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없는세상 소식지 17호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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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ial

호흡을 가다듬으며.. 현지 | 전쟁없는세상 책임활동가 + slow-steady@hanmail.net

또 늦었다. 하루 이틀 이야기도 아니지만 이 게으름이 지겨워질 때도 된 것 같긴 한데 말이다. 이젠 정말 ‘게으름과의 ’ 연애가 지겨워졌는데.... 참 이 ‘게으름이란 ’ 녀석은 질기기도 하다. 이제 정말 이별을 고해야 할 때가 왔는데 끈질기게 날 따라다닌다. 다음 소식지가 나올 때쯤에는 '게으름과 ‘ 깔끔한 이별을 해야겠다.^^;;; 늦은만큼 내용과 편집이 모두 알차면 부끄럽지나 않으련만.. 부끄러워 소식지 보기가 참 민망할 따름이다. 매우 산만 하고 칠칠맞은 나이지만 소식지 편집을 할 때만큼은 엄청난 집중력과 세심함을 발휘하였었는데 이번 소식지를 마무리 할 때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정말 꾸역꾸역, 대충대충 일을 마무리하였다. 그래서 마지막 점검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러면 결과는 뻔한 것이다. 몇 번이고 소식지 편집본이 엉망진창으로 뒤죽박죽이 되어 눈물을 흘리며 손대고 또 손을 대야만 했 다. 그래서 소식지 편집이 끝나고 다시 2주라는 시간을 낭비해야만 했다. 자승자박이다. 쩝~ 5월이면 병역거부자의 날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것이 전부였는데.. 이젠 또 하나의 기억을 보태어 5월을 보내야 만 하게 되었다. 5월의 대추리. 이젠 기억 속에만 남아있게 된 그 곳을 기억하며 살아가야 한다. 지난 4일에는 대추분교 강제집행이 있은지 꼬박 1년이 되었던 날이었고 평택역에서 집회가 있었다.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엔 가지각색의 표 정들이 가득했다. 상실감, 결연함, 피로감 등등. 각자 기억하는 대추리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 보았다. 이젠 돌아 갈 수 없는 그 곳이지만 언제나 기억 속의 고향으로 남겨두고 또 다른 고향들을 지켜내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닐까 쓰린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17호 소식지에서는 5월 병역거부자의 날 특집으로 콜롬비아의 병역거부 내용을 싣게 되었다. 또 언제나 읽고 나면 마 음 한 곳이 따뜻해져 오는 병역거부자들의 수기를 강력추천한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고 삶에 쫓기며 엉뚱한 곳에 삶의 무 게를 싣고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본다. 세상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에서 가장 이상적인 모습은 ‘이물질이 개입되지 않은 관계라는 ’ 말을 들었다. 물론 정말 어려운 것이겠지만 우리 스스로 맺고 있는 수많은 관계들 속에는 너무 많은 이물질들이 개입되어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욕심, 질투, 미움, 의심 등등. 하루하루 수행하는 마음으로 이물질들을 내려놓으려 노력은 해보지만 정말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어느새 1년의 절반이 지나가려고 한다. 정신없이 달려온 길. 잠시 쉬어가며 뒤들 한 번 돌아보시길 바란다. 그리고 다 시 달리는 그 길에 평화가 함께 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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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투적 일상과의 대결 김훈태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현재 논산구치소에 수감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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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사는 게 그리 쉬운 줄 아십니까?"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이다. <씨알 함석헌>을 쓰신 이치석 선생이 젊은 날 함선생님 댁에 무작정 찾 아갔다가 면박처럼 들은 얘기라고 한다. 수감되기 전, 대전의 한 소박한 독서모임에 놀러갔다가 얻 어들은 그 얘기가 수감생활 내내 잊혀지지 않는다. 하루를 산다는 것,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제 수감된 지 열 달이 넘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정확히 308일째다. 다섯 달은 미징역방에서 앉음뱅이 생활을 했고, 나머지 다섯 달은 논산구치소 취장에서 오롯이 밥만 지었다. 솔직히 얘기하 면, 몹시 힘들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는 것도 그렇지만 좁은 방에 갇혀 독특한 성격의 사람들과 억지로 어울려 지내야 하는 게 쉽지 않았다. 옮기는 곳마다 내 한계를 가볍게 넘기는 비호 감이 꼭 한둘씩 있었다. 혐오 자체도 괴로웠지만 병역거부자로서(평화를 지향하는 자로서) 누군가를 혐오한다는 이율배반이 깊은 자책이 되어 스스로를 괴롭혔다. 극복하기 힘든 문제였다. 지루함도 혐오만큼 괴로운 것이었다. 이곳의 일상은 극히 단순하고 반복적이다. 나름대로 책도 읽고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해보지만 마음이란 놈은 어느새 풀어져 있곤 했다. 한번 지겨워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 몸에서 의욕과 기쁨이 빠져나가고 우울과 무기력이 머리 위를 뱅글뱅글 돈다. 음악 을 듣거나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떠나면 그나마 나을텐데 기분전환 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이곳 엔 출구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하루는 찾아오고 흘러가고 다시 찾아온다. 억지로 쓴 작문처럼 상투적인 일상 속에서 어떻게 든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쓴 빅터 프랭클은 대학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미래의 자신을 상상하며 아우슈비츠를 견뎌냈다고 한다. 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 에게도 그런 상상이 필요했다. 즐거웠던 기억과 즐거워질 미래를 열심히 떠올리며 우울함을 달래곤 했다. 그러나 그건 진통제에 지나지 않았다. 문제는 내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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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 L e t t e r s

아무 노력 없이 평안을 바라는 건 운동도 하지 않고 근육질 몸매를 꿈꾸는 것과 같다. (이것은 전형 적인 감옥 스타일의 비유이다. 많은 수인들이 늘어나는 뱃살을 고민하며 달리기를 하고, 가슴 근육 을 키우기 위해 팔굽혀펴기를 몇 백 개씩 한다.) 투쟁 없이 주어지는 것은 없다. 상투적인 일상을 벗 어나기 위해서는 날마다 싸워야 한다. 단, 병역거부자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그것은 평화적인 방법이어야 할 것이다. 나를 바꾸는 고민은 그런 것들이다. 감옥에서 평화롭지 못하다면 밖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단절적이지 않다. 사회나 감옥이나 비평화적인 것은 매한가지이므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싸우며 스스로 평화를 만들 어가야 하리라. 그러나 나는 번번이 진다. 날마다 패배이다. 습관적으로 쉬운 길을 택해 버린다. 사 랑 대신 경멸을, 대화 대신 침묵을, 웃음 대신 짜증을 택한다. 그래서 일상은 더욱 상투적으로 되어 간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이 하루가 나에겐 일생과 같다고. 새로운 아침마다 나는 다시 태어나고, 저녁 이 되면 모든 걸 내려놓고 죽음을 맞이한다. 아침마다 도전한다. 그리고 저녁마다 상실을 연습한다. 무엇보다 마음을 모아 지내려고 애쓴다. 그래서 꾸준히 일기를 쓰고 명상을 하고 절을 드려본다. 상 투적인 일상의 가죽을 찢어 그 너머에 닿으려 날마다 몸부림친다. 과연 희망은 있는 것일까? 모르겠 다. 아무래도 나는 영원히 패자일 것 같다. 하지만 끊임없는 이 대결 속에서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 곤 하니까 그걸로 됐다. 승패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김훈태 -2006년 3월 28일 병역거부 선언 -2006년 5월 22일 수감 -현재 논산구치소 수감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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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만들기 최재영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현재 진주교도소에 수감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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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비교적 인기가 많은 축구국가대표 A매치도 시청률이 50%를 넘기기 힘들만큼 TV 시청 률이 낮은 제가 있는 거실에 얼마 전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바로 '하얀거탑' 이라는 드라마입니다. 물론 저도 그 드라마 시청률 증가의 중심에 서서 열심히 시청하였습니다. 내용은 그다지 집중을 하 지 않아(극중 두 주인공 장준혁과 최도영의 아내들의 모습만 집중하였습니다ㅋㅋ . ) 특별히 언급할 건 없고, 드라마를 보면서 전 자꾸 주인공 장준혁이 예전에 스스로 세상을 등진 한 기업인과 비슷하게 느껴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와의 엄청난 거리감을 느꼈습니다. 과연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물론 저마다 행복의 기준과 그 정의가 달라 한 마디로 단정지을 수는 없 을 겁니다. 저의 경우엔 제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 맺어온 '작은 관계들에서 ' 행복을 느낍니다. 너무 평범하다고 느껴지시죠? 전 그 평범함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행복을 힘들게 멀리서 찾으려 하지 않 아도 저의 일상에서 너무 쉽게 찾을 수 있어서 제 삶을 항상 행복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어 행복하고(새로운 하루가 쌓여야 집에 가죠), 밤엔 꿈나라로 갈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계속 웃으며 지낸다고 옆에서 "징역사는 놈이 뭐가 그리도 좋아 계속 웃 고 있냐?" 라는 말을 들을만큼 낮시간은 행복한 시간의 연속입니다. 더구나 최근엔 작년에 징역경험(?) 부족으로 느끼지 못하고 지나쳤던 봄을 느낄 수 있어서 행복합니 다. 많은 사람들이 창밖으로 보이는 산에 만발한 진달래를 보면서 봄을 느끼지만, 전 점심 이후 엄 청난 무게로 저를 압박하는 눈꺼풀에서 봄을 느낍니다. 그 압박에 대처하는 방법은 사람들마다 다르 겠지만 전 아무런 저항없이 그 압박에 굴복(?)하고는 단잠에 빠져듭니다. 얼마나 꿀맛인지 모릅니다. 이렇게 낮잠에서도 행복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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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 L e t t e r s

징역살이를 해보신 분은 아실겁니다. 아무리 행복하다고 한들 그래도 징역인데 어떻게 어려움 없이 좋다고만 하겠습니까만, '기분이 좋아서 웃기도 하지만 웃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 말처럼 힘든 기억 들보단 여러분 주위에서 작은 행복을 찾아 느껴보세요. 행복은 늘 우리들 주위에 있고, 행복을 느끼고 생활하면 힘든 기억들은 우리에게 자리잡지 못하게 될겁니다. 새로움이 싹트는 이 봄처럼 여러분들에겐 행복이 싹트길 기도합니다.☮ 3월 27일 편지 나누어주는 시간을 기다리며 재영 드림.

최재영 -2005년 12월 6일 병역거부 -2006년 3월 6일 수감 -현재 진주교도소 수감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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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기사와 촬영기사 정재훈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2007년 2월 6일 병역거부 선언

1. 나는 버스 타는 걸 좋아한다. 우선 첫째로 창밖을 볼 수 있어서이고 둘째로 버스의 진동이 편안하게 느껴져서 잠도 잘 오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버스의 진동과 소리가 너무 싫다고 하는데 나는 그게 왜 그리 편한지 잠자기 시작하면 정신없이 자고 간혹 종점에서 내리기도 한다. 또한 버스기사는 매일 다르기 때문에 언제나 타고 가는 느낌, 즉 운전 스타일이 다르다. 언젠가 어떤 운전기사는 운전하는 내내 욕을 하고 경적을 울리기도 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어서오세요, 출발합니다. 꼭 잡으세요." 라며 부드럽고 안전하게 가는 운전기사도 있었다. 이 두 가지 예들이 모두 불편할 때도 있고 아무렇 지도 않기도 즐거울 때도 있지만 어쨌든 버스는 참 재밌고 좋다. 지하철은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기 는 하지만 너무 답답하다. 오래 걸리더라도 나는 버스를 탄다. 그리고 나는 꼭 어디로 가기 위해서 가 아니더라도 진동을 느끼고 창밖의 풍경을 보는 것이 즐거워 모르는 노선을 갈아타면서 버스를 타 고 돌아다니기도 한다. 2. 그렇지만 버스기사는 언제나 같은 길을 따라서 간다. 노선은 언제나 정해져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운전을 하던 아저씨가 두 갈래로 갈려진 길 앞에서 멈칫하면서 정해진 노선이 아닌 다른 길로 가고 싶어하는 순간을 느낀 적이 있다. 길을 가던 버스가 두 갈래 길 앞에서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고 버스는 정해진 노선대로 갔다. 나는 맨 앞에 타고 있었기에 그 모든 순간을 뚜렷하 게 느꼈다. 내가 아는 사람은 진짜로 다른 길로 빠져나간 버스를 탄 적이 있다고 했다. 노선을 벗어 난 버스의 승객들은 웅성거렸고 항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버스는 공공의 것이다. 승객 들은 어디로 가기위해, 목적을 가지고 각기 다른 노선의 버스를 탄다. 3. 나는 노량진에 있는 학원에서 강의를 찍는 촬영 아르바이트를 한다. 학원 내에서 강의를 찍는 목적 은 우선 인터넷에 올려서 동영상을 제공하기 위해서고, 넓은 강의실에서 뒤에 앉은 학생을 위해서 찍는다. 강의실 뒷편에 칠판 방향으로 설치되어 있는 두 대 혹은 한대의 TV는 녹화를 하고 있는 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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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 N O T E

코더와 연결되어서 실시간으로 눈이 나빠 뒤에 앉거나 강의 듣는 인원이 많아 뒤에 앉을 수밖에 없 어서 칠판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보여준다. 그러니까 생방송처럼 찍고 인터넷에 올리는 식 이다. 촬영은 어떤 매뉴얼을 가지고 있다. 왜냐면 보여줄 사람이 학생이라는 것이 분명하며 그 학생 들이 강의를 보는 목적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촬영을 할 때 중요한 것은 첫째로 사운드다. 교사가 하는 말의 내용은 곧 강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중요한건 칠판에 쓰는 판서이다. 교사가 칠판에 쓰는 것은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 만 학생에게는 필기꺼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판서가 정말 작아서 줌인(카메라가 고정된 상태에서 줌인렌즈를 변화시켜 피사체에 접근하는 것)을 통해 보여줘야 할 때가 있기도 하고 교탁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강의하는 교사는 패닝(카메라가 고정된 상태로 좌우로 움직이는 것)을 통해서 그 를 따라다녀야 한다. 말을 하는 사람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촬영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의 배우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찍어야 한다. 강의 내용의 흐름을 따라 충 실히 판서를 따라가고 교사를 따라간다. 그 넓은 강의실에서 강의하는 그 순간, 나는 다른 것을 찍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아예 빈 공간, 빈 책상, 의자들을 찍고 싶기도 하고 교사의 콧구멍을 찍고 싶기도 하며 열중해 있는 학생 의 눈을 찍고 싶기도 하고 일일이 열거하자면 정말 많다. 하지만 내가 그런 식으로 찍으면 난 아르 바이트를 더 이상 못하게 될 것이고 그 동영상은 인터넷에 올리지도 못할 것이며 올린다 하더라도 기존 동영상에 익숙한 학생들의 항의글과 전화가 빗발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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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 N O T E

4. 젠장. 그 많은 사람들의 눈과 귀가 된다는 것, 게다가 하나의 목적을 위해 거기에 내 몸을 움직인다 는 게 끔찍하다. 버스기사는 또한 어떠한가. 운전하는 그 순간 그는 거기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니다. 정해진 길 속에서 그도 나도 어쩔 수가 없다. 불특정 다수의 이동수단이 되거나 눈과 귀가 되 는 것. 그게 즐거울 수도 있고 즐거워서 하는 이도 있을 수 있지만 난 하나도 즐겁지가 않다. 난 촬 영하는 걸 좋아하고 즐겨하는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건 정말 더더욱 아닌 것 같다. 여기에 나는 없다.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만들었을 때, 테이크 아웃 커피점에서 카페라떼를 만들었 을 때가 생각난다. 이게 무슨 경영시스템인지 모르겠는데, 아마도 매뉴얼 경영이었던가 뭐 그런거겠 지. 매뉴얼대로 행동하고 생각하라! 회사는 움직일 몸을 요구하고 그 몸이 가야 할 길도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오예~ 얼씨구나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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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 N O T E 관계를 가로막는 욕심 내려놓기 최진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2006년 9월 청송교도소 출소

출소한지도 6개월이 지났습니다. 그간 저를 아껴주시는 선배들과 선생님들께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 기는 “너 왜 이리 교만해졌냐!”였습니다. 삼촌뻘 되시는 큰 형님 한 분은 차라리 군대 다녀온 것 만도 못 하다시며 그간 묵혀두었던 충고를 나직이 들려주시기도 하였습니다. 겨울 추위가 가시기 전 이었던 그날 새벽, 숲을 내려와 강을 따라 난 길을 따라 무던히도 걸었던 기억이 납니다. “영원한 지금”이라는 말이 있지요. 순간 순간을 지배하는 분노와 두려움과 욕심과 미움이 영원한 흔적이 되어 나의 가슴과 내 앞에 있 던 그의 가슴 속에 남아있습니다. 지울 길이 없지요. 다만 깊이 깊이 용서를 구하고 기다림과 감사 함으로 나의 다른 순간들을 새겨나갈 뿐입니다. 요즘엔 저와 아내의 집을 작은누리 식구들과 함께 짓고 있습니다. 13평, 작은 집이지만 큰 의미와 정성이 모여 지어지고 있습니다. 집을 세우며 자신을 허물어야할 것이 많음을 배웁니다. 가슴에 잠 들어있던 욕심이, 집이라는 현실이 되어버리면 그 열매는 그 누구의 삶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나의 사소한 욕심이 모여 자신을 망가뜨리고 관계를 허뭅니다. 무엇보다 함께 짓는 집이여서 더 많 은 배려와 포기가 필요합니다. 오늘은 상량식이 있습니다. 대들보를 올리는 것이 큰일이듯 나의 영혼을 짓누르는, 당신과 나의 관 계를 가로막는 욕심의 들보 하나 내려놓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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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 N O T E

겨울 보리 나를 짓밟는 자에게는 목숨으로 저항하겠다 그러나 겨울 앞둔 보리를 밟는 어진 농부의 따순 발바닥처럼 생의 겨울을 앞두고 어설피 쳐드는 나의 교만을 낮추는 당신의 충고는 목숨으로 받겠다 2006. 12. 9. -누리걸음-

최진 -2004년 5월 15일 병역거부 -2006년 3월 6일 수감 -2006년 9월 26일 청송교도소 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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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수다모임 조은 | 전쟁없는세상 책임활동가 + epilogue@empal.com

한국에서 페미니즘은 원죄이다. 한국에서 페

공간에는 서른 명 가량의 호러 마니아들로 그

미니즘이라는 단어에 덧씌워진 부정적 이미지

득했다. 그들 중 인상 깊었던 것은 남자 고등

는 좌파, 병역거부, 노동 등에 덧씌워진 억압적

학생 분과 중년의 남성분이었다. 페미니즘 같

인 도덕개념 만큼이나 근거가 없고 유치하다.

이 무서운 이론을 가장 꺼려하는 로맨스 집단

하지만 무섭다. 얼마나 많은 남성들이 페미니

에서도 역시나 이단아는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

즘이라는 단어만 접하면 사시나무 떨 듯 떨었

해주시는 두 분. 그 분들은 시종일관 진지한

는가. 이 무시무시한 페미니즘이 심지어 그들

자세로 수다에 동참하시고 같이 웃어주었다.

에게 도전을 한단다. ‘페미니즘의 도전!’, 이 얼 마나 무서운 책인가.

수다는 정리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주제로 진행되었다. 젠더의 중요성, 성별분업, 성매매,

무서운 책의 뒤풀이는 역시 무시무시했다.

젠더환원주의 등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식스센스를 뛰어넘는 반전은 첫 만남부터 터져

말들이 웃음과 눈물을 머금고 모임을 구성하였

나왔다. 읽는 이를 압도하는 논리력, 소름끼치

다. 수다가 진행되다보니 집단 상담소 같은 느

는 문제제기를 자랑하는 호러책의 저자 정희진

낌이 들 정도로 개개인의 진지한 고민이 이곳

선생님은 차분하고 냉정하고 논리 정연한 말투

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일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었다. 수줍어하면서도 빠르고 높은 톤의 말투, 본인의 말처럼 대중 앞에서 말하는 것에 훈련되지 않은 말솜씨와 산만함. 아, 이건 선생님 보다는 옆집 누나! 덕 분에 우리는 강의가 아닌 수다를 떨 수 있었 다. 엄숙해야할 토론이 아닌 수다라니, 지식인 의 사회에서 이 얼마나 무서운 뒤풀이인가. 많은 수다꾼들이 모였다. 홍보도 많이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오셨는지 평화박물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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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선생님은 여성학을 공부하고, 이 책

자 또한, 조금이라도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 다

을 쓰게 된 것은 페미니즘이 자신에게 깨달음

수자의 입장에 매몰돼 의도치 않게 소수자에게

의 쾌락을 주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하지만 지

상처를 줄 수 있다. 나는 페미니스트를 지향하

금은 여성주의에 대한 회의가 들고 힘이 든다

는 남성으로서 얼마만큼 내 스스로를 경계를

고 하셨다. 그 힘듦의 예로, 정희진 선생님이

하고 있는 것인가. ‘페미니즘의 도전’과 우리의

한겨레에 칼럼을 연재를 한 적이 있는데 이 칼

수다는 내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나의 고정

럼은 50대 남성에게 인기가 많았던 것을 들었

관념을 깨고, 내가 지닌 권력조차 제대로 인식

다. 선생님의 글이 그들에겐 정치학적으로 동

하지 못하였음을 들추어내주었다. 나는 마초성

의를 주진 않지만 그들에게 지적쾌락을 주었던

을 지닌 사람을 저열함을 내포한 대상으로만

것이 인기의 비결이란다. 그것은 ‘페미니즘의

봤지, 공존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았음을 고

도전이 ’ 정작 필요한 여성에게는 많이 공유되

백한다. 그들을 사랑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을

지 못하고, 책을 소화할 만한 지적 수준이 되

조금도 갖지 않았으면서 그들이 여성주의를 이

는 남성에게만 지적쾌락으로써 작용되는 것이

해하지 못한다고 은근히 무시했음이 부끄럽다.

고 이는 곧 여성주의를 공부함의 회의감으로

투쟁과 쟁취가 아닌 소통과 공존, 그것을 내면

다가왔다고 한다.

화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이야말로 우리의 수다 모임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아닐까한다.

하지만 선생님의 수다를 듣고 있노라면 이러한 회의감은 선생님의 도전에 큰 장애가 될 수 없

무시무시한 수다모임은 기념사진과 정희진 선

으리라는 믿음이 생긴다. 찬성과 반대의 이분

생님의 사인회를 마지막으로 끝맺음했지만, 우

법적 사고를 벗어나 여성의 눈으로 우리 사회

리의 책읽기모임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다음

를 새롭게 바라보자는 정희진 선생님의 수다는

번에는 어떠한 공포의 책읽기 모임이 펼쳐질지

기쁨과 충만함을 머금고 있다. 그가 여성주의

기대하시라. 어떠한 모임도 그대 마음속에 학

를 말하면서 보여주는 열정과 미소가 유지되는

습된 공포보다 무서운 것은 없을 터이니 두려

한, 페미니즘이 그에게 안겨주는 쾌락이 고갈

워하지 마시고 다음 모임에 오시길.☮

되지 않는 한 그의 도전은 끊임없이 발전하며 나아갈 것이다. 다수자가 소수자의 입장을 이해하고 위하는 것 은 쉬운 일이 아니다. 소수자의 문제는 다수자 에게 그닥 유용치 못한 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들은 대개 관심 없어한다. 어느 정도 소수자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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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 ․ 반전집회 후기 나동 | 전쟁없는세상 책임활동가 + peace1@jinbo.net

한미 FTA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을까? 참 가자보다 기자들이 엄청 많았다. 참가자는

할 자격이 없다. 그러면서도 왜 그들은 항상 뭐가 그리 당당할까!

1,000명이 조금 안 돼 보였는데 기자는 벌떼처 럼 모여들었다. FTA 반대 기류와 상관관계가

오랜만에 집회에 나오기 때문이기도 하고 봄

있다고 생각하고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나온

날이 왔기 때문이기도 했겠지. 일행은 모두 다

것 같았다.

소 들떠있었다. 기나긴 겨울, 그리고 계속된 학 원 아르바이트. 모처럼 사람들을 만나러 나오

경찰 대응도 과잉이다. 전경 숫자가 집회 대 오보다 훨씬 많다. 안전보장을 이유로 전투경

니 기분이 좋다. 그래도 여전히 봄이 덜 왔는 지 살짝 춥다.

찰을 동원하는 것도 잘못된 관성 중에 하나지 만 압도적인 병력으로 위압감을 조성하고 집회

조금 일찍 도착해서 부스를 차렸다. 부스는

자체를 원천봉쇄하겠다는 발상이 정말 안타깝

서울역 입구 계단 쪽에 세웠다. 처음 도착했을

기만 하다. 경제발전을 비롯해 한국 사회가 국

때는 양지였는데 시간이 지나자 건물 그림자가

제사회에 자랑하는 단골 메뉴가 몇 가지 있다.

드리워져 추웠다. 게다가 노숙자들이 너무 많

반면 구태의연한 집회 대처 모습은 정말 한국

았다. 문제는 문제인데 대부분 어떤 반응을 보

사회가 몸만 살찌워온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

여야 할 지 난감해한다. 노숙자들은 대개 거칠

을 갖게 만든다.

고 행동을 예측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전경 버스를 동원해서 서울역 전체를 둘러쌓 았다. 촛불집회 이후 새로 생긴 집회 대응 방 식이다. 참 어느 나라에서 이런 발상을 할까? 집회를 허가해 놓고 집회장 전체를 보이지 않 게 버스로 둘러막는 이런 희한한 방식 말이다. 가끔 종로 일대가 소위 ‘닭장차’로 가득한 모습 을 보면 짜증이 난다. 시위대에 교통체증 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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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과 엽서 보내기는 그렇게 큰 호응은 없

그리고 행진. 최근 삼엄한 분위기를 반영하

었다. 그래도 꾸준히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들

듯 경찰이 막아선다. 몸싸움이 약간 있었고 행

이 있어 고맙다. 오히려 수감자 피켓 쪽이 인

진을 허가하는 방향으로 결론이 났다. 행진에

기가 좋다. 진지하게 읽어보고 가는 사람들이

함께하고 오늘 캠페인은 마무리 되었다. 돌아

꽤 있다. 그 중에는 아직 군대를 다녀오지 않

오면서 든 생각은 한 가지. 병역거부 관련 캠

은 사람들도 있다. 깊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

페인도 어느 정도 관성화 되었다. 언제든 캠페

괜히 옆에서 한마디 거들어줘야 할 것 같은 느

인을 시작할 수 있게끔 장비도 마련이 되었고

낌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대체

선전물도 충분하다. 문제는 내용. 내용면에서

로 말을 아낀다.

뭔가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고, ‘평화란 무엇인 가?’, ‘평화를 위해서 지금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 한층 발전된 고민과 실천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지나치게 주변만 맴도는 것은 아닌가. 집단 속에 내 목소리가 묻히는 게 싫어서 그런 것이라면 이제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더 많이 찾아내야 할 때가 아닐까? 그런 상념 들을 품으며 돌아왔다.☮

집회가 시작되었다. 사회자 목소리가 낯익다. 평화난장을 함께해오던 경계를 넘어 활동가 지 은이다. 무심코 ‘오늘 사회 누구냐? 좀 서툴다.’ 고 말을 뱉었다가 지은이라는 사실을 알고 이 내 말을 바꾼다. ‘잘하네!’ 연사들의 발언이 계 속되었지만 우리는 주로 공연 때 더 열심히 호 응한다. 깃발이 없는 사람들이 부스 주위로 모 여들어 사람들이 제법 불어났다. 항상 행사 때 마다 비슷한 자리에 서게 되는 정체불명 공연 팀(??)도 보인다. 대추리에서 함께 싸웠던 이 들이 여럿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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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적 병역거부와 안보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연중시민토론 “시민, 안보를 말하다 ” 1 차 토론 여옥 | 전쟁없는세상 책임활동가 + yo1004@hanmail.net

지난 2월, 정부는 ‘비전2030 인적자원 활용

장의 사회로 진행된 토론은 한홍구 교수의 요

계획에 ’ 따라 군 복무기간을 점진적으로 단축

약발제로 시작하여, 6명의 시민패널의 발표와

하고 이와 함께 대체복무제를 단계적으로 폐지

참여연대 회원들의 다양한 의견과 뜨거운 논쟁

하는 대신 사회복무제를 도입한다고 발표했다.

의 장이 되었다. 한국사회에서 비교적 ‘진보적’

이에 대해 참여연대는 대체복무제의 형평성 문

이라고 생각되는 참여연대의 회원들도 양심적

제와 인력활용의 효율성 문제를 제고하기 위해

병역거부에 관해서는 많은 이견이 있었다. 하

사회복무제를 도입한다면서 양심적 병역거부자

지만 덕분에 무조건적인 욕설과 비난이 아닌,

들을 제외한 것은 매우 납득하기 어렵다는 내

병역거부를 반대하는 다양한 의견과 논리를 들

용을 골자로 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을 수 있는 자리였다.

하지만 성명서를 발표한 이후에 참여연대 홈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인정과 대체복무제

페이지에는 욕설과 비난의 댓글이 달렸고, 심

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 공동집행위원장 한홍

지어 회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있었다고 한

구 교수는 병역거부에 대한 개괄적 소개로 이

다. 그리하여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에서는 안

야기를 시작했다. 이어 한국전쟁을 겪고 국민

보를 소수 전문가들만 독점하는 것에서 벗어나

개병주의에 입각한 징병제도가 정착되면서 병

안보의 진짜 주인인 시민들이 이야기를 하고

역거부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한국의 상황에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보자는

대해 설명했다. 1950년대에는 길어야 1년으로

취지로 연중토론을 기획하던 중에, 첫 번째 주

처벌하던 것이 박정희 정권에 들어서는 형량이

제로 ‘양심적 병역거부와 안보’를 정했다.

점차 늘어나 한 사람에게 2-3차례 실형을 선 고하고 5-6년씩 감옥에 가두는 일도 빈번하게

대체복무제도는 공존을 위한 지혜로운 제도

일어났다고 했다. 2001년에 본격적인 병역거부 운동이 일어난 이후부터 현재까지는 재징집 되

3월 14일 저녁 7시 반, 참여연대 강당에 토 론자리가 마련되었다. 이대훈 평화군축센터 소

지 않을 최소한의 형량인 1년 6개월 형을 선고 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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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병역거부를 한 사람이 무려 1만 여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긍정적인 면(성인이

명에 달하고, 매년 600명 정도가 감옥에 수감

된다)이 있다, 백번 양보해서 병역거부를 인정

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 교수는 대체복무제도

할 수밖에 없다고 해도 아직은 때가 아니다

가 ‘양심의 자유와 국방의 의무가 충돌했을 때

등..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공동체의 지혜로운 제도임을 ’ 강조했다.

이에 대해 병역거부를 찬성하는 사람들의 반 박이 이어졌다. 우리나라보다 안보상황이 불안 한 나라에서도 이미 병역거부를 인정하고 대체

지난 2월 초 정부가 발표한 ‘비전2030’에 포

복무를 시행하고 있다, 총을 들지 않는다고 해

함된 사회복무제도는 중증 장애인을 제외하곤

서 이들을 감옥에 보내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예외 없이 병역의무를 이행하도록 했는데, 신

이들을 감옥에 보내는 인력낭비 대신 공동체에

체등급을 현역복무와 사회복무를 가르는 유일

기여할 수 있게끔 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군대

한 기준으로 삼은 점과 사회복무자에 대해서도

에 다녀와야 사람이 된다고 하는 건 기득권체

현행 대체복무제에서 4주간 시행하는 군사훈련

제에 적응하는 법을 배워오기 때문이다, 군대

을 1주일로 줄여 계속 시행하기로 한 점을 문

의 환경이 너무 열악해서 군복무 과정 생기는

제로 지적했다. 이것은 오히려 병역거부자의

트라우마의 표출이 양심적 병역거부 반대로 나

수적 증가를 불러올 예정이다. 사회복무제 도

타나기 때문에 군대 처우개선도 필요하다 등의

입으로 지금까지 신체등급에 따라 면제되었던

병역거부 찬성에 대한 이야기들이 쏟아져나왔

여호와의 증인들마저 감옥을 선택해야하기 때

다.

문이다. 정희진 씨는 병역거부를 반대하는 쪽에선 안 반대 VS 찬성

보와 형평성을 내세우는 반면 병역거부를 찬성 하는 쪽에서는 양심과 인권을 주장하고 있는

요약발제와 패널들의 발언이 끝난 후에는 참

데, 이렇게 서로 대화지점이 다르기 때문에 논

가자들의 치열한 공방이 오고갔다. 주로 나이

의의 차이를 좁히기 힘들다는 의견을 밝혔다.

가 많으신 참여연대 회원들이 병역거부를 반대

그리고 과연 대체복무제도가 병역거부를 인정

하는 것에 대한 주장을 펼쳤는데, 정리해보면

하는 가장 적절한 대안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다음과 같다.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문제제기를 했다. 대체복무제도는 국민성원권

병역거부를 인정한다면 안보공백이 생길 가능

자체가 넓어지는 것이고 이것은 국가주의가 강

성이 높다, 남자라면 누구나 군대에 가야하는

화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군사주의보다 국가주

데 예외를 둔다면 형평성에 문제가 생긴다, ‘양

의를 더 반대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

심이라는 ’ 말을 써서는 안된다, 군대를 안가본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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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혀지지 않는 의견 차이를 보며 끝날 것 같지 않던 토론을 마무리하면서 한홍구 교수는 “한국 전쟁 당시 한국군은 20 만 정도였는데 현재 70만 대군이 있다. 병역 자체의 총량을 계산하고 남북한이 불합리한 낭비를 줄이고, 서로 화해하고 군축해서 평 화로 나아가야 한다. 또한 안보의 판단과 군 대의 역할이 바뀌어 병역거부자를 인정하고 군사력을 증강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 셨다. 병역거부에 대해 가졌던 생각들을 서로 나 누고 고민하는 기회가 되었다는 점에서 꽤 의미있는 자리였다. 그렇다고 해서 병역거부 에 대한 찬성과 반대 사이에 의견 차이가 좁 혀진 것은 결코 아니다. 병역거부를 절대 인 정할 수 없다던 주장의 근거들이 적절한 설 명으로 모두 해명이 되었을 때도 병역거부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것은 어떠한 이유 때 문에 병역거부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을 해본다. 병역거부가 안보를 위협하지 않는다는 근 거가 아무리 충분해도 병역거부가 안보를 위 협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을 설득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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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사회에 한국의 병역거부를 알려야 ..” - ‘국경없는인권’ 윌리포트레 대표와의 병역거부 간담회 여옥 | 전쟁없는세상 책임활동가 + yo1004@hanmail.net

얼마전 여호와의증인 측에서 한국 병역거부

윌리 포트레 대표와의 첫 만남

자에 대한 특별보고서를 발간했다. ‘국경없는인 권(Human

Rights

Without

Frontiers

월요일 오전 10시. 기자회견도 아닌 간담회

International)’ 윌리 포트레 대표는 35년간 인

를 하기에 월요일 아침은 좀 무리였던 걸까.

권활동을 해오면서 병역거부문제에 관심을 갖

간담회 장소에 조금 일찍 도착해 텅빈 장소를

고, 그리스와 프랑스의 병역거부 보고서를 내

혼자 셋팅하다보니 우리가 직접 초청하여 마련

서 결국엔 두 나라 모두 병역거부 문제를 해결

한 자리가 아니라서 급하게 준비한 점이 걱정

하게끔 했다고 한다. 한국 정부는 유엔의 계속

되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평화네트워크, 전

되는 권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결할 의지마

쟁없는세상, 평화인권연대, 여호와의증인 등

저 없어보이는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운동을

15명의 사람이 평화박물관에 모여 앉았다. 윌

해야하는지 고민하던 차에 그의 활동방식이 도

리 포트레 대표의 제안으로 자기소개와 더불어

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병역거부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에 대해 돌아가며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는 인사시간을 가졌다. 소개의 마지막 순서로 윌리 포트레 대 표가 자신을 소개하며 간담회가 시작되었다. 자신은 벨기에 사람이고 35년간 인권운동을 해 오면서 병역거부문제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 져왔다고 했다. 그는 젊은 시절 병역거부를 하 고 싶었지만 “1년간 수감생활을 할 용기가 없 어서” 하지 못했다고 했다. 당시 간디와 마틴 루터킹을 존경하면서 사람 사이의 갈등을 비폭

평화박물관에서 있었던 ‘국경없는인권’ 윌리 포트레 대표와의 간담회 ⓒ프로메테우스 강 서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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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에 큰 관심을 가 지게 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인권과 병역거부 에 관련한 활동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스와 프랑스.. 그리고 한국 윌리 포트레 대표는 그동안의 활동에 대해

했다. “제도 개선이 우선이다”

이야기했다. 그는 90년대 중반까지 그리스의 병역거부자들을 돕기 위한 활동을 했는데, 당

193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 병역거부의 역사

시 그리스에서 병역거부를 하면 4년간 수감생

를 보면 전쟁이 일어나고 독재정권이 들어서는

활을 해야했고 그들의 99%는 여호와의증인이

등 다양한 정치적 상황에서도 병역거부는 계속

라고 했다. 다른 병역거부자들이 없었던 것은

되었다며 “특정체제나 상황 때문이 아니라 언

자신처럼 “감옥생활을 견딜만한 용기가 없어서”

제 어디서든 병역거부를 했을 것”이라고 했다.

라고 했다. 1990년대 프랑스에서도 병역거부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기본권 중의 하나이고

들은 1년 동안 수감생활을 해야했다. 캠페인,

특히 국가안보, 병력약화와는 상관없다는 게

기자회견 등을 통해 유럽연합에서 이 사항을

그의 설명이다. 독일은 냉전기에 병역거부를

알 수 있도록 활동을 했고, 이에 대한 특별보

인정했다. 서독은 현재 한국이 겪고 있는 문제

고서를 발간하고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해서 프

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동독으로부터 위협

랑스 정부가 그 중 하나를 수용하여 법률로 만

을 받는 상황이었지만 우려했던 문제는 일어나

드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지 않았다. 그리스는 터키와 군사적으로 적대 관계인 상황에서 병역거부를 인정했다. 그렇다 고 해서 터키가 침략했다거나 많은 수가 병역 거부로 몰리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은 전체 징 집대상자 중 0.7%가 병역거부자인데이 , 숫자로

윌리 포트레 대표 ⓒ 프로메테우스 강서희기자

국가안보가 위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다. 대만은 한국과 안보상황이 비슷함에도 불 구하고 대체복무제도를 도입했다. 그렇다고 해

그는 몇 년 전 한해 수백 명이 병역거부를 하고 감옥에 가는 한국의 병역거부문제에 대해

서 대만의 모든 젊은이가 병역거부를 한 것도 아니었고, 안보위기가 생기지도 않았다.

알게 되었고, 여호와의증인 신자를 만나 대법 원과 헌법재판소 판결 등 한국 상황을 알게 되

민변의 오재창 변호사는 여론의 문제점을 제

면서 그리스와 프랑스의 사례와 비슷한 방법으

시했다. 예전보다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

로 활동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스

히 확인되지 않은 안보에 대한 불안감과 피해

와 프랑스에서도 그랬지만 언어적 장벽 때문에

의식이 병역거부에 대한 토론을 불가능하게끔

국제적으로 알려지기 어려웠던 부분이 있어서

한다는 얘기다. 이 부분에 대해 윌리 포트레

영어로 특별보고서를 발간했던 것이라며 그런

대표는 법 제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의미에서 이번 한국 보고서는 중요하다고 강조 19


일단 복무기간을 현역보다 2배 정도 길게

력을 가할 것이라고 했다. 중요한 국회일정

라도 해서 대체복무제도를 도입하고 차츰 국

이나 국제회의를 미리 파악하고 전략적으로

제적인 기준에 맞게 줄여나가는 방법을 써야

접근하는 방법을 권하기도 했다. 인권문제를

한다면서, 긴 복무기간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다루는 전략적 차원에서 국경을 초월한 연대

에는 군복무와 대체복무의 기간이 거의 비슷

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 그의 생각에

해진 대만의 예를 들었다. 프랑스에서 사형

동의를 하면서도,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제도를 폐지하기까지는 여론의 반발이 많았 으나 사형제를 폐지하고나서 나중에 헌법에

‘인권의 ’ 가치란 무엇인지 좀더 깊은 고민

까지 넣기로 했는데도 별다른 반발이 없었던

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역거부운동

사례를 알려주었다. 제도가 바뀌면 여론은

에서 말하는 인권은 병역거부자들이 더이상

변화되기 마련이기 때문에 여론보다 제도화

양심상의 이유로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되는

를 우선적인 활동목표로 잡아야 한다는게 그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

의 주장이었다.

일상에 뿌리박혀있는 군사주의문화를 해체하 고 좀더 궁극적인 평화를 살아나갈 권리이기

인권의 가치

도 하다. 국제적인 공론화를 통해 병역거부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면서도, 과연 이 문

예상했던 대로 북한인권문제에 관련한 질 문이 나왔다. 윌리 포트레 대표는 자신이 그 문제에 5년 정도 관심을 가지고 함께 해왔다 고 했다. 북한은 비민주적 정부라서 여러 차 례 압력을 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며, 북한 의 구조상 시민들의 움직임이 있기 힘들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이것은 자유·보수주의 자들의 일관된 주장과 맥락을 같이 하는데, 북한인권과 관련된 논의의 여러 가지 문제점 -북한인권상황의 처참함을 강조함으로써 정 권교체주장, 햇볕·화해정책에 대한 공격, 반 북이데올로기와 레드컴플렉스 자극 등-과 다르지 않다. 윌리 포트레 대표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에서 한국의 병역거부문제를 해결하라고 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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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국제적으로 많이 알려진다고 해서 해결 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반문을 해본다.☮


콜롬비아의 병역거부 번역_2007 515 ․ 병역거부자의 날 준비팀

징병제도 - 미망인이거나 이혼한 어머니가 있는 경우 1991년 헌법의 제 261 조항은 강제적인 병

- 집안의 가장인 경우

역을 규정한다. “모든 콜롬비안 국민은 나라

-징집대상이 병역을 피하려고 하는 경우

의 자치권과 공공기관을 방어하기 위해서 공

-28살까지 징병 영장을 피하는 경우

공의 필요가 있을 때 무기를 들 소임이 있

-군복무 기록을 사는 경우 (살 수 있는 여

다. 법이 병역에서 제외될 개인과 복무하는

건이 되서)

자의 이득을 결정하는 조건들을 항시 결정한

-부적격자로 판정 받기 위해 의료 증빙서류

다.” 강제적인 병역은 1993년 통과된 법 No.

를 얻은 경우

48조와 대통령령 2048에 의해 규제된다. 신병모집 병역 두 가지 방식의 신병 모집이 있다: 합법적과 16세에서 28세의 모든 남성은 병역의 대상

비합법적(강제적)인 방식. 중등교육을 이수

이다. 병역은 중등교육 (학사)을 마친 개인

한 모든 젊은 남자는 나이를 막론하고 학교

에게는 1년, 아닌 다른 모든 개인에게는 2년

에 의해서 그 지역 지휘자(사령관)와 함께

이다.

접수된다. 중등교육을 받지 않은 이들은 18 살이 될 때 등록된다. 등록된 자들은 의학검

(병역) 연기와 제외

진을 받고, 적합하다고 판정되면, 군의 적절 한 부대로 배치 받기 위해 더 정밀한 검사를

병역 연기에 따른 정보는 이용할 수 없다.

받는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누가 입대하고

제외 대상이 될 수 있는 징집자

안 할지를 결정하기 위한 추첨을 한다. 최소

-심각한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있을 경우

합법 신병 모집의 나이는 16살이지만, 실제

-토착 인종 그룹의 구성원이거나 그들과 살

로는 15살에서 24살에 의해 병역이 이루어

고 있는 경우

지고 있다. 오직 40%의 중등교육을 받은 자 만 실제로 병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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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신병모집

차례와 실행

중등교육을 받지 않는 이들은 여러가지 형

양심적 병역거부의 지위를 얻기 위한 절차

태의 강제 신병모집의 피해자 일 수 있다.

는 없다. 자신이 양심적 병역 거부자라고 발

버스 정류장에서, 시장에서, 거리에서 군대는

표하는 이들에게 군대를 떠난다는 명백한 보

젊은이를 포착한다. 군 복무를 했다는 증거

장은 없다. 그들은 경찰력으로서 감옥 보초

자료나 확실한 면제의 근거 이유를 증명할

를 서거나 의무를 유기하고 숨어있어야 한

수 없는 이들은 신병모집 센터로 보내진다.

다. 만약 그들이 병역을 수행하길 거부한다

그들은 그리고 나서 나라 주변의 분쟁지역,

면, 유기죄를 추궁 당하고 감옥에 갈 수 있

경계지역, 숲, 늪지대의 아주 힘들고 위험한

다.

조건 속에서 병역을 수행하도록 흩어져 보내 진다. ? 이것은 ‘징병 대상자는 고향 주변에

대체 복무_대체 복무는 이용할 수 없다.

서 군복무를 한다’고 쓰여진 법 No. 48에 어 긋난다. 이런 종류의 강제 신병모집은 공식 적으로는 군에 의해 부정되고 있다.

1994년 령(Decree) 1743에 의해 규제되 는 1993년 법 No.99의 제 102조항은 환경 프로젝트(사업)을 함으로 병역을 이행하는

양심적 병역거부_합법적 권리

것을 허락한다. 이 제도는 그때의 교육환경 부에 의해서 지도 되었다. 하지만 징집자가

1991년 헌법 제18조항은 “양심의 자유는

이런 대체 복무를 통해 병역을 수행한 케이

보장된다. 아무도 자신의 양심을 거스르며

스는 없다. 정부가 루이스 가브리엘 칼다스

행동해야 하는 의무는 없다.”라고 말한다. 제

레온에게(이하 루이스 가브리엘) 이 선택을

18조항에는 양심적 병역 거부의 권리는 명

허락하지 않은 것처럼, 이것은 참된 대책이

백하게 보장되어 있지는 않지만, 양심적 병

아니다. 그 대신, 1995년 그는 한번도 복무

역거부는 이 조항이 만들어 질 때 토론 되었

대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 법원에

던 개념 중 하나이다. 그러나 입법부의 양심

회부되었고 유기자로 판결 받았다.

적 병역거부를 보장하려는 노력은 결실을 맺 지 못했다.

1994년 그는 군 당국에게 그가 양심적 병 역 거부자이고, 환경 프로젝트를 통해 대체 복무를 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1995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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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10일에 그는 경찰에게 잡혀 감옥에 보

부를 선언했다. 그들은 모두 병역의 ‘잉여 인

내졌다. 그는 1995년 11월 28일에 6개월 동

원’으로서 의무에서 제외되었다. 명백하게 군

안 복역한 뒤 풀려났다. 그는 출소 후 6일

은 새로운 양심적 병역거부자 케이스를 피하

이내에 군 징병 센터에 (출소 사실을) 보고

고 있다. 루이스 가브리엘의 케이스에 대해

안 할 경우 다시 수감될 것이라고 들었다.

잘 알고있는 옴부스맨은 양심적 병역거부를

그, 그의 가족과 그의 여자친구는 우파 준-

허락하는 새 법을 위한 캠페인을 시작했다.

군사조직이라 믿어지는 알 수 없는 개체들에 게 죽음 협박을 받았다. 그는 법정에 그가

징집 회피와 유기_처벌

양심적 병역거부자임을 선언하고, 왜 군복무 를 할 수 없는지 설명하러 갔다. 시 경찰은

1945년 법에 따르면, 영장에 응하지 않는

그에게 6일안에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그들

사람들은 태만자로 분류되고 대학에 들어가

은 새로운 구속영장을 그에게 발부했고, 그

거나 여권을 얻을 수 없게 된다. 병역을 거

래서 그는 Bogata에서 도망쳤다. 그의 가족

부하는 사람들은 유기자로 분류된다.

은 즉시 그가 어디에 숨어있는지 말해야만 한다고 협박 당했다. 검찰관은 그의 어머니

군 형사 규약의 제 3장의 제 115조항부터

를 대상으로 수사를 시작했다. 그의 케이스

117조항이 유기에 대한 처벌을 규정하고 있

는 인권위에게 이 경우 콜롬비아가 인권에

다. 제 115항은 6개월에서 2년의 수감생활

대한 아메리카 협정의 제 12조항을 위반한

을 유기에 대한 처벌로 규정하고 있다. 만약

다고 선포해주길 바라는 메노파 교회와 양심

유기가 전쟁기간이나, 국내 반란이나 사회적

적 병역거부 그룹에 의해 Bogota에 있는 아

불안, 또는 반란의 근접상태에서 일어나면

메리카 대륙 내 인권위에 상정 되었다. 위원

처벌은 두 배가 될 수 있다 (제 116조항).

회는 콜롬비아 정부와 루이스 가브리엘을 불

만약 유기자가 유기한 날의 8일 이내에 자발

러 이 사태를 협상하려고 했으나 콜롬비아

적으로 돌아오면 처벌은 절반으로 줄 수 있

정부는 루이스 가브리엘이 형을 수행할 때까

다 (제 117조항).

지 협상을 거부했다. 이것은 현재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으

실행

로 이어졌다. 이것은 루이스 가브리엘이 계 속 숨어 지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장에 반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강제로 병역을 수행하게 할 수 있다. 징집을 피하는

그 동안 많은 다른 이들도 양심적 병역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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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병역 레코드가 없으므로 직업을 구하

CO-ALERT] Luis Fernando Callejasrk

거나, 대학에 들어가거나, 계약을 맺거나, 재 병역거부자 Luis Fernando Callejasrk 가 강

산을 소유하거나, 나라를 떠날 수 없다.

제입영되었다반전인터내셔널은 12월 13일에 유기자들은 수감되고 그 후에는 다시 병역

25살이 되는 Luis가 12월 9일 Cali일대를

를 이행해야 한다. 감옥에서 그들은 자주 구

수색중인 콜롬비아군에 의해 강제입영되었음

타 당하고, 음식 없이 남겨지거나, 어떤 경로

을 오늘 알게 되었다.11일과 12일 밤사이

로든 군에 의해 신체적인 고통을 받는다.

콜롬비아군

3여단의

Ramos인근지역과

병사들이 Cali의

Mariano 이스라엘

Republica에 대한 수색을 감행하였고, 징집

4가지의 군의 강제 신병모집

연령의 젊은이들을 체포하였다. 시골의 게릴라와 준-군사조직에 의한 강 제 신병모집도 있다. 미국 국무부에 따르면,

판정되면, 군의 적절한 부대로 배치 받기

게릴라 습격, 군 대(對)반란활동, 게릴라와

위해 더 정밀한 검사를 받는다. 그리고 나서

준-군사조직의 징병, 그리고 마약 밀매업자

그들은 누가 입대하고 안 할지를 결정하기

의 토지 탈취는 자주 농민들에게 그들의 집

위한 추첨을 한다. 최소 합법 신병 모집의

과 땅을 떠나게 만든다.

나이는 16살이지만, 실제로는 15살에서 24 살에 의해 병역이 이루어지고 있다. 오직 40%의 중등교육을 받은 자만 실제로 병역하

연간통계

고 있다. 군은

146,300 부대로 구성되고,

67,300정도가 징병자다.

그들은

인구의

Luis

Fernando

Callejas는

공식적인

0.41%를 차지한다. 예비군은 60,700이다.

“remiso”(병역기피자)이며, 지금까지 그의

매년 약 350,000의 젊은이가 18살 즉, 징병

양심적 병역거부를 공개적으로 선언하지는

이 가능한 나이가 된다.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누이로부터 받은 정보 에 따르면 그는 콜롬비아의 무장충돌에 참여 하는 것에 반대하며, 비인간화와 테러가 자 행되는 과정에서 자신이 그 일부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계속해서 표현해왔다고 한다.

24


반전인터내셔널은 그의 안전에 대해 매우 염

있다. 전시나, 국내반란이나 공공불안, 반란

려하고 있다. 콜롬비아와 국제법에 따르면,

군이 인접해 있는 동안 탈영이 일어나면 처

그의 사례와 같이 억류에 의한 징병은 콜롬

벌은 곱절이 된다(116조). 틸영자가 탈영 8

비아에서 흔한 일일지라도 불법이다. 그러므

일이내 자발적으로 돌아온다면 형벌은 줄어

로 루이스를 현재 억류하는 것은 자의적이

든다(117조).

다. 반전인터내셔널은 Luis Fernando Callejas의 강제징집은 아메리칸 인권협약에 보장하고

즉각적인

석방과

군면제를

있는 개인적 자유의 권리(7조), 인간존엄의 보호(11조)와 이동의자유권(22조)을 위반한

요청한다. 마음

을 열 수만 있다면 삶은 가르침을 줄 것....

것이다. 과테말라의 유사한 사례 (CASE 10.975, 6 October 1993)에 대한 미대륙간

구스타보 몬로이(Gustavo Monroy)

인권위원회의 결정에 따르면 동일한 법적 보 증에 있는 1.1조와 연관되어 있다. 이것만으

마음을 열 수만 있다면 삶은 가르침을 줄

로도 그가 군에서 즉시 석방될 충분한 이유

것이다. 나는 행복을 위해 이 얘기를 꺼낸다.

가 된다.

그러나 매우 개인적인 이유에서이다. 내가 어릴 적 부모님과 함께 살 때조차 나는 인간

1991년 규약의 18조가 “양심의 자유가 보장

의 삶과 환경을 파괴하는 무기들, 사람의 자

된다. 누구도 자신의 양심에 반하여 행동하

리를 대신하는 무기들에 관해 생각했었다.

도록 강요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하고

몇 년이 흐르고 나는 어업에 전념했지만 내

있음에도 콜롬비아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

안에는 항상 인류를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

정하지 않고 있다. 1945년의 법조항에 따르

고자하는 욕망이 자라났다. 나는 최신 무기

면, 소집에 응하지 않는 이들은 “remiso”로

가 굶주림, 사람과 무기의 뒤바뀜, 가난을 끝

간주되며 대학에 들어가거나 여권을 얻을 수

장내고 여성과 남성 모든 이들에게 교육을

없다. 병역수행을 거부하는 자들은 탈영자로

제공할 거라 생각했었다.

간주된다. 비록 내가 생각이 완전히 확립되었던 것은 탈영에 대한 형벌은 군형법 3장 115-117조

아니지만 나는 훌륭한 투사가 되길 꿈꿨다.

에서 기술되어 있다. 115조는 탈영에 대한

투사가 되는 것만이,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형벌은 2년에서 6개월 수감으로 기술되어

끊임없이 일하는 전사가 되는 것만이 내가

25


바래왔던 꿈들을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

한다.

다. 그 때 나는 읽고 쓰는 것을 겨우 시작할 수 있는 소년이었다. 나는 정부군에 의한 폭력에

첫 모임 후 며칠이 지나고 나는 18여단에 임명

고통 받았다. 정부군은 단지 내 친구들, 친척

된 가브리엘 피자로(Gabriel Reveis Pizarro)

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학대만 한 것이 아니

장군의 명령 하에 있는 18번 기계화기병그룹

라 사람들을 암살하고 고문하고 강제로 추방하

(Mechanised Cavalry Group)에 의해 불법적으

였다. 이러한 행동들은 내 마음 속에 이러한 범

로 군대에 감금되었다. 이 부대는 스라베나-아

죄들에 대해 증오와 혐오감을 만들었다.

로카-콜롬비아(Sravena-Arauca-Colomibia)시 에 근거지를 두고 있다. 내 배경을 조사한 후

나는 좌파 ‘혁명그룹에 ’ 가담하게 되었고

그들은 나를 농민군(soldardos campesinos)의

그 곳에서 나는 내가 꿈꿔왔던 투사나 전사는

일원으로 징집하려고 하였다. 안돼요. 안됩니

내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

다. 나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그들이 내

다. 그것을 통해 나조차도 바뀌게 되었다. 처음

존엄과 윤리적인 신념을 밟아 뭉갤 때 저항했고

에는 거기에 함께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생각했

군대에 의해 가해진 귀청이 터질 것 같은 모욕

다. 하지만 모임에 함께 하고 나는 이것이야말

과 물리적 폭력 모두를 견뎠다.

로 내가 가야할 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또한 그것은 동의할 수 없는 내 일부에 불과하

나는 항상 어떤 군대라도 그 일원이 되고 싶

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나는 다른 사람의 삶을

지 않다는 내 입장을 고수했다. 나는 그들에게

앗아가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그

무기를 들지 않을 것이며 나의 고결함과 도덕적

럴 수 없고 그러지도 않을 것이다. 이것은 왜

원칙이 침해되는 상황에서는 어떠한 행동도 하

나는 투사 혹은 국가의 길을 걷는 것이 쉽지 않

지 않을 것이며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지도

은 가에 대한 것일 것이다.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의 윤리는 이것을 허 락지 않았다. 당시 나는 원칙과 꿈과 자유를 위

어느 날 오후 친구가 국제인권워크숍에 나를

한 일, 그리고 내 자신에 대해 방해받지 않고

초대했다. 나는 무기 없는 투쟁이나 저항에 대

개발이 허락된 어린 아이였다. 나는 무차별적으

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 워크숍을

로 목숨을 빼앗는 집총을 거부하며, 중산계급과

통해

Juvenil

그들만의 이윤과 방위를 위해 다국적기업들에

Estudiantil, Young Student Association)의

의해 자금이 조달되는 자본가들의 국가를 지키

일원이 되었다. 나는 이 조직의 이상을 사랑하

는 군대의 일원이 되는 것을 거부하여 이 부대

며 그들의 삶과 지역의 인권, 안전을 지켜나갈

에 의해 이틀 동안 감금되었다. 엄청난 폭풍우

수 있도록 젊은이들에게 힘을 주는 방법을 지지

가 지나간 그날 오후 나는 하마터면 내 자유의

26

나는

ASOJER(Asociacion


꿈이 꺼질 수도 있다, 나의 존엄성을 박탈할 수

ASOJER의 친구를 만났다. 나는 그에게 비록

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내 볼을 타고 흐르는

그렇게 하는 것이 고통스럽긴 하지만 ‘나는 이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의학적 검사를 받으

미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러 갔는데 텔레즈 상병이 낭만적이게 간호사에

나는 군복무를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

게 말했다. ‘1 혹은 2리터쯤 피를 뽑아라. 그

다. 집에 돌아와 나는 위험을 무릅쓸 결심을 하

러면 나는 빨갛고 걸쭉하고 풍부하고 게다가 맛

고 짐을 싸고 결론을 받아들였다. 전쟁에 동원

도 좋은 최고의 피를 조금 가져가겠다.’ 이후

될 수는 없었다. ‘만약 내가 죽음을 마주하게

나의 왼팔에는 염증이 생겼다. 내 모든 존엄을

되더라도 그것은 기꺼이 환영할 일이며 영원한

다해서 나는 용기를 냈고 이러한 상황에 관해

자유가 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부모님께

쓸 편지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그들에게 요청

말하기에는 고통스런 말들이다.

했다. 나는 때리지 말 것, 내 원칙을 깨뜨리는 비인간적인 행동을 하도록 나에게 요구하지 말 것.

모든 것은 변한다.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다. 내 친구라는 사람들은 거리에서 나를 볼 때면 나를 비겁자라고 부른다. 그늘은 나와 함께 놀

나를 군대에 징집할 목적으로 감금했던 2005

지 않으며 나를 시한폭탄이라 말한다. 내 가족

년 8월 8일 나에게 일어난 모든 것들은 자유를

들은 나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러한 것들은 내

위한 투쟁과 삶을 위한 협력적이며 포괄적인 모

가 감수해야 할 것이었다. 과거에는 잊는 것도

델을 만들고자 하는 욕망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

용서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현재 나로서는

라는 것을 증명해보였다. 나는 나를 지원해주고

나를 차별하고 그렇게 하려고 생각하고 나나 나

내 권리가 어떤 군대와 함께라도 전쟁터에 보내

의 사회적 이상을 믿지 않았던 모든 사람들을

질 수 없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국내, 국제단체

용서했다.

들과 항상 함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2005년 8월 9일 구금된 지 37시간 후 나는 군대 포로

13개월이 지난 오늘 나는 군사주의 모델과 경

신세, 모욕, 정신적 구박 텔레즈 상병으로부터

쟁하기 위해 사람들에 대한 모든 분노와 고통을

의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했다. 나는

증언한다. 당신은 개인의 투쟁이 사회의 많은

내 스스로 병역거부자임을 선언했다.

분야를 이롭게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을 것이 다. 무기는 절대 옳은 방법이 아니며 우리 아이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악몽은 끝나지

들의 꿈의 자유를 가져올 수 없다고 주장하고자

않은 것이다. 집에 돌아와 보니 엄마는 울고 있

한다. 나는 군전역증을 사길 거부한다. 내가 하

었고 아빠는 내 행동 때문에 나에게 끊임없이

지 않았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그러한 방법은 1

화를 내셨다. 나는 눈물이 날 만큼 무척 고통스

센타보(멕시코·필리핀·쿠바·브라질

러웠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나는 엄마와 함께

액 화폐 단위 1/100peso)도 전쟁에 기여하지 않

등의

27


는 것이다. 군전역증을 사는 것은 군수품을 살

동을 기다렸다. 아침식사로 나온, 옥수수가루에

수 있는 경비를 그들에게 주는 것이다. 그러나

초콜릿이 얹혀져 구워진 케이크부터 시작하여

신은 그들이 심지어 총탄 하나도 내 것으로 사

고메즈 중위가 창고에서 보여준 수많은 물건들

길 원치 않는다.

-축구공, 도미노, 탁구 라켓, 여러 벌의 카드-, 그리고 군부대 특유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비웃

[병역거부자 증언]

음과 냉소들은 나를 끊임없이 놀라게 하였다. "

안드레스 다니엘 히라우두 이야기 (2006)

어이, 몸조심하게, 병역거부자 친구, 총을 잡고 탄약통이 줄어드는 것을 보면 자네도 곧 모든

안드레스 다니엘 히라우두는 2006년 11월 1

것을 잊어버릴 수 있을거네, 그게 바로 내가 말

일, 보고타(Bogota)에서 메들린(Medelin)으로

하는 즐거움일세." 고메즈 중위가 이렇게 말하

가는 길에 불법적으로 연행, 감금되었다(CO

자 주위의 모든 이들이 얼굴에 위장칠을 하지

Alert, 2006년 11월 2일자 참조). 히라우두는

않고 귀고리도 하지 않은 나의 모습을 상상하며

같은 날 밤에 다시 풀려났다. (역주_아래는 히

비웃기 시작하였다.

라우두 자신이 부대에 붙잡혔다가 다시 풀려나 기까지의 과정을 서술한 것이다.)

아침 8시 30분, 그들은 서치라이트와 장비들 을 챙겨서 고속도로 순찰을 나갔다가 오후 12시

나는 저녁 9시에 보고타에서 출발하여 메들린

30분경에 15명의 젊은이들과 함께 되돌아왔다.

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새벽 12시 45분

우리는 부대원들과 함께 축구를 하면서 그들로

에 쿤디아나마르까 구아두아 시(市) 소재 국군

부터 군부대 경험이 얼마나 좋았는지, 새로운

부대가 내가 탄 버스를 정지시켰다. 우리는 고

정책이 얼마나 좋은지, 공공기관에서 그들이 받

속도로 위에서 새벽 1시 55분까지 붙잡혀 있다

는 대우가 얼마나 좋은 지 등등에 대해서 얘기

가, 구아두아 보병 부대로 옮겨졌다. 그 때가

를 들었다. 부대원 중에는 라 파즈에서 온 사람

새벽 2시 11분이었는데, 이 다음에 무슨 일이

이 셋, 보고타에서 온 사람이 둘, Huilences 에

일어났을 지는 누구라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

서 온 사람이 둘, 지역 토착민으로 부대에 징집

다. 부대의 격납고 안에는 13명의 젊은 군인들

된 사람이 한 명, 그리고 나머지 21명은 대서양

이 그들의 전차위에서 웃으며 떠들어대고 있었

해안 곳곳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다. 나는 고메즈(Gomez) 중위에게 내가 병역거 부자라는 것을 밝혔다.

우리를 다른 부대로 이동시킬 트럭에 탈 시점 에는 다섯 명을 뺀 나머지 스물 세 명의 사람들

새벽 5시 20분에 점호가 있었다. 불이 켜지

이 남았다. 제외된 다섯 명중 한 사람은 꽤나

자 양치를 하고 퀸테로 (Quintero)와 함께 대형

운이 좋은 편이었는데, 바로 안띠오끼아 연방

을 맞추어 서서 파까따띠바(Facatativa)로의 이

(Uni?n de Antioquia) 에서 온 스물 두살 먹은

28


티베리오 오소리오 (Tiberio Osorio) 라는 사람

줄을 맞추어 정렬하였고, 우리가 연행되어 감금

이다. 그는 초등학교를 겨우 3년을 다녔을 뿐이

되던 때에 징발하지 못했던 우리의 신분증 조사

었고, 그가 보고타로 일을 하기 위해 갔을 때

가 시작되었다. 나는 파까티바에 도착한 직후부

그는 자신의 마을을 처음으로 떠나보는 것이었

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정렬하도록 절대로 강

기 때문에 무척이나 두려웠다고 한다. 그는 자

요받지 않았음을 명확히 밝히고자 한다. 한 하

신이 보고타처럼 큰 도시에서는 아는 사람도 한

사관이 나를 부르더니 나에게 어디에서 왔냐고

명도 없지만 적어도 자신의 마을에서는 아는 사

물으면서 자신에게 잘 붙어있으라고 얘기하였

람도 많고, 심심할 때에는 언제는 자기 밭에 가

다. 솔직히 말하여서, 그 하사관은 나는 아주

서 딸기와 감자를 먹으면서 즐길 수 있다고 말

잘 대해주었고, 마치 내가 그의 가장 좋은 친구

하였다. 대도시에서는 누군가 자신에게 직업을

인 양 동행하면서 잘 대우해주었다. 그는 나에

묻지 않아도 자신의 손을 보면 이내 곧 자기가

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고, 질문을 던지기도

남성 성판매자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고, 오소

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내가 얘기했던 전통 토

리오 자신이 생각하기에 바로 그런 이유에서 고

착 민간 치료약들에 그가 몹시 흥미로워 했다는

메즈 중위가 자신을 풀어준 것 아니겠냐는 이야

것이다. 그 하사관의 옆에 있던 사람이 나를 보

기를 하였다.

더니 내가 군복무에 아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고 얘기를 하자, 바로 그 하사관은 내가 약초를

오후 2시 15분에 파까티바(Facativa)로 우리

구하러 가야하기 때문에 군부대에 머무를 수 없

를 태우고 갈 트럭이 도착하였다. 트럭이 움직

다고 대답하였다. 하사관의 이 대답은 나를 즐

이는 동안 우리는 고정된 자리에 앉아서 농담을

겁게 해주었다.

하기도 하고, 곰곰이 사색을 하기도 하고, 제복 을 입은 자신들의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를 떠올

소령이 부대에 도착하여서 사람들에게 군복무

려보기도 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군복무을 수행

를 거부하는 이유를 묻기 시작하였고, 이는 나

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의 병역거부를 받아들이게끔 하는데 아주 좋은

사람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소리치기 시작하

기회였다. 나는 대다수의 젊은 군인들이 병역거

였다. " 저는 평발입니다 ; 저는 천식을 앓고

부의 개념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을 뿐 더러

있습니다 ; 저는 팔이 부러졌습니다" 등등. 우

그런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을

리는 군복무를 피하기 위하여 수많은 선의의 거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

짓말을 하면서, 이송되는 동안 트럭 위에서 시

에 내가 다른 조사 없이 풀려날 수 있을 것이라

간을 때웠다.

는 생각을 하였다. 결국 나는 군부대에서 풀려 날 수 있었고, 내게 요구된 것은 단 하나, 정식

우리는 보병 제38대대인 미겔 안토니오 카로

으로 작성된 병역거부 선언서를 쓰는 것이었다.

(Miguel Antonio Caro)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조사를 받은 사람 중 나를 포함한 네 명이 풀려

29


났고, 우리가 부대에서 해야했던 것은 자신의

롬비아 국군에 입대하고 싶은 사람이 있느냐고

지역정보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나는 따로 확인

물었을 때 아무도 앞으로 나오지 못했고, 핑계

할 것이 없었고, 따라서 바로 다시 자유를 찾았

를 대기에 급급했다. 이로 인해 분명히 소령은

다.

매우 분노한 것이 틀림없다. 군복무를 면제받은 자를 제외한 나머지 열일곱명은 결국 입영을 위

나는 오후 5시 50분에 페나 (Pena) 병장과 함께 부대를 나섰다. 나는 페나 병장에게, 내가

한 신체검사를 받아야만 했고, 최종 판결만을 기다리고 있다.

다음 번에 다시 도로 위에서 군부대를 만났을 때 연행되지 않을 수 있는 병역거부자 인정 확

군에 억류당했던 병역거부자 안드레스 다니엘

인증을 받을 수 있겠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걱

히라우두(Andres Daniel Giraldo)

정말라고 하면서, 군부대가 다시는 나를 제지시 키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혹시나 다시 나를

11월 1일 병역거부를 선언했던 안드레스는 군

붙잡으려 한다면 자신에게 바로 전화를 하라면

에 억류당했다. 당시 그는 보고타에서 메들린으

서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었다.

로 가는 길이었는데 Facatavita부대 군인들이 정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안드레스에게

나는 그의 그러한 호의에 매우 놀라웠다. 나

군전역증을 보여줄 것을 요구하였다. 병역거부

는 군대 내에서 지시사항이 있었고 그래서 그들

를 선언한 안드레스가 군복무와 관련한 어떠한

이 그렇게 병역거부자인 나에게 우호적인 태도

서류도 가졌을리가 없었다. 물론 군인들을 안드

를 취하는 것인가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 날 벌

레스를 이해할 수가 없었고 그를 억류시켰다.

써 하루가 저물 시간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안드레스는 구아두아 보병부대로 끌려갔다.

꼭 그런 이유에서만은 아닌 것 같다. 그 군인의 호의의 원인을 분석해보며 내가 도달한 결론은,

안드레스는

보병

제38대대가

있는

내가 병역거부에 관한 수많은 법적 근거와 인용

Facatavita의 미겔 안토니오 카로 지역으로 이

문들을 제시하면서 일관되게 내가 절대로 군대

송되어져 신체검사를 받게 되는 상황이었다. 신

를 위해 복무할 수 없으며, 무기와 폭력은 결코

체검사를 받고나면 어느 지역에서 군복무를 하

공동체를 만들어나가는 방법이 될 수 없음을 밝

게 될지 결정되어지는 것이었다.

혔을 때 그들 역시 스스로에게 질문과 고민을 던져보게 되었고 그래서 나에게 그런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다행히 안드레스는 그가 활동하고 있던 단체 의 활동가 Red Juvenil과 통화할 수 있었고 Red juvenil에게서 얻은 정보를 가지고 아주

나와 같이 끌려간 젊은이들중 누구도 군복무 를 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소령이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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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착하게 군부대의 명령들에 대해 불복종할 수 있었다.


콜롬비아와 국제법에 의하면 현재의 안드레스

받거나 명령불복종으로 기소당할 위험한 상황에

경우와 같이 억류, 감금을 통한 군징집은 분명

놓여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매우 위험한 수준의

히 불법이다. 하지만 콜롬비아에서는 이런 일

언어적, 신체적 학대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안드레스를 억 류하는 것은 그냥 제멋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Co alert] Juan Carlos Montoya Munera

분명 헌법1991의 18조에 "...양심의 자유를

이번 주 콜롬비아 병역거부자 Juan Carlos

보장한다. 그 누구도 양심에 반하는 행위를 강

Montoya Munera(후안 카를로스)가 안티오키아

요받지 않는다."라고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

시 군당국에 의해 강제로 징집되어 BatallAn

고 콜롬비아 정부는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인정

Bombona Coronel DAaz의 병영에 수용되었다.

하지 않는다.

그 주 내내 콜롬비아 군당국은 안티오키아와 메 데인 시에서 다수 젊은이들을 강제로 징집했는

1945 법에 따르면 징집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데 여기에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도 포함

사람은 태만한 사람으로 여겨져 대학에 들어가

되었다. 10월 10일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이자

거나 여권을 발행받을 수 없다. 군복무를 거부

WRI의 Red Juvenil 지부 행동가인 Alejandro

하는 사람은 그냥 탈영병과 같은 탈선자로 여겨

Piedrahita가 50명의 젊은이들과 함께 군당국

지는 것이다.

에 의해 구금당했다. 그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 부를 공표하였고, 이후 군당국은 그를 비밀스럽

탈영에 대한 처벌들은 군형법 3장 115~117조 에 명시되어 있다. 115조에는 탈영에 대해서는

게 풀어주었는데 구금된 다른 젊은이들은 그 사 실을 알 수 없었다.

최소 6개월에서 최대 2년형까지 선고할 수 있 다고 나와 있다. 만약 이러한 탈영이 전시

다음 날, Red Juvenil의 행동가인 Hector

(wartime) 혹은 민중반란, 공공불안 상태에서

Fabian LondoAo는 젊은이들을 잡아 가두고 있

일어날 경우에는 군형법 116조에 의해 처벌이

는 군당국을 감시하는 작업 도중 구금되었다.

두 배로 과중되어질 수도 있다. 또한 117조에는

그 역시 병역거부를 선언했고, 군당국에 의해

탈영병이 8일 이내에 군으로 복귀할 경우 형량

구금되어 있던 동안 Red Juvenil로 불리웠다.

이 절반으로 축소됨을 명시하고 있다.

그 역시 석방되었다.

현재 안드레스의 상황은 불명확하다. 그가 여

콜롬비아 헌법 18조가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전히 구아두아 보병부대에 있는지 Facatavita의

인정하고 있지만, 국가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부대로 이송되었는지 알 수 없다.

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콜롬비아에서는 강제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안드레스가 군복무를 강요

징집이 일상적인 관습이다. 버스 정류장과 시장

31


과 거리에서 군당국은 젊은이들을 잡아간다. 군

입니다. 저는 20살이고, 8월 4일 Anderson

복무 기록이 있다거나 타당한 면제사유를 제시

Andras Anturi Ruaz라는 군인에 의해 Casabe

하지 못한 사람들은 징병센터로 끌려간다. 그리

군에 징집되었습니다. 당일 오전 저는 수리를

고 나서는 매우 거칠고 위험한 조건 아래에서

맡겼던 오토바이를 찾아서 제가 사는 La

군복무를 수행해야 하는 전투 지역, 국경 지대,

Soledad길로 돌아오기 위해 마을 시내로 갔습

산림과 늪지대 등 전국으로 배치된다. 징집병은

니다. 저는 농사짓는데 필요한 도구들을 사기

자신의 거주지 지역에서 군복무를 수행해야 한

위해 시내에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저는 군대

다는 서술을 포함한 법률 48조에도 불구하고

에 붙들렸고 제 의지에 반하여 그들은 저를 군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군당국은 이런 식으

으로 끌고 갔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께서

로 강제 징집된 사람들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부

는 노동이 불가능하고 형(남동생)은 간질로 고

인하고 있다.

통 받고 있기 때문에 가족이 경제적으로 제게 의지하고 있어서 군대에 갈 수 없다고 설명했습

전쟁저항자

인터내셔널은

Juan

Carlos

니다. 또한 저는 단 한 번도 무장 행위자들에게

Montoya Munera를 비롯해 양심에 따른 병역

동의한 적이 없으며, 저는 무기와 다른 사람을

거부자들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한다.

죽이는 행위에 반대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저의 말이 복무 거부의 이유가 되지 않

[co-alert] Carlos Andras Giraldo Hincapi

는다고 말했고 그 순간부터 저는 이미 군인이었 습니다.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이하 WRI)은 2006년 8 월 4일 군대에 강제 징집된 콜롬비아 젊은이

이곳에 있는 동안, 저는 학대와 모욕을 받아

Carlos Andras Giraldo Hincapi (COL14911)가

왔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제가 농부 출신 군인

받는 대우에 관하여 크게 염려하고 있습니다.

이기 때문에 시내의 도시 지역 보안을 맡게 될

징집 이후, 그는 군에 의해 혹사당하고 학대받

거라고 말했지만, 저는 산을 순찰하게 되었습니

아 왔습니다. Carlos Andras Giraldo Hincapi

다.

는 현재 군병원에 있으며, 콜롬비아 내의 어떤 무장 그룹에도 속하고 싶지 않다는 입장을 고수 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저는 병이 났고, 지난주에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저는 부모님과 형(남동생)이 처해있을 상황이 많이 걱정됩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상황을 아래 와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곳에 저의 의지와 반하여 와 있습니 다. 여러분께서 제가 이곳을 나갈 수 있도록 도

“제 이름은 Carlos Andras Giraldo Hinca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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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


르겠으며 여러분께서 저를 도와주시기를 부탁드 립니다.” 과테말라에서 일어났던 비슷한 사건(CASE 10.975, 6 October 1993)에 대한 미 국내 인권 위원회의

판례에

따르면

Carlos

Andras

Giraldo Hincapi의 강제징집은 “동 법률의 1.1 항과 관련하여 미국 인권 협약에서 보장하고 있 는 개인의 자유권(7조), 인간의 존엄을 보호할 권리(11조), 그리고 이동의 자유(22조)를 침해” 하고 있다. 이 것 만으로도 Carlos Andras Giraldo Hincapi를 군에서 즉시 면제할 충분한 사유가 된다. 게다가, Carlos Andras Giraldo Hincapi는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 규약]의 18조에 명시되어 있는 양심적 병역 거부권을 주 장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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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 수필 1 |

P.e.a.c.e.E.s.s.a.y “미친 학교” <틈새>에서 윤종 | 청소년 인권활동가 네트워크 활동가 + taekyoon73@hanmail.net

“우리 학교가 왜 미친 학교야! 우리 학굔 좋은 학교야!” 오늘은 광문고 학생부장이라는 교사가 손찌검에 배치기(;)까지 해대더니, 경찰까지 와서 실랑이를 벌였다. 학교 근처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는 게 불법이라던가, 정당하지 않다던가…. 광양중에 온 경찰 은 나한테 반말을 해서 경어를 써주시면 좋겠다고 부탁했더니, 나이가 몇 살이냐고, 자기한테 나만 한 자식이 있다고, 버르장머리 없다고 도리어 화를 낸다. 안 그래도 홍보를 위해 중고등학교 등하교 시간에 맞춰 돌아다니다보니 아주 죽을 맛인데, 이렇게 시비까지 붙으면 명치 부근이 아파오곤 한다. 으. “미친 학교 혁명하라”라는 학생인권 행사 이름이 적힌 전단지를 나눠주면, 그냥 무시하고 지나 가는 청소년들을 빼면 청소년들은 “미친 학교?”하면서 깔깔거리며 웃거나 “야 미친 학교래.”라 면서 피식하거나 “맞어, 우리 학교 미쳤어.”라고 맞장구를 친다. “미친 학교”라는 이름 붙임이 청소년들에게 공감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고 나름 재미있다는 것이다. 학교야, 너 정말 미쳤니? 그러나 “미친”이라는 수식어가 교사들이나 성인들, 아니면 좀 ‘큰’ 청소년들에게는 많이 부담 스러운 모양이다. 표현이 너무 과격하다거나, 합리적이어야 한다거나, 우리 학교가 왜 미쳤다거나, 여하간 각양각색으로 욕을 얻어먹고 있다. “미친 혁명을 혁명하라”라거나 “미친 학생을 혁명하 라”라거나 나름 패러디물(?)들도 쏟아지고 있다. 역시 단체들 연대회의 때는 문제가 되었던 “혁 명”이라는 말보다는, “미친 학교”라는 말이 훨씬 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거였다. “완전 미쳤 어~.”라거나 “미친 거 아냐?”처럼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는 학교가 미쳤다는 말들이 어느 정도 허용되지만, 대놓고 전단지와 현수막에서 “미친 학교”라고 부르니까 속이 안 좋은가보다. “어떻 게 신성한 학교를 미쳤다고 하니? 너 미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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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

누가 ‘미친 것을 ’ 규정하는지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학교는, 학교 ‘규율’에 적응하지 못하 는 우리를 정신병자나 생각이 없는 사람들로 몰아세우곤 했다. 그 사람들한테는 그렇게 규정하고 그 렇게 말할 권력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이번엔 아예 우리가 “미친 학교”라고 먼저 불러주기로 했다. 서로 누가 더 미쳤는지 싸우는 것 같군, 꼭. 나한테 ‘미성숙한’ 애들을 선동하지 말라고 말하고, 혼란을 일으키지 말라고 하고, 잘 하고 있 는 학교를 뒤흔들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내가 ‘평화로운 ’ 학교에 풍파를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하지만 내게 학교는 그다지 평화롭지 않다.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학교에 서 폭력을 당하고 있겠지. 비 오는 날, 교사들의 감시로 학내시위가 무산된 광양중학교를 올려다보 며 나는 슬픔과 혐오와, 하여간 이런저런 복잡한 감정에 잠겨있었다. 전단지 나눠주지 말고 학교 안 으로 들어와서 조사 좀 받자는 교사에게, 했다가 온갖 비난을 다 받은, “학교가 새삼 혐오스러워서 들어가고 싶지 않다.”란 말처럼... 그 말을 했더니 경찰에 신고 전화하면서 내가 ‘이상한 언행’을 한다고 하던데, 정말이지 내가 미친 건지 학교가 미친 건지. 운동을 하다보면 내 등 뒤에 점점 죄가 쌓여가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교사들, 학부모들, 경찰 들과 싸우고, “우리 애 공부시키게 좀 내버려둬요.”라고 울먹이며 말하는 학부모에게 “부모님 의 견보다 *** 씨의 의견을 존중해주십시오.”라고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말하는 나. 상대의 맥락에 공감하고 동의할 수 없기에, 그 맥락을 일부러 옆으로 치워두는 나. “미친 학교”라는 말에 흥분하 는 교사를 이해하면서도, “미친 학교”를 고집하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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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

분명히 나한테도 학교가 미쳤다고 규정할 권리는 없다. 원래 그런 권리는 누구에게도 있어선 안 된 다. 그냥 그렇게 내가 느끼니까 그렇게 말하고 쓸 뿐이다. 어쩌면 학교가 평화롭지 않으며 미쳤다는 인식을 공유하는 그런 사람들만 “미친 학교를 혁명하라” 행사에 올지도 모르겠다. 미친 학교와 미친 우리 사이의 틈새. 권력의 간극 같은 건 어쩌면 사소한 걸지도 모른다. 우린 그 저 서로 미쳤다고 하면서, 상처 입고 상처 줄 뿐인지도. 누가 미쳤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내 상 처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의 상처에 대해 들으면서도, 평화를 이야기하면서도, 별로 ‘적 (敵)’들에게는 평화적이지 못한 것 같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미친 학교”에 깔깔거리는 청소년들이 있으니까 또 우리는 “미친 학 교”라는 카피를 쓸 테지. 살아야 하니까 여하간... 우리가 내뱉은 말에, 우리 스스로 ' 조금은 ' 상처 받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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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 수필 2 |

P.e.a.c.e.E.s.s.a.y 혼자 떠난 여행이야기 아침 | 평화인권연대 활동가 + achimgirin@gmail.com

떠나기 전 복도 많은 팔자를 대변이라도 하듯 지지자들이 확 늘어버린 2월에 혼자 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다. 복 이 넘치지만, 받을 만한 그릇이 완성되지 않은 관계로, 혼자서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염두에 두지 않은 대가를 치루고야 말았다. 우선 여행을 간다는 마음가짐을 먹었다. 때가 되면 코에 낯선 바람을 잔뜩 집어넣어주어야 현실과 일상을 즐길 수 있다는 신념에 따라 날짜를 고르고 골라 2월로 잡았다. 1월에 시작한 강의가 끝나고 3월에 시작할 강의가 끝나는 주를 몽땅 빼버렸다. 그런데 막상 내가 정한 휴가가 다가오자 강의요청 이 들어오려는 것이었다. 예전과 달라 살짝 매여있는 몸이라 강의일정 잡히면 암것도 못할듯 싶어서 무조건 강의를 빼버렸다. 그러니까 무조건 서울을 떠야만했다. 그런데 어디로? 과연 내가 혼자서 할 수 있으려나? 하는 질문을 애써 외면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 다. 혼자서 뭔가를 해본 적이 별로 없다는 기억, 함께여야 뭔가 해내는 경험을 뛰어넘고 싶었다. 당 연히 시간이 맞아서 함께 할 것이라고 믿었던 친구들과의 일정이 안맞아버리자 초조해지기 시작했 다. 정말로 혼자간다면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여러 가지 이유를 가지고 지리산행을 결정했다. 나름 대로 나에겐 그것이 가장 쉬운 선택이었다. 몇 번의 경험이 있으므로 길을 잃지 않으리라는 확신도 있고, 산행은 무엇보다 성찰과 성취감을 얻 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설연휴 전에 지지자들의 지지도 듬뿍 받았고, 연휴에는 검단산에 친척들 과 오르면서 힘든 줄을 몰랐으니 결정하기가 쉬웠다. 기차표 끊고, 산장을 예약하고 필요한 물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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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 빌리고 새로 구입도 했다. 몇가지의 사고를 겪은 끝에 결국은 하루 늦게 출발하게 되었다. 하루 만 에 준비한다는 것이 무리였는지, 그 하루를 다른 이들의 필요에 응답하느라 시간을 써버려서인지 출 발시간이 가까이 오도록 제대로 짐을 꾸리지 못하고 있었다. 출발하는 날, 짐을 일찍부터 싸기 시작했다. 짐을 줄이기 위해 먹거리 일부를 많이 덜어내야만 했다. 핸드폰 밧데리를 가득 충전하면서 두려움에 대한 책을 보다가 지금 내게 필요한 글귀가 있어 옮겨 적는다. '만약 관념을 보지 않고 두려움 자체를 본다면, 실제 사실을 살펴본다면 두려움이란 단지 미 래라는, 내일이라는 관념이요 개념일 뿐이며, 그것이 두려움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 다.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것은 실제가 아니다.' 그 밑에는 '우리가 슬픔의 구조를 전부 이해할 때 그 래서 슬픔을 완전히 끝낼 때 모든 삶의 원형인 뭔가 낯설고 불가사의한 것을 찾아낼 가능성이 있다. (중략) 그 에너지는 어느 쪽으로도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폭발한다.' 라고 적혀있다. 또 옮겨 적는다. 그래. 난 삶의 원형을 찾으러 가는 거다. 폭발시키지 않고 흐르게 하기 위해서. 10시에 집을 나선다. 짐이 무거워 휘청거린다. 괜...찮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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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 입산 성삼재에서 노고단으로 올라가는 길. 사람들은 계속해서 나를 앞질러가고, 다리보다 어깨가 먼저 지친다. 다리는 괜찮아보여서 오르막이 심한 지름길을 이용한다. 캄캄한 숲길에서 그만 주저앉아 울고만 싶어진다. 그러면 내가 왜 이런 고생을 사서하는지 알 것만 같다. 잠시 그런 상 상을 하면서 모퉁이를 도니 노고단 산장의 불빛이 보인 다. 노고단 산장에서 식사를 하고 여유를 부리며 일기도 쓰 고 출발한다. 노고단에서 앞으로의 여정을 확인하니 더 실감이 난다. 금방 눈길이 나온다. 아이젠 신고 폭신한 눈길을 밟으면서 온다. 길이 편하다. 경사심한 오르막도 내리막도 없다. 포삭포삭. 포삭포삭포삭포삭 눈길 밟는 소리만 들린다. 외롭지 않다. 나는 산과 함께 있다! 변함없는. 늘 새로운. 의지가 되는. 산에 있다. 문득 내게 지리산은 엄마와 같다는 생각이 든 다. 푸근한 엄마의 모습을 즐기면서 가다보니 바위로 된 길도 나온다. 아이젠을 벗었다가 신었다가 하면서 투정을 부리면 세상사가 그렇다면서 어느새 절경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게 걸음을 이어간 다. 여전히 무거운 짐을 주체하지 못하다가도 절경에 취해 사진도 찍고 가져간 시집도 꺼내어 읽는 다. 가는 길은 새록새록 기억이 난다. 함께했던 친구들의 모습도 하나씩 기억이 난다. 헐떡거리며 쉬자 고 소리치던 친구, 물 떠오는 일 등을 도맡아 해주던 친구, 맛난 간식을 준비해준 친구, 무거운 짐을 나누어지던 친구들과 여전히 함께하는 듯하다. 쉬어갔던 곳도 기억이 난다.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었 는지도 새록새록 기억이 난다. 중간중간 쉬면서 여행의 지지자들에게 전화로 보고하기도 한다. 어디 쯤 왔으며 이제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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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 그렇게 산과 대화하고, 기억을 떠올리고, 나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는 사이에 사람들은 계속해서 앞 질러간다. 혼자만의 여행은 내 속도에 맞출 수 있는 것이 좋다. 여러 번 와보았으니 어느 정도의 시 간이 걸리는지도 알 수 있다. 좀 더 느긋하게 즐겨도 좋겠다는 걸 확인하면서 새삼 내 다리와 몸에 감사하게 된다. 식사를 하면서 앞질러갔던 사람들을 다시 만난다. 역시나 ‘여자혼자의 ’ 여행이 신기한 모양이다. 혼자서 온 사람들을 발견할 수 없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중에는 도움도 얻게 되고 저녁 에는 식사도 대접받는다. 덕분에 줄지 않은 짐들을 걱정하다가 나도 다른 이들에게 간식거리 등을 퍼준다. 길은 동쪽으로 갈수록 험해져간다. 폭신한 길보다는 바위길이 많다. 아이젠을 벗어야하는지, 계속 신 어야하는지 난감한 상황이 닥친다. 아예 돌아가면서 한쪽 발에만 아이젠을 신고 등산스틱을 이용해 본다. 왠지 조심스러워지면 꼭 넘어지게 된다. 그냥 확 한발씩 내딛으면 별 탈 없이 지날 수 있다. 괜히 닥치기 전에 벌벌 떨면서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그렇게 하나씩 배우면서 한뼘씩 마음이 자라 는 것을 느낀다. 엄마(지리산)를 만나면 이렇게 자라난 나를 확인할 수가 있어서 좋다.

그렇게 나의 성장을 확인하면서 장터목 산장에 도착한다. 새벽에 일출을 보러 천왕봉에 오를 것이다. 이전에는 일출을 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원했었다. 그런데 혼자서 그만큼 왔다는 대견함 에 더 이상 바랄 것도 없어진다. 그저 가보고 있으면 좋고, 안보아도 크게 실망할 일이 아닐 것 같 다. 우체통을 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니 엽서판매를 한다. 3장을 들고 수감되어있는 친구들에 게, 그리고 나에게 편지를 쓰다가 잠이 든다.

천왕봉에 오른다. 해를 기다리며 일기를 쓴다. 무언가 하늘이 꿈틀! 하더니 밝은 빛이 다가온다. 그 저 고마운 마음이 샘솟는다. 그리고 순간! 나와 태양이, 빛이, 산이, 자연이, 우주가 다르지 않게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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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 겨진다. 나름의 깨달음을 또 얻는다. 고맙게도! 기러기 당신이 꼭 좋은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참회를 하며 무릎으로 기어 사막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당신 육체 안에 있는 그 연약한 동물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게 하라. 내게 당신의 상처에 대해 말하라, 그러면 나의 상처에 대해 말하리라. 그러는 사이에도 세상은 돌아간다. 그러는 사이에도 태양과 비는 풍경을 가로질러 지나간다. 풀밭과 우거진 나무들 위로 산과 강 위로. 당신이 누구이든, 얼마나 외롭든 매 순간 세상은 당신을 초대하고 있다. - 메리 올리버 천왕봉에서 내려오는 길에 아이젠을 잊어버렸다가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의 도움으로 다시 찾는다. 혼자라는 건 없다. 역시 누군가, 무엇인가 존재하고 영향을 주고받고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것. 괜히 두려워하고 소심하게 행동할 필요는 없다. 도움이 필요하면, 요청하면 된다. 산에서 배운 것을 잊지 않기를 되새기면서 산을 내려온다.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 시간을 확인하지 못한 채로 한 대를 놓치고 2시간을 더 기다린다. 그래도 덕 분에 백무동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서울로 올라오니 다른 공기가 느껴 진다. 특히나 나에게서는 다른 냄새가 난다. 산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냄새가 난다. 신촌역 바글바글 한 사람들 틈에서 오직 나만 낯설다. 이질감 속에서 오직 나만 다르다는 것이 또 두려워진다. 꽃을 한송이 사들고 나서야 안심이 된다. 그렇게 나를 돌보면서 지내다보면 또 새로운 경험들을 통해 성 장한 나를 만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하루하루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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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약속 - 틱낫한 스님의 반야심경 풀이1) 번역 _ 김훈테논 ( 산구치소에 수감중인 병역거부자) + 정리나 _ 동

편집자 서문 세상의 모든 승가(僧家)에서는, 불교의 바탈로 여기는 반야심경을 매일 낭송하거나 독송합니다. 이 책에 나오는 틱낫한 스님의 해설은 2500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 이래로 입에서 입으로 이어져오던 근본 불교의 일부입니다. 반야(완벽한 깨달음의 알속 또는 알짬)에 관한 문헌은 서력기원(예수 시대) 시작 즈음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인도에서 시작해 중국, 베트남, 한국, 티벳, 일본으로 전파된 대 승불교 나라에서는 2000여 년간 반야를 가르치고 배워왔습니다. 근래 들어 이러한 가르침은 영어로도 가능해졌고, 30년 넘게 선승과 티벳의 스승들이 쓴 명상서적 을 통해 서양에도 가르침이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양인들은 그러한 가르침을 어렵게 여 겼습니다. 1987년 봄, 베트남의 선승이자 시인이며 평화운동가인 틱낫한 스님은 캘리포니아, 퍼시픽 노스웨스 트, 콜로라도, 뉴잉글랜드, 그리고 뉴욕 등지에서 명상과 강연 강좌를 연이어 열었습니다. 스님은 “미국적인 불교”의 참모습을 찾기 위해 구도(求道)에 동참한 미국인 청중을 북돋았습니다. 그것은 외부의 것이 아니라 우리들 깨달음의 깊은 데에서 솟아나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불교는 단 하나가 아니에요. 불교의 가르침은 다양하지요. 불교가 한 나라에 전파될 때, 그 나라 는 늘 새로운 형태의 불교를 받아들입니다. 그곳에서 불교의 가르침은 다른 나라 것과 다를 거예요. 참된 불교가 되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가치와 문화에 꼭 알맞은 불교여야 합니다.” 타이(Thay : 스승. 틱낫한 스님을 일컬음)의 반야심경 강연은 우리의 깨달음을 넉넉하게 하였고, 지적인 탐구를 도왔습니다. 캘리포니아 오자이에서 열린 공개 강연에는 칠팔백 명이 와서 들었습니 다. 오륙십 명은 집단명상에도 참여했습니다. 여러 예술가와 명상가들이 로스 파드레스 산 들머리의 1) 이번 호부터 병역거부자 김훈태 씨가 번역하고 있는 <반야심경>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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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갈참나무 아래에 앉아, 이른 아침의 멧새 소리 같고 따뜻한 산들바람의 감촉 같기도 한, 부 드럽지만 통찰력 있는 타이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반야심경에 대한 스님의 풀이는 명확하면서도 이해가 쉬워 이 오래된 가르침을 살아 숨쉬는 깨달음으로 만들어줍니다. 이 책은 여러 개의 강줄기 가 모여 하나가 되듯, 스님의 여러 말씀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명상을 하는 동안 타이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고요하고 맑은 눈으로 마음을 모아 생활하도록 격려 하셨습니다. 밥을 먹거나 불상을 그릴 때, 또는 그저 조용히 걸을 때 발이 땅에 닿는 것을 알아차리 도록 말입니다. 이렇게 마음 모음의 상태를 북돋기 위해 큰 종을 때리기도 합니다. 그러면 모든 사 람은 움직임을 멈춘 뒤 숨을 세 번 들이 내쉬고 조용히 “들어라, 들어라, 이 거룩한 소리는 우리를 참 자아로 돌아가게 해주나니” 라고 외는 것입니다. “종은 보살이예요.” 타이가 말씀하셨습니다. “종은 우리를 일깨워줍니다.”종소리가 우리를 마음 안으로 이끌 때, 우리는 정원을 다듬는 연장과 망치, 페인트 붓 또는 펜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연스럽게 숨을 들이 내쉬고 잔잔한 미소로 자기 주위의 모든 것 - 사람들, 나무, 꽃, 가볍게 뛰는 아이, 근심 걱정과 괴로움까지 - 을 향해 웃으며 본래의 나로 잠시 돌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깊이 들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종소리와 하나가 됩니다. 종소리가 우리의 마음 안쪽에서 굵고 낮게 울려 퍼지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 순간이 지 난 뒤 우리는 아마 좀 더 집중력 있고 깨어있는 마음으로, 새 힘을 얻어 일상을 다시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오직 종만이 보살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물건이든 지금 즉시 우리를 일깨우고 편안하 게 할 수 있습니다. “불교는 즐거운 삶을 위한 슬기로운 방편입니다.” 라고 타이가 말씀하셨지요. 저는 그러한 가르침에 따라 이 작은 책을 읽기를 제안하며, 그리하여 당신도 참된 깨달음을 얻기를 바랍니다. 부디 종소리를 듣는 것처럼 읽으십시오. 당신의 하루 일과를 잠시 내려놓고, 몸과 마음을 모두 편안하게 하여 앉은 뒤, 이 훌륭한 법문이 당신의 내면에서 굵고 낮게 울려퍼지도록 하세요. 만약 당신이 당신 자신과 이 책을 그와 같은 방법으로 하나가 되게 한다면, 당신은 많은 시간 충 만한 종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종이 울릴 때면 잠시 책을 덮고, 당신의 깊은 곳에서 메아리치는 그 소리를 들으세요. 가만히 숨을 고르고 웃음을 머금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대부분 그것이 처음엔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은 할 수 있어요!” 라고 격려하시 던 타이의 음성을 여전히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방법을 통해 당신은 마음 깊이 반야심경과 아주 가까워질 것입니다. 손에 닿을 만큼 말입니다. 우리가 자비로울 수 있다면, 세상의 평화는 먼 것일까 요? 1988년 4월 캘리포니아 말리부에서 피터 래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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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있음(INTERBEING) 당신이 시인이라면 이 종이 안에 떠가는 구름을 뚜렷이 볼 수 있을 거예요. 구름 없이 비는 내릴 수 없고, 비 없이는 나무가 자랄 수 없으며, 나무가 없다면 종이도 만들 수 없지요. 종이가 존재하기 위해 구름은 꼭 있어야 합니다. 이곳에 구름이 없다면 종이 역시 이곳에 있을 수 없어요. 그래서 우 리는 구름과 종이가 더불어 있다(inter-are)고 말할 수 있지요. ‘interbeing’이란 낱말이 아직 사전에 나와 있진 않지만, ‘inter-’라는 접두사와 동사 ‘to be’를 연결해 ‘inter-be’라는 새 낱말을 만들 수 있습니다. 구름 없이는 종이를 얻을 수 없기에 우리는 구름과 종이가 ‘더불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거예요. 우리가 이 종이를 더 깊이 들여다본다면, 그 안에서 햇빛도 볼 수 있습니다. 햇빛이 없으면 숲은 자랄 수 없어요. 사실 아무것도 자랄 수 없지요. 우리 자신도 햇빛 없이는 자랄 수 없습니다. 그렇기 에 우리는 햇빛 역시 이 종이 안에 있음을 알고 있어요. 종이와 햇빛은 더불어 있는 거지요. 그리고 계속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무를 베어 펄프공장으로 옮기는 벌목꾼도 볼 수 있어요. 또 통밀도 볼 수 있습니다. 벌목꾼은 날마다 빵을 먹어야 하고, 그 빵은 통밀로 만드니까, 통밀 역시 이 종이 안에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지요. 벌목꾼의 아버지와 어머니 또한 그 안에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볼 때, 지금까지 살펴본 모든 것이 없으면 이 종이도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좀 더 깊이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리 자신도 그 안에 있음을 알 수 있어요. 그걸 아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이 종이를 바라볼 때, 종이는 이미 우리 인식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지요. 당신의 마음도 이 안에 있는 거예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삼라만상이 이 종이 한 장 안에 있다 고 말 할 수 있어요. 여기에 있지 않은 것을 당신은 단 하나도 말할 수 없을 거예요. 시간, 공간, 지구, 비, 흙 속의 미 네랄, 햇빛, 구름, 강, 온기 따위 말입니다. 모든 것이 이 종이와 함께 존재합니다. 그래서 저는 ‘inter-be’라는 낱말이 사전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해요. ‘있다’는 곧 ‘더불어 있다’입니다. 당신은 절대 당신 혼자 있을 수 없어요. 다른 모든 것과 더불어 있을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이 종 이 한 장은 다른 모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그것의 본디 자리로 돌려보낸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햇빛을 태양으로 돌려보 낸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러면 이 종이가 있을 수 있을까요? 아니요, 햇빛 없이는 아무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벌목꾼을 그의 어머니에게 되돌려 보내도 역시 우리는 종이를 얻을 수 없지요. 이 종이는 ‘종이 아닌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진실이에요. 종이 아닌 것들을 그것들의 본 디 자리로 돌려보낸다면 종이는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 벌목꾼, 햇빛과 같이 종이 아 닌 것들이 없다면 종이는 여기에 있지 못합니다. 이 얇은 종이 안에 우주만물이 들어 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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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반야심경은

반대로

말하는

듯이

보일지도

모릅니다.

아발로키테쉬바라

(Avalokiteshvara:관세음보살)는 그것들이 비어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자, 더 자세하게 살펴봅시다.

무엇이 비어있는가? “보리살타이신 아발로키타께서 깊은 선정(禪定)에 드셨을 때, 다섯 스칸다(five skandhas : 몸과 마음을 이루는 다섯 요소. 오온 五蘊 -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를 밝게 비추시고, 그것들이 똑같이 비어있음을 깨달으셨느니라.” ‘보리(bodhi)’는

‘깨달음’을,

‘살타(sattva)’는

‘살아

있는

존재’를

뜻하며,

그래서

‘보

리살타(bodhisattva)’의 뜻은 ‘깨달은 이’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따금 보살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요. 아발로키타는 이 경전에 나오는 보살의 이름입니다. 아발로키테쉬바라를 줄여 아발로키타라 고 부르지요. 반야심경은 아발로키타 보살이 우리에게 주는 놀라운 선물이예요. 중국과 베트남, 한 국, 그리고 일본에서는 그를 콴인, 쿠안암, 관음, 또는 카논이라고 부르며, 그 뜻은 “도움의 손길을 바라는 세상의 울음소리를 듣는 이”입니다. 동양에서는 많은 불교도들이 그에게 기도를 드리거나 그의 이름을 외웁니다. 아발로키타 보살은 두려움을 스스로 극복했기에, 우리에게 ‘두렵지 않 음’(non-fear : 무유공포)이라는 선물을 주었어요.(이따금 아발로키타는 남성이기도 하고 여성이기 도 해요.) 반야바라밀다(prajnaparamita)란 곧 완벽한 깨달음입니다. 반야를 흔히 ‘지혜’라는 말로 옮기지 만, 저는 지혜가 반야의 뜻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깨달음은 강줄기를 따라 흐르는 물과 같지요. 지혜나 지식처럼 딱딱한 말은 도리어 우리의 깨달음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는 지식이 오히려 깨달음에 장애가 된다고 여기지요. 우리가 어떤 것을 참이라 규정해버리면, 우리 는 그것에 지나치게 집착할 수도 있어요. 참(진리)이 우리의 방문 앞에 다가와 문을 두드리는데도 우 리가 그를 안으로 들이려 하지 않는 것처럼요. 사다리를 타고 오르기 위해선 우리의 선입견을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섯째 칸에 오른 뒤 가 장 높은 곳에 올랐다고 여긴다면 여섯째 칸으로 발을 디딜 수 없어요. 우리는 자기 자신의 주관을 극복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깨달음은 물과 같아서 흐를 수 있고, 또 꿰뚫을 수도 있습니다. 견해, 지식, 지혜 따위는 고형적(固形的)이어서 깨달음의 길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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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발로키타에 따르면 이 종이는 비어 있어요. 하지만 우리의 분석에 의하면 그것은 모든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과 그의 통찰이 서를 부정하는 듯하지요. 아발로키타는 다섯 스칸 다가 비어 있음을 발견했어요. 그런데 무엇이 비어 있다는 걸까요? 열쇳말은 ‘비어 있다입니다 ’ . ‘비어 있다는 ’ ‘어떤 것이 비어 있다’예요. 제가 물이 든 컵을 들고, “이 컵은 비어 있나요?” 하고 묻는다면 당신은 “아니요, 물이 가득 차 있습니다.” 라고 대답할 거예요. 하지만 제가 물을 쏟아버리고 다시 묻는다면 당신은 “예, 비어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겠지요. 그런데 무엇이 비어 있나요? 비어 있음은 어떤 것이 비어 있음을 뜻합니다. 컵은 완벽하게 비어 있을 수 없어요. 무엇이 비어 있는지를 당신이 알지 못한다면 ‘비어 있다는 ’ 온전한 말이 아니에요. 제 컵은 물이 비어 있 긴 하지만 공기가 비어 있는 건 아니지요. ‘비어있다는 ’ ‘어떤 것이 비어있다는 ’ 겁니다. 이것 은 사실상 새로운 발견이에요. 다섯 스칸다가 똑같이 비어있다고 아발로키타가 말할 때, 그 뜻을 분 명히 하기 위해 우리는 이렇게 물어봐야 합니다. “아발로키타 선생님, 도대체 뭐가 비어 있다는 겁 니까?” 다섯 스칸다는 다섯 더미, 또는 다섯 집합 따위로 번역 할 수 있으며, 인간 존재를 이루는 다섯 가 지 요소입니다. 그러한 다섯 요소는 우리 안의 모든 것에 강처럼 흐릅니다. 사실 그것들은 우리 안 에서 더불어 흐르는 다섯 개의 강이에요. 우리의 몸을 뜻하는 꼴(형태)의 강, 감각(느낌)의 강, 지각 (알아챔)의 강, 정신 작용(의지)의 강, 그리고 인식(식별)의 강 들입니다. 그것들은 언제나 우리 안에 서 흐르고 있어요. 아발로키타에 따르면, 그가 다섯 강의 본바탕을 깊이 들여다보았을 때, 그는 문득 다섯 모두가 비어 있음을 깨달았다고 해요. 그리고 우리가 “무엇이 비어 있는 겁니까?” 하고 물으 면 그는 꼭 대답해줘야 합니다. 그의 대답은 이래요. “개별적인 속성이 비어 있는 것이다.” 그 뜻 은 다섯 강이 각자 홀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거예요. 각각의 강은 다른 넷에 의해 만들어지지요. 그 것들은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어요. 다른 모든 것과 더불어 있어야 하는 거지요. 우리 몸을 보면, 우리에겐 허파와 심장, 콩팥, 위, 그리고 피가 있습니다. 이 중에서 외따로 존재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어요. 모두 다른 것들과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지요. 당신의 허파와 피는 서로 다른 두 기관이지만 개별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어요. 허파는 공기를 들이마셔 피를 풍부하게 하고, 피는 허파에 영양분을 공급해줍니다. 피 없이 허파는 살 수 없고, 허파 없이 피는 깨끗해질 수 없지요. 허파와 피는 더불어 있는 거예요. 콩팥과 피, 콩팥과 위, 허파와 심장, 피와 심장 역시 마찬 가지입니다. 우리의 종이가 비어 있다고 아발로키타가 말할 때, 그 뜻은 개별적이고 독립된 실재가 비어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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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예요. 종이는 단독으로 있을 수 없어요. 그것은 햇빛과 구름과 숲과 벌목꾼과 마음, 그리고 다른 모든 것과 더불어 있어야 해요. 개별적인 속성이 비어 있는 거지요. 그러나 개별적인 속성이 비어 있다는 것은 또한 모든 것으로 가득 차있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펴 알게 된 것과 아발로키 타의 깨달음은 서로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아발로키타는 꼴과 감각과 지각과 정신 작용과 의식의 다섯 스칸다를 깊이 들여다본 뒤, 그 모든 것이 자기 홀로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달았어요. 각각의 것은 오직 다른 것들과 더불어 있을 수 있지 요. 그래서 그는 “꼴은 곧 빔이다.” 라고 말한 거예요. 꼴은 개별적인 속성이 비어 있지만, 또한 우주만물로 충만하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감각과 지각과 정신 작용과 인식 역시 그렇습니다. 깨달음의 길 “오온이 모두 비어있음을 꿰뚫어본 뒤, 아발로키타께서는 모든 괴로움을 뛰어넘으셨느니라.” 꿰뚫어봄은 대상의 바깥에 서 있지 않고, 그 안으로 들어감을 뜻합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알고 자 할 때 밖에 서서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어요.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가 하나가 되어야만 참으로 아 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의 괴로움을 함께 괴로워하고, 기쁨을 함 께 기뻐하며, 그의 감정들에 공감해야 합니다. ‘꿰뚫어봄(penetration : 통찰 洞察)’이란 정말 훌 륭한 낱말이지요. “comprehend(이해하다)”는, ‘마음으로 함께’라는 뜻의 라틴어 어근 ‘com’ 과 ‘끌어안다 또는 안아 올리다’의 뜻을 가진 ‘prehendere’가 결합돼 만들어졌습니다. 어떤 대 상을 이해한다(comprehend)는 것은 그 대상을 안아 올려 그것과 하나 된다는 뜻이에요. 그 밖에 다 른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단지 관찰자로 바깥에 서서 이 종이를 들여다본다면, 우리는 결코 이 종이를 알 수 없어요. 꿰뚫어봐야만 합니다. 우리 자신이 구름이 되어야 하고, 햇빛이 되어야 하며, 벌목꾼이 되어야 해요. 대상 안으로 들어가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면, 우리의 앎은 완벽해질 것입니다. 인도에는, 바다가 얼마나 짠지 깨닫고 싶어서 그 속으로 뛰어들어 바닷물과 하나가 되었다는 한 소금 알갱이의 이야기가 있어요. 소금 알갱이는 바로 그 방법으로 완벽한 깨달음을 얻었지요. 우리 모두는 평화에 관심이 많으며,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을 알고 싶어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저 바깥에 서서 관찰만 할 수는 없어요. 러시아 인민과 하나가 되기 위해 그들의 감각과 지각, 정신 작용을 이 해해야 해요. 진정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들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꿰뚫어보는 것, 즉 하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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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는 것이야말로 참된 앎이며 불교적 사유지요. 평화를 위한 어떤 의미 있는 일도 불이(不二 : nonduality)의 원칙과 꿰뚫어봄의 원칙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염처경(念處經)에서 부처님은 우리가 꿰뚫어보는 법(관법 觀法)을 깨닫도록 조언하셨어요. 부처님 은 몸속의 몸, 느낌 속의 느낌, 정신 작용 속의 정신 작용을 가만히 살펴보라고 우리에게 이르셨지 요. 왜 그 분은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왜냐하면 당신이 무언가를 관찰하고 알고 싶어 한다면 그 안으로 들어가 하나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에요. 이와 비슷한 말을 핵물리학자들도 하기 시작했어요. 어떤 물질을 알기 위해 원자의 세계에 들어 설 때 당신은 그것의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고요. 당신은 더 이상 지켜보기만 하는 관찰자로 남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과학자들이 관찰자란 말보다 참 여자란 말을 더 좋아하지요. 서로를 알기 위한 우리의 노력도 마찬가지예요.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상대방의 마음을 직접 느껴야 해요. 그렇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참된 이해 없이 사랑은 불가능합니다. 만일 당신이 누군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결코 그를 사랑할 수 없어요.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사랑한다는 건 사랑이 아니지요. 그것은 다른 무엇입니다. 아발로키타의 사유는 다섯 스칸다에 대한 깊은 통찰입니다. 꼴과 감각과 지각과 정신 작용과 인식 의 강 들을 깊이 들여다본 뒤 그는 그것들의 본바탕이 텅 비어 있음을 깨닫고 마침내 모든 괴로움을 뛰어넘었습니다. 그러한 해방에 이르고자 하는 이들은 모두 빔(공,空)의 참된 바탈을 꿰뚫어보기 위 해 깊이 들여다봐야만 합니다. 빔이여, 영원하라 “들으라, 사리푸트라여. 꼴이 곧 빔이고, 빔이 곧 꼴이며, 꼴은 빔과 다르지 않고, 빔은 꼴과 다 르지 않느니라. 감각과 지각과 정신 작용과 인식 역시 마찬가지이니라.” 빔(emptiness)이 바다라면 꼴(form)은 파도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거예요. 인도 인들의 개념은 우리를 당황스럽게도 하지만, 그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표현법을 잘 알아야 합니다. 서양에서는 동그라미를 숫자 영(0)이나 무(無)로 여기지요. 그러나 인도에서는 동 그라미가 전체 또는 완전을 뜻합니다. 뜻이 서로 반대지요. 그래서 “꼴이 곧 빔이고, 빔이 곧 꼴이 다”는 “파도가 곧 바다이며, 바다가 곧 파도이다”입니다. “꼴은 빔과 다르지 않고, 빔은 꼴과 다 르지 않다. 감각과 지각과 정신 작용과 인식 역시 마찬가지이다.” 라는 말은 그 다섯(오온)이 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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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서로를 포함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즉, 하나가 존재하면 다른 모든 것도 함께 존재하는 거지요. 베트남 문학에는 12세기 리(Ly) 왕조 시대의 한 선승이 쓴 두 줄 짜리 시가 있습니다. “그것이 있기에 먼지 한 점이 있다. 그것이 없다면 온 우주 또한 없으리.” 라고 그는 썼어요. ‘있음과 ’ ‘없음’이라는 생각은 단지 우리들 마음이 만들어냈을 뿐이라는 뜻이지요. 그는 또 “온 우주는 머리카락 한 올 끝에 올려질 수 있다. 그리고 겨자씨 한 알 속에서 도 해와 달을 볼 수 있다.”라고 했어요. 이러한 이미지들은 우리에게 ‘하나가 곧 모두이고, 모두가 곧 하나’임을 보여줍니다. 물질과 에너지는 하나이며, 물질과 공간 역시 하나임을 현대과학을 통해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물질과 공간만 하나인 게 아니라 물질과 공간과 마음 또한 하나입니다. 왜냐 하면 마음이란 물질과 공간 ‘속에’ 있기 때문이지요. 꼴은 곧 빔이기에 꼴 자신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꼴을 통해 감각과 지각과 정신 작용과 인식 등 다른 모든 것을 알고 있어요. 그리고 빔은 개별적 속성이 비어있다는 뜻입니다. 빔은 모든 것으로 가득 차 있고, 생명으로 충만합니다. 따라서 빔이란 말이 우리를 두렵게 할 수는 없어요. 그것은 훌 륭한 낱말입니다. ‘비어있다는 ’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를 ’ 뜻하지 않아요. 만약 이 종이가 비어있지 않다면, 햇빛과 벌목꾼과 숲이 어떻게 그 안에 있을 수 있겠어요? 컵은 비어있기에 거기 있습니다. 꼴과 감각과 지각과 정신 작용, 그리고 인식 역시 개별적 속성이 비어있기에 거기 있는 것입니다. 빔은 또한 모든 것의 바탕이에요. 만물은 비어있기에 존재할 수 있지요. 그것은 2세기의 불교사상 가 나가르주나(용수 보살)의 선언입니다. 게다가 빔은 굉장히 희망적인 개념이에요. 비어있지 않다면 저는 여기 있을 수도 없지요. 당신 역시 비어있지 않고는 거기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거기 있기 에 제가 여기 있을 수 있는 것이고요. 이것이 바로 빔의 참뜻입니다. 꼴은 개별적인 존재 형태를 가 질 수 없어요. 아발로키타는 우리가 이 점을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만일 비어있지 않다면 우리는 나무토막처럼 굳어 버릴 거예요. 숨도 쉴 수 없고, 생각도 할 수 없지요. ‘비어있다는 ’ 곧 ‘살아있다이며 ’ ,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는 ’ 뜻입니다. 비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살 수 없어요. 또한 빔은 덧없음(무상無常), 즉 변화입니다. 우리는 덧없음을 탓 할 수 없어요. 왜냐면 덧없지 않고 만물은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저를 만나러 영국 에서 온 한 불자는 삶이 비어있고 덧없다는 것을 불평하기도 했어요. (그는 불교를 믿은 지 5년이 되었고, 빔과 덧없음을 큰 거래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그에게 열네 살 난 딸아이가 이렇게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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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줬다지요. “아빠, 제발 덧없다고 불평하지 마세요. 덧없지 않다면 제가 클 수나 있겠어요?” 당 연히 딸의 말이 맞습니다. 당신이 옥수수 씨앗을 땅에 심을 때, 당신은 그것이 키 큰 옥수수로 자라길 바랄 거예요. 만약 덧 없지 않다면, 옥수수 씨앗은 영원히 씨앗으로 남을 것이고, 당신은 결코 옥수수를 먹을 수 없겠지요. 덧없음은 살아있는 모든 것에게 몹시 중요합니다. 덧없다고 불평하기보다 “덧없음이여, 영원하라!” 라고 해야 할 거예요. 덧없기에 모든 것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것은 매우 희망적인 인식입니다. 빔도 마찬가지예요. 빔 없이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으므로 빔은 중요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번에 도 “빔이여, 영원하라!”라고 외쳐야 하는 거예요. 빔은 모든 것의 근본입니다. 빔이 있기에 생명도 있는 거지요. 다섯 스칸다 모두 이와 똑같은 원리를 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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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이야기 _ 첫 번째 용석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현재 수원구치소에 수감중입니다.

수감생활의 식단

고기국과 고기반찬이 겹치더라도 기본적으로 김치가 있다. 게다가 김, 멸치볶음, 무말랭이,

수감되기 전 오리가 나에게 수감되면 채식식

마늘장아찌 등을 구매해 먹을 수 있으며, 반찬

단을 요구하며 단식을 하라고 농담반 진담반

이 남으면 다음 끼니에 먹게 되니 채식을 하는

(?) 이야기를 했었다. 그 당시는 이 곳(수감시

것에 큰 어려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여기

설)의 식단이 어떻게 짜여져 있는지 알지 못했

서 나오는 고기반찬들은 전혀 먹음직스럽지 않

기 때문에 나의 채식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

기 때문에 먹고 싶다는 일말의 욕구도 생기지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않는다(물론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걱정도 되었었다. 수용자들에게 고개반찬을 푸 짐하게 제공하지는 않을 듯 했고, 까짓것 불과

고기를 먹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꽁보리밥에 김치만 먹고도 고된 육체노동들을 했는데, 굶거나 영양실조에

채식을 시작한 지 3년차, 사실 그 동안 몇

걸릴 일은 없겠지 싶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채

차례 고기를 먹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도 있

식은 수감생활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

었고 스스로 고기를 먹기도 했다. 총 4번 정도

힘든 취장의 김장철(교도소에서 하는 일 중 가

ㅋㅋ 수감생활 7개월째, 이곳에서도 고기를 두

장 힘든 육체노동일 듯)도 견뎌냈으니…

차례 먹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의 경험들은 이전에 생각지 못한 것들을, 느끼지 못했던 것

그래도 이곳의 식단이 궁금한 사람들이 있을

들을 느끼게 해 주었다.

터이니 좀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하루 세끼, 한 끼는 밥(쌀:보리=4:1)과 국 한 그릇 두 개

취장(밥 짓는 곳)에서 일할 때였다. 취장은

의 반찬(그 중 하나는 김치 류)으로 이루어져

육체적으로 힘든 곳이기 때문에, 그리고 음식

있으며, 2007년부터는 하루에 한 끼씩은 반찬

을 만드는 곳이기 때문에 먹는 거 하나는 풍족

이 세 개가 나온다. 식단은 일주일 단위로 반

하고 음식의 종류와 질도 뛰어나다. 다른 곳에

복된다. 일주일 동안 21번의 국 배식 중 내가

서는 고추장, 간장, 참기름이 유일한 양념이지

먹지 못하는 고기국은 4번밖에 안 된다. 또한

만 취장은 설탕, 고춧가루, 식초, 미원 등 각종

고기가 포함된 반찬도 일주일에 5번이니 하루

조미료와 마늘, 파, 양파 등 양념이 구하기 쉽

에 한 가지도 안 되는 셈이다. 간혹 운이 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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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취장일 때문에 취장의 수용자들이 배식

일이다.). 그냥 안 먹으면 되겠지, 어차피 금방

표에 없는 특식을 해먹는다고 해도 어느 정도

떠날 방인데…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사람들은

용인이 된다. 특히 김장철은 일이 더욱 고되기

계속 고기를 권했고 거절하기도 귀찮고 설명하

때문에 소 측에서 고기 등을 제공하기도 한다.

기도 귀찮은 난 그냥 먹었다. 방 분위기로 미

한마디로 취장은 몸이 힘든 만큼 ‘맛있는’ 음식

루어 나의 채식이 이해되지 않을 거라 짐작했

을 ‘많이’ 먹을 수 있다. 서로 고기를 많이 먹

었기 때문이다. 몰론 강력히 거부했으면 안 먹

으려고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내가 취장에

을 수 있었겠지만 난 먹기 싫은 걸 억지로 먹

있을 때도 여러 가지 특식을 먹었다. 다른 곳

은 느낌이었다. 뭐랄까 동물의 시체를 먹는다

에서는 못 먹는 김치전, 김치볶음, 김치찌개,

는 생각이 들고 속은 메스꺼웠다. 다른 요인도

돼지보쌈, 탕수육, 간짜장, 깐풍기 등등… 다른

있겠지만 입맛이 뚝 떨어졌다. 불과 며칠 전

사람들은 취장일 하려면 고기 먹어야 한다며

취장에서 스스로 집어먹은 고기는 맛있었는데

권했지만, 난 그저 웃으며 먹지 않았다. 몸이

억지로 먹게 된 고기는 몸과 마음에서 거부하

힘들긴 했지만 일이 힘들어서이지 채식 때문이

는 것이 너무도 확연했다. 머리로 이해하는 채

라고 생각지 않았고, 채식에 대한 편견(힘을

식이 아닌, 몸에서 채식을 진정으로 받아들이

못 쓴다는)을 깨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게 된 것일까? 아무튼 이 두 가지의 상반된 경

정말이지 다른 것은 몰라도 기름에 바삭하게

험은 꽤 흥미로웠고 습관처럼 정체되어버린 나

튀긴 탕수육과 김장김치에 보쌈은 너무 먹고

의 채식에 대해 돌아보는 시작이 되었다.

싶었다. 그리고 운 좋게 창고에 혼자 남겨졌을 때, 아무도 모르게 낼름 집어 삼켰다. 먹고 싶

채식의 의미 찾기

은 욕구를 참지 못해 고기를 먹은 것은 처음이 었다. 냉동 창고에서 차갑게 식은 고기는 그러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감옥에서 채식하는 것

나 맛있었고 다행스럽게도 한 번의 일탈로 끝

이 어떤 의미일까?’하는 것이었다. 채식은 어떤

이 났다.

면에서는 굉장히 상징적이며 또한 실질적인 실 천이다.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재판소환장을 받고 수원으로 이감오기 전 3

자체가 가치실현이라는 면에서 실질적인 실천

일 정도 출력이 취소된 채, 미징역방(일하지

이고, 직접 행함으로써 주변사람들의 공감과

않고 있는 방)에 머물렀다. 그 방은 지금껏 내

동참을 유도한다는 면에서 상징적이다(물론 전

가 겪어본 그 어떤 방보다도 최악이었다. 건달

적으로 나의 생각이며 백 명에게는 백 가지의

한 명이 왕처럼 군림하며 다른 사람들을 억누

다른 의미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감옥이라

르고 있었고, 사람들은 서로 간에 어떤 긍정적

는 특수한 공간은 채식의 두 가지 의미 모두를

인 관계도 보여주지 않는, 지옥 같은 방이었다.

감소시키거나 무의미하게 만든다. 내가 접촉하

재판 대문에 마음이 뒤숭숭하기도 하고 방 분

는 사회가 제한됨에 따라 상징성은 급속히 감

위기도 그 모양이라서 난 굳이 채식에 대한 이

소하고, 실천의 의미는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야기를 꺼내지 않았다(왜 고기를 안 먹는지 만

다.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 내가 세상과

나는 사람마다 석명하는 일은 굉장히 피곤한

맺어가는 방식으로서의 채식의 실천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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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주체적인 개체가 사라지는 감옥에서

다. 하지만, 속단할 수는 없지만, 좀처럼 그 같

는 발휘되지 않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 하나의

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것 같다. 수감생활

행동이, 혹은 나의 저항이 거대한 구조(감옥)

중 두 번의 육식의 경험에서 시작된 나의 채식

속에 파묻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된다. 내가

에 대한 공부와 고민들이 새로운 즐거움을 주

집에서 고기를 안 먹으면 하다못해 단 200g이

고 있기 때문이다. 채식에 대한 이해가 싶어지

라도 고기소비량이 세계적으로 줄어들겠지만

면서 새롭게 인식하는 채식의 의미, 그리고 그

여기선 나에게 아무런 선택권이 없기 때문에

의미를 더욱 풍성하게 할 여러 가지 실천적인

고기소비량에는 변동이 없고 쓰레기량이 200g

방법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며 나를 즐겁게 한

늘게 되는 것이다. 오리의 말대로 채식식단을

다. 이곳에서의 채식이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강력하게 요구하거나 같은 방 사람들에게 채식

고 느끼는 것은 여전하지만 채식에 대한 즐거

의 필요성을 역설하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운 상상이 (출소하고 나서 펼쳐갈 미래에 대

없는 것일까? 하지만 목소리 높여가며 논쟁하

한) 지금의 채식에까지 영향을 기치고 있는 것

면서까지 피곤하게 채식을 하고 싶지는 않고

이다.

(병역거부를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피곤 하다. 그리고 내 경험상 채식은 병역거부보다

첫 번째 이야기를 끝내며.

인정받기 더 힘든 주제다) 앞에 제시한 식단대 로 고기를 안 먹으며 살기에 큰 무리가 없기에

평화를 알고 나서 병역거부를 한 것이 아니라

채식식단(채식주의자를 위한 별도의 식단)을

병역거부를 시작으로 평화를 만나고 알아가게

주장하기엔 약간 내 쪽의 근거가 빈약하게 느

된 것처럼, 무언가를 알기 때문에 채식을 하는

껴진다. 감옥에서 나의 채식은 의미가 없는 것

것은 아니다. 오히려 채식을 하면서 새로운 세

일까?

상과 만나고 새로운 미래를 만나게 된다. 채식 은 고민 끝에 도달하는 결과가 아니라 고민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채식을 하고

확장해가는 시작이자 영속적인 과정이고 그 자

있고 앞으로도 계속할 것이다. 우선 고기를 먹

체로 완결적인 목표이다. 채식의 의미를 삼켜

어야할 어떠한 이유도 느끼지 못하겠다. 전혀

버리는 감옥에서 채식에 대한, 채식으로부터

눈길을 끌지 못하고 침샘을 자극하지 못하는

시작된 고민이 심화되는 것이 참 역설적이다.

이곳의 고기요리(?)때문이기도 하고, 건강에

감옥에 감사해야하는 걸까? 미안하지만 그럴

있어서도 아무런 필요성을 못 느끼기 때문이

생각은 없다. ^^ 첫 번째 이야기는 이쯤에서

다. 고기 먹는 것이 당연한 채로 살다가 특별

마무리하고 조만간 채식에 대한 신나는 이야기

한 이유를 가지고 고기를 끊었었지만, 지금 나

들을 풀어보고자 한다. 누구나 알고 있는, 어쩌

에게는 고기를 안 먹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고

면 가물가물한 이야기, 그래서 내 이야기가 가

기를 먹기 위해선 특별한 이유가 필요한 것이

물가물한 몸의 기억, 태고 적부터 우리의 영혼

다. 물론 혀끝에서 침이 고이는, 너무 먹고 싶

과 육신에 새겨진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는 계

은 욕구도 특별한 이유가 될 수도 있을 것이

기가 되기를 바라며… 53


일상의 평화를 바라며

배여진 | 천주교인권위원회 상임활동가

네가 테러가 뭔 줄은 알고 있기나 해? 응? 네가 테러로 죽어봤어? 테러로 다쳐봤어? 가까이서 테러 를 본 적이나 있어? 텔레비전만 켜면 보이니까 다 안다고 생각하는거야? 하지만 리오르, 텔레비전은 네가 냄새를 맡을 수 있게 하지도, 폭발이 일어나는 그 찰나의 침묵을 들려주지도, 그러다 모두들 벌 벌 기고 아연질색하는 그 순간을 보여주지도 못한다고.... (중략) ....아무도 알 수 없는 거야. 아침에 출근하러 나간 사람들이 죽음의 입장권을 사고서 그걸 확인까지 받고는 오후에 묻히게 될 거라는 걸. 그래서 그 가족들이 입장료를 환불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책 <가자에 띄운 편지>중에서 ) 느즈막히 일어나서 눈꼽에 부스스한 머리에 침 흘린 자국이 있는 내 얼굴은 매일 봐도 참 반갑다. 잠이 덜 깨 반가운 인사도 채 하지 못하고, 헐레벌떡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 말리고, 옷을 뭐 입 을까 10초 정도 고민하다가 손에 집히는 아무 옷이나 걸쳐 입고, 핸드폰과 가방을 챙겨 터벅터벅 집 을 나선다. 사람이 꽉 찬 지하철을 타고 사무실에 와서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서핑을 하고 일을 시 작한다. 어느 덧 해가 지고 집에 와서 잠을 자거나, 친구들을 만나서 술 한 잔 하거나, 애인과 데이 트를 하거나, 혼자 놀거나 등등(물론 하루의 일과를 잠으로 마감한다는 건 365일 똑같다^^v). 이렇 듯 한 개인에게 일상이란 화장실에서 똥을 누며 신문을 보고, 거리를 터벅터벅 걸어 다니는 것 등 지극히 평범한 것들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겠다. 책 <가자에 띄운 편지>(낭기열라 출판사)는 각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는 ‘탈’과 ‘나임이 ’ 주고받는 이메일을 통해 전쟁과 테러에 대한 공포가 일상이 되어버린 이들에 대해 이야 기 한다. 탈이 유리병 속에 담아 보내는 편지를 나임이 받게 되면서 둘은 서로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탈이 나임이 되고, 나임이 탈이 되어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고 이해해나가기 시작한다. 물론 그 과정 이 순탄치만은 않다. 이 둘이 서로를 이해하기에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은 너무도 달랐다. 이 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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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벽이 있음은 분명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과 ’ ‘테러’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으로 얼 룩진 일상 대신 내가 탄 버스가 터지지 않기를, 헬리콥터 소리 없이 잠들 수 있기를 바라는 ‘소소 한’ 일상이 돌아오길 희망함은 똑같았다. 이곳의 이름이 네겐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거 알아. 하지만 여기에도 거리, 대로, 구역, 사람들에게 이름이 있다는 걸 네가 알았으면 해서. 여긴 단지 ‘가자지구’만은 아니거든.(p143) 이제는 갈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린 평택 대추리. 그곳 ‘대추리라는 ’ 마을은 땅 위에 덩그러니 있 던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수십 년 갯벌을 땅으로 만들어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있었고, 한 때는 갯벌이었던 논밭이 있었고, 기다란 묵주 쥐고 종종 걸음 향해하던 천주교 공소가 있었고, 이불로 만 들어 덮고 자고 싶을 만큼 넉넉해보이던 노을이 있었다. 하지만 바보상자라는 텔레비전에는 주민들 의 삶도 추억도, 집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경찰과 시위대가 싸움하는 모습과 몇 명이 다쳤느니, 경 찰병력 몇 명이 출동을 했느니 등등의 미울 만큼 무미건조한 기자의 멘트뿐이다. 이 책의 작가는 바 로 이 점을 꼬집는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하면 ’ 떠오르는 이미지, 탱크, 군인, 자살폭탄테 러로 폭발한 버스, 파괴, 눈물. 하지만 이렇게 반복되는 장면들 사이에 유일한 차이점인 ‘희생자’ 들이 바뀐다는 것에 대해서는 카메라가 얼마만큼 담아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탈이 말하듯 텔레 비전에서 본다고 우리가 다 알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하지만 우리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이 전 부인냥 그렇게 인정해버리고 사는 것은 아닐까. 감히 겪어보지도 못한 고통에 대해서 ‘안다고 ’ 말하는 것만큼 무책임한 말도 없는 것 같다. 그 래서 나는 한미FTA체결에 반대하며 몸에 불을 붙인 허세욱 아저씨를 보고 제발 살아달라고 말 한마 디 할 수 없었다. 그 고통을 단 1초도 나눌 수 없으면서 살아달라고 하는 나의 바람이 지나친 욕심 인 것 같았다. 책 <가자에 띄운 편지>는 직접 테러를 눈앞에서 겪은 이스라엘의 탈과 이스라엘 군인이 마음만 먹 으면 한 동네를 고립시킬 수도 있는 곳에 살고 있는 나임, 전혀 어울릴 수도 말이 통하지도 않을 것 같은 이 둘을 이어주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게 한다. 편히 버스를 타고 거리를 걷고 싶은 것조차도 욕심이 되는 세상이 아닌 그/그녀들의 일상이 보장(?)되는 세상. 그런 세상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 (비록 ‘책’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이 둘을 이어준 것은 아닐까. 그런데 써놓고 보니 좀 이상하다. 일상을 ‘보장’ 받아야 되다니. 이 씁쓸함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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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동+재정보고 |

전쟁없는세상 이렇게 살았어요~

전쟁없는세상 팀별활동: 팀별활동은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 가능합니다. : 매체편집팀은 소식지를 편집회의를 통해 기획/제작하고 있습니다. 18호 소식지 제작을 함께할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 평화주의자들의 책읽기 다음 책은 문승숙 씨의 <군사주의에 갇힌 근대>입니다. 6월 5일 문승숙, 박노자 씨와 함께 하는 책읽기모임 많은 관심

전쟁없는세상 소식정리와 굵직한 활동보고입니다.

부탁드립니다. : 해외자료번역팀 함께 하시고 싶으신 분, 제안거리가 있으신 분들은 홈페이지 운영실

활동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지면관계상 안타깝게도 생락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열식인 점 사과드립니다.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 운영실에서 확인하세요~ ^ ^

-> 팁별게시판 -> 해외자료번역팀 게시판을 참고하시거나 사무실로 연락주세요~ : 수감자지원팀은 수감된 병역거부자들이 감옥 안에서도 밖과 소통할 수 있도록 개인요 청물과 회의록 및 편지를 담은 우편물을 정기적으로 발송하고 있습니다. 수감자지원팀에 관심이 있으신 분은 홈페이지 운영실->팀별게시판->수감자지원팀 게시판을 참고하시 기 바랍니다. 또는 날맹에게 연락주세요~

>>전쟁없는세상 재정보고 (2007년 2월 6일 ~ 2007년 4월 12일) <총괄> 총 수입 합계 : 2,699,126 총 지출 합계 : 2,396,948 사무실 재정 잔액 : 5,136,088 <CMS 후원 수입 월별 현황> 3월 CMS 후원금 수입 : 437,290 4월 CMS 후원금 수입 : 456,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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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사항> 전쟁없는세상 계좌로 입금된 내역 중에 전쟁없는세상 책임활동가 이용석현재 ( 수 원구치소 수감 중)의 벌금 납부를 위한 후원금이 2,365,000원임.(4월 12일 현재)


:: 김영진 : 가석방으로 출소 김영진씨가 2007년 4월 30일 의정부교도소에서 출소했습니다.

:: 오정록 : 가석방으로 출소 오정록씨가 2007년 4월 30일 서산구치소에서 출소했습니다.

:: 이용석 : 평택관련 재판 종결 이용석씨 평택관련 재판이 끝났습니다. 병역거부 수감 이유로 벌금이 부과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이용석씨 재판에 관심가지고 많은 도움 주신 분들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효웅 : 1심종결, 검사항소 작년 여름 중단되었던 효웅씨 재판이 지난 4월 속개되었습니다. 징역8월 집행유예가 선고되었습니다. 현재 검사항소가 되었고 재판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많은 분들의 격려 부탁드립니다.

:: 정재훈 : 영등포구치소 수감 5월 22일 1심 선고공판에서 1년 6월을 선고받고 영등포 구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 수감된 병역거부자들의 주소 김훈태 충남 논산시 성동우체국 사서함 1호 370번 (320-940) - 논산구치지소 이용석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동수원우체국 사서함 17호 316번 (442-600) - 수원구치소 김태훈 전북 군산우체국 사서함 10호 1215번 (573-600) - 군산교도소 고동주 서울시 금천우체국 사서함 164호 2437번 (153-600) - 영등포구치소 김도형 서울시 금천우체국 사서함 164호 2479번 (153-600) - 영등포구치소 최재영 경상남도 진주시 진주우체국 사서함 68호 1204번 (660-600) - 진주교도소 박철 서울시 금천우체국 사서함 164호 2426번 (153-600) - 영등포구치소 송인욱 서울시 금천우체국 사서함 164호 2616번 (153-600) - 영등포구치소 박경수 서울시 송파우체국 사서함 177호 1974번 (138-709) - 성동구치소 정재훈 서울시 금천우체국 사서함 164호 2542번 (153-600) - 영등포구치소

서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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