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 4박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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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명의 고향

서안 西安 4박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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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

西安 Xian

11_30 - 12_04

1130

소안탑 섬서역사박물관 대안탑

1201

화산 비림박물관 종고루

1202

병마용박물관 화청지 여산 흥경궁

1203

청진사 명대성벽 대명궁 한양릉 한성호

1204 - 2 -

실크로드 기점군상


섬서성 陝西省 Shanxi 산시성

중국 중서부에 있는 성. 면적 19 만 6000 km2. 인구 약 3,400(1992). 성도(省都)는 시안[西安]. 황허강[黃河] 중류 유역에 있다. 현재 중국 시베이 지구[西北地區]의 현관에 해당한다. 친링산맥[秦嶺山脈]이 성의 남부를 동서로 달리며, 그 남쪽은 양쯔강[揚子江] 수계의 한수이강[漢水]의 유역이고, 그 북쪽은 황허강 유역에 속한다. 다바산지[大巴山地]와 친바산지[秦巴山地] 사이에 한수이강에 면한 비옥한 한중[漢中] 분지와 안캉[安康] 분지가 있다. 친링산맥의 단층애(斷層崖) 북쪽은 웨이허 평원으로 관중 분지라고도 한다. 관개용수로가 잘 정비되어 있고 농업이 성하여 보리, 목화 등의 주산지로 알려져 있다. 북부의 산베이고원[陝北高原]은 황투고원[黃土高原]의 일부로 황토층이 두껍게 퇴적되어 있다. 산시성[山西省]과의 경계를 깊은 협곡을 만들며 황허강이 이루고 있고 우딩강[無定河], 옌허강[延河], 뤄허강[洛河], 웨이허강이 합류하는데, 이들 지류로부터 대량의 진흙이 유입되어 황허강 흙탕물의 원인이 되고 있다. 친링 이남은 온난습윤하나 북쪽으로 갈수록 한랭, 건조해진다. 연강수량은 적으나 강우는 대개 집중호우의 형태이기 때문에 수해, 한발 등을 초래하고, 북쪽에서는 모래바람의 피해도 많다. 농업은 웨이허 평원이 중심이지만 한중분지에서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북쪽에서도 농지 조성이 많이 이루어져 농업이 발전을 보이고 있다. 룽하이 철도[海鐵道:連雲港~蘭州]가 성의 중앙을 횡단하며, 바오지에서 쓰촨성[四川省]을 지나는 바오청 철도[寶成鐵道]와 셴양~퉁촨 간 지선도 있다. 시안에는 전국 각지에 대한 항공로도 열려 있다. 성내 교통은 버스 교통을 주로 하며 시안, 한중, 옌안이 그 중심이다. 성도인 시안 외에 셴양, 바오지, 퉁촨, 옌안의 4 개 시가 있다.

서안 西安 Xian 시안

중국 산시성의 성도이며, 행정구역은 9 개의 구와 4 개의 현으로 나뉜다. 관중분지 (關中盆地) 의 중앙부, 북쪽으로 웨이허강[渭河]이 동류하고 남쪽에 중난산[終南山]이 솟아 있는 곳에 위치한다. 인구는 900 만에 달하며 중국의 대표적인 관광 도시 중 하나이다. 과거 동양과 서양의 문화 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실크로드의 기점이며, 우리에게는 서안보다는 오히려 장안(長安)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고도(古都)이다. 오늘날 서안은 중국의 신흥 내륙 공업 지역 가운데 하나이며, 20 여 개의 대학과 연구소들을 갖춘 교육 도시이기도 하다. 지금은 중국의 - 3 -


군수 공장, 우주연구센터 등 핵심적인 산업체가 있다. 시안은 신석기 시대 반파 (半坡)마을에서 시작해서 청동기시대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세운 호경(鎬京), 풍경(灃京), 진(秦)의 수도 함양(咸陽), 아방궁(阿房宮) 등 초기 왕조들의 수도로 건설되었다. 그 뒤 한(漢)나라에서 당(唐)나라에 이르기까지 13 개 왕조에 걸쳐 약 1,000 여 년 동안 단속적이었으나 국도(國都)로 번영한 역사적 도시로 그 동안 장안(長安)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다. 1943 년에 시(市)가 설치되었다. 가장 번영했던 당대(唐代)에는 동서 9.5km, 남북 8.5km 의 규모에 인구 100 만이 넘는 계획적인 대성곽 도시를 이루어 멀리 서방에도 그 이름이 알려졌다. 그러나 당나라의 쇠퇴와 그에 따른 병란으로 장안도 파괴되어 쇠퇴하였다. 현재의 시역(市域)은 명(明)나라 때 구축한 주위 13km 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시가와 교외로 되어 있으며, 명, 청대에 서안부(西安府)를 설치한 바 있으나 중화민국 때에 그것을 폐지하고 산시성에 직속시켰다. 구시가는 당나라의 장안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으로, 고도(古都)의 면모를 간직하는 한편 관공서와 상점 등이 밀집해있다.

함양

산시성의 제 3 대 도시 중의 하나이며 성(省)에서 관할하는 고도(古都)이다. 시안[西安]에서 북서쪽으로 25km 떨어져 있으며 시안의 관문인 셴양국제공항 (西安咸阳国际机场 )이 위치해 있다.

咸陽 咸阳 Xianyang 셴양 기원전 350 년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진(秦)의 효공(孝公)이 이곳에 도읍하고, 처음으로 도성을 쌓았으며 이 때부터 진나라의 수도로서 번영을 누렸다. 140 여 년 간 함양은 진의 국도(國都)였으며 BC 221 년 시황제(始皇帝)의 통일 이후 천하의 부호(富豪) 12 만 호를 이주시켜 전국의 정치. 경제, 교통,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때 270 개가 넘는 궁전이 건설된 화려한 수도였다. 당시의 셴양은 현재 위치에서 동쪽으로 10km 위치에 있었다. 당나라 때 성의 구역이 서쪽으로 10 ㎞ 옮겨졌다. 진이 멸망할 때 궁전과 함께 시가지는 모두 불태워지고 현재의 구시가(舊市街), 즉 성곽도시는 명초(明初)에 건설되었다. 현재 성밖 북동부에는 신시가가 건설되어 있다. 서안성 남쪽의 천복사(薦福寺)에 위치해 있다. 천복사는 당대 장안성

소안탑

내에서 유명한 불교사원이었다. 684 년에 지어졌으며, 중국 황실이 고종이 죽은 후에 "헌복(獻福)"을 위해 지어 준 절이다. 그래서 원래

小雁塔 Xiaoyanta 샤오얀타

이름도 헌복사(獻福寺)였는데, 무측천 때(690 년) 천복사로 이름을 바꿨다. 불교대사 의정(義淨)이 인도에 가서 경전을 얻어 귀국한 후에 이 곳에서 경전을 번역하여 대량의 불경을 남겼다. 소안탑은 당 중종(707-709 년) 때 지어졌는데, 원래는 15 층 높이 45m - 4 -


였으나 1556 년 섬서 대지진 때 훼손되어 현재 높이는 13 층(43.3m)이다. 대자은사 내에 위치한 대안탑과 대치하고 있고, 크기 면에서 약간 작다는 이유로 소안탑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주변을 크게 확장하여 공원화 조성 사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으며 서편으로는 서안박물관(西安博物馆 )과 바로 이웃해 있다.

대흥선사

시안 최고(最古)의 사찰로 265 년부터 289 년까지 축조되었다. 수나라 때 확장공사를 하고 현재의 이름을 얻었으며, 당나라 때에 이르러 크게 번성하였다. 다싱산쓰(大兴善寺)에서 처음으로 중국에 밀교를

大兴善寺 Daxingshansi 다싱산스

전파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불교는 만인에게 불법을 설파하지만, 밀교는 은밀하게 가르침을 전한다. 당대에 크게 유행하였으나 주술적이고 은폐적인 경향이 강하다는 이유로 당이 멸망한 이후 탄압 1 순위로 낙인 찍혔으며 점점 사라져갔다. 지금도 절 자체는 중국 밀교의 본산으로 유명하지만 종파는 거의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다싱산쓰는 중국에 밀교를 처음 전파한 금강지와 불공화상의 제자이자 <왕오천축국전>이란 명문을 남긴 신라의 혜초스님이 불경을 번역한 곳이기도 하여 한국인 여행자에게는 더욱 의미가 깊다. 중국의 전통건축의 미를 살린 섬서성 역사박물관은 서안 남쪽 교외

섬서역사박물관

대자은사 대안탑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건축면적 5 만 6 천㎡의 넓은 부지에 개관된 섬서성 역사 박물관은 고전과 현대의 건축예술을 한데

陕西省历史博物馆 Shanxishenglishibowuguan 샨시셩리시보우관

어울려놓은 건축물로 중국에서도 손꼽히는 대규모 박물관이다. 여섯 부분으로 이루어진 박물관은 주, 진, 한, 수, 시대의 역사유물들을 중심으로 11 만여 건에 이르는 진품 문물을 전시하고 있다. 이외에도 당대 능묘에서 출토된 40 여 폭의 채색벽화는 중국 미술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방문객들에게 백미로 꼽히고 있다. 중앙에 위치한 건물은 2 층 높이, 면적은 6 ㎢인 섬서지방 역사 전시관으로, 원시시대부터 1840 년 아편전쟁 중에 섬서성에서 출토된 각종 전시품들을 전시하고 있고다. 서쪽에는 2500 ㎡의 주제 전시관이 있는데, 주로 실크로드 등 섬서성의 역사, 문화 등에 관련된 문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주요 전시품은 청동기, 도용, 금, 은 장신구, 당나라 무덤 벽화 등이다. 동쪽에 있는 2555 ㎡의 역사문화전시관에는 주로 중국과 외국의 문화 교류를 주제로 한 전시품들이 있으며, 전국 각 성과 시의 문화 전시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은 현대적인 시설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전시관 내에는 문물보호 센터, 도서관, 다용도 학술보고실 등이 갖춰져 있다. 컴퓨터를 이용한 전시품과 자료 관리를 하고 있으며, 자동 조절 - 5 -


에어컨과 인공 조명시스템, 6 개국어 동시통역 시설 등이 설치되어 있다.

대자은사 대안탑

중국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인 628 년 황태자가 모후(母后)인 문덕황후(文德皇后)를 위하여 산시성[陝西省] 창안현성[長安縣城]의 남팔지리(南八支里)에 세운 고찰이다.

大慈恩寺 大雁塔 Daciensi Dayanta 다츠언스 다얀타

천축(天竺)을 다녀온 현장(玄 :602~664)이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며, 고종(高宗) 때인 652 년 현장의 발원(發願)으로 대안탑(大雁塔)이라는 7 층전탑(七層塼塔)이 건립되었다. 이 탑은 기단의 각 변이 42m, 높이가 54m 에 이르는 서역식(西域式) 불탑으로, 각 층마다 사리를 봉안(奉安)하였는데, 그 후 삼장법사(현장)의 전기인 《자은전(慈恩傳)》과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명상(瞑詳)의 대당고삼장현장법사행상(大唐故三藏玄 法師行狀)》 등의 서책이 보존되어 있었다. 대자은사의 혜립(慧立) 스님이 현장 스님의 출생부터 인도에서 귀국한 때까지의 이야기를 5 권으로 저술해 놓고 미처 편찬하지 못하고 입적하였는데, 그 후 언종(彦悰)이 그것을 토대로 그 뒤의 일까지 보충하여 10 권으로 완성한 것이 본 전기이다. 혜립 스님은 664 년부터 683 년에 걸쳐서 기록하였고, 언종이 편찬한 때는 688 년이다.

대당부용원

- 부용원은 본래 오랜 세월동안 명성을 떨친 황가의 어원으로서 천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 서안(西安)에 자리하고 있으며 대안탑(大雁塔) 에서 가깝다. 수(隋)나라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大唐芙蓉园 다탕푸롱유안

약 1300 년에 이르는 유서깊은 역사를 지니고 있어서인지 고풍스럽고, 깊이 있는 매력과 분위기가 물씬 풍기며 주변 환경의 아름다움도 일품이다. - 오늘날의 부용원은 당나라 부용원 유적 위에 지어진 것으로 중국 최초로 성당(盛唐:당나라의 전성기)시기의 문화와 당대 시대상 및 생활상을 전방위적으로 속속들이 재현해 우리나라로 비유하자면 조선시대를 재현한 민속촌과 같은 위상을 지닌 곳이다. 볼거리도 많거니와 단순히 오락으로 즐기고 넘기는 눈요기 거리가 아니라 역사를 배우고, 현재와 미래를 사색할 수 있게 도와주는 즐거운 학습장으로 매우 유익한 관광지라 할 수 있다. - 부용원 안에는 자운루(紫雲樓 ), 사녀관(仕女館), 어연궁(御宴宮), 방림원(芳林園), 황명구천극장(凰鳴九天劇場), 행원(杏園), 육익차두(陸翼茶杜), 당시(唐市), 곡강류음(曲江流飮) 등의 관람관들이 준비되어 있으며 다채로운 구성으로 "오감"(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체험을 할 수 있어 서북 지역에서 단연 손꼽히는 - 6 중국 -


테마공원이다. 특히 매력적인 야경으로 최근 많은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 밤 어스름이 찾아올 때면 부용원 중앙에 위치한 호수에서 분수처럼 물이 뿜어져 올라오고, 그 위로 레이저가 쏘아지며, 수면 위에는 세계 최대규모의 수막(水幕)영화가 펼쳐진다. - 화려하고 몽환적인 야경은 관광객들에게 국제도시로 그 어느때보다도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당나라시대로 돌아간 듯한 환상적인 체험을 선사한다. 참고로 이 곳을 배경으로 촬영된 중국 드라마 "대당부용원"은 국내에서도 방영된 바 있다. 대안탑 광장(大雁塔广场)에서 펼쳐지는 아시아 최대의

대안탑분수쇼 大雁塔广场音乐喷泉表演 펜촨비아오얀

음악분수쇼(音乐喷泉表演) 월요일 2 12:00 21:00/겨울 20:30 화요일 1 21:00/겨울 20:30 수요일 2 12:00 21:00/겨울 20:30 목요일 2 12:00 21:00/겨울 20:30 금요일 2 12:00 21:00/겨울 20:30 토요일 5 12:00 14:00 16:00 18:00 21:00/겨울 20:30 일요일 5 12:00 14:00 16:00 18:00 21:00/겨울 20:30 매주 화요일 12 시에는 정기정검으로 운영을 안한다고 하네요. 겨울에는 밤 9 시 대신에 8 시 30 분에 한다고 하구요.

화산

고칭 서악. 오악의 하나이며 첫번째 국가중점풍경명승지, 5A 급 관광지, 국가안전위생문명산, 전국문명풍경관광지시범점, 중화십대명산. 섬서성 위남 화음시에 속하며 서쪽으로 서안까지

华山游客中心 화샨요우커종신

100 킬로미터, 용해철로, 정서고속철도, 연호고속도로가 산 기슭에 지나가 교통이 편리하다. 남쪽으로 진령과 인접하고 북쪽으로 황하와 가까이 하고 대서북으로부터 중원에 출입하는 문을 지키고 있다. 기험천하제일산이라는 미명을 가지고 있다. 거대하고 완전한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경관이 극히 험하고 동서 20 킬로, 남북 7.5 킬로미터, 지상 2000 여미터의 거대한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음양오행설에 기초하여 전국을 동, 서, 남, 북, 중앙으로 나 누고 각 지역마다 명산을 하나씩 지정하여 오악이라 불렀다고 한다. 고대 한나라 당시의 오악 가운데 동악은 산동성의 태산, 서악은 섬서상의 화산, 남 악은 안휘성의 황산, 북악은 하북성의 항산, 중악은 하남성의 숭산이었다. 하지만 후대에 이르면서 남악은 호남성의 형산으로 북악은 산서성의 다른 항산으로 바뀌게 되었다. 동악인 태산은 예부터 천하제일의 산이라고 칭송되어 온 곳으로 역사적으로 무수한 군주와 시인들이 태산에 올랐다고 한다. 서악 화산은 해발 2,160m- 의7 화강암산으로 동, 서, 남, 북, 중봉 등 5 대봉이


있는데 그 가운데 조양대가 일출명소로 최고다. 남악인 형산은 72 봉의 웅장한 산세가 아름다운 곳으로 많은 제왕들이 다녀갔으며 불교의 성지로도 유명하다. 오악 가운데 북악에 해당하는 항산은 모두 108 봉우리가 있으며 주봉은 현무봉, 항 산의 각종 명승고적이 이곳에 몰려 있다. 오악 가운데 중악에 해당하는 숭산은 소 림사가 위치한 곳으로 해발 1,400m 로 남북조 이래 종교문화의 중심이 되어 온 곳이 다. 飛雪連天射白鹿, 書笑神俠依碧鴛 비설연천사백록, 서소신협의벽원 '하늘 가득히 눈이 휘몰아쳐 흰사슴을 쏘고, 글을 조롱하는 신비한 협객은 푸른 원앙에 기댄다.' 위 7 언 2 구의 한시는 김용 작가님의 소설 14 편 첫글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 북봉에 오르면 저 한시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김용 작가님 작품 목록 서검은구록(1955) 벽혈검(1956) 사조영웅전(1959) 영웅문 1 설산비호(1959) 신조협려(1961) 영웅문 2 원앙도(1961) 의천도룡기(1961) 영웅문 3 백마소서풍(1961) 비호외전(1961) 연성결(1963) 협객행(1965) 천룡팔부(1966) 소오강호(1967) 월녀검(1970) 녹정기(1972) 참고로 녹정기를 월녀검보다 먼저 집필했지만 완성은 더 늦었기에 녹정기를 끝으로 절필 하였으며, 위 7 언 2 구에서 월녀검은 제외되었다. 그외 소설 '화산논검', '장백산맥', '의천도룡기외전', '속천룡팔부', '속녹정기' 등은 김용 작가님의 작품이 아니라고 한다.

비림박물관

기원전 1090 년에 당나라 개성 여간에 새긴 '개성석경' '석대효경'을 소장하기 위해 건조한 것으로 중국 최대의 석조 서고이다. - 8 -


碑林博物馆 베이린보우관

개성 석경은 114 개의 석판에 유교경전 13 경(655,025 자)을 조각한 것입니다.중국역대 명필과 경전을 새긴 1,095 의 비석이 전시되어 있으며 비석이 마치 수풀을 이루는 듯 무성하여 비림(碑林)이라 이름이 붙여졌다. 비림은 중국 서예예술의 보고로 한나라에서부터 청나라 이르기까지 각 시기의 이름난 서예가들의 필적을 모아놓고 있다. 6 실 7 랑으로 나누어진 비림 입구에는 당나라 현종의 친필서체가 비석 사면에 새겨진 '석대효경'이 우뚝 서 있다. 이중 당나라때 만들어진 고대 페르시아 문자가 한자와 같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서안이 그 옛날 국제적인 도시였으며 실크로드의 출발지답게 서쪽에서 많은 사람들이 왔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고대 페르시아 문자는 이집트와 인도에 각 1 점씩, 세계를 통틀어 3 개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또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전래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도 눈길을 끈다. 남문에서 비림으로 연결되는 길. 양쪽에 기념품 가게, 서화 가게들이

서원문

즐비하게 늘어선 길로 인사동을 연상케 한다.

书院门 슈위엔먼

덕복항

서안 명대성벽 남문내 분항(fen xiang)에 있는 덕복항은 서안에서 커피슢,차집,호프집이 제일 많이 집중된 골목이다. 덕복항은 수,당조때 이미 있었는데 원래는 황성의 일부분이였다고 한다.현재의 덕복항은

德福巷 더푸샹

20 세기 90 년대에 고대 풍격을 그대로 보수하여 청석으로 바닥을 깔았고 골목 양쪽 건물도 재건축하였다.1 키로 좀 안되는 골목 양쪽에는 크고 작은 커피슢,호프집이 40 여개나 된다.현지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아가는 곳이기도 하지만 타지방 관광객,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밤문화의 좋은 체험지이다.

종루

종루(鐘樓)는 서안중심에 위치한 동서남북 4 방이 연결되어 있는 교통중심지역이다. 우리나라의 동대문이나 남대문과 비슷한 위치로 총 높이가 36 미터, 총 면적이 1377.4 평방미터다. 서안의 종루는

钟楼 종러우

중국에 남아있는 수많은 종루중에서 제일 크고 보존이 완벽하여 서안의 상징적인 건축물일뿐 아니라, 예술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그 종류의 건축물 중에서 가장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종루는 명태조 주원장 홍무제 17 년인 1384 년에 시간을 알리기 위해 건설된 것으로, 외관 3 층, 내부 2 층 정방형의 누각형태다. 이 건물의 특징은 못을 사용하지 않고 건물을 올렸다는 것인데, 4 면에 회랑이 둘러져 있고 내부에 계단이 있어서 올라가 서안시내를 둘러볼 수 있게 해 놓았다. 또한 누각 안에 보전되어 있는 종은 고대시대때 아침을 깨우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서, 새벽에 종이 울리면 종루의 문을 열고 저녁에 종이 울리면 종루의 문을 닫았다고 한다. 종루가 서안 중심에 위치해 있고, 종루를 기준으로 교통이 4 방으로 - 9 -


통하기 때문에 이 주변에는 크고 작은 상점과 먹거리 장터가 열려 있다. 종루가 있는 곳은 8 차선의 넓은 도로로, 종루에서 서안성벽까지 양쪽의 도로변에 새로 지어진 건물과 백화점, 은행, 음식점들이 들어서 있고 성벽 왼편으로 고가(古街)가 펼쳐져 있다. 이곳은 북경의 유리창 거리처럼 그림, 옥, 도장, 장식품 등 고물건을 판매하는 상점거리인데 거리 끝에는 비림(碑林)으로 들어서는 문이 있다. 종루에서 이 거리까지는 대략 300 미터 떨어져 있으며, 종루로 가는 버스를 이용하면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종루 바로옆에 있다. 북을 쳐서 시간을 알려주던 곳이다.

고루

중러우[钟楼]보다 4 년 빠른 1380 년에 세워졌다. 두 개의 높은 건축물은 서로 마주 보고 있으며, 이 모양을 보고 제메이러우[姐妹楼,

鼓楼 구러우

자매 누각]라고도 칭한다. 구러우의 기초는 장방형으로 청색의 벽돌로 쌓았으며, 높이는 약 33m 이다. 이곳에는 전러우[镇楼]의 대고(大鼓) 외에도, 동서남북 사방에 모두 24 개의 북이 있으며, 북의 표면에는 24 절기가 그려져 있다.

병마용박물관

실물 크기인 8 천 점의 테라코타 전사들은 거의 2,200 년 전, 진 나라의 첫 황제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군사들입니다. 1979 년에 이들은 지역의 농부들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으며, 20 세기에

兵马俑博物馆 삥마용보우관

이루어진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발굴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발굴작업은 진시황제의 능에서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유적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전사와 말의 모형들은 전투 대형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박물관의 주요한 볼거리입니다. 많은 모형들이 아직 발굴되지 않았으며, 병마용의 보존과 보호 방법이 더욱 개선될 때까지 많은 발굴이 중지되었습니다. 이 곳은 이 지역을 찾는 모든 관광객들이 반드시 보아야 할 곳입니다. 병마용이란 흙으로 빚어 구운 병사와 말을 가리키는데, 진시황이 사후에 그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세계 8 대 불가사의로 꼽힐 만큼 세계 어느 곳에서도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규모를 갖추고 있다. 서안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약 30km 거리에 있으며, 진시황릉에서 북동쪽으로 1.5 ㎞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 곳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74 년 중국의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했고, 그제서야 세상에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현재에도 발굴이 진행중이다. 갱 내에는 6000 여개의 실물 크기의 도용(陶俑)이 묻혀 있었으며, 현재에는 1000 개 정도가 진열되어 있다. 더욱 놀랄만한 점은 모두 제각기 다른 자세와 표정, 복장, 헤어 스타일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병마용갱은 총 3 개의 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1 호갱은 당시 농민이 발견한 것이고, - 10후에 - 2, 3 호갱이 발견되었다. 세곳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동서 길이가 230m, 넓이는 612m 로 총 면적이 12 ㎢이다.1 호갱은 동서쪽을 향한 긴 모양으로 장군과 병사가 배열되어있고, 2 호갱은 면적이 약 6000 ㎡이며,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2 호갱은 발굴이 되고 있는 상태에서 전시되어 있다. 3 호갱은 면적이 520 ㎡으로 凹모양이며, 병마용들은 양쪽으로 늘어서 있다.

1 호갱. 개방된 3 개의 갱도 중 가장 보존 상태가 좋고 규모도 제일 크다. 보병 중심의 군진인데 전시된 병마용만 6000 점이 넘는다. 우측의 커다란 구멍 같은 곳은 병마용 발굴 당시 농부가 우물을 파던 곳. 병마용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농부는 명예공무원이 되어 관광객들을 위해 사인해준다. 1 호갱의 뒷편에는 복권중인 병마용들이 줄을 지어 서있다. 병용은 장인들에 의해 머리, 몸통, 팔, 다리가 각각 제작된 후 결합되었다고 한다. 흙을 사용하여 등신대로 제작하여 구워 만든 테라코타인데, 제각기 다른 얼굴을 위해 8 종류의 틀을 사용했으며 다리 부분은 같은 틀로 대량생산했다. 이러한 조립을 위해 따로 조립 라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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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호갱. 1976 년 발견되었는데 보병, 기병, 전차대, 궁노수들로 군진이 구성되어 있다. 일부 병용들에는 채색의 흔적이 있다.

3 호갱. 1976 년 발견되었으며 공개된 갱도중 가장 작은 규모이지만 채색된 전차가 있고, 그 전차의 병용들은 머리에 큰 관을 쓰고 있어서 1, 2 호갱의 지휘기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규모는 가장 작지만 가장 화려한 유물들이 이곳에서 발견되어서 전시실에 따로 보관되고 있다.

진시황릉 秦始皇陵 친시황링

중국을 통일한 최초의 황제 진시황이 여기에 묻혀 있다. 능묘는 37 년간이 걸려 완공되었는데, 무덤의 둘레가 6 ㎞, 높이는 40m 에 달한다. 무덤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야산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 내부는 개발이 되지 않아 있어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다고 해도 내부는 볼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진시황이 무덤을 설계할 때 훗날의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함정들을 설치해 두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진시황릉 앞까지 간다고 해도 내부에 들어갈 수는 없고, 밖에서 사진 촬영을 하는 정도의 관광을 할 수 있다. 1987 년 유네스코는 진시황릉을 <세계유산목록>에 넣었다. - 12 -


사마천의 사기에는 진시황이 70 만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기원전 246 년에 건축되기 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진시황릉이 지하에 황궁을 그대로 옮긴 것과 같은 규모였으며 수은이 흐르는 100 여개의 강과 수십개의 망루를 가진 도성 그대로의 모습으로 조성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진시황릉 완공 이후에 도굴을 막기 위해 인부들을 생매장하였다고 한다. 2003 년 1 월 9 일, 진시황릉의 부장릉이 발견되었으며 사마천의 기록이 과장되거나 허황된 것이 아님이 입증되었다. 병마용갱 부근의 리산의 토양은 많은 수은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높이 76 미터, 넓이 350 평방미터에 이르는 흙으로 조성된 피라미드이며 2007 년의 원격탐지 장치 조사를 통해 내부에 벽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중국 정부는 현재의 기술로 진시황릉을 완벽하게 발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현재 발굴작업을 보류하고 있다. 진시황제(秦始皇帝, 친쉬황디) BC 259 년 1 월 ~ BC 210 년 9 월 10 일 진나라의 31 대 왕이며 중국 최초의 황제이다. 이름은 영정이며 조나라에서 출생하였기에 조정이라고도 한다. 진 장양왕 영자초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당시 세도가 대단하던 조나라의 상인 출신의 승상 여불위의 친자로 추정된다. 진나라의 왕이었던 영정은 중국을 통일하고 난 뒤, 왕이라는 칭호가 자신의 업적에 걸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새로운 칭호를 만들었다. 이사, 왕관 등의 요청에 따라 삼황오제에서 ‘황’과 ‘제’를 따 합쳐서 황제라 칭하였으며 자신이 처음이니 시황제(始皇帝)로 부르라 명했다. 정오에 출정의식 행사를 하고 있다.

화청지 华清池 화칭츠

당나라 말엽 양귀비와 현종이 사랑을 나누었던 곳으로 유명한 곳. 당나라 현종(玄宗)이 60 만㎡의 넓은 면적 안에 화청궁을 만들어 중국 4 대 미인의 하나인 양귀비와 생활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양귀비는 원래 현종의 친아들인 수왕(壽王)의 아내였지만 결국에는 현종의 눈에 들어 총애를 받게 되었다. - 13 -


4 문, 10 전, 4 루, 2 각, 5 탕. 연못가에 버드나무가 늘어지고, 석방(石舫)이나 어전, 정자, 회랑을 배치한 중국식 정원이 있고, 양귀비상도 서 있다.

양귀비가 사용하던 목욕조, 지금은 썩은 물만 밑에 조금 깔려 있다. 당(唐) 현종(玄宗)과 양귀비(楊貴妃), 그리고 그들을 노래한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로 유명한 화청궁(華淸池) 또한 이곳에 있다. 화청궁은 임동 남쪽에 위치한 여산(驪山, 리산) 기슭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곳의 온천은 예로부터 유명하다.2) 온천 북쪽의 유적 발굴 결과에 의하면, 약 6000 여 년 전부터 사람이 이 지역에 거주하면서 온천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서주(西周) 유왕(幽王)이 온천이 있는 이곳에 처음으로 ‘여궁(驪宮)’을 건설하였다. 이후로 관중(關中, 오늘날의 서안 지역)을 수도(首都)로 한 역대 중국 왕조는 이곳을 이궁(離宮)으로 이용하였다. 한(漢) 무제(武帝)는 이 궁을 ‘한이궁(漢離宮)’, 당(唐) 태종(太宗)은 ‘탕천궁(湯泉宮)’, 고종(高宗)은 ‘온천궁(温泉宮)’이라 불렀다. - 14 -


양귀비(楊貴妃)가 사용했다는 해당탕(海棠湯). 부용탕(芙蓉湯), 귀비지(貴妃池)로도 알려졌다. 현종 대에 이르러 이 궁의 명성은 절정에 오르게 되었다. 현종은 개원(開元) 11 년(서기 723 년)에 기존의 궁터 위에, 여산의 지세(地勢)를 따라 대규모로 궁전을 신축할 것을 명하였다.3) 예전부터 있어온 온천정(溫泉井)을 온천탕(溫泉湯)으로 만들었다. 또한 여산 정상에 이르는 길을 내는 한편, 황도(皇都)인 장안(長安)의 대명궁(大明宮)과 흥경궁(興慶宮)에 이르는 길도 새로 건설하였다. 천보(天宝) 6 년(서기 747 년)에 이르러 궁전을 완공하고 화청궁이라 개명하였다. 좌사(左思)4)의 위도부(魏都賦) 중 ‘温泉瑟湧而自浪 華清荡邪而難老(온천물은 끓어올라 파도를 이루고, 화청은 언제나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인다.)’를 인용하여 명명하였다고 한다. 또한 궁내에 많은 온천탕으로 인해 화청지(華淸池)라고도 불렀다.

화청궁 안내도, 구룡호에 위치한 것으로 표시된 양귀비 상은 태자탕(太子湯) 앞으로 옮겨져 있다. 출처: 華淸池(http://www.hqc.cn/) 망경문(望京門)을 통해 입장하고 나서, 안내자에 의해 좌측(동편)으로 인도되었다. 구룡호(九龍湖)에 이르니 푸른 버들과 금빛 동물 형상들, 당풍(唐風)의 건물들이 여산(廬山, 리산)을 배경으로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구룡호는 1959 년에 조성된 것으로, 구룡교(九龍橋)에 의해 두 개의 호수로 구분되어진다. 호수 동편(좌측)으로는 구룡호를 묘사하는 글들을 새긴 돌들이 있고, 건너편인 서편에는 구곡형랑(九曲逈浪) 등의 건물이 있다.5)

입욕(入浴)하는 양귀비 상(像) 뒤로 성진탕(星辰湯, 좌측)과 상식탕(尙食湯, 우측)이 보인다. 구룡교가 있는 곳에서 동편(좌측)으로 접어들면 온천탕들이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1982 년 4 월부터 3 년 동안 발굴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발굴 결과 현종을 위한 연화탕(蓮花湯)6), 양귀비를 위한 해당탕(海棠湯)7), 공경과 관리들을 위한 상식탕(尚食湯), 태종의 성진탕(星辰湯), 그리고 태자탕(太子湯) 등 5 개의 황실 목욕탕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그 유적 위로 당풍(唐風)의 건물을 짓고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입욕(入浴)하는 양귀비 상(像). 그 뒤로 좌측 건물이 연화탕(蓮花湯), 우측 건물이 성진탕(星辰湯). 중앙의 비하각(飛霞閣)과 성진탕 사이로 여산에서의 온천 원수(原水)가 흘러들어 온다. - 15 -


성진탕, 상식탕 앞에 입욕하는 양귀비 상이 있다. 양귀비를 일러 ‘풍만하고 탐스러웠다(肌态丰艳)’8)고 묘사대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풍만하다는 것은 비만하다는 것이 아니고 육체파(肉體派, glamour)란 의미다. 이것은 당시에 추구하던 여인들의 아름다움이었다. 성도(成都, 청두) 망강공원(望江公园)에 있는 당대(唐代) 최고 여류시인(女流詩人) 설도(薛濤)의 입상도 풍만하게 묘사되어졌다고 한다.9)

양귀비가 목욕 후, 젖은 머리카락을 말렸다는 비하각(飛霞閣). 그 너머에 장개석이 머물다가 ‘서안사변(西安事變)’을 당했던 오간청(五间厅)이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현종은 화청궁이 완공되기 이전인 즉위(卽位) 초기부터 방문을 하였다. 해 마다 방문한 것은 아니지만 자주 방문을 하였다. 여산 온천(화청궁) 이외에도 여주(汝州) 역성탕(歷成湯), 봉천탕(鳳泉湯) 등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화청궁 방문 시기는 9 월에서 2 월 사이였으며, 체류기간은 대개 일주일에서 보름 정도였다.10) 그러나 사랑했던 무혜비(武惠妃)가 죽은 후, 그녀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인 수왕(壽王) 모(瑁)의 비(妃), 즉 며느리였던 양옥환(楊玉環)을 여도사(女道士)인 태진(太真)으로 만들어 놓고는 11) 화청궁 방문이 잦아졌고 체류기간도 달을 넘기게 되었다. 천보 4 년(서기 745 년) 7 월에 현종은 수왕에게 위소훈(韋昭訓)의 딸을 새 부인으로 주어 왕비로 삼게 하였다. 이어서 8 월에 귀비(貴妃)12)라는 새로운 품계를 만들고 양태진(楊太真)을 그 자리에 앉혔다. 이 해 시월에 현종은 공식적으로 처음 양귀비를 대동하고 화청궁을 찾았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모습을 이렇게 읊었다.13) 차가운 봄날 華清池에서의 沐浴케 하였더니, 溫泉물은 매끄럽게 굳은 臙脂 맑게 씻어내네. 侍女 副軸 받아 일어나는 힘없음이 妖艶하기 그지없으니, 비로소 임금의 사랑을 받기 시작하네. 구름 같은 머리칼, 꽃 같은 얼굴, 그리고 黃金 떨잠, 따뜻한 연꽃 揮帳 속에서 봄밤을 지냈다네. 봄밤이 짧음을 안타까워하다가 해가 높다래야 일어나니, 이때부터 임금은 朝會에 나오지 않았다네.

현종과 양귀비, 그리고 안록산(安祿山)의 연회도 발굴 결과에 따르면 현종은 투계전(闘鶏殿), 안가대(按歌臺), 크고 작은 - 16 격구장(擊毬場), 가마대(歌馬臺) 등도 건축하였다고 한다. 이 모든 것


이상을 양귀비와의 향락을 위해 사용하였다. 백거이는 계속 노래하길; 宴會에 參加하고 즐기기에 餘暇가 없으면서도, 봄에는 봄놀이에, 밤에는 침상에서 온 밤을 지새웠다네. 비록 後宮 佳人이 三千이어도, 三千 名 몫의 사랑을 홀로 한 몸에 받았다네. 驪山 離宮의 歡樂은 푸른 구름 속에 이르고, 神仙의 音樂은 바람을 타고 곳곳에 들렸네. 官能的인 노래와 춤은 피리 거문고에 어우러지고, 임금은 온 종일토록 넋 놓고도 不足하다고 하네.14) 그 와중(渦中)에서도 양귀비는 두 번이 사가(私家)로 쫓겨났었다. 그러나 현종의 그리움과 고력사(高力士)15)의 도움으로 환궁(還宮)할 수 있었다. 천보 9 년(서기 750 년)부터 있은 남조(南詔)의 군사 행동에 따른 잇단 패배,16) 천보 10 년의 고선지(高仙芝)의 탈레스 전투 패배, 무기고 화재로 인해 병장기가 37 만개나 소실(燒失)되는 속에서도 화청궁 방문은 계속되었다. 화청궁 방문에는 항상 공경들도 동반되었는데, 천보 12 년(서기 753 년)에는 양귀비의 6 촌 오라비인 양국충(楊國忠)은 물론이고, 그녀의 세 누이들까지도 동행되었다.17) 이를 두고 백거이는 노래하였다. 兄弟姉妹가 모두가 諸侯 班列에 오르게 되어, 새로운 삶의 榮華로운 빛이 家門에 뿜어지네. 緣由로 世上 모든 부모 마음이 바뀌어, 아들보다 딸 낳기를 더 貴重하다고 여기게 되었네.18) 천보 13 년(서기 754 년) 시월에는 현종은 장안을 떠난 지, 만 9 일 만에 화청궁에서 다시 장안으로 돌아왔다. 양국충과 안록산(安祿山)의 대립이 가시화(可視化)된 연유인 것으로 보여 진다. 이듬해 시월에 현종이 다시 현청궁을 찾았을 때에는, 둘의 대립은 더 이상 걷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 혼란한 세태 속에서도 연회는 계속되었다. ‘안록산의 난(亂)’이 바로 임박한 천보 14 년(서기 755 년)에 두보(杜甫)가 비로소 우위솔부(右衛率府)의 주조참군(冑曹參軍)이라는 관직을 얻게 되었다. 지난해에 지인(知人)에게 기탁했던 처자(妻子)를 찾아 봉선현(奉先縣)19)으로 가는 길에 - 아마도 그 해 시월에 - 이곳을 지나게 되었다. 그의 ‘사시(史詩)’20) ‘봉선현으로 가면서(自京赴奉先縣詠懷)’는 당시 세태를 이렇게 고발하였다. 이른 새벽에 驪山을- 지나자니, 17 -


우뚝 솟은 저 곳에 임금께서 계실 터. 妖星이 찬 하늘을 가리니, 내딛는 벼랑길이 미끄럽기도 하여라. 온천의 김들이 피어오르고, 羽林軍의 창들은 부딪혀 소리를 내네. 君臣이 함께 머물며 즐기고, 풍악소리는 어우러져 멀리 울려 퍼지네. 목욕을 허락받은 이들은 높으신 분이고, 연회에 함께한 이들도 庶民은 아니네.21)

화청궁 앞 길. 두보가 읊던 주문(朱門)이 이와 같았을 것이다. 두보는 계속해서 고발하길; 궁중에 선녀 같은 여인이 있고, 안개 낀 듯 얇은 옷으로 옥결 같은 몸을 가렸다네! 客(公卿)들은 담비 가죽옷으로 몸이 다사롭고, 구슬픈 피리소리에 맑은 거문고소리가 따른다네. 객들에게 낙타 족탕을 권하고, 향기로운 귤에 농익은 유자로세. 붉은 칠한 대문 안에는 술과 고기가 썩는데, 길에는 얼어 죽은 사람 뼈로구나. 성함과 쇠함이 지척을 두고 판이한데, 실망스런 탄식을 다시 말할 수 없구나!22) 그의 ‘붉은 칠한 대문 안에는 술과 고기가 썩는데, 길에는 얼어 죽은 사람 뼈로구나(朱門酒肉臭, 路有凍死骨).’은 춘향전(春香傳)에 나오는 이몽룡(李夢龍)의 ‘옥쟁반의 좋은 안주는 천 사람의 기름이요, 금 단지의 좋은 술은 만 사람의 피라!(玉盤佳肴千人膏 金樽美酒萬人血).’의 원조 격으로 널리 회자(膾炙) 되었었다. 마침내 11 월에 안록산은 범양(范陽)에서 거병(擧兵)을 하였다. 화청궁에 머물던 현종은 안록산의 모반 소식을 6 일 후에나 접하게 되었고, 다시 6 일 후에야 장안으로 환궁하게 되었다. 이후로 현종은 다시 화청궁을 찾지 못하였다. 후진(後晋) 때에 이르러 이곳은 도교 사원이 되었다. 송(宋), 원(元), 명(明), 청(淸), 민국(民國) 초(初)에는 잠시나마 이곳이 별궁처럼 이용되기도 하였었다.

- 18 ‘서안사변(西安事變)’ 때 장개석(蔣介石)이 머물던 오간청(五間廳).


화청지와 관련한 역사적 사건은 현종과 양귀비 이야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현종과 양귀비의 연정(戀情)이 있기 약 1500 여 년 전에, ‘여산봉화(驪山烽火)’로 알려진 서주(西周) 유왕(幽王)과 포사(褒姒)의 사련(邪戀)도 화청지에서 있었다(서기전 771 년). 서기 1900 년의 북청사변(北淸事變) - 일명 의화단(義和團) 사건을 은근슬쩍 벌려 놓고 서태후(西太后)와 광서제(光緖帝)는 이곳으로 잠적하였었다. 1936 년 12 월 12 일, 동북군(東北軍) 사령관 장학량(張學良)이 자신의 고토(故土) - 만주(滿洲)를 잠식한 일본의 침략을 모르는 체하고 내부 문제 - 홍군(紅軍)에만 집착하는 장개석(蔣介石)을 체포․구금한 쿠데타 - ‘서안사변(西安事變)’ 장소가 또한 화청지였다. 아들의 아름다운 아내 양귀비(719-756)의 본명은 양옥환이다. 그녀는 애초 당 현종과는 시아버지와 며느리라는 관계에 있었다. 사천성 관리의 딸로 태어나 어린시절 부모를 여의고 친척의 집에서 자랐던 양옥환은 16 세에 그 미모를 인정받아 당 현종의 수많은 아들 중 하나인 수왕의 비로 궁에 들어간다. 수왕의 아내로 산 것이 6 년이 되던 22 세의 어느 날. 양옥환은 당 현종 처소의 환관인 고력사의 은밀한 방문을 받는다. 그리고 불려 간 곳이 당 현종의 술자리. 현종은 수왕비를 보자 한눈에 마음이 끌렸다. 수왕비는 빼어난 미모일 뿐 아니라 매우 이지적인 여성으로 음악, 무용에도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술자리에서 현종이 작곡한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의 악보를 보자 그녀는 즉석에서 이 곡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것이었다. 그녀의 자태는 마치 선녀가 지상에 하강하여 춤을 추는 듯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수왕비야말로 다름 아닌 후의 양귀비(楊貴妃)로서 현종 황제와 양귀비의 로맨스는 이 만남을 계기로 그 막이 오르게 된다 56 세의 시아버지 현종이 22 세의 며느리와 사랑을 불태운다는 것은 당시로서도 충격적인 스캔들이 아닐 수 없었다 시아버지의 귀비로 들어가다. 그러나 아무리 황제라 하더라도 염치는 있는 법. 아들의 아내를 바로 빼앗을 수 없었던 당 현종은 일단 양귀비를 궁에서 내보내 당분간 화산에서 도가의 여도사(女道士)로 생활하게 한다. 그 사이 아들 수왕에게는 위씨 성을 가진 여인과 재혼하도록 주선한다. 마침내 모든 일이 매끄럽게 처리되고 당 현종은 꿈에도 그리던 여인을 맞을 수 있게 되었다. 양옥환은 귀비에 책봉되어 현종의 비로 다시 궁에 들어온다. 양귀비는 비록 비의 신분이었지만 당 현종이 황후의 자리를 비워둔 채 지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황후와도 같은 권력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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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보 10 년(751) 칠월칠석날에 있었던 일이다. 현종은 화청궁에 거동하여 장생전에서 양귀비와 함께 노닐고 있었다. 이윽고 밤이 깊어 하늘에는 은하수가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건만 웬일진지 칠석의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양귀비는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현종은 왜 우느냐고 달래듯 물었으나 양귀비는 그저 울음만을 계속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다. 이윽고 양귀비는 눈물을 닦으면서 띄엄띄엄 그의 심정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하늘에 반짝이는 견우성과 직녀성, 얼마나 아름다운 인연입니까. 저 부부의 지극한 사랑, 영원한 애정이 부럽습니다. 저 부부와 같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에도 자주 기록되어 있지만 나이가 들면 가을 부채처럼 버림을 받는 여자의 허무함, 이런 일들을 생각하면 서글퍼 견딜 수가 없아옵니다......." 양귀비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한 마디 한 마디는 현종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을 손을 서로 붙잡고 그들의 영원한 애정을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에게 맹세하는 것이었다. "하늘에서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連理枝)가 될 지이다." 이 뜻을 풀이하면, '비익조'는 중국 전설에 나오는 새로, 암수가 한 몸이 되어 난다는 데서 사이가 좋은 부부를 상징하고, '연리지' 또한 중국 전설에 나오는 나무로, 뿌리는 둘이지만 가지는 합쳐져 하나가 된다는 데서 부부의 깊은 애정을 상징한다. 현종과 양귀비는 이 '비익조'와 '연리지'처럼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을 맹세한 것이다 당 현종이 양귀비를 맞으면서 당나라는 큰 변화를 맞이한다. 당 현종 치세 전반기는 <개원의 치> 라는 칭호를 받으며 중국 역사상 몇 안되는 태평성세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양귀비를 맞으면서 사랑에 눈이 먼 당 현종에게 정치는 관심 밖의 일이 되었다. 환관과 탐관오리가 득세하면서 일반 백성들은 살림살이는 급속히 몰락하기 시작했고 민심은 흉흉해졌다. 화청지에서의 사랑 그러나 당 현종에게는 오로지 양귀비뿐이었다. 당 현종은 양귀비를 위해 온천인 화청지에 궁을 짓고 오로지 양귀비와 사랑하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양귀비를 자신의 말을 이해하는 꽃, 즉 해어화(解語花) 라 부르며 양귀비의 아름다움 앞에는 꽃조차도 부끄러워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양귀비가 즐겨 먹는다는 이유로 2,000 리 밖에서 나는 여주라는 과실을 매일 공수해오도록 하였고 양귀비가 원하는 모든 사치를 다 누리도록 해주었다. 더불어 그녀의 친인척을 궁과 관직에 대거 등용하여 정치를 - 20 -


모두 다 맡겼다. 이때 등용된 양귀비의 6 촌 오라비 양국충은 건달출신의 부도덕한 간신배로 당 현종 치세 말기를 부정 부패로 얼룩지게 만들었다. 양귀비는 당 현종의 사랑을 붙잡아 두려고 새로운 화장법을 개발하여 미모를 가꾸었다. 양귀비는 날씬하고 가녀린 미녀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통통한 몸매에 희고 매끄러운 피부를 가졌던 양귀비는 온천물에 몸을 닦고 통통한 몸매를 유지하면서 밤이나 낮이나 당 현종을 자신의 침실로 이끌었다. 안녹산의 난과 양귀비의 죽음 양귀비의 몰락은 당 현종 외에 양귀비가 총애하던 두 남자 사이의 알력에서 시작되었다. 양귀비는 중국 변방 돌궐족 출신의 안록산을 가까이 하였다. 안록산은 일개 군졸에서 시작하여 용맹으로 공을 세워 일약 중앙으로 진출한 인물이었다. 20 대의 양귀비는 40 대의 안록산을 수양아들로 삼고 그를 매우 가까이 하였다. 일설에는 양귀비가 안록산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당 현종은 안록산과 양귀비의 관계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양귀비가 안록산을 총애하는 것에 비례하여 더욱 안록산을 높은 지위로 등용하였다. 그것이 양귀비의 6 촌 오빠인 양국충과 안록산 사이에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양국충은 안록산의 성장에 위협을 느끼고 그를 제거하려 하였다. 이를 눈치 챈 안록산은 변방에서 난을 일으키고 곧 이어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까지 쳐들어 왔다. 양귀비와 함께 급히 피난길에 나선 당 현종이 섬서성 마외파에 이르렀을 때였다. 황제의 가마를 운반하던 병사들이 소동을 일으켰다. 나라를 망친 양귀비와 그 일족을 죽이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가지 않겠다고 주저앉은 것이다. 뒤에선 안록산의 군사가 쫓아오고 피난의 가마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자 다급해진 당 현종도 별수 없이 병사들의 요구에 따라 양귀비의 일족을 주살하였다.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고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히 여겼던 양귀비가 인근 절 배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하도록 방치하였다. 안록산의 난이 진압되고 다시 장안으로 돌아온 당 현종은 죽을 때까지 양귀비를 잊지 못했다. 양귀비의 초상화를 앞에 두고 끝내 그녀를 지키지 못한 회한과 그리움 속에서 남은 세월을 보냈다. 잘못된 아름다움은 타인을 미혹하여 판단을 흐리게 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스스로의 목숨마저도 위태롭게 만든다. 그래서 ‘미인 박명’이라는 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예순을 바라보던 현명한 성군, 당 현종의 눈을 흐리게 하여 스스로의 명예도, 나라에 대한 의무도 벗어 던지게 한 양귀비의 매력은 결국 스스로의 명마저 재촉하게 하였다. 여성에게 있어 아름다움은 그 어떤 것보다 가장 축복받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반드시 현명하고 바른 가치관과 함께 빛을 더 발할 수 있다. 양귀비의 - 21고사에서 발견하듯이 그녀가 조금만 더


현명하였더라면 스스로의 목숨도 구하고 더 나아가 당 현종의 치세를 태평 성세로 유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여산

높이 1,274m. 서주(西周)때 여형국(骊戒国)의 소유지였기 때문에 리산[骊山]으로 부르게 되었다. 주(周), 진(秦), 한(汉), 당(唐) 이래 황가원림(皇家园林)이자 이궁(离宫)이었다. 산록에 있는 온천인

漢骊山 리산

화칭츠[华清池]는 대중목욕탕으로 사용되며, 이곳은 삼림공원으로 되었다. 빙젠팅[兵谏亭]과 장제스[蒋介石]가 시안사변[西安事变] 때 은신했던 장소인 스터우펑[石头缝], 라오췬먀오[老君庙]와 로무먀오[老母庙], 산 정상 위에 위치한 봉화대(烽火台) 등의 명소가 있다. 시안사건 1936 년 12 월 12 일 공산군 토벌을 위하여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에 주둔 중인 장쉐량[張學良] 휘하의 구(舊)북동군(만주군)이 난징[南京]에서 독전(督戰)을 위하여 온 장제스[蔣介石]를 감금하고 국공(國共) 내전의 정지와 거국일치에 의한 항일(抗日)을 요구한 사건. 1936 년 국민당 북동군 총사령관 장쉐량(張學良)은 서북군 총사령관 양후청[楊虎城]과 장제스의 지시를 받아 산베이[陝北]의 공산군을 포위하고 있었다. 원래 장쉐량은 만주족의 실력자였으나 일본군에 밀려 북경을 근거로 국민당의 부사령관으로 합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부하들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을 정지하고 항일투쟁에 나서줄 것을 요구하였다. 장쉐량은 공산당과 비밀협정을 맺어 서로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였다. 한편 국내를 먼저 안정시키고 그 다음 국외의 사건을 도모한다는 정책을 취하여 항일투쟁에 소극적이던 장제스는 스스로 공산군에 대한 작전을 독촉하기 위하여 장쉐량군이 포진하고 있던 시안으로 들어와서 화칭츠[華淸池]에 체류하고 있었다. 마침 시안의 청년들은 12·9 운동 1 주년을 기념하는 데모를 하면서 장제스의 군사행동을 견제하였다. 따라서 장쉐량과 양후청 두 사령관은 민중의 요구에 의하여 12 월 12 일 장제스를 체포하고 내전의 정지와 항일투쟁 정치범 석방 등을 요구하였다. 25 일 장제스는 감금에서 해제되어 난징으로 돌아왔고 공산당 저우언라이(周恩來)와 협상을 벌여 공산당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국민당과 공산당은 공동으로 항일투쟁에 나서기로 합의하였다. 당시 소련은 시안사건을 일본이 배후에서 조정한 것이라고 잘못된 판단을 하였다. 이로써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2 번째 국공합작(國共合作)이 이루어져 항일민족통일전선이 결성되었다.

반파유적지

중국 산시성 서안(西安)시 동쪽 교외 6km 에 있는 양사오(앙소, 仰韶)문화의 대표적 유적. 1953 년에 발견되어 다음 해 이후,1 만㎡에 달하는 발굴이 행해져 40 여 개의 주거지(址),200 을 넘는 - 22 -


半坡博物馆 반포보우관

저장고∙제도요(製陶窯),250 여기의 묘장(墓葬)이 조사되어 중원의 앙소문화에 대한 양상이 밝혀졌다. 인면 (人面),물고기를 다룬 특색있는 채도(彩陶)가 들어 있으며,허난∙산시 앙소문화는 이 반파류형이 하나의 기준이 되었고,잠시 후에 묘저구(墓底溝)유형이 이어진다. 발굴된 일부는 그대로 지붕을 씌워서 산시성 박물관 관장의 유적박물관을 통해 공개되고 있다. 부근서 전국묘(戰國墓)도 발견되고 있다. 유물의 대부분은 토기로서 회갈색의 도기 ·붉은간토기[紅陶] ·흑도(黑陶) 등이 있다. 이 채도에는 동물 무늬가 많으나 기하학 무늬도 볼 수 있다. 석기와 골각기도 풍부하고, 석기에는 마제(磨製)가 많은 반면 반마제 ·타제품(打製品)은 적다. 또한 돼지 ·개 ·사슴 ·양 등의 뼈가 좁쌀[粟]의 저장혈 주거지 ·묘 등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아 곡물 ·채소의 재배와 가축을 사육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현종이 양귀비와 함께 살면서 집무를 보던 흥경궁(興慶宮) 유적을

흥경궁공원

공원으로 조성한 것. 넓은 부지에 꾸며진 공원인데, 그나마 원래의 흥경궁 크기에 비하면 반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현재 흥경궁으로 쓰던

兴庆宫 싱칭공

건축물의 초석 일부만 남아 있는 가운데, 양귀비가 좋아했다는 모란 정원 침향정(沈香亭) 등 부분적으로 복원되어 있다. 취해서 편히 누운 듯한 포즈를 한 이백의 조각상도 재미있다. 고루의 서북쪽 코너에 있는 화각항(化覺巷) 내에 위치해 있다. 비교적

청진사

규모가 크고 오래되었으며, 현재에도 보존이 잘 된 이슬람사원이다. 중국의 전통 건축 풍격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슬람교 사원만이 지니는

淸眞寺 칭전쓰

특색을 동시에 품고 있다. 당 천보(天寶) 원년(742 년)에 지어졌으며, 송, 원, 명, 청대로 이어져 가면서 점차 규모가 커져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전체 면적은 13 ㎢이며, 건축 면적은 5 ㎢이고, 동서 방향으로 길게 이어진 장방형의 모습을 띄고 있다. 사원 내에는 약 600 여점의 그림이 있고, 천명이 동시에 절을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최근 20 년간 세계 80 여개 국가의 여행객들과 50 여만 명의 이슬람 신도들이 방문을 했다. 팔로군 서안변사소기념관은 해방이후에 건설된 전쟁기념관으로

팔로군판사처기념 관 八路军西安办事处纪念馆 바루쥔반스추지녠관

항일전쟁 당시의 혁명근거지이다. 이곳에는 공산당 설립이전부터 항일전쟁 전후까지의 현대사가 열루된 역사적인 곳이다. 서안역변의 혁명공원 옆에 있으며, 겉으로는 독일 치과의사의 병원인척 하면서 실제로는 연안(延安)에 들어오려는 사람들에게 신분증을 발행해 주는 곳이었다. 주은래, 주덕, 등소평 등 공산당 간부들이 묶었던 곳이기도 하며, '중국의 붉은 별'이라는 작품의 저자인 미국의 저널리스트 에드가스노도 이곳에서 묵었었다. - 23 -


1935 년 10 월, 모택동이 이만오천리장정(兩萬五千里長征)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연안(延安)에 입성하면서 연안은 중국혁명의 총사령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장개석도 서안을 섬서성과 감수성 침공의 주요기지로서 사용하게 된다. 항일전쟁이 발발하기 전, 공산당의 항일민족통일 전쟁정책의 영향아래 전국 항일운동이 고조되면서 국민당의 동북군과 서북군이 발병하는 '서안사변(西安事變)'이 일어나고 이어 모택동과 장개석의 제 2 차 국공합작이 진행되면서 농공민들의 홍군이 집합한 '홍군연락처(紅軍聯絡處)'가 집합된다. 이 기관은 이후 1 년 뒤에 이름을 '팔로군주서안반사처'로 바꿨는데, 이 곳은 공산당의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현재 이곳은 그때 항일운동의 정신을 기리는 기념관으로서 항일전쟁 당시의 비참한 중국의 상황을 담은 사진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일본인들의 만행을 고발하고 있다.

명대성벽

매표소는 동서남북 방 방위당 1~3 군데씩 위치해 있어 어느 방향이라도 들어갈 수 있다. 입장후 한번 퇴장하면 재입장은 불가능. 입장료는 성인 기준 40 위안. 학생 20 위안.

明代城壁 밍다이청비

전체 길이가 13.6km, 높이가 12m, 폭은 15m 정도로 넓어서 붐비지 않고 자전거를 대여해서 한바퀴 돌 수도 있다. 1 인승 자전거 기준 대여로 40 위안, 보증금 200 위안. 넓은 성을 둘러보게 하기 위해 전동전차도 운행된다. 성벽은 배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안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다. 중간의 누각을 제외하면 그늘이 없으므로 여름철에는 음료수와 부채를 미리 준비하는 게 좋음. 각 방위를 상징하는 동물로 가로등이 만들어져있다.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명나라 홍무제 3 년부터 11 년까지 걸쳐 건설되었으며 동서남북의 4 개문이 그대로 보전되어 있고 주변에는 넓고 깊은 호성하(護城河)가 흐른다. 정문에서 시작되는 정로를 가로지르는 조교(弔橋)가 높여있다. 성 주변의 공원은 1982 년 7 월 섬서성 정부의 주도 하에 환성공원(環城公圓)을 조성해두었으며 성 정상 부근에는 조그마한 화원을 여러개 만들어 놓았다. 안정문(서문), 영령문(남문), 장락문(동문), 안원문(북문) 실크로드 상인들은 주로 서문을 이용하였고, 황제는 남문을 사용하였다. 당나라시대에는 남문(남초문)이 황제의 전용 문이었는데 삼장법사가 서역행에서 귀국했을 때 단 한번의 예외가 주어졌다고 한다.

대명궁

대명궁은 당 태종 정관 8 년(서기 634 년)에 장안성 룡수산에 지어진 궁궐로 원 이름은 영안궁(永安宮)이었다. 당 고종때 대규모로- 확장공사를 하여 663 년 거대한 규모의 대명궁이 24 -


大明宮 따밍공

완성되었고 그 이듬해 대명궁으로 옮겨 집정하였다. 이후 대명궁은 세계 최강국 당나라를 상징하는 거대한 궁궐이자 당나라 권력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된다. 당나라 대명궁은 둘레가 7.6km, 면적은 3.2 ㎢에 달해 자금성의 4 배에 맞먹는 엄청난 규모였다고 한다. 궁성은 11 개가 있었으며 동, 서, 북의 삼면은 곂성벽까지 있었다고 한다. 성 밖의 단봉문 거리는 그 지름이 176m 나 되어 상상이 안갈 정도로 넓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거대했던 대명궁은 서기 896 년 병란으로 완전히 파괴되어 지금은 몇개의 성터만 남아있다. 중국 산시성[陕西省] 셴양[咸阳] 에 위치한 한(漢) 경제(景帝)

한양릉

유계(刘启)와 황후가 합장된 능원(陵园).

汉阳陵 한양링

센양시[咸阳市] 웨이청취[渭城区] 정양전[正阳镇] 장자완[张家湾]에 위치하며, 시안시[西安市]의 북쪽에 있다. 능원(陵园)의 면적은 약 12 ㎢이다. 제릉능원(帝陵陵园), 후릉능원(后陵陵园), 능묘(陵庙), 배장묘원(陪葬墓园), 형도목지(刑徒墓地)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원우천례팅[文物陈列厅]을 참관할 수 있으며, 현재 한양링[汉阳陵]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새로 세워진 디링와이짱캉바오후잔스팅[帝陵外葬坑保护展示厅]이다. 중국에서 처음으로 현대화된 제왕릉(帝王陵)에 위치한 지하박물관(地下博物馆)으로서 총 건축면적이 7,865 ㎡이며, 중점적으로 전시되고 있는 81 개의 외장갱(外葬坑) 중 10 개가 이곳에 있다. 지하의 갱도에 세워졌으며, 유리로 된 통로가 깔려있어 관광객은 발 밑에 있는 유리를 통해 배장품(陪葬品)을 볼 수 있다. 신도는 동에서 서로 향하고 능도 일반적인 남쪽이 아니라 동쪽을 향하고 있다. 한나라 무덤 대부분이 셴양 주변의 넓은 평지 지대에 펼쳐져 있어 우뚝 선 피라미드처럼 보인다. 한경제에게는 두명의 황후가 있었는데, 첫번째 황후는 쫓겨났기 - 25 효경황후의 때문에 황후릉은 두번째 능으로 추측된다.


팔이 없고 벌거벗은 조그마한 병마용갱이 발견되었다. 팔은 나무로 만들어서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이고, 작은 이유는 진나라처럼 무덤을 만들다 망하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정식명칭은 한양릉 박물관으로 묘지답게 지하로 되어 있으며 서안 서북쪽 건현(乾縣)에 있다. 한(漢)나라 제 4 대 황제 경제(景帝)와 황후 동영의 합장릉이 있다. 한양릉 박물관은 관람객이 유리로 된 통로를 따라 발굴 당시 그대로 보존된 부장품을 감상할 수 있으며, 무사, 시 녀, 환관, 각종 동물 등 다양한 도용이 그 시대의 특색 있는 매장풍습 을 보여준다. 진시황릉의 토용과 다른 점은 진시황릉의 병마용은 일 대 일 비율로 만들어져 토용 하나의 크기가 180Cm 가 되지만 한경제 의 한양릉의 토용의 크기는 60Cm 정도이며, 재미있는 것은 한양릉의 토용들은 모두가 모두 자상하고 즐거운 표정으로 나체(裸體) 토용이면 서 팔이 없다는 것이다. 본래는 토용들에 실크로 만든 옷을 입혔으나 그동안 삭아 없어졌고 나무로 만든 팔은 썩어 사라졌으며 토용들의 남 녀 구분이 확실한 것이 특징이다. 한 경제는 문제(文帝)의 아들로 어머니는 두황후(竇皇后)이다. 기원전 179 년 아버지가 황제에 오르자 황태자에 책봉되었고 유학을 배웠으나 두황후는 도교도 유계에게 가르쳤다. 황태자 시절 먼 친척인 오나라 세자와 바둑을 두다 자신이 지게 되었는데 한 수를 물려달라 하였다. 그러나 세자는 거절하였고 이에 화가 난 유계는 우발적인 실수로 바둑 판을 던져 세자를 죽게 한 일화가 있다. 기원전 156 년 선정을 베푼 문제가 사망하자 황제에 즉위하였고 어 머니 두황후는 황태후로, 전한 고조의 측실이자 문제의 어머니인 박태 후는 태황태후가 되었다. 그러나 경제에게는 적자가 없었다. 이에 두태 후는 경제에게 경제의 아우인 양왕 유무를 후계자로 세울 것을 부탁하 였으나 경제는 이를 거절하였다. 기원전 151 년 조모인 박태황태후가 죽자, 경제는 황후인 박황후를 황실을 번성케 하지 못한 죄로 폐하고 다음 황후로 총애받던 후궁인 율씨를 내쳤으며 오히려 다른 후궁인 왕 씨를 황후로 점찍어 그녀의 소생인 유철을 황태자로 삼았다.

한성호

시안의 한대 성벽 해자 위치에 조성된 호수공원.

汉城湖 한청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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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노선 입구 이름

버스정류장이름

封禅门广场入口 50 미터

朱宏机电市场

입구동쪽

大白杨

입구남쪽

李下壕村

입구북쪽

环 1、环 2、211、1、901 路

安门广场入口 500 미터

입구남쪽

福迪汽贸

环 1、环 2、211、1、901 路

三杰广场入口 50 미터

입구북쪽

环 1、环 2、211、1、901 路

崇威桥入口 50 미터

郭家村

环 1、环 2、211、1、901 路

中兴阁入口 50 미터

남쪽

900、235、50、207、221、33、717、708、714 路

尚武桥入口 200 미터

汉城湖封禅门

버스노선

900、235、717、714 路

和平桥入口 50 미터

위치

沣惠路

입구남쪽

环 1、环 2、211、1、902 路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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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차 – 편도 6.27km, 왕복 13km 의 호수를 둘러보려면 전기자동차가 좋아요.

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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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차쇼(水车表演) 시간 10:30-11:00 12:00-12:30 13:30-14:00 15:00-15:30 16:30-17:00 한풍수운(汉风水韵) 시간

10:00 – 10:15 14:00 – 14:15 16:00 – 16:15 18:30 – 18:45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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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상

한교수진(汉桥水镇)

고루 뒷편의 청진사로 들어가는 먹자골목. 당나라시대부터

회족거리 回民街 후이민제 회민가 북원문 보행가 北院門 步行街 베이위안먼 부싱제

실크로드를 따라 교역하던 이슬람교도들이 거주하면서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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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거리

실크로드의 출발점

실크로드기점군상 丝绸之路群雕 스처우지루 쿤디아오

◆ 하서주랑(河西走廊) : 서안에서 난주(蘭州)와 ‘하서 4 군’인 무위(武威)•장액(張掖)•주천(酒 泉)•돈황을 거쳐 옥문관(玉文關)에 이르는 황하 이서의 약 900km(폭 수 km 에서 100km)에 달하는 좁은 길, 오아시스 육로의 일부로서 중요한 국제 통로

서쪽으로 건능황토민속촌을 가다보면 큰길 로타리에 실크로드 출발점 조각상이 있다. 섬서성의 성도 서안은 장안이란 이름이 익숙하게 들린다. 우리가 "요즘 장안의 화제가 무엇이냐?"고 말할 때의 장안이 오늘의 서안이다. 중국 역사에 대해 별 지식이 없는 사람도 만리장성을 쌓은 진시황, 세기의 로맨스를 나눈 당 현종과 양귀비, <서유기>의 주인공 현장법사 등은 잘 알고 있다. 이들이 천하를 호령하고 영화를 누리는가 하면 위업을 쌓고 뼈를 묻었으며, 아직도 곳곳에 이들의 숨소리가 살아 있는 도시가 서안이다. 서안은 기원전 1134 년 서주(西周)가 도읍을 정한 이래 실로 11 왕조의 수도로써 흥망성쇠를 겪은 고도이자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동서문화의 중심지였다. 이곳의 서쪽으로는 사막을 건너 페르시아와 로마로, 남쪽으로는 천축국으로 불리던 인도로, 동쪽으로는 만주와 한국에 이르는 길이 있었다. - 31 -


실크로드의 출발점인 서안을 기념하여 세운 서역 캐러밴의 대규모 조각상. 이 길을 따라 캐러밴과 숱한 전쟁의 출정군사들이 오갔고, 신라의 고승 혜초스님이 <왕오천축국전> 행로를 밟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실크로드라고 말할 때는 흔히 서안을 출발점으로 하여 중앙아시아를 거쳐 지중해 연안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 이 길을 통하여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가 캐러밴의 낙타나 노새 등에 실려 서역으로 보내졌다. 역으로 포도주와 아라비아의 향료와 말, 그리고 로마의 유리그릇이 실려 왔다. 1200 년 전 당의 전성기에는 서안의 인구가 100 만 명을 넘었고 세계 70 여 개국과 교역을 하던 당시 최대의 국제도시였다 서안은 분명 1000 년 동안 천하의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많을 때는 하루에 23 만 마리의 낙타와 노새가 비단을 싣고 떠났다는 기록이 있으니 중국인의 과장벽을 감안하더라도 그 규모가 엄청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크로드(오아시스 육로)의 동단이나 출발지로 오해--- 옛 서시의 개원문(開遠 門)과 ‘실크로드 기점 군상’(석조구조물); 동단이나 출발지가 아니라 지나가 는 요지일 뿐, ‘파수절류(灞水折柳’)와 ‘위수절류(渭水折柳)’가 이를 증명, 동 쪽으로 떠나는 사람들에게는 파수 가에서, 서쪽으로 떠나는 사람들에게는 위 수 가에서 버드나무를 꺾어 둥근 고리를 만들어 주었다는 고사, 고리를 뜻하 는 ‘환(環)은 ‘돌아오다’란 뜻의 ‘환(還)’자와 발음 같으므로 빨리 돌아오라는 염원을 담은 작별인사, 이런 것을 해음(諧音)현상이라고 함 ▶ 실크로드의 개척과 서안--- 기원전 2C 한무제의 장건(張騫) 파견(제 1 차 서역 사행), 즉 ‘서역착공(西域鑿空)’, 이를 계기로 파미르 고원을 중심으로 한 오 아시스로 개척, 그 시발점이 한 수도인 장안, 그래서 당대까지 이 육로의 남 ․ 중 ․ 북도의 기점으로 인식, ▶ 실크로드를 통한 교류 입증 유물 #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 -- 중국 최대 ‘석조문고(石造文 庫)’라고 하는 ‘비림(碑林)’(한대부터 청대까지 명필 - 32 -


석비 1,095 기 소장) 에 있는 경교(景敎, 네스코리우스파 기독교=고대동방기독교)비, 781 년 건립, 고 2.7m; 내용은 경교 교리와 의례 및 7c 중엽 중국에 들어온 후 약 150 년간(태종~덕종 5 대) 전파과정 기술; 동서문명 융합상, 상부 와 비신. 좌대로 구성, 상부는 용이 큰 여의주(불교)를 받쳐 들고 있고 그 밑에 십자가(기독교)가 연꽃과 뜬구름(부운 浮雲, 도교) 속에 새겨져 있음, 기독교 용어들을 유교나 불교, 도교에서 차용, 하느님=건(乾, 종 교=법(法), 주교=법주(法主), 구원=제도(濟度) 사원=법당(法堂) 등, 그래 서 일부에서는 ‘비경배불(非景非佛)’(경교도 아니고 불교도 아님)라고 혹평; 기독교 동전사 연구의 권위자인 골든(E.A.Goldon)여사는 1917 년 이 비의 모조품을 금강산 장안사(長安寺) 경내에 건립 명대의 서문, 실크로드의 출발점이다.

개원문 开远门站 카이위엔먼좐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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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미인 이야기 현재 중국에서 여성들이 아름답다고 알려진 곳은 대강 세군데다. 하나는 북방의 패션도시 따리엔(大連)이다. 따리엔은 소비산업이 발달하고, 여성들의 키가 큰 한편 북방계의 영향을 받아 동양적인 미녀들이 많은 곳으로 알려졌다. 중국미인대회에서 따리엔은 우리나라 대구에 못지 않은 좋은 성적을 내는 곳이다. 다음은 항저우다. 항저우는 경국지색(傾國之色) 서시(西施)로 인해 미녀의 고향으로 이름나기 시작했다. 항저우는 이 역사를 바탕으로 유흥업을 도시의 가장 중요한 여행상품으로 만들었다. 사실 항저우에서 여행자들이 시후(西湖)에 쏟아붓는 돈보다는 여자에 쏟아붓는 돈이 많다고 할 정도다. 물론 그 만큼 다양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 항저우다. 항저우는 시에서 내보내는 여행 홍보광고에서 조차 백인 남성과 항저우 여성의 로맨스를 담은 내용을 내보내 이목을 끌만큼 여성을 이용하는 도시다. 다른 한 곳은 청두(成都)나 충칭(重慶) 등 쓰촨 지역이다. 쓰촨 역시 전통적으로 미녀를 많이 배출한 곳이다. 하지만 꾸미기에 따라 여성의 외모가 크게 달리지는 한편, 아름다운 여성들이 대도시로 몰리는 상황 때문인지, 베이징이나, 상하이, 광저우, 선전 등 대단위의 소비도시에서는 눈에 띄는 미모를 가진 여성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광저우나 선전 등 남방 도시의 여성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미인과 거리가 먼데도 불구하고, 이런 미인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산업화와 더불어 도시로 몰려든 현상을 말해준다. 하지만 필자에게 여성들이 아름답다고 느껴진 곳 중 하나는 옌안(延安)이었다. 샨시의 중심도시 시안에서 북북동으로 한참이나 떨어진-옌안은 33 - 대장정을 마친 홍군이 10 년가량


머물면서 중국의 기반을 만든 혁명의 도시다. 혁명의 도시라지만 주변과 연결되기 어려운 지형 때문에 여전히 궁벽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 도시에서 만난 여성들은 시골답지 않게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중국 역사를 살펴봤을 때, 이쪽 여성들의 미모가 출중한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중국 4 대 미인 가운데 하나인 양귀비(楊貴妃)의 고향이 샨시성 화인(華陰)이고, 역시 4 대 미인 가운데 하나인 초선(貂蟬)의 고향도 성은 다르지만 거리상 그다지 멀지 않은 산시(山西)성 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곳의 여성들이 아름다운 것은 역사적 근원이 있다. 하지만 ‘가인박명’(佳人薄命)이라는 성어를 증명하듯 이곳 출신의 미녀들도 항상 슬픈 운명을 품고 있었다. 또 이 성어와 더불어 같이 따라다니는 ‘경국지색’(傾國之色 나라를 기울이게하는 여자)도 그다지 그른 말이 아니라고 중국 역사는 증명한다. 중국 역사에서 ‘경국지색’으로 악명을 높인 첫 여인은 아마도 은(殷 BC1600~BC 1046)나라를 멸망시키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달기’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미모에 빠진 주왕(紂王)을 휘둘러 주지육림(酒池肉林)의 향락을 즐기는 한편 비간(比干)을 주살시키게 해 은나라가 주(周) 무왕에게 무너지게 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하지만 은나라의 교훈에도 불구하고 서주(西周)가 무너진 것은 달기와 같은 ‘경국지색’ 포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주(西周)의 마지막 왕인 유왕(幽王)은 은 주왕과 마찬가지로 포사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온갖 일을 다했는데, 그녀의 일화 가운데 하나가 ‘중국판 양치기 소년’이야기인 봉화에 관한 것이다. 포사는 태어난 후 한 번도 웃는 일이 없었고, 유왕의 비가 된 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유왕은 그녀를 웃기려고 온갖 꾀를 쓰다가 가짜로 봉화를 올려 제후를 허탕치는 걸 보여줬는데, 포사가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유왕은 포사를 웃겨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위해 수시로 봉화를 올렸고, 제후들은 서서히 반감을 갖기 시작했다. BC 771 년 포사의 아들에게 태자가 물려지는 것을 분노한 태자가 궁궐을 침입했을 때, 봉화를 올려도 아무도 오지 않아서 결국 주는 멸망하게 된다. 역시 경국지색으로 인해 멸망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됐다. 이 역사의 주인공 포사 역시 샨시 바오청(褒城) 태생이라는 점은 생각하면 샨시와 산시는 경국지색의 본향이라고 하기에 그르지 않다. 중국 4 대 미인 가운데 하나로 삼국지의 중간에 있는 초선(貂蟬) 역시 산시(山西) 신저우가 고향이다. 역사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소설에는 계속해서 등장하는 그녀는 15 살에 궁궐로 들어가 초선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처음에는 왕윤(王允)의 의녀로 있는데, 왕윤은 동탁을 죽이기 위해 연환계로 그녀를 동탁에게 보낸다. 결국 왕윤은 초선에게 당대의 맹장인 여포의 질투심을 이용해 동탁을 죽인다. 이후 초선은 여포의 첩이 됐다가 훗날 여포가 조조에게 붙잡혀 죽을 때, 같이 처형된다. 그녀는 ‘경국지색’은 아니었지만 당대를 호령하던 동탁과 당대 최고의 호걸인 여포를 쥐락펴락했다는 점에서 경국지색에 버금간다고 할 수 있다. 4 대 미인 가운데 가장 드라마틱한 모습으로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한 경국지색의 대표는 양귀비(719~756)일 것이다. 5 악 가운데 하나인 화산(華山)의 중앙부에 위치한 화인(華陰)현 태생인 그녀는 원래 궁에 당 현종(재위 712∼756)의 아들의 비로 들어갔다가 그녀에게 한눈에 반한 현종과 사랑을 독차지했다. 하지만 결국 그녀 일족이 정권을 휘둘러 당나라는 혼란에 빠지고, 결국 안록산의 난이 일어난다. 그녀와 더불어 서쪽으로 피신을 떠나던 현종은 주변에서 양귀비를 죽이지 않으면 보위가 어렵다고 권고하자 당시의 도읍인 셴양(咸陽)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우꽁(武功)부근에서 죽음을 당한다. 그밖에도 산시성은 서한무제(西漢武帝)의 후궁인 된 위자부(衛子夫), 중국 역사상 첫 여황제에 등극한 무측천(武則天)등 수많은 미녀의 고향이기도 하다. 산시에서 한참으로 남으로 내려와 창지앙이 지나는 지점에는 창지앙 산샤가 있다. 중국 최고의 명소로 꼽히는 산샤댐이 건설되면서 잠기는 곳 중에 중국 4 대 미녀중 하나인 왕소군(王昭君)의 고향마을도 있다. 강쪽으로는 굴원의 고향 즈구이가 있고, 북쪽으로는 중국의 숨어있는 비경 - 34 선농지아(神農架)가 있는 이곳은 중국 미녀의 고향 쓰촨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다.


왕소군은 전한(前漢) 말 원제(元帝 재위 BC 49∼BC 33)의 궁녀로 다양한 이야기 속에 주인공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녀는 흉노와의 친화를 위해 보내던 화번공주로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갔는데, 그녀가 화번공주로 떠나는 과정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남겼다. 빼어난 미모를 가진 그녀는 다른 후궁들과 달리 초상화를 그리는 화공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았고, 때문에 화공이 그녀를 추하게 그려, 그녀가 화번공주로 뽑혔는데, 떠나는 날 그녀의 미모를 본 왕이 크게 후회하고, 그림을 그린 화공을 처형했다는 고사의 주인공이다. 사실 필자에게 여성들의 미모로 가장 인상적인 곳이 바로 왕소군의 고향과 그 주변도시였다. 샤오산샤의 출발지인 우산(巫山), 파둥(巴東) 등 왕소군 고향과 부근 도시의 여성들은 발달되지 못한 주변 환경으로 인해 꾸밀 기회가 드문데도 불구하고 미모에 있어서는 어느 도시의 여성들 못지 않게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다. 시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아낙에서부터, 어린 소녀들에 이르기까지 왕소군의 후손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미모가 뛰어났다. 하지만 이런 곳 역시 중국에서 급속히 번지고 있는 매춘 문화의 예외는 아니었다. 일주일 코스에 수천불하는 호화여객선은 물론이고, 여행자들이 쉬어가는 작은 도시의 호텔에도 여성 매매춘은 극성을 부리고 있었다. 샤오산샤(小三峽)의 출발지여서 여행자가 가장 많이 몰리는 우산의 비교적 깨끗한 호텔들에는 2 백위안이면 몸을 파는 여성이 넘쳐나고, 이주를 앞둔 구시가지의 퇴락한 거리에는 20 위안이면 몸을 던지는 여성들이 지나는 이들을 붙잡고 있었다. 그녀들의 선조인 왕소군은 전한의 황실에 의해 군사적으로 강한 흉노에게 화번공주로 보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면, 지금의 여인들은 이미 그곳까지 완전히 지배한 돈의 볼모가 되어 살아가고 있었다. 시선 이백은 왕소군의 운명을 두고 “살아선 황금이 없어 초상화를 잘못 그리게 하더니, 죽어선 청총을 남겨 사람들을 탄식케 한다. 生乏黃金枉圖畵 死留靑塚使人嗟”라고 말했는데, 지금 이백이 살았다면 어떻게 읊었을까 자못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비단 이들 뿐만 아니라 중국에는 미녀에 관한 고사가 많다. 천하의 영웅 항우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우미인을 비롯해 근대 중국사를 뒤집은 서태후도 ‘경국지색’으로 분리될 수 있다. 가깝게는 문화대혁명을 주동해 이미 쇠약한 마오쩌둥을 대신해 정권을 잡으려 했던 지앙칭(江靑)도 그런 여인 가운데 하나다. 1960 년대 들어 정신이 쇠약해 그녀를 바로 볼 수 없던 마오쩌둥에게 다가가는 한편 자신과 뜻을 같이한 4 인방 등을 앞세워 그녀는 문화대혁명을 주도하고, 마오의 죽음에 맞추어 권력장악을 꿈꾼다. 하지만 마오가 일단 점찍은 후계자 화궈펑의 동의하에 예젠잉(葉劍英) 등 원로파들의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해 그녀의 꿈은 물거품이 된다. 하지만 그녀의 포부는 실패했지만 그녀는 중국의 역사를 뒤집기에 충분한 여걸이었다. 서태후나 지앙칭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시간과 체제는 바뀌지만 ‘경국지색’의 출현가능성은 배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서안의 먹거리 비앙비앙면 견과류 봄이면 거리에서 호두를 굽는 장면들을 볼 수 있다. 호두를 구우면 호두 껍질에 파열이 일어나 까먹기가 편해진다. 가을에는 밤 굽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말린 건조식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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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이지방은 기마민족과 유목민족이 문화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주나라도 목축을 중심으로 했고, 진나라도 목축을 중심으로 했었다. 한나라의 가장 위협적인 적은 장안 근처에 거주하는 유목민족들이었고, 당나라의 가장 큰 적도 관중 일대의 유목민족들이었다. 말을 타며 이동을 해야 하는 문화에서 말린 식품은 필수이다. 다만 내륙지방이라 어류가 없으므로 대부분 과일을 건조해서 먹는 편. 감자요리

회족들이 잔치할 때 먹는 음식 양고기 마장피

마장은 일종의 소스로 꺠와 땅콩 등의 견과류로 만든 것이다. 우동 같은 면에 마장소스를 얹은 것. 감병 스즈삥(柿子饼)

홍시와 밀가루를 섞어 피를 만들고 그 속에 팥 속을 만들어 지져낸 것. 매실주스 수완메이쯔(酸梅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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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꾸이찡가오(玫瑰镜糕)

바바오시판(八宝稀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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