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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귀한 일상>
from <고귀한 일상>
고귀한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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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지난 십여 년 동안 땅 가까이에서 살았다 . 매일 걷는 들 판을 일 년 , 이 년 …… 십 년을 걸었다 . 벼들이 자라는 한 생애가 들어오고 , 바람이 지나가는 길을 알게 되었다 . 뜰 을 가꾸고 작물을 키우면서 꽃들이 피고 지는 걸 지켜보 았다 . 늦가을까지 생명을 잉태하는 가지의 속살을 들여다 보고 , 여린 몸으로 겨울을 나는 마늘의 생명력에 놀라워 했다 . 봄에 새들이 일 년 중 가장 아름답게 노래한다는 사 실을 알게 되었고 , 저녁이면 대숲에 들어와 잠을 자고 새 벽이면 다시 날아오르는 수백 마리 참새 떼의 생리도 알게 되었다 .
아래에서 볼 때 더 잘 보이고 들리는 것들이 있다 . 나는 오랫동안 위에서 보는 삶을 살려고 했다 . 뭔가 그럴듯하고 위대한 것을 꿈꿨다 . 더 높이 , 더 멀리 삶을 따라잡으려 했 다 . 언젠가부터 그 삶을 돌이켜 느리고 , 낮고 , 단순하게 삶 이 주는 것을 받아 살았다 . 내 의지를 내세우기보다 삶이
고귀한 일상 4
때로 외로움은 고독으로 가는 길이 되기도 한다 .
고독과 외로움
자연 속에 있을 때 , 내가 자연의 일부로 함께 있다는 것이 명징하게 느껴질 때 , 고독하다 .
자연이면서 동시에 자연이 아닌 나는 고독하다 . 자연이지만 자연일 수만 없는 존재 , 자연인 자신을 바라보는 존재로서 나는 고독하다 .
고독은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난다 . 자연과의 근원 적 연결을 그리워하는 자의 안타까움 , 거대한 우주 앞에 천둥벌거숭이로 서 있는 자의 나약함 . 내가 사라져도 자 연은 어김없이 자신의 길을 순환할 것을 아는 자가 느끼는 안도감 섞인 고독 .
고귀한 일상 16
자연 속에 살면서 보고 듣게 되는 것들 , 작고 아름답고 절실한 것들 . 가끔 생각한다 . 이들을 보거나 듣지 못하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 하고 .
고귀한 일상 34
고요가 없으면 충만함도 없다 .고요가 없으면 아름다움도 없다 .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 고요 1
짧은 인간의 생애 동안 너무도 많은 변화들이 있어 , 나 는 내 생애 이런 일을 겪을 줄 몰랐다는 말을 수십 년 동안 여러 차례 반복했다 . 미세먼지 자옥한 세상에서 살 줄 몰 랐고 , 세계적인 전염병이 전쟁보다 심하게 사람들을 죽음 으로 데려갈 줄 몰랐다 . 바쁜 것을 넘어 과도하게 움직이 던 사람들이 움직임을 멈추자 이리도 금방 맑은 하늘을 보 게 될 줄도 몰랐다 .
밤새도록 거센 비가 내렸다 . 아침이 되니 날은 개었고 , 밤새 내린 비로 개울물 소리가 우렁차고 빠르다 . 나무들은 안녕한지 , 꽃들과 풀은 또 무사한지 . 숲으로 들어선다 . 놀 랍게도 풀들은 고요하다 . 어젯밤 비바람의 흔적을 읽을 수 없다 . 바위도 , 나무도 꽃들도 고요하다 . 숲은 고요로 꽉 차 있다 . 습기로 가득 찬 고요는 고막을 찢을 듯 팽팽하다 .
고귀한 일상 48
차를 우리고 따르고 마시는 이 순간의 고요를 나는 즐긴다 . 하루 중 가장 깊은 고요와 함께하는 시간 , 시간에 향기라도 있는 듯 이 시간을 깊이 들이마신다 .
고귀한 일상 58
자신의 노동에서 느끼는 기쁨은 예술적 창조의 기쁨과도 같다 . 자신의 노동으로 달라진 존재에게 느끼는 대견함과 아름다움 . 그 존재와 하나가 되는 자기 확장 , 그 감동으로 그는 자기 변화 에 이른다 .
계절에 따라 자연은 부지런히 자기 길을 간다 .자연의 순환을 보며 부지런함과 바쁨의 차이를 배운다 .
3 장세상을 향해 걷다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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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차에게 경의를 !
아침에 시내로 가기 위해 나섰다 . 개운못 쪽으로 가는데 중간쯤 어디서 나타났는지 말 그대로 똥차가 가고 있다 . 요즘은 보기 드문 차 , 앞으로는 볼 수 없을 , 분뇨 운반차다 .
정화조의 똥을 호수로 빨아들여 싣고 가는초록색 구닥다리 ‘ 위생 차량 ’그 뒤를 12 인승 회색 승합차가 따라가고 있다 .
똥차는 느렸다 .승합차가 곧 똥차를 추월할 거라고 생각했다 .‘ 그러면 나도 추월하리라 .’
그런데 앞차는 똥차를 추월하지 않았다 .
고귀한 일상 124
그저 똥차 뒤를 따라갔다 .바쁜 나는 짜증이 일다가‘ 어라 , 이건 무슨 상황이지 ?’ 궁금해진다 .
똥차는 무겁고 낡은 몸으로 고개를 넘고 ,개운 호수 굴곡진 길을 터덜거리며 달렸다 .그 뒤를 승합차와 나와 내 뒤의 일 톤 트럭이 따라갔다 .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그렇게 달리고 있자니왠지 똥차를 추월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일어났다 .앞차도 , 뒤차도 같은 마음일 것 같았다 .
똥차를 따라 천천히 그의 앞길을 가로채지 않고 달리는
우리는 운명이 다해 가는 똥차의 오랜 역정을 기억하고 똥차를 격려하는 동지들 같았다 .
남루한 창자인 양 구부러진 호스를등짝 위에 둘둘 감고 재를 넘는 똥차는
3 장세상을 향해 걷다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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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근원 위에서 인간은 다른 생물과 달리초월적 꽃을 피울 수 있다 .근원에 닿지 못하면 ‘ 헛꽃 ’ 을 계속 피우게 된다 .
지는 꽃에 관하여
피는 꽃에 대한 관심은 누구나 있지 . 지는 꽃은 좀 달라 . 생명의 소멸에 시선을 주는 건 삶의 깊이를 비추는 거야 .
꽃이 질 때 모든 꽃이 같은 모습으로 지는 건 아니야 .많은 꽃이 핀 자리에서 시들고 마르지 .꽃잎이 한 장 한 장 떨어져 나가며 지기도 하지 .
마르는 모습이 유난한 건 산수국과 국화야 . 산수국은 마치 피어 있는 듯 생생하게 말라 있지 . 글쎄 , 살아 있는 줄 깜박 속지 뭐야 . 국화는 말라서 오래오래 서리와 눈을 다 맞아 .
꽃잎이 시들며 떨어지는 꽃 중엔 모란이 있어 .
고귀한 일상 164
져야 할 것들이 져야 , 익어야 할 것들이 익는다 .
두려운 질문
소나무를 꺾으면그 꺾인 자리에서짙은 솔 향이 난다 .
페퍼민트를 밟으면밟힌 자리 가득화한 페퍼민트의 향기 !
모든 생명의 상처에는고유의 향기가 있다 .
내 꺾인 자리그 상처에서는어떤 향기가 날까 ?
고귀한 일상 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