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없는세상소식지 32호(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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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OUTWAR Newsletter No.32 CONTENTS World

Editorial

에디토리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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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막바지

CO note

병역거부자 활동수기 2 6 10 15

홍원석 병역거부 소견서 최기원 병역거부 소견서 이사단상 /안지환 출소인사 /김영배

Focus

Experience

20 22

방위산업전시회를 다녀와서

Special

기획기사

정의의 여신, 군복을 입다 - 들어가며 기획1 - 병역거부에 대처하는 사법부의 자세 기획2 - 병역거부권 인정, 세계는 지금 기획3 - 처벌에 대처하는 병역거부운동의 자세 연중기획 - 병역거부운동 뒷담화2 /신윤동욱

Review

25 26 31 35 39

- 영화<그을린 사랑>을 보고

32호 매체편집팀 성민 기획기사, 섭외, 편집 등 여옥

영화평․서평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공존할 수 있을까

기획기사, 섭외, 편집 등

41

하동기 기획기사, 섭외 등

기획연재

가람이의 좌충우돌 세상읽기 제13화 나름의 바다건너 일기 네 번째 - 나를 향한 응원 웅이 왓져여 뀨잉뀨잉 난영의 그림이야기

47 48 52 55

아하 표지디자인

평화에세이

여기서 전쟁이 시작된다, 우리가 여기서 막아내자! 8당은 에코토피아 죽음의 비는 아직 현재진행형

Translation 반군사주의적 관점

56 62 65

번역

미국의 ‘묻지도말하지도마라’정책 폐지에 관한 퀴어

Report

17

참가후기

헌법재판소 풍경 /숲이야

Essay

정의의 여신, 군복입다 ... 25

시선집중

헌법재판소 병역법 합헌결정 외

Series

▶▶ Special

발행처 : 전쟁없는세상

70

발행일 : 2011년 11월 15일 제 호 :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2호 연락처 : 02-6401-0514

재정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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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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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ial

그 여름의 막바지 성민 |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 peacedrip@gmail.com

년 여름의 막바지, 아제르바이잔에 갔었다. 토부즈라는 변방도시에 갔는데 작은 마을이어서 온 마 을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었다. 아제르바이잔은 손님을 모셔 환영하는 문화가 있었고, 이내 어떤 아저씨 에게 초대를 받았다. 마당에서 직접 딴 포도와 무화과를 대접받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그 집 할머니가 들 어오자마자 쫓겨났다. 할머니의 영문 모를 분노는 대단해서 빗자루로 맞듯이 우리는 나와야 했다. 전쟁 때문이라 했다. 후에 상황을 들어보니 그 곳이 아르메니아와의 접경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고장 사람들은 여전히 전쟁의 상처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국가인 아르메니아에 대한 증오심은 기독교인인 우리에게로 향 했던 것. 전쟁은 역시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와 갈등을 남긴다. 소식지에 영화평과 에세이로 소개된 레바논도 다르지 않다. 집속탄으로 그 상처를 온 몸으로 겪고 있는 레바논처럼 한국도 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갈등이 지금도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 아니, 여전히 한국 땅의 일부에도 지뢰와 폭탄이 있 는 것처럼 말이다. 아제르바이잔을 이번 기사를 쓰면서 다시 접했다. 해외 사례를 찾아보며 아르메니아를 다루는데 연관 이 된 것이다. 그곳에도 적지만 병역거부자들이 있었다. 한 병역거부자의 출신지가 겐자라는, 내가 갔던 곳이라서 그 반가움(?)은 더 했다. 병역거부자를 처벌하는 것도, 휴전상태인 것도 그 땐 몰랐던 한국과의 닮은 점이리라. 그 여행 끝에 아우슈비츠를 방문하면서 아제리와 유럽 그리고 한국의,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에 대해 서 생각했었다. 그 땐 너무도 달리 느껴졌던 아제리와 유럽이 유럽인권재판소의 판결로 조금씩 닮아가는 것을 보며 조금은 부러웠다. 한국은 언제쯤 전쟁을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고 평화를 다른 방식으로 꿈꿀까. 2011년 여름의 막바지, 병역거부를 준비하고 있기에 헌재의 결정은 나에 대한 유죄 확정판결과 마찬 가지였다. 전날 밤, 혹시라도 위헌이 되면 내 인생은 어떻게 바뀔까 고민하면서 설렘 반, 걱정 반인 상태 로 잠들었던 기억이 난다. 여지없이 그 기우(?)는 무너졌지만 말이다. 이번 호에선 헌재 판결을 중심으로 그동안의 사법부의 변화와 병역거부운동의 대응, 그리고 다른 나 라의 사례를 정리해보았다. 저번 호에 연중기획을 싣지 못했는데, 이번엔 연중기획의 맥을 이으면서 헌법 재판소의 결정에 맞춰 정리해보고자 했다. 소식지가 늦어지는 동안 두 젊은이가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지 금 한국에는 없지만 병역거부운동 10년에 빼놓을 수 없는 오리, 그의 글과 그에 대한 글도 있다. 올해를 마무리하고 내년을 준비하며 병역거부운동이 어디로 갈지 우리는 묻게 될 것이다. 다음 호는 그에 대한 내용으로 채울 것을 기약하며 운동 11년째를 함께 맞이하자. 벌써 춥다. 2006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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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부소견서 홍원석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st.pope.pius5@gmail.com

1.

가톨릭 교회에서는 이미, 교도권은 “전쟁의 야만성”을 비난하며, 전쟁에 대하여 달리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사실상, “원자핵 시대에 전쟁을 정의의 도구로 이용할 수 있다고는 거의 상상할 수 없다.” 전쟁은 “재앙”이고, 결코 국 가 간에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적절한 길이 아니며, “지금껏 한 번도 그러지 못했으며, 앞으 로도 결코 그러지 못할 것이다.” 전쟁은 새롭고 더욱 복잡한 분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전쟁이 발 발하면, 그것은 “불필요한 대량학살”이 되고 “되돌릴 수 없는 모험”이 되어 인류의 현재와 미래를 위 협한다. “평화로는 잃을 게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전쟁으로는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무력 전쟁으로 발생하는 피해는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도 있다. 결국, 전쟁은 “진정한 모든 인도주의의 실패”이며, “언제나 인류에게 좌절을 안겨 주는 것”이다. “결코 다시는 일부 민족들이 다른 민족들과 대적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더 이상, 더 이상 전쟁은 없어야 한다.” 『간추린 사회교리 497 항』라고 전쟁의 속성을 규정했다. 또한 1962년부터 1965년까지 개최되었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공포한 사목헌장 「기쁨과 희망 Gaudium et Spes」 79항에서 “양심의 동기에서 무기 사용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위한 법률을 인간답게 마련하여, 인간 공동체에 대한 다른 형태의 봉사를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천명했다. 이것은 … 국법이 인정하더라도 하느님의 법에 위배되는 관습들에는 공식적이 아니라 하더라도 협력 하지 않아야 할 중대한 양심의 의무가 있다. 사실 그러한 협력은, 다른 사람의 자유에 대한 존중 때문 이라고 해도, 또 그것이 국법으로 상정되고 요구되고 있다는 사실에 호소한다 해도, 정당해질 수는 없 다. 그 누구도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한 도덕적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러한 책임을 바탕으로 하 느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로마 2, 6; 14, 12 참조).『간추린 사회교리 399항』라는 가르침인 것이 다. 2.

군 입대에 대해, 병역거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쯤이었을까? 2


언젠가 이 두 가지를 놓고 고민을 거듭하던 때, 가톨릭신앙을 가진 이들 중에서도 처음으로 병역거부 를 선언한 이가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결국 이는 나 혼자만의 고민거리가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내안에 과연 병역거부를 택할 용기가 있는지, 과연 이를 설명할 나의 언어는 무엇 인지 끊임없이 찾기 시작한다. 그리스도교 신앙. 나 또한 가톨릭 신앙인이다. 태어나던 그해 유아세례를 받았으니 28년째 신자로서 살아오고 있는 셈 이다. 그리고 외국의 에큐메니컬 공동체에 입회하여 수도자로서 살아가는 꿈을 갖고 있는 성소자이기 도 하다. 언젠가 방문했던 그 곳에서 대체복무를 위해 1년 여 동안 봉사자로 일하고 있다는 친구의 이 야기를 듣고는 한국의 현실을 생각하며 자괴감에 빠졌던 시간들을 떠올려 본다. -

신앙 안에서 살아가기를 결심하고 난 뒤에 우연히도 앞서 인용한 교회의 문헌들을 발견했다. 내 앞에 놓인 병역이란 문제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준거들을 발견한 것이라 생각했다. 한국 가톨릭교회가 침 묵하고 있을 때에도 소수이지만 병역거부자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미 병역거부가 보편적 인권으로 받 아들여지고 교회의 공식교리가 이러한 상황에서 더 이상 침묵만 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양심의 언어, 평화의 언어, 인권의 언어 그 사이 어딘가 나는 과연 양심적인가 혹은 평화적인가. 양심적 병역거부 혹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라는 명칭들을 대하며 끊임없이 번민했다. 사는 동안 매순간마다 끊임없이 따라다닐 이 물음들을 앞에 두고 내린 결 론은 이 두 가지 쟁점 안에 갇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병역거부자들에게 보다 더 양심적이고 보다 더 온화한 인간이기를 요구하는 것 역시 차별이며 폭력이 아닌가. 나에게는 그저 복음을 구체적으로 살아내는 것이 유일한 관심사요 과제일 뿐이다. -

이와 더불어 뿌리 깊은 국가 안보의 논리로 의혹과 비난의 시선을 던지는 이들에게 나는 인권의 언 어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병역을 거부하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인권의 문제라고. 인권은 원래부터 가 보편성의 원리라고 말이다. 한국의 특수성을 이야기하기 전에 보편성의 원리가 우선이며 그 특수성 을 타개하기 위해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했느냐고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사실상 누군가의 가치관 혹은 가치 판단의 준거들을 이해하기 위해선 결국 그가 살아온 삶 전체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

유년의 기억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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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돌아가시고도 마지막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아니, 일부러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저 병풍 뒤 담요 덮인 아빠를. 돌아가신 아빠를 내 기억 속에 남겨놓는 다는 것이 그 자체로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옳았음을 깨닫는다. 겨우 여덟 살짜리 꼬마가 직면해야 했던 그 두려움도 그 외로움도 또한 까닭이 있을 것이라 위안할 뿐이었다. 이때의 기억은 이제는 누군가의 죽음. 사랑하는 이와 영원히 떠 난다는 것 자체로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가 되어 남아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르고 아주 우연히도 곳곳에서 들려오던 전쟁소식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 야 했던 비슷한 아픔들을 안고 있을 누군가를 떠올리며 잊으려 애썼던 그 기억들이 아프게 되살아나고 있음을 발견한다. 대추리에서 명동까지 2006년경이었던가. 내게도 평택 대추리에 미군기지가 들어선다는 소식이 들렸다. 곧이어 이 나라 공 권력이 어떻게 주민들을 살던 땅에서 쫓아내고 있는지에 대한 소식들이 쏟아졌다. 그 중 많은 부분들 이 주류언론들에서 가려졌다.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나름 심각하게 고 민할 수 있는 계기를 던져준 사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폭력적인 상황에서 어김없이 동원되는 것은 군대와 경찰이란 이름의 국가 공권력이었다. 한참 군 입대를 고민하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도 내가 그 안에 있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안에 무언가 알 수 없는 분노와 함께 부끄러움들이 일어남을 발 견했다. 그동안 주입되어 왔던 평화를 위한 군대라는 이미지가 벗겨지는 경험이었다. 더불어 그나마 몇 안 되는 군 입대에 대한 당위성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기도 했다. -

이러한 모습들은 이후에도 여러 곳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목격한다. 용산이 그랬고 현재의 강정마을과 명동의 재개발 구역이 그렇다. 평택의 쌍용자동차가 그랬고 현재의 유성기업과 한진중공업이 그렇다. 충성!! 을 생각하다 입영일자가 나왔다는 소식을 SNS(Social Network Service)에 남겼을 때 누군가 잘 다녀오라는 인사와 함께 “충성!!”이라는 댓글을 남긴 적이 있다. 그 두 글자가 내게는 무척이나 불편한 것이었다. 일상 언 어 깊숙이 녹아들어 있는 군대문화가 이런 것이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특히 나와 가깝다고 여기는 사람들로부터 그런 일들을 겪게 되면 더욱 곤혹스러워 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싶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

나에게 있어서 병역을 거부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인간관계에서 상하관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충성이란 두 글자가 가장 빛을 발하는 것은 군대 조직일 것이다. 하 지만 학교에서도 일터에서도 어디에서든 사람들은 끊임없이 상대방과 나 사이에 상하를 나누고 드러나 4


든 암묵적으로든 복종을 강요하게끔 하지 않던가.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인식에 서 비롯되는 존중이지 이와 같은 강요된 충성과 복종이 아니라 확신한다. 그리고 최근 몇몇 국회의원들이 나서 대체복무제 도입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병역법 개정안이 국회에 발의 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내용 중에서 판정위원회를 만들어 병역거부자들이 군 입대가 아닌, 감옥행이 아 닌 다른 형태로 인간에 대한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들어있음을 보았다. 조금 더 구체적 으로는 복무기간을 현역의 1.5배로 하고 합숙생활을 하며, 노력봉사가 절실한 기관들에 배치하도록 하 는 안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몇 해 전 국방부에서 도입하려다 폐기했던 안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병역거부와 대체복무를 국방의 의무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으로 인정하고 있는 선진국들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 것이다. 그럼에도 한 해에 천여 명에 가까운 이들이 감옥에 있는 한국 현실에서 이렇게라도 공론의 장이 열리게 되기를 기대한다. 진정 중요한 것은 병역필이냐 미필이 냐 혹은 면제냐를 가르는 구도가 아닌, 인간에 대한 헌신을 다양한 시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사회를 희망해 본다. -

Dona la pace signore..

홍원석(홍이) 2011.08.23 입영일, 병무청에 병역거부의사 전달 2011.09.21 경찰조사 2011.10.12 검찰조사 2011.11.10 심리공판(서울중앙지법) 현재 재판 진행 중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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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는 병역을 거부합니다 최기원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loisesprit@gmail.com

국가폭력에 가담할 수 없습니다 대략 3년 전인 2009년 1월 20일 새벽, 불길이 다섯 철거민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우리가 이른바 ‘용산참사’로 부르는 사건입니다.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돈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이들이 그들의 삶을 수탈했고 돈의 하수인이 된 권력이 그들의 생명까지 앗아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오랫동안 함께해 왔던 강남 포이동 266번지 판자촌 주민들의 얼굴, 내가 가르치던 저소득층 공부방 학생들의 미 래가 떠올랐기에 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참사 당일 후배들과 함께 추모집회 에 참여했습니다. 그 현장에서 철거민의 죽음을 공모한 공권력은 전혀 반성의 기미도 없이 방패와 곤봉을 휘둘렀습니 다. 우리는 명동성당으로 쫓겨갔고 주변은 전투경찰로 가득 메워졌습니다. 자정이 가까울 무렵, 한 무리 의 전투경찰이 다 때려 부술 기세로 시민들을 짓밟으며 달려들었고 거기에 한 후배가 말려들었습니다. 전경에게 머리를 심하게 구타당해 곤죽이 된 후배를 근처 병원에서 확인하고 그 친구의 부모님께 연락 을 드렸습니다. 우연하게도, 그 후배의 아버지는 외과 의사였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아들을 수술하는 모 습을 지켜보게 된 것입니다. 미안함, 자책감, 그리고 분노가 제 마음을 지배했고 수술 내내 눈물을 흘려 야 했습니다. 3년이 다 된 지금도 그 광경을 떠올리면 오한이 일고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평범한 삶을 죽음으로 내몬 것도 모자라 추모하는 시민들을 폭도 취급하는 공권력에 깊은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철거민들은 무엇을 잘못했기에 불에 타 죽어야 했던 겁니까? 후배는 무엇이 문제였기에 얻 어맞아 두개골이 골절되어야 했던 겁니까? 군대와 경찰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란 말입니까? 예 전부터 갖고 있었던 공권력에 대한 회의와 의문은 확신이 되었습니다. 오랜 독재의 당사자로서, 또한 노근리와 5.18 등 수많은 민간인 학살의 당사자인 대한민국 군대와 경찰은 21세기에 들어서까지도 그 구태를 청산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권력에는 굴종하고 힘없는 이들에게는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을 평택 대추리에서,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용산에서, 쌍용자동차 공장에서, 그리고 최근에는 영도 의 조선소와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똑똑히 보았습니다. 제가 병역을 거부하는 첫 번째 이유는 현 대한민국 공권력을 국민의 안전보다는 가진 자의 재산과 권력만을 지키는 파수견으로 여기기 때문이며, 그러한 행위에 직간접적으로 참여/동조할 수 있는 군복 6


무는 저의 양심에 반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대학생활 동안 구로에서 오랫동안 저소득 층 공부방을 했고, 장애아동 주말학교에 참여했습니다. 또한 철거민,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장애인, 농 민의 삶과 조금이나마 교감하려 했고 이들이 인간으로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서기 위해 저항할 때 늘 그 자리에 있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늘 우리는 강력하기 이를 데 없는 힘 앞에서 무릎꿇어야 했습니다. 전경의 곤봉 앞에서, 물대포 앞에서, 양보 없는 방패 앞에서 좌절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민중 의 억압과 차별에 저항하던 제가 민중을 향해 총을 겨누는 행위, 시위 진압을 위한 기술을 익히는 행 위를 명령과 복종에 의해 태연히 이행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평화주의자로서의 신념 때문입니다 평생을 농사로 살아오신, 아흔이 되어가는 제 외할아버지는 일제에 징용되어 강제노역을 했고 한국전 쟁에도 참전하여 처절한 고지전투에 투입되어야 했습니다. 큰외삼촌은 베트남에 파병되었다가 심각한 고엽제 후유증을 얻고 아직도 고생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상처는 아직 저, 그리고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동서고금의 전쟁을 살펴보십시오. 전쟁의 원흉인 자들은 권세와 영화를 누리면서도 그 쓰라 린 상처는 평범한 민중들이 다 짊어지는 것이 전쟁이라고 하는 괴물의 본질입니다. 왜 저들의 탐욕에 우리의 삶을 내놓아야 하는 것입니까? 년 이라크 전쟁은 충격이었습니다. 어떤 정당화도 불가능한 참혹한 범죄행위를 동시대인으로서 목격해야만 했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한 성전이라는 이유로, 끝내 발견되지도 않는 대량학살무기가 있다 는 명분으로 수십만의 죄 없는 이라크 민중들이 처참하게 살육당한 최악의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에 한 국정부는 미국을 도와 파병을 결정했습니다. 명백한 침략전쟁에 한국군이 참여했다는 것은, 한국군이 평화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베트남 전쟁 파병에 이어 다시 한번 증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파병은 오히려 증오를 부추기고 탐욕으로 점철된 전쟁을 정당화하고 있습니 다. 왜, 무엇 때문에 김선일 씨는 그 머나먼 타향에서 처참하게 살해당해야만 했던 것일까요. 2003

저는 전쟁없는 평화로운 세상은 총칼이 아니라 평화적 수단으로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천안함과 연평 도의 비극은 오로지 저 위협적인 김정일과 북한 정권에만 책임이 있는 것일까요? 물론 그들 역시 책임 져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역시 되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로지 군사적 수단으로 평화 를 지키려 하는 발상은 마치 불쏘시개를 쌓아올리는 것처럼 위험하다는 것을 보여준 예가 아닐까 합니 다. 좀 더 많은 미사일과 탱크와 군함으로 제2의 천안함 사건, 제 2의 연평도 포격을 막을 수 있을까 요? 양차 세계대전에서 보듯 인류의 역사에서 일시적 안보를 위한 군비의 확장은 더욱 끔찍한 사태로 연결된 사례가 허다합니다. 그리고 그 일시적 안보라는 것을 위해 국민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팽개친 사례 역시 부지기수며, 한국사회 역시 이에 해당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창고에 총칼을 가득 채 워 넣는 것이 아니라 그 총칼을 녹여 어떻게 보습을 만들 수 있을지 궁구하는 것입니다.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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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해군기지 건설은 안보와 국방을 위해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희생되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 습니다. 저는 2007년 이 문제로 강정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이 마을에서, 주 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놀란 것은 친척처럼 가까이 지냈던 마을 사람들이 찬성과 반대로 갈라져 이야기 도 하지 않고 가게도 다른 곳을 이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문제는 결국 해결되 지 않았고, 급기야 공사는 시작되고야 말았습니다. 평화의 섬이라는, 4.3항쟁과 학살이라는 슬픈 역사를 갖고 있는 제주도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는 것도 비극이지만, 다수 주민의 생계를 위협하고 그들의 공동 체를 갈기갈기 찢어 놓은 일상의 비극에 눈물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저는 한국의 군대가 평화를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합니다. 탐욕스런 전쟁 과 기만적인 안보의 본질, 부끄럽고 참담한 파병의 기억, 군사적 대립으로만 안전을 지킬 수 있다는 광 적인 군사주의, 이로 말미암은 일상과 주권, 민주주의 파괴를 묵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평화는 평화 적 수단으로 이룩할 수 있다는 평화주의의 신념을 가진 저로서는 입영하여 군사훈련을 받는 것을 받아 들일 수 없습니다. 사회복무제를 요구합니다 제 앞에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습니다. 제 양심에 반하는 병역의 의무를 이행할 것인가, 아니면 감옥 에 갈 것인가 선택하는 고민의 과정은 정말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저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일정 한 의무를 다해야 함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무의 내용이 기본권을 침해하는 경우 주어진 선 택지가 양자택일의 길 밖에 없다는 사실에 절망합니다. 한국과 비슷한 국제관계에 놓여 있는 이스라엘이나 대만도 대체복무제를 시행하고 있으며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는 국가 중 절반 이상이 대체복무제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처벌하는 국가는 얼 마 없습니다. 현재 한국에서는 800여 명의 병역거부자들이 감옥에 갇혀 있는데, 우리나라를 제외하고는 아르메니아에서 70여 명, 다른 4개 나라에서 4명이 수감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UN조차도 양심적 병역 거부자를 처벌하는 것은 인권규약을 위반하는 것이라는 의견을 냈습니다.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정 부와 법원은 요지부동입니다. 이런 현실에 저는 또다시 좌절합니다. 대안이 필요합니다. 올해 이정희, 김부겸 의원이 대체복무제를 포함한 병역법 개정 발의를 했습니다. 국회에서 진지하게 논의해주시길 청합니다. 덧붙여 대체복무제를 넘는 ‘사회복무제’가 필요함을 감히 말씀드립니다. 대체복무제는 국방의 의무를 대체한다는 의미로, 병역의무의 예외로 인정하는 수준입니 다. ‘사회복무제’는 ‘국방’이라고 하는 좁은 영역을 넘어 공공의 복리를 증진한다는 넓은 의미의 의무를 공동체 성원에게 부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꼭 군이 하지 않아도 되지만 실제로 하고 있는 재해복 구나 대민지원, 공익근무요원등이 하고 있는 업무 등이 여기에 일단 포함될 것입니다. 나아가 교육, 복 지, 의료 등 우리 사회에서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모든 공적 영역으로 확장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신 8


체 건강한 남성’을 대상으로만 했던 ‘국방의 의무’에서 여성이나 신체적 부적합자, 저와 같은 병역거부 자 등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참여할 수 있는 ‘사회공공에의 의무’로 전환하자는 것입니다. 이런 전환이 헌법의 정신에도 부합하고 국방을 포함한 각 분야의 효율도 증진할 수 있다고 봅니다. 국방의 영역은 불가피한 수준으로 최소화하는 노력과 더불어 평화와 공적 참여라고 하는 가치를 중심에 둔 사회복무 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감사드립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1천 명에 가까운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대체복무제가 없는 한국사회는 종교적 이유나 혹은 저와 같은 이유로 병역을 거부하는 이들을 어떠한 예외 없이 교도소로 보내고 있습니다. 집총을 거부하다 구타로 맞아 죽기도 하고, 감옥에서 나오면 다시 입영영장을 보내 또 감옥행을 강제하기도 했었습니다. 반세기만에 양심적 병역거부와 대체복무제가 사회의 화두가 된 것도 이들의 굳은 믿음과 희생 끝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마 제가 ‘병역거부’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면, 끙끙 앓다가 ‘그래도 군대는 가야지’하면서 입대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 이나 버트란드 러셀 같은 지성들의 병역거부 주장도 저에게 큰 용기를 주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거인의 무등을 탄 난쟁이입니다. 평화의 한 길을 걸어온 수없이 많은 이들이 있었기에 그 길을 걸을 수 있는 제가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해방 이후 평화를 희구하며 병역을 거부한 이들은 1만 명이 넘고, 이들이 산 징역은 3만 년에 육박합니다. 이들이 감옥에서 보낸 3만 년의 시간이 전쟁없이 평화로운 3 만 년의 미래로 바뀌리라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전쟁에서 죽어간 이들, 잔인한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된 이들, 병역거부로 목숨을 잃 은 모든 이들을 추모하며 저는 이 자리에서 병역거부의 의사를 밝힙니다.

최기원 2011.11.01 입영일 국방부 앞에서 병역거부선언 기자회견 현재 경찰조사 대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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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단상 안지환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서울남부교도소 수감 중

이사를 일주일 앞두고 있다. 영등포구치소 1500명, 영등포교도소의 900명 대 인원이 시 외곽의 서울 남부구치소와 교도소로 이전하는 대사건이다. 원래 계획은 올해 5월 중의 이전을 목표로 하고 있었지 만, 연기-연기-연기의 시간을 지나, 10월 말 드디어 하는 것이다. 나는 이사 같은 것은 정말로 싫다. 익숙했던 낡은 공간을 버리고, 모든 구질구질한 생의 찌꺼기들을 상자에 쟁여 다른 곳에 옮겨 또 풀어헤치는 그 모든 과정이, 생각만으로도 막막하고 짜증스럽다. 그저 피하고픈 일이다. 성격의 문제인지 무어인지 모르겠다. 다만 이사는 싫다. 지금 나의 유일·최대의 꿈은 여생 이사 걱정할 필요 없는 집에서 사는 것이다. 그렇게 말해도 큰 과장은 아닐지도 모른다. 부끄러운 일이다. 몇 년 전인지 모르겠다. 고향집이 있는 전포1동에 재개발 이야기가 다시 새어나온 일이 있었다. 재개 발 이야기가 꽤 전부터 있었던 동네이고, 그 덕분에 그 가격에 그 정도의 넓은 집을 얻을 수 있었던 덕도 있었다. 처음 그 집으로 이사갈 때 나는 무척 기뻤다. 그간 지냈던 반지하 비슷한 산복도로 일대 의 집들은 그 풍광을 사소설잠의 소재로 쓰기에는 더없이 좋은 어두침침한 곳이었다만, 너무나 낮고 좁아서 그것에 슬퍼하는 부모를 쳐다볼 면목이 없었다. 아버지의 책들을 버리고, 어릴적 우리 오누이의 장난감들과 어린이 도서들을 버리고, 어머니는 좁아지는 이사의 과정들 속에서 버릴 것과 버리지 않을 것을 구분해내는 - 가족의 ‘그것을 버리는 슬픈 얼굴'을 모른 체 외면해야만 하는 더욱 더 슬픈 여인의 마음을 삼키며 - 고역을 해내야 했다. 아버지는 또 얼마나 슬픈 얼굴을 했던가. 그것은 결코 숨겨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집은 지상에 있는 형태였고, 넓었으며! 목재로 마감된 특정 시대의 나름의 로맨스가 묻어있는 건축물이었다. 거기에다 옥상까지 갈 수 있었는데! -옥상은 늘 세입자가 아닌 건물주만의 전용지였다황령산 산턱의 옥상에서 내려다보는 부산 시내 전경과, 소위 태평양 고개께인 그곳에서 멀리 보이는 항구의 풍경은 썩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다. 나는 때때로 그 옥상에서 해풍이 대륙풍으로 방향을 바꾸는 새벽을 보냈다. 늘상 가난함이 마치 고통인 것만 같아하던 가족에게 이 집은 여유를 주었고, 새소리나 뱃고동 소리, 햇살이 드는 창문은 내게 그나마의 죄의식을 감해주었다. 10


언제였던가, 고교의 친구를 무슨 일로 집에 데려온 일이 있었다. (부모님은 제대로 대접해줄 수 없는 형편의 집으로 친구를 데려오는 일을 늘 우려했다) 나는 이사한 지 얼마 안된 시점의, 무언가 들뜬 마 음으로 그에게 나도 모르게 “집 엄청 넓제?” 하고 기쁜 마음으로 말한 적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튀어 나온 유일한 말의 기억이다. 나는 그 때 그 말을 일생 후회하고 있다. 다니던 고교의 동문들은 하나같 이 어려운 형편이었다. 지금도 그 때의 내 그 말이, 마치 부잣집 놈이 뭣도 모르고 재력 자랑을 하는 식으로 그에게 대뜸 상처를 준 것이 아닌지 하는 걱정이 든다. 아직도 후회스런 일이다. 내게 그 집은 그만큼 너무나 좋았던 것이었으리라. 여하간에 재개발 이야기가 다시 나올 때, 나는 응당 이사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언제 영장이 나오고 언제 감옥에 들어갈지 모른다는 혼자만의 불안 속에 지내던 때였던 것이다. 장손 없이 이사를 해야 하게 되는 부모의 모습을, 심경을 - 그것도 아들은 감옥에 있는 중의 - 나는 도저히 상상할 엄두도 낼 수 없었던 것이다. 지키고 싶었던 것들은 무너져내렸다. 누군가에게 이사는 더 비싼 아파트, 더 비싼 아파트로의 재산 증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와 내 주변의 세계에서 이사는 늘상 무너지는 것으로부터의 쫓겨남이었 다. 어떤 집들은 주차장이 되고, 어떤 집들은 도로가 된다. 어떤 집들은 캐슬이니 하는 아파트가 되고, 어떤 집들은 공원이 된다. 어떤 집들은 몇 년째 공터가 되고, 어떤 집들은 군사기지가 된다. 대체로 내가 보고 경험한 이사들은 그런 쫓겨남이었다. 이사란 것이 썩 달갑지 못하는 태생적인 이유 일지도 모르겠다. 이번의 교도소 이사라는 것도 내게는 그런 씁쓸한 기호를 불러일으킨다. 교외의 새로운 교도소 부지 근처에는 SH공사 등이 대규모로 설립한 임대아파트 단지가 있다. 행정가 의 논리란 이렇듯 간편한 것이다. 새 교도소의 건설을 맡은 것은 SK건설이었던가, 1500명 구치소 건설 을 하면서 접견실은 겨우 4개, 무슨 창고는 없고 등등의 설계 실수 탓에 초반 이사가 미루어졌었다. 정 작 생활할 교도관과 수용자라는 인간들은 고려하지 않은, 거대 전산 기계적인 현대식 자동 시스템의 교도소를 만드는 데에만 몰두한 까닭이다. 행정주의, 관료주의라는 것은 현장의 인간을 체계로부터 괴 리시킨다. 부품으로 사용될 따름이다. 조금의 사각지대도 없는 꼼꼼한 CCTV 시스템은 많은 것들을 생 각하게 만든다. 최첨단 시스템은 삼성이 맡은 것으로 들었다. 이건 그 자체로 우스운 디스토피아다. 최후까지 “내년으로 미뤄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임대 아파트 입주자들의 반발이 거세지 기 전에 일단 이전을 해야한다는 위기감이 있었다고 들었다. 설계 미스의 엉망인 시설의 리모델링도 끝났다고 들었다. 마지막까지 준공을 못하고 발목을 잡은 것은, 그러나 다른 이유가 있었다. 개발 금지 구역에 (교외이고, 아마도 그린벨트가 있었던 듯) 직원용 테니스장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환경단체의 반 발이 있었고, 이것의 시정을 요구하는 압력이 있는 상황에서 준공 허가를 행정 당국이 내주기 어렵다 는 것이었다. 결국 이사 결정이 난 것을 보면 유야무야 넘어갔으리라 예상된다. 이삿짐을 쌀 때는 3주 동안 모았던 박스를 사용했다. 라면 박스, 빵 박스, 사과 박스, 소세지 박스, 세 제 박스 등등. 박스 구하기 어려운 이곳에서 26일은 합심하여 박스를 모았다. 이삿짐을 쌀 때는 사과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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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가 제일 인기 있었다. “이토록 튼튼하기에 비자금이라던가 뇌물에는 역시 사과 박스를 애용했군”, 그런 이야기들을 하면서 모두들 사과 박스 쟁탈에 나섰다. 그러던 것이, ‘본격 짐싸기의 날’에 모두 소용없어졌다. 구질구질하게도 박스떼기 몇 개 쓰는가로 다 투고 기분 틀어지던 우리에게, 대량의 아주 튼튼한, 그것도 미사용의 박스가 지급된 것이다. 거기엔 “박 스는 얼마든지 더 있으니 마음껏 가져다 쓰라”는 추신도 더 붙었다. 피에스, 박스는 양껏 소모하시라. 박스에는 현대택배의 로고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한껏 두터운 위용을 자랑하는 신삥 박스의 탑 앞에 서 -그것도 접힌 채 쌓인 것이 높이를 자랑하는-, 그 아우라 앞에서 여하간 그간의 구질구질했던 모두 들 압도되었다. 나는 현대 택배의 로고에 한숨짓고, 그 새하얗게 표백·코팅된, 사과 박스보다 백만 배쯤 단단하고 짐짓 날카로와 보이는 박스의 어마어마한 수량 앞에서 이렇게 한없이 새것으로 지급·소모될 박스를 위해 나무는 얼마나 잘려나갔는가를 상상하기에 이르렀다. 이 교도소에는 거대한 나무가 있었다. 나는 처음 그 나무를 보았을 때부터 이곳이 헐릴 때 이 나무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를 걱정해왔다. 나무의 밑둥은 세 아름을 훌쩍 넘길만큼 거대했고, 그 아래 벤치 에 누워 올려보면 횡으로 퍼진 가지와 잎이, 하나의 나무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숲의 천장을 올려다보 듯이 횡으로 넓게 퍼져 큰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버드나무. 왕버드나무인지 수양버들인지 그런 것 까진 잘 모르겠지만, 이런 무식한 나이지만 버드나 무라는 것만큼은 안다. 내게 버드나무는 어떤 고향의 이미지, 조국의 강가의 이미지, 마을을 수소하는 신성의 이미지. 버드나무 앞에는 M동지가 지낸다는 12사가 있었다. 때때로 주말 운동을 나가 (버드나무는 대운동장 에 있다. 내가 있는 공과는 대운동장으로 토요일마다 운동을 나간다)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누워 흔들 리는 늘어진 나뭇잎들 사이로 하늘을 보면서 12사를 보았다. M의 이름을 불러보기도 했으나, 몇 달 동 안 한 번도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이사 준비로 출역이 정지되고, 교도관 부족으로 운동 스케줄이 달라지면서 지난 한 주 동안 매일 이 대운동장으로 나갔다. 그러던 와중에 드디어 M과 마주쳤다. 가까이서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 었다. 헤어지면서 또 이렇게 나오다 보면 이사 가기 전에 몇 번 더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 것이 마지막이었다. 이제 운동은 사동 옆의 담장 아래에서 진행한다. 버드나무도 이제는 볼 수 없을 지 모르겠다. 내내 버드나무의 안위를 걱정하던 나는 얼마 전, 교도관에게 나무는 어찌 될지 물어본 일이 있다. 나 무에 대해 의외의 이야기를 몇 가지 들었다. 지금의 거대한 크기가 실은 벼락을 한 번 맞고 반쯤 타 죽고서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 예전엔 이보다 더 컸다는 것이다. 백년 이상은 된 고목이라는 이야기, 그리고 아마도 나무는 구나 시, 혹은 국가에 재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베지 는 못할 것이란 이야기였다. 작은 나무들은 기실 벌써 조경업자들이 파서 뿌리를 흙과 함께 씌워 묶어 서는 가지고 가던 중이었다. 20년 동안 이 교도소에서 근무했다는 한 여직원은 나무를 뽑아가는 것이 무척 쓸쓸했다고 했다. “우리집 나무야, 왜 뽑아가…” 하는…. 늦게까지도 꽃을 피우던 작은 장미나무도 반나절 사이에 가지가 모두 절단되고 뿌리가 들어내진 채 12


땅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저 꽃을 가지고 가서 접견을 온 애인에게 선물해주면 좋으련만…. 영등포교도소는 무려 1949년에 지어졌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도 전에 지어진 건물이다. 이정도면 근 현대사 유적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처음 이감 와서의 감회록에서 이 낡은 건물들의 아련한 균열들과 색조들을 찬탄한 이후로, 나는 늘상 이 공간에 애착을 가져왔다. 예의 고목 버드나무 곁, 12사 옆에는 아주 아름다운 저수탑도 있다. 보안과 건물, 사동도 운치가 있지만, 이 저수탑과 고목이 있는 대 운동장 일대는 영등포교도소 최고의 비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당으로 사용하는 창고형 건물의 회벽 질감의 하얀 외벽과 그 입구의 옛날식 아치하며, 내게는 교도소의 곳곳이 장관이다. 전에도 이야기한 일 있지만 식생도 다양하다. 빈터란 빈터에는 모두 온갖 풀꽃이 핀다. 베어내도 조 만간 못 보던 새 꽃이 되고, 나비가 떼지어 너울거리며 날아다닌다. 저 흙에 얼마나 많은 종류의 씨앗 들이 숨어 있을지, 얼마나 많은 곤충들의 알이 숨어 있을지 모를 일이다. 어쩌면 49년 이후 고립된 채, 그 시절의 식생을 간직하고 있는 생태계일지도 모른다. 시골 출신의 노인에 의하면, 그 풀들 중에 높이 뻗던 한 그루 풀대는 오동나무라고 했던 일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개망초와 쑥부쟁이도 아름답다. 얼마 전부터 보일러를 가동하기 시작했는데, 그 난방이 얼마나 따뜻한지 모른다. 이토록 따뜻한 방에 서 지내는 것은 너무나 오랜만이랄까, 구인(九人)의 체온 탓에 따뜻한지도 모를 일이지만, 난방이 좋은 것은 확실하다. 그 날 밤에 문득 생각했는데, 역시 이 건물이 너무나 아까운 것이다. 철창과 철문을 걷 어내고 어느 정도의 인테리어 리모델링만 하면, 요즘의 소위 도시형 생활주택으로 공급하기에도 전혀 무리가 없는 수준이 아닌가 생각했다. 청킹맨션 못지않게 운치 있는 맨션이 될 것이다. 사방의 녹지는 그저 내버려두기만 해도 자연 공원이다. 둘레의 15척 담장만 허물고 (감시탑 같은 것은 나름의 운치가 있어서 아까운데…) 조금만 손보면 괜찮을텐데. 정히 공원으로 만들어야겠다면, 그럼 개중에 49년에 지어진, 그리고 건축사적으로 역사성 있는 몇 개 건물동이라도 추려내어 살려서 활용할 방안이 없을까. 저수탑과 교회당이라도…. 누구에게도 이러한 의 견을 말할 방법 없으면서 혼자 그런 생각을 했다. 운동장을 둘레 걸으며 산책하면서 “요새 생각했는데…” 하며 이야기를 해보면 취지는 공감하지만 한 국 정서상 -무조건 파괴, 무조건 재건축의 개발·재개발 지상주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답변만 들었다. 아 아- 부디 버드나무라도 살려주길. 나는 때때로 둥치에 손을 대고 오르내리는 개미들에게 나도 같은 나 무의 줄기인 양 있어보았다. 노목님, 부디 살아남으십시오. 낡은 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요즘의 사람들은 전혀 애석해하지 않는 것일까. 나의 어린 동무이자 동지인 박모씨는 10대 시절 애인과 함께 곧잘 아현이라던가 하는 재개발 철거 예정지에 데이트를 다녀 오곤 했다. 사진을 찍고, 그 곳에서 무언가 주워오기도 했다. 나 또한 부산의 고향집에 가면 지금은 기 지가 된 (아니 아직도 기지가 되진 못하고 몇 년째 지지부진한 상태지만) 한 마을에서, 부숴져가던 집 들 속에서 건져온 무엇인가가 가방에 든 채 처박혀있다.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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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이사를 거듭할 때, 나는 모든 인형과 장난감들을 버리게 되었을 때 한 인형을 세탁기 안에 몰래 숨겨 살려낸 적이 있다. 그건 파파스머프 인형이었다. 수염도 떨어지고 입도 떨어지고 눈도 망가 졌다. 곳곳이 찢어졌고, 영화의 클리셰한 챠일드후드가 담긴 테디베어 인형과는 거리가 멀다. ‘스머프 인형’이라는 것은 존재 자체가 미묘히 그로테스크한 것이다. 하필 파파스머프라니. 나이가 들고 들어도 스머프 캐릭터가 어떤 역사적 인물들을 표의하는지 전해듣고서는 무척 웃겨했던 기억이 난다. 출소하 면 눈을 새 것으로 바꿔달고 스머프 인형을 가져올 생각이다. 창문에서 (나는 2층에서 지내고 있다) 담 너머 건너보이는 맞은편 구치소의 국기게양대에서 깃발이 내려졌다. 법무부기, 태극기, 경비교도대기, 세 개의 깃발이 내려진 것이다. 구치소는 교도소보다 일주일 먼저 이사를 갔다. 친정집 (나는 구치소에 지내다 앞집 교도소로 이감을 왔다)에 지내는 태준형, 인연이 닿았던 구속 동기인 증인 친구들 등등은 이미 이사를 떠난 것이다. 전국의 교정시설로부터 버스와 병력이 총동원 될 예정이라고 했었다. 나는 군경까지 대동된다던 대규 모의 보안 속 이전의 대 사건이 아마도 시끌벅적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신문에도 TV뉴스에도 구치소 이전 소식은 없었다. 부산의 여동생이 시내에서 교정 버스 5대의 줄지어가는 모습을 며칠 전에 보았다고 했다. 오빠가 이야기하던 교도소 이전에 동원되는 차량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더랬다. 다음 주면 우리도 모두 이감될 것이다. 썩 달갑지 않다. 여하간 이사라면 지긋지긋하다 이말이다. 호 지명은 십수차례 이감 뺑뺑이를 돌았다고 한다. 정확히 몇 번인지는 현대택배 박스에 넣어둔 김남주 시집 안에 쓰여 있어 지금은 모르겠다. 그랬던 그의 사정에 비하자면 내 쪽은 무척 안일한 편일 것임 에 틀림없다. 그러나 역시 이사라는 것은 늘상 타의에 의한 일이었다. 불유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떠난 이후 이곳은 또 무너져내릴 것이다.

안지환 2010.11.30 입영일, 병무청에 병역거부의사 전달 2010.12.20 경찰조사 2010.12.29 검찰조사 2011.02.17. 징역 1년6월 선고, 법정구속, 영등포구치소 수감 2011.06.20. 서울남부교도소(구 영등포교도소)로 이감 현재 서울남부교도소에 수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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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소인사라기보다는 그냥 김영배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spcommune01@naver.com

나오고 나서 어느덧 한 달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안에서는 그리도 느리게 지나던 시간들이 나오자마 자 쏜살같이 흘러간다. 안에 있는 동안 함께 걱정해주고, 찾아와주고, 기다려준 이들을 찾아가 인사를 하고, 고기와 술을 얻어먹으며 일주일을 보내고, 그동안 변한 것들에 적응하며 내 몸에 익히는데 또 일 주일을 보내고, 그렇게 한 달이 흘러갔다. 감옥 안에 있는 많은 걱정을 하며 찾아와 주시던 부모님을 보며 내 선택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 같은 것들은 많이 누그러졌다 믿었다. 출소 한 날 저녁엔 아버지께서 케이크와 와인까지 사오시며 축하를 해주셨기에 그런 것이라 확신을 했지만, 가끔씩 들리는 탄식과 속앓이는 두 분의 마음에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남아있다고 말해준다. 부모의 마음을 너무 간단히 여겼던 것일까?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두 분께 잘 해보려 하고는 있는데, 잘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후원회장과 함께 이런저런 일들을 챙겨준 애인은 정말 반가워하지만, 너무 바쁘다. 평화캠프라는 단 체에서 상근을 하는데 하는 일이 많아 데이트를 하자면 사무실에 갔다가 일을 도와주어 조금이나마 빨 리 끝내게 돕고 저녁식사를 하거나 커피 한 잔 마시러 가는 것 정도다. 그래도 나도 그녀도 그 시간이 행복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은 어느 때고 손을 잡을 수 있으니까. 사실 나오기 전에는 모든 것이 반갑고 즐거울 것이라 생각했다. 1년 3개월 동안 하지 못하고,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이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막상 누군가를 만나고, 무언가를 먹고, 해도 처음에만 그럴 뿐 이고 곧 익숙한 느낌이 들어 어색한 괴리감이 든다. 마치 엊그제 이렇게 있었던 것 같은 느낌에 지난 수감시절의 일들은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조금은 더 반갑고, 더 즐거웠으면 했는데 그렇지 않은 것에 잠시 속상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즐거운 하루하루다. 가기 전에 사용하던 폰에 문제가 생겨 이참에 스마트폰을 샀다. 스마트폰의 지존이라는 아이폰에는 아직도 적응 중이다. 웬만한 것들은 다 익혔다고 생각하다가도 끊임없이 새로운 뭔가가 튀어나온다. 한 달 여를 쉬면서 이제 무엇을 할 지 고민하며 찾고 있다. 사회당 서울시당에서 계속 상근을? 서울 의 한 지역에서 공동체를? 사람연대에서 상근을? 이런저런 고민들을 하는 것이 막연히 앉아서 혼자 하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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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것보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하니 이것도 뭔가 진행이 되는 느낌이다. 앞으로 할 일들이 마냥 기대가 되고 설렌다. 이것도 요즘 즐거운 내 일상이다. 한 후배가 또 병역거부를 한다. 이것도 기쁜 일이다. 감옥에 가기 전에 대체복무제가 도입되더라도 군대에 가지 않으려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듣기 좋은 말을 했지만, 사실은 나 하나가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군대에 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그 마음을 표현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굳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잠시(?) 고된 생활이 있겠지만, 그래도 더 많은 이들과 평화를 이야기하고, 사람을 이 야기하며 군대를 거부하기를 바란다. 쓰고 보니 안에 있는 동지들을 약올리는 글이 된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지만, 나오니 이렇더라~하는 느낌을 전해주고 싶기도 했다. 모쪼록 모두 건강하게 남은 시간을 잘 보내고, 손 맞잡고 같이 인사하는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걱정하고, 함께 해준 모든 분들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녀왔습니다. ^________________^”

김영배 2010.03.02 입영일 2010.03.04 병역거부선언 기자회견 2010.04.13 경찰조사 2010.06.24 징역 1년 6월형 선고, 법정구속, 영등포구치소 수감 2010.08.31 영등포교도소(현 서울남부교도소)로 이감 2011.09.30 서울남부교도소에서 가석방 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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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 합헌결정 외 여옥 | 전쟁없는세상 책임활동가 + yo1004@hanmail.net

헌법재판소 병역법 합헌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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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8월 30일 헌법재판소는 병역거부자들을 처벌하는 조항인 병역법 88조 1항과 향토예비 군설치법 15조 8항에 대해 7대 2로 ‘합헌’ 결정 을 내렸다. 병역거부 연대회의는 선고 직후 기 자회견을 열고, 그동안 여러 유의미한 사회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헌법재판소가 7년 전보다 더 후퇴한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규탄했다. 특히 지나친 국가안보에 대한 우려와 병역거부권이 국제인권조약에 명문화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국 제법 존중원칙을 위반한 것이 아니라는 부분에 대해서 강력히 비판했다.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 정으로 사법부에서의 논의는 일단락이 되고, 병 역거부자들에게는 여전히 감옥이라는 선택항만 이 남겨지게 되었다. 헌법재판소의 선고를 기다 리며 재판을 연기해온 이준규씨를 비롯한 많은 병역거부자들이 계속 수감되고 있다. 2011

병역법개정안 또 발의, 국회논의촉구 기 자회견 열려> <

지난 7월에 이어 18대 국회에서 또다시 병역거 부자들에게 대체복무를 허용하는 병역법개정안 이 발의되었다.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은 비록 헌법재판소에서는 병역거부자 처벌을 합헌이라 고 결정했다고 하더라도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 체복무제 도입은 인권을 옹호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범인류적 요구이자 반드시 실현되어야 할 헌법적 요구라고 하며 법안발의 취지를 밝혔다.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과 민주당 김부겸 의원 은 9월 15일 국회에서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대체복무를 인정하는 법안의 국회심의를 촉구했 다.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나라가 인권 보장을 논할 수 없고, 국제인권규약과 국제인권 기구의 권고를 무시하는 나라가 선진국을 논할 자격이 없다면서 현재 발의되어 있는 두 건의 병역법 개정안과 향토예비군설치법 개정안(이정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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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의원 대표발의)의 조속한 심의와 의결을 촉구 한 것이다. 18대 국회의 임기가 얼마남지 않은 상황에서 얼마나 논의가 진행될 수 있을지는 확 신할 수 없지만, 병역거부를 둘러싼 그동안의 사회변화와 더불어 제도개선의 근거가 충분한만 큼 유의미한 논의와 진전을 기대해본다.

집속탄금지협약 2차당사국회의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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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열린 집속탄금지협약 제2 차당사국회의에 3명의 활동가(가람, 아침, 여옥) 가 시민사회영역 집속탄금지연합CMC의 일원으 로 참가했다. 집속탄금지협약은 2010년 8월 1일 발효되어 작년 11월 라오스에서 1차 당사국회의 를 개최했고, 올해 9월 레바논에서 열린 2차 당 사국회의에는 120여개가 넘는 국가의 정부관료

와 66개국의 시민사회 활동가들이 모여 비인도 적이고 민간인의 피해가 많은 집속탄을 없애기 위한 논의를 진행했다. 9월 11일부터 17일까지 현장방문, 개회식, 당사국회의 등의 일정이 진행 되었으며, 시민사회영역에서는 공식회의 전 사 전미팅과 당일 세션시작 전 브리핑, 사이드이벤 트, 전시 등을 통해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고, 어 떻게 정부를 설득할 것인지 의견을 나누는 자리 를 가졌다. 특히 매일 점심시간에 열린 사이드 이벤트들은 집속탄과 관련한 여러 주제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자리였는데, 한 국의 집속탄관련 최신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한국참가팀은 돌아와서 10월 7일 보고회를 열어 2차당사국회의 내용과 새로운 정보를 공유하고 앞으로 한국에서의 집속탄반대활동에 대해 함께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제 회 평화군축박람회 “지금 평화를 이 야기하자”> < 2

년 10월 18일-23일까지 서울국제항공우주 및 방위산업전시회 2011(ADEX 2011)이 성남 공군비행장에서 개최되었다. 이중 주말을 맞아 일반 시민에게 공개되는 퍼블릭데이인 22-23일 에 맞추어 평화군축박람회 준비위원회는 2011 평화군축박람회 “지금 평화를 이야기하자”를 보 신각 앞 광장에서 개최했다. 이번 박람회에는 평화단체들뿐만 아니라 인권, 환경, 대북지원 단 체들도 함께했고, 국회의원 33인이 공동주최로 참여했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린 평화군 축박람회는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증가되고 있는 군비와 무기도입 및 개발에 대해 문제제기 하고 정작 뒷전으로 밀려난 시민의 ‘안전’과 평 화를 위한 투자를 촉구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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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번 평화군축박람회는 몇 백억의 예산을 들여 대규모로 진행되고 있는 방위산업전시회가 치명적인 파괴력과 정밀성을 갖춘 각종 무기들 의 거래와 생산 및 개발을 촉진하면서, 그것이 필연적으로 야기하고 조장하는 분쟁과 무장갈등 의 문제, 인명살상의 문제, 군비경쟁의 악순환 문제를 외면하고 있는 것을 비판하며, 방위산업 전시회 개최 시점에 맞춰 열리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열리는 평화군축박 람회는 시민들이 평화와 군축에 공감할 수 있도 록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타당성없이 개발, 수입되는 각종 무기사업, 교육이나 주거, 의료 등 복지를 위한 예산을 희생시켜 적정규모 이상 책정되는 국방예산의 문제점, 제주해군기 지문제와 핵발전, 방사능 문제 등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판넬 전시를 중심으로 어린이 체험프 로그램, 영상마당, 시민토론 그리고 음악회와 연 극, 영화상영 등 문화행사들이 동시에 열렸다. 특히 첫째날 주제인 핵 문제, 둘째날 주제인 제 주해군기지문제에 맞추어 관련 영화상영, 이어 진 감독, 관련활동가와의 대화는 지나가던 많은 시민들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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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의 풍경 -

헌법재판소병역법선고방청후기

숲이야 | 만행 협동조합의 조합원 + jihyeda@gmail.com

년 8월 30일. 헌법재판소라는 곳에 처음으로 다녀왔다. 각종 사건에 대해 위헌/합헌 결정을 내 리는 곳인가 보다. 사실 헌법재판소에 가보기 전까지 나에게 법은 먼 나라 이야기 같았고,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헌법재판소라는 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었다. 병역거부와 예비군 관련해서 선고가 있는 중요한 날이라 헌법재판소 참관을 위해 오전부터 움직였다. 병역거부를 지지하 는 한 사람으로 선고결과를 지켜보고 싶었다. 2011

위헌소송이 청구되었던 법 조항은 향토예비군설치법 15조 8항, 병역법 88조 1항 1호 였다. 참관증을 받기위해 기다리던 중에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들은 예비군은 위헌선고가 내려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다고 했다. 헌재 앞 담벼락에서 한 시간 가량을 기다렸을까, 참관증를 받고 들어간 헌법재판소 풍경은 엄숙했고 너무 갑갑한 나머지 살벌함이 느껴졌다. 모자를 벗어야하며 재판관들이 들어올 때 일 동 기립을 해야 하는 관례는, 권위는 바로 여기, 헌법재판소에 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 다. 판사들은 몇 가지 사건에 대한 위헌/합헌 선고를 내렸다. 말, 말, 말들이 이어졌다. 예상대로 병역거부자들이 형사처벌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대해 합헌 결정이 나왔고, 병역거부를 한 경수는 판결을 듣고 화가 나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으려고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 날에 병역거부, 예비군 관련 선고 뿐 아니라 4대강 사업과 관련해서 경상남도가 정부(국토해양부)에 사업대행권을 회수해간 것에 반발해서 소송을 건 것과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과 관련한 선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에 관한 선고도 있었다. 하나의 선고 를 내릴 때마다 결정을 내린 이유를 설명하는 말들을 들어야만 했다. 아무리 애를 쓰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려고 해도 재판관들이 하는 말을 전부 이해할 수 없었다. 병역거부, 예비군, 4대강사업과 관련 된 선고결과가 내 기대와는 다르게 나오는 걸 지켜봤다. 이런 사안들에 법에 근거하여 판결을 내리는 저 사람들 -재판관-이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권한을 얻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내가 보는 그들은 심장이 없어야 되는 사람처럼 보였다. 어떻게 한사람, 한사람의 인생이 걸린 병역거부와 예비군 사건에 대해 책임지지는 않으면서 담담한 어조로 합헌의 이유에 관한 말들을 쏟아낼 수 있는 것인지.. 20


국가 조직 아래에서 개인의 인권이나 기본권 이 라는 것은 “헌법”을 통해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양심적 병역거부가 국가 안보를 이유로 허용이 되지 않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사는 사회가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60 년이 지나도록 휴전상태로 지내오면서 군사주의와 는 도저히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황필규 목사님이 병역거부 선 고 후 기자회견에서 한국 사회가 문제임을 보여준 선고결과였다는 이야기를 하셨을 때 깊은 공감이 되었다. 병역거부자를 형사처벌하는 병역법 조항에 대해서는 이미 2004년에 합헌결정이 내려진 바 있 다고 했다. 이전 상황들은 잘 몰랐지만 이번 선고결과가 2004년에 비해 대체복무제에 관한 언급조차 없어 후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예비군만이라도 위헌선고가 내려졌으면 좋겠다고 기대하던 이들은 허탈해 하는 것 같았다. 이번 선고결과로 인해 또 얼마나 많은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수감자가 되어 야 하는 걸까. 헌법재판소 참관을 하고나서 들었던 한 가지 생각은 ‘헌법재판소는 도대체 뭐하는 곳인가? 왜 존 재하는가?’였다. 판결을 내리는 이들이 앞에 있는 단상에 더 높이 앉아있고 재판정을 흐르는 엄숙한 분위기는 숨이 막혀 터져버릴 것만 같았고 해설 불가능한 외계어를 써가며 권위를 세우는 듯한 판결 문들이 인상적이었다. 헌법재판소 존재 자체에 무지막지한 권위가 부여되어 있는 것 같았다. 또한 ‘결정을 내리는 저 사람들에게 결정권을 준 것은 누구인가? 어떻게 재판관이란 사람들이 법을 잣대로 이런저런 사안들에 대해 결정을 내릴 권한을 갖게 되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헌법재판소 의 위헌/합헌 선고는 너무 어려웠고 우스웠다. 나중에 알고 보니 평소에 사용하는 용어들에도 법률적 의미가 달라지는 것들이 있고 재판관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그러한 법률용어들로 이루어진 판결문들이 었기 때문에 그들의 언어가 나에게 외계어처럼 느껴지는 일이 일어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들이 그토록 어려운 언어를 써가면서 내린 판결로 수백 명의 사람들의 인생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이 화가 났다. 법은 무엇이고 정의는 무엇일까. 화가 나면서도 법이라는 것이 사회체제를 형성하는데 기 본적인 틀이 되고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참관을 하며 초긴장, 집중 상태로 재판관들의 말을 듣느라 기력을 소진해버렸다. 재판소를 나와 병 역거부를 지지하는 이들의 기자회견까지 끝나니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그날 보고, 듣고, 숨쉬던 헌법 재판소의 풍경은 잊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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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파는 세상, 우리가 사는 세상 - 2011

방위산업전시회에다녀와서

성민 |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 peacedrip@gmail.com

월 20일 목요일, 성남 서울공항에서 열리는 방위산업전시회(서울 항공우주 및 방위산업 전시회 에 다녀왔다. 주최측 설명으로는 30개국에서 약 300여개의 업체나 기관들이 참여하는 큰 행사라고 한다. 성남 태평역에 내리면 제공되는 셔틀버스를 타고 아침 일찍 전시회장으로 향했다. 하루종일 정신 차리고 돌아다녀야 볼 만큼 행사장은 크고 넓다. 전시는 크게 외부전시와 내부전시로 나뉘는데 내부에 서는 방위산업 회사들이 부스를 차려놓고 자사 제품이나 기술 등을 홍보하고 밖에는 실물크기의 비행 기나 탱크 등이 전시되고 에어쇼가 펼쳐지는게 대략적인 풍경이다. 10

2011)

내부 전시 배치 살피면 한국 국방정책 흐름 볼 수 있어 내부전시관으로 먼저 발걸음을 옮겼는데 전시의 배치를 보면 한국의 국방정책의 흐름을 대충 느낄 수 있다. 입구를 들어가면 가장 중앙에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수출하려고 하는 T-50 고등훈련기를 개조한 KA-50과 국산헬기 수리온이 전시돼 있다. 그 왼편으로는 역시나, 국내 최대의 기업인 삼성의 부스가 커다랗게 차려져 있다. 삼성 테크윈과 삼성 탈 레스라는 두 개의 자회사가 나란히 전시를 하고 있고, 한편에는 무대까지 만들어서 공연과 퀴즈 등으로 관심 을 모으고 있었다. 삼성은 육군의 주 전력이며 연평도 사태 때 입에 오르내렸던 K-9자주포를 비롯해 함대포 와 통신장비 등을 생산하고 있다. 전시 규모나 방식 등 에서 ‘역시 삼성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 외에 두산과 한화 풍산과 현대 등 국내 유수의 대기업 들은 다 한 자리씩 크게 차지하고 각종 무기와 군사 삼성부스에서 펼쳐지는 공연을 관람객들이 구경하고 기술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그냥 한국의 대기업은 전 있다. 삼성의 부스는 입구 왼쪽 가장 좋은 곳에 위치 해 무기전시, 시뮬레이션 체험, 공연, 영상 등의 다양 부 다 방위산업체 한 개씩은 갖고 있다고 보면 편할 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제공되는 간식도 가장 듯 하다. 어느 한 기업이 옳고 그르다 할 수 없는 한국 좋아서 원두커피와 과자, 주스 등을 먹을 수 있었다. 사회 전반의 현상일 것이다. 외국계 기업들이 주로 부스를 차리고 있는 다음 홀에서는 차세대 전투기 사업의 경쟁자인 보잉의 22


와 록히드마틴의 F-35 그리고 유로파이터 타이푼이 경쟁하듯 크게 전시를 하고 있었다. 비행기 모형과 각종 홍보 영상 등을 보여주며 직접 조종석에 앉거나 시뮬레이 션 조정을 체험할 수 있게 하고 있었다. 특히 나한테는 시선 한번 안주면서 공군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 친절하게 말을 걸거나 설명을 해주기도 했다. 그 외에도 SAAB, 허니웰, IAI, 텍스트론 등 해외 유수의 기업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상품을 홍보하고 있었다. 이 전시회에서 풍산 부스 앞에 진열된 각종 탄약. 풍산은 잘 알려 많은 거래나 홍보가 이루어지냐고 한 부스 홍보자에게 질 진 기업은 아니지만 탄약을 국내외에 공급하는 건 문을 했더니 바로 계약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방위산업의 실한 방위산업체로 한국의 방위산업 총 수출의 차지한다고 한다. 병역거부자 홍이 판이 넓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여기서 많은 만남이 이루 12%(2010년)를 가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어지고 서로 문의와 상담을 하며 장기적으로 거래가 이루 어질 수 있는 효과가 상당하다는 대답을 들었다. 실제로 각 기업의 부스 안쪽으로 마련된 VIP룸이나 미 팅룸에서는 군관계자들이나 국내외 바이어들이 둘러앉아 회의를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F-15

소음과 박수소리에 전시장 밖으로 나가니 에어쇼가 펼쳐지고 있었다.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는 시늉 을보여주는아파치헬기부터시작해서기본훈련기인 KT-1(웅비), T-50, F15, F16등이차례로쇼를펼 쳤다. 사회자의 말에 맞추어 천키로가 넘는 속도로 질주하기도 하고 회전비행, 수직 상승 등을 보여주 었고 T-50 여섯대가 편대를 이루며 하트모양, 태극기 모양 등을 그려내기도 했다. 관람객들의 박수와 탄성이 절로 나왔다. 에어쇼가 엄청나게 시끄러워 인근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기도 하고, 오늘은 저게 훈련이고 쇼이지만 실전에서는 살상과 공포를 가져다 줄 것을 생각하니 속이 편치는 않았다. 하 지만 파란 하늘에 펼쳐지는 쇼는 확실히 큰 볼거리였기에 나도 카메라를 들이대곤 했다. 그밖에도 거 대한 수송기 c-17을 공개해 들어가 볼 수 있게 하고, f-35의 조정석을 타볼 수 있게 하고, K-9 자주포 의 속을 보여주는 등 실제 무기들을 전시해 놓아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화려한 돈잔치, 뜨거운 관심 전시회를 둘러보며 확실히 방위산업에 막대한 돈이 오고 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최측의 말로 는 5억달러치의 계약과 50억달러치의 상담이 이뤄진다고 한다. 그런 만큼 전시회의 곳곳에는 첨단 장 비와 만지고 보고 듣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놀거리들이 넘쳐났다. 군용무기를 설명하고 홍보하는데 전문가나 직원뿐이 아닌 모델과 같은 여성분들이 동원되는 것도 새삼스러웠고 하다못해 팜플렛 하나까 지도 가장 빳빳하고 좋은 질의 종이를 사용하고 있었다. 총이나 무기, 탱크와 전투기들이 실제로 사람 을 죽이고 전쟁을 일으키는 용도로 사용되는데 그러한 비극 뒤에 이렇게 거대하고 화려한 산업이 있다 는 게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또한 평일이었고 낮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관람하며 북적이는 모습도 인상적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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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다. 물론 동원된 군인과 학생 직원들이 많았겠지만, 그저 형식적으로 지나가면서 시간을 떼우는 게 아니었다. 열띠게 참여하고 홍보하는 사람들과 이런 저런 질문을 주 고받으며 참여하는 모습에서는 관심과 흥미가 느껴졌다. 또한 아마도 대부분 군인 출신일 어르신들과 방산 관계자 들 등 진지한 분위기를 볼 때 무기를 비롯한 방위산업에 대한 한국사회의 관심이 깊고 크다는 것이 느껴졌다. 평화 군축박람회를 함께 준비하는 사람으로서 비교를 하지 않을 "Today's Trainer for Tomorrow Fighters" T-50 광고판에 써있는 문구다. 오늘 우리가 하는 것은 수가 없게 됐는데, 박람회를 하는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훈련이고 전시이지만 그것이 내일의 전쟁과 싸움 부족한 점도 있고 배울 점도 있겠지만 국방과 군축이라는 으로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나에겐 읽혔다. 상반되는 이슈에 대한 관심과 권력의 차이가 '넘사벽'에 가 깝다는 것을 절감해야 했다. 그들이 파는 세상은 평화롭고 안전할까 화려한 돈잔치에서, 멋진 전시와 쇼에서 이것들이 사실은 전쟁과 죽음을 불러온다는 사실은 명시돼 있지 않았다. 보기 좋게 포장되고 멋지게 홍보되는 무기들이 사실은 여러 가지 문제점들과 우려들을 낳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이야기 되지 않고 있었다. 나아가서 정말로 우리가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이 무 엇인가, 평화란 무엇인가, 국방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도 그곳에선 찾을 수 없었다. 창공을 비행하는 T-50 편대의 멋진 비행을 올려다보며 그러한 질문들과 의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져야만 했다. 또한 전시 회 곳곳에서 내가 아는 것이 부족해서 그들과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없을 때 평화라는 이름으로 현실에 무관심했던 내가 아쉬워지기도 했다. 지난 10월 셋째주 주말, 우리는 서울 도심에서 조그맣게 평화군축박람회를 열었다. 화려한 에어쇼는 없지만, 늘씬한 모델과 삐까뻔쩍한 팜플렛은 없지만 이틀간 진행됐던 평화군축박람회는 그러한 질문과 고민들이 있었다. 또 평화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의 노래와 공연이 있었다. 물론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았 고, 어설픈 점도 많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전쟁과 무기, 국방정 책이 무엇이 문제인가 하는 질문이 우리 사회에서 계속되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가 됐을 것이다. 그 방 식은 병역거부에서부터 국방예산 감시, 집속탄 감시, 핵과 MD, 무기수출과 무기거래조약 등 다양했지 만 말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기 위해선 대체 얼마나 많은 무기를 우리의 세금으로 사야 하는 것일까. 그 답은 누가 알까. 대통령이 알까 국방부 장관이 알까? 확실한 건 그들에게만 그 권한과 책임 을 줄 때 세상은 결코 평화롭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무기를 사는 이들에게, 혹은 무기를 수출하는 이들에게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이름으로 사고 팔지 말라고. 우리는 당신들 이 사고 파는 세상에 살고 싶지 않다고. 24


정의의 여신, 군복을 입다 성민 | 전쟁없는세상 매체편집팀 + peacedrip@gmail.com

들어가며 헌법재판소 결정은 지나치게 씁쓸했다. 7년 전에 비해 전혀 나아지지 않은, 오히려 후퇴한 결정이 었던 것이다. 7:2라는 숫자는 그대로였고, 국회에 대한 권고도 없었다. 그 결정을 뒷받침 하는 거 대한 토대는 헌법보다는 국방이었다. 보수적인 정권하에서 사실 위헌을 기대하진 않았다. 하지 만 그동안의 운동으로, 또 많은 병역거부자들의 감옥행으로 조금의 진전이 있길 바라지 않았던 가. 국제사회의 변화도 달라진 조건이었다. 최근 있었던 콜롬비아나 유럽인권재판소의 전향적인 판결과 비교하면 그 아쉬움이 더 크다. 물론, 병역거부운동의 정당성은 헌법재판소가, 사법부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우린 얼마나 많 은 사법부의 오판을 목격했는가. 또한 단지 병역 법이 위헌임을 확인하는 것이, 대체복무제를 만 드는 것만이 운동의 목표이자 전부는 아니다. 병 역거부운동은 차별과 군사주의에 저항하고 평화 를 향해가는 다양한 변화를 바라며 걸어왔고, 또 나아갈 것이다. 결과보다는 과정에 그 의미를 두 자는 것이 또한 우리의 목표가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법부의 판결이 우리에게 무겁게 느껴지는 것도 현실이다. 병역거부자들은 수십년 동안의 감옥행에도 불구하고, 또 지난 10 년간의 운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감옥에 가며 범죄자가 되고 있다. 이번 헌재의 결정은 단순히 1년 6개월의 수감생활 이상의 의미로, 이들의 삶

에 큰 영향을 주는 이 현실이 앞으로 수 년간 변함없이 계속 될 것이라는 선언이다. 또한 앞으 로 흘릴 병역거부자들과 그들의 가족, 친구의 눈 물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병역거부운동은 사법부와 떼어놓고 이 야기할 수 없다. 병역거부자들이 최초로 맞닥뜨 리게 되는 현실의 벽도 그러하기에 우리는 처음 부터 많은 변호사들과 운동을 함께 해왔다. 사법 부의 판결에 울고 웃었으며 국제법과 조약, 권고 를 비롯한 나름의 법적논리 등을 들어 사법부를 설득하려는 노력을 해왔다. 헌재 결정이 나고 대 법원 이하 판결들이 기존 판례대로 속행되는 지 금, 우리의 운동은 사법부만을 향하지는 않을 것 이다. 당분간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병역거부 운동을 돌아보고 평가하기 위해 사법 부의 판결이,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운동이 어떠 했는지 정리할 필요가 있다. 찬찬히 살펴보면 꽤나 많은 것들이 변해왔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에 대처하는 병역거 부운동이 정말 안 해본 것 없었다는 것도 느껴 질 것이다. 외국사례를 살피며 병역거부권을 바 라보는 시각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그것이 한 국과 어떻게 다른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몇 년 이 지나 병역거부에 최종적으로 무죄가 선고될 그 때, 이 글은 그 과정을 돌아보는 중요한 기록 일 것이다.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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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기 | 전쟁없는세상 매체편집팀 + jxshinev@gmail.com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이 생겨나면서 국가는 그들을 처벌하기 시작했다. 초기의 병역거부자 들은 집총을 거부하는 등의 방식을 통해 병역 을 거부했고, 그들의 행위는 ‘항명죄’ 를 적용 받았다. 1993년까지의 병역거부자들은 평균 2 년 가량의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1994년부터 2000년 까지는 군사재판을 통해 법정 최고형 인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1)

2)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처벌이 지속되면서 상 위 법원의 판단을 받으려는 시도도 이어졌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병역거부자와 관련한 최 초의 대법원 판례는 1969년 7월 22일의 판결 이다. 이 판결은 여호와의 증인 신자의 상고로 이루어졌고,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3)

【이 유 】 피고인의 상고이유를 본다. 헌법 제25조의 규정에 의하면 모든 국민은 법 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방의 의무를 가진 다고 되어 있어서 병역법은 위 헌법의 규정에 따라 제정된 것으로서 같은 법의 규정에는 특 단의 사정이 없는 이상 모든 국민은 다같이 이에 따라야 하며, 피고인이 "애호와의 증인" 이라는 종교를 신봉하고 그 교리에 크리스토 인의 "양심상의 결정"으로 군복무를 거부한 행 위는 응당 병역법의 규정에 따른 처벌을 받아 야 되며, 한번 처벌을 받았다고 하여서 다시는 같은 법의 적용으로 처벌을 받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고, 논지에서 말하는 소위 "양심상의 결정"은 헌법 제17조에서 보장한 양심의 자유 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것이므로 논지는

【판시사항】

이유없다.

크리스토인의 소위 "양심상의 결정"은 헌법 제

… 후략

17조에서 보장한 양심의 자유에 속하지 않는 다 … 중략 … 1) 군형법 제44조 2) 한겨레 21 제651호 ‘양심적 병역거부 1만2324명 2만5483년’ 3) 대법원 1969.7.22. 선고 69도934 판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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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의 이러한 판결에도 병역거부자들은


끊임없이 등장했고, 법원의 판결에 따라 징역 형을 선고받았다. 2001년, <한겨레21>이 병역 거부자의 처벌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여호 와의 증인이 아닌 병역거부자들이 등장하면 서 법원의 판단에도 변화가 생긴다. 첫 번째 변화는 서울 남부지방법원에서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결정 한 것이다. 이로써 사법부에서 도 병역거부자를 처벌하는 것이 위헌인지를 판단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 재판부는 "헌법상 규정 된 병역의 의무와 기본권인 사상, 양심 및 종 교의 자유가 충돌할 경우 양자는 적절히 조 화, 병존해야 한다"며 "병역거부자에 대한 예 외없는 처벌을 규정한 현행 병역법 제 88조 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 구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다"는 결정문을 제 시했다. 다른 큰 변화는 병역거부자들이 군사 재판이 아닌 민간재판을 받게 되었다는 점과 병역거부자에게 선고되는 형량이 법정 최고 형인 3년형에서 병역이 면제되는 최소 형량 인 1년 6개월 형으로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비종교적’ 사유로 병역을 거부했던 나동혁이 2002년 12월 10일 1심에서 1년 6개월의 실형 을 선고받은 것에 이어 대부분의 병역거부자 들은 1년 6개월의 형량을 선고받게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간 병역거부자에 대한 재판은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고, 그것이 당연시되었다. 4)

그러던 2004년 5월 21일, 병역거부운동사에 특기될 만한 사법부의 결정이 내려진다. 서울 남부지방법원의 이정렬 판사가 병역거부자에

게 무죄를 선고 한 것이다. 이 판결에서는 1) 병역법 88조 1항의 ‘정당한 사유’가 폭넓은 개 념으로 여겨진다는 점과 2) 병역을 거부하는 양심의 자유가 헌법 상 보장되는 양심의 자유 라는 점을 판결의 주요한 이유로 들고 있다. 이 판결문은 이어 ‘그렇다면, 이 사건 공소사 실은 범죄가 되지 아니하거나,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하므로 형사소송법 제325조 에 따라 피고인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다.’ 라 는 결론을 도출한다. 최초의 무죄판결은 언론 의 많은 주목을 받았고 이로 인해 병역거부 문제가 다시 화두로 떠오르며 각계의 많은 관 심을 얻게 되었다. 5)

법원의 위헌제청과 무죄선고가 이어지며 병 역거부자에 대한 처벌에 관한 논란이 거세지 자 대법원은 2개월 후인 2004년 7월 15일에 전원합의체 판결을 내린다. 판결문은 ‘대법원 2004. 7. 15. 선고 2004도2965 전원합의체 판 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판결에서는 병역 법 제88조 제1항의 ‘정당한 사유’에 따라 병역 거부자를 처벌하는 것이 옳은지와 양심의 자 유가 법률에 의하여 제한될 수 있는지에 대한 부분들을 주로 다루었다. 대법원은 ‘헌법상 기 본권의 행사가 국가공동체 내에서 타인과의 공동생활을 가능하게 하고 다른 헌법적 가치 및 국가의 법질서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양심의 자유 를 포함한 모든 기본권 행사의 원칙적인 한계 이므로, 양심 실현의 자유도 결국 그 제한을 정당화할 헌법적 법익이 존재하는 경우에는 헌법 제37조 제2항에 따라 법률에 의하여 제

4) 서울남부지방법원, 2002. 2. 19. 병역법 위헌제청 결정문 5) 서울남부지방법원, 2004. 5. 21. 2002고단3940, 2002고단3941 병역법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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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될 수 있는 상대적 자유’임을 이야기하며 따라서 ‘병역법 제88조 제1항은 가장 기본적 인 국민의 국방의 의무를 구체화하기 위하여 마련된 것이고, 이와 같은 병역의무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아 국가의 안전보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국민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도 보장될 수 없음은 불을 보듯 명확한 일이므로, 병역의무는 궁극적으로는 국민 전체의 인간으 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 할 것이고,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양심의 자유 가 위와 같은 헌법적 법익보다 우월한 가치라 고는 할 수 없으니, 위와 같은 헌법적 법익을 위하여 헌법 제37조 제2항에 따라 피고인의 심의 자유를 제한한다 하더라도 이는 헌법상 허용된 정당한 제한이다.’ 라고 판결했다. 그 러나 대법관 이강국은 이에 대해 ‘절대적이고 도 진지한 종교적 양심의 결정에 따라 병역의 무를 거부한 피고인에게 국가의 가장 강력한 제재 수단인 형벌을 가하게 된다면 그것은, 피 고인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심각하게 침해 하는 결과가 될 것이고 형벌 부과의 주요 근 거인 행위자의 책임과의 균형적인 비례관계를 과도하게 일탈한 과잉조치가 될 것’ 이라는 언급을 하며 반대의견을 제시했다. 2004년의 대법원 선고는 물론 병역거부자를 처벌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리는 한계를 보여 주었지만 병역거부자를 처벌하는 것이 부당하 다는 반대의견을 국내 최고 법원인 대법원 판 례에 남기는 성과를 냈다. 또한 네 명의 재판 관이 제시한 보충의견에서 대체복무제를 마련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언급을 얻어냈다. 대법원의 판결이 제시되고 얼마 지나지 않 은 2004년 8월 26일에 헌법재판소도 병역거부 28

자를 처벌하는 근거가 되는 병역법 제88조 제 1항 제1호의 위헌 여부에 대한 판결을 내놓았 다. 판결문 전문은 ‘헌재 2004.08.26, 2002헌가 1, 판례집 제16권 2집 상, 141, 141-194’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결과는 합헌. 합헌판결을 한 재판관이 7명, 위헌판결을 한 재판관이 2명이 었다. 헌법재판소는 ‘양심의 자유는 단지 국가 에 대하여 가능하면 개인의 양심을 고려하고 보호할 것을 요구하는 권리일 뿐, 양심상의 이 유로 법적 의무의 이행을 거부하거나 법적 의 무를 대신하는 대체의무의 제공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다. 따라서 양심의 자유로부 터 대체복무를 요구할 권리도 도출되지 않는 다. 우리 헌법은 병역의무와 관련하여 양심의 자유의 일방적인 우위를 인정하는 어떠한 규 범적 표현도 하고 있지 않다.’라고 규정하며 ‘이 사건 법률조항을 통하여 달성하고자 하는 공익은 국가의 존립과 모든 자유의 전제조건 인 ‘국가안보’라는 대단히 중요한 공익으로서, 이러한 중대한 법익이 문제되는 경우에는 개 인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국 가안보를 저해할 수 있는 무리한 입법적 실험 을 할 것을 요구할 수 없다. 한국의 안보상황, 징병의 형평성에 대한 사회적 요구, 대체복무 제를 채택하는 데 수반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제약적 요소 등을 감안할 때, 대체복무제를 도 입하더라도 국가안보라는 중대한 헌법적 법익 에 손상이 없으리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라 할 것인바, 대체복무제를 도 입하기 위해서는 남북한 사이에 평화공존관계 가 정착되어야 하고, 군복무여건의 개선 등을 통하여 병역기피의 요인이 제거되어야 하며, 나아가 우리 사회에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 한 이해와 관용이 자리잡음으로써 그들에게 대체복무를 허용하더라도 병역의무의 이행에 있어서 부담의 평등이 실현되며 사회통합이 저해되지 않는다는 사회공동체 구성원의 공감 대가 형성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선행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은 현 단계에서 대체복무제를 도 입하기는 어렵다고 본 입법자의 판단이 현저 히 불합리하다거나 명백히 잘못되었다고 볼 수 없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판결문 에 ‘입법자는 양심의 자유와 국가안보라는 법 익의 갈등관계를 해소하고 양 법익을 공존시 킬 수 있는 방안이 있는지, 국가안보란 공익의 실현을 확보하면서도 병역거부자의 양심을 보 호할 수 있는 대안이 있는지, 우리 사회가 이 제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하여 이해와 관 용을 보일 정도로 성숙한 사회가 되었는지에 관하여 진지하게 검토하여야 할 것이며, 설사 대체복무제를 도입하지 않기로 하더라도, 법적 용기관이 양심우호적 법적용을 통하여 양심을 보호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 방향으 로 입법을 보완할 것인지에 관하여 숙고하여 야 한다.’는 문장을 삽입하여 입법부에 대해 대체복무제와 관련된 입법을 고려할 것을 권 고하고 있다. 이 판결로 병역거부에 대한 사법

부의 논의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언론 등에 서는 마지막의 입법에 관한 권고에 집중하며 대체복무제의 도입 가능성을 이야기하게 되었 다. 2004년에 나타난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실망스러웠지만 이러한 판결이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많은 사람들이 병역거부와 대 체복무제에 대한 의견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는 점은 하나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판결로 병역거부자가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병역거부자들의 수는 지속적으로 늘어나게 되 었다. 대부분의 법원에서는 병역거부자들에게 1년 6개월의 맞춤형량을 선고했지만 2007년 10월 26일 충북 영동지원에서 병역거부자에 대해 무죄가 선고 되고 대전천안, 원주, 수원, 대구김천 법원 등에서 위헌법률심판제청을 하 는 등 병역거부자에 대한 처벌이 부당하다는 사법부의 판결도 이어졌다. 헌법재판소의 결정 이후에도 위헌제청 등이 이어진 것은 한국의 사법부가 병역거부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것을 해결하려는 움직임 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사법부의 폐쇄적인 구조에서 이 사안에 대해 위헌제청을 하는 것 은 판사 개인의 입장에서는 출세의 길을 봉쇄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이러한 판 결을 내린 판사들이 자신의 출세보다도 병역 거부를 선언하는 사람들의 인권, 혹은 양심을 우위에 놓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판결이 이어지며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다시 이뤄지기를 기대하던 2011년 8월 30일, 헌법재 판소가 다시 한 번 병역법 제88조 제1항 제1 6)

6) 청주지방법원 영동지원, 2007. 10. 26. 2007고단151 병역법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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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위헌제청 등에 대한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2011년의 결정은 2004년의 결정보다도 후퇴한 수준에 그쳤다. 합헌의견을 제출한 7명의 재판 관의 주장은 2004년의 논지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위헌의견을 낸 재판관 없이 2명의 재 판관이 한정위헌의견을 제출했다. 한정위헌의 견을 제출한 재판관들은 ‘이 사건 법률조항 본문 중 ‘정당한 사유’에, 양심에 따른 병역거 부를 포함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하는 한 헌법 에 위반된다.’는 의견 으로 2004년에 위헌의견 을 제출한 재판관들보다 후퇴한 입장을 보였 다. 이들의 입장은 2004년의 논의보다도 훨씬 후퇴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복무제에 대한 권고도 사라졌으며, 병역거부자들의 주장 이 국민들의 보편적 정서와 합치하는지를 살 펴보아야 한다는 내용 역시도 사라졌다. 이러 한 결정에 대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 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는 “유엔은 그동안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에 근거하여 수차례에 걸쳐 회원국들 에게 병역거부권 인정을 권고했으며, 일반논평 과 결의안을 통해 병역거부권을 명시하고 있 다. 한국정부에게 병역거부권 인정과 대체복무 제 도입을 권고하는 결정은 2006년부터 지금 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자유권규 약을 위반했다는 결정 역시 반복되고 있다. 최 근에는 국제적으로 유래없는 인원인 100명에 대한 권고가 나오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7)

조문에서 명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유엔 사무총장까지 배출한 나 라에서 할 소리인가. 그럼 그동안 반복된 유엔 의 권고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유엔회원국 이자 자유권규약 가입국으로서 이러한 헌법재 판소의 시대착오적인 국제규약 해석은 국제적 인 망신이자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는 성명 을 내기도 했다.

8)

병역거부자들은 지금까지 사법부의 판단에 자신들의 처벌 여부를 맡겨 왔다. 모두들 자 신들의 신념에 따라 사는 것이 죄가 되지 않 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법부가 올바 른 판결을 내려주기를 바라며 이러한 결정을 사법부에 맡긴 것이다. 그러나 가장 최근의 헌법재판소 결정에서 병역법 제88조 제1항 제 1호에 대한 합헌 결정이 내려지며 앞으로의 병역거부자들도 처벌을 피하기 어렵게 되었 다. 지난 2004년 헌법재판소의 합헌 결정 이 후 지방법원들이 내린 판결로 미루어볼 때, 아마도 앞으로 몇 년간은 무죄나 위헌제청 등의 판결이 나오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병역거부자들을 만 나야하는 판사들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사법 부의 고민과 문제인식은 깊어질 것이고 병역 거부자들을 처벌하는 것, 각자의 양심에 따른 선택을 처벌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판결은 분명히 나타날 것이다.

7) 헌재 2011.08.30, 2008헌가22, 공보 제179호 , 1205 8) 2011. 8. 30. <헌법재판소인가 안보재판소인가 -인권을 저버린 병역거부에 대한 헌법재판소 결정을 규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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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민 | 전쟁없는세상 매체편집팀 + peacedrip@gmail.com

지난 10월 6일, 휴전선 부근에서 총성이 울렸 다. 대치중인 양쪽의 군인 세 명이 사망하는 총 격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한국 얘기가 아니다. 바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휴전선에서 벌어진 일이다. 1)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1988년부터 6년 간 전쟁을 벌이고 94년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전 쟁의 원인이 됐던 영토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그루지야(조지아), 터키, 이란, 러시아, 쿠르드 족 등 주변 상황도 위협적이다. 언제라도 다시 무력 갈등이 빚어질 수 있는 곳이다. 종교, 민족, 자원, 영토 등 복잡하게 엉켜있는 관계로 인해 긴장의 수위가 높은 곳이다. 휴전국가이기 때문에 대체복무제를 허용할 수 없다는 한국처럼 이들 국가에서도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은 감옥에 가고 있다. 특히 아르메니아

는 70여명의 병역거부자들이 수감돼 있는 국가 이다. 인접국가인 터키와 아제르바이잔도 모두 대체복무제를 도입하지 않고 있다. 한국만큼이나 안보위협이 강조될 이들 국가들도 한국처럼 분 쟁이 모두 해결되고 평화로운 상태가 되기 전에 는 대체복무제 도입을 기대할 수 없을까? 휴전 국가 아르메니아에 대한 유럽인권재판소의 판결 한국의 헌법재판소가 2004년에 이어 2011년에 도 변함 없이 안보상의 이유를 들어 대체복무제 없는 병역법의 합헌을 결정하는 사이 이들 나라 에서는 대체복무제를 향한 변화가 꾸준히 일어 났다. 특히 2011년, 유럽인권재판소(ECtHR)의판 결 은 유럽에 속하는 모든 나라가 병역거부권을 인정하고 대체복무제를 만들어야 함을 명시적으 로 인정했다고 볼 수 있는 역사적인 판결로 평 2)

1) 연합뉴스 <아제르·아르메니아, 무력충돌 상호 비방> 2011.10.07. 2) CASE OF BAYATYAN v. ARMENIA (Application no. 23459/03). 결정문 전문은 전쟁없는세상 홈페이지 자료실에서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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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된다. 아르메니아의 병역거부자 바티얀은 2001년 유 죄판결을 받고 2002년부터 2003년까지 수감생활 을 했다. 양심의 자유가 침해됐다며 이를 유럽인 권재판소에제소했고 2009년에있었던재판(재판 관 7인 소재판부: the third section)에서는 이것 이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결정 을 내렸지만, 바티얀은 이에 불복해서 대재판부 (Grand Chamber)에상고했다. 2011년 7월 17인 의 재판관으로 구성된 대재판부는 아르메니아 출신의 재판관 한명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의 동 의로 유럽인권협약 9조(사상과 양심의 자유)에 의해 양심적 병역거부권이 보장된다고 결정했다. 따라서 아르메니아 정부에 의해 바티얀의 양심 의 자유가 침해됐으며 이에 아르메니아 정부가 배상할 것을 명령했다. 이는 바뀌거나 불복할 수 없는 최종판결이다. 앞선 판례들을 뒤엎고 유럽 인권재판소가 처음으로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명 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3)

유럽인권재판소의 판결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양심적 병역거부권이 국제적으로 사실상 전반적 인 합의가 있다고 판단한 점이다. 이는 양심적 병역거부권이 전세계적으로 승인된 국제규범이 라 볼 수 없어 국제법 존중 원칙에 위반되지 않 는다고 판단한 한국의 헌재와는 다른 판단이다. 특히 유럽인권재판소가 중요하게 그 근거로 든 점이 UN인권이사회의 ICCPR 해석이며 2006년에 유엔인권이사회에서 한국이 양심적 병역거부자 를 처벌하는 것이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는 18조

에 대한 위반이라고 결정을 한 것이라는 점이다. 한국에 대한 판결을 인용하며 양심적 병역거부 권이 국제적으로 승인된 규범이라고 판단하는데, 정작 한국에서는 그 판결을 무시했다는 점이 대 조적이다. 특히나 2006년에 2명에 이어서 작년 12명, 올해 초 100명이나 더 추가적인 결정이 나 왔음에도 한국 헌재가 국제적인 합의가 없었다 고 판단한 점은 안타깝다. 판결 이후 아르메니아의 변화, 그리고 아제르바 이잔과 터키 기대와 달리 유럽인권재판소의 판결에도 불구 하고 아르메니아의 병역거부자들은 석방되지 않 았다. 바티얀의 제소 이후인 2003년에 대체복무 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의 병 역거부자들은 이를 진정한 대체복무제로 인정하 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군부에 의해 지휘되고 군복을 입으며 기간도 너무 길기(42개월) 때문에 비군사적이고 비처벌적인 대체복무제가 아니라 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예전부터 대체복무제에

4)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위치한 유럽인권재판소

3) 정확한 과정과 진행 일지는 위 결정문의 1-8. Procedure를 참고할 것. 4) 헌법재판소 결정문 2008헌가22 병역법 제88조제1항 제1호위헌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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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논란이 있어왔다. 유럽인권재판소의 판결이 당장의 구속력을 갖진 않지만 유럽회의나 유럽 연합과의 다양한 관계들 때문에 대부분 실효성 을 갖는다는 점을 볼 때 유럽인권재판소의 판결 은 그 의미가 크다. 실제로 아르메니아 정부도 판결 후에 유럽인권재판소의 판결을 받아들여 배상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현행의 대체 복무제를 개정하는 작업이 국회에서 진행되고 있기도 하다. 5)

유럽인권재판소의 판결은 아마도 인접국인 터 키와 아제르바이잔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터 키와 아제르바이잔의 병역거부자들도 유럽인권 재판소에 진정을 한 상태이며 2010년 7월 유럽 인권재판소는 터키에 대해 바티얀 건에 대한 최 종 판결이 될 때까지 병역거부자에 대한 처벌을 중단할 것을 지시한 상태이다. 터키 정부는 이 를 무시했지만 말이다. 유럽인권재판소가 이미 바티얀 건에 대한 판결을 내리면서 병역거부권 보장을 명시적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터키의 병 역거부자에 의해 쌓인 네 건의 사안에 대해 인 권침해라고 내릴 것이 거의 확실하게 예상되고 있다. 6)

아제르바이잔도 마찬가지인데 아제르바이잔은 사실 95년도에 헌법적으로 병역거부권을 인정했 다. 하지만 입법이 되지 않아 여전히 대체복무제 로 실질적인 보장을 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년 두 명, 2011년 7월 한 명 등 총 세 명의 병역거부자가 유럽인권재판소에 제소를 한 상태 이다. 이들 또한 바티얀건과 마찬가지로 병역거 부권 인정 판결이 날 것을 예상하고 있다. 이미 터키와 아제르바이잔은 병역거부권을 인정하지 는 않지만 판결을 내리고 석방하는 방식으로 처 벌을 완화하고 있는 상황이며, 유럽의회에 대체 복무제 도입을 약속했다. 2008

헌법재판소에서 병역거부권을 인정한 콜롬비아 최근 국제적인 변화에서 주목할 또 하나의 나 라는 콜롬비아이다. 콜롬비아는 현재에도 반군과 의 내전이 계속되고 있다. 이 소식지를 마무리하 고 있는 11월 4일 반군지도자가 사살됐다는 뉴 스가 올라오기도 했지만, 분쟁이 완전히 마무리 될지는 미지수라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2009년 10월 콜롬비아 헌법재판소는 병역거부권 이 헌법적으로 인정된다고 판결을 내렸다. 판 7)

콜롬비아의 바띠다. 거리에서 불심검문을 통해 강제징 집을 한다.

5) Forum 18 news <ARMENIA: European Court finds conscientious objector was wrongfully convicted and jailed ? but what will government do?> 2011.07.07. 6) Forum 18 news <COMMENTARY: Bayatyan - a European Court judgment with an impact far beyond Armenia> 2011.07.26. 7) <Colombia : Constitutional Court recognises conscientious objection> http://www.wri-irg.org/node/9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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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이후에도 병역거부권이 현실적으로 보장되고 있지는 못하다. 바띠다(batida)라고 불리는 강제 징집이 계속되고 있는데, 이는 길거리에서 불심 검문을 통해 젊은이들을 입영시키는 것이다. 이 는 2010년 7월 유엔인권이사회에 의해서도 금지 돼야 할 것으로 결론지어진 바 있다. 이러한 상 황에서도 최근에 새롭게 병역거부를 선언하는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병역거부권이 헌법재판소 판결에 따른 권리라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8)

대체복무제 이후에도 병역거부운동이 법적인 운 동을 계속 벌여나가는 국가들이 있다. 핀란드, 그리스와 같은 국가들은 완전병역거부(대체복무 제도 거부한다)의 법적 인정을 위해 싸우거나 전 쟁시에도 병역거부권을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우크라이나와 같은 나라들은 비종교적인 병역거부자들도 병역거부권을 인정받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르메니아, 러시아와 같은 많은 나라들이 대체복무제가 생긴 후에도 그 성 격과 길이에 대해서 끊임없이 문제제기가 되고 있다. 느린 것 같아도 최근 10년간 국제사회 전 체로 보면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 불과 10년 전에 대체복무제를 도입해 한국과 비교됐던 대 만은 이제 징병제 폐지를 논의하고 있다. 아르메니아와 콜롬비아를 중심으로 최근에 있 었던 주요한 판결들을 살펴보았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들 판결들이 양심의 자유와 안보상의 중 요성을 겨루는 방식으로 내려지지 않았다는 것 이다. 휴전중인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유 럽이라는 거대한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면서 병 역거부권을 약속했고, 그것의 이행을 요구받고

있다. 유럽이라는 틀 속으로 가기위한 조건 중 하나로서 병역거부자의 인권이 요청된 것이다. 콜롬비아도 전쟁 중이고 보수적인 정권임에도 불구하고 유엔인권이사회의 권고 등을 받아들여 병역거부권을 인정한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병역거부권 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콜롬비아, 유럽인권재 판소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아직 몇 가지 과정이 더 남아 있는 아르메니아,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터키와 아제르바이잔과 달리 한국에서는 사법부 의 판결이 바로 대체복무제 도입으로 이어질 가 능성이 크다. 행정수도 이전, 군가산점 제도, 집 시법 위헌 등의 사례로 볼 때 헌법재판소의 결 정은 법적, 정책적 구속력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병역거부권은 보편적인 인권으로 각 지역, 각 국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과정은 국제적인 기구들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유엔인권위원 회나 자유권규약위원회가 병역거부권을 인정했 지만 법적인 구속력이 없는 조약이었다면, 유럽 인권재판소의 결정이나 유럽 각 국가와 콜롬비 아 등의 변화는 점점 실제적으로 효력을 발휘하 고 있는 결정이라 할 것이다. 유럽인권재판소의 판결에서 유엔의 한국에 대한 권고는 중요한 참 고 대상이었다. 판결 후에 한국의 헌재판결에 대 한 영향력을 세계는 주목했으나 헌재는 그 기대 에 부응하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에 상반된 판단 을 내린 두 재판소의 판결, 과연 우리는 같은 ‘국제사회’에 살고 있는가?

8) warresisters <Colombia: batidas continue> 2010.11.08. http://wri-irg.org/node/1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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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옥 | 전쟁없는세상 매체편집팀 + yo1004@hanmail.net

그럼 나라는 누가 지킵니까? 북한이 쳐들어 오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토론회에서나 들을 법한 질문이지만, 그곳은 분명 법원이었다. 병역거부로 병역법을 위반하고 스스로 감옥에 가겠다는 피고인에게 판사는 법 을 위반한 사실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질문을 하 기보다는 잘못을 꾸짖으며 나무라고 있었다. 그 렇게 병역거부에 대한 이해도 지식도 부족했던 판사들은 별다른 고민없이 법정최고형을 선고하 고 감옥에 보내왔으며, 실형이 확실시되니 도주 할 수도 있다며 영장실질심사에서 구속결정을 내리는 것도 일종의 관행이었다. 하지만 끊임없 는 문제제기와 사회적 공론화 및 다양한 활동의 전개는 병역거부자의 사법절차과정에서부터 조 금씩 변화를 만들어냈다. “

불구속수사를 받기까지 불구속수사의 원칙 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9)

실형선고가 확실한 사건에 대해서는 도주의 우 려가 있다고 보고 구속수사와 재판을 받았던 것 은 그리 먼 옛날이 아닌, 2006년에도 자주 있었 던 일이다. 징역 1년6월형을 받지 않으면 다시 입영영장이 나온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수감생활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법정구속이 두려 워 도망갈 거라고 생각할만큼 병역거부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일 수도 있다. 혹은 감히 군 대를 거부하는 것에 대한 보복성 조치이거나. 병 역거부연대회의 혹은 지지자들의 이름으로 꾸준 히 발표되었던 불구속수사 촉구성명과 구속수사 규탄성명에서도 당시의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 다. 그래서 그때는 불구속수사를 촉구하는 서명 과 탄원서를 모아서 제출하는 것이 병역거부자 후원회의 중요한 활동이었다. 주변 지인들뿐만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열리는 행사에 찾아다니 며 서명을 받고, 거리에서 캠페인과 서명전을 진 행했으며, 온라인과 우편으로도 모았다. 그러한 과정에서 불구속수사는 부당하다는 점, 병역거부

9) 형사소송법 제198조는 ‘피의자에 대한 수사는 불구속 상태에서 함을 원칙’으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으나, 증거인멸의 우려나 도주의 우려가 있을 경우에 구속수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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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구속수사를 촉구하는 탄원서에 서명하는 시민들. 대체 복무제 도입촉구 서명과 함께 진행했다.

자를 처벌하는 현행 병역법에는 문제가 있다는 점 등을 많은 시민들에게 알릴 수 있었다. 그 결 과 2006년부터 영장실질심사에서 불구속결정이 나는 사람들이 점차 생겨났고, 2007년부터는 구 속영장이 청구되는 경우도 점차 사라져 현재는 대부분의 병역거부자들이 불구속상태에서 수사 와 재판을 받고 있다. 지금은 당연하게 느껴지지 만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영장실질심사를 받은 후 경찰서 유치장에서 구속결정여부를 기다리고, 재판 때마다 수갑과 포승줄에 묶인 채 법원으로 출정나오던 때가 있었다. 끊임없는 법정투쟁 지금은 대부분 변호사 없이 재판을 진행하지만, 2000년대 중반까지는 병역거부자를 무조건 처벌 하는 것의 문제점을 알리기 위해 변호사와 함께 변론을 준비했다. 법정에서 피고인인 병역거부자 가 자신을 변론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짧다. 실 정법을 위반한 사실만을 가지고 병역거부의 정당 성을 설명하기에는 발언의 기회와 시간이 부족했 기 때문에 변호사를 통해 법정에서의 논쟁을 이 어갔다. 경우에 따라 변호인단을 구성해 재판을 준비하기도 했고, 지금은 꽤 유명해진 분들도 함 께 했었다. 병역거부를 하게된 과정을 드러내기 36

위한 질문을 짜고, 증인을 신청하고, 병역거부에 대한 오해와 우려를 풀기위한 변론을 준비하고, 여러 학자들의 의견서와 해외사례를 정리한 자료 를 제출하는 등 재판준비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 였다. 동시에 재판방청을 조직했다. 법정의 분위 기는 상당히 엄해서 유죄무죄와 상관없이 사람을 긴장하게 하고 주눅들게 한다. 그래서 지지하는 사람들이 함께 방청하러 가는 것은 재판을 받는 사람에게 상당히 큰 힘이 되곤 한다. 방청을 하 는 입장에서도 법정진술과정을 통해 병역거부 사 안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어서 도움이 되 고, 판사가 보기에도 많은 사람들이 방청하러 온 사건에 대해 그냥 쉽게 넘어갈 사안이 아님을 인 지시키는 효과도 있었다. (간혹 법정소란으로 난 처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법정투쟁의 과정은 기계적으로 똑같은 판결을 찍어내는 판사들에게 사안의 심각성을 알리고 한번이라도 더 고민해보기를 바라는, 호 소에 가까운 노력이었는데 실제로 그 과정에서 태도의 변화를 보이는 판사를 목격하기도 했다. 첫 재판에서는 시큰둥하더니 선고공판에서는 현 행법상 처벌할 수밖에 없음을 아쉬워하며 ‘지 금의 감옥행이 어쩔 수 없는 일이더라도 계속 가다보면 길이 될 것이다’라고 격려를 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그 판사는 징역 1년6월을 선고하며 법정구속을 시켰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는 달라진 것은 없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병 역거부자를 예외없이 처벌하는 병역법이 헌법에 위배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위헌법 률심판을 제청한 판사들이 꾸준히 생겨났던 것 은 지금까지의 노력이 조금이나마 영향을 주었 을 것이다. 헌법재판소에 막힌 사법부


사법부는 이미 존재하는 법을 집행하는 역할 을 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 다. 물론 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여지가 남아 있고,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판단되면 위헌법률 심판 제청을 해서 사건을 헌법재판소로 보낸다. 헌법재판소가 합헌이라고 결정을 내리면 그동안 여러 법원에서 끊임없이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 다 하더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헌법소원을 내고 탄원서를 보냈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많은 사람 들이 감옥에 간다 하더라도 그 법은 아무런 문 제도 없다는 듯 그대로 그 효력을 발휘한다. 헌법재 판소의 결정은 사 법부의 논란을 정 리해버리는 효과 가있다. 2004년 에도 그랬고, 이번 에도 마찬가지로 그동안 선고를 기 다리며 재판을 미 2011년 5월, 헌법재판소 앞에서 뤄왔던 병역거부 병역법 위헌결정을 촉구하는 일 인시위를 하는 병역거부자 이준 자들이 줄줄이 수 규씨. 그는 헌재가 합헌결정을 감되었다. 내리고난 며칠뒤 수감되었다. 10)

그래서 병역거부자의 처벌을 막기위한 활동은 당장 병역거부자를 처벌하고 감옥에 보내는 것 은 사법부임에도 불구하고 소송과 법정투쟁의 차원에 머무를 수 없다. 지난 2004년 합헌결정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된 국회입법운동과 대법원 까지 갔던 사건들을 모아 유엔 자유권규약위원 회에 개인청원을 신청했던 것도 그러한 맥락이 었다. 유엔에 보낸 사건들, 국가별정례검토UPR

등 국제기구가 한국정부에 했던 높은 수준의 권 고들은 글로벌 스탠다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국정부에 분명 압박이 되었을 것이다. 2007년 국방부가 병역거부자들에게 대체복무를 도입하 겠다고 했을 때도 그 영향이 컸을 것이다. 이러 한 여러 측면에서의 유의미한 사회적인 변화는 사법부의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법과 사회변화의 상관관계 병역거부권을 인정하기엔 아직 우리 사회가 준비가 안되었다며 여론조사로 감옥에 보낼지 말지를 조사하는 것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어떤 상황에서든 지켜져야하는 것이 인권 아니 던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감옥에 보내는 것만큼 심각한 인권침해는 없을 것이다. 인권침 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법의 변화를 통해 사람들 의 인식을 바꾸고,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는 과정 이 필요하다. 법을 집행해 병역거부자들을 처벌 하는 것은 사법부이지만, 그 법을 만들고 바꾸는 것은 입법부의 역할이다. 현재 18대 국회에 두 건의 병역법개정안이 발의되어있고, 내년에 있을 총선과 대선에서 후보자들의 병역거부에 대한 입장을 확인하고 대체복무제도가 공약과 정책에 반영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다. 끊임없는 항소와 상고, 위헌법률제청 신청, 헌법 소원, 입법부작위 위헌확인소송, 손해배상청구소 송 등 다양한 방식으로 사법부의 문을 두드리는 활동 역시 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약간 다른 차원에서, 병역거부를 인정 하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법이 바뀐다 는 것은 사실이다. 아직도 병역거부자를 처벌하 는 것이 인권침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10) 헌법재판소는 독립된 헌법 기관으로, 사법부에 속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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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다. 병역거부자는 인간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들도 인간임을 알리고, 감옥에 보 내지 않을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주장하는 것은 병역거부자들이 감옥대신에 선택할 수 있 는 대체복무제도이지만, 그동안 신성시되던 우리 사회의 군대문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는 것도 우리의 과제일 수밖에 없다. 견고한 군사주의와

안보주의, ‘신성한’ 국방의 의무 아래 시행되 는 대체복무제도는 여전히 문제가 많을 것이고, 전쟁을 거부하고 살상을 거부하는 병역거부권의 인정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병 역거부자의 감옥행을 막는 방법이 결국 법을 어 떻게 바꾸고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라면, 다른 상 상이 가능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 그 큰 그림 속에 대체복무제도가 존재해야한다.

다양한 언어로 만나는 평화

디에고 | limcarey22@gmail.com

이번에는 아랍어와 러시아어로 평화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아랍어> 글씨는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쓰는거, 다~ 알고 계시죠? ^^

‫ﺳﻼﻡ‬

(Salaam) [살람]이라 읽으심 되요.

# 아랍어와 히브리어를 비교하다가 보면 참 많은 어휘들이 비슷한데, 이 '살람' 역시도 히브리어의 '샬롬'과 비슷하죠. 사실 두 언어는 같은 굴레에서 나왔는데, 어족이 같기 때 문이랍니다. 평화를 나타내는 형식은 각자 다르더라도, 그 정신만은 같겠죠? <러시아어>

Мир

[미르]

# 톨스토이가 남긴 《전쟁과 평화》 (Война и мир). 말할 수 없이 쓰라리고 참혹하고 또 수많은 소중한 사람들의 일상을 잔인하게 산산조각내는 전쟁. 톨스토이가 그의 삶을 통해 알려준 것이 바로 평화의 소중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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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동욱 | 한겨레21 기자 + ptpoeple@naver.com

아뿔사! 약간 바쁜 마감 중에 성민씨 이메일을 받고 ‘기냥’ “하겠다”고 메일을 보냈다. 메일에 첨부된 나동의 글을 읽지도 않고 말이다. 한 주 의 마감이 끝나고 성민씨가 말한 마감 날짜에 임박해 ‘어떻게 쓰라는 거지’ 하고 나동의 글을 읽어보니, ‘뒷담화’다. 더 나중에 성민씨 메일을 다시 읽어보니 그런 글을 써달라는 이야기도 있 는데 그냥 ‘머 그리 비싼 몸이라고’ 하면서 청탁 을 받고 덥썩 해버리겠다고 한 것이 후회가 된 다. 그래도 어쩌랴, 짜내는 수밖에. 사실 낯을 ‘쫌’ 가리는 성격에다 잠도 많아서 뒷담화를 할만큼 병역거부운동 하는 사람들을 그리 자주 만나지 않았다. 그저 ‘업무상’ 만나고 이렇게 ‘생까도’ 되나 해서, 정민에게 10년에 한 두번 만나서 맥주 한잔 하자고 했지만, 그것이 전부다. 그러니 만나는 만큼 쌓이는 우정은 물론 뒷담화도 그닥 없다. 그리하여 요리조리 머리를 굴려보지만, 나오는 얘기가 신통치는 않다. 그래 도 ‘내가 고백을 하면 아마 놀랄 거야 깜짝 놀랄 거야’ 하는 기대는 언감생심 접어두고 그나마 지

면을 채우기 위한 ‘남들을 몰랐을 이야기’를 여 기에 적어둔다. 사실 병역거부 취재를 하기 전부터 ‘오리’를 요주의 관찰해왔다. 요즘은 게으른 아저씨가 돼 서 집회에 잘 안 가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광고 회사에 다니던 90년대 후반, 나의 취미는 ‘집회 참가’였다. 대충 그 즈음에 인권·평화·생태운동 단체들이 열심히 활동 중이거나 생겨났다. ‘본인’ 도 이러저러한 이유로 인권, 평화 등에 관심이 없지는 않았으므로 그들의 홈페이지를 훔쳐보기 도 하고, 여차저차 해서 ‘아 저 사람이 그 단체 의 그 활동가구나’ 하면서 남 모르는 관음증을 즐겼던 것이다. 당시엔 학생운동을 하던 90년대 학번들이 만든 단체들이 있었는데, 역시나 나이 주의 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본인’에게 이들은 요시찰 대상 1호였다. 그러니까 평화인권연대 같 은 단체의 활동가들은 나를 몰랐지만, 나는 그들 을 모르지 않았단 얘기다. 그들의 운동과 나의 관심이 서로 만나는 지점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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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으니, 얼굴을 비추는 집회도 자주 겹쳤을 것이다. 어떤 계기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 만, 생머리가 긴 활동가를 보면서 ‘아, 쟤가 최정 민이구나’ 생각했다. 당시 나의 시야에 들어온 내 또래의 활동가들이 한둘은 아니었으나, 최정 민은 유난히 집회에 가면 눈에 띄는 ‘언니’였다. 당시 나에게 활동가들이란 내가 해야할 일을 대 신하는 ‘높으신’ 분들이라, 범접하기 어려운 대상 이었다. 무턱대고 다가가서 ‘저 누군데요. 너무 고마워요’라고 말하기엔 너무 쪽팔린 일 아닌가. 어쩌다 여차저차 해서 <한겨레21>에서 기자를 하게 됐는데, 언젠가 저들을 뭔가로(아마도 취재) 만날 일이 있겠지 생각을 하곤 했었다. 사회가 바라고 한겨레가 요청하는 민완 기자였으면, 적 당히 기회를 잡아서 (아마도 집회 같은 곳에서) ‘저 한겨레21에서 일하는 아무개라고 하는데요’ 하고 안면을 터야 마땅했으나, ‘본인’은 그런 민 완 기자는 아니었고 아닐 것이다. 역시나 여차저 차 해서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여성 100인 위’ 취재를 하면서 최정민을 취재원으로 만나게 되었다. 기자 생활을 하다 보면 이렇게, 그분들 은 나를 모르지만 나는 그분을 아는, 활동가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널뛰는 질문의 끝에 오리가 병역거부 얘기를 했고, 언제나 기사 아이템 부족 에 시달렸던 나는 덥썩 다음 주에 그 기사를 발 제했다. 무슨 얘기냐면, 지금도 오리는 모르지만, 상당 기간 ‘본인’은 오리의 활동을 염탐해 왔다 는 것이다. 10여년이 지난 이제야 고백을 하자면, 최정민 활동가에 대한 어떤 종류의 ‘연모’의 마 음이 있었기에 병역거부 운동과 인연도 가능했 단 얘기다. 그래서…? 뭐 그냥 그렇단 얘기다. 직업적 특성상, 기자가 아니면 알기 어려운 이 40

야기 하나 더한다. 병역거부를 좀 취재해본 기자 들 사이에선 빵 터지는 얘긴데, ‘어디선가 누군 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반드시 나타난다 홍반장!’ 이라는 농담이 있다. 요기서 홍반장은 여호와의 증인으로 병역거부 관련해서 홍보를 담당하는 홍영일 선생님을 말한다. 이분은 단연코 내 인생 최고의 취재원이었다. 완벽한 자료 제공에 민첩 한 사례 지원에 그토록 점잖은 태도까지, 이분과 한번 일해본 기자들은 병역거부 취재라면 일단 자신감을 가진다. ‘홍반장’이 알아서 도와줄 테니 까. ^^ 역시나 여차저차 해서 수혈 거부 문제를 동료 기자가 취재하게 됐는데, 그에게 ‘야, 좋지?’ 그랬더니 ‘어 그래’ 하더라. 그리고 ‘정말로 최고 의 취재원 아니냐’ 하니까 ‘어 나도 느끼고 있어’ 했다. 한때 내 옆자리에 앉았던 정인환 기자도 한겨레 신문에 있을 때부터 병역거부 취재를 꽤 많이 했는데, 병역거부 관련 기사를 쓰다가 어려 움을 겪으면 서로 ‘홍반장한테 물어봐’ 하고 농 담을 하고 했었다. 비단 홍영일 선생뿐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 홍보부 선생님들은 죄다 그랬다. 그러니까 병역거부 기사의 절반 이상은 그분들 이 쓰셨다고 해도 일말의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지루한 얘기긴 하지만, 병역거부 취재 를 하면서 만났던 사람들 가운데 두어 사람이 무척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예전엔 미처 몰랐는 데, 어느새 마흔이 되고 보니 앞으로 내가 다시 이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 다. 나의 게으름이 나아질 기미가 없어서 앞으로 도 자주 만나진 못하겠지만, 오리와 홍반장, 그 분들께 이렇게라도 저의 애끓는(ㅎㅎ) 마음을 전 한다. 땡큐, 아리가토, 셰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공존할 수 있을까 - 영화 <그을린 사랑>을 보고 아침 | 무기제로 + achimgirin@gmail.com

여러분이 지금까지 한 것은 정확하고 분명한 문제에 대한 정확하고 분명한 답을 찾는 거였어요. 하지만 이젠 완전히 다른 모험을 시작할 것입니다. 아주 어려운 주제를 다룰 것이며 그건 항상 또 다른 어려운 문제를 낳게 될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반복적으로 듣게 될 것입니다. 왜 가망 없는 일을 하느냐고. 여러분에겐 자신을 옹호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자면 너무나 복잡한 얘기니까요 순수 수학... 고독의 땅에 잘 왔습니다. - 니브(잔느의 교수)가 수업 시작 전에 한 말

# 영화의 모든 장면이 끝이 나고 음악이 멈추고 자막이 다 올라가고 불이 켜진다. 사람들은 서서히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그러고도 한참을 움직이지도 않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밖 으로 나갔을 때 쯤 정신이 돌아온 듯 주섬주섬 짐을 챙기면서도 멈칫하며 생각에 잠겼다. 서로의 얼 굴을 바라보았을 때 처음 꺼낸 한마디는 “레바논에 못가겠다”라는 말이었고 들려온 말은 “지금 (비행기) 취소하면 수수료는 얼마 나올까?”였다. 조용히 극장을 빠져나와 밥이라도 함께 먹자며 식당 을 찾으면서도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레바논에서 열리는 집속탄금지협약 두 번째 당사국회의에 참가하기로 한 세 명이 만났을 때의 일이다.

너는 진실 앞에 침묵할 수밖에 없을거야. 알아. - 나왈 마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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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본 후에 계속 이어지는 질문들로 이틀 동안은 꿈 자리마저 뒤숭숭했다. 과연 평화가 가능할까? 내가 뭐라고 전쟁과 폭력의 고통을 겪은 이들에게 평화니 화해니 떠들어 댈 수가 있을까? 이 원고를 쓰겠다고 결심한 다음날 나는 극심한 복통으로 한의원을 찾았다. 아픈 곳을 손으로 짚어 주니 한의사는 내가 극심한 스트레스로 아픈거라면서 최근 에 무슨 일 있었냐고 묻는다. 내과에서는 스트레스로 인한 급성위염이라고 한다. 사랑니를 뽑았고 그러느라 한시간 동 안 턱이 빠진 채로 있었고, 그래서 먹고픈 것도 못먹고 좋 아하는 술도 못먹고, 그리고 구럼비 바위가 파괴되는 사진 을 봤고.. 심지어 이 영화에 대한 리뷰를 청탁받고 다시 이 영화를 생생하게 떠올렸다. 같이 사는 친구에게 <그을린 사 랑>에 대한 원고를 써야한다고 하니 바로 얼굴을 찡그리며 그게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었을 수 있겠다고 한다. 글을 쓰 는 지금 다시 복통이 명치 쪽으로 움직인다.

넌 못 알아볼거야. 아주 아름답거든. - 나왈 # 좁은 이코노미 좌석에서 어설프게 잠들었다가 깨서는 카타르의 도하에서 환승을 위해 내렸다. 공항 안에 기도실이 있다. 여기는 중동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 쓴 여인네들이 화장품 진열장에서 이러저러한 화장품을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구경 중인 낯선 풍경. 베이루트행 비행기를 타려면 공항 건물에서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야했다. 그 버스에서 예쁘게 생긴 젊은 여자가 말을 건다. 레바논의 트리폴리 출신인데 몇 년 전에 호주로 이민가서 살다가 휴가차 가족과 함께 가는 중이란다. 이름은 나왈이라고 했다. 이름을 듣고는 속으로 쿵!하고 뭔가 내려앉았다. 나왈은 영화의 주인공 이름이다. ‘영어로 그을린 사랑의 원제가 뭐더라?’ 하는 사이 버스가 도착했고, 우리는 눈인사만 하고 헤어졌 다. 부모로 보이는 나이든 남자분과 히잡을 쓴 여성분이 있었다. 나왈은 히잡을 쓰지 않았다. 물어볼 영어실력이 될 리가 없다. 다만 다시 한 번 영화를 떠올리며 작은 한숨을 내쉰다.

만약 나왈 마르완의 딸이라면 여기서 환영 못받으니까 돌아가시래요. - 사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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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한 여인의 유언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충격적인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모두에게 이 영화를 볼 것을 부탁한다. 그리고 영화를 본다면 반전에 는 초점을 두지 말아달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이 이야기 는 어쩌면 반전(反轉)이 아니라 반전(反戰)에 대한 이야기 일 수도 있다. 쌍둥이에게 쌍둥이의 아버지와 자신의 큰 아들을 찾아 편지를 전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어머니의 황당한 장례식 주문에 화가 난 시몬과 달리 어머니를 이해하려는 잔느는 어머니의 고향으로 향한다. 낯선 이방인을 반기고 외국어로 인사를 하며 재밌어하던 어머니의 고향 동네 아줌마들은 ‘나왈 마르 완’의 이름과 사진을 보고는 표정이 변한다. 전쟁이나 내전이나 분쟁의 고통을 직접 겪은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더 이상 말하기 힘들다. 나왈도 자신이 알게 된 진실 앞에 입을 다물어버릴 수밖에 없었 다. 지켜보는 사람들, 다른 세대의 사람들의 숙명인 거리가 오히려 진실을 보는 데는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아마도 자신들의 겪은 이야기 속에는 자신들의 평가가 더 크게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샤르벨 삼촌은 말과 책이 평화를 가져올 거라 생각했어요. 나도 그랬고.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는 걸 배웠죠. - 나왈 # 비행기에서 내 좌석은 오른쪽 창가자리였다. 높은 곳에서 땅을 구경하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그러면 뭔가 초연해지는 기분이 든다. 일상의 자질구레한 집착들이 내려놓아진다. 땅에서는 심각한 일들이 고도가 높아지고 시야가 넓어지면서 아무렇지도 않아진다.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카타르 에서부터는 도시와 길들 그리고 나머지는 사막이다. 아무 것도 없는 황토색의 땅. 길이 보이다가도 황토색으로 먼지를 뒤집어썼는지 지워진 부분도 보인다. 사막에서는 유일신을 믿을 수밖에 없다는 책 에서 읽은 말들을 떠올린다. 그러다가 푸른 빛이 돌기 시작하더니 바위로 된 지형이 바로 아래에 펼 쳐진다. 가파르게 멀어지는 땅. 곳곳에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도시가 펼쳐진다. 베이루트다. 도하 에서 만난 나왈이 알려준 대로 레바논은 아름다운 곳이었다. 문명의 교차로 역할을 해오던 지역으로 고대 이집트 사원과 로마시대의 유적과 십자군 요새가 한 공간에 자리하고 있는 비블로스에 가보려고 했으나 중간에 포기했다. 시내 중심가에는 로마시대 목욕탕 유적지가 있다고 했다. 폭격을 맞은 자리 를 치우다가 발견했다고 한다. 근처에는 시계탑을 중심으로 정부청사 같은 건물들과 이웃한 블록에는 명품 쇼핑몰들이 자리잡고 그 뒤편으로 공사 중인 건물들이 보였다. 그리고 곳곳에 총탄과 폭격의 흔 적이 보였다. 폭격을 맞은 채로 쓰러져가는 빈 건물들도 있었다. 그리고 물가는 예상보다 더 비싸고 수도인 베이루트에선 더했다. 한참 개발 중인 명품 쇼핑몰과 폭격으로 방치된 건물들만 눈에 들어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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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 아니었다. 아랍어로 쓰인 성경,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히잡을 쓴 채 담배를 피우는 여성들, 도심 한가운데 있던 바리케이트와 총을 들고 지키고 선 군인, 그리고 총탄자국이 남아있던 교회의 모습이 레바논에 도착한 첫날 본 것이었다. 낯선 것 투성이었다.

터무니가 없으면 당연히 질문을 해서 알아봐야지. 안 그러면 마음이 안 편할거야. - 니브 # 3명이 하루 60달러의 방을 빌렸다. 그나마 저렴하게 어렵게 구한 방이다. 침대 3개가 빼곡히 들어 차있었다. 낮에는 정전이 되었다. 무선 인터넷이 된다는 로비는 TV소리와 담배냄새와 아랍어로 떠들 어대는 수다와 와이파이 접속이 자주 끊겨 괴로웠다. 회의장은 횡단보도가 없는 거리를 두 번 건너는 곳에 위치한 아주 비싼 호텔이었다. 회의 동안 일기를 쓰고 엽서를 쓰고 가끔 사진을 찍고 와이파이 가 되는 곳에서는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렸다. 통역에 대한 배려가 없는 회의였고, 같이 간 친구들은 하루하루 소식을 전하고 언론에 보낼 글을 쓰느라 바빴다. 이곳에 내가 왜 온 걸까?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답답해하며 읽을 수 있는 자료들을 조금씩 읽기도 했다. 그러다가 집속탄의 폭격 후 오염되어 제거작업이 진행 중인 나바티예 지역으로 갔을 때 받았던 동화책을 보며 충격을 받 았다. 어린이들에게 집속탄의 위험을 알리는 내용이었는데, 나의 조카에게 일상적으로 산과 들로 다 닐 때 조심하라는 경고로 가득찬 동화책을 읽어주는 것을 상상했기 때문이다. 그 충격으로 말도 안되 는 일상이 현실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런 현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믿기 위해, 그리고 희망을 만들어내고 있는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것을 믿기 위해 그 자리에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잔느가 홀로 어머니의 고향에 찾아가 어머니가 겪은 일들을 알아내고 어머니의 유언이 어떤 뜻인지 알아내었던 것 처럼.

네 자신을 위로해라. 그 무엇도 함께하는 것만큼 아름답지 못하니까. 넌 사랑으로 태어났단다. 함께하는 것보다 아름다운 건 없단다. - 나왈 # 영화의 시작은 라디오헤드의 노래로 시작된다. 그리고 무장한 사람들에게 이끌려 줄을 서는 겁에 질린 소년들이 나온다. 두려움이 분노로 바뀌는 머리 깎이는 소년은 후에 편지를 받는다. 그 소년은 폭격 맞은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소년들을 저격하는 전사가 되고 그리고 다른 편이 되어 잔혹한 일을 하기도 한다. 그 소년은 피해자일까? 가해자일까? 편지를 받은 후 그 아이의 남은 삶은 어떻게 변할 까? 살아갈 수 있을까? 혹은 살아오는 동안 그 사람은 어떻게 지냈을까? 이런 질문을 받을 만큼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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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똑같은 사람이었다.

절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아. 여전히 자취들이 남아있지. - 메 나다드 # 최근 썩 튼튼하진 않아도 나름 건강하고 병원갈 일이 없을 것 같은 몸에 이상이 생기고, 심지어 자 신감에 가득 차 있던 마음도 약해져서 몸의 통증에 쉽사리 휘둘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면서 얻게 된 통찰은 고통 역시 수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통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도 바라보겠다는 다짐도 했었다. 다른 것은 희망이었다. 분노의 끈을 끊겠다는 희망이었고 그것은 다짐 이었다. 의사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상황이라며 무슨 일을 하냐며 물어봤다. 그래. 어쩌면 하려던 일을 제대로 안해서 받게 된 스트레스였을지도 모른다. 그 질문을 받으며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구 럼비가 파괴되고 있는 사진이었다. 주변에서는 간혹 왜 사회의 아픈 곳에 유독 관심을 가지고 삶을 즐기지 않냐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질문당하는 당시에는 나에 대한 그들의 평가가 불편했으나 조금 지난 지금은 그들의 애정도 함께 보인다. 하지만 나는 나의 다짐을 어길 생각이 없다. 이 세상 에 만연한 고통들은 어쩌면 내가 겪을 수도 있을만한 일들이다. 얼마나 참혹한지 예상을 뛰어넘는 비 참함에 내가 버틸 수 있는 능력은 없다. 다만 그런 순간이 왔을 때에도 믿고 싶은 것이다. 누군가는 나를, 나의 고통을 기억해주고 이것을 중단하거나 없애려는 마음을 나누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끝 끝내 갖고 싶은 것이다.

이놈의 나라는 전쟁이 끊이질 않아요 복잡한 얘기는 아니죠 노아 시대에 공증인이 있었다면 이렇지 않았겠죠 원래 계약서만 찾으면 되니까 이건 당신 것, 저것 당신 것 다 거기 나올테고 좀 더 얘길 해보면 다들 만족했을 겁니다. - 레바논 공증인 메 마다드

# 충격적인 이 이야기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일까? 팔레스타인에 살던 와합이 고향에서 쫓겨나 레바논 에서 난민으로 살아간 것일까? 혹은 기독교도들과 난민을 지원하는 무슬림들의 분쟁? 이스라엘의 건 국 때문일까? 홀로코스트 때문일까? 디아스포라 때문일까? 공증인이 없었기 때문일까? 나왈의 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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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공포에서 시작되었을까? 혹은 대단한 러브스토리에서 시작되었을까? 어쩌면 마지막 질문이 이 영 화의 충격을 감동으로 전환시키는 답이 될런지도 모른다.

이걸 알아야 돼. 당시엔 보복에 보복이 이어졌어. 그게 서로의 거침없는 논리에 부합됐으니까 - 삼세딘

# 함께한다는 건 정말로 멋진 일일까? 본인은 말을 잃고 생명을 잃어가면서 자신이 생명을 준 이들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 역시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으로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니면 어쩔 것인가? 분노의 끈 을 가지고 있어봤자 더 불행해지는 건 나뿐이 다. 모든 건 지금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이것 역시 선택이다. 분노와 복수를 선택할 것인지, 그럼에도 불구 하고 용서와 화해를 선택할 것인지. 증오보다 사랑이 크면 평화는 가능하다. 그리고 아마도 인류 역 사상 불행한 길을 걸어왔지만 여전히 생존하고 있는 이유는 어쩌면 그런 선택 때문일 것이다.

너희 이야기는 이 약속으로 시작될 거라 생각해. 분노의 끈을 끊겠다는 약속으로. - 나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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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클이 있어야 된다, 피클. 잠깐만 기다려봐.” 동생에게 통닭을 먹이려던 언니는, 스스로 급제동을 건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이 피클 하나

가 그녀의 존재 자체를 흔드는 커다란 물음으로 다가올지. 이런 거 하나 제대로 못 만드나 몰 라. 어떻게 열라는 거야 이거를… 이 정도 하나 내가 못할 까봐. 내가 할 거야… 이런 거 하나

내 맘대로 안 돼. 나보고 어쩌라고… 그녀는, 온 힘을 다한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내 가 진짜 미쳐. 열려라 좀. 이 정도 됐으면 불쌍해서라도 봐주겠다. 내가 불쌍하지도 않냐… 열려

라 좀! 여러 가지로 힘든 시간을 겪고 있던 그녀. 정말, 불쌍해서라도 열려야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피클조차 이 처절한 호소를 외면한다. 결국 그녀는 피클이 든 병에 자신의 존재도 함께 담아 벽을 향해 날린다. 그렇게 피클은 아스러지고, 그녀도 함께 으스러진다. 드라마 <연애시대> 에 나오는 대목. 정말 되는 게 하나도 없는 상황이다. 손예진이 나를 연기하고 있는 건지, 내가 손예진을 연기하고 있는 건지. 최근 이 장면을 몇 번이나 보며 내가 눈물을 쏟은 이유다. 열려라 좀! 사정이 있어 학교를 옮겨 스칸디나비아 땅에 더 머물게 되었다. 논문을 완성해야 할 시점에 새 로운 장소로 옮긴 것, 바로 문제의 시작이었다. 가장 기본적인 부분들, 그러니까 숙소, 연구실, 컴퓨터 문제와 씨름하느라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옮겨온 뒤 3주일 동안 무려 3번의 이사, 3번 의 연구실 이동, 3번의 컴퓨터 교체를 겪어내야 했다. 하루하루가 정말 불확실함 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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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불러왔는데, 상황 자체도 불안했지만 무엇보다 논문 쓰기에 집 중을 못 한다는 생각이 엄청난 불안으로 다가왔다. 가장 안정된 상황에서 논문을 써야 할 시점, 나는 가장 불안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하루하루, 1시간 1시간이 급박한 상황에서 계획보다 늦어지고 있는 논문. 정말 괴로웠다. 게다가 얼마 전부터 시력이 안 좋아지고 있었는데 왠지 두 려운 마음이 엄습했다. 이와 더불어, 여러 가지 일들이 계속 안 되는 쪽으로 돌아갔다. 그나마 얻은 안정된 연구실 공 간은 소속 학과가 아닌 다른 학과 건물에 있었다. 이번 학년도에 사람이 유난히 많아져 공간이

부족해서였는데, 다른 이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은 고립감 을 주기에 충분했다. 부분적으로 새로운 친구를 만나기 위해 몇몇 과목의 청강을 신청했는데, 이상하게도 부정적인 반응만 돌아 왔다. 또 가고 싶은 행사나 강좌는 이미 마감기한이 지났거나, 뒤쳐져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 엄 두가 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학술지에 투고한 원고가 2번이나 거절당하고, 기대했던 논문공 모전에도 탈락했다. 그러다가 멍한 생각으로 복도를 지나다 어이없게도 어떤 물체에 머리를 크 게 부딪혔다. 혹시나 하여 손으로 만져보니, 피가 꽤 흘렀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극심한 스트레스와 계속되는 불확실함은 논문 쓰기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이는 또 다른 스트레 스와 불확실함으로 이어지는, 말그대로 악순환이 지속됐다(어떤 면에서 그래도 난 괜찮은 편이 었다. 주위의 도움으로, 나 하나만 잘 챙기며 공부하면 되는 환경이니. 그럼에도 힘겹다는 생각

‘ ’

은 자학 으로 이어졌다). 이 모든 상황은 몸으로도 나타났다. 입 주위에 이상한 것들이 생겼는 데, 피도 나오고 시려워 먹는 것도 어려웠다. 그러면서도, 몸부림쳤다. 먼저, 달렸다. 내년에 마라톤을 뛰려고 계획하고 있었지만, 무엇보다 나는 살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뛰기 시작했다. 그나마 뛸 때는 머리 속으로 공부를 할 수 있었 다. 어지러운 상황들을 하나씩 정리하고, 논문의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1시간 정도 몸

‘ ’

을 혹사 시키고 나면, 그나마 잠을 깊게 잘 수 있었다. 그렇더라도 아침에 일어나기가 무서웠다. 오늘을 또 어떻게 견뎌내나 하는 두려움에. 그러던 어느 저녁. 그날도 절박한 마음으로 뛰고 있 었는데, 어떤 기숙사에서 파티를 하고 있었다. 노래가 크게 흘러나왔는데, 여러 가지 복잡한 감 정으로 지쳐있던 나는 그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음악이 특별히 슬퍼서가 아니라, 그냥 내 상황이 참 서럽게 느껴졌다.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된 채, 그날도 그렇게 잠을 청했다. 달리기 와 더불어, 성당에서도 약간의 안정감을 찾았다. 특별히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바다를 건 너온 뒤 나는 꼭 상황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여러 가지 이유로 성당에 가곤 했다. 일단 성가 소 리를 들으면 뭔가 고요해지는 것 같았다. 특히 오르간 연주는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묘한 힘이 있는 듯하다. 그렇게 겨우겨우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일종의 돌발상황이 발생했다. 비행기를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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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멀리 다녀와야 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것도 일주일 간격으로 두 번씩이나. 겨우 책상에 앉아 본격적으로 논문을 쓰려고 하는 찰나, 나는 또 다른 이동으로 불안정한 시간을 보내야 했 다. 일단 비용도 문제였지만(다행히 지원을 받긴 했다), 시간을 최대한 아껴야 하는 상황에서 거 의 2주일을 훌쩍 넘겨버려야 하는 상황은 나를 너무도 괴롭게 만들었다. 게다가 두 번째 비행에 서는 뜻밖의 일로 비행기를 놓치고 말았는데, 이 일로 공항에서 24시간을 고스란히 보내야만 했 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겨우 안정을 찾았던 내게, 이 일은 결정타나 다름 없었다. 그나마 가지 고 있던 오기와 의욕이 완전히 상실되고 말았다. 어떤 분이 전에 개인적으로 했던 말이 떠올랐

” “

다. 사방이 막혀 있는 느낌 , 노력하면 할수록 어려워지는 상황 … 그 말들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었는지 뼈저리게 알게 됐다. 다시 연구실로 돌아왔지만, 극도의 무기력감으로 하루하루를 흘려 보냈다. 시간이 줄줄 새고 있는 소리가 나를 둘러쌌다. 10가지 일을 하고 있으면, 11가지 가 안 되는 그런 상황. 네가 행복해져야만

그러면서 생각했다. 네가 행복해져야만, 이 세상도 행복해진단다. 역시 <연애시대>에 나오는 말이다. 내가 행복하지 않으니, 주위의 모든 것들에 무감각해졌다. 아름다운 도시, 좋은 날씨, 여러 행사들. 이 모든 것들이 내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내가 행복해야, 세상도 행복한 것이 다. 그리고 선택의 문제였다. 정확히 1년 전, 나는 넘쳐나는 파티와 살가운 친구들 덕에 행복한 고민을 많이 했다.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오히려 피해다녀야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고립을

‘선택’했다. 그런데 새로운 곳으로 옮기면서, 연구실을 포함해 그야말로 고립감이 지속되는 상황. 적절한 예가 될지 모르겠지만, 동성애 결혼이 떠오른다. 결혼을 원하는 동성애 동반자들에게 왜

굳이 억압적인 제도에 편입하려 하느냐는 이성애자들의 비판이 있다. 과연 처음부터 선택지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은 어떻게 다가갈까. 이는 선택권 있는 사람들의 무지이며 폭력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본다. 끝으로 내가 느낀 모든 불안과 스트레스는, 내가 뭔가 절실히 해내려 한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 다. 포기한 상황이라면 (그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지만), 굳이 불안해하거나 스트레스를 받 지 않을 것이기에. 노력하기 때문에 힘들고 불안한 것이다(또는 당장 뭔가 하지 않더라도 자신 과 삶을 아끼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어딘가에 숨어 있다면, 우리는 고민하게 될 것이고, 좀더 나 음을 추구할 것이고, 결국 이는 언젠가 불안을 동반하게 될 거라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왜 꼭 이렇게 각박하고 절박하게 지내야만 하나, 라는 생각도 든다. 즐겁게, 웃으면서 노력할 수는 없 을까. 복잡한 문제다. 동시에 나를 향한 응원이 필요한 이유. 누군가 해주는 응원도 좋지만, 내 가 하는 나를 향한 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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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스웨덴 소식] # 스웨덴, 팔레스타인 대사관 승격 (스웨덴 국영라디오 국제: 2011. 9. 8) 스웨덴이 스톡홀름에 있는 팔레스타인 대표부를 대사관으로 승격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는 팔레 스타인이 유엔에 공식적으로 국가 인정을 요청할 시점과 맞물려 이루어졌고, 스웨덴이 팔레스타 인을 국가로 인정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을 낳았다. 이와 관련해 스웨덴 외무부는 공식적으로 그 사안과는 관련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 스웨덴 경찰, 동성애 혐오발언 처벌 문제 (스웨덴 영문뉴스 <로컬>: 2011. 10. 27) 동성애자는 “사회에 대한 암”이라고 발언한 남성 경찰이 처벌을 받지 않게 되었다. 그는 새로 들어온 신입 여성 경찰에게 동료 레즈비언 경찰을 언급하며 위와 같은 혐오발언을 했다. 우연히 이 대화를 듣게 된 해당 레즈비언 경찰은 그를 처벌해줄 것을 요구했는데, 경찰 당국은 내부 조 사 결과 충분한 정보(증거)가 없다며 처벌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전쟁없는세상을 후원해주세요> 전쟁없는세상은 병역거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소중한 후원들이 모여서 시작되었습니다. 대체복 무제 도입을 위한 활동, 수감 중인 병역거부자들을 지원하는 활동, 병역거부를 고민하는 사람들 을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해왔습니다. 이제 병역거부운동과 함께 보다 다양한 평화운동을 해 나 가고자 합니다. 후원을 해주시면 병역거부에 대한 다양한 뉴스와 정보, 전쟁없는세상의 소식지 등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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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안녕하세요,

저는 병역거부를 고민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막상 병역거부를

하려니 감옥에 다녀온 후가 걱정됩니다. 전과자가 되면 취업도 어렵다고 하고, 국가고시같 은 것도 못본다고 하더라구요. 해외 나가는 것도 비자가 안나오기도 한다고 하던데요. 그 렇게 되면 사회에서 매장당해버리는 건 아닌가요? 병역거부 때문에 아무 것도 못하게 되는 건 너무 싫은데요... 효웅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A. 사랑합니다

고갱님. 고갱님의 질문에 답변드리겠습니다. 네. 너님 레알 매장당합니

다. 게다가 고갱님께서 만일 저처럼 병역거부 + 게이라고 온천하에 시일야방성대곡처럼 커 밍아웃을 한다면 신상이 이중 삼중으로 개털릴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요새 사회로부터 관 심 어그로1)가 감소하고 너무 외로와서 은근히 신상이 더 털리고 싶네요.... 무플보다는 악 플이 낫다지요.... 각설하고; 흠 일단 직업시장에서는 고갱님이 국정원이나 경찰같은거 공 무원이나 교직 캐릭같은걸로 전직2)하고자 하신다면 다소 레벨 제한이 있는거는 맞구요. 국 가직 공무원이나 공기업 같은데 말고 그 외에 일반 기업이나 전문직들은 어차피 고갱님의 스펙이 딸려서 못들어가는 거지, 병역거부 때문에 딱히 문제될껀 없을꺼 같아요. 일단 사 법부나 경찰에 수형기록부가 남아 있다고 해서, 그걸로 어떤 기업 채용시나 인사시의 불이 익을 줄 순 없거든요. 또 기업에서 전과기록같은 개인 신상을 알기 위해 조회해보는 것도 금지되어 있구요. 그런데 군필자를 우선시하는 우리나라에서, 현역이나 보충역이 아니라 ‘미필’이라고 한다면 면접에서 의심할 수는 있겠죠. 왜 미필인가를 추적해서 뭐 이런 것 1) 게임에서 몬스터들이 캐릭터에게 몰리는 것을 의미함. 여기서는 관심이라는 의미로 씌였음. 2) 게임에서 레벨 업을 하면서 직업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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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딴지걸어서 불이익 줬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네요. 정 내키지 않으면 굳이 미필 임을 밝히지 마시고, 병역거부한 사실이 밝혀져서 “우리 기업에서는 절대 네버 에버 병역 거부자는 못쓰겠다!!”고 주장하는 기업이 있다면 인권위에 꼬지르세요. 그래도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병역거부자 채용은 안돼!!”라는 회사가 있다면, 다른 직장을 알아보셔야죠. 그리고 국가고시나 공무원시험 같은 경우에는, 금고 이상의 실형을 선고받으면 응시제한 이 있는데, 평생 시험을 못보는거 아니냐고 쪼실꺼 없어요. 시험마다 다르긴 하지만 보통 형 종료(그러니깐 출소)후 3년-5년 정도까지만 응시를 못하고, 그 이후에는 응시를 할 수 있답니다. 그럼 순간의 실수로 감옥 갔다온 사람들은 평생 재능이 있어도 시험도 못보고 일도 못하고 굶어 죽어야 하게요? 물론 국정원이나 외무고시 같은건 좀 들어가시기 힘드실 꺼 같아요. 국가관을 중요시하는 분야인데, 너같으면 병역거부자를 채용하겠어요? 그럼 국 가공무원 말고 전문직이나 기타 자격시험, 고시 등등은 응시제한기간(보통 3년~5년)이 지 나면 시험 치시는데 전혀 지장 없답니다. 시험을 응시 못하거나 취직이 안되는건 너님 스 펙 탓일 확률이 크구요. (농담이에요 ^^;;;) 저같은 경우만 해도 대학교생활 도중에 가게 돼서 좀 그랬지만, 재입학을 해서 잘.....은 아니고 학점 메꾸면서 힘겹게(죽지 못해서) 다 니고 있답니다. 참, 해외여행도 잘 갈 수 있음요. 보호관찰기간3)이라면 다소 서류가 빡빡할 수도 있겠으 나 가시는데 전혀 문제 없음요. 그럼 죄한번 짓고 감옥간 사람들은, 평생 한국에만 갇혀 있어야 하게요? 한국이라는 나라가 병맛인건 사실이지만, 그 정도로 개념없지는 않습니다. 암튼 그 다음에는 사회문화적인 편견이나 차별, 가족관계의 문제겠죠? 이게 젤 큰 문제 죠. 상담원인 제 경우에도 뭐 이해해주는 사람들은 전없세밖에 없구요 따라서 어차피 타자 는 지옥이라고 생각하기에 주로 대응하기보다는 똥이 드러워서 피하구요. 그렇지만 믿고 아끼는 지인들이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다면 참 슬프네요.... 저 님하 어디가면 상담받을 수 있을까요? ㅠㅠ 저좀 젭라 상담해주세요 ㅠㅠ 암튼;; 그건 앞으로 저희 전없세에서 점 차 해결해 가야할 부분인거 같아요. 그리고 어차피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소수자이기에, 지잡대라서 매장당하기도 하고, 장애인이라서 일단 매장당하기도 하고, 스펙이 안되거나 부모재산 버프4)를 못받는 경우 이미 루저로서 매장당한다고 생각해요. 그나마 병역거부를 해서 콩밥을 먹으면서 렙업하면서 그런걸 상쇄할만한 주체적인 지혜와 현명함이라는 경험 치+ 레어아템을 득템했으니 그나마 아무것도 없는 뉴비5)들보다는 다행이라고 생각하구. 전없세같은 님 친구들의 길드버프도 있고...또 아주 보란듯한 지위에 올라가거나 직업을 갖 는데 하필이면 병역거부가 발목을 잡고 있다고 여길 정도로의 욕심이 없다면요. 제 생각엔 3) 예정보다 조금 일찍 가석방으로 출소하면 형 종료까지 보호관찰기관이 된다. 4) 게임을 하면서 받는, 아군의 축복기술 같은것. 5) 게임에서 초짜를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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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부 한다고 갑자기 마치 원래 자기는 우주인 엄친아 스펙이었는데, 병역거부 하나만 으로 없던 스펙이 마이너스 스펙이 되는건 아닌거 같아요. 그건 원래 고갱님이 저처럼 병 역거부를 상쇄할만한 ‘A급 엘프 외모’라는 종특 스펙을 갖추지 못한 탓일테니까요 *^^* (부러워하면 지는거임 *^^*) 흠 사실 저같은 경우엔 워낙 병역거부를 찜쪄먹는 게이+복부 비만이라는 다소 하자있는 종특을 이미 가지고 있었던지라, 사실 병역거부는 그냥 하나 더 너프6)가 된 수준이였지요. 병역거부도 은근히 문화적 차별은 있겠지만, 그래도 소통이성을 통해 타인에게 대화를 건넬 수 있을 정도는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합의점을 찾아 나 갈 수 있구.. 그건 그동안 전없세 림하들에게 너무 고마운 부분이네요. 가족과의 문제도 마찬가지겠지요. 안심시켜 드리면서 소통하고 이해시켜 드리고자 노력하면서.... 설마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제 자식인데 호적에서 파고 발가벗겨서 다 큰아들 내쫓겠어요? 그건 부모가 천륜을 어기는거죠. 암튼 적어도 북한이나 이란처럼 백주대낮에 죽여버리던가, 힘 없는 여인을 채찍으로 후려갈기거나, 중세시대처럼 화형을 당하거나 예전 군부독재시절 민 주화 인사들처럼 끝없는 감시에 연좌제에 온갖 사회적 불이익에 평생 죄인으로 고문을 받 진 않으니.. 그나마 이게 다 MB님의 은총이죠. 어차피 이 미친 한국 사회에서는 1%빼고 모두 매장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마치 “병역거부 안했으면 내가 말야 엄친아에 방구 꽤 나 끼면서 살았을 캐릭인데 병역거부 너 때문이야!!”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그건 너 때문 이구요, “너나 나나 다같이 매장당하는 이 사회에서 우리 그나마 숨구녕을 찾을 수 있는 구녕들을 찾읍시다!!”라고 생각해야겠죠. 그런 구녕들은 분명히 어딘가에 많이 있을꺼에 요. 그래 안그래?? 그럼 고갱님 답변이 되었는지요? 고갱님 오늘 하루도 좋은 하루 되시구 요. 이상 상담원 효웅이였습니다. 사랑합니다 고갱님 *^^*

여러분의 질문을 기다립니다! 병역거부에 대한 질문이나 평화운동에 대한 고민이 있다구요? 근데 상의할 사람 이 없다구요? 그렇다면 dreamsnail@naver.com 또는 peace@withoutwar.org 로 질문을 보내주세요. 효웅님의 재미난 답변을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6) 게임에서 캐릭터의 능력이 밸런스를 위하여 깎이는 것을 뜻함. ex) “아 내 법사 너프당했어!” “블리자드 님하 전사 너프점여 전사 사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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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想․像 난영 | 개척자들 + sksdudrhdw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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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 여기서 전쟁이 시작된다. 우리가 여기서 막아내자! War Starts Here! Let's Stop it Here!! 오리 | 무기제로 + WRI 런던사무국에서 활동 중 + jungmin.duck@gmail.com

뭔가 새로운 삶에 도전해보고자 한국을 떠나온 지 1년 가까이 되던 시점에 스웨덴에서 개최되는 액션캠프에 참가할 기회가 생겼다. 공부랍시고 수업듣고 도서관에서 책 읽고 에세이를 작성하는 데 어느 정도 지겨움을 느낄 즈음이었다. 아싸, 말로만 듣던 스웨덴이구나! 그런데 좀 궁금해졌 다. 스웨덴 하면 중립국, 유럽에서도 최고 수준이라는 사회복지시스템, 양질의 교육제도 등등 우 리가 어느 정도 본받아야 하는 나라 아니었나? 그런 곳에서 웬 액션캠프? 쌩뚱맞게스리... 그러나 두둥... 실상은 이랬다. 스웨덴은 공식적 나토(NATO) 멤버가 아니면서도 나토가 전 지구 적으로 하고 다니는 나쁜 짓은 다 따라 하는 나쁜 국가였던 것이다. 스웨덴 군대는 현재 나토가 진행 중인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리비아 작전에 참여하고 있으며 벨기에 브리셀에 있는 나토본부 에도 대사관을 두고 있다. 액션캠프가 개최된 스웨덴 북부의 도시 룰레오(luleå)에는 NEAT(North European Aerospace Testrange)라는 군사훈련지역이 있는데 하루 24시간, 일주 일에 7일, 1년 365일 개장하는, 그 넓이만 해도 벨기에 땅 전체와 맞먹는, 유럽 최대의 육상 군 사훈련장이 존재한다. 이 거대한 군사훈련지역은 스웨덴 군대뿐만 아니라 나토, 미국 등 다른 나라의 군대도 돈만 내면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1966년부터 2010년까지 적어도 24개국의 무기 생산기업및군대가이곳에서훈련을실시했고 2009년엔나토신속대응군(NATO Response Force) 이 그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훈련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NEAT는 아프간과 파기스탄으로 보내진 무인항공기의 훈련장소로 사용되어져 왔으며 이처럼 가장 기술적으로 진화한 전투기들의 훈련장 소로 유명한 곳이다. 헛 그것 참... 스웨덴, 너 안 되겠구나? 이런 군수산업 및 시설 등을 바탕으로 삶의 질 상위권에 랭크되어 있는 스웨덴, 스웨덴의 활동가 들은 이런 자국의 이중성에 대해 국제사회에 폭로하고 사회적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많은 활 56


P.e.a.c.e.E.s.s.a.y 동들을 벌이고 있었다. 이번 액션캠프는 평화인권연대가 해체하기 전까지 매년 개최했던 평화캠 프와 마찬가지로 Ofog라는 단체에서 매년 NEAT 주변에서 개최하던 것이다(Ofog가 NEAT에 주목하기 이전에는 스웨덴의 다른 곳에서 진행되었었다). 액션캠프의 컨셉은 간단하다면 간단한 것이었다. 나도 그랬듯이 국제사회, 심지어 스웨덴 사람들 대부분이 NEAT의 존재를 아예 모르 고 있고 자신들의 조국이 얼마나 더러운 전쟁에 깊숙히 가담하고 있는지 상상조차 못하고 있기 때문에 알리자! 알릴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이것이었다. 스웨덴에서의 2주간의 경험은 나에게 여러 가지 영감과 힘을 주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아래 소개 한 공식 프로그램은 정말 말 그대로 주최 측에서 준비한 정말 뼈대 정도의 공식 프로그램들이고 이 공식 프로그램 보다 더 많은 활동이 각 소그룹(Affinitiy group)을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벌어 졌었다. 이를 테면 틈나는 대로 시내 나가서 온 시내를 핑크로 물들이고 하고 그림을 그리고 노 래를 부르고 또 어떤 그룹들은 새벽을 틈타 NEAT에 참입, 활주로를 핑크로 도배하고 군용레이 더에 핑크 배너를 걸고 도시락 등을 까먹으며 놀다가 경찰서에 붙들려 가고(여기는 스웨덴, 한 국과는 다르다. 오전에 잡혀들어가면 오후에 나옴) 하는 자발적 행동들 및 각종 워크샵들이 개 최되었다. 액션 캠프 전에는 일주일간 WRI Council 회의가 있었으니 굉장히 빡빡한 2주일을 소 화한 셈이다. 나누고 싶은 여러 가지가 많지만 그 중에서 몇 가지만! 먼저 이번 액션캠프를 조직한 Ofog 소개 를 하고 넘어가야겠다. Ofog는 스웨덴의 반군사주의자 네트워크로 스웨덴 전국 각 지역에 기반 을 두고 활동을 하면서 또한 전국적인 행동을 함께 하는 네트워크 단체이다. WRI 소속 단체이 기도 하다. 이 단체의 주축은 젊은 페미니스트 퀴어 활동가들로 네트워크의 분위기가 시종 일관 밝고 경쾌하며 유연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각자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몇 사람이 소그룹을 결 성해 이번 액션캠프를 위해 1년 동안 스웨덴의 각 지역을 돌며 스웨덴의 무기산업, 군사주의, NEAT에 대해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이다. 단 일회성의 행동이 아니라 그 행동을 위해 오랜 기간 준비해왔다는 것에 놀라왔다. 뭐 한국과도 비슷... ㅎㅎ 그 결과 200명이 넘는 대규모 인원이 액션캠프에 모일 수 있었고 많은 언론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액션캠프는 매년 일 상적으로 진행해오던 행사이지만 캠프가 끝나고 Ofog 전국회의를 진행한 결과 내년에는 액션캠 프를 한 차례 쉬고 지역활동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대두되어서 내년에는 한 차례 액션 캠프를 쉬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어맛, 딱 내 스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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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 (공식) 프로그램 소개 * 국제세미나, 7월 23~24일 - 군-산 연계 및 글로벌 무기산업 - 전쟁과 기후변화 - 북극의 군사화 - 기지 및 지역적 저항 - 오늘날의 전쟁, 미래의 전쟁: 무인항공기, 인공위성 그리고 우주의 군사화 - 우라늄, 핵발전, 그리고 핵무기 - 인도주의적 개입 - 전쟁과 군사주의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응답 - 모병제, 신병모집, 그리고 대항신병모집 캠페인 - 페미니즘, 퀴어, 그리고 반군사주의 - 두려움을 다루기, 조절하기 - 전 세계 전쟁수혜자에 저항하는 캠페인들 간의 네트워크 만들기 * 대규모 직접행동, 7월 26일 * 테마의 날 1: 이주, 7월 27일 테마의 날 2: 기후, 7월 28일

이틀 동안 열린 세미나는 시내 어느 학교에서 진행되었다. 접근성이 용이하기 때문에 캠프 보다 더 많은 인원이 모일 수 있었던 것 같다. 각 세미나는 1시간 반 정도씩 진행되었는데 세미나의 주제 상 발제하는 사람들이 많은 시간을 가지고 설명하는 세미나도 있었고 그 외 대부분의 세미 나들은 5분 내외의 짧은 모두 발언 후 2~3명 정도씩 조를 짜서 토론하고 공유하는 그런 스타일 로 세미나가 진행되었다. 이런 세미나가 좋은 것은 성격이 소심한 사람도 누구나 소그룹 안에 서 소외되지 않을 수 있고 내리꽂기 식의 강의 가 아니라 주로 자신의 활동경험을 나누기 때문 에 서로가 서로에게 영감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서 완전 소중하다. 또 WRI가 Council 회의를 이 액션캠프에 맞춰 개최하기로 한 덕분에 많은 인터내셔널들이 참여했고 덕분에 세미나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더욱 풍성할 수 있었다. 58


P.e.a.c.e.E.s.s.a.y 일은 공식 일정이 없는 대신 반나절의 짧은 트레이닝(스스로 트레이닝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참여 안해도 무관)과 대규모 직접 행동에 필요한 소품들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하루 동안 액션캠프가 진행되는 캠핑장 곳곳에서는 각종 배너를 만들고, 노래 연습을 하고 게임을 하 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풍경이 연출되었고 미디어 팀은 따로 모여서 어떻게 하면 이번 액션을 효 과적으로 미디어에 노출 시킬 수 있을지 워크샵을 개최하였다. 아무래도 이런 상징적 직접행동 은 얼마나 미디어에 잘 노출되느냐가 관건이니까... 26일 직접행동을 위해 NEAT로 가는 버스 안 에서(캠프가 열린 캠핑장과 NEAT 훈련장은 약 90km 정도 떨어져 있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랑 만약 기자가 와서 왜 여기서 데모를 하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에 대해 서로 연습하 고 그랬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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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망의 액션의 날! 다들 어디서 구했는지 정말 가지각색의 핑크가 등장했고 보는 재미가 참 쏠쏠 했다. 나는 원래 핑크를 완전 싫어해서 핑크색 옷이 하나도 없는 관계로 걍 행사 기간 중 팔았 던 핑크티셔츠를 입고 액션에 참가했는데 내 코디가 너무 밋밋하고 재미가 없구나 스스로 생각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뭐라도 준비하는 건데... 그리고 이 참에 핑크에 대한 고정관념도 깨졌 다. 초록과 국방색 일색의 군사지역에서 핑크는 정말로 눈에 띄는, 색으로 표현할 수 있는 최대 한의 반군사주의, 평화, 놀이의 색깔이었다고 생각된다. 아래 핑크에서 영감을 받은 다양한 활동 을 소개한다. 한국에서도 조만간 이런 발랄한 행동이 기획되고 실행되길 기대하면서... 핑크의 힘! * 스웨덴 2011년 6월 초, Ofog는 스톡홀름 Utö 섬에 서 있던 3개의 탱크를 업그레이드하였다. 이제 이 곳을 방문하는 방문객들 은 폭력의 기념물 대신 자연의 이미지, 핑크 하트를 만나게 될 것이다.

2011년 5월 중순, Karlskoga 시에 있던 이 탱크는 분홍 옷 을 입었다. Karlskoga시는 스웨덴 무기산업의 중심으로 BAE Systems, Saab 이외 여러 개의 무기 회사들이 위치 해 있는 곳이다. 여기서 만들어지는 무기는 전 세계 곳곳의 전쟁에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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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 2011년 4월, Ofog는 Umeå에 있던 이 탱크를 분홍으 로 색칠했다. Ofog는 보도자료를 통해 군대의 상징은 전쟁 문화를 조장하기 때문에 그 어떤 것이라도 공적 인 자리를 차지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하였다. 이 행동 은 또한 무기 판매, 군대 및 군사 훈련 지역 등을 통 해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스웨덴에 대한 비판의 의미 이기도 했다. * 스페인 오랫동안 "Alternativa

스페인의

반군사주의

Antimilitarista-MOC"는

네트워크인 사라고사

(Zaragoza)시 북쪽의 군사훈련장인 CENAD(Centro National de Adiestramiento Militar)에 반대하는 캠페 인을 계속해왔다. CENAD는 스페인 군대의 주요 훈 련장이자 유럽 다른 나라들, 나토, 그리고 여타 무기 회사들이 자신들의 상품을 테스트하기 위한 장소로 활용되어져 왔다. MOC은 여러 차례 반복해서 CENAD로 들어갔는데 2007년 5월, 수퍼히어로 복장을 한 많은 사람들이 CENAD에 들어가서 탱크를 핑크로 색칠했다. MOC은 이 지역의 군사점령을 중단하라고 요구했고 이 메세지는 탱크 옆부분에 씌어졌다. "지역 되찾기" 2007년 Heiligendam에서 있은 G8 회담과 연계하여 700명의 사람들이 이틀 동안 이곳 군사훈련지역을 점 거하였고 관제탑을 핑크색으로 칠했다. 활동가들은 이 지역의 군사훈련과 G8국가들의 공격적인 군사정책과 의 연관성을 폭로하고자 하였다. 2010년 4월, 정부는 Bombodrom 폭격장 사용 계획을 폐기하기로 결정하 였다. 이 외에도 Code Pink, Art against War 등 핑크를 소재로 한 다양한 행동들이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일 액션은 Affinity Group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Affinity Group이 없었기 때문에 영국팀 (영국 참가자들팀)과 함께 하였다. 이제는 한국에서도 나름 유명한 Trident Ploughshares 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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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 핵잠수함 기물 다 파손하고 무죄선고 받은 유명한 액션의 주인공들)을 중심으로 한 팀이었는데 이 언니들을 알게 되어서 너무 행복했다. 사인이라도 받아놓을 걸. ㅎㅎ 내가 속한 Affinity Group은 그룹 전체가 구속이나 체포를 원하지 않는 Low-risk 그룹이었지만 막상 행동의 날 꼴 랑 서너명 출동한 스웨덴 경찰들에게 삘(!)받아서 즉석에서 재논의를 해 그룹 대부분의 멤버가 NEAT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나 있을 지 모를 경찰의 체포 등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NEAT바 깥에서 피크닉을 하고 춤을 추고 근처를 핑크로 물들이는 액션을, NEAT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그 안을 핑크로 물들이고 몇몇 그룹은 아예 담장을 넘어 활주로 진입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물 론 스스로 결의하고 미리 논의된 일들이다. (

대규모 행동의 컨셉은 NEAT를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핑크로 칠하는 것이었다. 핑크색 대형 화살 표들이 NEAT로 향하는 길에 그려졌고(이 쪽으로 가면 NEAT 요!) 핑크 풍선들은 NEAT의 하 늘마저 핑크로 물들였다. 뭔가 감춰진 것,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권력이 숨기고 있는 것을 드러 내는 행위... 참으로 단순하지만 활동하면서 순간순간 잘 까먹게 되는 활동목표이기도 한 것 같 다. 어쩌면 우리의 몫은 여기까지인지도 모른다. 알려내고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생각할 수 있 도록 유도하는 것! 그런 생각들이 모여 요즘 세계 곳곳에서 유행(!) 중인 민중의 힘(People Power)으로 표출되는 것이 아닐까. 여러 가지로 설레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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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 8당은 에코토피아 밥톨 | 8당은 에코토피아였으면.. 오늘은 어제보다 덜 한심하고픈.. + medurung@gmail.com

작년 여름 팔당에서 있었던 에코토피아 캠프를 통해 만난 친구들과 함께하면서 이런 이름을 얻게 되었어요.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두물머리의 투쟁에 참여하면서 몇몇 친구들은 아예 두물머리 근 처에 집을 얻어 살면서 그 지역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도 했지요. 사실 저로 말하자면, 운 좋게 멋진 친구들을 만나서 힘을 얻어왔을 뿐이라 이 원고를 부탁받았을 때 많이 당황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자격 미달인 것 같아서, 이 자리에는 친구들의 얘기를 가능한 한 많이 풀어보 려고 해요. 농민 아저씨들의 일, 농사와 싸움을 도와주는 사람’에서 이제는 어엿한 ‘두물머리 활동가’ 가 된 친구들. ‘8당은 에코토피아’는 서열이나 위계질서 같은 것도 없고 나이나 경력에 상관 없이 누구나 누구에게나 하고 싶은 말이나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고, 누구든 주체적으로 일을 제안하고 자율적으로 해 나갈 수 있지요. 농담 처럼 우리는 8당원이다 하고 이야기하지만, 실은 ‘8 당은 에코토피아’는 조직으로 출발한 것도 아니고, 조직이 되려고 했던 적도 없었어요. 이 틀 안에서 직 접 마주하고 확인하는 얼굴들보다 어려울 때마다 나 타나 묵묵히 손을 보태는 보이지 않는 얼굴이 많은 것 같기도 하고. 요컨대, 이 싸움에 공감하는 모두에 게 열려 있는 무형의 울타리 같아요. 실제로 소셜 네 트워크를 든든한 기반으로 삼고 있기도 하고요. 이처 럼 자유로운데도 서로에 대한 신뢰가 견고한 것은 개 인의 활동역량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무엇 보다도 우리가 모두 두물머리에 대한 애정으로 묶여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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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 정동길 촛불문화제, 8당은 에코토피아 음반발매, 조계사 스페이스 모래 전시회, 두물머리 벌금 및 소송 비용 마련을 위한 온라인 홍보전, 경인미술관 두물머리 후원 작품전시회 ‘두물머리 전전 전’, 4대강 포기 배추, 불복종 햇감자, 4대강 뭥미(米)의 온라인 판매, 10월 15일 두물머리 강 변가요제… 당은 에코토피아의 이름으로 큼지막한 것만 꼽아봐도 참 여러 가지 활동에 참여해왔네요. 이렇 게 대외적인 활동 말고도, 친구들은 투쟁과 농사를 병행하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아저씨 들 일손 돕기나, 8당은 에코토피아의 공동 텃밭 일도 하면서 농사도 배우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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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일을 도우면서 매 순간 느끼는 건, 참 농사만 짓기에도 시간이 빠듯하다는 거예요. 특히 유 기농이 보통 손이 많이 가는 일이 아니잖아요. 요전번에 모기에게 백 방 정도 물리면서 요왕 아저씨 파프리카를 묶어주는 작업을 하고 들은 것은, 파프리카 열매가 맺히기 전에 이미 나방 이 알을 까놔서 열매가 작건 크건 다 유충이 들어 있다는 얘기였어요. 그래서 작년, 누구는 그 많은 것 중에 겨우 두 열매만 건졌다고요. 그 순간, 힘이 쫙 빠지는 기분이었지만 아저씨가 잘 라 주신 벌레 든 파프리카는 정말이지 달고 맛있었어요. 작물도 잡초도 지렁이도 너무 건강하게 잘 자라나는 두물 머리의 흙. 폭신폭신, 축축하고 부드러운 흙을 맨발로 밟 고, 맨손으로 만지면 자연히 생각하게 돼요. 진짜 이 땅 을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일까 하고. 멋대로 ‘국가하 천부지’라 이름 붙이고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국가나 지자체일까요, 땅의 개발권을 따낸 시공사나 올라간 땅 값으로 챙길 어부지리를 노리는 주변부의 부동산 소유주 들일까요? 말로는 환경친화사업이라면서 토박이 나무는 커녕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밀어버리고 하천 가장자리 에 거리낌 없이 석면 자재를 처바르는 시공사나, 사정을 알면서도 묵인하고 날조하는 국가가 이 땅에 흙 한 톨만큼의 사랑이라도 품어볼 일이 있었을 까요? 땅도, 집도, 일터도 진정 그 가치를 알고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서 가장 빛날 수 있는 거 잖아요. 때 되면 명아주, 쇠비름, 참비름, 고마리, 황새냉이가 앞다투어 자라나는 풀씨가 살아 있는 땅으로, 제초제, 농약, 항생제, 화학비료 등 인간의 이기적인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땅으 로, 굼벵이, 땅강아지, 뱀, 두더지가 함께 호흡하는 다양한 삶의 터전으로 수십 년을 가꿔온 농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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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 부들만큼 이 땅을 잘 알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없어요.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저 역시 이 땅이 난도질당하는 걸 상상할 수조차 없게 되어버렸어요. 대강 사업 시작 2년, 처음 22조 원에서 연 2,400억 원의 유지관리비, 혹자는 1조 원에 육박할 것이라 말하는 엄청난 국가주도 세금 탕진, 대재앙에 다름 아닌 국토파괴사업. 이미 천문학적 인 액수로 느껴지는 저 비용이 얼마만큼 더 늘어난다 한들 제게는 피부로 와 닿지 않아요. 버 드나무 군락의 처참 한 벌목이나 수천 마리 물고기의 집단 폐사 역시 마찬가지로 상상의 한도 를 넘어선 그 고통스러운 죽음을 감히 떠올려 볼 시도조차 할 수 없었어요. 그것들이 소중하다 는 걸 채 깨닫기도 전에 너무 많은 것을 잃었지만, 앞으로 지켜내야 할 것을 생각하면 슬퍼할 시간조차 없어요. 지켜야 하니까, 지킬 수 있기 때문에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지켜내는 수밖에 없어서, 절대로 포기할 수 없어서 지켜내려고 해요. 얼마 전, 공정률 0%의 4대강 한강 살리기 사업 1공구, 두물머리에도 최종계고장이 날아왔고, 정부와 지자체는 올해가 가기 전에 이곳에 중장비를 들여와 4대강 사업을 마무리 지으려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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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개개인의 강한 의지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요. 더 많은 사람이 양심적 병역거부자 가 된다면 언젠가는 진짜로 전쟁 없는 세상이 올 것이고, 더 많은 사람이 4대강 사업을 거부한 다면, 그리고 정부, 공기업, 시공사 내부에서도 더 많은 양심적 4대강 사업 거부자가 생겨난다 면 분명히 4대강 사업의 완공만 은 막아낼 수 있어요. 언젠가 지율스님께서도 말씀하셨어요. 모든 것을 다 바쳐 반대하는 사람이 단 세 사람만 있어도 이 사업 막아낼 수 있다고…. 장담컨대 우리는 셋보다 훨씬 많아요. 그러니까 이 싸움은 반드시 이깁니다. 누구도 섣불리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으면 해요. 두물머리 농민이 4대강 사업에 역전만루홈런을 크게 한 방 날리는 그 순간까지, 부디 우리의 싸움을 잘 지켜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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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비는아직현재진행형 -집속탄금지협약CCM 2차 당사국회의 참가후기 가람 | 전쟁없는세상 회원 + garam.maria.pj@gmail.com

나 죽으면 무슨 소용 영화를 보는 게 아니었다. 레바논이라는 나라의 역사와 지형을 조금이라도 더 알고 가야하지 않겠 냐는 기특한 마음에서 출발한 일이었다. 그러나 레바논 내전을 배경으로 했다는, 심지어 평도 좋은 ‘그을린 사랑’을 다 보고 나서 우리는 잠시 할 말을 잊고 서로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레 바논에 가기로 결정한 이후 수십 번은 들었을 ‘위험하지 않아?’, ‘남부지역은 절대로 가지마’, 그 리고 외교통상부 홈페이지에 또렷이 박혀있던 ‘여행제한국가’ 빨간 글씨가 머릿속을 스쳤다. 자 국민의 인생을 그토록 짓밟아 으스러뜨린 나라 (영화 내용은 아침의 영화평에서!), 불과 5년 전 이스라엘과의 전쟁이 있었던 나라, 그래서 땅 밑 에 아직 불발탄이 가득 묻혀 있다는 나라, 지금 도 이스라엘 도장이 여권에 찍혀 있으면 입국 거부를 당하는 나라. 물론 ‘중동 지역의 나라니 까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논리에는 정보 의 부족 및 나의 무지에서 비롯된 편견이 상당 히 작용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했으나 어디까지 레바논에서 지역을 이동할 때마다 받았던 외교부 나 그것은 이성일 뿐, 급 비행기 표 환불 절차를 의 문자. 나름 할 일을 하고 있다. 알고 싶어졌다.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희망이 아슬아슬하게 공존하는 도시 베이루트는 그랬다. 국제회의가 열리는 5성급 호텔 바로 옆에 2006년 폭격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폐허가 된 건물이 서 있는 곳. 이슬람 히잡을 쓴 여성과 천주교 묵주팔찌를 한 남성이 손 을 잡고 걸어 다니는 곳. 폐차되지 않은 게 이상한 택시 옆으로 반짝반짝 윤이 나는 고급 세단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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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 이 스쳐가는 곳. 도심복원 프로젝트 솔리데어 (Solidere)를 통해 베이루트 중심가를 중동의 샹젤 리제로 만들겠다는 레바논 정부의 야심찬 계획은, 외형적으로는 어느 정도 성과를 올리고 있는 듯 보 였으나 낡고 총탄구멍이 가득한 건물들 사이에 초 현대식 고급 건물들이 텅텅 빈 채 들어서 있는 모 습은 오히려 ‘영혼 없는 거리’라던 별명에 더 가까 운 듯 했다. 그들의 정치적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아직 전쟁의 상흔에서 벗어나지 못한 수많은 사람 베이루트 도심에 있는 폭격 맞은 건물의 잔해. 이 들을 뒤로한 채 중동의 부호들을 유혹할 수 있는 런 건물들이 레바논 곳곳에 산재해 있다. 럭셔리 쇼핑거리를 만드는 데 얼핏 보기에도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붓고 있는 듯한 모습은 한 국에서 온 나에게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고 그래서 더 씁쓸했다. 무기보다 더 비인도적인 무기, 집속탄 모든 무기는 비인도적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특히 더, 말도 안 되게 비인도적인 무기가 바로 집속탄(cluster bomb)이다. 하나의 대형 컨테이너 안에 적게는 수십 개에서 많게는 650개까지의 소폭탄이 들어있는 이 폭탄 은, 목표물을 가리지 않고 공중에서 흩뿌려져 축구장 수 십 개의 광범위한 지역을 일거에 파괴하는 위력을 지닐 뿐만 아니라 불발률이 높아서 타격 지역을 말 그대로 거 대한 지뢰밭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2006년 전쟁 당시 이스라엘군은 레바논에 약 42만개의 집속탄을 사용 했다고 추정되며, 이로 인해 무차별적으로 사상당한 사 람들은 3000여 명에 이르고 휴전 이후 5년이 지난 지금 까지도 불발탄으로 인해 400명 이상이 사상하는 등 그 피해가 상상을 초월한다. 집속탄 직접 피해자의 가족들 이나 집속탄 제거 작업 중 발생하는 사고 등을 모두 고 2006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에 가한 집속탄 폭 격 지도출처: 위키피디아 ‘2006 Lebanon 려하면 400만이 안 되는 레바논 인구 중 집속탄으로 직 War’ 간접적 피해를 입은 숫자는 사실상 집계가 불가능하다. 1)

1) 흔히 컨테이너 역할을 하는 폭탄을 모(母)폭탄, 안에 들어있는 소폭탄들을 자(子)폭탄이라고 하는데, 왜 폭탄에 母자를 갖다 붙이는지, 맘에 안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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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 한국, 수치의 전당에서 빨간 깃발을 흔들다 그렇게 세계적으로 지탄받는 무기 중의 무기 를 생산하고 비축하고 있는 몇 안 되는 국 가 중 하나가 대한민국이다. 2011년 CMC (Cluster Munitions Coalition) 선정 8대집속 탄 생산기업에는 한국기업 한화와 풍산이 포함되어 있다. 한화가 생산하는 ‘다목적 소탄’(MPSM ․ Multi-Purpose Submunition) 은 2003년 이라크 침공시 미군이 사용한 것 과 같은 종류이며, 풍산이 생산하여 2006년 레바논 남부의 격전지 믈리타(Mleeta)의 전쟁박물관에 보 파키스탄에 수출한 바 있는 것으로 추정되 존되어있는 이스라엘군의 집속탄. 소폭탄 하나는 성인 주 는‘155mm DPICM’는 지난 2006년이스라엘 먹보다 약간 작은 크기이다. 군이 레바논에 쏟아 부은 집속탄과 비슷한 종류이다 . 대표적 비인도무기로서 국제적으로 생산 및 사용, 비축, 이전이 전면 금지되어 있 는 이 무기를 생산하고 수출한 바 있으며 금지 협약에는 가입을 거부하고 있는 한국은 불명예 스러운 ‘빨간 깃발’이 꽂힌 채 수치의 전당(Hall of Shame )에 5위로 당당히 그 이름을 올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민연금을 비롯하여 국민은행, 신한은행, 우리투자증권 등 우리에게 친숙한 총 26개의 한국 금융기관이 집속탄 생산기업인 한화(20개)와 풍산(18개)에 투자를 하여 수익을 올리고 있다. 2)

3)

4)

회의장 어디에도 한국 정부와 북한 정부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고 레바논으로 출발하기 전, 외교부에 한국정부의 참가여부를 물었을 때 답변은 ‘참가 계획이 없다’였 다. 1차회의 때는, 참가 목적이야 어쨌든 간에, 풍산과 한화 관계자들까지 대동하고 참석을 했었 기 때문에 이번 불참 소식에 우리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고, 회의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참가국 명단에서 북한의 이름을 찾았을 때 실망감은 더했다. 심지어 북한도 온다는데. 그래서 회의장에 도착한 후, 참가국 정부관계자 최종 명단에서 한국과 북한의 이름을 모두 확인하는 순 간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온대, 왔을까?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지? 어떻게 하면 따로 만날 2) 이유경, ‘집속탄 생산국·수출국·수입국 KOREA’, 한겨레21 제 714호, 2008.06.12 3) 명예의 전당(Hall of Fame)에 빗대어 CMC에서 선정하는 집속탄 금지 비협력 국가들의 순위이다. 4) Landmine and Cluster Munition Monitor, 「Cluster Munition Monitor」, 20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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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 수 있을까? 다른 나라(시민사회영역) 참 가자들은 다들 (자기 정부에) 로비를 한 다는데, 어떻게 하면 되지? 태국에서 활 동하는 아시아지역 모니터링 담당자 죠 슈아씨도 큰 관심을 보였고, 우리는 머리 를 맞대고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첫 날 이 핵심이다, 오프닝 때 와서 얼굴만 보 이고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사라지기 전 에 붙잡아야 한다. 그래서 공식회의 첫 날 넓은 회의장을 몇 바퀴씩 돌며 테이 블의 명패를 확인했지만, 어디에도 한국과 북한의 이름은 없었다. 결국 회의기간 내내 다른 나 라 활동가들이 자국 정부를 만나 로비를 진행하고 집속탄금지협약CCM의 활성화를 도모하는 동 안, 우리는 앞으로 우리의 활동에 많은 도움을 받아야 할 CMC 활동가들을 상대로 얼굴 익히기 로비를 진행하며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사람보다 돈, 방위산업의 경제성에 무릎 꿇은 인도주의적 가치 집속탄에 대한 국제사회 및 시민사회의 문제제기에 관하여 한국 정부는 집속탄의 “무책임하고 무 계획적인 사용이 문제”이고, “집속탄의 무기 체계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으며”, 집속탄의 비인도 성에 관한 이슈에 대해서는 “불발률을 낮추고 자기파괴 메커니즘을 장착하는 기술적 개선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는 답변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설사 자기파괴 메커니즘을 기술적으로 장착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차별적 폭격을 퍼붓는 집속탄 자체의 비인도성을 해결하 는 것은 결코 아니며, 불발률의 경우에도 레바논에 사용된 집속탄 M85s의 생산자는 1~2%라고 설명했던 불발률이 실제 레바논에서 전후에 확인된 수치로는 10%에 달했다 는 사실을 기억할 때 한국 정부의 답변은 궁색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비축 기간이 길어지면 무기의 성능 저하와 불발률 증가는 당연한 수순인데, 한국에는 무려 1980년대 이전에 생산된 작동여부를 보장할 수 없는 집속탄이 아직 가득 쌓여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2008년 CCM 협정 초안이 채택된 이래 5)

6)

5) Grethe Østern, Norwegian People’s Aid(NPA) 집속탄 정책 자문위원, Cluster Munition Coalition(CMC) 전 공 동의장 6) 한국은 사실상 유명무실한 특정재래식무기금지협약CCW의 가입국이라는 사실을 집속탄금지협약CCM 미가입의 핑계로 이용하고 있는데, 최근 CCW는 특정 조건(불발율 1% 미만, 자기파괴 메커니즘 장착, 1980년대 이후 생산)을 충족하는 집속탄에 관해서는 금지협약의 예외로 삼는 제6의정서를 제출하여 협약의 후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심지어 이 예외조항에 1980년대 이전에 생산된 집속탄도 포함시킬 것을 의견 으로 게재한 바 있으며, 이를 통해 한국이 비축하고 있는 집속탄에 1980년대 이전 생산품이 있는 것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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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 지금까지 집속탄 주요 피해국을 비롯한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111개국이 협정에 서명을 했고 그 중 66개국은 비준 절차까지 마친 후 협약 의무 를 이행하고 있다. 그러나 집속탄 생산 량 1위인 미국을 비롯하여 주요 생산국인 한국, 중국, 러시아, 파키스탄 등은 가입을 하지 않고 있으며, 이로 인해 CCM을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 시키고자 하는 당사국 및 시민사회단체의 노력 과 협약의 현실적 효력이 크게 위협받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국가들의 협약 가입 및 비준 소식이 메일링을 통해 실시간 공유가 되고 있지만, 그 어디에도 한국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7)

누군가의 머리 위로 떨어질 나의 돈으로 만든 무기 한국을 비롯하여 협약을 무시하고 있는 주 요 생산 및 비축 국가들 덕분에 이 지 구상에는 아직도 집속탄이 무수히 쌓여 있다. 피해자를 가리지 않는 그 죽음의 비는 언제, 어느 곳에서, 누구의 머리 위에 내릴지 모른다. 그리고 땅에 떨어 진 이후에는 땅 밑에 묻혀서, 언제 누가 될지 모를 피해자를 숨죽인 채 몇 십 년이고 기다릴 것이다. 안타깝지만 나와 2MSP 마지막 날, 각국의 피해자들이 피해자 선언문을 낭독 하고 있다. 는 상관없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일까. 그러나 내가 내 노후를 위해 꼬박 꼬박 내고 있는 국민연금이, 내 월급이 들어오는 국민은행이, 내 펀드를 운용하고 있는 우리투자증권이 집속탄 생산 기업에 투자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현실은 달라지고 나는 불편해진다. 나의 돈이 나도 모르는 새 죽음의 무기 생산에 자금을 제공하고 있고, 그 무기가 어디론가 팔려나가 누군가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다. 인권단체 휴 먼라이츠워치HRW는 지난 4월 리비아의 미스라타 민간인 지역에서 카다피군이 집속탄을 사용했 으며 그로 인해 민간인이 사망했다는 보고를 한 바 있다. 그것 또한 어딘가에서 생산되어, 어딘 가에서 잠자고 있던 집속탄이었을 것이다. 한국 정부가 협약에 가입을 해야할 이유, 그리고 내 가 지금 당장 전화기를 집어 들고 내 자금을 맡기고 있는 은행에 무기생산 기업에의 투자 철회 를 요구할 이유, 충분하지 않은가. 8)

된다. 7) 집속탄금지협약CCM 당사국은 집속탄의 생산/보유/비축/이전을 금지하고, 비축분을 폐기하며, 피해자 지원 활 동 및 집속탄 정화 작업과 이에 대한 국제적 지원을 이행할 의무를 가진다. 8) 강조하지만 모든 무기는 비인도적이며, 피해자를 가린다고 해서 그 무기가 정당화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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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묻지도 말하지도 마라’(Don't Ask Don't Tell) 정책폐지에 관한 퀴어 반군사주의적 관점 2011년 2월 2일 CO업데이트 63호에 안드레아스 스펙Andreas Speck이 쓴 글입니다. (번역 : 정지훈 / 검토 : 매체편집팀) * 원본출처 http://www.wri-irg.org/node/12142 Opinion: A queer antimilitarist perspective on the repeal of 'Don't Ask Don't Tell' in the US

2010년 12월, 미국 의회 상원과 하원은 모두 ‘묻지도 말하지도 마라’(Don't Ask Don't Tell, DADT) 정책을 폐지하는 법안을 가결했다. 이 정책은 1993년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이 게이와 레즈비언 군인들과 관련하여 도입한 것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2010년 12월 22일 이 정책을 폐 지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비록 시행까지 얼마간의 유예가 있긴 하지만 이 법안은 이미 미국의 게 이와 레즈비언들의 중요한 승리로 칭송받고 있다. 현재로서는 자신이 동성애 혹은 양성애자임을 공개한 군인들에 대한 강제 퇴역이 언제 멈출지, 지금 당장일지, 오바마 대통령이 법안에 서명한 후가 될지, 종합 검토 내역을 수리한 후 주어지는 60일 유예 기간이 지난 후1) 가 될지, 혹은 그 이후가 될지 확실히 알 수 없다. 2011년 말에는 해당 법안이 군대 조직에 완전히 적용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면 이제 우리 퀴어들은 행복한가? 그렇지 않다. ‘묻지도 말하지도 마라’(Don't Ask Don't Tell) 정책을 철회한다고 하여 군대 안의 호모포비아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호모포비아 가 없는 군대가 가능하다는 생각은 성차별주의나 인종차별주의가 없는 군대가 가능하다는 생각만 큼이나 헛된 생각이다. 군대는 과거에도 현재도 특정한 ‘남성다움’이란 개념에 기반을 둔 조직 이다. 군대는 이 ‘남성다움’을 병사들에게 주입시키며, 군대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이 ‘남성다 움’이 필요하다. 이런 사실은 여성이나 소수 민족들의 군 입대가 허용된다고 하여 달라지지는 않는다. (2006년 가디언Guardian 보도에 따르면 여성 군인의 99%가 이전 년도에 남성 동료의 성적인 언급의 소재가 되었다고 보고했다) 이제 LGBT2) 들의 군 입대가 허용된다고 해도 마찬가 지일 것이다. 퀴어들에 대한 어떤 차별도 나쁜 것이기에 DADT 정책을 지지한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는 않지만, DADT 정책의 폐지가 우리의 중요한 승리로 축하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주류 LGBT 1) 해당 법안 폐지는 담당 부서인 국방부가 시행을 위한 검토 및 준비를 마친 후 이 사실을 대통령이 의회에 전 달하는 과정을 거쳐 효력을 갖는다. 그 이후에도 60일간의 유예기간을 추가로 가진다. 2) 레즈비언(Lesbian), 게이(Gay), 양성애자(Bisexual), 성전환자(Transgender)의 축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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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이 DADT 정책에 집중하기로 한 전략적 선택은 적절하지 않았다. 고용법이나 주거 상의 비차 별, 동성애행위 금지 법안(sodomy law) 폐지, 동성애자를 성적으로만 묘사하는 경향에 대한 비 판 등 더 많은 LGBT들에게 더 긴급한 사안들이 많았다. DADT 정책과 동성애 결혼을 특별히 선 택하는 전략은 LGBT들을 주류화하고 정상화하려는 시도를 드러낸다. 이는 더욱 급진적인 사회 변화를 도모하던 이전의 LGBT 운동과의 단절이다. 이전의 LGBT 운동은 사회의 특권들(의 일부) 에 편입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보다는 그 특권들을 없애는 것을 지향하였다. 우리 퀴어들은 “게 이들을 군대 안으로 편입하라”고 주장하기보다는 도리어 이성애자들이 군대 밖으로 나오고 최종 적으론 이 군사적이고 남성 중심적이며 동성애혐오적인 조직을 폐지하기를 요구해야 한다. 이상적 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성애혐오가 없는 군대 역시 적어도 그만큼은 이상적이다. DADT 정책의 폐지는 심지어 실제로 시행되기 전부터 퀴어 공동체에 엄청난 중요성을 지닌다. 모 병 담당자들은 조만간 군대를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는 고용자’로 제시하며 퀴어들을 모병 대 상으로 삼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이는 1999년 유럽인권재판소의 판결에 의해 영국 군대의 동 성애자 금지가 폐지된 후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오늘날 군대는 게이 프라이드 퍼레이드(gay pride parade)와 게이 레즈비언 잡지들의 광고에 등장한다.(영국의 주류 LGBT 단체인 Stonewall에 따르면 2008년 런던 게이 퍼레이드에서 영국의 육·해·공군은 모두 군복을 입은 채 행진했다) 2005년 2월 영국 해군은 Stonewall의 다이버시티 챔피언스Diversity Champions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이후 2006년 11월에는 영국 공군이, 2008년 6월에는 영국 육군이 “현재 와 미래의 고용자들의 좋은 노동 여건을 장려하고 동성애 및 양성애자들에 대한 동등한 대우를 보장하기 위해” 참가했다. 순진하거나, 분명 어리석은 것이다. 결론적으로, DADT 정책의 폐지는 내겐 그저 우리 투쟁의 새로운 국면이고 퀴어들의 삶을 군사주 의에 물들게 하는 새로운 단계일 뿐이다. 이러한 군사주의의 확산에 대항하는 자원을 개발하는 일 이 시급하다. ‘Bash Back! 덴버’에서 배포한 퀴어 신병모집 반대 가이드3) 나 다른 퀴어들을 대상으로 한 신병모집 반대 자료 등이 그 한 예다. 우리는 똑바로(straight, 이성애적으로) 행진 하고 싶지 않다!

3) http://zinelibrary.info/files/bb_queercounterrecruitment.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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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없는세상을 후원해주신 분들 가람 강돌 강민정 강성준 강소연 강은애 강지유 강진선 고동주 고동환 고태경 고희라 괭이눈 구종우 권순욱 권인숙 권혁기 김경숙 김명섭 김미선 김미현 김민경 김민영 김박가온 김반지 김범준 김보미 김선미 김선옥 김선영 김성민 김세윤 김송이 김수용 김수정 김숙희 김영수 김영준 김영환 김영효 김용엽 김유리 김은주 김윤종 김정웅 김주현 김준희 김중미 김지호 김태훈 김현정 김환태 김훈태 김희순 나동혁 류동훈 문명진 문상현 문수현 문연정 박남식 박승호 박아름 박용희 박정경수 박조건형 박지선 박태하 방강수 백선희 백지숙 보라 서범석 설순일 송명관 송준 수하 시와 신기현 신순영 신유아 신은재 신희권 아침 아키오 양제열 여문정 여옥 여은 염창근 오정록 우경환 우완 우성섭 우지연 위양자 유은정 유현미 유희원 유희정 윤민순 윤종 윤지환 은국 은종복 은혜와평화교회 이계삼 이덕현 이비함 이상길 이선아 이선영 이선옥 이선정 이선화 이세현 이승규 이연희 이영롱 이용석 이은주 이준규 이현우 이희진 인정환 임성환 임재성 임태훈 장기정 장대환 장미희 장성희 장정혜 장현진 장희원 전기화 정은정 정주열 정혁 정현채 정혜윤 조명래 조서연 조원영 조은 조정의민 주관수 주창언 지은 진진 진현호 진흙 참새 채승우 최민아 최지선 편설란 하동기 하승우 한주훈 햄 현민 홍성훈 홍세은 홍수봉 홍수영 황명규 황예랑 >>전쟁없는세상 재정보고 (2011년 8월 1일~ 2011년 10월 31일) 자세한 수입과 지출 내역은 전쟁없는세상 홈페이지 운영실 ‘재정보고’ 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후원인 여러분의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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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수입

총 지출

이월금

총계(수입-지출+이월금)

5,221,454

5,290,345

7,225,802

7,156,911


:: 김영배 : 서울남부교도소에서 출소 서울남부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김영배는 9월 30일 가석방으로 출소했습니다.

:: 이준규 : 대구구치소에 수감 재판 중이던 이준규는 9월 14일 선고공판에서 징역 1년6월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되어 대구구치소에 수감되었 습니다.

:: 홍이(홍원석) : 재판 진행 중 8월 23일 병역거부를 선언한 홍이는 11월 현재 서울중앙지법에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 최기원 : 병역거부 선언 11월 1일이 입영일이었던 최기원은 국방부 앞에서 병역거부선언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 현재 수감 중인 병역거부자들의 주소

이조은_경기도 군포우체국 사서함 20호 3956번 (435-050) 김영준_경기도 의정부우체국 사서함 99호 841번 (480-700) 안지환_서울시 금천우체국 사서함 165호 530번 (153-600) 이태준_서울시 금천우체국 사서함 164호 2164번 (153-600) 강상우_경기도 여주우체국 사서함 30호 1011번 (469-885) 문명진_서울시 금천우체국 사서함 165호 837번 (153-600) 이준규_대구시 수성우체국 사서함 48호 1038번 (706-600)

서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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