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戰場)이 된
아시아, 후퇴한 민주주의 테러와의 전쟁 10년, 국가별 보고서
전장(戰場)이 된
아시아, 후퇴한 민주주의 테러와의 전쟁 10년, 국가별 보고서
전장(戰場)이 된
아시아, 후퇴한 민주주의 테러와의 전쟁 10년, 국가별 보고서
2011년 12월 30일 발행 발행 : 5·18기념재단(www.518.org) 편집 :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사무국 광주광역시 서구 쌍촌동 1268번지 5·18기념문화관 1층 전화 (062)457-0518 / 전송 (062)456-0519 2011 ⓒ 5·18기념재단 / 이 자료집의 무단 전재와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전장(戰場)이 된
아시아, 후퇴한 민주주의 테러와의 전쟁 10년, 국가별 보고서
CONTENTS 전장(戰場)이 된 아시아, 후퇴한 민주주의 테러와의 전쟁 10년, 국가별 보고서
발간사 ▪ 5·18기념재단 김준태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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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여연대 이태호 사무처장,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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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egional Overview of Asia, 9.11 이후 10년, 아시아는 더 안전해졌나 | 얍 스웨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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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대테러리즘에 대한 고찰 | 파하드 마즈하르
15
대테러리즘과 인권에 대한 영향 | 임파셜 인권감시팀
25
남아시아 아프가니스탄 대테러리즘의 과제 | 파잘 가니 카카르
41
파키스탄의 민주주의와 테러와의 전쟁 | I. A. 레만
49
인도의 대테러리즘과 인권 | 바블루 로이통밤
55
방글라데시의 관점에서 본 테러와의 전쟁 | 아딜라 라만 칸
63
스리랑카의 대테러 정책과 민주주의 그리고 인권 | B. 스칸타쿠마르
73
네팔, 대테러법과 정책이 인권에 미친 영향 | 고빈다 프라사드 샤르마 코이랄라
87
동남아시아 인도네시아, 테러와의 전쟁과 민주주의 | 피트리 빈탕 티무르
95
말레이시아, 테러와의 전쟁과 민주주의 | 옹진쳉
103
태국, 공포를 조장하는 대테러리즘 | 크리트디코른 웡스왕파니치
115
싱가포르, 대테러 정책의 경험 | 시나판 사미도라이
125
필리핀, 대테러와 대반군 전략의 혼동 | 카르멘 루존 개트메이탄
133
동북아시아 테러와의 전쟁 10년, 한반도 평화와 민주주의 | 이태호
145
부록 중국의 법치와 인권변호사 | 패트릭 푼
161
버마의‘국가 테러리즘’과 인권 | 소웅
165
▪ 발간사
테러와의 전쟁 10년, 국가별 보고서의 의미
김준태 5‧18기념재단 이사장
‘테러와의 전쟁과 아시아 민주주의 워크숍’은 2010년 광주아시아포럼을 통해 공식 출범한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SDMA)가 처음으로 주관한 워크숍으로 9.11발 발 10년을 맞이하여 테러와의 전쟁이 아시아 지역에 초래한 민주주의와 인권의 후퇴 문제를 조명해보고자 개최되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10년간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이름하에 자행됐던 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 탄압, 그리고 어떻게 시민사회가 이러한 위 기를 견디며 해결을 모색해왔으며 앞으로 나갈 길은 무엇인지 짚어보고자 했다. 아프가니스탄, 버마, 네팔, 파키스탄,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 아, 필리핀, 태국, 인도, 싱가포르 등지에서 참석한 발표자들의 연구보고서는 그 래서 많은 시사점과 교훈을 주었다.
오월광주는 지난 31년 동안 한국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경험과 국제적인 오 월정신의 연대와 교류활동을 바탕으로 더 나은 시민의 삶과 아시아 민주주의와 인권증진을 위한 제도를 체계적으로 준비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아시 아민주화운동연대는 이러한 체계적인 노력을 구체화한 첫 발걸음이다. 5개국 7개 단체가 뜻을 함께 하여 출범한 네트워크 모임은 오월정신을 아시아의 시민사회와 함께 나누기 위한 필드이다.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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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테러가 발생한지 올해로 10년이 넘었다. 그동안 여러 나라 수많은 사람들 이 테러와의 전쟁이란 미명하에 진행된 분쟁으로 희생되었으며 더러는 치유되거 나 회복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기도 하였다. 테러와의 전쟁은 인권과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독재권력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9.11테러와 같은 비극의 원죄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의 가진 힘으로 평화로운 세상을 억압하는 명분으로 활용한 것이 그것들이다.
이제 우리는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가 아시아 시민사회에 보다 지속적인 힘이 될 수 있도록 광주아시아포럼을 하나의 지점으로 하여 재단의 기념사업과 교육의 각 부분에서 적극적인 영향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열고 회원단체간의 연대와 활 동반경을 넓힐 수 있도록 힘을 다할 것이다. 이번 책자 발간이 그러한 출발점이 됨과 동시에 아시아시민사회의 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길잡이가 되기를 기원한다.
2011년 12월 5‧18기념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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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戰場)이 된 아시아, 후퇴한 민주주의
▪ 발간사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 /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운영위원
이 자료집은 테러와의 전쟁 10년간 아시아에서 일어난 일들을 민주주의에 대 한 도전이라는 맥락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 실린 글들은 지난 2011년 5월 17일
광주에서
5·18기념재단의
후원으로
열렸던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Solidarity for Democratization Movement in Asia, SDMA)의 워크숍, ‘테러와 의 전쟁과 아시아 민주주의’에서 발표된 내용을 재정리한 것입니다. 올해는 여러 면에서 우리나라와 아시아, 그리고 국제사회의 민주주의 현실을 점검해볼만한 해입니다. 9.11사건이 일어나고 테러와의 전쟁이 선포되어 전 세계 가 연루된 지 10년이 지났습니다. 소련이 붕괴되면서 냉전이 해체된 지 꼭 20년 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냉전의 승자였던 신자유주의 세계체제는 최근 금융위기 와 재정위기 속에 무너져 내리고 있고 그 상징인 월스트리트에서는 1%만을 위한 체제에 반대하는 99%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또한 지난 10년간 남미 에서의 민주화가 주목받았다면 올해에는 아랍과 북아프리카에서 민주화 도미노가 그 바통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20년은 냉전 해체 이후 대세로 자리 잡은 신자유주의와 이에 도전하는 민주주의와의 긴장관계로 요약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1세기 초에 이르러 이 긴장관계는 두드러졌습니다. 하지만 금세기 초에 시작된 테러와의 전 쟁은 비록 ‘민주주의’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90년대 동안 지구촌에서 성장한 민 주주의 흐름에 대한 신자유주의, 군사주의, 권위주의의 반동이었습니다. 지난 10 년간 외부의 위협과 공포를 과장하여 통제와 차별을 정당화하는 체제가 지구촌 곳곳에서 강화되었습니다. 이 자료집에 실린 각 나라의 사례들은 지난 10년간 과장된 공포가 어떻게 아시 아 각 나라에서 민주주의와 정의를 향한 목소리를 억압하는데 악용되었는지 잘 보 여줍니다. 아시아의 몇몇 국가들은 테러와의 전쟁의 가장 격렬한 전장이 되었고,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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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의 나라들에서도 차별과 억압이 확대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테러와의 전쟁 10년 동안 안보논리 뒤에 숨어서 민주주의가 제공하는 성찰의 기회를 외면했던 경제체제와 정치체제들은 지금 위기에 직면해있습니다. 미국과 유럽에서 시작된 세계경제위기, 그리고 아랍과 북아프리카에서 시작된 권 위주의 정치체제들의 위기가 그것입니다. 이 전환이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전지 구적인 차원의 군사주의의 파산과 맞물려 일어났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아시아가 경제적으로 혹은 지정학적으로 점점 더 주목받 는 공간이 되고 있지만, 아시아의 낡은 체제들 역시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아시 아의 권위주의 나라들, 민주주의 도상에 있는 나라들, 그리고 민주화 이후 정체 상태에 있는 나라들에서 민주주의의 후퇴가 다른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 다. 민주주의가 부여하는 역동성과 성찰의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아시아의 세기는 도래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자료집이 지금 전환기를 맞는 아시아에 부족 한 것, 혹은 지나친 것을 살펴보는데 조그만 참고자료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나오기까지 힘써주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먼 저 워크숍과 자료집 발간을 지원해 주신 5·18기념재단 김준태 이사장과 김찬호 사무처장께 감사드립니다. 자료편집과 교열을 맡아 주신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사무국의 아담 브리즐리(Adam Breasley) 간사, 포럼아시아의 얍 스웨셍(Yap swee seng, Asian Forum for Human Rights and Development, 태국) 사무총장, 백가윤 동아시아 코디네이터, 그리고 오디카의 아딜라 라만 칸 (Adilur Rahman Khan, Odhikar, 방글라데시) 사무총장, 참여연대 양영미 국제연대위원회 위원장, 박정은 평화국제팀 팀장, 차은하 국제연대위원회 간사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 고 총론을 집필해주신 파하드 마즈하르(Farhad Mazhar, UBINIG, 방글라데시) 소장을 비롯한 모든 필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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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戰場)이 된 아시아, 후퇴한 민주주의
A Regional Overview of Asia 9.11 이후 10년, 아시아는 더 안전해졌나
얍 스웨셍(Yap Swee Seng) 포럼 아시아(Asian Forum for Human Rights and Development, 태국) 사무총장
2011년 9월 11일은 미국이 알카에다의 테러 공격으로 하루사이에 수천 명 이상 이 목숨을 잃은 참극이 벌어진지 10년이 되는 날이다. 이 사건으로 전 인류는 충 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부시 행정부는 곧장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논란이 있 는 애국자법(Providing Appropriate Tools Required to Intercept and Obstruct Terrorism Act, PATRIOT Act)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알카에다가 활동하는 것으 로 의심되던 아프간을 침공했다. 9.11이후 전 세계 곳곳에서는 테러리스트들의 활 동을 억제하고 국가 안보와 공공의 안전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각종 대테러 법안 과 정책들이 수립되었다. 이에 대해 시민사회는 각국의 대테러리즘 조치들이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하고 인권을 침해하고 있는 것에 대해 우려해왔다. 테러와의 전쟁이 치룬 대가는 막대 했고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9.11테러의 10주년에 즈음하여, 지난 2011년 5월 17일 광주에서는 테러와의 전쟁 이 아시아 국가들에 미친 영향을 점검하기 위한 아시아 지역 워크숍 ‘테러와의 전쟁 과 아시아 민주주의(War on Terror and Asian Democracy)’가 아시아민주화운동연 대(Solidarity for Democratization Movement in Asia) 주최 하에 열렸다. 워크숍을 통해 공유된 아프가니스탄, 네팔, 파키스탄,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인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태국, 싱가포르, 버마, 대한민국, 그리고 중국 등 모두 14개 국 가의 상황과 경험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아시아 대테러법 9.11이전부터 아시아에서는 테러리스트들의 활동이 있었고 대테러법들이 존재해 왔다. 스리랑카, 파키스탄, 인도 같은 나라들이 그러한 경우이다. 다른 아시아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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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들의 경우 테러리스트 활동에 초점을 맞춘 국내법은 없었지만, 민족자결권운동 이나 공산주의 운동, 내전 등 정치적 억압이나 폭력에 대응하는 국가 보안법들이 존재했었다. 9.11이후 아시아 각국에서 적용되고 있는 테러 관련 법률들은 다음과 같다. 1. 전통적으로 민족자결권운동이나 공산주의 내전이 있었던 나라들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미명 하에 억압적인 국가보안법이나 대테러법을 강화하거나 연장하 였다. 스리랑카의 1947년 공공치안법령(the Public Security Ordinance, PSO) 와 1979년 테러방지법(the Prevention of Terrorism Act, PTA), 파키스탄의 1997년 대테러법(the Anti-Terrorism Act, ATA), 1952년 파키스탄안보법 (the Security of Pakistan Act), 1960년 공공질서유지법(Maintenance of Public Order Ordinance), 인도의 1958년 군특별권한법(the Armed Forces Special
Powers
Act,
AFSPA)과
1967년
불법행위방지법(the
Unlawful
Activities Prevention Act, UAPA),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의 1960년 국내보 안법(the Internal Security Act, ISA), 그리고 한국의 경우 1948년 국가보안법 (the National Security Act, NSA), 태국의 2005년 긴급령(the Emergency Decree), 2007년 컴퓨터 범죄법(the Computer Crime Act) 등과 같은 법률들 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전 지구적 맥락 속에서 새롭게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2. 9.11이후 제정된 대테러 법률들은 테러리즘에 대한 정의가 모호하고 정부에 게 자의적 통제권한을 폭넓게 부여함으로써 인권과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할 소 지를 안고 있다. 네팔의 2002년 테러리스트와 교란행위 예방 및 통제법 [Terrorist and Disruptive Activities(Prevention and Control) Act, TADA], 인도네시아의 2003년 테러리즘 범죄 근절에 관한 법률(the Law No.15/2003 on Eradication of Terrorism Crime), 필리핀의 2007년 인간안보법(the Human Security Act, HSA), 인도의 2002년 테러방지법(the Prevention of Terrorism Act, POTA), 방글라데시의 2009년 대테러법(the Anti-Terrorism Act, ATA), 2002년 돈세탁방지법(Money Laundering Prevention Act), 스리 랑카의 2005년 테러리스트 자금 조달 억제에 관한 법안(The Convention on the Suppression of Terrorist Financing Act)과 2006년 돈세탁방지법(The Prevention of Money Laundering Act), 한국의 2007년 테러자금조달금지를위 한법률안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9.11을 전후해서 아시아 각국에서 제정된 대테러 관련 법률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 을 보이고 있다. 테러리즘을 애매모호하고 지나치게 폭넓게 정의한다. 예를 들어 2007년 필리핀 이 제정한 인간안보법(The Human Security Act 2007, HSA)은 테러리즘을 ‘형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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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戰場)이 된 아시아, 후퇴한 민주주의
상 처벌할 수 있는 행위를 자행하면서 정부에게 불법적인 요구를 강압하기 위해 광범위하고도 엄청난 공포와 공황을 대중에게 조성하는 사람은 테러리즘이라는 범 죄의 책임이 있다’고 정의하고 있다. 심지어 스리랑카가 1979년 제정한 테러방지 법(The Prevention of Terrorism Act 1979, PTA)의 경우에는 법률상에 테러리 즘에 대한 정의가 없다. 견제와 균형의 원칙 없이 정부와 안보 기관에 폭넓은 권한을 부여한다. 법률들 은 공안기관으로 하여금 테러리스트 행위와 관련된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구 속, 구금, 취조할 수 있는 권한, 적절한 사법 절차 접근에 대한 권리를 무시하고 오랜 기간 동안 개인들을 구금하는 권한, 수색 및 압수할 수 있는 권한, 커뮤니케 이션을 가로 막을 권한, 그리고 용의자들을 자의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권한을 부 여했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의 국내보안법(The Internal Security Act 1960, ISA)의 경우는 재판 없는 무기한 구금을 허용하고 있다. 스리랑카의 테러방지법 (The Prevention of Terrorism Act 1979, PTA)은 해당 장관의 재량에 따라 재 판을 기다리는 동안 18개월까지 구금할 수 있도록 했다. 인도의 불법행위방지법 (The Unlawful Activities Prevention Act 1967, UAPA)은 테러 용의자를 180일 동안 감금할 수 있도록 했다.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와 정당한 법절차에 대한 권리를 부인한다. 예를 들어, 파키스탄의 대테러법률(the Anti-Terrorism Act 1997, ATA)은 무죄 판결을 받 을 때까지 용의자를 유죄인 것으로 추정하고, 재판 이외 자백을 허용하며, 부재 중 재판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사형, 무기징역, 그리고 추방과 같은 처벌의 수준도 가혹하다. 예를 들어, 필리 핀의 인간안보법(The Human Security Act 2007, HSA)은 용의자를 40년간 투옥 시킬 수 있고, 인도네시아의 테러리즘 범죄 근절에 관한 법률 제15조(The Law No.15/2003 on Eradication of Terrorism Crime)는 사형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공안기관들에게 면책 특권을 부여한다. 예를 들어, 네팔의 테러리스트와 교란행 위 예방 및 통제법[Terrorist and Disruptive Activities (Prevention and Control Act 2002, TADA]은 선의로 행해진 보안군의 어떠한 행위에 대해서도 처벌할 수 없도록 면책특권을 부여하고 있다. 인도의 군특별권한법(The Armed Forces Special Powers Act 1958, AFSPA) 하에서는 정부의 사전 승인 없이 군대를 기 소하거나 어떤 종류의 법률적 문제제기도 할 수 없다.
2. 대테러 조치가 인권과 민주주의에 미치는 영향 아시아에서 오·남용되고 있는 대테러법과 정책들은 각국의 인권과 민주주의 발 전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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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단체나 기관들에 대한 테러리스트 낙인찍기와 정치적 권리 박탈 대테러법은 테러리즘과 관련된 혐의만으로도 해당 단체나 기관의 활동을 임의 적으로 폐쇄시킬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네팔과 인도의 마오이스트(Maoist), 필 리핀의 모로(Moro)인들의 민족자치운동, 신장 지방의 위구르족(Uighur), 태국 남부의 파따니(Pattani)의 무슬림들, 북동부 인도 지역의 선주민들과 같은 활동 가들은 단순히 자신들의 정치적 신념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다. ■ 자의적 체포와 구금 대테러라는 명분하에 공안기관은 자의적으로 체포하거나 구금할 수 있도록 하 고 있다. 테러에 대한 정의가 법률상 광범위해서 민족자치 운동가, 야권 세력, 자유와 인권을 주창하는 활동가, 언론인과 노동운동가 등 정부 비판적인 인사들 을 체포할 있다. 인도의 군특별권한법(AFSPA)은 카슈미르 지역과 동북지역 주 민들처럼 자신들의 영토를 지키려는 주민을 억압하는데 이용되었다. 태국 남부 는 대테러법으로 무려 7,680명이 체포되었고 1,500명이 기소되었다. 파키스탄의 경우 테러 혐의로 체포되어 구금된 사람은 2,500명에 달한다. 2009년 스리랑카 에서는 타밀반군(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과의 전쟁이후 1년 동안 체포된 사람은 약 8,000명에 달한다. ■ 고문 장기 구금, 변호사 접견이나 가족과의 면회 거부, 정당한 법적 절차의 부재, 그리고 공안세력의 면책권 등이 고문이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 강제 실종 테러와의 전쟁이 수행되는 동안 강제 실종은 흔해졌다. 특히 아시아 분쟁지역 에서 더욱 그러하다. 1991년 ~ 2010년 사이 태국의 평화정의재단은 90건 이상 의 강제실종이 있었다고 밝혔다. 2004년 1월 네팔변호사협회 보고서에 따르면 4개월간 최소 254건의 강제 실종이 발생했다. 2006년 파키스탄에서는 강제 실 종의 수가 4,000건에 이르렀다. ■ 사법절차를 거치지 않은 처형 대테러법은 사법 절차를 무시하고 면책 조항을 둠으로써 사법절차를 거치지 않은 처형을 조장했다. 인도의 군특별권한법(AFSPA)에 따르면 공안기관은 테러 혐의가 의심되는 자에게 사형을 포함한 가혹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2003년 네팔 국가인권위원회 보고서는 테러 혐의로 구속된 사람의 사망률이 유난히 높 았다고 밝히면서 대테러리즘이라는 미명하에 사법 절차를 밟지 않은 처형이 얼 마나 많았는지를 증명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2000년부터 2010년 사이 대 테러 작전으로 죽은 테러용의자가 87명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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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戰場)이 된 아시아, 후퇴한 민주주의
■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침해 2003년 7월 네팔 내무부의 통계에 의하면 약 1,000명이 테러리스트와 교란행 위 예방 및 통제법(TADA)에 의해 구금되었고, 그 중 400명이 석방되었는데 단 한 명도 재판을 받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 ■ 사생활 침해 인도네시아의 테러리즘 범죄 근절에 관한 법률은 비밀스러운 정보 보고만으로 도 개인의 은행계좌 감시 및 차단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싱가포르에서는 테러 혐의를 받는 경우 경찰이 인터넷과 휴대폰 검열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법은 인터넷상 데이터와 이메일 보관도 허용하고 있어, 시민사회가 정부의 끊임없는 감시 하에 놓이도록 하고 있다. ■ 차별 대테러 조치는 차별과 편견, 인종별 자료수집·분석으로 이어지고 있다. 2004 년 이후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파키스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리비아 와 수단 등 8개국 출신 이민자들은 경찰에 체류기간과 거주 지역을 보고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한국은 2004년 ‘한국 정부에 반하는 활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14명의 불법체류자를 쫓아냈다. 스리랑카에서 북동 지역 외곽에 거주하는 타밀 족은 경찰서에 등록하도록 되어 있고, 검문, 검색 시 정부에서 발급한 신분증을 내놓아야 한다. ■ 언론의 자유에 대한 침해 2005년 태국에서는 비상령에 따라 100여개의 라디오 방송국이 폐쇄되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2003년 테러리즘 범죄 근절에 관한 법률에 따라 검사, 변호인 단, 판사 등을 협박하는 사람을 기소할 수 있도록 했는데, ‘협박’에 대한 정의를 막연하게 함으로써 테러 문제와 관련된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
3. 아시아 시민사회의 대응 테러와의 전쟁과 각종 대테러법의 남용에 대응하여, 아시아 시민사회단체들은 오랫동안 각 나라에서 억압적인 법률의 폐기와 개정을 요구하는 활동을 전개해왔 다. 그러나 국가안보가 각 나라와 지역 그리고 국제적 수준에서 지배적인 의제가 되어버림에 따라 시민사회운동은 심각한 좌절에 직면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의 시민사회운동은 테러와의 전쟁에 맞서 인권과 민주주의의 원칙을 수호하 고 폭력적인 대테러 법에 대항하면서 일부 돋보이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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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에서는 강력한 시민사회운동 덕분에 네팔 왕정이 무너졌고, 2007년 마오이 스트와의 포괄적인 평화협정에 서명함으로써 대테러법이 철폐되고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수백 건의 재판이 철회되기에 이르렀다. 필리핀의 경우, 시민사회운동 덕분에 인간안보법(HSA, 2007)은 경찰과 법 집행 관에 대한 처벌 조항, 고문 금지, 인권을 침해할 수 있는 조사, 심문, 처벌 금지 등의 조항을 담게 되었다. 한국 시민사회의 활발한 운동은 정부의 테러관련법 제정 시도를 저지시켰고, 패 킷감청을 허용하고 전기통신사업자 등에게 감청장비를 구비하도록 하여 수사정보 기관의 감청과 추적을 가능하도록 한 통신비밀보호법 개정 시도를 저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시민사회는 대테러 작전을 보호하고 언론의 기능을 마 비시킬 수 있었던 2009년 국가기밀법 통과를 연기하도록 했다.
4. 결론과 제언 파하드 마즈하르가 지적했듯이 미국이 주도하는 테러와의 전쟁은 전 세계적인 비상사태를 의미하는 것이자 누구도 전쟁이 언제쯤 끝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없고 승리의 기준도 불분명한 전쟁이다. 이 전쟁은 사람과 공동체 그리고 국가 간 의 신뢰와 이해를 깨뜨리는 공포의 이데올로기에 기반하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 10년 동안 인권은 후퇴되었고 민주적 공간도 위축되었다. 언론의 자유도 심하게 제약받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이 수호하겠다던 평화와 안보, 안전은 어디론가 증발 되어 버렸다. 오늘날 아시아의 상황은 9.11이전보다 더 악화되었다. 자유와 인권을 위한 오랜 투쟁은 수포로 돌아갔고 이를 되찾는 데는 수년이 걸릴 것이다. 우리 앞에 산적한 과제들이 놓여 있다. 시민사회는 억압적인 국가보안법과 맞서 싸워야 할 뿐만 아 니라, 테러와의 전쟁이 남긴 잔재, 즉 지구적인 대테러조치에 의존하는 안보패러다 임과 각종 억압적인 대테러법들을 해체하는 데도 힘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비극적인 9.11테러 10년을 맞이하여, 각국 정부가 대테러 조치를 취함에 있어 국제사회가 합의한 인권의 원칙을 준수하고, 민주주의의 근간인 언론과 표현 의 자유, 정보 접근의 자유를 보장할 것을 촉구한다. 국제적인 인권 규범과 기준에 어긋나는 국가보안법이나 대테러법들은 모두 폐지되거나 개정되어야 한다. 또한 현재까지 취해지고 있는 모든 비상사태 관련 조치들을 해제하고, 부당한 구금, 구 속으로 인한 피해자들을 구제해야 한다. 아울러 각종 대테러법 남용 사례들을 조 사하여 가해자들을 처벌해야 한다. 나아가 갈등의 원인을 해결하려는 노력과 더불 어 분쟁예방을 위해 힘써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스리랑카 동북부, 필리핀 민다나 오 지역, 카슈미르와 인도 동북지역, 한반도 등 분쟁지역에서 군비축소가 이루어져 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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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대테러리즘에 대한 고찰
파하드 마즈하르(Farhad Mazhar) 개발 대안에 관한 정책 연구소(UBINIG, 방글라데시) 소장
세계무역센터와 미 국방부 펜타곤 공격이 있던 날 저녁, 부시 대통령은 대국민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시민들과, 우리의 삶과, 참된 자유가 계획적이고 치명적인 연속적 테러에 의해 공격을 당했습니다. 희생자들은 비행기에서 사무실에서 공격받았습니다. 비서, 사업가, 여성, 군대와 연방정부의 공무원들, 어머니, 아버지, 친구, 이웃이 바로 그들입니다. 비열한 악에 의해 수천 명이 느닷없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건물로 돌진한 비행기, 화염, 거대한 구 조물이 무너져 내리는 광경을 보면서 불신과 끔찍한 슬픔, 조용하지만 굽힐 수 없 는 분노를 느끼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량살상 행위는 우리나라를 공포와 혼란에 빠뜨리고 우리를 위축시키기 위한 의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우리나라는 굳건합니다.”1) 다음날, 부시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국가안보팀과 방금 회의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최신 첩보를 입수했습니다. 어제 우리나라에 감행된 계획적이고 치명적인 공격은 테러행위 이상의 것이었습니 다. 그것은 바로 전쟁 행위였습니다. 우리나라는 흔들림 없는 결단과 결의로 하나 가 되어야 합니다.” 이후 부시 행정부와 미 언론은 ‘테러와의 전쟁(war against terrorism)’이라는 문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테러리즘에 대한 조직화된 폭력의 배치를 ‘전쟁 행위 (acts of war)’에 대한 ‘전쟁(war)’으로 묘사한 것은 테러리즘과 대테러리즘 조치 1) http://articles.cnn.com/2001-09-11/us/bush.speech.text_1_attacks-deadly-terro rist-acts-despicable-acts?_s=PM:US. (2011년 4월 20일 열람)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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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둘러싼 담론에 매우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증거였다. 과거에 정부는 테 러에 대해, 특히 식민주의 맥락에서 전쟁 대신 치안활동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었다. 독일의 적군파, 아일랜드 공화국군, 스페인의 바스크 조국과 자유, 이탈리아의 붉 은 여단 등을 상대하면서 각국 정부는 자신들의 대응을 ‘안보조치’ 혹은 ‘치안활동’ 으로 묘사했었다. 국가들은 대내외적 위협에 대해 항상 치안 및 안보 조치를 취해왔지만, 그런 위 협들이 ‘전쟁’ 상태에 버금갈 정도는 아니었으며 이에 대한 일련의 조치들을 ‘대테 러 전쟁’이라고 명명하지도 않았었다. 즉 ‘테러’로 지정된 활동에 대한 국가의 대테 러 정책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9.11이 비정부 행위자들에 의한 전쟁 행 위로 인식되면서부터 현실적 상황은 질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특히 특정 전략적 영역에서의 변화는 각별히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9.11이후의 세계가 결코 이전과 같을 수가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 변화는 다 양한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우선 적이자 대테러 전쟁의 표적인 ‘그들’의 ‘테러 리즘’에 직면한 ‘우리’의 관점이다. 둘째로 본질과 속성들이 어떻게 테러리즘에 기 여하는지 이다. 그것은 바로 ‘이슬람주의’이다.2) 이 글에서는 먼저 법인격자이라는 관점에서 이 변화를 이해하고자 한다. 이것이 민주주의와 인권 양 측면에서 함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9.11테러 이후에 제정 된 대테러법의 기본 특징은 피고인에 대한 어떠한 법적 보호도 배제하며, 따라서 ‘인간’으로서 한 개인이 가지는 법적 지위를 부인한다. 피고인은 안보기관의 구금 하에 혹은 구금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고문당하거나 살해될 수 있는 ‘벌거벗은 생명,’ 즉, 하나의 생물학적 존재로 격하된다. 둘째,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전 지구 적 상황 하에 민주주의와 인권 보호가 더더욱 어려워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전 지구적 질서의 신자유주의적 재구성과 관련된 현상을 짚어볼 것이다. 끝으로, 아시아 각국이 채택한 대테러법의 공통점 몇 가지에 대해 논할 것이다.
1. 테러와의 전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조지 부시(George W. Bush) 대통령의 연설에서 미국은 스스로를 보호하 기 위해서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권한을 이 끌어내기 위해 자신들을 ‘희생자’로 지칭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연설 2) 다음 논문 참조 : 2001년 9월 11일, Philosophy and the “War against Terroris m” by Alain Badiou in POLEMICS. Verso 2006.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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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통해 전 지구적 비상사태, 즉 ‘전 지구적 내전’, 혹은 전 지구적 ‘예외적 상황’ 을 선포한다. 2001년 10월 26일, 미국 상원은 애국법(Patriotic Act)을 통과시켰 다. 이 법에 따라 법무장관은 미국의 국가안보를 위협한다는 혐의가 있는 모든 외 국인을 구금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7일 내에 해당 외국인은 석방되거나 이민법 위반 혹은 다른 형사 범죄로 기소되어야만 한다. 부시 대통령의 명령은 상당히 새로운 특징을 드러낸다. 그것은 한 개인의 법적 지위를 철저히 배제하였고, 이에 따라 법적으로 명명할 수도, 분류할 수도 없는 존 재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프가니스탄에서 체포된 사람들은 제네바 협정이 부여한 전쟁포로의 자격을 박탈당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 국내법이 부여하 고 있는 범죄 혐의가 있는 피기소인의 자격조차 박탈되었다. 이들은 그저 ‘피구금 자’이자 실정법의 대상일 뿐이다. 이들의 구금은 시간적 의미에서 무제한적일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도 무제한적이다. 왜냐하면 법과 사법적 감독을 완전히 배제했 기 때문이다. 이것과 유일하게 비슷한 상황은 나치 캠프에서 유대인들이 처했던 법적 상황일 것이다. 유대인들은 시민권과 함께 모든 법적 정체성을 상실했었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올바른 지적처럼 관타나모에 구금되었던 사람들은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가장 불확정적인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3) 둘째, 테러와의 전쟁은 한 패권국가가 다른 국가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얼굴 없는 전 지구적이고 비국가적 행위자를 향해 선포된 새로운 종류의 전쟁을 의미한 다. 이는 ‘세계대전(world war)’이 아니라 ‘전 지구적(global)’전쟁이다. 전 세계 모 든 나라가 이 전쟁에 휘말릴 수도 있다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이 전쟁을 수행함에 있어 국제외교와 국제법, 법적·도덕적 인권체계가 테러의 ‘희생자’를 보호하는 방향 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전쟁이 언제 완전히 끝날 것인지, 승리 나 패배의 기준은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 누가 승리와 패배의 조건을 결정할지를 알 수는 없다. 한마디로 테러와의 전쟁은 끝없는 전쟁이다. 셋째, 테러와의 전쟁은 공포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두고 있다. 공포는 사람들 간 에, 공동체와 국가 간의 신뢰와 이해를 파괴하며, 그 결과 자연스럽게 폭력과 분쟁 을 수반한다. 공포는 또한 합리적 분석을 방해한다. ‘다른 이들’은 그들로부터 ‘우 리’ 스스로를 보호해야만 하는 적으로 간주된다. 어떤 행동의 결과를 비난하고 그 러한 행위를 저지른 이들을 배척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행동을 유발한 원인을 이해 하려고 하지 않는다. 공포는 서로 소통하고 희망을 말하게 하는 이해와 분석보다 우선시된다. 특히 정보화 시대에 공포는 불통이고 정보부재를 야기하며, 그 결과 허위정보를 양산한다.
3) 다음 논문 참조 : ‘State of Exception’ by Giorgio Agambe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5. Page 4.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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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와의 전쟁은 미국의 군사력이 강압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 다. 패권국가인 미국은 법의 한계를 넘어 자신들의 존재의 증거로 전쟁에 특권을 부여했다. 그 결과 인권을 포함한 모든 활동들이 이 ‘전쟁’의 수준과 강도, 그리고 ‘우리’와 ‘그들’, 친구와 적을 나누는 틀에 따라 결정되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테러리스트’가 국제적이든 국내적이든 어떤 법적 지위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인 권이 이러한 치외법권적 강압에 굴복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러한 문제 는 9.11이전에 취해졌던 대테러 조치들과 질적으로 다르다. 그 전에는 피고의 권 리가 계엄령 등을 통해 유보되거나 조건적으로 부정되었고, 이러한 권리의 부정은 국가가 그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자가 초래하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스스로를 보호 하기 위한 것처럼 표현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상황에서는 피고인의 법적 권리가 노골적으로 부정된다. 2001년 9.11이후 등장한 전 지구적 정치적‧사법적 질서는 아시아 각국의 정치적 ‧사법적 토대를 구성하고, 이들 나라의 인권활동가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하는 대 테러법 제정의 빌미를 제공했다.
2. 지구화와 테러와의 전쟁 지구화는 개인의 무한한 탐욕의 문화를 전 지구적으로 확산시키고, 기업의 이익 창출 범위를 확대하기 위해 점점 더 상호 의존적이고 서로 연결된 세계를 만들어 왔다. 하지만 지구화는 화석연료 기반의 산업 문명과 자연이 가진 삶의 긍정적 활 동 양상을 끊임없이 공격하면서 생태 환경의 파괴를 가속화하였다.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더 강화된 지구화는 국내 경제 및 자본과 재화의 이동을 위해 모든 장벽을 제거함으로써 전 지구적 수준에서 시장뿐만 아니라 주권, 국가, 성, 계급과 그 역할을 끊임없이 변화시키고 있다. 법과 법체계 역시 시민의 권리와 책임을 보장하기보다는 기업의 이익에 부합하기 위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지 구화 시대의 놀라운 특징은 어떤 나라도 외부의 개입으로부터 차단된 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 그리고 이 현실이 만들어 내는 모순과 적대감이 인권활동의 범위와 한계를 결정한다. 소련이 붕괴된 후 미국과 유럽 내 미국의 동맹국들은 확고한 승리를 거둔 것이 라며 역사의 종말을 선언했었다. 이후 미국의 방식에 따라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 한 작업이 시작되었고 미국 패권주의와 그 방식은 광범위하게 수용되었다. 세계는 단일 초강대국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일극 체제 하의 경제비전과 이것의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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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과정은 지구화와 중첩되었다. 전 지구적인 정치적·사법적 질서의 변화는 전 지구 적인 신자유주의 질서의 변화와 동시에 일어났다. 우리는 세계 질서 구조의 급격 한 변화를 목격했고 지난 수십 년 동안 세계는 거대한 전환을 경험했다. 이 체제는 본질적으로 불균형하며 강압적인 메커니즘을 갖고 있으며 국가보다 시장을 우선시 한다.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다. 신자유주의에 따르면 시장은 부와 자원의 분배를 포함한 모든 경제활동이 이뤄지는 주요 기제이므로, 안보의 영역을 제외하고는 국가가 할 일은 없다. 그런데 경제문제와 사회문제의 전체적인 기반이 안보 문제로 비춰지기 시작했다. 어떠한 국지적인 문제라 할지라 도 이렇게 ‘만연한 위협’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없다. 즉 위협은 이제 더 이상 한 국가의 국경 밖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내에서도 발생한다는 것 이다. 사회의 내적변화, 기술변화, 인구성장, 특히 빈곤, 경제적 불안정, 실업, 도시 화, 환경훼손, 에너지와 자원에 대한 경쟁, 기후변화와 같은 이슈들도 국가의 안보 위협을 구성하는 중대한 불안정화 요소로 간주되었다. 신자유주의적 사회경제 환경은 테러에 대한 전 지구적 전쟁을 ‘테러리스트’에 대 한 국내 전쟁으로 내부화하는 근거를 제공하였다. 전 지구적인 것과 지역적인 것 은 쉽게 일치되었다. 국가의 강압적 안보기구들은 테러에 맞서기 위해서 정비되었 다. 국가는 권위주의와 독재에 대한 대중적 저항을 안보에 대한 위협인 것처럼 묘 사했다. 자치권을 요구하는 공동체는 테러리스트로 간주되었다. 안보기구의 개입과 관련된 법과 규정의 변경에 따라 순수한 민주적·정치적 저항과 범죄성 폭력 사이 의 구분이 모호해졌다. 테러리즘의 정의를 확대하여 어떤 이의제기나 정치적 저항 까지도 테러로 규정하는 것이 용이해졌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라는 의제가 전 지구적으로, 지역적으로 모두 극렬한 저항 에 직면해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치자들은 자국 민들을 길들이고 착취하기 위한 또 다른 전략적 대안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각 국 정부는 신자유주의적 의제를 강제하기 위해 더욱 극단적인 수단에 의존해왔다. 대테러법을 포함한 ‘대테러 조치’는 반대자들을 위협하기 위한 것이었다. ‘테러와의 전쟁’은 시공간적 제약이 없다. 이에 형사법도 ‘테러리즘’의 정의를 폭 넓게 해석해 그 적용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본질적으로, 테러에 대한 전 지구적 전쟁은 반대자를 처단하고자 하는 국내전으로 내부화되었다. 이는 부정과 압제에 저항하는 민중의 힘을 막으려 하는 것이기도 했다. 민주주의는 모든 곳에서 지구 적 질서와 이러한 정부들과 양립할 수 없게 되었다. 통치기술이라는 것도 안보와 테러리즘을 다룬다는 구실 하에 저항하고 반대하는 이들을 다루는 기술이 되었다. 대테러리즘은 국가의 민주적 행정체계를 대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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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권 인권은 이제 보편적인 고려사항으로 거의 모든 국가가 인권의 기본 원칙을 공식 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화적, 정치적으로 다양한 현실 세계에서 인권의 보편성을 인정하는 것이 인권활동가의 활동을 용이하게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어렵게 만든다. 인권문제는 점점 더 국가로 인한 희생자로서의 개인에 관한 문제 가 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인권 의무를 이행하는 것은 바로 범법자인 국가이다. 협약, 선언, 그리고 소위 희생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의 법들이 실제로는 국가의 힘 을 강화한다. 국가는 인권보호를 이행하기 위한 법의 힘을 획득한다. 오직 국가만 이 법으로써 규범을 강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경제 환경과 대테러 전쟁이 벌어지는 시대에 각 국가가 겪은 변화를 고려할 때, 인권 이행을 국가에 의존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또한 이제 ‘외부 개입’은 종종 인도주의라는 이유로 ‘정당화’된다. 이것은 언제나 선별적이며 정치적인 동기를 갖는다. 오늘날과 같은 군산복합체 시대에는 어떤 나 라도 단지 인도주의적 가치를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전쟁을 벌이고 군사자원을 동원하지는 않는다. 테러와의 전쟁은 적을 일체의 법적 실체가 결여된 ‘벌거벗은 생명’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잔혹한 폭력을 인정한다. 전쟁에서 ‘무자비한 폭력’이 자행되었던 역사적인 사례가 있고, 그것이 때때로 군 지휘부의 승인을 받았던 것 이라는 점도 사실이다. 그러나 군사적 목적을 정당화하기 위해 불필요하고 무자비 한 폭력을 비례하지 않게 명령하는 지휘관은 드물다. 더 중요한 것은 정치적·사법 적 명령 또한 그러한 폭력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테러와 의 전쟁 시대가 되면서 변화되었다. 역설적인 상황은 인권옹호자들에게도 나타났다. 인권활동가들이 자국의 사회와 정치체제가 가진 다양한 수준의 역할을 인식하고 있는 경우, 그리고 그들이 시민 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에 대항하면서 동시에 인도주의적 근거로 정당화 하려는 ‘개입’에 대항해야 하는 경우 그 어려움은 훨씬 복합적이다. 아시아 내 모든 국가 들이 이에 해당되는데, 계속해서 인권을 침해하고 있는 것도 국가이고, 신자유주의 시대에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주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그 주권을 유지해야 하 는 것도 국가이기 때문이다. 이 역설의 그늘 속에서 국가가 대자본의 편에 서고 시민 대 기업의 대립관계가 적대적이고 갈등과 폭력이 발생하는 상황에 직면해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국가 는 점점 더 엘리트와 기업을 대리해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안보기관으로 축소되고 있다. 만약 우리가 민주주의의 의의를 조금이라도 지키길 원한다면 국가의 주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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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주권을 구분 지을 필요가 있다. 시장이 시민 의지에 의한 정치사회적 결정으 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압도적 권한을 갖는 사회기관으로 격상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국가가 안보를 유지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축소했을 뿐만 아니라, 달라진 전 지 구적 정치·사법적 질서라는 현실에서 강압적인 변화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4. 아시아 지역 대테러법의 공통점 아시아 몇몇 국가들은 테러를 겨냥한 법과 정책을 논의 중이거나 이미 통과시켰 다. 이러한 법과 정책은 서방 국가들이 이들 국가의 군대와 법 집행기관들에게 훈 련이나 고문장비, 총기류를 공급하는 것과 같은 ‘안보 지원’을 통해 뒷받침되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특정한 법과 정책을 논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이러한 법과 정책들이 국제 경제, 정치 및 사법 질서의 변화라는 맥락 속에서 분석되고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하고자 한다. 패러다임의 전환과 국가의 역 할의 변화로 인해 대테러 전략과 정책이 비단 정부뿐만 아니라 지역적, 국제적 기 관과 단체들의 주요 임무가 되었다는 것 또한 명백하다. 테러와의 전쟁 패러다임 이 지구화됨에 따라 대테러법이나 정책과 같은 안보증후군이 국내는 물론이고 국 제적으로도 문제가 되고 있다. 대테러법과 정책은 국가 간의 국경을 넘나들고, 국내와 지역 그리고 국제법 간 의 경계를 넘나들 뿐만 아니라 행정, 헌법, 형사, 이민, 군사법, 전쟁법 등과 같은 전통적 학문의 경계 또한 넘나든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법과 정책은 모든 아시 아 국가들의 민주적 문화를 깨뜨리고, 심지어 가장 강고하다는 유럽의 민주주의 하에서도 대테러법 제정이라는 강박적이고 불균형한 접근으로 인해 시민의 자유가 위협받고 있다. 아시아 인권활동가들은 각국 정부에게 인권운동가, 인권옹호자, 변호사, 판사, 언론인 등이 강력히 비판하고 있는 대테러법과 정책을 재검토하도록 요구하고 있 다. 집행 중에 있는 대테러법은 표현과 사상, 이동, 결사 등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 다. 어떤 이들은 대테러법들이 너무 광범위하고 애매모호하기 때문에 자유권 수호 자, 자기결정권 운동가, 종교단체, 테러리스트 용의자, 그리고 정치적 반대자나 인 권옹호자, 노조활동가 등과 법을 준수하고 있는 시민들에게도 적용되고 있으며, 무 엇보다도 무죄추정의 원칙과 공정한 심판을 받을 권리를 포함한 국제인권기준을 훼손시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이러한 법들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공통으로 갖 고 있는 근본적인 자유권들을 대단히 가혹한 방식으로 공격하고 있다. 이러한 법들은 통상 국가가 일반 법률을 건너뛸 수 있도록 허용하는 구체적인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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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조항들을 포함한다. 또한 잠재적으로 종교단체와 특정 정치단체를 목표로 삼 을 수도 있다. 아시아 각국에서 공표된 혹은 제안된 법 모두 ‘테러’의 정의를 용납 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고, 부정확하며, 통제하기 어렵게 규정하고 있다. 특히 어떤 행위가 정치적, 종교적 혹은 이념적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대테러법은 그 행위를 테러로 규정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대테러법에 포함될 수 있는 조치들 중에는 태국과 파키스탄의 재판 없는 구금, 방글라데시와 인도의 통제 명령(control orders), 필리핀, 인도네시아,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서 볼 수 있는 영장 없는 수색, 그리고 신속하고 장기간에 걸친 구금과 같은 정상적인 형사 절차를 우회할 수 있는 조항 등이 해당된다. 남아시아 지역의 법에서 커다란 논쟁이 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첩보 정보가 사전 증거로 채택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용의자를 체포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제안 되거나 통과된 법률 중 다수가 테러 단체가 될 가능성이 있는 단체를 금지할 수 있도록 하는 권한을 정부에 부여하고 있다. 방글라데시처럼 어떤 조항들은 테러 단체와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자들에게 사형 선고4)를 허용하고, 용의자를 장기간 기소 없이 혹은 변호사 접근이 차단된 상태에서 구금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아시아 각국 정부와 공적 자금으로 운영되는 안보기관들은 민주적 논쟁에 참여 하는 것과 ‘테러리즘’ 혹은 폭력 선동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난받고 있다. 대테러법은 이러한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법적 근거를 제공한다. 논쟁과 저항은 민주주의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발전하게 하는 필수 요소이다. 대테 러법이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라는 것은 명백하며, 아시아인들에게 중요한 시민 정치적 권리와 개인의 자유를 지속적으로 훼손할 것이다. 대테러법의 주된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모든 법률은 그 어떤 공적인 협의나 참여 없이 공표되었다. 종교나 정치적 신념 을 이유로 개개인이 표적이 되고 기소될 수 있다. 테러에 대한 정의가 상당히 광 범위하고 애매모호하여 남용될 가능성이 크다. 정부는 모든 이들을 체포할 수 있 으며, 심지어는 헌법적 권리를 행사하는 합법적 시위까지도 국가에 대한 위협으로, 따라서 테러로 간주할 수 있다. 이 법률에 따른 범죄는 보석이 허가되지 않는다. 자기방어를 위한 국제인도법 상의 권리를 훼손한다. 실제 어떤 폭력행위를 저질 렀을 때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 행동을 테러 범죄로 결론짓는다. 현존하는 법령에 따라 이미 상당한 권한을 갖고 있는 법 집행기관에게 단순 혐의에 대해서도 영장 없는 체포나 예방 차원의 구금을 허용하는 등의 더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한다. 개
4) 이것은 국제협약 및 조약을 명백히 위반한 것이며, 몇몇 아시아 국가들에서는 국내법 을 위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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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을 특정 기간 동안 구금할 수 있는 권한을 법 집행기관에 부여한다. 이 기간은 법원의 결정에 따라 연장될 수도 있다. 누구나 테러 활동을 재정적으로 혹은 다른 방식으로 지원한 혐의로 기소될 수 있다. 테러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 조직을 금 지할 수 있고, 금지된 조직을 지지하는 발언을 범죄시할 권한을 부여한다. 그러한 발언이 범죄 행위나 테러 행위를 직접적으로 선동했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중대한 요소들이 아시아에 영향을 미침에 따라, 문제제기가 필요하게 되 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시아에서는 불이익을 당하는 계층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지만, 이를 관리할 수 있는 법적, 정책적 틀과 제도적 장치가 그만큼 마련되지 못하고 있고, 그들과 그들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지원도 충분하지 못한 상황이다. 인도에서는 가혹한 군특별권한법(Armed Forces Special Powers Act of 1958) 이 이제 카슈미르와 북동부 지역의 주민들은 물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와 숲에 대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되 고 있다. 초법적 살인행위(encounter killings)도 마오주의 운동을 차단한다는 명목 하에 일상적인 일이 되어버렸다. 파키스탄에서는 서방의 무인항공기 폭격과 함께 실종된 사람들의 숫자가 매일같이 늘어나고 있다. 방글라데시 총리는 ‘남아시아 대테러 전담반’을 이미 제안한 바 있다. 2009년 대테러법 도입 이후 언론인, 인권옹호자, 정치 활동가들이 이 법에 의해 기소되고 있다. 이 조잡한 법에 의거해 테러를 방지한다는 미명 하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구금되어 고문을 당하고 기소되고 있다. 태국 정부는 빠따니 지역에서 자결권 운 동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군대를 배치하고, 국가의 지원 하에 살인과 고문, 구금을 자행하여 전 지역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용감하게 활동한 몇몇 인권운동가들 역시 실종과 같은 위협에 직면하였다. 필리핀 북쪽 좌파 게릴라 운동과 남쪽 자결권 운동이 똑같이 국가의 탄압에 직 면해 있다. 자결권 획득을 목표로 하는 남부 모로(Southern Moro) 운동은 미군의 지원을 받은 아로요 정부에 의해 무자비하게 탄압받았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는 점령과 저항의 사례 중 일부에 불과할 뿐이다.
5. 맺음말 이 글은 아시아 지역의 대테러법에 대해 철저히 고찰하면서 이 법들을 분석하고 이해하면서 반드시 유념해야 할 개념적 문제 몇 가지를 강조하였다. 대테러법에 의한 개인의 법적 지위의 변화와 전환은 아시아에서 시민권, 인권이 훼손되고 있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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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정도를 이해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문제이다. 자신들의 잔인하고 잔혹한 행위를 정당화하고자 대테러리즘 담론과 법을 이용하려는 모든 가능성과 충동에 대항해, 그 현실을 해체시키고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 법인격체를 해체시키고 인간을‘벌 거벗은 생명’으로 격하시키고 있는 이 질서에 대응하는 것도 민주주의를 위한 중 요한 과제이다. 그것의 가능성과 한계는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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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테러리즘과 인권에 대한 영향
임파셜 인도네시아 인권 모니터(Imparsial, 인도네시아) 인권감시팀
테러리즘은 우리가 맞서 싸워 막아내야 할 적이다. 그러나 테러에 맞선 싸움이 또 다른 테러리즘, 권력의 남용, 안보를 핑계로 한 민권에 대한 제약으로 이어져서 는 안 된다. 9.11 테러의 비극이 벌어진 지 10년이 지난 지금, 많은 국가에서 테러리즘에 대 한 공포가 널리 확산된 가운데 인권 원칙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안보를 위해 대중이 인권침해를 기꺼이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책결정자들이 늘어나 고 있다. 테러리즘은 분명 인권에 대한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고 테러행위로부터 대중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나, 실제로는 많은 국가에서 테러리즘에 대한 대응이 인권유린과 법치훼손으로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현대 테러리즘에 대한 대응을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테러와의 싸움에서 ‘안보(security)’와 ‘자유(liberty)’ 사이의 균형이 가지는 중요성에 대한 고전적 논 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뉴욕의 상황이 테러와의 전쟁으로 이어지며 많은 국가 에서 인권 관련 문제를 야기했던 것은 지금도 우리의 뇌리에 생생히 남아있다. 자 유에 대한 제약, 다중적 정밀조사, 자의적 체포, 고문 등 대중을 상대로 한 다양한 형태의 차별이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다. 많은 국가에서 테러와의 전쟁은 두 가지 형태로 수렴되고 있다. 하나는 불가침한 인권과 자유에 대한 무지와 훼손이고, 다 른 하나는 법 집행에 대한 군부 권위의 합리화이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해 독자들이 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본 논문에서는 필자의 나라인 인도네시아의 사례를 다수 제시하고자 한다. 테러행위가 발생할 때마다 국가는 항상 자국 내 안보기관의 역할과 개입을 조정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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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강화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기 마련이다. 이 같은 논리는 1차 발리 폭탄테러 (2002년), 2차 발리 폭탄테러(2005년), 메리어트 호텔 폭탄테러, 호주 대사관 폭 탄테러(2004년) 이후 널리 확산되었다. 메가 쿠닝안(Mega Kuningan) 비즈니스 지구에 대한 테러 공격은 인도네시아 정부가 대(對)테러전과 관련한 인도네시아 군부(TNI)의 역할과 개입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이 같은 점은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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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5일TNI창립기념일에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대통령이 발표한 훈시에도 잘 드러 나 있다. 대통령 훈시 발표 후에는 테러리스트로 의심되는 인물을 체포·구금·취조 할 권한을 군부와 정보기관에 부여하는 정보기관 및 군부 관련 법안에 대한 심의 가 이루어졌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테러리스트 네트워크가 실존하며 소규모 조직으로 분화하고 있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다른 국가에서는 국가 자체가 테 러리스트로 행동하며 야당과 반대세력을 숙청하기 위해 테러조직을 지원하고, 결 국에는 정부기관이 나서서 자국 국민에 대한 압제를 자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버마와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야말로 국가 테러리 즘, 그리고 국가의 후원을 받는 테러리즘의 사례라고 하겠다. 본 논문은 지난 2009년 인도네시아어(Bahasa Indonesia)로 작성하고 2011년 개정된 임파르시알 보고서 <인권에 대한 인도네시아 내 대테러리즘의 영향 (Impact of Counter-Terrorism in Indonesia towards Human Rights)>의 발췌본 이다. 여기에서는 무장화, 폭력을 유발하는 안보 접근법, 그리고 이러한 접근법이 공포를 조장하는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초점을 두고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1. 테러리즘의 정의 테러와 테러리즘은 폭력의 세계사에서 결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테러리즘의 역사는 크세노폰(Xenophon)이 적국 국민에 대한 심리전의 효과에 대해 논했던 고 대 그리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 시대에는 정치적 권력투쟁으로 말미암아 티베리우스(Tiberius) 황제와 칼리굴라(Caligula) 황제가 정적을 약화시킬 목적으 로 유배, 고문, 살인 등의 테러행위를 합법화하기도 했다.1) 폭력의 정치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의 테러리즘은 표현하고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테러리즘에 대한 학술적 분석은 언제나 테러리즘에 대한 보편적 정의를 찾 1) S. Mohindra 소장(퇴역), A Historical Heritage, Terrorist Games Nations Play, New Delhi: Pvt Ltd, 1993. Adjie S. MSC, Sinar Harapan, Jakarta, 200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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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과정에서 난관에 봉착하기 마련이다. 오늘날까지도 테러리즘에 대한 보편적 정 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테러리즘의 양상이 매번 변화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국가가 테러리즘을 수행하기도 하고, 때로는 비(非)국가 행위자, 혹은 국가와 비(非)국가 행위자 모두가 테러리즘의 주체가 된다. T.P. 손톤(T.P. Thornton)은 1964년에 발표한 <정치적 선동 무기로서의 테러 (Terror as a Weapon of Political Agitation)>에서 비정상적 수단을 통해 정치행 동에 영향을 미치고자 고안되었으며 폭력의 사용 또는 폭력에 대한 위협을 수반하 는 상징적 행위로 테러를 정의한 바 있다. 이러한 테러는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권력자들이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한 극단적 수단으로 자행 하는 테러를 지칭하는 ‘강압 테러(enforcement terror)’이고, 둘째는 권력을 손에 넣고자 하는 이들이 기존 권력자들이나 국민으로부터 특정한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자 저지르는 테러행위를 일컫는 ‘소요성 테러(agitation terror)’이다.2) 테러의 목적 및 목표와 관련해 윌킨슨(Wilkinson)은 테러리즘을 다음의 네 가지 로 분류한다. 첫째는 부수적 테러리즘(epiphenomenal terrorism, 아래로부터의 테 러리즘)으로, 구체적인 목적 없이 무작위로 이루어지며 대형 폭력투쟁에서 발생하 는 대규모 수평적 폭력의 부산물이다. 둘째는 혁명적 테러리즘(revolutionary terrorism, 아래로부터의 테러리즘)으로, 기존 제도에 대한 완전한 전복이나 혁명, 급진적 변화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집단현상(group phenomenon), 리더십 구조, 이데올로기 프로그램, 음모론, 준군사조직적 요소 등이 특징이다. 셋째는 준 혁명적 테러리즘(sub-revolutionary terrorism, 아래로부터의 테러리즘)으로, 정부 를 압박해 정책이나 법률을 변경하려는 정치적 동기, 경쟁집단을 상대로 한 정치 전(政治戰), 소규모 집단이나 개인이 특정 관료를 낙마시키려는 노력 등을 포괄한 다. 사전에 예측하기가 어려우며 정신병이나 범죄와 구분하기도 쉽지 않다. 넷째는 억압적 테러리즘(repressive terrorism, 위로부터의 테러리즘 또는 국가 테러리즘) 으로, 숙청을 통해 압제자의 마음에 들지 않는 (반대파) 인물 또는 집단을 억압하 는 것이 목적이다. 이러한 유형의 테러리즘은 대규모 테러로 이어지기 쉬우며, 테 러 기관과 비밀경찰, 고문기법, 대중 간 상호의심의 확산, 지도자에 의한 편집증의 발생 등이 특징이다.3)
2) Azyumardi Azra, “Jihad and Terrorism: Concept and Historical Development/ Jihad dan Terorisme : Konsep dan Perkembangan Historis”, Islamika Journal 4th edition April-June 1994. 3) Wilkinson, Paul, Terrorism and the Liberal State, London: The Macmillan Pres s Ltd, 1977, pp.56-57, 그리고 F. Budi Hardiman, “Terrorism: Paradigm and Definition/Terorisme: Paradigma dan Defenisi”, Terorisme: Defenisi, Aksidan Regulasi, Jakarta: Imparsial 2003 참조.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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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국가는 국가전복, 분리주의 등 국가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행위에 연루된 집단을 겨냥하는 수단으로 테러리즘의 정의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정의 를 활용해 친(親)민주 인권운동을 반(反)국가 테러리즘으로 낙인 찍고 있는 것이 다. 즉, 테러리즘의 정의는 국가와 국민간의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이러한 관계 뒤에는 정치, 종교, 사상 등 다양한 동기가 숨어있다. 요컨대 국가는 스스로의 권 위에 저항하는 것으로 보이는 집단이나 개인이라면 누구에게나 테러리즘이라는 꼬 리표를 붙일 수 있는 것이다. 미국 형법전 제 22권 38조 2656f(d)항에 적시된 미국 연방법에서는 ‘준 국가단 체나 비밀요원들이 정치적 동기를 가지고 사전에 계획하여 비전투상태에 있는 목 표물에 가하는 폭력’으로 테러리즘을 정의하고 있다. 대(對)테러전 정책을 수립하 는 과정에서 미국이 국제인도법의 용어를 차용했음이 분명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한편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테러리즘을 ‘정부나 일반시민 또는 그 일부를 위 협하거나 강제함으로써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개인이나 재 산에 대하여 가해지는, 외국의 세력과 관계를 갖거나 국경을 넘어 활동하는 집단 이나 개인에 의한 불법적인 무력·폭력행사’로 정의하고 있다. 미국 국방부는 테러리즘을 ‘정치, 종교, 이데올로기적 목적 달성을 위해 정부 혹은 사회에 대한 위압 혹은 협박의 수단으로 불법적인 폭력을 계산적으로 사용하거나 불법적인 폭력을 사용하겠다는 협박을 통해 공포를 조장하는 행위’로 정의한다. 이와 같은 정의는 테러리스트들이 정치적, 종교적, 사상적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 으로 폭력을 사용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국제적인 차원에서 살펴보면 제1차 세계대전 후 구성된 최초의 국제기구 중 하 나인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은 당시 상황에 따라 테러리즘을 ‘국가에 대항 하여 특정 인물이나 집단, 대중의 마음 속에 공포감을 조성할 의도 또는 계산으로 행하는 모든 범죄행위’로 정의했다. 국가를 희생양으로 보는 관점이 국제연맹의 이 같은 정의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데, 이는 당시 수많은 유럽 국가에서 독립을 위한 분리주의 운동이 팽배하던 상황 이 제1차 세계대전의 촉매로 작용했던 점에 기인한다. 지역적 수준에서 이와 다른 정의를 찾아볼 수 있다. 1998년 발표된 테러리즘 억 제에 대한 아랍 협약(Arab Convention on the Suppression of Terrorism)에서 아 랍 국가들은 테러리즘을 ‘동기나 목적을 불문하고 개인 또는 단체의 범죄적 계획 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며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거나, 사람들을 해하 여 공포를 조장하거나, 사람들의 목숨이나 자유, 안전을 위협하거나, 환경이나 공 공 내지 사유시설·재산을 훼손·점유·몰수하거나, 또는 국가자원에 위협을 가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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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행위 또는 폭력에 대한 위협’으로 정의했다. 위에서 언급한 정의는 특정 집단의 종교적 신념과 해석만이 테러의 주된 동기가 아님을 잘 보여준다. 개인적인 사유, 범죄적 사유, 민족국가주의, 정치적 사유 등 테러의 동기는 다양하다. 테러행위의 주체는 개인이 될 수도 있고, 집단이 될 수도 있으며, 또는 국가가 될 수도 있다. 테러리스트의 입장에서 테러의 희생자들은 궁 극적인 목표가 아니라 목적 달성을 위한 협박, 강압 또는 선전 전술을 펼치는 과 정에서 발생하는 부수적 피해에 해당한다. 테러리즘에 대한 다양한 정의에서 공통 적으로 나타나는 요소가 하나 있는데, 이는 바로 체계적인 테러행위의 활용을 통 한 공포감의 확산이다. 2000년대에 들어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테러리즘도 성장하고 있다. 현대기술의 발달로 테러의 수단도 갈수록 진화하고 있다. 탈냉전 시대의 현대 테러리즘에서는 국가보다 비국가 행위자가 보다 우세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오늘날 테러의 목적, 동기, 테러행위의 규모, 조직유형, 테러리즘의 목표는 매우 상이하다. 현대화와 세 계화의 영향으로 테러리즘의 특성이 보다 복잡해지고 있다. 기술이 진보하고 정보 의 흐름이 빨라짐에 따라 테러조직이 공격 결행에 활용할 수 있는 자원도 더욱 풍 부해졌다. 테러리즘은 불법 마약거래, 불법 총기거래, 돈세탁 등의 초국가적 조직 범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오늘날의 테러조직은 이제 고립된 환경에 존재하지 않고 광범위하지만 폐쇄적인 국제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든 정당화된 다고 생각하는 이들 조직의 단골메뉴는 자살폭탄테러이다. 테러조직이 채택하는 전략은 궁극적으로 개방적이고 직접적인 전선에서 규모가 보다 큰 적과 맞서 싸울 수 있는 테러조직의 역량(비대칭전)을 기초로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테러 조직의 공격 시점과 장소는 갈수록 예측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9.11 테러 이후 의 테러리즘은 모든 테러리스트를 소탕해야 한다는 반응으로 이어졌고, 심지어는 테러조직에 은신처를 제공하거나 테러리스트에 협력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정권을 전복시키겠다는 계획도 수립되고 있다. 테러리즘에 맞서 싸우는 국가들 사이에 협 력을 다지기 위해 수많은 국제 파트너십이 구성되었고, 이로 인해 안보보장과 자 유권 보장간의 균형에 대한 고전적 논의, 즉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게 되었다. 테러와의 전쟁은 세계 정치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세계 전역에 걸친 테러와의 전쟁은 세계평화의 장애물로 작용하는 것은 물론 새로운 권위주의 정권이 탄생하 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민주주의 국가들도 자유를 제약하는 법률을 제정함으로써 이 같은 추세에 편승했다. 보다 강화된 억압 수단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즉시 잡은 권위주의 정권의 경우에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이 같은 테러와의 싸움은 안보와 자유 사이의 균형을 깨뜨린다. 국가가 수호해야 할 가치 목록에서 자유는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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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우선순위가 아니다. 안보를 위해 자유에 일시적인 제약을 두거나, 심지어 는 국가의 간섭이 이루어지는 실정이다. 여러 국가에서 테러리즘에 대응하기 위해 ‘준 전체주의적(semi-totalitarian)’ 정책을 활용하고 있다. 정보수집 과정에 광범 위한 권한을 부여하고, 개인문서를 일상적으로 점검하며, 여행의 자유를 제한하고, 대중매체를 비롯한 공공 커뮤니케이션 수단에 제약을 가하며, 시민들의 개인적 영 역을 침해하고 심지어는 정적을 약화시키기 위한 규정이 도입되고 있다. 수많은 국가들이 테러리즘으로부터 대중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도입한 새로운 법률제도를 통해 국내정책을 변경하고 있다. 이들 국가는 과거의 억압적 수단 내 지 조직을 부활시키고 테러리스트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이들을 대상으 로 정치적인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과거 자유정치체제를 자랑하던 민주주의 국가 들도 자유를 제약하고 시민에 대한 다중적 정밀조사를 시행하는 한편 심지어는 자 국민에 대한 차별을 자행해 시민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권위주의 국가에서 민주 주의를 향해 힘겹게 나아가던 국가들은 과거의 억압적 방식으로 회귀하고 있고 이 로 인해 민주주의가 설 자리가 줄어들고 있다. 변화에 저항하거나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구시대의 정권들은 반대세력을 제압할 수 있는 기회를 재빨리 잡았다. 일례로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는 테러리즘을 빌미 로 국내보안법(ISA)을 신속히 제정하였다. 반대파를 억압할 목적으로 오랫동안 활 용되던 가혹한 법률이 이제는 테러와의 싸움에 이용되고 있다. 아프리카 각국에서 미주 지역에 이르기까지 유사한 추세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같은 새로운 국제정세는 소위 ‘테러조직’을 소탕할 힘을 유지하려는 파키스탄과 같은 권위주의 정권에게는 축복이나 다름없다. 대(對)테러 전략은 많은 정부들이 민권의 보호 및 실현보다 국가안보를 우위에 놓고 있음을 보여준다. 테러리즘에 연루된 이들은 적절한 법 집행 절차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보다 긴 수감기간을 감내하는 것은 물론 무죄추정 권리도 침해 당 하고 있다. 국제자유감시그룹(International Civil Liberties Monitoring Group)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소위 ‘테러와의 전쟁(war against terrorism)’으로 인해 주로 아랍 및 무슬림 공동체가 위협대상에 포함되고 이들의 기본권은 약화되고 있 다. 정치적 차별로 인해 망명을 원하는 이들 지역 출신 이민자들은 여우 굴에서 도망쳐 나와 호랑이 굴로 향하는 셈이다.4) 이 같은 상황은 인종차별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제가 된다. 국가기관들은 인종별
4) International Civil Liberties Monitoring Group(국제자유감시그룹) 보고서, Anti-T errorism and the Security Agenda: Impacts on Rights Freedoms and Democrac y. Ottawa, 2004년 2월 17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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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자료를 이용해 인종차별적 법안 및 이민규정을 도입하고 있다. 이는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 결사의 자유는 물론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권인 자결권에도 부 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캐나다의 대테러리스트법(UU C-36), 미국의 애국법(Patriot Act), 영국의 대테 러안보법(ASTA)은 2001년 9.11 테러 직후에 제정된 법률이다. 대테러리스트법은 예방적 체포에 대한 포괄적 권한을 경찰에 부여하며, 이에 따라 소수민족 집단에 ‘협력(collaboration)’을 강요하는 등 권한을 남용할 가능성이 있다. 이 법에서는 난민이민보호법(Refugee and Immigration Protection Law)에 따라 열리는 ‘비밀 재판(secret trial)’에서 사용되는 ‘비밀증거(secret evidence)’를 합법으로 인정한 다. 또한 내각의 각료들이 일반적 ‘비(非)시민(non-citizen)’에 대한 ‘안전증명서 (security certificate)’를 발급하고 이들을 추방할 수 있게 허용한다. 또한 캐나다 정부는 공공치안법(Public Security Law)을 통해 군사장비 전용 구역을 접근제한 구역으로 선포할 수 있는 권한을 자국군에 제공한다. 영국에서는 반(反)테러 법률의 도입으로 인해 경찰과 취약한 소수민족간의 관계 가 크게 악화되었다. 이들 소수민족 중에는 대테러안보법에서 ‘의심 공동체 (suspected communities)’ 명단에 올린 2백만 이슬람 인구도 포함되어 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영국에서는 대테러안보법 도입 후 흑인과 아시아인이 경찰검문을 받는 빈도가 8배나 높아졌으며, 다른 지역에서는 이 같은 경찰검문 비율이 27배 증가하기도 했다. 경찰범죄증거법이 적용되던 2003년에는 총 90만 건의 검문이 이루어졌고 이 중 13%가 체포로 이어졌다. 한편 대테러안보법이 도입된 현재는 검문 수가 15만 건이나 증가했지만 체포 비율은 2%에 불과하다.5) 영국에서는 런 던 항에서 개최된 무기전시회에 항의하고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를 진압하 는 과정에서도 대테러안보법이 사용된 바 있다. 전 세계의 민주주의 기관은 이처럼 공포스러운 환경 속에서 불안한 입장을 유지 하고 있다. 이처럼 오싹한 상황은 결국 사회 전반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으로 이어 지게 된다. 가장 큰 논쟁거리가 되었던 사안은 쿠바 관타나모(Guantanamo)만에 무기한 구금된 700명의 문제였다. 이곳에서는 군인들에게 형법적 지위를 부여하고 취조 과정에서 고문을 사용했으며, ‘특별인도조치(extraordinary rendition)’라는 이 름으로 고문을 정당화하고 있다. 더욱이 동남아시아의 반(反)테러 의제는 역내 민주주의 및 인권의 근간을 뒤흔 들고 있다. 테러리스트로 의심되는 사람들에 대한 자의적 체포가 이루어지고 있고, 구시대의 유물인 억압적 법률이 정당화되고 있으며, 인권침해와 반대파 단체에 대 한 형사법적 제재가 자행되고 있다. 동남아시아에서 느리고 힘겹게 진행된 민주화 5) 앞의 글.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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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은 캐나다와 같은 자유민주국가에서 보인 ‘모범’으로 인해 타격을 입었다. 그 결과 동남아시아 인권운동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말레이시아의 사례는 40년의 역사를 가진 ‘가혹한(draconian)’정치규제인 국내보 안법(ISA)이 테러와의 전쟁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국내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된 사람들은 당국이 ‘말레이시아 또는 그 일부의 안보, 말레이시아 내 필수적 서비스의 유지, 또는 말레이시아의 경제에 해로운’6) 행동을 저지르는 것으로 간주된 이들이다. 이들은 변호인이나 가족과의 접견권도 없이 60일간 경찰 유치장에 구금되며, 60일간의 구금이 끝나면 내무부 장관의 지침에 따라 교도소로 이송된다. 교도소에서도 이들은 체포사실 및 혐의의 적법성에 대해 제소를 하거나 의문을 제기할 기회를 박탈당한다. 국내보안법 제73조는 누군가가 국가안보를 위 협한다고 ‘판단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경우, 또는 해당 인물의 체포가 말레이시아 국가안보에 위협에 되는 행동을 방지하기 위한 것임을 내무부 장관이 ‘납득’할 경 우 경찰이 해당 인물을 수감시키는 것이 허용된다고 적시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헌법 제5조는 명확한 이유만 있다면 경찰이 체포를 진행하는 데 충분하다고 밝히 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국제법에서는 체포사유와 혐의를 당사자에게 적시하는 경우에만 체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세계인권선언은 ‘어느 누구도 자의적으로 체포 및 구금되지 아니한다’는 내용을 명문화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시민권 및 정치적 권리에 대한 국제규약 역시 ‘체 포를 당하는 모든 사람은 체포 시점에 자신의 체포사유를 통보 받아야 하며 자신 에 대한 혐의를 신속하게 통보 받아야 한다’고 분명히 규정하고 있다. 한편 국내안보법 위반 혐의로 체포된 이들은 수감 기간에 발생하는 물리적·심리 적 강압 등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를 박탈당한다.7) 이는 형법상의 혐의를 판단하 는 과정에서 모든 사람이 ‘자신을 변호할 준비를 하고 자신이 선택한 변호인과 연
6) Section 73 ISA : (1) 경찰은 다음과 같은 사유로 모든 시민을 긴급 체포하여 검거할 권한이 있다. (a) 8조에서 언급되는 사유 중 해당 사항이 있을 때. (b) 말레이시아 또 는 그 일부의 안보, 말레이시아 내 필수적 서비스의 유지, 또는 말레이시아의 경제에 해로운 행동을 저질렀거나, 저지를 확률이 높은 것으로 판단되는 사람. (2) 경찰은 신 분을 밝히지 않거나 있는 위치에서 무엇을 하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않거나 말레이시 아 또는 그 일부의 안보, 말레이시아 내 필수적 서비스의 유지, 또는 말레이시아의 경 제에 해로운 행동을 할 것으로 판단되면 긴급 체포하여 검거할 권한이 있다. (3) 이 조항에 해당되는 사람은 최대 60 일 동안 체포 영장 없이 구금될 수 있다. Edy Prasetyono, Internal Security Act (ISA): Reflection on Malaysia’s Experie nce/ Internal Security Act (ISA) : Berkaca dari Pengalaman Malaysia, 2005, J akarta, unpublished paper 참조. 7) 앞의 글, p.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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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을 취하는 데 필요한 적절한 시간과 수단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적시한 시민권 및 정치적 권리에 대한 국제규약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행위이다. 고문 및 그 밖의 잔혹하고 비인도적인, 또는 굴욕적인 대우나 처벌의 방지에 관한 협약(CAT)에서 도 이와 유사한 입장을 찾아볼 수 있다. 많은 국가에서 테러와의 전쟁은 두 가지 형태로 수렴하고 있다. 하나는 불가침 한 인권과 자유에 대한 무지와 훼손이고, 다른 하나는 법 집행에 대한 군부 권위 의 합리화이다. 하니 질라니(Hani Jilani)가 지적한 대로,8) 현재 민주주의 국가와 권위주의 국가 모두 자국 국민들에게 자유와 안보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는 실정이다.
2. 무장화와 폭력의 문화 테러와의 싸움에서 전 세계 거의 모든 국가들이 자국의 군사력을 활용하고 있 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정부는 테러리즘을 전 세계적 무장봉기가 아닌 법 집행 문 제로 인식한다. 따라서 인도네시아는 지금도 테러리즘에 맞서는 주체로 경찰력을 주로 활용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군부는 인도네시아 군법 제34/2004호에 준하여 평시 군사활동을 수 행하고 있으며, 인도네시아 법 제2/2002호에 따라 법 집행은 인도네시아 경찰이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두 법 모두 테러와의 싸움에서 군부와 경찰의 권한을 어떻게 구분할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적시하지 않고 있으며, 이로 인해 작전조율 및 전술 측면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실정이다.
반테러 특수파견대, Antara 뉴스
8) Hina Jilani는 전 인권옹호자의 상황에 관한 유엔 초대 대표이다.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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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조율 측면에서는 양 조직간에 중복되는 기능 및 업무로 인해 효율이 저하되 고 있다. 전장에 배치된 정보요원은 많으나 상호간에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센트럴 자바 지역경찰(Central Java Regional Police) 산하 반(反)테러 88호 특수파견대(Anti Terror 88 Special Detachment)의 어느 대원은 이러한 커뮤 니케이션 부재로 인해 전장에서 실수가 발생하고 있음을 인정한 바 있다. 짐바란 (Jimbaran) 및 쿠타(Kuta) 폭탄테러 용의자가 도주에 성공한 것도 바로 이러한 문 제점 때문이었다. 또한 이는 정보기관끼리 경쟁관계를 만들기도 한다.9) 전술 측면 에서는 이 같은 문제점으로 인해 군부가 테러리스트 검거와 같은 자신들의 영역을 넘어선 문제에서 권한을 남용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10) 또한 2006년 10월 5일 인도네시아 군부 창립기념일 당시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 쟁에서 군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연설을 한 이후 영토사령부가 더욱 강화되었으며, 특히 최하위 직급인 사병급 지역 법률시행관(Babinsa/ bintara Pembina desa) 역 할이 부활되었다. 2011년 현재 인도네시아 정부와 의회는 정보기관, 국가안보, 테러리즘 법 개정 관련 법안을 심사하고 있는 중이다. 이들 법안은 군부와 정보기관이 테러와의 전 쟁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이는 테러리즘 법은 물론 인도네시아 헌법과 형법·절차법, 그리고 국토사령부 개혁의제의 중요성(군법 34/2004호 제11 조)11)을 시사하는 군법의 정신에도 위배된다. 군 구조는 안보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분쟁이 잦은 지역, 국경지역, 외곽 도서지 역 안보를 우선시하는 등 지리적 상황과 국방전략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인도네 시아 군법은 군 구조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남용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모 든 조직구조로부터 독립되어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정부 행정구조와 도 연결되어 있어서는 안된다. 테러와의 전쟁은 인도네시아의 군부개혁 과정에서도 문제를 발생시켰는데, 특히 군법 34/2004호 제11호에 의거해 국토사령부에 대한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대신 국토사령부를 부활시켰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국내치안에 대해 군부의 개입이 이 9) Tempo Daily, 2005년 10월 3일. 10) 범행이 해군의 영역인 해양에서 벌어졌다는 이유로 해군이 현행범을 잡지는 않는다. 상세한 내용은 Imparsial Human Rights Report, Selective Democracy on Human Rights/Demokrasi yang Selektif terhadap Penegakan HAM, Jakarta: Imparsia l, 2005 참조. 11) 군법 34/2004호 제11조. (a) 군사태세는 군사적, 무장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국가방어 의 일부분이다. (b) 위에서 언급되는 군사태세는 국가 정책에 따라 구축되고 준비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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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어지면서 인권보호에도 문제가 생겼다. 테러와의 전쟁 과정에서 국토사령부가 부활한 것은 차후에 나타날 장기적 문제 를 고려하지 않는 정부의 반동적인 특성을 잘 보여준다. 반테러리즘에 있어 이러 한 정부의 즉각적이고 과도한 접근은 시민사회에 위협이 되었으며, 안보 행위자간 의 기능 및 역할 중복을 초래했다. 이는 정치영역에서 손을 떼는 대신 정치영역에 재진입하려는 군부에게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다.12)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에 군부를 개입시키기를 원할 경우 행동규범과 교전수칙 에 대한 상세한 규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군부의 업무범위, 역할, 직무를 명확하게 적시하고 기본원칙과 한계, 업무내용을 구체적으로 정의해야 한다. 또한 테러와의 전쟁은 민주주의와 법치의 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테러와의 전쟁은 군부가 아닌 경찰의 영역이어야 한다. 군부의 개입은 제한적이고 일시적이며 보조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이를 통해 권력의 남용과 폭력행 사 가능성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효과적인 대(對)테러 전략을 수립하려면 안보 행위자의 책무, 기능, 한계가 명확 해야 한다. 포괄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정작 위임(mandate)을 명확하게 하지 않으 면 어렵게 쟁취한 민주주의를 약화시킬 것이다.
3. 종교와 문화에 대한 영향 테러와의 싸움을 위해 인도네시아의 유스프 칼라(Jusuf Kalla) 전(前) 부통령은 발리 2차 폭탄테러가 발생한 직후인 2005년 9월에 한 가지 아이디어를 냈다. 바 로 폭력을 조장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이드 쿠투브(Sayyid Qutub), 무함마드 쿠 투브(Muhammad Qutub), 핫산 알 바나(Hasan Al-Banna) 등의 저서에 대해 출판 금지 조치를 내리는 것이었다. 이들의 저서는 폭탄테러가 발생하기 훨씬 전에 출 간되어 널리 판매되던 서적이었다. 이 같은 출판금지 조치는 정보를 습득하고 종 교에 대한 포괄적 견해를 형성할 대중의 권리를 침해하는 효과를 가져오는 것은 물론, 인도네시아 이슬람 공동체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심는 결과를 초래할 것 12) 하원 대표인 Agung Laksono, 국회 부대표 A.M Fatwa, 그리고 전 군부 최고책임자 Agus Widjojo (퇴역) 등이 이러한 발언을 한 바 있다. “Find Another Solution to Fight Terror: Territorial Command Revitalization Leads to Excessive Risk/Car i Solusi Lain untuk Atasi Teror: Menghidupkan Lagi Koter Perbesar Resiko E ksesif” Kompas. 2005년 10월 8일 참조.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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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국민협의회 의장인 히다야트 누르 와히드(Hidayat Nur Wahid)는 이러한 아 이디어에 반대하는 입장이며, 이들 서적의 주된 독자는 폭탄테러를 자행하는 이들 이 아닌 이슬람 학자들이라고 단언했다. 무함마디야(Muhammadiyah)의 전 지도자 였던 시아피 마리프(Syafi’i Ma’arif) 역시 유사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 이러한 출판금지 조치는 테러리즘의 증상에만 골몰해 정작 근본적 원인을 치유하지 못한 다고 밝힌 바 있다.13)
인도네시아 테러용의자, Antara 뉴스
‘강경파(hard line)’ 서적에 대한 출판금지 조치는 테러리즘에 대한 지나친 단순 화와 순진한 접근법을 잘 보여준다. 더욱이 이는 자유롭게 견해를 표명할 권리에 대한 불법적인 제약으로 이어질 수 있어 표현의 자유에도 부정적 영향을 준다. 일 반적으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의견의 다양성과 창의성,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지 혜가 사라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보다 많은 서적을 세상에 내놓아 현안에 대한 포 괄적 시각과 적절한 분석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출판금지 조치는 획일적 사 고와 단일한 해석, 그리고 유리한 것으로 판단되는 시각을 강요하는 상황을 만들 뿐이다.14) 또한 유스프 칼라 전 부통령은 인도네시아 전역의 이슬람계 학교에서 지문정보를 수집하자는 제안을 내놓은 바 있다. 수많은 성직자들과 나들라툴 울라마(NU)와 무 함마디야 등 대형 종교단체 지도자들이 이러한 제안에 대한 거부의사를 밝혔다.15)
13) http://www.detiknews.com/read/2005/11/24/150112/485598/10/ 14) http://www.lampungpost.com/cetak/berita.php?id=2005112101205453 15) http://www.tempointeraktif.com/hg/nasional/2005/12/11/brk,20051211-70450,i d. html ; http://tempo.co.id/hg/nasional/2005/12/13/brk,20051213-70548,id.ht 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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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일정한 패턴이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폭탄테러가 발생한 다 음에는 언제나 과도한 감시를 수행하겠다는 정부의 계획이 뒤를 잇는다. 발리 2차 폭탄테러가 발생한 후 유스프 칼라 부통령은 문제서적의 출판을 금지하고 이슬람 계 학교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겠다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자카르타(Jakarta) 소 재 J.W. 메리어트(J.W. Marriott) 호텔과 리츠칼튼(Ritz-Carlton) 호텔에 대한 폭 탄테러가 발생한 다음에는 라마단 금식기간 동안 종교시설 및 학교에서 이루어지 는 종교적 가르침의 내용을 감시하겠다는 계획이 등장했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경찰 홍보부장인 나난 수카르나(Nanan Sukarna) 경무관이었다.16) 사실 테러와의 싸움에서 일정 정도의 감시는 필요악이다. 그러나 지나친 감시는 민주주의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이 같은 감시는 과거 수하르토(Soeharto) 정권이 묻지마 식 조사를 통해 시민사회의 비판적 목소리를 억압했던 상처를 상기시키기 마련이다. 이에 따라 이러한 아이디어는 종교단체, 의 회 정치인, NGO에서 학자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반대에 직면했다. 인도네시아 국가인권위원회의 이프달 카심(Ifdal Kasim) 위원장은 종교적 가르 침에 대한 감시가 인권침해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자 경찰청장은 그러한 감시활 동은 경찰의 업무범위에 포함되지 않으며 종교부(Department of Religious Affairs) 소관사항이라고 해명했다. 경찰뿐만 아니라 군부에서도 과도한 대응책을 내놓았다. 중부 자바지역에서는 디포네고로(Diponegoro) 제4군 국토사령부 사령관인 하리야디 수탄토(Hariyadi Soetanto) 소장이 경계태세 강화를 통해 의심인물 체포는 물론 사살명령도 증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수탄토가 2009년 8월 4일 중부 자바 주지사 비비트 왈루 요(Bibit Waluyo)와 중부 자바 지역 수석경무관 알렉스 밤방 리아트모조(Alex Bambang Riatmojo)와 공동으로 테러리스트 네트워크 확장에 관한 간담회를 열고, 중부 자바 각 도시의 마을 지도자, 사병급 법률시행관(Aparat Badan Pembina Desa/ Babinsa), 경찰서장(Kepala Kepolisian Resor/ Kapolres)으로 구성된 참석 자 2,051명 앞에서 했던 말이다.17) 정부나 정보기관 같은 조직의 상명하달식 위계구조 하에서 이와 같은 발언은 지 침 내지 명령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이를 실행하는 현장조직이 권한을 남용할
16) http://www.sabili.co.id/index.php?option=com_content&view=article&id=494:po lisi-akan-awasidakwah&catid=82:inkit&Itemid=199; 17) http://www.surya.co.id/2009/08/05/, http://www.kompas.com/read/xml/2009/ 08/04/15232774/, http://cetak.kompas.com/read/xml/2009/08/05/1133059/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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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지가 있다.
마치 자신들 손에 정의가 있는 양 하는 것처럼 대중들에게 비춰질
수 있다. 테러리즘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수많은 무고한 희생자를 양산하며, 이들 중에는 민간인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직접적인 희생자로는 공공장소에서 발생한 폭탄테러로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람들이며, 간접적인 희생자로는 이러한 폭탄테 러로 큰 타격을 입은 관광산업 종사자 등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포함된다. 쇼핑몰, 호텔 등 공공장소에서 공포와 불안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결과 대중은 편집증적 증세를 보이고 있으며, 인쇄매체 및 온라인 매체에서도 테러리스 트에 대한 정형화된 이미지를 강화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사람들은 스스로의 손으로 법을 집행하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 다. 말랑 시(Malang City) 부미아유(Bumiayu) 지역공동체에서 어느 부부는 혼인 사실과 이사를 확인하는 증명서를 제출하라는 요구에 비협조적이고 비교적 저항하 는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로 새로 이사한 집에서 강제로 퇴거 당했다. 이들 부부의 일상생활이 이웃들의 눈에 특이하게 비쳤기 때문에 두 사람은 테러리스트라는 의 심을 받아 새 집을 떠나야만 했다. 이들 이웃주민이 이러한 행동을 보인 것은 바로 얼마 전 2009년 6월에 말랑시 워노코요(Wonokoyo) 지역공동체에 거주하고 있던 헨드라완(Hendrawan)이 지난 2003년 싱가포르로 도주한 자마 이슬라미야(Jamaah Islamiyah) 테러분자들과의 연계되어 있다며 반(反)테러 88호 특수파견대에 의해 체포된 상황이었기 때문이 다.18) 테러리스트에 대한 정형화된 이미지가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나머지, 수 염이 길고 기다란 옷을 입었으며 바지 끝단을 발목 위로 접어 올린 사람들은 대중 으로부터 의심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웨스트 자바(West Java) 케둥수쿠(Kedungsuku) 마을에 거주하는 DD, 중부 자바 데마크(Demak)에 거주하는 SD, 중부 자바 반유마스(Banyumas)에 거주하는 AD도 비슷한 일을 겪 었다. 불안감에 사로잡힌 이웃 주민들이 이들을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취조와 소지 품 검사 끝에 이들 세 사람은 성스러운 무덤을 순례하던 중이었음이 밝혀졌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중부 자바 반유마스 주민들은 이들을 마을에서 내쫓았다.19) 보고르(Bogor)에서는 테러리스트라는 의심을 산 사람들이 살고 있던 집 2채를
18) http://www.detiknews.com/read/2009/07/26/115011/1171588/10/ 19) http://nusantara.kompas.com/read/xml/2009/08/14/15073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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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주민들이 불태워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집주인이었던 쇼리힌(Sholihin)은 이웃들에게 잡혀 구타를 당했고, 그의 집에 살던 친구 10명은 스스로의 안전을 위 해 급하게 달아나야만 했다.20) 이 같은 사건이 발생한 이유는 사람들이 집을 드나 드는 모습을 이웃들이 목격했고 이들의 종교의식이 일반적이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웃 주민들은 이들이 인근 지역공동체의 우두머리에게 거주지를 보고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차단하려면 테러와의 싸움에서 대중의 참여가 매우 중요하다. 대중이 경찰, 변호사, 심지어 판사의 역할을 참칭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더욱 심각 해진다. 무정부상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던 과거 사례에 비추어보면 이러한 점 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실제로 1965년 테러 이후 무정부상태가 심화되면서 수 없이 많은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한 적이 있다. 2009년 7월 17일 J.W. 메리어트 호텔과 리츠칼튼 호텔에서 발생한 폭탄테러 이 후로 새로운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테러 용의자로 추정되는 인물들의 이웃이 이 들의 묘지 안장을 거부했는데, 이는 마을 전체가 테러리스트의 소굴이라는 낙인이 찍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일각에서는 이 같은 거부를 테러리스트에 대한 사회적 제재로 보고 있다.21) 2009년 8월 8일 자티아시 베카시(Jatiasih Bekasi)에 대한 88호 특수파견대의 공습 과정에서 사살된 아이르 세티아완(Air Setiawan)과 에코 조코 사르요노(Eko Joko Sarjono, Peyang)의 시신을 매장할 시점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극심해졌다. 사겐(Sagen) 구에 위치한 칼리요소 캄퐁(Kaliyoso Kampong) 구역 주민들은 주민회의를 거쳐 이들의 시신을 마을에 매장하기로 합의했다.22) 이브로힘(Ibrohim)은 자티아시 공습이 있던 날 중부 자바에서 실행된 테망궁 (Temanggung) 공습에서 목숨을 잃었다. 웨스트 자바 쿠닝안(Kuningan)구에 위치 한 삼포라(Sampora) 마을의 주민들은 이브로힘의 시신을 마을에 매장하기를 거부 했다. 이들은 이브로힘을 어쩌다 마을에 흘러 들어와 마을의 명예를 더럽힌 이방 인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이브로힘의 시신은 가족이 참석하지 않은 상황에서 자 카르타 동부의 한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23)
20) http://nasional.vivanews.com/news/read/84449-pemilik_rumah_diduga_anut_al iran_sesat 21) http://www.inilah.com/berita/politik/2009/09/25/159610/ 22) http://regional.kompas.com/read/xml/2009/08/13/13232426/ 23) http://metrotvnews.com/index.php/metromain/news/2009/08/12/2013/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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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용의자로 지목되어 반테러특수파견대에 의해 총살당한 사람의 유가족들, Antara 뉴스
4. 결론 인도네시아의 경험은 테러리즘의 문제가 군사화와 안보적 접근을 통해 스스로의 권력과 권위를 강화하려는 정부에 의해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우 리가 속한 사회와 문화를 우호적이고 개방된 사회에서 급진적이고 폭력을 조장하 며 분노로 가득한 사회로 변화시키고 있다. 다시 말하면, 시민사회를 약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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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戰場)이 된 아시아, 후퇴한 민주주의
아프가니스탄 대테러리즘의 과제
파잘 가니 카카르(Fazal Ghani Kakar) 아프간 여성전문교육원(Afghan Women Professional Education Institute, 아프가니스탄)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근본주의자들의 현재 그리고 잠재적인 안보위협을 해 결하는 것이야 말로 미국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국가안보이다. 파키스탄에서 는 알카에다(Al Qaeda)를 비롯한 ‘성전주의 테러리스트’ 집단이 새로운 테러공격 을 계획하고 있으며, 이들은 미국 본토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인도, 유럽, 호 주, 중동지역 내에서 기회만 있으면 어디든 목표로 삼아 테러행위를 저지르려 한 다. 이들 테러리스트 집단의 활동반경이 확대된 것은 탈레반과 그 관련조직이 수 행하는 테러 및 무장세력 활동 덕분이다. 또한 탈레반은 오랜 보금자리였던 아프 가니스탄에서 다시금 세력화를 도모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은 알카에다와 파키스 탄 내 알카에다 은신처를 파괴, 해체, 분쇄하고 이들이 파키스탄이나 아프가니스탄 으로 복귀하지 못하게 막는 것을 핵심적 목표로 삼아야 한다. 파키스탄의 근본주의자들이 아프가니스탄의 안정을 깨뜨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추 고 있음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며, 반대로 아프가니스탄의 무장세력 봉기는 파키스 탄의 정정불안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과 파키스탄 내 우리의 동맹 에게 알카에다가 가하는 위협(근본주의자들의 핵분열물질 확보 가능성 등)은 너무 나 가까이에 실재하는 위협이기 때문이다. 파키스탄 내 이들 집단에 대해 보다 효 과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아프가니스탄의 불안한 정세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 이다.
1.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및 파키스탄 정책에 대한 논평 미국의 관점을 따르자면 다음과 같은 단계를 실행해야 바람직한 결과를 달성할 수 있다.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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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의 반군진압 전략은 국민의 안전, 효과적인 지역정부 구축 및 경제 개발 문제와 통합되어야 한다. 안정화 및 재건 활동에 필요한 시간과 공간을 제공 할 수 있도록 치안이 확보되어야 한다. 지역 주민을 포함하여 미국과 그 동맹국들 에 대한 추가 공격을 방지하기 위해 체계적인 대테러 커뮤니케이션 전략의 수립이 시급하다. 이러한 전략은 (미국 군대가 이 분야에서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 이 라크에서 성공적이었음이 입증되었으며,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미국과 동맹국의 이 미지 개선을 위해 최우선 과제로 다뤄야 한다. 통신, 라디오 등 전자매체를 포함한 전략적인 커뮤니케이션 계획은 적의 테러작전의 핵심이 되는 선전활동에 가장 잘 대응할 수 있는 옵션이 포함되어야 한다. • 아프가니스탄 내 민간인 지원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고 이를 최우선시 할 것 • 아프간 국가 안보군(군대와 경찰)을 확대할 것 • 아프간 정부에 관여하고 정부의 합법성을 강화할 것 • 화해할만한 반군들과 통합하고자 하는 아프간 정부의 노력을 지지할 것 • 역량 구축을 위해 노력함에 있어 지역과 지방 정부를 포함시킬 것 •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간의 협력을 강화할 것 • 공동의 위협과 관련하여 파키스탄 정부에 관여하고 집중할 것 • 파키스탄과의 경제 협력 분야를 모색할 것 • 파키스탄 정부의 역량을 강화시킬 것 •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위해 동맹국의 지원을 요청할 것 안타깝게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대테러리즘 정책은 미국의 목표를 중심으로 설 계된 정책이라 아프가니스탄의 자체적 관점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핵심목표의 달 성이 미국의 국가안보에 필수적이며, 무엇보다도 현실적이고 달성 가능한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중 주요 목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특히 파키스탄에 소재한 테러리스트 네트워크를 파괴 해 국제적 테러 공격을 계획하고 결행할 능력을 감소시킴 • 아프가니스탄에 보다 나은 능력과 책임성을 갖춘 효과적인 정부를 수립해 아프가니스탄 국민에게 봉사하고 국제적 지원이 제한적으로 이루어지더라 도 특히 국내안보 측면에서 궁극적으로 제 기능을 하도록 함 • 보다 자립성이 높은 아프가니스탄 보안군을 양성해 미국의 지원이 줄어든 상태에서도 무장봉기와 테러리즘에 맞선 싸움을 주도할 수 있도록 함 • 파키스탄 내 민간통제 강화, 입헌정부 안정성 증대, 경제 활성화 노력을 지 원해 파키스탄 국민들에게 기회를 제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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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국제사회의 적극적 지원을 유도하고 UN이 중요한 리더십 역할을 수행하도록 함
2. 아프가니스탄 국민의 관점 이 글에서 필자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역사까지 되짚어 설명하지는 않고자 한 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서방의 지원에 힘입은) 무자헤딘의 성전(聖戰), 공산주의의 패망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기 때문이다. 소련의 몰락 이후 아프 가니스탄은 파키스탄에서 돌아온 11개 지도자 집단, 이란에서 돌아온 11개 집단, 공산주의 정권에서 유래한 2개 주요 집단으로 나뉘었다. 이들 집단은 모두 권력을 잡기 위해, 또는 최소한 정부보다 큰 입지를 차지하기 위해 상호간에 치열한 경쟁 을 벌이고 있다. 내전으로 인해 아프가니스탄의 역사는 무고한 이들의 피로 물들여졌다. 권력을 향한 내부 투쟁 때문에 성공은 요원한 일이 되었다. 정부도 지도자도 없이 수많은 위협과 문제점 속에서 국민들은 저마다 뿔뿔이 분열되었고 당장의 생계를 걱정하 며 살아가던 이 땅, 아프가니스탄은 결국 글로벌 테러리즘의 소굴이 되었다.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있던 아프가니스탄은 아시아 전역에 엄청난 과제와 위 험을 안겼다. 아프가니스탄이 처한 딜레마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마약의 확산, 이 슬람 혐오주의와 군사적 침공, 근본주의, 인근국가의 이해관계로 인한 테러리즘의 급격한 성장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힘이 없고 정치인들은 더더욱 힘이 없으며,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은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과연 저녁에 집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지 장담 하기 어려울 정도로 위험한 상황에서 살고 있다. 이는 각종 폭발, 폭탄공격, 자살 테러, 납치, 절도 등 전반적 치안 불안정으로 인해 발생했다. 파키스탄 정부는 국 제사회와 인근 국가의 과도한 정치 개입, 그리고 30년간의 전쟁에서 파생된 무능 력한 정치인들로 인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최근 칸다하르에서 고위급 탈레반 사령관들이 무사히 탈출하는 데 성공한 탈옥 사건으로 인해 불안정성과 위험은 더욱 커졌고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대한 국민들 의 신뢰에도 큰 상처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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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프가니스탄 내 대테러리즘의 장애물 이 글에서 필자는 아프가니스탄 내 대테러리즘의 주요 장애물을 몇 가지로 간략 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 지난 10년간 국제사회가 아프가니스탄의 재건에 참여했지만 경제발전의 속도가 워낙 느렸던 탓에 수많은 청년들이 테러리스트 단체에 가입하거나 마약거래상 이나 관련 세력에 합류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2. 아프가니스탄은 전 인구의 99%가 이슬람교 신자로 구성된 국가이다. 이슬람교 온건파 집단에 대한 지원이 전무하고 정책결정 과정에서 이들의 견해가 반영되 지 않았던 탓에 종교간 적대감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었으며, 특히 무장세력이 이 같은 적대감의 확산을 주도했다. 3. 그 결과로서 나타난 대테러리즘은 외국군의 아프가니스탄 내 지속적 주둔에 대 한 설득력 있는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점이 아프가니스탄 국민 들이 테러리즘을 지지하고 테러리스트들의 은신처를 제공하는 데 촉매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ASP(American Security Project)의 버나드(Bernard) 박사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물론 아프가니스탄 내 외국군의 지속적 주둔이 갖는 대테 러리즘적 가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고 해서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Af-Pak)’ 문제에 대한 미국 정책에 대해 명료한 제언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 테러리즘의 논거를 제거할 경우에는 논쟁이 무척 복잡해진다. 현재 아프가니스탄 과 파키스탄에 대한 우리의 논의는 파키스탄의 안정, 아프가니스탄 인권, 마약거래 에 대한 통제, 기타 주요 쟁점 등 광범위하다. 그러나 종국에 이 같은 논쟁은 9.11 테러 자체로 수렴되는 경향이 있다. 과거로의 회귀를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외국 군의 주둔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정책적 합의는 근본적으로 대테러 임무에 관한 주 장이다. 아프가니스탄 내 미군 주둔을 통해 무자비하고 결의에 찬 테러세력들이 미국 본토에서 대량살상을 저지르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가정을 폐기해야만 아프 가니스탄에 대한 보다 나은 논쟁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가정을 폐기 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며, 이로 인해 우리는 자국 내 안보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갖고 해외 군사지원을 과도하게 약속하는 경향이 있다.”1)
1) Finel, B. I. “Counterterrorism and Military Occupation” Small Wars Journal, .http://smallwarsjournal.com/blog/journal/docs-temp/228-finel.pdf (2011년 9월 8일에 참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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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소외된 아프가니스탄 국민들 새롭게 태어난 아프가니스탄 시민사회는 테러리즘 문제에 대한 꾸준한 연구와 상세조사를 하고 있으며 서서히, 그리고 점진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사회 제 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시민사회는 수많은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사회적 보호장치와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어 위험한 상황은 아예 회 피하려 하려는 경향이 높다. 아프가니스탄 시민사회 일원 중 한 사람으로서 필자는 다음의 몇 가지 사항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아프가니스탄에는 자체적인 대테러 정책이 없는 반면, 미국이 주도하는 동맹국 들은 다양한 관련 정책들을 내놓고 있다. 이 같은 정책 및 의사결정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은 철저히 소외되어 의견을 반영할 기회가 없었다. 이들 정책을 살펴보면 아프가니스탄이 아닌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안보와 안전을 최우선적인 문제로 다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 우선순위는 아프가니 스탄 내 대테러전을 지지한 파키스탄이다. 파키스탄의 안정이 보다 우선시되며 이 란은 저항세력으로 간주되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이 이슬라마바드(Islamabad)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파키스탄 영토에서 사살되었다는 점은 아프가니스탄 국민과 정부가 여러 해 동안 줄기차게 주장했던 내용, 즉 테러리즘의 근원이 아프가니스탄 외부에 있다는 주장이 사실임 을 증명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사실을 주의 깊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 무도 없었다. 이 같은 미국의 정책으로 인해 아프가니스탄 국민의 삶은 피폐해졌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아프가니스탄에 제공되는 원조자금은 탈레반과 무장세력의 손으로 흘 러가고 있다. 2009~2010년 아프가니스탄 남부와 북부에 헬리콥터를 통해 제공된 원조물품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원조자금 중 대부분이 아프가니스탄 사회의 재건이 아닌 전쟁자금 조달에 사용되고 있다. 또한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원조자금이 ‘프로그램 지원’이나 행정비용 명목으로, 때로는 휴식 및 레크리에이션 비용 등으로 국제기구의 호화로운 생활에 전용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활동하고 있는 자문관 중 대다수는 아프가니스탄의 현 상 황과 현지 문화·종교에 대한 이해가 일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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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테러리즘과 마약류 근절 노력 최근 몇 년간 종교와 마약류 간의 연결고리에 대한 관심이 널리 확산됨에 따라 미국 정부 관계자나 주요 국제기구 등은 마약테러리즘(narco-terrorism), 마약게릴 라(narco-guerilla),
마약국가(narco-state),
마약근본주의(narco-fundamentalism)
등의 신조어를 즐겨 사용하고 있다. 한편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무장세력 소탕, 민주 적 안정화, 마약류 근절 조치가 일관성 있게 진행되면서 국제사회의 이 같은 정책 에 주춧돌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내 대테러리즘, 안정화, 민주화 노력의 맥락에서 살펴볼 때, 아직까지 대테러 문제에 신속하게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정책적 해법은 안타 깝게도 존재하지 않는다. 탈레반의 몰락 이후 미국은 이라크전에 필요한 병력을 확보하고자 아프가니스탄에는 분쟁 후 평화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만을 배치했 으며, 이는 아프가니스탄의 재건 및 마약류 근절 노력에 타격을 주었다. 중무장한 군벌의 수가 많고 엄청난 양의 소형무기가 국내에 유통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분쟁 후 아프가니스탄의 인구 및 영토면적 대비 국제평화유지군의 비율은 여타 분 쟁지역과 비교할 때 최저 수준에 불과했다. 지난 2004년 10월 대통령 선거를 성 공적으로 치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는 여전히 힘이 없으며 자국 영토 중 상 당 부분에 대해 통제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보 다 많은 병력을 배치했다면 알카에다나 탈레반 테러분자들을 생포하는 과정에서 지방 군벌에 대한 의존도가 이 정도로 높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미국 정부가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도와 군벌을 조기에 제압했다면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국제사 회 모두 마약류 근절과 같은 포괄적인 대테러 정책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 오늘날의 환경에서 마약류 근절을 위한 미국의 정책대안은 미국의 대테러리즘 및 안정화 노력에 크게 좌우된다. 알카에다나 탈레반 분자들에 대한 첩보활동 과 정에서 마약거래에 연루된 군벌들에게 계속해서 의존하는 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에서 마약류 근절을 기대할 수 없다. 아프가니스탄 정부도 전국적으로 치안이 안 정될 때까지 마약류 근절 노력을 중단해야 한다. 아프가니스탄의 대(對)마약류 부 대의 역량이 아직까지 제한적이기는 하나, 이들 부대에게 마약수송 차단에 대한 주도권을 부여해야 한다. 신설된 대(對)마약류 부대는 병력규모가 작고 필요한 장 비가 구비되어 있지 않은데다 적절한 훈련을 받지 못한 상황이라, 이들이 수행할 수 있는 마약수송 차단 및 헤로인 제조조직 소탕 건수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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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관계자들은 마약류가 아프가니스탄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 같은 진단은 사실 증상과 치료법이 뒤바뀐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마약류의 확 산을 통제하기에 앞서 국가 재건을 먼저 이루어야 한다. 마약류 근절을 위한 노력 은 아프가니스탄 군대와 경찰력의 역량강화를 통해 반군과 군벌의 변절행위를 진 압하고 마약류 제조·유통에 대한 금지를 실행하는 한편 마약 공급책의 기소 및 처 벌에 대한 사법부의 역량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경제재건 노력, 특히 농촌지역 발전을 통해 마약류 근절의 초석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아프가니 스탄
전역의
지역은행,
NGO,
자선단체를
통해
대안적
마이크로크레디트
(microcredit) 제도의 도입을 신속히 진행하면 마약류 재배의 주요 유인을 일부 약화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6. 아프가니스탄 시민사회의 제언 아프가니스탄과 다른 국가의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미국이 고려해야 할 점을 몇 가지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아프간 민간인의 생명, 재산, 명예 그리고 사회참여를 중시할 필요가 있다. 국제사회는 모든 아프간 사람들이 테러리스트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인간으로서 이들의 생명도 중요하다. •
테러리즘의 근원이 아프가니스탄 외부에 있다는 것을 국제사회도 이제 분 명하게 알게 되었으며, 이를 감안할 때 아프가니스탄 내에서 진행되는 테러 와의 전쟁은 보다 많은 무고한 인명을 앗아가고 테러리즘이 성장할 수 있 는 시간을 벌어줄 뿐이다.
• 고등교육을 받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매년 70,000 명에 달하고 있다. 이들 젊은이들에게 고등교육의 기회와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 이들은 테러리즘 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 아프가니스탄의 문화적·종교적 규범을 고려하지 않고 군사적 공격을 지속하 면 서방에 대한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의 적개심만 더욱 키우는 결과를 초래 하게 된다. NATO군의 부주의,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국민과 가치관에 대 한 무례함도 불 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 될 수 있다. • 아프가니스탄에서 민주주의는 잘못 이해되고 있는데, 이로 인해 종교인들은 민주주의를 부도덕한 수단으로 여기고 있다. • 외국군의 점진적 철수, 아프가니스탄 군대와 경찰의 강화, 아프가니스탄의 재건과 자립을 위한 정책 수립은 아프가니스탄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 해 반드시 실행에 옮겨져야 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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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필자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 대부분이 테러리즘, 그리고 외부로부 터 강요된 ‘대테러전’에 대한 이해가 별로 없으며, 그저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 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전 세계 시민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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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의 민주주의와 테러와의 전쟁
I. A. 레만(I. A. Rehman) 파키스탄 국가인권위원회(Non-governmental Human Rights Commission of Pakistan, 파키스탄) 사무처장
1. 들어가며 파키스탄은 1973년 헌법에 따라 통치되는 민주연방국이다. 하지만 헌법이 채택 된 이래 그 시기의 반을 군부 독재자들이 정권을 차지하면서 선거로 선출된 민간 지도자들을 쫒아내고 헌법을 대폭 수정하였다. 현 정부는 2008년에 민주적으로 선 출되었고 2010년 연방정부기관에 권력을 부여하고 본연의 의회제도를 되찾기 위 해 혁신적으로 헌법을 개정하였다. 파키스탄 사법체계는 인도 식민지 시대 당시 영국이 만든 틀을 유지하고 있다. 파키스탄에서 최고 법원은 대법원이고, 각각의 연방정부는 고등법원을 두어 하위 사법기관을 관장하고 있으며 수도 이슬라마바드에도 고등법원이 있다. 지아울 하 크(Zihaul Haq) 장군이 정권을 잡았을 당시(1977년 ~ 1988년) 시행된 이슬람화 프로그램에서 이슬람 법원인 연방 샤리아 법원(Federal Shariat Court)은 고등법 원의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서 본 재판과 상소심 모두를 심리할 수 있고 이슬람 관 습법에 위배되는 사항이 있을 경우 다른 법에 우선하여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갖 고 있다. 샤리아 법원의 판사는 일반 판사들과 종교학자들로 구성된다. 법원 명령 으로 이루어지는 항소심은 세 명의 대법원 판사와 두 명의 종교 학자들로 구성된 대법원의 샤리아 항소 판사에게 이양된다. 또한, 파키스탄에는 금융이나 마약관련 범죄, 대테러를 다루는 특별 법정이 있 다. 파키스탄 헌법은 종교를 바꾸고 성인남녀가 배우자를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를 제외하고는 국제권리장전에 규정된 모든 기본권을 인정하고 있다. 2008년 이전까 지 파키스탄은 인종차별철폐조약, 아동권리협약, 여성차별철폐조약만을 비준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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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에 서명하였다. 2008년 이후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적 권리들에 대한 국 제규약과 고문방지협약도 비준하였다. 다시 말해, 파키스탄은 경제, 사회, 문화적 권 리들에 대한 국제규약(ICESCR),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ICCPR), 인종차별철폐조약(CERD), 아동권리협약(CRC), 여성차별철폐조약(CEDAW) 그리고 고문금지조약(CAT)이 명시하는 모든 국제적 의무를 받아들이고 있다.
2. 테러관련 법률 1. 파키스탄은 오랫동안 테러에 해당하는 범죄를 처벌하는 법률을 시행해 왔다. 식민지 시절(1859-1947) 영국은 벵갈규정(Bengal Regulation)과 (아직도 파 키스탄
부족사회에서는
시행되고
있는)
국경범죄규정(Frontier
Crimes
Regulation)과 같은 특별법을 만들어 사법권한이 없는 당국이 간소한 절차를 통해 강력범죄를 처리할 수 있도록 하였다. 파키스탄은 1860년에 제정된 인도 형법을 1860년 파키스탄형법으로 명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폭동을 선동하거나 왕이나 정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파키스탄은 20세기 들어 인도와 분리되기 이전인 첫 30년 동안 정치적 테러의 물결이 일었고 식민지 정부는 롤래트법(Rowlatt Act)이나 펀잡 살해 및 잔혹행위처벌법(Punjab Murderous Outrages Act)과 같은 가혹한 법률을 채택 하여 정당한 법적 절차 없이 테러범으로 고발당한 사람들을 처벌하였다. 2. 파키스탄 내 테러는 특별 법원에서 테러활동진압령(Suppression of Terrorist Activities Ordinance)이 1974년 공포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1974년은 정치 적으로 이견을 가진 세력이 무력으로 정부에 대항하기 시작했던 때였다. 이 법 령은 1975년 의회에서 통과되어 법률로 제정되었으나 정당한 절차를 밟지 않 았다는 이유로 법정에서 거부되었다. 무효화된 법률을 대신하기 위해 다른 사 법적 조치들이 취해졌는데, 1987년 신속재판을 위한 특별법원령(Special Courts for Speedy Trials Ordinance), 1990년 테러영향지역에 대한 (특별법 원)령[Terrorist-Affected Areas (Special Courts) Ordinance], 1992년 테러 영향지역법[Terrorist-Affected Areas (Special Courts) Act] 등이 그것이다. 마침내 1997년에는 대테러법(Anti-Terrorism Act, ATA)이 채택되어 정치, 민족, 종교와 종파 등에 관한 다양한 테러행위를 처벌하는 법률이 되었다. 대테 러법은 이와 병행하는 법체계(legal system)를 만들어냈다. 이 법은 ‘테러 및 종교종파와 관련된 폭력’을 막기 위한 특별법원을 탄생시켰고, 또한 극악범죄를 속전속결로 처리할 수 있게 했다. 인권활동가들은 대테러법을 맹비난하고 있다. 이 법은 무죄의 추정의 원칙을 거부하고, 모든 피고인은 무죄를 증명하기 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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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유죄로 가정한다. 그리고 휴정을 어렵게 하여 가능한 신속하게 재판을 하도 록 하고, 재판과정에서 나온 자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를 증거로 인정하고 부재판결(trial in absentia)을 내리기도 한다. 인권법과 대테러정책 전문가로 저명한 나잠 유 딘(Najam U Din)은 파키스 탄 국가인권위원회(Human Rights Commission of Pakistan)에서 연구를 수행 했다. 연구주제는 ‘달리 증명되지 않는 한 테러리스트인 사람들–파키스탄 대테 러법과 그 시행에 관한 인권적 함의(2007)’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기본 형법과 절차에서 본연의 보호조항들이 빠지고 대테러법과 병행하여 법 체계가 생겨났는데, 이는 피의자 권리의 상당부분을 제거하고 대신 신속한 판 결을 내리게 했다. 논리적으로 추론해 보건대 정상적인 형사법원에서는 피의자 의 권리를 존중함에 따라 판결이 지연될 수 있다. 그러나 대테러법 조항들은 공정한 재판이 열리거나 피의자가 합당한 권리를 누리기 어렵게 하고 있어 국 제인권법과 헌법을 수호하겠다는 파키스탄 정부의 약속을 무색하게 하고 있다.” 3. 예방적 구금법(Preventive Detention Laws) : 파키스탄 정부는 1952년 파키스 탄 보안법(Security of Pakistan Act), 1960년 공공질서유지령(Maintenance of Public Order Ordinance) 등을 통해 테러리스트 활동에 참가하거나 테러를 돕는 행위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억류하는 데 예방적 구금법을 자주 사용해 왔다. 4. 1923년 공식비밀보호법(Official Secrets Act) : 이 법은 간첩활동이나 안보 관련 기관의 정보와 이들의 활동에 대한 정보를 적에게 누출하는 범죄를 주요 하게 다룬다.
테러리스트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혐의로 이 법에 의해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5. 군복무법 (Defence services’ Laws) : 육해공군은 육군법(Army Act), 해군 법(Navy Act), 공군법(Air Force Act)을 각자 제정하여 반정부 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군인을 군법회의에 회부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몇 년 전에는 육군법 이 민간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도록 개정되었다.
3. 법의 남용 9.11 사태 이후 파키스탄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합류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후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 억류되고 미국 당국에 이양되면서 헌법에 명시된 권리는 무시되고 있다. 수천 명의 파키스탄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실종되었다는 신고가 들어오고 있다. 수년간 ‘테러리스트’라고 지목된 사람은 정당하거나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도 없었다. 다음은 이러한 상황을 명백히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들이다.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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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치(Karachi)에 위치한 발로흐(Baloch)에 사는 두 여성이 체포되었다. 한 여 성은 팔에 어린 아이를 안고 있었다. 신문은 이들을 ‘자살폭탄 테러범’으로 묘사하 였다.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인신보호영장을 신청했지만 여성들이 신청서에 명시 된 장소에 있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1년 후 여성들은 집으로 돌아왔으나 공포에 떨며 어느 기관에 끌려갔었는지에 대해서는 함구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정 부 기관에 붙잡혀 감금되었다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다. 카라치(Karachi) 출신 고등학생 라자 자이디(Raza Zaidi)는 테러리스트로 오인 받아 한동안 구금되었으나 유죄를 증명할 수 없어 풀려났다. 자이디는 국제사면위 원회(Amnesty International)의 초청으로 이슬라마바드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자신 이 당한 일에 대해 이야기 하였는데 세미나 이후 라호레(Lahore)에서 다시 체포 되었다가 결국 함구하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나지르 아흐마드(Nazir Ahmad)는 테러리스트와 연관되어 있다는 혐의로 체포되 어 투옥되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아무런 범법혐의도 발견되지 않았고, 그가 체포된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다. 인신보호영장 신청서를 라호레 고등법원에 보냈고 고등 법원은 그를 구제하기 위해 집행관을 파견하였다. 집행관은 나지르를 경찰서 유치 장에서 찾았지만 경찰은 나지르의 신변 인도를 거부하였다. 고등법원이 다른 조치 를 취하기 전에 대법원이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되었다. 지방 경찰서장은 나지르가 불법 무기와 폭발물 소지죄로 반테러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예정이라고 했다. 하 지만 공판에서 나지르의 불법무기 소지 혐의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어 테러 혐의는 벗었으며, 보안법에 의해 억류되어 있다고 집행관은 진술했다. 법률적 남용이 가장 심했던 경우는 아디알라의 11명(Adiala Eleven) 사건으로 11명의 남성이 테러 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나 무혐의로 풀려난 사건이다. 하지만 그들은 구금되었던 아디알라 형무소에서 석방된 것은 아니었다. 인신보호영장이 신청되자 형무소 관계자는 구금되었던 11명은 정보국에 인도되었다고 말했다. 대 법원은 이에 대해 크게 분노하였다. 이에 군부는 동료 테러리스트들이 이들 11명 을 형무소에서 탈출시켰지만 이들은 군사 작전 지역에서 다시 체포되었고 테러행 위 혐의로 재판을 받을 예정이라고 법정에서 진술했다. 여러 해 동안 시민사회단체들은 갑자기 실종된 사람들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써 왔다. 2006년 실종자 수가 4천명에 이르렀지만 모든 실종사건을 문서화 할 수 없 었다. 대법원은 2007년부터 ‘실종자’ 구제를 위한 탄원을 심리하고 있다. 2010년 파키스탄 정부는 이러한 사건들을 다루기 위해 판사 3인으로 구성된 법정을 설치 하였고 인권위원회는 134명의 실종자들을 추적할 수 있었다. 위원회는 실종사건의 상당한 책임이 안보당국자들에게 있다며 위원회를 추가로 설치하여 실종사건을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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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심도 있게 다룰 것과 장기간 억류되었다가 풀려난 사람들을 위해 보상금을 지 불할 것을 권고하였다. 위원회는 구성되었지만 보상금은 지급되지 않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이 불러일으킨 주된 쟁점 중 하나는 용의자의 불법 혹은 승인되지 않은 범죄인 인도문제이다. 무샤라프(Gen. Musharraf, 군부 지도자 1999-2008) 는 그의 저서 ‘In the Line of Fire’에서 파키스탄이 672명에 이르는 알카에다 지 도자와 활동가들을 체포하였으며 이 가운데 369명 이상을 미국 당국에 인도했다 는 것을 인정했다. 인도된 용의자들은 모두 외국인이 아니며 파키스탄인도 포함되 어 있었고, 그 중 몇몇은 관타나모 수용소로 보내졌다고 했다. 현재 파키스탄 시민사회단체는 군이 탈레반이거나 그 공범자일 수 있다는 이유 로 구금하고 있는 2,500명에 대해 크게 우려하고 있다. 당국이 구금한 사람들의 혐의를 입증할 근거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재판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현재 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은 실종된 사람들을 찾기 위해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현재 조성되어 있는 공안 분위기는 구금되어 있는 이들이 적법한 절차를 밟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제기하기 어렵게 하고 있다.
4. 제언 파키스탄 정부는 어느 국가도 테러문제를 다루면서 법치주의 원칙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실종자들을 되찾기 위해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파키스탄은 유엔의 강제실종에 관한 협약에 가입하고 불법 구금에서 풀려난 이들에게는 보상금을 지급해야만 한다. 파키스탄은 이미 비준한 바 있는 유엔 인 권협약들을 시행하는데 필요한 국내법을 긴급히 제정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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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대테러리즘과 인권
바블루 로이통밤(Babloo Loitongbam) 인권긴급행동(Human Rights Alert,인도) 팀장
1. 개요 테러리즘과 대테러리즘에 관한 담론에서 2001년 세계무역센터를 공격한 9.11 테러는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다. 인도 정부도 그들 식으로 규정한 ‘테러리스트’들 을 탄압하는데 ‘테러와의 전쟁’을 충분히 활용했다. 하지만 인도 동북지역 주민들 에게 정신적으로 크나큰 상처를 준 날짜는 2001년 9.11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 라간다. 반세기 전 같은 날인 1958년 9월 11일 인도 대통령은 엄벌주의로 악명 높은 군특별권한법(Armed Forces Special Powers Act, AFSPA)1)을 승인하였다. 이 글은 확연히 드러났던 미국의 9.11 사건뿐만 아니라 오래되었고 또 알려지지 않았던 인도의 9.11까지 두 건의 사례가 인권에 미친 영향을 논하고자 한다.
2. 오래된 9.11 군특별권한법에 의해 ‘치안불안지역’이라 선포되는 지역 내에서는 연방연합군2) 에게 특수한 권한이 주어져 영장 없이도 실내를 수색하거나 사람을 체포하고, 의 심되는 건물을 파괴하고, 구금하거나 심문하여 ‘작전정보’를 받아내며, 미미한 혐의 가 보여도 죽음에 이를 정도의 물리력을 사용할 수 있다.3) 연방정부의 사전 승인 1) 인도 국회는 일부 군경이 저항하는 가운데 1958년 5월 22일 군특별권한법을 통과시키 고 인도 대통령은 1958년 9월 11일 이 법안을 승인하였다. 2) 공군과 의회병력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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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이는 군부대나 군인의 이러한 소행에 대해 기소하거나 법정 대응을 할 수도 없 다.4) 1950년대 나가스(Nagas)의 민족자결권 쟁취를 위한 노력이 폭력적으로 바뀌자, 나가스 힐스(Nagas Hills)는 ‘치안불안지역’으로 선포되었고 1960년대 미조스 (Mizos)가 비슷한 절차를 밟으면서 ‘치안불안지역’은 루샤이 힐스(Lushai Hills)로 확대되었다. 1972년 동북지역 행정구역이 다시 정리되면서 군특별권한법이 개정되 어 그 시행이 아삼(Assam)지역을 돌아 트리푸라(Tripura) 주까지로 확대되었다. 또한 ‘치안불안’을 선포할 수 있는 권한이 주(State)에 국한되었던 것이 연방정부 로 확대되었다. 점차적으로 동북지역의 7개 자매 주 모두가‘치안불안지역’으로 선 포되었다. 1990년 잠무(Jammu)와 카슈미르(Kashimir)에 대해서도 유사한 법들이 제정되었다. 이 법에 따라 1966년 3월 5일부터 11일까지 미주람(mizoram) 지역은 폭격을 당했다. 강제 실종, 사법절차를 무시한 처형, 강간, 고문, 구금 등이 널리 행해지면 서 이러한 사실들이 정기적으로 문서로 보고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극악 한 행위들은 처벌을 받지 않고 있다.5) 유엔인권위원회는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International Covenant on Civil and Political Rights)에 따른 인도의 세번째 정례보고서를 검토한 후 검 토결과(1997년 8월 4일자, 유엔문서 번호 CCPR/C/79/Add.81)를 발표했다. 이 보 고서에서 유엔인권위원회는 인도 일부 지역이 군특별권한법에 의해 장기간 ‘치안 불안지역’ 선포의 대상이 된 것에 유감을 표명하였고 국가가 실질적으로 이 지역 에서 무력을 사용하여 규약 4조 3항을 위배한 것에 대해서도 유감을 표명하였 다.6) 국가비상사태 선포로 4조 3항을 행사한 국가는 유엔 사무총장의 중재를 통 해 다른 국가들에게 1) 훼손한 규정들, 2) 시행한 사유 3) 종료된 날을 즉시 알려 야 하는 의무가 있다. 인권위원회는 또한 군특별권한법에 지속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준군사조직과 반 군세력 뿐만 아니라 이 법에 따라 움직이는 보안당국에 의해 가해지는 생존권(6 조), 고문 받지 않을 권리(7조), 개인 자유와 안전의 권리(9조), 공정한 재판을 받 을 권리(14조) 등의 인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를 가져온다고 우려를 표명하였다.7) 6조와 7조에 명시된 권리는 국가비상사태 시에도 훼손되어서는 안 되는 인권들이 3) 4) 5)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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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 군특별권한법 2001년 8월 대법원 명령 인도 살인의 길을 가다: 군특별권한법 50년과 인권감시, 2008년 8월 유엔문서 CCPR/C/79/Add.81 19번째 단락 유엔문서 CCPR/C/79/Add.81 18번째 단락 전장(戰場)이 된 아시아, 후퇴한 민주주의
다.8) 인권위원회는 인도 정부가 민중의 자결권(1조), 표현의 자유(19조), 참정권(25 조)을 존중할 의무를 지닌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또한 테러리즘과 반란에 의해 영향을 받는 지역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접근 법도 본질적으로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인도 인권위원회(National Human Rights Commission)의 의견을 지지하였고, 국제규약에 부합하는 방법으로 테러에 대응해 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9) 하지만 인도의 국가기관들은 국제규약의 가치에 대해 립서비스를 하면서도 이상 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면, 인도 대법원은 군특별권한법에 이의를 제기하 는 진정을 신속히 처리해버리고 이 법이 헌법 상 정당하다는 ‘악명 높은 판결’을 내렸다.10) 이 과정에서 법원은 군특별권한법이 국제규약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검 토하라는 유엔위원회의 특별 권고를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인도 헌법에 보장된 생존권 조항도 쉽게 무시하였다. 유사한 맥락에서 인도 인권위원회는 군특별권한 법에 대한 공식 입장 표명을 회피하였다. 2004년 인도의 군부세력이 마니푸르(Manipur)의 한 처녀인 탄잠 마노라마 (Thanjam Manorama)를 감금, 강간, 살해하면서 시민들은 전례 없이 격한 반응을 보였고 인도 국무총리는 마니푸르 주민들에게 ‘군특별권한법’을 ‘좀 더 인간적인 법’으로 대체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후 연방 정부는 정년퇴임한 대법원 판사 B.P. 지반 레디(Jeevan Redddy)를 ‘1958 군특별권한법 검토위원회[Committee to Review the Armed Forces (Special Powers) Act 1958]’ 위원장으로 임명하였 다. 위원회는 여러 이해당사자들의 입장을 고려한 뒤 ‘군특별권한법은 어떤 이유에 서든 억압의 상징이 되었고 증오의 대상이고 차별과 횡포의 도구였으므로, 이 법 안을 전면 폐지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현명하다’고 결론지었다.11) 이 보고서는 2005년 6월 6일 정부에 제출되었으나 정부는 보고서가 권고하는 사항을 시행에 옮기는 대신 보고서 자체를 비밀에 부쳤다. 하지만 한 힌두 일간지 덕분에 이 보고서는 유출되어 인터넷에 게재되었다. 인종차별금지 국제규약에 따라 인도 정부의 14차-19차 보고서에 대한 토론을 8)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대한 국제규약 4조 2항 9) 유엔문서 CCPR/C/79/Add.81 18번째 단락 10) 군특별권한법, 긴급성 검토. 저자 : A.G. 누라니 http://www.scribd.com/doc/1908 9510/Armed-Forces-Special-Powers-Act-1958 2011년 5월 5일 11) 2005년 군특별권한법 검토위원회 보고서 4차, 권고사항, 단락 5(a), 75페이지. 전문 참조 http://www.hindu.com/nic/afa/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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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친 후 인종차별금지위원회(Racial Discrimination Committee)는 군특별권한법의 인종차별적 성격에 주목하면서, 인도 정부에 검토 위원회의 권고사항에 따라 1년 안에 군특별권한법을 폐지할 것을 촉구하였다. 인도 정부는 권고사항을 수용하지 않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인종차별금지위원회가 보낸 독촉서한에도 답하지 않았 다. 심지어 유엔 인권고등판무관 나바네덤 필라이(Navanethem Pillay)도 2009년 3월 인도를 단독 방문하는 동안 군특별권한법을 ‘오래된 식민지 잔해’라 부르며 폐 지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군특별권한법은 국제적 오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행되고 있다. 광주 인권상 수상자인 이롬 샤르밀라 차누(Ms. Irom Sharmila Chanu)는 오로지 군특 별권한법 철폐 한 가지를 요구하면서 11년째 단식투쟁 중에 있다. 그녀는 중대보 안사범으로 취급받고 있다. 그리고 인도 동북쪽과 카슈미르의 ‘치안불안지역’은 여 전히 군특별권한법의 통제를 받고 있다.
3. 새로운 9.11 인도 정부는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 선포에 대한 첫 반응으로 2002년 테러방지 법 (Prevention of Terrorism Act, POTA)을 제정하였다. 뉴욕에서 발생한 9.11 테러 외에도 2001년 12월에 발생한 뉴델리 의회 공격도 촉매제로 작용하였다. 다 음 해 테러방지법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무시한 채 광범위하게 남용되고 있으며, 특히 이슬람권 소수민족을 억압하기 위한 수단이 되고 있다는 강력한 비난을 받았 고, 역효과를 낳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인권단체를 포함한 사회 각계의 집중적인 로비로 테러방지법은 2004년 의회에서 폐지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1967년 제정된 ‘불법행위방지법(Unlawful Activities Prevention Act, UAPA)’ 개정을 통해 수많 은 엄벌위주 조항들이 생겨났다. 인도에서 악법 조항 폐지를 위한 민주화 운동이 있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 니다. 국가긴급사태라는 명목으로 악용되고 있는 ‘국내안보유지법(Maintenance of Internal Security Act, 1971, MISA)’이 대표적인 것으로, 1997년 권력을 잡은 자 나타(Janata)당 집권시기에 폐지됐다. 인디라 간디(Indira Gandhi) 여사가 보안요 원에 의해 살해되었던 사건 때문에 생긴 ‘테러리스트와 교란 행위 예방 및 통제법 [Terrorist and Disruptive Activist (Prevention) Act, TADA]’은 여론의 강력한 비난에 직면하면서 1995년에 폐기되었다. 인도에서는 억압적인 법과 민주 세력 간 의 밀고 당기는 시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 세계적인 ‘테러와의 전쟁’으로 이 둘 사이의 균형은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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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6일 발생한 뭄바이 테러공격은 맹목적 애국주의와 폭력을 낳았고, ‘테러 에 강력 대응’하려는 보다 완고하고 거친 법률 제정으로 이어졌다. 2008년 12월 의회는 실질적인 토론이나 심사 없이 이미 독소조항으로 가득한 ‘불법행위방지법’ 을 개정해 더 많은 엄벌위주 조항들을 도입했다. 이 때 개정된 법조항들이 현재 인도의 대테러법 조항이라고 할 수 있다. 법 개정은 미국이 연방수사국(FBI)을 두 고 있는 것처럼 인도수사국(National Investigation Agency)12)을 설립하여 인도의 주권과 안보, 통합에 영향을 미치는 범죄행위를 수사하고 기소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하지만 인도헌법 상 수사는 기본적으로 주 관할 사항이고 연방형사범 죄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위키리크스(Wikileaks)에 의하면 연방 내무부 장 관 치담바람(Chidambaram)은 ‘인도수사국에 권한을 부여하면서 헌법의 경계를 거 의 넘어섰음’을 인정했다고 한다. 개정된 법률에 대한 국제사면위원회의 우려사항 은 다음과 같다.13) 1. ‘테러행위’에 대한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정의 2. ‘테러리스트 집단이나 조직’의 구성요소와 구성원에 대한 불분명하지만 엄격 한 정의 3. 테러에 가담했다고 의심되는 용의자의 최소 구금 기간이 15일에서 30일로, 최대 구금기간도 90일에서 180일로 연장. 개정 전 기준으로도 국제기준을 위배 4. 매우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 승인되지 않은 절차나 불법적인 방법으로 입국한 외국인에 대한 보석 거부 5. 일부의 경우 혐의를 받고 있는 용의자가 스스로 무죄를 증명하도록 요구 6. 근거를 명시하지 않거나 근거에 제한을 두지 않고 특별법정을 두어 비공개 로 재판을 진행할 수 있도록 인도수사국에 새로운 권한을 부여 인도에는 특정 지역에만 해당하는 법들이 있다. 차티스가르 공공보안법 (Chhasttisgarh
Public
Security
Act),
마하라스트라
계획범죄법(Maharastra
Organized Crime Act), 잠무와 카슈미르의 공공보안법(Public Security Act of Jammu and Kashmir), 푼잡의 주 보안법(Pubjab Security of State Act), 아삼의 치안불안지역법(Disturbed Area Act of Assam) 등이 오늘날 인도의 테러 대응조 치로 활용되고 있다. 광주인권상 수상자인 비나약 센(Binayak Sen)이 불법행위방 지법과 차티스가르 공공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하지만 지도자급 인권 변호 사가 언급했듯이 테러와 무관하게 부패한 경찰이 집단적으로 엄벌위주의 악법을 적용하면서 문제를 악화시키고 있다.14) 12) 치담바람 ‘인도조사국은 위헌’ – 위키리크스 http://rtn.asia/171_chidambaramfelt-nia-was-unconstitutional-wikileaks 13) http://www.amnesty.org/en/for-media/press-releases/india-new-anti-terrorlaws-would-violate-international-human-rights-stan 14) 샨티 부샨, 테러리즘 : 강력 법안이 해답일까? http://www.thehindu.com/todays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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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오래되고 새로운 9.11 : 마니푸르 ‘불법행위방지법(UAPA)’은 테러행위를 매우 광범위하게 정의하고 있다.15) 위법 행위(actus reus)에 폭탄, 다이너마이트, 그 외의 폭파물질, 총기류 사용을 포함하 거나, ‘본질에 관계없이 어떤 방법으로든’ 이라고 명시하고 있으며, 인도의 통합과 안보, 주권을 위협하거나 위협의 가능성이 있는 행위, 또는 인도 국민에게 테러를 가하려는 의도를 가진 행위가 이루어질 경우 범죄의 요건(mens rea)을 충족한다 고 보고 있다. 이렇게 광범위하고 모호한 법률로는 마니푸르(Maniur)의 누구도 ‘테러리스트’가 될 수 있다. 마니푸르는 1947년 헌법 절차와 민주적 선거를 통해 정부를 선출하였 지만 1949년 인도 자치령으로 흡수되면서 마니푸르가 ‘인도’에 속해 있는 것인지 를 둘러싸고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는 곳이다. 사실상 세상에서 가장 많은 치명적 인 테러집단이 존재하는 곳이 마니푸르 계곡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인구 백만 명 중에 ‘불법행위방지법’상 리스트에 올라가 있는 테러 단체가 여섯 개나 존재하며 군특별권한법에 의해 군부가 마니푸르에 반세기 이상 주둔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세기 동안 국가에 의해 면책권이 보장되면서 법의 지배와 같은 민주적인 제도 는 파괴되었다. 다음의 에피소드를 통해 그 정도를 파악할 수 있다. 2011년 4월 2일에서 3일까지 열린 세계 크리켓 월드컵에서 인도는 우승을 차지 했고 마니푸르에 주둔하고 있는 8만 명의 인도 무장군대는 이에 고무되어 30분간 여러 번에 거쳐 총을 발사하였다. 군부대에서 800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논강크 홍(Nongangkhong) 마을에 사는 75세 와이크홈 마니(Waikhom Mani)할머니는 침 실에서 잠들어 있다가 군이 발사한 총알에 맞아 즉사하였다.16)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한 사후 조치는 아무것도 보고되지 않았다. 2011년 4월 20일, 교통이 혼잡한 시간에 임팔 시(Imphal City) 중심에 구와하 이트(Guwahait) 고등법원의 T. 난다쿠마르(Nandakumar) 판사가 탄 차량이 무장 군대 차량을 추월하였다. 이에 소총부대 모모 사팜(Momo Sapam) 대령은 판사 차 량의 수행원을 발견하고는 뒤쫓아 가 법원건물 바로 앞에서 그를 위협하였다.17) 법조계는 강력히 항의하였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2010년 8월 18일, 교사이자 7살과 4살배기 두 아이의 어머니인 데비 paper/tp-opinion/article365554.ece 15) 2008 군특별권한법 15항 16) 임팔 자유 언론, 임팔, 2011년 4월 4일, 페이지 1 17) 산가이 특급, 임팔, 2011년 4월 22일, 페이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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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irangthem Londhoni Devi)는 남편을 만나러 구와하이트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날 저녁 부부는 마니푸르의 민족해방전선(United National Liberation Front, UNLF) 활동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2010년 9월 6일 증거불충분으로 임팔 시 서부지부 일급 치안판사(Judicial Magistrate 1st Class Imphal West)에 의해 보석을 승인받았지만 그녀는 아직도 인도수사국(NIA)에 억류되어 있다. 인 도수사국 불법행위방지법 중 기소 전 180일까지 구금할 수 있다는 독소조항을 악 용한 것이다. 법적구금기간이 지난 후 법원은 기소혐의가 사실인 것 같다며 보석 을 허락하지 않았다. 불법행위방지법은 공정한 재판의 기본 원칙인 무죄추정의 원 칙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다. 그녀는 테러집단의 일원이라는 모호한 기소로 10개월 이상 구금되어 있다. 인도에서 기본권과 민주주의의 부재는 지리적, 인종적 맥락에서 살펴봐야 한다. 소위 세계에서 가장 큰 민주주의 국가라는 인도에서 인권의 부재는 인도의 독립과 민주화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고, 특히 동북지역의 문제는 무관심한 채로 내버 려져 있다. 1958년 제정된 군특별권한법과 2008년 개정된 불법행위방지법(UAPA, 1967)은 테러에 대응한다는 명분하에 수많은 이들에게 갖은 모욕과 고통을 전가 하는 법 아닌 법으로 존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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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의 관점에서 본 테러와의 전쟁
아딜라 라만 칸(Adilur Rahman Khan) 오디카(Odhikar, 방글라데시) 사무총장
1. 테러와의 전쟁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 빌딩을 덮친 테러 공격은 세계를 충격과 경악 에 빠뜨렸으며 결국에는 세계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미국 정부의 초기 대응과 뒤 따른 논평이 결정적이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 공격을 ‘테러 행위’로 명명한 후, 이것은 미국에 대한 ‘전쟁 행위’라고 선언했다. 이후로 부시 정권과 미 국 언론은 특정 어구에 집착하게 되는데, 그것이 ‘테러리즘과의 전쟁’, 혹은 ‘테러 와의 전쟁’이었다. 이 공식입장에 맞추어 수많은 글들이 쓰였고 말들이 쏟아졌다. 그들의 ‘제국주의적’ 전쟁 시도에 동의를 끌어내고 지지를 얻기 위해서였다. 미국 은 그들의 욕망과 필요에 충분히 따라오지 않는 나라들을 응징하겠다고 대담하게 선언했다. 이는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었는데, 특히 이슬람교도가 인구 대다수를 차 지하는 국가들과 남아시아 국가들에게 그러했다. 이후로 ‘테러와의 전쟁’은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대외정책에 있어 핵심 의제가 되었다. 각국은 사법기구와 안보기구를 개조하기 시작했다. 각 국가와 지역의 다양 하고 오래된 사회경제적 문제들이 도매급으로 취급되어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프리 즘을 통해서만 비춰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제국의 논리는 민주주의의 후퇴나 인권 침해로 얼룩진 역사 등의 문제를 외면하고 ‘테러리즘과 싸우기 위한’ 새로운 규칙 들을 강요했으며, 심각한 인권침해를 저지를 수 있는 힘을 안보기구들에게 부여했 다. 이런 상황은 관타나모 수용소나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의 포로 처우 문제 외에 도 다른 많은 예를 통해 명백히 드러난다. 미국과 미국의 대외정책에 순응하도록 재구성된 안보기구와 법체계는 궁극적으로는 헌법과 국제법상으로 보장된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했고 자국 시민들을 문자 그대로‘적대’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방글라 데시도 예외는 아니다. 방글라데시 또한 같은 압력을 받았으며 2009년의 대테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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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위에서 서술한 국제 상황의 직접적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2. 논란의 촉발 ‘테러리즘’이라는 말은 국가 권력이 언제 어디서든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공 간을 열어주었다. 국가는 무언가를 ‘위협’으로 설정하기만 하면 되고 ‘테러 행위’라 고 이름붙이기만 하면 된다. ‘테러리즘’이란 말은 쉽게 조작할 수 있으며 인권 패 러다임과의 충돌 없이는 거의 정의내릴 수 없는 말이기도 하다. ‘테러’는 그것에 대응해 수천 명을 살해할 수도 있는 쉬운 명분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테러리즘’이 란 ‘공포를 퍼뜨리기 위해 폭력이나 폭력에 대한 위협을 계획적으로 사용하는 행 위로, 보통 정치적 또는 종교적, 이념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정부나 사회를 강제 하고 협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1) 고 정의된다. 이 정의는 테러리즘과 그 밖의 폭력, 즉 법적으로 허가되고 도덕적으로 받아들 여지는 규범적 폭력 수단을 구분한다. 테러 행위는 어떤 동기에 의해 행해졌는지 와 관계없이 정의된다. 어떤 한 집단은 여러 명분을 빌려 테러를 저지른다. 테러리 즘은 폭력의 특정한 종류이다.2) ‘테러리스트’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어떤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알고 있다. 테 러 대상은 그들이 이루려는 목표에 따라 합리적으로, 또한 계획적으로 선택된다. 테러범들 그들의 행위가 불러올 결과를 잘 알고 있다. ‘테러’는 즉흥적이지도 않으 며 무작위로 발생하지도 않는다. 테러 행위는 두 가지 종류로 정의할 수 있을 것 이다. 하나는 국가의 지원을 받는 테러 행위, 다른 하나는 그에 대한 저항이다. 9.11테러 이후 국제정치적 관계뿐만 아니라 국가 및 지역 단위에서의 안보와 인 권 문제에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9.11이후로 인권단체 및 기타 유관 단체들로부 터 인권침해 사례가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다는 보고가 잇따랐다. 시민권과 정치적 권리 외에도 경제적, 사회적, 환경적 권리에 대한 침해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테러를 억제하겠다는 명분으로 국가가 시민에 대한 테러 행위를 지원하고 있는 셈이다. 그 결과 법치가 무시당하고 있으며 국제인권법을 포함해 국제법의 일반 원칙들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 관점과 의견이 다른 공동체들과 민족들, 국가들 이 서로 소통하고 인권과 개인의 자유, 민족자결권과 국가주권 같은 공통된 원칙 에 기초해 협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또한 글로벌 미디어의 조작에 의해 더욱 저하되었다. 1) U.S. Army, Field Manual 100-20, Stability and Support Operations (안정 및 지 원 작전). (최종고), “Chapter 8: Combating Terrorism.” Terrorism Research Ce ntre (http://www.timeenoughforlove.org/saved/TerrorismResearchCenterBasics.h tm) 참고. 2)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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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9·11이전부터 테러를 겪어 왔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 간 다른 수많은 나라들에서 흔히 벌어졌던 것처럼 일상적 공포, 일상적 현실, 또는 삶의 방식으로 써 겪어온 것은 아니었다.3) 두 번의 세계 전쟁과 마찬가지로, 미국은 테러를 상대 로 승리할 수도 없고 끝낼 수도 없는 또 다른 전쟁, 영원히 지속되는 무한한 전쟁 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전쟁’이라는 수사는 근본적으로 여러 가지 이유에서 기만적이다. 군사적으로 격퇴해야 할 적국이 없다. 물리쳐야 할 적의 군복을 입은 병사들도 없 으며, 침공하고 정복해야 할 영토도 없으며, 승리를 결정하는 명확한 조건도 없 다.4) ‘국제 조직범죄’와는 다른 ‘국제 테러리즘’을 제거하기 위해, 군이나 다른 안 보기관들과 협조하고 법집행기관을 동원해 예상치 못한 적들을 상대로 하는 무한 한 싸움인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범죄 없는 사회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테 러를 완전히 몰아내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미국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던 알카에다는 9.11테러를 자 행했다. 서구에서는 무슬림이 테러리즘에 이끌리는 것은 그들이 빈곤하고 억압받 기 때문이며, 미국이 그 빈곤과 억압의 원인이라는 주장이 있다.5)
3. 방글라데시의 관점 이슬람교도가 대부분인 남아시아 개발도상국인 방글라데시 또한 테러리즘 문제 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취약한 나라이기 때문에 국가의 가장 큰 관심사는 항상 경제발전이었으며 국제적으로 중대한 문제들도 그보다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았다. 국내 법질서 상황은 가히 좋다고 할 수 없으며, 이와 관련하여 많은 조치가 필요하다. 미국과는 달리 방글라데시는 처음에 테러리즘을 주요한 문제로 간주하지 않았 다. 하지만 곧 법질서 확립을 위해 국내 법체계를 고쳐야 한다는 압력을 받게 되 었다. 방글라데시는 2002년에 신속심리법정법(Speedy Trial Tribunal Act)을 제 정하여 일부 중대 범죄에 대해 빠른 재판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였다. 정부의 법 질서 유지 능력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테러 행위에 쓰일 개연성이 있는 자금의 방글라데시 유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자금세탁방지법(Money 3) Ramesh Thakur, “International Terrorism and the United Nations(국제적 테러 리즘과 유엔)”. himane-Yamaguchi Global Seminar, 2006년 8월 5일 ~ 8일 4) 앞의 책. 5) Goska D. V, “Islam and Terror: Some Thought after 9/11.” http://www.answ ering-islam.org/Terrorism/islam_terror.html 에서 가져옴.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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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undering Prevention Act) 또한 2002년에 제정하였다(2002년 법률 제 7호). 2005년 8월 17일 과격단체 자마툴 무자헤딘 방글라데시(Jama’atul Mujahideen Bangladesh, JMB)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전국적인 폭탄 테러가 일어난 후, JMB의 지도부 6명 전원이 체포되어 신속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방글라데 시 국민당(BNP)이 주도한 4당 연립 정권하의 일이었다. 군부의 지지를 받는 과도 내각 시절이었던 2007년 3월 30일에 그들 모두 사형이 집행되었다. 2008년 3월 11일에는, 과도내각이 반테러리즘령(Anti-Terrorism Ordinance)을 공포하였다. 총선 취소 등 떠들썩했던 2007년의 반부패 운동 이후 들어선 당시 내각 은 군부의 지지를 받는 비선출 임시 정부였다. 2009년 2월 24일에는 의회가 이 법 령에 기초하여 대테러법(Anti-Terrorism Act, ATA)을 제정했다. 그보다 조금 전인 2009년 2월 19일의 각료 회의에서 대테러법안이 어떠한 공개적인 논의도 없이 발의 되었다.6) ‘테러 행위’의 정의는 지나치게 모호하며, 해당 법률은 반정부 운동가, 교 사, 언론인과 인권옹호자들로 대표되는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악용되고 있다. ■ 보호책임 방글라데시 헌법과 법률은 국가에게 인권과 기본적 자유권을 존중할 책임과 해롭고 위협적인 행위로부터 국민을 보호할 책임을 부여하는 규정을 충분히 갖 추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항상 정부가 국민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몇 년 간 계속된 폭탄 테러에 대해, 정부는 범인과 배후를 찾아내지도 상황에 적절히 효율적으로 대처하지도 못했다. 이러한 범죄 행위로부터 정부가 국민을 보호할 수 없었던 것은 조직체계의 미비, 부패, 법집 행기관의 비효율성, 정보의 부족 등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 사법부의 독립 방글라데시의 대법원은 행정부로부터 끊임없는 압력을 받으면서 사법부의 독 립성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사법부가 정치화되는 문제도 겪고 있다. 하급법원의 관리들은 행정부에 속해 있으며, 정부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 기를 꺼린다. 경찰도 종종 여당 관련 인사들의 조사를 기피하는데, 이는 경찰이 주로 행정부의 감독을 받기 때문이다. 정부도 경찰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기 도 한다. 경찰의 부패와 기강해이 의혹도 널리 퍼져 있다. 유감스럽게도 방글라 데시가 독립국가로서 출범한 이래 이런 상황이 지속되어 왔다. ■ 자유 박탈
6) Odhikar/FIDH(국제인권연맹) 방글라데시 보고서 : Criminal Justice through the P rism of Capital Punishment and the Fight against Terrorism, 2010. 4. http:// www.odhikar.org 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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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테러 행위’ 용의자들은 법원의 허가 하에 조사받는 경우도 있지만, 어 떤 경우에는 변호사 접견이나 가족과 면회도 하지 못한 채 혹은 진료를 받지 못하는 상태로 은밀히 취조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헌법상의 안전장치인 인신보 호영장 제도를 통해 불법 구금으로부터 용의자를 보호할 수 있었던 사례도 몇 몇 있다. ■ 재판 법원에는 많은 수의 소송이 계류되어 있으며,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구금 기 간이 길어져 문제가 되고 있다. Odhikar에 따르면 유죄 혹은 무죄 판결이 나기 까지 구금기간은 평균 4년에서 7년 사이이다. 일부 수감자들의 경우 선고받을 수 있는 최장 형기보다 훨씬 오랫동안 수감된 상태로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조 사 과정은 느리고 번거롭고 비효율적이며 중대 범죄자들에 의해 좌우되기도 한 다. 그러나 경찰의 인권 침해는 대부분 처벌받지 않았는데, 그 결과 이를 문제 삼지 않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경찰에 의한 인권 침해와 초법적 살인을 종식 시키는 데 심각한 장애가 되고 있다.
4. 남아시아 대테러 전담반(Anti-terrorism Taskforce) 2009년 1월 28일 셰이크 하시나(Sheikh Hasina) 총리는 국회에서 가진 첫 번 째 질의응답을 통해 정부가 국내 무장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엄격한 조치를 망설임 없이 취할 것이라 밝혔다.7) 총리는 ‘무장세력을 소탕하기 위해 이미 각 부처와 관 계기관에 배후와 자금원, 무기와 탄약의 출처를 조사하도록 했다’고 말했다.8) 셰 이크 하시나 총리는 무장세력을 국가적 중대사로 규정했으며, 또한 국경을 넘나드 는 테러리즘을 근절하겠다는 여당의 선거 공약대로 관계기관에 ‘남아시아 대테러 전담반(South Asian Anti-terrorism Taskforce, SAAT)’설치에 착수하도록 지시 했다고 밝혔다. 외무장관 디푸 모니(Dr. Dipu Moni) 또한 취임 직후에 SAAT의 출범이 가장 중요한 사안 중 하나라고 말했다.9) 방글라데시 정부에 따르면, SAAT의 임무는 무장세력 및 테러리즘에 맞서 싸우 는 것이다. 하지만 인도가 원하는 것처럼 반군을 상대로 싸우겠다고는 하지 않았 7) Dr. K. M. A. Malik. “South Asian Anti-Terrorism Taskforce: A Trap to Invol ve Bangladesh in the US-India War on Terror.” 2009년 2월. http://www.defe nce.pk/forums/strategic-geopolitical-issues/21965-south-asian-anti-terrorism -taskforce.html. 8) New Age, 2009년 1월 8일. 9) 앞의 글.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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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SAAT가 인도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명확히 밝히지 않았 다. 셰이크 하시나 총리와 디푸 모니 장관의 발언으로 미루어본다면, 이 기관을 설 립하는 주요 목적은 인도와 역외 ‘우방’세력들의 도움을 받아 방글라데시 국내와 국경 바깥에서 무장세력 및 테러리스트들과 전투를 벌이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인도는 오직 방글라데시와 인도만으로 구성된 SAAT를 설립하자고 주장하는 입장 이다. 인도와 방글라데시 양측이 ‘남아시아’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지만 네팔, 부 탄, 파키스탄, 몰디브, 스리랑카 등 남아시아지역협력연합(SAARC) 국가들은 여기 에 전혀 관여하고 있지 않다. 이 국가들이 참여하지 않는다면 이 기관은 ‘인도-방 글라데시 전담반 (India-Bangladesh Taskforce)’라 불려야 할 것이다.10) 인권단 체 Odhikar는 SAAT가 민족자결운동과 정권의 부조리에 저항하려는 국민들을 상 대로 악용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5. 국제법 준수 방글라데시는 ‘고문 및 그 밖의 잔혹하고 비인도적이며 모욕적인 대우나 처벌의 방지에 관한 협약(CAT)’을 비롯한 여러 국제인권협약의 회원국이다. 하지만, 방글 라데시는 아직 국내에서 고문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하지 않았고 선택의정서에도 비준하지 않았다. 방글라데시에서는 종종 경찰이나 정보기관에 의한 고문이나 구 금 중 사망 사건 등이 발생하는데 이는 국제법 위반에 해당한다. 경찰과 다른 법집행기관들은 심각한 인권침해 행위를 수없이 자행하지만, 죄질 이 현저하게 나쁜 경우에서조차 거의 징계를 받지 않는다. 경찰은 수많은 초법적 살인을 저질렀는데, Odhikar에 따르면 2010년에만 여러 법집행기관들이 67명을 고문하였고 그 중 22명이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고문의 형태로는 위협, 폭행, 손톱 뽑기, 뼈를 부러뜨리거나 탈구시키기, 얼굴이나 몸에 뜨거운 물 붓기 등이 있으며 종종 전기충격을 사용하기도 한다. 2011년 2월 14일 방글라데시 히 즙 우트 타리르 (Hizb-ut Tahrir Bangladesh) 공보부는 회원들이 취조실에서 고 문을 당했다는 의혹을 여러 인권단체에 서면으로 제기하였다. 이 서면에 따르면 히즙 우트 타리르가 2009년 10월 22일에 불법단체로 규정된 10)“이 기관의 명칭에 ‘남아시아’를 붙이는 것은 부적절하고 기만적이며, 가짜 라벨 을 붙여서 상품을 파는 행위와 같다. 이러한 목적은 명백히 방글라데시의 여론을 호 도하는 것이다.” Dr. K. M. A. Malik. "South Asian Anti-Terrorism Taskforce: A Trap to Involve Bangladesh in the US-India War on Terror." 2009년 02월. http://www.defence.pk/forums/strategic-geopolitical-issues/21965-south-asia n-anti-terrorism-taskforc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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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다카 대학 교수 모히우딘 아흐메드(Mohiuddin Ahmed), 카지 모르셰둘 허크 (Kazi Morshedul Huq), 시예드 골람 마울라(Syed Golam Mawla)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그들은 여전히 수감 중이다. 2010년 12월 22일과 2011년 1 월 19일에 경찰은 더 많은 히즙 우트 타리르 회원들을 체포했으며, 정보를 캐내기 위해 최조실에서 고문을 했다는 의혹이 있다. 체포된 사람들은 성기에 전기 고문 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발가벗겨진 채로 거꾸로 매달리거나, 얼음판 사이에서 장 시간 짓눌리는 고문도 받았다.11)
6. Clean Heart 작전 2002년 방글라데시 정부는 정규 경찰이 아닌 무장군인을 동원하여 ‘클린 하트 (Clean Heart) 작전’이라는 법질서 확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한 달 동안 진행된 이 캠페인은 치안 상황을 개선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구금되어 있는 동안 군인의 고문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 48명의 죽음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 후 해당 캠페인 기간에 이루어진 무장군인의 모든 행위에 대해 국회가 면책권 을 보장해주면서 심각한 인권 문제로 떠올랐다.
신속대응부대(RAB), Andrew Biraj, Reuters
7. 신속대응부대(Rapid Action Battalion, RAB) 2004년 정부는 신속대응부대(Rapid Action Battalion, RAB)라는 명칭의 특수 법집 11) 방글라데시 히즈브 우트 타리르 홍보부가 2011년 2월 14일부로 발표한 호소문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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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기관을 창설했다. 이 기관은 특수 훈련을 거치고, 최신 무기와 병참술을 갖춘 경 찰과 군 출신자들로 이루어졌으며 범죄 소탕작전을 수행하는 특별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엘리트 부대’라고 불린 이 기관은 ‘최고 흉악범’들을 체포하는 일부 성과 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RAB는 작전 과정에서 사람들을 고문하거나 살해하기도 했다. 통계에 따르면 2011년 1월에서 3월 사이에 19명이 RAB와의 ‘교전’ 혹은 ‘충돌’로 인해 사망했다고 한다.12) 이 때문에 RAB의 작전 양상이나 그들이 보 유한 권한에 대해 인권과 책임성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신속대응부대(RAB), Munem Wasif, Drik News
신속대응부대(RAB), New Age Daily
12) Odhikar의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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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속대응부대(RAB), New Age Daily
8. 결론 ‘테러리즘(terrorism)’은 ‘국가 테러리즘(state terrorism)’으로는 막을 수 없으 며, 매우 높은 사회적 비용만 치르게 된다. 만약 사회정치적 불균형이 시정되고 국 민들의 권리가 보호받는다면 극단적인 방식의 불만 표출은 사라질 것이다. 우리 자신의 문제를 제대로 진단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는 용기와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국제 정세가 이끄는 대로 쉽사리 군사력을 동원해 표면적인 현상만을 억누 르는 것은 상황을 훨씬 복잡하게 만들 뿐이다. 근본적인 원인을 적절히 해결하지 않으면 언제나 반발이 일어날 위험이 있다. 해결책은 국가 전략의 차원에서 대화 를 통해 결정되어야 하며, 찬반양론을 모두 검토해야만 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 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점은 방글라데시의 국내 문제를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섞으 려고 하는 어떠한 국제적, 지역적 시도와는 계속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방 글라데시는 그 누군가의 전쟁에 개입할 입장에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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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의 대테러 정책과 민주주의, 그리고 인권1)
B. 스칸타쿠마르(B. Skanthakumar) 법치사회기금(Law & Society Trust, 스리랑카) 활동가
1. 들어가며 스리랑카에서 26년에 걸친 내전이 끝난 지도 2년이 넘었다. 그러나 국제인도법 과 인권법의 심각한 위반이라는 문제제기2) 속에서도 여전히 국가 전체에 비상사 태가 선포되어 있으며, 또한 대(對)테러 관련법은 폐지되지 않고 일부만 수정되었 을 뿐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불린 것은 아니지만, 통일전선(United Front, UF) 정권 시절, 싱할라족 청년들이 일으킨 1971년의 무장 반란에 대응하기 위해 서둘러 틀을 잡 아 소급 적용하도록 제정한 것이 최초의 대테러법이었다. 이 형사정의위원회법 (Criminal Justice Commission Act, 1972년 법률 14호)은 비록 오래 가지 않았지 만(이 법은 1977년에 폐지되었다) 이 법의 심각한 독소조항들은 폐지된 지 2년 후 우익 통일국민당(United National Party) 정권이 제정한 새 법률에 포함된다. 1979년의
테러방지(임시조치)법[Prevention
of
Terrorism
(Temporary
Provisions) Act, PTA]은 타밀족 청년들의 무장 투쟁을 근절하기 위한 법이다.3) 1) 이 글은 2011년 5월 17일 광주 아시아 포럼 워크숍에서 발표한 원고이다. 원고에 언 급된 법률과 자료는 2011년 7월 20일에 인용한 것이다. 원고에 조언을 준 Kishali Pi nto-Jayawardena에게 감사를 표한다. 2) “스리랑카에서의 책임문제에 관한 유엔 사무총장 전문가 자문단 보고서” 유엔. 뉴 욕, 2011년 3월 31일. http://www.un.org/News/dh/infocus/Sri_Lanka/POE_Repor t_Full.pdf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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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 싱할라족을 우대하는 정책이 소수민족인 타밀족4)에 대해 차별적이었고, 또 타밀족이 전통적으로 터를 잡고 살아온 북부 및 동부 지역에서의 자치권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반란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 테러방지법은 인종차별정책 (apartheid) 시대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법과, 아일랜드 반군을 상대로 적용하던 당 시의 영국 법5)을 본떠 만들어졌다. 이 비정상적인 법률이 제정되기 전부터, 스리랑카 정부는 영국 식민지 시절의 공공치안법령(Public Security Ordinance, PSO)에 근거해 비상사태를 선포할 권한 이 있었다. 공공치안법령은 1947년에 제정되었는데, 2차 세계대전 후 폭발적으로 증가한 독립 운동의 일부이기도 했던 노동계급의 파업을 억누르기 위한 법이었다. 스리랑카에서 비상사태관련 법들이 제정되었고 정부는 이를 갱신해 왔다. 스리랑 카 정권은 다당제 정치제로 정기적인 선거를 통해 선출되며 시민사회운동과 언론 을 통해 어느 정도 견제되어 왔다. 1978년 이후 스리랑카는 민주적인 가치와 제도, 인권이 가장 크게 후퇴했는데 이 시기에 스리랑카 경제는 신자유주의 헤게모니로 인해 급격히 세계화와 시장 자유화의 위협을 받았다. 스리랑카 헌법은 기본권으로 언급된 사상, 양심, 종교의 자유, 인종, 종교, 언어, 카스트, 성별, 정치적 의견, 출생에 따른 비차별을 포함한 평등권, 임의적인 체포 구금으로부터의 자유, 표현, 집회, 직업, 이동할 자유 등과 같은 모든 권리 행사가 국가안보에 관한 법에 따라 제한을 받을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6) 헌법에서는 훼손될 수 없는 두 가지의 권리, 즉‘사상과 양심, 종교의 자유’그리고‘고문이나 잔 인하고 비인도적인 대우와 처벌로부터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는데, 불행히도 후자 의 경우 지속적인 기본권 침해를 막아오지 못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스리랑카의 대테러법 및 대테러정책은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벌어진 참극 이후 범세계적 ‘테러와의 전쟁’이 촉발되기 훨씬 전부 3) 분쟁의 원인은 Tambiah, Stanley. J. Sri Lanka Ethnic Fratricide and the Disma ntling of Democracy.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 91 참조.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국가적-비국가적 폭력의 연보 및 결과는 Hoole, R.. Sri Lanka: The Arrogance of Power – Myths, Decadence and Murder, Univ ersity Teachers for Human Rights. Colombo: Jaffna. 2001, 그리고 Saigol, R. “The State and the Limits of Counter-Terrorism: The Case of Pakistan and Sri Lanka”, Council of Social Sciences. Pakistan, Islamabad. 2006 참조. 4) Leary, Virginia A. “Ethnic Conflict and Violence in Sri Lanka (1981)”, Inter national Commission of Jurists. Geneva, 1983. pp. 47-48. 5) Sieghart, P. “Sri Lanka: A Mounting Tragedy of Errors, International Comm ission of Jurists and JUSTICE”. London, 1984. p. 34. 6) Constitution of the Democratic Socialist Republic of Sri Lanka 1978. Section A. 15 (7). http://www.priu.gov.lk/Cons/1978Constitution/1978ConstitutionWitho utAmendments.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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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 존재했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정치적, 군사적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스리랑카 국내에도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첫째, 국제사회의 인권법 및 형사법과 절차에 명백히 어긋나는 법률과 정책, 관 행이 정당화되기 시작했다. 둘째, 군사주의 영향으로 스리랑카 내전을 민족자결권 투쟁이 아니라 토착 테러리즘 문제인 것으로 규정하게 되었다. 셋째, 타밀 분리주 의 반군인 ‘타밀일람 해방 호랑이(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 LTTE)’를 고립시키기 위한 해외 로비, 은밀한 첩보 혹은 군사작전, 공개적인 군사행동, 반자 유법,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 등을 통해, 국내외적으로 정부의 대테러 공세에 관대 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2. 대테러법에 대한 분석 위에서 밝힌 대로, 스리랑카에서는 두 가지의 법령이 대테러를 목적으로 사용되 고 있다. 그것은 공공치안법령(1947년 법률 25호)과 테러방지(임시조치)법(PTA, 1979년 법률 48호)이다.7) 9.11 이후 새로운 대테러법으로 2005년에 제정된
테
러리스트 자금 조달 억제에 관한 법(Convention on the Suppression of Terrorist Financing Act)과 2006년의 자금세탁 방지법(Prevention of Money Laundering Act)에 대해서는 지면 관계상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겠다. ■ 공공치안법령 공공치안법령은 헌법 155조에 따라 대통령의 선언만으로 간단하게 비상조치 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행정부에 부여한다. 이 비상조치는 헌법을 제외한 일반 법 조항을 ‘대체하거나, 수정하거나, 효력 정지시킬 수 있는’ 법적 효력을 지닌
7) Weliamuna, J. C. “The Story of National Security Laws in Sri Lanka (200 0)” in Law & Society Trust (ed.), Aspects of 50 Years of Law, Justice and G overnance in Sri Lanka, Law & Society Trust: Colombo, 2005. pp. 399-434; C oomaraswamy R. and C. de Los Reyes. “Rule by Emergency: Sri Lanka’s P ostcolonial Constitutional Experience”, International Journal of Constitutional Law, Vol. 2, No. 2. (2004). pp. 272-295; Welikala, A. “A State of Permanen t Crisis: Constitutional Government, Fundamental Rights and States of Emerg ency in Sri Lanka.” Centre for Policy Alternatives. Colombo, 2008. pp.173-2 06; Bastiampillai, B., Edrisinha, R. and N. Kandasamy(eds.), Prevention of Te rrorism Act: A Critical Analysis. Centre for Human Rights and Development. Colombo, 2010; and Punyasena, W., “The Legacy of Emergency Rule”. Disse nting Dialogues, No.1. November 2010, pp. 9-12.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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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공공치안법령에 따르면 ‘공공 안보와 사회 질서 유지 및 반란, 폭동, 소요의 제압, 혹은 공동체의 삶에 필수적인 물자 및 서비스 공급 유지’가 이러한 조치 의 근거가 될 수 있다. 대통령이 선언한 비상사태는 최장 14일 동안 유효하다. 그 이후로는 한 달마 다 의회가 비상사태의 연장을 비준해야 한다. 1986년에 제10차 헌법 개정을 통 해 의석의 2/3 이상의 지지를 요구하는 조항을 없앤 이후, 과반수만 넘으면 비 준이 가능하게 되었다. 의회에 비상사태를 취소하거나 최소한 심의라도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한 번도 행사하지 않은 것은, 스리랑카 의 회 의원 대다수의 민주주의적 양식과 양심을 의심할 수밖에 없게 한다. 비상사 태 연장 비준에 대한 의회 토론에 대한 참석률은 매우 낮으며 타밀계 야당 의 원들만이 끊임없이 이 조치에 대해 토론하고 반대표를 던지고 있다. 비상사태 선포에 대한 법률적 이의신청에 대해 사법부 내에서 많은 공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별 규정들은 헌법에 불합치한 부분으로 남아있다. 1987 년 대법원은 ‘비상사태의 필요성과 그 목적이 시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심의할 권한이 대법원에 있다’고 판결했다.8) 임의적 체 포와 구금의 경우 구금, 체포 명령이 떨어진 사람을 보호할 의무가 있고, 스리 랑카 인권위원회에 48시간 내에 구금 및 체포 상황을 알리고 구금 장소에 관계 자가 접근이 가능해야 하며 피해자의 상태를 묻게끔 되어 있다.9) 2006년 7월 대통령은 무장세력의 지도자를 체포하고 구금하라는 명령을 내 렸다.10) 경찰은 그들에게 비상사태 규정과 테러방지임시조치법(PTA)에 따라 ‘누구든 적절한 절차와 법에 따라 체포할 수 있다’고 공지했다. 이러한 사건은 2007년 7월에도 현직 대통령이 대규모의 체포 및 구금 명령을 내리면서 재차 발생했다. 8) Joseph Perera (조셉 페레라) 대 법무장관 소송 판결문. http://www.lawnet.lk/docs /case_law/slr/HTML/1992SLR1V199.htm (1987년 판결). 이 소송에서는, 팜플렛이나 포스터의 배포를 허가하거나 불허할 수 있는 절대적 재량권을 경찰에게 부여하는 법 규에 이의가 제기되었고, 해당 법규는 무효 판결을 받았다. 표현의 자유를 행사할 시 민의 권리를 제약했기 때문이며, 금지사항과 국가안보 및 공공질서 사이에 합리적이 거나 긴밀한 연관관계가 없기 때문이었다. 9) Human Rights Commission of Sri Lanka. Act No. 21 of 1996, Section. 28 (1) & (2). http://www.hrcsl.lk/PFF/HRC%20Act.pdf. 10)“Presidential Directives on Fundamental Rights Re-circulated”, http://www. news.lk/home/2235-presidential-directives-on-fundamental-rights-re-circul ated; ‘Emergency Laws and International Standards’, International Commi ssion of Jurists, Sri Lanka. 2009, pp. 19-20 의 비평 참고. http://www.icj.org /IMG/SriLanka-BriefingPaper-Mar09-FINAL.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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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체포되거나 구금된 모든 사람들이 인권위원회에 통보되지 않을 뿐만 아 니라 비밀리에 마련된 구금 장소에 대해서는 인권위원회가 알지 못한다. 어떤 경우에는 인권위원회가 인권을 보호하고 증진해야할 국가기관으로서 인권 피해 자를 위해 제대로 민감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정부로부터 독립적이지도 않다.11) 현재의 비상사태는 타밀 호랑이 반군이 라크시만 카디르가마르(Lakshman Kadirgamar) 외무장관을 암살한 후 2005년 8월12)에 선포된 것이다. 2006년 12 월에 새로운 법이 시행되면서 정국은 더욱 삼엄해졌다. 이 법은 테러방지법의 양형기준을 그대로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캐나다, 영국, 미국의 법(애국자법 포 함)에서 빌려온 조문을 통해 처음으로‘테러리즘’을 정의하고 있다.13) 정부의 인권 기록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속적인 조사와 정치인들, 시민사회운 동가들의 요구 결과, 2005년 8월의 비상사태 규정들은 2010년 5월에 수정되었 다. 검시를 하지 않고 시신을 처분할 수 있게 하는 등의 몇몇 끔찍한 조항들이 폐지되었고, 국가안보를 위협할 우려가 있는 인물을 예방차원에서 구금할 수 있 는 기간이 1년에서 3개월로 줄어드는 등 느슨해진 조항들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비상사태법을 위반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이동의 자유에 제한을 가하 고 필수서비스 분야의 노동조합의 활동에 재갈을 물리기 위한 새로운 규정들이 도입되었다.14) 11) Skanthakumar, B., “‘Window-Dressing?’: The National Human Rights Co mmission of Sri Lanka”, Law and Society Trust Review. Vol. 20 (No. 262), August 2009. pp. 5-26. http://www.lawandsocietytrust.org/web/images/PDF/ HRCSL%20Report%202009.pdf 참조; “Sri Lanka: Atrophy and Subversion of t he Human Rights Commission” in Gil, E, P. A. M. Dawson and E. Legaspi (eds.), 2010 ANNI Report on the Performance and Establishment of National Human Rights Institutions in Asia, FORUM-ASIA, Bangkok 2010, pp. 207-22 2, http://forum-asia.org/2010/ANNI2010_TEXTONLY.pdf. 12) 비상 (기타조항 및 권한) 법규 제01호. 2005년 8월 13일; Nissan, E. (ed.), “Sri L anka: State of Human Rights 2006,” Law & Society Trust, Colombo, 2007. pp. 167-228, 특히 pp. 196-217에 실린 Edirisinghe, S. ‘Emergency Rule’의 비판을 참조. 13) 비상 (테러리즘과 특정 테러 행위 방지 및 금지) 법 제07호 2006년 12월 6일; Nissa n, E. (ed.), “Sri Lanka: State of Human Rights 2007”, Law & Society Trus t. Colombo, 2008. pp. 122-160, 특히 pp. 127-131에 실린 Edirisinghe, S., ‘E mergency Rule’ 참조; “One Year On: Counter-Terrorism Sparks Human Ri ghts Crisis for Sri Lanka’s Minorities”, Minority Rights Group Internationa l. 2007 12월. http://www.minorityrights.org/?lid=4583. 14) “Changes to Emergency Regulations: CRM Examines Recent Amendment”, E 01/05/2010, Civil Rights Movement of Sri Lanka, Colombo, 2010년 5월 15일.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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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테러방지법에 의해 구금된 언론인의 석방을 요구하는 포스터
■ 테러방지법(PTA) 테러방지(임시조치)법은 원래 1979년에 3년의 시한을 두고 발효되었기 때문에 공식 명칭에 임시조치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이 법은, 제정을 비판했던 이들이 애초에 예상했던 대로 1982년 상설법으로 개정되었으며, 실패로 끝난 몇 번의 평화협상 도중에 잠시 효력이 정지되었던 것 외에는 지금까지 계속 시 행되고 있다. 이 법이 표방하는 목표는 정권교체를 달성하기 위한 무력 사용 등의 테러행 위 및 불법행위를 방지하는 것이고 주로 타밀족을 겨냥한 법이라고도 했지만, 이 법을 비판한 측이 경고한대로 테러방지법은 한 부류의 국민에게만, 어떤 인 종이나 소수 집단에만 적용될 수 있는 법이 아니었다.15) 이 법은 싱할라족 내 반정부 성향의 시민들을 박해하는 데 악용되었고, 노동조합을 공격하는 데도 쓰 였다. 그리고 당연히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는 데에도 이용되었다. 저널리스트 J.S 티사이나야감(J. S. Tissainayagam)16)은 스리랑카 군대의 반인도적 행위가 서로 다른 공동체간의 악의와 적대를 초래할 수 있다는 기사를 썼다는 혐의로 20년형이 선고되기도 했다. (그 후 그는 국제적인 구명 운동이 일어나면서 보석 으로 풀려났다.) 테러방지법은 ‘테러 행위’ 또는 ‘불법 행위’를 규제하는 법이면서도, 테 러리즘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아태포럼(Asia-Pacific Forum)의 법 15) Sarath Muttetuwegama 의원 (Communist Party–Kalawana) 1982년 3월 11일의 의회 연설, Weliamuna, op. cit., pp. 424에서 재인용. 16) Hattotuwa, S. “Terrorized Media”, Index on Censorship Vol. 38, No. 1: pp. 4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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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 자문위원의 의견에 따르면 법률 위반 범위를 광범위하게 두면 무자격으로 무기를 소지한 사람이나 정부기관의 물품을 훔친 사람이나 작은 반달리즘(기물 파괴행위)에 개입된 사람들까지 의도치 않게 포함시킬 수 있다. 그런 까닭에 경 미한 법률 위반자임에도 과중한 처벌이 부과될 수 있다.17) 이 법으로 처벌하도 록 되어 있는 죄목은 이미 대부분 형법에 의해 처벌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 법의 진짜 목표는 징벌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1. 일부 범죄에 무기징역을 비롯한 가혹한 형벌을 내리고 공공표지판 훼손 등 에 최소 5년에서 20년의 징역을 선고하며,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피고의 모든 동산과 부동산을 몰수한다. 2. 일반 형사법에서 피고에게 보장되는 기본적이며 제한적인 안전장치를 박탈 하고 있다.(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으며, 영장심사를 받지 않고 72시간까지 구금할 수 있으며 구금 중 자백의 증거능력이 인정되는 등) 3. 관계 장관의 재량만으로도 범죄행위를 저지를 우려가 있는 인물을 예방 목 적으로 최대 18개월까지 구금할 수 있으며 재판을 무기한 연기할 수 있다. 4. 사후에라도 ‘불법’으로 간주되는 모든 행위는 소급 적용된다. 행위 당시에 처 벌 규정이 없었다고 해도 처벌 가능하다. 굳이 강조할 것도 없이 위에 열거한 조항들과 그 외의 더 많은 조항들은 스 리랑카가 1980년 6월에 서명한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협약( International Covenant on Civil And Political Rights, ICCPR)18) 위반이며, 이 를 유엔 인권위원회19) 등의 조약기구들이 지적한 바도 있다. 스리랑카와 같이 민족 갈등으로 양극화되어 있고 내전으로 피폐해진 나라에 서 대테러 법들의 무차별적이고 무분별한 악용이 어떤 악영향을 낳는지는 단순 히 해당법률을 독해하는 것만으로는 짐작하기 어렵다. 대테러 법과 정책들에는 17) “Reference on the Rule of Law in Combating Terrorism,” Advisory Council of Jurists of the Asia-Pacific Forum of National Human Rights Institutions. Sydney, 2004. pp. 30-31. http://www.asiapacificforum.net/acj/references/acj -references-terrorism-and-rule-of-law/downloads/reference-on-terrorism-a nd-the-rule-of-law/final.pdf. 18) Ganeshalingam, S. V. “PTA Violates International Human Rights Standard s”, Beyond The Wall. Vol. 1, Issue 1 (June-August 2002), Home for Human Rights. Colombo, pp. 22-34. 13번째 단락, Sri Lanka: Concluding Observatio ns of the Human Rights Committee, CCPR/CO/79/LKA, 2003년 12월 1일. p. 4, http://daccess-dds-ny.un.org/doc/UNDOC/GEN/G03/456/23/PDF/G0345623. pdf?OpenElement. 19) Sri Lanka: Human Rights Committee(인권위원회)의 최종 논평. 13 번째 단락. CC PR/CO/79/LKA, 2003년 12월 1일. p. 4. http://daccess-dds-ny.un.org/doc/UN DOC/GEN/G03/456/23/PDF/G0345623.pdf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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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의도가 깔려 있으며 그 중 어떤 것도 무장갈등의 원인은 커녕 폭력 테 러를 대처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신 그러한 법과 정책들은 타밀족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박해하는 데 쓰였고, 정권을 평화로운 방식으로 반대하는 자들을 억누르는 현 정권의 칼과 방패로 쓰였다. 이 조치는 타밀족의 투쟁을 비 합법적인 형태로 변질시키고 권위주의를 양산시켜 행정부의 중앙 집권적 권력 을 강화시키고 있다.
비상사태가 해제되는 동안 테러방지법이 강화된다는 내용, 2011년 8월 31일 Daily Mirror
3. 대테러 조치와 정책 스리랑카의 대테러리즘 조치는 1971년부터 여러 정권을 거치는 동안 법과 비상 사태 조치, 정책 결정 등과 복잡하게 맞물려왔다. 그 결과 다양한 대테러 정책이 혼재하게 되었다.20) 이 글에서는 최근 몇 년 동안 가장 두드러졌던 정책들만을 소 개할 것이다. 그 중 일부는 2009년 5월 내전이 끝난 후 효력이 정지되거나 폐지 되었다. ■ 예방적 구금 수만 명의 젊은 타밀족 남성들은 (다른 사람들도 소수 섞여 있었다) 연기된
20) 관계 토론을 읽어보려면 Manoharan, N., “Counterterrorism Legislation in Sri Lanka: Evaluating Efficacy,” Policy Studies. No. 28, East-West Center. Was hington, Washington D.C., 2006, 특히 30쪽~38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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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날짜를 기다리고 있거나 강요된 자백이나 정황 증거를 근거로 몇 년씩 수 감되어 있다.21) 일부 구금 장소는 위치가 확인되지 않아 국제적십자사나 스리랑 카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도 받지 않고 있다. 공식 통계자료에 따르면, 내전 막 바지에서 종전 직후에 이르는 기간에만 최소 11,700명의 타밀족이 구금된 것으 로 추정되며, 종전 후 1년이 지난 시점에도 최소 8,000명이 구금되어 있는 상 태였다.22) 2011년 6월까지 공식적인 죄목도 없이 갱생을 목적으로 감금된 사람 만 4,500명이다.23) ■ 보안구역(High Security Zone) 국가안보기관들이 대규모의 농지와 어로수역을 점유하면서 주민들의 권리를 빼앗아왔다. 특히 북부와 동부지역 거주자들이 자신들의 집에서 살 권리, 어로 활동을 하거나 농사를 지을 권리,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우물이나 물탱크에 접 근할 권리 등을 빼앗고 언제 줄 것이라는 기약도 없이 손해배상이나 보상을 하 지 않고 있다. 그러는 동안 이들의 땅은 심각하게 채굴되고 있다. ■ 경제봉쇄 최소 1990년부터 내전 기간 내내, 특히 정부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서는 타밀 호랑이 반군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간주되는 물품이나 의약품, 식량 유입을 통제하였다.24) 금지된 물품에는 자전거, 라디오, 발전기, 화학비료, 등유, 비누, 비스켓, 코코넛 오일, 초콜릿 등이 있다. 내전 종식 후 민간에게 A-9 도로가 다시 열리면서 이러한 제한은 사라졌다. ■ 검문소 주요 도로에 일정한 간격으로 수많은 검문소가 설치되었다. 누구든, 어떤 차 21) Amnesty International. “Forgotten Prisoners: Sri Lanka Uses Anti-terrorism Laws to Detain Thousands,” ASA 37/001/2011, 2011년 2월. http://www.amne sty.org/en/library/asset/ASA37/001/2011/en/64530ad7-76a6-4fb1-8f46-996c85 43daf8/asa370012011en.pdf. 22) International Commission of Jurists. “Beyond Lawful Constraints: Sri Lank a’s Mass Detention of LTTE Suspects”, 9쪽-10쪽, 2010년 9월, http://www.i cj.org/dwn/database/BeyondLawfulConstraints-SLreport-Sept2010.pdf; Human Rights ; Watch, Legal Limbo: The Uncertain Fate of Detained LTTE 23) “500 More Ex-combatants to be Released,” Daily Mirror. Colombo, 2011년 6월 20일. http://print.dailymirror.lk/news/news/47470.html. 2010년 2월. http: //www.hrw.org/en/reports/2010/02/02/legal-limbo-0 24) Paust, Jordan J. “The Human Rights to Food, Medicine and Medical Supplie s, and Freedom from Arbitrary and Inhumane Detention and Controls in Sri Lanka,” Vanderbilt Journal of Transnational Law. Vol. 31, No. 3 (1998). pp. 617-642.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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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이든 무작위로 정지시켜서 수색할 수 있었다. 이때 타밀족 여성들은 성추행의 위험에 노출된다. 최근 콜롬보 주변의 검문소는 줄어드는 반면, 북쪽과 동쪽의 검문소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 신분 등록 북부 및 동부지역 밖에 거주하는 타밀족들은 근처의 경찰서에 신분 등록을 의무적으로 해야 했다. 비상 수색작전이나 경찰 단속이 있을 때, 검문소를 지날 때 등록증을 제시해야 했다. 등록증이 없는 경우 구금과 심문을 받을 수 있다. 이 조치는 내전이 끝난 후에 완화되었고 현재는 신분카드만으로도 충분하게 되 었다. ■ 강제 이주 2007년 6월 376명의 타밀족이 콜롬보의 거주지에서 강제로 쫓겨나 북부와 동부로 옮겨졌다. 그 중에는 노인과 병자들도 있었다. 다행히도 이 조치는 대법 원에 의해 뒤집어졌고, 그 후로 정부는 더 이상 이 정책을 실행하지 않았다. 그 러나 최소한 수만 명의 타밀족이 보안구역 마련을 이유로 그들의 땅과 집에서 쫓겨났다는 통계가 있다. ■ 비밀 수용소 내전 막바지부터 종전 직후까지 약 30만명의 타밀족이 군부의 관리를 받는 비밀 수용소에 억류되어 있었으며, 그들에겐 이동의 자유도 외부 기관과의 접촉 도 허용되지 않았다. 체포에 관한 아무런 서류도 없이, 그들의 행방에 대해서 가족들도 모르는 채 수용소에서 사라진 이들이 있다는 보고들도 있다. 이 수용 소들은 국내외의 강력한 비난이 잇따르자 2009년 12월에 공개되었으며, 지금은 수용자가 몇 천 명만 자발적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대테러리즘 정책에 따른 지역 검문, AP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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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테러 법률과 정책들이 존재하거나 강화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스리랑카의 테러 리즘을 철폐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로, 전쟁이 계속되면서 타밀 호랑이 반군의 역량은 육상과 공중에서 점점 더 강력해졌다. 반면 대테러정 책의 그물망에 걸려든 사람들 중에 정말로 테러 범죄에 가담한 사람이 손으로 꼽 을 만큼이나 있었는지도 의심스럽다. 한 대테러리즘 전문가는 스리랑카의 경험을 ‘테러와의 전쟁에서 우리가 종종 보 게되는 징조들, 즉 폭력의 원인보다 증상에 초점을 두고 폭력이 나타난 이유를 잘 못 해석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으로 보았다.25) 대테러 정책이 실제로 가져온 결과는 다음 세 가지였다. 첫째, 자유민주주의 제 도를 약화시킴으로써 지나치게 강력한 행정부와 억압적인 국가기구로부터 시민들 의 권리를 지키지 못하게 했다. 둘째, 타밀족 사람들을 혈통만으로 범죄자로 취급 해 타밀 공동체를 사회로부터 소외시켰고26), 타밀족 자치운동, 심지어 분리 독립 운동에 대한 지지를 결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마지막으로, 심각한 인권 유린에 대한 면책을 장려하고 정당화했으며 희생자들에 대한 책임을 부정하였다. 2000년에서 2007년 사이에 있었던 잘못된 체포나 구금과 관련하여 대법원 결 정에 관한 최근 분석은, 행정부의 구금명령만 있으면 판사에게 관련 서류를 즉각 제출하지 않아도 감금이 연장되는 것이 일상다반사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한 사례들 중에는 처음에 근거가 없거나 터무니없는 의심만으로 체포된 후 구금 중에 ‘자백’인 것으로 조작되어 범죄자가 된 것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경향에도 불구하 고 법원은 비상사태법 아래에서 발생한 기본권 침해문제를 조사하는데 침묵으로 일관하였다.27)
25) Marks, Thomas A., “Sri Lanka and the 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 i n Art, Robert J. and Louise Richardson (eds.), Democracy and Counterterrori sm: Lessons from the Past, United States Institute of Peace, Washington D. C. p. 515 참조. 26) “The targeted Tamil mass base; although alienated, was unwilling to reject participation in the democratic system until the state demonstrated its absol ute unwillingness or inability to incorporate and protect them.” pp. 484-48 5. Marks, Thomas A., "Sri Lanka and the 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 in Art, Robert J. and Louise Richardson (eds.), Democracy and Counterterror ism: Lessons from the Past. United States Institute of Peace, Washington D. C.; Uyangoda, J. “Banning, the PTA etc.” Daily Mirror. Colombo, 2006년 12월 9일. http://tamilweek.com/news-features/archives/690 참조. 27) Jayachandra, M. and D. Samararatne. “Judicial Response to the Right to Li berty in terms of the Fundamental Rights Jurisdiction of the Supreme Court (2000-2007),” Law & Society Trust Review. Vol. 21, Issue 281 & 282, (Marc h & April 2011): pp. 1-68. 특히 p. 33 참조.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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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서술한 대로, 행정부는 비상사태법을 통해 의회를 거치지 않고도 입법자로 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대테러법과 관련 조치가 당파를 초월하여 공 감을 얻고, 싱할라족 의원들의 종족의식과 연대로 굳어지자 입법기관인 의회는 비 상사태의 기간을 연장할 때 최소한의 감시 기능을 수행하거나 테러방지법에 대한 개정안을 상정하지도 않았다. 1972년에 만들어진 최초의 ‘공화국 헌법’에서 시작해, 1978년 헌법의 원칙으로 강조된 후 일련의 헌법 개정을 거치면서, 국가의 권력은 행정부에 집중되고 입법 부와 사법부는 경미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2년 전에 내전이 끝났지만 국가와 사회의 군사화는 약해지지 않았다.28) 군부는 민간 정부를 감독하고 있는데, 주로 북부와 동부에서 그랬던 것이 최근에는 국방 부를 통해 다른 영역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NGO의 등록과 도시 개발 등도 관리하고 있다. 군부 출신이 북부와 남부 지역 정부기관의 권위 있는 자리에 임명 되어 투표로 선출된 관리나 민간인들을 감독하고 있다. 그리고 군사시설을 해체하는 대신, 군 기지의 규모를 키우고 기지도 여러 곳에 건설하고 있다. 군 출신 인사들이 경제활동에까지 개입하여 민간인들이 접근할 기 회를 차단하기도 한다. 전쟁이 끝난 후 군 예산은 실질적으로 증가했는데, 이는 정 부의 보건 예산과 교육 예산을 합친 것보다 훨씬 큰 규모이다.
4. 대테러법과 정책에 대한 시민사회의 대응 역사적으로, 비판적인 시민사회운동가들이 대테러법과 그것이 시민권, 인권, 소 수자 인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다양하게 대응해 왔다. 헌법적 자유나 국제인권 법적 관점에서 법조항을 자세하게 분석해 행정부나 의회를 설득하기 위해 피케팅, 시위와 노조 파업, 대법원에 제소하기, 집회와 세미나를 통한 대중 교육과 의식 제 고 등의 활동을 해왔다. 이런 운동의 중요성은 반대 의견을 표현하는 것 자체에 있었으며, 정부 당국자들이 합리적으로 변화하거나 아주 드물게는 조용히 물러서 도록 압박하는 효과도 있었다. 비판적 시민사회운동가들이 겪어온 가장 큰 어려움은 다수의 시민들을 움직일 수 없었다는 점이다.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싱할라족은 대테러법과 정책들이 정당하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그 법제들이 법치주의에 미치는 영향, 정부 안보 당 국자들에 대한 면책특권 문제, 다른 시민들이 겪고 있는 인권침해에도 불구하고 지지하고 있다. 권리를 침해당하는 사람들이 타밀족이든 노동운동가든 언론인이든
28) Rajasingham-Senanayake, D., “Is Post-War Sri Lanka Following the ‘Milit ary Business Model?’,” Economic and Political Weekly (Mumbai), Vol. XLV I, No. 14, 2001년 4월 2일. pp. 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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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옹호자이든 상관없이 싱할라 불교 민족주의가 대두되고 스리랑카의 분단에 대 한 우려가 높아지면서 이와 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비정부 인권 단체들 또한 그런 법률과 정책들의 공격과 억압에 취약하다.29) 인 권옹호자들에겐 대테러 정책에 반대하고 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주장이나 행동 을 했다는 이유로 ‘반국가세력’이라는 낙인이 찍힌다.30) 시민사회운동가들과 인도 주의활동가들도 초법적인 살인과 강제 실종, 납치, 습격, 강제 구금, 투옥, 경찰 조 사 등에 희생 되어왔다.
5. 결론과 제언 민주주의와 인권규범에 따라 대테러법과 정책의 문제점들을 교정하기란 매우 어 렵다. 유엔인권이사회의 전(前) ‘대테러 과정에서의 인권과 기본적 자유의 보호와 증진에 관한 특별보고관’인 마틴 쉐이닌(Martin Scheinin)의 최종 보고서에는 ‘대 테러리즘에 개입하고 있는 국가들을 위한 10가지 유익한 관행’을 제안하고 있 다.31) 이것은 국제인권법과 인도주의법, 난민법에 각 국가의 법과 관행을 합치시 킬 것, 임시조치법보다 일반법을 활용하고 과도한 조치가 아닌 비례한 수단을 이 용할 것, 일몰 조항을 포함해 대테러 조치를 정기적으로 검토하고, 인권침해 피해 자에게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적용될 구제책을 마련할 것, 테러와 대테러의 희생자 들을 지원하고 배상할 것, 국제법에 따라 테러리즘의 개념을 정의할 것, 테러리스 트 명단 작성에 세이프가드(Safeguard)를 마련할 것, 테러리스트 용의자를 심문, 체포하는 기준과 관례를 마련할 것 등이다. 스리랑카 정부는 범죄예방을 목적으로 구금된 모든 사람들의 이름과 구금된 위 치를 공개하고 그들이 죄목이 없는 이상 신속히 석방해야 한다. 보안구역을 해제하 29) Samaraweera, V.“Sri Lanka: Politics, National Security and the Vibrancy of NGOs,” (‘Promoting Three Basic Freedoms: Towards Greater Freedom of As sociation, Assembly and Expression in Asia’ Regional Report의 국가별 보고 서), Law & Society Trust. Colombo, 1997. 30) Skanthakumar, B. “‘The Enemy Within’: Human Rights Defenders in Sri Lanka”, Law & Society Trust Review. Vol. 19, Issue 53 (November 2008): p p. 1-15. http://www.lawandsocietytrust.org/PDF/Enemy%20Within%20HRDs%2 0in%20Sri%20Lanka.pdf. 31) Martin Scheinin. “Ten Areas of Best Practices in Countering Terrorism,”대 테러 과정에서 인권과 기본적 자유의 보호와 증진에 관한 특별 보고관(Special Rapp orteur on the Promotion and Protection of Human Rights and Fundamental F reedoms while Countering Terrorism). United Nations. A/HRC/16/51, 2010년 1 2월 22일. http://daccess-ods.un.org/TMP/6376544.83318329.html.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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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압류한 땅과 어업권을 반환해야 한다. 당연히 비상사태를 해제하고 공공치안법 령을 인권규범에 따라 개정하고 테러방지법을 폐지해야 한다. 북부와 동부지역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지역에서 국가 행정기관의 탈군사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마지막 으로, 대통령제 폐지와 콜롬보와 지방사이의 권력분산을 포함하여 행정부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이루어지도록 헌법에 근거한 근본적인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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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대테러법과 정책이 인권에 미친 영향
고빈다 프라사드 샤르마 코이랄라(Govinda Prasad Sharma Koirala) 대법원고등변호사 (네팔)
1. 여는 말 “개인적으로 그 같은 국제테러 주모자에게 정의가 실현되었다는 소식에 크게 안 도하였습니다.” 이것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발표한 빈 라덴 사망에 대한 성명의 일부로, 반 총장은 전 세계가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지금 이번 사건이 중요한 전환점 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 성명은 테러에 대처하는 유엔의 역할에 대하여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9.11 이후 마련된 전 지구적 대테러 전략이 빈 라덴 사망 이후 재검토될 것인지 예단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2001년 9월 11일에 있었던 미국에 대한 공격은 국제사회가 전 지구적 차원의 ‘대테러전략’을 마련하게 했고, 이후 지역적 그리고 국가적 차원에서 모두 수용되 었다. 이것은 네팔의 결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네팔이 당시 ‘네팔공산당(마오주의 자, Unified Communist Party of Nepal, CPN)’ 당원들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한 것 은 국제사회가 반란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으로 돌아서게 하고, 손쉽게 안보를 위 한 지원을 확보할 수 있도록 했다. 미국과 인도 등 여러 국가들이 네팔이 ‘테러와 의 전쟁을 벌이는 것’을 지지한 것이다. 그 결과, 의회는 비상사태를 선포하여 기 본권을 제한하고 왕립네팔군(현 네팔군, Nepal Army)이 군사작전을 수행하도록 하는 대테러법을 제정했다. 비상사태 선포와 대테러법, 대테러정책의 도입으로 심각한 인권침해, 특히 절대 적 권리마저 침해되었고1), 사법 절차를 거치지 않은 사형(extra-judicial killing),
1) 자세한 내용은 2003 Human Rights Commission(국가인권위원회) 보고서 pp.62, 7.1 참조.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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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권력 개입에 의한 실종, 자의적 구금 등 모든 것이 급격히 증가하였다.2) 법치의 붕괴는 사실상 공안요원의 이러한 행태를 부추겼다. 공안은 수많은 언론인, 학생지 도자, 정치가, 변호사, 마오주의에 동조한다는 혐의를 받는 사람들을 체포했고 그 후 이들은 실종되어 다시는 볼 수 없었는데 그들은 구금기간동안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테러조치의 도입은 테러 행위 그 자체보다 훨씬 더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이러한 조치들이 필요했는지, 과연 성공적이었는지 대해 논란이 되고 있 다. 네팔의 사례는 또한 이러한 조치 이전에 있었던 소위 ‘인민 전쟁(People’s War)’당시보다 훨씬 더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음을 보여 준다. 이는 ‘테러와의 전쟁’, 특히 전 지구적 및 지역 단위에서 시행되는 대테러 전략 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네팔의 사례를 통해 테러리즘을 구성하는 요소를 알아보고자 한다.
2. 정치적·법적 맥락 1996년 ~ 2006년 네팔은 10년 간 국내적으로 무장갈등을 겪었고, 정치적, 경 제적 불안정으로 인해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갈등은 2001년 11월 비상사태 선포 와 왕립네팔군대 배치, 그리고 이것이 마오주의자들의 수차례 보안군 거점 공격으 로 이어지면서 더욱 격화되었다.3) 네팔 정부는 이 반란의 원인을 단지 법과 질서의 문제로 보고, 경찰력을 동원했 지만 경찰력은 빠른 속도로 확산되는 반란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 들은 반란의 원인이 외세에 있는 양 몰아갔는데, 대개는 인도 그리고 때때로 미국 이 마오주의자들을 지원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만 한 근거도, 설득적인 논거도 내놓지 못하였다. 2001년 11월 26일 갸넨드라(Gyanendra) 왕은 네팔 헌법 제115조 1항에 따라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왕은 헌법적 권리에 따라 군대를 동원하였고, 마오주의자 를 ‘테러리스트’라고 선포하였다. 국민의 기본권과 관련된 조항인 제12, 13, 15, 16, 17, 22, 23조는 모두 정지되었다. 제12조 2항은 의사표현의 자유, 평화적 집 회의 자유, 국내에서의 거주이전의 자유, 제13조는 언론과 출판의 자유, 제15조는 예방차원의 구금을 당하지 않을 권리, 제16조는 정보 취득의 권리, 제17조는 재산 소유 및 처분권, 제22조는 사생활 권리, 제23조는 헌법상 구제 조치를 받을 권리 2) “Nepal: Danger of Disappearance Escalates,” Human Rights Watch. http://hr w.org/english/docs/2005/02/09/nepal10152.htm (최근 방문: 2007년 12월 19일) 3) 마오주의자들의 반란은 네팔의 입헌군주제를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수립하기 위하여 1 996년부터 계속되고 있다. 현재까지, 1만 3천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h ttp://www.inseconline.org/hrvdata/kill_data.php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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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규정한다. 네팔의 시민인권지원센터(INSEC)는 2001년 11월 26일부터 2002년 8월 28일 까지 비상사태기간 동안 발생한 사망자의 81퍼센트가 국가에 의한 것으로 추정한 다. 비상사태 종료 후, 사망자 수는 줄었으나 여전히 국가에 의한 사망자 비중은 마오주의자들에 의한 사망자 비중보다 훨씬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비상사태는 두 번 연장되었는데, 한 번은 의회4)의 승인에 따른 것이었고, 두 번 째는 2002년 5월 27일 의회를 해산시키고 헌법 절차5)를 우회하여 이루어진 것이 었다. 비상사태는 9개월 동안 유지되었고 2002년 8월 27일에 마침내 해제되었다.
3. 테러와 파괴행위(예방과 규제)에 관한 법률(TADO/TADA)의 공포 왕은 또한 비상사태를 선포한 3일 후에 ‘2001 테러와 파괴행위(예방과 규제)에 관한 령[Terrorist and Disruptive Activities (Prevention and Control) Ordinance, 2001, 이하 TADO로 명기]’을 발표하였다. 정부는 이 명령을 통해 마오주의자와 그 자매조직을 ‘테러단체’로 선포하였다. 2002년 3월, TADO는 의회의 승인을 받아 ‘2002 테러와 파괴행위(통제와 처벌)에 관한 법률[Terrorist and Disruptive Activities (Control and Punishment) Act, 2002, 이하 TADA로 표기]’로 바뀌었 다. 정부는 이 법의 기한을 법을 폐지할 때까지로 정하려 했지만 야당의 반대6)로 2년간 한시적으로 적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2년이라는 시간은 마오주의 문제를 종 식시키기에 충분하지 않았으므로, 정부는 TADO를 공포하여 기간을 연장했다. 2004년 10월 13일, 네팔 정부는 더 강력한 TADO를 공포하여 공안에게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또한 공안은 법원의 조사 없이 용의자를 최대 1년간 ‘사람이 지낼만한 장소’에 예방차원의 구금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반정부 인사들이 실종되고 이들이 고문을 당할 가능성이 커졌다.7) 이러한 구금 규정은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를 초래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보고 서8)를 통해 공안이 사람들을 체포하거나 구금하는 과정에서 여러 명을 살해했다 4) 거의 모든 정당이 국가가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것을 지지하였고, 의회는 2002년 2월 22일 이후 3개월 간의 비상사태 기간을 승인했다. 5) 2002년 5월 22일, 세르 바하두르 데우바(Sher Bahadur Deuba) 총리는 의회를 해산 했는데, 자신이 속한 네팔의회당(NC)을 포함한 거의 모든 정당이 비상사태 연장 필요 성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6) 네팔 정부는 테러법의 기한을 2년으로 하는데 동의하였다. 2002년 3월 26일자 The Kathmandu Post; BBC Monitoring Service의 Nepalnews.com 웹사이트 모니터링 내용에서 재인용. 7) 자세한 내용은 고문방지협약(CAT), 2.3.4차 네팔 정부보고서에 대한 대안보고서 pp. 38 참조. 8)‘비상사태와 인권‐ 2003 인권상황보고서,’국가인권위원회, 카트만두, 2002, pp. 14.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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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밝혔다. 보고서는 또한 파르바트(Parbat)에서 남성 1명, 루판데히(Rupandehi) 에서 여성 1명, 라메찹(Ramechhap)과 까브레(Kavre) 지역에서 각각 남성 1명씩 이 체포 또는 구금된 후 군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밝혔다. 마찬가지 로, 테흐라뚬(Tehrathum)에서 21명, 신두팔촉(Sindhupalchowk) 지역에서 4명을 항복시키는 과정에서 살해하였다고 한다.9) 이 보고서는 TADO가 이행된 이후 구 금자 수뿐만 아니라 유사사건의 수가 두드러지게 늘어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비상사태 선포로 인권과 법치의 위기는 더욱 악화되었고, 민주적 절차는 붕괴되 었다.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와 적법한 절차를 받을 권리 등 인권과 기본적 자 유도 제한되었다.
4. 인권적 함의 TADO는 불법적으로 수많은 마오주의 용의자, 언론인, 변호사, 인권운동가 등을 구금하고 고문하는 수단이 되었다. 비상사태 하에서 인신보호영장을 청구할 권리 가 중단되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영장이 전면 기각되거나 무기한 연기되었 다고 네팔의 인권변호사들은 단언한다. TADO에 의하여 구금된 다수는 미성년자이며, 많은 사람들이 (종종 증빙서류도 없이) 체포된 지 몇 개월 또는 몇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행방불명이다. 인신보호 영장 덕분에 석방된 몇 명도 석방된 지 몇 분, 몇 시간 만에 다시 체포되었다. 마 오주의 반군을 공격하는데 있어 사법절차를 거치지 않은 즉결 처형이 사실상 국가 정책이 되었다. 언론의 자유는 제한되었고, 몇몇 마오주의자들의 출판물은 폐간되었다. 마오주의 자와 공안 간의 폭력 사태가 증가하는 것을 취재하려던 언론인들은 양측으로부터 고문과 자의적 구금을 당할지도 모르게 되었다. TADA 하에서 구금이 광범위하게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많은 용의자들이 법 이 허용한 것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 동안 구금되었다.10) 흔히 비밀리에 독방에 구금되고 친척의 면회나 법률적 자문도 금지된다.11) 내무부 통계에 의하면, TADA 시행 후 2003년 7월까지 약 1천명이 구금되었고, 이 중 400명이 석방되었 9) 앞의 글. 10) ‘Nepal’ (2003. 3. 31). United States Department of State Country Report o n Human Rights Practices 2002. Bureau of Democracy, Human Rights, and L abor. (민주주의 인권 노동 사무국). URL: http://www.state.gov/g/drl/rls/hrrpt/ 2002/18313.htm. 11) ‘Nepal: Widespread “disappearances” in the context of armed conflict’ A mnesty International 보고서 2003년 10월 16일. URL: http://web.amnesty.org/l ibrary/Index/ENGASA310452003?open&of=ENG-NP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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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데, 이들 중 재판을 받은 사람은 없다.12) 국제법률가위원회(ICJ)는 2003년 초 네팔에서 진상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조사한 구금 사례 중 ‘절대 다수’가 체포영장 없이 이루어졌고, ‘본인이나 가족에게 체포 사유를 통보하지 않았다’고 한다.13) 지 방관료 책임자가 불법적으로 백지구금허가서를 경찰에 제출했다는 보고도 만연하 다.14) 군대가 장기간 비밀 구금에 관여했다는 보고도 많이 있다. 그러나 군법에 따르 면 군대는 군사작전 과정에서만 사람을 구금할 수 있고, 24시간 내에 민간 당국에 피구금자를 인도해야 한다.15) 2004년 1월, 네팔 변호사협회의 인권위원회는 지난 4개월간 적어도 254명이 실 종되었다고 발표하였다.16) 이들의 행방과 사실상 그들의 운명은 아직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TADO/TADA는 ‘테러활동’에 가담하였거나 혐의가 있는 사람을 체포, 구금, 심 문할 수 있는 권한을 확대했을 뿐만 아니라, 사법적 검토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한편, 당국이 장기간 개인을 예방차원에서 구금할 수 있 는 권한, 광범위한 압수수색 권한, ‘좋은 신념으로 행한’ 어떤 일도 기소되지 않도 록 면책권 행사 등을 부여하는 등 보안당국의 권력을 확대했다. 인신보호영장 청구의 절차도 타당한 사법적 검토를 수반하지 않는다. 경찰이나
12) 앞의 글. 13)‘Human Rights and Administration of Justice: Obligations Unfulfilled’ Inter national Commission of Jurists, Centre for the Independence of Judges and L awyers (Fact-Finding Mission to Nepal)(국제법률가위원회 판사와 변호사의 독립 을 위한 센터 -네팔 조사단). 2003년 6월. URL: http://www.icj.org/news.php3?i d_article=2950&lang=en. 14)‘Nepal: A deepening Human Rights Crisis: Time for international action’ . Amnesty International 보고서. 2002년 12월 19일. URL: http://web.amnesty.org /library/Index/ENGASA310722002?open&of=ENG-NPL; “Human Rights and A dministration of Justice: Obligations Unfulfilled’'.). International Commissio n of Jurists, Centre for the Independence of Judges and Lawyers (Fact-Findi ng Mission to Nepal). 2003년 6월. URL: http://www.icj.org/news.php3?id_arti cle=2950&lang=en. 15)‘Nepal: Widespread "disappearances" in the context of armed conflict' (2003.1 0.16). Amnesty International 보고서. URL: http://web.amnesty.org/library/Ind ex/ENGASA310452003?open&of=ENG‐NPL; 'Human Rights and Administration of Justice: Obligations Unfulfilled’. International Commission of Jurists, C entre for the Independence of Judges and Lawyers (Fact-Finding Mission to Nepal). 2003년 6일. URL: http://www.icj.org/news.php3?id_article=2950&lang =en. 16)‘254 People Disappeared in Last Four Months: Nepal Bar Association’' . Nat ional Human Rights Commission, Nepal 2004년 1월 23일. (전자게시판). URL: http://www.nhrc‐nepal.org/?ID=229&AFD=0.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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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그 누구도 구금자들에 대한 포괄적인 기록조차 갖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이 고, 당국이 누구를 구금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증빙할 수 있는 경우도 드물다.17) 또한 당국이 특정인을 구금하고 있는지 여부를 두고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데도, 위증죄 항목이 없다.18) 인신보호가 허용되는 경우에도 법원의 명령은 무시되기 일 쑤여서 석방된 구금자는 즉각 다시 체포되거나 아예 명령이 거부되기도 한다.19) TADA 제20조에서 순수한 동기(모호하고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에서 한 행위는 면 책된다는 규정으로 인해 이러한 문제는 더 악화되고 있다. 정부 관리가 자의적이 고 불법적인 구금을 관행적으로 계속하는 것을 법률로 허용하고 있는 셈이다.
5. 국제사회의 역할 미국, 특히 부시행정부는 네팔의 정치적 불안과 마오주의 세력의 부상을 지렛대 삼아 네팔 국내 문제에 더 깊게 개입하였다. 이것은 인도와 중국의 사이에 위치한 네팔의 위치가 지리적으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간주되기 때문으로 보인다. 미 행정부는 ‘테러 척결과 테러 공격 방지를 위해 네팔 정부와 협력한다’는 5개년 ‘반테러협정’을 네팔정부와 체결하고, 재정적 지원과 네팔 군대 훈련을 포함한 장 비 지원 등 군사지원을 확대하였는데, 이는 네팔 내에서 흔치 않은 미국의 전략적 조치로 간주된다. 또한 미국은 이 같은 조치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2003년 10월 31일, 행정명령 13224호에 따라 네팔공산당(마오주의자)을 테러단체로 지정하여 미국 내 또는 소 재 불문하고 마오주의자들의 자산을 차단하고 이들과의 거래 대부분을 금지했다. 또한 연합혁명인민회의(United Revolutionary People's Council, URPC)와 마오주 의 인민해방군(People's Liberation Army, PLA)으로 알려진 단체들도 차단 명단 에 올리고 모든 거래에 제재조치를 가했다. 이와 유사하게, 인도는 가장 오랫동안 네팔에 군사 장비를 공급해온 국가 중 하
17)‘Human Rights and Administration of Justice: Obligations Unfulfilled’. Inte rnational Commission of Jurists, Centre for the Independence of Judges and Lawyers (Fact-Finding Mission to Nepal). 2003년 6월. URL: http://www.icj.o rg/news.php3?id_article=2950&lang=en. 18)‘Nepal: A deepening Human Rights crisis: Time for international action’ A mnesty International 보고서. 2002년 12월 19일. URL: http://web.amnesty.org/ library/Index/ENGASA310722002?open&of=ENG-NPL. 19)‘Human Rights and Administration of Justice: Obligations Unfulfilled’. Inte rnational Commission of Jurists, Centre for the Independence of Judges and Lawyers (Fact-Finding Mission to Nepal). 2003년 6월. URL: http://www.icj.o rg/news.php3?id_article=2950&lan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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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다. 그러나 마오주의자들의 반란과 관련한 인도의 역할은 매우 복잡하다. 일부 정치인은 마오주의자들이 인도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인도가 아직도 그 들을 지원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인도는 평화적 문제해결의 출발점이 되고 있는 12합의항의 사실상 핵심 관계자이다. 그럼에도, 인도와 미국은 대테러리즘 공동실 무단(Joint Working Group on counter-terrorism)을 통하여 국제 테러리즘 전쟁 에서의 상호협력을 제도화하였다. 남아시아지역협력연합(SAARC)의 역할 남아시아 8개국은 지역적 차원에서 반테러협력협정을 채택하였다. 반테러협정은 테러행위에 사용될 가능성이 있는 자금의 동결, 안보책임자간 정례회의, 정보교환, 테러와 마약 범죄에 대응할 인력훈련 등을 포함하고 있다. 지난 7월 7일 아프가니스탄 주재 인도대사관 폭탄테러로 41명이 사망한 것에 대해 인도와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파키스탄 정보기관이 이를 지원했다고 비난한 것을 감안하면 협정이행이 순탄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 주장은 이틀간 열린 남아 시아지역협력연합(SAARC) 정상회의에 먹구름을 드리웠다. SAARC는 여러 차례에 걸쳐 대테러리즘을 최우선 의제로 채택하였다. 그러나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그것을 위해 어떻게 나아갈지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그러나 네팔에 있어 인도의 정책은 항상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6. 무장갈등 이후 반란군 진압 정책 네팔 정부는 남부의 평원 테라이(Terai)에 경찰력을 증강시키고, 준군사적으로 무장한 경찰력과 네팔 군대의 역할을 강화하면서도, 거기에 상응하는 민간경찰과 형사법 체계에 대한 지원이나 개혁은 하지 않았다. 인권단체가 경찰과 관계당국에게 사법절차를 거치지 않은 살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 일상적인 작전 수행 중에 무장한 범죄집단과의 ‘충돌’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상투적으로 답변한다. 그 결과 네팔 테라이(Terai) 지역의 인권상황은 계속 악화되고 있다. 치안상황이 악화되는 것에 대응하기 위한 정부의 특별한 치 안정책이 오히려 더 많은 인권 침해를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20)
20) 전국 규모의 비정부단체인 DIHR은 최근 보고서에서 2008년과 2010년에 Terai에서 134건이 넘는 허위 충돌이 있었다고 밝혔다.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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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결론 네팔의 ‘반란군 진압정책’은 정부가 정치적 반대자를 체포하고 소수집단과 기존 체제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따라서 네 팔의 사례는 정부가 채택한 대테러 조치로 인해 분쟁이 격화되고 인권상황이 악화 된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인민 전쟁’의 근본적 요구사항은 입헌군주제를 폐지하고 ‘진정한 인민의 공화국’ 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지금 네팔은 군주제가 폐지되고 ‘네팔연방민주주의공화국’ 으로 불리고 있으나, ‘진정한 인민의 공화국’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새로운 헌법이 어떤 정부 체제가 필요한지를 결정지을 것이다. 물론 마오주의자들의 활동과 전술은 테러 성격을 띠었으나, ‘인민 전쟁’은 빈곤, 실업, 카스트 제도와 성차별로 인한 광범위한 사회적 차별 등 만성적인 사회경제 적 병폐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런데도 일부 유엔기구와 비정부기구를 제외하고 네팔 정부와 국제사회는 그것 을 테러리즘이라고 규정지었다. 네팔 사례는 테러행위와 정부 체제에 반대하는 혁 명·운동 또는 반란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제사회, 특히 인도와 미국은 하나같이 그것을 테러행위로 규정하고 네팔 군대 에 기술과 치명적 무기를 제공하였다. 네팔 당국은 보안군을 동원하고 무력사용을 승인하였으나, 반란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국내·외적으로 법률적 의무가 준수되는지 점검하는 시스템은 없었다. 또한 면책조항 때문에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네팔 전 역에서 대규모의 인권 침해가 자행되었다. 그러나 2007년 포괄적 평화협정(CPA) 을 체결한 뒤, 네팔 정부는 반테러법을 폐지하고 수감된 공산반란군과 관련된 수 백 건의 소송을 취하하였다. 마오주의자는 네팔법과 정치체제 하에서 더 이상 테 러리스트가 아니지만, 미국과 인도의 공식 기록상에서는 여전히 테러리스트이다. 이제 정부와 국제사회가 채택한 대테러 조치가 타당한 것이었는지, 타당하였다 면, 왜 정부는 마오주의자들이 제기한 의제에 합의해야 했으며, 왜 대테러법과 정 책은 폐기되었는가 라는 질문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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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戰場)이 된 아시아, 후퇴한 민주주의
인도네시아, 테러와의 전쟁과 민주주의
피트리 빈탕 티무르(Fitri Bintang Timur) 국가안보와 평화학 연구소(Institute for Defense Security and Peace Studies, 인도네시아) 연구원
2억 3천만 명이 넘는 인구 중 85%가 이슬람교를 믿는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대 인구의 이슬람 국가이다. 인도네시아의 대다수 이슬람교도는 온건함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는 라스카 지하드(Laskar Jihad), 라스카 준둘라(Laskar Jundullah), 제 마 이슬라미야(Jamaah Islamiyah)와 같은 국제 테러조직과 연관된 것으로 알려진 과격조직들이 자행한 테러행위의 희생국이 되었다. 이들 테러리스트들에 대해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훈련을 받은 대테러 경찰 특수부대(Densus 88)와 육군 특수부대(Gultor 81)를 특별 배치하는 조치가 이뤄 졌다. 그러나 이들 부대가 사용하는 과도한 무력행사로 인해 대테러 작전은 여러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부당한 기소, 자의적 체포 등의 문제를 비롯하여 대테러 군 사행동 도중에 용의자가 살해되는 등 재판과정을 거치지 않은 살해가 벌어지기도 했다. 새로운 정보법안이나 대테러 법률 개정을 제안함으로써 대테러 활동에 군부 의 개입을 강화하려는 인도네시아 정부의 시도는 과거 군부가 자행했던 인권유린 행위에 대해 처벌받지 않고 있는 역사를 상기시키고 있다.
1. 배경 인도네시아에서 테러활동은 1981년 코만도 지하드(Komando Jihad)의 가루다 항공기 납치사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사건으로 승무원 1명, 군인 1명 그리고 테러리스트 3명이 목숨을 잃었다. 1995년에는 보로부두르 폭파 사건(Borobudur Bombing)이 발생했으나 인명 피해는 없었다. 급진 이슬람교도의 모든 소요사태에 대해 수하르토 독재 정권은 군사작전을 펼치며 강경하게 대처했다. 1998년 개혁운동(Reformasi)으로 수하르토 정권이 몰락한 이후 2000년에는 필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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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핀과 말레이시아 대사관 폭탄공격, 자카르타 증권거래소 폭탄공격 그리고 크리 스마스 이브에 13개 도시에서 일련의 폭탄공격이 발생하는 등 폭탄 테러가 만연 했었다. 2001년에는 81건의 폭탄 공격이 있었으며, 그 중 29건이 자카르타에서 발생했다.1) 다음해 발리에서 발생한 강력한 폭탄공격 사건으로 200명 이상이 사 망했다. 2003년에도 또 다른 고강도 폭탄공격이 발생했다. 메리어트 호텔에서 발 생한 차량 폭탄공격으로 인해 12명이 목숨을 잃었고 150명 가량이 부상을 입었 다. 2004년 오스트레일리아 대사관 앞에서 또 다른 차량이 폭탄공격으로 폭발했 다. 이 폭발로 인해 5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2005년 발리에서는 자살 폭탄공격으로 인해 20명 이상이 사망하고 100명 정도의 사람들이 부상을 당 해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이 후 폭탄공격은 한동안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2009년 중반 총선거 이후 같 은 날 메리어트 호텔과 리츠칼튼 호텔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이 폭탄공격은 대테러 특수 부대의 경계태세를 촉발시켰으며, 중부 자바 솔로 지역에서 발리와 메리어트 호텔 폭탄공격의 주모자인 누르딘 모하메드 톱(Noordin M. Top)을 추 적하기 위한 강도높은 작전이 개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생포되지 않았 다. 결국 그와 다른 테러리스트 용의자 3명이 포위 공격으로 살해됐는데, 이는 인 도네시아의 대테러 작전에서 발생한 많은 사건 중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2. 대테러리즘 관련 주요 법률 및 정책 9.11이전에 인도네시아는 테러리즘에 관한 규제가 없었다. 1차 발리 폭탄공격 이후 테러리즘 범죄 근절에 관한 정부규칙(제1호/2002)이 공표되었으며, 이것은 후에 법률(제15호/2003)이 되었다. 이 법은 제정 당시 충분히 심의할 시간이 없었 기 때문에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이 법에 대한 주요 비판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첫째, 이 법은 테러리스트와 테러행위를 형사사법제도 상 특수한 경우로 취급하고 있다. 이는 인도네시아 형법을 인정하지 않고 대테러리즘 활동에 군과 정보기관의 개입 을 허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테러리즘과의 전쟁’을 과대선전한 덕분에 정치와 안보 조정장관을 임명하여 테러리즘 퇴치정책을 수립하도록 하고, 국가정보기관 (BIN)이 대테러 작전에서 정보수집을 담당하도록 하는 대통령 지시(제5호/2002) 가 발표되었다. 이러한 규정들은 비사법기관이 체포와 구금을 행사할 수 있는 권 한을 갖도록 했다.
1) Sukawarsini Djelantik(수카와르니시 젤란틱). “Terrorism in Indonesia: The Emer gence of West Java Terrorists”, Paper Presented at International Graduate St udent Conference Series. Hawaii: East West Center,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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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형법이 테러리즘 사건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진정제도(complaint mechanism)를 사용할 수 없으며, 따라서 정당한 근거를 갖지 않는 체포, 구금, 수 색 또는 압수와 관련한 보상이나 복권 요구를 포함하여 사전심리절차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이 법(제15호/2003)은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위협한다. 법률 제20 조에서‘조사관, 검사, 변호사, 판사를 대상으로 위협(intimidation)을 행하는 자는 기소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듯이, ‘위협’이라는 모호한 규정은 테러리즘에 관한 법적 절차가 다뤄지는 방식에 대해 언론이나 사람들이 의견을 개진하는 것을 제한 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법은 정보기관의 보고만으로도 도청이나 은행계좌조회를 허용함 으로써 개인의 사적인 권리를 위협하고 있다. 이는 정보기관이 자신들의 권력을 남 용할 수 있게 하고, 더욱이 인도네시아의 정보기관은 어떠한 주법(state law)의 규 제도 받지 않기 때문에 집권세력이 쉽게 악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위험하다. 테러리즘 범죄 근절에 관한 법률은 수차례 개정되었다. 2003년과 2004년에 개 정이 있었으며, 현재도 정부가 새로운 법률개정안을 마련 중에 있다. 하지만 개정 안은 여전히 인권과 민주주의의 실천을 존중하고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강한 국가를 만드는 데 그 취지를 두고 있다.
3. 대테러리즘 법률과 정책의 남용 및 시민사회의 대응 인권 존중에 기초하지 않은 법규들은 시행 상에 많은 문제들을 초래했다. 아래 는 2000-2011년 동안 인도네시아에서 있었던 대테러리즘 작전 사례들이다. 1. 대테러리즘 조치의 문제점 2000년 이래 인도네시아의 특수부대는 대규모 대테러 작전들을 수행해 왔다. 하지만 이들 작전에는 문제점들이 있다.
발리(Bali)와 메리어트(Marriott) 호텔 1차, 2차 폭탄공격사건 사례 발리와 메리어트 호텔 폭탄 공격에 대한 수색 및 체포 작전은 2002년부터 2010년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작전의 문제는 몇몇 테러리스트의 부인이 함께 체포되었고 3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수차례 있었던 체포 시도 과정 에서 몇몇 사람들이 살해되었다는 데 있다(2005년 11월 아즈나리(Aznari), 2010년 3월 둘마틴(Dulmatin), 2009년 이브로힘(Ibrohim)과 누루딘 모하메드 톱(Nurdin M Top)이 다른 5명과 함께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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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2007년 중부 술라웨시 포소(Poso, Central Sulawesi)에서의 법 집행 사례 분쟁지역인 포소(Poso)에서 법집행 과정 중 사건이 3차례 있었다. 가장 큰 사건은 경찰이 용의자를 계속 추적했었던 2007년 1월 말에 발생했다. 이 작전 에서 과도하게 무력을 행사하여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 사건에서 경찰관 1명, 미성년자 3명, 그리고 경찰이 무장단체 소속이라고 주장하는 11명 등 총 15명이 사망했다.
아체주 잘린(Jalin, Ache) 산악지역에서의 포위작전 2010년 초 테러리스트 훈련소가 위치한 것으로 의심되는 잘린(Jalin) 산악지역 에서 포위작전이 실시되었다. 전투 없이 3명이 체포되었으나, 민간인 3명이 총에 맞았으며 그 중 한 명은 사망했다. 3월에 경찰은 아체주 일부 지역에서 포위공격 을 지속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5명이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했고 1명이 총상을 입었다. 그리고 48명이 체포되었고 이 중 1명은 부당하게 기소를 당했다.
자바 서부지역 카왕, 자카르타, 치캄펙(Cawang, Jakarta, Cikampek, West Java)에서의 포위작전 2010년 5월 카왕에서 포위작전이 실시되었으며 테러리스트 용의자 3명이 살 해되었다. 이 작전은 치캄펙에서도 지속되었으며, 테러리스트 용의자 2명이 살 해되고 1명이 생포되었다. 이들의 신원은 작전이 있기 전에는 알려지지 않았으 며, 경찰은 조사 이후 그들의 이름을 공개하였으나 모두의 이름을 공개하지는 않았다. 이들이 매장되고 난 후에도 카왕에서 살해된 2명의 신원은 여전히 밝 혀지지 않았으며, 심지어 테러리스트 혐의를 씌워 이들에게 사격을 가한 경찰조 차도 모르고 있다.
수마트라 북부지역 메단(Medan, North Sumatra)에서 발생한 CIMB 니아가 은행 강도 및 경찰서 공격 사건 2010년 메단에서는 경찰이 테러활동 자금 조달을 위해 한 것이라고 믿는 은 행강도 사건이 발생했으며 경찰서 한 곳이 테러리스트 용의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이후 일련의 강력한 대테러 작전이 수행되었다. 이 작전에 따라 18명이 체포되고 6명이 총에 맞았으며, 10명이 총에 맞아 사망했다. 이 작전에서는 거 짓으로 혐의를 씌우고 목표대상을 잘못 잡는 일도 있었다.
자바 서부지역 치레본(Cirebon) 모스크에서의 우편폭탄과 자살폭탄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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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본부 내에 있는 모스크에서 2011년 3월 우편폭탄 테러가 발생했으며, 2011년 4월 15일에는 자살폭탄 공격이 있었다. 이로 인해 테러조직 색출을 위 한 대테러 수사가 대대적으로 실시되었다. 이미 몇몇 사람이 강도 높은 심문을 받기 위해 체포되었으며, 국방위원회의 대테러리즘 단장은 여전히 수십 명의 체 포 용의자가 남아있다고 말했다.
2000년 ~ 2010년 테러리스트 용의자에 대한 법집행 사례 조치
인원수
체포된 테러리스트 용의자
1,040명 (2009년 ~ 2010년 444명)
체포되어 재판 받은 테러리스트 용의자
953명 (2000년 ~ 2009년 420명)
대테러 작전에서 살해된 테러리스트 용의자
87명 (2000년 ~ 2009년 24명)
구금 기간을 마치고 풀려난 테러리스트 용의자
210명 (2005년 ~ 2010년만 해당)
감형 받은 테러리스트 용의자
53명 (2005년 ~ 2010년만 해당) 출처 : Kontras 감시 및 문서관리국
2. 대테러리즘에 대한 시민사회단체의 대응 : 도전과제 및 성과 인도네시아 시민사회단체와 인권옹호자들은 국가의 대테러 활동에 직면하여 몇 가지 활동을 전개했다. 테러리즘법에 대응하여 공정한 인권모니터(Imparsial Human Rights Monitor)를 간사단체로 하여 법률 개정에 반대하는 시민자유연 합(Coalition for Civil Liberties)을 2002년에 결성하였다. 시민자유연합은 해당 사안에 대한 일반 시민의 인식을 제고하기 위해 몇몇 책자를 발간하고 캠페인 을 벌여왔다. 시민사회단체는 또한 대테러 활동에 대한 모니터링을 하고 있으 며, 이들 단체 중 하나가 국방안보와 평화연구소(Defense Security and Peace Studies, IDSPS)이다. 시민사회단체의 또 다른 활동 분야로는 피해자 옹호활동을 들 수 있으며, 실 종자 및 폭력희생자를 위한 위원회(Commission for the Disappeared and Victim of Violence, kontraS), 마시야라캇 법률구조기관(LBH Masyarakat), 그 리고 인도네시아 법률구조재단(YLBHI)과 같은 법률지원기구에서 이러한 활동 을 담당하고 있다. 이들은 피해자나 피해자 가족이 경찰이 행한 권한남용을 신 고하는 곳이 되었으며, 신고된 피해자 사건을 법정으로 가져가 책임과 복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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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구한다. 그러나 테러리즘법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복권 요구는 아직까지도 충분히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2009년 시민사회단체는 굳건히 연대하여 공공정보접근연합(Coalition of Access to Public Information)을 결성했다. 이 연대체는 문제가 많은 국가기밀 법 초안을 발표하려던 정부 계획에 반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법안이 통과됐더 라면 대테러 작전 사실을 국가 기밀로 은폐하고 언론을 침묵시킬 수 있었을 것 이며, 이로 인해 1998년 이래 성공적으로 정착된 민주주의가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계속된 반대활동과 국회의원들을 대상으로 한 로비를 통해 법안 이 입법화되는 것을 성공적으로 지연시킬 수 있었다. 현재 정부와 의회는 정보법안(intelligence bill)을 2011년 7월 공표할 수 있 도록 법률 제정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하지만 그 초안은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정보법안이 (‘집중적 심문’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밤낮 없이 용의자를 체포할 수 있고 법원의 허가를 받지 않고도 당국이 도청을 할 수 있게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사회단체와 인권 옹호자들은 다시 한 번 연대하여 정보법안반대 연합(Coalition on Intelligence Bill Advocacy)을 결성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 자회견을 열고 로비활동을 벌이고 공공의 인식을 제고하였으나, 정부는 최근 발 생한 우편폭탄과 자살폭탄 사건을 근거로 법안 처리를 강행하려 하고 있다. 따 라서 논쟁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악법의 제정을 저지시킨 성과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 시민사회단체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여러 도전과제에 직면해 있다. • 정부 권력이 강화됨에 따라 시민사회가 약화되고 있다. 인도네시아가 개혁에 성 공하고 발전해 온 모습을 전 세계가 목도한 것처럼 13년 동안 인도네시아는 저 소득 국가에서 중소득 국가로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시민운동에 대한 국제사회 의 지원은 줄어들고 있으며 국가권력은 강화되고 있다. 정부정책에 대한 견제와 균형의 역할을 수행하는 시민사회의 힘이 약화되는 것은 위험하다. • 시민사회운동이 분산되고 있다.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는 한편 시민사 회단체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동일한 목표를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때 로 시민단체 활동 간에는 조율이 부족해 보일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정부가 취 한 대테러리즘 조치에 직면하여 한 단체는 법률 개정을 반대하는 활동을 하고, 다른 단체는 법집행기관에 책임성과 투명성을 요구하는 활동을 하며, 또 다른 단체는 희생자의 편에서 활동을 하기도 한다. • 정부와 국회가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국제인권규약에 서명, 비준하도록 요구하 는 데 어려움이 있다. 예를 들어, 인도네시아는 사형제도 폐지를 위한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과 강제실종에 관한 협약에 서명하지 않았다. • 대테러 작전을 수행하는 법집행기관의 책임성을 요구하고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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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시민사회단체와 인권 옹호자에게 오명을 씌우고 있 다. 정부는 대테러 활동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테러리스트를 지원한다는 대 중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4. 부정적 효과 앞부분에서 정부가 테러리스트 용의자를 어떻게 다루는지 살펴본 바 있다. 위의 표는 단순히 정량적 수치만을 보여주고 용의자들에게 가해진 권력남용을 간단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정보를 모으고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후 이러한 수치를 일반인 에게 공개하고 접근 가능하게 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대테러 정 보 작전이 비밀리에 진행되는 특수성을 감안할 때, 용의자에게 행한 절차나 사상 자 수치가 모두 포함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용의자가 공격할 의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총격이 가해지거나 정보를 얻기 위해 고문행위를 하는 등 대테러 작전에서 불법 행위가 자행되고 있 다. 우리는 경찰이 체포하는 테러리스트 용의자의 숫자가 최근 증가하는 경향을 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각종 규칙과 법을 개정하거나 감시하지 않으 면 테러리즘법과 대테러 작전은 시민사회단체와 정부 비판자들에게 재갈을 물리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시민사회단체의 약화나 오명 씌우기와 더불어 이 문제는 일반 대중의 의견이 존중되고, 정보의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약화시키고 대중의 목소리가 선거에서 단순히 숫자로만 계산되는 절차적 민주주의 로만 남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5. 제언 국민을 위해 강력한 대테러리즘법이 필요하고 대테러 작전을 수행해야 한다고 정부는 주장하고 있지만, 강력한 무력행사만으로는 대테러리즘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부당하게 테러리스트로 비난받은 희생자와 그 가족들이 보복 행위를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새로운 테러리스트를 양산할 수 있다. 따 라서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몇 가지 권고사항을 제시하고자 한다. • 사람들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열망을 분출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야 한 다. 이는 대학을 포함한 학교에서 공개토론을 장려하고, 청문회를 열며, 대중의 의견이 정책 수립과 시행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반영될 수 있도록 해야 가능하다. • 정부는 잘못된 기소나 고문과 같은 학대가 발생한 사건의 경우, 대테러 작전 희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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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자들의 진정(appeal)을 심리하고 조사하며, 잘못된 점이 입증되면 법을 집행 한 당사자들에게 그들의 잘못에 상응하는 징계를 내려야 한다. 경찰 채용 시 신 원조사 절차를 두고 희생자들에게 구제책을 제공해야 한다. 인도네시아의 문제 는 대테러 작전 중에 행한 잘못된 행위에 대해 국가가 아직까지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또한 과거의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들도 아직까지 완전하게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이로 인해 면책문화가 여전히 굳건히 자리 잡 고 있다. • 국제사회는 대테러 작전에서의 불법행위와 희생자의 진정 등에 관한 시민단체의 활동을 계속해서 지원해야 한다. 이것은 인도네시아 정부가 이러한 사건들을 해 결하도록 하는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 국제사회는 또한 인도네시아 정부가 인권보호를 보장하는 국제협약을 비준하도 록 압력을 가해야 하며 정부가 이를 따르도록 해야 한다. • 국제사회는 정부의 대테러 작전 남용에 대응하는 시민사회단체의 역량강화를 위 한 교육과 자원을 제공하여 소수자와 인권을 보호하는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촉 진하도록 해야 한다. • 대테러 작전을 감시할 수 있고 정부정책에 대한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지도록 대 중의 정보 접근과 언론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이상적으로는 인권과 안보가 서로 상충되지 않아야 한다. 안전이 보장된다는 것 은 인권이 철저하게 보호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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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 테러와의 전쟁과 민주주의
옹진쳉(Ong Jin Cheng) 말레이시아 사람들의 목소리(SUARAM, 말레이시아) 활동가
1. 배경 : 전후(戰後) 말라야와 공산주의자들의 위협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민족해방 운동이 식민지 국가 전역으로 확산 되었다. ‘전(全) 말라야 공동행동협의회(AMCJA)’가 구성되어 영국 식민통치로부 터의 독립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전후(戰後) 말라야의 헌법제정에 참여했다. AMCJA는 정당 및 시민단체로 구성된 협의체였다. 민중헌법초안(People’s Constitutional Proposal)이 마련되었지만 자체적으로 수정헌법초안을 준비했던 영 국 식민당국은 이를 거부했다. 민중헌법은 민중이 주체가 되어 동등한 정치적 권 리, ‘멜라유(Melayu)’라는 새로운 국적에 대한 인정, 동등한 시민권, 그리고 모든 인종차별적 법률을 검토·폐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민족간 협의회 등을 요구한 헌법이었다. AMCJA는 다른 정당과 함께 전국적 규모의 하르탈(hartal, 총파업)을 조직했으며, 총파업기간 동안 말레이시아 내 대부분의 지역에서 하루 동안 모든 업무를 중단함으로써 영국 식민당국에 대한 정치적 반대를 한 목소리로 표명했다. 이에 대응해 영국 식민당국은 하르탈에 참여한 모든 조직을 불법조직으로 선포했 으며, 이와 관련해 많은 관계자들이 당국에 체포되었다. 정치적 반대파를 평정하기 위해 식민당국은 국가긴급사태를 선포했다. 1948년에 제정된 긴급규정조치(Emergency Regulations Ordinance)는 폭력행위를 방지하고 말라야 공산당의 무장반군에 맞서 싸우는 것을 그 목적으로 했다. 국가긴급사태는 결국 말라야의 독립을 위한 투쟁을 벌이던 민족주의 조직을 궤멸하기 위한 전쟁으 로 비화되었다. 당시 영국은 본국의 전후(戰後) 재건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 기 위해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말라야 지역 내 이해관계를 보호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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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새마을(new villages)’을 설치해 민족주의 투쟁세력에 동조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현지주민을 모두 이주시켰다. 이러한 ‘새마을’은 실제로는 수용소에 가까 웠다. 주민들은 이주를 강요당했고 배급을 통해 식량이 공급되었다. 통금제도가 실 시되었으며, 새마을 내외에서 진행되는 민중운동에 대해 엄격한 통제가 가해졌다. 말라야 긴급사태는 1960년 공식 종료되었고 긴급조치도 폐지되었다. 그러나 긴 급규정조치를 대신해 같은 해 8월에 국내보안법(ISA)이 제정되었다. 국내보안법은 정부당국이 재판 없이 개인을 억류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조항을 담고 있었다. 표 면상으로 드러난 이 법의 목적은 국가긴급사태 이후 말레이시아 내 공산주의 활동 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 국내보안법의 용도 및 남용 사례 국내보안법은 원래 체제전복 분자, 특히 당시에 활발히 활동하던 공산주의 반 군세력을 진압할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정부에서는 공산주의 운동을 테러활동으 로 간주했다. 그러나 1989년에 공산주의자들이 무장투쟁을 포기하고 정부와 평 화협정을 체결했음에도 불구하고 동 법은 폐기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었다. 국 내보안법은 오늘날에도 효력을 발휘하며 노동운동가, 종교지도자, 야당 정치인, 현지어 학교 활동가, 학자, 시민단체 회원 등을 구금하는데 이용되고 있다. 1960년에서 70년대 사이에 동 법은 사회주의전선(Socialist Front) 구성원과 학생운동가들을 구금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국내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천 명이 구금되었고, 일부는 재판도 없이 최대 16년까지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국 내보안법은 언제나 정권의 권력유지에 편리한 도구 역할을 해왔다. ■ 랄랑 작전 1987년에 실행된 악명 높은 ‘랄랑 작전(Operation Lalang)’당시 말레이시아 정부는 마하티르 모함마드(Mahathir Mohammad) 총리의 주도로 대대적 검거작 전을 실시해 국내보안법 위반 혐의로 106명을 체포했다. 여기에는 현지어 학교 를 둘러싼 논쟁으로 인종차별적 색채가 강화된 데 따른 정치적 긴장이 촉매로 작용했다. 당시 체포된 이들 중에는 중국인 교육운동가, 야당 지도자, 시민단체 회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중 대다수는 이후 석방되었지만 주거제한명령 의 적용을 받게 되었다. ■ 레포르마시 운동 1987년 마하티르 모함마드 총리가 안와르 이브라힘(Anwar Ibrahim) 부총리 를 경질하자, 안와르 부총리와 그 지지자들은 ‘레포르마시(Reformasi)’운동에 착수했다. 레포르마시 운동의 주된 목적은 마하티르 총리의 부정부패와 권력남 용을 고발하는 것이었다. 정부에 대항하는 대규모 집회 및 시위가 조직되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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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이 같은 운동은 1998년 말 안와르가 체포·수감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레포 르마시 운동은 말레이시아의 정치구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다인종을 기반 으로 한 새로운 정당인 민족정의당(PKN)이 구성되었다. 1999년 총선에서는 바 리산 내셔널의 득표율이 1995년 65%에서 56%까지 떨어졌다. UMNO는 의회 의석 15석을 잃었고 이슬람계 야당인 PAS가 15석을 확보했다. 그해 주의회 선거에서는 야당이 총 113석을 차지했으며, 이 중 PAS가 98석, 민주행동당(DAP)이 11석, PKN이 4석을 각각 확보했다. 말레이시아 북동부에 위치한 켈란탄(Kelantan) 주와 테렝가누(Terengganu) 주에서는 레포르마시 운 동이 한층 더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PAS는 켈란탄 주에서 전체 43석 중 41석 을, 테렝가누 주에서 32석 중 28석을 싹쓸이하는 기염을 토했다. 덕분에 PAS 는 이들 2개 주에서 주 정부를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말레이시아 북동 부에 위치한 케다(Kedah) 주에서 PAS는 전체 주 의회 의석 중 1/3을 확보했 다. 이전까지 케다 주의회 의석이 전무했고 테렝가누 주의회 의석은 1석을 확 보하는 데 그쳤던 PAS로서는 엄청난 성과였다. PKN은 2003년 말레이시아 민중당(PRM)과 합당해 민족정의당(PKR)이라는 새로운 정당을 구성했다. ■ 9.11 이전의 탄압 2001년 3월 이슬람교 시아파 신자 한 사람이 편향적 교리를 전파한다는 이 유로 2년간의 구금명령을 받았다. 같은 해 4월 민족정의당(PKN) 및 레포르마 시 운동 지도자 10인이 체제전복 시도 혐의로 구금되었다. 5월에는 국내보안법 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던 학생운동가 2명이 국내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 되었다. 6월에는 국제적 조직과 연관이 있는 이슬람 무장투쟁 활동에 참여했다 는 혐의로 5명이 체포되었다. 같은 해에 야당인 PAS의 지지자 16명도 말레이 시아 무자헤딘 그룹(KMM)에 참여했다는 죄목으로 구금되었다. 정부당국은 구 금자 중 일부가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 군사훈련에 참가했다고 밝혔다. ■ 9.11 이후의 탄압 2001년 미국에 대한 9.11 테러공격은 말레이시아 정부가 국내보안법을 마음 껏 사용할 수 있는 빌미가 되었다. 정부당국은 국가안보 수호를 명분으로 내걸 었다. PSA와 관계가 있던 수많은 현지 이슬람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모두 말레이시아 무자헤딘 그룹(KMM), 제마 이슬라미야(JI), 다룰 이슬람(DI) 등의 무장 종교단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혐의를 받았다. 9.11테러가 발생한지 3일 후 압둘라 아흐마드 바다위(Abdullah Ahmad Badawi) 부총리는 대국민 담화를 통해 6월 초 KMM 구성원들을 구금했던 정 부당국의 조치가 옳았다고 밝혔다. 2001년 9월 29일 마하티르 모함마드 총리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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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말레이시아의 국내보안법 활용에 대해 반민주적이며 부당하다고 비난하던 국가들이 이제 동일한 수순을 밟고 있다고 선언했다. 또한 마하티르는 ‘국내보 안법을 폐지하지 않은 이유는 테러리즘 대처에 효과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 으로 알려졌다. 또한 마하티르는 향후 체포 건수가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경고 하며 ‘최소 하나 이상의 정당’의 당원들이 무장투쟁 쪽으로 선회하고 있다고 밝 혔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명백히 PAS를 겨냥한 것이었다. 이후 추가 소탕작전 이 진행되면서 10월에는 KMM 당원 6명이 추가로 구금됨에 따라 2001년 국내 보안법 관련 구금자 수는 총 30명이 되었다. 2001년 이후에도 수백 건에 달하는 체포가 진행되었다. 정부는 ‘테러리즘’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는데, 이에 따라 필리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인도네시 아의 국제적 조직과 ‘테러 연결고리(terrorist link)’가 있거나 또는 이슬람세력 과 연관관계가 있다는 혐의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들에게 는 KMM 또는 제마 이슬라미야(JI) 구성원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JI의 경우 인 도네시아를 본거지로 한 이슬람 테러조직과 연관이 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미국 국무부는 KMM과 JI 모두 국제테러조직 목록에 포함시킨 바 있다. 2003년 발리와 필리핀에서 발생한 폭탄테러를 빌미로 말레이시아 정부는 소 위 ‘테러리스트’에 대한 소탕작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정부당국은 심지어 미 국과 영국에서도 재판 없는 구금을 허용하는 새로운 반(反)테러법을 제정했다 고 주장했다. 이후 국내보안법에 근거한 체포 건수가 더욱 증가했으며, 구금자 중 대다수는 JI나 KMM의 구성원이라는 혐의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 중 실제 재판을 받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일부 구금자는 이후 석방되었지만 주거제한명 령(restricted residence order)을 받는 대상자가 되었다. 연도 2001년 2002년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국내보안법에 의거한 구금자 수* 30명 42명 자료 없음 97명 자료 없음 16명 자료 없음 10명 7명
*내무부(Home Ministry)는 국내보안법에 따라 이루어진 구금 건수를 공식적으로 발표하거나 공개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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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은 국내보안법 구금자들에 대한 인신보호영장청구(habeas corpus application) 를 대부분 거절했다. 연방법원은 예방적 법률 하에 개인들에게 부여된 구금명령에는 제한기간이 없다고 판시했다. 이 같은 판결은 재판 없는 구금에 대한 사법적 시정 조치를 모색하던 이들에게 좌절을 안겨주었다. 또한 여권 및 여행문서 위조, 핵무기 밀매, 그리고 심지어 화폐위조 등의 기타 범죄에도 국내보안법이 적용되었다. 이와 더불어 정부 관계자들은 소프트웨어 복 제, 종교·인종감정·선동 등의 범죄에도 국내보안법을 적용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 민중운동 2009년 8월 수 만 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국내보안법 철폐를 요구했고, 정부는 국내보안법에 대한 조치를 취하라는 엄청난 국내외적 압력에 직면했다. 그 결과 이듬해에 40여 명의 구금자가 석방되었다. 또한 정부는 국내보안법 일 부 조항을 재검토하겠다고 약속했으나 현재까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 다. 한편 체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정부가 국내보안법을 폐기 할 의사가 없다는 점이 분명해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정부는 인신매매 및 화폐 위조 용의자에게까지 국내보안법을 적용하는 등 동 법의 적용범위를 더욱 확대 하는 퇴행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 2011년 7월 9일 시민단체 회원들은 깨끗하고 공정한 선거를 위한 선거개혁 을 요구하는 시위를 계획했다. 62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연합인 BERSIH 2.0이 주관하는 집회였다. 정부는 주최측과 참가자들을 체포하겠다고 위협했다. 시위 가 열리기 며칠 전 30명이 체포되었다. 말레이시아 사회당(PSM) 당원인 이들 은 당내 행사에 참석하러 가는 길이었다. 일부는 이후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이 들 중 6명은 긴급조치(EO) 하에 구금되었다. 긴급조치는 국내보안법과 유사한 또 다른 전근대적 법률로, 재판없이 최대 2년까지 구금이 가능한 법이다.
2. 말레이시아의 국가안보 및 대테러 관련 법규 분석 ■ 1960년 국내보안법(ISA) 국내보안법은 영국 식민주의의 유산이다. 1948년 영국은 말라야(Malaya)에 국가긴급사태를 선포하며 재판 없는 구금을 집행했다. 1960년 국가긴급사태가 해제된 이후에도 국내보안법은 존치되었다. 정부는 1970년대에 말레이시아 내 ‘공산주의자들의 위협(communist threat)’에 대처하는 데 국내보안법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편 최근에는 민족 간 화합과 경제안정을 유지하는 데 국내보안법이 필요하다고 당국은 주장하고 있다.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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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내무부는 국내보안법의 적용 대상 및 시점에 대해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다. 동 법 제8조는 말레이시아의 안보에 해롭거나 필수적 서비스의 유지 또는 경제생활에 위협이 되는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구금이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은 국내보안법이 정치적 반대 세력을 억압하는 데 사용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국내보안법은 국가안보를 근거로 형사범죄 혐의에 대해 재판 없는 무기한 구 금을 허용한다. 구금자들은 수사 목적으로 구금 초기 60일간의 구금기간을 거 친다. 60일간의 구금기간이 끝나면 내무부 장관이 구금자에게 제한명령을 내리 거나 재판 없이 2년간의 구금기간을 추가로 요구할 수 있다. 내무부 장관은 원 래의 구금명령과 동일한 근거 또는 다른 근거를 바탕으로 2년간의 구금기간을 무기한 갱신할 수 있다. 초기 구금기간 60일 동안 구금자들은 가족 및 법률대리인과의 접촉을 차단 당할 수 있다. 구금자의 변호인 접촉을 차단하는 것은 말레이시아 연방헌법 제 5조 제 3항에 배치되는 행위이다. 법정대리인과 가족면회를 보장하는데 실패했 다는 점에서 사법부는 국내보안법 관련 체포 건에 대해 견제와 균형을 달성할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겠다. 내무부의 재량에 따라 구금자들은 언제든지 제한명령이 적용 또는 미적용된 상태로 석방될 수 있다. 제한명령의 조건으로는 거주지 제한, 고용 등의 활동 및 운동 제한, 자택 외부 활동 허용시간 제한, 공무담임 및 정치활동 금지 등이 있다. 국내보안법에 따른 구금기간 동안 구금자들은 자문위원회의 검토를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최소한의 공정재판 보장을 충족하지 못한다. 피고의 변호인 들은 모든 문서자료 및 증거에 대한 접근권이 없고 증인소환이 불가능해 의뢰 인을 제대로 변호할 수가 없으며, 무엇보다도 자문위원회의 권고는 법적 구속 력이 없다. 법원은 구금 자체의 실질적 근거가 아닌 구금과 관련된 절차적 내용만을 바 탕으로 인신보호영장 청구를 심사할 수 있다. UN의 인권 관련 조약은 재판 없는 자의적 구금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로마규약(Rome Statute) 제55조는 재판 없는 자의적 구금을 중대한 범죄로 정 의하고 있다. 재판 없는 구금을 규정한 법률은 1948년 세계인권선언을 비롯한 국제협약에 명시된 수많은 기본권에 위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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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적 구금에 대한 UN 실무그룹(UN Working Group on Arbitrary Detention)은 2010년 6월 말레이시아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재판 과 혐의 없이 유연하고 연장 가능한 시한 동안 당국의 재량에 따라 이루어지는 구금은 개인의 자유권, 자유로운 재판권, 무죄추정원칙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범죄를 저지른 사실이 없는 모든 사람에게 자유권을 보장하고 있는 개인의 안 전에 대한 권리에도 위배된다’고 밝혔다. 또한 세계인권선언 제5조는 ‘어느 누구도 고문이나 잔인하고 비인도적이거나 모욕적인 처우 또는 형벌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적시하고 있다. 그러나 구금자 들은 수용소를 오가는 과정에서 눈가리개를 씌운 채로 이송되고 있으며, 초기 구금기간 동안 고문을 비롯한 잔인하고 비인도적이며 모욕적인 처우가 흔히 발 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의적 구금에 대한 UN 실무그룹 역시 ‘면담 대 상 구금자, 특히 예방적 법률에 따라 구금된 이들 중 거의 모두가 자백 또는 구금의 증거를 확보할 목적으로 고문이나 부당한 처우를 받은 경험이 있다’고 확인했다. 또한 자의적 구금에 대한 UN 실무그룹은 구금자들이 경찰의 고문이나 부당 대우에 가장 취약하다는 점을 밝혔다. 특히 이 기간 동안 가족과 법률대리인 등 타인과의 접촉 없이 ‘의사소통이 금지된 상태로 구금’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 이 이 같은 문제에 한몫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사실은 말레이시 아 정부가 UN의‘고문 및 그 밖의 잔혹한, 비인도적인 또는 굴욕적인 대우나 처 벌의 방지에 관한 협약’비준을 지속적으로 거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 반테러 법규 개정 정부는 테러리즘 관련 범죄에 대처하기 위해 새로운 법안과 형법·형사절차법 개정안을 상정하고 있다. 새로 도입된 법 조항은 자의적이고 적용범위가 넓어 이제는 ‘개인에 대한 심각한 신체상해’부터 ‘국가안보 또는 공공안전에 위해를 가하는’ 행위, 그리고 주정부 또는 연방정부가 특정한 조치를 취하거나 취하지 않도록 영향을 미치거나 강제하는 행위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모든 행위에 대한 적용이 가능할 정도이다. 해당 법 조항에서 다루는 범죄의 범위도 테러리스트 에 대한 서비스, 편의 제공, 교사(敎唆), 지원까지 확대되었으며, 여기에는 변 호사와 회계사가 제공하는 서비스도 포함된다. 개정 법안은 테러리스트의 피신 을 돕거나 테러리스트의 체포를 방해하는 행위, 테러조직 구성원을 모집하는 행위, 테러조직에 폭발물이나 회합장소 등의 편의를 제공하는 행위를 저지르는 자에게 최고 종신형에 이르는 무거운 형량을 부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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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예방적 법률의 악용 수많은 구금자와 그 가족들은 구금기간 동안 당국이 저지른 학대에 대해 고발하 고 있다. • 2001년 4월 젊은 야당 지도자 에잠 모드 노르(Ezam Mohd Nor)가 체포되었다. 그의 가족은 체포 사실에 대해 알지 못했으며, 다음날 신문기사를 통해서야 체 포 사실을 겨우 알게 되었다. 또 다른 야당 소속 구금자인 압둘 가니 하론 (Abdul Ghani Harron)의 가족 역시 경찰로부터 전혀 연락을 받지 못했다. • 구금 초기 60일간 국내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는 구금자들은 의사소통이 차단된 상태로 비공개 장소에 종종 억류된다. 이송 과정에서 눈가리개를 하는 경우가 많아 구금자들 자신도 구금장소가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 구금자에 대한 정보를 가족에게 알리지 않음으로 인해 구금자 가족들은 엄청난 스트레스와 불확실성에 시달리고 있다. • 구금자의 생사 자체를 알 수 없는 상황은 수많은 구금자의 가족과 자녀들을 궁지 로 내몰았다. 금전적 지원도 없고 구금자들이 언제쯤이나 풀려날지도 알 수 없는 가운데 이들 구금자 가족은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가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2000 년 7월부터 억류된 알마우나(Al-Ma’unah) 조직원 중 하나로 알려진 모크타르 세 니크(Mokhtar Senik)의 경우, 그의 아내인 시티 하자르 모드 자인(Siti Hajar Mohd Zain)이 말레이시아 국가인권위원회(SUHAKAM)에 전한 바에 따르면 당국 측에서 당초 3년이었던 구금기간이 추가로 연장될지 여부를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모크타르가 구금되어 있는 동안 여덟 식구나 되는 그의 가족은 엄청난 경제 적 어려움과 불확실성에 시달려야 했다. 2003년 10월에는 KMM의 또 다른 구성 원으로 여겨지는 압둘라 모함메드 누르(Abdullah Mohamed Noor)가 당국에서 자 신의 은행계좌와 직불카드를 압수해갔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했다. 당국의 이 같은 조치로 인해 그의 가족은 금전적 자원에 대한 접근권을 박탈당하고 말았 다. 또 다른 구금자인 파우지 모함마드(Fauzi Mohammad)의 아내는 가족을 부양 하기 위해 집을 팔아야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 국내보안법의 여파는 구금자의 자녀에게까지 이어진다. 구금자 자녀 중 대부분 은 자신의 부모가 왜 사라졌는지를 완전히 이해할 능력이 없으며, 이들은 급우 들과 친구들의 조롱과 놀림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구금자 자녀 중 하나로 올해 18세가 된 대학 1학년생인 압둘 무아즈 압술 사마(Abdul Muaz Abdul Samah) 는 2004년 1월 케방산 말레이시아 대학병원의 정신병동에 수용되었다. 진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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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에 따르면 ‘그가 앓고 있는 정신질환은 심각하며 이는 국내보안법에 따른 아 버지의 구금으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 이라고 전하고 있다. • 국내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금된 여러 구금자와 이들의 가족은 특수국(Special Branch)과 카문팅 수용소 관계자들로부터 법적 지원을 단념하라는 전화와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고 밝혔다. 몇몇 구금자의 부인은 배우자가 조만간 석방될 것이 라는 구실로 경찰심문에 소환되기도 했다. 이들 중 하나인 노를라일라 오트만 (Norlalia Othman)이 2003년 7월 국가인권위원회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오트만 이 변호사 선임을 고려하고 있음을 알게 된 수용소 당국이 오트만을 괴롭히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들은 변호사를 선임하면 남편의 구금명령이 연장될 것이라 고 오트만을 위협했다. • 2004년 1월 19일 국내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금된 31명이 국가인권위원회에 각 서를 보내 카문팅 수용소에서 겪은 다양한 형태의 학대에 대해 고발했다. 이 각 서는 구금자들에게 가족이 보는 앞에서 수갑을 채워 체포하는 일이 일상다반사 이며, 구금명령의 세부 내용과 언론보도를 경찰이 조작하는 경우도 많다고 밝혔 다. 일부 구금자들은 침을 마시거나 병에 소변을 보라는 명령을 받는 등 모멸적 인 대우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한편 구금자의 몸에 침을 뱉거나, 코란을 달라는 요청을 거절하거나, 또는 구금자의 수염을 태우는 사례도 있었다고 다른 구금자 들은 전했다. 또한 각서는 당국이 눈가리개와 수갑 사용 등 구금자를 학대하는 취조전술을 사용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일부 구금자의 경우 연기로 가득 찬 취 조실에 감금되어 하루 종일 지속된 취조시간 동안 연기를 참아낼 것을 강요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 2004년 5월 25일 인권감시기구(Human Rights Watch)는 말레이시아에서 국내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금된 이들이 겪은 학대를 기록한 보고서를 발간했다. 동 보고서에 소개된 학대 사례는 카문팅 수용소 구금자들이 주장한 내용과 일치한 다. 또한 동 보고서는 담뱃불로 구금자의 몸을 지지거나, 구금자의 생식기 부분 을 구타하거나, 심문관 앞에서 자위를 강요당하거나, 변호사와의 면담을 거부당 하는 등의 기타 학대 유형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4. 시민사회 행동 ■ 국가인권위원회(SUHAKAM) 활동 참여 1999년 7월에 설립된 국가인권위원회(SUHAKAM)는 1명의 위원장과 12명 의 위원으로 구성된다. 국가인권위원회는 다양한 인권단체와 정부기관의 면밀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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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관찰·감시를 받고 있다. 시민사회는 당국의 권력남용과 관련해 꾸준히 소를 제기하고 제안서를 제출해왔으며, 인권위 역시 수용소 및 교도소를 방문해 인 권실태를 점검하고 있다. 인권위는 정부에 이 같은 사안을 보고하고 권고안을 제시하며, 시민단체에서는 인권위의 보고서를 면밀히 검토하며 관련당국의 실 천 여부를 감시하고 있다. 비정부기관인 수아람(SUARAM, ‘말레이시아 국민의 소리’의미)도 말레이시아 내 인권 및 정치권 침해에 대한 연례보고서를 발행하 고 있다. 이들 보고서는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에 대한 침해 사례, 경찰의 무 자비한 진압 사례, 선거부정, 사법체계, 언론·표현·정보의 자유, 언론자유 등을 다루고 있다. ■ 의식 향상 캠페인 및 국내보안법 폐지 운동(GMI) 랄랑 작전 이후인 1989년에 창립된 SUARAM은 지난 22년간 국내보안법 폐 지를 요구하는 캠페인을 활발하게 진행해왔다. 이들의 캠페인 전략으로는 자동 차 스티커, 배지, 전단지 등의 인쇄 및 배포, 각서 체결 및 청원 신청, 시위 및 의식향상 캠페인 조직 등이 있다. SUARAM은 국내보안법 문제를 다룬 서적을 두 권 발간했는데, 하나는 말레이시아 인민당(PRM) 사무총장인 코 스웨 용 (Koh Swe Yong)이 저술한 <국내보안법의 40년 역사(40 Years of the ISA)>이고 다른 하나는 랄랑 작전 당시 구금되었던 인물이자 SUARAM의 창 립회원이기도 한 쿠아 키아 숭(Kua Kia Soong)의 <철창 안에서 보낸 445일 (445 Days Behind the Wire)>이다. 2001년 국내보안법 폐지를 위해 GMI(Gabungan Mansuh ISA)이 구성되었다. GMI를 통해 시민사회 단체 및 야당 관계자들이 한데 모여 국내보안법의 철폐 를 촉구했다. GMI가 수행한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 • GMI는 국내보안법의 잔인성을 다룬 서적과 교육자료를 발간했다. • GMI는 (과거 국내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금되었던 또 다른 인물인) 사리 순 기브(Saari Sungib)와 국내보안법이 무슬림의 위치를 보호한다고 주장하는 이슬람 단체 연합인 PEWARIS간의 토론 자리를 마련하였다. • GMI는 2008년 국내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된 모든 구금자의 석방을 촉구 하는 엽서 캠페인을 조직했다. GMI는 30,000건에 이르는 서명을 모아 정 부당국에 제출했다. • GMI의 활동가 중 하나인 노를라일라 오스만(Norlaila Othman)이 UN인권이 사회 제11차 회의에 참석해 발표를 하기도 했다. 그녀의 남편인 마트 사 빈 모드 사트레이(Mat Sah Bin Mohd Satray)는 7년 넘게 구금된 상태였다. • 2009년 8월 1일 GMI는 국내보안법 철폐를 촉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개최했 다. 시위 참가자 수는 약 50,000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정부는 국내외적으 로 엄청난 압력에 직면하고 있다. 그 결과 노를라일라의 남편을 포함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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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구금자들이 이후 자유의 몸이 되었다.
5. 결론 및 제언 말레이시아의 바리산 내셔널(Barisan National) 정권은 국내보안법을 정치활동 가와 시민단체 회원들을 체포하는 데 악용하고 있다. 이는 집권세력의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2001년 9.11테러 이후 정부는 테러리즘에 대처한다는 명 목으로 반대파에 대한 구금을 늘리고 있으며, 수많은 야당 정치인들이 테러리즘 및 체제전복활동 혐의로 구금된 바 있다. 2009년 국내보안법 철폐를 요구하는 대규모 대중시위가 이목을 집중시키며 세 계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 국내외에서 거센 압력에 직면한 정부는 이에 대응해 국 내보안법의 일부 조항을 수정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지만 지금까지 어떠한 수정조 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정부는 인신매매와 화폐위조 가담 혐의 등 갈수록 터무니없는 사안에 국내보안법을 지속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정부당국이 긴급조치 발동을 통해 집권세력에 대한 전쟁 기도, 공산주의 부활 시도 등 날조된 혐의를 덮어씌워 정치활동가들을 구금하는 새로운 추세가 나타나고 있다. 긴급조 치는 국내보안법과 유사한 전근대적 법률로 긴급조치 하에서도 재판 없이 구금이 가능하다.1) 과거 정부당국은 공산주의자들을 핑계로 내세워 반체제인사와 활동가들을 구금 하는 데 국내보안법을 사용했다. 9.11 테러 이후 당국은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에게 국내보안법을 적용할 목적으로 이들 극단주의자를 테러리스트로 묘사하고 있다. 정부당국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국내보안법을 악용하는 상황을 방지하려면 ‘테러 리즘’에 대한 재정의가 시급히 필요하다. 다양한 집단간에 보다 많은 대화를 시도 하고 서로 다른 문화, 정치사상, 종교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야 할 것이다. 재판 없는 구금을 허용하는 모든 법을 검토해 폐기해야 한다. 우리는 어떠한 테 1) 지난 9월 15일, 말레이시아 총리 나지브 라자크(Najib Razak)는 국내보안법과 세 개 의 긴급조치를 폐지할 것이며, 1967년 경찰 행위법의 27조항과 1984년 언론잡지와 출 판물에 관한 법을 포함하여 표현의 자유 및 집회의 자유와 관련한 금지법들을 수정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동시에 국내보안법을 ‘체제전복적인 행위들과 조직화된 테러리즘 을 방지하고 평화와 공공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두 개의 법안으로 대체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말레이시아 시민사회운동 진영에서는 정부의 국내보안법 폐지 등에 대해 환 영하는 한편, 국내보안법을 대체하고자 도입되는 두 개의 법안이 국내보안법 폐지의 의미를 훼손하는 것이라며 크게 우려하고 있다.(참여연대 주)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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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행위도 지지하지 않으나 모든 사람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는 반드시 존중되 어야 한다고 본다. 이는 UN인권선언에 적시된 기본권으로 결코 침해해서는 안 된 다. 정부당국은 ‘유죄가 판명되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하는 근본적 원칙을 존중 해야 한다. 국내보안법에 의거한 구금사례들은 모두 최소한 1개 이상의 기존 법률 로 처리가 가능한 사안들이다. 일례로 다음의 죄목은 기존 법률로 충분히 처벌이 가능하다. • 화폐위조 (형법 제489B조) • 여권 및 여행문서 위조 (이민법 제56조) • 종교적 증오 조장 (형법 제298A조) • 인종간 증오 조장 (형법 제499조) • 허위사실 유포 (형법 제499조) • 테러공격 (형법 VIA장) 그러므로 관련 준거법 및 규정이 존재하는 경우 국내보안법을 이용해 재판 없이 용의자를 구금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정부당국은 정책과 법률을 새롭게 제안할 시 해당 내용을 보다 투명하게 시민사 회에 공개하고 시민사회와 보다 활발한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 이는 신규 법규를 공표하기 전에 국민의 권리와 이해관계 보호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말레이시아의 주류언론은 정권의 통제 하에 있기 때문에 정권의 입맛에 맞춘 편 향된 언론보도를 하고 있다. 일례로 총선 준비기간 중에 주류언론은 여당의 일거 수일투족은 상세히 보도하지만 야당 관련 보도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 다. 이 같은 맥락에서 공정선거연합(BERSIH 2.0)은 선거개혁 조치 중 하나로 주 류언론이 야당에 대해서도 공정하고 균형 잡힌 보도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참고문헌 ·‘Human Rights Report (1998-2010)’, SUARAM 발간 ·‘SUARAM : 20 Years Defending Human Ri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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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공포를 조장하는 대테러리즘
크리트디코른 웡스왕파니치(Kritdikorn Wongswangpanich) 작가(태국)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테러행위라고 할 수 있을 2001년 9.11 테러 이 후 ‘테러리즘(terrorism)’이라는 용어에 대한 인식은 변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 한 변화는 예상 가능한 성질의 것이었다. 물론 9.11 테러 이전에도 수많은 테러공 격이 있었지만, 9.11 테러의 경우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자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요새로 인식되던 미국 본토에서 벌어진 테러공격이기 때문이다. 9.11 테러는 기존 의 테러공격과 유사한 점도 일부 있지만 이후 나타나게 될 새로운 유형의 테러공 격의 등장을 알리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 같은 새로운 테러공격의 공통점, 즉 언제 어디에서 발생할 지 알 수가 없어 피하기가 어려우며, 반제국주의 등 상징화된 대 의를 달성할 목적으로 자행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야말로 (일부 사상가의 견해에 따르면) 오늘날 테러리즘을 전쟁보다 무서운 존재로 만드는 주된 요소일 것이다. 9.11 테러는 대량살상 목표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9.11 테러 이후 발생한 일련의 테러공격은 보다 많은 사상자를 내고 상징화의 중요성을 줄이는 방 향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런던 지하철 폭탄테러, 발리 폭탄테러, 2011년 노르웨이 테러공격 등이 그 좋은 사례이다.1) 세계 최강의 요새를 공격해 다수의 희생자를 내는 최근 테러공격의 추세에 대응해 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새로운 대테러 정책 및 법률을 도입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 및 법규 자체가 상당히 새로 운 현상이라 ‘테러리즘’이라는 용어에 대한 해석은 아직까지도 정립이 되지 않은 상태이며, 이에 따라 태국에서는 대테러 법규를 정치적 목적에 따라 해석하고 인 권침해에 악용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특히 태국 최남단 지역에서는 9.11 테러가 발생하기 수 년 전에도 이미 테러행 위가 일부 발생했으며, 이러한 테러행위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새로 1) 더 상세한 내용은 Adrian Guelke의 The New Age of Terrorism and the Internati onal Political System. I.B.TAURIS: London - New York, 2009 참조.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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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전 세계적 추세가 태국 남부 테러리스트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서방국가에 비해 상당히 미미한 수준이다. 태국 테러리스트들의 테러공격 양상에는 그리 급격한 변 화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태국 대테러 법의 변화에는 미국이 공격을 당했다 는 사실, 혹은 국내정치적 동기, 혹은 두 가지 측면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바로 9.11 테 러가 태국 내 테러리즘 자체에 미치는 영향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태국의 반테러 정책에 급격한 변화를 초래했다는 점이다. 1988년 ‘국제민간항공용 공항에 서의 불법적 폭력행위의 억제를 위한 의정서(Protocol for the Suppression of Unlawful Acts of Violence at Airports serving International Civil Aviation)’에 서명한 이래 태국의 대테러법은 큰 변화 없이 동결된 상태에 가까웠다. 그러나 오 랜 기간 동안 변화의 움직임이 없던 태국의 대테러법은 9.11 테러 이후 갑작스러 운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태국의 외무부 장관은 9.11 테러가 발생한지 불과 몇 달 후에 ‘테러자금조달 억제를 위한 국제협약(International Convention for the Suppression of the Financing of Terrorism)’에 서명했다. 이런 면에서 논리적으 로 9.11 테러의 영향을 부정하고 태국 남부에서 발생하는 테러행위가 대테러법 변 화의 유일한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태국의 경우 9.11 테러 이전 부터 테러가 발생했지만 대테러법에 어떠한 변화도 가져온 적이 없이 동면상태에 가까웠다. 요컨대, 개정된 대테러법은 기존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만들어진 것이라 기보다는 전 세계적인 대테러리즘의 물결에 발맞추고자 마련된 법안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대테러법은 기존 문제의 해결에 적용되기보다는 제국주의적 추세 에 영합하는 방향으로 운영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법률의 시행은 일부 정치적 목적을 위해 테러리즘 이외의 문제에 적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우선 필자는 태국 대테러법의 세부 내용을 살펴보고 동 법의 모호한 의미와 불법적 이용에 대 해 분석해보고자 한다.
테러리즘 관련 범죄2) 제135조 제1항: 다음에 해당하는 형사범죄를 저지르는 자에게는 아래와 같은 처벌이 적용된다. (1) 폭력행위를 저지르거나, 또는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위협 또는 개인의 신체와 자유에 중대한 위해를 가하는 행위를 저지르는 자 (2) 대중교통체계, 통신체계, 기타 대중에게 이득이 되는 공공기반시설에 심각한 손상을 초래하는 행위를 저지르는 자 (3) 국가의 재산, 개인의 재산, 또는 환경에 위해를 가하는 행위를 저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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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경제적 손실을 초래했거나 초래할 가능성이 높은 자 대중에게 광범위한 공포감을 조장함으로써 심각한 손실 또는 무질서를 초래할 행위를 실행하거나 또는 어떠한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하도록 태국정부, 외국정부 또는 국제기구를 위협 또는 강제할 목적으로 이러한 행위를 저지른 경우, 이는 테러행위에 해당한다. (이러한 행위를 저지른 자는) 사형, 종신형 또는 3년에서 20년 사이의 징역형, 그리고 60,000 바트에서 1,000,000 바트 사이의 벌금형에 처한다. 국가에 정의를 실현할 것을 요구하기 위해 집회, 시위, 반대 캠페인을 벌이거나 그러한 운동에 참여하는 행위는 헌법에 적시된 민권의 행사로 테러행위가 아니다. 제135조 2항: (1) 실제로 위협한 바를 실행에 옮기리라고 판단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행동을 (보임으로써) 테러행위를 저지르겠다고 위협하는 자 (2) 테러행위 또는 테러행위를 저지르기 위한 계획의 일부인 다른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사람이나 무기를 동원하거나, 재산을 구매 또는 징수하거나, 테러리스트 교육을 제공 또는 이수하는 등 준비작업 내지 공모를 하거나, 테러행위에 참여하도록 대중을 선동하거나, 또는 누군가가 테러행위를 저지를 것임을 인지하고 이를 은폐하는 데 도움을 주는 자 위에 해당하는 자는 2년에서 10년 사이의 징역형과 40,000바트에서 200,000만 바트의 벌금형에 처한다. 제135조 3항: 제135조 1항 또는 2항에 적시된 범죄의 실행을 지원하는 자는 주범과 동일한 처벌에 처한다. 제135조 4항: 어떠한 집단(조직)*이 테러행위를 저질렀음을 적시하는 UN안보리 결의안 또는 발표가 이루어지고 태국정부가 그러한 결의안 또는 발표를 공인할 것을 공고한 경우, 해당 운동에 속한 자는 7년을 초과하지 않는 징역형과 140,000바트를 초과하지 않는 벌금형에 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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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테러법에는 여전히 모호한 요소가 너무나 많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며, 테러 리즘을 다른 범죄와 별도로 분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 다. 제 135조 제1항의 (1)이 그 좋은 예이다. 여기에서는 테러행위가 (사실상) 일 반적 살인과 동일한 것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동 법을 자의적 으로 해석해 불안정한 판결이 나올 수밖에 없다. 또한 ‘테러리즘’의 다양한 정의에는 ‘폭력’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차이를 내포하 고 있기 때문에 이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테러리즘에 대해 논할 때 우리는 테 러리즘이 어떠한 방식으로건 폭력과 연관되어 있으며 관점에 따라서는 일종의 폭 력이라고도 볼 수 있음을 분명히 인지한다. 그러나 테러리즘이라는 행위로 인지하 게 되면, 이는 단순하고 일상적인 폭력 또는 암살행위로 해석하지 않는다. 기준에 대한 해석은 달라질 수 있으나, 이렇게 서로 다른 기준들도 테러리즘을 다른 종류 의 폭력과 구분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알렉스 P. 슈미드(Alex P. Schmid)는 ‘테러리즘’을 구성하는 기 준을 파악하고자 시도했다. 슈미드는 테러리즘의 해석과 관련해 검토된 관점들에 서 그 기준으로 사용 가능한 22가지 주요 요소들을 발견했다. 이들 요소들로는 폭 력과 무력, 정치적, 공포감과 테러에 대한 강조, 위협, 심리적 효과와 예상 반응, 희생자 목표 차별화, 목적성 있고 계획되어 있으며 체계적이고 조직화된 행동, 교 전방식·전략·전술, 인도주의적 제약 없이 원칙을 위반하는 비정상성, 강압·강탈·복 종 유도, 홍보 측면, 자의성, 비인격적이고 무작위적인 성격, 무분별함, 민간인, 비 전투원, 외부인의 희생자화, 겁박, 희생자의 무고성 강조, 집단, 운동, 조직의 가해 자화, 상징적 측면 및 타인에 대한 시위성, 폭력 발생의 계산 불가능성, 예측 불가 능성, 불의성, 은밀하고 암묵적인 특성, 폭력의 반복성, 연쇄성, 캠페인적 특성, 제 3자에 대한 범죄 및 요구사항 등이 있다.3) 슈미드의 조사에 따르면 ‘상징성’등 일부 요소의 경우 오늘날에는 중요도가 다소 감소했다고는 하더라도 테러리스트가 되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게다가 테러리 즘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악한 요소를 갖추고 있는지라 가장 추악하고 저 열한 형태의 폭력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누군가를 테러리스트로 비난할 경우 이는 해당 인물이 세상에서 가장 천한 폭력을 행사하는 자라는 의미도 함께 담고 있다. 테러행위가 추악하다는 의식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테러리즘’이라는 비난이 정치 적 목적으로, 특히 정적을 비난할 때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슈미드의 기 2) http://bangkokpundit.blogspot.com/2006/02/anti-terrorism-legislation-in-thail and.html.(2011년 8월 27일에 참조했다.) 3) Alex P. Schmid and Albert J. Jongman. Political Terrorism: A New Guide to Actors, Authors, Concepts, Data Bases, Theories and Literature. North-Hollan d Publishing Company: Amsterdam, 1988. pp.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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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요소를 벗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상대방(the other)’을 테러리스트로 비난함으로써 정적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일례로 미국의 조지 W. 부시 (George W. Bush) 전(前) 대통령은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에게 테러리스 트를 지원한다는 혐의를 씌워 이라크를 테러리스트의 소굴로 만들었다. ‘우리’와 ‘적’을 나누는 의식이 강할수록 테러리즘의 이름을 빌린 비난이 더욱 과열될 수밖 에 없다는 것은 태국도 예외가 아니다. 결국 ‘정적’을 테러리스트로 비난함으로써 명예를 훼손하는 것은 실체적이고 공식적인 권력이 없으면 그리 쉬운 일이 아니 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나 마음대로 테러리스트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적을 비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테러리즘이라는 비난으로 이어진 갈등 중 가장 최근에 큰 규모 로 나타난 갈등을 꼽자면 단연 레드셔츠(Red Shirts) 시위대와 왕정이 (비)공식적 으로 주도한 아비싯(Abhisit) 정부간의 충돌일 것이다. 레드셔츠 운동은 태국 역사상 최다득표수로 선거에서 승리한 탁신 시나와트라 (Taksin Shinawatra) 전(前) 총리를 낙마시킨 9월 19일 쿠데타에 대한 정치적 대 응으로 시작되었다. 탁신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사랑, 지지, 중립, 반감, 혐오)이 어 떻건 간에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따라서 9월 19일 쿠데타는 태국의 민주 주의 발전 역사상 최악의 쿠데타라고 볼 수 있다. 처음에 레드셔츠 시위대가 탁신 에게 복귀 기회를 줄 것을 정부에 요구했다는 것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쿠데 타가 없었다면 탁신은 총리직으로 복귀할 정당한 권리가 있었다는 점에서 이 같은 요구에는 틀린 점이 없다. 따라서 운동 전체의 요구가 일개 개인의 권리에 관한 것 이라 해도 탁신이 민주주의 제도를 통해 총리직에 올랐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러 한 요구는 전적으로 정당하며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치부할 수 없다. 시간이 흐르면서 레드셔츠 운동의 요구는 단순히 탁신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대 신(물론 탁신 문제도 요구사항 중 하나로 포함되어 있다) 정의실현, 이중잣대 철 폐, 사회계급 해체 등으로 점진적이지만 지속적으로 진화해갔고, 일부 레드셔츠 시 위대의 경우 정권교체까지 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레드셔츠 운동조차도 슈미드의 22개 요소 기준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정부에 맞선 정치적 시위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태국 대테러법에도 이 같은 정치적 시위는 불법이 아님을 적시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자신에게 맞선 ‘적’을 흉측하고 천한 야수로 만들고자 결국 레드셔츠 시위대를 테러리즘 혐의로 기소하 기에 이르렀다. 레드셔츠 시위대 전원이 기소된 것은 아니지만 레드셔츠 운동의 주축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상징하는 지도자들은 모두 기소대상이 되었다. 대테러법 자체에 정치적 시위는 테러행위가 아니라는 점이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 논문에서 앞서 설명한 바대로 대테러법은 모호한 표현이나 다른 법 의 동일규정을 활용한 자의적 판단과 개별적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 많다. 따라서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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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와 정부는 대테러법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 이 와 더불어 반테러법의 원래 목적이 태국 남부의 테러조직 등 실제적인 테러리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전 세계적 추세와 제국주의적 요구에 편승하 는 것이었음을 감안할 때, 이 법은 권력자가 편의적으로 이용하는 장식용 법규라 고 할 수 있다. 레드셔츠 사건에 대해 상세히 파악하려면 분석을 시작하기 전에 세부사항을 어느 정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법원, 테러리즘 혐의로 체포된 ‘레드셔츠’ 지지 의원들에 대한 보석 허가 6월 8일(방콕) 태국 법원은 화요일 테러리즘 혐의로 기소된 자투포른 프롬판(Jatuporn Prompan), 카룬 호사쿨(Karun Hosakul) 등 야당 푸어타이당 소속 ‘레드셔츠’ 지지 의원 2명에게 보석을 허가했다. 판결 결과 두 사람은 보석금으로 각자 100만 바트를 지불했으며 의원직을 상실하게 되었다. 레드셔츠 지지자 수백 명이 법원 밖에 모여 두 사람에게 꽃을 선물하며 기운을 북돋웠다. 자투포른은 법원의 자비와 정의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했다. 재판부는 두 사람에게 7월 28일 특수수사부(DSI)에 출석할 것을 명했다. 야당인 푸어타이당 소속 의원인 자투포른 프롬판과 카룬 호사쿨은 검찰 측에서 자신들을 구금하기 위한 법원명령을 신청한 가운데 화요일 오전 특수수사부에 출석해 테러리즘 혐의에 대한 변론을 펼쳤다. 두 사람은 레드셔츠 시위대를 이끌고 4월 3일부터 5월 19일까지 라챠프라송(Ratchaprasong) 교차로를 점거한 것과 관련해 테러리즘 혐의로 기소되었다. 경찰은 이들이 경찰관을 상대로 폭력을 사주해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고 주장했다. 특수수사부는 6월 3일 자투포른, 카룬, 위치엔 카오캄(Wichien Khaokam) 등 푸어타이당 소속 의원 3인에 대해 소환영장을 발부해 테러리즘 혐의로 기소하고 6월 8일 형사법원에 출석해 검찰 측에 답변할 것을 요구했다. 자투포른은 라챠프라송에서 수 개월에 걸친 반정부 시위를 조직한 반정부
조직인
‘반독재
민주주의
통일전선(United
Front
for
Democracy against Dictatorship)의 최고지도자이며, 카룬은 레드셔츠 시위대의 핵심 지지자이다. 위치엔의 경우 지방에 일이 있어 출석이 불가능하다며 연기를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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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법원은 화요일 아침 나타우트 사이쿠아(Natthawut Saikua), 크완차이 프라이파나(Kwanchai Praipana), 비푸탈라엥 파타나푸미타이(Viphuthalaeng Phatthanaphumthai),
요차와리트 추클롬(Yotsawarit
Chuklom),
니시트
신투프라이(Nisit Sinthuprai) 등 레드셔츠 지도자 5인에 대한 구금을 7일(6월 9~15일)간 연장했다. 이번으로 세 번째인 구금기간 연장은 보다 상세한 취조 및 조사를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레드셔츠 지도자들은 시위지역을 탈환하기 위한 군사작전이 개시된 후 라차프라송에서 진행된 6주간의 시위를 종결하기로 결정하고 5월 19일 경찰에 투항했다.4) [밑줄표시: 필자가 강조한 부분]
위 내용은 테러리즘 혐의로 기소된 레드셔츠 지도자들에 대한 언론보도이다. 뉴 스에 따르면 법원의 보석허가를 받은 이들은 의회 소속 의원들뿐이다. 그러나 이 들 이외에도 불법적인 대테러법을 적용받아 테러리즘 혐의로 기소된 레드셔츠 시 위자들은 태국 전역에 많으며, 이들 중 대부분은 수년간 보석신청이 거부되었다. 유죄판결이 내려지지 않은 사람은 모두 무죄로 대우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는 인간 으로서의 기본권을 무시한 처사였다. 태국의 주요 영자신문인 <더 네이션(The Nation)>에서 이 문제를 보도했는데, 그 중 우본 라차타니 시청5) 방화 혐의와 관 련한 레드셔츠 시위대에 대한 법원 판결을 다룬 최근 기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시청 방화 혐의로 레드셔츠 시위대 12명 징역형 선고, 9명 석방 어제 지방법원은 작년 5월 19일 시위 중 우본 라차타니 시청(Ubon Ratchathani City Hall) 방화에 개입한 혐의로 레드셔츠 시위대 4명에게 33년 4개월의 징역형을, 8명에게는 1~3년 형을 각각 선고했다. 다른 레드셔츠 시위대 9명은 제출된 증거가 유죄 판결에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무죄 방면되었다. 레드셔츠 지지자 200여명은 법원 밖에 모여 재판을 받은 21명에 대한 판결을 기다리며 이들에 대한 도덕적 지지를 표했다. 파타마
물밀(Pattama
Mulmil),
테에라와트
사짜수완(Theerawat
4) http://www.mcot.net/cfcustom/cache_page/64812.html.(2011년 8월 27일에 참조 했다.) 5) Ubonratchathani은 태국의 동북 지방 중 하나다.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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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jjasuwan), 사농 케추완(Sanong Ketsuwan), 솜삭 프라산삽(Somsak Prasansap) 등 4인은 원래 종신형을 구형 받았으나 법원은 이들의 자백이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되었다는 근거로 각자의 형량을 33년 4개월로 낮추어 선고했다. 프라디트 분수크(Pradit Boonsuk), 리키트 수티판(Likhit Sutthipan), 차이야 디사엥(Chaiya Deesaeng), 피시트 부탐카(Pisit Butamkha)는 원래 3년 형을 구형 받았으나 형량이 2년으로 줄었고, 우본 사엔타위수크(Ubon Saenthaweesuk), 수포즈 도운응감(Supoj
Doungngam),
오나농
반파차트(Onanong
Banpachat)는 1년 형을 구형 받았다가 형량이 8개월로 줄었다. 특수수사부에서 테러리스트로 지목한 레드셔츠 시위대 지도자A피체트 타부다(Pichet Thabuddha)의 경우 법원은 그의 행위가 테러리즘의 틀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나 그가 시청 방화를 선동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존재하기 때문에 대중을 규합해 범법행위를 저지른 혐의에 대해서는 유죄라고 판결했다. 나머지 레드셔츠 시위대 9명에 대해서는 검찰 측에서 이들이 시위에 합류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제출했을 뿐 혐의 내용대로 공공기물을 파괴하거나 방화를 저지르는 모습이 나타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죄가 선고되었다. 판결 후 피고 전원은 우본 라차타니 교도소로 이송되었으며, 피고 중 무죄가 확정된 9명과 형량을 채운 3인은 오후 늦게 석방될 예정이다. 변호사 와타나 찬싱하(Wattana Chansingha)는 오늘 푸어타이당 의원들이 항소를 기다리는 레드셔츠 시위대들에 대한 보석신청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6)
일부 레드셔츠 시위대가 정부에 맞서 싸우기 위해 일부 무장을 했던 것은 사실 이며, 레드셔츠 시위와 같은 장기적 정치운동에서 이는 상당히 일반적인 일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레드셔츠 시위대가 폭력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할 의도는 전 혀 없다. 여러 지방에서 시청에 불을 지르고 야만적이고 강압적인 성명을 내는 등 의 행위는 분명 폭력행위에 해당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행위가 테러행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테러리즘도 폭력행위의 일부이기는 하나 여타 종류의 폭력과는 다른 독특한 특성이 많다. 슈미드의 22개 요소 기준에서는 테러리즘을
6) http://www.nationmultimedia.com/2011/08/25/national/12-red-shirts-jailed-ov er-town-hall-burning-9-free-30163610.html. 2011년 8월 25일 발행.(2011년 8 월 27일에 참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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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범주화하는데 사용되는 모든 용어를 취합하고자 노력했으나, 여기에 정치적 시위는 포함되지 않으며, 만약 정치적 시위가 포함되었더라면 테러리즘의 정의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만약 정부나 집권세력에 맞서 폭력적으로 투쟁하는 정치적 시위가 테러리즘으로 분류된다면 이 세상의 모든 혁명은 테러행위가 될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에서 카다피에 맞선 리비아 시위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치적 시위를 테러행위로 간주한다면 무척이나 우스운 일이 될 것이며, 그렇다면 이 글은 세계 모든 시민들에게 테러행위를 저지르라고 권유하는 셈이 될 것이다. 완전무장을 한 ‘군사작전’에 맞선 싸움이라는 점을 굳이 지적하지 않더라도 레드 셔츠 시위대가 맞서 싸울 무기를 전혀 소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인 권이 진정으로 존재한다면 삶을 영위할 권리야말로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 의 가장 핵심적인 원칙일 것이다. 따라서 이들을 테러리스트로 비난한다면, 자신의 권리와 삶을 보호하기 위해 무기를 든 민간인, 그리고 완전무장을 갖춘 병사와 무 기를 사용해 자국민을 진압하고 살해하는 정부 중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묻는다 면 쉽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법무부 직속 특수수사부(DSI)는 ‘테러리즘’용어의 정의 또는 철학을 제쳐 놓고 자의적으로 대테러법을 활용하고 있다. 이들은 테러리즘의 의미가 무엇인지 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으며, 좀 더 거칠게 표현하자면 반테러법의 세부 내용에 대 해서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단순히 법을 활용하고 있다. 흥미로우면서 동시에 슬 픈 사실은 이 같은 반테러법이 실제로 실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반테러법 의 불법적 실행은 의심할 여지없이 정부의 ‘적’인 레드셔츠 시위대의 명예를 훼손 하고 이들에게 명령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들은 인권에 대해서는 워낙 문외한이라 삶을 영위할 권리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며, 인권을 논의할 여지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레드셔츠 시위대에 대테러법을 적용함으로써 정부와 상층 권력7)은 최소한 정적 에 대한 명예훼손과 명령이라는 두 가지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이들은 이로 인 한 후폭풍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으며, 이러한 여파 중 하나가 바로 얼마 지나지 않아 열린 2011년 총선이었다. 레드셔츠 시위대에 가장 추악한 형태의 폭 력인 테러리즘 혐의를 뒤집어씌움으로써 법원과의 협력은 원활하고 효율적으로 진 행될 수 있을 것이다. 테러리즘 혐의는 무거운 처벌(사형, 종신형 등)을 수반하는 중죄이며, 이는 부분적으로는 가장 저열한 형태의 폭력으로서 테러리즘이 갖는 야 만성과 추악함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테러리즘 혐의를 적용하면 누구든 죽일 수 있는 저열한 존재, 즉 호모 사케르(Homo Sacer, ‘벌거벗은 생명’을 의미) 라는 이미지를 정적에게 심어줄 수 있고 손쉽게 탈인간화할 수 있다. 레드셔츠 시 7) 이러한 상층 권력은 ‘초정부(Supragovernment)’라고 부를 수도 있다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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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는 테러리스트이므로 이들에 대한 살해, 고문 등 어떠한 조치도 용인되는 것 이다. 법원 역시 보석신청을 거절하는 등 천한 존재인 이들에게 어떤 조치든 할 수 있게 된다. 법원이 형량을 줄일 경우 이는 법원이 선량한 자비를 베푼 덕인 셈 이다. 정부가 이미 이들을 탈인간화해 인간이 아닌 존재로 만들어두었기에 인권 같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래서 이러한 영역에는 인권이 발을 붙일 틈 이 없다. 또한 이는 천한 백성들에게 하나의 교훈으로 작용한다. 이들은 인간이 아 니기에 더 이상 시민(citizen)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고 인 간으로서 동등한 대우를 받고자 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 된다. 이는 결국 영원히 목소리를 죽이고 살라는 가르침인 셈이다. 개는 짖어도 되지만 붉은 옷을 입은 벌 거벗은 생명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현재 태국의 대테러법이 테러리즘보다 더 무서운 공포를 조 장하고 있다고 본다. 이 법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권력자의 이익을 위해 제정 되었기 때문이다. 대테러법은 기존의 테러에 대처하기 위해 보다 공포스럽고 야만 스러운 테러를 허용하며, 또 다른 테러를 남길 뿐이다. 시민의 증오심만 남는 그러 한 테러 말이다. “국민은 정부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정부가 국민을 두려워해야 한다.” ----------------------------------------------* 이 글은 9.11 이전과 이후 세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리고 그것이 태국의 정 책과 법률에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그러한 정책들이 인권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 지 분석하고자 했다. 이 글은 태국의 레드셔츠 시위대들이 행사했던 폭력을 방어 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이들이 테러리즘 혐의를 받는 것을 문제 삼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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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대테러 정책의 경험
시나판 사미도라이(Sinapan Samydorai) 싱크 센터(Think Centre, 싱가포르) 아세안 분과 팀장
1. 배경 테러리즘을 근절하기 위한 조치를 소개하기 전에, ‘테러리즘이 무엇인지’에 대한 국제적 합의와 명확한 정의가 필요하다. 테러리즘에 대한 정의는 테러를 수반하거 나 혹은 돕는 것, 테러리스트 그룹, 국가 지원 테러리즘, 무장군인들, 군대 활동과 테러리스트와 관련된 회사 혹은 테러 활동에 대한 법률과 처벌의 공식화를 용이하 게 한다. 테러에 관한 합의된 정의 없이 테러리즘 방지 및 처벌을 위한 국제협약 을 채택하려던 1937년 국제연맹의 노력은 실패했다. 이후 1949년에 설립된 국제 연합은 테러리즘에 대한 포괄적인 접근보다 오직 범죄나 이슈같은 단편적인 방향 으로 접근했다. ■ 테러리즘에 대한 국제연합(UN)의 정의 UN은 비행기 납치, 외교적 인질 사건, 폭파, 테러자금 지원 등의 테러활동에 대처하기 위해 1963년 ~ 1999년 사이에 12개의 국제협약을 만들었다. 그러나 유엔의 ‘테러에 대한 포괄적인 협약(안)’은 테러리즘의 정의와 관련하여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주된 어려움은 테러조직과 해방운동조직의 구분, 그리고 테러 행위로 인식되는 군대의 활동에 관한 것이다. 협약안 제18조는 협약의 범 위, 특히 군대의 활동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다. ‘지역 또는 내부 무장갈등 기간 동안 행해진 특정 행위는 국제인도법에 의하면 금지되지 않지만, 협약안 2(1) 에 의하면 국제범죄로 간주될 수 있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령, 내부의 무 장 갈등을 규제하는 국제법은 무력사용의 기본 원칙만 지키면 정부군이나 무장 반군의 무력 사용을 금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국내법에 의거할 때는 범죄행위 가 될 수 있으며, 반군이 당국에 체포되면 형법에 적용되어 폭력행위로 기소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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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 게다가 UN 안보리 결의안 1373호는 인권 프레임이 없어 인권과 근 본적인 자유권에 대한 침해 여부를 허술하게 다루는 국가들이 대테러리즘 수단 을 채택하도록 요청하였다. 많은 국가들은 1373호에 따라 시민의 자유, 자금 통제, 이민 정책, 난민보호에 대한 새로운 제약을 제도화하고 있다. ‘테러리스트’에 대한 싱가포르의 법적 정의는 일체의 테러 행위를 하거나 또 는 테러 행위를 시도하는 자, 테러 행위에 가담하거나 돕는 자를 말하며, 여기 에서 ‘테러 행위’란 타인에 대한 심각한 폭력을 수반하는 행위를 하거나 위협하 는 것을 말한다. 대테러 법규는 테러리즘에 대한 자금 지원과 거짓 위협을 전 파하는 행위를 범죄행위로 처벌한다. 싱가포르 의회는 지난 2001년 법무장관 에게 UN 안보리 결의안 제1373호 이행 권한을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후 2002년 7월 8일 정부가 테러리스트에 대한 자금 지원을 규제할 수 있도 록 하는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면서 테러 행위와 연관성이 있는 자산을 거래하 는 것은 불법으로 규정되었다. 자금 활동은 은행 대출, 여행자수표, 은행 수표, 주식, 증권, 채권, 환어음, 신용장 등을 포함한다. 이 법률은 ‘테러자금 조달 억 제를 위한 국제협약’과 UN 안보리 결의안 제1373호의 이행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다.
2. 대테러 조치와 주요 법률 ■ 국내보안법(Internal Security Act. ISA) 많은 아시아 국가에서는 9.11 테러 이전에도 국내법을 통해 인권을 유린하는 관행이 있었다. 싱가포르는 영국으로부터 이어받은 국내보안법을 1965년에 제 정하였다. 국내보안법 73(1)·74조는 모든 경찰이 구금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 거가 있거나, 어떤 방식으로든지 싱가포르의 안보 혹은 경제생활에 필수적인 서 비스를 유지하는 데에 있어 편견 있는 행동을 하였거나 앞으로 할 것이며 또는 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어지는 이유가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체포영장 없이 심문기간 동안 구금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국내보안법 8조에 의하면 장 관이 어떤 이의 구금을 찬성한다면, 장관은 2년을 초과하지 않는 기간 동안 구 금하도록 명령을 내릴 수 있다. 또한 국내보안법은 2년 동안 무제한으로 재판 없이 혹은 아무런 설명 없이 구금하는 것을 허용한다.1) 국내보안법에 의하면 정부는 전에 구금되었던 이의 1) 싱가포르에서 잘 알려진 국내보안법(ISA)적용 사례는 다음과 같다. 1. 1963년 2월 2일 싱가포르 합동안보회의 때 말라야와 영국 두 나라의 야당과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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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적, 정치적 권리를 제한하는 것도 가능하다. 국내보안법은 집회 및 결사, 표현의 자유, 거주 및 이동, 직업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도 허용한다. 정부가 국 내보안법을 적용하여 1966년부터 1989년까지 재판 없이 찌아 띠에 포(Chia Thye Poh)를 구금했다가 1998년이 되어서야 그를 복권시켜 주었다. 하지만 1989년 개정된 헌법은 국내보안법에 따른 구금의 경우 실질적인 근거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법적인 검토를 금지하고 있고, 그 법의 헌법과의 합치여부에 대 한 검토도 금지하고 있다. 국내보안법 하에서는 공개재판을 받을 권리가 없다. ■ 1987년 국내보안법 중 구금조항 1987년 국내보안법에 따라 22명의 젊은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들이 구금되 는 일이 벌어졌다. 이들은 재판 없이 구금되었고, 무력으로 PAP 정부를 전복하 려는 음모를 꾸민 위험한 마르크스주의자라는 혐의를 받았다. 이 일은 젊은이들 이 이주 노동자 문제나 노동문제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싹을 자르기 위한 것이 었다. 구체적으로 1987년 5월 21일 15명의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또 다른 7명 이 6월에 체포되었다. 그들은 법적 대리인 없이 심문을 받고, 오랜 시간동안 수 면을 취하지 못했으며, 일부는 뺨을 맞거나 찬물을 뒤집어썼고, 눈을 뜰 수 없 는 강한 밝은 빛 밑에서 자백을 강요받았다. 정의와 평화 위원회의 간사인 빈센트 청(Vincent Cheng)은 3년이나 복역했 다. 법률가 떼오 소(Teo Soh)는 1987년 9월에서 1988년 4월 19일까지 몇 개
운동 지도자들을 재판 없이 17년 동안 구금했다.(Operation Cold Store) 2. 1961년 찌아 띠에 포(Chia Thye Poh)는 Barisan Socialis(BS)당을 만들었던 3명의 의원 중 한 명이었다. 1966년 10월 찌아는 People’s Action Party(PAP)에 저항하기 위해 의회에서 나와 장외투쟁을 벌였던 10명의 Barisan 당원 중 한 명이었다. 3주 후 그는 체포되었고, 23년 동안 구금되었다. 그 기간 동안 PAP는 찌아의 범죄사실이나 어떤 증거도 내놓지 않았다. 3. 1974년 티티 라자(T T Rajah)가 체포되어 18개월 동안 구금되었다. 1971년에 그는 IS A에 의한 구금자들을 위해 활동했었고, 그의 의뢰인을 구타했었다고 알려진 공무원들 에 대한 소환장을 제출했었다. 4. 1977년 정치범 변호활동을 하던 변호사, 지 로만(G Roman)은 ‘공산주의 모의’를 했다는 혐의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5. 1979년 대학강사 한 명과 싱가포르 대학의 8명이 친공산당 활동을 이유로 체포되었 다. 6.‘마르크스주의자들이 폭력적 수단으로 정부를 전복하려고 모의했다’는 이유로 22명 이 1987년 5월 21일과 6월 20일에 체포되고 구금되었다. 7. 1988년 5월 전 법무차관이자 법률사회 회장이었던 프란시스 쏘(Francis Seow)는 198 7년부터 구금되었던 의뢰인으로부터 성명서를 받았다는 이유로 체포, 구금되었다. 그 는 이전부터 정부의 언론 및 출판에 관한 법률을 비판해 정부의 분노를 샀다.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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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동안 풀려난 후, 언론 성명서를 발표한 뒤 다른 7명과 함께 다시 체포되었 다. 그가 발표한 성명서는 정부가 주장했던 내용, 즉 그들이 정부를 전복하려는 마르크스주의 음모 일당이고 그들이 구금기간 동안 신체적 학대를 겪지 않았다 는 것은 거짓주장이라고 밝히고 있다. 떼오(Teo)는 1990년 6월 1일까지 구금 되었고, 다른 이들은 자신들이 발표했던 성명과 상반되는 입장을 밝힌 후 수개 월이 지나서야 풀려났다. 1987년 5월 구금 사건은 정부가 시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더 가혹한 법률을 동원하고 모든 반체제 운동을 제한하며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욕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싱가포르의 경험 싱가포르가 경험했던 테러 행위는 거의 없다. 1960년대 싱가포르 독립투쟁 당시 공산주의 반란군에 대한 폭력적 진압의 사례가 있기는 하다. 독립 후에는 3건의 테러공격이 싱가포르에서 발생하였다. 1. 1965년 맥도날드 하우스 폭탄공격 :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의 합병에 반대하 는 인도네시아인들의 공격이 있었다. 싱가포르는 이들을 잡아 유죄를 선고했 다. 2. 1974년 일본 적군파(JRA) -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PFLP)의 셀 석유 습격사건 : 이들은 싱가포르에서 공산주의 북 베트남과 싸우고 있는 남 베트남과 미 육 군에 대한 석유 공급을 중단시키려고 했다. 그들은 선박 나유(Naju)를 납치 하고 5명의 선원을 인질로 잡았다. 싱가포르는 인질을 풀어주는 대가로 테러 범들을 안전하게 쿠웨이트로 보내주겠다는 협상을 했다. 3. 1991년 싱가포르 에어라인 항공기 117 납치 : 파키스탄 인민당(PPP)이 파키 스탄 전 총리인 베나지르 부토(Benazir Bhutto)의 남편과 다른 PPP 당원들 의 구금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싱가포르 특공대는 납치범을 사살하고, 188명의 승객들과 승무원 모두를 안전하게 구출하였다. 4. 9.11 이후 12개월 동안 싱가포르는 제마 이슬라미아(JI) 소속의 회원들을 체 포하고 미국의 대테러 공격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3. 대테러 법률 남용과 문제점 대테러 조치는 인권존중과 법치, 민주주의를 무시한 채 군사적 해결책에만 초점 을 맞추고 있다. 9.11테러 이전에 미국과 호주 등은 국가보안법에 따라 반체제 인 사를 구금하는 것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 정부들이 한 목 소리로 국가보안법을 옹호하며, 이러한 가혹한 법률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 결과 대테러 조치 이후 개개인과 공동체의 자유는 더 엄격히 통제받고 있고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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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인터넷에 대한 더 많은 통제들이 행해지고 있다. 싱가포르 정부는 유사한 보안법을 시행하려는 여타 아세안(ASEAN) 회원국들로 부터 자극을 받았고, 그 결과 기존에 보장되던 표현, 집회, 파업 그리고 시위의 자 유 등이 축소되었다. 9.11테러는 각국 정부가 자의적 체포와 가혹한 법률의 시행 을 정당화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싱가포르에서는 국내보안법에 따라 행정적 구금이 이루어지고 있다. 정부는 정치적 반대자, 비판자, 시민운동가를 재 판 없이 무기한 구금할 수 있다. 과거 공산주의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국내보안법 에 따라 사람들을 구금했다면, 지금은 호전적 이슬람 운동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재판 없이 구금하고 있다. 이러한 구금의 관행은 어떤 형태의 구금보다도 공인된 무형의 권리를 침해할 위 험이 있다. 행정적 구금이 일체의 반대 세력을 탄압하고, 비판과 저항을 차단하며 야당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오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의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 을 뿐만 아니라 적법한 절차와 공정한 재판을 무시하고 행정적 재량에 따라 기본 적 자유를 제한하여 무죄추정의 원칙을 위반하고 있다. 또한 일반 법률 시스템에 의해서는 보장되는 법적 보호 없이 판결이 선고되기도 한다. 정보기관에 의한 도 청과 수색을 허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법률 시스템은 국가보안법(National Security Law, NSL)의 상시적 시행을 필요로 한다. 대테러 조치로 인해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것 가운데 하나가 사생활 침해 부분이 다. 단지 혐의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은 비밀리에 인터넷, 휴대폰 등의 통신수 단을 도청을 할 수 있다. 싱가포르 경찰은 테러 대응이라는 미명 하에 시민의 합 법적이고 개인적인 생활과 전화, 이메일 및 기타 통신수단을 감시할 수 있는 더 큰 권한을 갖게 되었다. 9.11 이후 정부는 안보상 통제할 영역으로 인터넷을 포함 시켰다. 이 조치로 정부는 이메일과 인터넷 검색에 관한 전체적인 통계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 국무부의 1998년 보고서에 따르면,
싱가포르는 국내보안부(Internal
Security Department, ISD)와 부패관행조사위원회(Corrupt Practice Investigation Board, CPIB)를 포함하여 법 집행기관이 정보 수집을 위한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갖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는 싱가포르 당국이 정기적으로 시민들의 전화 통 화 내용과 인터넷 사용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관행이 1997년에 있었다는 확증은 없지만, 많은 사람들은 정부당국이 일부 야당 정치인과 비판적 인사를 일상적으로 사찰했던 것으로 믿고 있다. 9.11 이전에는 국내보안법의 점진적 폐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지금은 그렇 지 않다. 싱가포르 시민의 자유 증진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명백히 후퇴했다고 할 수 있다. ‘테러리즘’과 ‘테러리스트’의 정의를 폭넓게 적용하면, 반대자에 대한 탄 압, 시민단체 활동에 대한 감시와 신상 파악 등이 더 폭넓게 허용된다. 국내보안법으로 제마 이슬라미아(JI)의 회원을 구금하는 것과 같은 차별행위도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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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가하고 있다. 이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자 싱가포르 전국노동자평의회(National Trades Union Congress, NTUC)는 사용주가 말레이-무슬림 노동자들을 차별하 지 않을 것을 보장하기 위해 반(反)차별 심사위원단 구성을 제안하기도 했다. 현재 정부는 국제적 대테러리즘에 편승하고 있다. 이는 정부의 권한 남용과 인 권 제약에 대한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게 한다. 덕분에 각국 정부는 인권운동가, 소수자, 자기결정권과 정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을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을 ‘테러리스트’로 낙인찍음으로써, 정부는 사회갈등이나 종족분쟁 해결에 군사력을 동원할 수도 있게 되었다. 결국 대테러 조치는 시민의 사생활을 침해하고, 비정부 기구의 의사표현의 자유와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차별과 빈곤문제 해소는 더 이상 최우선 과제가 아니게 되었다. 이러한 환경 변화에 어떻 게 대응할 지를 놓고 시민사회 내부의 고민도 커지고 있다.
4. 제언 시민에 대한 무차별 폭력은 용납될 수 없다. 시민에 대한 폭력은 인권이나 민주 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민주주의의 근간은 만인의 인권, 평등, 자유, 정치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영역에 대한 참여를 존중하는 것이다. 또한 민주주의는 사람들이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안전을 보장한다. 이러한 기본적 전제를 배제한 테러리즘 과의 전쟁은 궁극적인 해법이 될 수 없다. 9.11 이후 세계화, 자본주의 그리고 자유무역의 부정적 영향에 대해 문제를 제 기하는 사람은 테러 행위 가담자로 의심받는 적대적 환경을 실감할 것이다. 각국 정부는 표현과 정치 활동의 자유에 대한 제한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예를 들어 경제적 불평등이나 연료 가격 인상에 항의하는 비폭력 대중 집회도 경찰이 폭력적 으로 진압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도청과 같은 경찰의 감시나 폭력, 시민사 회단체 활동에 대한 탄압도 강도가 높아졌다. 이민자와 이주노동자의 권리, 노동 권, 난민을 보호할 재정적 수단도 줄어들었다. 정의, 평등 그리고 민주주의 없이는 항구적인 평화도 없으며, 경제적 불평등 문 제와 폭력, 근본주의와 같은 안보문제와의 연관성을 알려나가야 한다. 사실 각국 정부는 극단주의가 대두하고 있는 근본 원인인 사회경제적, 정치적 부정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있다. 대테러 조치에는 반드시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시스템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라도 대테러 조치가 국제적 인권기준에 부합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 을 모색해야 한다. UN인권고등판무관을 비롯한 독립적인 전문가를 초청해 국내보 안법 등이 해당 지역 주민들의 인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감시하도록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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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한 방법이다. 그리고 아시아 각국 정부가 인권에 관한 국제협약을 비준하고 이 행하도록 촉구해야 한다.
참고자료 : 대테러리즘에 관한 주요 유엔협약과 관련 보고서 · 항공기 내에서 행한 범죄 및 기타행위에 관한 협약(1963년 ‘도쿄 협약’ - 항공기의 안전) · 항공기의 불법 납치 억제를 위한 협약(1970년 ‘헤이그 협약’ - 항공기 납치) · 민간 항공기의 안전에 반하는 불법 행위의 억제를 위한 협약(1971년 ‘몬트리 올 협약’ - 비행 중 항공기 폭파 같은 항공 사보타지 행위에 적용) · 국제적 보호인물에 대한 범죄 예방 및 처벌에 관한 협약(1973년 - 고위공무원 들이나 외교관들에 대한 공격 금지) · 인질억류방지에 관한 국제협약(1979년 ‘인질 협약’) · 핵물질의 방호에 관한 협약(1980년 ‘핵물질 협약’ - 물질의 불법 취득과 사용 방 지) · 국제 민간 항공기가 사용하는 공항에서의 불법 폭력행위의 억제를 위한 의정서(1988 년 - 1971년 민간 항공기의 안전에 반하는 불법 행위의 억제를 위한 협약의 보충) · 해양 항해의 안전을 위협하는 불법 행위의 억제를 위한 협약(1988년 - 선박에 서의 테러 행위에 적용) · 대륙붕 상에 소재한 고정 플랫폼의 안전에 반하는 불법 행위의 억제를 위한 의 정서(1988년 - 고정된 해상구조물에서의 테러 행위에 적용) · 가소성 폭약의 탐지를 위한 식별 조치에 관한 협약(1991년 - 가소성 폭약 탐지 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화학적 표시 제공) · 폭탄테러의 억제를 위한 국제 협약(1997년 UN 총회 결의안) · 테러 자금 조달 억제를 위한 국제 협약(1999년) · UN의 ‘테러에 대한 포괄적인 협약(안)’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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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대테러와 대반군 전략의 혼동
카르멘 루존 개트메이탄(Carmen Lauzon-Gatmaytan) 국제대화 이니셔티브(Initiatives for International Dialogue, 필리핀) 프로그램 매니저
1. 서론 지난 2008년 필자가 소속되어 있는 국제대화 이니셔티브(IID)는 민다나오에 위 치한 다바오 시티(Davao City)에서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대테러리즘과 개발에 관한 컨퍼런스’를 개최한 적이 있다. IID의 개발 파트너인 네덜란드 가톨릭 구호개 발원조기구(Catholic Organization for Relief and Development Aid Netherlands) 와 공동으로 주관한 회의였다. 이는 대(對)테러 조치와 개발 이니셔티브 간의 연 결고리를 살펴보고자 하는 일련의 노력이었다. 당시는 우리가 평화개발 NGO이자 인권기구, 여성인권 단체의 입장에서 전 세계적인 테러와의 전쟁의 여파를 온몸으 로 체감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우리는 9.11테러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인권을 제 물로 삼는 국가안보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여왔다. 9.11테러 이후 세계 전역에 걸친 테러와의 전쟁은 전 세계의 담론을 지배하게 되었다. 대(對)테러 조치 같은 안보의제는 국제적으로, 그리고 필리핀을 비롯한 수 많은 국가에서 우선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이에 따라 개발목표의 달성을 위 한 정치적 공간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이는 비단 필리핀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국 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대테러전의 분명하고도 직접적인 영향이라고 하겠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논거와 자원은 국가안보를 명목으로 다양한 정치적, 정책적, 정보군사적 도구를 고안·확장하는데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는 시 민의 자유와 인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1)
1) Proceedings, Conference on Counter Terrorism and Development in South and Southeast Asia, Davao City, Philippines May 25-28, 2008, Cordaid.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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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통해 필자는 앞서 언급한 회의를 비롯한 다양한 논의 내용을 정리하고 필리핀 국가안보와 인간안보의 위협에 대응해 IID에서 진행하고 있는 평화 및 안 보 이니셔티브의 최근 진전사항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IID의 경험과 민 다나오 지역 내 업무를 주로 소개하고, IID의 연대활동과 관련된 기타 지역의 사 례를 몇 가지 언급할 예정이라 모든 내용을 자세히 논의하지는 않을 것임을 미리 밝혀두고자 한다. 먼저 필자의 소속기관인 IID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IID는 필리핀 남 부의 민다나오에 사무소를 두고 평화구축과 갈등방지, 인간안보, 자결권 및 민주화 등의 주제를 중심으로 민중간의 연대를 구축하는 것을 주요임무로 하고 있다. 최 근 10년간 IID는 주요 사무소가 위치한 민다나오 이외에도 버마, 아체, 서파푸아, 태국 남부, 티모르 레스테(‘동티모르’의 새로운 명칭) 등을 우선순위 지역으로 놓 고 활동해왔다. 우리는 현지 수준(구체적으로 민다나오 지역)과 국내 수준에서 정 부를 비롯한 여러 이해관계자 및 정책결정자와 협업하는 것은 물론, 역내 수준에 서는 아세안(ASEAN) 회원국을 상대로 갈등방지 메커니즘 도입을 위한 로비활동 을 진행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IID는 시민사회의 역할을 강화하는데 주력하고 있으며, 특히 평화구축, 갈등예 방, 민주주의 및 인권 신장과 관련해 풀뿌리 조직과 소외계층의 역할을 늘리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보호책임(R2P), 세계인권선언, 국제인도법 등 인권과 인간안보의 보호 및 신장과 관련된 다양한 국제협약, 규범, 조약은 물론 UN 국제난민지침(UNGPID), UN 인권옹호자선언 등 관련 협약의 실행을 지원하 고 있다. 또한 필자는 여성, 평화, 안보에 대한 UN안보리 결의안 제1325호의 실 행을 지원하기 위해 우리가 수행하고 있는 업무에 대해서도 설명하고자 한다.
2. 배경 우리는 아시아 지역 내 일부 정부가 테러와의 전쟁을 이용해 표현과 결사의 자 유, 정보 접근권, 자결권 등의 기본적인 권리 및 자유에 대한 적법하고 평화적인 주장, 그리고 갈등해결과 관련된 주장들을 억압하는 모습을 목격한 바 있다. 테러와의 전쟁은 역내 무장화와 미국의 군사적 영향력 확장에 촉매 역할을 했 다. 특히 부시 행정부가 전 세계적인 테러와의 전쟁의 ‘제2전선’으로 지목한 필리 핀 남부 민다나오 지역에서 이 같은 현상이 더욱 두드러졌다. 당시 미국 정부는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국경지대와 서부 사하라의 테러조직 캠프와 함께 민다나 오도 수많은 다른 테러전선 및 목표물과 인접한 위치에 있어 경찰력을 발휘하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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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 테러리즘 분석가들에 따르면 민다나오는 인도네시아, 말 레이시아, 호주 등 역내 인근국가와 거리가 가까워 테러활동을 벌이기에 매우 쉬 운 지리적 위치에 있다. 따라서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에서 민다나오가 중요한 지 리적 요충지라고 보았다. 부시 행정부를 거쳐 현재의 오바마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측면의 정책은 현재까지 변함이 없다. 흥미로운 사실은 필리핀 남부에서 미국의 지원으로 진행된 안보작전은 일정 부 분 성과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對)테러와 대(對)반군전략을 혼동하는 경향을 보였다는 점이다. 이는 민다나오에서 이슬람 혁명조직을 상대로 진행되고 있는 무 장분쟁에 대해 위험한 함의를 갖는다.2) 국제위기감시기구(International Crisis Group)의 보고서를 읽으며 필자는 IID가 2008년 5월 개최한 대테러리즘과 개발에 관한 회의에서 JB 크록 평화학대학원의 조지 로페즈(George Lopez) 교수가 설명한 내용이 떠올랐다. 당시 로페즈 교수는 ‘전 세계적인 테러와의 전쟁보다 지금은 반군 진압에 대한 우려가 더욱 우세해진 상황’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로페즈 교수에 따르면 미국 국방부의 관점에서 볼 때 테러리즘을 분쇄하기 위해 각국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바로 반군, 그리고 정부의 역할을 거부하는 세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다. 또한 로페즈 교수는 이 라크 전을 통해 미국이 얻은 경험과 교훈은 ‘이라크 국민 중 스스로를 테러리스트 로 간주하는 이들은 1%에 불과할지 몰라도, 이라크인 50% 이상이 미국에 대한 공격을 지지했다. 따라서 미국은 이들 인구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 었다고 언급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수의 무장세력이 존재하는 필리핀의 상황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정부와 여러 반군 사이에 평화협상이 진행되고 있기는 하나, 현실적으로는 대(對)테러와 대(對)반군전략을 혼동하고 있다는 증거가 명백하다. 따라서 정부는 이 같은 무장갈등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위한 효과적 조치를 실행하고, 국내 주요 반군조직과의 평화협상을 꾸준히 추진할 필요가 있다. 필리핀의 주요 반군조직으 로는 모로 민족해방전선(MNLF), 모로 이슬람해방전선(MILF), 그리고 공산주의자 들이
주도하는
필리핀
민족민주전선(National
Democratic
Front
of
the
Philippines) 등이 있다.
3. 인권 및 민주주의에 대한 영향 테러리즘에 대한 정의가 광범위하면서도 모호하기 때문에 국제사회는 포괄적이
2) International Crisis Group, Asia Report No.152, 14 May 2008, The Philippines : Counter-Insurgency Vs. Counter-Terrorism in Mindanao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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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보편적으로 합의가능하며 법적 구속력이 있는 정의를 수립하지 못하고 있다. 위키피디아(Wikipedia)는 테러리즘의 정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테러리즘에 대한 공통된 정의는 공포를 조장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종교적, 정치 적 또는 사상적 목표를 위해 자행되며 비전투원(민간인)을 의도적으로 목표로 하 거나 비전투원의 안전을 무시하는 폭력행위에 대해서만 지칭하고 있다. ‘테러리 즘’이라는 용어에는 정치적, 감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며, 이로 인해 정확하게 정의하기가 매우 어렵다. 일부 정의에서는 국가 테러리즘 행위를 제외하고 있으며, 또 다른 정의에서는 불법적 폭력 및 전쟁행위도 테러리즘에 포함시키고 있다.” 반(反)테러에 대한 UN안보리 결의안 제1373호는 UN 회원국이 채택한 국제적 인 대(對)테러 독트린으로 널리 인식되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테러행위의 정의가 불관용 또는 극단주의를 동기로 한 행위로 제한되어 있다. 이 결의안은 회원국들 이 상호 협력해 테러행위를 예방·진압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각 회원국이 자국 영 토 내에서 모든 합법적 수단을 동원해 테러행위에 대한 자금조달 및 준비를 예방 하고 진압하기 위한 추가적 조치를 단행함으로써 국제협력에 동참해야 할 필요성 을 인식하고 있다.3) UN안보리 결의안 1373호의 통과 이후 다른 국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필리핀 역 시 오랜 논쟁을 거쳐 몇 년 후 대테러법을 통과시켰다. 아이러니하게도 ‘2007년 인간안보법(Human Security Act of 2007)’이라는 이름이 붙은 공화국법 제9372 호 제3조는 테러리즘에 대해 ‘개정형법 조항에 따라 처벌 가능한 행위를 저질러 정부가 불법적인 요구를 수용하도록 강압할 목적으로 대중이 광범위하고 심대한 공포와 공황을 느끼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테러리즘 범죄를 저지르는 자는 유죄이 며 가석방 없이 징역 40년 형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경우 테러행위에 대 한 정의가 워낙 광범위해서 해적행위부터 살인, 납치, 마약밀매, 총기불법소지 등 까지 포함된다.4) 3) UN안보리 결의안 제1373호는 2001년 9월 28일 제4385차 안보리 회의에서 채택되었 다. 4) Piracy in General and Mutiny in the High Seas or in the Philippines Waters (일반 해적행위 및 공해나 필리핀 해역 내의 반란) (Article 122), Rebellion or Insur rection(봉기 또는 반란) (Article 134), Coup d’état including acts committed b y private persons(개인 행위를 포함한 쿠데타) (Article 134), Murder(살인) (Article 248), Kidnapping and Serious Illegal Detention(납치 및 불법 구금) (267), Crime s Involving Destruction(재산파괴에 관한 범죄) (Article 324). The Law on Arson (방화放火법) (PD No. 1613), Toxic Substances and Hazardous and Nuclear Wast e Control Act of 1990(유독성 물질 및 핵 폐기물 관리법) (RA 6969); Atomic Ener gy Regulatory and Liability Act of 1968(원자에너지 규제 및 책임에 관한 법률) (R A 5207); Anti-Hijacking Law(반-공중 납치법)(RA 6235); Anti-Piracy and AntiHighway Robbery Law of 1974(반-해적행위 및 반-노상강도법) (PD 532); and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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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옹호 활동가들에 대한 양보의 의미일지는 몰라도 이 법에는 경찰 및 법 집 행인의 처벌에 대한 구체적 조항(제18조 및 제22조)과 더불어 조사·취조 시 고문 또는 강압의 사용을 금지하고 위반 시의 처벌내용을 적시한 조항(제24조)이 포함 되어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인간안보법은 심의 및 승인 과정에서 시민사회 단 체 및 평화·인권 활동가들의 의심과 불신,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단순히 부 시 행정부의 반(反)테러 기조에 맞추는 것처럼 묘사되었다. 필리핀 내 인권옹호 운동 및 진보운동의 경우 모두 테러행위에 책임이 있게 되 었다. 2008년 대테러리즘과 개발에 관한 회의에서 공유된 필리핀 참석자들의 경험 은 대(對)테러와 대(對)반군 전략의 구분이 불분명하며‘전 세계적인 테러와의 전 쟁’을 지지하는 이들이 현실에서는 테러행위를 저지르는 주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반체제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정당한 울분과 정당한 대의를 가진 이들로 보 지 않고, 편의적으로 대(對)반군 전략을 대(對)테러 전략의 일부로 포함시키는 경향 이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정부와 안보기관이 자국민을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물리치고 제거해야 할 테러리스트로 포장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필리핀, 특히 민다나오 지역에서는 민중의 자결권 주장이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 으며 이와 관련해 장기간의 평화협상이 진행되고 있다. 수 세기에 걸친 정부와 방 사마로(Bangsamaro) 간의 갈등은 식민지 체제의 유산이다. 방사마로는 자신들의 정체성, 영토에 대한 통제권, 자치권을 박탈한 역사적 불의에 대항하고자 자결권을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다. 이는 무슬림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투쟁과도 일맥상통한 다. 따라서 민다나오 지역에 대한 미국의 반(反)테러 의제는 당연한 것이 되었다. 소위 ‘민다나오 모델(Mindanao Model)’이 기본적으로 대테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고전적인 대반군 기법을 활용함에 따라 작전은 주로 아부 사야프 그룹(ASG) 에 집중되어왔다.5) ASG는 일반적으로 테러조직으로 분류되며, 공식명칭인 ‘알-하 라카툴 이슬라미야(Al-Harakatul Islamiyya)’6) 는 알카에다와 제마 이슬라미야와
Decree Codifying the Laws on Illegal and Unlawful Possession, Manufacture, Dealing in, Acquisition or Disposition of Firearms, Ammunitions or Explosives (총기, 탄약 및 폭발물의 불법 소유, 제조, 거래, 구입과 처리에 관한 법률) (PD 186 6). 5) ICG 보고서 내용 6) 호주 학자 킷 콜리에르(Kit Collier)는 관련 연구성과를 개관한 결과(Collier, 2004) ‘국제 테러범’이라는 명칭 이외에도 ‘이슬람 강도’, ‘사회의 강도’, ‘안건을 가진 무법자’ (Frake, 1998), ‘반역자도 혁명가도 아닌, 폭력의 새로운 개척자’ (Gutierrez, 2000), 이슬람 국가를 위해 싸우는 ‘혁명 단체’ (Quimpo, 1999), MN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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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연결고리를 상징하기 때문에 이슬람 운동에 기원을 둔 것이라고 군부는 주장한 다. ASG 소탕작전은 미국의 전 세계적인 대(對)테러전‘영구적 자유 작전(Operation Enduring Freedom)’을 필리핀 민다나오 지역까지 확장한 것이었다. 미 태평양 특수전사령부 소속 병력들은 ASG에 대한 군사작전을 위해 필리핀 군에게 자문과 지원을 할 목적으로 필리핀에 파견되었다. 실제로 미국이 필리핀 정부와 맺은 주둔군지위협정(VFA)이 1999년 5월 발효되 었기 때문에 미군 주둔은 공식적으로 정당화되고 있다. 2008년에는 필리핀 주둔 미군병력 규모가 660명에서 1,200명으로 확대되었다. ICG 보고서에 따르면 이들 미군은 ‘발리카탄 훈련 02-1’에 따라 필리핀 군부의 직업의식을 고취시키고 도 로·교각·학교 건설 및 인도주의적 서비스 제공 등을 통해 ASG 지역 주민들의 마 음을 얻겠다는 광범위한 목표를 갖고 있다. USAID 보고서 ‘안보와 개발 : 필리핀 남부의 3D’는 미국과 필리핀이 필리핀 남부에서 평화를 증진하고 반군 및 테러조직을 패배시키기 위한 공동전략을 추진 해왔음을 알 수 있다. 2002년 국가안보전략지침(NSSD)에서 처음 수립된 이 전략 에서 ‘3D’는 외교(diplomacy), 개발(development), 국방(defense)을 의미한다. 궁극적으로 테러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테러리스트와 이들의 사상적 기반을 모 두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 3D 전략의 요지이다. 따라서 평화 달성과 개발 촉진을 동시에 추진하면 테러리스트들이 지역 내 자원확보나 불만세력의 잠재적 지지를 막아내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필리핀 군 민다나오 서부 사령부와 만난 미군병력 LF 또는 MILF, AFP의 분파 내지비밀조직, 아니면 미국 CIA의 창조물(Iqbal, 2003), 다양한 용어가 쓰인다는 것을 확인했다. Primed and Purposeful, Armed Groups an d Human Security Efforts in the Philippines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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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우리는 미군이 필리핀 공군과 공동으로 정찰 및 전투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는 보고에 주목한다. 술루(Sulu)에서는 미군이 참여한 ASG 소탕작전으로 7명의 민 간인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 발생했다. 몇 년 전 IID의 현지 평화감시단과 언론 관계자들이 정전협정에 대한 감시임무 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미군이 민다나오 중부에서 필리핀 공군과 공동으로 반군 추적 작전에 참여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인권 및 평화단체에서는 이 같은 미- 필 리핀 주둔군지위협정(VFA) 위반사례를 문서화하고 있다. 필리핀 현지여성에 대한 미군의 성추행 사건이 논란이 된 바도 있어, 이 일은 VFA를 폐기해야 한다는 주 장의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한 신문기사에서 지적한 바처럼 미국과의 주둔군지위협정을 검토할 때 교전수칙 위반사례에 대한 문서기록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일례로 2008년 초 술루에서 미 군 정찰기 조종사들이 ASG의 근거지로 의심되는 장소로 바랑아이(barangay)를 지 목했는데, 이 같은 첩보보고를 바탕으로 진행한 공격은 민간인에 대한 대량학살을 초래했다. 필리핀 인권위원회는 이 사건을 조사했지만 해당 지역이 ASG의 근거지 라는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7)
민다나오 중부에서 미군이 참여한 GPH-MILF 정전협정 과정을 감시하는 민다나오 지역 시민사회 단체 (2008년 반타이 정전)
7) Durian by Amina Rasul, VFA and Mindanao, The Sunday Times. 2008년 9월 28 일. www.manilatimes.net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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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시사점과 향후 활동 방향 2010년 6월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이래로 현 정부는 새로운 안보 프레임워크를 개발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평화협상을 계속 추진하는 한편 다양한 조치 및 메커니즘을 도입·강화하는 등 평화구축 프로세스를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국제감시팀(International Monitoring Team, 말레이시아 주도) 및 민간인보호부서 (Civilian Protection Component), 현지감시팀(Local Monitoring Team), 적대행위 중단을 위한 공동조율위원회(JCCCH) 등이 포함된 정전협정 메커니즘 이외에도 정부와 민다나오 이슬람해방전선(MILF)은 임시공동행동그룹(AHJAG)을 재가동해 테러조직과 범죄자들을 추적하고 MILF와의 연계를 차단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 다.
반(反) VFA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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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다나오 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은 이러한 접근법이 특히 MILF 지역 범죄자들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정부와 MILF간의 협력 또는 협업을 보장할 수 있는 효과적인 메커니즘이라고 본다. 필리핀 민족민주전선(NDFP)은 미국의 테러리스트 명단에 지 금도 이름을 올리고 있으나 MILF의 경우 명단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 주목 해야 한다. 그러나 새 정부의 NDFP 평화협상 담당 의장은 이들이 테러조직이 아 니라고 공개적으로 천명한 바 있다. 임시공동행동그룹(AHJAG)은 MILF의 지역기반에서 활동하는 ASG, 펜타곤 갱 (납치를 통해 몸값을 요구하는 조직) 등의 테러조직에 대한 소탕작전에서 갈등심 화를 방지하는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왔다. ICG 보고서에 따르면 AHJAG가 MILF 소속 극단주의자들을 훈화하는 경우도 일부 있었다. 안보분야 개혁 및 평화구축 과정에서 시민사회의 의견 제시 및 참여가 장려되고 있으며, 여러 부문의 집단도 참여할 권리를 지속적으로 주장, 확보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얻은 중요한 교훈이자 감히 말하자면 하나의 성취라고 할 수 있다. 민주적 공간, 인권, 개발활동, 그리고 남녀노소의 소중한 삶이 대테러리즘의 제물로 불필 요하게 희생되는 상황을 우리가 인내로 이겨냈다는 점이 중요하다.(특히 국내에서 빈번하게 발생했던 초법적 살인으로 필리핀은 UN이 주시하는 국가가 되었다.) 개 발 관련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급진적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테러리스트와 도매급 으로 취급하는 정부 관계자들이 많은 상황에서 우리는 가족과 공동체, 조직에 대 한 불이익을 참아냈고 체제전복세력이라는 비난에도 인내했다. 정부 역시 주권과 영토권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기 때문에 근시안적인 안보정책을 고집하기 마련이 다. 따라서 우리는 시민사회의 입장에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인권 수호와 전 인류의 인간안보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IID 이외에도 수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이 안보분야 개혁 및 평화구축 과정에 참여 하고 있다. 이들 조직은 MILF를 상대로 한 정전협정과 NDFD를 상대로 한 인권법 및 국제인도법 존중에 대한 포괄협약(CARHRIHL) 등을 감시하고, 필리핀 전역에 서 평화 지지세력을 양성하며, 정보제공 및 교육 캠페인을 실행하고, 워크샵을 개 최하는 한편 분쟁 및 안보기관 관계자에 대한 직접적 로비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최근 진전사항 중 이 글을 통해 공유하고 싶은 사항으로는 민다나오 민중평화의제(MPPA)의 수립, 그리고 UN안보리 결의안 제1325호의 실행을 위한 필리핀 국가행동계획(Philippine National Action Plan) 개발 참여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입법에 관한 성과로 국제인도법과 관련해 통과된 ‘국제인도법에 반하는 범죄, 대량학살, 기타 반인류범죄에 관한 법’(공화국법 제9851호, 2009년 제정)과 ‘여성인 권헌장’(공화국법 제 9710호, 2009년 제정) 등이 있다. 정보의 자유, 인종·종교차별 철폐, 국내이민자 권익 수호와 관련된 법 제정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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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안보 개념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과제에 직면해 있지만, 이러한 과제가 쉽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헛된 믿음을 갖고 있지는 않다. 실제 새 정부가 전향적인 정책선언을 발표하고 있지만 이러한 정책선언은 중앙정부의 수사 수준에서 그칠 가능성이 높다. 지방정부로 내려가면 실행 과정에서 병목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이 다. 기존의 국가안보 개념에서 ‘민중 중심의 인간안보’로의 전환을 모색하는 새로 운 평화·안보 프레임워크를 현장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내재화하고 실천할 수 있 을 것인가? 이는 앞으로 우리가 꾸준히 감시해나가야 할 부분이다. 또한 우리는 정부 내 동맹세력과의 관계를 증진할 필요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점은 필리핀 정치에서 특유하게 나타나는 현상으로, 과거 시민사회 운동에 몸담았다가 정부로 영입된 고위급 인사의 수가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들 인사는 관료주의 사회와 시민사회와의 가교 역할을 하며 시민사회가 정부의 운영 및 소통방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시민사회단체의 정책제안을 정부의 정책결정 과정에 반영하는 통로가 되어줄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증진하는 과정에 서 우리는 확고부동하고 지조 있으며 방심하지 않는 자세를 유지하고 상황에 따라 서는 비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필리핀 정부의 입장에서 현재 가장 시급한 과제는 민다나오 지역 무슬림 인구가 인식하는 불의와 소외 문제가 적절하고 공정하게 해결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고통 받은 끝에 이제는 극단주의 테러조직원을 충원하는 곳으로 변한 민다나오 무슬림 공동체의 경우 이 같은 점이 특히 중요하다. 이들이 중앙정 부 또는 주정부가 자신들의 공동체에 진정한 안보를 제공할 수 있다고 느끼는 날 까지 테러리즘의 위협은 우리 주변을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다. 오사마 빈 라덴의 사살 이후 알카에다의 보복공격이 있으리라는 소문이 필리핀 전역에 무성한 가운 데, 미국의 주요 동맹국으로 인식되는 필리핀은 더더욱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어 있다. 이 같은 점에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시급한 과제에 직면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여성과 평화, 안보에 관한 담론을 활발하게 확산 해왔다. 무장갈등으로 피해를 입는 이들 중 절대다수가 여성과 아동인데다 전투원 이나 무장세력들이 여성과 아동을 목표로 삼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2000년 10월 UN안보리는 여성평화 및 안보에 대한 결의안 제1325호를 내놓았는 데, 이 결의안은 무장분쟁 시 여성과 아동의 권리 보호, 그리고 평화구축 및 의사 결정 과정에서의 여성의 역할과 참여 증대에 관한 내용을 명확하게 적시하고 있 다. 지금이야말로 안보와 민주화와 관련된 담론에 여성의 관점을 반영해야 할 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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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생각한다. 진정한 안보를 달성하고자 한다면 인권에 기반한 안보, 그리고 인권 에 기반한 사회를 목표로 해야 할 것이며, 우리 여성들도 이 과정에 참여할 수 있 어야 한다.
참고자료 · International Crisis Group, Asia Report No.152, 14 May 2008, The Philippines : Counter-Insurgency Vs.Counter-Terrorism in Mindanao · Republic Act 9372, Human Security Act of 2007 · Primed and Purposeful, Armed Groups and Human Security Efforts in the Philippines, Soliman Santos Jr. April, 2010 · Liaison Online A Journal of Civil-Military Humanitarian Relief Collaborations http://coe-dmha.org/Publications/Liaison/Vol_4No_1/Dept10.htm · Armed Forces of the Philippines Internal Peace and Security Plan 2011-2016 “Bayanihan”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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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와의 전쟁 10년, 한반도 평화와 민주주의 - 테러와의 전쟁 선포 후 10년 평가 보고서 -
이태호 참여연대(한국) 사무처장
1. 서문 : 2001년 9.11과 한반도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1년 소련이 해체됨으로써 탈냉전이 본격화 되었다. 하지만 그 10년 뒤인 2001년, 냉전을 대체한 새로운 시대가 결코 평화로 운 시대가 아닐 수 있다는 우려를 현실로 드러내는 듯 한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났 다. 9.11사건과 미국 부시행정부의 테러와의 전쟁 선포, 그리고 아프간 공격이 그 것이다. 한반도의 분단된 반쪽인 북한은 부시 행정부가 집권할 당시 사회주의권 붕괴의 충격과 이어진 1990년대 말의 식량난으로부터 겨우 벗어나와 2000년 북미 코뮤 니케, 2002년 북일정상회담 등 미국 일본 등 냉전시대 적대국과의 포괄적인 관계 개선을 약속한 상태였다. 한편, 한반도 분단체제의 다른 한쪽인 남한은 1987년 이후의 민주화 이래 1998 년 최초로 민주화 운동 진영이 선거에서 승리하여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었고 반 부패, 인권, 복지에서 중요한 개혁이 진행되고 있었다. 김대중 정부는 북한에 대해 ‘햇볕정책’으로 알려진 화해협력 정책을 추진하여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개 최하였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그 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부시 행정부가 집권하고 테러와의 전쟁이 선포되었을 때, 한반도 남단에는 두 개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었다. 스스로 이룬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에 자긍심 을 느끼면서 동시에 반세기 이상 이어져온 한미군사동맹이 불균등하고 비용 대비 효과가 적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대한민국, 그리고 반공을 국시로 여기고 힘 있는 미국과의 군사외교경제를 망라하는 포괄적인 동맹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생존과 번 영 그리고 궁극적으로 민주주의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는 대한민국이 그것이다.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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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서는 9.11이후 테러와의 전쟁이 선포된 이래, 이 전쟁의 주된 대상이 되 었던 북한에 대한 미국과 남한의 정책 변화와 갈등, 그리고 대테러리즘이라는 이 름으로 남한 내부에서 일어난 변화와 갈등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2. 테러와의 전쟁과 한반도 평화 부시 독트린과 한반도 2001년 3월 김대중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신 임 미 대통령은 북미코뮤니케를 존중하지 않겠다고 밝히고, 남한 정부가 추진하 던 햇볕정책과 정상회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이듬해 부시 행 정부는 북한을 3대 악의 축의 하나로 공표했다. 한국 정부는 당시 미국으로부터 F-15전투기의 구매와 MD 참여,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요청받고 있었다. 2002년 10월 미국은 북한이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는 의혹 을 제기했다. 한반도 화해협력 분위기는 일순간에 전쟁가능성으로 전환되었다. 김대중 정부는 F-15전투기 40대(40억달러 규모)를 구매했다. 또한 미국이 아 프간을 공격한 직후 아프간에 400여명의 군대를 파병하여 ‘대테러전쟁’ 참전국 가가 되었다. 영국이 공식참전하기까지 한국은 가장 먼저, 가장 많은 군대를 파 견한 나라였다. 다만, 김대중 정부는 북한에 대한 군사공격에는 반대한다는 입 장을 명확히 했고 북한과 중국의 반발을 야기할 MD참여도 거부했다. 주한미군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 책임자 처벌을 위한 촛불집회 미국의 아프간 전쟁이 한창인 2002년 6월 13일 군사훈련 중이던 미군 전차 가 2명의 여중생을 치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한국정부가 재판 권이양을 요구했으나, 주한미군측이 SOFA 규정을 내세워 이를 거부했다. 같은 해 11월 22일 주한미군 배심원이 두 명의 미군 운전병에게 무죄를 평결하자 이 에 대해 항의하는 시민들의 촛불집회가 2003년 초까지 이어졌다. 12월 14일에 는 서울에서만 최대 10만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주요 요 구사항은
책임자
처벌과
한미
행정협정(한미SOFA,
Status
of
Forces
Agreement)개정이었지만, 두 요구사항 모두 관철되지 못했다. 이 촛불집회는 직접적으로는 여중생 사망의 책임자 처벌을 위한 것이었지만, 한미군사동맹의 구조적인 불균등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이 2001년 이후 미국의 무기구매압력과 남한의 화해협력 정책에 대한 반대와 무시 등 한미동맹의 불화와 전쟁위기를 계기로 분출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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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대테러전쟁 참전 2002년 12월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었다. 그는 선거기간 중 ‘미국에 할 말은 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공약한 바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아프간 파 병에 이은 이라크 파병, 북한제재 공조, PSI(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 및 MD 참여, 그리고 한미군사동맹의 지역·지구적 범위에서의 역할 확대를 강력히 요구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기대와는 달리, 한반도 핵 문제 해법을 제외한 대개의 문제 에 대해서는 미국의 제안에 응했다. 우선,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인권위원회의 이라크 파병 의견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다. 정부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 이라크 파병이 불가피하다고 시민들을 설득하면서 미국에 대해서는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약속받고자 했다. 노무현 정부는 이라크 1, 2차 파병에 협조하여 1차 약 500명(2003년), 2차 약 3000명(2004년 ~ 2007년, 1차 병력 포함 3500명 내외)의 부대를 이라크에 파견했다. 그러나 미국 부시행정부는 이 라크 파병을 대가로 북핵 문제를 대화로 해결하는데 협조해달라는 한국 정부의 제안을 공개적으로 거절했다. 선제(핵)공격 옵션은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를 위한 미국의 전략이므로 포기 할 수 없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다. 부시 행정부가 이 옵션을 사실상 포기하 고 북한과의 대화에 나선 것은 이라크에서의 저항으로 전황이 불리해지고, 미국 국내에서 이라크 철군여론이 다수가 된 2005년 이후였다. 또한 주한미군을 신 속기동군으로 재편하고, 주한미군기지를 전 세계 분쟁지역을 향한 허브 기지로 활용하도록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보장’하는데 합의하였다. PSI에는 참 관자격으로, MD에는 ‘한국형 미사일 방어체제 구축’이라는 이름으로 제한적으 로만 참가했다. 노무현 정부는 미국의 군사적 요구를 받아들이는 대신 2015년 까지 한국군에 대한 전시작전통제권을 주한미군으로부터 반환받기로 합의했다 는 사실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는 미군 스스로 대한반도 군사정책의 유연성 확보를 요구해온 만큼 미국이 양보한 것은 없으므로 적절한 해명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시민사회단체는 2002년 한국군의 아프간 파병 이래 한국군의 대테러전쟁 파 견에 반대하는 연대기구를 구성 운영해오고 있다. 특히 2003년 9월 한국군의 2 차 이라크 파병 발표 이후 350여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이라크파병반대국민행동 (People’s Action Against the Dispatching of Troops to Iraq)은 한국군이 이 라크에서 철군하는 2008년까지 지속되었고 이후 아프간 재파병반대연석회의로 전환하여 활동을 지속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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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5년을 맞아 평화·시민사회단체들은 평화 행진 ‘총 대신 꽃’을 개최함.
6자회담과 북한의 핵실험 2003년 4월의 북미중 3자 대화를 계기로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 개 최에 동의한다. 6자회담은 북미 양자대화와 한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이 포함 된 6자 대화가 병행되는 이중구조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부시행정부는 6자회담 초기에는 ‘악행에 보상할 수는 없다’며 북한의 핵폐기가 불가역적이고 검증가능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이후에 관계개선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는 소극적인 태도로 임했고 6자회담은 교착되었다. 2005년 들어 북미 양자와 나머지 국가들은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따라 단계적으 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고, 4차 6자회담에서 9.19공동성명을 채택한다. 그 골 자는 북한이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계획을 포기하는 대신 미국은 북한에 대한 핵 또는 재래식 공격의사가 없음을 밝히고 5자는 북에 대해 에너지를 지 원하고 적절한 시기에 원전(경수로)도 제공한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과 북한은 각자의 정책에 따라 관계정상화를 위한 조치를 취하며, 6자회담 내에 별도의 포 럼을 설치하여 관련 당사국간 한반도 평화체제를 논의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하 기로 했다. 그러나 9.19성명 직후 미국의 재무부가 예고 없이 대북금융제재[BDA 북한자 금 동결(2005년 9월)]조치를 취함에 따라 북미관계가 다시 악화되었다. 북한의 위조지폐 발행으로 조성된 자금의 세탁에 BDA 계좌가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었 다. 이 제재조치로 인해 9.19성명 이행은 교착되었고, 이에 대해 2006년 북한 은 핵실험으로 대응했다. 북한의 핵실험은 남북간, 북미간 긴장을 고조시켰지만 북에 대한 적대적 정책의 한계 또한 드러내는 사례로 받아들여졌다. 그 결과 6자는 2007년 2월 13일 우여곡절 끝에 9.19성명의 초기 이행방안에 합의하고, 같은 해 10월 3일 2단계 이행방안에도 합의하였다. 더욱이 10.4 남 북정상회담으로 인해 모든 조건이 호전되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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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긴장이 고조되는 조건에서 시민사회단체들은 남북민간 대화에 의해 갈등해결의 돌파구를 마련하려했다. 2005년 3월 1000개 이상의 시민사회단체, 종교단체, 언론단체와 문화예술단체, 그리고 정당들은 북한의 사회단체와 정당, 그리고 해외동포 사회단체들과 함께 6.15민족공동위원회를 구성하여 연 2회 남 북교환 대규모 교류행사를 추진해왔다. 특히 2005년 8월, 2007년 8월 평양에서 의 교류행사에서는 한국 정부 대표단의 방북도 병행되었고, 시민사회 교류행사 를 지렛대로 삼아 정부간 접촉이 이루어져 2005년 9.19 6자 공동성명, 2007년 10.3 6자합의, 10.4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막후협상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8년 이명박 정부 집권 이후에는 남북관계의 악화와 남북민간접촉에 대한 남 한 정부의 부정적인 태도로 인해 정기교류행사가 중단된 상태이다. 이명박-오바마 정부 시기의 한미동맹과 동북아시아 신냉전 2007년 12월 치러진 대선에서 보수 정치인인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했다. 그 는 미국에서 클린턴 행정부에 대해 부시 행정부가 취했던 태도를 답습했다. 남 한이 군사적, 외교적 힘을 충분히 사용하는 것이 한반도에 분단극복과정을 정의 롭게 관리하는 최선이 길이라는 네오콘식 접근법을 채택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 는 남북이 합의한 6.15선언과 10.4선언을 일방적으로 폐기했고, 북한 핵폐기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대화협력이 병행될 수 없다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2008년 10월 미국 정부가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제외하고 북한의 핵 재처리시설 불능화 조치를 취하는 등 6자회담의 돌파구가 마련될 가능성이 엿 보였지만, ‘검증’문제를 둘러싼 북미, 남북간 이견으로 다시 교착되었다. 이 교착 은 2008년 9월 남한의 국정원장이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 이상설을 공 개적으로 발표할 때 어느 정도 예정된 것이었다. 미국과 남한은 전반적으로 북 한의 불안정성을 이유로 북핵문제 등 현안 협상에 유보적이거나 소극적으로 임 하기 시작했다. 또한 북한 붕괴나 내전 시 북한에 한미연합군이 개입하여 이를 안정화한다는 북한 비상사태 대비계획을 공공연히 천명하고 이를 구체적인 전 쟁계획(O-plan 5029)으로 발전시켰다. 이에 대해 북한은 더욱 자극적인 방식 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남북, 북미관계는 점점 심각한 갈등으로 치달았다. 북 한은 2009년 4월 위성발사실험을 강행했고, 이에 대해 유엔안보리 의장성명이 채택되고 제재가 강화되자 2009년 5월 2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이후 아직까지 6자회담은 열리지 않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는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적 외교와 테러와의 전쟁 노선을 수 정하겠다는 입장을 천명하면서 아랍세계와 이란, 쿠바 등에 대해 관계개선을 제 의하는 등 적극적인 제스쳐를 취했다. 하지만, 한반도 정책에 관해서 만큼은 초 기부터 그런 대화제스쳐를 배제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2005년의 BDA(방코 델 타 아시아)에 대한 미 재무부의 대북금융제재가 북을 고통스럽게 하여 협상테 이블로 이끌어내는데 효과적이었다고 평가하는 인사들을 중용했다. 북한이 ‘인 공위성’ 발사실험을 강행한 이래 오바마의 대북정책은 ‘전략적 인내’로 표현되는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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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층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섰다. 이명박 정부와의 대북제재공조도 더욱 강화되 어왔다. 2010년 3월, 남북간 해상경계가 모호한 서해 NLL(Northern Limited Line) 인근 백령도 근해에서 남한 대잠수함 초계함인 천안함이 침몰한 것에 대해 이 명박 정부가 북한을 원인제공자로 지목한 이후 남북관계는 모든 면에서 단절되 었다. 같은 해 11월 NLL 인근 연평도에서 사격훈련을 하던 남한 해병부대를 겨냥한 북한의 포사격으로 민간인 2명을 포함한 4명이 사망한 직후 갈등은 절 정을 이루었다. 이들 사건 이후, 한미군사동맹은 핵항모와 핵잠수함을 동원한 서해상의 무력시위, 서해분쟁 재발 시 남한군의 대규모 보복공격을 포함하는 ‘적극적(능동적) 억지전략’ 개발 등 공격적 성격을 더해가고 있다. 남한은 PSI 참여를 공식화하고 MD 참여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에서 확인도 부인도 하 지 않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한미군사동맹은 또한 국제금융위기 이래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는 중국과의 갈등을 유발하면서 한반도와 동북아에 새로운 냉전체 제가 형성되도록 하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3. 테러와의 전쟁과 민주주의 남한의 민주화 과정에서 구제도, 특히 국가보안법의 폐지와 국가정보원의 개혁 은 가장 중요한 의제였다. 20세기의 마지막 해인 1999년 12월, 국회에서의 가장 큰 쟁점은 ‘3대 입법’ 통과 여부였다. 부패방지법 제정, 국가인권위원회법 제정, 국 가보안법 폐지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입법안 중 부패방지법과 국가인권 위원회법 제정안은 2001년 국회를 통과했지만, 국가보안법은 폐지되지 않았고 지 금까지 효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에 더해 테러와의 전쟁과 한국군의 아프간 이라크 파병 이후 반테러 입법 시 도가 계속되고 있다. 더불어 축소되어오던 국정원의 역할도 다시 강화되고 확대되 고 있어 인권침해 논란을 야기하고 있다. 9.11 직후인 2001년 12월 통합방위법 개정안을 국회가 가결한 이래, 테러방지기본법, 테러자금조달금지를위한법률(공중 등 협박목적을 위한 자금조달행위의 금지에 관한 법률), G20정상회의경호안전을 위한특별법, 통신비밀보호법 개정, 국정원법 개정 등 테러방지를 빙자한 각종 통제 제도를 강화하려는 시도가 지속되고 있다. 국가보안법 폐지 노력의 좌절 국가보안법은 일제시대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치안유지법 이 그 모태가 된 악법이다. 조문의 모호성과 자의적인 적용으로 국가 안보보다 는 주로 정부 비판 세력을 탄압하고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목적으로 사용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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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피 했지만 남북 분단 상황에서 북한 공작원에 대한 사법처리에 필요하다는 이유로 유지되어 왔었다. 하지만, 1991년 남북간 불가침과 상호존중을 약속한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2000년 남북 정상이 채택한 6.15선언과 2005년 ‘남북관 계발전에관한법률’의 제정을 거치면서 남과 북이 적대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 하는 잠정적 특수 관계’로 인정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최소한의 존립 이유도 사라 지게 되었다. 국가보안법은 반국가단체를 구성하거나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는 활동을 할 경우 최고 사형(1949년 개정)에 처하도록 하고 있고, 불고지죄(1961년 개정), 찬양고무죄(1961년 개정) 등도 처벌하도록 하고 있다. 국보법 사건에 대한 구 속적부심 청구는 1987년(7차 개정)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해졌다. 국가보안법 관련 통계는 1961년 이후부터 확인1)된다. 제한된 통계에 따르더 라도, 1961년부터 2002년까지 최소한 1만 3178명이 국가보안법(반공법 포함) 위반으로 기소,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들 중 90% 이상이 단순히 북한을 찬양하 거나 고무했다는 자의적인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1961년부터 국가보안법 으로 사형이 확정된 사람 204명, 집행된 사람은 182명이다. 마지막 사형은 1986년 5월 3명에 이루어졌다. 한편, 국가보안법 사범 중 사상전향을 거부한 비전향장기수 94명의 평균 복역기간은 31년이다. 인권단체를 비롯한 300개 이상의 시민사회단체들은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 를 구성하고 1999년, 2004년 두 차례에 걸쳐 단식투쟁과 서명운동을 포함한 대규모 국가보안법 폐지 청원 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2004년 말에는 1000명의 인권활동가들이 20일 ~ 60일에 이르는 집단적인 단식투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04년 8월 국가보안법 폐지를 권고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9 월 국가보안법 폐지를 공약하였다. 그러나 국회에서는 논란 끝에 폐지가 무산되 었다. 당시 의회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속한 열린우리당은 과반수 의석을 점하고 있었다. 이 법이 통과되지 못한 이유는 여당인 열린우리당 내에도 이 법의 폐지 에 대한 입장이 확고하지 않았고, 폐지여론도 압도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명박 정부 이후에는 의회 내에서 개·폐 논의가 중단된 상태이다. 나아가 이명 박 정부 이후 국가보안법 적용사례가 더 늘어나고 있다. 2003년 이후 2010년까지 기소된 인원은 430명에 이른다. 국가보안법 입건자 수는 참여정부 때인 2005, 2006, 2007년 각각 33명, 35명, 39명이었으나 이명 박 정부 이후 2008년 40명에서 2009년 70명, 2010년 151명으로 크게 늘었다. 2010년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당시 자신의 견해를 인터넷에 올린 네티즌
1) 이는 한국전쟁(1950-1953) 전후 이념대립이 가장 극심했을 때의 처벌실태는 공식적으 로 기록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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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명 역시 국가보안법 혐의로 조사받고 있다.
2010년 참여연대는 천안함 침몰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위해 국회가 국정조사에 나설 것을 요구함.
테러방지법 제정 시도 통합방위법은 1997년 제정된 뒤 9.11직후인 2001년 12월 대폭 개정되었다. 통합방위란 ‘적의 침투·도발이나 그 위협에 대하여 각종 국가방위요소를 통합하 고 지휘체계를 일원화하도록 한 것’을 말한다. 통합방위사태가 선포되면 국무총 리가 총괄하는 중앙통합방위협의회가 각 지역 행정조직과 경찰조직, 군과 예비 군, 그리고 국정원 등 정보기구를 통합적으로 운용하도록 하고 있다. 대통령은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통합방위사태를 선포하고 통제구역을 설정할 수 있다. 통합방위법의 제정과 개정에도 불구하고 2001년 11월 국가정보원은 테러방 지법 제정안을 국회에 발의하였다. 테러방지법안은 9.11테러 직후의 막연한 공 포심을 이용하는 한편 2002년 월드컵 한-일 공동개최 성사라는 명분을 내세웠 다. 테러방지법은 테러의 개념 자체가 명확하지 않고, 테러방지라는 명목으로 과도한 인권침해를 정당화하며, 국정원의 권한이 비대화되고, 테러행위 발생 시 군이 치안에 개입할 수 있게 하는 등 반민주적이고 위헌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는 비판에 직면했다. 테러방지법의 핵심은 ‘국정원 산하에 대테러센터’를 만드는 것이다. 이를 통해 국정원장은 법원의 허가 없이 대통령의 지시만으로 도청 및 감청을 할 수 있고, 테러단체 구성원으로 의심되는 외국인에 대해 법무부 장관에게 출입국 규제를 요청할 수 있으며, 국가중요시설을 테러로부터 보호하기 어려운 때에는 대통령 에게 군병력 지원을 건의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는 △테러행위에 대해 지나치게 모호하고 포괄적인 규정을 사용하는 등 법안의 각 조항들이 헌법과 국제인권법의 기준에 어긋나며 인권침해 소지가 매우 크고, △법·제도, 국가기관의 체계로 테러범죄에 대한 예 방, 처벌, 방지가 가능하며, △별도의 테러대책기구를 만든다는 것은 민주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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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운영 원리에도 어긋나며 특히 국정원의 고유기능인 정보수집 이외의 수사 권한, 군동원요청 권한을 제공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로 이 법의 제 정에 반대했다. 한편,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은 테러를 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 만으로 국정원이 법무부에 입국불허를 요청하도록 한 것에 대해 한국의 테러방 지법이 난민 및 외국인의 지위를 위협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했다. 정부와 국회의 테러방지법 제정 시도는 이 법안을 제2의 국가보안법으로 간 주한 시민사회의 저항과 국가인권위원회의 반대의견 등으로 국회심사가 중단되 었고, 그 후 여러 차례의 수정안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2011년 5월)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103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테러방지법제정반대 공동 행동은 2001년 결성된 이래 본격화된 테러방지제도 도입을 저지하고, 인권침해 를 예방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해오고 있다. 공중 등 협박목적을 위한 자금조달행위의 금지에 관한 법률 2001년 한국은 이미 일정 금액 이상의 원화와 외화거래를 추적하고, 범죄수 익과 관련된 금융거래나 돈세탁행위에 대해 처벌하고 그 이익을 몰수·추징할 수 있는 주요 법제를 갖추고 있었다. 사실 이 제도들은 부패한 정치인들과 기업인 들, 그리고 부유층의 재산해외도피, 뇌물수수, 불법정치자금 제공 등의 행위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민단체들이 도입을 요구해온 제도였다. 그런데, 정부는 2004년 ‘테러자금조달의 억제를 위한 국제협약에 대한 비준동 의안’을 국회에 제출하여 승인받은데 이어, 이 협약의 이행법안이라면서 ‘테러자 금조달의 금지를 위한 법률 제정안’을 2007년 초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이 법률안의 내용은 국제협약의 권고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독소조항들을 다수 포 함하고 있었다. 법률제정안은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테러관련자를 지정하여 고시할 경우 이들의 금융거래가 허가제로 전환(불허)되고, △재경부 산하 금융 정보분석원(Financial Investigation Unit)2)의 장이 ‘테러혐의금융거래자라고 지 목하면 이를 토대로 재정경제부장관은 이들의 자금의 동결을 지시’하며 △이 자 금의 조성과 세탁에 관련된 자를 형사처벌하는 규정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법안에 대해 시민사회단체들(테러방지법제정반대 국민행동)은 △‘테러’라 는 개념이 자의적인 해석의 여지가 많다는 이유로 테러방지법이 제정되지 못한 상태에서 ‘테러자금’을 정의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고, △‘테러를 위한 자금’ 조성행위 뿐만 아니라 ‘테러관련 자금’ 조성행위, 나아가 그 미수행위까지를 처 벌대상으로 하는 것은 지나치게 포괄적인 제한이며 △단지 우방국의 요청만으 로도 개인이나 단체를 테러관련자로 지정하여 금융거래를 동결하도록 한 조항 이 남용될 가능성이 높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재정경제부 장관이 정당한 사법
2) 특정한 범죄로 발생한 수익으로 의심되는 혐의거래 혹은 일정액 이상의 현금거래를 모니터하는 재경부 산하 부서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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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판단을 구하지 않고 임의로 개인과 단체의 금융거래를 제한하거나 금융자산 을 동결하는 권한을 갖는 것은 민주적 원리에 맞지 않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한 국에서 이미 운영되고 있는 자금세탁방지, 처벌 제도로도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유사한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법률안은 국회를 통과했다. 다만, 정부의 원안은 폐기되고 ‘테러자금조 달금지법’이라는 직접적인 표현 대신 ‘공중 등 협박목적을 위한 자금조달행위의 금지에 관한 법률’3)로 명칭이 수정되었다. 이 법의 남용을 막기 위해 ‘테러행위’ 혹은 ‘테러관련자금’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대신 국제법으로 금지된 특정한 범죄 행위들을 구체적으로 나열하여 그 위반자의 금융거래를 제 재하기로 했다. 또한 행정부가 자의적으로 개인이나 단체의 자금을 동결하지 못 하도록 최소한의 사법적 통제장치를 마련했다. 하지만 우방국(미국)의 요청만 있으면, 유엔이나 국제협약에서 제재하지 않는 개인이나 단체의 금융거래라 할 지라도 한국정부가 일방적으로 제재할 수 있도록 하는 독소조항은 원안대로 유 지되었다. 이미 동일한 조항이 외국환 관리법에 의해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환 관리법과 이란 제재 실제로 외국환 관리법은 ‘한국이 체결한 조약 및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 의 성실한 이행을 위하여 불가피한 경우’뿐만 아니라 ‘국제평화 및 안전유지를 위한 국제적 노력에 특히 기여할 필요가 있는 경우’ 한국 정부가 특정한 외국환 거래를 허가제로 전환(사실상 불허)하는 방식으로 제재를 가할 수 있도록 규정 하고 있다. 우방국(미국)의 요청만으로도 특정인의 외환거래를 금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이란제재에 외국환 관리법을 작용한 경우다. 2010년 9월 이명박 정부는 이란에 대한 미국의 제재요청을 받아들여 102개 단체 및 개인 24명을 금융제재 대상자로 지정하였다. 여기에는 이란 국영은행 멜라트 은행도 포함되어 있다. 유엔 안보리 결의안 1929호는 이란의 40개 단체 및 개인 1명만 을 제재대상으로 지정하였고, ‘이 결의안의 어떠한 조항도 국가들이 이 결의안 범주를 넘어선 조치나 행동을 취할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고 밝히고 있다. 한국의 이란제재는 미국 국내법에 따른 것으로서 유엔안보리 결의 에는 위배되는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패킷감청의 남용과 통신비밀보호법 개악 시도 3) 당시 국회는 입법과정에서 정부가 ‘테러’라는 자의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 고 대신 국제법에서 금하는 범죄 행위 목록들을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이를 공중협박 행위라고 표현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글 법률명칭을 ‘공중 등 협박 관련 자금조달 금지법’으로 바꾼 것이다. 그런데 외교통상부는 이 법률의 영문명칭을 ‘테러자금 조달 금지법’으로 번역하여 국제사회에 소개하고 있다. 이 번역은 테러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 국회입법 취지에 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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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국가정보원이 국가보안법 수사에서 약 10년 이상 패킷감청수단 을 사용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패킷감청’이란 인터넷 전용회선 전체에 대한 실시간 감청을 의미하며, 감청 대상이나 내용을 특정하여 감청할 수 없다는 점 에서 범죄수사를 위한 증거수집이 아니라 사찰과 감시를 위한 광범위한 정보수 집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국정원은 패킷감청이 통신비밀보호법에 따라 법원의 허가서를 받아 이루어졌으므로 위법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패킷감청에 대한 법원의 허가는 사실상 ‘포괄 백지 허가서’를 발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고 인권단체들은 비판하고 있다. 국경 없는 기자회가 매년 발표하는 한국의 표 현의 자유 지수는 2005년 31위에서 2009년 69위로 급락했다. 이 단체는 또 한 국을 2009년 이후 3년간 줄곧 인터넷 감시국(Under Surveillance)으로 지목했 다. 2011년 3월 참여연대 민변 등은 패킷감청의 위헌여부를 묻는 헌법소원을 제출했고 이를 금지하는 입법운동도 추진하고 있다. 한편, 여당인 한나라당은 전기통신사업자 등에게 감청장비를 구비하도록 하며 탑재를 의무화하고, 개인휴대 단말기(휴대폰)의 위치정보를 ‘통신사실확인자료’ 로 분류해 반경 5m까지 추적이 가능하도록 했다. 또한 전기통신사업자에게 통 화기록이나 위치정보 같은 ‘통신사실확인자료’일체를 보관하여 수사정보기관에 협조하도록 했다. 야당 및 시민사회단체는 당시‘감청의 일상화’라며 반대하고 있 고 국가인권위원회도 이 독소조항의 삭제를 요구하는 의견서를 채택했다. 해당 법안은 통신비밀보호제도를 한층 강화하고자 하는 다른 개혁적인 야당 개정안 들과 더불어 국회에 계류되어 있다. 국정원의 정치개입과 국정원법 개악 시도 국가정보원은 1961년 군부쿠데타 이후 미국의 CIA를 모방한 중앙정보부라는 이름으로 출범하였다. 중앙정보부(1981년 국가안전기획부, 1998년 국가정보원 으로 명칭 변경)는 대북 정보수집, 국가보안법 사건 수사 외에도 정부부서 보안 점검, 국내정치 관련 정보 수집 등의 광범위한 비밀권한에 힘입어 정권안보도구 로 악용되어왔다. 이에 민주화 직후인 1994년 국가안전기획부 법 개정을 통해 정치관여를 엄격 히 금지했고, 그 직무를 ‘국외정보 및 대공·방첩·대테러 등 국내 보안정보 수집, 국가기밀에 대한 보안업무, 내란 및 국가보안법 등 사범 수사, 국정원 직무 관 련 범죄에 대한 수사’ 등으로 엄격하게 제한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5년 불법 도청 테이프 공개사건을 통해 1990년대말과 2000년대 초반, 김대중 대통령 집 권기간 구 안기부와 국정원이 직무범위 이외의 사안에 대한 불법도청을 자행해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명박 정부 이후 국정원의 국내정치개입과 같은 직권남용은 더욱 심해졌다. 국정원의 대통령을 위한 정례 정보 보고 부활(이 관행은 국정원의 정치개입을 제한하기 위해 노무현 대통령 당시 폐지되었었다), 정부의 토목사업(한반도 대 운하 사업) 반대 교수모임에 대한 불법 사찰, 대통령이 연루된 부패혐의 사건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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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K 사건) 관련 민사소송 개입, 국정원 고위인사의 언론·종교 대책회의 참여, 시민사회단체를 후원한 기업에게 후원내역 자료 요구 등 법이 정한 직무범위에 서 명백히 일탈한 정치적 개입사례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에 더해 여당은 2008년 국정원법 개정안을 제출하여 국정원 직무범위를 ‘국익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국가정책 수립에 필요한 정보에 관한 업무’ 등 추상적이고 불확실한 개념으로 확대하려 하고 있다. 여기에 테러방지기본법 제 정안,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 등이 더해지면 국정원은 국내외 대부분의 정보수 집 권한과 합법적인 패킷감청 권한을 보유하고, 치안 및 군사행동 집행기능까 지 포괄한 거대한 비밀권부로 부활할 수 있다.
이슬람계 이주노동자와 반한외국인에 대한 사찰과 차별 테러와의 전쟁은 이주노동자들, 특히 이슬람계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국가적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강화시키는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이라크 추가 파병 전후인 2004년 법무부는 ‘대테러종합대책’에 따라 이란, 이라크 등 8개 테러지원국가 국민이 입국할 경우 경찰 등에 이들의 체류지, 기 간 등을 통보하고 경찰은 국내에 체류하는 이슬람권 출신자의 동향파악 활동을 하도록 했다. 당시 국내 거부 이슬람국가 출신자는 29개국 6만7068명으로 집계 됐다. 특히 이 가운데 미 국무부가 테러지원국으로 분류한 이란, 이라크, 리비 아, 시리아, 수단 등 5개국 출신이 1755명, 알 카에다 등 테러 단체를 실질적으 로 지원해 왔다는 의혹을 받아온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출신 7177명이 집중 사찰을 받았다. 또한 같은 해 법무부는 ‘불법체류자의 반한활동에 대한 종합대책’을 마련하여 △국가정책에 반대하는 집회시위를 선동하거나 주도하거나 적극 참여하는 자 △정치적 주장을 하면서 정부시책을 비판하고 오도하며 이를 선전하거나 주동 하는 자 △기타 국익에 현저히 위배되는 활동을 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되는 자 등을 반한활동 인사로 규정하여 국가보안법이나 형법, 출입국관리법, 집시법 등 을 적용해 형사처벌한 뒤 강제퇴거시키고자 했다. 실제로 이해 10월 말, 법무부 는반한 활동 관련자 등 단속실적을 국회에 제출, 집회 등 가담 불법체류자 14명은 강제퇴거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2010년 G20 정상회담을 앞두고 정부와 국회는 한시법인 ‘G20정상회의경호안 전을위한특별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테러방지를 명분으로 G20기간 전후 집 회와 시위를 포괄적이고 자의적으로 제한하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이와 더불 어 경찰청은 중동과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의 이슬람권 57개국에서 입국한 5만여 명의 국내 체류상황을 조사해 체류 목적이 불분명하거나 주거지를 수시로 옮기 는 등 의심스러운 외국인 99명을 골라 관리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경찰 발표에 따르면, 경찰은 2∼3주에 한 차례씩 이들의 거주지와 직장을 확인하고, 이들이 체류 목적 이외에 다른 일을 하는지도 감시했다. 경찰과 검찰은 2010년 2월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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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이슬람 사원 주변에서 근무하는 이맘과 이주노동자 등 2명의 파키스탄인이 탈레반 구성원이라고 발표하였으나 재판과정에서 관련 혐의를 입증하지 못했다.
경찰청은 또한 ‘법무부와 국가정보원 등도 테러 용의자 명단을 확보해 입국금지 대상에 포함하고 있으며, 현재 입국이 금지된 테러 혐의 외국인은 5천여명에 달한 다’고 발표했다. 이 명단에 의거하여 시민사회단체의 G20 관련 학술회의에 참가할 예정이었던 파키스탄 여성단체 대표 칼리크 부슈라(Khaliq Bushra), 네팔노총 사 무총장 우메쉬 우파댜에(Umesh Upadhyaya), 국제농민단체 비아캄페시나 대표인 헨리 사라기(인도네시아) 등 6명의 비자가 거부되었고, 필리핀 소재 IBON International의 폴 퀸토스 부장을 비롯한 8명의 필리핀 활동가가 입국비자를 지녔 음에도 불구하고 무더기로 공항에서 출국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들은 대부분 각 종 국제행사에 자유롭게 참여하던 인사들이었다.
4. 종합 : 테러와의 전쟁이 한반도에 미친 영향과 시민사회의 대응 미국 부시 행정부가 시작한 테러와의 전쟁은 90년대 태동하기 시작하여 2000년 이후 본격화한 남한 내의 시민 주도 민주주의, 그리고 한반도 화해협력 실험과 갈 등을 빚었다. 김대중 정권에 이어 시민의 능동적 지원 속에 집권한 노무현 정권은 미국의 패 권적 정책에 맞서 갈등을 빚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 행정부의 대다수 관료들과 여 야를 막론하고 보수적인 정치인들에게는 특히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관료들은 대테러전쟁의 논리를 손쉽게 내면화했고, 안보 관료와 군, 그리고 보수적인 언론과 정치인들은 이를 기득권 강화에 적절히 활용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집권기간 동안에는 테러와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표현의 자 유를 비롯한 시민권이 완만하게 확대되어왔다. 하지만 국가보안법과 같은 악법의 폐지는 유보되었다. 정부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대한 파병을 계기로 외국인 이나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적 정책이나 사찰행위를 강화했고, 테러방지법을 제 정하여 군과 정보기관이 치안문제에 관여할 수 있게 하려는 시도를 지속했다.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상황은 보다 악화되었다. 특히 공안기구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약화되고 이들의 권력남용이 두드러졌다. 국가보안법 적용사례가 늘어나고 국가정보원과 군정보기구의 정보통제와 사찰이 강화되었다. 이명박 정부 는 G20 개최를 계기로, 테러예방을 이유로 집회나 시위를 자의적으로 금지하는 한시법을 발의하여 여당 주도의 국회에서 통과시켰고, 해외 인권 개발 활동가들의 입국을 자의적으로 통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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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전체로 시야를 확대해 본다면, 2000년 6.15선언과 그 해 10월 12일 북 미코뮤니케 합의를 전후한 6개월간의 짧은 ‘한반도의 봄’을 제외하면 테러와의 전 쟁 10년간 몇 차례의 평화정착의 계기를 살리지 못한 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어 왔다. 부시 행정부 집권 기간 동안 한국군은 미국의 대테러 전장에 대규모로 동원 되었고, 한반도 전체가 이른바 ‘불량국가’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일방주의를 실험 하는 시험대로 전락했다. 이전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은 최소한 한반도 문제 는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기본 입장을 비교적 분명하게 견지했으나, 2007 년 이명박 정부가 집권한 이후에는 남한의 일방주의가 강화되었다. 이명박 정부는 기존 남북 정상간 합의의 이행을 거부했고, 오바마 행정부 역시 전략적 인내라는 이름으로 남한의 선택을 도왔다. 북한은 이에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대응하면서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특히 2010년 서해상에서의 무장출동 이래 동북아 시아에는 새로운 냉전질서가 형성되고 있다. 시민사회는 지난 10년간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 테러방지법 제정반대 운동, 불법 도청·감청 반대운동, 이주노동자 추방·차별 반대운동, 아프간·이라크 파병반대 운동, 남북민간교류 및 갈등예방운동, 미군허브기지 반대운동과 한미 SOFA개정 운동 등을 전개하면서 테러 또는 전쟁 위협을 이유로 가해지는 통제, 차별, 억압으 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켜내고 전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한반도와 지구촌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다양한 실천을 전개해왔다. 이 과정에서 테러방지제도의 도입을 최소화하고 불법 도감청 등 정보권력 남용을 견제하는 등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2007년 한국시민사회단체들은 아프가니스탄 피랍인 무사귀환을 염원하고, 이를 위한 ‘노란 리본 달기’캠페인을 개최함.
하지만 오래된 악법인 국가보안법은 폐지되지 않았고 심지어 최근 수년간 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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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하게 남용되는 상황을 목격해야 했다. 남한의 시민사회는 아프간, 이라크로의 거 듭된 파병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했고, 이는 국내거주 외국인이나 이주자, 특히 이슬람 출신 이주자들에 대한 차별로 이어졌다. 미국의 요청만으로도 특정한 금융 거래를 차단할 수 있는 제도가 도입되는 것도 제동을 걸지 못했다. 시민사회단체 는 한반도 갈등 해결과 남북관계 개선에 가교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테 러와의 전쟁’은 오랜 냉전의 유산과 결합하여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 새로운 군사 주의와 신냉전을 불러오고 있다.
5. 권고 지난 10년간 테러의 위협을 과장하여 전쟁과 무장개입, 그리고 군사력 증강 같 은 군사주의적 수단에 호소해왔지만, 이 시도는 새로운 무장갈등의 악순환을 불러 왔고 세계는 더욱 위험해졌다. 또한 테러방지를 이유로 안보기구들을 비정상적으 로 확대하고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제약해온 국가들에서 구성원들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은 도리어 후퇴했다. 구성원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인들을 해소하기 위해서 국가와 사회가 노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정부가 외부의 군사적 위협이나 테러에 대한 공포를 과장하여 공동체 내부의 민주주의와 정의를 향한 요구를 억압하거나 부당하게 통 제하는 것을 정당화해서는 안된다. 또한 무엇이 진정으로 구성원의 안전을 위협하 는지, 공동체를 보다 안전하게 만들 국가적 사회적 처방의 우선순위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민주적으로 토론되고 결정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안보는 공동체 구성원 의 안전이라는 본래적 목적에 맞게 재정의되어야 하며, 안보를 다루는 국가기구들 은 민주화되어 보다 투명하고 책임있게 운영되어야 한다. 인권보장 관련 국가비밀지정은 최소화해야 하며, 정보기관들의 활동은 법에 의해 엄격하게 민 주적으로 통제되어야 한다. 국가보안법은 폐지되어야 한다. 테러방지법 제정 시도 는 중단되어야 한다. 공중등협박목적을위한자금조달행위의금지에관한법률과 외국 환관리법 상 우방국(미국)의 요청만 있으면, 유엔이나 국제협약에서 제재하지 않 는 개인이나 단체의 금융거래라 할지라도 한국정부가 일방적으로 제재할 수 있도 록 하는 독소조항은 개정되어야 한다. 이주노동자와 외국 국적자 특히, 아시아 중 동 아프리카의 무슬림들에 대한 차별과 사찰을 중단해야 한다. 패킷감청이나 위 치추적 같은 각종 검열과 사찰은 중단되어야 하며 통신비밀보호법은 그 취지에 부합하게 강화되는 방향으로 개정되어야 한다. 인터넷 공간을 포함한 모든 공간 에서 시민들의 의사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는 보장되고 확대되어야 한다. 정보 기구의 국내정치개입을 부활시킬 국가정보원법의 개악은 중단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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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정책 관련 테러와의 전쟁을 돕기 위한 파병은 중단되어야 한다.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하 고 있는 한국군은 즉각 철군해야 한다. 미국의 요청에 따라 결정된 이란에 대한 제재를 해제하고 유엔안보리 결의안이 제안한 수준으로 제재를 한정해야 한다. 대북정책 관련 남과 북은 남북기본합의서, 6.15선언, 10.4 선언 등 기존 남북 정부 간 합의 사항을 성실히 이행해야 한다. 북한에 대한 조건 없는 인도적 지원을 재개해야 한다. 이 지원은 북한을 상대로 한 군사적 압박보다 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북한 급변사태 시 한미연합군의 북한 주둔·점령 계획 등 국제법상 논란이 있는 공격적 군사계획은 폐기되어야 한다. 한반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 하고 화해와 협력에 의한 평화적인 분단극복의 전망을 마련해야 한다. 이것은 어떤 군사적 수단보다 더 효과적으로 한반도 주민들의 안전을 지켜줄 것이다. 북한과 미국을 포함한 6자회담 당사국들은 9.19 성명등 기존의 합의사항을 성 실하게 이행해야 한다. 6자회담과 더불어 동북아시아 평화협력방안, 동북아시아 비핵화 방안도 함께 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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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1
중국의 법치와 인권변호사
패트릭 푼(Patrick Poon) 중국인권변호사모임(China Human Rights Lawyers Concern Group, 홍콩) 사무총장
국가의 법치가 유지되는 데에는 변호사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러나 중국에서 변 호사, 특히 형사사건 변호사(그 중에서도 인권 변호사)는 중국 정부의 상시적인 탄압의 대상이다. 변호사와 일부 법률 운동가들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이들에 대한 탄압도 지속되었다. 하지만 체포 또는 구금된 인권운동가, 지방정부 관리와 유착한 개발업자에게 불법으로 땅을 빼앗긴 사람, 중국 정부가 ‘악의 숭배’라며 불 법화한 파룬궁과 개신교도 등 박해 받는 종교인을 변호하면서 변호사들의 영향력 도 커지고 있다. 인권운동가와 중국의 인권상황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변호사와 법률 운동가들을 통상 ‘인권변호사’[유권율사(維權律師)]라고 부른다. 아시아의 법조계, 시민사회, 각국 정부 사이로부터 주목을 받을 필요가 있는 이들 ‘인권변호사’의 관심 영역을 아래에 열거하고자 한다. 중국의 국제적인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권위주의적 관행 으로 인해 왜곡된 법치(rule of law)가 중국의 경제발전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국 제사회에서 점차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많은 ‘인권변호사’들이 여러 형태의 고초를 겪었고, 그들 중 일부의 상황은 매우 놀라울 정도이다. 국제적으로 많은 관심을 끌었던 가장 심각한 경우는 베이징의 인권변호사 가오 지셩(Gao Zhisheng, 高智晟)의 사례이다. 그는 두 번이나 실종되 었고 현재도 행방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지난 2005년 가오는 중국 후진타오 주석 과 원자바오 총리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정부의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공개적인 행위 때문에 그의 변호사 자격은 정지되었고 그가 속한 법률회사도 영업을 정지당했다. 2006년 12월 그는 비공개 재판에서 소위 ‘국 가권력 전복을 선동한’ 혐의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 받았다. 그와 그의 가족은 이후 자택에서 24시간 내내 감시를 받았다. 그는 가족 앞에서 공안의 부당 한 대우를 받거나 욕설을 들어야 했고, 거리에서 차에 치일 뻔한 사고를 당하기도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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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당시 12살이었던 그의 딸도 학교에서 시달림을 당했다. 2008년 9월 그는 눈을 가린 채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2009년 2월에는 집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끌려간 뒤 사라졌다. 그는 1년 후인 2010년 3월말 에 잠깐 돌아와 다음 달인 4월 중순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처가를 방문할 예정이 었으나 다시 실종되었다. 현재 그의 소재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의 부인과 두 아이는 미국에 망명해 있다. 2011년 1월 AP통신은 2010년 4월 초 가오가 실종되 었다가 돌아온 지 며칠 뒤 베이징에서 가진 인터뷰를 공개했는데, 그는 고문을 당 했고, 지난번보다 더 가혹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는 가오의 현 상황에 대 하여 국제사회에 설명해야 할 것이다. 당국이 가오에게 취한 조치는 형사소송법, 변호사법, 헌법 등 중국 국내법과 중 국이 서명했거나 비준한 국제규약 즉,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 약’(ICCPR. 중국은 서명만 하고 비준하지 않음)과 ‘고문 및 그 밖의 잔혹한, 비인 도적인 또는 굴욕적인 대우나 처벌의 방지에 관한 협약(CAT, 중국정부가 서명하 고 비준)’ 등에 따르면 명백한 불법행위이다. 이 외에도 이들 법규나 규약에 위배 되는 변호사와 법률 운동가들에 대한 탄압 사례는 다수가 있다. 중국 북동부 산둥성의 장님 법률운동가인 천광청(Chen Guangcheng, 陳光誠)은 지역 주민에게 법률 지원을 제공하고 인구억제 정책(소위 ‘1자녀 정책’)을 위하여 지방 관리들이 추진한 강제낙태 관행을 폭로하였다. 그는 2006년 8월 ‘재산 손괴’ 라는 조작된 죄목과 마을 열차 선로에 주민들을 규합하여 누웠다는 ‘주민을 동원 한 교통 방해죄’로 징역 4년 3월을 선고 받았다. 2010년 9월 석방된 후, 그와 그 의 가족은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된 상태이다. 그와 그의 부인이 그들의 고향집에 서 엄격한 감시를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비디오가 공개되자 이들은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중국 남부 광동성의 법률운동가인 궈페이시옹(Guo Feixiong, 郭飛雄)은 광동성 타이시 마을에서 주민에게 법률 지원활동을 한 뒤, 2007년 11월‘불법사업 운영’이 라는 조작된 죄목으로 징역 5년을 선고 받았다. 2001년 중국 북동부 랴오닝성 션 양의 한 고위 관리의 뇌물 스캔들에 관한 책을 펴내면서 무허가 도서등록번호를 사용했다는 혐의였다. 그는 전기봉 구타를 포함하여 고문을 당했으며, 재판 전인 2007년 11월에 이미 구금되었다. 2009년 7월 이후 그의 변호사와 누나는 그를 면 회할 수 없게 되었다. 보도에 따르면, 그는 2010년 초 교도소에서 베이징에 있는 변호사에게 팩스를 보내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면회를 오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상하이 인권변호사인 정엔총(Zheng Enchong, 鄭恩寵)은 토지에서 쫓겨난 주민 들이 이 지역의 전 토호인 저우정이 (Zhou Zhengyi, 周正毅)를 상대로 낸 소송의 변호를 맡았다가 3년 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였다. 그의 혐의는 조작된 ‘국가기밀 누설죄’인데 외국 기관에 ‘내부의 보고서’를 팩스로 보냈다는 것이다. 지난 2006년 6월 출소한 후에도 그는 경찰서에 70여 회나 불려가 심문을 받았고, 지금도 가택 연금 상태에서 가끔 교회에 가는 것만 허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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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중순 이후 다수의 변호사가 사라졌다. 그 중 몇 명은 얼마 뒤 석방 되었으나 일부는 아직도 실종 상태이다. 일부에서는 최근의 인권변호사와 인권운 동가에 대한 탄압이 2011년 1월 이후 튀니지, 이집트 등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민 주화 운동이 성공한 뒤, 중국 전역의 대도시에서 ‘자스민 혁명’을 위해 모이자는 온라인 호소에 중국 정부가 과민 반응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중국에서 일어 난 익명의 온라인 호소란 것은, 단지 사람들에게 2011년 2월 20일을 시작으로 매 주 일요일 오후마다 거리를 ‘걸으면서 웃기’를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이 글을 쓰는 현재 (2011년 5월 4일) 실종된 변호사는 다음과 같다. 2011년 4 월 29일 체포된 베이징 인권변호사 리 팡핑(Li Fangping, 李方平), 참고로 그는 2011년 5월 4일 풀려났다. 베이징 인권변호사 리 씨옹빙(Li Xiongbing,黎雄兵)은 2011년 5월 4일 체포되었다가 2011년 5월 6일 풀려났다. 광저우 변호사 리우 시 후이(Liu Shihui, 劉士輝)는 광저우 ‘자스민 집회’에 참석하려다 구타를 당해 다리 에 심하게 부상을 입고 2월 25일에 끌려갔고, 상하이 변호사 리 티안티안(Li Tiantian, 李天天)은 2011년 2월 19일에 끌려갔다. 실종되었다 풀려난 변호사는 다음과 같다. 2011년 2월 19일에 잡혔다가 5월 5 일 석방되어 고향인 중국 북동부 지린성으로 끌려간 베이징 인권변호사 탕 지티안 (Tang Jitian, 唐吉田). 탕은 구금되어 있는 동안 고문을 당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2011년 2월 19일 끌려갔다가 4월 19일에 석방된 베이징 인권변호사 쟝 티안용 (Jiang Tianyong, 江天勇)은 중국대학에서 정치학과 법학을 가르치는 전직 인권변 호사이다. 2011년 2월 19 끌려갔다가 4월 29일에 석방된 텡 비아오(Teng Biao, 滕彪), 2011년 2월 25일 끌려갔다가 3월 4일에 석방된 광저우 변호사 우 전치 (Wu Zhenqi, 吳鎮琦), 2011년 3월 25일에 끌려갔다가 4월 28일에 석방된 광저우 변호사 리우 천칭(Liu Zhengqing, 劉正清), 2011년 4월 8일에 끌려갔다가 4월 19 일에 석방되어 후베이성 고향으로 강제로 보내진 베이징 변호사 진 광홍(Jin Guanghong, 金光鴻), 구금된 유명한 예술가인 아이 웨이웨이(Ai Weiwei,.艾未未) 의 가까운 친구로서 2011년 4월 14일에 끌려갔다가 4월 19일 석방된 베이징 인 권변호사 리우 시아오위엔(Liu Xiaoyuan, 劉曉原) 등이 있다. 베이징의 인권변호사 니 유란(Ni Yulan, 倪玉蘭)은 몇 년 전 자신의 집이 철거 되는 것을 막으려다 구금되었다가 경찰의 구타로 불구가 되었는데, 2011년 4월 6 일 ‘사회질서 교란’ 혐의로 다시 구금되었다. 광저우 인권변호사 탕 징링(Tang Jingling, 唐荊陵)도 2011년 2월 22일에 끌려갔다. 3월 1일 공안은 탕의 가족들에 게 그가 광저우시 판유 지역의 ‘다쉬교육센터(Dashi Training Centre)’ 내 연금 상 태에 있다고 통보하였다. 중국 당국은 이들 변호사들의 구금에 대하여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고 있다. 중 국 외교부 관리는 외국 언론인이 변호사들과 구금된 인권운동가들에 대해 묻자 중 국은‘법치’국가이며, 중국 당국은 이들 사건 처리에서 법규를 준수하고 있다는 상 투적인 주장만 되풀이 하였다. 형사 절차에 관한 법규가 얼마나 준수되었는지, 해 당 사건을 맡은 관리에게 얼마나 많은 권한이 부여되었는지, 그리고 구금된 인권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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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와 인권운동가들이 어떤 법적인 보호를 받았는지 의심스럽다. 이러한 탄압과 함께, 많은 인권변호사들이 인권보호 활동을 이유로 자격을 정지 당하기도 했다. 2010년 4월 베이징 법무국(Beijing Justice Bureau)는 2009년에 있었던 쓰촨성 루저우시의 파룬궁 사건에 대한 법정 심리 도중에‘법정 질서를 문 란케 했다’는 이유로 베이징 인권변호사 탕 지티안(Tang Jitian, 唐吉田)과 리우 웨이(Liu Wei, 劉巍) 의 변호사 자격을 영구적으로 취소하였다. 이들 변호사에 따 르면, 당시 자신들은 법정에서 변론 시도를 판사가 계속 방해하여 항의 표시로 퇴 정했을 뿐이라고 한다. 한편, 인권변호사인 웬 하이보(Wen Haibo, 溫海波), 쟝 티안용(Jiang Tianyong, 江天勇), 리 수빈(Li Subin, 李蘇濱), 통 차오핑(Tong Chaoping, 童朝平), 양 후이 웬(Yang Huiwen, 楊慧文), 텅 비아오(Teng Biao, 滕彪) 장 지안캉(Zhang Jiankang, 張鑒康), 탕 징링(Tang Jingling, 唐荊陵) 등은 베이징 법무국이 뚜렷한 기준 없이 ‘연례 평가’를 통과시키지 않아 변호사 자격을 갱신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 변호사들은 인권옹호 활동을 비롯해 파룬궁 신도나 유명 인권운동가 등 ‘정 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의 변호를 맡았기 때문에 평가를 통과하지 못한 것으로 보 인다. 이들 변호사와 법률 활동가들의 사례를 볼 때, 우리는 중국 정부가 스스로‘법치’ 국가라고 주장하는 것을 매우 우려한다. 중국이 진정한 법치국가라면, 왜 중국 헌 법에서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에 관한 규정이 전혀 이행되지 않았는지 의구심이 든 다. 오히려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려고 노력했을 뿐인 인권변호사와 운동가는 항상 반체제 인사로 찍혀 탄압의 대상이 되어 왔다. 2007년 개정되어 2008년 6월부터 시행된 변호사법에서 일부 법조항이 개선되긴 했지만, 변호사 보호에 관한 규정은 한 번도 적절하게 집행된 적이 없다. 형사사건 변호사는 아직도 중국 형법 제306 조에 따라 증거 수집 과정에서 증거 조작 혐의로 기소될 위험을 안고 있다. 이 법 의 가장 유명한 최근의 희생자는 베이징 변호사인 리 주앙(Li Zhuang 李莊)으로, 그는 2010년 1월 충칭시 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 형을 선고 받았다. 리는 당초 마피아 두목 용의자를 변호하였다. 의뢰인이 구금 도중에 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하 면서, 그는 법정에서 위증을 하게 한 혐의를 받았다. 위 사례들은 형사사건의 변호, 특히 중국 당국이 ‘정치적으로 민감하게’ 생각하는 인권 관련 사건의 변호를 맡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준다. 중국이 어떻게 자신들이 ‘법치’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사실상 중국 정부가 주장할 수 있는 최대치는 중국이 기껏해야 법을 이용해 통치하고 있다는 것이지, 많은 법규가 실제로 엄격하게 집행되어 왔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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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2
버마의‘국가 테러리즘’과 인권
소웅(Soe Aung) 버마민주주의 포럼(Forum for Democracy in Burma, 버마) 부총무
1. 서론 2011년 5월 국제회의 ‘테러와의 전쟁과 아시아 민주주의’에 관한 배경 글에서 말하고 있듯이, 대테러법이 집행될 때 종종 기본권과 자유를 제한하는 결과를 낳 는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 이동의 자유 그리고 결사의 자유가 흔히 영향을 받는 다. 버마에서도 이와 같은 법률은 테러리스트와 잠재적 테러리스트뿐만 아니라 자 유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과 정치적으로 반대 입장을 취하는 운동가, 인권옹호가, 노조 활동가 등 법을 준수하는 시민들에게까지 불리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버마 정부는 ‘국가안보’ 를 수호한다는 구실로 억압적인 조치를 정당화하고 있다. 아이 러니하게도, 이러한 정부의 가혹하고 억압적인 조치들을 우리는 ‘국가가 지원하는 테러리즘’이라고 부른다. 온라인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국가 테러리즘은 국민들에게 공포를 조 성함으로써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것’ 으로 정의된다. 버마정부는 지난 수십 년 간 장악해온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 을 사용하여 국민들 사이에 공포감을 조성하고 있다. 군부에서 초안을 작성한 헌 법 하에서 군부가 임명한 선거위원회가 감독한 ‘사기’ 선거에서 전직 군인들이 거 의 대다수 당선되었고 이들이 새로운 민간 정부를 세웠다. 변화는 허울뿐이고 폭 력은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테러와의 전쟁’이 억압적인 정부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원칙을 정립하고 준수해야 할 정부의 책임성을 약화시켜 온 것을 목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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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버마는 1962년 이래 지금까지 군사정권 하에 놓여 있다. 부정과 협박, 사기로 얼룩진 2010년 11월 선거 이후 예전의 군부는 소위 민간정부 행세를 하고 있다. 이 신생 정권은 여전히 버마 인구의 대략 40%를 차지하고 55%의 영토를 차지하 고 있는 소수민족을 탄압하고 있다. 1996년 이래 군부는 버마 동부지역에서 3,600개의 마을을 파괴하고 50만명 이상의 사람들을 내쫓았는데 이는 규모에 있 어 수단 다르푸르(Sudan's Darfur) 분쟁과 비교될 수 있다.
3. 헌법 2008년 헌법은 군부의 엘리트들이 군대에 부여된 특권을 유지하여 권력을 영속 화할 수 있도록 개정되었다. 헌법은 소수민족의 권리뿐만 아니라 어떠한 실질적인 민주적, 기본적 인권도 규정하지 않고 있다. 헌법 개정안을 마련하는 과정에 1990 년 선거에서 선출된 국회의원들의 참여는 허용되지 않았다. 명령 제5-96호에 따 라 헌법 토론에 참여 및 입법과정에 대한 비판이 일체 금지되었다. 더욱이 휴전단 체를 포함한 소수민족의 논의 및 제안은 철저하게 무시되었다. 그리고 헌법은 강 요, 압력, 기만 및 심지어 폭력까지 사용된 사기 국민투표를 통해 승인되었다. 국 민투표는 또한 사이클론 나르기스(Nargis)로 인해 대대적인 파괴와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직후 실시되었다. 이러한 헌법을 토대로, 정권은 자신의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에 대해 스스로 면 책권을 부여했다. 헌법 제445조에 따르면, ‘자신들의 책임에 따른 의무를 공식적으 로 이행한’ 국가평화발전위원회(State Peace and Development Council, SPDC) 또는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State Law and Order Restoration Council) 위원들을 대상으로 어떠한 법적 조치도 취할 수 없다. 전직 장관이자 국무총리 출신인 우 떼인 세인(U Thein Sein) 대통령이 이끄는 정권은 민간의 외양을 갖춘 국가의 입법, 행정 및 사법기관을 전직 군부 관료와 그들의 대리 정당인 연방단결발전당(Union Solidarity and Development Party)의 당원들로 채움으로써 세력기반을 더욱 공고히 했다. 연방의회(Union Assembly) 의장과 부의장은 전직 합참의장과 장군이 각각 차 지하고 있으며 민회(People’s Assembly)와 국회(National Assembly) 의장 또한 전직 합참의장이 맡고, 연방단결발전당 당원 출신이 부의장을 맡고 있다. 행정부 총 35개의 장관직 중에서 26부처를 전직 또는 현직 군부관료가 맡고 있으며 연방 단결발전당 당원이 나머지를 채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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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억압적인 국내법 버마의 사법제도는 전혀 독립적이지 않다. 재판은 종종 비공개로 진행되며, 피고 자 상당수가 변호사나 가족이 참석하지 않은 채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갇혀 있다. 이러한 사법제도는 기본적인 수준의 공정성도 갖추지 못하고 있으며, 정부는 이를 정치적 반대자에게 재갈을 물리는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 정치적 반대자란 정부에 비판적인 기사를 쓰는 사람, 사이클론 나르기스의 피해자들에게 음식을 기부하는 사람 혹은 ‘세계인권선언’ 사본을 배포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버마에는 이들을 억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42개의 감옥, 109개의 노동수용소 그리고 그 수가 알려 지지 않은 심문소가 있다. 카렌국민연합(Karen National Union), 전버마학생민주전선(All Burma Students’ Democratic Front), 민족민주동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심지어 버마 변호사회의(Burma Lawyers’ Council)를 포함하여 현 정권에서 불법단체라고 지정 한 93개의 단체 중 어느 곳과도 접촉을 하는 사람은 심각한 곤경에 처할 수 있다. 이들 단체와의 연관성은 자의적으로 정의될 수 있다. 현 정권은 정당들에게 정당 등록을 취소당하지 않으려면 불법단체와 접촉 혹은 관계를 맺지 말라는 지시를 최 근에 내렸다. 형법 제121조, 제122(1)조, 제122(2)조, 제124(a)조 또는 (b)조, 불법결사법 (Unlawful Association Act, 1908), 국가보호법(State Protection Law, 1975), 긴 급조항법(Emergency Provisions Act, 1950), 전자거래법(Electronic Transactions Law, 2004), 인쇄업자 및 출판사법(Printers and Publishers Act, 1962), 공식기 밀법(Official Secrets Act, 1923) 그리고 텔레비전과 비디오법(Television and Video Law, 1996) 등 정치활동에 관여한 사람들을 범인으로 취급하는 수많은 법 들이 존재한다. 2011년 2월, 22세의 블로거인 까웅 먓 흘라잉(Kaung Myat Hlaing)은 정치수감 자 석방을 위한 캠페인을 벌였다는 이유로 10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그는 이미 2010년 4월 15일 랑군에서 발생한 치명적인 폭발사건에 연루되어 2년 징역형을 선고 받은 바 있다. 같은 달 버마 민주화의 소리(Democratic Voice of Burma, DVB) 리포터인 마웅 마웅 제야(Maung Maung Zeya)는 전자거래법 및 불법결사 법에 의해 13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이들 사건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정권이 억 압적인 법을 이용하여 자행한 잔혹행위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위에서 언급한 억압적인 법에 의해 구금된 정치적 수감자는 2,000명이 넘는다. 정권은 국방부 산하 군정보부와 특별조사국, 내무부 산하 버마 경찰대 및 특별정 보군을 두고 활용하고 있으며 이 모든 기관은 현 정부 고위층의 통제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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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계속되는 인권 침해 민간의 외양을 갖춘 정부임에도 불구하고, 인권 침해는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 버마는 국제노동기구(ILO) 강제노동금지협약을 비준하였으며, 국가평화발전위원회 명령 제1-99호는 국가 내 강제노동을 불법으로 공식 규정했다. 국제적, 국내적 법적 의무에도 불구하고 정권은 광범위하고 체계적으로 강제노동을 실시해왔다. 또한 버마는 15세 미만의 어린이를 군인으로 모집하지 못한다는 유엔아동권리협 약(UN Convention on the Rights of the Child)을 비준한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군대는 약 70,000 명의 소년병을 모집했다. 또한 대부분의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국경 지역에서의 무장 분쟁이 계속되면서, 정권은 ‘4가지 차단’ 전략을 세워 분쟁지역으로부터 마을을 강제적으로 이주시키고 있다. 이 전략은 무장 반군이 징집, 정보, 보급, 재정에 대한 접근을 약화시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로 인해 수천 명의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었으며, 의료서 비스, 교육, 고용에 대한 접근 기회 감소와 더불어 질병과 건강악화, 폭력, 인신매 매, 강제노동에 직면하게 되었다. 버마는 강간을 전쟁의 무기로 사용하는 것을 포함해 민간인의 전쟁 수행을 금지 하는 제네바협약에 가입한 국가이며,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철폐에 관한 유엔협약(UN Convention on the Elimination of All Forms of Discrimination against Women, CEDAW)을 비준한 국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군부는 이러한 의무 와 책임을 무시하고 샨, 몬, 카렌, 팔라웅, 친, 카친을 포함한 소수민족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과 강간을 저질러왔다. 샨여성행동네트워크(Shan Women Action Network)는 최근 발표한 보도자료 (2011년 4월 12일)를 통해 샨주 북부군(Shan State Army North, SSA-N) 을 대상으로 한 현 버마 군대의 공격과 불교사원의 포격, 집단강간, 여성의 인간방패 사용을 포함한 민간인 잔혹행위를 강력히 비난했다. 이들은 버마 내에서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인권 침해의 일부 사례에 불과하다.
6. 조사위원회 토마스 오제아 퀸타나(Tomas Ojea Quintana) 버마 인권 상황에 관한 유엔 특 별보고관(UN Special Rapporteur on the human rights situation in Burma)은 보 고서를 통해, 선거 이전에 버마 국민에게 가해진 억압이 커지고 있다면서, 모든 정 치범들의 무조건적인 석방과 조사위원회를 통한 책임자 처벌 및 정의구현을 촉구 한 바 있다. 더불어 오제아 퀸타나 특별보고관은 새로운 선거제도와 당국에 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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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戰場)이 된 아시아, 후퇴한 민주주의
집행은 기본권인 표현과 집회, 결사의 자유를 더욱 제한했다고 말했다. 특히 특별보고관은 2010년 3월 인권이사회에 제출한 획기적인 보고서에서 그는 버마 국민의 운명과 그 책임이 국제사회의 손에 달려있다고 언급하였다. 그는 ‘만 일 정부가 이러한 책임을 회피한다면, 이후 책임은 국제사회에게 있다... 특히 2008년 헌법 제445조는 정부가 향후 정의와 책임성 문제를 효과적으로 다루는데 저해가 될 수 있어 우려된다. 헌법에 담긴 면책권을 이용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유 엔은 인권이사회, 총회, 안보리가 채택한 결의문 또는 사무총장의 자체 권한을 이 용해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조사위원회를 설립할 수 있다’고 했다. 14개국이 이러 한 요구를 공식적으로 지지했으며, 그 수는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권고가 현실이 될 수 있도록 국제사회는 지금이라도 행동에 나서야 한다.
7. 결론 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국가 테러리즘이 ‘비국가 테러리즘’보다 도덕적으로 더 나쁘다고 본다. 현대 국가는 속성상 비국가 행위자보다 더 큰 희생자를 낳기 때문 이다. 이러한 피해는 은밀한 잔혹행위와 함께 비밀, 기만 및 위선에 의해 더욱 악 화되기 마련이다. 버마에서의 국가 테러리즘은 비국가 행위자에 의한 테러리즘보 다 훨씬 나쁘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버마에서 이러한 행위가 끝임 없이 반복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국제적인 수단을 이용하여 정부에 압 력을 가하는 것이다. 반인도적 범죄를 조사하기 위한 ‘조사위원회(Commission of Inquiry)’를 가능한 한 빨리 설립하는 것이 가장 유용한 수단이 될 것이다.
*** 2011년 3월 출범한 세인 정부는 군부정권의 실책을 일부 인정하면서, 빈곤퇴 치, 국가인권위원회 설립, 가택연금에서 해제된 아웅산 수치 여사 면담, 정치범 300여명 석방, 집회와 시위의 자유 보장, 해외 투자 유치법 개정, 노동자들의 노 동조합 설립과 파업 권리 부여 등 여러 개혁 조치들을 시도하고 있다.(감수자 참 여연대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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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얍 스웨셍 Yap Swee Seng 포럼 아시아(FORUM-ASIA, 태국) 사무총장
• 파하드 마즈하르 Farhad Mazhar 개발 대안에 관한 정책 연구소(UBINIG, 방글라데시) 소장
• 파잘 가니 카카르 Fazal Ghani Kakar 아프간 여성전문교육원(Afghan Women Professional Education Institute, 아프가니스탄)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 아딜라 라만 칸 Adilur Rahman Khan Odhikar(방글라데시 소재) 사무총장
• B. 스칸타쿠마르 B. Skanthakumar 법치사회기금(Law & Society Trust, 스리랑카) 활동가
• 바블루 로이통밤 Babloo Loitongbam 인권긴급행동(Human Rights Alert, 인도) 팀장
• 고빈다 프라사드 샤르마 코이랄라 Govinda Prasad Sharma Koirala 네팔 대법원 고등변호사
• I. A. 레만 I. A. Rehman 국가인권위원회(non-governmental Human Rights Commission of Pakistan, 파키스탄) 사무처장
• 임파셜 인도네시아 인권감시팀 • 피트리 빈탕 티무르 Fitri Bintang Timur 국가안보와 평화학 연구소(Institute for Defense Security and Peace Studies, 인도네시아) 연구원
• 옹진쳉 Ong Jin Cheng SUARAM(Suara Rakyat Malaysia, 말레이시아 사람들의 목소리) 활동가
• 크리트디코른 웡스왕파니치 Kritdikorn Wongswangpanich 작가
• 시나판 사미도라이 Sinapan Samydorai 싱크센터(Think Centre, 싱가포르) 아세안 분과 팀장
• 카르멘 루존 개트메이탄 Carmen Lauzon - Gatmaytan 국제대화 이니셔티브(Initiatives for International Dialogue, 필리핀) 프로그램 매니저 •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
• 패트릭 푼 Patrick Poon 중국인권변호사모임(China Human Rights Lawyers Concern Group) 사무총장
• 소웅 Soe Aung 버마민주주의 포럼(Forum for Democracy in Burma, 버마) 부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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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戰場)이 된 아시아, 후퇴한 민주주의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 (Solidarity for Democratization Movements in Asia)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는 아시아 인권과 민주주의 증진을 위한 시민사회 연대를 위해 2010 광주아시아포럼에서 출범했습니다. FORUM-ASIA (태국), IDSPS, Imparsial (인도 네시아), Initiatives for International Dialogue (필리핀), Odhikar (방글라데시), 참여연대, 5·18기념재단 (한국) 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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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788994 128177 ISBN 978-89-94128-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