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5일은 세계병역거부자의 날!!
<우리의 구호> 파병계획 즉각 철회하라! 병역거부권 인정하고 대체복무제 도입하라!
칠레 및 라틴아메리카의 병역거부 인정하라!
☮ 2004년 CODAY. 1 - Bring the sordiers back home!!
☮ 일시 : 2004년 5월 15일 (토) 낮 2시~4시 ☮ 장소 : 혜화역 4번출구 ☮ 주최 : 5·15 세계병역거부자의 날 준비팀
☮ 2004년 CODAY. 2 - 전쟁없는세상 후원의 밤
☮ 일시 : 2004년 5월 15일 (토) 저녁 5시~8시 ☮ 장소 : 중앙대학교 학생회관 3층 루이스홀 ☮ 주최 : 전쟁없는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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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없는세상(World Without War)
기획1 - 515 coday
5월 15일, 세계 곳곳에서는.... (**자료출처는 WRI 소식지, 'Broken Rifle' 515 특별판. www.wri-irg.org)
올해 세계병역거부자의 날은 칠레와 라틴아메리카 에 초점을 두고 진행된다. 세계 곳곳에서 각 나라
전날 저녁에는 뮌스터 브레울 43번지에 위치한 ESG에서 7시 30분부터 공개 토론회가 있을 예정이
및 지역 내 상황에 부응하는 다양한 행사들을 준비 하고 있다.
다. 문의 Redaktion Graswurzelrevolution, Breul 43, 48143
영국
Münster tel: +49-251-48290-57 fax: +49-251-48290-32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행사가 런던 타비스톡 광장에 있는 병역거부자 기념비 앞 에서 5월 15일에 열릴 예정이다. 이 행사는 정오부 터 시작된다. 몇몇 하원의원들은 영국정부에 대해 매년 5월 15일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의 역할 이 기념될 수 있는 날로 인정해줄 것을 제안하였다.
email: redaktion@graswurzel.net website: www.graswurzel.net
터키
그러나 병역거부자들 중 일부는 이러한 인정조차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전통 군사주의 페스티발’이 5월 15일 이스탄불에서 개최된다. 이날 페스티발에서는 이스탄불의 군사주
문의 Conscience, Archway Resource Centre, 1b Waterlow Rd, London N19 5NJ
의 상징물 및 병역거부자들의 저항을 부각시키기 위한 투어, 콘서트, 전시 등이 예정되어 있다. 투어 는 오전 11시에 하이다파사 기차역에서 출발한다.
tel: +44 20 7561 1061 fax: +44 20 7281 6508 email: info@conscienceonline.org.uk
문의 Istanbul Antimilitarist Initiative
콜롬비아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메델린에서 병역거부자들의 국회가 열릴 계획이다. 문의 Redes Juveniles A.A.52-215, or Calle 47 N 40 53, Medellin tel: +57 4 2923234 email: redjuvenil@colomsat.net.co website: www.redjuvenil.org
독일 5월 15일에 독일 북부 뮌스터에서 집회가 열린다. 이날 집회에서는 터키에서 도피하여 독일에 망명을 신청한 쿠르드 병역거부자들이 병역거부를 공개 선 언한다. 집회는 오전 11시에 뮌스터 프린지팔마르크 트에서 열리며 터키 영사관으로 이동할 계획이다.
tel: +90-546-7127931 email: iami@savaskarsitlari.org website: www.savaskarsitlari.org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형제교회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 반군사주의, 모병반대 그리고 전쟁세(war tax) 거부에 관한 워크샵과 세미나가 열릴 예정이다. 전 날인 14일은 병역거부와 군대징집 문제 등에 초점 을 두고 의회에 대한 로비 활동을 벌일 계획이다. 문의 Center on Conscience and War, 1830 Connecticut Avenue NW, Washington, DC 20009 tel: +1-202-483-2220 fax: +1-202-483-1246 email: tsitther@nisbco.org website: www.nisbco.org
☮ 소식지 CODAY 특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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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1 - 515 coday
칠레기본정보 (**자료 출처는 5월15일 행사준비 게시판 www.withotuwar.org/coday)
○ 1818년에 스페인의 식민통치에서 독립한 칠레
○ 1989년 피노체트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남.
는 그 후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이 대부분 그
○ 이후 1998년 피노체트는 런던의 한 병원에서
렇듯이 극심한 빈부격차로 인해 좌우파간의 갈등이
영국경찰에 의해 체포되고 이후 칠레본국으로 송환
심해지게 되었음. 그런데 이 나라의 좌파세력은 합
되어 재판받음. 칠레대법원은 피노체트의 면책특권
법적 정당활동을 통해 1970년에 제3세계 국가에서는
을 박탁하고 가택구금시킴.
최초로 사회당과 공산당 등의 좌파연합세력이 선거 에 승리, 정권을 잡게 됨. 이 때 대통령이 된 사람이 유명한 비운의 대통령 아옌데임.
○ 2000년 칠레의 사회주의자 리카르도 라고스가 대선 결선전에서 우파의 후보 라고스를 물리치고 당 선되었음. 이로서 칠레는 아옌데의 선거혁명과 쿠데
○ 아옌데정부는 곧 바로 외국인기업들을 국유화
타에 의한 반혁명, 그리고 1990년대 민주화 시대를
하고 노조의 활동을 강화시키는 등 급진적인 좌파
거쳐 새로운 방식을 기반으로 한 혁명의 시기로 들
개혁을 시도했더랬음. 이에 불만을 느낀 우익세력이
어선 것을 의미하며 아옌데 이후 지난 30년간 이른
군부와 합작하여 3년 만에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
바 시장주의적 진로를 겨냥한 칠레사회 내부의 반발
을 탈취했는데, 바로 이 쿠데타를 주도하고 그 후
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왔었고, 이를 기초로 한 대
종신지도자로 군림하게 된 사람이 그 유명한 아우구
안제시에 대한 호응이 이루어진 것을 말해주고 있
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임. (1973년 9월 11
음.
일, 칠레판 911) ․
○ 비록 형식적으로 군부독재는 종식되었지만 군
○ 아옌데대통령은 대세가 쿠데타군에게로 넘어
부독재가 남긴 유물들은 군대 내에서뿐만 아니라 칠
가자 방송을 통해 국민에게 비장한 고별연설을 하고
레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 군사쿠데타 당
경호원들까지 다 피신시킨 후 혼자서 기관총을 들고
시 실종된 사람들, 그의 가족들이 겪는 눈에 보이는
대통령 궁에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함.
인권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저변에 군사주의의 영향력
○ 이 쿠데타는 국유화에 불안을 느낀 미국계 다 국적기업 국제전신전화회사(ITT)가 미국 CIA와 공모 하여 칠레의 우익세력을 조종했다고 하는 것이 정설 임. 제3세계에서 다국적기업들이 얼마나 못된 짓들 을 해왔는가를 말할 때 대표적인 사례로 흔히 인용 되고 있음. ○ 피노체트 정권은 수많은 사람을 잡아다가 고문 하고 살상했으며 미국의 지원 하에 군부를 강화하고, 시장의 자유를 내세워 자본의 독점적 지위를 형성하 면서 칠레 노동자들의 삶을 극단적으로 억압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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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없는세상(World Without War)
이 막강함.
기획1 - 515 coday **출처는 WRI 홈페이지(www.wri-irg.org). 평화인 권연대 오리씨가 번역했습니다.
러한 영향은 칠레 군대에서 파시스트 조합주의 핵심 에서 자라난 민족주의적 사고와 함께 군대를 반동적 인 반아옌데 운동의 선봉으로 만드는데 예리해지고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했을 것이다. 반아옌데 운동은
칠레의 병역거부와 반군사주의 군사주의 해체를 향한 투쟁
심지어 1970년 민중연합정부가 세워지기 전부터 일 어났다. 국가원수가 살해당하고 민중연합이 패배했다. 군
칠레에서 군사주의의 세력 불균형은 1973년부터
사주의는 국가의 문화, 경제와 같은 상부에서 다시
90년까지 진행되었던 피노체트의 군사독재 때문만은
구조화되기 시작했으며 군대를 국가의 도덕적, 정치
아니다. 오히려 역사적인 구조가 칠레 민족국가의
적 행정관의 지위로 올려놓았다. 이것은 1980년 헌
성격과 형식을 규정해왔다.
법에서 구체화 되었고 모든 정치적인 반대에 대해
심지어 1830년부터 시작된 Portaliano 정권 전부 터 군대와 군대문화의 영향은 위계적인 사회에서 스 스로 명백히 나타나고 있으며 국가에 의해 통제되었 다. 국가는 공동체와 시민사회, 도시, 농촌으로부터 사회적인 기능을 대신한다. 국가정책은 확장적이고 중앙 집중적인 것을 동시에 추구하며 북쪽으로 볼리 비아와 페루의 해안까지 확장하고 남쪽으로는 마푸 체와 파타고니아 원주민들의 해안까지, 그리고 폴리 네시아를 향해가고 있었다. 이러한 진행은 사회가 국가방위의 일부분으로 국토팽창의 식민주의에 군사 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군대는 칠레인 되기의 극치 로서 존재한다. 이러한 사고는 “칠레인 아님(unChilean)"의 평화 주의자나 반군사주의자들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인 반대에 대해 공공연한 비난을 허락한다. 이러한 범 주들 사이에서 19세기가 끝나고 20세기가 시작된 이 래 박해받고 주변화된 신디칼리스트, 아나키스트, 사 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은 헌법적인 정책 속에 그들 을 포용할 수 있는 사회적 타협에 의한 무언가가 생 겨나기 전까지 차별받았다. 이러한 타협은 프로이센 스타일 군대라는 일정 부분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몰
강요되었으며 군사주의와 권위주의 헌법이 되었다. 이것은 심지어 오늘날까지 칠레 영토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다. 이 헌법은 지정된 상원의 원에게 부여된 힘을 통해 군대에게 상원에서의 결정 적인 참여를 보장해주었다. 군대는 다양한 교육과 문화적 연구뿐만 아니라 은퇴와 연금으로서 그들 자 체의 경제업무를 관할한다. 그리고 시민생활의 많은 부분을 침해한다. 민주적인 정부는 아직 이러한 영 향을 많이 제거하지 못했다. 이것의 증거가 바로 칠 레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상황이다. 칠레의 병역거부는 1990년대 민주주의를 향해 절 반의 반환점을 돌았다. 그것은 1996년 MOC(병역거 부 운동)와 NCNU(Ni Casco Ni Uniforme Neither Helmet Nor Uniform)의 창립으로 시작되 었고 이들 단체의 창립은 주목할 만한 사회적 효과 를 가져왔다. MOC와 NCNU의 활동의 결과로 병역 거부는 국가적 차원의 논쟁 주제가 되었고 일반인들 중 젊은이들과 주변화 된 그룹들에 뿌리를 둔 운동 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징병에 마주한 사람들 이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칠레의 징병제는 오로지 낮은 계급의 사람들에게만 강제적이다.
아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민간정부는 미국의
해가 거듭될수록 더 많은 젊은이들이 징병에 반
안보독트린과 군대의 영향 하에 있기를 원했다. 이
대했고 군입대를 거부했다. 법적으로 변명의 여지가
☮ 소식지 CODAY 특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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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1 - 515 coday 없는 상황 속에 그 자신들을 밀어 넣었는데 왜냐하
징병제의 부정의에 대한 비폭력직접행동과 시민불복
면 칠레 정부는 군대의 압력에 굴복하고 있으며 병
종을 통해 칠레에서 병역거부와 반군사주의 운동을
역거부를 합법화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다. 심지어
흔들었다. 이것은 강제적 군복무에 대한 사회적, 정
다양한 국제인권조약들에 사인한 것을 통해서 병역
치적, 법적 저항이다. 누군가 칠레에서 병역거부를
거부를 인정하고 있음에도 그러하다. 정부는 무기
선언한다는 것은 징병에 등록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소비를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것에 투자했고 그것은
이것은 사실 국제법 위반이다. 따라서 모든 병역거
주변 국가들과의 마찰을 가져왔다. 동시에 내부적으
부자들은 그 법과 충돌한다. 우리는 또한 교육과 연
로는 마푸체 운동과 시민단체 운동에 대한 탄압으로
구 활동을 하고 있고 교육과정, 워크샵, 세미나, 국
이어졌다. 이러한 행동은 오로지 지역의 군사적 통
내‧국제회의,
제를 위해 필요한 군사적 부하쯤으로 칠레를 취급하
(CESOCAM)를 통해 이러한 것들을 지속적으로 발
는 펜타곤의 독재를 방어하는 것으로만 설명될 수
전시키고 있다.
그리고
스터디
센터
프로젝트
있다. MOC와 NCNU의 활동은 합법적으로 포장된
We wait for Volunteer!! Action Together for World Without War
자원활 동가를 기다 립니다 ☮ 캠페인, 집회, 퍼포먼스, 상영회
☮ 온라인 행동
- 병역거부권 실현/대체복무 도입 캠페인
- 홈페이지 공동 기획/관리/제작
- 매달 민가협과 함께하는 병역거부 양심수 석방을 위한 목요집회 - 다큐멘터리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 대학 상영회
☮ 소식지 - 소식지 기획/취재/제작 전과정을 함께!
☮ 평화인권열린대화마당 -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 주제를 정해서
☮ 기타 - 병역거부자 면회, 편지/엽서쓰기 모임 등등
☮ 영문자료번역 - 영어를 잘하고, 병역거부 운동에 애정이 많은 사 람. 영문 자료가 아주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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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없는세상(World Without War)
기획1 - 515 coday
칠레,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와 연대 5월 15일, 세계병역거부자의 날 (**자료출처는 WRI 소식지, 'Broken Rifle' 515 특별판. www.wri-irg.org)
칠레의 군사주의 문제는 1973년부터 90년까지 지 속되었던 피노체트 군사독재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 려 역사적인 구조가 칠레 민족국가의 성격과 형식을 규정해왔다. 군대와 군대문화의 영향은 심지어 1830년부터 시 작된 뽀르탈리아노(Portaliano) 정권 이전부터 위계 적인 사회 속에서 스스로 자라났으며 공동체와 시민 사회, 도시, 농촌으로부터 사회적인 기능을 인계받은 국가에 의해 통제되었다. 국가정책은 확장적이고 중 앙 집중적인 것을 동시에 추구하며 북쪽으로 볼리비
파시스트 조합주의 핵심에서 토착화된 민족주의적
아와 페루의 해안까지 남쪽으로는 마푸체와 파타고
사고와 함께 군대를 반동적인 반아옌데 운동의 선봉
니아 원주민들의 해안까지, 그리고 폴리네시아를 향
으로 만드는데 확실하고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했을
해 확장해가고 있었다. 이러한 확장으로 사회는 국
것이다. 반아옌데 운동은 심지어 1970년 민중연합정
가방위의 일부분으로 국토팽창의 식민주의에 군사적
부가 세워지기 전부터 일어났다.
으로 포함되었다. 군대는 칠레인 되기의 극치로서 존재한다.
국가원수가 살해당하고 민중연합이 패배했다. 군 사주의는 국가의 문화, 경제와 같은 상부에서 다시
이러한 사고는 어떠한 평화주의자나 반군사주의
구조화되기 시작했으며 군대를 국가의 도덕적, 정치
자들의 “칠레인 아님(unChilean)"이라는 정치적 혹
적 행정관의 지위로 올려놓았다. 이것은 1980년 헌
은 사회적 저항도 허용하지 않는다. 조합주의자
법에서 구체화 되었고 모든 정치적인 반대에 대해
(syndicalist),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
강요되었으며 군사주의와 권위주의 헌법이 되었다.
은 이러한 범주화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들은 19세
이것은 심지어 오늘날까지 칠레 영토에 살고 있는
기가 끝나고 20세기가 시작된 이래, 사회적 합의를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다. 이 헌법은 지정된 상원의
겨냥한 절충안을 통해 공공 정책 속에 인정되기 전
원에게 부여된 힘을 통해 군대에게 상원에서의 결정
까지 탄압받고 차별받고 주변화 되었다. 이러한 절
적인 참여를 보장해주었다. 군대는 다양한 교육과
충안은 프로이센 스타일 군대의 분야를 이데올로기
문화적 연구뿐만 아니라 은퇴와 연금으로서 그들 자
적으로 배척하였다. 게다가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체의 경제업무를 관할한다. 그리고 시민생활의 많은
민간정부는 미국의 안보독트린과 군대의 영향 하에
부분을 침해한다. 민주적인 정부는 아직 이러한 영
있기를 원했다. 이러한 영향은 칠레군대에서 응축된
향을 많이 제거하지 못했다. 이것의 증거가 바로 칠
☮ 소식지 CODAY 특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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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1 - 515 coday 레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상황이다.
활동을 하고 있고 교육과정, 워크샵, 세미나, 국내‧
칠레의 병역거부는 1990년대 민주주의를 향해 절
국제회의, 그리고 스터디 센터 프로젝트(CESOCAM)
반의 반환점을 돌았다. 그것은 1996년 MOC(병역거
를 통해 이러한 것들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있
부 운동)와 NCNU(Ni Casco Ni Uniforme -
다.
Neither Helmet Nor Uniform)의 창립으로 시작되 었고 이들 단체의 창립은 주목할 만한 사회적 효과 를 가져왔다. MOC와 NCNU의 활동의 결과로 병역 거부는 국가적 차원의 논쟁 주제가 되었고 일반인들 중 젊은이들과 주변화 된 그룹들에 뿌리를 둔 운동 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징병에 마주한 사람들 이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칠레의 징병제는 오로지 낮은 계급의 사람들에게만 강제적이다.
P. Carvallo, Javier Grate Ni Casco Ni Uniforme Roberto Espinoza 1839, Santiago Chile tel +56 2 556 6066 email info@objecion.cl http://whttp://www.objection,cl/
해가 거듭될수록 더 많은 젊은이들이 징병에 반 대했고 군입대를 거부했다. 법적으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상황 속에 그 자신들을 밀어 넣었는데 왜냐하 면 칠레 정부는 군대의 압력에 굴복하고 있으며 병
전쟁없는세상을 후원해주세요!!
역거부를 합법화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다. 심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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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국제인권조약들에 사인한 것을 통해서 병역 거부를 인정하고 있음에도 그러하다. 정부는 무기 소비를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것에 투자했고 그것은 주변 국가들과의 마찰을 가져왔다. 동시에 내부적으
서울시 관악구 봉천 10동 893-5번지 2층 전쟁없는세상 (우 : 151-060) TEL : 02) 876-6897 E-mail : peace@withoutwar.org
로는 마푸체 운동과 시민단체 운동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행동은 오로지 지역의 군사적 통 제를 위해 필요한 군사적 부하쯤으로 칠레를 취급하 는 펜타곤의 독재를 방어하는 것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 MOC와 NCNU의 활동은 합법적으로 포장된 징 병제의 부정의에 대한 비폭력직접행동과 시민불복종 을 통해 칠레에서 병역거부와 반군사주의 운동을 흔 들었다. 이것은 강제적 군복무에 대한 사회적, 정치 적, 법적 저항이다. 누군가 칠레에서 병역거부를 선 언한다는 것은 징병에 등록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 것은 사실 국제법 위반이다. 따라서 모든 병역거부 자들은 그 법과 충돌한다. 우리는 또한 교육과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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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2 -유엔 참가기 병역거부권 연대회의 제60차 유엔인권위원회 참가기
그래서 그들은 제네바로 갔다 정용욱(평화인권연대 활동가, jyuk@mail.skhu.ac.kr) **이 글은 평화인권연대(peace.jinbo.net)소식지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제60차 유엔인권위원회가 지난 3월 15일부터 6주
현황, 유엔기구의 역할 등을 논의하고 향후 민간단
간의 일정으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되었다. 2년
체들의 활동 방향에 대해 모색하는 자리라는 점에서
마다 한번 씩 다뤄지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의제
정부 관계자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
와 관련하여 지난 2002년에 처음으로 유엔인권위에
다. 2년 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병역거부 수감자
참가했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연대회의’는 올해
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 국제적인 관심
다시 한 번 참가단을 꾸려 제네바를 찾았다. 이번
대상으로 부각된 한국 상황은 이번 간담회에서도 역
활동기간 동안 참가단은 국제적인 병역거부운동 단
시 많은 주목을 받았다. 특히 참가자들은 한국 보수
체인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WRI)과 공동으로 작성
기독교단의 대체복무제도 반대 입장에 대해 어떻게
한 한국 상황 보고서를 통해 매년 약 700여명의 병
기독교에서 그럴 수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
역거부자들이 처벌받고 있는 실태를 알리고 유엔 인
응을 보였으며 반복 처벌 문제를 안고 있는 예비군
권조약 가입국인 한국 정부의 책임 있는 대책 마련
병역거부자 문제에 대해서도 자의적 구금에 해당될
을 촉구했다. 특히 올해에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문제뿐만 아니라 송두율 교수 사건을 비롯한 국가보 안법 적용 실태와 집시법 개악 문제 등도 언급하며,
이날 간담회에서는 유엔에 대한 비판도 빠지지
이른바 ‘한반도 분단 상황의 특수성’ 등을 이유로 표
않았다. 이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과 관련하여
현의 자유 및 사상, 양심의 자유가 심각하게 침해되
각국의 모범사례(best practice) 보고서를 작성한 유
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 대해 보다 폭넓게 지적하고
엔인권고등판무관실의 관계자도 참석하였는데, 그는
자 했다.
2002년 채택된 결의안에 따라 지난 2년 동안 병역거 부권 인정 및 대체복무제와 관련한 모범 사례를 제
국제NGO, 유엔의 구체적인 실태조사와 가이
출해 줄 것을 각 국 정부에 요청하였으나 그 응답이
드라인 마련 촉구
매우 적어 보고서 작성에 어려움이 많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참석자들은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실이 모
이번 참가기간 중 빼놓을 수 없는 활동이 바로
범 사례만을 수집할 것이 아니라 병역거부권과 관련
민간단체 간담회였다. 이번 간담회는 국제인권연맹
한 각 국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수집, 분석하여
(FIDH), 팍스 로마나(Pax Romana), 전쟁저항자인터
병역거부권 인정과 대체복무제도에 대한 보다 구체
내셔널(WRI) 등 그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결의
적인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내는 작업에 착수하는 것
안 채택 과정에서 상당한 역할을 담당해 왔던 국제
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와 함께 전 세계에
인권NGO들이 한자리에 모여 병역거부자들의 인권
서 다양한 수위와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병역거부
☮ 소식지 CODAY 특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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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2 -유엔 참가기 문제의 실질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유엔 인권위원회 차원의 논의를 넘어 국제 인권NGO 차 원의 보다 적극적인 대응 방안을 모색해야 할 시점
유엔인권위원회
(Commission on Human Rights)
이라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53개국 정부대표로 구성되는 인권위원회는 매년 3 이미 많이 알려져 있지만 유엔차원에서는 1980년
월 중순부터 6주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된다. 인
대부터 병역거부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어 1998년 인
권위원회의 위원국은 유엔 회원국 중 지역별 안배를
권위원회 결의안에서 이에 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고려하여 선출되며, 정부를 대표하여 의견을 개진하
명시하고 있다. 일명 병역거부권의 ‘마그나 카르타’
는 만큼 국익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성격을 띄기도
(대헌장-편집자 주)로 알려진 98년 결의안에 따르면
한다. 참고로 한국정부는 지난 1993년부터 인권위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은 세계인권선언 18조와 시
회 위원국으로 활동 중이다. 인권위원회는 세계인권
민적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18조에 따라 모
선언(1948)과 두 개의 국제인권규약(1966) 의 초안을
든 사람에게 부여되어야 할 정당한 권리이고 각 국
작성한 바 있으며, 인권문제의 종류와 규모가 다양해
가는 병역거부로 인해 거부자가 투옥이나 반복된 징
짐에 따라 그 권한 영역을 점점 넓혀가고 있다. 인권
계를 받지 않도록 조치해야 하며 양심에 따른 병역
위원회는 △전 세계의 인권상황 모니터 △인권침해
거부자를 위하여 병역거부의 취지에 합당한 대체복
사건 조사 △인권에 대한 조사연구를 토대로 한 새로
무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이러한 병역거부권은 유엔
운 프로그램의 개발 △새로운 국제인권기준 설정 △
은 물론이고 유럽연합을 비롯한 전세계 징병제를 채
유엔총회나 경제사회이사회 등의 상급기관이 부여하
택하고 있는 많은 국가들에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는 인권관련 과제를 수행한다. 또한 인권관련 국가
하나의 기본적 권리로 보장받고 있다. 인권위원회의
활동에 대하여 각 국에 필요한 자문서비스 및 전문기
회원국으로서 한국 정부도 이 결의안에 따라 병역거
술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인권위원회는 어디까
부자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조치들을 자국 내에
지나 정부 간 회의이지만, 서면진술서 제출·구두발언·
서 취해야할 의무가 있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한
로비활동 등 민간단체가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다양
국 정부는 한반도의 특수한 분단 상황을 이유로 인
한 기회가 있다. 회의참가 및 서면진술서 제출, 구두
권위원회 결의에 대해 지금까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
발언 등은 경제사회이사회와의 협의지위를 가진 민간
지 않고 있다. 올해에도 한국 정부는 병역거부문제
단체들만이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협의지위 단체들과
가 헌법재판소에 위헌심사 계류 중이라는 등의 이유
의 연대와 협력을 통해 많은 민간단체들이 인권위원
로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보편적으로 인정된 권
회에 참여, 활동해오고 있다. 한국의 민간단체들도 그
리를 국제인권법이 아닌 국내법 문제로 환원해 책임
동안 협의지위를 가진 국제인권단체들과의 연대를 통
을 모면하려는데 여전히 급급할 뿐이었다. 이는 해
해 국가보안법, 일제강점기 하의 성노예, 양심에 따른
를 거듭할수록 인권이 ‘인권문제’로서 다뤄지지 않고
병역거부권, 테러방지법 문제 등을 인권위원회에 제
각국의 첨예한 이해관계 대립 속에 정치적 수단으로
기, 활동을 펼쳐온 바 있다. 현재 국내 민간단체 중
전락하거나 내정 논리 뒤로 후퇴하고 있는 인권위
협의지위를 가지고 있는 단체는 민주사회를위한변호
회의장의 현실과 겹쳐져 더욱 씁쓸함을 안겨주었다.
사모임, 한국여성단체연합, 환경운동연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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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없는세상(World Without War)
기획2 -유엔 참가기 한반도 특수성 논리는 이제 그만
권운동은 이렇게 문서로 확인된 보편적 권리들을 현 실에서 확보해 나가는 운동일 것이다. 더구나 인권
올해도 유엔인권위원회에서는 양심에 따른 병역
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다. 역사 속에서 나타나듯
거부권이 보편적 인권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하는 결
이 인권은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는 투쟁을 통해
의안이 채택되었다. 이번 결의안 역시 양심에 따른
한걸음 한걸음 진전해 온 것이다. 따라서 현실의 인
병역거부권이 세계인권선언과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권운동 역시 새롭게 그 개념과 폭을 확대하면서 재
관한 국제규약이 규정하고 있는 사상, 양심, 종교의
창조해 가야 하는 것이다. 2년 만에 다시 한국의 양
자유에 대한 “ 정당한 권리 행사”임을 다시 한 번 확
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를 가지고 제네바 유엔인권
인하였다. 또한 앞서 채결된 결의안에 따라 자국의
위 회의장를 찾으며 새삼 인권의 보편성과 현실속의
현행 법률과 관행들을 재검토하지 않은 국가들에게
실현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인정과 대체복무제도 도입
작년 이맘때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보편적으로 인
을 재차 촉구하고 있다. 올해 유엔 결의안은 공동
정된 인권인 줄도 모르고 ‘ 죄인’이 되었던 1600여 국
제안국이 지난 2002년의 14개국보다 20개국이 늘어
내 병역거부 양심수들과 인권활동가들은 비록 한쪽
난 34개국에 달했으며, 이라크 침공으로 국제적인
짜리에 불과하지만, 그리고 아무런 강제력도 갖지
비난에 직면해 있는 미국까지도 유엔인권위에서 발
못하지만 유엔인권위의 병역거부권 결의안을 접하면
언을 통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인정의 정당성을
서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2년이 지
명확히 밝힘으로써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에 대한
난 지금, 여전히 병역거부자들은 ‘죄인’ 신분에서 벗
국제사회의 강력한 지지가 재확인되었다. 이와 함께
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다양한 이유와 신념에 따른
평화시 뿐만 아니라 전쟁시의 병역거부권이 결의안
병역거부자들이 꾸준히 등장하고 있으며 이제는 그
에 언급됨으로써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은 어떠한
누구도 병역거부권이 보편적 인권이라는 점에 대해
상황에서도 침해될 수 없는 기본적 인권임이 다시
서는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과의 간극
한 번 천명된 셈이다. 이로써 소위 ‘국가안보’ 혹은
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라는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한반도 분단 상황의 특수성’이라는 미명으로 병역거
않고 남아 있다. 올해 유엔인권위원회 참가는 여전
부자들에 대한 처벌을 정당화 해왔던 정부와 국방부
히 해결되지 못한 한국의 병역거부 상황을 알리기
의 논리는 이제 더 이상 어디에도 발붙일 곳이 없게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병역거부권이 보편
된 것이다.
적 인권이라는 사실을 꾸준히 확인하고 그 과정에서 국제인권규범을 통해 확대·지속될 수 있도록 하는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고 넘겨줄 수도 없는, 인
것, 그리고 그간의 성과를 바탕으로 현실 속에서 조
간이 인간답게 생존할 수 있는 기본적 조건이 되는
속히 실현될 수 있는 토대를 어떻게 마련하고자 하
권리. 바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너무도 자주 입에 올
는데 그 목적이 있었고 또한 고스란히 과제로 안고
리는 ‘인권’의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세계인권선언
돌아왔다. 아무쪼록 내 후년에 제네바를 다시 찾을
이나 국제인권조약에서 인권을 이야기할 때에는 ‘모
때는 한국의 걸출한 모범사례를 들고 갈 수 있기를
든 사람은~’, ‘누구나~’ 같은 형식으로 서술된다. 인
기대해 본다. ☮
☮ 소식지 CODAY 특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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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2 -유엔 참가기 # 편집자 주 : 제60차 유엔인권위원회에서 현지시각 4월 19일(월) 오후 채택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 부권에 관한 결의안
시민적․정치적 권리: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결의안 공동제안국 : 알바니아*, 아르메니아, 호주, 오스트리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브라질, 불가 리아*, 캐나다, 코스타리카, 크로아티아, 체코*, 덴마크*, 핀란드*, 프랑스, 그루지야*, 독일, 헝가리, 아일 랜드, 이태리, 네덜란드*, 노르웨이*, 폴란드*, 포르투갈*, 몰도바*, 루마니아*, 러시아, 산마리노*, 세르비 아 몬테니그로*,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스페인*, 스위스*, 마케도니아*, 영국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유엔인권위원회는, 모든 사람은 사상과 양심, 종교의 자유, 차별 받지 않을 권리, 생명과 자유, 개인의 안전에 대한 권리 를 가지고 있음이 세계인권선언과 시민적정치적 ․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에 인정되어 있음을 명심하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관한 본 인권위원회의 과거 결의 사항들, 특히, 모든 사람은 양심에 따른 병 역거부를 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세계인권선언 제18조, 시민적정치적 ․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제 18조, 유엔인권이사회 일반논평 22호에 규정된 사상양심종교의 ․ ․ 자유에 대한 정당한 권리 행사라는 점 을 인정하고 있는 1998/77호 결의(1998.4.22.)의 내용을 상기하며, 1. 사상양심종교의 ․ ․ 자유에 대한 정당한 권리 행사로서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인정과 대체복무제 도에 관한 모범사례를 편찬, 분석한 유엔인권고등판무관실의 보고서(E/CN.4/2004/55)에 주목한다. 2. 유엔인권고등판무관실의 보고서 작성을 위해 자료를 제공해 준 정부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3. 아직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과 관련된 자국의 현행 법률과 관행들을 본 인권위원회의 1998/77 호 결의에 비추어 재검토하지 않은 국가들은 유엔인권고등판무관실 보고서의 내용을 참조하여 그러한 작업을 수행할 것을 재차 촉구한다. 4. 양심을 이유로 병역을 거부했던 사람들에게 사면복권 ․ 등을 제공하고 그러한 조치가 법률과 관행에 있어 실질적으로 이행될 수 있도록 할 것을 전후 평화건설 과정에 있는 국가들에게 권장한다. 5. 모든 적절한 출처를 통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모범사례에 관한 보충적 정보를 담은 분석보고서 를 작성하여 제62차 유엔인권위원회에 제출해 줄 것을 유엔인권고등판무관실에 요청한다. ____________ * 경제사회이사회 산하 기능위원회의 절차규칙 69의 3항에 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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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없는세상(World Without War)
가이드북 소개
병역거부 가이드북 소개 용 석 (병역거부자, stego@freechal.com)
반가운 소식이다. 이제는 봄이 와도 제비도 찾아
터 병역거부자를 인정할 수 없는 사회에 쏟아부어지
오지 않는 삭막함 속에서 살고 있지만, 그래도 간간
는 함성인 것이다. 때문에 이 친구는 그저 친구 일
히 들려오는 이런 반가운 소식이 세상사는 재미를
뿐이다. “네가 기쁠 땐 날잊어도 좋아 즐거울 땐 방
일깨워 준다. 병역거부자를 위한 가이드북이라... 그
해할 필요가 없지. 네가 힘들땐 나를 찾아와줘 너를
동안의 병역거부운동이 머릿속을 스쳐 간다. 그 동
감싸안고 같이 울어줄께”라며 말하는 친구이다. 이
안은 병역거부가 하나의 평화를 위한 행위로 인정받
런 친구 하나 만나보지도 못하고 병역거부를 했던
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군대가기 싫은 파렴치한 놈
이전의 병역거부자들이 감은 두 눈에 아련히 눈물로
들이라는 세상의 모진 풍파들이 이제는 아득히 옛날
떠오른다. 어쨌든 각설하고 이 놈의 친구를 사귀는
의 일들처럼 느껴지는 것은 너무 이른 감상일까? 어
건 좋은데, 친구에게만 전적으로 의존하지는 마라는
느덧 병역거부는 그것을 찬성하는 사람에게 혹은 반
이야기다. 너무 의존하는 친구사이는 오래 못 간다.
대하는 사람에게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게다가 이제는 그냥 병역거부
이쯤 되면 이 가이드북을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
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잘’해보자고 어떻게 하면 ‘잘’
들이 많아질 듯한데, 어디가면 이 친구를 만날 수
할 수 있을지 도와주는 소책자까지 나온다니 이 얼
있을까? 사실 이런 친구 만나기는 쉽지 않다. 특히
마나 행복한 일인지... 물론 아직도 북괴가 겁이 나
나 군대이야기만 나오면 쌍심지를 켜는 사람들이 득
서 100만대군도 모자라는 사람들에게는, 혹은 병역
시글거리는 곳에는 이런 친구들은 차마 무서워서 함
거부자들을 너무도 너무도 미워해서 절대로 절대로
부로 돌아다니지 못한다. 참 다행인 것은 이 친구가
병역거부를 인정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 무슨
나에게 자신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다. 자기도 친
오호통제!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구들을 만나고 싶다고. 친구들을 만나서 밤새도록 처마 끝 떨어지는 봄비 소리 들으며, 혹 세찬 소나
들어보니 가이드북에는 병역거부를 고민하는 과
기 한 여름의 내음을 들으며, 두런 두런 이런 저런
정에서 수감생활 이후까지 아주 자세히 나와 있다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모양이다. 그래서 가르쳐 줬
하니 앞으로 병역거부를 할까 말까 생각중인 사람들
다. 전쟁없는 세상 홈페이지(www.withoutwar.org)
에게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듯 싶다. 물론 병역
에 와보면 만날 수 있다고. 그래서 또 가르쳐줬다.
거부라는 것이 이 군사주의가 뼛속까지 찌들어 있는
전쟁없는 세상이나 평화인권 연대(peace.jinbo.net)로
시궁창까지 찌들어 있는 세상에 대해서 내지르는 고
연락하면 오프라인에서도 만날 수 있다고...
요하고 거대한 외침이기도 하지만, 그 기본 속성이 고요한바, 누구도 병역거부를 강요하거나 요구할 수 없는 것이다. 고요하고도 웅장한 내면의 양심으로부
☮ 소식지 CODAY 특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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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부자 활동수기 병역거부자 활동수기 - 유호근씨
'희망동네'를 아시나요? 유 호 근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공동체운동, dasi2000@hanmail.net)
전쟁없는 세상 소
보다는 부분적 조합주의 형태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식지 팀에서 “병역
난 언제부터인가 도시에도 본격적인 지역공동체 운
거부자들의 근황을
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특히 이 생각
소식지에 싣고 있는
은 스페인의 ‘몬드라곤 공동체’에 대해 접한 후 도시
데 이번 호에는 유
지역공동체는 필요성에서 가능성으로 전화되었다.
호근씨가 글을 써주
그 공동체가 가져야 할 정신은 무엇보다도 ‘나눔
셨으면 합니다. 간
과 연대’라는 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그리고 그 실험
단하게 쓰시면 되
은 앞으로 내 일생을 두고 가져가야할 과제가 되었
요.” 라는 전화를 받
다. 그러던 중 기존에 해오던 일에서 성과와 기쁨도
았다. 당혹스러웠다.
있었지만 나름의 한계에 직면하며 “진정 내가 하고
바쁜 일정들, 아니
자 하는 일을 하자”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그 모
그 바쁜 일정들보다 일에 쫓겨 마음의 여유가 없이
임을 올해 3월 발족하게 되었다. 이름하야 <나눔․
지내는 요즘 ‘간단한 글’이라는 것조차 부담스러웠기
연대평화의 ․ 공동체 ‘희망동네’>이다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없는 세상을 위해 상근하고
그러나 이 모임은 내가 본질적으로 꿈꾸는 단체
있는 분들에게 미안해 그만 승낙해 버리고 말았다.
의 최종판은 아니다. 본격적인 도시지역공동체로 나
그리곤 소식지팀에서 마감시한으로 정해준 5월 9일
아가기 위한 워밍업정도로 정의하는 게 적당할 듯싶
을 1시간 30분 남겨놓은 저녁 10시 30분에서야 글
다.
을 시작하고 있다.
‘밥’은 평화 지역공동체 ‘희망동네’
어떤 이들은 내게 “그럼 이제 ‘병역거부’운동은
개인적으로 나는 공동체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그
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하기도 한다. 그럼 나는
래서 지난 수년간 이런 저런 책들도 살펴보고, 관련
“‘ 병역거부’운동은 평화운동이다. 밥, 즉 인간으로 살
신문이나 방송도 가급적 빼놓지 않고 보고 있는 편
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을 확보하는 것이 바로
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나라의(아마 세계
평화 아닌가? 난 그런 평화운동을 하고 있다.”라고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공동체 운동이라는 것이 대부
답하곤 한다. 실제로 얼마 전 한 어린 학생이 먹을
분 ‘귀농형’과 ‘종교형’으로 국한된다는 것이다. 그
것이 없어 택시강도를 했다가 택시기사의 온정으로
외 도시지역에서의 공동체 운동은 삶의 공동체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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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없는세상(World Without War)
병역거부자 활동수기 풀려난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된 바 있다. 인간으
움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고통 속에
로서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보장이야말로 어쩌면
감춰진 희망의 빛을 종종 발견하곤 한다.
‘평화’라는 상태의 전제가 아닐까? 최근 내가 살고
‘공동체성’은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내재되어 있
있는 지역에서 철거문제로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다. 그러나 극심화 된 자본주의사회에서 황금만능주
그때 참으로 재미있는 단체의 구성원들을 볼 수 있
의가 횡횡하고 있는 지금도 ‘좋은일’이라며 동참하는
었다.
많은 주민들을 종종 만나곤 한다. 중요한 것은 가슴
‘밥과 투쟁’
속에 숨겨져 있는 공동체성의 회복이다. ‘공동체성의
그것이 그들의 이름이었다. 소외받고 있는 고통
회복’ 그것이야말로 평화를 만들어 가는 자양분이
속에서 투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달려가
될 것이다.
‘밥’을 해주는 이들이었다. 이주노동자, 철거민과 같
그러나 다른 한편 ‘공동체’라는 허울을 쓰고 오랜
이 더 이상 쫓겨날 곳조차 없는 이들이 그들의 ‘운
기간 우리를 억눌러온 전체주의를 경계해야 할 것이
동장소’였다. 참으로 신선했다.
다. 그 대안은 무엇보다 연대의 정신에 기초한 공동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속담이 있다. 먹을 것만 충
체간의 네트워크 형태여야 한다. ‘서로의 다름을 인
분해도 우리는 보다 평화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따
정하며 억지로 통합하는 것이 아닌 자발적 연대를
뜻한 열대기후에서 살고 있는 이들의 성격이 낙천적
강화해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펼치고
인 이유도 매한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사회의
있는 다양한 운동의 형태 사이에서도 적용할 수 있
모습은 그렇지 못하다. 산업사회의 발전으로 전체적
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잊지 않기 위해 항상 노력
인 부는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지만 서민들의 생활
중이다.
은 별로 나아진 것이 없고 극빈층의 생활은 여전히 비참하다. “가진자는 더욱 부유하게 만들고 못가진
마치며
자는 더욱 처참하게 만드는 시스템이 바로 우리의
쓰다보니 무겁고 딱딱한 글이 되어버렸다. 아마도
발아래 놓여있다. 이런 사회시스템은 범죄를 야기한
요즘 내 머릿속이 온통 앞의 글 내용으로 가득 차
다. 그 시스템을 변화시켜야 한다.” 여기까지가 과거
있기 때문이겠지 하고 양해해주길 바란다. 이제 상
내 활동의 전제였다. 그러나 “시스템이 온전하게 변
당히 많아진 병역거부자들의 면면이 참으로 다양하
화되기 전에 그 시스템에서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을
다. 비록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이기란 쉽지 않지만
돌보는 것이 우선이다.”라는 것이 최근 내 고민의
모두가 자신이 속해 있는 곳에서 열심히 살고 있을
핵심이고 그것이 지금 활동하고 있는 ‘희망동네’라는
것이라는 믿음만은 확고하다. 5월 15일 세계병역거
단체의 최! 우선적인 활동 목표가 될 것이다.
부자의 날에 맞춰 한국에서는 두 번째의 행사가 열 린다. 병역거부자로서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삶
공동체와 네트워크
을 살고 있는지 다시금 되돌아보게 되는 밤이다. ☮
새로운 단체를 만들다 보니 이런 저런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다행히 3명의 상근자를 확보했으니 인력의 측면에서 한숨을 놓게 되었지만 그에 비례하 게 어려운 부분은 재정문제이다. 그 이외에도 어려
☮ 소식지 CODAY 특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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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부자 활동수기 병역거부자 활동수기 - 최진씨
나는 이 땅에 교사로서 군대를 거부합니다! 최진 씨는 현재 문경 용흥 초등학교 교사로 5월 15일 입영을 앞두고 병역거부를 선언했습니다. 최진 씨와 함께하고자 하는 분은 후원회 홈페이지: http://cafe.daum.net/naagaljin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최진 씨 관련 기사를 보고 싶으신 분들은 전쟁없는세상 홈페이지(www.withoutwar.org)를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그의 자녀였기 때문입니다. 이후로는 한 땀 한 땀 바느질 을 하듯 걸음을 옮겼습니다. 이 땅의 미움과 무관심 으로 갈라진 관계를 걸음을 통해 회복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직도 그 걸음을 걷고 있습니다. 하늘이 허락하는 한 그 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 다.
저에게 병역거부에 대한 씨앗이 싹튼 계기는 55 년 전 지금 제가 살고 있는 문경의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2003년이 시작되던 겨울, 제천에서 국어교사를 하고 있는 한 선생님께 서 제게 이런 제안을 하셨습니다. 양민학살지인 단 양의 곡계굴에서 문겨의 석달마을까지 평화도보순례 를 기획해보면 어떻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자연스레 저는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길에서 세상을 만나 고 스승을 만나고 친구를 만나왔습니다. 사람과 풀 과 나무와 작은 새들, 별빛과 바람냄새와 물소리를
6.25사변 전후에 있었던 양민학살의 역사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석달마을에서 일어난 사 건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1949년 12월 24일
형제로 여기며 길을 걸었습니다. 그 여정 가운데 내
오후 2시 경, 국군 2개 소대는 문경의 주월산에 있
안에 계신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내가 미워하고 감
는 공비를 토벌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석달마을에
추려했던 나의 모든 모습을 하느님이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길 위에서 나 는 나를 만나고 나를 위로하고 나에게 용서를 구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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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없는세상(World Without War)
도착하였습니다. "국방군이 와도 환영하지 않는 것 을 보니 빨갱이 마을이다."라는 소대장의 불평과 더
병역거부자 활동수기 불어 24채의 집을 모조리 태우고 전 주민 127명 중
아팠습니다. 강한 나라와 큰 기업의 이익을 위해 그
86명을 학살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13살 미만의 아
억울함은 덮여질 것입니다. 그 아이들은 우리 반 아
이들이 27명이나 되었지요. 이때부터 막연하게 이해
이들과 다를 바 없는 아이들입니다. 모두가 하느님
하고 있던 군대에 대해, 우리의 역사에 대해 공부하
의 자녀이며 한 형제입니다. 국익을 이유로 파병한
기 시작하였습니다.
국가의 국민으로서 그들에게 저 역시 살인자가 되었 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은 이라크에 대 한 보복전쟁을 선언하였습니다. 제가 근무하고 있는
나는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이 땅의 교사로서 전
초등학교의 반 아이들과 함께 논의를 한 끝에 아이
쟁에 반대합니다. 폭력에 반대합니다. 군대를 거부합
들은 피켓을 만들고 저는 문경 시내에서 1인 시위를
니다. 이라크만의 문제가 아닌 제가 사는 이 세상의
시작하였습니다. 난생 처음 하는 1인 시위라 부끄러
현실이 폭력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 안
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흘쯤 지나자 가슴
에서도 군사문화의 잔재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아이
엔 이라크에 있는 1500만 명의 아이들에 대한 마음
들의 생명력 넘치는 자율과 교사의 기다림에 방종과
이 가득 차기 시작하였습니다. 매일 1시간 동안의 1
무능력의 낙인을 찍습니다. 더불어 존중하며 삶의
인 시위는 온전히 기도하는 시간으로 바뀌었습니다.
원칙을 세우고 서로를 사랑하는 모습은 불신의 장막
스무 날 남짓 1인 시위를 하고 아이들과 함께 대통
에 짙게 가리워 있습니다. 졸업식날 상장 받는 연습
령께 편지를 쓰고 아침마다 이라크의 아이들을 위해
을 하며 미리 정한 순서대로 나오지 않았다고 아이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각자가 믿는 신을 향해 기
들에게 호통치는 교사의 모습을 보며 군사문화의 허
도드렸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일어났고 대한민국 정
상이 우리의 일상에 너무나도 깊게 현실로 자리함을
부는 국익을 이유로 파병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소식
봅니다. 군대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대로의
을 접한 저와 아이들은 할 말을 잃고서 한참을 앉아
아름다운 삶을 지킬 수 없습니다. 군대의 본질이 폭
있었습니다. 전쟁의 공포에 떨게 될 이라크 사람들
력이기에 사람에게 폭력의 씨앗을 심고 키웁니다.
을 위해 아이들과 함께 기도를 올리며 대한민국의
지배당하던 삶은 또 다른 지배를 낳을 뿐입니다. 실
초등학교 교사로서 아이들 앞에서 가눌 수 없는 부
체가 없는 두려움과 불안함에 길들여진 학교는 서로
끄러움과 분노가 솟아올랐습니다.
의 자유를 속박합니다. 하늘이 주신 진정한 감사의 나눔과 섬김을 한낱 이상으로 치부하게 만듭니다.
총선을 앞두고 불리한 상황이 될까봐 이승만 정 부는 억울하게 학살당한 민간인들을 죄인취급하였습 니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동안 대한민국은 국가의 안보를 이유로 사실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
정말 두려운 것은 이것을 너무나도 당연히 받아들이 는 나와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 의 사랑을 잊고서 사는 일상입니다. 비단 학교만의 모습이 아니라 이 사회의 깊게 병든 모습입니다.
의 상황과 이라크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 겪는 상황 은 저에게 다르게 느껴지지 지지 않았습니다. 석달
"한 개인을 업신여김은 그의 거룩한 능력들을 업
마을의 아이들에게 일어났던 폭력이 이라크의 아이
신여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한 몸만을 해하는 것
들에게 다시 일어날 생각을 하니 가슴이 찢기는 듯
이 아니라 더불어 온 세계를 해하는 것이다."
☮ 소식지 CODAY 특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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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부자 활동수기 간디의 이 말에 저의 모든 삶으로 동의합니다. 간
병역거부자들 재판 소식
디가 우리에게 남긴 정신은 폭력을 쓸 수 없는 상황 에서 어쩔 수 없이 하는 나약한 비폭력이 아닙니다. 일상이 비폭력이어야 하며 상대가 누구이든지 그 안 의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간디의 비폭력입니다. 그 런 의미에서 저의 병역거부는 군대만을, 전쟁만을
-2004년 5월 24일
오태양씨 재판이 동부지
원(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진행됩니다. 장소 가 확실히 정해지는대로 <전쟁없는 세상>홈페이 지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의 폭력과 사회의 폭 력으로부터 우리의 소중한 일상을 지켜나가는 것입 니다.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자연이 진정으로 더불
- 4월 29일에
임태훈씨 첫 재판에서 실형 1
년 6개월을 선고받았습니다. 보석과 불구속 수
어 사는, 하느님이 처음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삶
사가 늘어나고 있는 시점에서 안타까운 소식입
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회복의 실천이 '비폭력 직
니다. 임태훈씨는 현재 항소심을 준비하고 있습
접행동'입니다. 저는 비폭력 직접행동으로써 군대거
니다. 지지와 격려 부탁드립니다.
부를 선언합니다. 저는 그것을 아이들로부터 배웠습
영민씨가 보석으로 출소했습니다. 1심재판
니다. 가난해지더라도 공평함을 기뻐하는 아이들은
-
저의 스승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람으로 대접받
진행 중입니다.
기를 원하고 그것을 기뻐하는 아이들은 저에게 사람
최준호씨가 드디어 1년 넘는 수형생활을 마
답게 사는 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아이들을 보며
-
비폭력 직접행동을 통해 회복하고자 하는 우리의 일
감하고 출소했습니다.
상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있기에 믿고 붙드는 것입니 다. 거짓 없이 정직하게 살자고 나누었던 아이들과
병역거부 양심수에게 편지를!!
의 약속을 이제는 지킬 때가 왔습니다. 한 사람의
2004. 2. 15 현재
능력으로 세상에 평화가 오게 할 수는 없습니다. 다 만 폭력으로 척박해진 이 세상에 한 알의 밀알이 되 고자 합니다. 하늘이 비폭력 직접행동을 더불어 실 천할 길동무들을 저에게 보내주실 것을 믿습니다. 나의 어린 스승들에게, 한 명 한 명의 가슴 속에 살
5 2 1명 (명단을 보실 분은 peace.jinbo.net 으로!!)
☮강철민
아 계시는 하느님께 부끄럼 없이 살고자 하는 작은
(우 : 630-705) 마산시 마산 우체국 사서함 7호 551번 강철민
소망으로 군대와 전쟁과 이 땅의 모든 폭력을 거부
지원단 홈페이지 : peace.gg.gg
합니다.
☮임태훈 ☮ 2004년 4월 30일 최진
(우 : 435-050) 경기도 군포우체국 사서함20 서 울구치소 수감번호 3318번 전자서신 보내기 : 서울 구치소 홈페이지 http://www.moj.go.kr/corrections/seoul/ind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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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없는세상(World Without War)
병역거부자 활동수기 병역거부자 활동수기 - 임태훈씨
1심재판 최후진술문 임태훈 씨는 1심 재판에서 병역거부자 구속수사의 부당성을 이야기하는 도중 판사의 제지로 최후진 술이 중단되었습니다. 또, 최근 보편화되어 가는 불구속 수사, 보석허가, 재판 유보 추세에 역행하여 실형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항소심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잠들기 전에 저는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좌이대
본인 소유의 주거가 일정하고, 이미 공소사실을
단의 심정으로 출정전야를 맞이하였습니다. 47일 동
모두 자진해 인정하며 증거인멸의 염려도 없고, TV
안의 구속수감 생활과 구속 이후 첫 재판까지 28일
출연과 각종 기자회견 및 재판 모니터링으로 공개적
간의 단식은 병역거부에 대한 나의 신념을 다시 한
활동을 하고 있음을 객관적 자료를 통해 모두 입증
번 확인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였고, 8년여 동안 인권
하여 도주의 우려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재판부는 완
활동가로서의 삶을 성찰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
고한 앎에 대한 기피 의지로 일관하였습니다.
다. 그리고 인권활동가들이 그토록 보고 싶어하는
이런 과도한 인신구속 남용의 책임은 과거에는
감옥의 인권을 두 눈으로 생생하게 보게 되어 개인
수사시관인 검찰에 더 많았으나 구속영장실질심사제
적으로 무한한 영광이었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궁
의 도입으로 잘못된 구속영장 발부의 책임과 비난은
리와 대안을 모색하게 해주었습니다.
고스란히 사법부의 몫이 되었습니다.
또한 행형제도와 형사법의 허구성을 몸소 체험하
만약 저에 대한 구속사유가 법외적 예컨대 범죄
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97년 개정 형사
의 경중이나 범죄자에 대한 응징의 필요성과 일반예
소송법에 의거 구속영장실질심사제도가 실시되던 초
방효과, 수사와 재판 및 형집행의 편의성에 따른 것
기 불구속수사와 불구속재판의 원칙을 실현하려는
이라면 이것은 분명 초법적 발상이라 더욱 비난받아
사법부의 의지는 매우 확고했고, 일선의 영장전담
마땅할 것입니다.
판사들이나 형사 단독 판사들에게서도 이에 따른 광 범위한 공감대가 형성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이러한 사법부의 과도한 인신구속의 남용은 교도소와 구치소의 과밀수용으로 이어져 재소자 1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구 10만 명당 미결수용자
에게 평균적으로 할당된 수용시설의 단순면적이 0.5
수는 평균 60% 이상이며, 유럽 국가들의 40% 미만
평에 미치지 못하고, 숙식을 하기에는 지나치게 협
과 일본의 10% 미만과 비교해 볼 때 매우 높은 구
소해 칼잠을 자야하며, 그 결과 여가활동 공간이나
속률을 보이고 있습니다. 제가 이 부분을 지적하는
운동시간 부족, 면회횟수와 시간 및 장소 등이 축
이유는 형사소송법 제 70조의 구속사유 즉 주거부정
소될 수 밖에 없습니다. 또 의사 1인당 1000여명의
과 증거인멸의 염려 및 도주우려가 전혀 없음에도
제소자를 진료함에 따라 의료권 침해와 300여 명의
불구하고 영장전담부 판사는 저에 대한 구속영장을
(서울구치소)치매, 중독, 정신질환 자들이 병보석 내
기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 소식지 CODAY 특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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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부자 활동수기 지 치료감호를 받아야함에도 해당 판검사들은 이를
모든 연수생들에게 경찰서 유치장부터 경찰 구치감
묵살하고 있어 반인도적인 행위의 가해자들이 되어
구치소로 이어지는 전 과정을 체험하게 하고 2주동
버렸습니다. 이는 헌법이 보장하는 신체적 자유와
안 수용생활 하는 것을 필수과정으로 제도화하는 동
행복추구권 및 인격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으며
시에 배심원제도와 참심제를 도입하여 시민이 재판
UN 가입과 동시에 비준한 경제, 사회, 문화적 권리
과정에 참여하고 인권단체들이 사법부 감시를 통해
에 관한 국제조약과 시민,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
일본 제국주의적 사법잔재와 군사독재 시절을 거치
제조약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며 잔존하던 반인권적 사법체계와 관행을 철저히 뿌
위와 같은 과밀 수용으로 인한 공간 부족은 무엇
리 뽑는 대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다도 수용자의 사회복귀를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 하며, 재사회화를 위한 중요한 전제조건이기도 한
제가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이번 재판이 졸속
수용자의 분류가 형식적으로 행해지기 쉽고 신규 입
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
소자의 성격과 경력 및 적성에 대한 엄밀한 조사와
다. 그중에서 가장 문제가 심각한 것은 재판부의 재
심사를 하여 수용자의 재사회화를 위한 최적의 조건
판에 임하는 태도입니다.
과 장소를 찾는 것이 분류심사의 목적이 되어야 하 지만 이제는 어느 교도소의 '빈자리'를 찾아 입소시 키느냐의 문제가 우선 과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근거로 첫째, 법원에 의해 현행 병역법이 위헌 의 소지가 다분하여 위헌제청신청을 헌법재판소에 제출하였고, 아직 판결이 나지 않아 대다수의 병역
궁극적으로 보안과 질서 유지에 신경을 더 씀으
거부자들에게 각 재판부는 구속영장을 기각하거나
로 재사회화 노력보다는 소극적인 구금 위주의 행형
보석으로 불구속재판 또는 심리와 선고를 무기한 연
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과밀수용으로 인해
기하고 있음에도 재판장 자신의 생각은 다르다며 법
교도관들의 업무량이 많아지고 업무 부담이 커지면
에 의해 판단하지 않고 법외적 자신의 윤리관과 가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가 쌓이기 마련이고 특히
치관을 내포한 듯 말하고 있고, 심지어 피고로 하여
교정직원들은 일반사회와는 전혀 다른 폐쇄적인 감
금 재판장을 호모포비아(동성애 공포증)로 의심케
옥사회에서 생활하고 있고 항상 재소자들과의 갈등
하였으며 둘째, 실체적 진실주의에 입각하여 올바른
과 충돌의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수용인원이 적정
심리를 진행하기는커녕 변호인이 제출한 자료조차
수준일 경우라 하더라도 그들의 직업생활에서 받는
제대로 검토하지 않아 1차 심리에서 피고인 저에게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는 일반 직장인들에 비해
무슨 인권 운동하느냐 또 국제사면위원회가 무엇을
상대적으로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하는 기관이냐는 둥 재판부의 권위를 스스로 깎아내
자신들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잃어버림과
리는 제 우물에 독약 치는 오류를 범한 사실조차 인
동시에 재소자를 교화시켜 사회복귀를 도와주는 교
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셋째, 현행 병역법이 동성애
도관으로서의 보람과 자부심보다는 단순하게 재소자
를 성적 선호도 장애, 성전환자를 성주체성 장애로
의 동태를 살피고 감시하며 열쇠로 자물통만 열어주
규정한 것이 동성애자인 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는 소위 간수로 전락해버린 지 오래 되었습니다
지에 대한 심리조차 없어 재판에 임하는 재판장의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현 사법연수
양심과 진실성을 의심케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는
원 제도를 개혁하여 판사와 검사 임용을 지원하는
얼마 전 서울 고등법원 제 6특별 재판부가 동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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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없는세상(World Without War)
병역거부자 활동수기 관련 재판에서 보여준 심리 과정과 실체적 진실에
끝으로 수감생활 제가 지치지 않게 마음써주신
접근하려는 태도, 그리고 판결문 중 동성애자의 기
선후배, 동료, 동지들과 저를 양심수로 지정하여 석
본권을 인정한 판례를 남겨 모르쇠로 일관하는 서울
방운동을 위해 애쓰신 국제사면위원회 아이리 칸 사
중앙지법 형사 제8 단독관은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무총장 국제사무부 동아시아 담당 라지브, 한국지부
제가 병역거부를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현행 병역법
회원들, 해외 LGBT그룹 각국 서신 보내주신 인권활
이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며 동성애자의 권리를 침해
동가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리고 나의 동지이
한다는 내용으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하
자 친구들이 제60차 UN인권위원회에 참가하여 민
였습니다. 특히, 동성애자 인권 침해의 법적 근거는
변의 협의 자격으로 구두발언을 통해 송두율 교수
국가인권위원회 법에서 명시한 성적 지향에 의한 차
사건을 비롯한 국가보안법, 집시법 문제와 양심에
별금지 조항에 따른 것입니다. 동성애를 정신병으로
따른 병역거부 문제를 지적하며 국제인권연맹 , 팍
취급하고 군형법 91조가 합의된 동성애 행위까지 처
스 로마나, WRI 등과 더불어 활동한 것을 고맙게
벌함으로써 완고한 이성애주의를 확립시키며 군복무
생각합니다. 저의 수감생활을 걱정하시며 10분도 못
를 통해 삐뚤어진 남성다움을 강요하고 이를 사회가
보는 얼굴 보시려고 먼 거리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
인정하는 형식으로 이에 반대되는 동성애를 반체제
주신 어머님께 가슴 많이 아프게 해드려 대단히 송
적으로(의도하던 의도하지 않았던) 낙인찍고 있습니
구스럽다는 말씀 올립니다, 늘 건강하시길 신께 기
다. 따라서 한국의 병역제도의 반인권, 반동성애성을
원합니다.
문제삼고 이를 폭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 다. 위와 같은 근거들을 종합해 볼때, 재판부는 최소 한 국가인권위원회에 의견서 제출을 요청해야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가슴이 말하는 것을 머리가 따르
2004년 4월 13일 ☮
지 않는다면 그것은 온당치 못한 것이다"라고 밀란 이 말한 것처럼 이는 곧 양심이 말하는 것을 행동으 로 옮기지 않는 것은 동양철학도로서 기본정신인 지 행합일에 반하는 것입니다. 독선호학하며 수사선도
선고는 한 순간이지만 역사는 영원하다고 믿는 끼 많고 기갈 드샌 인권활동가 임태훈
라는 논의 구절처럼 나의 인권에 대한 신념은 당당 하며 평화에 대한 신념은 더 당당하며 병역거부에 대한 신념은 언제나 당당합니다. 내가 믿고 따르는 인권과 평화 그리고 병역거부에 대한 신념을 이 자 리를 통해 여러분들과 나누고자 하는 소박한 희망조 차 주어지지 않았지만 이 자리를 통해 제 가슴속에 간직한 작은 신념을 여기 계신 모든 이들에게 드리 고자 합니다.
참고문헌 [행형과 형사사법] 한영수 저. 새창출판사, 2000년 [호치민 평전] 찰스 펜 저. 김기태 옮김. 자인, 2001년 [세계사 편력] 네루 저. 장명국 편역. 도서출판 석 탑, 1982년 [논어] [도덕경]
☮ 소식지 CODAY 특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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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부자 활동수기 병역거부자 활동수기 - 영민씨
이렇게 지냈습니다. 영 민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mean16@hanmail.net)
이제야 이렇게 출소 인사를 드리게 됐습니다. 변
있었습니다. 위에 이야기 했던 해야 할 것들 고민할
명을 하자면 출소 일주일 후에 있을 안티미스코리아
것들이 더 많았었던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아
대회에서 병역거부 퍼포먼스를 준비한다고 이렇게
쉬운 마음과 홀가분한 마음으로 옷을 갈아입고 밖으
늦게 인사를 드리게 됐습니다.
로 나왔습니다. 나오기 전 조금 높은 사람인 듯한 사람이 이곳에서 안 좋은 일은 없었냐고 물어보더군
4월 29일 보석으로 출소
요. 방안 사람들과의 폭력이나 그런 것들을 물어보 았는데 너무나 황당하고 어이없었습니다. 0.7평의 독 방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데 4.5평이 되는 공간에
재판을 앞두고 재판 전후로 보석으로 나올 수 있 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나오기 전에 뭔가를 해볼까
많게는 13명을 집어넣고 있는 상황이 반인권적이라 고 쏘아 붙이고 나왔습니다.
라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가령 순시를 도는 보안과
어둑한 길거리를 나왔습니다. 이제까지 신경 써준
장한테 달려가서 왜 이렇게 인사해야 하는지 나는
아샬과 채은영, 그리고 저희 친형이 기다리고 있었
잘 모르겠고 당신은 뭐 길래 그렇게 폼잡으면서 사
습니다. 솔직히 뭐가 뭔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다음
람들 위에 굴림 하려 하냐고 한 소리 하고 싶었습니
날에 있을 재판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습니다. 간만
다. 점검 할 때는 교도관들에게 왜 이런 식으로 점
에 집에서 잠을 잘 거라 생각했는데 이것저것 해야
검 하냐고 당신들이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이
할 일이 생겨서 전쟁없는 세상에서 잠을 자게 됐습
잘 있나 없나 안부 물어보고 알아서 하라고 말해주
니다. 집에서 좀 편안하게 잠을 자지 못했네요. ^^;;
고 싶었습니다. 실은 조금 더 있어 볼까라는 생각도 했답니다. ( __);; 이 안에서 할 수 있는 일도 많고 해야 할 일도 있다고 생각했지요.
4월 30일 첫번째 공판
함께 생활했었던 방안 사람들도 조금 더 있다가 나갈 거라고 생각했었던 모양입니다. 특별히 이야기
다른 일을 처리하고 2시에 남부지원으로 향했습
를 정리하거나 뭔가 부탁을 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니다. 솔직히 재판 과정에서 다시 구치소로 들어가
이불을 깔고 누워서 TV를 보고 있을 때 저는 출소
야 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를 하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기분이 좋았습니다. 하
재판이라는 것을 처음 접해서 그런 것이겠지요. '나'
지만 그 안에서 정들었던 사람들과 뭔가 더 이야기
라는 존재가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규정지어지고
할 것이 있었던 거 같기도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아
단정지어지는 순간이 되어 버릴지도 모를 일이 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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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없는세상(World Without War)
병역거부자 활동수기 니다. 다행이도 이번 판사는 병역거부에 지대한 관
런 것들을 만들어 가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
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재판을 하는
다. 자유롭게 왔다갔다하며 감옥에 대한 이야기, 학
과정에서 독일의 병여거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이
교에 대한 이야기, 군대에 대한 이야기들을 말입니
번에는 독일의 경우를 바탕으로 판단하려 하는 듯
다. 인권의 사각지대라고 말하는 그런 공간들은 이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상당히 획기적인 일이 아
렇게 계속 묻혀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느꼈습니
닐 수 없습니다. 다음 재판을 5월 말로 잡았다가 변
다. 얼만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뭔가를
호사가 조금 더 시간을 달라는 말에는 '여호와의 증
해볼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함께 하실 수 있는
인들은 300년을 기다렸는데 한두 달 못 기다리겠습
분들이 많았으면 좋겠네요.
니까?'라는 말로 6월 9일로 두번째 재판을 잡게 되 었습니다. 독일에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평화의 신
마치며
념에 대한 활동 사항들을 증거로 제출해 달라는 것 이었습니다. 무언가 획기적인 재판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만큼 저는 부담을 가져 야 하는 것임에 틀림없겠지요. 재판이 끝나고 다리가 휘청거리는 것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제가 원래 좀 소심하거든요. ^^;; 준비했 었던 말도 제대로 못했던 것 같습니다. 너무 쫄았거 든요. ^^;; 일단 영장실질 심사 이후의 제가 안보이던 때의 이야기를 주로 적었습니다. 병역거부 이후로 저의 삶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위에서도 말했다 싶이 적극적인 평화를 찾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게 된 것이죠. 이제까지 사람에 대해 고민 했던 것
구치소 안에서 하늘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높고 옅은 파란색의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늘을 그냥 바라만 보았습니다. 보는 자체로도 좋 았으니깐요. 하지만 출소 이후로는 그 만큼 하늘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저도 벌써 잊어 가 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저것 병역거부와 관련해서 할 수 있는 일들 을 어떻게든 함께 해보고자 지문날인 거부도 해보았 습니다.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이 정도라도 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려 합니다. 저의 정신건강을 위해 서 말이죠. ^^*
들을 조금 더 넓게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
출소 후에는 5월 8일에 있었던 안티미스코리아
습니다. 하지만 나름대로의 고통도 있었습니다. 감옥
대회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게 일주일을 보낸 것 같
에 들어 가서 할 수 있는 것들을 많이 준비 못했습
습니다. 병역거부 이후에 함께 할 수 있는 뭐든 하
니다.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중고등학교의
고자하는 마음으로 준비를 했습니다. 남성중심적인
반인권적인 일들을 잊어버리고 대학에 들어가고 군
폭력적인 군사문화는 여성들에게 상당히 많은 폭력
대에 관련된 반인권적인 일들을 잊어버리고 제대를
을 가하고 있기에 안티미스코리아와도 함께 할 수
하며 이런 저런 활동을 하고 감옥에 들어가 있었던
있는 것들이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다행이도 많
활동가들이 출소를 하고 난 다음에 감옥에서 있었던
은 분들이 호응을 해주셨구요. 성황리에 행사를 마
일을 잊어버리고...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
쳤습니다. 아쉬운 건 저의 변론 비용을 그 자리에서
는 공간이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 일들을 맡아
어떻게든 모금을 하든 마련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
서 해올 사람도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조금씩 그
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아쉽습니다.
☮ 소식지 CODAY 특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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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부자 활동수기 뒤돌아보고 생각해 보니 아쉬운 것이 많이 있습
도움 부탁드립니다.
니다. 끊임없이 계속해서 고민하면서 이것 저것을 해보고 싶습니다.
보석으로 나올 수 있을 때 까지 도와주신 진선미 변호사에게 감사드립니다. 변호사 접견 시간에 잡아
덧붙여 5월 8일 새벽에 풍동 철거대책위원회 골 리앗에 용역 깡패들이 화염병과 새총을 들고 H빔을
주신 손과 전해 주신 말들은 많은 힘을 되었습니다. ^^*
꽂은 포크레인으로 무자비한 침탈을 강행했습니다. 영장실질심사 하기 전까지 제가 간간이 머물렀던 곳
변호비용 마련을 위한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 여유
이기도 합니다. 따듯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따듯한
가 되시면 조금씩 도와주세요. ㅠㅠ
공동체 였던 그 곳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으리으 리한 집이 아닙니다. 두다리 뻗고 지낼 수 있는 가 국민은행 412702-01-274368 예금주 : 전영민
수용 주택이며 저렴한 임대 주택입니다. 선대책 후 철거를 외치는 그들을 지지합니다. 집은 상품이 아 닙니다!!
풍동
철대위
홈페이지는
http://nobreak.gg.gg 입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저의 후원 홈페이지 주소는 http://mean.2ing.net 입니다. 오셔서 글도 많이 써주세요~^^/ ☮
수 입 내
용
총계 금
액
금 505000 3월 이월금
개인후원금 유료상영회
+968832
46650 수입
+551650
지출
-850010
551650
합계
액
합계
670472
지 출 내
용
금
액
선전물품
20600
사무용품
66200
소식지(인쇄+발송) 교통비
60000
생수
21000
각종공과금
244420
제네바비행기취소
200000
감옥인권판례집
30000 850010
합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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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790
☮ 전쟁없는세상(World Without War)
4월 회계(3.31~4.30) 회계 내용은 전쟁없는세상 홈페이지 (www.withoutwar.org)에 공개됩니다.
번역글 번역글) History about Conscientious Objection 새로운 병역거부(The New Conscientious Objection)/ 옥스퍼드대학 출판사(Oxford University Press)
덴마크 : 병역거부의 선봉 헨닝 쇠렌센(Henning Sørensen) (번역자 : 오리, duck52@jinbo.net, 평화인권연대 활동가)
유럽에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역사적으로 대
인 양심의 가책을 역설하였다. 덴마크 당국이 남긴
부분의 사례에서 병역거부권에 대한 인정과 병역거
기록에 의하면 최초의 병역거부 사례는 1884년에 있
부자들에 대한 자유주의적 규정(대체복무 포함)에서
었고 그것은 종교적 병역거부와 관계된 것이었다.2)
선도적 위치에 있어왔다. 이러한 진보적인 국가들
소문에 의하면 거부자들은 그렇게 가혹한 대우를 받
사이에서 덴마크는 이러한 자유주의적이고 세속화된
지는 않았다고 하나 그들을 위해 만들어진 특별 규
병역거부를 향한 운동의 선봉이었다.
정은 없었다. 3)
전 세계적인 남성 징병은 1849년 제정된 헌법에
세기가 바뀔 무렵에 수많은 사회주의자들과 아나
따라 덴마크에서 처음으로 도입되었으며 현재까지
키스트들이 정치적인 이유에서 병역을 거부하였고
유효하게 남아있다(그 이전에는 농촌사람들만이 필
그들은 군 규율을 위반한 자로 취급되었다. 저항은
요에 따라 징집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징병제가
1차 세계대전 시기에 폭발하였다. 그들은 1차 세계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도시사람들은 당시 선생님,
대전을 ‘자본가들의 전쟁(capitalist's war)’이라 규정
장관, 프로그램의 일부이거나 어떤 다른 직업을 가
하고 저항하였다. 그 전쟁에서 덴마크는 잘 무장되
지고 있었지만 면제되었다. 게다가 이렇게 어떤 사
었으나 법적인 중립 국가였다. 1914년에서 1917년
람들이 징병을 면제받는 것은 1849년부터 1867년 사
사이
이에는 합법적이었다.1)
(consistent antimilitarist)”라고 불린 상당수의 사회
비록 병역거부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규정은 없었
덴마크
사회당과
“일관된
반군사주의자
주의자들이 전쟁과 의무적 군복무에 반대하여 저항
지만 몇몇 사람들은 집총을 하는 것에 대해 종교적 1) Svend Erik Larsen, Militœrnœgterproblemet I Danmark, 1914-1967 (The Conscientious Objection Problem in Denmark, 1914-1967) (Odense: Odense Univeristy Press, 1977), 9.
2) Ibid., 9-10. 3) Devi Prasad and Tony Smythe, eds., Conscription: A World Survey: Compulsory Military Service and Resistance to It. (London: War Resisters International, 196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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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글 하였고 그 수는 계속적으로 늘어났다. 종교적 병역
정의회는 지원자의 진실성에 관한 입장과 권고사항
거부자들이 적은 수였던 것에 비해 사회주의자들의
을 전쟁부(Ministry of War)로 보낸다. 전쟁부는 병
수는 많았고 정치적 문제를 주장하였다. 결과적으로
역거부 지위에 관한 최종결정을 하는 곳이다.
덴마크 정부는 병역거부를 명백히
인정하였다. 4)
1993년 병역거부자들을 관할하는 재판권이 전쟁
1917년에 덴마크 의회는 (비록 자격을 얻기 위해
부에서 내무부로 바뀌었다. 그러나 전쟁부 하에서도
선 거부의 사유가 ‘반군사주의’ 이상이어야 하지만)
병역거부자들은 군 관례적 규율에서 예외였다. 대신
병역거부를 인정하는 대체복무법(alternative service
초반에 워크캠프(work camp)의 상관이 결정한 규율
law)을 통과시켰으며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대체공공
상의 징벌에 처해졌다. 지휘관에 의해 만들어진 규
복무를
제공하였다. 5)
이 법의 제 1조는 다음과 같이
율상의 결정에 대해 군 징집병의 항의가 없는 것처
명시하고 있다. “국방부는 군복무를 용납하지 않는
럼 그 결정에 대한 어떠한 항의도 없다. 1933년 관
양심에 대한 타당한 근거를 가진 사람들을 이러한
할권 이양의 결과로 대체복무자들은 시민노동법
복무로부터 면제시킬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국
(civilian work law)에 따라 노인들이 일하는 곳의
가를 위한 시민적 임무에 종사하여야 한다.”
십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1975년에는 정교한 항소
1917년 법률이 통과된 것으로 덴마크 의회는 유
절차가 만들어졌다. 이 절차에 따르면 항소자는 첫
럽대륙에서 병역거부권을 인정한 최초의 정부가 되
번째 징계위원회(Disciplinary Committee)에 회부되
었다(영국은 1916년 징집법(conscription act)에서 병
고 다음으로 항소위원회(Appeal Committee)를 거친
역거부를 인정하였다). 병역거부자로서의 지위는 종
다. 최종결정은 항소위원회에서 한다.
교적이거나 혹은 윤리적인 평화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다. 두 차원의 병역거부 모두 모든 전쟁, 인간을
시민대체복무
살상하는 행위, 그리고 심지어 자기방어라 할지라도 폭력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해야 한다. 선택적 병역 거부나 정치적 근거에 의한 병역거부 모두 법적으로 용인되지 않았다.
관계당국의 원래 계획은 제비뽑기를 통해 요구되 는 징집병수(병역거부자 포함)만큼을 선발하는 것이 었다. 소집된 병역거부자가 군대 내에서 비전투
병역거부자가 되지 위한 지원과정은 1917년에서
(noncombatant) 복무를 선택하면 그렇게 할 수 있으
1968년까지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개별 지원자
나 복무중인 군인은 시민대체복무로의 전환을 신청
들은 지역 ‘수정의회(Revising Council)’ 전에 구두
할 수 없다. 처음엔 병역거부자로 인정되었으나 군
혹은 서면으로 그의 거부사유를 설명해야 하며 문서
대내 비전투 복무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징집병들
자료와 두 명의 증인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면 지역
과 마찬가지의 기간(20개월), 같은 월급의 시민대체
경찰은 지원자와 증인들에게 지원자의 신념과 진실
복무에 지정되었다. 1차 세계대전 시기 대부분의 병
성을 입증할 수 있는가를 질문한다. 이러한 절차를
역거부자들은 지휘관들의 감독 아래 그립스코프
통해 그 진실성이 미심쩍은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등
(Gribskov)와 콤페달 플란타게(Kompedal-Plantage)
급이 매겨진다. 다음으로 조사와 심의가 끝난 후 수
임시 주둔지에서 산림 관리 일을 하였다. 임시 주둔 지 중 하나는 1920년 폐쇄되었고 다른 곳들은 1922
4) Ibid., 13. 5) Ibid.,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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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까지 오로지 6명의 병역거부자들만이 일했다. 6)
번역글 1917년부터 1962년까지 병역거부자들은 정부기관
년대까지 지속되었다. 60년대엔 군 징집자들이 14개
복무를 요구받았다. 대부분은 소위 공공업무(Civil
월에서 16개월을 복무했고 병역거부자들은 22개월을
Service)라는 이름으로 국립산림지 관리프로젝트에
복무했었다. 1986년 몇 번의 축소 후에 시민복무는
배치되었다. 이 시기에 병역거부자들은 그들의 반대
징집병들의 군복무기간과 마찬가지로 9개월로 줄어
에도
전체방위체제(Total
들었다. 1986년 법은 병역거부 시민복무와 군 징집
Defense system)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1962
병들의 복무 부담이 같아져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
년 내무부는 병역거부자들은 공공도서관, 유치원, 노
하여 덴마크 정부는 공식적으로 병역거부자들의 복
인복지시설, 그리고 다른 문화시설들과 같은 공익적
무를 군 징집병들의 복무 기간보다 길게 하려는 시
인 일에 복무할 수 있다는 행정상의 결정을 내렸다.
도를 포기하였다.
불구하고
1970년이
덴마크의
시작되면서
해외자원활동(Voluntary
1960년대 후반까지 정부는 병역거부 지원자들에
Service Overseas, VSO)도 허용되었다. 1983년에는
게 어떤 상황 하에서도 폭력의 사용에 반대하겠는가
병역거부자들은 평화, 환경단체에서 활동하는 것이
를 지속적으로 물어왔다. 만약 그들이 자신의 가족
허용되었다. 1986년에 정부는 공공업무에 병역거부
이나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폭력을 사용하는
자들을 고용하기를 그만두었다. 그 결과 그들은 현
것을 받아들이거나 그들이 예를 들어 나토(NATO)
재 전체방위체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에 덴마크 군대를 배치하는 것은 거부하지만 조국을
오늘날 덴마크의 병역거부자들은 비영리기구라면
방어할 목적으로 폭력의 사용에 동의한다면 그들은
얼마든지 정부 혹은 비정부 조직에서 일할 수 있다.
병역거부자로서 인정되지 못했다. 그리고 정부는 핵
종류는 사회복지, 평화단체, 환경기구, 그리고 문화
무기 사용의 가능성 때문에 군복무를 거부하는 ‘반
사업들을 포괄하고 있다. 요즘엔 병역거부자들이 가
핵평화주의자’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장 자주 요청하는 곳은 방송국, 박물관, 도서관 그리 고 이와 비슷한 곳에서의 일이다.7)
병역거부 지지그룹들 중에서 가장 활동적인 그룹 은 영국 런던에 본부를 둔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덴마크에서는 1917년 이래로 병역거부와 대체복
(War Resisters International, WRI)의 덴마크 지부인
무법규가 유지되어오고 있다. 심지어 2차 세계대전
알드리 메레 크리(Aldrig Mere Krig, AMK)8)이다.
중 독일점령 하에서도 유지되었다. 그러나 복무기간
1963년 덴마크 정부는 병역거부규정을 재검토하기
규정은 몇 차례에 걸쳐 변경되었다. 1933년 5월에는
위한 위원회를 만들었다. 알드리 메레 크리의 대표
수정안이 제출되어 군복무와 시민대체복무 기간은
단은 이 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정되었으며 그들은 국
20개월에서 15개월로 줄어들었다. 다른 변화들도 이
제화해친우회(International
어졌으나 1952년 4월까지는 병역거부자들과 군 징집
Reconciliation, IFOR)나 평화와 자유를 위한 국제여
자들이 같은 기간 동안 복무하였다. 1952년 4월엔
성연맹(Women's International League for Peace
시민대체복무 기간이 24개월로 연장되었다. 군복무
and Freedom, WILPF) 덴마크 지부와 같은 다른 평
기간과 대체복무기간 사이의 이러한 불일치는 1960
화단체가 그랬던 것처럼 병역거부의 자유화를 위한
Fellowship
of
권고를 하였다. 1960년대 중반에 이러한 노력의 결 6) Ibid., 31. 7) Bodil Hansen, Conscript Board of the Ministry of Interior, telephone interview with the author, March 11, 1990.
과로 대체복무자들의 반수 이상이 전통적인 대체복 8) 역자 주 : 덴마크어로 ‘never more war'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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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글 무 역종 이외에 노인이나 장애인 아동을 위한 단체
Conscientious Objectors)와 같은 병역거부 단체 중
혹은
삼비르케(Melemfolkeligt
의 하나가 만든 것이다. 지원자의 신념과 진정성이
같이 개발도상국 지역개발 프로그램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정부 또한 지원자
멜렘폴케리그트
Samvirke)9)와
에 참가하거나 원조를 위해 젊은 자원 활동가들을 파견하는 단체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와 증인들의 인터뷰 관례를 포기하였다.10) 이러한 변화로 시민대체복무를 할 수 있는 병역 거부권은 또한 보다 견고하게 확립되었다. 이것은 병역거부자들이 산림관리업무집단에 포함되고 전체
1960년대 후반의 자유화
방위체제의 일부로서 간주되는 소위 공공업무에서라 덴마크의 관대한 정부와 단호함, 병역거부 운동의 활약으로 덴마크는 병역거부 규정의 자유화와 양심 의 세속화를 선도하였다. 이 규정은 미국과 유럽에 서 1960년대 후반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 들의 대부분은 법률보다는 행정상의 결정을 통해 소 개되었다. 그것으로 의회에서 이 주제에 관한 대중 적 논쟁을 피해갔다.
기보다는 정부 혹은 비정부 기구에서의 참된 대체복 무이다. 게다가 1970년대와 80년대의 관대한 행정상 의 결정은 시민대체복무의 기간을 줄여주었다. 그래 서 위에 언급했던 것과 같이 군복무를 수행하는 징 집병들과 같은 기간동안 복무할 수 있었다. 더욱이 행정관들은 대체복무자들이 복무할 수 있는 곳의 폭 을 넓혀왔다. 현재는 병원, 요양시설, 보육시설, 그리 고 평화, 환경 단체들과 같은 비영리적인 사설기관
1968년 3자 연립정부는 개인적, 정치적, 심지어
뿐만 아니라 학교, 도서관 그리고 다른 정부기구들
선택적 병역거부자들도 병역거부자로서의 자격을 부
까지 포괄하고 있다. 주로 덴마크 평화단체들의 노
여하였다. 병역거부 인정 근거에 대한 이러한 역사
력의 결과로 해외자원활동 프로그램이 확립되었고
적인 변화는 주로 평화주의로 기울어진 급진좌익당
1970년 이후 병역거부자들은 24개월 동안 해외에서
(Radical Left party)의 영향 때문이었다. 급진좌익당
복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긴 기간 동
의 참여로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다른 두 정당
안의 복무를 신청하는 병역거부자들은 적었다.
들은 선택적이고 자유재량적인 병역거부뿐만 아니라 정치적 병역거부도 받아들여야만 했다. 연립정부의 행정부는 행정상의 결정을 통해 병역거부자들이 비 군사적 복무를 신청하게 된 사유를 더 이상 설명하 지 않아도 된다고 결정했다. 그것은 심지어 이미 군 복무중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적용되는 것이었다.
는 모든 사람에게 자동적으로 적용되었다. 사실상 젊은이들은 그저 병역거부 지원서에 사인하고 정부 에 제출하는 것으로 병역거부자가 될 수 있었다. 심 지어 지원서 양식은 병역거부자협회(Association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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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주 : 덴마크 국제원조협회(Association International co-op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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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들이 병역거부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왔다. 실제로 이미 얼마동안 군복무를 하였기 때문에 그 사람은 믿을 수가 있었다. 1952년에는 군의(medical corps)가 병역에서 제외되어 비부장군복무를 원하는 병역거부자들의 선택의 폭이 좁아졌다. 그 이후로
그리하여 1968년 이래로 병역거부 지위는 신청하
9)
덴마크는 또한 군복무중에 군인과 다른 군 종사
for
비무장 군복무 병역거부자들은 점점 줄어들었다. 오늘날 덴마크 징집병들은 군대에서, 병역거부 대 체복무자로서, 해외자원활동에서 혹은 공공업무에서 10)
Steen Borup-Nielsen, "Conscription and Conscientious Objection in Denmark"(Paper presented at the Defense Leadership Training Center, Copenhagen, 1985).
번역글 4가지 다른 역종 중 어떤 곳에서도 복무할 수 있다.
심문 포기, 병역거부자에 대한 복무의 몇 가지 선택
만약 이러한 선택지 중 하나라도 선택하지 않았거나
규정, 심지어 완전거부자들과 여호와의 증인에게도
어떠한 방식으로든 협조하길 거부한다면 그 사람은
편의를 들어주기 위한 시도 등…
국민병역기간을 완전히 거부한 사람으로 1달에서 12 달 정도 감옥에 수감되게 된다.
실제로 군대 내에서, 그리고 다른 덴마크 사람들 사이에서 덴마크의 병역거부자들은 보다 호의적인
징집법이 도입된 이래로 상당히 적은 수의 절대
취급을 받아야 하며 군인보다는 훨씬 가벼운 부담을
적거부자(absolutist)들이 어떠한 방법으로든 군대나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해왔다. 1972년에 국방연
시민대체복무를 거부하는 것으로 징병당국에 비협조
구모임은 병역거부자와 징집병 사이의 부담의 평등
해왔다. 처음에 그들은 군 규율을 위반한 자로 취급
화는 너무 병역거부자들에게 유리하다고 명쾌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전체 비협조에 대한 형벌이 대체
입장을 발표하였다.12) 예를 들면 시민대체복무를 배
복무와 같은 기간의 구금형으로 바뀌었다.
치하는 지부는 526개가 있는데 이 숫자는 군기지의
최근 몇 년 동안 절대적거부를 선택하는 젊은이
숫자보다도 한참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군 징집병
들의 대다수는 여호와의 증인들이다. 마련된 시스템
들보다 병역거부자들이 집에서 가까운 곳에 배치되
의 기능을 원활하게하기 위해 덴마크 당국은 군대보
기가 훨씬 쉽다는 것을 말한다.13) 이 연구모임은 육
다는 차라리 공공업무를 선택하겠다며 스스로 여호
군에서 징집병의 16%, 공군에서 30%, 해군에서 50%
와의 증인이라 공표한 징집병들을 자동적으로 등록
가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 배치된 것으로 추산했다.
을 시켰다. 더욱이 여호와의 증인들에게는 징병의
이에 대한 병역거부자들의 비율은 훨씬 낮다. 게다
평균(일반적으로 9개월)보다 더 짧은 대체복무 기간
가 병역거부의 경우 복무기간 9개월 동안의 모든 근
(1개월에서 6개월)이 부여되었다. 만약 여호와의 증
무시간을 합하면 2,714시간이고 군 징집병의 경우는
인이 여전히 협조를 거부한다면 법원은 보통 그에게
3,256시간이다. 일과표에 따르면 병역거부는 일반적
할당된 대체복무 기간만큼 몇 개월 동안 감옥형에
으로 8시간 교대로 일을 하는데 반하여 징집병들은
처한다. 그러나 실제로 여호와의 증인들은 형기의
2교대 근무를 요구받는다. 더욱이 징집병들은 초과
절반을 복역한 후 석방되었고 그들의 이름은 공식적
수당을 받지 않는데 비해 병역거부 시민복무자들은
인 징집명단에서 제외되었다. 11)
초과수당을 받는다. 월급은 징집병과 대체복무자 모
게다가 병역거부 시스템의 관리는 위에 언급한대 로 많은 변화들처럼 시민화, 자유화되어왔다. 군복무 와 시민복무의 같은 복무기간, 국방부의 약화된 영 향력, 병역거부를 요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찰관의
11) 가장 최근의 통계로는 40명의 젊은이들이 여호와의 증인 등록을 하였다. 이들 중 20명이 제비뽑기를 통해 면제되 었으며 15명은 6개월에, 5명은 1개월 복무에 처해졌다. 이후 군 당국은 이러한 개인들의 행정을 공무국(Civil Service Board)으로 옮겼다. (Reported to the author by Maj. B. O. Riis, Conscripts Section, Defense Command, Vedbæk. The author gratefully acknowledges this helpful information.)
두 10,000크로네(Dkr)14)로 같다.15) 12)
Arbejdsgruppen vedr. Vaernepligtsproblemtikken (Working Group on Conscript Problems), Redegørelse for vœrne-pligtssituationen I perioden 1971-80, 3. del; Militaernœgterspørgsmalet (Statement on the Conscript Situation in the Period 1971-80, Part 3: The Issue of Conscientious Objectors) (March 1972), 6. 13) Hans J. S. Mogensen, Militœrnœgterhandbogen-en bog for vœrnepligtige (Manual for Conscientious Objectors-A Book for the Military Conscript) (Langeskov: Aldrig mere Krig, 1989), 13. 14) 역자 주 : 원화로 약 2백만 원 15) Arbejdsgruppen, Redegørelse for vœrne-pligtssituationen, 6; Borup-Nielsen, "Conscription and Conscientious Objection," 3.
☮ 소식지 CODAY 특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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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글 1970년대 초반 병역거부규정의 자유화와 병역거
를 정치적 신념까지 확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부자들의 기하급수적 증가로 덴마크에서는 3가지 주
1990년에는 또 한번의 여론조사 실시되었다. 요번
제의 여론조사가 진행되었다. 이것은 그 당시에 덴
의 갤럽 여론조사는 덴마크에서 병역거부에 관한 자
마크에서 유일한 여론조사였다. 1971년에 갤럽에 의
유주의적 태도가 현저히 향상되었음을 보여주었다.
해 실시된 첫 번째 여론조사는 응답자의 51%가 양
1971년에 병역거부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겨우 과반
심상의 이유로 군복무를 면제받는 것을 받아들인다
수를 넘었던(51%)것에 비해 이번에는 3분의 2(66%)
고 하였다(37%는 반대하고 12%는 의견이 없다고 하
가 받아들였다. 병역거부자들의 수가 빠르게 증가하
였다). 같은 해 실시된 두 번째 여론조사는 병역거
고 있는데 이를 억제해야 하는가라는 두 번째 질문
부자의 숫자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
에 대한 답변에서 1971년엔 51%가 이 문제의 해결
고 이러한 증가를 억제해야 하는가를 질문하였다.
을 고려해야 한다고 대답했지만 1990년에는 33%만
응답자의 51%가 그렇다고 대답했고 32%는 억제하
이 정부가 이러한 병역거부자의 증가에 대해 어떤
지 말아야 한다고 대답했다. 결과들을 종합하여 이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고 대답했다. 명확하게 덴마크
여론조사들은 1970년대 초반의 덴마크 인구의 대다
에서 지난 20년 동안 대중의 태도는 병역거부자들에
수가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자유주의적 정책을 찬성
대해 자유주의적이 되었다.
하나 대다수는 또한 군대에 직면한 실질적인 문제들 의 해결을 원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하였
1970년대 병역거부자들의 증가
다. 16) 1972년에 실시된 세 번째 여론조사는 병역거부 사유 중에서 어떤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물었 다. 과반수를 약간 넘는 수(52%)가 군징집을 피하는 근거로서 종교적인 이유는 받아들일 수 있다고 대답 했다. 24%는 이러한 견해에 반대했다. 35%는 평화 주의적 이유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고 35%는 반 대했다. 정치적인 이유는 단지 19%의 응답자만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으며 52%는 반대했다. 17) 이 모든 3가지 이유를 모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리고 게다가 병역거부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일반적 으로 30세 이상 되었으며 다른 응답자들보다 저학력 층의 사람들이다. 보다 중요한 사실은 비록 여론조 사가 대다수의 사람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병역을 거 부한 사람들을 반대했지만 덴마크 정부는 (주로 행 정부의 행정상 결의를 통해) 이미 병역거부의 사유 16) Gallup Poll Yearbook, 1971, Survey 44. 17) Observa Institute, The Danes, 1967-1977 (Copenhagen: Observa Institute, 1977),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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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그 시기에 통계를 내지 않아서 비록 정확 하게 숫자를 추정하기는 어려우나 1917년에서 1945 년 사이 덴마크에서 병역거부자들은 다수가 아니었 다.
따라서
자료는
주로
전쟁저항자연맹(War
Resisters League) 덴마크 지부나 병역거부협회에 의 해 기록되어 보관된 것을 기초로 하였다. 비록 병역 거부 지위를 요구한 사람들의 수, 대체복무를 요구 한 사람들의 수, 혹은 당해연도에 실지로 대체복무 를 수행한 사람들의 수 등에서 어떤 것을 판단할지 때때로 결정하기 어렵지만 이 통계는 꽤 정확한 것 으로 생각된다. 1917년에서 1931년 사이에는 300여 명의 병역거부자들이 대체복무를 했던 것으로 나타 났다. 병역거부자의 수는 1931년 59명에서 1935년 500명 이상으로 늘어났고 그 후에 1943년 백여 명이 될 때까지 그 수는 줄어들었다.18) 18) Larsen, Militœrnœgterproblemet I Danmark, 87, 91. Larsen cites the records of the War Resisters League
번역글 년도
징집병 총계
병역거부자 수
비율
1943-1964
-
39-505
0-2
1965
27,500
490
2
1966
33,700
540
2
1967
33,600
672
2
1968
31,900
1,107
4
1969
28,500
1,766
6
1970
27,100
2,456
9
1971
28,200
4,200
15
1972
35,000
4,489
13
1973
22,600
3,987
18
1974
22,400
4,161
19
1975
29,700
3,136
11
1976
39,500
2,255
6
1977
39,200
814
2
1978
31,300
763
2
1979
31,600
909
3
1980
23,200
816
4
1981
31,000
606
2
1982
31,800
466
1
1983
33,400
366
1
1984
34,000
319
1
1985
34,600
218
1
1986
32,200
232
1
1987
30,000
355
1
1988
30,400
484
3
1989
29,700
590
4
표 8.1 매년 절대적, 상대적 병역거부자들의 수, 1945-1989 1945년에 덴마크 정부는 등록된 병역거부자들의
대체복무에 종사하는 병역거부자의 수가 매년 천명
수를 기록에 남기기 시작했다. 통계는 특정 시기 병
이상으로 증가했고 실제로 1970년대 초반에는 4천명
역거부자의 수가 경제, 군사, 문화적 발전 등과 관련
(19%) 이상으로 증가했다. 그 후로는 숫자가 급격히
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표 8.1에서 보여 지듯이
감소하였다.19)
덴마크 군대는 1945년에서 1989년 사이에 매년 3만 에서 4만 명의 병사를 보유하고 있었다. 대체복무에 종사하는 병역거부자의 수는 4백에서 6백 명으로 평 균 군인의 약 2%였다. 1968년에서 1976년 사이에는
as the basis for his figures.
19) Figures from 1945 to 1989 come from the Danish National Military Service Board, Vœrnepligtsstyrelsen, letter of March 6, 1990, j. nr. 1990/30-6. For these and other figures on conscripts and conscientious objectors, the author is indebted to Per Jensen of the Conscript Section, Civil Service Board, as well as to Maj. B. O. Riis of the Conscripts Section of the Defense Command, and Bodil Hansen of the
☮ 소식지 CODAY 특별호
30
번역글 1968년에 시작된 급격한 증가는 아마도 대부분의
다른 한편 군대는 몇몇 고학력자와 지적인 젊은이들
서구 국가들에서 베트남 전쟁의 평판이 안 좋아지고
을 잃었고 그들은 현재 군인대신 병역거부자로서 복
군대가 많은 비판을 받을 때로 이에 대한 젊은이들
무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병역거부자들이 보다
의 반발로 설명할 수 있겠다. 초기 아래와 같은 국
낳은 조건에서 복무한다는 인식과 결합되어 조국을
제적인 사건 역시 덴마크에서 갑작스런 병역거부자
방어한다는 일반적 의지를 약화시킬 것이다. 다른
의 증가를 가져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950년에서
한편 보병중대와 포병중대의 중령들은 그들의 부대
1953년 사이 한국전쟁과 나토 무장으로 1953년 262
에 “말썽꾸러기”가 될 수도 있는 병역거부자들이 없
명으로 줄기 전까지 병역거부자들은 1949년의 132명
다는 것에 대한 “일정한 만족의 단계”를 느낀다.
에서 1952년의 505명으로 껑충 뛰었다. 경제상황과 병역거부자 수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
결론
계가 있다. 1960년대 병역거부자가 증가한 것은 1960년부터 1972년 사이 덴마크의 번창 시기와 일치
국가와 병역거부자 간의 관계 발전에 대한 세 가
한다. 이와 유사하게 1973년에서 1985년 사이 경기
지 차원의 패러다임을 고려해 볼 때 덴마크의 경험
후퇴 시기에 병역거부자의 수는 줄어들었다. 한편
은 몇몇 사례에서 두 가지 차원의 진전이 있었다는
1945년에서 1960년 사이 경제상황이 약간 안 좋았을
것을 말해준다. 윤리적인 세속화와 종교적인 기준은
때 병역거부자의 수는 매년 대략 백 명에서 이백 명
순차적이라기보다는 비슷한 시기에 인정되었다. 이
정도로 안정되었다. 아마도 경기후퇴시기에 젊은이
러한 인정은 1차 세계대전 시기 일어났다. 이것은
들이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에 도전하는 것에 덜 확
아마도 덴마크에서 사회주의자들과 소위 “일관된 반
고하고 덜 의욕적이었던 것 같다.
군사주의자”들의 정치적 힘과 국가의 중립주의에 영
다른 요인들 또한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나는 인
향을 받은 것 같다. 덴마크 정부는 1960년대 후반
구통계학적인 것인데 군대가 밝힌 징병요구에 의해
급진좌익당의 주도로 심지어 정치적 동기의 세속적
총체적인 통계는 영향을 받았다. 적절한 기준은 군
병역거부자들을 인정했으며 특정 전쟁을 반대하는
인에 대한 요구에 따라 바뀌었다. 또 다른 요인은
선택적 병역거부자를 받아들였던 다른 나라들보다
정부 관료들이 병역거부 문제를 최소화하고자 하는
더 앞서 나아갔다. 덴마크 시스템이 더 이상 병역거
정치관료적인 ․ 욕망이다. 예를 들어 병역거부자로
부자들의 거부사유를 묻지 않았으며 어떤 젊은이라
등록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특히 1970년대 초반부터
도 병역거부자로 등록하고 시민대체복무를 수행하기
군복무요구를 받지 않았다.
를 결심하는 간단한 이유로 군복무를 피할 수 있었
왜냐하면 1980년대에는 군복무를 할 수 있는 상
기 때문이다. 병역거부자를 허용하는 것에서 덴마크
당한 젊은 잉여인원이 있었다. 덴마크의 자유주의적
정부는 많은 사람들을 군대로부터 멀어지게 하였으
인 병역거부자 시스템은 군인들의 수적인 부족을 만
나 또한 서구 나라들에서 병역거부의 자유화, 세속
들지 않았다. 질적인 상황은 더 평가하기가 어렵다.
화의 선봉이 되었다. ☮
Conscript Board of the Ministry of Interior. The numbers of conscripts each year are taken from Borup-Nielsen, "Conscription and Conscientious Objection,"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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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없는세상(World Without W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