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속에서 찾은 큰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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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야기 속에서 찾은

작은

큰 행복

김웅옥 | 권이근 | 박영자 |박태동| 정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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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 속에서 찾은

큰 행복

김웅옥 권이근 박영자 박태동 정주영


작은 이야기 속에서 찾은 큰 행복 지은이 김웅옥|권이근|박영자|박태동|정주영 펴낸이|설인숙 펴낸곳| 써니 Copyright@HealingAutobiography 이 책은 펜아시안노인복지원 실버스쿨 힐링자서전 수강생들의 글로 만들어졌습니다. 책 속의 일부 이미지는 인터넷에서 퍼왔습니다. 2015년 8월 24일 펜아시안노인복지원 6926 Old York Rd Philadelphia, PA 19126 T 215-572-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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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09 10 15 20 24 28 36 40 44 49 53 59 65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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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말 은수저 | 김웅옥 내가 사랑하는 보물 |김웅옥 나의 길 |김웅옥 할아버지 이야기 |권이근 서울구경 |권이근 남포등 | 권이근 개구리 | 박태동 나는 교장이다 | 박태동 나의 어머니는 위대하다 | 박태동 꿈을 이루는 길 | 박영자 헌 차 | 박영자 이민살이의 흔적 | 박영자 아들이 준 깜짝 선물 | 정주영


머릿말 10년 넘게 노인 복지원을 운영하면서 힘들 때 마다 늘, 이 길이 정말 내가 가야 할 길인가 반문 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 나의 꿈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지금의 달라진 나의 모습은 마치 내가 아닌 듯, 거울 속을 나를 쳐다보며 저게 누굴까 생소하게 느끼기 도 했지요. 그런데 이번 펜 아시안 실버스쿨 학생들의 글 을 읽어가며 저는 잔잔한 감동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내 곁에 많은 분이 그들의 잃었던 꿈을 향해, 언젠가 어렸을 적 꾸었던 그 꿈을 향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 소설 같은, 수필 같은, 이야깃거 리를 담고 살아갑니다. 전설처럼 되어버린 그 옛날이야기 들을 실타래처럼 풀어내어 사회, 사람과 인연에 대하여, 애정 어린 시선으로, 마치 손자 손녀들에게 마주 이야기 하듯 애틋하고 진솔하게 써 주신 것에 대해 깊은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어릴 때 나의 모습, 완전히 잃 어버린 줄 알았던 저의 이야기들도 언젠가 한번 다시 꺼 내리라는 생각이 들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첫 자전적 수필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최임자 (펜아시안 노인복지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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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수저 김웅옥 카타리나

은수저를 보면, 저는 시부모님이 생각납니다. 시어머님은 풍채가 좋고 화사한 얼굴이셨으며, 흔들의자에 앉으시어 TV에서 하는 레슬링 경기를 즐겨 보셨습니다. 남자도 아닌 여자가 이 경기를 좋아하 시는 것을 보고, “어머님, 왜 레슬링 경기를 좋아 하세요?”라고 물으니 “스트레스가 확 풀려서 좋단다.”라고 하시면서 레슬링 경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셨습니다. 그리고 시아버님은 그 시대에 보기 드물게 집 안 청소는 물론 부엌 일도 잘 도와주셨습니다. 두 분이 생활하시는 모습은 마치 신세대 부부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시부모님은 연세가 드시면서 건강 문제로 힘든 시간 을 보내시게 되었습니다. 시어머님은 당뇨로 인한 합병증으로 병원을 자주 가시게 되었고, 시아버님은 가슴막염으로 열이 몹   10


시 나고 기침이 심하였고 가슴막에 물이 자주 고여 물을 뺴 기위해 병원을 들락날락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가슴막에 물 이 너무 차서 어쩔 수 없이 등에 손바닥만 한 구멍을 내서 갈 비뼈 하나를 제거한 후에 고여 있는 물과 피, 고름이 흘러나 오게 했습니다. 시아버님은 하루에 한 번씩 병원에 가셔서 치료를 받아야 하셨습니다. 매일 병원에 다니시는 것은, 돈도 돈이지만 매 우 번거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어머님은 생각 끝에 치 료법을 배워 집에서 시아버님을 치료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시어머님은 시아버님의 등에 고여 있는 피고름을 닦아내고 소독하고, 다시 소독된 거즈를 그 부위에 넣고 몇 겹으로 거 즈를 위에 붙인 후 밴드를 하셨습니다. 한번 사용되었던 거즈 의 양은 대야로 하나 가득했습니다. 처음에는 한번 사용했던 거즈를 버리다가 이를 감당할 수가 없자, 더러운 거즈는 버리고 그 외의 것들은 빨아서 삶고, 삶 은 것들을 쪄서, 완전 멸균을 한 후 소독장에 넣으셨습니다. 이때 사용했던 모든 기구와 가위, 핀셋 등도 같은 방법으로 살균하여 재 활용을 하셨습니다. 저는 시어머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만 있어도 힘이 드는데, 시 어머님은 정말 지극 정성으로 그 모든 일들을 척척 해 내셨 습니다. 그러시다가 시어머님이 병이 나셔서 병원에 입원하 시는 일이 생겼습니다. 어쩔수 없이 시아버님의 치료는 인근 에 있는 병원에 가서 받기로 했습니다. 치료를 받고 돌아오신 시아버님께서 “얘, 어멈아, 그 병원에 있던 핀셋에 녹이 있었 는데 소독도 하지 않고 그냥 나에게 사용하더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점심때가 되어서 식사 준비를 하여 드렸더니, “어, 이상하다.   11


밥이 넘어 가지를 않네.” 하셨습니다. 그래서 죽을 빨리 쑤어 서 드렸더니, 죽도 넘어가지 않고 입술도 움직일 수가 없이 점 점 굳어 가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깜짝놀라 엠브란스 를 불러서 시아버님이 다니시던 대학병원으로 모시고 갔습니 다. 병원에서 검사를 하더니 파상풍이라고 했습니다. ‘파상풍?’ 말로만 듣던, 그 병이 시아버님에게 온 것이었습니 다. 시아버님의 몸은 점점 굳어져 갔습니다. 대소가에서 와서 보시더니, 장례 준비를 미리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으 신 시어머니께서 “그런 말을 하시려면, 이곳에 두 번 다시 오 지 마세요. 제 남편은 꼭 살아날 것입니다.” 라고 강경하게 말 씀 하시더니, 의사한테 허락을 받고 중 환자실에서 생활하시면 서 주무시지도 않고 옆에 붙어서 간호를 하셨습니다. 그 당시 한 육군 장교도 파상풍으로 같은 의사에게 치료를 받 고 있었습니다. 시아버님의 주치의가 “제가 이 치료 방법을 처 음 시도하는데 육군 장교는 아직 어리고, 시아버님은 연세도 있으시니 이 치료법으로 한번 시도해 보시지 않겠습니까?”라 고 묻는 것이었다. 시어머님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흔 쾌히 승낙하셨습니다. 담당 의사의 새로운 치료법이 시작되면 서 시아버님은 잠깐 잠깐씩 의식이 돌아오셨습니다. 잠깐 의식이 돌아오신 시아버님은 저의 손을 어렵게 잡으시더 니, “어멈아, 미안하다. 부탁한다.” 라고 힘들게 겨우 한 말씀 을 하셨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그럴때마다 저는 “아 버님, 힘내세요. 꼭 일어나실 거예요.”라며 시아버님의 손을 꼭 잡아드렸습니다. 드디어 그렇게 힘겹게 파상풍과 싸우시던 시아버님이 회복되 시어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의사의 치료법이 성공 한 것입 니다.   12


이 치료법은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처음 시도한 것 으로서 의학계에 보고 할 수 있게 도와주어서 고맙다고 주치 의가 시어머님께 감사의 인사를 했습니다. 함께 치료를 받던 육군 장교는 이 치료법이 확인되기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나 셨다 했습니다. 안타까웠습니다. 시아버님은 시어머님의 지극 한 정성과 주님의 보살핌으로 기적같이 완쾌된 것이었습니다. 얼마후 장남인 우리 가족은 시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이민을 하 게 되었습니다. 시부모님은 이민 생활을 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런데 시아버님의 가슴막염은 완쾌가 되지 않아서 계속 시어머님이 치료하고 계셨기 때문에 함부로 다닐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늑막염은 매일 치료를 해야 할뿐아니라, 비행기를 타면 기압에 의해 등에서 피가 나올 수 도 있으므로 고민을 하였습니다. 고민 끝에 시부모님은 주치 의와 의논을 하셨습니다. “ 등에 있는 구멍을 봉합하면 가슴막의 상태가 양호하여, 다시 열이 나거나, 기침을 하 거 나, 물이 차지도 않을 것 입니다.” 라며 의사는 봉합 을 추천하셨고, 시부모님은 이 말을 듣고 너무나 기쁜 마 음으로 봉합 수술을 하시고, 어느 정도 회복되시자 저희 들이 사는 곳으로 달려오셨습니다. 우리 집에 오신 시어머님은 가방을 푸시더니 빨간 보자기에 곱 게 싼 것을 내 앞으로 내 미셨습니다. 저는 말없이 보자기를 펼 쳐 보았습니다. 그 속에는 뽀얀색의 윤이 나는 은수저 열두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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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습니다. 시어머님이 오랫동안 고이 간 직 하셨던 것으로서, 큰 행사가 있거나 손님이 오셨을때만 사 용하셨던 은수저였습니다. 세월을 머금은 은수저 12벌이 제 앞에서 찬란하게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시어머님께서는 “이 것을 네가 보관하거라. 네것이다.”라고 하시며 내 앞으로 밀어 놓으셨습니다. 시어머님에게는 여러 자식이 있는데도 큰 며느 리에게 사랑의 표시를 하시기 위해서 한국에서 여기까지 가지 고 오신 것이었습니다.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시부모님을 모시고 뉴욕,캐나다등 이곳 저곳을 구 경시켜 드렸습니다. 다리가 아프신 시어머님을 위해 휠체어를 빌려 손자는 뒤에서 밀고 우리는 끌면서,행복해 했었습니다. 시부모님은 한국에 돌아가셔셔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을 늘어 놓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시부모님은 두분 모두 지병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서로 도와 가 시며 오손도손 재미있게 사시더니, 시어머님의 지병이 악화되 어 팔십구세에 세상을 뜨시자, 쓸쓸하고 외롭다고 하시던 시 아버님께서는 시어머님이 돌아가신후 육개월만에 구십이세를 일기로 시어머님을 따라 가셨습니다. 오늘 저는 시어머님께서 주신 은수저를 닦으면서 지금은 두분이 손을 다정히 잡으시고 천국낙원을 산책하시며, 행복하게 살고 계시리라 믿으며, 시부모님의 사랑이 담긴 은수 저를 어루만져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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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보물들 김웅옥 카타리나

나에게는 소중하고 귀한 보물이 네개가 있습니다. 결혼하여 첫 번째 딸을 얻었을 때, 이 세 상에서 나만이 보물을 얻은 것 같았습 니다. 아이가 눈을 떴다, 감았다 입을 오 물거리고, 그 오물거리는 조그만 입에서 소리도 내고, 손발은 너무 앙증스러워 만지면 어떻게 될까 봐 꼭 쥐어 보지도 못했었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 신기하기 만 했습니다. 딸이 점점 자라면서 우린 둘째를 갖고 싶어 했습니다. 어렵게 임신이 되었는데 오 개월이 지났는데도 배가 부르지도 않았고, 조금씩 출혈을 했습니다. 내가 다니던 병원의 의사가 “포산괴 태를 배었다”라고 하여 전문적인 검사를 받기 위해 대학 병원 으로 갔습니다. 그랬더니 아기가 유산이 된지 이개월이 넘었 다며, 조금 더 늦었으면 산모의 생명이 위험했다고 했습니다. 우린 어렵게 어렵게 두째 보물인 딸을 받았습니다. 두째는 두 돌이 가까워 오는 데도 말을 하지 않아 걱정했었습니다. 그런 데 늦게 시작한 말이 우리를 재미있게 했습니다. 귀엽고 조그 만 손으로 밥을 먹으며, 젓가락으로 콩장을 집어서 입에 넣으 려는 순간, 그것이 국에 빠졌습니다. 젓가락으로 다시 시도했으나 국속에 있는 콩장이 잘 집어지지 않자 두째 딸은 “얘, 거기서 그만 놀고, 나하고 놀자.”라며 계   15


속 젓가락으로 콩장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 또 한 번은 교회에 서 연극을 하는데 두째딸이 토끼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 연극에서 “너는 뭐니?”하고 물으면, 두째 딸은 “나는 토끼 야.”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뭐긴 뭐니, 사람이지.” 라고 대 답하여 모여 있던 많은 관중에게 웃음을 선사했었습니다. 우리는 또 보물을 얻고 싶었습니다 계속 유산이 되었습니다. 칠년 만에 겨우 다시 얻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이번에 아이를 낳고 싶으면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서 생활해야 한다고 경고를 했습니다. 나는 조심조심하면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배가 너무 불 렀었습니다. 칠 개월이 되었습니다. 새벽 두 시경에 대포 소리 같은 ‘펑’하는 소리가 나의 귀를 찢는 듯했었습니다. 깜짝 놀란 나는 남편을 깨워서 ‘펑’하는 소리가 났다고 했더니, 남편은 아 무 소리도 듣지 못했으니 자라고 했습니다. 조금 뒤 아래에서 물이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남편에게 얘기했더니 당황하며, 아래채에서 살고 계신 할머니를 깨웠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딸과 함께 사는 할머니에게 아래채에서 사시게 했습니다. 할머니가 보시더니 “아이고, 양수가 터졌구먼 빨빨 리 병원으로 가야 해. 아이가 위험 혀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남편은 경찰서로 달려가서 구급차를 불러 달 라고 부탁 했습니다. 경찰은 몇 번인가 전화를 걸어보더니 병 원에서 전화를 받지 않는다며, 통금해제가 네 시니 조금 있다 가 택시를 타는 것이 빠르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추운 엄동 설한이었는데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길 로 나가 택시가 빨리 나오기를 기다렸답니다. 첫차가 나타나자 재빨리 잡아타고, 나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내가 다니 던 병원 의사가 보더니, 쌍둥이고, 미숙아라서 자기 병원에는 시설이 없으니, 빨리 대학 병원으로 서둘러 가라고 했습니다.   16


우리는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혜화동에 있는 우석 병원으로 갔습니다. 그곳의 숙직 의사가 황급히 나 와 보더니, 쌍둥이라고 말을 하자마자 첫아이가 울음을 터트 렸었습니다. 뒤 이어서 나와야 할 아이가 나오지 않자 의사들 이 당황한 듯 분주히 움직였습니다. 의사의 노력으로 십삼 분 만에 둘째가 태어 났습니다. 의사가 둘 다 아들이라고 하자, 남편은 입이 귀에 걸렸습니다. 친정 식구, 시댁 식구 모두 몰려와서 함께 기뻐해 주었습니다. 나는 처음 먹어보는 미역국인 양 맛있게 먹으며, 싱글벙글 좋 아 했습니다. 옆에 있던 간호사가 “뭐가 그렇게 좋으세요. 쌍 둥이를 낳으셨으면서…”라고 입을 비죽거렸습니다. 그 당시 쌍둥이를 낳으면 모두 이상한 눈으로 쳐다 볼 때 였으 니,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당연 했습니다 그렇게 비죽거리며 이 야기하는 간호사도 밉게 보이지 않아, 오히려 활짝 웃는 얼굴 로 대답했었습니다. 쌍둥이 중 큰애는 2.3kg이고, 작은애는 1.9kg이라서 작은애 만 인큐베이터에 넣었었습니다. 그런데 삼 일째 되던 날 큰아 이가 숨을 멈추었습니다. 의사가 “아이에게 산소 호흡을 시키 고 있는데, 세 시간 안에 깨어나지 않으면 소생시킬 수 없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두 손을 맞잡고 간절히 기도했습 니다. 두 시간이 지났을 무렵, 위세척을 했더니 검은 덩어리가 나왔 고, 그 후 숨을 제대로 쉰다는 말을 전해 듣고 우리 부부는 눈 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아이 들은 환한 빛으로 눈이 부셨습니다. 쌍둥이들은 한 달 반 동안 병원에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병원 에 있는 동안 남편은 회사에서 일이 끝나면, 하루도 거르지 않   17


고 병원에 들러, 아이들 얼굴을 보고나서야 집으로 돌아갔습 니다. 의사가 아이들이 100cc의 우유를 먹으니, 이제 퇴원해도 된 다고 했습니다. 병원에서는 아무리 깨끗이 소독을 하여도 병 균이 돌아다녀서 신생아에게는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안심하고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아이들 은 10cc 정도도 안되는 우유를 먹었고, 그것마저도 토해내기 일쑤였습니다. 나는 쌀에 야채류, 고기류,멸치 번갈아 가며 넣어서 죽을 쑤 고, 그 물에 우유를 섞어서 먹였습니다. 그랬더니 토하는 일 이 줄어들었습니다. 아이들은 잠도 잘 자지 못해서 체중 미달 이 되었고, 첫 예방접종을 구 개월이 넘어서 시작했습니다. 쌍 둥이들이 다섯 돌이 지날 때까지 나는 밖을 제대로 내다 보지 도 못하고, 오로지 아이들에게만 집중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 당시 미숙아로 나오면 정상아가 되기 힘든 시기였는데, 우 리 가족 모두의 힘으로 어렵고 정성껏 만들어 키운 쌍둥이들 이 학교에 다니면서부터는 쑥쑥 잘 자라 주었습니다. 쌍둥이 들이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우리는 우리가 받은 귀하고 소중한 보물들을 더 잘 키우기 위해서 이민을 오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미국적인 사고방식과 약간의 한국적인 사고방식을 섞어 자신들의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며 잘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젠 쌍둥이 중 한 아이만을 제외하고 모두 결혼을 하여 부모가 되었습니다. 잠시도 우리 부부의 머릿속에서 사라 지지 않는 우리의 자녀들이 제 자리에 서 성실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께서 주신 귀하고   18


소중한 나의 사랑하는 보물들을 가만히 가슴으로 보듬어 봅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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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길 김웅옥 카타리나 나를 가르치셨던 많은 분들 중, 기억 에서 사라지지 않는 선생님이 한 분 계신다. 그 선생님을 생각하면 보라색 등꽃도 함께 떠 오른다. 내가 다니던 학교의 교정 앞 양쪽에는 아름다운 쉼터가 있었다. 그 쉼터 기 둥에는 등나무가 기둥을 따라 서로 꼬 여서 위로 올라가 그 엉켜있는 모습 이 꿈틀거리는 것 같이 보였다, 등나 무 가지들은 마음껏 활개를 펴서 지붕 이 되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었는데 봄철이 되면 탐스러운 등꽃 이 주렁주렁 달려서 등꽃 축제를 보는 듯 했다. 등꽃의 향긋한 꽃내음이 은은히 퍼져가면, 그 당시 노처녀이 셨던 국어 선생님은 우리를 의자에 앉히고 재미있는 이야기 를 자주 들려주셨다. “지금이 너희에게 가장 예민한 사춘기란 다. 이 시기에는 무조건 많은 책을 읽어라. 책 속에는 너희가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 들어 있고 너희가 가야 할 길도 알려 준단다. 그리고 책 중의 책인 성경은 그리스도를 믿든, 아니 든 간에 꼭 읽어 보아라. 너희가 살아가는데 밑거름이 될 뿐 아니라 너희 길을 밝혀 줄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는 책을 많이 읽기 위해서 청계천에 쭉 늘어서 있는 헌책방에 가서 흥미본위의 책을 사서 다독을 하였다. 그러다가 책 중의 책이라는 성경이 생각났다.   20


‘성경’이 무슨 책이길래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궁금했다. 그 때까지 뿌리 깊은 불교 집안에서 자란 나에게 성경 책은 나와 는 거리가 먼 책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 성경 책을 사서 첫 장을 펴 보았다. ‘ 태초에 하느님이…….’ 나는 성경을 덮었다. 도저히 그 글들이 이해가 되지 않을 뿐더러 눈으로 읽어 갈 수가 없었다. ‘이것이 책 중의 책이라고….? 하나도 재미가 없잖아!’ 그 당시 나는 재미있는 책이면 밤을 새우면서 읽었다. 때로는 엄마가 늦은 시간까지 불을 켜고 있는 나를 보시면 빨리 자라 고 성화를 하셨고, 그러면 나는 전등불을 이불 속으로 들고 들 어가서 책을 읽기도 하였다. 그러나 흥미를 느끼지 않으면 그 냥 덮어 버렸다. 결국 성경은 나의 책장에서 밀려나갔다. 그 뒤, 나는 결혼을 하였고 살면서 삶의 회의를 느껴 방황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 무렵 나는 ‘나는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문제를 깊이 생각 하였다. ‘내가 왜 이곳에 있어야 할까? 이것이 나의 삶이란 말 인가?’라며 모든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이러 한 삶에서 탈피를 하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가졌다. 생각이 깊어지자 옛날 선생님께서 들려주셨던 말씀이 어렴풋 이 떠 올랐다. ‘삶의 근원이 되고 우리들의 길을 밝혀 줄 것이 라는 책’ 성경 책이 생각났다. 그래서 먼지가 뽀얗게 앉은 성 경을 펼쳐 보았다. 그리고 무조건 읽어 내려갔다. 나의 아픔이 그 속에 있었다. 눈물이 장강을 이루었다. 눈물이 때문에 글씨 을 읽을 수가 없었다. 나는 눈물을 닦고 다시 읽고, 또 닦고 읽 어 내려갔다. ‘아!, 그래, 나를 알아야 내 어깨를 누르고 있는 이 모든 짐을 내 려놓을 수 있고 나 스스로 깨달아야 모든것에 감사하게 되는구   21


나.’라고 생각하며 내가 살았던 삶을 다 시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하느님의 창조물이다. 이 세상에 서 하나밖에 없는 귀한 존재물이다. 그 러한 나인데 나는 이때까지 그렇게 생 각하지를 못하고 살아왔다. 성경을 읽으면서 나는 나를 발견하고 나를 알게 되었다. 나의 삶을 다시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겼으며, 나의 삶을 내가 이끌어 갈 수 있는 힘도 생겨나는 것을 스스로 느꼈다. 내가 살았던 지금까지의 삶은 나에 의해서 살았던 삶이 아니라 그냥 덤덤히 세월을 쫓아 가는 삶이었다. 누가 나에게 상처를 주면 그 아픔을 가지고 상대방을 더 아프게 찌르려고 하였고, 나를 미워하면 그를 미워했으며, 남의 잘못을 보면 ‘왜, 저럴까’하고 핀잔을 주 면서 나의 잘못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었다. 그래서 아파하고 괴 로워하고 상처를 주고 고민을 하며 살아온 것이었다. 고통을 아파하고 고민하면서 떨쳐 버리려고 몸부림쳤을 때는 더 큰 아픔으로 다가와서 나를 괴롭혔는데, 나를 알고나니 그 고통 을 끌어 앉고 그곳에서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그러자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나를 진정으로 알면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 은총으로 다가옴도 알게 되었다. 나를 알게 되니 세상은 활기차고 아름다우며 정말 신나게 살 수 있는 곳이었다. 지금까지 뿌옇게만 보였던 나의 삶 이 은은한 향기가 풍기는 보라색 등꽃으로 장식된 듯 보였다.   22


단 숨에 읽어 내려가던 성경 책에서 ‘나를 발견’하면서 나는 ‘ 고인의 기도’를 조용히 들었다. ‘오늘 나의 길에서 험한 산이 옮겨지기를, 또한 부딪히는 돌이 저절로 굴러가기를 원치 않으며, 그 험한 산을, 부딪히는 돌을 발판으로 삼아 갈 수 있도록 저에게 믿음을 주세요.’라는 노래 를 들으며 어떠한 고통과 괴로움도 그것을 발판으로 삼고 살 아 갈 때 축복과 행복을 누릴수 있는 진정한 나의 길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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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이야기 권이근 저는 오늘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저의 할아버지에 대해 이야 기를 하고자 합니다.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약 7살부터 있으며 그 이전은 기억나 지 않습니다. 할아버지는 1891년 3월 27일생이셨고 제 고향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덕정리 은동 150번지에서 오랫동안 살 아계시다가 1950년 12월 23일에 작고 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외모가 왜소하였고, 가끔 예쁘다고 저를 안아주실 때는 수염이 저를 따갑게 만들곤 했지요. 그럴 때마다 저는 “ 아이 따가워” 소리치며 도망가곤 했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 면 제가 귀여워서 그리하신 모양입니다. 국민학교 입학 전의 일같이 기억되는데, 어느 해엔가 마 을 사람들과 함께 초가 대형 집을 지으시든 할아버지의 모 습이 어제 일같이 생생하게 떠올라옵니다. 달빛이 환한 밤에 동네 어른들이 모두 동 원되어 지경을 다지고 (추춧 돌 자리를 굳게 하는 작업) 있 을 때였습니다. 바위 돌 같은 것을 튼튼한 밧줄로 콱 묶어 사방팔방에서 소리 높여 당겨 올 렸다 내렸다 하던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큰 집을 짓는데 술과 떡이 빠질 수 없지요. 할아버지와   24


동네 어르신들은 술기운이 살짝 오르면 더욱 흥겨워져서 소리 높여 영차영차 노래를 불렀답니다. 그러면 저까지 덩달아 신이 나서 옆에서 겹 잡아 안고 춤을 추곤 했지요. 생각하면 참으로 행복한 순간들이었어요. 할아버지께서 기분 좋게, 약주 한 잔을 드시고 흥겨워하시든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또 술잔을 들고 일하는 사람마다 잔을 권하며 음식을 대접하시든 모습도 선합니다. 그때 함께 먹은 것이 수수 팥 떡이었습니다. 저는 형제가 많아서 동네 아이들이 모두 모이면 저희 형제들 이 절반 정도를 차지하였답니다. 이종해, 임제빈, 권이호,이뿐 네 등이 지금 기억나는 그 시절 함께 모여서 놀던 동네 친구 들이랍니다. 아이들이모이면 자연히 엄마들도 따라와서 함께 왁자지껄하였는데 그 모습이 마치 큰 잔치를 하는 것처럼 느 껴졌어요. 그런 분위기가 좋아서 들떠있으면 간혹 실수하게 되고, 실수를 저지른 저를 어른들이 볼기 짝을 때리고, 저는 맞으면서도 신이 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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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짓는 일이 그리 쉽고 간단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대목수들 이 오랫동안 우리 집에 기거하면서, 대들보감, 기둥감, 서까래 등을 다듬고, 만들었습니다. 어린 저에게 특히 인상 깊었던 것 은 주 자재인 소나무를 마차로 싣고 와서 긴 톱을 두 사람이 양 쪽에서 잡아 밀고 당기면서 장단에 맞춰 소리를 지르며 톱질하 던 모습입니다. 이렇게 모두 자재 준비하느라 바쁘고 정신없는 차에 어린 제가 궁금한 것이 있어 물어볼라치면 사정없이 볼기 짝을 맞았지요. 그건 진짜 저를 때리는 것이 아니라 저를 번쩍 집어 들어 저 멀리 떼어놓는 것이었답니다. 제가 놀라서 제 편이 되어줄 할아버지를 이리저리 찾으면 호 랑이 할아버지는 마침 그때 따라 어디 계시는지 보이지를 않 는 것이었지요, 그러다가 깜빡 할아버지 찾는 일을 잊어버리고 아이들과 활기차게 놀다 보면 저 멀리서 할아버지가 마차에 나 무를 싣고 오는 모습을 발견하곤 했답니다. 집이 거의 완성되어 갈 무렵, 벽을 만들기 위해 마당의 흙을 파내고 나니 앞마당에 움푹 큰 웅덩이가 생겨났지요. 그 웅덩 이를 오르내리며 놀다가 또 할아버지에게 볼기짝을 맞았답니 다. 그 넓은 벽을 모두 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흙이 많이 필 요했고, 마당에서 흙 파는일에 장시간을 보내다 보니 모두 작 은 일에도 짜증이 났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런 속도 모 르고 웅덩이 안에서 놀면서 일을 방해했으니 할아버지가 볼기 짝을 칠만했지요. 그 후, 집이 완성되고 나니 우리 집이 동네에서 네,다섯 번째 쯤되는 큰 집이 되어있었습니다. ㅁ자 형의 집이라고 합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그중에서 소 외양간(소를 재우는 방)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 같았습니다. 할아버지가 소를 사랑하며, 아끼시던 모습이 지금도 머릿속에 아련히 남아있습니다.   26


소에 대한 할아버지의 사랑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매일 아침 소 죽을 손수 끓이시고, 꼴(풀)을 소가 먹기 좋게 잘디잘게 잘 라서 정교하게 정리하여 주는 것을 보면 금방 알 수가 있었 답니다. 할아버지는 늘 소 죽에 콩을 조금 넣고 끓이셨는데 그중에 한 알이라도 우리가 골라서 먹으면 불호령이 떨어지곤 하였답니 다. 소 앞에서는 장난을 치거나 놀지 못하게 하셨던 우리 할 아버지.

그런 할아버지가 6.25 전쟁이 나서 모두들 피난을 떠났지만, 누군가는 집과 고향을 지켜야 한다면서 고집스럽게 피난을 가지 않으셨답니다. 전쟁이 끝나면 가족들이 돌아올 곳이 있 어야 한다며 홀로 그 큰 집에 계시다가 북한군의 폭격에 외로 이 운명을 하신 우리 할아버지! 지금도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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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구경 권이근 이 이야기는 약 65년 전쯤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던 덕정리 은동은 서울서 북쪽 방향으로 경원 선이 지나가며, 청량리역에서 시작하여 현촌, 창동, 의정부, 주 내 그리고 다음이 덕정역입니다. 서울에서 덕정리로 오는 또 하나의 길은, 서울 미아리에서 원 산을 향하는 국도로 오는 방법인데 약 100리쯤 된다고 합니 다.국도라고 하여야 마차길보다 조금 넓은, 포장도 안 되어 있 는 흙길입니다. 그때는 서울 구경 한 번 가 보는 것이 누구나 소원이었던 시절 이었습니다. 우리 외갓집은 은현면 사천리라는 마을인데 서울 까지 바로 갈 수 있는 교통편이 없어서 기차를 타려면 딸(엄 마) 집에서 하루를 묵으면서 기차를 이용하여 서울로 갑니다. 그런데 하루는 외할머니가 서울 경마 구경을 가시는데 엄마가 함께 가시게 됐다는 사실을 우연히 할머니와 엄마의 대화를 듣 고 알게 되었지요. 그 사실을 알고 저는 얼마나 좋은지 밥도 먹을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당연히 저도 함께 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랍니 다. 그리고 기회를 틈타 언제 서울 가느냐고 엄마에게 물었지 요. 그런데 엄마는 아무 대답 없이 “밥이나 먹어” 하셨답니다. 나는 투덜거리다가 “엄마, 나도 데리고 가는 것 아니야?” 하며 또 물었지요. 그제야 엄마는 “서울은 복잡하고 사람이 많아서 자칫하면 잃어버리기 쉬우니 너는 이다음에 커서 가자꾸나.” 하시며 단호히 거절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에 몇 번을 더 졸라 보았지만 대답은 역시 “안돼” 였고 오히려 나를 달래는 것이었습니다.   28


저는 어린 마음에 서울의 화려한 모습이 자꾸 생각나서 꿈까 지 꾸게 되었답니다. 어른들이 서울 이야기를 하면 귀가 쫑긋 하여 궁금증만 점점 더 커졌지요. 그러다가 어떻게 그런 생각 을 하게 되었는지 나도 모르게 “무조건 차를 타 버리자.”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답니다. “기차가 오면 먼저 기차에 올라타서 앉아 있는 거야, 설마 엄마가 나를 버리지는 않겠지?” 이런 생 각을 하게되었고 단단히 결심을 한 것입니다. 마음을 그렇게 정하자 저는 서울 가는 날짜, 시간 등의 정보를 얻기 위해서 엄 마와 할머니 곁을 빙빙 맴돌면서 두 분의 대화를 엿듣곤 하였 습니다. 드디어 서울 가는 날이 왔습니다. 외할머니가 보따리를 잔뜩 들고 우리 집으로 오셨습니다. 저 는 저도 모르게 흥분되어 할머니를 돕는다는 것이 방해되었든   29


지 엄마는 “비켜 이근아, 얘가 왜 오늘따라 앞에서 이렇게 알 짱되나? 그러면서 외할머니께 드릴 음식 장만으로 이리저리 매우 바삐 움직이셨고, 집안 분위기는 웃숨 소리가 꽉 찼지요. 어린 나는 음식 만드는 것도 좋고,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무척 좋아한 모양입니다. 동생 이하와 같이 여기도 참견, 저기도 참 견하고 뛰어다니면서 즐거워하였답니다. 그러면 외할머니는 “ 이리와” 하시며 저를 껴안아 주고 사랑하여 주셨지요. 저는 할 머니의 눈치를 이리저리 살피다가 할머니의 기분이 좋아 보일 때, 이때다싶어 외할머니에게 “서울 구경 가실 거죠?” 하고 물 었고 할머니는 “그래, 너도 가고 싶어?” 하시며 제 머리를 쓰 다듬어 주셨지요. 제가 “응, 할머니. 서울은 사람도 많고, 불도 환하고, 전차도 있다는데 나도 가서 보고 싶어”하며 나를 데 리고 가자고 응석을 부리며 할머니를 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외할머니는 유쾌히 허락하시며 “애야(엄마) 얘를 데리 고 가자!” 합니다. 그러나 엄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어요. 아마도 동생 이하도 있고, 나이가 우리와 비슷한 삼촌 명옥, 형 이범이 등 여러 아이가 있으니 나만 데리고 간다는 것이 불공 평하다는 생각 때문에 대답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었습니다. 대청 마루에 잘 차려진 밥상에 앉 자마자 화제꺼리가 온통 서울 이야기로 가득 찼습니다. 나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나도 갈거야”하며 소리치고 말았지요. 그러자 누군가가 “같이 데리고 가”하는 소리가 들 렸고 나는 그 말에 용기를 내서 조금 전보다 더 큰 소리로”나 도 갈 거야” 하며 또 소리 질러 말했지만, 이번에는 저를 돕는 사람은 별로 없고, 야단만 치십니다. “안돼, 사람이 너무 많아 잊어버려” 합니다. 다음날이 되었습니다. 모두 바삐 움직이며 서울 갈 채비를 합 니다. 나는 외할머니만 바라보는데 “이근이는 왜 준비를 안   30


해?” 하는 소리가 없어 할머니가 저를 데리고 갈 것이라는 희 망은 그만 포기하고 말았답니다. 그리고 무조건 기차역으로 나 간다는 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지요. 기차는 12시쯤 떠 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아무도 모르게 계획대로 먼저 기차역으로 나갔습니다. 조 금 있으니 기차가 들어왔지요. 저는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얼른 기차에 올라타서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았답니다. 그리고 조금 지나서 모두 나를 보더니 깜짝 놀라며 난리가 났지요. 그 러자 외할머니가 앞장서서 저를 데리고 기자시며 엄마에게 동 의를 구하시더군요. 그런데 아직 엄마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 에 시간이 되어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거였어요. 나는 서울을 못 가면 어쩌지 하는 걱정 반, 무서움 반으로 엄마 치마에 매달렸지요. 그러자 엄마가 제가 입고 있던 옷을 보시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야 단을 치십니다. 서울을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 만으로 아무 준비도 없 이 놀고 있던 그대로 왔 기 때문에 옷이 너무 남 루 해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서울에는 어머니 의 친척이 계셨고, 우리는 그 댁에서 지내야 하는데 게쩨쩨해 보인 제 복장이 엄마의 자존심을 건드렸던 것 같습니다. 그러 자 “서울가서 한 벌 사 입히자”며 외할머니가 저를 거들고 나 섰습니다. 사면초가에 몰려 있던 저는 그 소리가 얼마나 반갑 고, 기뻤든지 외할머니가 내 편이구나싶어 안도의 숨을 내쉬 었답니다. 할머니의 적극적인 권유로 결국 저도 엄마와 함께   31


서울 길에 오를 수 있었답니다. 기차가 서울에 거의 도착 할 무렵에서야 비로소 나는 서울을 가고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났고, 마음의 여유가 생겨나서 외 할머니에게 지금 우리가 누구 집에 가느냐고 물어볼 수 있었 지요. “허정남” 내게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한 분 어르신 의 이름을 말씀하시면서 “큰집의 장남이지요. 반대로는 작 은 엄마” 할머니는 짧게 설명을 덧붙이시고 “너는 장차 알게 될 거야” 하시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십니다. 나는 달리는 기차의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항상 느릿느릿 한 마차만 타다가 처음 타 보는 기차는 마냥 신기하고 어린 나를 들뜨게 만들었습니다. 기차 안에서 내다보는 바깥의 모 든 물체는 뒤로 가는 것 같습니다. 서울 갔다 온 사람들이 자 랑하면서 하든 이야기가 그 순간에 기억이 나더군요. 그때부터 내 마음은 ‘서울’이라는 곳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 로 들뜨기 시작했어요. 서울이라는 곳에는 동대문, 남대문, 창경궁, 전차,전깃불, 수돗물, 사대문 안 거리, 기와집 등등 다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볼거리가 많다는데 과연 서울은 어떤 곳일까? 서울이 그리 좋은데 그곳에 사는 사람은 누구 일까? 내 상상은 끝이 없었답니다. 그러다가 문득 “그렇게 좋은 서울에 나는 살 수 없을까?” 라 는 의문이 들기도 했답니다. 온종일 시골 뙤야볕 아래서 땀 을 흘리며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만 보다가 이렇게 환상적인 도시를 가고 있으니, 마음이 가라앉지를 않은 것이지요.서울 은 누구나 동경하는 도시, 나도 꼭 살아 봐야지 하는 꿈이 생 겨났고, 그 달콤한 생각에 어린 마음이 요동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드디어 기차가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기차에서 내려 보니 많은 것들이 낯설었지만 나는 구석구석을 모두 머릿속에 기   32


억해 둘 것처럼 자세히 보았습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걸어가자니 자연스럽게 잡고 있던 외할머니의 손을 놓치곤 하였지요. 내가 외할머니에게서 조금만 떨어져도 엄마는 깜 짝 놀라서 소리를 지르시며 “떨어지면 잃어버린다. 할머니 손 꼭 잡고 따라와라”고 하셨지요.

우리는 기차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전차를 탔습니다. 처 음 타 보는 전차를 보고 어리벙벙하여 어찌해야 할지 모르 는데 전차는 덜커덩덜커덩하며 움직이더니 동대문으로 향 했습니다. 내리라는 말을 듣고 주변을 돌아보니 동대문이 크게, 높게, 웅장하게 눈앞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아! 이것이 말로만 듣 던 동대문 이구나! 하였지요. 외할머니의 손을 잡고 종종거   33


리며 따라갔더니, 어느 깨끗하고 화려해 보이는 큰 기와집 으로 들어가시는 거였어요. 시골서는 쉽게 보지도 못한 그런 웅장하기까지 한 기와집이었습니다. “여기가 아저씨네 집(엄마의 사촌)이다.” 이렇게 말씀하시 면서 외할머니는 저를 데리고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셨 습니다. 어린 제 눈에 그 기와집은 말로 뭐라 표현할 수 없 을 만큼 좋아 보였습니다. 오랜만에 만났는지 어른들은 한참 인사와 가져온 선물 보따리를 주고받기를 하였습니다. 인사말이 끝나자 엄마는 내 옷을 벗기고 목욕을 시켰습니다. 목욕물을 받기 위해서 앞마당 수도꼭지를 틀자, 물이 콸콸 쏟아졌어요. 그걸 보고 깜짝 놀란 기억이 아직도 제 기억에 남아있답니다.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물동이를 머 리에 이고, 사용할 물들을 길어 날랐던 시골에 비하면 얼마 나 편리해 보였던지. 서울의 수돗물은 시골에서 온 어린 저 에게는 신기한 마술같이 보였지요, 목욕이 끝나자 엄마는 내 나이 또래의 아이가 입던 옷을 사 촌 오빠에게 빌렸는지 내게 갈아입혀 주시면서 “내일은 새 옷을 한 벌 사서 입자” 하십니다. 엄마가 옷을 갈아입히는 동 안 나는 하릴없이 그 집안을 둘레둘레 돌아보았습니다. “잘 사는구나, 이 아저씨는 부자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부자로 잘사는 그 집을 마음속으로 부러워하였습니다. 특히 저녁이 되었을 때, 시골에서는 볼 수 없는 전깃불이 환 하게 들어오자 세상이 빛이 나는 것 같았고 그런 전기 불과 수돗물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아저씨네가 부럽기만 하 였습니다. 서울은 시골에 비해 음식들도 다 맛있었지만 전깃불은 등잔 불보다 몇 배나 밝아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마루 에 하나만 켜도, 시골 등잔불 여러 개를 켠 것보다 훨씬 밝고   34


환하였습니다. 전깃불 구경에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나봅니다. 깨어보니 아침이 되어 있었고 모두 일어나 계셨습니다. 언제 사 놨는지 할머니와 엄마가 “잘 잤니?” 하시며 저를 새 옷으로 갈아 입히셨습니다. 며칠이나 지났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어느 날, 신 설동에 있는 경마장 구경을 갔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말이 경주하던 기억은 없고, 많은 사람과 땀 냄새 로 고생한 기억, 호떡 사 먹든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어느 날은 창경궁 동물원을 갔는데 그때가 마침 봄철이라 그랬는지 사람들 이 너무 많아 제대로 구경도 못 하고 그저, 사자, 코끼리 등대충 휙 둘러보고 말은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싸 간 음식을 펴놓고 빙 둘러앉자 먹던 생각, 그리고 그 음식이 왜 그렇게 맛이 있었든지. 그 뒤에는 서울 시내를 다니면서 구경을 하였지만, 기억에 특별 히 남는 것은 별로 없네요. 그럭 저럭 한 달이 되었는지 제법 많 은 날짜가 지나자 엄마와 외할머니는 이제 집으로 내려가야 한 다면서 짐을 챙기기 시작하셨습니다. 전차를 타러 가는데 서운 함과 아쉬움이 남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청량리역에 도착하 여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지요. 서울을 다녀온 후로는 ‘서 울’과 ‘기차’가 저의 환상의 그림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그 후 한 동안은 동네 친구들에게 자랑하느라 바쁘게 지냈지요. 꿈에 그 리든 서울 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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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등 (호롱불) 권이근 제가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덕정리 은동 은 서울에서 가까우면서도 먼 시골 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하신 후에 새마을 운동의 하나로 전기 가 가설되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주로 호롱불과 등불로 밤을 밝혔 지요. 그래서 나에게는 어려서부터 등잔불에 관한 추억이 많답니다. 지금은 인사동 골동품 가게에서나 볼 수 있는 남포등은 호롱불이라고 도 불리며 유리관이 씌어 있으며 등 불은 등잔에 기름을 넣고 심지를 꽂 아 불을 붙여 밝히는 간단한 형태의 등입니다. 남포등과 등불은 비슷하지만, 남포등이 등잔불보다 몇 배나 밝습니다. 당연히 그만큼 석유 소모도 크지요. 그 시절에는 석윳값이 무척 비싸 일반인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던 때였습니다

기억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10살 정도 되었을 때입니다. 마 루에 걸려있던 괘종시계가 저녁을 알리는 종을 치고 나면 중 천의 해도 뉘엿뉘엿 넘어가는 계절이었습니다. 엄마나 할머 니가 “이 근아 등잔불에 석유 넣어야지.” 하시면서 “깨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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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말고 안방, 사랑방, 건넌방, 마루 등 잘 챙기라”고 염려가 섞인 부탁을 하시면, 나는 형도 있고 삼촌도 있는데 왜 나만 시키느냐고 투덜 대면서 방문을 발길로 차며 나가곤 했습니 다. 그러면 할머니는 “또 투정부리는구나, 형하고 삼촌은 딴 일이 많잖아.” 하시며 저를 달래곤 하셨습니다. 그러면 나는 마지 못해 입을 뿌루퉁해서 화난 표정으로 등잔 닦는 일을 시 작하곤 했지요. 그러다가 간혹 호롱불 유리 를 깨거나, 석유를 흘리면 날 벼락이 났지요. 그러면 나는 “이제 다시는 석유 안 넣을 거야” 하며 밖으로 뛰어나가 곤 했습니다. 할머니는 저를 따라오셔서 부드러운 목소리 로 달래는 것입니다. “이근 아, 이제부터 잘하면 돼. 앞 으로는 엎지르지 말고. 아까 운 석유를 버리니까 그래.” 하시든 우리 할머니. 나를 야 단치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 시던 엄마와 할머니의 다정 한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 뒤, 내가 12살이 되면서 서울로 중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동생 이하가 제 뒤를 이어 호롱불 닦는 일을 넘겨받게 되었답 니다. 남포등 사용은 1960년대에 새마을 운동이 한창 펼쳐 질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등불을 밤새도록 켜 놓고 잘 때 면, 엄마와 외할머니는 석유 많이 든다 하시며 등잔불을 꺼 버렸습니다. 석유 소모량이 호롱불과 등잔불이 두 배나 차이   37


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방마다 다니시며 불을 끄고 “석유 아껴라.” 하시든 우리 엄마. 지금도 눈앞에 선합니다. 호롱불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더 싼 등잔불을 많이 사용하였지요. 호롱불의 밝기가 몇 배나 더 밝지만, 석유가 많이 필요하니 초 저녁 잠시 호롱불을 사용하고 밤새워 긴 시간 동안 필요할 때 는 석유가 적게 들어가는 등불을 켜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러나 등불은 밝기가 약해서 한밤중에 자다가 일어나면 주변 에 무엇이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아 애를 먹기 일쑤였습니다. 밤 에 소변이 급해서 요강을 찾다가 바지에 오줌을 쌀 때도 있었 지요. 지금 돌이켜보면 여러 가지 이유로 그때는 밤새워 불을 켜 놓고 자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등잔불이 나 호롱불을 켜 놓고 아침에 자고 일어나 보면 코밑이 까맣게 거슬러있었지요. 그때는 건강에 좋은지 또는 나쁜지 생각도 없 이 무턱대고 밝은 것만 좋아했답니다. 장날이면, 엄마는 꼭 석유를 챙겨졌는데 대들 병으로 여러 병 을 사서 한꺼번에 끈으로 질끈 묶어 나에게 들고 오게 하였습 니다. 아주 가끔은 저 대신에 동생 이하가 들어 주곤 했지요. 그러다간 언제부터인지 등불은 깡통 초롱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면서부터 호롱불과 등불은 점점 그 모습이 사라져 갔답니다. 제 어린 시절의 추억도 함께 사라져 갔습니다. 나쁜지 생각도 없이 무턱대고 밝은 것만 좋 아했답니다. 장날이면, 엄마는 꼭 석유를 챙겨셨는데 대들 병으로 여러 병 을 사서 한꺼번에 끈으로 질끈 묶어 나에게 들고 오게 하였습 니다. 아주 가끔은 저 대신에 동생 이하가 들어 주곤 했지요.   38


그러다간 언제부터인지 등불은 깡통 초롱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면서부터 호롱불과 등불은 점점 그 모습이 사라져 갔답니다. 제 어린 시절의 추억도 함께 사라져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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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박태동

나는 개구리에 대하여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개 구리가 귀엽거나 애완용으로 기르기에 적합해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개구리에 대한 노래 가사나 좋은 글을 보고 감동을 받은 것도 아니다. 나는 크리스천이다. 내가 크리스천이 된 것은 개구리와 얽힌 아주 작은 사건 때문이었다. 그 이야기는 반세기가 훨씬 지난 오래 전의 이야기다. 나는 일본 농촌마을에서 태여나 유년기를 그 곳에서 보냈다. 5 살 이 되던 해였다. 내가 살던 집 주위에는 가뭄 때 논에 물을 공 급하기 위하여 만들어놓은 적지도 크지도 아니한 연못이 하 나 있었다. 그 연못에는 붕어, 송사리가 많이 살고 곤충들도 득실거렸다. 곤충이 많다보니 개구리들도 많이 모여 살고 있 었다. 동네 아이들이 이 연못에 모여들어 놀이를 하거나 잠 자리를 잡곤 했다. 어느 날, 나는 보통 때와 같이 동 네 아이들을 따라 연못가로 갔 다. 그때 내 눈에 큰 개구리 한 마리가 띄었다. 순간 이상한 호 기심이 발동하여 나는 손에 들 고있던 회초리로 개구리를 후려 쳤다. 그런데 개구리를 죽일 생 각이 전혀 아니였는데 갑자기 회초리에 맞은 개구리는 발딱 뒤집어지면서 하얀 배를 하늘로 향하여 누워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 기절 할 것만 같다. 그런데 개구리의 죽음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따로 있었다. 옆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   40


던 일본 청년이”오마이 받지가 아다른다”즉 한국말로 “너는 이제 벌을 받게 된다”라고 하는 말이었다. 어린 나는 벌을 받 을 것이라는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날 밤, 나는 앞으로 받게 될 벌이 무섭고 불안하여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훌쩍거리며 울고 있으니 어머니가 잠에서 깨셨다. 그리고 내 울음소리에 놀라신 어머 니는 무슨 일이냐고 물으셨고 내 설명을 다 듣고나서야 빙그레 웃으시면서 “괜찮다”고 하면서 나를 어머니 품에 안아 재우셨 다. 그날 밤은 어머니 품에서 잘 잤지만 그 뒤에 벌에 대한 공 포감은 항상 나를 사로 잡고 있었다. 나는 개구리를 죽였으니 언젠가는 그 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 후 세월이 지나, 일본이 패전하자 부모님들은 아이들을 모 두 데리고 해방 된 조국으로 귀국하여 충청남도 강경에 정착하 셨다. 그곳은 난민 정착촌이다. 이웃 중에 같은 난민으로 만주 에서 오신 가정이 있었는데 그 집 주인 아주머니가 독실한 기 독교 신자였다. 나는 그분의 전도를 받아 주일 학교를 출석하 기 시작했고 그 때부터 ‘벌을 받을 것’이라는 불안했던 마음은 다 사라지고 독실한 크리스쳔이 되었다. 나는 주일학교를 다니면서 많은 새로운 것을 배웠다. 성경을 통해 죄와 벌, 천당과 지옥 그리고 기도하는 것을 배웠다. 개 구리를 죽인 것 때문에 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주일학교를 다니기 시작 한 뒤,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에 북한이 남한을 급습하 면서 민족 상쟁 이라는 전 세 계 유래가 없는 끔찍한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살 던 동네가 공산군의 점령하에   41


들어간 것이 순식간의 일이였다. 공산당은 처음 마을로 들어 와서 삽과 괭이를 들고 부역을 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일도 낮에는 비행기 공습 때문에 못하고 밤이 되면 마을 사람들을 산중턱까지 오르게 하여 가슴 높이에 맞추어 땅 파는 일을 끊임없이 시켰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그들은 반역자를 잡아서 파 놓은 구덩이에 집어넣고, 쇄스랑 으로 찍

어 죽여 흙으로 묻으려고 계획했던 것이다. 경찰가족, 사무직 공무원, 지주 그리고 목사 와 성직자 들이 그들의 처형 대상이 었다. 당시 나의 큰형님이 경찰 공무원으로 국군과 함께 남으 로 후퇴 하셨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그들이 처형해야하는 불순 분자의 중요한 대상이다. 우리 가족들은 언제가 될지 모르지 만 공산당에게 발각되면 그들의 손에 끌려 가야하는 운명이라 는 두려움으로 벌벌 떨며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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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온가족이 근처의 강에 가서 목욕 을 하고 돌아오니 이웃집 아주머니들이 우리 집으로 모여 들 었다, 그리고 천만다행이라면서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함께 기 뻐하시는 것이었다, 우리 가족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북 한군이 우리가족을 잡기 위해서 우리 집을 덮쳤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웃 분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온 몸에 소름이 돋았고 더 큰 불안과 두려움으로 그날 밤을 꼬박 세우고 말았 다. 다음 날이 밝으니 먼데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구-룽 구-룽 하는 소리가 계속 들렸는데 알고보니 유엔군이 진격하 는 탱크 소리였다 . 이미 공산당은 산을 따라 도망가고 우리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모든 일이 우연이 일어난 것같지만 나 는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특별히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생을 이 만큼 살고보니 인생의 모든 일들 이 서로 상관없는 것들이 없다, 내가 겪은 모든 일들이 분명히 어떤 연결 고리를 갖고 있으며 그 고리는 하나님의 사랑이라 고 믿는다. 내가 개구리를 죽이고 ‘벌’을 받을 것이라는 일본 청년의 말에 겁을 먹었을 때, 나는 이미 반성과 회계를 한 것이며, 그 순간 부터 보이지 않는 손길이 나를 이끌어 주신 것이다. 한마리 개 구리의 희생이 나를 하나님께 인도했고, 내가 크리스천이 되도 록 만들었으며 내가 크리스천이 되었기 때문에 공산당으로부 터 온 가족이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개 구리에 대하여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으며 모든 일을 섬세하게 연결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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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장이다

박태 동

“저는 요즘 교장으로 있습니다.” 내게 근황을 묻는 사람들에 게 이렇게 대답하면 열명중 여덟 아홉은 “아, 한국학교 교장이 요?” 한다. 나는 한국학교 교장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행복 한 우리 ‘가족 학교의 교장’이다. ‘교장’을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초,중,고등학교 따위의 우두머 리 교무를 맡고 직원을 감독함’으로 되어있다. 한국 어르신들 은 학생이 선생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선생 의 그림자도 밟을 수 없는 환경에서 선생의 최고 우두머리인 교장은 어떻겠는가? 감히 학생들이 범접 할 수 없는 존재일 것 이다.   44


그 반면에 미국의 교장은 어떤가? 학생보다 먼저 출근하여 스 쿨 버스에서 내리는 학생을 맞이하고, 교장이 먼저 인사 하면 학생들은 교장의 이름을 부르며 답례를 한다. 물론 아이들은 교장의 이름 앞에 반드시 미스터나 미세스를 붙여 존경의 표 시를 최대한으로 한다. 하늘같이 높은 교장이 어린 아이들에게 먼저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 참으로 아름답다. 한번은 이런 경험도 있다. 내 아이들이 있는 학군에 새로 이 사한 학생이 있었는데 스굴버스 운전 기사가 미처 연락을 받 지 못해서 아이를 데리고 오지 못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교 장이 직접 자기 차로 가서 아이를 등교 시켰다. 그걸 보고 나 는 아! 하며 잔잔한 감동을 받았고, 이런 것이 바로 미국을 키 우는 힘이구나라고 생각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근엄한 한 국의 교장도 아니며, 다정하고 친근한 미국의 교장도 아니다. 나는 내 아이들의 아이들, 내 손자 손녀들을 돌보는 ‘가족 학 교’ 교장이다.

나는 은퇴한지 얼마 되지 않는다. 은퇴를 하고나니 주위에 아 는 사람들이 만나기만 하면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어온다. 나 는 대답한다. “요즘 배비시터 한다” 고 말이다. 그러면 대개는   45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동정의 말을 건넨다. 어떻게 하다 그렇게 되었냐고. 쯔쯔쯔. “배비시터 하기가 얼마나 힘 드는데. 지 자식은 지가 길러야 지”하거나 “처음부터 못한다고 하지”라고 한다. 모두들 진심 으로 나를 생각해서 해 주는 말들이다. 그런데 너무 여러 사 람에게서 이러한 말을 들다 보니 언제부턴가 번거로운 기분이 들었다. 내 가족, 내가 지킨다는데 뭐가 문제야? 나는 가족에 대한 생각이 그들과 조금 다 르다. 우리 세대가 살아온 시대는 대 가 족이 모여서 함께 사는 것이 사회적 분위 기였다. 그러다보니 자식을 키우는 일이 누구 한 사람의 책임이 아니라 가족 모두 의 관심사요 책임이었다. 그런데 산업이 극도로 발달한 요즘은 직 종이 다양해져서 직장 따라 움직이고 게 다가 인터넷의 영향으로 어디에 있는냐 가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서로 편리와 자유를 더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 다 보니 가족이 반드시 함께 살아야 할 이유도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지금 내 자녀들은 핵가족으로 살고 있다, 핵가족의 장점도 있 겠지만 핵가족 의 단점은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받지 못한 다는 것이다. 특히 직장이 있는 여성에게 가정과 육아의 어려 움은 상상을 초월 할 것이다. 그래서 핵가족들이 서로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는 협동가족이 필요하다. 나는 그 실천으로 , 이미 결혼을 한 아들과 딸을 일년에 몇 번 만이라도 특히 명절 때는 반드시 다 같이 모이는 기회를 만들 도록 하고 있다. 아이들은 장소를 바꾸어가며 같이 모여 정보   46


도 교환하고 서로의 우애를 다진다. 내게는 아들과 딸 사 남매 가 있다. 그들이 모두 결혼하여 낳은 아이들이 열한명이다. 모 두 한자리에 모이면 시끌 벅적한다. 때로는 장난감 쟁탈전이 일어나거나 불공평 한 일이 생기면 이것을 공평하게 해결하여 주는 것은 교장의 몫이다. 또 한글도 가르치고 가정의 가훈과 예의 범절을 가르치는 것도 역시 교장의 역할이다. 나는 크리스천 이다. 할 수만 있다면 예수님 말씀대로 살고 싶 다. 예수님께서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신 것 처럼 나 또한 누군가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라 주면서 살고 싶다. 나와 내 아내는 종종 이런 말을 자주 쓴다. “ 있을 때 잘해” 라고. 그리고 우리 부부는 서로 한 마음으로 동 의를 했다. “살아 있을 때” “가지고 있을 때” 내 이웃과 자녀 들에게 베풀기로 말이다. 며느리 와 손자녀의 생일을 알아서 챙겨주고, 때로는 손자녀 를 만났다 헤여질 때, 항상 축복기도 해주고 헤여 진다. 기도는 간단하다. 금보다 귀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잘 섬기게 해주 시고 지혜 총명 받아 공부 잘하고 좋은 친구, 좋은 선생 ,만나 게 해주시고 앞으로 좋은 배필 과 좋은 영적 지도자 만나 하나 님 말씀 잘 양육 받아 하나님의 귀한 일꾼 되기를 기도 해 주 는 것이다. 그러면 말이 아직 서툰 두 살짜리도 아멘 한다. 기 도를 해주는 나도 흐뭇하다. 세 살 버릇이 여든 간다 하였다. 성경 열왕기 하에 북 이스라 엘 과 남 유다 의 멸망의 최후가 온 것이 왕들의 어릴 적 에 바 르지 못한 교육이 엄청난 결과를 가지고 왔던 것이 아닌가 생 각된다. 우리 장모님은 네명의 자녀를 낳고 길러주셨다. 나는 내게 이 토록 훌륭한 아내를 키워 주신 장모님의 수고로움과 희생에 감 사를 표시하고 싶지만 이미 천국 행을 떠나시고 우리 곁에 없   47


다. 나는 빚진 자가 되었다. 장모님이 남겨 두신 이 빚을 나는 이제부터 내 아이들에게 갚아 나갈려고 한다. 나의 배비시터 는 부담이 아닌 즐거움이다. 나는 지금 장모님의 빚을 갚아나가는 교장이다. 행복한 가족 학교의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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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머니는 위대하다 박태동 내 어머니의 평생을 돌이켜 보면, 도무지 내세울 만한 근사한 경력이 없다. 사회에 큰 공헌을 한 적도 없고 그렇다고 자녀 교육을 잘 시켜서 역사에 기록이 남을 만큼 뛰어난 인재를 만 드신 것도 아니다. 역경을 딛고 일어나 세상이 놀랄 만한 업적 을 세우신 분은 물론 아니시다. 오히려 내 어머니는 너무나 평 범하여 사람들 틈에 있으면 찾기 조차 어려운 분이었다. 나는 지극히 평범하신 나의 어머니를 사랑하며, 나에게는 그런 어머 니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다. 어머니는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자랐고, 아버지 랑 결혼하여 우리 형제 7남매를 키우시면서도 평생을 가난때 문에 고생을 낙으로 삼아야 했다. 한번도 마음 편안하게 ‘내 날 이 구나’ 하고 어깨 조차 펴보시지 못하셨다. 그러다가 1999년 어느 추운 겨울날, 그 날도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어머니는 아이들과 함께 모여서 식사를 하기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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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나르시다가 갑자기 심장마비가 와서 엠브란스에 실려 가시고 그후 영영 깨어나시지 못하셨다. 이렇게 74세의 일기 로 생을 마감하셨다 . 누가 봐도 그 생을 흠모할만한 것이 없지만 나에게는 잊지못할 어머니의 위대하심을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의 위대한 사랑과 희생을 가슴 깊이 새겨두고 있다. 어머님은 갑작스런 죽음으로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셨다. 어 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간혹 주위에서 어머니를 잘 아시는 분 들을 만나면 “그렇게 고생을 하시다가 이제 자녀들이 자리잡 고, 효도 받을려고 하는데 가셨구나” 하고 아쉬움의 위로를 하 시는 분이 있을 뿐이다. 나도 그렇게 말 한마디 없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원통하고 답답하여 가슴을 친다. 세월을 탓 하는것은 아니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지 않은 시간이 원망 스럽기도 하다. 나의 부모님은 가난하였다. 그 분들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시 대가 그런 때였다. 부모님은 일본에서 사시다가 광복을 맞아 고국으로 찾아온 난민 이였다. 나라가 난민을 돌볼 수 없는 형 편이라 우리가족은 살아남기 위하여 뿔뿔이 흩어저 살면서 각 자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위해 몸부림을 쳤다. 그런 어려운 환 경 속에서도 어머니는 “이 어려움을 이겨내는 길은 공부 밖에 없다”하시면서 나를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에 입학시켜 공부를 할 수 있게 만드셨다. 나는 공부하는 것이 너무 쉽고 재 미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나에게 참 잘해 주셨고 우리 어머니 를 볼 때 마다 공부 잘한다고 내 칭찬을 아끼지않고 하셨다 한 다. 선생님이 나를 칭찬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어머니는 당신이 회생의 밑 거름이 되어서라도 공부를 계속 시켜야지하 고 결심하셨단다. 그러나 아버지의 생각은 어머니와 전혀 다르셨다. 우선 입으로   50


들어가는게 우선이니 굶지않고 살기 위해서는 공부는사치라고 생각하셨다. 아버지는 일 할 곳을 찾다가 어려 워지자 궁여지책으로 강원도 어느 산골 화전민 마을을 찾아서 둘러보시고는 다른 가족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무조건 짐을 챙 겨서 아버지를 따라오게 하셨다. 우리는 선택도 없이 아버지를 따라 잠시 머무르고 있던 곳을 떠났다. 아버지가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로 봐 둔 곳까지 가려면 기차에 서 내려서 50리를 더 걸어 들어가야 했다. 거기까지 가는 교통 수단이 전혀 없으니 우리 가족은 걷기 시작했다. 가는 도중에 해가 저물었다. 그래도 우리가족은 걸어가야 했다. 우리는 밤 새 걸었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그 길을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걸어 들 어가면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무슨 생각들을 하셨을까? 어머니 는 가슴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손으로 연신 흘러내리는 눈물을 딱으셨다. 그리고 생전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말대꾸를 하셨다. 두 분은 의견이 맞지 않는지 오랫동안 토닥토닥 다투셨 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다투셔도 걸음을 멈추지는 않으셨다. 밤 새도록 걷고 걸어 우리 가족은 우리가 살 장소에 도착을 하였다. 도착 해보니 완전히 불모지였다. 무에서 유를 창조 해 내야하는 곳이었다. 우리는 실망과 절망을 안고 아버지가 봐 둔 곳에 터 를 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다지 오래가지 못 했다. 충격이 컸 던지 어머니는 갑자기 실명하여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힘든 생활을 얼마나 이어나갔을까? 어머니는 결국 고 민 끝에 용단을 내리셨다. 그리고 세 명의 어린 자녀를 구걸해 서라도 먹여 살리겠다며 전에 살던곳으로 다시 돌아갈려고 집 을 떠났다. 어머니를 따라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온 우리를 맞아 준 것은   51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고통 뿐이었다. 배고픔을 눈물로 참고, 온 몸을 에워내는 추위도 견뎌내야했다. 어떤 날은 벌목한 나 무를 후송하는 군용차 트럭의 나무 꼭대기에 매달려 오다가 동사 직전까지 간 적도 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암탉이 병아 리를 품 듯 우리를 어머니의 가슴에 품어 추위를 녹여주셨다. 절대로 지나갈 것 같지않던 그 가난의 시간도 세월을 따라 흘 러갔다. 시간의 흐름이 강산을 수 없이 바꾸어 놓고,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우리 가족들의 인생도 바꾸어 놓았다. 수 많은 변화가 생기고,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화지 않고 퇴색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극한의 추위와 배고픔앞에서 우리를 따뜻하고 편안하게 품어주었던 ‘어머님의 품’ 이다. 지금 우리 집에는 큰 포도 나무가 있다. 나무 넝쿨에 새가 둥지 를 틀었다. 어미 새는 둥지 안에 알을 낳고, 거센 비바람을 맞 으며 한 달 동안 알을 품고 있다가 새끼를 맞았다. 새끼가 짹 짹 거리면 어미 새는 어디선가 먹이를 날라와서 먹인다. 둥지 는 그다지 높지 않은 곳에 있어 사람의 손이 충분히 닿을 수 있다. 어미 새는 자신과 새끼들의 목숨을 모두 위험한 곳에 노 출 시켜놓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새끼들은 어미를 믿고 평화 롭게 자라고, 어미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새끼들을 보호한다. 나는 이 새들의 가족을 보고 어 머니 생각이 물 밀듯 밀려온다. 지금 저 새끼 새들처럼 우리도 위 험한 세상에 벌거숭이처럼 아무 렇게나 드러나 있었고, 내 어머니 는 어미 새처럼 목숨을 걸고 우 리를 지켜 주신 것이다. 새 둥지 를 바라보다가 망대처럼 서서 ‘어머니’ 하고 불러본다. 나의 위대한 어머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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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이루는 길 박영자

아카시아 꽃이 피는 계절이 오면 나는 어린 시절 놀던 생각이 떠 오른다. 그때는 먹을 것이 귀한 시절이어서 그랬는지 동네 아이들은 물론 나도 아카시아 꽃을 따서 입안 가득 넣고 오물 거리면서 꿀맛 같은 단맛에 허기도 채우고 시간을 때우기도 하 였다. 그리고 아카시아라는 말만 들어도 즉시 떠오르는 또 하 나의 추억이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꿈으로 남아서 오 늘날까지 내 곁을 따라다니고 있다.

내가 태어난 장소인 경기도 계양면 귤현리 가운데 마을에는 초 가집 6채가 있었는데 동네 아이들이 다 모여도 여자아이들은   53


4명밖에 없었다. 동네 아이들하고 모여서 소꿉놀이 할 때면 나는 미용사처럼 머리 만지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아카시 아 잎을 훑어 내고 남은 줄기를 반으로 접어서 그 사이로 머 리카락을 넣고 돌돌 말아서 끝을 구멍 사이에 끼워 꽉 조여 여 자아이들의 머리를 곱슬곱슬 예쁘게 파마를 해 주곤 하였다. 진짜 파마는 아니지만 곱슬 거리는 모양새가 마치 파마를 한 것처럼 보여 우리는 ‘파마’라고 불렀다. 아카시아 파마는 머 리카락이 젖은 상태에서 말아야 곱슬거렸다. 마른 머리에는 효과가 없었다. 내가 만든 파마머리였지만 나는 그것을 볼 때 마다 스스로 신기하게 여겼고 마치 미용사라도 된 것처럼 뿌 듯해 하며 아이들에게 뽐을 내곤 했다. 그때까지 나는 미장원이란 곳은 단 한 번도 가 본 일도 없고 누가 알려준 기억도 나질 않는다. 다만 언니가 쇳덩어리를 가 지고 화롯불에 달구어 젖은 수건에 열을 식혀가며 머리를 돌 돌 말아서 곱슬 거리게 했던 것을 본 기억이 난다, 그런데 마른 머리보다 젖은 머리를 말아야 한다는 것은 어떻 게 알았을까? 어쩌면 작은언니가 머리를 갖고 놀고 있는 나 를 보면서 뭔가 힌트로 한마디 던져주시지 않았을까? 머리 에 물을 적셔야지! 하고 말이다. 그 후 어른 이 되어서 결혼 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는 미용기술을 배워서 자격증 을 받았다. 그리고 내 아이들의 머리를 깎아주곤 하였다. 그 러나 자격증만 있으면 자신 있게 머리를 할 수 있는 것이 아 니었다. 아이들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짜증도 내고 울기도 했 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더 잘 깎을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아르헨티나에 이민을 가게 되었는데 그곳 에서 자리 를 잡고 안정된 생활을 한 후 난 불쑥 꼭 해보고 싶고 해야만 하는 일처럼 마음 깊은 곳에서 말하는 대로 발길 따라 미용   54


학원을 찾아갔다. 한국에서의 자격증도 있으니까 기초반이 아 닌 고급반에서 직접 손님을 받으면서 커트 연습을 하였다. 한 국에서는 비싼 가발로만 연습하였는데 거기서는 손님의 머리 로 직접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이었는지 모른다. 한 달 동안 수련을 마치고 수료증을 받았다. 그러나 기술직이 란 것이 이론과 실기가 제대로 숙달되지 않고서는 자신 있게 확실한 느낌으로 머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틈만 있으면 동네 아이들과 어른들의 머리를 해보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10년 후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두 아이는 한국으로 유학을 보내고 남편과 막내아들만 우리와 함게 왔다. 이민생활의 경험을 토대로 우리는 더욱 열심히 새 로운 터전을 마련하려고 애쓰며 살아가고 있을 무렵 갑자기 남 편이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여자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며 생각한 끝에 한국인 미용학원인 샤넬을 찾아갔다 그 내가 50대 초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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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망인이 되어 절망과 슬픔 속에서 용기를 내어 찾아갔는데 얼 마나 내 모습이 초라하고 10년은 늙어 보였던지 한마디로 거 절을 당하고 말았다. 젊은 아이들을 어떻게 따라가시려고 하 냐는 것이었다. 너무 늦은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희망의 끈 이 끊어진 듯 힘없이 걸어 나오면서 나는 속으로 내 나이 탓 을 하였다. 그러나 나는 내 오랜 꿈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몇 년 후 미용 일에 대한 갈망이 다시 내 안에서 꿈틀거렸다. 그래서 나는 늘 입버릇처럼 만나는 사람마다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 면 미용이라고 대답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성당 구 역원이었던 한 자매님을 만났는데 “그렇게 하고 싶던 것을 왜 포기하냐”라면서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시작해 보라며 용기를 주었다. 본인도 이제 등록을 해서 네일을 배울려고 하니까 당 장 등록을 하고 도전을 하라면서 힘을 팍팍 주었다. 난 용기를 얻고 다시 샤넬을 찾아갔다. 이번에는 묻지도 않고 흔쾌히 환 영하며 접수를 받아 주었다. 이제 와서 생각을 해보면 무엇이 든 때가 있고, 무엇이든 정말 간절히 원하면 그 뜻이 이루어지 는 것 같다. 50 대 초반이었던 그때, 내게 용기를 주던 자매님 과 함께 미용을 배우고 있던 젊은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드디 어 미국의 국가고시인 미용시험에 합격하여 토탈 미용 라이쎈 스을 받았다. 그때 내 기분은 정말 통쾌하고 성공한 기분으로 하늘을 나르 고 싶었다. 자신감과 기쁨이 가슴 가득하였다. 그러나 자격증 갖고 손님의 머리를 만질 수가 없었다. 특히 한국사람 머리는 금방 커트 자국이 나서 오랜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뒤 늦게 알았다. 그리고 당장 먹고 살기 위해서 미용 자격증은 잠시 밀 려 나 있어야 했다. 몇 년이 지난 후, 내 꿈은 다시 꿈틀거리며 올라왔다. 그래서 다시 미용 자격증을 꺼내놓고 곰곰이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하   56


면 연습을 충분히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러던 중 미국 양 로원에 환자들 머리를 자르러 다니게 되었다. 환자들은 휠체 어를 타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였다. 몇 달 후, 사 고가 났다. 이발기에 숙달되지 못한 터라 그만 환자의 살을 살 짝 건드려서 피가 난 것이다. 그 후 다시는 그곳에 갈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한국 미 장원을 몇 군데 다니면서 시다 노릇을 해주고 어깨 넘어로 배 워 보려 했으나 감이 오질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제 막 미 장원을 인수 맡아서 하고 있던 젊은 새댁이 본인도 쩔쩔매면서 하고 있다면서 나랑 함께 제대로 배워보자는 말을 건네왔다. 나는 정말 기뻤다. 도매상에 가서 얼른 가발과 받침대를 샀다. 나는 가게에서 일하는 것 만으로는 만족 할 수 없어서 오후에 일찍 가계 문을 닫고 전문 미용인을 모셔서 기초 단계부터 몇 가지 변형된 머리 스타일을 따로 배웠다. 이론을 듣고 난 후 실 기로 들어갔다. 가위의 놀림과 빚의 각도에 따라서 머리스타 일은 다른 작품이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갈수록 신비롭 고 흥미로웠다. 그 후 나도 모르게 어느새 전문 미용인이 된 듯 자신감이 생겨 났다. 아마도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궁금했던 것들이 조금 파 악이 된듯 싶다. 그 무렵 미장원을 하던 어떤 사람이 한국으로 돌아가는데 미용 재료 인수를 받는 조건으로 모든 기술전수를 해 주겠다는 제안이 들어왔다. 나는 퇴근 후 한 시간 동안 운전 을 해서 가게로 가, 며칠 동안 직접 기술을 배웠다. 레슨이 끝 나고 집에 오면 새벽 1시가 넘었다. 며칠 후에 나는 미용실 의 자부터 약이며 모든 재료를 몽땅 차에 가득 싣고 왔다. 나는 마치 미용에 미친 사람처럼 열정적으로 배우고, 연습하며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 후 이웃 분들 머리를 즐거운 마음으로 정성껏 해 드렸다. 내 노력의 결과인가? 어느 날 내게도 행운   57


이 찾아왔다. 집 가까이에 있는 펜아시안 노인복지원에서 미 용사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게 된 것이다. 나는 한치의 머뭇거 림도 없이 이력서를 냈다. 아카시아 향기 가득한 그 추억을 떠 올리면서 지금 나는 펜 아시안에서 어르신들의 헤어 컷을 해 드리고 있다. 그러면서 늘 유튜브를 통해 혹시 내가 부족한 게 없는가? 새로운 것은 없는가? 연구하고 노력한다. 이제서야 비 로소 가위를 만지는 내 손 끝에 살아서 움직이는 감각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이론과 실기가 얼마나 큰 차이가 있으며 피 나는 연습이 필요 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채 늘 자신감으로 꿈을 놓지 못하고, 좋 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미용 가게 앞에 서서 서성거렸던 자신을 되 돌아 본다. 이렇게 60 고개를 넘으면서 어렸을 적 꿈을 펜아시안 노인복 지원에서 이루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그때 나에게 용기를 주 었던 율리아나 자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하고 싶다.그리고 소꿉장난 하던 그때를 생각하자니 그때부터 내 꿈은 미용이었 구나싶어 미소를 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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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차 박영자 지금도 생각이 난다. 우리 집에는 가족처럼 지낸 차가 한 대 있 었다. 남편이 타든 이 차는 몇 년 동안 건강하더니 주인을 잃은 후에 쇠약해져서 천정이 내려앉고 가끔은 시동이 꺼지기도 하 였다.

가끔 시동이 걸리지 않아 애들 먹이고, 느린 걸음으로 우리 발 을 동동 구르게 하였지만, 말없이 목적지까지 데려다주었던 착 하고 부모 같은. 남편 같은 차였다. 그 정든 차를 떠나보낼 때 마 음이 너무나 아렸다.   59


그냥 주차할 곳만 있다면..,,,, 없애지 않고 두고 싶은 마음에 아들에게 몇 번이나 내 생각을 비춰보았지만 역시 어려운 일이었다. “인생은 이렇게 사람도 물건도 언젠가 하나씩 이별을 하는 것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 니 더욱 마음의 쓸쓸하였다. 비록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함께 했던 추억은 지금도 잊을 수 가 없다. 미국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공항에 마중 나온 사 람의 직업 따라서 직업이 결정된다’고 종종 말한다. 우리 역시 처음 공항에 도착했을 때, 마중 나온 사람의 영향을 받은 것이 그 차였다. 미국에서 처음 만난 그분이 크고 튼튼해 보이는 차 를 몰고 왔는데 그때 우리도 그런 차를 사야겠다는 마음을 먹 게 된 것이다. 98년도 12월 25일, 추운 겨울에 미국으로 와서 아르헨티나에 서 이웃에 살았던 친구 송희네 집에서 며칠을 지냈다. 고바우 근처에 있는 리누드 아파트에서 살던 그 가족은 4명이었다, 작 은 아파트에서 그 집 식구들만으로도 복잡한데 우리 식구 3명 과 10개 남짓 되는 우리 짐이 들어오니 발 디딜 틈도 없고, 누 워서 잠잘 곳도 마땅찮았다. 세탁소 일을 다녔던 그 친구는 일 을 마치고 집에 와서 우리식구 밥까지 책임을 졌으니 지금 생 각 해 보면 참으로 착하고 고마운 사람들이다. 친구 남편인 친구의 남편 최 집사는 이미 우리를 위해 방을 얻 어 놓고도 우리를 그 집으로 바로 들어가게 하지 않고 몇 일을 데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다녀야 하는 직장도 미리 다 알아 놓고 나를 그곳 까지 안내를 해주기도 하셨다. 오늘날까지 살아보니 그렇게 힘들고 불편한 환경 속에서 단 하 루라도 남을 배려하기란 쉬운 일이 아님을 알겠다. 그 마음 착 하신 천사 같은 친구 내외분은 평생 고마운 마음으로 내 가슴 에 남아있으며, 고마움을 잊지 않을 것이다.   60


얼마 뒤에 우리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이사하게 되었고, 우선 급한 차를 구하기 위해 막내아들이 앞장을 섰다. 아들은 물과 간식을 챙긴 배낭을 어깨에 메고 “다녀오겠습니다”. 하더니 아 침 일찍부터 온종일 버스를 타고, 여기저기 다니다가 해가 져 서야 집에 들어오곤 했다. 어느 날, 마음에 꼭 드는 차를 봐 놓 았다며 돈을 갖고 함께 보러 가자는 것이었다. 우리 부부는 막내아들을 따라 처음으로 버스를 타고 갔다. 가 서 보니, 친구네 차처럼 크고 튼튼해 보이는 파아란 색깔의 차 가 눈에 띄었다. 올즈모빌 6년 된 중고 자동차였다. 우리가 생 각했던 대로 듬직하게 생긴 차가 마음에 들어, 즉시 현찰로 완 불하고 열쇠를 받아 차를 몰고 집으로 왔다. 우리는 처음 장만 한 차인 만큼 마음이 무척 즐거웠다. 새 차를 장만한 기념으로 우리는 여행을 가기로 하였다. 막내 아들이 그 차를 몰고 남편과 세 식구가 오하이오주를 겁도 없 이 온종일 달려갔다. 겨울이라서 눈이 엄청나게 내렸는데, 눈 속에서 길을 잘못 들어서서 헤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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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아르헨티나에서 사시던 구역 분이 살고 계셨고 또 다른 아는 분도 살고 계셨다. 우리는 비록 중고차였지만 새로 우리 가족이 된 듬직한 차를 타고 지도 하나만 들고 그렇게 멀 고 눈 덮인 거리를 다녀 왔다. 지금 생각하면 꿈만 같다. 그리고 나중에 친정동네 언니 한 분이 볼티모어에 사시는 것을 알게 되어 두 아들을 동행하여 다녀 오기도 하였다. 일을 시작 하기 전에 여기저기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부부의 길잡이 였던 막내아들 덕분이었다. 남편은 미국 생활에 적응을 매우 힘 들어했지만 3년동안 그 차 를 몰고 세탁소 일을 배우면서 충실하게 살았다. 그러나 그 차 의 주인은 머지않아 막내아들이 되었다. 아들이 유 펜 의대를 다닐 때 학교 근처에 방을 얻어놓고 아들 과 내가 차 두 대로 짐을 가득 싣고 이삿짐을 날랐다. 아들에 대한 희망과 꿈은 나에게 용기가 되어주었다. 아들은 내가 어 려웠던 그 시절을 견뎌 낼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으며 근원이 었다. 그런 아들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을 올즈모빌 중고차가 함께 한 것이다. 나는 운전이 서툴러 혼자서 집으로 오는 길을 배우기 위해 아 들하고 필라 시내 다운타운까지 가서 브로드웨이를 만나는 곳 까지 여러 번 왔다 갔다 연습을 하였다. 그래도 막상 혼자서 운 전을 하고 돌아올 때는 일방통행로로 들어가서 되돌아 나온 적 이 여러 번 있다. 아들은 일주일 동안 헌 차를 학교 근처에 세워두었다가 집으 로 올 때 타고 오곤 하였는데 시동을 걸면 작동이 되지 않아서 잠시 기다렸다가 달래서 다시 시동을 켜고 오곤 했다. 언젠가 는 누군가가 자동차 번호판을 떼어간 적도 있었다. 그렇게 헌 차는 4년 동안을 우리와 함께 힘든 시기를 보냈다.   62


드디어 아들이 의대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 우리 는 다시 4년 전처럼 차 두 대로 짐을 가득 싣고 1번 도로를 타 고 학교와 반대 방향인 집으로 달려왔다. 4년 전과는 달리 이 번에는 마음이 그렇게 기쁘고 좋을 수가 없었다. 비록 헌 차는 천정이 내려앉아서 축 늘어졌지만, 우리를 도 와 아들의 짐들을 우리 집까지 무사히 잘 날라 주었다. 헌 차 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고맙고 편안했다. 나는 헌 차에서 내리자마자 아들에게 말했다. “아들아! 그동안 고마웠고 수 고했다!”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인턴에 들어가면서 아들 은 내게 말했다. “엄마! 우리 집 사서 이사해요!” 그러더니 집 을 보러 다니기 시작을 하였다. 감히 생각도 못 하였던 일들 을 아들은 앞장서서 처리해 나갔다. 집을 사려고 다니면서 조 건이 있었다. 학교까지 거리가 30분 이내여야 한다는 것이다. 드디어 우리는 모든 조건을 고려해서 우리 마음에 꼭 드는 집 을 구하게 되었다. 그때는 내가 집 근처에 있는 드랍샵 에서 일할 때여서 편리하게 살고 있었는데, 혹시 이사를 멀리하게 되면 운전할 일이 두려웠다. 다행히, 우리는 일터와 학교가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이사하 게 되었다. 이사를 얼마 앞두고, 새 차를 한 대 내 몫으로 샀 다. 드디어 이사하는 날이 왔다. 살림이라고 해야 좋은 것도 없었고, 낡고 오래된 것들은 거의 버리고 새로 장만하기로 아 들과 이미 결정을 하였기에 별로 짐도 없었다. 그래서 새 차도 헌 차도 한몫을 하면서 짐을 가득 싣고 날랐 다. 그때의 내 기분은 만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기쁘기도 하   63


고 아쉽기도 하며 또 한편으로는 보람도 느껴졌다. 이삿짐을 다 나른 후에 차를 주차해 놓고 보니, 차가 어느새 3대가 되었 다. 우리 집 앞 주차장에 맥이 빠진 듯이 서 있는 헌 차가 왜 그렇 게도 측은해 보이던지…그 차를 이제 어디론가 보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더욱 마음이 아려왔다. 지금껏 우리를 위해서 수고하고 애쓰며 함께 해 주었는데 이 제 늙고 병들어서 흉한 모습이 되었다고 버려야 한다니! 사람 도 늙고 병들어 저런 모습이 되면 어디론가 버려질 것인가? 마 음이 착잡하였다. 아들과 나는 헌 차에 대한 우리의 마음을 나누면서 폐차를 시 키는 것보다는 인터넷으로 알아보고 다른 주인을 찾아서 떠나 보내기로 하였고 몇 달 후 우리 집에서 헌 차는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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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살이의 흔적 박영자 우리 가족이 미국에 이민을 온 지도 어느새 17년이 되어가고 있 다. 대부분의 부모님이 자식을 위해 이민을 온 것처럼, 나 역시 도 자식들의 앞날을 위해서 모든 것을 각오하고 이민을 오게 되 었다. 미국 영주권을 취득하기 위해, 나는 나를 후원 해준 공장에서 일 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일을 시작하기 전에 공장답사를 하고 매 니저를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젊고 잘생긴 미국인 매니저의 이 름은 마이클이었다. 마이클은 나를 데리고 이곳저곳 공장 시스템을 보여주었다. 그곳 은, 헌 옷을 분리하는 일을 하는 곳이었는데, 주로 중남미 사람들 이 일하고 있었다. 바닥 아래에는, 커다란 통들이 줄지어 놓여 있 었고, 계단 위쪽에서는, 사람들이 제 자리에 서서 아래에 놓인 통 속으로 옷이나 다른 물건들을 집어 던지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일이 시작되고 어떤 과정으로 진행되는 일인가를 알 고 싶어 유심히 살펴보니, 맨 끝에서부터 체격이 좋아 보이는 몇 사람들이 단단하게 묶여 있는 커다란 덩치를 손으로 힘껏 풀고 있었다. 네모 반듯한 덩어리는 하나로 압축되어 풀어내기가 매 우 힘들어 보였다. 풀어놓은 물건들은 넓은 기계 위에 올려지고 면 자동으로 기계가 돌면서 흘러내려 가는데, 사람들은 각자 자 기 앞에 흘러가고 있는 물건을 보고, 자기 몫을 골라, 아래에 놓 여 있는 커다란 통속으로 집어 던지는 것이었다.   65


매니저는 어떤 아프리카 여자에게 나를 소개해주면서, 일하는 법을 가르쳐 주라고 일러주었다. 그때는 영어가 서툴러서 알 아들을 수 없었지만, 눈치를 보니 같은 종류의 옷이나 물건들 을 골라내는 일이었다. 미국 와서 처음으로 갖은 직장인만큼, 나는 최선을 다해 성실 성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고, 한국사람이 얼마나 일을 잘하는 지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 두 손으로 마치 춤이라도 추듯 이, 통 안으로 이리저리 옷을 집어 던져 날렸다. 1시간쯤 지났을까? “영자~”하고 매니저가 불렀다. 깜짝 놀라 서 내려갔더니, 어떤 한국 청년에게 나를 데리고 갔다. 매니저 는 그 청년에게 나를 소개해주면서 그가 하는 일을 내가 배울 수 있도록 가르쳐 주라고 했다. 그 일은, 위에서 골라낸 통 안 에 있는 옷을 재검사하는 일이었다. 그때, 나는 얼마나 순진했 는지 모른다. 내가 일을 잘해서 일을 배운지 단 1시간 만에 검 사자로 승진한 것으로 착각을 했다. 나는 인정받은 기분으로 쉬는 시간을 알리는 벨이 울릴 때까지, 이리저리 홀을 걸어 다 니면서 정말 열심히 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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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위에서 하는 일은, 제 자리에서만 하는 일이라서 다리가 아프고 지루한 일이었다. 보통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잠 시 쉬고 싶으면 눈치를 봐서 살짝 화장실을 가는데, 따로 화장 실 가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은 탓에 늘 감시하는 매니저 눈 치를 살피면서 다녀오곤 한다. 그러나 아래에서는, 걸어 다니 면서 일을 하다가 슬쩍 화장실을 갈 수가 있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그 공장에는 에어컨도 없이 천장에 커다란 선풍기가 몇 대 돌아가고 있었는데, 온통 그 안에 있는 먼지가 날리고, 그것을 마시면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었다, 어느 날 난 가슴이 답답하여 견디기 힘든 것을 느꼈다. 식은땀 을 흘리며 쓰러질듯하여 화장실에 있는 의자에 가서 기대어 앉 아있는데, 누군가 매니저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잠시 후 매니 저가 와서 놀란 듯이 병원에 가야 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나는 NO!’라고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때 나는 혹시 일자리를 잃 어버리지는 않을까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매니저에게 흠이 잡히는 것도 싫었다. 그러자 매니저는 친절하게도, 어느 빈 방으로 나를 데리고 들 어가더니, 의자에 앉아 쉬게 해주었다.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 로는 남들은 일하느라고 바쁜데 나 혼자 쉬고 있는 것 같아 너 무 미안하기도 하였다. 그곳에 앉아서, 나무 한 구루도 보이지 않는 창밖을 보니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곳에서 1년 동안 일을 더 해야한다는 사실이 마치 감옥에 갇힌 것 처럼 답 답하게 나를 눌렀다. 목 안에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오면서 뜨 눈물이 흘러내렸다. 얼마 후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아서 다시 일하기 위해 자리로 돌아갔다. 그 곳에서 일 하는 동안 또 하나 힘들었던 것이 있는데 새벽 일 찍 서둘러서 출근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일을 시작하는 시간   67


은 7시인데, 그 시간 안에 도착하여 출근카드를 찍기 위해서는 OLNEY역에서 첫 기차를 타야만 했다. 그렇게 이른 시간에는 버스가 없어서 남편이 새벽 5시 전에 일어나 나를 OLNEY역 까지 태워다 주어야 했다. 매일 새벽 나를 태워다주는 남편을 바라보면서 미안함과 고마움을 함께 느꼈다. 나는 공장까지 가는 길을 익히기 위해서, 이미 여러 번 아들을 데리고 연습을 했다. 첫 기차를 타고 시청 앞에서 내리면 정신 을 바짝 차려야 했다. 왜냐하면, 여기저기 노선도 많고 바닥에 는 여러 색깔의 라인이 그려져 있는데, 내가 타려는 전철 정거 장까지 같은 색깔의 라인을 잘 따라가야 길을 잃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전철을 갈아타고, 흑인 촌에 있는 공장 앞에서 내리면 되는 것이다. 하루 3번씩 차를 갈아타고 출퇴근을 하였다. 그 렇게 출근을 하기 위해 아침도 제대로 못 먹고, 새벽 7시부터 일을 시작하면, 배가 무척 고팠지만 기다리던 점심시간은 겨 우 30분이었다. 처음 며칠은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일하던 자리에 앉아 급히 점심을 먹곤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자세히 보니 내 일자리 주변은 헌 옷에서 나오는 먼지가 솜처럼 쌓여있었다. 먼지 때 문에 시선을 피할 수도 없고, 숨 쉴수도 없고 밥도 먹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점심시간에 뜨거운 태양열이 비치는 밖으로 나가서 시멘트 바닥에 앉아 도시락을 급히 먹고 들어오 곤 했다, 급하게 한 술 뜨면 어느새 일을 시작해야 하는 벨 소 리가 울리고 매니저 마이클은, 제자리에 사람들이 와서 일을 시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점검하면서 왔다 갔다하거나 이 층 위 작은 사무실에 서서 주위를 둘러 보고 있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기계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얼른 제 자리를 지키면서, 손놀림을 부지런히 하고 있어야 한다. 나도 통 안에   68


가득 쌓여있는 옷을 중간부터 힘껏 잡아 빼서 검사하고 난 후, 수북이 쌓인 그 옷들을 다시 들어 올려 통 안으로 넣으면서 매 니저의 눈치를 보곤 하였다. 얼마후 그 공장에서 젊은 한국 청 년 하나가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 청년은 실수가 많은 편이 었다. 나는 그 사람이 같은 한국사람인데 일 못한다는 소리를 듣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나는 아무도 몰래 그 사람이 골라놓은 통 안에 든 웃을 거의 전부를 끄집어내서, 다시 검사를 해 주곤 하 였다. 너무 무리한 탓이었는지, 어느 날 팔에서 따끔한 느낌이 들어 나도 모르게 “앗! 따가워!” 하였다. 손목이 아팠다. 그래 도 퇴근 시간까지 일을 해야만 하니까, 그제서야 슬슬 꾀를 부 리면서 요령껏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년이 좀 넘도록 그곳에서 일하다가, 그 일을 그만두 고 세탁소 계산대 보는 일을 배우게 되었다. 어느 날부터 , 그 때 따가웠던 부위에 좁쌀 만한 혹이 손끝에서 잡히더니, 어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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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 건드리며 아프고 또 그러다가 괜찮아지곤 하였다. 겉에 서 보면 아무 표시도 없고, 또 만지지 않으면 크게 아프지 않 으니 자연스럽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서 10년이 넘고 15년이 되면서, 그 자리 가 눈에 띄게 부풀어 올라와서 이제는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몹시 아팠다. 혹을 수술해야 할 시기가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손에 생긴 혹만큼의 기간을 어렵게 공부하면서 그 동안 의 대를 졸업하여 의사가 된 막내아들은 15년의 긴 세월을 내 팔 목 속에 앉아 내 이민생활을 고스란히 함께 한 ‘혹’을 미련없 이 없애 주었다. 이민의 역사와 의미가 담긴 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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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준 깜짝 선물 정주영 델라웨어 한국학교 김정미 교장선생님께서 펜아시안 노인복지원 실버스쿨에서 자서전 수업시간에 책을 만드는데 세현이 이야기를 써 보라고 권하셨다. 태어 나서 처음으로 해보는 일, 내 아이가 상을 받은 일에 대한 소감이라니! 마음이 설레고 긴장되었다. 한편 으로 자식 자랑으로 비칠 까봐서 조심스럽기도 하 지만, 이 행사를 통해 나와 아이에게 기쁨과 동시에 배움의 기회를 준 한국학 교에 감사하는 마음을 전 하고싶다. “상 받으면 전화 드릴게 요!” 서 선생님의 진지한 (?) 인 사말을 뒤로하고 개인사정 으로 먼저 행사장을 떠났다. 나는 차 안에서 아이에게 한국 학교에서 마련해주신 한글날 행사, 세종대왕 그리고 독도에 대해 설명 해주었다. 남편은 아직 대회에 참가해서 상을 받는   71


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는 아이에게 대회란 원래 참가 해서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원론적인 설명 도 잊지 않고 해주었다. “나 끝까지 그리고 색칠도 다 했는데 그럼 상 받아?” 무엇이든 하나에 꽂히면 집요해지는 아이의 성격을 잘 알기 에 상에만 너무 집착해서 혹시나 나중에 상처받을까 염려스 러워하면서도 전혀 기대하지 않은 일이였기 때문에 한글을 열심히 익혀 내년엔 꼭 독도에 대해 써보자며 아이의 관심을 돌려주었다. 얼마나 기대를 하지않았던지 선생님께서 전달해주신 이메일 을 보고도 남편에게 “우리 세현이 맞아?” 하며 다시 물어보았 고, 혹시 상을 해마다 학교별로 돌아가며 주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주변분들의 축하 이메일을 받으면서 진짜 상 받았구나! 실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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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되었다. 그 즈음 나는 Deleware Art Museum에서 그림수 업을 들었는데 수업 중에 마무리하지 못한 부분을 집에서 마 치곤 했었고, 세현이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내 옆에서 여러 가 지 재료로 그림을 따라 그리곤 했었다. 엄마처럼 안 된다며 불평하기 다반사였지만 파스텔의 부드러 움, 캔버스지의 독특한 질감과 오일 페인트의 뻑뻑함 등 재료 에서 오는 다른 느낌에 재미를 붙여 한동안 신 나게 그림을 그 렸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지난 번의 한글날 기념행사를 통해 엄마인 나는 아이에게 강요하지않고 자연스럽게 하는 교육이 어떤 것 인지 배울 수 있었고, 아이는 나름대로 그 날의 행사를 통해 한 국인이라는 정체성도 가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회를 통해 상까지 받아 자신감과 한국학교 가는 재미를 덤으로 얻게 되었 다. 한국학교 박영은 교장선생님께서 “상이란 것이 가끔 생각 지 못한 선물이 되곤 한답니다.”하고 축하 인사말을 전하셨는 데 나에게는 선물인 동시에 엄마인 나를 위한 훌륭한 육아 메 시지였음이 가슴에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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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자서전 수업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책으로 만들어질 것 은 기대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열심히 준비해 주신 수강생들 에게 감사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2015년 8월 25일 설인숙 (힐링자서전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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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로운 삶을 위한 공간

펜아시안 노인복지원

실버스쿨

펜 아시안이 제 행복입니다.

P E N N A S I A N S E N I O R S E RV I C E S

PASSi


Penn Asian Senior Services Silver School Healing Autob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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