부터 조성되던 혁명적 분
투’가 시작된 것이다.
위기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귀국해 자신이 전쟁 중에 저지른 죄에 대해 이야
이와 병행해서 전범들을 기소하기 위한 준비작업도 진행되고 있었다. 1954년 3월에 최고인민
기하는 이들에 대한 일본 사회의 반응은 ‘중공에서 세뇌당한 이들’이라는 냉담한 것이었으며
검찰원은 700여 명으로 구성된 ‘동북공작단’을 푸순전범관리소에 파견해 범죄행위 조사에 착
공안조사청과 경찰에서도 이들을 감시 대상으로 삼았다.37)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그들은 1956
수했다. 이들은 전범들에 대한 심문도 진행했지만 결코 자백만에 의지하지 않고 광범위한 조사
년 10월에 ‘중국전범귀환자연락회’ 명의로 ‘중국전범 귀국기념 문화공연’을 개최해 자신들의 존
를 실시했다.34) 1955년 가을에는 조사가 끝나 동북공작단은 사형 70명, 무기 이하 110명의 기소
재를 알렸으며 이어서 ‘중국귀화자연락회(가칭)’ 임시상임이사회가 구성되어 조직화를 위한 본
장을 가지고 베이징을 향했다. 그러나 그들이 저우언라이로부터 듣게 된 것은 ‘단 1명의 사형이
격적인 움직임이 시작되었다.38)
나 무기형도 있어서는 안 되고 유기형도 되도록 소수로 해야 된다. 일반적인 죄를 지은 자는 불
이듬해 2월에는 전범들이 전범관리소 시절에 ‘창작활동’의 일환으로 쓴 수기들의 일부가 일
기소로 하라’는 지시였다. 처음에는 모두가 불만을 표했지만 저우언라이는 20년 뒤에 알 것이라
본의 한 출판사 손에 들어가 책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 제작 과정에는 임시상임이사회도 참여
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1956년 6~7월에 열린 최고인민법원 특별군사법정에서 푸순에서 기소된
해 전체 82편 가운데 15편을 골라 『삼광 (三光)』이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그들의 경험이 본격적
자는 36명에 불과해 나머지는 모두 석방되었으며, 기소된 이들도 징역 12~20년 정도의 ‘가벼운’
으로 일본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하는 첫 신호탄이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 책을 펴낸 고
형을 받았다 (그것도 1945년부터 구금되었던 11년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훨씬 짧았으며 대부분은 형기 만료
분샤(光文社)의 갓파북스(カッパブックス)라는 시리즈는 워낙 베스트셀러가 많긴 했지만,39) 이 책
이렇게 해서 1956년부터 1964년 사이에 병사한 1명을 빼고 자신의 가해 사실
은 언론에서도 많은 주목을 받았으며 20일 만에 초판 5만부가 다 나갈 정도였다. 하지만 이 책
전에 석방되었다).
35)
을 충분히 인지한 일본군 출신들이 모두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에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호국청년대라는 우익단체가 출판사를 찾아와 항 의하는 등 우익의 공경대상이 되었고, 출판사 사장도 그런 부정적인 견해에 동의하는 부분이
2. 가해의 증언자로서
전범들의 석방과 귀국은 1956년 7월부터 9월까지 세 번으로 나눠서 진행되었다. 7월 3일에 일본 마이즈루(舞鶴)에 도착한 첫 그룹 335명은 바로 ‘마이즈루 방침’이라고 불리는 것을 결의했는데, 그 첫 번째로 제시된 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후반생(後半生)은 잘못된 길로 들어선 전반
33) 中国帰還者連絡会編(1987), 앞의 책, 106~113쪽. 34) 金源, 앞의 글, 18~21쪽.
35) 新井利男, 「供述書はこうして書かれた」, 新井利男・藤原彰編, 『侵略の証言』(東京: 岩波書店, 1999), 274~275쪽.
44
36) 中国帰還者連絡会編, 『帰ってきた戦犯たちの後半生』(大阪: 新風書房, 1996), 26~27쪽. 전체 5개항 가운데 나머지 4개는 주로 생계와 관련되는 문제들이라 이념적 방향성은 여기에 집약되어 있다.
37) 吉田裕, 「なぜ日本は「侵略」という認識をもたなかったのか」, 岡部牧夫・荻野富士夫・吉田裕編, 앞의 책, 153~154쪽. 귀국한 지 1년 정도 지난 단계에서 중귀련 상인(山陰)지부가 회원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설문에 응답한 32명 가운데 경찰이나 공안조사관이 찾아왔다고 대답한 이가 19명으로 절반이 넘었다. 小林奈緒子, 「戦争体験といかに向き合うか」, 『山陰研究』4号(島根: 島根大学法学部山陰研究センター, 2011), 41쪽. 38) 中国帰還者連絡会編(1996), 앞의 책, 29~30쪽.
39) 탄광촌에서 생활하는 재일조선인 남매의 생활을 기록한 재일조선인 소녀의 수기 『작은 오빠(にあんちゃん)』 도 1959년에 이 갓파북스에서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45
3. 국제학술대회 ㅣ 가해 경험을 말한다는 것: 일본 중국귀환자연락회의 사례
있어서 잘 팔리는 책인데도 재판을 찍지 않았다.40) 하지만 전범 출신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출 판사와 서명을 바꾸고 내용도 약간 수정해서 이듬해에 『침략』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했다.41)
해 증언 활동에 초점을 맞춰 살펴보기로 하겠다. 초기부터 중귀련 회원들은 각지에서 ‘반전(反
戰)
강연회’ 연사로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특히 히로시마에서는 조직적·계획적으로 이 활동을
원래 『삼광』의 출판은 그들이 스스로 기획한 것이 아니었지만 이 경험은 그들의 가해 증언이
발전시켜나가고 있었다.46) 그러나 60년대 후반에 중귀련에 큰 시련이 닥쳤다. 문화대혁명을 시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이었다.
작한 중국공산당과 일본공산당이 심각한 대립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중귀련에도 중요한 존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1957년 9월에 전국대회를 열어 이제 공식적으로 중국귀환자연락회는
재였던 일중우호협회가 분열하게 된 것이다. 일중우호협회는 1950년 10월에 결성된 조직으로
출범했다. “전범으로 중국에 억류됐다가 귀환한 자로 모임의 목적에 찬성하는 자”를 회원으로
‘일본 국민의 잘못된 중국관의 시정’, ‘일중 우호를 통한 세계평화 공헌’, ‘일중 무역 촉진’ 등을
하며 회장은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고관이나 장성을 모시기 위해 당분간은 공석으로 남겨
내세워 아직 국교가 없던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우호 친선을 위한 운동을 펼쳤으며 거기에는 일
두었다. 일단 중국에서 전범으로 지냈던 천여 명을 모두 회원으로 하기는 했지만 실제 조직율은
본공산당 당원들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중일 양 공산당의 대립으로 인해 일본
50%안팎이었으며 이 상태는 그 뒤에도 변하지 않았다.42) 초기에는 회원들의 생활난을 해결하
공산당은 기존 일중우호운동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로 돌아섰고, 그런 가운데 1966년 10월에
기 위해 일본 정부에 대한 보상 요구 등 생계와 관련된 문제들이 많이 논의되었고, 일중우호, 반
발표된 일중우호협회와 중일우호협회 대표단의 성명서에 대한 승인을 둘러싸고 일중우호협회
43)
전평화에 대해서는 일본중국우호협회 등 다른 단체와의 공동보조가 강조되었다.
이때만 해
도 중귀련의 성격은 약간 애매한 것이었지만 1960년 10월에 열린 2차 전국대회에서 그 성격은
는 분열하게 되어 설명서를 지지하고 기본적으로 중국공산당 입장에 서는 이들이 ‘일중우호협 회 정통본부’를 ‘재건’했다.47)
분명해진다. 이때 개정된 규약 2조에서 “이 모임은 제2차 대전에서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에 참
이 공동성명에 대한 평가는 중귀련 내부에서도 구구했지만, 후지타 회장은 내부 논의에 앞
여하거나 이를 용납한 것에 대한 인도적 반성을 심화시키며 또 이를 국민들 속으로 확산시켜
서 이 성명서를 지지하는 입장을 밝히면서 일중우호협회 정통본부 고문에 취임하는 등 독단적
평화와 일중우호에 공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했고, 3조에서는 사업으로서 “침략전
인 행보를 보였다.48) 이어 1967년 2월에 이 문제는 중귀련 본부 상임이사회에서 논의되었지만
쟁의 죄악에 대한 반성을 심화시키기 위한 학습과 이를 확산시키기 위한 활동”을 첫 번째로 꼽
결론을 내지 못했고, 그 뒤 후지타 회장, 구니토모 슌타로(國友俊太郞) 부회장 등 핵심 간부들을
았다. 또 이때 회장으로 59사단 사단장이었던 후지타 시게루(藤田茂) 전 중장이 선출되었다.44)
포함한 12명의 명의로 된 ‘중귀련 회원 제군에 대한 긴급 호소’라는 문서가 발표되었다. 그 문서
1889년생인 후지타는 이때 이미 70대였지만 중장이라는 높은 지위와 그가 보인 깊은 반성 때문
는 중귀련 본부 상임위원회가 실질적으로 분열되어 있어서 이미 그 기능을 상실했다고 진단하
45)
인 것으로 보인다.
이리하여 중귀련은 임원진도 모두 구성되고 노선도 정립되기에 이르렀다.
면서 중귀련을 재건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었다.49) 그리고서 1967년 11월, 일방적으로 ‘중국
초기 중귀련에서는 일본 정부에 대한 보상 요구를 둘러싸고 내부에서 많은 논쟁이 있었고
귀환자연락회 정통본부’를 만들었다.50) 이렇게 중귀련은 ‘정통’을 자처하는 이들과 남겨진 이들
그것이 뒤에 조직이 분열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했지만, 이번 발표에서는 우선 그들의 가
로 쪼개졌다. ‘정통’측은 ‘중국 일변도’를 내세워 일중우호운동을 더욱 열성적으로 밀고 나갔는 데, 그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가해 증언’과 관련해 남겨
40) 中国帰還者連絡会編(1996), 앞의 책, 35~37쪽; 吉田裕, 앞의 글, 155~156쪽. 41) 中国帰還者連絡会編(1996), 앞의 책, 38쪽. 42) 같은 책, 31쪽.
46) 中国帰還者連絡会編(1996), 앞의 책, 118쪽.
44) 같은 책, 73~75쪽.
48) 中国帰還者連絡会編(1996), 앞의 책, 143~145쪽.
43) 같은 책, 55~57쪽. 45) 그는 1954년 8월에 쓴 자술서에서 마지막에 자신의 범죄행위에 대한 인식을 이야기한 다음 “마지막으로 나는 나로 하여금 이런 범죄를 저지르게 만든 히로히토에 대해 진심으로 증오와 투쟁을 선언하고자 하는 바이다”로 글을 맺었다. 新井利男・藤原彰編, 앞의 책, 39쪽.
46
47) 일중우호협회에 대해서는 일단 [社]日中友好協会編, 『日中友好運動五十年』(東京: 東方書店, 2000) 참조. 49) 같은 책, 145~147쪽.
50) 같은 책, 157~162, 352쪽.
47
3. 국제학술대회 ㅣ 가해 경험을 말한다는 것: 일본 중국귀환자연락회의 사례
진 이들, 즉 ‘중련’51)의 활동을 중심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정통’과 ‘중련’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
법정에 섰을 때도 그는 최종진술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을 극형에 처해 달라며 청중들에게 사
할 때, 중귀련 활동의 두 가지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일중우호와 반전평화 가운데 대체로 ‘정통’
죄했다. 결국 15년 형을 받은 그는 형기만료 전인 1959년에 석방되어 귀국했다.55) 그런 자신의
이 일중우호를, ‘중련’이 반전평화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이 장의 주제인 ‘가해 증언’은 바
경험을 담은 그의 책은 계속 판을 거듭했으며 ‘전일본 학교도서관 선정 도서’에도 지정되어 널
로 반전평화 활동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리 읽혔다.56) 또 이어서 ‘중련’ 상임위원 중 1명이며 1983년부터 2002년 중귀련 해산 직전까지
‘중련’은 분열 이듬해인 1968년에 바로 ‘일중 불재전(不再戰) 운동’을 전국적으로 벌였으며, 베 트남에서 미군이 저지른 학살에 항의하는 집회에도 조직 차원에서 참여하는 등 중일관계로 한
무엇인가 (あるBC級戦犯の戦後史: ほんとうの戦争責任とは何か)』를 펴내 ‘전쟁책임’에 대해 일본 사회
또 1970년에는 『침략: 종군병사의 증언』이
에 중요한 질문을 던졌고, 이 책 역시 많은 호응을 얻었다.57) ‘정통’ 측에서는 이런 출판 활동을
라는 증언집을 펴냈는데 금방 2만 부가 나갔으며 언론에서도 이들의 증언에 많은 관심을 보였
“개인플레이이며 자기선전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공격하기도 했지만 ‘중련’은 출판 활동을 주요
다.53)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들의 증언 활동이 중국 정부와의 관계를 떠나서 진행되었
활동으로 삼아 그 뒤에도 수기 출판을 이어나갔다.58)
정되지 않는 반전평화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52)
회장을 맡게 될 도미나가 쇼조도 1976년에 수기 『한 BC급 전범의 전후사: 진정한 전쟁책임이란
다는 점이다. 물론 이들도 일중우호를 원했지만 ‘정통’에 의해 ‘반중국분자’라는 공격을 받기까
1986년에 중귀련이 다시 통일된 뒤에도 이런 기조는 유지되었다. 특히 1988년에 천황 히로히
지 했던 상황 속에서 이들은 자율적으로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여건 속에서 그들이
토가 위독해지면서 언론이 그를 ‘평화주의자’로 치켜세우는 상황이 벌어지자 중귀련은 당면의
스스로 가해 증언을 주된 활동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것이야말로 이들의 ‘런쭈이
활동방침으로 ‘천황제 반대’를 내세워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그들이 천황을 비판하는 방식
(認罪)’가
역시 천황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자신들의 가해 경험을 공론화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푸순전범
자발적인 것임을 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런 활동은 1974년에 새로 ‘중련’ 회장에 취임한 시마무라 사부로(島村三郞)가 자신의 경험
관리소에서 쓴 수기를 모아 『천황의 군대 <중국 침략>(天皇の軍隊<中国侵略>)』을 펴냈는데 당시
을 적은 수기 『중국에서 돌아온 전범(中国から帰ってきた戦犯)』(1975)을 펴내는 것으로도 나타났
회장이었던 도미나가는 후기에서 “우리는 천황의 명령에 의해 저질러진 자신의 전쟁 범죄에 따
다. 교토제국대학을 나와 만주국에서 경무총국 특무처 조사과장을 지낸 시마무라는 전범관리
라, 그 책임의 일단을 맡은 사람으로서 우리의 피해자들에게 천황의 전쟁책임을 추궁할 의무가
소에 수용된 뒤에도 감시병과 싸우며 ‘침략전쟁은 국가가 한 것이고 자기는 말단 관리로서 명령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히로히토가 사망한 1989년에도 수기를 모아 『침략, 학살을 잊지 않
과 법에 따라 직무를 집행했을 뿐이니 책임은 국가가 져야지 내가 질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었
는다 (侵略、虐殺を忘れない)』는 펴냈다.59) 그들은 스스로의 가해 책임을 지는 방법으로 그 명령자
고,54) 자신의 범죄 사실에 대해서도 이미 잊어버린 것을 어떻게 기억하라는 거냐며 계속 저항
의 책임을 추궁한 것이다.
했다. 하지만 밑에서 일하던 부하들의 추궁을 받으면서 서서히 자신의 행위에 대해 말하기 시
사실 중귀련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시기는 이때부터 10여 년 동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작했다. 그런데 그가 결정적으로 변하게 되는 계기는 따로 있었다. 1954년 말에 중국홍십자회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자위대 해외 파병에 반대하는 운동에도 참여하는 등 반전평화 운동
일본인 전범들의 명단을 일본 측에 건넸고 이듬해에는 일본과의 서신왕래가 가능해졌는데 이
단체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하면서 가해 증언도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90년대 중반
때 시마무라도 아내에게서 편지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 편지를 통해 그가 접하게 된 것은 아
부터 ‘자유주의사관연구회’,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등 역사수정주의가 본격적으로
들의 죽음이었다. 그것을 계기로 그는 ‘피해자’들의 아픔을 더욱 느낄 수 있게 되었고 기소되어
모습을 드러내자 중귀련은 1997년에 『계간 중귀련』을 발행해 그 흐름에 맞서고자 했다. 대중적
51) 그들은 중귀련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지만 ‘정통’과 구별하기 위해 이 시기 중귀련에 대해서는 ‘정통’과 ‘중련’이라는 호칭으로 구별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이 글에서도 그것을 따랐다. 52) 中国帰還者連絡会編(1996), 앞의 책, 363~364쪽. 53) 같은 책, 368~371쪽.
54) 中国帰還者連絡会編(1987), 앞의 책, 52~55쪽.
48
55) 崔仁傑, 「将官佐官級の日本戦犯の改造」, 中国帰還者連絡会訳編, 앞의 책, 78~89쪽. 56) 中国帰還者連絡会編(1996), 앞의 책, 393~394쪽. 57) 같은 책, 414~415쪽.
58) 같은 책, 420~421쪽.
59) 같은 책, 580~583쪽.
49
3. 국제학술대회 ㅣ 가해 경험을 말한다는 것: 일본 중국귀환자연락회의 사례
으로 침략의 역사가 부정되는 상황에 대항하기 위해 자신들의 경험을 보다 광범위하게 알리려
며 침략전쟁에 반대하고 진정한 일중우호를 실행하자”를 구호로 내거는 등 65) 마오에 대한 ‘일변
고 한 것이다. 그 결과 창간호는 7000부가 나가 이런 매체의 필요성을 확인시켜주었다.60)
도’를 분명히 했다. 그런데 이런 자세는 중일간의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곧바로 문제를 드러냈다.
또 90년대 활동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위안부 문제’에 관한 사업이다. 그들은 1992년부터
국교 정상화는 중국 정부가 일본 정부를 대화 파트너로 인정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정통’에
위안소에 관한 증언을 하기 시작했고 조직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증언을 하기로 했다.61) 2000년
서도 일본 정부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66) 심지어는 중
에 도쿄에서 열린 여성국제전범법정에서도 중귀련 회원 2명이 증언에 나선 것도 그런 흐름에서
국 정부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오늘날에는 소련 패권주의가 가장 위험한 적이며 미중이 접
나온 것이다.62) 성폭력의 문제를 가해 당사자가 공개적으로 증언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기 때문
근하고 일중 관계가 정상화되어 안보조약조차 일정한 평화유지 역할을 담당하는 현상 (現狀)”
에 이들의 활동은 중요한 의미를 지녔지만, 중귀련 전체에서 봤을 때 회원들의 호응이 충분했다
이라는 인식을 보이기까지 했다.67) 또 ‘정통’ 측의 가해 증언에서는 자신이 하지도 않은 것에 대
고 보기는 어렵다. 중귀련에서는 회원들에게 ‘위안부 조사카드’를 작성해줄 것을 2년에 걸쳐 요
해 ‘증언’을 하게 되는 경우까지도 나타났는데,68) 이런 문제들이 발생한 원인은 그들이 추구한
청했지만 실제 카드를 만들어서 제출한 이는 조직회원 가운데 15%에 지나지 않았다.63) 여기에
‘연대’, 즉 ‘일중우호’가 ‘중국’의 입장을 거의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는 그들이 주로 ‘런쭈이(認罪)’ 대상으로 생각한 것이 ‘중국 인민’에 대한 ‘침략행위’였다는 점이
이것은 ‘가해자’가 ‘피해자’와 연대하려고 할 때 흔히 나타날 수 있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정통’
반영된 듯하다. 우리가 지금 중귀련에 대해 생각한다면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으
의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를 통해 어떤 ‘연대’를 만들어
로 보인다.
낼 수 있을지 고민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일 것이다.
3. 좀 더 고민해야 할 것들
2) ‘중국’이란 누구인가
1) ‘가해자’와 ‘피해자’는 연대할 수 있는가
또 ‘정통’뿐만 아니라 중귀련 자체가 전체적으로 ‘중국’에 대한 죄의식과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정통’의 경우에는 그것이 너무 강하게 중국 정부에 대한 지지로 나타났지만
이번에 열리는 시민평화법정은 ‘연대의 법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대등
그 정도가 덜했던 ‘중련’의 경우에도 ‘중국’이라는 단위로 생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
하지 않은 관계 속에서 연대란 가능할까? 이 점에 대해 ‘중귀련(정통)’이 보인 행태는 많은 고민
점과 관련해 꼭 생각해봐야 할 점이 있다. 그들을 푸순에서 직접 ‘교육’했던 이들이 어떤 사람들
거리를 던져준다. 앞서 간략하게 언급했듯이 중귀련은 1967년에 ‘정통’과 ‘중련’으로 분열했다.
이었느냐는 문제이다.
‘정통’은 ‘재건대회’에서 규약을 개정해 ‘활동’ 항목에 “마오쩌둥 사상을 옹호하며 단결을 강화시
푸순전범관리소에서 일본인 전범들을 ‘교육’하기 위해서는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반드
키기 위한 여러 활동”을 추가했으며64) 1970년에 열린 전국회의에서는 “마오쩌둥 사상에 감사하
시 필요했다. 그런데도 초기에는 일본어가 가능한 이는 3명밖에 되지 않았고, 그 3명 가운데 일 본 유학 경험이 있는 장멍스 1명을 제외한 나머지 2명은 사실 조선족이었다.69) 처음에 전범들
60) 石田隆至, 「戦争の反省はどのように受容されたか」, 『社会イノベーション研究』第10卷第1号(東京: 成城大 学社会イノベーション学会, 2015), 113쪽.
65) 같은 책, 169쪽.
62) 吉田裕, 앞의 글, 162쪽.
67) 같은 책, 211쪽.
61) 中国帰還者連絡会編(1996), 앞의 책, 667~671쪽.
63) 中国帰還者連絡会編(1996), 앞의 책, 670~671쪽. 64) 같은 책, 161~162쪽.
50
66) 같은 책, 182쪽.
68) 같은 책, 195쪽.
69) 吳浩然, 앞의 글, 126쪽.
51
3. 국제학술대회 ㅣ 가해 경험을 말한다는 것: 일본 중국귀환자연락회의 사례
이 중국 측으로 인계될 때부터 통역으로 참여했던70) 김원(金源)은 교육과 과장, 부소장을 거쳐
나오며
소장까지 지낸 푸순전범관리소의 핵심 인물이었으며,71) 김원과 함께 처음부터 전범관리소에서 일한 오호연(吳浩然)72)은 “전범들에게 가장 다정하고 가장 따뜻하게 대한” 사람으로 기억될 정
이상 간략하게나마 중귀련의 사례를 통해 ‘가해자’가 어떻게 ‘가해 경험’을 제대로 인지할 수
도로73) 전범들과 가깝게 지낸 인물이었다. 그리고 1952년 겨울부터 일하게 된 최인걸(崔仁傑)74)
있게 되었는지, 또 그 경험을 어떻게 공론화해나갔는지 살펴보았다. 지금 ‘미투’의 파도 속에서
도 일본어가 가능했기에 전범들과 아주 가까이 지냈다. 그들 외에도 조선족인 사람들은 더 있
도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자체에, 그 아픔에 공감하는 것 자체에 거부반응을 보
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중요한 것은 중귀련 회원들이 그들에 대한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이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피해자’ 관점에서 ‘가해 경험’을 이야기하는 중귀련 사람들에게 ‘세
있으면서도 그들이 조선족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귀련 40년의
뇌당했다’는 딱지를 붙여서 거리를 두려고 한 일본의 적지 않은 이들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마
발자취를 기록한 책에서도 오호연의 훌륭한 인간상을 언급하면서 바로 이어지는 말은 “중국
지막에 지적한 것처럼 그들의 활동에도 당연히 한계가 있다. 하지만 이런 ‘가해자의 미투’가 실
인민의 위대함에 압도”당했다고 되어 있다.75) 또 중귀련 마지막 사무국장을 지낸 다카하시 데
제로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는 충분히 기억될 가치가 있다.
쓰로(高橋哲郞)는 “특히 일본어가 유창한 교육지도 담당자로서 우리를 접한 3명, 金源 씨, 吳浩 然 씨, 崔仁傑 씨는 잊을 수 없다”고 쓰면서 각각 인명에는 “きんげん”, “ごこうぜん”, “さいじん 76) けつ”라고 발음을 표시했다. 이는 그들을 ‘중국인’으로 다루고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그들 스
베트남전에서 민간인을 학살하고도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이 사회에 분명히 존재 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이 입을 열고 ‘피해자’들과의 관계를 다시 만들 수 있는 계기를 마 련할 수 있을까. 이 자리에 모인 분들과 함께 논의했으면 한다.
스로도 ‘중국인’으로 행동했을 테지만,77) 그렇다고 그들이 왜 유창한 일본어를 할 수 있는지 전 범들이 고민한 흔적은 찾기 힘들다. 그들은 중국에 대한 침략에는 분명한 죄의식을 가지고 있 지만, 그 전제조건이자 침략 과정과도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식민지배에 대해서는 별다른 인식 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소극적 반응 역시 이런 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피해자’를 ‘중국’ 또는 ‘중국 인민’으로 인식하는 데서 오는 시야협착이 존재하는 것 같다. 가장 가까이 지낸 이들에 대한 이 상상력의 결여를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될까.
70) 金源, 앞의 글, 5쪽. 71) 같은 글, 1쪽.
72) 吳浩然, 앞의 글, 116~117쪽.
73) 中国帰還者連絡会編(1996), 앞의 책, 291쪽. 74) 崔仁傑, 앞의 글, 75쪽.
75) 中国帰還者連絡会編(1996), 앞의 책, 675쪽.
76) 高橋哲朗「帰国後の元戦犯たちの歩み」, 岡部牧夫・荻野富士夫・吉田裕編, 앞의 책, 168쪽.
77)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를 ‘조선인’이 아니라 ‘중국인’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김원은 1949년 에 국공내전이 끝난 뒤 연변으로 가서 살 생각을 했었으며, 푸순전범관리소로 갈 것을 지시받았을 때도 차라 리 조선으로 보내 달라고 했던 것처럼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분명했다. 김원, 『기구한 인연』(한울, 1995), 83, 102~103쪽.
52
53
3. 국제학술대회 ㅣ 법정에서 하지 못한 이야기 1 - 왜 법정에서도, 법정 밖에서도 이야기해야 하는가
법정에서 하지 못한 이야기 1
그렇다면 법정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의 한계와 법정에서 이야기하지 않는 것의 한계 사이
- 왜 법정에서도, 법정 밖에서도 이야기해야 하는가
에서, 피해를 드러내면서도 피해자다움에 가두지 않는 이중적 과제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 가. 그 가능성은 법적 재현이 유일한 재현이 아니라는 데 있다. 법정에서 법적 판단을 위한 증언 이 이루어지는 방식, 법정에서 사실관계를 구성하는 방식, 법적 문서에서 피고를 표현하는 방 식 등을 통해 대상이 재현되는 방식을 ‘법적 재현’이라고 할 때, 학문과 예술의 영역에서 이들이 재현되고 주체성이 구성되는 방식을 ‘학문·예술적 재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이중적 과제는 법적 재현과 학문·예술적 재현 사이의, 일종의 역할 분담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법적 재현만이 유일한 재현이 될 경우에는 주체의 행위성이 지워질 우려가 있다. 하지만 법적인 재현
이경빈 (시민평화법정 조사팀)
을 바탕으로 할 때, 주체가 사회적 존재로서 나타나고 이를 바탕으로 보다 섬세한 재현이 시작 될 수 있다. 이 때 이야기되는 것들은 지금까지 국가가 법적책임을 가리는 맥락에서 언급하는 개인들의 다양성과 전혀 다른 역할을 할 것이다. 즉, 법의 영역에서 구조적 피해가 단단하게 밝 혀질 때 다채로운 목소리들이 왜곡되지 않고 들릴 수 있다는 점에서 법적 재현은 다른 영역에
법정에서 하지 못하는 이야기는 무엇이며, 왜 해야 하는가. 반대로 왜 한계에도 불구하고 법정 에서도 이야기해야 하는가. 기존의 역사쓰기와 담론구조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목소리 1)
서 재현의 사회적 토대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영역 분화의 필요성을 인정하더라도, 오해의 두려움 때문에 충분한 법적 재현이 이
를 내기 힘든데, 이러한 문제는 이들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루어지고 난 이후에야 보다 섬세한 재현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피해자성을 인정받
우리는 그에 대한 답으로, 학살 생존자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법정을 열고 있다.
기 전에 다양한 경험과 목소리를 이야기 하는 것은 피해자성을 지울 우려가 있다면서 ‘아직은
그런데 우리는 법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법이 이들의 목소리를 온전히 담기 힘들다는 점
이르다’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한다. 하지만 법적 재현과 학문·예술적 재현의 보충적 관계를 시
을 느꼈다. 이들은 자주 무력한 피해자로 표현될 수밖에 없고, 증언을 듣는 자리에서는 이들이
간적 선후 관계를 통해 이룰 수는 없다. 어떤 재현의 과정은 당사자 스스로의 주체성이 구성되
말하고자 하는 다른 이야기들을 빠르게 뛰어넘으면서 사실관계를 거듭 확인해야 한다. 사실,
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주체성은 본질적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발견해서 드
법은 여러 담론구조 중에서도 더욱 고정적인 담론이자 보편규범이기 때문에 주체의 목소리가
러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생산되고 변화되는 지속적인 과정에 있으며, 생존자의
온전하게 담기기는 더욱 힘들어 보인다. 기존 법의 언어에 맞추어 피해자성이 주요하게 재현되
기억과 주체성 역시 사회 규범의 영향을 받으면서 현재의 맥락에서 구성되는 것이다.2) 법적 피
고 생산되는 과정은 재현의 다른 측면들이 지워지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해만을 중심으로 한 증언과 운동 이후에, 그 기억과 주체성은 법적 피해를 중심으로 한 것일 수
그렇다면 이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시민법정이라는 형식을 빌려 법적 운동을 하는 것은 언뜻 모순으로 보인다. 개인들의 서로 다른 이야기에 주목하면서, 이들을 피해자로서 묶지 않는
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으로 특정한 방향의 재현이 형성되고 나면 다시 변화를 이끌어 내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것이 더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하는 고민이 이어진다. 하지만, 재현의 불완전성을 무릅쓰지 않는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가해자’로 불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생각해보
것은 곧 이들을 영원히 재현되지 않는 개인들로 남겨두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 구조적 피해
고자 했다. 법정에서 피고는 대한민국이지만, 어떤 ‘잘못’을 밝히고자 할 때는 가해경험에 대해
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자발적 행동의 이야기나 ‘피해자답지 못한’ 모습들은
일반병사였던 사람들을 추궁할 수밖에 없었다.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두려운 적
역사구조적 문제를 지우는 데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으로서 베트콩과 순수하고 무력한 피해자의 이미지 사이에서 진동할 수밖에 없었다면, ‘가해
1) 양 현아, 「증언과 역사쓰기: 한국인 ‘군 위안부’의 주체성 재현」, 『사회와 역사 제60권』,(2001년), 61-62쪽.
2) 양 현아, 앞의 글, 62-63쪽.
54
55
3. 국제학술대회 ㅣ 법정에서 하지 못한 이야기 2
자’들은 한편에서는 애국자로 한편에서는 지나치게 무섭거나 우스꽝스러운 참전군인으로 남아
법정에서 하지 못한 이야기 2
있다. 이번 세션에서는 조사팀의 경험을 따라가면서 조사팀에서 했던 고민들을 나누고자 했다. 조사팀은 기본적으로는 법정을 위한 법적 증거를 함께 준비하면서도 동시에 어떤 이야기들이 법정에서 빠지게 되는지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그 과정에서 시도했던 것과 생각했던 점 들을 담아 이야기할 것이다. 첫 번째로 ‘피해자’의 측면에 주목해서, 베트남 현지에 방문해 증언 장한길 (시민평화법정 조사팀)
을 듣는 과정에서 했던 고민들을 이야기할 것이다. 두 번째로, ‘가해자’의 측면에서 이야기하고 자 한다. 그중에서도 먼저, 법정에서 다루지 못한 더 큰 구조적 차원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우리는 한국의 법정에서 다룰 수 있는 차원의 문제들에 집중할수록 더 근본적으로 느껴지는 미국의 책임 문제를 간과하게 되는 것 같은 느낌 속에서 고민했다. 다음으로는, 한 참전군인과 의 만남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것이다. 어떤 참전군인과의 만남은 우리가 가져왔던 ‘참전 군인’상에 균열을 가져왔다. 나아가, 역사적 사건에 대한 당사자들을 대할 때 그들의 일생을 특
프랭크 볼드윈과 미군에 대해
정한 시간에 가두게 되는 문제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법정에서 하는 이야기를 통해, ‘피해자’들이 ‘순수한 민간인’임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조사팀 작업 중, 한국군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에 대해 기록한 보고서 「미국의 용병들: 베트남
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 설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한 ‘가해자’의 자리에서 행해졌던 일들이 명확
에서의 한국군」(America’s Rented Troops: South Koreans in Vietnam)의 저자인, 미국 퀘이커 봉
하게 밝혀지기를 바란다. 동시에 우리는, 법정 밖에서 하는 이야기를 통해 ‘피해자’들의 다채로
사위원회
운 목소리가 들리기를 기대한다. 또, ‘가해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그 자리에 있었던 특정한
이클 존스 부부와 공동작업을 진행한 프랭크 볼드윈과 연락이 닿았다. 볼드윈은 콜럼비아 대학
개인들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그 자리에 대한 질문으로 바뀌기를 바란다. 법정에서 하는 이야
에서 한국학을 전공하는 박사과정생이었고, 한국군 파병당시 한국에 머물고 있었으며, 더 뉴
기는 그 자체로 불완전하지만, 이 문제를 어떤 시작점에 놓이게 해 줄 것이다.
리퍼블릭(The New Republic) 등의 매체에 기고해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과 한국군 파병의 원인이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에서
사이공으로 파견되었던 다이앤 존스와 마
기도 했던 ‘많은 깃발’(More Flag) 정책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퀘이커 보고서에 볼드윈 이 작성한 글은 한국군 파병에 대한 정치적 배경에 대한 서술이었고, 존스 부부의 보고서의 맥 락을 짚는 역할을 했다. 유창한 베트남어로 사이공에서 베트남인 난민들과 면담을 진행하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에 대해 보고서를 직접 작성한 존스 부부와 연락이 닿을 수 있었다면 법정에 있어서도 더 구체 적인 증언 및 증거를 확보할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존스 부부를 찾아내는 것은 실패했다. 볼드윈 자신도 몇 년 전 그들을 찾아보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볼드윈이 마지막으로 보낸 이메일에서 강조했던 것은 시민법정이 꼭 미국의 책임까지 물을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는 것이었다. 볼드윈뿐만 아니라 다른 관련분야 문헌에서 드러나듯, 한 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문제는 구조적으로 미국 내 정치적 배경과 긴밀하게 엮여있다. 한
국군만이 특별히 잔인한 학살을 자행한 것은 아니었다. 베트남전 당시 펜타곤 산하 TF였던 베
56
57
3. 국제학술대회 ㅣ 법정에서 하지 못한 이야기 2
트남전쟁범죄연구단의 연구자료가 몇 년 전 기밀해제됨에 따라, 미군에 의한 무차별 총기난사,
는 분도 계셨고, 계속되는 진술요청에 장사를 일찍 접고 오셨어야 해서 언짢은 표정을 하고 있
민간인 학살 및 강간이 상습적으로 이루어졌고, 미라이 학살은 이들 중 영상자료가 남아 대대
으셨음에도 열심히 응해 주셨던 분도 계셨고, 귀찮게 구정기간까지 자꾸 왜 찾아오냐며, 진술
적으로 보도가 된, 빙산의 일각이었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졌다. 이러한 상황을 조성했던 미국
한다고 자신들에게 득이 되는게 있냐고 역정을 내시는 분도 있었고, 진술 도중 학살을 직/간접
정치계 및 군내 구조적 요인들이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과 무관하다는 것은 매우 설득력
적으로 경험했던 마을 이웃들이 지나가는 길에 자신의 이야기를 보태려고 하기도 했다. 자신의 마을이나 집 근처에서 매우 편안한 표정과 몸짓으로 진술을 하던 그분들의 모습이
이 떨어져 보인다. 1968년 베트남 중부 꽝남성에서 여러 차례 일어났던 남베트남 민간인에게 가한 한국군의 만
법정에 섰을 땐 매우 다를 거라는 것을 꼭 말하고 싶었다. 우리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법률적 접
행은 미군 내 감찰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듯, 양국 간의 정치적 이슈가 되었다. 하지만 이미 베트
근에서는 소홀해 질 수 밖에 없던, ‘위안부 이후의 삶’, 혹은 ‘증언대 밖의 모습’에 주목하기 시작
남전 개입에 우호적이지 않았던 여론을 인식한 미국에서는, 여론을 악화시킬 수도 있는 이 건
한 것은 매우 최근의 일이다. 증언은 이들의 삶을 다 담아내지는 못한다. 마찬가지로, ‘학살 이
을 무마하려는 식으로 조사를 황급히 마무리하고 관련 사안을 한국군에게 이관했다. 채명신
후의 삶’, 그리고 증언으로 이야기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이 자리를 통해 주목해 보고 싶
은 이를 “한국군으로 위장한 베트콩의 만행”이라고 보고했다. 또한, 구정대공세
(Tet Offensive)
었다.
이후 전쟁의 승기를 잡으려고 무리한 반격 공습작전을 구상해 민간인 피해를 야기한 베트남 군 사원조사령부 사령관 웨스트모어랜드의 지시가 한국군에게 무관하게 작용했다고 볼 수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볼드윈이 지적했듯 애초에 많은 경제적 및 군사적 지원의 댓가로 한국군 파 병을 요청하게 한 것은 당시 베트남 파병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었던 미국 내 여론을 우회하기 위해 구상되었던 존슨 정부의 ‘많은 깃발’(More Flag)정책이었다. 볼드윈의 소망을 법정에서 직 접 다룰 수 없었지만, 이 자리에서라도 꼭 언급을 하고 싶었다.
학살 생존자의 ‘그 후’의 삶에 대하여
사실 법정 밖에서만 할 수 있는 생존자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에게 부적합한 일일 수도 있 다. 현지조사를 다녀온 조사팀원들 중 베트남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고, 이 들의 삶을 좀 더 총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베트남의 당시와 지금에 대한 깊은 맥락을 짚어낼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다루고 싶었다: 법정에서 학살 생존자들은 피해자로만 규정될 수 밖에 없 으며, 따라서 이들의 수동성에 초점이 맞춰지고, 반대로 학살 이후에 이들이 어떤 존재인지, ‘피 해자’라는 수식 외에 얼마나 다양한 결을 지니고 있는 사람인지는 다뤄지지 않는다. 학살 이후, 특히 남베트남 지역의 민간인 학살 생존자들은 통일된 베트남 정부가 만든 ‘영웅적 항미전쟁’ 이라는 공식 서사의 그늘에서, 그리고 이후 펼쳐진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제대로 된 보상이 나 사과를 받지 못한 와중에도 꿋꿋하게 살아왔다. 학살 당시 상황을 진술하면서 눈물을 흘리
58
59
3. 국제학술대회 ㅣ 우리가 만난 참전군인 - 참전군인 A와 ‘함께 말한다’는 것
우리가 만난 참전군인
그에게 호주 원주민 어보리진에게 행해진 19세기의 학살에 대해 어떤 심리적 수준의 책임이 발
- 참전군인 A와 ‘함께 말한다’는 것
생할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에 대해 그는 자신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한 관계, 즉 과거와 나와의 관계인 ‘연루’를 강조한다. 자신의 집이 학살된 어보리진의 토지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빼앗긴 것을 물려받았다’는 관계에 놓여 있고, 자신이 얻은 경험과 지식 속에 학살과 그 후의 역사가 불러일으킨 차별적인 고정관념이나 이미지가 들어있는 한, 그 학살과 역사에 ‘연루’되어 있다고 말이다. 반면, ‘책임’은 ‘내가 일으킨 무언가’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라는 주체의 문제라는 점에서, 그것은 미래와 나와의 관계이기도 하다.1) ‘연루’는 ‘책임’을 상대화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책임’과 ‘연루’는 상반되는 혹은 선택의 심아정 (시민평화법정 조사팀 간사)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좁은 의미에서의 책임이 직접적인 가해자에게 물어지는 것이라면, ‘연 루’를 통해서 오히려 그 책임의 범위가 확장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연루’는 새로 운 관계성을 만들어내는 정치적 개념이 될 수 있을까? 기존의 법적 책임을 묻는 것과는 다른
“누가 이들을 만나게 했을까. 아주 멀리 살고 있던 사람들, 서로에게 어떠한 원한도 증오도 갖고 있지 않았던 이들은 어떻게 만나 죽고 죽이게 되었을까. 어떤 이유로. “ (김현아, 『전쟁의 기억 기억의 전쟁』, 6쪽.)
차원에서, 즉 어떤 사태에 대한 ‘응답가능성(response+ability)’ 으로서의 책임 문제를 제기하는 관점을 ‘연루’에 도입한다면, 이때의 ‘책임’은 국적을 달리한다 하더라도 가질 수 있는 것이 되지 않을까? 당사자와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조차도 응답하게 만드는 다른 종류의 책임. 이러한 ‘응 답가능성’을 염두에 둘 때 ‘연루’의 의미는 비로소 느슨하더라도 조금 더 적극적인 것으로서 모
0. 프롤로그
색될 수 있지 않을까?
참전군인 당사자가 아닌, 더군다나 전쟁을 겪어본 경험도 없는 사람들이 ‘민간인학살’에 대 한 가해자성을 우리 혹은 나의 문제로 공감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실제로 지난 2월 베트
2. ‘가해자성’을 느낀다는 것
남에서 피해 생존자들을 만났을 때 느꼈던 감정은, 가해국 국민으로서의 자책감 따위가 아니 었다. 눈물이 났던 건 한국인인 내가 베트남 피해자를 만나 느끼게 된 미안함이라고는 말할 수
‘가해자성’을 느낀다는 건 필시 불편한 감정일 것이다. 그러나 ‘가해자성’ 그 자체는 매우 명료하
없는 이유에서였다. 참전군인을 만나 인터뷰를 할 때도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너무나 커다란
다. 그것은 어떤 행위에 대한 인정이다. ‘피해’라 불리는 상황을 일으킨 어떤 행위에 대한 인정
‘우리’라는 간극 앞에서 그저 막연하게 가슴이 아팠다. 피해생존자와 참전군인. 그들과 우리는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러한 행위로 어떤 결과를 일으킨 혹은 그것에 가담한 자로서 자기
어떻게 ‘우리’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베트남전쟁이라는 과거의 시공간에 어떻게 ‘연루’
자신에 대한 인정이 포함된다. 그래서 가해자가 된다는 건 주체의 자리에 서는 것이기도 하다.
되어 있는 걸까.
‘행위’에 대한 가치판단은 그 ‘행위’를 인정한 다음에야 비로소 개입의 여지를 갖게 되는 것 아 닐까? 사실, ’가해자성’을 당위나 보편의 차원에서 인식하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자기의 삶과 구체
1. ‘책임’과 ‘연루’ implication
테사 모리스 스즈키는 20여년 전에 호주로 이주해온 이민자로 호주 국적을 가지고 있다. 그런
60
적인접점이 있어야 겨우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가해자임을 인정할 수 없는
1) 다 카하시 데쓰야 지음, 김성혜 옮김, 『사고의 프런티어1-역사/수정주의』(푸른역사, 2015년), 44~45쪽.
61
3. 국제학술대회 ㅣ 우리가 만난 참전군인 - 참전군인 A와 ‘함께 말한다’는 것
이유로, 자신이 ‘모르고 한 일’이라는 말을 한다. 의식적으로 선택해서 한 것이 아니면 가해라 고 볼 수 없고, 가해자성을 느낄 필요도 없다는 식의 논리다. 예를 들어, 최근의 미투운동의 맥 락에서도 대부분의 가해자들은 무의식적으로 했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책임 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해를 가했던 것이 반드시 자신이며, 그것에 대한 기억 또한 생생해야만 ‘가해자’의
3. 가해자 스스로가 바뀐다는 것 - 참전군인 A의 사례 인터뷰 작업은 기존의 참전군인 서사의 토대에서 출발했지만, A를 만나면서 우리의 시각과 방
법론은 적잖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호탕하고 당당해 보이는 첫인상의 A는 자기의 의지와는 무
관하게 자신에게 상이군인, 국가유공자, 무공훈장 수여자, 고엽제 피해자, 장애인 등의 레테르
자리에 설 수 있는 걸까? ‘가해자성’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려면, 이 논리부터 뒤집어야 한다. 오
가 붙어있다고 투덜거렸다. 자신이 겪은 전쟁에 대해서, 여느 증언자들과는 달리, 그럴싸한 의
히려, ‘가해자성’이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의 의도나 선택 바깥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다. 자기
미를 부여하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사실 그는 부당하고 의미 없는 파괴 행위에 가담한
도 모르게 했던, 혹은 자기가 서 있는 그 자리를 만들기 위해 행해진 잘못들을 뒤늦게나마 알아
것에 대해 많은 부분 시인하기도 했다.
차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인정하려 드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여기에서 자기가 발 딛고 서있는 토대가 흔들리고 무너지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가해자성을 인식하는 것의 핵 심이다. 우리는 우리가 맺고 있는 복잡다단한 관계망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채 가해자가 되는 구조 에 놓여질 수 있다. 그래서 가해자임을 알아차리고 인정하는 일은 부단한 과정일 수밖에 없
“유공자는 무슨 유공자, 내가 무슨 공적을 세웠다고…… 괜히 남의 나라 통일 전쟁에 끼어들어서 훼방이나 놨지. 민주주의 같은 소리하고 있네. 무슨 민주주의야. 그냥 거기서 재수가 없어서 다친거야.”
다. 끊임없이 자기가 놓여진 구조를 의심하고 되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해자성을 인정 하는 것은 자기자신을,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계를 새롭게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행위의 가해성이 인정될 때, ‘가해자’는 처음으로 존재하게 된다. 가해자는 애초부터 존재하
참전 당시 스무 두 살이었던 A는 베트남전쟁에 동원되어 ‘한국군’이라는 뭉뚱그려진 존재로
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성의 인식을 통해서 부각되는 것이다. 가해자성을 인식하게 되는 건 오
철저하게 익명화되었다. 그러나 전장은 전방과 후방이, 사병과 장교가, 해병대와 육군이 저마다
히려 주체로 서는 일이다. 누군가 ‘가해자’의 자리에 서게 될 때, 거기에는 이제껏 생각해보지
다른 경험을 매우 구체적으로 겪어내야 하는 장소였다. 유명한 ‘구정대공세’ 라든가 1968년 2월
않았던 새로운 물음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 물음엔 이제껏 당연시되어온 폭력을 멈추게 할 힘 이 있다. 가해자성을 인정함으로써 폭력을 멈출 수 있다면, 가해자 스스로가 바뀌면 된다. 그런
에 A 가 수행했을 ‘괴룡 1호작전’이라는 이름은, 정작 그 작전의 한 복판에서 죽음과 폭력에 노 출되었던 병사들에겐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데 그런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2)
2) 시민평화법정 조사팀원 이마즈 유리(今津有梨)와의 대화를 통해 ‘가해자성’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글을 작성하 게 되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가해자의 자리에 서게 만드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닐까? 예 를 들면, 전쟁에서의 ‘피해 허용 가능성’을 암묵적으로 인정해 버리는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라는 표현이 있다. 민간인학살이 전쟁 수행을 위한 ‘부수적 피해’로 취급되는 동안, 폭격이나 서식지 파괴로 죽어 나 간 동식물의 죽음은 피해-가해의 구도에 조차 놓이지 않는다. 허용가능하고 정당화될 수 있는 피해를 판단하는 분계선은 과연 어디인가를 묻기 전에, 이것을 가늠하는 것 자체에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부수적 피해’라는 개 념은, 배제되어 마땅한 존재들의 외연을 끊임없이 넓혀가는 무시무시한 발상에 근거하고 있다. 시민법정에서 다 루지 못한 문제들 중에는 전시 성폭력을 겪는 여성들과, ‘피해자’로 셈해지지 않았던 동식물들의 죽음이 있다. 1961년부터 1969년까지 미군은 베트남에서 화학 및 생물 무기를 대대적으로 이용했다. 네이팜과 집속탄, 10만 톤에 이르는 고엽제, 제초제를 베트남 전역에 살포해, 엄청난 수의 인간과 동물을 죽이고 환경을 파괴했다. 뿐만 아니라 폭발물을 찾기 위해 수천 마리의 개를 투입했다. 그중 상당수는 죽었고, 살아남은 개들은 미군이 철수할 때 ‘비경제적’이라는 이유로 본국으로 송환되지 못하고 도살되었다. 앤서니 노첼라 2세 지음, 곽성혜 옮김, 『동 물은 전쟁에 어떻게 사용되나?』(책공장더불어, 2017년)60~61쪽.
62
“나중에 알았지, 그게 뭔 놈의 작전인지 그런 건 알 수도 없고, 그냥 헬리콥터가 떨궈 주면 열 명 정도 분대원들이 투닥탁탁 투두두두 총을 쏘고 다시 헬리콥터가 데리러 올 때까지 거기서 버티는 거야. 작전은 무슨 놈의 작전. 그런 건 몰랐어.”
자신이 어떠한 폭력의 구조에 배치되어 있었는지 A는 그땐 몰랐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안
다고 말한다. 어떻게 알았을까? A는 자신의 경험을 어떻게 다시 만나 다른 해석을 할 수 있었
63
3. 국제학술대회 ㅣ 우리가 만난 참전군인 - 참전군인 A와 ‘함께 말한다’는 것
을까? 몇 년 전 읽었던 ‘태백산맥’ 덕분이라고 했다.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었다. 자신이 겪은 전
는 형태로 법정에 세우려고 한다. 법정에서 그는 가해 경험이 아닌 다른 어떤 말도 할 수 없을
쟁이 무엇이었는지 조정래의 소설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소설을 통해 자신이 어떤
것이다.3) 그렇다면 법정에서도 심지어 전우회에서도 말해지지 못하는 그의 말들은 어떤 발화
시대적 맥락에서 어떤 위치에 어떻게 배치되었으며, 그곳에서 겪어야 했던 폭력과 죽음은 무엇
의 장(場)을 가질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젠가 그와 함께 그러한 장을 만들 수 있을까?
이었는지, 죽은 자와 산 자는 어떻게 다시 만나야 하는지, 전쟁 이후의 시간들을 어떻게 살아내 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고 한다.
베트남전 참전군인들에 대한 새로운 담론은 오늘을 살아가는 남성 혹은 한국인들이 누구인 지를 다시 말하는 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경험이 다르게 이야기됨으로써 역사를 다시 보
전쟁은 이윤과 고통을 동시에 양산한다. 그리고 우리 중 대다수는 많은 생명체가 겪는 고통
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급, 민족, 젠더 등 참전군인이 놓인 다양한 위치성과 참전
과 살해를 포함한 폭력에 대해 의도적으로 무지하다. 이 무지의 밑바닥에는 이윤이 깔려있기
이후의 삶 또한 고려하는 중층적인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시도는 그들의 목소리로부터, 그들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를 끊어낸다는 것은 중요하지만 매우 어려운 일이다. 지금-여기의 우리가
과 함께, 다른 역사를 다시 쓰는 작업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참전군인 A와 그리고 그의 경험과 맺는 관계는, 더 이상의 폭력을 멈추기 위해 그와 우리가 함 께 부숴야 할 커다란 구조가 무엇인지를 되물음으로써 시작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사병들이 중심이 되는 월남참전전우회(이하 ‘월참’)가 군인 사회단체 중 유일하게 이라크 파병에 반대했다는 점이다. 장교 출신들이 중심이 되는 베트남참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개입하고 거기에 한국을 끌어들인 혹은 한국이 참전을 자처한 과정
전전우회(이하 ‘베참’)는 재향 군인회와 더불어 국익을 위해 파병을 하라는 데모를 했지만, 월참
은,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긴장과 박정희정권의 3선개헌 그리고 유신체제형성으로 나아가는 독
은 과거의 전쟁 경험을 통해 국민의 생명 보호가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월참에 속한 일부의 참
재를 지탱하고 정당화한 과정이기도 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와 그의 관계-맺기는 이러
전군인들의 경험은 반전운동의 가능성으로 작동할 수 있는 잠재성 또한 갖는 것이다. 이렇듯
한 과정까지도 들추어내어 새로운 참전서사의 가능성을 제안하는 성질의 것이어야 한다. 문제
참전군인 단체들은 하나의 성격으로만 규정될 수는 없다. 국가권력의 주변부적인 특성을 지니
가 되는 건 우리를 피해자나 가해자로 만드는 ‘폭력을 마주하게 만드는 틀’, ‘구조’를 부수는 일
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시민사회단체의 특성을 지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공유하는
이다. 그 구조속에서 얼마나 많은 폭력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자행되고 있는 지, 그것을 알아
집단기억과 정치적 실천의 특성에 차이에 따라 이중적인 성격을 갖기도 하고, 이권과 이념의 동
차리는 것이야말로 가해자가 바뀔 수 있는 첫번째 계기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닐까? A에게 그
런 ‘알아차림’의 계기는 소설이었다
그간의 인터뷰에 감사하는 자리를 마련해 술잔을 기울이던 어느 밤, A는 우리에게 이렇게
원방식, 정부와의 관계, 활동의 공익성 등에 따라 각각의 단체는 동질적이지 않다.4) 우리는 이 지점에서 예정조화적인 주체를 설정하지 않고도 참전군인의 주체화를 말할 수 있는 여지를 가 질 수 있다.
말했다. “자네들이 나를 고통의 광장에 끌어냈다”고. 떠올리고 싶지않은 과거의 기억을 마주하 게 한 것이 그에겐 커다란 고통이었을 거라는 짐작은 했지만, 그것이 ‘광장’이라는 공론장에서 끌어내 보여졌을 때 그가 느꼈을 감정에 대해서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죄송한 마음과 고마
4. 에필로그 - ‘다른 인민’과 ‘공유지’의 가능성
운 마음이 동시에 밀려왔다. ‘광장’으로 나온 그의 고통은 전쟁에서 병사의 가해경험이 개인적 인 것으로만 수렴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가 겪었을 고통은 다른 누군가가 다
전쟁과 폭력적 갈등이 없는 상태가 소극적 평화라면, 적극적 평화는 우리가 보고 싶은 세계에
른 강도로 겪었을 터이고, 전쟁 이후의 시간들 속에서 그들의 경험은 국가가 제시하는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경제개발의 담론에 떠밀려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장(場)을 갖지 못했다. 그가 들려준 민간인학살의 정황에 대한 증언은 너무나도 또렷했고, 공식적인 기록과도 일치 했다. 법정에서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지만, 동시에 다른 고민이 생겨났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서는 것이야 말로 전쟁의 전체상을 볼 수 있는 길이며, 전쟁 책임을 개인으로 수렴시키지 않아야 한다고 말해왔던 우리가, 이제 그의 말을 ‘증언’이라
64
3) 참전군인 인터뷰를 함께 했던 시민평화법정 사무국장 여옥이 제기했던 물음이다. 병역거부운동을 비롯한 평화 활동가로서의 오랜 경험 속에서 줄곧 가져왔던 고민이었다고 한다. 조사팀원들은 이러한 물음을 계기로, 우리가 법정 이후에도 참전군인 A와 어떻게 관계 맺을 수 있을 지, 그와의 관계 맺기를 통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참전군 인서사를 어떻게 함께 만들어 나갈 수 있을 지, 그 과정 속에서 새로운 연대의 방식을 발견할 수 있을 지에 대해 논의하게 되었다. 4) 이태주, 「베트남전쟁과 이데올로기」, 『전쟁의 기억 냉전의 구술』(선인, 2008년), 271,273쪽.
65
3. 국제학술대회 ㅣ 우리가 만난 참전군인 - 참전군인 A와 ‘함께 말한다’는 것
대한 더 넓고 진보적이고 긍정적인 전망이며, 그 변화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 이다. 적극적 평화는 갈등의 수용을 요청하는데, 갈등이야말로 변화를 촉진할 잠재력을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과정으로서 갈등을 다루려면, 제3자가 강요하는 제한적이
능성은 우리가 피해생존자들 혹은 참전군인 A와의 관계-맺기에 있어서도 하나의 참조점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다른 인민’이 될 수 있을까?
유독 현대사에서 강도높은 비극을 겪은 베트남에는 혼령들에게 몸을 빌려주는, 싹(xac)이라
고 표피적인 해결책을 거부해야 한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정부차원에서 줄곧 이야기되는 ‘마
고 불리는 의례전문가가 있다. 몸-빌려주기에서 몸은 ‘공유지’8)와 같은 같은 의미를 갖는다. 다
음의 빚’이나 ‘유감’이라는 공식적인 말로는 담아낼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과, 여전히 살
양한 혼령들이 모이는 장소이지만 누구도 그 장소를 소유할 수 없고 반드시 빠져나와야 한다.
아내고 있는 피해생존자들과 참전군인들의 삶에 주목해야 한다. 전쟁의 문제가 국가 단위로 논
혼령들과 싹은 ‘함께’ 말하지만, 그 순간에도 완전한 하나는 아니다. 몸을 빌려주는 자는 자신
의될 때, 근본적인 폭력의 문제는 오히려 가려진 서사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의 관계의 영역을 공동체와 그 너머로 확장하고, 그 지역의 또 다른 다양한 혼령들 및 살아있는
대중들은 무시무시한 사건들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주기적으로 알게 되지만, 그 앎이 오래가 는 일은 드물다. 부정, 억압, 해리는 개인의 내적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수준에서도 작 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디스 허먼은 트라우마를 이해하는 일이 역사를 재발견하는 일에서 5)
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학살은 ‘공적’이 없는 죽음이다. 폭력을 행사하는 자리에서건 폭력을 당하는 자리에서건 학살을 경험한 사람들은 기본적인 인간관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 고, 인간의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는 신념 체계의 토대마저도 침식당하는 존재의 위기상태로 내 던져질 수도 있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이렇듯 대인 관계에 손상을 입히는 사건은, 사회 적 세계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그 결과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 다. 산산이 부서진 자기감(sense of self)은 그것이 처음 세워졌던 방식대로, 즉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 속에서 다시 세워질 수 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알고 있든 모르든 간에, 우리는 각기 다른 강도로 어떤 사건들에 대
이웃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베트남에서는 산 자뿐 아니라 죽은 자까지도 이러한 연합의 과정을 통해 이어져 있다고 믿어진다.9)
싹의 사례는 참전군인 A와 우리가 ‘함께 말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좋
은 지침이 된다. 각자의 방식으로 A와 관계를 맺고 있는 동료들은, 우정이란 자신의 고유한 존 재감 속에서 친구의 존재를 함께-자각하는 것임을, 그러한 과정이 바로 연대임을, 그리고 우리
는 서로에게 공유지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배워가는 중이다. 법정 이후로도 A와의 만남을
이어가며, 그의 고통 뿐 아니라 기쁨에 대해서도, 그의 과거 뿐 아니라 유기적으로 이어져온 현 재의 삶에 대해서도 ‘공감적인 증인’이 될 수 있다면, 그건 아마 그의 곁에서 우리가 함께 살 수 있는 최대치의 실존이 아닐까? 무엇보다 오늘 이 자리에, 먼 발치에서라도 좋으니 참전군인 A 가 와 주셨으면 좋겠다. 당신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로 어떻게 번져갈 수 있는지 꼭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다.
해 ‘연루’되어 있고, 그에 대한 선별과 해석을 넘겨받았다. 이러한 선별과 해석이 참여 혹은 몫 (part)
6)
이라는 실천적이고 수행적인 방식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국가에 의해 셈해지는 국민이
나 시민이 아닌, 자신을 셈할 수 있는 ‘다른 인민’ 7)이 될 가능성을 갖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가
5) 주디스 허먼 지음, 최현정 옮김, 『트라우마-가정폭력에서 정치적 테러까지』(열린책들, 2012년)18쪽, 113쪽.
6) 영어 take place에는 ‘발생하다’라는 뜻과 함께 ‘자리를 갖는다’는 뜻이 있다. 이탈리아어 avec luogo나 프랑스 어 avoir lieu, 독일어 statt-fiden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서양의 언어에서 ‘사건의 발생’이 모두 어 떤 ‘자리의 확보’라는 의미와 연관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몫/자격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는 우리 의 ‘자리’는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을 겪으면서 그때마다 스스로가 만들어 가야 하는, 구성적 인 역량이 요구되는 것이라고 말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글에서 주목하는 ‘다른 인민’은 소여가 아닌 구성의 에 너지로 창안된 존재임을 강조해 두고 싶다.
7) people의 번역어인 ‘인민’은 한국인들에게는 여전히 불편한 단어다. ‘인민’은 북한이 전유했기에 한때는 금칙어 였다. 대신 한국은 ‘국민’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사실 이 말이 어쩌면 더 무시무시한 말일 지도 모른다. 국가 아래 인민을 두는 이 말은 지배 주체인 국가 없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듯 보인다. 오늘날 ‘인민’ 개 념은 다시 사유되고 규정되어야 한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자유주의적 의회민주주의는 ‘인민 주권’을 사실상 선
66
거를 통한 주권의 위임이라는 소극적인 의미로 한정하고 있다. 알랭 바디우 외 지음, 서용순 외 옮김, 『인민이란 무엇인가』(현실문화, 2014년)185~189쪽. 이렇듯 제한적으로 파악되는 인민이 필연적으로 발생시키는 ‘배제된 존재들’의 한가운데에서 ‘새로운 인민’의 가능성, 즉 국가가 셈하는 인민과는 ‘다른 인민’을 산출하여 그 자체로 또 다른 공동체의 공간을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난다.
8) 베트남에서 가난한 농민의 보호책으로 제시되어 온 것은 ‘마을 공유지’제도였다. 모든 마을에서 마을 사람들 전 체 명의로 일부 토지를 소유하고, 마을위원회에서는 이 토지를 더 가난한 농민에게 합리적인 가격으로 임대했 다. 공유지의 면적은 전체의 1/4에서 2/3까지 다양했다. 1888년 대부분의 베트남 마을에서 부자는 여전히 부유 했지만, 가난한 농민도 어느 정도 먹고 살 정도는 됐다. 그러나 프랑스 식민 세력은 1900년을 기점으로 마을에 서 지주의 권한을 강화하여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다짐으로써, 마을 경제를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일부로 편입하 기 시작했다. 마을은 불평등해지고, 노동자와 쌀은 도시로 흘러들었다. 조너선 닐 지음, 정병선 옮김, 『미국은 어떻게 베트남에서 패배했는가』(책갈피,) 26~27쪽. 9) 권헌익, 『베트남전쟁의 유령들』(2016, 산지니), 225, 244쪽.
67
3. 국제학술대회 ㅣ 어떤 ‘참전군인’ 상을 만들어나갈 것인가?
어떤 ‘참전군인’ 상을 만들어나갈 것인가?
지 나중에 어떤 그 위치에 올라서도 묻어버리겠어? 허우적거리는 그 국민들이 드글드글 할텐데 고엽제로. 팔다리 나간 노인들, 전상자들 얼마나 많겠어. … 우리나라 6·25 이후 치룬 것도 득실득실한데. 베트남 정부가 그걸 잊을 수가 있겠나. 지금 우리가 다가가야 하는거야.”
장원아 (시민평화법정 조사팀)
신상공개 문제 상 구체적인 내용과 맥락을 모두 언급할 수는 없지만, A는 장남으로 자라나
엄격한 아버지에 반발하면서 고교시절 비행청소년의 길로 접어들었다. 동시에 두 살 아래의 여 학생을 짝사랑했다고 하는데, 거절당하자 미련없이 물러섰지만 성인이 된 후에는 그녀에게 안 부 연락을 받았다는 에피소드를 자랑하기도 했다. 뒷골목 생활이 문제가 되면서 별 수 없이 군 에 입대했고, ‘남자답게’ 무조건 해병대를 지원했다. 해병대에서는 폭력이 일상이었다. 베트남전 에 지원한 것은 “배를 굶기고 노상 훈련을 하고 지쳐가지고 지원을 하게 만들어” ‘명색이 지원’
1. 우리가 만난 참전군인 - A의 경우
으로 갔다고 했다. A는 이등병으로 지원했던 상황을 반영하듯 “선임들한테 터지니까 무슨 정이
있어. 웬수같은 놈들. 무슨 정이 있어”라며 부대의 분위기를 비판하기도 하고, 육군과 다른 해 시민평화법정 조사팀 활동을 통해 몇몇 참전군인들의 이야기를 접했다. 그들은 베트남전 당시
병대의 군기를 자랑하기도 했다. 베트남에서 돌아온 후에는 전국을 돌며 생활하고, 회사에서
학살을 수행하고 연계된 가해자인 동시에, 장애나 트라우마를 지닌 피해자이기도 했고, 또한
높은 위치에 오르기도 하고, 사업에 실패하기도 하고, 가족을 얻기도 잃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가해와 피해의 순간에 고착되지만은 않고 생활을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참전 이후 반세기의
새로운 삶에 대한 계획과 실천을 도모하는 야심가이고, 동물보호를 실천하기도 한다.
생존자로서 누구나 그렇듯 자신이 겪고 느낀 경험에 대한 증언가능성을 지닌 이들이었다.
이러한 구술생애사적 접근은 최근 여럿 시도되고 있다.1) 한국사회의 베트남전쟁 경험과 개
전쟁을 수행했다고 할지라도 전방과 후방, 사병과 장교, 부대별로 모두 다른 경험을 지님에도
인의 역사라는 퍼즐을 맞추면서, 수많은 기억과 다양한 삶의 양태를 발견하고, 거대서사로 채
불구하고, 추상적인 ‘참전군인’이라는 상에서 그 구체적 차이는 사상되곤 한다. 또한 베트남전
울 수 없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찾으려 하는 작업들이다. 이를 통해 국가 차원의 공식 기억을 넘
참전의 경험 즉 폭력과 학살에 연루된 경험만이 반복적으로 강조되며, 이는 참전군인에 대해
어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나가고, 역사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는 취지이
전제하고 있는 편견들이 강화되는 효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한 문제제기를 의식하면서 우
다. 그러나 이러한 생애사가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사 혹은 전쟁수행에 연루됨
리가 만난 참전군인 A에게 참전경험 외의 삶에 대해 물었다. A는 선선히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놓아주었다.
A는 이전에 어렴풋이 상상하던 참전군인의 모습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자신의 행위를 포장
하지도 않았고,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았다. 베트남전 당시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지금 먼저 다가가야 한다고 했다.
으로써 생겨난 가해자성을 옹호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또한 단순히 다양한 삶의 양태를 살피 며 각각의 삶을 개별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책임을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결론이 내려지는 것 또 한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개인의 미시적 서사를 살피는 것은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거시적 구조를 확인하는 작업과
교차된다. A의 경우, 베트남 참전의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인맥이나 국가기관 및 참전군인 조직
“베트남에서 요구하지 않을 때, 우리가 그런 거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고 진정한 화해 를 위해서 노력하는, 그렇게 할 때 베트남하고 벽이 무너지는 거야. 응어리의 벽이. 그들 이 어떻게 그걸 잊을 수 있겠어. 지금 나라를 우선 발전을 시켜야 되니까 덮어두는 것이
68
1) 대표적으로는 윤충로, <베트남전쟁 참전자의 삶의 맥락과 생애사적 시간>, <<현대문학의 연구>>54, 2014. ; 최 현숙, 앞의 책; 이 외에도 구술사 연구의 확산과 함께, 학계 및 공공기관, 여러 단체 등에서 참전군인을 비롯한 베트남전 관련자들의 구술자료수집 및 분석을 시행하였다. 일부는 온라인으로도 접근할 수 있다.
69
3. 국제학술대회 ㅣ 어떤 ‘참전군인’ 상을 만들어나갈 것인가?
과의 관계는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동시에 “나이를 먹고 많은 사회경험을 하고 ... 나는 지금까
촛불정국 이래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풍경인 태극기 집회의 핵심으로 등장했다. 태극기집
지 살아온 사회적 경험이 항상 잘나가는 쪽에 서본 일이 없어. 그래서 내 주변 사람들이 다 어
회 속 군복을 입고 나와 반공을 외치고, 경제성장에 있어서 참전용사의 역할을 설파하는 것이
려운 사람들이야. 그러다보니까 많이 성숙”해졌다고 스스로 평가하며, 베트남전의 학살 목격을
현재 쉽게 접하는 참전군인의 모습이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드는 참전군인들의 모습은 특정
증언하는 동시에 한국전쟁기 양민학살 문제를 거론하며 “어떤 경우든 전쟁은 막아야”한다 하
세대를 대변하는 것처럼 그려지곤 한다. 이러한 기억의 전쟁은 이 시민평화법정을 둘러싸고도
고, “이런 진실은, 나도 일부분이지만, 내가 경험하고 아는 것은 역사가 알아야해. 내가 역사에
진행중이다.3)
남겨야 해. 그게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의무야”라는 발언 또한 반세기를 거친 삶과 시대의 산물이다.
그런데 우리는 베트남전 참전군인들에게 전형적 이미지를 은연중에 부여하고 있는 것이 아 닐까? 그들은 태극기부대의 주요구성원이기도 하지만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보통 할 아버지이기도 하다. “참전 용사들을 보수 할배로 취급하고 마는 진보는 월남전 참전 용사가 자 기 아버지를 혐오한 그 혐오의 다른 모습”4)이라는 일갈은 시민평화법정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2. ‘참전군인’에 대한 인식의 변화 A를 비롯한 참전군인들에 대해 우리는 이미 알만큼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1964년 베트남
머릿속에 남아 있던 지적이었다. 참전군인들도 한때는 청년이었다. 베트남전 참전 이후에도 반 세기의 삶이 지속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개인의 삶 속에서 베트남전 참전이 지닌 의미와 영향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고, 특정시기의 경험만으로 그 삶을 전부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함에도 불
전 한국군 파병 이래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이 일어난 지도 오십여년이
구하고, 그들은 모두 ‘참전군인’으로 일원화되곤 한다. 또한 학살의 가해/피해라는 시민평화법
흘렀다. 반세기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국사회는 수많은 변화를 겪었고, 이는 베트남전쟁을 바
정의 주제에서 학살의 주체인 참전군인은 무엇보다 ‘가해자’의 자리에 세워지게 된다. 이 때 ‘피
라보는 인식, 그리고 참전군인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국가차원의 열렬한
해자다움’을 피해자에게 강요하는 것의 폭력성이 지적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떤 전형
환송 속에서 배에 올랐던 ‘파월장병’들의 수는 1964년 9월부터 1973년에 이르기까지 8년 6개월
적인 ‘가해자다움’을 가해자로서 참전군인에게 투사하며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간 연인원 32만명에 달한다. 미국이 국제적 비난 속에 1969년부터 철군을 결정하고 한국군 또 한 단계적으로 철수한 이래, 참전군인들은 국가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이들이 다시 등장한 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이다. 미국과 호주 등에서 제기되었던 고엽제 피해 문제가 한국에서 뒤 늦게 점화되면서, 참전군인들은 집단적으로 피해 인정을 요구했다. ‘피해자’로 돌아온 참전군인
그러나 앞서 제시한 A의 이야기는 참전군인에 대해 전형성을 부과하는 행위를 반성하게 했
다. A는 참전경험에 대해 자신의 성찰을 통해 이 잘못을 반성하고 증언하며, 나아가서 거시적인 차원에서 베트남과 한국 간의 화해까지 고민하는데 이르렀다. 물론 A와 같은 경우는 소수일 것
이다. 많은 수의 참전군인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성찰하지 않은 채 또다시 태극기부대로서
들은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가 공론화되면서 ‘가해자’라는 지목 또한 받게 된
국가에 동원되었다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그에 앞서 그러한 참전군인의 상이 만들어지도록 주
다. 전장에 동원된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학살에 연루된 가해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참전군인들
동한 것 또한 다시 국가권력이었음을 지적해야 하지 않을까?
은 계속해서 당사자로서 기억투쟁을 벌여왔다. 즉 베트남전 참전과 관련된 기억의 변화를 살피는 일은 반세기 간 한국사회의 역사적 변동 을 마주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2000년대 전국 곳곳에는 베트남전 참전기념물이 보훈처와 지자 체의 예산지원을 받아 기념탑 형태로 세워져 2010년에는 50여개에 달한다.2) 2011년 박근혜 정 권 하에서 베트남전쟁 참전군인들은 국가유공자 대우를 받게 되었다. 참전군인들은 2015년말 거센 반발을 불러왔던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찬성하는 집회의 주요 구성원으로, 그리고 2016년
2) 강유인화, <한국사회의 베트남전쟁 기억과 참전군인의 기억투쟁>, <<사회와 역사>>97, 2013.
70
3) 현재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홈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안내가 올라와 있다. “구수정과 그 일당들은 스스로 왜곡 날조한 월남전 민간인학살 사건 시나리오를 가지고 이달 21-22양일간 시민 무슨 법정 이란 재판놀이를 한 다고 합니다. 뻔뻔스러운 국민 기만극을 규탄하고 나아가 월남전 참전용사는 물론 대한민국 국군의 명예를 심대 하게 훼손 하려는 불순한 책동을 분쇄하기 위한 집회를 아래와 같이 개최코자 하오니 회원님들의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라는 내용이다. 4) 최현숙, <<할배의 탄생>> 이매진, 2016. 263쪽.
71
3. 법정 바깥의 과제와 가능성
현재도 진행중인 ‘기억의 전쟁’은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까? 참전군인 이야기의 역사상에 대 해 살피고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을 질문한다는 것은, 사실 현재의 ‘우리’ 혹은 ‘내’가 어떻게 베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트남전쟁에 대한 책임에 연루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이야기를 듣고 해석하며 의미를 부 여하는 것은 연루되기의 출발점이다. 결코 동일하지 않았을 반세기의 역사를 어떻게 기억할 것 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국가에 의해 이 기억을 획일화시키는 작업이 한국뿐만 아니라 베트남에 서도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다양한 기억을 발굴하고 동시에 이 기억이 어떠한 구조 하에서
Phiên tòa hòa bình của nhân dân
발현되는가를 분석하는 작업은 새로운 베트남 참전 역사상을 구축하는 시작이 될 것이다. 바
về tội ác thảm sát thường dân do quân đội Hàn Quốc
우만은 홀로코스트를 살피는 것을 통해 역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강조하기보다 오늘
gây ra trong chiến tranh Việt Nam
날 ‘우리’가 사는 사회의 본성을 분석하는데 주목했는데, 이러한 방식을 베트남전에서 있었던
People's Tribunal on War crimes by South Korean Troops during the Vietnam War
학살을 비롯한 여러 과거의 문제를 해석하는데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5) 이 때 베트남전에 연루된 ‘우리’를 발견하고, 베트남전 참전에 대한 새로운 서사를 구축하는 것은, 법정 바깥에서 지속되어야 할 과제가 된다. 국가권력이 갖는 행위의 범죄성에 대해 법적 으로 짚어 나가는 작업은 물론 필요하다. 현재 시민평화법정의 피고는 대한민국 정부이고, 이 피고를 대상으로 판결이 내려질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이는 책임을 국가로 귀속시키고, 개인들 이 지니는 연루의 가능성을 희석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지도 모른다. 국가를 주어로 삼는 공식 서사에서 개인의 기억과 맥락은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지거나 쉽게 사라지곤 한다. 민간인 학살을 단지 국가에 책임을 귀속시키는 데 그친다면 새로운 서사가 가 능할까? 베트남전 당시의 대한민국 정부 및 책임자를 처벌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당시 사병으로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참전군인들에게 비난의 화살이 고스란히 돌려지게 될 수도 있다. A와 같
이 베트남전의 민간인 학살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참전군인이 다수는 아니겠지만 적지도 않을
4. 시민평화법정
것이다. 이러한 참전군인 개개인의 기억과 성찰은 ‘법정에서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일 것이고, 이후에 ‘우리’가 고민해야 할 과제로 남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민간인 학살 문제를 포괄하여 베 트남전의 어떤 역사상을, 그리고 어떤 ‘참전군인’ 상을 만들어나갈 것인가? 1. 재판부·서기단, 원·피고 및 각 대리인 소개
2.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 헌장 3. 소장 요약본 4. 재판진행경과 보고
5) 지그문트 바우만, 정일준 옮김 <<현대성과 홀로코스트>> 새물결. 2013. 367쪽.
72
4. 시민평화법정 ㅣ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 헌장
재판부·서기단, 원·피고 및 각 대리인 소개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 헌장
재판부 - 김영란 서강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 (前 대법관) - 이석태 법무법인 덕수 변호사 (前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 - 양현아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前 ‘2000년 일본군 성노예 국제여성전범법정’ 남북한공동기소단 검사)
서기단 - 김자연 변호사 / 안지희 변호사 / 홍유진 변호사
[전문]
우리는 시민평화법정을 설치하여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에 대한 학살 등 총체적인 인권침해의 진실을 규명하고 피해자들의 권리를 회복함으로써 평화의 연대를 구 축하고자 한다. 베트남 전쟁은 북위 17도선 이남의 내전이 1964년 미국과 한국의 군대가 개입하
원고
- 응우옌티탄(Nguyễn Th ị Thanh, 1960. ○. ○.생)
- 응우옌티탄( Nguyễn Thị Tha nh, 1957. ○. ○.생)
원고들의 대리인
면서 국제적인 전쟁으로 비화하였다. 미국과 한국의 군대가 내세운 ‘자유수호’라는 명분은 국 제적으로 의문시되었고, 오히려 수없이 많은 학살과 참극을 남겼다. 전쟁이 끝나고, 베트남 정 부가 개혁개방정책을 내세운 이후 현재까지 한국 기업들은 베트남과 많은 경제적 협력관계를 구축하며 관계개선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학살의 피해자들과 유족들은 인권침해의 피 해와 고통을 국제적으로 호소할 여건이나 책임을 추궁할 기회를 여전히 갖지 못하고 있다.
- 권민지 변호사 / 김남주 변호사 / 오민애 변호사
이에 우리는 국가책임에 대한 대한민국 헌법과 법률상의 원칙뿐만 아니라 제네바협약상의 민
이선경 변호사 / 임재성 변호사 / 함보현 변호사
간인보호원칙, 2001년 ‘국가책임법초안’ 상의 국가책임과 2005년 유엔총회가 채택한 ‘국제인권법 의 중대한 위반행위와 국제인도법의 심각한 위반행위의 피해자의 구제와 배상에 대한 권리에 관
피고 - 대한민국
한 기본원칙과 가이드라인’(A/60/509/Add.1)상의 피해자의 제 권리, 나아가 2000년 일본군 성노 예 여성국제전범법정의 결론을 바탕으로, 시민평화법정을 통해 베트남 전쟁 시기 발생하였던 불 법행위에 대한 대한민국의 책임을 판단하고자 한다. 또한 우리는 국내법적 장벽을 내세워 국가의 책임을 부정하는 것은 부당함을 확인하며, 국가행위, 즉 군대의 행위에 대한 국가 책임에 대하여
피고의 대리인 - 박진석 변호사 / 이정선 변호사 / 전민경 변호사
시효 부적용 원칙을 확정하고자 한다. 시민평화법정은 국내법과 국제법의 원칙을 선험적으로 관철시키고 피해자의 주장에 단지 법 적인 효력을 부여하려는 데에 있지 않으며, 가해자나 책임자 또는 책임당사국에게 적절한 방어의 기회도 부여하고자 한다. 시민평화법정은 형사법정이 아니므로 가해자들의 유무죄를 가리고자
74
75
4. 시민평화법정 ㅣ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시민평화법정 헌장
하는 것이 아니며, 국가의 불법행위, 인권침해에 대한 책임을 판단하려는 것이다. 지금까지 국제 적인 관계에서 한국의 과거청산작업은 피해국으로서 가해국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는 것에 집중 되었다. 시민평화법정은 가해국에 대하여 한국인들이 요구하였던 것을 한국정부와 한국인에게 되돌리는 과정이다. 우리는 시민평화법정이 베트남 전쟁에서 민간인학살에 대한 한국군대의 책
④ “ 학살등”이라 함은 살인, 상해, 폭행, 성폭력 등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생명과 신체를 침 해하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 ⑤ “피해자”라 함은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학살등으로써 피해를 입은 민간인 및 그 피해를 입은 민간인의 배우자, 직계 존비속, 4촌 이내 친족을 말한다.
임을 규명함으로써 베트남과 한국 사이에서 평화와 책임의 유대를 수립하는 데에 디딤돌이 되기 를 열망하면서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 헌장 을 이와 같이 채택한다.
제3조 [관할권] 법정은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이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해 민간인에게 학살등을 한 사건에 대 해 본 헌장 및 제7조 소정 준거법에 따라 발생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책임에 관하여 심판한다.
제4조 [국가책임] ① 대한민국 정부는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이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해 민간인에게 학살등을 한 경우, 다음 각 호의 책임을 진다.
제1장 총칙
1. 피해자가 입은 손해에 대한 배상책임 2. 진상규명(진상규명 과정 및 결과의 완전한 공개 포함) 책임 3. 법적 책임 인정 및 피해자의 존엄, 명예 및 권리를 회복시키는 조치를 포함한 공식선언
제1조 [민간법정의 설립] ①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시민평화법정”(이하 ‘법정’이라 한다)은 본 헌장 전 문의 정신에 의거하여 설립된다. ② 법정은 법정 준비위원회가 결정하는 일시와 장소에서 공개된 재판을 한다.
(사과)을 할 책임 4. 피해자의 피해 및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필요한 행위를 할 책임 5. 대한민국 정부가 학살등 불법행위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행위를 할 책임 ② 대한민국 정부는 제1항의 불법행위와 관련하여 다음 각 호에서 정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부작 위가 인정될 경우, 그로 인해 피해자가 입은 손해에 대해 배상하여야 한다. 1. 어떠한 형태라도 진실을 발견하고 공표할 책임을 다하는 것을 게을리 하여 피해자의 진
제2조 [정의] 본 헌장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① “베트남전쟁”이라 함은 현재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하 ‘베트남’이라고 한다) 영토에서 1954년 ‘17도선 분할’로 남북으로 분단된 이후 국제전 양상이 본격화된 1964년 8월부터 1975년 4월 까지 벌어진 무력충돌을 말한다. ② “ 한국군”이라 함은 베트남전쟁에 파병되어 주월한국군사령부의 지휘를 받았던 대한민국
실에 대해 알 권리를 침해한 경우 2. 책임자를 처벌하지 않은 경우 ③ 재판부가 본 법정에서 심판한 사건 이외에도 베트남전쟁 기간 동안 한국군에 의해 발생한 일 체의 학살등 불법행위에 대해서도 진상규명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재판부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그에 관한 진상규명을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할 수 있다.
군인을 말한다. ③ “민간인”이라 함은 베트남전쟁 시기 발생한 적대행위에 직접 가담하지 아니한 자를 말한다.
76
77
4. 시민평화법정 ㅣ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시민평화법정 헌장
제5조 [배상의 원칙]
제2장 시민평화법정의 구성과 절차
① 제4조 소정 국가책임이 인정될 경우, 책임의 중대성에 비례하여 피해자에게 효과적인 배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② 피해자가 입은 다음 각 호의 손해들에 대해서는 비례하는 범위 안에서 금전적인 피해배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제8조 [구성] ① 법정은 재판부, 서기단으로 구성한다.
1. 신체적 또는 정신적 장애
② 재판부는 판사 3명, 서기단은 3명으로 구성한다.
2. 고용, 교육 및 사회적 편익 등 제반 기회의 상실
③ 재판부는 다음 각 호 중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자를 법정 준비위원회가 위촉한다.
3. 물질적인 손해와 잠재적 소득을 포함한 소득의 상실
1. 민주주의, 평화에 대한 신념이 투철하고 이에 기여한 자
4. 심리적 고통
2. 국제인권규범을 비롯한 국제법, 대한민국 법에 대한 전문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자
5. 법적 원조 또는 전문가 원조, 약과 의료 서비스, 심리적·사회적 서비스에 소요된 비용
3. 국가 공권력에 의해 발생한 학살등과 관련하여 진실규명을 위해 노력한 자 ④ 서기단은 법정 준비위원회가 임명하며, 법정의 사무 및 운영과 재판과정의 기록을 책임진다.
제6조 [소멸시효 및 상호보증 배제] ① 제3조에 따라 본 법정이 관할권을 가지는 사건에 대하여는 소멸시효 규정은 적용되지 않는다.
제9조 [재판진행]
② 피해자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경우, 대한민국과 해당 국가 사이에 상호 보증이 없더라도 제4
① 법정은 공정하고 신속하게 공개적으로 진행한다.
조에 따른 국가책임은 인정될 수 있다.
② 법정의 공식 언어는 한글이다. 단, 재판부의 지시에 따라 특정 절차에서 다른 언어(베트남어 등)로 통·번역이 이루어질 수 있다. ③ 이 헌장에서 정하는 것 이외의 재판진행과 관련된 사항은 대한민국의 민사소송법을 준용한
제7조 [준거법]
다. 다만, 재판부와 당사자들 간의 합의로 특칙을 정할 수 있으며, 이 특칙은 위 민사소송법
① 본 법정은 아래 각 호의 국제인도법, 국제인권규범 및 대한민국 법령을 준거법으로 한다.
에 우선한다.
1. 전시에 있어서의 민간인의 보호에 관한 1949년 8월 12일자 제네바협약 2. 1949년 8월 12일자 제네바협약에 대한 추가 및 국제적 무력충돌의 희생자 보호에 관한 의 정서 (제1의정서)
제10조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송달]
3. 1907년 육전에서의 법과 관습에 관한 협약(헤이그 제4협약)
원고가 제출한 소장과 준비서면 등 소송서류들(이하 ‘소송서류’이라 한다)은 피고 대한민국의 법률
4. 대한민국의 헌법, 민법 및 국가배상법
상 대리인인 법무부장관에게 송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법정 준비위원회 홈페이지에 게재
5. 세계인권선언
하는 방식으로써도 송달된 것으로 간주한다.
② 위 준거법 상 충돌이 있을 경우 제1항 제1 내지 3호 소정 국제인도법이 우선 적용된다.
78
79
4. 시민평화법정 ㅣ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시민평화법정 헌장
제11조 [대한민국 정부의 참여 보장]
제15조 [협력 의무]
① 대한민국 정부는 이 법정의 당사자로서 변론기일(변론준비기일 포함)에 출석하여 혹은 대리인
① 법정은 개인, 단체, 공공기관에게 자료 제출, 의견 진술 등 법정 진행에 협력하도록 요청할 수
을 선임하여 대한민국 정부에게 유리한 주장과 입증을 할 수 있다. ②대 한민국 정부가 제1항 행위를 하지 아니하거나 이를 포기하는 경우, 재판부는 직권으로 대
있다. ② 위 제1항의 요청을 받은 개인, 단체, 공공기관은 이에 협력할 의무를 진다.
리인을 선정하여 대한민국 정부의 변론 기회를 보장한다.
제16조 [판결] 제12조 [원고와 증인의 참여와 보호] ①법 정은 원고 등 피해자가 재판과정에 최대한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 재판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한 경우 원고 등 피해자와 신뢰관계 있는 자가 법정에 동석할 수 있다. ②법 정은 재판절차가 종결된 이후에도 원고, 증인 등 재판에 참석하였던 이들의 신체적·정신 적 안전과 존엄, 명예, 사생활을 보호할 수 있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한다.
① 재판부는 심리를 마치면 증거조사 결과 및 변론 전체의 취지를 바탕으로 사회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입각하여 사실주장이 진실한지 여부를 판단한다. ② 재판부는 판결원본을 작성하기 전, 판결 주문과 이유의 요지만을 법정에서 공개적으로 말 하는 방식으로 선고할 수 있다. 이 경우 판결원본은 위 선고 이후 50일 이내에 작성하여 공 개한다. ③ 판결은 선고 즉시 확정되며, 당사자들은 이에 불복할 수 없다. ④ 판결문, 소송서류 및 판결의 기초가 된 증거는 역사적 기록으로서 보관한다. 판결문(베트남
제13조 [절차와 증거]
어 등 다른 언어로 번역된 판결 요지 포함)은 널리 공표한다.
① 재판부는 증거채택여부 및 증거조사여부, 원고와 증인의 보호를 포함하여 재판 진행과 관련 된 제반사항을 합의하여 결정한다. ② 판결의 기초로 삼을 수 있는 증거는 다음 각 호와 같다. 1. 공문서, 사문서, 진술서 등 서면으로 된 증거 2. 사진, 영상, 녹음파일 등 멀티미디어 자료 3. 피해자, 관련자, 전문가 등 증인의 법정 진술 및 당사자 진술 4. 기타 법정에 현출된 관련 자료
제14조 [당사자신문에 대한 특칙] 원고에 대한 당사자신문을 실시할 경우,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방지하기 위해 증인신문의 방식에 따르지 않고 재판부가 직접 원고를 신문하는 것으로 한다.
80
81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소장 요약본
청구 원인
Ⅰ. 본 소를 제기하는 이유
원
고
피
고
1. 응우옌티탄(Nguyễn Th ị Thanh, 1960. 0. 0.생)
1. 한 국이 베트남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 : 경제발전이라는 미명 하에 망각되어 온 민간인 학살
주소: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 꽝남성 디엔반시 ◯◯◯
2. 응우옌티탄(Nguyễn Th ị Thanh, 1957. 0. 0.생)
한국 정부는 1964. 9. 최초 파병부터 1973. 3. 철군까지 32만 5,000여명의 한국군을 베트남 전쟁
대한민국
하고 있는 것은 ‘경제발전에 대한 기여’가 전부입니다. 정부의 공식문헌들과 역사교과서에서 확
법률상 대표자 법무부장관 박상기
인되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주된 평가는 ‘전쟁특수’인 것입니다. 목적과 과정은 삭제되고, 전쟁
주소: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 다낭시 탄케군 ◯◯◯
에 파병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친 베트남 전쟁과 파병에 대해서 한국 사회가 기억
으로 희생된 수많은 베트남 민간인들의 모습도 지워진 채, ‘두둑한 돈’만이 ‘고생한 보람’처럼 박
청구 취지 1. 피고 대한민국은 원고들에게,
제된 꼴입니다.
전쟁특수 담론 속에서 망각된 베트남 전쟁의 진실 중 가장 부끄러운 것은 베트남전 민간인
가. 각 국가배상법 제3조에서 정한 배상기준에 따른 배상금을 지급하고,
학살 1) 문제입니다. 오른쪽 지도와 같이, 주월 한국군의 주둔지역, 특히 베트남 중부의 주둔지역
나. 원고들의 존엄과 명예가 회복될 수 있도록 공식 사과하라.
은 현재까지 조사를 통해 민간인학살이 대규모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베트남 중부의 5개 성(Tình, 省)과 일치합니다.
2. 피고 대한민국은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사이에 베트남 지역에서 대한민국 군대에 의해 베 트남 민간인에 대한 살인, 상해, 폭행, 성폭력 등 일체의 불법행위가 일어났는지 여부에 관한 진상조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를 공표하라.
전투병과 민간인의 구별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게릴라 전쟁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한 국군에 의한 베트남전 민간인학살은 광범위한 지역에서,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졌고, 또 잔학하 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전 이후 한국 사회에서 베트남전 민간인학살은 많은 경험담이
3. 피고 대한민국은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로 29(용산동 1가 8번지) 소재 전쟁기념관을 포함한 대한민국 군대의 베트남 전쟁 참전을 홍보하고 있는 모든 공공시설과 공공구역에 대한민국
퍼졌고 누구나 짐작하는 일이었다는 점에서는 ‘공공연’하였지만, 정부의 공식적인 인정이나 사 과, 책임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비밀’이었습니다. 폭력의 망각이었습니다.
군대가 원고들에게 불법행위를 하였다는 사실 및 제2항에 따른 진상조사 결과를 함께 전시 하고, 향후 대한민국 군대의 베트남 전쟁 참전을 홍보하는 공공시설과 공공구역을 설치할 경 우에도 같은 조치를 취하라. 라는 판결을 구합니다.
82
1) 이하에서는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해 베트남 민간인이 살인, 상해, 폭행, 성폭력을 당한 사건들을 통칭 하여 ‘베트남전 민간인학살’이라고 합니다. 이 때 ‘민간인’이란 「1949년 8월 12일자 제네바협약에 대한 추가 및 국제적 무력충돌의 희생자 보호에 관한 의정서 (제1의정서)」 제51조 제3항 정의를 원용하여 ‘적대행위에 직접 가담하지 아니하는 비전투원’으로 정의합니다. 한편 ‘학살’이란 살인, 상해, 폭행, 성폭력 등 인간의 존엄성을 훼 손하고 생명과 신체를 침해하는 모든 행위를 의미합니다.
83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살 진상규명 대책위원회”(이후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진실위원회“로 전화, 이하 ‘진실위원회’라고 합니다)를 조 직하면서 운동은 더욱 본격화되었습니다.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의 반향은 컸습니다. 사단법인 “월남참전전우 사회복지 지원회”는 1999. 12. 17. 성명서를 통해 “베트콩에 동조하지 않은 양민이 학살됐다면 27만 참전용사를 대표해서 진심으로 사죄를 드린다. 우리 역시 피해자이만, 이것은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라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당시 진실위원회는 위와 같은 증거와 증언들을 공개하며 “이제 정부가 응답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3. 피고 대한민국의 부인
가. 국방부의 부인
주월한국군 주둔지
민간인학살 발생 지역
피고 대한민국의 국방부는 1999. 11.경 비공식입장임을 전제로 하여 “사실 확인이 안 된 상태라 공식의견을 밝히기는 곤란”하고, 베트남 전쟁이 “적과 아군을 구별하기 힘든 비정규전의 성격 을 지니고 있”었기 떄문에, “진실규명을 위해선 좀 더 신중하고 객관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2. 민간인학살이라는 불편한 진실의 공론화
입장을 언론 인터뷰 형식으로 밝혔습니다. 이후에도 국방부는 어떠한 공식적인 입장도 밝히지 않으며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가. 1999년부터 전해진 피해자들의 증언과 학살의 실체 나. 역대 대통령의 언급들 1999년 한 주간지의 보도를 통하여 1980년대 중후반 베트남 인민군대 정치총국 직속 연구소에 서 작성한 ‘남베트남에서의 남조선 군대의 죄악’(이하 ‘베트남 인민군대 보고서’라고 합니다)이라는 보고
국방부의 침묵은 피고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들의 발언에서도 확인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 중 일부와 학살 피해자들의 인터뷰가 공개되었습니다. 그동안 풍문으로만 떠돌던 민간인 학
은 2001년 정상회담에서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들에게 고통을 준데
살이 역사적 실체로서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습니다.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면서 한국군이 주로 활동했던 지방에 병원을 세우겠다는 뜻을 밝혔으나, 진정한 사과란 진실을 인정하고 그 앞에 고개 숙이는 것에서 시작
나. 한국 시민사회의 진상규명 노력
한다는 점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과에는 베트남전 민간인학살에 관한 겸허한 인정은 없었 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 3. 23. 베트남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우리 마
위와 같은 언론보도와 학살 증거들이 전해지면서,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진상을 확인하고,
음에 남아있는 양국 간의 불행한 역사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하며 양국이 미래지향적인 협력
사과와 배상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등장하였고, 한국 시민사회 내부에서 ‘미안해요 베트남’
증진을 위해 함께 힘을 모아가길 희망한다”고 말했으나, 불행한 역사의 구체적 내용(사실인정, 진
운동이 자발적으로 시작되며 모금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상조사)이나
유감에 따른 책임(배상 등)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사과’라고 볼 수는 없습
니다. 시민사회단체들이 2000. 4.경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베트남전 양민학
84
85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4. 소결: 국가범죄에 대한 배상적 정의를 묻기 위한 소송
Ⅱ. 당사자 관계
본 소의 원고들은 바로 베트남전 민간인학살의 피해자로서, 1968년 주월 한국군 제2해병사단
원고 응우옌티탄 (Nguyễn Thị Thanh, 원고들 중 동명이인이 있기 때문에 이하에서는 “원고 응우옌티탄A”라고
인 청룡부대 소속 군인들에 의해 총상을 입었고, 가족들까지 잃었습니다. 2018년은 학살이 일 어난 지 50년이 되는 해로, 50년 동안 견뎌야했던 고통과 슬픔이 용기가 되어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이하 ‘본 법정’이라고 합니다)의 원고가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합니다)은
1968. 2. 12. 베트남 꽝남(Quảng Nam)성 디엔반 (Điện Bàn)현 탄퐁(Thành Phong)사 2) 퐁
니(Phong Nhị) 촌(이하 ‘퐁니 마을’이라고 합니다)3)에서, 한국군 해병 제2여단(청룡부대) 제1대대 1중대 (이하 ‘이 사건 1중대’라고 합니다)
소속 성명불상의 군인들에게 총격을 당해 복부에 심각한 상해를
입었습니다. 당시 원고 응우옌티탄A는 8살이었습니다. 위 총격으로 원고 응우옌티탄A의 가족 들 역시 죽거나 중상을 입었습니다.
베트남전 민간인학살은 전쟁 동안에도 반드시 지켜져야 할 헤이그 육전조약 등 국제인도법 을 위반한 중대한 전쟁범죄이자 국가조직인 군대에 의해 저질러진 국가범죄입니다. 국가범죄에 있어서 처벌과 배상은 정의의 근본적 요구입니다. 그러나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에 있어서
원고 응우옌티탄(Nguyễn Thị Thanh, 이하 “원고 응우옌티탄B”라고 합니다)은 1968. 2. 22. 베트남 베
트남 꽝남(Quảng Nam)성 디엔반 (Điện Bàn)현 디엔즈엉(Điện Dương) 사 하미테이(Hà My Tây) 마
가해군인 개인에 대한 (형사)처벌은, 국가범죄가 학살을 실행한 하급 군인과 이를 명령하였던 상
을(이하 ‘하미 마을’이라고 합니다)에서, 한국군 해병 제2여단 제5대대 제26중대(이하 ‘이 사건 제26중대’
급자 일부의 ‘일탈’처럼 축소될 우려가 있다는 점, 학살의 진실이 망각되는 것을 방관했던 보통
소속으로 추정되는 성명불상의 군인들에게 공격을 당해 자신은 왼쪽 귀, 왼쪽 다리
사람들과 공동체의 책임은 담기지 못한다는 점 등의 문제가 있기에, 원고들은 제한적인 형사책 임보다는 피고 대한민국을 상대로 한 국가배상소송을 통해서 배상적 정의를 실현하고자 합니다.
라고 합니다)
와 엉덩이를 다쳤고, 같이 있던 가족들이 살해당했습니다. 응우옌티탄B는 여성이고 당시 10살
(1957년 11월 27일 생)이었습니다.
정의를 위한 시작은 진실입니다. 사과는, 배상은, 그리고 정의는 진실을 철저히 밝히는 것에
피고 대한민국은 본 법정 헌장 제4조에 따라 한국군이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해 민간인에게
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원고들은 본 법정에서 진실이 밝혀지기를 원합니다. 원고들과
살인, 상해, 폭행, 성폭력 등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생명과 신체를 침해하는 행위를 한 경
피고 대한민국은 50년 전 총구를 사이에 두고 만났지만, 이제는 진실을 담은 언어로서 만나고
우, 또한 그러한 행위를 숨기거나 왜곡하여 피해자의 진실에 대한 권리를 침해한 경우, 이에 대
싶습니다. 그 언어 속에서 진정한 책임과 사과가 시작되기를 원합니다.
한 법적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2) 위 탄퐁사는 1975. 이후 디엔안(Điện An)사로 지명이 변경되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3) 베트남 행정단위인 성省(Tình), 현縣(Huyện), 사社(Xã), 촌村(Thôn)은 한국의 도, 군, 읍, 면에 해당합니다. 지명 표기시 성, 현, 사, 촌은 한글로만 표기하고, 지명 부분만 베트남어를 병기하도록 하겠습니다.
86
87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Ⅲ. 괴룡1호 작전과 1968년의 꽝남성 대학살
3. 괴룡 1호 작전 기간 중 집중적으로 발생한 꽝남성 대학살
1. 1968년 ‘구정공세’(Sự kiện Tết Mậu Thân)라는 전환점
국방부가 1972년 발간한 『파월한국군전사』에 따르면, 괴룡 1호 작전은 1968년 1월 30일부터 2
북베트남 정규군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1968년 1월31일 음력 설날 새벽, 구정공세를 전개하
동안 꽝남성의 여러 마을에서 학살사건이 집중적으로 발생하는데, 한베평화재단과 <한겨레
여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켰으나, 미군과 남베트남군에 의해 곧바로 격퇴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21>의 공동기획으로 추진된 현지조사에 따르면, 괴룡 1호작전이 수행되었던 31일이라는 기간
사건은 미국의 반전여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구정대공세를 통한 남베트남 전역에
중에 꽝남성에서 자행된 학살로 밝혀진 사례로는 1월 30일 깜안 학살(11명 사망), 2월 12일 퐁니
월 29일까지 한 달간 해병 제2여단이 적에 대해 수행한 수색 및 섬멸작전이었습니다. 이 기간
대한 공격은 후에(Hue)의 탈환을 끝으로 모두 진압되었는데, 이로 인해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
퐁넛 학살 (74명 사망), 2월 22일 하미 학살 (135명 사망), 2월 29일 하꽝 학살 (36명 사망) 등이 있습니
민족해방전선은 수천 명의 숙련된 전투요원과 정치 간부를 잃게 되고, 그 결과 지방의 농촌지역
다.
에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권력공백이 발생하며, 미국의 평정(pacification)정책4)이 힘을 얻게 됩니다.
2. 괴룡1호 작전: 구정대공세에 대한 반격과 소탕
구정공세 초반의 기습작전으로 호이안 공격에 실패한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잔여 병력으로 북상하여 다낭을 공격할 것이 예상되었습니다.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구정대공 세의 잔당 소탕을 위한 작전에 돌입하는데, 바로 이때 1967년 12월말까지 베트남 중부 추라이 에서 활동하다가 이제 막 호이안으로 주둔지를 옮기던 해병 제2여단(청룡부대)도 이 작전에 합류 하게 됩니다. 꽝남성 내 해병 제2여단의 여러 전술책임지역에서 적을 탐색하고 반격한다는 괴 룡 1호 작전, 구정대공세 반격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미군이 다낭의 남쪽에 위치한 해병 제2여 단 전술 지역 쪽으로 공격하면, 해병 제2여단은 이에 호응하여 적들이 남쪽으로 도주하지 못하 도록 하는 이른바 ‘NUT CRACKER 작전’을 펼치기로 협의했습니다.
4) 미군은 님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인적, 물적 공급원을 차단하고 파괴한다는 명분으로 도시와 농촌에서 민간인 들을 상대로 CIA가 주도한 피닉스 작전과 미 군부의 ‘수색파괴작전’을 포함한 이른바 ‘평정’(pacification)작전 을 전개했습니다. 미국은 1961년 말 디엠정권에게 인민을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강제이주정책에 해당하는 전략촌(Strategic Hamlet) 정책을 강력히 시행하도록 지시하여, 11,300여 개에 달하는 전략촌을 설 치하고 이곳에 농촌주민을 강제로 이주시켜 철저히 감시했습니다. 이 작전들은 그 과정에서 수없이 무고한 민간 인들의 삶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지만, 미국은 이를 전쟁수행의 불가피한 단면으로 정당화했습니다. 평정 작전 은 구정대공세 이후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세력의 주력군의 활동이 감소한 시기에 미군이 시행한 주요작전으로 볼 수 있습니다.
88
1968 꽝남대학살 지도
89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4. 괴룡 1호 작전과 퐁니퐁넛 마을 학살의 연관성
Ⅳ. 퐁니·퐁넛 사건 및 원고 응우옌티탄의 피해사실
퐁니·퐁넛 사건이 발생한 1968년 2월 12일에 이 사건 1중대가 퐁니·퐁넛 마을에서 작전을 하였
1. 이 사건 1중대에 의한 1968. 2. 12. 퐁니ㆍ퐁넛 사건 개요
다는 사실은 『파월한국군전사』에서 명확하게 확인됩니다. 물론 마을 주민들에 대한 학살사실 까지 기재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숫자의 민간인이 군인들에 의한 총격으로 살해당했
가. 퐁니ㆍ퐁넛 마을 개요
던 1968년 2월 12일 오전에 퐁니·퐁넛 마을에서 1중대가 바로 그 날짜와 시각에 해당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하였음이 공식 전사를 통해서 확인되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뒤의 IV.항 에서 보다 자세히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퐁니 마을과 그 옆에 바로 인접한 퐁넛(Phong Nhat) 마을은 베트남 중부 다낭시에서 남쪽으로 약 25km 거리에 위치한 곳입니다. 꽝남성 디엔반현 디엔안사에 위치한 두 마을은 1968년 당시 100가구가 넘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5. 괴룡1호 작전과 하미마을 학살의 연관성 퐁니·퐁넛 마을과 접한, 베트남의 남북을 잇는 1번 국도(이하 ‘1번 국도’라고 합니다)에도 미 해병
하미 마을 북쪽과 접해있는 청룡도로는 여단 본부에서 예하 대대를 연결하는 중요한 기능을
대와 남베트남 민병대가 연합한 캡(CAP, Combined Action Platoons) 소대5)들이 주둔하기 시작
하는바, 해병 제2여단은 2월 17일 적이 지뢰와 부비트랩에 의한 파괴를 도모하고 있다고 판단하
하였습니다. 퐁니·퐁넛 마을에는 남베트남 민병대 가족들이 많이 거주하게 되었고, 인근 캡소
고, 제5대대 26중대와 공병중대 일부 병력으로 하여금 2월 18일부터 24일까지 청룡도로를 순
대와 자매결연도 맺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퐁니·퐁넛 마을은 사건 당시 ‘사격제한지역(control
찰토록 하였습니다. 공병중대는 2월 22일 하미 마을의 청룡도로에서 대전차 지뢰 4개를 제거하 고, 근무중대는 이 마을의 도로 근처에서 잠복하다가 적 6명을 사살하였으며, 그 다음날 청룡 도로 근처(전날 공병중대가 대전차 지뢰를 제거한 지점)에서 대전차지뢰 2개를 제거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정황에 따라, 해병 제2여단은 청룡도로에 부비트랩을 설치하는 적의 은거지를 제
fire zone)’으로
분류되었는데, 사격제한지역은 남베트남 정부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하 ‘베
트콩’이라고 합니다)과
관계없는 지역이라고 공인한 지역으로서, 해당 지역에서의 총격 등 군사작
전은 엄격하게 제한되었습니다.6)
나. 1968. 2. 12. 퐁니·퐁넛 사건 발생
538도로 서쪽과 청룡도로 동쪽 지역인 하미 마을로 판단하고, 2월 22일 청룡도로 보호 및 여단 본부의 방어 목적을 겸하여 이 지역에 대한 공격을 계획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미 사건일인 2
앞서 Ⅲ.항 에서 살핀 괴룡1호 작전이 진행되던 1968. 2. 12., 이 사건 1중대는 오전 8시경 1번 국도
월 22일 작전을 기록한 『파월한국군전사』에서 26중대가 하미 마을을 포함한 “그 지역 일대를
를 순찰하던 도중 서쪽에 인접한 퐁니·퐁넛마을로 진입하였습니다.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 문
탐색하기 위하여 선정된 7개 목표를 공격하였다”, “6개 목표를 점령 탐색”이라고 언급된 부분이
화통신청이 1995. 12.경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1968. 2. 12. 오전 한국군(이 사건 1중대)은 퐁니·퐁
위의 추정에 부합됩니다. 이에 관해서는 뒤의 V.항 에서 보다 자세히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넛 마을에서 민간인 74명을 살해, 17명을 다치게 하였습니다 (이하 위 사건을 ‘퐁니·퐁넛 사건’이라고 합 니다).
총 91명의 사상자 중 1968년 기준으로 만 10세 이하인 1958년 이후 출생자인 아동이 29명
으로 약 32%를 차지합니다. 60세 이상의 노인들도 11명에 달하였습니다.
5) 캡소대란 미군이 정보수집을 위해 조그마한 개별 단위부대로 편성한 소대입니다.
6) 베트남전 당시 민간부락은 ‘자유사격지역’(free fire zone)과 ‘사격제한지역’(control fire zone)으로 구분되었습니 다. 후자의 경우 베트콩과 관계없는 민간인들이 사는 곳으로 남베트남 정부가 공인한 마을이므로 사격을 하려면 상 부에 보고하여야 하며, 사전에 지원요청을 하여야 포사용이 가능한 지역입니다.
90
91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퐁니·퐁넛 사건은 사격제한지역에서의 대규모 학살이라는 점, 남베트남 민병대의 가족들이 희생되었다는 점, 사건 직후 인근에 주둔한 미군에 의해 사건 조사가 이루어졌다는 점 등의 이 유로 ‘제2의 미라이 사건’이라고 불리면서 당시에도 매우 널리 알려진 사건이었습니다.
현재 퐁니·퐁넛 마을에는 아래 그림과 같이 위령비가 서 있는데, 위령비의 비문은 “74명의 사람들이 남조선 군인들에 의하여 68년 2월 12일에 학살되었다”입니다. 퐁니·퐁넛 마을 주민들 은 매년 기일(음력 1월 14일)이 다가오면 학살되었던 가족들을 기리며 “따이한 제사”를 지내고 있 는데, 이는 ‘대한’제사, 즉 대한민국 군인들이 희생시킨 사람들의 제사라는 의미입니다.
갑 제10호증 『파월한국군전사』 제4권 349-42면 (밑줄은 인용자) 2월 12일(D+13) 여단(장, 김연익 준장)은 TAOR 내에서 활동하는 적을 격멸하기 위하여 계속 인접부 대인 미 해병제1사단과 미 AMERICAL사단과 상호협조하면서 「NUT CRACKER작전」을 전개하였다.
1. 제1대대(장, 홍성환 중령)는 적을 포착 격멸하기 위하여 가용장갑력과 화력을 최대한 집중하고 월맹 군 연대병력으로 추측되는 적을 강압하였으며 이어서 미 해병제1사단 작전을 도와 Sui Co Ca(강) 남쪽을 차단 엄호하였다.
제1중대(장, 김석현 중위)는 08:15에 1번 도로를 정찰하며 북진하고 Phung Nhut 마을에 진입하 였다가 공격방향을 서쪽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11:05에 중대의 선두부대는 목표(11)을 공 격하였는데 이때 서쪽지역으로부터 30여발의 적 사격을 받아 4.2인치 박격포로 발사지점을 포격하 여 제압할 수 있었으나 중대는 부상자 1명이 생겨 후송하였다.
같은 시간에 중대의 후속부대는 미군LVT 1대가 1번도로상에서 “부비트랩”에 접촉하여 이에 탑승하고 있던 미군 1명이 부상을 입고 차체가 크게 파손된 사고가 발생하였기 때문에 제1소대(장, 최영연 중위)로 하여금 이를 경비케 하였다. 이러하여 중대는 제2, 제3소대만 목표 (12)~(13)을 공격하고 접적없이 수색 한 다음 Suoi Co Ca(강) 서안인 마을 Phong Nhut (2)의 유리한 지형을 따라 남북으로 병력을 산개시 켜 제2, 제7중대와 같이 협조된 지역에 대한 차단임무를 수행하였다. 중대는 이때에 강 너머에서 적의 퐁니·퐁넛 마을에 설립된 위령비
사격을 받아 또 부상자 1명을 내고 13:10 Phong Phut마을 (2)를 점령하여 급편방어를 실시하면서 밤을 지냈다.
2. 퐁니ㆍ퐁넛 사건을 입증하는 증거들
가. 『파월한국군전사』에 기재된 이 사건 1중대의 퐁니·퐁넛 마을 작전
위 기재를 통해 이 사건 1중대가 1968. 2. 12. 오전 8시 15분부터 퐁니 마을과 접해있는 퐁넛 (Phung Nhut)마을에
국방부가 1972년 발간한 공식자료인 『파월한국군전사』 제4권의 ‘제3장 2월 작전기’ 중 ‘3. 괴룡
진입하였고, 오후 1시 10분경까지 인근의 목표(11), (12), (13) 지역에서 작전
을 수행하였음이 확인됩니다.
1호작전’ 부분에 1968. 2. 12. 이 사건 1중대의 퐁니·퐁넛 작전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1968. 2. 12. 오전 퐁니·퐁넛 마을에서 상당한 숫자의 민간인들 살해당했을 당시, 이 사건 1중대가 바로 그 날짜와 시각에 해당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하였음이 공식 전사를 통해서 확인되는 것입니다.
92
이에 더해 『파월한국군전사』 제4권 359면에는 청룡여단 제1대대의 1968. 2. 12.자 작전상 황도가 기재되어 있는데, 주월미군 감찰보고서에 첨부된 퐁니·퐁넛 마을 지도와 비교하여 보
93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면(각
지도 우측의 1번 국도와 우측 상단의 미군 CAP 1소대를 기준으로 함),
(12) ~(13)”이
“목표(11) ”이 퐁니 마을, “목표
나. 주월미군 감찰보고서
각 퐁니 마을과 인접한 마을들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점이 명백해집니다. 즉, 이 사
건 1중대는 1968. 2. 12. 오전 8시경 퐁니·퐁넛 마을에 진입하여 오후 1시 이후까지 작전을 수행
1) 주월미군 감찰보고서 개요
하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주월미군 감찰보고서 중 일부
앞선 지도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퐁니·퐁넛 마을 근처에는 미군 캡소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갑 제10호증 359면
퐁니·퐁넛 사건 당일 캡소대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들은 한국군에 의한 퐁니·퐁넛 사건을 처음 부터 인지하고 있었고, 학살이 끝난 직후 마을로 진입하여 부상자들을 후송함은 물론, 끔찍했 던 학살현장을 사진과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특히 주월미군 사령부는 퐁니·퐁넛 사건을 비롯한 여러 민간인학살 사건에 관하여 감찰을 진행하여 그 보고서를 작성하였는데, 베트남 전쟁 당시에는 비밀문서로 설정되었으나, 30여년 이 흐른 2000. 6. 1. 비밀해제 되었고, 이는 현재 워싱턴의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Natoi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이하 ‘NARA‘라고 합니다)에서
보관 중에 있습니다. 그 중 일부
가 국내에 입수되어 같은 해 11월에 국내 언론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하에서는 퐁니· 퐁넛 사건을 입증하는 문서 11개를 제시하도록 하겠습니다.
갑 제15호증의1 8면
94
95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2) 퐁니ㆍ퐁넛 사건 관련 감찰보고서 그 사건이후, 당시 지역 대표였던 호앙 트렁(Hoang Trung) 소령이 이 사건을 검사했습니다. 그는
가) 1968. 1.~1968. 4. 기간의 한국 해병 제2여단의 꽝남성에서의 활동 개관 보고서
잔인하게(그로테스크) 희생당한 상태로 있는 희생자의 사진을 찍었고, 최고 지역대표는 희생자들을 묻 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중략)
꽝남성 다낭에 파견된 미군 정치고문 제임스 맥(James F Mack)은 1969. 4. 25. 주월미국대사관
정치담당 참사관 니콜라스 손(Nicholas G. W. Thorne)에게 “한국군 해병 제2여단이 1968. 1. 부터
1969. 4. 까지 꽝남성에서 행한 활동 개관”보고서를 송부하는데, 보고서 중 퐁니·퐁넛 사건은
과거 우리의 친척들이 학살당했던 그 날이 다가오는 오늘, 우리는 우리들의 부모님, 남편, 부인, 아이 들과 다른 친척들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한국군이 “79명이 여성과 어린이를 살해한”, “가장 악명 높은” 사건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 슬프도다.
위 보고서에 첨부된 “#2”문서는 퐁니·퐁넛 마을에서 발생한 대량학살의 유가족들이 베트남 공화국 하원의원에게 보내는 청구문의 일부로, 퐁니·퐁넛 사건에 대하여 한국군이 어떠한 책임 도 지지 않고 있는 바, 한국군과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 정부)이 함께 이에 대한 배상을 해 줄 것을
시민권을 가지고 있고, 4000년의 문명을 지닌 67명의 베트남사람들이 일개 곤충의 취급을 받았습니 다. 이들 불행한 희생자에 대해서 어떠한 공식적인 집단에서도 작은 동정조차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비통한 심정을 담아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반드시 이 요구를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기관 인 국회(입법부)의 존경하는 의장님께 전달해야만 한다는 것을 느낍니다.
갑 제15호증의2 한국군 해병 제2여단이 1968. 1.부터 1968. 4. 까지 꽝남성에서 행한 활동 개관 보고서 번역본 7면
우리는 의장님께 한국군과 남베트남 정부가 다른 유사한 사건에서 적용했던 규칙에 따라 배상해주기 를 정중하게 요구합니다.
존경하는 의장님 :
우리는 1968년 2월 12일, 꽝남성 디엔반현 탄퐁사 퐁니 · 퐁넛 마을에서 한국군의 행위에 의해 살해 를 당한 35개의 가족들의 친척들입니다. (중략)
1968년 2월 12일 9시에 (피해자들은) 가난하고 열심히 일하는 농부들이었고, 군인이나 죽은 군인의 가 족이었으며, 할머니나 할아버지였고, 그리고 아직 젖을 때지도 않은 어린아이들로 이루어진, GVN 통제
위 보고서에 첨부된 “#3(A)” 문서에는 퐁니·퐁넛 사건에 대한 구체적 설명(“한국군에 대해서 전
략촌으로부터 베트콩의 소총사격이 있자 한국군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민간인들을 살해하였다”)과
함께 퐁니·퐁닛
사건 직후 미군에 의해 촬영된 사진까지 첨부되어 있습니다 (사진의 경우 아래 5항에서 당시 사진을 촬영
한 미군의 진술과 함께 확인하겠습니다).
지역하에서 매우 평화롭게 살아가는 가족이었습니다. (우리 친척들은 모두 시민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디엔반 현에 주둔하던 한국군 부대가 우리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하였고, 우리 마을로 들어와 서 사람들을 집에서 끌어내고 총으로 모든 사람들을 죽이고, 신체의 일부를 토막내는 등 야만적인 행위 를 하였고, 한국군 부대는 사체를 그대로 두거나 숨기고 그 현장을 떠났습니다.
96
97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갑 제15호증의2 한국군 해병 제2여단이 1968. 1.부터 1968. 4. 까지
c. 1968년 2월 18일에, 조사보고서가 해병 제3상륙전부대의 지휘관에게 전달되었다. (TAB G)
꽝남성에서 행한 활동 개관 보고서 번역본 10면 (밑줄은 인용자) (1) 미해병대와 민병대원의 진술과 보고서에 기초한 최종 요약은 다음과 같다. 이 사진들은 1968년 2월 12일 꽝남성 디엔반현 탄퐁사 퐁니 전략촌에서 한국군이 79명의 민간인들을 살해하는 학살현장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전략촌으로부터 한국군에 대한 베트콩의 소총사격이 있자 한 국군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민간인들을 살해하였다.
(a) 1968년 2월 12일, 한국 해병제2여단 1대대 1중대가 전술종대로 1번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이동, CAP D-2를 통과하고 10:30 경 CAP D-2로부터 북쪽으로 400m 떨어진 곳에서 서 쪽으로 방향을 틀어 일렬로 이동하여 퐁니(Phong Nhi) 마을을 통과해 퐁넛마을(Phong Nhut)(2) 쪽으로 수색작전을 진행함.
나) 1968. 2. 12. 한국 해병대가 저지른 잔학 행위 혐의 보고서 (b) 퐁넛 마을(Phong Nhut)(2)로부터 총성이 들려왔고, 오두막들이 타는 것이 보였음.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의 샘 샤프(Sam H. Sharp) 대령은 1969. 12. 23. “1968. 2. 12. 한국군 해병 대에 의해 자행된 학살 의혹 참모장조치 4984-69”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주월미군사령부 참모
(c) 13:00 경, 촌락 인근지역으로 포병 사격 요청 후, 1중대는 퐁니(Phong Nhi) 마을로 돌아옴. 총성에 이어 연기가 나는 것이 관찰되었음. 13:30경 한 민병대원이 부상당한 두 명의 어린
장에게 제출합니다.
소년과 칼에 찔린 여성 한명을 이송해 왔음.
이 보고서는 1) 참모장에게 한국 해병대에 의해 수행된 일련의 학살 의혹 중에서 첫 번째 사 건을 알리고, 2) 미국대사관의 실무진행자에게 보낸 학살의혹에 관한 정보 서류 승인을 얻기
(d) 13:30경 직후, CAP D-2에 도착한 미해병 연합행동단 델타중대(USMC Combined Action
위하여 작성된 것입니다. 위 보고서는 1968. 2. 18.에 작성된 보고서(‘미해병대와 민병대원의 진술에 기
Company-Delta) 지휘관은 무전으로 한국 해병 제2여단 연락담당 미해병 연락장교(호출
초한 자체보고서’)를
원용하면서 아래와 같이 한국군에 의해 퐁니·퐁넛 사건이 발생하였음을 구체
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위 자체보고서에 기재된 진술들은 다음 항에서 확인할 것입니다).
부호: Past 6)와의 접선을 시도, 실패하였으나, 한국군 여단 작전과 인원 (ROK Bde S-3 personnel)으로부터 해당 지역에서 수행되고 있는 작전은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e) 15:00경 미해병/민병대 연합 정찰대가 CAP D-2 지점으로부터 퐁니마을로 진입해 들어왔
갑 제16호증의2 1968. 2. 12. 한국군 해병대에 의해 자행된 학살 의혹,
다. 미해병 중 한명이 그곳에서 발견한 것들을 촬영하였다. (그 사진들은 TAB G의 6번 동봉
참모장조치 4984-69 번역본 2-6면 (밑줄은 인용자)
물에 첨부되어있다. 미해병제3상륙부대 에 의해서 제공되었던 그 사진들은 글로는 확인되지 않았다. 확인작업은 군사원조사령부 감찰부가 사진과 촬영자의 증언을 취합하여 진행하였
4. (s) 연대기와 논평 (중략)
다. 본문에서 명시되지 않은 다른 여분의 사진들도 발견되었다. 이 사진들은 본문에서 명시 된 사진들과 관련이 있다.) 퐁니마을의 주민들은 3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사살된 것으로 보
98
b. 1968년 2월 18일, 해병 제3상륙전부대의 참모차장의 구두 명령에 응하여, 1968년 2월 12일 퐁니
였으며, 몇몇의 피해자들은 칼에 찔렸고, 한 젊은 여인은 가슴이 도려내어져 있었다. 69명의
(Phong Nhi)와 퐁넛(Phong Nhut)의 두개 마을에서 일어난 베트남 민간인 부상과 사망 관련 정
마을주민들이 퐁니(PHONG NHI)와 퐁넛마을(PHONG NHUT)에서 죽임을 당했고 퐁니는
황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방화로 인해 파괴되었다.
99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f) 이 작전은 지역책임자(District Chief)나 휘하 참모들에 의해 허락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d) 한국군이 마을에서 수색작전을 펼쳤다. (미확인).
간접사격 임무 또한 해당 본부에서 허가하지 않았었다. (e) 12:00경, 두 명의 미 해병대원들은 지휘소 인원들과 함께 마을로 들어갔다. 그들은 작은 연 (g) 한국 해병 제2여단의 부여단장은 사건 이후에 지역 책임자(District Chief)를 방문하여 발생
못 안의 시체들과 대나무로 가려져 있는 다른 시체 무더기를 보았다.
한 사건에 대한 유감을 표명했으며, 마을 사람들을 위한 쌀 30 가마니를 두고 떠났다. (f) 그 중대는 4번의 박격포 공격을 받았던 퐁니 북쪽 600미터 근교에서 하루밤을 보냈다. (h) 감찰부는 그날의 해병 제3상륙전부대의 상황보고서에 대해 조사했다. 한국 해병은 퐁넛 지 역에서 제1중대가 작전을 수행한 것에 대해, 그리고 11:05과 15:30에 소화기사격을 당하고 아군사격에 의한 한 명의 부상자가 나온 것에 대해 상기했다. 적군 피해는 없는 것으로 보여
(g) 이른 저녁, 미 해병대원 중 하나가 호출부호 Past 1-4로부터 무전교신을 받았는데, 뭔가 수상 쩍은 구석이 있어 보이므로 어떤 누구와도 낮의 작전에 대해 논의하지 말 것을 지시받았다.
졌다. (2) 주석 (2) 주석 : 누가 퐁넛에 들어갔는지에 대한 증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마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 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 또한 밝혀지지 않았다.
(a) 작전 자체에 관한 해병들의 진술의 정확성은 반박될 수 있다. 그들이 지휘소 인원들과 마을 로 들어갔을 때, 12:00까지는 둘 중 아무도 1번 도로를 떠나지 않았다. 또한, 둘 중 아무도 중
d. 1968년 2월 20일에 해병 제3상륙부대 지휘관에게 보충조사에 대한 내용이 전달되었다. 이 문서는
대의 움직임을 여러 마을들과 관련해서 규명하지는 않았다.
별도의 주석 없이 1968년 2월12일 한국군 중대와 함께 했던 2명의 미해병의 진술을 전달하기만 하 였다. (TAB H)
(b) 이들의 증언은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의 가치를 갖는다. 1. 한국군은 소화기와 포를 발사했다.
(1) 상기 진술의 요약은 다음과 같다:
2. 한국군 중대는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던 그 지역에 있었으며, 그날 밤 내내 퐁니 북쪽 600 미터 인근에 배치되었다는 것이 특히 의미가 깊다.
(a) 9:30에서 10:30 사이에 한국 해병 중대는 CAP D-2지점과 CAP D-1 지점 사이에서 1번 도 로에서 빠져나와 서쪽으로 이동했다.
(b) 퐁넛과 안탄(An Thanh)에서 소화기 사격을 당했고 한명의 한국군 병사가 부상을 당했다. 후에 두 번째 한국군 병사가 소화기사격에 의해 부상을 당했다.
(c) 박격포가 퐁누 마을을 향해 사격되었고 25-30명의 주민들이 그 곳으로부터 달아났으나 그 중의 몇명은 파편에 의한 상처를 입어 치료를 받아야 했다.
3. 한 해병에게 침묵을 지키라는 경고는 제2한국해병여단과의 연락을 맡고 있던 미해병 연 락부대에서 무언가가 잘못 되었다고 감지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c) 조사보고서 원본이나 추가보고서에는 미해병연락부대 장교로부터의 증언이 포함되지 않았 음을 주목해야 한다.
e. 1968년 4월 16일, 해병제3상륙부대 지휘관의 공문. 제목 : 1968년 2월12일 한국해병에 의해 행해진 전쟁범죄 의혹 보고서가 베트남 군사원조사령부 지휘관에게 조사보고서와 추가보고 서가 전해졌다. (TAB 1)
100
101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1) 공문 요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략) 사태에 대해 좀 더 분석을 해본 후 한국군 여단 화력지원 협조본부 (ROK Brigade FSCC) 에
(a) 그 보고서는 한계가 있다.
퐁니(Phong Nhi) 마을 남쪽 논 근처를 표적으로 한 81mm 박격포 사격 임무를 위한 좌표 허가를 요청
(b) 전쟁범죄가 저질러졌다는 가능성이 있다.
했지만, 내가 의심하던 대로 한국군이 그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된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c) 한국해병 제2여단 지휘관 김윤상 준장은 그가 조사를 진행하였고, 사상자들은 포병과 베트
마을에 가해지는 공격을 막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해야 했었기에, 나는 연합행동단(CAG)에 무선을 보내
콩에 의한 것이라 결론지었다고 지역 책임자에게에게 시사했다.
해병 제3상륙전부대를 통해 퐁니(Phong Nhi)에 가해지는 한국군의 만행을 막아달라고 요청했다.
(d) 남베트남 정부에서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미해병과 민병대는 마을을 탈출하는 생존자들을 치료했다. 한국군은 퐁니(Phong Nhi)에서 작전을 (2) 주석 : 해병제3상륙부대 지휘관은 전쟁범죄가 일어났을 가능성을 시사 하는 것 외에는 그의 감 찰 장교의 의견(결론)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았다.
수행 중이었기 때문에 우리군의 마을 진입을 막았고 우리는 할 수 없이 그들의 작전 수행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중략) 15:00경 마을에 남은 부상자들이 빠져나오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고가 있었고 퐁
다) 실비아 중위의 1968. 2. 16.자 진술
디엔(Phong Dien)으로 들어가 도움을 제공하라는 허가가 떨어졌다. 5명의 미해병과 26명의 민병대로 구성된 정찰대와 드엉(Duong) 준위가 부상자 공중수송을 요청하기 위해 마을로 들어갔다. 두 명의 여
위 항에서 확인한 1968. 2. 18.자 “미해병대와 민병대원의 진술에 기초한 자체보고서”는 퐁니·
자와 소년만이 생존해 있었고 그들은 수송되어 갔다. 경비대는 잿더미 아래 묻혀있던 두 노인과 풀더
퐁넛 사건 직후 현장에 진입하였던 5인의 미 해병 진술을 담고 있는데, 그 중 1인인 실비아 (J. R.
미에 덮힌 있는 시체들을 도랑 근처에서 찾을 수 있었다. 잿더미에서 회수한 다른 시체들은 너무 심하게
Sylvia)
중위의 진술은 아래와 같습니다.
불에 타 신원을 확인하거나 성별조차 구분이 힘들 정도였다. 자취를 따라 내려가니 또 다른 시체 더미 사이에서 부상당한 여자 두 명을 발견했다. 그들 중 한명은 우리가 그들을 죽일 것이 두려워 내내 신분 증을 내보이고 있었고 정찰대원 중 하나인 본(Vaughn) 상병에 의해 사진에 찍혔다.
갑 제17호증의2 실비아 중위 진술서 번역본 1면 일부 발췌 (밑줄은 인용자) 라) 본 상병의 1968. 2. 17.자 진술 1968년 2월 12일 10:30 경 나는 제1번도로에서 북쪽인 다낭 방면으로 전진하다가 CAP D-2 지역 안 의 길 근처에서 한국군 중대를 보았다. 그들은 일렬로 서쪽에 있는 한 마을로 전진하고 있었다. 나는 다 낭에서 일을 마치고 디엔반으로 돌아오는 중 CAP D-1과 D-2 사이의 다리가 끊어진 관계로 어쩔 수 없 이 CAP D-1에서 머물 수 밖 에 없었다. (중략) 퐁니 (Phong Nhi) 마을에서는 포격전이 진행되고 있는 듯 했고, 마을 위로 연기가 나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사태를 알아보았고, 한국 해병대가 퐁니(Phong Nhi) 마을에 포병 폭격을 가했고 지상에서 마을을 습격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얼마지 않아 민병대 한명
미 해병 제3상륙전부대 소속이자 꽝남성 디엔반현 1번 국도에 위치한 연합작전중대 산하 경비 대에 근무한 본(J. Vaughn) 상병 역시 사건 직후 퐁니·퐁넛 마을로 진입하였던 미 해병 중 한 명 이었습니다. 본 상병은 진입 당시 카메라를 챙겨갔는데, 그가 찍은 사진들은 퐁니·퐁넛 사건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매우 귀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그 사진을 포함한 진술은 다음과 같습 니다.
이 총에 맞아 다친 어린 소년들과 총검에 팔을 심하게 다친 나이 든 여성 한명을 데리고 왔다. 그들은 치 료를 부탁하면서 한국군이 자기들을 죽이려 했다고 말했다.
102
103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제18호증의2 본 상병 진술서 번역본 1-2면 일부 발췌 (밑줄은 인용자)
2월 12일 월요일 13시 30분 경 CAP D-2 지점의 해병대원들인 우리와, 실비아 (Sylvia) 중위 그리고 시크레스트(Seacrest) 하사관은 제 1번도로로부터 CAP D-2 서쪽까지 이르는 퐁니(Phong Nhi) 마을 에서 작전 수행을 하고 있는 한국 해병대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한국군은 마을에 포격을 가한 다음
7)
자동화기 사격으로 습격을 시작했다. 길 위 우리가 있는 위치에서 많은 집들이 불타고 마을에서 커다란 연기가 나고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사진 D: 잿더미에 묻힌 마을 주민
사진 F & G: 가슴이 도려진 채 아직도 살아있는 여자 7)
민병대 중의 하나가 부상당한 소년들과 여자를 소대로 데리고 왔을 때 비로소 나는 한국군이 마을의 민간인에게도 사격을 가하고 있었고 따라서 더 많은 부상자들이 도움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후 15:00 경, 우리는 퐁니(Phong Nhi)와 퐁넛(Phong Nhut)으로 들어가 도울 수 있는 이들을 도 우라는 허락을 받았다. 우리의 정찰대는 5명의 미해군과 26명 가량의 민병대 그리고 해당지역의 작전장 교(S-3)로 구성되었다. 나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생생한 기록을 위해 카메라를 가지고 갔다.
우리는 동쪽 경로의 적 매복을 피하고자 퐁니(Phong Nhi)근처의 넓은 루트를 선택해 서쪽으로부터 진입했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내가 촬영한 사진에 기록되어 있다.
사진 H: 여자와 아이들 무리 중 가장 숫자가 많았던 무리. 거의 모두 죽었음. 오른쪽 상단의 여자와 아이는 아직 살아있음. 사진 F&G에 있는 여자 도 이 무리에서 찾았음.
사진 A: 진입하여 처음으로 보게 된 집들 중 하나
104
사진 B: 타버린 집들
7) 한겨레신문 고경태 기자는 2001. 4.경 퐁니·퐁넛 마을에서 마을주민들에게 위 사진을 보여주고 신원을 확인하는 조사를 진행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가슴이 도려진 채 아직도 살아있는 여자”로 기재된 사람 이 응우옌티탄(당시 21살)이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녀의 여동생 응우옌티호아의 진술에 따르면 “언 니는 한쪽 가슴이 완전히 도려져 있었고, 또 다른 가슴은 반쯤 베인 상태였어요. 그래서 가슴이 덜렁덜 렁거렸죠. 왼쪽 팔은 잘려 있었고, 몸에 총상이 있었지만 희미하게나마 의식이 있었어요. 병원에서 언니 는 계속 ‘엄마’만을 불렀습니다. 엄마는 죽었는데 말이에요. 언니가 숨을 거둘 때의 모습도 기억나요. 눈 을 뜨고 아버지를 쳐다보면서 ‘아빠’하고 나지막하게 불렀지요. 그리곤 고개를 떨구었어요. 마지막이었습 니다.” 사건 당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쩐티투언은 “한국군이 마을사람들을 한 지점에 모아놓고 총을 갈겼습니다. 저 역시 그곳에 있었지만 다행히도 맨 밑에 깔렸지요. 기어 나와 봤더니 한국 군이 응우옌티탄 언니를 강간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대검으로 장난을 치고…”라고 증언하였습니다[갑 제 19호증 “그날의 주검을 어찌 잊으랴”, 2001. 4. 24. 「한겨레21」.
105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마) 1968. 2.경 작성된 퐁니·퐁넛 사건을 직접 목격한 베트남인들의 진술서 본 항의 아래 각 진술들은 퐁니·퐁넛 사건의 피해자 또는 사건을 직접 목격한 베트남 인들(남베 트남 민병대)의
진술들로서, 미군에 의해 수집되어 ‘미해병대와 민병대원의 진술에 기초한 자체보
고서’에 실린 것들입니다. 진술들은 일관되게 한국군이 1968. 2. 12. 오전 퐁니·퐁넛 마을을 공 격하였고, 이후 수많은 민간인 사상이 발생하였음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갑 제21호증의2 연합작전단 델타중대 2소대 민병대원이자 베트남인
사진 J1 & J2: 사진 I & J에 있는 여자와 아이가 발견된 무리
응우웬 사(Nguyen Xa)의 진술서 번역본 1면 (밑줄은 인용자)
2월 12일 약 10시경 우리 6명은 CAP D-2지점에 있는 벙커의 위에 앉아서 한국군을 보고 있었다. (중략) 퐁니마을에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이곳은 1번 도로와 아주 가까워서 우리는 망원경 없이도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중략)
한국부대는 마을주민들을 그룹별로 죽이기 시작했고, 우리는 각각 세 군데의 장소에서 이런 일이 벌 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첫 번째 장소에서는 한번에 17명의 사람이 사살되었고, 두 번째 장소에 서는 14명이, 그리고 다른 장소에서는 6명, 그리고 3명이 사살되었다.
사진 K & G: 뽑혀진 벼 무리에 가려진 채 도랑에서 발견된 여자와 아이들의 시체
그 후 오후에 우리가 그 마을을 수색했을 때 나는 나의 친척 10명이 사살되었고 2명이 부상을 당했음 을 발견했다. (응우웬 양Nguyen Yang(14)과 응우웬 티 탄Nguyen Thi Thanh(9))
우리가 마을을 돌며 사진을 찍을 때 발견한 이상한 점 중 하나는 시체 더미 주위에서 탄흔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는 마을 주민 모두가 가까운 거리에서 총에 맞았거나 총검에 찔렸다는 것을 입증
[손으로 그린 지도]
한다. 나의 친구인 민병대원 응우웬 티(Nguyen Thi)의 친족들의 경우, 3명이 사살되었고 1명이 부상을 당 했다.
106
107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갑 제20호증의2 퐁니마을의 이장이자 베트남 민간인인 응우웬 쭈어(Nguyen Chua)의 진술서 번역본 1면 (밑줄은 인용자)
그 사격지에서 나는 너무나도 무서웠고, 죽은 척 가만히 있으려 했다. 그러나 한 한국군인이 나를 보 았고, 나는 두손을 내 가슴 앞으로 모으고 그에게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그는 나를 향해 총을 쏘았고, 총알이 나의 손가락을 망가뜨리고 두 팔에 부상을 입혔다. 그 후 나는 정신을 잃었다.
1968년 2월 12일 대략 오전 10시경에 한국군이 퐁니마을과 퐁넛마을을 공격했다. 군인들은 얼룩무니 군복을 입고 있었으며 한국어를 사용했으며, 전체적으로 100명이 넘는 것 같았다. (중략)
내가 정신을 차린 뒤, 나는 내 부모님과 두 오빠가 죽었다는 것을 알아냈고 그리고 나의 3개월된 어린 여동생은 칼에 찔려 부상을 당했음을 알았다.
한국군은 서쪽의 디엔반 방향에서 왔으며 포장되어 있는 1번 지역의(route #1) 도랑에 도착했다. 한국군 은 처음에는 퐁니마을을 지나 서쪽으로 이동했으며, 후에 퐁넛마을을 통과해 서쪽과 동쪽으로 이동했다.
나는 위생병에 의해 응급처치 되고 있는 사진 속의 나(사진 O, P)를 알아볼 수 있었다.
우리는 한국군들이 마을 사람들을 공격하리라는 것을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퐁니 마을을 통과할 때 사람들은 모두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퐁넛마을에서 총성이 들리고 난 후, 한국부대 는 퐁니마을로 돌아왔다. 그들은 주민들에게 그들의 집에서 나오라고 명령한 후 그들을 모두 한 장소로
갑 제25호증의2 꽝남성 디엔반현 지역 대표
집결시킨 뒤 이동시켰다. 한국군은 어떠한 경고도 없이 마을 주민들을 쏘기 시작했고 아이들을 칼로 찔
호앙 트렁(Hoang Trung)의 진술서 번역본 1면 (밑줄은 인용자)
렀다. 나는 2월 12일에 퐁니 퐁넛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익숙하다. 퐁니마을에서 33명의 죽임을 당했고 4명이 부상당했다. 나와 나의 동료들은 내가 그 날 오후 CAP D-2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그 마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중략)
퐁니마을의 퐁넛마을의 사망자의 공식 리스트는 나의 사무실에서 준비를 했다. 모든 사망자는 누구인
갑 제23호증의2 꽝남성 디엔반현 퐁니마을에 거주하는 베트남 여성
지 밝혀졌고 그리고 2월16일 모두 확인이 되었다. (사본은 첨부되어있음)
쩐 티 뜨억(Tran Thi Duoc)(16세)의 진술서 번역본 1면 (밑줄은 인용자) 우물 안에는 아직도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12명의 시체가 있고 그리고 다른 사망자들은 한국군의 작 (이 진술은 그녀가 다낭 민간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그녀가 한 진술이다)
전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가져올 수 없었다.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한국군은 2월12일 우리 마을로 왔다. 그들은 마을주민들에게 집에서 나와 다른
제 2한국해병여단의 제 1대대의 선임장교는 퐁니마을의 사건 이후 나를 불렀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
장소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어떤 장소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경고도 없이 그곳의 집에 있는 사람들을
을 위해 30포대의 쌀을 제공했다. 그는 어린아이들과 여성들에게 그런 일이 생긴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
향해 사격을 시작했다. 그러고 난 후 한국군은 나를 포함한 이동명령을 받았던 주민들을 향해 총을 쏘기
하며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작했다.
108
109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3) 소결론 갑 제26호증의2 「한국군이라 불린 동맹군」 번역본 9-10면 (밑줄은 인용자) 앞서 확인한, 1968년부터 1970년까지 주월미군에 의해 작성된 10개의 문서에는 모두 한국군에 의한 퐁니·퐁넛 사건의 발생과 그로 인한 민간인들의 무고한 학살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으 며, 그 날의 끔직한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1968년 2월 12일 구정 휴일이 있은 지 2주 후 한국해병대는 디엔반현, 탄퐁사, 퐁니촌에서 많은 양민 들을 학살했다. 우리가 얘기 들은 다른 학살사건과는 달리 이 사건은 적어도 꽝남에서는 매우 널리 알려 졌다. 서구 언론에서도 이 사건을 언급할 정도였다. 1972년 2월13일 <뉴욕 타임즈> 기사는 미 국방성과 해병대 관리는 이 사건의 발생을 인지하고 있었고, 그에 대해 한국군 사령관에게 언급을 한 것으로 보도 하고 있다. (중략)
다. 1976년 출간된 「한국군이라 불린 동맹군: 베트남 보고서」 1972년 6월, 우리는 퐁니촌에서 온 소규모의 피난민 가운데 여덟 명을 만났다. 그들은 우리에게 다음
미국에서 발간되는 『BULLETIN OF CONCERNED ASIAN SCHOLARS』 저널의 1976년
4-6월호(제8권 제2호)에는 존스 다이앤(Jones Diane)과 존스 마이클(Jones Michael)이 공동집필
한 「한국군이라 불린 동맹: 베트남 보고서」(Allies Called Koreans: A Report from Vietnam) 보
고서(이하 ‘이 사건 1976년 보고서’라고 합니다)가 개재되어 있습니다. 존스 다이앤과 존스 마이클은
1970년부터 1974년까지 미국 친우봉사위원회8) 베트남 사이공(현 호치민) 지부에서 활동하였는데,
과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고 들려주었다.
일단의 한국군 병사들이 1번 도로에서 매일 있는 도로 정지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퐁니에서 불과 얼마 안 된 거리에서 정찰부대는 대인 지뢰에 걸렸다. 부락민들은 지뢰가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런 총성도 없었고 그 지역에서 교전이 이루어지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했다. 그 폭발이 있
1972. 5. ~ 8.경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피해자들을 광범위하게 인터뷰하여 이 사건 1976년
은 후 얼마 안 돼 군인들이 도로변 바로 옆에 있는 퐁니촌으로 들어왔다. 군인들은 주민들을 불러 모으
보고서를 작성한 것입니다.
고 인접한 들로 데려가 총살했다. 군인들은 집안에 있었던 사람들도 쏴 죽였다. 그리고 마을 전체에 불을 질렀다. (중략)
이 사건 1976년 보고서에서도 퐁니·퐁넛 사건은 당시 ‘유명했던’ 사건으로서 비중 있게 다뤄 지고 있습니다. 퐁니·퐁넛 사건에 관한 인터뷰는 1972. 6.경 이루어졌으며, 그 내용은 앞서 확인
가까운 절에서 온 한 비구니 스님은 우리에게 시신들 가운데 어떤 것은 어린 아이까지 칼로 창자를 끌
한 이 사건 주월미군 감찰보고서의 내용과 일치하며, 이후 검토할 이 사건 1중대 부대원들 및
어낸 채 죽은 것이었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죽었어요.” 그 스님은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었
퐁니 마을 주민들의 증언과도 모두 부합합니다.
다. “우리 작은 절 안에는 그들 모두를 위해 향을 피울 공간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퐁니촌은 국도에서 가까웠고 당시 사이공 정부에서는 안전지역으로 판정한 지역이었다. 그 희생자들 가운데에는 남베트남 군인들의 아내와 아이들도 포함돼 있었다. 생존자들은 전면적인 조사와 정부가 자 신들의 편에서 개입하는 것을 지켜보았지만 어떤 주목할 만 한 결과는 없었다고 말했다. 그 노파는 6명 의 가족이 죽은 보상으로 한 사람당 20㎏의 쌀과 2m의 상복을 만들 천을 받았다고 했다.
8) 미국 친우봉사위원회는 1917년 개신교 평화주의 분파인 퀘이커(Quakers) 신자들과 반전 운동 단체들이 함께 만든 단체로서, 1947년 ‘영국 친우봉사위원회’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타기도 하였습니다.
110
111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라. 꽝남성 디엔반현 문화통신청의 퐁니·퐁넛 사건 자료집 … 럽남 마을에서 개울 하나와 논길 100미터 정도 떨어진 퐁넛에서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 문화통신청은 1995년경 현 산하 20개 사에 중요한 역사적 사건과 문 화유적을 각 보고하라고 지시하였고, 퐁니·퐁넛 사건이 발생하였던 디엔안사에서는 퐁니·퐁넛
럽남 마을 쪽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연기가 보이자 퐁넛촌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중략) 팜티깜은 서둘
사건을 ‘중요한 사건’으로 보고하였습니다. 이후 위 문화통신청은 퐁니·퐁넛 마을을 조사하여
러 남편 응우옌전에게 이렇게 말했다. “빨리 나가라. 남자들은 다 가라. (퐁넛 인근) 퐁응우 마을을 지나
1995. 12.경 “자료: 야유나무 학살, 퐁니 디엔안사”(Tư Liệu: Vụ Thảm Sát Tại Cây Da Dù Phong Nh
서 빨리 나가라. 마을 남자들과 같이 빨리 나가고 우리 여자들과 아이들은 여기에 남겠다. 그들(군인)이
Điện An)라는
제목의 자료집(이하 ‘이 사건 디엔반현 문화통신청 자료집’이라고 합니다)을 발간합니다.
설마 우리를 죽이겠나.” 응우옌전 아저씨가 갈까 말까 망설이자 깜 아주머니의 마음이 더 급해졌다 “빨 리 가. 빨리 가…. 나하고 자식들은 여기 남겠어. 괜찮아.”
이 사건 디엔반현 문화통신청 자료집은 베트남 정부 공식기구에 의해 발간된 퐁니·퐁넛 사 … 10시 30분경, 철모를 쓴 군인들이 개울을 넘고 논을 지나서 왔다. 그들이 응우옌전 집에 들어왔는
건 자료라는 점에서 큰 증명력을 가집니다.
데 깜 아주머니는 동굴 구석에서 세 명의 자식들을 꽉 안고 있었다. 수류탄 한 개, 두 개…. 동굴에 불이
이 사건 디엔반현 문화통신청 자료집에는, 먼저 퐁니 사건으로 인한 총 74명 사망자 명단과
붙었고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어머니의 몸이 타올랐는데 아직도 자식들을 꽉 끌어안은 자세로 있었다.
17명 부상자 명단이 각 기재되어 있으며, 다음으로 퐁니·퐁넛 마을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서 아
짠반로이(1927년생)가 말했다. “그놈들이 집 앞에 들어왔을 때 나는 바나나나무들 쪽으로 기어갔다. 쑤
래와 같이 1968. 2. 12. 발생하였던 퐁니·퐁넛 사건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15세)가 내 뒤에서 기어 따라왔다. 대나무 숲 속에 숨었을 때 나는 후에 아저씨 집 쪽에서 사람들이 말 하는 소리를 들었다. ‘제발, 제발, 우리 가족들을 죽이지 마라.’ 그 말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총성이 터지 며 이후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다.”
갑 제27호증의2 디엔반현 문화통신청 자료집 번역본 2-3면 … 한참의 침묵이 흐른 뒤에 판르엉(럽남 마을에서 유일하게 가족 전체가 살아남은 집)이 느리게 말했 9)
10)
원숭이해 1월 14일 아침 8시. 퐁니촌 럽남 마을 에서
다. “당일 점심 12시경 총소리가 가라앉았는데 대나무로 된 벽은 아직도 불에 타느라 쇅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아내와 아이들을 보고 ‘가만히 있어라 따이한 놈들이 어쩌면 다시
9) 10) … 1번 국도의 지압바 다리 근처에선 일개 중대의 남조선 군인들이 행군을 하고 있었다(청룡여단, 호
이안 주둔). 야유나무를 출발점으로 해서 군인들이 서쪽으로 1백 미터 떨어진 럽남 마을로 들어갔다.
들어올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오후 2시 나는 동굴에서 기어 나왔다. 1번국도 쪽을 보니 남베트남 군인들 과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퐁넛 쪽을 바라보니 마을 사람들이 불타 오르는 집 근처에 모여 있었다. 나는 아내와 자식들을 불러와 집 정문으로 나갔다. 그리고 후에 아주머니 집 연못으로 갔다. 응우옌쑤(1928
… 찐티드억 아주머니는 오른쪽 옆구리와 오른쪽 허벅지에 통증을 느꼈다. 뒤에서 논으로 내려가는
년생) 아저씨, 찐티드억 아주머니의 남편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왔다. 모두 합해 17구의
사람들의 발소리와 함께 비명이 들려와서 일어나 달리려고 했다. 또 총소리가 한참 들렸다. 비참한 비명
시신을 발견했다. 여성, 아이, 노인의 시신들이 서로 포개져 있었다. 갑자기 나는 아주 작은 신음 소리를
들과 함께 사람들이 찐티드억 아주머니의 몸 위로 엎어졌다. 피가 논을 빨갛게 적셨다.
들었다. 응우옌득상(1954년생)이 한쪽 팔에 중상을 입었는데 내장이 드러났고 심장은 뛰고 있었다. 묵 아이도 배를 다쳤다. 어머니 시신 위에 엎어져 있었다.”
9) 음력 1968. 1. 14.은 양력으로 1968. 2. 12.입니다.
10) 한 국의 리(里)에 해당하는 퐁니촌(마을)에 속한 5개 마을 중 하나입니다.
112
113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마. 이 사건 1중대 군인들의 증언
나) 퐁니마을에는 베트콩이 없었고, 민간인들만 있었음
1) 중앙정보부에 의한 퐁니·퐁넛 사건 조사
최영언(1소대장), 이상우(2소대장)의 증언에 의하면, 퐁니마을에 진입하여 소대원들이 마을을 뒤 졌지만, 베트콩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마을에는 어린이, 부녀자, 노약자 등 민간인들
퐁니·퐁넛 사건은 주월한국군도 조사를 할 수밖에 없었으나, 한국군의 조사는 학살을 은폐하
만 남아있었고, 겁먹고 놀란 표정으로 밖으로 나오라는 이 사건 1중대의 지시를 저항 없이 따랐
기 위한 조사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주월한국군 측에서 퐁니·퐁넛 사건 조사를 담당하였던 청
습니다.
룡부대 헌병대 수사계장이었던 성 아무개(당시 계급 중사)씨는 2000. 6.경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 서 “청룡부대처럼 위장복을 입었지만 청룡부대로 꾸민 베트콩들의 소행이다. 청룡부대는 절대
다) 후방에 있던 3소대의 한 분대가 민간인들을 사살함
양민을 학살한 일이 없다”는 내용의 지침이 사전에 내려왔고, 위 지침에 따라 형식적인 조서를 받았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성 아무개씨는 “양민학살이 있었지만 사실을 은폐시키라는 것과 다
당시 이 사건 1중대 대열의 중간에 있었던 이상우(2소대장)는 ‘마을에 진입하여 70~80명의 민간
름 없었다”며 “나 역시 왜곡된 조서를 작성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렇게 했다”라고 밝혔습니다.
인들을 후방으로 대피시키고, 이를 중대에 보고하고 앞으로 나가는데 갑자기 후방에서 총소리 가 났고, 그날 저녁 뒤로 후송시킨 사람들을 다 사살하였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고 증언하
한국 정부는 1969. 11.경 당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를 통해 이 사건 1중대 소속 10명의 장
교와 선임하사들을 소환하여 1968. 1.에서 2.까지의 작전 수행 내용(특히 퐁니·퐁넛 사건 관련)에 대
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사건 1중대 대열의 앞쪽에 있었던 최영언(1소대장)은 ‘민간인들을 모두 1번국도 쪽 후방으로 후송시키고 마을 끝까지 갔다. 마을 끝에서 큰 뱀이 죽어있는 것을 보고
하여 조사 (이하 ‘이 사건 중앙정보부 조사’라고 합니다)하였습니다. 이하에서 확인할 이 사건 1중대 소속
기분이 안 좋다고 생각하던 중, 갑자기 후방에서 들입다 총소리가 났다. 후미의 소대의 어느 분
군인들은 모두 이 사건 중앙정보부 조사에 참여하였던 이들이며, 이들은 모두 이 사건 1중대에
대가 쏜 걸로 언뜻 들었다’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의해 퐁니·퐁넛 사건이 발생하였음을 명백하게 자인하고 있습니다. 반면 김기동(3소대장)과 김석현(중대장)은 ‘누군가 사살한 것은 맞지만 누가 그런 것인지 모르 2) 위 중앙정보부 조사에 참여했던 이 사건 1중대 소속 군인들의 증언
고, 기억도 나지 않는다’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이는 앞선 최영언, 이상우의 증언과 배치되는 것 이라기보다는 퐁니·퐁넛 사건의 구체적 사실에 대한 증언을 거부했던 것일 뿐, 사건 자체는 인
2000. 5.경 「한겨레21」에 실린 이 사건 1중대 장교들[김석현(중대장), 최영언(1소대장), 이상우(2소대 장),
정하는 취지의 증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기동(3소대장) 및 하사관]의 증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라) 이 사건 1중대 중대장 김석현은 퐁니·퐁넛 사건으로 인해 조기귀국 되었음 가) 이 사건 1중대가 퐁니·퐁넛 마을을 공격하였음 최영언(1소대장)은, 1968. 2. 12. ‘해병 제1대대 1중대는 1, 2, 3소대 순으로 1열 종대를 지어 퐁니촌
이상우(2소대장)는 ‘김석현 중대장은 그 사건 때문에 1주일쯤 뒤에 조기 귀국했다. 청룡여단 헌병 대쪽에서 조사관이 나와서 나도 베트남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이상우의 증언
측면을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퐁니촌이 있는 서쪽으로부터 선두 1소대 병력 쪽을 향해
은 『파월한국군전사』에 기록된 바와 일치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김석현(1중대장)은 1967. 11. 20.
사격이 날아와, 1명이 부상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1중대는 애초에 안전마을인 퐁니마
파병되었음에도 이례적으로 1968. 2. 12. 퐁니·퐁넛 사건 발생한 직후인 1968. 3. 2. 귀국조치 되
을에 진입할 계획이 없었으나, 중대장(김석현)은 퐁니마을을 공격하라고 명령하였고, 1, 2소대는
었기 때문입니다.
방향을 왼쪽으로 틀어 총을 쏘며 퐁니마을에 진입했습니다‘라고 증언하였습니다.
114
115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3) 소결
2) 쩐반지옙(Tran Van Diep)의 진술
이 사건 1중대 소속 군인들 및 관련자 증언 내용을 종합하면, 1968. 2. 12. 이 사건 1중대가 퐁니
쩐반지옙은 1953. 1. 10.생으로, 이 사건 당시 16세였습니다. 당일 할아버지 쩐 황 (Tran Hoang), 할
마을의 민간인을 위법하게 살해하거나 상해를 입혔음은 명백하게 들어납니다. 위 증언들은 사 실상의 ‘자백’이며, 이 군인들의 증언은 아래에서 확인할 피해자들의 증언과 정확하게 일치합
머니 응우엔 티 응(Nguyen Thi Ling), 동생 쩐 린(Tran Linh, 당시 14세), 쩐 반 투(Tran Van Thu, 당시
5세),
쩐 티 땀(Tran Thi Tam, 당시 3세)와 함께 집에 있었고, 아버지(Tran Tranh)는 어머니(Nauyen
Thi Wuyen)가
니다.
다.
바. 퐁니 마을 주민들의 일관된 증언
막내 동생을 출산하여 2km 부근의 보건소에서 어머니의 간호를 하고 있었습니
처음 총소리가 들린 시간은 오전 8-9시로 기억하고 있는데, 총소리를 듣고 바로 건너편 집의 방공호로 가족들과 함께 이동하였습니다. 당시 쩐반지옙의 집11)은 초가였고 방공호가 없었기
2018년 현재 당시 사건을 경험하고 생존해 있는 퐁니 마을 주민들은 안타깝게도 많지 않으나,
때문에 위험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쩐반지옙과 가족들이 건너편 집으로 피신한 후 한
퐁니 마을 주민들은 모두 자신들이 경험한 퐁니·퐁넛 사건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일관되게 진
국군들이 그 집 앞을 지나갔는데, 할아버지가 그 집에 있던 물소가 겁을 먹고 계속 움직이자 이
술하고 있습니다.
를 잡아주기 위해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 때 한국군이 할아버지에게 총을 쐈고, 할아버지의 비 명소리를 듣고 쩐반지옙도 밖으로 나왔다가 한국군이 쏜 총에 다리를 맞았습니다. 총에 맞은
1) 판 르엉(Phan Leung)의 진술
후 서둘러 방공호로 다시 들어왔고, 조용해지기를 기다렸습니다.
판 르엉(1926년생)은 1968. 2. 12.당시 본인의 집에 있다가 총소리를 들었습니다. 총소리가 들렸을
쩐반지옙의 진술에 의하면, 당시 퐁니마을에서 만날 수 있었던 군인은 베트남, 한국, 미국 군
때 본인 집 방공호에 숨었다가, 집에 있는 것이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에 물소가 있는 집(아래 응
인만 있었는데, 미국 군인과 한국 군인은 군복이 거의 비슷했고 베트남 군복은 구별이 가능할
이동하여 방공호에 숨었습니다. 그 집에 물소가
정도로 차이가 컸습니다. 쩐반지옙에게 총을 쏜 사람이 입은 군복은 베트남 군복은 아니었고,
총소리를 듣고 놀라서 계속 움직였고 판 르엉은 물소를 잡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가 한국 군인
미국 군인과 다르게 덩치가 작고 피부가 까만 모습을 보고 한국군인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
들과 마주쳤습니다. 한국군인은 물소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고, 쓰러진 물소에 깔린 판 르엉이
었습니다.
우옌티탄A와 응우옌득상의 진술에서도 확인되는 집)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고 이동하였습니다. 방공호에 들어가서, 이후 1-2시간 정도 방공호에 계속 숨어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판 르엉은 한국군이 이동하는 것을 확인하고 방공호에 있는 가족들에게 밖으로 나오도록
하였고, 방공호 밖으로 나온 후, 원고 응우옌티탄A와 응우옌득상이 물소 집으로 오는 것을 발
견하였습니다. 원고 응우옌티탄A는 배에 상처가 나있었고, 응우옌득상은 배와 엉덩이에 피가 흐르고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 기어서 물소 집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원고
응우옌티탄A는 부축해서, 응우옌득상은 돗자리로 옮겨서 큰 길로 나갔는데, 가는 길에 응우옌 싸 (원고 응우옌티탄A와 응우옌득상의 삼촌)를 만났고, 응우옌싸가 헬기를 불러 원고 응우옌티탄A 남매
를 헬기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116
집에 돌아와 이제 한국군이 갔으니 나와도 된다고 하여 밖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밖으로 나 온 가족들은 인근에 있는 쩐반지옙의 외삼촌 집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외삼촌 집으로 이동하려 할 때, 쩐반지옙은 동생 쩐반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총소리를 듣고 건너편 집으로 이동하여 방공호로 들어갔을 때, 쩐반지옙의 동생인 쩐반투는 퐁넛마을 방향으로 도망하고 있 는 사람들을 따라 자기도 도망가겠다며 방공호 밖으로 나갔고, 이는 쩐반지옙이 총에 맞기 전
11) 현재도 같은 집에 살고 있습니다.
117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이었습니다. 당시 한국군이 퐁니마을에서 퐁넛마을로 향하는 방향으로 오고 있었고, 사람들은 퐁넛마을 방향으로 도망가고 있었습니다. 이를 아버지에게 설명하면서 집 밖으로 나오는 길에, 쩐반지옙은 쩐반투의 시신을 발견하였습니다. 방공호로부터 불과 100미터 정도 떨어진 논두렁 에, 쩐반투는 가슴 부위에 총을 맞고 발에 수류탄을 맞아 발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로
3. 원고 응우옌티탄A의 피해사실 가. 원고 응우옌티탄A의 구체적 진술
누워있었습니다.
원고 응우옌티탄A는 1960년생 여성으로, 1968년 당시 퐁니 마을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
3) 응우옌티니아(Nguyen Thi Nghia)의 진술
Trí, 1934년생, 당시 34세)와
응우옌티니아 (1938년생)는 사건 당시 30세였으며 꽝남성 디엔반현 디엔안 퐁넛마을에 거주하
고 있었습니다. 당시 응우옌티니아는 빈(Binh), 봉 (Bong), 통 (Thong), 민 (Minh), 이렇게 4명의 자 녀와 함께 집에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군인들이 마을사람들을 한 장소에 모이게 한 다음에 폭 탄으로 죽였고 일부는 집안에서, 논에서 죽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한국군들이 마을사람들의 시신을 죽인 장소에 그대로 두고 갔기 때문에 사건 당시 마을에 없어서 살아남았던 사람들이 나중에 대로변으로 시신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날 응우옌티니아의 가족 중에서도 어머니(Tran
Thi Ky),
언니(Nguyen Thi Thoi), 조카(Le Dinh Duoc)이 사망하였습니다.
었습니다. 원고 응우옌티탄A는 1968년 당시 8살(한국나이 9살)이었으며, 어머니 판티찌(Phan Thị
1954년생, 당시 14세),
언니 응우옌티쯩(Nguyễn Thị Trọng, 1957년생, 당시 12세), 남동생 응우옌득쯔엉
(Nguyễn Đức Trường, 1963년생, 당시 6세)과
함께 퐁니 마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12)
원고 응우옌티탄A는 퐁니·퐁넛 사건을 직접 보고 경험한 목격자이자 본인 또한 피해를 입은
피해자인바, 원고 응우옌티탄A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습니다. 1) 1968. 2. 12. 퐁니·퐁넛 사건의 가해자는 한국군이었음
원고 응우옌티탄A는 1968. 2. 12. 오전 자신이 살던 집에 들어와서 총격(이하 ‘퐁니·퐁넛 사건 총격’이
라고 합니다)을
사. 소결: 본 항의 증거들을 통해 명백히 확인되는 퐁니·퐁넛 사건
오빠 응우옌득상(Nguyễn Đức Sang, 서류상으로는 1956년생이지만 실제 출생은
가한 한국군은 3-4명이었고, 그들이 한국 군복을 입고 있었다고 기억합니다. 응우
옌티탄은 퐁니·퐁넛 사건 이전에도 한국 군인들을 퐁니 마을에서 여러 차례 본 적이 있고, 당시 한국 군인들이 입었던 얼룩무늬 군복의 모양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파월한국군전사』에 기재된 1968. 2. 12. 이 사건 1중대의 작전지역, 주월미군의 내부 공식보고 서들, 그리고 그 보고서에 실린 사건 직후의 목격자들의 진술, 이 사건 1중대 소속 참전군인들의 사실상 자백에 가까운 증언, 그리고 퐁니·퐁넛 마을 주민들의 일관된 증언들까지 종합하면, 퐁 니·퐁넛 사건의 진실은 매우 구체적이며 중층적으로 입증됩니다.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목 격자의 진술이 모두 일치하고, 이를 기록한 문서들 역시 오랜 시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 한 사실을 지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하에서는 이처럼 분명하게 확인된 퐁니·퐁넛 사건에서 원고 응우옌티탄A 가 총격을 당하
였고, 그녀의 가족들이 희생되었다는 점에 관하여 입증하겠습니다.
2) 원고 응우옌티탄A의 가족들은 오빠를 제외하고는 모두 한국군에 의해 살해당했음 1968. 2. 12. 아침, 콩 튀기는 듯한 총소리가 들리자, 원고 응우옌티탄A 가 살던 집에 남아있던 가 족들은 이모가 이끄는 대로 방공호13)로 대피하였습니다. 1968. 2. 12. 당일 어머니는 집에 없었고
이웃에 살던 동네 오빠 진저(Trịnh Chớ, 1956년생, 사건 당시 12세 정도, 물소가 있는 집의 주인인 쩐티드억의
12) 원고 응우옌티탄A의 아버지 응우옌득푸엉(Nguyên Đức Phương)은 함께 살지 않았는데, 원고 응우옌티탄A 는 아버지가 1967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13) 1968년 당시 베트남은 전쟁 중이었고, 베트남 가옥 곳곳에는 미군 폭격에 대비해 파놓은 작은 동굴 같은 공간 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 총격 당시 응우옌티탄의 집에도 깊이 1m 정도의 구덩이에 미군이 사용하던 모래포대 를 주변 벽으로 올리고 천장을 덮은 형태의 공간이 있었습니다. 이하에서는 이를 ‘방공호’라 하겠습니다.
118
119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아들)가
집에 놀러와 있었습니다. 집안에 아기인 조카 도안테민부터 15살 오빠까지 6명의 아이들
은 함께 채소 심기 놀이를 하고 병 모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 한국군 3-4명이 원고 응우옌티탄A의 집으로 들어왔고, 방공호로 다
가와 한 손에는 수류탄을 들고 한 손으로는 나오라고 손짓을 하였습니다. 응우옌티탄A의 이모 는 무서웠지만 아이들에게 나가자고 하였습니다.
3) 응우옌티탄A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음 한국 군인들은 이모를 죽인 뒤 집에 불을 붙이고는 모두 집 밖으로 나가 다른 집으로 향했습니 다. 원고 응우옌티탄A의 오빠는 엉덩이(오빠는 배에 총을 맞고 그 총알이 엉덩이까지 관통한 것이었는데 응우 옌티탄A는 엉덩이에 맞은 줄 알고 있었습니다)에
총을 맞고 심하게 피를 흘리며 부엌 옆 대나무 숲에서
쓰러져 있었는데, 응우옌티탄A 가 오빠를 바라보니 오빠가 팔을 움직이고 있어서 살아있는 걸 알게 되어서 오빠 쪽으로 다가가 오빠를 흔들어 깨우며 일어나서 나가자고 했습니다.
방공호에 있던 7명 모두가 마당으로 나갔고, 한국 군인들은 사람들에게 집 안쪽 부엌으로 이동하라고 손짓하였습니다. 그렇게 오빠응우옌득상부터 방공호에서 나와서 부엌 쪽으로 이 동하였는데, 그 순간 한국 군인들이 갑자기 총을 쏘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빠 응우옌득상은 제
일 먼저 총을 맞고 쓰러졌고 원고 응우옌티탄A와 언니, 동생은 부엌 근처에서 총을 맞고 쓰러졌
습니다. 원고 응우옌티탄A는 배에 총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응우옌티탄A는 배가 몹시 아팠지만 다행히 의식은 있었기에 쓰러진 채로 주변을 살폈습니다. 원고 응우옌티탄A 옆에 찐쩌가 쓰러
져 있었고, 앞에는 언니 응우엔티쩡이 엎드려 있었습니다. 물통 근처에는 동생 응우엔득쩡이 누
워있었는데 턱에 총을 맞았는지 숨쉴 때마다 입으로 피를 내뱉고 있었습니다. 마당 쪽을 보니 방공호 옆 마당에 서 있던 한국 군인들을 총을 쏘고 난 이후 집에 불을 붙이려고 하고 있었습 니다. 방공호에서 마지막에 나온 이모는 한 손에 조카를 안은 채로, 한국군인들에게 불을 붙이
응우옌티탄A는 오빠와 집 밖으로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한국 군인들이 집에서 10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물소가 있는 집에서 물소를 향해 총을 쏘고 있는 장면을 보았고 오빠가 숨으라고 하여 길옆에 있는 논에 숨었습니다. 물소 집은 외양간을 지나야 그 집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
였는데 한국 군인들이 물소에게 총을 쏘는데도 물소가 외양간에 서 있었기 때문에 한국 군인 들은 결국 물소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집에서 나와 옆마을인 퐁넛마을 쪽으로 향했습니다. 한국 군인이 퐁넛 마을 방향으로 멀리 이동하는 모습을 본 뒤, 원고 응우옌티탄A와 응우옌
득상은 숨었던 논에서 나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응우옌티탄A와 오빠 응우옌득상은 불에 타지 않은 물소가 있는 집으로 향하였습니다. 물소집의 방공호 안에는 10명 정도의 마을 사람
지 말라고 애원하는 듯한 손을 뻗었습니다. 이모가 그렇게 손을 뻗자 한 한국 군인이 이모를 죽
들이 있었는데, 본래 쩐티드억의 집이었으나 당시에는 쩐티드억은 없고 쩐티드억의 아이들, 그
였습니다.
리고 이웃에 사는 판 르엉과 그 부인,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응우옌득상은 그 방공호 문 앞에 기
결국 1968. 2. 12. 오전에 벌어진 퐁니·퐁넛 사건 총격으로 원고 응우옌티탄A의 어머니와 언
니, 남동생, 이모, 어린 조카 모두 당일 사망하였으며14), 원고 응우옌티탄A와 오빠 응우옌득상
은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 간신히 살아남았습니다.
운이 빠져서 쓰러졌고 기절하여 의식을 잃었습니다. 방공호 안에 있던 마을 이웃 판 르엉의 부인이 원고 응우옌티탄A에게, “너희 엄마가 아직 다
낭에 안갔을 것이다”, “이 시간에는 사 아버지(Trinh Sa의 아버지, 2018년 현재 나이는 90이 넘었음) 밭
에서 야채를 뽑고 있을 꺼다. 지금 엄마를 찾아봐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응우옌티탄A는 움 직이지 못하는 오빠를 그대로 두고 엄마를 찾으러 갔습니다. 그제서야 응우옌티탄A는 총에 맞
아 생긴 배의 상처에서 피는 물론이고 내장까지 조금씩 빠져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응우옌티탄A는 손으로 배의 구멍을 틀어막고 엄마를 찾기 위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엄마 를 찾으러 가는 길에 물소집 근처 논에 10여명이 쓰러져있던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 아버지 집과
밭을 돌아다니면서 엄마를 찾고 있다가 마을 사람들이 오빠를 들것으로 실어서 국도 쪽으로 옮 14) 퐁니·퐁넛 사건으로 인해 사망한 응우옌티탄A의 가족들은 모두 이 사건 디엔반현 문화통신청 자료집에 실린 퐁니·퐁넛 사건 희생자 명단에서 출생년도와 함께 확인됩니다.
120
기는 보았습니다. 그 순간 엄마도 없는데 오빠까지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빠가 있는
121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곳으로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넘어졌는데 다시 일어날 수가 없었고, 그러던 중 의식을
구별할 수 있었습니다. 미군과 한국군은 군복은 비슷했지만 얼굴 생김새가 달랐습니다.
잃었습니다. 심각한 총상으로 의식을 잃었던 원고 응우옌티탄A는 자신이 어떻게 헬기를 타고 병원으로
이동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퐁니 마을에서 30분 거리의 다낭 소재 병원 으로 이송된 원고 응우옌티탄A는 이후 끊어진 장을 연결하는 수술을 해야만 했고, 8개월 정도
사건 당일 응우옌득상이 제일 먼저 방공호 밖으로 나갔고 총도 제일 먼저 맞았습니다. 총을 맞자마자 정신을 잃었기 때문에 다른 가족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동생 응우옌
티탄A 가 와서 깨워서 정신을 차렸고, 응우옌티탄A 가 “오빠 일어나. 가자”고 해서 집 밖으로 나 갔습니다.
입원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마을에서 물소가 있는 집만 불에 안타고 있었기 때문에 물소가 있는 집으로 가고 있었는데,
원고 응우옌티탄A와 오빠 응우옌득상을 미군 헬기에 태워 병원으로 이동하도록 도와준 남
가는 도중에 물소집 근처에서 한국 군인들이 총을 쏘는 소리가 들려서 길 옆에 있는 논으로 숨
옌티르엉(Nguyễn Thị Lương, 1939년생)의 진술을 통해, 원고 응우옌티탄A와 오빠 응우옌득상이
물소가 총을 맞고도 움직이지 않아서 그 집으로 들어가지 못했으며 결국 화를 내며 물소에게
베트남 민병대원 응우옌싸 (Nguyên Xá)15)와 보호자로서 함께 헬기를 타고 병원으로 갔던 응우
총격으로 심각한 부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 채 다낭 소재 병원으로 이송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
었습니다. 한국 군인들은 물소집에 들어가려고 외양간에 서 있던 물소를 총으로 쏘았던 것인데
수류탄을 던지고는 떠나갔습니다.
었습니다. 물소집에 갔을 때, 물소집에 원래 살던 쩐티드억의 가족과 이웃인 판 르엉의 가족이 방공호 나. 오빠 응우옌득상의 진술
안에 있었는데 6명 정도였고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응우옌득상은 방공호에 도착한 후
원고 응우옌티탄A의 오빠 응우옌득상은 이 사건 1중대에 의해 총격을 당했고, 그 날의 총격으
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에 정신을 잃었기 때문에 어떤 경로로 동생 응우옌티탄A와 헬기에 타서 병원에 가게 된 것인지
로 7년 가까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현재까지도 큰 후유증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2) 응 우옌득상은 이 사건 1중대의 총격으로 7년을 병상에 누워 있었고, 1) 1968. 2. 12. 퐁니·퐁넛 사건의 가해자는 한국군이었음
응우옌득상은 1968. 2. 12. 갑작스러운 총소리에 이모 및 동생들과 함께 방공호로 몸을 숨겼습 니다. 방공호에서 응우옌득상은 자신들의 가족과 마을 사람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퍼붓는 사 람들이 한국군임을 한눈에 알아보았습니다. 사건 발생 전에 2일 전부터 한국 군인들이 마을에 왔다갔다 했고 그들을 보고 손을 흔들고 한 적이 있었으므로 얼굴을 보고 미군과 한국 군인을
현재도 불구의 몸으로 살아가고 있음
퐁니·퐁넛 사건으로 응우옌득상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으며, 위 총격으로 7년을 병상에서 지
내야 했습니다. 사건 직후 원고 응우옌티탄A와 함께 다낭 수술병원에 입원했으나 부상이 너무 심해서 11일 이후에 뛰화에 있는 미국병원으로 갔고 거기에서 3-4개월 정도 있다가 다시 다낭 병원으로 왔다가 퇴원하고 집에 갔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독일 병원으로, 다낭에 있는 논르 억이라는 미국 병원으로, 독일 병원으로, 선자에 있는 미국병원으로, 다시 독일 병원으로 계속
15) 위 응우옌싸(1938-2006)는 2000년 이루어진 인터뷰에서 원고 응우옌티탄A 및 오빠 응우옌득상의 삼촌이었고, 그 들을 자신이 미군 헬기로 후송되도록 했다고 진술하였습니다. “1번 국도변 초소에서 쌍안경으로 불타는 마을을 목 격했습니다. 마을에 들어가려고 했어요. 형수와 조카들을 구하려고 했어요. 미군 장교가 말렸습니다. 한국 군인들 이 흥분했다고, 당신도 위험하다고. 불길이 꺼진 뒤 마을에서 부상당한 조카 2명을 찾아내 헬기로 보냈습니다. 나 머지 조카들과 형수는 처참한 주검으로 변해 있었어요”(고경태. 『한마을 이야기: 한국, 베트남, 퐁니·퐁넛 고경태 의 기록.』 보람출판사. 2016. 96면).
122
해서 옮겨다녔습니다. 수술은 총 13번 받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1975. 4. 초순경에 퇴원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퇴원하고 바로 호치민으로 이사를 했고, 삼촌 집에 갔습니다. 동생(원고 응우옌티탄A) 은 1975. 5.에 고향에 가서 만났습니다.
123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이 사건으로 인해 입은 몸과 마음의 상처로 인해 응우옌득상은 현재 퐁니 마을을 떠나, 호치 민에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응우옌득상은 겪어서는 안 될 학살의 참상을 온몸으로 겪었고, 그 기억으로 인해 퐁니 마을에서의 생활을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 1중대의 학살 로 인해 응우옌득상은 가족과 친구를 잃고, 자신 또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 원고 응우옌티탄A 가 구조된 헬기에 동승하였던 응우옌티르엉의 진술 응우옌티르엉(Nguyễn
Thị Lương) 은
(Nguyen Thi Luc, 당시 52세),
1937년생으로 사건 당시 30세였고, 어머니 응우옌 티륵
여동생 응우옌티투이(Nguyen Thi Thuy)와 함께 살고 있었으며, 아버
지 응우옌트어(Nguyen Thua)는 그 전에 사망하였습니다. 응우옌티르엉은 1968. 2. 12. 당시 같은
났습니다. 응우옌 싸는 인근의 퐁넛 마을 사람으로 평소 알고 지냈고, 응우옌티르엉의 동생이 응
우옌티탄A의 외숙모였기 때문에 인척 간이기도 했습니다. 응우옌싸인지, 옆에 있던 다른 마을사
람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떤 사람으로부터 응우옌티탄A와 그녀의 오빠 응우옌득상 이 다쳤으니 병원까지 데려가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응우옌티탄A과 응우옌득상의 집은 같
은 마을에 있고, 거리도 가까워16) 서로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남매가 있다는 곳에 가보니 둘 다 온몸이 피로 젖은 상태로 집 앞 큰길 위에 다른 희생자들 과 함께 누워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삼촌인 응우옌싸와 응우옌쩌이(Nguyen Choi, 응우옌싸의 동생) 가 남매를 큰길까지 옮겼다고 하는데, 엉덩이에 총을 맞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응우옌티탄A에 게 “괜찮으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이기는 하였으나 말은 하지 못했습니다.
퐁니 마을에 있긴 했지만 마을사람들이 희생된 곳과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어서 화를 입 지 않았습니다. 응우옌티르엉은 그날 집 앞을 가로지르는 큰길(국도) 건너편,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900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남매를 나눠 업고 헬기로 옮겼습니다. 근처의 큰길 위에, 응우옌티르 엉의 집에서 봤을 때 오른쪽에 헬리콥터가 내려와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시신(희생자)들이 있던 곳에서 옮길 때 뒤따라갔는데 처음 비행기를 타서 무서웠습니다. 헬기에서 내려다보니 다낭의
터 정도, 2킬로미터 이내의 거리에서 총소리를 들었습니다. 총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는 오전이
한 병원이었는데 정확히 어떤 병원인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 다음날까지 남매의 보호자로 병
었는데 정확한 시간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멀리서 군인들이 어른거리는 것을 보았고, 총소리
원에 같이 있었습니다. 도착하고 다음날 남매의 막내삼촌인 응우옌쩌이의 아내, 그러니까 남매
를 들은 직후에는 집안 마당에 파놓았던 방공호에 들어갔습니다. 집에 함께 살던 어머니, 여동
의 숙모인 ‘헤(He)’가 병원으로 와서 아이들을 맡기고 응우옌티르엉은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생과 함께 3명이 같이 방공호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곳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응우옌티르엉의 진술은 앞서 확인한 주월미군 감찰보고서에 첨부된 실비아 중위 방공호에 들어간 지 얼마 쯤 지난 이후 어머니가 바깥의 상황을 보고는 군인이 다 지나가고
의 1968. 2. 16.자 진술과도 일치합니다. 위 진술에 따르면 “5명의 미 해병과 26명의 민변대원과
안전한 것 같다고 말하여 셋이서 함께 밖으로 나왔습니다. 방공호에서 나와서 어머니와 동생은
두옹 준위로 구성된 경비조가 마을로 들어갔고 부상용 수송헬기 지원을 요청했다. 2명의 여성
집에 있고 큰 길로 나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당시 희생된 사람들의 시신을 지켜봐 달라고 하
과 1명의 소년이 유일한 생존자였고, 이들은 헬기로 수송됐다.” 이렇게 수송된 3명의 생존자 중
여 큰길로 향하는 골목으로 나왔던 것이고 당시 가족이나 아는 사람의 시신을 확인하고 지키 는 역할을 했습니다. 집밖으로 나와 보니 큰길에는 죽은 사람들도 있었고, 상처 입은 사람들도
2명이 바로 원고 응우옌티탄A와 오빠 응우옌득상이었던 것입니다.
있었습니다. 그날 같은 마을에 살던 응우옌티탄A(Nguyễn Thị Thanh, 1960년생)의 언니인 응우옌티쫑(여,
1957년생),
응우옌티탄A의 동생인 응우옌득쩡(남, 1963년생), 그리고 응우옌티르엉의 이종사촌인
도안테민(남, 당시 생후 9개월) 등 3명이 희생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 아이들의 시신을 확인하고 지
키다가 집으로 돌아오려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응우옌싸(Nguyên Xá, 1938~2006)를 만
124
16) 응 우옌티르엉의 집과 응우옌티탄A 남매가 살던 집 사이에는 큰길(현재 국도)이 놓여있었는데, 그 길 하나를 사 이에 두고 응우웬티렁의 집은 피해를 입지 않았고, 응우옌티탄A네는 화를 입었습니다.
125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4. 소결
Ⅴ. 하미 사건 및 원고 응우옌티탄B의 피해사실
구사일생이었습니다. 창자가 흘러나오는 총격을 입고 쓰러진 소녀, 복부와 둔부의 심각한 총상
1. 이 사건 26중대에 의한 1968. 2. 22. 하미 사건의 발생
으로 한국군을 피해 기어가 숨는 것조차 어려웠던 소년은 죽음을 예감하였을 것입니다. 단 3명 이 미군의 헬기에 탑승해 병원으로 이송되었는데 바로 이들이 그 중 2명이었던 것입니다. 원고 응우옌티탄A는 1년 가까이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어야 했을 만큼 중상을 당했
가. 하미 마을 개요 하미 마을은 호이안에서 직선거리로 약 7km, 다낭에서 직선거리로 약 15km 거리에 위치한 곳
습니다. 힘들게 퇴원한 이후 그녀를 마주해야 했던 것은 전쟁고아의 삶이었습니다. 가족이 모두
으로, 꽝남성 디엔반현 디엔즈엉사에 위치한 이 마을은 하미 마을 중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살해당한 9살 소녀는 친척집이나 중국인 노부부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며 생활해야 했습니
하여 서쪽을 뜻하는 테이(Tây)를 붙여 하미 테이(Hà My Tây)라고 불렸습니다. 이 마을에서 동쪽
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1975년에 이르러서야 다시 퐁니 마을로 돌아와 외할머니와 함께 생활하 게 되었지만, 제대로 배울 기회를 갖지 못할 수밖에 없습니다. 퐁니·퐁넛 사건으로 놓쳐버린 배 움의 기회,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가족들, 그리고 완전히 회복될 수 없는 신체. 원고 응우옌티탄 A는 비통한 슬픔을 견디며 살아와야 했습니다.
2000년 이후 한국 사회에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사건이 알려지고, 한국인들이 학살 지역
으로 약 1.5km 떨어진 하미동(Hà My Đông)(2) 마을 해변 지역에 해병 제2여단 본부가 1968. 1.
24.부터 주둔하였습니다. 하미 마을의 동쪽으로 약 500m 거리에 다낭과 호이안을 잇는 제538
번 도로가 지나가고, 마을의 북쪽은 청룡도로에 접해있습니다. 청룡도로는 해병 제2여단 본부 와 제3대대 본부 주둔지(여단 본부 임시주둔지)를 연결하는 도로로서 여단 본부 주둔지에서 제538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약 2km 지점에서 분기하여 하미 마을을 지나 남서쪽으로 연결되어 있 습니다.
을 방문하면서 가장 먼저 ‘방문 지역’이 되었던 곳이 바로 퐁니·퐁넛 마을이었습니다. 그렇게 방 문한 한국인들은 원고 응우옌티탄A를 만나고, 그 앞에서 조용히 1968. 2. 12.의 이야기를 들었 습니다. 원고 응우옌티탄A는 처음에는 한국 사람들이 무섭고 미웠다고 합니다. 한국 남자들을
17)
보면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르고, 한국 대학생들이 오면 배우지 못한 한에 그들이 미웠다고 합니 다.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가 끝나고 고개 숙이는 한국 사람들을 보면서 조금씩 마음을 열 수 있
었습니다. 본 소송은 응우옌티탄A 가 마음을 열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피고 대한민국에게, 그리 고 한국 사람들에게 답변을 듣기 위한 소송이기 때문입니다.
원고 응우옌티탄A는 원합니다. 피고 대한민국 정부와 한국 사람들이 과거 무고한 자신의 가
족들과 베트남 주민들을 한국 군인들이 학살한 사실을 인정하고 잘못을 마주하길 말입니다.
원고 응우옌티탄A는 묻습니다. “왜 8살이었던 나를 쏘았나요.” 사과는, 배상은, 그리고 정의는 이 질문에 답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하미마을과 다낭특별시, 호이안시
17) 구글지도에 하미마을과 다낭특별시, 호이안시를 표시하였습니다.
126
127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한국 해병 제2여단(청룡부대)은 꽝응아이성(Quảng Ngãi)18)의 추라이(Chu Lai) 지역에서 작전하
다가 미군과 월남군에게 그 지역을 인계하고 1967. 12. 22. 꽝남성19)의 호이안(Hoi An) 지역에 새
로운 전술책임지역을 할당 받아 여단 소속 부대를 5개 제대로 구분하여 제대 순서대로 구정 직 전인 1968. 1. 29.까지 전환배치를 완료하였습니다. 이 지역은 전략도시 다낭에 근접하고 있기 때 문에 그 외곽방어를 위하여 매우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1.5km 동쪽의 해병 제2여단 본부 주변의 제538 도로 좌우에 직할 부대인 통신대, 경비중대, 특 공중대, 군종부대가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 26중대의 주둔지에서 제538번 도로를 따라 북서쪽으로 약 2km 지점에 청룡도로
분기점이 있으며, 분기점에서 청룡도로를 따라 좌회전하여 남서쪽으로 약 700미터 지점에 하미 마을 입구가 있었고 마을은 남쪽으로 길게 가옥과 농지가 평지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나. 1968. 2. 22. 하미 사건 발생
1) 하미 사건과 관련된 괴룡1호 작전의 개요
해병 제2여단은 1968. 1. 30. 구정 휴전기였으나 월맹군 제2사단 예하부대 등이 구정공세를 펴 여 단 내 여러 지역을 공격한다는 정보를 파악하고, 이날부터 2. 29.까지 31일간 월맹군의 공격을 방 어하고 도주하는 월맹군을 반격하고 수색하는 괴룡1호 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월맹군이 구정 월남 성(省)별 및 아군(我軍) 작전구역도
해병 제2여단 본부는 1. 24.부터 하미 마을부터 동쪽으로 약 1.5km 떨어진 하미동 (Hà My
Đông
)
20)
마을(2) 일대에 주둔하였습니다. 해병 제2여단 예하 제5대대는 그 예하에 제25중대, 제
공세 작전의 일환으로 호이안시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2. 3.까지 격퇴 당하자 그 후 잔여 병 력으로 북상하여 다낭을 공격할 것이 예상되었습니다. 해병 제2여단은 미국 해병 제3상륙군사
령부인 Ⅲ MAF와 협의 끝에 2. 4.부터 그달 29.까지 호이안시 및 디엔반현, 두이쑤언현 등지에서
패주한 월맹군이 북상할 것으로 예측되는 경로 일대를 탐색하여 잔적격멸을 계속하고, 미군이
26중대, 제27중대를 두고 있었는데, 1968. 1. 17. 제3제대에 편성되어 추라이 지역에서 호이안 지
다낭에서 남쪽인 해병 제2여단 전술 구역 쪽으로 월맹군을 공격하면 이에 호응하여 월맹군이
하꽝(Hà Quang)(4) 지역 해안가에, 제25중대는 하미 마을21)로부터 약 3.5km 서쪽에 위치한 꽝하
펼쳤습니다.
역으로 이동하였습니다. 그 무렵부터 제5대대 본부는 하미 마을로부터 약 2.5km 북쪽에 위치한 (Quang Hà)(2)
Đông)(2)의
지역에, 이 사건 26중대는 하미 마을로부터 약 1km 동쪽에 위치한 하미동(Hà My
남쪽으로 도주하지 못하도록 차단과 지역탐색을 병행 실시하는 일명 ‘NUT CRACKER 작전’을
제538번 도로 서측에 인접한 지역에, 제27중대는 하미 마을로부터 약 1km 북쪽에 위
치한 하꽝 (Ha Quang)(1)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하미 마을 주변에는 해병 제2단 예하 다 른 부대들도 주둔하고 있었는데, 하미 마을로부터 약 500m 서쪽 청룡도로 변에 공병중대가, 약
18) 월남 성(省)별 및 아군(我軍) 작전구역도의 5번 지역 19) 월남 성(省)별 및 아군(我軍) 작전구역도의 3번 지역 20) 베트남어로 동쪽이라는 의미입니다.
『파월한국군전사』 제4권 부도 제15호, 괴룡 1호 작전 경과요도 No. 6 (1968. 2. 22.~29)
21) 아 래 지도의 노란색 점선 표시 지역
128
129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해병 제2여단은 여단 본부의 주둔지 안전을 확보하기 위하여 인근 마을 주민들에게 철수명 령을 내리고, 제5대대, 경비중대 등에 명하여 여단 본부의 인근 마을을 수색하고, 철수명령을
26중대가 하미 마을을 포함한 “그 지역 일대를 탐색하기 위하여 선정된 7개 목표를 공격하였 다”, “6개 목표를 점령 탐색하고”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그 기재는 이러한 추정과 부합됩니다.
미이행한 주민들을 호이안 공항 수용소 등지로 소개하는 작전을 펼쳤습니다. 구체적으로 제5대 대 예하 이 사건 26중대는 2. 7. 심리전소대 대적방송반과 함께 제5대대 본부 주둔지 인접 해안
2) 하미 사건의 개요
마을에서 철수명령을 미이행하는 주민 1,000명을 소개시켰고, 이날 특공중대가 여단 본부 근 처 마을을 수색하다가 발견한 여단 본부 안전에 큰 지장을 주는 주민 573명을 특공중대와 함
이 사건 26중대는 2. 22. 07:30경 진지에서 출동하여 소부대 단위로 북서쪽 방향으로 이동한
께 제3대대로 호송하였으며, 2. 15. 지역 수색 후 검색한 주민 234명을 난민수용소로 소개시켰
다음 청룡도로를 따라 서쪽 방향으로 기동하다가 하미 마을 입구에 이르러 방향을 남쪽으로
습니다. 제5대대 예하 제27중대는 2. 1. 여단 본부 서쪽의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강(호수) 양안
틀어 하미 마을로 진입하였습니다. 이 사건 26중대는 하미 마을을 여러 방향에서 에워싸며 진
을 탐색하다가 아직 철수하지 않고 남아 있는 주민 250명을 제11중대 기지로 호송하였고, 2. 3.
입하면서 마을 사람들을 약 4곳으로 모았습니다. 그 때 모인 대부분 마을 주민들은 여성과 어
중대 기지 주변을 수색하여 철수명령을 이행하지 않는 주민 82명을 압송하였습니다. 이렇듯 하
린이 노인이었고, 그 동안 한국군과 우호적으로 지냈기 때문에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습니
미 학살일 당시 해병 제2여단 본부 주변 대부분 마을은 소개되었습니다.
다. 이 사건 26중대가 주민들을 모은 지점은 응우엔디에우(Nguyễn Điểu)의 집 앞, 원고 응우옌
그러나, 하미 마을 주민들은 그 마을의 어른인 응우옌빈이 해병 제2여단에 편지로 마을에
티탄B의 집 방공호, 응우옌빈(Nguyễn Binh)의 집, 동체(Dong Che) 반 등이었습니다. 이 사건 26
중대는 통역을 대동하지 않았고, 주민들이 월맹군인지 베트콩인지를 심문하거나 분류하지 않
남아 살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원을 하고, 그 청원이 받아들여져 난민수용소로 보내지지 않고
은 채 네 곳으로 갑자기 불러 모은 마을 주민들 합계 약 145명에게 총을 쏘고 수류탄 터트렸고
그 마을에서 계속 거주할 수 있었습니다.
총검으로 찔러 살해했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들은 집에 불을 질러 집과 시체를 태웠습 니다.
하미 마을 북쪽과 접해있는 청룡도로는 여단 본부에서 예하 대대를 연결하는 도로로서 중 요한 기능을 합니다. 해병 제2여단은 2. 17. 월맹군이 지뢰와 부비트랩에 의한 파괴를 중시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이 사건 26중대로 하여금 단독으로, 때론 공병중대 일부 병력과 협동으로 2. 18.부터 24.까지 청룡도로를 순찰토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 26중대는 2. 18. 청룡도로를 정찰하다가 81mm 포탄으로 만든 적 부비트랩 1개를 제거하였고, 공병중대는 2. 22. 하미 마을
(Hà My Tây)의
My Tây)의
청룡도로 상에서 대전차 지뢰 4개를 제거하고, 근무중대는 2. 22. 하미 마을(Hà
이 날 학살로 135명이 사망하였습니다. 사망자 중 59명이 만 10세 이하 아동 (학살사망자
43.7%),
중
98명(학살사망자 중 72.5%)이 여성이었습니다. 사망자 중 만 1세 이하의 영아가 6명, 만 1세
이상 6세 이하인 유아는 29명, 영유아 합계 35명(학살사망자 중 25.9%)이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날 공격을 당한 145명 중 원고 응우옌티탄B, 소외 쯔엉티투, 응우옌티홍, 당티코아 등 10명
도로 근처에서 잠복하다가 적을 발견하고 6명을 사살하였으며, 그 다음날 청룡도로
은 구사일생으로 생존하였습니다. 한국군이 돌아간 다음 살아남은 주민들과 숨어 있던 청년들
근처(전날 공병중대가 대전차 지뢰를 제거한 지점)에서 대전차지뢰 2개를 제거하였습니다. 해병 제2여단
은 이날 저녁, 마을로 돌아와 생존자를 구조하여 인근 마을로 옮기고, 학살 사망자의 시신을 수
은 대전차지뢰를 제거한 지점을 적의 부비트랩 설치의 중심지로 추정하였습니다.
습하여 마을에 가매장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살펴보면, 해병 제2여단은 중요 보급로인 청룡도로에 부비트랩을 설치하는
한국군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이 사건 26중대와 공병중대를 보내 다음 날 불도저로 전날 가매
적의 은거지를 제538도로 서쪽과 청룡도로 동쪽 지역인 하미 마을(Hà My Tây)(1), (2), (3)으로 판
장한 시신을 형체도 알아 볼 수 없게 그 옆 논으로 밀어 버렸습니다. 한국군이 무덤과 시신을 훼
단하고, 2. 22. 청룡도로 보호 및 여단 본부의 방어 목적을 겸하여 이 지역에 대한 공격을 계획
손한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날 주월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중장이 작전 현황을 살피기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미 사건일인 2. 22. 작전을 기록한 “갑 제10호증 367면”을 보면, 이 사건
130
위해 미국 해병 제3상륙군사령부인 Ⅲ MAF의 사령관과 함께 해병 2여단을 방문한 일과 무관
131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목격자가 겨우 살아났다고 하더라도 부상 등으로 당시 상황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 는 경우가 많고, 학살 후 상당한 시간이 지나 전쟁이 끝난 다음에야 또는 진상규명을 방해하는
하미 사건의 유족들은 한국군에 의해 시신이 훼손되어 가족의 시신을 찾을 수 없게 되자 하
정치적 상황이 해소된 다음에야 증거와 진술을 조사할 수 있지만, 그때까지 시일이 경과됨으로
는 수 없이 집단으로 묘지를 만들고, 매년 음력 1월 24일에 맞춰 집단 묘지 앞에서 합동으로 추
인해 객관적 증거가 상당 부분 사라지고 어렵게 살아난 목격자들도 상당수 사망하는 등의 이
모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이 한국에 알려진 후 대한민국의 월남
유로 피해자측이 증거를 확보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전 참전 군인들의 모임인 월남전참전전우복지회(이하 ‘전우복지회’라고 합니다)가 2000년에 건립비용 3만달러를 기부하여 우여곡절 끝에 하미 사건의 유족들은 2001년에 그 돈으로 하미 마을에 위 령비를 세웠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면, 피해자들에게 학살로 사망한 자의 시신이나 학살의 직접적인 목격 자의 진술 등 명백한 증거에 의하여 엄격하게 증명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대 법원도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 의한 민간인 살해를 원인으로 한 국가배상청구 사건에서 “피고 (대한민국)
스스로 한국전쟁 전후의 불법행위에 관한 진상규명 시도를 은폐하거나 심지어 처벌
하기까지 하는 등으로 막았던 경우도 없지 않고, 그 사이에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 객관적인 증 거가 상당 부분 사라지고 개별 사건에 관하여 알고 있던 사람들도 상당수 사망하였다는 등의 사정을 감안하면, 희생자의 시신이나 직접적인 목격자 진술 등 명백한 증거에 의하여 진실규명 신청대상자가 당시 희생된 것이 맞다는 사실을 엄격하게 증명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고 판시한 바 있습니다 22).
2) 하미 사건 증거수집의 어려움 하미마을 위령비
하미 사건은 당시 주변 마을 주민들이 소개된 상태라서 주변에 그 마을 주민 이외의 베트남 주 민들이 없었고, 그 지역에는 미군이나 남베트남군이 없었으며, 괴룡1호 작전 지역 내에서 벌어진 2. 하미 사건을 입증하는 증거들
가. 민간인 학살 사건에서의 증거수집의 어려움
사건이기 때문에 제3의 목격자가 있기도 어려웠습니다.
더욱이 가해자인 한국군은 주민 전원을 살해하려 하였으며, 실제로 살아있는 것이 발각되지 않아 운 좋게 살아남은 10여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마을 주민인 135명을 살해하였습니다. 나아
1) 통상의 민간인 학살 사건에서의 증거수집의 어려움
가 학살 당일 현장에 불을 질러 시체를 소훼하였고, 학살 다음날 불도저로 시신을 훼손하여 사 망자 신원을 확인할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즉, 한국군은 철저히 목격자와 증거를 남기지 않으
전쟁 상황에서 발생하는 민간인 학살은 고립된 지역 또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에서 벌
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어지는 특성상 가해자와 피해자 이외의 제3의 목격자가 존재하기 어렵고, 가해자가 마을 사람 들을 전원 살해함으로써 피해자측의 목격자가 존재하는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한국전쟁 당시의 민간인 학살 사건에서도 역시 같았습니다.
132
22) 대법원 2013. 5. 16. 선고 2012다202819 전원합의체 판결
133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전쟁이 끝난 후에도 한국정부와 베트남 정부가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한 소극적이거나 부정 적인 태도를 취하는 동안, 생존자나 목격자들이 사망하고, 학살의 증거들은 사라지고 있습니
갑 제10호증 『파월한국군전사』 제4권 367-369면 일부 발췌
다. 2월 22일(D+2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미 사건은 학살 사실을 입증할 관련 증거가 충분합니다. 해병 제2여단 의 작전 상황을 기재한 파월한국군전사에 학살 당일 이 사건 26중대가 하미 마을에서 작전을
[전략] 5대대(장, 이화출 중령)-제26중대(장, 양용석 중위)는 07.30에 출동하고 소부대 단위로 청룡
펼쳤고, 학살 다음날 공병중대가 이 사건 26중대와 하미 마을 인근에서 작전을 펼쳤다는 사실
도로의 정찰을 실시하면서 겸하여 그 지역 일대를 탐색하기 위하여 선정된 7개 목표를 공격하였다. 기지
이 기재되어 있으며, 전우복지회가 하미 사건 위령비 건립 기금을 지원함으로써 하미 마을에서
를 떠난 이들은 청룡도로 남쪽을 전진하면서 (61)~(65)까지 6개 목표를 점령 탐색하였다. 다음 목표인
민간인 학살 사건이 발생하였음을 스스로 인정하기도 하였습니다. 학살 당시 구사일생으로 생
(66)로 전진하다가 빈 가옥을 발견 탐색하여 집안에 있는 대피호에서 AR탄창과 CAR탄창 및 수류탄 등
존한 피해자들과 생존자를 구조한 이들은 직접 경험하고 목격한 사실을 구체적이고 일관되게
각기 2개씩과 모종의 문서 약간을 노획하였다. 중대는 그 후 목표 (66)(67)을 탐색하고 15.00경 진지로
진술하고 있고, 매년 음력으로 학살 당일에 공동으로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나아가, 이 지역
돌아갔는데, 이날 탐색에서 중대가 거둔 성과는 청룡도로에 “부비트랩”을 매설하는 적정연구에 많은 도
을 관할하는 행정기관인 디엔즈엉사 인민위원회는 2000년경 학살 사실 및 피해자 명단을 조
움을 주었다.
사하여 발표하였으며, 디엔즈엉사가 속해있는 지방 행정기관인 디엔반현 인민위원회는 2010. 8. 13. 꽝남성 인민위원회에 하미 사건 위령비를 성등급 역사 문화 유적지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 하였고, 꽝남성은 2011. 1. 21. 하미 마을 위령비를 성 등급 역사문화 유적지로 지정하였습니다.
공병중대(장, 엄무량 소령)는 (중략) 1개 소대 병력으로 차량들의 통행에 앞서 도로 정찰을 실시하다 가 07.30와 07.40에 Ha My Tay마을(1) 노상에서 대전차 지뢰 2개를 발견 제거하였고, 08.30에 그 남 쪽에서 또다시 대전차 지뢰 2개를 제거하였다.
나. 이 사건 26중대와 공병중대가 하미 마을에서 작전한 사실이 기재된 『파월한국군전사』 근무중대(장, 곽영달 소령)은 1개 매복대로 하여금 Ha My Tay마을 노상 근처에서 잠복하다가 12.00
『파월한국군전사』중 ‘제3장 2월 작전기’ 중 ’3. 괴룡1호작전 부분에 1968. 2. 22. 이 사건 26중대
에 적을 발견하고 ... 적 6명을 사살하고, M14 소총 1정과 수류탄 1발 및 소총실탄 249발을 노획하였다.
가 하미 마을에서 작전을 펼쳤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그 다음날 이 사건 26중대는 공병중대의
[후략]
일부 병력과 함께 하미 마을 인근 청룡도로에서 작전을 수행했다는 사실이 확인됩니다. 물론 위 공식 전사에 하미 마을 주민들에 대한 학살 사실까지 기재되어 있는 것은 아니나, 하미 마을
2월 23일(D+24)
에서 상당한 숫자의 민간인이 군인들에 의해 살해당한 1968. 2. 22. 오전, 이 사건 26중대가 같 은 시각, 같은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그 다음날 공병중대와 함께 작전을 수행하였다는 전 사의 기록은 하미 사건이 파월 한국군 청룡부대가 펼친 작전 중에 일어났음을 뒷받침합니다.
[전략] 특히 이날은 파월한국군 사령광 채명신 중장이 괴룡작전이 시작된 이래 두 번째로 여단을 찾 아 작전현황을 살폈고, Ⅲ MAF사령관이 또 내단하여 참모장 김석구 준장의 “브리핑”을 받았다.
[중략] 제26중대(장 양용석 중위)는 공병중대(장, 엄무량 소령)의 일부 병력과 같이 소부대로 07.50~11.40까지 청룡도로의 정찰과 경계임무를 수행하였다. [후략]
134
135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④ 하미 마을 인근에 해병 제2여단 예하 제5대대 본부, 제27중대, 통신중대, 여단 본부, 군종 중대, 경비중대, 특공중대 등의 상당한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⑤ 해병 제2여단은 하미 사건 이전부터 여단 본부의 방어를 위해 인근 마을 주민들에게 소 개명령을 내리고, 예하 부대로 하여금 수색작전을 펼쳐 불응하는 주민들을 난민수용소 등으로 호송하였습니다.
⑥ 하미 사건 직전에 이 사건 26중대가 중요 보급로인 청룡도로의 하미 마을 인근에 매설된 부비트랩과 대전차지뢰를 제거하고 월맹군과 교전을 벌였으며, 해병 제2여단은 이 사건 26중대 등으로 하여금 하미 사건 일자를 전후하여 청룡도로와 하미 마을 인근을 수색하 이 사건 26중대의 하미 학살 당일 작전 경로
고 공격하도록 하였습니다.
⑦ 이 사건 26중대는 2. 22. 미리 하미 마을이 포함된 인근 지역에 그리고, 작전 상황을 표시한 지도가 별책으로 첨부되어 있는데, 그 중 부도 제15호 「괴룡1
호 작전 경과요도 No6.
(1968. 2. 22~29)」(이하 ‘부도 제15호’라 합니다)는
목표를 공격하기로 선정하였습니다 24)
(61) ~(67)로
표시된 7개23)
괴롱1호 작전 중 2. 22.부터
29.까지 작전경과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⑧ 이 사건 26중대는 2. 22. 아침 7:30경 청룡도로 분기점 남서쪽에 있는 주둔지를 출발하여 소부대 단위로 수색하면서 청룡도로가 있는 북서방향으로 이동 한 후 남서쪽으로 나 있
파월한국군전사의 2. 22.자, 23.자 각 기재 내용과 부도 제15호의 하미 마을 부근 작전 현황
는 청룡도로의 남쪽 지역으로 전진하였습니다.
표시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⑨ 청룡도로의 하미 마을 입구에서 남쪽 방향으로 진입하면 하미 마을의 집들이 분포하고 ① 이 사건 26중대는 2. 22. 하미 마을 남동쪽으로서 하미동(Hà My Dong) 마을(2)의 제538번
있습니다.
도로 서측에 인접하여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② 이 사건 26중대의 주둔지에서 제538번 도로를 따라 북서쪽으로 약 2km 지점에 청룡도
⑩ 이 사건 26중대가 2. 22. 공격한 지점으로 표시된 (61), (62) 지점은 하미 마을에 해당합니 다.
로 분기점이 있으며, 분기점에서 좌회전하여 남서쪽으로 약 700미터 지점에 하미 마을 입 구가 있었습니다.
③ 공병중대는 하미 마을 입구부터 청룡도로를 따라 남서쪽으로 약 500미터 떨어진 지점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136
23) 2. 22.에 이 사건 26중대가 공격한 지점은 위 지도에서 검은색 원으로 표시된 지점입니다. 위 지도에는 여러 종 류의 화살표와 번호가 나오는데, 2. 22.부터 2. 29.까지 작전을 표시하기 위한 것으로서 범례에 의하면 일자 별 로 화살표 종류를 달리 하여 표시하였다고 합니다.
24) 파 월한국군전사에 “‘선정된’ 7개목표를 ‘공격’하였다”, “6개목표를 점령 탐색하고”고 기재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 사건 26중대가 우연히 공격한 것이 아니라 공격 목표를 미리 선정하고, 그 작전계획에 따라 작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137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⑪ 이 사건 26중대가 2. 22. 전후에 여러 차례 하미 마을 일대에서 작전을 벌였고, 하미 마을 포함된 호이안 북동쪽 지역은 이 사건 26중대가 소속된 제5대대 작전책임구역입니다.
그러던 중 집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기 시작했고, 한국 군인들이 방안으로 들어와 개머 리판을 휘두르며 밖으로 나가라는 몸짓을 했습니다. 쯔엉티투가 무서운 나머지 이러지도 저러 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방 밖에서 총소리가 나기 시작했고, 쯔엉티투는 다른 아이들은 모두 죽
⑫ 이 사건 26중대와 공병중대 일부 병력이 2. 23. 오전에 합동 작전을 실시하였습니다.
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남은 아이라도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아이를 안은 채로 방 안에 엎드렸 습니다. 한국 군인들은 엎드려 있는 쯔엉티투를 둔 채로 집에 불을 질렀고, 쯔엉티투는 불길에
『파월한국군전사』에서 알 수 있는 이와 같은 사실은 하미 마을 학살 생존자 등이 한 다음과 같은 취지의 증언, 즉 하미 마을 주민들을 살해한 부대는 하미 마을 인근에 주둔하고 있었고,
휩싸인 가재도구들이 떨어지는 집 안에서 타 죽으나 밖으로 도망쳐 총에 맞아 죽으나 매한가지 라는 생각으로 아이를 안은 채 집 밖으로 도망쳤으나, 얼마 못가 정신을 잃었다고 합니다.
마을에 자주 방문해서 여러 번 본 적이 있었으며, 하미 사건 당시 마을로 진입한 부대가 공병부 대가 아니고 보병부대였고, 얼룩덜룩한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온 시간은 아침 시
쯔엉티투는 정신을 차려보니 다낭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독일 의료선이었고, 오른쪽 발은 절
간대였으며, 부대원들은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사격자세를 취한 다음 일제 사격을 했고, 학살
단되어 있었습니다. 의료진으로부터 상태가 심각해서 오른쪽 발을 자를 수밖에 없었다고 들었
다음날 불도저로 가매장한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훼손했다는 증언과도 부합합니다.
고, 왼쪽 다리, 엉덩이, 허벅지 등에도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날 학살로 자녀 2명을 포함한 12명 의 가족을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다. 하미 사건 생존자 등의 일관된 증언
나) 학살 이후의 삶
1) 쯔엉티투(Truong Thi Thu, 1938년생, 학살 당시 만29세)
쯔엉티투는 독일 의료선 관계자에게 최초에는 다낭종합병원으로 이송되었는데, 상태가 심각 하여 독일 의료선으로 옮겨졌고, 아이도 함께 왔었으나, 쯔엉티투의 상태가 심각하여 일단 다
가) 학살에 대한 진술
낭의 보육원으로 보내져 생활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쯔엉티투는 다낭 시내를 수소문하여 보육원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이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쯔엉티투는 독일 의
쯔엉티투는 1968년 2월 사건 당시 하미마을에서 배우자 응우옌 탄 디와 함께 하미마을의 시아
료선에서 5개월 정도 치료를 받았습니다. 퇴원한 후에는 다낭에 있는 까오다이 사원에서 2년
버지 응우옌빈의 집에서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정도 머물렀고, 사원을 떠난 뒤에는 고종사촌과 같이 생활하며 담배를 만드는 작은 수공업장 에서 일했으며, 전쟁이 끝난 다음인 1975년에 하미마을로 되돌아갔습니다. 그 뒤 수소문 끝에
쯔엉티투는 1967년 12월 경 출산을 하여 3개월 된 아이 응우옌티러이(생존)가 있었기 때문에 산후조리를 위해 집 안에서 아이와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쯔엉티투는 학살 당일 오전에도 집
남편이 다낭 근처의 벽돌공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남편과도 재회하여 하미 마을에서 계속 살아오고 있습니다.
안에서 아이를 돌보고 있었고, 다른 자녀 2명(응우옌 티탄, 응우옌 떠이)은 응우옌빈 집에 가 있었습 니다. 그러던 중 마을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고, 총소리도 간간히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응우
쯔엉티투는 다친 몸 때문에 아이를 돌보거나 간단한 집안일 외에 다른 일을 할 수 없었고, 배
옌빈 집에 가 있던 아이들은 쯔엉티투에게 달려와 “군인들이 사람을 모으고 있다. 무섭다.”라고
우자에게 모두 의지해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신체적인 불편함보다도 쯔엉티투를 평
알려주었고, 쯔엉티투는 할아버지 집에 가 있으면 괜찮을 거라고 아이들을 달래고 다시 응우옌
생 괴롭힌 것은 그 날 자신이 두 아이들을 시아버지 응우옌빈 집으로 보내지만 않았어도 아이
빈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들이 죽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이었습니다. 쯔엉티투는 그 날을 애써 잊고 지내려고 하 고 있으나,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잠을 이루려고 할 때마다 학살로 떠나보낸 아이들이 떠올 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138
139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2) 응우옌탄디(Nguyen Thanh Di, 1928년생, 학살당시 만 39세)
3) 응우옌티홍(Nguyen Thi Hong, 1954년생, 학살 당시 만 13세)
가) 학살에 대한 진술
가) 학살에 대한 진술
응우옌탄디는 응우옌빈의 아들이고, 쯔엉티투의 배우자로서 학살 당시 마당에 쓰러져 있는 쯔
응우옌티홍은 어머니 쯔엉티바 (Tran Thi Ba, 1932년생), 아버지 응우옌탄끼엣, 오빠 응우옌탄호
엉티투를 발견하고 그녀를 구해 피신시켰습니다. 응우옌탄디는 학살 당일 새벽부터 마을 밖에
아, 동생 응우옌티흐엉, 응우옌티히엡, 응우옌티한이 있었는데, 하미학살로 인해 어머니, 동생 3
서 농사일을 하다가, 마을에서 총소리가 나자 피신해 있었기 때문에 학살을 직접 목격하지는
명, 외할머니 응우옌티빈(Nguyen Thi Bien, 1920년생)이 사망하였습니다. 응우옌티홍은 할아버지
못했으나, 그 뒤 바로 마을로 돌아와 참상을 목격하였습니다. 응우옌탄디는 학살 당일 새벽 집에서 약 500m쯤 떨어진 논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었는데,
가까운 곳에서 총소리가 나자 본능적으로 근처 나무 밑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마을에서 들려
응우옌빈25) 집의 제단 뒤 공간에 숨어 하미 학살의 참상을 직접 목격한 생존자입니다. 응우옌
티홍은 부모님, 형제들과 응우옌빈 집 바로 옆에 있던 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아버지 응우 옌탄끼엣은 호이안으로 나가 일을 했기 때문에 1주일에 하루 정도 집에 찾아왔을 뿐이었고, 대 부분은 어머니와 형제들과 생활하였습니다.
오는 총소리는 약 1시간 정도 계속되었고, 집들이 불에 타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총소리가 잦 아든 뒤에도 숨은 곳에서 쉽게 일어나지 못했고, 점심시간이 지난 뒤 마을에 더 이상 인기척이
한국군들은 하미 학살이 일어나기 전부터 마을에 자주 찾아왔었고, 쌀, 초콜릿, 과자와 같은
느껴지지 않을 때 곧바로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집은 불에 타 있었고, 마을 사람 수십 명이 마
선물들을 주곤 했으며, 마을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마을사람들은 그들을 “청룡군
당에 죽어 있었으며, 자녀 2명(응우옌티탄, 응우옌떠이)은 응우옌빈 집에서 죽어 있었습니다.
인”이라고 부르거나, “대한군인”이라고 불렀는데, 인근에 한국군이 주둔해 있었기 때문에 이들 이 한국 군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 중에는 하미 마을에 자주 찾아와 낯
배우자 쯔엉티투와 막내 아이 응우옌티러이는 마당 지상 방공호 같은 곳에 쓰러져 있었으나, 살아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응우옌탄디는 일단 쯔엉티투를 눕히기 위해 옆집에 있던 침대
이 익거나 자신이나 오빠와 친한 사람도 있었고, 집에 자주 찾아왔던 한 한국 군인은 응우옌티 홍의 오빠에게 멀리 도망가 있으라고 하여 살 수 있게 해주기도 하였다고 합니다.26)
를 마당으로 끌고 와 쯔엉티투와 막내 아이를 눕혔고, 저녁이 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저녁이
되자 쯔엉티투와 아이를 데리고 하미 마을에서 5km정도 떨어져 있는 “런미”라는 마을로 이동
응우옌티홍은 학살 당일 어머니와 함께 집에 있었는데, 이른 아침 한국 군인들이 마을로 들
했고, 그 곳에서 차를 타고 다낭으로 이동했습니다. 다낭에 도착한 뒤 쯔엉티투와 아이를 다낭
어와 할아버지 응우옌빈 집으로 모이라고 하여 할아버지 집 마당으로 갔습니다. 당시 마당에는
종합병원에 입원시켰고, 응우옌탄디는 마을로 돌아갔으며, 그 뒤 전쟁이 끝나 재회할 때까지
10가구 30~40명 정도의 마을사람이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어린이, 여자,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배우자와 아이의 소식은 듣지 못했습니다.
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한국 군인들에게 전혀 저항을 하지 않았고, 더더욱 무기를 들거나 한 국 군인들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마당에 마을 사람들이 모이자, 한국 군인들은 주민들이 월
나) 학살 이후의 삶
응우옌탄디는 하미마을로 돌아간 뒤에도 농사일을 하였는데, 군인들에게 잡혀 호이안에서 8개 월 정도 감옥생활을 하였고, 석방된 이후에는 호이안 근처 “껌하”의 벽돌공장에서 일하며 생활 하였으며, 전쟁이 끝난 뒤 쯔엉티투가 찾아와 가족과 재회하여 하미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 다. 응우옌탄디는 학살 당시 얻은 상처로 몸이 불편한 배우자 쯔엉티투를 도와 그녀가 하지 못 하는 집안일까지 도맡아 하며 생활했습니다. 140
맹군인지 여부를 심문하거나 남녀노소 별로 분류하지도 않은 채, 곧바로 이들을 둘러싸고 한
25) 쯔엉티투는 응우옌티홍의 작은어머니입니다.
26) 응 우옌티홍이 오빠에게 전해들은 얘기로는 오빠와 여동생 응우옌티흐엉이 소를 데리고 밭에 나가 있었는데, 친한 한국 군인이 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갔고, 소를 묶어둔 뒤, 방공호로 들어가 숨어 있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동생은 한국 군인의 몸짓을 보고 무서움에 어머니 쯔엉티바를 찾아갔 고, 어머니와 함께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141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쪽 무릎을 꿇고 총을 장전했습니다. 한국 군인들은 지휘관 같은 사람의 신호에 맞춰 마을 사람
4) 응우옌꺼이(Nguyen Coi, 1945년생, 학살 당시 22세)
들을 향해 일제히 총을 쏘았습니다. 한국군의 총소리는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모두 그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응우옌티홍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마당에 모여 있다가, 한국 군인들이 총을
가) 학살에 대한 진술
쏘기 시작하고, 마을사람들이 총을 피해 마당에서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칠 때 할아버지 응우 옌빈과 함께 집 안으로 도망쳤습니다.
응우옌꺼이는 하미 학살 당일 방공호에서 군인들이 학살하는 소리를 들었고, 당일 생존자를 구 조하였으며 사망자의 시신을 직접 목격하고 매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위령비 건립 당시부터
당시 응우옌빈의 집은 세 칸으로 되어 있었고, 가운데에는 조상들께 기도를 드리는 제단이 있었고, 제단 뒤에는 물건들을 놓는 빈 공간이 있었는데, 응우옌티홍과 사촌오빠 응우옌탄남, 할아버지는 그 공간으로 도망쳐 숨을 수 있었습니다. 숨은 뒤에도 할아버지 집 안으로 도망쳐 들어온 마을사람들이 한국 군인의 총에 맞아 쓰러져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하미 학살 유가족회 연락반장을 맡아서 하미 사건을 조사하였는데, 그때 주민들로부터 학살 당 시 사실들에 대한 다양한 진술을 청취하였습니다. 응우옌꺼이는 원고 응우옌티탄B의 오빠이고, 학살 당시 어머니 레티토이(Le Thi Thoai, 1922
년생),
응우옌티홍은 총소리가 멈추고, 한국 군인들이 집들에 불을 지르고 떠난 뒤에야 제단 뒤에 서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집 밖으로 나온 뒤 응우옌티홍이 목격한 참상은 지옥과도 같았 습니다. 마당에는 시체가 즐비했고, 시신에서 흘러나온 피가 발목까지 차올랐습니다. 맨 바닥을 밟을 수 있는 곳이 없어 시신들을 밟을 수밖에 없었고, 그 때마다 부드럽고 따뜻한 시신에서는 피가 흘러 나왔습니다.
년생),
남동생 응우옌반땀 (Nguyen 사촌 응우옌반닷 (팜티수의
Nguyen Thi Xi, 1963년생)가
응우옌티탄B)이
Van Tam, 1960년생),
작은 어머니 팜티수 (Pham
아들, Nguyen Van Dat, 1962년생),
Thi Su, 1918
사촌 응우옌티씨(팜티수의
딸,
사망하였습니다. 그 외 응우옌꺼이의 여동생이 두 명(응우옌티너, 원고
있었는데, 원고 응우옌티탄B는 학살 당시 부상을 입었지만 생존하였습니다.
응우옌꺼이는 1945. 8. 18.일 생이고, 하미 사건 당시 22세 성년 남자이었으므로 군대에 가야 할 나이였지만, 남베트남군, 민족해방전선 어느 곳에도 징집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낮에는 방공
나) 학살 이후의 삶
호 등에서 숨어 지내고, 저녁에만 집에서 생활했습니다.
응우옌티홍은 학살이 일어난 후 남아 있던 소를 데리고 호이안 근처의 “탄하”라는 곳으로 도망
한국군은 하미 마을 주변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호이안부터 껌하까지 한국군들이 주둔하
쳤고, 1년 이상 그 곳에서 생활하였으며, 가정부일을 하거나 바구니를 만들어 팔며 생계를 유지
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한국군을 “청룡부대”라고 불렀습니다. 마을 서쪽 근처에 한국군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1975년에야 하미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응우옌티홍은
의 공병부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그 부대가 도로를 만들었습니다. 한국군이 부대 주변 마을 주
지금까지도 학살 당시 자신이 밟고 나왔던 시신들의 느낌과 자신의 발목까지 덮던 핏물을 잊을
민들을 다른 데로 이주시켰지만, 하미 마을은 이주시키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응우옌빈 할
수가 없고, 반복적으로 악몽에 시달리고 있으며, 행여라도 부드러운 곳을 밟게 되면 그 때가 떠
아버지가 자신들은 전쟁에 관여하지 않는 민간인이니 마을에 계속 살게 해달라고 한국 군대에
올라 소스라치게 놀라는 등 트라우마를 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어린 나이에 학살로
문서로 요청했고, 그 요청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하미 학살이 벌어지기 이전에 한국 군인
화목했던 가정과 어머니, 형제들을 잃은 것은 모든 것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들이 마을에 자주 다녀갔는데, 마을 주민들에게 쌀과 과자를 주면서 우호적으로 지냈습니다.
응우옌꺼이는 학살 당일 오전 7시 경 총소리를 듣고 하미 마을에 있는 땅 밑 은신처로 숨었 습니다. 그래서 보지는 못했으나 땅 밑에서 외국말 소리, 총소리, 수류탄 터지는 소리, 비명소리, 집이 타는 소리, 불에 타 대나무가 터지는 소리, 애기들 우는 소리가 들었습니다. 응우옌꺼이는
142
143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학살 당일 저녁에 은신처인 방공호에서 나와 우선 본인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동생들을
5) 팜티호아(Pham Thi Hoa, 1928년생, 학살 당시 만 39세)
구출했고, 그 후 다른 마을 사람들과 함께 10여명의 생존자들을 구했으며, 사망한 135명의 시신 을 매장하였습니다. 응우옌꺼이는 생존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자기 집에서 부상당한 원고 응우 옌티탄B, 사촌동생 응우엔반닷, 남동생 응우옌반땀, 이웃집 아이 응우옌탄을 구조하고 병원으 로 옮겼습니다. 응우옌반땀은 부상이 심하여 안타깝게도 다음날 세상을 떠났습니다.
팜티호아 (2013. 6. 16. 사망)는 하미 사건 생존자, 유가족으로서, 디엔반 현 인민위원회 등의 공문 서류에도 팜티호아의 피해 사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팜티호아는 하미 사건 당일 한국 군인들 이 모이라고 하여 아들 응우옌반판 (Nguyen Van Phan, 1959년생), 딸 응우옌티씨(Nguyen Thi Xi, 1963년생),
응우옌꺼이는 자신의 집 방공호에서 끔찍한 자세로 사망한 어머니 레티토이, 작은 어머니 팜
임신 중이었던 사촌올케 응오티까이(Ngo Thi Cai, 1940년생)와 그의 젖먹이 자녀 2명
및 다른 주민들과 함께 하미 마을의 응우옌빈의 집에 모여 있었습니다.
티수, 사촌 응우옌반닷을 포함한 12명의 시신을 한구 한구 수습하여 응우엔빈의 집 옆 빈터에 묻었습니다. 응우엔꺼이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응우옌빈 집에서 약 50명 이상의 시체를 수습했
마을 사람들이 응우옌빈의 집에 모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군에 의한 무차별 사격이 시
습니다. 그 시신들은 일부 시체는 참혹하게 타서 누구인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응우
작되었고 팜티호아는 뛰쳐나가서 소리치려고 하였으나 어깨에 총알을 맞았습니다. 연이어 날아
옌꺼이는 하미 사건이 일어나고 이틀 뒤 저녁(26일)에 다시 마을로 돌아왔는데, 시신들이 매장
온 수류탄이 발 밑에서 터져서 팜티호아는 하반신에 큰 부상을 당한 채 곧 기절하였습니다. 팜
되어 있던 곳이 파헤쳐져 있었고, 그 자리에는 불도저들이 지나다닌 흔적을 발견하였습니다. 응
티호아의 아들 응우옌반, 딸 응우옌티씨, 사촌올케 응오티까이와 그의 자녀 2명은 사망하였고
우옌꺼이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한국군이 불도저를 가지고 마을로 들어와 위 매장지를 밀어 엎
팜티호아는 약 7일 후 독일 의료선으로 옮겨져 왼쪽 발목 부위와 오른쪽 무릎 아래 부위를 절
어 시신들을 모두 훼손하였다고 들었습니다.
단하는 수술을 받았고, 사망시까지 의족에 의지하여 생활하였습니다.
나) 학살 이후의 삶 라. 하미 학살을 입증하는 베트남 당국의 자료 응우옌꺼이는 하미 사건 이후 한국군에 잡혀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석방 된 후 1975 년 전쟁이 끝나자 하미 마을로 돌아와 현재까지 살고 있습니다. 그는 2000년경 디엔즈엉사 인
1) 하미 학살 사건 유적지 인증 관련 인민위원회 문서들
민위원회로부터 유가족회의 연락반장으로 위촉되어 연락반원 11명과 함께 하미 사건을 조사하 였고, 위령비를 성급 문화 유적지로 인정받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미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의 문화유산법령에 근거하여, 디엔반 현 인민위원회는 2010. 8. 13.에, 디
위령비는 2010년 꽝남성 문화유적지로 인증을 받았습니다.
엔즈엉 사 인민위원회는 2010 8. 9.에 각 꽝남 성 인민위원회에 대하여 하미 사건 발생지를 성 (省)
등급 유적으로 지정하여 달라는 제안서를 제출하였고, 꽝남 성 인민위원회 2011. 1. 21. 하미
사건 발생지에 성(省) 등급 유적지 인증을 수여한 사실이 있습니다. 한편, 위 과정에서 작성된 제안서에서 디엔반 현과 디엔즈엉 사의 인민위원회는 하미 사건
발생지를 “미국 및 동맹국가 군인들의 죄악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역사 유적지”로 판단한다고 하면서, “1986년 2월 25일, ‘청룡’ 부대의 남조선 군이 하미 마을의 떠이27) – 쭝 반에 밀어닥치
27) 서쪽을 의미합니다.
144
145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며 둘러쌌습니다. 그들은 주민들을 추격하여 떠이 반에 있는 3군데로 모아두었고 총 145명이 모
마. 위령비
였습니다. 심문, 조사 없이 또는 주민인지 베트공인지 확인하지 않고, 145명의 하미 마을 주민을
향하여 M70 소총과 수류탄으로 총알을 퍼부었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순식간에 133명은
1) 하미마을 위령비 건립 추진 경위
니다. 불과 2시간 내에 145명의 하미 마을 주민이 피바다에 묻혀 버렸습니다.”라고 하미 사건을
꽝남성 디엔반현 디엔즈엉사에는 하미 마을 학살의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비’가 2000년 전우
개관하고 있고, 디엔반 현 인민위원회는 이 사건 소장에서처럼 하미 사건의 구체적 양상까지도
복지회의 지원으로 건립되었습니다. 1999년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실
설명하고 있습니다. 위와 같은 인민위원회 문서들을 통해 베트남에서도 자체 조사 결과 하미
이 언론을 통해 보도된 후, 이에 대한 진상을 확인하고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
사건을 민간인 학살로 인정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면서 당시 전쟁에 참여했던 군인들이 학살이 있었던 마을에 위령비를 제작하게 된 것입니다. 당
살해당하였고 2명은 빠져 나왔으며 10명은 상처를 입었는데 1일 후에 사망자가 2명 더 늘었습
시 김문구 전우복지회 이사장은 “국가 명에 의해서 전쟁을 했을망정 많은 민간인이 죽은 것은 2) 사망자 명단
어쨌거나 잘못된 것이다. 나는 이 일의 마무리가 후손 대까지 내려가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잘못한 일은 겸허하게 받아들이자. 많은 참전 군인들이 위령비를 세우는 일에 동참해주기 바란
하미 사건 유가족들은 1990.경 즈음부터 희생자들을 기리는 제단을 만들고자 인민위원회에 공
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식적인 희생자 명단을 작성하여 달라고 요청하였고, 1999.경까지 제단 건립을 위한 모금 활동을 하였습니다. 당시부터 현재까지 유가족회와 인민위원회 사이의 연락반 반장을 맡고 있는 응우
당시 디엔반현 인민위원회는 처음에 위령비 건립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용서와 화해
옌꺼이에 따르면 충분한 모금액이 모이지 않아 제단 설립이 미뤄지고 있던 중, 2000.경 대한민
로 전쟁의 아픔을 치유하자”는 김 위원장의 호소에 마음을 열게 되었고, 민간인 희생자를 기리
국의 참전복지회가 하미 마을에 위령비를 건립하고 싶다는 뜻을 밝혀오면서 사업이 본격적으
는 위령비에 학살 당시 상황에 대하여 비문에 자세히 묘사하였습니다. 구체적인 비문의 내용은
로 추진되었습니다.
아래와 같습니다.
응우옌꺼이는 위령비에 새길 피해자 명단을 작성하기 위하여 유가족 연락반 11명과 함께 집 집마다 방문하여 직접 학살 사실과 학살 사망자의 명단을 조사하고 디엔즈엉사 인민위원회에 보고하였습니다. 디엔즈엉사 인민위원회와 디엔증사 적십자사는 학살 사망자 명단을 인증하 였습니다. 위 학살 사망자 명단에는 사망자의 성명, 출생년도, 사망일, 고향, 유족의 성명, 유족 과 생존자의 관계를 <표> 형식으로 기재되어 있고, 문서 마지막장에는 디엥즈엉사 인민위원회 (UBND)의
확인 문구(“Xác nhận của UBND xã Điện Dương”)와 함께 디엔즈엉사 인민위원회와 적
(전략) 잔악함이여,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이여. 머리가 땅에 떨어져 구르고 피가 흘러넘치고 끔찍한 전쟁으로 물야자나무 숲은 마른 머리카락이 빠지듯 산산이 흩어지고 강도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몸을 구 부리고 밤새 흘린 눈물이 고여 못을 이루었다. 단두대에 잘린 머리가 굴러다니는 광경이 다시 펼쳐지고 사원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으며 하지아(HA GIA) 숲은 마른 뼈만 하얗게 남았고 캐롱(KHE LONG) 선착장에는 주검이 더미를 이루었다. 28)
십자사의 각 날인이 되어 있습니다. 베트남 꽝남성 사회보훈처는 매년 설날이면 위 명단을 근거 로 피해자들에게 선물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28) 1968년 이른 봄, 정월 24일 에 청룡부대 병사들이 미친 듯이 몰려와 선량한 주민들을 모아놓고 잔
인하게 학살을 저질렀다. 하미 마을 30가구, 135명의 시체가 산산조각이 나 흩어지고 마을은 붉은 피로
28) 양력으로 2. 22.입니다.
146
147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정받고 늦게나마 치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마을 주민들에게, 오로지 가해자의 입장에 물들었다. 모래와 뼈가 뒤섞이고 불타는 집 기둥에 시신이 엉겨 붙고 개미들이 불에 탄 살점에 몰려들고
서 자기중심적이고 반성 없는 시혜자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다시 한 번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피비린내가 진동하니 불태풍이 휘몰아친 것보다도 더 참혹했다. 참으로 가슴 아프게도 집 문턱에는 늙
입힌 행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은 어머니와 병든 아버지들이 떼로 쓰러져 있었다. 전쟁을 피할 수 없었던 어린아이들이 끙끙대며 신음 하니 또 얼마나 공포스럽던가. 허둥지둥 시체를 쌓아 올리는데 악의 탄환이 관통하지 않은 시신이 없었 다. 시체에는 여전히 마른 피가 고여 있고 아기들은 어머니의 배에 기어올라 차갑게 시든 젖을 찾았다. 입과 턱이 날아간 아이는 목이 타는 듯 말라도 물을 마실 수가 없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또 하나의 참 극이 더해졌으니 탱크의 강철 바퀴가 무덤들을 짓뭉갠 것이다. 황혼이 서린 땅에는 풀이 시들고 뼈들은 말라가고 원혼이라도 나타난듯 구름은 푸른 하늘에 울부짖었다.
(중략) 그 옛날의 전장은 이제 고통이 수그러들고 과거 우리에게 원한을 불러 일으키고 슬픔을 안긴 한국 사람들이 찾아와 사과를 하였다. 그리하여 용서를 바탕으로 비석을 세우니 인의로써 고향의 발전과 협력의 길을 열어 갈 것이다. 모래사장과 포플러 나무들이 하미 학살을 가슴 깊이 새겨 기억할 것이다.
하미마을 위령비문을 덮은 뒤편 연꽃대리석
한 줄기 향이 피어올라 한 맺힌 하늘에 퍼지니 저세상에서는 안식을 누리소서 천 년의 구름이여, 마을의 평안과 번영을 기원합니다.
3) 소결 2000년 8월 경진년 가을 디엔즈엉 사의 당과 정부 그리고 인민들이 바칩니다
앞서 살펴 본바와 같이 전우복지회가 기부하여 위령비를 건립하게 된 것은 학살이 존재하였다 는 사실과 이에 대하여 한국군으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전제하였던 것입니다. 하미 마을 위령비 건립과 비문을 덮게 된 경위는 그 자체로 하미 마을 학살의 직접적인 증거가 될 수
2) 한국대사관과 전우복지회의 비문 수정 압력
는 없으나, 하미 마을에서 한국군에 의한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매우 유력한 정황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위령비에 새겨진 내용이 당시 주베트남 한국대사관 참사관에 의해 발견되어 알려지자, 주베트남 한국대사관 측은 베트남 외무성 측에 이를 수정해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전우복지회 또한 비 문을 수정해야 2000. 9. 2. 예정된 준공식을 진행할 수 있며 지속적으로 수정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하미 마을 유가족협의회는 비문을 지우는 대신 이후 언젠가는 공개하겠다는 의미에서 연꽃 문양의 대리석으로 비문을 덮어두었습니다. 현재까지도 비문은 연꽃 문양의 대 리석으로 덮여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위령비 건립을 통하여 상징적으로나마 피해사실을 인
148
149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3. 원고 응우옌티탄B의 피해사실
는 옆집으로 기어가면서 마을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봤고, 사람들이 울고 소리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저녁까지 옆집에서 사촌동생 응우옌반닷, 옆집 아이와 함께 공포에 떨며 사
가. 피해사실 원고 응우옌티탄B는 1957. 11. 27. 출생하여, 1968. 2. 22. 무렵에 하미 마을에서 어머니 레티토이,
람들이 구해주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녁이 되자 오빠 응우옌꺼이가 옆집으로 와서 자신을 포함한 다친 어린이들을 찾아냈고, 그녀의 집에서 하반신이 거의 잘려나간 응우엔반땀을 방공 호에서 찾아내서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오빠 응우옌꺼이, 언니 응우옌티요, 남동생 응우옌반땀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한국군에 의한 하미 학살로 그녀는 어머니 레티토이, 남동생 응우옌반땀, 작은 어머니 팜티수, 사촌 응우옌반
남동생 응우옌반땀과 사촌동생 응우옌반닷은 독일 의료선으로 옮겨졌지만 곧 죽었습니다.
닷, 사촌 응우옌티씨를 잃었습니다. 자신도 수류탄 공격을 받고 왼쪽 귀와 왼쪽 다리, 엉덩이에
다행히 그녀는 다낭종합병원(당시에는 다낭수술병원)으로 옮겨졌고, 약 15일간 치료를 받고 걸을 수
상해를 입었습니다. 그녀는 그 때 입은 상해로 현재까지 왼쪽 귀가 전혀 들리지 않는 장애가 남
있게 되어 퇴원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때부터 수류탄 폭발로 다친 왼쪽 귀가 전혀 들리지
았습니다. 병원을 퇴원한 후에 사실상 전쟁고아가 되어 식모살이 등을 하며 어렵게 자랐습니다.
않았습니다. 그녀는 퇴원 후 보살펴줄 가족이 없어서 홀로 전쟁고아와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그녀는 오갈 데가 없어서 남의 집에서 식모 생활도 했고, 때론 아이스크림 직접 만들어서 아이
나. 원고 응우옌티탄B의 구체적 진술 원고 응우옌티탄B는 1968. 2. 22. 아침에 집 밖에 나갔다가 얼룩덜룩한 군복을 입은 군인 2명이
들에게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녀는 학살 후 아주 힘든 청소년기를 견뎌냈습니다. 그녀 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하미 학살 사건의 충격으로 안개가 끼거나 사람 울음소리를 듣게 되면 학살 현장의 끔찍한 공포가 떠올랐습니다.
길에서 마을 방향으로 몸을 낮춘 자세로 총을 들고 하미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봤습니다. 그녀
는 군인들이 오라고 손짓했지만 무서워서 가지 않고 집으로 도망갔습니다. 집에 들어온 그녀는 어머니에게 “군인들이 포위했다”고 말했고, 그러자 마자 그 군인 2명이 집으로 들어와서 “비씨 비씨 비씨29)” 하며 다 모이라고 손짓했습니다. 그 후 군인들이 마당에 서 있는 어머니에게 손을 흔들면서 방공호로 들어가라는 듯 손짓했고, 자기들 말로 들어가라고 하는 듯 했습니다. 어머 니가 처음에는 이해가 안 가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방공호로 들어갔습니다.
군인들이 물을 담는 큰 항아리를 두 조각으로 깨서 방공호의 양쪽 입구를 막은 채 방공호
다. 원고 응우엔티탄B의 오빠 응우옌꺼이의 진술 원고 응우엔티탄B의 오빠 응우옌꺼이는 하미 학살 당일 아침에 집에서 약 100미터 정도 떨어
진 방공호에 숨어서 총과 수류탄 소리 등을 직접 들었고, 그날 저녁 방공호에서 나와 원고 응우 엔티탄B와 남동생 응우옌반땀 등을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그는 살해되거나 상해를 입은 가족들을 발견하고 원고 응우옌티탄B를 구조하여 병원으로 옮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자 세히 진술하였습니다.
안으로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그때 방공호 입구 근처에 그녀의 작은어머니가 어린 아이인 사촌 동생을 안고 앉아있었는데, 군인들이 던진 첫 번째 수류탄에 작은어머니와 사촌동생이 죽었습
응우옌꺼이는 하미 학살 당일 저녁이 되자 숨어 있던 방공호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나오자
니다. 군인들은 곧바로 두 번째 수류탄을 양쪽 입구에 동시에 던졌는데, 그 수류탄은 어머니가
마을의 집들이 불에 타 파괴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곧바로 자신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는
그녀와 동생을 안고 있는 방공호 안에서 터졌습니다. 두 번째 수류탄이 터지고 나서 안에 있던 사람들이 거의 다 죽었습니다. 그녀도 수류탄 폭발로 왼쪽 귀와 왼쪽 엉덩이부터 다리까지 다 쳤습니다. 그녀는 다친 몸으로 방공호에서 기어 나와 빈집이었던 옆집으로 기어갔습니다. 그녀
옆집에서 상해를 입은 여동생 원고 응우옌티탄B, 사촌동생 응우옌반닷, 옆집 아이를 발견했습 니다. 그는 원고 응우옌티탄B를 발견했을 때 엉덩이가 찢어져 있었고 엉덩이와 다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응우옌티탄B로부터 남동생이 집 방공호에 살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집 방공호에서 하반신이 얼마 남아 있
29) ‘베트콩(VC)’이라는 의미로 추정됩니다.
150
지 않은 남동생 응우옌반땀을 구했습니다. 응우옌반땀은 다리가 거의 잘려 있는 심각한 상해
151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를 입었습니다. 하지만 약간의 의식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집과 옆집에서 발견한 생존
Ⅵ. 피고 대한민국의 책임
한 아이들 4명을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그는 그날 밤에 자신의 집 방공호에서 자신의 손으로 직
접 자신의 어머니이자 원고 응우옌티탄B의 어머니인 레티토이, 작은어머니 팜티수, 사촌 응우
1. 피고 대한민국의 국가책임 발생
었습니다. 남동생 응우옌반땀은 병원으로 옮겼지만 그 다음날 사망했다고 합니다.
가.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등에 따른 책임 관련 (헌장 제4조 제1항 소정 작위책임)
4. 소결
1) 이 사건 학살들은 한국군 작전수행 중 발생된 사건임(직무관련성)
하미 학살은 해병 제2여단 주둔지와 중요 보급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에서 미리 수립
가) 법리
된 작전 계획에 의거하여 민간인인 하미 마을 주민들에 대한 공격이었습니다.
헌장 제4조 및 헌장 제7호 제1항 4호에 따라 원용되는 대한민국 헌법 제29조와 국가배상법제2
옌티씨를 비롯한 12구의 시체를 수습해서 현재 위령비가 세워진 자리 바로 옆 공터에 시신을 묻
조 제1항에 따라, 피고 대한민국은 군인(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인하여 손해를 입게 된 경 학살 당일 하미 마을에서 한국군에 대한 어떠한 총격이나 기타 공격이 없었음에도 불구하
우 이에 대한 손해배상책임을 집니다.
고, 한국군은 이른 아침 마을로 들어와 주민들을 몇 군데로 수십 명 단위로 모이게 한 후 지휘 관의 명령에 따라 일제히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은 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영유아, 여자, 노인
이 때 “직무상”의 요건에 관하여 대한민국 대법원은 “직접 공무원의 직무집행행위이거나 그
등 135명을 살해했습니다. 한국군은 마을 주민들을 심문하거나 남, 여, 노, 소를 구별하지 않았
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행위를 포함하고, 이를 판단함에 있어서는 행위 자체의 외관을 객관적
습니다. 한국군은 증거와 증언자를 남기지 않을 목적으로 인기척이 나지 않을 때까지 주민들을
으로 관찰하여 공무원의 직무행위로 보여 질 때에는 비록 그것이 실질적으로 직무행위가 아니
모조리 죽이고, 집에 불을 질러 시신을 훼손했으며, 학살 다음날 불도저를 동원해 무덤을 파헤
거나 또는 행위자로서는 공무집행의 의사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 행위는 공무원이 ‘직무를 집
치고 시신을 짓이겼습니다. 이렇듯 하미 학살은 전혀 우발적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작전계획
행함에 당하여’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며 적어도 외관상 직무관련성이 인정되면 국가배상책
에 따른 철저히 계획적이고, 주도면밀한 학살이었습니다.
임의 요건을 충족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대법원 1995. 4. 21. 선고 93다14240 판결 등).
원고 응우옌티탄B는 한국군에 의한 하미 학살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고, 자신의 신
나) 이 사안의 경우
체에 상해를 입었으며, 평생 왼쪽 귀가 들리지 않는 장애를 입었습니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한국군이 1968. 2. 12. 퐁니마을, 같은 해 2. 22. 하미마을에 각각 작전의 일 환으로 들어와서 민간인들을 공격하여 수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원고
응우옌티탄A와 원고 응우예티탄B 또한 한국군의 총격으로 인하여 상해를 입고 가족들을 잃 게 되었습니다.
원고 응우옌티탄A의 경우, 파월한국군전사에 이 사건 1중대 소속 군인들이 퐁니마을 일대
에서 “작전”을 수행하였다고 기재되어 있는 점, 이 사건 1중대의 책임작전구역에 있는 퐁니마을
일대에서 발생한 학살이고, 중대 병력이 중대장의 지휘하에 소대별로 이동하면서 작전을 펼치
152
153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는 가운데 발생하였으며, 사건 발생 시간이 작전 시간 중이라는 사정 등 즉, 학살 발생 지역, 병
라야할 피해자 보호의 기본적인 의무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중 민간인 보호에 관한 규정들
력의 이동 경로 및 규모, 사건 발생 시간대 등을 살펴볼 때 이 사건 1중대가 해병 제2사단의 지
은 헌장 제7조 제1항 제1, 2호가 준거법으로서 규정한 “전시에 있어서의 민간인의 보호에 관한
휘력을 이탈하였다고 보기 어려운 점, 이 사건 1중대 소속 군인들 역시 작전 수행 중이었다고 진
1949년 8월 12일자 제네바협약”(이하 ‘제네바협약’이라고 합니다)과 “1949년 8월 12일자 제네바협약에
술하였다는 점 등에 비추어볼 때, 1968. 2. 12. 당시 원고 응우옌티탄A의 피해는 피고 대한민국
대한 추가 및 국제적 무력충돌의 희생자 보호에 관한 의정서 (제1의정서)”(이하 ‘제네바협약 제1의정서’
소속 이 사건 1중대 군인들의 직무수행 중 발생하였다는 점은 분명한 바, 직무 관련성은 넉넉히
라고 합니다)에
인정됩니다.
서 헤이그법과 제네바법의 내용을 모두 포괄하고 평가받고 있는바, 이하에서는 제네바협약과
원고 응우옌티탄B의 경우에도, 파월한국군전사에서 이 사건 26중대가 1968. 2. 22. 하미마
구체적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현재 제네바협약 제1의정서는 민간인 보호에 있어
제1의정서에 규정된 민간인보호 의무를 중심으로 한국군의 민간인 보호의무를 살펴보도록 하 겠습니다.
을에서 작전을 수행하였다는 사실과 그 다음날 이 사건 26중대와 공병중대의 일부 병력이 하미 마을 인근 청룡도로에서 작전을 수행하였다는 사실이 각 확인되었고, 이 사건 26중대의 1968.
제네바협약 제1추가의정서 제48조는 민간인과 민간물자의 존중 및 보호를 보장하기 위하여
2. 22. 작전 중에 하미사건이 발생하였다는 점 역시 하미마을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해 일관되게
충돌당사국은 항시 민간인과 전투원, 민간물자와 군사목표물을 구별하며, 따라서 그들의 작전
입증됩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학살 당일 한국군이 하미 마을을 여러 방향에서 에워
은 군사목표물에 대해서만 행하여지도록 하여야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쟁
싸고 마을로 진입해서 약 4곳으로 마을 주민들을 불러 모아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람의 지시에
중이라도 민간인(민간물자)와 전투원(전투물자)는 ‘구별’해야 하며, 그 구별 속에서 민간인과 민간
따라 주민들에게 일제 사격을 한 점을 보면 하미 학살은 작전 중에 발생한 것이 분명합니다.
물자가 보호받아야 한다는 ‘분별의 원칙’입니다. 만약 이 분별의 원칙을 위반하여 충돌당사국이 민간인을 공격하였을 경우, 그것은 전쟁이라는 핑계로 합리화될 수 없는 ‘전쟁범죄’이자 ‘학살’
그렇다면 이 사건 학살들은 이 사건 1중대, 26중대의 작전수행 중 발생한 사건이며, 외관상
이 됩니다.
직무관련성을 부인할 수 있는 어떠한 요소도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분별의 원칙’ 속에서 보호받는 민간인의 범위(정의)가 문제됩니다. 제네바협약 제1
추가의정서 제50조 제1항은 “민간인이라 함은 제3협약 제4조 1항 (가), (나), (다), (바) 및 본 의정서 2) 한국군은 민간인 보호의무를 위반하였음(위법성)
제43조에 언급된 자들의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아니하는 모든 사람을 말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위의 제3협약 제4조 1항
가) 한국군의 민간인 보호의무
(가), (나), (다), (바)에
언급된 사람은 충돌당사국 군대의 정규
군 구성원, 그 군대의 일부를 구성하는 민병대 또는 의용군의 구성원, 억류국이 승인하지 않은 정부 또는 당국에 충성을 서약한 정규군대의 구성원, 군민병을 의미하여, 제1추가의정서 제43
① 제네바협약 제1의정서에 따른 민간인 보호 의무
조에 언급된 사람들은 충돌당사국의 군대 구성원입니다. 즉, 이러한 부류에 속하지 않는 사람 은 모두 민간인으로서 보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흔히 전쟁법이라고 통칭되는 규범 중 가장 핵심적인 규범은 “헤이그법”(Hague Law)와 “제네바
법”(Geneva Law)입니다. 헤이그법은 무력충돌시 군대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고 있는데, 이 규
나아가 제네바협약 제1추가의정서 제50조 후문이 “어떤 사람이 민간인인지의 여부가 의심스
범들의 요체를 담은 것이 헌장 제7조 제1항 제3호에서 준거법으로서 규정한 “1907년 육전에서
러운 경우에는 동인은 민간인으로 간주”한다고 규정함으로써 공격대상이 전투원 등인지 여부
의 법과 관습에 관한 협약(헤이그 제4협약)”과 그 부속규칙입니다. 한편, 제네바법은 상병자, 조난
의 입증책임을 그 충돌당사국에게 두고 있을 만큼, 전시 하의 민간인에 대한 보호는 충돌당사
자, 포로, 민간인 등 무력충돌의 “피해자”의 관점에서 작성된 법이며, 무력충돌시에 군대가 따
국이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라고 할 것입니다.
154
155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② 대한민국 헌법, 세계인권선언, 국가배상법에 따른 신체의 자유 보호 의무
피고 대한민국 소속 공무원인 군인, 경찰이 침해한 행위는 위법행위에 해당하고, 이에 따라 대 한민국 정부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는 국적을 불문하고 인간으로서 향유하고 보장받아야 할 가장 근본
나) 원고들은 비롯한 학살등의 피해자는 민간인이었음
적인 권리이며, 이는 대한민국 헌법과 세계인권선언에서도 확인하고 있고, 국가배상법에서도 국가배상책임 인정 기준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개인의 생명과 신체의 안전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가장 기 본적인 전제에 해당하고, 이는 국적을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하는 가치이며, 피고 대한민국은 개인의 생명과 신체의 안전을 보호 하고 이를 침해하지 않기 위하여 노력할 의무를 부담합니다. 더욱이 전쟁에 참가하고 전투원과 무기를 통하여 충돌상황을 형성하게 되는 국가 로서, 전쟁 참가여부를 결정하거나 전쟁으로 인한 충돌상황에 대응할 수도 없는 민간인들의 생 명과 신체를 보호할 의무를 부담한다 할 것입니다.
① 객관적인 증거들에 의해 민간인이었음이 증명됨
앞서 살핀 바와 같이 1968. 2. 12. 퐁니마을, 같은 해 2. 22. 하미마을에서 벌어진 학살에 관한 많 은 증거들은 원고들이 민간인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고 응우옌티탄A는 1968. 2. 12. 당시 만8세의 아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전투행위에
가담한 사실이 없는 민간인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① 응우옌티탄A 가 거주하던 퐁니마을은 당시 주월미군 초소 옆에 위치한 ‘사격제한구역’으로 판정된 지역이었다는 점(남베트남 민병대 가족
들이 살고 있던 마을),
③ 대한민국 법원의 판례
② 이 사건 1중대 소속 최영언, 이상우 등은 당시 퐁니마을에서 베트콩의 존
재는 확인하지 못했고 마을에서 민간인들만 확인하였다고 증언하였다는 점, ③ 주월미군감찰 보고서 역시 퐁니사건을 민간인에 대한 한국군의 공격으로 정의하고 있다는 점(위 보고서에 기재
앞서 살핀 피고 대한민국의 민간인보호 의무는 이미 대한민국 법원에 의해서도 한국전쟁 시기 군·경에 의한 민간인학살 사건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된 미군, 남베트남 민병대의 진술 모두 ‘주민’, ‘민간인’에 대한 공격이라고 확인),
④ 퐁니사건을 목격한 퐁니마
을 주민들(판르엉, 쩐반지옙)의 증언 역시 퐁니사건의 피해자들이 민간인들이었다고 진술하고 있 다는 점 등을 종합해볼 때, 피고 대한민국 소속 이 사건 1중대는 1968. 2. 12. 오전 퐁니마을에
대한민국 법원은 ‘국민보도연맹사건’에 따른 국가배상책임을 묻는 사안에서 “피고 소속 경 찰이 정당한 사유 없이 적법절차를 거치지 않고 1950. 7.경 또는 1950. 9.경 이 사건 희생자들을 살해한 것은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인 신체의 자유, 생명권, 적법절차에 따라 재판을 받 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고, 이로 인하여 이 사건 희생자들과 그 유족으로서 원고들은 상당한 정
거주하던 민간인을 상대로 공격행위를 하였고, 그 민간인 중 한 명이 원고 응우옌티탄A이었음 은 분명합니다.
원고 응우옌티탄B 역시 1968. 2. 22. 당시 만10세의 아동으로서, 전투와는 무관한 민간인이
신적 고통을 당하였다고 봄이 타당한바, 피고(대한민국)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제헌 헌법 제27
었습니다. 당시 호이안 지역에 피고 대한민국 소속 해병2여단이 주둔하기 시작한 후 주변 마을
조에 따라 그 소속 공무원들의 위법한 직무집행으로 인하여 희생을 당한 이 사선 희생자들과
주민들을 소개시키면서 하미마을만 소개시키지 않았고, 1968. 2. 22. 이전까지는 하미마을 주
이 사건 희생자들의 유족인 원고들이 입은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서울
민들과 한국군이 우호적인 교류를 하여오다가 당일 주민 135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또한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학살에 대해서도 ‘국민
는 점은 파월한국군전사의 기록과 하미마을 생존 주민들의 일관되고 일치된 진술을 통해 확인
의 기본권을 침해한 행위’로 규정하고 이를 위법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대법원 2013. 5. 16. 선고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 26중대는 1968. 2. 22. 하미마을에 거주하던 민간인을 상대로 공
고등법원 2015. 10. 23. 선고 2013나2028092판결). 2012다220819판결 등).
격행위를 하였고, 그 민간인 중 한 명이 원고 응우옌티탄B였음은 명백합니다.
즉, 대한민국 법원 역시 민간인의 생명권, 신체의 자유는 보호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156
157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② 민간인 추정원칙
4) 원고들은 본인의 신체의 자유를 침해당하고 가족을 잃었으며, 그로 인해 수십 년 동안 고통 속에 살아와야 했음(손해의 발생과 인과관계)
이와 같이 원고들이 민간인이었음은 명백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피고 대한민국이 원고들의 민간인여부를 다투고자 한다면, 제네바협약 제1추가의정서에 따라 피고 대한민국에게 전투원 에 대한 입증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지적하고자 합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제네바협약 제1 추가의정서는 민간인인지의 진의가 확인되지 않는 경우 민간인으로 ‘간주’하도록 정하고 있고, 이는 이 사건 학살에도 당연히 적용됩니다. 즉, 피고 대한민국은 스스로가 이 사건 학살이 전투
앞서 자세히 살핀 바와 같이 원고 응우옌티탄A는 퐁니 사건으로 평생 심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
고 있고, 오빠를 제외한 모든 가족들을 잃은 전쟁고아로서 가난과 고통 속에서 성장해야만 했 습니다. 원고 응우옌티탄B 역시 하미 사건에서 한국군이 던진 수류탄에 의해 어머니와 동생을
잃었고, 평생 왼쪽 귀가 들리지 않는 상태로 살아야 했습니다. 이처럼 원고들은 모두 평생 불편
원에 대한 정당한 작전이었다는 점을 입증하지 못하는 한, 원고들의 민간인 여부를 다툴 수 없
한 몸으로 살아와야했고, 일을 하기 어려운 몸으로 식모생활을 전전해야했으며, 가족을 잃은
습니다.
슬픔과 가난을 견뎌야 했습니다.
3) 한국군은 민간인임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음에도 학살등을 하였음(고의) 원고들은 모두 10세 이하의 소녀였고, 원고 응우옌티탄A 가 거주한 퐁니마을과 원고 응우옌티
탄B가 거주한 하미마을 모두 각 사건이 발생하기 전부터 한국군이 마을 주민들과 왕래하며 지 내던 곳이었습니다. 또한 각 마을에서 학살로 인한 사상자를 살펴보면 만 10세 이하의 아동이
나. 피고 대한민국의 진실을 밝힐 의무 위반에 따른 책임 관련 (헌장 제4조 제2항 소정 부작위책임)
1) 진실에 대한 권리
나 노인, 여성이 다수를 차지합니다. 이와 같은 아이와 노인에 대한 공격은 이 사건 1중대, 26중 대가 자신들이 공격하는 대상이 민간인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공격하였다는 점을 보여주
헌장 제4조 제2항은 피고 대한민국이 베트남전쟁 민간인학살에 관하여 진실규명의 의무를 방
는 유력한 정황입니다.
기한 경우, 이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을 져야함을 규정하고 있습니다(부작위 책임).
또한 구체적인 학살의 태양을 살펴보면 더더욱 이 사건 1중대, 26중대의 고의가 인정됩니다.
헌장 제4조 제2항 소정 국가의 진실규명 의무는 국가범죄 또는 중대한 국제인권법·인도법
퐁니마을과 하미마을 모두 마을 주민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총격을 가해 사살하거나 방공호에
위반사건의 피해자가 사건의 진실에 대한 조사와 공개를 요청할 수 있는 진실에 관한 권리(right
주민들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방공호 안에 수류탄을 던지는 방식으로 사살하였습니
to the truth)입니다.
다.
위반사건에 대해 철저한 진상조사를 한 후 그 진실을 공표할 의무를 지며, 이러한 의무를 방기
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는 국가범죄 또는 중대한 국제인권법·인도법
하는 국가의 부작위는 피해자에 대한 또 다른 불법행위가 됩니다. 유엔 총회가 2005년 채택한 그렇다면 이 사건 1중대, 26중대원들은 퐁니사건과 하미사건에서 원고들을 포함한 민간인을
‘국제인권법의 중대한 위반행위와 국제인도법의 심각한 위반행위의 피해자의 구제와 배상에
상대로 공격을 하다는 점을 인식하였거나, 최소한 인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 사건 학살
대한 권리에 관한 기본원칙과 가이드라인’(이하 ‘유엔 피해자 권리장전’이라고 합니다)30) 및 유엔 인권위
들을 자행하였다고 할 수밖에 없는바, 이 사건 학살들의 고의 또는 과실이 분명히 인정됩니다.
30) U N Doc. A/60/509/Add.1, “Basic Principles and Guidelines on the Right to a Remedy and Reparation for Victims of Gross Violations of International Human Rights Law and Serious Violations of International Humanitarian Law.”
158
159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원회가 같은 해 채택한 ‘불처벌 투쟁 원칙’31)에서도 피해자의 진실에 관한 권리는 분명하게 확
2. 책임의 내용
인되고 있습니다.32) 가. 헌장 제4조에 따른 책임 따라서 피고 대한민국이 앞서 입증된 이 사건 학살들에 관해서, 진실 규명을 의무를 방기하 여 원고들을 포함한 피해자들의 진실에 관한 권리를 침해하였을 경우, 이는 또 다른 불법행위
헌장 제4조 제1항은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이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해 민간인에게 학살등을 하
가 된다고 할 것입니다.
였음이 인정될 경우, 피고 대한민국이 져야 할 책임에 관하여 ① 손해배상 책임, ② 진상규명 책 임, ③ 피해자의 존엄과 명예를 회복시키는 공식선언(사과)을 할 책임, ④ 피해자의 피해 및 명예
2) 피고 대한민국의 베트남전쟁 민간인학살에 대한 일관된 부인과 침묵
를 회복시키기 위해 필요한 행위를 할 책임, ⑤ 불법행위를 반복하기 않기 위해 필요한 행위로 각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헌장 제4조 제2항은 피고 대한민국이 진실을 밝힐 의무를 위반한 경우
피고 대한민국은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에 관하여 50여 년 전부터 현재까지 줄곧 침묵하고, 부
에도, 그 의무위반으로 손해를 입은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 책임을 지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
인하고 있으며, 피고 대한민국의 침묵과 부인은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가 1999년부터 공론
니다.
화된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이는 베트남 피해자들의 진상규명과 사과요구에 대해 가해국 가로서 마땅히 져야할 의무를 방기한 것입니다.
앞서 확인한 바와 같이 이 사건 1중대, 26중대에 의해 이 사건 학살들이 자행되었고(헌장 제4
조 제1항 책임 발생),
피고 대한민국이 진실을 밝힐 의무를 방기하였음(헌장 제4조 제2항 책임 발생)이 각
3) 피고 대한민국의 부작위로 인해 원고들의 진실을 알 권리가 심각하게 침해되었음
분명하게 입증되었으므로, 피고 대한민국은 마땅히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하는 바, 이하에서
피고 대한민국은 지난 50여 년간 진상조사와 관련된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침묵함으로써 원
는 그 책임의 내용에 관하여 진술하겠습니다.
고들을 비롯한 피해자들의 상처와 고통을 더욱 깊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는 피해자들의 진실을 알 권리를 침해하는 불법행위에 해당하는 바, 피고 대한민국은 헌장 제4조 제2항에 따른 손해
나. 배상책임(청구취지1의 가항)
배상책임을 부담한다 할 것입니다. 먼저, 피고 대한민국은 헌장 제4조 제1항 제1호에 따라 한국군이 자행한 이 사건 학살들에 의 해 심각한 상해를 입었으며, 가족들을 희생당한 유족이기도 한 원고들에 대하여 금전적인 손 해배상을 할 책임을 집니다. 대한민국 국가배상법 제2조는 이 사건 학살들과 같이 대한민국의 공무원(군인)이 불법행위를 하여 손해가 발생한 경우, 그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 31) U N Doc. E/CN.4/2005/102/Add.1, “PROMOTION AND PROTECTION OF HUMAN RIGHTS: Impunity - Report of the independent expert to update the Set of principles to combat impunity, Diane Orentlicher: Addendum - Updated Set of principles for the protection and promotion of human rights through action to combat impunity.” 32) ‘불처벌 투쟁 원칙’에서 정립된 피해자의 진실에 대한 권리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 첫째로, 모든 국 민은 인권침해가 야기된 상황과 이유를 포함해 진실에 대한 불가양의 알 권리를 가지며, 이러한 권리의 완전한 행 사만이 인권침해의 재발을 방지한다고 천명한다. 둘째로, 국가는 인권침해와 관련된 기록과 증거를 보존할 의무 를 지며, 집단적 기억이 멸실되지 않도록 수정주의나 부인주의 주장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고 천명한다. 셋째로, 피 해자와 그 가족은 피해자의 운명에 관한 진실을 알 권리를 가진다고 밝히고 있다”(이재승, “세월호 피해자의 권 리”, 인권오름 432호, 2015).
160
습니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법원 역시 상당한 숫자의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사건(한국전쟁
전후)에서
피해자에 대한 피고 대한민국의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한 바 있습니다 (대법원 2011. 9. 8,
선고 2009다66969 판결 등 참조).
따라서 피고 대한민국은 “국가배상법 제3조에서 정한 배상기준에 따른 배상금”을 원고들에 게 지급할 의무가 있습니다.
161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다. 원고들의 존엄 · 명예 · 권리를 회복시키는 조치를 포함한 공식사과를 해야 할 책임 (청구취지1의 나항)
마. 대 한민국 정부가 불법행위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베트남전 민간인학살을 사회적 기억으 로 보존할 책임(청구취지 3항)
헌장 제4조는 이 사건 학살들이 인정될 경우 피고 대한민국이 “법적 책임 인정 및 피해자의 존
헌장 제4조 제1항 제5호는 이 사건 학살이 인정될 경우 피고 대한민국이 “학살등 불법행위를
엄, 명예 및 권리를 회복시키는 조치를 포함한 공식선언(사과)을 할 책임”을 진다고 규정하고 있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행위를 할 책임”을 진다고 규정하고 있는바, 가해국 공동체 내부에
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피고 대한민국의 사과는 추상적인 의사표시에 그쳐서는 안 되며, 구체
서 인권침해의 사실을 공식적인 자신의 역사로 인정하고, 그 역사를 사회적 기억으로 보존하기
적인 사실인정을 바탕에 둔 법적책임을 전제로 한 사과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본 사건에
위한 노력을 대표적인 조치로서 볼 수 있습니다. 가해자의 기억을 품고 있는 사회는 폭력의 역
서 인정된 이 사건 학살들에서 발생한 한국군에 의한 불법행위를 명시하고, 이에 대한 법적 책
사를 성찰할 기회를 가질 수 있으며, 또 다시 그렇게 폭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이
임을 담은 피고 대한민국의 ‘사과’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를 저지할 수 있는 사회적 힘을 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원고들은 피고 대한민국에게 헌장 제4조 제1항 제3호의 책임을 물어 “원고들의 존엄 과 명예가 회복될 수 있도록 공식 사과하라”(청구취지 1의 나항)라는 청구를 합니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에서 베트남 전쟁의 기억에서 민간인 학살이라는 역사적 진실은 철저 하게 배제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국가기록원 홈페이지 중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70 년-해외파병”에서는 베트남 전쟁의 한국군 파병이 “위용을 떨치며 숱한 전과”를 올리는 것이었
라. 진상규명 실시 및 그 과정과 결과를 완전히 공개해야 할 책임(청구취지2)
을 뿐, 그 과정에서 발생한 과오와 아픔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베트 남전 민간인학살이라는 진실을 외면한 채, 일방적인 승리와 성취로서 베트남전 파병을 박제하
한국군에 의한 이 사건 학살들이 인정될 뿐만 아니라, 피고 대한민국이 진실에 관한 권리를 침
는 대표적인 시설은 바로 서울 용산구에 소재한 전쟁기념관입니다. 전쟁기념관은 베트남 파병
해한 사실까지 인정되었기 때문에, 헌장 제4조 제1항 제2호에 따라 피고 대한민국은 “진상규명
이 “자유의 십자군으로서 당당하게 출정”한 것이었고, “무한한 긍지와 자부심을 갖는 계기”가
(진상규명 과정 및 결과의 완전한 공개 포함)
책임”을 져야함은 마땅합니다. 한편, 본 소송을 통해 인정된
되었다고만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고,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를 왜
한국군에 의한 학살등 불법행위는 퐁니·퐁넛 사건과 하미 사건 2가지 사건이나, 두 사건 이외
곡하는 것은 원고들을 포함한 피해자들의 존엄과 명예를 다시 한 번 침해하는 것입니다. 또한
에도 수많은 지역에 한국군에 의한 학살등이 발생하였다는 직 ․ 간접적인 증언과 증거가 존재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그러한 행위를 다시 반복할 가능성을 기르는 위험한 일이기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피고 대한민국의 진상조사 책임은 본 소송에서 다룬 2개의 사건에 한
도 합니다.
정되어서는 안 되며, 베트남 전쟁 시기 발생하였던 민간인학살 전체에 대한 것으로 확대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피고 대한민국은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피해자들의 진실에 관한 권리를 더 이상 침해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원고들은 피고 대한민국에게 헌장 제4조 제1항 제5호의 책임을 물어 “피고 대한민국 은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로 29(용산동 1가 8번지) 소재 전쟁기념관을 포함한 대한민국 군대 의 베트남 전쟁 참전을 홍보하고 있는 모든 공공시설과 공공구역에 대한민국 군대에 의해 베트
따라서 원고들은 피고 대한민국에게 헌장 제4조 제1항 제2호 소정 책임을 물어, “1964년부
남 민간인에 대한 살인, 상해, 폭행, 성폭력 등 일체의 불법행위가 일어났음을 알리는 게시물을
터 1973년까지 사이에 베트남 지역에서 대한민국 군대에 의해 베트남 민간인에 대한 살인, 상
함께 전시하고, 향후 대한민국 군대의 베트남 전쟁 참전을 홍보하는 공공시설과 공공구역을 설
해, 폭행, 성폭력 등 일체의 불법행위가 일어났는지 여부에 관한 진상조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
치할 경우에도 같은 조치를 취하라”(청구취지 4항)라는 청구를 합니다.
를 공표하라”(청구취지 2항)라는 청구를 합니다.
162
163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Ⅶ. 결론
그리고, 원고들은 1968. 2. 학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다시 한 번 용기를 내 이 소송의 원고 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1968. 2. 학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원고들은 그 날의 공포스런 기
1968. 2. 학살 이후 원고들이 생존자로서 겪어야만 했던, 그리고 견뎌내야 했던 아픔과 슬픔, 고
억과 대면하기로 다시 한 번 용기를 낸 것입니다. 원고들은 이 법정이 진행되는 동안 그 악몽과
통에 관해서는 설령 천 페이지, 만 페이지를 쓴다 한들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쩌
도 같았던 1968. 2. 학살 당시의 끔직한 기억들과 끊임없이 마주해야만 할 것이고, 그로 인해 이
면 1968. 2. 학살 이후 원고들이 겪어야만 했던 아픔, 슬픔, 고통을 언어로 풀어낸다는 것 자체
법정이 진행되는 이틀 동안 내내 공포, 두려움, 아픔, 슬픔, 고통들을 수없이 감내해야만 할 것입
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니다.
그 처절했던 전쟁은 끝났지만, 원고들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고, 1968. 2. 학살 당시 느꼈던 공
그런데, 도대체 왜 1968. 2. 학살 이후 가족을 잃은 슬픔과 공포스런 기억들 때문에 평생 슬
포와 두려움 그리고 가족을 잃은 슬픔은 원고들의 삶의 일부가 되어 평생을 따라다니며 원고
픔과 아픔 속에 살아와야만 했던 원고들이 50년의 고통으로도 모자라 끊임없이 고통을 당해
들을 괴롭혔습니다. 무엇보다 1968. 2. 학살로 인해 삶이 송두리째 파탄나 버린 원고들은 그 여
야만 하는 걸까요? 그 이유는 1968. 2. 학살의 진실을 밝히고 그에 대해 궁극적으로 책임을 져
파로 배움의 기회마저 잃게 되었고, 변변한 일자리조차 구하기 어려워 생존을 위한 또 다른 사
야 하는 피고 대한민국이 오히려 학살의 진실을 은폐하고 책임을 회피해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
투를 벌여야만 했습니다. 1968. 2. 학살로 인해 배움의 기회를 빼앗긴 원고들은 아직도 글을 읽
합니다. 만약 피고 대한민국이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건들에
지 못합니다.
대해 철저히 진상규명을 하고, 그에 따라 피해자들에게 진심어린 사과와 피해구제를 위한 진지 한 노력들을 기울여 왔다면, 비록 학살로 인해 이미 파괴돼 버린 원고들의 삶 자체를 되돌릴 수
한편, 베트남이 1992년 한국과 수교를 맺고, 그 후 한국의 시민단체들과 언론이 1999년부터 한 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알리기 시작한 이후, 원고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또 다른 고
는 없겠지만, 최소한 원고들이 한평생 아픈 기억 속에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일만큼은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통과 마주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의 진실을 알기 위해 찾아오는 한국인들과 마주하는 일이었습니다. 원고들을 찾아온 한국인들에게 학살의 진실을
그러나, 피고 대한민국은 1968. 2. 학살에 대해 계속해서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며 책임을
알리기 위해 학살 당시의 공포스런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것 자체가, 나아가 그 끔직했던 기억
회피해 오기만 했고, 이런 피고 대한민국의 비겁한 태도는 최근까지도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을 자신의 입으로 직접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원고들에게는 너무나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었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베트남을 국빈 방문함에 따라, 한국의 시민단체는 문재인 대통령이 피고
고, 그래서 피하고 싶은 일이었습니다. 특히 한국의 대학생들과 만날 때면 원고들은 배우지 못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건의 피해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사
한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괴감마저 들어 더욱 힘겨웠습니다.
과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피고 대한민국은 베트남 정부의 공식 요청이 없다는 핑계를 대며 공식 사과를 할 계획이 없음을 공표하였습니다.
그러나, 학살의 진실을 알리는 일이야 말로 살아남은 자들에게 남겨진 숙명이라고, 억울하게 죽어간 원혼들을 조금이나마 달래주는 길이라고 생각하였기에, 원고들은 용기를 내어 공포스
그러나, 원고들의 소송대리인들은 피고 대한민국에게 분명히 말해 두고 싶습니다. “국가 공권력
런 기억들과 마주하기로 결심하고 한국인들이 찾아올 때마다 1968. 2. 학살 당시의 공포스런 기
에 의해 저질러진 국가범죄에 대한 사과는 그 범죄의 피해자들에게 하는 것이지, 피해국 정부에게
억들을 애써 다시 떠올리며, 그 지옥과도 같았던 경험들을 상세히 증언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고”. 원고들은, 그리고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피해자들
원고들이 또다시 얼마나 큰 상처와 고통을 감내하였을지, 원고들의 소송대리인들로서 감히 가
은 단 한 번도 피고 대한민국에게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늠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피고 대한민국이 베트남 정부의 공식 요청이 없다는 핑계를 대며 학살의 피해자들에 대한 공식 사과를 거부하는 것은 참으로 비겁할 뿐만 아니라 부끄러운 행동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164
165
4. 시민평화법정 ㅣ 소장 요약본
피고 대한민국은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피고 대한민국의 그런 비겁한 태도가 변하지
이처럼,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대해 피고 대한민국이 진실을 밝히
않는 한, 1968. 2. 학살 이후 50년 동안 이어져 온 학살 피해자들의 슬픔과 고통은 절대 끝나지
고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과하는 것은 피해자들을 위한 길일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 바로 한국
않을 것임을. 학살 피해자들의 슬픔과 고통은 피고 대한민국이 학살의 진실을 인정하고 진심으
인들을 위한 길이기도 하므로, 원고들의 소송대리인들은 반드시 이뤄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로 피해자들에게 사과할 때에야 비로소 끝날 수 있음을.
것입니다.
원고들은 오랜 시간 동안 한국인들에게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진 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해 왔고, 그것은 원고들에게는 또 하나의 인고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
귀 재판부께서 이런 점들을 살피시어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실 것을 기원하면서, 이 소 장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나, 피고 대한민국이 공식적으로 학살의 진실을 인정하지 않고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기를 거부 하고 있는 것을 통해 상징적으로 알 수 있듯이, 한국 사회는 아직도 원고들의 그런 노력에 제대 2018. 3.
로 응답하지 않고 있습니다. 원고들의 소송대리인들은 이제는 한국 사회가 원고들의 노력에 진지하게 응답을 해야만 한
원고들의 소송대리인
다고 생각하며, 이 법정이 그러한 진지한 응답의 시발점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이 법정에서의 울림이 한국 사회 곳곳으로 퍼져나가, 궁극적으로는 피고 대한민국의 학살 피해자 들에 대한 공식 사과 및 피해구제 그리고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 전 반에 관한 진상규명 노력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 재판부 귀중 마지막으로, 원고들의 소송대리인들은 피고 대한민국인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 간인 학살에 관해 진실을 밝히고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과하는 것은 비단 학살 피해자들을 위 한 길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시리아에서는 전쟁으로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당하 고 있음에도, 이 땅 한반도에서는 군사적 갈등을 부추기며 필요하다면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처럼 전쟁의 비참함에 대해 점점 무감각해져 가는 현실 속 에서, 피고 대한민국이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관해 진실을 밝히고 피 해자들에게 공식 사과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전쟁의 비참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는, 바로 우 리 자신을 위한 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피고 대한민국인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진실을 밝히고 피해 자들에게 공식 사과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생명과 인권 그리고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 줌으로 써 두 번 다시 이런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각심을 심어 주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66
167
재판진행경과보고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2018. 3. 27. 재판부 및 서기단 구성 - 준비위원회 공동준비위원장 정연순 변호사의 시민평화법정 헌장 공표 - 헌장 제8조 제3항에 따라 재판부(김영란, 이석태, 양현아) 위촉 - 헌장 제8조 제4항에 따라 서기단 임명(김자연, 안지희, 홍유진)
2018. 3. 30. 원고들의 소장 제출 및 피고에게 송달
Phiên tòa hòa bình của nhân dân
về tội ác thảm sát thường dân do quân đội Hàn Quốc
gây ra trong chiến tranh Việt Nam
People's Tribunal on War crimes by South Korean Troops during the Vietnam War
- 원고들의 대리인 소장 및 증거를 재판부에 제출 - 피고 대한민국(법률상 대표자 박상기 법무부장관)에게 소장, 증거, 소송절차안내서, 변론준비기일 통지서 송달 (법무부 민원실 접수)
2018. 4. 5. 13:00 제1회 변론준비기일 (민변 대회의실) - 원고들 대리인 5인 출석, 피고 불출석 - 재판부, 헌장 제11조 제2항에 따라 피고들의 변론기회 보장을 위해 피고의 대리인 선정
2018. 4. 11. 17:00 제2회 변론준비기일 (민변 대회의실) - 원고들, 피고 각 대리인 출석 - 원고들 대리인, 전문가 증인(구수정, 고경태) 및 당사자신문 신청. 영상증거 검증 신청. - 피고 대리인, 원고들 소장에 대한 답변 구두진술
168
5. 준비위원회 소개 및 구성, 준비과정
5. 준비위원회 소개 및 구성, 준비과정 ㅣ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소개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소개
실 학살 피해자들의 ‘왜 나를 쏘았나요’라는 질문을 던지고, 한국 사회는 그 질문에 응답하기 위 해 노력하는 장소. 50년 전 태극기를 달고 베트남에 갔던, 이제는 노인이 된 청년들은 비로소 자 신의 목소리로 그 날의 기억을 꺼낼 수 있는 장소가 시민평화법정이 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진실 : 시민평화법정은 진실을 위한 운동입니다. 베트남 중부 한국군 주둔지역에 건립된 수많 은 증오비와 위령비들, 따이한(‘대한’의 베트남식 표현) 군대에게 가족이 학살당한 피해자들의 절규 (이 문서는 시민평화법정을 소개하고, 준비위원회 참여를 요청하는 문서로서 활용되었던 것입니다)
앞에 가해자로 지목된 한국이 더 이상 귀 막고 눈 감을 수는 없습니다. 시민평화법정에서 다루 려고 하는 사건은 베트남 중부 꽝남성에 위치한 퐁니·퐁넛 마을 및 하미 마을 학살 사건입니다.
1.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구성 배경
두 사건 모두 1968년에 일어났기에, 시민평화법정이 예정된 2018년은 학살 50주기가 되는 해입 니다. 시민평화법정은 50년이나 지연된 정의를 세우고 진실을 밝히는 일입니다. 시민평화법정은
-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이하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가 한국 사회에 공론
엄정한 기준으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이 발생하였는지를 확인할 것입니다.
화된 1999년 이후 20년 가까이 학살 피해자들의 절절한 증언이 전해져왔지만, 한국 정부는 진 상규명 등 책임 있는 조치를 전혀 취하지 않은채 부인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 평화 : 시민평화법정은 평화를 위한 운동입니다. 20세기 후반 가장 부정의한 전쟁으로 평가받 는 베트남 전쟁에서 벌이진 참상을 현재화하여, 무력충돌의 가능성이 상존하는 한반도에서 전
- 한 국 사회운동은 2002년 “조선일보의 반민족 반통일 행위에 대한 민간법정”, 2004년 “부시·블
쟁반대라는 평화의 가치를 확산시킬 것입니다. 또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국가는 이에 대한 법적
레어·노무현의 이라크 전쟁범죄와 파병에 대한 전범 민중재판” 등 시민법정의 형태로 중요한 사
책임은 피할 수 없으며,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피해배상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임으
회적 문제를 공론화시켜왔습니다. 또한 2000년 일본 동경에서 열렸던 ‘여성국제전범법정’은 가
로써 50여 년 전의 국가폭력을 오늘의 평화운동으로 넘어서고자 합니다. 나아가 얼마 전 미국
해국의 수도에서 일본군‘위안부’라는 전쟁범죄 책임을 묻는 시민법정으로서, 일본군‘위안부’ 문
기밀문서를 통해 확인된 바와 같이, 전두환 군부에게 1980년 광주의 학살은 베트남 민간인학살
제의 국제적 연대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의 연속이었습니다. 많은 연구자들은 한국전쟁 당시 벌어진 민간인학살과 베트남전 민간인학 살의 구조적 유사성을 지적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반복되는 민간인학살을 시민들의 손으
- 이에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를 다시 한 번 공론화시키고, 진상규명을 바탕으로 한 한국 정
로 끝내는 평화운동이 바로 시민평화법정입니다.
부의 법적 책임을 확인하기 위해,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이하 ‘시민
평화법정’)을
2018년 4월 20~22일, 서울에서 개최하는 것을 한국 시민사회가 함께 준비하기 위해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습니다.
- 책임 : 시민평화법정은 한국 사회가 마땅히 져야할 책임을 생각하는 운동입니다. 자신이 저지 른 과오를 명백히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하고, 모든 책임을 다하는 것이야 말로 성숙한 공동 체의 모습입니다. 일본 정부에게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법적 책임을 인정하라 외치는 한국 사회라면, 베트남에 대한 책임 역시 마땅히 다해야 합니다. 한국 사회가 이러한 책임을 다할 때,
2. 시민평화법정의 원칙과 의미
베트남전 참전군인분들이 견뎌온 고통에 대해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보상과 예우 역시 훨씬 더 무게감을 갖게 될 것입니다.
- 원칙 : 시민평화법정은 처벌의 장소가 아닌 고통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장소이고자 합니다. 시민평화법정은 누군가를 처벌하기 위한 목적의 법정이 되길 원하지 않습니다. 베트남에서 오
170
171
5. 준비위원회 소개 및 구성, 준비과정 ㅣ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소개
3. 시민평화법정의 형태 - 국가배상소송
을과 한국 시민사회는 꾸준하게 교류를 이어왔습니다.
- 시민평화법정은 대한민국 법령과, 국제인권법, 국제인도법을 근거규범으로 하는 민사법정입니
- 다른 하나는 하미 마을 사건2)으로 학살을 목격한 생존자가 비교적 많고, 유가족 단체가 조직되
다. 구체적으로 시민평화법정은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과정에서 상해를 입으신 분 및 사망한 분
었습니다. 한편, 2000년 월남참전전우복지회의 기부로 하미 마을에 위령비가 세워지는 과정에
의 유족(이하 ‘피해자’)이 원고가 되고, 대한민국을 피고로 하는 국가배상소송의 형태로 이루어질
서 학살의 경과를 적은 위령비 비문을 두고 참전전우회 쪽의 삭제요구가 있었고, 이에 하미 마
것입니다. 한국 군인들이 무장한 교전 상대가 아닌 베트남 민간인들을 위법하게 살인하거나 다
을 주민들은 사실을 기록한 비문을 지울 수 없다며 삭제하는 대신 그 위에 연꽃 문양이 그려진
치게 한 사실이 인정된다면, 한국 정부는 국가배상법에 따라 마땅히 군인(공무원)이 행한 불법
대리석을 덧씌우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결국 위령비는 그 상태로 제막되어 현재까지 연꽃 대리
행위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
석으로 비문이 덮여있습니다. 이 위령비 사건이 내포하는 의미도 대상사건 선정에 큰 고려요소 였습니다.
- 시민평화법정은 전문성과 사회적 명망을 가진 재판부의 진행아래, 원고측(피해자 및 소송대리인),
피고측(한국 정부 및 소송대리인) 간 공방이 진행될 것이며, 그 과정에서 참전군인, 목격자에 대한 증 인신문 등 다양한 형태의 증거조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 위 두 마을 사건에서 한국군에 의해 상해를 당하거나, 사망당한 이의 유족이 시민평화법정의 원고가 될 것입니다. 민변 베트남전쟁 민간인학살 TF 소속 변호사 6명과 한-베 평화재단 구수
정 박사는 2017. 6.경 1차 현지조사를 진행하여, 두 마을에서 원고가 되실 수 있는 피해자 5명을 - 시민법정에서 민사법정은 이례적인데(대부분 형사법정), 이후 시민평화법정의 자료를 바탕으로 실
인터뷰하였습니다(아래 2017. 6. 23자 한겨레신문 기자 참조).
제 한국 법원에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즉, 시민평화법정은 단순한 1회성 행사가 아닌 본격적인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맥락 위에 놓여 있습니다.
- 두 마을의 희생자가 한국에서 열릴 시민평화법정에 참석하셔서, 자신의 피해사실을 직접 법정 에서 증언하실 수 있도록 한국으로의 초청준비를 진행할 것입니다
4. 시민평화법정 대상사건 – 퐁니·퐁넛마을 사건, 하미마을 사건 - 한 국군에 의한 베트남전 민간인학살의 전체규모는 (대락의 추정치이지만) 80여건, 9천 여명의 희생 자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시민평화법정에서 위 사건들을 모두 다룰 수는 없기 때문에, 이 중 다음의 2개 사건에 집중하고자 합니다(2개 사건은 모두 1968년 벌어진 학살로서 2018년이 학살 50 주기입니다).
- 하나는 퐁니·퐁넛 마을 사건1)으로 주월미군의 조사보고서, 해당 작전에 참여한 참전군인의 증 언 등 민간인학살 사건 중 상대적으로 가장 많은 증거가 확보된 사건입니다. 또한 퐁니·퐁넛 마
1) 1968. 2. 12.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 퐁니·퐁넛 마을 주민들이 대한민국 해병대 청룡부대에 의해 학살당하여 74명이 죽 은 전쟁범죄 사건.
172
2) 1968. 2. 22.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 하미 마을 주민들이 대한민국 해병대 청룡부대에 의해 135명이 학살당하고 가매 장당한 사건.
173
5. 준비위원회 소개 및 구성, 준비과정 ㅣ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소개
5. 증거발굴을 위한 조사팀 운영 및 학술대회 개최
7.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준비현황
-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는 베트남 현지의 피해자 지원단체가 없고, 피해자에 대한 접근 도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는 한국의 인권·평화단체들이 준비위원으로 참여하여 2018. 4.까지 시
어렵기 때문에 실증적인 연구가 희소한 상황입니다. 더욱이 한국 정부 및 베트남 정부 차원의
민평화법정을 함께 준비하는 기구입니다. 2017. 9. 22. 설명회(사전모임)를 진행하였고, 2017. 11. 21.
공식적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1차 자료의 발굴이 필요합니다.
출범기자회견을 하였습니다.
- 이에 준비위원회는 10여명의 석·박사급 연구자들로 구성된 조사팀을 조직하여 베트남전 민간 인학살 관련 자료를 수집·분석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확보된 증거는 시민평화법정에서 한국 정 부의 책임을 입증하는 증거로 사용될 것이며, 이후 실제 소송뿐만 아니라 관련 연구를 촉발하 는 자료로서 활용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전문 연구자들이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를 위해 협업을 진행하는 것은 최초의 일입니다.
- 또한 위 조사팀은 국가폭력, 과거사청산 등의 주제와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를 연결시켜서 국내외 연구자들과 함께 학술대회를 시민평화법정 즈음하여 개최하고자 합니다.
6. 시민평화법정 일자, 장소 및 예산
- 일자 : 2018. 4. 20.(금) ~ 22.(일)
2018년은 퐁니·퐁넛 마을 및 하미 마을 학살 50주기이며,
4월은 베트남 종전일(30일)이라는 상징성이 있습니다 - 준비위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내부 실무팀을 구성하였습니다.
- 장소 : 서울 / 서울은 가해국의 수도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공동대표
- 추정예산 : 약 5천만 원 (베트남 초정자 4인 기준)
집행위원회
자문위원회
법률팀
174
조사팀
홍보팀
사무국
초청팀
자원활동팀
175
5. 준비위원회 소개 및 구성, 준비과정 ㅣ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구성
8. 준비위원회 참여제안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구성
-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은 행사 취지에 동의하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공동준비위원장 - 준비위원은 행사개최를 위한 분담금(단체 5만원 이상, 개인 1만원 이상) 납부를 통해 재정적인 부담을
- 강우일 주교, 한베평화재단 이사장
나누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또한 준비위원은 시민평화법정과 관련한 여러 행사에 참여하고
- 정연순 변호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회장
홍보역할을 나눌 수 있습니다.
- 정제봉 베트남평화의료연대 이사장
자문위원 - 고경태 한겨레 새매체사업단장 - 김귀옥 한성대 교수, 민교협 상임공동의장 - 김엘리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공동대표 - 명진스님 전 봉은사 주지 - 박영립 화우공익재단 이사장 - 박태균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 안김정애 평화를만드는여성회 상임대표 - 안병욱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 - 이경주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이나영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 이재승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이재영 한국평화교육훈련원 원장 -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 전수안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이사장, 전 대법관 - 정강자 참여연대 공동대표 - 정재원 국민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 정지영 영화감독 - 조시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한성훈 연세대학교 역사와공간연구소 연구교수
176
177
5. 준비위원회 소개 및 구성, 준비과정 ㅣ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구성
집행위원
조사팀
- 임재성 변호사(집행위원장), 법무법인 해마루
-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역사학, 팀장)
- 여옥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사무국장
- 심아정 독립연구자(정치학, 간사)
- 김정우 베트남평화의료연대 사무국장
- 윤영실 연세대 근대한국학연구소 연구자(문학)
- 석미화 한베평화재단 사무처장
- 이경빈 서울대학교 연구자(인류학)
- 장보람 미국변호사, 민변 사무처 간사
- 이대훈 성공회대 연구교수(평화학)
- 황수영 참여연대 간사
- 이마즈 유리 히토츠바시대학 연구자(문학) - 이지은 서울대학교 연구자(문학) - 장원아 역사문제연구소 사무국장(사학) - 장한길 번역가(예술, 철학) - 황윤희 이화여자대학교 연구자(사학) -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사학) - 최시범 성균관대학교 연구자(사학) - 강시내 법학전공자 - 고산 문학전공자 - 김미례 다큐멘터리 감독 - 배상미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연구자(문학)
법률팀 - 박진석 변호사(팀장), 법무법인 이공 - 권민지 변호사, 법률사무소 다올
초청팀
- 김남주 변호사, 법무법인 도담
- 권현우 한베평화재단 아카이브팀장
- 김기남 미국변호사,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아디
- 전미화 한베평화재단 총무팀장
- 김자연 변호사, 법무법인 양재 - 안지희 변호사, 법무법인 위민 - 오민애 변호사, 법무법인 향법
홍보팀
- 이선경 변호사, 법률사무소 유림
- 이동화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아디 활동가(팀장)
- 이정선 변호사, 법률사무소 재율
- 노은정 프로젝트 매니저, 맨인사이트 대표
- 전민경 변호사
- 김환태 다큐이야기 감독
- 함보현 변호사, 화우공익재단
- 신민주 연꽃아래 활동가
178
179
5. 준비위원회 소개 및 구성, 준비과정 ㅣ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일지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일지
2017. 9. 22. 시민평화법정 설명회 개최(민변 대회의실, 50여명 참가) 사회단체 및 개인들에게 시민평화법정 구상을 설명하고, 함께 만들어갈 것을 제안하는 설명회 개최.
2017. 11. 21.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발족 기자회견 (한국프레스센터19층 기자회견장) 공동준비위원장, 자문위원, 집행위원 및 각 팀별 구성을 갖추고, 이를 발표하는 기자회견 진행.
2016. 4. ~ 2017. 3.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전략 검토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이하 민변) 변호사 10여명을 중심으로 민변 내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연구 모임’ 구성. 학살 문제의 법적, 제도적 해결을 위한 전략 검토 진행.
2017. 3. 11. 민변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연구모임 워크숍 진행(구수정 박사, 고경태 기자 참석) 시민평화법정 구상에 대한 논의 본격화
2018. 12. 이후 참전군인 인터뷰 진행 이후 6차례 이상 참전군인 인터뷰 진행.
2017. 4. 민변 산하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TF’ 인준 2018. 1. 27. 준비위원회 전체워크샵 (참여연대 아름드리홀, 30여명 참가) 2017. 5. 시민평화법정 준비논의 시작
한베평화재단, 베트남평화의료연대, 민변TF 3단체를 중심으로 시민평화법정 실무논의 시작. 2017. 6. 학살지역 1차 현장조사 진행
민변 TF 변호사 6인과 한베평화재단 구수정 이사가 퐁니·퐁넛마을, 하미마을을 중심으로 1차 현장
조사 진행.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지역에서 법률가 집단에 의해 이루어진 최초의 현장조사.
180
법률팀, 조사팀, 홍보팀 등 각 팀별 준비상황을 공유하고, 법정과 학술행사 준비의견을 교환하는 워 크샵 진행.
2018. 2. 9.~12. 학살지역 2차 현장조사 진행 법률팀, 조사팀 등 10명이 2차 현지조사 및 증언수집 진행, 피해자 14명을 인터뷰하였고, 학살지 현장 확인 및 촬영진행.
181
5. 준비위원회 소개 및 구성, 준비과정 ㅣ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일지
2018. 2. 19. 2차 현장조사 브리핑 및 심주영 박사와의 간담회(수유너머 104, 50여명 참가)
2018. 4. 11. 2차 변론준비기일 및 재판부 언론간담회 (민변 대회의실)
2차 현장조사 참가자 이지은, 장한길 발표.
원고들, 피고 각 대리인 출석.
심주형 박사의 <정처없는 애도, 끝나지 않은 전쟁-1968년 베트남 ‘후에학살’을 중심으로> 논문 발표
원고들 대리인, 전문가 증인(구수정, 고경태) 및 당사자신문 신청. 영상증거 검증 신청.
및 베트남의 전쟁기억에 대한 간담회.
피고 대리인, 원고들 소장에 대한 답변 구두진술.
2018. 3. 3. <‘가해국 국민’으로 살기: 베트남전쟁, 국가 그리고 ‘나’> 강연회 진행
2018. 4. 18. 원고들 입국
(역사문제연구소 관지헌, 약 100여명 참가)
원고들을 포함한 베트남 초정자 한국 입국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와 역사문제연구소 공동주최로 조사팀의 후지이 다케시 박사 강연. 2018. 4. 19. 국회 기자회견 2018. 3. 27. 시민평화법정 헌장 및 재판부발표 기자회견 (민변 대회의실)
시민평화법정 원고이자 퐁니 퐁넛 마을 학살 사건 생존자 응우옌티탄 발언
정연순 공동준비위원장의 시민평화법정 헌장 공표, 김영란, 이석태, 양현아 재판부 위촉. 법정과 학술행사의 세부 내용에 대한 발표.
2018. 4. 20. 국제학술대회 <‘가해자’의 자리에 선다는 것 - 베트남전쟁에 연루된 ‘우리’> 마포 문화비축기지 T6원형회의실 2018. 4. 21~22 시민평화법정 마포 문화비축기지 T2공연장
2018. 3. 30. 소장 제출 및 피고 대한민국에게 송달 원고들의 대리인, 소장 및 증거를 재판부에 제출. 피고 대한민국의 법률상 대표자인 법무부장관에게 소장 및 증거 송달(법무부 민원실 접수) 2018. 4. 2. 시민평화법정 및 국제학술행사 참가신청 접수시작
2018. 4. 5. 1차 변론준비기일 (민변 대회의실) 원고들 대리인 출석, 피고 불출석. 원고들 소장 진술 및 증거 제출. 재판부, 헌장 제11조 제2항에 따라 피고들의 변론기회 보장을 위해 피고의 대리인 선정.
182
183
주관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주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베트남평화의료연대, 국회시민정치포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한베평화재단, 화우공익재단 후원
디자인 디자인스튜디오 다다름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tribunal4peace@gmail.com
Blog
http://blog.naver.com/tribunal4peace
https://www.facebook.com/tribunal4pe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