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없는세상 소식지 15호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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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OUTWAR Newsletter No.15 CONTENTS World

▶▶Special

Editorial

자전거 여행기 ..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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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와 나아감.

CO letters 처음 마음을 되돌아보며

CO note

병역거부자 활동수기

군대와 학교,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편집팀 11 14 16 18 21 24

깁스와 함께한 여행 콩깍지 제대로 쓰고 돌아온 유럽여행 오래된 여행, 내가 배운 것들 나의 여행기록 무엇을 배웠냐고 물으신다면

날맹 칼럼, 기획기사, 번역글,,재정정리

나동 기획기사, 참가후기, 수감기록

영은 기획기사, 기고자 섭외

조은 표지, 에디토리얼, 활동보고, 편집

Column

칼럼

그 날 그곳엔 어떤 경찰도 잘못한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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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에세이 31 34

폭력의 합리화 평택으로 평택으로

기획연재 37

수감자와 재판

Translation

번역 40

비폭력의 세계화

Report

9

기획기사

나의 발견

Series

유럽을 누비고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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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평화를 기원하며

Special

평화활동가가 독일에서 열린 WRI 전쟁저항자 인터내셔날 국제대회에 참가할 겸 자전거로

병역거부자의 편지

당당한 걸음을 위해

Essay

전쟁없는세상의 활동가 영은가 , 람날 , 맹나 , 동과 평화인권연대 활동가 오리아 , 침. 총 여섯명의

에디토리얼

활동재정보고

전쟁없는세상 이렇게 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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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ial

정체와 나아감. 조은 | 전쟁없는세상 책임활동가 + epilogue@empal.com

며칠 전, 몇 년 만에 제 방 안의 시계를 발견했습니다. 분명 3년 전인가 4년 전에 직접 못질을 하고 달 아놓았던 시계인데, 어느덧 건전지의 약효가 다 되어 침묵하고 있던 그것을 참 일찍도 발견했습니다. 발견한 순간 아차 싶었습니다. 오랜 기간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생각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느라 저의 흥 미적 요소의 범주를 벗어나는 존재에 대해 무관심해져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필연 매너리즘으로의 지름 길이고, 스스로의 지평을 확장시킬 수 있는 계기를 차단시켜 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관심이 있는 것, 지향하는 것에 감각을 투자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긴 하겠나마는, 극도의 몰입은 시야를 좁아지 게 하고 자신의 생각이나 활동을 정체시켜버리겠지요. 무언가 자신이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느낄 때, 그 느낌을 벗어나기 위해 흔히 쓰는 방법 중 하나는 여행입니다. 전쟁없는세상과 ‘옆집’ 평화인권연대의 활동가 여섯은 7,8월 여름 기간 동안, 독일에서 열린 WRI(전쟁저항자 인터내셔날) 국제회의에 참가할 겸 사비를 털어 유럽으로 자전거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 들은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요.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을지 모를 ‘정체성 ’ 을 털어버리고 왔을까요? 이번 전쟁 없는세상 소식지에서는 그들의 유럽 여행기를 기획기사로 실었습니다. 그들이 흘린 땀과 눈물을 확인해보시 기 바랍니다. 아, 평화활동가 여섯이 유럽에서 업그레이드가 되는 동안 전쟁없는세상 또한 정체해있지 않았습니다. 여 옥과 육구가 새로운 책임활동가로 들어왔고, 전쟁없는세상의 오랜 친구였던 겸의 제안으로 남아있는 활동가 들은 영상팀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영상팀은 수감되기 전의 병역거부자들과 출소한 병역거부자들의 활동모 습을 영상으로 담아 전쟁없는세상 홈페이지에 공개할 예정입니다. 나아가다. 진보를 연상시키는 이 4음절의 동사는 분명 매력적인 단어입니다. 책임활동가 용석과 뎅이 병 역거부로 수감되면서 정체되어있던 전쟁없는세상이 어떻게 나아가는지 지켜봐주십시오. 여러분들의 많은 질 책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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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한 걸음을 위해 임재성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2006년 5월 4일 출소

출소인사를 쓰라는 제안. 출소한지 2개월이나 지났기에 좀 쑥스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전쟁없는세상의 소 식지의 발행주기를 보면 이번 호에 나의 출소인사가 실리는 것이 맞다 생각에 쓴다고 했다. 그래도 내가 출 소 당일 후원클럽에 올린 출소인사처럼 “잘 다녀왔습니다!” 같은 형식의 글은 아닐 수밖에 없는 시점이기에 출소 이후의 지금까지와 앞일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야기 지난 2개월 동안 많은 이야기를 했었다. 스스로와의 이야기. 사실 걱정이 많았었다. 나가면 후유증은 없 을까. 예전과 같이 지낼 수 있을까. 생각보다 훨씬 잘 적응했던 출소 이후 이었지만 그래도 스스로와 많은 대화를 나눠야 했다. 때론 잘 견뎠다고, 잘 적응하고 있다고 칭찬도 해주고, 때론 좀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혼도 내주면서. 나를 지지해주고 도와주었던 이들을 만나면서도 역시 많은 이야기. 징역살이의 비화도 간간 히 섞어가며 나의 수감시절 이야기를 전했고, 지금 고민하는 몇 가지들을 털어놓기도 했다. 수감시절 내내 내가 가장 그리웠던 것은 바로 생각이 통하는 이들과의 대화였다. 때론 며칠씩 한마디도 하지 않으며 보냈 던 수감시절이었기에 그들과의 즐거운 대화는 어쩌면 나의 치유과정이었을 것이다. 수감시절도 그랬지만 출 소 이후 난 그 사람들에게 또다시 많은 것들을 받은 셈이다. 마지막으로 사회와의 이야기. 많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노력했던 부분이다. 출소한 병역거부자로서 사람들에게 글과 목소리로 병역거부자들의 현실과 대체 복무의 정당함을 알리고자 했고, 평택과 관련한 자리들을 찾아다니며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자 했다. 신문 내가 감옥에서 얻은 좋은 습관 중 하나는 신문을 정독하는 것이다. 여건상 신문이 거의 유일한 사회적 정 보의 창구였기에 난 하루에 1시간이상 탐독했고, 필요한 기사들은 손으로 베껴가며 재독, 삼독 했었다. 그 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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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을 반년정도 지속하니 스스로가 이 과정을 통해서 무척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에 이 후 이 습관을 지킬 것을 마음에 새겼다. 출소 후 얼마동안은 가판대에서 신문을 꼬박꼬박 사 보았고, 곧 신 문사에 전화해 지국 전화번호를 받아서 구독신청을 했다. 착하게 자동계좌이체신청까지. 그런데 시간이 지 날수록 신문이 밀리기 시작하더니 어떤 날은 약속이 많다는 핑계로 기사 한 줄 읽지 못하는 날도 생겨났다. 가방 안에 어제, 그제 신문이 뒤엉켜갔고 마치 학창시절 밀린 학습지처럼 버리지도 읽지도 못하며 다음날 올 신문에 스트레스까지. 마침 오늘은 시간이 좀 있어서 3일치 신문을 꼼꼼하게 일어내리고 가방을 정리했 는데 그러고 나니 하루가 갔다. 2개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하지만 난 출소 직후와 지금을 비교 할 때 참 많이 변했다. 더 이상 새벽 5시 50분에 눈이 떠지지도 않고, 출소 이후 얼마간 꼬박꼬박 하던 빨 래와 설거지도 슬슬 게으름을 부리고 있다. 당연하다고 하기에는 굳은 결심을 가지고 지키고자 했던 습관들 인데. 신문을 보면 그런 나의 변화가 가장 적나라하게 들어난다. 신문이 창살 넘어 던져질 때, 신문을 읽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었을 때, 난 꽤 근면한 독자였다. 그러나 나와서는 왜 그렇지 못한가. 상황이 다르 다는 핑계를 대며 적당히 타협하려는 내가 너무 간사하게 느껴진다. 평생의 습관으로 삼자고 그렇게 다짐했 건만. 그렇게 원하던, 스스로의 시간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는 지금, 왜 나태해갈까. 디자인사업 “양심적 사교육 거부” 깊은 고민 속에서 결심했었고, 이런 결심을 나누고자 글을 썼었는데 출소하니 많은 이들이 물어본다. 정말 사교육 안 할 거야? 채식(육식거부)을 하는 이들이 채식을 하며 그렇듯, 거부를 하 는 이의 최대의 운동은 거부를 하면서 즐겁게 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 믿는다. 근데 현실은 일단 즐겁고 자시고 어쨌든 호구지책이 급했다. 이 나이에 집에서 용돈을 받을 형편도 아니고, 출소 이후 이것저것 목돈 을 쓰고 나니 정말 그랬다. 수감시절 계획해두었던 디자인사업을 후다닥 시작했다. 병역법 전과자들은 사업 자등록을 낼 수 없기에 아버지 이름으로 “매체상상력” 이란 이름의 편집디지인 사업자등록을 하고 전쟁없는 세상 사무실에 책상을 하나 놓아서 공간도 임시로 마련했다. 지인들에게 들어온 몇 가지 의뢰를 처리하며 예전의 감도 살리고 인쇄소 정보등도 다시 확인하며 어찌어찌 시작이구나 싶었는데, 비즈니스는 인맥이라더 니 평화운동 하는 이들의 소개를 통해 인권잡지 월간 “사람의 ” 웹진 제작 의뢰가 들어와서 얼마 전까지 며 칠 매일 밤을 새며 제작을 마쳤다.(http://www.esaram.org) 사실 안에서 계획을 세우면서도 그랬고, 사업자 등록을 하면서도 의뢰가 많을까 싶었는데 감당하기 벅찰 만큼 일이 들어와서 몇 가지 의뢰는 정중하게 사 절하기도 했다. 비즈니스는 인맥. 金言이다. 당분간은 공부에 집중해야 할 시기이기에 의뢰를 받지 않으려고 하지만 연말부터는 나도 체계적으로 디자인공부를 하면서 사업을 본격적으로 해 보려고 한다. 물론 어디까 지나 이것은 나의 활동과 공부를 위한 호구지책이기에 주가 되면 안 되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먹고는 살아 야지.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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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뭐 할 건데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 그리고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출소 이후 스스로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열심히 발품을 팔며 정보를 구하고, 조언을 구하고, 고민하고. 이제는 나름의 정리가 되었기 에 이렇게 글로 쓸 수 있을 것 같다. 원래는 출소이후 언론사에 입사하는 것이 계획이었다. 그런데 막상 수 감이 되어서 병역거부에 대한 자료들을 읽고, 정리하면서 출소이후 병역거부 운동과 비폭력 평화주의 운동 을 제대로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밖에서 부족하기만 했던 평화운동에 대한 도서들을 읽어나 가면서 그러한 열정이 더욱! 그런데 그런 독서가 심화되자 슬슬 공부에 대한 욕심도 생겼다. 특히 당시 일 본의 교과서 왜곡이나 독도문제, 야스쿠니 신사참배문제, 북핵문제와 6자회담 등등을 보며 한반도의 평화체 제와 동북아시아의 평화공동체에 대한 고민을 키워갔고 전쟁과 폭력, 평화의 문제가 근대국가의 단위로서만 해결될 수 없는 부분이라 느끼고 국제정치에 대한 공부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활동과 공부를 연관시킬 수 있는 고리를 모색해야겠다는 마음을 지니고 몇 가지 선택항들을 모색해본 끝에 지금 나의 선 택은 일단 대학원 진학이라 결정했다. 물론 학위 욕심이나 공부를 길게 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운동하는 이들의 대학원 진학에 대해 불신의 눈으로 바라봤던 나였기에 스스로의 선택이 조심스럽지만 가볍지 않은 시간 속에서 내린 결정이고, 내가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들을 믿기에 지금은 대학원 준비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준비된 것이 없기에 마음도 급하고 불안하지만 어쩌겠는가. 노력하는 수밖에. 병역거부자는 군대가 아닌 감옥을 가서가 아니라 그 선택의 근거가 되는 신념을 평생 지니고 살 것이기 에 병역거부자일 것이다. 수감시절 비록 몸은 고단했으나 내 결정과 신념에 대한 확신으로 맘은 뿌듯했던 시간이었다. 그런 감옥살이를 마치고 난 지금.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조심스럽지만 당당한 걸음이고 싶다.

임재성 2004.12.13 병역거부 선언 | 2005.1.26, 27일 경찰조사 2005.1.28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영장실질심사구속 , 2005. 3. 18 서울지법에서 1심 선고공판, 1년 6개월형 선고 2005.9.9 충주구치소로 이감 | 2006.5.4 가석방으로 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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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평화를 기원하며.. 유호근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2006년 5월 4일 출소

출소 그러나 그것은 생각만큼 대단하지 않았다. 그 안에서의 길었던 시간들. 좋은 일과 좋은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음에도 그곳의 시간은 어쩔 수 없이 회색빛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벗어나기만 한다면...’하는 생각을 참으로 많이 했던 것 같다. 나름대로 마음을 차분히 하고 수행하는 마 음을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원래 생각이라는 것이 내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기다리던 출소였는데...출소 당일 의정부 교도소 강당에서 소지품 검사를 할 때까지도 설레였었는데, 집 에 오는 차안에서 나는 그저 하룻밤의 꿈을 꾸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특별할 것도 없고, 대단할 것도 없는 그저 일상... 그리고, 실제로 내가 돌아온 이 사회는 안에서 걱정했던 것(나 혼자 뒤처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등의)과는 다르 게 여전히 그대로였고 나는 시나브로 사회로 흡수됐다. 역시 교도소 안의 시계와 교도소 밖의 시계 속도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수감생활 수감기간 내내 전반적으로 나는 무엇인가와 싸워왔던 것 같다. 폭력적인 방 생활, 권위적이고 편의적인 교도행정 그리고 흐트러지는 나 자신까지.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것들과의 싸움에 지침을 느꼈다. 승리의 요체는 ‘단결이 ’ 라던가? 하지만 그곳은 단결의 ‘ㄷ자 ’ 도 꺼낼 수 없는 곳이다. 단 결은 커녕 심지어 다른 재소자와 인사를 했다는 이유로 난 자술서를 쓰고 교도관과 대판 싸운 적도 있다(가석방 분류를 받은 직후여서 조금 걱정은 됐지만...). 그곳에서 발견한 무수한 모순들은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문 제는 그 모순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하나에 대응하면 두 개의 다른 문제가 드러난다. 그렇게 힘겨워 하던 중 나는 방향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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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것을 보지 말고 좋은 것을 보자’ 그 이후에도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음의 변화를 준 이후 신기하게도 문제점 투성이었던 나의 주 변에 좋은 사람들이 여럿 나타났다. 그들을 보며 나 혼자 그런 생각을 했다. 교도소에는 크게 세 부류의 사람으 로 나뉜다고. 밖에서 나쁜 일을 저지른 것은 같지만 수감생활 중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과 도움을 주는 사람 그리고 피해도 도움도 주지 않는 사람으로 나뉜다고. 내가 말하는 좋은 사람은 바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 을 사람을 말한다. 그들의 발견은 지쳐가던 내게 오아시스와도 같았다. 교도소 안에도 분명 그런 사람이 있었다. 달라이 라마, 법정, 틱낫한 등 유명한 스님들의 책을 읽으며 그냥 그렇구나 하고만 생각했던 이야기, ‘문제는 내 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이다.’라는 말이 몸으로 이해가 됐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들과 여전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 출소이후 징역생활의 장점이라면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에서는 자신은커녕 주변을 쳐다보기에도 바쁘지만 그곳은 나를 바라보기에 좋은 곳이다. 지루하고 답답한 일상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조차 민감하게 감지되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많이 잊고 지낸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내가 느낀 것은 아무리 힘든 상황도 얻을 것이 있고, 아무리 좋은 상황도 잃는 것이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인생은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다. 욕심을 버리자라 ’ 는 것이 1년 3개월 수감기간이 내게 준 교훈이다. 얼마 전 20대 후반에 결혼한 고등학교 친구와 통화를 했다. 와이프와 열심히 돈을 벌어서 얼마 전 강남에 전셋집으로 옮겼다며 자랑을 하는가 싶더니 조만간 직장을 그만 둘거란다. 왜냐고 물으니 올해 초 스트레스로 인해 아침에 쓰러졌었다고 한다. 병원에서 쉬라고 했다고 조만간 회사를 그만두고 유럽여행을 다녀올 생각이라는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부러움보다는 안타까움이 앞섰다. 누구든 무언가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이 있고, 잃는 것이 있다면 분명 얻는 것이 있다. 문제는 우리는 주로 잃는 것에 집착하고, 분노하고, 슬퍼한다는 사실이다. 욕심을 버리고 세상을 바라보면 교도소도 평화로운 곳일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욕심에 가득 차 있다면 교 도소 밖도 결코 평화로운 곳일 수 없다. 결국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다. 이 글의 취지와 목적이 수감자를 위한 것 인지 회원을 위한 것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래서 출소한 지 얼마 안 된 사람으로서 현재 감옥 안에서 고생 하고 있는 친구들을 생각하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갇힌 벗들의 마음의 평화를 기원하며...

유호근 2002.07.09 병역거부 선언 | 2002.10.25 구속영장실질심사, 구속확정 2002.11.11 보석 허가. 1심 재판 연기 | 2004.09.23 재판 속개. 국회 입법 논의 2005.02.17 1심선고공판, 1년6개월 실형선고, 보석취소 법정구속 2005.04.19 2심선고, 1년 6개월 실형 선고 | 2006.5.4 가석방으로 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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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마음을 되돌아보며 김훈태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2006년 3월 28일 병역거부 선언, 1심에서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논산구치소에 수감 중.

2006.6.26.월 1.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갑자기 멍해졌다. 나는 아직도 사람이 죽는다는 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죽음은 늘 낯 설다. 어떻게, 살아있던 사람이 죽어 없어질 수 있을까? 새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죽 음은 여전히 난해하다. 그것은 내게 검고 깊은 구멍의 이미지로만 존재한다. 알아봤더니 부모의 상이 아니면 나 갈 수 없다고 한다. 나는 갇혀있는 것이다. 2. 밥은 식구통으로 들어온다. 복도를 향한 창 밑으로 정사각형의 구멍이 식구통이다. 사람 머리통 하나가 겨우 들 어갈 정도의 크기이고 스테인리스 철제로 만들어졌다. 그곳으로 밥과 국과 반찬이 드나들고 기타 식료품과 생필 품이 들어온다. 쇠창살과 철문으로 막혀있는 방안에서 유일하게 열려있는 통로이다. 이를테면 감방의 목구멍이자 생명줄인 셈이다. 나는 감옥의 상징성을 저 식구통에서 찾는다. 식사가 끝나고 식구통을 닦으며 나는 나의 몸이 감옥에 처해있음을 절감한다. 3.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듯 여기에서도 사람들은 즐거움을 찾으려 하고, 더 나은 생활환경을 꾸미기 위해 노력한 다. 마음이 가라앉지 않도록 끊임없이 대화하고 몰두할 무언가를 찾는다. 대체로 쓰잘데기 없는 것이긴 하지만, 서로 위로하고 농담을 던지고 신세한탄 또는 자기 자랑을 하거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무기력하 고 답답해지는 마음을 다스리고 지루한 시간을 ‘깨는데 ’ 큰 도움이 된다. 장기에 꽂히거나 독서에 꽂히고, TV에 꽂히는 것도 같은 효과를 낳는다. 즐거워야 시간도 잘 가는 법이다. 난 예상대로 책에 꽂혀 있다.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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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역시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듯 여기에서도 적응을 잘해야 미움 안 받고 덜 괴롭게 살 수 있다. 남성들만의 폐 쇄적인 집단생활이기 때문에 우선 튀는 행동을 자제해야 한다. 그리고 질서의식의 생활화가 필요하다. 아직까지 는 이곳 질서가 그렇게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운이 좋아 비교적 지내기 편한 방에 있어서 그런지 몰 라도 감옥 특유의 마초적인 분위기도 그렇게 심각해 보이지는 않다. 나이와 경력(방에 오래 있었던 순서대로)을 중심으로 한 권력의 서열화는 익숙한 것이기도 하고, 소리 안 나게 사뿐사뿐 걷는다든지, 자는 시간에는 볼 일을 zd

봐도 (큰 것이 아니라면) 물을 내리지 않는다든지 하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 안 주는 일들은 빨리 배우고 빨리 익혀야 한다. 그 밖에 이곳의 독특하고 자잘한 징크스 같은 것들도 최대한 빨리 알아둬야 욕을 덜 먹는다. 밖에 서 가르치는 일을 많이 해서 그런지 배우는 게 더뎌 나는 꽤 구박을 받는 편이다. 5. 들어온 지 이제 한 달이 조금 넘는다. 오늘 오전엔 그간 자르지 않던 머리칼과 수염을 말끔하게 깎았다. 그런데 이발사 솜씨가 그리 뛰어난 게 아니어서 거울을 보면 웃음이 나온다. 꼭 80년대 제비같이 깎아 놨다. 다시 가서 고쳐달라고 할까하다가 그만 두었다. 누구한테 보여줄 것도 아닌데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을 것 같아서다. 시간은 잘 간다. 아침 먹고 책 좀 볼만 하면 운동 나가고, 들어와서 또 뭣 좀 쓰려면 점심 먹어야 하고, 신문 보 고 낮잠 한숨 자면 또 운동(방 안에서)하고, 책 보다 말고 저녁 먹고 TV보고 간식 먹으며 수다를 좀 떨다보면 잘 시간이다. 이렇게 하루하루, 한 주 한 주가 잘도 간다. 처음에는 공부 욕심을 많이 내서 괴로워질 뻔도 했지 만 곧장 내려놨다. 공부하러 온 게 아니라 고행하러 왔다는 초심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금세 마음이 편 해졌다. 다 큰 어른들이 여럿이기 때문에 서로 조심한다 해도 부딪히기 일쑤다. 하지만 대체로 지혜롭게 해결해 나간다. 큰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작은 싸움으로 예방을 하는 까닭이다. 작은 방에 갇혀 있기에 마음들이 자잘해진다. 마 음을 일부러 넓히기보다 자잘해진 마음을 그 때 그 때 알아차리는 게 해법인 것 같다. 6. 온 종일 켜져 있는 형광등 불빛을 보면 양계장의 닭이 생각난다. 밤에도 꺼지지 않는 불빛. 달걀 생산을 위해 시 달리는 닭처럼 우리도 무언가를 강요받고 있다는 느낌이다. 보통 전과자는 누범자가 되기 십상이다. 그것은 전과 자들의 성향의 문제라기보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 때문으로 보인다. 그 모순은 진부할 정도로 뻔한 것인데도 달 라지지 않는 것은, 우리 모두가 공범이어서일 것이다. 7. 아무래도 이 곳에서 출역하기는 힘들 것 같다. 언론에 알려진 데다 전교조에 대추리 일까지 한 게 드러나(?) 골 치 아픈 공안수로 대접받는다. 평택구치지소에는 김지태 이장님뿐만 아니라 대추리 관련 사범들이 많아 교도관 들이 긴장하고 계시는 와중이라 더욱 그렇다. 이곳에서 출역하면서 편하게 징역살려고 했던 마음이 컸나보다. 다 른 교도소로 이감 갈 생각에 잠시 두려웠었다. 처음 마음을 되돌아본다. 고생할 각오를 새삼 다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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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와 학교,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경수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2006년 7월 13일 병역거부 선언

평화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면 이내 막막해지고 만다. 평화의 반대가 무엇인지는 잘 알겠는데 평화가 무엇이 냐고 물어보면 대답을 못 하겠다. 이건 나만의 경험은 아닐 것 같다. 굳이 전쟁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평화롭지 않은 모습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된다. 매일 최저 생계선 아래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이나 차 별받는 소수자들의 모습, 그리고 삶의 터전에서 내몰리는 주민들의 삶이 그렇다. 벌겋게 드러난 산비탈처럼 파괴 된 자연도 평화롭지 못하다. 하지만 평화는? 쉽게 대답할 수 없다. 아마 옛날 사람들도 평화는 쉽게 떠올리지 못 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동화책의 마지막은 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고 대충 끝맺었던 게 아 닐까. 요즘 들어 병역거부를 선언할 날자가 다가오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이번엔 평화가 무엇일까 고민하던 차에 잠깐 학교 이야기를 꺼내볼까 한다. 병역거부를 고민하기 시작했을 때도 그랬지만, 이런 문제들을 고민할 때면 습관적으로 고등학교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된다. 내 중고 ․ 등학교 시절의 삶이 그만큼 치열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평화를 고민하기 전에 먼저 교육과 내 권리에 대해 고민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누구나 세 상을 보는 창, 하나의 시각을 가지고 있기 마련인데, 나는 그것이 학교와 교실인 셈이다. 체벌의 예를 들어보자. 사실 지금도 그렇지만 체벌에 대해서 나는 아직도 왜 공부를 못하면 맞아야 하는지 이 해를 못하고 있다. 대게 매라는 건 어차피 누군가 맞아야 할 사람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정해져있는 경우도 많 다. 지금까지 10년이 넘게 학교를 다녔지만 선생님이 매를 들고 그냥 지나쳤던 기억은 없는 거 같다. 칼을 들었 으면 무라도 썰어야 한다는 군인정신이었을까. 대신 매를 맞을 때 내 기분은 분명하게 생각이 난다. 그리고 매를 맞는 아이들을 지켜볼 때의 기분도 기억하 고 있다. 그래도 학교를 다닐 때 공부를 못하는 편은 아니어서 대체로 나는 맞기 보다는 맞는 걸 지켜보는 편이 많았다. 그리고 그때, 매 맞는 친구들을 보면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아, 다행이다.’였다. 누군가는 맞고 있 는 상황에서 다행이다 라니!!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분명히 표정은 어두웠지만 그때 나는 속 으로 ‘다행이다.’ 라고 외치고 있었다.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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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벌이 만들어내고 있는 잘못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누군가 맞아야 하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그리 고 모두들 그게 내가 아니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드라마(사실 드라마의 주인공은 매를 맞아 야 하는 ‘우리가 ’ 아니다)를 보며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수재민 돕기를 무슨 기록 세우기라도 하듯 그렇게 열을 올리는 사람들이 왜 그토록 다른 이들의 권리에 무관심할까가 이해되지 않는다. 여전히 외롭게 농성장을 지키고 있는 KTX 여승무원들도, 평택의 주민들도, 그리고 여전히 70년대의 어두운 현실에서 일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 도 이해되지 않는다. 우리는 학교에서 매를 맞으며 은연 중 이런 생각을 배워온 것은 아닐까. 그래서 사람들은 누군가가 단지 매를 맞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아니니까 다행이다 라고 자조하면서. 학교에서 배운 것들은 그것만이 아니다. 늘 아침 조회시간만 되면 반복하는 앞으로 나란히, 차렷, 열중쉬어. 그리고 두발규제와 교복으로 상징되는 내 몸에 대한 간섭들. 무엇보다 폭력 속에서 강제되는 학습들. 폭력에 의 해 학습되는 것은 단지 폭력일 뿐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리고 우열반이라는 이름으로 성적으로 제멋대로 나 뉘는 아이들까지. 사실 학교에서의 불쾌했던 기억들을 일일이 열거할 생각도 없고, 그러기엔 이 글을 오늘 밤 안에 마저 완성하 기도 어려울 거 같다. 다만 학교에서 배워온 것들이 철저하게 반 평화적이라는 것, 그리고 이런 것들이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평화가 무엇이냐고. 여전히 어려운 질문이다. 충분한 답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평 화는 끊임없이 긴장하는 것이 아닐까. 평화롭지 않은 것들에 대한 긴장. 내가 학교에서의 기억들에 긴장하고 있 는 것처럼, 우리 주변의 평화롭지 않은 것들에 대한 긴장들이 평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나는 생 각해 본다. 종종 학교가 군대와 닮아있다고 이야기하곤 하는데, 반대로 군대가 학교를 무서우리만치 닮아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군대에서 가르치는 것을 흔히 군사주의라고 부른다. 나는 굳이 평화주의만이 아니더 라도 이 군사주의와의 긴장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총을 들지 않겠다고 선택하는 데는 다른 이들처럼 다 양한 층위의 경험과 고민이 존재하지만, 이 군사주의와의 긴장 역시 중요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결국 고등학교 때 내가 선택했던 것은 자퇴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조용히(?) 졸업을 하고 말 았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뾰족한 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최근에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지금 나는 그 군 대라는, 일종의 범사회적인 교육기관에 대해 적극적으로 저항해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평화라는 게 누군 가의 동화처럼 힘겹게 무언가를 성취해낸다고 해서 “오래오래 행복해질 수 있는”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니라면 매 순간 끊임없이 긴장하는 수밖에 없는 거 아닐까. 병역거부는 그 과정 속에 있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간디가 했던 말을 되새겨 본다.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

경수 2006.07.13 병무청에 병역거부 이유서 직접 제출 2006.08.21 경찰 조사 받음 2006.09.27 1차 검찰조사 2006.09.29 2차 검찰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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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발견 - 경험들은 결국엔 자신감으로 남아 새로운 도전을 계속할 수 있 는 작은 힘이 되었다. 나동 | 전쟁없는세상 책임활동가 + peace1@jinbo.net

여행은 끝났고, 일상이 여행처럼 바뀌는 것 아닐

이 번 여행을 통해서 자전거도 배웠고, 수영도 배

까 기대했지만 일상은 견고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웠다. 뭐 대단한 건 아니지만, 나한테는 대단했으

순간 모든 게 그 자리에 있었다. 가족은 한결 같았

니. 스물이 넘도록 자전거 못 배운 사람들은 이 심

고, 졸업과 돈벌이에 대한 걱정은 잠시 유예된 것

정 안다. 한 번 때를 놓치면 그 후엔 기회가 잘 안

뿐이었고, 왕복 6차선 도로를 꽉 메운 차들은 하루

온다. 쑥스러워서 못 배운다. 그러다 여행가기로

종일 매캐한 연기를 내뿜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지

맘먹고 5월에 자전거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6

나치게 바쁘고, 끊임없이 만능이 될 것을 요구받는

월에 강화도로 예행연습을 다녀올 때만 해도 한강

사람들은 동시에 절대 튀지 않으려 애를 쓴다. 그

다리에서 가드레일 들이 받고 차도로 떨어졌는데.

리고 개그콘서트는 여전히 재밌다(마빡이 미치겠

아무 탈 없이 여행을 마무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다).

기분이 참 좋다. 이젠 나도 자전거 타고 여기 저기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또 다른 여행을 계획할 수도 있고. 수영 배운 것도 신기한 일이다. 물에 대한

1.

공포심이 심해서 수영만은 평생 극복 못할 콤플렉 스라 생각했는데 물에 뜬다는 사실이, 그래서 이제

하지만 이게 다는 아니다. 난 분명 많은 걸 기대했

수영장이 두렵지 않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

다. 그리고 여행은 기대이상이었다. 여행은 50일.

다. 자신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의 발견. 내가 참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

초라해 보이고 새로운 도전이 마냥 두렵기만 할

기엔 충분했다.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가 두드러지

때 여행은 나에게 작은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낯선

진 않겠지만 두고두고 내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칠

환경으로 가득 찼던 첫 번째 해외여행이자 자전거

것 같은 예감. 무엇보다 최고의 수확은 자신감이

여행이었다.

다.(아~ 좀 식상한 말이지만 정말 그래요-.-;;)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3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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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난 자전거로 사무실에 오고 가기 시작했다.

섬세해질 수 있다면 일상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

어나겠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둔해지는 건 한순

기 시작한다. 종로나 청계천을 지날 때는 유독

간이다. 감이 떨어진다 싶을 때 그 때 느낌을 떠

오토바이가 많다. 짐을 가득 실은 오토바이가 신

올려봐야지.

호를 기다리며 일렬횡대로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몸이 힘든 때도 많았다. 애초에 몸으로 때우기로

있노라면 오토바이로 가득했던 호치민 시티가

결심했던 여행이었다. 예산은 넉넉지 않았고, 계

생각난다. ‘치열한 삶의 현장은 어디나 이렇게

획은 완전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자전거에 대한

비슷하구나.’ 다른 듯 닮아 있는 모습을 본다.

준비가 너무 미흡했다. 사전지식도 부족했고 10

종로와 청계천 일대를 지날 때마다 드는 생각이

만원대 하이브리드 생활형 자전거로 장거리 여

다. 전태일 열사거리도 자전거를 타고 집에 가는

행을 계획한 것도 무리였다. 자전거는 하루도 멀

길에 처음 봤다.

쩡한 날이 없었고, 친구 중 한 명은 자전거를 타 다 넘어졌는데 손목에 금이 가서 중간에 자전거 여행을 포기해야만 했다. 사고가 정말 많았다.

2.

거짓말 안보태고 하루에 평균 한 번 이상씩 튜 브에 펑크가 났다. 아, 정말 계획하고 사고를 친

여행을 가면 더러는 헤어지는 연인도 있다는 말

것도 아닌데 영화 같은 장면 많이도 찍었다.

을 들었다. 그 만큼 의견을 조정하기가 쉽지 않 고 서로 바닥을 보게 되니까 더러 실망도 한다 는 뜻. 여섯 명이서 50일 동안 자전거 여행을

상황 하나. 캠핑장은 밤 열 시에 문을 닫는다.

갔다. 참 많이 부대끼고 즐거운 일도 힘든 일도

어렵사리 캠핑장에 도착한 게 밤 9시 조금 넘은

많았다. 내 인간성의 밑바닥을 보였다. 흔치 않

시간. 캠핑장 자리가 꽉 차서 더 받을 수가 없단

은 경우다. 또 다른 사람들의 밑바닥을 봤다. 항

다. 그러더니 ‘인근 숲에서 몰래 텐트를 쳐라.

상 사무실이나 집회 현장에서만 보던 친구들. 너

단 경찰에게 들키면 우리가 가르쳐줬다고 말하

무나 자주 보는 얼굴이지만 깊이 이해하려들면

지 말라고 ’ 귀뜸해 주는 캠핑장 주인. 계속되는

전혀 잡히지 않는. 그런 친구들. 마냥 좋은 일만

토론과 의견수렴. 어렵사리 캠핑장에 양해를 구

있었던 건 아니다. 그래도 우리는 잘 이겨냈고

해서 1유로를 내고 샤워만 해결하기로 결정. 그

서로 배려하는 모습도 많이 보았다. 여행 전에는

런데 텐트를 칠 자리 찾는 게 쉽지 않다. 날은

어색했던 친구들도 있었는데 이제는 좀 편해졌

너무 춥고 해는 떨어져서 날은 어둡고. 그 때 기

다. 사람에 대해서, 인간관계에 대해서 그 어느

적적으로 자기 집 정원에 텐트를 치라며 호의를

때보다 많이 생각한 시간이었다. 그 때 느낌처럼

베푼 의사 부부.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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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 둘. 벨기에에서 프랑스를 넘어갈 때다. 100KM 가까이 달리는 장거리 코스. 벨기에 자전

이런 경험들이 결국엔 자신감으로 남았다. 새로

거 도로 상황이 너무 좋아서 페이스가 괜찮다. 그

운 도전을 계속할 수 있는 작은 힘이 되어주고 있

런데 프랑스로 접어들면서 상황 반전. 자전거 도로

다. 그래서 다들 여행을 가나보다. 어느새 새로운

를 찾기도 쉽지 않은데 도로 표지판이 죄다 바뀌

여행이 기다려진다.

어서 도로구조를 파악할 수가 없다. 해는 저물어 가는데 비가 온다. 체온이 급격히 떨어진다. 자전 거 도로는 나타나지 않고, 저녁 6시가 지나면 상점 이 죄다 문을 닫아 거리에 사람 찾기가 힘들다. 어 렵게 행인을 붙잡고 길을 물어봐도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고. 없친 데 덮친 격으로 타이어가 또 펑크. 버스 정류장에 비를 피하면 펑크를 떼우 는 사이 몇몇은 숙소를 알아보러 떠난다. 결국 캠 핑장을 못찾고 호스텔에서 일박. 예산에 무리가 간 다.

쉴 새 없이 반복되는 자전거 사고는 사람들을 점점 불안하게 만들었다. 심리적으로 지쳐갔다. 자 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아주 작은 변화에도 민감해졌다. 고열에 타이어가 터지는 가 하면 자전거 휠을 지탱하는 가는 살들이 뽑히는 경우는 생전 처음 봤다. 친구들과 헤어져 혼자 기 차를 타고 국경을 넘는 것도 일이다. 기차역에 앉 아 있으니 낯선 땅의 노숙자들이 돈을 달라고 접 근하는데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고, 예정된 시간까 지 친구들이 안 오니 연락할 수단도 없어 마음이 급해진다. 안트베르펜 역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마 치 ‘대구역과 ’ ‘동대구역 ’ 이 있듯 안트베르펜으로 시작하는 역이 두 개.(-.-) 아무튼 여행 내내 이 랬다. 좌충우돌. 이러니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여 행을 무사히 끝낸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가슴 벅 차지 않을 수 있겠나?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3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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깁스와 함께한 여행 영은 | 전쟁없는세상 책임활동가 + slow-steady@hanmail.net

여행에서 돌아오고 꼬박 한 달이 지나서야 카메라 에 있던 사진들을 옮겼다. 난 원래 사진을 좋아하 지 않는다. 사진에는 별로 흥미가 없고, 사진은 어 떻게 해도 그 순간의 느낌들을 온전히 살릴 수 없

처음 팔에 깁스를 하고나서 몇 일 동안 정신적, 육

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순간을 붙잡으

체적 충격에 정말 멍했다. 어떤 판단도 서지 않았

려는 것은 영~ 맘에 들지 않는다. 이번 여행에서

다. 그래서 독일 쾰른에서 혼자 4일 정도를 머물렀

도 정말 꾸역꾸역 사진을 찍어대면서도 40여 일

다. 매일매일 미술관에 갔다가 빵조각 하나 들고

동안 꼴랑 200장도 찍지 않았고 사진을 옮기는 과

라인강변에 죽치고 앉아 책 읽고 일기 쓰는 게 내

정에서 절반정도는 또 지워버리고 말았다. 사진을

일과의 전부였다. 아무 준비 없이 떠났던 여행. 정

정리한 것도 사실 이 기사를 쓰기 위해 무언가 되

말 난감했지만 허겁지겁 혼자서 어찌 하면 좋을지

짚어봐야 할 것 같아서였지만 역시 사진은 도움이

고민하고 결정하고. 무엇보다 마음을 단단히 다잡

되질 않는다. 그래서 여행에서 언제나 유일하게 내

았다. 그리고... 혼자 씩씩하게, 열심히 걷기 시작했

곁을 떠나지 않고 있던 일기장을 다시 꺼내어본다.

다. 아마 이번 여행은 나에게 ‘도보여행이었 ’ 는지 도 모르겠다. 기차에서 내리면 하루에 적어도 5~6

이번 여행은 너무 급하게 떠나는 바람에 준비도

시간은 열심히 걸었다. 사실 왼쪽 팔을 쓸 수 없는

부족했고, 도착하던 순간까지 정신이 없었기 때문

상태였기 때문에 가방을 드는 것도 불편했다. 여튼

에 특별히 어떤 다짐이나 설레임을 가지고 출발하

우산도, 우의도 없이 때론 깁스한 팔이 젖을까 겉

지 않았다. 유일하게 한 생각들이 ‘제발 내 마음에

옷으로 칭칭 감아 매고 정말 열심히도 걸었다. 한

있는 나쁜 기운들은 버리고 돌아오자.’였다. (정말

국의 살인적인 찜통더위 때 그 곳은 입에서 입김

큰 욕심이다. -_-;;) 어쨌든 난 유럽에 도착해서

이 나올 만큼 날씨가 추웠다. 사람들은 다들 재킷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던 날 바로 굴러 떨어져 팔

을 입고 다녔고 머플러는 거의 기본센스였다. 덕분

에 깁스를 해야 했다. 아~ 정말 대략난감!!! 완전

에 걷는데 날씨까지 나를 괴롭히지는 않았다. 그렇

압박!!!이었다. 그렇게 혼자만의 여행은 시작되었

게 한 걸음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난 조금씩 강해

다.

지고 성장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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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나의 유치함과 어리석음은 갈 길이 한참

유럽 중세시대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풍경들은 사

남았지만. 그래도 날 괴롭히던 불필요한 미움, 서

실 나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한다. (원래부터

운함, 분노 들은 그렇게 내 발걸음마다에 사뿐히

난 유럽을 좋아하거나 그렇지 않았다. 기회되면 간

내려놓았다. 걸으며 유일한 나의 말동무는 내 자신

다 정도.... ^^;;;) 그냥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

뿐이었으며, 나를 위로할 수 있는 동무도 내 자신

는 게 즐거울 뿐이다. 그래서 ‘유럽여 ’ 행 후기는 쓸

뿐이었다. 누군가 그리울 때는 언제나 엽서를 꺼내

수가 없다. 그리고 자전거에서 떨어진 나로서는

들고 내 마음을 적어내려 갈 수 있었고, 가끔 서글

‘자전거여 ’ 행 후기도 쓸 수 없다. 난 그저 내 나이

픔이 밀려올 때는 아무 눈치도 보지 않고 혼자 울

스물다섯에 훌쩍 떠날 수 있었던 그 여행에 대해

수 있었다.

서만 이야기할 수 있다. 그 여행은 나에겐 너무 특

나는 혼자임을 배웠다. 혼자이며 함께 있을 수 있

별했다고. 그 여행에서 돌아오며 난 많은 것들과

는 법을 배웠다. 우리가 사람들을 떠나는 것은 진

이별할 수 있었고, 그 이별로 또 많은 것들을 만날

정 함께임을 깨닫고 배우기 위해서란다. 난 사람들

수 있었다고.

을 떠나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내 자신을 만났고, 마음으로 사람들을 만났다. 불필요하게 많은 이야

일기장을 덮는다. 이제 또 현실로 돌아가 난 때

기들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사람사이라는 것을

론 지나칠 만큼 냉정하게 많은 것들을 버리며 살

알았다. 언어는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담아내기엔

아가고 때론 부질없이 무언가를 붙잡고 놓지 못하

역부족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며 어리석게 살아가겠지. 하지만 단 하루도 빠지지

않는 것이, 고요히 마음을 전하는 것이 때론 더 많

않고 일기장에 적어두었던 그 주문만은 잊지 않으

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며 살아가련다.

수많은 언어와 대화에 노출되어 있다가 돌아서면 허무함을 느끼는 이유도 이제 조금은 알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무너지지 말고 강해지자.

아~ 노친네 같다. -_-;;;;;; 보태기 - 아~ 누가 보면 이번 여행을 혼자 다녀 그렇게 한국에 돌아왔다. 난 예전처럼 쉽게 흥분

온 줄 알겠다. 다친 나를 위해 물신양면 배려해주

하고 쉽게 짜증내고 수많은 언어들을 내뱉으며 살

고 보살펴준 나의 친구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빠트

아간다. 여행에서의 다짐이나 느낌들은 온데 간데

렸다. 고맙다는 말만으로는 이 마음 다 표현할 수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어느 여행이 안 그랬나? 그

없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건 아픈 다리 기대어 쉴

느낌들만으로도 인생은 조금씩 새로워지고 있으니

수 있는 친구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

까. 그 느낌들이 때론 삶의 위기 순간들에 불쑥 나

하며....

타나 나를 구제해주기도 하니까. 그래서 떠나는 거 겠지....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3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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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깍지 제대로 쓰고 돌아온 유럽여행 날맹 | 전쟁없는세상 책임활동가 + nalm109 @hanmail.net

내가 요즘 학교에서 듣는 수업 중에 교육인류학

는 어디든 여행을 가더라도 최후에는 돈만 있으면

이라는 수업이 있다. 꾸역꾸역 학점을 채우러 다니

김밥천국에 가서 김밥을 먹으면 되고 잘 곳이 없

는 학교이지만 배드민턴, 불어 수업과 함께 그나마

으면 찜질 방에 가서 하룻밤을 보내면 되었다. 하

흥미가 가는 수업이다. 파리에서 3년간 살다왔다는

지만 유럽에서는 저녁 6시면 모든 상점이 문을 닫

수업 선생님은 문화상대주의에 관한 예를 들 때면

고 해가 지면 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조차 쉽게

항상 파리와 서울의 다른 생활방식을 말하곤 하는

찾을 수 없는 상황을 맞닥뜨리고 나노라니 말 그

데 나도 이제 외국물 좀 먹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대로 패닉 상태를 자주 경험했다. 아직 목적지인

인지 마구마구 공감을 하게 될 때가 있다. 선생님

캠핑장은 나오지도 않았지, 벌써 마트는 문을 닫아

의 개인적 생각이나 인품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

서 먹을 것도 없지, 해는 져서 캄캄해지고 지나가

르겠지만, 선생님이 파리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는 사람도 없지, 게다가 자전거 도로는 나오지도

얘기할 때마다 덩달아 공감하며 입이 근질근질해

않지, 이쯤 되면 함께 있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정

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내 모습을 보노라면 절로

말이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어버렸을지도 모르

웃음이 나온다. 여행을 다녀온지 이제 한 달이 넘

겠다.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하러 왔나 생각하면서

어가지만 아직도 눈을 감으면 볼로뉴 숲 캠핑장에

말이다. 낮에 아무리 좋은 풍경을 봤어도 당장 오

서 개선문을 거쳐 에펠탑으로 에펠탑에서 세느강

늘 밤에 따뜻한 물로 씻고 편하게 잘 수 있는 곳

따라 쭉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길이 눈에 아직 선하

이 없다는 생각은 심리적으로 여유를 잃게 만들었

다.

다. 그런 상황에 좀 익숙해졌다 싶으니까 네덜란드 로 넘어와서부터는 웬걸, 이제는 캠핑장은 보이지

기존의 소비중심적인 일상을 벗어나 내가 스스

도 않는데 비까지 주룩주룩 쏟아지면서 나의 밑천

로 자립해야만 하는 일상을 접해보는 건 정말 좋

이 두루두루 까발려졌다. 덕분에 함께 한 사람들에

은 경험인 것 같다. 워낙 ‘귀하게’ 컸다보니 생존과

게도 별거 아닌 걸로 신경이 예민해지곤 했는데,

관련한 의식주 문제를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는 것

이 자리를 빌어서 다시 한번 미안하고 고맙다는

이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다. 여행 초반에 내가 겪

말을 전하고 싶다.

었던 스트레스의 많은 부분이 1차적인 욕구충족의 어려움과 관련되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한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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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까르푸와 같은 초대형 마트도 저녁 8시

의 건축양식이 그대로 남아있는 5,6층 정도의 건물

면 문을 닫는다. 일요일에 영업을 한다는 건 상상

들이 줄지어 있는 마을의 모습이 웬지 더 여유로

조차 하기 힘들어 보였다. 서울에 있을 때에 밤에

워 보였던 건 나만의 편견이었을까? 물론 그 동네

술 떨어지면 동네 슈퍼나 24시간 편의점을 가면

의 자세한 도시설계나 주택건축정책에 대해서는

되지만, 그 곳에서는 술을 먹다가 떨어져도 그걸로

전혀 아는 바가 없어서 더 이상 말하기에는 조심

땡이다. 순간 이 동네는 왜 24시간 편의점이 없을

스러워진다. 무슨 뉴타운재개발, 신도시 이런 개념

까 원망도 하지만, 평소에 한국의 천박한 자본주의

이 없어 보이긴 했지만, 사회 저소득층이나 이주노

에 대해서 얘기하던 걸 떠올리고나면 그런 생각을

동자들의 주거환경도 한국에 비해 ‘평화로 ’ 울지는

한 내가 잠시 부끄러워진다. 일요일이면 북적북적

알 수 없는 바이다. 쩝, 아무튼 한국에서 산을 깎

해지는 서울의 시내중심가의 모습과 대비되면서

아서 30층 아파트를 지어놓고선 친환경 주택이라

그 곳의 풍경이 그렇게 여유로워보이고 평화로워

고 홍보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아보였다.

보일 수가 없었다. 독일 루데스하임에서 마을의 병 원을 찾아가며 느꼈던 일요일 오전의 화창한 햇살

이 무엇보다도 역시나 여행 내내 고민을 하게 되

과 조용한 분위기는 앞으로도 쉽게 잊지 못할 것

는 건 관계에 대한 문제였던 것 같다. 이념적으로

같다.

는 서로 비슷하다 할지라도 라이프스타일 자체가 다를 때에는 갈등의 소지가 되기도 한다. 서로 힘

한국의 근대화의 모습과 대비되면서 인상적이었

든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더 힘든 일을 겪은 사람

던 모습은 ‘도로문화와 ’ ‘거리문화였 ’ 던 것 같다. 웬

에게 감정노동을 하고 위로해주는 일이 그렇게 힘

만한 마을길에서는 인도와 차도가 분리되지 않는

든 일인 줄 몰랐다. 베트남에서는 그 동안의 고생

다는 점, 언제나 자동차보다 사람이 우선이라는 점

을 싹 잊을 수 있을 만큼 좋은 잠자리와 좋은 식

들이 서울의 모습과 대비되면서 부러워 보였다. 심

사를 했는데, 몸이 상대적으로 편해지니까 서로에

지어 암스테르담에서는 자전거가 오히려 자동차나

게도 여유가 생기면서 화기애애한 관계가 절로 형

보행자를 무시하고 난폭운전을 하는 경우도 보았

성되는 느낌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타워팰리스에

다. 도저히 자전거를 타고서는 여유롭게 이동하기

사는 아이들이 학교에서도 선생님과 친구들한테

가 힘들 것 같아서 시내에서 걸어 다니는데 인도

인정을 받고 결국 사회적으로도 성공하게 되는 ‘악

로 안 걷고 인도 바로 옆에 붙어있는 자전거도로

순환이 ’ 만들어지는 건가 싶었다. 고생을 하면서

로 걷는다고 경찰이나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혼을

자신의 밑천을 다 내보이고(나만 그런 건가..?음)

나기도 했다. 말 그대로 문화충격이었다. 한편, 파

서로에게 실망도 하지만 이게 극복이 되는 순간

리와 같은 대도시를 제외하면 우리가 가본 거의

한 차원 더 업그레이드된 신뢰감이 모락모락 생겨

모든 마을에는 'centre/zentrum'이라고 불리는 곳에

나는 느낌, 그리고 그 신뢰감과 마음 가득한 충만

성당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앞에는 넓은 광장이 있

함으로 여행이 끝나고도 의욕적으로 다시 기존의

어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거닐 수 있었는데 이 역

일상을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신뢰감과 자

시 서울시청 앞 광장의 모습과 대비되면서 인상적

신감, 내가 이번 여행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인 것

으로 보였다. 어디든 노른자 땅이다 싶은 곳에는

같다.

초고층 건물이 있는 곳에 살면서 막혀있던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화려한 네온사인도 없고 예전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3 호

17


오래된 여행, 내가 배운 것들 아침(평화인권연대 활동가, achimgirin@gmail.com)

하도 오래 전일은 분명 아닌데, 마치 몇 년 전의 일인 것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그새 적응을 잘 한

전쟁 수혜자들(War Profiteers)이란 주제의 소그룹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적응할 일들에 빠져 잊고

에 매일 참여를 했었다. 막연히 전쟁에서 이익을

사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누군가 만나면

내고 있는 존재들에 대해서 알아두는 것이 좋겠다

여행 안부를 물어보는 것으로 보아 내가 여행을

고만 생각했었는데 예상보다 많은 고민들을 가지

다녀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가보다. 그래 나는 생

게 되었다. 단순히 무기를 만들어서 팔기 위해서

전 처음으로 한 달이 넘는 여행을, 아주 멀리 떠났

전쟁을 바라는 존재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었드랬다.

만들어내기 위해서 사람의 생명 같은 건 안중에도 없이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온갖 짓을 해내는 존

작년에 한국에서 WRI(전쟁저항자 인터내셔날) 회

재들이었다. 그들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분

의에 참가한 후 헤어지면서 내년에 보자는 말을

쟁에 어떻게 개입하고 있는지, 어떤 이익을 내고

했었다. 과연 그 먼 곳까지 돈과 시간을 들여갈 수

있는지를 들으면서 그 숫자들이 너무나 거대해서

있을까하는 것은 나중에 고민하기로 하고 갈 수

한동안 멍했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밝혀내기 위해,

있다고 믿기로 했다. 과연 나의 믿음은 모 재단의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활동들을 펼치는 사람들의

활동가 지원프로그램으로 점점 현실화되어갔다. 그

경험담을 들으면서 필요성을 절감하기 시작했다.

러나 5월의 부상 이후 7월에 한다는 대추리, 도두

벨기에에서는 무기를 만들어내는 회사들에 투자하

리에 대한 공가철거를 앞두고 멀리 떠날 수 있을

는 은행들을 조사해서 그 은행의 예금유치자들에

지 걱정이 되었었다. 뿐만 아니라 부상으로 다니지

게 알려주는 캠페인을 진행했다고 한다. 예전에 미

못하고 미루어둔 교육일정들을 소화하느라 짐을

국에서는 하니웰이라는 보일러제조와 무기를 만드

싸지도, 심지어 여권 재발급도 늦어져서 정말이지

는 회사를 상대로 비폭력주의와 여성주의적인 방

혼자서 끙끙 거렸었다. 과연 떠날 수 있을까?를 하

식으로 캠페인을 진행했다고 한다. 아주 긴 시간

루에도 수백 번 되뇌이기도 했었다.

동안 연구하고 서로 훈련을 하고 민주적인 의견 수렴을 거쳐서 비폭력 직접행동들을 진행해왔고

낯선 기후와 언어와 음식들과

결국 하니웰은 무기 만드는 부분을 포기하기에 이 르렀다고 한다.

전쟁의 수혜자들, 각오해라. 여행의 목적 중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던 회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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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를 하게 된다. 그리고 불평할 겨를 없이 다른 한국 사회에서 운동의 대상은 피해자들과 그 피해

대안을 찾아가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헤쳐 나갈 수

를 조장하는 정부가 되는 경우가 많고 정책을 수

많은 방법들이 있음을 드디어 믿을 수 있게 되었

정할 것을 요구하는 방식이 된다. 하지만 그 속에

다.

서 정부가 왜 그런 정책을 내놓는지, 어떤 존재들 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해서 고민이 부족한

“고마워!” 놀이

현실이다. 새만금 개발이나 평택으로 미군기지를 이전하려는 계획 역시 단순히 정책이 잘못된 것임

저녁 장을 보면서 와인이나 맥주 등을 조금씩 샀

을 밝혀내는 것을 넘어서 그에 영향을 미치는 존

었다. 가격이 싸도 무게가 있으니 목을 축일 정도

재들에 대해서 밝혀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나

씩만 사게 되었다. 한잔씩 하면서 고마워 놀이를

아가 절박한 생명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시작했다. 그날 있었던 일 중에서 고마웠던 일을

침묵들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일상에

알려주고 어떻게 도움이 되어 고마웠다는 말을 하

서 저항을 만들어내는 다양한 방식들이 생겨날 것

는 것. 사실 일일이 기억해서 뭐가 고마웠는지 찾

이라는 기대를 하게 되었다. 평택으로 들어왔던 용

아서 말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호응을

역들 일부와 포크레인 기사 등이 돈이 문제가 아

해주는 덕에 쭉 이어갈 수 있었다. 혼자가 아닌 한

니라 인간이 할 짓이 아니라며 돌아갔던 사례를

갈등을 피하기는 어렵지 않다. 게다가 몸이 고된

보아 분명 이러한 접근들이 좀 더 야만적인 파괴

여행이다 보니 아주 사소한 것에 민감해지고 서운

에 맞서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다.

해지기가 쉽다. 물론 그들의 어떤 말이나 행동을 보고 힘들고 짜증나고 화가 났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상하기

그건 충족되지 못한 나의 필요를 돌보는데 도움을 주었다.

회의장을 떠나면서 내리기 시작한 비는 어느 곳을

예를 들면 자전거타고 달리기 시작한 첫날, 라인강

가도 따라왔다. 비가 오자 밤에 많이 추웠다. 돌돌

따라서 달리다가 아이들이 앞질러가고 나는 30분

돌 껴입고 침낭 안에서 추위와 싸우면서 얼어죽는

동안 혼자 뒤쳐져 왔었다. 그때는 숙소가 정해져있

상상을 많이 했었다. 파리에 도착한 날 캠핑장을

었고, 길이 엇갈릴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지만, 그

찾아 도심을 가로지르다가 지하차도로 뒷깜박이도

렇지 못한 들판에서 아이들은 안보이고 나의 나침

없이 지날 때는 몇 번이나 차에 치여 죽는 상상을

반은 아이들이 갔을 것 같은 곳과 반대편을 가르

했었다. 죽는 상상, 다치는 상상, 모든 걸 잊어버리

킬 때도 있었다. 파리에서 첫날 기나긴 지하도를

는 상상, 아이들과 흩어져서 고생하는 상상 등을

지나면서 여러 번 내 뒤에 따라와 줄 것을 말해도

많이 했었다. 내가 평생에 겪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듣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베르샤

못하거나 피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졌던 상황에

유에 가기로 했을 때는 지하철에서 잠시 눈을 감

대한 상상을 하면서 두려움을 조금씩 이겨낼 수

았다가 뜨니 아이들이 사라지고 안보이던 적도 있

있었다. 까짓 거 죽기 밖에 더하나, 높은데서 떨어

었다. 뭐 지나고 나서야 재미나게 이야기하지만 사

지면 죽거나 다치기밖에 더하겠나 싶었다. 민망하

라들이 왜 혼자서 여행하는 것을 추천하는지 깊이

게 죽거나 다치지만 않으면 그나마 잘 살아왔으니

이해하게 되었었다.

후회는 없을 듯했다. 실제로 어려움과 공포를 마주 치고 나서야 감당 못할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에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3 호

19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단순히 여행의 기회라고 하 그럴 때 일수록 서로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시간이

기에는 부족한 여행이 있기까지의 과정들, 함께하

적어도 나에게는 필요했다. 그러고 보니 고마웠던

는 친구들과의 관계와 변화들에 대해 감사를 느끼

때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아름답게 빵구 떼우는 경

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에 이르른 가람 덕에 다들 조급해하지 않으면서

그 여정들을 통해서 내가 무엇을 배우고 느꼈는지

안심하면서 빵구를 떼울 수 있었다. 초조해질 무렵

가 더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게 나에게 얼마나

시작되는 나동의 개그 덕에 힘들어도 웃을 수 있

소중한 것이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는 여유가 생겼다. 아침잠이 적고, 여행의 풍부한

후에 우리에겐 더 큰 시련들이 닥쳐왔었지만 나는

경험을 가진 오리 덕에 이러저러하게 배울 수 있

더 포용력과 수용할 수 있는 넉넉한 사람이 되어

었다. 공감해주는 날맹 덕에 안심이 많이 되었었다.

있었고 무사히 받아들이고 헤쳐 나갈 수 있는 용

어른같은 소리를 던지던 영은 덕에 침착하게 힘든

기 있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것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대부분의 힘들었던 시 간들에서도 이 아이들과 함께해서 참으로 다행이 라는 생각을 계속 하게 되었었다. 그러고 보니 나 는 정말 운이 좋다.

-그래도 나는 도착합니다.

당신이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은 기적입니다. 자! 말

웃고 울기 위하여, 두려워하고 희망을 갖기 위하여,

을 해보세요.

나의 심장 고동소리는 살아있는 모든 것의 삶이며

여행 중의 사건 사고들은 일상이 되었었다. 자전거

죽음입니다.

바퀴는 매일 같이 바람이 새거나 터지거나 하였고 익숙해져버려서 처음엔 울먹이며 낑낑거리다가 나 중에는 한 손으로도 자전거 뒷바퀴를 프레임에서 뽑았다가 다시 끼우는 것도 척척 해버렸다. 비는 아침에 해가 뜨듯이 매일 같이 찾아왔다. 덕분에 평택에서 찢어진 코는 고생을 했었다. 비를 맞으며 달리는 것도, 비에 젖은 텐트를 다시 싸는 것도 빗 속에 음식을 해먹는 것도 익숙해지면서도 지겨울 때로 지겨웠다. 겐트에서 머물던 날 혼자서 반나절 정도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일기를 쓰고, 엽서 를 쓰고 오카리나를 불어도 친구들은 도착하지 않 고 비가 많이 와서 찾아보러 나갈 엄두도 나지 않 았었다. 읽으려고 들고 간 책을 꺼내 들었다. 옳은 말들 속에서 문득 내가 여행을 하고 있는 기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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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틱낫한 스님의 시 중에서


나의 여행기록 가람 | 전쟁없는세상 책임활동가 + kazkada0305@gmail.com

그 무아지경을 잊을 수 없습니다. 아마 내가 존 재하는 한 나와 계속 함께 할 그런 기억이 되겠 지요. 자전거 페달을 밟고..밟고... 밟고... 머리 위에서 작열하는 태양과 함께,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와 함께, 시원하게 얼굴을 두드리는 바람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해 먹습니다. 메뉴는 주로

과 함께 그저 페달을 밟던 기억.

밥과 국물, 라면, 혹은 우유와 시리얼, 아님 요거 트와 시리얼, 과일 정도입니다. 부지런히 먹고

독일에서 WRI 국제회의를 하고, 네덜란드와 벨

텐트를 탈탈 털어 걷고, 혹 볕이 좋은 날이면 그

기에를 거쳐 프랑스에 머물다가 귀국길에 베트남

사이에 침낭과 매트 등 텐트 안의 짐들을 몽땅

에 들러 1주일을 더 놀고 왔다는 여행 일정 얘

꺼내어 살균시킵니다. 그런 날은 밤 새 널어놓은

기나- WRI 회의에서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사

빨래도 빠닥빠닥 잘 말라서 기분이 참 좋습니다.

람들이 한 자리에 모였고 그 사이에 평화로운 바

그렇게 텐트를 다 걷고 나면 짐을 싸서 자전거에

람이 얼마나 넘실댔는가에 관한 감탄이나- 독일

싣고 다 같이 모여 커다란 지도를 펼칩니다. 그

에서 재워준 게르노트씨, 독일에서 많은 도움을

날의 목적지를 정하고, 목적지에서 제일 가까운

준 티나씨, 벨기에에서 잠잘 곳 없는 우리에게

캠핑장을 확인한 후 이동하며 지나칠 거점 도시

기꺼이 앞마당을 내어준 부부, 프랑스에서 더 이

들을 선정해서 드디어 출발합니다.

상 완벽한 가이드일 수 없었던 르네와 실비 그리

한참을 달리다 보면 배가 고프지요. 그러면 대형

고 그렉, 그 외에 여행이 고비를 맞을 때 마다

슈퍼마켓을 찾아 근처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을

마치 천사처럼 나타나서 우리를 인도해주었던 사

눈에 불을 켜고 찾아 헤맵니다. 다들 배가 많이

람들 등 얼마나 많은 따뜻한 사람들이 우리의 여

고프거든요. 마침내 슈퍼가 나타나면 당장 먹을

행을 한껏 채워 주었는지에 대한 감사의 인사는

점심, 캠핑장에 도착해서 해 먹을 저녁, 다음날

- 생략하렵니다. 6명이나 같은 여행을 놓고 동

일어나서 먹을 아침거리까지 꼭 세끼 분 음식을

시에 후기를 쓰는데, 너무 많이 겹치면 재미없잖

삽니다. 6명이 3끼 먹을 분량이니 총 18끼, 꽤나

아요. :)

많은 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3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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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보통 장을 보는 시간이 다들 배가 잔뜩 고

미리 정한 메뉴에 따라 매달고 달려온 재료들을

플 대로 고파있는 시점이라 아무리 자제를 하려고

꺼내서 저녁을 만듭니다. 저녁은 주로 푸짐하게,

해도 사고 보면 가히 놀랄만한 양이 됩니다. 하지

냉동피자, 또띠야, 퓨전 파스타, 밥, 라면 등입니다.

만, 다 먹는다는 거-. 그나마 다행인건 인건비가

너무 배가 불러서 숨 쉬기 힘들고 잠들기 힘들만

적게 드는 공산품, 즉 소위 장바구니 물가는 전반

큼 먹습니다. 그리고 깨끗이 씻고, 각자의 텐트 안

적으로 한국에 비해 싸다는 겁니다. 안 그랬음 큰

에 폭신하게 엎드려 일기를 쓰거나, 그리운 이들에

일 날 뻔 했습니다. 슈퍼에서 나와서 근처 나무 그

게 엽서를 쓰거나, 그러다 잠들거나 합니다.

늘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점심 식사를 합니다. 메뉴 는 주로 빵과 샐러드 스프레드, 잼, 초코스프레드,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해 먹습니다. 밥을

샐러드, 탄산음료, 주스, 아이스크림 등입니다. 다

먹고 나면 점심을 먹기 위해 달리고, 점심을 먹고

먹고 나면 한 끼 어치가 줄어든 12끼 어치 음식들

나면 잠잘 곳을 찾아 달립니다. 정말 지극히도, 기

을 마치 없을 것 빼고 다 있는 아라비아 상인들처

본적인 욕구에 충실한 나날들입니다. 여행 초기에

럼 자전거 짐 위 끈에 여기 저기 끼워 넣고 주렁

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 돈벌이에 대한 고민, 학업

주렁 매달고 다시 달리기 시작합니다. 잘 달지 않

에 대한 고민, 미래에 대한 고민, 관계에 대한 고

으면 가끔 과일이나 음료수 등이 떨어져 터져서

민- 온갖 종류의 고민이라는 고민은 다 끌어안고

버려야 하는 가슴 아픈 상황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있었다지요. 자전거를 타면서도 이 생각, 저 생각,

이 때 배가 불러서 바로 자전거타기가 조금 힘이

잡생각, 잡생각. 나름대로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

들지만, 조금만 달리노라면 금방 괜찮아집니다.

는 유용한 시간이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내가 언 제는 그렇게 효율적인 사람이었다고, 거기까지 가

이제 배가 불러졌으니 그 날 몸을 뉘일 곳을 찾아

서도 시간의 효율성을 따졌나 봅니다. 그런데 그렇

달려야지요. 힘껏 달립니다. 어느 날은 라인 강의

게 시간이 흐를수록, 유럽이 나름대로 익숙해질수

청초함에 취해서, 어느 날은 이름 모를 시골 들녘

록, 몸이 고되어질수록, 머리와 가슴 속은 거짓말

황금빛 물결의 풍요로움에 취해서. 어느 날인가는

처럼 깨끗해지는 거예요. 아, 이래서 여행을 오는

우유 곽에서 막 튀어 나온 듯 한 초원 위 젖소들

구나. 했습니다. 맞다, 이래서 내가 여행을 좋아했

의 여유로움에 취해서, 또 어느 날은 케이블 TV

었지. 물론 그런 고민들이 모두 정말로 해결되어

여행전문 채널에서 언젠가 보며 감탄했던 오밀조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라도 잠시나마 숨통

밀 아름다운 꽃이 가득 한 동화 속 집들에 매혹되

을 트일 수 있는 아름다운 기회가 또 어디 있겠어

어서. 또 다른 날은 빠리 센 강과 퐁네프의 로맨틱

요. 나에게 주어진 그 무용한 시간의 선물이 어찌

한 분위기에 흠뻑 젖어 말랑말랑해져서, 그리고 언

나 행복하고 감사하던 지요. 흔히 말하지요, 일상

제나 함께여서 즐겁고 힘들 땐 진정으로 서로에게

으로부터의 탈출. 그건 정말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힘이 되어주었던 친구들에 대한 고마움에 중독되

이었어요. 나를 얽매고 있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어서- 달립니다. 그렇게 달리고, 달리고, 중간에

모든 고리들이 풀리고, 모든 얽힌 매듭들이 잘라지

가다가 잠시 숨을 돌리며 6명이 모두 있는지를 확

는 기이한 경험. 그 순간만큼은 세상 최고의 경험.

인하고 또 달리고, 그렇게 달리다 보면 뉘엿뉘엿

그저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잘 곳을 찾아 달리는

해가 질 무렵 캠핑장에 도착합니다. 서둘러 텐트를

가장 단순한 여행. 매 순간 그저 나 자신일 수 있

치고, 자- 또 밥을 먹어야지요. 배, 고프거든요.

는 짜릿하고 매혹적인 그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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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잊겠어요. 이제 현실로 돌아와 다시 마주하고 앉았어요. 정 체성, 돈벌이, 학업, 미래, 관계, etc- 하지만 이 제 다시 그런 고민들을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마음에 빈자리를 만들어두고 왔다는 거. 그거 하 나로도 내 인생은 너무 멋져요. 언젠가, 이 현실 이 또 내 마음을 미어터지도록 몰아붙일 때, 훌쩍. 떠날 거예요. 미치도록 단순한 여행을. 내 마음에 햇살과 구름과 바람과 풀내음이 마음껏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커다란 창을 만들러 말이지요. 물론 누구나 쉽게 여행을 결정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조건은 아니겠지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잖아요. 그래도 참다 참다 막 울고 싶을 때. 너무 힘이 들 때, 더 이상은 내가 못 버틸 것만 같은 바로 그 순간에. 이것저것 재지 말고, 내가 이렇게 충동적일 수 있 는 사람이었나 스스로도 놀랄 만큼. 그렇게 또 훌쩍, 여행을 떠나 보려구요. 꼭 멀 필 요도 없고, 꼭 거창할 필요도 없어요.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순간, 이미 반쯤은 자 유롭게 저 하늘 어딘가를 날고 있는 나를 발견할 테니까요. Great thankless to my dearest friends-☮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3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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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배웠냐고 물으신다면 오리 (평화인권연대, duck52@jinbo.net) 왜 여행을 떠나는가? 모르겠다. 왜인지. 벌여놓은 일 때문에 몸도 무겁고 돈도 없고 여행을 다녀와

항자인터내셔널(War Resisters' International)의

서는 다시 일상모드로 돌아오는 데 고달프기도 하

국제회의가 독일에서 있을 예정이어서 이보다 더

지만 늘 여행은 내게 백 권의 책보다 더 큰 깨달

근사한 계획이 있을 수 없겠다 싶었다.

음을 주는 시간인 것 같다. 뭐랄까 일상에서 금 거 놓은(사회적으로 그어놓은 것일 수도 있고 또 간

티켓은 거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가장 싸면서도

혹 내 스스로가 그어 놓은 것일 수도 있는) 선을

대한항공과 마일리지 교환을 하고 있는 베트남 항

눈 딱 감고 넘어가는 기분이랄까. 30살로 접어들

공을 택했다. 게다가 한 번 베트남에서 스탑오버까

무렵 매년 여행(일주일 이상의 긴 여행)을 다녀야

지 허용하기 때문에 정말 가격대비 최강이라 할

지 결심했고 올해로 6번째 그 계획을 실천에 옮겼

수 있겠다. 하지만 베트남항공이 유럽에 취항한 지

다. 매번 여행에는 늘 가족이나 친구가 함께 했었

얼마 되지 않아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와 프랑스 파

는데 이번 여행에서도 평생 오랜 친구로 남을 동

리 편밖에 없었기 때문에 우리의 여행 루트는 티

지들 5명이 내 여행의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켓을 구입한 순간 이미 정해져 있었다 해도 과언 이 아니다. 또 이번 여행에는 자전거 초보들도 함

이번 여행은 내 6년 여행의 역사(?)에서 비용 면

께여서 가능하면 오르막이 적은 서유럽 쪽으로 돌

이나 준비 면에서 굉장히 큰 프로젝트였다. 유럽

자고 했었기 때문에 독일 라인 강변을 따라 국제

여행은 내 오랜 꿈 중의 하나이다. 물론 처음부터

회의 장소인 게세케(Geseke)까지 갔다가 네덜란드

자전거로 다녀봐야지 했던 건 아니었고 3년 전 자

로 넘어와서 암스테르담, 헤이그, 로테르담을 쭉

전거를 타기 시작하면서 꿈이 본격화되었던 것이

돌고 벨기에 안트베르펜 브뤼셀, 브뤼헤를 거쳐 파

다. 그렇지만 언제쯤 그 꿈이 현실화될 수 있을지

리에서 아웃하는 일정이 세워졌다. 극기 훈련을 가

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입버릇처럼 얘기했던 ‘조금

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루에 너무 많은 거리를

만 더 시기를 넘기면 기력이 떨어져서 자전거를

달리지 않는다, 박물관이나 미술관 등 평상시 관심

타고 여행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라 ’ 는 조바심이

있었던 장소는 적극적으로 가본다 가능하면 잠은

내 꿈을 어거지로 현실화시킨 셈이다. 또 마침 병

텐트에서 이동은 자전거로 밥은 해 먹는다 정도의

역거부 운동으로 2001년부터 꾸준히 연대를 해온

원칙만 가지고 무작정 비행기에 올랐다.

전쟁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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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자전거 도로는 정말 신기했다. 특히 네덜

유럽의 캠핑장은 이전에도 경험해본 적이 있었지

란드는 고속도로 옆에다가도 따로 자전거 전용도

만 새삼 좋다는 것을 느꼈다. 특히 암스테르담이

로를 만들어 놓아서 정말 기운만 받쳐준다면 자

나 파리의 캠핑장처럼 대형화되어 있고 복잡한

전거를 타고 네덜란드 전역을 여행하는 것이 자

곳보다는 라인 강변에 조그맣게 자리한 캠핑장이

동차를 끌고 여행하는 것만큼 편할 것 같았다.

나 안트베르펜의 저렴하고 소박한 캠핑장들이 훨

또 자전거 도로용 표지판도 굉장히 잘 되어 있어

씬 좋았던 것 같다. 텐트를 치게 되면 시멘트나

여행하는 내내 아주 감탄을 연발했다. 한국처럼

벽돌로 만든 집보다 훨씬 자연과 가까이 만날 수

생색낸답시고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자전거

있다. 가까운 수퍼에 가서 비싸지 않은 먹거리들

도로가 중간 중간 끊긴다든가 턱이 있어서 중간

을 사다가 식사를 해결하면 적은 돈으로도 푸짐

에 내려 자전거를 들어야 하는 열 받는 시츄에이

하게 배를 채울 수 있어서 좋다. 또 가끔씩 만들

션이 없어 토탈 점수를 매긴다면 98점쯤? 하지

줄도 모르는 서양식 음식도 만들어 먹었는데 나

만 아무리 이런 유럽이라 할지라도 암스테르담이

름대로 재미도 있고 맛도 있었다. 같이 여행했던

나 파리 같은 곳에서 자전거를 타는 것은 서울에

친구들이 대부분 채식가들이라 그것도 함께 여행

서 자전거를 타는 것만큼 힘들었다. 차가 너무나

하는 데 스트레스를 덜 하게 했다. 유럽의 새벽

도 많고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여

은 무척 춥다. 그리고 서유럽 쪽 여름은 비가 계

유도 없어보였다. 서울만큼 빨리빨리 걷는 사람

속 오락가락하기 때문에 잘 때를 대비해서 두꺼

들 속에서 특히 여행자로서 느긋하고 천천히 자

운 옷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내가 가 본 캠핑장

전거를 즐기며 돌아다닌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은 전부 뜨거운 물 샤워를 제공하고 있었고 브뤼

일이었다. 암스테르담에서는 하도 욕을 먹다 못

헤의 캠핑장을 제외하곤(이 곳 캠핑장은 만원이

해 자전거를 두고 걸어 다니니 이제야 편하다는

어서 결국 그 동네 천사아주머니의 정원에서 텐

얘기를 서로 나눌 정도였다. 개인적으로 추천하

트를 쳤다. 친절하게도 잘 곳이 없어 헤매고 있

고픈 코스는 강이나 운하를 따라 가는 코스다.

는 불쌍한 우리를 위해 정원도 제공해주시고 와

우리가 가 본 코스는 독일의 라인강 코스와 벨기

인도 한 병 주시고 아침엔 따끈한 커피까지 끓여

에의 브뤼헤에서 겐트 사이의 운하를 따라가는

주셨다) 특별히 예약하지 않아도 작은 텐트 3개

코스였는데 일단은 경치가 아주 끝내주고(라인강

쯤은 칠 수 있는 공간이 언제든지 있었다(유럽의

코스에는 강변 양 옆으로 야트막한 언덕이 보이

캠핑장은 대부분 캠핑카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

고 언덕 위에 고성이 아주 멋지게 자리 잡고 있

다. 어떤 캠핑장은 아예 텐트를 허락하지 않는

다. 브뤼헤 겐트 운하코스는 아주 한적하고 고즈

곳도 있다). 세탁과 건조를 할 수 있는 세탁실,

넉했다) 강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까 길을 잃을

갓 구운 빵과 음료, 맥주, 와인 등을 파는 가게

걱정하지 않아서 좋다.

등이 대부분의 캠핑장에 갖춰져 있고 수영장이나 테니스장 등의 시설이 갖춰진 캠핑장들도 있다.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3 호

25


여행 기간 중 참석했던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국

몽마르뜨 언덕에서 가방을 도난당했다. 그 가방에

제회의는 내가 몰랐던 세상을 내게 보여주었다.

들어있던 현금이나 Mp3-Player와 같은 기계들은

이번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고사하고 50일 여행 내내 거의 매일 써놓았던 일

평화주의, 반군사주의자들은 모두 저마다 활동공

기와 사진들이 그 가방과 함께 홀랑 사라졌다. 아

간에서의 고민들을 가지고 와 국제적 시각에서 분

직도 유럽에서 친 사고를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지

석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려 하였다. 물론 영어를

만 그래도 여행 중 일기에 고백했던 내 헛된 욕심

더 잘 했다면 더 많은 정보와 논점들을 챙겨들을

과 욕망, 못된 성질 모두를 유럽에 두고 왔다(?)

수 있었겠지만 앞으로 차차 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잊으려 한다. 일종의 살풀이인 셈이다.

위안해본다. 이 회의에서 제기됐던 논점과 토론에 대해서는 평화인권연대에서 발행하는 소식지 「평

아무래도 총명탕을 지어먹어야겠다. 이제 보니 나

화연대」를 참고해 주시라. 우리는 밤마다 열렸던

이 먹으면서 내가 극복해야 할 것은 떨어져가는

바에서 술도 마시고 춤도 추면서 많은 친구들을

체력이나 고집불통의 성격이나 남의 시선을 의식

사귀었다. 이전에 만났던 반가운 얼굴도 있고 처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아니라 아차 하는 건망증

음 보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이들이 앞으로 내 활

이랑 맨날 뭔가를 흘리고 다니는 칠칠맞음이었던

동에서 든든한 동지이자 동반자가 될 것 같은 예

것이었다. 사고의 여파가 워낙 커서 이번 여행 베

감이 들었다. 특히 작년 한국에서 있었던 회의에

스트를 정리하긴 쉽지 않지만 좋은 친구들과 더욱

도 참가해서 이미 낯이 익은 르네 아저씨는 우리

가까워진 것을 꼽고 싶다. 여행 중엔 서운하고 섭

가 파리에 머무는 일주일 동안 갖은 수고로움을

섭하고 징글징글 하다는 생각이 없진 않았으나 내

아끼지 않고 우리 여행의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맘을 더 활짝 열어놓고 만날 수 있는 친구들이 생 긴 것 같아 기쁘다. 다음 여행은 또 어떤 모험이,

아마 이번 여행은 나에게 가장 사건, 사고가 많았

어떤 깨달음이 기다리고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던 여행으로 기록될 것 같다. 모르겠다. 앞으로

된다. 내 안에 쳐진 금중의 하나인 혼자 여행하는

어떤 여행에서 더 큰 사고를 칠지. 독일 뮌스터

프로젝트도 조만간 호흡을 깊이 들여 마시고 실천

캠핑장에서는 멀쩡히 서 있는 캠핑카를 들이받아

해볼 생각이다.

서 2,500유로를 물어줬고(물론 여행자 보험으로 해결. 장거리 여행이나 자전거 여행 등 사건사고 가 예견되는 여행, 아니면 개인적으로 뭘 잘 잃어 버리거나 잘 부딪힌다 싶은 분들은 꼭 여행자보험 을 들고 여행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너무 싼 보험만 찾지 말고 나에게는 어떤 보장이 필요한 지, 선택한 보험이 그 보장을 해주고 있는지를 반 드시 확인할 것) 유럽을 떠나기 이틀 전에는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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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오마이뉴스

그 날 그곳엔 어떤 경찰도 잘못한 것이 없었다 -국민을 적으로 몰아가는 야만적인 경찰폭력에 대한 이야기 날맹 | 전쟁없는세상 책임활동가 + nalm109 @hanmail.net

국가권력에 의한 잔인한 폭력이 다시금 사람들

가. 촛불집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학생들과 주민들

을 경악시키고 있다. 그 무자비함과 비인간성앞에

을 마을 입구에서 붙잡아 새우고 아무런 이유 없

이제는 분노와 공포를 넘어서 허무함만이 몰려온

이 밤새도록 기다리도록 하는 국가. 최소한의 표

다. 평택미군기지확장반대와 한미FTA저지의 구호

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를 야만적인 폭력으로 짓

를 걸고 서울 청와대에서 평택 대추리까지 285리

밟아버리는 경찰과 군인. 이런 상황에서 과연 누

평화행진에 참가한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연행한

가 범법자이며, 무엇이 폭력이며, 진정한 평화는

경찰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도록 하는 국가권력

무엇인가 다시금 묻게 된다. 최소한의 이성조차

에 대한 분노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시위대들

사라진 상황, 일말의 인간적인 양심조차 보이지

의 폭력에 강경하게 대응하겠다고 하는 위정자와

않는 상황. 국가라는 괴물 앞에 초라해져버린 개

그리고 그 역할을 아주 충실히 수행하는 경찰들은

인의 모습에 애처로움마저 든다.

도대체 왜, 술에 취해 행진단에게 폭력을 행사하 는 상인회 사람들은 현행범으로 체포하지 않았는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3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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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 속에서 군인들은 단지 명령에만 충실하면 되는 인간성에 대한 호소의 공허함

것이다. 추상적인 국가권력과 위계질서는 보편성을 획득하면서 절대 타당하고 공평무사한 것으로 만

철저하게 자신의 생각이나 양심을 저버리도록

들어지는 순간이다.

만드는 것이 군대 내의 위계서열이다. 단지 상관의 명령에 따라 부과된 역할만을 수행하면 될 뿐, 괜

그러나 군대라는 공간이, 국가 시스템이라는 것

히 튀는 행동을 한다거나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을

이 정말로 공적이고 근대의 합리적인 구조로 이루

표출해서는 안 된다. 인간을 등급화 하고 그에 따

어진 공간인가 하는 질문에는 의문의 여지가 남는

라 서열을 매기는 폭력적인 구조 속에서 하급자일

다. 수많은 사람들을 살상하도록 지휘한 전두환 전

때 받은 억울함과 피해의식은 자신이 다시 상급자

대통령에 대해서 사형이라는 무시무시한 구형이

가 되어서 보상을 받으면 된다. 그런 구조 속에서

내려져서 사람을 놀래 키더니 구속을 한지 채 얼

개인의 양심은 괜히 긁어 부스럼이나 만드는 쓸데

마가 안 되어 건강상의 이유라는 명분으로 보석을

없는 것이 되고 많다. 기존의 체제에 대한 어떠한

허락해줘서 또 한 번 사람들을 놀래 키는 것이 한

합리적인 비판과 토론도 허용되지 않는 구조 속에

국 사회이다. 제 발로 경찰서에 조사를 받으러 가

서는 모두가 폭력의 공범자희 / 생자가 되고 만다.

고 구속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병역거부자들에 대

결국 모두가 유죄인 곳에서는 아무도 폭력에 대한

해서는 한없이 엄격한 법집행을 하는 그 현명하고

죄의식을 갖지 않게 되는 것이다.

명쾌한 판사가 동시에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는 갖 가지 이유를 대며 사면을 해주고 복권을 시켜주기

이미 감히 넘볼 수 없는, 틈새를 찾기 힘들 정도

도 한다. 더 희극적인 것은 이런 비논리적 상황들

로 탄탄해 보이는 국가권력 앞에서 ‘저항을 ’ 하는

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내 곧 자연스러운 것

것은 어쩌면 큰 용기를 지녀야만 할 수 있는 일일

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다.

수도 있다. 가능한 모든 사적 관계를 합리성이라는 미명하에 계산가능한 공적 관계로 만드는 것이 근

자신은 단지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라는 이유로

대 국가의 본질적 속성이다. 따라서 무자비한 폭력

경찰에 의한 폭력이 정당화되는 순간 전경 개개인

을 행사하고도 문제가 생기면 명령(공적 질서)에

의 양심은 사라지고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하게

따랐을 뿐이라고 책임을 회피하는 군인, 경찰 개개

된다. 진압 명령이 내려졌을 땐 자신의 감정을 실

인들을 비난하는 것은 맥 빠지는 일이 되기 쉽다.

어서 오버하면서 시위대를 진압하는 그들이 정작

20여년간 공교육으로부터 배운 것은 국가를 위해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인들의 일방적

희생하는 정신의 숭고함이다. 부당한 구조에 대해

인 폭력에 대해서는 단지 명령이 내려지지 않았다

문제제기 하고 합리적으로 토론할 수 있는 능력은

는 이유만으로 가만히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철저히 위계화된 조직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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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쉽게 납득할 수 있겠

국가인권위, 군의 현대화 이런 수식어들이 국가에

는가. 누가 봐도 명백한 일방적인 폭력 행위를 왜

의한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들에 대한 감수성을

민중의 지팡이라고 자임하는 경찰은 가만히 보고

마비시켜 나간다.

만 있었는가. 국민을 지키러 자랑스럽게 입대를 한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 현장에는 다 사라지고

더 큰 문제는, 지난 5월 4일 평택에서 국가에

없었던 걸까. 폭력행위를 막고 피해자를 보호하라

의해 자행된 야만적인 공권력에 대해서도 그것을

는 상급자의 명령이 없어서, 명령에만 충실할 것

옹호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다. 이젠 80년 5

을 너무나 잘 교육받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 현

월의 광주도 국가에 의해서 민주화 운동의 역사로

장에 있던 전경들 모두가 인간이기를 포기한, 한

인정이 되었고, 국정교과서에도 그 내용이 버젓이

줌의 감수성조차 메말라 버린 인간 이하의 족속들

실리는 마당에 광주에서 벌어진 국가폭력과 다를

이었단 말인가.

바 없는 평택에서의 국가폭력에 대해서 다수의 대 중은 어떠한 문제제기도 하지 않는다. 전쟁은 나

명백한 가해자가 아무런 죄의식 없이 살아갈

쁘다는 초등학교 수준의 명제가 부시의 전쟁에 대

수 있는 곳. 국민을 지켜준다는 군인들이 한낱 관

한 비판으로 이어지지 않듯이, 폭력에 대한 거부

객으로 전락한 가운데 부당한 폭력을 당해야 했던

감이 시위대의 폭력에 대한 반발로 이어질지언정

시위대들이 오히려 다수에 의해 매도되는 곳. 인

결코 국가폭력에 대한 비판으로는 이어지지 않았

간성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를 저버리지 않으면서

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살아가기가 너무나 힘이 든다.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바라보면서 자신도 잠재적 가해

그 해답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 같다. 온 국

자가 됨을 경험하고 이로 인해 상처 받았을 군인

민이 월드컵에 열광해야만 하고, 월드컵을 안 좋

들이 한 명이라도 존재했기를 바란다.

아하는 사람은 애국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여겨지 는 분위기. 학교에서부터 시작하여 군대, 직장생

파시즘과 국가주의

활을 통해 공고히 다져지는 위계서열에 대한 철저 한 복종심. 언제 어디서건, “괴로우나 즐거우나 무

일제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대한민국이라는 정

조건 사랑해야하는 자랑스러운 우리의 조국.” 인

부가 들어섰지만 단지 누가 지배하느냐만 바뀌었

간들은 모두 이기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사

을 뿐 한없이 정당화되는 국가폭력과 그에 따른

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국가가 필요하다는 이데

사회의 군사화, 일상화된 폭력의 존재라는 점에서

올로기.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만 안심을 하게 되

는 예전과 별 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은 참으로 서

는, 일말의 어떠한 차이들도 철저히 배제시켜버리

글픈 현실이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라

는 집단주의. 경제적군 / 사적으로 부강한 국가에

는 역사적 인물들이 극단적 폭력 정권의 상징으로

대한 환상. 국가는 이렇게 절대 정의의 자리를 차 지하고 있다.

타자화 되는 순간 참여정부 노무현 정권은 권 력의 정통성과 순수성을 인정받게 된다. 인권경찰,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3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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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와 경찰이라는 국가권력이 국민들을 지켜

호국영령의 혼을 기리자는 언사를 내뱉고, 국가유

주기는커녕 두드려 패고 토끼 몰아가듯 연행해 가

공자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대우를 해주지만, 자신

는데,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모습들이 너무나 자연

이 행한 폭력으로 인해 개인이 경험하는 심리적

스럽게 받아들여지고, 더 끔찍하고 스펙터클한 장

충격과 후유증은 결코 절대로 치유될 수가 없다.

면이 연출되지 않으면 언론과 대중은 더 이상 관

국가에 의한 철저한 동원이데올로기만 존재할 뿐,

심조차 기울이지 않는다. 투철한 애국심으로 똘똘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가 존재한다는

뭉친 사회에서 국가라는 존재는 절대선이요 절대

발상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더 슬픈 현실은,

적인 정의이며 보편과 정상성의 기준이 된다. 한

자신이 한 행동이 폭력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는

편, 국가에 맞서는 모든 세력은 사회적인 행동을

사람이 얼마 없고, 설령 있다 할지라도 사회적 목

취하는 순간 집단이기주의자, 비애국자, 빨갱이,

소리를 낼 수 없는 사회분위기일 것이다.

미성숙하고 철이 덜 든 사람이 되고 많다. 파시즘. 어떤 특정한 생각을 절대화시키고 그와 어긋나는

나치 시대의 파시즘이 무서운 것은 히틀러 개

생각은 가차 없이 처내어버리는 것. 과연 2006년

인이나 당시 독일 사회의 시스템 자체 때문이라기

을 살아가고 있는 한국사회는 최소한의 절차적 민

보다는 히틀러의 지배 자체가 절차적 민주주의를

주주의라도 존재하는 것인가. 여전히 30년 전의

통한 다수 대중들의 지지에 기반 했다는 점 때문

‘한국식 민주주의에 ’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

이다. 군인과 경찰에 의한 몰상식적이고 비인간적

는 반문만이 머릿속을 맴돈다.

인 폭력을 바라보면서 말로만 듣던 나치의 통치방 식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어떠한 사상이나 행

군인과 경찰들이여, 최소한의 인간적인 양심만은

동도 국가정책에 반하는 것이면 군대와 경찰에 의

저버리지 말기를

해 무참히 짓밟히는 사회. 인간에 대한 인간의 폭 력을 행한 사람이 가해자가 되지 않고, 오히려 추

국가가 아무리 앞장서서 인권경찰을 운운한다 할지라도 인간과 인간 사이의 명령과 복종의 관계

앙을 받는 사회. 무엇이 사람들을 이토록 국가폭 력에 대해 무심하도록 만들었는가.

가 합법적으로 승인을 받는 공간에서는 인권감수 성이 나올 수가 없다. 진압명령이 떨어지면 진압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군인들과 경

에 나서고, 꾹 참으라는 명령이 있으면 시위대들

찰들 개개인의 인간성에 호소한다. 폭력적인 조직

의 욕설과 폭력에도 꾹 참기만 하는 순간 그들은

구조 내에서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인간적인 양심

로봇이지 인간이 아닌 것이다. 내가 휘두른 폭력

은 저버리지 말아달라고. 인간으로서 인간에 대한

은 언제든 국가에 의한 명령이라는 커튼 속으로

예의를 저버리지는 말아달라고. 자신이 피해자라

숨어버리면 그만이지만, 국가의 명령을 수행하던

고 인식하는 순간 어느새 자신이 가해자의 위치에

중 자신이 저지른 가해의 경험 때문에 입게 된 상

서게 될 것이며, 시위대들의 폭력에 예민해지는

처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보상해주지 않는다.

것처럼 자신 내면에 존재하는 폭력에 대해서도 예

국립현충원과 국립묘지를 통해 국가는 끊임없이

민하게 반응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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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합리화

이용석 | 부천 상동고 교사

7살 때쯤으로 기억한다.

이었다. 정확하게 겨누어 내리치면 배추흰나비는

손재주가 남다른 아버지께서 나에게 장난감 칼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한 쪽 날개를 잃고

을 만들어 주셨다. 단단한 형광 플라스틱으로 만들

땅으로 떨어졌다. 배추흰나비가 어떻게 되는 것이

어진 그 칼은 친구들 사이에서 부러움이었다. 그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확한 칼놀림에서 느껴지는

당시 형광 플라스틱을 구하기 힘든 이유도 있었지

만족감과 ‘적을 ’ 쓰러뜨렸다는 성취감이 뿌듯할 뿐

만, 친구들의 장난감 칼과 나의 장난감 칼이 맞부

이었다. 하루 종일 뙤약볕에 시달린 버드나무 가지

딪히면 친구들의 칼이 휘어지기 일쑤였고, 나무로

가 이제는 힘이 겨워 땅으로 축 늘어져 있다. 그

만들어진 칼들은 부러지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

가지는 나의 앞을 막고 있는 ‘적일 ’ 뿐이다. 버드나

이다. 덕분에 나는 동네에서 골목대장을 도맡아 할

무 가지의 중간 부분을 겨누어 왼쪽에서 오른쪽으

수 있었다.

로 칼부림을 한다. 가지가 꺾여 허공으로 튕겨져

“나를 따르라에 ” 서 느껴지는 의기양양함은 그렇 게 어린 마음속에 ‘작은 영웅을 ’ 만들고 있었다.

나간다. 또 하나의 ‘적을 ’ 제거하고 난 후의 걸음걸 이는 득의만만이다. 하늘 높이 뻗지 못한 이유 하 나만으로 가지가 꺾여 버린 버드나무는 중요하지

그 칼은 내 몸의 분신과 같았다. 언제 어디서나 그 칼은 내 허리에 꽂혀 있었다. 친구들과 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혹은 어쩌다 친구들과 약 속이 어긋나 혼자 놀게 되었을 때 그 칼은 나를

않다. 그 칼로 ‘적을 ’ 쓰러뜨렸다는 자체가 어린 소 년에게는 만족스러울 뿐이다. 칼끝에서 무너지는 ‘적을 ’ 보며 그렇게 어린 마 음속에 ‘폭력의 합리화가 ’ 자리 잡기 시작했다.

심심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팔랑거리며 날아가는 배추흰나비는 ‘적의 ’ 대용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3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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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지도 않았다.

점거한다. 지나가던 시민이 한 마디 던진다. “왜 시

베트남 전에서 람보가 자신의 동료들을 구하기

민들을 불편하게 만들면서....” 이것은 폭력이 아니

위해 ‘적에 ’ 게 무차별적 살상을 저질러도....영화 ‘영

란다. 그저 시민들의 편의를 위한 것일 뿐이란다.

웅본색에 ’ 서 주윤발이 성냥을 입에 물고 쌍권총으

그 뿐이란다.

로 ‘적들 ’ 을 아무런 표정 없이 죽여도...역사 드라마

지하철 노동자들이 파업을 한다. 모 방송국 뉴스

에서 이성계가 왕권을 노리며 반대편 ‘적들 ’ 을거

시간에 기자가 말한다. “시민의 발을 볼모로....” 이

침없이 죽이는 장면들에서도...영화에서 깡패가 의

것은 폭력이 아니란다. 그저 시민을 위한 것일 뿐

리나 사랑을 위해 또 다른 깡패인 ‘적들을 ’ 화려한

이란다. 그 뿐이란다.

칼놀림으로 무차별 죽여도...그들은 영웅이고 그 영 웅들의 폭력은 정당한 것이었다. 이미 ‘우리 편은 ’ ‘선(善)’이고, ‘우리 아닌 편은 ’ ‘악(惡)’이 되어 있다. ‘우리 편의 ’ ‘선(善)’은 폭력

이미 ‘나는 ’ ‘선(先)’이다. 그렇기에 저쪽은 ‘악 (惡)’이 된다. 그래서 저쪽은 ‘적이 ’ 된다. ‘적에 ’ 게 가해지는 모든 유형의 ‘폭력조 ’ 차 정당성을 부여받 는다.

조차도 의심해서는 안 되는 정당성을 부여받았고, ‘악(惡)’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폭력’ 그 자체도 이

나는 개별적 존재들에 대해 이런저런 기준으로

미 정당화되어 있다. ‘우리 아닌 편은 ’ 이미 ‘악

이러쿵저러쿵 따지고 싶지 않다. 모든 것은 나와는

(惡)’이기 때문이다. 그 ‘악(惡)’은 이미 ‘적이기 ’

별개로 그 자체로서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개별적 대상 자체가 상징적 의미를 가질 때에는 나에게 다르게 다가올 수 있

주변을 돌아본다.

다. 대상이 가진 상징적 의미가 무의식적으로 무언

인터넷 게임에서 ‘악(惡)’들은 제거될 대상일 뿐

가를 강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강요는 폭력이

이다. 내 손 끝에서 마우스를 통해 가해지는 것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폭력이 아니란다. 그저 재미일 뿐이란다. 그 뿐이 란다.

요즘 어떤 회사의 맥주를 마시다보면 재미있는

인터넷에서 마음에 안 드는 대상들은 ‘악(惡)’이

것을 발견하게 된다. 맥주병이나 맥주캔에 시원한

다. 그들에게 가해지는 악성 댓글은 폭력이 아니란

정도를 알 수 있다는 표식이 그려져 있다. 그 표식

다. 그저 개인의 감정일 뿐이란다. 그 뿐이란다.

이 분명히 드러날 때가 그 맥주를 가장 맛있게 마

더운 여름 날씨에 여성들의 옷차림은 더욱 얇아

실 수 있는 온도라는 것이다. 어느 순간엔가 나는

지고 짧아진다. 여성들의 다리와 가슴을 훑고 지나

강요받는다. 나의 개인적 취향과는 상관없이 그 표

가는 시선들이 바쁘다. 이것은 폭력이 아니란다.

식이 분명히 드러날 때 마시지 않으면 별로 맛없

그저 한 번 보는 것일 뿐이란다. 그 뿐이란다.

게 맥주를 마시는 꼴이 된 것이다. 의도하든 의도

지하철 안에서 자리다툼이 생긴다. 나이가 더 많

하지 않든 그 표식 덕분에 난 둘 중에 하나를 강

아 보이는 중년의 어른이 말한다. “나이도 어린 젊

요받게 되었다. 그 표식을 충실히 따르면 맥주를

은 사람이...”라고 충고하듯 한 마디 던진다. 이것

맛있게 먹을 줄 아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으면 맥

은 폭력이 아니란다. 그저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주를 맛있게 먹을 줄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미덕일 뿐이란다. 그 뿐이란다.

나에게 이 표식은 서비스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장애인들이 이동권을 주장하며 전철의 선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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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의 폭력일 뿐이다.


광화문 도로 한가운데에 서 있는 이순신 장군의

의 마음 속에 폭력의 합리화를 내면화한다. 폭력에

경우도 그렇다. 이순신 장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도 좋은 폭력과 나쁜 폭력이 있다고 말이다. 내가

따지고 싶지 않다. 부족하게나마 내가 알고 있는

인터넷 삼국지 게임에서 발휘하는 ‘무(武)’가 폭력

지식으로는 이순신 장군은 적어도 스스로에게 부

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 편의 폭력이 ’

끄럽지 않게 살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

기 때문이다. 과연 그런가? 폭력은 어디까지나 폭

은 ‘민족의 영웅으 ’ 로 추앙받기에 그 자체가 상징

력일 뿐이지 않은가?

적이어서 나에게 다르게 다가온다. 이순신 장군은 무장(武將)이다. 이순신 장군의 개인적 인품과는 상관없이 이순신 장군은 ‘무(武)’

내 몸 안에 유유히 흐르고 있는 폭력의 합리화.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에게서 그것을 보는 것은 너 무 지나친 것인가?

를 상징한다. 우리에게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때 장렬히 전사한 군인으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우리 편)’ 아닌 ‘너(우리 아닌 편)’를 배타적

그리고 그 ‘무(武)’는 ‘우리 편의 ’ ‘무(武)’이다. 그

으로 배제하고 대상화하는 모든 유형은 폭력이다.

래서 그 ‘무(武)’는 ‘선(善)’이다.

그 곳에는 개별 존재에 대한 인정을 전제로 하지

그러나 ‘무(武)’는 기본적으로 (방어적이든 공격

않는다. ‘나(우리 편)’의 ‘욕망이 ’ 전제될 뿐이다.

적이든) 폭력이다. 그렇다고 ‘무(武)’의 기본 정신

본인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여성의 몸을 훑는

이 평화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

남성의 시선은 그 여성을 욕망 충족의 대상으로

속성이 그렇다는 것이다. 더더욱 이순신 장군을 폄

보는 폭력이다.

하할 생각도 없다.

좋은 폭력은 과연 있는 것인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은 ‘우리 편의 무(武)’이기에 우리 편의 ‘폭력을 ’ 정당 화, 합리화한다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숭 배(?). 자칫 우리 편의 ‘폭력을 ’ 정당화는 과정을 통해서 폭력의 합리화가 내면화되는 또 다른 과정 은 아닐까? 이순신 장군은 ‘무장(武將)’으로서 이미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은 나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3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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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으로 평택으로

생명과 평화를 향한 인간의 진실과 정성을 어찌할쏘냐? 유기만 | 대추리 도두리 황새울 지킴이

사람들도 5월 4일 그들은 상상하지도 못할 가공할 폭력으로 민중을 제압하는 것으로 평택미

깊은 절망에 빠졌다. 대추리와 도두리로

군기지 확장 사업을 마무리 하려고 했다.

들어가는 모든 길은 차단되었고 검문소와

2006년 5월 4일 그들은 대추분교를 허물

CCTV가 설치되었다.

고 농지를 빼앗아 사람들로부터 희망도 꿈도 사라지게 하는 것으로 그들의 승리

공포정치, 폭력으로 민중을 굴복시키고

를 확정하려고 하였다. 600여명이 연행

희망조차 갖지 못하게 하는 것! 일제시

되었고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다. 경찰

대, 군사독재 시절, 미국의 패권주의, 결

청장은

국 노무현도 그 길을 택했다.

경기경찰청을

방문하여

작전명

“여명의 황새울”의 승리를 자축하고 경찰

수천의 군대와 만 여명의 경찰 그리고 용

들을 치하하였고 국방부는 100억 원을

역 깡패. 안성천에 부교를 설치하고 헬기

주둔한 군대와 경찰을 위해 내놓았다.

로 철조망을 나르고 경찰 헬기는 애국가

2004년 9월부터 시작한 팽성읍 대추리⋅

를 틀어댄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도두리 주민들의 촛불집회도 2006년 5 월

닳도록 연행해라~~ 돈과 권력이 보호하

4일에는 눈물과 한숨 바다가 되었고 많

사 폭력경찰 만세~~ 무궁화 박대령(0총

은 사람들이 넋을 잃었다. 문정현 신부도

경) 일계급 특진~~ 주한미군 평택에서

주민들도 지킴이들도 그리고 수년을 이어

기리번창하세~~”

대추리⋅도두리와 인연을 맺어온 수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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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으면 막을수록 평택으로 가고자하는 열 5월 4 일 그 이후 많은 사람들이 평택 팽 성읍 대추리⋅도두리를 찾는다. 경찰에

망은 커져가고 6 월부터 시작된 평화 순

막혀 들어가지 못한다 해도 수 km를 걷

례는 끝이 없다. 어린이가 초등학생이 중

거나 비밀 작전을 방불케 해서라도 걸어

학생이 종교인이 청년이 할아버지가 할머

서 자전거로 평택 팽성읍 대추리⋅도두리

니가 대추리 도두리로 간다. 여러 운동

를 찾는다. 이것은 싸움의 승패와는 무관

단체들이 간다. 한총련 학생도 민주노동

하다. 이것은 어떤 사업의 성과를 놓고

당 당원도 민주노총 조합원도 아닌 사람

성공과 승패를 결정하는 사고방식과는 무

들이 대추리 도두리로 간다. 뉴스를 보고

관하다. 아픈 아이에게 줄 약이 당장 없

신문을 보고 인터넷을 보고 여름휴가를

다고 아이를 돌보지 않을 건가? 나에게

반납하고 뜻에 동참하고자 평화 행진에

묻는다. “너는 왜 대추리⋅도두리로 가느

함께한다. 마을에 사는 지킴이도 늘어간

냐?” 모두들 묻는다. 대답도 여러 가지이

다. 사람이 살지 않던 집에 불이 켜지고

지만 우리는 이것을 ‘대추리⋅도두리 병’

있다.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주택 철거와

이라 부른다.

강제 집행에 맞서 사람들이 모인다.

‘대추리 도두리 병?’ 주민들의 촛불 집회

285만평을 철조망으로 가두려던 노무현

가 700 일이 넘어 2주년을 앞두고 있다.

정권은 결국 자기가 친 철조망에 갇히고

285만평의 한 평 한 평을 농사지어보지

있다. 평택을 둘러싸고 있는 반전 평화에

않은 사람은 그 땅의 가치를 알 수 없다

대한 전 민중의 염원을 막지 못하고 있

는 김지태 이장님의 말처럼 700일이 넘

다. 이것이 지금 국면의 본질이다. 전국

게 촛불을 들어온 주민들의 하루하루를

에서 평택으로 평택에서 전국으로 확산되

살아보지 않은 사람이 그것을 어찌 알 수

는 민중의 염원은 공포 정치로 다스려지

있을까? 고작 몇 번 촛불행사에 함께 한

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인연이 전부이다. 그러나 농부가 한포기 한포기와 맺은 인연처럼 700일을 살아온

그러나 국방부는 8 월에 주택철거를 하겠다

주민과 여러 사람들과의 인연은 실로 대

고 한다 . 그들은 그렇게 할 것이다 . 갈수록

단하다. 대추리⋅도두리에서 며칠만 있으

드러나는 정권과 미국의 음모가 그들도 두

면 걸리는 생명과 평화의 바이러스 ‘대추

려울 것이다. 사람들의 기억에 공포가 가시

리⋅도두리 병!’ 그 땅을 일궈온 주민들

기 전에 마약과도 같은 폭력적인 강제 집

의 삶과 그것을 파괴하려는 거대한 미국

행을 또 할 것이다.

과 자본의 음모! 그리고 계속되는 정부, 언론, 군인, 경찰의 거짓말! 거짓말! 거짓 말!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3 호

35


전략적 유연성, 한미동맹 강화, 미국식 자 본주의화 이런 것들이 가져올 끔찍한 미래 들이 더 드러나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강 제 집행을 하려 할 것이다. 그들이 왜곡하 듯 한총련도 아니고 민주노동당도 아니고 민주노총도 아닌 어린이가 학생이 시민들 이 무관심의 벽을 깨고 평택의 평화를 염 원한다 . 한 번도 오지 못한 사람들조차 마 음속에 생긴 빚! 그것이 평택 대추리⋅ 도두 리에 대한 마음이다. 이제 노무현 정권과 미국은 전쟁 교본으로 는 이 싸움을 이길 수 없다. 지고이기는 것을 땅을 빼앗고 기지를 만드 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과 다른 사고방식 으로 폭력을 극복하고 평화를 쟁취하는 사 람과의 차이! 미국이 아무리 병법서를 분석 하여 전쟁 교본을 만들고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을 전략적 유연성이라고 부른다 해도, 노무현이 동맹자가 되어 전략 적 유연성에 편승하여 동아시아 패권의 장 악을 꿈꾼다 해도, 운동권을 기껏해야 주말 에 큰 집회 한번하고 시간이 지나면 잊어 버리는 이기주의 집단으로 매도하려 해도 평택 투쟁으로부터 시작되는 우리의 행진 을 막을 수 없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살 수 없고 권력을 아무리 가지고 있어도 어 쩌지 못하는 것! 평화와 생존권을 향한 사 람들의 진심과 그것으로부터 발현되는 우 리들의 행동을 어찌할 것인가? 이미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학교가 되어버린 대추 분교! 모두의 고향이 되어버린 대추리와 도두리! 무너트려 봐라! 밀어붙여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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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원폭 60년, 그 재판 리고...’을 수감자와 보고 나동 | 전쟁없는세상 책임활동가 + peace1@jinbo.net

또 다시 넉 달 만에 수감기록이다. 이 수감기록은

이지 않던 것들, 못 보던 것들, 내가 문제의 정 가운

순 사기다. 수감생활도 다 끝난 사람이 그것도 서너

데 놓여 있을 때 깨닫지 못하는 것들, 흥분된 감정

달에 한 번 씩 쓴다. 어느덧 출소한 지도 1년이 다

때문에 좀체 냉정하게 바라볼 수 없던 것들. 더 냉

되어가니 이전 기억도 상당히 왜곡되었을 것이 뻔한

정하게, 더 솔직하게, 더 처절하게 보이는 게 있을

데 게다가 갖가지 사후 정보나 지식으로 윤색되기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기억의 총량은 줄어들어도

마련이니 이 글은 순전히 날조된 것일지도 모른다.

해석의 총량은 자꾸만 늘어날 것이라 생각했다. 결

그래서??

국은?? 그랬다. 시간이 지나니까 차츰 그 때 내가 왜 그랬었는지,

되게 뻔뻔한 얘기지만 원래 그렇게 수감기록을 쓸

어떤 심정이었었는지, 무엇을 원했었는지 알게 되

작정이었다. 안에서 쓰던 일기도, 수감기록도 출소하

기도 한다. 그리고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이야기할

기 전에 다 버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쓰다가 지겨워

수 있게 되었다. 어떤 감정은 너무 얽히고 뭉쳐 있

서 관뒀다. 아무것도 새로울 것 없는 매일 매일을

어서 제대로 이해하기까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보내니, 지금은 참 할 이야기가 많지만, 그 때는 아

시간이 지나면 가끔은 안 보이던 게 보인다. 이건

무 말도 하기 싫었다. 귀찮았고, 힘들었고(할 말이

누구나 경험하는 인생의 진리다. 이런 일반적인 조

없는데 억지로 말을 만들어내야 할 때 참 힘들다),

건 말고도 새록새록 그 때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구질구질해 보였다. 그래서 버렸다. 이거 싸들고 나

사건은 많다. 수용시설과 관련된 뉴스를 볼 때면 하

가서 뭐에 쓰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막판에는 하도

고 싶은 말들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다. ‘다 알고

쓸 말이 없어서 편지도 거의 쓰지 않았다. 너무 할

있던 것들이야. 뭘 새삼스럽게 이제 와서 떠들어

말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펜만 들면 할 말이 없었다.

대는 거야? 너희들은 그런 거 원래 몰랐었어?’이 렇게 냉소적인 반응도 나오고. ‘애초부터 이건 문

그러다 시간이 좀 지났다. 아마 몇 달 쯤. 거기서 보

제가 있었어.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3 호

37


그래서 내가 이런 이런 대안을 생각하고 있었지.’

을 극도로 긴장시킨다. 심하게 위축되기도 한다. 재

이렇게 생산적인 반응도 나온다. 심지어 얼마 전 서

판 전날이면 어떤 사람들은 잠도 제대로 못자고, 이

울구치소 내 성폭력 사건이 벌어졌을 때는 가해자가

상한 꿈을 꾸기도 한다. 대개 당신에게 의미심장한

누구인지 쉽게 알아낼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그렇게

어떤 날 전야에는 그런 경우가 많을 테니 이해하기

하지 않았다. 나와 너무나 가까이 있었던 사람이었을

어려운 일도 아니다.

게다. 출소하고 영화 ‘오로라 공주를 ’ 볼 때는 종반부 에서 엄정화가 어떤 방식으로 복수에 성공하는 지 구

재판 당일 행동지침에 얽힌 갖가지 미신이 있다. 같

체적인 실행방법을 다 맞춰내고야 말았다. 므훗해하

은 방 쓰는 사람이 재판을 앞두고 있는 날에는 한 방

는 내 모습. 대략 좋지 않다.

을 쓰는 사람 모두가 물이나 국에 밥 말아먹으면 ‘재 판 말아 먹는다고 ’ 금지, 밥에 김 싸먹는 것도 금지,

계기는 많다. 무엇보다 지금 수감 중인 병역거부자

컵라면도 금지, 비벼먹는 것도 금지, 뭔 놈의 금지가

들이 보내주는 편지 속에서, 그들이 어떤 상황을 대

그리 많은 지. 그런데 이걸 안 지키면 당사자는 아주

하고 거기에 반응하는 모습 속에서, 나는 매일 그들

불쾌해한다. 미신이라해도 남이 관습을 안 지켜주면

의 기쁨과 고통을 느낄 수 있다. 이해한다. 재발견한

괜히 불쾌하고 불안한 것은 당연하다. 판사의 말 한

다. 마음으로 최대한 기쁨과 고통을 함께하려고 노력

마디에, 판사가 판결문을 읽는 그 몇 분 사이에, 경

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미안하게도 해석하고 관조한

우에 따라서는 평생의 운명이 좌우되는데. 어떤 사람

다. 동시에 과거의 나를 해석하고 관조한다. 그 시간

들은 꼭 고무신만 신고 간다. 전 날부터 고무신을 광

에 자신이 얼마나 무미건조했었는지. 얼마나 자주 자

이 나도록 깨끗이 닦아두는 사람도 있다. 수능 백일

학과 가학을 일삼았었는지. 또 얼마나 많이 심사숙고

전날 온갖 선물 주고받는 거랑 비슷하지 않나? 잘 찍

했었는지. 또 얼마나 선택지가 좁았는지. 그래도 나

으라고 포크를 선물하는 따위의. 사람들은 아주 긴장

름대로 얼마나 자신이 대견했었는지. 오늘도 날조된

되고 힘겨운 시간을 이겨내기 위해 제의(祭儀)를 만

기억 하나를 붙잡고 떠들 작정이다.

들어낸다. 이것은 어찌 보면 실효성이 없는 일종의 주술행위지만 고난을 이겨내고자 하는 그 나름의 의

얼마 전 병역거부자 김태훈 씨가 1심에서 1년 8개월

식적 행동이기도 하다.

을 선고받았다. 이는 통상 1년 6개월을 선고하던 기 존 관습에 반하는 행동이었다. 우리는 판사가 똘아이

나는 글재주가 없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재판부

라고 욕하며 스스로를 안심시켰고 2심(항소심)에서

에 제출하는 항소이유서나 반성문을 여러 차례 대필

는 당연히 1년 6개월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해 준 경험이 있다. 학생운동을 하다가 수감된 사람

데 항소심이 기각되고 1년 8개월 원심이 확정되었다.

들에게는 아주 흔한 일이다. 예의 ‘존경하는 재판장

이 소식을 유럽 여행 중에 들었다. 쿵~. 아주 된통

님~’으로 시작해서 ‘선처를 부탁드립니다로 ’ 끝나는

세게 두들겨맞은 느낌. 기분이 나빴다. 아니 아팠다.

그 반성문은 사실 아무 내용도 담고 있지 않다. 그런

숫자상으로는 2개월 차이다. 그런데 수감되어 있는

데도 사람들은 반성문이 큰 효력을 발휘한다고 믿고,

사람에게는 그게 아니다.

또 실제로 어떤 판사는 반성문을 안 쓰는 자에게 괘 씸죄를 적용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수감생활 초반에 진행되는 검찰수사와 재판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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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판사의 종교적 성향을 조사해 같은 종교를

밟아온 사람들이 남을 판단하는 위치에 서서 가장 강

믿으며 새로 태어났다고 은근슬쩍 종교적 권위에 기

력한 권위를 행사한다는 사실 자체를 어찌할 수는 없

대는 사람도 있다. 늘 어느 재판부에 판사 아무개는

다. 누구를 그 자리에 세워도 완전무결한 판결은 존

어떤 경향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떠돌기 마련이고,

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판사라면, 국가권력의

아무개 판사랑 친한 변호사를 찾는다고 돈을 들이 붓

정점에 서서 남의 인생을 쥐락펴락 하는 사람이라면,

는 경우도 있다. 당연한 일이다. 판사의 한마디에 모

좀 영리해야 한다. 공정하고 냉정해야 한다. 착한 심

든 것이 달려 있으니. 판사들은 매순간 알아야 한다.

성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진지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찌질이 판사들 도 많다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병역거부자

그렇다면 이 판사는 왜 똘아이인가? 우선, 공부를 안

재판 과정에서 우리는 찌질이 판사들을 너무도 많이

했다. 이론 공부도 안했고 세상물정 돌아가는 공부도

만났다.

안했다. 그래서 똘아이다. 병역거부자에 대한 판결이 주관적인 감성에 치우치는 순간, 권위는 추락한다.

병역거부 운동에서 다가오는 재판에 대비하는 것이,

똘아이가 제 고집을 신념이라 우기기 시작하면 피곤

판사들의 변화를 촉구하고 형량을 낮추고 보석을 받

해진다. 볼테르는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

아내는 것이, 변호사들과 함께 변론을 작성하고 법원

지만, 당신이 의견을 말할 권리를 위해 싸우겠다고 ’

에 제출할 병역거부 이유서를 설득력 있게 써내는 것

했다. 적어도 민주사회에서 판사질 하려면 그 정도는

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때가 있었다. 그 때는 전

돼야 한다. 국가권위를 빌어 누군가를 판단할 때는,

례가 없었으므로 모든 과정이 항상 새로운 상황이었

판사의 개인적 감정이나 주관적 판단에 근거해서는

고, 철저한 대비가 필요했다. 그러나 1년 6개월 형이

안 된다. 판사는 판사의 재량을 이야기한다. 법이 허

관습처럼 굳어지면서 수사나 재판과정이 다소 안정되

용하는 범위 내에서 얼마든지 재량껏 판결을 내릴 수

기 시작했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예외 없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더 강조하는 것이다. 당신

이 1년 6개월을 받았다. 당연히 그렇게 예상하고 이

재량에 한 사람의 삶이 달려 있다고 생각하라. 당신

런 저런 계획도 짜고, 재판에 대비한다. 그런데 예상

이 판사 앞에 서서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

이 깨졌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는 속담이 실

라. 영리한 판결이 세상을 움직이기도 한다. 역사적

재하는 상황. 엄습한다. 구치소에서는 일도 없다. 일

인 판결이 큰 변화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어떤 판

이 없는 심리적 불안상태. 굉장히 힘들다. 김태훈 씨

결은 역사적인 ‘쪽팔림으 ’ 로 남기도 한다.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혼자 고뇌하는 시간을 이겨냈으리라. 그

또 있다. 이 판사가 똘아이인 이유. 판사는 무오류의

래도 나는 믿는다. 병역거부자 들이 강한 사람이라고.

권력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무오류의 권력이란

그래서 마음고생 후에 더 강해질 것이라고. 또 바란

민주사회에선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다. 최대한 빨리 이 상황을 이겨내고 새로운 활력소

군대, 사법부, 경찰, 검찰, 정당, 국회 등 각종 권력집

를 찾기를.

단의 구성원들이 자신을 무오류의 화신이라 착각하고 있다. 반성도 없고, 회개도 없고, 회한도 없다. 자신

이제 남는 것은 똘아이 판사를 심판하는 일이다. 자

의 결정이 항상 옳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신은 판결을 내려보기만 했지 판결을 받아보지는 못

그 착각을 깨줘야지. 판사님 앞으로 편지나 한 통 쓸

했으니 피고인으로 재판정에 서야만 하는 사람들, 소

까? 신경도 안 쓸 텐데...심난한 밤이다.

위 피고인의 심정을 잘 모를 것이다. 엘리트 코스만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3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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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의 세계화 저자 _ 브라이언 마틴 | 오스트레일리아 울런공 대학 과학기술학부 교수 번역 _ 전쟁없는세상 번역팀 , 정리 _ 날맹

이번 소식지에는 2006년 독일에서 열리는 WRI 국제세미나에 참여하는 활동가들이 함께 번역한 글들을 싣 습니다. 이번 국제세미나는 “Globalising Nonviolence(비폭력의 세계화)”를 주제로 7월 23일부터 27일까지 5일에 걸쳐서 진행이 됩니다. 아래 번역글들의 원문은 http://www.wri-irg.org/tri2006/en/news/index.html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비폭력의 세계화: 장애물을 극복하기

일에 걸쳐 열리는 국제회의의 논의를 위한 시금석 을 제공해 줄 것이다.

브라이언 마틴 지난 일세기 동안 비폭력이라는 가치는 무서운 속 브라이언 마틴은 이 글에서 방법전 / 략으로서의 비

도로 확산이 되었다. 더욱더 많은 사회운동들이 비

폭력 운동이 직면하게 되는 일반적인 과제들에 대

폭력행동을 사용하고 있다. 지역 주민들 역시 예전

해서 다루고 있다. 과제들을 다시 다음처럼 크게

에 비해 비폭력행동을 더 선호하고 있다. 네트워킹,

다섯 가지 영역으로 분류를 하고 있다. ▶비폭력의

대중매체, 각종 글들을 통하여 비폭력에 대한 사회

가시성(visibility of nonviolence), ▶비폭력운동에

적 인지도가 확실히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대한 사람들의 평가(reputation of a nonviolent movement/struggle), ▶비폭력이 가지는 의미 알

그러나 아직도 (비폭력의 확산을 위해서는) 가야

려내기(the struggle over meaning) ▶비폭력의 제

할 길이 멀다. 조직화된 폭력은 세계적 군사체제

도화(institutionalisation of nonviolence) ▶두려움

속에서 자리를 확고하게 지키고 있다. 국경을 넘어

(fear). 비폭력의 세계화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에

선 테러리즘은 군사적 억압의 명분을 제공해주고

대한

있다. 따라서 우리는 비폭력에 대한 인지와 실천을

탐구는

“비폭력의

세계화(Globalising

Nonviolence)"를 주제로 2006년 7월 23일부터 27

40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비폭력을 일상의 영역으로 끌어오기(The struggle

은 간디나 마틴루터킹과 같은 용기 있는 지도자들

over visibility)

이 한 행동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사람들은 비폭력 행동을 자신의 일상에서 빈번하게 일어날 수 있는

매스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비폭력에 대한 인지도

것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다른 어느 곳에서 일어날

는 무척이나 조야하다. 대부분의 비폭력직접행동들

법한 일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은 무시되기 십상이다. 대신에 미디어들은 폭력사 건들에 대해서는 무한한 관심을 보인다.

많은 사람들은 전쟁의 기본적인 것들에 대해서 알

게다가 미디어는 비폭력행동을 단순한 사건사고로

고 있다: 무기는 수단이고, 군인은 주체이며 교전

초점을 맞추어 버릴 때가 많다. 대규모 집회가 있

은 싸움의 한 방식이다. 하지만 비폭력에 관해서는

고 난 후에는 오직 사소한 다툼이나 연행 장면만

오직 행진이나 파업과 같은 수단만이 잘 알려져

이 보도가 된다. 가끔씩 미디어는 폭력을 행사하는

있다. 비폭력행동의 주체들은-민간인 혹은 시민

경찰 때문에 유발되는 “폭력 시위를 ” 보도하기도

혹은 민중이라고 불리는-잘 인지가 되지 못하고

한다. 많은 기자와 편집장들의 어휘목록에 비폭력

있다. 운동의 방법 중에 하나인 비폭력이라는 것도

이라는 단어가 아직까지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

잘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같다. 활동가들과 그 후원인 들은 이러한 비폭력 행동의 활동가들은 미디어의 관심을 모으기 위해서 기발

비가시성들을 조금씩 허물어 가고 있다. 하지만 그

한 방법들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미디어의 관심은

속도는 결코 빠르지 않다.

뜸하며, 그나마 원래 비폭력행동의 의도하는 바나 비폭력 행동 자체에서 발생하는 원동력에 대한 이

역사학자나 사회과학자들이 비폭력행동을 학술논

해 없이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스펙터클한 모습만

문과 같은 글에 쓸 수 있게 되려면 많은 시간이

을 취재한다.

필요할 것이다. 시급하게 당면해야할 더 큰 과제는 비폭력에 대한 매스 미디어의 무관심이다. 이 과제

비폭력이란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언론

를 해결하는 한 가지 방법은 언론인들로 하여금

의 태도는 정부와 정치제도, 정책에 초점을 맞추고

비폭력이 정당정치나 스포츠처럼 정치의 한 방식

있는 학술적인 글에도 그대로 반영이 되고 있다.

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주의, 헤게모니에 대한 비판서는

쉬운 정답은 없다. 직접 실천하고 실험하는 것이

정말 많지만, 비폭력직접 행동에 대한 인지도는 거

요구된다.

의 없는 편이다. 비폭력을 좀 더 선명하게 보일 수 있도록 하는 것 활동가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진과 파업, 농

은 문화적 배경과도 부분적으로 연관이 있다. 단어

성들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그것들이 다양한 투쟁

와 상징들, 이야기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는

방식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곧 해당 문화권의 언어와 전통에서 기인하는 부분

군 장성들, 정치인들, 전쟁(전술)들에 대해서는 많

이 있다. 사람들이 비폭력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은 것을 알지만, 일상적인 사람들의 직접행동들에

하는 방법을 아는 것은 비폭력의 세계화에 있어서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만약 사람들이 비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폭력행동에 대해서 들어본 게 있다면 아마도 그것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3 호

41


비폭력에 대한 사회적 평판과 싸우기

스로를 호전적 또는 혁명적이라고 분류 짓고 도발,

(The struggle over reputation)

자극 또는 폭력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평 가 절하된다. 그들에게 있어 비폭력은 유약하며 개

비폭력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종종 활동가들을 불

량주의적인 것이다. 비폭력이 여성적이고 겁먹은

신한다. 기득권층은 비폭력 저항자들을 아무것도

것과 관련되는 무언가로 이해되는 반면, 폭력적인

모르는 사람이나, 속이 빈 이들, 어중이떠중이, 범

것이 남성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비폭력 활동

법자, 동원된 군중이나 테러리스트등과 같이 경멸

가들은 보통 그들 자신이 마초 이미지를 벗어날

조의 방식으로 명명한다.

수 있는 것에 만족감을 가지지만, 이와 같은 성별 화 된 이미지와 관련하여 (고민해야할) 중요한 평

이러한 방식의 낙인찍기는, 특히나 비폭력 저항자

판의 문제가 존재한다.

들이 청중(시민 또는 일반사람들)들과 멀리 떨어 져 있을 때, 방송매체의 해설이나 영상 등에서 그

오늘날, 간디가 비폭력을 “수동적인 저항으 ” 로표

효과를 잘 발휘한다. 사람들은 활동가들을 개인적

현하는 것에 대해 그것이 비폭력의 의미를 왜곡하

으로 알게 될 때에, 훨씬 더 그들을 존중하는 경향

는 것이라고 주장한지 거의 100년이 다 되어감에

이 있다. 따라서 활동가들 역시 평범한, 보통사람

도, 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비폭력을 “수동적인

들이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또 다른 사람들로 하여

저항이 ” 라는 맥락에서 이해하고 또 그렇게 의미부

금 여러 행사에 참여함으로써 활동가를 만날 수

여하고 있다. 비폭력은 종종, 대중의 입장에서,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동성 또는 평화주의 그리고 유화적인 입장과 연관

할 수 있다.

되어 진다. 이러한 연관 짓기는 ‘비폭력 행동에 ’ 서 ‘행동에 ’ 강조점을 두고자 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좋은 평판을 공고히 하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은

계속 반복되어 행해진다.

이미지에 신경을 쓰는 것이다. 욕설이나 관습에 벗 어나는 옷차림, 특이한 행동들은 어떤 사람들에게

단어와 그 단어들이 지니는 외연적 의미에 지속

는 나쁜 인상을 줄 수 있다. 부정적인 이미지들이

적인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대중들의 힘이 ”

운동을 불신하게 만드는 데에 한 몫을 담당한다고

라는 표현은 ‘비폭력이 ’ 라는 단어의 의미에 좋은

한다면, 비폭력 저항자들을 ‘질 나쁜 얼뜨기로 ’ 보

설명을 더해줄 것이다. 언어와 이미지는 비폭력 운

는 이러한 고정관념을 바꾸기 위한 방법에 대한

동의 성공에 매우 중요하다. 직접적 행동과 함께,

고려도 충분히 볼 만하다. 한 예로, 격식을 차려

우리에게는 인도의 불복종 운동인 사챠그라하란

옷을 입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어떤 옷을 입거

말이 지니는 것과 같은 상징적 의미가 필요하다.

나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정석은 없다. 다만 중요한 점은, 평판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활동의 결정적인 요소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비폭력활동가들은 다른 활동가들 -특히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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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이 가지는 의미 알려내기 (The struggle

종종 (억압적인 공산주의 정권의 붕괴에 기여한)

over meaning)

민중들의 비폭력적 활동에 관하여는 언급하지 않 은 채, 동유럽 공산주의가 붕괴한 것은 냉전에서

세계무역기구(WTO)의 회의에 반대하여 대규모

미국 정부가 성공을 거둔 것, 특히 소비에트 정부

집회가 열린다. 직장에서는 준법투쟁 캠페인이 벌

로 하여금 국방에 과다지출 하도록 압박을 가한

어지며, 지역의 부동산 개발에 반대하여 철야시위

것 때문이라고만 이야기한다. 사실 정부기관들은

(농성)를 하기도 한다. 활동가들은 이러한 현상들

대부분, 그들 행동이 민중적 압력 또는 힘에 의해

을, 억압이나 착취에 대항하는 민중들의 직접행동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으로 쉽게 파악하지만 다른 이들은 이 의미관계를 즉각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어떤 경우에는, 비폭력 행동의 중요성을 무시하기 가 힘듦에도 불구하고 이때에도 이것의 효과는 최

비평가들은 반(反)WTO 집회를 경제 발전에 문제

소화되어 표현된다. 간디는 가장 유명한 비폭력 활

제기하는, ‘의도는 좋으나 잘못된 방향의’ 반발로,

동가임에도, 종종 인도 독립 운동의 성공은 영국의

직장에서의 준법 투쟁은 교섭 전술의 하나로, 그리

‘온화한 방식의’ 식민통치 때문이라고 일컬어진다.

고 철야농성에 대해서는 단지 하나의 파티로 묘사

좋은 반박으로, 케냐 독립 세력인 Mau Mau (폭력

할 수도 있다. 이러한 활동들의 의미는 권력 잡기

을 사용한)에 대한 영국의 식민통치를 언급할 수

(언어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낼 것인가의 문제)

있다. 이 때 영국인들은 군사 집결지를 세우고는,

의 문제로 이해된다. 활동가들은, 그들이 좋아하건

고문, 처형 그리고 대량 학살 등을 자행하였다.(?)

좋아하지 않건 간에, 비폭력 행동이 가지는 ‘의미’ (또는 ‘의도’)의 문제에 연루되어 있다.

비폭력이 나치에 대항하는 세력으로는 유효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또 다른 친숙한 논쟁주제이

비폭력행동들을 각기 다른 분야의 주제로 할당

다. 비폭력이라는 화두를 꺼내는 사람들은 위와 같

하고 분류하는 방식은 대중의 비폭력에 대한 바른

은 문제제기에 대하여 비폭력은 나치에 대항하기

이해를 방해한다. 뉴스 보도에서 어떠한 것은 월드

위해 채택되었으며 성공적이기도 하였다는 내용의

뉴스에, 어떠한 것은 비즈니스 섹션에, 또 어떠한

적절한 답변을 준비할 필요가 있겠다. 그 예로,

부분은 지역 뉴스에 해당되며 꽤 많은 양의 일들

1943년 베를린에서의 민중 저항 (public protests)

은 어느 것에도 포함되지 않기도 한다.

은 유대인 수감자를 풀려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 적이 있다. 이러한 종류의 논쟁들은 사람들의 비폭

비폭력 행동의 성공들은 종종 다른 원인들에 기

력에 대한 이해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한 것으로 설명되어져 버리기 쉽다. 논평가들은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3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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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의 실패사례들 또한 존재한다. 가장 잘 알려

많은 나라에서, 집회는 관습적인 것이 되었다.

진 예로는 1989년 중국의 민주화 운동(천안문 사

1960년대 거슬러 올라가면, 몇몇 주제에 관한 집

건)의 실패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것과

회 - 베트남 전쟁 반대 같은 - 는 현상유지에 대

는 다르게 아주 큰 참패는 아니었는데, 그 이유는

한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경찰은 엄청 경계했고 체

이 운동이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중국 정권에 대

포와 구타의 위협이 높았다. 그러나 오늘날, 동일

한 신뢰도를 손상시켰기 때문이었다. 한편 폭력비 /

한 국가들에서 집회는 특별한 게 아니다. 정부는

폭력에 대한 이중 기준이 존재하게 되었는데, 중국

집회를 허용하고 경찰은 모든 일이 부드럽게 흘러

천안문 사건과 관련해서는 중국 정부의 폭력진압

갈 것이라 확신하며, 때때로 구경꾼들이 집회 참가

이 옳지 못했다고 말하지만 한편으로는 미국 군대

자들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아준다.

가 1975년 베트남에서 철수한 것에 대한 매파의 결론은 폭력(전쟁)이 효과적이지 않았다는 것이

이런 (표현과 집회의 자유가 잘 보장된) 시나리오

아니라 오히려, “충분히 전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는 단지 몇몇 장소에만 적용된다. 여전히 집회나

(즉, 더 위력적인 폭력이 필요했다)”였다.

탄원조차 탄압받는, 심지어 행동을 조직한 사람이 심각한 형벌에 처하게 되는 억압적인 사회도 존재

비폭력활동가들은 종종 자신들의 ‘다소 성공적이

한다.

지 못한 캠페인에 ’ 대하여 같은 종류의 이야기를 말하곤 한다. “우리는 좀 더 현명하고 강해질 필요

비폭력의 제도화는 성공의 표시다. 그것은 합법적

가 있으며 우리의 비폭력 활동을 끈기 있게 해나

행동의 목록이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가야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거의 그렇게 생 각하지 않는다. 비폭력에 부정적인 사람들의 관점

한편, 제도화가 권력자의 생각에 맞춰 행동을 제한

을 바꾸는 것이, 비폭력이 가지는 의미를 둘러싼

하는 것이 된다면 오히려 지배이데올로기에 포섭

투쟁의 핵심이다.

될 수가 있다. 노동운동은 지난한 투쟁 뒤에 파업 의 권리를 얻었다. 그러나 몇몇 국가에서 파업은

비폭력을

이제 심하게 규격화되어 버렸다. 몇몇 조합에서는

제도화하기 (Institutionalising nonviolence)

파업을 안 한다는 서약을 해야만 한다. 또 다른 어 떤 조합들은 협소하게 정의된 조건 하에서만 파업

정의에 따르면, 비폭력 행동은 관습적인 정치적 행

을 할 수 있으며 규정을 어기면 조합은 엄한 형사

동 이상을 의미한다. 투표나 로비 같은 방법들은

적 처벌을 받게 된다. 이에 따른 전형적인 결과는

전통적이지만 비폭력 행동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

조합 간부들이 조심스러워지는 것이다. 승인을 받

나 비폭력 행동이 폭넓게 사용됨에 따라, 관습적인

지 못한 파업(wildcat strikes)은 노동자의 직접행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정치적 제도가 된다.

동의 경계를 넓히는 방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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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이 법률과 규약에 의해 보호받을 수 있도록

제약가능성이 제기될 수도 있다.

하는, 비폭력 행동의 합법화를 위한 지속적인 투쟁 이 진행되고 있다. 반면, 리플렛을 배포하는 따위

비폭력이 더 많이 성공하고, 더 많이 받아들여지고,

의 단순한 행동도 쇼핑센터에서는 법률로 제한을

더 많이 제도화되고 지구화될수록, 이런 문제들이

받을 수 있고 자유로운 발언을 위한 투쟁의 기초

더욱 두드러지게 될 것이다. 지속적인 논쟁이 필요

가 될 수도 있다. 한편, 핵 미사일을 제거하는 풀

하다.

뿌리 활동가들은 인종학살을 막는 행동이었다는 주장으로 법정에서 정당성을 주장한다.

Fear(두려움)

일반적으로, 폭넓은 합법성은 비폭력 행동을 위해

비폭력의 지구화에 가장 큰 장애물은 두려움이다

유익하며, 특히 억압적인 정부에 맞서 사용된 방법

(행동 중 또는 그 이후의 과정에서 생기는, 행동을

들을 가능하게 하는데 그렇다. 그러나 만약 정부당

그르칠까 하는 두려움, 보복에 대한 두려움). 비폭

국이 과도한 제약과 통제를 통해 합법성을 부여한

력 행동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데, 특히 부상이나

다면 위협이 된다.

체포의 위험이 있다면 더욱 그렇다. 비폭력 행동을 위한 준비는 이 두려움을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에

비폭력 행동에 대한 구속은 좋을 수도 나쁠 수도

대한 학습을 포함한다. 그룹의 일원이 되는 것은

있다. 그것은 많은 부분 누가 구속을 결정하고 도

개인 수준에서 비폭력직접행동을 준비하는 것과

구화하느냐에 달려 있다. 비우호적인 정부당국이

비교해 볼 때 훨씬 큰 차이가 있다.(그룹을 구성하

구속을 요구하면, 비폭력의 총체적 힘이 억눌리곤

는 것의 긍정성)

한다. 활동가와 지역 공동체가 구속을 결정했을 때, 비폭력 행동은 더 나은 사회를 위한 강력한 도구

부상이나 체포에 대한 두려움만큼 중요한 또 다른

로 기능할 가능성이 커진다.

종류의 두려움이 있다 : 군중과는 다른 어떤 행동 을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사회의 통념을 벗어나

몇몇 사례를 통해 - 세르비아나 우크라이나 같은

고 눈에 띄는 존재가 되는 두려움이다. 비폭력 행

- 미국정부 기관으로부터 자금을 제공받았던 몇몇

동이 관습적인 것일 때는 두려움이 사라진다. 세계

운동에서 비폭력 행동이 독재에 맞서는데 매우 성

평화를 위한 서명행위는 어떠한 두려움도 들지 않

공적이었음이 증명되었다. 이것은 비폭력이 제도화

는다. 그러나 보스를 비난하는 청원에 서명하는 것

될 수 있는 또 다른 모습이다. 정부로부터 돈을 받

은 매우 위험할 수 있다.

는 것은 비폭력 행동이 폭넓은 합법성을 얻어냈다 는 의미지만, 재정지원의 조건이 직접적으로 제시 되거나 또는

재정지원을 위태롭게 하는 행위를

활동가들 스스로 피하게 됨으로써 비폭력 운동의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3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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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에 관여한 사람이 많을수록 더 안전해진다. 참

를 끌어들였는데 이를 더 적극적으로 도입할 필요

가자 수가 어떤 임계점을 넘어서면 그 활동이 극

가 있다.

적으로 확장이 된다. 1989년 동독에서 벌어진 저 항의 급속한 확장이 그 예다. 마찬가지로, 2003년

결론

3월 15일 이라크 침략에 맞서는 전 세계의 저항도 그렇다.

투쟁의 방법으로써의 ‘폭력이 ’ 없어지기까지의 길 은 여전히 멀다. 비폭력으로의 길에는 다양한 장애

비폭력 행동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두려움의 요소

물들이 놓여있으며 이들 각각은 활동가들이 넘어

를 늘리려고 노력하는데, 거의 사용될 가능성도 없

야할 과제이다. 지금까지 비폭력을 위한 노력의 다

는 가혹한 법률을 통과시키는 따위의 예를 들 수

섯 가지 영역을 살펴보았다. 가시화 또는 일상화

있다. 많은 피고용인들은 그들이 저항운동에 동참

(visibility), 사회적 평판reputation), 비폭력이 가

하거나 어떤 주장을 제기하면 해고당하거나 괴롭

지는 의미 알려내기(meaning), 비폭력의 제도화

힘을 당할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에 저자세를 유지

(institutionalisation) 그리고 두려움(fear)이 그것

한다. 정부는 다른 사람들에게 똑같은 일을 당할

이다.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몇몇 사람을 기 소함으로써 두려움을 증가시킬 수도 있다.

비폭력을 세계적으로 퍼뜨리는 것은 이러한 다섯 가지 영역 각각을 다루는 데에 가장 중요한 고려

활동가들은 연행과 같은 우발적 상황에 대한 대응

조건이다. 다양한 접근 방식을 시험해보고 우리의

을 역할극을 통해서 미리 연습해 봄으로써 두려움

통찰력을 공유함으로써, 우리는 빠르게 배워나갈

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들은 또 더 많은 이

수 있을 것이다. 비폭력을 세계화하는 것은 수단인

들이 큰 두려움 없이 동참할 수 있는 행동을 선택

동시에 목적이기도 하다.

하고 설계한다. 이미 100명의 사람들이 서명에 동 참했다면 탄원에 서명하는 행동은 더 안전해진다.

*브라이언 마틴은 울런공 대학 연합전공(과학, 공

법을 어기며 체포의 위협이 있는 직접행동을 하는

학, 사회학) 교수입니다. 그는 1970년대 후반부터

것은 순전히 개인의 의지와 선택에 달려있는 것이

비폭력 행동에 대해 연구해오면서 많은 책과 논문

다.(집단에 의해 강요받는 것이 아니라.)

을 썼고, 동시에 활동가 그룹에 속해 있기도 합니 다. WRI 웹사이트에서 볼 수 있는 그의 또 다른

군대는 군인들이 긴장된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싸 울 수 있는 방법을 발전시키기 위해 심리학자들을 이용해왔다. 비폭력 행동가들 역시 심리학적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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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은 다음과 같습니다: (다음 페이지)


Brian

Martin:

Technology

for

Nonviolent

군사적 분야에서까지도 “위로부터 지구화에 ” 맞서

Struggle, War Resisters' International, London

는 지구적 네트위킹의 필요성이 제기될 것이다. 오

2001. Available online in HTML and PDF

늘날의 전쟁과 부정의에 맞서는 행동주의는 인종

format.

분리 반대 투쟁을 단순히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Brian Martin: Nonviolence versus Capitalism,

중요한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는 성공적인 사례로

War Resisters'

분석해야 한다.

International, London 2001.

Available online in HTML and PDF format. Brian Martin, Social Defence: Arguments and

스테판 준스(Stephen Zunes), 정치학 교수, 샌프

actions.

란시스코 대학

In:

Shelley Anderson

and

Janet

Larmore, eds. Nonviolent Struggle and Social Defence, War Resisters' International, London

많은 서구 정부들은 서구 자본주의의 자비로운 영

1991. Also available as a single download.

향력이 남아프리카의 인종분리 시스템을 종식시켰 다고 주장하고 여러 좌파들은 해방은 오직 무장 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변

인종분리에 맞서는 비폭력 - 아래로부터 지구화의

화는 남아프리카와 해외에서 다수의 흑인들과 그

사례 연구

지지자들이 벌였던 비무장 저항에 크게 힘입었다.

1980년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인종분리 반대

1980년대의 저항은 1989년 9월 19일자 ‘Weekly

행동에 대한 국제적 지원이 확대되었고,

Argus' 사설에서 묘사했듯이 대중적인 비협조에 중

전세계

풀뿌리 조직들의 압력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대

심을 두고 있다.

한 국제적 제재를 이끌어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에서 폭력이 아닌 비폭력의 강조로 인종분리에 대

... 국가의 위협적인 권력이 약화되었다; 법에 의한

한 폭넓은 국제적 저항을 더 쉽게 이끌어 내었고

지배의 침식과 함께 법에 대한 존경심이 줄어들었

인종분리 체제를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고립시켰

다. 불가피하게 마지못해 동의하는 모습을 보이던

다. Stephen이 연구한 이 사례는 특별히 WRI를 위

최근의 경향마저 사그라들었고 SA는 개방적이고

해 쓰여 졌고, 일련의 두 번째 기사는 2006년 7월

계획적이며 조직된 저항 운동을 목격하고 있다.

독일에서 진행되는 “비폭력의 지구화” 국제회의를 위해 준비되고 있다. 이 글에 묘사된 지구적 네트 워킹은 오늘날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아래로 부터 자구화의 ” 초기 사례이며, 향후에는 경제적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3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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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의 인종분리을 극단적인 양극화로 이해

흑인들의 비폭력 행동은 권력을 잡고 난 후 예상

하기가 쉽다 해도(변화의 수단으로써 무장 투쟁을

되는 보복으로 결말이 예상되지 않는 관용적인 태

지지하는 경향을 보여왔던 모델), 높은 상호의존성

도의 표현으로 비췄다. 저항의 주된 수단으로써 무

(소수의 백인 지배계급이 부여한 불공정한 용어지

장 투쟁은, 비록 백인 사상자가 적었지만, 많은 백

만)은 비폭력 수단을 통해 전통적으로 양극화된

인들에게 최악의 사태에 대한 공포를 유발시켰다.

사회에서 가능한 것 이상으로 상당한 범위의 시장 조작을 이끌어냈다. 대략 50년간 흑인들은 남아프

백인 공동체 내에서 발생한 분열의 한 가지 양상

리카의 백인들에 의해 조정된 지역에서 살았는데

은 전쟁 저항이었는데, 1970년대 남아프리카의 나

여기에는 항구, 대도시, 산업도시, 광산, 최적화된

미비아 점령과 앙골라 침략에 반대하는 젊은이들

농업지역 등이 포함되며, 사실상 모든 홍인들과 아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뒤이어 징병폐지 운

시아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소수의 백인은 일상적으

동으로 발전했다. 이 운동은 정규군이 백인 마을로

로 다수의 흑인에게 많은 부분을 의존하며 지냈는

진입했던 1980년대 중반에 극적으로 성장했다.

데 단지 그들의 높은 생활 수준을 위한 의존이 아

1989년에만 1000명이나 되는 젊은이들이 공개적

니라 그들의 직접적인 생존을 위한 의존이었다. 비

으로 저항을 표시했고, 수 천명 이상이 덜 공식적

폭력 행동은 인종분리 시스템에 대해 폭력보다 더

인 방법으로 징병을 피했다. 저항은 자발적인 망명,

직접적인 도전을 만들어냈다.

잠적에서부터 자발적으로 군 징병을 거부하고 체 포, 투옥되는 사례를 포함했다. 일부는 종교적인

남아프리카 흑인의 압도적인 수적 우세는 1980년

평화주의자들이었으나, 대다수는 정치적 입장에 기

대 중반에 엄청난 규모로 동원을 시작했을 때 특

초해 저항했다.

히 효과적인 비폭력 행동을 만들어냈다. 비폭력 행 동은 진압에 맞서는 용기와 규율을 필요로 하지만

무단 거주자들에 대한 비폭력 방어를 지지하고 나

게릴라 군대보다 엄청나게 높은 비율의 참여를 이

선 백인들(이전에는 전혀 우호적이지 않던)의 활

끌어내서 다수 흑인의 힘을 극대화시켰다.

동적인 저항, 가령 케이프타운 근방의 크로스로드 같은, 은 정부당국의 파괴행위를 위협했다. 이 같

비폭력으로 방향을 크게 이동하자 백인들의 대중

은 사례들은 훗날 흑인 저항에 의해 촉진된 지배

적인 여론이 지속적인 백인 지배를 추구하던 사람

계층 내의 분열을 만들어냈다.

들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비폭력 행동은 정치 적으로 체제의 균형을 만들어냈다. 1980년대 비폭

비폭력 행동은 소수 백인 특권 계층 내 분열을 만

력 투쟁은 다수 흑인들의 통치 하의 삶의 전망을

들어내는 데 훨씬 막대한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훨씬 덜 두려운 것으로 만들었다. 대부분 백인들이

저항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혁명이 요구하는 불

자신들의 특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예상을 특별히

가피한 변화에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그리

반겼던 건 아니지만, 백인 압제자들에 맞선 다수

고 얼마나 큰 비용을 치룰 것인가 하는 문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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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을 얻는데 비폭력의 장점은 남아프리카 소수

들에 의한 대규모 비폭력 저항 덕분에 대다수 산

백인 가운데 잠재적으로 사리가 밝은 사람들, 나아

업화된 국가들은 인종분리 체제에 제재를 취했다.

가 세계 곳곳의 공동체에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국

노동조합, 교회, 학생, 그리고 좌파 조직들은 인종

제 여론은 엄청 중요했다. 인종주의 정책에 대한

분리 정부 내에서 일상적인 기업 활동이 불가능하

말뿐인 비난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산업주의 국가

도록 만들었다. 파도처럼 솟구쳐 오르는 연대활동

들은 무역, 산업 개발, 기술 원조, 자본 투입, 무기

은 1980년대 내내 진행된 남아프리카의 비폭력 저

등의 형태로 계속해서 남아프리카를 도왔다. 남아

항과 이에 따른 정부의 억압 때문에 가능했다. 반

프리카는 지난 40년간 지속된 인종분리 통치에 대

면에, 저항의 주된 분위기가 무장 투쟁이었다면 아

해 서방으로부터 지원받은 엄청난 원조가 없었다

마도 이런 정도의 동정심을 이끌어내지는 못했을

면 경제적 군사적으로 강력한 힘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대규모 동원은 국제사회의 제

것이다.

재를 매우 성공적인 것으로 이끌어내기에 충분했 다.

1980년대 중반 제재를 부과하기 전에는 서방과 남 아프리카 사이에 매년 130억 달러가 넘는 요역이

이 투쟁은 오래 동안 지속되었고, 매우 복합적이었

이루어졌는데 외국투자는 300억 달러에 달했으며,

으며 20세기에 벌어진 몇몇 유사한 투쟁처럼 배타

운송장비, 전자제품, 기계, 핵기술, 원거리 통신 장

적인 비폭력으로 흐르지 않았기 때문에 가장 중요

비와 서비스, 컴퓨터 기술, 화학품과 관련 제품들,

한 투쟁 가운데 하나였다. 이 투쟁은 많은 곳에서

종이와 제조업 제품들, 그리고 근대적으로 산업화

매우 많은 이들이 비폭력을 포기해왔음에도 불구

된 국가로써 남아프리카를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

하고, 저항 운동의 핵심 요소들은 사람들에게 저항

인 상품 등 기초적인 제품들을 광범위하게 공급했

운동의 힘을 인지시키고, 비무장 된 저항을 활성화

다. 게다가, 서방세계는 남아프리카 체제에 총합

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성공적인 해방의 경험으로

65억달러에 달하는 엄청난 채권과 은행돈을 빌려

증명하였다.

주었는데 이 중 대부분이 어떤 제한도 없이 정부 로 흘러갔다. UN안전보장 이사회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경제 제재를 비롯해 다른 징벌적 수단을 강구하겠다고 위협했을 때, 미국, 영국, 프랑스는 경제적 정치적 이익 때문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위 국가들과 인종분리 반대 행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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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eart of understanding' (Parallax Press) 1장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종이도 있을 수 없음을 우 리는 압니다. 더욱 깊이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리 자신도 그 안

- 김훈태 씨가 수감 시설 안에서 번역한 틱낫한

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아는 것은 어렵

스님의 글입니다.

지 않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이 종이를 바라볼 때, 종이는 우리 지각의 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당신

당신이 만일 시인이라면, 당신은 이 종이 안에 떠

의 마음은 이 종이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

가는 구름을 선명하게 볼 것입니다. 구름이 없다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모든 것

비는 내릴 수 없고, 비 없이는 나무가 자랄 수 없

이 이 종이 한 장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으며, 나무가 없다면 종이도 만들 수 없겠지요. 종

당신은 여기에 있지 않은 것을 단 한 개도 말할

이가 있기 위해서는 구름이 꼭 있어야 합니다. 이

수 없을 것입니다. 시간, 공간, 지구, 비, 흙 속의

곳에 구름이 없다면 종이 역시 이 곳에 있을 수

미네랄, 햇빛, 구름, 강, 온기 따위 말입니다. 모든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름과 종이가 더불어 있

것은 이 종이와 함께 존재합니다. 제가 'inter-be'

다(inter-be)고 할 수 있습니다. 'interbeing'이라는

라는 낱말이 사전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

낱말이 아직 사전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는 그래서입니다. '있다는 ' 곧 '더불어 있다입니 ' 다.

'inter-'라는 접두사와 동사 'to be'를 연결해

당신은 결코 당신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다른

'inter-be'라는 새 낱말을 만들 수 있습니다. 구름

모든 것과 더불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없다면 종이도 얻을 수 없기에 우리는 구름과

이 종이 한 장은 다른 모든 것입니다.

종이가 '더불어 있다고 '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그것이 처음 시작한 곳으로 이 종이를 더 깊이 들여다 본다면, 우리는 그 안에

돌려보낸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햇빛를 태양으로

서 햇빛도 볼 수 있습니다. 햇빛이 없으면 숲은 자

돌려보낸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이 종이

랄 수 없습니다. 사실 아무 것도 자랄 수 없겠지요.

가 있을 수나 있겠습니까? 아니지요. 햇빛 없이는

우리 자신도 햇빛 없이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그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벌목꾼을

렇기에 우리는 햇빛 역시 이 종이 안에 있음을 알

그의 어머니에게로 돌려보낸다면, 그 역시 우리는

고 있습니다. 종이와 햇빛은 더불어 있는 것입니다.

종이를 얻을 수 없습니다. 이 종이는 종이 아닌 것

그리고 계속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나무를 베어 그

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참입니다. 종이 아닌 것

것을 펄프공장으로 옮기는 벌목꾼도 볼 수 있습니

들을 그것들의 처음으로 돌려보낸다면 세상에 종

다. 그리고 밀(가루)도 보게 됩니다. 벌목꾼은 날

이는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 벌목군,

마다 빵을 먹어야 하고, 그 빵은 밀로 만들어지므

햇빛들과 같은 종이 아닌 것들이 없다면 종이는

로 밀 역시 이 종이 안에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얇은 종이 안에 우주만물이

벌목꾼의 아버지와 어머니 또한 그 안에 있습니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볼 때, 지금까지 살펴본 모든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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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동+재정보고 |

전쟁없는세상 이렇게 살았어요~

전쟁없는세상 팀별활동: 팀별활동은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 가능합니다. : 매체편집팀은 소식지를 편집회의를 통해 기획/제작하고 있습니다. 13호 소식지 제작을 함께할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 세미나팀에 커리주제를 제안해주세요. 커리주제가 정해지면 참가희망자들이 준비모임 을 가지고 본격적인 토론모임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전쟁없는세상 소식정리와 굵직한 활동보고입니다.

: 해외자료번역팀은 날맹이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함께 하시고 싶으신 분, 제안거리가 있으신 분들은 홈페이지 운영실 -> 팁별게시판 -> 해외자료번역팀 게시판을 참고하시거 나 날맹에게 연락주세요~

활동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지면관계상 안타깝게도 생락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열식인 점 사과드립니다.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 운영실에서 확인하세요~ ^ ^

: 수감자지원팀은 수감된 병역거부자들이 감옥 안에서도 밖과 소통할 수 있도록 개인요 청물과 회의록 및 편지를 담은 우편물을 정기적으로 발송하고 있습니다. 수감자지원팀에 관심이 있으신 분은 홈페이지 운영실->팀별게시판->수감자지원팀 게시판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또는 날맹에게 연락주세요~ : 영상팀은 수감되기 전, 출소한 후의 병역거부자들의 활동모습, 전쟁없는세상의 캠페인 등을 찍어 영상으로 남기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영상팀에 관심이 있으신 분은 전쟁없 는세상 사무실에 연락을 주시거나 조은( epilogue@empal.com )에게 메일보내주세요~

>>전쟁없는세상 11,12월 재정보고 ( 5월 10일 ~ 9월 23일) 산정 기간이 긴 관계로 구체적 지출 항목은 제외합니다. 자세한 내역은 홈페이지 게시판을 참조바랍니다. 지출총계 5월지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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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총계 452,350

5월-9월개인후원금총계

3,855,436

채무관계 받을돈총계

805,270

줄돈총계

808,490

6월지출계

1,116,870

7,8월지출계

927,750

9월지출계

136,550

이월금

526,471

총지출합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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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액(이월금+수입-지출)

1,731,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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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진, 이승규 : 가석방으로 출소 최진, 이승규 씨가 9월 29일 출소하였습니다.

:: 조정의민 : 가석방으로 출소 조정의민 씨가 8월 14일일 출소하였습니다.

:: 고동주 : 9월 21일 보석 취소 9월 12일 항소심 기각, 9월 21일 보석 취소되어 현재 영등포구치소에서 수감 중입니다.

:: 김도형 : 8월 17일 보석 취소 통지 8월 17일 보석 취소 통지를 받고 구속, 현재 영등포구치소 수감 중입니다.

:: 오정록 : 서산 구치소 수감 중 2월 7일 1년 6개월을 선고 받고 법정구속, 지금은 서산구치소 수감 중입니다.

:: 김태훈(부르뎅) : 서울구치소 수감 중 8월 17일 항소심이 기각, 9월 4일 기결수가 되어 현재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입니다.

:: 김영진 의정부 교도소로 이감되었습니다.

:: 이용석 : 인천구치소 수감 중 8월 22일 1심에서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현재 인천구치소에 수감 중입니다.

:: 김훈태 7월 5일 1심에서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현재 논산구치소에 수감 중입니다.

:: 최재영 : 진주교도소 수감 중 7월 7일 진주교도소로 이감, 4월 14일 1심에서 1년 6개월 형 받고 수감 중입니다.

:: 타랑 7월 10일 병역거부, 10월 26일 1심 심리공판이 있을 예정입니다.

:: 경수 7월 13일 병역거부, 9월 29일 2차 경찰조사. 곧 영장실질심사가 있을 예정입니다.

:: 수감된 병역거부자들의 주소 김훈태 충남 논산시 성동우체국 사서함 1호 370번 (우:320-941) 이용석 인천광역시 남인천우체국 사서함 343호 2232번 (우 405 600) 김영진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813번지 의정부교도소1723번(480-700) 김태훈 경기도 군포우체국 사서함 20호 수감번호 2494(435-050) 고동주 서울시 구로구 금천우체국 사서함 164호 영등포구치소 2437번우 ( :152-707) 오정록 충남 서산시 성연면 갈현리 산 31 서산 성연우체국 사서함 1호 서산구치지소 103번 (우 : 356-851) 문상현 충북 서 청주 우체국 사서함 100 청주교도소 수감번호 844번 (우 361-600) 김도형 서울시 구로구 금천우체국 사서함 164호 2479번 (우:152-707) 최재영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광석리 1204번 (600-912)

서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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