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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urary 2014

Volume.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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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온전한 복원을 위하여 Restore and Store in m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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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잠금해제 vol.01 February 2014

COVER STORY

편집 편집장 최한빛 수석에디터 김연수 수석에디터 이원일 포토그래퍼 안제세 바보인턴 안제세 디자인 아트디렉터 최한빛 수석디자이너 김연수 디자이너 이원일 광고 이사 이원일 과장 김연수 인턴 안제세

일본 교토에 있는 고려박물관 앞에서 찍은 사진입니 다. 왠지 모르게 포즈가 익숙하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걸잠 특유의 포즈는 영국의 유명한 록밴 드 비틀즈의 1969년 앨범 'ABBEY ROAD(애비로드)' 의 앨범 자켓을 패러디 했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 포 즈에 특별한 의미를 하나 부여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논하는 것에 있어, 부질 없는 탁 상 공론을 벗어나 직접 두 발로 걸어보자는 것입니 다. 페이지 곳곳에서 다음과 같은 포즈를 하고 있는 걸어서 잠금해제 멤버들의 모습을 찾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될 수 있겠습니다. 아니면 말고! 사진_채호진

2 걸어서 잠금해제

미디어콘텐츠 부사장 김연수 기획마케팅 차장 이원일 과장 최한빛 사원 안제세 독자관리 대리 이원일 사원 안제세


CONTENTS

Editor's Letter 걸어서 잠금해제를 만든 사람들 What's in our bag? 백제의 온전한 복원을 위하여 교토 / 기요미즈데라 나라 / 호류지 백제사 오사카/ 백제왕신사 왕인묘 시텐노지

REVIEW 에디터 김연수가 말하는 걸잠의 좌충우돌 에피소드 실향의 상처 , 그리고 일상의 안단테 : 우토로 마을

SPECIAL INTERVIEW

PEOPLE 걸잠이 만난 사람들 교토대학교 교환학생 김슬기 오사카시립대학 문학연구과 전은휘

당신이 몰랐던 이야기 츠루하시_재일교포 3세_양천하자 오사카_김광민 Korea NGO Center 사무국장 교토 고려미술관_재일교포2세_이일해

보물지도 PHOTO GALLERY 사진가 안제세가 만난 사람들 어쩌다 마주친 그대

역사는 어떻게 서술되는가? 김현구 교수

이달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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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잠금해제 vol.01 February 2014

EDITOR'S LETTER

정조문의 이야기로 시작하고 싶습니다. 1918년 경상북도 예천에서 태어난 정조문이라는 인물 의 이야기로 시작하고 싶습니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부두 노동자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던 그는, 빠칭코를 차려 큰 돈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당시 재일교포들은 일 본인들이 꺼려하는 직업만을 맡을 수 밖에 없었고, 그에 게는 생계를 위한 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 입니다.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게 된 물건이 하나 있습니다. 어느 날, 골동품 가게에서 만난 조선의 소박한 백자 항 아리 하나가 그것입니다. 그는 감탄을 금치 못하고, 그 때부터 사비를 털어 일본에 있는 조국의 문화재를 수집 하기 시작했습니다. 잡지 편집후기 면을 한 개인의 사적인 이야기를 소개하는데 할애하다니, 의아하실 만도 하겠 습니다. 그러나 정조문이 없었다면 <걸어서 잠금해제>란 잡지도 탄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굳이 그의 이야기를 소개한 이유는, 이것이 그저 그런 골동품 수집가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 입니다. 핍박과 멸시를 견디며 살아가던 일본에 사는 조선인들을 보며, 그는 그들이 어떻게 하면 조국 에 한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게 할 수 있을까 치열히 고민했습니다. 그 순간, 그의 머리를 스쳤 던 것이 바로 잡지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정조문은 잡지 이름은 ‘일본 속의 조선 문화’라고 명명합니다. 30년간 잡지를 발간하고, 고려미술관에서 만난 잡지 < 일본 속의 조선문화>. 걸잠 잡지를 탄생하게 해준 고마 운 존재입니다. 사진_안제세

꾸준히 문화재를 모은 결과, 마침내 1680여 점에 이르는 한국의 유물을 수집하는데 성공합니 다. 여러 일본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그들로부터 조선의 문화를 복원하기 위한 학술적 도움을 받았고, 일본사람들의 편견들도 점점 해결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일본 속의 조선문화>는1969년부터 81년까지 총50회가 발간되었습니다. 그가 발행한 잡지 속에는 당신 자신도, 조국도, 역사가 오롯이 녹아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잡지도 이와 같습니다. 페이지를 넘기면서 단순히 20대의 한 계절의 우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탐방 내내 지속했던 역사에 대한 우리의 고민과 열정을 확인하실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글_걸어서 잠금해제 4 걸어서 잠금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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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잠금해제 vol.01 February 2014

걸어서 잠금해제를 만든 사람들

_최한빛 백제는 익숙했지만, 일본 속의 백제는 낯설었습니다. 탐방 전, 사전 조사를 하며 우리는 주제 “백제의 온전한 복원을 위해”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어 문헌을 찾고, 권위자를 만 나며, 회의에 회의를 거듭했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입니다.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습 니다. 우리가 찾아간 곳에서, 일본은 낯설었지만, 일본 속의 것들은 정말이지 친숙했습니 다. 유물과 유적, 심지어는 사람들까지!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마음이 통하는 것은 굉 장히 어려운 일인데 말이죠. 일본을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합니다. 이제서야 그 말을 실감합니다. 타협의 지점이 없을 것만 같이 역사분쟁을 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지만, 그 어느 곳보다 우리 조상들의 문화가 녹아 있는 삶의 공간이었습니다. 일본 속의 대한민국 을 확인하고 싶으시다면, 이번 호를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_안제세 만남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작은 도자기, 맑은 하늘, 전통가옥이 줄지어있던 풍경, 그리고 한 눈에 다 들어올 수 없었던 거대한 유적들과의 만남까지. 열심히 셔터를 누르며 카메라 렌즈 안에 담아온 그 모든 만남의 기억들이 여전히 생생합니다. 특히나 타국의 낯선 도시, 어느 거리에서라면 모든 만남들이 이전보다 더 설레고 긴장될 수 밖에요. 대한민국에 대한 향수와 긍지는 오히려 이 곳에서의 만남들을 통해 커지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우리 팀의 팀워크도 더욱 단단해졌습니다. 이렇게 잊지 못할 추억과 애정을 가지고 입대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제게는 정말 보석 같은 시간들이었습니다. 다시 또 새로운 만남을 기약하며 ..

_이원일 상상원정대는 대학생활의 첫 대외활동이었습니다. 이제 막 적응한 1학년, 뭘 어떻게 해야 되는 지 몰라 방황할 때마다 팀원들이 옆에 있었습니다. 이번 활동은 사학과를 전공하는 저에게 특히 감명 깊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일본의 고대사, 한일 관계사에, 현 한국과 일 본의 국제적인 정세까지! 한 번의 대외활동을 통해 엄청난 공부를 했습니다. 예전부터 무 척이나 가고 싶었던 호류지와 꼭 보고 싶었던 백제관음상은 아직까지 제 머리와 가슴 속 에 남아있네요!! 그리고, 재일교포 분들의 삶. 그들의 삶에 대해 알게 된 게 아마 가장 값 진 경험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비록 여러 가지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고생한 면도 있지만, 많은 분들에게 알릴 수 있다는 즐거움이 더 큽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우리 걸잠 팀 멤버들, 그 중 지금 훈련 받고 있는 제세 형, 상상원정대의 운영진분들 그리고 다른 대 원들에게 감사하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_김연수 우리는 1월 9일부터 13일까지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가 돌아왔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잠겨 있는 역사의 문을 하나 하나 잠금해제 할 때 마다, 역사는 우리에게 과거에 머물러 있지 말고 미래를 향해 가라고 말했습니다. 그 렇습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 머물러 있지 않기 위해 우리는 역사 속에 머무르고 왔습니다. 역사는 항상 기록 속에서만 실재합니다. 위와 같은 우리의 무용담이 그저 말 그대로 하나 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게 하기 위해, 하나의 역사로서 존재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하 기 위해 우리는 이렇게 우리들의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남깁니다. 이 책이 우리가 과거 에서 얻은 대답을 미래에게 잘 전달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6 걸어서 잠금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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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잠금해제 vol.01 February 2014

WHAT'S IN OUR BAG?

걸어서 잠금해제에게 물었다

걸어서 잠금해제의 캐리어에 들어간 물건들은 여느때의 여행용품과는 달랐다. 사전 준비부터 철저했던 걸잠은 효과적인 홍보를 위해 특별한 것들을 준비했는데! 커피를 앞에 두고 걸잠 팀원들에게 물어봤다. 여행 가방에 무엇을 가져가나요?

WHAT'S IN YOUR BAG?

에디터_최한빛 사진_김연수

포스팅 본능 노트북

상상원정대 점퍼와 후드

쉐킷 쉐킷 걸잠 로고

구슬이 서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다 라는 속담이 있다. 사진과 기록이 아무리 많아 도, 잘 정리해서 탐방현장취재 온라인 포 스팅을 하지 않으면 그만! 걸잠팀은 일본 탐방과정을 실시간으로, 생생하게 공유 하고자 노트북을 챙겨갔다. 주의할 것은 일본은 110V이기 때문에 어댑터를 항상 같이 준비해야 한다는 것!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과잠을 연상 시키는 상잠과 상후! 소속을 분명하게 해주 는 점퍼와 후드는 단체여행에 있어 빠질 수 없는 아이템. 여러 다른 외투를 준비할 필요 가 없다는 실용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으며, 여행에 무리가 없는 스포티한 복장이기 때문 에 언제 어느 곳에서 입어도 무방함. 단체복 을 제공해준 운영진들의 센스에 박수를!

걸잠 팀의 브레인 제세가 직접 디자인한 걸 잠의 로고. 혹자는 유니클로와 비슷하다는 평가를 내렸으나, 그저 우연일 뿐! 어느 곳 에서나 걸잠을 한 눈에 알아보도록 만든 명 찰의 역할을 했다. 핸드메이드 제품이나 시 트지와 가위만 있으면 되기 때문에 제작과 정도 매우 간편! 외투 위에 스티커를 붙이 면 유니크한 명찰 완성!

클래식 준비물 메모장과 카메라

내가 제일 잘나가 선글라스

움파룸파! 걸잠 깃발

여행지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잊지 않 기 위해서 수첩은 필수! 실제로 이 수첩 하 나에 4박 5일 일정에 대한 모든 리뷰가 빼 곡하게 들어있다. 탐방지의 낮과 밤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주는 카메라는 여행과는 뗄 레야 뗄 수 없는 단짝. 핸드폰 카메라의 화 질도 좋으니 무게를 줄이고 싶은 사람은 하 나만 챙기는 것도 좋은 방법.

자유로운 이국에서 부리는 허세의 묘미! 입국장에서 이 선글라스를 쓰고 나온다면, 당신도 연예인 못지 않은 관심을 한 눈에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걸잠 팀의 재간둥이 연수와 원일은 실제로 공항만 가면 이 선 글라스를 착용했다는 사실! 번쩍번쩍 빛나 는 선글라스와 함께 걷는 일본의 거리, 상 상만 해도 재밌지 않은가?

팀원 한빛이가 제작한 이 깃발은 종이와 수 수깡 만으로 만든 초 간단 깃발로, 가볍기 때문에 휴대가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탐 방지 곳곳에 걸잠을 알리고, 홍보를 담당했 던 깃발은 역할이 끝나자 강풍을 못 이기고 끝내 산산이 부서지는 최후를 맞이했다는 후문. 만약, 여행 전 깃발 제작을 염두에 두 고 있다면 튼튼하게 만들 것을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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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잠금해제 vol.01 February 2014

백제의 온전한 복원을 위하여

복원이라는 슬로건을 가방에 함께 챙겨 넣었다. 우리 역사 빈 공간의 을 채우는 것, 그리고 그 유구한 역사를 삶 속으로 녹여내는 것. 이를 우리는 책상을 박차고 일어났다. 어찌됐든 탁상공론보다야 직접 걷는 낫지 않겠는가? 무작정 걸은 길들 위에서, 우리가 찾아낸 숨어있던 의 숨결. 이를 걸어서 잠금해제 하고자 했던 고군분투기.

퍼즐 위해 것이 백제

에디터_이원일 글_걸어서 잠금해제 사진_걸어서 잠금해제 취재협조_상상원정대 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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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T PLACE 고고학 사전에서 복원의 개념은 작게 는 유구나 유물을 원상태로 되돌리는 것을 말하나 크게는 과거 문화를 재 구성하는 것을 포함한다. 우리는 백 제를 온전게 복원하기 위해, 두 가 지 측면을 생각해보았다. 이것은 복 원의 정의를 더듬는 일과 크게 다르 지 않다. 첫 번째는 백제와 왜의 관계 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봐 역사를 온전 하게 되돌리는 것. 한국은 일본에게 근대사 콤플렉스가 있고, 일본은 한 국에게 고대사 콤플렉스가 있다. 이 콤플렉스가 만들어낸 민족주의적 역 사관은 사실관계를 정립하는 역사의 가장 기초적인 단계의 물을 흐렸다. 두 번째는 현실의 삶 속에 백제의 문 화를 재구성해내는 것이다. 사학자 E.H.Carr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말했다. 백제가 현실에서 공존하는 삶, 이것이야 말로 복원이 의미를 갖는 이유일 것이다.

고대 일본과 백제는 정치적으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였 다. 고구려와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서 일본과 친선을 도모하 던 삼국시대부터, 나당연합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고, 일본으 로 많은 유이민이 언급되면서 백제타운이 형성될 때 까지. 일 본 속에는 제 2의 백제라고 불러도 무방할 수많은 유적과 유 물이 존재한다. 걸잠이 찾은 백제의 흔적, 지금부터 확인해보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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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요미즈데라

교토가 자랑하는 랜드마크 청수사(기요미즈데라)는 778년 창건되었으나 여러번의 화재 로 소실되고, 일부가 1633년에 재건되었다. 유네스코 세계문 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호류사와 함께 일본사찰의 대표적인 곳으로 유명하다. 교토의 오토와 산을 배경으로 한 곳에 위치 해 있는데, 높은 툇마루에서 시가지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청수사를 세운 사람에 대해서 일본의 <청수사연기>를 비롯한 많은 문헌이 존재하고 있다. 문헌에 따르면, 캄무천왕 의 부하이자 백제계의 후손인 정이대장군(세이타이쇼군) 시카 노우에노 다무라마로 장군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정 이’라는 말은 ‘오랑캐를 물리친다.’ 라는 뜻이다. 교토가 자랑하는 문화유산을 우리의 선조가 만들었다니, 자부심과 애 정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걸어서 잠금해제 11


걸어서 잠금해제 vol.01 February 2014

Tip

청수사에서 볼거리는 오토와 산에 서 흘러내리는 물이다. 이 물이 너 무나도 맑고 깨끗해서 사찰 이름을 청수사(淸水寺)로 붙였다고 한다. 세 가지 물줄기마다 각각 의미가 있 는데, 사람들 마다 말이 다르다고 한다. 제일 유명하게 굳어진 설로 는, 왼쪽부터 사랑, 재복, 장수이다. 하나를 골라 물을 떠 마시면 미래에 각 물줄기에 따른 복이 찾아오는데, 주의 할 것은 3가지를 모두 마시는 욕심을 부리면 오히려 벌을 받게 된 다고 한다.

교토 시가지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기요미즈무대는 단 하나의 못도 사용하지 않고 15m의 높이를 139개의 대형기둥들의 견고한 조립만으로 지탱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무대가 얼마나 높기로 유명한지, 일본의 속담에 <기요미즈무대에서 뛰어내릴 생각으로>라는 말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말로 해석하자면, 뜻을 이루기 위해 결단을 감행하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 실제로 뛰어 내린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1694년부터 1864년 사이에 234건이 발생되었고, 생존률은 85.4% 였다고 한다.

연인의 성지 지슈신사. 엔무스비노 신을 모시고 있다. ‘사랑의 신’이 라고나 할까? 이곳을 들어서면 여기 저기 다정한 연인의 모습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런 연인의 모습이 부럽 기만한 솔로라도 이곳을 방문해야하 는 이유! 한 쪽 돌을 만 지고 다른쪽 돌까지 눈을 감고 걸어가 면 사랑을 이루어준다 고 한다. 다 들 도전 고 고! 12 걸어서 잠금해제

턱받이를 두르고 있는 아기자기한 돌들은 바로 일본의 지장보살이다. 일 본에서의 지장보살은 한국과 달리 여행객과 아이들을 보호하는 보살이 다. 특히 사산아나 낙태아로 이 세상에 나오지 못한 아이들의 혼을 달래 준다고 한다. 턱받이를 두른 불상이라, 참 친근하고도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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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류지

HOT PLACE 최고最高이자 최고最古 호류지는 스이코 천황의 아들이자 백제 계 귀족 소가씨의 지지자였던 쇼토쿠 태자가 7세기 초반에 세운 절이다. 호 류지의 창건 연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에 일본의 몇 미술사 학자들 은 현존하는 호류지의 가람 형식이 백 제풍의 고식과 거의 동일하다며, 호류 지가 만들어진 시대는 아스카 시대이고 그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는다고 주장 한다. 사실 여러 학설들이 있지만 대략 710년 무렵 중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창건 설화는 다음과 같다. 쇼토쿠 태자 가 601년 사랑하는 아내의 고향인 이 카루가에 궁을 짓기 시작했다. 그때 근 처에 세운 절을 호류지의 시작으로 본 다. 창건 무렵이 소가씨 의 씨사인 아스 카사가 준공되어 불상이 안치되던 때인 만큼 태자가 이에 팔적할 만한 절을 세 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MORE 백제관음상

호류지는 서원과 동원으로 나뉘어 있 는데, 서원은 엄청난 높이의 5층 목탑, 범종이 있는 종각, 대강당, 금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고구려 승려인 담징 이 그렸다는 벽화도 서원에 위치해 있 으나 사진 촬영이 불가능하였다. 이러 한 호류지에서 나타난 구조는 백제의 사찰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구조 로, 특히 백제 정림사와 그 구조가 동 일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 취재팀을 놀라게 한 것은 바로 호류지의 규모이다. 우리는 일본이 작은 나라라고 편견을 갖고 있 다. 낮은 평균키, 작은 자동차, 저층 건물 등 우리가 일본에 대해 가지는 보 편적 생각은 ‘작다’는 것입니다. ‘작다’는 편견에 사찰도 예외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호류지를 탐방하며 우리가 본 것은 거대한 사찰 면적, 하 늘 높이 올라 태양과 어깨를 견주 하는 탑이었다. 운영진분의 설명을 들어 보니 호류지 이외에도 나라에 수없이 많이 존재하는 사찰들은 과거 그 절 을 세운 세력가들의 권력을 상징한다고 한다. 사찰의 크기가 권력과 비례하 여 존재하는 만큼 고대 일본의 권력가들은 ‘작다’는 틀을 깨고 웅대한 규 모의 사찰을 지어냈다. 특히 호류사를 세운 쇼토쿠 태자는 야마토 정권 당시 아스카 문화를 개창한 인물로 당시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만큼 호류사를 어 마어마한 규모로 축조할 수 있었다. 일본이 ‘작다’는 편견을 버리고, 걸어 서 잠금해제는 호류사의 거대한 위용을 품에 안고 발걸음을 이어갔다.

금속의 표면을 도려내고 남은 부 분을 무늬로 나타내는 투조식금구 의 제법에 대해서 일본의 미술사학 자인 세끼노 다다시가 “조선에서 고도로 발달한 수법으로 백제 예술 의 최고 걸작”이라고 평가한 만 큼 백제에서 전래된 최고의 명품이 다. 미국의 미술학자 페로스를 놀 라게 했다는 구세관음상도 바로 이 ‘백제관음상’을 가리킨 것이다. 유홍준 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에서는 백제관음상에 대하여 이렇 게 표현되어 있다.“이상적인 인간 상이면서 생동하는 듯한 사실감도 느끼게 해주며, 불성과 인성의 절 묘한 만남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책에서 볼 때는 추상적으로 다가 오던 이 문구가 백제관음상을 실 제로 보자 뇌리를 스쳤다. 실제 높 이 209cm의 팔등신도 넘는 훤칠 한 몸매와 물결무늬를 그리며 퍼져 내려가는 법의 아랫자락, 근육의 굴곡을 살짝 나타내는 천의 자락은 아름다움을 그 자체였다. 아쉽게도 사진 촬영이 불가능하여 그 아름 다움을 담아올 수 없었으나, 백제 관음상이 준 깊은 감명은 우리들의 가슴속에 두고두고 함께할 것이다! 걸어서 잠금해제 13


걸어서 잠금해제 vol.01 February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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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사

조국을 언제 떠났노. 백제사의 꿈은 가련하다. 김동명 시인의 '파 초'에 이런 구절이 있다. “조국을 언 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시대적 배경도 말 하고자 하는 바도 다르지만, 우리는 백제사의 처지가 가련한 파초와 다 름없어 보였다.

<일본서기>의 백제사에 관한 기록은 어디 까지 믿어야 좋을지 모르지만, 조메이 왕 은 ‘구다라강(백제강) 옆에 구다라궁(백 제궁)과 구다라사(백제사)를 지었고 구다 라궁(백제궁)에서 생활하다가 641년 서거 했을 때 구다라대빈(백제대빈)으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조메이 왕 7년(635)조에 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백제에서 온 손님들을 조정에서 대접했다. 상서로운 연꽃이 검지에서 피어났다. 한 개의 줄기에 핀 두 송이의 연꽃이었다. 왜와 백제는 쌍둥이 형제와 같다는 뜻이나, 그 꽃은 사실상 백 제꽃이라 불릴 만한 것 이었다. <일본서기>를 보면 백제계 기 술자 후미노아따히아가따를 건축기사의 장으로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소가씨의 소가노에미시에게 백제대사를 완공시키기 위해 인부를 동원하라는 명을 내리고 있는 기록도 있다. 요컨 대 백제계의 소가대신이 주관하여 백제천 근처에다가 백제 기 술자들이 세운 궁과 당탑이 백제궁이고, 백제사이고, 9층탑인 것이다. 어디를 가나 어느 것이나 아스카 시대의 문화에서는 소가씨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다. 백제사는 일본 전역에 수없

이 많게 퍼져있다. 백제와 관련된 이름없는 절들을 모 두 백제사로 부르기 때문이다. 그 중 나라에 있는 백제 사를 답사해보았다. 나라 지역은 일본 최대의 역사 도시로, 경주와 같이 중고 등학생의 단골 수학여행지가 되는 상징적인 지역이다. 명 성에 걸맞게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리는 덕분에, 나라 시 는 관광 수입액만으로 3천억 엔이라는 비용이 드는 사찰 의 금입 작업을 했을 정도다. 이런 대단한 도시의 대단한 유물들과 함께 백제사가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것, 대단히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였을까? 눈 앞에 드러난 백제사는 더없이 초라한 행색을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곳곳에 거미줄이 쳐져 있고, 관리가 전혀 안 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백제사를 비롯해 백제마을을 세운 주체세력인 소가가문대신을 모시는 신사 또한 제대 로 관리되지 않아 탑 속의 병이 쓰러져 있기도 했다. 운영 진분들의 조언을 얻어가며 알아보니 백제사의 초라한 몰 골은 일본의 극우파들에 의한 결과였다. 일본의 시초인 야 마토 정권이 백제계의 도움을 받아 문화를 꽃 피울 수 있 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일극우파들이 역사를 가리 기 위해 백제사를 관리하지 않고 방치한 것이다. 호류지의 서원가람이 7세기 말 ~ 8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 져 있으니, 백제사는 유구한 역사의 세월을 견뎌온 고마운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걸어서 잠금해제 팀원들은 백제사 가 여전히 일본에 남아있는지, 이런 대우를 받고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일본이 관리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조국도 백제사를 떠나면 안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백제사에 많은 이들의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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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CE 4

백제왕신사

HOT PLACE

“백제왕신사는 백제왕실 사당으로 백제왕과 신라 신(우두천왕)이 합사되어 있음.” “백제왕이 모셔진 곳이지만 일본 내 신사의 모습을 하고 있다.” 검색창에 “백제왕신사”라고 치면 나오는 결과들이다. 이름만 들어보았을 때는 백제왕을 모셔놓은 신사라고 생각할 수 있을 여지가 많다. 그러나 역사는 조금 다른 대답을 던졌다.

걸잠 팀은 백제왕신사의 진상을 규명 하기 위해 백제왕신사로 이동해보았다. 백제왕신사로 들어가기 전에 백제사적 이 먼저 걸어서 잠금해제 팀원들을 맞 이해주었다. 백제사는 오사카 성과 더 불어서 오사카 시 자체에서 직접 특별 관리하는 사적이라고 한다. 시 차원에 서 이렇게 특별 관리를 받는 사적이 이 두 군데밖에 없다고 하니 그 위엄을 간 접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었다. 그러 나 안타깝게도 백제사는 11C~12C 무 렵에 불에 타 지금은 1932년에 발굴한 주춧돌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도를 통해 금당 왼쪽과 오른쪽 을 회랑으로 둘러싼 그 규모로 짐작해보 건대, 과거에 웅건함과 아름다움을 한껏 뽐냈었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고 대 백제사의 아름다움은 현대에까지 일본 에 그대로 전해져 온다. 이러한 사실은 백 제 사적에서 불어오는 솔바람이 히라카타 8경(백제사적과 백제왕신사가 있는 곳이 히라카타시이다.)의 하나로 속하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위 지도를 통해 2 탑 1금당의 가람 배치를 쉽게 알 수 있는 데, 이는 대한민국의 역사도시 경주에 있 는 감은사터의 가람 배치 양식과 매우 유 사하다.한반도와 교류한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백제사 뒤편으로 가면 그토록 찾아 다니던 백제왕신사를 볼 수 있다. 백 제왕신사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비 석이 세워져있다 백제왕씨족의 조 상들의 넋을 기리는 비석들 같지만, 2002년 신사 자체를 이 위치로 옮겨 재건할 당시에 금전적으로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을 기리는 기념비라고 한다. 이름은 백제왕신사이지만, 어 디까지나 일본의 양식으로 지어진 하나의 신사이기 때문에 한, 일 합작 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배전 한가운데에는 “백제국왕 우두천왕”이라고 적힌 문구가 적힌 간판이 있 었다. 우리 취재 팀은 이 문구에 주목했다. 히리카타 교육위원회의 자료에서는 이 편액이 신사가 백제 왕씨의 조상을 제사 지낸 곳임을 명확하게 해 준다고 적 었다. 즉, 이 ‘백제국왕 우두천왕’이라는 문구가 세간에 돌고 있는 백제왕신 사가 백제왕족을 모신 신사라는 억측에 대한 역사적 반증이 된다는 것이다. 하 지만, 역병을 전파함과 동시에, 만병통치의 비법을 알려준 우두천왕을 백제왕씨 들과 같은 곳에 모신 것은 아직까지 학계에서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우리가 백제왕신사에 가서 가장 주목한 것은 백제왕신사가 백제왕을 모시는 신사가 아 니라 백제 왕씨들을 모시는 신사였다는 것이다. 백제왕과 백제 왕. 겨우 띄어쓰 기 하나 더해졌을 뿐인데 둘은 현격한 차이를 야기한다. 그리고 이 차이가 곧 나 비효과처럼 커져 인터넷상에는 백제왕신사가 백제왕족의 신사라는 것을 증명하 기 위해 각종 사료까지 인용한 글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역사가 인터넷 보다 그 정확도에서 앞선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백제왕신사를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걸어서 잠금해제 15


걸어서 잠금해제 vol.01 February 2014

PLACE 5

왕인묘

왕인묘의 표지석을 읽어보면 왕인묘가 아니라 전(傳)왕인묘 라고 적혀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왕인묘를 왕인묘라 이름 붙 이지 못하고 ‘왕인묘라고 전해지는 곳’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궁금증을 안고 백제문 을 지나 왕인묘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가보면 자연 석이 어 색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박 사왕인지묘’라고 적힌 비석이 놓여 있다. 왕인 묘역에 대해 생각해보면, 무언가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전반적으로 당 시의 흔적이라기보다는 후대에 겉치레로 이것저것 갖다 붙 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박사왕인지묘’라는 비석 앞에 놓인 무궁화만 봐도 그렇다. 이는 영암과 자매결 연을 맺으면서 놓은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영암이 왕인 탄 생지로 알려진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는 것을 생각해보 면, 무궁화 역시 후대의 끼워맞추기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 니다. 왕인묘에 대한 의심은 왕인묘가 있는 위치나, 묘역 지 정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먼저, 위치의 경우에는, 왕인은 오 사카부의 남부 하비키노 시 후루이치에 있는 사이린사 부근 에 살았고, 지금도 그의 후손이 가와치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왕인의 묘가 존재하는 곳은 정반대인 오사카부 북부 이다. 왕인의 후손들이 많이 남아있는 남부 오사카부도 아니 고, 그렇다고 왕인이 일본으로 갔던 당시의 정치적 중심지 인 나라지역도 아닌, 북부 가타노라는 지역에 왕인박사묘가 존재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이 지역에 백제인들이 자 리를 잡은 것도 일러야 왕인이 일본에 들어온지 몇 백년 후 인 백제왕 경복 때부터라고 한다. 이보다도 훨씬 이전의 인 물인 왕인의 묘가 이곳에 있는 것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잘 되지 않는다. 이상한 점은 여기서 끝이 나지 않는다. 히라가 타에 왕인묘가 처음 고증되어 묘역이 다듬어진 것은 1731 년이다. 오사카 부사적으로 지정된 것은 1938년이다. 그런 데 그렇게 지정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어처구니가 없 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1616년 히라카타의 긴야 정에 있는 와다사의 니시무라 도슌이라는 자가 자칭 왕인의 자 손이라 주장하며 「왕인분묘내조기」룰 쓴 바가 있다. 그런 데 이 기록을 보면, 후지사카 마을 오하카타니에 있는 ‘도 깨비묘’는 왕인의 묘가 변한 것이라 적혀 있다. 도깨비묘는 16 걸어서 잠금해제

왕인박사묘는 비어 있다. 왕인은 문명의 빛을 가져다 줬음에도, 그 존재가 역사 속에만 남아있는 비운의 인물이다. 고대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한 시점이다.

일본어로 ‘오니바카’라고 하는데, 그것이 변질되어 ‘와 니바카’, 즉 ‘왕인묘’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후 1731 년에 그것을 본 교토의 유학자 나미카와 세이쇼가 후지사카 부근에서 왕인의 묘를 찾던 중 현재의 자연 입석을 발견하 고는 그것을 왕인의 묘로 삼았고, 이후 그곳의 영주가 막부 의 권위를 배경으로 그를 왕인박사지묘로 일컬어 지금의 왕 인박사묘가 된 것이다. 일본의 왕인박사묘 역시 역사 속에서 한국의 왕인유적지처럼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다. 1899년 닌 토쿠 천황 등극 1500주기 기념제에서 왕인에 대한 제전도 함께 진행했다. 이는 당시 위정자들이 왕정복고로 인한 천황 중심주의를 선창하기 위해 과거 천조를 섬겼다고 하는 왕인 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 불과하다. 당시 왕인 박사 추모 제가 거행되어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해 많은 명사들이 돈을 낸 것을 보면 이를 짐작할 수 있다.일제시대에는 국가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에게 이용되어, 1938년 5월에 왕인의 묘가 오 사카 부에서 사적 13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2차세계 대전 이후 해마다 11월 3일에 왕인제를 열고 있다. 최근에 는 위에서 봤던 무궁화에서 볼 수 있듯이 영암과 친선 교류 활동을 전개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지금은 정치적 의도 없 이 순수하게 왕인묘를 돌보며 친선을 도모하고자 하는 사람 들이 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상상원정대원들이 왕인묘를 방문했을 때 그 곳을 관리하시며 많은 설명을 해 주신 고 마우신 할아버지 한 분만 봐도 그렇다. 그럼에도 서글픈 과 거 행적을 보면 이곳이 진짜 왕인묘인지 좀 더 철저한 고증 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우에노 공원의 왕인박사 비 역시 일본이 내선일체를 주장하고자 왕인을 추앙하는 정 책의 일환으로 쓰였던 것이었다. 비석 건립을 협찬한 사람들 중에는 친일파로 지탄을 받은 한국인이 13명이나 있었다.결 국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정치적으로 이용만 당한 왕인은 지금, 한국에도 그리고 일본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오 직 역사 속에서만 실재한다. 이를 모르면서 영암 왕인 축제 로 흥겨워하고, 왕인묘에 꽂힌 무궁화를 보며 신기하다며 사 진을 찍고, 관광 안내서에 나온 내용만 보고 우에노 공원의 왕인비 앞에서 좋다고 사진을 찍고 있는 우리들의 현실을 과연 무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PLACE 6

시텐노지

시텐노지는 그 어느 유적지보다도 많은 백제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 어느 유적지보다도 백제의 흔적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시텐노지, 백제가 일본에게 바통터치하는 교차점이 아닌가 싶다.

시텐노지는 이렇게 탄생했다 시텐노지는 서기 593년 건축되어 일본에서 공식적으로 가 장 오래 된 절이다. 시텐노지를 건설한 사람은 초기 일본역 사의 위대한 문화적 영웅으로 유명한 쇼토쿠태자이다. 태 자가 시텐노지를 건설하게된 배경에는 소가씨와 모노노베 씨 사이에 싸움이 있었다.쇼토쿠태자를 대표로 하는 소가씨 는 인도에서 시작되어 중국을 거치면서 고도로 발전된 신착 종교인 불교를 받아들이기를 원했지만, 모노노베씨는 고대 의 일본토착종교를 지지하면서 이에 강력히 반대했다. 모노 노베씨와의 전쟁터로 가던 길에 쇼토쿠태자는 4대 천왕상을 조각하고 ,적과 싸워서 이기게 된다면 사천왕을 위해 절과 탑을 세우겠다고 맹세했다. 이후 싸움에서 승리한 593년 승 리를 기리기 위해 시텐노지 절의 축조를 명하게 된 것이다. 시텐노지에서 눈여겨볼 점은 건축양식이다.가람배치양식과 1탑1금당 양식이 고대 백제의 대표적인 건축양식과 같기 때 문이다. 실제로 부여의 군수리 절터에서는 가람배치양식과 1 탑1금당 양식이 모두 발견되었 다. 시텐노지에 백제의 양식이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이 는 당시 왜의 국력과 기술로는 절을 건축하기 힘들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쇼토쿠 태자는 시텐노지를 건축할 당시 부족한 기술과 국력을 보완하고자 백제의 목공과 기술자들 을 불러 시텐노지를 건축했는데, 이 과정에서 백제의 양식이 고스란히 전달된 것이다.

MORE 공고구미 이야기 공고구미 회사는 시텐노지에 얽힌 백제 이야기로 유명하다. 578년,쇼토쿠태자의 초청으로 백제에 서 온 목수 유중광이 시텐노지를 지으면서 이 회사 를 설립했는데, 이후 대대로 사업이 이어지면서 일 본 전역의 절과 성을 건축하고 유지보수하는 업무 를 해왔다. 1995년 고베시를 강타한 대지진 때 16 만 채가 무너지며 도시 전체가 초토화된 폐허 속에 서도 한 개의 건물만이 무너지지 않고 남았는데, 바 로 공고구미에서 지은 대웅전이었다고 한다. 이후 ‘공고구미가 흔들리면 일본 열도 전체가 흔들린 다’는 표현이 생기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가이 드분과의 인터뷰에서 위 표현이 심하게 과장되었기 때문에 자제해야한다는 충고를 들었다. 백제의 흔 적을 찾는 길은 신중하고 또 조심스러워야 하는 것 같다. 시텐노지에서 찾은 또다른 백제의 흔적은 11월 첫 째주 일요일에 열리는 ‘왓소’축제이다. 우리나라 말 ‘왔소’에서 유래된 이 축제는 쇼토쿠 태자가 직접 일본 사절단을 맞이하는 모습을 재현한 가장 행렬 축제라고 한다. 왓소축제에 대해서도 관계자 분들과 인터뷰해보았는데, 안타깝게도 왓소축제 역 시 시텐노지에서는 대가 끊기고 대신 다른 축제가 중요 행사로 자리매김한다고 하셨다. 시텐노지의 탐방은 이렇게 아쉬운 부분을 많이 남기고 끝났다. 걸어서 잠금해제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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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 “경보”

#Episode 2 “음식랩”

4일차 밤이었죠, 신사이바시에서 열심히 돌아다니가 지하 철을 타고 호텔에 가까운 역에서 내렸습니다. 내려서도 호 텔은 15분정도 더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있었습니 다. 저벅저벅 걸어갔죠. 그런데 신사이바시에서 3시간 동 안 쉴 틈 없이 걸어다녔더니 더 이상 걸어간다는 사실 자 체가 너무 지겨운 겁니다. 그래서 저는 걷는 거라도 재밌게 걸어보려고 경보로 축지법하듯이 걸어봤습니다. 고등학교 체육시간에 운동장 돌 때 지루하면 가끔 하던 거였죠. 그런 데 뒤에서 한빛이 누나가 말했습니다. “제세가 경보 진짜 잘하는데.” 저희 팀은 제세 형을 부추겨서 경보를 해 보 게 했고, 저와 간단한 경보 시합을 했습니다. 그리고 “시 ~작” 하고 있는 힘껏 걷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옆에서 뭐 가 휙 하고 지나가더니 반쯤 갔을 때 제세 형이 결승지점에 서 웃고 있는 겁니다. 저도 걸음 빠른 편인데 그렇게 빠르 게 걷는 사람은 처음 본 것 같았습니다. 다시 한 번 경보하 는 걸 봤는데 ‘저런걸 보고 축지법이라 하는구나’ 싶더 군요.

2일차였죠 아마? 그게 시작되었던게. 아침에 버스를 탔는데 원일이가 갑자기 이상한 염불을 외우는 겁니다. “밥 밥 밥 밥 밥 밥…. 김칫국, 김칫국, 김칫국….” ‘얘 뭐지’이러 고 물어봤는데 음식랩이랍니다. 처음엔 별로 관심이 없었는 데 유투브에서 동영상을 하나 보여주더군요. 고등학생 4명 이서 음식랩을 하는 건데 뭔가 참신하고 재밌어 보였습니다 그 길로 바로 연습에 들어갔죠. 그렇게 계속 연습을 하다가 3일차 밤이 되었습니다. 밤에 샤워를 끝내고 방에 저랑 원일 이, 한빛이 누나가 모여서 이번에는 보이는 라디오 형식으로 동영상을 찍어 봤습니다. 너무 웃긴 애드리브가 많아서 NG 만 40번 난 것 같습니다. 마침내 약 2분에 달하는 동영상을 촬영하는 데 성공했고, 저는 나중에 컨텐츠 만들 때 쓸 수 있겠다며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한빛이 누나의 격렬한 반 대에 그 동영상은 아직 제 핸드폰에만 남아 있습니다. 꼭 한 번 공개하고 싶은데 말이죠…ㅎㅎ 아, 저희가 찍은 동영상 의 제목은 “둘이 먹다가 셋이 죽어도 모를 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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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에디터 김연수가 말하는 좌충우돌 에피소드 에디터_김연수 글_김연수 사진_걸어서 잠금해제 촬영협조_상상원정대 운영진

#Episode 3 “불청객”

#Episode 4 “호호이”

4일차였습니다. 저와 원일이는 옷가게에 들르면 비싼 옷들 입어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대리만족이죠. 그런 저희는 신 사이바시에서 물만났습니다. 옷가게 정말 많더군요. 그 중에 하나를 골라 잡아서 들어가서 여러 옷들 입고 있는데 이상 하게 저 쪽에서 시선이 느껴지더라구요. 살짝 보니 점원 한 명이 계속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서울에서도 많이 받은 눈초 리라 신경쓰지 않고 계속 입어봤습니다. 잠깐 한빛누나랑 제 세형한테 간 사이, 원일이는 계속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고 있었습니다. 옷을 봐 주다가 원일이 쪽을 힐끔 보니 아까 그 점원이 원일이 쪽으로 다가가고 있더군요. 그리고 원일이랑 이상한 대화를 하더니 갑자기 구석으로 끌고가는겁니다. 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때 원일이 표정을 봤어야 했는데.. ㅋㅋ 구석진 곳으로 따라간 원일이 는 또 피팅룸으로 등떠밀려 들어갔습니다. 그런 원일이가 한 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하고 그 상황이 너무 웃기기도 해서 저희는 웃음을 멈추지를 못했습니다. 겨우 나온 원일이의 표 정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호호이~”. 짱구가 특유의 목소리로 눈을 감은 채 뜬금 없는 상황에 하는 말이죠. 원일이가 갑자기 짱구 성대모사 를 하겠다고 하면서 그걸 따라하는 겁니다. 그래서 기대에 가득차서 들어봤습니다. 근데 하나도 안똑같은데 표정이랑 목소리가 너무 웃긴겁니다ㅋㅋㅋㅋ 그리고 그걸 하더니 또 원장선생님 따라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해보 라고 했더니 “어린이 여러분, 오늘은 산책을 할꺼에요” 라고 짱구 목소리랑 똑같이 표정만 다르게 하는겁니다.ㅋ ㅋㅋㅋㅋㅋㅋ 아 그 표정을 봤어야 하는건데..ㅋㅋㅋㅋㅋ ㅋ 그리고 연이어서 훈이, 철수, 맹구까지 따라하면서 유치 원 풍경을 1인 5역으로 소화해내기도 했습니다. 정말 오랜 만에 원일이가 큰 개인기 하나 건진 것 같아 기쁩니다. 혹 시 길가다가 원일이 만나면 한 번 시켜보세요. 후회하지 않 으실 겁니다. 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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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토로에서 살았고, 우토로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앞으로도 우토로에서 살아가기를. 일상의 안단테, 여유로움과 평온함을 잃지 않고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에디터_걸어서 잠금해제 글_이원일

실향의 상처, 그리고 일상의 안단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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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차의 오후는 특별했다. 살아있는 역사를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쟁과 침략의 역사를 오롯이 새긴 교토의 작은 마을 "우토로 마을"을 방문

REVIEW

하고, 봉사활동을 진행했다.

우토로 마을의 주민의 구성원은 대다수 연로하신 어르신 들이다. 주민들을 위한 봉사활동은 전통 요리, 벽화 작업, 단청 만들기, 사랑의 리본 달기, 이벤트 총 다섯 팀으로 나 누어 기획 했다. 이벤트 팀에 속한 걸잠 멤버들은 어르신 들께 실질적인 도움을 드리고, 활동을 통해 보람을 느끼기 위해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며 상의했다. 이벤트 팀이 생 각해 낸 것은 바로 전통 윷놀이! 해방 후에도 고국으로 돌 아가지 못한 어르신들의 향수를 달래드리고, 한바탕 웃을 수 있는 재미있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걸잠 멤버들, 윷놀 이를 어떻게 진행할지 게임 룰을 정하고 윷판을 제작하기 시작했다.윷놀이 제작을 하면서 "무반주 댄스", "애교", "우 토로 마을 주민분과 뽀뽀하기" 같은 각종 우스꽝스럽고 민 망한 미션들이 등장했다. 중요한 것은, 이 미션들은 봉사 자인 상상원정대가 인간 말이 되어 수행한다는 것!!! 과연 윷놀이가 성황리에 끝날 수 있었을지! 잠시 후에 to be continued... 걸어서 잠금해제 23


걸어서 잠금해제 vol.01 February 2014

우토로 마을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비행장 건설을 위해 동원 된 조선인 노동자들에 의해 형성된 마을이다. 70년 전, 조선 인 노동자들은 함바라고 불리는 임시 숙소에 거주하며 비행 장의 땅을 다지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작은 목조 건물 이었고, 횡으로 건물들이 나란히 나열되는 모습이었다. 신축 건물들 사이로, 언뜻 보기에도 무너져 내리는 함바가 위치해 있다. 30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갈 곳이 없어진 조선인들

우토로 마을은 원래 구릉지대였다. 그러나 1943년, 비행장 건설시 만들어지는 활주로를 평평하게 다지기 위해, 우토 로 마을에서 흙을 파다 날랐기 때문에 지금은 지대가 굉장 히 낮다. 당시 일본인들은 모두 전쟁에 참여하고 있었고, 공 사를 위해서 조선인들을 많이 고용했다. 이것이 우토로 마을 이 "살아있는 역사"인 이유이다. 이 마을의 역사는 절대 전쟁 의 역사, 침략의 역사, 식민지 조선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처음 지어진 모습은 지금보다 훨씬 볼품없었고, 지금 보는 사진이 그나마 세월을 거쳐 개 조된 모습이라고 한다. 함바 안에는 수도가 없었고, 전기는 건물 두개당 하나 꼴로 사용했다고 한다. 화장실이 집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공동화장실을 따로 만들어 여러 함바의 사람들이 함께 사용했다.

우토로 마을의 지대가 인위적으로 낮아지다보니, 여러가지 문제들이 많이 생겼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수세식 화장실이 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은 물이 차서 70cm까지 빗물이 찼다 고 한다. 그럴 때면, 화장실 안의 오물이 밖으로 나와버리고, 거리는 오물과 물이 섞여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심지어는 일본 정부에서 수도를 설치해주지 않아서, 마을 사 람들은 1988년까지 우물물로 식수를 해결할 수 밖에 없었 다.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 역시, 바로 이 수도를 설치하자는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그 뒤에, 우토로 마을을 두고 토지 문 제가 발생하면서, UN과 한국 정부에서 개선의 요청이 시작 된 것이다.

MORE 밥상의 문화 본격적인 봉사 프로그램 을 시작하기 앞서, 어르신 들이 손수 만들어주신 떡 국을 먹었다. 출출한 배도 채우고, 마음까지 든든하 게 채우자 힘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떡국 한 그릇 에서 한국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일본은 밥과, 국 반찬까지 모두 개인 앞으로 한 상이 차려진다. 식사는 함께 하되, 너와 내가 먹을 것이 따로 마련되는 것이 다. 그러나 한국은 함께 먹고 함께 나누는 밥상의 문 화를 가지고 있다. 독자들도 밥상 앞에서 가족들과 오 순도순 찌개 한 그릇을 나누어 먹던 기억이 있을 것이 다. 이곳에서는 아직까지 음식을 만들어 함께 먹는 전 통이 남아있었다. 물론 어려운 시기 가족으로서 서로 돕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기도 했지만, 전을 한 장 부 쳤더라도 사람들과 젓가락을 같이 하는 것을 보며, 우 리는 추운 겨울을 견뎌내는 따뜻함이 다른 데 있지 않 다고 생각했다. 24 걸어서 잠금해제

우토로 마을 사람들에게 그들만의 노래가 있다고 한다. 2002년, 우토로마을의 이야기를 담아 만든 시(노래) "어머니 의 노래"가 바로 그것이다. 내용은 왜 주민들이 이곳에 살아 야만 하는지를 표현했으며, 특히나 마지막 두 줄이 우리들 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이 마을을 떠나면 나는 나로 있을 수 없다. 내가 아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일본에게 말하고 싶었던 우토로 주민들의 진심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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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윷놀이를 준비하는 이벤트 팀 02 미션 수행중인 인간 말 03 힘 차게 윷을 던지신 어머니 04 멋진 공연에 팬이된 걸잠

인간 말들의 몸개그와 바디랭귀지로 윷놀이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일본어를 모르는 우리 팀원들은 어머니들과 많은 말 을 나누지 못하고, 손짓 발짓을 이용해가며 어렵사리 대화 를 했지만, 함께 즐긴 윷놀이에서 언어의 장벽은 문제가 되 지 않았다. 그분들과 나눈 소소한 행복, 그리고 여유로운 웃 음은 탐방 내내 바쁘게 이 곳 저 곳을 뛰어다니던 우리 팀원 들에게도 좋은 휴식의 시간이 되었다. 따뜻한 온돌 바닥에 둘러 앉아, 걱정 없이 웃고 즐겼던 윷놀이 한판, 이런게 바 로 일상의 안단테 아닐까? 우토로 마을에 저녁이 찾아왔다. 일과가 끝난 원정대원들은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숙소로 돌 아가야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이 들어 어르신들과 헤어 지는 것이 많이 아쉬웠다. 부족한 솜씨로 어설프게 어르신들 을 도왔지만, (실은, 도왔다는 말보다는 함께 했다는 말이 맞 을 것 같다.) 그런 우리를 많이 기특하게 여겨주시고, 정성스 럽게 맞이해주신 우토로 마을 주민분들 정말 감사를 표한다. 우토로에서 살았고, 우토로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앞으로도 우토로에서 살아가기를. 일상의 안단테,여유로움과 평온함 을 잃지 않고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MORE 와다이코

우리를 위해 오사카에서 직접 찾아와준 일본 학생들 의 전통 타악기 공연도 있었다. 일본의 전통 북인 와 다이코를 신명나게 연주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덩달 아 우리도 흥이 났다. 북소리는 마을 앞마당을 뒤덮 을만큼 크게 울렸고, 공연이 고조될수록 열기가 가 득찼다! 걸어서 잠금해제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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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INTERVIEW 100%의 백제를 만나는 일에 대하여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김현구 EDITOR_이원일 글_안제세 사진_최한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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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잠금해제 vol.01 February 2014

온전한 백제를 만나는데 왜 일본이 필요하냐고 의문을 갖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백제를 복원 하는 일과 일본은 무슨 연관을 갖는 것일까? 한 반도 안에서 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우리의 역사의 복잡한 실타래를 풀기 위해 걸잠은 걸음 을 옮겼다. 일본 고대사와 한일관계사 분야의 권위자인 고려대 김현구 교수가 일목요연하게 짚어주는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한일관계를 들 여다보자. 28 걸어서 잠금해제

Q 오사카성을 보니 한국의 성은 산이나 도시 외곽에 위치 해 있는데, 일본은 이와 반대로 성이 도시의 가장 중심부 에 있다는 사실이 매우 놀라웠습니다. 이렇게 한일간 성의 위치와 기능이 다른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시가지 중심 에 성이 위치했을 때 어떻게 적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지 궁금합니다. A 한국과 일본은 성의 발생원인이 다릅니다. 한국은 산성 이나 나성(수도를 둘러싼 성)을 축조한 반면, 일본은 도시 로서의 성이 발달했습니다. 일본에서의 성은 영주의 거주


를 받아 공산품을 사고 파는 상업도시이자, 영주에 의한 행정도시였던 것 입니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성이 방위시설의 역할도 했지만, 우선 영주의 거주지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도시의 중심에 형성되었던 것이죠. 이를 바탕 으로 조카마치가 발달해 행정도시, 상업도시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Q 호류지의 백제관음상은 투조식금구제법이라는 독특한 방법으로 제조되었 다고 보았습니다. 이 기법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A 백제관음상의 배경으로 달려있는 광배를 보세요. 광배는 쉽게 말해 부처 님 뒤의 판을 말합니다.그것을 만드는 기법이 바로 투조식이었던 것입니다. 금동판을 투조하는 작업은 당시로서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고, 장인의 섬세 한 손길을 필요로 했습니다. 무엇보다 의미 있는 것은 이렇게 백제 특유의 기술들이 관음상에 표현되었기 때문에 현대의 우리들이 고대일본문화에 백 제가 미친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Q 왕인박사묘 탐방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영암이나 일본의 왕인 박사묘, 우에노공원의 왕인박사비의 역사를 보면 역사 속에서 세 유적지 모 두 정확한 고증 없이 시대적 상황이 요구하는 것들을 이루려고 이용되기만 했다는 문헌을 읽었습니다. 교수님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 합니다. A 일본에서의 통설은 왕인박사가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줬다는 시기에 사실 천자문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왕인박사의 유래가 와 니씨라는 백제계 일족이 건너온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논문들이 있습니다. 영암에서 왔다는 건 근거가 아예 없고, 아마 교포들이 만들어낸 말인 것 같 습니다. 학계에서는 왕인이 실존인물인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왕인박사묘 를 보셨다면, 우리나라 교육에서 <고서기>, <일본서기>의 내용 중에서 우리 에게 불리한 건 거짓말이라 하고, 우리에게 유리한 건 사실이라고 하는 잘못 된 역사 교육 방식과 수용 방식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고 문헌에는 이러한 일들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있지 않으며, 관광을 유도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에서 다양한 이야깃거리들을 만들어내게 되었습니다. Q 이러한 것들을 토대로 백제 역사의 온전한 복원을 위해 한국인들이 가져 야 하는 인식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A 사료를 통해서 복원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료가 담고 있는 내용의 시시비 비를 가려낼 수 있어야 합니다. 백제 사람들이 일본으로 많이 건너간 것은 사실이지만 그 와중에 만들어진 이야기나 설화들은 다 사실무근입니다. 설 지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나 전국시 대 이후부터 영주의 거점인 성을 중심 으로 도시가 생성되었습니다. 이것을 조카마치라고 부릅니다. 조카마치를 우리말로 해석하면 ‘성 아래 있는 마을’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당 시는 철저한 병농분리 사회였기 때문 에 지배층과 농민이 사는 동네가 구 분 되었습니다. 도시는 농촌의 물자

화는 설화대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겠습니다. Q 그렇다면 시텐노지를 지은 사람이 백제사람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불명확 하다고 볼 수 있습니까? A 시텐노지를 보시면 백제의 1탑1금당 가람배치 양식을 확인하실 수 있습 니다. 백제불교의 영향입니다. 그러나 시텐노지가 한반도 계통의 절이란 것 에 대해 명확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 일본의 절들을 대부분 한반도 사람들이 지었기 때문에 시텐노지도 이와 같은 영향을 받았다고 알 려진 것입니다. 백제인들이 단순히 건축 감독을 했는지, 기법을 전해줬는지, 직접 지어줬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없고, 어디까지 사실인지도 잘 모 걸어서 잠금해제 29


걸어서 잠금해제 vol.01 February 2014

SPECIAL INTERVIEW 릅니다. 그런데 시텐노지가 신라와 관계가 깊은 절이라는

막기 위해 2차 대전을 일으킨 일본의 극우 세력과 손을 잡

것은 명확합니다. 신라에서 건너간 유물들이 시텐노지와

게 된 것입니다. 이 한일수교에서 전달한 자금으로 일본은

관공서에 많이 보관되었기 때문이죠. 600년대 초에 일본

과거 문제에 대한 사과가 모두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내에 절이 49개가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일

데 최근, 또 사과하라는 국제여론이 조성되니 신경질이 나

본의 독자적인 기술로 세운 절들은 건물의 초석을 세운 것

는 것이죠. 여기에 한일관계의 모순이 있습니다. 자본주의

이 아니라, 그냥 땅에다 말뚝을 박아 만드는 정도의 기술

발달의 초점에서 쓴 교학사는 역사 왜곡을 옹호하고 있는

이었습니다. 그런데 49개가 단시간에 세워졌다는 건 한반

데, 정부는 그 교과서를 밀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

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사람들이 가서 건축 양식과 기법을

에게는 사과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이런 이중

전해준 것이라고 유추해볼 수는 있겠죠.

적인 태도를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의 역사왜곡을 비난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Q 교수님께서는 한 일간 문화의 차이가 어떻게 발생했다 고 보시나요?

Q 한국에 남아있는 백제 문화유적이 그리 크다는 생각을

A 그리스에서 폴리스가 발달한 기원은 산으로 인해 고립

못했는데, 청수사나 호류지를 방문하고보니 일본의 문화유

된 도시가 자체적으로 성장하던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산들이 무척 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 가

일본도 동일합니다. 산이 남북으로 있고 해안선이 복잡해

정집 같은 경우는 무척 작은데 이와 반대로 문화유적들은

지역 지역이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절로 지

상당히 큰 것은 어떤 이유에서 입니까?

방분권적인 문화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반면 한국은 왕

A 2가지를 말하고 싶습니다. 나라의 도다이지를 가보면

이 절대 권력을 발휘하는 중앙집권체제였습니다. 이런 조

대문인 남문이 있습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절 중 큰 절

건으로부터 한 일간의 문화의 차이가 발생하지 않았을까

이 화엄사 각황전이죠? 그런데 남문이 각황전보다 더 큽

합니다.

니다. 일본 사람들은 규모가 상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倭 라는 말을 통해 일본은 작고 왜소하다는 편견이 생긴

Q 일본이 독일에 비해서 역사왜곡에 대한 반성의 수준이

것입니다. 주택 같은 경우, 일본에게 주택은 휴식의 공간

낮은데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으로 기능합니다. 한국에게 집은 생활의 공간이자 부의 상

A 독일에서는 반나치즘 세력이 전후 정권을 장악합니다.

징이라면, 일본인들의 생활공간은 작업을 하는 일터라고

그러다보니 필연적으로 과거에 대한 사과를 해야했습니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돈이 생기면 일터를 키우고,

다. 그러나 일본은 전범처리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한국인들은 집을 늘립니다.

냉전 체제가 들어서면서 미국이 아시아가 적화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반공주의인 일본의 전범들과 손을 잡았던 것

Q 한중일이 나아가야 할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요?

이죠. 미국은 일본을 방공의 보류로 삼기 위해 전범의 일

A 가장 가까운 3나라가 역사 문제 때문에 싸우고 있습니

부를 석방시킵니다. 그 사람들이 다시 한 번 정치, 경제,

다. 그러나 이것의 일부는 19세기 일들에 불과합니다. 과

사회, 문화의 주인공이 됨. 다시 말해, 전범들의 후손들이

거에 대한 문제는 동아시아 공동체로 가는 하나의 성장통

오늘날의 일본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스쿠니 신사

같은 것입니다. 이를 잘 극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

문제가 발생하는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입니다. 정권과 가

라의 경우,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에 대한 일체의 말이 없

문의 정당성을 위해, 사과를 할 수가 없는 것이죠.

으면서, 일본에게 사과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교학사 교과서는 인정합니다. 이런 태도로는 역사를 논하

역사왜곡 문제는 한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최근의 교학사

고 대외관계를 원만하게 진행할 수 없습니다. 한중일이 서

문제와도 맞물립니다. 일본 극우 세력들은 한반도의 근대

로를 이해하고 자국의 잘못을 반성하며, 보편적인 가치를

화에 본인들이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서구의 침략

공유하는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에 대비해 아시아를 보호했다는 것이죠. 1965년 한일수교 는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미국이 강요시킨 것입니다. 이를 통해 미국이나 일본의 기술을 받아들이면서 근대화가 본 격적으로 추진됩니다. 남한은 자유주의 정권이기에 반공을 30 걸어서 잠금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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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걸잠이 만난 사람들

배를 만나리라곤 생각도 못해서...:0 Q: 저희두요...ㅎㅎ 그럼 준비한 질문 해볼게요^^ A: 넵! ㅋㅋ Q: 왜 교토대학교로 교환학생을 오시게 되었나요? A: 우선은 교토라는 도시 자체를 예전부터 좋아했었기 때문 에 정한 것도 있구요, 교토대가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명문대 이면서도 학생의 창의성과 자유를 존중하는 학풍을 가진 곳 으로 유명해서 교토대에서 한번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 Q: 그렇군요! 그럼 그 곳의 대학문화와 한국의 대학문화는 어떻게 다른가요?? A: 일단 여기 학생들은 한국 학생들에 비해 많이 여유로운 것 같아요. 학교 수업이 그렇게 빡센 것도 아니고 특히 남학 생들은 군대에 대한 압박이 없으니까 더 그런 것 같구요, 그 래서 동아리활동 이런 것도 굉장히 활성화 되어있는 것 같 아요. 우리나라는 동아리가 점점 죽어간다고 다들 안타까워 하고 있는데, 여기선 다들 학교 수업보다 동아리를 더 열심 히 하는 분위기라 ㅋㅋ Q: 아~ 흥미롭네요! 지금 배우고 있는 전공은 어떤 것을 위 주로 배우나요!?

교토대학 종합인간학부 교환학생 김슬기

A: 음... 종합인간학부 자체가 그 이름 그대로 오만 가지를

우연이 인연이 되는 순간

다 배우는 학부라서 정말 이것저것 다 배우고 있어요 ㅋㅋ

살다 보면 말도 안 되는 우연이 일어날 때가 있다. 교 토대 교류 학생들이 앉아있는 무리에 있던 슬기 선배 를 만났을 때 그랬다. 같은 학교, 같은 반, 같은 과 선 배를 한국도 아닌 일본에서 만나다니! 대단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한데 전 들은 적은 없구요 ㅋㅋ

에디터_김연수 글_김연수

ㅋㅋ 인데요 ㅋㅋ

문이과가 합쳐진 학부라 원한다면 이과수업도 들을 수 있긴

Q: 아.. ㅋㅋ 재미있었던 과목이 있었다면 어떤 것이 있나 요? A: 지금까지 들은 과목 중에 젤 재밌던 건 해리포터 수업

Q: 아 그거 페이스북에서 봤어요!! Q: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한번 부탁 드릴게요 ㅎㅎ

A: 해리포터를 문학적 분석기법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분야

A: 안녕하세요.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09학번 김슬

로 파고드는 수업이에요 ㅋㅋ 영국 문화나 역사랑도 연관시

기입니다. 2013년 4월부터 교토대 종합인간학부에서 교환

키고, 동성애 코드랑도 연관시키고....:S

유학 중입니다ㅎㅎ

Q: 우와 저도 한번 들어보고 싶네요..ㅋㅋㅋ

Q: 넵 저는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13학번 김연수입

A: 해리포터 좋아하는 친구들은 다들 부러워했어요 ㅎ_ㅎ

니다~ 교토대에서 저희 만나서 많이 당황하셨죠..?ㅋㅋ

Q: 저도 그 중 한명인 것 같네요..ㅎㅎ 그리구 최근 한일간

A: 당황이라기보단 많이 놀랐어요 ㅋㅋ 설마 그런데서 후

의 문제들을 피부로 절감하고 있으신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32 걸어서 잠금해제


01 슬기선배와 함 께 온 몸으로 표현한 KOREA. 02 교토대에 서의 첫만남 03 백주 년 시계탑 기념관 앞에 서 걸잠포즈로 찰칵!

A: 교토는 일반적으로 생각하시는 것과는 달리 의외로 좌

Q: 아아.. 그럼 교토대 내부에서는 거의 그런 것들을 느껴

파성향인 도시라 여기선 대규모 반한시위를 본 적은 없어

보시지 못하셨네요~

요. 물론 가끔가끔 극우 홍보 차량 이런게 지나다니긴 하지

A: 네ㅎㅎ 교토대는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좌파학교

만... 젤 크게 느꼈던 건 여름에 도쿄에 놀러갔을 때 신주쿠

라...ㅋㅋ

에서 반한시위 본거네요. 아마도 재특회...

Q: 그렇군요!

Q: 아… 재특회가 뭐예요...?

A: 오히려 우경화 반대시위나 글로벌화 반대시위 TPP반

A: 재일한국인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모임 이라는 극

대시위 반핵시위 이런건 많이 봤어요 학교에서 ㅋㅋ

우단체인데요 얘네 좀 많이 꼴통임... 교토에 조총련계 조

Q: 의식이 깨어있는 학교네요~ ㅎㅎ

선학교가 몇군데 있는데요, 일단 은각사 옆에 있는 중급학

A: 일본에서도 굉장히 독특한 축에 속한다고 하더라구요.

교(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교토역에서 남쪽으로 가면 있

ㅎㅎ

는 초급학교 이렇게 있는 것으로 알아요.

Q: 그런 것 같네요. ㅎㅎ 저희가 준비한 질문은 여기까지

Q: 아하

구요. 바쁜 와중에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A: 근데 초급학교(초등학교) 앞에서 얘네가 확성기 들고

A: 넵! 수고가 많습니당! *_* 포스트 재밌게 봤어요 ㅎㅎ

너네 쓰레기니까 꺼져라 그런 식으로 시위도 하고 그랬어

Q: 네 ㅎㅎ 계속 걸어서 잠금해제 사랑해주세요~!! 그럼

요 :(

3월에 학교에서 뵙겠습니다. 걸어서 잠금해제 33


걸어서 잠금해제 vol.01 February 2014

PEOPLE

걸잠이 만난 사람들 오사카시립대학 문학연구과 박사과정 전은휘

우토로는 나의 힘 탐방 전, 걸어서 잠금해제는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던 우토로마을. 이 마을을 연구하는 것이 좋아 직업으로까지 삼은 사람이 있다. 6년째 주민들과 고락苦樂을 함께하고 있는 전은휘님이 그 주인공이다. 에디터_최한빛 글_최한빛

Q: 간단한 소개를 부탁 드립니다.

Q: 지금 하고 있는 우토로마을에 대한 연구는 어떤 내용

A: 안녕하세요. 오사카시립대학 문학연구과 박사과정에 재학

인가요? (장기 프로젝트인가요?)

중인 전은휘라고 합니다.

A: 장기 프로젝트라고 하면 장기 프로젝트인데… 박사 학위 논문을 쓰고 있으니까요. 아직 성과는 미미하지만

Q: 일본 유학은 어떻게 결심하게 되셨나요? 기간은 얼마나 되

(^^;). 저는 인문지리학, 그 중에서도 문화지리학이라는

셨나요?

분야를 하구요, 생소하실 것 같아서 잠깐 설명드리면 인

A: 유학은 6년째에 접어들었는데요, 졸업하고 직장 다니다 여

문지리학은 왜 이 지역과 저 지역은 이런 점이 다를까?

러 가지 한계에 부딪혀서 고민하던 차에, 좋은 장학금 프로그

왜 이 지역에만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등등을 인문적으

램이 있어서 응모하게 되었어요. 다행히 운 좋게 합격해서 지

로 탐구하는 학문이에요. 그러니까 제 연구는 주변과 다

금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른 우토로 마을이 어떻게 생겨났을까? 그 문화적 차이는 어떤 것이고 왜 만들어졌을까? 왜 다른 재일조선인 마

Q: 유학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무엇이었나요?

을과 다르게 우토로 마을을 일본인들과 한국인들이 돕게

A: 음.. 사실 학부 때 워킹 홀리데이 경험도 있었고, 학생이라

됐을까? 에 관한 것이 됩니다. 왠지 학과 홍보 하는 것

는 위치가 나름 사회 안에서 보호 받는 점이 많아서 (기숙사라

같네요 ㅎㅎ

든가 학생 할인 같은 것들. 제 경우는 장학금이 굉장히 컸죠), 다른 친구들에 비해서 안정적인 유학 생활을 한 셈인데, 굳이

Q: 한국 사람들에게 다소 생소한 우토로마을에 대해 처

꼽자면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경험이 아닐까 싶어요. 줄곧

음 어떻게 접하게 되셨나요?

같은 울타리에서 살아오면 잘 할 수 없는 경험이기도 하고, 학

A: 2007년경에 인터넷에서 우토로 마을을 돕자는 움직

부 때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했었는데

임이 있었는데 , 모금도 했었고 개인 홈피에달 수 있는

그때도 전혀 상상조차 못했던 삶의 방식이니까요.

배너도 배포하고.. 이름 모를 네티즌들이 자발적으로 참 여한다는 점이 굉장히 신선하게 느껴졌어요 - 그 때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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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잠금해제 35


걸어서 잠금해제 vol.01 February 2014

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부끄럽지만 그 전까지는 재일교포

실하고 순박한 사람들이라는 점이었어요. 사실 사람들에

라든가 지금의 저 같은 해외 거주민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게 있어서 ‘외국’ 이라는 건 낯선 것이잖아요. 그래서

나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외국’이라고 하면 막연히

오해를 사기도 쉽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매체도 한정되

경험해 보고 싶은 곳, 자기 계발을 할 수 있는 곳, 이런 식으

어 있죠. 나름 격동의 시기 (?)에 일본 유학을 하면서 언

로 굉장히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했었죠. 그 후 유학을 가고,

론의 힘과 역할, 그리고 ‘상상’하는 능력이 얼마나 중

그 때 생각이 나서 선생님 따라 견학을 간 게 시작이네요.

요한 지 실감하게 되었어요. 그냥 주어진 것을 그대로 받 아들이는 게 아니라, 만약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하고

Q: 오랜시간 우토로마을을 연구하면서 가장 보람 있던 일 /

다른 방향에서 상상하는 능력이요. 그런 점에서 지금 상

힘들었던 일은 무엇인가요?

상원정대가 하는 일처럼 (‘걸어서 잠금해제’라니! 이

A: 제가 딱히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에피소드를 꼽기

런 센스~) 상상해보고 실제로 접해보고, 그 관계를 이어

가 어려운데요, 보람은 인터뷰를 할 때 마다 느끼는 것 같아

나가는 그런 일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 주민들이나 우토로 운동을 도와준 분들한테 두서없이 이 야기를 듣는 건데, 굉장히 개인적인 삶의 이야기를 불쑥 묻

Q: 우토로마을을 위해 현지에서 노력하는 한국인이 있다

는 건데도 불구하고 마음을 열고 말씀해 주시고, 심지어 힘

는 것이 저희에게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꼭 좋은

든 일 한다고 칭찬까지 해 주시니까.. ^^; 주민 인터뷰를 하

연구 성과 거두시길 응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다 보면 아무래도 젊은 시절에 고생했던 경험이 나오는데요,

연구 목표를 부탁드릴게요

우리 부모님 세대와 비슷해서 짠해지기도 하고, 보통은 사라

A: 저야말로 대학생 여러분들이 우토로 마을까지 와 주

져가는 이런 얘기들을 남기는 작업에 동참할 수 있게 되어

셔서 너무 신기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연구 목표

서 정말 운이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는 단순해요. 사라져버리지만 분명히 있었던 일들에 관 한 기록을 남기는 것.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이 좋아하는

Q: 우토로마을을 위해 현재 한국의 정부차원, 민간차원에서

‘일’로 만든 작업을 통해서 ‘직업’으로 연결하는

할 수 있는 일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것. 여러분들도 앞으로의 진로 선택에 대해 고민이 많을

A: 일단 우토로 마을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작업은

텐데요, 저같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려고 시도하

어느 정도 이루어진 상태인데요 (한국 정부로부터 재정적

는 케이스도 없지는 않으며, 조금 늦게 발견하는 경우도

지원이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일본 정부에서 주거 환경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남겨 봅니다. 미래에 대한

정비 사업을 진행중), 그 작업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관

확신은 없지만.. ^^ 불안을 긴장하는 에너지로 쓰는 건

심을 가져 주시는 것이 정부 차원에서도, 또 시민 차원에서

좋은 해소 방법인 것 같아요. 많이 보시고 걸어보시고 가

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는 우토로를 통해서 알

장 좋은 선택을 하시게 되길 바라고, 또 응원할게요.

게 된 점을 우토로에서만 그치는 게 아니라, 외국에서 살아 가는 한국 사람, 한국에서 살아가는 외국 사람들, 나아가서 는 조금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때 떠올려 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상상원정대 여러분들은 정말 좋은 경험을 하시는 것 같고, 앞으로도 기대가 됩니다^^ Q: 현재 우토로마을 이외에도, 혐한류의 열풍과 같이 재일 교포분들을 위협하는 상황이 일본 내에서 많이 벌어지고 있 는 것 같습니다. 이를 실감하시나요? A: 작년에 특히 심했지요. 저도 실제로 그 쪽 시위를 구경하 러 가보기도 했고, 주위 사람을 통해 느끼기도 했습니다. 놀 라웠던 건,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실제로는 굉장히 성 36 걸어서 잠금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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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몰랐던 이야기 재일교포의 삶 EDITOR_김연수 글_걸어서 잠금해제 사진_안제세 취재협조_상상원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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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당신이 몰랐던 이야기 츠루하시 재일교포 3세 양천하자

1일차 저녁, 우리는 츠루하시로 이동했다. 이 곳 츠루하시 에서 재일교포 3세 천하자씨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함 께 식사를 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오사카의 츠루하시는 일본 내에서 가장 많은 재일교포가 모여 살고 있는 지역 이다. 가장 큰 규모의 한인타운을 자랑하는 지역답게 츠 루하시 시장에는 작은 한국이 곳곳에 존재했다. 재일교포분들은 “안녕하세요”라는 단순한 말을 간판에 까지 적어두셨다. 타지생활에 지쳐가면서도 조국을 잊지 않은 재일교포들, 한국의 단순한 인사말 한마디가 그분들 에게는 얼마나 소중했을지 생각하니 어딘가 가슴 한 켠이 아련해지는 순간이었다. 츠루하시 시장의 좁은 골목을 굽 이굽이 돌아 도착한 식당 [아리랑]에는 재일교포 3세 양 천하자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천하자씨는 쑥스러 우신 듯 서투른 한국어로 상상원정대에게 인사를 건네셨 다. 우리는 천하자씨와 함께 맛있는 불고기전골을 즐기며 다 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일본에서 먹는 한식이 얼 마나 맛있었던지 걸잠팀은 불고기전골을 흡입하다시피 뚝딱 비워냈다. 단 하루만에 한국의 음식이 그리운데, 몇 십 년이 넘는 세월을 고국에 가지 못했던 재일교포들의 그리움은 어땠을까? 천하자씨는 일본 내 한류, 혐한류의 목소리, 교과서 문제 (위안부 문제, 식민시대에 대한 왜곡 등)에 대한 일본 현 지의 반응, 그리고 재일교포의 현실적 상황에 대해서 알 려주셨다. 특히나 시위와 데모를 찾아볼 수 없는 일본이 라는 곳에서, 혐한류 시위를 조직적으로 벌이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충격으로 다가왔다. 지난 해 2월, 츠루하시 역전에서 일본의 한 여중생이 “한국인을 죽여라, 한국 여성을 강간해라”라고 외치던

사건이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일본 내 극우혐한집단 재 특회와도 무관하지 않다. 이런 한일관계의 냉기류 속에서 재일교포들은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불안감 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식사가 마무리 될 무렵, 천하자씨는 준비해 온 프린트를 나눠주셨다. 프린트 들은 천하자씨가 민족강사로 강연을 할 때 사용하던 피피 티를 정리한 것으로 천하자씨의 개인적 경험부터 일본정 부의 공식적인 차별정책들까지 재일교포들이 견뎌낸 차 별과 고난의 역사가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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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잠금해제 vol.01 February 2014

오사카 Korea NGO Center 사무국장 김광민 우리를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얼굴을 떠올려주세요. 김광민 사무국장은 재일교포 3세이다. 그는 나고 자란 곳 이 일본이다 보니 한국말보다는 일본말을 먼저 접했고., 부 모세대를 통해 들은 이야기로 어렴풋이 한국의 모습을 그 릴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젊은 시절, 다음과 같은 목표를 세웠다고 했다.“우리말로 조국 사람들과 입 다툼을 해서 지지 않을 정도로 한글을 배우자.” 다소 공격적인 목표가 아닐까 생각하던 우리에게 곧바로 김광민 사무국장은 길지 않은 대답을 던졌다. 그기 그런 목표를 세운 것은 그런 일이 그에게는 너무나도 절실했기 40 걸어서 잠금해제

때문이었다. 고국에 대한 그리움에 처음으로 찾아간 1970 년대 당시는 한국이 먹고 사는 것만으로도 바빠 재일교포 에 대한 대우가 너무 낮았다. 우연히 만난 택시기사에게 “나는 재일교포입니다.”라고 소개하면, “힘든 시기 일 본에 가서 잘 먹고 잘 살았던 파렴치한 사람이 아니냐?” 라는 말이 되돌아왔다고 했다. 일본에서 조선인이라 멸시 를 받으며 하루하루를 전쟁같이 살아온 재일교포들의 삶 은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뿌리없는 수초에 불과했다. 어 느 나라에도 속하지 못한 채 양국의 미움을 받는 존재, 상 상하기 조차 힘들 정도로 어려운 삶이다. 그들이 받은 설움 과 고통을 부족한 필력으로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도 안타까울 따름이다. 재일동포들은 일본 정부로부터 아 무 공적 지원 없이 일본에서 살아갔다. 오죽하면 김광민 국 장은 시각장애인이자 미국의 부르스의 신 레이 찰스(Ray Charles Robinson)을 예로 들기까지 하셨다. 다들 “Hit The Road Jack~” 하는 노래를 들어봤을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각종 광고에서 많이 활용해 익숙한 음악이다. 김광민 국장의 말에 따르면, 인종차별로 인해 치료를 제대 로 받지 못해 시각장애인이 된 흑인과 재일동포의 삶이 전 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없었던 재 일동포들은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는 비참한 삶을 살았다. 직업은 일본에서 천시하는 일을 도맡아 하도록 제한되었 고, 생존을 위해서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


PEOPLE

당신이 몰랐던 이야기 교토 고려미술관 재일교포2세 이일해

업에 매달리다보면 자식들에게 한글 한 자를 가르쳐 줄 시간조차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이렇게 살아온 삶이 너무도 버거워 때로는 부모님께 원망의 화살을 돌리기도 했다고 했다. 살아가봐야 차별의 벽에 부딪힐 뿐, 나아지 는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희망을 잃지 않고 한글을 배웠다. 큰 마음을 먹고 한국을 찾아 성북구의 자그마한 달동네 꼬마 아이 들로부터 우리말을 익히기 시작했다. 고국의 사람들에게 재일동포의 현실을 알려야했기 때문이다. 한국정부가 재 일동포에 관심을 갖고, 그들을 지원하게 된 계기는 민간 차원에서 한국인들의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꿈은 그리 크지 않다. 비참한 재일동포의 삶의 온 상, 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억달라는 것이다. 모국어 를 잃어버린 그들의 눈동자 속에는 지난 슬픈 역사가 맺 혀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메모했다. “우리를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얼굴을 떠올려주세요." 이제는 목청을 높이지 않아도 츠루하시를 찾는 조국의 사람이 많아졌다고 한다. 그럴 때의 보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소박한 희망이 있다면, 츠루하시가 재일 동포들의 마음의 고향으로 남는 것이다. 한일관계가 악 화될수록 가장 직접적인 피해를 받는 사람들은 재일동포 들이다. 관심이라는 두 글자, 이것이 같은 민족으로서 그 들에게 책임을 다하는 일이 아닐지 생각해본다.

현재 현재 85살의 이일해 여사님은 일제강점기, 일본에 게 교육을 받았다.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왜곡된 교육을 받 았기에, 여사님은 학창시절에는 한국의 문화가 우수하다 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로 고려미술 관에서 일하게 되면서, 그제서야 한국이 얼마나 찬란한 문 화를 만든 나라인가를 깨달았다고 하신다. 올해 25년째 이 곳에서 일하고 있으시니, 이제는 누가 뭐래도 한국 문화의 전문가라고 말할 수 있겠다. 여사님께서 손수 정조문이 발 행한 잡지를 한 권 한 권 꺼내 보여주셨다. 우리는 잡지를 설명하는 여사님의 말투에 어린 애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신과 같이, 한국이 역사적으로 보나 문화적으로 보나 일 본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던 재일교포들에게, 잡지 의 발행은 조국에 대한 자긍심을 이끌어 낼 좋은 컨텐츠였 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잡지를 읽은 이들 중에는 저명한 일본의 학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비로소 한국의 유산이 일본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는 순간이었 다. 실제로, 재일교포를 도와준 일본인들은 적지 않았다. 이 일해 여사님이 국민학교를 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어느 일 본인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재일교포의 삶을 알지 못 했던 우리와는 다르게, 발벗고 도와주려 했던 일본인이 있 었다는 것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정 많으신 여사님 은 이것 저것 묻는 우리 팀원이 기특했던지, 고려 박물관의 개관 20주년 기념 책을 선물로 주시기도 하셨다. 걸어서 잠금해제 41


걸어서 잠금해제 vol.01 February 2014

일본은 넓고 볼 곳은 많다! 백제 관련 유적 이외에도, 일본 속에서 한국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은 얼마든지 있다. 소개를 안 하기엔 너무나도 보물 같은 장소들이 라서 오직 걸잠의 독자들에게만 살짜쿵 공개하는 보물지도 오사카 사람들은 먹다 죽고 교토 사람들은 입다 죽는다는 말이 있다. 같은 일본이지만 두 곳의 다른 문화를 한껏 즐기고, 각 도시가 어떻게 역사를 포 용했는지 느끼기를 에디터_최한빛 글_최한빛 사진_안제세 취재협조_상상원정대 2기 운영진 42 걸어서 잠금해제


걸어서 잠금해제의 탐방지 번외편

보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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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축성한 오사카 성은 나고야 성, 구마모토 성과 함께 일본의 3대 성에 속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 가와 이에야스의 치열한 오사카 여름전투를 영상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오사카 츠루하시에 있는 한인타운 각종 한국 요리와, 간판의 한글, 그리고 푸근한 인심까지! 일본 속 또 하나의 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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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의 객관이었던 쇼코쿠지. 그리고 사명 대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코쇼지. 임진왜란 이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국교요청으로 1811년(순 조11)까지 12회의 통신사행이 있었다.

일본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에 있 는 무덤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 란 때 왜군이 전리품으로 베어 간 조선 군사와 백성의 코와 귀 를 묻은 곳이다. 일본정부는 아 직까지 이 귀무덤을 본국으로 송환해주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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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 안제세가 만난 일본의 풍경

어쩌다 마주친 그대 낯선 곳에서의 즐거움은 종종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 우연히 고개 돌린 곳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거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사람들의 따뜻한 손길을 마주했을 때 그저 스칠 뻔했던 평범한 풍경은 여행을 추억할 장면이 된다. 일본 간사이 지방을 다녀온 사진가 안제세가 뷰파인더를 통해 일본의 정경들을 회상했다. 나이도 성격도 다르지만 같은 장소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추억을 만들어가던 사람들. 그들로 인해 더욱 아름답게 기억되는 일본의 풍경 속으로. 에디터_안제세 사진_안제세 취재협조_상상원정대 2기 운영진

01 청수사의 산넨언 덕에서 넘어지면 3년 안에 죽는다는 전설 이 있다. 02 한겨울 에 만나 빈가웠던 호 류지의 꽃. 03 오사 카성으로 출발하는 상상원정대원들의 모 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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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청수사에 온 사람들이 목판에 적은 정성스러운 소 원. 06 청수사의 산넨언덕 에서 넘어지면 3년 안에 죽 는다는 전설이 있다.2

01 04 오사카 공원에 서 만난 푸들. 동물 과 친해지는 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무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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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일본의 전통 공연 와다이코를 준비하는 아이들. 08 설명 없음 09 북소리로 마당을 가득 메운 와다이코 공연 10 우토로 마을 주민들과 추억을 남기며 11 우토로 마을에 서 만난 꼬마는 자기 몸만한 윷을 들고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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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채광 좋은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은 어딜 가나 통유리 를 통해 강이 흐르는 전경을 확인할 수 있다. 13 날이 좋으면 교토 시가지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기온 거리 14 고요하 고 한적했던 교토의 어느 골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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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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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_이원일 글_이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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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2_ 유홍준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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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와 미술사계에서 큰 존재감을 가지고 있는 유홍준 교수 가 최초로 해외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일본편’을 출판 했다. 최근 들어 한일 관계에 바람직하지 않은 일들도 일어 나고 있다. 특히, 역사적인 콤플렉스 때문에 장벽이 형성되 었다. 저자는 책에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 그 장벽을 허물 어 달라는 소망을 담았다. 한계를 꼽자면, 저자 스스로도 말 했듯이,일본사나 한국고대사를 전공하지 않았기에 일본에 있는 여러 문화재들에 대해 역사적인 측면보다는, 미술학적 이고 답사적인 측면에 더 초점을 맞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른 책들과 차별성을 갖는 장점이 되기도 한다. 역 사에 대해서는 약간 부담스럽지만 일본 고유의 문화들이 가 지고 있는 미적인 멋들과 우리나라와 관련된 신화나 설화에 대해 알고 싶다면 강추될 책이다.

한일 고대사 유적 답사기_ 홍성화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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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하게 엉켜버린 한일 고대사. 강한 민족주의로 장착된 고대사에 대한 양국의 논리. 도대체 사실이 무엇이고, 우리 가 믿어야할 것은 무엇인가? 저자는 중국 진나라의 시인 도 연명이 쓴 <귀거래사> 일부를 인용한다. “장차 전원이 황 폐해지려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2장 ‘천손 강림 신화’ 에서부터 본격 일본 내에서의 해설이 시작되면서 백 제 혹은 신라와 왜의 관계에 중점을 다룬다. 특히 백제에 대 한 비중이 크다. 왕인, 백제계 도래인들, 일본의 천황, 임나 일본부에 대한 여러 가지 루머와 소문들을 집대성하여 체계 적으로 정리했다.한일 고대사의 이야기를 답사를 통한 형식 으로 이뤄진 책. 저자 홍성화 교수와 함께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 떠나고 싶다면 과감히 이 책을 골라라! 50 걸어서 잠금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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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_ 김현구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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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위키피디아에 ‘왕인’을 검색해보면 ‘한국은 <일 본서기>에 나와 있는 왕인에 대한 이야기는 믿으면서 임나 일본부에 대해 부정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나 온다. 왕인은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등 한국 고대사를 다룬 책에서 등장하지는 않고, <일본서기>에서만 나오는 인물이 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일본서기>에서 언급되는 임나에 대한 이야기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과연 임나일본부설을 전적으로 후대의 일본인들이 왜곡해 만든 역사일까?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 일본과의 역사 문제에서 이 기기 위해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무기는 바로 ‘논리’이 다.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상세하면서도 본질적인 이해, 궁 금하지 않은가?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_ 김현구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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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고등학교 때 배운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가 정사에 바 탕을 둔 사실일까? 대한민국 국민들이 일반적으로 아는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가 충분한 사료에 바탕을 두지 못하 고 있다면? 위 책은 고려대학교 동대학원에서 일본사를 전공하고, 와세다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현구교수 가사료를 바탕으로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를 새로운 관점 으로 해석한 책이다.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서 론에서 백제와 일본, 신라와 일본 사이에서 일어났던 사 실들을 큰 틀 속에서 ‘있는 그대로’ 서술하고자 했다고 밝힌다.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에 대해서는 비교적 사실에 가깝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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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대한 애정으로 만든 우리의 결과물이 또 다른 발걸음으로 이어지길 희망하며, 우리는 이제 새로운 역사를 찾아 떠나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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