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OUTWAR Newsletter No.30 CONTENTS World
Editorial
에디토리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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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레마라는 제안
CO note
병역거부자 활동수기
노트1, 메모1 - 이정식 병역거부 선언, 그 이후 - 권순욱 살았던, 사는, 살 이야기 - 하동기 출소 후 잡감 - 백승덕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꿈꾸다 - 유호근 나의 꿈은 - 김훈태
Focus
Experience
▶2011 연중기획 병역거부운동 10년... 33
참가후기
안보관광명소에서 평화적으로 상상하기
Special
17 19
기획기사
기획2 - 친환경 무기개발이라는 코미디 기획3 - 우리의 고민과 어려움,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
Special
30호 매체편집팀 성민
기획1 - 기후변화시대의 반군사주의
22 26 30
기획기사, 섭외, 편집 등 여옥 기획기사, 섭외, 편집 등 하동기
연중기획
인트로 - 2011 연중기획을 시작하며 기획1 - 병역거부자의 10년을 말하다 기획2 - 무대뽀,, 막무가내, 뜬금 앙케이또! 기획3 - 병역거부운동 뒷담화, 나는 병역거부자다
33 34 40 44
기획기사, 인터뷰, 섭외 등 효웅(유정민석) 기획기사, 기획연재, 섭외 등 아하 섭외, 녹취, 표지디자인 등
Review
영화평․ 서평
정지훈
46 49
적극적인 비폭력을 향하여 관심사병의 설 자리는 어디인가
번역
기획연재
가람이의 좌충우돌 세상읽기 제11화 나의 비정규직 이야기 3 - 책자 배포 나름의 바다건너 일기 두 번째 - 상상이 안되는, 군대 난영의 그림이야기 - 공격하면 공격한다 웅이 왓져여 뀨잉뀨잉
53 54 57 60 61
2012년 죽음의 상인은 사라지게 될까? 한반도와 일본섬, 그 곳 ‘사람들의 ’ 교집합 온 몸으로, 평화
Translation
발행일 : 2011년 4월 1일
64 68 73 77
연락처 : 02-6401-0514 주소 : 서울시 마포구 망원동 422-9번지 3층 (우) 121-230 http://withoutwar.org peace@withoutwar.org
번역
세계는 군사비에 얼마나 많은 돈을 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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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기획 | 한울타리 130-062 서울동대문구 제기2동 137-69 TEL : 924-9641,2 FAX : 927-5104
재정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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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처 : 전쟁없는세상 제 호 :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0호
평화에세이
나의 평화 여정
Report
군사주의, 기후변화를 말하다..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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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출판기념회를 다녀와서
Essay
▶ ▶Special
시선집중
전쟁없는세상 신년회 외
Series
2 4 6 8 10 12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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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ial
딜레마라는 제안 성민 |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 peacedrip@gmail.com
사무실을 나서며 불은 껐는지, 전기 코드는 뺐는지 다시 확인한다.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향한다. 추워도 보일러를 많이 틀지는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샴푸도 세제도 잘 쓰지 않고 물도 한번 쓰고 버 리지 않는다. 조금은 불편하고 조금은 무력하다. 나의 행위들은 과연 얼마만큼이나 지구를 살릴까. 시기상 소식지에 다루진 못했지만 리비아 사태로 인해 열띤 토론이 여기저기서 있었다. 군사적 개 입을 하자니 찜찜하고 막자니 걱정되는 딜레마. 한참 얘기를 주고 받으면 돌아오는 질문, 그래서 우리 는 무얼 할 수 있을까. 어찌 됐든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다시 불편하고 무력하다. 리비아는 우리의 '지금 여기인가 ' . 병역거부운동 10년이다. 대체복무제라는 배가 여전히 산으로 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계속해 서 병역거부운동을 말해야 할지, 아니면 군사주의와 평화라는 더 넓은 얘기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했 다. 결정은 쉬웠다. 둘 다 이야기하자. 그래서 우리의 기획 주제는 두 개가 됐고 더불어 이런 저런 새 로운 코너들이 생겼다. 결정이 쉬운 만큼 일은 많았고 소식지는 두꺼워졌다.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 어>의 출간으로 우리는 하고 싶던 말을 뱉는데 조금 재미를 붙였기 때문일까. 새로운 활동가가 생겼으니 소식지가 더 알차고 새로워져야 한다는 욕심도 있었던 것 같다. 얼마나 새로워졌는지, 얼마나 알차졌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꼼꼼히 보시면 변화의 흔적이 조금 보일까. 병 역거부운동의 문턱을 낮추고 평화를 좀 더 가볍고 쉽게 얘기해보는데 신경을 쓰려고 했다. 새로운 기 획들에 대해서, 새로운 주제의 글들에 대해서, 다양한 방식의 평화에 대해서, 또 우리의 야심차지만 무모한 기획에 대해서 읽고 여러 가지 반응들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비판이어도 좋으니. 무력하고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구를 살리려 노력하는 이유는 이미 환경파괴와 지구온난 화라는 거대한 변화의 결과가 기후변화를 통해 우리의 피부에 와 닿고 있기에 그 위기의식이 공유됐기 때문이 아닐까. 막연하기만 했던 군사주의도 병역거부를 통해서, 리비아를 통해서, 또 기후변화를 통해 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우리는 위기의식을 갖고 여전히 군사주의를, 병역거부를 고민한다. 소식지라는 공간을 통해서 무력하고 불편하지만 그런 고민이 모아지고 공유됐으면 좋겠다. 어쩌면 우리의 글들이 서투른 것은 그런 고민은 홀로 할 수 없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고 우리에게 딜레마가 있 다는 건 더 많은 고민과 공부가 필요하다는 제안일지도 모르겠다. 어찌됐건 다양한 방식들의 고민과 실천이 이어질 때 우리에게는 군사주의보다 평화가 익숙해질 수 있는 때가 오리라. 봄은 느리게만 오고, 할 말은 여전히 많다. Vamos!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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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1 , 메모 1 이정식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논산구치지소 수감 중
# 노트 1 병역거부자의 양심을 증명하라는 전제는 그것을 요구하는 입법자의 양심을 증명한다. 병역거부의 문 제가 정치 영역에 걸쳐있더라도 병역거부는 인권의 문제이며 따라서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고 보장해야 할 의무를 방기하는 -국가의- 입법자의 양심이란 위선하다. 사실 양심이 도덕에 관계된 것이라면 그들의 범죄자를 양산하는 행위 -병역거부를 이유로 형량을 선 고하고 구금시키는-는 온전히 정당한 것이다. 인간의 도덕이란 보편성도 기준도 없다. 한 개인이 도덕의 화신으로 기능하려면 개인의 이익이 침해 당하지 않아야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병역거부는, 병역의 의무를 거부할 권리를 인정받기에는 명백히 심각하게 입법자의 이 익에 위반된다. 이미 상당수의 대체복무자들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소수를 위한 대체복무제 마련이 국가안보를 어떻 게 위협한단 말인가? 북한 GDP의 세 배를 국방비로 지출하면서도 국방비 예산을 증액하고, 군사무기 거래량으로는 세계 3위라는 명예스러운 국가임에도 전쟁위기를 조성하며 ‘국민을 만성적 불안증으로 시달리게 하는 ‘적의 ’ 존재는 ’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의 이익에 위반하는가? 병역거부의 행위가 국민이 국가에 종속된 관계를 부정 하는 것이다. 정당성을 잃은 정치권력의 부조리를 들추어내는 것이야말로 입법자들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이다. 이에 입법자들의 양심은 그들의 도덕에 충실하여 소수의 권리를 박탈하면서도 자기방어적인 모습을 취한다. 여론과 분단이라는 현실을 들먹이면서. 역겨운 것은 가변적인 현실을 고정된 것으로 설정하고 모든 진보적인 가능성의 출구를 차단하고서 뻔뻔하게도 문제를 개선하고자 모색하는 시늉조차 보이지 않는 태도이다! 다만 병역거부를 선택하고 선택의 이유들을 만들면서 개인의 도덕성에 결부시키며 도덕이라는 감정 을 -선택이 아닌- 이유들의 방어수단으로 표현한다면 그 행위자의 양심과 신념을 회의적인 시각에서 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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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을 수 없다. 병역거부 운동의 변혁의 가능성을 위해서는 병역거부는 모두의 권리라는 것을 민중에게 호소해야 하 며 그들의 동참을 이끌어 병역거부를 확산시켜야 한다. 그런데 병역거부가 말하는 평화란 무엇인가? 총을 들지 않았다고 해서 고도의 체계적인 살인기술에 서 벗어나기가 가능한가? 기계화된 살인은 멈추지 않는다. 기계를 작동하는 인간이란 부품은 신속하게 대체 가능한 대상이다. 인간이 기계에 의하여 폐기되었다- 평화를 위하여 군대를 거부한다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약탈로 이루어진 인간의 삶을 부정해야 한다. 우리가 소비하는 상품이 인간의 생명력을 고갈시킴으 로, 누군가의 삶을 착취하고 파괴하면서 이루어진 가치라는 것을 인식하고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던 것에 종속된 노예정신에 저항하면서 인간의 도덕성을 해체해야 한다. 인간은 자연의 대상이다. 고귀하지도 존엄하지도 않는 이기적인 파괴자일 뿐이다. -인간은 지성이라 는 발톱을 세운 짐승이다- 인간의 질서가 아닌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라. 나는 나에게 요구한다. 인간이라는 가면을 벗어던져버릴 것을. # 메모 1 남자는 총을 버렸다. 아니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총이 그를 버린 것이다.
이정식 2009.10.13 입영일, 병무청에 병역거부 의사 밝힘 2009.11.30 경찰조사 2010.02.17 1년 6월 선고 2010.02.25 대전교도소 수감 2010.05.06 논산지소로 이감 현재 논산구치지소 수감 중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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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부 선언, 그 이후 권순욱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doodoong@jinbo.net
병역거부 선언, 그로부터 약 2년 5개월이 지난 지금의 나의 삶은 많은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2008년 11월 11일, 병역거부 선언 이후, 2009년 4월 22일 인천구치소 입소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1년 2개월여 의 수감생활 후, 2010년 6월 30일 출소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나의 병역거부 선언이 올바른 선택이었을까, 2년여의 시간 동안 끊임없이 되물을 수밖에 없었던 저의 질문이었습니다. 정말 후회는 없는가, 구치소에서 지내는 시간 동안 끊임없이 되묻게 되는 저의 질문이었습니다. 병역거부자로서 사는 인생은 생각보다 그리 쉽지만은 않은 듯합니다. 끊임없이 저의 삶을 점검하게끔 하고 되돌아보게끔 합니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병역거부에 이르게 하였으며, 지금의 나를 만들고 있는 것일까. 수많은 질문들과 수많은 고민들이 지금의 제 삶을 가득 메우며 오늘 하루도 살아가게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질문들과 고민들 속에 항상 같은 답을 주는 건, 오늘 다시 입영 영장이 나와도 똑같 은 선택을 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여전히 감옥행은 싫다는 것입니다. 저의 구치소 생활은 그리 평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그 평탄하지 않은 시간들 속에서 끝없이 외로움 과 괴로움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 스스로 구치소 밖으로 뛰쳐나오고 싶었던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해줍니다. 답답함과 갑갑함, 제게 처해진 현실에 대한 비탄은 제 자신의 가 슴을 수없이 도려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시간들 속에서 전 제 자신을 아주 솔직히, 아주 정확히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제 자 신의 깊은 속과 바닥까지 느끼며, 부끄러운 제 자신과 마주하게 되는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병역거부는 제게 아직도 수많은 질문과 고민들을 던져줍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구치소 안에서의 경험 은 제 자신을 성숙케 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고, 제가 가진 생각들을 재정립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끊이지 않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진정 평화를 원하는가. 내가 진정 병역거부자로서 의 길을 걷기 위해 부족함이 없는가. 병역거부는 이 시대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인가. 내 삶에 병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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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는 과연 어떠한 영향을 가져다 줄 것인가. 단지 총을 들지 않는 선택만이 이 시대의 아픔을 해결 해 줄 수 있는 것인가. 진정한 평화를 이루기 위한 나의 선택은 무엇인가. 구치소 안에서 제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들 속에서 끊임없이 던졌던 질문들입니다. 정답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나름의 답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답들과 함께 좀 더 성숙되길 바라는 제 자신의 모습을 보태어 지금의 저의 삶을 완성해 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이 땅은 아픔에 몸서리치고, 가엾은 민중들은 끊임없이 울음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하 지만, 지금의 저의 현실은 이 아픔에 그저 함께 몸서리치고, 이 울음따라 그저 함께 울음을 토해낼 뿐 입니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이 땅의 아픔이 사라지고, 서로가 서로를 짓밟아 가며 높은 곳에 올라서려 는 추악한 인간의 모습을 벗어 던질 그 날을 기대해 봅니다. 언제쯤일까. 저의 소망이, 그리고 고요속의 외침이 온 인간들의 가슴 속을 뚫고 해방의 깃발을 나부 끼며, 기쁨의 미소로 이 땅의 아픔이 회복될 그 날이... 지금도 구치소에서 혹은 교도소에서 끊임없이 자신과의 싸움을 하고 계실 많은 병역거부자들을 생각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의 선택과, 지금 여러분들이 겪고 계신 아픔들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 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도 외로운 싸움 속에 지치지 않기를 바라며, 저의 마음을 조 금이나마 나누어 드리고자 합니다.
권순욱 2008.11.11 입영일, 국방부 앞에서 병역거부선언 2008.12.16 경찰조사 2009.04.22 징역 1년 6월형 선고, 법정구속, 인천구치소 수감 2010.06.30 가석방으로 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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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았던, 사는, 살 이야기 하동기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jxshinev@gmail.com
얼어붙은 겨울의 구치소를 박차고 나와 처음 만난 세상은 하나도 춥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 들, 그러나 그리 오랜만이지 않은 것 같은 사람들. 나의 수감생활을 나만큼이나, 혹은 나보다 더 깊이 느껴야 했던 사람들을 만난다. 염치없이 그들을 만나 웃으며 안부를 건넨다.
출소 직후, 옷가지를 몇 벌 사서 입고 두리반으로 갔다. 징역살이를 마치면 꼭 찾아가봐야지 생각했 던 곳. 두리반에서의 농성이 1주년을 맞았다기에 오랜만에 전철을 타고 홍대입구로 갔다. 나의 첫 목적 지. 설렘은 말할 수 없이 커져갔고, 나는 두리반의 문을 열었다. 두리반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내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자신들이 여기에 있다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주변 에 있었다. 아는 사람도 없고, 현장감도 없는 나는 그 자리를 즐길 수가 없었다.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 지만, 왠지 모를 광기마저도 느껴졌다. 내가 아는 사람이 없어 그러려니, 친구 녀석들을 찾아보았지만 그마저도 실패했다. 걷어차이듯 문을 박차고 밖으로 튀어 나왔다. 징역살이를 통해 소진된 에너지를 채 우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게 향한 곳은 자주 찾던 술집. 누구와 만날 약속도 하지 않았지 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 곳에서 만날 수밖에 없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1년 몇 개월 전의 그 때처럼 이야기를 나눈다. 대화의 주제는 언제나 같다. 그냥, 우습게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이야기들. 누구도 나에게 힘드셨죠, 고생이 많으셨네요 하지 않는다. 그저 똑같이. 잘 살았냐? 난 망했어. 일상적 인 이 대화야말로 내가 이들에게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위로다. 어떤 녀석들, 한 마디 대화도 나누려 하 지 않던 녀석들의 수고하셨다, 고생하셨다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위선적 위로 - 라고 하면 그들의 호의 에 지나친 경계를 품는 일이겠지만 - 가 아니라 좋다. 그렇게 그 날은 취해버렸다.
그리고 출소 후 지금껏 나는 놀고 있다. 최대한 빈둥거리며, 최대한 의미 없는 시간을 흘려보낸다.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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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 시대를 한탄하며 모든 운동에 피를 흘릴 것 같던 징역에서의 모습은 그저 지나간 봄날의 꿈이다. 억지로 찾아서 정치, 사회면을 찾아 읽지 않으면 그 이야기들을 알지 않아도 괜찮은 이곳은 달콤한 초 콜릿의 도시와 같다. 그래서 언제까지나 여기 머물려 하지만, 안되겠지. 나는 언제쯤 벗어날지를 여전히 고민하며…… 놀고 있다.
무엇도 확실하지 않고, 무엇도 장담할 수 없다. 뭘 먹고 살지도, 뭘 하고 살지도 불분명하다. 이 시간 이 짧아지길 바랄 뿐이다. 그래야 나와 함께 고된 징역살이를 견뎌낸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떳 떳해질 것만 같다. 일단 봄이 오면, 웅크린 온몸이 큰 기지개를 할 따뜻한 봄이 오면.
하동기 2009.07.07 입영일, 병무청에 병역거부의사 밝힘 2009.07.13 병역거부선언 기자회견 2009.07.17 경찰조사 2009.08.21 검찰조사 2009.10.21 징역 1년 6월 선고, 법정구속, 서울구치소 수감 2010.12.24 가석방으로 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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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소 후 잡감 백승덕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pdsd100@hotmail.com
다이어리를 미처 구입하지 못해 탁상 달력에 약속들을 끼적여놓았다. 나왔다고, 오랜만이라고 반가워 하는 것으로는 성이 안차 “언제 시간돼?”냐고 물을 때마다 달력 위 하루하루는 채워져 갔다. 그만큼의 술을 마셨다. 새벽 6시면 자연스럽게 일어나던 습관은 슬슬 사라져가고 구속 전에 달고 살았던 위장병 은 다시 도졌다. CO노트를 보내기로 약속한 날이 지났음을 깨닫고 끼적여놓은 술 약속의 흔적들을 헤 집어보니 벌써 16일이다. 출소한지 두 주가 넘었다. 제길, 징역도 이렇게 빨리 갔다면.
동생이 장기 출타 중이라 동생 방에 머물고 있어 다행이지, 내가 지낼 방은 아직도 사람을 받을 준 비가 안 돼 있다. 당장 책을 꽂을 책장이 필요하다. 책상도 있어야겠고 앞으로 공부하며 수집해둘 자료 가 담길 컴퓨터도 필요하다. 어머니는 안방 TV가 안 나온다고 그리로 선을 연결해줄 수 없겠냐고 물으 시는데, 출소하며 “까짓것 금방해요.”라고 호언장담한 순간으로부터 2주가 부도수표처럼 흘러버렸다. 아 침마다 운동을 하겠다며 무리해서 산 트레이닝복은 언제든 반품해도 좋을 만큼 깨끗하게 걸려만 있다.
그간 안에서 했던 수많은 ‘탓들이 ’ 떠오른다. 하루 종일 켜져 있던 TV는 내 원망의 제 1 타겟이었다. ‘저것만 없다면…….’ 나는 훨씬 많은 책을 보고 편지를 썼을 것이며 사색의 시간 속에서 하루의 피로 를 거뜬히 풀어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걸 붙들고 영혼 빼앗긴 표정을 해서는, TV 보지 않 는 날도 있으면 어떻겠냐고 제안이라도 할라치면 별의별 정당화를 해서는 TV 사수에 힘쓰던 어느 아 저씨도 떠오른다. 밤만 되면 얘기하자고 조르던 아저씨도 있었다. 출역도 원망스러웠다. 낮에 일을 한다 는 것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시간이 얼마나 많다고 여겼던가. 그냥 출역 깨고 만기를 살면서 독방에서 원 없이 책을 읽는 게 더 합당한 일은 아닐까, 라는 계산이 시작되면 그날은 일하는 게 엄청 고됐다. 그런데 그때보다도 어쩌면 책을 못 읽고 있다. 그때 그게 어쩌면 상당부분 ‘탓이 ’ 었겠구나 싶다.
그러나 이런 순간들도 있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걷는다. 인도를 따라 걷다 보면 한강이다. 다리를 건너다 중간 쯤 난간에 기대 강변을 따라 서있는 빌딩을 바라본다. 담배를 물고, 흐르는 강의 물결을 살핀다. ‘아, 혼자 걸어본지 참 오래됐구나.’ 아무도 찾지 않는 낮에 서점에 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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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롭게 책들을 구경한다. 완전한 자유감의 순간.
아직은 앞으로 뭘 할지 정하지 못했고 그런 막연함 때문에 좀 불안하기도 하다. 병역을 거부해 감옥 에 다녀온 나는 이제 어떤 식으로 사회에 개입해야 할까? 스스로에게 명확하게 답을 하기가 아직도 어 렵다. 그래서 거창하게 출소인사라고 할 만한 무얼 이야기하기도 힘들다.
작은 답은 안다. 우선 규칙성을 다시 찾아야 한다. 오랜 기간 외부의 강제에 익숙했던 터라 스스로 를 규율하는 습관을 새로 만든다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더운 피가 몸을 돌며 정신 을 맑게 해줬던 기억을 떠올린다면, 책을 읽던 시간에 꾸준히 책을 읽었을 때 느껴지던 독서의 소화력 을 다시금 상기해본다면, 외부의 강제를 벗어나 스스로의 자유감 속에서 그것들을 다시 만끽해보려고 노력하게 될 것 같다. 이렇게 작은 규칙성을 찾아 갈 때 내가 누구를 만나든, 무엇을 하든, 휩쓸려서 한 일이 아닌가 괜히 걱정하지 않고 비로소 자신 있게 나의 의지임을 확신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그래. 생각해보면 출소 즈음에 너무도 들떠 출소 이후를 장밋빛으로만 그렸기에 현실이 좌우에서 포 위해 들어오는지도 모르겠다.
백승덕 2009.09.07 입영일, 병무청에 병역거부의사 밝힘 2009.09.09 병역거부선언 기자회견 2009.10.12 경찰조사 2009.12.07 징역 1년 6월 선고, 법정구속, 영등포구치소 수감 2011.02.28 가석방 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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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꿈꾸다 유호근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dasi2000@hanmail.net
나는 지금까지 병역거부한 것을 후회한 적이 없다. 많은 아픔과 불이익이 있었지만 내가 스스로 선택 한 길이기에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나 스스로의 성장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옥생활만큼은 후회에 가까운 아쉬움이 남았다. 대학시절 나는 ‘활동가(?)라면 한번은 감옥을 다녀와야 한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뭐랄까 통과의례 같은 기분? 심지어 20대시절 ‘운동권 낭만주의에 ’ 빠진 나는 감옥을 다녀온 이들을 동경하기도 했던 것도 같다. 그런데 직접 경험한 감옥생활은 내 환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그렇다고 나의 감옥생활이 특별히 문제 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의 높은 기대치가 실망을 만들어 낸 것일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병 역거부자가 일반 정치범과 다른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지도 모르겠다. 몇몇 건달(를 가장한 양아치??) 과 충돌은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과 친절하게 지냈고, 출역장에서도 거의 좋은 보직을 받았다. 그럼 에도 천성이 무언가로부터 구속받기 싫어하는 성향을 ‘과하게’ 가진 나로서는 방안에서의 위계질서, 여 유로울 것 같으면서도 전혀 여유롭지 않은 개인시간, 개인과 개인 간의 감정트러블까지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귀찮게 느껴졌다. 솔직히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까지는 아니더라도 수감기간동안 책을 읽 고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거라고 기대했는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기상-식사-TV운동-식사-TV-바둑-식사-TV-취침으 ’ 로 이어지는 일정 속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오 죽하면 한때 출역을 중단하고 독거방을 신청해서 들어갔는데 독거방(2인실) 역시 혼거방과 스케줄에 큰 차이가 없었다. 그냥 여러 명과 두 명의 차이일 뿐이었다. 그래도 나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다들 잠이 들어 조용한 새벽 2 시까지 책을 읽으며 공부를 하기도 했고, 앞에서 언급했듯 출역을 거부하고 독거방에 들어가기도 했다. 공부를 원하는 사람과 의기투합해 하루 종일 방한구석에 밥상을 펴고 공부를 해보기도 했다. 그래도 뭔가 부족했다. 이런 몸부림이 끝나기도 전에 나에게 출소라는 시간이 다가왔고 내게 있어 감옥은 ‘한 번은 다녀와야 할 곳에서 ’ ‘가급적이면 가지 말아야 할 곳으 ’ 로 바뀌었다. 꽤나 오랜 기간 동안 감옥에서의 1년 반이 내게는 죽은 시간으로 느껴졌다. 감옥생활이 후회에 가까 운 아쉬움으로 남은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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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땅에서도 싹은 틔운다 나는 지금 동작구의 풀뿌리 주민운동단체인 <희망나눔동작네트워크>에서 일하고 있는데 하루하루가 새롭고 재미있다. 새로운 주민을 만나고, 새로운 사업을 펼치고 있다. 장애인, 주부, 아동, 철거민, 노인 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더불어 행복한 세상, 오늘과 다른 내일을 이야기하고 꿈꾸고 있다. 열심 히 살다보니 너무 바빠졌고 무의미하기만 했던 지난 수감기간은 어느새 내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그런데 최근 우연한 기회에 지난 몇 년간의 활동을 정리할 기회가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되짚어가다 보니 출소 이후 5년간 벌여왔던 새롭고 즐거운 일들의 상당부분이 감옥생활동안 공부하고, 상상하고, 꿈꾸던 일들이었다. 그랬다! 당시는 즐겁지 않고 무의미하게만 보였던 일상이었지만 스스로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했고, 포기하지 않았던 노력의 결과가 어느새 내 몸에 축적되어 있었던 것이다. 수감기간 정리해두었던 노트 를 펼치며 아직도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이 많음에 한번 더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이다. 물론 수감생활이 즐거울 리는 없다. 그러나 사회생활도 즐거울 수만은 없다.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일도 누군가에게는 보람된 일일 수 있고, 모두가 존경하고 추앙하는 일도 부질없는 일일 수도 있다. 아직도 총을 들 수 없는 양심을 가진 젊은이들이 감옥을 가야만 하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다. 그러나 아직 세상이 덜 변했고, 스스로 선택한 고행의 길이라면 그 시간을 어떻게 보람있게 보낼 것인가를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적지않은 병역거부자들이 출소이후 혼란의 시기를 겪 었던 것으로 안다. 나 역시 그랬던 것 같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이다. 그런데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말에는 빈칸이 있다. 마음만 먹어서는 안 된다. 스스로 최선을 다한다는 전제가 깔려있어야 할 것이다.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작심삼일만 반복해서 는 될 일도 안된다.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실제로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면 그 곳이 어느 곳이건 스스로를 성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전쟁없는세상의 원고청탁을 받고 오랜만에 감옥에 있는 병역거부자들을 떠올리다보니 충고아닌 충고 를 하게 됐다. 지금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너무나도 잘 알기에 이미 경험을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나름대로 극복을 했다고 자부하며 몇 마디 지껄였다. 비록 답답한 감옥생활이지만 정신적으로 풍요로 워질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며 우리의 청춘에 진한 건배를 전하고 싶다! 분명히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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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꿈은 김훈태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edukht@hanmail.net
내가 일하고 있는 발도르프학교는 8학년까지 한 담임이 아이들을 이끌어간다. 하지만 중간에 사정이 생겨 담임이 바뀌는 경우도 있어서 몇 해 전 나는 6학년이 된 아이들의 새로운 담임교사가 되었다. 출 소 뒤 반년 가량이 지난 뒤였다. 그렇게 사춘기에 진입하기 시작한 아이들과 3년 세월을 보냈다. 그리 고 작년에 아이들을 졸업시켰다. 졸업학년인 8학년 시기에는 행사가 많아서 일 년 내내 정신이 없었다. 상급학년에 진급하기 위해 졸업논문과 비슷한 장기 프로젝트를 준비해 발표하기도 하고, 제법 큰 규모 의 연극 공연을 연말에 올리기도 했다. 노래와 연주, 춤 등을 연습해 문화제도 벌이고, 멀리 떠나는 학 급여행도 있었다. 아마 여름이 지나고 여행을 다녀온 뒤부터였을 것이다. 예기치 못한 슬럼프가 찾아온 것은. 아이들과 함께 떠난 여행의 행선지는 몽골이었다. 입시교육도 없고, 부모의 사랑도 넘치게 받는 우리 아이들 역시 다람쥐 쳇바퀴 돌듯 답답한 일상을 보낸다. 학교 다녀와서는 과목별로 내주는 숙제와 악 기 연습, 프로젝트 작업과 공연 준비 등으로 늘 바쁘다. 게다가 사춘기의 격랑 속에서 쌓이는 감정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해 날카로워지기 일쑤였다. 그런 아이들에게 탁 트인 대자연을 맛보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걷고 초원 위로 말을 타고 달렸으면 했다. 여행비가 만만치 않았지 만 학부모들과 의기투합해 일을 벌였다. 여름방학 중에 아버지들과 답사를 다녀온 뒤 9월에 아이들과 설레는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과연 몽골이었다. 우리보다 더 빨리 가을이 찾아온 그곳은 예상대로 드넓은 평원을 지녔다. 아이들과 바얀고비 사막에서 낙타를 타기도 하고, 게르 앞에 모닥불을 피우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추운 밤하 늘은 수많은 별과 은하수로 뒤덮였다. 거짓말처럼 선명한 별자리들이었다. 말을 타고 초원을 질주한 기 억도 잊지 못할 것이다. 아이들은 겁이 없어서 난생 처음 타보는 말임에도 두려움 없이 달리고 또 달 렸다. 땅이 너무 넓어서 온종일 차량으로 이동하기만 한 날도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여 동안 몽골의 여 기저기를 누볐다. 미리 답사를 하였고 일정을 꼼꼼하게 짜두어서 별다른 일 없이 끝나는 줄 알았다. 하 지만 출국 전날 마지막 코스로 잡은 등산에서 문제가 생겼다. 울란바토르 근처에서 가장 높은 산인 체체궁산에 갔다. 그런데 현지인 가이드의 실수로 전혀 엉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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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에서 산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요구했던 출발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뿐더러 길도 험하고 좁았다. 그 와중에 시간마저 많이 지체돼 산행을 포기하든지, 그냥 오르든지 결정을 내려야 했다. 담임교사로서 아이들에게 모험의 기회를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등산을 시작했지만 산행 중 우리는 모험 이상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낯선 나라의 깊은 산속에서 모두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두 팀으로 나뉘어서. 지금 생각해도 간담이 서늘하다. 바위가 많은 체체궁산은 잠시만 방심해도 바위틈으로 실족 하기 딱 좋다. 등산로를 벗어난 곳은 온통 너덜겅이라 발목을 삐는 아이가 생겨났다. 선두를 맡은 내가 데리고 있던 팀은 그나마 해가 어둑어둑해질 무렵 천신만고 끝에 길을 잡아 예정 했던 종착지에 닿았다. 하지만 후미에 있던 팀은 밤이 되었는데도 오지 않았다. 보조 선생님과 연락도 되지 않고 날은 깜깜해져 가는데 겁이 덜컥 났다. 입김이 날 정도로 추운데다 조난에 대비할 만한 걸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아 산에서 하룻밤을 묵으면 위험할 수 있었다. 먼저 도착한 아이들은 버스에서 기다리게 하고 종착지에서 만난 운전사와 가이드를 이끌고 다시 산을 올랐다. 거의 탈진한 상태에서 다시 산을 오르려니 다리가 후들거려 지팡이를 짚어도 속도가 나지 않았다. 온갖 최악의 상상이 떠올 랐다.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를 하며 힘을 냈다. ‘모든 것은 나의 잘못이니 제발 무사하길. 내게 어떤 고난이 와도 좋으니 제발 무사하길.’ 산을 절반쯤 되짚어 올랐을 때 무전이 되었다. 밤 10시쯤이었다. 그리고 손전등 몇 개에 의지해 조심조심 내려오는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맥이 탁 풀렸다. ‘내가 무 슨 짓을 한 거지...’ 한국에 돌아와서 자책과 자문을 많이 했다. 나의 경솔함이 큰 사고를 부를 뻔하지 않았나. 만에 하나 사고가 일어났다면? 생각하기에도 끔찍했다. 나는 교사로서 자격이 없는 것 아닌가? 계속 생각이 부정 적인 쪽으로 자라나 옭죄었다. 당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들었다. 12월에 있을 연극공연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힘이 나지 않았다. 내 안에 확신이 없으니 힘은 고갈되어 갔고 아이들과도 호흡이 잘 맞춰지지 않았다. 어떻게 공연을 올렸는지 모르겠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힘들었고 나는 나대로 진이 빠졌다. 욕심을 내서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 준비했는데 아이들 나이에 조금 벅찼는지 연습 내내 불만과 두려움을 달래야 했다. 항상 연습이 끝날 때마다 파국으로 치닫는 기 분이었다. 어찌됐든 무겁디무거운 시간을 이겨내고 공연은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역시 아이들은 저 력이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문제는 겨울방학이 되었음에도 움츠러든 마음이 풀리지 않는 데에 있었다. 8학년을 끝내고 1학년으로 내려가기로 한해 전부터 이야기가 되었지만 나의 마음은 우울할 뿐이었다. 과연 나는 계속 교사를 하 는 게 옳을까? 아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기는 하는 걸까? 그럴 자격도, 능력도 없는 것 아닌가? 졸업식 (우리 학교에서는 ‘마침식이 ’ 라고 부른다)이 있는 날도 홀가분하기보다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감사해 하는 아이들 앞에서 몹시 부끄러웠다. 자격지심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렇게 내내 기쁨 없는 삶이었다. 사람들과 연락도 거의 하지 않고 껍데기 속으로 들어가 웅크린 채 한 철을 보낸 것 같다. 완전히 몰락 해버린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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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1학년 아이들과 새로 생활을 시작했다. 내 키에 가깝던 아이들을 떠나보내고 허리에도 닿지 않는 아기들과 지내는 게 아직은 많이 낯설다. 하지만 천진난만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 앞에 서 우울해할 수만은 없는 것이지 않나. 저렇게 사랑스러운 표정과 몸짓인데 슬럼프에 빠졌다는 핑계로 교사를 하네, 마네 고민하는 건 사치일 것이다. 그런 것이 바로 어린 아이들이 주는 선물이다. 어떻게든 스스로를 치유해야 한다는 절박한 의무감. 아이들 앞에서 문득 옛날에 가졌던 나의 꿈을 떠올리게 되 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어느 순간 벅찬 감동과 함께 그 마음이 떠올랐다. 병역거부 소견서에도 썼다시피 내 꿈은 저렇게 해맑은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행복하게 늙어가는 것. 저 아이들을 졸업시킬 때쯤이면 마흔이 넘었을 것이다. 그때까지 좌절하지 않고 좋은 선생이 되어 갈 수 있을까? 아마 이번에는 잘할 수 있겠지. 내기를 걸어도 좋다.
다양한 언어로 만나는 평화 평화 디에고 | limcarey22@gmail.com
<한국어> 평화
平
和
평평할 평
화할 화
‘평평하다’는 뜻과 ‘화목하다’ 는 뜻이 합쳐졌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한국의 사상에서 평화를 ‘안온하고, 혼란스럽지 않고, 화합(和合)한’ 상태로 보아왔음을 나타낸다. '사 이좋음'을 뜻하는 말이랄까. 우리도 울퉁불퉁하지 않고, 화목한 평화를 꿈꾼다 ^^ <영어 >
Peace
[píː s]
앵글로-노르망어 pas에서 유래했는데, 의미는 “혼란스러움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속 라틴어 “pax”, 그리스어 “eirene”와 더불어 초기에는 인사말로 쓰였고 “침착함”과 “조용함”의 뜻으로도 쓰인다. 히브리어 “shalom”과 아랍어 “salaam” 역시 인사말로, “평화” 이외 여러 가지 뜻이 있다(안전, 복지, 친근함 등등). 이리저리 지치고 피곤한 일이 많고, 서로간에 사랑의 한마디가 그리운 요즘이다. 오늘, 소중한 사람들에게 "평 화"의 인사를 건네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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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없는세상 신년회 외 여옥 | 전쟁없는세상 책임활동가 + yo1004@hanmail.net
<전쟁없는세상 신년회와 운영회의 재개>
의 공연, 병역거부 관련 영상 등이 어우러지는 편 안하고도 의미있는 자리였다. 그리고 전의경제 토
2011년 1월 10일 망원동 전쟁없는세상 사무실에
크쇼 코너에는 전경 출신 병역거부자인 박석진씨
는 많은 병역거부자들과 회원들이 모여서 새로운
과 유정민석씨가 출연하여 전경으로 복무하다가
한 해를 맞이하는 신년회를 가졌다. 2010년의 활
병역거부를 했던 당시의 상황과 고민을 이야기했
동과 재정에 대한 간략한 보고가 있었고, 활동비
고, 홍세화 선생님께서도 참석하셔서 격려의 말씀
인상에 대한 제안이 있어서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을 해주셨다.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약 50여명의
했다. 이후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들과 함께 밤새
사람들에게도, 책이나 서평으로 내용을 접한 사람
도록 술자리가 이어졌다. 신년회에서 새로 활동의
들에게도 이 책이 품고있는 고민들이 잘 전달되었
시작을 알린 성민씨의 등장으로 그동안 활동가 한
으면 좋겠다. 책은 온오프 ․ 라인 서점에서 구입하실
명이서 할 수 없었던 운영회의가 1년 8개월만에
수 있다.
다시 시작되었다.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 출판기념회 “평화의 링겔을 꽂아라”> 지난 2월 초, 병역거부자 임재성씨가 쓴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 : 병역거부가 말했던 것, 말하 지 못했던 것』이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한국 사회의 병역거부 논의를 평화운동의 지평으 로 확장하고자 하는 책이고 지난 10년의 한국 병 역거부운동의 역사와 이후 운동에 대한 고민을 담
<키리졸브 한미연합 군사훈련 반대 캠페인>
고있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과 책의 의미를 나 누고자 전쟁없는세상에서는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2월 28일부터 3월 10일까지 키 리졸브(Key
2월 22일 저녁, 홍대앞 라이브클럽 빵에서 열린
Resolve) 한미연합 군사훈련이 서해상에서 실시되
출판기념회는 병역거부자들과 활동가를 비롯한 다
었다. 지난 연평도 사태 이후 군사훈련이 더욱 강
양한 사람들이 들려주는 책을 읽은 소감, 편집자
화되고 공격적이 되어가며, 미국 항공모함도 모자
와 저자의 책에 대한 이야기, 홍대 인디뮤지션들
라 예비군까지 동원한다는 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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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평화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정부종합청사 앞
<평화학 함께읽기>는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
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어』『 , 제노사이드와 기억의 정치』, 『이것이 인 간인가』,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를 읽고 듣 는 임재성씨의 강의, 토론, 마음에 드는 구절을 필사하는 시간, 그리고 새벽까지 이어지는 불타는 뒷풀이도 있다. 6주에 총 4권의 책을 읽어야 하는 빡빡한 프로그램이라 신청할 사람이 있을지 걱정 이었는데, 의외로 관심을 보이고 참여하는 사람들 이 많아서 망원동 전쟁없는세상 사무실에서 비좁 지만 더 가깝게 얼굴을 맞대고 공부를 하고 있다.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 저자 직강이었던 2 주차 3월 11일에는 조금더 넓은 공간인 그린비 출판사 사무실 내 강의실에서 진행했다. 행복한 책읽기 게시판(withoutwar.org/happybook)에는 매주 서평과 발제, 모임후기 등의 글이 올라오면 서 활성화되고 있는 중이고, 책읽기 시즌2는 4월 8일 금요일 저녁 마무리 토론 <실천을 위한 공부 그리고 평화운동>을 끝으로 정리될 예정이다.
그리고 계속되는 대규모 군사훈련이 한반도의 군 사적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있고, 군사훈련보다는 대화를 위한 진정성 있는 노력을 촉구하는 내용을 시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말풍선 형식으로 피켓을 만들어 키리졸브 훈련기간 동안 매일 점심 시간에 돌아가며 캠페인을 진행했다.
<평화주의자들의 행복한 책읽기 시즌2 “평 화학 함께읽기”> 지금까지 <평화주의자들의 행복한 책읽기>를 진행 해오면서 아쉬웠던 부분인 비정기적이고 일회적인 방식을 뛰어넘고자 6주 동안 매주 정해진 책을 함 께 읽고 토론하는 방식의 ‘시즌2’가 3월 4일부 터 매주 금요일 저녁에 진행되고 있다. ‘공감’ 과 ‘기억이 ’ 라는 화두에 초점을 맞춰 준비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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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 출판기념회를 다녀와서 유은정 | 전쟁없는세상 후원회원 + yoolymph@gmail.com
우선, 저자가 지금에 꼭 필요한 책을 세상에 내놓기까지 참아내야 했던 것들, 기다려야 했던 시간들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막이 올랐다. 첫 만남의 설렘이랄까. 소식지만 가끔 받아보고, 잊고 있었던 <전쟁없는세상>을 직접 만 나는 날이 왔다. 딱히 하는 거 없는 백수인데 이제야 <전쟁없는세상>이 하는 행사에 슬쩍 발을 내딛 었다. 약속된 시간 전에 무대 앞 의자에 앉아있게 된 건 전적으로 설렘 때문일 거다. 맥주가 있고, 먹 을 게 있고,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에 대한 서평과 음악이 있었다. 그곳에서 난 또 손에 잡힐 듯 말 듯 한 ‘평화와 ’ 만난다. 그이는 내 생활에서 잊힐 때 쯤 되면 꼭 날 찾아온다. 사실 내 삶에서 ‘평화의 ’ 등장은 날 가끔 고통스럽게 한다. 실제로 ‘평화는 ’ 말처럼 평화롭지 못 하다. 일본여행에서 만났던 찢겨지고 버려진 위안부 할머니도 ( 쿄에 있는 여성평화박물관 스크랩 자료 를 통해 뵈었다.)와 난민으로 내몰린 우토로 마을에 사는 재일 조선인 친구, 오키나와라는 미군기지에 서 살아내야 하는 오키나와 사람들, 라오스여행 중 본 집속탄 피해로 다리 한 쪽이 잘려나간 아저씨, 병역 거부를 하고 감옥을 경험한 친구... 이들을 만나고 나서 평화를 생각해야 할 때가 되면 난 울어 버리거나, 경악하거나, 무기력하게 주저앉거나, 머리숱도 없어 걱정인데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하는 척 한다. ‘세상은 왜 이 모양일까?’, ‘말도 안 되는 사건들에 대해 사람들은 리액션반 ( 응하거 ) 나 액션행 ( 동한 ) 다. 그럴 경우 난 아직 전자일까?’ 라는 식의 고민들.... 그리고 난 오늘 임재성이 쓴 『삼켜야했 던 평화의 언어』를 만났다. 『삼켜야했던 평화의 언어』 출판기념회에서 무대에 올 라가 간 사람들은 그 책의 탄생을 진심으로 반가워했고,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으면 하는 맘을 전했다. 심 각한 걸 싫어한다는 저자와 평화의 언어를 행동하는 친 구들은 각자가 준비한 공연으로 진지한 분위기에 숨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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틔워주었다. 참 유쾌했다. 하하하- 책에 등장했던 역사 속 병역거부자들과의 대화에선 역사 한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어 신기했고, 처 음 알게 된 병역거부의 역사에 신선한 충격도 받았다. (무식하게도 병역거부는 2000년 이후에 생겨난 개념이 라고 착각하고 있었거든...) 아직 책을 다 읽지 못했지 만 내가 다 이해할 수 없는 선택과 경험을 한 사람들 에게 배워 확실해진 게 하나 있다. 평화운동으로서 병 역거부운동은 착한 느낌의 모호한 ‘평화라 ’ 는 단어를 지우고, 그 자리에 ‘병역거부라 ’ 는 행동을 놓았다는 것 이다. 행사의 막이 내렸지만 처음의 설렘은 병역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날 긴장시켰다. 내 일상에는 ‘폭력이 ’ 없었는지, 나도 모르게 세상이 만들어 놓은 권력 구조 에 스며들어 여성임에도 가해자가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물어보게 된다. 그리고 출판기념회 다음날, 난 동네 서점에서 책을 주문하고 서점 언니에게도 책을 권했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여성의 몸’ 모임에서도 밑 줄을 그으며 함께 읽어 볼 작정이다. 병역거부를 통해 전쟁을 반대하는 그들의 염원이 이제 나의 염원이 되 길 바란다. p.s. 얼마전 일본에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었던 대지진이 일어났다. 그로 인한 희생자들과 인 간이 만들어 놓은 원자력 발전소에 의해 속출하는 방 사능 피폭 희생자들을 무기력하게 바라보았다. 그 순 간 원자력과 같은 무기생산을 가능케 하는 모든 것들 에 대고 ‘제발 이젠 좀 그만해주세요라 ’ 고 마음으로 외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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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관광명소에서 평화적으로 상상하기 - 참여연대 평화기행을 다녀와서 성민 |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 peacedrip@gmail.com
‘결코 잊지 말라라는 ’ 경고는 자꾸 되풀이되는 주제였지만, 잊지 않는 것이 그 자체로 해결책이 아니 라는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분명해졌다. 기억하기가 단순히 출발점으로서 필요할 수는 있지만, 기억 은 인간적이고 정당하며 평화로운 미래를 세우기 위한 토대가 되어야 한다. - <제노사이드와 기억의 정치> 中 작년에 화제가 됐던 영화중에 <인셉션>이란 영화가 있다. 남의 꿈에 들어가 생각을 훔치거나 생각을 심는다는 발상에서 비롯된 꿈에 대한 영화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꿈들이 등장하고 서로의 꿈을 조 작하려 하지만 그 모든 꿈들이 기반으로 삼고 있는 것은 구체적으로 경험된 현실이다. 꿈은 상상이고 창작이지만 꾸는 사람이 경험하고 느낀 구체적인 현실을 재료로 해서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 럼 상상은 구체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평화적으로 상상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경험해 보지 못한 평화라 는 추상적 개념을 상상할 때 우리는 구체적 재료로서 경험과 느낌을 필요로 한다. 우리 곁에 분쟁지역 이 있음을 다시 한 번 보고 느끼는 것, 그곳의 역사를 톺아보며 넓은 관점을 가져 보는 것, 그 장소들 에서 구체적인 평화의 방법을 고민해보는 것, 이것들이 모두 평화를 상상하는 재료들이 되지 않을까. 어떻게 안보를 관광할까. “이시우와 함께 떠나는 민통선 평화기행”의 첫 목적지였던 애기봉 전망대 앞 검문소에 서 제공된 안내 팜플렛을 받고 든 의문이다. 보통의 관광 지에 써있는 ‘천년고도라 ’ 든가 ‘수려한 자연경관같 ’ 은 수식어 대신 “안보관광명소”라는 호칭이 눈에 들어 왔다. 안보를 관광하는 이곳에서 어떻게 평화를 관광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며 전망대로 오르는 짧은 산책로
애기봉 전망대에 오르는 길에 있는 표지판. 북한땅 을 최단거리에서 볼 수 있다는 위치에 걸맞게 "우 를 걸었다. 리는 조국의 총끝! 칼끝!"이라는 자극적이고 선동 작년 말을 뜨겁게 달군 논쟁의 현장인 애기봉 등탑은 시 적이며 유치한 구호가 적혀있었다. 곳곳에 있는 비 슷하게 새빨갛고 유치한 미감의 각종 표지판들을 시한 철골 탑이었다. 대단한 전투의 흔적도 없었고 거창 보면 여기가 남한인지 북한인지 헷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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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상징물이나 사소한 장식조차 없었다. 이곳에는 역사문화적 요소나 수려한 자연경관 대신 앙상한 철 탑을 통과하는 휑한 바람과 그에 투영된 사람들의 증오와 분노만 있을 뿐이었다. 이시우 작가가 인용 했듯이 정치가 적과 나를 나누는 것이며 정치의 연장이 전쟁이라고 할 때 애기봉이라는 장소는 적과 나의 나눔을 확인하고 머리와 몸에 되새기는 곳으로써만 기능할 뿐이었다. 즉 전쟁의 이분법적 전제를 다시 확인하고 전쟁을 준비하려는 마음가짐인 ‘안보의식을 ’ 다지는 곳인 것이다. 마침 전망대를 방문하신 민통선 평화교회 목사님께서 문제의 점등식 때의 분위기와 풍경들을 전해주셨 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랑을 ’ 말해야 하는 교회가 사실은 ‘증오로 ’ 기치로 모였을지도 모른다 는 것, 또 그 사람들이 북을 자극하고 반격할 빌미를 줄 수도 있는 볼모로써 이용됐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예수의 탄생일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사람들이 가진 폭력성에 대해서 곰곰히 따져보게 됐다. ‘안보관 ’ 광 명소에서 평화를 이야기하는 이상한 사람들을 불편해하며 지켜보는 관리소장의 눈총을 뒤로 한 채 우리는 애기봉을 내려왔다. 이어서 찾은 연미정도 애기봉과 마찬가지로 민통선 안쪽에 위치하고 있고 2008년 초까지는 민간인에게 개방되지 않은 곳이었다. 지금은 깔끔하게 단장된 돈대 안에 500년 묵은 느티나무 두 그루와 함께 세 월의 무게를 드러내고 있다. 정자에선 한강과 임진강이 바다와 만나는 거대한 해협인 한강 하구를 볼 수 있는데, 애기봉 전망대에서도 볼 수 있는 이곳은 낙동강하구, 영산강 하구와는 달리 구체적인 지역 을 지칭한다. 정전협정 1조에 근거해 구획되는 이 지역은 남북 어디의 땅도 아닌 유엔사가 관리하는 중립적 비무장 지대이다. 한강하구는 조항에 따르면 민간항해가 제한되지 않는다. 하지 만 직간접적인 압력 때문에 민간항해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 고 있다. 이시우 작가도 평화를 상징하려는 뜻으로 이곳을 항 해하려는 시도를 몇 번 했었는데 그 때마다 주최 측 스스로의 두려움과 유엔사나 정부와의 마찰 때문에 좌절 됐다고 한다. 남북간의 날카로운 군사적 긴장이 감도는 곳에서 그 긴장의 해소는 정부나 군대가 아닌 민간수준에서 일궈낼 수 있다는 바람과 희망을 전해 들으며 우리는 함께 서서 그 바람을 구체 화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길들을 상상해보았다. 이시우 작가의 설명은 단편적인 역사적 사실을 서술하거나 순 국선열들의 희생만을 강조한 교과서나 관광 안내서와 달랐다. 유럽과 아시아의 역사적 맥락을 넓게 설명하며 관점의 차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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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학적 특성들을 관련지었다. 그와 함께 차례 로 일정을 소화하며 이전엔 갖지 못했던 평화적 인 상상력을 조금씩 익혀나갔고 '유라시아적 관 점의 ' 필요성을 절감했다. 상대를 나에게 맞게 세 우고 바로 잡는 균형보다는 서로가 조금씩 기울 어진 상태에서 함께 이루는 ‘부조화의 조화를 ’ 고 인돌로부터 배웠고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유적 지인 충렬사와 광성보에서는 그곳을 지키고 또 공격했던 사람들의 시각과 정신에 대해서 생각해 구체적인 현장에서 들려주는 이시우 선생님의 설명은 보다
보게 됐다. 나름대론 최선을 다해서 치열하게 싸 넓은 관점과 역사적인 맥락을 담고 있었다. 재밌으면서도 웠겠지만 그들에게 결여됐었던 넓은 시각을 우리 해박한 선생의 설명에 지나가던 관광객들도 함께 귀를 기울 는 갖고 있을까. 대몽항쟁, 병자호란, 병인양요,
이기도 했다.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강화도는 넓은 세계사적인 맥락위에 위치했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남북대 치와 그 사이에 위치한 너른 물길 위에 배 한척 맘대로 띄울 수 없는 우리의 상황도 단지 대한민국의 문제가 아니라 수많은 국가들이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유라시아적 문제인 것이다. 사실 난 강화도에서 2년간을 살았었기에 강화의 유적지들은 꽤 익숙했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 지만 평화라는 관점으로 바라본 강화는 예전의 그곳과 달랐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순국선열과 호국영 령들만의 과거의 유적지가 아니었다. 그곳은 여전히 우리의 현재였고 보다 넓은 시각과 관점을 요구하 는 국제적인 분쟁지역이었다. 그저 흘러간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인간적이고 정당하며 평화로운 미래를 세우기 위한 토대로서 ' 볼 필요가 있는 역사를 간직한 곳이었다. 누군가는 군사전략지로 강화도를, 투자대상으로 한강하구를 바라보고, 적을 확인하고 증오를 공유하려 애기봉에서 성탄트리를 점등한다. 하지만 나는 평화로 나아가는 길로, 평화를 이뤄내는 구체적 장소로, 적이 아닌 인간이고 친구임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로, 즉 평화적으로 상상하기 위한 구체적인 재료로 써 강화도와 한강하구와 애기봉 등을 경험하고 느낄 것이다. 이것이 ‘안보관광명소에 ’ 서 평화기행을 하 는 방법이 아닐까. 평화로 향하는 길을 모색하는 모든 가능성으로의 고민, 즉 평화적으로 상상하는 법 을 배우기 위해 우리에겐 더 많은 평화기행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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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민 | 전쟁없는세상 매체편집팀 + peacedrip@gmail.com
겨울은 새삼 추웠다. 굳이 수치화 하자면 평
을은 이미 희미해져 가고 있어서 4계절이 분명
년보다 1도 이상 낮았던 기온, 28년 만에 가장
한 나라라는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이 이제는 혼
길었던 한파, 그리고 부산지역에서의 100년만의
란스럽다. 이제 곧 찾아오며 또 지나갈 봄은 적
최저기온 등으로 표현됐다. 적어도 내가 겪은 겨
당히 따뜻한 날씨의 ‘계절이라 ’ 기보다는 겨울
울 중엔 제일 추웠다는 것은 과장이 아닌 셈이
과 여름이 간헐적으로 반복되며 교차하는 ‘환
다. 얼지 않을 만큼만 틀어놓은 전쟁없는세상 사
절기에 ’ 불과한 시기가 된 것 같다. 우리는 이
무실의 보일러는 20만원이 넘는 가스요금고지서
미 ‘기후변화의 ’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를 뱉어냈고 수도꼭지도 끝내 추위를 버티지 못 하고 터져버렸다. 왜 그렇게 추웠을까. 역설적이게도 지난겨울의 추위는 지구 온난
기후변화 시대의 새로운 도덕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United Nations
화 때문이라고 한다. 기후라는 것이 워낙 시공간
Framework Convention on Climate Change)에 따
적으로 거대한 규모로 변화하는 것이기에 정확
르면 ‘기후변화란 ’ 전 지구 대기의 조성을 변
한 원인을 딱 집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북
화시키는 인간의 활동이 직간접적으로 원인이
극의 온도가 올라가면서 ‘북극진동이 ’ 라는 현
되어 일어나고, 충분한 기간 동안 관측이 된 자
상이 심해져 중위도 지방에 차가운 공기가 내려
연적인 기후변동성에 추가적으로 일어나는 기후
왔다는 설이 여기저기 보인다. 그렇다. 지구가
의 변화를 뜻한다. 산업화 이후 탄소를 포함한
더워지면 많은 것들이 변하고 심지어 내가 사는
온실가스의 지속적 배출이 지구의 평균 온도를
곳이 추워지기도 한다.
올렸고 이는 해수와 대기의 흐름에 영향을 미쳐 강수의 양과 패턴을 변화시키고 있다. 이에 따라
생각해보면 내가 지구에 발붙이고 살았던 얼
가뭄, 홍수, 태풍, 폭염, 한파 등 기상이변이 잦
마 안 되는 세월동안 꽤나 많은 것들이 변화해
아진 것이다. 기후변화는 인류에 직접적인 피해
왔다. 우리는 이제 기록적 폭염폭 / 우폭 / 설 이라는
를 미칠 뿐만 아니라 해수면 상승, 생태계 파괴,
단어에 익숙하다.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봄과 가
식량생산량 감소 등으로 인류생존에 큰 영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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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고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이론적으로만 존
하지만 우리의 이런 노력을 무색하게 만드는
재하거나 어디 먼 나라 얘기만이 아니라 이미
거대한 ‘범죄세력이 ’ 있다. 우리가 잠시 잊었
우리의 문제가 됐으며 국제사회에서 합의된 과
던 이 지구온난화의 주범은 우리가 아무리 일상
제이기도 하다.
을 변화시켜도 눈썹하나 깜짝하지 않고 계속해 서 기후변화의 원인들을 대량으로 제공한다. 그
지구 온난화, 탄소배출량, 탄소 발자국 등의
‘범죄세력은 ’ 바로 군대와 전쟁이다. 지구온난
단어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상식이 됐다. UN을
화를 막기 위해 1리터의 휘발유로 10km를 가는
비롯한 국제기구는 물론이고 한국 정부에서도
자동차를 줄이겠다고 다짐하고선 우리가 버스와
하는 것마다 ‘녹색이 ’ 나 ‘친환경이 ’ 라는 이름을
지하철로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탱크는 고작
붙이고 있으며 시민사회에서도 환경운동은 선택
250m를 전진하는데 1리터의 기름을 쓰며 무한궤
이 아니라 필수라고 이야기 한다. 지구온난화로
도를 돌리고 있다. 우리가 고유가 시대에 가스를
인해 전 지구적인 기후변화가 일어나서 북극곰
아껴보겠다며 실내기온을 1도 낮출 때 전투기와
도 울고, 아마존 전사들도 울고, 아프리카의 코
군함들은 기름을 쏟아 부으며 푸른 하늘과 바다
끼리도 울고 있다는 것은 초등학생도 알 정도다.
를 누비고 있다.
우리는 이를 막기 위한 ‘무한 도전’1)의 일환으 로 비누세 / 제물 / 을 아껴 쓰고, 안 쓰는 전기제품
새로운 범죄세력, 군사주의
을 끄며 비닐봉지 대신 장바구니, 수입품 대신 국산품, 자가용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등의
군대와 전쟁이 석유를 먹고 자란다는 것은
수고를 기꺼이 감내하기도 한다. 이는 우리가 살
사실 새로운 얘기는 아니다. 군대가 직접 소비하
아갈 지구를 조금이라도 덜 더워지게 하기 위해
는 석유의 양 또한 어마어마하겠지만 석유를 확
서이다. 지구 온난화의 원인이 되는 우리의 일상
보하기 위해 전쟁이 벌어지고 군대가 키워지기
을 우리는 조금씩이나마 바꿔가고 있으며 이러
도 한다. “지금 내가 타고 가는 승용차 기름이
한 사회적 흐름에서 과다한 탄소배출, 석유과소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사람들의 목숨과 연결
비는 점점 ‘죄가 ’ 되어가고 있다.
되어 있을 수 있다고 느낀다”는 권정생 선생의 말2)처럼 이라크 전쟁과 아프간 전쟁의 근본 원 인이 종교도, 테러도, 대량살상무기도 아닌 석유 였음은 공공연한 비밀이 됐다. 우리가 더 많은 석유를 필요로 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전쟁을 필 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녹색평론 등의 지면을 통해 그러한 이야기들이 한국에서도 시작됐고 이 라크 전쟁 때를 기점으로 자전거를 타거나 걷는 등의 석유소비를 줄이는 방식으로 반전운동을 하 는 사람도 생겨났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여전히 이 석유 먹는 하마를 키우고 있는 것일까.
1) MBC <무한도전 - 나비효과>, 2010년 12월 18일 방영분. 지구 온난화를 주제로 북극의 얼음이 녹으면 몰디브가 잠 긴다는 컨셉으로 평소의 사소한 행동이 지구온난화를 일으킨다는 것을 쉽고 재미있게 표현하며 일상에서 지구온난 화를 막는 다양한 방법이 제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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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와 군사주의”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석유를 많이 쓰는 군대를 유지하고, 석유를 확
30호 기획주제로 잡게 됐다. 이런 저런 자료를
보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것을 뒷받침하는 거
찾아보며 논의를 하기 시작했으나 곧 몇 가지
대한 토대는 바로 군사주의이다. 군사주의를 “전
난관에 부딪히게 됐다.
쟁을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사회적 활동으로 보 이게 하는 가치관의 체계, 또는 전쟁이나 전쟁 준비가 일상적인 사회활동으로 인식되게 하는 사회적 실천이나 태도들의 총합”으로 보거나마 ( 이클 만), “군대의 상층부나 지배 세력들이 다른 수단에 비해 군대적 문제 해결을 첫 번째 수단 으로 보는 것”으로 보는기 ( 든스) 정의는 이를 잘 설명해 준다.3) 다시 말해 석유를 엄청나게 쓰는 것을 비롯해 많은 비용을 치러야 하는 군대를 유지하는 전쟁준비를 정상적으로 보게 하고, 석 유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다른 수단들을 배제 하고 전쟁을 선택하게 하는 이데올로기가 바로 군사주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군사주의가 치 르는 비용은 비단 석유와 사람 목숨뿐만이 아닌 지구 전체의 변화와 손실이다. 기후변화와 군사주의 군사주의는 전쟁을 준비하는 것을 높은 사회 적 가치로 설정하도록 하고 전쟁준비를 우선시, 당연시 하도록 한다. 전쟁과 전쟁준비를 위해 존 재하는 군수산업과 무기, 장비 등을 포함한 군사 시설은 석유를 비롯한 화석연료를 대량으로 사 용함으로서 다량의 온실가스를 발생시킴으로써 지구온난화에 크게 기여한다. 그 외에도 지구온 난화와 연관된 다양한 환경의 파괴 및 오염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하고 있으며 이것이 결국 기 후변화라는 결과로 돌아오게 된다. 우리는 기후 변화에 기여하는 중요한 원인으로서 군사주의를 주목하게 됐고 이를 어떻게 흥미롭고도 설득력 있게 드러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우선 이 주제에 대해서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환경문제의 일환으로서 군대나 전쟁이 얘기되는 것은 많이 들었고, 몇몇 무기들의 대가 로서 발생하는 환경파괴에 대한 자료는 종종 있 었지만 보다 넓게 기후변화와 군사주의의 관계 에 대해서는 연구되거나 조사되지 않은 것 같았 다. 무엇보다 국가 안보라는 명분 아래 군대와 전쟁 그리고 기후변화, 환경오염 및 파괴를 연결 짓는 정보들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물론 그 이 유는 안보 때문이었다. 환경이나 투명성, 민주성 같은 다른 가치들보다 국가 안보가 우선시 되는 이 상황도 물론 군사주의 때문일 것이다. 또 한 가지 우리를 어렵게 한 것은 군사주의와 기후변
2) 월간 <작은책>. 이계삼, 『영혼없는사회의 교육』-<전쟁, 일상, 세상의 슬픔>, 2009, 녹색평론사에서 재인용. 3) 임재성, 「평화운동으로서의 한국 병역거부운동 연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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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의 관계가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군사주의는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되는 악순환 의 고리라고 할 수 있다. 군사주의와 환경안보,
우리는 기후변화도 군사주의에 기여한다는
자원 안보는 국수주의나 민족주의와 연결될 여
사실을 생각해 보게 됐다. 지난 겨울 우리가 겪
지도 다분하며 미처 우리가 살펴보지 못한 여러
었던 추위가 각자의 생활 조건에 따라 그 무게
가지 요소들을 고려한다면 그 연결고리는 엄청
가 다르게 느껴졌듯이 환경 파괴와 기후 변화의
나게 얽혀있을 것이다.
영향은 평등하지 않다. 한 사회 내에서, 또 사회 간에 발생하는 이른바 ‘기후불의’
(climate
앞서 말했듯이 자료가 많이 부족한 상황에서,
injustice)라고 불리는 불평등은 갈등을 심화시키
또 너무나도 막연하고 거대한 구조 앞에서 우리
고 무력 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고갈되는
는 막막함을 느꼈다. 우리는 이것이 단순히 몇
자원들과 (극지방의 빙하가 녹음으로써) 새롭게
번 논의를 하고 약간의 책이나 자료를 읽어서
등장하는 자원들, 지형과 국경의 변화들 때문에
답이 나올 문제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
사람들은 이동할 것이며 갈등은 고조될 것이다.
래서 우리는 성급하게 결론을 내서 무언가를 주
이처럼 기후변동과 자원고갈이 다양한 방식으로
장하기 보다는 우리의 어려움과 고민을 솔직하
우리들이 만들어놓은 사회의 틀을 흔들 것이라
게 털어 놓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 소식지까지
는 것은 분명하며 이로 인해 커지는 전쟁의 위
이 주제를 이어가며 좀 더 긴 호흡으로 이 문제
험과 불안정은 군사주의의 강화를 가져오게 된
를 다룸으로써 군사주의와 전쟁에 반대하는 또
다. 환경안보, 자원안보 등의 새로운 개념은 이
하나의 근거로서 기후변화를 제시하고 기후변화
를 잘 드러낸다.
에 대응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반군사주의를 제안하고자 한다.
기후변화시대의 반군사주의 자, 그렇다면 기후변화시대에 군사주의를 반대한 살펴봤듯이 군사주의는 기후변화와 자원고갈
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무엇을 요구하는가.
을 촉진함으로서 간접적으로 전쟁의 원인이 되
또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으며 무엇을 말해
며 기후변화와 자원고갈은 전쟁위협을 증대시키
야 할까.
고 군사주의를 심화시킨다. 따라서 기후변화와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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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옥 | 전쟁없는세상 매체편집팀 + yo1004@hanmail.net
매체편집팀원들이 모여 기획기사에 대한 논의를
이는 다시 △저탄소에 ․ 너지절감형 국방운영 △녹
진행하면서 이러다 ‘녹색군대’ 나오는거 아니
색작전, 훈련체계 구축 △기후변화 대응체제 강
냐는 농담을 주고받았는데, 국방부 홈페이지를
화 △병영생활의 녹색화 △녹색 국방기술 개발
찾아보고 깜짝 놀랐다. 녹색을 좋아하는 현 정부
등의 7대 정책과제로 나뉜다. 구체적인 실천과제
는 2009년 6월부터 ‘국방 녹색성장’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 군사주의를 생각했던 것처럼 환경문제 를 국방부가 자신의 문제로 받아안고 고민과 실 천을 하고있다는 사실에 웃어야하나 울어야하나
로는 탄소저감형 장비차 / 량 보급확대, 저탄소고 / 에너지형 신무기체계 개발, 친환경녹 / 색에너지 기술개발, 자전거이용 활성화, 친환경적 부대이 전시 / 설재배치 등 23개의 과제가 있다.
잠시 고민하기도 했지만, 아무리 녹색을 좋아한 다고 해도 국방에 녹색을 갖다붙이고 군장비와 시설을 ‘녹색화한 ’ 다니.. 이거 온국토에 삽질 하고는 ‘4대강 살리기라 ’ 고 하는 것만큼 너무 대놓고 MB스러운거 아닌가 싶다. 국방 녹색성장을 추진하는 국방부 국방부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2009년 6월부터 시 행중인 ‘국방 녹색성장’ 정책에 대해 자세히 볼 수 있다. 국방부 녹색성장 종합구성체계를 살 펴보면, 3대 추진전략으로 △기후변화대응 및 국 방에너지 혁신 △국방 신성장동력 창출 △장병 생활방식 변혁 및 녹색군 위상 강화를 선정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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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국방부 홈페이지>국방 정책>국방 녹색성장
“국방 녹색성장은 국방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 용할 수 있도록 군장비와 시설을 녹색화 및 첨단화 시키고, 국방분야 녹색기술 개발을 통 한 국제 방산시장을 선점함으로써 국가의 성 장동력 창출에 기여하며, 병영생활을 통해 녹
색생활을 교육하고 실천하는 도장으로서의 역
른 나라에 비해 기름 값이 한참 비싸고, 인구수
할을 수행함으로써 미래의 녹색시민을 양성하
도 많지 않아 특별히 기름을 더 낭비하지도 않
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국방분야 녹색성장
을 것 같은 한국이 이렇게 높은 순위를 차지한
추진은 국익창출과 국방발전에 직결되는 획기
것은 무엇 때문일까.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겠지
적인 기회가 될
것입니다.”4)
만 세계에서 손꼽는 거대한 군사부문의 기여도 는 결코 낮지 않을 것이다. 묘하게도 석유소비량
이제 정부에서 하는 거의 모든 사업에 ‘녹색’ 을 붙이고 원래 ‘국방색인 ’ 국방에도 녹색을
과 군사비 지출 상위국7)의 순위표는 놀랍도록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붙이는 것을 보면 기후변화의 문제는 더이상 미 뤄둘 수 없는 문제로 인식하고 있나보다. 화석연
하지만 ‘국방 녹색성장은 ’ 이 문제를 자원고
료를 사용하면서 증가한 이산화탄소로 대표되는
갈과 비용증가로 인해 운영체제의 변화가 불가
온실가스가 지구의 기온을 상승시키는 큰 원인
피하다는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다. 거칠게 말해
이라고 생각하는, 어떻게 보면 아주 기본적인 차
탱크가 이렇게 기름을 많이 먹으면 기름값도 계
원에서 문제의식은 이미 공유된 것인지도 모른
속 오르는데 훈련을 제대로 하기 힘드니까 저비
다.
용 고효율의 탱크를 개발하겠다는, 정말 단순한 이야기다. 이렇게 단순하고 편하게 생각을 정리
비용절감을 위한 친환경
하기 전에 먼저 탱크, 전투기에 얼마나 엄청난 양의 석유가 들어가는지, 군대와 전쟁, 전쟁 준
우리나라의 2009년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5억 2813만으로 t 세계
8위5)를
비를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양의 화석연료가 사
기록했고, 1인당 이산
용되어왔고 필요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진지
화탄소 배출량은 10.9t으로 영국(8.4t), 일본(8.6t),
하게 반성하는 것이 먼저다. 전쟁에 사용되는 무
프랑스(6.3t)보다 많다. 온실가스 배출량과 결코
기는 에너지 효율보다는 살상력이 우선이 될 수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석유 소비량은 세계 9
밖에 없고 그렇게 발전해왔다. 지금까지 오염시
위6)이다.
한국은 중국, 인도, 미국, 러시아와 같
킬만큼 다 해놓고, 앞으로도 상당히 오랜 시간동
은 대형 국가도 아니고 사우디, 멕시코와 같은
안 그럴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산유국도 아닌데 왜 그 순위에 있는 것일까. 다
근본 원인에 대한 고민도 없이 비용차원에서 접
4) 국방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국방 녹색성장’의 필요성 http://www.mnd.go.kr/mndPolicy/greenGrowth/outLine/outLine_1/index.jsp?topMenuNo=2&leftNum=8 5) 2009년 CO2 배출 순위 : 1위 중국, 2위 미국, 3위 인도, 4위 러시아, 5위 일본, 6위 독일, 7위 캐나다, 8위 한국, 9위 이란, 10위 영국 (출처 : 기후변화행동연구소, 미국 에너지정보청 EIA) 6) 2009년 석유소비량 순위 : 1위 미국, 2위 중국, 3위 일본, 4위 인도, 5위 러시아, 6위 브라질, 7위 독일, 8위 사우 디아라비아, 9위 한국, 10위 캐나다, 11위 멕시코, 12위 프랑스, 13위 이란, 14위 영국, 15위 이탈리아 (출처 : CIA World Factbook https://www.cia.gov/library/publications/the-world-factbook/rankorder/2174rank.html?countryCode)
7) 2009 군사비지출 순위 : 1위 미국, 2위 중국, 3위 영국, 4위 프랑스, 5위 러시아, 6위 독일, 7위 일본, 8위 사우디 아라비아, 9위 이탈리아, 10위 인도, 11위 한국, 12위 브라질, 13위 캐나다 (출처 :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 SIP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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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하는 친환경은 정말 ‘친환경적 ’ 일 수 있을까.
에 없다고 한다. 왠만한 나라보다 더 많은 석유
수많은 군사훈련과 무기개발은 절대 포기할 마
를 소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부분에 대한
음이 없으면서 녹색이니, 친환경이니 말하는 것
논의는 기후협상에서 빠져있다. 그리고 감시나
은 과연 기후변화를 막는 데에 얼마나 도움이
규제에서 면제해줄 것을 뻔뻔스레 요구하고 있
될 것인지는 미지수다. 친환경까지는 바라지도
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큰 오염원이자 석유 때
않고 더 악화시키지나 않으면 다행인데 말이다.
문에 전쟁을 일으키는 펜타곤은 아이러니하게도 기후변화가 국가안보를 위협한다고 인식하고 있
손바닥으로 하늘이
가려질까8)
다.9) 기후변화로 인한 여러 문제들 때문에 약탈 과 갈등이 심화될 것으로 예상하기 때문에, 대체
미군(US military)은 대규모 생태계 파괴를 일
연료를 개발해서 해외의 석유의존도를 낮추고
으키는 세계 최대의 온실가스 배출처이다. 미국
기후변화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로부터 국가를
의 2009년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17.7t으
지켜내려고 하는 차원의 ‘친환경’ 이야기가 오고
로 1위를 차지했는데, 이는 세계 평균 4.5t의 4
간다. 다들 알고는 있지만 금기시되는 문제, 군
배에 달했다. CIA World Factbook에 따르면 하
사주의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결국 기후변화와
루에 펜타곤보다 석유를 더 쓰는 나라는 35개밖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가장 큰 악영향을 끼 침에도 불구하고, 기후변화의 심각성은 인정하고 방안을 찾으려고 노력하면서도 정작 군사주의 문제는 모르는 척 못본 척 건드리지도 않고 있 다. 하이브리드 전차나 바이오 디젤로 나는 전투기 는 친환경일까? 적진을 초토화시키고도 적의 공 격으로부터 버텨낼 수 있도록 만들어져야하는 거대하고 튼튼한 무기들의 동력은 어디서 올 수 있을까. 철, 보크사이트알루 ( 미늄의 원료) 등 군 수산업의 필수 광물들은 채굴, 이동과정에서부터 엄청난 탄소를 배출할 뿐만 아니라 환경오염, 강 제철거 등의 문제도 심각하다.10) 화석연료가 아
전세계 군비지출의 분포 중 미국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 지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닌 친환경 에너지로 군사훈련을 가능하게 하려
8) 기후변화에 대한 논의에서 군사주의 문제는 언급을 꺼려한다는 점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elephant in the living room’이 주로 쓰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elephant in the living room’은 직역하면 ‘거실 안의 코끼리라는 ’ 말 로, 다 알지만 금기시되는 문제를 뜻한다. 우리말로 그 의미를 살린 적절한 표현을 찾지는 못했다. 9) <Militarism as Cause and Consequence of Climate Change> http://www.climatesos.org/2010/12/militarism-as-cause-and-consequence-of-climate-change/ 10)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27호 <개발과 군사주의에 맞서다!> 기획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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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그런 무기체계를 개발하기 위한 과정에서 실
각자의 안전을 목적으로 한 군사훈련 역시 계속
제 줄어드는 탄소배출량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결국 군비증강과 군사주의
화석연료가 소비될 것이다. 원자력? 지금 일본의
의 악순환으로 빠져들게 되고, 이는 전쟁과 연결
상황을 보고도 원자력이 대안이라고 쉽게 말하
된다. 전쟁이 기후변화에 얼마나 악영향을 미치
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우리가 아무리 자가용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병영생활을 ‘녹색으로 ’ 전환한다면서 군인들의
난방실내온도를 낮춰도 지금과 같은 군사훈련이
자전거 이용을 활성화하고 부내 내 쓰레기를 줄
계속된다면, 또 안보가 위험하다는 변명 아래 무
이고 자연보호 교육을 하는 식으로 노력하는 모
기개발과 훈련을 포기할 수 없다면, 기후변화는
습은 조금 안쓰럽기까지 하다. 물론 문제해결을
우리의 삶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것이다. 폭설,
위해서는 전반적인 삶의 패러다임이 변화해야하
한파, 폭우, 폭염에서 피부로 느껴지는 위기감은
는 것이긴 하지만, 전쟁을 준비하고 훈련하는 체
‘국가안보와 ’ 는 차원이 다른, 지구멸망론을 떠
제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개인에게 그 책임을 떠
올리게 한다.
넘겨 해결하려는 모습은 그야말로 ‘눈가리고 아 웅이 ’ 다.
탄소배출량만 줄이면 친환경 되나 전지구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기후변화 문제를 이런 와중에도 한국 정부는 친환경 무기 개발
제대로 볼 수 없다. 지구 공동체가 하나의 운명
로 국익을 창출해낼 생각을 하고 있다. 친환경
이라는 것은 단지 도덕적인 수사가 아니라 물리
무기는 어떤 무기를 말하는 걸까. 적은 기름으로
적이고 실존에 근거한 문제라는 것을 인지해야
멀리 가면 친환경인가? 폭발하지 않고 직접 타격
한다. 전쟁을 준비하고 군사훈련을 하는 것이 적
으로 적을 살상하는 새총이나 활? 시간이 지나면
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게 아니라 우리를 기
땅 속에서 자동으로 분해되는 배설물 지뢰? 이
후변화의 위기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 그리
러다가 무기 아나바다, 로컬 무기, 생협 무기 등
고 기후변화로 인한 여러 문제점들이 또다시 전
그 누가 감히 생각할 엄두도 못낸 코믹 아이디
쟁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아야 적
어로 기후변화 시대에 전 세계 무기시장을 석권
절한 대책을 세울 수 있다. 기후변화를 걱정한다
하는건 아닐지 심히 우려스럽다.
면 군사비 지출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친환경 무기를 만들기 위해 사용하려던 국방비
무기는 필연적으로 전쟁을 불러일으키게 되어있
를 쓰지 않는 것이 ‘친환경이 ’ 다. 군사비 지출을
다. 무기를 판다는 것은 무기가 필요한 상황, 즉
줄여나가는 것, 서로에 대한 전쟁위협을 중단하
갈등과 분쟁상황이 더 필요하게 된다는 것이고,
는 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국방 녹색 성장이 ’
이런 무기들은 서로의 존재를 위협하기 때문에
아닐까.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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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민석 | 전쟁없는세상 매체편집팀 + dreamsnail@naver.com
로 실타래처럼 얽히고 섥힌듯 보이는 이 두 개 1. 우리의 고민과 어려움
념에 대해 복잡한 매커니즘을 추적하는 것은 어 찌보면 언감생심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는
1월 26일 첫 회의를 기점으로, 전쟁없는세상 소식지의 30호의 기획기사의 주제로 ‘기후변화와
일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우리의 고민지점은 막 연하고 복잡하다는 것이었다.
군사주의가 ’ 정해졌다. 기후변화는 넓게 보자면 ‘환경문제라 ’ 는 좀더 넓은 유개념11)의 외연에 속해있는 작은
종개념12) 이고,
우선 기후변화와 군사주의의 인과관계가 복잡
이는 대소관계이
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군사주의와 환경문제
기에, 엄밀이 말한다면 환경문제와 군사주의라는
(기후변화가 ) 서로 충분원인14)인가?” 하는 것이
두 변량의 상관·인과관계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
다. 즉, 군사주의가 강화되면 환경문제가 심화되
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13)
첫술 밥에 배
고, 환경파괴가 심화될수록 군사주의가 강화되는
부를 수는 없겠으나, 환경문제와 군사주의라는
가에 대한 문제이다.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는
두 개념의 상관관계·인과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없겠지만 군사주의의 강화는 당연히 환경문제를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고, 어찌보면 이제 막
심화시키는 원인으로 작동한다. 그렇지만 군사주
첫발을 내딛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유기적으
의는 반드시 환경파괴를 야기하고 환경자 ( 원문 )
11) 상위 개념. 12) 하위 개념. 13) 설명을 오히려 복잡하고 난해하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한데, 나부터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 환경문제와 군사주의의 상호 관련성을 현재 일어난 결과적 사건이 왜 발생했는지를 추론하거나 주어진 원인 현상에 따라 앞으로 어떤 결과 가 발생하게 될지를 에측하고, 상호 관련된 현상들을 분석하여 주어진 현상들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음을 추론하는 ‘인과추리’라는 논리학적 방법론이 유용한 듯 생각되어 이를 이용해 보았다. 14) ‘X가 발생하면 항상 Y도 발생하는 경우, ‘충분원인’이 된다. 군사주의가 강화하면 반드시 환경문제가 발생한다고 보 면, 군사주의가 환경문제의 충분원인이 된다.(군사주의↑ → 환경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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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인해 반드시 군사주의가 강화된다고 판단
들을 축으로 하여 기후변화와 군사주의라는 두
하기에는 약간 의문이 든다.
마리 토끼를 잡고자 한다.
또한 “군사주의와 환경문제가 서로 필요원 인15)인가?” 하는 것이다. 즉 군사주의의 강화가
2. 무엇을 할 것인가
없다면 환경문제는 없을 것이고, 환경문제가 없 다면 군사주의의 강화 역시도 없을 것인가 하는
군사주의와 환경문제라는 공통의 주제를 가지
문제다. 이 또한 약간 이상한 것으로 보인다. 환
고 각자의 관심사와 이해도에 따라 이런저런 실
경문제는 단순히 군사주의 말고도 다양한 발생
마리부터 풀어가자는 데에 의견을 모으고 다양
원인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환경문제
한 주제들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를
가 없이는 군사주의도 강화되지 않는가?”라고 단
나누었다. 우선 논의된 사항들은 다음과 같다.
정하기에 무리가 있다. 군사주의는 자원을 둘러
기후변화 문제와 관련한 활동을 하고있는 녹
싼 문제말고도 다양한 민족적·종교적 대립과 같
색연합, 에너지정의연합 등 국내 환경단체와의
은 정치적 원인으로 인해서 강화되기도 하기 때
접촉을 시도해보자는 제안과, 한국 진출 여부를
문이다.
생각 중이라고 하는, 환경과 평화를 함께 고민하
마지막으로 “환경문제와 군사주의는 서로 확률
는 세계적인 환경단체 그린피스 활동가들과의
원인16)인가?” 하는 것인데, 반드시 그런 것은
교류를 통해 우리의 인식을 넓히자는 이야기가
아니지만 군사주의는 보통 환경파괴를 낳고 자
오고갔다. 또한 기후변화와 군사주의를 서로 다
원을 둘러싼 환경문제가 군사주의의 대표적인
른 관점에서 다룬 책인『그린존 The Green
원인중 하나라는 점에서, 종합해보자면 군사주의
Zone
와 환경문제는 서로를 부채질하는 동인(agent)
environmental
으로서 작용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costs
면 우리의 고민은 이러한 상대적으로 느슨한 연
militari sm』과
결고리로부터 출발하며 두 현상들을 살펴보는
『기후전쟁』등
것이 될 듯하다. 그리고 자료의 부족과 정보의
의 텍스트를 통
부족도 우리의 고민지점이였다. 참고할만한 텍스
해 살펴본 발전
트도 부족하고 관련된 자료역시 두 인과관계를
된 의식, 친환경
파악하기에는 동떨어진 느낌이었기에 이제 첫발
군대라는
을 내딛어서 그동안의 축적된 두 변량들의 정보
부의
:
The of
국방
녹색군대
15) 'X가 발생하지 않으면 Y가 결코 발생하지 않는 경우, ‘필요원인이 ’ 된다. 자원문제가 결부되어 있지 않다면 군사주 의는 강화되기 힘들다고 볼 경우, 환경문제는 군사주의의 필요원인이 된다. (~환경문제 → ~군사주의↑) 16) ‘X가 발생하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Y의 발생 확률을 크게 높일 때 X는 Y의 ’확률원인‘이 된다. 음주운전 을 한다고 반드시 교통사고를 일으키지는 않지만 사고확률을 높이기에 음주운전이 교통사고의 확률원인이 된다. 군 사주의는 환경문제를 심화시킬 가능성을 높이고, 자원을 둘러싼 환경문제는 군사주의의 위험성을 높이기에, 서로 확 률조건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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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실체에 대해 국방부에 정보공개 및 자료청구
했다고 한다면, 다음 호에서는 기후변화와 군사
를 통해 관련된 질의를 하여 그 실체를 파악, 석
주의의 복잡하게 얽힌 양상을 보다 세심하게 살
유자원과 생물다양성을 통해 살펴본 군사주의
피며 군사주의가 어떻게 기후변화에 영향을 끼
등이 다음호에서 다루어질 듯하다. 한편 녹색평
치는지, 또 기후변화가 어떻게 군사주의에 영향
론이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서 관련 주제를
을 끼치는지 보다 간명하게 드러내보이고자 한
찾아보기, 외국자료 번역하기, <아바타>나 인권
다. 나아가 비단 전쟁이 아니더라도 지구온난화
영화제에서 상영했던 <기울어진 세계>와 같은
시대에 폭력의 양상이 어떻게 변화해가고 있는
환경파괴와 군사주의를 함께 다룬 영화 매체 등
지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조명해보고자 한다. 그
을 감상해보는 것도 논의되었다. 기후변화와 군
리고 이러한 시대를 맞아 변화하는 전쟁과 폭력
사주의에 제3의 공통원인17)은 없나하는 의문점
의 구조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하며, 어떠한 노력
에서 영화「아바타」를 통해서 살펴본 에코페미
들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얘기하고자
니즘 및 가이아 이론 등도 다뤄볼 예정이다. 즉
한다.
텍스트에 한정되지 않은 다양한 매체들과 방법 들을 이용해서 ‘기후변화와 군사주의라 ’ 는 난해
무엇보다 이 목표들을 향한 우리의 고민과 계
하고 막막한 주제들을 살펴보기로 하였다. 적시
획과 그 노력들을 공유하고 함께 머리를 맞대고
된 주제들은 물론 바뀌거나, 고민이 깊어지면 가
손을 맞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우리의 이
지치기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러한 고민은 비록 부족하더라도 결코 의미가 없 지는 않을 것이라는 작은 바람을 덧붙인다.
일단 이번 호에서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기 후변화에 기여하는 군사주의라는 시각으로 접근
17) 보통 귀납논리학의 인과추리에서 원인과 결과만을 생각하여 ‘제3의 공통원인’이 존재할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을 ‘공통원인 무시의 오류라고 ’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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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병역거부운동 10년, 2011 연중기획을 시작하며 여옥 | 전쟁없는세상 매체편집팀 + yo1004@hanmail.net
운동 10년, 걸어온 길과 가야할 길을 생각하며 올해는 한국에서 병역거부운동이 시작된 지 10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 2001년부터 병역거부문 제가 공론화되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항상 존재해왔으나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았던 사실이 -해 방 이후 반세기동안 1만 여명에 가까운 이들이 병역거부로 감옥에 다녀왔다는- 드러났고 사회적 파장은 크게 일었다. 그리고 그해 말 오태양이 병역거부를 선언하면서 2002년 초에 드디어 <양 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가 만들어져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2001년 당시의 뜨거웠던 반응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10년이 지난 2011년에도 병역거부자들이 여전히 감옥에 가야할 거라고 짐작이나 했을까? 그동안 무죄판결도 있었고, 헌법재판소의 대체복 무제도 개선 권고, 법안 상정, 국가인권위원회 권고, 유엔의 반복된 권고, 국방부의 대체복무제 허용발표, 대체복무제 무기한 연기, 또다시 유엔의 권고, 헌법재판소 공개변론... 병역거부운동이 국가와의 타협안으로 제시한 대체복무제도는 손에 잡힐듯 하다가도 또다시 멀어져만 간다. 어떻 게든 감옥행만은 막아보고자 이리뛰고 저리뛰며 노력해온 시간이지만 여전히 병역거부자들은 어 제도 오늘도 내일도 감옥에 간다. 그리고 또 돌아온다(간혹 사라지기도 한다). 그렇게 한해한해 흘러온 세월이라 병역거부운동 ‘10년’이라는 기점이 9년이나 11년에 비해 아주 특별한 올해만 의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더라도, 의미를 부여할 무언가가 필요한 우리들에게 ‘10 년’이라는 것은 아주 큰 기회로 다가온다. 병역거부로 시작해 군사주의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저항을 만들어가는 중인 병역거부운동의 다양한 경험과 시도를 정리해보는 것은 운동을 계속해온 사람들에게도, 앞으로 동참할 사람들에게도 모두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올 한해 발간되는 전쟁 없는세상 소식지에서 <2011 연중기획>으로 이 주제를 꾸준히 다뤄볼 예정이다. 무엇을 상상하든 절대 그대로 되는 법이 없는 대한민국이지만, 그래도 지금까지의 10년을 잘 정리해보고 또다시 10년 후의 병역거부운동을 그려보는 것은 그 자체로 희망이다. 벌써 10년이 라기보다는 아직 10년이다.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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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하동기 / 사진_김성민 / 녹취_아하 | 전쟁없는세상 매체편집팀
병역거부운동은 병역거부자 없이는 성립되지
근황
않는다. 병역거부운동이 10년을 맞을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도 지속적으로 병역거부자가 등장
오태양 (이하 오): 저는 2001년 12월 17일이
했기 때문이다. 지난 10년 동안 자신의 양심에
입영일이어서 올해가 병역거부를 한 지 10년째
따라 공개적으로 병역을 거부한 사람은 50명에
되는 해입니다. 재판을 받고 2004년 10월에 수
달한다.1)
병역거부운동 10년의 이야기를 다루기
감되었고 2005년 12월에 출소했습니다. 출소
위해서는 병역거부자들의 이야기를 다룰 필요가
후에는 JTS라는 국제 구호단체를 통해 인도에서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각의 병역거부자들을
활동하다가 한국으로 돌아와 정토회에서 공동체
만나 이야기를 들으며 각자의 병역거부의 모습
생활을 했습니다. 현재는 남북관계와 통일문제에
을 듣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만, 이번 호
관한 사업을 진행하는 평화재단에서 활동하고
에서는 우리가 기록하고 있는 첫 번째 병역거부
있어요. 특히 평화재단의 교육 분야에서 일을
자인 오태양과 가장 최근에 병역거부를 선언한
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청년열린아카데미란 ’
날맹을 만나 그들의 병역거부 이야기를 들어보
이름으로 사회명사들을 모셔서 젊은이들에게 비
기로 했다. 오태양과, 그가 병역거부를 선언한
전과 희망을 주는 강좌를 진행했고, 시민 대상
시기로부터 9년 후에 병역거부를 선언한 날맹의
교육, 오피니언 리더 대상 교육 사업을 합니다.
이야기를 함께 듣다보면 병역거부운동이 무엇을
날맹 (이하 날): 일단 오태양씨를 이런 자리에
이야기해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서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저는 2010년 12월
를 어렴풋이나마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14일에 병역거부를 선언하고 국방부 앞에서 기
인터뷰는 2011년 3월 18일에 오태양씨가 근 무하는 평화재단 내 회의실에서 이루어졌다.
자회견을 했고, 지난 3월 16일에 심리공판을 받 았습니다. 검사가 1년 6개월을 구형한 상태구요.
1) 여호와의 증인과 알려지지 않은 병역거부자는 포함하지 않은 수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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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재판을 상상할 때는 이상한 질문을 받지
희망을 발견하지만, 불특정 다수로부터 비난을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한 마디도 없는
당하고 감옥에 가는 일을 가족들에게 설득하는
검사와 감옥갈 일을 걱정해주는 판사를 보면서
작업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앞서간 병역거부자들의 덕을 보는구나, 하는 생 각을 하게 됐어요.
오: 주변의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오히려 병역 거부운동을 주도하시던 한홍구 선생님께서 걱정
조사·재판
된다며 말리신 것이 의외였지요. 주변에서는 우
병역거부자에 대한 조사와 재판 과정은 갈수
려하지만 지지해주는 동료들이 많이 있었고, 물
록 점점 형식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여호와의
론 군대에 가기 싫어서 그러는 건 아니냐는 식
증인들이 오랜 시간 병역거부를 진행해왔기 때
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문에 그들을 대하는 방식을 그대로 다른 병역거
날: 저는 병역거부를 준비하고 고민하는 과정
부자들에게도 적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자체가 전쟁없는세상 활동과 맞물리기 때문에
렇다해도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병역거부에 대
주변에서는 “아, 날맹도 갈 때가 되었구나.”
한 인식도 많이 바뀌어왔기 때문에 이 절차에서
하는 식의 반응이에요.
도 변화는 분명히 느껴질 것이다. 날: 저는 경찰조사, 검찰조사 등 형식적인 절 차는 다 밟아가고 있는데, 질문이나 조사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많이 정형화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조사도 금방 끝났고 조사관들은 ‘감옥에 갈 준비를 하고 온 애들이다’ 라는 정도의 인식을 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오: 제가 병역거부를 했을 때도 조사하는 사 람들이 크게 못살게 굴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 사람들이 궁금한 것들을 이것저것 물어보기 에 저도 소소하게 대답해줬지요. 그래도 기존의 병역거부 사례들이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범죄 자 취급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영장실질심사에서 영장이 기각되었기 때문 에 구속되어 수사를 받지는 않았는데, 그 당시 의 병역거부자들은 대부분 구속을 당했어요. 그 래서 제 영장이 기각된 것도 이슈가 되었지요. 주변의 반응 병역거부자들에게 가장 힘을 주는 것도, 가장 어려운 일도 주변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리하느 냐의 문제이다. 지지해주는 사람들로부터 용기와
오: 저는 가족들로부터 지지를 많이 받은 편 입니다. 어머니께서 많이 걱정하시긴 하셨지만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으셨어요. 형제들로부 터는 다 지지를 받았습니다. 오히려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는 병역거부의 논리적인 개념이나 담 론보다는 서로의 인간적인 관계에서 오는 걱정 이 우선인 것 같아요. 직업군인인 사촌형님은 이 문제를 가지고 사병들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 라는 명령을 받고 이런 정신빠진 녀석들이 있을 수 있냐고 육두문자를 쓰면서 교육을 진행했는 데 알고 보니 그 정신빠진 녀석이 사촌동생인 저였던 웃지못할 일화도 있었습니다. 날: 재판 날 판사가 ‘우리 사회의 부모님들 은 이런 걸 이해하지 못하실 거다라고 ’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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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데 재판정에 오셨던 어머니께서 울고 계시
여하다보니 군대를 미루게 되었고, 결정적으로
더라고요. 그래도 져주시는 것 같다는 느낌이에
한겨레21에 난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관한 기사
요. 어머니께는 최근에 나온 『삼켜야 했던 평
를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후에 나에
화의 언어』를 사드렸는데 재미있게 보시고 아
게 있어 집총이나 군사훈련이 어떤 의미를 갖는
들이 하는 일이 이런 역사적인 맥락이 있었구나
지, 어떻게 더 평화적으로 살 수 있을지 고민하
하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기 시작했고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을 찾아다니면서 성찰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병역거
준비과정
부를 선언하면서 이슈화를 위해 기자간담회를
최근의 병역거부자들이 병역거부를 선언하는
가졌는데, 진보적인 언론에서 많이 다루면서 주
방식은 아주 다양하다. 초기의 병역거부자들이
요 언론들에서도 많이 다루는 내용이 되었습니
했던 것처럼 기자회견을 여는 경우도 있고, 병
다. 당시에는 이것이 단순한 가십거리에 그치지
역거부를 자축하는 파티를 여는 경우도 있다.
않을까하는 우려가 있었지만 언론에서 많이 다
또한 병역거부를 선언한 이후 재판, 수감생활
루어주면서 많이 알려낼 수 있었습니다.
등을 준비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다. 병역거부를 준비하다가 포기하는 경우도 있는 것을 보면, 병역거부를 준비하는 과정이 참 어려운 일이라 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없세: ‘최초의 병역거부자라 ’ 는 수식어가 붙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없으셨나요? 오: 저는 스스로를 최초라고 생각해본 기억도 없고 쓰면 안된다고 생각해요. 운동의 측면에서 그런게 필요할 수는 있지만 자신의 양심과 신념
오: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아주 오랫동안 준
에 맞게 사유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있을 따름이
비하지는 않았습니다.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
지 거기에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경계를 두는 건 사회적 통념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아니 냐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이게 신종이고 신상이 다보니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야 했고, 운동적으 로 보면 필요와 선택이었어요.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존재했기 때문에 이 운동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다른 케이스가 필요하다고 봤 고, 공론화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병역거부 를 고민하던 사람들이 병역거부자가 된 것이죠. 날: 저는 대학 1학년 때, 학교에서 ‘총을 들 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 다큐를 본 것이 큰 충 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당시 병역거부자들이 학교 로 찾아왔고 그 자리에서 이 문제를 스스로의 문제로 인식했었습니다. 선택에 대한 개인적인 고민은 많이 있었지만 제가 병역거부를 선언할 때는 사회적으로는 훨씬 수용적인 분위기였다고 생각해요. 획기적이라는 생각으로 국방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했는데도 기자들이 많이 찾아오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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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더라고요. 전없세: 준비과정에서 신념이 흔들린다거나 하는 경험은 없었나요? 날: 고민을 계속 하면서 오히려 군대에 갈 수 없다는 생각은 더욱 강해진 것 같아요. 이전까 지 국가의 강제에 의해서 복무할 수 없다는 정 도의 생각이 있었다면 2005년에 전쟁없는세상을 찾아가서 병역거부의 역사를 공부하고 활동하면 서 병역을 거부하는 것이 전쟁·군대와 관련해 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삶의 방식을 어떻게 가 져야 할 것인지 하는 쪽으로 발전했어요. 오: 제가 처음 병역거부를 결심할 때의 초점 은 ‘내가 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어떻게 살 아갈 것이냐의 ’ 문제였고, 그 고민의 결과는 좀 더 인간적이고 평화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생 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재판 기간 동안 제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서 내가 만나는 사회의 폭력 성, 관계의 폭력성 등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제 삶의 일관된 가치와 방식, 태 도를 결정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만난 장애물 이 군대문제였고 군대를 가지 않겠다고 결정했 어요. 그래서 외부의 시선이나 비판, 문제제기, 내면의 갈등은 저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오히려 삶의 방식이나 가치관을 잃어버 리지 않고 유지해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죠. 수감생활 병역거부자들이 갖는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수감생활을 견딜 수 있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날맹은 수감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이 고민이 커져가는 시기일 것 같다. 오: 전 재미있었어요! 감옥가기 전 기자들이 ‘감옥에 가게 되면 어떨 것 같냐는 ’ 질문을 많이 했는데, 그 때 설레고 호기심이 일어난다, 재미있을 것 같다고 하면 기사거리가 안될 것 같으니까 ‘힘들 것 같은데 그런건 없냐고 ’ 계
속 물었어요. 그래도 없다고 했죠. 군인이 되지 않으면 감옥에 가야하는 건데 저한테는 새로운 경험을 하는 감옥이 유익할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실제로도 힘든 것 없었고 새로운 것 경 험하면서 재미있게 살았어요. 읽고싶은 책 실컷 읽고, 쉬고, 불교공부하고, 잠 많이 자고, 규칙 적으로 밥먹고, 운동하고, TV도 많이 봤죠. 날: 재미있을 거라고 최면을 걸고 있죠. 계속. (웃음) 저는 감옥에 간다는 상상을 계속하고 꿈 도 꾸고 그러는데,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는건 저의 바닥을 보는 순간이 오게될 것 같아요. 그 런 순간들을 오태양씨는 어떻게 넘기셨는지 궁 금하네요. 오: 그 모습을 똑바로 쳐다봐야죠. 저도 그 안에서 스스로 사람에 대한 편견, 기득권의 두 가지를 가지게 되는 모습을 봤어요. 감옥에서는 신참이 들어오면 화장실 앞에서 자야하고, 밥도 받고, 청소도 하는데 밑에 다른 사람들이 더 들 어오면 더 좋은 잠자리로 가게 되거든요. 별거 아닌 일이지만 그런 생활조건에서는 그게 기득 권이 되어 버리더라구요. 저 개인에게는 이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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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내가 추구하고 말하는 것과 내가 실제로
같았던 시절이 있었거든요. 내 결정을 번복할
어떤 조건에서 살아가는 모습의 모순과 간극을
것 같지는 않은데 스스로 확신이 없어지기도 하
보여주는 일이었어요. 세상의 모순이 내 안에도
고, 내가 굳이 병역거부를 하면서까지 지키고자
많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는 걸 알아내고, 자책
하는 가치관이 뭔가 하는 질문들도 하게 되고,
하거나 할 필요 없이 똑바로 그 모습을 쳐다보
그러다 막히면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었죠. 전쟁
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아요. 저는 그 경험으로
없는세상 활동을 통해 얻은 것이라면, 소견서에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왜 기득권을 놓치지 않
도 쓰기는 했는데,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모
으려 하지 않는지를 공부할 수 있는 계기가 되
습의 8할이 전쟁없는세상 활동을 하면서 총체적
었어요. 자기 성찰의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할
으로 바뀐 것이거든요. 어떻게 살아야할지, 가치
까요. 그래도 병역거부자들은 어느 정도 대우도
관을 어떻게 가져야 할지를 병역거부자들과 활
받고 못살게 구는 사람도 없지 않나요.
동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생각하게 되었지요. 전 쟁없는세상이 제 인생을 망친거죠. (웃음) 부모
전쟁없는세상
님이 생각하시기엔 정말 못된 단체인거죠.
전쟁없는세상은 2003년 출범했고, 지금까지
오: 초창기에는 병역거부를 고민하는 사람들
병역거부운동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오태양은
과 병역거부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전쟁없는세상의 시작에 함께했고, 날맹은 전쟁없
‘양심을 나누는 사람들이 ’ 2주에 한 번인가
는세상 활동가로 일했다. 이들이 보는 전쟁없는
한 달에 한 번 정도씩 모였어요. 그러다 병역거
세상은 어땠고, 또 앞으로 어떤 모습이기를 바
부를 선언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감옥에 가는 사
랄까?
람들이 생기다보니 당사자들의 모임이 필요하지
날: 제가 학교 다닐 때 알던 선배들이나 학생 운동조직에 있었던 친구들이 전쟁없는세상을 만 들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스스로 군대문제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면서 휴학을 하고 전쟁없는 세상에 찾아가서 활동을 시작하게 됐죠. 전쟁없 는세상 활동을 하면서 단순히 군대를 가지 않는 다는 수준의 고민뿐만 아니라 그것과 내 삶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 어서 좋았던 것 같아요. 채식을 시작하거나 자 전거를 타거나 하는 삶의 방식이 내가 지향하는 삶의 방식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 구요. 3년 정도 활동을 하면서 병역거부자들이 감옥에 들어가고 나오고 하는 것을 보며 제 모 습을 대입시켜 보기도 했어요. 한때는 정말 바 닥을 많이 쳤던 것 같아요. 어떻게 살아야할지 답은 잘 모르겠고, 사회에서 배운대로 혹은 부 모님이 기대한대로 살고 싶지는 않고, 당연히 감옥에 가기 싫은데 마음의 준비는 해야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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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된거죠. 이렇게 스스 로의 모임을 가지면서 소수자가 되어볼 수 있었 다는 것이 지금도 큰 자산입니다. 전쟁없는세상 이 처음 가졌던 궁극적인 목적은 양심적 병역거 부권의 실현과 이들에 대한 사회적인 보장이었 습니다. 대체복무제도든 다른 형태든 권리의 인 정과 제도적 장치의 마련, 더 나아가서는 한국 사회의 군사주의 문화를 개선한다던가 군인권을 개선한다던가 하는 이야기들이 있었지요. 또 병 역거부자들이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후원하고 지지받을 수 있고, 출소 후에도 모임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고, 병역거부에 관한 고민 을 하는 사람들에게 선택을 잘 할 수 있도록 지 원해주는 역할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전없세: 날맹이 느끼기에는 이런 역할과 지금 전쟁없는세상의 역할이 비슷하다고 생각하나요? 날: 사실 전쟁없는세상의 역할을 분리해서 생 각해본 적이 없어서 쉽게 말할 수는 없지만 활
동을 하는 위치는 조금 변해온 것 같아요. 대체
후 10년이 채 되지 않아 대체복무제도의 도입이
복무제도 도입이나 수감자 지원 등의 작업은 지
공식화되면서 병역거부운동의 영역이 확대된 것
금도 중요하지만, 이것보다 논의를 확장해서 무
이 사실이다. 하지만 정부의 결정 번복으로 10
기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는 무기제로팀
년 전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은 별다를 바 없다.
등의 활동을 통해 문제의식을 확산해나가는 느
결국 처음 진행했던 대체복무제도 도입이나 병
낌이 있는 것 같아요.
역거부운동에 대한 홍보 작업과 동시에 확장한
오: 병역거부운동의 역사를 보면 병역거부자
영역의 운동을 함께 이어나가야 할텐데, 결국
가 출현하고, 이들이 고통을 받고, 이것이 사회
필요한 것은 사람이다. 기사에는 실리지 않았지
적·국가적 논란이 되고, 국가가 이들의 권리를
만 오태양씨 스스로의 고백처럼 ‘나부터도 그
인정하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데 이르는 것
렇지만 병역거부자들이 모이지 않아서의 ’ 문제
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이 문제가 여전히 해결
도 있고, 병역거부운동에 대한 심정적 지지가
되지 않고 있는 것이죠. 물론 이 부분은 제도권
후원이나 활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문제도 있을
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것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병역거
을 한 축으로 활동이 전개되어야 하지 않을까
부자들, 그리고 이 기사를 읽고 있는 독자들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참여밖에 없다.
대만이 징병제를 폐지하기로 한 것 같은 단계를
이번의 짧은 인터뷰로는 ‘병역거부자들의
밟을 것이라고 봅니다. 사실 한국의 경우 북한
모습은 어떻게 바뀌어왔을까?’라는 질문에 대
의 문제로 이념적·군사적 공포를 가지고 있지
한 대답을 생각만큼 분명히 드러낼 수는 없었다.
만 병역거부자들의 수도 많고 대만에 비해 시민
하지만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오태양씨
들의 사회의식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의 말처럼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끊임없
첫 번째 단계를 제대로 밟아나가지 못하는 이유
이 고민하고 선택했던 CO들이 지난 10년간 끊
는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되네요.
임없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날: 사실 저는 지금 재판받는 중이라서 전체
스스로의 치열한 고민들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적인 조망을 하면서 살 수 있는 여유는 되지 않
알던 CO들, 내가 알지 못하는 CO들에게는 또
는 것 같아요. 그래도 재판을 받으면서 사람들
얼마나 많은 숨겨진 이야기들이 남아있을까? 그
에게 내가 병역거부를 한 이유를 나누고 싶다는
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는 시간이 있으면
욕심이 많이 들었습니다. 전쟁없는세상에서도 대
좋으련만, 생각해본다.
체복무제 도입이 시사된 이후에 병역거부운동 2 라운드라고 해서 무기감시운동도 시작했는데, 이
덧붙여) 혹, CO들의 숨겨진 이야기가 궁금하
것과 함께 병역거부를 하는 이유를 나누는 작업
신 분들은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서 ‘삼켜야 했
들이 이루어지는 것이 의미있다고 생각해요. 초
던 평화의 언어를 ’ 구입하시면 되겠다!
창기에 대학토론회를 다니고 병역거부학교도 했 던 것이 지금도 여전히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두 시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인터뷰는 병역 거부운동이 앞으로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할지를 생각하며 끝났다. 사실 병역거부운동이 시작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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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웅 | 전쟁없는세상 매체편집팀 + dreamsnail@naver.com 아하 | 전쟁없는세상 매체편집팀 + ogamdo86@hanmail.net
그리하여 바야흐로 올해 병역거부 운동 10주
3) 2006년 빅뱅 태양 등장 - 2표
년 도로아미타불을 맞이하야 이번에 10주년 도
4) 2007년 국방부 대체복무 허용 발표 (및 번
로아미타불을 되돌아보자는 심뽀에서, 특집으로
복;;) - 16표
다짜고짜, 밑도끝도 없이, 무대뽀로 뜬금없이 엉
5) 쪽팔릴 정도로 계속된 UN권고 - 2표
뚱하고 생뚱맞게 막무가내로 앙케이트를 진행했
6) 효웅 ♥이명박♥ 특별사면 - 9표
었다. 'ㅁ' 질문지는 병역거부 10주년 도로아미 타불에서 꼴에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나, 싶
※ 평가: 역시나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는 비종
은 질문들을 엄선하여 엿장수 마음대로 정했보
교적 이유로 최초로 한국 병역거부 역사에서 양
았다 ^s^ 올해 2월 22일에 있었던 재성림하의
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로 어그로를 끄셨던 오태
출판기념회와 3월 20일 날맹림하의 후원주점 행
양씌의 병역거부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싶었
사 때 꼽사리껴서 두 차례에 걸쳐서 앙케이트를
던 국방부의 대체복무제 도입 시사 긍정적 발표,
진행했고 했었고 총 질문은 5개로 구성하였고
그리고 호떡 뒤집듯 뒤집던 번복발표가 동수를
각 질문 문항들과 답변 결과 그리고 이에 대한
얻었다. 병역거부 10년에서 솔찬히 중요하지 않
평가는 아래와 같다. 드디어 앙케이트 결과를
은 사건은 없을꺼이고 모두다 장면장면이 소중
공개한다!! ’-^)y-♥
한 시간이겠으나 (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신 림 하도 있었다) 그나마 사람들에게 인상깊었던 사
* 질문1. 병역거부운동 10년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들 위주로 구성했던 점이 패착이다. 그리고
사건은?
전혀 주관성을 배제한 객관적인 질문이었던 3번 과 6번 문항이 저조하였던게 괘씸하다. ‘효웅
1) 2004년 남부지법 무죄판결 - 11표
♥이명박♥ 특별사면과 ’ 빅뱅 태양 등장이 얼
2) 2001년 오태양 등장 - 16표
마나 중요한 사건인데.... 그래도 UN권고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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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다니ㅋㅋㅋ 조사원들도 조사하면서 놀랐던 부
요?
분이다. 흡족한 결과이다. 1) 국민적 공감대 - 28표 * 질문2. 2011년 병역거부운동에서 가장 듣고싶
2) 군사주의 - 28표
은 뉴스는?
3) 북괴 - 4표 4) 미쿡 - 2표
1) 대체복무제 날치기 통과 - 10표
5) 이명박 - 7표
2) 병역법 헌재 위헌 판결 - 15표
6) 오리 - 8표
3) 『삼켜야했던 평화의 언어』종합 베스터셀러
7) 나의 부족한 후원금 (★ 전쟁없는 세상 후원
1위 등극 - 7표
계좌: 국민(양여옥) 543001-01-35291) - 7표
4) 전쟁없는세상 후원회원 백만명 돌파 - 4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5) 현빈(현민 아님ㅋ ! ) 군복무 중 병역거부 선언 - 15표
※ 평가: 병역거부운동의 걸림돌이 한두개이겠
6) 오태양 등장 10년 이후 빅뱅 태양 병역거부
냐만은 그래도 떠오르는 것 중에 정해보았다.
선언 - 5표
역시나 병역거부 운동의 걸림돌은 미흡한 국민 적 공감대와 명줄이 질긴 군사주의가 압도적으
※ 평가: 사람들이 2011년 가장 듣고싶어하는
로 공동1위를 차지했다. 아무래도 의식적인 부
병역거부관련 뉴스는 무엇일까? 바로 ‘병역법
분이 큰 듯하다. 평화를 위협하는 거대한 실체
현재 위헌판결과 ’ ‘현빈 군복무 중 병역거부
로 흔히 왜곡되는 ‘미국이나 ’ ‘북한보다는 ’
선언이였 ’ 다. 병역법이 사법부라는 국가기관에
나님과 너님의 의식이 문제라는 것이다. 재밌는
서 유죄라고 판결이 나오는 순간은 얼마나 짜리
것은 영쿡에 철을 나러 철새들과 함께 날라간
몽땅할까? 또한 사기캐 훈남인 현빈사마가 해병
오리(최정민)가 북한와 미국을 누르고, 아니 이
대 갔다가 마음씀씀이를 고쳐먹고 군복무 중에
둘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득표를 했다는 점이
병역거부선언을 해서 우리편으로 동맹을 맺는다
다!!!!!!!!! 이로써 우리는 많은 응답자들이 미쿡
면 그건 또 얼마나 감동적인 순간일까? 꿈도 야
보다 북괴보다 오리를 더 군사주의에 대한 위협
무지다 ㅎㅎ 그래도 꿈★은 이루어진다!! ^ㄴ^
이자 걸림돌로 공감하고 있다는 상당히 객관적
그리고 재성림하가 이번에 내셨던『삼켜야했던 평화의 언어』가 종합베스트셀러 1위를 등극하 던 말던, 남의 집구석에 밥이 끓던 죽이 끓던 관심이 없는 분들이 많았다. 하기사 조금 손발 이 오그라드는 질문이기는 했다. 6번 문항도 질 문자가 심사숙고해서 연구한 문항인데 예상외로 저조해서 탐탁치 않았다. * 질문 3. 병역거부운동의 걸림돌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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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 신빙성있는 결과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 평가: 이번 앙케이트의 압권이자 백미인 질
사실은 투표결과의 정당성에 문제가 있을 뻔 했
문이었다. 그래도 대부분의 응답자들이 정상적인
는데, 그거슨 용서받지 못한자 병역거부자 용석
사고방식과 사회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었
이 투표결과의 조작을 시도했지만 아랫집 중앙
다. 4번을 마치 정답처럼 고른 범생이들이 많았
선거관리위원회가 제재하여 미수에 그친 것이다.
다. 마치 상품을 주려고 작정한 라디오 퀴즈에
그거슨 오리 후보에게 몰표를 주려던 파렴치한
서 뻔한 정답을 작정하고 가르쳐주는 퀴즈같달
체육관 선거를 하려고 했다. 그렇다면 투표결과
까. 이를테면 “한국이 1997년 외환위기를 겪었
는 달라져서 ‘30표+8표를 ’ 획득한 오리 후보
을 때 지원을 받은 국제기구 이름은 무엇일까
가 다른 경쟁자들을 압도적인 차이로 누르고 명
요? 1번 아이엠쌤, 2번 아이엠 쏘리, 3번 아이
실공히 병역거부운동의 걸림돌 1위로 등극할 뻔
엠 에프...”같은 수준이랄까. 언어영역 정답과
한 아찔한(아쉬운) 순간이었다. 만일 보통선거를
뻔한 오답을 많은 분들이 가려내었다. 그럼에도
하지 않았다면 오리가 10년간 병역거부운동의
불구하고 ‘그러게 누가 낳으래요?’나 ‘자식
원흉이 될 뻔했다. 한편 병역거부운동의 걸림돌
이기는 부모 없다지요’, 심지어 ‘부모님의 약
로 ‘나의 부족한 후원금을 ’ 꼽은 사람은 고작
점을 틀어잡아 협박하며 맞불을 놓는다와 ’ 같
꼴랑 딸랑 7표다 Orz 사람들 참 야박하다. 서울
은 정말이지 내가 다 평소 사회생활과 도덕적
깍쟁이 찜쪄먹을 정도로 야박하다. 병역거부운동
가치관이 걱정이 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음에 상
을 지지하지만 제코가 석자인 것은 어쩔 수 없
당히 놀라운 결과를 보여주었다.
을 것이다. 하기사 난 감기 고뿔도 남 주는게 아깝다. 어쩌라고?
* 질문5. 대체복무제 도입 이후에 병역거부운동 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 질문4. 당신이 병역거부를 결심하게 되었다. 부모님께 드릴 말로 적절한 것은?
1) 북침전쟁 - 3표 2) 해외파병 - 5표
1)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지요 - 7표
3) 핵개발 - 3표
2) 그러게 누가 낳으래요? - 7표
4) 모병제 - 5표
3) 나중에 부모님 부양을 누가할지 곰곰히 생각
5) 기타 평화운동 - 23표
해보세요 - 2표 4) 자신의 신념과 병역거부를 한 이유에 대해서
※ 평가: 역시나 멀쩡하게 생긴 겉모습과 달리
소통하고자 노력한다 - 25표
반사회성과 적응장애와 심지어 대인기피증도 확
5) 부모님의 약점을 틀어잡아 협박하며 맞불을
실시되는, 이웃집의 평범한 모습을 가장한 소시
놓는다 (ex 부모님의 범죄사실, 재산은닉, 탈세,
오패스로 의심되는 분들의 섬뜩한 몇몇 답변과
병역기피, 외탁한 자식, 불륜 및 외도 정황 증거
달리, 대부분의 응답자들은 ‘평화운동을 ’ 대
포착 등) - 5표
체복무제도의 도입 이후에도 병역거부운동이 나
6) 묵비권을 행사한다 - 6표
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앞으로의 앞날도 밝음을 알 수 있었다! ^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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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한 앙케이트를 기획할 때 많이 도움이 될듯하 ※※ 총평: 다소 희화화된 부분이 있었지만, 어
다. 첫술밥에 배부르랴? 이게 얼마나 노가다인
차피 10년을 맞이해서 재밌게 해보자고 한 거
줄 알어? 참고로 디에고님과 아하님과 같이 시
니, 개그를 다큐로 받아들이지 마시길 부탁드린
작한 앙케이트였지만 디에고님은 중간에 먹튀하
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어 앙케이트에서 이름
고 함흥차사였고 아하님 하고는 중간에 싸웠지
이 거론된 분들께 심심해서 사과를 드린다. 하
만 그래도 재밌게 같이 모두 노력해서 끝마칠
나도 안미안해 *^^* 특히나 오리 활동가는 아마
수 있었다. 특히 아하림하는 직쏘퍼즐과 테트리
다들 그리워서 그러는 것일꺼니깐 니가 참고.
스로 앙케이트지를 꾸미는 에셔나 마그리트 따
없는데서는 나랏님욕도 하는 법 *^^* 누가 이
귀때릴 아이디어를 작품으로 만드셨다. 그럼 10
자리에 없으래? 꼬우면 부재자 투표라도 하지그
주년을 추카추카하며 모두들 하나도 감사 *^^*
랬어 *^^* 이미 엎지러진 물 *^^* 아무튼..;; 또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다양한 다른 의견 이 계신 분들도 많았을텐데, ‘기타란을 ’ 만들 어서 수렴하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어떤 질문 에 응답해도 저 중에서만 골라서 답변해야 하는 것이 조금 문제가 있지 않았나 싶었다. 마치 “지금 무료 다운로드 하시겠습니까?” 혹은 “지금 옥션 머니를 받으시겠습니까?”라고 팝 업창이 떠서 이게 웬떡이냐 싶어 클릭해보면 이 상한 사이트 연결되서 꼭 들어가지 않을 수 없 게 만드는 악성코드 같은 앙케이트였달까ㅋㅋ (오태양씌와 태양의 이름이 비슷한 것을 이용해 장 난친건데 오태양님 불쾌하셨으면 쏴리요 ^ ε^;;) 처음해본 앙케이트치고는 미흡했지만 나름 노 력했고 재미도 있었다. 다음번에도 이런 방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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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동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peace1@jinbo.net
병역거부 운동의 뒷담화를 써달라고 부탁했던
처음 그 모임이 생각나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여옥이는 ‘이 글은 너 아니면 쓸 사람이 없
이화여대 후문 근처였는데 그 모임의 정확한 구
어.’라고 잘라 말했다. 나는 바로 수긍했고
성원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 모임을 시작으로
‘너밖에 없다는 ’ 말의 의미를 직감적으로 잡
병역거부 연대회의를 비롯한 모든 모임에 참여
아냈다. 재성이가 쓴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
했었다. 그 모임들은 대개 공식 . .적이었다 . . 그
어』가 지난 10년의 병역거부 운동을 정제된 언
리고 비공개 모임이 하나 있었다. 병역거부를
어로 기술한 정사(正史)라면 이 글은 그냥 내키
결심한 사람들끼리 모여 만든 모임, 그 모임의
는대로 써내려간 야사(野史)쯤 되겠다. (이거 시
이름이 <전쟁없는세상>이었다. 그 작은 모임이
리즈인가?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지... 이런 주제
오늘에 이를 것이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
는 효웅이가 딱인데. 릴레이 형식으로 이어받아
다. 아니 지속성마저 장담할 수 없었다.
다음엔 효웅이가 글을 쓰는 것도 괜찮겠다.)
당시 병역거부운동이 여론의 주목을 받고, 예비 병역거부자 20명 가량이 대량(?)으로 병역거부
뒷이야기를 해달라니 처음 생각나는 건 병역거
선언을 하자 이 분위기라면 곧 수십, 수백 명의
부 운동에 함께한 수많은 사람들, 딱 그 수만큼
젊은이들이 병역거부에 동참하게 될 것이고 이
의 개성과 사연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다. 아주
보다 더 강력한 병역거부 운동이 어디 있겠느냐,
오래 전부터 함께해왔던 친구 조은에 이어 날맹
수적으로 더 이상 잡아 가두기 어려운 지경에
까지 곧 감옥에 가게 된다. 그 날맹과 오늘 저
이르면 병역거부권은 저절로 달성되지 않겠느냐
녁을 함께했다. 그래서일까? 이렇게 센치한 밤
는 장밋빛 전망도 있었다. 그러나 요즘 돌아가
엔, 말과 말을 끝없이 뒤섞으며 도무지 올 것
는 시국을 보면 세상에 무엇 하나 호락호락 바
같지 않은 아침까지 마시고 또 마시고 싶네.
뀌는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다시 본줄기로 돌아가자. 비공개 모임은 대개
2002년에 처음 병역거부를 결심하고 대화모임에
오태양, 유호근, 김훈태,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
나갔던 기억이 있다. 수많은 모임 중에서 제일
모이는 경우가 많았다. 누가 더 있을 때도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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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텐데 잘 기억은 안 난다. 나는 그 모임이 대
는 다들 참 고집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로 따분하고 답답했다. 훈태 씨는 병역거부가
평화주의자가 되어도 기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참 남은 상황이었고 주로 이야기를 듣는 편이
그 사람 고유의 행동방식이 있는데 그건 심지어
었다.
구속되어도 마찬가지였다. 비슷한 시기에 구속되
오태양, 유호근, 나 이렇게 셋은 서로 달라도 참
었던 병역거부자들은 서울구치소에서 만난다. 밀
달랐다. 그 스타일의 차이를 대변하는 어떤 장
폐된 감옥이라는 공간에서 마주친 인간들은 어
면. 태양 씨는 대체복무 도입에 초점을 맞추기
쩜 그리 예상가능한 패턴대로 살아가는지. 오태
위해 병역거부자들이 봉사활동을 하자고 제안한
양은 봉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
다. 봉사라니? 마음에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왜
고, 유호근은 특유의 합리성으로 늘 뭔가를 구
내가?? 그러자 호근씨가 서해 바다에서 보트를
상하며 호모 폴리티쿠스답게 살아가고 있었다.
타고 나가 평화를 호소하는 퍼포먼스를 하자고
염창근은 안에서도 서류더미를 붙잡고 씨름했고,
한다. 실수로 군사지역에 들어가 총이라도 맞는
임태훈은 싸울 대상을 찾아 어슬렁거리는 하이
거 아냐? 그러다 국경이라도 넘어가면??
에나 같았다. 나는 적당히 삐딱하게 적당히 툴
그러면 나는?? 당시 나는 학생운동 하던 조직과
툴대고 참으며 살았다. 몇 번 싸우기는 했지만
같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정이 많았다.
대체로는 잘 풀렸다. 어쨌거나 그들이 감옥에서
게다가 쏟아지는 질문을 감당하기 벅찰 만큼 나
도 그들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는 무식했고, 평화적 감수성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리하여 가장 무난했던 봉사활동을 하게 됐다.
날맹이 50번째 병역거부자(여호와의 증인을 빼
일주일에 한 번씩 장애노인 목욕 봉사활동을 했
고)라고 하더라. 가끔 그런 상상을 한다. 세월이
는데, 정작 활동을 제안한 오태양이 바쁘다고
흘러 이 50명의 병역거부자를 모아놓고 재밌는
자꾸 빠지면서 한 달 만에 흐지부지됐다. 어찌
수다의 자리를 한 번 열어보는. 이거 무슨 평화
됐건 그 한 달간 나는 난생 처음 봉사라는 걸
운동의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인가? ‘나는
했다. 가끔 1급 장애인인 엄마와 같이 있다보면
가수다의 ’ 평화운동 버전. ‘나는 병역거부자
그때 생각이 난다.
다쯤 ’ 되는건가? 불교신자, 가톨릭신자, 기독교 신자,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이 셋은 모두 해오던 운동이 있었다. 그리고 그
생태주의자, 성적소수자 등등. 그리고 이들을 묶
특징을 고스란히 체화시킨 상태로 병역거부를
는 가녀린 끈 평화주의자. 이들에게 마이크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쥐어주고 수다 배틀을 해보자. 재미없다고 자리
병역거부자의 이미지와 내가 직접 겪은 그들의
뜨는 사람도 많겠군.
이미지는 조금 다를 때도 있었다. 가끔은 각자 가 받아들인 평화주의가 불협화음을 내기도 했
가끔 내 삶에서 병역거부는 무엇이었을까 생각
다. 초기엔 그게 참 어색하고 불편했었다. 난 늘
해본다. 아주 오래전 일기를 꺼내듯 그렇게 추
생각이 동일한 집단 내에서 활동을 함께해와서
억하며 웃어넘길 수 있는 가벼운 이야기는 아니
그런지 사회생활을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새로
다. 병역거부를 통해 진정한 ‘사람으로 ’ 다시
운 세계로 진입하는 자의 기대와 불안이 교차했
태어난 나는, 가끔은 이 야사들이 마구마구 꽃
었고, 당연히 어설펐다. 사람들은 이들에게서 평
을 피우는 그런 수다의 시간을 꿈꾼다.
화를 읽어내지만 막상 부대끼는 사람 입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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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인 비폭력을 향하여 -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를 읽고 오리 | 무기제로팀 + jungmin.duck@gmail.com
임재성의 새 책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는 병역거부 운동 10년을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그의 책에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혹은 자신의 신념을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가 담겨있다. 또 10년 간 운동을 하면서 어느 길로 가야할 지 갈팡질팡 고뇌하는 활동가들의 고민도 담겨있다. 그 길을 함께 걸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여러 가지 상념에 잠길 만하다. 임재성의 책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애초에 한국에서의 병역거부는 적극적인 사회변혁 운동으로 태동한 것은 아니다. 병역거부를 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있었고 -물론 이들의 사연을 발굴한 것은 활동가들 이지만- 종교적인 신념에 기초한 이들의 병역거부 문제는 당시의 상황에선 종교적, 사회적 소수자의 인권 문제로 논의될 수밖에 없었다. 성경에 충실한 이들의 신념을 세속의 평화주의 혹은 비폭력과 다 른 어떤 것으로 취급한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불성설이지만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사회 적 편견, 종교는 철저히 개인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전반적 분위기가 작용했고 활동가들조차 이에서 자 유로울 수는 없었다. 또 비폭력운동의 역사가 거의 없다시피 했던 한국의 상황에서 이 운동을 다른 어 떤 맥락에서 풀어가야 할지에 대한 단상조차 당시 활동가들에게는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병역거부는 철학, 전술, 행동의 측면에서 평화주의, 비폭력주의와 맥을 같이 한다. 병역거부는 전쟁이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는 평화주의 ‘신념이 ’ 자 분쟁 해결의 수단으로서 전쟁에 저항하는 ‘행위’ 이다. 그 방편으로 병역거부를 선언하는 사람은 전투원으로 전쟁에 참전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간접적 으로 지원 혹은 준비하는 행위 자체를 거부한다. 또한 병역거부는 사회 변혁을 위한 운동에서 폭력의 사용을 거부하는 비폭력과 철학적, 전술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비폭력은 위에서 아래로 작동하는 권력과는 다르게 아래로부터 수평적으로 함께 작용하여 위에 영향 을 주는 사람들의 ‘힘’, ‘권력을 ’ 믿는다. 이는 어떠한 권력도 사람들의 협조가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이해로 확장되는데 즉, 현대 정치권력은 시민들의 협조에 의거하고 있고, 이 협조는 얼마든 지 무너질 수 있으며,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협조가 없이는 어떠한 엘리트들도 권력을 쥘 수 없다는 것 이다. 최근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혁명은 비폭력 저항이 능히 압제자를 몰아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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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었다. 그렇다면 한국의 병역거부 운동은 어떤가. 종교적 소수자의 문 제에서부터 출발했던 한국의 운동은 인권 VS 평화혹 ( 은 반군사 주의라 ) 는 경합하는 관점의 견지에서 본다면 임재성의 분석처럼 인권에서 평화로 옮겨가고 있는 중이라 볼 수 있다. 경합한다는 표현을 썼는데 우째 인권과 평화가 경합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 다면 머 꼭 그렇지만은 않고 또 그렇지 않아야 하지만, 예를 들 어 인권적 접근의 경우 그 속성상 투쟁이 법적, 제도적 해결로 성급히 귀결되는 경우가 많고 따라서 징병제도나 군대의 문제 등 사회적 이슈 혹은 군사주의 자체의 문제를 제기하기 어렵게 만드 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전 세계 병역거부 운동의 역사에서 이 논쟁은 꽤 오래된 논쟁이기도 하고 아직도 지속 중인 논쟁이기도 하다. 한국의 경우 오태양의 등장 이전 1년여의 운동이 거의 인 권적 관점에만 초점을 맞춘 경우라고 볼 수 있고 오태양의 등장 이후에도 대충 비슷한 패턴을 유지했지만 불교 신자이자 평화운동가라는 특성상 연대회의가 조직되는 등 보다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이 균형이 깨지기 시작한 것은 2003년 이라크 전쟁으로 이후 운동의 무게 중심이 서서히 전쟁반대 혹은 징병제도, 혹은 군사문화에 대한 문제제기 등으로 본격적으로 넘어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2003 년 이라크 전쟁과 2008년 촛불시위를 통해 등장한 강철민, 이길준은 머 본인들이 의도했든 안 했든 병 역거부 운동의 방법론을 다양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초창기 국가에 의한 선의의 피해자라는 상식 을 벗어나지 않는 수준의 접근법에서, 이후 원리적인 비폭력(Principled nonviolence), 즉 병역거부는 삶 의 방식 혹은 정신적, 종교적 실천이라는 것으로, 그리고 이들의 등장 이후 정치적인 전술로서 수단적 인 비폭력(Pragmatic nonviolence)으로의 다른 접근법이 그것이다. 예전에 날맹이 자신의 블로그 어딘가 에도 이 두 접근방식의 차이에 대해 브라이언 마틴의 글을 소개한 것1)을 본 적이 있으니 궁금하신 양 반들은 일독을 해보시라. 사실 이 두 사례를 수단적 비폭력이라 구별 짓는 것은 정확한 구분법은 아니 다. 수단적 접근법의 핵심은 비폭력이 옳다원 ( 리적 접근법라 ) 기보다는 비폭력이 효과적이다라는 것인데 이 두 사례가 꼭 거기에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병역거부 운동의 카테고리에서는 이들 의 병역거부를 보편적(universalistic) 병역거부와 대조되는 선택적(selective, 특정 전쟁 반대) 혹은 임의 적(discretionary, 특정 무기 반대라 ) 고 칭하기도 한다.
1) http://blog.jinbo.net/flyanthony/81 <비폭력에 대한 오해들> Published in Gandhi Marg, volume 30, number 2, July-September 2008, pp. 235-257 브라이언 마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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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맹이 번역한 글에서 마틴도 지적하고 있듯이 수단적 접근법에는 함정이 많다. 특히 상대편에게 비 판당하기 쉬운데 예를 들어 병역거부자들이 자주 듣는 질문 중에 ‘언제는 화염병, 짱돌 들고 시위하 더니 왜 이제 와서?’ 머 이런 따위 따위의 일관성을 주제로 한 시비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회 적 현상 혹은 사물들이 그렇듯이 이러한 접근법에는 장점도 있는데 예를 들어 지극히 세속화된 사회에 서 그 사회의 가치는 정확히 비폭력과 정반대일 경우가 대다수이므로강 ( 한 자가 승리한다!) 너무나 영 적이고 종교적인 인상을 주는 원리적 접근법 보다는 수단적 접근법이 보다 적절할 수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길준을 비롯해서 촛불의 대부분을 수단적 비폭력의 효과적인 적용으로 평가해 볼 수도 있겠 다. 평화운동으로서 병역거부 운동의 목표는 보다 적극적인 비폭력 직접행동, 비폭력 운동의 확산에 있 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수단적 접근법이 일면 한계가 있지만 비폭력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설득한다는 것 자체도 한국 사회에선 갈 길이 멀기 때문에 이것 자체로도 큰 도전이 아닐 수 없겠다. 또한 굳이 자신의 철학적, 종교적 신념에 의해서 비폭력운동에 발을 들여놓는 경우가 아니라도 이 운 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원리적 비폭력주의의 입장을 견지하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 가 아닐까 싶다. 이를 위해서 앞으로 우리는 연구, 정리, 트레이닝, 사례 발굴 등 참 많은 일들을 해야 한다. 신난다! 우후~ OTL 10년을 돌아보면, 처음에 얘기했던 것처럼 운동을 힘 있게 끌고나갈 활동가들의 준비가 부족했던 것 과는 대조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반응은 가히 폭발적인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내 평생 2001년 봄이 가장 바빴던 시기로 지금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결코 말랑하지 않은 주제이지만 60여 년간, 특히 군부독재 시절 병역거부자들과 그의 가족들이 겪어야했던 고난은 주류 언론마저도 좋아라 할 만한 스펙타클 그 자체였고 특히 유명 성우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관음증을 자극하기 충분했다고 보 여 진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사회적 공감대 형성을 위해서 전쟁없는세상, 인권운동사랑방을 비롯한 많은 평화, 인권단체 활동가들, 변호사들, 개인들이 뛰고 또 뛰면서 각종 공청회, 간담회, 기자 회견을 조직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글을 써 제끼고 했던 노력들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10 년, 아직 갈 길이 바쁘지만 조금 쉬면서 축배를 들어도 괜찮은 시기인 것 같다. 감옥에 있는 사람들, 감옥행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어떻게 하면 언론에 한 줄이라도 다뤄질까 노심초사 머리를 쥐어뜯는 활동가들이 일궈낸 10년이다.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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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사병의 설 자리는 어디인가 - <어느 병사의 일기, 그는 왜 죽음을 택했나>1) 시청기 성민 |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 peacedrip@gmail.com
집으로 가던 중 PD수첩에 그린캠프 이야기가 나온다는 문자를 받았다. 마침 기후변화와 군사주의라 는 기획주제를 잡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래서 난 그린캠프라는 것이 정부에서 추진하는 '녹색' 군대, 즉 친환경 군대를 의미하는 줄 알았다. PD수첩에서 왜 그런 주제를 잡았을까 하는 궁금증을 갖고 집에 오자마자 방송을 봤다. 그린캠프는 친환경 군대가 아닌 ‘관심사병들 ’ 을 ‘처리하 ’ 는 별도의 시설이다. 복무 부적응자 및 자살 이 우려되는 사병들을 ‘관리하 ’ 기 위해 2009년 4월부터 운영되고 있다. <PD수첩>은 그린캠프가 인성 교육과 심리치료를 한다지만 실제로는 감금과 다름없는 대우를 하며 한 병사를 자살로 몰아갔다고 지 적하고, 그 책임을 회피하며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국방부를 비판한다. 자연스럽게 전문적인 심리치 료와 세심한 배려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출 수 있게 그린캠프를 개선하고 군인권을 신장해야 한다 는 주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여전히 남는 의문. 왜 우리 사회는 자살하는 사람들을 굳이 군대에 보내는가. 왜 우리는 ‘부적응자를 ’ 굳이 적응 시키려 하는가. 심지어 국가에서 나름대로 문제없다고 판단하고 징집해 간 병사가 복무 중 자살할 경우 자살한 사람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기도 한다.2) 뽑아가질 말든가. 언제나처럼 왜곡이니 과장이니 방송 내용을 두고 공방이 있지만3) 그것은 대수가 아니다. 우리는 이 미 문제를 알고 있다. 아무리 그린캠프를 개선하고 군인권을 신장해도 군대라는 조직에 적응하지 못하 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는 것. 우리 또한 우리 나름의 분류체계에 의해 습관처럼 넌 군대 가면 잘 할 놈, 사회가면 잘 적응할 놈, 넌 사회 나가면 좀 고생 좀 하겠다고 평가받는 ‘문제적 장병들 ’ 을 구분 짓 고 있지 않은가. 이들의 설자리는 우리 사회에서, 또 징병제의 틀 안에서 어디쯤 있을까. 가끔 병역거부에서 그 설자리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 전쟁없는세상의 문턱을 두드리는 다양한 사람 1) <어느 병사의 일기, 그는 왜 죽음을 택했나>, MBC PD수첩, 2011년 2월 8일 방영 2) 「군대 내 자살, 사유 따라 국가책임 차이」『내일신문』2011년 01월 17일 3) 「`PD수첩`, 故황이병 자살이유…불꽃 튀는 ‘논란’」『매일경제 연예』2011년 0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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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중에 마땅한 ‘언어가 ’ 없는 이들. 그저 군대가 무 섭다거나, 군대가 싫다거나 하는 느낌과 말만 있는 이들. 국가의 기준대로 등급화 된 평가에서, 면제받 을 수 있는 정신병과 징집돼야 하는 정상병의 애매 한 경계에 걸쳐있는 이들. 이들이 면제를 받는데 실 패하고, 이렇다 할 양심과 신념을 표현하지 못한다 면 이들은 징집되어 비로소 ‘관심사병으 ’ 로 거듭난 다. 대체복무제가 없는 가혹한 징병제의 현 체제 하 에서 나는 이들의 설 곳이 어디일까 고민하게 됐다.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를 읽고 뭔가 채워지지 않은 2%가 있었다. 언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 때문일 것이다. 아직 소견서를 쓰지 않은 ‘예비병 ’ 역거부자로서, 운동의 언어와 거리가 있는 이과생으로 서, 또 스스로의 언어가 부족한 나는 책을 읽은 후에 난감했다. 소견서에다 무슨 말을 써야 하나. 이과 생이라 하여 소견서를 수학공식이나 과학법칙으로 쓸 수는 없지 않은가. 나뿐만아니라 관심사병과 병 역기피, 그리고 그 언저리 어디쯤에 있는 사람들은 과연 언어라 할 만한 것이 있을까. 물론 언어라는 것이 반드시 학술적이고 논리적인 또 인문학적인 무언가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일까. ‘공 감을 ’ 하나의 가능성으로 제시하는 이 책마저도 사실은 어느 정도의 독해 능력이 있어야 그 ‘공감이 ’ 가능하다는 것에 나는 여전히 막막했다.4) 할아버지 얘기를 해야겠다. 군대 가서 사람 되지 못하고 사람 버려 오셨던 분. 평생을 그 트라우마 로 사셨던 분. 그의 트라우마는 우리 가족의 한이 됐다. 군대에서 남자로 거듭나지 못하고 사회화에 실 패했기에 그는 회사와 가족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사회에서 퉁겨져 나갔다. 우리 할아버지와 같은 사람 은 과연 아주 예외적인 경우일까? PD수첩 내용 중 한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한 해 입대하는 장병 중에 이러한 관심사병이 될 수 있는 사람은 10%라 한다. 이 10%는 지금 다들 어디 있을 까. 몇몇은 자신의 문제를 한껏 발현해 의병제대5)를 하고, 몇몇은 그린캠프에서 무조건 예스를 외치며 긍 정하는 법을 교육받아 군대에 ‘적응한 ’ 다. 물론 한 해 수십 명이 넘는 사람들은 통계상으로 드러나듯이 스스로를 죽음의 길로 던진다. 그렇다면 나머지 드러 나지 않은 자들은 어떻게 됐을까? 과연 ‘진정한 남 자로 ’ , ‘진짜 사람으 ’ 로 사회화에 성공했을까? 4)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p.302-310에 이러한 ‘언어부재의 ’ 문제가 제시되고 있다. 5) 현역 군인이 업무 수행을 계속하기 어려운 병에 걸렸을 때, 국방부의 허가를 받아 예정보다 일찍 제대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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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우리 할아버지와 같은 길 을 걸었으리라 추측한다. 초중고를 거치면서도 되지 않 은 사회화가 군대식의 교육시스템에서 단 1년 6개월 동안 이뤄졌을 거라는 기적을 바라기보다는 그들이 겉 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트라우마를 입었을 것이고, 그 럼으로써 사회에 완전히 녹아들지 못하고 적당히 부유 하며 그 주변 이들에게 고통과 폭력을 행하고 있을 가 능성이 크지 않을까? 우리 주변에 그런 아빠, 그런 남 편 들어보지 못했는가? 그렇게 될 것만 같은 내 친구 들이 있지 않은가? 꼭 특정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모두들 조금씩은 저마다의 상처를 입고 지 내지 않는가. 당신의 병역거부를 양심이나 평화주의나 아나키스트, 아니면 감수성 예민한 문학적 언어로 뚜렷하게 표현하지 못한다면 병역거부를 하지 않는게 좋다는 배려의 말들6). 어쩌면 이것이 폭력이자 벽으로 작 동하지 않을까. 당연하게도 병역거부는 한 사람의 삶의 방향 전체를 좌우 할 수 있는 중요한 결정이기 에 누가 하라 말라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될 것이다. 다만, (물론 과장이 섞여 있겠지만) “병역거부 를 한다고 찾아오는 사람을 일단 말리고 보는” 것이, 또 감옥생활이 얼마나 끔찍한지, 가족관계나 사회 생활의 곤란함 점들을 얘기하며 병역거부를 하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을 강조하는 것이7) 어떤 사람들 에게는 병역거부를 하는 데 있어서 넘지못할 벽이 될지도 모른다. 남들에게는 정상적인 군대와 일반적 인 사회가 어떤 이들에게는 이미 너무나도 곤란한 것이 아닐까? 이들에게 있어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 하고 자신의 소신을 드러내는 것은 또 하나의 곤란한 일이 아닐까. 대체복무제가 생긴다 해도 이들의 설 자리는 애매할 수 있다. 하지만 대체복무제가 최우선의 당면 목표라는 인식선상에서 우리는 이 무작정 두렵고 떨리는 연약한 젊음들을 운동의 전면에 내세우지 못 한다. 운동은 전략적인 것이고 단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언어도 없고, 용기도 없어서, 자 칫하면 운동의 정당성을 훼손시킬지도 모른다. 이것은 무슨 걱정일까. 대체복무제가 생기면 이들처럼 양심적이지도 않고, 강한 신념을 지니지 않은 이들에 의해 악용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인가, 또 자신의 신념을 표현하지 못하는 이들에 의해 평화주의라는 거룩한 신념이 조롱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인가. 동성애자에겐 외국군보다는 이성애 제도가, 장애인에게는 북한 사람보다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체제가 더 위협적이라는 것처럼8) 이러한 병역기피자들에게는 병역거부운동이 차라리 위협적인 것 아닐까하는 6) 물론 이런 식으로 직접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적어도 병역거부운동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없을 것이다. 다만 자연스 럽게 소견서를 얘기하고, 병역거부의 힘든 점을 강조하는 조언이 암묵적인 기능을 하지 않을까. 또 뚜렷한 소신이나 신념, 그리고 용기를 병역거부자에게서 기대하는 것도 은연중에 그런 역할을 하지 않을까. 7)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23호 <기획기사-새로운 유형의 병역거부, 그들을 만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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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과도한 조심스러움까지 들게 만든다. 그렇다면 어쩌잔 말인가. 우리는 함께 언어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우리가 이들 대신 말한다는 것은 오만일까. 운동으로서의 병역거부는 이제 10년이 지나고 있고 비로소 삼켜야 했던 언어들을 뱉고 있다. 물론 아무렇게나 뱉는 것은 아니다. 그 언어들은 ‘평화라 ’ 는 이름표를 달고서야 비로소 뱉어지고 있다. 숭고한 양심이나 신념이 주는 딱딱함과는 달리 ‘평화의 ’ 언어는 조금 더 감성적으로, 부드럽고 촉촉하 게 말해진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와 아주 가까운 곳에 계속해서 무언가를 삼키고 있는 자들이 있음을 우리는 불편하지만 인지해야 한다. 언어의 역할을, 언어의 힘을 부정하거나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병역거부를 통해 만들어진 많은 언어 와 실천은 물론 세상을 바꾸고 공감의 가능성을 열어 나갈 것이다.9) 다만 병역을 거부함에 있어서 반 드시 언어가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느낌일 수도 있고, 다만 어떠한 말에 불과할 수 도 있다. 아니 그것은 때론 차라리 처절한 몸짓으로서 더욱 절실히 표현될지도 모른다. 우리의 과제는 삼키고 있는 새로운 언어를 더 만들어 내는 것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다양한 몸짓과 느낌들을 공유하며 함께 어울려야 하지 않을까. 내가 어렴풋이, 그렇지만 강하게 믿고 있는 것은 아마도 세상엔 군대라는 시스템에 잘 녹아드는 사 람보다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 더 많을 것이란 것이다. 군대라는 사회적 현상은 비인간적일 것이라는 믿음. 그렇다면 군대라는 것이 몸에 맞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군대라는 ‘황금갑옷을 ’ 굳이 입게 하 는 힘은 무엇일까. 우리는 그러한 힘으로서, 그러한 강요로서, 그러한 억압으로서 군사주의를 고민해 봄으로서 그들의 몸짓과 느낌에 닿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 몸짓과 느낌을 한껏 표현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 수는 없을까. 병역거부가 만들어 낸 평화가 단지 공감을 넘어서 우리 몸에 깊숙이 체화될 순 없을까. 그럼으로써 우리 모두가 군대 부적응자가 될 순 없을까. 결국은 다시 병역거부운동을 열심히 하자로 돌아온 건가? 아니 적어도 나에게 만큼은 변한 게 하나 있다. 이제는 언어가 없이 찾아오는 자들에게 병역거부를 쉽게 하지 말라고 선뜻 말할 수가 없게 됐다. 대신, 다른 사람들보다 스스로에게 먼저 자신의 느낌과 거부하는 몸을 납득시키라고 조심스럽게 말하 게 됐다. 그리고 나는 이제 세계의 모든 인간이 ‘관심사병이 ’ 되는 날을, 우리의 온몸으로 군대를 거부 하고 두려워하게 되는 것을 진지하게 꿈꾸게 됐다.
8) 『평화백서 2008』<국가는 어떤 몸인가? - 비국민의 입장에서 본 안보위협> _ 정희진 9)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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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비정규직 이야기 ③ - 책자 배포 디에고 | 전쟁없는세상 매체편집팀 + limcarey22@gmail.com
지난 겨울, 푼돈을 벌어보겠다고 몇 차례 했던 알바. 책자 배포이다. 일관된 자리에서 쭈욱 일한게 아니라 단기 알바라 여기서도 해보고 저기서도 해봤던 일인지라 그때 그때마다 느꼈던 기분도 다르지 만 그래도 모든 경험을 관통하고 있는 부분도 있어서 적잖이 뱉어낼 수 있는 말이 많았기에 여기에 적고자 한다. “저 상가 건물들이 보이지? 그곳을 다 돌거야. 가게가 비어 있으면 문앞에 꽂으면 되고, 가게에 계 시면 인사하고 전해주고 나오렴. 난 차를 몰고 대기하고 있을게. 한 블록 다 돌면 여기(아이패드에 입 력된 위치를 가리키며)로 모이는 거다!” 나를 고용(?)하신 아저씨는 이렇게 말하셨다. ‘고용’이라는 말이 좀 이상할 수도 있는것이, 이 아저 씨는 이 일 (알바생에게 책자 배포를 맡기는 일)을 십 년이 되가는 세월 동안 진행해 오고 있는 터인 데, 내가 배포해야 할 책자는 아저씨와 동료분들이 만든 게 아니라, 광고주들이 ‘정성스레’ 만들어 올 린 음식광고책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럼 ‘누구’에게 ‘고용’된 것일까? 광고주? 책자회사? 재미있는 상황은 알바생들과 아저씨들과의 관계에서도 보여진다. 보통 ‘페이를 ’ 주는 ‘사장님들과 ’ 알바생들이 사이가 좋은 경우를 찾아보기 쉽지 않을 것이다. ‘사용자’와 ‘노동자’의 권력 역학 관계가 아르바이트 세계만큼 여실히, 명백히 드러나는 경우가 또 있을까? 장기이든, 단기이든 ‘한 번 쓰고 버 리는 일회용품으로 ’ 구매당하는 느낌이 드는 것은 모든 알바생들이 경험한 느낌일 터. 하지만 적어도 여기는 좀체 그런 분위기를 감지하기 힘들다. 좀 희한한 사고방식일 수 있겠지만 내게 책자를 맡기는 ‘사장님들에게서 ’ 우리와 같은 ‘노동자로서의 ’ 모습을 느꼈다고 할까? 실제로 나를 비롯한 알바생들에 게 친절하셨고, 수시로 힘들지는 않는지 배려하시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광고주들이 너희가 제대로 꽂았는지 성의 없이 휙휙 던졌는지 다 알 수 있어. 성의 있게 일하고 페 이를 받아야지 안 그래? 발각이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비장하다. 검사를 하는 주체는 사장님들이 아니라 광고주들이다. 분명 사장님들도 광고주들에게서 ‘애들 잘 교육시켜서 바닥에 던지거나 대충 우편함에 끼우는 일 없도록 해주세요. 이거 우리들 돈으로 하는 건데 사장님들만 믿습니다’ 류의 당부(?)를 들었을 것이다. 이런 ‘무서운’ 공지를 하고 싶어서 하 시겠나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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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방식은 의외로 간단하다. 4인 1조, 혹은 3인 1조로 각 사장님의 인솔 아래 차를 타고 이동하 며 무지 많은 박스 안에 있는 책자를 각자 준비해 온 배낭에 ‘쓸어담는다 ’ . 오피스텔이나 대형빌딩에 있는 상가들을 쭉 돌면서 나눠주고 나오면 무겁디 무거운 배낭 안에 있는 짐들이 꽤 줄어든다. 처음 에는 “안 받는 분들도 있으면 어쩌나?” 싶지만 기우이다. “두 개 주시겠어요?”하는 분부터, “아이고, 치 킨 값이 이렇게 오르면 안되는데?”하는 분들도. 근데 진짜 '은근히‘ 힘들다. 헥헥.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은 직접 꼭대기층까지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내려와야 한다. 무거운 배낭을 매고. 그래서일까? ’ 여자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뭇 사람들의 편견어린 시선이 다시 한 번 확인되는 지점. 대부분의 책자 배포 알바는 남자들만 뽑는다. 이건 또 무슨 성역할 구분이며 젠더화란 말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상가에 있는 커피숍에 다다라 역시 나와 같은 처지의, ‘남자는 할 수 없는 일을 ’ 하고 있는 서빙 알바 생과 마주친다. 서로 어색하지만 으레 그렇듯 나는 “음식책자입니다. 한 부 받으세요.” 그는 “네, 이리 주세요. 고맙습니다.”를 주고받는다. 이 일이 재밌는 것은 묘하게 같은 조에 소속되어 나와 같이 배포를 하고 있는 동료 알바생과 ‘연대’ 가 진행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처음에 그 날 시간이 다 끝나고 여전히 배낭 안에 남아 있는 ‘잉여’ 책 자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한 내게, “아이구, 그거 그냥 집에 가져가서 재활용에 넣으면 되지”하고 친절하게 알려준 형이 있었고, 아파트를 둘이서 돌다가 왁스칠한 바닥에 넘어져서 무릎을 찧은 나에 게 “아이고, 안 다치셨어요? 아프시겠어요. 돈 벌다 다치면 고생이죠.” 걱정해준 분도 있다. 적당히 ‘요 령 피우기’ 등 각종 노하우가 전수되기도 한다. 다른 알바도 이런 모습일 수 있겠지만 단언컨대 배포 만큼 알바생들과 동병상련 물씬 풍기는 연대가 가능한 일이 있을까? 청년유니온 운동이 일정한 성과 를 거둔다면 가장 먼저 활성화될 곳은 바로 여기리라. 아파트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 일, 얕잡아 보면 안 된다. 보통 일일이 확인하고 들어가야 하는 일반 주택보다 아파트가 훨씬 쉽다고들 하는데 물론 맞다. 그런데 체험한 바로는 아파트 배포도 장시 간 오래 하다보면 역시 할 말 많아진다는 것. 무거운 가방을 메고, ‘마스터 카드’가 없기에 무작정 사 람 나오기를 기다려 공동현관문이 열리면 들어가 묵묵히 로비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층인 ‘25’를 꾸욱 누른다. ‘목적층에 ’ 도달하면 복도식이건 홀 식이건 상관없이 그저 책자를 문고리에 끼우고 밑에 층을 서둘러 내려가기 바쁘다. 가끔 개구멍으로 낯선 인기척을 발견한 개가 왈왈 짖어댄다. “나도 이 러고 싶진 않다구. 먹고 살아야지. 멍멍아.” ㅠ 알바하다가 ‘도둑’ 처지가 되는 기묘한 사연들은 21세 기 초엽 한국 알바생 수난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게다. 역시 당황스러운 경우는 문고리에 책을 끼 우려는 찰나, “끼익”하고 문이 열리며 안에서, 거주하는 분이 나오시는 경우다.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으레 책자를 받아드신다. 역시 “고맙다”는 말과 함께. 나는 불쑥 집 앞에 나타난 “미안함”을 표현하고 는 냉큼 다음 집으로 향한다. 내가 “미안”한 이유는 무얼까. 왜 강요받은 느낌이 드는 걸까. 물론 ‘낯 선 사람과 ’ 본의 아니게 맞닥뜨리게 된 주인에게는 미안하지만 흠, 역시 개운한 느낌은 아니다. 광고 회사의 할당량을 채우고자, 좀 더 ‘성실히’ 배달하려는데 벌어지는 돌발 상황의 책임도 결국에는 ‘알바 생들의 ’ 몫이구나 하는 좌절감 비슷한 기분이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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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힘든 것은 이 상황을 초래한 주체, 즉, 나를 ‘부려먹는’ 주체가 베일에 싸여 있다는 것이다. 이 알바는 사장님들도, 어떻게 보면, 비싼 돈 들여 광고냈는데 효과가 있어야 할 텐데 하며 전전긍긍할 광고주들도 부려먹는 주체는 아니라는 것. 이분들도 알바생들과 비슷한 처지일 것이다. 우리 모두 서 민 아닌가. 그렇다면 이 정체모를 주체는 결국 익명의 ‘자본이라는 ’ 것인가? 다시 아파트 얘기로 돌아가서, 꼭대기층을 완료하고, 밑층에서 똑같은 작업을 반복한다. 밑층에서도, 그 밑층에서도 ,계속 배낭에서 일정량의 책자를 어림잡아 꺼내 문고리에 갖다 붙인다. 곧이어 내가 이 일을 하는지, 이 일이 나를 이끄는지, 내가 지금 어디 있는 누구인지 전혀 알 바 없이 기계적인 작업 을 반복하고 있는 나 자신을 마주한다. 당황스럽다. 세상이 더 ‘발전’한다면 분명 이런 배포를 담당할 ‘전담 로봇도 ’ 등장할텐데, 그렇게 되면 일자리를 잃게 될 알바생들은 새로운 ‘러다이트 운동을 ’ 벌여 야 할까? 짐작하기 힘들다. 그렇게 한 동을 다 돌고 아저씨가 대기하고 있는 차 안으로 들어오면 또 다른 박스 안의 책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아파트보다 훨씬 극적인 곳이 바로 주상복합 오피스텔이다. 아저씨가 사전에 돈 몇 만원을 지불하시 고, 마스터 키를 얻어낸 곳. 우리는 이곳에 들어가 한 층에 무려 32가구가 있다는 복잡한 미로 같은 이곳을 ‘완료’한다. 5층의 501호부터 532호를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말 그대로 ‘미로 찾기’를 한다. 그 렇게 ‘주인님의 조종을 ’ 받아 열심히 구석구석 청소하는 로봇과 같이 이 과업을 끝낸다. 사장님들은 차 안에서, 인생에 대한 갖가지 씁쓸한 말들을 늘어놓으신다. 원래 이 일을 하고 싶어 하신 게 아니라느니, 우리에게 페이를 주고 차를 계속 몰아야 하니까 기름값, 아이패드, 사업비, 기타 등등해서 손해 보는 일 하고 있다는 하소연까지 털어놓는다. ‘ 사용자’ 와 ‘노동자의 ’ 경계가 불분명한 이 일의 면모를 다시 확인하는 순간. 그래, 이분들은 본인들에게 정해진 ‘할당량을 ’ 알바생을 대행으로 써서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권력 관계가 아주 없으랴만은 그나마 ‘민주적일 ’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이 일을 앞으로도 당분간 하게될 것 같다. 그때그때 돈이 필요한 상황에서 이 일만큼 몸에 밴 단기 일자리는 없어서이다. 다만 이 일을 시작하려는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배낭의 ‘무거움보다 ’ 거대한 어떤 힘 앞에 놓인 ‘무력감과 ’ 할당량을 실수없이 배달해야할 ‘의무감이 ’ 정말 상당하다는 것이 다. 그것을 ‘이겨낼’ 자신이 있는 분들은 이 일에 적응이 쉬울 것이다. 세상의 모든 알바가 그렇듯. OECD 최장 노동시간에 최하권의 GDP 대비 복지지출을 ‘자랑’하는 나라의 알바라면 ‘무력감과 ’ ‘의무 감은 ’ 더 크게 와닿는 법. 그래도 바라는 게 있다면 경비원의 “떼어내세요” 소리를 듣고, 주택 공동현 관을 들어서며 본의 아니게 ‘침입자의 ’ 경험을 하게 되는 이 일을 더 이상 ‘생계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세상이 진보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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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해진 얼굴. 그는 당황한다. 국방부 요원들이 그에 대해 묻고 갔다고 한다. 평소 그에게서 수상한 점을 발견한 게 있는지, 그가 국가안보에 위협이 되는 발언이나 행위를 한 적이 있는지… 몸은 거짓말 을 하지 않는다. 갑작스러운 공포에 그의 몸은 떨리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동행인과 집에 일찍 들어간 다. 복도에서 어떤 이들이 서성인다. 그는 또 당황한다. 열쇠를 쥔 손이 심하게 떨린다. 다행히 그들은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 힘겹게 문을 열고 숨을 가쁘게 몰아쉰다. 심장이 고동친다. 고통에 찬 신음소 리가 이어지고, 그는 화장실로 뛰어가 속을 게워낸다. 동행인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무슨 일이냐며 다가선다. “지겨워… 도망치는 것이 지겨워.” 결국 그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을, 조금 전 속 을 게워낸 것처럼, 힘겹게 게워낸다. 전쟁터에서 동료가 죽었고 자신은 부상을 입었다. 그런데 동료의 시신이 수습되기 전, 목에 걸려있던 인식표를 바꿔치기 한다. 그 뒤로 그는 죽은 이의 신분으로 새롭 고 비밀스러운 삶을 살아왔다. 때문에 국방부 이야기를 전해듣고 그렇게 놀랐던 것이다. 미국의 인기 드라마 <매드맨>의 한 대목. 주인공의 비밀이 ‘한국전쟁과 ’ 관련돼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전쟁과 죽 음은 그렇게 비밀을 만들어내고 삶을 뒤틀어 드라마로 재구성된다. 코스타리카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늘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전쟁이 있는 곳에 죽음이 있고, 그 사이에 군대가 있다. 굳이 국제관계학의 현실주의 이론을 찾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우울한 이야기지만, 군대 없는 세상이란 상상하기 어려운 것인지 모른다(이런 면에서 ‘전쟁 없는 세상’이란 말은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런 곳이 있긴 하다. 바로 코스타리카. 어느 날, 학교에서 늦게 집에 가는데 전철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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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사 친구 에스테반. 다른 기숙사 친구들과도 그렇지만, 사정상 나는 에스테반과 살갑게 대화를 나 눠본 적이 없었다(파티에 같이 간 적은 많지만). 그래서 기회는 이때다 싶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본 다. 그러다가 그가 코스타리카에서 왔다는 걸 떠올리고 얼른 군대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 “내가 알 기로 코스타리카에는 군대가 없다는데… 정말 그런 거니?” 에스테반 얼굴에 화색이 돈다. 그의 말로는, 코스타리카는 1948년 혁명 이후부터 군대가 없었단다. 혁명이 있고 나서 제일 처음했던 일이 군대를 없애는 것이었다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에스테반이 정말 자랑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 었다. 군대가 없는 곳이라… 대단하지 않은가. 전철에서 내려 기숙사까지 걸어가는 동안에도 대화는 계속됐다. 나는 2010년, ‘한국전쟁’ 60년에 일어 났던 남북-북남 사이의 갈등을 이야기하며, 한반도의 맥락에서 군대 없는 나라를 상상하기란 어렵다 고 말했다. 그랬더니 이런 말이 돌아왔다. “군대 있는 나라? 나는 그게 상상하기 어려운데.” 이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군대를 상상하기 어렵다… 그렇구나. 코스타리카인의 입장에서는, 군대 있는 나라가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아,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한 번도 못 했을까. 내 고민은, 군대가 없어져야 한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개인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을 바라고 있지만), 군대 없는 세상 을 구체적으로 그려보지 못한 ‘상상력 결핍’에 관한 것이다. 게다가 실제로 군대가 없는 곳이 있음에 도, 왜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고민한 적이 없었던 걸까. 물론 에스테반도 확인해주었지만, 코스타리카에는 경찰이 존재한다. 그리고 다른 경로를 통해 들은 바로는, 여기 경찰은 다른 곳의 경찰 보다 더 잔인할 때가 많다고 한다. 그래도 여전히 군대가 없다는 것 자체가 나로서는 신기하게 다가 온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기숙사 친구들과 파티를 하는데, 칼레와 파비온이 장난 삼아 격투기를 했 다. 도합 4단의 무도 유단자이면서도 짐짓 모른 체하던 나는 (그러니까 나름이란 사람은 나름 무서운 사람인 것이지요), 이곳 스웨덴 출신인 칼레에게 격투기를 어디에서 배웠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칼레 는 자신이 군대에 있을 때 격투기 강사였단다. 아하. 그러고보니 스웨덴도 징병제 국가였던 것이다(참 고로 2010년 7월 1일을 기점으로 스웨덴의 징병제는 폐지됐다). 그래서 내가 스웨덴 군생활에 대해 좀더 물어보니, 그냥 좋은 경험이었다며 아주 털털하게 대답한다. 또 다른 스웨덴 친구 오스카도 군대 에 다녀왔는데 칼레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냥 뭐 좋은 경험이었다는 식의 쿨~한 대답이 었다. 스웨덴 친구들이 말하는 “좋은 경험”은 한국의 맥락에서 얘기되는 “군대 가야 사람 된다”는 것과 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이른바 중립국으로 간주되는 스웨덴(‘테러와의 전쟁’ 참여 등으로 이에 대 한 논쟁이 일고 있다)에서의 군대 경험은, 한국에서의 경험과는 다른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병역거부 이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 한국의 상황에 대해 더 고민할 수 있었다. 내게 한국의 군대는, 구타 및 가혹행위, 의문사, ‘남자’ 만들기와 ‘북쪽 주적’ 만들기의 의미로 다가온다. 그리고 여기 어딘가에 병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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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가 있다(거부/기피가 갖는 정치학의 차이는 잠시 제쳐두고). 마침 2011년은 병역거부 운동의 역 사에서 중요한 해라고 한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그 흐름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함께해온 분들에게 새삼스레 지지의 마음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병역거부가 “병역거부”라는 이름을 갖기 이전부터 수많은 이들이 함께해왔고, 지금도 이 함께하기는 이어지고 있 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분들과 동시에 만날 수 기회가 있다면, 난 조용히 눈을 감고 입을 지그시 다 문 다음, 고개를 두세 번 끄덕이며 혼자서 수줍게 박수를 칠 것 같다. 아울러(또 다른 형식의 타자화라는 혐의를 무릅쓰고) 고백하건대,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첫 번째 글을 준비하면서 나는 감옥에 있는, 그리고 앞으로 감옥에 가게 될 (또는 감옥에 갔었던) 몇몇 이들 을 떠올리며 내 자신이 참 사치스럽다는 생각을 했었다. 누구는 감옥에 가고 누구는 이 북유럽 땅에 서 이렇게 편하게 글이나 쓰고 있구나(수전 손택이 말했던 고통과 ‘거리의 ’ 관계가 떠오르는 건 왜일 까)… 특히 지금 당장 감옥에 있는 이들에게 스웨덴 땅에서의 겉핥기식 경험을 구역구역 토해내는 나 의 글들이 어떻게 읽혀질 것인가를 생각하니 글쓰기가 두려워지기도 했다. 그래도 어찌어찌하여 이렇 게 두 번째 글을 써내고 있다. 이를 기념해 조만간 에스테반을 만나면 병역거부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물론 이 코스타리카 친구는 병역거부 자체가 상상이 안 되겠지만.
[나름대로 스웨덴소식] # 스웨덴 총리, 올로프 팔메 암살 25년 (스웨덴 국영라디오 국제: 2011. 2. 28) 1986년 2월 28일, 스웨덴 총리 올로프 팔메가 총에 맞고 쓰러졌다. 사회민주당 소속이었던 팔메는 미국-소련의 군사정책에 반대 목소리를 내는 등 비교적 진보적인 정치인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스웨덴 사회를 큰 충격에 빠뜨 렸던 이 암살 사건은 지금까지 풀리지 않은 채로 공식 수사가 계속되고 있다(용의자가 붙잡혔지만 재판 과정에서 풀려났다). 참고로 스웨덴은 2003년 9월 10일, 또 다른 정치인 암살을 목격하게 된다. 바로 당시 외무장관으로 있던 안나 린드가 칼에 찔려 쓰러진 것이다. 당시 유력한 정치인이었던 그녀는 바로 다음 날인 9월 11일 세상을 뜨게 된다. # 한국, 세계 3위의 무기수입국 (스웨덴 영문뉴스 <로컬>: 2011. 3. 14)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의 보고서에 따르면, 2006년-2010년 기간 동안 한국은 세계에서 무기를 세 번째로 많이 수입한 국가로 기록됐다(6%). 무기수입국 1위는 인도이며(9%), 중국이 그 뒤를 잇고 있다(6%). 파키스탄은 4위(5%), 그리스는 5위의 수입국이다(4%). 한편 미국은 세계 제1위의 무기수출국으로 기록됐으며(30%), 전체의 44%가 아시아와 오세아니아 지역으로 수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참고로 이 연구소는 1966년에 만들어졌고 스웨 덴 정부가 재정의 50%를 지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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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 想․ 像 난영 | 개척자들 + sksdudrhdw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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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지만 새로 생긴 코너를 소개합니다 ㅋ 약간은 딱딱하고 매콤한 전없세 소식지에서 샹콤하고 성 기발랄하고 화기애무한 분위기로 바꿔보자!는 예능감에서 투입된 웅이입니다 ♥ 심심파적삼아 소일거리로 신변잡기식의 잉여글을 쓸거 같습니다. 그게 잘못이야?? 이제 낙장불입이라서 뒤늦게 후회해봐도 사후 약 방문이라서 어쩔수 없어 이 인간아. 이 코너의 정식 명칭은 <전없세 잉여 끝판왕 웅이의 ‘웅이 왓져여 뀨잉뀨잉ლ( ˚ ∇ ˚ ლ)’’>입니다.
앞으로 이 코너는 엿장수 마음대로입니다. 억울하면 너님이 하시던가요. 개똥참외밭은 먼저 맡는게 임자 인 법인것도 모름?? 이 코너에서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오만데 때만데의 것들을 아우르는 ‘순위매기기’ 형식이 될 것입니다. 우리 할머니가 쓰는 일본말로 ‘나래비(ならび)세운다’고 하죠. 이는 인간을 합리 적선택을 통해 경제행위를 하는 동물로 간주하는 고전학파적 효용가치설과 심리적 언어를 행동양식의 기 술로 정의하는 행동학파와 콩도르세의 패러독스와 애로우의 불가능성정리를 이용하여 선호공리주의를 통 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극대화시키는 한편 라캉주의식의 욕망의 환유연쇄와 보드리야르의 차이의 가치 를 보여주고자하는 순위매기기 형식으로, 예를 들자면 ‘좋아하는 K-POP 아이돌그룹 말해보기’부터 ‘길거리 군것질 순위 랭킹5위’, ‘계란빵 vs 바나나빵 당신의 선택은?’ ‘팥빙수 토핑 순위 5’ ‘프리미엄 경험치를 주는 PC방 안내 가이드’와 ‘내인생 어드벤쳐 게임 BEST 10’이나 ‘편의점 가 기 좋은 날’ ‘뷔페 런치타임 정보공유점여’
‘2011년 최고의 mmorpg 기대작’ ‘문구세트 추천
좀’ ‘똥 맛 카레 vs 카레맛 똥 - 당신의 선택은?’ 등등 유익하고 교훈적이며 시사적이고 권선징악적 인 주제들을 쌍지팡이 짚고서 오지랖넓게 다룰것입니다. 플러스!! 생각할 거리는 토핑으로 개미 콧구녕만 큼 가미할 거 같습니다. 왜냐면 그냥 신변잡기만 쓰면 “너님 일기는 일기장에 *^^*” 와 같은 발칙하고 맹랑한 성토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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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없세 잉여 끝판왕 ‘웅이 왓져여 뀨잉뀨잉ლ( ˚ ∇ ˚ ლ)’>코너의 타겟은 전없세 언저리에 잇는 잉여잉여분들 전부이며 목표는 한겨레의 ESC인데요 ESC처럼 본지에서 다루기 애매호모하고 후안무 치한 것들을 잉여로운 코너에서 다루는 식으로 잠시 머리를 식히며 전없세 소식지를 읽으면서 누적되어 쌓인 피로도를 <전없세 잉여 끝판왕 웅이의 ‘웅이 왓져여 뀨잉뀨잉’>를 통해서 다시 휴식겸치를 쌓을 수 있는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아무나 손만 뻗으면 꺾을수 있는 노류장화 기방처럼 쉬어 가는 코너입니다. 외로워요...혹은 고민 상담 같은 것들도 받을려구여...제발 많이 관심듀세여 (ㅠ 3 ㅠ) 이를테면 전쟁없는 세상 회원분들이나 예비 병역거부자분들, 평화운동에 관심이 잇는 분들한테 ‘Dear. Abby’(애미애비에게)나 ‘He's just not that into you’(그는 너님한테 낚이지 안앗따)처럼 세계적으 로 유명한 칼럼이나 혹은 한겨레의 김어준 총수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같은 유명한 독설 상담 칼럼에 서 하는 식으로 상담도 받고자 합니다. 근데 실은 일본 넷우익 히키코모리들의 집합소인 2CH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암튼 이를테면 이런 질문들이 자주 예상되는 FAQ입니다. Q: “웅이님께서 이전에 쟈니스 주니어1) 멤버였다는게 레알인가요?” A: “네, 김레알 최트루입니다.”와 같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주 옥같은 상담이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상담을 원하시는 림하들은 이멜 주소 dreamsnail@naver.com으로 메일보내듀세여 ‘ ㅁ ’ 상담은 어떤 질문이든 좋은데, 인터넷에서 가르쳐주는거는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 뒀다가 국끓여먹지 말고 거기다 물어보센 ㅋ ㅋ ㅋ 맞다 그리고 병역거부 관련 고민도 너님 인생에 감놔라 배놔라 왈리왈시 할 순 없겠 지만 카운슬링은 할 수 잇을듯요 ㅋ ㅋ 그럼 사랑합니다 고갱님 *^^*
아래는 그런 상담 형식의 예시글입니다.
Q. 안녕하세요 웅이님! 저는 고민이 생겼습니다. 저는 병역거부를 고민중인 사람입니다. 저는 아주 우 연히 전쟁없는세상이라는 단체의 모임을 갔다가, 하이엘프, 그것도 하이엘프 중에서도 거의 쿠엘도레이2) 의 최고위급 귀족 하이엘프를 닮으신 ‘효웅’이라는 분을 처음에 보고서, 첫눈에 가슴이 방망이질치고
1) 일본 최대 남성 아이돌 그룹 기획사이다. 저 유명한 SMAP이나 최근의 야마시타 토모히사, 타키자와 히데아키, ARASHI 등등 한국에서도 많은 인기를 누리는 일본 미소년들도 과거에 이 소속이였다. 어렸을 때부터 발탁하여 아 이돌로 육성하는 기획사이다. 회장이 나님처럼 변태라는 소문이 있으며, SM엔터테인먼트나 YG, JYP같은 기획사로 생각하면 된다. 쟈니스 주니어 출신들이 주로 일본 오리콘 챠트를 좌지우지한다. 2) 엘프에는 아주 커다랗게 세 종족이 있는데, 이중에 아즈라샤 여왕을 주축으로 하는 귀족 하이엘프를 ‘쿠엘도레이라 ’ 고 부른다. 그러나 아즈라샤 여왕과 쿠엘도레이중 일부는 어둠의 힘의 저주를 받아 바다 저 깊은 곳의 ‘나가’라는 종족으로 타락하게 되었다. 현재 쿠엘도레이 (하이엘프)는 극소수만 살아남았다. 나머지는 칼도레이인 나이트엘프와 신도레이인 블러드엘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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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간장이 녹아서 밤에 하앍거려 뜬눈으로 잠도 못자고 전전반측하게 되었습니다 (뮤 3 뮤) 눈만 감으면 제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사기캐같은 그분의 모습(세미누드)만을 떠올릅니다. 그런데 전 애인이 이미 있어 요. 아놔 제 인생은 이제 망캐인가요? 제 고민을 들어주세요 ㅠㅠㅠㅠ
A. ‘운명을 거스르려 하는 반한남’께. 이봐요 ‘반한남’ 씨. 그건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랍니다. 전혀 이상할게 없는 이끌림이죠. 나비는 예쁜 꽃을 찾아 옮겨다니듯, ‘반한남’ 씨 너님이 더 예쁜 꽃에게 끌리는건 천지간에 당연한 이치인 것을, 왜 알면서 물어보시죠? 니까짓게 아무리 팔자 도망 질을 치려 발버둥을 쳐봐도, 이미 가슴 속에 타오르는 불길을 재울순 없답니다. (으흐흐... 이제 거미줄에 단단히 걸려든 나방신세임 으흐흐) 운우지정은 인력으로 되지 않는 법이거든요. ‘ 아모르 파티amor pati’, 니체의 말처럼 주어진 너님의 운명을 받아들이세요. 그리고 지금의 애인분은 유기견 버리듯 가차 없이 당장 헌 짚신짝처럼 내던져 버리세요. 사실 그래요. 삼척동자도 다 알만큼, 효웅님은 정말 매력적이 죠. 누가 봐도 하이엘프를 닮았으니까요. 왠만한 K-POP 아이돌그룹 미소년들 여럿쯤은 제 혼자서 찜쪄 먹을 정도이시잖아요? 너님의 그런 감정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랍니다. 그냥 고민 하지 말고, 너님의 행복을 위해서 가슴이 시키는대로 행하세요. 왜 그런말도 잇자나요? “트롤은 가슴이 시킨다”라고. 왜 하필이면 하고 많은 종족 중에 트롤을 골랐냐라고 물어볼 때마다 트롤덕후들은 그런 대 답을 한답니다. 마찬가지로 너님도 당장 효웅님과 꿈에 그리던 새출발을 하세요. 어차피 개도 안물어가는 ‘영원한 사랑’ 따위는 말라 비틀어진 것이니까요. 그래 안그래?? 그리고 그렇게 나님을 만나고 잡아서 애걸복걸 걸떡거려 하고 있다면, ‘전쟁없는세상’행사에 기웃거려보세요. 볼기짝 구들장에 붙이고 있어 봐야 니까짓게 묘수가 떠오르는 것도 아니잖아요? 산에 가야 범을 잡죠. 물론 잿밥(저한테)에 관심이 있 긴 하지만, 515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이나 평화주의자들의 행복한 책읽기 모임, 병역거부자 후원의 밤이 나 피스몹과 같은 전쟁없는세상 단체 행사와 모임에 와서 곁불이라도 쬐다 보면 병역거부 고민도 좀더 깊어질겸, 님도 보고 뽕도 따고 일타쌍피에, 혹시 암니꽈? 소 뒷걸음에 쥐잡듯이 퀘스트 보상템으로 저라 는 미인까지 득템하시는 영웅이 되실지.. 우ㅐ 성경 구절에도 공자님께서 하신 그런 말이 있자나요. “용 기있는 자만이 미인을 얻는다”고. 나님이랑 상담하시다가 눈이 맞으면 긴 베개를 베러 같이 야반도주 할 지 누가 아나요. 망설이지 말고 롸잇 나우!! p.s. 그런데 너님 잘생기셨나요?? 식스팩은 있음?? 인증사진 보내줄 수 잇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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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 나의 평화 여정 그냥 | 기독교평화센터 소장 + osolgil64@hanmail.net
2008년 5월에 기독교평화센터를 개소했으니 난생 처음으로 소장이라는, 그것도 평화와 관련해서, 타이 틀을 지니고 살은 지도 이제 만 3년이 되어간다. 주로 하는 일은 교회에서 ‘갈등해결과 ’ ‘평화 건설에 ’ 대한 워크숍 진행, 강의, 설교이다. 소위 말해서 평화로 밥벌어 먹고 있다. 구멍가게 같이 한 사람이 일하는 단체이지만, 그래도 이 일을 하고 나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곳을 방문 하며 특별한 경험을 하며 일하고 있다. 얼마 전 2년에 걸쳐 진행한 ‘평화만들기 지도자과정’ 마지 막 단계 워크숍에서 참석했던 한 목사님이 “이게 마지막 과정인데, 평화에 대해 어떤 해답을 찾기 보다는 더 많은 질문만 늘어가는 것 같아 당황스러운 느낌이다”라는 소감을 이야기하였다. 이 이야 기는 비단 그 목사님만이 아니라 나의 생각이기도 하다. 나도 아프간 전쟁 때부터 현장을 다니면서 활동을 했으니 시간으로만 따지면 벌써 10년 가까이 평화를 생각해오고 나름 실천을 했는데도, 여전 히 평화에 대해서 질문만 늘어가고 그뿐만 아니라 평화에 대한 회의와 안개 같은 흐릿함으로 고민이 늘어가고 있다. 내가 평화와 구체적으로 만나게 된 첫 출발은 아마도 2003년이었을 것 같다. 9년 동안의 민중교회 목 회로 지쳐있던 나는 후배의 권유를 받아 우리 교단대 ( 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사회부에서 일을 하 게 되었다. 주로 맡은 분야는 인권, 환경, 사회문제 대책이었다. 우리 부서에 국내외 재해가 발생했을 때 구호를 담당하는 일이 있었는데, 아프간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 담당 간사님이 어린 아이가 있는 여성이었기 때문에 아프간까지 출장을 갈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에게 출장의 기회가 왔 고 그렇게 해서 우여곡절 끝에 아프간에 가게 되었다. 카불국제공항에서의 첫 인상은 포탄에 맞은 공항활주로였고, 명색이 국제공항인데 전기도 없고 화장실 에 물도 나오지 않는 풍경이었다. 공항을 나서자마자 수많은 아이들이 달려들어 “기브 미 원 달 러”를 외치는 풍경도 잊혀지지 않는다. 차를 타고 카불시내로 들어서자 나무가 전혀 없는 황토색 산과, 폭탄과 총탄에 벌집이 되어 버린 집들이 가장 먼저 눈에 보였다. 밀가루를 한 지역에서 나누어 줄 때의 모습도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지역의 책임자들과 협의하여 분배표를 나누고 밀가루 분배 를 시작하였지만, 나중에는 너무나 많이 몰려온 사람들 때문에 밀가루분배 장소는 아수라장이 되었 고 우리는 황급히 몸을 피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굶주림 앞에서 체면과 질서는 얼마나 공허한 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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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 지, 그리고 전쟁이 어떤 것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이라크 구호활동, 쓰나미가 발생하였던 인도네시아 아체, 스리랑카에서의 구호활동, 대규모 지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친 파키스탄 카슈미르의 경험을 통해서 전쟁과 내전의 폭력성과 처참함을 더욱 경험하게 되었다. 평화와 먼 거리에 있는 전쟁과 내전, 재난 상황에서, 더욱 평화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지만, 구호활동을 하는 과정 중에서도 여러 가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한국사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 2003년의 이라크전쟁은 우리 사회가 평화에 대해 더욱 구체적으 로 생각하고 논쟁하는 계기가 된 것처럼 나도 이라크전쟁을 계기로 평화에 대한 교회의 입장, 나의 고민을 확장할 수 있었다. 이라크전쟁이 일어나기 전, 미국의 전쟁계획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지 만, 대다수 한국교회는 전쟁을 찬성하거나 전쟁에 대해 침묵하였다. 그런데, 전쟁 찬성에 대한 대부 분의 이유가 "국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와 "이라크가 이슬람이기 때문에", 그리고 "미국이 정의의 전쟁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였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부에서 총무와 간사들이 협의하여 '반전 성명 서를 ' 발표하였는데, 이 성명서 발표로 인해 논란이 되었고 이 일이 나중에는 사회부에 부담으로 오 게 되기도 하였다. 이런 와중에서도 우리 교단은 이라크구호모금을 하였는데, 의의로 많은 교회들이 모금에 참여하였고 나는 구호활동을 위하여 이라크까지 갔다 오게 되었지만, 나는 내면의 갈등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전쟁은 찬성하고 그 전쟁으로 인해 죽은 사람들과 다친 사람들, 그리고 전쟁의 와 중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한 구호활동이라는 이 모순은 생각하면 할수록 나에게는 힘들게 다가 오게 되었다. 교회가 전쟁도 반대하고 전쟁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밀었 다면 나는 정말로 기쁘고 보람 있게 그 일을 감당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찬성과 구호의 모순은 한국교회의 평화에 대한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이고 그 구조 속에서 일하는 나는 계속해서 그 고민 때문에 힘들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2005년 총회사회봉사부를 사임하고 6개월간의 캐나 다 여행을 통하여 새로운 평화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나는 캐나다 방문 6개월 동안 다양한 경험을 하였 는데, 역사적으로 평화교회라고 불리우는 메노나 이트교단의 초대로, 500년 역사의 뿌리를 갖고 있는 후터라이트 공동체와 아미쉬 공동체를 방 문하였다. 짧지만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전쟁거 부와 성경에서 배운 원수사랑의 절대적 평화신 념을 지키기 위하여 조국과 고향을 등지고 이리 저리 쫓기면서도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 은 공동체의 중심에 놓여있는 교회를 통한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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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 과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가정과 학교, 교회에서의 평화교육과 훈련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이후에 도 기독교 평화사역팀(Christian Peacemaker Team) 총회 참석, 콘라드그레벨대학 부설 '평화와 갈등 해결연구소' 갈등해결과정 수강은 구체적으로 더욱 평화에 대해 생각해보고 구체적으로 "내가 있는 곳에서 어떻게 평화를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해 한 발 더 진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후에 한국에 돌아와서 교회에서 평화사역을 진행하면서 평화에 대한 생각은 넓어지고 깊어지고 있다. 히로시마의 WFC(World Fellowship Center) 회원들과의 만남은 한국이라는 국적 안에서 사고하고 행 동했던 나에게 '아시아인이라 ' 는 정체성을 선물로 주었던 소중한 기회였다. 또 이 만남을 통해서 일 본 기독교인들과 대화할 수 있었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은 모든 차이를 넘을 수 있는 새로운 정 체성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더불어 전쟁과 식민의 기억이 있는 동북아시아를 유럽연합과 같이 지역 공동체로 만들어 가기 위한 모임과 국제세미나, 평화교류에 참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평화와 관련하여 소중한 만남을 하나 더 소개하고 싶은데, 바로 병역거부자 하동기씨와의 만남이다. 한 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일하던 황필규 목사님으로부터 연세대학교 신학생이 병역거부를 준비하고 있는데, 기독교인으로서 병역거부를 하는 이유를 나눌 수 있는 교회에서의 대화모임을 원하고 있다 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전에도 병역거부자 모임에 몇 번 나가기는 하였지만, 성격이 내성적이라 서 구체적인 만남으로까지 이어지지 않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기꺼이 동기씨에게 먼저 연락 을 하였고, 이후 내가 공동목회하고 있는 교회, 함께 공간을 사용하고 있는 기독청년의료인회, 대림 동에 위치한 서울의료생협, 이렇게 세 번에 걸쳐 대화모임을 진행하게 되었다. 이 대화 모임을 통하 여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이전 지역에서의 전투경찰의 폭력성에 대한 경험과 성경에서의 '원수에 ' 게 까지 확대되는 사랑과 평화의 가르침이 동기씨의 병역거부의 주된 이유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를 포함하여 대화모임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동기씨가 갖고 있는 개방성과 겸손함, 낙천성에 깊 은 감동을 받고 병역거부에 대한 거리감을 많이 줄여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물론 동기씨 개인에 대한 호감을 가지면서도 여전히 군대와 병역을 거부하는 동기씨의 입장에 대해서는 받아들이지 못하 는 분들도 있었지만 대화모임을 통하여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는 되었다고 생각한다. 동기씨가 재판을 하고 수감되어 있는 동안 재판방청과 세 번의 면회를 통해서 나는 평화는 거저 얻어지는 것 이 아니라 희생과 고통, 시간과 비용, 그러면서도 시행착오를 거칠 수밖에 없는 과정으로서의 평화를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또한 동기씨와의 만남은 기독교평화센터의 앞으로의 평화사역의 방향과 방법 에 대해서도 많은 통찰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큰 이슈와 주제로서의 평화실천도 중요하지만, 한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서 평화운동과 실천이 더 구체적이 되고 살아 있고 관념화되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내가 처해 있는 상황과 센터의 상황 때문에라도 거창하게(?) 그리고 여러 가 지 일을 할 수도 없지만 평화의 본질을 생각해 볼 때 작게 그리고 구체적인 만남을 통해서 평화를 배우고 실천했으면 좋겠다. 평화활동가들이 일에 치여서 너무 바쁘고 과로해서 평화가 없는 현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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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 자주 보곤 한다. 그리고 평화의 세상을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가까이에서 평화가 없어 고통당하는 한 개인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내가 경험하곤 한다. 동기씨라고 하는 한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서 병역거부와 양심의 자유, 전쟁반대와 군사문화, 동성애와 여성차별 등의 문제 등 그동안 내가 전혀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평화영역의 문제들을 만나고 있다. '전쟁없는세상도 ' 동기씨를 계기로 더욱 가 까워지고 또 앞으로 점점 친해질 것 같다. 나는 요즘, 점점 생각이 많아지고 시야가 흐릿해질 때가 많다. "전쟁의 소식은 그치기는 커녕 점점 늘 어만 가고, 가정, 학교, 국가, 초국적 자본의 폭력은 점점 교묘해지고 광범해지면서 무차별적이 되어 가는데, 나의, 우리의 자그마한 평화실천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아니 그것보다 내 안에 들어있는 폭력을 종종 보게 되는 경우, 그 폭력의 넓이와 깊이 때문에 우울해진다. 게다가 정답이 없고 결과가 없는 과정으로서의 평화여정을 생각하면 아득함마저 느낀다. 여기까지가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평화여정이다.
<전쟁없는세상을 후원해주세요> 전쟁없는세상은 병역거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소중한 후원들이 모여서 시작되었습니다. 대체복무제 도입을 위한 활동, 수감 중인 병역거부자들을 지원하는 활동, 병역거부를 고 민하는 사람들을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해왔습니다. 이제 병역거부운동과 함께 보다 다 양한 평화운동을 해 나가고자 합니다. 후원을 해주시면 병역거부에 대한 다양한 뉴스와 정보, 전쟁없는세상의 소식지 등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홈페이지의 “후원하기”를 클릭하셔서 가입양식을 채워주시면 CMS 회원가입을 하실 수 있습니다. - 개인정보의 이용에 동의하지 않으신다면 계좌이체를 하실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543001-01-305291 (예금주 양여옥) -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 http://www.withoutwar.org 를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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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 2012년 죽음의 상인은 사라지게 될까? - 유엔 무기거래조약 회의 준비위원회 2차회의를 다녀와서 박승호 |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 campaigner@amnesty.or.kr
전세계에 존재하는 소형무기의 수는 얼마나 될까? 1,000만개? 1억개? 스몰암스서베이(Small Arms Survey)의 추산에 따르면 전 세계에 존재하는 소형무기의 수는 약 6억 3천 9백만 개에 달한다. 지 구 인구를 60억이라고 가정할 때, 10명 중 한 명꼴로 총을 쥐어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양이다. 여 기에 매년마다 평균 8백만 개 정도의 소형무기가 새롭게 생산된다. 매년 새롭게 생산되는 소형무기를 포함해 재래식 무기들의 거래도 매우 활발하다. 2007년을 기준으로 볼 때 재래식 무기의 국제 거래액 중 '공식적으 ' 로 기록된 거래액의 합계는 511억 달러를 조금 넘 는다.(이 액수는 기록된 공식 국제거래만을 대상으로 추산된 것으로, 세계군비나 군수기업의 매출액 보다는 훨씬 작다.) 우리 돈으로 약 58조에 가까운 액수다. 상당한 양의 무기가 매일마다 국경을 넘 어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하긴, 지난 해 말 이명박 대통령이 우리나라 방위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 해서 2020년까지는 방위산업 수출 7위권에 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했던 것을 떠올려보니, 확 실히 이쪽이 '돈이 되는' 장사임이 분명한 건 맞는가 보다. 얼마 전 SIPRI의 발표를 보니 전세계가 금융위기에서 허덕이던 2009년에도 100대 군수업체의 판매액은 전년 대비 8%나 증가했다는 것을 보니까 말이다. 무책임한 무기거래 무기는 누군가를 죽이거나 다치게 하려는 목적만으로 만들어진 위험한 생산품이다. 그래서 무기의 거 래는 다른 상품의 거래와는 달리 엄격히 규제되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현실은 정반대다. 화석이나 미술품의 거래에도 이를 규제하는 국제조약이 있는데, 아직까지 국제 무기 거래 규제에 관해 세계 공통으로 적용되는 국제기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무기는 국가간 존재 하는 법률상 허점을 통해 자유롭게 국경을 넘어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삶을 앗아가는데 사용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보통 거래되는 무기의 사용처에 대한 위험성 평가 없이 인권침해의 잠재적 가해자에게 무기를 쥐어주는 행위를 "무책임한 무기거래"라 칭한다. 매년마다 무력분쟁에서 평균 25 만명 이상이 사망하고 무력분쟁 이외의 지역에서 총기와 관련된 무장폭력으로 인해 30만명 이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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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 생명을 잃어가고 있는데, 대부분이 무책임한 무기거래의 직간 ․ 접적인 결과로 볼 수 있다. 무책임한 무기거래의 종식을 위한 국제조약에 대한 요구가 구체적 움직임으로 만들어진 것은 2003년부 터였다. 당시 국제앰네스티와 IANSA, 옥스팜 등 세계 곳곳의 활동가들은 무책임한 무기거래를 규제 할 수 있는 법적 구속력이 있는 국제 조약의 제정이 필요하다는 데 뜻을 모으고 무기통제캠페인 (Control Arms Campaign)이라는 연대 단체를 결성해 각국 정부에 무기거래조약의 제정을 촉구하기 시작했다. 2003년 연구 조사 보고서의 발표를 시작으로 조약 제정을 촉구하는 백만인 얼굴 서명 등 대중적인 캠페인이 각국에서 이어졌다. 무기거래조약의 제정을 요구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각국 사회 내에서 점점 힘을 얻기 시작하자 조약 제정의 현실 가능성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던 정부들이 하나 둘씩 입장을 선회하기 시작했다. 결국 2006년 12월, 61차 유엔 총회는 153개국의 찬성으로 "무기거래조약을 향하여"라는 제목의 결의안 을 채택하고 조약의 제정에 대한 공식적인 논의를 시작하기로 결정했고, 61차 유엔 총회의 결정에 따라 유엔 회원국들은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했다. 첫 논의시작으로부터 3년만인 2009년 10월, 64차 유엔 총회 제1위원회에서 "무기거래조약"이라는 제목의 결의안을 채택하고 무기거래조약의 체결을 위한 구체적인 일정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결의안은 유엔 무기거래조약 회의의 2012년 개최를 명 시하고 이를 위한 유엔 무기거래조약 회의 준비위원회(Preparatory Committee for the UN Conference on the Arms Trade Treaty, 이하 준비위원회의 ) 소집을 결정했다. 준비위원회는 향후 제 정될 조약에 포함되어야 할 핵심 요소들을 추려서 2012년 회의에 권고하는 역할, 즉 조약의 뼈대를 잡는 임무를 부여 받았다. 이번 준비위 회의는 2월 28일부터 3월 4일까지 5 일간 뉴욕 유엔 본부에서 열렸다. 2010년 7월 1차 회의에 이어 이번 2차 회의에서는 조약의 통제범위, 기준, 국제협력 및 공조, 피해자 지원 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번 조약 성안 논 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무엇을"과 "어떻 게"라고 볼 수 있는데,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 어떤 무기와 거래의 종류"를 조약 상 통제대상 으로 삼을 것이며 "어떤 기준으로 무기거래를 승인하거나 거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얼마 나 치밀하게 조약의 문안을 만드느냐에 관한 부
유엔무기거래조약 회의 준비위원회 전체회의 장면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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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 이 부분을 놓고 각국의 치열한 입장 교환이 이어졌다. 사실 유엔에서 진행되는 회의는 다소 지루한 방 식으로 진행된다. 거의 200여개에 가까운 국가들이 모인만큼 한 주제에 대한 즉각적인 의견조율보다 는 각 주제에 대한 각국의 의견발표가 이어지는 방식이다. 의장은 회의 중 나온 참가국들의 의견을 취합해 중간 문서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각국이 또 의견을 제시하고 의장이 이를 다시 취합해 최 종적으로 정리된 문서를 채택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결과 문서에서 최대한 강력한 문안이 포함되려 면 각국의 발언내용에서 그런 내용이 반영되어야 한다. 회의에 참여한 활동가들은 각자 자신의 출신 지역이나 전문 분야에 따라 각국 관계자들을 쫓아다니면서 의견을 교환하고 우리의 요구를 자국 발 언에 포함시켜 줄 것을 설득한다. 특정 주제에 이견이 있을 경우에 각 단체들이 가진 연구자료들을 바탕으로 설명을 하고 의견 다툼을 하기도 한다. 무기거래조약에 대한 논의 자체가 시민사회의 강력 한 요구를 바탕으로 시작된 것이다보니 전반적으로 각국 정부 대표단들은 활동가들과의 의견 교환에 적극적이다. (물론 비정부기구 활동가들과 관계 맺기를 "어색해하는" 국가들도 있지만...) 하긴 어떤 면에서는 시민사회 활동가들이 오히려 정부 대표단보다 정보력(?)이 더 뛰어나기도 하고 관련 분야 에 대한 전문성도 있기 때문에 정부 대표 단으로서는 활동가들과의 만남을 꺼릴 이 유가 없을 것이다. 나는 주로 아시아 지역 국가의 담당자들을 만났는데, 인도네시아 정부의 경우 국제인권법과 국제인도법의 포함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다가 오랜 설명과 면담 끝에 자국의 협상 정책을 바 꾸기도 했는데, 생각과는 달리 시민사회의 의견과 비판에 개방적인 태도를 가지고 NGO활동가들의 회의 현장. 정규 세션 전후로 열리는 활동가들 만의 회의를 통해 각자의 활동사항을 공유하고 주요 쟁점에 대 한 내부 토론을 벌인다. 사진은 2010년 7월 1차 준비위원회 당 시 회의장면
있어서 오히려 내가 놀라기도 했다. 회의 장에서 약 50여명의 활동가들이 만들어내 는 변화는 작지만 대단했다.
각국의 무기 이전 허가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이번 회의에서 가장 치열한 쟁점 중 하나는 무기이전 허가를 위한 위험성 평가의 기준 중 국제인도법 과 국제인권법을 포함 여부였다. 무기 이전의 허가 기준과 관련한 우리의 요구사항은 무기거래조약 의 제정을 촉구하며 캠페인을 출범할 시점부터 한결같았다. 국제인도법이나 국제인권법의 중대한 위 반 행위에 사용될 실질적 위험이 있는 상황에서는 허가 당국이 무기 이전을 승인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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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 중국, 러시아, 파키스탄, 이집트 등 일부 국가들은 이전 회의들과 마찬가지로 이번 회의에서도 '인권이 란 개념이 주관적이 ' 기 때문에 이를 기준으로 무기이전 결정을 내리는 것은 위험하다는 논리를 내세 웠다.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국제인권법과 국제인도법은 이미 국제관습법적 지위를 가지고 있고 그 해석도 충분히 확립되어 있지 않았던가? 더구나 일부 국가들은 유엔 헌장 51조를 인용하면서 그 런 논리를 펼쳤는데, 51조는 각국이 외부의 침략에 대해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 인권을 무시하고 '죽음의 거래를 ' 이어가도 좋다는 권리를 이야기 하지 않고 있다. 국제인권법 과 국제인도법의 포함 등 강력한 기준 설정에 반대한 대표적 국가들인 미국, 중국, 러시아는 유엔 안 보리 상임이사국들이다. 평균적으로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무기거래량이 전체 무기거래량의 80% 정도 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이들이 강력한 기준 설정에 반대하는 것과 과연 무관할까? 사실, 2008년 처음 회의에 참여했을 때 받았던 인상은 말잔치 같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매분마다 한명 씩 무기로 인해서 생명을 잃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회의장에서 국가들은 자신들의 무책임한 무기거래를 외교적 수사로 변명하고 있었다. 2011년 준비위원회에서는 실제 조약 제정을 염두로 사 전 교섭회의가 진행 중이지만, 회의장에서 소위 "선도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몇몇 국가들도 자 국의 실리에 대한 냉혹한 손익계산 하에서 교섭에 임하고 있는 것이 드러난다. 어쩌면 일부 국가들 은 조약의 실효성이야 어떻든 무기통제를 목적으로 하는 국제조약을 만들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만족해 할지 모르겠다. 어떤 국가들은 조약의 제정이 불가피한 현실에서 최대한 이빨 빠진 조약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조약의 논의에 대한 시민의 감시와 참여가 중요한 것은 바로 이 같은 우려 때문이다. 넘치는 말의 잔치 속에서 우리가 왜 이 조약이 필요한지, 지금도 무기로 인해서 고통을 당해야 하는 이들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가 통제해야 하는 무기는 무엇 인지, 어떤 강력한 기준이 필요한지에 대한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절실했다. 그 자리에 우리가 있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국익의 논리에 따른 무기 통제가 아닌, 인권의 논리에 따른 무기 통제를 요구하기 위해서. 마지막 남은 준비위 회의와 2012년 무기거래조약 회의 이번 준비위원회 2차 회의는 어느 정도의 진전이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4일째인 목요일, 의장이 회 람한 문서에는 인권기준에 근거한 무기 거래 허가 절차 등을 포함하는 비교적 촘촘한 기준이아직 ( 부족하지만) 마련되었으며, 통제범위무기 ( , 거래 종류 등) 역시 지난번 회의보다 조금 더 확장되었다. 이제 준비위원회는 7월 마지막 회의를 남겨두고 있는데, 7월의 회의는 지금 보다 더 치열한 회의가 될 것이다. 여태까지의 논의를 종합해 향후 조약의 논의에 기초자료가 될 권고문을 채택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2012년 4주간 열릴 유엔 무기거래조약 회의가 최종적으로 조약의 문안을 확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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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 고 이를 채택하는 "최종 교섭회의"의 역할을 할테지만 사전 교섭 역할을 할 준비위에서 내는 권고가 2012년 최종회의의 시작점이 될 것이다. '죽음의 거래를 ' 이어가고 싶어하는 이들은 더욱 더 회의의 진전을 가로막기 위해 갖은 논리를 다 동원할 것이다. 그에 맞선 우리들의 활동도 더욱 강력해져야 할 것이다. 이번 준비위 회의의 참석을 위해 출국하기 전날, 나는 임재성씨가 쓴 책,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 - 병역거부가 말했던 것, 말하지 못했던 것 "의 출판을 기념하는 모임에 참석했다. 이 책의 곳곳에서 수많은 이들 이 왜 자신이 총을 들 수 없었는지, 왜 자신이 신념을 지키기 위해 감 옥에 가야만 했는지를 변론하고 있었다. 병역거부자의 시선에서 쓴 병 역거부운동의 역사, 그리고 인권담론을 넘어선 평화의 담론으로서 '병 역거부의 언어를 ' 이야기하던 그 자리에서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 었다. 변론의 자리에 있어야 하는 사람들은 병역거부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다수의 자리에서 아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살인훈련에 임 해왔던 나와 같은 사람들이었다고. 병역거부자들을 '우리의 ' 범주에서 몰아내고 타자화했던 이들이야말로 오히려 '당신은 어떻게 총을 들 수 있었느냐는 ' 질문에 먼저 답을 했어야 했다고. 그리고 곧이어 참석했던 준비위원회의 회의에서 여러 정부대표단들은 외교적 수사를 동원해 죽음의 거 래를 이어가 보겠다고 여러 가지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폭력에 민감해 도무지 총을 들 수 없었다 던 병역거부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이리저리 까다로운 기준들을 피해 계속 무기를 팔고자 외교적 수 사를 동원하는 이들의 이야기, 이 둘 사이의 먼 거리 속에서 나는 매우 불편했다. 그리고 다시 생각 했다. 강력한 무기통제를 요구하면서 변론의 자리에 서야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고. 여태까지 나몰 라라 죽음의 거래를 계속해왔던 죽음의 상인들, 그리고 그들의 거래를 통제하기 위해 별다른 노력을 가하지 않았던 국가들, 바로 그들이 매년마다 죽어가는 55만명의 삶에 대해서 변론해야 한다고. 앞으로 교섭이 진행될수록 무기에 대한 강력한 통제를 요구하는 지구 시민들의 목소리는 더욱 더 커져 갈 것이다. 2012년 최종 교섭회의에서 강력한 조약이 탄생되어, 죽음의 상인들의 활동을 가로막을 수 있는 효과적인 장치가 마련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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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 한반도와 일본섬, 그 곳 ‘사람들의 ’ 교집합 -제 18회 동아시아 대학생 평화인 · 권 캠프에 참여 하고 나서 장현진 | 전쟁없는세상 후원회원 + ccongjin@gmail.com
무슨 말로 글을 시작해야 할까 이것저것 고민하다 일본의 지진 속보를 듣게 되었다. 일본에 엄청난 규 모의 대지진이 발생했다는 뉴스를 듣자마자 떠오른 것은 지난 겨울, 캠프를 함께 했던 일본 친구들 의 얼굴이었다. 간사이 지역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 학생들이기는 하지만 혹여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았는지 걱정되어 관련된 기사만 읽으면 가슴이 먹먹해졌다. ‘일본 침몰을 ’ 헤드라인으로 뽑은 한 신문, 엄청난 수의 사람들의 죽음을 단지 ‘일본이 ’ 라는 이유만으로 냉담하게 대하는 일부 사람들의 태도를 바라보며 지난 역사적 경험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았다. 지난 2월, 일본 간사이 지방에서 열린 ‘제 18회 동아시아 대학생 평화인 ․ 권 캠프에 ’ 참여했다. 이번 캠 프의 주제는 ‘전시동원이 ’ 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제국주의 일본의 15년 전쟁 하에서의 전시동원이 주제였다. 첫 조별토론 때 ‘전시동원에 ’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를 공유했는데, 9명의 조원 중 6명이 ‘강제적이다라 ’ 는 키워드와 관련된 징병, 징용, 위안부 등의 이미지를 말했다. 큰 틀에서 ‘전시동원이 ’ ‘강제라 ’ 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대부분이 동의하였으나 과연 전시동원이 강제적이었나 라 는 주장에 대해서는 상이한 입장이 존재했다. 먼저, 한국 학생들의 경우에는 ‘전시동원이란 속아서 간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자발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라 ’ 는 주장을 했다. 그 외 ‘노동자로 일본에 간 경우는 무조건 강제적이지는 않다라 ’ 는 입장과 ‘민중의 입장에서 바라보자라 ’ 는 입장들이 존재했다. 이 입장은 ‘전시동원’ 개념 전체를 바라보는 입장뿐만이 아니라 각 개별 사건을 대하는 입장에도 차 이를 가져왔다. 차이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공유한 결과, 우리는 이 차이를 어떻게 좁힐 수 있는가, 과연 그 간극은 해결될 수 있을까를 함께 고민해보자고 했다. 우리는 필드워크에서의 여러 동을 통 해 이전에 보지 못했던 한일 / 서로의 역사적 경험과, 서로의 의견이 맞닿을 수 있는 지점을 찾는데 집중했다. 첫 날의 마인드맵 활동에 덧붙여, ‘강제에 ’ 집중되었던 생각의 갈래를 보다 다양하게 만 들어 나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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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 첫 번째 생각의 갈래는 ‘역사를 기억 하는 방식이 ’ 다. 피스오사카와 리츠 메이칸 평화박물관은 ‘박물관의 ’ 형 태로 지난 역사에 대한 정보를 사 람들에게 알리는, 일련의 ‘교육’ 역 할을 수행한다. 피스오사카는 시민 과 오사카 부의 공동출자로 설립되 었으며, 리츠메이칸 평화박물관은 대학이 설립한 대학 내의 박물관이 다. 이렇게 설립 주체가 다르기에, 박물관이 전시하고 있는 내용들도 피스오사카 1t 폭탄 상이할 수밖에 없다. 피스오사카와
리츠메이칸의 평화조형물
리츠메이칸 평화박물관 모두 일본의 전쟁책임을 전시하고 있는 일본에 몇 안 되는 박물관이기는 하 지만, 두 박물관의 세부 전시 내용은 상이했다. 위에 제시한 두 사진은 각 박물관에서 대표적인 전시 물의 사진이다. 이 사진을 통해서 같은 ‘평화박물관이 ’ 지만 각 박물관이 전쟁의 어느 측면에 집중하 여 전시를 진행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토론 중에 전쟁을 방기하고 전시체제에 복무했던 민중에게도 전쟁책임이 있냐는 질문이 제기되었다. 필드워크 이전까지의 ‘전시동원’ 논의는 ‘식민지 민중이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강제 연행되었 다에 ’ 한정되어 있었는데, 리츠메이칸 박물관의 전시물들을 토대로 ‘전시체제 하에서 일본의 민중 도 전쟁에 동원된 것이 아닌가라 ’ 는 의문이 생겨났다. 14세가 되면 학교가 아닌 군수공장에 나가 폭탄을 만들어야 했던 일본의 소녀는 자신의 의지에 반해 전시상황에서 강제로 동원된 것이 아닌가? 징병을 피하기 위해 손가락까지 잘라야 했던 일본섬 의 청년은 전시동원의 피해자가 아닌가? 결국 일본 민중 또한 전시동원체제에서 또 다른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상처도 물론 엄청날 것이다. 그러나 제국주의만 아니었다면 하등 관련 없었을 타국에 의해 평생 잊지 못할 고통을 당한 이들의 눈물과 외침 앞에서 그들의 목소리는 어쩔 수 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었고, 또 작아져야만 하 는 상황은 아니었나 라는 생각을 혼자 해봤다. 제국주의 하에서 일본은 인간을 인간 그 자체가 아닌, 전쟁 수행을 위한 도구로 이용했다. 전쟁을 지속 하기 위해 비행장을 지으며 저임금의 식민지 노동자들을 이용한 우토로 지구, 전쟁 말기에 공습을 피하기 위해 저임금 이주노동자들의 노동력으로 산을 뚫어 만든 지하창고 타치소를 보며 ‘인간이 다른 인간의 아이덴티티를 존중했다면 우토로나 타치소와 같은 불행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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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 라고 한 친구가 이야기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인권을 가진 인간으로 보지 않을 때, 상상할 수도 없는 끔찍한 일들이 일 어나기 시작한다. 그도 기쁨, 슬픔, 행복, 분노를 느끼는 인간 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사람을 개체로, 숫자로 취급하기 시 작하는 순간 인간의 도구화가 시작되며 그 결말은 누구도 예 측할 수 없다. 타치소 : 산을 뚫어 지하창고를 만들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어떻게 그랬을까 싶다. 전쟁 당시에 일어났던 수많은 강제적 조치들에 대 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들을 강제한다고 실행하는가라 ’ 고 물었다. 한 일본 친구가 이렇 게 말했다. ‘한국 남자들은 군대에 어떤 심정으로 가는가. 가고 싶어서 가는가?’ 3월에 입대하는 한 국 친구의 대답이 있었다. ‘누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가겠는가, 가야 하니까 갈 뿐이다.’ 그리고 일본 친구는 이렇게 끝맺었다. ‘아마도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제국주의 일본 하에서 징병 제가 실시되었다는 사실을 쉽게 잊는다. 또, 그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는 ‘징병제가 ’ 여전히 한국에 서 실시되고 있다는 사실 또한 간과하곤 한다. 리츠메이칸 평화박물관에서 자원 봉사하시는 할아버 지께서 ‘당시 일본에서는 강제징집을 피하기 위해 신체검사 당일날 연기를 들이마셔 폐병이 있는 것 처럼 보이게 하거나, 심지어 손가락을 절단하는 등의 행위가 흔했다라 ’ 말씀하셨던 것이 문득 떠올 랐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일본 ‘군대의 ’ 이미지는 철저히 ‘가해자의 ’ 측면에 집중되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군대에 징집되어야만 했던 수많은 이들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평화박물관에서 한 여성이 기증한 편지들을 보았다. 그 편지들은 군인으로 징집되었던 오빠와 애인이 전장에서 보낸 편지였다. 한없이 살가운 오빠였고 따뜻한 애인이었던 그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쟁에 참여했고, 결 국 모두 전사했다. 어떤 한 ‘주의가 ’ 지배하는 상황에서는 그 ‘주의와 ’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 혹여 지배 담론에 저항하는 의문이 제기되었다면 그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철저히 탄압받는다. 이것은 어느 사 회에서나 마찬가지다. 천황의 칙령 하에서 군국주의가 지배하던 사회에서 ‘평화를 ’ 말하던 평화주 의자들은 소리소문 없이 죽어갔고, 한국의 극단적 반공주의는 아무 죄 없던 재일조선인 유학생들을 간첩이란 누명을 씌워 고문하고 수십 년 동안 감옥에 가둬놓았다. ‘전시라 ’ 는 체제 하에서 일본의 15년 전쟁에 동원된 일본섬의 ‘사람들 ’ 과, 아직까지도 전시 체제 하에서 살고 있는잘 ( 인지하지 못하기는 하지만) 한반도의 ‘사람들은 ’ 어쩌면 손을 맞잡을 수 있는 지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제국주의’, ‘반공주의’ 하에서 얼굴도 보지 못한 그 누군가를 적으로 돌린 채 억지로 총을 잡 고 누군가를 증오했던 그들의 상처는 아직까지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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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 이번 캠프 내내 제국주의 일본, 오늘날의 일본 국가, 조선, 대한민국을 분리해서 생각하려고 애썼다. 사 람들은 보통 국가와 국민, 그 지역의 주민을 등치 시켜 생각하는 경우가 흔하지만 사실 이들은 같지 않다. 제국주의 일본 내에서도 패권주의적 움직임을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존재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전시라 ’ 는 상황논리 하에 죽어 갔다. 수많은 전쟁을 저지른 주체는 ‘제국주의 일본이 ’ 지 일본 섬에 살고 있었던 ‘사람이 ’ 아니다. 원폭으로 일본의 항복선언이 이루어졌고 ‘제국주의 일본이 ’ 시작한 전쟁은 끝이 났으나, 정작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아스러진 것은 제국주의가 아니 라 제국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등교하던 어린 초등학생들이었다. 전시동원의 책임도 물론 중요하 지만 이번에는 필드워크 내내 몇 십 여 년 전 이 땅을 밟고 서 있었을 ‘사람들 ’ 을 생각하려 했다. 국가와 정부보다는 지역 중심의 사고로 사람들의 진짜 목소리를 듣고자 했다. 일본 섬에서 한반도의 상황을 떠올렸다. 국가의 책임 방기 하에서 전쟁 도중 동원된 자신들의 아픔을 말할 수 없었던 일본 섬의 사람들과 역사적 진실을 떳떳이 이야기 할 수 없었던 한국전쟁 민간인 학 살 피해자. 1940년대 치안유지법으로 탄압받던 일본의 평화주의자들과 오늘날 국가보안법으로 수감 되어 있는 한국의 양심수들. 제국주의 일본의 징병제와 한국의 군대. 저임금을 받으며 고된 노동을 했던 재일조선인 1세대와 한국의 이주노동자. 일본섬의 사람들과 한반도의 사람들은 서로 상이한 역사적 경험을 해왔다. 그러나 이 경험은 몇 십 년 의 시간 차이는 있지만 큰 틀에서는 공통점이 존재하며, 서로 엮일 수 있는 경험들이다. 우리는 타자 의 경험을 자신의 사례에서 찾아 생각해 볼 수 있고, 이는 이전까지 적대하던 타자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 또한, 소위 ‘인과응보’ 식의 논리로 지진으로 인한 일본의 고통에 무관심하게 대응하기보다는 그 섬에 살고 있는 나의 친구, 친구의 친구 등 ‘사람을 ’ 상상하기 시 작할 때 우리는 타자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다. 우리는 서로 교집합을 찾고, 교집합 속에 사람을 상 상하며 그렇게 손을 내밀어 연대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적대와 갈등의 ‘지진의 ’ 진 앙이 아닌, ‘평화의 진앙으 ’ 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오늘도, 진정한 ‘평화와 ’ ‘전쟁 없는 세상을 ’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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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 온 몸으로, 평화 김윤영 | 대학생사람연대 5기 준비위원장, 서강대학교 사회과학대 학생회장 + ygctw@naver.com
평화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어느 먼 곳의 어떤 이의 죽음을 참 을 수 없어 그곳으로 떠나고 마는 많은 분들과, 총부리를 거두기 위해서 스스로를 가두는 결정을 하 는 많은 분들이 짊어지는, 평화, 라는 것의 무게가 제가 감히 이야기할 수 있는 정도의 무게인지 모 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디디고 서있는 작은 땅에서 느끼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전에는 평온하고 화목하게 사는 것을 생각했었습니다. 마음의 술렁거림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지켜보 며 사는 것, 사소한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사는 것, 그런 것이 평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생각하 면 그런 생각 속에서 평화라는 것을 멀리 보내버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청소복을 입으면 투명인간이 된다는 어떤 영화의 대사와 다르지 않던 서강대학교에서, 지난 겨울부터 학내 청소노동자들과 관계 맺기를 시작했습니다. 일상의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들인 만큼 일상에서 관계 맺고 싶어 시작한 것이 '영어교실입 ' 니다. 방학 내내 ABC를 배워도 여전히 헷갈려하시지만, 서 로의 이름을 부르고 서로를 대접하며 일상의 공간이 변해가고 있습니다. ‘I like you’라는 말을 가르 쳐 드리며 듣습니다. 한 중년 여성이 어떤 역사를 살아왔는지, ‘I like you’라고 말하기 위해 하루에 몇 시간을 더 못 자게 되었는지, 그럼에도 그것이 그녀에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듣습니다. 서로의 삶을 엮고 관계 맺는 일을 대학에 막 들어온 신입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투명인간들의 세상보다, 이런 세상이 더 감동적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신입생환영회 행사에 영 어교실 선생님과 학생들즉 ( 대학생들과 청소노동자들의 ) '인디언 송' 공연을 넣었습니다. 밝은 계열 옷을 입고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함께 '인디언 송을 ' 부르고 무대에서 내려와, 꼭 껴안고 한참을 울었 습니다. 그밖에 여러 가지 일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을 ‘조합원님이 ’ 라고 부르는 것이 올바른지, ‘어머니라 ’ 고 부르는 것이 나은지에 대해 공부하고 토론했습니다. ‘영어교실은 ’ 일방적으로 학생들이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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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 들에게 베푸는 행위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학생들에게 베풀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 비로소 동등 한 관계의 연대가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도 하였습니다. ‘영어교실은 사실 학우들을 무관한 일이다, 왜 그런 것을 하느냐는 ’ 질문에 ‘이것은 당신과 당신이 사는 세상을 위한 일이다. 함께 사는 세상 을 위한 일이다라 ’ 고 말하며 목이 메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울고 웃고 고민하는 날들 속에서 확 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나의 마음이 전보다 훨씬 끊임없이 술렁거린다는 것입니다. 다시 생각합니다. 평화를 위해 평평한 관계들을 맺어가야 함이 분명하지만, 세상은 평평하지 않다는 것 입니다. 그것에서 눈을 돌리는 것은 비겁한 것이며, 평평하지 않은 세상을 직시하고 이것이 잘못되었 다고 소리 높여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꿈처럼 평평하지 않다는 것을 모두에게 말하고, 붙 잡고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평화는 사소한 바람에도 흔들려 괴로워해야했던 것입니다. 멈 춰있거나 한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부딪히며 실천하는 것입니다. 불평등한 모든 권력 관계 사이로 들어가, 그것이 주는 불편함을 몸으로 느끼고 울면서 평화는 생겨나 는 것입니다. 평화를 만드는 것은 마음이라기보다 몸이고, 꿈이라기보다 실천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대학생사람연대 김영배 선배, 이태준 선배는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로서 그 몸을 철창 속에 가두 며, 온몸으로 평화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떤 용기로 그러한 선택을 했는지 이제야 조 금 알 것 같습니다. 평화를 위하여 평화롭지 않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다짐합니다. 온몸에 평화를 둘러싸고, 모든 권력 관계 속으로 나아가겠습니다. 그 치열한 삶, 그것이 평화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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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군사비에 얼마나 많은 돈을 쓰는가 매년 4월 12일은 ‘세계군축행동의 날’(GDAMS : Global day of action on military spending)로서 스톡홀롬 국제평화연구소SIPRI에서 세계 군비지출에 대한 보고서를 발간하는 시기에 맞춰 전 세계에 서 군비지출을 줄일 것을 요구하는 행동들이 이어집니다. 이번 호의 번역 글은 이번 세계군축행동의 날을 준비하는 주축단체인 IPB(International Peace Bureau)가 제작한 브로셔(2010년 12월)에 실린 글로서 우리가 군사비로 지출하는 엄청난 돈을 줄인다면 전 세계의 복지 수준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다는 전체 내용 중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돈을 군사영역에 쓰고 있는지에 ’ 관한 내용을 발췌·편 집한 것입니다. 전쟁없는세상에서도 4월 12일 군축행동의 날을 맞아 평화와 군축을 요구하는 행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회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번역 : 정지훈 / 검토 : 매체편집팀) * 원본출처 http://ipb.org/i/pdf-files/GDAMS-Brochure.pdf <What does development cost?> - What does the world spend on the military?
군사부문 비용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 것은 개발영역에서의 암묵적인 금기다. 전 세계의 군비 지출은 ‘테러와의 전쟁에 ’ 의해 늘어나기 시작해 냉전 시기의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1990년대 초반 전 세 계 군비 수준은 상당히 하락했었다. 하지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20여 년이 지난 2009년 현재의 전 세계의 군비 지출은 1조 5310억 달러에 이른다(SIPRI, 2010). 지금 전 세계의 군비 총액은 어마 어마하다. UN 새천년개발목표(Millennium Development Goals, MDGs)들을 다섯 번이나 달성할 수 있는 돈이다. 불행히도 MDGs의 재정에 대한 그 어떤 UN 보고서도 “군비 지출”이란 단어를 말하 고 있지 않다.
IPB는 ‘잘못된 우선순위를 ’ 시급히 바로잡는 데 새롭게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한다. “테러와의 전 쟁”은 각국이 대량살상무기를 비롯한 전쟁무기를 늘릴 명분을 새로이 제공했다. 각국이 UN 새천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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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목표 달성을 위한 박차를 가하도록 강하게 압박해야 할 바로 그 시점에 말이다. IPB는 정부 기관들, NGO들, 그리고 학계를 포괄하는 개발 공동체 전반이 군비 지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현재의 과도한 군비 예산은 종종 시민들을 불안정하게 할 뿐 아니라 (정치적 의지가 있다면) 시급한 문제인 빈곤 퇴치 사업에 쓸 수 있는 중요한 재원이다.
군비 지출을 늘리는 원인들 정부들이 군대에 그토록 큰 지출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주로 역사, 전통, 식민지 유산, 그리고 (보 통 남성들의) 호전적인 사고방식 등이 그 이유이다. 그 밖에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구체적인 요소들 이 개입한다. ●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 그리고 테러에 대항하자는 주장. 하지만 수 십 억불의 비용을 썼고 수백만 명의 희생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수단을 통해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는 못했다.. ● 군사 영역을 포함한 공공 부문 지출을 늘려 경기를 부양하자는 주장. 일자리 창출의 문제. 실제로 방위 산업은 이러한 경기 부양책의 최대 수혜자 중 하나일 것이다. 이러한 조치들은 종종 “군사 케인즈주의”라 불리며 1930년대 대공황을 ‘치료하기 ’ 위해 사용되었었다. ● 무기 산업과 군사관련 집단들이 갖고 있는 권력과 로비스트들의 영향. 각국의 정부들이 주요 고객 이기 때문에 안정적인 국방 예산을 확보하는 것이 그들의 주 관심사다. 그들은 정부의 주문이 줄어 들 경우 부족해지는 수입을 해외시장에서 만회한다. 이 과정에서 종종 갈등을 조장하고 부도덕한 정권을 지원하기도 한다. ● 국방 병력 - 거의 모든 국가들의 명분이다. 하지만 ‘무력 투사’(power-projection)1)과 같이 더 넓은 지정학적이고 전략적인 이해관계 역시 주요한 요소들이다. 이는 천연 자원이 점차 고갈되 는 상황에서 자원 확보를 위한 경쟁과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특히 기후 변화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다. 에너지 경쟁 문제는 주요 선진국들은 물론 중소규모 국가들의 군사 전략에 있어서도 장기적 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다. 우리의 과제는 전쟁에 의존하지 않고 자원을 적절히 분배할 수 있는 외 교적 방법을 찾는 것이다.
군사주의가 발생시키는 다른 비용들 군사주의는 군비 예산 그 자체 뿐 아니라 다양한 다른 ‘비용을 ’ 발생시킨다. 우리는 종종 이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곤 한다.
1) 자국 영토 밖에서 전쟁을 치를 수 있는 군사력을 뜻한다. 국제관계 속에서 해당 국가의 힘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 로 치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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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 연구. 예를 들어, 미국 R&D 예산의 대부분은 국방부문을 위해 쓰인다. ● 환경과 건강. 원자력 및 생화학 무기의 생산과 관련 사고에 의한 오염, 유정의 연소, 일상적인 대 기, 토양, 수질 오염 등 ● 사회적 영향. HIV/AIDS 발생률 증가를 가져오는 매매춘, 범죄와 폭력 증가 ● 경제적 영향. 군사적 생산이 증가하면 국가적으로 소비재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민간 경제 영역에 돌아가는 물적, 인적 자본이 줄어든다. ● 정치. 군대는 세계 곳곳의 정부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운영 및 통제하기도 한다. 더욱이 군사주의 비용의 총합은 (동일한 예산에 대한 다른 지출 방법들인) 모든 기회비용들을 포함해 야 한다. 연간 전 세계 군비 지출이 1조 5310억 달러까지 치솟은 현 상황을 보며, 이 어마어마한 자 금이 어떻게 달리 사용될 수 있었을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빈곤한 지역들 을 개발하기 위해,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개발하기 위해, 그리고 수많은 다른 방식들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경제 위기의 관점에서 보는 군비 지출 경제 위기는 2007년 말에 최초로 감지되었으며 지금도 전 세계의 나라들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부 분의 선진국과 몇몇 거대 개발도상국들은 공공 부문에 대한 지출을 늘려 경기를 부양해서 경기 침체를 벗어나려 했다. 반면, 경제 위기는 2009년 전 세계 군비 지출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0년에는 여러 국가들이 군비 삭감을 발표했다. 미국, 그리스, 터키, 영국, 스 페인, 프랑스, 그리고 이탈리아와 같은 나라들은 전체적인 공공 비용 감축의 일환으로서 군비 지출을 줄여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군비 삭감이 언제쯤 국제적인 군비 지출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 수 있을지 는 알기 힘들다. 가령, 중국과 미국 간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경제 위기로 인해 양측 모두가 군비 경쟁을 지속하기 어려워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경제 위기는 향후 몇 년 간 중미관계의 갈 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Friedberg, 2010). 현재의 군비 지출 흐름을 바꿀 “기회의 창”이 지금 열렸다는 점이 중요하다.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실제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곳에 예산을 쓰기 위해 군사비 삭감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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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수입
총 지출
이월금
총계 (수입-지출 +이월금 )
6,802,469
6,833,580
8,159,246
8,128,135
:: 하동기 : 서울구치소에서 출소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하동기는 12월 24일 가석방으로 출소했습니다.
:: 백승덕 : 영등포구치소에서 출소 영등포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백승덕은 2월 28일 가석방으로 출소했습니다.
:: 김영준 : 의정부교도소에 수감 2010년 12월 28일 영장실질심사에서 구속된 상태로 재판을 받았으며 현재 의정부교도소에 수감 중입니다.
:: 안지환 : 영등포구치소 수감 2월 17일 선고공판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법정구속이 되어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 이태준 : 영등포구치소에 수감 2월 23일 선고공판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법정구속이 되어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 상우 : 수원구치소에 수감 2월 24일 선고공판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법정구속이 되어 수원구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 날맹 : 영등포구치소 수감 3월 30일 선고공판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수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현재 수감 중인 병역거부자들의 주소 이정식_충남 논산시 성동우체국 사서함 1호 244번 (320-941) 박현민_서울시 금천우체국 사서함 165호 1216번 (153-600) 김영배_서울시 금천우체국 사서함 165호 1314번 (153-600) 이조은_경기도 군포우체국 사서함 20호 3956번 (435-050) 김영준_경기도 의정부우체국 사서함 99호 841번 (480-700) 안지환_서울시 금천우체국 사서함 164호 2568번 (153-600) 이태준_서울시 금천우체국 사서함 164호 2164번 (153-600) 강상우_경기도 동수원우체국 사서함 17호 902번 (442-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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