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없는세상 소식지
19호
‘어떻게 살 것이냐’에 대한 고민이 과거에는 가치에 대한 고민만 있었다면, 이제는 생활에 대한 것까지 포함이 된거죠. 그게 가장 큰 변화인 것 같아요. [인터뷰본문 중_유호근] 병역거부 결심하면서부터 감옥에 가기 전에는 아침에 깨서 잠들 때까지 일만 하는
`
그런 시기를 보냈어요. 시간이 갈수록 저한테 일이 몰리면서 정보에 있어서 독점적이 되고, 위계도 생기고.. 이런 상황이 평화운동을 깊이있게 하는 데에 걸림돌이 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혼자서 열 걸음씩 가려고 하는 것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인터뷰 본문 중_ 염창근] 지금은 우선 공부를 하고, 아마 석사를 마치고 나면 단체활동가로 다시 돌아가서 제가 공부 한 시간들이 좀더 의미있게 평화운동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해요. 조금더 공부하고 다시 열심히 활동하는 제가 되는 게 지금 저의
삶
목표입니다. [인터뷰 본문 중_임재성]
국방부의 입장발표, 그리고... 당신의 선언, 감동이 없다 밥상 앞에서의 기도 평화수감자의날 번역
을 병 역만 거나 부다 자 들 의
WITHOUTWAR Newsletter No.19 CONTENTS World
Editorial
에디토리얼 1
또다시 봄을 기다리며 ┃여옥
CO letters 독서일기 ┃김치수
병역거부자 편지 2 4
친구들에게 ┃효웅
CO note 출소인사 ┃고동 초겨울, 못된 생각 ┃뎅
Focus
출소한 병역거부자들을 만나다 다양한 생각과 사고방식을 가진 병역거부자들 이 어떤 고민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지 인터뷰를 통해 만나보는 시간을 가져보았
병역거부자 활동수기 6 8
시선집중 11 16
국방부의 입장발표, 그리고... ┃나동 YMCA 시민법정 ┃가람
습니다
편집팀 여옥 표지, 에디토리얼
Special
기획기사
번역글 정리 및 편집
20 22 25 28
병역거부자를 만나다 ┃나동 유호근 인터뷰 염창근 인터뷰 임재성 인터뷰
Essay
▶▶Special
원고수집 및 독촉
나동 편지글 섭외 시선집중 & 기획기사1
가람 시선집중
평화에세이
조은
31 33
당신의 선언, 감동이 없다 ┃지은 편지 한 통 쓰실래요? ┃여옥
기획기사인 ( 터뷰진행 및 정리)
날맹 재정보고
Series
기획연재 35
밥상 앞에서의 기도 ┃용석
Review
영화평 37
[용서받지 못한 자]를 보고 ┃정은
Translation
번역
반야심경 해석 ┃김훈태 평화수감자의날 번역
Report
39 42
활동재정보고
전쟁없는세상 이렇게 살았어요~!
49
발행처 : 전쟁없는세상
인쇄기획 | 한울타리
발행일 : 2007년 12월 1 일
130-062 서울동대문구 제기2동 137-69
제 호 :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19호
TEL : 924-9641,2 FAX : 927-5104
연락처 : 02-3147-1201 주소 : 서울시 서대문구 충정로 2가 190-10 아랫집 2층 (우) 120-012 http://withoutwar.org| peace@withoutwar.org
Editorial
또다시 봄을 기다리며 여옥 ┃전쟁없는세상 책임활동가 + yo1004@hanmail.net
정신없는 가을이었습니다. 늘 뒷통수를 치던 정부의 발표는 이번에도 여전했거든요. 여기저기서 전화를 받고서야 국방부의 대체복무제 도입 입장발표 소식을 들었습니다. 쏟아지는 전화인터뷰와 취재요청과 기고요청 때문에 정신없는 사무실에 다들 모여 서 서둘러 기자회견을 준비하면서도 정작 스스로는, 함께 활동해온 사람들끼리는 자신의 감정을 돌아볼 시간마저 없었어요. 물론 대체복무제도가 도입된 것도 아니고 입법화와 제도정착까지는 여전히 멀기만 하지만, 그래도 다 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하나의 선을 넘은 듯한 기분이 들어요. 사실 저는 전쟁없는세상에서 활동한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막차에 무임승차한 기분이랄까, 뭔가 좋은 것 같으면서도 딱히 그렇지만도 않은 묘한 기 분이 들더라구요. 이제 전쟁없는세상은 그동안 해오던 정체성과 활동방향에 대한 고민이 조금더 깊어져야 할 시기를 만났습니다. 예전부터 지속되어오던 고민들이긴 하지만, 고질병을 넘어서 불치병이 되어버린 내부의 문제들을 풀어나가야 하 는 노력만큼은 의지를 가지고 해나가야겠지요. 이번 소식지 기획기사에서는 감옥에 다녀와서 병역문제가 해결된 후에도 여전히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라 ’ 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CO들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병역거부자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솔직담백하게 담아내보고자 하는 시도였는데, 처음에 생각했던 것들을 제대로 담아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소식지의 기획이 여러 차례 바뀌고, 마감 일자도 자꾸 바뀌고, 담당자도 자꾸 바뀌고.. 소식지는 언제나 전쟁없는세상의 영원한 숙제인가봐요.. 이제 겨울입니다. 각자의 생계를 스스로 책임져야하는 활동가들이 가장 바쁜 시기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런 모습이 꽁꽁 얼어버린 강물같기도 하고 앙상하게 말라버린 나뭇가 지 같기도 하겠지만.. 그 안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봄까지 잊어버렸다고 생각하 지는 말아주세요. 늘 그렇듯, 금방 봄이 올 거에요. ☮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9호
1
독서일기 김치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현재 여주교도소 수감 중
벗어날 수 없이 은밀하게, 만져볼 수 없는 내 두개골의 안쪽 면만큼이나 섬뜩하게, 오래된 피딱지처럼 눌러 앉은 문장들이 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마치 주문처럼, 주문 에 걸린 암호처럼, 뒤따르는 문장이 아니라 나를, 나의 과거를, 실은 어떤 두려움을, 나에 대해 물어대는 물음표 후면의 그림자를 부르는 문장들이 있다. 굵은 활자들이 무거운 운석처럼 떨어져 커다란 홈을 만들 고, 인쇄된 종이 위에는 벗겨진 시간들이 역류하고, 어쩌다가 응고된 자리마다 머리가 벗겨진 새들이 기웃 거리며, 눈치를 본다. 나는 읽었다. 예를 들어 노숙자 명의의 통장과 휴대폰을 만든 중년 남성의 반성문, 목찰마다 새겨진 명료한 단어들, 수천 개의 수번들, 빨갛게 타들어가는 최고수의 수번과 노랗고 파랗고 하얀 색색의 수번들, 몇 가 지 상품들, 에 박혀버린 유통기한에 주의하며, 기억 속으로 뻗어간 홈을 따라 비릿한 냄새를 풍기며 솟아나 는 온갖 문장들, 심장 박동에 맞춰 정답게 소곤거리는 유년시절의 입간판들, 사랑했던 사람들의 이름과, 이 름과 동시에 젖어버린 축축한 바다와 횟집의 메뉴판, 다시 가격표를 읽는다, “상품어로 말하자면...”, 갖 가지 문장들이 서로 꼬리를 물어, 따뜻하고 끈적하게, 긴 행렬을 만든다. 어쨌건, 어쩔 수 없이 나는 계속 읽었다. 소리를 읽고, 냄새를 읽고, 버짐꽃이 피어난 어떤 얼굴과 접견실 의 타이머와 뒤뚱거리던 젊은 건달의 몸에 엉킨 빨간 장미꽃들을, 비늘을 박은 문신들을, 나는 읽었다. 모 든 문장들은 흩어진 카드패처럼 뒤섞여 있고 뒤섞인 문장들에서는 항상 부서지는 소리가 나서, 내 머리 속 은 금세 하얗게 얼어버린 얼굴들과 얼굴마다 박힌 붉은 열꽃들로 화끈거렸다. 김훈의 문장에서는 살이 썩는 냄새와 분뇨 냄새가 났다. 가파르게 다듬어진 그의 문장을 따라 한웅큼의 구 더기와 천연덕스러운 생의 의지가 서로를 지나치며 기어오르고 있었다. 협심증 때문에 밤새 숨을 못 쉬던 한 당뇨병 환자에게서 질척거리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그는 갑상선 때문에 눈알이 튀어 나왔고, 오래 전부 터 발기가 되지 않는 성기를 매달고 있었다. 음모들은 매 시간 방바닥으로 툭툭 떨어졌고, 사람들은 밥을 먹고 난 다음에는, 낙엽을, 떨어진 시간을 주워 담듯, 음모들을 쓸어 담았다. 물론 정갈하고, 고고한 문장들도 있는 법이다. 2.17평은 정원이 7명이야, 그래서 1인당 0.31평이 요긴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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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우화라도 반영하듯 교훈적으로 주어지지. 0.31이라니, 놀랍게도 소수로 끝나는, 이 쓸쓸하면서 도 단호한 숫자의 울림이 <수식을 사랑한 박사> 위로 내려앉고 나면, “운동!”, 소지의 외침이 복도 끝에 서 메아리를 기다리며 울려 퍼졌다. 나는 달렸다. 잘게 부서진 모래 위를, 요동치는 근육을 의식하며 계속 달렸다. 나무들 위에 살았다는 그 고 집 센 남작을 칼비노가 소개해 주었을 때, 담장 밖으로 솟아난 나무들 위로, 문장이 앉고, 문장이 흩어지 고, 쓸 데 없는 메타포들이 입안을 채워버려, 나는 토하고 싶었다. 말들을 토하고, 나무를 토하고, 이야기 를 토하고, 자유를 토해버려 나는 갈 곳을 잃었다. 그럴 때마다 사전을 보았다. 사전들 위로, 단어들은 정렬한 채, 정중한 경례를 시작한다. 나는 일렬종대로 도열한 단어들 사이를 헤매고 다녔다. 무엇을 읽어야 할지 가르쳐 줄 수 있는 권리를 누구도 지니지 않았 다고, <자기 앞의 생>의 모모가 무표정의 얼굴로 읊조리면, 로빈슨 크루소는 그 문제와 관련해서 방드르디 라도 붙잡고 토론하고 싶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토닥인다. 세계에는 시신들로 가득했고, 나는 그에게 토론에 앞서, 지나치게 많은 죽음들 에 대한 예의를 갖추자고 제안했다. 나일강에서 오랜 친구에 의해 죽든, 뉴욕에서 800만 가지 다른 방법으 로 죽든 황해도에서 야소교를 믿는 이들에 의해 죽든, 마르케스의 혀에 얹혀 지고한 쓸쓸함으로 다시 태어 나든, 어쨌든 세계에는 수많은 묘비석들이 끝없이 사연들을 써 갈기며 솟아 있었다. 마치 기억의 홈 속으 로 역류해 들어가다 뜯기고 증발해 버리고 싶지는 않다는 듯, 온 힘을 다해 돌들은 자신의 몸을 밀어 올렸 고, 질척거리는 땅에서 천연덕스러운 죽음이라도 내세우고 싶어 했다. “상품어로 말하자면...”, “공산주 의라는 유령이...”, 생과 사의 진열장 위에서, 당신의 말씀에 얹혀, 작가의 이마 위에 맺혀, 쓸쓸한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
김치수 2007.05.15 병역거부 선언 2007.09.13 1심 선고공판에서 1년 6월형 선고, 법정구속, 서울구치소 수감 2007.11.02 여주교도소 이감┃현재 여주교도소에 수감 중 (469-600) 경기도 여주군 여주우체국 사서함 30호 1538번 김치수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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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에게 효웅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현재 여주교도소 수감 중
안녕하세요? 여주교도소의 홍일점, 효웅입니다. 요 며칠 너무 정신도 없고 안정되지 못했네요. 어제 면담을 했는데, 그날 바로 독거실로 배정을 해줬어요. 이제 교정기관에서는 동성애자=독거수용이 등식인건가? 물론 저처럼 커밍아웃하거나 아웃팅된 자에게 한하 겠지만요. 여튼 그래서 이감온 이곳 여주교도소에서도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버렸네요^^ 공부하고 명상하긴 좋지만, 멍하게 넋놓고 있는 시간이 많게 되더라구요. 억지로라도 편지 자주 쓰고, 사람 들하고 대화도 자주 해야겠어요. 직원들이 자기들도 저한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신경 쓰고 있으니, 언제든 불편한 것 있으면 이야기하라는군요. 그래서 꽃미남 수용자들을 제 방으로 전방시켜달라고 했어요(농담ㅋ) 여튼 이감을 가도 독거실만 계속 쓰게 되네요. 뭐 그게 저도 간섭 안받고, 목욕하거나 잘 때도 덜 불편하기 는 한 것 같아요. 전 아예 목욕시간도 따로 배정받았답니다. 절 잠정적 가해자 또는 피해자로 주시하고 있 는 것 같아요. 뭐 이런 대접에는 이골도 났고, 저도 되도록 마초들과 말 섞으면 될 일도 안되기 때문에 이 런 특별대우(차별대우?)가 그리 싫은 것 같지는 않아요. 이제 얼른 시간이 흐르고 흘러서 무탈히 파란 하늘 을 맘껏 볼 수 있을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이곳 생활을 하면서 깨달음(?)을 얻은게 있다면.. 가사노동의 위대함을 몸으로 느낀건데요, 설거지, 빗자루질, 걸레질, 빨래 등이 아무것도 아닌거 같아도 힘 도 들고 중요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초딩 일기장 같이 교훈적이지만ㅋㅋ) 여기 와보니 걸레, 수 건, 빗자루, 행주, 수세미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네요. 밖에 있을 때는 나 아닌 누군가가 항상 이런 일들 을 했었고 전 제 생물학적인 성으로 인해 면제받을 때가 많았었는데... 사실 부끄럽게도 행주, 수건, 걸레 가 왜 굳이 그렇게 분류되어 있는지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할 정도로 가사노동에 무지/무관심 했었는데... 여 기 와보니 다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지혜로운 도구들이고, 이들 중 하나라도 없으면 삶이 매우 불편해지 고 쾌적하지 못할 것만 같아요. 세수비누, 빨래비누도 고맙고.. 밖에 있을 땐 이런 뒷치닥거리를 항상 누군 가가 제 몫까지 대신해서 해줬던 것 같아요. 누군가가 도맡아서 하지 않았더라면 전 그동안 윤택한 생활을 누리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지금 와서 그동안 제 생활을 돌이켜보면 제가 참 무책임하고 자기중심적이었던 것 같아요. 마치 남에게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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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해서 제 힘으로는 아무것도 못하기에 숙주의 영양분을 빨아먹고 연명하는 기생충처럼 말이죠. 뭐 독립을 배우는 것이라고 여겨야 하나봐요. 여튼.. 요새 컨디션도 안좋고 새로운 환경으로 와서 그런지 통 마음이 미친년 널뛰듯 싱숭생숭 뒤숭숭하네 요. 조만간 안정이 되겠죠? 스트레스와 폭식, 비염과 감기를 안겨준 대한민국이 너무나 고마워서, 몸과 마 음을 바쳐서 충성을 다할 것을 곧게 다짐하고 싶네요ㅋㅋ 대한민국이 내게 해준 것은 한국어뿐인데 말이죠 ㅋㅋ 아, 한국음식은 맛있어서 예외임!! 이 한국에서 살아갈 앞날을 생각하면... 출소하고서도 막막하네요. 어딜가나 감옥이고, 군대 같을텐데.. 그 때마다 거부를 해야하나?? 아님 더 꿋꿋하게 살아남아야하나? 좀 안정되고 나면 또 소식 전하고 편지할께요. 그럼 그때까지 다들 잘 지내기!! ☮
2007. 10. 12. 여주교도소에서 효웅
효웅 2006.03.06 병역거부 선언 | 2007.05.11 1심 선고공판에서 집행유예 판결 2007.07.23 항소심 재판 시작┃2007.08.09 항소심 선고공판 1년 6월 선고 2007.08.17 형 확정, 성동구치소 수감 | 2007.10.08 여주교도소 이감 (469-600)경기도 여주군 여주우체국 사서함 30호 1535번 유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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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 부자들 이 살아가 는 모습을 엿볼 수 있 습니다
출소인사 고동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2007년 9월 28일 영등포구치소 출소
출소한 지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났습니다. 저는 구치소에서는 당연히 시간이 더디게 갈 줄 알았는데, 사실 그 안에서도 시간은 잘 갔습니다. 그런데 출소해보니 바깥에서의 시간은 그것과 비교가 안 되더군요! 정말 엊그제 출소한 것만 같습니다. 그동안 특별히 무얼 한 것도 없는 것처럼 정말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갑니다. 이제는 그냥 이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면 안 되겠다는 불안감까지 살짝 드네요. 제가 병역거부를 선언하고 재판을 받으며 수감생활을 마치고 다시 출소하기까지 정말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큰 도움을 받은 사람을 꼽자면 전쟁없는세상의 활동가인 여옥을 꼽을 수 있습니 다. 사실 여옥은 사람들에게 고동의 후원인으로서만, 옥바라지 하는 사람으로서만 인식되는 것을 싫어했습 니다. 하지만 어쨌든 여옥이 저에게 가장 많은 애정과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요. 저는 그래서 출소한 이 후에 당분간은 전쟁없는세상 활동을 하지 않고 여옥이 하는 활동만 개인적으로 도와줄 것이라는 선언(?)을 했습니다. ^^; 구치소에 있었던 1년간을 모두 만회하려는 듯 여옥에게 선물을 사주고, 시간과 정성을 쏟다보니 지난 한달 동안은 아직도 구치소에 있는 CO들을 마음에 두지 못했답니다. 정말 미안하고 제 스스로에게도 챙피하답니 다. 사실 제가 구속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병역거부운동 내에서 성별분업이 심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 었지요. 뭐 저도 예외가 아닌지라, 제 생각으론 남성 CO나 활동가들이 좀 더 수감자들에게 신경을 써야 한 다고 생각했고, 제가 출소하게 되면 아직 수감되어 있는 CO들에게 관심을 많이 쏟아야겠다고 생각했거든 요. 그런데 출소 후 근 한 달간 편지 한 통을 쓰지 않았네요. 수감자 우편물에 프롤로그로 출소 자랑만 잔 뜩 늘어놓고 말이지요. ^^; 아마도 이렇게 다짐만 해서는 언제 수감자들에게 신경을 쓸 수 있을 지 장담하기 어렵겠네요. 저도 빨리 누군가의 멘토가 되어야겠어요. 아무래도 수감생활을 미리 경험한 사람이 현재의 수감자들이 고민하는 생 활에서의 문제점들을 좀 더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미 구치소에서의 1년여는 망각의 늪에 빠 뜨린 지 오래 되어서 정말 그럴지는 의심스럽습니다만…zd 대체복무제에 대한 정부의 발표도 있었고, 평화수감자의날도 다가오니 할 일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내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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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기에 복학을 하기 위해서는 오른 학비도 미리 벌어놔야 할 것 같고요. 돈을 좀 벌면서 활동까지 함께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있다고 했더니 천주교인권위원회 덕진 선배가 좋은 일거리 하나를 소개시켜 주네요. 이제 출소 후의 달콤한 휴식을 마치고 조금은 더 바쁘게 지내게 될 것 같아요. ☮
고동 2005.10.19 병역거부 선언 2006.01.24 영장실질심사 후 구속 ┃2006.03.14 보석으로 풀려남 2006.04.26 1심 1년 6월 선고┃2006.09.12 항소심선고, 기각결정 2006.09.21 보석취소, 재수감 | 2006.12.07 대법원 판결, 기각결정 2007.09.28 영등포구치소에서 가석방 출소
- 고동은 현재 천주교인권위원회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내년 복학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평화주의자들의 행복한 책읽기』를 소개합니다
평화주의자들의 행복한 책읽기(이하 ‘행복한 책읽기’)는 수감되어 있거나 출소한 병역거부자들, 평화운동가들 그리고 평화에 관심이 있는 여러 사람들이 함께 책을 정해서 읽고 토론해나가는 모 임입니다. 행복한 책읽기는 수감된 병역거부자들에게 정해진 책을 보내서 병역거부자들이 감옥 안에서 보내온 서평을 함께 읽고 다른 사람이 쓴 서평을 보내주며 서로 소통하고 있습니다.
인터넷게시판(http://www.withoutwar.org/happybook)을
통해서
책을
정하고
어느
정도의 시간을 가진 후 오프라인 모임에서 서로의 서평을 읽고, 책의 저자 분을 모셔서 함께 토 론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그동안 ‘당신들의 대한민국2’, ‘나는 평화를 기원하지 않는다’, ‘대한민 국은 군대다’, ‘페미니즘의 도전’, ‘군사주의에 갇힌 근대’, ‘평화의 얼굴’ 등으로 모임을 진행했습 니다. 행복한 책읽기에 참여하고자 하시는 분들은 위의 주소로 접속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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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 부자들 이 살아가 는 모습을 엿볼 수 있 습니다
초겨울, 못된 생각 뎅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2007년 9월 28일 군산교도소 출소
작년 이맘때쯤의 일이다. 서울구치소 2上7방에서 이감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는데, 어느 날 밤 추씨 성 을 가진 형이 나를 말동무 삼아 자기 결혼 생활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당시 그는 아내가 아닌 한 명 의 애인이 있었는데, 그 애인으로부터 매일 오던 편지가 끊겨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징역을 돌봐주는 아내의 마음이 돌아서 이혼을 요구하진 않을까 두려워하여, 걱정과 의심과 고마움과 미안함이라는 미묘한 감정들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결혼에 대한 회의와, 부부 관계의 위태로움, 그 리고 현재 사랑하고 있는 사람에 대한 갈망 때문인지, 그는 나의 미혼 상태에 대해 유별나게 부러워했 다. 우연한 기회에 나는, 내가 돈을 벌었던 방식과 돈을 썼던 방식에 대해 꽤 자세하게 설명한 적이 있 는데, 어쨌든 요는 결혼과 자식 모두의 부재 덕택에, 나름대로 돈을 쓴다고 썼는데도 돈이 남더라는 거 였다. 그는 그 점에 대해서도 굉장히 부러워했는데, 그러면서 자기 아내의 사치스런 소비와, 재테크에 대한 무심함에 대해 꼬집었다. 자기 역시 만일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돈벌이에 구속됨 없이 취미를 챙기며 적당한 여유를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의 아내와 그의 애인에 대한 진실은, 해당되 는 세 명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보아야 알 수 있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 위태로움에 대해 공감하기보다 는 단지 대단한 흥밋거리로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는데(남의 불행도 흥밋거리가 될 수 있다면), 내가 그 렇게 완벽한 ‘남의 이야기’로서 들을 수 있었던 건, 결혼이라든지 또 한 명의 애인이라든지 하는 그 런 소재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수한 이야기들이 나와는 아주 먼 세계의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출소하기 며칠 전에도 생각한 거였지만, 난 출소한 뒤의 일상에 적응하는 일이 별로 힘들지 않을 거라 고 예상은 했었다. 물론, 전혀 힘들지 않은 건 아니지만, 출소 후 한 달이 조금 지난 지금, 징역생활이 새긴 습관과 상처는 거의 잊혀 지고 있다. 이제 징역에서의 나는, 가끔씩 끄적여 놓았던 낡은 법무부 노트 속 일기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바깥세계로 돌아와, 노동과 죽음과 사랑이라는 개념이 드 디어 제대로 된 의미를 띄기 시작했을 때, 부적응과 어색함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찾아왔다. ‘결혼’과 ‘아주 진지한 연애’가 나를 둘러싼 것이다. 학교 선배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나는 종종 개그콘서트 한 개그맨의 말을 흉내내 “형, 결혼 한다는 소문이 있어요..?”라며 말문을 튼 적이 있는 데, 그런 농담 같지도 않은 농담에 대한 답으로 돌아온다는 말이 “어! 너 누구한테 들었냐!?” 였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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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끼는 당혹스러움이란.. 학생운동을 함께 한 적이 있는 여자 후배가 결혼을 했다는 소문을 들었고, 잠 깐 좋아한 적이 있던 여자 동기가 나이차 많이 나는 권위 있는 분과 결혼했다는 소문을 들었으며, 동기 J와 K가, 그리고 또 선배 L과 선배 S가 결혼날짜를 잡아놓았다고 했다. 우연히 들어간 친구의 미니홈 피에서 아는 후배의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을 보았을 때 정말 그 친구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모니터 앞 5센티미터까지 눈을 가져가야 했다. 이 뿐이랴. 예상컨대 며칠이 지나면 또 다른 결혼날짜와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결혼 소식을 들어야 할 게 뻔하다. 그러니까 출소한 뒤 2주 동안 머물렀던 대구를 떠 나 서울로 올라온 그 날부터, 온통 ‘결혼’과 ‘결혼을 전제한 연애’, ‘결혼을 약속했지만 헤어져버 린’ 이야기들뿐이었다. 누나라고 불렀던 아는 선배 몇 명은 심지어 출산까지 했다니.. 감옥에 수감되 어있던 1년 4개월 동안 이 세상은 얼마나 변했을까 걱정을 하다가, 출소 후 막상 부딪혀 보고 나서야 실상 변한 게 별로 없다는 사실에 안심과 실망이라는 감정을 동시에 가졌지만, 쉽게 안심하다간 언제나 뒤통수를 맞나보다. 주위 사람들의 인생에 일종의 큰 변화가 일어난 셈인데, 예전에 무심한 척 하던 나 역시 이제는 그럴 수 없는 처지에 놓였고, 그 오랜 관습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시기가 되었으며, 그래서 조금씩 자신감을 잃고 겁도 나기 시작했다. 판타지에 가까웠던 세계가 어느덧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심리적 내 마지막 보루였던 룸메이트 형에게, “형 결혼 안 할 거라며!??” 라고 따지듯이 물어보았으 나,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고 허무해서, ‘아, 그냥 그런 거였구나..’라며 나 역시 너무 쉽게 수긍 해버렸다. ‘같이 살고 싶어서라니..’ 학생운동을 하며 낭만과 열정이 가득했을 땐, 특히 관습에 대한 비판과 저항정신이 투철(?)했을 땐, 우리도 술을 마시며 이렇게 투덜대곤 했다. “결혼이라는 제도 자 체가 가부장적이지 않냐. 현재 사회구조 속에선 여성에게만 이중적 고통이라니까! 맞아. 고통의 산실이 라 할 수 있지. 근데 말이야. 남성에게도 좋은 일만은 아냐. 결국 가부장제 속에선 남성도 피해자일 수 있잖아? 야. 글구 사랑의 감정이 어떻게 3년 이상 가냐.. 정 하나로 평생 간다고? 애들 바라보면서 평 생 살아? 난 못 하겠던데..? 그리고 결혼 한번 하는데 형식적인 절차가 좀 많냐. 그렇게 힘들게 결혼해 서 이혼할거면 왜 하는지 몰라..” 물론 여기서 우리는 남자들 뿐이었다. 여자들끼리 모여 있어도 이런 얘기를 할까 모르겠다만, 어쨌든 이성애자였던 우리 남정네들도 여자가 낀 자리에서까지 이런 얘기를 하진 않았다. 혹시나 앞에 앉은 이 여인이 미래 내 베필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나는 지금에 이르러서야 느끼는 거지만, 5~6년 전에 내뱉었던 말들의 대다수가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 너 무나 많았다. ‘나는 그 때 진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저 말은 나에게 속한 거라 할 수 있을 까.’ 물론 우리는, 이전 세대의 모든 인간이 쌓아놓은 맥락과 얽혀있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겠지 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각자 하기 나름 인거고 해봐야 아는게 아닐까.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생 각한다. 가족제도와 가부장제에 대해 가장 선두적으로 문제제기했던 사람 중의 한 명인 어느 선배가 얼 마 전에 결혼을 했다는데, 이제는 너무나 쉽게 이해가 간다. 다시 말하지만, 몇 년 전의 저 대화는 진 실이 아니었던 거다. 우리가 모르는 다른 맥락이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삶을 저렇게 쉽게 일반화 하 다니. 이치를 깨닫고 법도를 세우기엔, 아직 우리는 도를 덜 깨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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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는 하되, 여전히 궁금하고 걱정되는 부분이 한 둘이 아니다. ‘왜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을까. 꼭 해야만 했을까.’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을 지켜보면서 나름의 판단을 했을텐데.. 그래도 결혼할 맘이 생긴 걸까. 자신만은 정말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사랑이 식으면 견딜 수 있을까.’ ‘요즘 젊 은이들의 새로운 결혼생활이라는데 동의하고 주위 어르신들이 가만히 내버려둘까.’ ‘아무래도 여자가 손해이지 않을까.’ ‘저러다 애까지 낳으면 이제 되돌릴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솔직히 말해 나는, 내 인생에서 결혼이란 있을 수 없다는 원칙 따위 원래부터 없었다. 단지 다른 사람 들이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말할 때 살짝 다행이란 생각은 몇 번 했었다. 적어도 내가 먼저 외로워질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다. 그러니까 나는 할 만한 사람이면, 하게 되면 할거다. ‘이게 뭐야. 하게 되면 할 거라니.. 왜!!??’ 다른 사람을 걱정하는 척 하면서, 사실은 나를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 다. 그러니까 왜? 외로워서?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래 외롭다”. 1년 4개월 동안 좁은 방에 최대 10명 까지 모여 살았더니 사생활이라고 부를 만한 게 전혀 없었다. 그러다 또 다시 사생활의 세계로 돌아오 니까, 좋으면서도, 외롭다. 외롭다는 건 억지로 해결한다고 쳐도, 행복하겠어? 모르겠다. 행복할지.. 그 치만 다른 사람들도 하잖아? 그 사람들도 행복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러진 않았을거야. 결혼하는 순간만 큼은 온갖 밝은 환상들로 머릿속을 꽉꽉 채운다 하더라도 말이야. 그러니까 그들은, 혹시, 결혼을 하지 않아도 행복하지 않으니까, 거꾸로, 결혼을 하기로 맘먹은 건 아닐까? 심지어 이런 생각까지 드는 쓸쓸한 초겨울이다. ☮
부르뎅 2005.12.01 병역거부 선언 2006.05.17 1심 1년 8월 선고, 법정구속. 서울구치소 수감 2006.08.17 항소심 기각 ┃2006.11.06 군산교도소 이감 2007.09.28 군산교도소에서 가석방 출소
- 뎅은 현재 아르바이트를 하며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복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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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의 입장발표, 그리고... 나동┃전쟁없는세상 자원활동가 + peace1@jinbo.net
대체복무제, 도입될까?
을 의식한 듯 대체복무 형태 자제는 매우 거칠게 제시했지만 그래도 치밀하게 준비한 티가 곳곳에
정부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에게도 대체복무
묻어났다. 그 기사를 아침에 인터넷 뉴스를 검색하
제를 인정할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올해 초부터 심
다 보게 되었다. 이내 사무실로 향했다. 늘 중심에
심찮게 들려왔다. 국방부가 사회복무제를 발표할
서 활동하던 연대회의 집행위원장(참 되게 어색하
때도 그런 말이 있었다. 혹시 하는 마음은 역시나
군) 오리가 미국에 가고 없었다. 아무래도 누군가
로 바뀌었다. 국방부는 병역거부자에 대한 이야기
사무실에서 정신없이 걸려오는 전화도 받고, 여기
는 전혀 하지 않았다. 국방부와 정부가 서로 의견
저기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았
이 다른 것 아니냐? 국방부가 보수층의 여론을 의
다.
식해서 적절한 발표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는 게 아니냐? 정부가 대선을 의식해서 무리수를 두지
분명한 진전
않는 것 아니냐? 등등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갔다. 그렇지만 결국 언젠가는 도입될 수밖에 없다는 생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로. 사람들은 각자
각과 한쪽에서는 정말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다른 생각을 할테지만. 왜 그랬을까? 기본적으로
동시에 들었다. 어떤 생각이든 조금 현실감이 떨어
국방부가 제시한 안이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느낌
졌다.
이었다. 복무 기간 두 배에 노동 강도도 강하고 집
그러다가 국방부가 느닷없이 대체복무제를 허용하
단 합숙 생활까지. 나야 다 지난 이야기지만 앞으
겠다고 발표했다. 보도자료를 보니 보수층의 여론
로 대체복무와 병역거부 사이에서 고민할 친구들 을 생각하니 가슴이 조금 답답했다. 대체복무가 당 장 시행되는 것도 아니고 입법 과정을 밟으려면 최소 1년은 걸릴 것이다. 대선 앞두고 미뤄지다가 정권이 바뀌면 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 정말 재수 없으면 3~4년의 시간이 무의미하게 흘 러갈지도 모른다. 병역거부 당시에 가장 힘든 것은 어떻게 될 수 없 다는 두려움이다. 처음부터 감옥을 기정사실로 받
국방부의 입장발표에 대한 병역거부 연대회의 기자회 견 장면 ⓒ한겨레21
아들이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친구들에게는 이 신분불안정의 시기가 고통스러울 수 있다.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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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으니까. 2002년에 병역거부하고 2004년 9월
한다. 대체복무제가 도입되고 나면 군복무 형태는
까지 2년 가까운 시간이 수사와 재판과 기다림으
더욱 다양화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사회복지 분야
로 흘러갔다. 만약 처음부터 그 2년이 어떻게 흘
까지 고려해서 경제적으로 유용하다는 판단이 든
러갈지 알고 있었다면 덜 힘들었을 것이다.
다면 대체복무제가 폭넓게 인정받을 수 있다. 그렇
그렇지만, 그럼에도 대체로 사람들은 긍정적으로
다면 병역거부자들이 선택하는 대체복무제만 징벌
받아들였다. 정말 대체복무가 인정되다니 믿기지
처럼 고통스러울 이유가 없다. 복무 기간도 단축하
않는다는 친구도 있었다. 분명 이것은 작지만 큰
고 복무형태도 다양하게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변화다. 꾸준히 싸워서 뭔가를 바꿔낸 경험이 그다
둘째, 군 자체에 대한 시민사회의 감시와 견제가
지 많지 않다. 더욱이 한국 사회에서 군대를 둘러
확대되어야 한다. 병역거부자들이 더 이상 감옥가
싼 보수적인 시선을 고려했을 때 이 변화는 더욱
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대체복무제는 진일보한
갚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복무가 거친 형
제도다. 양심의 자유가 확대되고 소수자 인권이 확
태로 도입될 것이라는 점은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
대된다는 점에서도 긍정적이다. 그렇지만 더 큰 의
었다. 문제는 제도가 도입된 이후다. 대체복무에
의는 시민사회가 스스로 대안을 제시하고 개입해
대한 불안감이 줄어들수록 제도를 더 많이 뜯어고
서 국가가 독점하고 있는 안보 논리를 비판하고
칠 여지가 생긴다.
바꾼다는 데 있다. 어차피 평화운동인 이상 병역거 부의 궁극적 목표는 평화주의에 바탕을 둔 새로운
여전히 목마르다
안보개념, 그리고 이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 모델의 확산이다.
대체복무제가 도입되면 여러 가지 새로운 과제가
셋째,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된다.
드러날 것이다.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현 수준의 징병제가 지나
우선, 대체복무제 자체를 형벌이 아닌 선택이 되도
치게 소모적이라는 비판이 많다. 자본주의 경제논
록 해야 한다. 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정부 부처
리가 모든 분야를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군대야
가운데서도 기획예산처와 같이 경제적 이해관념이
말로 가장 비효율적이고 소모적인 집단이라는 사
밝은 쪽에서 대체복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고
실은 국민 모두가 공히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효 율성 논리가 반드시 평화를 확산시키는 것은 아니 다. 모병제 국가는 대개 부자다. 그리고 대개 공정 한 심판을 자처하는 침략자들이다. 효율성, 경제성 논리가 일시적으로 대체복무와 한 배를 탔지만 구 태의연한 징병제에 매스를 대는 이유는 서로 다르 다. 정부는 효율적이고 강한 군대를 원한다. 군이 민간 부분에 개방을 확대하는 것 역시 무조 건 환영할 만한 일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군사 부분 역시 기업이 개입할 게 뻔하기 때문이
지난 10월 17일 사회복무제 도입 정부 발표안에 대한 연대회의 공청회 모습 ⓒ전쟁없는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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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군사부분의 기업화가 어느 정도로 진전될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경제발전과 동시에 북한
위협론이 힘을 잃으면 새로운 안보논리를 위해서
반응하며 싸워왔기 때문에 평화운동 전반으로 관
라도 군비 확장의 계기를 찾게될 것이라는 점이다.
심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소중한 역할을 해내리라
여기서 국제적 역할이 강조될 것이고 동시에 한국
기대한다.
자본도 무기시장에 들어오기 시작할 것이다. 어떻 게 이 경제성 논리를 깨나갈 것인가가 중요한 숙
운동은 언제나 위기이자 기회
제다. 넷째, 대체복무제조차 거부하는 완전거부자를 비롯
돌이켜 생각해보면 엄청난 변화나 엄청난 위기도
해 새로운 형태의 저항이 등장할 지도 모른다. 군
늘 새로운 출발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 같다. 운동
대가 봉건적 구조에서 현대적 구조로 개편되고, 군
은 언제나 위기이자 기회다. 사람이 만들어내는 모
사관련 담론이 경제적 논리에 따라 효율성 위주로
든 생각과 제도는 끊임없이 흐르며 변화하지만 느
재편되면 평화운동도 그에 발맞춰 새로운 도전을
닷없이 착해지거나 느닷없이 4차원 세계로 진입하
시작해야 한다. 평화를 가장하며 세련된 방식으로
는 일은 없다. 연속된 고민을 따라 변화한다. 그렇
진실을 가리는 현실에 맞서야 한다. 병역거부 운동
다면 지금 우리들의 고민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이 누구보다 군대 문제와 군사 담론에 예민하게
가? 평화운동의 고민은 계속된다.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를 위해 사회복무제 도입
국방부 결정에 대한 연대회의 성명서
2007년 9월 18일 오전 국방부 고위 관계자는 기자회견을 열고, ‘종교적인 사유 등으로 집총(입 영)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군대 대신 다른 방법으로 병역을 이행할 수 있도록 대체복무를 허 용키로 했다"며 "(이에 따라)내년까지 병역법과 사회복지 관련법령, 향토예비군설치법 등을 개 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병역이행이라는 국민의 의무와 소수 인권보호를 합리적으로 조 정하고 병역거부 분위기의 확산 방지를 위한 안전장치를 강구한다는 차원에서 종교적 병역거부 자들의 대체복무 분야를 가장 난이도가 높은 부문으로 선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지난 2 월 정부가 발표한 '비전 2030 인적자원 활용 전략과 ' 일맥상통하는 내용으로 ’예외없는 병역의 무 이행‘이라는 원칙을 강조하는 동시에 병역거부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조처라 사료된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에게 대체복무제를 제공하는 방안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이하 연대회의)’가 지금까지 5년 넘는 시간 동안 줄기차 게 주장해왔던 내용이 현실화된 것으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에게 감옥 대신 대체복무를 선 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점에서 국방부 입장을 대환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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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2월 4일 발족한 연대회의는 지난 5년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과 고통을 함께해 오 면서 대체복무제도의 도입을 줄기차게 주장해왔다. 지난 60년 동안 자신의 양심상 집총을 할 수 없다는 병역거부자들이 꾸준히 존재해 왔으나 한국 정부는 남북분단, 국가안보를 이유로 매년 수백 명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감옥으로 보내고 출소 후에도 전과자 낙인을 찍어 사회 적, 경제적으로 엄청난 차별을 가했다. 군부독재 시절은 물론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등을 거치면서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고 남북 간의 교류가 활발해진 최근에도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들에 대한 형사 처벌은 계속되고 있다. 그 결과, 병역거부로 수감된 사람은 총 1만 3천명 을 넘어섰고 최근 5년간 수감된 사람만 해도 3700여명에 이른다. 이는 남북정세를 포함해 급변 하는 안보환경, 인권존중에 가치를 두는 시민의식을 생각할 때 시대에 뒤떨어진 결과라 하지 않 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국방부의 결정은 그 동안 병역거부권을 인정하지 않고 수감자들의 현실을 모르쇠로 일관하던 기존 입장에 비하면 매우 진일보한 결정이라 생각하며 적극 환영하는 바이 다. 국방부 발표 가운데 ‘종교적인 사유 등’이라는 표현은 모든 양심을 아우르기 위한 고민의 결과라 믿는다. 어떤 경우에도 종교인과 비종교인에게 다른 기준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 헌법에 보장된 양심의 자유가 양심, 종교, 사상에 따라 다르게 적용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체 적인 실천 방안에 있어 몇 가지 아쉬운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시행과정에서 이런 문제 점들을 수정해서 이 제도가 더욱 발전해 나가기 바란다. 첫째, 현역병보다 2배(현역 복무 기간이 1년 6개월로 줄어든다고 가정했을 때) 긴 복무기간은 징벌적 성격이 강한 것으로 유엔인권위원회(현재 유엔인권이사회)의 결의안 기준에 맞지 않는 다. 유엔인권위원회의 결의안에 따르면 현역 복무기간의 1.5배 이상인 경우에는 사실상 징벌과 동일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국민정서상 복무기간이나 노동 강도에서 여타 사회복무 분야와 차이점을 둘 수밖에 없다 해도 징벌적 성격이 강하다면 국방부에서 말한 ‘소수자 인권 보호’ 의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다. 둘째, 현역 복무 과정에서 병역거부를 결심하거나 예비군 훈련 거부를 결심한 사람에 대해서는 여전히 형사 처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2003년 현역 이등병이었던 강철민 씨가 파병 반대를 이유로 병역거부를 결심하고 실형을 살았던 경험이 있으며, 예비군 훈련을 거부해서 수 천만 원의 벌금형에 처해지는 등 가혹한 처벌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 대한 대책도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법안이 마련되는 동안 구속, 재판 중에 있는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대책이 포함되어야 하 며 형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형집행 정지와 같은 전향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이들 역시 새로 운 선택의 기회가 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또 이미 유엔자유권규약위원회와 국제 앰네스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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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고한대로 형을 마친 사람들에 대한 사면, 복권을 아울러 검토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국민 여러분께 부탁드립니다. 2004년 대법원이 유죄 판결을 내리고, 헌법재판소가 병역법 합헌 판결을 내릴 때도 장기적인 대안으로서 국회 입법을 촉구했습니다. 또 2005년에는 유엔자유권규약위원회와 국가인권위원회가 대체복무제도 입법을 권고한 바 있습니다. 여기에 급변하는 남북관계까지 고려했을 때 대체복무제 도입은 더 이상 시기상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 다. 국방부 방안을 보면 복무 기간 2배, 엄청난 노동 강도, 집단합숙, 강력한 처벌의지 등등 제 도가 악용될 소지가 거의 없습니다. 변화의 이면에는 1만 3천여 명이 넘는 수감자들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언제까지 이들을 감옥으 로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제는 합리적인 해결방안에 귀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한국 사회가 좀 더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라 생각해 주십시오. 사소한 문제들은 제도 시행 과정에서 충분히 고쳐나갈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국방부의 결정을 환영하는 바이며 입법과 시행과정에서 부족한 부분을 개선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연대회의 역시 앞으로도 이 제도가 개선되고 병역거부자의 실질적인 인권향상을 위해 기여할 수 있도록 감시와 참여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나갈 것이다. 2007. 9. 19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
이번에 함께 읽을 책을 소개합니다★ http://www.withoutwar.org/happybook
[디아스포라 기행-추방당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
한 자의 시선] 서경식
비를 찾아서] 서경식
돌베게/2006년 1월
창작과비평사/2006년 12월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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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MCA 시민법정 가람┃전쟁없는세상 자원활동가 + kazkada0305@gmail.com
한국 사회 대안적 분쟁해결의 장
문제를 다루었다. 대한민국 헌법상
지난 9월 20일 목요일 오후 2시, 종로 YMCA 2층
의 인권 침해와
강당에서 제2회 시민법정이 개최되었다. 다양한
국가 안보 논리
생각과 의견을 가진 독립적 개인들이 모인 ‘시민
사이에서
사회에는 ’ 그 다원성만큼이나 많은 갈등이 존재
년간 지속되어 온
한다. 이러한 개인과 사회를 흔드는 갈등 사례들을
양심에 따른 병역
대립이 아닌 조정과 중재를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거부 문제는, 법
시도로써 한국 YMCA는 2006년 시민법정을 시작,
정이 개최되기 하
성숙한 갈등해결 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루 전인 19일, 그
있다. 개정 형사소송법과 새로 제정된 '국민의 형
동안 입을 닫고
사재판 참여에 관한 법률(배심제)'에 따라 오는
있던 국방부의 ‘대체복무제도 개선 도입 방안’의
2008년 1월부터는 일반 시민이 배심원으로 재판에
갑작스런 발표에 따라 보다 고조된 관심 속에서
참여할 수 있게 됨에 따라, 공정한 배심원단 선정
진행되었다. 재판은 1부의 양측 청구취지 소개 및
과정1)을 통한 배심제 형사재판의 형태를 띠고 있
변론, 증인심문과 최후변론에 이어 2부에 시민 배
는 시민법정은 사회적 공론과 시민적 결론을 도출
심원단 토론에 의한 평의를 거쳐 3부 재판장의 평
하고자 하는 배심제의 실제 한국사회 적용 가능성
결로 이어졌다. 피고인으로는 실제 평화적 신념에
을 가늠할 수 있는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2)
따른 양심적 병역거부로 2004년 기소되어 복역을
70여
마치고 2006년 출소한 임재성씨가 다시 한 번 법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범죄인가권리 ’ ‘ ’
인가
정에 섰으며, 검찰 측 증인에는 자유주의연대 김혜 준 정책실장과 전 재향군인회 정창인 연구위원이, 변호인 측 증인에는 서울제일교회 정진우 담임목
제 2회 시민법정에서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사와 서울대학교 법학과 한인섭 교수가 각각 출석 했다.
1) 인구통계학적 비례에 따라 나이, 성별, 소득 분포를 고려한 총 4번에 걸친 필터링으로 공신력과 공정성을 확보하도록 구성되었다 2) 서울 YMCA 시민법정 배포 자료에서 참고,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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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은 우선 병역을 이행하는 사람들의 선택을
졌다. 이라크전의 고 김선일씨 사건은 누구의 잘못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사회에
인가. 자국을 지키기 위한 군대라는 것이 과연 존
만연한 병역비리/기피는 특권/돈/지위를 이용한 편
재하는가. 끊임없는 폭력의 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법이지만, 이러한 기피풍조는 개인이 아니라 군대
누군가 먼저 총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의 인권 유린과 보상이 전무한 상황 등 사회적 책 임 부분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병역거부자인
국가 혜택은 다 누리며 국방 의무는 지지 않으려
자신은 의무의 면제나 특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한다는 비난에 대해서는, 자신은 무정부주의자는
신념에 맞는 다른 방식의 기회를 바라는 것이라는
아니며 따라서 국가의 다양한 권리와 의무를 수행
점을 주장했다. 지난 60년간 병역거부자에게 기회
중이라고 답변했다. 그러므로 처벌을 받아야 한다
는 주지 않고 처벌로만 일관한 한국사회, 그러나
면 기꺼이 받겠지만, 단지 처벌만이 유일한 해결책
다양한 논쟁과 토의로 성숙해진 사회에서 이제는
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신념에 맞는 방법으로, 사회
형평성을 보장하는 다양한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의무를 수행하고 싶다는 마
이다. 이러한 기회가 보장되어 대체복무가 도입된
음을 표현했다. 앞으로 대기업 취직, 공무원 시험,
다면 기꺼이 할 의사가 있음 역시 밝혔다. 그러나
국가고시 등이 모두 불가능한데 먹고 살 방법이
검사는 양심적 병역거부는 헌법에 반하며 남북 대
있는가, 감옥에 다녀와서도 신념을 유지할 수 있다
치 안보 상황을 고려했을 때 병역법 88조 1항에
고 믿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는, 피고인
따라 피고인을 기소했다. 징병검사 자체를 거부하
의 평화에 대한 신념과 확신이 드러났다. 아직 어
지 않은 이유를 묻는 검사의 질문에 피고인은 징 병검사 당시에는 병역거부라는 것 자체를 몰랐다 고 대답했다. 반대로 변호인 측 피고인 신문을 통 해서는 병역거부를 선택한 구체적인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학생 때 F15반대 운동을 하면서 무기로 평화를 살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러한 평화에 대한 고민이 2001년 주간지를 통해 이슈화 가 된 병역거부를 접한 이후 비폭력의 가치에 대 한 고민으로 이어진 것이다. 또한 불필요한 논쟁을 줄이기 위해서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용어 대
려서 큰 미래 계획은 없지만, 감옥에 다녀온 사람
신 ‘양심에 따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했
들과 이야기 해 보며 느낀 점은 수감 경험은 평생
다. 병역거부는 착한 마음이 아니라, 혹은 군대에
사회 구성원 속에서 배제되는 효과라는 것이었다.
간 사람이 ‘비양심이 ’ 아니라, 그저 나의 양심이
이는 단순한 2~3년의 격리가 아닌 것이다. 유죄가
비폭력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 비폭력을 실천에 옮
나와 감옥에 간다면 다양한 취직이 불가능해 지겠
기는 과정에서 부딪혔던 가장 큰 갈등은 자식의
지만 그렇다고 신념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
미래를 걱정하시는 부모님과의 갈등이었고, 실제로
그의 결론이었다. 재판 당일 아침까지도 부모님 눈
전과자로 살아가게 될 비폭력의 선택이 비현실적
물을 밟고 감옥에 가야 하는가를 고민했으나, 신념
이라는 비난에 대해 피고인은 역으로 물음표를 던
을 지키는 것이 삶의 근간이라고 생각하여 지금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9호
17
이 자리에 서 있다는 피고인의 대답으로 변호인
에서 제시한 병역자원 감소 주장을 반박했고 동시
신문이 종료되었다.
에 대체복무에 찬성하는 반대 여론 결과를 제시했 다. 또한 전 세계 병역거부 처벌자의 95%가 한국
대체복무제도가 사회적 이슈가 된 상황에서, 대체
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들어 한국의 열악한 인권
복무를 위해 신념을 객관적으로 증명하기 위한 방
상황을 고발하고 이에 대한 UN인권위 및 자유권
법에 대한 의문 역시 제기되었다. 대체복무를 주장
협약위원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등의 권고안을
하는 사람들이 사회활동경력, 소견서, 심층면접 등
제출했다. 마지막으로 미국, 대만, 그리스, 독일,
을 제시하고 있는데, 나의 양심을 검증 대상으로
이스라엘 등 해외 사례를 통해 이유 여하를 막론
내어 놓는 것 자체가 양심 침해라고 생각하지는
하고 지켜져야 하는 인간의 양심을 강조했다.
않느냐는 것이다. 이에 피고인은 양심의 자유 중에 는 ‘검증받지 않을 자유’가 있고 궁극적 목표는
이후 검찰 측 증인으로 정창인(현 재향군인회 연구
양심의 완벽한 자유지만, 여기서의 핵심은 양심의
위원), 김혜준(자유주의연대 정책실장)씨가, 변호
자유와 국방의 의무의 충돌 지점이며 대체복무는
인 측 증인으로 정진우(서울제일교회 담임목사),
분명히 지금보다 진보된 상황이라고 생각하기 때
한인섭(서울대학교 법학과 형사법 전공 교수)씨가
문에 제시된 양심 검증 방법에 동의한다는 뜻을
각각 출석하여 양 측의 의견을 피력했다. 특히 한
밝혔다. 이 논리를 이어 변호인은 검사가 양심의 '
인섭 교수는 법학과 형사법이라는 전공을 살려 현
객관적 기준'을 다그치고 있음을 비판하며, 헌법에
실적인 논거들을 제시했는데, 이는 다음과 같았다.
서 말하는 양심은 '너와 내가 다르다'는 '주관적 양
양심의 자유는 권리 중의 권리이며, 이를 잘 인지
심이라고 ' 변론을 펼쳤다. 60억 인구에게는 60억
하고 있는 판사들의 병역거부 문제에 대한 태도
개의 양심이 있으며, 이를 사회적 제도로 모두 분
역시 참 안타깝다는 의견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류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제도로써 이 60억 개의
는 진정한 범죄라고 볼 수 없다. 또한 이들은 신체
양심을 보장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세
적/정신적 조건여하에 따라 군대에 가지 못하는
계적으로 퀘이커 교도, 메노나이트 등의 사례를 살
사람들처럼, 다른 사회적 능력은 높으나 군대에 보
펴볼 때에도, 신념이 변화하여 비판받은 전례는 찾
낼 경우에는 병역 의무를 이행할 능력이 부족한
아볼 수 없다고도 주장했다. 60년대에는 심지어
사람들로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교도
사형을 선고받기도 했지만 그런 방법으로도 신념
소 내의 병역거부자 수감 실태를 보면, 도망가지
에 따른 병역거부는 막을 수 없었으므로, 신념 검
않는 사람들이라는 확신에 기반하여 교도 행정에
증 기준이 문제가 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큰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복역이 아닌 일 종의 대체복무라고 볼 수 있다는 언급도 덧붙였다.
이 치열한 공방에서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하기
국가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병역을 이행하는 것이
위해 검사 측에서는 대체복무에 대한 반대 여론
아니라 신념이 지켜지고 양심이 보장되어 지킬만
자료와 자발적 군 복무자 통계 자료, 그리고 병역
한 가치가 있어서 지키고 싶은 국가가 되어야 한
자원 필요성의 증대를 증명하기 위한 병역자원 감
다. 성숙한 국가는 개개인의 양심이 지켜지는 국가
소 수치 등을 제시했다. 이에 변호인 측은 현재의
이며, 인권 조항은 다수의 횡포를 막고 소수를 지
대체복무 유지 상황 분석 결과를 토대로 검찰 측
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법학자로서의 의견을 피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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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단 한 명의 소수자라도 보호해야 하는 것이
는가, 모두가 대체복무제를 하려 한다면 어떻게 할
고, 이것이 바로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이
것인가,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하는 질
다.
문들은, 비록 현역병보다 훨씬 길고 어려운 일이라 도 일단 대체복무로 주어질 수만 있다면 점진적으
마지막으로 주어진 최후 진술 시간을 통해 피고인
로 해결되어 나갈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 역시 피
은 시민법정을 참관하는 좌중의 가슴을 울렸다. 변
력하며, 간곡한 무죄를 청원했다.
호사와 검사 양 측 이야기가 모두 옳지만, 그 두 생각이 어떻게 이 사회 속에서 조화롭게 공존할
또 한 번의 유죄 판결, 그러나..
수 있는가를 모색하는 자리가 자신이 서 있는 이 자리라고 말했다. 그는 사회의 다양한 면들과 교감
그러나 이러한 모든 논증 공방에도 불구하고, 검찰
하려고 노력하면서 차별,소외 받는 사람들의 현실
에서는 본 형사 재판이 ‘실정법 위반 여부’를
과 그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현실에 대해 알게 되
가리는 것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배심원들의 결론
었고, 그 폭력에 맞서 싸우는 것이 꼭 올바른 것인
에 한계를 지었고 결국 1시간이 넘는 배심원 토론
가, 아니면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그들의 권리를 보
끝에 7:4의 결과로 피고인은 현 병역법 88조와 헌
장받을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이 없나를 고민하다가
법 39조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 비록 법적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구속력이 없는 시민법정 이었지만, 이미 한 번 유
것인 전쟁이라는 것을 멈출 수 있는, 느리지만 가
죄판결을 받고 1년 6개월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장 근본적인 방법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앎을
나온 피고인에게는, 2년이 흘러 변화했을 것이라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고, 대체
기대했던 사회로부터 받은 두 번째의 유죄판결이
복무법이 국회를 통과하지 않는다면 감옥에 가서
었다.
평생 전과자 신분으로 살아야 하는 현실에 직면했 다. 수많은 고민과 반문 끝에 비폭력과 평화주의의
그러나 시민법정의 판결을 단순히 병역거부에 대
신념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
한 반대 여론으로 인식하는 것은 부당하다. 7:4의
한 가치라고 결론을 내렸고, 그런 신념을 가진 자
실정법 상 유죄 판결 뒤에 가려진 7:4의 대체복무
신이 군사훈련을 받는 것은 자신의 자아를 송두리
도입 찬성의 판결 또한 존재했기 때문이다. 당일
째 파괴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선고 된 결과는 대체복무를 배제한 채 현 실정법
군사훈련이 배제된 다른 방식으로, 특권이 아닌 더
에 대한 위반 여부만을 고려한 평결이었다. 비록
힘들고 긴 기간이라도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다함
형사 법정이기에 발표하지는 않았으나, 대체복무를
으로써 내 자아를 지킬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
함께 고려할 경우에 대한 배심원들의 토론은 무죄
다는 간절함을 드러냈다. 더 이상 감옥에 보내버리
7, 유죄 4의 결론을 이끌어내었다. 이는 다양한
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에서 이와 같은 생각이 공
계층 및 집단에서 공정한 과정을 거쳐 선발된 배
존할 수 있도록, 그리고 이런 생각으로 보다 평화
심원단이 시민의 상식과 지혜에 입각한 진지한 숙
로운 세상이 만들어 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
의 과정을 거쳐 내린 하나의 사회적 결정으로, 현
는 마음이 전해졌다. 대체복무 도입 논란 속에서
대 시민사회에서 고무적 의미를 갖는다고 평가할
늘 이야기 됐던 반론들, 즉 양심을 어떻게 확인하
수 있을 것이다. ☮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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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부자들을 만나다 나동┃전쟁없는세상 자원활동가 + peace1@jinbo.net
다양한 매력
도 있지만 아닌 사람은 더 많다. 하지만 그 누구보 다 평화에 대한 고민이 많은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전쟁없는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양심을 나누는
는 왠지 할 이야기가 많을 거 같다. 인생유전이 길
사람들이란 비공개 모임이 있었다. 여호와의 증인
면 할 이야기도 많지 않을까?
을 제외하면 병역거부자가 거의 없던 시절(불과 몇
병역거부를 결심하게 된 계기를 한 가지로 요약해
년 전), 함께 고민을 나누며 불안감을 덜어보려 했
서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도식화시키자면 키워
던 이 모임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독서모임 또는
드가 꼭 평화는 아닐 수도 있다. 더러는 국가권력
수다모임처럼 진행되었다. 적을 땐 세 명 많을 때
이나 군대 내 권위주의가 싫어서 병역거부를 결심
는 다섯 명이, 그나마다 비정기적으로 모였는데 지
하기도 한다. 생태주의, 성소수자 인권, 반자본,
금 생각해보면 그 때 분위기가 참 재밌다.
반폭력 등등 그 이유는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종교
이동목욕 봉사활동을 시작했는데 다들 시간 없다
적 이유는 여전히 강력한 병역거부의 주요 원동력
고 한 달도 못 갔다. 서해교전 사태 때에는 해상시
이다. 이유가 다양한 만큼 사람들의 모습도 다양한
위를 해보자는 의견도 있었다. 아무튼 몇 안 되는
데, 가치관이나 이념이 다양한 것보다 삶의 모습이
사람들이 저마다 어찌나 개성이 강했는지 십인십
다양한 게 더 편차가 커 보인다. 생각만 들으면 얼
색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 같았다. 당시 병역거
핏 비슷해 보이는 사람들도 사는 모습은 생판 다
부를 선언한 사람이 딱 세 명일 때 그랬으니 지금
른 경우가 많다.
은 오죽할까?
그래도 무리해서 이들을 평화주의자라고 엮어본다
그 뒤로 병역거부자들의 면면은 더욱 화려하고(?)
면 그들이 생각하는 평화라는 것도 무척 다양할
다양해졌다. 참 사고방식도 다양했고 그 만큼 사는
것이다.
모습도 달랐다. 이들이 병역거부란 이름으로 모이 게 된 것도 재미있는 인연이었다.
출소한 병역거부자들의 삶이 궁금하다
십인십색, 그 만큼 다양한 평화
그런 이들이 1년이 넘는 시간을 감옥이란 특수한 공간에서 살다 나온다. 초기 병역거부자들은 4년
평화를 이루는 방식도 가지각색이다. 병역거부자들
이상 이 문제를 두고 씨름해왔을 것이다. 많은 시
이 모두 평화운동을 하는 건 아니다. 단체 활동가
간 고민했을 것이고 생각이 깊어진 만큼 숱한 변
20
화도 경험했을 것이다. 이들은 잠이 오지 않는 불 면의 밤에 무슨 고민을 했을까? 그 가운데 얼마나 많은 고민이 현실로 반영되고 더러는 휴지통에 버 려진 파일처럼 기억 저편에 남겨졌을까?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품거나 외면하거나 아니면 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살아가는 사람 들. 병역거부자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이들이 겪 은 숱한 고민의 시간은 단지 평화라는 거대한 이 념의 캔버스에만 흔적을 남긴 것이 아니라 세상사 인간이 고민하는 모든 문제, 즉 인간관계, 직업관, 연애관, 결혼관, 정치의식, 사회의식 등등 모든 분 야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아마도 내 예상에 많 은 사람들이 자기 몸을 재발견하는 기쁨도 누렸을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출소한 병역거부자들을 인터뷰한다. 예의와 격식은 갖추겠지만 이전과는 달리 조금 솔 직하게 접근해볼 생각이다. 그 편이 더 재밌을 거 같다. ☮
불교신자인 오태양 씨가 2001년 병역거부를 한 이후, 30여명의 사람들이 평화주의, 천주교, 불교 등 다양한 이유로 병역거부를 했다. 일부는 출소를 했고, 일부는 수감 중이다. 이들 중 왕성한 외부 활동을 하고 있고, 출소한 지 1년 이상 지난 병역거부자들을 선정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는 현재 하고 있는 활동과 출소 이후의 변화를 위주로 질문하였고, 병역거부자들의 생생한 삶을 듣기 위해 취미나 연예계 이슈 등에 대한 가벼운 질문도 추가하였다. 이번 인터뷰에 실리지 못한 다른 병 역거부자들은 다음에 기회가 되면 소개하기로 하겠다.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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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에 ’ 대한 끊임없는 고민 속에서...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유호근 인터뷰 조은 ┃전쟁없는세상 책임활동가 + epilogue@empal.com 정은 ┃전쟁없는세상 자원활동가 + zealot7df@nate.com
서울 동작구의 지역주민단체인 ‘ 희망나눔 동작네트워크’ (희망동네)에서 지역 공동체 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유호근 씨를 만나봤다. 호근 씨는 ‘전쟁 반대, 평화주의’ 신념을 이유로 2002년 병역거부를 선언하고, 2005년 2월 수감되 었다가 2006년 5월4일 출소했다. 전쟁없는세상(이하 전) 유호근(이하 유)
전 : 호근 씨가 일하고 계신 ‘희망동네’에 대한
이에요.
간단한 소개를 해주세요. 유 : 희망동네는 ‘희망나눔 동작 네트워크’의 준
전 : 희망동네에서 호근 씨는 어떤 일을 하시나요?
말이구요. 처음에 만들어질 때부터 참여한,
유 : 저는 이제 희망동네에서 사무국장을 맡고 있
동작구에 있는 지역주민단체에요. 지역의 어
어요. 단체 활동에 있어서 정말 같이 할 곳이
려운 사람을 돕는 복지 활동과 주민들이 참여
없었는데, 2년을 하면서 지금 동작구 지역단
해서 지역사회를 바꾸는 주민참여운동, 크게
체 협의회가 만들어졌고, 현재는 장애인 지원
두 가지 차원에서 활동이 진행되고 있고요.
네트워크랑 공부방 협의회가 추진되고 있어
현재까지는 동작구가 지역 참여운동이 전혀
요. 그 정도가 진행되고 있고, 올 연말에는
없던 곳이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아
의정감시단을 준비하고 있어요. 그리고 겨울
보고 있었고, 그 작업이 한 2년 정도 진행이
철을 맞이해서 연탄 지원 사업도 논의하고 있
됐어요. 지금은 어느 정도 성과가 나오고 있
어요. 하는 일들은 많은데 인력이 딸리는 게
고, 향후에 본격적으로 일을 하려고 준비 중
문제에요. 또, 동작구에 보라매 병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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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립병원이 있는데 실제로 시립병원의 공공성
어요. 그냥 개인적으로 만나서 얘기하는 것은
이 거의 없거든요. 그 병원에서 돈 되는 일만
문제가 없는데, 취업을 위한 상황에서 군대가
하고 있어서 시립병원 공공성 되찾기 활동도
면제된 사유가 이러이러하다 하면 설명하기가
해야 되고.. 하려는 거는 많죠(웃음)
난감해요. 그래서 아예 자기 스스로 일정한 검열을 하게 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좀 받
출소 후의 변화
았고, 이런 게 어떤 사회적인 제약이 될 수
: 가치에 대한 고민과 생활에 대한 고민의 경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전 : 수감 전과 출소 후의 포지션이 달라진 것 같 나요? 활동영역이나 생활패턴, 심경의 변화 같은거요.
전 : 요즘 알바하시고 계신다고 하셨는데 힘들진 않나요? 유 : 힘들긴 힘들죠. 하지만 삼십대가 되기 전까지
유 : 수감 전과 후는 아무래도 나이가 먹었다는 게
는 제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아왔는데,
달라진 거 같고요.(웃음) 감옥을 갔다 온 병
삼십대가 넘어서는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할
역거부자들은 저랑 비슷할 텐데 저는 처음에
수는 없는 것 같아요. 부모님도 나이를 드시
병역거부 할 때는 그 정도까지 생각 못했는데
고 내가 하고 싶은 것과 생활의 문제를 조화
사실 정말 제약이 많이 생기는 것 같아요. 사
시켜야 하는 어려움이 있는 거 같고 그거를
회적으로 제가 하려는 일에 있어서 제약이 많
지금 하려다보니까 불가피하게 시간을 쪼개는
이 생기고, 이제 특히 나이가 들어가면서 단
수밖에 없더라구요. 아까 얘기 한 것처럼 두
지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할 수는 없는 집안의
가지를 다 하면서 일반적인 일을 하기에는 힘
문제, 주변의 문제 등도 생기구요. 이제는 주
들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봤는데 현재 저
변을 자꾸 돌아보게 되는 것 같아요. ‘어떻
의 조검에선 대리운전이 가장 맞겠다는 생각
게 살 것이냐’에 대한 고민이 과거에는 가치
이 들어서 대리운전을 밤에 하고 오전에 자고
에 대한 고민만 있었다면 이제는 생활에 대한
낮에 나와서 일을 하고 그렇게 생활을 하고
것까지 포함이 됐죠. 그게 가장 큰 변화 인
있죠.
것 같아요. 활동에 있어서의 큰 변화는 없고 요.
전 : 안 힘든가요? 대리운전을 직접해보니까 어떤 가요?
전 : 아까 수감사실로 인해서 활동에 제약이 가해
유: 5개월 가까이 했고, 몸이 힘들어서 그렇지 일
진다고 하셨는데 어떤 것인지 일하는데 제약
은 재밌는 것 같아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을 말하는 건가요?
고 간접경험도 하고, 체력이 딸려서 그렇지
유 : 구체적으로 얘기를 한다면.. 지역활동을 하면
그것만 제외하면 괜찮을 것 같아요.
서도 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렇겠지만 생계 때문에 일을 하려고 하면 이력서를 써야
전 : 낮에는 희망동네 일을 하고, 밤에는 대리운전
되잖아요. 그러면 병역에 관한 문제도 써야
을 하고.. 이렇게 바쁘면 취미생활이나 여가
하는데,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는 일반사
시간 같은 것 없을 것 같아요.
람들에게 설명하는 게 상당히 난감한 문제였
유 : 그게 이제 지금 내가 원래 출소하면서 계획했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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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것 중에 가장 못하는 거에요. 원래는 취미
하게 되고요.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생각을
생활을 많이 즐기려고 했었죠. 과거에 구속되
하게 되면서 내가 했던 것들에 대해서 돌아보
기 전에도 내 삶의 대부분이 운동이었고 출소
게 되고, 타인에게도 그런 절대성에 대한 강
이후에도 그러다 보니까, 출소 이후에는 내가
요를 하기 힘들어지면서 내가 아닌 것들도 인
하고 싶은 것들 즐기면서 살자는 결심을 했는
정을 하게 되고요. 좋게 말하면 유연해 지는
데.. 역시나 여의치가 않아서 그런 것들은 유
거고, 나쁘게 말하면 세상에 찌들어 가는 거
보가 됐죠.
일 수도 있죠.
전 : 시간이 된다면 어떤 취미생활을 하려 했나요?
관련해서 아쉬운 거 한 가지는 운동하는 사람
유 : 악기를 하나 배우고 싶어요. 재즈를 좋아해서
들의 삶이 타자화되어 있다는 것이에요. 자꾸
섹스폰 같은 관악기를 하나 배우고 싶어요.
주변을 보고 세상을 바꾸고, 사람을 바꾸고
그리고 테니스를 배우려고 했었고요. 악기는
하는 고민들은 많은데, 정작 나의 요구에 대
처음 출소했을 때 알아봤는데 꽤 비싸더군요.
해서는 무감각하고 오히려 그거는 도외시 하
활동하면서 배우기에는 부담스러운 금액이라
는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는 감옥에 있는
보류하고 있어요.
동안은 정말 할 수 없다보니, 나의 요구가 뭔 지 내 몸의 소리에 기울였던 거 같아요. 그러
“운동하는 사람들의 삶이 타자화되어 있다”
면서 발상의 전환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쉬운 건 그 때 생각했던 게 밖에 나와서 유지가 안
전 : 원더 걸즈의 텔미 아세요?
된다는 거죠.
유 : 저는 소녀시대 팬이에요.(웃음) 기본적으로 누구나 젊음을 보면 에너지를 느끼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좋아하는 건 아니에
전 : 마지막으로 호근 씨를 지지하고 있는 사람들 에게 한마디 해 주신다면?
요. 제가 뭐 소녀시대를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유 : 정부에서 대체 복무제 도입했다고 발표한 상
건 아니니까.(웃음) 그냥 보면 활기차고 그런
황이잖아요. 그동안 다들 고생들이 너무 많으
게 좋다. 그런 분위기가 좋다 정도죠.
셨어요. 사실 사회적인 여건 때문에 이번 국 회회기 안에서는 힘들고 다음 국회에서나 될
이런 걸로 깊게 얘기하는 건 우스운데 과거에
거라 생각했는데, 아마 노무현 정부가 물러나
는 가치지향적인 삶을 살았어요. 그런데 가치
기 전에 다 해버린 것 같기도 하고요. 어쨌든
지향적인 게 뭔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면
그 과정에서 함께 했던 사람들 때문에 여기까
서, 감각적인 걸로만 가면 안 되겠지만 감각
지 온 거죠. 도움 줬던 사람들에게 감사해요.
적인 부분들도 긍정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정말 동생들, 후배들이 여기 오면 안 되겠다
하게 됐어요. 그러다보니 그런 부분(소녀시대)
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 시간이 빨리 와서 기
에도 눈이 가더라고요.
쁘고, 빨리 정식으로 통과가 돼서 법제화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보이는 게 달라지는 것 같
됐으면 좋겠어요.
아요. 이것이 절대적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 게 절대적인 게 아니었구나하는 것을 발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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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이 계획하고 같이 걸어가는 평화운동을 위해...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염창근 인터뷰 조은 ┃전쟁없는세상 책임활동가 + epilogue@empal.com 정은 ┃전쟁없는세상 자원활동가 + zealot7df@nate.com
염창근 씨는 ‘반전, 평화’ 를 이유로 2003년 병역거부를 선언했고, 2004년 12월 수감되었다가 2006년 1월 27일 출소했다. 현재 평화바닥과 전쟁수혜자 모임 등 다양한 반 전 평화활동을 하고 있는 창근 씨를 만나봤다. 전쟁없는세상(이하 전) 염창근(이하 염)
도 간간히 대책활동하고 있어요. 크게는 이정 전 : 현재 어떤 일을 하시는지 소개를 부탁드려요.
도고, 가끔 전쟁없는세상과 병역거부 운동에 서 요청하는 그런 병역거부자로서의 운동을
염 : 지금은 몇 가지 평화활동가들 모임들 활동을
곁들여서 하고 있습니다.
하고 있고요. 얼마 전부터 알바를 하면서 생 계를 꾸려가고 있어요. 그리고 동생들하고 같
출소 후의 변화
이 생활하는 집에서 살림을 맞고 있습니다.
: 혼자가 아닌 함께 하는 운동
주로 하는 활동은 평화바닥이라는 이라크 반
전 : 활동에 대한 대략적인 얘기만 들어도 상당히
전평화팀에서의 활동이고, 그밖에 전쟁수혜자
많은 활동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출소 후에
모임, 이라크 평화모임이라는 연대모임, 지금
일이 더 많아졌나요? 수감 전과 후의 활동이
은 거의 안하지만 운동사회 성폭력 문제 활동
어떻게 변화했나요?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9호
25
“....이제는 시간도 없는데 놀기도 잘하자는 생각만 있으니, 노는 것도 일이 되어버렸어요. 노는 것도 일처럼 조직해가지고...” 염 : (수감)전에는 주로 활동했던 게 두 가지였죠.
했던 것도 있고, (활동에 있어서) 내가 다 알
이라크 문제와 병역거부운동. 이 두 가지활동
고 내가 다 해야 한다는 생각이 컸죠. 일 중
이 거의 중심이지만, 한창 일이 커지고, 이슈
심인 시간을 보냈어요. 쉬고 노는 것도 일정
화되는 상태였기 때문에 양적으로는 그 때가
속에 포함되는 이런 식이었지요. 결국 병역거
훨씬 많았던 것 같아요. 지금은 활동하는 영
부 결심하면서부터 감옥가기 전까지, 아침에
역이 넓어졌지만, 그때처럼 정신이 없진 않고
깨서 잠들 때까지 일만하는 그런 시기를 보냈
계획한 만큼 조금씩 해 나가고 있어요.
어요.
전 : 지금 하는 일은 만족스러우세요? 염 : 아뇨 불만족스럽죠. (웃음)
출소 후에는 그렇게 한 것이 후회돼서 바꾸겠 다는 생각은 아니었고, 약간 쓸모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한다고 해서 뭔가
전 : 어떤 점이 불만족스러우세요?
더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갈수록 저 한테 일이 몰리면서 정보에 있어서 독점적이
염 : 계획대로 안 되니까요. 일단 공부욕심이 많아
되고, 같이 활동하는 사람들 속에서 위계가
서 책도 읽고, 활동도 하고 같이 해야 되는데
생기면서 어떤 활동에 있어서 허락을 받아야
쉽지 않네요. 사실 출소하기 전에 감옥 안에
되는 식이 되고.. 이러다 생긴 갈등 상황이
서 일이 많은 게 좋은 게 아니라는 생각을 많
한번 놀자고 해서 해소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이 했었거든요. 가능하면 너무 많은 일을 하
이런 상황이 평화운동을 깊이 있게 하는데 걸
지 말고,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놀고
림돌이 되는 작용을 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
즐기는 시간을 많이 보내야겠다고 생각했어
어요. ‘혼자서 열 걸음씩 가려고 하는 것은
요. 출소초기에는 그렇게 했죠. 그런데 점점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죠.
일이 많아지면서 그 시간이 줄어들었어요. 그 러다보니 이제는 시간도 없는데 놀기도 잘하
후회하고 그럴 문제는 아니겠고, 현실적으로 혼
자는 생각만 있으니, 노는 것도 일이 돼버렸
자서 다 짊어지는 것으로 될 운동이 아니라는
어요. 노는 것도 일처럼 조직해가지고 어디가
생각 속에서, 이제는 같이 계획하고 같이 걸
자, 등산가자 이런 식으로 조직하고 하니까
어가고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고민하고 있는
요.(웃음)
데, 잘 모르겠네요.(웃음)
전 : 일이 아닌, 주변사람들과 시간을 보내야겠다 는 생각이 수감 전후의 큰 변화인가요? 염 : 그전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좀 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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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 수감생활 동안 생각이 변하게 된 특별한 계기 가 있었나요? 염 : 계기는 많았어요. 많은 사람들이 지적해줬죠.
감옥에 가서도 초기에는 일 하려고 했어요.
혹시 시간적인 이유 때문에?
우편과 서신으로 자료 받는 식으로 일 하려고 했어요. 사람들이 자료 뽑아서 넣어주고 하는
염: 맞아요. 그게 제일 크기도 했는데.. 자연스럽
일을 2개월간 했는데, 사람들이 많이 힘들어
게 그렇게 된 것 같아요. 게임 같은 것이 재
했죠. 주변에서 지적을 많이 해줬죠. 애인으
미가 점점 없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끊게 된 것
로 있는 친구에게서 이런 식이면 뒷바라지 못
처럼요. 채식도 마찬가지인데, 채식을 하면서
한다는 말도 나오고.(웃음) 저는 안에서 그렇
점점 분명한 형태가 있는 고기를 먹을 수가
게 일해도 제가 실제로 일하는 게 아니라서
되는 거에요. 얼마 전에 감자탕을 동생이랑
처리되는 느낌이 없었어요. 그래서 뭔가 부족
먹었는데, 감자탕 등뼈 있잖아요. 그게 자꾸
하다고 느끼고, 밖에 사람들을 더 닦달했던
생각이 나는 거에요. 그래서 잘 못 먹겠더라
것 같아요. 안에 있으니까 일도 느리고 결과
고요.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끊게 되어가는
물이 나와야 될 거 같은데, 밖과는 소통이 안
것 같아요.
되고 하니 사이가 점점 안 좋아지고.. 그래서 그 때부터 일을 놓기 시작했어요. 그러고 나 서 문제가 뭔지 돌아보기 시작했죠. 하지만
전 :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쉽게 깨달아지지 않더라고요. 지금도 계속 고 민하고 있어요. 일 대신 책을 보고.. 이러면 서 서서히 문제가 뭔지 보이는 거 같아요. 전 : 요즘 특별히 취미생활로 즐기는 것 있나요? 영화나 게임이나. 염 : 게임은 2001년에 끊었어요. 게임을 좋아해서 여러 가지 게임을 즐겼었는데 하지 말아야겠 다는 마음을 먹고 차근차근 몇 가지씩 끊기 시작했어요. 햄버거를 안 먹겠다. 콜라를 안 마시겠다. 컴퓨터 게임 안 하겠다. 이런 식으 로 다 끊었어요. 물론 술과 담배는 포함되지 않지만..(웃음) 시간나면 주로 하는 게 독서.. 라고 하면 안 되겠죠. 예전에는 비디오나 영 화를 봤는데, 이제는 그런 것도 거의 안 하고 만화책을 보거나 웹서핑을 좀 하죠. 웹서핑도 평화와 관련된 정보들로..(웃음) 전 : 게임이나 그런 것을 의식적으로 끊은 건가요?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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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운동에 기여할 수 있는 공부를...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임재성 인터뷰 조은 ┃전쟁없는세상 책임활동가 + epilogue@empal.com 정은 ┃전쟁없는세상 자원활동가 + zealot7df@nate.com
임재성 씨는 ‘반전, 평화’ 를 이유로 병역거부를 선언했고, 2005년 1월 28일 구속, 수감되었다가 2006년 5월 4일 출 소했다. 현재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있고, 평화활동 과 인권재단 사람에서 발행하는 잡지인 월간‘사람’ 편집 일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재성 씨를 만나봤다. 전쟁없는세상(이하 전) 임재성(이하 임)
나의 공부는 평화운동의 연장선
채워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해서 대 학원을 찾아보게 되었죠. 평화학이나 군사주
전 : 현재 대학원 공부를 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
의 쪽으로 공부해 보고 싶었는데, 실제로 한
데, 수감 후 공부를 계속하게 된 이유가 있나
국에서는 그런 학문을 배울 수 있는 곳이 거
요?
의 없고, 그나마 가장 근접한 학문이 사회학
임 : 수감시절에 출소하고 나서 뭘 할지 생각들을 많이 했었는데 단체에서 계속 활동을 하는
이 아닌가 해서 사회학과 대학원에 진학을 하 게 되었어요.
것, 공부를 조금 더 해보는 것, 아니면 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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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었던 언론사 시험 준비하는 것, 이 세 가
대학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제가 학부가 법학
지를 고민했어요. 출소하고 나서 사람들 만나
이고 해서 사회학 기초를 쌓는데 시간도 들고
얘기도 좀 해보고 실제로 자료들을 찾아보고
고생도 좀 했는데요. 지금은 조금 더 제 고민
하는 과정에서 공부를 조금 더 해보는 게 좋
에 근접한 연구들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
겠다는 욕심이 들었어요. 일천한 교양을 좀
래도 좀 자리를 잡았구나 하는 생각을 들고
있구요. 지금은 석사논문을 어떻게 좀 더 활
있어요. 그래도 이제 집에 갈 때는 꼭 한 번
동과 지금의 평화운동과 맞닿아 쓸 수 있을지
씩 듣고 가고하죠.
를 고민해 보고 있어요. 전 : 자제는 어떻게 해요? 전 : 수익생활은 어떻게..?
임 : 일단 인터넷에 원더걸즈 동영상이 자꾸 올라
임 :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사교육으로 돈을 안
오잖아요. 군부대 동영상, 의무소방관 동영상,
벌어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수감시절에
고3 원더걸즈.. 막 클릭을 하고 싶은데 그냥
조금 더 공부를 했구요. 나와서 디자인 기술
저는 오로지 박진영의 혼이 담겨있는 ‘원더
로 돈을 벌 수 없는지 알아봤어요. 지금은 한
걸즈의 텔미’만 보고 있습니다.
달에 한 번씩 인권재단 사람에서 나오는 ‘사 람’이라는 잡지를 편집하러 수원 가는 거랑,
현재의 목표
학과에서 학과 서버 관리랑 홈페이지 제작하
: 공부와 활동의 연계
는 일.. 그리고 이건 좀 제 자랑인데 여기 사 람들이 그런 걸 잘 몰라서 제가 잘 하는 줄
전 : 현재의 목표는 뭔가요?
알아요. 그래서 이것저것 홈페이지 만드는 일
임 : 제가 성격자체가 원래 일을 하는 걸 좋아하고
들이 들어와서 지금은 얼마 전에 출소한 뎅
사람들과 만나서 구체적인 변화가 가시적으로
(김태훈)이랑 같이 홈페이지 작업하는 게 하
드러나는 걸 좋아해요. 글을 쓰는 것들 중에
나있고, 학과 연구소 홈페이지도 방학 때 작
서도 인터넷 매체에 기고하는 그런 방식의 글
업하려고 해요. 재수가 좀 좋아서 돈을 버는
들을 좋아하고요. 지금 생각에는 우선 공부를
일이랑 등록금을 마련하는 일은 그럭저럭 되
하고, 아마 석사를 마치고나면 단체활동가로
고 있죠.
다시 돌아가서 여러 가지 기고나 글을 쓰는 일들을 한다거나, 아니면 조금 더 준비를 해
전 : 원더걸즈 좋아하나요?
서 평화교육이나 여러 가지 세미나 커리 같은
저도 원더걸즈 좋아해요. 원더걸즈 첨에 [아이러
거를 만드는 것들이 제가 공부한 시간들을 좀
니]나왔을 때는 안 좋아했는데 [텔미] 나왔을
더 의미 있게 평화운동에 기여할 수 있는 방
때는 뮤직비디오 다운받아서 아마 100번은 넘
법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게 봤을 거에요. 지금은 전 안무를 다 외우고
물론 그런 것 이전에, 공부하면서 느꼈던 거
있고, 전 가사를 다 외우고 있어요. 소희가 좋다, 누가 좋다는 식으로 원더걸즈 개개인을 좋아 한다기보다는 원더걸즈 안에 있는 박진 영의 흥이 느껴져서 좋아요. 제가 박진영을 좋아하는데, 원더걸즈 안에서 박진영을 느끼 면서 되게 즐거웠던 거 같아요. 그런데 이게 변질이 돼서 이게 로리타 콤플렉스다 뭐다 이 렇게 분석을 하니까 이제는 좀 자제를 하고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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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필드에서 활동하는 걸 제가 좋아하는 것
해서 본인 스스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나요?
같아요. 그래서 조금 더 공부하고 다시 열심 히 활동하는 제가 되는 게 지금은 저의 목표 입니다.
임 : 얼마 전에 드라마 보니까 배종옥이 그런 말을 하더라구요. “니가 쿨하지 못하다는 걸 아는 게 정말 쿨한거야” 그런 거 같아요. 제가 운
‘임재성의 헬스클럽’
동을 하면서 그런 얘기 되게 많이 듣는데, 물 론 근육이 있고 몸에 힘이 있으면 확실히 생
전 : 몸이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들으시지 않나요?
활을 하는데 힘이 붙는 거죠. 근데 근육이 의
임 : 세상에 몸 좋은 사람이 정말 많은데 저 같은
미하는 남성성이나 같은 것들에 대해서 저 역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한다는 건 좀.. 저는 조
시도 갖고 싶고 원하고 있는 것 같아요. 몸이
금 뚱뚱한 거고 저처럼 술을 많이 먹고 하는
좋은 남자배우들이 티비에 나왔을 때 부럽다
사람에게 과잉근육이라 말하는 거는 아니죠.
는 생각을 해요. 몸이 조각 같아지고 싶고 그
조금 운동을 해 보신 분이라면 알텐데..
런 건 아니지만, 제 안에도 분명히 그런 욕망
운동은 수감되고 나서부터 꼬박꼬박 했구요. 그
들이 존재하는 거 같아요. 특히 요즘에는 태
게 습관이 돼서 출소하고 나서도 계속 운동을
왕사신기를 봤을 때 그런 걸 느껴요. 검들에
했어요. 그리고 지금도 대학원 다니면서는 학
묻어나는 피들이 끔찍해서 주몽 같은 거는 되
교 안에 있는 피트니스에 등록을 해서 일주일
게 싫어하는데도 불구하고 제가 태왕 사신기
에 두 번 내지 세 번 정도는 운동을 하는 편
를 보는 게, 배용준 때문이 아닌가 해요. 제
인데, 원래 좀 체격이 어깨가 넓고 살이 있는
가 배용준을 상당히 좋아하는데, 배용준의 몸
편이라 몸이 좋다고 보시는 것 같은데 저 그
때문이 아닌가 싶죠. 분명히 제 안에도 그런
렇게 몸에 집착하는 거 절대 아니에요.
모습들이 있는 거 같아요. 그런데 그렇다고
그리고 염창근 씨는 “전경 옷을 입고 있는
해서 운동을 그만 해야겠다는 생각은 아직 해
것 같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넌 왜 항상
본 적이 없어요.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냐.” 이러는데, 아닙
모든 남성들이 원하는 것들을 나 역시도 원하
니다. 원래 어깨가 올라왔어요. 그래서 그렇
고 있고.. 그런 모습을 어떻게 극복할까.. 글
게 보이는 거구요. 기회가 되면 많은 사람들
쎄요. 그런 것까진 아직 고민이 없는 것 같아
이 같이 운동을 했으면 좋겠어요. 특히 활동
요. 뭐 정답이 있겠습니까. 자기가 하는 일이
하다 보면 식생활도 불규칙하고, 운동도 잘
어떤 건지 어떤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존재하
못할텐데 기회가 되면 ‘임재성의 헬스클럽’
는 건지 알아가고, 자기가 깨달으면 스스로
같은 거 열어서 많은 분들에게 운동하는 법을
바꿔 나가고 그럴 필요가 있는 거죠. 하지만
알려드리고 싶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K1(이종격투기), 권투 이런 것들은 평화주의자들이 하면 안 되지 싶
전 : 사실 건강차원에서 운동을 한다면 특별히 근
어요. 저의 고민은 그 정도까지인 것 같아요.
육을 키울 필요까지는 없다고 보는데, 남성의 근육이 상징하는 것들이 있잖아요? 그것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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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당신의 선언, 감동이 없다 지은┃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활동가 + oversmiler@gmail.com
얼마 전 한국의 300여 시민사회단체가 모인 파병반대국민행동은 정부의 거듭된 파병연장 추진에 대한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히기 위한 자리 중 하나로서, 각계 인사들의 파병연장 반대 선언식 기자회견을 가지게 되었다. 파병반대국민행동 기획단원 중 한 명이었던 나 역시 이번 선언식 개최에 여러 가지 실무를 담당 하면서 며칠을 바삐 보내야 했다. 보통 선언문 초안을 작성하고 여러 사람들의 검토를 거쳐 최 종 완성한 다음 이를 각계각층으로 메일이나 팩스를 보내 회람하고 선언에 참여할 인사들을 조 직하는 일을 한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도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법은 없었다. 각계각 층의 두루 인사들에게 연서를 부탁하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은 누가 ‘인 사’인가를 정하는 것부터가 애매모호하고 난처한 일이었다. 대개 진보적 평판이 나 있는 사람들을 추천해 연명 참여를 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하고 각 시민 사회단체로부터 간부급 명단을 일괄 넘겨받아서 인사목록에 넣기도 한다. 어떤 곳은 아마 우리 가 사람 수 채우기 급급하다고 생각했는지 단체 상근자들의 이름을 모조리 보내기도 했다. 반면 어떤 활동가는 왜 간부급 명단만 보내야하는 거냐며 볼멘 충고를 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을 겪으니 도대체 누가 누구를 위한 선언을 하고자 하는 것인지 오히려 반문이 들었다. 우리 사회에서 인사라는 계열에 속한 사람들이 줄기차게 파병을 반 대하는 입장을 널리 알리고자 애써 왔다면 굳이 오늘과 같이 내가 직접 나서서 그들 에게 연서를 받으러 다니는 일이 생겼을까 싶었다. 3․1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대표자들 이 직접 만든 독립선언은 일파만파 독립운 파병반대국민행동 주최로 10월 1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앞에서 동의 봇물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오늘 내 열린 자이툰 부대 파병연장 반대 기자회견에서 각계인사들이 정 부의 자이툰 부대 파병연장을 반대하는 공동선언문을 발표하며
가 준비하는 선언식은 그런 자발적 의미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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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 차 퇴색되고 이미 다 차려진 밥상에 제발 오셔서 이 선언문을 외쳐달라고 주문하고 있는 모양새 처럼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이번 파병연장 반대 각계 인사는 총 368인의 연명으로 완성되었다. 그에 비해 기자회견에 참석 한 사람들은 스무 명도 되지 않았다. 도대체 이번 선언이 얼마만큼 파병을 막으려는 간절한 울 림으로 작용하는 것일까? 선언이 가질 엄숙하고 고귀한 가치는 사라지고 그저 행사를 위한 행사 로, 기자회견을 위한 기자회견으로 전락되고 남용되는 것은 아닐까? 과연 여기에 나열된 연명 중에서 정말로 이라크의 절규를 생각하며 선언을 작심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는 선언식 기자 회견이 진행되는 내내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 채 직접 준비한 당사자로서 자괴감에 빠 져 있어야 했다. 팔루자 학살, 아부그라이브 감옥 포로 학대, 고(故)김선일 피살 사건, 시아와 수니 분열사태… 지 난 수 년 간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라크에서의 굵직굵직한 사건들 몇 개만 되뇌어 봐도, 과연 인간이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전쟁의 상처는 우리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을 만큼 잔인하 다. 이러한 전쟁의 참상이 일러주는 것은 우리가 파병을 반대하는 운동이 형식상 내용상으로 대 수술이 필요할 시기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지금 한국에서의 주류라고 볼 수 있는 제국주의 미국만을 겨냥한 운동이거나 혹은 반정부 시위의 수단 중 하나로 취급되는 양상도 우 려스럽다. 진정한 평화운동은 인간의 전쟁행위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이 담겨 있어야 한다. 살려
지금처럼
‘언론
플레이용’
그러한 의미를 선언이
아니라
‘인사’든 ‘비인사’든 구분 없이 한국군 파병이 어 떻게 부당하며 정의롭지 못한지를 알리는 각계 양심선 언이 잇따라야 할 것이다. 나 또한 이제 운동적 각성이 없는 억지 선언을 애써 준비하지 않아야겠다. 더 이상 의 생명력도 감동도 느낄 수 없는 선언은 모래사막위 에 집을 짓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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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한 통 쓰실래요? 여옥┃전쟁없는세상 책임활동가 + yo1004@hanmail.net
지난 국방부의 발표 이후 한동안 몹시 떠들썩했
시선들로 심리적인 압박이 심해지는 그 때, 가
다가 다시 잠잠해진 요즘, 간혹 사람들은 이렇
장 필요한 것이 바로 ‘외부와의 소통이다 ’ .
게 묻곤 한다. “대체복무제도 된거 아니었어?”
다들 알다시피, 수감된 병역거부자와 그를 지지
아니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어쩌면 제대로
하는 사람들과의 소통은 매우 중요하다. 대부분
가기조차 힘든 길일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리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이 모여있는 공간에서 총
고 여전히 병역거부자들이 감옥에 있다. 전과자
을 들 수 없는 자신의 양심에 대해 끊임없이 설
를 양산하는 현행 병역제도에 문제가 있다며 병
명해야하는 위치에 처한 사람에게 외부에서의
역거부자들을 감옥에 보내지 않고 대체복무를
관심과 지지는 큰 힘이다. 예전에 한 병역거부
시키겠다는 국방부의 입장이 이미 밝혀진 이 상 황에서, 이제는 더 이상 범죄자가 아닌(물론 예 전에도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800명이나 감옥에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또다시 겨울은 다가왔다. 앞에서도 소개가 되었지만 병역거부자들은 무척 다양하다. 그래서 수감된 병역거부자들이 모두 이렇다 저렇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을 꼽으라면 외부와의 단 절감 - 그로 인한 소외감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감옥이 아닌 바깥에서 일상생활을 잘 하던 사람들도 종종 심한 외로움을 느끼고 잠적 도 하고 슬럼프도 겪는데, 심지어 감옥 안에서 는 오죽 할까. 병역거부를 고민할 때부터 또는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부터 마음의 준비를 했으 면서도 막상 부딪히게 되는 낯선 환경과 낯선 상황들은 당황스럽기도 하고 긴장을 늦출 수 없 게 한다. 수감자 간의 사소한 갈등이나 불편한
단절된 상황에서 편지는 생각보다 큰 힘을 발휘한다. 편지를 받고 기뻐하는 해리포터의 모습
자는 폐방점검을 하고 편지를 나누어주는 오후 5시를 손꼽아 기다리게 되면서 자신이 징역살이 를 혼자 힘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 들의 관심과 사랑으로 하고있다는 것을 절감했 다고 전해왔다. 이런 이야기가 담긴 답장을 받 았을 때의 기분은 어떨까? 소통은 결코 일방적이지 않다. 감옥 안에서는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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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어지기 어려운, 마음을 나누는 대화가 오고
은 편지가 중심이 된다. 인터넷을 이용한 전자
갈수록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관계가 싹튼다.
서신을 이용하면 이메일 쓰듯이 편리하게 소식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군대 대신 감옥을
을 전할 수 있다. 가끔은 정성스런 손글씨로 편
택한 병역거부 수감자와의 진지한 소통은 평화
지를 보낸다면 사이가 더욱 돈독해지지 않을까?
에 대해 배워가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
여행지에서 보내는 엽서나 현상한 사진 뒤의 메 모, 중요한 기사를 표시해둔 잡지는 수감자에게
소통은 수감자에게 심리적인 안도감을 줄 뿐만
더없이 좋은 선물일 것이다. 간혹 소통의 시간
아니라 실제로 불합리한 상황에서 보호해주는
차 때문에 힘들어할 수도 있다. 편지를 받고 연
역할을 하기도 한다. 감옥특성상 정보접근성이
락을 하고 의견을 나누고 다시 편지를 보내는데
떨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에 억울한 일들이
걸리는 며칠은 안에서 연락을 기다리는 사람에
발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외부와의 긴밀한 소통
겐 너무 길게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빠른
이 있는 수감자의 경우는 필요한 정보를 쉽게
답장을 해야하는 상황일수록 서두르는 것이 서
얻을 수 있고, 필요에 따라 인권단체가 개입하
로에게 좋다. 잘못하면 사이가 더 나빠질지도
기도 한다. 그래서 민가협이나 인권단체에서 계
모른다.
속 소식지를 보내오거나 편지가 꾸준히 오는 사 람에게는 교도관, 재소자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 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도 좀더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은 따 로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감옥이라는 독특한 공간에서 자신의 한계를 경 험하기도 하고, 많은 것을 깨닫기도 하고, 작은 것에 감정이입을 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이나 고
△ 2007 평화수감자의날 엽서
민, 생각들을 통해 변화하는 모습은 소통하는 과정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런 소통의
올해도 12월 1일 평화수감자의 날이 다가온다.
결과물들은 수감자 스스로에게도, 지지하고 지
바쁘다보면 그 편하다는 전자서신 한 통 쓰는
켜보는 사람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는 결과물
것도 쉽지가 않다. 이렇게 기회가 마련될 때 엽
로 남게 된다. 출소한 이후에는 징역생활이 잘
서 한 장이라도 쓰는 것이 상책이다. 나의 엽서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던데, 남겨진 기록은 축적
한 장이 수감자들에게는 감옥 생활을 견뎌낼 힘
되어 역사가 되기도 하고 같은 길을 가려는 사
이 되곤 하니까. 그리고 늦은 귀가길 우편함의
람에게 안내서가 되기도 한다.
편지 한 통은 나에게도 삶의 활력이 되어줄 테 니까.
소통은 주로 편지로 이루어진다. 면회는 시간이 짧고 횟수도 제한적이기 때문에 지속적인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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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감자들 주소는 소식지 뒷표지를 보시길. ☮
채식이야기 세 번째, 밥상 앞에서의 기도 용석┃전쟁없는세상 책임활동가 + stego@jinbo.net 얼마전 전쟁없는세상 책임활동가로 복귀한 용석씨가 수감시절에 보내온 수감기록 중 채식에 관한 이야 기를 연재해오고 있습니다. 채식이야기는 세 번째 이야기를 끝으로 마무리됩니다.
배고픈 아이 청주교도소의 가장 큰 장점은 음식이 맛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재소자들이 만드는 밥인데 무슨 차이 가 있겠냐 싶지만, 그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이를테면 수원구치소의 밥알은 모래알 마냥 따로따로 굴러다니며 푸석거리지만 청주교도소의 밥은 반들반들한 윤기에서 단맛이 우러나온다. 가장 기본적인 밥맛에서 이미 게임 끝이다. 밥이 유난히 맛있어서인지, 아님 활발한 육체활동이 입맛을 돋우는지, 먹 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다.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 아마도 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밖에서는 고기를 안먹으면서도 충분한 영향을 섭취할 수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불가능하다. 몸에 부족한 것이 있기 때문에 뱃 속이 항상 허하고 몸에 힘이 없는 거다. 그렇지만 고기를 먹고 싶지는 않다. 내가 살 찌기 위해서 누군가는 고통스러워야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냥 배고프고 말아버린다. 거룩한 밥상 내가 일하는 직원 이발은 총 10명이 출역을 하고 있다. 대부분이 여호와의 증인이며 나머지 사람들도 각자의 종 교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밥먹기 전에는 언제나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모두들 굳게 다문 입과 지긋이 내리감은 눈꺼풀로 저마다의 의식을 치룬다. 혼자서 멀뚱멀뚱거리고 있기도 민망해서 나도 함께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근데 뭐라고 기도해야 하지? 누구에게 기도 드리지? 지구촌 어 딘가에선 하루 한 끼도 먹지 못해 온 몸이 오그라드는 아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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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한 끼의 밥상은 그 자체로 감사의 대상이다. 가만히 음식들을 들여다 본다. 풋고추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져 있을지, 호박볶음은 어떤 세상을 품고 있을지 생각해본다. 오 늘 아침 미역국엔 짜고 서글픈 어부의 땀방울이 담겨져 있다. 찰지고 부드러운 쌀·보리밥은 내리쬐는 햇살의 열정과 세찬 빗줄기의 속삭임을 가지고 있다. 무말랭이 무침은 꼼지락거리는 지렁이의 몸짓을 닮았다. 밥상을 앞에 두고 어느덧 나는 기도하는 법을 익혔다. 저 쨍쨍한 7월의 태양과 뭉클거리는 구 름과 시원한 빗줄기와 농부의 땀과 눈물에 감사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내 앞에 펼쳐진 세상은 기적과도 같은 이야기들이다. 이 거룩한 광경 앞에서 겸손해지지 않을 사람 누구 란 말인가. 아무도 미워하지 말기를 감탄으로 받은 밥상에서 감사로 시작된 기도는 언젠가부터 하나의 바램으로 끝맺게 된다. "밥상 앞에 서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기를..." 싫은 사람은 있었지만 미운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감옥 안에서는 적어도 한 명씩 미운 사람이 꼭 있다. 예컨대 같은 방의 A라는 사람이 너무 밉다. 그 사람이 출소하 거나 이감가면 '이제 미운 사람이 없겠구나' 싶었지만, 나머지 사람 중에서 다시 미워지는 사람이 생 겨났다. 언제나. 결국 문제는 상대방이 아니라 나에게 있던 것이다. 소설[데미안]에서 읽은대로 사람들은 자기 안에 없 는 것을 미워하지 않는 것이다. 미움을 만든 건 다른 사람이 아닌 나였던 것이다. 안다. 이 모든 걸 머리로는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 또한 미움은 굉장히 강력한 에너지라서 그 감정을 갖는 사람의 원 기마저 갈아먹는 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아직 너무나 부족한 인격을 가진 나는 어쩔 수 없다. 머리 로 아무리 이해해도 마음이 따르지 않는다. 미운건 미워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밥상 앞에서 기도하 기 시작했다. 적어도 이 거룩한 밥상 앞에서는 감사하는 마음만으로 충만하기를. 아무도 미워하지 말 기를 기도했다. 신기하게도 기도는 큰 효과를 보였다. 내 앞에 펼쳐져 있는 거룩한 기적에 압도되어 누군가에 대한 미움은 말끔히 사라졌다. 밥상 앞에서의 감정 상태는 밥상을 떠나서까지도 영향을 끼쳤다. 내 마음에 서 미움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했지만, 예전보다 약해진 미움의 가늘게 뜬 눈을 느낄 수 있다. 나의 기도는 채식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감사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이 채식과 무슨 관계냐고 궁금해하 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게 채식은 일종의 행위를 넘어선 마음가짐이다. 그 마음가짐을 몸의 기억 으로 아로새기기 위한 노력이다. 밥상 앞에서의 나의 몸가짐 마음가짐을 가다듬는 일이다. 밥상을 통 해서 세상과 관계맺는 일이다. 때문에 나는 항상 배가 고파도 내 몸에 결핍이 느껴져도 밥상 앞에서 행복함을 느낀다. 아. 배고프다. 빨리 내일 아침 식사 시간이 되었으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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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지 못한 자]를 보고 정은 ┃전쟁없는세상 자원활동가 + zealot7df@nate.com
정상적인 사회화 과정이란 어떤 것일까? 학교, 직장, 동아리 같은 단체... 한 개인이 속해있는 그 모든 준거집단들이 개인에게 제시하는 어떤 태도 의 기준이란 것이 있다. 그것을 사회성이라 칭할 수도 또는 처세술, 융통성, 뭐 EQ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한 개인이 다수의 개개인들의 집합체인 단체에 속하기 위해, 적응하기 위해, 이렇듯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 워지는 자신을 재처리하는 어떤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뻔한 얘기,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혼자서는 살 수 없고 등등 익히 많이 들어왔던 얘기를 또 다시 언급하지는 않겠다. 여하튼 사회화 과정은 필요하단 것 이고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사회화 과정은 어떠한가? 내가 겪은 몇 가지 과정을 소개해 보겠다. 나의 대학시절, 자유, 힙합정신 어쩌구 하며 특권인 듯 젊음을 누리려던 청춘들이 많았던 그 곳, 나는 춤 동아리에서 활동했었다. 신나고 자유롭고 재미있을 것 같았던 그 곳은 나에게는 고등학교 사춘기 시절보다도 더한 반항심을 마구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선후배간의 철 저한 위계질서라던가 엠티에서의 극기 훈련 비슷한 -그걸 한 따까리 한다고 했던가- 뭐 그런 모습들은 차 치하고 뭔가가 굉장히 답답하고 비합리적이었으며 나의 논리적 주장이 선배들에겐 전혀 먹히지 않는다고 느꼈던 한 시절이었다. 그것이 지방대의 경우 더욱 심하게 나타난다고 누군가는 말하던데. 여하튼 나의 사 회성의 결핍이었을까, 아니면 처세술의 결핍이었을까? 나에겐 둘 다 엇비슷한 말로 들리지만. 물론 의미 가 좀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사회적 필터링이 좀 부족했던 사람이었던 걸까. 결국 적응하긴 했지만 진짜 적응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여튼, 그 사람들 지금 생각해도 참 갑갑~~하다. 어쨌든, 뭐 이런 것들로 군대식 문화에 젖은-여성에게도 요구하기위해 변형되어진-사회화 과정의 한 단면 을 엿볼 수 있지 않나 싶다. 그러니까 여성에게는 다른 식으로 작용된다는 얘기다. 그 얘긴 나중에 기회 있 으면 하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들의 그런 모습에서, 군대 문화를 흉내 내는 또는 이미 자신들도 모 르는 사이, 스물 몇 해 살아오는 동안 몸에 배어버리게 되었는지 모를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지 않는가 생 각해 보게 된다. 나의 직장은 영화계이다. 자칭, 타칭, 문화 예술계라 부르는 그 곳. 그러나 여기도 별반 다른 곳은 아닌 듯 싶다. 나의 공손함과 말 잘 들음을 가장한 가식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으나 이곳에서의 생존을 위 해 그것을 꼭 발전시킬 필요가 있단 생각이 든 적도 있다. 그런 것에 거부감 느껴지고 반항심이 일면서도 적응하기 위해 내 자신을 맞추어가던, 그리고 결국에는 그러한 것들이 내면화 되어 내가 비판해 마지않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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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과 같아져버리는 그런 모습을 나 자신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분명 이러한 나의 개인적인 경험들 을 일반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겠으나 사실 우리 사회 전반을 그냥 훑어보더라도 군사문화의 영향이 참으 로 공고함을 볼 수 있는 경우는 많을 것이다. 풀어내는 방식도 다르고 비중을 둔 지점도 다르나 비슷한 주 제를 다룬 영화로는 [방과 후 옥상]과 [말죽거리 잔혹사]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군대를 제대한 사 람들이 그렇게 어른이 되어서 그렇게 가르쳐서 그렇게 배운 아이들이 자라 군대를 가고, 다시 한 번 그렇 게 개조되어 나오고 그렇게 어른이 된 사람들이 그렇게 만드는 세상. 그런 구조를 이 두 영화에서도 살펴 볼 수 있다. 이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속의 군대란 조직은 이해할 수 없다. 말도 안 됨이 말이 되는 곳.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키워지는 이상한 구조. 그 속에 적응하려 서로에게 상처를 내는 소년들. 상처 냄을 당연시하고 깨 닫지 못하는 그들. 그런 모순들을 처음엔 거부하지만 결국엔 그런 모순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내면화되 어버린 소년들. 그렇게 어른(?)이 된 소년들. 피해자이자 가해자였던 그들 모두가 용서받지 못한 자는 아닐 런지.. 용서받지 못한 자는 우리조국 대한민국의 국방의 의무를 이행한 대한건아 모두가 아닐런지... 태정의 마지막 대사, "넌 먼저 어른이 돼야 돼!" 대한민국 이 바라는 어른의 모습은, 진정한 남자의 모습은 그런 것 인가 보다. 승영은 상처받은 것에 아파하기도 하고 상처 준 것에 아파하기도 한다. 결국 자살해 버린 그는 사회 부적응 자인 걸까? 어리버리하고 심약한 허지훈은 꼭 개 조되어야만 하는 이사회에서 용납 할 수 없는 덜 자란 아 이인 것인가? 그렇다면 군 생활을 잘한 태정은 진짜 어른 이 되었나? 그들 모두를 용서받지 못한 자로 만드는 이 세상의 구조가 잘못된 것은 아닌가? 다큐멘터리 "708호 이등병의 편지"를 본적이 있다. 남들보다 좀 더 민감한 감수성(?)을 가진 한 이등병의 마음은 이라크 파병반대를 외치며 군복무 중 휴가를 나와 병역거부를 하게 만들었다. 도드라진 그의 그런 행동들은 우리조국 대한민국에서는 용인될 수 없는 일이다.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대한건아로써의 당연한 의무, 국방의 의무를 져버린 그는 지금 전과자가 되었다. 남들이 욕하듯, 그는 비겁한 겁쟁이일까? 아니면, 자신의 신념을 지킨, 진정 용기 있는 자일까? 어떤 모습이 더 어른인 걸까? 군사문화란 무엇인가. 무조건적 복종을 가르치고, 가식을 가르치고, 폭력을 가르치는 비논리적인 약육강식 의 문화. 물론 이것으로만 군사문화를 정의내릴 수는 없겠으나 확연히 드러나는 폐단이 있음은 분명하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여러 이유들은 무엇인가?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지정학적 우리나 라가 가지고 있는 조건의 여러 측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대안은 없는 것일까? 비뚤어진 남성성 이 지배하는 사회를 개선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승영과 지훈같은 사람들이 그냥 그대로 인정받으며 살아 갈 수는 없는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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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해석 김훈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2007년 7월 30일 논산구치소 출소
병역거부자 김훈태씨가 감옥 안에서 시작한 번역을 모두 완결을 지으셨다고 합니다. 연재해오던 훈태 씨의 번역글은 이번호로 마무리합니다. 전체 번역글을 훈태씨 블로그 http://blog.naver.com/edukht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그동안 꾸준히 번역글을 보내주셨던 김훈태씨께 감사드립니다.
저 달은 언제나 달
이요. 그분들은 다른 모습으로 우리와 계속 함께 계세요. 우리 자신은 그분들의 존재로 지속하고 있
“늘어남도 줄어듦도 없느니”
지요. 그러니 줄어듦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건 달과 같아요. 우리는 달이 커지고 줄어드는 걸 보
우리는 죽고 나면 더 이상 사람일 수 없다고 생각
지만 달은 언제나 달일 뿐이지요.
하기에 걱정을 합니다. 겨우 한 점 먼지로 돌아가 겠지요. 다시 말해, 우리는 줄어들고 있는 거예요.
부처는 부처 아닌 것들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건 진실이 아닙니다. 먼지 한 점은 온우 주를 품고 있지요. 우리가 만일 태양처럼 커다랗다
“그러므로 빔의 마당에서는 꼴도 없고 감각도 없
면 지구를 내려다보며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도 몰
고 지각도 없으며 정신 작용도 없고 의식도 없느
라요. 사람인 우리가 먼지를 보는 것처럼요. 하지
니라. 시각과 청각과 후각과 미각과 촉각과 생각도
만 크고 작다는 생각은 우리 마음이 지어낸 관념
없고, 꼴도 소리도 냄새도 맛도 감촉도 생각의 대
에 지나지 않지요.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을 포
상도 없는 등 오온의 세계(시각부터 생각-의식까
함한다’ 이것이 바로 상호침투(interpenetration)
지) 자체가 있지 아니하므로, 연기(緣起)의 시작도
의 원리입니다. 이 종이 한 장은 햇빛과 벌목꾼과
없고 그 끝도 없으며(무지부터 늙고 죽음까지), 그
숲,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을 품고 있어요. 그래
렇기에 괴로움도 없고 괴로움의 극복 방법도 없으
서 이 종이가 작고 하찮다는 생각은 그야말로 생
며, 깨달음도 없고 깨달음의 성취도 없느니라.”
각일 뿐이에요. 우리는 이 종이 한 장도 없앨 수 없습니다. 어떤 것도 없앨 수 없지요. 암살범들이
이 글은 오온이 모두 비어있음을 분명히 하며 시
마하트마 간디나 마틴 루터 킹을 살해했을 때 그
작합니다. 오온은 각자 따로 존재할 수 없지요. 각
들은 완벽하게 없애려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분들
각의 것은 다른 것들 모두와 더불어 있어야 해요.
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 전보다 더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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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구절은 열여덟 가지 요소들의 영역을 열
다가오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마라가 오는 걸
거합니다. 먼저 우리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원치 않았거든요. 그냥 사라져 주길 바랐지만 마라
촉각, 생각 등 여섯 감각(육근六根)을 갖고 있어
는 아난다에게 곧장 걸어왔어요. 그리고 부처님 뵙
요. 그리고 꼴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과 생각
기를 청했지요.
의 대상이라는 여섯 가지 감각 대상(육경六境)이 있지요. 꼴은 시각의 대상, 소리는 청각의 대상,
아난다가 말했어요. “여기가 어디라고 왔느냐?
… 이렇습니다. 끝으로 이 열두 가지 감각과 감각
너는 예전 보리수 아래에서 부처님께 패한 것을
의 대상은 “여섯 의식(육식六識)”과 닿아 있어
벌써 잊었느냐? 여기 오는 게 부끄럽지도 않은가
요. 봄, 들음, 그리고 마지막은 생각-의식이에요.
보구나. 썩 꺼져라! 부처님은 널 만나지 않으실 게
따라서 시각을 포함한 감각들의 영역부터 열여덟
다. 넌 악마일 뿐이야. 부처님의 적이란 말이다.”
번째 생각-의식까지 이 부분이 말하는 것은 어떤 영역도 그것 혼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마라는 이 말을 듣고 크게 웃기 시작했습니다.
냐하면 각각의 것들은 오직 다른 모든 영역들과
“그대의 스승이 적이 있다고 말하던가?” 그 말
더불어 있기 때문이지요.
에 아난다는 아주 혼란스러워졌지요. 아난다는 스 승께서 적이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음을 잘 알
그 다음은 열두 가지 연기(십이인연)가 무지로부터
고 있었거든요. 난처해진 아난다는 마라가 왔음을
시작하여 늙음과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을 말해 줍
알려야 했지요.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시길
니다. 십이인연 역시 그것들 혼자서는 존재할 수
바라면서요. “가서 전하거라. 모임 때문에 여기
없어요. 한 존재는 오로지 다른 존재들에 의해 있
없노라고.”
을 수 있지요. 그러므로 그것들 모두는 비어있어 요. 비어있기에 참으로 존재하지요. 네 가지 고귀
하지만 부처님은 마라가 왔다는 말을 듣고 옛 친
한 진리(사성제) ― 괴로움도 없고, 괴로움의 원인
구가 찾아온 것처럼 무척 반가워하셨어요. “그게
도 없으며, 괴로움의 소멸도 없고, 그 소멸의 길도
사실이냐? 정말 마라가 여기에 왔느냐?” 부처님
없다 ― 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목록의 마
은 마라를 반기러 밖으로 나가셨어요. 아난다는 몹
지막 항목은 깨달음도 없고 깨달음의 성취도 없다
시 당혹스러워했지요. 부처님은 마라에게 다가가
는 거예요. 깨달음(praj?a)은 불교의 정수지요.
고개를 숙인 뒤 두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셨습니
“깨달음이 없다”라는 말은, 깨달음이란 개별적인
다. “반갑네! 어떠신가? 그간 잘 지내셨나? 하는
실재가 아님을 뜻합니다. 부처가 부처 아닌 것들로
일은 다 잘 되고?”
이루어졌듯, 깨달음도 깨달음 아닌 것들로 이루어 집니다.
마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부처님은 그를 토굴 안으로 데려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 주
부처와 마라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고자
셨지요. 그리고 아난다에게 나가서 차를 내오라고
합니다. 어느 날 부처님은 당신의 토굴 안에 머무
이르셨습니다. ‘스승님을 위해서라면 하루에 백
르고 계셨어요. 부처님의 시봉승인 아난다가 문밖
번이라도 차를 내올 수 있다. 하지만 마라를 위해
가까이에 서 있었지요. 아난다는 갑작스레 마라가
서는 전혀 내키지 않아.’ 아난다는 속으로 투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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렸어요. 그렇지만 이 일도 스승을 위한 것인데 어
약해 긴 게송으로 노래하셨습니다.
떻게 거절할 수 있겠어요? 아난다는 부처님과 손 님을 위해 차를 준비하러 갔습니다. 그 일을 하는 동안 아난다는 둘의 대화를 엿들었지요.
자유
부처님이 아주 따뜻하게 되물으셨어요. “어떻게
“굳이 이룰 것이 없으므로 반야바라밀다에 의지
지냈는가? 자네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마라가
한 보살의 마음엔 걸림이 없느니라. 걸림이 없기에
답했어요. “잘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요. 마라로
두려움을 넘어섰고,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영원히
사는 게 지겨워요. 이젠 다르게 살고 싶어요.” 아
해방되었으며, 궁극의 열반에 이르렀느니라. 과거,
난다는 몹시 놀랐지요. “아시잖아요. 마라로 사는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가 바로 이 반야바라밀다에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에요. 말 한 마디를 해도
의지하여 충만하고 올바르며 절대적인 깨우침에
수수께끼 같은 말만 해야 하고, 무슨 행동을 하더
이르렀느니라.”
라도 교활하고 사악하게 보여야 해요. 저는 정말 지쳤다구요. 게다가 제 추종자들도 견디기가 힘들
걸림이란 태어남과 죽음, 더러움과 깨끗함, 늘어남
어요. 그들은 이제 사회정의와 평화, 평등, 해방,
과 줄어듦, 위와 아래, 안과 밖, 부처와 마라 들과
불이(不二), 비폭력 같은 것들만 얘기하고 있어요.
같이 우리의 생각과 관념에 의한 것입니다. 더불어
더는 못 참겠어요! 그러려면 차라리 부처님을 따르
있음(interbeing)의 눈으로 볼 때, 그러한 걸림들
는 게 낫잖아요. 저는 다른 걸 해 보고 싶어요.”
은 우리의 마음에서 사라지고 우리는 두려움을 넘 어서게 될 거예요. 또 우리 자신의 잘못된 생각으
아난다는 불안해졌어요. 그의 스승이 다른 역할을
로부터도 해방될 뿐만 아니라 궁극의 열반에도 이
맡기로 할까봐 두려웠지요. 마라가 부처님이 되고,
르게 될 겁니다. 파도가 자신이 허망한 것이 아닌
부처님이 마라가 될까봐 몹시 우울해졌어요.
바다 그 자체임을 깨닫는다면, 태어남과 죽음이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힐 수 없다는 것도 알아차릴 거
부처님은 주의 깊고 자비롭게 귀 기울여 들으셨습
예요. 그러한 깨달음은 모든 두려움을 극복한 것이
니다. 마침내 조용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지
며, 궁극의 열반이란 두려움이 없는 상태지요. 당
요. “자네는 부처로 사는 게 즐거울 거라 생각하
신은 해방되었고, 더는 태어남과 죽음, 더러움과
는가? 자네는 내 제자들이 내게 무슨 짓을 하는지
깨끗함 따위에 영향 받지 않아요. 당신은 그 모든
모르고 있군. 그들은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내 입
것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
을 빌려 하고 있다네. 지나치게 화려한 사원을 짓 고, 제단 위에 불상을 놓고서 바나나와 오렌지, 기 름진 쌀을 바치기도 하지. 오리지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 말이야. 나를 포장하고 내 가르침을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었어. 마라여, 만일 자네가 부처의 실상을 알게 된다면 부처가 되길 원치 않을 거라 고 확신하네.” 그러고나서 부처님은 이 대화를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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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평화수감자의 날(터키) 번역┃평화수감자의날 준비팀 정리┃여옥
이번 소식지에는 2007년 12월 1일 평화수감자의날 초점인 터키의 상황에 대해 활동가들이 함께 번역 한
글들을
싣습니다.
아래
번역글들의
원문은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WRI)
홈페이지
http://www.wri-irg.org 또는 평화수감자의날 준비게시판 http://www.corights.net/brokenrifle에서 보 실 수 있습니다. 10,000DM(약 600만원)의 “몸값” 선택권이 주어졌
[터키 : 침략에서 저항까지]
다. 헌법은
이것을
“조국을
위한
복무(fatherland
service)"라 부르며 20세 이상 모든 터키 남성 시민
동시에 그들은 누군가 이것에 저항하기 위해 거부를
은 군복무를 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터키는 군
결심하는 정면대결을 원하지는 않았다. 1990년 첫 번
사주의 전통이 강력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째 공식적 거부자들은 아나키스트 타이푼 고눌
병역회피는 오랜 기간 만연되어 왔다. 그것은 때때로
(Tayfun Gonul)과 베닷 젠시르(Vedat Zencir)였다.
공식적인데 누구든 “몸값(ransom)"을 치르는 것으로
타이푼에게 “병역거부는 군대에 관한 논쟁을 일으킬
간단히 군복무를 한 달간의 기초 군사훈련으로 줄일
수 있는 정치적 행위이다. 터키에는 역사적 이유로
수 있다. 또 터키 공무원들의 무능력이나 학생의 경
군대에 관해 말하는 것은 터부시되었다. 터키는 군
우 징병의 일시적 유예 제도를 활용할 수 있다. 아무
장교에 의해 건설된 나라이다. 그래서 터키 문화에서
튼 병적번호가 그들의 신분증에 포함되어 있다 할지
무력의 사용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남성은 지배적인
라도 특히 부유층과 영향력 있는 계층의 자제들은 군
위치를 갖는다. 전쟁영웅들은 우상화된다.” 논쟁을
복무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무시하고 군대를 유지하며 정부 관료들은 그를 군복
그러나 남동부지역(쿠르디스탄)에서의 이름 없는 전
무를 거부한 것으로 기소한 것이 아니라 터키 형법
쟁(undeclared war)을 끝내길 원했던 터키정부는
제155조 “군대로부터 사람들의 이간(alienating)”에
1993년 12월 이래로 병무 관련 문제들을 다루기 위한
의해 기소하였다. 타이푼과 베닷은 1990년 벌금형에
조치들을 취해왔다. 어림잡아 250,000명의 탈주병들
처해졌다.
과 병역기피자들이 존재하는데 정부는 이들에게 5월 까지 신고하지 않으면 3년 이상의 징역형과 군복무에
전쟁저항자연합(War Resisters' Association)의 설립
직면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하였다. 공식적인 집계
Savas Karsitlari Dernegi(SKD, 전쟁저항자연합)은
에 의하면 50,000명만이 신고를 하였고 1994년 2월
1992년 12월 이즈미르(Izmir)에서 발족했고 타이푼과
에는
베닷은 조직의 설립에 함께했다. 조직의 목표는 병역
해외
거주
터키인들에게만
한정적으로
거부자들을 지원하고 전쟁에 저항하는 대중적 의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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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취시키는 것이었다. 초창기 SKD는 대결 전략을 취
Iyidogan)은 징병제는 징집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주
했다. 조직을 설립하고 한 달 안에 6명의 멤버가 기
장했고 터키에서 병역거부권이 인정되어야 함을 요구
자회견을 열어 병역거부를 선언한 것이다. 정부 관료
했다. 오스만 무랏 울케(Osman Murat Ulke)는 이즈
들은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SKD는 이
미르가 이러한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고 말했고 이어
즈미르의 다른 비정부조직들과 함께 쿠르디스탄으로
세 명의 거부자들이 군복무를 거부하겠다는 선언을
평화기행을 시작했다. 평화기행은 전쟁반대캠페인 그
했다. SKD 활동가들과 독일 참가자들에 대한 체포가
룹들의 연대체인 이즈미르피스플랫폼(Izmir Peace
즉각 실시되었고 이스탄불 SKD는 그것이 불법적인
Platform)의 단체들이 돌아가면서 담당하였다. 단체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아리프, 오스만, 메흐멧 세파
는 7월에 허가 없이 세계병역거부자회의를 주최하였
페르잘(Mehmet Sefa Fersal), 그리고 고칸 데미르키
다. 이 회의 또한 터키의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
란(Gokhan Demirkiran) 모두는 155조 위반 혐의를
는 반군사주의자들의 흥미를 끌었다.
받았다. 마막(Mamak) 군형무소에서 2개월 넘게 열린 미결 재판에서 아리프는 비록 성공적으로 군사훈련을
터키에서 모든 조직들은 정부에 등록을 해야 할 의무
거부할 수는 있었지만 강제로 군복을 입을 수밖에 없
가 있다. 1993년 11월, 정부는 이즈미르 SKD를 받아
었다. 그러나 심리법정에서 그는 극적으로 군복을 벗
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으로 SKD의 활동이 끝난
었고 절대로 군인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것은 아니었다. 말할 것도 없이 1994년 2월 새로운 정관을 갖춘 새로운 SKD가 발족을 했고 등록을 위한
그 사건은 1995년 8월 29일 1년이 지나 아리프가 6
긴 여정을 시작했다.
개월을, 고칸이 4개월을, 메흐멧이 2개월을 복역했을
1993년 12월 병역거부에 관한 텔레비전 인터뷰 이후
때 종결되었다. 오스만은 조직자 중 한 사람이 아니
아이텍
멜틀리
었기 때문에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곧바로 징집사무소
(Menderes Meltli) 두 명의 SKD 멤버들이 155조 위
로 이송되었고 군부대에 입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반으로 체포되었고 아이텍은 1년 15일의 형에 처해졌
1995년 9월 1일 오스만은 입소하는 대신 기자회견을
다(멘데레스는 종적을 감췄다). 이후 적어도 10명의
열고 징집장을 불태우며 “나는 입영기피자가 아니라
평화활동가들, 5명의 저널리스트, 그리고 인권연합
병역거부자”라고 선언하였다.
오젤(Ayt다 Ozel)과
멘데레스
(Human Rights Association)의 지부위원회가 155조 위반 혐의를 받았다.
튼튼한 구조 만들기 이 재판과정 전체에 걸쳐 이즈미르 SKD는 아무 목소
이스탄불 SKD의 기자회견이 있고 나서 가장 큰 사건
리도 내지 못했고 직접적 대결 전략도 취하지 못했
이 터졌다. 이스탄불 SKD는 이즈미르와 어느 정도
다. 이것은 터키에 튼튼한 구조를 만들어야 하며 국
다른 분위기 속에서 1993년 9월 결성되었다. 아나키
제적 네트워크와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 “물불을 가
스트는 적고 사회주의자가 더욱 늘어났으며 모든 전
리지 않고” 첫 번째 병역거부를 준비해야 한다는
쟁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쿠르디스탄과의
것, 병역거부 운동을 계층 간의 전쟁을 대변하는 조
전쟁만을 반대하였다. 1994년 5월, 터키가 초점이었
직이나 민족주의 전쟁에 의해 전취되지 않을 수 있도
던 세계병역거부자의 날(International CO Day) 이
록 독립적 개념으로 건설하는 것을 의미했다.
틀 후, 탈주병들에 대한 정부의 몸값이 만료되기 이
오스만이 징집장을 불태운 것은 새로운 국면으로의
틀 전 그들은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스탄불 SKD 대
전환을 의미했다. 그 일 이후 다른 사람들 또한 공개
표인
적으로 병역거부를 준비했으며 결과를 받아들였다.
아리프
히크메트
이이도간(Arif
Hikmet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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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피의 날들은 끝나지 않았지만 저항의 날들은 도착
서 우리들은 감옥과 군의 권위자들-그를 압박하고
했다.
그의 저항을 부수려고 하는데 책임이 있는 자들- 조 차 그에게 다소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1996년 『부러진 총(Broken Rifle)』 제37호
되었다. 오씨는 그의 반대자들을 단순히 비판하기보
번역 : 오리 (평화인권연대)
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는데 집 중했고, 그것은 성공적이었다. 전쟁거부자로서의 고차원적 의식이 그랬던 것처럼 정
[터키의 군사주의에 대한 저항]
직하고 단호한, 합리적인 그의 태도는 우리가 기대했 Karsitlari
던 것보다 그의 수감기간을 훨씬 덜 어렵게 하였다.
Dernegi, ISKD)의 세르나르 테킨Serdar Tekin은 잘
구속 상태에서조차 그는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그럴
알려진 오스만 무랏 울케Osman Murat Ulke의 병역
수 없는 것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즈미르 전쟁저항자연합(Izmir Savas
거부가 터키사회에 끼치고 있는 영향력에 대해 생각 하다.
병역거부자와 터키의 좌파 우리에게 처음 시기는 감옥 이상으로 피곤했으며 긴
터키에서 20세 이상의 모든 남성은 헌법에서 완곡하
장되었다. 우리는 그의 삶에 대해 걱정했으나, 놀랍
게 부르는 “조국을 위한 복무”을 18개월 수행해야
게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지원했다는 사실을 깨달
만 한다. 우리나라의 강한 군사주의 전통에도 불구하
았다. 심지어 몇몇의 극좌 그룹들-전통적으로 폭력과
고 수년 동안 돈으로 면제받거나, 입대연기의 이점을
음모적인 투쟁에 관여해오던-도 그의 행동에 깊은
취하거나, 징병을 회피하거나, 도주하는 방법으로 병
인상을 받았고 그의 운명에 대해 염려하였다.
역기피가 넓게 퍼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세 가지 본질적인 이유들로 인
그러나 1990년에 처음으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해 자신의 투쟁 중 하나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한 명이 징병을 거부한다며 공개적으로 병역거부 의
채택하지 않았다. 그것은 첫째, 우리가 모든 전쟁에
사를 밝혔다. 그의 친구들과 지지자들은 열정적으로
반대한다는 것이고 둘째, 비폭력을 옹호한다(그들에
그를 후원했다. 더 많은 병역거부자들이 공개적으로
게 이것은 우리가 혁명적 폭력에도 마찬가지로 반대
그의 전례를 따랐다. 그들 대부분은 병역기피자가 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 세 번째, 그들은 양심에
니었으며, 그들의 정치적 활동을 공개적으로 지속하
따 른 병역거부의 개념에 대해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였다. 그들은 군사법원에서 재판을 받아 수감되었으
(즉 그것을 사회 변화를 위한 수단보다는 개인적 저
나 공식적으로는 양심에 따른 거부에 대한 대가는 아
항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니었다. 그들은 형을 산 이후 심지어 군대에 대해 언
우리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비폭력 혁명의 문제
급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받았고 우리는 그것이 병역
이거나 소위 “공상적인 아이디어”일 뿐만 아니라
거부자들을 무시하는 국가 정책이라 생각하기 시작했
인권, 특히 전쟁-특히 쿠르드 민중에 대한-이 아직
다. 왜냐하면 수감자들이 너무나도 유명질 수도 있음
진행 중인 국가에서 특별한 문제라고 믿고 있다. 따
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라서 우리는 다른 조직들에게 군대-사회의 군사화와 인권침해에 가장 책임이 있는 기관인-에 대항하여
그러나 1년쯤 전에 오씨(Osman Murat Ulk, "Ossi")
함께 일을 벌이기 위해 동일한 정치적 관점을 가질
가 체포되었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에 대한 실제
필요는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터키의 양심에 따른
조사가 시작되었다. 이즈미르 전쟁저항자연합ISKD에
병역거부와 반군사주의의 발전은 단지 평화주의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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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에 달려있지는 않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살아가는 것은 저항하는 것]
또한 좌파의 변화여부에도 달려있다.
- 평화뉴스 독자들에게 보내는 오씨Ossi의
일반 대중
편지
오씨의 사례는 대중들에 대한 두 가지 주요한 영향력 을 가져왔다. 하나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개념을 재기하고 설명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병역거부를 실질적인 선택이자 가능한 어떤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로부터의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 라,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행위자는 우리 들 중 바로 한 사람이다. 국제적 연대
저는 오씨Ossi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터키에서 양 심에 따른 병역거부로 인해 수감되었습니다. 1996년 10월의 첫 번째로 수감되고 그 해 12월에 풀려났고, 97년 1월에 다시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다시 구속 시키기 위한 재판이었죠. 그래서 97년 5월에 풀려나 고 10월에 다시 구속되었습니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재판이었습니다.
터키 외부로부터 우리가 받고 있는 지지들은 기대한
그러나 이번엔 병무청(recruitment office)이 자발적
것보다 훨씬 더 강한 것이다. 이것은 그리 놀라운 것
으로 나서서, 법원에서 풀려난 후의 저에게 자유를
은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수년 동안 국제적
허락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올해 5
활동에 참여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독일의
월 9일 변호사가 정말이지 힘들게 저를 빼 내줄 때까
알럿네트워크(Alert Network)와 전쟁저항자인터내셔
지 몇 번이나 다시 구속되었습니다.
널(War Resisters' International)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었다. 또한 국제적으로 혹은 유럽의 병역거부모
2년 동안 법적인 상황이 개선되지 않은 채, 감옥과
임과 유럽 몇 개 국가에서 장기간의 스피킹 투어가
병영과 병무청에서(이송 도중에 잠깐씩 거치면서) 시
있었다. 한 해가 지나 아직 국제적 관심의 범위에 대
간을 낭비했습니다. 저는 여전히 “군대에 소속”되
해 평가하는 것은 어렵지만 정부 당국이 놀란 것은
어있으며, 이것은 제가 실제로 탈영병의 신분에 놓여
명백한 사실이다. 그것은 확실히 오씨의 단식 투쟁
있으며 언제든지 다시 수감될 수 있다는 것은 의미합
시기-그의 첫 체포이후 짧게 이뤄진-에 마막
니다. 반면에 저의 의지를 꺾지 않고서는 대결을 피
(Mamak) 군 교도소장을 혼란의 상태에 빠뜨렸다. 앞으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각기 체포하는 것은 새로운 캠페인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군사주의에 대해 반대 투쟁 중인 다른 지역들 을 포함하는 국제적 협력 또한 진행될 것이다. 이는 터키의 병역거부운동을 진전시킬 것이다. 우리로서는, 훈련과 인쇄매체의 발간과 같은 것을 통해 비폭력의 진전이 터키 반군주의의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가질 것이라 믿는다.
할 수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군당국이 저를 구속시 키는데 그다지 필사적이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이야기가 말이나 되는지, 이 모든 것을 실행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 의아해할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고난의 길이 아닌가요? 정치적인 논쟁 대신에 감옥에서의 일상에서 경험한 간단한 이야기로 대답하고 싶군요. 제가 96년 11월에 에스키세히르 영창(Eskisehir military prison)에 처음 갔을 때, 저는 혼거방
1997년 11월 부러진 총(Broken Rifle) 제40호
(community room)에(12명 정원의) 수용되었습니다.
번역 : 뽀 (평화인권연대)
저는 죄수복을 입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나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9호
45
는 그것을 죄
다르지만 그는 저를 존경하기 시작했고, 어떤 우정과
수복을 입기를
도 같은 감정으로 저를 이해했습니다. 감옥 안에서의
거부했고 이전
저의 행동을 관찰하면서 아흐멧은 저의 원칙들을 이
앙카라
마막
해하기 위해 더욱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영
래서 우리는 토론을 시작하였고, 좀 더 편안한 방식
창에서의 단식
으로 윤리, 종교, 인류학, 역사, 내셔널리즘, 심리학
투쟁을 교정당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내 친구들이
국에게 상기시
저에게 보내준 책들을 읽었고, 어느 날 그 책들 중
켰습니다) 같
한 권이 그 안에서 폭발과도 같이 움직였습니다. 그
은 방의 사람
것은 서양철학의 역사에 관한 입문서였습니다. 그 책
들은
을 읽고 난 후, 예상되어지는 어떤 것들에 대한 질문
(Mamak)
나에게
경고했습니다.
들이 그를 관통하고 흘러넘쳤습니다.
이틀 동안 서 로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된 후에, 침묵이 내 주위를
거의 2년 가까이 서로 알고지내가면서, 그의 변화속
둘러쌌습니다. 단지 한 무슬림만이 나에게 말을 걸어
도는 점점 더 빨라져갔습니다. 어느 날 밤 대화에서
왔지만 그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잠시 후에 나는
그는 저에게 내가 그를 가르치려들지 않는다는 것을
나에 대한 일종의 봉쇄정책이 존재하고 그것은 방장
알기 때문에 이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이라고 했
(方長)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파
습니다. 교도소에서의 생활도 점차 변하기 시작했습
시스트라고 확신되는 사람이었고 (경제적인 이유 때
니다. 아흐멧은 12명이 기거하는 방의 방장이었지만
문에)살인으로 이미 2년 째 살고 있었습니다. 그를
더 이상 그 위치를 유지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반면
“아흐멧(Ahmet)"이라고 부르기로 합시다.
에 다른 모든 사람들은 여전히 엄격한 권력구조에서 사는 것이 더 익숙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상황이
이런 사회관계적인 스트레스를 받고 살아가는 일은
더 나빠질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아흐멧은 포기할 수
저에게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저는 부당한 권위들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천천히 더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저항하곤 했지만, 말 한마디도 섞는 것을 원하지 않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통치 받는 것이
는 사람들로 가득 찬 조그만 방에서 어떻게 살 수 있
익숙한 사람들이 이것을 연약함의 표시라고 이해했기
겠습니까. 한 달 안에 저는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아
때문에 그것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결과는 종종 민주
시다시피 곧 다시 구속되었습니다. 이번엔 방사람들
주의가 아닌 혼란으로 나타났습니다. 반면에 교정당
이 매우 놀랐습니다. 제가 그곳에 있는 것이 우연이
국과 교도관들은 언제나 방안의 일에 간섭하고 통제
나 제 의지 바깥의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
할 기회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제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에 관한 이 모든, 믿기 힘든 상황들에 진지하다는 것
우리는 순결한 오아시스를 만들지는 못했지만, 최소
을, 그리고 내가 감옥행을 택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
한 외부로부터 유발되는 물리적인 폭력과 그와 비슷
었습니다. 특히 아흐멧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한 것들에 대한 일치된 합의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그는 그것에 대해서 저와 토론하기 시작했습
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흐멧을 알게 되었
니다. 잠시 후에 우리는 함께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
다는 것, 그의 경험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
는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비록 우리의 생각은 전혀
다. 사람이 어떻게 변할 수 있을지, 진정한 예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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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풀려났을 때, 그는 4년째 살고 있었고 13년이 더 남아있었습니다. 이제 저는 연락이 끊기지 않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모든 것을 답해줄 수 없고, 아흐멧 과 같은 사람을 알기 위해서 병역거부자가 된 것도 아니지만, 이 경험과 다른 많은 경험들은 자신의 의 지에 따르는 것과 스스로의 삶으로써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를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저 는 수감되어 있는 동안 아무런 목적 없이 시간을 낭 비했다고 느껴본 적이 결코 없습니다. 그러기는커녕 이 시간들은 저에게 다시 한 번 명확하게 일깨워주었 습니다. 살아가는 것은 저항하는 것이라는 것을. 저는 최근 몇 년 동안 연대를 보내준 <평화뉴스>의 독자들과 엠네스티 인터내셔널 활동가들에게 몇 마디 전하면서 이야기를 끝내고자 합니다. 저는 당신들의 편지를 받은 적이 없지만, 군대가 내게 오는 편지들 을 불허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을 때, 제가 속한 단체 이즈미르 전쟁저항자연합(Izmir War Resisters' Association)은 그것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단 3 개월 만에 2,500통이 넘는 편지가 이즈미르에 도착했 습니다. 비록 저는 그것들을 읽지 못했지만, 제 친구 들이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석방되었을 때 제가 가 장 먼저 했던 것들 중의 하나는 산처럼 쌓인 편지들 을 읽어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결코 그것들 모 두를 끝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와 함께 해주어서 너무 너무 너무 고맙습니다. 오씨Ossi(오스만 무랏 울케Osman Murat Ulke) 드림 1999년 11월 부러진총 제44호 번역 : 용석 (전쟁없는세상)
[터키 병역거부운동의 생명]
1989년: 첫 번째 공개적인 병역거부선언 타이푼 Tayfun 1990년: 두 번째 병역거부자 베닷Vedat의 공개선언 은 징병제에 저항하는 운동으로 이어지고, Gunes와 Sokak 신문에 보도되었다. 1990년 초: 터키의 지식인들은 이 운동을 지지했고, 타이푼과 베닷은 주 관할 법원에서 형법 제 155조에 의거해 판결을 받았다. 1992년: 국제병역거부자회의(ICOM)에서 다음 회의를 터키에서 열기로 결정했다. 1992년 12월: 전쟁저항자연합(Savas Karsitlari Dernegi, SKD)이 이즈미르(Izmir)에서 발족. 1993년 1월 16일: 6명이 병역거부 의사를 밝히고 전 쟁저항자연합에서 이와 관련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1993년 7월 10일~17일: 터키에서 국제병역거부자회 의(ICOM)가 열렸다. 1993년: 키프로스의 살리 아스케로글루Salih Askeroglu가 병역거부를 발표했다. 1993년 11월 8일: 전쟁저항자연합이 이즈미르시 시장 에 의해 해산되었다. 1993년 가을: 이스탄불 전쟁저항자연합이 발족함. 1993년 12월: 이즈미르 전쟁저항자연합 회장인 아이 텍 외젤(Aytek Ozel)이 체포되었다. 그는 TV 인터뷰 때문에 형법 제155조에 의거해서 기 소 당했다. 아이텍은 앙카라(Ankara) 군사법 정에서 두 달을 보냈다. 1994년 2월: 이즈미르 전쟁저항자연합(ISKD) 발족. 1994년: 군사 재판권에 저항하는 운동. 1994년: DEP에서 병역거부 목록을 만들었다. 1994년: SHP에서는 민간인이 군사법정에 회부될 수 없다는 취지로 목록을 만들었다. 1994년 5월 17일: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을 기념해 이 스탄불 전쟁저항자연합은 이스탄불에서 기자 회견을 열었다. 17명과 3명의 독일 참관자들 이 체포되었고, 4명의 터키인이 구금되어 형 법 제155조에 의거해 앙카라 군사법정에 기 소되었다. 처음에는 독일인들이 터키를 떠나 는 것이 허가되지 않았지만 7월초 재판 이후 강제로 송환 되었다. 전쟁저항자연합은 금지 되었다. 1995년 8월 29일: 5월 17일 사건에 대해 앙카라 관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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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군사 법정에서는 오스만 무랏 울케Osman Murat Ulke(오씨Ossi)를 석방했으나 동시에 군대에 징집되었다. 1995년 9월 1일: 이즈미르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오씨 (Ossi)의 입영통지서를 불태웠다. 1996년 4월: 포카(Foca)에서 첫 번째 비폭령행동 트 레이닝 1996년 10월 3일~6일: 이즈미르에서 반군사주의 세 미나가 연속해서 열렸다. 1996년 10월 7일: 오씨(Ossi)가 체포되었고, 마막 (Mamak)으로 이송되었다. 1996년 10월: 오씨는 열악한 감옥 환경에 저항하는 단식을 했다. 1996년 가을: 이스탄불, 이즈미르, 안탈야(Antalya) 와 앙카라에서 오씨에 관한 연대위원회 설립. 1996년 11월: 이즈미르 전쟁저항자연합은 이즈미르시 시장에 의해 다시 폐쇄되었다. 1996년 11월: 앙카라 군사법정에서 오씨에 대한 1심 진행. 오씨는 많은 변호사들에 의해 변호되었 다. 그 재판은 재판관들이 검열을 강요할 때 까지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빌레씩 (Bilecik-오씨의 부대)의 사령관과 에스키세 히르(Eskisehir) 군사법정으로 보내는 항의 팩스들이 조직되었다. 1996년 12월 27일: 에스키세히르 군사법정에서 재개 된 재판 불복종 1997년 3월 6일: 에스키세히르 군사법정의 진행 오씨(Ossi)는 5개월의 구속 판결을 받았다. 1997년 4월 1일: 앙카라(Ankara)의 이즈미르 전쟁저 항자연합과 인권연합(Human Rights Association)은 형법 155조를 근거로 한 재판 에 저항함. 1997년 5월 29일: 그 후 오씨는 에스키세히르 법정 에서 석방되었다. 1997년 10월 9일: 오씨(Ossi)는 다시 체포되었고, 23 일에 10개월의 구속 판결을 받았다. 1998년 초: 병역거부에 관한 재판관들의 판결이 처벌 할 만한 것이 아님에 따라 고무됨. 1999년 3월 9일: 오씨(Ossi)가 석방되었다.
A Movement Action Plan for Turkey 1998년 4월 4일~8일 시가씩(Sigacik) 세미나 문서 번역 : 고동 (전쟁없는세상)
[터키의 병역거부 상황] 징병제 존재유무 터키의 헌법은 군복무를 권리이자 의무로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병역거부행위는 군형법에 의해 처벌받 는다. 병역은 20세 이상의 모든 남성에게 의무적으로 적용되며 병역의 기간은 18개월이다. 국가주의가 강 한 터키임에도 불구하고 돈을 치르고 군복무를 면제 받는 것이 합법화되어 있고 이는 병역회피의 수단으 로 폭넓게 악용되고 있다. 정부의 병역거부 불인정 터키의 헌법은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지만 양심 에 따른 병역거부권을 인정하고있지 않으며 대체복무 도 불가능하다. 병역거부자들은 병역 기피자, 탈영병 으로 간주되며 강력한 제재가 가해진다. 특히, 군형 법은 양심상의 이유로 병역거부를 할 수 없다는 반병 역거부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병역거부운동의 현황 1990년 이후 터키인들은 군대와 폭력을 거부하는 그 들의 신념을 공개적으로 선언해왔다. 비록 동기는 다 양하지만 그들 모두는 군사력의 사용에 반대하는 사 람들로, 소수 쿠르드인들의 권리를 억압하기 위해 터 키의 군사력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병역거 부를 한 사람들도 있고, 순수한 평화주의나 비폭력 신념에 의해 병역거부를 한 사람들도 있다. 특히, 1995년 오스만 무랏 울케Osman Murat Ulke의 공식 병역거부 선언으로 터키 사회에 병역거부에 대한 인 식이 바뀌어 가고 있으며, 평화운동 단체들의 국제적 지지와 대중 캠페인을 통해 터키 정부에 압박을 가하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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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병역거부권 인정에 대한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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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동주 : 가석방으로 출소 2007년 9월 28일 영등포구치소에서 가석방 출소하였습니다.
:: 김태훈(뎅) : 가석방으로 출소 2007년 9월 28일 군산교도소에서 가석방 출소하였습니다.
:: 이용석 : 가석방으로 출소 2007년 10월 26일 청주교도소에서 가석방 출소하였습니다.
:: 김치수 : 9월 13일 법정구속, 여주교도소 이감 9월 13일 1심 선고공판에서 1년6월형을 받고 법정구속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11월 2일 여주교도소로 이감되었습니다.
:: 효웅 : 여주교도소 이감 성동구치소에서 수감생활 중, 10월 8일 여주교도소로 이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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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