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OUTWAR Newsletter No.12 CONTENTS World
Editorial
에디토리얼 1
말랑말랑해지기
Special
특별기획
..去者必返 병역거부자 출소후기 3
여유를 부리며 쉬어가기
..會者定離 병역거부를 선언하다 서툴어도 씩씩하게!
Focus
2
감옥 안에서 신념을 지켜낸 임태훈씨가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마치 바통을 이어받듯, 함께
침묵의 시간을 깨고, 천주교회는 병역거부..
Column
12 14
활동해왔던 친구들이 신념을 몸으로 실천하기 위해 잠시 우리 곁을 떠나려고 하고 있습니다. 평화운동가로 열심히 활동 해오던 오정록씨와 전쟁없는세상에서 함께 활동하며 가톨릭...b
칼럼
‘국가를 ’ 넘어선 안보의 재정립, 그리고..
14
평화에세이
Fan(팬) 감옥 안의 그들을 만나다.. 가로 여섯 발자국, 세로 열 발자국의..
Review
18 20 22
Translation
12호 소식지팀장
26 28
거북이도 난다
편집팀 가람
서평 + 영화평
나는 폭력의 세기를 고발 한다
소식지편집 & 에디토리얼 특별기획 1,2 섭외 & 번역 & 활동보 고
까만★
번역
독일에서 만나는 에리트리아 반군사주의..
Series
去者必返 會者定離
왔고, 나동혁씨가 돌아왔고, 임치윤씨가 돌아
시선집중
인권위, 병역거부 관련 국가 권고안..
Essay
▶▶Special 6 8
내가 병역을 거부하는 이유
31
기획연재
소설로 읽는 전쟁, 두 번째, ‘전쟁, 상처, ..’
Notice 광고 Report 활동재정보고 Suppert 후원안내 COs 병역거부자소식
발행처 : 전쟁없는세상 발행일 : 2005년 11월 10일 제 호 :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12호 연락처 : 02-3147-1201 주소 : 서울시 서대문구 충정로 2가 190-10 아랫집 2층 (우) 120-012 http://withoutwar.org | peace@withoutwar.org
기획연재
날맹 평화에세이 1 섭외 & 평화에세이 2
42 45
영화평 섭외 & 번역
뎅 표지디자인 & 시선집중 1 & 번역 평화에세이 3 섭외 & 재정보고
46
영은 특별기획 1 섭외
47
용석 1
48
시선집중 2 & 칼럼 수신인 조정
인쇄기획 | 한울타리 130-062 서울동대문구 제기2동 137-69 TEL : 924-9641,2 FAX : 927-5104
Editorial
말랑말랑해지기 가람 | 전쟁없는세상 책임활동가 + kazkada0305@gmail.com
며며칠 전의 일이었어요. 여느 일상의 아침처럼 종종걸음으로 지하철역에 도착해서 마침 문이 닫히기 일보직전의 초초초만 원지하철에 겨우 몸을 실었지요. 그날따라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잔뜩 잡혀있는 계획덕택에 부담감이 이미 포옥 폭 쌓일 대로 쌓여 있었던 데다 전날 늦게 자는 바람에 살짝 늦게 일어나서 서둘러야 했던 탓에 기분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더랍니다. 저는 여유로운 아침을 좋아하거든요. 그러니 집 앞에서 내 발걸음을 부드럽게 감싸는 노랗고 빨간 낙엽들과 시릴 만큼 파랗 게 빛나는 하늘, 상큼하게 노래하는 새들의 지저귐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죠. 하물며 숨쉬기도 힘들만큼 북적이 는 지하철이 달가울 리가 있나요, 별 것 아닌 일에도 짜증이 목까지 턱턱 차오르고, 각자 자신의 목적지에 늦지 않으려는 사 람들의 부대낌에 극도로 민감해져 있었어요. 그런, 아침이었던 거예요. 사람들이 어쩜 이렇게 배려심이 없나, 이래서 자전거를 타야해, 혼자 궁시렁 궁시렁 거리면서 그나마 막 도착한 지하철을 놓치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그것마저 코앞에서 놓쳤더라 면!!) 문틈에 아슬아슬하게 몸을 지탱한 채 몸의 부대낌을 최소화 하려고 혼자 애를 쓰고 있던 그 때, 그 유쾌하지 못한 아침 을 360도 확 뒤집어준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났어요! 어머니로 보이는 여성분의 손을 꼬옥 잡고 제 옆-아래에 서 있던 한 작은 여자아이가 자그마한 손을 내밀어서 제가 팔 에 걸고 있던 커다란 쇼핑백을 제 품으로 살며시 끌어안는 거예요. 그리고는 제가 쳐다보자 어떤 표정의 흔들림이나 변화도 없이 물끄러미 그 시선을 마주치다가 문이 닫히자 그제야 스르르 제 가방을 놓지 않겠어요?!? 별 것 아닌 일처럼 느껴질 수 도 있었겠지만, 그 순간이 저에게는 마치 빛과 같았어요. 아! 하고 속으로 탄성을 질렀죠. 숨을 몰아쉬며 지하철에 세이프한 어떤 언니의 짐이 문이 닫히면서 문 사이에 낄까봐 걱정이 돼서 그 짐을 챙겨준 아이의 눈은, 정말 까맣고 말랑말랑했어요. 덩달아 긴장과 짜증으로 팽팽히 곤두서있던 제 마음도 거짓말처럼 말랑말랑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사람들이 좀 부딪히면 어때요, 살짝 비켜주면 되지. 부딪힌 사람이 미안하다는 말을 안 하면 어때요, 그만큼 바쁜 일이 있는 거겠죠. 일과가 좀 많다 싶으면 어때요, 하나하나 끝내고 나면 그만큼 더 달콤한 휴식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렇게, 마 음이 풀어지고 나니 그제야 내가 사랑하던 풀과, 바람과, 새의 노래가 다시 마음을 적시기 시작했어요. 생각했죠, 현실에 쫓겨 서, 현실에 치여서, 현실에 매여서, 그리고 내 자신의 주술에 매여서 말랑말랑했던 내 몸과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 각박해져 버린 거였구나, 하고. 친구가 “왜 사냐건 웃지요..”라고 놀릴 만큼 세상의 모든 일이 행복하고 감사해서 헤실헤실 웃음을 피워 내던 말랑말랑한 가람이가 문득 그리워졌어요. 어느 날 문득 그리워지는 ‘나’..를 느껴본 적이 있나요? 나도 모르게 잊고 지내던 그 존재를 찾아내는 건 정말이지 신나고 행복한 일이더라고요. 말랑말랑.. 말랑말랑.. 세상 모든 사람들이 말랑말랑해졌으면 좋겠어요. 여유롭게- 너그럽게- 조화롭게 - 서로 경쟁하고 서로를 생채기내는 대신 서로를 이해하고 감싸줄 수 있는 말랑말랑한 사회, 말랑말랑한 세상. ..언제쯤이면 만날 수 있을까요? ☮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2호
1
떠나는 자, 그리고 돌아오는 자..
감옥 안에서 신념을 지켜낸 임태훈씨가 돌아왔고, 나동혁씨가 돌아왔고, 임치윤씨가 돌아왔습 니다. 조금 있으면 아마 오태양씨와 임성환씨의 모습도 볼 수 있겠네요. 그리고 마치 바통을 이어 받듯, 함께 활동해왔던 친구들이 신념을 몸으로 실천하기 위해 잠시 우리 곁을 떠나려고 하고 있 습니다. 평화운동가로 열심히 활동 해오던 오정록씨와 전쟁없는세상에서 함께 활동하며 가톨릭 신자로서 최초의 병역거부를 선언한 고동주씨. 그리고 앞으로도, 이 사회가 변화하고 이 세상의 군사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한 스스로 감옥행을 택하는 병역거부자들은 끊임없이 생겨날 것입니다. 시린 바람이 차가운 감옥 안으로 파고드는 11월 발행되는 12호 소식지는 오랜 길을 걸어 우리 곁으로 돌아온 사람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떠나는 사람들을 힘차게 격려해줄 수 있는 따뜻한 바람 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
여유를 부리며 쉬어가기 나동혁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2005년 9월 30일 출소
또 이사를 했다. 메가패스를 다시 깔았는데 모뎀을 바꾸는 과정에서 바이러스가 침투했다. 우리 집 컴퓨터는 악성 스파이웨어와 바이러스 놀이터가 되었다(고 짐작할 뿐-.-;;). 결국 포맷했다. 여기는 PC방이다. 다시는 PC 방 신세 안 져도 될 줄 알았는데 역시 바깥세상은 나름대로 험하다. 며칠 전에는 지하철을 타는데 환승역을 못 찾는 일이 있었는가 하면 엉뚱한 출구로 나와서 헤매기도 했다. 너무나 빠르게 걷는 사람들, 너무나 계획이 많은 사람들, 너무나 돈 욕심이 많은 사람들, 챙겨야 할 관계가 너무 많은 사람들. 그 속에서 난 당분간은 이렇게 어 리버리 하겠지. 곧 그마저도 적응이 되겠지. 그래도 나오니까 참 좋다. 이 맑은 공기, 푸르고 높은 가을하늘은 정말이지 매력 그 자체다. 적응이 빠를수록,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이 아름다운 것들도 잊고 살게 될까? 솔직히 사람에 대한 매력은 가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겠다. 이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달라지게 될까? 구치소와 군대는 비슷한 면이 많다(고 짐작할 뿐-.-;; 군에 다녀온 사람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니까). 본인 의 선택과 무관한 집단생활, (소위 짬이 쌓여) 갈수록 편해지는 위계서열 구조, 수많은 벽 앞에서 자포자기하게 되는 심정. 기본적으로 낯선 사람들 끼리 집단생활을 하는데 마찰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공간이 너무 좁은 게 결정적이다. 3평도 안 되는 공간에 7명까지 들어온다. 다리가 겹치는 건 둘째 치고 재수 없으면 어깨도 못 펴고 자야한다. 그런데도 화가 안 난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그런데 그 좁은 공간에서 서열이 높은 사람은 조 금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한다. 구조가 그런 식이니 딱히 누구에게 화를 내기 애매할 때가 많다. 이럴 땐 ‘그러니 까 감옥이지 달리 감옥이냐는 ’ 운명론적 사고가 싹튼다. 사람들과 1:1로 얘기를 해보면 각자 불만이 다 있다. 특 히 누구누구는 이래서 재수 없다는 식의 감정을 다 가지고 있다. 1:1로 수다 떨기가 서로 맺힌 감정을 푸는 데 효과적일 때도 많다. 갈등을 무마시키는 가장 큰 무기는 위계서열. 일단 이 구조에 적응하려면 처음엔 고생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래서 인내한다. 더러 불만이 생기면 대화로 풀어보려 하지만 토론에 익숙한 사람들이 별로 없 다. 남성들만의 세계라 더 거칠다. 가끔 주먹다짐도 벌어지지만 대개는 폭언으로 끝난다. 징벌을 받으면 자기도 손해니까. 교도관들도 어지간하면 말로 해결하라 하고. 그 다음으로 시간이 지나면 나도 곧 서열이 올라간다는 기대심리가 생긴다. 기대심리는 웬만한 불만을 참게 만든다. 실제로 시간이 지날수록 감옥 생활은 조금씩 편해지 는 경향이 있다. 그 만큼 익숙해지기도 하고 대처방법을 터득해가니까. 사람들은 위계질서가 가하는 폭력도 두려 워하지만, 그 구조에 적응 못해서 왕따를 당하게 되는 것도 두려워한다. 군대, 회사, 학교, 감옥... 이 세상에 많 은 것이 얼추 비슷한 방식으로 굴러가겠구나 생각도 든다.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2호
3
처음엔 굴욕감도 조금 있었다(그래, 지나고 나니 편하게 얘기할 수 있다. 가끔은 정말 진저리나도록 사람이 싫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냉정해지지 못하고 감정의 노예가 될 때도). 뜻대로 되는 게 없으니까. 나중엔 점 점 늘어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시간이 너무 안 가더라. 도 닦으러 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온갖 수단 다 동원해서 제 입맛에 맞출 때까지 저항할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든 그리 간단한 건 아니다. 난 여러 가지 태도 를 두루 고려해서 적당히 잘 지낸 거 같다. 가끔은 싸우기도 하고 가끔은 상대를 이해해보려고 노력도 하고. 시스템을 알고 나니 사람들에게 거칠게 대해봤자 나만 손해라는 생각도 들었다. (평범한 의미에서) 좋은 사람 들이었다. 그래서 잘 지냈다. 서로 조금은 들어주려는 노력도 하고, 더러 사소한 것들은 배려도 해주고. 평범한 사람들인데 이렇게 모아놓으면 누구라도 예민해질 수밖에. 이건 운동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운동하는 사람들하 고 있어도 반드시 발생하는 비슷한 문제들도 많았다. 요컨대 인간관계의 문제였다. 어느 순간부터 그 모든 걸 순응이냐 저항이냐 하는 식으로 사고하는 건 좀 자신을 지치게 만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약간 생각을 바꾸니까 좀 편해졌다. 무리 가운데는 꼭 대화가 통하는 사람들이 있다. 확실히 개개인마다 사고방식의 차이가 많이 난다. 무조건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대화를 시도하면 더러 통하는 사람도 있다. 게다가 나도 모르게 시간이 지날수록 편 해지는 생활에 적응하더라. 안 그러려고 나름대로 노력은 했던 거 같다. 조금은 달라 보려고. 어느 정도 성과도 있었다. 더러는 오래 살다보면 정들기도 한다.(이건 참 신기한 발견이었다. 친구도 별로 없는데...) 결정적으로 자존심을 상할 정도로 거친 사람들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자존심이 다쳤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어쩌 면 내가 그 만큼 거친 사람인지도 모르고. 그래도 이 생활이 잘 안 맞는 사람들은 많이 힘들겠구나 생각했다. 여기서 바뀐 생각이 또 하나 있다. 원래 난 공무원을 싫어했다. 국가는 자본가들의 위원회고, 공무원은 그 위 원회를 떠받치는 벽돌 같은 존재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 역시도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박봉을 탓 하고, 아이들 교육을 걱정하고, 내 집 마련 생각에 가슴 설레고, 무미건조한 일상에서 벗어나 보려고 주식투자에 목을 매는 그런 평범한 사람들. 내 아버지 같은 그런 사람들. 정치적인 문제를 두고 입장을 가르면 더러 같은 편 에 서는 경우도 많다. 공무원에 대한 인기가 높아졌지만, 여전히 교도관은 공무원 중에서도 가장 막다른 선택이 라는 피해의식이 팽배하다. 사람은 원체 복합적인 존재니까. 무엇보다 1:1로 만나면 그들 역시 다양한 감정을 가 진 인격체다. 그러니 공무원이라는 집단을 묶어 생각하지 말고 각 개인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그러면 어떤 부분 에서는 묘한 인간적 유대가 생겨나기도 한다. 아주 미세한 연대의식이랄까? 참 외로운 사람들 많더라. 무슨 책이 었었나? ‘상대방에 대해 너무 완벽한 걸 요구하면 자신도 상처 받는다는 ’ 말을 보았다. 자신이 완벽과는 거리가 먼 존재라는 걸 인식하면 할수록 상대방이 좀 더 인간적으로 보이게 되는 거 같다. 처음에 병역거부를 결심했을 때는 형량 따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워낙 의지가 남다를 때였으니. 당연 히 3년형을 예상했다. 출소를 두 달 정도 앞둔 시점부터는 시간이 참 느리게 갔다. 짐작컨대 군에 입대한 사람 들도 비슷하리라 생각했다. 3년형을 받았다면 참 힘들었겠다 싶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해서 이만큼 온 거라 고 생각하니 뭉클했다. 작은 변화도 그 과정을 직접 겪은 사람에게는 얼마나 벅찬 감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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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이 가까워오면서 자주 구치소를 배경으로 꿈을 꿨다.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도 여러 번 등장했다. 자고 일 어나면 멍한 상태에서도 그 꿈 때문이 기분이 무지하게 찝찝했다. 1년 6개월에 가석방까지 받아서 나왔으니 참 다행이다. 이 좋은 가을에 나와서 참 재수 좋다. GP 총기난사 사건 때, 리셋 증후군이란 말이 사회화되었다. 컴퓨터 게임과 인터넷에 익숙한 신세대들은 삶도 언제든 리셋할 수 있다는 생각에 철없는 행동을 벌인다는 식이다. 정말 속편한 논리다. 온라인 게임 수출국이니, IT 최강국이니 자랑하다가도 무슨 사건만 터지면 애먼 곳만 두드린다. 관련이 없진 않겠지. 그렇지만 사람이 어 디 그렇게 간단한 존재냐? 사회적 책임은 생각도 않는 한심한 사람들. 출소를 앞둔 시점부터 리셋 증후군에 대해 여러 번 생각해봤다. 이 시기를 나는 리셋 시키고 싶은 건가? 처음 엔 뭔가 의미있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다. 이런 저런 계획을 잡고 바깥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애 썼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이건 단절의 시간임이 점점 더 분명해져가더라. 혼자 견뎌내야 할 시간이다. 그리 고 마음을 콩 밭에 두고 안에서 잘 살기는 힘든 노릇이다. 한 두 달이면 가능하겠다. 그렇지만 1년이 넘는 시간 은 그런 식으로 지내기 힘들다. 언젠가부터 나는 그야말로 자연스레 빵잡이가 되었다. 다들 그렇듯이. 그러면서 점점 지루함에 지쳐갔지만 지나고 나서 보니 잘 지냈다.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넌 참 잘 해냈어라 ’ 고 한마디 해 주고, 밖에서 격려해준 사람들에게도 ‘참 고마웠어라 ’ 고 한마디 해주었다. 그 시간을 리셋시킬 필요는 없을 거 같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많은 걸 배웠다느니, 자유로운 공기와 푸른 하 늘의 소중함을 깨달았다느니 그런 말들을 할 수도 있겠다. 1년 넘는 시간 동안 몸 버리고 마음 상했다고 할 수 도 있겠다. 그저 난 지금 나무늘보처럼 늘어지게 쉬고 싶을 뿐이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해야 할 일들이 파도 처럼 몰아치리라. 그러기 전에 마구 쉬어보자. 사람들이 빠르게 걸어가는 모습을 어이없는 듯 쳐다보며...
나동혁 2002.09.12 병역거부 선언 | 2002.12.10 1심 1년 6개월 실형선고 2003. 01.14 2심 보석 허가2004. 08.31 법정구속상태에서 1년 6개월 실형 선고 이후 대법 상고 기각, 기결수로 서울구치소 수감 2005.09.30 출소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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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병역을 거부하는 이유 오정록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2005년 10월 04일 병역거부 선언
일상적인 유무형의 폭력이 만연한 곳, 사람을 물건으로 취급하는 곳, 따라서 오직 번호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곳, 생명까지 내맡긴 채, 철저한 위계와 폭압적 권위 속에서 살아야 하는 곳, 여성에 대한 비하, 성적 대상화가 만연한 남성들의 공간, 구체적 인간 개개인이 아닌 집단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곳, 모든 시간이 오직 전투력 강화, 즉 살인기술의 강화를 위한 훈련으로 쓰이는 곳,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양심을 거스르는 거짓된 말과 행동을 해야 하는 곳, 양심에 반하는 행동을 반복하여 스스로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는 곳, 그 결과, 인류 역사에서 있어왔던 수많은 전쟁(살인)의 행위자가 되는 곳..
저는 군대를 이런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병역을 거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위와 같은 제 의견에 동의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벌써부터 비난하는 소리들이 들려오는 듯합니다. “꽤나 극단적이군.” “가보지도 않은 군대에 대해서 안좋은 소리만 들었군.” “그 곳도 사람사는 곳인데...“ “저래가지고 사회생활 어떻게 하겠나.” 그렇습니다. 저는 군대 근처도 가보지 않았고, 사회와 군대는 꽤 많은 유사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보다 더 민감하고 여린 사람들도 군대를 다녀온 것을 보면 군대가 사람 잡는 곳만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 다. 하지만 군대는 사회의 폭력성, 남성중심성, 권위-위계가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사 회에서는 제 나름의 생활방식을 만들어가고 사회적 불평등, 폭력에 저항할 수 있지만, 군대는 둘 중 하나입니다. 거부할 것인지, 적응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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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응하는 것, 익숙해지는 것은 저에게 가장 두려운 것입니다. 고된 육체 활동으로 생각은 점점 적어지고, 군대 의 살인훈련에 몸은 익숙해지는 것, 선임병이 되어 후임병에게 욕설과 폭력을 행하는 것, 종국에는 전투명령에 저항하지 못하고 집단의 부속품처럼 살인의 행위자가 되어버릴 수 있는 것은 모두 군대에 적응할 때 가능한 것 입니다. 저는 군대를 다녀온 한국 남성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군대의 폭력과 문화가 몸과 마음에 새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마디 못하고, 생명을 죽이는 어떤 짓도 하지 못할 것 같은 착한 사람이라도 말 입니다. 그래서 군대의 폭력 때문에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사람들보다 저는 운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입영 영장보다 병역거부를 먼저 만났기 때문입니다. 병역거부를 선언한 저를 국가는 병역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감옥에 가두고 저의 양심을 교정하려하겠지만, 저는 군대를 거부한 저의 양심을 꿋꿋이 지킬 것입니다. 50년이 넘는 세월동안 1만 명 이상의 병역거부자들이 감옥에 갇혔지만, 그들의 양심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사회가 그들을 이단종교라고 매도하고 저와 같은 사람을 사회부적응자라고 비난하겠지만 군대가 존재하는 한, 이에 저항하는 이들은 끊임없이 나올 것입니다. 비록 병역 거부자들 한 명, 한 명의 힘은 미약하지만 제 목소리에 공감하고 군대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더욱 많아질 것입니 다. 40년 전 베트남 파병군인은 멋쟁이 군인이었겠지만, 2005년 자이툰은 그렇지 않습니다. 군대는 남자라면 당 연히 경험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가까운 미래에는 누구나 꺼려하고 그 존재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 는 집단이 될 것입니다.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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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툴어도 씩씩하게! 고동주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2005년 10월 04일 병역거부 선언
10월 11일 병무청에 입대를 하지 않겠다고, 나를 고발해달라고 전화한지 벌써 2주가 지났다. 이 글을 독자들이 읽 을 때쯤이면 한 달은 지나 있을 거 같다. 시간이 정말 빠르게 지나감을 느낀다. 병역거부를 하기 전에 일주일간 고민 좀 하겠다고 사람들을 걱정시킬 때도 시간이 정말 빠르게 지나간다고 생각했는데…. 이 짧은 시간동안 많은 일이 있었 다. 그리고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그 생각들을 한번 풀어보고자 한다. ^^ 10월 11일 병무청에 전화를 걸었다. 이전 병역거부자들이 서울지방병무청에서 병역거부의사를 밝히는 방법대로, 전 화와 이메일을 통해서 내 의사를 밝히려 했으나, 경기인천지방병무청은 그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들은 여호와 의증인들이 병역거부하겠다고 하면 항상 소견서를 서면으로 받아왔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여호와의증인 신자가 아니 라 천주교 신자라고 했더니, 그렇다면 직접 올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그런 경우는 단순 병역기피니 자신들이 고발을 하면 된다고 했다. 그렇다 쳐도 법적으로 여호와의증인들도 단순 병역기피로 고발당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 지만, 암튼 제대로 고발을 해달라고 다시 영장을 보내는 짓은 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전화통화를 마쳤다. 병 무청에서는 나름대로 여호와의증인들이 일반적 병역기피자들과는 다르다고 생각은 하는 것 같았다. (물론 결과적으로 는 같지만) 이나마 그동안 여호와의증인들이 수십 년 동안 조용히 한길을 걸어온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사회참 여는 많이 안한다고 하지만, 저절로 사회참여가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0월 19일 있을 기자회견을 준비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여러 사람들과 접촉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신부님들이었다. 하지만 많은 신부님들이 곤란함을 밝히셨다. 어렸을 때부터 신부님들은 용감하다고 생각했 다. 신부님들은 결혼을 하지 않아서 처자식 걱정이 없기 때문에 정의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 지만, 신부님들이 가족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신부님들끼리 가족을 이루고 있고, 그 전체 가족이 곧 무서 운 아버지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10월 15일에 첫 후원모임을 진행했다. 우울해졌던 마음이 활짝 펴지는 날이었다. 다들 바쁘고, 학생들은 시험기간 임에도 불구하고 많이 와주고, 진심으로 격려를 해주었다. 특히 후원회장을 하겠다고 나섰던 여옥이가 혼자서 굉장히 많은 일을 하게 되었다. 벽장식, 고동주에게 격려의 한마디를 쓸 수 있는 종이, 종이를 접어 넣을 수 있는 예쁜 유리병, 음식 준비(여기에는 또 많은 이들의 도움이 ^^) 등…. 첫모임이라 많은 이들이 도움을 줄 수 없었다. 다음번에는 좀 더 많은 친구들과 함께 꾸려나갈 수 있으리라. 그리고 좀 더 체계적으로 할 수 있으리라. 당연히도 내가 병역거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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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도 처음이고, 후원모임을 하는 사람들도 이런 경험이 거의 없어서 우왕좌왕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에 너무 실망 하지 않았으면 한다. 처음이니까! (너무 책임 회피인가? ^^;) 지금까지 기자들과 4번 정도 인터뷰를 했다. 한결같이 ̇ ̇ ̇ ̇ 그리고 당연하기도 하다. 기자들은 병역거부의 계기를 물어보았다. 그 중에서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유형은 결정적인 계기를 묻는 것이었다. 나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상당히 긴 기간 고민을 해왔고, 그 고민이 있기 전에 또한 오랫동 안 군대나 평화에 대한 생각이 쌓여왔는데, 무엇이 결정적 계기였지? 갑자기 일기를 써둘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암튼 저런 질문이 들어오면 이것저것 중구난방으로 대답을 하게 된다. 그런데 역시 아무나 기자를 하는 건 아닌 듯싶다. 내 가 중구난방으로 대답을 해줘도 그걸 짜임새 있게 기사로 내어놓으니 말이다. 인터뷰한 것이 기사로 뜨기 시작하면서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가장 많이 댓글이 달린 기사는 오마이뉴스 같은 데, 이전 병역거부자들의 기사에 달렸던 댓글을 보면서 느꼈던 울분보다는 좀 덜했다. 이제 그런 반응들에는 조금 적응 이 되었나보다. 또한 그 친구들이 왜 그렇게 얘기하는지도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다보니 그렇게 반응 하는 친구들이 오히려 안쓰럽게도 느껴진다. 그리고 나보다는 오히려 나를 지지해주는 친구들이 더 속상해하는 거 같 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24일에는 우리신학연구소와 천주교인권위원회에서 주최하는 긴급토론회가 열렸다. 천주교 교리에 비추어 병역거부 를 어떻게 볼 것인지를 토론하는 자리였다. 이날 느꼈던 것은 자신감이었다. 물론 내가 병역거부를 하는 이유가 반드시 교리에 부합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천주교회의 역사가 증명하듯 교리와 충돌하면 굉장한 어려움이 뒤따른다는 걸 알기에 본능적으로 위축이 되곤 했다. 그러나 토론회를 통해서 교회가 그동안 발전해온 전쟁교리와 평 화주의전통에 대해서 한국의 상황에 맞게 알리는 노력을 너무 게을리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직간접적으로 전쟁을 수 행하고 있는 한국의 상황에서 교회는 그 전쟁의 정당성을 판단해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온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토론회를 빌어서 자신감을 얻는 것이 여전히 부족한 나를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진정 내 가 자신감을 가져야 하는 근원은 나의 신념인데 말이다. 그동안 군사주의문화가 너무나 강대하고, 천주교회의 절대성에 너무 억눌려왔다는 핑계에서 빨리 벗어나야겠다. 내 안에 있는 생각대로 이야기하고 그대로 살아가고 싶다. 토론회를 마치고 학교에 가서 친구들을 만났다. 오랜만에 만나는 터라 술을 마시러 갔다. 술이 꽤 들어가자,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내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가 있었다. 하지만 그 친구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형이니까, 자신이 아는 사람이 병역거부 하니까 도와주는 것이라 말했다. 그 다음부터는 다른 곳에 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논쟁(?)이 오고갔다. 우선 그렇게 솔직하게 얘기해주는 친구가 고마웠다. 같은 동아리라고 같은 마음으로 나를 지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앞으로는 이런 친구들과 더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갔으면 하는 생각이다. 바 로 주위의 친구들부터 제대로 알려주는 것부터 시작해야하니까…. 병역거부를 하고나서 숨 가쁘게 하루하루 지내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도움을 받았다. 거부는 내 개인의 결단으로 시작했지만, 그 이후의 모든 일은 나 혼자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일들이다. 여기저기서 자랑스럽다는 이야기 가 들려오지만, 정말 대단한 사람들은 나를 지지해주고, 자신의 시간을 쪼개면서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도움 을 잊으면 안 되는데, 어떻게 살아가야 보답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을 팍팍 심어주고 있다. 모든 분들이 너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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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위, 병역거부 관련 정책권고안 낸다. 2기 국가인권위, 병역거부 문제 해법 마련을 위한 준비 작업중.. 이번 청문회는 정책 권고안을 내기위한 의견 청취 자리.. 뎅 | 전쟁없는세상 책임활동가 + sehw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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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청문회는 병무청 전원규 선병국장, 양심에 따 른 병역거부 연대회의 이석태 공동집행위원장, 국방부 최운 인사국장이 모두 진술을 발표한 뒤, 앞의 3인과 더 불어 양심적 병역거부 수형자 가족모임 홍영일 공동대 표, 재향군인회 안보연구소 정창인 연구위원, 양심적 병 역거부 관련 활동가 임태훈, 자유시민연대 조남현 대변 인, 국민대 법과대학 이재승 교수, 중앙대 법과대학 제 [2005.10.19 국가인권위 병역거부 청문회]
성호 교수가 진술인으로 참석하여 청문위 위원들의 질 문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10월 19일 오후 2시, 국가인권위원회 을지로 청사 13층에서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관련 청문회가 개최 되었다. 인권위는 이번 청문회를 계기로 관련 단체 인사 와 전문가들의 의견을 직접 들어본 뒤, 병역거부자 문제 에 대한 정책 권고안을 해당 기관에 제시할 계획이다. 청문회에 앞서, 인권위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연대회 의와 국방부, 병무청 등 관련 단체와 기관에 서면으로 의견 조회를 마친 상태였다. 이번 청문회는 그간 이 사안에 대해 확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인권위에서 직접 준비한 자리였기에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국가인권위는 출범한 이래 꾸준히 접수된 병역거부 관련 진정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보이 지 않아 인권단체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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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복무 입법 vs 국가안보 위협 이 날 진술은 청문위원과 진술인 사이의 질문과 답변 으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진술인 사이에 날카로운 공 방전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진술인들의 답변은 아직 한국사회에서 병역거부를 바라보는 시선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 주었다. 국방부 최운 인사국장의 경우, “여전히 병력자원이 부 족한 상황에서, 병력자원 누수를 발생시킬지도 모르는 병역거부 인정은 현 단계에서 받아들이기 힘들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그는 대체 복무제가 징병제의 기본 틀을 훼손할 우려가 있고, 종교 종파 간 새로운 갈등을 야기
할 수 있으며, 병력자원 수급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가했다.
점이 국방부가 이 제도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그는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병역 거부를 이유로 처벌 받아서는 안된다고 규정한 유엔 인권이사회의 국제 인
그러나 최운 국방부 인사국장은 "남북 긴장관계 해소
권규약에 한국도 가입한 만큼 인권위는 우리나라의 양
등 국방환경 변화에 대비해 대체 복무제 도입을 장기
심적 병역 거부자의 인권 보호와 대체 복무제 입법을
과제로 신중히 검토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는 최근
촉구해야 할 법률상 의무가 있다"고 덧붙였다. 또 대만
병력감축과 첨단시스템 도입이라는 국방개혁 분위기 속
의 사례를 통해, 대체복무제도가 국가안보를 악화시키는
에서 나온 발언이긴 하나, 병역거부에 대한 대책을 인권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보이기도 했다.
의 관점에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이 날 발언에서 작년 국군 병력을 9천명 감축시키
이어 양심적 병역거부 수형자 가족모임 홍영일 공동
지 않았냐는 청문위 위원들의 질문에, “이것 역시 병력
대표는 "종교적 이유로 병역을 거부하는 것은 국민으로
자원의 부족에 의한 것”이라는 황당한 답변을 내기도
서 의무를 저버리겠다는 것이 아니다"라며 "군과 관계되
해, 잠시 코믹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지 않는다면 다른 어떤 일이라도 할 준비가 돼 있는 게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자세"라고 주장했다.
이 외에도 대체복무제 도입에 반대하는 진술인들은 병역 문제는 헌법이 규정한 국민의 의무에 따른 것으로
병역거부 사안, 올해 안 신중 처리
종교적인 이유로 개인이 이를 선택할 문제가 아니라고 거듭 강조했다.
조영황 국가인권위원장은 청문회 전날 기자들과의 오 찬간담회에서 “올해 안에 이 사안에 대해 권고할 예정이 지만, 신중하게 처리할 것”이라며 부담감을 표했다. 국가 인권위 관계자도 “11월 중 병역거부 사안이 위원회에 상정될 것”이라며 “특별한 경우가 발생하지 않는 한 청 문회 결과 등을 바탕으로 병역거부에 대한 권고가 나올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인권단체들은 이번 권고안으로 인해 정부
[2005.10.19 국가인권위 병역거부 청문회]
이에 대해 양심적 병역거부 연대회의 공동집행위원장 인 이석태 변호사는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에 대한 그 동안의 논의와 활동 과정을 요약하면서 대체복무제 도 입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이 변호사는 "작년 대법 원이 유죄 판결을 내리고 헌법재판소가 병역법 위헌제
차원에서의 대책 마련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는 작은 기대를 걸고 있다. 현재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연 대회의는 국회의원 설득작업과 병역거부 전시회 등의 계기를 통해, 병역법 개정안의 통과를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이번 인권위 청문회와 정책 권고안, 그리고 인권 단체들의 노력이 합쳐져 큰 결실로 맺어졌으면 한다.
청 신청을 기각했지만 소수 의견 등을 통해 대체복무 입법의 필요성을 시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평
[참조] 연합뉴스, 프로메테우스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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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시간을 깨고, 천주교회는 병역거부에 답하라. 천주교의 긴급 토론회를 다녀와서.. 용석 | 전쟁없는세상 책임활동가 + stego
@ jinbo.net
천주교신자 고동주씨의 병역거부를 계기로 천주교 내
정신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에서 병역거부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전개될 전망이다. 천주교 신자로서는 최초로 병역을 거부한 고동주씨의
전쟁에 대한 천주교의 입장변화
선언을 교회의 입장에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논의 하는 긴급토론회가 10월 24일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교의 전쟁에 대한 대응방
서 천주교 인권위원회와 우리신학연구소의 주최로 열렸
식은 크게는 정의로운 전쟁과 비폭력노선으로 나뉠 수
다.
있고 이것을 구체적으로 나누면, 십자군전쟁-성전, 내키 지 않는 슬픈 전쟁, ‘이번 전쟁에 ’ 대한 반대, 비폭력 저 항, 무저항으로 나뉠 수 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이 전의 카톨릭교회는 정의로운 전쟁과 십자군-성전의 논 리가 뒤섞여서 전쟁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기존 의 전쟁양상과는 다른 현대전의 참혹함을 보면서 오히 려 교회의 평화주의자들이 형성이 되었고 그들은 “더 이 상 정의로운 전쟁은 없다”며 “전쟁보다 더 악한 것은 없 [토론회에 참가한 병역거부자 고동주씨]
김덕진(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씨의 사회로 진행 된 이날의 토론회는 천주교 교리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에 대한 지지를 어떻게 이끌어낼 수 있을지가 논의 되었다. 발제로 나선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강인철교수는 카톨릭 교회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교리의 변화과정을 면밀하게 검토하면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카톨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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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주장했지만 그 당시까지 천주교 교회와 신자들은 이 흐름에 거의 가담하지 않았다고 한다. 천주교회의 입 장변화는 2차대전을 겪으면서 일어났는데, 유례없이 참 담한 전쟁을 몸소 겪은 교황 비오 12세는 ‘정의로운 전 쟁에 ’ 입각해 전쟁에 대한 입장을 재정립하여 정의로운 전쟁이 되기 위한 요건을 보다 엄격하게 규정하였다. 이 후 1960년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 요한 23세는 『지상의 평화』를 통해서 모든 전 쟁에 대한 부정을 시사한다. 평화를 “전쟁의 부재”나 “적
이후 이어진 토론에서는 신성국 신부와 김재복 수사
대세력의 균형”이 아닌, “정의의 작품”이자 “사랑의 열
와 평신도 안원영씨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신성국신부는
매”라고 이해하며 한층 평화주의의 입장으로 다가갔다.
카톨릭의 교리는 모든 생명윤리평화윤리와 ․ 일치한다며,
한 편 미국의 교회들도 베트남 전쟁을 겪으면서 선택적
그 동안 한국교회는 국가안보의 종사자였을뿐, 평화에
병역거부와 평화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이어 갔다고 한
대한 신앙고백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김재복수
다. 그리하여 1980년대 이후에는 ‘비폭력을 ’ ‘정의로운
사는 이라크에서의 경험을 소개하며 전쟁의 부당함을
전쟁’ 교리와 대등한 지위를 갖는 ‘두 전통중의 ’ 하나로
역설하였다. 평화를 여는 카톨릭청년 대외협력부장인 안
격상시키면서 양자간의 화해를 도모하기도 하였다. 현재
원영씨는 한국 천주교의 역사에서 초기에는 국가에 저
까지도 전쟁에 관한 교리의 공식입장은 ‘정의로운 전쟁’
항하여 순교도 했지만, 현대사에서는 국가에 순종하는
이지만, 현대화된 정의로운 전쟁의 이론은 보다 엄격한
역사를 가졌다며, 반성을 촉구하였다.
기준으로 사실상 정의로운 전쟁이란 가능하지 않게 되
한편 질의 응답시간에서는 한국과 직간접적으로 연결
었다고 한다. 또한 교회 내의 평화주의자들에 의해 발전
된 전쟁들에 대해서 한국의 천주교회가 어떤 입장을 가
되어 온 ‘비폭력’ 또한 병역거부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
졌냐는 질문이 나왔다. 강인철 교수는 중일전쟁과 태평
의 교리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양전쟁에 대해서 한국교회는 성전의 입장을 가지고 바 라보았고, 한국전쟁에 대해서는 유사종교인 공산주의를 멸하는 성전이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였다. 베 트남 전쟁에 대해서는 자세히 조사해본 바가 없지만, 60 년대 주교회의의 일관된 입장은 반공주의였다고 했다. 그리고 최근의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는 파병이전에는 조심스러운 입장표명이 있었지만, 파병이후에는 침묵으 로 일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토론회의 참가자들은 그동안 천주교회의 병역거부에
[천주교 긴급 토론회 발제자들]
대한 침묵을 반성하며 앞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종단내의 자성을 촉구하였다. 한편
이후 발제에 나선 전쟁없는세상의 오영은 활동가는
고동주씨가 활동했던 서가대연(서울카톨릭대학생연합회)
그동안의 병역거부에 대한 한국사회의 논의과정을 개괄
을 중심으로 형성된 동주씨의 후원회에서는 11월부터
적으로 설명하고, 병역거부에 대한 반대여론의 핵심인
평화미사를 계획하는 등, 카톨릭 내외에 동주씨의 평화
한국의 특수성과 국가안보에 대한 비판의 내용을 이야
의 마음이 전달되도록 여러 가지 활동을 할 예정이라고
기하였다. 독일, 대만 등 외국의 대체복무 도입당시와
밝혔다. 주류 교단의 50년의 침묵 속에서 이단들의 엇나
비교하여 한국의 상황이 대체복무를 충분히 시행할 수
간 행동으로 여겨졌던 병역거부가 한 천주교인의 병역
있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국가안보의 개념 자체에 대한
거부를 계기로 종교계, 더 나아가 사회에 어떤 파장을
비판을 통해서 탈냉전 평화의 시대에 걸 맞는 새로운
일으킬지 관심이다.
안보개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국가와 전쟁에 순응한 역사를 반성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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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징병 논란에 대하여.. 용석 | 전쟁없는세상 책임활동가 + stego @ jinbo.net
한동안 여성징병제로 사회가 시끌벅적했었다. 한국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여성문제와 군대문제가 연결되
사회는 ‘군과 ’ 관련되면 어떠한 사건이든그 맥락이 사
었던 군가산점제 폐지의 과정에서 그 아프고 화나는
병들의 인권에 대한 것이든, 반공주의와 레드 콤플렉스
기억들처럼 말이다. 그리고 또 여성문제와 군대문제가
에 입각한 것이든, 대통령선거와 결부된 것이든지 간에
만났다. 여성징병제에 대한 사회적인 여론이 한차례 들
사회적인 이슈가 된다. 특히 그 중에서도 군대 가지 않
끓고 지나간 뒤 이런 글을 쓰는 것이 한 발짝 늦은 것
아서 군대와는 별 상관없어 보이는
사람1)들과
군대가
연관될 때는 사회적인 이슈와 함께 온갖 눈살 찌푸릴
일 수도 있지만 덕분에 더 길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1) 군대는 한국사회 모든 구성원들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군대와 사회가 서로에게 끼치는 영향을 고려했을 때, 여성문제와 군대문제가 서로 만나는 지점은 군가산점제, 여성징병제에 국한하지 않고 오히려 일상생활 전반으로 확대해서 봐야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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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징병제, 논란의 시작
먼저 여성징병에 대한 찬성 쪽의 근거를 살펴보면, 군복무의 확대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군대를 경험함으
여성징병제의 주장이 갑자기 이슈가 되긴 했지만, 처
로써 전 국민적인 안보의식이 향상될 수 있다는 주장이
음으로 제기된 것은 아니었다. 페미니스트저널 이프의
있다. 이는 국방이나 군사안보분야의 전문가들이 주로
2003년 봄호에서 이김정희 교수는 평화군축을 전제로
취하는 입장이다. 다음으로는 여성징병제가 현 사회의
징병제 상태에서는 여성도 함께 징병대상이 되어야하고
불평등한 남녀관계를 개선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어느 특정 성(性)의 비율이 70%를 넘어서는 안된다2)
의견이 있다. 사실상 대한민국의 군대가 보이지 않지만
고 주장하였다. 여성징병제가 보다 본격적으로 사회적인
강력하게 규정되어지는 일종의 시민권을 획득하는 곳이
이슈가 되기 시작한 것은 2005년 한 여고생이 “남자만
고, 그러한 구조로 인해서 남녀차별이 심화되기 때문에
의무 군복무 하는 건 양성평등의 원칙과 모든 국민이
여성징병을 통해서 보다 성평등한 사회로 나아가야 한
국방의 의무를 지도록 한 헌법에 위배 된다며 ” 헌법소원
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여성징병을 실시하면 한국의 남
을 내고, 한나라당의 송영선 의원이 희망자에 한해서 여
성중심적이고 비민주적인 군대의 군사주의 문화가 개선
성도 사병으로 복무할 수 있는 병역법개정안에 대해서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언급하면서부터이다. 반면에 여성징병을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우선 현실론
찬성VS반대, 다양하고 복잡한 충돌 세상이 변해서인지, 사안의 특수성인지, 이 문제에 대 한 찬성과 반대는 기존의 보수와 진보처럼 쉽사리 구분 하고 판단하기 힘들다. 보수 진영뿐만 아니라 기존의 진 보진영 안에서도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지금까지 여성징병제를 둘러싼 입장들을 거칠게 나누어 보자면 크게는 찬성과 반대로 나뉘지만, 그 안에 는 오히려 찬반보다 더 큰 차이가 존재하기도 한다. ‘여 자주제에 어디 감히 군대를 올 수 있냐는 ’ 의견이나, ‘우 리만 고생하기 억울하니까, 여자들도 군대가서 고생시켜 봐야한다.’ 이런 류의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고려할 필요 가 없으므로 언급하지 않겠다.
이 있다. 현실적으로 한국 군대의 구조상 여성징병은 불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또한 여성징병제가 성차별을 해소 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군대 안에서도 남녀의 성역할 이 구분되어 흔히 여성의 일이라고 사회적으로 인식되 는 보조적인 업무에 그친다는 이스라엘의 예를 들어3) 여성징병을 통한 여남평등의 가능성을 비판한다. 또한 징병제도가 가지는 강제징집-반론의 여지는 있겠지만, 가능한 한 국가가 개인에게 의무를 강요하지 않는 모습 이 바람직한 모습일 것이다-의 문제점이라든지, 징병을 통한 시민권의 획득이 과연 옳은 것인지4)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한다. 그리고 평화와 군대의 상관관계에 대한 비 판적인 인식을 토대로 여성징병 뿐만 아니라 징병제와 군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다.
2) 이김정희, 「여자가 군대를 간다면…-‘여남군대에 대한 꿈꾸기’」, 『페미니스트저널 이프 2003년 봄호』, 도서출 판 이프 3) 최정민, 「군대의 여성화-여성평화운동은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2005년 9월 28일, 여성/병역/ 의무-대안적 논의 를 위해서 WAW집담회 자료집 4) 징병제를 통한 시민권의 획득은 특정한 시기에 형성된 특정한 조건-서구의 시민혁명 시기에 국한하는-이기 때문에 그것을 바탕으로 지금의 시민권을 논의하기에는 군대와 전쟁의 양상, 그리고 시민권의 개념이 크게 차이가 난다. 보 라, 「병역법개정안에 대한 논쟁-어떻게 넘어설것인가」, 2005년 9월 28일, 여성/병역/의무-대안적 논의를 위해서 WAW집담회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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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안보’ 해체하기
한 사회계층의 불평등-여남의 문제이든, 비장애인과 장 애인의 문제이든, 군필자와 병역거부자의 문제이든-은
위의 복잡한 찬반 논리의 여러 가지 측면들에 대해서
결코 해결될 수 없다.
모두 언급하기에는 능력이 벅차기 때문에 한가지의 논 점을 잡아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찬성 쪽의 입장 을 보면 그리고 일부 반대의 입장을 가진 사람들도 기
‘나와 ’ ‘작은 공동체의 ’ 안보를 스스로 지키 기
본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이 안보의 주체는 국가이고 그렇기 때문에 국가의 안보를 지키기 위한 군대의 존재
그렇다면 ‘국가안보를 ’ 대체, 혹은 그 집중도를 분산
는 현실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국가안
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일단 안보를 고민
보를 보다 많은 사람이 경험함으로써 안보의식을 높이
하는데 있어서 ‘국가라는 ’ 틀은 과감하게 벗어던질 필요
고, 또한 국가안보에 군입대를 통해서 기여함으로써 그
가 있다. 그렇게 되면 ‘내가 ’ 지켜야하는 것은 외국의 침
계층이 일정한 권리를 얻게 된다는 결론의 도출이 가능
입으로부터 우리나라의 영토가 아니라, ‘나와 ’ ‘내가 속
하게 된다.
한 공동체의 ’ 안녕과 평안이다. 보다 일상적이고 보다 많은 영역에서 안보가 지켜지기 위해서는 안보의 대상
하지만 과연 안보의 주체는 국가이고 안전해야 할 것
은 아주 구체적이고 일상적이며 굉장히 작은 형태의 집
은 국가의 영토일까? 물론 지금 당장 징병제를 폐지하
단-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한-이거나 개인으로 점차적으
고 군대를 없애자는 의견은 하나의 의견일 수는 있어도
로 축소되어야 하고, 안보의 주체도 ‘군대와 ’ 같은 거대
설득력을 가지기 힘들다. 하지만 ‘안보라는 ’ 것이 ‘국가’
한 조직이나 국방전문가와 같은 소수 집단이 아니라, 모
를 위한 것이고, ‘군대라는 ’ 사회적으로 합의된 폭력의
두가 스스로의 안보를 지키기 위한 주체가 되어야 한다.
공권력을 통해서만 지켜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강력한
징병제 하에서는 국가를 지키기 위해 군대를 가는 성인
군대가 막아낼 수 없는 위험은 너무나 많다. 세계 최강
남성만이 안보의 실질적인 주체이며, 그로 인해 차별적
의 군대를 가지고 있는 미국은 카트리나라는 위협으로
인 관계가 형성되지만,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국가라는
부터 국민들에게 어떠한 안전도 보장해 주지 못했다. 때
집단화된 권력이 아니라 개개인들의 삶과 공동체라면,
로는 많은 경우, 국가의 안보를 이유로 군대는 지역민들
모두가 안보의 주체가 되고 그로부터는 불평등한 관계
의 안보를 위협한다. 미국의 국민들은 세계최강의 군대
가 형성되는 조건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때문에 오히려 테러의 위협에 시달려야 한다. 평택의 주
또한 국가안보에 입각한 징병제가 특정한 계층이 특
민들은 미군기지 덕분에 오히려 더 불안하다. 시끄러운
정한 기간에 안보의 주체가 되는 것에 비해 개개인이
헬기 소리뿐만 아니라, 미군의 환경오염의 피해는 고스
안보의 주체가 된다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일생을 통
란히 주민들에게 남는다. 게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한 일상 속에서 안보의 주체가 된다. 이는 한 사회의 안
먼저 폭격대상이 될 곳이 군사시설일텐데 그만큼 불안
보가 소수에 의해서 이루어지면서 생기는 부작용-이를
한 곳이 어디있겠냐.
테면 군대가 독재정권에 의해 악용될 때 생기는 문제점
여성징병을 둘러싼 논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지점 중의 하나가 바로 ‘안보에 ’ 대한 개념과 정의이다. ‘안보’ 의 대상이 ‘국가이고 ’ 주체가 ‘군대인 ’ 이상, 징병제를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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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견제할 수 있는 훨씬 안정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이러한 시도들은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면서5) 이미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다. 생존자체를 위협하는 ‘핵’ 에 대해서 국가가 지켜주지 못한 공동체의 안전-오히려 국 가가 헤치려 했던-을 위해 국가와 맞섰던 부안주민들, 군사적인 안보개념들 속에서 파괴되는 일상을 지키기 위한 평택주민들의 싸움이 좋은 예이다.
정리하며 물론 ‘안보에 ’ 대한 논점으로 여성징병제에 대한 논란 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나 여성문제 에 있어서는 보다 깊이 있는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능 력의 부족함에 아쉬움을 남기지만, ‘안보에 ’ 대한 재정립 은 여성문제의 해결에도 큰 연관을 가질 것이라고 확신 한다. 안보에 있어서 ‘국가로부터의 ’ 탈피는 안보주체의 확대를 통한 평등한 관계 형성뿐만 아니라, 국가안보의 지탱수단인 합법적인 폭력으로서 공권력이 가지고 있는 절대권력에 대한 문제제기이기 때문이다. 차별은 의무와 권리의 격차에서 나타나는 것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권력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것이고, 차별을 없애는 것은 독점되어 있는 권력이 어떻게 분산될 수 있는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5) 물론 이러한 안보관에 입각한 실천들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국가안보에 입각한 군사적인 방어 또한 많은 실패를 해왔으며, 거기에 기울인 노력을 비교하여 본다면 군사적 방어는 더욱 더 큰 실패를 했다고 할 수 있겠 다.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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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 (fan)
평화캠프, 그 기억을 떠올리며.. 달 | 전쟁없는세상과 친한 친구 + 평화캠프2005 참가자
어느덧 두 달 정도 되었나. 그동안 달리기만 한 것
이 들던 시절이었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평화 캠프
같다. 그 기억들이 저만치 멀어져서 저기 저곳에 있는
에 가게 된 동기 중의 절반은 회비가 무척 싸다는 점이
것을 보면서 새삼스레 놀랬다. 최근 일주일 간은 숨을
었다. 왠 단체가 후원이라도 해주는 건가. 김밥 2줄, 우
몰아쉬며 주저앉아 있었다. 내가 속한 동아리에서 여러
유 하나, 치즈 5pcs, 가끔 보너스로 라면이 들어가는,
가지 행동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사이, 나는 책 사이에
총 5천원 어치의 야식을 3번만 먹어도 다 써버릴 돈으
틀어박혀 학점 받을 생각에만 몰두했으니. 그러고는 오
로 5일이나 버틸 수 있다니. 다른 일정도 없었기에 아무
늘까지 며칠 동안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거의 누워만
런 고민 없이 평택으로 가는 전철을 탔다. (하지만 배보
있었다.
다 배꼽이 크다. 맥주 값, 복채, 교통비로 참가비보다 더 썼다)
그다지 새삼스럽지 않다. 저런 일상은 처음이 아니 니까. 말 그대로 일상이다. 누가 말해준 미래인지는 모
그렇게 어영부영 와서는 5일간을 무얼 하다가 간걸
르겠지만, 미래를 바라보며 열심히 달리기만 하는 게 대
까? 대강 말해보자면, 세 끼 챙겨서 먹고, 가끔 운동(펭
부분의 사람들의 일상이니까. 하지만 이런 일상이 새삼
귄과 펠리컨 같은)도 해주고, 저녁이면 맥주도 마시고,
스러웠던 적이 있었다. 2달 전이었던가.
점심 먹고 낮잠도 늘어지게 자고, 박민규 씨의 소설 카 스테라와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도 읽고, 이빨
방학의 막바지였다. 몇 차례의 현장 활동으로 까맣 게 탄 피부. 돈도 거의 다 떨어져서, 뭘 먹고 사나 고민
6) 이를 닦다의 사투리. 많은 사람들이 못 알아듣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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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열심히 쳤다6).
그것 뿐 만이 아니네. ‘달이라는 ’ 이름을 인디언 식
와야 하는 걸까.
이름 짓기의 변형판인 놀이 끝에 얻었고, 직접 행동을 위한 5개의 단계별 교육도 받았고, 기린 언어도 배우고,
하지만 새삼스러울 것 없다. 달려가던 나에게 다시
에스페란토 어도 맛보고, 생리와 면 생리대에 대해 교육
뒤돌아보면서 숨을 몰아쉴 수 있는 기억으로 남았으니
을 받기도 했었다.
까, 더 이상 아쉬울 것도 없다. 때로 달려가는 이 큰 길 이 아니다 싶을 때, 새로운 생각들을 가득 담게 해준 이
정말로 그렇게 멍하게 지냈는지 어떠했는지 모르겠지
캠프는 많은 영감의 원천이 되어줄 테니까.
만, 시간은 지나고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뭐, 학교 정문 으로 전경들도 달려왔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나는 팬 이구나. 팬일 뿐이구나.
거창한 구호도, 작은 일상에서 시작하는 많은 이야기 들도, 이른바 폭력적인 방식들도, 흔히 말하는 어떤 비 폭력 행동도, 그리고 여기서 깨달은 새로운 삶의 방식들
1. 삼미 슈퍼스타즈의 팬들처럼 나는 울어야 했다.
도 하나의 거대한 바다처럼 마음 한 구석에 짠 내를 내
너무나도 말도 안되는 경기였다. 신난 OB의 팬들인 것
면서 담겨 있는 것이었다. 평화 캠프에서 5일간 이야기
마냥 국방부 직원들은 운동장 구석에서 소리를 질러댔
하고 배우고 깨우치고 몸으로 행동해 나갔던 것들이 지
고, 쓰러진 아주머니 곁에서 나는 그저 울분을 삼켰다.
금은 갈무리되고, 천천히 앙금처럼 가라앉아, 지금의 나
건강 진단이라도 받아야 할 판이었다. 빛이 잘 들어오는
는 이렇게 누워있지만은, 다시 일어서서 덧없어 보이는
창이 있는 방에는 비도 잘 들어왔다7).
경기를 시작하려 할 때에는 그 바다도 출렁거리지 않을 까 싶다.
2. 나중에 직접적인 행동을 하면서 나는 순간 내가 선수가 된 듯, 그래 함께 건강 진단을 받아야 할 사람이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저렇게 나열한 기억들과, 모두
라도 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고서 2달이 지나갔다. 그
와 함께 속삭인 비폭력의 기억들과, 나는 팬이었구나!
러고 오늘 이렇게 글을 쓰려고 앉는 순간, 나는 다시 팬
하는 느낌은 바다처럼 내 맘에서 출렁이고 있다는 것이
이 되어 있음을 느꼈다. 그렇게 운동장에서 달려나와서
다. 소금으로 방부 처리되었으니 오래오래 갈 것이다.
눈물 한 번 쓰윽 닦고는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있
그 기억들은.
었다. 간간이 삼미를 기억하며 잠깐의 응원을 하고, 쓰 린 속을 달래는 방법을 배워 가면서 그렇게 세상에 무 덤덤해져 갔다. ** 당부 말씀
5일의 기간 동안 나는 무슨 생각을 해야만 했을까. 정답이란 없는 거겠지. 축 늘어진 오징어처럼 짠 물을 흘리며 서울로 돌아가서는 이내 마른 오징어가 되어 씹
혹시 제 후기가 이해가 되지 않으신다면 박민규 씨의 소설 ‘카스테라와 ’ ‘슈퍼 삼미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 꼭 보시길 바랍니다. 저 두 권의 책을 읽었던 것과 이천 오년 8월 중순에 평택 분교에서 이러 저러한 일을 겪었던
기도 힘든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곰팡내를 내면서
것은 저에게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경험이기에, 제 후기에서도 아주 긴밀
누워만 있는 나에게 평화 캠프의 의미는 무엇으로 다가
히 결합되어 있습니다.
7) 기억해 줄 사람이 있을까. 내 소개를 하면서 써먹었던 말이다.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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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 안의 그들을 만나다
평화캠프, 그 기억을 떠올리며..병역거부 수감자 특별 면회투어를 다녀와서 날맹 | 전쟁없는세상 수습활동가 + nalm109 @hanmail.net
0. 수감된 병역거부자 면회투어를 다녀온 지도 벌써 한 달이 넘어가는 것 같다. 그땐 한창 화창한 가을날이 었는데 이제는 겨울나기 준비를 해야 할 때라니, 시간이
CO들은 비좁은 공간 안에서 낯선 사람들과 하루하루 보 내고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인데, 약간은 오만했나보다.
빠르구나 생각도 들지만 내가 어지간히도 글 쓰는 것을 미뤘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마음속에 들었던 그때그때
2. 어찌어찌해서 서울구치소에 가기로 결정을 했고,
의 느낌과 단상들을 단지 말로 풀어내기 어렵단 핑계로
나동혁씨와 조정의민씨를 만났다. 일반접견을 해본 적도
차일피일 미루는 건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찝찝함이 남
없었는데 처음부터 특별접견이라니. 담당 공무원이 함께
을 것 같다.
배석해서 이야기를 듣는 것도 ‘신기했지만 ’ , 그것보다도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이렇게 폐쇄적인 공간에서 가을을
1. 처음 특별면회투어 얘기를 들었을 때에는 같이 따
맞이하는 사람도 있구나 라는 새삼스러운 느낌에 가슴
라가야지 하는 생각은 별로 안 들었던 것 같다. 화장실
이 착잡해졌다. 기자회견을 하고 언론을 타고 어쩌면 화
들어갈 때 나올 때 맘 다르다고, 학교에 다닐 때에는 간
려해 보이기까지 하던 병역거부자들이 정말 감옥에서
간이 들려오던 병역거부자 소식에 가슴 두근대던 시절
살고 있구나. 감옥 밖에서 하는 수감자 지원 활동이 정
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막상 병역거부 관련 활동을 시작
말 큰 힘이 되겠구나 싶었다.
하고, 사람들로부터 감옥 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병역 거부자들에 대한 로망도 함께 없어졌나보다. 감옥 안에
3. 대구역에 내려 대구교도소로 가는 차안에서 깜박
서도 잘 생활하고 있겠지 으레 생각했던 것 같다. ‘수감
졸았다. 날씨도 찌뿌둥하고 몸도 찌뿌둥하고. 덩달아 마
자지원이라는 ’ 활동 역시 그렇게 와닿지 않았던 것도 사
음도 찌뿌둥했나보다. 뎅이랑 나는 미리 예약을 못해서
실이다. 병역거부자만이 병역거부운동의 주체인 것처럼
접견이 불가능하단다.
여기는 것을 경계하는 것과는 별개로 개개인으로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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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원대기실 앞에서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시며 뎅이랑
양심은 결코 교정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던 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니 금방 접견들어간 사람들이 돌아왔다. 알고봤더니 최진씨 부인분도 함께 접견을 들
5. ‘징역살이도 인간살이죠’ 나에게 오태양씨의 이미
어갔다고. 최진씨가 정말 좋아하시더란 얘기를 전해들었
지는 참한 수도자의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다. 역시나 이
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건 역시나 행복한 일인
번에 충주구치소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에도, 징역살이도
것 같다.
결국 인간살이라는 이 말 한마디로 내 마음 속에 깊숙
용석이 최진씨를 만나고 나와서 하던 말이 기억에 남
한 흔적을 남겨주었다.
는다. 군대 가야 사람되는게 아니라 감옥가야 사람되는
삶의 방식으로서의 병역거부. 예전에 어느 인터뷰
것 같다고. 사람이 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된
에서 누군가가 병역거부는 다른 무언가를 위한 수단이
다라는 ’ 말만 들으면 그럼 여성, 장애인은 사람도 아닌
아니라 운동 자체라는 말을 했던 게 기억이 난다. 그런
가 속으로 흥분부터 했을텐데, 그 말을 듣고 며칠간을
것 같다. 채식을 하고, 자전거를 타는 것처럼, 병역거부
곰곰이 곱씹어봤다. 그럼 사람이 된다는 걸 뭘까. 단지
를 하고 (이에 따르는 현실적 상응으로) 감옥을 가는
차분해진다는 점? 내면 성찰?
것은 그 자체로 한 개인의 삶의 방식의 하나라는 생각
모르겠다. 감옥에 안가더라도 사람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이 든다. 다른 거창한 무언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삶에서 평화를 실천하는 방식의 하나인 것이다. 아직은 ‘병역거부라는 ’ 행위가 세상 사람들에게 낯설게
4. 부산교도소는 버스에서 내려서 좀 걸어야 했다.
느껴지기 때문에, 뉴스에도 나오고 신문에도 나오지만,
논밭이 펼쳐져있고 스산한 풍경이었다. 여느 교도소 앞
곧 언젠가는 다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병역거부를 할
처럼 ‘속옷 판매’ ‘두부 있음’ 간판을 건 슈퍼도 있었다.
수 있는 때가 오면 좋겠다.
나름대로 환경미화에 신경을 써서 그런건진 모르겠지만, 교도소 외벽에 항구와 배와 갈매기 그림이 크게 그려져 있던 게 기억에 남는다. 이번에도 내가 신청명단에 없었 기 때문에 임치윤씨를 보진 못하고 기다리다가 돌아왔 다. 기다리던 참에 교도소 내에 대외 홍보 문구들을 쭉 읽어봤다. 내용이 들어있는 액자 모양이나 배치가, 중고 등학교 시절 건물 1층 현관에 붙어있는 교훈, 교목, 교 화, 교가 -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들을 떠올리게 했 다. ‘교정 역점 사항이라고 ‘ 적힌 것이 눈에 띄었다. 책에서 공부할 때에는, 교도소 안에서의 규칙적인 생활과 노동, 교육을 통해서 수감자들의 습속을 ‘교정하 ’ 고 ‘정상적인 ’ 사회인이 되도록 돕는 것이 교정의 목표 라던데, 정작 수감자들에게는 최소한의 생필품만을 지급 해준다는 말을 들으니 허탈해졌다. 영치금이 부족해서 운동화를 사신지 못하고, 간식을 사먹을 수 없는 사람의 교정의 질을 그들은 어떻게 판단할까. 오정록씨가 병역 거부 기자회견 때 한 말 중에 문득 떠오르는 게 있다. 국가는 자신을 1년 6개월간 감옥에 가두겠지만 자신의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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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 여섯 발자국 세로 열 발자국의..
가로 여섯 발자국, 세로 열 발자국의 공간 위를 ‘떠다니는이야기 ’ 윤경 | 전쟁없는세상 친구
1. 기숙사에서 나와 혼자 쓸 방을 구해야겠다는 생각
꼬박 큰 상자로 9개. 짐들을 트럭에서 내려 어렵게 방으
을 하게 된 것은 사실 채 일주일도 안 된 일이다. 말이
로 옮겨다 놓고 보니 문득 이게 똑 내 삶의 무게 같다
야 바른말이지 기숙사에 살면서 불편한 점보다는 오히
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어째 영 이상하였다. 에이, 쓸데
려 좋은 점이 더 많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
없는 생각은 말자고 툭툭 허벅지를 치고 일어나 기지개
구하고 이렇게 짐을 싸들고 나오게 된 것은, 어렸을 적
를 쭉 피고 일단 방 이곳저곳에 아무렇게나 쌓인 박스
부터 단 한 번도 내 방을 가지지 못하고 두 살 터울 여
의 포장을 뜯었더랬다. 순간 확 하고 먼지가 뽀얗게 일
동생과 같이 방을 써왔던 까닭에, 혼자만의 공간에 대한
어나 이리저리 손사래를 치며 창문을 반대쪽 끝까지 다
은근한 욕심은 가지고 있었던 터에, 며칠 전 학교 주변
열었다. 한낮인데도 반지하인지라 햇볕이 딱 손바닥만하
에서 혼자 자취하는 친구의 노골적인 부추김이 있었던
게 든다. 그래도 좋았다. 작지만 그래도 딱 이것만큼은
탓이다. 그 날 친구 녀석 앞에서 그 동안 담아온 욕심을
내가 오롯하게 누릴 수 있는 것만 같아 괜시리 기분이
입 밖으로 내고 나서부터는, 나 자신도 주체할 수 없을
좋았다.
정도로 마음이 앞서, 방을 따로 구해 기숙사를 나오지 않고서는 못 배길 지경에 기어코 이르고야 말았다. 결국
이쪽 벽에서 저쪽 벽까지 휘적휘적 걸어보니 딱 여섯
에는 혼자 쓸 방을 구해야겠다고 결심한 그 날로 당장
발자국이 나온다. 또 저쪽 벽에서 바로 현관 앞까지 걸
방을 찾아 조금 무리를 해서 계약금을 치르고, 바로 그
어보니 열 발자국이 세어졌다. 나는 하하 소리 내어 웃
다음 날 섭섭해 하는 룸메이트 언니를 뒤로 한 채 부리
어버렸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웃어보는 것도 참으로 오
나케 짐을 꾸려 나온 것이었다.
랜만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가로 여섯 발자국, 세로 열 발자국의 작은 공간. 내가 마음 놓고 쉴 수도 있고 이렇
-휴 꼭두새벽부터 이삿짐 트럭을 불러 나른 이삿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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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웃을 수도 있는 온전한 내 공간. 손바닥 만한 햇볕도 제 자리에서 핑그르르 돌며 따뜻하게 웃는다.
2. 순간 나는 화들짝 놀라 급한 대로 방바닥에다 담 뱃불을 눌러 끄고는 서둘러 손으로 부채를 만들어 훌훌
기회를 가질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실로 끔직하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연기를 창문 밖으로 몰아내었다. 그러고는 아무렇게나
그렇게 흐느적흐느적 마치 기는 것과 같은 자세로
풀어헤쳐진 짐들 사이로 널려있는 속옷들을 보이는 대
방 안으로 다시 굴러들어왔을 때, 방 바닥을 따뜻하게
로 밀어 넣고 문 쪽으로 다가섰다. 누구지. 현관에서 분
데워주던 그 햇볕의 온기는 이미 사라져, 대신 그 자리
명히 문손잡이를 돌리는 소리가 났던 것 같은데. 그 짧
에는 까맣게 불에 그을린 자국만이 덩그라니 남아있었
은 순간 동안 나는 내 눈앞에 굳게 잠긴 자물쇠가 금방
다. 나는 무언지 참담한 기분에 다시 담배를 꺼내 입가
이라도 녹아 쇳물로 뚝뚝 떨어져나가란 법이 어디 없겠
로 가져갔으나 차마 물지도 못하고 심호흡을 하듯 한숨
느냐는 식의 말도 안 되는 걱정들을 꽤나 진지하게 했
만 몇 번 몰아쉬었다. 좁게만 보였던 방이 갑자기 확 하
던 것도 같다. 힌참을 그렇게 멍 하니 입을 딱 벌리고
고 넓어지는 느낌이 난다. 저쪽 벽이 휙 소리를 내며 저
서 있다가 퍼뜩 주머니 어디엔가 넣어두었던 핸드폰을
만치 달아난다.
찾아내 1번 버튼 위에 손가락을 살며시 가져다 대고 준 비 땅 자세를 취하고 있던 터였다. 열리기만 해봐라. 확 열리기만 해봐라. - ...찰칵. 차알칵. 딱.
3. 자정이 넘어도 훨씬 넘은 시간. 이렇듯 술자리가 늦게 파하는 날이면 이렇게 이사하기 전의 나는 우두커 니 차도에 나가 서서 기묘한 손짓을 하곤 했다. 기숙사
왼쪽 오른쪽으로 몇 번 흔들리던 손잡이가 잠시 멈
로 가는 택시를 잡아타려 손을 내밀다가도 순간 텔레비
추더니, 이번에는 짤랑 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믿을 수
전에서 신문에서 떠들어온, 엄마에게서 친구에게서 과선
없게도 너무 쉽게 문이 활짝 열려버린다. 내 손가락은
배에게서 들어온 온갖 무섭고 끔찍한 이야기들이 내 머
얼어버린 것처럼 굳어있다. 열린 문틈으로 둥둥 떠오르
리가 터지도록 꽉 하고 메워버리는 통에 금방 손을 움
는 것은 바로 위층에 산다는 주인집 할아버지의 얼굴이
츠리고야 말곤 하는 탓이었다. 거진 빈 차도를 자동차
다.
경주를 하듯 마음 놓고 속도를 내는 택시들을 이런 어
- 학생, 매달 방세는 20일날 내는 거라고… 뭐어 난. 혹시 못 박을 게 있나 해서. 쯥. 그렇게 몇 분간을 나는 그 할아버지의 얼굴만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혼자서 뭔가 내
정쩡한 손짓으로 멈춰세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나마도 운 좋게 내가 타려는 곳 근처에서 내리는 사람 이 있을 때라야 택시들을 겨우 잡아타는 식이 태반이었 다.
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몇 마디 더 웅얼거리고는
그런데 만일 말 많은 택시기사를 만나는 경우라면 이
문을 다시 쿵 소리 나게 닫았다. 층계를 오르는 발소리
야기는 또 달라진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학생이 무슨
도 공룡 발소리처럼 쿵쿵 울렸다.
일로 밤늦게 돌아다니냐느니, 부모님은 뭐하시는 분이냐
발소리가 멀어가는데에도 나는 웬일인지 현관문으
느니, 느네 학교 기숙사는 통금 시간도 없느냐느니 너무
로 달려갈 엄두가 감히 나지 않았다. 윗 집 현관문이 끼
나 공공연하지만 또 너무나 부당한 간섭들이 쉴 새 없
긱 소리를 내는 것을 듣고 나서야, 나는 현관문으로 느
이 쏟아진다. 대답을 하기가 싫어 자는 척을 하고 싶어
릿하게 다가가 문을 소리 없이 잠그고는 문에 기대어
도 또 그 무서운 이야기들이 떠올라 잠을 잘 수도 없어
참은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그렇게 밭은 기침 몇 번을
결국에는 내뱉듯 대답을 하고 만다. 사실 기숙사에서 나
하고 나서 발을 쿵쿵 굴렀던 것도 같다. 내가 낸 계약금
오려 한 것도 어느 정도는 이러한 간섭과 불쾌한 경험
으로는 잘해야 이 방문의 복사키를 손에 넣을 수 있는
들에서 벗어나기 위함이기도 했었다.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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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도 늦었고 돈도 다 떨어졌고, 니네 집에서 놀 면 어떠냐?
빠른 걸음으로 집에 도착해 문을 쾅 소리나게 나게 닫고 자
- 그래, 너 이 근처에 산다 그랬었지? 어?
물쇠를 잡가 문고리를 세게 틀어
- 에~이, 우리가 남도 아니고 뭐 어때?
쥔다. 숨은 어느 새 턱까지 차올 라있다. 등 뒤로 단단하고 차가
그런데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착각이었다는 생각이
운 문의 감촉이 느껴져 왔지만,
지금 든다. 그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이번에는 거절할
안심하지 못하는 나는 벽을 손끝
수도 없는 간섭들이 예전보다 훨씬 더 집요하게 이루어
으로 더듬으며 미칠 듯이 스위치
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가 기숙사를 나와 따로 방을
를 찾았다. 내 눈 앞에 가로놓인
잡아 지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주위의 몇몇 사
깜깜한 어둠은 여전히 공포스럽고 내 머릿속에서 상영
람들은 바로 그 날부터 ‘집들이를 ’ 빌미삼아 내 집에 ‘쳐
되는 무서운 영화는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그렇게
들어오기 ’ 시작했다. ‘시간이 늦었다’, ‘돈이 떨어졌다’,
나는 한참을 들어가지도 못하고 나가지도 못한 채 그렇
‘내가 자취를 한다’, ‘그들이 나를 안다라고 ’ 하는 사실들
게 현관의 좁은 공간에 그대로 서 있었다.
과 ‘그들이 내 집으로 쳐들어온다는 ’ 것이 어떻게 바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인지 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 지만, 그렇다고 그냥 거절할 수도 없었다. 핑계거리를 만들기 위해 골몰하는 것에도 지쳐 이제는 그들을 만나 는 것 자체를 먼저 피해버리기 시작했다. 내가 집에 있 는 사이에 또 불시에 찾아올까 두려워 이렇게 늦은 시 간까지 만화방에서 버티다 타달타달 지친 걸음으로 집 으로 돌아오는 것도 벌써 몇 번째다. 그리고. - 치익 찍. 그리고, 이런 날이면 내 귀에 담겨온 그 무섭고 끔직 한 이야기들이 갑자기 현실로 살아나 내게로 성큼 다가 온다. 누군가에겐 이른 시간일 늦은 시간, 가로등도 없 는 어두운 골목길. 뒤에서 신발 끄는 소리라도 들릴라 치면 나는 차마 뒤돌아볼 엄두도 못 내고, 순식간에 차 가와진 손끝을 양 겨드랑이 밑으로 밀어넣고 만다. 아무 것도 아닌 일(실은 벌써 ‘아무것인 일이 ’ 되어버렸지만) 이 괜히 더 커질 새라, 마음놓고 냅다 달리거나 하지도 못하고 뒤에서 걸어오는 그 누군가가 눈치채지 못하도 록 걸음을 빨리 하는 것이 고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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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멀리서 에엥 하고 울부짖음 소리와 같은 싸이렌 소리가 들린다.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리니 방 은 벌써부터 어둑어둑하다. 분명 알람을 끈 기억이 없는 데 이미 일어나야 할 시간은 훨씬 지나있다. 나는 이불 속에서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 듯 길게 이어지는 싸이렌 소리를 한참을 들으며 눈만 껌뻑껌뻑이고 있었다. 어렸 을 적 종종 이렇게 골목골목마다 저 으스스한 싸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는 날이면, 나는 집 안으로 얼른 들어 와 이불을 쓰고 오돌오돌 떨곤 했었다. 이불을 쓰고도 귓가에 생생히 들리곤 했던 그 소리는 유월이면 학교에 서 꼭 한 번은 틀어주던 다큐멘터리에서 본 폭탄이 비 처럼 쏟아지고 땅이 터지는 장면들을 갑자기 한꺼번에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쭉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 앉으니 머리가 어질하다. 결국 오늘도 새벽녘까지 잠을 못 이루고 괜히 컴퓨터 모니터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또 기억나지 않는 나 쁜 꿈을 오늘만해도 두세 차례는 더 꾼 것 같다. 이렇게 잠들기 힘든 밤을 보낸 지도 이제는 오래 되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먹을 것이 없다. 우유 냄새를 맡 아보니 시큼한 내가 훅 하고 난다. 그도 그럴 것이 밤늦 게 집에 들어왔다가 아침이면 수업 때문에 부랴부랴 챙 겨 나가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기숙사에서는 취사 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취를 하면 해먹고 싶은 음식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흐뭇한 채로 짐을 쌌던 그 때의 일이 아득한 옛날의 일처럼 느껴진다. 나는 신경질 적으로 우유를 씽크대에 부어버리고 확 하고 찌그러뜨린 채 쓰레기통에 구겨 넣었다. 그리고 대강 입을 옷을 챙 겨 입고 집 앞 분식집으로 가기 위해 밖을 나섰다. 그러고보니 우리 집에서 한 블록만 더 내려가면 경찰 서가 있다. 문득 중학교 때 일이 생각이 난다. 어느 날 밤 왠 남자가 와 옆집의 문을 발로 차고 유리창을 깨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일이 있었다. 우리 엄마와 나는 겁이나 오들오들 떨며 경찰서에 전화를 했지만 우리 집 에서 100m도 안되는 거리에 있었던 경찰은 20분이 지 나서야 왔고, 와서도 뭐 이런 일로 사람을 다 부르냐는 듯한 표정으로 “바깥 양반 안 계시나?”라는 말을 툭 하 니 던질 뿐이었다. 흥! 나는 또 신경질이 확 하고 나는 고개를 팽 하 니 반대쪽으로 돌려 버렸다.
5. 가로 여섯 발자국, 세로 열 발자국. 작지만 내게는 결코 작지 않은 공간. 이 공간을 둘러싼 폭력들. 그리고 이 공간을 지킨 다는 명분 아래 정당화되는 폭력들 속에서 나는 평화를, 행복을, 내가 누릴 수도 없고 지킬 수도 없는 단어들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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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맞서 평화를 실천하기
‘나는 폭력의 세기를 고발한다를 ’ 읽고 조은 | 전쟁없는세상 수습활동가
저자 소개 _박노자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라 ’ 는 이름을 갖고 있던 박노자가 태어난 곳은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 이러한 그가 한국과 특 별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영화 <춘향전>을 보고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동방학부 한국사학과를 졸업한 그 는 이후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서 고대 한국의 가야사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러시아 국립 인문대학교 강 사를 거쳐, 학생과 강사의 신분으로 한국에서 대학 생활을 보냈던 그는 ‘박노자라 ’ 는 이름으로 한국에 귀화하고, 지금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한국학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나를 배반한 역사", "우승열패의 신화",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 "당신들의 대한민국 ", "하얀 가면의 제국",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外 가 있다.
최근에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적이 있는가. 국내 굴
손으로 떠받들고 있었던 대한민국의 수호신이었더라. 뭐,
지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인 메가박스에서는 본 영화를
이런 내용이다. 여기에서 표현된 일본인들은 한국에서
시작하기 전에 스크린으로 몇몇 기업의 광고를 내보낸
일본인을 비하할 때 전형적으로 묘사되는 키가 작고, 콧
다. 그 광고들 중 언젠가부터 인가 고정적으로 메가박스
수염을 기르고 있고, 눈이 째진 모습-심지어는 자유민
극장에서 스크린광고를 하고 있는 대기업의 광고가 있
비둘기가 투여한 배설물을 뒤집어 쓸 정도로 바보스러
다. 이 광고는 요즘의 감각적인 광고들에 비해 그 표현
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
방법에 있어서 무척이나 간결하고 직설적이다. 얼마 조
일본에 대하여 강한 배타성을 드러내는 이 광고를
선시대 즈음 독도를 무력으로 침략하려는 왜적을 상대
본 관람객들은 대부분 통쾌한 미소로 가득하다. 무엇이
로 바다를 가르며 나타난 태권브이가 그들을 간단하게
이들의 감수성을 이토록 폭력적 배타성에도 무뎌지게,
무찌르는데, 알고 보니 태권브이는 바다 밑에서 독도를
아니 오히려 즐기도록 만들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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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나는 폭력의 세기를 고발한다는 ” 이러한
우리는 어떠한 사안에 대하여 자신이 일생동안 정
국가주의적 배타성을 포함한 많은 종류의 폭력성이 한
립해온 판단기준을 가지고 그 사안에 대하여 평가를 내
국 근대화 과정에서 ‘힘의 숭배가 ’ 내면화되었기 때문임
리고, 필요에 따라 그 사안에 대한 적절한 행동을 한다.
을 다양한 사료를 들어 나타낸다.
이렇게 우리 개개인의 자율의지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 한 결과물들이 우리 사회의 의식을 형성해 나가고, 이렇 첫 번째 장에서
게 형성된 사회의식은 우리 삶의 미시적인 부분들에 스
는 한국에서 기독교
며들어 결국에는 우리 스스로에 의한 능동적인 사회 그
가 종교적 배타성이
자체를 구성한다.
강한 종교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하지만 한국에서 일반적인 삶을 살아가는 국민들은
한국
이 책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개화기부터 누적되어 온
교육이 근대화가 되
집단개인 / 차원의 ‘힘 숭배와 ’ 우승열패의 신화에 의해
면서 어떻게 입시지
그들 자신에 의한 완전한 사회를 만들지 못하고, 스스로
옥의 전쟁터로 변했
의 자율적인 사고를 성립해 나아갈 수 있는 사회적 환
는지를 보여준다. 그
경을 박탈당했으며, 심지어는 그러한 박탈감마저 인식하
리고 한국인이 어렸
지 못해왔다.
을 적부터 필수교양도서로 읽어온 위인전의 서양 영웅
이러한 폭력적 이데올로기에 맞서서 우리는 무엇을
들이 미화된 그 이면에 어떠한 폭력성들을 지니고 있었
할 수 있을까. 저자가 지적했듯이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는지를 분석한다.
이상 이데올로기적 변화는 극복되기 어렵다. 그러나 우
두 번째 장에서는 경찰국가를 꿈꾼 개화파의 이상과
리는 미시적 차원에서 ‘힘과 ’ 맞서는 개인/집단의 생각과
구한말의 담론으로부터 시작된 징병의 성역화 과정, 그
행동으로 저항할 수 있다. 주체적 의지에 의해 집회에서
리고 이를 모두 포함하는 개화기 지식인들이 꿈꾸었던
시위를 하거나, 병역을 거부한다는 것은 폭력의 세기에
부국강병의 현대적 발현과 그를 극복하는 길에의 사색
저항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많은 실천 가운데 하나일
을 드러낸다.
것이다.
세 번째 장에서는 종교적인 도덕론과 사회진화론적 현실의 긍정 사이에서 방황하는 박은식의 모순된 모습, “힘만 믿고 힘을 키워 남을 이기고 짓밟는 인간은,
‘동북공정으로 ’ 우리에게 인식된 중국의 국수주의는 결 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것이 아님을 드러낸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행복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산의 고요함
박정희가 문화재 관리를 통해 국난극복 사관을 만들어
을 즐길 수 없을 것이고, 잎사귀의 속삭임을 들을 수 없
놓았다는 것과 중국의 스타지식인 량치차오에 의해 블
을 것이고, 지저귀는 새들과 대화를 나눌 수 없을 것이
룬칠리가 왜곡되고 그 사상에 의해 유입된 개명전재를
다. ‘힘의 숭배는 ’ 생명 파괴의 길이요, 죽임의 길일뿐이
파헤친다.
다. 인간에게 삶을 구하려는, 그리고 삶을 지키려는 본
마지막 장에서는 개인독립의 투쟁을 벌인 여성해방 혁명가 나혜석의 의미와 그 한계, 개화기 시대에 한국에
능이 있기에, 이 사실을 결국 파악할 수밖에 없을 것이 다.”
갓 태어난 ‘개인의 ’ 발견과 그 의미가 국가 소속의 개인 으로 변질되어간 과정을 그리고, 현재에도 고질적인 사 회문제인 지역감정의 뿌리를 살펴보기도 한다.
<나는 폭력의 시대를 고발한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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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도,
난다! 영화거북이도 ‘ 난다를 ’ 보고.. 창훈 | 전쟁없는세상 친구
이 글을 부탁받고 얼마 안 되어 영화에 대한 정보
의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현실이 개인의 머리 속
를 찾고 있을 즈음, 아는 후배 한 명이 이런 말을 했다.
에서 위축되어가는 상황은 더욱 위험해 보인다. 이는
‘반전이나 평화라고요? 그렇게 특정한 틀에 맞추어
두 번째 이유인 해석의 선후관계에 대한 몰이해와 연결
영화를 본다니...(말도 안돼요)’
된다. 언젠가부터 자신의 생활 이외의 현실에 대해 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맞을 것이다. 내가
체를 통해서만 접하고 인식하게 되어버린 현대인들은
이 글을 쓰는 것이 꽤나 마음에 들지 않았었나 보다.
전달되는 현실 자체보다 매체의 특성에 집착하는 경향
나는 이 말이 굉장히 다양한 이유로 불쾌했는데, 많이
이 있다. 이는 꼭 개인의 잘못은 아니다. 매체를 통한
양보해서 대충 두 가지 정도로 추려보자면 다음과 같다.
커뮤니케이션은 그 특성에 맞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수용자들에게 해석의 단계를 요구한다. 그리고 이 단계
첫째, 나 역시 다양성을 존중하지만 ‘반전’ 이나 ‘평
에서 현실은 증발하고 수용자의 자의적인 인식만이 남
화’ 와 같은 말들이 ‘특정한 틀’ 이라 여겨지는 상황을
게 되는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한다. 텍스트의 다의성과
좋게 넘어가기란 힘들다. 물론 후배의 말이 사상적 차
수용자의 능동성이 지나치게 낭만화 되면서 우리는 스
이가 아닌 예술작품의 해석 방법이라는 측면에서 나온
스로의 논리 정화를 위해 현실을 오독하는 만행을 저지
것임은 안다. 그가 전쟁을 옹호하고 혼란을 사랑하는
르게 되는 것이다. ‘반전이나 ’ ‘평화와 ’ 같은 개념은
것은 아니니까.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후배가
<거북이도 난다>라는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을 표현하
지적했던 것은 ‘틀에 맞추어 영화를 감상하는 것은 옳
기 위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말들은 물론 중요하고
지 않다였다 ’ . 이것은 곧 ‘반전이나 ’ ‘평화가 ’ 관념적인
작품의 심층에 깔려 있는 본질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해
틀의 하나로써 분류될 수 있음을 은연중에 인정하는 것
석 단계에서 발생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
에 지나지 않는다. 절대보편적인 것에 대해 함부로 정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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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후배의 말은 이것이 수용자의 머리 속에 뿌리
들은 땅에 묻힌 지뢰를 내다 팔며 근근이 생존해간다.
박힌 해석의 도구로써 제한되는 것을 염려하는 것이었
위성이라 불리는 소년은 아이들의 리더로 수완을 발휘
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이전에 저 말 자체가 수용자
하며 전쟁에 대처하려 한다. 그러다 난민 수용소에 들어
중심의 해석을 지나칠 정도로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온 낯선 소녀 아그린에게 한눈에 반한다. 아그린은 앞을
재고해 봤어야 했다. 모든 텍스트가 열려 있는 것은 아
거의 못 보는 아기 리가와 두 팔을 잃은 오빠 헹고와
니다. 그것을 간과한 채 행해지는 매체의 해석은 사회
함께 떠돌고 있는 상태다. 그리고 생각과는 달리, 리가
전반에 대한 난독증을 유발할 수도 있다.
는 동생이 아닌 이라크 군에게 강간당해 낳은 아그린의 아들이다. 본인도 아직 어린 아그린으로서는 리가에 대 한 책임감보다 끔찍한 기억에 대한 상징으로써의 증오 가 더욱 크다. 때문에 아그린은 언제나 자살을 꿈꾼다. 위성은 어른들보다 유능하게 현실에 대처하며 어떻게든 아그린을 도우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 다. 그를 비롯한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은 오직 위성 안 테나 (그래서 ‘위성’ 이라 불린다)를 설치하여 뉴스를 보는 것뿐이다. 어서 미군이 도착하여 이라크군으로부터
<거북이도 난다>는 복잡한 상황에 대한 단순한 영화
자신들을 해방시켜 주기를 바라면서.
이다. 쿠르드 족 어린이들의 생활을 별다른 기교를 부리 지 않고 고저없는 드라마 안에 담아놓았을 뿐인 이 작
<거북이도 난다>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이라크전을
품은 그러나,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 이상
배경으로 하면서도 중심이 쿠르드족에 가 있다는 사실
의 배경지식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거북이도 난다>라
이다. 감독 바흐만 고바디는 이란의 쿠르드족 출신이다.
는 영화작품에 대한 예술적 이해가 아니라 영화가 보여
정식으로 영화 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 그는 얼핏 보면
주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이해를 말하는 것이다. 말했듯
세계 영화계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이란영화계의 새
줄거리는 특별한 강단이 없다. 주인공 아이들이 처한 상
로운 기대주처럼 보인다. 그러나 고바디의 출신 성분은
황 자체가 워낙 극적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도 드라마의
선배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이란
파장은 꽤 큰 편이지만 영화는 보여주기 이상의 시도는
의 영화감독이라기보다는 이란에 사는 쿠르드족 출신의
하지 않는다. 감독의 전작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에
영화감독이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고향 사람들의
서는 적어도 클라이맥스를 구성할 만한 사건의 부여라
이야기를 영화로 찍고 있는 것이다. 대외적으로 자신들
도 있었지만 <거북이도 난다>에는 그 정도도 없이 구
의 생활을 보여줄 문화적 도구가 전혀 없는 고향 마을
조가 헐렁하다.
사람들을 대신해서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영화 에 진정한 힘을 불어넣는다. 사실 쿠르드족에 대해 우리
2003년 미국과 이라크 전쟁 발발 몇 주 전에 이야
가 얼마나 알고 있을까. 2천만명이 넘는 그들의 인구에
기는 시작된다. 이라크와 터키 국경 지대에 걸쳐 있는
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존재조차도 알지 못하는 경우
쿠르드족 난민 캠프에는 항상 긴장감이 가득하다. 아이
가 많다. 그들은 도저히 갈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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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에서 학살당하고, 터키에서 억압당하고, 이란에
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해석에 지나치게 천착하게 되면
서 푸대접받는 신세다. 후세인 치하에서 최대의 피해자
현실의 고통은 어느새 자리를 잃는다. 앞에서 말한 사회
는 시아파도 수니파도 아닌 쿠르드족이었다. 쿠르드족
적 난독증은 다만 매체의 수용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
민병대는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후세인에 맞서 싸웠고
니다. 언제나 책임의 소재를 찾고자 하는 우리의 과도한
그 일로 후세인은 생화학무기를 이용해 1988년 할랍자
노력 역시 무의식적인 자기합리화에 빠질 가능성을 품
의 쿠르드인 5천여명을 몰살했다. 당시 인종 청소로 사
고 있다. 물론 그 역시 매체의 영향임을 부정할 수는 없
망한 쿠르드인은 18만명이 넘고 난민의 수는 80만이 넘
지만. 모든 것을 해석하는 데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눈앞
었다고 한다. 이러한 과거를 지닌 쿠르드족이 이라크에
에 놓인 진실을 놓고도 엉뚱한 생각만 하기 십상이다.
대해 좋은 감정이 있을 리 만무하다. 할랍자는 그들에게
그런 태도가 우리를 눈멀게 한다.
있어 비극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거북이도 난다>의 시작 부분, 아그린이 이라크-터키 국경마을로 온 것은 바로 할랍자를 떠나서였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우리는 다소 특이한 구도를 보게 된다. 쿠르드족은 미군이 한시라도 빨리 후세인을 밀어 내기를 바란다. 영화 속 주인공들에게 미국은 꿈의 나라 이다. 이라크전의 실상을 보다 객관적이고 속 편한 입장 에서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감정이입이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혹자는 심지어 불편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다. <거북이도 난다>의 가장
때로는 해석이 필요하지 않은 작품들도 있다. 그리
탁월한 객관성은 거리두기가 아닌 피해자의 눈에 가까
고 <거북이도 난다>는 바로 그런 영화이다. 이 영화에
이 감으로써 획득된다. 쿠르드인의 시각에서 본 중동의
서 보이는 상황을 둘러싼 수많은 역사적, 사회적 논의들
상황은 우리의 지식이 허용하는 논리를 가볍게 초월한
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쿠르드족 아이들에게는 그런
다. 부시와 후세인. 미군 점령군과 이라크 저항세력. 너
논의들보다 고철 지뢰 하나가 더 간절할 수도 있다. 미
무도 편리한 이러한 이분법은 그러나, 쿠르드족과 같은
군이 들어온 다음에도 아이들은 행복해지지 못한다. 영
또 다른 소수자의 이름을 너무도 쉽게 지워버린다. 폭력
화의 마지막에서 미군이 들어오지만 변한 것은 없다. 위
의 악순환은 그 시작을 찾기가 거의 불가능해졌다. 중동
성은 다리를 잃고, 아그린은 결국 목숨을 끊는다. 이 비
지역의 비극은 더욱 그렇다. 그럼 누구를 비난해야 할
극에서 국가들간의 선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폭력과 전
것인가?
쟁은 그 자체로 악이다. 그 악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 는 아이들을 보라. <거북이도 난다>는 이라크전에 대해
우리는 원인과 결과의 경계를 그으려는 강박증에 시 달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범위는 결코 세 상의 크기만큼 확장되지 못한다. 역사의 소용돌이를 읽 어내고자 할 때, 직접 체험한 개인의 감정에 귀 기울여 야 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물론 원인과 결과를 아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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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봐야 할 작품이다.
2005 평화수감자의 날_ 에리트리아의 양심적 병역거부 출처 _ WRI | War
Resisters International (www.wri-irg.org)
번역 _ 전쟁없는세상 번역팀, 정리 _ 가람
번역팀의 사정으로 12호 소식지에는 6호(2004.8/9월호)에서 시작하여 지금까지 시리즈로 번역해 온 브라이언 마틴의 [자본주의 vs 비폭력 주의]를 싣지 못하였습니다. 하여 이번에는 곧 다가올 12월 1일 세계 평화수감자의 날에 관련된 자료를 일부 발췌, 번역하여 싣습니다. 1956년 12월 1일 그 첫 걸음을 내딛은 세계 평화수감자의 날은 매년 특정한 지역을 선정하여 특히 그 지역의 평화수감자들과 다른 많은 평화수감자들의 상황을 알려내는 다양한 행사를 전 세계 곳곳에서 진행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2003년 한국의 병역거부 수감자 들, 2004년 핀란드의 완전거부자들에 이어 올해는 에리트리아의 병역거부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자본주의 vs 비폭력주 의] 다음 번역분은 13호 소식지에 실릴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 부탁드립니다. 번역본의 원본은 전쟁없는세상 홈페이지 (www.withoutwar.org) 또는 WRI 홈페이지(www.wri-irg.org)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들어가며.. 우리는 1990년대 초에 있었던 에리트리아의 독립 에 대한 희망을 기억한다. 나는 그 당시에 에리트리 아의 독립적인 발전에 대한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난 다. 그 글은, 많은 나라들을 거대한 빚더미의 수렁으 로 빠뜨렸던 세계 은행과 같은 국제기구에 의존하지 않고 에리트리아 스스로 발전을 해나가는 모습에 대 한 것이었다. 14년이 지난 지금, 그때와는 달라진 에 리트리아의 상황에 대해 "부러진 총"(The Broken Rif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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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에서는 일단은 대략적인 언급을 하는 수준으
독일에서 만나는
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에리트리아 반군사주의 주도자들
WRI(세계전쟁저항자모임)가 에리트리아에 있는 반군사주의 단체로부터 에리트리아의 상황을 처음 전 해 들었을 때의 느낌은 충격 그 자체였다. 여남을 가 리지 않는 강제징집과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처벌이 일상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에리트리아의 젊은이들에 게는 해외망명만이 유일한 ‘대안으 ’ 로 보였다. 아프리카의 상황에 대한 WRI의 정보망과 관심은 아직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4년 전인 2001 년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에 앙골라의 상황에 초점을 맞춘데 이어서, 이번 2005년 평화수감자의 날에 에 리트리아의 상황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아프리카에 서 직접 활동을 하고 있는 반군사주의 단체들과도 연 대를 증진하는 좋은 기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 이다.
소개 에리트리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탈영 2004년 가을 독일에서 활동하는 에리트리아 반군 사주의
주도자들
(Eritrean
Anti-Militarism
Initiative)와 Connection e.V (전쟁저항자 인터내셔 널War Resisters' International의 독일 단체)는 에리 트리아의 병역거부와 탈영 문제에 관한 자료집을 발 간했다. 이 자료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폭력과 전쟁이 만연한 에리트리아를 탈출하는데 성공한 망명 자들과의 인터뷰이다. 지금 유럽연합은 망명 반대 정 책을 취하고 있다. 이들과의 감동적인 인터뷰를 통해 에리트리아의 젊은이들(남성과 여성)이 처해 있는 곤
이번 호에 실린 병역거부자들과의 인터뷰를 보면 서 에리트리아의 전쟁거부자들이 얼마나 우리의 지원 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에리 트리아의 상황에 대한 정보는 WRI의 웹사이트 (http://wri-irg.org/news/2005/eritrea-en.htm)에 올 라와 있는 문서들을 참고하길 바란다. 자료들은 자유 롭게 다운받아서 배포할 수 있다.
경이 생생히 드러난다. 에리트리아는 극도로 군사화 된 환경을 갖고 있으며, 이런 곳에서 젊은이들은 성 장하고 살아간다. 전쟁저항자 인터내셔널은 2004년 12월에 뉴스레터를 통해 처음으로 에리트리아의 병 역거부와 탈영에 대한 문제를 다루었고, 이들과의 인 터뷰와 각종 자료들이 담겨있는 자료들을 2달 후 발 간했다. 이 자료집을 보면 에리트리아에 대한 국제연대와
- Andreas Speck
지원활동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 리트리아를 탈출한 망명자들은 독일에서 에리트리아 반군사주의 주도자연대를 결성했다. 전쟁저항자 인터 내셔널은 이를 환영한다. 에리트리아에서는 군사주의 에 대한 반대뿐만 아니라 정부에 대한 어떠한 공개적 인 반론도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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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에리트리아 반군사주의 주도자연대를 결성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을 위하여
는데 참여한 창립멤버의 한 명인 아브라함 게브레에 수스 메흐레테압Abraham Gebreyesus Mehreteab은
아브라함
게브레에수스
메흐레테압(Abraham
전쟁저항자 인터내셔널을 대표해 제네바에서 열리는
Gebreyesus Mehreteab)은 전쟁저항자 인터내셔널을
제61차 유엔 인권위원회 회의에 참여해 에리트리아
대표해 제61차 유엔 인권위원회 회의에 참석하여 진
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를 집중적으로 알릴 계
술하였다. 아래에 그의 진술내용을 첨부한다.
획이다. 의장님 에리트리아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어떤 식으
저는 전쟁저항자 인터내셔널(WRI)을 대신해 이
로든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가
자리에 섰습니다. 저희들은 전 세계 많은 나라들의
저절로 풀릴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에리트리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에 관해 연구조사를 하고
아 정부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대하는 방식
있는데, 작년에는 에리트리아 병역거부자들의 문제에
을 볼 때 그 나라의 일반 국민들을 어떻게 대우하는
관한 사전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에리트리아
지 드러난다. 즉 국민들에 대한 불신을 갖고 있으며,
에는 수천 명의 병역거부자들과 탈영자들이 있다는
기본적인 인권마저 부정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에리트리아 정부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을 법 우리는 에리트리아의 상황이 널리 알려져 사람들
적으로 인정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이로인해 여호와
이 이 문제를 인식하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 에리트
의증인과 같은 종교 조직들의 구성원들은 군사복무를
리아의 반군사주의 활동가들과 인권운동가들 그리고
거부하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10년 이상 감옥에 수
망명자들이 보다 평화롭고 정의로운 에리트리아 사회
감되어 있습니다. 법정에서는 이들에 대한 심리조차
를 만드는데 힘을 보태야 한다.
열리지 않고 있습니다. 안드레아스 스펙
법정심리를 거치치 않아도 대부분의 병역거부자들
전쟁저항자 인터내셔널
과 탈영자에게는 자의적인 감금과 고문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을 최전선으로 보내기도 하고, 강제노동에 종사시키기도 합니다. 군대에서는 이들을 묶어놓고 태양빛 아래 며칠에서 길게는 몇 주 동안 방치하는 처벌을 자주 사용합니다. 심지어 탈영자 친 척의 자녀를 탈영자가 속했던 부대로 입영시키겠다며 협박하기도 합니다.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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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부자와 탈영자의 숫자가 정확히 얼마인지는
>> 아브라함 게브레에수스 메흐레테압은 독일의 ‘에리트리아
모르지만, 수천 명이 병역거부 또는 탈영의 방법으로
반군사주의 주도자들(Eritrean Anti-Militarism Initiative)' 에서 활
군사복무를 회피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다양한 방법
동하고 있다. 그리고 인권위원회에서 전쟁저항자 인터내셔널을 대 표해 참가하였다.
으로 병역거부를 선언합니다. 어떤 이들은 양심에 따 라 거부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탈영을 하거나 군사 독재를 피해 달아나고 있습니다. 많은 탈영자들이 다 른 나라로의 정치적 망명을 요청하고 있는 상황입니
감사의 말씀
다. 우리의 반군사주의 주도 운동은 e.V의 Rudi 따라서 유엔 인권위원회가 에리트리아의 병역거부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가해지고 있는 폭력과 인권침해 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들이 난민에 대한 제네바 협약에 따라 망명자로서 보호를 받을 수 있기 위한 확실한 조치를 요청드립니다. 그리고 에리트리아의 병역거부자와 군대 구성원들 의 실태를 조사하기 위한 종교와 신념의 자유에 관한 특별보고서를 요청합니다. 또한 저희들은 에리트리아 정부가 유엔 결의안 1998/77을 이행할 것을 요청합니다. 특히 다음과 같 은 구절들입니다. 모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즉시 석방해야 한다. 종교적, 윤리적, 인도적 그리고 이와 유사한 동기
Friedrich, Evangelical Church의 Frau Mechthild Gunkel, 그리고 변호사 Antje Becker씨의 협조가 없 었다면 시작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나의 동료 Abraham Gebreyesus의 지원과 헌신에 감사를 표합 니다. 이 보고서에서 사용된 거의 모든 자료들은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권리를 지지하는 전 세계 곳곳의 단체 웹 싸이트에서 수집하였습니다. 이 자료들을 사용할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아래 웹 싸이트들을 운영하 시는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합니다. www.Wikipedia.org, Pax Christi International, Amnesty
international,
CCW
Conscientious Objectors, www.objectors.org, and www.nisbco.org.
병역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는 인정되어야 한다.
1. 배경
도입되어야 한다. 양심적 병역거부(CO)와 양심적 병역거부자(COs)
감사합니다. - 아브라함 게브레에수스 메흐레테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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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Conscience and war), Central Committee for
에서 발생되는 양심 또는 깊고 확고한 신념에 따라 병역거부의 근거를 훼손하지 않는 대체복무제도가
(Center
이제까지 정부가 시민들을 전쟁터로 내몰아 싸울
이익에 장애가 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항상 양심적
것을 강요하는데 권력을 행사해 왔음은 역사를 통해
병역거부와 거부자들을 반대해왔다. 양심적 병역거부
증명할 수 있다. 동시에 다른 한 편에서는 철학자,
자들은 언제나 수감되거나, 국외로 추방되거나, 괴롭
신학자, 정치인들과 다른 시민들이 수년간 전쟁에 대
힘을 당하기 일쑤였다.
한 의문을 제기해 왔다.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가 모 든 종류의 전쟁, 혹은 특정 전쟁을 지지하거나 참여
그러나 세계 곳곳에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권리
할 수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많은 젊은 여성들
를 옹호하기 위해 설립된 각양각색의 국제 기구들이
과 남성들 또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
존재한다. 덧붙여 매년 5월 15일은 세계 병역거부자
인가에 관해 심각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이 모든
의 날로 지정되었다. 사람들이 전쟁에 반대하는 방식
것들은 결국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한 의문이다. 사람
이 다르기 때문에 양심적 병역거부 역시 그 형태가
들이 ‘양심적 병역거부라 ’ 는 용어를 모르거나 전쟁 참
다양하다. 전쟁에 어떠한 방식으로 저항하는가에 따
여를 양심적으로 거부하는 행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라 그 사람의 병역거부 형태가 구별된다.
모를 수는 있겠지만, 일단 자신이 전쟁에 너무나 강 하게 반대하여 참여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사실을 깨
- 양심적 병역거부자: 종교적, 도덕적, 윤리적, 인
닫는 순간 그 사람은 양심적 병역거부자다. 그리고
도주의적, 철학적, 정치적, 그 비슷한 동기로 인한 양
그들은 혼자가 아니다.
심이나 깊은 신념에 따라 군복무나 모든 종류의 직/ 간접적 전쟁과 무장분쟁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많은 양심적 병역거부자들
사람들이다.
이 전쟁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수감되어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는 인간의 삶의 가치와 인간의
- 비전투적 양심적 병역거부자: 종교적, 도덕적,
욕구에 답하는 일의 가치에 대한 양심적 지지로써 현
윤리적 신념에 의해 어떤 형태로든 전쟁에서 살상하
실 속에서 보여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는 것에 양심적으로 반대하지만 군부대에서 비전투병 으로 의무를 수행하는 것(위생병과 같이)에는 반대하
국제적으로 양심적 병역거부는 세계인권선언
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군대나 징병되어 간 곳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과 유럽인
에서 비전투병으로 배치 받아서 무기를 들지 않고 훈
권조약(European Convention on Human Rights)에서
련받는다.
모두 인정하고 있는 권리이다. 세계인권선언에서는 “모든 인간은 사상과 양심과 종교 외 기타 등등의 자
- 전쟁비용납부에 반대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
유를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양심적 병역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 신념에 의한 양심에 따라 세
거부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로서 많은 정부들이
금 중 군사비로 지출되는 부분의 납부를 거부하는 사
이 권리를 수용하지 않고 있다. 병역을 양심적으로
람들이다. 이들은 과세 대상에서 배제되어 힘겨운 생
거부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논쟁은 정부 행정에 대
활을 하거나 소환통고를 받고 법정에 출두하여 재산
한 부정적 대응을 나타낸다. 대부분의 정부는 그들의
을 압류당하거나 때로는 구금이 되기도 한다.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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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택적 병역거부자: 양심에 따라정 “ 당하지 못한”
되었다.
전쟁이라고 판단될 경우 참여를 거부하지만정 “ 당한” 전쟁이라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병역을 수행하는 사람
기초 훈련과정에서 제공되는 음식들은 질이 낮았
들이다. 이들은 핵무기를 개발하거나 사용하는 복무
으며, 제대로 된 군사 훈련도 받지 못했다. 상관들은
에 관해서는 그것이 부도덕한 행위라고 믿는다. 혹은
정규 훈련 프로그램과는 별개로 우리를 부려먹으면서
시민이나 시민사회를 공격 대상으로 하는 등의 특정
그들의 옷을 빨거나 물을 떠오도록 시켰다. 음식이
한 전쟁의 경우에는 도덕적으로 이에 참여하지 못한
충분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상한 밀가루로 빵을 만들
다.
어야 했다.
- 반핵 평화주의자: 핵전쟁이나 핵전쟁으로 변모
6개월의 군사훈련이 끝난 후, 우리는 케탄(Ketan)
할 가능성이 있는 전쟁에 양심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으로부터 사헬(Sahel)까지 120 킬로미터가 넘는 행
사람들이다. 이들 중 몇은 현대의 모든 전쟁은 핵무
군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는 나크파(Nakfa)로
기 사용의 가능성이 있으므로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이동하여 15일간 참호를 파는 삽질을 하였다. 전혀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쓸모도 없는 참호를 파기 위해 우리가 왜 삽질을 해 야만 하는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게다가 그곳 은 아주 추운 곳이었는데 담요 한 장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는 수 없이 맨바닥에서 잘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나는 다른 사단으로 이동하게 되어 뎀벨 라스에 있는 암보리에 배치되었다. 그렇게 배치가 된 이유는, 그 지역에서 1993년 이후로 수단에 기반을 둔 지하드의 공격이 계속 있어왔기 때문이다. 1997년 11월, 나는 멘슈라로 재배치되어 군사학 수업을 듣게 되었다. 그 시간에 우리는 소규모 부대
[출처: http://www.dianahulton.com/images/dh-m350/dh116m.jpg]
로 전투를 진행하는 미국식 방식을 배웠다. 그때 나 는 전역날짜를 두 달 정도 앞두고 있었다. 나는 곧 (군대에서 학습하는 모든 것들이) 전쟁 준비를 위한
태양 아래서의 고통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해) 4월 초에 는 많은 예비역들이 다시 징집이 되어 들어오게 되었
나는 1978년 12월 12일 아스마라에서 태어났다. 그리고1996년, 나는 사와(Sawa)에서 국군으로 징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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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들은 자기 계발 명목으로 끌려온 것이었지만, 결국은 전쟁에 내보내질 것이었다.
5월 12일, 우리는 베다임을 공격했다. 에디오피아
나는 곧 체포되었고, 풀려났다가 다시 또 체포되었
영토를 지나 뎀베게다무에 도착을 했고, 그 지역을
다. 한번은 3개월 동안 붙잡혀서 다른 22명의 군인들
점령한 후 군사적 요지에 자리를 잡았다. 한 주 후에
과 함께 아침 6시부터 정오까지, 그리고 오후 2시부
381 사단이 우리를 구원해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조
터 4시까지 일을 해야만 했다. 그 작업은 정신교육,
로나로 다시 이동하였다. 애초에 그곳은 할 만한 일
혹은 우리를 세뇌시키려는 목적이었다. 우리는 토마
이 없었다. 우리는 다시 참호를 파기 위해 삽질을 했
토와 양파를 키웠다.
다. 부대의 장교들은 채소를 가꾸는 것과 같은 그들 의 사적인 일을 하도록 명령했다. 그 수확물들을 우
그 이후에, 그들은 나를 분대장으로 승진시켰다.
리 돈을 내고 사야만 했고, 수익금은 모두 다 장교들
그들이 내가 분대장에 적합하다고 생각해서라기 보다
의 개인 돈이 되었다. 부대에 있던 한 엔지니어는 그
는 나의 결점들을 잡아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나는
들 개인의 집을 짓는데 차출되기도 했다.
분대장 역할을 수행해야 했으며 4명의 다른 군인들 을 통솔했다.
나는 과거에 국방의 의무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나 는 에리트리아 국민으로서 군인이 되어 나라가 위협
그러던 중, 1999년 2월에 (지하드의) 두 번째 침
에 빠지면 기꺼이 나라를 지키기 위한 싸움을 할 준
입이 이루어졌다. 우리가 오노샤호크에 있는 동안에
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군대에 들어온 이후, 상관
하루 반나절 동안 연달아 화재가 발생했다. 다행히도
들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부려먹는
나는 다치지 않고 불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내
것을 보면 나는 (억울함에)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가 있던 분대에서 각각 한명의 여성과 남성이 부상을
나는 도무지 왜 나의 삶을 이렇게 희생해야 하는지
당했다. 그 여성은 상관의 명령을 거부하여 최전선으
더 이상 이해할 수가 없었다.
로 보내졌다. 우리는 오노샤호크에서 5월까지 머물렀 다.
겨우 분대장만 되어도 여성들에게 자신의 권력을 관철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 하물며 한 중대
얼마 후, 나는 부대장이 되기 위한 과정에 참여해
한 대대급 장군들은 더 큰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야만 했는데, 그것을 거부했다. 나는 군대 안에서 개
수 있을 것이다. 상황은 점점 더 내가 견딜 수 없을
인적 이익을 위한 행위들에 연루되고 싶지 않았고,
만큼 나빠졌다.
또한 나의 친구들을 억압하는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 다.
나는 (상관들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나는 군복 무를 하러 왔습니다. 비록 내가 지금 상황들에 동의
그러한 거부로 인해 나는 또 다시 구속되었다. 그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군사훈련을 하러 온
들은 나에게 우유와 설탕이 범벅된 것들을 쏟아부었
것이지 당신들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일하려고 오진
다. 그리고 나를 묶어서 이틀 반동안 태양 아래 노출
않았습니다. 내가 왜 상관들의 사사로운 일들을 해야
시켜 놓았다. 낮에는 매우 뜨거웠고, 밤에는 극도로
만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추웠다.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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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피부는 화상을 입었고, 얼굴에는 물집들이 잡혔 다. 또한 심한 두통을 앓게 되었다. 극심한 고통으로
에리트리아 반군사주의 주도자들
나의 정신은 혼미해졌다. 한 의사가 치료가 필요하다
(Eritrean Anti-Militarism Initiative)
고 얘기했다. 대대장은 이 요구를 거절했다. Abraham Gebreyesus Mehreteab 의사가 말했다. “나는 이 일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습니다. 만일 무슨 일이 발생한다면 당신이 책임을 져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대대장이 치료를 허락해 주었다. 그들은 나를 군병원으로 이송 하여 피부를 벗겨내고, 살균제로 나의 살을 소독했다. 그리고 항생제 약을 주었다. 그것이 치료의 전부였다. 나는 병원에서 2주일을 더 머물렀다. 항생제에도 불구하고 나는 병균에 감염되었다. 결국 나는 알라에 있는 다른 군병원으로 옮겨졌다. 그 곳에서 약 4개월 동안은 왼쪽 눈으로 아무 것도 볼 수가 없게 되었 다. 나는 그 대대장을 기소하려고 했지만 (군으로부 터의) 어떠한 반응도 오지 않았다. 나의 상처들이 완쾌가 된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 지만, 또 다시 감염이 되고 물집들이 다시 되살아나 기도 했다. 상처는 지속적으로 없어졌다가 다시 생겨 났다. 나는 결국 병가 제대 조치를 받았고, 나의 가 족들의 품에 다시 되돌아 갈 수 있었다. 나는 군복무 완전 면제 조치를 신청했지만, 내가 완쾌가 되는대로 다시 전선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이 유 때문에 이 요구는 거절당했다. _Interview with Saed Ibrahim, Translation: Thomas Stiefel
연락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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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lerflychtstraße 8 D-60318 Frankfurt 전화: 069 / 9551 8994 이메일: Abrahamgebr@hotmail.com Yohannes Kidane Ogubamichael Bahnstr 51 61449 Steinbach 전화: 01625-208472 이메일: Yohannesk2000@yahoo.com
Refuse to Kill)]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 개인과 양
살상을 거부할 권리
심적 병역거부 운동단체, 그리고 그 활동을 지원하기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War
Resisters'
위한 광범위한 활동들을 포함하고 있다.
International)의 양심적 병역거부자 지원 활동
양심적 병역거부 양심적 병역거부는 항상 WRI 정책운영의 중심에 있어왔다. WRI의 ‘모든 전쟁에 반대한다는 ’ 선언은 모든 형태의 군사력이나 무력에 복무하는 것에 대한 거부를 의미한다. 이는 양심적 병역거부라 불린다. 수감된 병역거부자 지원활동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은 대체복무의 수행(대체복
: CO-Alerts
무의 기회가 있는 국가의 경우)을 원하는가 원하지 않는가에 관계없이 모든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지지
많은 국가에서 감옥이란 여전히 양심적 병역거부
한다. WRI는 살상을 거부하는 개인의 동기나 전쟁을
자들에게 있어 숙명과도 같은 공간이다. 대한민국,
멈추게 하기위한 첫 걸음으로서 전쟁과 전쟁준비에
이스라엘, 핀란드, 스페인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의 참여를 거부하는 개인의 결정의 가치를 평가하지
수 천명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현재 수감생활을
않는다.
하고 있다. 이 국가들에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한 법 률이 소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양심적 병역거부
전쟁은 ‘NO'
자들은 여전히 수감생활에 직면해 있는데, 이는 병역 거부자들이 당국의 규범에 부합하지도 않을 뿐더러
WRI는 그 전쟁이 국가에 의한 것이든, “해방군에 ”
모든 대체복무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전쟁저항자인터
의한 것이든, UN(United Nations)의 원조 하에 일어
내셔널은 양심적 병역거부로 인해 수감되었거나 국가
나는 것이든, 심지어인 “ 도주의적 군사 중재라 ” 불리는
나 그와 비슷한 존재에 의해 억압받고 있는 병역거부
것이든 관계없이 모든 형태의 전쟁에 반대한다. 전쟁
자들을 지지한다. WRI사무실이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이라는 것은 아무리 미사여구로 치장을 하더라도 반
수감이나 재판에 관한 정보를 수신하는 즉시 발송되
드시 누군가의 권력-정치적 혹은 경제적 이익에 기
는 이메일인 CO-Alert는 지원과 저항력을 동원하는
여한다. 우리는 전쟁이 우리를 어디로 치닫게 하는가
강력한
를 알고 있다. 고난과 파괴, 성폭력과 조직적 범죄,
(http://lists.wri-irg.org/sympa의 웹 인터페이스를
가치의 전복과 새로운 구조의 지배가 그것이다. WRI
이용)이나 인터넷 wri-irg.org/news/alerts을 통해 수
의 프로그램인 [살상에 반대할 권리(The Right to
신할 수 있다.
수단이다.
CO_Alert는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2호
이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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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중인 양심적 병역거부자 지원활동
병역거부운동-연대행동, 양심적 병역거부 활동가들
: CO Asylum
의 트레이닝, 경험의 공유 등-을 지원하고 있다. 1990년대에 이러한 활동들은 터키(특히 Osman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종종 기소나 수감을 피하
Murat Ülke의 수감기간동안)와 발칸반도의 병역거부
기 위해 그들의 국가를 떠나야만 하기도 한다. 그러
자 지원에 초점을 맞추어왔다. 이러한 투쟁은 아직
나 양심적 병역거부는 망명신청의 원인으로 거의
끝나지 않았지만, 남동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이스 라엘과 아프리카에서는 새로운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으므로 거부자들은 자신을 떠나
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종류의 병역거부운동
도록 만들었던 그 상황- 자신의 국가로 강제 송환될
은 국제적 지원을 필요로 한다.
위기에 처하게 된다.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은 양심적 병역거부가 망명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의 필요 성을 주장한다. WRI는 이렇게 망명신청을 원하는 병 역거부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군복무에 관한 정보와 징병거부에 관한 처벌, 그리고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 한 정보를 제공한다. CONCODOC 양심적 병역거부자 지원 단체 연합의 일부로서 WRI는 CONCODOC(징병과 양심적 거부 문서 센터; CONscription
and
Conscientious
Objection
DOcumentation Centre)를 운영한다. CONCODOC는 징병과 양심적 거부상황에 관한 전 세계의 문서들이 며, 이러한 형태의 활동은 세계에서 유일하다. wri-irg.org/co/rtba/에 가면 180개의 CONCODOC 국 가 보고서들을 읽을 수 있다. 몇몇 문서는 스페인어 로 쓰인 것도 있다.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은 두 가지 국제 행동의 날 양심적 병역거부운동 지원 & 세계적 캠페인
을 진행하는데, 두 날 모두 평화활동가들과 양심적 거부자들의 지원에 중심을 두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양심적 병역거부를 지지하는 새로 운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은 단체의 가장 중요한 과업 중 하나로 이러한 새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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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5일 - 세계병역거부자의 날
- 카드와 편지 보내기 카드는 항상 봉투에 담아서;
5월 15일은 1982년 ‘행동을 하는 날로 ’ 처음 출발 하였다. 그 하루는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위한 투쟁에 초점을 맞추는데, WRI는 과거 이를 가능하게 했던 사람들을 기억함과 동시에 매년 한 특정한 투쟁을 강 조하여 진행한다.
봉투 위에는 수신 가능한 이름과 주소를 적을 것; 잡담을 마구 떨어보자. 사진이나 그림을 보내는 등 창조적인 사고도 해 보자; 전쟁과 전쟁준비를 멈추게 하기 위해 당신이 무엇 을 하고 있는지를 수감자들에게 말해주자; 수감자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말은 쓰지 말 것;
12월 1일 - 평화수감자의 날
당신이 감옥에 있다면 무엇을 받고 싶을지를 생각 해 보라;
평화수감자의 날은 전쟁과 전쟁준비에 반대하여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을 지지하기위한 날이다. 수감 자들에게 안부편지를 쓰거나 평화수감자들의 존재를
"당신은 정말 용감하군요, 저라면 절대 그렇게 못 했을 거예요."라는 시작은 금물; 수감자들에게서의 회신을 기대하지 말라;
세상에 알려내는 활동들을 한다. 평화수감자의 날은 1950년대에 처음 소개되었으나 그 기원은 WRI가 수 감자들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냈던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wri-irg.org/co/pfphist.htm에서 평 화수감자의 날의 역사를 알 수 있으며, Broken Rifle/Prisoners for Peace 홈페이지에 가면 최근과 예전의 캠페인 정보들을 볼 수 있다.
2005.12.1, WRI가 제안하는 직접행동 12월 1일, 적어도 1시간은 비워두고 최소 4명 이 상의 평화수감자에게 편지를 쓰자; 당신이 속해있는 평화모임에 편지쓰기를 제안하자; 어디든 당신이 있는 곳에 부스를 차려놓고, 거리공 연처럼 사람들의 주의와 흥미를 끌 수 있는 행동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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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전쟁읽기 _ 두 번째 이야기 ‘순이 삼촌’ 까만★ | 매체편집팀 + ebonystar82 @ hanmail.net
전쟁, 상처, 그리고 기억
1. 섬
― 현기영(1995), 順伊 삼촌, 창작과비평사. 사람들은 자신과 말이 통하지 않으면 너무나도 쉽게 타자(他者)를 만든다. 그리고 그 타자와는 소통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고, 아무런 죄책감 없이 폭력을 행사하기 도 한다. 육지와 동떨어진 ‘섬이라는 ’ , 물리적 거리감. 그리고 방언이라기보다는 외국어라고 해야할만한, 언어적 거리 감. 제주도가 가진 이런 거리감은 어쩌면 ‘빨갱이로 ’ 타 자화하기에 너무나도 손쉬운 조건이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그 때 눅지사람치구 이 섬 사람들을 도매금으로 몰아쳐 뻘갱이루다 보지 않는 사람이 없댔디.”
기획연재에서 다루어지는 소설들.. 태평양전쟁 - 권정생, ‘슬픈 나막신’
제주 4.3 항쟁 - 현기영, ‘순이 삼촌’ 베트남 전쟁 - 안정효, ‘하얀 전쟁’ 광주 민중항쟁 - 이순원, ‘얼굴’ 현대의 군사문화 - 위기철, ‘무기를 팔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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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순이 삼촌8)’ 역시 서울 출신인 ‘아내와 ’
던 수많은 사람들을, 토벌군은 공비 소탕을 위한 소개
소통하지 못한다. 단지 언어적인 오해만은 아니다. 순이
작전이라는 명목으로 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은다. 그리고
삼촌은 스스로를 타자화(他者化)했다. 별 것 아닌 일로
무차별 사살, 우익 가족을 뺀. 군인들은 마을 사람들을
도 사람들이 자신을 의심한다고 여기고, 의심받지 않기
장대로 가두어서 내몬 다음, 일주도로 변 밭에서 일제
위해 병적으로 결벽하게 행동하고, 스스로 사람들과 거
사격하였다.
리를 만들었다. 순이 삼촌의 마음 속에는 견고한
성벽9)
이 쌓여 있었다. 30년 전, 마을 사람들을 가두었던 성벽
그리고 그 시체들 속에서, 순이 삼촌은 홀로 살아남 았다.
이. 그리고 순이 삼촌은 죽었다.
3. 아직 죽지 못한 죽음, 이미 죽어 버린 삶. 2. 소혼(召魂), 죽음을 되살리기 순이 삼촌은 살아남았다. 순이 삼촌이 키우던 고구마 ‘나는 ’ 순이 삼촌의 죽음을 집안 제사에 모인 어른들
들은 시체의 거름을 먹고 팔뚝만큼 굵어졌고, 순이 삼촌
께 듣는다. 순이 삼촌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은 그 고구마들을 먹고 아이를 낳았다. 순이 삼촌이 밭
그러나 순이 삼촌의 죽음은 개인적인 자살이 아니었다.
을 갈 때마다 그 때의 흔적들 ― 흰 잔뼈와 녹슨 납탄
그 죽음의 배경에는 집안의 죽음이 있고, 마을의 죽음이
환이 나온다. 순이 삼촌의 밭에는 그 때 죽은 두 아이가
있다. “한날 한시에 이 집 저 집 제사가 시작되는 것이
묻힌 봉분의 풀냄새가 독하게 퍼져있다.
었다.” 죽음은 죽음을 불러온다. 아니, 죽음에 대한 기억을 불러온다.
순이 삼촌은 살아남았나? 살아남는다는 말이 육체적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면, 순이 삼촌은 살아있었던 것이 아니다. 아직-죽지 못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 이다. 혹은 이미-죽은 채로, 죽음 속에서 살고 있었거
세월이 삼십년이니 이제 괴로운 기억을 잊고 지낼 만
나.
도 하건만 고향 어른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오히려 잊힐 까봐 제삿날마다 모여 이렇게 이야기를 하며 그때 일을 명심해 두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누이가 묻혀 있는 그 옴팡밭은 당신의 숙명 이었다. 깊은 소(沼) 물귀신에게 채여가듯 당신은 머리 끄덩이를 잡혀 다시 그 밭으로 끌리어갔다. 그 죽음은
그리고 1949년 음력 섣달 열여드렛날의 학살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한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30년 전의 해묵은 죽음 이었다. 당신은 그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다만 30년
“밤에는 부락 출신 공비들이 나타나 입산하지 않는
전 그 옴팡밭에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30년의
자는 반동이라고 대창으로 찔러죽이고, 낮에는 함덕리의
우여곡절한 유예(猶豫)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순경들이 스리쿼터를 타고 와 도피자 검속을 하”는 전쟁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었다.
같은 하루 하루. 그 틈새에서 근근히 숨만 쉬며 살아가
8) “고향 에서 는 촌 수 따 지기 어려 운 먼 친척 어른 을 남 녀 구별 없이 흔히 삼촌 이라 불러 가까 이 지 내는 풍습 이 있 다.” 9) 소설 에서 ‘성 벽’은 특수 한 상 징적 의미 를 지닌다 . 당시 토벌 군은 제주 도 공 비들 의 해 안 마을 침입 을 막 는다 는 명 목으 로 마 을 주 민 들 의 집을 허 물어 해 안 성 벽을 쌓 았다 . 그러나 공 비들 은 오지 않았 고, 성 벽은 결 국 과 잉 조처 로 드러 났다. 지 나친 의 심이 상상 의 적 을 만 들고, 상 상의 적을 방어 하기 위해 스스로 를 성벽 속에 가두 어 버 린 것 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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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없는 죽음에 한(恨)하며, 말할 수 없는 상처를 품 은 채 죽지 못하는 것이다. 라는 생각이 지금 조금 바뀌고 있다. 죽은 자와 산 ̇ ̇ . 상처는 그들의 영혼 깊숙이 새 자 모두, 죽을 수̇ 없다 겨지지만,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상처를 끝내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다. 전쟁의 폭력은 사람들을 상처 속에 가두어놓는다. 순 이 삼촌은 그 상처의 감옥 속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결 국 죽음을 택했다. 그렇다면 전쟁의 피해자들은 결국 상 처 속에서 짓눌려서 죽어갈 수 밖에 없는가? 아니다. 라고 믿고 싶다. 비록 나는 전쟁 피해자들의 비단 순이 삼촌뿐이겠는가? 그 당시 학살을 겪고 ‘살
상처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조심스럽게
아남은’ 수많은 사람들. 그들 역시 지워지지 않는 낙인
말하고 싶다. 서로의 상처를 꽁꽁 감추고 전전하는 것이
을 가지고 있다. 무심결에 이북 사투리를 쓰는 고모부
아니라, 상처를 함께 나누며 울며 되새긴다면……. 부정
(당시 서북청년단으로 토벌군에 가담했다)의 말투에, 머
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상처의 늪에서
리보다 먼저 몸이 반응하는 사람들. 상처는 일상의 순간
벗어나, 상처를 끌어안고 상처를 통해 만나고 상처를 함
순간 되살아온다. 죽음과 공포의 사슬은 그들을 놓아주
께 치유한다면……. 그래서 전쟁과 폭력의 기억을 적극적
지 않는다.
으로 전유하고 바꾸어나갈 수 있다면.
누가 뭐래도 그건 명백한 죄악이었다. 그런데도 그
“도대체 비무장공비란 것이 뭐우꽈? 무장도 안한 사
죄악은 30년 동안 여태 단 한번도 고발되어본 적이 없
람을 공비라고 할 수 이서 마씸? 그 사람들은 중산간
었다. … 섣불리 들고나왔다간 빨갱이로 몰릴 것이 두려
부락 소각으로 갈 곳 잃어 한라산 밑 여기저기 동굴에
웠다. 고발할 용기는커녕 합동위령제 한번 떳떳이 지낼
숨어 살던 피난민이우다.”
뱃심조차 없었다. 하도 무섭게 당했던 그들인지라 지레 겁을 먹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비무장공비를 ’ ‘피난민으로 ’ 바꾸는 것. 상처받은 사
결코 고발이나 보복이 아니었다. 다만 합동위령제를 한
람들이 스스로의 기억을 공유하고, 그 기억을 치유하고,
번 떳떳하게 올리고 위령비를 세워 억울한 죽음들을 진
기억을 바꾸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전쟁의 상처에서 해
혼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가해자가 쉬쉬해서 30년동안
방되는 길이 아닐까?
각자의 어두운 가슴속에서만 갇힌 채 한번도 떳떳하게 햇빛을 못 본 원혼들이 해코지할까봐 두려웠다.
4. 전쟁을 기억(記憶)하기 전쟁과 학살은 죽은 자와 산 자 모두를 죽인다. 그러 나 역설적이게도, 죽은 자와 산 자 모두 죽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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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동+재정보고 | 전쟁없는세상 팀별활동: 팀별활동은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 가능합니다.
전쟁없는세상 이렇게 살았어요~
: 매체편집팀은 소식지를 편집회의를 통해 기획/제작하고 있습니다. 13호 소식지 제작을 함께할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 세미나팀은 이번 소식지에도 실린 [폭력의 세기를 고발한다]를 커리로 모임을 준비하
전쟁없는세상 소식정리와 굵직한 활동보고입니다.
고 있습니다. 조만간 연락이 가면 참가를 희망하시는 분들은 재빨리 손을 들어 주세요! : 해외자료번역팀은 날맹이 새로이 합류하여 무엇을 할까 고민중입니다. 함께 하시고 싶
활동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지면관계상 안타깝게도 생락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열식인 점 사과드립니다.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 운영실에서 확인하세요~ ^ ^
으신 분, 제안거리가 있으신 분들은 홈페이지 운영실->팀별게시판->해외자료번역팀 게시판을 참고하시거나 날맹에게 연락해주세요~ : 수감자지원팀은 수감된 병역거부자들이 감옥 안에서도 밖과 소통할 수 있도록 개인요 청물과 회의록 및 편지를 담은 우편물을 정기적으로 발송하고 있습니다. 수감자지원팀에 관심이 있으신 분은 홈페이지 운영실->팀별게시판->수감자지원팀 게시판을 참고하시 거나 뎅에게 연락주세요~
8.22~8.26 8.24 9.28 9.29 10.10 10.15 10.19 11.8~10
2005 평화캠프 세계반전공동행동의 날 WOW 집담회 - 여성징병제 국가인권위 NAP 간담회 12.1 캠페인 준비 시작 병역거부자 고동주 후원의 밤 국가인권위 병역거부 청문회 고동주&오정록 병역거부 기자회견 부산 병역거부 전시회
>>전쟁없는세상 8,9,10월 재정보고 (7.5~11.5 간의 3개월분인 까닭에 지면 관계상 지출 내역을 모두 싣지 않습니다. 자세한 내역은 홈페이지 게시판을 참조 부탁드립니다.)
수입 개인후원금 계 지출 7월 지출 계 8월 지출 계 9월 지출 계 10월 지출 계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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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740 525,098
429,710 608,700 225,460 433,060 1,696,930
채무관계 받을 돈 줄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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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받을 돈 : 195,800 총계
이월금 잔액 (이월금 + 수입 -지출)
478,555 889,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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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 소식지가 8,9,10월호가 된 까닭
전쟁없는세상에서는 2004년 2월 첫 월간 소식지를 시작으로 2005년 현재에는 두 달에 한번씩, 격 달로 소식지를 발행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8,9,10월에는 굵직굵직한 행사들이 줄지어 있어서 행사 외의 다른 일들은 잠시 보류가 되었습니 다. 8월에는 평화캠프, 9월에는 아랫집 제주도 여행, 9월 말~10월에는 밀려드는 간담회와 토론회 및 보류되었던 일정들을 소화하느라 정신이 없었답니다. 또 한 가지, 책임활동가들에게 개인 활동비가 지급이 되지 않는 까닭에 개인 활동가들의 생계 유지를 위한 아르바이트 시간이 보장되는 것이 전쟁없는세상의 운영 원칙 중 하나인데 7,8,9월에 책임활동가들의 아르바이트가 갑자기 늘어 난 것도 큰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하여 9월 말 책임활동가들이 모여앉아 소식지 발행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의논한 결과, 큰 가지의 행사 외에는 특별한 일이 없 었고 + 10,11월호와 12,1월호 보다 12월 1일 세계 평화수감자의 날과 활동정리를 중심으로 한 11,12월호와 새해의 시작을 준비하는 1,2월호가 더 좋을 것 같다는 합의를 이루어 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12호 소식지는 부득이하게 8,9월호가 아닌 8,9,10월호로 발행이 되었습니다. 아무런 소식이 없이 한 달이 늦어진 소식지에 많이 궁금해 하셨을 후원인분들께 양해의 말씀 드립니다. 앞으로도 전쟁없는세상에 많은 관심과 후원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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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의민 : 9월 1일 항소심 선고, 5일 서울구치소로 이감. 6월 29일 1심, 9월 1일 항소심을 거쳐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현재 서울 구치소로 이감되어 수감 중입니다..
:: 임재성 : 7월 28일, 대법원 상고 기각, 9월 9일 충주구치소로 이감 7월 28일 대법원 상고가 기각되어 기결수가 되었습니다. 9월 9일 이감되어 현재 충주구치소에 수감 중입니다.
:: 이승규 : 9월 1일 1심 선고, 10월 24일 김천교도소로 이감 7월 28일 영장실질심사 후 구속되어 8월 18일 1심 재판을 거쳐 9월 1일에 1년 6개월을 선고받았습니다. 10 월 24일 김천 교도소로 이감되어 수감 중입니다. 교도소 내에서 반인권적인 지문날인을 거부함에 따라 생필품 및 영치금 수령까지 거부당하고 있습니다. 승규씨에게 지지와 성원 부탁드립니다.
:: 나동혁 : 9월 30일 출소 9월 30일 오전 10시에 드디어 출소를 하였습니다. 많이많이 축하해주세요!
:: 유호근 : 8월 9일 의정부 교도소로 이감 지난 8월 9일 의정부 교도소로 이감되어 수감 중입니다.
:: 최진 : 6월 28일 항소심 선고, 9월 15일 상고 기각, 10월 청송교도소로 이감 6월 28일과 9월 15일에 각각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9월 15일 상고가 기각되어 기결수가 되었습니다. 10월 청송 교도소로 이감되어 현재 수감 중입니다.
:: 임치윤 : 10월 28일 출소 임치윤씨가 지난 10월 28일 긴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하였습니다. 많이 많이 축하해주세요!!
:: 수감된 병역거부자들의 주소 오태양 충청북도 충주시 산척면 송강리 1151-1 충주구치소 894번 (우 : 380-830) 임성환 서울 금천우체국 사서함 164호 영등포구치소 수감번호 2579번 (우 : 153-600) 염창근 충청북도 충주시 산척면 송강리 1151-1 충주구치소 654번 (우 : 380-830) 이원표 대전광역시 유성구 유성우체국 사서함 136호 대전교도소 800번 (우: 305-600) 임재성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엄정우체국 사서함1호 충주구치소 865번 (우: 380-840) 유호근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813번지 의정부교도소 1550번 (우: 480-700) 조정의민 경기도 군포시 군포우체국 사서함 20호 서울구치소 수감번호 2322번 (우 : 435-600) 최진 대구시 달서구 달서우체국 사서함 7호 대구교도소 1557번 (우 : 704-600) 문상현 충북 서 청주 우체국 사서함 100 청주교도소 수감번호 844번 (우 361-600) 이승규 경상북도 김천시 김천우체국 사서함 12호 김천교도소 수감번호 569번 (우:740-600) ※ 2005년 10월 4일, 고동주씨(천주교신자)와 오정록씨(평화활동가)가 병역거부를 선언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