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 National University of Fine Arts] 20th graduation exhib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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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작업

4 - 217 권도율 김규상 김도연 김무영 김서희 김소현 김예진 김진주 김하윤 박제호 박주영 서명범 서영현 손효정 용하정 유나윤 유정우 윤혜준 이명은 이승일 이연석 이운 이은결 이택우 임종원 장다은 장영해 정다훈 정진희 정화연 진지원 차시헌 최규태 추승민 한가윤 홍우인

서문

220

청탁글

222 -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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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피를 씻는다 water washes blood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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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도율 fixxton88@gmail.com

OF COURSE I STILL LOV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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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tinel-15, acrylic, glycerin, 6cm x 9cm x 0.8cm,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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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ll Star Tracker, mixed media, 9.2cm x 5.7cm x 14.7cm, 2019

Horn, mixed media, 8cm x 10cm x 18cm,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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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IREX-REx, PLA filament, acrylic, 10cm x 10cm x 17.5cm,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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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ow Ring, PLA filament, aluminum, brass, 12cm x 6.5cm x 16cm, 2019


김규상 colalove3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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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랑거리기 위한 지지체 A Pole for Fluttering, 나무,석고,철사,종이,모터, 21cm x 38cm x 310cm,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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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된 돼지들의 땅 The Land of buried Pigs, 스티로폴과 나무에 채색, 가변크기,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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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화된 작물 Worship a Crop, 스티로폴에 채색, 40cm x 40cm x 142cm,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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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랑거리기 위한 생명체 A Creature for Fluttering 나무,레진,철사,종이,모터,바퀴 , 125cm x 23cm x 45cm,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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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연 doyeang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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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pt>

사람 없는 작업실 책상 위에 조금씩 쌓여가는 편의점

음식 포장과 쓰레기를 보면서 겨우 누군가 있었었다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 타인과 단발적으로 교차하고 멀어지길 반복하는 삶 속에서 내겐 누군가가 남긴 쓰레기들이 더 긴 시간을 함께 하는 것들이다. 그마저도 빨리 먹고 자리를 나설 수 있는 패스 트푸드의 잔여물이란 것이 일상의 공허함을 불러 일으켰다. 음 식과 식사라는 기본적 행위마저 절약하고 단축시켜 얻는 미래 가 그다지 보상받지 못하다고 느끼는데도 매일 같이 소비되고 쌓이는 음식 쓰레기들은 동시대 모든 사람이 대체 어디를 향해 쏜살같이 달리는지 의문이 들게 했다. 종말엔 사람은 없고 남 겨진 쓰레기들만 남은 풍경이 펼쳐질 거라 생각했다. 지속적으로 주변의 버려진 사물들과 쓰레기들을 수집해 모 델링을 시작하고 3D 유닛들을 만들었다. <Swept>는 그 유닛 들을 가지고 만든 작업이다. 거대한 공간감을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는 도구를 붓에서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바꾸는 데에 일조 했다. 대형 수제 캔버스에 유화로 큰 공간을 그리려 했는데, 그 때의 기억을 살려 3채널 영상으로 공간을 확장시켜 보려 했다. 유닛들은 프로그램 내 물리엔진을 통해 마치 바람에 휘날리듯 움직이게 했는데, 그러한 역학이 가상 이미지를 현실 공간의 확장으로 보이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디지털 매체를 선택하게 만든 신체적 그리고 경제적 여건은 거대한 공간을 만드는 일을 쉽게 해줬을 뿐만 아니라, 주변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영향을 주었다. 큰 캔버스를 다루는 일이 무거운 노동으로 느껴지기 시작했을 정도로 나의 만성적인 질 환이 심해지고 나서 평소 먹는 것에 대하여 고민하게 되었다. <Swept>에서 등장하는 쓰레기들은 모두 섭취와 관련됐던 제품들의 남은 것들이다. 재활용 될 수 없는 포장의 식품들이 가진 문제점을 알면서도 먹고 살기 바쁜 현대인이 빠르게 칼로 리를 섭취할 수 있는 수단이기에 그것에 대한 가치판단을 유 보할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서 마주한 동시대의 것들에 대하여 대답을 내놓을 수 없어 차라리 다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Swept>의 풍경을 그리는 연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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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pt , 3 channel video installation,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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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영 rlaandud95@gmail.com

Annual Honesty 1, single channel video, 11'3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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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eyes, (with Nils Ekman), single channel video, 7' 4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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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잔가지 Danish Twigs, single channel video, 8', 2017년 12월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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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ual Honesty 1, single channel video, 11'3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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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희 sh_maker@naver.com * 작가 본인의 요청으로 게재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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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현 cdyba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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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Free For Art Performance, single channel video, 8' 4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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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Recycled fabric,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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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진 zimzez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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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 김진국과 임진국이 한 마을에 살았다. 김진

국은 아들을 낳고 임진국은 딸을 낳았다. 김진국 아들은 사라도 령이라 이름 짓고, 임진국 딸은 원강암이라 이름 지었다. 김진국 과 임진국이 일찍이 사돈을 맺은 터라, 두 아이는 자라 부부가 되었다. 원강암이에게 태기가 있어 배가 항아리만큼 무거워졌을 무렵, 사라도령에게 서천꽃밭의 꽃감관을 살러 오라는 전갈이 내려왔 다. 누구의 명인데 거절을 하리. 사라도령은 곧 채비를 하고 부 인에게 말했다.

“내 꽃감관을 살고 올 테니 잘 있으시오.” 사라도령은 서천꽃밭으로 훌훌 떠나고, 원강암이는 얼마 안 되 어 궁이를 낳았다. 궁이가 제법 자라서, 마당에서 막대기로 말타기를 하며 놀게 된 어느 날, 궁이는 원강에게 물었다. “우리 아버지는 어디 갔습니까?” 원강암이는 사실대로 말하면 아들마저 떠날 것 같아 불안했다. 걱정에 물 한모금 입에 가져가지 못하던 원강은 사나흘 사경을 헤매다 죽어버렸다. 앓다 죽어버린 원강의 주검은 너무나 비참했다. 머리는 끊어 푸 른 대밭에 던져졌고, 잔등이는 끊어 검은 대밭에 던져졌고, 무릎 은 끊어 푸른 띠밭에 던져져 있었다. 원강의 주검을 모은 궁이는 엄마와 아빠가 필요했으니 죽은 원강을 다시 살려내기로 한다. 할락궁이는 어머니의 뼈를 차례대로 모아 놓고 환생꽃을 뿌렸 다.

“아이고, 봄잠이라 오래도 잤다.”

원강암이가 살아나 머리를 긁으며 일어났다. -<원강이야기> 中-

呪花 주화 pruning, HD, single channel video, 1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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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주 withpear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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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ARE ONE, single channel video, 8' 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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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 HEART RED POINT, single channel video, 7' 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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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니다, single channel video, 8' 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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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윤 gelly96@naver.com

The show, oil painting, 162.1x112.1cm,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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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how#2, oil painting, 130.3x89.4cm,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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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how#3, oil painting, 100.0x80.3cm,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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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how#4, oil painting, 130.3x89.4cm,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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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들은 스크린을 통해 봤던 대중문화 속 쇼의 이

미지로, 움직이는 영상이나 캡처된 이미지를 참고해 만들어진다. 쇼라는 일종의 프레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캔버스라는 프레임 에 옮길 때, 여러 의미와 제한이 더해지며 붓질은 다양한 가능성 을 획득한다. 쇼의 비현실적인 분위기, 장식성, 영상 이미지에서 기인한 재생 혹은 정지의 감각들은 다양한 회화적 상태로 재구성 된다. 페인팅 속 대상들은 규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감각적으로 배치되며 '시끄러운', '갈구하는'과 같은 형용사를 중심으로 화면 을 구성해 나간다.

Red eyes, oil painting, 65.2x50.0cm,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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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호 wpgh162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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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il on canvas, installed on Brackets 1.193.9 x 130.3 2. 130.3 x 162.2 3. 130.3 x 97.0 4. 45.5 x 53.0cm, 2019 charcoal on paper, acrylic panel, 1,2,3,4,5. 27.2 x 39.4cm, 2019 moving image on display panel, 1. 68.45 x 121.82 2. 35.5 x 53.2cm, 2019 plaster object, 48.0 x 54.0cm,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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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 parkjuyeong3701@gmail.com

* 작가 본인의 요청으로 게재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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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titled-uncanny image


서명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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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현 pinokosay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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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기본적으로 주체를 변화시키는 사건이다.

구원에 대한 희구는 결코 현재 상태가 유지되기를 추구하지 않는다.” 서동욱 <일상의 모험> 중

이상세계에 간다면 모든 것에 만족할 수 있을까, 나

자신이 다른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면 손 쓸 도리 없는 이 세 상에서 굳이 천국을 찾아 떠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지 않을 까.

외부의 큰 개입으로 괴로웠던 삶이 뒤바뀌고 결국 행

복한 결말에 이르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욕망이다. 신데렐라부터 tv의 드라마까지 변신에 대한 욕망은 오래된 클리셰로 우리 곁에 존재해왔다.

욕망은 쉽게 해결 될 수 없기에 욕망으로 지속된다.

그로인해 사람들은 욕망의 실현을 기약 없이 기다리기보다 대 체재를 찾아 나선다. 내가 아닌 타자가 되기 위해, 이곳이 아 닌 다른 곳으로 떠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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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효정 sognojeong@gmail.com

자연법칙을 거스르려는 빗방울들을 숨겨주는 공간들 A Research about a Space to Hide Raindrops that Defy Law of Nature, Oil on canvas, acrylic, collage, 110cm x 60cm,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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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하정 hihajung21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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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e, Oil on wood panel, 146x112cm,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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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ping stones, Oil on wood panel, 73x54cm, 2019 Desert, Lock&lock series no.4, Oil on wood panel, 60.6x45.5cm,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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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gs I, II Oil on wood panel, 146x112cm, 2019 / Oil on wood panel, 116.8x91cm,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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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gs, single channel video, 5’23”, 2019 Things III, IV, V, Oil on wood panel, 30x30cm,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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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나윤 dbrudtjf@naver.com

Missing (2), 80 x 100 cm, charcoal and conte on paper, 2019 Missing, 390.9 x 160.2 cm, charcoal and conte on paper,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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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tchhhhh, 60.6 x 72.7 cm, charcoal and conte on paper,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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ëŹ˜íƒ‘, 72.7 x 116.8 cm, charcoal and conte on paper,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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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따라 산책길이 북적 했다, 65.1 x 45.5 cm, charcoal and conte on paper, 2019 잠자기 전 가족들과 경전 읽기, 51.9x 36.4cm, charcoal and conte on paper,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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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함께, 67.5 x 48 x 38.5cm, acrylic adhesives on clay and watercolor,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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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우 jwyu062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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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혜준 hjyunn@naver.com

관계 엮기, oil on panel, 33.4 x 24.2cm, 2019

관계 엮기, oil on panel, 21 x 29.7cm,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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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원 사이의 수영장, single channel video, installation, 00' 10'', looped, 2019

웅성웅성, single channel video, 00' 47'', looped,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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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성웅성, single channel video, 00' 47'', looped,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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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표정, oil on panel, 21 x 29.7cm, 2019 다 똑같은 사람, oil on panel, 27.3 x 22cm, 2019 관계 엮기, oil on panel, 27.3 x 22cm, 2019 관계 엮기, oil on panel, 21 x 29.7cm, 2019

관계 엮기, oil on panel, 53 x 45.5cm,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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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의 성, oil on fabric, 130x 125cm, 2019

트위스터, oil on fabric, 140 x 190cm,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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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색 바다도 허구였다, single channel video, 2019


이명은 reemyeongeu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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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바이포도, single channel video,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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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NER, photograph and photo book,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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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일 snngg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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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폴리투스 Hippolytus, HD single channel video, color,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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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클 플라자 Miracle plaza, 4K single channel video, color, sound, 6' 3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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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석 rinnstein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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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agram.com/rinn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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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2woon.com

이운 whe2u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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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되었건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될거라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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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나라 ,캔버스에 유채, 162.2 cm x 260.6 cm, 2019


이은결 sallycool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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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하리보, 캔버스에 유채, 90.9 cm x 72.7 cm,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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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번출구, 캔버스에 유채, 162.2 x 130.3 cm,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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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우 leetekwo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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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발씨들, 8.5cm x 6.5cm x 11.5cm , 레진에 도색


임종원 imjongwon1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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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 86.1cm x 58.3cm, 종이에 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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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 86.1cm x 58.3cm, 종이에 색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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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당신>

무엇이 좋은 작업인지는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다.

사실 창작자들이 일련의 과정을 거쳐 뽑아내는 결과물들

을 사회에서는 모두 작업이라고 지칭한다. 그런 관점에서

그 이후 나온 드로잉 연작들은 당신들을 내 기호에 맞춰

볼 때 작업이란 것은 항상 신박한 것만은 아니다. 자기만의

바라보기 시작하는 첫 걸음이다. 시작인 '나'에서 벗어나

꽂히는 무언가를 바탕으로 단순히 그걸 구체화 시킨 것 역

주변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이유에 대해서는 사실 논리

시 작업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모든 작업물들이

적인 사고과정이 개입 하진 않는다. 단지 근래 들어 나와

남들은 꿈도 꾸지 못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나올 필요는

가장 가까운 당신인 어머니와의 대화에서, 같은 시대를 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멀리 갈 것도 없이, 가장 가까운

면서도 동시에 다른 시대를 살았던 당신들에 대해서 보다

존재인 '나'를 가지고 작업을 시작했다.

궁금점이 생겨 이것저것 찾아보면서 기록해나가는 작업물 들이다.

저녁노을을 보면서 옆에 있는 친구는 저 아름다

운 색채를 보라며 사진을 찍기 바쁘지만, 나는 그냥 해가 지는구나 싶다. 나는 남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덤덤한 편 인 것 같다. 다만 인체에 대한 관심은 조금 있다. 조그마한 좌표상의 차이, 내지는 신체구조가 이루는 각도 차이 하나 로 나와 당신들은 다른 사람이 된다.

그렇다면 그 조그마한 차이를 더 극적으로 변형

해서 나타내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라는 생각에서 작업은 출발한다. 나라는 사람을 나타내기 위해서 꼭 외형이 닮을 필요는 없다. 뭐 굳이 따진다면 인체형태를 띌 필요도 없을 것이다. 게임에서 굳이 자기 자신 모습 그대로 캐릭터를 만 드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바야흐로 대 SNS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오늘날에도 프로필 사진에는 본인 사진뿐만 아니 라 다양한 이미지들이 쓰인다. 자신이 그린 그림이라든가, 풍경, 내지는 좋아하는 작품이나 사람, 동물의 이미지 등 등. 물론 자기 셀카를 그대로 쓰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보정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올린다. 그리고 이미지를 선정 하는 데에 있어서 그 사람의 <취향>이 반영된다. 대체로 는 자기가 좋아하는 걸 고르지 싫어하는 걸 고르진 않는다. 작업에 있어서도 나는 내 기호를 충실히 따라간다. 나는 나 자신을 미국식 카툰처럼 표현하고 싶었고, 그것을 여러 가 지 매체를 통해서 만들어보고 싶었다. 그렇게 나온 것이 < 삭발씨> 작업물들이다.

삭발씨가 나를 내 기호에 맞춰 바라본 것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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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발씨 인트로, 삭발씨의 위장, 59.4cm x 84.1cm, 750 x 750 (px), 디지털 작업, 프로세싱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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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ny Rain Echo, performance, 2019


장다은 chezja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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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ny Rain Echo, performance,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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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해 younghae121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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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me, front hook, angel, invert, daphne, figure head, scorpion, fall, gemini, princess, chopstick, 20’, performance,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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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ge analysis, 13’ 11�, performance,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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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훈 pinceaufran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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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희 jinnystory9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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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 2019, installation view


정화연 meww1219@gmail.com

매달린 뼈, 2019, mixed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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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뼈, 2019, mixed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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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이는 뼈, 2019, mixed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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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테로토피아. 자기 이외의 모든 장소들에 맞서서, 어떤 의미로는 그것들을 지우고 중화시키고 혹은 정화시키기 위해 마련된 장소들. 일종의 반 공간. (…) 우리가 사는 공간에 신화적이고 실제적인 이의제기를 수행하는 다른 공간. (…) 현실화된 유토피아이자,

*

수 없는 완벽한 청결로부터 계속해서 부족해지는 상태. 모든 깨끗함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들은 인간 본연의 상태

어릴 때 하던 놀이를 떠올려본다. 잠수한 채 입

로부터 먼 이미지들이다. 적당한 세균과 박테리아는 오

밖으로 빠져나오는 거품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지만,

히려 인간에게 도움이 된다는 연구결과는 이제 새로운

금세 숨이 막히곤 했다. 비누와 물을 섞어 입으로 불면

이야기가 아니다. 깨끗한 용품들의 생산이 생태계의 파

비누방울이 생겨났고, 물방울도 거품도 아닌 묘한 빛의

괴를 가져온다는 것도 자명한 사실이다. 깨끗함에 대한

구체에 매료되어 바라보곤 했다. 그것은 인체로부터 먼

새로운 사유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욕실이 필요한 시

짙은 비누향의 세계도. 혹은 나르시스를 죽음으로 이끈

점이 아닐까.

물의 세계도 아닌 다른 어떤 세계의 순간이다. 쭉, 아주 가까이에 있었던.

*

*

모든 오브제들은 신체에 기준을 둔 스케일로 제

작했다. 길에서 수집했거나 쓰고 남은 사물들, 마트나 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욕실은 쾌적함이나 휴식을

이소 편의점 등에서 구입할 수 있는 사물들. 그런 사물

위한 공간은 아니었다. 세탁기와 변기, 세면대가 나란히

들이 지금 소비사회의 문제와 가장 밀접하다고 생각했

붙어 있는 말 그대로‘씻기 위한’공간이었다. 세면대와

고, 폐품과 자연물과 진열된 물품들의 차이를 두지 않고

비슷한 높이의 샤워기, 대야에 물을 받아 세수를 하는 장

오브제를 만들었다. 깨끗함을 위한 물품들로 다른 방식

면들, 어서 나오라고 문을 두드리며 재촉하는 욕실 밖 가

의 깨끗함을 이야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 수 있지 않을

족의 모습들을 드라마나 영화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그

까 했다. 욕실이라는 비유적-연극적 공간을 제시함으로

러나 최근의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욕실의 이미지는 보다

써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그 안에서 다루려 했다. 전시

모던하고 쾌적하며 사적인 공간에 가깝다. 내적 갈등을

가 하나의 극이자 퍼포먼스가 되는 설치의 방식을 고민

겪는 드라마 속 인물은 부스 속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

했다. 오브제들을 배우이자 퍼포머로 해석하였고, 그것

을 맞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연예

을 움직이게 하려 했다. 영상으로 움직임을 기록하여 오

인은 대리석 욕조와 세면대에서 반신욕을 즐기며 피로를

브제와 영상이 서로 조응하며 일으킬 수 있는 변화에 관

푼다. 그것은 아주 일상적인 공간이자 잘 설계된 소비의

심을 가졌다.

공간이다. 중세의 재계일이나 세례식에서 물은 영혼을 정화하며 악귀를 쫓는다고 여겨졌는데, 마치 그러한 의

*

식이 현대의 욕실에서 부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 나 그것이 정화에 가까울까, 아니면 다음 날의 피로를 견 디도록 만드는 잘 설계된 채 숨겨진 의식에 가까울까?

인간의 모든 활동은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고,

공간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밀접한 영향을 끼친다. 그 것은 중립적인 공간이 아니라, 역사가 쌓이고 사회 정치

욕실 안에서 우리는 모든 불결하고, 혼란스럽

적 관계들이 엮여 이뤄진 공간이다. 하나의 공간을 가져

고, 건강하지 않은 것들을 씻어내고 흘려보내기를 반복

와 구조와 그 안에 얽힌 관계들을 드러낸다면 그것을 변

한다. 모든 잡생각이 사라진 새하얀 상태가 된다. 그것을

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 역시 그 안에서 열 수 있을 것이

깨끗하다고 말한다. 깨끗함을 위한 용품은 매일 새롭게

라고 생각했고, 그 경험이 전시장 밖까지도 이어질 수 있

등장한다. 계속해서 갱신되는 깨끗함의 이미지는 더 많

었으면 했다.

은 선택을 만들고, 더 많은 노력을 요구한다. 그것이 낳 는 것은 더 많은 만족이 아니라 더 많은 불안이다. 어떻 게 해야 불결하지 않을 수 있는가의 문제, 결코 도달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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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 2019, performance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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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한 표정(자화상); at the funeral, mixed media, 40 x 21 x 32.5cm, 2019


진지원 jinjiw@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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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한 표정(사람들); at the funeral, floral foam, 5~9x10.5x8cm,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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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져도 되는 얼굴, mixed media, 40 x 34 x 13cm / 29 x 37.5 x 7cm / 31 x 41 x 9.3cm,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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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의 얼굴, mixed media on canvas, 162.2 x 130.3cm,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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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용 장승 호출기_일회용 컵, 빨대, 우산비닐_13 x 13 x 60cm_2019


차시헌 sihun.cha@gmail.com

리콜도장(퍼스트 건담)_PLA 및 혼합재료_가변크기_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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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콜된 형상 / 실내용 입체 리콜기구_먼지, 톱밥 및 가변재료 / 장바구니, 청소기 및 혼합재료_가변크기 / 52 x 85 x 190cm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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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용 185ml 시리즈_일회용 컵, 빨대, 우산비닐_7.3 x 7.3 x 21cm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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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은 불친절하고 한계는 예측 가능할 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적극적으로 '고인물 무빙'을 구사하 는 것이다. 이것은 유연함에 관한 것이며 동시에 의연함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고인물 무빙'은 '고인 물은 썩는다'라 는 속담에서 유래했지만, 그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으로 사 용되는 게임 은어다. '고인물'은 한 게임을 너무 오랫동안 해서 게임의 규칙과 구조뿐만 아니라 한계와 버그까지 구 석구석을 섭렵하여 언제든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 내는 유저를 일컫는다. '고인물 무빙'은 다시말해 자신이 발견한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전용하는 움직임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규칙과 구조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어떤 것 이 가능하고 어떤 것이 불가능한지를 직시하는 것이다. 이 때 가능함이란 성과사회의 '해낼 수 있음'과 같은 막연한 과잉긍정을 뜻하지 않는다. 확정적이고 명확한 의미의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잠재된 것이 아닌 이미 내재한 것이 다. 그렇기에 가능성은 발명이 아닌 발견을 통해 조명할 수 있다. 발견은 본연의 쓰임과 역할의 범주에서 약간의 상상 력을 가미하여 어떤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다. 그것은 변 신 가능성이다. 이 변신은 결코 완전한 전환을 말하지 않는 다.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살짝 비틀어 그 안에 내장하고 있는, 혹은 간과되고 있는 모습을 비추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함을 재고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체화되지 않은 발견은 아득한 전설과도 같다. 나

의 일상이 아닌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 다. 그렇기에 '고인물 무빙'의 특이점은 실천적으로 전용함 에 있다.

나의 작업은 신체의 통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적극적인 노력에서 출발한다. 그 노력이란, 명확한 해결법 이 없는 증상이 몇 년간 지속되어 어느샌가 당연해져 버린 지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언가를 소장한다는 것은 가 능한지에 관한 해소방안을 찾아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입 체적 호출 가능성을 탐색하는 '고인물 무빙'이다.

장치는 예측 가능한 통증을 예방하지만, 통증의

원인을 제거하진 못한다. 근본적인 구조를 직접적으로 바 꾸거나 해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융 통성은 상황으로부터 미끄러져 나와 결과적으로 구조를 비틀어버릴 어떤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나는 장치가 일 상의 피로와 염증에서 벗어나기 위한 적극적인 우회 전술 로써 제한된 일상에 개구멍을 낼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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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위한 사리탑_마대자루, 낙엽_가변크기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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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태 guetong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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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n, live performance with Jiwon Kwak, still shot documentation by Woon Lee, 2019


추승민 dawnfev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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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chuseung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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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총잡이

Grand bleu gris bleu Maison the hill 한남 the hill

Say 돈 줘(돈 줘)

Grand-mere d'or verre Gold and rich Grand mother

Let the gold chain for U

Long live the king (long live the king!)

Silver chain for the King Steel sweat d'undercover

강남에 40억 홍대에 60

on the bed cover of grandmother 할머니 총 끝에 빛나는 gold sweat 너에겐 황금이 그에겐 휴짓조각이야 할머니 원샷원킬 할머니 총잡이

놓치는 지금 이미 결정났으니까 너의 패배

할머니 전설의 피스톨 전설의 저격수 X2

준비 샷 존버 슛 준벅 셋 정리 해 강인 해 위대 한 그리고 제대로 알아들어 총 잡어 총 빼 총알 몇 개 다 버려 인간을 분리수거 하려면 이 정도는 해

https://soundcloud.com/kwakigu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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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탈 어머니회

메탈 어머니 메탈 아버지

가족의 숙명 그 피의 운명

오~~~ 오오 ~~~~~~~ 오오오오

추석이후엔 강추위가 찾아 올 뿐야..

오오오 오오오 오

‘집에 가고싶은’

오~~~~ 오오오 오오오오 ~~ 우리는~ 메탈가족~

오 오오오 오

메탈 어머니 회! (샤우팅)

메탈 어머니 메탈 아버지

어느덧 가을입니다

오 오오 오오

노래를 만들 땐 가을이었습니다

썩씨딩유 마더

가내 두루 평안하시옵고

메탈 어머니 메탈 아버지

가화만사성 하옵소서

오 오오오 오 메탈 어머니 메탈 아버지

할머니 가족의 족보 가족의 선율

오~ 오 메탈 병아리 모히칸 병아리

오 오오 오오

우리가족은 메탈의 흔적

나이든게 벼슬이라면 (싫어! 싫어!)

...

머리카락 뽑으면 만날 수 있지

오~ 오 닭벼슬 I Seoul U (Yes! Yes!) I Seoul U~~ (yes yes)

https://soundcloud.com/chu-seung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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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컴퓨터에서 어떤 파일을 불러올 때 컴퓨

작업과 상호참조하는 글의 관계는 컴퓨터에서 원

터는 썸(thumb)파일을 만든다. 이미지, 영상 파일 등의 '

본 파일과 썸 파일의 관계와 유사하다. 여기서 글은 원본

미리보기'인 썸네일 파일은 원본 파일의 데이터 잔상을 생

작업을 가리키는 일종의 잔상, 참조(reference)가 되고

성한다. 원본 파일의 캐쉬값(value)인 썸 파일은 원본 파

있다. 퍼포먼스, 글, 모니터들이 보여주는 비디오들은 어떤

일을 저장 할 때 필요한 메모리 용량을 차지하지 않기 때

것이 원본인지 아니면 원본의 잔상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문에 효율적인 메모리 관리에 사용된다. 썸 파일은 삭제해

왜냐하면 참조란 그것이 생성될 때 원본에 영향을 미치지

도 아무런 오류를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컴퓨터가 구동되

않으면서도 원본이 전용하는 주소지를 통해 원본을 경유

는 동안 은밀하게 다시 생성되어 원본 파일의 잔상 정보를

하기 때문이다.

구축한다. 이렇게 생성된 썸 파일은 원본 파일을 대변하면 서 지시하고, 썸 파일이 삭제될 경우 프로그램은 끊임없이

이 라이브 공연에서 퍼포머들은 쇼, 퍼포먼스와

(새로 생성되는 썸 파일에)새로운 주소를 할당해준다.

기획, 플레이타임과 롤플레잉 같은 요소들로 층위를 구축 한다. 이들은 위에서 말한 수많은 썸 파일들과 그것들의 경

추승민과 곽지원이 결성한 얼터너티브 록 그룹

[인생개고통파티]는 전시장에서 자신들의 신곡 [할머니 총잡이]와 [메탈 어머니회]를 연주한다. 그는 자신의 작업 에 대해 가상의 인물이 동시대미술사적 단어들로 남긴 어 떤 데이터와 상호참조를 시도하며 작업을 전시장에 어떻 게 배치할지(placing)를 궁리한다. 1. 참조는 원본의 존재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원본까지 도달하는 경로, 원본이 살고있는 주소지를 통해 원본을 경 유한다. 2. 원본의 안위에 손상이 일어난다 해도, 참조는 원본의 주소지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작동할 수 있다. 3. 원본이 원래 살던 주소지가 아닌 다른 주소지에 다시 등장할 때도 참조가 여전히 수명을 넘어 작동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허상참조 dangling reference라고 부르며, 프 로그래밍에서 잘못된 결과를 내거나, 메모리에 있는 다른 프로그램을 오염시키거나, 찾기 힘든 실행시간 오류를 야 기한다.

로, 원본들이 작동하는 관계들을 가시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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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윤 aijiar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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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은 우연히 찍은 마음에 드는 이미지, 확대와

분리를 거쳐 깨진 이미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공포의 대상이 되며 가짜 뉴스로 다양한 변주를 하며 재생 산된다. 미신은 종교와 다르게 시대 상황에 따라 변하고 더 실생활에 붙어있다. 아주 사소한 것들이 엘리베이터 4층

추상화에 가까운 그림들은 깨진 이미지와 연결되

번호판을 없애고 꿈을 팔며 생선을 뒤집지 못하게 한다. 이

며 회화에서 사진으로, 사진에서 회화로 넘나든다. 회화드

런 미신적인 요소는 디지털 내부에서 아주 만연하다. 유투

로잉들은 기억되고 있는 존재 위치가 생성될 때마다 고정

브 타로점은 장소를 바꾸어 더 활발히 소셜 활동이 가능해

된 지표와 유동하는 요소들의 맵이 형성된다.

지는 등 화면 너머의 미래를 점 쳐준다. 이미지가 되어 온 라인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납작해지고 영원해진다.

손으로 그린 그림과 디지털로 그린 이미지는 매질

유령이 되는 조건은 무엇일까?

의 차이가 있지만 (두꺼움과 얇음) 개인적으로 묘사에 있 어서는 분리하여 구분하지 않는다. 출력되기 이전의 가벼 움은 있어도 디지털로 그린 이미지는 디지털로 그린 이미 지일 뿐이다.

<디지털 유령되는 법>

프리소스로 얼굴 올리기

게임에서 플레이하는 사람은 주인공의 탈을 쓰고

빙의된다. 유령의 시점으로, 보고 있다는 시선 정중앙의 점

계정을 만들고 오랫동안 들어가지 않고 아무것도 포스팅하

과 총을 든 사람의 손. 가는 장소의 방향과 주인공의 플레

지 않아서 유령계정 되기

이 없이는 절대 흐르지 않는 시간. 원하는 시간대를 다시

시크릿 탭으로 검색하기 (검색기록 삭제하기)

불러오고, 거의 신이 된다.

1인칭 게임으로 죽고, 부활하기 구글 맵으로 여행하기

풍경 그림들은 유령의 시점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게임플레이의 비유와 다르게 유령상태는 무력하다는 점에 서 다르다. 이는 그림이 기억에 기반하여 만들어지고, 기억

<구글 맵>

은 종종 의지에 반하여 재구성되곤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 게 유령상태의 시점에서 보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회화를

게임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의 문법으로 재구성하

수 있는 여행이다, 다만 여행 중 누구와도 대화하거나 소통

구글 맵 여행은 1인칭의 시점으로 전 세계를 다닐

고 사용할 수도 있다. 거의 구분 불가능할 정도로 익숙해져

할 수 없으며 여행 중 마주치는 인물들은 고정된 풍경의 일

있는게 지금이다.

부라 ‘바깥’에서 만날 수 없다. 밤이 없으며 항상 좋은 날씨를 유지할 것이다. 가끔씩 풍경이 일그러진 것을 볼 수

저번 작업에서 불태워 버릴 미련과 유령의 상태를

있지만 여행의 큰 지장을 주는 것은 아니다. 빨간 마크를

말했다면 이제 서술어를 말할 시간이다. 하지만 서술어를

눌러 이동하라. 길이 없는 곳은 여행할 수 없다. 같은 사람

넣고 싶지 않다. 미련과 애도의 목적을 가진 그림에서 판타

을 여러 번 볼 수도 있다. 당황하지 말고 지나치시길. 자신

지 지도의 그림처럼 현실에 밀접할 수도 있지만 유령같은

의 그림자는 항시 제공되지 않음. 여기서 그림자는 시간의

곳을 그리게 된다. 떠다니는 기표들은 디지털 세계에서 뽑

흐름을 뜻하지 않으니 사물의 일부로 보시면 됩니다.

아온 것들일지라도 완전한 현실적 기능이 아닌 정처 없이 떠도는 유령 데이터들을 가르킨다.

<디지털 미신 정의 내리기>

이제 미신은 말로 전해지는 것보다 괴담이란 말

로 디지털로 퍼진다. 다른 문화권의 귀신이 유투브를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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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우인 4903ghd@gmail.com

로텍트 렌즈 고양이, single channel video, 03' 3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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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치라이트, single channel video, 05' 4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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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레옥잠 사과, single channel video, 02' 3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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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모, single channel video, 06' 0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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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피를 씻는다〉는 익숙하고 상징적인 관용구를 뒤집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물이 피를 씻는 물리적

인과를 통해 잠시 뒤집어지는 물과 피의 관계에 주목하고, 오래된 상징을 다시 생각해볼 가능성을 불러본다. 그러나 물은 정말 피를 씻을 수 있을까? 불가능해 보이는 전제를 마주한 후,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관용구를 짚 고 다시 물은 피를 씻는다는 말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물과 피가 굳어있는 게 아니라 움직이는 유체라는 것을 안다. 언어를 벗겨냈을 때 둘의 관계는 가까워진다. 피의 반은 물이고, 물과 피는 임시적인 섞고 섞임의 관계 속에 있다. 관 계가 재정립될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써 둘은 서로 전복시킬 대상이 아닌 역학 관계에 놓인다.

우리는 이런 순간들 속에 있다.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흐름을 만나 묶이거나 흩어진다. 그 안에

서 들여다보기도 멀리 떨어져 밖을 보기도 한다. 서로 다른 위치에서 하나의 풍경을 볼 때, 시차(parallax)가 생긴다. 시차가 알려주는 것은 고정된 좌표가 아닌, 겹치는 상들로 깊이를 파악하는 흔들림이다. 그 사이의 거리를 통해, 섣 부른 결말을 내리기 대신 계속해서 관측을 시도하며 바늘의 떨림에 집중한다. 우리는 제목의 동력을 딛고 움직임을 경험하는 순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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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으로, 죽는다고 누군가 말했다. 그래서 무척 괴로운 거라, 누군가 말해주었으면 좋겠네.” 제20회 조형예술과 졸업전시에 부치는 글

안소연 미술비평가

1.

지는 해와 반쪽짜리 달과 혼자 떠 있는 별을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것이 가진 차가움 때문입니다. 등을 잔뜩 구

부려 그 차가움 때문에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서 있어도, 온몸을 긴장시키는 차가움을 나는 쉽게 떠날 수가 없습 니다. 내 눈의 깜박거림이 나를 의식할 정도로,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는 형태들은 그 차가운 긴장과 마주하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차가운 어둠 속에서는 세계가 투명하게 열린 것처럼 내 동공 안으 로 밀려들어와 미지의 존재들에 대해 환대하기를 주저하지 않게 됩니다. 한낮의 눈부심은 서서히 노안이 시작된 내 시력 을 스스로 탓하게 하여, 그 뜨거움이 나는 이제 불편합니다. 온 세상의 빛을 집어삼켜 거대해진 빛 덩어리들은 너무 밝고 뜨거워서 더 이상 나를 홀로 고립시켜 두지 못합니다.

2.

광장은 여전히 거대한 소리들로 채워져 있고 서로를 향한 혐오의 시선들이 종말을 불러올 것처럼 타락한 세상

의 속살을 드러내는데 한창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 사이, 서울에서는 청계천과 을지로 일대가 다시 기억상실의 채찍 을 맞으며 빠르게 붕괴되고 있습니다. 어디든 그렇습니다. 얼마 안 가서 광장은 스펙터클한 도시의 기념비가 될 것이고 삶의 터전은 또 다시 낡은 유토피아의 환상 속에 영영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발 붙일 곳 없던 미술은 스스로의 영토를 만 들어내려 단단한 지반에 둘러싸인 무명의 공유지를 찾아 나서느라 기꺼이 “우리”가 되기를 서슴지 않았는데, 아직 그 젊음이 다하지 않았어도 “우리”의 성취는 “개인”의 몫으로 호명되며 배분됐고 그러한 성취의 끝자락은 다시 예술이 사회의 도구로 나아가게 되는 당위를 안겨주었습니다. 예술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국가 정책의 지원과 검열 속에서 얕 은 터전을 만들어 온 우리의 미술 현장은, 기념비가 되어가는 광장이나 사라져가는 청계천과 을지로 일대에서 거대한 빛 에 사로잡혀 제 초라함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제 어디로 흘러 들어가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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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는 비평가입니다. 그리고 올해는 안식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일체의 글쓰기를 중단하고 안식하겠노라 마음

먹었지만, 차마 끊어내지 못한 몇 편의 글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이 글도, 그러네요.) 어쨌거나, 글쓰기를 중단하고 안 식의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한 데에는 내게 몇 개의 크고 작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가장 큰 일은 광장과 터전의 문제였고, 그 다음은 계속해서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내 자리의 문제였습니다. 광장을 되찾았다고 생각한 순간 그곳은 이미 전리 품인 것처럼 상징화 되었지만, 광장 밑에는 여전히 이 사회 속에서 아무 자리 없는 이들이 삶의 비릿한 냄새들에 섞여 광 장과 무관한 밤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광장을 기념하는 예술의 실천들이 국가의 지원과 검열을 동시에 받으며 광장 곳곳을 한낮의 뜨거운 빛처럼 밝게 비춰내고 있었으나, 광장 아래, 그곳을 배회하는 이들에게는 삶의 저편에서 들 려오는 지독한 소음처럼 느껴질지 모릅니다. 나는 그러한 지원과 검열을 매개할 수 있는 “전문가”라는 명분으로 곧잘 광장에 불려갑니다. 그런데 언젠부턴가 나는 예술이 광장에 나가기 위해서는 그 자리가 누구의 것인가/것이었는가/것이 어야 하는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술은 지원과 검열의 프레임에 귀속될 것이 아니라, 지원과 검열의 프레 임이 갖는 한계를 포괄하여 초월할 수 있는 그만한 가치의 것이라 생각해 왔던 나는 현실의 사건들 앞에서 나를 다시 살 피기 시작했습니다. “시민청 지하에는 공허한 정책 홍보물처럼 예술이 빈곤하게 진열돼 있었고, 아침부터 모여든 노숙 자들에게 그것은 다소 피곤하고 호들갑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상대를 생각하지 않는 수다스러움이라 해야 할까? 허공 을 바라보며 목적 없는 하루의 아침을 맞고 있는 그들과 아름다운 것을 공유할 방법이 이토록 없는 걸까? 정책은 늘 그렇 다 치고 예술은 그러면 안되는 거라, 난 생각하는데…”(2019.2.21.@__dialogue) 그 무렵, 광장 저편은 스펙터클한 가 림막에 둘러싸여 끝없이 허물어지고 있었지요. 우리의 터전은 안타깝게도 오래전부터 기억상실에 볼모 잡혀 있습니다. 내가 생각해 온 예술적 삶이란, 현실의 속도와 가치를 우회하여 지극히 사소한 것으로부터 가장 아름답고 원대한 것을 사유할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의 실체입니다. 하지만 최근에 내가 목격해 온 예술의 현장은 현실의 속도 안에 매몰돼 스스 로 우회하는 힘을 상실한 것처럼 보입니다. 타인 없는 삶, 어둠과 차가움 속에서 만나는 타인을 인식하지 못하는 삶, 그것 은 예술이 사라진 한낮의 뜨거운 광장일 뿐이겠지요. “오래된 것과 한 사람의 삶에 대한 성찰 없이 성공과 실패라는 욕 망에 잔뜩 붙들려 사는 사람들이 타인의 삶에서 반짝이는 아름다운 것을 찾는 건 어렵겠지. 타인 없는 삶, 험난한 지옥을 살아가는 중이라, 그 지옥이 광장인들 아름답겠는가.”(2019.1.25.@안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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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을 읽지 않는 가난한 시절입니다. 글을 쓸 수 없는 가난한 시절이기도 하지요. 두 세 쪽 비평문을 쓰려면 나는

몇 달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는 동안, 나는 강의도 하고 심사도 하고 전시도 보고 다른 글 요청도 받고 누군가를 만 나고 밥도 먹고 청소도 하고 잠도 잡니다. 하지만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에스키스를 가지고 작업을 시작하기까지 필요한 시간처럼, 글이라는 것은 문자로 나오기까지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 있습니다. 그만큼의 글을 만들어내기까지, 나 는 굉장히 많은 것, 이를테면 나의 시간과 공간과 지식과 정신과 몸의 노동과 커피값을 감수해야 합니다. 하지만, 미술현 장에서는 내가 하는 일의 가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전업 비평가로서의 삶을 존중받기 위해서, 나는 원고료에 대해서는 국가의 지원 및 검열 뿐 아니라 미술 현장의 오랜 관행과도 수없이 맞서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나 는 더 큰 강, 더 큰 바다를 향해 갈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그 흐름과 속도를 스스로 멈출 안식을 선택했습니 다. 내 스스로 물처럼 투명하고 유연한 액체가 되지 않으면 내 나이듦을 탓하며 한낮의 광장 안에서 떠날 줄 모르고 서서 히 타 들어가겠지요. 그런데 나는 한 해가 다 가는 지금도, 이 안식의 자리를 자꾸 벗어나려고 하는 나의 불안과 늘 반목 하고 있습니다. 이 괴로운 일을, 나는 예술이 가진 스스로의 품위라 생각하고 기꺼이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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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당신이 아닌 이들께

안소현

당신은 당신이 아닌 사람들도 읽을 수 있도록 제게 최근 학교 밖에서 감지한 것들을 편지보다는 글로 써달라했

지만, 저는 망설임 끝에 결국 당신께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학교 밖 정글에 대한 묘사는 비관과 냉소로 가득 할 수 밖에 없고 당부의 말에서 자기계발서의 비린내를 제거하기란 쉽지 않기에, 차라리 편지라는 사적인 형식을 통해 이 조마조마하고 복잡한 마음이라도 솔직하게 드러내는 편이 낫겠다 싶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는 당신의 당부를 잊지 않고 당신이 아닌 사람들도 떠올리며 이 편지를 쓰겠습니다. 사실, 당신을 생각할 때마다 이상하게도 늘 당신이 아닌 이 들이 떠올랐습니다. 당신이 되지 못한 사람들, 당신이 질투하고, 두려워 하고, 불편해 하는 사람들, 당신이 동경하고 가까 이 가려 하는 사람들, 당신이 잊고, 못본 척하고,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 말입니다.

저는 전시를 만들고 글을 쓰고 대안공간 혹은 비영리 공간이라고 불리는 곳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각종

미술제도와 관계된 일을 합니다. 그 모든 활동이 엄격하게 중립적이라거나 관계와 이익과 두려움을 완전히 배제한다고 우길만큼 거짓말쟁이는 아닙니다. 하지만 ‘대안’이 이름뿐이라 해도(심지어 지금은 그 이름조차 잘 안쓰지만), 불리 는 이름의 힘은 무시 못할 것인지 늘 미술계 안에서 빈 곳, 어그러진 곳을 보고 있는 편입니다.

당신은 오늘도, 내일도 포트폴리오를 다듬고, 5분 안에 당신의 작업을 소개할 말들을 고릅니다. 당신이 살아온

그 복잡한 세계를 가능한 온전하게 5분 안에 담으려 하니 단어들이 자꾸 커질 수 밖에 없는데, 그럴수록 상대는 점점 더 지루해 하는 악순환에 빠집니다. 저라고 그런 상황을 마주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제 아무리 관료제의 꼭대기에 앉아 있어도 아무도 누군가에게 평가를 받는 일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간혹 전시를 열어놓고는 모든 평가를 거부하는 작가를 만나게 되는데, 솔직히 그럴 때마다 그가 올라탄 백마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싶습니다. 다만 미술계에서는 평가의 시간이 점점 짧아지는 현상이 너무 심각해서 어떻게 하면 저 시스템을 어그러뜨릴까 늘 고민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평가 자체가 아니라, 모든 평가가 입시제도가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작업하고 전시할 작은 공간이

필요할 때도, 누군가 내 작업에 대해 쓴 글을 읽고 싶을 때도, 내 작업을 보여주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필요할 때도, 모 든 것은 ‘붙고 떨어지는’ 문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그 입시가 내면화되다 보니 좋은 작업을 보면 나도 모르게 ‘저들이 붙어서 내가 떨어졌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비평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뒷말들 이 채우고 있습니다. 작품을 보며 토론하는 사람들은 없어졌고, 면전에는 공허한 찬사들만 남고, 소셜미디어에는 아는 사 람만 알아볼 힌트와 함께 근거 없는 원색적 비난이 올라오면 다들 ‘그거 봤어?’라고 수군대는 장면은 이제 일상이 되 었습니다. 모두들 이 무한입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서로의 머리를 밟고 올라설 ‘전략’들을 짜고 있는데, 그것을 아무도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나이가 많건 적건 원하는 누구나 창작하고 보여주도록 지원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달라고 요

구하는 것이 아니라, 저 작가는 지원을 이미 많이 받았으니 이제 지원을 끊어도 된다고 했습니다. 미술 시장이 너무 멀게 느껴진 젊은 작가들이 스스로 흥겨운 작은 시장을 만들었을 때 함께 즐기는 것 아니라, 그 작은 시장에조차 들어가지 못 한 자신은 실패한 거냐고 되묻고 있었습니다. 전시할 곳을 찾아헤매던 작가들이 삼삼오오 모여 공간을 열었는데, 자기들 끼리 패거리를 만들었다고 비난했습니다. 비엔날레에 정말 괜찮은 작업이 전시되고 있나 묻지 않고, 비엔날레에 전시된 작업은 당연히 좋은 작업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겐 왜 동시대미술을 전문으로 하는 국립미 술관이 한 개 밖에 없는지 묻지 않고, 그 한 개의 미술관 안에 서로 나를 들여보내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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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숨고를 시간이 주어지면 저는 자꾸만 거대한 음모론을 생각하게 됩니다. 누가 이 싸움을 붙인 것일까?

우리 중 누가 이 싸움에서 정말 이길 수 있을까? 제가 예술계를 기웃거리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예술가들이 세상에서 가 장 예민한 사람들, 권위를 가장 우습게 아는 사람들, 공감과 위로를 일삼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오지랖이 넓은 사람 들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조리한 세상은 예술가들 앞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 가 예술가가 될 재주는 없지만 저들 가까이에서 살아야겠다 싶어 큐레이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 주변의 예술가 들은 서로 경쟁하느라 정신이 없고, 저도 덩달아 그 안에서 허둥대며 예술가들을 선별하며 먹고 살고, 그러는 와중에 세 상은 잘도 돌아갑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사람과 동물들이 길거리로 뛰쳐나오고 점점 더 높은 곳으로 기어 올라가고, 떨어지고, 뛰어내리고, 그러다 잊혀지면 세상은 또 그렇게나 잘 돌아갑니다. 어쩌면 이 모든 장면을 뒤로 하고 예술가들 이 투견처럼 싸울 때, 힘들은 그 장면이야말로 평화롭다고 느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힘들은 당신의 시합 에 기꺼이 배팅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당신께 미술 제도를 벗어나라고 권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저도 제도의 일부가 된 지 오래고, 매일 밤 제

가 낮에 뱉은 제도에 어울리는 말들이 너무 별로라 뒤척거리곤 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아직 할 일이 많다는 생각을 합 니다. 만일 건강한 제도라는 것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제도의 바깥을 만들어줄 것이라 믿고 있기도 합니다. 요즘 제가 술 을 많이 마시면 언젠가 새로운 종류의 학교를 만들겠다는 헛소리를 떠들고 다닙니다. 예술가들에게 궤도를 벗어나는 법 을 가르치는 학교, 궤도를 벗어남으로써 예술가가 되게 하는 학교, 기본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의심하게 하는 학교. 취한 척하고 막 떠들었지만 실은 그러면서 누군가 그말에 솔깃해하는 사람이 없나 흘끗거리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언제까지나 함께 하는 공동체 같은 걸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들이 무한경쟁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잠시나마 공통의 목표를 설정하는 일이 중요하며, 또 그러다 흩어져도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유난히 정치적인 움직임이 없 다고 생각했던 한 학교에서 ‘다시 만난 세계’를 들었을 때, 그것이 어떤 의도로 시작된 운동인지 모르지 않았을 때, 그 리고 그런 뜨거움이 순식간에 사그라든 것을 알았을 때, 저는 정치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끈 끈하거나 영원하지 않은 움직임도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울타리가 없어졌을 때 당신이 가장 떨리는 손을 잡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 가장 떨리는 손이 당

신의 손이어도 좋겠습니다. 당신이 이 제도가 만만치 않다고 느껴질 때 그 제도의 한 귀퉁이를 허물어 빈 곳을 만들 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옆에는 오지랖 넓은 동료들이 있을 것이고, 저도 부끄러움이 남아있는 한 거기에 있겠습니다. 더 비려지기 전에 줄입니다.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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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둘러싼 불안

유운성 영화평론가. 영상전문 비평지 《오큘로》 공동발행인.

“선수(選手)끼리니까 굳이 더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겠죠?”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지 일 년 남짓 되

었을 무렵에 들은 말이다. 나는 이 말을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던 가운데 누구에게 들었는지를 기억하지 못 한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은 솔직하지 못한 일인 것 같다. 나는 사실 그 모든 것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만 애써 떠올 리려 하지 않으면서 이 말이 나의 마음에 남긴 얼룩만을 간직하려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여하간 이 말을 듣는 순간 한없 이 부끄러워졌던 것만은 사실이다. 게다가 이 부끄러움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만 순간 대책 없이 불어나기 시 작했다.

어느덧 내가 당당히 그들의 일원이 되었음을 무심한 척 승인하고 있는 이 말에는 어딘지 모르게 어둡고 축축한

구석이 있었다. 거기에 자리한 것은 대략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특정한 영역의 제도나 관습을 숙지하고 있는 이가 휘장 처럼 두르고 있는 실은 별것도 아닌 우월감이나, 그러한 제도나 관습의 빈틈을 교묘하게 파고드는 법을 알고 있는 자들 끼리의 공모의식 같은 것 말이다. 나는 “선수끼리니까 굳이 더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겠죠?”라는 말을 듣는 순간, 대단 치는 않지만 그렇다고 사소하지도 않은 무언가를 믿고 맡기는 가운데 슬며시 이루어지는 시험 내지는 입교(入敎)의식에 강제로 불려 나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호출에 분명하게 거부 의사를 표하지 않은 것에 대해 두고두고 후회 하곤 했다.

요즘에도 ‘선수’라는 표현을 계속 쓰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표현이 사라진다 해서 그것이 가리키던 역장

(力場)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동안 교류해왔거나 잠시나마 발을 담글 일이 있었던 각종 예술계(영화 계・미술계・문학계・공연계 등등)의 ‘거주민’들 사이에서 이 표현이 다양하게 변형되고 변주되어 반복되는 것을 보 아 왔다. 부정적인 것의 부정성을 확인하기 위해 굳이 부정적인 것을 한자리에 불러모을 필요는 없으므로 구태여 여기서 그 변형과 변주의 사례들을 나열하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은 누구나 쉬이 짐작 가능한 것들이리라.

하지만 오해는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다. 나는 예술계를 좀먹는 노회(老獪)함이나 공모의식에 토대를 둔 공동

체(패거리)의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선수끼리니까 굳이 더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겠 죠?”라는 꺼림칙한 얼룩의 말을 이 자리에서 굳이 떠올려본 것은 이 말에 모종의 방법에 대한 확신이 담겨 있기 때문이 다. 그리고 방법에 대한 확신이야말로 예술과 관련된 모든 일(창작・비평・기획・운영・아카이빙)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태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동시대 예술이란 것을 정의하는 방식은 여럿일 수 있겠지만 내가 동시대 예술이란 것을 이해하는 방식은 다음

과 같다. 방법의 무근거성(groundlessness)에 대한 자각과 이러한 자각이 초래하는 불안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동시 대 예술 및 그와 결부된 활동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따금 미술이나 문학과 관련해서 쓰기도 하지만, 주로 영화 에 대한 글을 쓰는) 평론가로서의 나의 경험을 두고 말하자면, 나는 ‘빼어난 촬영’이란 어떤 것인지, ‘탁월한 연기 연 출’이란 어떤 것인지, ‘리드미컬한 편집’이란 어떤 것인지를 여전히 정확히 (실은 전혀) 알지 못한다. 물론 기술적으 로 어떻게 처리했을 경우에 ‘선수들 사이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지는 얼마간 알고 있다.

사실 동시대 비평의 문제는 가치판단과 관련된 어떤 유의미한 범주도 더 이상 지니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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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 미학은 당대적 비평의 근거를 탐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문헌학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이런 상황에서 비평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식은 방법에 대한 판단의 문제를 기술에 대한 평가로 대체하거나, 경향에 대한 진단으로 대체하 거나, 이런저런 동시대 이론과 작품 사이의 상동성에 대한 확인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방법은 거짓 근거들 위 에 다시 자리 잡게 되며 예술적 활동을 둘러싼 동시대적 불안은 슬며시 감추어진다. 이와 더불어, 불안한 가운데 내기를 거는 심정으로 작품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유랑하는 평론가 대신 작품들을 관망하는 연구자임을 자처하는 이들이 부상하 게 된다.

내가 보기에 오늘날의 미술계는 이러한 상태에 있는 비평과 가장 문제적인 방식으로 관계 맺고 있는 영역이다.

이를테면 창작자와 (유사)연구자의 ‘협업’은 흔한 일이고 더러 바람직한 사례도 있다고 보지만 ‘멘토링’이라는 이 름으로 이루어지는 이상한 관행에 대해서는 나는 여전히 의구심을 품고 있다. ‘전시연계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꾸 려지는 각종 (유사)학술행사가 이따금 전시 자체를 압도하곤 하는 현상도 신기하게 보인다. 동시대 예술인들의 임무가 서둘러 방법을 다시 세우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거짓 근거에 기대어 방법을 다시 세우려는 시도들에 맞서야 한다 는 것만은 분명하다. 미술은 그 어떤 영역보다도 빨리 현대예술에 있어서 방법의 무근거성을 자각하고 이로 인한 불안에 정직하게 맞서 왔다. 이는 현대 및 동시대의 미술이 극도로 비평적이고 담론적인 형식을 띠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지 만, 한편으로는 바로 그 때문에 미술은 여타의 영역들이 동시대적 무근거성을 끊임없이 자각하게끔 하는 강력한 지표도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미술계는 연구라는 이름으로 편리하게 이루어지는 비평의 외주화(outsourcing)를 통해 자신이 짊어져 온 짐을 덜어내는 일에만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결과 우리 눈에 비치는 것은 어느새 구분 할 수 없을 만큼 닮아버린 창작과 비평이, 어디선가 빌려 온 침대 위에서 서로를 ‘연구’하는 근친상간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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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그런 거 잘 모르겠고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만

유은순(미학)

한국의 신진미술인 지원제도1 는 지난 15여 년 동안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레지던시, 각종 전시지원프로

그램, 멘토링 프로그램 등 국공립 미술관과 문화재단, 사립미술관과 사립재단, 비영리공간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에 존 재하는 거의 모든 미술기관들이 신진미술인을 발굴하고 육성한다는 명목으로 지원제도를 설립했다. 서로가 서로를 참조 하기도 하고 독자성을 내세우기도 하며 펼쳐진 지원제도는 현대미술이 신진미술인에 주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 다.

하지만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역설적으로 신진미술인이 미술로 자생하기 어려운 시기임을 방증하였다. 지원제

도가 아니고서는 신진미술인이 작업을 지속할 방법이 거의 없게 된 것이다. 지원제도가 가시적인 결과물에 초점을 두고 있으므로 지원제도의 수혜가 곧 미술인의 자립성과 직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미술인은 ‘예술이라도’ 계속해나가기 위 해 지원을 하게 된다.

신진미술인이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선행 활동이 요청된다. 물론 작업이 좋아서 졸업 전시회에서

부터 미술관이나 갤러리로부터 전시를 제안받아 이후 무탈하게 경력을 쌓아나가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매우 드문 일이 고, 계속 작업을 해 나가면서 자기 자신을 꾸준히 증명해야만 지원 프로그램의 수혜를 받기가 수월하다. 지원서에 명시 적으로 개인전 0회 이상, 기획 0회 이상이라고 표기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명시적이지 않더라도 수많은 지원자들과 경쟁 하기 위해서는 주목할 만한 활동 혹은 포트폴리오에 기록될 만한 활동들이 요청된다. 지원을 받기 위해 때로는 해당 기 관의 성격들을 분석하고 그 기관의 취향에 맞는 문구를 작성하기도 한다. 프레젠테이션 역량은 이제 작가의 필수 요건이 다. 제도권의 지원을 받기 위해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야만 하는 역설적인 상황. 아직 제대로 된 시작을 하지 않았을 때도 지원 경험담은 새롭게 시작하는 이들에게 피로감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한편 신진미술인에서 중견미술인으로 내딛기 위한 발판으로 기능하는 지원제도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전시

와 신작 제작지원을 내세운 올해의 작가상, 일민미술관과 페리지 갤러리의 개인전 등이 있기는 하지만, 중견미술인으로 올라서는 순간 역설적으로 신진미술인에게 주어진 수많은 기회를 포기해야 한다는 역설이 발생한다. 지금의 침체 된 한

1)

청년세대 미술가 혹은 젊고 유망한 예술가를 지원하는 각종 제도에 사용되는 여러 용어 중 신진미술인이라는 용어를 채택한다. 이 용어는 중견미술인의 전 단계를 일컫는 대비적 용어이자 미술을 시작한다는 어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각종 지원제도의 저마다 다른 기준들로 인해 도대체 ‘미술을 시작하는 단계’의 예술가를 데뷔 몇 년차로 보아야 하는 건지 혹은 데뷔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모호하게 만듦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예컨대 서울시립미술관은 ‘신진미술인 지원 프로그램’에 대해 구체적인 자 격 없이 대한민국 국적의 순수미술 작가라면 모두 지원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기획자는 기획 1회 이상이라는 기준이 있기는 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레지던시 모집에 ‘젊고 유망한 작가’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만25세 이상의 작가로 규정하고 있으며, <젊은 모색>전에서는 신진 작가라고 지칭하면서 나이 제한은 두지 않고 국내 미술관에 미소장 작가를 중심으로 추천 받았다. 서울문화재단에서는 청년예술지원, 유망예술지원 등의 용어를 사용한다. 청년예술지원 중 한 프로그램인 최초예술지원 은 만39세 이하이거나 첫 개인전/기획전을 기준으로 10년 이내 미술인들이 신청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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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의 미술시장은 현대미술작가가 자생적으로 ‘미술’을 팔아 ‘생계’를 유지할 수 없도록 만들고 지원금과 프로그램 에 의존하게 만든다. 이 때문에 중진 미술인의 타이틀은 계속해서 지연되고, 신진미술인은 대학을 갓 졸업한 미술인부터 굵직하게 활동하고 있는 미술인까지 포괄하는 열린 개념이 된다. 이는 곧 많은 커리어를 가지고 있는 미술인과 이제 막 시작하는 미술인이 함께 경쟁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전시 지원 프로그램이나 레지던시에 척척 붙으면서 각종 프로그 램의 수혜를 받는 이들을 향해 부러움의 눈빛을 보내기도, 때로는 지원프로그램을 ‘휩쓴다’는 비판을 하기도 하지만 이들 역시 매 순간 자신들을 증명해야 하는 문제로 불안해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지원제도와 미술시장이 반영하지 못하는 현실적인 문제들 앞에서 지속 가능한 예술을 위한 두 가지 실험이 있

었다. 한 축은 예술이라는 이름에 가려졌던 노동을 복권하려는 움직임이었고, 다른 한 축은 자본이나 지원, 노동에 얽매 이지 않는 자족적 움직임이었다.

청년 세대의 고용불안정, 저임금 문제와 맞물려 20-30대의 젊은 예술가들의 생업에 관한 문제가 2010년대 초

반부터 대두되기 시작하였고 예술계에 만연한 무임노동에 관한 문제가 2014년 초 공장미술제로부터 ‘촉발’되었다. 이로부터 당시에 만연했던 여러 문제들이 공론의 장에서 펼쳐졌다. 이후 예술인 복지재단의 출범, 표준계약서 제안, 아티 스트피 기준마련 등 여러 대책들이 마련되고 있지만 여전히 답보상태이다. 다만 미술인들 사이에서는 적은 금액이나마 작품제작지원비와 아티스트피를 책정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소모하지 않는 방식을 도모하고 있다.

2015년 정점을 찍은 신생공간은 대안공간의 대안으로서 제도의 가장자리에서 자족적 활동을 펼친 실험적 움직

임이었다. 대표보다 운영자라는 호칭을 사용하면서 공간의 성격을 정의 내리지 않고 무언가 재미있어 보이는 것이라면 모두 수용하는 방식으로 단발적인 활동이 주를 이루었다. 대표적으로 교역소가 그런 공간이었다. ‘우리끼리’ 재미있 는 걸 하자라는 명목으로 재미있는 걸 할 만한 참여자들을 모으고, 참여자들의 자발적인 재능기부와 아이디어로 이벤트 를 만들었다. 애초에 지원받은 예산이 없었던 만큼, 참여 사례비나 작품제작지원비는 없었지만 청년 작가들 간의 새로운 네트워크 형성을 통한 연대감과 참여 그 자체의 즐거움이 이를 보상해 주었다.

2015년 <굿-즈>는 “자신의 작업/'굿-즈', 소량제작된 에디션, 작업의 파생물 등을 직접 판매하는 행사”로

서 신생공간 운영자와 작가들이 모여 예술을 통한 수익창출을 시험한 제 3의 움직임이었다. 36명의 운영진들과 80여명 의 작가/팀들이 만들어낸 행사는 6000여명이 넘는 방문객, 참여작가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구매층 유입, “판매를 통해 작가와 작품을 소개”2하는 새로운 형식의 도입이라는 점에서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굿-즈>는 예술경영지원센터의 기금에 의해서 실행 가능하였고, 운영진들과 작가들의 봉사에 가까운 노동과 헌신은 2회 개최를 꿈꾸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일부 에디션의 경우 지나치게 소액으로 책정되어 지속적인 수익창출 모델로는 부적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굿-즈>에서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부분들은 이후 운영자 혹은 참여작가들에 의해 기획된 행사 혹은 공간(취미가, 소쇼룸, 스크랩, 퍼-폼, 팩 등)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굿-즈> 이후의 실험은 여전히 진행 중 이다.

아주 조금씩 개선의 여지들이 제도권 안팎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청년 세대의 예술활동은 지원제도

에 얽매여 있다. 내가 미술계라는 곳에 발을 들인지 약 5년 정도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작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처음 졸준위로부터 원고를 의뢰받았을 때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이라는 의례적인 표현에 유난 히 눈길이 갔던 이유이기도 하다. 흐물거리는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나는 나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일에 계속 시달릴 것 이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언제까지 젊고, 유망하고, 패기있는 신진미술인일까. 이러다 떠밀리듯 기성세대가 되어 있지 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든다. 내가 혼자 기획했던 <틱-톡>(2019, 온수공간)展의 도록에 실린 전시 리뷰에서 양효실 비평가는 전시 자체에 어떤 평가를 내리기보다 그 다음 전시에 의해 이 전시가, 그리고 기획자 유은순이 누구인지를 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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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내게 될 것이라고 언급한다(양효실,‘신체, 질병, 타자, 고백, 우회, 암시, 알레고리, 죽음 ......’, <틱-톡> 전시도록, 52쪽). 전시도, 나도 결국엔 지금 현재보다는 미래에 의해 지금이 해석될 것이고 그렇게 나의 자리는 지연되면서 자리를 잡아갈 것이다. 많은 불안함과 약간의 낙관을 가지고서. 그러니까 지금은 그저 할 수 있는 일들을 차근히 해 나갈 뿐이다.

2)‘피아-방과후 ‘대화: 굿-즈 2주기’, 2018 (https://pia-after.com/?p=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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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이라는 시간

윤원화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최근 몇 년’이란 구체적으로 몇 년일까. 경험적으로 그것은 4년 정도 된다. 2014년만

되어도 분위기가 심드렁해지기 시작하고, 2009년까지 거슬러 올라 가려면 재미없는 옛날 이야기를 해서 죄송하다고 미 리 양해를 구해야 한다. 그런 와중에 2009년이 벌써 10년 전이라니 믿을 수 없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고, 다른 한편으 로 ‘최근 몇 년’ 동안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지겨웠다는 말도 여러 번 들었다. 그리고 올해는 2010년대의 마지 막 해다. 2010년대라고 하면 막연히 새롭다는 이미지가 있었지만 그것도 거의 다 지나간 시간이다. 작년에 나는 이 시간 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하고 여러 사람에게 질문했는데, 대부분 왜 지난 시간에 연연하냐는 반응이었다. 그런데 올 해는 어째서인지 똑같은 질문이 나에게 여러 차례 들어왔고, 그때마다 답을 하려고 애썼지만 번번이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들과 마주쳤다.

최근의 시간이 이상한 수수께끼가 된 것이 그렇게 최근의 일은 아니다. 나는 2014년에 몇몇 작가들을 인터뷰하

면서 2-3년 전의 전시에 관해 질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지독한 숙취에 시달리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과 굳이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것 사이에서, 입이 벌어지고 소리 없이 뻐끔거리다가 다시 다물 어졌다. 입이 별도의 생물인 것처럼, 마치 자신과 맞지 않는 염도의 물에 던져진 물고기나 조개처럼 미약하지만 히스테 릭 하게 움직이다 멈추는 것을, 나는 이후에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서 몇 번이나 더 보게 된다. 그 경련 같은 움직임은 내 가 이 시간에 관해 무언가 써야겠다고 생각한 직접적인 동기 중 하나였다.

하지만 2010년대는, 의외로 2000년대나 그 이전의 시간이 무엇이었는가를 반추하기에 좋은 거울이지만, 그

자체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 흐릿함을 불쾌하게 여긴다. 그것이 너무 불쾌하기 때문에 오래 쳐다보거 나 깊이 생각하고 싶지는 않은 것 같다. 그 흐릿함 속에 무엇인가 기만적이고 뻔한 것이 숨어서 연막을 치고 있을 뿐이라 는 견해도 있다. 그런 생각은 흐릿함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는 구실이 된다. 그렇지만 이 흐릿함은 우리가 지금 시간을 보지 않으려고 너무나 맹렬하게 고개를 저은 결과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본능적으로 대면하지 않으 려고 하는 그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그토록 참을 수 없는 불쾌를, 문자 그대로의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꼭 최근 몇 년이 아니더라도, 직업적으로 말을 다루는 일을 하다 보면 종종 말할 수 없는 것의 벽에 부딪히게 된

다. 이때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전부 동일한 속성을 공유하지는 않는다. 단순히 내가 충분한 정보를 수집하지 못했거나 적 합한 말을 찾지 못했을 수도 있고, 말은 만들 수 있지만 관련자들이 공개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제약이 없는데도 어떤 보이지 않는 벽이 말을 가로막을 때가 있다. 그것은 말을 관리하는 외부적 규범의 작용일 수도 있겠지만, 그 이전에 아주 뚜렷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의 형태로 다가온다. 이 또한 말이 되지 못할 것이고, 소화되지 못한 채로 삼킬 수밖에 없다는, 가슴을 누르는 예감 같은 것. 예전에 나는 농담 삼아 이것을 한국식 한의 원천이라고 말하면서, 마음 한 구석에 작은 사당처럼 존재할 수 없는 책들의 도서관을 만들고 말이 되지 못한 것들에게 공양을 드리곤 했다. 10 년쯤 전에, 내가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지는 않겠다고 생각했을 때의 일이다.

도서관이 바다처럼 다가왔다가 어느 순간 늪처럼 느껴졌을 때, 전시를 보러 다니는 것은 도서관 바깥으로 나가

는 하나의 탈출구가 되었다. 하지만 그 궤적은 결국 책을 쓰는 일로 귀결되었고, 그와 함께 내가 물려받기를 회피했던 모 든 유산과 부채가 고스란히 되돌아왔다. 지난 시간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애초에 왜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미래가 과거에 한 점 빚지지 않고 어딘가 멀리 바깥에서 도래한다고 믿는다면, 지난 시간은 돌아볼 필요가 없다. 또는 거꾸로 과 거에 너무 큰 빚을 져서 도저히 청산할 방법이 없다고 느낀다면, 지난 시간은 그냥 묻어두는 편이 낫다. 실제로 그것이 내가 어렸을 때 어른들의 태도였다. 과거에는 무가치한 것, 숨겨야 할 것, 어딘가 수치스러운 것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로 부터 얼마나 멀리 나아갔는가에 따라 살아온 시간의 가치를 측정할 수 있다는 듯이. 이러한 태도는 그 자체로 여러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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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 이어진 하나의 전통이기도 했다.

나는 그 전통이 무너지면서 행방불명 되었던 지난 시간이 귀환하고 복원되고 만연해져서 급기야 진부해졌다가

다시 잊히고 다시 재발견되기를 반복하는 시간 속에서 어른이 되었다. 지난 시간과의 관계 속에서 지금 시간을 바라보는 관점은 그 사이에 급격히 다변화되었다. 기본적으로 현재를 긍정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이해하고 기념 하기 위해 지난 150여 년의 시간을 돌아보려는 접근이 있다. 반대로 현재를 종말 이후의 재난 상황으로 인식하면서, 이 미 벌어진 파국을 해명하기 위해 지난 50여 년의 시간을 재검토하려는 접근도 있다. 또는 현재에 대한 판단을 열어 두고, 같은 시간 동안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고 그것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탐문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때로 는 좀 더 긴 시간이 검토의 대상이 된다. 이른바 신대륙 발견 이후 500년의 역사, 또는 농업혁명 이후 1만년의 역사. 하 지만 어떤 사람들은 현재의 연장선에서 과거는 끝없이 지지부진하고 실망스러우며 애초에 우리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일 찌감치 포기하고 미래를 선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은 갈취당한 미래의 이름으로 현재가 채무를 이행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처럼 입장과 노선들이 분화하면서 행동이 재현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지만, 그 행동 은 대체로 재현의 지평에서 수행된다.

누군가는 이렇게 너무 많은 말들과 너무 많은 정보들이 우리를 불안하고 무력하게 만든다고 말하고, 또 누군가

는 그렇기 때문에 인공지능에 기반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데이터 처리 환경을 구축할 수밖에 없다고 진단한다. 나는 언어 처리의 자동화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고, 실제로 어느 정도는 그에 기반한 새로운 환경 속에서 말을 다룬다. 하지 만 언젠가 나의 상상을 뛰어넘는 어떤 현명한 존재가 나타나 나를 대신해서 내가 말할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을 대신 말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지적인 존재는 상징 처리를 기계화하는 관료제의 오랜 전통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의 항목을 오류로 인식하여 삭제하고, 그런 오류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조치할 것이다. 사람들은 간 혹 그에 관해 기억나지 않는 꿈을 꾸고, 잠과 각성 사이의 짧은 시간 동안 스스로 잘 알지 못하는 이유로 슬퍼할 것이다. 이것은 먼 미래이기도 하지만, 오래된 현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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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경윤

잘 알려졌다시피 최근 대학의 강사법이 바뀌면서, 현재 출강하는 학교들이 요구하는 각기 다른 양식의 자기소

개서를 작성하느라 지난여름을 정신없이 보냈고, 또 계약서를 썼다. 그 밖에 기관이나 기업 등 외부 프로젝트를 할 때도 비슷한 포맷과 절차를 요구 받는다. 자기소개서는 물론, 견적서, 계약서, 지원서, 결과보고서 등등. 미술 분야에서 언제부 터 이런 포멀한 문서가 일반화되었을까. 내가 미술계 현장에서 일하는 동안 느껴 온 작지만 큰 변화는 바로 이러한 ‘포 멀(formal)함’인 것 같다. 미술계에 종사하는 직종도 다양해지고 각각의 역할이 전문적으로 분화되었다. 미술기관도 미술관, 화랑, 대안공간, 레지던시, 신생공간 등으로 각자의 경계를 분명히 하게 됐다. 이와 함께 작가들의 활동 영역, 나 아가 세대의 구분도 명확해졌다.

‘포멀함’에 대해 다시 풀어 말하자면, 미술계가 체계를 잡아 가는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예술에서 공공의 기

제가 작동하게 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물론 비단 미술계에만 국한된 것이라기보다는, 한국사회 전반적인 현상이다. 그 러나 미술 분야는 이러한 공적인 것에 취약했던 과거를 갖고 있다. 특히 이러한 변화가 미술계에서 최근 더욱 도드라지 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공적 자금에 의존하는 비율이 미술시장의 불황 이후 급격히 커졌기 때문일 것이다. 한 해 동안 열리는 주요 전시나 미술 관련 이벤트 중에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금의 혜택을 받지 않는 경우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작 가나 큐레이터처럼 개인적 차원은 물론이고, 비영리 미술기관이나 잡지사도 운영 및 프로그램에 있어 부분적으로 지원 을 받는다. 심지어 화랑마저도 아트페어의 조직이나 참가하는 데 지원금을 받거나, 미술은행을 통한 작품 구매도 이루어 진다. 이러한 공적 자금을 지원하는 대상을 선정할 때에는 무엇보다 ‘공정함’이 중요한데, 사실 예술의 속성이 본디 공정한 것이던가.

공적 자금에 기댈수록 현장은 더 많은 요청을 하게 된다. 온오프라인의 발언대를 통해, 각종 단체의 토론회 등

을 통해 미술계의 다양한 분야와 주제를 둘러싼 제도적 개선을 요구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이에 노무현정부의 <새예술 정책>부터 문재인정부의 <문화비전2030>까지, 정부에서는 현장의 변화와 요구에 부응하며 재빠르게 새로운 정책들 을 내놓는다. 올 초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예술경영지원센터, 법무법인이 함께 <미술 분야 표준계약서>를 고시한 바 있 다. 작가, 전시기획자, 화랑, 전시기관 등 미술 관계자들의 권익을 향상하고 공정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함이라는 목적을 갖고 제정되었지만, 실제로 이것을 현장에 적용할 때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제안된 소위 <미 술창작 대가기준>의 경우, 얼마 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관 50주년 전시에 과거 작업을 전시하는 데 하루에 250원 꼴 로 책정된다는 뉴스가 보도되면서 공분을 샀다. 또 ‘아티스트피’와 같은 예술가의 인건비 책정에서는 작가들의 경력 을 점수화시켜서 급수를 나누기도 한다. 그 중에서 가장 웃기고도 슬픈 광경은 예술인복지재단에서 시행하는 대부분의 사업의 혜택을 받고자 할 때, 작가들 스스로 “본인이 얼마나 못 사는지”를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포멀함’에는 예술의 자리가 점차 희미해진다. 대신 경계가 짙어지고, 그 사이마다 정말 중요한 본질

이 누락되는 사각지대가 종종 발생한다. 앞서 언급했던 대로 미술기관에서 일하는 인적 구성은 훨씬 분화되고 있는 가운 데 이들의 대부분은 임기제, 기간제, 무기 등 다양한 형태의 계약직의 신분이다. 그러면서 기관과 개인과의 관계 설정에 큰 변화가 생겼다. 직장은 단지 거쳐 가는 곳일 뿐이며, 그래서 계약서 너머의 영역에 있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또 계약 기간 이후의 시간에 대한 걱정이 늘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한다. 각각의 프로젝트마다 표기된 크레딧 란에 자신의 이 름 석 자를 확인하며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잠시 달래 본다.

사회학자 김홍중의 <서바이벌, 생존주의, 그리고 청년 세대: 마음의 사회학의 관점에서>는 칼 만하임(Karl

Mannheim)의 세대 사회학을 비판적으로 참조하면서 출발한 글이다. 김홍중은 “서열화된 위치들이 구성하는, 외부 없 는 경연장으로 상상되는 사회 속에서, 자아의 전 부분을 존재를 위한 투쟁에 요구되는 자원으로 전환시켜야 하는 강박에 밀려, 자기 자신과의 도구적 관계 그리고 타인과 의 경쟁적 관계를 유지해야 비로소 획득할 수 있는, 어떤 영원한 유예 (moratorium)의 상태가 그들을 지배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생존주의의 헤게모니이다”라면서, 오늘날의 한국 청년 세대의 마음을 지배하는 네 가지 삶의 좌표축으로서 생존, 독존, 공존, 탈존을 제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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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허문다. 따라서 졸업 후 학교 바깥의 삶에서 위의 네 가지 좌표 안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았으 면 좋겠다. 무엇보다 여러분들이 서바이벌의 불안한 세대성를 대변하는 ‘청년 작가’가 되지 말았으면 한다. 또 미술계 에서 소비재로 매년마다 대체되는 ‘신진 작가’는 더더욱 아니다. ‘포멀함’을 무너뜨리고, 새 판을 짜는 예술가로서 다시 만나기를 바란다. *월간 <아트인컬처> 2019년 10월호에 게재된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혀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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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피를 씻는다 / water washes blood 2019.12.20 - 31

졸업 준비 위원장

김예진 이운 추승민

공간팀

유정우 김규상 김서희 서명범 손효정 박제호 유나윤 이명은 김도연 정진희 정화연 진지원 한가윤 임종원

장비팀

최규태 권도율

디자인팀

김무영 장다은 이연석 정다훈 이은결

서기팀

이승일 김소현

행사팀

장영해 용하정 박주영 서영현 홍우인

회계팀

이택우 차시헌

홍보팀

김하윤 김진주 윤혜준

촬영

정지필

인쇄

가람미술

감사한 분들

정정화 이우현

글 써주신 분들

안소연 안소현 유운성 유은순 윤원화 호경윤

한국예술종합학교

www.karts.ac.kr

조형예술과 졸업전시 아카이빙

www.kartsfa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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