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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나팔21호(천주교의정부교구정의평화위원회)

현대적 의미의 정결과 평화

김승한 요셉 신부 /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 , 토평동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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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희망을 안고 다가올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가 톨릭의 전통적 가르침의 하나인 복음삼덕 , 그 중에서도 정결 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한다 .

복음 삼덕이란 예수님의 삶의 세 가지 덕목을 말한다 . 그 것은 바로 가난 , 정결 , 순명이다 .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세 가지 덕목을 수행의 과제로 삼고 살아야 하는 것인데 , 그 이유는 예수님의 삶의 길이 곧 ‘ 나는 길이요 , 진리요 , 생 명이다 .’ 하신 말씀처럼 우리의 구원의 길이기 때문이다 . 예 수님께서는 가난 , 정결 , 순명의 삶을 통해 당시 세상 - 인간의 삶의 모순이 담긴 - 을 바로 잡으려 하셨다고 생각한다 . 왜냐 하면 이 세 가지 덕목은 단순히 윤리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인 간의 삶의 근본적인 문제 혹은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삶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

예수님 시대나 오늘날이나 우리 사회에 항존 ( 恒存 ) 하는 문제는 동일한 모습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빈부 차이의 문제 , 차별이나 계급의 문제 , 권력 문제들은 시대를 초월해 서 인간이 사는 세상이라면 항상 있어왔던 본질적인 문제라 할 수 있다 . 이는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 욕구에서 비롯된 것 인데 , 여기에 더해서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욕심에서 문제 들이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 빈부의 문제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지고자 하는 욕구의 반영이고 , 계급의 문제는 사 람을 자기 마음대로 다루고자 하는 욕구의 반영이고 , 권력 의 문제는 자신의 존재를 더 높게 하고자 하는 욕구의 반영 이라 할 수 있다 . 1)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가난 , 정결 , 순명의 삶을 사셨다 .

그 중에서도 정결의 덕이란 단순히 독신이나 부부가 정결 의 삶을 지키는 성적인 문제로 국한해서 생각해서는 안 된 다 . 보다 근본적인 의미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고자 하는 욕 망의 절제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명령 받기 보다는 명령하기를 더 좋아할 것이라 생각한다 . 그래서 다른 사람을 내 의도대로 혹은 내 이익대로 조종하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에 사람 사이에 차별이나 계급을 형성 하게 되고 , 동시에 성적인 문제로 들어와서는 다른 사람을 자기 쾌락의 도구로 삼게 되는 것이다 .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정결의 덕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

예수님의 삶을 성찰해 보면 분명 예수님은 독신으로 사셨 고 , 여성들을 존중한 면을 보면 정결의 삶을 사신 것이 분명 하다 . 그러나 더 본질적으로는 사람에 대한 존중의 모습이 정결의 덕의 참 모습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 당시 예수님 의 시대는 율법적 가치에 따라 사회 계급이 형성된 사회였다 .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분명한 차별이 존재하는 사회였다 . 그래서 바라사이나 율법학자들 은 기득권을 누릴 수 있었고 , 율법을 어겼거나 율법을 지킬

형편이 못되는 사람들은 이른바 죄인이라는 낙인으로 사회 적 배제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 이것을 바로 잡기 위해 예수님 께서는 스스럼없이 죄인들과 어울리셨고 , 죄인의 집에 들어 가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고 친교를 이루셨다 . 배제된 사 람들 , 주류에서 벗어난 사람들 속에 들어가 그들과 하나가 되어 죄인들을 구원으로 이끌어 주셨던 모습이야말로 참된 정결의 덕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 멸시받던 세관장 자캐오에 게 ‘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 하고 말씀하셨고 , ‘ 의 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 고 말씀하신 것은 죄를 용 인하는 것이 아니라 , 사람에 대한 존중으로서 그 사람과 그 사회를 정화시키신 것이다 .

이제 우리 사회를 돌아보자 . 우리 사회에는 정결의 덕이 요 구되는 현장이 존재하는가 ? 물어보나 마나한 질문이다 . 사 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정결의 덕이 요구 된다 . 예수님 시대와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에도 다양한 차별 과 편견이 존재한다 . 최근에 그런 것이 아니라 항시 존재했던 것이라 말해야 옳을 것이다 . 어떤 것들이 있을까 ?

성 , 빈부 , 인종 , 학력 , 지역 등의 차별이 존재한다 . 사람들 이 서로 같을 수는 없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생각으로 함께 모여 사는 것이 당연하고 , 어쩌면 하느님의 창조의 아 름다운 측면이라 할 수 있다 . 그러나 서로 다름을 차별의 도 구로 사용한다면 ,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조정하고 싶은 욕 구에 휩싸인다면 사회적 갈등이 야기되고 서로 간에 적대감 으로 발전하게 된다 . 사회적으로 본다면 어느 정도의 긴장 과 갈등은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 차 별의 무의식은 이제 혐오라는 말로 우리 사회의 한 부분을 장식하고 있다 . 주로 혐오의 대상은 약한 주체들을 향해 있 는데 , 특정한 사람들이 행하는 일탈 정도로 이해하기엔 너 무 자주 등장하는 말이 되어 버렸다 . 차별의 의식이 혐오라 는 말로 표현되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의 일상을 살 펴보면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에 일정 부분 영향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 그 대표적인 예가 갑질의 일상화 내지는 보편화가 아닐까 ? 갑질하면 떠오르는 것이 대기업의 오너들이나 사 회 지도층의 안하무인의 태도를 연상하기 쉬운데 우리의 일 상에도 알게 모르게 갑질이 용인되거나 혹은 내 자신이 갑질 을 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 가령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했는 데 나중에 온 사람에게 먼저 갖다 주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 게 하는가 ? 당당히 손님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며 종업원 을 다그치거나 심하면 혼을 내기도 한다 . 어쩌면 이런 상황 에서 가만히 있으면 온당한 대접도 못 받을 수도 있다는 생 각에 평소보다 과도한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 또 한편으로 는 차별이 은밀히 진행되고 있어서 선망의 원동력으로 작용

하기도 한다 . 우대 , VIP, 프리미엄 등의 말이 그것이다 . 이런 말에는 자산의 가치가 사람의 가치로 치환되어 작용한다 . 더 많은 소비의 능력을 지닌 사람에게 더 많은 권한과 혜택이 주 어지는 것이다 . 일상에서 은밀이 경험되는 이러한 차별이 사 람들로 하여금 더 악착같은 마음을 불러 일으킨다 . 그래서 더더욱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사 소한 부당한 대우도 참기 어려워진다 .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 는 자본주의에서 물신이 만연해서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게 된 것은 아닐까 ?

앞서 음식 주문의 예를 다시 보자 . 우리가 만난 직원이 너 무 분주해서 , 혹은 주인이 직원을 넉넉하게 고용할 형편이 안 되어서 내 차례가 잠시 밀렸을 뿐인데 우리는 힘들게 곤역을 치르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내가 지불할 돈의 위력을 과시하 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다 . 원수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능동적인 이미지로 원수를 사 랑하라 하셨다고 생각한다 . 원수를 사랑하려면 원수가 누 구인지 알아야 한다 . 어떤 상태인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 때 가 되어 적당한 조건이 이루어지면 사랑할 준비만 가지고 있 는 것이 아니라 ,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말로 알아듣는 다면 사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 그가 어떤 사 람인지 어떤 상태인지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 예수님의 비유 속에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에서 부자의 잘못은 불쌍한 라자로에게 인색하게 한 것에 있지 않 다 . 문간에 있는 사람을 보지 못한 무관심이 불러일으킨 잘 못인 것이다 . 문제는 보려고 해야 보인다는 점이다 .

정결의 덕은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 그가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온전한 한 사람으로 존중하는 데에 서 출발해야 한다 . 그래야 내 이웃도 보이고 원수도 보인다 . 그리고 만약 원수가 내 멱살을 잡으려 달려든다면 , 멱살 한 번 잡혀 주자 ! 되갚지 않으려는 용기를 내자 ! 그러면 사람 이 보이지 않겠는가 ? 그래야 예수님이 찾아가신 이 시대의 약자들이 보일 것이고 , 악착같은 마음에 갑질의 주체가 되는 내 이웃이나 자화상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

현대 사회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정결의 덕을 새롭게 조명 한다면 사람이 존중받는 세상 ,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공 존하는 평화의 세상이 되지 않겠는가 ? 앞으로 우리에게 주 어질 평화의 시대를 관조하면서 예수님이 가르쳐준 정결의 덕 을 마음에 새겨 본다 .

1)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이 세상의 문제는 물질 ( 재화 ), 사람 , 하느님을자기 욕심대로 하고자 하기에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 물질을 함부로 하기때문에 빈부의 문제가 생기고 , 사람을 함부로 하기에 차별의 문제가 생기고 , 하느님을 함부로 하기에 권력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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