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y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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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7

우주의 고아는 조국을 잃은 민우만이 아니다. 이 땅에서 태어난 사람 중 대다수가 자신을 우주의 고아라고 느끼지 않을까. 자신이 태어난 땅을 어쩔 수 없이 떠나와 다시는 돌아가지 못한 채 언제까지라도 이방인으로 살아야 하는 이들의 외로움은, 이 땅에서 태어났으면서도 도무지 이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이들의 외로움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 「우주 고아의 외로움」 중에서 -


2013년 7월호·모두모아 96권 | 차례

여는 글

인생은 한 판의 유머 | 이재복•4

동시

힘 약한 참새들처럼 / 한번 알고 나면 | 권영상•8

처음 언니가 되던 날 / 할머니의 저것들 | 이성자•10

토코투칸 / 당나귀야 | 박소명•12

방물장수 / 강적 | 박은경 •15

집으로 가는 길 / 참새 떼 | 이현영 •17

응모 동시

개구리 노래방 | 남은우 •19

응모 동시를 읽고

자신감으로 밀고 가자 | 장영복•20

동화

동찬이와 형민이 | 이숙현•31

어떤 꽃길 | 오미경 •41

응모 동화

계단 | 이인호•54

응모 동화를 읽고

고급 독자를 만나고 싶은 열망 | 최나미•65

서평

자전거에 대한 모든 것

『달리는 기계, 개화차, 자전거』 | 오진원•87

만남

아이들의 순수한 본성을 지켜 주는 교육을 꿈꾸다

동림자유학교 김찬정 선생님 | 편집부•94 교실 이야기

힘내라, 오한성! | 배훈•107

한 아이

우리 놀이터에 티라놈이 산다 | 김연희•115

삐뚤빼뚤

짜장면 / 아이 키우기 | 김관우 •122

개교기념일 | 하지운 •123

나 좋으면 TV 꺼 | 이재원 •124

안내

청소년 소설 원고 모집 안내 •53

원고를 기다립니다•74

정기 구독 안내•120

2013년 여름 대토론회 안내•121

<어린이와 문학〉 운영위원·후원회원•126

작가의 책가방

배추머리 구구는 내 스타일

『내 이름은 구구 스니커즈』 | 정연철•75

우주 고아의 외로움

표지 그림 : 임채담 (주)모나미, 소담출판사 등지에서 디자이너로 근무하다가 1993년 제2회

『우주 비행』, 『류명성 통일빵집』 | 김해원•82

황금도깨비상 신인우수상을 수상하며 일러스트레이터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작품으로는 『작은 사춘기』, 『살칸 왕자의 모험』, 『장화 신은 고양이』 등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지금은 거 미똥구멍 친구들과 글공부도 열심히 하며 동화 나라에서 즐겁게 놀고 있습니다.


여는 글 | 이재복

경계해야 할 지점은 작가들 스스로 자신 작품의 수준을 팔리고 안 팔리고 의 잣대로만 바라보는 자존감의 결여일 것이다.

인생은 한 판의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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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급격하게 아동문학이 일종의 대중 문예 시대로 접어들기 시작하였다. 대중들의 관심을 받는 문예가 되면서 이 판에도 자 본의 논리가 작동하게 되었다. 자본은 나름의 아주 긍정적인 요소를 많이 갖고 있다. 자본이 유입되는 곳에는 늘 사람들이 모이게 되어 있고, 이렇게 사람들 이 많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다양한 시도들이 생겨난다. 다양한 작품들도 생겨나고, 다양한 출판사들도 생겨나고, 작가들의 층이 두터워지고……. 1

그래서 자본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창조적인 활동을 유도하는 순기능은 이

요즘 우리 사회는 젊은이들에게 너무나 자본에 대한 패배감을 심어 주

루 말할 수가 없다. 역시 자본이 개입되는 곳에 엄청난 속도로 변화의 물결

고 있다. 자본(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자본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로 점점 내몰리고 있다.

이 생겨난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의 존재 운동은 지나치면, 즉 태과하면 힘의 균형이

절대 빈곤에서는 벗어났다고 하지만 삶과 죽음의 경계로까지 내몰린 아

기울어지면서 본래의 순기능도 방향을 바꾸어, 자신이 창조해 놓은 판을

이들이 너무나 많은 현실에서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자기모순의 함정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자본

지금 우리 사회 문제에 응답할 수 있을까?

의 논리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세상은 늘 이윤을 창출해야만 하고, 늘 성장

물론 작가는 작품으로 먼저 응답을 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요즘 작가들

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근대화 과정을 통해서 성장을 거듭해 온 이 지구촌

로부터도 여기저기서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다는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의 자원과 시스템은 이제는 더 성장을 거듭할 만큼의 내적인 힘을 다 쏟아

듣는다. 열심히 쓰는데 작품이 팔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도 이

버리고 말았다. 더는 성장할 여력이 없는데, 이윤을 창출해서 성장해야만

렇게 열심히 쓴 작품이라면 좀 팔릴 것도 같은데, 기본 부수도 잘 안 나간

살아간다고 하니까, 결국 겉으로 드러나는 경제의 모습은, 늘 불경기의 불

다는 소리를 듣고는 무언가 지금 이 어린이, 청소년을 둘러싼 출판문화 생

안한 얼굴을 하고 있다. 365일이 늘 불경기일 수밖에 없다. 늘 불안한 얼굴

태계가 고장이 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을 하고 있는 자본의 논리에 매몰된 세상에 그럼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

4•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여는 글•5


은 또 어떤 방법으로 응답할 수 있을까?

을 가져오는 씨앗이 되기도 한다. 이걸 바라는 것이다. 운동(놀이)의 바람과 자본의 바람이 서로 기대기도 하고 맞서기도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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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살아갈 때, 생태계는 건강하게 굴러갈 것이다. 어느 한 쪽의 바람이 위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다가, 얼마 전 한 가지 놀이를 시작해 보았다. 이

축되거나 지나치면 출판문화를 둘러싼 생태계도 건강성을 잃어버리게 될

땅의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돈이 없어도, 자본의 무게에 주눅 들지 않고 재

것이다. 지금은 자본의 바람이 너무나 강하게 불어, 위축된 운동의 바람을

미있게 놀 수 있다는 걸 한번 보여 주는 방법은 없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조금 더 불러일으켜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해 보았다. 그러다가 출판문화 운동을 한번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작가든지 원고를 하나 써 주면, 그 원고를 인터넷 공간이든 공개를

4

해서, 그 원고를 읽고, ‘아, 이 원고는 꼭 책으로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월간 〈어린이와 문학〉 5기 운영진이 6월호부터 시작해 새로운 출발을 하

드는 분들은 자본을 보내달라는 광고를 내 볼 작정이다. 그야말로 뜬구름

였다. 〈어린이와 문학〉은 존재 자체가 하나의 상징성을 갖고 있다. 자본의

잡는 허무맹랑한 실험일지도 모르겠다.

바람이 거센 현실에서 〈어린이와 문학〉의 존재는 이런 세상에 길들여져 살

아동문학의 가장 큰 본질, 동화의 가장 큰 핵심은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고 있는 우리의 내면을 돌아보게 하는 거울의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낭만성에 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옛이야기만 보더라도 그렇지 않은가?

내가 좋아하는 말씀이 하나 있다.

공주가 징그러운 개구리를 벽에 확 던졌을 때, 짠 하고 왕자로 변신하지 않

인생은 한 판의 유머.

는가? 한순간에 세상이 그렇게 바뀌는 것이다. 이 낭만성의 본질은 또한

5기 운영진 여러분들에게 이 말씀을 응원 겸 전해 드린다.

놀이 정신으로 통한다. 아무리 힘들다 하더라도,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 에게는 이 동화의 낭만성이 갖고 있는 놀이 정신이 몸에 배어 있기에, 현실 에서 직접 동화를 몸으로 살아 보는 실험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0년에 책 한 권 내는 걸 일단 목표로 하기 때문에 아마도 이러한 출판 문화 운동이 지금 자본의 바람이 극대화되어 일으키는 세상 문제에 조금 이라도 어떤 효율적인 응답의 결과를 가져오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단 지 이러한 느림보 출판문화 운동은 하나의 놀이로, 상징으로 지금 우리 사 회에 꼭 필요한 실험이라 생각한다. 상징은 실제 현실에서 살아가는 사람 들의 내면 심리에 조그만 균열이나 에너지의 낙차를 일으켜 사유의 전환

6•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여는 글•7


동시 | 권영상

힘 약한 참새들처럼

한번 알고 나면

냉이 꽃다지는

작은 꽃,

모여 살지.

벼룩이자리꽃을 봤다.

힘 약한 참새들처럼,

쪼그리고 앉아야

시골 정자나무 밑에 모여드는

볼까 말까 작은 꽃.

할배들처럼. 암만 작아도 봄볕을

한번 알고 나니

나누어 쪼아먹는 참새들처럼,

자꾸 보인다.

정자나무 그늘을 나누어 베고 눕는 할배들처럼

친구와 이야기하며 가는데도 내 눈에 반짝 띈다.

냉이 꽃다지는 모여 살지.

몰라 그렇지,

같이 이야기하고, 같이 놀지.

알고 나면 언뜻 언뜻 자꾸 보인다.

권영상 강릉의 초당에서 태어나 〈강원일보〉와 소년중앙문학상에 동시가 당선되었다. 동시집 『구방아, 목 욕 가자』, 『엄마와 털실뭉치』 등 여러 권이 있고, 세종아동문학상, 소천아동문학상 등을 받았다.

8•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동시•9


동시 | 이성자

처음 언니가 되던 날

할머니의 저것들

할아버지, 김대우

시골에 혼자 사는

할머니, 박화자

할머니 댁에 들렀어요 마당가에 질경이들 천지예요

아버지, 김경규 어머니, 이미령

당장 뽑아 버리려고 호미를 가져왔어요

오빠, 김수호 나는 언니, 김정은

-그냥 놔둬라!

내 동생, 우연희

할머니가 손사래를 쳐요

우리 집 강아지, 깜지 저것들 노는 것 보고 있으면 교통사고로 아빠 엄마 다 잃어버린 채

할머니의 하루해가 훌쩍 잘도 간대요

우리 집으로 살러 온, 아홉 살 먼 친척 아이

나는 샘나서 오리주둥이가 되었어요.

두 눈에 눈물 그렁그렁 달고 있는 연희에게 제일 먼저 우리 가족 이름 적어 주었어요 언니가 해 줄 수 있는 게 뭔지 아직은 잘 몰라서요.

이성자 1992년에 〈아동문학평론〉 동시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였고, 1996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 시가 당선되었다. 작품집으로 동시집 『너도 알 거야』, 『키다리가 되었다가 난쟁이가 되었다가』, 『입안이 근질근질』, 동화집 『형이라고 부를 자신 있니?』, 『딱 한 가지 소원』, 『뭐가 다른데?』 등이 있다. 눈높이아동문학상, 방정환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현재 광주교육대학교 대학원 외래교수로 재직 중이다.

10•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동시•11


동시 | 박소명

토코투칸* -브라질 포스 두 이구아수*에서

끄악끄으악 시끄러운 음치

밀림의 귀염둥이

커다란 공기주머니 부리

왕부리새

무겁지도 않은지

토코토코

고개도 꼿꼿

투칸투칸

균형도 척척

이름처럼 박자 맞춰 노래할 것 같은데

박소명 2002년에 〈월간문학〉에 동시가, 200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가 당선되었다. 은하수문학 상, 오늘의동시문학상, 황금펜아동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동시집으로 『산기차 강기차』, 『빗방울의 더하기』, 『꿀벌 우체부』, 그림책 『든든이와 푸름이』, 『창창창 창구』 등이 있다.

12•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토코투칸 : 브라질 밀림에 사는 새, 공기주머니로 된 커다란 부리로 체온 조절을 한다. *포스 두 이구아수 : 브라질 이구아수 폭포가 있는 지역 이름.

동시•13


동시 | 박은경

당나귀야

방물장수

-인도 라다크*에서

방물장수 나비 아주머니 찻길로 나온

무얼 팔러 가시나

어린 당나귀야. 복사꽃한테는 연지를 야! 비켜!

옥잠화한테는 은비녀를

덜커덩 덜컹

금낭화한테는 복주머니를

고함치는 트럭 좀 봐. 보자기를 너! 죽을래?

묶었다가 풀었다가

빠아앙 빵

묶었다가 풀었다가

매몰찬 자동차 좀 봐.

나풀나풀 나풀나풀

길을 잃은 거야?

방물장수 나비 아주머니

누구를 찾니?

꽃마다 팔러 가시네

늘 놀던 밀밭 들길 싫증 난 거니? 흙먼지 속에 댕그라니 서서 아직도 두리번거리는 당나귀야.

*라다크: 인도 대륙 북부 잠무카슈미르 주에 속하는 카슈미르 동부 지역의 높고 메마른 땅.

14•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박은경 2011년에 〈어린이와 문학〉에 추천되어 등단했다. 서울의 초등학교에서 3학년 아이들과 함께 놀 며 배우고 있다.

동시•15


동시 | 이현영

강적

집으로 가는 길

숲길에서 주운 도토리 한 알

바람이 따라와요

내 방 책상 위에 두었다

구름이 따라와요 나비가 따라와요

어느 날 보니

까만 점 같은 작은 구멍 하나

학교는 멀리서 눈도 안 떼고

누군가

보고 있어요

두꺼운 껍질을 뚫고

방 하나 짓고

혼자

들어앉아 있다

집으로 가는 길 혼자 다 데리고 가는 길

그 녀석은 나처럼 공부하다가 물 마시려고 화장실 가려고 들락거리지도 않고 방 안에 틀어박혀 꼼짝도 안 한다 기웃거려도 깜깜 무소식이다 내 방에 또 방을 짓고 사는 놈 도대체 넌!

이현영 2011년에 〈어린이와 문학〉으로 등단했고, 2013년 동시 「벨소리」 외 11편으로 제11회 푸른문학상 새로운 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하동 적량초등학교에서 도서관 사서로 재직 중이다.

16•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동시•17


응모 동시 | 남은우

참새 떼

개구리 노래방

포르르 같이 날아오고

초여름밤 한 때 영업으로

포르르 같이 날아가는

평생 행복 보장!!

참새 떼

골짝골짝 파고든

째끄락짹짹

프랜차이즈 개구리 노래방

이 나무에서

우리 동네 진출 코앞이다

째끄락짹짹 저 나무로 떼 지어 난다

저수지 딸려 있죠,

산 아래라 공기 좋죠,

우르르 운동장 나왔다가

농약 근처에도 안 간 논이죠,

우르르 교실로 몰려가는

손으로 김매 주죠,

일학년 아이들

흠이라면 아파트촌 산책로에 있다는 건데…….

왁자지껄 같이 떠들고

봄비 중개인

우당탕탕 같이 나간다

침 튀기며

개구리 투자자 모으고 있다

일학년 아이들 우리 학교 참새 떼

남은우 밤이면 ‘개구리 노래방’에 들러 개구리들 노래를 훼방하고, ‘무지개폭포’로 무지개를 잡으러 떠나 는 천방지축, 동시 쓰는 아줌마이다.

18•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응모 동시•19


응모 동시를 읽고 | 장영복

동시 쓰기란 장님 코끼리 만지기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다 잘 썼다는 칭찬을 들으면 금세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동시를 써낼 수 있을 것

자신감으로 밀고 가자

같아 우쭐하기도 했었지요. 시를 너무 몰랐던 시간임에는 틀림없으나 그 때 지녔던 뜬금없는 자신감이 그립기도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감 이 사라지고 말았으니까요. 무지했던 그 시기가 철없는 어린 날처럼 소중 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동시를 보내 주신 열세 분도 지금 소중한 시간을 보 내고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함에도 어쭙잖은 칭찬이나 늘어놓을 수 없으니 짧고 거친 잣대에 대해 너그러운 이해를 먼저 구해야겠습니다.

「국희」 외 2편을 보내 주신 분의 시들은 매끄럽게 읽혔습니다. 「국희」를 39편의 동시를 읽고 또 읽어 봅니다. 읽을 때마다 어떤 작품을 뽑을까라

읽으면서 첫 작품부터 괜찮은데, 라는 생각에 미소가 번졌습니다. 눈이 보

는 심사자로서가 아니라 내가 거쳐 온 습작기(아직 습작기를 졸업했다는

이지 않는 친구 국희가 좋아하는 병철이 생각을 하는 사이 병철이 있는 쪽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로 시간여행을 떠나곤 했습니다. 길다고도 짧다고

으로 ‘귀가 늘어난다’라는 표현에 눈길이 갔지요.

도 할 수 없는 시간이 흘러갔고, 그때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언뜻 솟아오 르는 기억들이 있어서 그때가 그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곧 고개가 갸웃거려졌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국희가 병철이 를 좋아하는 것이 진한 울림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병철이를 좋아하

나는 시를 쓰겠다는 꿈을 꾸어 본 적이 없습니다. 창작과는 아주 먼 자리

는 사람은 내 친구 국희인데 더 설레는 것은 왜 국희의 친구인 시의 화자

에서 살아온 탓에 꿈을 갖지 못했었지요. 그래서인지 동화를 공부할 때도

였을까요. 정말 눈이 보이지 않는 국희보다 눈이 보이는 화자가 설렐까요.

동시를 공부할 때도 스스로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습니다. 동화를 먼저 공

국희가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라면서 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건 가능한가

부했지만 제대로 써 보기도 전에 동시를 만나게 되었고, 시를 좋아했었다

요. 글감의 사실여부를 떠나서 ‘눈이 보이지 않는 국희가 병철이를 좋아한

는 생각으로 꿈은 동시로 옮겨졌습니다. 동시를 쓰려면 시에 대한 이론부

다’는 이야기가 품고 있는 설렘과 안타까움이 미약합니다. 두 번째 작품은

터 탄탄하게 공부해야 올바른 방법이겠으나 합평부터 시작하였으니 나의

「꽃」입니다. 선생님을 꽃으로 즉 정물화로 그린 아이의 이야기를 쓰셨는 데, 무난하게 읽혔으나 시를 읽고 떠오르는 그림이 새롭거나 시적 감흥이

장영복 본지 기획위원. 2004년 가을 〈아동문학평론〉으로 등단하였다. 『여름휴가』, 『곤충을 읽어요』, 『대 장장이를 꿈꾸다』, 『울 애기 예쁘지』 등을 출간하였다.

20•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오지 않았습니다. 「새」는 마술사 아빠와 할머니와 함께 사는 아이가 화자

응모 동시를 읽고•21


입니다. 마술사 아빠가 돌아가신 할머니를 땅에 묻습니다. 화자는 아빠가

쓸해진 나를 발견하지요. 아이도 즐겁고 어른도 즐거운 동시를 써보시기

할머니를 땅에 묻는 일도 마술이라고 여깁니다. 그리하여 ‘무덤에서 흰 새

바랍니다.

가 훨훨 날아갑니다.’라고 맺고 있지요. 영원한 이별, 죽음을 바라보는 시

「고무풍선 하늘가에」 외 두 편을 보내 주신 분입니다. 「고무풍선 하늘가

인의 시선은 어떠한가 생각해 봅니다. ‘할머니의 죽음’은 아빠에게 어머니

에」 1연에서 ‘부풀어 오른 풍선의 마음’은 ‘하늘보다 키가 크려는 마음’인

를 잃음이며 어린아이 또한 할머니와 영원히 이별하는 것입니다.

가요? 1연에서 2연으로 전개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하늘 보다/높은 키/

할머니의 죽음이나 눈이 보이지 않는 국희의 이야기가 모두 무거운 글

보이려고’라는 표현도 어색합니다.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게 더 좋아 보입

감이지요. 그러한 주제를 동시로 가져올 때는 더더욱 많은 고민이 필요하

니다. 제목의 ‘하늘가’는 어디일까요? 「분꽃」의 ‘동그란 까만 꽃씨’는 꾸며

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병철이를 좋아하는 국희를 보고 가슴이 설레는 것

주는 단어가 겹쳐 어색하고 읽기에 방해가 됩니다. ‘새파란 싹’도 일반적으

은 시의 화자가 아니라 국희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국희를 느끼는 독자

로 많이 쓰는 표현이긴 하지요. 그런데 까만 씨앗에서 새로 나오는 새싹에

가 되고 싶습니다. 시를 읽으며 진정한 사랑의 떨림을 느끼고, 영원한 이별

‘새파랗다’라는 표현을 붙이는 건 적절하지 않아 보입니다. ‘새파랗다’를

이 무엇인지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힘들고 슬픈

사전에서 찾아보면 ‘매우 파랗다’라고 나옵니다. 이제 막 나오는 새싹과는

일일지라도 말입니다.

거리가 있어요. 「산길」은 시로서의 느낌이 적습니다. 세 편을 읽고 나서 이

「고구마」는 호박고구마를 좋아하지만 아이가 좋아하는 밤고구마를 찌

제 막 동시를 써보려고 첫발을 디딘 분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고개를 갸웃

는 엄마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시입니다. 저학년 아이들에게 읽힐 만한 동

거려 보았습니다. 동시를 배울 때 저 역시 고민하지 않고 나오는 대로 썼습

시입니다. 1연의 두 번째 행 ‘더’, 2연 1행의 ‘항상’, ‘-만’ 등의 표현을 조금

니다. 갈수록 적절한 꾸밈말 찾기가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더

더 다듬었으면 좋겠습니다. 소리 내어 읽으면서 시의 리듬을 살펴보기 바

군요. 익숙해진 꾸밈말도 그냥 쓰지 말고 적절한 표현을 찾아 보십시오. 자

랍니다. 「앞머리」를 커튼으로 표현한 것도 재미있습니다. 커튼을 내려 주

연을 표현한 꾸밈말이라면 정말로 그러한지 확인도 해 보면 좋겠습니다.

름살 가렸다고 좋아서 웃는 엄마, 머리 모양이 달라진 엄마를 보고 즐거워

「할머니 이사」는 저도 시골에 늙은 어머니가 계시기에 가슴이 뭉클해집

하는 가족들 모습이 금방 그려집니다. 「책꽂이」는 한자를 활용한 동시로

니다. 할머니들의 한 마디 한 마디 하시는 말씀이 그냥 시라고 해도 과언이

군요. 다른 작품들과 견주는 동시로서 앞세울만 한 무엇이 찾아지지 않았

아니지요. 그런 할머니 말씀에서 시의 씨앗을 받을 때는 말 한 마디에 스몄

습니다. 「고구마」와 「앞머리」 두 편이 무난하지만 아이가 화자로 씌어졌을

을 웅숭깊은 뜻을 담아내는 고민을 더 해야 합니다. 삶터인 ‘앞산’과 ‘논밭’

뿐 시에서 어른의 모습이 금세 드러나는 것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어른인

그리고 ‘내 집’을 지키시던 할머니가 병원 중환자실로 입원하신 걸 ‘이사’

나를 내세우려 할 때 아이들의 반응은 대개 썰렁하답니다. 그럴 때 나도 쓸

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이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도 삶터를 지키는

22•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응모 동시를 읽고•23


할머니가 생을 마감할 시간이 다가오면서 두고 가는 ‘앞산’, ‘논밭’, ‘내 집’

보일 뿐 아니라 시선도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놀이터에 새로 놓인 정글짐

에 담긴 지극함을 담아내는 데는 아쉽다는 생각입니다. 「내 마음 속에 사

과 낡은 놀이기구들이 주인공인 「개업」을 읽으니 낡은 놀이기구들이 안쓰

는 강아지」를 봅니다. 길을 걸을 때 강아지들이 따라오면 참 난감하지요.

럽게 다가옵니다. 약간의 불만이랄까요. 제목이 차지하는 비중 때문에 시

강아지가 나를 따라오는 동안 나와 강아지 사이에는 여러 생각들이 빠르

의 맛을 놓친 것 같습니다. ‘개업’이란 ‘영업을 시작하다’ 즉, 돈을 벌기 위

게 스쳐가지요. 달려들지나 않으면 좋은데, 라며 겁을 먹다가 달아날까 마

해 문(가게 등)을 여는 것을 말하지요. 돈을 벌기 위해 열었으니 손님이 없

음먹었다가 달아나면 만만하게 보고 달려들지도 모르는데, 하고 흠칫 돌

으면 ‘파리가 날리는 것’입니다. 놀이터에 정글짐이 새로 놓였다는 것은 의

아보면 초라한 떠돌이 강아지가 불쌍해지기도 합니다. 이 시에서도 강아

미가 조금 다릅니다. 영업의 의미가 담긴 ‘개업’으로 첫 행을 시작하다보니

지를 마음에 살게 하는 특별한 것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직은 그저 누구

맨 마지막 행 ‘파리만 날린다’로 맺게 되지요. 개업과 파리 날린다의 의미

나 겪을 수 있는 평범한 시로 읽힙니다. 「패션 모델」은 뭐랄까요. ‘나무’의

가 놀이기구와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그릴 수 있는 따뜻한 그림을 흐린다

생태라는 관점에서 보면 안타까운 ‘반짝이 옷’ 선물인데요. 그와 다르게 보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운동장 한쪽에 정글짐이 새로 놓였고 낡은 미끄럼

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구가 매달린 줄을 줄줄이

틀이나 시소, 철봉, 그네(페인트가 벗겨졌을지도 모를)등이 부러운 눈으로

감고 불편하게 서 있는 나무들 생각에 새로운 상상력이 가로막히는 건 어

정글짐 쪽으로 몰려가는 아이들을 응시하고 있는 것으로도 인상적인 시가

쩔 수 없습니다.

될 듯한데요. 「급식 검사」는 내용이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습니다. 4연

「아파트」 「구름 위에서」 「나뭇가지」 등 세 편을 보내오셨습니다. 「나뭇

‘맛있는 저녁밥 기다리는/우리 집 아기 돼지들/얼마나 속상할까?’라고 하

가지」를 먼저 보겠습니다. ‘마르고 딱딱한 회색 나뭇가지/봄이 왔는지 알

셨어요. 시를 다 읽고 나서 우리 집 돼지들이 잔반을 먹고 사는 돼지들이라

아보려고/연둣빛 새싹아기를 내 보냈어요’ 하셨지요. 겨울을 지낸 나무들

고 얼른 읽혀지지 않았습니다. 시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보완하면 좋

은 모두 연둣빛 새싹을 먼저 내보내지 않습니다. 어떤 나무는 꽃부터 피우

겠습니다. 「국회의원 선거」도 좋은 글감이지만 아쉽습니다. 5, 6연은 합쳐

고, 어떤 나무는 잎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제목을 「나뭇가지」라고 하기

서 다듬으면 좋을 듯합니다. 6연의 ‘편하게 벌 수 있는 일당 오만 원에/밭

보다는 시의 씨앗을 안겨 준 나무 이름을 제목으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에서 일하던 일손들/우루루루 선거유세장으로 몰려갔다.’는 것은 오해를

보내오신 세 편 모두 길이가 깁니다. 또한 이미 다른 이들이 수없이 썼던

살 수 있습니다. 일당 오만 원을 받고 선거유세를 돕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내용이어서 독자에게 다가갈 시인만의 씨앗이 만져지지 않았습니다. 익숙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법의 이치에 맞지 않을 수 있고요. 몇몇 아쉬움에도

한 소재일수록 새로운 상상력을 에너지로 삼아야 합니다.

불구하고 세 편 모두 좋은 시가 될 수 있는 씨앗을 품고 있어서 반가이 읽

「개업」, 「급식 검사」, 「국회의원 선거」 세 편을 보내 주신 분은 글감이 돋

24•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었습니다.

응모 동시를 읽고•25


「봄꿈」은 늘어집니다. 1, 2연을 읽을 때 저의 머릿속엔 좋은 그림이 그

봐」는 시가 늘어져서 흐름을 방해합니다. 2연은 간결하게 다듬었으면 좋

려졌습니다. 그런데 3연 이후에 사라지고 말았어요. 1, 2연만 말끔하게 다

겠습니다. 5연의 ‘라일락’은 봄볕을 찾아가는 이른 봄에 피는 꽃이라기보

듬어도 좋은 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3연 이후는 독자가 상상할 수 있는

다 5월경에 피어나는 꽃이니 봄볕을 찾아가는 이른 봄에 적절하게 보이지

공간을 시인이 그려주고 있어서 친절이 지나칩니다. 시를 쓰는 사람이라

않습니다. 기후변화로 인해 날씨가 변덕스럽기는 해도 일반적인 개화시기

면 누구나 겪는 일일 거예요. 시에 드러내야 할 표현과 생략해도 좋은 표현

와 맞아야 하지 않을까요. ‘더딘 향’이란 표현도 진부합니다. 시인의 시선

의 경계가 어디인지 늘 혼란스럽습니다. 「논바닥」도 좋은 발견입니다. 1연

이 아이들이좋아할만 한 거리에 있음은 칭찬해 주고 싶습니다.

의 ‘보드란’과 ‘엄마’ 두 단어 중 하나만 택해도 괜찮을 듯하며, 3연 1행 ‘구

「개구리 노래방」은 웃음이 났습니다. 너부죽한 주둥이를 물 밖으로 내

름과 나무 모두 떠나간 늦여름’에서 구름과 나무가 떠났다는 건 무엇을 가

밀고 개골개골 ‘봄비 중개인’을 보채는 개구리들이 그려져서 절로 웃음이

리키는지 갸웃거려집니다. 「움직이는 등대」는 안개가 잔뜩 낀 도로 위를

났습니다. 인간에게 밀려나는 개구리들에게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무논이

달리는 차들을 떠올리며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앞의 응모자처럼 좋은 시

나 골짜기가 얼마나 소중한지요. 사람들은 금싸라기 땅이라고 돈으로 계

를 쓰실 수 있는 힘이 느껴져서 반가웠습니다.

산하지만 그들에겐 생존의 땅입니다. 「까치은행」과 「똥 그림」도 자연을 살

「코끼리는 코로 먹지만」외 2편을 보내오신 응모자님은 발랄한 상상력

피면서 얻은 글감에 상상력을 보태어 쓴 시들인데요. 「똥 그림」 4연의 「괭

을 가진 분인 것 같습니다. 토끼가 코로 말한다는 걸 발견했을 때 토끼 코

이갈매기, 2013년, 갯바위에 똥화.」를 이해하는 데 오래 걸렸습니다. 그림

를 보며 얼마나 즐거웠을까요. 갈매기들이 새우깡을 받아먹으면서 어떤

에 붙이는 이름표를 이르는 것인지요, 그렇다면 제목처럼 ‘똥 그림’이라고

이야기를 나누는지 얼마나 궁금했을까요. 높은 아파트에 가려진 그늘에

하면 되지요. ‘똥화’라는 생뚱한 단어에 새로운 뜻이 담긴 것은 아니라고

서 봄볕을 향해 더듬더듬 지팡이를 짚어 가는 할아버지를 안타까이 바라

읽혀지거든요. 나머지는 읽는 데 무리가 없었습니다. 시어들이 조금 거칠

보는 시선은 곱기만 합니다. 완성도를 떠나 발랄함과 진실함이 전해 옵니

기는 하지만 비교적 고른 완성도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다만 읽고 나서 재

다. 시들은 전체적으로 늘어집니다. 발랄한 상상력을 돋보이게 하는 탄탄

미만이 아니라 자연에 다가앉게 하고 자연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

한 전개가 필요합니다. 「코끼리는 코로 먹지만」에 토끼가 씰룩이는 모습

을 품게 하는 씨앗이 있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내 봅니다. 아이들이 바로 그

이나 「석모도 갈매기 새우깡 낚아채는 법」은 ‘야야야’, ‘야이야’ 등이 어디

곳, 개구리 노래방에 다가앉을 수 있는 동기를 시를 읽으며 얻을 수 있기를

에 몇 번이나 들어가야 리듬을 살릴 수 있는지 연구해 보셔요. 또한 세 편

바래봅니다. 그러한 마음을 담아 「개구리 노래방」을 추천합니다.

모두 제목이 적절한지도 검토해야 합니다. 「석모도 갈매기 새우깡 낚아채

「민들레」 외 2편을 살펴봅니다. 민들레를 보고 ‘가장 용감한 꽃’, ‘가장

는 법」을 읽고 제목과 썩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좀 비켜

지혜로운 꽃’ 그러면서도 ‘가장 평범한 꽃’이라는 시상을 얻으셨군요. 시를

26•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응모 동시를 읽고•27


읽고 나서 그렇구나 하고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았습니다. 3연에서 흐름이

습니다. 「오줌 편지」는 깜찍한 발견입니다. 정말 강아지들의 언어로 편지

이어지지 않아요. 3,4연을 정리해야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또한 모든 들꽃

를 쓰고 읽는 것인지 모르지요. 1연의 ‘봉투 없이’는 군더더기로 보입니다.

의 삶이 민들레처럼 용감하고 지혜롭고 평범하다는 생각을 하니 공감 가

2연 ‘골목 모퉁이에 한 줄 찍!/전봇대에도 한 줄 찍!/화단에도 한 줄 찍!/

는 부분이 적었습니다. 「폐광에」를 읽어봅니다. 석탄이 없어 더 이상 찾는

갈겨 쓴다’라고 쓴 것도 다듬어 보면 좋겠습니다. ‘-찍!’이라고 행마다 강

이가 없는 폐광에 황금박쥐가 살고 있다는 시입니다. 사람만 아니라면 폐

조해서 읽자니 리듬감에도 영향을 주고 모양도 거추장스럽게 보입니다.

광에도 생명이 깃드는 것까지는 참 좋았습니다. 다음 행에 ‘황금’이 생긴다

담백한 표현으로 강아지 걸음처럼 발랄한 리듬감을 살려보세요. 「토끼와

고 힘을 준 것이 시로서는 힘이 빠지는 느낌입니다. ‘황금박쥐’라는 이름을

거북이」는 무난하고, 「나는 바퀴벌레」는 특별한 글감입니다. 바퀴벌레를

가진 그 생물은 제 모습이 황금인지 은인지 알지 못하며 이름 또한 인간이

싫어하는 우리에게 바퀴벌레가 ‘이제 나마저 쫓아내면/넌 혼자야.’라고 충

붙인 존재지요. ‘황금’은 인간이 무수한 생명들을 해쳐가며 탐내는 물질이

고를 하는군요. 한번쯤 새겨볼 만합니다. 참신하기는 하나 바퀴벌레가 너

고요. 황금박쥐는 황금보다 더욱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어 아쉬웠습니다.

무 화풀이를 하는 것은 아닌지요. 3연의 ‘그이’라는 표현이 어색하고 맞춤

「청소하는 날」 외 2편을 보내오신 응모자 님은 일상에서 찾아낸 글감을

법에 맞지 않는 ‘놀라킨’은 읽는데 방해가 되었습니다. 확신이 가지 않는

시로 쓰셨습니다. ‘청소하는 날이 신 난다’라는 1연을 읽고 묻고 싶었습니

단어는 반드시 사전을 찾아 확인해야 합니다. 애써 찾아낸 글감을 어떻게

다. “정말요?” 2연에 ‘총채’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먼지떨이’라는 쉬운 우

다듬어야 하는지 무엇을 담을 것인지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숙제입니다.

리말이 있지요. 그런데 “정말 총채로 청소를 합니까?” 하고 또 묻고 싶습

「천리포 사구」 등 3편의 동시를 보내주신 분의 차례입니다. 「천리포 사

니다. 아이들이 혹 청소 시간이 신 난다면 청소 후 깨끗한 집 안을 즐기는

구」는 여러 번 읽어야 했습니다. 주체가 게으른 파도인지, 천리포 사구인

어른하고는 다르게 ‘짜장면’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지 잡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괜스레’는 누구의 움직임을 말하는 것일까

「오색 꽃」과 「새 지갑」에서도 안타깝지만 시가 될 씨앗을 발견할 수는 없

요. 사구가 그랬다는 것인지 파도가 그랬다는 것인지, 아니면 시의 밖에 있

었습니다. 언제나 마주하는 일상에도 자신만의 이야기는 많습니다. 무엇

는 시인 자신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흔들리는 현상은 「꽃 진

으로 어떻게 찾을지 자신만의 도구를 갖추고 나면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자리」에서도 발견됩니다. 1연에서 4연까지 꽃이 지는 모습을 설명하다가

않을 것입니다. 돋보기처럼 들여다볼 일인지, 아니면 현미경을 들이대고

5연에선 ‘지는 것이 슬픈 게 아니다/슬픈 건 못 피는 꽃이다’라고 시인이

분석을 할 일인지, 망원렌즈처럼 멀리 떨어져 지켜 볼 일인지, 나름의 방법

목소리를 냅니다. 그리고 다시 마지막 연에 ‘꽃 진 자리에/봉긋, 옹골진/

을 찾아서 특별한 동시를 빚어 보기 바랍니다.

열매하나 매달린다’라고 쓰셨어요. 그래서 독자인 나는 시인이 꽃 지는 모

「오줌 편지」, 「토끼와 거북이」, 「나는 바퀴벌레」는 모두 재미있게 읽었

28•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습을 그려 보고 싶었던 것인지, 지는 꽃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함이었는

응모 동시를 읽고•29


동화 | 이숙현

지 혼란스러웠습니다. 마지막 6연을 읽으면 어떤 모습으로 꽃이 지든 꽃이 진 자리에는 열매가 달린다는 의미를 담고 싶었다는 것으로 읽히고, 5연까 지 읽으면 어떻게 꽃이 지든 꽃이 지는 것보다 피어나지 못하는 꽃이 슬픈 것이다, 라는 의미를 담고 싶은 듯도 했습니다. 「봄」이란 겨울 다음에 오는

동찬이와 형민이

계절의 이름이기에 실체는 없습니다. 그러한 봄에게 ‘꽉 닫힌 입술에 틈이 생긴다//입 꼬리도 살짝 올라 앉는다’라는 표현을 하려면 독자가 무엇에 기대어 봄의 입술이나 입꼬리를 상상할지 한 가지 단서를 제공해야 합니 다. 막연한 진술로는 봄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쓰는 일만큼 읽는 일도 중 요합니다. 많이 읽고 많이 써 보기를 바랍니다.

봄을 지낸 시기라 그런지 봄과 관련된 시가 여러 편이었습니다. 새싹 돋 는 것만 보아도 들꽃 하나 피어나는 것만 보아도 시가 나올 듯합니다. 시

드디어, 끝났어요!

한편 쓰는 순간 아름다운 명시라도 쓴 것처럼 행복해지고요. 그러니 이달

모두 한 줄로 선생님을 따라가요. 동찬이만 빼고요. 맨 꼴찌로 서 있던

에 추천이 안 되었어도 실망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쭉 동시를

동찬이는 다다다다, 복도를 가로질러 튀어 나갔어요.

쓰며 행복할 거니까요. 「개구리 노래방」을 추천하면서 평을 마칩니다. 들

“김동찬! 뛰면 안 돼요!”

보 박힌 눈으로 남의 눈의 티끌을 집어내려니 휴우~ 힘이 부칩니다. 어설

선생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동찬이는 신발장까지 뛰어나갔어요.

픈 평 가운데 쓴소리라 여겨지는 것이 있더라도 훅 날려 버리십시오. 혹 날

운동화를 꺼내 탁, 집어던지고, 운동화에 발을 쑤셔 넣었지요. 그리고 발

아가지지 않는 쓴소리가 있다면 딱지가 앉을 때까지 심사자를 원망하면

뒤꿈치가 다 보이게 운동화 접어 신고 후다다닥, 유치원 마당으로 걸어

서, 지금 가진 자신감 그대로 꿋꿋이 밀고 나갑시다.

나갔어요.

모두 건필을!

“히히, 내가 일등이다!”

이숙현 경북 구미, 오래된 아파트들 한가운데 이야기숲 옆구리에 끼고 있는 금오유치원과 그 속에 운 좋 게 마련한 별별어린이도서관에서 별별 일 만들어가며 아이들과 어른들과 복작복작 지내고 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점점 궁리가 많아진다. 지은 책으로는 『초코칩 쿠키, 안녕』이 있다.

30•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동화•31


동찬이는 돌아보며 웃었어요. 맨 꼴찌는 시시해요.

“동찬이가…….”

“김동찬!”

형민이가 다시 울먹여요.

선생님이 동찬이를 불러요. 선생님 옆에 형민이가 주저앉아 울먹이고

“뭐? 또? 동찬이 어디 있니?”

있어요. 친구들이 형민이를 둘러싸고 말했어요.

형민이는 바로 앞에 있는 동찬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어요. 형민이 엄

“선생님, 동찬이가 형민이 밀쳤어요.”

마는 고개를 돌려 동찬이를 보았어요. 동찬이도 형민이 엄마를 올려다보

“가방에 달린 공룡 때문이에요.”

았어요. 마주친 눈빛이 번쩍, 했어요. 동찬이는 눈동자를 오른쪽 왼쪽 굴렸

“공룡 꼬리가 슉, 하고 할퀴었어요.”

어요. 빠르게 굴렸어요.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요. 어지러워요.

웃고 있던 동찬이 얼굴이 굳었어요. 동찬이는 가방에 달린 티라노사우 르스를 가만히 만져 보았어요. 꼬리가 뾰족해요. 가슴이 따끔, 해요.

“네가 동찬이니?” 형민이 엄마가 물었어요.

“공룡 꼬리가 눈을 안 찔러서 다행이구나.”

“내가 안 그랬어요.”

선생님은 형민이 얼굴에 약을 발라 주며 말했어요.

동찬이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어요.

“어때? 이제 좀 괜찮지?”

티라노사우르스는 원래 제멋대로라고요.

형민이가 고개를 끄덕였어요. 눈물 뚝 그치고요.

동찬이 입술이 달싹거렸어요. 하지만 입 밖으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

선생님이 형민이 손을 잡고 동찬이에게 다가왔어요.

아요.

“동찬아, 형민이한테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네가 그랬잖아!”

형민이가 동찬이를 물끄러미 바라봐요. 동찬이도 형민이를 쳐다보았어

형민이가 엄마 옆에서 소리쳤어요.

요. 형민이 왼쪽 눈 가장자리에 생긴 빨간 선이 또렷하게 보여요. 형민이는

“난 몰랐다구!”

아픈지 얼굴을 찡그렸어요. 동찬이는 두 손가락으로 아랫입술을 잡아 흔

동찬이도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어요.

들었어요.

“친구한테 그렇게 소리 지르면 안 되지.”

미안해. 내가 티라노사우르스 혼내 줄게.

형민이 엄마가 동찬이한테 말했어요.

이렇게 말하고 싶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아요.

“먼저 소리 지른 건 형민이라구요!”

그때였어요.

동찬이는 소리를 빽 내질렀어요.

“어머, 형민아, 얼굴 왜 그래? 누가 그랬어?”

“울보 이형민, 바보 송충이!”

형민이 엄마였어요. 동찬이는 움찔, 놀라 뒤로 물러났어요.

“너어…….”

32•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동화•33


형민이 입이 삐죽삐죽해요.

다행히 화난 고릴라는 사라지고 없었어요. 친구들도 모두 집에 갔는지

“동찬아, 아줌마랑 잠깐 얘기 좀 하자.”

안 보여요. 유치원 마당에는 형민이 엄마와 형민이, 동찬이 엄마와 동찬이,

형민이 엄마가 동찬이한테 손을 뻗었어요. 벌게진 얼굴로요. 동찬이는

그리고 선생님만 있었어요. 세모 모양으로 서 있어요.

며칠 전 선생님이 보여준 그림책이 생각났어요. “으아아, 화난 고릴라다!” 동찬이는 소리 지르며 달아났어요. 화난 고릴라한테 잡히면 큰일 나요.

“아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요?” 동찬이 엄마가 동찬이를 품에 안으며 물었어요. 선생님과 형민이 엄마 를 번갈아 쳐다보면서요.

“얘, 거기 서봐, 잠깐만 있어 보라니까!”

“그게, 그러니까……”

화난 고릴라가 마구 뒤쫓아 와요. 벌렁거리는 콧구멍으로 엄청난 콧김

선생님은 차근차근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이야기를 들으며 형민이 엄마

을 내뿜으면서요. 아까는 얼굴만 발갰는데 이제 몸 전체가 빨개요. 동찬이

와 동찬이 엄마는 서로 마주 보았어요. 마주친 눈빛이 번쩍, 했어요.

를 쳐다보는 눈빛이 무시무시해요. 어서 안전한 곳으로 도망가야 해요. 동

먼저 말을 꺼낸 건 동찬이 엄마였어요. 동찬이 엄마 말이 끝나자마자 형

찬이는 놀이터 구석 자리가 생각났어요. 거기라면 화난 고릴라도 못 찾을

민이 엄마가 말했어요. 형민이 엄마 말이 끝나자마자 동찬이 엄마가 말했

거예요. 동찬이는 서둘러 뛰어갔어요. 운동화 한 짝이 벗겨졌어요. 휘청거

고요. 말소리는 점점 커졌어요. 선생님은 그대로 멈춰라, 자세로 가운데 서

리며 몸이 갸우뚱하던 동찬이는 그만 엎어지고 말았어요.

있었어요. 자꾸만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면서요. 엄마 곁에 선 동찬이는 덥고, 지루하고, 심심했어요. 그래서 맞은편에 서

팍!

있는 형민이와 눈이 마주쳤을 때, 메롱, 하고 혓바닥을 날름 내밀었지요.

아야!

그랬더니 형민이도 메롱, 하고 혓바닥을 내밀지 뭐예요.

“동찬아, 동찬아!”

메롱, 메에롱!

누군가 동찬이 이름을 불러요. 눈을 떠 보니, 엄마가 보여요.

메롱, 메롱, 메에에롱!

“엄마!” “동찬이 괜찮니? 아휴, 무릎이 다 까졌네.”

동찬이와 형민이는 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혀를 점점 더 길게 뺐어요.

동찬이는 무릎에 난 피를 보고 눈물이 찔끔, 날 뻔했어요. 하지만 꾹 참 았어요. 누구처럼 울보 되긴 싫으니까요. 선생님이 금세 약을 바른 다음 밴

메롱, 메롱, 메롱, 메에에에롱!

드를 붙여 주었어요.

메롱, 메롱, 메롱, 메에에에에에에롱!

34•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동화•35


그러다 동찬이 입에서 침이 튀어나왔어요. 침은 반짝, 빛나며 바닥에 뚝

“엄청 사나운 사자랑 정말 무서운 호랑이랑 싸우면 누가 이길까?”

떨어졌지요. 형민이는 쿱, 입을 틀어막고 웃었어요. 신이 난 동찬이는 입안

동찬이와 형민이는 으르렁거리는 사자와 입을 쩍, 벌리며 크허엉, 소리

에 있는 침을 가득 모아 퉤, 뱉었어요. 형민이도 동찬이 따라 침을 퉤, 뱉었

치는 호랑이가 싸우는 모습을 상상했어요. 사자가 풀쩍 덤비면 호랑이가

어요. 둘은 마주 보고 낄낄거렸어요.

물러나고, 호랑이가 와락 덤비면 사자가 물러나고……. 좀처럼 누가 이길

“형민아!”

지 알 수 없었어요.

“동찬아!”

“근데, 우리 엄마, 화 안 낼 때는 개미 같다. 부지런히 일해.”

엄마들의 화난 목소리가 빠르게 날아들었어요.

“우리 엄마, 화 안 낼 때는 나비 같은데. 팔랑팔랑 잘 돌아다녀.”

“이크, 도망가자!”

“개미랑 나비는 안 싸울 것 같다.”

동찬이는 형민이 손을 잡고 냅다 놀이터로 달아났어요. 가방도 던져 버

“안 싸우고 친구 하면 좋겠다.”

리고요. “여긴 안전해.” 동찬이는 놀이터 가장자리 구석진 곳으로 형민이를 데리고 갔어요. 그

동찬이랑 형민이는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였어요. 가만히 일어나 살며 시 마당을 내다보았어요. 아무 소리도 안 나요. “어떻게 된 거지?”

곳은 안쪽으로 움푹 들어가 있어서 마당에서 잘 보이지 않아요. 나무와

형민이가 속삭였어요. 동찬이가 어깨를 으쓱, 했어요.

나무 사이, 둘이 딱 숨기 좋은 공간도 있고요. 둘은 쪼그리고 나란히 앉았

“어, 앵두다!”

어요.

형민이가 놀이터 가장자리 앵두나무를 가리켰어요.

“우리 엄마는 화나면 도깨비처럼 뿔이 난다.”

“선생님이 앵두 익으면 먹어도 된다고 했어.”

“우리 엄마는 화나면 불 뿜는 용이 돼.”

동찬이는 순식간에 빨간 앵두를 한 움큼 땄어요. 바로 입에 넣으려다 말

“뿔 달린 도깨비하고 불 뿜는 용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고 형민이한테 손바닥을 내밀어요. 동글동글 아기 사과 같은 빨간 앵두가

동찬이와 형민이는 뿔 달린 도깨비와 불 뿜는 용이 싸우는 모습을 상상

손바닥에 가득해요. 형민이는 앵두를 집어 한입에 쏙 넣었어요.

했어요. 커다란 용은 쉬지 않고 불덩이를 내뿜었고, 뿔 달린 도깨비는 뿔

“짜다!”

달린 도깨비 방망이로 불덩이를 멀리멀리 보내 버렸어요. 누가 이길지 알

형민이가 얼굴을 찌푸렸어요. 형민이 왼쪽 눈가 가장자리 빨간 선도 꿈

수 없었어요.

틀거렸어요. 동찬이는 가슴이 콩콩 뛰었어요.

“우리 엄마는 화나면 엄청 사나운 사자 같아.”

“아깐 미안해, 형민아.”

“우리 엄마는 화나면 정말 무서운 호랑이 같은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동찬이가 말했어요.

36•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동화•37


“응?”

돌려 벌떡 일어났고요. 순간, 동찬이는 눈앞이 번쩍, 했어요.

형민이가 앵두 씨를 손바닥에 뱉다 말고, 동찬이를 쳐다봤어요.

“어, 피, 피 나!”

“미. 안. 하. 다. 구!”

형민이가 울먹였어요. 동찬이 코에서 피가 뚝, 뚝, 떨어지고 있었어요.

동찬이는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어요. 그러고는 형민이 얼굴에 바짝 다

“도, 동찬아, 괜찮아?”

가갔어요.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고 있는 힘을 다해 호, 하고 불었어요. 상 처에 대고 호, 호, 불었어요.

동찬이는 아무 말도 못 했어요. 코피가 입으로 들어갈 것 같아 말을 할 수 없었어요.

“그만 해, 간지러워!”

“자, 잠깐만, 기, 기다려, 내가 얘기하고 올게.”

형민이는 동찬이를 떠밀었어요. 동찬이가 엉덩방아를 찧었어요.

형민이는 마당으로 뛰쳐나갔어요.

“괜찮아. 이젠 하나도 안 아파.”

“동찬이 코피 나요!”

형민이가 동찬이한테 손을 내밀었어요.

“뭐?”

“정말?”

선생님은 약상자를 챙겨 헐레벌떡 뛰어갔어요. 동찬이 엄마와 형민이

동찬이가 형민이 손을 잡고 벌떡 일어났어요.

엄마도 허겁지겁 달려갔고요. 그 사이, 형민이는 동찬이를 부둥켜안고 미

“응.”

끄럼틀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었어요. 둘 다 여기저기 코피가 묻어 옷이 엉

형민이가 고개를 끄덕였어요. 동찬이는 활짝 웃으며, 앵두 한 움큼을 모

망이었어요.

두 입안에 털어 넣었어요.

“동찬아!”

“우리, 미끄럼틀 타자!”

“형민아!”

형민이가 미끄럼틀로 달려갔어요. 동찬이도 신 나서 뛰어갔어요. 앵두

엄마들은 깜짝 놀라 멈춰 섰어요. 선생님은 동찬이한테 다가가 코피를

씨를 투, 투, 투, 투, 뱉으면서요. 날아갈 것처럼 몸이 가벼웠어요. 동찬이와

닦아 내고 콧구멍에 약솜을 넣어 주었어요.

형민이는 미끄럼틀 타고 신 나게 놀았어요. 누워서도 타고, 엎드려서도 타

“형민아, 어떻게 된 거야?”

고, 둘이 잡고서도 탔어요.

선생님이 형민이한테 물었어요.

“동찬아, 여기, 왕거미 있어!”

“내가 왕거미를 보고, 이렇게 고개를 돌렸는데…… 동찬이랑 꽝, 부딪혔

미끄럼틀 올라가는 계단 끝, 모퉁이에서 형민이가 말했어요.

어요.”

“왕거미? 어디, 어디?”

형민이는 찔끔, 난 눈물을 닦으며 말했어요.

동찬이가 형민이한테 다가가 고개를 숙였어요. 형민이는 고개를 뒤로

“미안해, 동찬아…….”

38•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동화•39


동화 | 오미경

“괜찮아, 모르고 그런 거잖아.” 동찬이가 헤, 웃었어요. “동찬이, 다른 데 다친 곳은 없니?” 동찬이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코피는 더 이상 나지 않았어요. “다행이다.”

어떤 꽃길

선생님이 동찬이 얼굴에 묻은 코피를 닦아 주며 말했어요. “엄마, 나 동찬이랑 더 놀다 가면 안 돼?” “뭐? 동찬이가 자꾸 때려서 싫다며?” “내가 언제? 나, 그런 말 한 적 없어!” “아니, 얘가…….” “엄마, 나도 형민이랑 더 놀래.” “아니, 이제 그만 가자.”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어떻게 해?”

“싫어! 안 가!”

엄마의 성화로 많은 봉사를 해 보았지만 이런 건 처음이었다.

“아니, 얘가…….”

“그냥 손만 잡고 걸으면 돼. 봉사 시간도 중요하지만 봉사의 질도 중요

“형민아, 우리 왕거미 보러 다시 가 보자!”

해.”

“그래!”

엄마는 신호등이 걸리자 거울을 보면서 립스틱을 칠했다.

형민이가 동찬이에게 손을 내밀었어요. 동찬이는 형민이 손을 냉큼 잡

“도서관에서 책 정리하는 거랑은 차원이 달라. 나중에 널 돋보이게 하는

았지요. 순간, 동찬이가 갑자기 에취, 하고 재채기를 했어요. 그 바람에 콧

스펙이 될 거야. 넌 엄마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구멍에 넣었던 솜뭉치가 바닥에 떨어졌지요. 빨간 콧물도 비죽 나왔고요.

엄마는 ‘스펙’이란 말에 힘을 주었다.

형민이가 이히히히, 웃기 시작했어요. 동찬이도 히이이이, 웃음을 터뜨렸

“모르는 사람인데 어색하잖아. 할 말도 없고.”

어요. 동찬이랑 형민이 웃음소리가 놀이터에 기분 좋게 퍼져 나갔어요.

“할 말 없으면 안 하면 되지. 아니면 눈에 보이는 것들 대강 얘기해 주든

오미경 1998년 중편동화 「신발귀신나무」로 등단했고, 틈틈이 어린이 독자들과 만남을 가지며 동화를 쓰 고 있다. 쓴 책으로는, 『교환일기』, 『선녀에게 날개옷을 돌려줘』, 『신발귀신나무』, 『금자를 찾아 서』, 『일기똥 싼 날』, 『사춘기 가족』 등이 있고 2012년, 『사춘기 가족』으로 올해의 아동청소년 문 학상을 수상했다.

40•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동화•41


가. 하긴 앞을 못 보니 얘기해 줘도 잘 모르겠지만…….”

봉사자들과 시각장애인들이 섞여 서로 인사를 나누느라 시끌벅적했다.

“앞이 안 보이면 얼마나 갑갑할까?”

시각장애인들은 목소리만 듣고도 금방 사람을 알아보는 듯했다. 나는 전

나는 눈을 감아 보았다. 차창 밖으로 보이던 싱그러운 가로수들이 사라

학 온 첫 날, 낯선 교실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지고, 대신 씽씽 달리는 차들 소리랑 경적 소리만이 시끄러웠다. 나는 가방에서 식물도감을 꺼냈다. 어색한 침묵을 깨려면 이야깃거리가 필요했다. ‘나팔 모양 주황색 꽃은 원추리, 국화처럼 생긴 보라색 꽃은 쑥부쟁이,

“제과점을 하시는 봉사자 님께서 고맙게도 빵을 가져오셨어요. 빵이랑 물을 하나씩 가져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명찰도 받아 가세요.” 젊은 아저씨 한 분이 손나팔을 하고 말했다. 목소리나 억양이 꼭 여자 같 아 하마터면 웃음이 나올 뻔했다.

누름 꽃처럼 납작한 꽃분홍색 꽃은 패랭이꽃…….’

“이거 얼른 가방에 넣어.”

나는 꽃들의 생김새를 자세히 보면서 꽃 이름을 외웠다. 산을 오르다 꽃

엄마는 어느새 빵이랑 물을 챙겨 와 내밀면서, 한 손으로는 내 목에 명찰

을 만나면 내가 길을 안내할 시각장애인에게 알려줄 생각이었다. 그러니

을 걸어 주었다.

까 길 안내에 덤으로 꽃 안내까지 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예쁜 꽃들을 볼

“나중에 봉사 기록에 올라갈 거니까 빠짐없이 잘 써.”

수 없다니! 갑자기 그들이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종이도 볼펜과 함께 내밀었다. 엄마는 정말

‘그래, 불쌍한 사람들이니 이왕 하는 거 확실하게 하는 거야! 잎에 가시

이런 데는 선수다. 언제, 어디서나, 무엇이든지, 늘 남보다 한 발 앞서 챙겨

가 달린 자주색 꽃은 엉겅퀴, 손톱에 물들이고 놀던 노란색 꽃은 애기똥

왔다. 그런 모습에 가끔 낯 뜨거울 때도 있었다.

풀……. 참, 눈이 안 보이는데 색깔을 알까?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색깔

나는 종이를 작성해 엄마한테 건넸다.

을 알려주는 건, 듣지 못하는 사람한테 노래를 들려주는 거나 마찬가지

“저, 대장님! 저희 딸, 오늘 학원도 빠지고 왔는데 봉사 시간 좀 넉넉히

가 아닐까?’

끊어 주세요.”

“이제 다 왔어. 내려.”

나는 얼굴이 달아올라 가방에 빵이랑 물을 넣으며 고개를 깊숙이 숙였

엄마는 선글라스를 꺼내 머리 위로 쓰며 말했다.

다. 간드러진 엄마 목소리가 또 들렸다. “죄송하지만 제 시간까지 합쳐서 곱빼기로 달아 주시면 안 될까요?”

소망 교회 앞에는 벌써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이 많았지만 봉사자와 봉사를 받을 사람이 한눈에 가려졌다. 시각장애인들은 거의 검

눈을 감듯이 귀도 열고 닫을 수 있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이 럴 때 귀를 꽉 닫아 버릴 텐데.

정색 안경을 꼈거나, 안경을 쓰지 않았어도 눈이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

“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봉사하신 만큼 넉넉히 달아 드리겠습니다.”

러웠다.

엄마가 봉사대장이라고 부른 아저씨가 웃음 띤 목소리로 말했다.

42•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동화•43


“아이! 너무 빡빡하시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은결이는 눈으로 보며 말하듯 술술 말했다.

엄마 모습이 훤히 보였다. 엄마는 보나마나 눈을 살짝 흘겼을 것이다.

나는 잠깐 얼빠진 듯 있다가 은결이를 자세히 보았다. 하얀 얼굴에 통통

“오늘 처음 봉사 나오신 분들은 이쪽으로 오세요.”

한 볼살, 도톰한 입술, 조금 납작한 코, 전체적으로 귀여운 얼굴이었다.

봉사대장 아저씨가 큰 소리로 말했다.

“너도 예뻐.”

어느새 내 곁으로 온 엄마는 내 팔을 잡아당겨 맨 앞에 세웠다. 뭐든 남

“코가 못생겼지?”

보다 앞서야 떡 하나라도 더 얻을 수 있다는 게 엄마의 인생철학이다.

씩 웃는 은결이의 코에 주름이 잡혔다.

봉사대장 아저씨는 맨 앞에서부터 한 명씩 짝꿍을 정해 주었다.

“자, 모두 짝 정해졌지요? 그럼 지금부터 산을 함께 오르겠습니다. 도우

“나윤지? 초등학교 6학년? 가만있어 보자, 윤지는 누가 좋을까? 음, 그

미님들은 짝꿍들 팔짱을 끼고 천천히 가 주시면 됩니다. 자, 출발!”

래, 은결이가 좋겠네.”

봉사대장님이 큰 소리로 출발을 외쳤다.

봉사대장 아저씨는 내 손을 이끌고 성큼성큼 시각장애인들이 모여 있는

“윤지야! 조심해서 잘 가!”

곳으로 갔다.

엄마가 뒤에서 큰소리로 말하며 손을 흔들었다. 엄마 옆엔 까만 선글라

“자, 윤지는 은결이 도우미가 되어주세요.”

스를 쓴 어떤 아저씨가 팔짱을 끼고 있었다. 나는 오늘따라 왠지 엄마의 선

아저씨는 어떤 여자 아이의 손을 끌어다 맞잡아 주고는 급히 돌아갔다.

글라스가 눈에 거슬렸다. 엄마 선글라스는 한눈에 봐도 시각장애인들이

“6학년? 나도 6학년인데, 우리 친구 하자. 이름이 윤지? 예쁜 이름이네.”

끼는 거랑은 달랐다.

내 손을 잡은 아이가 나머지 한 손을 마저 잡으며 말했다. 나는 만나자마 자 스스럼없이 구는 아이가 조금 부담스러웠다.

평평한 등산로를 지나 오르막길을 올라갔다. 내가 걱정했던 것과는 달 리 은결이는 길을 잘 갔다. 나는 바닥을 주의 깊게 살피면서 걸었다.

“난 고은결. 윤지, 어떻게 생겼어?”

“조심해. 나무뿌리가 위로 솟아 있어.”

은결이는 갑자기 손을 내 몸으로 뻗쳤다. 가슴께에 닿았던 손이 눈 깜짝

“고마워. 소나무지?”

할 사이에 얼굴을 더듬었다. 나는 깜짝 놀라 움찔 하며 얼굴을 뒤로 했다.

고개를 들어 나무를 보니 소나무가 맞았다. 난 깜짝 놀라 물었다.

“미안! 놀랐구나! 네 얼굴이 어떻게 생겼나 보고 싶어서 그래. 난 손으로

“응. 맞아. 근데 어떻게 알아?”

볼 수 있거든.”

“소나무 냄새가 나잖아. 아아! 상쾌해. 소나무 향은 언제 맡아도 좋아. 꼭

은결이는 다시 눈부터 아래로 더듬어 내려갔다.

향기로 목욕하는 거 같아.”

“안경 썼고, 코는 오뚝하고, 입술은 작네. 여드름도 안 나고, 피부가 참

“향기로 목욕?”

고와. 윤지, 예뻐!”

“응. 솔 향이 온몸에 스며들며 시원하게 씻어 주는 것 같잖아.”

44•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동화•45


은결이는 눈을 지그시 감고 걸었다.

땀이 배고 등으로도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러다 넘어지면 어떻게 하려고? 아, 참……”

“여러분! 힘드시죠? 이곳에서 잠깐 쉬었다 갈게요. 아침 안 드신 분들은

나는 은결이가 눈을 떠도 보이지 않는다는 걸 잠시 깜빡했다.

빵도 드시고요.”

“눈을 뜨나 감으나 똑같은 것 같지만 느낌이 달라. 눈을 감으면 냄새에

“아침 먹은 사람은 빵 먹으면 안 돼요?”

더 집중할 수 있거든.”

엄마의 짝꿍 아저씨가 활짝 웃으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은결이는 마치 내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 말했다.

“아침 드시고 오신 분도 드셔도 됩니다~!”

나무 계단을 올라 좁은 오솔길을 지날 때였다. 은결이 몸 위로 조그만 솔

봉사대장 아저씨가 끝을 길게 빼며 우스꽝스럽게 말했다.

방울이 툭, 떨어졌다. “어머! 솔방울이지? 지금 떨어진 것 좀 주워 줄래?”

사람들은 가방에서 냉커피며 방울토마토, 오이 등을 꺼냈다. 내가 가방 에서 물을 꺼내 마시고 있을 때였다.

나는 은결이 발치에 떨어져 있는 솔방울을 주워 건넸다.

“어이구! 우리 딸, 땀 난 것 좀 봐!”

“아이! 예쁘기도 해라! 꽃 같아. 나한테 좋은 일이 생기려나봐.”

엄마가 어느새 내 곁으로 와 수건으로 얼굴에 묻은 땀을 닦아 주었다.

은결이는 솔방울을 코끝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윤지 어머니세요? 저는 고은결이라고 해요.”

“지난번에도 솔방울이 내 몸에 떨어졌는데 삼촌한테서 편지가 왔어. 삼

은결이가 엄마 쪽을 바라보며 인사했다.

촌은 몽골에 있거든. 삼촌이 나중에 몽골에 데려가 준댔어. 거긴 초원이

“응? 응, 그래. 우리 윤지 또래인 거 같네.”

끝없이 펼쳐져 있대. 멋지지? 삼촌이 말도 태워 준댔어.”

“네, 맞아요. 저도 6학년이에요.”

삼촌 얘기를 하는 은결이는 마치 꿈을 꾸는 듯 행복해 보였다.

“아, 그래? 쯧쯧! 얼굴도 예쁘고 똘똘하게 생겼는데 어쩌다…….”

“어? 비가 오려나?”

나는 엄마 팔을 살짝 꼬집었다.

“응? 비? 이렇게 맑은데?”

“윤지야! 팔짱 끼니까 팔에 땀 많이 나지? 자, 이거 팔에다 감아. 끈적거

“날이 맑으면 솔방울이 활짝 펴지거든. 이것 봐. 그런데 지금은 오므라

리지도 않고 안 찝찝하고 좋아.”

져 있잖아. 공기가 눅눅하면 솔방울도 오므라들어. 신기하지?”

엄마는 내 팔에 손수건을 둘러 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으, 응. 신기하네.”

“엄마는! 괜찮아.”

사실 솔방울보다 더 신기한 건 은결이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데도 손끝

다행히 은결이는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있어, 엄마 말을 듣지 못한 것 같

이나 냄새, 느낌으로 다 알 수 있는 게 정말 신기했다. 산을 오른 지 삼십 분쯤 되었을까? 은결이랑 팔짱을 낀 팔엔 축축하게

46•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았다. “윤지야! 이리 와 봐! 이 망초대꽃 좀 봐.”

동화•47


은결이가 하얀 꽃 무더기 사이에서 나를 불렀다. ‘보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꽃 이름을 알지?’

서였다. 산이 조금씩 가팔라지면서 숨도 점점 가빠졌다. 그런데 은결이는 숨도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은결이가 있는 곳으로 갔다.

헐떡거리지 않고 생각보다 잘 걸었다. 마치 내가 은결이한테 도움을 받으

“예쁘지? 정말 사랑스러워. 어쩌면 이렇게 여리고 부드러울까?”

며 산을 가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눈에 띄는 꽃도 없

나는 갑자기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다.

었다. 나는 이래저래 자존심이 상했다.

“은결아! 너 혹시……. 조금이라도 보이는 거 아니니?”

제법 길게 이어진 나무 계단을 올라 평평한 오솔길로 막 접어들 때였다.

“응, 보여.”

드디어 내 자존심을 세울 기회가 찾아왔다. 식물도감에서 보았던, 누름 꽃

‘그러면 그렇지. 하나도 안 보인다면 어떻게…….’

처럼 납작한 꽃! 몇 발짝 앞에 바로 그 꽃이 있었다.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은결이가 뒤이어 말했다.

‘그런데 꽃 이름이 뭐였더라?’

“난 손으로 다 볼 수 있어. 가운데 있는 꽃술을 꽃잎들이 동그랗게 감

보란 듯이 은결이에게 가르쳐주고 싶은데, 꽃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싸고 있잖아. 안에 있는 꽃술은 노란색, 바깥 꽃잎은 눈처럼 하얀색, 맞

속이 바작바작 탔다.

지?”

“왜 그래? 너, 갑자기 긴장하는 거 같아.”

나는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응, 맞아. 그런데 너, 색깔 알아?”

난 깜짝 놀랐다. 은결이는 어떻게 내 속마음까지 읽는 걸까? 몸이 더 바

“어렸을 땐 괜찮았는데, 많이 아프고 나서부터 안 보인 거야. 엄마가 색

싹 달았다.

깔 잊지 말라고 뭐든지 색깔을 말해 주셨어. 사과처럼 빨간색, 하늘처럼

“뭐라도 본 거야?”

파란색, 눈처럼 하얀색, 이런 식으로. 이 꽃, 꼭 계란 프라이 같지 않니?”

“응, 저기에 꽃이 있어서…….”

망초대는 흰 꽃잎이 노란 꽃술을 감싸고 있어 정말 계란 프라이 같았다.

말을 해 놓고 보니 우스웠다. 꽃이 무서운 것도 아닌데…….

“자! 모두 땀 좀 식히셨나요?”

“그래? 나 좀, 꽃 있는 데로 데려다 줄래?”

“예! 땀이 너무 식어 얼음이 되려고 해요.”

나는 은결이를 꽃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은결이가 깃발을 뽑기 전에 얼

봉사대장 아저씨의 말에 시각장애인 아주머니 한 분이 웃으며 대꾸했다.

른 내가 먼저 뽑아야 했다. 그런데 입안에서 꽃 이름이 뱅뱅 맴돌 뿐 떠오

“그럼, 다시 산을 오르겠습니다!”

르지 않았다. 아! 뭐였더라?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엄마가 팔에 감아 준 손수건을 풀어 목에 둘렀다. 살 닿는 걸 꺼려하는 것으로 은결이가 자칫 오해할까 봐

48•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은결이가 줄기에 달린 잎이랑 꽃잎을 만지는 동안, 가슴이 콩콩 뛰었다. “패랭이꽃이구나! 내가 다니는 성당 꽃밭에도 있어.”

동화•49


‘맞아! 패랭이꽃이었지? 바보! 왜 생각이 안 났지?’

“우리 딸도 다쳤단 말이에요!”

내 머리를 콩,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은결이에게 또 지고 말았다.

사람들이 은결이 주변에만 몰려 있자 엄마가 쏘아붙였다.

‘하나도 안 보인다는 건 거짓일 거야. 손으로 만지기만 하고 어떻게 다

“큰일 날 뻔했네. 다행이야, 이만하길. 많이 놀랐지?”

알아? 말도 안 돼!’

대장 아저씨가 내 무릎에도 연고를 발라 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산길을 척척 잘 걷는 것도 수상했다. 조금이라도 보이는 게

“윤지야! 미안해! 나 때문에 너까지……. 많이 다쳤어?”

분명했다. 나는 슬그머니 은결이를 시험해 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알맞은 곳이 나왔다. 나무뿌리가 툭툭 불거진 곳! 나는 땀을 닦

은결이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아, 아니. 난 괜찮아.”

는 척하며 팔짱 낀 오른손을 슬쩍 뺐다. 그러자 은결이가 반사적으로 내 옷

나는 은결이 말에 속이 뜨끔했다. 미안해 해야 할 사람은 나인데…….

깃을 잡았다.

“어머머머! 이 땀 좀 봐. 윤지야, 너, 너무 힘든 거 아냐?”

“엄마야!”

엄마가 내 얼굴의 땀을 닦아 주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은결이가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많이 힘들면 얘기해. 빼 줄게. 은결인 다른 사람이 데리고 가면 돼.”

“엄마!”

“저, 윤지랑 같이 가고 싶어요. 윤지랑 가게 해 주세요.”

은결이가 넘어지며 옷깃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나도 중심을 잃고 엎어

내가 아저씨에게 대답을 하기도 전에 은결이가 조르듯 말했다. 은결이

졌다.

는 다행히도 내가 일부러 손을 놓은 걸 모르는 것 같았다.

“어머머! 윤지야! 괜찮아?”

“괜찮아요. 그냥 은결이랑 같이 갈게요.”

엄마가 어느새 달려와 나를 일으켰다. 다행히 무릎이 슬쩍 까지기만 했다.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은결이는 얼른 내 팔짱을 꼈다.

“아프겠네! 조심하지 어쩌다 그랬어?”

“자, 다시 출발합니다! 조심조심, 조금 천천히 갑시다.”

엄마 말에 뒤이어 어떤 아주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봉사대장 아저씨가 밝은 목소리로 출발을 알렸다.

“어머! 이 피 좀 봐! 얼른 약품 상자 가져다주세요.”

“은결아, 미안해. 내가 널 다치게 했어.”

나는 깜짝 놀라 은결이를 보았다. 은결이 무릎에서 피가 빨갛게 흘러내

“아니야, 네 잘못 아니야. 너랑 만난 날을 기념하려고 내 무릎에 표시해

렸다. 봉사대장 아저씨가 달려와 약품 상자에서 솜을 꺼내 피를 닦아 냈다.

놓고 싶었나 봐.”

아저씨는 다친 곳을 깨끗하게 소독을 한 다음에 연고를 발랐다. 그리고 거

은결이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즈를 대고 반창고로 붙였다. 아저씨는 은결이 손바닥에도 연고를 발라 주

나는 은결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어느새 은결이가 오래된

었다.

50•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친구처럼 편해졌다.

동화•51


“너희 둘은 오늘 처음 만난 거 같은데 어쩜 그렇게 다정하니?”

“조심해. 잎에 가시가 달려 있어. 꽃 색깔은 자주색이야.”

뒤에서 누군가 우릴 보고 말을 건넸다. 뒤돌아보니시각장애인 아주머니

“아! 엉겅퀴네. 잎엔 가시가 달렸어도 꽃은 부드러워. 너도 만져 봐.”

였다. 나무 그늘에서 쉴 때 먹을 걸 가방에 듬뿍 싸 와 나눠 주던 분이었다. 아주머니는 볼 때마다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잎의 가시가 무시무시한데다 꽃잎도 바늘처럼 뾰족한데 부드럽다고? 나는 조심스레 꽃을 만져 보았다. 은결이 말대로 정말 부드러웠다.

“꽃길이야, 꽃길!”

“정말이네! 부드러워! 넌 볼 수도 없는데 어쩜 그렇게 꽃 이름을 잘 알

나는 아주머니 말에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꽃은 보이지 않았다.

아?”

“이보다 더 아름다운 꽃길이 있을까? 사람들이 만든 꽃길! 난 한 달에

“볼 순 없지만 손으로 만질 수 있고, 코로 향기도 맡을 수 있잖아. 내가

한 번 산에 오는 이 날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꽃을 좋아하니까, 우리 엄마가 꽃 박사 되셨지, 뭐. 호호호!”

아주머니 얼굴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은결이가 꽃처럼 환하게 웃었다.

‘산에 와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뭐가 행복하단 걸까?’

산을 거의 다 내려왔을 때였다. 빗방울이 얼굴을 스치며 뚝 떨어졌다.

전 같으면 난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어? 빗방울이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꽃길을 만들어 주셔서!”

나는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니는 앞뒤 사람 모두 들리게 큰 소리로 외쳤다.

“은결아! 아까 네 말이 맞아. 솔방울 일기예보! 정말 빗방울이 떨어져!”

“윤지야, 고마워. 내 꽃이 되어 줘서.”

나는 마치 내가 비올 거라는 걸 맞히기라도 한 양 기뻤다.

은결이가 꽃처럼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나도 마주 웃었지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내가 속으로 품었던 생각들을 안다면 나한테 꽃이라 해 주었 을까?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돌리는데 꽃 한 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잎에 가 시가 달린 자주색 꽃!

청소년 소설 원고 모집 안내 월간 〈어린이와 문학〉은 청소년 문학을 사랑하는 작가의 뜨거운 열정과 도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어? 저기, 진짜 꽃이다!” 이름이 뭐였더라?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아까처럼 속이 타지는 않 았다. “어디? 나 좀 꽃 있는 데로 데려가 줘.”

■ 응모 형식 및 방법 ·분량은 원고지 70장 내외로, 1년에 두 번, 1월과 7월 10일까지 보내 주세요. ·원고에 반드시 이름과 연락처를 적어 주세요. ·2회 추천 완료 시 〈어린이와 문학〉의 추천 작가로 모십니다. ·보내실 곳 : 강윤정 justine02@hanmail.net(010-6412-8773)

은결이를 꽃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 꽃송이에 손을 대 주었다.

52•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동화•53


응모 동화 | 이인호

“네? 왜요?” “늬 엄마가…….” 아줌마가 얼굴이 벌게져 뭐라고 얘기하는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

계단

다. 바닥에 누워 있던 아빠가 나를 발견하고는 벌떡 일어나 앉는다. “어이. 우리 아들. 장근석. 이리 와 봐. 엄마한테 전화 좀 해 봐라. 이 여편 네. 아까부터 전화를 안 받는다.” 아빠가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내게 주었다. 엄마 전화기는 꺼 져 있었다. 옆집 아줌마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이번엔 아주 작정을 한 것 같은데. 어쩌면 나한테까지도 감쪽같 이…….” 오늘 아침에 엄마가 집 앞까지 나를 따라 나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공부

또 집 앞이 시끄럽다. 아직 3시밖에 안 됐는데 벌써 아빠가 취했나 보다.

열심히 하고 아빠 말 잘 들으라고. 그러면서 3만 원이나 되는 돈을 줬다. 어

그런데 오늘은 좀 이상하다. 이삿짐 트럭이 세워져 있고 아빠와 어떤 아저

안이 벙벙해서 선뜻 돈을 못 받고 서 있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뒤

씨가 멱살잡이를 하고 있다.

로 몸을 뺐다. 엄마가 다른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 그때 알아봤

“이게 말이 돼? 말이 되냐고? 멀쩡히 사람이 살고 있는데 이삿짐이 웬

어야 하는 건데. 바보.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칠 수 있는 게 보이지 않았다.

말이야?”

힘없이 주먹을 내려놓았다.

“나 원, 재수가 없으려니까. 이거 놔요. 난 짐 날라다 준 죄밖에 없어요.” 아저씨는 가볍게 아빠를 뿌리쳤다. 아구구. 저 놈이 사람 잡네. 술에 취 한 아빠는 나뭇잎처럼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우이 씨. 책가방을 바닥에

나는 이 꼴 저 꼴 보기 싫다고 며칠 전 고모 집으로 간 할머니에게 전화 를 걸었다. 울고 싶은데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 빨리 와. 집이 이상해.”

내던지고 아저씨에게 달려드는 순간 누군가 내 뒷덜미를 잡아끌었다. 옆 집 아줌마였다. “야. 야. 근석아. 큰일 났다. 어떡하니?”

“어때요? 이 정도면 훌륭하지. 그 돈으로는 절대 어디 가서 이만한 집 못 구한다구요.” 할머니는 숨을 헐떡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표

이인호 한겨레 아동문학작가학교 23기에서 동화 공부를 했습니다. 그때 만난 친구들과 ‘이야기밥통’ 모 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꼬부랑 할머니,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같이 가기로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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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을 살피던 부동산 아저씨가 어서 계약서 씁시다! 하며 서둘러 대문을 나

응모 동화•55


섰다. 그 뒤를 따라나선 할머니가 가파른 계단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

켜 앉았다. 아줌마, 아저씨다. 손에는 성경 책이 들려 있었다. 아, 오늘이 일

다. 아저씨가 내려가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요일이지. 나도 예전에 몇 번 교회에 가 본 적이 있다. 목사님은 항상 큰 소

“뭐해요. 빨리 안 오고.”

리로 이야기를 했다. 꼭 야단을 맞는 기분이었다. 헌금 통도 문제였다. 오

아까 올라올 때 세어 봤는데 딱 45개였다. 할머니가 끙 앓는 소리를 냈

백 원을 넣고 천 원짜리를 빼내고 싶은 마음을 참느라 힘들었다. 이러다간

다. 나는 앞으로 굴러떨어질까 봐 다리가 후들거렸다. “근데 계단이 너무 높아. 할머니 다른 집 알아보자. 응?” 어둡고 냄새는 났지만 반지하 옛날 집이 더 나은 것 같다. 할머니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지옥에 더 빨리 갈 것 같아서 나는 교회를 끊었다. 아저씨, 아줌마는 내려가면서 계속 손을 흔들었다. 가만히 보니 그냥 흔 들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서로 마주 보면서 손가락을 입에 대기도 하고 양 손으로 배를 긁기도 했다. 그러니까 저건 수화였다. 말을 못하는 사람들끼

“이거보다 더 한 것도 하고 살았다.”

리 손으로 대화하는 거다. 학교에서 잠깐 배운 적도 있지만 기억나지 않았

며칠 후 우리는 이 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게 다 엄마 때문이다. 엄마가

다. 눈앞에서 직접 보는 건 처음이라 정말 신기하고 기분이 이상했다.

우리 모르게 집을 내놨다. 그리고 이사 올 사람들에게 돈을 받아서 집을 나

아저씨 아줌마가 가 버리고 나서 나도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가 버린 거다.

‘사람은 손으로 뭐라고 하지? 학교는? 할머니는? 사랑한다는 말도 손으

동네 사람들이 두 편으로 갈라졌다. 세상에 어쩌면 그럴 수가 있냐고, 독

로 할 수 있겠지?’

하다고. 또 다른 사람들은 오죽했으면 그랬겠냐고, 이해한다고. 나는 누구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난다. 저기 아래에 보이는 집 어딘가에 엄마가 있을

편을 들어야 할지 몰랐지만 할머니와 아빠가 엄마 욕을 하도 하니까 엄마

지도 모르겠다. 며칠 동안 아빠와 할머니 모르게 계속 엄마한테 전화를 했

쪽으로 마음이 좀 기울었다. 진짜 따지고 보면 아빠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

지만 받지 않았다. 공중전화로 했으니까 모르는 번호라서 안 받았을지도

면 나도 집을 나가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모른다. 어쩌면 영원히 안 받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

대충 이삿짐 정리를 하고 할머니는 낮잠을 잤다. 아빠는 어디 갔는지 아 침부터 보이지 않는다. 할 것도 없어서 밖으로 나왔다. 우리 집이 맨 꼭대 기는 아니었다. 우리 집 위에도 집들이 있었다. ‘우아. 여기까지 올라오는 것도 힘든데 저기 사는 사람들은 정말 힘들

는 돌멩이 중에서 제일 큰 걸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던졌다. 돌멩 이는 원을 그리고 어딘가로 떨어져 버렸다. “야! 그러다 누구 맞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뒤에서 누가 소리를 질렀다. 뜨끔해서 돌아보는데 어, 아는 애다. 송나

겠다.’

은. 그 애도 나를 보고 놀랐는지 눈이 동그래졌다. 그런데 어디선가 아빠

나는 계단에 앉았다. 시내가 다 내려다보였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다.

소리가 들렸다. 나는 오백 미터 밖에서도 아빠 소리를 구분할 수 있다. 술

뒤에서 발소리가 났다. 계단 가운데 앉아 있던 나는 얼른 가장자리로 비

에 취해서 지르는 그 소리를. 나는 나은이에게 아무런 말도 못하고 후다닥

56•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응모 동화•57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 애도 이 동네 사나? 짜증난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다.

으로 피했다. 이번엔 왼쪽으로 가니까 그 사람도 왼쪽으로 갔다. 고개를 들어보니 나은이다.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그 소리를 들 은 나은이가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아무 말도 듣기 싫었다.

이사하고 학교가 좀 멀어졌다. 아침엔 좀 힘들지만 수업이 끝나고 나면

“비키라구!”

집까지 걸어갈 만하다. 문방구 앞 게임하는 애들도 구경하고, 인형 뽑기 기

나은이를 밀치고 앞으로 나가는데 나은이가 어! 했다. 돌아보니 아빠가

계도 만지작거린다. 돈만 있으면 다 뽑을 것 같다. 엄마가 준 3만원이 있지

비틀거리면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온몸이 비에 젖은 아빠는 꼭 괴

만 뽑기 하는데 쓰고 싶지는 않았다. 중학교 형 누나들이 하는 욕 듣는 것

물 같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얼굴을 뒤덮고 신발도 한 짝밖에 신고 있지

도 재미있다. 처음 듣는 욕이 있으면 그게 무슨 뜻일까 집까지 곰곰 생각하

않았다. 한 짝은 가게 앞에 나뒹굴고 있다.

면서 간다. 할머니 다리가 더 안 좋아졌다. 오늘은 더 끙끙 앓았다. “가서 라면 세 개하고 파스 할미가 만날 붙이는 걸로 한 개만 사 오니

“너 어디 가는 거야? 그건 뭐야?” 아빠가 봉투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아빠보다 아직까지 안 가고 옆에 서 있는 나은이 때문에 더 화가 났다.

라.”

“비키라니까 뭐하고 있어? 가. 가란 말이야!”

밖으로 나왔는데 하늘이 어둡다. 툭 툭. 빗방울이 떨어졌다. 집에 있는

내가 소리를 지르니까 나은이는 후다닥 뛰어가 버렸다. 아빠가 봉투를

우산은 다 꼴았다. 빨리 갔다 와야겠다. 나는 다다다다 계단을 뛰어 내려갔

휙 낚아챘다.

다. 처음엔 가파른 계단이 무서웠지만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 어떨 땐 한

“쳇. 라면이네. 너 거스름돈 남았지? 이리 줘 봐.”

번도 안 쉬고 올라오기도 한다. 내려가는 건 더 쉽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오

나는 뒤로 물러났다. 아빠가 다가오더니 나를 담장으로 밀어냈다. 그리

르다 보니까 다리도 단단해진 것 같다. 비가 더 많이 내린다. 약국 옆에 놓인 정보지를 머리에 올리고 나도 뛰었 다. 어디선가 고함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쿵쿵 뛴다. 에이 씨. 돌아보지 않 아도 나는 그게 아빠인지 다 안다. “돈 갖다 주면 될 거 아니야! 술 달라고!” 아까 약국 옆 마트에서 라면 사길 잘했다. 아빠랑 마주치지 않으려고 최 대한 가게에서 멀게 걸어갔다. 이미 다 젖어 버린 정보지로 얼굴을 가리고 걸어가는데 뭐가 앞을 탁 막았다. 오른쪽으로 피했는데 그 사람도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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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한 손으로 내 가슴을 누르고 한 손으로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나는 몸 부림치며 아빠로부터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무리 술이 취했어도 아빠는 어른이었다. 아빠가 주머니에서 기어이 돈을 꺼냈다. “아구구구!” 그런데 갑자기 아빠가 소리를 질렀다. 누가 아빠의 등을 우산으로 때렸 다. 나은이였다. 난 깜짝 놀라 나은이를 멍하니 쳐다봤다. 나은이는 좀 겁 이 나는지 얼른 뒤로 물러섰다가 다시 달려들어 아빠의 등을 또 때렸다. “저리 가요. 저리 가!”

응모 동화•59


나은이가 또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늦어.”

“아이고. 나 죽네.”

할머니 손이 귀신이 아니라 할머니 눈이 귀신이다. 꾀병인지 아닌지 대

아빠가 팔을 허우적거리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번에 알아낸다. 씻으러 가는데 아빠가 문 쪽에서 자고 있다. 나는 일부러

“야! 너 괜찮아? 안 다쳤어? 빨리 경찰에 신고하자!”

아빠 발을 밟고 지나갔다. 아빠가 끙 하면서 돌아누웠다.

나은이는 흥분한 얼굴로 씩씩거렸다.

“아빠 너무 미워하지 마라. 언젠가 정신 차릴 거야. 하도 하는 일이 안 되

“이런 나쁜 사람은 경찰에 신고해야 돼. 대낮에 술 먹고 애들 돈을 뺏다

니까. 애들 모양 사춘기 겪는 거라고 생각하자. 엉?”

니. 내가 경찰에 신고해서 잡아가라고 할 거야.”

할머니가 아빠에게 이불을 덮어 주며 말했다. 무슨 어른이 사춘기냐. 그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그칠 생각을 안 한다. 이제 나은이도 아 빠랑 나처럼 물에 빠진 생쥐 꼴이다. 바닥에 떨어진 봉투를 집어 들고 아빠 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것도 온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면서. 정말 쪽팔려 죽겠다. 아빠가 아빠인 게 정말 창피하다. 어제 책가방 그대로 메고 대문을 열고 나왔는데 나은이가 앞에 서 있다.

“아빠. 일어나. 일어나라고! 아이 씨. 일어나란 말이야!”

나는 진짜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 자빠질 뻔 했다. 하지만 절대 그런

무지 쪽팔리는데 아빠를 두고 가긴 그랬다. 나는 나은이를 쳐다보지 않

내색 안 하고 눈을 착 내리깔았다.

았다. 쳐다보면 욕도 나오고 눈물도 나올 것 같아서였다.

“뭐냐?” 나은이가 투덜거렸다.

학교고 뭐고 다 귀찮다.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는 나에게 할머니가 말 했다. “왜 안 일어나? 아까부터 깨 있는 것 같더니.”

“우린 그렇다 치고 너네는 왜 초인종이 없냐? 한참 기다렸잖아!” 뭔 소리야? 어이가 없어서 나은이를 쳐다보는데 기분은 하나도 나쁘지 않다. 오히려 실실 웃음이 나왔다. 억지로 참으면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배 아파. 학교 안 갈래.”

“왜 기다리는데?”

“왜 갑자기 배가 아파? 이리 와 봐. 내가 문질러 줄게.”

나은이가 계단을 한 칸 먼저 내려갔다.

할머니가 윗옷을 휙 걷어 올리더니 배에 손을 갖다 댔다. 저절로 몸이 움

“너 이 계단이 모두 몇 개인지 알아?”

찔했다. 차갑고 거칠거칠했다. “아이. 씨. 내가 애기야? 만날 배 아프다고 하면 문지른대!”

갑자기 무슨 계단 숫자를 물어보냐? 알지. 매일매일 오르내리는데 그걸 모르겠냐.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화를 벌컥 내면서 벌떡 일어났다. 할머니가 웃었다.

“45개!”

“확실히 내 손이 귀신이야. 이젠 손만 갖다 대도 낫네. 얼른 일어나. 학교

“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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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모 동화•61


“뭐야? 45개 맞거든! 내가 만날 세어 본단 말이야!”

다. 하나만 들어 줄까? 하다가 거절당할까 봐 용기가 안 났다. 아줌마가 나

나은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손을 들어 하늘을, 아니 위를 가리

를 흘끔 쳐다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더니 다시 올라갔다. 나는 조

켰다. “저기. 제일 마지막 계단까지 말이야. 이 바보야!” 어. 마지막 계단? 맞다. 여기가 끝이 아니지? 위에 또 계단이 있다는 걸 까먹었다. “몇 갠데?” 나은이를 따라 내려가며 물었다.

금 있다가 올라가려는데 앗! 몇 개까지 세었는지 까먹었다. 내려가서 다시 세면서 올라갔다. “야. 뭐 그렇게 오래 걸려? 너 수학 못 하는 거 알고 있었지만 숫자도 못 세냐? 바보.” 올려다보니 나은이가 두 손을 허리에 걸치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었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안 가르쳐 줘.”

“아니거든! 다리에 쥐 나서 그러는 거거든!”

“뭐냐. 치사하게.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내가 지금 당장 올라가서 확인

거짓말까지 하니까 온몸이 화끈거린다. 나은이가 소리쳤다.

하고 올 수도 있단 말이야.”

“아무튼 빨리 올라 와. 배고프단 말이야. 울 엄마가 떡볶이 해 준댔어!”

“너 지각하려고 그래? 이따가 우리 집에 놀러 와. 그러면 자연히 알게 될

“알았다고! 서른하나, 서른둘, 서른셋!”

거야. 빨리 와!”

그렇다. 우리 집에서 나은이네까지는 서른셋. 그러면 우리 계단까지 합

나은이가 나머지 계단을 우다다다 뛰어 내려갔다. 나보다 더 빠른 것 같 다. 질세라 나도 뛰어 내려갔다. 이상하다. 오늘 따라 계단이 너무 짧게 느 껴진다. 이상하다. 나은이랑 처음 얘기하는데도 하나도 낯설지 않다.

치면 가만. 78개다. 78개! 나는 자신 있게 나은이에게 말했다. 나은이가 씨 익 웃었다. “맞아! 난 너보다 더 높은 데 살고 있어. 그러니까 겨우 계단 45개 올라 오는 거 힘들다고 투덜거리지 말란 말이야. 알겠어?”

“하나, 둘, 셋, 넷…….”

이건 또 무슨 소리냐? 내가 언제 투덜거렸다고. 그때 나은이네 집 대문

나은이네 집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나는 일부러 천천히 올라갔다. 계단

에서 누군가 나왔다. 앗! 아까 그 아줌마다. 아줌마가 나를 보며 활짝 웃었

숫자를 틀릴까 봐 입으로 소리를 내며 세었다. 어디라고 알려 주지도 않고

다. 그리고 두 손을 두 번 맞잡았다. 나은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똑같이 따

무작정 오라고 하다니. 나은이가 괜히 한 소리가 아닐까 생각했다.

라하며 말했다.

“에잇. 몰라. 몇 개인지만 세어 보고 내려오면 되지!”

“맞아. 엄마. 내 친구야.”

이렇게 마음먹고 올라가는 길이다. 옆에서 어떤 아줌마가 숨을 헐떡거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서 있었다. 갑자기 나은이 배에서 꼬

리면서 올라오고 있었다. 양 손에는 비닐 봉투를 들고 있다. 무거워 보인

르륵 소리가 났다. 나은이가 양손을 배에 대고 허리를 구부렸다. 그건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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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모 동화•63


응모 동화를 읽고 | 최나미

알 것 같았다. 아줌마, 아니 나은이 엄마가 빨리 오라고 손짓을 하며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상하다. 나는 배가 하나도 안 고프다. 78개의 계단을 올라왔는 데도. 집에 놀러 오라는 말에 급식도 먹는 둥 마는 둥했는데. 나은이가 내

고급 독자를 만나고 싶은 열망

등을 떠밀었다. “알았어. 들어간다고!” 나은이네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우리 집도, 시내 도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나는 있는 힘껏 숨을 들이마셨다. 내 배에서도 꼬르륵 소리가 났다.

동화를 쓰기 시작할 무렵 첫 작품을 쓰고 흥분했던 기억이 납니다. 내 머 릿속에서만 빙빙 돌던 이야기를 모니터 화면에서 문장으로 확인할 수 있 다는 것, 그 이야기 속에 내가 아닌 다른 인물이 낯선 배경과 시간 속에서 일을 저지르고 해결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었지요. 무엇보 다 그렇게 만든 이야기를 누군가 읽어 준다는 사실이 두렵고도 설레서 평 을 받기 전날 뜬눈으로 밤을 새고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혼자 좋아하고 흥분하고 감동한 이야기를 함께 동화 공부하던 친구들과 선생님은 어떻게 읽었을까? 뭐, 다들 예상하셨겠지만, 작품 평은 혹독했습니다. 인물은 살아 있지 않 고, 이야기에 여백이 없으며 사건의 결말도 작위적이고……. 물론 첫 작품

최나미 동화 작가. 그동안 쓴 작품으로는 『바람이 울다 잠든 숲』, 『진휘 바이러스』, 『엄마의 마흔 번째 생 일』, 『걱정쟁이 열세 살』, 『셋 둘 하나』, 『단어장』, 『움직이는 섬』, 『학교 영웅 전설』, 『옹주의 결혼 식』, 『천사를 미워해도 되나요?』, 『진실 게임』 등이 있다.

64•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응모 동화를 읽고•65


치고 꽤 선전했다는 영혼 없는 칭찬도 한두 번 들은 것 같기도 합니다. 지옥 체험을 한 합평이 끝나고 머릿속에는 참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들 었습니다. 나는 재미있는데, 남들은 왜 내 작품이 재미없다고 할까? 나는

로 자기 작품을 되돌아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필요 없는 장면과 인 물에 대한 점검, 대사 수위와 과잉된 감정 표현은 그 기회를 놓치면 잡아내 기 힘들지요.

그 의미를 보여 주기 위해 쓴 글인데, 저 사람들은 왜 엉뚱한 의미를 들이 댈까? 과연 저 인간들이 내 작품을 제대로 읽기는 한 건가? 결정적으로 어

「내 친구 플라타너스」는 신발주머니를 잃어버린 새물이와 아이들의 잃

린이 독자들이 내 작품을 이해하기는커녕 끝까지 읽어 낼 수 없을 거라는

어버린 물건을 보관하고 있는 플라타너스 나무의 이야기입니다. 플라타너

평은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습니다.

스가 신발주머니를 찾으러 온 새물이에게 처음 말 건네는 장면을 표현하

작품 쓰는 사람의 주관적인 집착과 읽는 사람의 객관적인 이해 방식의

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돋보

간극이 하늘과 땅처럼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경험했습니

였습니다. 거기다 돌아가신 새물이 아빠와 친구였던 플라타너스의 중후한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균적인 독자의 시선을 파악하고 글을 쓰라는 말

말투 또한 앞으로 벌어질 근사한 상황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멋진

에는 내 나름대로 속으로 반박했던 것 같습니다.

첫 만남이, 분실물을 찾아가지 않아 숨쉬기가 힘들다고 플라타너스가 진

“평균적인 독자의 시선? 내 작품을 이해하는 고급 독자만 만나면 되잖

술하는 장면에서 솔직히 맥이 풀려 버립니다. 분실물을 찾지 않는 요즘 세

아!”

태를 은근하게 풍자한 작가의 의도는 알겠으나, 좀 더 생동감 있는 상황을 기대한 독자에게 작가가 의도를 성급하게 드러내 버림으로써 이야기의 재

이번 달에는 아홉 편의 작품을 읽었습니다. 김이구 선생님과 심사하면 서 간혹 작품에 대한 의견 차가 약간 있었으나 참신한 모험을 시도한 응모 작이 없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었습니다. 좀 서툴고 거칠어도 지금이라서 보여 줄 수 있는 신인의 패기가 무척 아쉬웠습니다.

미를 더 살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캐릭터가 주는 무게감에 맞는 사건에 좀 더 신경을 쓰면 좋겠습니다. 「내 친구는 마술사」는 분량이 짧은 생활 동화입니다. 전학 간 첫날, 짝 꿍이 자기 집에서 함께 놀고 데려다 주겠다는 말에 따라나선 정이는 친구

대체로 안정된 작품이 몇 편 눈에 띄었습니다. 그러나 단편에서 절제해

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 집 찾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야기가 짧은데도

야 할 장면과 인물에 대한 남용,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해설의 부족, 지

정이의 전학 첫날이 눈에 그린 듯 생생합니다. 하지만 작가가 제목을 굳이

문으로 표현해야 할 부분을 행동이나 대사로, 또 그 반대의 경우까지 해서

「내 친구는 마술사」라고 명명한 이유가 있을 텐데, 정이의 행동이나 태도

아쉬운 작품도 있었습니다.

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나칠 정도로 수동적이어서 마지막에 마술에 걸린

초고를 쓴 뒤에 꼼꼼한 퇴고는 필수입니다. 작품을 완성하고 이성적으

66•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것 같다는 표현이 읽는 이에게 그리 와 닿지 않습니다. 정이의 감정이 좀

응모 동화를 읽고•67


더 밀도 있게 그려져야 할 것 같네요. 「아기 참새 팅크」는 남을 행복하게 해 주는 참새 팅크의 이야기인데요,

니다. 아이와 있을 때는 아빠라고 했다가, 집에서 나오면 김 과장이라고 지 칭하는 호칭부터 독자가 이해하는 데 혼란을 줍니다.

팅크가 전해 주는 행복의 내용보다 작가가 더 먼저 감정에 취해 있다는 느

또한 아빠가 실직하기도 전에 엄마와 새싹이의 대화에서 이미 아빠의

낌이 듭니다. 작가는 독자의 감정을 요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쯤에서 어

실직이 거론되는데, 시간적인 흐름조차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빠의 건강

떤 이야기를 건넸을 때 독자가 기뻐하고 슬퍼하고 또 행복한지 파악하고

과 실직한 아빠의 상황을 한꺼번에 이해시키려고 하다 보니 이런 문제가

조절하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얘기지요. 또한 팅크가 행복을 준 두 가지 이

생긴 것 같은데요, 우선 하나의 이야기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부터 선결

야기 역시 지나치게 조형되어 자연스러운 내용보다는 팅크와 연결된 결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만 남아 버렸습니다. 『행복한 왕자』(오스카 와일드)에서 제비가 전해 주는 각각의 사연들이 넘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읽히는 지점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 니다.

「태풍이 와도 절대 휴교 금지」는 태풍 때문에 임시 휴교를 하게 된 날, 얄미운 동생을 혼내주려는 오빠의 이야기입니다. 전반적으로 에피소드는 재미있고 발랄하지만 전체적으로 소란스럽다는 느낌이 먼저 듭니다. 보통 일인칭 주인공 시점의 이야기를 쓸 때는 지문도 주인공의 자기 진

「아빠에게 어퍼컷!」은 이번 달에 유난히 많이 눈에 띄는 아버지 시리즈

술입니다. 그러다보니 활달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경우, 대사에 지문까지

중 하나입니다. 짓궂게 놀리고 장난치는 아빠와 권투 시합을 벌인 아들의

더해서 전반적으로 소란스럽고 산만하게 읽히게 됩니다. 그렇게 쓰면 절

이야기인데, 아빠의 캐릭터가 인상적임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이야기

대로 안 된다는 게 아니라 소란스럽고 산만한 분위기에서 서사가 제대로

가 평면적으로 느껴집니다. 작가가 이야기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사건 서

읽힐 리 없기 때문에 좋은 효과를 얻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지요.

술에 급급하다보니 사건의 비중이나 작가가 착상한 것보다는 에피소드만 나열되어 이야기가 납작해져 버린 것이죠.

이 작품에서 주인공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주인공을 뺀 나머지 인물들 의 대사가 많지 않기 때문에 70% 이상이 주인공의 자기 진술인데, 고장 난

이 작품에서는 정보를 주는 해설이 거의 없어서 특히 아쉬웠는데요, 아

줄 알았던 문을 고치는 장면에서는 거의 주인공 혼자 만담하는 수준이 되

빠의 장난이 요즘 부쩍 심해졌다든지, 원래 아빠는 짓궂게 구는 사람이라

어버리고 맙니다. 이런 때는 전략적인 배치가 중요하지요. 대사의 비중을

든지, 독자가 의문을 갖지 않게 효과적인 정보 제공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줄이든지 지문에서 자기 진술하는 방식을 다르게 사용하는 방법으로 인물

듭니다.

과 이야기를 살리는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빠와 아이스크림」은 새싹이를 중심으로 아빠의 담배를 끊게 하기 위

또한 전반적으로 비약이 지나쳐서 작가가 보여 주고 싶어 하는 것마다

해 노력하는 사연과 실직한 아빠의 사연이 한 이야기에서 따로 놀고 있습

약간씩 넘친다는 느낌이 듭니다. 절제하고 정리해야 하는 것들을 다시 한

68•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응모 동화를 읽고•69


번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진 아이가 친구, 학교, 도우미의 구조 속에서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채 배 척되는(전학) 상황을 이만큼 생생하게 짚어내기도 쉽지 않습니다.

이 달의 응모작 중에서 상대적으로 나은 평을 받은 작품은 세 편입니다.

그러나 광수 때문에 겪는 사건들을 시우 눈에 보이는 에피소드로 나열

「계단」은 아빠의 계속된 술주정으로 엄마가 집을 판 돈을 갖고 나가 버

하는 방식이 되다 보니 불필요한 장면들이 군데군데 눈에 띕니다. 단편에

리고 낡은 집으로 이사 가게 된 근석이의 이야기입니다. 술주정뱅이 아버

서는 구성상 번호를 붙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독자가 서사를 이해하는

지와 다리가 아픈 할머니와 함께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올라야 나오는 집에

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별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살게 된 근석이의 상황은 암담하기만 합니다.

단편치고는 등장인물들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도 걸립니다. 그 많은 인

작가가 인물과 적절한 거리를 두고 독자의 감정을 이끌어 낸다는 점이

물이 각각 제 몫의 역할을 한다면 모르겠지만, 광수를 괴롭히는 찬효, 민

무척 돋보입니다. 엄마와 살던 때 이야기가 없긴 하지만, 아빠의 술주정이

재, 승민, 진철이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찬효 일당으로 거론될 뿐, 개

엄마를 도망가게 했을 거라는 적정선의 정보나 근석이의 절제된 감정은,

별적인 성격이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작품에서 이름이란 구체적인 인

독자에게 한꺼번에 풀지 않으려는 작가의 공력이 엿보입니다. 사족처럼

물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인데요, 그렇게 되면 독자는 그 인물이 어딘가에

느껴지는 장면도 거의 없고 나은이나 할머니처럼 주인공이 아닌 등장인물

쓰일 걸로 생각하고 은연중에 찾게 됩니다. 보통 인형놀이라고 하는, 등장

의 캐릭터나 운용의 묘도 적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달동네 친구 나은이

만 하고 역할이 없는 인물들은 작가가 과감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와 계단이 주는 상징성도 가볍지 않습니다.

작품의 내용을 알지 못하는 독자는 제목만 보고 작품을 읽어야 할지 말

다만 지나치게 표현을 절제하다 보니, 작가는 알지만 독자는 모호할 수

지를 결정합니다. 따라서 제목을 정하는 것 또한 공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

있는 지점이 눈에 걸립니다. 예를 들면, 근석이가 계단에 앉아 있을 때 수

이지요. 작품을 다 읽고 나서 「축구공 무늬의 비닐공」이란 제목은 작품의

화를 하며 지나쳐 간 아줌마가 이야기 마지막에 등장하는 나은이 엄마라

내용에 비해 손이 덜 간 느낌이 듭니다.

는 사실은 단서가 많지 않아 독자가 알아차리기 힘듭니다. 또한 결말이 갈 등의 원인과는 별개로 뭉뚱그려진 듯한 느낌도 지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작품을 잘 썼다 해도 많이 접해 본 이야기라면 독자에게 신선하 게 다가가기 어렵다는 점도 고민하시기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아쉬운 점을 지적했으나 수정하고 나면 다시 읽어 보고 싶 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꼭 다시 꼼꼼하게 다듬어 보기 바랍니다. 「콩 싹」에서는 반 아이들이 가져온 우유 팩 화분에 모두 공평하게 다섯 개씩 심기로 한 콩 싹을, 호준이만 화분을 들고 오는 바람에 열 개를 심게

「축구공 무늬의 비닐공」은 어느 날 선생님이 시우에게 장애가 있는 친

됩니다. 샘이 많은 정아는 호준이 화분의 콩 싹 다섯 개를 뽑아 버리자고

구의 도우미를 해 달라고 요청하는 데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좀 뒤떨어

아름이와 주인공에게 제안합니다. 친구와 옳은 일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

70•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응모 동화를 읽고•71


인공의 고민이 적절하게 잘 그려졌습니다. 뜻하지 않은 실수로 사건이 커

나고 싶다는 무지한 열망이 없었다면 지금껏 글을 쓸 수 있었을지 궁금해

지는 장면도 무리 없이 이해됩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정아를 의심하면서

집니다.

주인공에게 묻는 장면이 느닷없이 튀어 나와 당황스러웠습니다. 물론 처

추천된 작가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말을 전합니다. 그리고 이번에 추천

음에 선생님이 아이들 말만 듣고 무심코 반응했다가, 그 뒤에 사태를 알아

되지 못한 작가들에게 지치지 말고 다음을 준비하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

보고 전체 사태를 파악해서 주인공을 불렀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

습니다. 고급 독자 한 명은 확실히 확보했으니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습니다. 그러나 그 장면 바로 직전까지 전혀 의심하지 않는 것 같다는 주인 공의 진술 때문에 빠진 부분이 더욱 아쉽습니다. 그리고 왜 선생님이 정아 에 대해 의심을 하는지도 이 이야기 맥락에서는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작 가가 주절주절 설명하는 것도 문제지만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와 상관없는 궁금증을 갖게 하는 것도 서사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전체 적으로 안정되고 고른 리듬으로 읽히니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좋을 것 같네 요.

세 작품을 놓고 고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다 고른 장점을 갖고 있지만, 의논 끝에 「계단」을 이 달의 응모동화 선정작으로 추천하기로 했습니다.

작품을 쓰기 시작한 때부터 꽤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제가 평을 해야 하는 자리에서 가끔 그 옛날의 저처럼 고급 독자를 만나고 싶어 하는 절절 한 시선을 느낍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저의 바람 역시 달라지지 않았으나 그 시간 동안 얻은 것이 있다면, 내 작품을 100% 이해하는 고급 독자는 자 신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작품을 쓰는 동안은 내 것이지만 인쇄되어 독 자가 읽는 순간부터는 내 것을 고집할 수 없습니다.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서는 좀 더 애쓰는 수밖에는 없더라고요. 그렇지만 그 시절 고급 독자를 만

72•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응모 동화를 읽고•73


정연철 작가의 책가방

원고를 기다립니다 월간 〈어린이와 문학〉은 어린이 문학을 사랑하는 여러 동시인, 작가, 평론가, 독

배추머리 구구는 내 스타일

자가 뜻을 모으고, 힘을 모아 만들어 가는 잡지입니다. 신인에게는 발표의 장을,

『내 이름은 구구 스니커즈』 (김유 동화, 오정택 그림, 창비, 2013)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자유로운 담론의 장을, 그리고 어린이를 창작과 비평의 중 심으로 되불러옴으로써 어린이 문학의 지평을 넓혀 가고자 합니다. 월간 〈어린 이와 문학〉은 어린이 문학을 사랑하는 여러분과 함께 만들어 가는 잡지가 되고 싶습니다. 많은 참여와 관심 부탁 드립니다. ■응모 분야 •동화 : 원고지 40장 내외 •동시 : 3편 (1인 3편) •청소년 소설 : 원고지 70장 내외 - ‌ 동화, 동시 3회 추천. 청소년 소설 2회 추천 완료시 〈어린이와 문학〉의 추천 작가, 추천 동시인으로 모십니다. •어린이 글 : 시, 일기, 생활문(모든 글은 어린이의 허락을 받고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 ‌ 〈어린이와 문학〉에 글이 실린 어린이에게는 작가 사인이 담긴 동화책을 보내드립니다.

1

육아 휴직 중이다. 교사로서 재미도 보람도 좀 퇴색되고, 학생들과 지지 고 볶는 것도 지치고, 딸내미들과 함께 보낼 시간은 태부족이고, 그래서 한

■마감일 매달 10일 (청소년 소설은 1년에 두 번, 1월과 7월에 원고를 받습니다.) ■심사 보내 주시는 작품은 심사위원들이 가려 뽑아 심사평과 함께 싣습니다. 심사위원은 달마다 바뀌며, 동화는 두 분이 함께 심사합니다. 실리지 않은 글에 대해서도 평을 실어 드립니다. ■보내 주실 곳 보내실 때 이름과 연락처를 꼭 적어 주세요. •동화 : 이퐁 leepong@hanmail.net (010-8946-2507) •동시 : 주미경 go-mu-jul@hanmail.net (010-7275-2230) •청소년 소설 : 강윤정 justine02@hanmail.net (010-6412-8773) •어린이 글 : 강윤정 justine02@hanmail.net (010-6412-8773) ※ 본지에 실린 모든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선택이었다. 기대 5분의 4, 걱정 5분의 1이었다. 지금? 걱정이 무색할 정도 로 탁월한 선택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전업주부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 는 것 같다. 아내는 벌써부터 불안에 떨고 있다. “이참에 눌러앉을 생각은 아니지?” 하며 의심의 눈초리를 쏘아 댄다. 육아 휴직을 결정하고 대충 일과표를 짜 보았다. 거의 계획대로 되고 있 다. 직업병 탓인지 애정 결핍 탓인지 딸내미들한테 현재 아빠의 점수와 등

정연철 푸른문학상 ‘새로운 시인상’에 동시가 당선되고, 〈어린이와 문학〉에 동화가 추천 완료되어 등단 했다. 동화책 『주병국 주방장』, 『똥배 보배』, 『생중계, 고래 싸움』, 동시집 『딱 하루만 더 아프고 싶 다』를 냈다.

작가의 책가방•75


수를 확인하는 버릇이 있다. 큰애는 아빠한테 후한 점수를 준다. 늘 일등이

커즈』였다.

고 백 점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큰애한테 부동의 일등은 갓난아기 때부터

갑자기 엄마 아빠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에서 뿅 연기와 함께 사라진다

금이야 옥이야 키워 준 외할아버지였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래

면 남겨진 아이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일 것이다. 하지만 요즘 같은 요지경

도 외할아버지가 물으면 할아버지가 제일 좋아요, 해야 돼.” 하고 넓은 아

세상에서는 어떤 일도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부모가 고아가 아닌 이상 할

량을 베푼다. 문제는 내 머리 꼭대기에 앉아 나를 쥐락펴락하는 작은애다.

아버지, 할머니, 이모, 고모, 삼촌 등 남겨진 아이를 보살펴 줄 어른들은 있

언젠가 아빠, 엄마, 언니 중 아빠가 몇 등이냐고 물어보니 일등이란다. 나

다. 그렇다고 안심이 되는 건 아니다. 언제나 엄마 아빠의 몫이 있기 마련.

는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아내한테 으스댔고, 한없이 너그러운 미소로 작

부모의 부재로 인한 이상 증세는 시시각각 각양각색으로 나타날 것이다.

은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데 “언니는 영등이고 엄마는 땡등!”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 동화책은 나의 육아 방

이라며 안 해도 될 말까지 재잘댔다. 고개를 갸웃대며 진상 파악에 나섰고,

식을 재정립하게 하는 데 일조했다.

이내 작은애의 숫자 개념은 일반인들과 달랐음이 확인됐다. ‘십구팔칠육 오사삼이일’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영땡’까지 이어진다는 사실. 그러니까

고아가 자신을 고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설정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아빠는 꼴등. 가끔 사탕이나 비타민 같은 극약 처방으로 순식간에 땡등을

구구는 교통사고를 당해 하늘나라로 떠난 엄마 아빠가 자유를 찾아 잠시

사수하기도 한다. 그럼 작은애는 귓속말로 비밀이라고 못을 박는다. 차츰

여행을 떠난 거라고 생각한다. 굳이 ‘왜?’라고 의심 품을 필요는 없다. 구구

작은애의 여우짓과 고무줄 등수에도 적응해 가는 중이다.

가 세상 사람들의 보편적인 인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너뜨리는 데서 오

안타깝게 실천 못하고 있는 건 전업주부의 특권(?)이라 할 수 있는 막장

는 해방감도 이 작품의 강점 중 하나이니까.

아침 드라마에 중독되기. 꿩 대신 닭이라고 소문으로만 들었던 국민 드라

다행스럽게도 구구에게는 엄마 아빠와의 기억이 깃들어 있는 여섯 켤레

마 ‘넝쿨째 굴러 온 당신’을 시청하게 되었다. 뜬금없이 거기 나오는 지환

의 스니커즈가 있다. 스니커즈는 엄마 아빠가 없는 빈자리를 일정 정도 채

이라는 아이한테 꽂혔다. 부모한테 버림받고 고아원에서 사는 자폐아. 봉

워 준다. 엄마 아빠는 스니커즈에 어떤 추억과 사랑을 담아 주었을까. 마지

사활동 점수를 따기 위해 온 학생들의 들러리 역할을 할 때 지환이의 표정

막으로 반짝이 스니커즈를 선물하면서는 구구의 가슴속 별이 반짝반짝 빛

은 우울했고 나는 가슴이 아팠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했다. 혹시 내 아이들

나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구구의 가슴속 별의 정체는 영원히 지지 않을 엄

이 저런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마 아빠일 수도 있고 꿈과 희망일 수도 있겠다. 그 덕분인지 구구는 아이답 지 않게 언제나 당차고 꿋꿋하고 발랄하다. 개인적으로 그 사실이 더 애틋 2

그 생각을 하면서 떠올린 책이 김유 작가의 동화 『내 이름은 구구 스니

76•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하고 안쓰럽고 슬프긴 하지만. 현실적인 시각에서 보면 이 동화는 뜬금없고 황당무계하다. 사회는 구

작가의 책가방•77


『내 이름은 구구 스니커즈』 (김유, 2013), 창비 제공

구를 결코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구구는 십

다. 반대로 구구의 순진무구하고 자유분방함은 더욱 부각된다. 구구는 이

중팔구 복지 시설에 위탁되어 또래들과 갈

행사에서 뜻밖의 선물을 받게 된다. 구구의 반짝이는 눈은 각각 개성 넘치

등하면서 부모 없는 현실을 절감하고 꾸역

는 에이뿔따구와 떡진머리라는 새 친구를 발견한다. 경제적인 지원보다

꾸역 하루를 살아 낼 공산이 크다. 하지만

더 진정한 의미의 후원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을 나눌 친구가 없다면 세상

동화 속 구구는 과감하게 모든 제의를 거절

은 얼마나 외롭고 따분한가 말이다.

하고 정체불명의 키다리 아저씨를 동반자로

이제 조건은 완벽하게 갖추어졌다.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친구들. 무엇

선택한다. 키다리 아저씨한테 끌린 이유를

이 더 필요한가. 구구가 세계 최초의 스니커즈 발견자가 되기까지 키다리

말하자면 외모와 말투에서 풍기는 자유의

아저씨와 몽돌이와 에이뿔따구와 떡진머리와 코딱지와 함께 종횡무진 벌

냄새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는 모험. 이 순간 가슴이 설레지 않으면 가슴건조증을 앓고 있을 가능성

구구는 동네 사람들 즉 세상 사람들의 편견과 쓸데없는 걱정을 무찌르

이 크니 한시바삐 인근 병원에 가서 진단받아 보기를 권고한다.

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항해를 시작한다. 엄마 아빠가 자유를 찾아 여행을 떠났듯이 말이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아빠 어디 가?’에 나오는 꼬마들과

나는 이 동화를 낮은 산의 오솔길을 걸으면서 읽었다. 읽는 내내 구구와

는 처지가 천양지차다.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에 더욱 유쾌하

손잡고 걷는 느낌이었고 흐뭇한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캐릭터의 힘일

고 신 난다. 키다리 아저씨와 살게 된 집은 낡고 버려진 집이다. 하지만 구

것이다. 배추머리 구구. 나비까지 배추로 착각할 정도이니 구구의 인력은

구한테 아늑한 보금자리다. 전망 좋은 다락방에서 바라보는 별은 반짝인

실로 대단하다. 고아라는 말이 주는 쓸쓸함과 애잔함은 철저하게 무시된

다. 구구의 눈으로 보는 세상에 반짝거리지 않는 게 과연 존재할까. 구구는

다. 작가의 내면에 숨겨진 긍정의 에너지가 구구를 탄생시켰을 것이다.

그곳에서 시와 노래를 사랑하는 키다리 아저씨와 시인 기질이 다분한 몽 돌이와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이 작품은 공모전 수상작인데 수상 소감이 기억에 남는다. 김유 작가는 나의 첫 번째 두 번째 동화책의 편집자였다. 내가 알고 있는 그녀는 겸손하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들만의 규율과 잣대로 구구를 간섭하고 울타리

고 친절하고 성실하고 열정적이었다. 그런데 고아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

속에 편입시키려고 한다. 전혀 외롭지 않은 구구를 위해 ‘외로운 이웃을 위

녔다니. 상처가 깊었겠다. 그때 만난 ‘삐삐 롱스타킹’은 작가의 영원한 친

한 후원의 밤’을 여는 아이러니가 버젓이 자행된다. 실상 ‘후원의 밤’은 물

구가 되어 주었단다. 그러고 보니 삐삐와 구구는 닮은꼴이다. 둘이 만난다

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굶주림에 시달리는 통장 아

면 환상의 복식조로 세상의 모든 허위와 위선과 모순을 뒤집어엎을 수도

줌마나 신고버꼬 회사의 배불뚝이 회장 같은 부류들의 고독한 마음을 위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작가는 그때 삐삐한테 받은 마음의 선물을 아이들에

무하기 위한 일시적 수단에 불과하다. 이들의 속물근성은 점점 도드라진

게 환원하고 있다. 작가의 신념 표현이자 아이들에게 전하는 희망의 메시

78•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작가의 책가방•79


히. 애들 어디 맡기고 아내와 해외여행 가려는 꼼수는 절대 절대 아니다.

지인 셈이다. ‘거침없이 하이킥’ 어린이 버전을 보는 듯 박진감 넘치는 이 동화는 일등 과 외모 지상주의에 속박된 아이들에게 탈출구 역할을 충분히 해 줄 것이

좋은 육아서 한 권을 읽은 기분이다. 누군가 구구 인형을 만들어 준다면 항상 달고 다니고 싶다. 배추머리 구구는 내 스타일이다.

라 믿는다. 어쩌면 현실적인 판타지라고 명명할 수도 있겠다. 구구의 발길 을 따라가다 보면 근거 없는 자신감과 용기가 불쑥불쑥 생기는 신비한 체 험을 할 수 있다. 요즘같이 험난하고 삭막한 현실에서는 구구가 가지고 있 는 오픈 마인드와 기분 좋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절실히 필요하다. 어른인 나조차 막혔던 가슴 밑바닥에 샘물이 솟는 느낌이다. 동화 속에 존재하지 않는 부모는 어떤 스타일로 구구를 키웠을까. 그 비밀 수첩이 공개된다면 단박에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를 거라 확신한다.

구구 팔십일도 아니고, 구구절절도 아니고, 구구콘도 아니고, 구구 비둘 기 울음소리도 아니고, 구구 스니커즈라니. 구미를 당기지 않는가. 갈등할 필요 없다. 한시바삐, 누구라도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매력 덩어리 구 구를 직접 만나 보시기를. 참고로 오정택 화가의 그림과도 찰떡궁합이다.

3

우리 애들은 아빠가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씻어 주고, 재워 주는 데 완벽 하게 적응되었다. 똥을 눈 뒤에도 아빠부터 부른다. 똥 닦는 방법을 어떻게 가르치나 고민되지만 대체로 만족한다. 애들과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임을 안다. 다시 못 올 절호의 기회다. 육 아 휴직이 끝난 다음 나는 좀 더 나은 아빠로 업그레이드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바란다. 우리 아이가 구구처럼 생기발랄하고 구김살 없고 낙천적 이고 독립적이며 언제 어디서나 사랑받는 아이로 성장할 수 있기를, 간곡

80•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작가의 책가방•81


김해원 작가의 책가방

고, ‘북괴의 무력 도발’을 수시로 경계하던 시대였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 어나지 않았다. 북한 전투기는 전투를 치르려고 남한 하늘로 돌진한 게 아 니었다. 그날 밤, 텔레비전 뉴스에는 북한 장교가 전투기를 몰고 귀순한 사

우주 고아의 외로움

건을 크게 보도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사람들은 전투기값에 관심을 기울

『우주 비행』(홍명진 지음, 사계절, 2012) 『류명성 통일빵집』 (박경희 지음, 뜨인돌, 2013)

이며 돈 되는 걸 갖고 귀순한 사람을 장하게 여겼다. 그 봄날 떠들썩하던 귀순 사건 이후로 귀순, 탈북은 내 관심사에서 멀어 졌다. 군사 분계선을 넘어와 초소 두 곳의 문을 직접 두드렸다는 북한 병사 의 조용한 귀순은 연예인의 열애 기사처럼 잡담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 런데 얼마 전 라오스에서 탈북 청소년들이 북송되었다는 기사를 뒤늦게 찬찬히 읽고는 가슴이 서늘했다. 북송된 아이들의 안전은 보장되는 걸까. 아이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대사관은 무얼 한 걸까. 그 아이들이 도대체

그날은 날씨가 화창했다. 봄방학 내내 집에서 종일 뒹굴던 동생들은 아

어떻게 그곳까지 간 걸까.

침 밥숟가락을 내려놓자마자 축구공을 끌어안고 학교 운동장으로 쏜살같 이 달려갔다. 아마도 나는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으니 책 좀 보라는 엄

우리는 장맛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던 야밤에 두만강을 건넜다. 누나를 생

마 잔소리를 귓등으로 들으면서 빈둥대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가한

각하면 지옥처럼 캄캄한 물속에서 내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던 무서운 손힘

아침이 지나갈 무렵 밖에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민방위 훈련을

부터 떠오른다. 강을 건널 때 어머니는 죽어도 손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하는 날은 분명 아니었다. 이웃집 아주머니한테 북한 전투기가 서울 상공

어머니가 먼저 강물에 들어섰고, 어머니와 손을 잡은 누나가 내 손을 잡고 강

에 들어왔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곧장 동생들을 찾으러 학교 운동장으로

물로 들어섰다. 강의 중간쯤에서 나는 물살에 떠밀려 곤두박질을 쳤다. 그때

달려갔다. 억지로 끌려 나와 투덜거리는 동생들을 앞세우고 걸으면서 나

어머니의 손을 놓친 누나는 허우적대면서도 내 손만은 놓지 않았다.

는 북한 전투기가 머리 위로 날아들까 봐 연신 하늘을 올려다봤다. 우리 집

- 『우주 비행』(사계절, 2013), 21쪽

에서 멀지 않은 공군 비행장은 전쟁이 나면 가장 먼저 공격을 받을 거라고 언젠가 들은 그 말 때문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툭하면 간첩단 사건이 터지

『우주 비행』에서 주인공 승규가 넘은 두만강은 아무나 마음만 먹으면 건널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어떤 이는 거친 물살에 휩쓸려 영영 강가에 닿

김해원 처음부터 지금까지 목표는 제대로 잘 쓰는 건데, 여전히 아득하다. 지은 책으로는 『고래벽화』, 『열일곱 살의 털』, 『오월의 달리기』 등이 있다.

82•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지 못하고, 어떤 이는 국경 수비대의 총에 맞아 꼭 부여잡고 있던 가족의

작가의 책가방•83


손을 놓치기도 한다. 박경희의 단편집 『류명성 통

『우주 비행』(사계절, 2013), 사계절 제공

일빵집』 중 「자그사니」의 주인공 강희는 중국 땅을

“난 자기 나라 배신하고 온 탈북자들 보면 괜히 싫더라. 한번 배신한 자는

코앞에 두고 엄마를 잃었다. 총을 맞고 자갈밭에

또다시 배신하기 마련이니까.”

쓰러진 엄마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강희는 그곳

아이들은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말했다.

에 엄마를 묻고 혼자 남쪽으로 내려왔다. 승규와

‘내래 조국을 배신한 게 아니라, 그저 배가 고팠을 뿐이라우.’

강희가 목숨을 걸고 온 길이 얼마나 절박했는지,

목까지 차오른 말을 억지로 삼켰다. 배가 고파 탈북했다는 말을, 배고파 보

얼마나 멀었는지 나는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아

지 않은 아이들은 절대 이해 못 할 것이다. - 「자그사니」(뜨인돌, 2013), 126쪽

니 짐작하려고는 했을까.

『우주 비행』과 단편집 『류명성 통일빵집』은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던 탈 북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아프다. 시퍼런 두만

남한 땅에서 「자그사니」의 주인공 강희를 보듬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강을 목숨 걸고 넘어서 행여 잡혀갈까 봐 두려움에 떨며 중국 땅을 떠돌다

학교 선생님은 겉도는 강희가 자퇴하는 걸 은근히 반기는 눈치고, 아르바

가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국경을 넘은 그 험난한 여정이 아픈 게 아니다. 그

이트할 사람을 구하는 가게 주인들은 강희 말투만 듣고도 고개를 내젓는

래도 배는 곯지 않으려니 새 희망을 기대했던 낯선 땅에서 겪어야 할 고통이

다. 강희는 뿌리가 뽑힌 채 부유하는 자신의 처지가 수족관에 적응하지 못

너무나도 아프다. 전투기를 끌고 와 개선장군처럼 카메라를 향해 “대한민

하는 물고기 자그사니와 같다고 생각한다. 두만강에만 산다는 자그사니

국 만세!”를 외치던, 전교생을 뙤약볕에 세워 놓고 북한의 우울한 실상을 얘

는 결국 흰 배를 내놓고 물 위로 떠오른다. 강희는 자그사니처럼 쉽게 죽지

기했던 그 옛날 귀순자들의 모습이 뇌리에 강하게 박힌 탓일까. 그래도 미련

않을 거라며 주먹을 불끈 쥐지만, 그녀가 뿌리를 내리고 단단히 서는 데는

없이 떠나온 땅에서보다 잘살겠거니 했던 이들은 결코 잘살고 있지 않았다.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배고파 보지 않은

하기야 이 땅이 어디 호락호락한 곳인가. 있고 없고를 따져 명확하게 선을

이들이 많아서가 아니다. 배고픈 것을 수치라고

그어 놓으며, 다른 것은 틀린 것이라고 단정 지으며, 기회만 되면 편을 가르

강요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고 패거리를 짓는 야박한 이 땅에서 이들이 잘살기를 바랐다고 말하는 건 어

『우주 비행』에서 춤꾼이 되고 싶은 탈북 청소

불성설이다. 더군다나 통일을 반드시 이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

년 민우는 자신을 ‘우주의 고아’라고 말한다. 우

점 줄어들고 있는 판국에 탈북자들 가슴에 붙은 ‘동포’, ‘겨레’ 같은 낡은 명

주의 고아는 유목민처럼 떠돌며 사는 것을 숙명

찰은 이제 어디서도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조선족처럼 그저 가난한 나라에

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우주의 고아는 조국을

서 온 이주노동자일 뿐이다. 아니 오히려 그들을 보는 시선은 더 냉랭하다.

잃은 민우만이 아니다. 이 땅에서 태어난 사람 중

84•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류명성 통일빵집』 (뜨인돌, 2013), 뜨인돌 제공

작가의 책가방•85


서평 | 오진원

대다수가 자신을 ‘우주의 고아’라고 느끼지 않을까. 그러니까 자신이 태어 난 땅을 어쩔 수 없이 떠나와 다시는 돌아가지 못한 채 언제까지라도 이방 인으로 살아야 하는 이들의 외로움은, 이 땅에서 태어났으면서도 도무지 이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이들의 외로움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니, 남들이 그럴 것이라는 게 아니고 내가 그랬다. 두 권의 책에 그려

자전거에 대한 모든 것 『달리는 기계, 개화차, 자전거』(정하섭 글, 조승연 그림, 보림, 2013)

져 있는 탈북 청소년의 모습을 더듬어 가면서 나는 자꾸 내 모습을 떠올렸 다. 낯선 도시로 전학하고 적응하지 못해 울며 지냈던 십 대와 높은 빌딩 숲에서 수시로 길을 잃던 어리숭한 이십 대. 그리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는 나의 외로움은 그들의 외로움과 다르지 않다는 걸. 라오스에서 북송된 청소년들을 보면서 이 두 권의 책을 골라 읽고, 나는 탈북 청소년 문제를 통일 문제와 그럴듯하게 연관 지어 서평을 써야 하지 않을까 싶어 독일은 통일하기 전 이런 문제를 어떻게 했는지 찾아보기까

1. 신선한 첫 만남

지 했다. 그런데 막상 서평을 쓰다 보니 나는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통일

어? 이 책 우리 거 맞아?

이니 뭐니 거창한 걸 잠시도 떠올리질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통일을 운운

이 책을 봤을 때의 솔직한 느낌이었

한다면 그건 허세일 뿐이다. 나는 그저 이 땅에 사는 모든 우주의 고아들이

다. 묵직한 내용과 섬세한 펜화, 세련

씩씩하게 우주를 비행해 나가길 바란다.

된 디자인은 지금껏 우리 책에서 보지 못한 특별한 느낌을 줬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라오스에서 강제 북송된 청소년들이 평양 놀이공원

그러니 이 책이 번역본이 아니라 우

과 능라 테마파크를 견학하는 모습을 북한 언론에서 촬영했다는 기사가

리 책이라는 걸 확인했을 때 얼마나

떴다. 아마도 그 아이들은 오래전 이 땅에 귀순한 이들이 반공 이념을 선전

반가웠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수준 높은 외국 책들에 대한 열등감인지

해야 했듯이, 북쪽 땅을 훑고 다녀야 할지 모른다. 그러고 보면 세월이 흘

아님 부러움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이제 우리나라 책의 수준도 한 단계

러도 남과 북은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빼닮아 있다. ‘우주의 고아’들의 외로

높아졌다는 생각에 뿌듯한 마음마저 들었다.

『달리는 기계, 개화차, 자전거』 (보림, 2013), 보림 제공

움 따위는 알 턱이 없는 정치인들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그들을 보면 우리 는 한민족임이 틀림없다.

86•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오진원 어린이 문학사이트 오른발 왼발(Childweb.co.kr)을 운영하며 옛이야기 연구 모임 ‘팥죽할머니’와 ‘어린이 논픽션 공부모임’을 하고 있다. 『오른발 왼발의 독서학교』와 『책 빌리러 왔어요』를 썼다.

서평•87


게다가 자전거라니! 이거다 싶었다.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보행기, 유모차를 졸업하고 세발자전거를 만나기 마련이다. 처음엔 어른들이 밀어 주지만 다리에 힘이 어느 정도 붙고 나면 혼자서 신 나게 타고 다니고, 조금 더 크고 나면 두발자전거로 옮겨 간다. 간혹 두발자전거 타기에 실패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두발자전거 타기에 실패했다 해도 자전거에 대한 추억은 있다. 어린 시절에 탔던 세발자전거는 물론이지만 두발자전거 도전에 대한 실패담마

『달리는 기계, 개화차, 자전거』(보림, 2013), 4~5쪽

저도 하나의 추억으로 남는다. 비록 실패는 했지만 용기 있게 도전했던 인 생의 멋진 도전으로 말이다. 그러고 보면 아이들은 자전거와 함께 자라는 셈이다. 이처럼 자전거는 중요한 아이들 놀이 문화의 하나였다. 어려서 몸으로 익힌 자전거 타기는 십여 년을 잊고 지내도 언제든지 너끈하게 탈 수 있다. 덕분에 어른이 되어서도 취미 생활로 자전거를 타고 즐기거나, 간단한 교 통수단의 하나로 유용하게 이용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니 이 책에 관심이 가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자전거야말로 어린 시 절부터 평생의 친구로 무궁무진한 이야깃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거에 대한 모든 걸 담은 백과사전이기도 하다. 참으로 매력적인 책이다. 이런 성격에 걸맞게 첫 번째 장면은 ‘자전거는 무엇일까?’라는 제목으로 자전거의 분해도와 함께 이 책의 내용 전반을 포괄하는 글로 빼곡히 채웠다. 그리고 다음 쪽에선 앞쪽에 나온 글들을 자세히 조곤조곤 설명해 나간다. 자전거가 나름 의미 있는 모습이 되기까지는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 었다. 최초의 자전거는 나무로 만든 말 모양에 두 개의 바퀴를 달아 두 발 로 번갈아 땅을 치며 나아가는 방식이었다. 최초의 자전거는 모양 면에서 나 달리는 모양에서나 어른들의 사치스러운 장난감에 불과했고, 당연히 그 유행은 오래가지 못했다. 속도도 문제였지만 방향을 바꾸려면 무거운

2. 자전거의 역사와 과학적 원리

자전거를 들어서 바꾸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최초의 자전거 탄생에서 지금 현재의 자전거에 이르기까지 자

하지만 사치스러운 장난감으로 일시적인 관심을 끌고 말았던 최초의 자

전거의 역사를 보여 준다. 또 동시에 자전거가 서양과 조선에서 사람들의

전거는 이후 사람들에 의해 끊임없이 진화하며 우리가 알고 있는 자전거

생활을 어떻게 바꾸어 왔는지도 보여 준다. 한편으론 자전거의 작동과 관

로 발전해 나간다. 말 모양의 머리 대신 방향을 바꾸는 핸들이 도입되고,

련한 과학적인 설명도 빼먹지 않는다. 자전거의 역사를 보여 주는 주제사

두 발로 땅을 번갈아 치며 나아가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앞바퀴에 페달이

이자 생활사이고, 서양사이자 한국사이고, 과학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전

도입되면서 진정한 자전거로 거듭난 것이다. 그리고 자전거는 사람들 사

88•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서평•89


이에 열풍을 일으키며 개인용 교통수단으로 자리를 잡았다.

의 대안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자전거는 끊임없이 개량된다. 주된 개량은 속도에 맞춰졌다.

자전거의 역사지만 그 속에 시대의 흐름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게다가

그래서 등장한 것이 사람 키만 한 앞바퀴를 한 ‘하이 휠 자전거’였고, 고무

자전거의 발전 과정에는 자전거에 숨겨진 과학이 담겨 있다. 속도를 빠르

타이어로 승차감도 좋아지면서 자전거 경주 대회와 자전거 여행을 하는

게 하기 위한 노력이 왜 ‘하이 휠 자전거’를 낳았는지, 기어가 동력 전달 방

문화가 번지기도 했다.

식을 어떻게 바꾸는지, 경주용 자전거에 쓰이는 디스크 바퀴가 어떻게 공

그러나 ‘하이 휠 자전거’는 위험했고, 이 문제를 해결한 건 지금 우리가 아는 자전거의 모습인 ‘안전 자전거’다. 덕분에 자전거는 여성들에게까지

기 저항을 줄여 높은 속도를 내는지 등 자전거에 담긴 과학을 알아 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인기를 끌었고, 여성들의 답답한 삶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해

그밖에도 이 책에는 소소하면서도 일상적인 정보도 많다. 온갖 종류의

서 ‘안전 자전거’는 남성과 여성, 부자와 서민, 어린이와 노인을 가리지 않

자전거를 만나 볼 수 있는 것도 그중 하나다. 바퀴 달린 목마 형태의 최초

고 누구나 타고 즐기는 탈것이 되었고,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갔다. 이 모든

의 자전거부터 현재의 자전거까지의 변천 과정은 물론 현재 우리가 볼 수

것이 약 100년 만에 생긴 결과다.

있는 온갖 자전거 종류를 만나 볼 수 있다. 또 자전거를 타기 전에 점검할

19세기 말 자전거는 조선에도 들어온다. 그리고 ‘개화차’로 불리며 빠르 게 조선 사람들의 삶 속으로 파고들었다. 엄복동이란 걸출한 자전거 스타 도 배출했고, 중산층의 교통수단이 되었다. 이후 1970년대에는 자전거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중학생들이 가

것은 무엇인지, 또 자전거를 탈 때 주의사항은 무엇인지, 자전거 관련 표지 판에는 무엇이 있는지까지 그야말로 자전거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겼다. 이 모든 걸 읽고 나면 드는 생각이 있다. 정말 자전거는 대단하다. 그리고 이 책 또한 대단하다.

장 받고 싶은 입학 선물로 등극했고, 이렇게 받은 자전거는 학생들의 재산 목록 1호가 되었다. 게다가 계엄령이 내려져 모든 정치, 사회, 스포츠 활동

3. 그래도 굳이 아쉬움을 이야기한다면

이 중지되었을 때도 자전거 경주 대회는 허용될 정도였다.

더없이 만족스러운 책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있다. 우선 조금은

1990년대 마이카 시대가 열리면서 자전거가 도로에서 밀려나긴 했지만,

뜬금없어 보이는 정보들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자전거의 진화는 계속됐다. 여전히 자전거 경주는 인기가 있었고, 색다른 자전거가 개발되었다.

낯선 서양인, 낯선 탈것

그리고 자전거는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자전거 타기의 즐거움을 다

미국인 선교사 알렌은 1884년에 조선에 들어와서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시 깨닫게 된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고, 환경을 지키는 교통수단

광혜원(제중원)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알렌은 자전거를 즐겨 탔으며

90•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서평•91


자전거와 관련된 기록도 여럿 남겼다. 캐나다인 의사 에비슨은 1893년에 조

4. ‘작은 역사’의 다른 책들이 더 기대된다

선에 왔으며 제중원 원장을 지냈다.

이 책은 『한양 1770』(정승모 글, 강영지 그림)에 이어 ‘작은 역사’ 시리

『달리는 기계, 개화차, 자전거』(보림, 2013), 27쪽 캡션

즈로 나온 두 번째 책이다. ‘작은 역사’를 표방한 건 역사하면 으레 떠오르 는 거시적 안목에서 쓰는 통사와는 달리,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소

여기서 중요한 내용은 광혜원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한 미국인 선교사

한 삶과 관련된 역사를 다루겠다는 뜻일 게다.

알렌은 자전거를 즐겨 탔고 자전거와 관련된 기록을 여럿 남겼다는 점이

이런 점에서 이 시리즈는 의미가 있다. 어쩌면 이 책에서 느끼는 약간의

다. 그렇다면 독자가 궁금해지는 건 어떤 기록을 남겼는가 하는 점이다. 하

아쉬움은 이 시리즈의 기대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책에 이어서 나온 한

지만 다음 문장은 생뚱맞게도 캐나다인 의사 에비슨이 1893년 조선에 왔

반도 음식 문화사를 다룬 『밥상을 차리다』(주영하 글, 서영아 그림) 역시

으며 제중원 원장을 지냈다는 내용이다. 자전거가 중심이 아니라 제중원

기대되는 책이다. 얼른 찾아 읽고 싶다.

이 중심이 된 뜬금없는 설명인 셈이다. 이보다는 덜하지만 본문과 다른 캡션에서도 이처럼 자전거가 글의 중심 에서 밀려난 듯한 경우가 간혹 보였다. 좀 더 주인공인 자전거로 글이 집중 됐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편으론 우리나라에 자전거가 들어오고 난 뒤 절정기를 맞은 1970년 대까지의 모습을 더 많이 보여 줬으면 어땠을까 싶다. 단 4장으로 끝내기 엔 뭔가 서운하다. 앞서 나온 캡션에서 밝혔던 것처럼 알렌의 기록을 더 보 여 줘도 좋고, 무거운 짐자전거가 어떻게 짐을 싣고 다니는지, 또 자전거를 갖고 싶은 아이들이 발도 안 닿는 어른들 자전거를 어떻게 타는지, 자전거 포의 상세한 모습이나 한국전쟁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생산되던 국산 자전거 공장의 모습도 좋다. 기왕이면 자전거가 우리 생활 문화에서 어떻 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구체적으로 알고 싶으니 말이다. 자전거와 관련된 과학 정보도 원리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줬으면 좋았을 것 같다.

92•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서평•93


만남 | 편집부

로부터 많은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해 주면서 그 속에서 내용이 구성 되고, 결론을 얻는 방식을 많이 쓰

아이들의 순수한 본성을 지켜 주는 교육을 꿈꾸다 - 동림자유학교 김찬정 선생님

죠.

어린이와 문학 공교육만 알던 분

들이 보면 충격적일 수도 있는 모

김찬정 선생님

습일 것 같아요. 그런데도 조화롭게 균형을 잡아가는 교실 안의 분위기가 유기적이고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아이들의 질문에 귀 기울여 주 시고 대답해 주시는 것도 인상적이었고요. 김찬정 그렇죠. 아이들이 새로운 걸 배우고, 자기들 힘으로 알아내는 걸

여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던 날, 책 읽기를 금하는 독특한 책 읽기 교육

너무 좋아해요. 질문을 많이 하고, 자기들끼리 대답도 하고요. 공립학교에

서 『나는 책 읽기가 정말 싫어!』를 펴내신 김찬정 선생님을 만나러 용인으

서 전학 온 아이들은 대부분 뭔가 배우고 생각하는 걸 싫어하고 귀찮아하

로 향했다. 권정생 선생님 6주기 기념 행사 때 맑은 목소리로 노래와 낭독

기도 하는데, 계속 다녔던 아이들은 조금 다르죠. 오늘 한자 수업 시간에

을 들려준 동림자유학교 5학년 아이들을 다시 만난다는 설렘도 가득했다.

보셨다시피 ‘결초보은(結草報恩)’이라는 한자를 배울 때에도 부수 이름은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과 텃밭도 구경하고, 딱지 이야기를 나누며 한바탕

뭐냐, 이거랑 저거랑 비슷한 글자 아니냐 하는 질문이 쏟아지죠. 알고 싶은

소란스럽게 떠들었다.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뒤, 타닥타닥 지붕을 울리는

것이 많고 스스로 그것을 발전시켜 가는 거지요. 그런데 물어보지 않는 아

빗소리만 남은 교실에서 선생님과 마주 앉았다.

이들은 또 전혀 질문이 없어요.

어린이와 문학 노래와 이야기로 시작하는 수업이 인상적이에요. 아이들

이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다니기도 하고, 엉뚱한 질문도 많이 하던데, 혼내 거나 제지하지는 않으시네요.

어린이와 문학 공립학교에서 전학 온 아이들이 많은 편인가요? 그런 아이

들이 이 학교의 수업 방식에 적응하는 게 힘들지는 않을지 궁금해요. 김찬정 원래 대안 교육에 뜻이 있었는데 여의치 않아 공립학교에 보내시

김찬정 설명을 해야 할 때는 제지하기도 해요. 다만 수업을 통해 전달하

다 전학을 결정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는 편이에요. 아이가 점점 빛을 잃어

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그것을 일방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

가는 모습이 안타까워 보내기도 하고, 때때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따

94•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만남•95


돌림, 학교 폭력 등을 당하다 오는 경우도 있지요. 전학 온 아이들은 스스

에서 뭔가가 일어날 수 있는 방식으로 진행해요. 그림도 많이 그리고, 노

로 생각해서 공부하는 걸 처음에는 힘들어해요. 저학년에 전학을 오면 금

래, 시, 활동을 많이 하죠. 이야기를 무척 많이 들려주는 편인데, 학년에 따

방 잘 지내는데, 고학년 이후에는 많이 힘들어하죠. 그냥 문제만 풀었으면

라 들려주는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도 발달 시기에 맞춰서 아이들이 내면

좋겠다고 하거나 시험은 언제 보냐고 묻기도 하고요. 시험을 안 보니까 누

적으로 필요로 하는 이야기를 고르기 때문이에요.

가 잘하고 누가 못하는지 내 성적은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 몰라 답답해하 기도 해요.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겉으로 보이는 성적이 아니라

어린이와 문학 주로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시나요?

진짜 삶과 세상에 대해 배우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겨나죠.

김찬정 1학년 때는 옛이야기를 날마다 들려주었어요. 2학년 때는 주로

우화, 전설, 성인 이야기를, 3학년 때는 창세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지 어린이와 문학 오늘 수업에서 식물에 대해 배우는 모습을 보았는데요. 일

요. 4학년 때는 우리나라, 중국, 북유럽 신화들을 많이 들려주었는데요. 특

반 학교에서 하는 수업과는 무척 달라 보였어요. 다양한 색상의 분필로 그

히 북유럽 신화는 호흡하면서 두운을 맞춰 낭송하는 게 중요해요. 이때의

림을 그려서 수업을 하시던데, 아이들이 그림을 보고 느끼는 것도 교육에

아이들은 호흡과 심장, 맥박의 비율이 성인의 비율인 1대 4가 되어 가거든

포함되는 것인지요?

요. 4박자에 맞춰 낭송하는 활동은 이 시기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발달을

김찬정 이번 주기 수업이 식물학이라 3주째 배우고 있어요. 발도르프 교

도와주는 의미도 있어요. 북유럽 신화를 배울 때에는 아이들이 산에서 나

육에는 주기 수업(에포크 수업)이라는 게 있는데요. 식물학을 3주 동안 배

뭇가지를 주워다가 직접 나무 지팡이를 만들고 룬 문자도 새겨서 연극을

우고 나면 그 뒤로는 전혀 다른 수업을 해요. 의도적으로 식물학을 멀리 하

하기도 했어요. 5학년이 된 요즘은 식물학 수업을 하면서 식물에 얽힌 이

는 거지요. 우리가 뭔가 받아들이면, 그걸 싹 잊어버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야기를 주로 들려주고 있고요. 신화도 아직 많이 들려주는 편이에요. 얼마

고 보는 거예요. 배운 지식을 잊어버리고 있는 동안 그 지식은 어디론가 날

전에는 제주도 신화를 들려주기도 했어요.

아가는 게 아니라 마음속에 가라앉아서 소화되는 것이지요. 같은 방식으 로 국어를 배우고 수학을 배울 때 그때 재워 둔 것을 불러오면, 아이들이 소화시키고 숙성시킨 것으로부터 출발해서 발전시켜 갈 수 있어요. 오늘 칠판에 그린 그림은 5학년 수업이라 매우 구체적인 형태로 되어 있

어린이와 문학 아까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았는데, 텔레비전을 전혀

보지 않고 휴대 전화나 컴퓨터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그런 부분도 발도르프 교육의 특징인가요?

는데, 저학년 때에는 훨씬 경계가 없고 부드러운 느낌의 그림을 그려요. 초

김찬정 네, 학교에서는 공식적으로 금지하고 있어요. 수업에 큰 영향을

등학교 시기, 특히 7세부터 14세까지는 아이들의 감정이 발달하고 성숙하

끼치거든요. 저학년일수록 엄격하게 그 규칙을 적용하고 있어서 부모님들

는 시기라서 수업의 많은 부분을 감정에 호소하는, 아이들의 느낌의 영역

도 텔레비전을 보시지 말라고 해요. 하지만 여전히 텔레비전을 보는 아이

96•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만남•97


도 있어요. 게임도 조금씩 하는 아이들도 있고요. 부모님이 일하시다 보면

생겨 참여하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발도르프 학교로는 처음 생겼던 ‘과천

아이를 돌보기 어려울 수도 있거든요. 그러면 확실히 달라요. 수업 시간에

자유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게 된 것이 시작이었지요. 그 뒤 교사 생활을

산만하고, 수업에 깊은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요.

그만두고 다시 동화를 써서 〈어린이와 문학〉에서 추천 받기도 하고, 주변 의 권유로 평론을 써 봤는데 운 좋게도 공모전에 당선이 된 거예요.

어린이와 문학 요즘 시대에 텔레비전을 보지 않고 휴대 전화, 컴퓨터를 사

용하지 않는 아이들이라니, 뭔가 달라도 많이 다를 것 같은데요.

제가 발도르프 교육에서 가장 매력을 느끼는 건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 이에요. 발도르프 교육에서는 인간의 삶이 단 한 번뿐이 아니라 계속되는

김찬정 그래서인지 대부분 요즘 아이들 같지 않고 옛날 아이들 같아요.

것이라고 말해요. 불교의 윤회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개념인데요. 인간은

애들 안에서 정말 많은 게 나와요. 그래서 생일날 같은 때도 선생님 축하

누구나 그 이전 삶으로부터의 과제들을 가지고 태어나고, 그것을 이루기

연주 해 주면 안 되냐고 묻고, 친구를 위해서 마술 쇼도 하고 연주도 해 주

위해서 살고, 또 다른 씨앗이나 열매를 가지고 죽고, 또 그다음 생에 태어

고요. 학교 안에서만 볼 때는 몰랐는데, 여행이나 공연 등 외부로 아이들

나면 그 씨앗을 키우며 살아간다는, 마치 식물의 순환처럼 인간의 삶을 바

을 데리고 나가 보니 이곳을 새롭게 보게 되더라고요. 아이들이 예의가 바

라보지요. 그렇기 때문에 아이라고 하는 존재 안에 정말 수많은 삶이 들어

르고, 어른들의 말을 진지하게 잘 듣는데, 위축되지도 않고, 굉장히 잘 놀

있다고 보는 거예요. 오히려 어른보다 더 지혜로울 수 있고, 더 많은 것을

고 활기차다는 말을 종종 들었어요. 그러면서 저는 원래 아이들이 갖고 있

알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교사가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친

는 힘을 확인했어요. ‘아, 그래서 내가 이 교육을 하고 있는 거지.’, ‘아이들

다기보다는 아이가 이미 가지고 있는, 아이가 이 삶에서 행하려는 것을 스

이 원래 가지고 있는 본성을 지키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이구나.’ 하는 것

스로 꺼내도록 도와주는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을 하지요. 아이들이 자기

을 느꼈어요.

스스로를 활짝 열도록 말이에요.

어린이와 문학 동화를 공부하셨던 적도 있고, 이미 등단하신 아동문학 평

김찬정 선생님의 책 『나는 책 읽기가 정말 싫어!』에는 다양한 이유로 책

론가이시기도 한데요. 발도르프 교사를 택하신 계기가 무엇인가요? 발도

을 싫어했지만 조금씩 변화하며 책과의 거리를 좁혀 가는 아이들이 등장

르프 교육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끼게 되셨는지도 궁금하고요.

한다. 필리파 피어스의 동화를 계기로 책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나중에는

김찬정 처음에는 동화를 쓰려고 습작하고 있었는데, 아이를 키우고 있었

윤동주 시인을 좋아하고 직접 시도 짓게 된 신우, 외로움을 많이 탔지만 식

기에 교육, 특히 대안 교육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보니 발도르프 교육을 알

물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토대로 친구들과 가까워진 철민이, 책을 정말 싫

게 되었어요. 우리나라에도 이런 교육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어했으나 그림책부터 차근차근 읽기 시작한 재용이, 마술을 연습하여 친

한국인지학연구센터에서 인지학적인 관점에서 동화를 공부하는 모임이

구들을 기쁘게 해 주는 매력만점 정환이까지. 동림자유학교 5학년 교실 안

98•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만남•99


과 밖에서는 온 감각을 동원해서 열심히 뛰어놀며 세상을 만나던 책 속의 아이들을 실제로 만날 수 있었다. 물론 책 속에 등장하지 않는 다른 아이들 까지도.

어린이와 문학 얼마 전 펴내신 책 이야기를 해 볼게요. 첫 책이 동화도 평

론집도 아닌 책 읽기 책이라는 점이 독특하네요. 김찬정 동화를 습작하다 다시 교사를 시작할 즈음 〈열린어린이〉에서 연

재를 부탁받았어요. 연재를 하면 동화를 붙잡고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서 2 년 동안 연재했고, 마지막 글에 제가 책 읽기에 대해서 갖고 있던 생각을 썼지요. 그 글을 본 출판사 편집자의 제안으로 책을 쓰게 된 거죠.

어린이와 문학 책에서 봤던 대로 철민이는 저희가 교실 밖에 있는 텃밭을

구경하고 있으니까 스스로 다가와서 여러 가지 식물들에 대해 알려 주더

왼쪽 위부터 차례로 신우의 시화, 리코더 합주를 들려주는 아이들, 아이들이 직접 가꾸는 텃밭, 발도르프 습식 수채화.

면서요? 쉽게 흉내 내기 힘든 규칙 같은데요. 9학년을 마칠 때까지 한 선생 님과 함께 공부한다는 특징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싶어요.

라고요. 또 선생님 책에 실린 신우의 시를 보고 가냘프고 여린 시인의 이미

김찬정 모든 발도르프학교에서 그런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저학년 시기

지를 상상했는데 오늘 직접 보니 엄청 씩씩하던데요. 요즘도 시를 많이 쓰

까지는 책을 읽는 것을 권장하지는 않지요. 제가 3학년 때까지 책을 못 읽

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이 쓰라고 할 때만 쓴다고 하고요.(웃음)

게 하니까 부모님들이 그림책은 도대체 언제 읽어야 되냐, 그 시기를 그냥

김찬정 신우와 철민이는 워낙 자유로운 성격이라 처음에는 가만히 있으

건너뛰는 거 아니냐고 걱정하시기도 해요. 그런데 아이들이 혼자 책을 읽

라는 말도 많이 했지요. 하지만 지금은 잘 적응하며 즐겁게 지내고 있어요.

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뿐이지, 읽어 주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가끔 보면 신우는 마음속에서 감성이 막 배어나올 때가 있어요. 그림도 곧

오히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아무리 과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봐요. 하

잘 그리고요. 책을 진짜 싫어하던 아이로 소개되었던 재용이는 요즘도 책

지만 그림과 글이 어우러진 옛이야기 그림책은 절대로 보여 주지 말라고

을 썩 좋아하는 건 아닌데, 아예 안 보진 않아요.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과

하는데요. 왜냐하면 우리가 이야기를 들으면 내면으로부터 어떤 상을 꺼

연관된 책은 잘 보는 것 같아요. 여전히 책도 잘 가지고 오고요.

내어 보게 되거든요. 그런데 그림을 보게 되면 그 이미지로만 각인이 되기 때문이에요. 옛이야기는 사실 그 안에 엄청나게 많은 내용과 상징이 들어

어린이와 문학 발도르프 학교에서는 3학년까지 책 읽기를 금지하고 있다

100•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있잖아요. 그게 하나의 장면으로 고정이되어 버리기 때문에 아이가 풍부

만남•101


『나는 책 읽기가 정말 싫어!』 (낮은산, 2013), 낮은산 제공

함을 갖기 힘든 거예요. 구전되어진 것들은 말

다 깜짝 놀란 거예요. 권정생 선생님도 모르고, 이오덕 선생님도 모르는 분

로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옛이야기 그림책

들이 많더라고요. 그래도 책과 관련한 강연에 오는 사람들은 관심이 좀 있

은 읽어 주지 말라고 하는 거지요.

을 것 같은데, 많이 모르시더라고요. 예전에 제가 동화를 막 공부할 무렵에

강연에서 독자들을 만나게 되면 아이들에게

는 부모님들이 굉장히 열정적이었거든요. 작가들에 대한 공부도 하고 여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시라는 당부도 잊지 않

기저기 찾아가서 알아보기도 하고 그랬는데, 요즘은 그런 분위기가 아닌

고 해요. 근데 들려주는 게 힘들면 읽어 주시

것 같아요. ‘이야기 들려주기 운동’ 같은 새로운 독서 운동이 시작되어야

라고 하죠. 옛날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아

할 때가 아닌가 싶어요.

빠가 하던 일이고, 해 보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예전에 저는 엄마들끼리 모여서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옛이야기

어린이와 문학 책을 읽다 보니 어린 시절에 굉장히 많이 아프셔서 남들과

들려주는 모임을 했거든요. 아이들을 다 모아 놓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맛

는 다른 시간을 보내셨더라고요. 그래서 더 책을 가까이 하게 되셨다고요.

있는 것도 해 주면 아이들이 굉장히 좋아했어요. 그렇게 지역 모임들이 활

선생님께 책이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요?

성화되면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김찬정 병명이 ‘혈소판 감소증’이었는데, 처음에는 백혈병인 줄 알고, 죽

을 거라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초등학교 때 거의 바깥 활동을 못할 정도로 어린이와 문학 선생님 책을 읽으면서 아이에게는 책을 권하는 것 자체가

코피도 많이 흘리고 굉장히 아팠지요. 그때 책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읽지

부담이 되어 책을 싫어하게 되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더 많은

않아도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했어요. 그런데 사는 게 행복하진 않았

어른들이 깨달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죠. 친구들하고 언제나 떨어져 있어야 하고, 친구도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김찬정 사실 독후 활동이 제일 문제예요. 아이들이 책을 읽으면 그걸 좀

인지 동화책 안의 관계들이 굉장히 좋았던 것 같아요. 그 안에 나오는 어른

껴안고 있어야 하잖아요. 일 년이고 이 년이고, 어떨 땐 평생을 껴안고 있

들의 모습도요. 정말 내가 존경하고 싶은 어른들이나, 정말 좋아할 만한 친

기도 하잖아요. 책 읽은 느낌이나 생각을 딱 자기 안에 갖고 있어야 하는데

구들을 찾기 힘든 현실에서 살다 보니 동화책 안에 그려진 어른들이나 아

바로 쏟아내 버리면, 그것에 대해서 더 갖고 있을 여지가 없어져 버리거든

이들의 모습을 정말 사랑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런 세상에서 살고 싶

요. 그게 좀 안타까워요.

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고, 내가 어른이 된다면 정말 사람을 사랑하고, 정

강연회를 하면 초등학생 부모님들보다 유아 부모님들이 주로 오시는데,

말 동화책에 나오는 어른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굉장히 실용적인 질문을 하세요. 언제부터 읽혀야 하느냐, 무슨 책부터 읽 혀야 하느냐 하는 식으로요. 얼마 전 한 도서관에서 강연을 했는데, 얘기하

102•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어린이와 문학 아까 아이들에게 선생님의 어떤 점이 가장 좋으냐고 물었

만남•103


더니, 여러 가지가 다 좋은데 어떻게 콕 집어서 말할 수 있느냐고 하더라고

를 듣는 순간, 그 시간과 공간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이 하나로 모아지면서

요. 우문현답이 된 것 같아 머쓱했는데요. 아이들과 무척 친밀한 관계를 맺

희열 같은 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이야기꾼이 되고 싶다는 생각

고 계신 것 같아요.

이 들었지요. 이야기를 들려줄 때 느끼는 또 다른 쾌감이 있어요. 이야기를

김찬정 아이들은 정말 어른들하고는 다른 존재인 것 같아요. 제가 잘못하

들려주다가 재미있는 부분에서 딱 잘랐을 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는 아

는 것도 많은데 다 잊어버려 주고 너무나 많은 것을 주고, 다 받아들여 주는

이들의 반응 같은 것들 말이에요. 방정환 선생님 일화들 보면 사람들 모아

존재이죠. 어떻게 보면 천사 같은 아이들하고 같이 사는 게 너무 좋아요.

놓고 화장실도 못 가게 하고 이야기를 들려주잖아요. 사람들이 내 이야기 를 듣고 뭔가 교류가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동화책 속 인물의 모습을 사랑했던 선생님은 동화 작가를 꿈꾸며 오랫 동안 동화를 공부하셨다. 평론으로 등단하시고, 대안 학교 교사까지 다방 면에서 쉼 없이 활동을 이어 가신 선생님의 앞으로의 꿈은 무엇일까? 대화

어린이와 문학 선생님이 하고 계신 교육에 관한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도

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구상하고 계신 책이 있으신가요?

도중 선생님은 이야기 들려주기의 중요성을 몇 번 언급하셨다. 오래 전에

김찬정 언젠가 도서관 강연에서 신우 이야기를 했어요. 예전에 신우가

추천 받은 동화 「구불구불 자라나는」(어린이와 문학, 2006년 1월)에도 아

힘든 걸 잘 못 참을 때가 있었어요. 특히 산에 올라갈 때 항상 힘들어했거

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교사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아이들은 어른

든요. 조금 올라가다가 “선생님 이게 저의 한계예요. 더 이상 못가겠어요.”

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야 하는데, 지금 그 주체가 부모가 되

하는 식이었지요. 제가 한계를 극복해 보라고 격려하고 그러면 힘을 내서

긴 어렵기에 교육을 하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실

올라가고, 또 올라가고 했지요. 그러던 신우가 얼마 전 여행길에서 이렇게

때, 어쩐지 그 답에 가까이 다가간 것 같았다.

말하는 거예요. “선생님 저는 이런 여행이 너무 좋아요. 이런 데를 오면 저의 한계를 발

어린이와 문학 예전에 쓰셨던 글 중에서 이야기꾼이 되기 원하신다는 구

절을 본 기억이 있어요. 행복한 이야기꾼으로 살고 계신가요? 김찬정 발도르프 교육에서는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걸 굉장히

견할 수 있거든요.” 그 말을 듣고 저는 이렇게 말해 주었지요. “그렇지, 신우야. 너는 너의 한계를 발견하고 언제나 그걸 극복하잖아.”

중요하게 생각해요. 발도르프 교사 연수 때 이야기 들려주기 실습을 하는

그런데 조금 있다가 신우가 아이들이랑 살짝 다툰 거예요. 상황이 해결

데, 제가 「구렁덩덩 신선비」를 들려주었어요. 그런데 독일에서 오셨던 교

되지 않아 신우가 저한테 막 하소연을 하기에 웃으며 “신우야, 너의 한계를

수님이 전체 연수 끝나는 발표회 때 다시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면 좋겠다

극복해 봐.”라고 또 말해 주었죠. 고개를 갸우뚱하던 신우는 조금 뒤에 “아

고 하셨어요. 그때 「연이와 버들잎 도령」을 들려줬는데, 사람들이 이야기

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더니 씨익 웃더라고요. 그러더니 친구들한테 가서

104•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만남•105


교실 이야기 | 배훈

시원하게 해결을 하는 거 예요. 그날 이 얘기를 들 었던 출판사 편집자가 그 런 보석 같은 에피소드가

힘내라, 오한성!

쌓여 있을 것 같은데 모 아서 책을 내면 어떻겠냐 고 하셨어요. 돌아보면 동림자유학교 5학년 아이들과 모두 모여.

아이들과의 삶은 보석이

굴러다니는 석류산에 사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아이들과 함께 사는 것만으 로도 너무 바빠서 보석을 주울 수가 없으니 언제쯤 가능하게 될지는 잘 모 르겠어요. 한성이 어머니와 면담을 약속한 날이었다. 우리 학교는 3월 한 달을 상담 기간으로 정해 두고 모든 학부모와 상담 을 한다. 수업이 없는 오후 일정을 안내한 후 원하는 날짜와 시간을 알려 오면 중복되지 않게 일정을 짜서 다시 안내를 한다. 그동안 여러 어머니들 과 상담을 하였으나, 오늘은 한성이 어머니라 미리 알고 싶은 것을 정리해 두고 있었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한성이 어머니가 찾아오셨다. “바쁘신데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 및 정리: 오지숙, 이퐁 사진: 이퐁

106•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배훈

초등학교 교사. 교실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아이들 얼굴이 더 자세히 보이고 아이들 하는 말도 더 잘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아이들 속에서 겪은 이야기를 담아 『멋진 1학년이 될 거 야!』를 펴냈다.

교실 이야기•107


서로 인사를 주고받은 후 묻고 싶었던 것을 차근차근 물어 나갔다.

마음을 가다듬은 한성이 어머니는 한성이가 태어난 그다음 해 생긴 동

“한성이 어렸을 때 누가 길러 주셨나요?”

생 때문에 어릴 때부터 사랑을 많이 받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하셨다. 유치

“제가 길렀어요. 지금은 일하러 다니지만 어릴 때는 제가 길렀습니다.”

원이나 집에서도 어디로 튈지 모르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먼저 해야 하

보통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 문제행동을 보이는 아이들 중 다수는 어릴

며, 그러지 않을 때는 폭력성을 보인 후 삐칠 때가 많다고 하셨다.

때 키워 주신 분이 부모가 아닌 경우가 많다. 어릴 때 외가에서 할머니의

힘들어하는 한성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과 관심이라는 점을 공감

손에 길러지고, 주말에만 엄마를 만난 인우가 그랬고, 갓 돌이 지날 때부터

했다. 집과 학교에서 한성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

어린이집에 맡겨진 재원이가 그랬다. 하지만 한성이는 어머니가 손수 길

다. 한성이 어머니는 바쁘지만 짬을 내어 한성이랑 많이 놀아 주고, 둘만의

러 주셨다고 하니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 같았다.

놀이나 등산, 여행을 해 보겠다고 하셨다. 학교에서는 한성이를 상담 선생

“집에서 누구랑 놀고, 주로 하는 것은 뭔가요?”

님과 연결해서 지속적인 대화와 놀이를 진행하고, 친구들과 함께 놀고, 함

“혼자서 잘 놀아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구요, 레고 맞추기도 좋아해요.”

께 공부하며,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하기로

지난번 한성이가 분노를 폭발하면서 했던 동생 이야기가 생각났다.

하였다.

“동생이 있는데 함께 놀지 않나요?”

한성이 어머니가 가신 후 상담 선생님을 찾았다. 20대 중반의 젊은 여자

“주로 혼자 놀아요. 동생은 한성이랑 달라서 어디 내놔도 괜찮은 아이

선생님이셨다. 서로가 새로운 학교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이름도 잘 몰랐

예요.”

다. 인사를 나누고, 찾아온 이유에 대해 말씀드렸다. 상담 선생님은 흔쾌히

어머니 말 속에서 한성이보다 동생에 대한 신임이 두터운 것을 느낄 수

한성이를 위해 힘이 되어 주시기로 하셨고, 월요일과 목요일 아침마다 한

있었다. 조심스럽게 그동안 한성이가 학교생활에서 보여 주었던 여러 가

성이와 상담과 놀이를 해 주시기로 하셨다.

지 일과 행동들을 말씀드렸다. 주위 친구들과 선생님을 힘들게 했던 일과

다음 날 아침, 한성이를 데리고 상담실로 갔다. 선생님께 한성이를 소개

그런 행동으로 본인 스스로가 더 힘들어하고 있으며, 그런 문제들은 본인

하고 교실로 돌아왔다. 한성이가 없는 틈을 타 아이들에게 한성이에 대한

이 어떤 욕구가 부족하거나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신호이므로 학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성이는 친구들이나 선생님에게 관심을 많이 받고

교나 집에서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싶어 하는 친구인데, 가끔 소리를 지르거나 책상을 두드리는 좋지 않은 방

가만히 듣고 계시던 한성이 어머니 눈에서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내렸고,

법으로 관심을 받는 경우가 많다고 하고, 그럴 때는 모른 척하는 것이 한성

손등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 냈지만 쉽게 멈춰질 것 같지 않았다. 휴지를

이를 돕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나눈 이야기는 한성이에게

건네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말하지 않아도 어머니 눈물 속에서 그동

비밀로 하기로 했다.

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108•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선생님의 뜻대로 잘 움직였다. 한성이가 시끄럽게

교실 이야기•109


괴성을 지를 때 무심코 쳐다보거나, 인상 쓰다가도 금세 고개를 다른 곳으 로 돌렸다.

를 좀 찾아봐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수업을 하고 있으나 불안한 마음이 더욱 깊어 갔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야!”

아이라 불안한 생각은 불길한 생각으로 번져 갔다. 고개를 저었다. 아이들

민승이가 소리 지르는 한성이에게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옆에 앉은 재

에게 쓰기 과제를 주고, 다시 운동장으로 나갔다. 텅 빈 운동장 한쪽에선

은이가 민승이 옆구리를 쿡 찌르고, 고개를 저으며 말리고 있었다. 그러자

여전히 한 반만이 발야구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교실로 돌아오는 한 걸

민승이도 금방 눈치채고 한성이에 대한 관심을 거둬들였다.

음 한 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불길한 마음은 가슴을 조여 오고,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월요일 아침, 애국조회가 끝나고 1교시가 시작되었는데도 한성이가 나

교실 문을 열어 두고 상담 선생님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타나지 않았다. 상담 선생님과 수업한 후 교실로 돌아오기로 한 아이가 감

4학년 아이들 두 명이 교실로 들어왔다. 선생님네 반 아이가 운동장에서

감무소식이었다. 상담실에 전화를 걸었다.

울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기쁜 소식을 받아 들고 득달같이 운동장으로 달

“선생님, 한성이 상담실에 있나요?”

려 나갔다. 한성이는 스탠드에 앉아 있었다. 처음부터 운동장에 있었던 것

“아니요, 오늘 한성이 안 왔는데요.”

이었다. 체육 하던 반 아이들 틈에 끼어 있어 찾지 못했던 것이었다. 체육

학교를 안 올 애가 아니었고, 못 올 이유가 있으면 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선생님이 교실로 가라고 하자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손에 든 레고 인형만

왔을 것이다. 집으로 연락할까 하다 먼저 아이들에게 물었다.

만지작거리고 있었단다. 가까이 가서 보니 눈물, 콧물이 배로 줄줄 흘러내

“오늘 아침 한성이 본 사람?”

리고 있었다. 레고 인형의 머리가 떨어져 끼우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

뒤쪽에 앉아 있던 용수가 신 나서 크게 대답했다.

아 속이 많이 상해 있었다. 누구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 아니어서인지 괴성

“봤어요. 문방구에서 장난감 사고 있었어요.”

이나 고함은 지르지 않고 있었다.

앞쪽에 앉은 현택이가 이어 말했다.

“한성아, 가자.”

“운동장에서 봤어요. 형아들 축구하는 데 앉아 있었어요.”

손을 잡고 일어섰다. 한성이와 함께 걸어오는 발걸음이 솜털처럼 가벼

다행히 학교에 왔다는 제보에 안심을 하고, 급하게 운동장으로 뛰어나 갔다. 이미 1교시가 시작한 뒤라 운동장에는 체육 하는 한 반만 스탠드 쪽

웠다. 부모가 자식에게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라고 하는 말이 정말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걸어오는 동안 한성이 기분도 많이 풀어져 있었다.

에 모여 있었고, 나머지 공간은 텅 비어 있었다. 다시 상담 선생님에게 전

“선생님, 실내화 가방 놓고 왔어요.”

화를 걸었다. 혹시 그사이에 한성이가 왔는지 물어보았으나 오지 않았다

얼른 가지고 교실로 오라고 하고, 이번에는 절대 어디로 가면 안 된다고

고 하셨다. 상담 선생님에게 수업이 있어서 교실로 들어가야 하니 한성이

신신당부를 하고 보냈다. 교실에 와서 다음 시간 수업을 준비하였다. 거리

110•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교실 이야기•111


상 금방 들어올 아이가 또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짧은 다리로 뒤뚱거리며

없었다. 서로 마주 보고 앉은 상태로 연약한 선생님의 두 다리는 한성이의

온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너무 걸렸다. 설마 또 어디로 샜으려고.

허리를 감싸고 있었고, 양손은 한성이의 두 손을 꽉 쥐고 있었다. 한성이의

잠시 후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상담 선생님 전화였다. 아차! 한성이 찾았다는 소식을 전하지 못했구나. 다행히도 상담 선생님이 복도에서 한 성이를 만났으며, 한성이가 졸졸 따라와 지금 함께 상담실에 있으니 금방 내려 보내겠다는 말을 전해 왔다.

눈, 코, 입에서는 쉴 새 없이 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이 광경은 불과 며 칠 전 나와 한성이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졸졸 따라온 한성이에게 늦게 와서 수업을 할 수 없다고 했단다. 다른 형 아와 수업이 있으니 교실로 가야 한다고 했으나 그때부터 떼를 쓰고 화풀

그럼 그렇지, 자기도 양심이 있어야지.

이를 해 대기 시작하더란다.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방의 문이 빼꼼 열리면

금방 내려온다는 애가 2교시 수업이 끝나 가도록 내려오지 않았다. ‘한

서 상담을 받으러 온 그 형아가 슬그머니 걸어 나왔다.

성이 요놈이 상담실에 놀이 도구도 많고, 친절하고 예쁜 상담 선생님이 있

어떻게 해야 할지 상담 선생님께 물었다. 상담 선생님은 상담 받으러 온

으니 내려오기 싫은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또 한 명의 친절한 내가 마중

형아를 교실로 보내 달라고 하고, 한성이는 진정되면 보내겠다고 하셨다.

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중간에 무슨 변수가 있을지 모르니 직접 데리고

둘이 이야기를 하는데도 한성이의 곡소리는 멈추지 않고 있었다.

내려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4층 코너 맨 끝에 위치한 상담실로 향했다. 코너를 도는데 익히 들었던 소리가 들려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점점 크게 들렸다.

형아를 데리고 나와 교실로 돌아왔다. 3교시가 끝나 갈 무렵 교실 앞문 이 스르르 열렸다. 열린 문틈 사이로 한성이의 모습이 보였다. 커다란 두 눈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퉁퉁 불어 있었다. 입에는 하얀 막대사탕을 물

“으악~.”

고, 어슬렁어슬렁 교실로 들어왔다. 영문을 모르는 아이들은 부러운 표정

“놔라고, 놔란 말이야!”

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이 소리는 불과 며칠 전에 내가 한성이에게 들었던 반말이 아니었 던가!

“한성아, 어서 와.” 점심시간, 다른 날보다 더 지친 몸을 맛있는 음식으로 달래고 싶었다. 밥

“집에 갈 거야, 집에 갈 거야!”

을 한 숟갈 입에 넣으려는데 고기반찬을 더 받아 든 한성이가 내 앞자리에

상담실 문을 열려고 힘을 주었으나 열리지 않았다. 지난번 왔을 때 문이

털썩 자리 잡고 앉았다.

빡빡해서 잘 열리지 않으니 힘을 주고 열어야 한다던 상담 선생님 말이 떠

이놈아, 그냥 제 자리에서 먹지, 밥 먹을 때까지 괴롭히냐?

올랐다. ‘상담실 문이 잘 열려야 아이들이 잘 올 건데요.’ 웃으며 농담까지

이 아이도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루가 얼마나 길었을까? 그래 같이 밥

했었는데. 손에 힘을 주고 문을 열었다. 순간 바닥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의

많이 먹고, 힘내서 살아 보자. 측은한 마음으로 찬찬히 한성이를 쳐다보았

시선이 나에게로 모아졌다. 나는 내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놀라지 않을 수

다. 코 안쪽에 빨갛게 피가 보였다. 힘들었나 보다. 걱정이 되어 물었다.

112•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교실 이야기•113


한 아이 | 김연희

“왜 코피 났냐?” 한성이는 눈길도 주지 않고 숟가락을 입에 넣으며 짧게 대답했다. “알잖아요!” 역시 코딱지 오한성다운 대답이었다.

우리 놀이터에 티라놈이 산다

7월 한낮의 땡볕을 받은 아이들이 해바라기 씨처럼 흩어져 쏟아진다. ‘지각이다. 또!’ 아이들에게 방과 후 논술을 가르친 지가 벌써 석 달째인데 한 달에 한 번꼴로 꼭 지각을 하고 만다. 벌써 새치름하게 책상에 앉아 시간을 재고 있 을 어린이, 교실 바닥이 운동장인양 순간 이동해 마구 즐기고 있을 어린이, 탐험가의 후예로서 교실 여기저기를 뒤지고 다닐 어린이……. 그 얼굴들 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서둘러야 한다. “아얏!” 팔뚝에 무언가가 박혔다. 한 손에 노트북이 든 가방을 들고, 다른 손에는 프린트한 활동지를 한 아 름 안고 가다가 무언가에 부딪힌 것이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딘가를 김연희 동화를 쓰고 싶어 아이들을 찾아다녀요. 방송사에서 얕은 글들을 써 왔고요. 발로 뛰는 글의 힘 을 믿는 힘센 그녀예요.

114•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한 아이•115


향해 질주하는 어린이들이 사방 곳곳에……. 범인 잡기를 포기하고 교실

서 어린아이들과 신 나게 노는 그 아이가 고맙기까지 했다.

을 향해 달리려 하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팔뚝을 살폈다. 피는 피했지만,

신 나게 달리던 손오공이 갑자기 그네 옆으로 달려갔다.

푹 팬 구멍 둘, 티라놈이다!

“야! 땅꼬마, 비켜. 너 탈 차례 아니잖아.”

다시 주변을 자세히 살펴봤다. 저 멀리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걸어가

그네에 새치기를 시도하던 아이에게 손오공이 준엄하게 말했다.

는 남자 어린이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긴 목, 밑으로 처진 어깨, 꼬챙이 다

“시여. 타꼬야(싫어 탈 거야).”

리, 탱크처럼 생긴 운동화……, 티라놈이 분명했다. 저 녀석을 잡아야 하는

땅꼬마는 아예 그네에 배를 깔고 엎드려 버렸다.

데……. 이미 십 분이 지나 버린 수업이 떠올랐다. 아쉽지만 교실로 발걸음

손오공의 반응이 궁금했다. 손오공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굳은 결심

을 돌렸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티라놈뿐이다. 티라놈을 처음 본 건 아파트 놀이터에서였다. 초등학생들을 학원으로

을 한 듯 주먹을 꼭 쥐고는 외치기 시작했다. “바보, 천치, 똥개, 멍충이, 아메바…….”

빼앗긴 놀이터에는 걸음마쟁이 아가들이나 유치원생들뿐 한산했다. 나도

그네에 엎드려 있는 땅꼬마 엉덩이를 발로 차며 이렇게 외쳤다.

다섯 살 아들을 미끄럼틀에 넘기고 찰나의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빠보, 턴티, 똥대, 먼추니…….”

정말 찰나의 휴식이었다. 멀리서 모래 구름이 일더니 손오공이 날아왔 다. 뾰족한 뿔로 된 붉은 악마 머리띠와 응원봉을 두드리며 등장하는 손오 공 곁으로 놀이터 아이들이 쏜살같이 몰려들었다.

손오공을 따르던 아이들이 손오공을 따라 말했다. 손오공은 그 아이들 에게 엉덩이를 차도록 양보까지 했다. “어머, 아가들한테 뭘 가르치니? 형이 그러면 안 되지.”

“헝, 꽁 엇떠(형, 공은 없어)?”

오랜 시간 지켜보던 아이 엄마가 나섰다.

아이가 손오공에게 물었다.

“얘가 아줌마 아이예요? 아니면서 왜 그래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네

“오늘은 축구공 안 가져왔어. 너는 뭐 가져왔어?”

가 있죠, 얘를 싫어해요. 그네가 싫다는데 자꾸 계속 있잖아요. 그네는

“뚜박, 하찌(할아버지가 수박 가져왔어).”

쟤를 좋아해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알았어. 치사하게 혼자 먹기 없어.”

손오공도 지지 않고 반격했다.

“헝, 둔비 땅 하자(형아, 준비 땅 하자).”

“너 몇 동 사니? 왜 또래들이랑 안 놀고, 애기들이랑 놀고 있어. 3학년은

“만날 지면서 또 달리기는……. 오늘은 잡기 놀이하자. 나 잡아 봐라~.”

됐겠다.”

붉은 악마 손오공은 아이들을 이끌고 놀이터 모래밭을 신 나게 달리기

아줌마들이 시시하게 나이를 들먹였다.

시작했다. 물론 내 아들도 신 나게 따라 달렸다. 초등학교 3학년쯤, 대부분 아이들이 학원에 가야 할 이 시간에 놀이터에

116•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점점 손오공에게 관심이 끌리던 때 무작정 끼어든 아줌마들이 얄밉기까 지 했다. 기가 죽은 손오공은 아이들을 째려보더니 바닥에 앉아 그림을 그

한 아이•117


리기 시작했다. 손오공을 물리친 아줌마는 벤치로 돌아가 수다를 떨었다. 다 들리도록.

이제 아이들은 대 놓고 크게 웃었다. 씩씩거리던 돌출이빨은 쥐고 있던 셔틀콕 털을 뜯기 시작했다. 돌출이빨에게 아이들이 쏜살같이 달려갔다.

“어디 사는지 얘기해요? 안 하죠?”

“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공은 왜 망가뜨려?”

“그러게요.”

“흐이힝…….”

“쟤 때문에 저도 여기 꼭 지키고 앉아 있잖아요. 애기들한테 뭘 가르칠

돌출이빨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니 울었다.

지 몰라요.”

“야! 티라놈, 너 이러기야? 한 대 얻어터지기 전에 내놔라…….”

“이빨 봤어요? 내 엄지손가락만 해. 깜짝 놀랐어요.”

‘브라보!’

“엄마가 누군지, 교정은 안 해 주나? 되게 신경 안 쓰네. 쯧쯧쯧…….”

바로 그거였다. 티라노사우루스……. 머릿속에만 맴돌던 그 형체, 손오

이빨이 문제였구나! 자세히 보니 닭 뼈도 뚝뚝 잘라 먹을 수 있을 것 같

공, 돌출이빨은 티라노사우루스를 닮았다.

았다. 앞니 두 개가 유난히 돌출돼 있고 뾰족하고 날카로웠다. 무언가 생각

‘그래서 별명이 티라놈이었군.’

날 듯하다 머릿속에서만 맴돌았다.

아이들의 재치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놀이터 한쪽에서 초등학생들이 배드민턴

셔틀콕을 뜯으며 티라놈은 도망갔고, 아이들은 그 뒤를 쫓았다. 숨 막히

을 치고 있었다. 역시나 재미있는 일이 또 펼쳐질 조짐이 보였다. 하늘로

는 추격전이 시작된 것이다. 한참을 구경하다 나는 그들을 제지할 수밖에

솟은 셔틀콕을 맞은편의 아이가 우아하게 스매싱했는데, 하필 돌출이빨

없었다.

그 아이 가슴팍에 꽂혔다.

“너희들! 차 옆에서 놀면 어떡해? 그러다 차 긁히기라도 하면 어쩌려

“아악! 뭐야?”

고.”

돌출이빨은 울듯이 비명을 질렀다.

“…….”

“어, 미안. 공 좀 줄래?”

“딴 데 가서 놀아.”

배드민턴 소년은 정중하게 사과했다.

나는 미끄럼틀에서 아이를 넘겨받아 집으로 돌아갔다. 동화 소재를 찾

“미안하다면 다냐고. 공이 갑자기 여길 치니까, 여기가 막 아프잖아.”

던 내게 티라놈은 매력적인 인물임은 틀림없으나, 이제 주부가 돼야 할 시

돌출이빨이 가슴을 치며 말했다. 배드민턴 소년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간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보며 웃었다.

그렇게 티라놈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다음 날, 내 차에는 무지막지한 두

“니들끼리 웃으면 다냐고. 아직도 여기가 아프다고. 재밌게 놀고 있는데

줄짜리 무늬가 생겼다. ‘똥차’라는 문신도 돼 있었다. 한 획 한 획 섬세하게

왜 방해를 하냐고?”

도 새겨 놓았다. 못을 쓴 것 같았다.

118•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한 아이•119


머릿속에 스치는 얼굴, 아니 이빨! 그런 티라놈을 오늘에서야 다시 만났 는데……, 또 놓치다니 아쉬웠다. 하지만 희망은 있었다. 이 학교에 다닌다 는 사실을 알았으니. 마음속에서 출렁출렁 파도가 치밀어 올랐다. 이제 막 건져 올리기 시작 한 쌈박한 이야기 소재에 내 다리는 벌써 티라놈 교실 앞에 가고 있는 듯 했다. ‘그래, 차 도색 값이야 너같이 매력적인 인물을 그냥 두고 밥하러 간 아 줌마의 우둔함에 대한 비싼 대가로 치련다. 티라놈, 지금 너에게는 들리 지 않겠지. 나의 득득 이 가는 소리가. 하지만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너 의 상대가 되어 주마. 클클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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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삐뚤빼뚤 | 어린이글

삐뚤빼뚤 | 어린이글

상봉초등학교 3학년 김관우

짜장면

아이 키우기

2012년 9월 9일 일요일 햇볕이 쨍쨍

2012년 9월 23일 일요일 햇볕이 쨍쨍

나는 오늘 자장면 집에 갔다. 오늘은 어른 없이 김동은, 김유미, 이기완,

나는 오늘 지혁이, 동은이랑 놀았는데 내가 첫째, 동은이가 둘째, 지혁이

나하고 넷이서만 갔다. 자장면을 두 그릇을 넷이서 먹었다. 양이 적었지만 어른이 없어서 기분이 좋았다. 다음에도 엄마, 아빠 없이 가고 싶다.

가 셋째였다. 지혁이가 이상한 외계어를 썼다. “따야 따야 뚜뚜바뚜뚜기”라고 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아기 키우기가 시작되었다. 밥, 운동, 텔레비전, 약 이런 것들을 다 해줘야 되니 귀찮았다. 엄마의 마음을 알겠다.

(이글은 김관우 어린이가 2학년 때 쓴 일기입니다.)

122•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삐뚤빼뚤 •123


삐뚤빼뚤 | 어린이글

삐뚤빼뚤 | 어린이글

신목초등학교 5학년 하지운

4살 이재원

개교기념일

나 좋으면 TV 꺼

2013년 4월 8일 월요일 흐림

(TV를 보고 있는 엄마에게)

우리 학교는 개교기념일이여서 학교를 안 갔다. 학교를 안 가면 하루 종

재원: 나 안 좋아?

일 쉴 수 있어서 좋았다. 나는 우리 학교 강당 개교기념일도 있으면 좋은데

엄마: 왜 안 좋아, 재원이 좋지.

아쉽게도 강당 개교기념일은 없다.

재원: 나 좋으면 TV 꺼.

학교가 갑자기 쉬면 웬지 할 것도 없는데 쉬는 날을 아무 것도 안하고 그냥 보내서 웬지 섭섭하다. 개교기념일이어도 학원은 가야 되니까 웬지 더 섭섭해진다. 그래서 나 는 학원을 안 갔다. 학원을 안 갔더니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그래도 할 게 없는 건 마찬가지여서 독서록, 피아노 숙제 들을 먼저 해 놨다.

124•어린이와 문학 2013년 7월호

삐뚤빼뚤 •125


〈어린이와 문학〉 운영위원·후원회원 강벼리 고재은 공지희 공진하 권오삼 권혁준 김경희 김기남 김기정 김남중 김리라 김리리 김미승 김미혜 김바다 김상욱 김성호 김소연 김송순 김양희 김영순 김 옥 김유진 김윤정 김은아 김은영 김이삭 김일옥 김정숙 김제곤 김중철 김지은 김진경 김찬정 김하늘 김해등 김환희 김회경 김희정 남지현 문현식 박경희 박금숙 박상률 박수진 박억규 박영기 박정아 박종순 박채란 박철수 박향희 방일권 배봉기 백승남 서정오 송아주 송 언 송미경 송수연 안오일 안점옥 양이랑 엄영숙 엄혜숙 염희경 오인태 원종찬 유영종 유영진 유은실 윤금숙

2013. 7. 모두모아 96권

이경화 이병승 이봉열 이상교 이성숙 이승국 이숙현 이 안 이영애 이지호 이진옥 이재복 이중현 이주영 이창숙 임어진 임연아 임정자 임정진 임해경 장슬기 장영복 장주식 전기남 정승희 정유경 정진희 정혜윤 조성은 조성자 조은숙 조태봉 지수연 진현정 채수아 최원오 최은경 최은영 최은희 최종득 하은경 한윤섭 하 제 홍경희 천안곰곰이서점

한일아동문학회

※ 특별 후원금 : 진주 〈콩세알〉

발행일 | 2013년 7월 1일 발행인 | 김진경 발행처 | 월간 어린이와 문학 운영위원장 | 배봉기 상임운영위원 | 권혁준, 공지희, 장주식, 이상권, 임정자, 임어진 감사 | 김하늘, 김바다

(가나다 순임) 편집주간 | 김리리

〈어린이와 문학〉은 이 땅의 아동 청소년 문학인 모두의 힘으로 만들어 가는

편집기획위원 | 김기정, 송수연, 유영진, 오정택, 장영복, 전경남, 최원오

잡지입니다. 독자와 운영위원이 되어 주세요. 후원회원도 좋습니다. 많은 참여

편집 | 강윤정, 김윤희, 김지현, 박보람, 박용숙, 서미애, 안성훈, 오지숙, 이퐁, 주미경

바랍니다.

디자인 | 디자인시(02–336–3095)

•운영위원 연회비 : 구독료 포함 12만 원

인쇄 | allin p&b

•후원회원 연회비 : 구독료 포함 10만 원

등록일 | 2008년 4월 30일

•계좌 : 국민은행 037402-04-166621 (예금주 : 김진경)

등록번호 | 서울 라11902

주소 |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6가 333–1 3층 전화 | 02–6497–0011, 010–7297–6497 인터넷 카페 | cafe.daum.net/childmagazine

정가 | 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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