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 팀장의 말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이 다가 옵니다. 오영 은 (전쟁없는세상 자원활동가, slow-steady@hanmail.net)
5월 15일은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입니다. 이 날 은 전 세계 병역거부자들이 네트워크를 통해 행 동하고 연대하는 날입니다.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 은 1981년부터 시작되었지만, 12월 1일 평화수감 자의 날 행사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는 작년에 처음으로 그 의미가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또, 5월 15일은 전쟁없는세상이 빛을 본 날이기도 합 니다. '후원인의 밤에 ' 와주셨던 수많은 분들과 함께 만들어낸 훈훈한 평화의 기운이 아직도 기 억나는군요.
▲ 작년 5월 15일,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을 맞아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항의시위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병역거부 운동의 역사가
의 밤은 ' 이런 맥락 속에서 함께 연대하고 행동
매우 짧고, 그런 만큼 모자란 것도 많고 새롭게
하는 과정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하
돌파해야 할 장벽도 많습니다. 새롭게 알아야 할
는 축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 계속해서 구속되
사실도 참 많습니다. 병역거부 운동에 있어 이미
고 있는 병역거부자들의 상황이 많은 이들에게
한 세기 이전부터 계속된 수많은 고통과 변화의
알려지고 이들을 후원할 수 있는 준비가 조금씩
기억들은 우리에게 좋은 참고자료가 되어주고 있
갖춰지기를 바랍니다.
습니다. 과거는 우리에게 병역거부권이 인정되는
이 번 소식지에는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의 의
과정 자체가 매우 지난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와 행사 참여 방법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 있
그러나 또 한 편으로 평화를 갈구했던 작지만 소
습니다. 또, 전면적인 전쟁없는세상 홈페이지 개
중한 행동이 가랑비에 옷이 젖듯 사람들 가슴 속
편 작업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후원인들
깊이 평화를 아로새기게 된 희망의 역사를 보기
이 재정 후원 외에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병역거
도 합니다.
부 운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목표를 두
이 번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 행사는 칠레에서
고 있습니다.
진행되며, 이 행사와 때를 맞추어 국내에서도 캠
따뜻한 봄입니다. 가끔 맑은 하늘을 보며 수감
페인, 강연회, 직접행동, 강철민 씨 농성 다큐멘터
되어 있는 병역거부자들에게 엽서 한 통 써 보는
리 시사회, 후원인의 밤 등 여러 가지 행사를 준
건 어떨까요? 당신의 삶에도 평화가 깃들기를 바
비하고 있습니다. 전쟁없는세상 두 번째 '후원인
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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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없는세상(World Without War)
번역글
병역거부자 임태훈 씨 옥중서신 임태 훈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
임태훈 씨는 2003년 7월 22일 입영을 거부했습니다. 임태훈 씨는 현재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이며, 현재 1심 재판이 진행 중인 상태입니다. 평화주의자로서, 또 성적 소수자로서 이중의 장벽에 맞서 싸 우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구속된 상태에서 한 달에 가까운 단식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임태훈 씨의 주장에 대해서는 홈페이지(www.withoutwar.org)에 올라온 편지글과 자료실에 있는 병역거부 이 유서를 참고하기 바랍니다.
구치소 입소한지 벌써 사흘이 지나버렸습니다. 모
경사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대뜸 화를 내면서 시키면
든 것이 낯설고 어색할 따름입니다. 왼쪽 가슴에는
시키는대로 하지라며 핀잔을 들었습니다. 결국 그냥
이름대신 수번이 오른쪽 가슴에는 방번호가 붙어있
버티고 있었고, 계속되는 명령에 앉아야 할 행형법
습니다. 그리고 몸에도 맞지 않는 수인복을 입고 있
조문을 제시하라는 말에 그 경찰은 입을 다물어 버
답니다. 바지 기장이 너무 짧아 팔보 바지가 되어
리더군요. 그 경사는 여기 끌려온 사람들은 모두 죄
버렸구요. 또 사타구니 사이 정중앙은 구멍이 '뽕'
인이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해도 된다는 사
뚫려있어 자연 통풍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옷이
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너무 얇고 박음질 상태가 좋지 못해 항상 춥게 지냅
구치감에 수감되어 검찰조사를 기다리는데 그곳
니다. 여기선 입소 할 당시 막 던져 준 옷을 알아서
은 마루바닥에 난방이 전혀되지 않는 곳입니다. 약
잘 골라 입어야 한답니다. 작거나 크다고 해서 교환
10명정도가 각기 다른 경찰서에서 검찰에 조사받기
해 달라고 하면 교도관에게 잔소리 듣기 십상입니
위해 구치감에 왔는데 아침 8시부터 오후 1시30분까
다.
지 6시간 동안 기다리는 게 지루해서 다들 이런저런
수요일 아침 일찍 강남경찰서 유치장에서 서울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주로 각자의 사건이야기와
검 구치감으로 이송하는데 사람을 굴비 엮듯해서 차
구속적부심 및 1심재판에서의 형량과 피해자와의 합
에 태운 다음 구치감 도착해서 본인 확인을 합니다.
의서 등등을 변호사도 아닌 제게 물어보기 시작했습
구치감에 배속된 경찰들의 계급은 경사(무궁화 잎4
니다. 저는 변호사가 아니라 인권활동가라고 했는데
개)들인데 본인확인 과정에서 존칭은 빼더라도 반말
도 불구하고, 그래도 자기들 보다는 재판과정도 잘
은 하지 말아야 하는데 반말하지 않는 것이 그렇게
알 것이고 법률도 잘 알 것이라며 잡다한 문제들을
어렵나 봅니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있는 경사가 본
집중 질문하는 겁니다. 제가 아는 범위에서 답변을
인확인 과정에 피의자들의 얼굴을 쳐다보기 힘들어
드리고 나머지는 가족들을 통해 대한법률구조단을
서 그런지 아니면 자신보다 더 아래에 위치해야 한
직접 방문하여 문의하거나, 구치소에 방문하는 공익
다는 관념을 가져서 인지 모르겠지만 수갑과 포승줄
법무관에게 면담요청하면 자세한 답변을 들을 수 있
에 묶여 있는 피의자들에게 바닥에 쪼그려 앉으라고
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화기애애
명령하는 겁니다. 저는 왜 앉아야 하는지 몰라 그
한 분위기가 싫었는지 밖에 있던 결찰들이 죄인이
☮ 소식지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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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부자 활동수기 반성은 하지 않고 떠든다며 우리 방문을 밖에서 닫
문자로 이어졌습니다. 더욱더 폭언을 퍼부었습니다.
어 잠궈버리는 겁니다. 어이가 없었지만 가만히 보
화가 너무 많이 났고, 우리들의 인격권은 안중에도
고만 있었습니다.
없어 보였습니다. 항의해도 소용없었고, 국가인권위
곧이어 오후 1시40분이 되자 조사받기 위해 문을
에 진정요청 또한 묵살 당하였습니다. 참으려고 했
열어 주었습니다. 약 30명의 남녀가 밖으로 나와서
지만 이곳을 거쳐갈 피의자들이 그 김00 경사에게
수갑을 차고 포승줄로 팔목, 양팔꿈치와 몸통을 꽁
당할 것을 생각하면 국가인권위에 진정을 통해 더
꽁 묶었고, 또 2열종대로 서게 한 다음 긴줄로 엮어
이상의 인격권 침해가 자행되는 것을 근절시켜야 겠
매어 마치 삼국지 적벽대전에서 봉추가 조조에게 알
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려준 연환지계처럼 만들어 버렸습니다. 졸지에 줄줄
그런데 유치장부터 인권위에 면전진정을 요청했
이 비엔나 소시지가 되어 746호 조사 대기실에서 80
지만 지금 이시간까지 아무런 소식도 방문도 없군
년대 초등학교 교실 또는 인사동 '학교종이 땡땡땡'
요. 검찰조사부터 입소하면서 구치소에서 벌어진 사
에서나 볼 수 있는 나무의자가 교회당 의자처럼 놓
건들을 다음 서신에서 알려드리겠습니다.
여 있었습니다. 자리를 잡고 앉은 우리들에게 경찰 관은 앞만보고 뒤돌아 보지 말 것과 대화하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우린 쥐죽은 듯 조용하게 있었고, 침묵이 연이어 계속되었지만 얼마가지 않아 이 침묵 은 깨지고 말았습니다. 여기저기서 포승줄이 팔목을
2004. 3. 6. 토요일 경기도 군포우체국 사서함 20호 서울구치소에서 수번 3318 임태훈 ☮
너무 조여 피가 통하지 않는다며 항의하기 시작했고 이을 본 경관의 태도는 가관도 아니었습니다. 엄살 피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느슨하게 풀어달라는
전쟁없는세상을 후원해주세요!!
요구와 안된다며 비아냥거리는 실랑이가 계속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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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관악구 봉천 10동 893-5번지 2층 전쟁없는세상 (우 : 151-060) TEL : 02) 876-6897 E-mail : peace@withoutwar.org
엄살인지 아닌지 알 것 아니냐는 소리에 소란이 멈 춰지고, 이윽고 경관들이 한사람 한사람 팔목을 느 슨하게 해 주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5명이 남았고, 오후 5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팔목이 많이 아프고 따분한 찰라에 옆 과 뒤에 계시는 60대, 50대 남성분이 대화를 걸어 왔습니다. 아주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 받았 는데도 성질 못된 김00 경사가 반말로 시끄러워! 떠 들지마! 똑바로 앉어! 반말을 하기 시작했고, 어간이 멍해져 있는 나는 정신을 차려 왜 반말 하느냐 항의 했지만 김00 경사의 그 다음 말은 반말도 아닌 육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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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없는세상(World Without War)
번역글
병역거부자 염창근 씨 출소 인사 염창 근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대학원생)
염창근 씨는 2003년 11월 13일 입영일이었으나, 반전평화의 신념에 따라 병역을 거부했습니다. 현재 1심 재판이 진행 중이며, 얼마 전 보석으로 출소했습니다. 이 글은 지난 3월 4일 보석으로 출소하면 서 홈페이지에 올린 글입니다.
아보이는 그 판사님이 피고인의 이야기를 단지 형식 적으로가 아니라 성실히 들어주시는구나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날 서울북부지방법원 형사 9단독 재판에는 저 말고도 두 명의 여호와의 증인 젊은이도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 판사님은 '그냥 살겠다'는 두 여호와 의 증인 젊은이에게도 판사 직권으로 내보내겠다고 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현행 병역법이 헌법재판소에 계류 중인 것 아시 출소 인사가 많이 늦었습니다. 제 소식 기다렸을
지요?' 여호와의 증인임을 확인하고 나더니 이렇게
분들에게 많이 죄송합니다. 그럼에도 반갑게 맞이해
물었답니다. 젊은이는 '예'하고 답하자, '보석으로
주신 분들께, 늦었지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저
내보내겠습니다. 재판을 헌재 판결 이후로 미루도록
나왔어요!' 외치면서 팔 활짝 펴고 인사드리고도 싶
할께요. 어떻습니까?' 여호와의 증인 젊은이는 '잘
지만, 저 때문에 염려해주시고 고생해주신 것이 밀
모르겠습니다. 그냥 살면 안될까요?' 하고 물었답니
려와 쑥스러움부터 생깁니다. 보내주신 고마운 마음
다. 그러자, 판사님은 방청석에 어머니를 불러 의견
들을 기억하며 그리고 또 한 걸음에 같이 할 것을
을 물었고, 어머니는 본인 판단에 맡기겠다고 말했
다짐하며 출소 이야기를 드립니다.
답니다. 그러자 판사님은, '판사 직권으로 오늘 보석 으로 내보내겠습니다. 2주 후에 재판을 다시 잡을테
출소하는 날 3월 3일 재판 때 말로만 듣던 혁신적인 판사를 만난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판사가 헌법 재판 소 판결 이후에 재판하겠다며 다음 재판은 추후지정 하겠다고 말하는 순간, 저의 작은 마음 속으로 설레 임이 쑤욱 들어왔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 좋
니, 그때까지 잘 생각해 보세요. 헌재 판결까지 기다 려볼 것인지 어떤지에 그때 이야기하죠.' 현행 병역법이 위헌의 소지가 있음을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판결나지 않은 사안을 가지고 피고인 을 구속시킬 수 없다고 그 판사님은 생각하였습니 다. 구속되고 나서 처음으로 병역기피자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기쁨을 누려 보았습니다. 그동안 병역기피
☮ 소식지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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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부자 활동수기 자로 바라보는 시선을 앞에 두고 순식간에 오고가는
뭐라 해야될 지 모르겠지만 마치 영화 속에 있는 느
대화 속에 저의 생각을 어떻게 담을까 전전긍긍했거
낌마저 들었습니다. 안내하는 경비교도대원은 내일
든요. 진땀을 흘리고 마음을 졸이며 몇 마디 대화
이 눈을 어찌 치울지부터 걱정합니다.
속에 병역거부의 이유를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
수의를 벗고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소지품 점검을
니었습니다. 게다가 말주변 없는 제가 감당하기엔
간단히 받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 영치금도 받았습니
너무 역부족이었죠.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 젊은이들
다. 다시 발목까지 덮히는 눈밭을 거닐어 나왔고 교
은 그 오랜 세월 동안 묵묵히 자신의 양심을 실천해
무과에서 마지막 신원확인과 형식적인 설문지 작성
왔기에 쉽게 이해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의
도 하였습니다. 이제 막 9시 뉴스가 교무과 TV에서
신념을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최소한 그 젊은이들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들어와서 처음보는 생방송
이 결코 남을 해칠 사람은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히
뉴스에는 폭설 소식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눈을 덮고 잠을 자는 듯한 컴컴한 구치소를 그렇
감옥에 들어가면서부터 커져갔던 혼자의 싸움 같
게 빠져나왔습니다. 펑펑 쏟아지는 눈 속을 걸으며
은 기분이 안개 걷히듯 서서히 사라졌습니다. 결코
나오는 게 너무 어색해 어찌해야 할지 잘 몰랐습니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며, 이 수감의 공간에서도 수
다. 눈을 선물해준 그 사람(?)도 고마웠습니다. 동생
많은 사람들이 같이 싸우고 있었고 또 우리와 같은
들과 동료들이 저기 철문 밖에서 저를 기다리는 것
사람들과도 손을 잡아주는 판사가 있었습니다. 이
이 보였습니다.
사실들이 조금씩 가라앉던 저의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감옥을 갔다왔다는 것도 바 깥에 나와 있다는 것도 잘 실감나지 않습니다. 이곳
그렇게 보석결정이 났습니다. 우리방, 11하4방 사
을 '바깥'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아직 마음은 '그
람들은 모두 진심으로 기뻐해 주었습니다. 갑갑한
안'에서 완전히 못 떠나온 듯 합니다. 오랫동안 있
자신들의 마음을 감추고 밖에 나가서 만나자며 그동
었던 것 같기도 하고 감옥에 있었던 것이 꿈같기도
안 고생했다며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5시쯤부
하지만, 감옥의 경험을 소중한 밑거름으로 만들어가
터 조금씩 내린 눈이 성동구치소 사동 전체를 덮는
고자 합니다.
것을 조그마한 창문으로 보며, '출소를 축하하는 눈 이 내리네' 라는 말도 빼먹지 않고 해 주었습니다.
그동안 부족한 저의 마음을 이해해주시고 격려해 주신 많은 분들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보내주
'낭랑 18세' 한 달 전 방영분이 8시 30분에 마치
시고 보태어주신 그 마음들을 어찌 다 갚을 수 없겠
고 취침을 위해 담요를 깔려고 하는 찰라에, 구치소
지만, 저의 길을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가는 것으로
에 들어올 때 봤던 경비교도대원이 와서 '염창근씨,
대신하겠다고 염치없게 말씀을 드립니다.
출소' 하며 불렀습니다. 챙겨놓은 짐을 부랴부랴 들 고 11동 하층 4방 사람들이랑 급한 인사를 나누었습 니다. 철커덩, 철문이 열렸습니다. 컴컴한 통로를 빠져나오면서도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어요. 통로 창가로는 눈이 퍼내리는 장관이 계 속 연출되고 있었습니다. 운치가 있다고 해야될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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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없는세상(World Without War)
오랫동안 좌절하고 시련을 겪을 지라도 멀고 험 한 길, 손 잡고 가는 것도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주점에서 만나뵈면서 다시 인사를 드리겠습 니다. 감사합니다. ☮
번역글
병역거부자 임성환씨 목요집회 편지 임성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출판업)
임성환 씨는 2003년 7월 1일 병역거부를 선언했습니다. 현재 출판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불구속으로 수사가 진행 중입니다.
었을 것입니다. 텔레비전에서 전쟁을 생중계 할 때 또 영화에서 동정을 빙자 해서 타인의 고통을 팔아 먹을 때도 여전히 사람들은 고통 속에 죽어 갑니다. 만약 정말 삶의 길과 죽음의 길이 있다면 아주 불행한 일이지만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우리 대다수 사람들의 삶은 죽음으로 가는 길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가지려 드는 사이 한 켠에선 더 많은 사람이 굶어 죽어 갑니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수만명을 학살하는 전쟁을 우리의 이익을 위해 그럴수도 있다고 용인하는 사이에도 그렇습니 다. 우리는 모르는 척 하고 있을 뿐 사실상 이에 동 참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을 위해 불행한 인간의 생명을 위해 어떤 분들
결국 우리에겐 두가지 길 밖에 없는 것 아닐까.
은 환경운동을 하고 또 어떤 분들은 난민과 아사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양갈래 길에서 선택을 강요 받
들을 돕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분들은 전쟁에 반대
고 있는게 아닐까.
합니다. 이 모든 행동을 같이 하는 분도 있겠죠. 그
그 길이란 바로 삶의 길과 죽음의 길 입니다.
리고 그중 우리들은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수천명의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
사실은 이 일들은 모두 같은 맥락의 일들입니다. 이
이 죽어 갔습니다. 상당수는 굶주려 죽었고 또 상당
모든 것들이 연계되어 있으니까요. 아마도 여기 동
수는 전쟁에 의해 죽어 갔습니다. 그 죽음은 우리가
참하고 있는 분들은 모두 전쟁에 반대할 뿐 아니라
눈 앞에서 볼 수 없을 뿐 또 그 고통을 직접 느낄
동시에 우리의 삶과 미래를 생각하는 환경주의자이
수 없을 뿐 그 어떤 영화보다 그 어떤 뉴스보다도
고 또 이웃의 아픔과 굶주림에 마음 아파하는 분들
큰 아픔입니다.
일 것입니다.
아마도 오늘 어디선가는 여전히 그 사람들은 고
이 사실을 꼭 알았으면 합니다. 사는 지역이 다르
통속에 죽었을 겁니다. 그중엔 아직 말을 시작하지
다는 이유로, 피부색이, 혹은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
못한 아이도 있을 것이고 또 그 아이들의 부모도 있
다는 이유로 오늘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죽어 갑니다. 국가가 다르다는게, 종교가 다르다는
☮ 소식지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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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부자 활동수기 게, 인종이 다르다는게 과연 죽음의 이유가 될까요.
지금도 수없이 많은 지구위의 이웃들을 죽음으로
그러나 현실속에서 이 어처구니 없는 말이 끊임없이
내모는 전쟁과 그 전쟁의 당사자인 군대를 거부 했
이어지는 현실입니다.
다는 이유로 수 백명의 사람들이 감옥에 갇혀 있습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이러한 고통속에서 삶의
니다. 지금도 지구 한 곳에선 국가라는 이름으로 석
길을 선택하려 한 사람들입니다. 사실은 다른사람들
유를 빼앗기 위해 또는 자신의 세력권을 넓히기 위
의 고통을, 또 죽음을 더 민감하게 나의 일처럼 느
해 분쟁을 일어나고 있습니다.
끼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고통을 외면하는 것 이 싫었던 사람들이고 그로인해 전쟁의 동참을 강요 하는 사회에서 특별해 질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입 니다. 그로 인해 국가가 또 그 국가에 속해 있는 개 인들에게 돌을 맞을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이 고통의 고리를 어떻게 끊어야 할 까요. 전 모 든 개인들이 삶의 길을 위해 자신이 뜻을 관철 시키 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 생각합니다. ☮
병역거부 양심수에게 편지를!! 2004. 2. 15 현재
5 2 1명 (명단을 보실 분은 peace.jinbo.net 으로!!)
☮최준호 (우 : 350-800) 충남 홍성 홍성우체국 사서함 9호 홍성교도소 수감번호 840 전자서신 보내기 : 홍성 교도소 홈페이지 http://hscorr.go.kr
☮강철민 (우 : 467-909)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이황3 리 사서함 900-10 강철민 지원단 홈페이지 : peace.gg.gg
☮임태훈 (우 : 435-050) 경기도 군포우체국 사서함20 서울구치소 수감번호 3318번 전자서신 보내기 : 서울 구치소 홈페이지 http://www.moj.go.kr/corrections/seoul/ind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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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없는세상(World Without War)
번역글
기획글 1 - 병역거부자 구속수사 부당하다 정 리 :오영 은 (전쟁없는세상 자원활동가, slow-steady@hanmail.net)
아마도 법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따라 불구속수사가 원칙적이며, 예외적으로 구속수
면 영장실질심사, 무죄추정의 원칙, 구속적부심제 등
사가 인정되는 것이고, 구속수사의 경우에도 구속기
등 법률용어들이 매우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또한
간은 가능한 한 최소한에 그쳐야 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 누군가가 구속되었다고 하면 그 사람을 죄를
그러나 한국의 형사 절차는 이와 정반대로 운용
지은 사람, 범죄자라 인식하기 쉽다. 한국 사회에서
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지난 20여 년간 교정시설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속=처벌=범죄자'라고 생각한
1일 평균 수용 인원 중 약 42%가 미결수용자였다.
다. 그렇게 구속받은 사람들은 나중에 무죄판결을
각종 구금시설의 수용자 10명중 4명이 아직 유죄 판
받더라도 구속의 경험으로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갖
결을 받지 않은 사람들인 것이다. 지난 97년부터 영
게 되는 경우가 많다. 범죄자라는 편견을 가지게 되
장실질심사제도가 시행되었지만 이 제도는 피의자
기 때문이다.
신청이 있어야만 심사가 가능하여 모든 피의자들에
하지만 구속되는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은 사람 즉, 유죄는 아니다. 형사 소송 절차의 진행 과정에서
게 영장실질 심사를 받을 기회가 돌아가지 못한다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구속'은 아직 유죄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도주
물론 구속제도 자체가 부당하거나 위법이라는 것
의 우려가 있거나 증거 인멸의 가능성이 있는 자에
은 아니다. 구속의 기준인 도주 및 증거인멸의 우려
한해서 사용할 수 있는 제도이다. 국가형벌권을 실
에 대한 입증이 엄격하게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
현하기 위한 제도라고 하지만 구속제도는 개개인에
다. 병역거부자들 또한 많은 사람들이 구속수사를
대하여 '신체의 자유'를 가장 심각하게 침해하는 강
받아오고 있다. 이들이 영장실질심사를 받음에도 불
제 처분으로 볼 수 있다. 사실상 한국 사회에서는
구하고 구속수사 결정이 난다는 것은 한국의 법조계
수사나 재판상의 편의를 위하거나 신속하고 용이하
가 주장하는 구속제도의 기준을 도저히 이해할 수
게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사용되어 온 부분이 있기
없게 만든다.
도 하다.
병역거부자들은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군복무를
한국의 헌법 및 형사소송법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행동이 현행법
기본 이념으로 천명하고 있다[헌법 제 27조 4항, 형
에서 위법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고, 그럼에
사송법 275조의 2]. 헌법재판소도 불구속수사와 불
도 불구하고 부당한 법이나 제도에 불복종함으로써
구속재판의 원칙이 형사절차의 전 과정을 지배하는
저항한다.
기본원칙이라 선언한 적이 있다. 무죄추정의 원칙이
이들은 법의 부당성에 대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란 누구든지 법원의 유죄 판결이 확정되기 전에는
알려내고자 하고 여론을 만들어 법과 제도가 바뀌길
범인으로 단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죄추정의 원
바란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내고 여론을 만들어
칙은 신체의 자유보장을 위한 규정이다. 이 원칙에
가는 과정은 공개적이고 대중적일 수밖에 없다. 그
☮ 소식지 3월호
8
기획글 리고 그 과정에 앞장서며 오히려 자신이 어떤 사람
는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 ☮
이고, 어떤 신념과 양심을 가지고 있는지 많은 사람 들에게 알려내려 노력하는 이들이다. 이들에게 과연 도주나 증거인멸의 가능성이 있는 것일까? 또한 피고인들은 무죄추정의 원칙과 더불어 피고 인 방어권의 주체이기도 하다. 피고인이 검사와 대 등한 위치에서 자신의 무죄와 관련한 자료를 법정에 제출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신체상태가 중요한 요 소가 된다. 이를 병역거부자들의 상황에 대입시켜 생각해 본 다면 병역거부자들이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타당성 과 법제도의 부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들은 사 실상 사회적 여론 환기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동 안 한국 사회에서의 <군대>라는 곳이 가져왔던 의 미와 병역문제에 대한 고민이 부재했음을 생각하면
병역거부자들 재판 소식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하는 문제는 사회적
오태양씨 재판
으로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문제 제기되어야 하고
-2002년 6월 이후 중단되었던
많은 토론과 설득의 과정을 가져야 한다.
이 3월 17일에 속행되었습니다. 이 날 재판에서
하지만 병역거부자들이 도주와 증거인멸의 가능
오태양씨 변호인 측에서 증인 신청을 하였고, 이 를 받아들여 4월에 재판이 다시 열립니다. 장소
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구속수사를 받아야만 하는
는 동부지원(지하철 2호선 구의역)이고, 날짜는
현실은 병역거부자 자신의 방어권을 행사하기 위한
확실히 정해지는대로 <전쟁없는 세상>홈페이지
기회 자체를 박탈하는 것이다. 자신의 무죄를 주장
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할 수 있는 증거 마련의 과정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대해 또 다른 방법으로 억압하고 있다고 보여 질 수 있다.
-3월 23일에
강철민 씨 선고공판이 진행되
었습니다. 1년 6월 형이 선고되었습니다. 그 동 안의 강철민 씨에 대한 기록은 peace.gg.gg에
또한 구속이 처벌의 일종이라 생각해 구속사유가
가시면 자세히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영장을 발부한다는 판사들 의 말을 뒷받침해 보았을 때, 병역거부자들을 여전
-3월 25일에
임태훈 씨 첫 재판이 진행되었
히 병역기피자라는 죄인으로 생각하고 불충분한 근
습니다. 한 달 가량의 단식진행으로 몸이 많이
거에도 불구하고 구속수사를 강행하고 있는 거라 생
안 좋아지실까 염려되었지만 다행히 이제 단식
각된다.
을 중단하고 회복단계에 있습니다. 4월 13일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구속수사는 부당하다. 도주 와 증거인멸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그들의 구속수사
9
☮ 전쟁없는세상(World Without War)
오후 4시에 1심 선고공판이 있습니다. 장소는 남부지원(지하철 2호선 교대역)입니다.
번역글 기획글 2)
세계병역거부자의 날(International Conscientious Objector's Day) 세계병역거부자의 날은 세계병역거부자회의(Interna-
그리스, 1987년 유고슬라비아, 1988년 폴란드, 1989
tional Conscientious Objectors' Meeting, ICOM)와
년 남아프리카, 1990년 스페인, 1992년 터키, 1993년
연관되어 있다. 1981년에서 1997년 사이 세계병역거
구유고슬라비아, 1995년 콜롬비아에 초점이 맞춰졌
부자회의는 매년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War Resis-
다. 또한 주제별 포커스도 있었다. 1991년에는 여성
ters' International, WRI)의 지부조직들에 의해 네덜
징병문제를, 1993년에는 징집을 거부하거나 탈영한
란드, 스페인, 프랑스, 슬로베니아, 오스트리아, 헝가
남성과 여성을 위한 보호시설에 관한 논의를 진행
리, 터키, 콜롬비아, 차드 등지에서 개최되었다.
하였다.
첫 해는 전 세계 병역거부자들 사이의 네트워크와
(Council Meeting)는 앙골라의 병역거부자들과 탈영
활동경험을 나누는 것에 초점을 맞춰 행사가 진행
병들의 상황에 초점을 맞출 것을 결의하였다. 2002
되었으며 나중에 이것에 특별한 목표가 추가되었다.
년의 초점은 발칸반도였다.
2001년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평의회
특별히 병역거부자들의 현황이 별로 좋지 않은 국 가들(몇몇 나라들은 아직도 그러한 상황이 계속되
세계병역거부자회의가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했을
고 있다)에서는 이러한 국제적인 활동이 그 국가
지라도 매년 5월 15일은 전 세계에서 병역거부자들
병역거부자들의 활동을 도모하는 데 큰 역할을 하
을 위해 단일한 액션을 취하는 날로 정착되었다. 전
고 있다. 병역거부 방법의 발전뿐만 아니라 해당 국
세계의의 병역거부 운동그룹들은 5월 15일을 병역
가의 이러한 활동을 하는 그룹들의 증가라는 매우
거부운동에서 주목하고 있다. 이 날에는 전 세계에
실질적인 차원에서도 역할을 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서 동시에 공개토론회, 철야농성, 시위, 각종 행동
최근 이러한 회의는 개최되지 않고 있다.
들, 세미나, 캠페인 등과 같은 행동이 벌어진다. 최 근에는 각 국가나 지역의 병역거부 운동그룹들이
세계병역거부자회의는 20개 이상의 나라 100여명
세계병역거부자의 날을 그 나라의 구체적 이슈에
이상의 활동가들이 참여했던 회의이며 세계병역거
보다 초점을 맞추고 있고 공동의 행동이 일정한 한
부자의 날의 배경이 된다. 1985년 5월 15일 세계병
계를 갖고 있지만 이 날의 의미는 아직까지 병역거
역거부자회의는 최초로 병역거부 행동에 초점을 맞
부가 단지 한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적인 이
추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그것은 각각의 개별 국가
슈이며 따라서 이러한 국제연대는 병역거부 운동에
의 병역거부자들의 어려운 상황을 인지하고 국제적
특별한 힘을 제공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차원에서 주제별 연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986년
세계병역거부자의 날 역사 『부러진 총(Broken Rifle)』, 2002년 5월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5 Caledonian Road, London N1 9DY, Britain Tel.: +44 20 7278 4040; fax 7278 0444; email office@wri-irg.org; website: wri-irg.org
☮ 소식지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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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글 기획글3)
세계병역거부자의 날(International Conscientious Objectors' Day) : 2004년 5월 15일
칠레와 라틴아메리카 국제세미나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적 군사화 : 신세계질서(New World Order)에 대한 저항의 경험" 그리고 국제비폭력행동트레이닝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War Resisters' International, WRI) Peace House, 5 Caledonian Road London N1 9DX Britain tel +44-20-7278 4040 fax +44-20-7278 0444 email info@wri-irg.org http://wri-irg.org
Ni Casco Ni Uniforme (No Helmet No Uniform) Roberto Espinoza 1839, Santiago Chile tel +56 2 556 6066 email info@objecion.cl http://www.objecion.cl/
2004년 5월 15일 세계병역거부자의 날
비폭력직접행동을 조직하였다. 2003년에는 이스라엘
: 칠레와 라틴아메리카
[4]의 평화운동 단체 뉴프로파일(New Profile)과 함 께 텔아비브에서 국제트레이닝을 조직하였다.
1980년대부터 5월 15일은 세계병역거부자의 날로 기념하였다[1]. 원래는 세계병역거부자회의(Interna-
올해는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과 전쟁저항자인터내
tional Conscientious Objectors' Meeting, ICOM)에
셔널의 칠레 지부인 Ni Casco Ni Uniforme가 공동
서 조직했던 것인데 세계병역거부자회의가 1995년
으로 칠레에서 세계병역거부자의 날을 조직하게 되
차드(Chad)에서의 마지막 회의를 가진 이후 전쟁저
었다. 칠레는 2003년 콜롬비아에서의 연례세미나 이
항자인터내셔널이 이를 이어서 조직하고 활성화하
후 결정되었는데 라틴아메리카 병역거부자들의 현
기 시작했다. 살상을 거부할 권리(Right to Refuse
황과 라틴아메리카 국가의 사회적 군사화에 보다
to Kill)[2]라는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프로그램의
많은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일환으로,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은 5월 15일 전 세 계의 다양한 행동과 함께 어떤 병역거부 투쟁을 지
세미나, 트레이닝과 함께 라틴아메리카 병역거부 코
원하는 국제비폭력직접행동의 전통을 세우는 것을
디네이션(Coordinadora
LatinoAmericana
목표로 하였다.
Objecion de Conciencia
CLAOC) 회의가 개최될
2002년에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은 발칸의 병역거부
예정이다.
운동[3]을 지원하기 위해 브뤼셀의 나토본부 앞에서
11
☮ 전쟁없는세상(World Without War)
de
번역글 목표
비폭력직접행동을 조직한다. ☮ 병역거부자를 지원하고 군사주의에 맞서 활동하
☮ 병역거부자 조직 간의 네트워크를 강화하며 Ni
는 칠레와 다른 라틴아메리카 조직 간의 연계를 촉
Casco Ni Uniforme, CLAOC 그룹들과 같은 조직
진한다.
에 대한 국제적 지원을 강화한다. ☮ 칠레와 라틴아메리카 병역거부자의 처우에 대한
이 캠페인을 위한 국제적 조직화는 런던의 전쟁저
국제적 관심을 높인다.
항자인터내셔널 사무국에서 하고 있다. 전쟁저항자
☮ 병역거부 문제를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적 군사화
인터내셔널 사무국은 캠페인 자료들을 만들고 세계
와 사회적 군사화에 대한 비폭력저항과 연계시킨다.
적인 활동을 증진시킬 예정이다. Ni Casco Ni
☮ 라틴아메리카와 해외의 그룹들 사이에 비폭력직
Uniforme은 칠레에서의 활동계획을 담당하고 있고
접행동의 경험, 특히 병역거부 문제에 관한 경험을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그룹들과 연락을 취하는 일을
교환한다. 이것에는 트레이닝 경험과 기술을 나누는
하고 있다.
것도 포함된다. ☮ 트레이닝과 행동을 함께하는 것을 통해 병역거
활동
부자들의 국제네트워크를 강화한다. 칠레에서의 활동은 다음의 세 가지 부분으로 진행
캠페인
된다. ☮ 2004년 5월 8~9일 : CLAOC 회의
2004년 5월 15일을 전후한 행동들은 하나가 아니다.
☮ 10~11일 : 국제세미나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적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과 다른 그룹들을 통해 현재
군사화 : 신세계질서에 대한 저항의 경험” / 칠레,
진행 중인 칠레와 라틴아메리카의 병역거부자들을
산티아고, Bolivariana 대학
지원할 수 있다. 2004년 5월 15일 최고점에 달하는
☮ 산티아고 근처에서 40여명의 참석자들과 함께
국제캠페인을 조직할 수 있다.
국제비폭력행동트레이닝
이번 캠페인에서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은
이 주간은 산티아고에서 15일 참가자들이 계획한
☮ 칠레와 라틴아메리카의 병역거부자들의 현황에
국제비폭력행동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대한 기초정보를 제공할 것이다. 이 정보는 전 세계 어디에서라도 사용할 수 있다.
Notes
☮ 『부러진 총{Broken Rifle)』특별호를 발간(영어,
1
스페인어, 불어, 독어로 발간)하여 캠페인 자료로
Objectors’ Day, Broken Rifle No 55, May 2002,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홈페
page 8 (http://wri-irg.org/pubs/br55-en.htm#art5)
이지에서도 볼 수 있다).
2 http://wri-irg.org/co/rrk-en.htm
☮ 2004년 5월 15일, 칠레와 라틴아메리카 병역거부
3 http://wri-irg.org/news/2002/press15may02.htm
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전 세계의 다양한 행동을 조
4 http://www.peacenews.info/issues/2451/245108.html,
직한다. ☮ 국제비폭력트레이닝주간과 5월 15일 칠레에서
Rudi
Friedrich:
History
of
Conscientious
see also The Broken Rifle No 58, May 2003, http://wri-irg.org/pubs/br58-en.htm
☮ 소식지 3월호
12
번역글
'송환 '을 보고 썰 (전쟁없는세상 후원회원)
다면, 보는 이로 하여금 만감을 교차하게 하는 장면 도 있었다. 주변의 눈이 있으니, 빨갱이 가족이라는 사실 때문에 너무 괴로웠으니, 제발 빨리 어머니를 만나고 돌아가 달라는 김선명씨 가족들의 말. 누가 그/녀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추호도 그 사람 들에게 누를 끼치고자 한 것은 아니었는데.” “차라 리 나 하나만 사선(死線)을 넘나들었으면 이렇게 가 슴이 미어지지는 않았을 텐데.” 서슬 푸른 반공의 시절에 빨갱이 가족이라는 오명과 그에 따르는 철저 한 사회적 격리는 아무런 희망도 찾을 수 없는 지금 <송환>은 개봉 이전부터 여러 사람들에게 추천 을 받았던 영화다. 시사회를 본 사람들은 2시간이
의 신용불량자들의 삶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망 그 자체였을 것이다.
넘는 상영시간동안 눈물을 한 바가지는 쏟았다고 했 다. 그래서인지 ‘혹시 신파는 아닐까?’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그러던 차에 <전쟁 없는 세상>의 부르뎅,
그런 빨갱이 가족들에게 돌을 던지고, 손가락질을
영은씨와 함께 개봉작을 봤다. 두 말 할 필요 없이
한 사람들은 어땠을까? 인민군에 의해 소중한 사람
‘참 잘 만든 다큐’였다. 하지만 눈물을 펑펑 쏟지는
이 죽었다면 모를까, 어제까지만 해도 얼굴 맞대고
않았다. 아무리 슬퍼도, 분노해도, 힘들어도, 눈물을
웃던 이웃집에 ‘순경’들이 들이닥치고, 빨갱이 가족
흘리지 않는 성격 탓 인가보다.
이라는 소문이 돌고……. “ 말이라도 한 번 건넸다가 나까지 엮이면 어쩌나?”하는 불안감. 그리고 그런 불안감을 불식시키기 위한 ‘적극적’ 비난. 분단과 반
그래도 영화를 보는 중에 몇 번 눈시울이 뜨거워 지는 장면이 있었다. <선택>이라는 영화를 통해 이
공이라는 압도적인 시대정신은 그처럼 사람들의 마 음속에 금을 그었다.
미 한 번 본 적이 있는 김선명씨와 노모의 만남. 혈 육에 대한 집착과 말로 다하지 못할 정이란 것이 지 금 같은 ‘Cooooool 의 시대’엔 너무 낡아버린 구닥다
그렇게 고통 받은 가족들은 또 얼마나 북한이 싫
리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런 장면을 보면서 “시시
었고, 빨갱이정신을 바득바득 놓지 않았던 장기수들
하네. 뻔한 가족주의잖아!”라고 말하는 도도함을 보
이 얼마나 싫었을까? 누가 이런 반목을 만들었나?
여주는 것이 더 세련된 지식인의 모습일지도 모른
누가 이 엄청난 ‘미어짐’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는가?
다. 하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정말 가슴 찡했다.
그냥 뭉뚱그려서 “시대가 그랬지”라고 말하면 참 쉽
그런 찡한 재회의 장면이 심금을 울리는 것이었
13
☮ 전쟁없는세상(World Without War)
다. 하지만 여전히 답답한 마음은 가시지 않는다. 차 라리 박정희나 김일성에게 독박이라도 씌워서 눈앞
번역글 에 두고, 실컷 패대기라도 쳐주고픈 마음이다. 보는
하면서, ‘2004년 강추영화’ 로 자신 있게 <송환>에
내내 이 같은 상념들이 끊이지 않았다.
올인한다. ☮
하지만 <송환>이 슬픔으로 점철된 영화는 아니 다. 장기수들의 삶이 그러했기에 어쩔 수 없이 따르 는 아픔이 있을 뿐, 억지로 그런 장면을 모아둔 것 은 아니다. 오히려 감옥소의 삶에 집중함으로써 관 객의 감정을 슬픔과 분노로만 몰았던 또 다른 장기 수 영화, <선택>에 비하면 <송환>은 장기수들의 일상을 ‘기록한’ 충실한 다큐다. 그래서 장기수들을 신념의 강자, 영웅으로 만들기보다는 한명의 ‘사람’ 으로서 우리 앞에 서게 한다. 비전향은 물론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감독의 카메라는 전향한 사람들의 삶과 고뇌도 비켜가지 않음으로서, 한 개인에 대한 가치평가 이전에 그를 둘러싼 쉽지 않은 상황들을 공감케 했다.
아직 비전향장기수라는 말은 한국사회에서 큰 반 향을 만들지는 못하나보다. 금기에 대한 도전이 상 업적 성공의 키워드가 되는 요즘의 문화코드를 생각 해볼 때, <송환>은 꽤나 많은 관객을 동원하리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개봉관에는 40여명의 사람들을 앉아있었을 뿐이다. 금기, 폭로, 비극, 그리고 Coooool을 적당히 버무려, 예술성이란 칭호도 잃지 않으면서 챙길 건 다 챙기는 영화들에 비하면 추천 의 글이 아깝지 않은 작품인데……. 아쉬움이 남는 다. 그나마 비전향장기수의 존재라도 아는 사람이라 면 꼭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을 것이다. “무엇이 그들을 버티게 했는가?” 이 물음에 대해 참으로 상 식적이지만 정치색으로 덧씌워지지 않은 대답을 듣 고 싶다면 꼭 한번 <송환>을 볼 것을 추천한다. 마감 하루 전에 부탁 받은 인스턴트 글이라 감상 을 잘 담지는 못했지만, “다큐가 극장가에서 흥행작 이 되는 것을 보고 싶다”는 한 후배의 염원에 동조
☮ 소식지 3월호
14
번역글 번역글) History about Conscientious Objection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 ANTON BEBLER (번역자 : 나동혁)
이 장에서는 소위 “사회주의” 라 불리며 공산당의
(patial objector)에 대해서는 종종 임의로 비전투 복
통치를 받았던 국가에서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양
무를 허용했으나 철저한 병역거부자들에 대해서는
상을 다룬다. 초점은 공산주의 시기의 동유럽 사회
거칠게 억압했다.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co의
주의 국가들에 맞추어져 있지만, 그 이전 시기도 간
존재는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공식적으로 논
단히 관찰하고 넘어갈 것이다.
의되기는 더 힘들었고, co 와 관련된 객관적 데이터
동유럽에서 공산주의 이전 시기에 사회적 조건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반하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이 지역의 대다수 국가들은 오랜 기간 동안 징병의 전통을 유지해왔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 짧은 기간 을 제외하면 동유럽 국가들은 정치적 관용이 매우
는 구할 수도 없었다. 병역거부를 대하는 스탈린주 의적 분위기는 이후에 소련 이외의 사회주의 국가로 확산되어 나갔는데, 적군의 임무를 부과하던지 소비 에트 모델을 모방했다.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의 이 런 특징은 1980년대 중반까지 계속된다.
부족한 상태였으며, 정당정치가 빈약했고, 사법부 독
co를 대하는 스탈린주의적 방식과 공산주의 스타
립이 거의 이루어져 있지 않았다. 더욱이 평화주의
일이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몇몇 증거들을 통해 보
교단의 힘은 서유럽에 비해 훨씬 미약했다. 간단히,
일 수 있다. 사회주의 국가들 사이에 상당한 차이에
약간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동유럽의 사회적 상황은
도 불구하고, 유사한 군사시스템이 발전했다. 보편적
병역거부에 매우 비우호적이었다. 이러한 조건은 사
으로 남성에게 군복무 의무가 주어졌으며(또한 어떤
회주의 사회 성립 이후에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것들은 여성들의 의무로 제한되기도 했다) 국제 프 롤레타리아트 연대라는 강력한 맑스주의 이데올로기
스탈린주의와 co1)들
가 항상 따라다녔다. 군복무와 국방의무를 묘사한 용어들의 유사성이 매우 두드러진다. “highest"(불가 리아, 체코슬로바키아), ”holy“(소련, 헝가리, 루마니
사회주의 국가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다루
아), ”holiest“(폴란드), ”honorable"(동독). “정당한
는 양상은 일반적으로 “스탈린주의”라 불리는 현상
조국의 방어”에 동참하기를 거부한 사람은 배신자와
과 꽤나 잘 맞아 떨어진다. 스탈린주의는 1930년대
똑같았으며 범죄자였다. “제국주의” 와 잠재적인 군
초반 소련에서부터 시작된다. 부분적 병역거부자
사적 대결은 어떠한 공식적인 민간대체복무의 수용 도 가로막았다.
1) conscientious object(or), 보통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의 줄임말.
15
☮ 전쟁없는세상(World Without War)
co를 대하는 스탈린주의적 방식은 여타의 권위주
번역글 의적인 공산주의 시스템의 특징들-예컨대 실질적인
(Nazarenes), 톨스토이 신봉자들(Tolstoyans), 재림
정치적 경쟁의 제거, 반대의견에 대한 억압, 종교적/
론자(Adventists), 그리고 무엇보다 여호와의 증인의
문화적 다원주의에 대한 가혹한 정책, 폭넓게 퍼진
오랜 신도들. 1980년대 병역거부자 수가 급증하면서
인권침해-과 함께 형성되었다. 꽤나 다른 두 연방
병역거부의 동기도 크게 바뀌었고, 비종교적인 병역
국가 소련과 유고에서는 국민 방위군(territorial
거부자들이 가시성이나 숫자의 양 측면에서 세상의
militias)의 폐지, 군대 내 소수민족 언어의 금지,
주목을 받게 되었다.
“사회주의적 인간” 창조를 위한 문화적 동화 정책 등등과 동시에 대체로 co 를 범죄로 다루는 경향이
스탈린주의의 침식
있었다. 소련에서 이러한 변화는 1930년대 일어났고, 유고에서는 1940년대 전후 기간에 일어났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와 구별되는 개념으로서 공산 주의가 반드시 co에 대한 억압을 의미하지는 않는 다. 공공연히 합법적으로 병역거부자들을 보호하거 나, 또는 관용하거나, 적어도 침묵하던 기간이 있었 다. 공산주의의 모국, 소련이 가장 좋은 보기다. 1918년 1월 23일에, 소비에트 러시아의 창시자 레닌 은 종교적 병역거부자들에게 시민봉사로 군복무를 대체하는 첫 번째 법령에 서명했다. 1919년 1월 4일 에, 소련은 모든 종교적 동기의 병역거부자들을 징 집으로부터 면제시켜주는 법령을 발표했다. 1년 뒤, 이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법정이 세워졌다. 사실에 입각해서 말하자면, 레닌 시대 소련은 co 에 대해 짜 리즘보다 훨씬 관용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대부분 서유럽 국가보다 훨씬 진일보했다.
co를 대하던 스탈리주의의 양상은 1960년대 중반 부터 조금씩 개선되기 시작했다. 병역거부의 가능성 이 인지된 첫 번째 사회주의 국가는 동독이었다. 13 장에서 윌프리도 폰 브레도우(Wilfried von Bredow) 가 이 과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는 동독이 1964년에 co 들이 복무할 수 있는 비무장 건설부대 (unarmed military construction units)를 만듦으로써 스탈린주의에 첫 번째 틈새를 냈다는 사실을 지적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물론, 동독은 co에 대한 서구 적 기준이 가장 쉽게 침투할 수 있는 사회주의 국가 였으며 특히나, 서독으로부터 접해있기 때문에 그랬 다. 1960년대 후반에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이와 유사한 건설부대(construction battalions)를 사용하 기 시작한다. 1972년에 이르면 위와 같은 건설부대 는 소련에서도 등장한다. 일명 ‘stoybat’은 양심에
co에 대한 소비에트의 관용은 1930년대 스탈린주
따른 병역거부자들 뿐만 아니라, 반체제 인사나 국
의로 통합되면서 사실상 끝났다. 어떤 사람도 그런
가의 적으로 간주되었던 부르조아 계층의 후손들을
지위를 요구하지 않았다는 거짓된 이유로 1939에 co
보내는 장소이기도 했다.
에 대한 합법적인 권리가 폐지되었다. 최근 1990년 대 후반까지 소련의 형법체계는 입대, 등록(병적), 훈련 등등을 “기피” 한 경우에 매우 강력하게 처벌했 다.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서 병역거부 선배 들은 철저한 종교상의 병역거부와 연관이 깊다 : 러 시아 정교, 오순절 교회파(Pentecostals), 나자레파
행정적으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를 제거하는 또 다른 방법은 정신적으로 미친 사람들로 분류함으 로써 징병 명단에서 병역거부자를 제거하는 것이었 다. 덧붙일 필요도 없이, 이런 식으로 면제된 사람들 은 그 후에 계속해서 직장 배치나, 고등교육 허용, 기타 여러 가지 사항에 있어 차별을 받았다. 몇몇 사회주의 국가에서 발견되는 특별한 형태의
☮ 소식지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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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글 군복무 면제는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다. 육체적으
는 동독을 따라 평화주의적 분파의 구성원들에게 비
로 힘든 일을 요구받는 직업의 노동자들은 징병이
무장 부대에서 복무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면제되기도 했다. 예를 들면, 불가리아에서는 제철공
가톨릭이나 비종교적인 병역거부자들에게 까지 그런
장, 조선소, 광산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면제를 받
조건을 적용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또, 여호와
았다. 폴란드 석탄 광산 노동자들도 비슷한 대우를
의 증인 같은 절대적 거부자들에 대해서도 허락하지
받았다. 이런 직업상의 면제를 받은 병역거부자가
않았다. 1980년 폴란드는 무기나 화기(fire-fighter)
존재하는 여부는 알려진 바 없다. 물론 스탈린주의
없이 병원이나 사회 봉사기관 같은 곳에서 인도주의
하에서도 사실상 가장 확실하게 면제를 받았던 대학
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민간 복무를 조용히 도입했
생들뿐만 아니라 직업상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을 사
다. 병역거부자들은 봉급과 군복 없이 복무했다. 육
람들(예를 들면 군산복합체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체적으로 부적당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종교적, 비종
대해서는 다수의 면제 또는 징병유예가 존재했다.
교적 거부자들 모두 대체복무를 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장 두드러진 경향은 세속
몇몇 동유럽 국가에서는 정치적인 반대도 원칙적
적 병역거부자들이 종교적 병역거부자들을 대체했다
으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동기로 받아들였다.
는 것이다. 동유럽에서 전형적인 정치적 반대는 각
그런 까닭에 체코슬로바키아의 헌장 77(Charter 7
정부의 군사정책과 소련의 존재에 대한 비판적인 태
72))과 폴란드 자유노조연대(Solidarity3))의 대표자들
도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러한 대항적인 행동은 정치
이 소련의 체코침공 19주년에 맞춰 체코와 폴란드
적인 동기에 의해 군복무를 거부한 수십 가지 잘 알
국경에서 만났을 때, 그들이 낸 공동성명에는 민간
려진 사례를 만들어냈다. 지식인, 학생, 그리고 중간
대체복무를 수행할 권리에 대한 요구도 포함되었다.
층에 속하는 일부 자영업자들이 가장 왕성한 세속적
특별히 몇몇 반체제적인 평화주의자들은 중등학교와
반대
복음교회(Evangelical
대학에서 시행되는 의무적인 군사 교육에 대한 저항
Church)는 잘 알려진 대로 면제를 받았고, 폴란드나
을 발전시켰다. 정치적인 반대자들은 체제의 억압적
헝가리에서 카톨릭 성직자들도 일부 면제를 받았는
인 본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대개 종교적인) 병역거
데 동유럽에 설립된 교회들은 대체로 ‘정당한 전쟁’
부자들을 박해했던 잘 알려진 사례들을 사용했다.
교리와 일반화된 국가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병역거
그러나, 그들과 달리 근본적인 평화주의자 그룹들은
부자들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정치적 반대 그룹들과 함께 왕성하게 활동하지 않았
그룹이었다.
동독의
동유럽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합법화와 대체 복무 도입은 명확히 서유럽의 경험, 특히 서독, 네덜 란드, 오스트리아, 그리고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들 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반면 사회주의 체제 는 구성원들 가운데 평화주의자들과 반체제적인 사 람들을 불신하게 만드는 사상적인 독단주의, 국가주 의, 외국인을 혐오를(xenophobic) 강요했다. 그 때까지도, 몇몇 국가들은 어떤 양보를 결정하 는 데 매우 조심스런 태도를 보였다. 1977년 헝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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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없는세상(World Without War)
2) 1977년 설립된 반체제운동 단체인 77헌장(Charter 77) 그 룹은 현 체코 대통령인 하벨(Vaclav Havel)과 체코 지식 인의 상징인 하예(Jiri Hayek) 등을 포함한 지식인들과 작 가, 예술가 등이 주축이 된 반체제단체이자 체코슬로바키 아 시민사회의 효시로, 프라하의 봄이 외부의 개입으로 무산된 이후, 다시금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새로운 봄을 일 으키고자 하는 시도였다. 3) 연대(Solidarity)는 1980년 여름 ‘폴란드 위기’ 때 일약 각 광을 받았던 바웬사가 이끄는 폴란드 자주관리노조의 정 식 명칭이다. 노동조합활동으로서 기업에 대해서 뿐만 아 니라, 제1회 전국대회(1981년 10월)는 정치·사회에 이르 는 ‘자주관리공화국’이라는 이상상(理想像)을 내세웠다. 이 자유노조에는 1000만여 명의 노동자가 참가하고 있으 며, 폴란드의 민주화·자유화를 향한 조류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번역글 으며, 대신 정부를 향해 조용히 변론하는 편을 택했
자들에 대해 가장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채택했다.
다.
1989년 1월에, "유럽에 들어가기 위한" 노력의 일환
폴란드가 여전히 군사정부의 지배 아래 있었을
으로 헝가리는 헌법에 민간대체복무 조항을 삽입했
때,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처음으로 종교적, 세속적("
다. 곧 이어, 의회는 필요한 입법절차를 밟았는데 양
도덕적") 병역거부자 모두에게 민간 대체 복무를 허
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보편적 권리, 민간 대체복무,
용했다는 사실은 다소 아이러니하다. "단호히 평화
투옥 중지, 공평한 판정 기구 구성 등 유엔 인권위
를 지키기 위한 소비에트 군대 및 그 동맹군대와 형
원회가 기본적으로 추천한 사항들을 명확히 포함시
제로서의 동맹"이라는 징병자 선서 문장을 두고 당
켰다. 처음 입법이 되었을 때, 헝가리의 민간대체복
시 존재하던 군사시스템에 대한 수많은 비판들이 오
무는 징병 기간인 2년보다 10달이 더 길었다.
갔다. 징병 저항 조직체였던 자유와 평화(Freedom and
Peace)에
자극을
받아,
또 헝가리의 경우 1988년(옛 체계에 따라 투옥된
장교 Woljciech
마지막 해)에 투옥된 병역거부자들의 배경과 수가
Jaruzelski가 병역거부 문제를 완화시키기 위한 단계
나타내는 특징도 매우 흥미롭다. 여호와의 증인 148
들을 밟기 시작했다. 1988년 7월에 단호한 조처가
명, 로마 가톨릭 신도 6명, 나자레파 1명, 안식일 재
취해졌으며, 폴란드는 공식적으로 젊은 남성들이 2
림파 1명, 그리고 비종교적 거부자 5명. 이 숫자를
년간 의무 군복무를 대신해서 3년간 대체복무를 수
통해 권위주의적인 사회주의 국가에서 절대적 병역
행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학생은 졸업 후에 1년간 군
거부의 사회적 구성이 어떻게 되는지 대략 훑어볼
복무를 대신해서 2년간 민간 복무를 수행할 수 있었
수 있다.
다. 그러나, 폴란드 시스템은 절대 북 대서양 패턴을
유고슬라비아
따라 설계된 게 아니었다. 양심을 결정하는 것은 군 대와 경찰의 보호 아래 운영되는 위원회였다. 병역 거부자들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방과 식사를 제공 받았지만 보수는 없었으며 병원이나 사회봉사기관에 서 불편하고 힘든 작업을 수행했다. 새로운 법이 제 정되고 처음 석 달 동안에 764명이 양심에 따른 병 역거부를 주장했고 그 가운데 480명이 인정받았다. 세속적인 병역거부자들이 종교적 병역거부자들보다 두 배 정도 많았다. 1989년에 병역거부자 숫자는 약 1500명이었고 그 중 오직 1%만이 군복무를 했다.
1940년대부터 1980년 티토4) 사망 때까지 co와 관 련된 유고슬라비아의 시스템은 전형적인 스탈린주의 양상을 따랐다. 유고슬라비아 사회가 다른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와 비교하여 훨씬 자유주의적 경향이 강했던 것에 비추어 볼 때 다소 이상한 일이었다. 군복무 거부(징병 통지 수령을 거부하거나, 소재를 알리지 않거나, 무기 소지를 거부하거나, 기타 경우 를 포함하여)는 여러 가지 형법을 통해 처벌 받을
폴란드에서 일반 대중이 징병제를 지지한다는 말은 새롭게 합법화된 병역거부를 인정받은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1988년 공산당 내 개혁주의자들의 반란에 뒤 이 어, 헝가리는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 중 병역거부
4) 유고슬라비아 초대 대통령(재임 1953∼1980). 1948년 6 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이 코민포름에서 제명되고 그의 정강(政綱)은 수정주의라는 낙인이 찍혔으나, 그는 독자 적인 사회주의를 목표로 한 비동맹중립외교의 정책을 굳 게 지켰다. 1969년에 소련과의 관계가 개선되었고, 1974 년 5월 연방의회에서 종신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민족적 ·종교적으로 복잡한 유고슬라비아의 통일을 지키며 경제 건설을 추진하였다.
☮ 소식지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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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글 수 있었다. 징병을 거부한 사람은 군재판관이 재판
Milian
Daljevic였는데
그는
사회주의자
동맹
을 주재했는데 이 경우에 독립적인 변호, 공개 재판,
(Socialist Alliance)의 단체 리더라는 새로운 지위를
효과적인 호소 등 여러 면에서 권리가 매우 축소되
이용-남용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지도 모른다-하
었다.
였다. Daljevic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합법화는 유
법률상 최고형은 10년까지 가능했지만, 유죄를 선
고슬라비아 시민들 사이의 불평등을 초래할 것이며
고 받은 병역거부자들은 대개 3년형을 받았다. 중복
유고슬라비아의 방어지침과도 모순된다고 주장했다.
처벌을 할 경우 30년까지 붙잡아 두는 것이 가능했
또, 유고슬라비아인들 중 아주 극소수만이 군복무
다. 명백히 이 체계의 목표는 병역거부를 제거하는
거부의 자유화를 옹호한다고 주장했다. Daljivic을
것이었다. 이 시스템의 고의적인 잔인함은 여호와의
지지하는 사람들은 병역거부자들이 국토를 방어하는
증인인 이반 체코(Ivan Cecko)의 사례에서 가장 두
데 전혀 기여하지 않으면서 자신은 보호를 받으려고
드러졌는데, 그는 동일한 죄로 네 번에 걸쳐 12년이
하는 것은 매우 비도덕적인 행동이라거나, 국가로부
나 형을 살았다.
터 교회를 분리시키는 것이 종교적 병역거부가 인정
유죄로 판정을 받은 병역거부자들은 유고슬라비 아 군사법정에서 형을 선고 받았는데 1970년 초반 이후 평균적으로 한 해 열 명 정도 되었다. 국제 앰 네스티의 보고에 따르면 1989년에는 최소 20명의 병 역거부자가 투옥되었다. 물론, 일부 병역거부자들은 간단히 지역 징병 사무소(local induction board)에서
받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거나, 종교적인 믿음이 시 민으로서 의무이행을 방해할 수 있다거나 기타 등등 의 이유를 들었다. 이러한 주장의 밑바탕에는 병역 거부자를 인정하기 시작하면 병역거부자가 넘쳐날 것이며, 결국 연방 군대의 토대를 허물어 뜨릴 것이 라는 유고슬라비아 군부의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부적합"으로 분류되어 효과적으로 소집자 명단에서
공개적인 사전 발표 없이 갑작스럽게 다시 이 문
제외될 수 있었다. 여전히, 유고슬라비아에서 양심에
제가 표면화 되었을 때,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
따른 병역거부를 대하는 방식은 매우 퇴보적이었다.
정하기 위한 노력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듯 보였
1980년대 중반부터 유일당 정치체제를 유지하던 티토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 자유화의 과정에서 이런 비인간적인 시스템이 대중적인 비판을 받기 시작했 다. 가유고 연방 내에서 가장 서구적이며 자유주의 적 경향이 강했던 슬로베이아는 병역거부자들을 거 칠게 대하는 데 제일 강력하게 반발했다. 1986년 여 름 슬로베니아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합법화와 민간대체복무 도입의 요구가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졌 다. 연방 의회는 이 문제에 대해 공개적인 토론을 요청했다. 그러나, 연방 내 전문적인 군사주의자들은 로비를 통해 훼방을 놓았다.
다. 1989년 2월, 유고슬라비아 최고간부회의5)(집단 적인 지도체제와 최고지휘기관)에서 완강했던 소수 파는 보수적인 입장을 뒤엎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를 합법화시키기 위해서 다른 멤버들을 무던히 설득 했다. 최고간부회의의 이러한 움직임은 Ivan Cecko 의 고통스런 처지와 서방세계에 유고슬라비아의 이 미지를 개선시켜야 할 필요성 때문인 듯 보인다. 어 쨌든, 최고간부회의는 연방의회에 징병법 개정을 제 안했다. 개정안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지역-유고 슬라비아 직업 군인 가운데 수의 균형이 맞지 않았 던 지역들- 의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통과되었 다. 크로아티아나 슬로베니아처럼 좀 더 개발된 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대한 공개적인 토론을 방해하는 데 최전선에 섰던 인물이 별 셋 퇴역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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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없는세상(World Without War)
5) Presidium,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에서 최고간부회 의를 지칭한다.
번역글 역의 대표들은 대부분 개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1989년 혁명 이후
1989년 4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매우 한정된 범위에서 합법화되었다. 오직 종교적 거부자들만이
1989년 동유럽에서 일어난 중대한 사건들을 따라
허용되었다. 병역거부자들은 비전투 분야에서, 무장
co의 상황도 드라마처럼 바뀌었다. 1990년 10월 동
하지 않았지만 반드시 군복을 입은 상태에서 복무해
독이 붕괴하면서 새롭게 독일연방공화국에 귀속된 5
야 했다. 더구나, 병역거부자들은 징병된 사람들보다
개의 주에서 이전 서독의 시스템이 확장되었다.
복무 기간이 두 배나 길었다. 민간대체복무는 없었
1990년 5월에 체코슬로바키아 의회가 종교적, 세속
고, 다만 군대 내 지휘관들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적 거부자 모두에 대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합
인정여부를 판단하는 권한을 가졌다. 군대 외부에
법화했고 대체복무를 도입했다. 폴란드는 전통적인
호소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명백
평화 분파들과 비종교적 거부자들 모두 부분적으로
하게 이러한 병역거부 관련 조항들은 유엔인권위원
병역거부를 합법화했다. 1991년까지 오직 루마니아
회나 안보협의회(Conference on Security)등이 제시
와 알바니아만이 오래된 스탈린주의 모델을 고수했
한 기준에 훨씬 못미쳤다.
고, 이 국가들의 경우에도 포괄적으로 보면 군개혁
유고슬라비아 붕괴가 임박하자, 상황이 달라지기
의 차원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합법화되면서
시작했다. 가장 정치적으로 자유적이었던 슬로베니
자유화되는 방향으로 갈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라도
아는 1990년 10월에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는데 유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고슬라비아를 비판하는 방향으로 갔다. 민간대체복
구소련에서 변화는 특히 중요하다. 소련 붕괴 직
무가 종교적, 세속적 거부자 모두에게 허용되었고
전, 징병 저항은 마치 풍토병처럼 번져 소비에트 군
기간은 군복무 기간과 동일했다. (병역거부) 지원자
대의 기초가 위협받는 상황이 되었다. 모스크바의
들을 처리하기 위한 민간 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본
유력한 정보에 따르면 1989년에 소련에서 400,000만
질적으로 슬로베니아는 발전한 서유럽 국가들과 동
명이 군복무를 거부했다. 그러나 이 중에 오직
일한 병역거부 시스템이 갖추어졌다.
2~3000명만이 종교적이거나 또는 나름의 신념을 갖
1991년 유고슬라비아에서 시민전쟁이 발발함에
춘 병역거부자로 간주되었다. 발트해와 카프카스 지
따라, 실질적인 상황이 어떻게 전환될 것인가 예측
방에서는 대중적인 견해와 지역정부 당국 모두 소비
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나, 1992년에 탈영과 징병
에트 군대 복무 회피를 지원했다. 1990년에 리투아
기피가 옛 유고슬라비아의 중심 지역이었던 세르비
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는 군복무를 피하고자 하
아에서조차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비록 이런 군
는 사람들을 위해 대체복무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복무 회피가 대개의 경우 의심할 여지없이 자기 자
라트비아의 경우, 새로운 대체 복무가 병역거부자
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는 했지만, 양심에 따른 병
뿐 아니라, 모든 지원자에게 개방되었다.
역거부 문제는 유고슬라비아와 유고슬라비아를 계승 한 곳6)에서 계속 확대될 것이다. 6) 구(舊)유고연방의 6개 공화국 중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2개 공화국이 합쳐 1992년 4월 신유고연방 구성. 슬로베 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4 개 나라가 새롭게 독립했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해야 할 것은 소련 말년의 거 의 모든 징병 거부자들이 군복무 자체가 아니라 소 비에트 군대에 대한 복무 거부에 기초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한 때 적군이 소비에트 사회주의 국가의 궁극적인 구현물이었던 곳에서, 1990년에 이르면 적
☮ 소식지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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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글 군은 소련이 해체되는 격렬한 긴장과 분해의 반영물
속화 경향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전형적으로, 초
이 되었다. 되살아난 (민족)국가주의 속에 새로운 공
기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종교적 병역거부자에 대해
화국들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어떻게 다룰 것인
서는 관용을 베풀다가 스탈린주의로 변모한 이후에
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완결되지 않았다. 단명했던
병역거부자들을 탄압하는 방향으로 퇴보하였다. 스
소련의 첫 번째 계승자 주권국가연합(the Union of
탈린주의 후기에 완고한 종교적 거부자들에 대해서
Sovereign States)7)은 1991년 8월 15일에 새롭게 제
는 사실상 병역거부를 인정했고 비무장 부대
정된 징병법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조항도 포함시
(unarmed military service)복무를 허용했다. 1989년
켰다. 징병법은 징병된 복무자들보다 긴 기간의 대
공산주의 국가들이 내부로부터 붕괴하면서 좀 더 경
체복무를 인정했다. 전통적인 종교적 이유뿐만 아니
제적으로 발전한 사회주의 이후(ex-socialist) 국가
라 도덕적인 거부자들 모두 병역거부자로 인정받았
들은 북서부 유럽 국가들을 따라 병역거부자들을 기
다.
본적으로 존중하는 정책들을 신속히 도입하였다.
1991년
막판에
구성된
독립국가연합(the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d, CIS)8)에서
결론을 내리자면, 병역거부와 관련된 정책들은 이
는 포괄적인 군개혁이 지연되는 바람에 양심에 따른
전 공산주의 국가 단계에 비하면 좀 더 다양한 형태
병역거부에 대한 조항들이 미정인 채로 남았다. 독
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다양한 형태는 모두 좀 더
립 러시아 군대의 경우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시
자유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역시나, 1990년
스템은 다소 이전에 사회주의 체제였던 국가들의 상
대 초반에 좀 더 발전한 국가들은 -특히 폴란드, 헝
태를 닮아 있는 듯하다. 완벽하게 전문화된 군대를
가리, 체코, 슬로비키아, 슬로베니아, 발트해 국가들
지향하는 러시아의 움직임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대해 나토에 가입한 지
를 중심으로 한 열띤 논쟁에서 많은 부분 긴장을 완
중해 연안 국가들보다 더욱 인본주의적인 정책들을
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도입하고 있었다. 특히,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관 해서 몇 몇 사회주의 이후 국가들은 남부유럽에서
미래를 향해
오래 동안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해왔던 나라들을 앞 지르고 있었다. ☮
사회주의 체제 그리고 그 이후에 이러한 발전들 이 이 책에서 서술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단계 와 그리고 병역거부의 세속화라는 주장과 어떻게 조 응하고 있는가? 간단히 말하자면,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가 현대에 이르러 주로 세단계를 밟았던 변화를 따라 동유럽의 현상들도 일반적으로 병역거부의 세 7) 소련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독립국가연합(CIS)결성 이전에 구성된 과도적 단계 8) 소련은 15개국 연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라 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발트해 3개국은 소련 시 대에 1989년에 이미 따로 독립했으며 나머지 12개국이 1991년 12월 독립국가연합을 형성함로써 소련은 해체되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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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없는세상(World Without War)
번역글
3월
회계 총계
수 입 금
액
내
1381722
2월 이월금 3월 수입
701060
2월 지출
-1113950
금
액 16750
대화마당 후원금
300000
피자매연대 후원금
22000
모금함 후원금
968832
총합계
용
은행이자
310
후원회비
352000
합계
701060
지 출 내
용
금
2,3월 전기세 월세 전화세
액
플랭카드
64000
511000
생수4통
20000 12000
선전물품구입
27500
3월 신문대금
2월대화마당준비
47630
연대회의 회의준비
18000
수감자 영치금
30000
제네바비행기취소
20000
광목천 2월소식지(인쇄, 우편발송)
351760 5100
쓰레기봉투
6960
1113950
합계
We wait for Volunteer!! Action Together for World Without War
자원활동 가를 기다립 니다 ☮ 캠페인, 집회, 퍼포먼스, 상영회
☮ 온라인 행동
- 병역거부권 실현 캠페인(행사/거리/대학) - 매달 민가협과 함께하는 병역거부 양심수 석방을 위 한 목요집회 - 다큐멘터리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 대학 상영회 - 5월 15일, 세계병역거부자의 날 행사 준비팀
- 홈페이지 공동 기획/관리/제작
☮ 평화인권열린대화마당 -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 주제를 정해서
☮ 영문자료번역 - 영어를 잘하고, 병역거부 운동에 애정이 많은 사람
☮ 소식지 - 소식지 기획/취재/제작 전과정을 함께!
☮ 5월 15일 후원인의 밤 - 결성 1주기,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을 맞아 후원인의 밤 행사를 함께 준비
☮ 전쟁없는세상 '평화영화제' - 6월, 여주 여성생활사 박물관에서 펼쳐지는 야간 영 화제를 함께 준비/ 숙식제공(!!)
☮ 소식지 3월호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