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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움직인 12 인의 천재들 편저자:이원용 차례 행동하는 지성 졸라 허기진 소녀에게 웃옷을 벗어 주다 문단에서의 화려한 싸움 작가로서 성공하다 "나는 탄핵한다." 어디까지나 진실을 밝히는 게 목적 과학적 자연주의와 실험 소설 제창 집중력의 천재 뉴턴 초인적인 집중력 세 가지의 큰 발견 침식을 잊고 연구에 몰두 열등생이었던 중학 시절 고독은 천재의 학교 여성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깊이 파면 샘물이 솟아오른다. 끝까지 도전한 세균학자 파스퇴르 과학보다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소년 최초의 의문에 도전 부패한 알코올에서 살아 있는 효모를 발견 저온 살균법을 발견하다 세균은 어디에나 있다 전염병으로 세 딸 잃고 자기도 반신불수 면역학을 창안하다 탄저병 백신을 발견하다. 고통스러웠던 마지막 도전 그래도 연구는 계속된다. 불가능에 도전한 전략가 나폴레옹 불가능이란 어리석은 자의 사전에나 연전 연승의 전술가 다방면에 걸쳐 야심 '서랍 같은 두뇌'


사람을 사로잡는 선동가 세상에 해를 끼친 천재성 청각 장애를 극복한 작곡가 베토벤 새벽에 일어나 피아노 연습 선천적인 음악적 재능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인간" 빈에서 다시 음악 공부 프랑스 혁명의 여파 귀가 잘 안 들리기 시작하다 비록 귀가 들리지 않아도 실연의 상처로 유서까지 쓰다. "영웅 교향곡"의 탄생 귀머거리로 오페라를 지휘 불끈 치켜든 주먹 변신을 거듭한 천재 화가 피카소 '르네상스 이후의 대혁명'을 이룩한 화가 스타일을 부정하는 화가 어릴 적부터 화가인 아버지를 흉내내 가르칠 게 없는 학생 매일매일 그림을 그리다 미술관을 학교로 모방 훈련 아름다운 것만이 그림은 아니다. 인류애의 산증인 슈바이처 다재 다능했던 거인 내성적이면서도 지기 싫어하는 성미 적당히는 하지 못하는 체질 꼴찌에서 우등생으로 졸업 시험의 옷차리 혼자서만 행복할 수 없다는 사명감 "책을 건드려서는 안 됩니다" 교수가 다시 학생으로 랑바레네 구호 사업 추진 생의 외경 모방을 재창조로 승화시킨 모차르트 12 세에 오페라를 작곡하다.


거의 똑같은 멜로디 비슷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 스승의 작품을 제자가 모방 모방을 한 단계 높이 승화시키다. 지상의 과객 '재산의 복음'을 실천한 카네기 소년 독서가 토끼 사육의 꾀 방직 공장에 취직하다 전보 배달 소년 책을 빌려다 공부 모스 부호를 익히다 고액의 급여로 철도 회사에 취직 처음으로 주식을 매입 철강에 눈드게 되다 활동 무대를 뉴욕으로 모친 "셰익스피어 전집"을 선물 4 억 9,200 만 달러에 매각 웃음의 마술사 채플린 전세계 사람들에게 웃음 선사 쇼펜하우어의 책에서 웃음을 시대를 초월한 새로운 웃음 가난했던 소년 시절 재능을 위한 과감한 투자 보통 이상의 독서가 유명한 인간에로의 길 다재 다능한 제작자 과연 웃어 줄 것인가? 사회 정의를 위하여 히틀러를 타이르다 뛰어난 관찰력과 열망의 주인공 다윈 지나치게 성장한 어린이 열성적인 수집가 강의실에서는 배울 게 없다. 뛰어난 관찰력 노예 제도에 대한 분노 경험한 것을 이론으로 체계화


사랑을 통해 자기 완성을 이룬 괴테 "예쁜 꽃은 다 꺾고 싶다" 사랑의 경험을 작품으로 형상화 베르테르는 괴테의 분신 극한 상황에서 씌어진 작품 계속되는 새로운 사랑 자기 완성을 위하여

행동하는 지성 졸라 "교정자 주:원문의 편집과정에서 p1__p13 쪽까지 빠진 바 그대로 입력 교정하였음을 밝혀둡니다. 읽는 분들은 착오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에도 뭔가 의심이 나는 것이 있으면 이를 끝까지 규명하여 밝혀내는 강인한 성격을 갖추고 있었다. 18 세가 될 때까지 중학교에서 그런대로 별 탈없이 공부를 할 수 있었지만, 그 후 마르세유 대학의 입학 시험에 떨어지자, 전학을 깨끗이 단념하고 말았다. 그 무렵부터 그는 과학을 좋아하는 한편 위고나 발자크 등의 작품을 구해다 밤이 가는 줄 모르고 탐독했다. 그렇지만 집안 형편은 더욱더 어려워져, 가냘픈 어머니에게만 의지해서는 입에 제대로 풀칠해 나가기도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한두 끼를 굶어도 결코 배가 고프다는 말을 하지 않고 태연히 이를 참아냈다. 오히려 어머니를 걱정하며 위로하는 편에 섰다. 그는 입학 시험에 떨어지기도 했지만, 어머니를 위해서도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그 대신 독학으로 학식을 쌓겠다고, 남모르는 결심을 했다. 그리하여 가계를 다소라도 돕겠다는 생각으로 세관의 말단직에 일자리를 얻어 생계를 보조하면서 공부를 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제도가 개혁되는 바람에 그만 면직 대상이 되어,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처없이 파리 시내를 방황하면서 직업을 구해 돌아다녔다. 그때는 불을 밝힐 수가 없어 집에 돌아가서도 독서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어렵게 어렵게 초 한 개라도 구하게 되면,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집으로 달려가, 자신이 공복인 것도 잊은 채 그 초가 다 타서 없어질 때까지 열심히 책을 읽곤 했다. 초가 다 타 없어지고 캄캄한 어둠이 찾아와서야 비로소 자신이 그날 한 끼의 식사밖에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새삼스럽게 허기를 느끼곤 했다. 그럴 때면 부엌으로 들어가 더듬어 먹을 것을 찾아봤지만 먹을 것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자기 방으로 돌아와 허리띠를 새삼 강하게 졸라매고는 그대로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허기진 소녀에게 웃옷을 벗어 주다


하루는 역시 두 끼나 굶고 돈 한 푼 없는 호주머니 속에 손을 찔러넣고 안개 낀 파리 시내를 방황하고 있었다. 배고픔이 한층 더 강하게 엄습했다. 그는 배고프다는 생각을 떨쳐 버리고는 공원 벤치에 어른스럽게 상체를 기댄 채 시를 짓는 일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어떤 소녀가 접근해 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날은 특히 추운 날이었다. 그렇게 벤치에 기댄 채 쓰는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 한 소녀가 추위에 입술을 덜덜 떨며 가까이 다가와서는 이런 말을 했다. "저는 동전 한 푼도 없습니다. 게다가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은 것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졸라가 대답했다. "그건 나도 똑같은데..." 그리고 나서 잠시 생각한 끝에 "잠시만 기다려, 밥 한 끼 정도는 먹을 수 있게 해 줄 테니" 하더니, 일어서서 웃옷을 벗어 소녀에게 주며, "이걸 헌옷집에 가서 팔면, 밥 한 끼 정도 먹을 돈을 줄 거야. 자아 어서 그렇게 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소녀는 미안한 생각이 들어 선뜻 졸라가 벗어 준 웃옷을 받지 못했다. 그러자 졸라가 채근했다. "하나도 미안해할 거 없어. 집에 또 입을 옷이 있으니까, 어서 받아 가지고 가." 하는 수 없이 소녀는 그의 웃옷을 받아 가지고 총총히 사라져 갔다. "교정자 주:원문 p16 빠져 있음." 졸라는 호구지책으로 어쩔 수 없이 시 쓰는 일을 그만두고 열심히 출판에 관련된 일에 전념했으므로, 사장이 일을 그만두고 열심히 출판에 관련된 일에 전념했으므로, 사장이 이를 알게 되어 그의 지위를 조금 높여 서기로 임명함과 동시에 연봉 3,000 프랑을 주기로 했다. 그렇지만 졸라는 도저히 문학을 버릴 수가 없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유지 내지 지속해 나가려는 강한 집념 탓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바쁜 중에서도 조금씩 틈을 내어 소설을 써 나갔다. 이것이 마침내 많은 수의 단편 소설이 되었으며, 이를 한 권으로 엮어 세상에 내놓았다. 이것이 뜻밖에도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되어 그는 촉망받는 작가로 문단에 화려하게 등단하게 되었다. 그는 이것을 계기로 "피가로 신문"의 기자가 되기를 희망했는데, 당시의 주필이 그의 재능을 인정해, 즉각 발탁해서는 신간 담당자로 채용했다. 이렇게 해서 졸라는 실직 상태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낭만주의까지 버리고 자연주의의 투사로서 일어서게 되었다. 이 무렵 프랑스의 문단에 자연주의가 성해져서, 젊은 문인이라든가 미술가 등이 서로 앞을 다투어 자연주의의 기치 아래 모이게 되었는데, 졸라는 그 중견이 됨과 동시에 대표자가 되었다. 그 대신 적대하는 측의 공격을 한몸에 받게 되어 맹렬한 싸움을 계속해 나갔다. 문단에서의 화려한 싸움 1867 년, 주필의 명에 따라 그는 당시의 파리 회화 박람회를 비평하게 되었는데 프랑스 화단에서 명화로서 정평이 나 있는 작품까지 가차없이 매도했으므로, 화단의 분노를 사게 되었으며, 유명한 신문인 "피가로 신문"조차도 팔방에서 공격을 받아, 도저히 맞받아 싸울 수 없게 되었다. 마침내 신문사측은 졸라로 하여금 그 비평을 중단케 함과 동시에 그를 해고해


버렸다. 이렇게 하여 그는 다시금 가난한 생활로 빠져 들어갔으며, 그런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보고 들은 것 또는 자신이 부딪친 상황이라든가 하층 사회의 고충이나 열악한 현실 및 죄악 등을 후일의 저작의 소재로 삼았다. "피가로 신문"을 그만둔 후 그는 다시금 다른 신문사에 입사했지만 그의 논평이 과격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재직할 수가 없었으며, 그 후에도 다른 신문사에 입사했지만 같은 이유로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그 중에서도 어떤 신문은(루 크르세르) 졸라의 논문 때문에 발행 금지의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그런 까닭으로 파리가 아무리 넓다고 하더라도 그의 논문을 게재해 줄 곳이 없었으며, 그 때문에 생활의 어려움은 날로 더해 갔다. 그렇지만 그렇듯 온갖 곤란 속에서도 그는 비범한 정력과 불굴의 정신력을 발휘해 여러 편의 소설을 썼다. 어떻게 해서든지 몇 년 동안에 돈 걱정 없이 마음 편히 소설을 쓰고 싶다는 것이 그 무렵의 졸라의 절실한 소망이었다. 작가로서 성공하다 금전 문제로 걱정하는 일 없이 조용히 글을 쓰고 싶다는 희망은, 다행히도 한 출판업자의 협조로 실현되게 되었다. 그의 계획은 프랑스 제 2 제정 시대의 어느 한 가족의 생활을 20 권의 총서 속에 담는 것을 통해, 유전의 법칙에 지배되는 인간 사회를 묘사하려는 것이었다. 엄청난 양심이라고 할 수 있다. 대단한 노력이 아니면 이룩해 낼 수 없는 일이다. 출판사와의 계약에 따라 10 년간에 걸쳐 매년 두 권씩 출판하기로 하고 매월 500 프랑씩 보수도 받기로 했다. 출판사에서 이렇듯 후한 대접을 하기로 결정한 것은 그 동안의 졸라의 작가적인 능력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보면 정규 교육이라곤 중학 정도의 교육밖에 받지 못한 그가, 그 동안 남모르게 어느 정도로 노력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야말로 그는 남이 편히 자는 시간에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거나 소설을 썼던 것이다. 그러한 노력의 보람이 있어, 그 후부터는 닭과 토끼를 벗삼아 조용한 정원 생활을 영위해 나가면서 자기 뜻대로 즐거운 소설 집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20 권의 총서는 유명한 "루공 마카르 총서"인데 그 중 불과 두 권을 출판했을 때, 출판사가 사업에 실패해 문을 닫고 말았다. 이로 인해 그의 대작 집필의 큰 계획은 좌절되게 될 비운을 맞게 되었다. 그런데 젊고 대담한 청년 출판업자가 출판사를 그대로 인수해, 졸라로 하여금 아무 걱정 말고 그 작업을 계속하도록 했다. 그렇지만 졸라는 속필이 아니어서 계약대로 약속한 원고를 넘겨줄 수가 없었다. 그렇게도 불구하고 출판사 쪽에서는 계약한 대로 돈을 매월 졸라에게 지불했다. 그러하여 3 년이 끝날 무렵에는 1 만 프랑의 빚을 출판사에게 진 꼴이 되었다. 그런 어느 날 출판사로부터 연락이 왔으므로 채무에 대한 담판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가 보게 되었다. 그러나 출판사 사장은, "나는 선생의 소설 덕분에 많은 이익을 얻었습니다. 나는 선생께서 어쩔 수 없이 체결한 계약에 의해 혼자서 모든 이익을 차지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계약을 고치도록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이 새로운 계약이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 효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선생은 저에게 한 푼의 빚도 없게 됩니다. 빚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제가 선생에게 1 만 프랑의 빚이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이렇게 말한 출판사 사장은 다시금 그에게 1 만 프랑의 돈을 건제 주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계약과 때마침 투르게네프의 주선으로 러시아의 어떤 평론 잡지에 기고하고 계약이 성립되어 그는 1 년에 평균 2 만 프랑의 수입을 얻게 되어 안심하고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7 세경까지 저능아라고까지 불렸던 그가 이만큼 대성하기에는 남모르는 숨은 노력과 피나는 분발이 있었던 것이다. 이는 가까운 사람들도 잘 모르는 일이며 오직 혼자서만 이를 악물고 노력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살아오면서 부끄러운 일을 한 게 없었으므로 모든 부정에 대해서는 용서가 없었고 격렬할 정도로 이를 파헤쳤으며, 또한 공격했다. 그의 평론이 대담할 정도로 격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소설도 대담할 정도의 필치로 주제를 파헤쳐 대단히 노골적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의 정직한 성격의 발로로서 졸라만큼 정의의 신념이 강한 사람도 드물었다. 그러면서도 실천력, 다시 말해서 졸라 만큼 정의라고 믿는 바에 따라 매진하는 용기를 지녔던 사람도 모르긴 하지만 드물었을 것이다. "나는 탄핵한다." 그 유명한 드레퓌스 사건 때 졸라가 취했던 태도는 그의 대쪽 같은 성격은 가장 잘 말해 준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자신이 믿는 바를 끝까지 관철해 나가는 강한 의지의 사나이라고 할 수 있다. 드레퓌스란 사람은 당시 프랑스의 군인으로서 포병 대위였으며, 유대인이었다. 참모 본부에 근무중 독일에 구사 기밀을 팔았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군법회의 재판 절차의 비합법성 등의 폭로로 여론을 자극하게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군부, 교회, 우익 단체 등에 의한 재심 반대 운동도 격렬해졌다. 더하여 졸라를 중심으로 아나톨 프랑스 동 작가를 비롯한 다수의 지식인들이 참가해 프랑스 국내가 온통 둘로 분열되기에 이르렀다. 대세가 간신히 재심 쪽으로 기울어졌으나, 군법 회의 는 다시금 유죄 판결을 내렸고, 대통령의 특사로 석방되었다. 1897 년에 진범이 밝혀지면서 이 사건은 군부에서 사실을 은폐하는 등의 부정이 있었으며 반유대주의 감정이 원인이 된 조작 사건임이 드러났다. 여기에는 또한 군부 쿠데타의 움직임도 있어 그야말로 제 3 공화국의 위기를 초래할 사건이었다. 그 당시 졸라는 그 사건이 군부의 조작이라는 것을 확신해 군부를 성토, 고발하는 성명을 당시의 "오로라 신문"에 게재했다. "나는 탄핵한다, 나의 명예와 전 저작과 전 재산을 걸고 나는 군부의 잘못을 고발 및 탄핵한다." 이런 식으로 서두부터 격렬의 극을 다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 정계에는 보수당과 공화당이 있었으며, 공화당 안에 국민파가 있었고 급진 사회파가 있어, 실제로 정권 싸움을 한 것은 이 공화당 가운데의 두 파, 즉 국민파와 급진 사회파였으며, 국민파와 손을 잡은 집단에 유대인 배척단이라는 것이 있어, 경제적인 이해 관계와 인종적인 편견에서 국내의 유대인을 배척할 목적으로 그러했던 것이다.


드레퓌스는 앞서도 말한 것처럼 유대인이었으며, 그가 유대인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유대인 배척단과 손을 잡고 있는 국민파에 의해 누명을 썼던 것이다. 육군 군부는 대부분이 국민파였으므로 세력으로 봐서 단번에 그렇게 돼 버린 것이다. 그간의 소식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드레퓌스의 억울함을 호소했으며 감정적으로 법을 다루는 육군의 횡포를 꾸짖었다. 그리하여 하루가 멀다하고 시위 행렬이 시가지를 누비고 지났다. 시위대의 선봉에서는 "타이스"의 작가인 아나톨 프랑스가 빨간 망토 자락을 휘날리며 군부의 횡포를 규탄했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대담하게 정면에서 군부를 질타하는 사람은 없었다. 여기에 에밀 졸라가 감연히 일어섰다. 1897 년의 일로, 졸라는 언제나와 같은 과격한 필치로 프랑스 정계의 부패를 적발하고 도려내어 이 사건의 부정을 통박하면서 파카르 소령 등과 손을 잡아 육군 반대 운동을 일으켰다. 세상이 떠들썩해지면서 이에 응해 드레퓌스 연합 전선이라는 결사까지 생겨 유대인 배척당과 충돌해 자칫하면 큰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상황이 전개되었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프랑스 정부도 무시할 수가 없게 되어, 민의를 받아들여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을 명령했으며, 그 결과 드디어 무죄가 선고되었다. 이보다 앞서 이 때문에 졸라는 정부의 비위를 건드려 본인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열린 재판에서 3,000 프랑의 벌금과 12 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를 미리 알고 영국으로 피신해 숨어 있었다. 1899 년 사건이 일단락되자 그는 즉시 귀국했는데, 이 드레퓌스 사건이 제대로 해결된 것은 졸라의 용감한 주장 덕택이며, 이 사건은 한낱 프랑스 한 나라의 정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인종 문제인 동시에 인도적인 문제였다. 따라서 졸라는 한낱 예술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인도주의의 전사였던 것이다. 졸라의 진면목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어디까지나 진실을 밝히는 게 목적 그의 소설 또한 어디까지나 진실 추구를 목적으로 했다. 그의 예술관은 후에 언급하겠지만, 요컨대 과학자가 물질 세계의 현상을 연구해서 설명하듯이, 인간의 현실을 연구해 기술한다고 하는 것이 그의 예술적 태도였다. 따라서 종전의 작가들이 감히 하지 못했던 인생의 어두운 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놓고 묘사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는 데 있어서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으며 온갖 악덕을, 또한 외설스러운 일까지 계속해서 묘사해 나갔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혹시나'하고 그의 품성을 의심하기까지 했지만, 이는 커다란 오해로서, 그는 매우 인격이 높은 훌륭한 신사였다. 이는 그의 친구나 주변 사람들이 다 같이 그를 경애하는 것으로도 알 수가 있다. 18 세 이후 철저하게 독학으로 많은 지식을 쌓았으면서도 성격이 본래 강직하고 정직했으므로 일그러짐도 비뚤어짐도 없이 그대로 유지해 왔던 것이다. 그의 일상 생활은 성직자의 그것하고도 비슷했다. 아침에 일어나고 저녁에 자는 일까지 규칙대로여서, 매일 아침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매수의 소설을 썼다. 이는 거의 기계적이었으며 결코 게을러서 예정된 일을


등한시하는 일이 없었고 또한 잘 써진다고 예정했던 매수 이상을 쓰는 일도 없었다. 그가 인간을 보는 눈이 기계적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생활, 그의 창작도 역시 기계적이었던 것이다. 그는 오전에 소설을 썼으며 오후에는 평론을 써곤 했다. 그리하여 12 시가 되면 1 분도 어김없이 식당에 나타나 많은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점심 식사를 했는데 그는 대식가로도 유명했다. 점심 식사가 끝나면 낮잠을 잤다. 낮잠에서 깨게 되면 그때부터 졸라는 소설가가 아니고 평론가가 되었다. 문제의 신랄하고 예리한 필봉을 휘둘러 희곡을 논했고 그림을 평했으며, 때로는 사회 및 정치상의 평론을 써서 이를 러시아의 신문사에 송고하기도 했다. 남의 작품을 평한다는 것은 그만한 안목과 식견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의 평론을 각계가 문제시했던 것을 보면 충분히 그런 식견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말하자면 졸라는 그만한 공부를 해서 누구든 귀를 기울일 만큼의 높은 지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평론은 자주 프랑스 사회로 하여금 격분케 하기도 했지만, 그는 태연히 이렇게 말했다. "공격하는 자를 공격토록 내버려둬라. 그것은 그의 권리이다. 그리하여 나 역시도 스스로 사고한 것은 자유롭게 토로할 권리가 있다." 그의 소설은 곧잘 심한 공격을 받았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온 세계로부터의 공격이었다. 혹자는 그의 소설을 가리켜 인심을 타락시키는 음탕한 책이라고도 했으며, 또 혹자는 부질없이 인간의 죄악을 들춰내기만 하는 부도덕한 책이라고도 했다. 이렇듯 여러 가지 입장에서 서로 앞다투어 그를 공격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공격자의 얕은 소견과 속된 해석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단 말인가. 식견이 높은 사람들은 옳게 그의 진가를 이해했다. 참다운 문예 비평가는 그를 부도덕한 인간으로 보는 대신 최대의 도덕가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의 예술관이 어떠했는지 잠시 더듬어 보기로 하자. 과학적 자연주의와 실험 소설 제창 졸라의 자연주의는 일반적으로 졸라이즘이라 불리고 있다. 그만큼 그것이 독자적인 색깔을 지니고 있었으며, 플로베르나 모파상 등의 그것과 완전히 면모를 달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건대 과학적이란 일면에서 졸라이즘만큼 색깔이 짙은 것은, 일반적으로 과학적인 자연주의 속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가 없다. 한마디로 자연주의가 과학적인 자연 속에서 자란 것이며, 과학적인 예술이라고는 하지만, 그 중에서도 과학적 자연의 직접적 영향이 가장 두드러진 것, 가장 과학적인 것이 그의 자연주의였다. 그의 예술을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의 여러 사상을 과학자와 같은 태도로 관찰하고 해부하여 현실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리려는 데 있다. 그의 대표적인 "루공 마카르 총서" 20 권은, '제 2 제정 치하에 있어서의 한 가족의 자연적 및 사회적 역사'라 풀이되어 세상에 나왔다. 그는 그 서문에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이 책에서 개인의 집단인 한 가족과 사회의 관계를 제시하기 전에 유선 옛날의 가족이 10 여명의 자손을 남기고 단절하는 것으로 정했다. 그리하여 그 남녀 자손 각각이 전 가족으로부터 이어받은 유전성과 갖가지 경우의 변화에 따라 여러 종류의 비극이 야기된다고 하는 일관된 사상을 그리려고 한다. 그 방법으로서 나는 여기에 유전과 상황이라는 두 가지를 세밀하게 연구해 하나가 다른 것을 탄생시키는 관계를 과학적으로 서술하려고 한다. 또한 그는 그의 예술론인 "실험 소설"에서, "금세기의 세계는 그야말로 과학의 세계이다. 이와 같은 과학의 발전을 위해 이상이라든가 절대 혹은 불가지라고 하는 말은 이제 그만 하자. 사람은 정직하고 솔직해져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얼마나 과학적인 자연에 철저했는지는 이를 통해서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야말로 과학의 연구법을 문학 작품 제작에 응용한 것이다. 마치 과학자가 물질 세계의 현상을 연구해 기술하는 것과 같이 인간 세계의 현상을 연구 기술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가장 철저한 유물론적 견지에서 소설은 썼다고 할 수 있다. 졸라는 관찰이라는 사실 위에 한 걸음 더 나가서 실험이라는 것을 제창하고 있다. 관찰이란 스스로 현상에 대해 보는 것이지만, 실험이란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떤 경우를 만들어 인간을 이 새로운 경우에 놓고 보는 것이다. 요약해서 말한다면 인간을 시험관 속에 넣고 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이란 물론 실험자의 뜻대로 되는 물질이 아니다. 시험관 안에 넣어 그 반응을 실험 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역시 상상을 추구하지 않으며 안 된다. 상상을 추가하는 이상 아무래도 주관적인 경향을 띠게 된다. 말하자면 사정에 작가가 가지고 있었던 틀 속에 맞추어 넣어 인간을 보는 것이다. 졸라의 소설은 객관적인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 대단히 주관적인 것이었다. 여기에 그의 자연주의가 파탄을 가져온 원인, 이른바 실험 소설의 약점이 있다.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약점이라는 더욱더 그의 진면목이 나타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가서 다시 언급하기로 하자. 여기서는 그가 어떤 식으로 소설을 구상해 어떤 식으로 줄거리를 묘사해 나갔는지, 본인 자신의 말을 들어 보기로 하자. 이는 소설을 쓰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많은 참고가 될 것이다. 나는 소설을 쓰고자 할 때는, 소설 속에 어떠한 사건을 만들어 내며, 어떠한 인물을 출현시키고, 어떤 식으로 시작해 어떤 식으로 끝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선 주인공의 성격을 분명히 마음속에 그리도록 전념하며, 그런 성격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그 인물의 기질과, 그가 태어난 가정 및 받아 온 감화 그리고 그가 살고 있는 환경을 깊이 생각한다. 그 다음은 주인공이 관계를 가질 인물의 성격이나 습관 또는 직업이라든가 환경 등을 잘 연구한다. 이와 같은 연구를 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소설 안에 묘사해야 될 일이 스스로 정해진다. 그리하여 만약 제 1 급의 극장 광경을 그린다든가, 제 1 급의 요정의 모양을 그리지 않으면 안 될 경우에는, 우선 이들 장소를 훤히 알 수 있게 될 때까지 이를 실지로 관찰하는 데 주력한다. 이런 식으로 2, 3 개월간 열심히 연구 관찰하게 되면, 그리고자 하는 생활 상태를 완전히 알게 됨으로써, 참다운 색깔과 참다운 향기를 내 소설에


부여할 수 있게 된다. 특히 내가 묘사하는 사회는 나의 생애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회로서, 주로 내 마음속에 살아 있는 기억을 펜 끝에 환기시켜 그렸으므로 내가 묘사한 인생은 진실한 인생인지 공상의 인생이 아니다. 살아 있는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일은 용이하지만 기억을 연결짓는 실을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를 연결하는데 공상의 살을 가지고 하지 않고, 논리의 끈을 가지고 한다. 나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그 일보다 논리적으로 자연적으로 또한 필연적으로 파생되는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인간의 성격 및 그런 경우에서 발생하는 결과를 제시하는 일에 가장 고심한다. 나는 사소한 실마리에 연연하기보다 복잡한 관계를 찾아내서 마침내는 비밀의 큰 죄를 발견해 내는 탐정과 똑같은 방법으로 소설을 쓴다. 만약 아무리 해도 사실의 관계를 발견해 낼 수 없을 경우에는, 나는 이에 대해 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둔다. 왜냐하면, 나는 반드시 그러한 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동시에 때가 오지 않으면 발견해 낼 수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2, 3 일을 기다리면, 날씨가 싱그러운 아침이나 식탁에 앉아 있을 때 순간적으로 전에 도저히 찾아내지 못했던 관계의 실을 발견해서 되어 그때까지의 모든 어려움이 깨끗이 없어지게 된다. 일의 관계가 아직 발견되지 않아 고통이 가슴에 응어리지져 있는 동안에는 어쩐지 불안하지만, 어려운 문제가 제거됨과 동시에 마음은 평온을 회복해 나의 일에서 괴로운 분자는 완전히 없어져 남은 것은 단지 펜을 들고 쓴다고 하는 마음 편한 일뿐이다. 나는 거의 한 정도 찢지 않고 원고를 쓰며, 써 버리고 나면 인쇄가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읽어보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매일 3 페이지 분량만 쓰므로 나의 소설은 그것을 며칠 동안에 완성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계산할 수가 있다. 어떤 소설은 6 개월이 소요되었으며 어떤 소설은 1 년이 소요되었다. 그는 스스로 변장을 하고 하층 사회에 출입했는가 하면 마굴을 탐험하는 등, 실험적인 관찰을 통해 얻은 것들을 작품의 소재로 사용했다. 그는 그와 같은 관찰을 자세하게 스케치해 몇 십 권의 노트를 만들었다. 그의 창작의 주요부는 이와 같은 노트를 만드는 일이며, 노트만 완전히 작성할 수가 있으면 그 다음에 만들어지는 작품은 발자크의 반공상적인 작품 같은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이렇듯 졸라는 어디까지나 사실을 주로 하여 거리낌없이 인생의 어두운 면을 묘사했다. "실험 소설"에서 그가, "우리의 임무는 사회의 죄악의 원인을 찾는데 있다" 고 말한 것처럼. 사회의 죄악의 원인을 찾는 것은 사회의 병폐를 제거하기 위해서이고 사회를 개량하기 위해서이다. 아무래도 졸라는 사회 개혁가라는 의욕을 가지고 펜을 들었던 것 같다. 그는 언젠가 "나는 유일한 이상을 위해 싸우는 병사일 뿐이다" 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그는 열렬한 이상가였던 것이다. 이렇듯 그가 이상가라는 점에 그의 진면목이 있었던 것이다.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그의 태도가 이를 뒷받침한다고 할 수 있다. "루공 마카르 총서"에서 졸라는 루르드(Lourdes), 로마, 파리로 이루어지는 "세 도시의 이야기"를 썼다. 졸라는 여기에 이르러 이상가적인 면모가 더욱 현저해진다. "세 도시의 이야기"를 쓴 목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제 1 권에서 내가 쓰고자 한 점은 현재의 과학의 발전은 모든 사회에 새로운 희망을 안겨다 주었지만, 그와 같은 희망이 실현되었다 하더라도 많은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며 사람들이 과학 이외의 힘, 즉 신앙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제 2 권 로마에서는 근세 카톨릭 교회의 야심과 고심을 함께 그렸으며, 그리하여 이를 루르드에 도착한 순례자의 순결한 종교심과 대조시키려고 생각했다. 제 3 권에서는 파리의 부패와 죄악을 낱낱이 묘사하기로 마음먹었다. 파리에서 내가 묘사하려고 한 것은 바로 문명국이 공통으로 안고 있는 폐해이다. "세 도시의 이야기"에 이어 그는 "사복음서"를 썼다. 이것은 생식, 노동, 진리, 정의의 4 개 소재로 된 것인데 진리의 편이 채 완성되기에 앞서 그는 과실로 인한 가스 질식으로 그만 아깝게 목숨을 잃었다. 바로 1902 년 2 월 29 일의 일이었다. "세 도시의 이야기"에서 그가 말하고 싶었던 사상은, 인생의 의의는 활동에 있다는 것, 즉 힘껏 활동하고 힘껏 사랑하며, 힘껏 일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사복음서"의 사상은 이를 한층 더 강조한 것으로, 생식 편에서는 인류의 번식은 인류의 발달을 의미하므로 낳고 또 낳으라는 사상을 그리고 있다. 파리에서 행해지고 있는 유아 살해죄를 파헤치고 척결하며, 간음과 낙태, 어린이 살해 등 죄악을 상세하게 그려 냈으며, 이와 함께 한편에서는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자손이 번창해 단란한 일가의 화목한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생식의 복음을 주장했다. 노동 편에서는 빈부의 커다란 차가 사회로 하여금 더욱더 비자연의 상태로 빠져 들어가게 한다고 보아, 이를 구제하기 위해서는, 자본과 지능과 노동의 3 자에게 이익이 평등히 나누어지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상을 묘사했다. 즉 한쪽에서는 프랑스에서의 노동자의 비운과 그 생활의 어두운 면을 열심히 묘사함과 동시에, 한편에서는 이른바 세 개의 커다란 이익의 평등한 분배에 의해 평화와 행복이 유지되는 이상적인 사회를 그려 내고 있다. 진리 편에서는, 이것은 결국 탈고할 수 없었지만, 기독교와 여권과의 관계를 기술하려 한 것으로 "세 도시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특히 기독교에 대해서 통렬한 비난을 가한 것이다. 그는 당신의 생명을 중히 여겨라, 당신에게 평화와 건강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생명뿐이다, 당신은 일하지 않으면 안 되며, 당신은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어디까지나 현실적으로 살고 있는 생명을 존중했으며, 반대로 신의 존재나 영혼의 불멸 같은 것은 믿지 않았다. 또한 신에 대한 의무 때문에 괴로워하고 혹은 내세를 원해 번민하는 것은 인생의 자연적인 질서를 거스르는 것으로 간주했다. 물질주의자로서의 그의 인생관은 당연히 그랬어야 했던 것이다. 그는 그야말로 가장 철저한 물질주의였던 것이다. 그의 그와 같은 자연주의는 물론 물질주의에서 자라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자연주의는 플로베르나 모파상의 자연주의하고는 다르다. 그의 자연주의는 그 안에 커다란 이상, 즉 구제의 대이상을 간직하고 있다. 그는 단순한 문학인이 아니고 실로 용감한 인도주의의 전사였던 것이다. 여기에 그의 참다움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촛불이 다는 것을 아껴 가며 부지런히 그리고 열심히 공부한 보람과 가치가 바로 이런 점에서 결실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집중력의 천재 뉴턴 아이작 뉴턴(Isac Newton:1642__1727) 영국의 수학자요 물리학자인 동시에 천문학자. 역사의 체계를 확립한 근대 정밀 과학의 아버지. 울즈소프의 농가에서 태어나, 1661 년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했으나 1665 년 페스트가 번져 귀향. 이때 세 가지 큰 발견(빛의 스펙트럼, 만유인력, 미적분)에 착안함. "광학"(1704),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 (1687) 등의 저서가 있다. 런던에서 조폐국 감사와 국장을 거쳐 1703 년에는 왕립 협회 회장을 지냈다. 과학계의 최고의 천재로 손꼽히며 특히 엄청난 집중력으로 유명하다. 초인적인 집중력 영국의 물리학자인 동시에 수학자요, 17 세기의 과학 혁명을 이룩해 낸 인물 뉴턴은, 그야말로 과학계의 최고의 천재이다. 그는 보통 사람들하고는 완전히 거리가 먼 사람, 다시 말해서 보통 사람하고는 완전히 동떨어진 사람으로서, 일반적인 사람들의 경험이나 견해로 뉴턴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해도 소용이 없다. 이는 어떤 전기 작가가 한 말이다. 이 말은 마치 뉴턴은 다른 사람들과의 공통점을 전연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는 말이다. 그렇지만 뉴턴 역시도 한 사람의 인간임에는 틀림이 없다. 말하자면 신이라든가 초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뉴턴은 그렇듯 유명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을 뿐 아니라 또한 물리학 및 수학의 연구로 말하자면 과학의 역사에 새로운 시대를 열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와 같은 큰일을 할 수 있었을까.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는 그는 다음처럼 대답했다고 한다. "그것은 발견해 낼 때까지 언제까지고 계속 생각했습니다. 그와 같은 문제를 앞에 제시해 놓고 새벽에 한 줄기 빛이 비쳐 들어와 그것이 점차 밝아져서 정말로 분명해질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습니다. " 한마디로 바꾸어 말하면 계속해서 집중력을 쏟아 넣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어떤 하나의 문제에 대해서 모든 정신력을 집중해 언제까지고 생각하는 일, 그것이 뉴턴이 천재가 될 수 있었던 비밀이었던 것이다. 어떠한 하나의 일을 하면서, 이에 정신을 집중하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이 해놓은 일의 결과란 허술한 것이 되거나 몹쓸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은 당연하다. 다시 말해서 어떤 일이든지 집중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부실한 결과를 초래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는 그러한 집중력을 어느 정도로 계속해서 유지시켜 나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보통 사람의 경우는 길어 봤자 2 시간 내지 3 식간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뉴턴의 경우는 보통 4 시간 이상 지속시킨 점으로


봐서 특수했던 것이다. 뉴턴의 생애 가운데 집중력을 최고로 발휘할 수 있었던 시기가 두 번 있었다. 그의 최초의 절정기는 22, 23 세경이었다. 이때 집중력의 절정기가 찾아온 것이다. 그 무렵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학생이었는데, 다시 런던의 중심으로 그 주변에 페스트가 크게 유행해 대학이 잠정으로 폐쇄되기 때문에 뉴턴은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 쉴 수밖에 없었다. 그 휴가는 약 18 개월 동안 계속되었는데, 그 휴가 동안에 그는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영원히 남길 만한 세 가지의 큰 발견을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18 개월 동안 몇 가지 일에 대해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해 끝내는 자신이 목적했던 일을 이룩해 내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세 가지의 큰 발견 세 가지의 큰 발견이란 만유 인력의 법칙을 비롯해서 미적분학과 태양 광선의 성질에 관계되는 발견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위대한 업적이었다는 점은, 그 중 어느 한 가지만 보더라도 다른 과학자로서는 평생을 다 소비한다고 해도 될까말까하는 내용이었다는 데 있다. 그 세 가지 위대한 발견의 내용을 간단히 설명하면, 먼저 태양 광선에 관한 연구로는, 그가 프리즘을 통해서 본 태양의 빛이 일곱 가지 색으로 나누어진다는 것과, 이것이 다시 프리즘에 이르게 되면 당초의 흰빛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실험으로 확인한 것이다. 이렇듯 따지고 보면 대단히 간단한 일 같지만, 뉴턴 이전에는 그 누구도 실험해 본 일이 없었던 일이다. 후에 그는 이와 같은 실험을 중심으로 빛의 각종 성질에 관한 연구서인 "광학"을 저술해 냈다. 그의 미적분학은 쉽게 말하면 변화의 정도 내지는 곡선으로 둘러싸인 면적을 구하는데 필요한 수학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현재에는 수학에 국한하지 않고 물리학에 있어서도, 예를 들면 물체의 운동 둥을 설명하는 데는 빼놓을 수 없는 법칙이 되어 있으며, 말하자면 과학 전반에 대해서 크게 공헌했던 것이다. 뉴턴이 이를 발견해 낸 것은 1665 년 여름경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후에 독일의 철학자인 라이프니츠와 누가 먼저 발견했는가의 논쟁이 벌어져 쌍방이 서로 상대방을 비방 혹은 중상한 모양이며, 성질이 급한 뉴턴은 자신의 명예가 상당히 손상되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이들 두 사람은 거의 같은 시기에 이를 각각 발견해 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호칭에 있어 미적분이라고 한 것은 라이프니츠였으며 뉴턴은 이를 '유율법'이라 불렀다. 또한 만유 인력의 법칙에 대해서는, 철없는 어린이들이, "야, 너 사과가 왜 떨어지는지 아니?"하고 질문하면, 또 한 아이가, "그것도 모를 줄 알고. 땅에는 잡아당기는 힘이 있어서 사과가 떨어지는 거야"하고 대답하듯이 간단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는 뉴턴이 당시를 회상하며 친구에게 한 이야기를 단순화한 것으로 그렇듯 간단히 처리해 버릴 내용이 아니다. 그 무렵 뉴턴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행성이나 달 같은 것의 운동에 관계되는 문제가


있었다. 사과는 지구의 인력으로 떨어진다고 하고, 그렇다면 달도 역시 지구에게 끌리지 않는가. 그런데도 어째서 달은 지구를 향해서 떨어져 내려오지 않는가? 행성의 운동에 대해서는 이미 케플러(J. Kepler)의 법칙을 비롯해, 지상에서의 물체의 운동에 대해서는 갈리레오(G. Galilei)의 연구가 있었다. 그렇지만 뉴턴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계기로, 이들 선인들의 연구를 발판으로 해서 이 지상의 물체에도 행성과 똑같이 해당되는 법칙이 무엇일까 하고 찾았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발견해 낸 것이 바로 두 개의 물체가 서로 잡아당기는 인력이란, 두 개의 물체의 질량의 곱에 정비례하며, 두 개 물체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고 하는 그 유명한 만유 인력의 법칙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뉴턴이 두 번째로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절정기는 언제였을까? 그 시기는 최초의 절정기로부터 약 20 년 후였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다. 그 무렵 영국에는 1660 년에 만들어진 왕립 협회라는 명칭의 협회가 있었는데, 뉴턴도 그 회원의 한 사람이었으며 나중에 회장이 되기도 했다. 어느 날 협회의 사무국장인 후크(R Hooke;후크의 법칙으로 알려져 있는 과학자)가, 왕립 협회의 회장인 렌(C. Wren)과 또한 천문학자인 핼리(E. Halley;핼리 혜성을 명명한 과학자)도 동석한 자리에서, 인력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법칙에 따라 운동한다는 말을 했다. 즉 뉴턴이 발견한 것을 그 역시도 발견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후크는 이를 수학적으로는 증명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미적분학 등 수학에 있어 탁월한 뉴턴이라면 그 문제를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뉴턴을 방문했던 것이다. 그 바람에 뉴턴은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일반적으로는 프린키피아(Principia)라 부름)를 저술해, 이미 발견한 만유 인력의 법칙을 필두로 운동의 법칙 및 천체의 운동을 기술하기 위한 수학적인 방법 등에 대해 서술했다. 이에는 18 개월이 소요되었다. 이는 전문가라 하더라도 쉽게 독파하기 어려운 동시에 이해하기 힘든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인류에게 새로운 과학의 시대를 열어 준 그와 같은 대작을 불과 18 개월 만에 완성한 것이다. 이는 다른 과학사가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렇듯 단기간에 그처럼 방대한 양을 저술할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초인적인 집중력을 경주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만큼 그 내용은 복잡했으며 또한 치밀하기도 했다. 침식을 잊고 연구에 몰두 그는 26 세 때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가 되었지만, 그렇듯 위대한 세 가지 발견을 '평상시 늘 생각하고 있음으로 해서' 이룩해 낼 수 있었다고 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온 정력을 투입했던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들 위대한 발견을 공표할 의사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들 미적분학과 광학에 대해서는 얼마 후 논문도 썼으며 대학에서 강의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만유 인력의 법칙에 대해서는 자그마치 20 년 동안이나 공표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세상 사람이 일반적으로 원하고 있는 명예 같은 것에는 전연 무관심했던 것 같다.


라이프니츠와의 논쟁에서 크게 화가 난 것은 라이프니츠한테서 미적분학을 표절했다는 부당한 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집필하고 있는 동안, 그가 어느 정도로 열중했는가에 대해서는 그의 비서라든가 친구들의 증언이 여럿 있다. 그 무렵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 구내에 있는 교수 사택에서 살고 있었으며 청소라든가 식사 시중은 가정부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침에 가정부가 침대를 바로잡기 위해 들어가 보면, 전날의 저녁 식사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경우가 흔했다고 한다. 그런데 뉴턴의 건강에 대해 신경을 써야 하는 비서로서는, 어떻게 뉴턴으로 하여금 식사에 대해서 생각나게 해 제대로 식사를 할 수 있게 하는가 하는 문제가 커다란 고민거리였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잊고 일에만 몰두하게 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일에 열중했다는 것은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고 뉴턴의 일상 생활 그 자체였다. 물론 뉴턴 역시도 사람이므로 공복을 느끼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런 경우에는 결코 앉아서 서서히 하지 않고, 선 채로 해치우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 그는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한시도 잊은 적이 없으며, 정원을 산보하다가도 뭔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이내 자기 방으로 달려가 책상 앞에 선 자세 그대로 메모를 하곤 했다. 또한 때로 친구들이 찾아오는 경우에도 일에만 정신이 팔려 친구가 찾아와 있다는 것을 완전히 잊어먹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고 한다. 위대한 발견을 하자면 당연히 그만한 집중력과 노력이 필요한 건 말할 것도 없다. 이는 보통 사람이 쉽게 체험할 수 없는 노력이다. 게다가 혼자 있어야 되는(즉 고독) 조건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경우는 역시 위대한 발견을 한 아인슈타인에게도 적용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사색을 하는 한편 피아노를 치기도 하고 메모를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는 종일토록 서재에 파묻혀 그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식사까지 서재로 가져오게 해 먹고 지내는 시간이 2 주일이 지났다. 그런 어느 날 그는 진지한 얼굴을 하고는 서재에서 뛰어 내려와, "자, 바로 이거야" 하며 종이 쪽지를 테이블 위에 펼쳐 놓았다. 그 것이 바로 상대성 이론이었다고 한다. 이는 채플린이 쓴 자서전 속에 아인슈타인 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뉴턴 역시도 아인슈타인처럼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아인슈타인의 경우 피아노와 같이, 극도의 정신 집중에 대한 기분 전환이 필요했던 것이다. 뉴턴에게 있어 기분 전환이 되는 것은 화학 실험이었다. 이런 점에서는 "자본론"을 저술한 마르크스의 경우도 비슷하다. 그는 피로한 머리에 휴식을 주기 위해서 고등 학교 수학 문제를 풀었다고 한다. 그런데 뉴턴이 기분 전환을 위해 한 화학 실험이란 사실 연금술이었다고 한다. 이 연금술은 중세 이후 전해져 내려온 것으로서, 그가 죽은 후에 보니, 방대한 양의 노트에 연금술에 관계되는 내용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케인스 같은 경제학자는 그를 가리켜 '최후의 마술사'라 명명했을 정도다. 뉴턴은 후에 조폐국장이 되었으므로 연금술이 좋지 않은 소문을 낳게 할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해 두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열등생이었던 중학 시절 그는 그 밖에도 신학과 성서에 관한 노트도 많이 남겼으며, 그 쪽 방면에 물리학 이상으로 많은 정력을 소모한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와 같이 뉴턴은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대상에 철저하게 집중할 수 있는 특성을 갖춘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특성은 어릴 적에 이미 나타나 있었다. 말하자면 넋을 잃은, 즉 방심 상태에 사로잡히는 기묘한 행동을 보였던 것이다. 농촌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 학교를 말을 타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가파른 언덕길이 앞에 나타나자, 말에서 내려 끌고 갔다. 그런데 가파른 길이 다 끝나고서도 그는 말을 타는 것을 잊어버렸을 뿐 아니라 고삐줄을 쥐고 있다가 고삐줄이 말에서 벗겨진 것도 모르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달걀인 줄 알고 그만 시계를 냄비에 집어넣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이와 같이 뭔가 하나의 일에 골몰하면 그 밖의 일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리는 방심 상태가 되는 모양이었다. 이를 옆에서 목격하게 되면 그야말로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중학 시절에는 침착성이 없으며 공부를 잘 못하는 학생으로 간주되어, 학급에서의 성적도 최하위급이었다고 한다. 어린이용 위인전에서는 열등생이라고 주위에서 구박을 받던 뉴턴이 어느 날 자신을 구박하는 상대방을 때려눕히고, 그때부터 자신이 생겨 공부도 잘할 수 있게 되었다는 에피소드를 강조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이는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인 것 같다. 이렇듯 학교의 성적과 천재로서 이룩해 낸 업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그가 지닌 남다른 집중력은 유년 시대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한 그의 두뇌도 한때 이상이 초래된 적이 있었다. 그의 나이 50 세경의 일로서 친구들에게 피해망상증에 사로잡혔다고 여겨지는 기묘한 내용의 편지를 썼기 때문에 정신 착란이라는 소문이 퍼졌던 것이다. 그 후 조폐국장으로서 훌륭하게 직무를 수행해 낸 것을 보면, 병은 분명히 일시적인 것이었지만 그의 정신이 착란의 시련에 노출된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었다. 발병의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문제의 "프린키피아"를 완성시킨 지 얼마 후부터 시작되었다는 설이 설득력을 지닌다. 아마도 뉴턴이 지나치게 두뇌를 혹사했기 때문에 정신의 균형을 잃었던 것 같다. '초인적인 집중력'이라고 했지만 초인이 되려면 인간으로서의 뭔가를 잃지 않으면 안 되었던 모양이다. 고독은 천재의 학교 고독감에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노인들만의 일이 아니다. 소년 역시도 고독하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어린 나이에 뉴턴이 그 얼마나 고독에 시달렸는가 하는 것은 20 세기경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죄를 고백한 기록에서 알아낼 수가 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죽여 버리고 그 집 또한 불살라 버리겠다고 위협하려 한 일."


"누군가가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뉴턴은 어떻게 해서 '초인적인 집중력'을 몸에 익히게 된 것일까. 최초의 유력한 계기는 그의 고독했던 유년 시대이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3 개월 전에 사망했으며, 어머니는 그의 나이 3 세 때 목사와 재혼하여 집을 버리고 떠났다. 어린 뉴턴은 외할머니와 단둘이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의 고독한 생활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가 재가하면서 뉴턴을 데리고 가지 않은 것은 목사가 아이를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목사가 8 년 후에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는 그 후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 동안 어린 뉴턴은 어머니하고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으며, 놀이 친구도 없이 외할머니와 단둘뿐인 나날을 보냈던 것이다. 뉴턴의 어린 시절 8 년 동안을 함께 지낸 외할머니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외할머니가 어린 뉴턴으로 하여금 어리광을 부리게 했는지, 혹은 엄격히 키웠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것 전하는 내용이 없다. 3 세부터 11 세까지라는 기간은 인간의 개성을 만들어 내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기이며,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는 시기이기도 한 것이다. 아마 그는 외할머니에게 그다지 큰 영향을 받은 거 같지 않다. 그의 인간성 형성, 특히 그 '초인적인 집중력'을 갖추는 데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그의 유년 시대의 고독의 체험이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재혼해 살고 있던 교회는 뉴턴이 외할머니와 함께 생활했던 집으로부터 약 2.5 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그 교회의 탑을 집에서 볼 수가 있었다. 그 탑을 바라볼 때마다 죽여 버리고 싶다고 하는 험악한 생각이 용솟음쳤다는 심리를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는 어머니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어머니와 함께 자신에게서 어머니를 빼앗아 간 사나이에 대해서도 미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존재이다. 참아내기 어려운 고독 속에서 그렇듯 험악한 생각은 더욱더 강해지기만 했던 것 같다. 고독이란 인간에게 있어 하나의 시련인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능력을 키워 주게 되는 다시없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가 태어나 자라온 집, 여기저기에 그가 새겨 놓은 해시계가 많이 남아 있다. 집 안으로 비쳐 들어오는 태양의 빛의 각도가 미묘하게 변화하는 일에 흥미를 느껴 계속 새겨 놓은 것으로, 이와 같은 어릴 적 관심이 후에 광학의 대한 연구로 연결되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한편 그는 또한 수차 등의 모형을 조립하는 일을 좋아했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혼자서 언제까지고 싫증을 느끼지 않고 손끝을 사용하는 놀이에 몰두하는 어린 뉴턴의 모습을 상상할 수가 있는데, 이런 식으로 훈련된 재치 있는 손놀림이 후에 렌즈나 프리즘을 다루는 일에서는 런던의 모든 장인의 우두머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의 솜씨로 자라게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고독이라는 시련 속에서 그런대로 지루해하는 일없이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발견하고 공부하는 가운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집중력을 키우게 된 것이다. 목사와의 사이에 태어난 3 명의 제매를 데리고 어머니가 돌아왔으므로 집안은 갑자기 어수선한 분위기가 되었지만, 이미 형성된 뉴턴의 개성과 행동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초등 학교 시절부터 대학 시절에 이어 대학 교수 시절에 이르도록 같은 시대의 사람들은 그를 친구 한 사람도 없는 가운데 말이 없고 생각이 깊은 형의 인간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음의 안쪽으로 눈을 쏟아, 그곳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은 특별히 친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가장 행복한 경우란 자기 혼자 있으면서 좋아하는 일에 열중하는 시간이다. 뉴턴은 유년 시대에 강요된 고독을 견뎌내기 위해서 그와 같은 생활 관습을 몸에 익히게 되었으며, 그것이 그의 인생 항로를 결정했던 것이다. 고독을 좋아하는 이와 같은 뉴턴의 특성은, 실은 위대한 사상가라든가 예술가 등 세상에서 천재라 불리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특성이다. 이에 대해서는 "로마 제국 쇠망사"를 저술한 영국의 역사학자인 기번(E. Gibbon)이 다음과 같이 요약한 말이 있다. "고독은 천재의 학교이다." "그는 자기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 정도로 자기 혼자서도 충분한 사람은 볼 수가 없습니다." 뉴턴을 평한 같은 시대 사람들의 증언이다. 그는 그야말로 '자급자족'형의 인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뉴턴의 그 3 대 발견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멀리 떨어진, 자기 고향인 시골에서 누구하고도 의논할 일 없이, 또한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로 행해졌던 것이다. 가령 영국에 페스트가 유행되지 않고, 그리하여 대학이 폐쇄되는 일도 없고, 고향에서 휴가를 보낼 일이 없었다면 과연 이와 같은 위대한 발견이 가능했을까. 이것은 한 번 의심해 볼 만한 일이다. 한편 대학 교수가 된 다음부터는 강의도 해야 했다. 말하자면 18 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기회는, 그의 84 년 3 개월이라는 긴 평생을 통해서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오랜 휴가 기간을 통해서 고독한 생활을 하면서도 이에 대해 전연 염증을 느끼지 않은 점, 이것이야말로 그의 특징이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일은 뉴턴뿐만 아니라, 그 밖의 많은 천재들의 행동에서도 나타난다. 말하자면 천재들이란 거의 비슷한 공통점의 일명을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예를 들면, 상대성 이론을 발견한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자기 자신 속에 깊이 파묻혀 들어가고자 하는 욕구는 해를 거듭할수록 깊어만 갈 뿐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완전히 고독한 등대지기와 같은 생활이 과학자에게 이상적인 환경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와 같은 또 하나의 예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기의 예술가인 미켈란젤로를 들 수 있다. 그는 작품의 제작 과정을 절대로 남에게 보여 주지 않았고, 일단 일에 착수하게 되면 절대로 남과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로마 교황으로부터 여러 차례 일의 의뢰를 받고서도 교황에 대해서까지 자신의 작업장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했을 정도이다. 한 번은 교황이 꾀를 내어 그의 조수로 변장을 하고 그의 작업장으로 들어간 일이 있었다. 그렇지만 미켈란젤로는 용케도 이를 알아차리고는 널빤지를 집어던져 밖으로 쫓아낸 적도 있었다고 한다. 뉴턴의 경우에는 미켈란젤로가 취한 행동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면 미켈란젤로보다 한층 더 심한 비밀주의자였다. 그는 자신이


연구해서 발견한 업적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비밀로 일관했다. 그렇지만 의식적으로 비밀을 지키려고 한 것이 아니라, 도대체가 자신의 연구 업적에 대해서 이를 공표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비밀주의자라기보다 무관심한 사람이었다고 평하는 것이 옳은 표현인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런 것을 세상에 발표해 과학자로서의 명예를 얻고자 하는 욕심이 전연 없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것이 비록 위대한 발견이라 하더라도 자기 혼자만 알고 있는 것으로 만족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남의 시선에 대해 무관심했던 것이다. 남이 뭐라든 말든 관심이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뚜렷한 특성이요, 성격이라 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무관심주의는, 남이 자신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기를 원한다. 뉴턴이 연구 성과에 대해서 이를 비밀로 해둔 것은 남과의 관계를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실제로 그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예의 "프린키피아"의 제 1 편과 제 2 편이 출판되었을 때 만유 인력의 법칙의 발견에 대한 선취권을 중심으로 로버트 후크로부터 비판을 받은 일이 있었다. 이를 알게 된 뉴턴은 그와 같은 번거로운 일에 대해서는 일체 관계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예정되어 있던 제 3 편의 출판을 중단하려고까지 하였다. 결국 친구의 주선으로 그 사건은 일단락되어 제 3 편을 출판하게 되었지만, 본래 뉴턴으로서는 학자로서의 업적을 인정받는 일 같은 것에는 전연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 혼자로서 충분했던 것이다. 여성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인간이란 그 누구든지 이성을 생각하지 않고 지낼 수 없다. 그것도 사춘기에 접어든 후부터는 상대방의 일거수 일투족에 시선을 쏟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이성에 관련된 문제로 시간을 보내게 된다. 프로이트의 유아 성욕설을 거론할 필요까지도 없이 인간의 본능 중 성욕이란 극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동물의 세계에 있어서도 짝짓기를 위한 동물들 사이의 투쟁이 엄청나며 때로는 처참한 상황으로까지도 발전하게 된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어울리는 배우자를 얻기 위해 이성에게 편지를 쓰고 데이트를 청하며 또는 뒤를 쫓아다니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소요되는 시간과 노력이 엄청나다. 그 결과 결혼하여 새 가정을 꾸리고 잠자리를 같이하며 살아가는 동안에, 이번에는 의견의 불일치, 성격의 부조화 등으로 부부 싸움을 하는 등 번거로운 일이 많이 발생하며 또한 그만큼 시간을 뺏기게 된다. 그런 동안에는 다른 일을 할 생각도 나지 않고 그와 같은 복잡한 일에 매달리게 된다. 그뿐만이 아니고, 결혼하게 되면 자식을 낳게 되어, 그 양육의 문제, 교육의 문제 등에 대해 다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으며, 많은 시간을 다시 빼앗기게 된다. 근래에 와서 독신으로 사는 남자나 여자의 수가 증가 추세에 있는 것도 그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자녀에 대해서는 무자식 상팔자라는 말이 있는 것도, 자녀로 해서 생기는 갖가지 번거로운 일을 두고 빗대서 한 말일 것이다. 그런데 뉴턴은 평생을 두고 독신으로 지냈다. 여성하고는 전연 관계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젊었을 때도 사랑한 여자 하나 없었던 것 같다. 말하자면 뉴턴은 여성에 의해 마음이 혼란해진 적도 없으며 따라서 공부나 연구에 전연 지장을 가져다 줄 일이 없이 살아갔다. 다시 말해서 그는 여성에게서 완전히 해방된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생을 살았던 것이다. 20 대 중반이라고 하면 남성은 여성 문제에 의해 가장 마음이 어지러워지기 쉬운 연령이다. 바로 그런 나이게 그는 이성의 문제로 인한 그 어떤 번거로움이나 고민 없이 고독 속에서 그 유명한 3 대 발견을 이루어 냈던 것이다. 뉴턴의 생애 가운데 사랑의 대상이 될 것 같은 여성이 등장하는 것은 공립 중학생 시절 뿐으로, 그 무렵 뉴턴은 고향을 떠나서 어느 약제사의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그 집에 두 살 손아래인 아가씨가 있어 그녀와 친해진 적이 있었던 것이다. 만약 당시 그가 대학으로 진학하지 않고 모친이 원하는 대로 농부가 되었다면 그 집의 그 여성과 결혼했을지도 모른다. 여성 쪽에서는 뉴턴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 같지만, 뉴턴은 그다지 흥미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관심을 두었던 것은 오히려 약제 점포에 진열된 화학 약품 쪽이었다. 그런 식으로 해서 시작된 화학에 대한 관심이 후에 가서 연금술의 연구로 발전해 나갔을 뿐 이성에 대해서는 관심을 쏟은 일이 없었다. 뉴턴이 태어나기 10 여 년 전에 영국의 정치가인 동시에 과학자요 문필가이기도 했던 프랜시스 베이컨(F.Bacon)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아내와 자식이 있는 자는 자기 운명을 담보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아내나 자식들이란 커다란 사업을 이룩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장애물이 되기 때문이다. 사회를 위해 가치 있는 일을 한 사람은 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자식이 없는 사람이다." 이 말은 뉴턴에게 해당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런 말을 한 프랜시스 베이컨 자신은 45 세에 결혼을 하였다. 짐작건대 그 후에 한 위의 말은 아무래도 결혼한 자신에 대한 반성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그렇다치고 실제로 철학자들 가운데 결혼하지 않은 사람을 여럿 들 수가 있다. 데카르트, 칸트, 니체, 쇼펜하우어 등이 그런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여성에게 관심이 전연 없었던 것은 아니다. 관심이 있으면서도 결혼을 하지 않은 탓으로 여성에게 빼앗기는 시간이라는 것이 없는 동시에 일에 대한 집중력에도 방해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즉, 니체는 몇 명인가의 여성에게 결혼을 요청한 사실이 있으며 데카르트는 사생아를 낳게 한 일이 있다. 그렇지만 뉴턴만은 그의 생애에 여성의 모습이 투영된 일이 전연 없다. 그렇다면 그가 이성을 멀리한 이유가 혹시 허약 체질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일단 의심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는 보통 사람 이상의 튼튼한 체력의 소유자였다. 하긴 미숙아로 태어나 몇 시간 정도 지탱해 낼 수 있을까 하고 걱정하게 했지만 84 세까지 장수를 누렸을 뿐만 아니라 청력이나 시력이 약해진 일도 없었으며, 이가 한 개 빠졌을 뿐, 80 세가 넘을 때까지 단 한 번도 병상에 누운 일이 없었다. 비록 키는 작은 편이었지만 다부진 몸매를 갖고 있었으며, 두뇌를 혹사한 탓인지 30 세에 머리가 온통 백발로 변해, 만년에는 은처럼 빛을 발하며


너풀거렸다고 한다. 그가 침식을 잊고 그렇듯 연구에 열중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단단하고 건강한 육체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단정할 수가 있다. 깊이 파면 샘물이 솟아오른다. 이와 같이 여성 문제에서 야기되는 각종 번거로운 일 없이 완전히 독신이었다는 점과 또한 혹사엘 충분히 견뎌낼 만한 튼튼한 육체를 소유했다는 두 가지 점이, 그로 하여금 집중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하였다. 다른 사람의 경우에는 쉽게 지닐 수 없는 유리한 조건이 되었던 것이다. 이상은 그의 천재성의 비밀을 집중력이라는 점에서만 살펴보았지만, 한편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즉 집중력만 갖추고 있으면 놀라운 능력은 자연적으로 탄생되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본래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집중력에 의해 그것이 고양되고 발휘되는 것이 아닐는지? 이런 의문에 대해서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좋아하기 때문에 잘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점이다. 격언에도 이와 비슷한 말이 있듯이, 이런 격언에 대해서는 우리 주변에서 그것이 옳다고 입증할 수 있는 예가 얼마든지 있다. 여기서 우리의 일상 생활의 주변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일을 에로 들고자 한다. 즉 자동차의 사진이나 그 일부분만 보고 차종이나 모양을 즉시 알아맞히는 어린이가 있다. 그런가 하면 전국에 걸친 철도의 역이나 그 이름을 거의 다 알아맞히는 어린이도 있다. 그런 어린이들은 자동차의 카탈로그나 열차의 시간표를 지켜보며 씨름하고 있는 동안 자기도 모르게 역의 이름 같은 것을 기억하게 된 것이다. 즉 본래부터 기억력이 좋은 아이는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지도나 차의 카탈로그를 그렇듯 지켜보며 씨름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집중력이라는 그 자체가 어느 정도로 경이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사방증후군'이라는 용어가 증명해 준다. 이 말은 학문이 깊은 사람이라는 뜻의 불어로 정신 의학자는 정신 장애가 중증인 사람이 경이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경우를 '사방 증후군'이라 부르고 있다. 트레파트라는 사람의 저서 "어떻게 해서 그들은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는가"라는 책에 흥미로운 예가 소개돼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과거나 미래의 4 만 년 동안에 대해서 어느 해의 몇 월 몇 일이 무슨 요일인가를 즉각 알아맞힐 수 있으면서도 숫자에 대해서는 30 까지도 셀 수가 없으며, 방금 만난 사람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소년은 음악을 제대로 공부한 일도 없으면서, 언제가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을 처음 듣고서도 이내 그 곡을 피아노로 쳐 보였다. 그 밖에도 어떤 곡이든 한 번 듣고서도 전연 실수 없이 다 연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본인은 맹인으로서 식사 때 나이프와 포크도 제대로 쥘 수가 없는 어린이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할 후 있게 되었는가? 이들에 대해 연구한 사람들의 일치된 의견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대부분 '사방


증후군'의 사람들로서, 본인들이 좋아하는 일, 또는 특기가 있는 일 및 즐거운 일에 대해서만 열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암산에 대해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천재의 경우는, 그가 어릴 때에 100 까지 셀 수 있게 되었을 때에는 소의 꼬리에 나 있는 털의 수를 계산하는 일에 흥미를 느끼게 그 후에는 여러 가지 것을 셈하게 되고 온갖 방정식을 연구해 내어, 이를 푸는 일을 즐거움으로 삼고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인물의 경우는 어느 한쪽 방향으로 지능이 지나치게 발달하게 되고, 그 밖의 일에 대해서는 거의 내버려두게 되어 정신 장애가 생긴 것 같다고 연구자들은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집중한다는 일 자체가 능력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인간은 땅을 깊이 파게 되면 반드시 샘물이 분출해 나오듯이 풍부한 능력을 분출하는 샘을 내부에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뉴턴은 사방 증후군의 사람들과 함께 실제로 증명하고 있다. 끝까지 도전한 세균학자 파스퇴르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1822__1895) 프랑스의 화학자요 세균학자로 돌에서 태어나, 파리 고등 사범 학교에서 공부했으며, 고등 사범 학교의 과학 지도 교수가 되었다. 최초로 주석산에 대해 연구했으며, 이어 발효에 대해 연구해 유산균을 발견했는데, 유산균은 이때에 발견된 최초의 혐기성균이었다. 또한 발효 현상의 자연 발생설을 타파하는 결정적인 실험을 했으며, 초산 발효 연구를 통해 포도주의 산패를 방지하는 저온살균법을 고안해 냄으로써 프랑스의 포도주 생산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또한 전염병을 연구해 각종 균을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예방 접종을 실시했으며 또한 살균법과 무균법을 확립했다. 과학보다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소년 묘하게도 파스퇴르의 소년 시절은 다른 위대한 과학자의 경우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어릴 적부터 특별히 과학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그렇듯 생명의 기본적인 수수께끼를 푸는 강한 사명감을 갖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보이는 계기는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었다. 어릴 적 그는 과학보다는 오히려 그림에 소질이 있는 소년이었다. 그는 1822 년 12 월 27 일 도브 강 옆의 작은 도시인 돌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생가가 있는 이 거리를 파스퇴르 거리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무두질 거리라 불리운 것처럼 거의 대부분의 집에서 가죽을 무두질하고 있었다. 그의 부친도 그러한 사람의 하나였다. '장차 교사가 되겠다.' 이것은 파스퇴르가 일찍부터 마음속에 그리고 있었던 커다란 꿈이었다. 그는 파리로 가서 나폴레옹이 대학교수를 육성하기 위해 설립한 고등 사범 학교에서 공부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첫 번째 파리행은 실패로 끝나 버렸다. 겨우 16 세인 그에게는 익숙해진 생활로부터 갑자기 400 킬로미터나 떨어진, 복잡한 도시로 뛰어든다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소르본 대학에서 학생들이 몰려 있는 것을 보거나 젊은이들이 거리의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아도, 그들에게


끼여들 수 없는 고독감을 느낄 뿐이었다. 6 주 후 부친이 마차를 타고 그를 데려가기 위해 찾아왔다. 이렇게 해서 그는 다시 고향의 학교로 돌아가 그림 공부를 계속했으며 친구들이나 친지들을 모델로 멋진 파스텔 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40 킬로미터 떨어진 브장송 학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재능을 충분히 발휘해 그림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렇지만 그는 당초의 목표를 결코 잊지 않았다. 즉, 그 학교에서 고등 사범 학교에 들어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최초의 입학 시험 결과 지원자 22 명 중 15 등의 성적으로 입학은 허용되었지만 떳떳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파리로 가서 1 년 더 공부해 재도전하기로 결심했다. 다시금 파리로 돌아온 그는 처음의 경우와는 완전히 딴판인 생활을 했다. 이번에는 꼭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의욕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이윽고 명문인 생 루이 고등 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으며 그 후 동경했던 소르본 대학에서 강의를 듣게 되었다. 이때가 돼서야 비로소 과학자 파스퇴르의 면모를 갖추어 가기 시작했다. 그는 6, 7 백 명이나 되는 학생들 사이에 끼어 방금 들은 강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했다. 대학의 넓디넓은 홀을 지나는 그의 얼굴에는 눈앞에 펼쳐지는 커다란 세계에 완전히 사로잡힌 밝은 표정이 역력했다. 학년 말에 고등 사범 학교의 입학 시험을 보았는데 성적은 4 등이었다. 공부하고 싶어 좀이 쑤시던 그는 신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파리로 가서 기다리고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하요 파스퇴르는 1843 년 10 월 21 세의 생일을 눈앞에 두고 화학과 물리의 교습법을 익히기 위해 고등 사범 학교에 입학했다. 최초의 의문에 도전 고등 사범 학교에서의 공부가 끝나가자 그는 뭔가 자기 혼자만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특별한 연구 과제를 찾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선택된 것이, 복잡하면서 정교하게 조립된 결정체였다. 어느 날 그는 교실에서 소금 결정의 표본을 보고 완전히 사로잡히고 말았던 것이다. 순수에 가까운 소금이었는데, 세 가지의 서로 다른 결정의 모양을 나타내고 있었다. 우선 그는 소금의 결정이 어째서 세 가지인가 하는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반드시 어떠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자연이 어째서 그와 같은 물체를 조립하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도 생겼다. 다른 명성 있는 과학자들이 느낀 것과 똑같이 그 역시도 가장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되었으면 이를 해명하기 위해 연구를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정체는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는 것일까. 의문은 꼬리를 물고 또 다른 의문으로 확대돼 나갔다. 결정은 예로부터 호기심이 강한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파스퇴르의 시대에는 과학자들에 의해서 그 모양이 상당한 수준까지 밝혀져 있었다. 그렇지만 그 이상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었다. 파스퇴르의 물리 선생도, 어떤 결정체에 빛을 대면, 그 광선이 휘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빛이 어째서 굴절하는 것일까. 이것 또한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문제였다.


그 후 반세기가 지나서야 비로소 원자의 내부 구조가 방사선을 통해 분명히 밝혀졌던 것이다. 파스퇴르는 이를 놓고 생각했다. 이러한 빛의 굴절은 결정의 종류에 따라 다른 것일까? 아니면 결정의 과학적인 성분의 결합 방식에 따라 다른 것일까? 혹은 과학자가 일반적으로 화합물이라 부르는 종류의 차이에 따라 다른 것일까? 파스퇴르는 이와 같은 많은 의문을 가진 끝에 즉시 주석에서 취할 수 있는 한 조의 아름다운 결정을 지닌 주석산염을 주의 깊게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두 가지 모양의 결정은 포도가 발효하고 있는 포도주 통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상한 것을 알게 되었다. 한쪽의 결정을 녹여 보니 빛이 굴절했지만, 나머지 결정을 녹였을 때는 빛이 굴절하지 않았다. 양쪽 다 화학상으로는 완전히 똑같은 성분으로 되어 있는데도 말이다. 이런 식으로 그는 계속 의문나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도전을 지속했던 것이다. 우선 그는 이들 두 개의 결정체를 찔러 보기도 하고 만져 보기도 하며 정성들여 조사를 했다. 그런가 하면 현미경으로 여러 각도에서 관찰해 보았을 뿐만 아니라 녹여서 재차 결정으로 만들어 보면서, 빛을 굴절시키거나 굴절시키지 않는 확실한 차이가 무엇 때문에 생기는 것인지 열심히 찾아보았다. 연구하던 것이 벽에 부딪치게 되면 젊은 과학자들은 낙심한 나머지 포기해 버리기 쉽다. 그렇지만 파스퇴르는 그 후에도 결코 동요하지 않고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드디어 커다란 발견을 했다. 수천 번씩 현미경을 통해서 관찰한 결과, 결국 두 개 결정의 차이를 발견한 것이다. 너무나도 작은 차이였으므로 여태껏 놓쳐 버렸던 것이다. 두 개의 결정은 거의 똑같았지만 결정의 면이 딱 한 개 달랐던 것이다. 제 1 의 결정은 그 면이 모두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지만, 제 2 의 결정은 오른쪽과 왼쪽 양 방향으로 기울어진 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파스퇴르는 설레는 가슴을 진정시켜 가며, 제 2 의 결정에서 오른쪽으로 기운 것과 외쪽으로 기운 것을 구분해, 이를 각각 녹여 용액을 만들어 보았다. 그리하여 이 두 가지 용액이 빛에 어떠한 변화를 주는지 실험해 보았다. 그 결과 오른쪽으로 기운 결정을 녹인 용액은 빛을 오른쪽으로 굴절시켰으며, 왼쪽으로 기운 결정을 녹인 용액은 빛을 왼쪽으로 굴절시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이를 통해 빛을 굴절시키지 않는 현상을 이 양쪽의 결정이 동량이어서 서로 상쇄시켜 버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하늘에라도 두둥실 날아오를 것만 같은 흐뭇한 기분이었다. 짐작건대 과학자들에게는 이와 같은 감격의 순간이 있어, 그처럼 까다로운 실험을 되풀이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물체가 어떤 식으로 조립되었는가를 알게 되면, 이와 관련된 새로운 방법, 새로운 기술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생각을 전개시키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그 후 수년 동안 결정의 연구에 열중하여 입체 화학이라고 하는 과학이 새로운 분야에 대한 기초를 마련할 수 있다. 파스퇴르의 이와 같은 발견은 과학의 발전에 한몫을 단단히 한 주요한 발견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우수한 과학자로서의 결의와 끈기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모험가로서의 멋진 본능을 지닌 탐구자로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로부터 10 년 동안 그는 이들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즐겁게 연구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사이 그는 1848 년 말에 고등 사범 학교를 졸업한 다음, 다음해 1 월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화학 강사라는 최초의 직업을 갖게 되었다. 한편 그는 여기서 학장의 딸을 사귀어 사랑에 빠진 끝에 26 세 때 그녀와 화촉을 밝히기도 했다. 그는 그 아가씨를 만난 지 불과 15 일 만에 학장에게, 당신의 딸과 결혼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 한 번 결심한 것은 끝까지 해내는 그다운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편지의 한 부분을 보면, 전재산은 5 만 프랑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모두 형제들에게 주려고 훨씬 전부터 결정했습니다...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건강과 일을 하려는 의욕과 연구뿐입니다. 라고 되어 있는데, 이 편지에서도 일에 대한 그의 강한 의욕을 보여 주고 있다. 두 사람은 마침내 1849 년 5 월 29 일에 결혼하게 된다. 부인은 남편이 연구에 열중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 실험실에만 파묻혀 있는 남편을 차츰 이해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편이 연구에만 열중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녀는 아내인 동시에 남편의 제자였으며 따라서 과학상의 문제를 이것저것 서로 이야기하며, 연구가 잘 진척되도록 응원한 우수한 협력자였다. 이는 그들 주변 사람들의 증언이기도 했다. 이렇듯 그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다. 스트라스부르에 있었던 5 년 동안 아내와 결정 연구 및 대학 수업을 위해 모든 힘을 쏟아부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의 부인은 이 같은 역할말고도 어머니로서의 임무도 다해야 했다. 그녀에게는 5 남매의 자녀가 있었기 때문이다. 1854 년 9 월 그는 마침내 릴 대학의 이학부장 겸 화학 교수에 임명되었다. 릴은 북프랑스의 활기찬 산업 도시로 많은 사람들이 사탕무에서 얻은 주스를 발효시켜 알코올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파스퇴르가 겨우 32 세의 나이로 그렇듯 책임 있는 지위에 오르게 된 것은 그의 재능이 각별히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열심히 가르쳤다. 자연이 이룩해 내는 무한한 기적에 대해서 자신이 느끼는 외경심을 학생들에게도 심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감자 하나를 아들에게 보이며, 이 감자에서 설탕이 생기고, 그 설탕으로부터 알코올이 생기며, 그 알코올에서 초가 생긴다고 가르쳐 주면, 이에 흥미를 느끼지 않을 자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파스퇴르는 돈 많은 사업가나 그 부인들을 향해 이와 같이 열기 어린 연설도 했다. 릴 대학의 학생들은 대단한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파스퇴르 선생의 강의는 하나도 놓치지 말라는 소문이 돌게 되었다. 그는 학생들을 이끌고 프랑스나 벨기에의 철강이나 금속 공장으로 견학을 하는 식으로 매사에 적극적이었던 것이다. 부패한 알코올에서 살아 있는 효모를 발견


1856 년의 어느 날 파스퇴르가 가르치는 학생의 아버지인 알코올 제조업자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고민을 털어 놓았다. 알코올이 술통에서 제대로 제조되고 있지만 그 중에는 알코올이 양조되지 않고 그대로 시어지기만 하는 것도 적지 않아 하루에 평균 1,000 프랑의 손해를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들의 스승이니까, 뭔가 방법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 찾아왔던 것이다. 파스퇴르는 주석산염의 결정에 대해 연구한 일이 있어 발효에 대해 다소의 지식은 있었지만 알코올 제조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었다. 그리하여 파스퇴르는 즉시 그 학부모의 알코올 제조 공장으로 찾아가서는 사탕무가 발효되고 있는 술통의 냄새를 맡아 보았다. 대부분이 알코올의 좋은 냄새를 풍겼다. 그렇지만 그 중 몇 통에서는 쉰내가 났다. 통 속을 살펴보니 내용물들이 진흙처럼 덩어리져 있었다. 그는 좀더 자세히 실험실에서 관찰해 보기 위해 부패한 통 속의 내용물을 두어 병 수거해 가지고 돌아왔다. 동시에 알코올이 주조되고 있는 향기가 좋은 쪽의 것도 조금 수거해 왔다. 파스퇴르는 제대로 발효가 되고 있는 병의 액체 한 방울을 현미경 밑에 놓았다. 과학자로서의 직업적 본능이라기보다 어떤 일이든지 실수 없이 완벽을 기하려는 그의 의도 때문이었다. 들여다본 순간 무수히 많은 소구체가 보였다. 노랗게 계란처럼 둥근 것이 그보다 색이 진한 소구체와 함께 엄청나게 많이 있었다. 그렇게 작은 것은 본 일이 없었다. 그는 어쩌면 이것이 효모의 세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사탕무나 포도가 발효하는 액체 속에는 반드시 효모가 포함돼 있다는 것이 과학자들에 의해 이미 밝혀진 사실이었다. 이렇듯 확실히 그 존재는 알려져 있었지만 그 역할에 대해서는 의견이 구구했다. 그러나 개중에는 이 효모의 세포가 사탕무나 포도 주스의 즙에 있는 당의 분자를 썩게 하고 분열시켜 알코올과 투명한 탄산 가스를 발생시킨다고 믿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관찰을 계속하던 그는 솟구쳐 오르는 흥분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그것은 그 소구체가 살아 있어 발효를 시키고 있다는 것을 점점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효모야말로 발효를 일으키는 근원이었던 것이다. 파스퇴르는 다시 현미경을 들여다보았다. 분명히 보였다. 확실히 눈이 보였던 것이다. 그 조그마한 세계에 사로잡힌 것처럼 그는 한시도 현미경으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다. 차분히 지켜보고 있자 그 눈은 점차 커지면서 마침내는 분리되어 하나의 효모가 두 개가 되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는 그것을 자기 눈으로 확인했던 것이다. 즉 효모의 세포는 커져 가지고 수를 불리면서 사탕무의 즙 속의 당에 영양을 공급하면서 알코올과 탄산 가스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는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피력했다. 증거가 불충분할 때 나는 매우 소극적이 되며 아무것도 할 기분이 들지 않는다. 그렇지만 반대로 과학적으로 틀림없는 증거가 있을 때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진실을 끝까지 밝혀낸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양조업자의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알코올이 양조되지 않는 까닭을 밝혀내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시어진 술통의 액체가 현미경 밑에 놓여졌다. 그렇지만 동그란 효모 세포는 어디에도 없었다. 놓치지 않도록 철저하게 관찰해 봤지만 역시 한 개도 발견할 수 없었다. 무거리 같은 액체가 든 시험관 하나를 들고 차분히 관찰했다. 그러자 작은 알맹이가 안쪽에 붙어 있는가 하면, 액체 속에 떠 있는 것이 보였다. 부패하지 않은 알코올을 넣은 시험관에도 이러한 것이 붙어 있는가 하고 조사해 봤지만 전연 발견할 수가 없었다. 부패한 알코올 속에서 발견한 작은 알맹이를 하나만 간신히 꺼내어 순수한 물 속에 넣어 그 물방울을 현미경으로 조사해 봤다. 그러자 전연 믿을 수 없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고작 하나의 물방울 속에 엄청난 수의 거무튀튀한 막대기 모양의 작은 생물체가 한데 엉겨 헤엄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춤이라도 추고 있는 것처럼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효모보다도 훨씬 작았다. 크기를 재려고 했지만 지나치게 작아서 잴 수조차 업었다. 그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떻든 그 미생물에 사로잡히고 만 것이다. 더 많은 견본이 필요했다. 그는 양조 공장으로 다시 돌아가 부패한 액체를 더 수거했다. 그 생물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그런데 그 액체가 시면 실수록 그 생물의 수가 많았다. 파스퇴르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 생물체의 수가 효모의 수보다 많아지면 효모는 알코올을 만들 수 없게 된다. 그 대신 이 막대기 모양의 생물이 우유를 시게 하는 것과 똑같은 유산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부패했다고 생각한 술통 안에서는 알코올 대신 유산이 생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알코올 업계의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었다. 즉 술통 속의 액체를 현미경으로 조사해 효모만 발견되면 그대로 계속 발효케 할 수 있었지만 한 개라도 막대 모양의 미생물이 발견되면 술통과 함께 버려야만 했다. 한 개라도 그런 것이 있으면 수가 엄청나게 불어나 효모를 전멸시키기 때문이었다. 파스퇴르의 미생물에 대한 관심은 식을 줄 몰랐다. 처음부터 그에게는 막대 모양의 미생물이 유산을 만들며, 효모가 알코올을 만든다는 확신이 있었으므로 이들 두 생물체가 서로 싸우고 있는 모습이 그의 뇌리에 못박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싸움 모습에 착안해 그는 다시 전염병의 세균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된다. 막대기 모양의 미생물인 간균은 사탕무의 과육에 완전히 엉겨 있으므로 정확하게 조사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여기서 문제되는 제 1 과제는 이들을 분명히 관찰할 수 있는 배양액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파스퇴르는 우선 설탕물을 가지고 시험해 보았다. 발효하고 있는 액체에는 틀림없이 당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안에서는 자라지 않았다. 그저 춤만 추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파스퇴르는 완전히 과학의 요리사가 되어 각종 혼합액을 하나하나 시험해 봤다. 여러 가지 액체를 만들어 이를 가열하고 여과한 다음, 균을 심어 봤지만 그 곳에서는 배양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크게 낙심하게 되었다.


다음은 효모가 들어 있는 용액을 가지고 시험했다. 그리하여 즉시 드라이 이스트를 물에 녹여 거기에 소량의 설탕을 주의 깊게 재서 섞었다. 다음은 그 용액을 끓도록 하여 안에 있는 세균을 완전히 죽인 다음 투명한 액체가 만들어질 때까지 여러 차례 걸렀다. 방해가 되는 것들을 모두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과연 부패한 발효액에서 꺼낸 간균이, 완전히 멸균된 효모 용액 속에서 성장해 갈 수 있을까. 그는 용액이 들어 있는 플라스크에 부패한 용액을 한 방울 떨어뜨려, 그것을 조심스럽게 배양기 안에 넣었다. 거기서는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했다. 그는 무척 바쁜 사람이었다. 교단에 서야 했으며 농민들이나 양조 제조업자들에게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틈을 내어 배양기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아무런 변호가 없었다. 그리하여 거의 절망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추측이 절대로 옳다는 신념은 굽히지 않았다. 그리하여 2 일째 되던 날 끝무렵에 그는 어떤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작은 거품이었다. 용액에서 가스가 발생해 거품이 생긴 것이다. 분명히 그 거품은 자신이 균을 심은 곳에 발생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게다가 여태껏 볼 수 없었던 작은 반점이 잔뜩 생겨 있었던 것이다. 파스퇴르는 그 액체 한 방울을 현미경 아래 놓고 정신없이 살펴보았다. 있었다, 수만 개나 되는 간균이 거기 있었다. 플라스크에 심은 것의 수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확인했다. 즉 그 효모용액에서도 역시 유산이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효모 용액에서 만들어진 간균 몇 개를 꺼내어 새로 끓여 살균한 효모 용액 속에 넣었다. 그리하여 잠시 관찰하고 있자, 하나 하나의 균이 길게 자라는가 싶더니 갑자기 갈라지며 여태껏 하나였던 균이 두 개가 되었다. 이번에는 거기에 신선한 우유를 넣어 보았다. 그러자 우유는 시어지면서 균이 계속해서 증식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파스퇴르는 이와 같은 실험을 확신이 설 때까지 여러 차례 되풀이해서 실시했다. 깨끗한 효모 용액 속에 간균이 들어 있는 액체를 한 방울 떨어뜨리면, 그 곳에는 틀림없이 새로운 간균이 무수히 발생해 유산이 만들어졌다. 1 만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수수께끼에 싸여 있던 발효의 정체가 마침내 밝혀진 것이다. 즉 발효의 원인은 바로 그 미생물이었다. 동그란 효모균이 설탕을 발효시키며 알코올을 만들 듯이, 이들 갸름한 균도 발효를 일으켜 유산을 만들었다. 1857 년 8 월, 완전히 확신을 얻은 그는 자신의 의견을 공표했다. 그는 릴 과학 협회에 논문을 발표했으며, 또한 프랑스 과학의 최고봉인 과학 아카데미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의 발표는 커다란 반응을 불러있으켰다. 그것은 당시 가장 존경을 받고 있던 과학자들의 생각과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발효를, 어떤 물질에 다른 물질이 가해졌을 때 일어나는 단순한 화학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살아 있는 효모가 없으면 알코올의 발효는 전연 일어나지 않는다고 파스퇴르는 주장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올바른 주장이었다.


저온 살균법을 발견하다 발효에 대한 파스퇴르의 연구는 그 후에도 수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 미생물이 다른 많은 물질에 발효를 일으킨다는 것을 밝혔을 뿐만 아니라, 이를 열로 죽임으로써 포도주, 초, 맥주 등을 부패로부터 지키는 방법도 개발했다. 이 방법은 파스퇴르--이 이름을 따서 '파스투어라이제이션'이라 했다. 즉 저온에서 살균하는 '저온 살균법'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매일 마시는 우유나 요구르트가 부패하지 않는 것과 세균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은 모두가 다 파스퇴르의 덕택이다. 발효의 연구를 통해 파스퇴르는, 지구상에서 볼 수 있는 발효 이외의 유익한 현상이나 무수하게 많은 유해한 현상이 다 같이 이 미생물의 조화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언젠가는 반드시 이를 증명해 보이겠다고 결심했다. 이렇듯 그는 새로운 의혹을 발견해 이 문제를 해결해 보이겠노라 다시금 도전한 것이다. 이는 그의 끈질긴 도전 정신 내지는 모험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857 년 말, 스팔란차니(L. Spallanzani)가 결사적으로 부정한 이래 이미 1 세기 동안 파스퇴르가 주장하는 세균의 자연 발생설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는 그가 모교인 고등 사범 학교의 이학부장으로 부름을 받았던 시기였다. 그 무렵의 과학자들은 인간이나 동물 및 곤충 같은 생물은 부모 없이는 태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효모 등 미생물은 자연히 발생한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파스퇴르는 발효를 연구한 결과 세균이 공기 속에 있으며, 이들이 물체에 붙거나 액체에 뛰어드는 것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지 않는 한 알아차릴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렇게 믿고 있는 것은 파스퇴르뿐이었으며 고명한 과학자나 교수들도 이를 부정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완전히 납득할 수 있는 증거가 없으면 만족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과학자로서의 자기 인생이 성공하느냐, 못하느냐의 기로에 선 그는, 자신에게는 오직 하나의 길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즉, 증거를 찾는 것이었다. 확고한 증거만 찾아낸다면 과학자들을 자신이 믿고 있는 방향으로 유도할 수가 있을 것이다. 세균이 없으면 발효도 부패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데까지는 그가 입증한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시체나 썩은 고기에는 부패라는 현상에 의해서 세균이 발생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반대, 다시 말해서 세균 자체가 부패를 일으키는 원인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입증해야 좋을 것인가. 우선 균이 밖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부터 생각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용기 속의 균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죽인 다음, 그 입을 막아, 그 이후에는 새로운 균이 절대로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그는 스팔란차니가 100 년 전에 실험했던 것과 비슷한 실험을 생각해 냈다. 우선 설탕이 들어 있는 효모 용액을 몇 개의 플라스크에 넣고, 안의 세균을 죽이기 위해 끓이면서 그 동안에 플라스크의 입을 녹여 밀봉했다. 다음은 밀봉된 플라스크를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누었다. 제 1 그룹에서는


플라스크의 목을 잘라 공기를 넣고 다시금 유리를 녹여 밀봉한다. 제 2 의 그룹은 세균이 번식하기 쉬운 온도를 유지하는 배양기 속에 넣었다. 결과는 확실했다. 목을 잘라 공기를 넣은 쪽 플라스크에는 효모나 기타 세균이 번식했지만, 밀봉한 채로 있는 쪽에서는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았다. 파스퇴르는 이와 같은 실험을 여러 차례 되풀이 해 보았다. 우유나 요 및 혈액과 같은 것이 들어 있는 용액을 가지고도 실험해 보았다. 액체를 끓여 밀봉한 다음 입을 열어 배양하는 이와 같은 작업을 되풀이해 자신의 생각이 옳은가를 조사해 보았던 것이다. 이로써 세균이 밖으로부터 온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렇지만 자연 발생설을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반론했다. 즉 공기와 떼어놓으니까 자연스럽게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끓이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공기만 있으면 세균은 자연적으로 발생한다고.... 이에 대해서 그는 여전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나는 아직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미개발의 영역으로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도대체 공기 중에 어떤 것이 이와 같은 생물을 낳게 하는 것일까. 그것이 세균일까, 고체일까, 아니면 액체나 기체일까, 모든 것이 수수께끼에 싸여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계속 실험할 수밖에 없다. 반대하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동안 그는 다시금 자신의 실험을 계속했다. 그는 세균을 운반하는 것이 공기 자신이 아니라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먼지일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연구해 봐도 공기만을 플라스크 안에 넣는 일은 불가능했다. 아무래도 세균과 함께 들어가 버리기 때문이었다. 이때 그를 도와준 사람이 연상의 화학 교수인 발라르(A,J. Balard)박사였다. 발라르 박사는 남이 실험하는 광경을 기웃거리며 돌아다니기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파스퇴르의 실험실에 찾아온 박사는 매우 난처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발견했다. 세균과 공기에 대해서 파스퇴르와 같은 의견이었던 박사는 그의 실험에 기꺼이 협력하기로 하고 함께 연구한 끝에 마침내 해결책을 찾아냈다. 그는 플라스크의 길다란 목 부분을 가열해 그곳을 아래쪽으로 S 자형으로 휘게 해 보라고 말했다. 그렇게 하면 공기는 굽은 부분을 통해서 흘러 들어가지만, 먼지는 중력이 있으므로 굽은 부분에 걸려 안에까지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파스퇴르는 발라르 박사의 말대로 실험을 해 봤다. 그랬더니 정말 박사의 말대로 공기는 S 자형의 통로를 통해 안으로 들어갔지만 먼지나 세균은 S 자형 부분에 걸려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으므로 플라스크는 여전히 깨끗했으며, 균에 의해 번진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1 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이 백로의 목 모양의 플라스크는 그대로 남아 있어 파스퇴르의 실험의 증거가 되고 있다. 또한 이 플라스크는 발라르 박사처럼 오직 진리만을 추구한 과학자들의 너그러운 마음을 우리에게 생각게 해 주고 있는 점에서도 귀중하다.


공기 중의 먼지의 양은 장소에 따라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다. 효모 용액이 들어 있는 플라스크를 여러 개 준비해 그 중의 10 개는 파리 천문대의 지하실에, 다시 10 개를 천문대의 정원에, 이어 20 개를 자기 고향의 가까운 언덕 위에, 다시 20 개를 몽블랑의 정상까지 운반해서 실험했다. 그 결과 지하실에 두었던 10 개의 플라스크 중 세균이 번식한 것은 고작 한 개뿐이었다. 지하실에서는 공기의 움직임이 그다지 활발하지 않으므로 먼지도 적을 것이라고 그는 추측했다. 그런데 정원에 놓아 두었던 10 개의 플라스크는 단 한 개에도 세균이 번식하지 않았다. 고향 근처의 언덕으로 운반한 20 개 중에서는 8 개에, 그 언덕보다 좀 높은 곳에 놓아둔 20 개 중에서는 5 개의 플라스크에 균이 번식했다. 그리고 몽블랑 정상에 놓아 둔 플라스크에서는 20 개 중 한 개에만 균이 번식했다. 이렇게 하여, 1860 년 11 월 그는 이 실험 결과를 과학 아카데미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들 실험 결과에 따라 공기 중의 먼지야말로 액체 속에 생기는 생명의 유일한 기원이며, 첫째로 없어서는 안 되는 조건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어 다음과 같이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지고 추가했다. 이제부터 가장 바람직스러운 일은 이들의 연구를 더욱 깊이 하여 각종 전염병의 기원을 알아내는 일일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파스퇴르는 자신을 포함한 당시의 과학자들을 발견의 세계로 안내했다. 그는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실험을 끈기 있게 계속해서 그 문제가 속시원히 밝혀질 때까지 지속해 나갔다. 그로부터 10 년 동안 곧잘 날카로운 의견이 교환되었지만, 그는 반대 의견을 하나도 그냥 두지 않고 깨버렸다. 어떻든 반대 의견은 많았다. 과학적인 근거에 따른 것도 있었지만, 개중에는 자신의 지위를 뽐내기 위해 무조건 방해를 하기 위한 반대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파스퇴르는 과학 아카데미에서 실제로 자신의 실험을 공개해 자기가 옳다는 것을 증명했다. 40 세가 된 1862 년에 그는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에 선출되었다. 그때 그는 매일 강의를 하면서 과학자들에게 상상력의 불을 붙여 주었다. 1850 년대와 1860 년대는 과학계는 물론이고 세계에 있어서도 가슴 설레는 시대였다. 그렇지만 파스퇴르의 개인 생활에서는 슬픈 일이 생겼다. 즉 1859 년 9 월 맏딸이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했다. 자세한 내용은 잘 알 수 없지만, 이 딸의 죽음을 계기로 그의 결심은 한층 더 굳어졌으며 전염병 극복을 위한 연구에 매진하게 된다. 세균은 어디에나 있다 그는 일반 사람들도 세균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1864 년


4 월 그는 소르본 대학에서 과학자, 학생, 장관 및 유명한 작가나 공주 등 많은 청중을 모아 놓고 연설했다. 우선 그는 대강당의 조명을 다 꺼서 캄캄하게 한 다음 한 줄기 광선을 비추었다. 그러자 공기 중에 무수히 먼지가 떠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넋을 잃고 바라보는 청중에게, 이 먼지의 입자 속에 엄청난 균이 있다고, 그가 설명했다. 그 다음 그는 두 개의 플라스크를 보여 주었다. 한쪽 플라스크의 효모 용액은 탁했으며 세균이 가득했지만, 다른 한쪽 플라스크의 효모 용액은 투명했고, 실험으로부터 4 년이 경과했는데도 전연 균이 붙어 있지 않았다. 갸름하고 굽은 목이 세균의 침입을 방지했기 때문이었다. "이 두 개의 차이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는 청중을 향해 이렇게 물었다. "이 두 개의 플라스크는 똑같은 액체와 똑같은 공기로 차 있으며 두 개가 다 입이 열려 있습니다. 단지 한 가지 차이는, 한쪽은 공기와 세균이 플라스크 안에 들어가 액체에 닿아 그곳에서 작은 생물을 만들었지만, 다른 한쪽은 공기 중의 세균이 액체에 닿기가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려운 상태에 있을 뿐입니다." 한편 파르퇴르는 세상 사람들이 세균설을 아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포도주 박사로서의 일도 했다. 고향의 포도주 제조업자들이 도움을 청해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제조한 포도주 중 딱하게도 반드시 식초처럼 시어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오랫동안 단맛을 유지할 수 없는 것도 있다고 호소해 왔기 때문이다. 그는 문제의 포도주를 즉시 현미경으로 조사해 이내 그 범인을 잡아냈다. 포도주 통 안에 많은 세균이 있어 그것이 술을 시게도 하고 쓰게도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각종 실험을 시작해 발효가 끝난 직후 어느 정도의 온도로 가열해야 포도주의 맛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균을 죽일 수 있는가를 제조업자에게 가르쳐 주었다. 이것이 바로 '저온 살균법'이라 불리는 방법이었다. 스코틀랜드에 조지프 리스터(J. Lister)라고 하는 선견지명이 있는 의사가 있었다. 그는 외과 의사로서, 어느 날 파스퇴르의 공기 중의 세균설이 증명되었다는 것을 읽어 알게 되었다. 병원에서 어떻게 하면 전염병을 방지할 수 있는가 하고 골치를 앓고 있던 중, 그것을 읽고, 바로 이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무렵의 병원은 상처나 피에서 나오는 고름 냄새로 가득 차 있는 기분 나쁜 장소였다. 환자들은 자신의 병이 아니라, 병원에서 전염된 병으로 죽는 일이 많았으며, 수술 후의 사망률이 특히 높았다. 리스터의 환자들은 수술을 한 후, 회복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4 일째경부터 상처가 세균에 감염되어 얼마 후에는 죽어 갔다. 그러나 파스퇴르의 과학 아카데미에 대한 보고서를 읽고 난 후부터, 그의 이론에 공감해, 1867 년까지는 그의 병동에서 상처를 처리하는 기구를 전부 강한 석탄산 용액 안에 담그도록 했다. 이 용액은 세균을 죽이게 된다. 의사들은 이 석탄산에 손을 씻고, 수술중 상처에는 이 산의 스프레이를 뿌렸다. 수술 후에는 상처를 다시 이 용액으로 소독하고 붕대 등도 살균된 것을 사용했다. 한때 수술 후의 환자들은 최소한 100 명 중 50 명이 사망했지만 이 방법을 도입한 직후에는 그 사망률 100 명 중 15 명으로 줄었으며, 얼마 후에는 100 명 중 3 명이 되었다.


한참 후의 일이지만 1874 년 리스터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파스퇴르에게 보냈다. 이 기회를 빌어 당신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훌륭한 연구는 부패가 세균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을 저에게 가르쳐 주었으며, 소독법을 실천할 수 있는 원리를 제게 알려 주셨습니다. 프랑스에서 살균제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훨씬 후의 일이다. 1871 년 보불 전쟁이 끝난 후 어떤 외과 의사가 파스퇴르의 생각에 주목하게 되어 외과 의사는 병사들의 상처를 곪게 하는 것이 세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비로소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술에 사용하는 기구를 소독하고 상처 언저리의 공기를 정화하곤 했다. 그렇지만 인간이 무엇에 의해 병에 걸리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에 싸인 채로였다. 대부분의 의사들이 병은, '인간 안에 있으며 인간의 일부이고 인간에 의해 활동을 시작한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병이 부패와 관계된다는 생각은 예로부터 있었다. 파스퇴르보다 200 년이나 전에 로버트 보일(R. Boyle)이라는 영국의 과학자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효소나 발효의 성질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를 무시하는 사람보다 전염병의 각종 현상을 훨씬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말처럼 발효 현상을 이해하고 있던 우리으 파스퇴르야말로 우연한 일이 겹친 것도 도움이 되어, 새로운 지식이 넘쳐 흐르게 되는 길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 된다. 전염병으로 세 딸 잃고 자기도 반신불수 그 무렵 사람들은 전염병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파리와 마르세유에서 콜레라가 발생해 하루에 200 명이나 사람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염병은 개인적인 면에서도 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미 맏딸을 장티푸스로 잃은 데 이어 1865 년 9 월에는 넷째 딸이 두 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죽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집안의 불행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로부터 8 개월 후에는 12 세 된 둘째 딸이 역시 장티푸스로 1866 년 5 월 사망했다. 이것은 그에게 큰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의사이면서도 죽어 가는 자식들을 위해 전연 손을 쓸 수 없었으니 얼마나 분하고 안타까웠을까. 더구나 그 무렵에는 누에고치의 병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던 때라 자신의 연구 결과가 옳은가 아닌가에 사활을 걸고 있는 양잠업자들에게 강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1868 년 10 월, 그는 파리로 돌아갔다. 19 일 눈을 뜨자 뭔가 몸이 이상했다. 몸의 왼쪽 절반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고 통증이 있었다. 오후가 되자 그 증상은 온몸으로 번졌다. 그러나 그날 밤 어떤 이탈리아 과학자 대신 과학 아카데미에 논문을 제출할 약속을 했으므로 꼭 외출해야


했다. 외출에서 돌아온 그는 이내 침대에 누웠다. 여전히 몸이 이상했다. 밤 사이에 상태는 더욱더 악화되었다. 이제는 말도 할 수 없었고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몸의 왼쪽 절반이 마비돼 버리고 만 것이다. 그는 그때 곧 46 세를 맞이하게 되어 있었다. 그 전에도 뇌출혈 발작을 일으킨 적이 있었으므로, 주의 사람들은 그가 그만 죽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으로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가 하지 않으면 안 될 많은 일들을 의식하고 있었다. '여기서 죽을 순 없어. 내가 생각하고 있는 많은 일들을 해내기 전에는....' 그는 반신불수의 불편한 몸으로도 자기 자신을 격려했다. 억척스럽기 그지없는 강한 정신력이라 할 수 있다. 그 덕분이었는지 얼마가 지나자, 처음에는 단어를 지껄일 수 있게 되었으며, 다시 얼마 후에는 정상적으로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까지 회복되었다. 그리하여 1 주일 후에는 조수들을 위해 메모까지 써서 넘겨주었다. 분명히 왼손과 오른손이 마비돼 있었지만, 그는 그런 일에 꺾일 수 없다고 다짐했다. 3 개월이 지났을 때 그는 자기가 시작한 누에고치 연구의 진행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현지로 출발했다. 반신불수 발작 이후 그는 자기가 실험 기구를 직접 다룰 수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자잘한 조작을 조수들에게 맡겨 놓았다. 그 동안에 파스퇴르에 협력해 일한 조수들 중에서 훗날 위대한 과학자가 많이 탄생했다. 그들은 지칠 줄 모르는 파스퇴르의 연구에 감화를 받았으며, 동시에 그의 정열과 꺾일 줄 모르는 강한 정신력에 감동한 것이다. 누에고치를 연구하면 할수록, 효모의 발효와 동물과 인간의 전염병 사이에 뭔가 관련이 있다는 확신이 그의 마음속에서 점점 커져 갔다. 파스퇴르는 다시금 도료인 과학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이 지구상에서 전염병이 쫓아내는 것은 인간의 힘입니다. 자연 발생설은 잘못된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의사들은 여전히 그의 예언을 무시했다. 전염병이 미생물에 의해 발생한다니! 그런 바보 같은! 그렇지만 그의 호소가 전연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즉 파스퇴르가 표시해 보인 중요성을 다시 확인하고, 의심을 풀었으며 그의 예언을 실제로 현실화한 것은 독일의 시골에 사는 어떤 의사였다. 동프러시아에 로베르트 코흐(R. Koch)라는 의사가 있었다. 코흐는 어렸을 때에는 탐험가가 되고 싶어했다. 그런데 의사가 된 그는 자신이 병을 고치지 못하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해, 부인으로부터 생일 선물로 현미경을 선사받았다. 그의 부인은 남편의 신경질이 다소 가라앉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 어느 날 코흐는 그 현미경 밑에 끈적끈적하고 거무튀튀한 혈액을 떨어뜨려 보았다. 그 혈액은 당시 유럽 전체의 양과 소를 엄습하고 있었던 탄저병이라는 전염병으로 죽은 동물에서 채취한 것이었다. 현미경을 들여다본 순간 코흐는 혈액 속에 막대와 같은 미생물이 우글우글한 것을 발견했다. 강한 호기심과 모험가로서 피로를 모르는 본능에 의지하면서 그는 실험에


실험을 거듭한 결과, 그 막대와 같은 것이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동시에 그것들이 번식하는 일 하며, 건강한 동물에서는 전연 볼 수 없으며, 포자로 변형해 다시금 활동하게 될 때까지 그 모습으로 생존하고 있는 일 등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 병균만이 탄저병을 일으킨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이 문제로 구하기 시작한 지 3 년 후인 1876 년 4 월, 코흐는 옛날 의학을 가르쳐 준 교수들을 만나, 연구 결과를 보고했다. 특정 세균이 특정의 병을 일으킨다는 결론으로, 파스퇴르가 누에고치의 병 연구를 통해서 거듭하여 주장하고 있는 일을, 코흐가 증명해 낸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매년 온 세계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는 전염병, 이를테면 콜레라, 장티푸스, 결핵, 폐렴, 매독, 디프테리아, 페스트 등을 일으키게 하는 세균을 찾아내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그로부터 10 년 동안, 과학자들의 눈길은 이들 세균을 향해 쏠렸다. 그들은 현미경을 통해 그 작은 생물체를 찾아내서 배양해 그것이 어떤 식으로 살아 있으며, 어떤 식으로 죽는가를 연구했다. 코흐가 전염병의 원인을 명확히 밝혀냈으므로, 그 다음은 파스퇴르가 그 치료법 개발에 나서게 되었다. 면역학을 창안하다 자신의 이론에 대해 더욱더 확신을 굳힌 파스퇴르는 병이란 살기 위한 투쟁, 다시 말해서 세균이 침입하려는 세포 조직과의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프랑스 국내를 여행했을 때 파스퇴르는 탄저병에 걸려 있던 소가 자연적으로 회복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더구나 그 후에 그 소에 강력한 탄저병 균을 주사했지만 그 소는 결코 죽지 않았다. 병에 걸림으로 해서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병에 대한 저항력이 붙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은 당분간은 그저 생각에만 머물러 그것이 구체화하기 위한 적당한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파스퇴르는 의사가 아니었으므로 연구실에서 실험하는 화학자가 의학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고 비난하는 의사들도 많았다. 그렇지만 파스퇴르의 연구가 세상 사람들에게 끼친 영향력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아, 1873 년 파스퇴르는 의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파스퇴르는 여러 젊은 박사들을 조수로 고용했다. 그들은 인간이나 동물에 관한 새로운 지식이나 의학적인 방법을 파스퇴르의 연구실로 가지고 들어와, 파스퇴르는 전염병 억제를 향한 연구를 한층 더 폭넓게 추진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1979 년 파스퇴르는 닭 콜레라라는 병을 일으키는 세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프랑스에서는 닭의 10 분의 1 이 병으로 죽어 가고 있었다. 파스퇴르는 닭고기 수프 속에서 이 세균을 배양하는 일에 성공했다. 옛날의 과학자들과 똑같이 그 역시도 미생물이 분열에 의해 증가하는 것을 관찰했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이해의 밑바닥에서는 어떻게 하면 전염병을 억제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관심의 초점이 모아지고 있었다. 어떤 미생물은 7,8 시간 후에는 몇 백만 개나 되는 수로 증식되었다. 서로 다른 종류의 미생물이 많이 있는 곳에서는 미생물끼리 싸움을 전개해 그 결과


승리한 쪽이 그 물질 또는 육체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승리한 쪽이 그 물질 또는 육체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그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어떻든 파스퇴르는 수프 속에서 배양한 세균 즉 배양균을 닭에 주사하게 되면 2, 3 일도 지나기 전에 전부 죽어 버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무렵은 여름이었으므로 그와 조수들은 여름 휴가를 떠나 닭이나 콜레라의 배양균에 대한 일은 일단 소홀히 취급하게 되었다. 여름 휴가로부터 돌아온 그는 배양균을 버리려다가 문득 마음이 변해 닭에 주사해 보았다. 이런 식으로 해서 우연히도 닭에 닭 콜레라 균을 듬뿍 주사했던 것이다. 그 닭은 가벼운 병에 걸리긴 했지만 이내 회복되었다. 보통 같으면 이미 병의 증상이 나타나 있을 텐데, 닭은 대체로 건강했으며 행복한 듯이 닭장 주변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탄저병으로 죽지 않았던 소의 사례를 생각해 낸 그는 완전히 흥분하게 되었으며, 오래된 배양균을 좀더 많이 닭에 주사해 보았다. 그러자 처음과 마찬가지로 닭들은 계사 주위를 힘차게 뛰어다녔다. 예상했던 그대로의 결과에 그의 마음은 불이 붙은 듯이 기쁘게 타올랐다. 그 다음 그는 닭들에게 보다 강력한 배양균을 주사했다. 그것은 주사를 하면 그 즉시 죽어 버릴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그런데 한 마리도 병에 걸리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 그는 오래된 배양균을 접종하지 않은 닭에 새로운 배양균을 주사해 보았다. 그러자 한 마리도 남지 않고 다 죽어 버렸다. 이를 보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실험 연구의 분야에서는 우연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의 편이 된다. 우연히 일어난 일을 그는 재빨리 이해했던 것이다. 당시의 유럽에서는 영국의 의사 에드워드 제너(E. Jenner)에 의해서 개발된 우두법에 따라 우두 접종이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파르퇴르의 닭 콜레라 균의 경우는 그것하고 달랐다. 그것은 똑같은 병으로 약해진 병원균 자체가 그 병과 싸울 저항력을 몸안에 불러일으킨 것이니까 말이다. 파르퇴르는 머리 속의 여러 가지 의문들을 여러 번의 실험을 통해 모두 떨쳐 버릴 수 있었다. 그는 이를 제너의 치료법을 따라 백신 주사라 부르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우리들은 사전에 병원균을 접종해 그 병을 예방하는 일을 백신 주사 또는 예방 접종이라 부르고 있다. 그 밖에 어느 정도의 병원균이 실험실에서 배양이 가능하며 이를 백신으로서 사용할 수 있을까. 파스퇴르는 그 자신의 타고난 호기심과 탐구심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오랜 세월 동안, 그와 같은 것을 찾아서 오직 연구를 계속해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이후 죽을 때까지 그는 병원균의 증식력을 약하게 만드는 방법, 즉 다시 말해서 병을 일으키지 않고 이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몸이 만들 수 있는 정도로 균을 약하게 하는 연구에 몸을 바치게 된다. 탄저병 백신을 발견하다.


코흐가 훌륭한 연구 성과를 발표한 탄저병에 대해서 파스퇴르도 얼마 동안 연구를 했다. 과학자들이 그 원인을 밝혀냈지만 프랑스의 목축 지대에서는 수천 마리의 가축들이 여전히 죽어 가고 있었다. 양의 무리들이 턱턱 쓰러져 거의 반수가 죽었다. 사람까지도 상처를 통해 감염되어 생명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탄저병 백신을 발견하기까지에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파스퇴르 등의 1877 년 이 연구를 시작해 1879 년에는 닭 콜레라의 배신을 발견했다. 이 탄저병 백신이 성공한 것은 1881 년 2 월의 일이다. 그런데 파리에 가까운 어떤 농촌 마을에서는 농민들이 이 백신을 의심해, 파스퇴르에게 공개 실험을 해 보라고 요청했다. 파스퇴르는 그와 같은 도전을 받아들여 1881 년 5 월 한 농장에서 그 유명한 공개 실험을 실시했다. 수의나 농민뿐 아니고 심지어는 장관을 비롯해서 과학자들과 멀리 영국에서 온 신문 기자들이, 파스퇴르와 그의 조수 두 명과 양들의 동작을 지켜보았다. 50 마리의 양이 두 개의 그룹으로 구분되었다. 첫 번째 그룹의 25 마리에는 백신 주사가 2 회 접종되었다. 처음에는 오래된 약한 균이 주사되었으며 그리고 두 번째는 그로부터 12 일 후에 저항력을 강화하기 위해 보다 새롭고 강력한 균이 접종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 그룹의 양들에게는 백신 주사를 일체 접종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두 그룹의 양들을 들판에서 따로따로 생활하게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들 50 마리 모두에게 치사량의 강력한 탄저병 균을 주사했다. 겉으로는 자신만만해 보였던 파스퇴르였지만 내심으론 걱정이 돼 밤에도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농장으로부터 결과를 알리는 전보가 도착했을 때도 도저히 자기 손으로 뜯어볼 요기가 없었다. 대신 개봉한 그의 부인의 손조차도 덜덜 떨렸다. 양의 수를 되풀이해서 세고 있는 동안, 그곳에 모여 있던 관리나 과학자 및 농민들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결과는 백신 주사를 맞은 쪽 양은 모두 원기 왕성하게 뛰어놀고 있었지만, 백신 주사를 맞지 않은 양들은 전부 죽었거나 빈사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이었다. 파스퇴르와 그의 조수들이 다시금 그 농장을 찾았을 때 주변 곳곳에서 일제히 환성이 일어나 그들을 환영했다. 파스퇴르로서는 감격스러운 한 순간이었으며, 자신의 고통스러웠던 지난날의 연구에 대해 참다운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 후 그의 연구소는 백신 제조소로 변신했다. 그는 몸이 불편한데도 피로를 잊고 조수들과 더불어, 동물에게 백신 주사를 접종하기 위해 프랑스 안의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1 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에 많은 동물이 예방 접종을 받게 되었다. 프랑스 안에서만 50 만 마리의 양과 8 만 마리의 소가 접종을 받았다고 한다. 백신을 만드는 일에 문제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순수한 것을 만들기가 어려웠으며 따라서 탄저병이 일어나기도 했고, 백신으로서는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것이 의학계에 커다란 비약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유럽 전체의 목축 지대를 엄습하고 있던 병을 사전에 막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웠던 마지막 도전


오늘날 파스퇴르는 탄저병보다 광견병의 치료법을 발견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광견병이란 무서운 병이었다. 이 병에 걸린 개나 늑대에게 조금이라도 물리게 되면 몸이 덜덜 떨리며 경직 상태가 되어 질식사하거나 온몸이 마비돼 버린다. 또한 광견병에 걸리면 누구나가 정신 장애를 일으킨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이 병원균이 아무래도 뇌라든가 척수와 같은 중추 신경 안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광견병에 걸려 죽은 개의 척수에서 신경 세포의 조각을 끄집어내어 토끼의 뇌에 이식했다. 2 주일 후 그 토끼는 광견병에 걸렸다. 그리고 그 토끼가 죽게 되면 그 척수를 꺼내어 또 다른 토끼의 뇌에 이식하는 식으로, 이런 작업을 25 회나 되풀이했다. 그러자 균이 강해지며 병의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 1 주간으로 줄어들었다. 더 이상 균을 강력하게 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파스퇴르 등은 그렇듯 강한 균에 감염된 척수의 조각을 빼내어, 이번에는 이를 약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 당시 파스퇴르는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금년에 나는 개에게 광견병의 예방 접종을 받게 하는 일을 실증했습니다. 그렇지만 광견병에 걸린 인간에게 도저히 그것을 주사할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1885 년 7 월 6 일, 일요일 아침에 아홉 살짜리 소년을 동반한 한 부인이 파스퇴르의 연구실로 찾아왔다. 그 소년은 이틀 전 알자스의 마을에서 미친개에게 얼굴과 손 그리고 몸을 물렸노라고 했다. 파스퇴르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스러웠다. 광견병 백신을 인간에게 접종하는 데는 아직도 위험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의학 아카데미의 동료들과 상의했다. 과연 소년이 광견병에 걸릴 것인지. 소년의 몸을 살펴보자 깊은 상처가 14 곳이나 있었으며, 모두가 그 소년이 광견병에 걸릴 게 틀림없다고 대답했다. 소년에게 백신 주사를 놓게 되면 그 소년은 죽고 말는지도 모른다. 주사를 놓지 않아도 소년은 아마 죽어 버리거나 온몸이 마비되고 말겠지만 말이다. 여기서 파스퇴르는 위험을 각오하고 백신 주사를 놓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7 월 6 일 밤에, 그는 의사를 불러 15 일 전에 광견병으로 죽은 토끼의 척수에서 추출한 독성이 약한 백신을 소년에게 주사했다. 그로부터 10 일간 전날의 것보다 약간 강한 백신을 매일 계속 주사했다. 그러자 상처도 나았을 뿐만 아니라 그 소년은 광견병에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 소식은 이내 온 세계로 전파되었다. 유럽 각지에서 광견병에 걸린 개나 늑대에게 물린 농부들이 파리의 파스퇴르에게 진찰을 받기 위해 몰려왔다. 그리하여 광견병에 걸려 죽게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이 백신 덕택으로 살아났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상당수가 된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 동물뿐만이 아니고 인간의 생명까지도 구할 수 있는 이 백신의 발견은 그만큼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되어 과학 아카데미는 광견병을 치료하기 위해 파스퇴르 연구소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의 반응도 대단했으며, 온 세계로부터 많은 기부금이 답지했던 것이다.


파스퇴르는 70 세 가까이까지 연구를 계속했다. 1887 년 64 세 때 두 번째 뇌출혈 발작이 엄습해 왔으므로, 그는 도저히 혼자서 실험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제자들이나 동료들과의 대화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1888 년 11 월 그의 이름을 딴 파스퇴르 연구소가 정식으로 발족했으며, 이로써 그는 자신의 인생의 원동력이었던 과학에 대한 정열과 꺾일 줄 모르는 강한 정신력이 다음 세대 사람들에게 계승된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1895 년 9 월 28 일, 파스퇴르는 가족이나 동료들 그리고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72 세의 생애를 끝내게 된다. 거의 반세기 동안 파스퇴르는 과학계를 지배했으며 사반 세기 동안이나 반신불수의 몸에 채찍질을 하며 계속 일해 왔던 것이다. 지금 그는 없지만 그 정신은 살아 숨쉬고 있다. 그 정신은 파스퇴르가 남겨 놓은 지식을 계승한 과학자들이나 의사들의 마음속에 내내 살아 있는 것이다. 파스퇴르가 키운 조수들 중에는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많다. 루(P.E. Roux)박사와 에르생(A. Yersin)박사는 한 때 1 년 동안에 수천 명이나 되는 어린이의 생명을 앗아간 티프테리아의 치료법을 개발해 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가장 두뇌가 명석한 조수였던 메치니코프(E. Metchnikoff)는 사람의 몸이 어떤 식으로 세균하고 싸워 면역을 키우는지를 분명히 밝혀냈다. 에르생 박사는 그 밖에도 페스트 균을 발견해 냈다. 나이가 들어 은퇴한 파스퇴르에게 현미경을 통해 그것을 보게 해 주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고 한다. "아직도 할 일이 산처럼 많아." 천재 파스퇴르는 그야말로 위대한 일을 해낸 것이다. 어떤 일이든 혼자서는 해낼 수가 없다. 같은 시대를 산 사람들의 도움과 그 이전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축적된 지식이 뒷받침이 돼야만 가능하다. 그런 것이 있었기 때문에 파스퇴르처럼 한 가닥 한 가닥의 실을 꼬아 모아서 미지의 세계를 개척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본인의 노력도 잊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개인의 끈질긴 노력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만약 파스퇴르가 그렇듯 악착같은 노력형의 인물이 아니었다면, 다시 말해서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끝가지 싸워 관철시키는 강한 의지가 없었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또한 리스퍼와 같은 깊은 통찰력을 가진 의사가 파스퇴르가 연구할 사실에 대해서 알아차리지 못했더라면 의학에서의 그와 같은 발전은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파스퇴르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여러분은 나에게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을 안겨다 주었다. 과학과 평화가 무지와 전쟁에 승리해,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미래는 개척된다고 나는 믿는다. 그와 같은 신념은 그 누구도 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연구는 계속된다. 인류는 몇 세기가 되는 긴 세월 동안 정체 불명의 병으로 시달려 왔다.


그러나 1870 년대 및 1880 년대에 전염병에 관한 파스퇴르의 획기적인 연구부터 시대는 급속히 발전해 왔다. 그리하여 19 세기 말에는 거의 대부분의 전염병의 병원균이 프랑스에 있는 파스퇴르의 연구실과 독일에 있는 코흐의 연구실에서 확인되었다. 1895 년에 파스퇴르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부터 어떤 전염병은 바이러스에 의한 것이라는 최초의 증거가 이미 쌓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바이러스의 모습이 확실히 밝혀진 것은 1938 년 전자 현미경이 발명된 후의 일이었다. 19 세기에서 20 세기로 들어갈 무렵에는 디프테리아나 파상풍의 균을 죽이는 약이 개발되었으며, 사람들은 이들 전염병으로부터 몸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한편 1888 년 루와 에르상은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디프테리아의 독소를 끄집어내는 데 성공했다. 또한 파상풍의 독소는 1890 년 코흐의 연구실에서 확인되었다. 20 세기가 되자 두창, 결핵, 황열병, 광견병, 폴리오(소아마비), 콜레라, 홍역, 장티푸스, 백일해, 풍진, 인플루엔자와 같은 병에 대한 효과적인 백신이 계속해서 개발되었다. 또한 페스트의 백신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20 세기 최대의 사건은 뭐니뭐니해도 항생 물질의 개발일 것이다. 이는 인체에 전연 해를 끼치지 않고 병을 고칠 수 있는 획기적인 물질이었다. 1941 년에 처음으로 페니실린이 사용된 이래 계속해서 다른 항생 물질이 개발되고 있다. 루이 파스퇴르의 발효 연구가 과학자들을 전염병 해명으로 몰고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최근 100 년의 발자취 중에서 파스퇴르의 연구야말로 최고봉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파스퇴르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 놓은 사람으로서 주목을 받았으며, 그의 생각은 당시의 과학자들에게 사물의 탄생, 생명, 부패 그리고 죽음 같은 것을 이해시키는 데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 동안에 완전히 새로운 학문이 계속 탄생되었다. 첫째는 세균학이며, 예방 접종과 면역법과 같은 전염병의 원인, 억제 그리고 예방에 관한 과학적인 연구가 진척되었다. 이로써 처음으로 병원균에 대한 면역이 인공적으로 가능해졌다. 또한 무균법도 발견되었으며 병원에서는 세균의 번식을 억제할 수 있게 되었으며 특히 수술에 도움이 되었다. 한마디로 파스퇴르가 연구해 찾아낸 것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실증한 것이라 할 수 있는 위대한 업적이었던 것이다. 불가능에 도전한 전략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나폴레옹(Bonaparte Napoleon;1769__1821) 프랑스의 황제. 코르시카 섬의 이탈리아 계의 지주인 보나파르트 집안 출신으로, 포병 사관이 되어 자코뱅당을 지지하는 소책자를 발표한 끝에 체포되었으나, 1795 년 방데미에르의 반란을 진압해 재기했으며, 총재 정부에 의해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때 수완을 발휘했다. 1799 년 이집트 원정으로부터 귀국 후 '브뤼메르 18 일의 쿠데타'로 제 1 집정이 되어 군사 독재의 단서를 열었다. 그 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를 정복해 왕당파 및


공화파를 탄압했고 1804 년에는 황제가 되었다(제 1 제정). 그 사이 나폴레옹 법전을 제정했고 교육 제도를 개혁했으며 종교 협약 등을 시행했다. 전 유럽의 제패를 기도하며 대륙 봉쇄령을 발하는 등 영국에 대항했으나 스페인 원정에 실패하고 해방 전쟁에 패해 14 년에는 퇴위했다. 그 후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음해에 재기했지만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여 세인트헬레나 섬에 다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 불가능이란 어리석은 자의 사전에나 나폴레옹에 대해서는,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말은 없다"라고 말했다든가 하루에 3 시간밖에 자지 않았다는 등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유명한 사람에게는 이런 유의 일화나 전설 같은 것이 으레 따르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말을 믿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모방해 하루에 3 시간만 자려고 노력하는 예도 있다. 그렇지만 실제는 이와 다르다. 나폴레옹은 하루에 7 시간 정도 잤으며, 그러고서도 오후가 되면 가끔씩 꾸벅꾸벅 졸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말은 누가 발설한 것일까. 모르긴 해도 아마 거짓말을 그럴듯하게 잘하는 전기 작가가 지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당사자인 나폴레옹이 하루에 3 시간밖에 수면을 취하지 않은 경우도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보통 사람보다 더 많은 수면을 필요로 했다는 이야기가 있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이 영웅도 평범한 사람과 똑같이 밤에는 충분히 잠을 잤다고 볼 수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나폴레옹의 특기할 만한 점은 적은 시간을 잤다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잠을 자고 싶을 때 잠을 이룰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그의 특기로서 포탄이 날아오는 싸움터에서도 의자에 앉아 태연히 잠을 잘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하루에 3 시간만 잤다는 이야기는 근거 없이 만들어 낸 이야기지만 불을 때지 않으면 연기가 나지 않는 것처럼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즉, 그가 하루에 18 시간이나 일을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은 일벌레였다는 것이 그런 일화를 낳게 한 근원이 되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이 일하는 방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부지런히 일을 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차분히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어떤 질문에도 대답할 수 있고 또한 어떤 일에도 대항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은 무엇을 계획하기 전에 항상 오랫동안 잘 생각하여 어떤 결과가 올 것인지 예측하기 때문이다. 천분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저녁 식사 때나 극장에 있을 때나 언제고 일을 생각하며 늘 일하고 있다. 밤이라도 잠이 깨면 일을 한다. 나는 일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말은, '일을 해내는 능력이란 주어진 일을 즉각 처리하는 능력이다'라는 말이 된다. 이 정도가 되려면 여간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폴레옹이 맹렬하게 일하는 것을 보고 그의 부하들이 비명을 질렀을 정도로 그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독특하게 보였으며 이상하다고 할까, 어떻든 보통이 아니라는 뜻의 형용사를 몇 개 겹쳐 봐도 부족한 인물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앞에서도 약간 언급한 바 있지만, 나폴레옹과 관련된 일화로,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말이 없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사실인 것 같다. 이와 비슷한 말을 그가 실지로 했던 것이다. 스페인과의 전쟁이 한창일 때, 정찰에서 돌아온 장교가 나폴레옹에게 고하기를, "이 산길을 돌파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나폴레옹은 말했던 것이다. "불가능하다고? 나는 그런 말은 모르는데." 이어 그는 "불가능하다는 말은 프랑스어에는 없어." 혹은 "불가능이란 소심한 자의 환영에 불과하며, 비겁한 자의 도피처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확실히 나폴레옹의 생애는 '불가능한 일'에 대한 도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평범한 군인이나 정치가가 꽁무니를 뺄 때, 그는 전진했던 것이다. 이탈리아 원정 때, 그는 알프스의 험난한 바위산에 길을 뚫어가며 군대를 전진시켰다. 말하자면 일반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가능케 한 것이다. 어떻든 그는 같은 시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후세 사람들까지도 경탄케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언젠가 나폴레옹을 만난 괴테가, "이 사람이야말로 인간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밖에도 나폴레옹의 전투를 상세히 기록한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 나폴레옹을 숭배하는 러시아의 군인을 비롯해 귀족들을 상당수 등장시켜, 나폴레옹 숭배가 온 유럽에 퍼져 있었다는 것을 짐작게 하고 있다. 그리고 나폴레옹에 대한 책을 펼쳐보게 되면 언제나 빠지지 않는 문구가 있다. 그것은 바로 '천재 나폴레옹'이라는 문구이다. 나폴레옹이 어째서 천재인지 규명해 보지도 않고, 처음부터 나폴레옹은 분명히 천재라고 믿어 버리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나폴레옹이 어째서, 또 왜 천재란 말인가. 이에 대해서는 나폴레옹 밑에서 참모로 일한 탈레랑이 한 말을 들어 보면 알게 된다. 나폴레옹은 정말로 드물게 볼 수 있는 천재이다. 정력을 비롯해서 상상력이라든가 지력이나 실천력에 있어서 천재였다. 그의 생애는 지난 천년을 통해서 가장 놀랄 만한 것이었다. 그는 나폴레옹을 천년에 한 번 나타나는 천재라고 표현했다. 지나친 표현인지도 모르지만 책모와 독설로 이름이 높았던 그로 하여금 그런 말을 하게 한 것을 보면, 역시 나폴레옹은 보통 천재가 아니었던 것 같다. 연전 연승의 전술가 나폴레옹을 천재라고 한다면, 그가 어떤 천재였는지 궁금하다. 따라서 그의 생애를 살펴보고 당시의 역사적인 사건을 조사해 볼 필요가 있는데 우선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그가 전쟁에서 천재성을 발휘한 사실이다. 군대를 지휘하는 사람으로서의 그의 전쟁 수행 능력에 대해 당시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전기 작가라든가 역사학자들도 다 같이 천재적이었다는 수식어를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쓰고 있다. 확실히 나폴레옹의 군대가 혁혁한 전과를 올린 것은 역사적인 사실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하여 흔히 '6 일 동안에 6 전 연승'이라든가 '12 개월에 한


차례의 승리'라는 말이 떠돌았다. 이것은 당시의 전쟁 기록으로 보아도 기적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연승 기록이다. 알렉산더 대왕 이래의 군사적인 천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알렉산더 대왕은 BC 4 세기에 마케도니아로부터 인도에 걸친 큰 제국을 이룩했는데, 그때부터라고 친다면, 나폴레옹은 2,000 년에 한 번 나타난 군사적인 천재라는 말이 된다. 그는 26 세 때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이 된 이래 46 세까지 20 년 동안 싸움터를 뛰어다녔다. 말하자면 46 세 때 워털루 전투에서 처음으로 패배해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될 때까지 내내 전쟁터에서만 생활했던 것이다. 도대체 그는 자신의 생애 동안 어느 정도의 전투를 한 것일까. 나폴레옹은 이 점에 대해서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며, 세인트헬레나 섬에 있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60 차례나 전투를 했지만, 일찍이 첫 번째 전투 때부터 알고 있었던 것말고는 한 가지도 따로 배운 것이 없다. 첫 번째 전투라고 하면 바로 이탈리아를 원정했을 때의 전투를 말하는 것인데, 나폴레옹은 그 당시 3 만 8,000 명의 군사로 8 만이나 되는 적군을 격파했던 것이다. 실제로 배 이상이나 되는 적을 격파할 수 있었다는 점으로 봐서도 소문대로 그가 전쟁의 천재였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나폴레옹의 군사적 천재성이란 간단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주어진 여러 지점에 어느 정도의 병력을 투입하는가를 계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즉 그는 언제나 그 지점에 적의 병력수보다 많은 군사를 투입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자면 그 지점에 투입되는 적의 병력수를 정확히 예측하기 않으면 안 된다. 적의 병력을 정확하게 예측하여 적보다도 많은 아군을 투입하기만 하면 분명히 그 전투에서 승리한다는 것이 나폴레옹의 전법이었다. 병사들의 사기라든가 무기에 그렇게 큰 차이만 없다면 전쟁의 승패란 병력의 수에 의해 결정이 된다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전투의 논리다. 말할 것도 없이 승패는 전투가 행해지는 지점에서의 병력의 차이에 달려 있는 것이다. 전투에서 전군이 한꺼번에 전투에 참가하는 일을 드물다. 따라서 계산한 그대로 군대를 집결시키고 이동시킬 수만 있다면 배 이상이 되는 적도 무지를 수가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 원정에 함께 참가한 어떤 병사의 종군기만 봐도 그 말이 이해가 된다. 그 종군기에는 그렇듯 놀라운 승리는 천재인 나폴레옹의 멋진 부대 이동 솜씨 덕분이었다고 씌어져 있다. 나폴레옹이 얼마나 정확하게 계산을 해서 그 계산대로 군대를 이동시켰는가를 잘 알 수가 있다. 이와 같이 정확하게 병력을 집중시키는 기동력은 전쟁에 비행기가 등장하기 이전인 제 1 차 세계 대전 때까지는 기본적인 전술이었는데, 군사사가들의 말에 의하면 이러한 전술을 처음으로 발견하여 이를 실전에 적용시킨 것이 바로 나폴레옹이었다고 한다. 그 무렵 나폴레옹과 함께 사관 학교에서 공부한 군인이 많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나폴레옹만이 그와 같은 새로운 전술을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공부를 했기에 그와 같은 천재가 된 것일까? 파리의 육군 사관 학교에서 군사학을 공부했을 때의 성적은 어떠했는가? 그 때에도 과연 두각을 나타내어 성적이 월등히 뛰어났던 것일까? 일반적으로 2 년이 소요되는 과정을 1 년으로 끝낸 점은 높이 살 만하지만 그의 성적은 58 명 중에서 42 등에 불과했다. 말하자면 미래의 천재를 예측할 만한 성적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그 누구도 나폴레옹이 장차 그렇듯 빛나는 인물로 등장하리라고는 전연 예상할 수가 없었다. 한편 나폴레옹은 천재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전쟁에서는 천재란 상황 속에서 사색할 줄 아는 자이다. " 다시 말하면 현장 훈련이라는 말이 된다. 일을 해나가는 가운데 방법을 배운다는 말이다. 이런 터득을 나폴레옹은 전광석화와 같이 신속하게 해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순간적인 학습이라는 이야기이며, 최초의 학습장인 싸움터에서 모든 것을 익혔으면, 여태껏 아무도 몰랐던 방법을 찾아내어 이를 현장에서 실천할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다방면에 걸쳐 야심 이탈리아 원정 다음으로 추진한 이집트 원정에서 나폴레옹은 원정군의 사령관이라기보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한 나라의 통치자라는 인상은 부각시키며 행정 전반에 걸쳐 능력을 발휘했다. 이집트 원정에서 그를 사령관으로 임명한 당시의 프랑스 혁명 정부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원대한 야망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야망이란 이집트에서 인도에 걸친 그야말로 2,000 년 전의 알렉산더 대왕이 이룩한 큰 제국을 건설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이집트 원정을 그러한 구상을 위한 출발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다방면에 걸쳐 야망이 많다는 것은 그 만큼 다방면의 일을 이룩하려고 하는 내적인 욕구가 강하다는 것으로서, 그러한 욕구는 무엇이든지 성취해 보겠다는, 말하자면 일해 보겠다는 의욕이라 할 수 있다. 나폴레옹은 생애의 대부분을 전쟁을 위해서 보냈지만, 그의 재능은 싸움터에서만 뛰어났던 것은 아니다. 그는 평화에 대응하는 능력에도 뛰어났으며, 이는 전쟁 사이사이에 생기는 평화시에 그가 무엇을 했는가를 알게 되면 증명이 된다. 당시 나폴레옹은 29 세였다. 그 나이 때 알렉산더 대왕은 인도에 도착했지만 왕국을 계승한 대왕하고 비교할 수는 없고, 즉 일개 포병 소위에서 승진한 나폴레옹이므로 그다지 뒤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이례적으로 빠른 승진으로 처음 한때는 모두 하나같이 자기보다 연상인 부하 장교들에게 명령해야 하는 일로 고민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그곳에서 그가 발휘한 통치자로서의 수완은 군사적인 천재와는 또 다른 능력을 보여 주고 있다. 조제법 제정을 위한 부동산 조사를 비롯해 통반 의회의 설치, 행정관의 임명 및 경찰의 창설과 도로라든가 학교, 병원, 미술관 등의 건설 등, 말하자면 한 나라를 만들려는 것처럼 시행했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폴레옹이 그런 모든 것을 시행하고 관리할 만한 지식과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더하여 이집트와 나폴레옹의 관계에서 잊어서는 안 돌 일은, 그의 이집트 원정과 동시에 '이집트학'이라고 하는 새로운 학문이 시작된 점이다. 여러 방면의 학자 200 명을 이집트까지 데리고 간 것을 보면, 그가 이집트를 전쟁뿐만 아니라 학문의 대상으로서도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중, 고등학교만 나왔어도 다 알고 있는 나폴레옹의 말이 생각난다. 피라미드 앞에서 병사들의 사기가 고취하기 위해 "4,000 년의 역사가 당신들을 굽어보고 있다." 고 한 말이 바로 그것이다. 나폴레옹은 이어 "이 세 개의 피라미드로 높이 3 미터, 폭 30 센티미터의 벽을 만든다면 프랑스 전국토를 둘러칠 수가 있다" 라고 말했다. 이 말은 아무래도 프랑스로부터 이끌고 간 수학자들이 계산한 것을 그대로 주워듣고서 한 말 같다. 그는 또 이집트로부터 여러 가지 물건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그 중의 하나로 '로제타 스톤'이라는 것이 있다. 당시에는 뜻을 알 수 없는 글자가 새겨져 있던 작은 돌이었지만, 이것은 후에 샹폴리옹이라는 프랑스의 이집트학자가 해독했다. 어쨌든 이로부터 '이집트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오늘날 세계의 학문의 역사 속에 기록된 중요한 항목이 되어 있다. 말하자면 커다란 제국은 건설해 새로운 국가로서 통치하고 또한 학술을 연구한다는 것은 바로 2,000 년 전에 알렉산더 대왕이 한 일과 똑같은 것이었다. 즉 알렉산더 대왕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를 가정 교사로 모시고 여러 가지 학문을 공부했으며 한편으로는 인도를 향해 원정차 출발했을 때 많은 학자들과 동행했다. 그리하여 새로운 땅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스승에게 보고했다. 그 중의 한 예를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나일강의 원류가 인도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인더스 강이 바다로 흘러내리는 것을 목격하고 돌아온 알렉산더 대왕의 보고를 듣고는, 스승이었지만 지신으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었던 낡은 지리관을 정정하게 만들었다. 역사책을 훑어보면 알렉산더 대왕은 계속해서 정복해 나간 땅에 새로운 국가를 세워, 그들의 다른 종교에 대해서 너그러운 종교 정책을 취했는데 그런 점에서도 나폴레옹이 이집트에서 취한 종교 정책이 알렉산더 대왕의 것을 본보기로 삼았던 것이다. 그는 프랑스의 지배자가 된 후부터 현재까지 그 이름이 전해져 오고 있는 "나폴레옹 법전" 이라는 민법을 제정했으며, 오늘날의 파리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 도시 계획안을 만들었으며, 또한 도로망을 건설했다. 말하자면 현대까지 이어져 내려온 새로운 프랑스라는 나라를 만들어 군인으로서는 말할 것도 없고 정치가로서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건 그렇다치고 전쟁이든 평화든, 나폴레옹을 움직인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단 한 가지, 야심이었다. 야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여러 가지 일을 해낼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폴레옹은 "야심이야말로 인간을 움직이는 주요한 원동력이다"라고 말했다. 그로 하여금 공부를 열심히 하게 한 것은 아무런 목적이 없는 호기심 같은 것이 아니라 대제국을 건설하겠다고 하는 야심이었던 것이다. '서랍 같은 두뇌'


나폴레옹은 1799 년 30 세 때 '브뤼메르 18 일의 쿠데타'로 실질적인 프랑스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 후 왕정제를 타도한 혁명으로부터 10 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은 엄청난 야심의 소유자가 아니고서는 실천은커녕 생각해 낼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가 보통 야심가가 아니었다는 것은 이미 10 대 중반, 즉 파리의 육군 사관 학교 시절부터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사관 학교의 어떤 교관이 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평가를 한 적이 있다. 그는 말수가 적었으며, 고독을 사랑했고 언제나 고고한 자세를 유지했으며 극단적으로 자존심이 강했다. 힘차게 대답을 하는 생도였으며 질문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요령 있는 대답을 해냈다. 자존심이 무척 강했으며 모든 것을 원하는 야심가였는데, 어떻든 특별히 눈에 띄는 청년이었다. 에고이스트인데다가 자존심이 강한 야심가라면, 일반적으로 정치가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적인 기질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10 대 중반에 이미 모든 것을 원하는 야심가였다면 이는 보통 야심가가 아니었다는 의미가 될 것 같다. 그런 것이 도움이 되어 앞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일반적으로 2 년이 소요되는 것을 1 년 만에 졸업한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학생 시절의 나폴레옹이 특히 무섭게 공부하는 스타일의 학생도 아니었다. 그가 무섭게 공부하게 된 것은 군대에서 근무하면서부터였으며, 학생 시절의 나폴레옹의 이미지는 어느쪽이냐 하면, 어두운 표정과 음울한 성격 그리고 빈약하고 작은 체구 등 그다지 신통한 요소는 거의 갖추고 있지 못했다. 야심가에게는 흔히 어두운 일면이 있는데, 나폴레옹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그의 초상화들은 하나같이 일종의 어두운 기운이 감돌고 있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소년 시절의 나폴레옹은 그 누구하고도 사귀지 않았으며 혼자서 산책하는 것을 즐겼고, 항상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어린이였다고 한다. 이런 점은 성인이 된 후에도 전연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학급에서 제일 꼬마였고, 어른이 된 후에도 키가 평균 이하에 머물러 있었으며, 더구나 너무 여위어 있었으므로 "고양이가 장화를 신은 것 같다"고 놀림을 받기도 했다. 10 대 전반을 보낸 유년 학교 시절에 대해서는, 그의 전기에 반드시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있었다. 교정의 한쪽 구석에 모든 학생들에게 한 구획을 할당해 야채나 꽃을 지배케 한 장소가 있었는데, 여러 학생들에게 시달림을 받는 일이 많았던 나폴레옹은 그 곳에 헛간을 지어 혼자서 거기 파묻혀 책만 읽고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사령관으로서 병사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나폴레옹의 모습이란, 영웅이라는 이미지하고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이었다. 26 세에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이 된 나폴레옹에 대해서 어떤 병사가 종군기 속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고 있다. 용모, 태도, 옷차림 어느 것 하나도 매력적인 것이 없다. 당시의 나폴레옹에 대해서 내가 본 것을 그대로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작고 빈약한 체구, 커다란 눈, 여위어 빠진 볼, 어깨까지 흘러 내려온 긴 머리카락.


이 병사의 말에 의하면, 혁명 후 얼마 안 된 그 당시, 군대의 통솔자는 군사적인 능력보다 육체적인 자질, 이를테면 보통보다 잘났거나 우람하거나 한 그런 점에 의해 선발되는데, 나폴레옹은 이 점에서 보면 대단히 열등했으므로 군사적인 능력도 부족한 것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그런데 처음의 전투에서 그는 크게 재능을 발휘해 "소유하고 있는 것 이상의 힘을 우리들로부터 빼낸 것으로 생각된다"고 이 병사는 말하고 있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얼굴보다 두뇌이다. 나폴레옹의 두뇌는 '서랍 같은 두뇌'등으로 불리어 전쟁에 대한 일뿐만 아니라 법률을 비롯해서 재정 문제, 상업 및 문학 등에 이르기까지 각종 지식이 각각 서랍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잘 정리되어, 언제고 필요할 때 꺼내 사용할 수가 있었다고, 같은 시대의 사람들이 증언하고 있다. 더구나 치밀한 논리의 소유자로서 토론 등에서는 누구에게도 지는 일이 없었으며, 게다가 결단력과 실천력이 뛰어나고 보니 그 누구도 그의 야망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방법으로 '서랍과 같은 머리'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그 대답은 지극히 간단했다. 즉 그는 많은 책을 읽었던 것이다. 독서 노트를 만들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공부를 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란 책을 읽는 데 있다. 가능한 한 많은 책을, 그것도 될 수 있는 한 광범위한 분야의 책을 읽는 일이다. 천재라 불리는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뭔가 불가사의한 능력을 받고 탄생한 것이 아니며, 많은 책을 읽음으로써 많은 지식을 머리 속에 축적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갖가지 상황에 대비해 여태껏 아무도 느끼지 못했던 진리를 발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이와 같은 것이며, 이른바 천재란 그런 일을 충실하게 수행해 나간 사람들을 가리킨다. 나폴레옹은 유년 시절부터 책방의 책을 온통 다 삼켜 버릴 듯이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것도 군인에게 필요한 전문적인 전술 서적이나 포술 서적뿐만이 아니고 역사, 지리, 수학, 법률, 문학 등 각계 각 분야에 걸친 책을 읽었던 것이다. 수학은 학생 시절부터 그가 잘하는 과목으로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가는 도중의 배 안에서도 문제 푸는 일에 열중했었다고 한다. 법률 분야에서는 근신 명령을 받았을 때 하루 만에 6 세기에 저술된 유럽 각국의 법률의 원전이라고 하는 대저, 유스티니아누스의 "법전(로마법 대전)"을 독파했다고 한다. 후에 새로운 헌법과 민법을 기초할 때 쭉 늘어서 있던 법률학자들에게 지지 않을 정도의 법률 지식을 피력할 수가 있었던 것도 그와 같은 독서 덕분이었다. 이렇듯 나폴레옹은 유년 시대부터 생애 마지막에 도달할 때까지 탐욕스러운 독서가였다. 특히, 독서에 열중한 것은 파리의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복무하기 시작한 16 세 때부터 수년 동안의 일이었다.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독서하는 습관을 몸에 익히게 되면 평생을 두고 책과 떨어질 수 없는 모양이다. 또 일반적으로 나폴레옹의 독서에 대해서 전해지는 말이 있다. 즉 괴테의 작품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전쟁터에까지 휴대하고 다니면서 여러 번 읽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인 것 같으며, 어떤 책을 보니


괴테와 나폴레옹이 만났을 때, 그 작품을 7 번이나 읽었다고 하여 괴테로 하여금 감탄케 했다고 기술되어 있었다. 이렇듯 나폴레옹은 문학 작품에 대한 애독자였을 뿐만 아니라 젊었을 때 한때는 직접 몇 편인지 소설을 쓰기까지 했다. 비록 그가 소설가는 되지 못했지만 자기 아내인 조세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글재주에 있어서도 보통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지만 나폴레옹의 독서와 관련해서 잊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읽은 책에 대해서 그 내용을 요약 혹은 발췌해서 기록해 둔 점이었다. 또는 감상문을 적어 두기도 했다. 이런 식의 습관을 몸에 익힘으로써 한층 더 그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 내지는 파악할 수가 있었다. 말하자면 독서가 차선책이라고 한다면 읽은 책에 대해 독서 노트를 만드는 일이야말로 가장 좋은 독서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싸움터의 지휘자로서 또는 일국의 통치자로서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만한 능력을 발휘하게 된 것은 판단력을 기른 것과 막대한 분량의 정보를 축적케 한 왕성하기 그지없는 독서 덕분이었다. 다시 말해서 나폴레옹의 천재성은 바로 독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독서의 힘은 군사나 정치 분야에서만 도움이 된 것은 아니었다. 역사가나 전기 작가의 평가에 따르면 그는 그 당시의 가장 학식과 교양이 높았던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다. 같은 시대의 사람들도 그의 학식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1797 년 아직 권력을 쥐기 전에 나폴레옹은 프랑스 학사원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는데, 본인이 무엇보다도 자랑으로 생각했던 일은 군인으로서가 아니고 문인으로서 인정을 받은 일이었다. 군대에 대한 명령서 등에도 프랑스 학사 회원이라고 반드시 기입할 정도로 그와 같은 타이틀을 명예로운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추방되어 최후의 약 6 년 동안을 보낸 세인트헬레나 섬에서도 책을 많이 읽었으며, 서고에는 3,000 권 이상의 책이 소장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사람을 사로잡는 선동가 병사들이여, 제군들은 벌거벗었으며, 급양도 좋지가 않다. 정부는 여러분에게 많은 신세를 지고 있음에도, 무엇 하나 여러분에게 해준 게 없다. 여러분의 인내로 이들 바위산에서 여러분이 발휘하는 용기는 그야말로 대단하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봐도 어떠한 명예나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여러분은 그곳에서 명예와 영광과 부를 찾아낼 것이다. 여러분은 그곳에서 명예와 영광과 부를 찾아낼 것이다. 이탈리아 원정군의 병사들이여, 여러분은 혹시 용기와 강한 끈기가 부족한 것은 아니겠지! 이 글은 이탈리아 전투에서 처음으로 군대를 지휘했을 때의 나폴레옹의 훈시 내용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목적하는 것, 즉 전쟁 혹은 구인에 대한 용모 또는 상품의 구매 등으로 유도하는 점에서는 군대의 사령관의 훈시나 구인 광고 또는 상품 광고가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나폴레옹의 그와 같은 하나의 예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즉 1805 년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의 "병사들에게 고함"이라는 글이 그것이다. 병사들이여, 우리 조국의 행복과 번영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전부 이룩된 날에는 여러분을 프랑스로 데려갈 수 있을 것이다. 고국에서, 여러분은 나의 가장 다정한 배려의 대상이 될 것이다. 프랑스 국민은 다시금 여러분을 볼 수 있어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은 "나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 참가했었다"고 말만 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아아! 이 사람은 용사다!" 이런 말을 듣고 한 번 해 보겠다는 의욕을 보이지 않는 병사는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인심을 사로잡는 천재이기도 했다. 그렇지 못했다면 감히 1 개 포병 소위가 한 나라의 지배자의 위치에까지 오른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인심을 장악하려면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려면,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1802 년에서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레종 도뇌르(Legion d'honneur)훈장을 제정했을 때, 그가 의회에서 한 말이다. 그런 훈장의 제정은 오래된 왕정제를 상기케 하는 것으로 혁명의 시대에는 걸맞지 않다는 반대 의견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프랑스 사람은 혁명 후 10 년이 경과해도 변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오직 하나의 감정밖에 갖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서 명예의 감정이다. 따라서 이 감정에 양식을 가져다 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에게는 경사스러운 의식이 필요하다. 프랑스 국민은 외국인들이 훈장 앞에 어떻게 무릎꿇는지를 보는 것이 좋겠다. 이렇듯 인간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관찰이나 마음을 취하게 하는 재치 있는 말에 더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크게 효과가 있었던 것은 그의 커다랗고 반짝이는 눈이었다. 그의 궁상스러운 용모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그의 커다란 눈에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그지없이 강한 매력이 있었다고 사람들은 증언하고 있다. 마음에 와 닿는 멋진 말과 눈, 광고 영어로 바꾸어 말하면 명 카피라이터로서 효과적인 두 가지 무기를 그는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해를 끼친 천재성 이와 같이 나폴레옹은 많이 공부했으며, 그리하여 천재성을 발휘했고 역사를 만들었다. 그는 분명히 특별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으므로 그를 숭배하는 사람들의 기분도 잘 알 수가 있다. 그렇지만 그의 천재성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발휘되었으며 또한 어떤 일에 도움이 되었는가 하고 따져 보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는 머리가 좋은 사람, 일을 잘해 내는 사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재치가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건을 잘 파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능력을 발휘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천재가 되고 보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게 된다. 천재는 본인 한 사람의 소유라는 영역을 넘어서서 세계에 무엇인가를 불러 일으키게 된다. 나폴레옹은 천재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천재란 자신의 세계를 비추기 위해 타오르도록 운명 지워진 유성이다." 그는 확실히 18 세기에서 19 세기 초의 10 여 년 동안의 세계를 계속 비추었다. 그리하여 그 자신도 불탔다. 아무래도 나폴레옹은 시대를 비추는 유성이 된 일에 만족해 스스로 천재에 취해 버린 것 같지만, 그와 같은 천재가 결국에는 유럽에 전쟁을 초래케 했으며, 전사자의 수를 증가시켰을 뿐이 아니냐는 의견이 제시되어도 이상할 게 없다. 프랑스의 저명한 역사학자 미슐레(J. Michlet)는, "나폴레옹을 예찬하는 것은 바로 폭력을 숭배하는 일이다"라고 말했는데, 이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많을 줄로 안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생명을 잃은 프랑스인의 수는 수백만이라고들 한다. 나폴레옹 전쟁은 쌍방 모두에게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전사자를 냈다. 과연 프랑스 국민들은 이런 사실을 잊고 천진난만하게 나폴레옹을 그대로 숭배할 마음이 생길는지. 나폴레옹은 스스로를 상황의 산물 혹은 운명의 자녀라고 알고 있었으며 그런 식으로 인식하려고 노력해, 스스로의 야망 달성을 위해 유럽 전체에서 치르게 될 희생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냉철성이야말로 지배자가 될 사람의 최대의 자질이다"라고 말한 것은 나폴레옹 자신이다. 같은 시대의 사람들을 위시해, 그를 분석한 후세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지적하고 있는 것은, 그가 얼만 냉혹한 사람이었으며 에고이스트였나 하는 점이다. 어떤 나폴레옹 연구가는, "나폴레옹은 인간을 자기 기분이나 야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값싼 도구처럼 간주해 왔다"고까지 극언하고 있다. 이와 똑같은 말을, 철학자인 쇼펜하우어는,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선이라고도 악이라고도 규명할 수 없는 의지라는 철학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폴레옹은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보다 나쁜 인간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번영을 위해 남을 희생케 하는 각별한 에고이즘을 지니고 있었을 뿐이다. 그를 특징짓는 것은 그와 같은 의지를 만족시키는 커다란 힘뿐이다. 그는 이러한 보기 드문 힘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인간 의지의 사악성 전부를 노출시킨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인간의 사악성을 나타내는 한 전형이었던 셈이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이성이라고 생각한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 베를린으로 입성하는 나폴레옹의 씩씩한 모습을 보고, "이것이야말로 세계 정신이다"라며 감격했다는 것과는 대단히 대조적이다. 과연 나폴레옹은 인간의 사악성을 상징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성의 뛰어남을 상징하는 것일까. 아무래도 이것은 쇼펜하우어의 말에 동조해야 할 것 같다. 나폴레옹이


열심히 공부한 것도,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실현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을는지 모르지만,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는 오히려 이익보다 해가 많았던 게 사실이라고 하겠다. 최소한 프랑스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이웃 나라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나폴레옹은 괴로운 존재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의 천재성은 이웃 나라에 파괴와 죽음과 지배를 안겨다 주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철학자 에머슨은 나폴레옹의 생애에 대해서, '양심을 지니지 못한 이지'라 말하고 있다. 선도 악도 구분할 줄 모르며, 혹은 그러한 일에는 관심을 갖는 것을 그만두고, 오직 자신의 에고이즘을 키우겠다는 그러한 인간은 공부를 많이 하면 할수록, 세상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는 위험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인간의 한 사람으로서 천재인 나폴레옹을 기억 속에 간직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도 모른다.

청각 장애를 극복한 작곡가 베토벤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__1827) 독일의 작곡가로 본에서 태어났다. 궁정 가수였던 아버지로부터 음악 교육을 받았으며, 이어 네페(C. G. Neefe)에게 사사해 정식으로 작곡을 배웠다. 12 세 때 극장 관현악단의 피아노 연주자가 되어 대주교 등에게 인정을 받았다. 1792 년에 하이든의 제자가 되었으며, 1795 년부터 연주가로서의 명성을 얻어 여러 귀족으로부터 장려금을 받게 되었고, 마침내 즉흥 연주의 명소로서 인정을 받아 촉망받는 음악가가 되었으나 이 무렵부터 청력이 점차 약해져 고독한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음악가로서는 치명적이랄 수 있는 장애를 극복하고 모차르트와 하이든 등이 세운 독일 고전 음악의 형식을 자유로이 구사해 음악을 단순한 취미로부터 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시적 표현의 그릇으로 끌어올려 제시하는 데 성공했다. 주요 작품으로 "영웅 교향곡", "운명 교향곡", "전원 교향곡" 외 다수가 있다. 새벽에 일어나 피아노 연습 눈부신 햇살이 라인 강 근처에 위치한 본 시의 거리와 즐비한 지붕을 비추고 있었다. 그 햇살은 베토벤 일가가 살고 있는 강가의 허름한 2 층집에도 비치고 있었다. 당시 9 세였던 베토벤은 그날따라 새벽녘에 자리에서 뛰쳐나와 잠옷차림 그대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어제 저녁 퍼뜩 머리에 떠오른 짧은 멜로디가 언제까지고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그 곡을 피아노로 쳐 보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조심조심해 가며 피아노 건반을 두드렸다. 아직도 잠에서 깨지 않은 아버지를 깨우지 않으려고 해서다. 한편 어머니는 부엌에서 두 동생의 아침 식사를 마련하느라 분주했다. 그리하여 베토벤도 달가닥거리는 식기 소리를 등을 수 있었다.


베토벤은 자기가 지은 짧은 곡이 무척 마음에 들어, 이를 바탕으로 멋진 곡으로 발전시켜 보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이렇듯 자기가 좋아하는 곡에 대해서는 잠자다 말고 뛰어 일어나 곡을 쳐 보는 그 였던 것이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고 자발적으로 늘 그렇게 연습하곤 했다. 그의 피아노 선생은 그런 곡을 가리켜 '곡예'또는 '즉흥 연주'라 이름 붙였다. "너는 나이에 비해 놀랄 만큼 즉흥 연주를 잘해" 하고 선생은 그를 칭찬했다. 베토벤은 어느새 아버지가 아직도 자고 있다는 것도 잊고 자기가 치는 곡에 열중해 있었다. 그리하여 마치 공을 힘차게 쳐올리듯이 양손으로 피아노의 건반을 힘껏 내리쳤다. 그 곡은 아름다운 무늬를 수놓으면서 허공으로 퍼져나갔다. 피아노 소리는 더욱더 높아지고 커졌다. 몇 개의 음이 서로 부딪치며 울리는가 싶으면 이내 잔잔해졌다가는 다시 강렬해졌다. 이러한 과정이 수없이 되풀이되곤 했다. 이때 정신없이 피아노를 치고 있던 베토벤의 귀에 벼락치듯 하는 고함소리가 울렸다. 바로 그의 옆에 아버지가 서서 호통을 치고 있었다. "도대체 너는 몇 번이나 불러야 대답을 할거냐!" "듣지를 못했어요, 아버지. 죄송합니다" 하고 베토벤이 그 때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내가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도 못 들었단 말이냐?" "예,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도대체 아까부터 치는 그 넋두리 같은 곡은 뭐냐?" 하고 부친이 계속 화가 나서 물었다. "피아노 선생이 그따위 엉터리 곡을 네게 가르치지는 않았을 텐데." 부친은 계속 다그치며 호통을 쳤다. "연습하라는 곡은 치지도 않고 그런 식으로 시간만 낭비한단 말이냐? 이놈아 모차르트가 몇 살 때부터 유럽 연주 여행을 다녔는지 너도 알고 있잖니!" "예, 여섯 살인가 그보다 조금 더 이를 때인 것 같습니다." "그것을 분명히 명심하고 있어야 한다. 너는 이미 아홉 살이 되었어. 그런 나이에도 아직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을 하나도 이룩하지 못하고 있단 말이다." "...." "이제 앞으로 1 년만 더 지나면 음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학교도 그만 다니게 할 참이다. 그때까지 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의 아버지는 이런 소리를 남겨 놓고는 발소리도 거칠게 다시 침실로 돌아갔다. 베토벤은 말없이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부엌에서 일하던 어머니가 그러한 베토벤을 안쓰러운 눈길로 맞았다. 사실은 지난밤에도 술에 취해 밤늦게 돌아온 부친이 자고 있는 아들을 깨워 한동안 피아노를 치게 했던 것이다. 베토벤은 집안의 세 아들 중 맏아들이었다. 깡마르고 작은 키였지만 베토벤은 어른스럽고 침착해 어머니는 마치 어른을 대하는 기분이었다. 늘 술만 마시는 부친의 일로 골치를 앓고 있는 모자는 아버지의 일과 집안의 장래에 대해서 함께 걱정하곤 했다. 한편 베토벤은 어머니의 건강에 대해서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점차 여위어 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안색 또한 나쁜 데다가 심한 기침 발작을 가끔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언제나처럼 우유를 빵에 적셔 먹는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한 다음, 집을 뛰어나가 거리의 광장에 있는 교회의 부속 학교로 달려갔다. 등교 시간에 조금 늦을 것 같아서였다. 그는 간신히 등교시간에 대어갈 수 있었다. 선천적인 음악적 재능 베토벤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궁정 악단의 테너 가수였다. 월급이 얼마 되지 않아 겨우 최소한 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매일 같이 마시고 술로 목이 상해, 이제는 거의 재대로 소리조차 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는 장래에 대한 뚜렷한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아들인 베토벤의 음악에 대한 놀라운 재능을 발견하고는 마치 미래의 재산을 발견한 것 같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베토벤이 네 살 때부터 직접 음악 교육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이미 아들에게 날카로운 음악적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가혹할 정도로 어린 아들에게 음악 연습을 강요했지만, 베토벤은 피아노를 칠 때만은 조금도 피로한 줄 몰랐다. 그러면서도 연습을 조금만 게을리해도 심한 꾸지람을 듣게 되었으므로, 꾸지람을 듣게 된 후에는 피아노에 엎드려 우는 경우도 흔했다. 이렇듯 가끔씩 울음을 터뜨리면서도 음악적인 천분을 어쩔 수 없었던지 그 재능이 날로 발전해 8 세 때는 음악회에 참가했으며, 9 세때부터는 부친이 가르칠 만한 음악의 영역이 없어지고 말았다. 베토벤은 그 후 할아버지의 친구로부터 오르간을 배웠다. 그는 궁정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였다. 1781 년에 그가 그만두고 그의 후임으로 네페가 임명되자, 베토벤은 비로소 정식으로 음악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네페 선생에게 음악을 배울 수 있게 된 것은 소년 베토벤에게는 커다란 행운이었다. 이번 스승은 다소 보수적이긴 했지만 정말로 음악을 이해하고 있는 데다가 교양도 갖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베토벤의 스승인 동시에 좋은 친구가 되었다. 그리하여 스승의 사람됨됨이가 음악적인 재능보다도 한층 더 깊이 베토벤에게 영향을 주었다. 한편 스승은 베토벤의 음악적인 천재성을 깊이 촉망했다. 바흐의 평균율을 치는 베토벤의 힘차고 동시에 세련된 연주에 감탄하기까지 했다. 말하자면 아직도 어린 나이에 일류급 연주를 하는 모습을 보고 제 2 의 모차르트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자신이 여행을 떠날 때는 11 세 소년인 베토벤으로 하여금 자기 대신 오르간을 연주하도록 했다. 교회 오르가니스트란 깊은 음악적 수련이 필요한 직업이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네페가 얼마나 베토벤의 음악적인 재질을 인정했는지 알 수가 있다. 그렇지만 이 모두가 베토벤의 지칠 줄 모르는 연습 덕택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시간을 아까워하며 늘상 피아노 앞에 앉아 계속해서 피아노 건반을 두드렸다. 그리하여 흥이 나면 자신의 피아노 음에 말려들어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연습을 했다. 1783 년 4 월, 베토벤은 극장 오케스트라의 쳄발로 주자가 되었다. 이는 극을


연습할 때 반주를 하는 직책으로, 즉 당시에는 오페라 악단을 지휘하는 책임 있는 자리였다. 그해에 베토벤은 세 개의 피아노 소나타를 인쇄해 선거후인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에게 바쳤다. 이는 아무래도 자기 아들의 천재성을 선전하기 위한 아버지의 지시였을 것이다. 헌정의 시도 아버지가 대필했다. 그는 1784 년 프리드리히 선거후가 죽은 후 새로 부임한 M. 프란츠로부터 네페 선생의 제 2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되어 150 플로린의 연금을 받게 되었다. 1787 년 베토벤은 부활절 행사를 끝낸 오르가니스트로서 휴가를 이용해 빈으로 여행했다. 16 세가 된 그는 희망과 자신에 넘쳐 즐거운 여행이 되었다. 빈에서 요셉 황제를 배알했으며 당시 음악계에서 가장 유명했던 모차르트를 만날 수 있었다.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인간" 처음에는 기성의 대가가 베토벤 같은 소년의 방문을 받자, 별다른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뭐든 좀 쳐 보지 않겠는가?" 라고 베토벤에게 말하면서도 모차르트는 그다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 투였다. 어차피 자신이 많이 연습한 곡을 치겠지 하는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민감한 소년 베토벤은 이를 알아차려, 뭔가 칠 곡을 지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모차르트가 곡을 주자, 그는 이를 기반으로 해 풍부한 악상을 담은 즉흥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놀란 모차르트가 친구가 있는 옆방으로 걸어가서 이렇게 속삭였다. "저 아이는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어. 머지않아 이 세상에 일대 파란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 될 걸세." 음악의 대가로 하여금 이런 평을 하게 할 정도로 베토벤의 연주 솜씨는 그야말로 대단했던 것이다. 동시에 이와 같은 평은 소년 베토벤에 대한 세간의 평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내 음악계에 그런 소문이 돌았던 것이다. 하이든도 그와 같은 소문을 듣는 "베토벤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군" 하면서 편지를 써 보냈다. 베토벤은 그 후 모차르트에게 작곡에 대해 두세 가지 공부를 했으며 그의 연주법도 익혔다. 베토벤은 피아노 연주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자신하면서도, 이렇듯 피아노의 대가인 모차르트에게 자기보다 나은 점이 있다고 인정하면 즉각 이를 가르쳐 달라고 청해 익히는 성실성을 지니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어떤 방면의 천재든 그것을 연습, 즉 공부하지 않고서는 성취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은 물론 주위에서 만족할 수 있을 때까지 공부하고 또 공부해 비로소 완성시켜 나가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당시 모차르트는 "돈 조반니"를 제작하는 데 분주했던 시기였으므로 그 이상의 교섭은 없었다. 빈으로 가는 동안과 빈에 머물러 있었을 때는 찬란했으며 즐거웠던 데 비해 돌아오는 길은 불안과 초조로 인해 허둥대는 여행이었다. 어머니의 위독을 전하는 편지가 왔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지체없이 고향으로 달려갔다. 그리하여 간신히 어머니의 임종을 지킬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지없이 선량하고 사랑스러운 분이었으며, 나의 가장 좋은 친구였습니다. 아아! 어머니라 부르고 이에 대답해 줄 사람이 있었을 때, 나 이상으로 행복한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 무렵 무리를 해서 돌아온 여행의 피로로 인해 천식에 걸렸다. 그는 어머니가 폐를 앓아 죽은 것을 생각하고 자기도 어쩌면 천식에서 폐병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근심하곤 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그의 집안은 한층 더 분위기가 어두워졌다. 아직도 나이 어린 두 명의 남동생과 알코올 중독이 심해진 아버지가 그의 양어깨에 무거운 짐으로 걸려 있었다. 이것이 16 세가 된 베토벤에게 부가된 운명이었다. 그 무렵 베토벤은 브로닝 집안에 출입하게 되었다. 그 후에 그가 죽을 때까지 친하게 드나들던 집이었다. 그 집에는 아들 셋과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들 중 딸과 아들 한 명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모친은 궁정 고문관의 미망인으로서 고양이 있는 세련된 부인이었다. 그는 피아노를 가르치면서 한편으로는 부인으로부터 문학적인 교양을 쌓았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13 세에 초등 학교를 그만둔 정도의 공부밖에 한 것이 없는 베토벤으로서는 교양이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으므로 부인의 지도를 받고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 집안에서 여러 가지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이 집안 사람들을 음악 연주로 즐겁게 해 주는 동시에 그들로부터 여러 가지 지식을 익히는 보답을 받았다. 어떻든 베토벤은 당시의 즉흥 연주의 대가인 선배들을 능가하는 연주를 한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아직 청년도 되기 전인 베토벤이 힘차고 감정이 풍부하며 표현이 깊은 동시에 매우 독창적인 연주를 한다는 평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는 이 무렵부터 한 가지 버릇이 생겼는데 그것은 작곡을 할 때 엄청나게 많은 스케치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쉽게 발표하지 않는 신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 스케치야말로 작곡에 대한 철두철미한 공부였다. 작곡한 것을 고치고 스케치하기를 여러 차례 되풀이했다. 한 예를 들면 실러의 "환희" 같은 작품은 만 30 년 동안이나 발표하지 않고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모차르트는 20 여 세 때 이미 36 개의 교향곡을 작곡했다. 그렇다고 베토벤은 작곡을 할 줄 몰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작곡을 해놓고서도 그만큼 신중하여 발표를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것은 그의 멋진 즉흥 연주곡이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므로 당시의 그를 천재라 말하고 있는 사람들은 늘 그의 즉흥 연주를 머리 속에 그리면서 그의 미래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빈에서 다시 음악 공부 이 무렵 사귀게 된 중요한 인물로 발트슈타인 백작이 있다. 그는 아직 젊은 귀족으로서 베토벤보다 8 살 위였다. 그리하여 연장자라는 의미에서 그를 많이 격려해 주었으며 피아노를 사 주는 등 경제적으로 여러 가지 원조를 했다. 그는 백작의 이름을 단 연탄 변주곡을 작곡해 이에 보답했다. 그 밖에도 백작의 암시를 받고 가장 무도곡의 일종인 "기사의 발레"를 작곡했다. 이는 그의 최초의 오케스트라곡이었다. 또한 빈에 나간 후 1805 년에는 유명한


"발트슈타인 소나타"를 작곡했다. 1788 년에는 선거후의 뜻으로 궁정 악단의 조직이 바뀌어 국민 극장이 만들어졌다. 베토벤은 이번에는 비올라를 맡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아직도 궁정의 차석 오르가니스트 직책을 맡고 있었다. 동시에 둘째 동생에게 음악을 공부시켰으며 셋째 동생은 궁정 약국에 집어넣을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절망 상태였다. 밤낮 없이 술에 취한 끝에 경찰 신세를 지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리하여 베토벤이 곤드레가 된 아버지를 경찰서에서 데려오는 일이 곧잘 있었다. 그는 이를 무척 부끄럽게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1789 년에는 궁정의 경리 담당자가 동정한 나머지 아버지의 월급을 베토벤에게 건네주도록 조치했다. 아버지가 이를 받게 되면 이내 술값으로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동안의 일이었으며 마침내 그의 아버지는 테너 가수의 자리에서 해고당하고 만다. 그 아버지도 1792 년 12 월에 결국 죽고 말았다. 1792 년 선거후는 베토벤을 빈으로 보내어 더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리라 결심했다. 이는 하이든과 네페 선생 및 발트슈타인의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드디어 그해 12 월에 베토벤은 빈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는 좋은 지도자였던 네페 선생과 발트슈타인 백작 그리고 브로닝 집안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발트슈타인 백작이 베토벤에게 준 편지 속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열심히 공부해 모차르트의 정신을 하이든의 손에 받아 갖도록 하시오. 11 월 중순 그는 음악의 도시 빈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성 바깥의 어떤 인쇄소의 다락방을 빌렸다. 얼마 후 1 층에 있는 방으로 옮겨, 그 후 가발을 위시해 구두, 책상 등을 구입했으며 피아노를 갖추었다. 살림살이가 일단 갖추어지자 그는 하이든에게로 다니며 엄격한 대위법을 공부했다. 245 개의 과제를 만들었음에도 선생은 고작 42 개밖에 고쳐 주지 않자 그는 스승에 대해서 불만을 느끼게 되었다. 고친 것만 해도 매우 형식적이었다. 물론 하이든은 당시 유명한 대음악가로서 조금도 한가할 틈이 없을 정도로 바쁜 신분이었다. 게다가 대도시에서 혹은 시골로부터 상경해 오는 이런저런 소천재들에 식상해하고 있었다. 1792 년 하이든이 영국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본에 들렀을 때 베토벤이 작곡한 어떤 칸타타를 보고 격찬한 적이 있었다. 이를 생각하고 베토벤은 하이든에게서 알차게 공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 사정이 매우 달랐다. 그리하여 하이든에게만 의지해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어, 하이든에게 공부하는 것 외에 몰래 유명한 여러 음악가를 찾아 착실히 공부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알브레히트베르거(Albrechtsbseger)에게서 엄격하게 음악 이론과 기법을 익혔다. 그렇지만 선생은 베토벤을 대단치 않게 여겼다. 가르친 것을 그가 그대로 따르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베토벤은 음악적인 규칙 같은 것을 전연 문제시하지 않았는데 보다 아름다운 곡이 가능하면 어떤 규칙이든 어겨도 상관없다고 확신하는 동시에


선언하는 베토벤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의 여파 1793 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드디어 국왕 루이 16 세를 단두대 위에서 처형하면서 그 분위기가 절정에 이르러 유럽 전체를 떨게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그가 있는 빈도 긴장했다. 그해 10 월에는 고향인 본으로 프랑스 군이 침입해 선거후가 망명했다. 1796 년 4 월부터 오스트리아 군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 군과 싸워 패전을 거듭했으며 5 월에는 밀라노가 점령당했다. 11 월에는 오스트리아 군이 3 일 동안의 대격전 끝에 크게 패해 총퇴각을 하게 되었다. 다음해 1 월에는 조국을 구하려고 하는 오스트리아 군에 의해 빈 시가지가 애국적인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그리하여 2 월에 하이든의 "황제 찬가"가 초연되었으며, 4 월에는 베토벤이 "우리들 위대한 독일 민족"을 작곡했다. 그렇지만 3 월에는 나폴레옹 군이 빈의 10 킬로미터 밖에까지 접근했다. 황제는 한때 망명하려고 했지만 공자의 만류로 머물러 있었으며 8 개월 후에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런 이유로 베토벤의 학자금은 선거후가 망명한 3 월 이래 중단되고 말았다. 그해 1 월에 선거후가 빈에 들러 살펴보았지만 험악한 정치 정세로 인해 베토벤을 도와주지 못했다. 이때부터 그의 빈의 시민으로서의 진짜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는 처음으로 젊은 연주가로서 데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791 년 12 월에 모차르트가 죽자 그의 영역으로 힘들이지 않고 들어갈 수 가 있었다. 그의 연주는 풍성했으며 동시에 깊이가 있어 독보적이었다. 그러한 그에게 제일 먼저 접근해 온 보호자가 지난날 모차르트의 제자였던 리히노프스키 공이었다. 그는 자기 집에 베토벤을 거주하게 했다. (비록 고집이 센 그가 이내 뛰쳐나왔지만). 베토벤은 그의 집에서 매주 금요일에 아침 연구회를 개최했다. 그의 부인도 선량하며 아름다운 여자로서 그 후에도 베토벤을 많이 도와 주었다. 은 정도로 친절했는가 하면, 베토벤의 말을 빌리자면 "그녀는 나를 가능하면 유리 상자 속에라도 집어넣어 키우고 싶어했을 정도였다."고 했다. 그는 여전히 하이든에게 대단히 불만이었지만, 그래도 아직 그것을 폭발시키지 않고 있었다. 그리하여 하이든과 함께 1795 년 12 월과 1796 년 1 월에 계속해서 공동 음악회를 가졌다. 연주가로서 행동하게 되면 적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 중에서도 베토벤과 공공연히 맞설 수 있었던 사람은 훔멜(A. W. Hummel)과 베르프르였다. 특히 훔멜은 정확하고 아름다운 연주로 유명했다. 그리고 베르프르는 엄청나게 큰 손이 도저히 다른 사람은 비교도 안 되었다. 그는 그 큰 손으로 건반을 넓게 잡을 수가 있다. 그렇지만 그들도 연주에 대한 열정과 감정의 깊이 및 즉흥 연주 때의 악상의 풍부함에서는 도저히 베토벤의 근처에도 이르지 못했다. 그의 즉흥 연주는 사람들에게 그의 재능과 미래 등 모든 것을 보증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의 연주는 아름다웠다. 그리고 열정이 있었다. 연주회에 참석해 전원이


진한 감동의 물결에 휩싸여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감격적이었다. 끝내는 감동한 나머지 소리를 내며 흐느껴 울게 했다. 그의 연주에는 단순한 아름다움이나 독창성, 음악적인 내용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었다. 얼마나 연주가 감동적이었으면 청중들을 흐느껴 울게까지 만들 수 있을까. 오랜 연습을 통해서 얻어진, 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연주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그와 같은 연주에는 오랜 피나는 연습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귀가 잘 안 들리기 시작하다 이렇듯 연주자로서의 명성이 오르자, 동시에 그의 작곡도 차례로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1795 년에는 그의 최초의 3 개의 소나타가 리프노스키 공의 금요일 연주회에서 발표되었으며 변 라조의 피아노 콘체르토, 12 곡의 미뉴에트와 "독일 무도곡"이 작곡되었다. 이어 1796 년에는 "러시아 무도곡에 의한 변주곡", "현악 5 중주"(작품 4), "피아노와 관의 5 중주"(작품 16), 1800 년에는 "현악 7 중주"(작품 12)와 6 개의 "현악 4 중주"(작품 18), "다조 현악 5 중주"(작품 29) 등이 계속 발표되었다. 그리고 1801 년 3 월에 발레곡인 "프로메테우스"를 궁정 극장에서 연주하여 대단한 성공을 거두어, 작곡가로서의 그의 명성의 이제 압도적인 것이 돼 버렸다. 그렇지만 이때 이미 운명은 인간의 눈에 띄지 않는 이면에서 역설적인 함정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그는 눈앞에 나타난 적은 때려 눕혔지만 몸의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그가 가장 크게 의지하고 있는 장소를 먹어치워, 그를 득의의 절정에서 이내 절망의 계곡으로 굴러떨어지게 만든 악마에 대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이때 이미 절반쯤 벙어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1796 년경부터 그는 귀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1798 년경부터 그것이 한층 더 악화되기 시작해 심한 귀울림과 함께 귀가 잘 들리지 않게 되었다. 걱정이 된 그는 몰래 의사에게 치료를 받았지만 조금도 효과가 없었다. 음악가에게 있어 귀가 들리지 않다는 것은 거의 치명적인 문제였다. 그것이 보통 음악가에게 일어났다면 이미 하나만으로도 그 사회에서 매장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병을 비밀로 했다. 본래 거친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과 다정하게 교제하는 일을 매우 좋아했던 그는 사교를 되도록 피하게 되었다. 가끔 지인에 대해 폭발하는 광적인 분노나 경솔함, 용서 없는 비꼼 등의 결과로 곧잘 그는 비참한 고독에 빠졌다. 그러나 이내 그러한 고독을 견뎌낼 수 없어 이제는 체면도 잊고 사과의 편지를 보내 새로운 우정과 애정을 구했던 것이다. 그른 남달리 사랑에 굶주렸으며 다정한 교제를 요구하면 눈물을 흘리곤 했던 것이다. 그러한 그가 귀에 이상을 감추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으면서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했던 것이다. 그의 고민은 이렇듯 깊고 심각했다. 마침내 그는 혼자 견딜 수 없게 되어 친구인 칼


아멘다에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편지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 자네가 내 옆에 있어 주기를 내가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 알겠나. 자네의 친구 베토벤을 대단히 불행하다고, 상상해 보게나. 나는 나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청각이 무척 약해져 버렸단 말이야. 자네가 이곳에 있을 무렵부터 나는 그 징후를 느꼈지. 그렇지만 그것을 숨기고 있었지. 그 후 점차적으로 더 악화됐어. 만약 언젠가 병이 낫는다면 기다릴 필요가 있어. 위장이 나쁘기 때문이라고 의사가 말하는데 배 쪽은 완전히 좋단 말야. 그런데 귀는 여전하거든. 나을 수 있을는지. 물론 낫기를 원하지만 매우 어려울 것 같아. 이런 종류의 병이 가장 치유되기 어려워서 말이야. 좋은 사람들은 피하고 극히 천하고 자기 본위인 사람들 속에서 생활하지. 정말로 나는 슬픈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이 귀가 제대로 말을 들어 준다면 아아! 얼마나 행복할까. 그렇게 되면 자네한테로 달려갈 거야. 그렇지만 지금으로서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피해 있지 않으면 안돼. 그리고 나의 전성기에는 나의 재능이 허용하는 한의 일을 완수 할 거야. 그지없이 딱한 체념! 나는 그런 곳으로 도망치지 않으면 안 돼. 물론 나는 이러한 불행을 초월해 일어서려고 스스로 생각해.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 그것이 가능해질는지... 그는 곁들여 이 일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것은 1801 년 6 월 1 일의 편지였다. 그후에도 여러 의사를 찾아가 자신의 귀에 대해서 고백했다. 그 밖에도 가까운 친지에게도 편지로 고백했다. 귀가 잘 안 들리는 것에 대해서 그가 어떠한 치료를 받았는가 알게 하는, 의사인 동시에 친구인 사람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3 년 전부터 귀가 점점 들리지 않게 되었어. 이것은 배의 병이 원인임에 틀림없지만, 배에 대해서는 자네도 알고 있듯이, 훨씬 옛날부터 좋지 않았어. 그것이 악화된 거야. 나는 계속 설사에 시달렸으며 그 결과 매우 허약해졌어. 의사는 강정제로 나를 튼튼하게 해주었으며 청각에도 필요한 조치를 취해 주었어. 그렇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어. 귀는 점점 더 나빠질 뿐이었으며 배 쪽도 변함이 없었어. 이런 식으로 해서 작년 가을까지 지내왔지. 나는 여러 차례 절망했어. 어떤 의사는 냉수욕을 하라고 했으며, 또 어떤 의사는 미온욕을 권유했어 그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와 배 쪽은 나았어. 그렇지만 귀는 더 악화됐어. 이번 겨울을 정말로 비참한 상태야. 무서운 복통이 엄습해 병은 완전히 재발하고 말았어. 그런 상태가 한동안 계속되었어. 나는 그 다음 외과 의사의 진찰을 받으러 갔어. 오히려 외과 의사의 진찰을 받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게다가 나는 평상시 그를 신뢰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는 맹렬한 설사를 거의 완전히 멈추게 해 주었지. 미온욕을 명했을 뿐만 아니라 강장제 한 병을 주었어. 4 일쯤 전에는 위약과 환약을, 그리고 귀를 위해서 달여 먹는 약을 주었어. 이로써 나는 회복 경향을 나타났지. 남은 것은 밤낮 없이 울리고 귀울림뿐이었어.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비참한 세월을 보내고 있다 할 수 있어. 최근 나는 사교계를 멀리하고 있어. '나는 병어리다'하고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기 때문이야. 이런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무서운 결과를


만드는 거야. 적지 않은 나의 경쟁자들이 이 사살을 알게 되면 뭐라고 할까! 상상할 수 없는 벙어리의 상태에 대해 잘 이해해 주기를 원하기 때문에 말하지만, 극장에서는 오케스트라 바로 앞에 있지 않으면 배우가 하는 말을 알아 듣지 못해. 조금 더 떨어져 있으면 약기의 고음이나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남과의 대화에서는 놀랍게도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내게는 멍청해하는 버릇이 있어. 사람들은 그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상대방이 조용히 말하면 간신히 들려. 그런데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니라 음이 들리는 거야. 의사는 완전히 낫지는 않지만 확실히 좋아질 거라고 말하고 있어. 나는 자주 나라는 존재와 조물주를 원망했어. 그렇지만 나는 운명에 도전하고 싶어.... 그는 반벙어리가 되고서도, 자신의 음악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도정하고 싶다고 말했다. 운명에 도전하고 싶다는 결의를 굳히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사실을 절대 비밀로 해 주기를 원했으며, 그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다음해에는 시골로 가서 반 년 정도 흙을 만지는 생활을 하고 싶어하기도 했다. 그렇듯 비참하게 벙어리가 된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이야기가 많았다. 장이 나쁜 것이 원인이라고도 했는가 하면 지나치게 냉욕을 해 관절염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그런가 하면 어머니처럼 결핵 때문이라고도 했다. 그 밖에도 어렸을 적 심하게 티푸스를 앓았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어떤 이비인후과 의사의 세밀한 병리학적인 조사에 의하면 이상할 정도로 민감한 감각 기관을 지나치게 혹사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아무래도 이를 대부분이 합쳐져서 생긴 것 같다. 그리고 여기에 그의 극단적으로 난폭한 성질이 가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확실히 베토벤 스스로 그 병을 초래한 게 틀림없다. 그는 본래 튼튼하긴 했지만 지신의 몸을 다루는 데 지극히 난폭했다. 비가 오는데도 온몸이 흠뻑 젖도록 산책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작곡에 열중했을 때는 흔히 식사하는 것도 잊었다.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이 작곡중에 왔을 때는 매우 화가 나서 사나운 기세로 뒤를 돌아봤으므로 어떤 때는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벌렁 넘어지기도 했다. 그로 인해 후두부를 바닥에 크게 부딪쳐, 그 후부터 귀가 들리지 않았다고도 한다. 비록 귀가 들리지 않아도....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이 고통만 없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텐데" 하고 베토벤은 한탄했다. "이제 겨우 내 나이 31 세니 참다운 나의 인생은 이제부터야. 해야 할 일이 태산 같이 많지 않은가! 하지만 귀가 들리지 않는다니 살아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베토벤은 내심 미칠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지신도 채 알아차리지 못한, 마음의 위안이 되는 점이 한가지 있었다. 그것은 귀가 설사 들리지 않아다 하더라도 연주와 작곡을 하는데는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일이었다. 들리지 않는다는 것에 신경이 쓰이는 것은 남과 같이 있을 때뿐이었다.


베토벤은 자신이 작곡한 곡은 분명 머리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는 마음속에서 혹은 머리속에서 분명히 음으로 들을 수가 있었다. 그는 될 수 있는 데까지 용기를 내서 자신의 운명을 꾹 참고 견뎌 내어 이를 극복하려고 다짐했다. 그렇지만 약한 인간이었기에 때로는 하느님이 만드신 것 중에서 지신이 가장 비참한 존재라는 생각도 했다. 그는 이렇게 한탄했다. 나의 인생이 왜 이다지도 외로운 것일까요! 나는 본의 아니게 나를 사랑해 주는 모든 사람들을 피해야만 하는 괴로움을 안고 살아야 합니까? 그러한 그의 슬픔은, 예를 들면 피아노 소나타 "비창"과 같이, 그가 불행했던 시대에 작곡한 몇 편의 곡에 담겨 있다. 그렇긴 하지만 그가 겪었던 불행의 크기에 비해 슬픈 곡의 수효가 매우 적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 무렵에 작곡한 것으로 "7 중주곡"이 하나 있는데 이 곡에서는 슬픔은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밝은 즐거움으로 충만해 있다. 그 외에도 "제 1 교향곡"이 있는데, 이 곡은 흡사 원기발랄한 즐거움에 취해 버린 젊은이가 작곡한 것과도 같은 곡이다. 이런 점에서 미루어 보아 그는 이미 한편에서 하늘이 준 고통, 즉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고통을 극복해 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베토벤에게는 빈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의 구석구석에까지 유명해져 연주하러 와 달라는 초청이 여러 건 있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그런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새로운 작품에 대한 구상이 마치 실타래에서 실이 풀려나오듯이 끝도 없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몇 개의 곡이 동시에 머리 속을 점령하는 때도 있어 그 자신마저 놀랄 정도였다. 이렇게 해서 철로 소나타, 클라리넷 3 중주곡, 5 중주곡 및 그 밖에도 몇 편의 피아노 소나타 등의 계속 작곡되었다. 한편 레슨을 요청하는가 하면 작곡의 주문도 힘에 겨울 정도로 많았지만 하나같이 다 들어줄 수가 없었다. 또한 그렇듯 많은 돈이 들어온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귀족들의 경제적인 원조도 한 한몫해, 이를 저축해 둔 그는 필요할 때 얼마라도 찾아서 쓸 수가 있었다. 그는 깨끗한 옷을 사서 맘껏 치장할 수도 있었다. 값에 구애받지 않고 먹을 것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으며, 또한 자신보다 불행한 사람을 도울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돈과 명예로도 살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아내를 맞아들여 가정을 꾸미는 일이었다. 그는 아름다운 아가씨들을 동경하고 있었다. 그 대부분이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는 귀족 친구들의 딸이었다. 아가씨들도 베토벤을 좋아했지만 결혼 상대자로서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막상 베토벤이 결혼을 신청하면 상대방은 듣기 좋은 변명을 하며 은근히 이를 거절했다. 베토벤을 이렇듯 여러 번 거절을 당하자 고민도 했으며 절망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에게는 자기 심정을 털어놓고 의논할 상대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마음이나 기분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그런 유의 작품에 귀를 기울이면 베토벤의 마음을 충분히 읽어 낼 수가 있었다. 또한 그러한 작품들은 그의 젊은 시절의 온갖 슬픔과 괴로움에 대한 무언의 항의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들 작품은 동시에 그의 즐거움과 환희도 담고 있었다. 그는


어떠한 장애나 실망이 닥쳐오더라도 이를 극복해 승리로 이끌겠다는 결심을 굳혀 가고 있었다. 실연의 상처로 유서까지 쓰다. 귀가 점차 들리지 않게 된 최초의 2 년 동안은 그런대로 짧은 기간이기는 했지만 조촐하게 행복한 시기도 있었다. 이 무렵 베토벤은 다시 사랑을 하게 되었다. 이번의 상대자는 줄리에타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아가씨로서, 귀족 제자의 사촌이었다. 베토벤은 그녀에게 완전히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 당시에 작곡한 "월광 소나타"를 이 처녀에게 바친 것으로 알 수 있었다. 줄리에타 쪽에서도 그를 좋아했으며 때로는 깊은 사랑의 즐거움을 나눈 때도 있었으므로 베토벤은 그녀 역시도 자신을 깊이 사랑하는 줄로 알았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신분의 차이가 장애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녀 쪽에서 아무 말도 없이 그녀와 같은 신분인 어떤 백작과 갑자기 결혼해 버리고 말았다. 이를 알게 된 베토벤은 깊은 실망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자신을 원망했다. 그녀가 자신을 배반한 것이 모두가 자신의 귀 때문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신분의 차이 때문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신분의 차이가 장애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녀 쪽에서 아무 말도 없이 그녀와 같은 신분인 어떤 백작과 갑자기 결혼해 버리고 말았다. 이를 알게 된 베토벤은 깊은 실망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자신을 원망했다. 그녀가 자신을 배반한 것이 모두가 자신의 귀 때문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신분의 차이 때문이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깊은 번뇌와 실망에도 굴하지 않고 그는 작곡에 전념했다. 새로운 교향곡을 위시해 다른 곡에 대한 구상이 계속해서 머리에 떠올랐다. "제 1 교향곡"은 임 발표되었는데 이에 대한 의견이 구구했다. 지나치게 대담하다고 모질게 비평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개중에는 이 곡을 즐거운 곡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어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잠시 동안 이 제 3 악장을 들어 보십시오. 아름다움과 참신함으로 넘치고 있습니다. 전반부의 가락을 의식적으로 익살스럽게 했으며 춤추듯하는 리듬이 풍부하게 넘치고 있어요. 구기 잘 들리지 않는 사람이 저렇듯 멋진 음악을 작곡했다니, 정말로 믿을 수 없을 지경입니다. 말하자면 눈에 보이는 바깥의 귀는 점차 들리지 않았지만 마음 속의 귀로는 더욱 선명하게 잘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베토벤은 그러한 자신에 대해 감사했다. 지금까지보다 마음의 귀는 확실히 더 잘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외계에 대해서 그의 귀는 완전히 닫혀 버렸으면서도 그는 그 음을 마음으로 또렷하게 들을 줄 알았다. 그 옛날 스승과 주고받은 말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즉 음악가는 설사 귀머거리가 되더라도 악보를 읽거나 머리 속에서 생각해 내기만 하면 분명히 음악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는 실연의 쓰디쓴 아픔을 딛고 일어나서도 다시 "제 2 교향곡"을 완성시켰다. 의사의 권유로 시골로 휴양을 떠나가 있을 때 이 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전에도 가끔 들른 적이 있는 그 곳 시골의 아름다운 전원 풍경과


조용한 분위기가 그의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어느 날 그는 완전히 의기 소침해져 이대로 있다가는 틀림없이 죽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는 책상에 앉아 유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 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나를 고집이 세고 완고하다고 속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든 나라는 사람을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은 내가 어째서 그렇게 보였는지, 숨어 있는 원인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최근 6 년 동안 나는 회복이 도저히 불가능한 불치병에 걸려 있다는 것을, 나는 본래부터 천성이 밝은 사람이다. 남과 사귀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남과 헤어져서 고독한 생활을 한다는 것은 정말 싫었지만 그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을 보고 좀더 큰 소리로 말해 주시오, 혹은 외쳐 주시오, 나는 귀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하고 말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추방당한 사람처럼 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누군가에게 그 사람에게는 목동이 부는 피리 소리가 들리지만 나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그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나는 자살하려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예술이 나를 그러지 못하게 했다. 내가 작곡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작품을 모두 다 완성시킬 때까지 이 세상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인내라는 것을 나의 길잡이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남는다면 그 상속인을 동생으로 한다. 아무쪼록 그 재산을 공평히 나누어 서로 돕고 지내도록 당부한다. 안녕히. 나를 잊지 말아 주기를 빈다. "영웅 교향곡"의 탄생 이렇듯 구제불능의 인생은 달리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그의 태도에는 돌연 현저한 변화가 일어났다. 베토벤은 강한 의지의 힘을 짜내어 절망과의 투쟁에서 승리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뼈아픈 성명을 하게 되었다. 나는 지금부터 나의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비밀로 하지 않겠다. 다시 한 번 빈의 사교계로 복귀하려고 한다. 귀머거리라는 것이 세상에 알려진다 해도 거리낄 것이 없다. 계속해서 작곡을 할 수 있으며, 또한 귀가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나의 예술이 손상당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베토벤의 머리 속에는 새로운 곡이 끊임없이 용솟음쳐 떠올랐으며, 계속해서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타이르기도 했다. 이것이 나의 운명이라면, 나는 아름다운 음악을 이 세상에 내보낸다는 일생의 사명을 이룩하기 위해 그러한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절대로 패배해서는 안 된다. 내가 인류에게 바칠 수 있는 아름다운 곡을


위해 귀가 먹은 자신과 싸워 승리를 거두어야 할 것이다. 이때가 베토벤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이 된 시기였다. 새로운 의욕으로 "제 3 교향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베토벤은 이 곡에서 한 영웅의 생애를 나타내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누구를 영웅으로 할 것인가? 그것은 물론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었다. 나폴레옹이 인간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투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이와 같은 숭고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 프랑스 사람들의 용기를 불러일으키지 않았는가. 베토벤은 "제 3 교향곡"을 '에로이카'라 명명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생애를 기초로 작곡할 것을 결심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제 3 교향곡"을 듣는 사람들이 이로 인해 더욱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기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본에 있을 때의 친구의 아들이자 현재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공부하고 있는 제자가 헐레벌떡 숨가쁘게 베토벤의 방으로 뛰어들어와 선생에게 커다란 소리로 외쳤다. "선생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세요?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겠다고 선언했대요!" 베토벤은 잘못 들었는가 싶어, "여보게 잘 알 수 있도록 이 필기장에 써 보라고!" 글을 읽고 난 베토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역시 그 사람도 한낱 보잘것없는 졸장부에 지나지 않는군! 아마 이제부터는 저 사내도 인간의 권리를 발 밑에 깔아뭉개고 자신의 양심만 만족시키려고 하겠지.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한층 높은 자리에 군림해 폭군이 될 게 틀림없어!" 베토벤은 이렇게 말하면서 책상 앞으로 다가가 보나파르트라고 씌어 있는 "영웅 교향곡"의 표지를 박박 찢어 마룻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는 다른 의자에 앉아 다른 표지에 '어느 위인의 추억을 위해'라고 썼다. 그러자 그 제자는 선생을 진정시키려고 필기장에다 다음과 같이 썼다. 선생님, 보나파르트를 잘못 봤다고 해서 지나치게 실망하시지 마십시오. 그 교향곡은 보나파르트가 아니라, 참혹한 운명을 극복하면서 계속 투쟁하신 선생님의 용감한 정신을 찬양하는 기념비가 될 것입니다. "제 3 교향곡 영웅"은 베토벤의 마음에 드는 곡이 되었다. 베토벤은 이 곡이 특정의 영웅의 인생을 표현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영웅적인 행위가 인간의 인생을 이끌어 가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라는 것을 음악으로 표현하려고 많이 노력했던 것이다. 베토벤의 보호자나 친구들 대부분은 "영웅 교향곡"은 베토벤이 지금까지 작곡한 모든 작품 중에서 가장 위대한 곡이라고 열렬하게 찬양했다. 그렇지만 비평가들 중에는 "이 교향곡은 지나치게 구성이 까다롭고 지나치게 색다른 표현 방식"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 교향곡은 밝은 악장에서는 무척 아름다웠으며, 다른 악장은 깊은 슬픔이 담겼으며 또 다른 악장은 커다란 희망에 차 있어, 이 곡을 듣는 사람은 누구나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위대한 행위에 감동을 받고 이 곡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이 곡은 베토벤의 음악에 있어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혼을 거부하다. 어렵게 어렵게, 베토벤은 자기를 깊이 사랑하는 연인을 만났다. 그 처녀는 바로 베토벤이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는 귀족의 한 사람인 테레제라는 이름의 아가씨였다. 테레제와 그녀의 여동생은 소녀 시절부터 베토벤을 존경해 오면서 그의 레슨을 받아 왔다. 베토벤은 또한 그녀들의 집안 사람들과도 가까이 사귀고 있었으며 특히 테레제의 남동생인 프란츠와 친하게 지냈다. 처음에는 테레제를 단순히 귀여운 제자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차츰 베토벤은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얼마 후 그들은 비밀리에 결혼할 것을 약속했다. 새로운 행복을 잡은 베토벤은 피아노 소나타 한 곡을 만들어 그녀에게 바쳤다. 그는 솟구쳐 오르는 애정에 힘입어 그렇듯 행복한 1 년 동안에 "황제 협주곡"을 비롯해 "철로 소나타", "현악 4 중주곡"을 작곡했다. 그러나 동생들의 일이 이를 망쳐 놓았다. 그런 골치 아픈 일들만 없었다면 베토벤의 행복은 오래오래 계속되었을 것이다. 동생들은 둘 다 결혼했지만, 베토벤은 두 제수가 다 마땅치가 않았다. 동생들 또한 도덕적으로 혹은 교양면에서 자신들과 지나치게 다른 점에 대해 실망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기분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특히 막내동생 요한이 문제였다. 그는 사업에 성공해 시골에 적지 않은 땅까지 기지고 있었다. 하루는 그 요한이 형인 베토벤에게 인사장을 보냈는데, 서명란에 '요한 판 베토벤, 토지 소유자'라 씌어 있었다. 베토벤은 이 인사장을 아니꼽게 생각하면서 답장 서명란에, '루트히비 판 베토벤, 지능 소유자'라 적어 보냈다. 베토벤은 동생인 칼이 택한 부인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근처에 살고 있으면서도 될 수 있는 한 만나는 것을 피했다. 그렇지만 같은 이름인 칼이라는 조카만은 사랑했다. 그리하여 어린 칼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을까 하고 늘 걱정하곤 했다. 그러면서 칼이라는 조카가 자신의 애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도 생각했다. 베토벤은 몹시 화가 나거나 심하게 놀라게 되면 몸에 이상이 생기는 체질이었으므로, 그때도 동생의 일로 마음이 대단히 상해 건강을 해쳤다. 그리하여 광천 이 몸에 좋다는 이름난 휴양지로 갔다. 귀는 여전히 들리지 않았으나 그는 언젠가는 반드시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테레제는 그가 돌아오기를 무척 기다렸다. 베토벤의 음악가로서의 생활에 크게 관심을 기울였을 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건강에 무척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로서는 베토벤의 일이 라면 어떤 것이든 중요했다. 그렇지만 돌아온 베토벤은 전과 다름없이 그녀에 대한 애정을 표시했지만 결혼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끝내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귀에 병이 있는 이상 결혼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자신의 전부를 음악을 위해 바칠 작정입니다. 제발 저의 이와 같은 마음을 이해하고 용서해 주시오. 당신만큼 내가 깊이 사랑하는 사람은 아마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이런 고백에 그녀의 마음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지만 자신의 슬픔을 베토벤에게 절대로 보이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다만, "당신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일은 내 일생을 두고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라고만 말했을 뿐이었다. "나는 나의 음악을 위해서 이와 같은 희생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하고 베토벤의 말은 계속되었다. "더욱이 잘 아시겠지만, 저만큼 아내와 가정을 원하는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이처럼 성공하고서도, 이렇듯 많은 친구들이 있어도 나의 생활은 언제나 쓸쓸할 뿐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상태에서는 결혼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베토벤의 집안은 하나도 정리된 것 없이 어망이었으며 더구나 하인들까지 그의 눈을 속이고 있었다. 그는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으며 몸치장도 깔끔하지 못했다. 양복도 손질이 안 된 채 구겨져 있을 때가 많았다. 베토벤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소중히 생각해 늘 곁에서 뒷바라지 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나 모처럼 그런 여인이 생겼으면서도 그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결심해 버린 것이다. 베토벤의 수입이 갑자기 줄어들었다. 그의 후원자인 세 명의 귀족 친구들 중에서 한 사람이 죽었으며 나머지 두 사람은 여전히 돈을 대주기는 했지만 액수가 많이 줄어들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동생 칼이 병에 걸려 그 가정까지 베토벤이 돌봐 줘야 할 입장이 돼 버렸다. 그렇지만 베토벤은 어디서 돈을 벌어야 할지 막막하지만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베토벤은 돈을 벌기 위해 영국으로 갈 결심을 했다. 그러나 칼의 건강이 매우 나빴으므로 영국으로 출발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그 사이 "전쟁 교향곡"(일명 웰링턴의 승리) 등의 곡을 작곡해 이를 발표했으며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 곡으로 2 회에 걸쳐 자선 공연도 열어 전쟁 미망인이나 고아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었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연주회를 열어 달라는 주문이 쏟아져 들어오기도 했다. 연주회가 상당한 수입이 되기도 하여 영국으로 건너가지 않아도 되었다. 이미 1805 년(38 세)에 "영웅 교향곡" 및 "피델리오"를 작곡해 초연했으며, 이어 1808 년 12 월에는 제 5 교향곡 "운명"과 제 6 교향곡 "전원"을 발표했다. 1811 년(42 세)에는 독일의 시인 괴테를 만나 사귀게 되었지만 서로 인생관이 달라 깊이 사귀지 못하고 이내 헤어졌다. 이어 1813 년(43 세)에는 제 7 및 제 8 교향곡을 발표했다. 거의 완전 벙어리와 같은 상태에서 거의 필사적으로 작곡을 계속했던 것이다. 가히 위인이요, 음악의 천재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는 계속 자신의 불편한 몸에 채찍질하며 그렇듯 어려운 곡을 완성시켰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귀는 이미 완전히 쓸모없게 되어 버렸다. 그는 이제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을 감출 재주가 없어졌다. 그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슬픈 듯이 미소지으면서 호주머니에서 회화장을 꺼내어 글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그는 만년의 쓸쓸한 모습으로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귀머거리로 오페라를 지휘 1822 년의 "피델리오 공연" 때의 일이었다.


베토벤은 이 곡의 총연습 때 지휘를 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가 지휘를 하자 1 막의 2 부 합창 무렵부터 그의 지휘봉과 무대가 전연 맞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렇지만 베토벤은 그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무대 쪽의 음을 전연 듣지 못했다. 그의 지휘봉이 상당히 느리게 움직였다. 오케스트라에서는 그의 지휘봉을 따랐다. 그렇지만 무대 쪽에서는 멋대로 소리를 내어 그의 지휘봉보다 점차 빨라져 갔다. 마침내는 피치가 다 같이 엉망이 돼 버렸다. 상임 지휘자가 이를 차마 볼 수 없어 이유를 말하지 않고 잠시 휴식 시간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무대 쪽 가수들에게 두세 가지 주의를 준 다음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두 번째도 똑같이 엉망이 돼 버렸다. 베토벤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진상을 말할 수 없었다. 모두 곤혹스러운 얼굴로 서로 바라볼 뿐이었다. 베토벤은 제자를 불렀다. 그리하여 그 상황을 글로 써달라고 했다. 제자가 이렇게 썼다. "이 이상 계속하지 마십시오. 부탁입니다. 이유는 집에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때서야 비로소 베토벤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부끄러움을 느끼며, 제자를 향해, "돌아가자!"고 말한 다음 달려 나갔다. 귀머거리로서 오페라를 지휘할 수 없는 것이다. 그 후 그는 완전히 귀머거리가 되었다. 만년에 그는 지휘봉을 입에 물고 그 봉의 끝을 피아노의 몸체에 대고 자기가 치는 음을 들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이로 음을 들은 것이다. 마침내 "제 9 교향곡"을 공연할 차례가 되었다. 오케스트라 앞에 두 명의 지휘자가 섰다. 동서 고금을 통해 일찍이 없었던 광경이었다. 한 사람은 귀머거리인 베토벤이었고 또 한 사람은 단원들이 이 사람만을 믿고 있는 상임 지휘자 우물라우프였다. 베토벤은 자기 작품을 지휘한다는 생각에 그지없이 즐거웠다. 베토벤의 지휘는 맹렬했다. 그는 거의 전부가 그를 주시하지 않고 우물라우프만을 의지하고 있는 악단에 대해서 무엇을 지휘하려고 하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그의 격렬한 몸동작은 미친 사람과 같았다. 저음부에 들어가면 몸을 심하게 낮추어 악보를 놓아 둔 대 밑으로 들어가 거의 바닥에 닿을 정도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이어 고음부로 들어서게 되면 점차적으로 몸을 뻗어 이내 몸이 쭉 되로 휘며 마침내 최고음부에 이르게 되면, 그는 두 팔을 활짝 벌리고는 폭발하듯이 하늘로 뛰어올랐다. 마치 구름 위까지 날아오를 듯한 기세였다. 그런데도 모든 단원은 우물라우프의 지휘봉만 바라보고 있었다. 각 악장마다 터질 듯이 갈채가 일어났으며 특히 템포가 빠른 제 2 악장과 합창의 최종 악장이 끝났을 때는 청중의 열광과 갈채로 극장이 흔들릴 정도였다. 장내는 노도와 같은 박수와 감격의 폭풍 속에서 귀를 멀게 할 정도로 시끄러웠다. 더구나 쾅쾅 울리는 소리가 뒤를 보고 있는 베토벤에게는 전연 들리지 않았다. 그는 연주가 끝났을 때 뒤쪽의 열광을 전연 알아차리지 못하고 아직도 지휘봉을 손에 쥔 채 멍청히 서 있기만 했다. 이때 알토를 독창으로 부른 가수가 다가가 그의 손을 잡고 뒤를 돌아보게 했다. 그는 처음으로 청중의 폭풍을 알게 되었다. 그는 정중히 그러나 어린이처럼 멋쩍게 인사를 했다. 그러자 다시금 우레와 같은 갈채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이 감격과 열광을 귀가 먹은 그에게 알리기 위해 일제히 일어서서 손을 흔들고 박수를 쳤으며 어떤 사람은 그와 같은 비장한 모습을 바라보며 동정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두 번 세 번 박수가 울렸으며 답례가 5 회가 되어도 박수는 그치지 않았다. 당시의 빈의 관습으로는 3 회의 박수가 황족에 대한 예의였다. 이렇듯 정도에 넘치는 열광에 대해서 드디어 임석한 경관들이 이를 중단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침내 청중의 흥분이 베토벤에게로 옮겨갔다. 이미 음악회 준비 등으로 완전히 지쳐 버린 그는 겹친 심신의 피로와 흥분으로 제정신을 잃은 것처럼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그를 제자의 집으로 데려 갔다. 그는 거기서 음악회의 복장 그대로 하룻밤 내내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꿈을 꾸는 듯한 상태에서 아침까지 누워 있었다. 소리를 전연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인 그가 자신의 곡을 지휘하겠다는 강한 열정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음악회는 그 달 23 일에게 프로그램을 다소 변경해 다시 열렸다. 이렇듯 음악의 세계에는 출중했으며 군중을 굽어보며 질타할 수 있었던 그도, 일단 속세의 일로 돌아오면 그야말로 아는 것이 없었으며 생각하는 것이 깊지 못했다. 그것은 일종의 희극인 동시에 비극이기도 했다. 그의 마음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인 소박함과 성실함이 깊은 애정과 결부될 때 그것은 비극이 되었다. 그와 같은 편린은 이미 여태까지의 경과를 통해 이곳저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렇지만 이를 가장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만년에 가졌던 조카인 칼과의 관계였다. 이 조카에 대한 그의 사랑은 부모 이상이었다. 그와 같은 사랑이 거의 그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조카에게 재산을 남겨 주기 위해 수전노처럼 구두쇠가 되었던 것이다. 죽음의 침상에서 끝가지 걱정했으며 마지막까지 펜을 쥐겠다고 결심한 것도, 그 조카 때문이었다. 그는 보통 인간으로서 제대로 교육을 받은 거이 없었으며, 세상에 익숙하지 못한 채로 지금까지 지내 왔다. 말하자면 이것이 그의 가장 큰 약점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와 같은 결점을 빈의 귀족들 사이에 있었을 때는 그의 음악 그 자체의 힘으로 보충할 수 있었다. 칼의 문제를 마지막으로 그의 명수도 끝났다. 이 문제가 희극적이면서 동시에 비극적인 베토벤의 가련한 생애에서의 마지막 갈등이 되었다. 마침내 베토벤은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작곡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그는 자신의 그와 같은 신세를 한탄했다. 말썽 많았던 조카 칼도 군대에 들어갔으므로 노여움 같은 것도 없어졌다. 베토벤은 조카를 무척 만나고 싶어했지만 그의 생활은 조카가 없는 것이 훨씬 평온했다. 이 무렵 그는 다음과 같이 소망했다. 아아, 나에게는 이미 작곡을 할 기력도 없지만, 적어도 훌륭한 곡을 하나만 더 작곡해 다정한 어린애처럼 다정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이 세상의 생활을 끝맺고 싶다. 그는 병들어 누웠을 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빨리 병이 완쾌되어 음악의 날개에 몸을 싣고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싶다." 이때 런던의 음악 애호가 협회로부터 베토벤이 병으로 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500 달러를, 다음과 같은 편지와 함께 보내 왔다." 이 돈은 협회를 위해 작곡해


주시기를 바라는 작품의 작곡료의 선금입니다." 극히 곤란을 받고 있을 때 그와 같은 대금을 받은 베토벤은 살아 난 듯이 기뻤으며 또한 마음이 놓였다. 영국 국민에 대해서 깊은 고마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몸이 좋아지면 런던으로 가야지. 영국 국민을 위해 대 교향곡 하나를 작곡해야지'하고 결심했다. 불끈 치켜든 주먹 그러나 2, 3 일이 지나자 베토벤은 더욱 쇠약해져서 거의 말도 하지 못하게 됐다. 어느 날 오후 베토벤이 좋아하는 포도주 세 병이 그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 놓여 있었다. 출판사에서 선물로 보내 온 것이었다. 베토벤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유감이지만 너무 늦었어"하고 중얼거렸다. 1827 년 3 월 26 일의 저녁 무렵, 심하게 비바람이 몰아치며 천둥까지 쳤다. 번갯불이 베토벤의 방을 대낮같이 밝혀 두 사람의 문병객을 놀라게 하였다. 그 때까지도 베토벤은 꼼짝도 않고 눈을 감은 누워 있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오른손을 높이 치켜들고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는 2,3 초 동안 그대로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올렸던 오른손을 침대에 늘어뜨리고 그는 결국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1827 년 3 월 26 일 오후 6 시였다. 이제 그 어떤 것도 그를 괴롭힐 수 없게 되었지만, 이와 동시에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고 힘을 북돋아 주는 빛나는 음악이 머리 속에 끓어올라 사나운 물결처럼 치닫는 일도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빈의 모든 시민들은, 곧 이 위대한 작곡가가 운명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2 만 명 이상의 각계 각층의 문상객들이 그의 집 앞에 서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일생을 통해 받은 것은 적고 베푼 것이 많았던 한 인간의 죽음을 애통해했다. 베토벤의 음악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람도 많았지만 그 사람들도 베토벤이 자기들의 거리에 명예를 가져다 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사람들에게는 베토벤은 흔한 황족보다도 위대한 인간이었다. 두말할 것 없이 베토벤은 음악계의 왕이며, 그 지위는 이 세상의 어떤 귀족도 누려 보지 못한 고귀한 자리였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일생의 절반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로 보낸 베토벤이지만, 마음속에서는 아름다운 음악을 끊임없이 들으면서 가난이나 질병 그리고 괴로움에도 굽히지 않고 그 아름다운 음악을 세상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온갖 고난을 이겨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장례식 때는 베토벤의 집에서 교회까지 연도에 모인 추모 인파로 인산 인해를 이루었다. 모든 학교가 애도의 뜻으로 휴교를 했으며 군중을 정리하기 위해 군대가 출동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장례 행렬에는 귀족들을 위시해 관리들과 그의 많은 친구들 그리고 빈 음악 학교의 학생들도 합류했다. 빈에서 가장 뛰어난 가수들과 네 사람의 트럼본 연주자들이 행진하면서 베토벤의 작품 중 한 곡을 연주했으며 반주도 했다. 땅거미가 짙어갈 무렵 많은 친구들이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를 위해 바치는


시와 그의 생애를 묘사한 시가 온 거리에 배포되었다. 장례식이 끝난 다음 베토벤의 유물의 정리하자, 작은 책상 안에 조카를 위해 저축해 둔 약간의 돈과 유서, 그리고 작은 사진 두 장이 있었다. 한 장은 그의 조부의 사진이었으며 나머지 한 장은 사랑했던 테레제의 사진이었다. 서랍 가장 깊숙한 곳에 '영원한 애인' 이라는 서두로 되어 있는 아름다운 사랑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베토벤은 비록 조카 칼에게 고생하며 저금한 약간의 돈밖에 남기지 못했지만, 온 세계 사람들에겐 엄청난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음악의 큰 보물을 남겨 놓은 것이다. 음악을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들어가며 작곡을 계속한 그 각고의 노력이야말로 베토벤만이 간직한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고귀한 정신이었던 것이다. 그가 눈을 감기 바로 직전 팔을 번쩍 치켜올리며 주먹을 불끈 쥔 것은 무엇을 의미한 것이었을까. 죽기까지 완성하지 못한 많은 곡에 대한 마지막 손짓인 동시에 커다란 한의 표현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변신을 거듭한 천재 화가 피카소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 스페인의 화가로 본명은 루이지 피카소 안달루시아 지방의 말라가에서 태어났다. 1901 년에 파리로 가서 로트레크(H. T. Lautrec)의 영향을 받았다. 1907 년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그려 큐비즘을 창시했고, 1920 년경 초현실주의 영향을 받아 사실주의로 돌아갔지만, 1925 년경 초현실주의 영향을 받아 특이한 변형에 의한 조소족 표현을 시도해 '변형의 시대'로 들어간다. 이후 각종 표현 방법을 받아들여 자유스런 조형을 구사했다. 1937 년에는 반전적인 대작 '게르니카'를 발표했으며 파리의 레지스탕스 운동의 투사들과 사귀면서, 전후에는 공산당에 입대했다. 석판화, 조각, 도기 등도 제작했으며 20 세기 현대 미술의 최고봉으로서 미술은 물론 다방면의 예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르네상스 이후의 대혁명'을 이룩한 화가 피키소는 20 세기 초에 큐비즘(Cubism)이라 불리는, 지금까지와는 전연 다른 독특한 방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리하여 서양의 미술사에서 이를 '르네상스 이후의 대혁명'이라고 말하는 미술사가도 있다. 그러한 방법의 한 예를 들면, 옆 얼굴과 정면에서 본 얼굴을 동일한 화면에 동시에 그려 놓고 있을 뿐만 아니라, 눈이나 코 또는 입같은 것을 익살스럽게 배치하는 등의 방법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피카소 이전에는 전연 볼 수 없었던 기법의 그림이다. 그런가 하면 인체를 조각조각으로 떼어서 그리는 등 피카소만의 독특한 수법으로 창조해 냈다. 이런 그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든 그렇듯 대담하게 그릴 수 있는 재능 또는 용기에 탄복하게 된다. 실제로 독특한 발상이나 묘사법에서 피카소에 필적할 만한 화가는 없다. 이렇듯 파격적인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피카소가 천재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러 가지 제약들에 얽매여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보통


사람이라고 한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경계선을 훌쩍 뛰어넘는 사람은 천재하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20 세기에 가장 유명한 화가를 대하고 하면 어떻든 피카소를 지적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천재 피카소'라고 자주 불리는데, 이는 아무도 시도해 본 일이 없는 경지를 개척해, 사람들에게 사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방법을 열어 놓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약 80 년에 이르는 그의 생애를 바라볼 때, 우선 느끼게 되는 것이, 이미 이루어 놓은 스타일에 안주함이 없이 변신을 한 것이다. 그러한 그의 솜씨나 '청색 시대'와 큐비즘의 시대에 이어 콜라주(초현실주의의 한 수법으로 신문 광고 사진 등을 잘라내어 붙여 화면을 구성하는 수법) 시대 식으로 스타일을 변화시킨 '변모하는 화가'라 불리게 된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완성된 자신의 스타일 그대로 똑같이 그림을 그리는 화가도 많지만, 피카소는 스타일의 반복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 때문에 그는 그와 같이 변모하는 일에 사로잡힌 것일까. 그런데 스타일을 변화시키는 일에도 이에 필요한 어떤 연구와 공부가 수반되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존재라 불리는 화가가 어떤 공부를 했을까. 도대체 그와 같은 공부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이 문제는 일반인들이 매우 흥미롭게 생각할 것이라 여겨진다. 어떻게 하면 화가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공부하는 것보다 재능이 한층 중요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화가도 사실 그 나름대로 공부를 해야 가능한데 그렇다면 피카소는 어떠했는가를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스타일을 부정하는 화가 피카소의 초기의 작품을 볼 때 반드시 느끼게 되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그가 이미 10 대 때 화가로서의 완전한 기술과 관찰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가 14 세 때 그렸다고 하는 '맨발의 소녀'라는 그림이 있다. 벽을 배경으로 하고 앉아 있는 소녀가 크고 검은 눈으로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그림이다. 그런데 소녀의 검은 눈동자가 보는 사람의 눈을 사로잡고는 놓아 주려 하지 않는 것이다. 적절하고 정확한 터치에 겸해 마주잡은 손이나 우람한 발의 표정이 인간의 존재감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훌륭한 그림은 어떤 것인지 간단히 말할 수 없지만, 보는 사람의 뇌리에 깊고 강하게 새겨지는 것이 명화의 조건이라면, 이 그림은 바로 이에 해당되는 명화라 할 수 있다. 피카소가 변모하는 일에 사로잡혔다는 것은 초기의 작품들을 보면 잘 알 수가 있다. 그가 그리는 그림은 처음부터 완성된 것으로 미숙한 점이 한 곳도 없다. 다시 말해서 처음부터 스타일이 확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소년 시절에도 어린애와 같은 그림은 단 한 번도 그린 일이 없다고 한다. 그와 같이 조기 완성의 화가한테 남아 있는 길은 두 가지밖에 없다. 즉 똑같은 스타일을 가지고 계속 그려 나가든가, 아니면 계속해서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 내든가. 이렇듯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택하는 데는 화가 자신의 개성이 크게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런데 피카소의 경우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을 대단히 좋아했던 것이다.


그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단언하고 있다. 과거에는 이미 흥미가 없다. 자신의 작품을 흉내낼 정도라면 차라리 남의 작품을 흉내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떻든 간에 나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일을 대단히 좋아한다. 영국의 미술 평론가로서 피카소에 대한 훌륭한 전기를 집필한 롤랜드 펜로스가 한 말이 있다. 그는 이어 "대부분의 화가들이 자신의 생애에 가장 좋은 작품으로서 만족할 게 틀림없는 정도의 그림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피카소는 14 세 때 벌써 일생의 최고 걸작을 완성시켜 놓았다는 말이다. 등산가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갓 등산을 시작한 사람이 단번에 세계 최고봉을 정복해 버린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등산가는 더 높은 산이 또 어디에 없을까. 그런 산이 있다면 그것까지도 정복해 버리고 싶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자신이 그렇듯 높은 산을 만들어 놓고 싶다고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미술의 세계에서 피카소가 도전한 것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피카소는 그야말로 변신하는 일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증명하고 있다. 그가 가장 피하고 싶어한 것은, 똑같은 일을 반복해서 하는 일이었다. "절대로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전제 조건으로 모든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피카소는 회화에 대해서도 그 나름의 독특한 해석을 하고 있다. 그쪽에 없는 것,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그림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어딘지 모르게 전에 누군가가 그린 작품과 비슷한 점, 즉 닮은 점이 있는 그림은 그림이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피카소의 작품으로 일반인들이 대체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그의 데생이며, 그 밖의 것으로는 '청색 시대'에서 '장밀 빛깔의 시대'까지의 초기의 작품이다. 그의 그림이 파리에서 팔리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의 작품부터였으며 화상들은 파카소에게 그와 똑같은 스타일의 그림을 계속 그려 줄 것을 기대했다. 그렇지만 피카소는 이를 완전히 배반하여 큐비즘이라고 하는 완전히 새로운,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불가해하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그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의 그림을 사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화가는 절대로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런 그림을 그려서는 안 된다. 화가에게 있어 최악의 적은 스타일이다." 변신하는 일에 사로잡혀 변신하는 모습을 작품으로 계속 표현한 그의 생애를 통해서 느껴지는 것은, 하나의 놀이에 염증을 느낀 어린이가 계속해서 새로운 놀이를 생각해 내는 모양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어떤 놀이가 가장 즐거웠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까지고 계속 놀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카소는 긴 생애를 통해 그것을 충분히 즐긴 것은 아닐는지. 그는 화가라는 점에 만족하지 못하고, 조각, 도예, 금속 세공으로부터 무대 장식은 물론 시도 썼으며 드라마도 써서 상연하는 등 무불통지의 대활약을


벌였다. 이렇듯 그가 계속해서 새로운 놀이를 생각해 낸 것, 혹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앞서도 말한 것처럼 한마디로 14 세에 이미 평생의 걸작을 완성시켰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그는 14 세까지 어떠한 공부를 했기에 평생의 걸작을 탄생시킬 수 있었는가, 그리고 그 이후에는 어떤 식으로 공부를 한 것일까? 어릴 적부터 화가인 아버지를 흉내내 피카소는 말을 하기 이전에 그림을 통해서 의사를 전달했으며, 말을 배우면서 가장 먼저 한 말이 '연필'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연필과 종이를 주게 되면, 몇 시간이고 싫증을 느끼는 일없이 나선 무늬와 같은 것을 계속 그리고 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붓가는 대로 마구 내갈긴 것으로, 그런 정도면 피카소가 아니더라도 모든 어린이들이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행동이다.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피카소의 아버지는 피카소가 그림을 배우던 학교의 미술 선생이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아버지는 언제나 집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피카소는 그 때 아버지의 흉내를 내어 마구 그림 같은 것을 그렸던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란 공부하지 않고서도 모든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이 위대한 예술가의 특징의 하나다"라고 프랑스의 위대한 극작가인 몰리에르(J. P. Moliere)가 말했지만 그것은 잘못된 말이다. 위대한 예술가는 물론이고 세상에서 천재라 지칭되는 사람들 전부가 열심히 공부한 결과로 천재가 된 것이다. 하긴 공부한다고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공부를 하는 경우는 있을 것이다. 이것은 효과적인 학습법이기도 하다. 즉 자연스럽게 지식이나 기술을 흡수하는 방법이다. 피카소의 경우가 그렇듯 이상적으로 행해진 것 같다. 흔히 자식을 보게 되면 그 부모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어린이는 부모를 반영하고 있다. 어린이처럼 학습자는 없다고 할 수 있다. 피카소의 경우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아무런 생각없이 그러한 아버지의 흉내를 냈을 뿐이다. 피카소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최초의 공부였으며 평생에 걸쳐 계속되는 학습의 발단이 되었던 것이다. 피카소의 아버지는 피카소가 좋아하는 그림을 마음대로 그리게 내버려두었다. 독본을 읽고 쓰는 일과 산수 같은 다른 학과는 어떻게 하든 전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심지어 알파벳의 순서를 몰라도 탓하지 않았다. 아들이 좋아하는 그림만 열심히 그리면 그것으로 만족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늘 그림을 그렸다. 따라서 교과서의 여백이나 공책 같은 것은 그가 그린 그림으로 온통 뒤덮이곤 했다. 일반적인 부모처럼, 학교 공부도 좀 해야지 않겠느냐는 정도의 말조차도 피카소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어디에 있든 늘 그림을 그리는 생활이 피카소 소년 시절이었다고 단언할 수가 있다. 말하자면 그는 오로지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 할 수 있었으므로 그에게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환경이 갖추어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런 것을 의식함이 없이 그림 공부를 했으므로 한층 더 효과적이었던 것이다.


그 후 일가가 스페인을 떠나 파리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는 무척 가난하게 생활했다. 그렇지만 그 시절에도 피카소는 그림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으며, 그의 인생에서 그림을 떼어 놓으면 아무것도 없다 할 정도였다. 도대체가 그림을 빼놓으면 아무것도 공부한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르칠 게 없는 학생 피카소는 집에서 아버지로부터 그림을 배울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즉 그의 아버지는 비둘기의 다리를 핀으로 꽂아 놓고, 그 비둘기 다리를 세밀하게 사생토록 시켰다고 한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충분히 긍정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사생을 시킨 것이다. 또한 사람의 손을 그리게 해, 이것이야말로 화가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공부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실제로 피카소의 그림에서는 인간의 손이 표정도 풍부하게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 모두가 아버지의 그림에 대한 교육의 흔적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리고 덧붙여서 한 가지 말해 둬야 할 것은 미술 학교에서의 그의 성적이 언제나 가장 우수했다는 점이다. 피카소의 부모는 그림말고도 자식을 완전히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피카소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너는 군인이 된다면 틀림없이 장군이 될 수 있을 것이고, 신부가 된다면 반드시 로마 교황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 자식은 학교에서 아무것도 배워 오지 않더라도 이미 무엇이든지 다 알고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부모는 자신의 자녀의 능력을 아무리 크게 평가해도 지나치는 일이 없으며 그러한 부모야말로 자녀가 지니고 있는 능력을 극대화해주는 훌륭한 부모라고 말할 수 있다. 도대체 어린이가 어느 정도의 잠재 능력을 소유했는가는 아무도 모른다. 크게 평가해도 나쁠 것이 없는데도, 어느 한계 안에서 밖에서 자녀를 볼 수 없다면 진짜로 우둔한 부모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피카소의 어머니는 이상적인 어머니였다. 한편 아버지는 언제고 자신을 흉내내어 그림만 그리고 있는 아들의 재능에 주목해, 피카소의 최초인 동시에 유일한 교사로서 그림 그리기를 초보에서부터 지도했다. 피카소가 10 세 때, 아버지가 교사로 일하고 있는 미술 학교에 입학하고 아버지가 맡고 있는 반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집에 돌아와서도 아들을 가르치는 식이어서, 이때부터 그림을 그리는 피카소의 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렇듯 아버지에 의한 교육은 계속되었는데, 아버지가 특히 중요시한 것은 데생으로서, 데생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될 때까지는 그림 물감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을 받은 피카소는 뒷날 "나만큼 데생 연습을 많이 한 화가는 없을 것이다"라고 회상할 정도였다. 그리하여 피카소가 13 세 때, 드디어 학생이 스승을 뛰어넘는 날이 오게 된다. 아버지는 아들이 자기보다 비둘기 그림을 더 잘 그리는 것을 보고, 자신의 화필과 그림 물감을 피카소에게 주면서, 그 다음부터는 그림 그리는 일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선생으로서 제자에게 이제는 가르칠 것이 없어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와 똑같은 이야기가 르네상스의 위대한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경우에도


있어 흥미롭다. 다빈치가 15 세경, 피렌체의 유명한 화가 베로키오(Andrea del Verocchio)의 공방에 입문했는데, 어느 때인가 베로키오가 제직중인 그림에 천사를 그리도록 다빈치에게 명령했다고 한다. 그런데 제지인 다빈치가 그 천사의 그림을 자기보다 멋지게 완성시켜 놓은 것을 보고 스승은 두 번 다시 화필을 손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듯 스승을 뛰어넘는 제자의 예도 흔한 일은 아니지만, 제자의 뛰어난 재능을 인정할 수 있는 것도 스승으로서의 중요한 능력의 하나라 하겠다. 그러한 능력이 없는 스승은 부질없이 제자의 재능에 간섭만 하고는 뛰어난 재능의 싹을 꺾어 버리기 쉽다. 피카소나 다빈치는 다 같이 물러설 때를 알고 스승을 둔 해운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피카소의 경우는 스승의 평가대로라고 할까, 아니면 그 보다 훨씬 뛰어났다고 할까, 14 세에 평생의 걸작이라고 하는 작품을 그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피카소의 공부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매일매일 그림을 그리다 누군가가 피카소를 보고, "당신은 화가로서 어떠한 공부를 해왔습니까?" 하고 묻게 되면, 피카소는 분명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나는 매일매일 그림을 그려 왔습니다." 피카소뿐만 아니고 일반적으로 화가는 어떤 공부를 할까 하고 궁금해하는 사람은 이와 같은 대답을 다시 한 번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그지없이 진부한 이야기인지도 모르지만, 화가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므로, 화가에게 있어서는 그림을 그리는 일이 공부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하루의 대부분을 무엇을 하고 지내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매일매일 똑같은 일을 계속해 나가는 동안에 인간은 좋든 나쁘든 뭔가가 되어가는 것이다. 철이 들 무렵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그림을 위해 바쳐 온 그는 14 세 때 평생의 걸작을 그리고 나서도 여전히 거의 쉬는 일이 없이 계속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가 공부하는 비결은 오직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는 일밖에 없었던 것이다. 피카소는 자기 생애에 2 만 점이 넘은 그림을 남겼는데, 그만한 수량은 미술사상의 온갖 예술가들의 작업량을 능가하는 것으로 이보다 많은 수량의 작품을 제작한 예술가는 아직까지도 없다. 물론 그렇듯 방대한 양은 그가 92 세까지 장수를 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더 탄복할 만한 사실은 그가 고령이 되어서도 그와 같은 제작력이 거의 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 예로, 1969 년 1 년 동안에 그린 그림의 전시회가 있었는데, 이미 팔린 것을 제외하고도 165 점이나 되는 작품이 전시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더구나 그 대부분이 대작이었으며, 동시에 1969 년이라고 하면 그의 나이 88 세 때다. 그러면서도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직도 그릴 그림이 남아 있다." 그런가 하면 피카소는 그리는 속도가 매우 빨랐다. 이런 사실을 말해 주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있다.


14 세 때 바르셀로나에 있는 예술 학교 입학 때의 일로 1 개월 기간이 주어진 입학 시험 과제의 그림을 불과 하루 만에 완성시켰는데, 그것도 이미 입학해 있는 선배의 작품보다 훨씬 뛰어난 그림이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일쯤은 14 세에 평생의 걸작품을 그려 낸 화가로서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게 틀림없다. 언젠가 주위에서 조각가인 로댕이 보고, "당신은 천재야"라는 말을 하자, "천재라고? 그런 것은 없어. 오직 공부가 있는 뿐이야" 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피카소가 말한다면, "공부? 그런 것은 없어. 단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했을 뿐이야"라고 말했을 지돌 모른다. 분명히 학교에서 공부한다는 의미로는, 피카소는 평생을 두고 한 번도 공부한 일이 없다. 말하자면 공부를 한다는 것은 본인이 본인을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을 말하며, 그런 의미에서 화가 피카소의 매일매일은 공부였음에 틀림없다. 피카소야말로 '오직 공부가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본보기가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피카소는 또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내 인생에서 해온 모든 것은 현재를 위해서다. 다시 말해서 늘 현재를 위해서이며 그러한 현재를 지속시키려는 희망을 가지고 해왔다. 나는 탐구심이란 것을 생각한 적이 없다. 나는 표현해야 할 무엇인가를 발견했을 때, 과거고 미래고 생각하지 않고 표현했다. 이 말에 의하면 그가 말하는 공부는, 미래에 대걸작을 완성시키기 위한 준비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자신이 시도한 스타일의 변화는 뭔가 어떤 이상을 향한 발전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변신을 '발전'하고는 전연 관계가 없다. 그의 공부란 이를테면 미래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매일매일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는 소년 때부터 90 세가 지날 때까지 항상 표현해야 할 무엇인가를 발견해 그것을 계속 표현했는데, 이는 대단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호흡을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을 쉰 적이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러한 그도 일시적으로 일을 할 수 없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것은 그가 54 세 때의 일로 약 20 개월에 걸쳐 그림을 그리는 일을 중지했는데, 첫 번째 부인과의 이혼 소송으로 고민하고 괴로워했기 때움이라고 한다. 그에게는 평생 동안 여러 명의 애인이 있었으며, 그런 일이 작품이나 공부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70 세가 지나서 젊은 애인이 그의 곁을 떠나자 마음에 상처를 입어 일을 중지한 때도 있었던 것이다. 약 반 년 동안의 일이기 했지만. 아무래도 피카소에게 있어서는 여성의 존재가 공부에 방해가 되었던 모양이다. 미술관을 학교로 피카소는 많은 그림을 그렸지만, 남의 작품에 대해서도 끊임없는 호기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남의 그림을 보는 것도 중요한 공부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는 18 세 때 스페인에서는 가장 우수한 마드리드의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때의 감상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카데미의 교사는 나의 대해서 잘 몰랐으므르 착각을 하고 나에게 그림을 가르칠 생각이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기고는 거의 학교에 등교하지 않았다. 13 세 때 아버지에게서, "이젠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을 앞에서 언급했지만, 교사에게 초보적인 미술 지도를 받는 일은, 이미 그 시점에서 끝낸 후였으므로, 그 이후는 자기 혼자서 배울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서 그림을 많이 그림과 동시에 남의 그림을 많이 보는 일이었다. 마드리드에는 벨라스케스와 고야 등 스페인 화가의 작품 외에 유럽 각국의 명화를 소장하고 있는 프라도 미술관이라고 하는 훌륭한 미술관이 있다. 피카소는 자주 이 미술관을 찾아갔으며 거기서 위대한 화가들의 작품을 연구했다. 미술관이야말로 피카소에게는 학교가 다를 바 없었다. 19 세 때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한 그는 그 후에도 몇 번인가 스페인과 파리를 왕복했으며 마침내는 파리에서 살게 되었다. 처음부터 파리 그 자체가 그에게는 학교나 다름없었다. 파리의 미술관이라든가 화랑에서 고흐나 로트레크의 그림을 처음으로 보게 되어, 그런 영향을 강하게 받은 그림을 그렸다. 그에게는 남의 작품을 연구해 남의 스타일을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한 공부의 하나였던 것이다. 독창적인 것처럼 보이는 피카소의 작품도 여러 가지로 조사해 보면, 남의 작품과 비슷한 것이 적지 않다. 유명한 '게르니카'에 대해서 몇 가지 점이 지적되고 있다. "피카소는 독창적이지 않다. 그는 언제나 앵그르라든가 로트레크와 같은 옛날의 대가들의 작품을 옆에 놓고 있다."고 주장하는 예술 평론가도 있는데 그러한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그렇지만 그림의 세계 뿐만 아니라 문학이든 철학이든 또는 음악에서도 완전히 독창적인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다른 것으로부터의 영향의 산물이며, 남에게서 빌려온 성과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차르트의 경우도 그렇지만, 독창성이나 개성을 특별히 강조하는 오늘날의 교육 풍조 속에서 간과하기 쉬운 것이, 흉내를 내는 능력이나 어떤 일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능력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답은 많이 흉내를 내고 많은 것을 기억하는 길뿐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피카소의 스타일의 변화도 흉내라고 하면 좋지 않은 표현일는지 모르지만, 어떻든 그와 같은 동화 능력 또는 차용 능력에 의해서 자연적으로 탄생된 것들이라 할 수 있다. 큐비즘은 누구에게서도 영향을 받지 않은 피카소의 독자적인 회화 양식이라 일컬어지고 있으며 회화의 세계에서는 새로운 행성을 발견한 것처럼 획기적인 것이라 말하고 있다. 확실히 하나의 대상을 동시에 여러 가지 시점에서 보고, 그것을 동일한 평면에 그려 넣는다는 큐비즘은, 그때까지 아무도 시도해 본 일이 없는 새로운 방법이었다. 그렇지만 여기에도 흉내가 있었으며 차용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큐비즘의 양식을 조각에서 차용한 것 같다. 어떤 능력을 높이는 최선의 방법은 그 능력을 혹사하는 일이다. 그와 친한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한 번 본 것은 절대로 잊지 않았고, 필요에


따라 이를 자유로이 재현할 수가 있었으며,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작품에 이용했다고 한다. 이 역시도 화가로서는 훌륭한 학습 방법의 하나가 될 수 있다. 큐비즘 양식의 최초의 작품인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1907 년의 작품인데, 그는 그 2 년 전부터 조각 작품을 제작했으며 스페인의 고대 조각에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큐비즘이란 큐브 그림을 그린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즉 피카소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래 입체를 어떻게 하면 평면에 재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내내 해 왔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조각을 흉내내어 그림을 그렸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는 소상을 형성하는 기분으로 그림을 그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피카소는 무엇이든지 차용할 수 있는 예술가였다. 70 세 때 제작한 '원숭이 부자'라고 하는 약간 재미있는 조각이 있는데, 원숭이의 얼굴 부분에 장난감 자동차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장난감 자동차라는 말을 하지 않으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장난감 자동차는 완전히 원숭이의 얼굴이 되어 있다. 장난감 자동차가 원숭이의 얼굴을 닮을 발견한 데 그의 독창성이 있다. 그 밖에도 바구니라든가 수도꼭지, 자전거의 핸들(이것은 황소의 뿔이 되었다) 등을 이용한 독특한 조각 작품을 만들었는데, 하나같이 그의 차용 능력의 예리함을 나타내는 작품들이었다. 모방 훈련 어떤 미술 평론가가 피카소를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피카소는 창조력도 뛰어나지만 그의 작품 전부에서 표절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독창적으로 보이는 것도 전문가의 눈에도 이를 특별히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를 당당히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술에 어느 정도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간단히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차용한 것도 많다. 그런 것 중의 한 예가 있는데, 그것은 1951 년에 그린 '한국의 학살'이라는 그림이다. 6.25 한국 동란에서 힌트를 얻어 구상한 작품으로 나체로 서 있는 여인들의 군상과 여기에 총을 겨누고 있는 병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그 구도가 고야의 '5 월 3 일의 처형'이라는 작품과 똑같은 것이다. 피카소가 고야의 그림을 흉내내어 그렸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피카소는 고야의 그 그림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완전히 차용해 온 것이다. 차용이라든가 흉내가 지나치게 되면 그대로 베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모사 또한 피카소로서는 중요한 일의 하나였던 것이다. 피카소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남의 그림을 그대로 모사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그림을 모사하는 것은 딱한 일이다." 피카소가 18 세경에 그린 그림으로 벨라스케스의 '펠리페(Felipe) 4 세상'을 모사한 것이 있는데, 이 그림은 벨라스케스의 그림과 복사판처럼 똑같다. 17 세기의 프랑스 화가인 푸생(N. Poussin)의 작품을 모사한 '푸생에 의한 바카날르'라는 그림이 있는데, 이를 모사하면서 피카소는, "이는 자기 훈련이며 수업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피카소 나름의 독특한 점은 이렇듯 모사를 습작으로 끝내지 않고 원화를 연상시키면서 피카소의 독자적인 세계를


표현한 작품으로 승화시켜 나간 점에 있다. 그 좋은 예가 '르누아르에 의한 시슬레 부처의 상'이라고 하는 데생이다. 부인이 남편의 팔에 두 손을 걸고 있으며, 남편은 아내의 귓가에서 무엇인가를 소근대고 있는 그런 정경을 그린 것인데, 원화의 모델인 부인을 그린 것처럼 보인다. 피카소의 간략화된 선은 원화의 요점을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말하자면 피카소는 르누아르의 그림을 모사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르누아르의 그림에서 모델을 재현시켜 그것을 그리려고 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하나의 원화를 기본으로 하여 많은 연작을 그리는 이유도 알 것 같다. 예를 들면, 마네의 작품인 '풀밭 위의 점심 식사'에는 자그마치 140 점이나 되는 연작이 있다. 이 경우에는 모사라고는 하지만 피카소의 독특한 큐비즘의 수법으로 그려진 것으로 인물상은 상당히 변형이 되어 있어 마네의 그림 그 자체를 모사할 생각이었다면 그렇듯 많이 그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마네의 그림을 모사하면서도 피카소가 보고 있었던 것은 마네의 그림이 아니라, 마네의 그림을 통해서 보이는 이미지, 즉 풀밭 위에 앉아 있는 남자들과 벌거벗은 여인의 모습이었다. 그는 이것을 모든 가능성을 다 고려해 그리려고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는 마네의 모사의 결정판을 그리겠다는 의도는 없었으며, 하나의 소재에 대해서 자신의 창작의 샘이 어느 정도까지 견뎌낼 수 있을까 시도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그렇다치더라도 오직 하나의 소재를 기본으로 100 점 이상을 모사했다는 것은 대단히 변화무쌍한 재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피카소가 이 연작을 그린 것은 79 세 때의 일이었다. 피로를 모르는 끝없는 창작 의욕이며 훈련인 동시에 공부였다고 할 수 있다. 아름다운 것만이 그림은 아니다. 피카소는 예술에 있어서 온갖 가능성을 기도했으며, 항상 변화를 추구했다. 이러한 점은 여성에 대해서도 똑같았다. 여성은 그에게 있어서 공부의 최대의 적이었다는 말은 했는지, 동시에 여성은 그에게 있어 창작의 최대의 원천이기도 했다. 여성 편력을 통해 배운 시인 괴테와 똑같이, 피카소 역시도 계속해서 등장하는 여성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이를 작품에 새겨 넣었던 것이다. 피카소의 회화의 스타일도 여성과의 만남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다. 파리로 와서 얼마 안 되었을 무렵에, 실연 때문에 자살한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그는 파란 색조로 인간의 고독이나 괴로움을 테마로 한 그림만을 계속 그렸다. 그런데 페르디난트 올리비에라는 여성과 만나 동거 생활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장미 빛깔을 밝은 색조가 화면 천체를 채우게 되었다. 피카소의 일생에서, 오랜 세월을 두고 같이 생활했거나 또는 결혼을 한 여성이 모두 7 명 정도가 등장하는데, 하나같이 모텔이 되어 그림 속에 남아 있다. 그녀들의 자신과 그림을 대조해 보면, 그 그림에 그려져 있는 여자가 누구인가를 단번에 알 수가 있다. 그리고 그녀들은 대부분 처음에는 아름답게 그려져 있지만, 마지막에는 추하게 그려져 있다. 그림 속에 어떻게 그려져 있는지를 보면, 그녀들의 대한 피카소의 마음 상태를 쉽게 읽어 낼 수가 있다. 피카소의 첫 번째 부인은 말이나 보기 흉한 모습의 노파로 그려졌으며 개나 두꺼비의 얼굴로 그려진 애인도 있었다. 그런 그림은 이를테면 그녀들에 대한


최후 통첩을 들이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피카소는 태연히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자로서는 그림 속의 자신이 추방 상태에 있는 것을 본다는 것은 괴로움일 것이다." "나는 멈추어 서지 않는다."라고 말한 피카소의 말이 예술에서 뿐만 아니라 여성에 대해서는 냉혹한 정도로 실천되고 있는 것을 알고는 피카소에게 반감을 품게 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피카소는 흔히 처음에 지녔던 정렬이 식어 버리면, 상대방을 점점 귀찮게 여기게 되고, 마침내는 증오심까지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상대방을 보기 흉하게 그릴 뿐만 아니라 그림 속에서 살해해 버리는 일까지 있었다. 즉 피카소는 인체를 조각조각으로 해체한 것 겉은 그림을 여러 개 그렸다. 이를테면 그러한 그림에 여성에 대한 증오심이 표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 중에는 '3 명의 댄서'라는 그림이 있는데, 이 그림에서는 여성의 육체가 잔인하다고 할 정도로 분해되어 있다. 이것은 그의 첫 번째 부인에 대한 증오가 표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듯 피카소가 그린 여성상은, 그 당시에는 그가 사랑했던 여인의 초상화일 뿐 창작된 그림은 하나도 없다"고 피카소를 잘 알고 있는 어떤 화상은 말했다. 이런 예는 얼굴의 원형을 없애고 마치 무슨 기호처럼 변형시켜 그린 여성의 얼굴도 에 해당되는 것 같다. 그 예로서 '빨간 팔걸이 의자에 앉아 있는 커다란 나부'라는 작품이 있는데, 크게 입을 벌리고는 이를 드러내어 무엇인가를 물어뜯으려는 듯한 얼굴이 그려져 있어 보는 사람에게 혐오감을 준다. 그와 같은 추악성은 변형되어 있기 때문에 한층 더해, 이런 그림을 보고 있으면 피카소만큼 여성을 추하게 그린 화가는 없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런 그림은 외면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런데 피카소의 그림을 자세히 보면 현실적으로 가까운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들의 그림도 그렇듯 추악한 모습을 한 것이 있음을 알게 된다. 미술사를 보면 여성을 아름답게 그린 그림은 얼마든지 있다. 그렇지만 '아름다운 것만이 그림은 아니다'라는 것이 피카소의 생각이었다.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이 섞여 있는 것이 살아 있는 인간의 현실이다. 물론 그의 작품 중에 여성의 아름다움을 강하게 나타낸 작품도 있지만, 그가 그림에 있어 새로 시도한 것은 잔인할 정도로 여성을 추하게 그리는 것이었다. 변화무쌍하게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이 뒤섞여 아무리 그려도 다 그릴 수 없는 것, 그것이 인간의 얼굴이다. 피카소는 그것을 깨닫게 하려고 그렇게 그렸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얼굴만큼 호소력이 강한 것도 없다. 말하자면 피카소의 변신은 그와 같은 인간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필요한 시도였는지도 모른다. 인류애의 산증인 슈바이처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zer;1875__1965) 알자스에서 태어난 독일계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이면서 철학자요 또한 음악가인 동시에 의사이기도 한다. 21 세 때 인류에게 직접 봉사하는 생활을 하겠다고 결심한 뒤, 1905 년부터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 의사 자격을 취득해, 1913 년 가봉(당시는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의 랑바레네에 병원을 설립했다.


그리하여 평생을 두고 원주민의 진료와 전도에 헌신했다. 1952 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한편 음악가로서의 재능도 뛰어나, 1905 년에는 바흐 연구의 표준적 저작인 "바흐전"을 저술했으며 또한 오르간 연주도 한다.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 "생명의 외경" 등의 저서가 있다. 사랑의 사업을 스스로 실천한 현대의 성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재 다능했던 거인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문가 자기가 하고자 했던 일에 정통하게 되고 그리하여 일가를 이루는 데는 얼마나 많은 노력과 공부가 필요한지 모른다. 대부분은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도중 하차하거나, 아니면 포기한 채 생각만으로 끝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니 대부분이 그런 길을 걷고 만다. 그런데 슈바이처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음악가(피아니스트, 작곡가)로 대성해 그 정상의 자리를 차지했고, 동시에 신학자(목사 및 예수 연구가)로서 뛰어난 연구 업적을 남겼으며, 그밖에 바흐 연구가, 괴테 연구가로서도 이름을 떨쳤다. 그가 얼마나 다재 다능했으며, 이를 위해 쏟은 정성과 노력이 얼마나 대단했나 하는 점을 헤아려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누구도 쉽게 하지 못할 귀한 일을 해놓고 갔다. 그는 대학 교수이자 목사이면서 다시 학생이 되어 공부를 시작해서 의학 박사가 되어 의술을 철저하게 익힌 뒤 남아프리카의 적도 부근의 오지에 가서 나병 환자를 위시해 열악한 환경에서 굶주리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인술을 펼쳐 그들을 돕고자 온 힘을 기울였다. 이 점이 그의 가장 위대하고 성스러운 점이었다. 사랑은 설교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절실하게 인식해, 그 사랑의 길을 직접 실천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인생은 90 세에 이르도록 계속되었다. 말하자면 슈바이처의 인생은, 한 인간이 일생 동안 도대체 얼마만한 일을 해낼 수 있는가 하는 한계점을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에게서 크나큰 격려와 희망을 얻을 수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또한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을 소중히 생각하여 그러한 예술과 문화를 키우려고 노력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가 다재 다능한 인간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지만, 그것보다도 옳다고 생각한 일에 대해서는, 어떤 어려움이 뒤따른다고 해도 이를 끝까지 해내는 강한 의지와, 제한된 시간을 충분히 활용하는 실행력, 모든 어려움을 끝까지 참고 버텨내는 정신력과 체력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아프리카로 떠나겠다고 결심한 것은 그의 나이 21 세 때로, 그때 이미 그는 자기 인생을 남을 위해 바치겠다는 각오가 서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더위가 유달리 심한 콩고 강 유역의 삼림 지대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프리카 부족의 얘기, 농작물이 잘 자라지 않는 늪지대에서 조금이라도 농작물을 더 얻기 위해 고투하고 있으며, 그 중에는 살이 문드러져 그나마 부락에서 추방된 나환자도 상당수가 된다는 이야기하며, 사람이고 가축이고 마구 죽어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그렇듯 참혹한 상태에서도 몇 백 킬로미터 사방에 의사가 한 명도 없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리하여 이들을 도와주지 않는 것은 오히려 죄를 짓는


일이라고 절실히 깨달았던 것이다. 그렇듯 많은 일을 했으며, 버림받은 자를 구제하고, 인류애를 직접 실천하는 등 누구보다도 하기 어려운 초인 내지 성인의 길을 걸은 슈바이처. 그렇다면 과연 그는 소년 시절, 청년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내성적이면서도 지기 싫어하는 성미 어느 늦가을의 오후 4 시경. 산기슭에 가로놓여 있는 조용한 마을. 초등 학교에서 그날의 수업이 끝나자 학생들이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들 중에는 하급생인 슈바이처 소년과 그의 친구 한 명도 있었다. 그 친구와 슈바이처는 어울려 하교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친구인 그 소년은 슈바이처보다도 체구가 훨씬 컸다. "너 나하고 힘 겨루기를 하고 싶다며? 나는 힘이 너보다 훨씬 세단다. 너 정도는 도저히 내 상대가 되지 않아!"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그것이 사실인지 겨뤄 볼까?" 평상시 그 친구되는 소년이 힘자랑을 했으며 슈바이처 소년의 나약해 보이는 체구를 깔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슈바이처 소년은 비록 연약해 보였지만, 뭔가 속에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옹고집 같은 것이 숨어 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들판으로 달려 나간 두 소년은 그곳에서 한판 씨름을 벌였다. 두 소년은 서로 상대방을 내동댕이치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한동안 팽팽한 힘겨루기가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슈바이처가 짧게 깎은 머리로 상대방의 가슴을 내질렀다. 상대방 소년이 놀라서 얼떨결에 손의 힘을 빼는 순간, 이 틈을 놓칠세라 몸을 뒤로 빼면서 상대방을 잽싸게 옆으로 당겼다. 상대방의 몸이 앞으로 쏟아지면서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이윽고 슈바이처가 친구의 상체를 타고 앉아서 생글생글 웃었다. "맛이 어떠니? 내가 분명히 이겼지, 응 그렇지?" "그래 네가 이겼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뭐냐?" "그렇지만 너는 목사집 아들이라 1 주일에 두 번씩이나 맛있는 고기 수프를 먹으니까! 너는 아직 한 번도 배를 곯아 본 일이 없지?" 이런 친구의 말에 슈바이처는 한마디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 친구의 말대로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고, 그의 가족은 목사관에서 살고 있었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배를 곯아 본 일은 없었다. 슈바이처는 집에 돌아온 후에도 오래도록 친구가 한 말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똑같은 친구이면서도 한편에서는 배를 곯는 쪽이 있다는 생각,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 평등치 못한 층이 있다는 생각이 어쩌면 아프리카 적도로 불쌍한 사람을 돌보겠다고 나서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조숙했다고 할는지, 이미 그 당시 그렇듯 어른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영향으로 그날 저녁 식탁에 나온 고기 수프를 슈바이처 소년은 영 먹으려 하지 않았다. '다른 애들보다 잘산다고 여겨질 짓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 그는 이렇게 결심하게까지 되었던 것이다. 그의 이와 같은 내성적이고 수줍은 성격은 어머니를 닮아서인지도 모른다. 두 사람 다 같이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도 그 내용을 좀처럼 말하려 하지


않았다. 서로가 다 같이 마음속으로 상대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얼마 안 된 어느 일요일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어머니가 슈바이처에게 입히려고, 아버지의 헌 외투를 그의 몸에 맞도록 각에서 고쳐 가지고 왔던 것이다. 그렇지만 슈바이처는 그 외투를 입고 가지 않았다. "어머니, 오늘은 춥지 않으니까 입고 가지 않을래요" 하고 거절했던 것이다. 자신이 다른 친구와 비교해서 특별해지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그의 차림새는 분명 추워 보였으며, 또한 실제로 한기가 몸속으로 배어들어 추웠지만, 슈바이처는 절대로 떨지 않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다져먹고 있었던 것이다. 새 모자를 만들어 주었을 때도 마찬가지로 낡은 헌 모자를 고집하여 그것을 쓰고 등교했다. 이런 사정이 아버지의 귀에까지 들어가 꾸중을 듣기도 했다. 그는 물론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었으며, 또한 존경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부모님의 말을 순순히 따라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학교 친구들이 넝마 같은 낡은 옷을 걸치고 있는데 자기 혼자만 좋은 옷을 입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루는 목사관으로 손님이 찾아왔는데, 슈바이처 소년이 낡은 스웨터에 벙어리 장갑을 끼고 오래된 털모자를 쓰고 나타났다가 아버지로부터 크게 꾸중을 듣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러고서도 슈바이처는 다른 친구들이 갖지 않는 물건을 자기 혼자서 가질 생각은 전연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아버지에게 단장으로 몇 차례 얻어맞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아무에게도 말은 하지 않았으므로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친구들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적당히는 하지 못하는 체질 슈바이처가 겨우 다섯 살이 되었을 때 그는 아버지로부터 구식 피아노로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소년은 그다지 큰 힘을 들이지 않고서도 악보 읽는 법을 익혔다. 그리하여 쉽게 연주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슈바이처는 악보를 보면서 연주하기보다도, 그저 귀로 듣기만 한 노래나 곡에 혼자서 생각해 낸 반주를 붙여서 치는 것을 더 좋아했다. 피아노 앞에서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는 줄 알았던 슈바이처가 스스로 작곡한 곡을 열심히 즐기고 있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감회가 새로웠다. 친정 아버지도 훌륭한 음악가였는데, 이미 돌아가셨지만, 아들이 외할아버지를 닮은 것 같아서였다. 아버지가 꼭 그런 분이셨기 때문이다. 어떻든 심심하면 자신도 모르게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두드리는 것이 거의 습관회되다시피 했다. 말하자면 그것이 은연중에 공부가 되었던 것이다. 슈바이처의 나이 여덟 살이 되었을 때 피아노의 기초가 튼튼해지자 파이프 오르간을 가르쳐 달라고 졸라 드디어 이를 배우게 되었다. 이때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너는 점점 외할아버지를 닮아 가는구나. 저 낡은 피아노도 외할아버지가 엄마한테 주신 거란다."


"외할아버지도 파이프 오르간을 치셨나요?" "물론이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만, 내가 어릴 적에는 마을 사람들이 외할아버지의 연주를 듣고 싶어서 늘 교회로 찾아와서 열심히 듣곤 했단다. 외할아버지는 그 즉석에서 즉흥곡을 치기도 했고, 연주중에 화음을 연달아 생각해 낼 수도 있으셨단다." 이리하여 어느 날 저녁 슈바이처는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돼 있는 교회의 가파른 뒷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수염이 무성한 나이든 선생이 그에게 파이프 오르간을 가르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슈바이처는 걸상에 앉았지만 오르간의 발판에 쉽게 발이 닿지 않았다. 늙은 선생님이 음정의 하나하나를 꺼내 놓은 다음, "자, 건반을 눌러 보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슈바이처는 자기가 대단히 좋아하는 바흐의 곡을 손으로 치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칠 수 있었던 건반이었지만, 거기서 울려 나오는 현묘한 음에 자신이 매료되어 들어갔다. 그로부터 1 년도 채 되기 전인 아홉 살 때, 슈바이처는 예배 시간에 대리 주자를 맡을 수 있을 만큼 솜씨를 갖추게 되었다. 언제나 자기가 치는 음에 사로잡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이었다. 1884 년 아홉 살 때 슈바이처는 초등 학교를 졸업하고, 계곡을 훨씬 거슬러 올라간 곳에 있는 뮌스터라는 읍의 중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슈바이처는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함께 들으면서 성장했기 때문에 2 개 국어를 다 같이 잘 구사했다. 편지를 불어로 쓰면서도 학교에서는 독일어로 수업을 받는 식이었다. 등교길은 4 킬로미터의 산길로 이어져 있었다. 그는 시골 태생의 소년이었으므로 걷는 것이 즐거웠다. 그는 완전히 자연과 친해져, 될 수 있으면 혼자 걷고 싶어했다. 그렇다고 남과 사귀기를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부르르 화를 내는 버릇은 있었지만, 그는 남들이 호감을 갖게 하는 좋은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만 매사에 적당히 해버리는 일이 없었다. 운동 경기에 있어서도 남들이 적당히 하고 말면 화를 잘 냈다. 특히 자신과 대적하여 경기를 했을 때, 예상보다 쉽게 상대방이 지게 되면, 일부러 져줬다고 화를 냈던 것이다. 그렇지만 조그만 일에도 잘 웃었으므로, 그에게는 웃음보라는 별명이 붙여지기도 했다. 심지어 그는 웃을 때에도 온 힘을 다 쏟아 힘껏 웃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런 식으로 매사에 전력 투구하는 습성이 생겨 버렸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웃고만 지낼 수 없다는 생각에 가끔씩 빠져들게 되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동물을 무척 좋아했다. 늙은 마리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장면, 특히 끌려가지 않으려고 꽁무니를 빼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그 장면이 몇 주일 동안 눈앞에 떠올라 몹시 애를 먹었다. 밤에 잠자리에 들어서도 눈을 감기만 하면 눈앞에 그 광경이 어른거려 잠을 이루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런 의문을 갖게 되었다. 어째서 인간에 대해서만 기도를 하는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모친이 잘 자라는 키스를 하고 돌아간 다음, 촛불이 꺼진 어두운 방 안에서 짐승들을 위해 몇 분 동안의 짧은 기도를 드리곤 했다. "하늘에 계시는 아버님, 목숨 있는 모든 것에 자비를 베푸시옵서. 동물들을 재난으로부터 지켜 주시어 편안히 잠들게 하옵소서."


그 후 새를 잡는 고무총을 친구가 만들어 주었지만 그는 결코 새사냥을 하지 않았다. 친구가 돌멩이로 새를 맞추어 잡는 광경을 목격하고는 더욱 그러했다. 주둥이를 벌리고 파닥거리면서도 따뜻한 체온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던 참새의 마지막 모습. "너 죽이지 말지어다!" 하시는 일요일마다 아버지가 읽으시는 성경 말씀이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하여 친구와 어울려 참새들이 몰려 있는 나무 근처에 접근했을 때, 슈바이처는 자기도 모르게 손바닥을 딱 쳐서 새들을 날려 보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변명도 늘어놓지 않고 친구 혼자 남겨놓고 뛰어서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꼴찌에서 우등생으로 슈바이처의 친척 중에 마리 아주머니와 루이 아저씨가 있었다. 아저씨는 공장이 많은 퀼루즈에서 학교 전체의 감독관으로 있었고, 마리 아주머니는 전직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으므로, 슈바이처의 부모가 다섯 아이나 돌보고 있는 것을 딱하게 여겨, 목사의 아들인 슈바이처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는 퀼루즈 고등 학교에 입학시켜 졸업할 때까지 집에 두고 보살펴 주기로 했다. 슈바이처는 낯선 퀼루즈까지 간다는 것이 어쩐지 자기 혼자서만 쫓겨간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가족과 오랫동안 헤어진다는 서글픔도 꾹 참고 아마 말도 없이 부모의 말씀에 따랐던 것이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슈바이처는 다시 고향의 부모 곁으로 돌아왔다. 겨울 방학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정색을 하고 슈바이처에게 말했다. "내가 너에게 얘기해 두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생겼다." 슈바이처는 미리 재빠르게 알아차리고는, "제 성적표 때문에 그러시죠?" 하고 물었다. "그래, 그렇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단다." 슈바이처는 고개를 숙인 채 아버지의 말을 듣기만 했다. "교장 선생님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네 일로 상의할 것이 있으니 한 번 만나러 와 달라는 구나. 성적이 좋아지지 않는다면 수업료 면제 자격을 부득이 취소할 수밖에 없다는 거야. 그뿐만이 아니고 결국 너를 퇴학시키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까지 말씀하셨단다." 아버지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아저씨 아주머니도 크게 낙담하고 계시단다. 만약 그 두 분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우리도 널 고등 학교까지 보낼 엄두를 내지 못했을 거야." "죄송해요." 슈바이처는 이렇게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나는 네 머리가 둔해서 이렇게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뭔가 그럴 만한 사연이 있어서겠지. 나는 너를 믿고 있다. 그러니 새 학기에 다시 학교에 가서 한 번 해보지 않겠니?" 슈바이처는 얼른 대답을 못했다. 가족들과 떨어져 있는 그곳 생활로부터 가능하면 속히 빠져나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예, 아버지 해 보겠어요" 하고 간단히 대답했다. 슈바이처는 그 다음 학기에 다시 고등 학교로 돌아와 열심히 공부를


시작했다. 평상시 싫어했던 학과에 특별히 힘을 경주했다. 그리하여 여태까지 질색이었던 수학도 남에게 뒤지지 않고 따라갈 수 있게 되었다. 남에게 지기 싫어했던 오기가 그대로 발동했던 것이다. 다만 책을 읽는 속도가 지나치게 빨라 아주머니의 충고를 받았다. "남의 글은 문장의 맛을 볼 수 있어야 해. 문장이 가장 중요하니까!" 그리고 아주머니는 루이 아저씨의 서재에 있는 많은 책들을 자유로이 꺼내어 읽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러므로 그 동안 학교 공부만 열심히 한 것만은 아니었다. 주석이 달린 옛날 책을 비롯해 역사 소설, 전기문, 일기 등 가리지 않고 탐독하는 생활을 보냈다. 이윽고 선생님은 이제까지와 다르게 슈바이처가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의 성적은 하루가 다르게 올라갔다. 마침내 학기말 성적표에 슈바이처는 꼴찌에서 상위권의 성적으로 진입해 있었다. 슈바이처는 부활절 휴가를 보내기 위해서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무렵을 경계로 아저씨와 아주머니하고도 아무런 격의없이 친하게 지낼 수가 있었다. 그 밖에도 슈바이처는 슈테판 교회 옆에 있는 파이프 오르간 주자인 뮌히 선생에게 매일 빠짐없이 피아노를 배우러 다녔다. 선생은 채 30 세가 안 되는 청년으로 땅딸막한 편이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집을 갓 떠나온 외로움으로 해서 피아노 공부도 잘 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지 모차르트의 소나타를 뮌히 선생이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집에서 연습해 가지고 가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슈바이처는 그 시간에 즉흥곡을 치는가 하면 마리 아주머니의 옛날 교본에 나오는 곡을 멋들어지게 치는 등 모차르트의 곡은 전연 연습도 하지 않았다. 하루는 슈바이처가 모차르트의 곡을 서툴게 치기 시작하자, 이것을 한참 듣고 있던 선생의 입에서 드디어 호통 소리가 터져나왔다. "너에게는 이렇듯 아름다운 곡을 칠 자격이 없어!" 슈바이처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니, 선생님은 뭘 모르셔!" 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철든 이후 음악은 슈바이처에게 있어 가장 큰 기쁨이었기 때문이다. 그날부터 1 주일 동안 슈바이처는 모차르트의 곡을 정성 들여 연습했다. 이미 그는 전에 노래 부분에 해당되는 멜로디와 하프 곡 같은 반주부가 마음에 들어 여러 번 쳐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곡에 가장 어울리는 운지법까지 생각해 냈다. 다음주에 슈바이처는 레슨을 받으러 선생한테로 갔다. 슈바이처는 정성 들여 연습했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극히 자연스럽게 쳐나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뮌히 같은 음악 전문가는 연주만 들어도 휜히 아는 법이다. 슈바이처가 연주를 마치자, 선생은 그의 어깨에 다정히 손을 얹고는, 단지 "고맙다"고만 말했다. '고맙다'는 간단한 말에 모든 뜻이 다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날 이후 두 사람은 친한 친구 사이의 관계로 발전했다. 어울려 연탄을 치기도 했으며 교향곡의 총보를 읽기도 했다. 그리하여 15 세가 되었을 때 뮌히 선생으로부터 정식으로 파이프 오르간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본격적으로 성 슈테판 교회의 음전이 62 개나 있는 파이프 오르간으로 배우게 되었다. 선생은 슈바이처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손발을


정확하게 움직여 침착하게 서두르지 않고 제대로 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슈바이처는 곧잘 넋을 잃고 파이프 오르간 연주에 몰두하곤 했다. 이렇게 해서 1 년 뒤에는 퀼루즈 합창단이 브람스의 레퀴엠을 공연하게 되었을 때 벌써 슈바이처는 파이프 오르간을 맡을 만큼 솜씨가 크게 향상돼 있었다. 합창단을 지휘하는 뮌히 선생은 아무런 걱정없이 파이프 오르간을 슈바이처에게 맡길 수가 있었다. 바이올린과 첼로 소리가 노랫소리에 녹아들었으며 이어 슈바이처가 치는 파이프 오르간의 음향이 예배당 구석구석에까지 넘치면서 다른 음과 한덩어리로 조화를 이루었다. 슈바이처의 가슴은 한없는 기쁨으로 부풀어올랐다. 자신이 마침 내 소망을 이루어 진정한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졸업 시험의 옷차림 이윽고 고등 학교의 상급생이 되자 슈바이처의 수학 실력도 아르바이트를 해서 가르칠 수 있을 정도까지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8 개월 동안 수학을 가르쳐서 30 달러나 저금할 수 있게 되었다. 슈바이처는 그 돈으로 중고 자전거를 한 대 구입하여 고향으로 돌아갈 때 타고 가서는 여름 방학 내내 아침에 서늘할 때 포도주 한 병과 잘 구운 빵 한 개 및 소시지 몇 조각을 배낭에 싸 넣고는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섰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자연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그로부터 1 년이 지나자 슈바이처는 18 세가 되었으며, 이제 졸업 시험만 무사히 치르면 졸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졸업 구술 시험을 받을 때는 규칙상 정해진 옷을 차려입고 가서 받아야 했다. "검정 색 저고리와 줄무늬 바지가 아니면 안 된다!" 마리 아주머니의 말이었다. 그런데 슈바이처에게는 검정색 저고리는 있었지만, 줄무늬 바지는 없었다. "그렇다면 새 바지를 하나 마련해야겠구나" 하고 마리 아주머니가 넌지시 말했다. 그렇지만 슈바이처는, "무슨 말씀이세요" 하고 단호히 거절했다. "그저 시험날에만 아저씨 것을 하나 빌려 입도록 해 주세요." 그리하여 아저씨에게 빌린 바지 하나를 시험날 아침까지 양복장에 걸어놓은 채 그대로 지냈다. 이윽고 시험날 슈바이처는 일찍 일어나서 불을 켜고는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지를 입어 본 슈바이처는 깜짝 놀랐다. 땅딸막한 루이 아저씨의 옷이 여위고 키가 큰 슈바이처의 몸에 맞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바지는 슈바이처의 허리께서 헐렁헐렁했으며 길이가 간신히 슈바이처의 무릎에 겨우 닿을 정도로만 내려와 있었다. 슈바이처는 하는 수 없이 바지 멜빵에 끈을 달아 길게 늘였지만, 여전히 장화 위에 닿을까 말까 할 정도였다. 슈바이처는 그렇듯 어울리지 않는 짧은 바지를 입고는, 서둘러 아침 식사를 마치고 집에서 뛰쳐나갔다. 학교에서는 동급생들이 시험관실 밖의 복도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긴장하고 있었으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슈바이처의 옷차림을 보고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도대체 그게 뭐니?"


"아저씨 바지야. 빌려 입었더니 이렇게 짧지 뭐니?" 친구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배를 움켜쥐고 숨이 막힐 정도로 웃어댔다. 역사 시험에서, 다행히 슈바이처가 한 번 읽고 깊이 생각한 바 있던 문제에 대해 시험관이 질문을 했으므로, 마침내 시험관과 토론을 벌일 정도까지 되어 무난히 끝마칠 수 있었다. 슈바이처는 방학이 되자 부모님과 가족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런 어느 날 우편 배달부가 시험 성적이 들어 있는 봉투를 주고 갔다. 부친이 봉투를 빼앗아 갔다. "내가 더 궁금하니 먼저 봐야겠다!" 이윽고 봉투를 뜯어 본 부친이 말했다. "합격이다. 시험관이 네 역사 지식에 대해 대단히 만족했다고 써 놓았구나! 그렇다면 이제 드디어 대학에도 갈 수 있게 되었구나!" 둘이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아버지는 아들의 어깨에 다정히 손을 얹고는 어깨를 밀었다. 1893 년 가을 18 세의 슈바이처는 스트라스부르 대학생이 되었다. 그 후 20 년 동안의 대부분을 그는 이 도시에서 보냈다. 슈바이처는 이 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함과 동시에 음악 공부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때문에 아침에 강의를 듣기 위해서 대학으로 자전거를 타고 갔다가는, 이내 점심을 먹으러 기숙사(성 토마스 신학교 기숙사)로 돌아왔다가, 이번에는 도서관이나, 아니면 파이프 오르간을 연습하기 위해 교회로 다시 달려가곤 하였다. 그는 파이프 오르간 연습에 들이는 것과 같은 정도의 정성과 노력을 또한 다른 학문 연구에도 쏟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19 세가 되었을 때 1 년 기한으로 군복무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군생활에서도 기회 있을 때마다 열심히 독서를 하는 등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행군중 단 10 분의 휴식 시간이 있어도 그는 그리스어로 된 성서를 호주머니 속에 넣고 있다가 꺼내서 읽었다. 또는 밤에 야영을 할 때 전우들이 총검 끝에 소시지를 꿰어 구워먹고 있을 때에도 공부를 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어려운 일은 솔선해서 했다. 포차가 진창에 빠졌을 때 혼자 앞장서서 끌어내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1 년간의 군대 복무를 끝낸 그는 다시금 자유로이 대학 생활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의 독일의 대학에서는 한 과목을 대개 5 년 내지 6 년에 걸쳐 깊이 연구하고 나서 학위 논문을 써내야 했다. 슈바이처는 신학 학위를 딸 계획이었지만, 철학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다. 슈바이처는 우연히 학교의 뜰에서 철학 교수와 마주친 일이 있었다. 교수는 그의 팔을 잡고 걸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고 말했다. "자네는 철학 학위를 따고 싶은 생각은 없는가?" "저는 신학 학위를 딸 생각인데요" 하고 슈바이처가 솔직히 대답하자 교수가 말했다. "그것도 좋지만 그래도 자네에게는 철학자가 될 소질이 충분히 있다는 생각이 드네. 자네 같으면 양쪽을 다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교수는 평소에 슈바이처가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몇 차례 보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 슈바이처는 그 후 1 년이 지난 22 세 때에는 두 개의 학위를 동시에 따기 위해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혼자서만 행복할 수 없다는 사명감


그 무렵 슈바이처의 집안은 퀸스바흐의 새집으로 이사했다. 한 신도가 자신의 집을 희사한 것이다. 슈바이처는 21 세의 여름 방학 때 이 집으로 돌아왔다. 따스하고 아늑해 살기 좋은 집이었다. 그러나 슈바이처는 이때부터 생각이 많아졌다. 훌륭한 대학 교수가 될까, 아니면 아버지처럼 시골의 목사가 되어 좋아하는 산골 마을에서 조용히 일생을 보낼까, 아니면 비도르(C.M. Widor) 선생처럼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가 될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모두 아름다운데, 과연 자신에게 그것을 누릴 권리가 있는 것일까? 즉 세상에는 비참한 일이 많은데 자신이 이렇게 혼자서만 행복해도 되는 것일까? 인간에게 학대받는 소나 돼지, 그 밖의 동물들이 슬피 울어대는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명했다. 자신은 이미 스물 한 살이 되었으며 건강한 체구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뒤에는 행복한 가정이 있다. 동시에 앞에는 만족할 만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나에게는 나라가 있고 친구가 있으며, 책이 듬뿍 있고 음악이 있다. 그런데 과연 이런 일들을 누릴 권리가 나에게 있는 것일까? 나는 결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는 한 자신만의 행복을 기뻐하고만 있을 수 없다. 어떻게 하면 그러한 행복을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을까? 그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그런데 자기에게 주어진 것은 자기 자신뿐이 아닌가. 슈바이처는 자신의 계획을 천천히 세워 나갔다. 즉, 30 세까지는 음악과 학문을 계속하고, 그 후부터는 자신의 생활 전부를 바쳐 세상 사람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때 슈바이처는 비로소 "나(예수)를 위해 제 생명을 잃는 자는 그것을 얻으리라"고 되어 있는 성경의 말씀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즉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그 일이란 것을. 그리하여 처음으로 안정되고 흔들릴 줄 모르는 기분을 맛보았다. 마침내 외계의 행복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 속의 행복도 차지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슈바이처는 철학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파리로 나가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때로는 밤새도록 논문의 주제를 선택하기 위해 독일 철학자의 두툼한 책과 씨름하기도 했다. 동시에 파리에 있는 기회를 이용해 두 선생에게 피아노를 공부했으며, 파이프 오르간의 대가인 비도르 선생에게 파이프 오르간의 지도를 받기도 했다. 모두가 그에게 공부에 대한 강한 의욕이 있었으므로 가능했던 일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이 있듯이, 자신에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서는 천재는 고사하고 평범한 사람도 되기 힘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슈바이처는 종종 밤을 꼬박 새워 파이프 오르간을 연습했으며, 스트라스부르로 돌아와서는 논문을 완성해 24 세 때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슈바이처의 지도 교수는 대학에 남아서 철학 교수가 되어 주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그 무렵의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될 생각이었다. 25 세 때 신학의 최종 시험에 합격한 그는 성 토마스 신학교 기술사와 강을 마주보고 있는 성 니콜라스라는 이름의 자그마한 교회의 부목사가 되었다. 이 모두가 다 남이 잘 시간에 자지 않고 시간을 아껴 열심히 공부한 결과로서 얻어진 것이었다.


주말 휴가 때는 퀸스바흐까지 짧은 기차 여행을 하여 마을 교회에서 아버지 대신 예배를 주재하기도 했다. 봄에는 파리의 숙부와 숙모를 뵙고 또한 계속해서 비도르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말하자면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공부를 위해 쏟아넣었다고 할 수 있다. 슈바이처는 성 니콜라스 교회에서 주는 월급이 14 달러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런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다. 다행히 성 토마스 신학교의 기숙사에서 기거할 수 있었다. 슈바이처는 스트라스부르에 있었던 수년 동안 성가대에 연습할 때면 반드시 파이프 오르간으로 반주를 했으며, 나중에는 공연 때에도 반주를 했다. 파이프 오르간의 제작에 관한 논문도 완성했다. 그는 교회에서 예로부터 전해 오는 소리가 깨끗한 파이프 오르간을 떼어내고 장치가 복잡하고 소란스럽기만 한 커다란 현대식 오르간을 설치하는 것을 보고 몹시 실망했다. 그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소가 좋고 나쁨은 뿔이 멋있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지 않고 젖이 좋으냐 나쁘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슈바이처는 바흐에 관한 책과 파이프 오르간 제작에 관한 책을 동시에 썼으며, 또한 신학에 관한 책도 함께 써 갔다. "책을 건드려서는 안 됩니다" 이렇듯 그는 목사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음악가였고 또 저술가이기도 했다. 마침내는 스타라스부르 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며 28 세 때는 성 토마스 신학교의 사감에 임명되었다. 그 동안 제일 나이가 젊은 사감이 된 것이다. 성실하고 학식이 높으며 모든 면에 있어 열심인 그를 주위의 여러 목사들이나 학생들은 다 같이 존경했으며 좋아했다. 누구나가 몸도 마음도 넓고 큰 이 교수를 마음에 들어했다. 어떤 일이든 하나밖에 모르는 식으로 마음이 꽉 막히지도 않았으므로 학생들과 농담도 잘 나누었다. 그런가 하면 소란을 떨거나 당황해 쩔쩔 매는 일도 없이 산더미 같은 일을 척척 처리해 나갔다. 슈바이처도 현재의 처지를 만족스러워 했다. 강이 바라다보이는 위치에, 해가 잘 드는 넓은 방이 몇 개 배당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봉급도 많이 올랐으며 역사가 오래된 도서관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가 있는 동시에 대학에는 훌륭한 친구들이 있었다. 성 토마스 신학교에는 중년이 지난 독일 태생의 과부가 사감의 시중을 들어 주는 가정부로 일하고 있었다. 몸을 사리는 일 없이 슈바이처를 위해 그의 주변을 돌봐 주었다. "상냥하고 너그러우신 분이시죠. 차려 드리는 것은 무엇이든지 맛있게 드시고 옷은 손질이 되었건 안 되었건 마음에 두지 않으세요. 얘기를 나눌 때도 유명하고 훌륭한 분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부에게는 단 한 가지 고민거리가 있었다. 여기저기에 온갖 책들이 산더미를 이루고 있는 탓에 서재가 어지러웠기 때문이다. 집안 어디에나 책이 널려 있었다. 벽난로 선반을 비롯한 모든 선반은 말할 것도 없고 창턱이나 의자 위 등에 비딱하게 기울어진 채로 책들이 쌓여 있었다. 가끔씩 털이개로 책의 먼지를 털려고 하면 슈바이처가 "책을 건드려서는 안 됩니다"라고 꼭 한마디 했다고 한다. 그래서 함부로 털이개도 댈 수 없는


처지였다. "이 바닥에 쌓여 있는 책더미 하나하나가 제가 지금 쓰고 있는 논문의 한 장 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다 앍고 논문을 끝낼 때까지는 고스란히 그대로 둬야 합니다." 책상 위에는 슈바이처 자신이 쓴 자잘하고 예쁜 원고 뭉치가 놓여 있었으며 피아노 위에도 이와 유사하게 공부와 관련된 자료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문제의 가정부는 매일매일 원고 뭉치에 쫓겨다니다시피 방에서 피해 나와야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슈바이처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었지만, 본인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것은 본인이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일생을 고통받고 있는 다름 사람들을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고 단단히 마음먹고 있었다. 즉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그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학생 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가난한 가정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원조한 일이 있었는데, 그 모임의 멤버 중 이목구비가 반듯하게 아름다우며 머리가 좋아보이는 검은 눈동자의 아가씨가 있었다. 헬레네 브레슬라우라는 이름의 처녀로 슈바이처가 교수로 있는 대학의 교수의 딸이었다. 그녀는 후에 슈바이처의 인품과 인격에 매료되어 아프리카 구호 사업에 따라가겠다고 자청하고 나서, 마침내 1912 년 그가 37 세 때(즉 아프리카로 떠나기 1 년 전)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되었다. 아프리카 구호 사업에서 그녀는 아내인 동시에 병원의 부원장 겸 간호사로 남편을 적극적으로 돕는다. 만약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슈바이처의 아프리카에서의 성과도 그렇게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가 82 세가 될 때까지(1957 년에 사망) 약 20 년에 걸친 온갖 고생과 시련이 시작된 셈이다. 한편, 사감 시절의 어느 날 슈바이처는 손님이 와서 잊고 두고 간 녹색 표지의 소책자를 보게 되어, 콩고 지방의 늪지대에 살이 문드러진 나병 환자들이 부락에서 쫓겨나고 있다는 내용의 글을 읽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생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그들을 돕지 않는다면, 죄를 짓는 것이라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나는 의사가 되어 의술로서 그들을 직접 도와줄 수밖에 없다. 어서 의술을 익혀 의사가 되어야지!'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고 찾아다니던 단계는 이제 끝났다고 다짐했다. 이렇게 되어 교수요, 목사요, 이름 있는 음악가가 다시금 의학생이 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교수가 다시 학생으로 우선 성 토마스 신학교 사감직을 사임하겠다는 편지와 친구들에게 자기 결심을 알리는 내용의 편지, 그리고 비도르 선생과 부모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각각 적어 우체통에 넣었다. 비도르 선생하고는 끝가지 이 문제를 놓고 토론을 했으며, 부친은 역정까지 내며 다음과 같이 반대했다. "너는 모르느냐? 거기가 백인들에게는 얼마나 고약한 땅인지, 적도에서 60 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며 일사병에다 호우에다 열사와 같은


더위에다,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냐! 세계에서 건강에 제일 나쁜 고장이란 말야." "그러니까 더욱더 의사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슈바이처가 고집을 꺾지 않고 주장했다. 비도르 선생과의 토론에서는, "이 일은 제가 어떤 일이 있어도 꼭 해야 할 일입니다"고 단정적으로 선언하듯이 못을 박았다. "하지만 자네의 재능과 학문을 전부 내동댕이치고 야만인과 생활하기 위해 가다니! 내가 생각하기에는 마치 위대한 장군이 소총을 들고 제 1 선에 뛰어드는 것처럼 어리석게만 보이네." 비도르 선생은 이렇게 말하며 못내 아쉬워했다. "그리고 목사로서도 그곳에 갈 수 있지 않은가?"고 비도르 선생이 말을 보탰다. "그곳에는 목사보다 의사가 더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설교만으로 그쳐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직접 그들의 병을 고쳐 주고 곪은 곳을 도려내어 치료해 줘야 합니다." 한편 스타라스부르 대학의 의학부장은 슈바이처가 학생으로 등록하겠다고 연구실을 찾아간 당초에는 통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신념과 사명감과 의지로 불타는 그의 행동을 아무도 꺾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어 10 월 말의 어느 날 아침 이미 30 세가 된 슈바이처는 안개 낀 길을 지나 처음으로 해부학 강의를 들으러 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니콜라스 교회에서 일요일마다 설교를 했으며 대학에서도 강의를 계속했다. 성 토마스 사감직을 그만두었을 때는 12 년간 정들었던 곳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여러 가지고 착잡했다. 학생들도 이제까지 제일 인기가 있었던 사감을 잃는다는 마음에 우울해했다. 그리하여 그곳 기숙사에서 살고 있던 루터 교회의 회장이 자신의 거처에서 방 네 개를 제공해 주었다. 이사 때는 제자들이 짐을 옮기고 가구 등을 챙겨 주었다. 슈바이처는 이곳에서 5 년 동안 괴로운 생활을 보내게 된다. 처음 2 년이 지나자 해부학, 생리학, 동물학, 화학을 포함해서 물리학 자격 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그런데 나이 많은 할머니 가정부의 고민이 컸다. 아무리 일찍 일어나서 아침밥을 차려 가져가도 슈바이처는 언제나 이미 일어나 두툼한 의학 교과서와 씨름하고 있거나 현미경을 들여다보고 있거나, 아니면 뭔가를 노트에 기록하고 있었다. 한잠도 자지 않고 밤을 새워 공부를 해서 눈이 벌겋게 충혈된 적도 많았다. 가정부가 뭐라고 걱정하는 말을 해도 그저 "고맙소" 하고 한마디 할 뿐 여전히 하던 일을 계속했다. 한편 의학부의 젊은 학생들은 교수와 나란히 앉아 공부하는 것이 쑥스러웠으며 또한 겁을 먹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슈바이처가 강의실로 들어오면 나누던 대화도 뚝 중단하고 행동 또한 조심스러워졌다. 그렇지만 슈바이처가 대범하게 자기들을 대해 주자 차차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으며 서로 허물없이 대화를 주고받게 되었다. 슈바이처는 동시에 바르셀로나라든가 파리의 음악가 그룹의 연주회에 출연해 그럭저럭 학비를 벌었다. 공연이 끝나면 즉시 스트라스부르 행 밤차로 돌아왔다. 그는 열차 안에서도 그대로 쉬는 일이 없었다. 열차의 진동과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출판사에서 보내온 교정쇄를 훑어보는가 하면 바흐 전집의


해설을 담당했으며 혹은 설교의 줄거리를 메모하기도 했다. 1911 년에는 뮌헨에서의 연주회 출연료로 수업료로 수업료를 지불할 수가 있었으며 최종 시험을 받을 절차를 끝냈다. 그는 32 세 때 의학부의 전과정에 합격했던 것이다. 마침내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것이다. 랑바레네 구호 사업 추진 슈바이처가 아프리카에서 구호 사업을 벌인 곳은 프랑스령 아프리카를 지나 기니 만으로 흘러드는 오고에 강가의 랑바레네라는 곳이었다. 슈바이처는 랑바레네에서 할 일을 결정하고 점검하는 한편 파리의 병원에서 현대 의학을 공부하며 실전에 대비한 경험을 쌓았다. 그러면서 그곳에서 일을 하기 위한 기금을 모금했다.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교수들이 자진해서 모금에 협조해 주었으며, 성 니콜라스 교회에서도 모금을 해 주었다. 그런가 하면 파리의 바흐 합창단에서 모금을 위한 특별 연주회를 개최해 도와주었다. 1912 년 6 월 18 일, 슈바이처는 마침내 헬레네 브레슬라우와 결혼했으며 자기 사업의 평생의 동반자를 얻게 되었다. 그녀는 슈바이처의 평생의 소원을 동시에 자기 소원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아프리카로 가서 그를 돕기 위해 그 동안 간호사 훈련을 받고 있었다. 마침내 1913 년 슈바이처는 모친과 누이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열차고 퀸스바흐를 떠났다. 두 내외가 열차에 올라 손을 흔들자 플랫폼에 모여 있던 가족과 친지들이 손을 흔들어 배웅했다. 열차가 점점 속도를 내기 시작하자 배웅 나온 사람들의 모습이 점점 더 작아지며 나중에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교회의 뾰족탑도 나무 사이로 숨어 버렸다. 배는 아프리카를 향해 출발하기 위해 닻을 올리고 파도를 가르며 남쪽을 향해 미끄러져 나갔다. 오랜 항해를 거쳐 슈바이처 일행이 탄 배가 마침내 세네갈의 다카르에 입항했다. 드디어 아프리카 대륙에 첫발을 내린 것이다. 4 월 14 일 월요일, 배는 기니 만의 로페스 곶에 닻을 내렸다. 여기서 다시 오고에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중기선으로 바꿔 타야 했다. 오고에 강은 길이가 1,300 킬로미터나 되는 큰 강으로, 콩고 강 북쪽에 거의 나란히 흐르고 있었다. 하류에서의 강폭이 1 킬로미터에서 2 킬로미터 가량 되었다. 하류 일대에는 물과 정글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슈바이처 부부가 원생림 속을 헤쳐 랑바레네에 도착할 때까지 꼬박 이틀이 걸렸다. 땀 때문에 옷이 몸에 착 달라붙었다. 밤이 되어도 낮과 마찬가지로 조금도 서늘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랑바레네 마을에 도착한 부부는 전도 본부의 전도사 한 명의 마중을 받고,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 같은 통나무 배를 타고 랑바레네 전도 본부에 도착했다. 저녁 6 시가 되자 캄캄한 밤으로 돌변했다. 슈바이처 부부는 그렇게 아프리카에서의 첫 밤을 지내게 되었다. 의사가 그 곳에 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약과 기구 등도 채 도착하기 전에 이미 집 주위에 병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슈바이처는 그대로 환자들을 쫓아 보낼 수가 없었다. 약도, 이렇다 할 설비도 아직 없지만 한 차례 진찰을 하고 가능한 한 손을 써 주었다. 매일 아침 베란다에는 30__40 명의 병자들이 슈바이처를 기다릴 정도였다. 숲의 훨씬 안쪽에 살고 있는 부족들은 먹지를 못해 몸이 온통 일그러져


있었으며, 기근이 심한 지역에서 온 아이들은 손톱으로 흙을 긁어모아 입에 틀어 넣고 있기도 했다. 이 근방 수백 킬로미터 주위에서 오직 슈바이처만이 그들을 구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약품이나 기구를 보관할 곳도 없었으며 환자들을 입원시킬 곳도 없었다. 그리하여 궁여지책으로 헐어빠진 닭장을 찾아내어, 이를 수리해 병실로 사용했다. 옆에서 이것저것 도와주는 부인의 힘이 큰 보탬이 되었다. 열대의 원시림에서는 항상 침착하지 않으면 안된다. 표범이 언제 습격해 올지 모르며 풀섶에는 독사가 우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강의 모래밭에서는 악어를 밟을 위험도 있다. 모기는 학질을 옮기며, 이동 개미의 습격을 받으면 닭 정도는 몇 분 안에 흔적도 없이 먹히고 마는 것이다. 우기에는 1 주일에 4 일 동안이나 공격을 감행해 오는 것이 이동 개미였다. 그런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이별 기념으로 파리의 바흐 협회에서 보내 준 멋진 피아노를 랑바레네까지 운반해 온 것이 큰 위안이 되었다. 파이프 오르간과 마찬가지로 페달이 달려 있는 훌륭한 악기였다. 그날 밤부터 매일 밤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가 숲속에 울려퍼지게 되었다. 원시림 속의 간이 병원은 그 시설면에서 조금씩 개선되어 갔다. 먹을 것까지 병원에서 배급해 줘야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가하면 바르라고 준 약을 먹어 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러 차례 나누어 먹어야 될 약을 통째로 마셔 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환자들은 또한 의술을 일종의 마술로 알고 있었으며 슈바이처를 주술사라고 불렀다. 특히 마취 용법을 신기하게 여겼다. 산 사람을 죽였다가 다시 살려낸다는 점에서였다. 그로부터 9 개월 동안 진료를 하는 등 손을 쓴 환자의 수가 2,000 명에 이르렀다. 수면병, 나병, 학질, 열대성 이질 및 뼈나 관절의 질환 각종의 병에 걸쳐 있었다. 생의 외경 제 1 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곳을 항해하고 있던 증기선까지 프랑스 식민지 주둔군이 인수해 가 버렸다. 그러고 나서 이내 식민지 주둔군 병사들이 슈바이처의 집으로 찾아왔다. 지휘 장교가 말했다. "선생님은 독일령 알자스 출신이므로 우리하고는 적의 관계입니다. 당신들이 이곳에 있는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만. 구금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슈바이처 부부는 순순히 명령에 따르기로 했지만, 환기들이 들고 일어날 기세를 보였다. "이분은 우리의 의사 선생님입니다. 이분을 우리한테서 떼어놓을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슈바이처가 그들을 달래지 않았던들 돌팔매 세례를 퍼부었을 판국이었다. 그렇지만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걱정거리가 늘어났다. 약과 붕대 등의 분량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쌀도 저장분이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었다. 서로 죽이고 죽고 하는 세상의 끔직한 상황에서 그는 어느 날 느닷없이, 생의 외경이라는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생의 외경! 생명이란 그 자체가 신성한 거이므로 그 생명을 소중히 키우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절대로 죽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때로는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수면병의 병원균이 발견되면 우리는 환자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그 군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그러나 우리는 결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죽여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농부는 소를 기르기 위해서 목초지에 피어 있는 숱한 꽃을 베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농부는 돌아오는 길에 심심풀이로 단 한 그루의 꽃이라도 꺾어서는 안된다. 생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진리를 터득했던 것이다. 인간은 길을 걸을 때에도 작은 벌레를 밟아 죽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이치였다. 여름밤에 불빛 밑에서 일할 경우 나방이 날아와 날개를 태워서 책상 위에 떨어지는 것을 보기보다는 창문을 닫고 무더운 공기를 마시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날부터 슈바이처는 이런 생각을 한 권의 책에 담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슈바이처는 앞으로 사람들에게 생의 외경을 가르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1917 년 9 월이 되자 느닷없이 그들 부부의 단조로운 생활을 뒤집어엎는 일이 닥쳐왔다. 다음 배로 독일인과 알자스인들과 함께 포로 수용소로 들어가라는 명령이었다. 그리하여 짐을 꾸리고 막 배를 오르려 할 때었다. 심부름꾼이 그 곳으로 달려왔다. 급한 환자가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진찰을 해 보니 탈장 환자였다. "수술을 해야 해, 수술 준비를 하도록!" 슈바이처는 급히 챙겨 두었던 짐을 풀고 기구를 꺼내어 그 자리에서 응급 수술을 해, 환자가 목숨을 되찾은 예도 있었다. 그들은 이윽고 보르도의 임시 수용소에 3 주일 동안 수용된 다음, 피레네 산 속의 가레종이라는 곳으로 보내졌다. 그리하여 그곳 사원에 수용되었다. 점호가 시작되었다. 주위에는 독일 사람과 오스트리아 사람이 있었다. 학자, 예술가, 식당 종업원, 사제도 있었다. '여기서도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군. 책을 펼치지 않고서도 여기 있는 사람들한테서 배울 것이 얼마든지 있겠군!' 이 수용소에서는 의사라고는 슈바이처 밖에 없었으므로 그들을 진찰하면서 얼마든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은행의 업무를 시작으로 건축술에 대한 것을 비롯해 농사 짓는 일, 공학에 대한 기술 등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가 있었다. 그는 인생의 도처를 학습의 도장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한 가지라도 더 배우고자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파이프 오르간 연습도 쉬지 않고 계속했다. 실제 파이프 오르간이 그런 수용소에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의자에 않아 책상에 양손을 올려놓고 실제로 오르간을 치는 것처럼 연습을 했던 것이다. 실제로 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슈바이처의 태도는 진지했다. 1918 년 봄 슈바이처 부부가 다른 수용소로 옮겨졌다. 수용소 소장도 그들을 잡아 두고 싶어했지만, 결국 두 사람은 알자스인만을 수용하는 프로방스의 생레미 수용소로 가게 되었다. 그곳은 반 고흐가 정신병을 앓아 수용된 병원이기도 했다. 유명한 '테이블', '해바라기', '쇠난로' 등의 그림이 이곳에서 그려졌던 것이다. 반 고흐가 불치의 정신병으로 시달린 것처럼, 당시 슈바이처도 이질을 앓고 난 끝에 쇠약해져서 좀처럼 회복이 되지 않았으며, 부인도 지친 데다 임신까지 하고 있어 더욱 약해 보였다. 이윽고 7 월이 되어 슈바이처를 비롯한 포로들은 독일에 수용되어 있는 프랑스 인과 맞바꾸어져 스위스를 통해 고국으로 송환되었다. 일행 중에 다리가 좋지


않은 노인 하나가 있었다. 그는 옛날에 슈바이처가 자신을 도와준 일을 기억하고는 무거운 짐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거들어 주겠다고 나섰다. 노인은 가방 두 개를 뺏어 들고는 절룩거리면서 타는 듯한 선로 사이의 자갈 위를 걷기 시작했다. 슈바이처의 가슴은 벅찬 감격으로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앞으로는 무거운 짐을 가진 사람을 늘 살펴, 반드시 거들어 줘야지.' 슈바이처는 그 후 이 맹세를 꼭 지켰다고 한다. 그가 어렵게 해낸 주요 업적을 대충 더듬어 보자. 1918 년 42 세 때, 포로 교환으로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그 다음해 생일날에는 첫딸이 출생했다. 그 뒤 그는 계속 쉬지 않고 20 년부터 24 년까지 스웨덴, 덴마크, 영국, 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서 연주회와 강연회를 개최해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이어 다음해인 1923 년(48 세 때)에는 "문화의 철학"을 출판해 내다. 이어 1924 년(49 세 때)에는 다시 아프리카로 가서 낡고 부서진 병원을 재건하는 데 노력을 집중했다. 그 다음해에 그가 임종도 하지 못한 가운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랑바레네 위쪽 둔덕에 새로 병원을 짓기로 결심해 그 다음해에는 200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새 병원을 완성시켰다. 그해에 "랑바레네 통신"이란 저서를 출간했다. 일시 귀국해 1932 년(57 세 때)에는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괴테 100 주년 기념회에서 괴테에 대해 강연을 했고, 이어 "괴테 기념 강연"을 출판했다. 1933 년에는 다시 아프리카로 갔다가, 다음해에 다시 일시 귀국해 옥스퍼드 대학에서 "현대 문명과 종료"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다음해에는 다시 아프리카로 2 월에 갔다가 10 월에 귀국하여 영국으로 여행했다. 이때 그가 연주한 바흐의 곡을 음반으로 취입했다. 1937 년 2 월(62 세 때)에 다시 아프리가 랑바레네로 가서 병원을 증축했다. 1939 년 1 월에 제 2 차 세계 대전이 발발해 아프리카 원시림 속에서 두 정부 사이에 내전이 격렬하게 벌어졌지만 양쪽 군이 다같이 슈바이처의 병원에 대해서는 조금도 피해를 주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그렇지만 병원의 조수 등 의료원이 징집되어 끌려 나가는 바람에 의료 업무에 위기가 초래되어 곤란을 겪게 되었다. 1941 년 8 월에는 여러 어려움을 무릅쓰고 부인 헬레네가 랑바레네로 다시 와서 그를 돕기 시작했다. 1952 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지만 수여식에는 참석하지 않고, 간단히 '감사하다'는 서신만 보냈다. 슈바이처는 상금으로 주어진 3 만 4,000 달러를 나병 환자 병동을 짓는 데 사용했다. 1950 년에 약 50 명에 불과했던 환자의 수가 1951 년에 100 명, 1952 년에 200 명, 1953 년에는 300 명 가까이로 불어났기 때문이었다. 당시 79 세가 된 그는 커다란 오두막 병동 일곱 채를 짓기 위해 손수 구덩이를 파서 기둥을 세우고 그 자리에 콘크리트를 개어 넣는 등 왕성하게 일했다. 이 병동은 입원실은 물론이고 취사장까지 딸려 있는 훌륭한 것이었다.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목숨이 붙어 있는 날까지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 친구들의 귀국하라는 독촉이 성화 같았지만, "이 고장 사람들에게는 내가 필요합니다." 면 완강히 거절했다. 하긴 그런 보람도 있었다. 크리스마스와 박사의 생일에는 나병 환자들의 합창대가 축하의 노를 불러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일요일 오후 나병환자인 노인이 어린이 나병


환자 한 무리를 대동하고 박사네 베란다로 찾아왔다. 아이들은 나무 그늘에서 부끄러운 듯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무엇인가 아쉬운 것이 있어서 온 것인가 싶어 물었더니, "우리는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 왔을 뿐이에요" 하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는지, 어느 날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만약 이곳에서 죽는다면, 이곳 아내의 무덤 옆에 나란히 묻어 주구려." 그는 평생에 자기가 원한 것을 모두 얻었지만 동시에 그것들을 다 남에게 돌려주었다. 그는 1965 년 90 년 때 랑바레네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하여 헬레네 부인(1957 년 6 월 사망)의 무덤 옆에 나란히 묻혔다. 장례식이 끝나자 흑인의 아버지 슈바이처를 그리워하는 그곳 주민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무덤으로 다가가 기도하며 한없이 울부짖었다. 모방을 재창조로 승화시킨 모차르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fgang Amadeus Mozart;1756__1791)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L. Mozart;1719__1787)의 막내 아들로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천재성을 발휘해 5 세 때의 작품도 현존함. 밀라노에서 오페라 "춤추며 기뻐하나 행복한 영혼이여" 등을 초연한 후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마적" 등의 대표작을 작곡했지만, "라단조 레퀴엠"을 미완으로 남기고 사망했다. 하이든과 나란히 고전주의 확립한 것으로 일컬어짐. 12 세에 오페라를 작곡하다. 모차르트는 3 세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으며, 4 세 때는 복잡한 곡을 짧은 시간 안에 기억해 연주할 수가 있었고, 5 세 때는 이미 작곡을 하기 시작했으며, 7 세 때는 벌써 유럽 각지를 연주하며 여행했다고 한다. 더구나 관중의 요청에 따라 어떤 곡이든 연구해 내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한편 12 세경에는 최초로 오페라를 작곡하는 신동의 재주를 발휘했다. 이렇듯 조숙하게 음악을 다루어 낸 재주는 서양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흔히 '10 세 때는 신동이지만 20 세가 넘으면 보통 사람'이라는 속담이 있듯이 모차르트에 대해서는 그렇듯 뛰어난 음악적인 재능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 하고 반신반의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는 20 세가 지나고서도 뛰어난 음악적인 재능을 그대로 유지해 나갔으며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의 음악을 한층 더 원숙해졌던 것이다. 그는 어떤 편지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었다. "한 장의 그림처럼 음악이 눈앞에 나타나 그것을 악보에 옮겨 놓으면 그대로 하나의 교향곡이 탄생되었다." 아무래도 그의 머리 속에서는 샘물처럼 음악이 분출돼 나와 그것을 길어 올리기만 하면 되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의 음악을 자세히 듣고 있으면 누군가의 고하고 매우 닮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음악에 대해 다소 조예가 깊고 또한 관심이 큰 사람에 한한 일이지만....


예를 들면 그의 마지막 작품인 "레퀴엠 라단조"와 매일 비슷한 곡이, 그것도 부분적으로는 거의 똑같은 흘러나오는 것을 듣게 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이 곡은 모든 사람들이 거의 다 좋아하는 곡으로 알고 있으며, 현재까지 여러 연주자의 것을 수 없이 듣고 있는 곡이다. 말하자면 이 곡은 일반에게 그의 최고 걸작의 하나로 소개되고 있는 명곡 중의 하나이다.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르긴 해도 한 번쯤은 들은 적 있는 곡이며, 한 번 듣게 되면 압도적인 박력과 끝없는 비애로 가득한 그 선율을 잊지 못할 것이다. 이 점이야말로 모차르트가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음악, 다시 말해서 모차르트이기 때문에 가능한 음악이다. 이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똑같이 느끼고 있을 것이다. 어떻든 "레퀴엠"은 모차르트라는 작곡가의 개성과 창조의 힘을 그대로 보여 주는 명곡이다. 그런데 그의 이 곡과 매우 닮은 곡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이든의 "레퀴엠 다단조"라는 곡이다. 하이든이라는 이름을 자진 작곡가는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유명한 요세프 하이든(J. Haydn)이고 나머지 한 사람은 미하일 하이든(M, Haydn)으로, 둘은 형제간이다. 그리고 "레퀴엠 다단조"는 바로 동생인 미하일 하이든이 작곡한 것으로 1771 년의 곡이다. 한편 모차르트가 작곡한 "레퀴엠 다단조"는 1791 년에 작곡한 곡이다. 다시 말해서 하이든의 이 곡은 모차르트의 같은 이름의 곡보다 20 년 전에 씌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의 똑같은 멜로디 그렇다면, 그렇듯 천재인 모차르트가 남의 작품을 훔쳤다는 말인가? 이것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모차르트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이 알고 있는 일이지만, 모차르트가 "레퀴엠"을 완성하는 데는 다소 복잡한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약 5 개월쯤 전에, 구면이 아닌 한 사나이가 찾아와 작곡을 의뢰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는 음악을 좋아하는 백작으로 죽은 아내를 위해 진혼곡(레퀴엠)의 작곡을 의뢰해서 자기가 작곡한 것처럼 해서 연주하려 했던 것이다. 그 백작은 그 전에도 남에게 부탁해서 만든 작품을 지신의 작곡한 것처럼 한 일이 있다고 한다. 작곡 의뢰를 받은 모차르트는 즉시 작곡을 시작했지만 다른 일 때문에 중단했다기보다는,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병 때문에 결국 곡을 완성시킬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 곡을 그의 제자인 쥬스마이어가 완성시켰다. 제자는 모차르트가 남긴 단편적인 곡이라든가 메모 등을 참고로 하나의 완결된 곡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듣고 있는 "레퀴엠"은 연주 시간이 약 50 분 정도가 되는 곡인데 이 중 모차르트가 작곡한 것은 전반 부분으로, 중요한 멜로디를 기록한 그의 스케치에 따라 제자가 손댄 것인데 모차르트가 작곡했다고 해도 좋은 부분이다. 이 부분은 "눈물의 날"의 중간까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다음 부분부터 모차르트다운 것이 없어진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이 전반부인데 그것이 하이든 "레퀴엠"과 아주 닮은 것이다. 동생 쪽 하이든의 "레퀴엠"은 레코드 판으로는 매우 희귀해 쉽게 들을 수가 없지만, 그런대로 어느 정도는 남아 있고 녹음해 둔 것도 있을 것이므로, 이 곡을 들은 사람도 결코 적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곡을 들어 본 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모차르트의 "레퀴엠"과 비슷한 곡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이 두 개의 곡은 비슷한 부분이 상당히 많다. 그렇지만 음악을 통해서 받은 감동은 완전히 다르며 음악 그 자체의 질 역시도 다르다. 하나하나의 멜로디는 매우 닮았지만, 하이든 쪽은 청신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멜로디나 리듬이 단조롭고 호소력이 부족한 느낌을 주는데 비해, 모차르트의 곡은 윤곽이 뚜렷해 유화로 완성시킨 것처럼 깊고 음영이 확실해 매우 극적이다. 다시 말해서 하이든의 곡은 간단히 쓱쓱 스케치를 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물론 그의 곡도 걸작이기는 하지만 모차르트의 것과 비교하면, 어딘지 부족한 것을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만약 하이든의 곡이 없었다고 한다면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결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모차르트가 분명히 하이든의 곡을 '도작'했거나 아니면 차용 내지 '표절'한 것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두 사람의 악보를 가지고 대조해도 쉽게 알 수 있으며, 이 두 곡을 피아노로 쳐봐도 쉽게 확인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닮은 것이 우연일지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그렇지만 그런 우연이 어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음악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우연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슷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 여기서는 일단 두 곡이 비슷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관계라든가,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을 어떻게 지내 왔는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동생 쪽 하이든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며 동시에 모차르트는 또 어떤 사람이며, 더 나아가서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어떠했는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유명한 요세프 하이든의 동생인 미하일 하이든은, 오늘날 그 이름이 거의 알려져 있는 않으며 그의 곡도 거의 연주되지 않고 있지만, 그가 살았을 때는 형이나 모차르트에게도 결코 뒤지지 않는 음악가였다. 그는 26 세 때 잘츠부르크의 대주교 궁정 악단의 콘서트 마스터라는 중요한 지위에 오른 이후 죽을 때까지 약 40 년간 잘츠부르크의 대주교 밑에서 연주 활동과 작곡 활동을 계속했다. 43 곡의 교향곡, 39 곡의 미사곡, 12 곡의 현악 4 중주곡 외에도 많은 실내악곡과 합창곡을 작곡했다. 그리하여 잘츠부르크를 비롯해 빈과 그 밖의 외국에도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던 작곡가였다. 스페인 궁정에서 미사곡을 작고해 달라는 주문을 받기도 했고, 스웨던 왕립 아카데미 회원으로 뽑히기도 했다. 오스트리아나 독일에서는 19 세기 전반까지 그의 작품이 연주회에서 곧잘 연주되곤 했다. 이렇듯 미하일 하이든은 형인 하이든만큼은 못되었다치더라도 생존 당시에는


뛰어난 작곡가로서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일은 모차르트와의 묘한 관계이다. 즉 미하일 하이든과 모차르트 부자는 상당히 친숙한 사이였던 것이다. 모차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하이든 보다 18 세 연상으로, 하이든과 마찬가지로 잘츠부르크 대주교 궁정 악단의 주요 멤버로 활약하고 있었으며, 후에는 아들인 모차르트 또한 이 악단의 일원이 되었다. 말하자면 이들 세 사람은 같은 직장에서 일한 동료라고 할 수 있었다. 더욱 흥미로운 일은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미하일 하이든의 재능을 매우 높이 평가해, 아들 모차르트의 음악 교육을 위해 하이든의 작품을 본보기로 택해 연습을 시켰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모차르트는 하이든의 악보를 베끼는 일도 있었다. 악보를 베끼려면 본인에게서 악보를 빌려야 하는데, 그러자면 상대방과 개인적으로 친한 관계가 아니면 안 될 것이다. 실제로 미하일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친한 관계였다는 것을 말해 주는 예가 있다. 예를 들면, 모차르트가 하이든을 위해서 대신 작곡한 일이 있었다. 언젠가 하이든은 잘츠부르크의 대주교로부터 여섯 곡으로 된 2 중주곡을 작곡토록 하명을 받자 네 곡을 완성했지만, 마침 이때 병이 나서 나머지 두 곡을 작곡하지 못했다. 하이든은 나머지 두 곡을 약속한 기일까지 작곡하지 못하면 면직당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일이 있기 2 년 전에 모차르트는 대주교와 싸우고 대주교 궁정 악단의 오르가니스트 자리에서 해고되어 그 직분을 하이든이 겸임한 적이 있었다. 모차르트는 하이든의 부탁을 받고 두 곡을 불과 이틀 만에 완성시켜 건네주었다.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2 중주 곡이였다. 또한 같은 무렵, 백작이 주최하는 음악회를 위해 하이든의 교향곡의 서주부를 모차르트가 작곡한 일도 있었다. 이 교향곡은 20 세기 중엽까지는 모차르트의 작품으로 통했으며, 그 밖에도 두 사람이 같이 작곡한 예가 더 있을는지는 모른다. 이렇듯 '대작' 혹은 '차용'이라든가 '도작'의 경우를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스승의 작품을 제자가 모방 모차르트가 미하일 하이든의 작품을 본보기로 해서 작곡을 익혔다는 말은, 두 사람이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 있었다는 방증이 되다. 그렇다면 제자가 스승의 모방하는 일은 결코 희귀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동시에 모차르트가 그런 일이 가능했다는 사실은, 말을 기억하듯이 음악을 기억할 수 있는 재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흔히 모방과 창조를 대립된 개념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과연 그것이 사실일까? 도대체 창조란 어떤 것일까?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는 명언도 있지마, 실제로 모방하는 능력과 창조하는 능력이란 한없이 가까운 것이다. 최소한 모차르트에 관해서는, 일반적으로 창의력이라고 여겨지는 것이 실제로는 그의 모방력이라는 것을 이해해 주면 된다. 그의 재능은 다시 말해서 공부하는 재능과 모방하는 재능이었던 것이다. 현대의 대표적인 모차르트 연구가인 독일의 음악사가 알프레트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1789 년에 작곡된 K 141 의 합창곡 "테 데움"을 기초로 했다. 모차르트는 이 곡을 매우 충실하게 모방한 것으로 거의 대부분의 소절에서 모방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이 밖에도 여러 개의 모방이라든가 혹은 '유사'한 예를 들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모차르트의 마지막 교향곡인 그 유명한 "주피터 교향곡" 의 웅장한 최종 악장이 미하일 하이든의 어떤 교향곡의 최종 악장과 매우 비슷하다고 했다. 즉 모차르트는 1788 년 이 "주피터 교향곡"을 포함하여 이른바 3 대 교향곡을 단기간에 작곡했는데, 그와 같은 작곡에 자극을 준 것이 미하일 하이든일 것이라고, 아인슈타인은 말하고 있다. 그것은 그렇다치고, 모차르트에 관계된 여러 연구 서적을 보면, 모차르트는 마하일 하이든 이외의 작곡가한테서도 '차용' 내지는 '모방'한 것이 많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미하일 하이든의 형인 요세프 하이든에게서 차용한 예도 많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을 보면, 모차르트는 하이든 형제에게 상당한 빚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그 밖에도 모차르트가 모방한 상대로서는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J. C. Bach), 카를 필립 멤마누엘 바흐(K. E. Bach)와 글루크(C. W. Gluck) 등 당시의 유명한 작곡가들을 들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모차르트는 많은 작곡가로부터 차용해 나가면서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 낸 작곡가라는 이야기를 되는 것이다. 그렇듯 모차르트는 미하일 하이든과 친숙한 관계에 있었으며, 하이든만이 아니라 그 밖의 많은 작곡가한테서도 '차용'한 것이 많다고 본다면, 그의 "레퀴엠"이 미하일 하이든의 "레퀴엠"과 많이 비슷하며, 부분적으로는 완전히 똑같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신경이 쓰이는 것은 '표절'의 문제라든가 음악 저작권의 침해 등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모차르트로서는 하이든으로부터 '표절'이라고 고소 당해도 어쩔 수 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일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것을 보면, 당시에는 음악 저작권이라는 사고 방식 자체가 아예 없었던 것 같다. 모차르트가 살았던 시대에는 다른 작곡가의 아이디어를 차용하는 일이 특히 힐책을 받는 일이 아니었으며, 또한 드문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모방을 한 단계 높이 승화시키다. 이렇듯 모차르트는 하이든을 비롯해 기타 여러 작곡가의 작품을 모방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식으로 모방해서 그 결과 어떠한 작품을 탄생시켰는가 하는 성과이다. 엄격하게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모방이 전연 없는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이든 건축이든 회화든 남의 조금도 모방하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란 없다.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어떤 기법을 바탕으로 이를 변형한다든가, 다시 독특한


자기 나름의 뭔가의 기법을 가미해서 새로운 형태의 것을 완성시켜 냈을 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모차르트는 다른 사람의 작품을 모방해서 어떤 것을 만들어 냈을까. 대답은 자명하다. 오늘날 우리가 귀로 듣고 있는 그의 음악 자체가 바로 그것이다. 1982 년에 타계한 캐나다의 유명한 피아니스트 굴드(Glenn Gould)가 말한 것처럼, "창조적 행위와 모방적 행위의 차이는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비교적 적은 차이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200 년이 지나고 보면, 처음에는 모방적인 음악이었던 모차르트의 음악이 이제는 창조적인 음악으로 들리게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미하일 하이든의 "레퀴엠"과 많이 닮았다고 해도 모차르트의 "레퀴엠"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음악적 특성이라든가 또는 듣는 사람에게 주는 감동이 달라질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의 "레퀴엠"이 더 멋있고 훌륭한가 하는 것이다. 말하나마나 한 일이지만 모차르트가 생존했던 시대의 활약했던 작곡가는 모차르트 한 사람만이 아니다. 그리하여 그 밖의 많은 작곡가가 "레퀴엠"을 작곡했지만, 200 년이 지나고 나니까 모차르트의 작품만이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것이 당초의 음악인가 아니면 모방한 음악인가 등에 관계없이, 즉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음악만이 남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모차르트는 남의 작품을 모방은 했지만, 그것을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켜 놓는 재능을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차르트는 미하일 하이든의 "레퀴엠"을 어느 정도 모방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차르트의 "레퀴엠" 쪽이 훨씬 더 깊이 사람들의 마음을 울려 주는 동시에 잊을 수 없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하이든의 "레퀴엠"이 없었다면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존재할 수 없었는지도 모르며, 혹은 전연 다른 "레퀴엠"을 작곡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경우는 모차르트가 하이든의 작품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차용해 그보다 훨씬 멋진 곡으로 완성시켜 놓았다. 모방을 하면서도 모방한 작품보다 훨씬 수준을 높은 작품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앞서 아이슈타인이 언급한 것처럼 모차르트가 자신이 본보기로 차용한 작품을 도약대로 삼아, 이를 한층 높고 또한 멀리 날수 있는 것으로 완성시켰던 것이다. 말하자면 모차르트는 어떠한 도약대에서도 한층 더 멀리 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즉 남의 음악을 모방하면서도 그것을 훨씬 멀리 넘어서 그만의 독특한 음악성으로 완성시킬 수 있는 능력, 이것이야말로 모차르트의 '천재성'이었다. 이 모방이라는 문제를 학교에 있어서의 사제간의 예로 생각해 보자. 대부분의 학생들은 스승의 행동을 모방하려고 한다. 특히 진지한 학생들이 그러한데, 스승의 말하는 방법을 비롯해 글자를 쓰는 모양이라든가 때로는 걸음걸이까지 모방하기 쉽다. 이런 식으로 학생들은 스승에게 조금이라도 더 접근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제자가 후에는 스승보다 나은 경우가 허다하다. 본보기로 삼았던 스승을 제자가 여러 가지 면에서 넘어서는 것이다. 흔히 '출람의 영예'라고 하는 것이 이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단순히 흉내만 내는 것이 아니라 모방을 넘어선 참다운 흉내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차르트의 모방은 참다운 모방이라 할 수 있으며, 그런 천재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는지? 그런데 모차르트는 어떻게 해서 모방하는 재능을 몸에 익힌 것일까. 모차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음악가였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는 두 자식을 위해서 스스로 음악 교육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그것을 엄격하게 실천했다. 두 사람의 지식이란 모차르트와 그 보다 5 년 연상인 누이다. 모차르트가 태어났을 무렵에는 이미 누이는 음악 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제자를 가르치면서 자기 스스로도 연습을 했기 때문에, 모차르트의 집안에는 하루 종일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모차르트는 뇌세포가 가장 유연하고 수용적인 시기에 음악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던 것이다. 아마 이런 일에 신경을 쓴 것도 아버지인 레오폴트의 교육 프로그램 속의 일부로 포함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린이들의 경우를 살펴보게 되면 돌이 되기 전에 '아빠''엄마'라 발음하면서 말을 기억하게 되고 2 세나 3 세가 되면 일상 용어는 거의 다 수사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조기 교육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즉 뇌세포가 어느 때보다도 유연한 언어 등 일상 생활에 필요한 내용을 거의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일반적인 어린이들보다 그러한 수용 능력이 월등히 뛰어났던 것이다. 말하자면 모차르트는 말을 기억하듯이 음악을 기억했다는 할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이 말을 기억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모방하는 능력이다. 거의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말을 익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모방하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에게 갖추어진 가장 기본적일 능력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모방'의 천재를 만들어 내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이, 6 세 무렵부터 20 세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행한 외국 여행이었다. 모차르트가 태어난 곳인 잘츠부르크는 그 당시만 해도 음악적으로도 상당히 뒤떨어진 지역이었다. 가장 최신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곳은 이탈리아의 각지였으며 또한 프랑스의 파리 혹은 영국의 런던이었다. 말하자면 당시 모차르트는 그러한 곳을 방문해 온갖 새로운 음악을 접할 수가 있었다. 이에 비해 미하일 하이든은 잘츠부르크를 벗어나 다른 지식이 빈약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외국의 음악 도시를 차례로 방문한 모차르트 쪽이 음악적인 면에서 훨씬 유리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일이든 무에서 창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풍부한 지식이 바로 창조의 근원이다. 온갖 음악에 접해 풍부하게 음악에 샘물을 저축한 모차르트로서는 극히 단편적인 악상으로부터 멋있는 멜로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무엇보다도 잘 말해 주는 것이 그의 최후의 작품인 "레퀴엠"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모차르트의 작품은 "레퀴엠"과 마찬가지로 작곡 의뢰를 받고 생산한 곡들이며, 말하자면 그 자신이 내적인 충동에 의해서 작곡한 것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가 주력한 것은 당시의 사람들이 원하는 곡을 만들어 내는 일이었다. 그는 그다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남의 음악을 이용해


자신만의 독특하고 멋있는 곡을 만들어 냈다. 따라서 감히 단언하자면, 그에게 모방이나 흉내가 없었다면 모차르트의 걸작으로 불리는 많은 작품들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모방'의 천재가 모차르트라는 생각에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사람은 미국의 저명한 철학자의 다음과 같은 말을 한 번 음미해 주기 바란다. "진실로 독창적인 인간만이 남에게서 빌리는 방법을 알고 있다." 에머슨은 다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든 책, 즉 '저작물'은 인용이며, 모든 인간이란 조상으로부터의 인용이며, 거미와 같이 자기 자신의 배에서 실을 끄집어내어 집을 만드는 식의 독창성을 요구한다면 단 한 사람도 독창적인 천재란 있을 수 없게 된다. 가장 위대한 천재란 남의 덤을 더 많이 받아 가진 인간이다. 말하자면 모차르트는 그와 같은 천재였다. 지상의 과객 모차르트 전기를 아인슈타인이 "모차르트는 이 지상에서 손님에 불과했다."고 했는데 이 말은 어느 정도까지는 진실이다. 이는 모차르트의 정신 세계를 평가할 때가 세속적인 인간으로서의 모차르트를 조명할 때나 모두 타당한 말이다. 그는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태어나 잘츠브르크는 물론이고, 그가 죽은 고장인 빈에서도 안주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거의 모든 방향으로 여행을 했다. 그렇지만 그 자신이 여행하겠다고 결심한 일을 한 번도 없었으며, 고향으로 돌아갈 때도 어쩔 수 없이 내키지 않았던 경우가 많았다. 동시에 그에게 있어서 여행이란 음악상의 어떤 일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의 작곡은 여행에 의해 중단당하는 일이 없었으며 오히려 자극이 되었던 것이다. 그 증거로 6 세 때인 1762 년에는 오스트리아만을 여행했지만 다음해인 1763 년(7 세 때)에는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의 여러 도시와 파리, 런던, 스위스 등 여러 도시를 돌아보았다. 이때의 여행은 3 년 이상이 소요된 긴 여행이었으며, K6--K34 의 작품은 다 같이 이 여행 동안에 완성되었으며 그 대부분의 곡이 연주되었다. 다음번 여행은 1769 년 말에서 1771 년 봄에 이르는 이탈리아 여행이었으며 그 후 1781 년 봄에 빈에서 생활하게 될 때까지 계속 여행을 했다. 그리하여 최후의 10 년 동안에는 프라하에 세 차례, 베를린에 한 차례의 여행밖에 없었지만, 그 대신 일부러 이사를 해 기분전환을 도모했다. 그렇지만 빈에서 생활했던 25 세 때 그는 이미 원숙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다시 말해서 위와 같은 사실은 유럽의 여러 도시에 살고 있는 청중들에게 있어서는 글자 그대로 그는 먼 것에서 찾아온 손님이었으며 휴대해 가지고 온 선물을 남겨 놓고 그대로 떠나 버렸다고 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또 이렇게도 쓰고 있다.


"그는 기이할 정도의 관찰력을 지니고 사람들을 보곤 했다." 그가 아무리 모방에 천재성을 지니고 있다 해도 날카로운 관찰력이 없었다면 모든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대로 멍청하게 지나쳐 버리기만 한다면 그와 같은 모방 능력도 존재할 수가 없는 법이다. 그는 특히 음식과 연극에 관계되는 일에서 그러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날카로운 관찰력은 나아가서 성직자나, 권력가 또는 유명인에 대해서 존경하는 마음을 조금도 갖지 않게 했다. 이는 어려서부터 인생의 혹은 인간의 이면을 이미 다 보아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14 세 때부터 수석 연주자로 섬긴 잘츠부르크의 대주교를 비롯해, 지난날 그를 신동으로서 사랑했던 각지의 왕후, 유지들의 호의까지 잃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런데 날카로운 관찰자에게 닥쳐온 중요한 일을 음악가들과의 관계였다. 탁월한 천부적인 능력이라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질시와 미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모차르트는 상대방의 도발에 대해서 전연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으며 사교적이지도 못했다. 아인슈타인은 또 이렇게도 기록하고 있다. 모차르트는 요세프 하이든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같은 시대의 작곡가들과 자신 사이를 떼어 놓고 있는 커다란 거리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즉 하이든은 자신의 창조력과 작품에 대해서 충분히 자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모차르트를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는 당대 유일한 작곡가였다. 유년 시대의 모차르트는 수많은 선배들의 영향을 받고 이를 극복해 독창성을 확립했지만, 하이든의 영향에 대해서는 모방하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강했으며, 오랫동안에 걸쳐서 그러했다. 그리하여 1782 년부터 1785 년에 걸쳐 여섯 곡의 4 중주곡을 작곡해 하이든에게 바쳤다. 그 중 세 곡이 빈에서 연주되었을 때, 하이든도 이를 듣고, 모차르트의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정직한 인간으로서 하느님 앞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드님은, 제가 개인적으로 알고 잇는 많은 작곡가 중에서 가장 위대합니다. 아드님은 음악에 대한 열의를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가장 위대한 작곡을 익히고 있습니다." 모차르트가 유일하게 존경했던 하이든으로부터 이와 같이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하긴 하이든말고도 모차르트가 존경한 작곡가로서는 바흐(J. S. Bach)가 있기는 했지만. 이렇듯 무서울 정도의 날카로운 관찰력에 의해 천재의 자리를 확립하게 굳힌 모차르트였지만, 여성에 대해서는 이룰 수 없는 짝사랑의 연속이었다. 상대방 여성이 자신을 사랑하는가의 여부에 대해서는 그의 날카로운 관찰력도 부족했던 모양이다. 한 예를 들면, 그가 20 세 때 당시 16 세의 아름다운 동시에 음악적인 재능까지도 풍부했던 알로이저 베버를 사랑했지만, 그녀는 그녀의 모친과 짜고 음악적인 출세를 목적으로 그를 이용해 접근한 데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모차르트의 주선으로 뮌헨 궁정 오페라 가수가 되자, 깨끗이 그와 인연을 끊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은, 언니만큼 아름다웠지만 음악적인 재능은 다소 부족한 여동생인 콘스탄체와 결혼해 버렸다. 그 밖에도 아내인 콘스탄체가 질투할 정도로 아름답고 완벽한 오페라 가수인 안나 세리나 스트라체를 사랑해, 그녀에게 "어찌 그대를 잊을 수 있는가"라는 곡을 작곡해, 음악으로 사랑을 고백하여 실현될 수 없게 관계의 이상적인 영역에서의 정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1784 년에는 프리메이슨(Freemason)이라는 비밀 결사에 가입해, 결사의 멤버인 한 대공과 백작이 죽었을 때, 전연 모방하지 않은 장송곡을 작곡한 바 있다. 이는 의뢰받은 일도 없고 보수도 없는 그런 곳이었다. 이 무렵의 곡으로 손꼽을 만한 것으로는 "마적"을 들 수가 있다. 이 곡은 1784 년 9 월 30 일 초연되어 크게 성공해서 그의 생애의 의의는 달성되었지만, 불행하게도 그해 겨울이 오면서 그의 생명력은 끝나고 말았다.

'재산의 복음'을 실천한 카네기 앤드루 카네기(Andrew Camegie;1835__1919) 미국의 실업가.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다. 산업 혁명으로 가업이었던 직물업이 불황의 늪에 빠지자, 집안 전체가 미국으로 건너갔다(1848). 현재의 피츠버그에 정주하여, 펜실베이니아 철도 감독 등을 거쳐 피츠버그에서 제철 회사를 운영했다(1865). 이어 프릭크와 공동으로 홈스테드에서 제강업을 시작했다. 그의 사업은 파업이나 불황에도 관계없이 더욱더 발전해 마침내는 미국 철강의 4 분의 1 을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사업을 처분하고 은퇴한 이후에는 주로 스코틀랜드의 도노크 퍼스 저택에서 보내면서 각종 재단 및 연구소, 기금 등을 통해 지신의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그는 자신이 외친 '재산의 복음'을 충실하게 실천했던 것이다. 소년 독서가 스코틀랜드의 던퍼믈린(Dunfermline). 카네기가 태어난 고향이다. 조그만 난로가 놓인 거실에서는 아버지 월리엄 카네기가 책을 읽고 있었다. 아래층의 공장이 오늘 따라 조용했다. 늘 찰카닥찰카닥하는 기계 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나 오늘을 조용했다. 카네기의 부친은 이 공장에서 이름난 직물 기술자로, 주로 손으로 테이블보를 짰다. 짜 놓으면 장사꾼들이 와서 사 가지고 가 되팔았다. 그런데 테이블보를 사러 오는 장사꾼의 눈에 띄게 줄어들어, 공장이 개점 휴업 상태였다. 카네기 일가에 어려움이 닥쳐온 것이다. 카네기의 집안만 그런 것이 아니고 주변의 직물 공장이 다 그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를 어떻게 타개해 나가야 좋을지 고민중에 있었다. 한편 카네기 소년이 여덟 살이 되었을 때 동생 톰이 태어났다. 카네기는 다른 소년들보다 키가 작은 편이었다.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여덟


살인데도 아직 학교를 다니진 않고 있었다. 동네 안에 식품 가게가 하나 있었는데, 식품 가게 아저씨가 곧잘 역사적인 영웅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므로, 어린 카네기는 그 이야기를 들으러 가기를 즐겨했다. 주로 스코틀랜드를 지킨 영웅이나 장군들의 이야기였다. 그 밖에도 스코틀랜드의 시인인 로버트 번스(R. Burns)의 이야기를 여러 차례 읽어 주어, 마침내 카네기는 그의 시를 암송할 수 있게까지 되었다. 마침내는 카네기가 암송하는 내용을 듣고자 동네 사람들이 몰려오기도 했다. 카네기는 친구와 함께 역사적으로 유명한 장면을 연극으로 보여 주기도 했다. 그런데 식품 가게 아저씨에게 들은 가지기지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묻기를 잘 했다. 질문 중에는 여러 가지로 어려운 문제도 많았다. 따라서 바쁘기도 한 어머니로서는 제대로 대답해 줄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 의논을 했다. 카네기를 학교에 보낼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애가 하도 질문이 많아서 지로서는 어떻게 대답해 줄 수가 없어요"하고 교장 선생님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교장 선생과 카네기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두 사람이 어울려 산책들 하는 가운데 생긴 일이었다. "제가 아버님에게 뭘 좀 여쭈어 보면, 또 뭐야, 하고 말씀하세요." "그래 그건 아버님이 대단히 바쁘셔서 그런 거야. 그렇지만 너도 학교에 와서 공부를 하게 되면 묻기만 하지 않아도 된단다. 의문을 푸는 데는 책이 도움이 된단다." "학교에 가면 책을 읽을 수 있게 되나요?" 카네기의 질문이었다. "그야 물론이지, 학교의 목적 중의 하나는, 책을 어떻게 읽어야 되는가를 가르치는 거니까." 카네기는 기억력이 좋았다. 무엇이든지 쉽게 기억했다. 그리하여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지 며칠 안 되었을 때, 그는 이미 교장 선생님의 책상 위에 있는 책을 무엇이든지 다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이렇듯 일찍 독서에 취미를 붙이게 되었던 것이다. 책상 위의 책들을 다 읽어 버리자 교장 선생님은 다른 책을 다시 두 권 갖다 놓았다. 물론 카네기는 그 두 권의 책도 빌려다 읽었다. 그때 교장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해 주었다. "네가 읽어야 할 책들을 아버지가 가지고 계셔." "직물 공장의 책장에 있는 책 말인가요? 아버지가 다른 사람들에게 빌려 주는 그 책요?" "그래, 아마 네 아버지도 기꺼이 그 책을 읽으라고 하실 거다" 라고 교장 선생님이 대답했다. 그날 밤, 카네기는 아버지에게 책상에 있는 그 책에 대해 물어보았다. 아버지는 "뭐라고, 네 벌써 그런 책을 읽을 수 있다고?" 하며 놀라서 말했다. "예, 교장 선생님께서 빌려 주신 책은 모두 다 읽어 버렸어요." "알았다. 그럼...." 하시며 조그마한 책장 쪽으로 걸어갔다. "이 책을 읽도록 해라. 이 책을 스코틀랜드의 왕들에 대해서 쓴 책이다." 카네기는 부친이 꺼내 준 책을 즉시 읽기 시작했다. 읽어 감에 따라 스코틀랜드의 영웅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마음이 싹터 갔다. 그리고 고향인 이곳 던퍼믈린이 대단히 재미있는 고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토끼 사육의 꾀 당시 나라 안엔 가난한 사람들이 늘어만 가고 있었다. 수많을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렸다. 새로운 기계의 출현으로 운명이 뒤틀린 결과였다. 그리하여 던퍼믈린의 직물 기술자들도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카네기가 가운이 기운 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846 년 봄이었으며 그의 나이 11 세 때였다. 그는 그 당시 바깥 계단 건너편에 있는 정원에서 귀여운 동물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가 식사 시간이 되었다며 부친을 찾고 있었다. 카네기는 공장에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말없이 앉아 있는 부친을 발견했다. "아버지! 어디 편찮으세요? 어머니를 모셔 올까요?" 카네기의 이 말에 비로소 부친은 제정신이 들었으며, 두 손을 내린 다음 얼굴을 들었다. 커다란 충격을 받은 것 창백한 얼굴이었다. "여보 왜 그래요?" 부인은 남편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며 말했다. "어떻게 되신 거예요? 어디 몸이라도 불편하신 거 아녀요?" "아니, 아프지, 않아. 그런 게 아냐...." "데이블보 사가는 장사꾼이 온 것 같던데요?" "응 왔지, 그렇지만 두 장밖에 사가지 않았어, 그리고 다시 주문도 하지 않았어. 글쎄 이젠 내가 짠 것은 없다는군." "...." "이제는 기계로 짠 것만 필요하다는 거야." "그 장사꾼이 또 오겠죠? 이번에는 제가 이야기해 보냈어요." "그런 기회는 다시 없을 거야. 다시는 오지 않을 테니깐!" 카네기는 그때 부모의 그런 대화를 통해 집안에 어려운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카네기는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끝내고는 정원으로 내려가서 키우고 동물들을 보살펴 주었다. 비둘기와 토끼 몇 마리를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부친이 예쁘장하게 비둘기집을 지어 주었다. 토끼는 처음 두 마리였던 것이 지금은 12 마리로 불어났으며, 모두 배를 곯고 있었다. 토끼에게 제대로 먹이를 대주는 것도 큰 일이었다. 그렇다고 밖으로 쫓아 버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이웃 사람들이 자기 뜰의 화초와 채소를 먹어 치웠다고 항의하러 몰려올 것임에 틀림없다. 카네기로서는 학교 다녀야 했으며, 이것저것 해야 할 집일이 많아서 토끼 먹이를 모아다 줄 겨를이 없었다. 그때 마침 카네기의 학교 친구들이 막 그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맑고 따스한 석양 무렵이었다. 친구들은 카네기가 사육하고 있는 토끼들을 무척 귀여워했으며 또한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러하기 친구들은 물끄러미 서서 토끼를 구경하고 있었다. 이때 카네기의 머리에 퍼뜩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너희들 토끼를 좋아하지? 제임스야, 네가 지금 안고 있는 토끼에게 네 이름을 붙어 줄까?" "내 이름을 붙여 준다고?" 제임스의 얼굴에 기쁨의 빛이 넘쳐 흘렸다. "그럼 이 토끼는 내가 가져가도 되니?" "아냐, 그건 안돼. 너희 집엔 키울 말한 데가 없지 않니. 그러기 여기다 두고 길러라. 그러고 이웃에 말썽도 많을 테고. 여기서 키워도 그 놈은 네 거야. 너는 먹이만 갖다 주면 된다고."


"아, 그럼 내 이름도 붙여 줘라." 이번에는 다른 아이가 부탁했다. "그래 좋다. 조지도 토끼 이름에 딱 어울리는데. 그렇지만 먹이는 제대로 대주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카네기는 제임스와 조지 말고도 윌리엄이라든가 부르스 등의 이름을 토끼에게 붙여 줬다. 그리고 나서 카네기는 토끼 하나하나에 붙여 준 이름을 잘 기억해 혼동이 없게 했다. 이렇게 해서 토끼 사육에 대한 어려운 문제를 간단히 해결할 수 있었다. 그 후에도 카네기의 집안의 경제 상태는 좀처럼 호전될 기미가 없었다. 부친은 마침내 행상까지 해 가며 테이블보를 간신히 몇 개 처분할 수 있었다. 이 집 저 집 찾아다니며 값을 깎아 주곤 한 끝에 말이다. 카네기의 어머니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대단히 부지런하고 책임감이 강한 여성이었는지라, 집 한쪽 구석에 가게를 내어 양배추라든가 파, 과장 따위를 진열해 놓고 팔았다. 그리고 밤에는 도한 구둣방을 하고 있는 오빠를 도와서 구두를 지었다. 카네기도 그런 모친의 옆에 앉아서 바늘에 실을 꿰어 주는 등 일을 도왔다. 이렇게 해서 간신히 생계를 이를 수가 있었다. 카네기는 학교 성적표에서 산수 점수가 특히 높았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장부 처리를 부탁했다. 모친이 운영하는 가게의 일도 있고 테이블보의 거래처도 여기저기 있어 장부가 엉망이었다. 카네기는 불과 2, 3 일 만에 장부를 정확히 맞추어 정리해 놓았다. 그로부터 약 2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카네기의 집안은 매일매일 보리죽과 야채로 끼니를 이었다. 카네기의 나이도 열두 살이 되었다. 겨우내 베틀은 전연 움직이지 않았으며, 장사꾼들도 전연 찾아오지 않았다. 마침내 먼저 미국으로 간 아주머니한테서 편지가 왔다. "제발 어서들 와요. 미국에는 얼마든지 일거리가 있어요. 여기 와서 베를 짜도 좋고 아니면 다른 일거리를 찾을 수도 있어요." 그곳의 친척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아, 이제는 어엿한 자기 집도 마련했으며, 공장 2 층에 방이 둘 있으니 그 2 층 방을 사용해도 좋다는 이야기였다. 또 아주머니는 끝에 이런 말도 덧붙였다. "가져올 수 없는 것은 다 팔아서 여비로 충당하도록 하세요." 그리하여 카네기의 어머니는 가재를 팔도록 했다. 집안이 텅 빈 것 같았다. 그렇지만 가구를 다 팔아도 여비가 약간 모자랐다. 어머니는 그리하여 오랜 친구에게 모자라는 여비를 꾸러 갔다. 어머니는 한 시간이 채 못 되는 사이에 밝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돈을 꾸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드디어 미국으로 출발하는 날이었다. 카네기는 그날로 수업을 마치고 선생님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미국에 가서도 학교엘 꼭 들어가도록 해라. 너는 이제 어떤 책이든지 읽을 수 있으니까. 그곳에도 책이 많을 거야. 그러니 빌려서라도 계속 읽도록 해라." "그렇지만 저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래도 될 수 있는 대로 학교에 들어가거라. 너는 이미 대수와 라틴어 공부도 시작했으니까!" 다음날 아침 그들 한가족은 상쾌한 기분으로 집을 나섰다. 많은 친구들이


그들을 배웅해 주었다. 1848 년으로 그의 나이 13 세 때였다. 카네기 일가가 미국에 도착한 것은 1848 년 5 월의 어느 날이었다. 피츠버그라는 도시였다. 예정대로 그들은 친척이 차려놓고 있는 공장의 2 층에 거처를 정했다. 부친은 즉시 베틀을 빌려다 베를 짜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다 짠 베를 몇 킬로미터나 되는 거리에 걸쳐 팔러 다녔다. 모친도 가만히 앉아만 있지 않았다. 구둣방 아저씨한테 일감을 얻어다 구두를 만들어 가져다 주었다. 여자가 어떻게 구두를 짓는가 하고 처음에는 의심했지만, 나중에는 솜씨를 인정해 아예 한몫 떼놓고 있을 정도였다. 방직 공장에 취직하다 가을로 접어들자, 카네기의 부친은 베 짜는 일을 그만두고 근처에 있는 조그마한 방직 공장에 일자리를 구했다. 다행히 케네기도 아버지의 주선으로 그 공장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주급 1 달러 20 센트였다. 얼마 안 되는 돈이었지만, 카네기로서는 그 돈이 상당한 재산처럼 여겨졌다. 어머니는 매주 남편과 아들이 벌어다 주는 돈을 받아서 일일이 세어 보았다. 그리고는 그 중에서 50 센트짜리 주화 한 개를 헌 양말 짝에다 꼬박꼬박 간직했다. 그리곤 벽 앞에 있는 옷장에다 돈이 든 양말짝을 보관하고는 자물쇠를 채웠다. 앤드루 카네기는 하루 종일 선 채로 빙글빙글 돌아가는 실패만을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실패에 감긴 실이 거의 다 없어져 가게 되면, 기계를 멈춰 다른 실패로 바꿔 끼워서 실올을 이어 놓아야 했다. 이런 식으로 매일같이 많은 실패와 눈씨름을 해야 했다. 실패의 실이 다 없어졌는데도 이를 갈아 끼우지 않으면 옷감에 흠집이 생겨 망가뜨리게 된다. 그런 어느 날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실패를 공급하는 헤이씨라는 사람이 카네기가 일하고 있는 옆을 지나갔다. 헤이씨는 마침 그때 소년 한 사람을 고용하고 싶어서 찾고 있던 중이었다. "이봐 꼬마, 나하고 같이 일하지 않겠니? 주급으로 2 달러 주마." 이 말에 카네기는 어떤 일을 하는지도 묻지 않고 승낙해 버렸다. 그리하여 다음 월요일부터 헤이씨의 밑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방직 공장이 일보다 다소 고되다고 생각되었다. 그곳에서는 엔진으로 실패를 만들고 있었다. 카네기가 하는 일은 엔진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 불을 때는 일이었다. 어둠침침한 지하실에 엔진과 화실이 있었다. 그곳이 바로 카네기 소년의 일터였다. "네가 증기의 압력을 너무 올리면 솥이 폭발해 우리는 다 저승행이야" 하고 헤이씨가 말했다. "반대로 압력이 너무 약하면 위의 공장에서 일하는 데 지장이 있어. 그렇게 되면 너는 해고야." "예, 조심해서 일하겠습니다." 카네기는 자신 있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겁이 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압력계를 읽는 방법도 알게 되었다. 2 달러의 주급은 매주 토요일에 받게 되어 있었다. 1 주일을 일하고서 카네기는 마치 1 년을 일한 것처럼 고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자기의 괴로움을 집에서는 일체 말하지 않았다. 동시에 일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의심스러운 것이나 알 필요가 있는 것이 있으면 서슴없이 물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카네기가 화부 노릇에서 해방된 것은 몇 달 후의 일이었다. 어느 날 헤이씨가 계단 위에 나타나서, "카네기야, 너 글 쓸 줄 아니?" 하고 물었다. "예, 쓸 줄 압니다. 선생님이 글씨를 잘 쓴다고 칭찬해 주신 적도 있습니다." "그럼 이리 올라와서 어디 한 번 써 봐라. 가마솥 불 때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길 테니." 카네기가 글씨를 두어 줄 써 보였다. 그러자 주인은, "그럼 내 편지를 하나 써 다오. 내가 천천히 말할 테니까, 그것을 그대로 적으면 돼." 카네기는 정성들여 글씨를 써 나갔다. 대문자는 모두 장식체의 글자로 썼다. 주인이 기뻐하면서 두 통의 편지를 더 부탁했다. 이틀 후 다시 헤이씨가 그를 불렀다. "너 계산할 줄 아니?" "예, 할 줄 압니다." "그럼, 불 때는 아이는 새로 고용할 테니, 너는 편지 쓰는 일하고 장부 정리하는 일을 맡아 다오." 그 후 케네기는 복식 부기까지 배워 가지고 엉망인 헤이씨의 장부를 깨끗이 정리해 주었다. 어느덧 카네기 일가족이 미국으로 건너온 지 2 년이 지나, 카네기 소년의 나이도 15 세의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전보 배달 소년 그로부터 며칠 후 헤이씨가 전신국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카네기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이상으로 급료를 올려줄 수 없다. 그렇지만 너는 열심히 일을 잘해 주었어. 전보 배달부가 되어 보고 싶으면 한 번 해 봐라. 잘 안 되면 여기서 다시 써 줄 테니 말야." 집에 돌아온 카네기는 헤이씨의 이야기를 전했다. 부모님들은 다같이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그날 밤 카네기는 꿈을 꾸었다. 자기가 부자가 된 꿈이었다. 카네기는 잠을 깨어 생각했다. 우선 부자가 되려면 전신국에 취직을 해야 한다고. 며칠 후 카네기는 우체국에서 면접을 보았는데, 무난히 합격해 채용이 결정되었다. "그럼 언제부터 일할 수 있는가?" 하고 우체국장이 물었다. "지금 당장부터 일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저기 긴 의자에 가서 앉아 있어, 곧 배달할 전보를 줄 테니까." 마침 아침이었으며, 그때쯤이면 전보가 한창 몰려올 시간이었다. 10 분도 채 되기 전에 카네기는 전보를 들고 층계를 뛰어 내려갔다. 그리하여 부친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아버지, 취직이 되었어요! 벌써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던 부친은 그대서야 마음을 놓았다. 부친이 먼저 돌아가고 카네기만 남아서 전보를 배달하기 시작했다. 제일 문제인 것이 배달할 구역의 지리에 어두운 점이었다. 카네기는 거리의 이름과 주민들의 이름까지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850 년 무렵의 피츠버그 시는 인구가 약 4 만이 되는 도시였다. 오하이오 강 옆에 발달한 도시인 피츠버그 시의 주요 산업은 철강 및 물류 유통업이었다. 카네기는 그 밖에도 그 구역 안에 있는 회사들의 이름을 깡그리 암기해 두었다. 또한 카네기는 누구에 대해서나 친절했다. 많은 사람들이 카네기 소년을


주목했다. 틈나는 대로 여분의 일을 언제고 기꺼이 해 주는 스코틀랜드의 소년을 모두들 기특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양말 주머니에 보관해 둔 돈이 어느새 200 달러가 되었으며, 전신 업무가 확장되어 우체국장은 보다 많은 소년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카네기 소년은 친구들을 여러 명 추천해 같이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우체국의 근무 시간은 상당히 길었다. 아침 7 시에 출근해 교대로 청소를 한다. 1 주일에 3 일은 전신국이 문을 닫을 때까지 밤늦도록 남아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야근을 하는 날에는 밤 11 시 전에는 집에 갈 수가 없었다. 언제 전보가 들어올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카네기는 이러한 밤 전보를 기다리면서 자신의 공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곤 했다. 미국으로 건너온 이후 그 누구도 그의 학교에 대해서 말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스스로 방법을 찾아내어 공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극장으로 전보를 배달하려 갔다가, 지배인이 2 층 입석으로 가서 보고 가라고 한 적이 있었다. 마침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상연되고 있었다. 카네기는 연극 보고 온 자랑을 모친에게 했다. 그리곤 그 날 기억한 대사 몇 마디를 어머니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마음속으로 잔인한 운명의 화살을 견디어 내는 것이 숭고한가. 아니면 많은 어려움에 대항해 이를 극복하는 것이 숭고한가. --"햄릿" 제 3 막 제 1 장 카네기는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방법을 발견해 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세익스피어의 희곡을 책으로 읽기 전에 먼저 귀로 듣고 기억했던 것이다. 가슴을 설레게 하는 대사를 듣는 동안에 아무래도 여러 가지 책을 읽으면서 직접 공부해야겠다는 열망이 그의 가슴에 용솟음쳐 올라왔다. 책을 빌려다 공부 그 무렵 제임스 앤더슨 대령이라는 사람이 400 권이나 되는 책을 가지고 있는데, 일하는 소년들에게 빌려 주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대령의 집 근처에서 살고 있는 친구가 말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카네기는 야근이 없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대령의 집으로 직접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드디어 앤더슨 대령의 집으로 찾아갔다. "아, 잘 왔네. 한 권 빌려 가도록 해라. 단 기간은 1 주일이다"하고 대령이 친절히 말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틀림없이 기한 안에 반납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1 주일마다 카네기는 앤더슨 대령을 찾아갔다. 본 책을 반납하고 새로이 새 책을 대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미국의 역사책을 비롯해 논문 및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후 앤더슨 대령이 그 도서들을 시에 기증해 버렸으며, 시에서는 건물을 제공해 직공들의 도서관을 만들어 버렸다. 카네기는 이 사실을 알고 책을 빌리기 위해 도서관으로 갔다. 그런데 관리인이, 목공이나 빵을 굽는 그런 소년에게만 책을 빌려 줄 수 있다며, 카네기 소년에 대한 대본을


거절했다. '저 역시도 열심히 이하는 소년입니다"라고 항의해 보았지만, "규칙이므로 어쩔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거절 당한 카네기는 힘없이 집으로 돌아오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을 계산해 보기까지 했다. 책을 한 권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문득 카네기 소년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래도 도서관 관리인이 일하는 소년에 대해서 그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마침내 피츠버그 "디스패치" 신문사에 편지를 보냈다. "일하는 소년이란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책을 기증한 분의 참뜻을 오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빵을 굽거나 목공일을 하는 소년만 일하는 소년이고, 그 밖의 일을 하는 근로 소년들은 어찌 일하는 소년이 안 되는 겁니까?" 이 투서 내용이 그대로 그 신문에 게재되었다. 그렇지만 규칙을 고치겠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그러자 카네기 소년은 다시금 편지를 보냈다. 투서 내용은, 어떠한 직업이든 소중하고 귀중한 것은 마찬가지가 아니냐 항변이었다. 다음날 아침 신문에, 투서한 소년은 꼭 한 번 신문사로 들려 달라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분명히 도서관의 규칙이 변경된 것으로 확신했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매주 토요일에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많은 책을 읽고 감명을 받은 카네기는 친구들과 토론 모임을 만들었다. 친구들 6 명이 구성 멤버였다. 그들은 토론회가 있을 때마다 새로운 논제를 골라 이에 임했다. 결국 그들은 모두 토론회에 보탬이 될 만한 그런 책을 골라 읽게 되었다. 이 토론 모임은 마침내 피츠버그의 유력한 토론 모임인 웹스터 문학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런 어느 날 아래층 사무실 주임인 글러스 씨가, 카네기를 불러 이런 말을 했다. "잠시 사무실을 비워야겠는데, 1 시간쯤 내 대신 일해 주겠나?" "예, 알겠습니다." 카네기 소년은 즉석에서 대답했다. 글러스 씨가 하는 일이란 전보를 칠 원고를 훑어보고 잘못된 글자의 유무를 확인한 다음 요금을 계산해서 받는 일이었다. 자기 같은 것은 주임의 안중에도 없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걸 알게 되어, 대단히 마음이 흡족했다. 주임이 나가자 마자 거의 동시에 한 남자가 들어와서 전보를 쳐달라고 부탁했다. 카네기 소년은 정성을 다해 손님의 전보를 쳐 주었다. 나중에 돌아온 주임이 카네기 소년이 해놓은 일을 보고 매우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그 후부터 주임은 곧잘 카네기 소년에게 그런 일을 부탁했으며 카네기 소년의 급료는 점점 올라갔다. 모스 부호를 익히다 우체국 2 층 사무실에는 모스 신호 장치가 되어 있었다. 송수신이 가능한 장치였다. 카네기는 모스 부호를 외려고 결심했다. 그렇지만 기사가 아이들이 그 장치를 만지는 것을 싫어했다. 그때 카네기는 음을 가지고 통신문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서부국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카네기는 음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였다. 결합된 장음과 단음의 의미를 혼자서 배웠다. 그리고 가끔씩 휴지통에 버려진 전보문 쪽지를 읽어 보며 자신의 해독이 맞는지 살펴보았다. 음을 읽을 수 있는 요령을 기억하기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간단했다. 어느 날 국장인 브루기가 카네기에게 이런 말을 했다. "카네기야, 잠깐 나 좀 보자. 업무가 확장돼서 아무래도 전신 기사를 한 사람 채용해야겠어. 그런데 자네가 통신 받는 법을 공부하고 있는 것 같아서, 자네를 기사보로 채용하고 싶은데." "예, 알겠습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카네기는 그 자리에서 대답했다. 주급이 불과 4 달러였지만 여러 가지로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것이 그에게는 기쁜 일이었다. 그는 또 스코틀랜드의 고향 친구와 아저씨에게 자랑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는 편지 말미에 '역사가 짧은 공화국'에 대해서 언급했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하나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시대의 대표, 그리고 자유의 주창자로서의 우리의 사명은, 다른 여러 나라들의 모범이 되어서 그런 나라들이 진정한 공화국이 되도록 격려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개혁을 실현해서 온 세계가 하나의 평화스러운 공화국이 될 때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전진해 나가도록 사람들을 촉구하는 일입니다." 카네기는 무엇이든지 새로 배우는 열성적이었으며, 그것을 익히고야 마는 성미였다. 그리고 불과 15 세의 나이에 이미 그의 정치관은 어른을 뺨칠 만큼 민주적인 동시에 진보적이었다. 온 세계가 하나의 평화스러운 공화국이 될 것을 목표로 삼았으니, 그 얼마나 진보적이며 동시에 넓은 아량인가. 피츠버그의 전신국에서 일할 때 카네기는 토머스 스콧 씨를 알게 되었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철도 회사의 피츠버그 관구장이었다. 카네기가 본 공사는 이 관구의 철도 공사였다. 스콧 씨는 종종 전신국에 오곤 했다. 일반 업무에 지장은 주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철도 회사의 일로 전신선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카네기는 가끔 지나치다가 멈춰 서서 말을 걸어 주는 스콧 씨와 친하게 되었다. "스콧 씨는 자네를 좋아하고 있어, 카네기." 몇 주일이 지났을 때 기사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지난번에도 자기와 같이 일해 주지 않을까 하는 말을 한 적이 있어. 그래서 카네기는 이곳 일을 좋아하므로 안 될 것 같습니다. 하고 대답해 준 적이 있어." "뭐라고 잠깐만! 물론 나는 이곳 일을 좋아하지만 평생을 두고 가사 노릇을 할 생각은 없어." 카네기는 그 후 씨를 보고 직장을 옮기고 싶은 생각이 있다는 것을 전했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 채용되었다. 급료는 월 35 달러 였다. 고액의 급여로 철도 회사에 취직 카네기는 스콧 씨의 부탁으로 시내에 있는 철도 회사 전용 전신국을 관리하게 되었으며, 또한 스콧 씨의 회계 감사의 일도 돌봐 주게 되었다. 카네기 집안은 그런대로 지낼 만하게 살림살이가 폈다. 그런데도 모친은 구두 짓는 일을 계속하고 있었으며, 일요일에는 이웃 아주머니가 운영하고 있는 가게의 일을 돕고 있었다. 스콧 씨의 사무실은 공장 안에 있었으므로 태도나 언행이 거친 승무원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었다. 그 수에 있어서도 엄청났다. 1 주일 동안에 만나는


사람의 수가 종전 같으면 1 년 동안에 만나는 수보다도 많았다. 그렇지만 카네기는 그들 승무원하고도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그런 어느 날 카네기는 스콧 씨의 명령으로 앨투나(Altoona)에 있는 본사까지 급료를 받으러 가게 됐다. 급료 도착이 여느 때보다 늦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산 근처에는 철도 선로가 부설되어 있지 않았다. 공사 열차가 유일한 운송 수단이었다. 앨투나로 가자면 철도가 끝나는 곳에서 열차에서 내린 다음 케이블카를 타고 산을 넘어야 했다. 앨투나는 완전히 철도촌이었다. 마을에는 몇 채의 가게와 나무로 지은 간이 노동자 주택이 늘어서 있었다. 카네기는 도착 즉시 용무를 마쳤다. 그는 수표와 현금을 받아 봉투에 두툼하게 챙겨 넣은 다음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경사진 골짜기에서 기관사를 기다리는 동안 여러 차례 안주머니를 살펴보았다. 이윽고 기관사가 왔다. 그는 운전실로 뛰어오르며 카네기를 보고 말했다. "이봐 운전실에 타고 가지 않을래?" "태워 주실래요, 감사합니다." 이내 기관차는 달리기 시작했다. 선로는 수 킬로미터에 걸쳐 아직도 자갈이 갈려 있지 않았다. 그 바람에 기관차가 심하게 흔들렸다. 한참 후 카네기의 손이 안주머니로 갔다. 친절한 기관사 아저씨가 차를 세웠다. 그리하여 운전실 내부와 근처 땅바닥을 찾아보았으나 봉투는 보이지 않았다. "떨어뜨린 장소가 그리 멀지 않을 거에요." 카네기가 말했다. "조금만 뒤돌아 갈 수 없을까요. 부탁합니다." 카네기가 기관사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기관사는 친절한 사람이었다. 기관사가 서서히 차를 뒤로 몰고 나갔다. 달리는 기관차에서 카네기가 한쪽을 살폈으며 화부가 다른 한쪽을 살폈다. "저기 있어요!" 카네기가 봉투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그리곤 차가 제대로 정지하기도 전에 뛰어내려 달려갔다. 봉투는 물이 세차게 흐르는 급류 가까이에 떨어져 있었다. 돈 봉투가 기슭에 떨어져 있었던 데다 친절한 기관사였기에 천만 다행이었다. 만약 문제의 월급 봉투를 찾지 못했다면 카네기의 운명도 훨씬 달라졌을 것이다. 열심히 사는 사람을 위해서 하느님이 도와주신 모양이다. 당시의 철도는 주철이나, 아니면 그보다 더 형편없는 것을 사용하기도 했다. 나무에도 철편을 뒤집어씌워 사용했던 것이다. 또한 주철못으로 철로를 고정시켰으므로, 그 못이 부러지거나 빠져 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리하여 열차 사고가 자주 일어났으며 탈선 사고도 흔했다. 피츠버그 선로는 단선이었으며, 스콧 관구장의 지시에 따라 운행되고 있었다. 하행 열차도 몇 개가 되었으며 상행 열차도 몇 개가 되었다. 그러면 시간을 봐서 도중의 역의 대피선에 대피케 한 다음(하행선일 경우) 상행선을 그대로 진입시켜 한다. 카네기는 열심히 했다. 자기가 전노선을 움직여 보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전신기의 키를 잡고 그는 스콧 씨의 이름으로 지시를 내렸다. 그리하여 전선의 열차를 무리가 없도록 운행시켰다. 몇 시간이 지나서 스콧 씨가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 후에 안 일이지만, 스콧 씨는 다른 주임에게 카네기가 실수 없이 취한 조처를 극구 칭찬했다는 것이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스콧 씨는 2 주일 동안 사무실을 비워 가면서 그 뒷일을 모두 카네기에게 일임했다. 그때 카네기의 월급은 40 달러로 올라 있었다.


카네기가 철도 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2 년쯤 되었을 부친이 돌아가셨다. 1855 년 10 월의 일로서 그의 나이 20 세 때였다. 처음으로 주식을 매입 어느 날 스콧 씨가 카네기를 불렀다. "500 달러 있거든 주식을 사도록 하지." "그 정도라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주식을 사 주겠네. 역에 출입하고 있는 사람이 애덤스 운송 회사의 주를 10 주 팔고 싶어하거든 내가 그것을 사 주지." 그날 밤 카네기의 집안에서는 가족 회의가 열렸다. 뭔가 중요한 일이 생기면 언제나 가족 회의를 개최했던 것이다. "스콧 씨의 말을 따르도록 해요." 모친은 스콧 씨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으므로 이렇게 말했다. 그리하여 부족한 돈은 모친이 이모부에게 빌려 오기로 했다. 카네기가 그 주를 500 달러를 주고 매입한 지 몇 주일인가 지났을 때 카네기의 책상 위에 흰 봉투 하나가 놓여졌다. 뜯어 보니 배당금으로 10 달러짜리 수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그 돈 역시 은행에 저금하기로 했다. 카네기가 22 세가 되었을 때 스콧 씨는 펜실베이니아 철도 회사의 총무로 승진했다. 그는 부임해 가면서 카네기를 자신의 비서로 데리고 갔다. 동생인 톰까지 철도 회사에 취직이 되자. 카네기 일가는 앨투나로 이사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앨투나로 가는 차 안에서 T.T. 우드랩이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침대차의 모형을 친절히 보여주면서 "스콧 씨에게 권해 보세요"라고 했다. 스콧 씨도 침대차에 대한 새로운 착안을 높이 평가했다. 기차의 주행 거리가 종전에 비해서 훨씬 연장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밤에 여행하는 경우에는 침대차로 기분 좋게 자면서 할 수 있는 것이다. 스콧 씨는 이렇게 생각하고 우드랩 씨에게 두 대의 침대차를 주문했다. 우드랩 씨는 감사의 표시라면서 설립 준비를 하고 있는 새 회사 주식의 8 분의 1 을 카네기에게 제공하고, 게다가 자본금도 후불 형식을 취해 주었다. 침대차는 크게 환영을 받았다. 회사의 경기도 좋아지고 마침내 배당금으로 원금을 찾게 되었다. 이와 같은 행운의 투자가 재산을 모아 굳히는 기초가 되었다. 그 후 스콧 씨가 수동 및 통신 담당 육군 차고간에 임명되자 카네기를 자기 보좌관으로 임명하여 워싱턴 근처의 군용 철도와 전신선의 관리를 일임했다. 현장으로 가 보니 워싱턴과 북부 사이의 연락이 완전히 두절되어 있었다. 엉망진창이 되어 있는 선로와 전신선을 수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미 1861 년 4 월에 남북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도 철도와 통신선을 조속히 보수해야 했다. 카네기는 자기가 데리고 간 열차 승무원과 선로 공원, 보선계 그리고 교량 가설자들과 함께 3 일 동안 밤낮 없이 계속해서 일했다. 그리하여 상호 통신이 가능해졌으며 열차도 제대로 왕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밖에 알렉산드리아에서도 남북군간의 격전을 며칠 앞두고 교대 병력을 소송하는 임무를 맡아, 병력을 안전하게 전선까지 수송하는 데 성공했다. 동시에 전선에서 부상병을 싣고 워싱턴에 있는 병원으로 급히 되돌아와야 전쟁의 참혹함을 처음 목격한 카네기는, 앞으로 자기는 평화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겠다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얼마 후 카네기는 스콧 씨를 따라 워싱턴으로 가서 육군의 전신부를 맡아 관리하게 되었다. 전신부 사무실에는 링컨 대통령이 자주 들르곤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오는 것이었다. 전투에 대한 최신 정보를 알아보는 동시에, 갖가지 번거로운 일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을 피해 잠시 쉬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렇게 해서 카네기는 링컨 대통령과도 친한 사이가 될 수 있었다. 카네기는 자기들 가족이 안주할 수 있는 땅을 제공해 준 나라에 대해서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을 기뻐했다. 철강에 눈뜨게 되다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으므로 육군은 철도를 될 수 있는 대로 가장 좋은 상태에서 유지해 둘 필요가 있었다. 병력 수송을 비롯해서 식량 및 탄약 등 군수 물자 등을 여기저기로 이동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선로는 닳아서 납작해졌으며 교량은 타 버린 곳이 허다했으며 기관차도 상당히 부족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상당히 힘이 드는 일이었다. 이렇듯 어려운 사태에 빠지게 된 것은 철이 부족해 전쟁으로 인해 생긴 엄청난 수요에 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철의 취급 방법을 아는 사람까지 크게 부족했던 것이다. 그 후 스콧 씨는 육군 대령으로 예편해 펜실베이니아 철도 회사의 운영을 맡게 되었으며, 카네기 역시 다시 피츠버그의 관구장이 되었다. 카네기가 그후 피츠버그에 돌아왔을 때는 철의 부족 현상이 한층 더 심했다. 철은 군수뿐만 아니라 선로, 교량, 기관차, 차축 등을 만드는 데에도 필요했다. 1859 년 피츠버그의 북쪽 80 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타이터스빌(Titusville)에서 유전이 발견되었다. 카네기도 이때 유전을 조사하러 간 적이 있었으며 콜먼 씨와 합자로 1862 년에 컬럼비아 석유 회사를 창립했다. 이들이 산 농장에서도 시추 결과 석유가 솟아나왔다. 운이 좋았던 것이다. 석유로 말미암아 횡재를 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번 돈을 낭비했다. 그러나 카네기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그 돈으로 은행 빚을 청산하고 나머지 돈으로 33 번가에 있는 땅을 샀다. 그리고는 서둘러 사이클롭스 제철소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주문이 엄청나게 밀려들었다. 그렇지만 주문에 제대로 대주지를 못했다. 아직 공장도 완성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로 골치 아픈 문제가 잇따라서 일어났던 것이다. 여러 가지 생각 끝에 1865 년 5 월에 크로만 제철소와 합병해 유니언 제철소를 설립했다. 카네기의 나이 30 세 때였다. 그들은 얼마 안 가서 훌륭한 차축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원가 계산까지 할 줄 아는 헨리 핍스라는 사람이 참가해 제철소를 도왔다. 헨리가 정리해 놓은 장부를 보게 되면, 현재 이익을 올리고 있는 부분이 어디이며 손해를 보고 있는 부분이 어디인지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카네기는 그때 이미 철도 회사를 그만둔 후였다. 자신의 사업이 급속히 발전했으므로 그 방면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카네기는 밖에는 나돌면서 주문을 맡아 오는 일을 했다. 이렇게 해서 결국은 철교 건설의 주문까지 맡아 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름이 붙여진 회사가


키스턴 교량 제작소였다. 펜실베이니아의 별명이 키스턴이어서 카네기가 그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첫 번째로 오하이오 강에 90 미터의 철교를 완전무결하게 가설한데 이어 세인트루이스에서 미시시피 강에 150 미터의 긴 철교를 가설했다. 이 역시 설계에서부터 최고의 자재와 최고의 기술이 동원되어 이룩한 훌륭한 성과였다. 그 후 카네기는 친구인 번드볼트와 함께 유럽을 일주하고 돌아왔다. 견문을 넓히고 도움이 될 수 있는 지식도 쌓기 위해서였다. 그의 나이 37 세 때였다. 카네기가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뒤 얼마 후, 동생인 톰이 어느 날 느닷없이 이런 말을 했다. "형, 우리도 강철을 생산해야 합니다." "당분간은 다른 사람들의 형편을 살펴보자. 그러고 나서도 늦지는 않으니까." 동생 톰의 제의도 옳은 것이었지만 형인 카네기의 대답도 시의에 맞는 적절한 답변이었다. 카네기가 현재 벌이고 있는 사업, 즉 제철소, 교량 제작소 및 유럽으로 떠나기 조금 전에 시작한 기관차 공장만 가지고도 손이 꽉 차 있었던 것이다. 활동 무대를 뉴욕으로 뉴욕으로 진출한 케네기는 그곳의 세인트 니콜라스 호텔의 조그마한 방에 거처를 정했다. 그리하여 카네기는 그곳에 사무소를 개설해 앤두루 카네기 투자 회사라고 씌어진 간판을 달았다. 우선 뉴욕 시를 돌아다니면서 여러 곳에서 주문을 받아 왔다. 뉴욕으로 진출한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한편 그는 판매원으로서의 수완도 발휘했다. 더하여 뉴욕에서 만난 유력한 은행가와 투자가들에게 호감을 샀다. 당시 카네기는 미국의 미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었다. "세계의 오래된 나라들은 느릿느릿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그들 나라들을 앞질러 급해 열차처럼 돌진하고 있다." 1872 년 런던으로 여행했을 때 그는 우연히 영국 사람이 발명한 전로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로가 실지로 조작되는 현장으로 가 보기도 했다. 그 후부터 카네기는 온 전신을 강철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몇 주일 동안 그러한 상태에서 강철에 대한 공부에 몰두했다. 강철도 뜨거울 때 굴리거나 압축하면 여러 모양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카네기가 강철의 포로가 되었을 때는 이미 그러한 실험적인 단계가 지나고 여러 가지로 시끄러웠던 분쟁도 다 해결된 후였다. 카네기는 피츠버그로 돌아오자 즉시 동생인 톰을 만났다. '제강을 시작해 보려고 한다"라고 카네기는 자신에 찬 동시에 즐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언제 어디서 시작하나요?" 하고 동생이 물었다. "그럼, 언제 어디서 시작하나요?"하고 물었다. "지금 곧 시작하는 거야. 장소는 이제부터 생각하는 거다." 카네기가 대답했다. 그런데 그가 새로 사업을 시작한 1873 년은 불행스럽게도 최악의 해였다. 미국에 대공항이 닥쳐온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급료도 받지 못하고 직장을 잃었으며, 철도 공사가 중단되어 미완성인 선로가 들판에 버려진 상태로 가로 누워 있었다. 모든 것이 정지된 그런 상태였다. 굶주려 신음하는 사람들도 허다했다.


카네기는 25 만 달러를 은행에 예치해 두고 있었다. 다른 동업자들처럼 헛되이 돈을 쓰는 일 없이 나머지는 반드시 은행에 맡겨 두었다. 마침내 제강소를 세울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졌다. 한편 일자리를 구하려 피츠버그의 거리를 방황하던 많은 사람들이, 카네기가 사람들을 구한다고 하자 앞을 다투어 몰려들었다. 주위의 친구들은 카네기의 제강소 개업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다만 어릴 적 친구인 데이비드 매캔드레스가 제일 많을 돈을 내주었다. 그는 폭넓게 잡화상을 경영해 돈을 모았으며, 그런대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 오고 있었다. 카네기는 그 친구의 호의에 감사한 나머지 회사의 이름을 카네기 매캔드레스사라 부르기로 결정했다. 장소는 교통이 편리한 동시에 유서 깊은 곳을 택했다. 강을 끼고 있을 뿐 아니라 오하이오 철도와도 가까운 곳이었다. 카네기는 하나의 사업에 전력투구했다. 그때까지는 애덤스 운수회사를 비롯해 침대차, 철, 교량, 기관차, 용광로 등 여러 가지 사업에 투자해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런대로 다 같이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와 같은 다양한 많은 업체를 정리하고 제강에다 전부 투자할 계획이었다. 그는 강철의 용도에 대해서 앞으로 무한한 발전성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강철은 차량과 배 그리고 고층 건물과 기계를 만드는 데 소요된다는 것을, 즉 산업의 중심이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카네기는 다른 회사의 주식도 역시 서둘러 처분해 그 돈을 제강에 투자했다. 돈만 투자한 것이 아니라 신념까지도 사업에 투자했다. 얼마 후의 일이었지만, 카네기가 철강을 속속 생산해 내고 있을 때, 링컨 대통령이 전국의 모든 철도 선로를 표준화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때까지는 선로가 철도 회사마다 제멋대로여서, 기관차를 이 철도에서 저 철도 위에 올려놓고 달리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카네기는 전직원에게 주식을 배당해서 일종의 공동 경영을 하는 것을 경영 방침으로 추진해 나갔다. 만약 한 직원이 회사를 그만두려고 할 때는 그 사람의 주를 다른 주주의 한 사람 내지 여러 사람이 매입하도록 했다. 따라서 이익금이 생기면 주에 대한 배당금이 분배되기 때문에 모두가 다 자기 일처럼 열심히 일했다. 전국의 철도가 거의 강철로 시설되어 수요가 점차적으로 줄어들었지만, 철도 외의 부분에서는 수요가 얼마든지 있었다. 배, 고층 건물에 사용되는 기둥이라든가 대들보, 골조와 승강기 등 강철의 새로운 용도는 얼마든지 있었다. 카네기의 강철은 자유의 여신상을 비롯해 워싱턴 기념탑에도 사용되었다. 그야말로 카네기는 미국의, 아니 전세계의 철강왕이 된 것이다. 1881 년, 그의 46 세 때는 당시의 미국의 총 강철 생산고의 50%를 카네기가 생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친 "셰익스피어 전집"을 선물 1878 년 가을, 카네기는 존 번드볼트와 함께 세계 일주 여행을 위해서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했다. 그때 그의 모친이 카네기가 제일 좋아하는 "셰익스피어 전집"을 선물로 주었다. 배를 타고 가면서 그렇듯 좋아했던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두루 읽어 보라고 해서였다.


특히 마음에 드는 부분은 일기장에다 옮겨 놓기도 했다. 그는 그 밖에도 공자에 관한 책을 구입해다 읽었으며 또한 힌두교와 불교 등의 책도 구입해 놓았던 것 같다. 당시의 미국 사람으로서 공자나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몇 사람 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는 여행중 사치스러운 일을 한 가지 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전보를 주고받는 데 아낌없이 돈을 쓴 일이었다. 그는 여행중에도 그가 가 있는 곳에서든지 미국에 있는 제강소의 상황을 전보로 상세하게 보고토록 했다. 따라서 그는 현재 제강소가 소유하고 있는 광석의 재고량을 비롯해 코크스, 선철 등의 양은 물론이고 이미 제조된 또는 선적된 강철의 톤수를 여행중에도 훤히 알 수가 있었다. 동시에 회사 쪽으로 격려와 칭찬의 전보를 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후 그는 고향인 던퍼믈린에 공공 도서관을 기증해 정초식에 모친과 함께 참석했다. 던퍼믈린에서는 시 당국이 그날을 기념하기 위해 공휴일로 지정했다. 카네기는 물론 돈을 버는 재주에 있어서도 뛰어났지만, 또 하나의 장점은 사람을 보는 눈이 정확하다는 점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인재를 발굴해 내는 안목이 뛰어난 점이었다. 그리하여 적재적소에 사람을 배치해 기업체를 움직여 나가도록 했다. 이런 일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해서 제강소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카네기는 공로자에 대해서는 이에 걸맞은 대우를 반드시 해 주었다. 공짜로 주식을 분배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되면 공동 출자자의 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미국의 대통령이 받는 금액만큼을 주어 대우해 주기도 했다. 당시의 금액으로 연봉 2 만 5,000 달러였다. 1881 년에는 키스턴 교량 제작소를 제외한 모든 제철소 그리고 제강소를 통합해 카네기 형제 회사라는 이름으로 발전적인 흡수 작업을 이룩했다. 말하자면 글자 그대로 원료에서 제품까지의 과정에서 필요한 강철과 관계되는 일체의 것들을 손에 넣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어 그가 철강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에게도 시련이 있었다. 그것은 1886 년에 일어난 여러 가지 일로 해서였다. 먼저 카네기가 장티푸스에 걸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상당한 중태에 빠져 있었다. 이때 동생인 톰이 문병을 왔다가 동생마저도 급성 폐렴에 걸리고 말았다. 그 역시 중태였다. 당시에 장티푸스나 급성 폐렴은 의사조차도 포기하는 무서운 병이었다. 여러 가지로 손을 쓴 보람도 없이 톰이 먼저 눈을 감고 말았다. 이어서 어머니마저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세상에서 카네기와 가장 가까운 동시에 사랑했으며 존경했던 두 가족을 잃자, 카네기는 삶의 의욕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이윽고 카네기가 움직일 수 있게 되자 절친한 친구의 자가용으로 뉴욕으로 향했다. 억만장자의 부를 이룩하고서도 카네기는 그때까지 자가용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자가용을 가지려고 마음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네기의 건강은 서서히 회복되어서 승마를 즐길 수 있을 정도까지 되었다. 그리하여 그 동안 오래 교제해 온 옛 친구의 딸인 루이스 피트필드와 사귀게 되었다. 품위가 있고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그 아가씨와 마침내 1887 년 7 월에


집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의 나이 52 세였으며 루이스의 나이 29 세였다. 루이스는, 정숙한 아내로서 동시에 가사 처리에도 재치 있는 솜씨를 발휘했다. 역시 카네기의 사람을 보는 눈을 틀림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 나타나기를 좋아하지 않는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그러면서도 남편에게 커다란 감화를 주었다. 어떻든 만혼이었지만 행복한 결혼 생활이었다. 남북 전쟁이 끝난 후 몇 년 동안에 다수의 이민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계속 몰려왔는데, 그들 대부분이 피츠버그에 정주했다. 그들중에는 카네기의 공장에 취직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1890 년대 초엽에는 약 1 만 5,000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카네기의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노동자의 수효가 많아지다 보면 여러 자지로 노사간에 말썽이 야기되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어떤 기업에서는 사용자에 맞서는 종업원 전부를 해고하는 경우도 흔했다. 이에 대해 카네기는 이들 기업을 비난했다. 그는 종업원에 대해 자기 나름의 신조가 있었다. '네 이웃의 직업을 빼앗지 말지니라'고 평상시에 말하고 있었으며, 종업원은 자기 직장을 지킬 권리가 있으며, 노사간에 생기는 의견 차이는 서로 대화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카네기의 사고 방식이었다. 그는 노동 쟁의를 해결할 만한 자신이 충분히 있었다. 그때까지는 대개의 공장에서는 노동자의 근무 시간이 하루 평균 12 시간이었다. 그런데 카네기는 1885 년에 8 시간 3 교대제를 실시하려고 했다. 제철소라 용광로에 24 시간 계속 불을 때야 했으므로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카네기가 최초로 8 시간 노동제를 실시했던 것이다. 카네기는 봄마다 유럽으로 가는 습관이 있었다. 그리하여 1892 년 그가 프릭에게 전권을 맡기고 유럽에 가 있을 때 카네기의 공장에서도 쟁의가 일어났다. 그런데 전권을 맡고 있는 프릭이 여러 가지 말썽에 대비해 회사와 공장 사이에 울타리를 치게 하고 300 명의 경비원을 보내 공장을 지키게 한 것이 결국 말썽이 되어 불상사가 발생했다. 프릭은 공장에서 일어날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경비원들로 하여금 밤에 배를 타고 공장으로 접근토록 지시했다. 공장 앞에 바로 강이 흐르고 있었으며, 다른 길을 통해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원들이 이를 알게 되었다. 신중한 배려가 오히려 역효과를 부른 것이다. 경비원들의 접근을 알고 총탄으로 맞이하자 이쪽에서도 총탄으로 응수했다. 밤새도록 총격전이 계속되어 최소한 10 명이 죽고 몇십 명이 부상했다. 결국 4 일이 지나자 주지사가 군대를 동원해 이를 진압시켰다. 그리하여 공장이 다시 가동된 것은 여러 달 후의 일이었다. 쟁의 소식을 들었을 때 카네기는 즉시 귀국하겠다는 전보를 회사로 쳤다. 그러나 프릭은 카네기가 돌아오는 것을 원치 않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 쟁의는 프릭 쪽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카네기는 그 분쟁을 오랫동안 잊지 못했으며 가슴 아파했다. 프릭은 회사의 소유자나 경영자에 대해서만 책임을 느낄 뿐 종업원을 위해 걱정하는 카네기의 마음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앤드루 카네기는 33 세 때, 앞으로의 자기 생애를 통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 기록해 둔 것이 있었다. 그는 2 년 이내에 은퇴해 대학에 진학해서


3 년간 공부를 하겠다고 적어 놓았다. 당시 그의 연수입은 5 만 달러로서 그만하면 누구에게나 충분한 금액이란 말도 했다. 33 세에 대학에 들어가 3 년 동안 공부할 마음이었던 것을 보면, 평상시 그가 얼마나 향학심이 강했던가를 알 수가 있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책을 읽어 많은 지식을 습득했던 것이다. 먼 여행을 할 때나 혹은 1,2 시간 정도가 소요되는 여행시에도 반드시 읽을 책을 휴대해 가면서 꼭 읽곤 했던 것이다. 3 년 동안 대학에서 공부한 후 신문사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본래 글쓰기를 좋아했던 그였으며, 신문사에 들어가서 빠른 정보를 흡수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또 이런 말도 남겨 놓았다. "나는 무엇을 하든지 열중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 따라서 나는 가장 인격을 높일 수 있는 인생을 선택하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일을 할 때 이에 집중하는 동시에 성실한 인격의 소유자였음을 충분히 이해하게 해 준다. 그러나 그로부터 25 년이 지난 후에도 막상 은퇴하려고 했을 때, 그는 자기가 쌓아올린 커다란 사업으로부터 몸을 뺀다는 것이 그리 간단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럴 때마다 자기 자신을 자극하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4 억 9,200 만 달러에 매각 마침내 1901 년 3 월 2 일에, 카네기는 자신의 모든 업체를 모건(J. Morgan)에게 4 억 9,200 만 달러에 매각해 버렸다. 그의 나이 66 세였으며 작은 체구에 살이 쪄 있었고 얼굴에는 주름이 전연 없었지만 머리와 수염은 새하얘져 있었다. 이렇듯 은퇴한 카네기는, 자기가 번 부를 어떤 식으로 사회에 환원하느냐가 희망인 동시에 고민거리였다. 그의 글을 보게 되면 가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 "저 세상으로 돈을 가지고 간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저 평상시 쓰고 싶을 때 어렵지 않게 지출할 수 있는 돈만 남겨 놓고 그 이외는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사회에 환원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자기의 돈을 어떤 식으로 인류의 복지를 위해 사용할 수 있을 것인가 신중히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수필이라든가 연설 원고를 부지런히 썼다. 그리고 또 하나 그는 세계 평화 달성에 커다란 관심이 있었으며, 음악 연주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또 벤저민 프랭클린 협회에, 플랭클린의 유산에 맞먹는 42 만 달러를 기부했다. 이 협회가 직공들을 위한 야간 학교를 설립하려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카네기는 은퇴한 후 여러 해에 걸쳐 던퍼믈린과 피츠버그에 있는 공공 단체를 비롯해서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는 개인에게 척척 돈을 보내 주었다. 개인적으로 주는 돈은 남모르게 주었으므로 남들은 아무도 그런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또 옛친구를 찾아내어 종신 연금을 보내 주었다. 그리하여 이제 와서는 남에게 돈을 주는 것이 그의 일이 되었을 정도였다. 카네기가 최초로 기부한 공공 도서관은 고향인 던퍼믈린의 도서관이었다. 고향의 도서관의 감동적인 정초식에 참석했다가 귀국한 카네기는 다음으로 피츠버그에 도서관을 기증하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시장에게 편지를 썼다.


만약 피츠버그 시에서 부지를 제공하고 매년 유지비 1 만 5,000 달러를 부담한다면 25 만 달러를 기부하겠다고 제의했다. 도서관을 건립하는 데 전적으로 이쪽에서 모든 것을 부담한다면, 도서관에 대한 애착이 가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얼마라도 자신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모은 돈이 도서관 건립에 사용된다면 그만큼 그 도서관을 사랑하게 될 게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피츠버그의 시장이 이 제의를 거절했다. 카네기가 자기의 기념관을 세우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라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카네기는 자기가 미국에 와서 처음 살게 된 아르게니시에 기증했다. 시에서는 이 돈으로 도서관과 음악당과 강당을 건립했다. 1890 년 이 건물의 헌납식은 해리슨 대통령까지 참석한 가운데 화려하게 거행되었다. 피츠버그 시에서는 이와 같은 기부를 거절한 일에 대해서 후회하기 시작했으며 카네기에게 재고를 요청해 왔다. 카네기는 그 자리에서 "안 된다"고 말하고 나서 다시 "피츠버그에서는 25 만 달러로는 부족하니 그것을 4 배로 해서 기부하지요" 하고 대답했다. 대단히 유머 있는 대답이었다. 카네기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것이 싫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기부도 조용히 했다. 도서관을 비롯해 음악당, 미술관 심지어는 공업 학교 설립, 여학교 설립도 될 수 있는 대로 조용한 가운데 했다. 후에 이들 공업 학교는 카네기 공과 대학이라는 이름으로 발전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모친의 이름이 붙여진 마거릿 모리슨 카네기 대학에 대해서는 이를 자랑으로 여겼다. 이 학교에서는 여학생들이 가정학과 도서관학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카네기가 기부를 잘해 준다는 소문이 퍼지자 도처에서 기부 요청을 해왔다. 그러나 앞서도 언급했지만 그는 무조건 기부를 하지는 않았다. 자기 나름으로 일정한 기준을 마련했다. 정말로 도서관이 필요한 사람들인가, 꼭 필요하다면 스스로 부지를 제공하고 책의 구입비와 도서관의 유지비 정도는 제공해야만 기부를 해 주었다. 인간이란 누구나 조금이라도 자기의 돈이 들어가 있는 것에 애착 내지는 관심을 갖게 되기 때문이었다. 카네기는 이렇듯 엄청나게 기부 의뢰가 많아지자 사무 처리에 전념할 비서를 몇 명 고용하게까지 되었다. 이렇게 하여 카네기가 기부한 단체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뉴욕 시내에 있는 68 개의 도서관 분관이었다. 이에 약 500 만 달러의 기부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카네기는 적어도 6,000 만 달러를 도서관을 위해서 기부했는데, 미국에서만도 2,811 개의 도서관을 세웠고, 영어권의 나라에도 300 개의 도서관을 건립했으며, 그 범위는 영국에서 남태평양의 피지 섬에 이르렀다. 그 밖에도 카네기는 많은 오르간을 각 단체에 기증했다. 최초의 기증처는 부친이 속해 있었던 교회였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오르간 기증은 약 8,000 대에 이르렀다. 그의 오르간은 각종 종파의 교회에서 은은하게 연주되었다. 또한 코넬 대학에는 교육의 진흥 및 급료(당시의 급료가 형편없었다)와 연금에 보탬이 되도록 기금을 만들었다. 또한 스코틀랜드의 4 개 대학에도 자기의 신탁 재산을 아낌없이 기부했다. 그 외에 기억나는 것만 해도 카네기 영웅 기금, 각종 예술의 전당으로 지금도 한창 이용되고 있는 카네기 홀,


카네기 교육 진흥 기금, 카네기 국제 평화 재단 등의 설립을 위해 기부하여, 그 액수가 자그마치 3 억 5,000 만 달러 이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카네기는 자신의 저서인 "재산의 복음"에서 말하고 있듯이 그러한 복음을 전달하는 자였으며, 일단 엄청난 재산을 맡아 관리하는 재산 관리자로서의 이상을 실천했던 것이다. 그가 3,000 개가 넘는 각지의 도서관을 건립하는 데 서슴없이 돈을 기부하고 나서 쓴, 다음과 같은 글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소년 소녀들은 좋은 책을 많이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학교 또는 일을 마치고서 이용할 수 있는 쾌적한 도서실도 있다. 나는 가끔 오후 5 시경 조용히 나의 방에 앉아서 이곳저곳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을 많은 소년 소녀들의 모습을 마음속으로 그려 보곤 한다. 나는 그러한 한때가 즐거운 것이다. 때때로 나는 공상 속에서 어린이로 돌아가 그들과 함께 책을 읽고 있는 것이다." 웃음의 마술사 채플린 찰리 채플린(Charles Spencer Chaplin;1889__1977) 영국의 영화 배우, 감독 및 제작자. 런던에서 보드빌 배우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부터 무대에 섰다. 6 세 때 부친을 잃어 밑바닥 생활에 빠졌다가 판토마임 희극 극단인 F. 카노 극단에 참가하여 미국 순회 공연중 영화 제작자인 세네트(M. Sennett)의 눈에 띄어 할리우드로 진출했다. 1914 년의 "성공 싸움"부터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으며 스스로 감독도 하면서 많은 단편 희극과 함께 1917 년부터는 장편 "키드(Kid)"(1921), "모던 타임스"(1936), "위대한 독재자"(1940), "라임라이트"(1952) 등을 제작했다. 독특한 분장과 뛰어난 인간 관찰 및 날카로운 사회 풍자로 명성을 얻었다. 항상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옹호했으며, 사회 부정에 대한 항의를 눈물과 웃음이 깃든 풍자를 통해 날카롭게 표현했다. 세계 평화상과 아카데미 특별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1964 년에 펴낸 "자서전"이 있다. 전세계 사람들에게 웃음 선사 1914 년은 채플린이 처음으로 영화에 모습을 나타낸 해이다. 불과 80 여 년 전에 불과하지만 그때의 영화는 대부분이 15 분짜리의 단편 영화였다. 그리고 희극 영화라는 것이 마지막 장면에 가서 서로 쫓고 쫓기면서 한바탕 소란을 피우다가 끝나 버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지만 그 중 몇 편의 영화는 지금 보게 되어도 새삼스럽게 감탄할 만한 것이었으며 충분히 웃음을 간직하고 있다. 최근의 텔레비전 프로에서 개그를 보게 되면 채플린을 흉내낸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탈근대주의가 칭송을 받고 있는 현대에 80 년이나 전의 개그가 그대로 통용되어 사람들을 웃길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아무래도 사람이란 언제나 똑같은 패턴에서 웃게 되는 것 같고 웃음에는 국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채플린의 영화는 유럽 사람이나 미국 사람은 물론이고 전세계 사람들을 웃음 속으로 유도해 갔던 것이다. 그러나 채플린은 사람을 웃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눈물을 자아내게도 할


수가 있었다. 또한 그것보다 더한 것도 해낼 수가 있었다. 그의 대표작 중 몇 편을 소개하면 "모던 타임스"라든가 "독재자", "살인광 시대"와 같은 작품을 들 수가 있다. 이들 작품은 전부 1930 년에서 1940 년에 걸쳐 제작된 그의 대표작들이다. 그런데 이들 작품은 앞서 말한 거처럼 사람을 웃길 뿐만 아이라, 뭔가 그 이상을 느끼게 하고 생각게 했던 것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뭔가를 생각게 하는 것은 사람을 웃기는 일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웃기면서 동시에 뭔가를 생각게 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채플린은 웃음의 예술가라 할 수 있다. 그의 영화 속에는 20 세기와 통하는 엄숙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뭔가 엄숙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여태껏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 생각게 한다는 이야기도 된다. 채플린의 영화는 그런 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잊을 수 없는 인상을 우리에게 남겨 준 것이다. 한 번이라도 그의 영화를 본 사람은 장편이든 단편이든 그러한 느낌을 간직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온 세계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한 채플린이라는 사람은 어떤 체험을 했으며, 또한 남을 웃기기 위해 어떤 공부 혹은 노력을 한 것일까. 쇼펜하우어의 책에서 웃음을 어떤 영화 평론가가 채플린의 영화를 본 것이 지금으로부터 20 년 전의 일로, 그 당시 '비바 채플린'이라는 제목으로 "모던 타임스"를 비롯해 "독재자" 등의 대표작이 상영되고 있었을 때였다. 그는 당초 역사적으로 유명한 영화의 샘플로서 봐 둬도 손해는 없을 것이라는 정도의 가벼운 기분으로 관람했지만, 영화관에서 나올 때는 망설임없이, 그 두 작품을 최고 걸작 영화의 부류 속에 포함시키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에 비디오 테이프로 다시 보아도 최초의 감동이 조금도 퇴색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처음 채플린의 영화를 본 무렵, 그렇듯 멋있는 영화를 제작한 채플린이라는 인물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에 대해 흥미를 느껴, 그의 자서전을 읽어 보았다고 한다. 자서전 또한 재미있는 저술이었지만, 어쩌면 사소해 보이는 다음과 같은 기술에 오히려 매우 호기심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채플린이 20 대 초반 무렵,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저술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기 시작해 그로부터 40 년 동안 몇 차례인가 읽다가는 중단하곤 하여 아직도 끝까지 다 읽지 못했다고 한 기술이었다. 쇼펜하우어라고 하면, 인생은 고뇌이므로 인간은 이것을 견뎌내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달관한 철학자이며,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그 문제를 중심으로 해서 쓴 길면서도 결코 읽어 나가기 쉽다고 할 수 없는 철학서이다. 그리하여 상당히 철학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쉽게 읽어 보려고 하지 않는 책이다. 그런 책을 채플린이 읽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중단을 거듭하면서도 40 년 동안이나 손 가까운 데에 놓아두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펼 보았던 것이다. 쇼펜하우어와 채플린 하면 기묘한 배합일는지도 모른다. 한쪽은 온 세계 사람들을 웃기는 희극 배우이며, 또 한쪽 언제나 개를 끌고 쓰디쓴 벌레를 삼킨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산보를 한 고뇌의 철학자였다.


그 밖에도 채플린은 여러 저서에 대한 독서 목록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로 언급하겠지만, 어떻든 그도 남모르게 책을 꾸준히 읽는 등 보통 이상의 공부를 했음을 틀림이 없다. 그가 쇼펜하우어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껴 무엇을 공부했는가에 대해서는 전연 언급이 없지만, 자기 일로 봐서 웃음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분석에 대해서 연구를 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웃음이란 어떤 개념과 여기에서 유출되는 현실과의 불일치에서 탄생된다고 했다. 개념과 현실과의 불일치. 철학자는 이와 같은 추상적인 표현을 즐기지만, 알기 쉽게 말하면, 어떤 일이 본래 갖추고 있어야 할 것과는 완전히 다른 역할이나 기능을 갖추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한 실례를 채플린의 영화를 통해서 몇 가지 들어 보면 철학자의 분석이 현대에도 통용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16 년에 제작된 "채플린의 소방서원"이라는 영화에는 소방차의 탱크 마개를 틀자 커피가 쏟아져 나오는 장면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장면에서 웃게 될 것이다. 불을 끄기 위한 장치라는 것이 소방차의 개념일 텐데, 이것이 커피 메이커라고 하는 현실이 되어 나타나, 이러한 불일치에 대해 사람들은 웃게 되는 것이다. 또한 1918 년에 제작한 "개의 생활"이라는 영화에는, 개의 꼬리가 북을 계속 두드리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도 개의 꼬리라는 개념이 한 가닥 나무 막대기라는 현실로 변신하고 있는 불일치가 웃음을 유도해 내게 된다. 그 밖에도 1940 년에 제작된 영화 "독재자"에서는 독재자 힌켈이 편지를 봉하기 위해 옆에서 부동 자세로 서 있는 사관의 혀로 봉투 가장자리를 핥게 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1936 년에 제작된 영화 "모던 타임스"에서는 자동 식사기가 고장을 일으켜, 입을 닦는 장치가 시험대에 앉아 있는 채플린의 얼굴을 여러 차례에 걸쳐 때리는 장면이 나온다. 다 같이 거기에 표현되어 있는 것은, 철학적으로 말하면 개념과 현실의 불일치가 되는 것이다. 물론 채플린 영화의 웃음이 이와 같은 불일치에서만 탄생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채플린이 쇼펜하우어의 저서를 읽었을 때 '과연!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구나' 하고 어느 순간에 탁 하고 알았다는 듯이 무릎을 쳤는지도 알 수 없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쇼펜하우어의 이론을 바탕으로 웃음의 순간순간의 장면을 생각했다고도 판단할 수 있다. 늘 웃음을 선사하기 위해 그 소재를 찾고 있었던 채플린으로서는 쇼펜하우어의 이론이 하나의 힌트가 되었으며 그로부터 웃음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고 상상할 수도 있다. 정말로 재미있는 일이다. 시대를 초월한 새로운 웃음 데이비드 로빈슨의 저서 "채플린"에는 흥미로운 사례가 많이 기록되어 있다. 즉 채플린의 영화가 어느 정도로 사람들을 웃겨 놓았는가에 대한 예이다. 예를 들면 채플린의 영화를 2 주일 동안 상영하게 되면, 손님들이 어찌나 심하게 웃게 되는지, 그만 손님들이 앉은 의자의 나사가 헐거워지므로 이를 단단히 다시 조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영국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황금과 시대"의 익살스러운 장면을 관람하고 있는 관객들의 웃음 소리를 10 분 동안에 걸쳐 방송하는, 방송사에 남을 만한 기묘한 실험을 한 적이 있었다. 이를 위해 선택된 것은 눈덮인 산의 절벽 끝에서 시소처럼 흔들리고 있는 통나무집 신(scene)이었다. 채플린과 그 상대자가 걸어다님에 따라 통나무집은 크게 기울어 금세라도 절벽에서 굴러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분명히 이런 장면은 몇 차례를 보아도 웃음이 터져나오게 한다. 이미 알고 있는 장면인데도 똑같은 장면에서 반드시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이다. 이 라디오 방송에서 웃음의 폭풍이 예정했던 대로 약 10 분 동안 계속되었는데, 지금도 아마 똑같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 짐작된다. 앞에서도 말한 바 있듯이 채플린이 만들어 내는 웃음에는 시대를 초월한 새로움이 있으며, 그러한 웃음을 만들어 낼 수 있었기 때문에 웃음의 예술가라고 지칭할 수가 있는 것이다. 10 분간이나 계속해서 사람을 웃길 수 있다는 것은 평범한 재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소문 만복래'라는 약간 낡은 격언이 있지만, 웃음은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 돈 안 들이고 받을 수 있는 간단한 처방이다. 채플린의 영화를 보고 크게 웃은 부상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지팡이도 잊고 걸어 나갔다는 예가 보고되어 있지만, 아무래도 그러한 일이 실제로 있었던 모양이다. 웃는 일의 치료 효과에 대해서 진지하게 검토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는지. 그렇다면 가장 좋은 제재로서 우선 추천할 수 있는 것이 채플린의 영화라 할 수 있다. 채플린 영화의 웃음의 기본이 도는 것은, 바로 그 실크 해트와 콧수염 그리고 여기저기가 찢어지고 답답해 보이는 웃옷과 헐렁한 바지, 커다란 구두, 자유자재로 걸터앉는 지팡이와 또한 발끝을 밖으로 향하고 오리처럼 걷는 걸음걸이다. 이와 같은 상표가 된 스타일은 이미 1914 년에 발표된 두 번째 영화에서부터 등장하는데, 처음에는 순간적인 착안에서 탄생되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모던 타임스"에 이르기까지 약 20 년간, 그는 이와 똑같은 스타일로 스크린에 등장했으며, 그리하여 관객들은 언제고 변함이 없는 부랑자의 모습을 보기만 하면 웃음을 자아내게 되었다. 헤아려 보면 약 20 년 동안이나 내용이 다른 영화에 완전히 똑같은 모양을 한 동일한 인물이 계속 등장한다는 것에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관객들이 용케도 싫증을 느끼지 않았구나 하고 탄복하게 된다. 이는 채플린의 영화를 몇 차례 보아도 싫증을 느끼지 않는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통해서도 증명이 된다. 그렇다면 싫증을 느끼지 않는 영화의 비밀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그것은 인간은 어째서 웃는가 하는 것과 똑같을 정도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웃음의 원리를 설명한 쇼펜하우어도, 인간은 어째서 웃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이란 유일하게 웃는 동물로 간주되어 있지만, 인간의 최고의 비밀은 웃음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에 대해서는 도스토예프스키도, "나는 웃는 방법에 따랄 그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 처음 보는 상대방의 웃는 얼굴이 기분을 좋게 해 주면, 그 사람은 좋은 인간이라고 생각해도 그다지 문제가 없을 것이다"라고 "죽음의 집의 기록"이라는 작품에서 말하고 있다. 인간은 어째서 웃는가에 대해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논리 정연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누구든 더 이상 웃지 않게 될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스스로도 왜 웃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닐는지! 채플린 본인의 말에 따르면, 그의 웃음의 기본이 되는 것은, 발끝을 밖으로 향해 걷는 오리 같은 문제의 걸음걸이에 있다고 말하지만 밖으로 향해 걷는 오리 같은 문제의 걸음걸이에 있다고 말하지만, 이를 숙달토록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연습을 쌓아야 했을 것이다. 그 힌트가 된 것은 소년 시절에 거리에서 본 류머티즘 환자인 노인이 한쪽 발을 질질 끌며 걷는 우스꽝스러운 걸음걸이였다고 한다. 채플린이 모친 앞에서 그 노인의 걸음걸이를 흉내내 보여 주자 모친이 남의 불행을 웃음거리로 삼는 것은 좋지 않다고 타일렀지만 웃음을 참느라 혼이 났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영화 배우가 된 채플린은 언제나 그 걸음걸이만을 생각하며 똑같이 연습을 했으며, 언제라도 그런 걸음걸이를 취하게 되면 틀림없이 웃음을 자아내게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가난했던 소년 시절 부랑자의 모습이 채플린의 등록 상표인데, 그것은 순간적인 착안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은 이미 한 바 있다. 그런데 거기에는 그의 가난하고 비참했던 소년 시절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늘, "언제나 어른들 틈 속에 잘못 끼여든 어린애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 바 있다. 말하자면 20 대의 젊은 나이로 미국의 대부호들 속에 끼여든 채플린으로서는 그야말로 가난하고 비참했던 그 시절을 잊지 않으려고 부랑자의 스타일에 계속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기아와 그 기아를 양육하는 가난한 사나이의 이야기를 묘사한 "키드"나 또한 싸움에 진 개와 함께 생활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그려 낸 "개의 생활"과 같은 작품이 탄생된 것은 채플린 자신의 가난하고 비참했던 소년 시절의 체험 덕택이었다. 가난한 소년 시절이 없었다면 결코 탄생될 수 없었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하는 것보다 이들 작품을 통해서 스스로의 체험을 묘사하기 위해 그런 작품을 제작했다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채플린은 자신의 소년 시절을 회고하면서 "진흙탕물처럼 생활이 비참했다"고 말했던 것이다. 채플린이 태어나고 1 년 후에 양친은 별거하기 시작했으며, 채플린은 모친이 맡아서 키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네 살 손위인 사촌형과 함께 런던의 빈민가에서 자랐다. 부친이 보내오는 위자료의 송금은 밀리기 일쑤였으며, 무대를 떠난 모친은 바느질 품삯을 팔며 가계를 간신히 지탱해 나갔지만, 제대로 먹을 수도 없는 무척 가난한 생활을 이어 나갔다. 그리하여 옷이 완전히 해져도 옷을 살 돈이 없었으며, 구도도 없었으므로 모친의 것을 신은 어린 채플린이 빈민에게 수프를 나누어 주는 구제소로 달려가 매일 한 번뿐인 식사를 받아 가지고 돌아오는 상황이었다. 사태는 더 악화되어 모친이 신경이 이상해져 정신 병원에 입원해 버리자, 집에 남게 된 아이들은 빈민 구제소에 넘겨졌다. 한 번 신경에 지장이 초래된 모친은 정신 병원을 자기 집처럼 들락거렸지만, 결국 정신병은 유치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머니를 지극히 사랑했던 채플린은 그러한 어머니로부터 아름다운 추억만을 끌어내어 자서전에서 기록해 둔 것 같다. 그리하여 그는 모친을 극찬해, "어머니의 모습은 꽃다발처럼 아름답게 보였다."고 기록했다.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는가 하면 판토마임을 연기하는 등 조금은 이름이 알려져 있던 그의 모친은 아이들을 예술인으로 만들기 위해, 집안에서 여러 가지 연기를 보여 주곤 했다. 모친의 판토마임에 대해서 채플린은 다음과 같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머니의 판토마임은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멋있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동작을 보고 있는 동안에, 나는 감정을 손이나 얼굴로 표현하는 기술뿐만 아니라 인간 그 자체를 배울 수 있었다." 말하자면 채플린에게 있어서 모친은 최초인 동시에 최고의 멋진 교사이기도 했던 것이다. 채플린이 빈민 구제소에 수용되어 있던 무렵, 또 다른 빈민 구제소에 수용되어 있던 모친이 면회를 왔을 때의 감동을 기록한 것이 있다. 당시의 채플린 소년은 백선에 걸려 박박머리에 살균제를 발랐으며, 그런 머리를 손수건으로 묶은 그야말로 보기 흉한 모습이었다. 채플린은 이때의 감동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모친은 크게 웃으며 나를 끌어안고는 키스를 해주었다. 그리고는 '그래 아무리 지저분해도 좋아. 정말로 너는 귀여운 내 아들이니까!'하는 다정한 말을 내게 해 주었던 것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렇듯 채플린이 모친의 일을 아름다운 추억으로서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극히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모친의 깊은 애정을 받으면서 자랐기 때문이다. 모든 어린이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자기 모친의 사랑을 받고 또한 소중한 취급을 받고 있다는 느낌일 것이다. 부모는 자기 자녀를 오직 사랑하면 되는 것으로, 이에 비하면 다른 일들은 거의 없어도 상관없다고 할 수 있다. 극빈의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채플린이 타락한 비행 소년이 되지 않는 것은 모친의 애정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채플린의 영화 "키드"에서는, 자신이 키운 기아가 강제로 고아원으로 끌려가려 할 때, 채플린이 초인적인 활약으로 되찾아 오는 감동적인 장면이 있다. 그러한 장면을 생각해 내어 영화화한 채플린의 뇌리에는 그의 어머니의 말이 깊이 새겨져 있었던 것 같다. 최소한 그 영화에는 자신이 맛보았던 고독에 대한 체험을 분명히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모던 타임스"에도 고아원으로 끌려가려고 하는 소녀가 등장한다. 그리고 부랑자로 등장하는 채플린은 교도소를 들락날락한다. 채플린은 영화 속에서 웃음이라고 하는 감미료로서 입맛을 좋게 해나가는 가운데 괴로웠던 소년 시절의 체험을 되돌아보지 않았나 싶다. 재능을 위한 과감한 투자 진흙 수렁과 같은 가난을 체험했던 채플린에게 있어서 돈은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절실한 문제였다. 채플린에게 자신의 예술과 돈의 관계에 눈뜨게 한 것은, 5 세에 처음으로 무대에 오른 체험이었다. 당시 그의 모친은 조그마한 음악홀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어느 날인가 도중에 갑자기 노래가 나오지 않게


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무대의 가장자리에 앉아 있던 채플린이 대역으로서 무대 중앙으로 끌려 나와 노래를 하게 되었다. 그는 언제나 무대의 가장자리에서 모친이 노래하는 것을 듣고 있었으므로 노래의 가사는 모두 암기하고 있었다. 작은 어린이가 재치있게 노래하자 관객들이 크게 기뻐했으며, 무대로 돈을 집어 던졌다. 채플린은 그 돈을 주워 모았으며 계속해서 노래를 불렀다. 이때 어느 정도로 돈을 모았는지는 기록에 없지만, 채플린은 자서전에, 소년 시절에 스스로 번 돈에 대해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12, 13 세경 인쇄소에서 일을 도와 가며 주에 12 실링, 학교 방과후 댄스를 가르치며 주에 5 실링을 번 일, 그리고 수부로 일하고 있던 형의 옷을 5 실링에 저당 잡혀, 그것으로 한 집안 식구 세 명이 1 주일 동안이나 식사를 할 수 있었다는 것 등을 기록해 놓았다. 그리하여 몇십 년 후까지 이러한 일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는 점은 역시 가난했던 소년 시절을 보내고 그 후에 대부호가 된 앤드루 카네기와 거의 똑같다. 카네기도 가난한 소년 시절에 집안의 생계를 위해 번 1 달러나 1 센트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기록해 두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어릴 적에 체험한, 돈으로 인한 고통과 고마움이 살아가는 데 의욕을 불어넣는 강한 힘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업적을 이루고 대부호가 된 그들이 몇십 년 전의 1 실링이나 1 달러에 대해서 그렇듯 집착할 리가 없다. 채플린은 19 세가 되었을 때 카노 극단이라는 순회 공연 극단에 참가하면서부터 안정된 수입을 얻게 되었지만, 미국으로 건너가 영화에 출연하게 되면서부터는 수입이 계속해서 크게 늘었다. 24 세 때의 주급이 150 달러, 다음 해에는 1,250 달러, 다시 2 년 후에는 주급이 자그마치 1 만 달러, 이어 28 세 때에는 연봉이 100 만 달러, 주급으로 2 만 달러를 넘어섰던 것이다. 4 년 동안에 약 130 배가 되었다. 무명의 배우가 세계 제 1 의 고급 월급쟁이로 크게 출세한 것이다. 그 후 그는 독립해서 스스로 프로듀서로서 영화를 세상에 내보냈으며, 다시 거액의 돈을 손에 넣을 수가 있었다. 예를 들면 약 1 년 반의 시간과 92 만 달러의 자금을 투자해 제작한 "황금광 시대"는 600 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이렇게 해서 얻은 부를 그는 무엇을 위해 사용한 것일까. 할리우드에 대저택도 건립했지만 대부분은 영화 제작을 위해 투자했다. 채플린이 충분히 시간과 돈을 투자해 자기 뜻대로 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스스로 자유로이 쓸 수 있는 풍부한 자금이 있었던 덕택이었다. 부에 의해 자유를 살 수 있지만, 그러나 그 자유를 살리기 위해서는 부를 늘리는 능력하고는 별도의 능력이 필요하다. 큰 돈을 갖게 하면, 그 사람을 잘 알 수 있다고 하지만, 그는 풍부한 부를 자신의 재능을 위해서 쓸 수가 있었다. 보통 이상의 독서가 채플린의 생애에 대해서 흥미를 느끼게 되는 것은 그가 쇼펜하우어와 관련된 일말고도, 배우로부터 감독, 각본 그리고 음악에 이르기까지 도맡아, 어느 것에서나 보통 이상의 능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 정도의 일들을 최고 수준의 경지에서 다루어 내려면, 이에 걸맞은 교양과 지식 및 경험과 수련, 즉 공부가 필요하다.


채플린에 대해서 특히 흥미를 느끼는 것은 그가 상당한 독서가였다는 점이다. 채플린의 아들은, 아버지가 독서가였음을 회상하고 있다. 즉 침실과 거실에는 투박한 웹스터 영어 백과 사전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가 어릴 적부터 책읽기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구빈원 부속의 학교라든가 지방 순회 극단에 들어가서부터는 순회처의 학교에서 일단은 학교 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거기서 얻은 것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14 세 때에는 어떤 극단에 고용되어 어린이 역을 맡게 되었는데 대본을 읽을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 나이가 되어서도 그는 글을 읽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형인 시드니로 하여금 대본을 읽게 하여 자신이 맡아 할 대사를 암기한 것으로 되어 있다. 아무래도 그러한 경험이 계기가 되어 글을 배우자고 발분했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로부터 수년 후 카노 극단에 들어가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기자, 그의 향학열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옷을 사는 데 돈을 쓰는 것 이외에는 유일하게 책을 구입하는 일에 많은 돈을 썼다. 무대 뒷방에는 많은 책들이 늘어서게 되었으며, 그는 틈틈이 짬을 내어 책을 읽곤 했다. 이는 당시의 동료들이 증언하고 있는 바이다. 한편 그는 자신의 자서전 속에도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다. 세상 속에는 탐욕스럽게 지식을 구하는 인간이 있다. 나 역시도 그러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단 동기부터 마하면 나는 그렇듯 순수하지 않았다. 지식을 사랑했기 때문에 구한 것이 아니라 단지 무지한 인간에 대한 세상의 멸시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 했을 뿐이다. 동기야 어떻든 그의 독서 범위는 대학 출신 지식인에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가 자서전에서 들고 있는 저자와 책들을 열거해 보면, 우선 문학에서는, 셰익스피어, 윌리엄스 블레이크(W. Blake), 디킨스(C. Dickens), 마크 트웨인(M. Twain), 제임스 보스웰(J. Boswell), 모파상(Guy de Maupassant) 등이 있다. 한편 철학에서는 쇼펜하우어 말고 플라톤, 칸트, 로크(J. Locke), 에머슨, 니체, 베르그송 등이 열거돼 있고 그 밖에도 프로이트, "플루타르크 영웅전" 등이 있으며, "천일야화"의 애독자였다고 한다. 또한 막대한 재산의 소유자로서 경제학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우연히 읽은 일이 있는 경제학자의 이론에 공명해 소유하고 있던 주식과 채권을 매각하는 바람에, 1929 년의 대공황의 피해도 모면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독서 리스트 속에서 쇼펜하우어와 함께 흥미를 느끼는 것은 미국의 철학자 에머슨의 "자기 신뢰"라는 수필 작품을 들고 있는 점이다. 이것은 "속마음에 간직되어 있는 확신을 말하면 반드시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통한다"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구절이 들어 있는 수필로서, 아무래도 채플린 역시도 이 구절이 마음에 강하게 와 닿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이 수필을 읽은 후부터는, 타고난 권리로서 자신감이 주어진 것처럼 그렇네 멋있게 느껴졌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자신감이다. 이것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실감케 해주는 것이 에머슨의 수필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에머슨의 수필을 읽게 되면 자신감이 생겨날 게 틀림이 없다.


채플린도 만년에 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고아원에 있을 때나 음식을 구해 거리를 방황하고 있을 때에도 나 자신은 세계에서 제일가는 배우라고 믿고 있었다. 나 자신에 대한 흔들림 없는 자신감에 푹 잠겨 있을 필요성이 있었다. 그것이 없었다면 인생에 의해 짓눌려 버렸을 것이다." 에머슨의 수필을 읽고 채플린은 이와 같은 자신감을 한층 더 굳게 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한 사람 몫의 어엿한 어른에게 한층 더 자신을 갖게 해주는 것은 몸에 익은 지식과 교양이다. 채플린에게 있어 관객을 웃게 할 뿐만 아니라 뭔가 엄숙한 것을 느끼게 하는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책을 통해서도 배우는 일이 필요했던 것이다. 쇼펜하우어나 니체 또는 에머슨 및 프로이트가 그의 영화에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만약 그가 문학이나 철학에 전연 관심이 없었다면, 그의 영화는 단순히 웃음뿐인 극히 질 낮은 작품에 불과했을 게 틀림이 없다. 다시 말해서 채플린과 거의 같은 시대에 활약했던 바스터 키턴이나 마르크스 형제 등의 희극 배우가 단순히 시끄럽게 웃기는 요란한 영화 이상의 것을 만들 수 없었던 것은 채플린과 같은 공부가 결여돼 있었기 때문이 아닐는지. 유명한 인간에로의 길 누구나 처음부터 유명해지기를 바라고 일해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다. 그런 일에는 전연 신경을 쓰지 않고 자기 재능을 갈고 닦게 된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유명해지고 명예가 따르게 마련이다. 채플린의 경우를 말하자면, 할리우드의 아카데미 특별상과 베니스 영화제의 금사자상 등 각종 상을 휩쓸어 영화인으로서의 최고의 영예를 획득했으며, 프랑스 영화 비평가 협회로부터는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된 일까지 있었다. 한편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으로부터는 명예 박사 학위가 수여되었다. 물론 이런 일들로 명예이기는 하지만 영화 감독 및 배우로서의 최대의 명예라고 하면 많은 사람으로부터 인기를 얻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스크린에 등장한 초기에 이미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이미 1916 년 채플린이 영화에 출연한지 불과 2 년 후 프랑스의 어떤 영화 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칭찬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현재로 봐서 유명한 점에서는 잔다르크, 루이 14 세, 클레망소(G. Clemenceau)를 능가하고 있다. 채플린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나폴레옹말고는 없다.... 과대 광고 같은 표현이지만, 채플린 영화의 초기 때부터 이미 사람들은 채플린에게 혼을 뺏기고 말았다. 미국에서는 채플린을 모델로 한 장난감 인형이 만들어졌으며, 그 밖에도 채플린은 만화에도 등장했고, 문제가 된 그의 걸음걸이도 유행했다. 그런가 하면 채플린의 분장 경기회 등이 개최되어 가장 무도회를 열게 되면, 남자들은 10 명 중 9 명 정도가 채플린 분장을 하고 등장했다. 심지어는 채플린 분장을 한 강도까지 나타날 정도였다. 인기가 생명인 배우로서는 이만한 명예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 놀랍고도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즉 1921 년 채플린이 9 년 만에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처음 3 일 동안에 6 만 3,000 통이나 되는 편지나 엽서 및 소포를 위시한 전보가 그의 앞으로 답지했다. 그리하여 이들 다양한 우편물을 구분하기 위해 6 명이나 되는 타이피스트를 고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또한 세계 각국에서 온 팬레터를 처리하기 위해 수개 국어에 능통한 비서를 고용한 일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채플린은 이렇듯 세계 각지로부터 보내져 오는 열광적인 팬레터를 순진하게 기뻐할 수만은 없는 마음이었다. 여기서는 다소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 "키드"가 세계 50 개국에서 크게 히트하고 있을 무렵 그는 '모두가 박수 갈채로 환영해 주고 있지만, 어쩌면 "키드"가 나의 마지막 작품이 될는지도 모른다. 정말로 잘못되면 다시 각광을 받을 기회가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는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온 힘을 다 기울여 일을 하고 난 다음에는 이런 기분이 들는지도 모른다. 동시에 그는 인기가 쉽게 변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이러한 위기감은 어떤 일에 있어서나 창조적인 일을 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게 될 것이다. 위기감이 없는 곳에 창조는 없다는 게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여자 문제에 있어서는 돈이나 명예처럼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 같지가 않다. 그는 평생을 두고 4 명의 아내를 두었는데, 결혼했을 때의 상대의 연령은 25 세였던 한 여자를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16, 17 세의 어린 여자였다. 결혼 횟수가 많은 것이 좋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혼율이 높은 것이 문명이 발전한 사회에 공통되는 현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발전한 문명이 오히려 불모의 인간 관계를 키웠다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채플린의 경우가 바로 전형적인 예로서 최초의 결혼은 2 년만에 파경을 맞았으며, 두 번째 결혼에서는 3 년 만에 별거를 했다. 한편 세 번째 결혼은 6 년만에 이혼하고 말았으며, 비로소 54 세 때 17 세의 우나 부인과 결혼한 후 오래도록 안정을 유지하게 되었다. 75 세가 된 채플린이 우나 부인과의 행복한 생활을 예찬하면서 자서전을 끝맺었지만, 사실 그는 평생 동안 여자로 인한 트러블에 시달렸던 것이다. 이혼 때마다 거액의 위자료를 지불했으며, 애인이 낳은 자녀의 친권을 중심으로 까다로운 소송 문제에 말려들었다. 또한 두 번째 아내와의 이혼 소송에서는 갓 촬영한 필름을 차압당할 위기에 직면하는 등 마음의 괴로움이 겹쳤으며, 40 세도 채 안 되었던 시기에 머리가 하룻밤 사이에 백발이 돼 버린 적도 있었다. 다재 다능한 제작자 채플린은 프로듀서, 배우, 감독, 극본 작가인 동시에 작곡가이기도 했다. 이만큼 많은 역할을 자기 혼자 다 맡아 한 영화인도 아마 없을 것이다. 그가 작곡한 "모던 타임스"나 "라임라이트"의 주제곡은 지금까지도 인기가 있는 대중음악으로 남아 있다. 채플린의 팬이라면 이 음악을 듣게 되면 이내 영화의 장면을 떠올릴 것이다. 영화 배우나 감독 중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연주할 줄 아는 사람은 드물지


않지만 스스로 영화 음악까지 겁내지 않고 만들어 내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오히려 극히 드문 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채플린이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악기는 연주할 줄 알지만 악보는 읽을 줄 몰랐다. 채플린은 여러 가지로 노력한 것이 많으면서도 어째서 악보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았는지 좀 이상스럽게 여겨진다. 그러고 보니 채플린은 그런 것은 몰라도 얼마든지 작곡할 만한 자신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스스로 악보를 쓸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머리 속에 떠오르는 영화의 정면과 맞추어 계속해서 떠오르는 악상을 입으로 흥얼거릴 수는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입으로 흥얼거리거나 피아노를 치는 것이다. 그러면 조수로 고용한 전문 음악가가 그것을 재빨리 악보에 옮겨 넣거나 혹은 편곡을 해 곡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그는 영화를 전부 자기 혼자서 제작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그가 영화계에 들어간 직후부터 그가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는 또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온갖 기회를 다 이용해서 영화 사업에 대해 철저히 공부를 하기로 했다. 그렇기 때문에 현상소를 비롯해 편집실을 열심히 드나들며, 어떤 방법으로 잘라 놓은 필름을 연결하는지 신경을 써서 살펴보곤 했다." 그리하여 이를 입증이라고 하듯이, 채플린의 아들이 쓴 "나의 아버지 채플린"에서 채플린 영화의 최초의 프로듀서였던 사람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촬영소에서 매일 늦게까지 버티고 있는 분은 자네 부친뿐이었다네. 그분은 남의 기술까지 열심히 관찰하고 계셨어. 정말로 무서울 정도로 공부를 하는 분이셨지."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이룩해 내는 사람, 또는 무엇인가를 스스로 이해해 성취하는 사람, 그것은 공부하는 사람말고는 없을 것이다. 중간에서 적당히 끝내는 그 정도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과연 웃어 줄 것인가? 채플린은 한편으로 남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자신만만한 독선가였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대단히 겸허한 부분도 있었다. 그가 제일 중요시한 것은 영화 스튜디오의 전문 스태프들보다도 관객의 반응이었다. 그는 미공개 영화를 거리의 작은 극장에서 실험적으로 공개해 주의깊게 관객의 반응을 살펴봤으며 그 결과에 따라 재차 편집을 하는 일도 있었다. 특히 중요시했던 것은 어린이들의 반응이었다. 이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린이들을 즐겁게 해 주는 것이 가장 어렵다." 따라서 채플린은 웃음을 유도해 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장면에서 어린이들이 웃지 않게 되면 다시 촬영할 정도였다. 일반적으로 영화 감독이면 가장 신경이 쓰이는 것이 관객의 반응임은 말할 것도 없다. '영화의 목적은 웃기는 일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채플린은, 새로운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때마다, 과연 이번 작품에서도 웃어 줄 것인가 하고 극장의 한 구석에서 관객의 반응을 언제까지고 지켜보았다. 채플린만큼 겸허하게 관객에게 배우는 영화 감독이란 드물지만, 이는 모든


것을 완전하게 완성시키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채플린의 스타일에 기인한 바가 크다. 그는 재촬영이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거리의 등불" 첫머리에 부랑자인 채플린이 장님인 꽃 파는 아가씨와 처음으로 만나는 중요한 장면이 있다. 꽃 파는 아가씨가 부랑자를 돈 많은 신사로 착각한다는 것이 이 장면이 노리는 점이었다. 이것을 대사 없이 표현해야 했다. 여러 차례 재촬영한 끝에 결국 파는 아가씨가 부랑자를 자동차에서 내리는 신사로 착각하도록 연구했다. 불과 몇 분 안 되는 이 장면을 위해서 1 개월이나 소비했다는 점 또한 그의 완벽주의를 잘 나타낸다고 하겠다. 완벽주의란 세세한 부분까지 철저히 신경을 쓰는 일이다. 그는 배우의 연기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직접 연기해 보고 나서 그대로 연기하도록 지시했다. 신작 준비를 하기 시작하면, 등장 인물의 특징이나 중요한 장면에서의 동작을 직접 연기해 본 다음, 그것을 비서를 통해 사전에 정해 놓은 부호로 상세히 기록하게 했다고 한다. 그는 어린이든 노인이든 또는 여서이든 사전에 온갖 연기를 보여 줄 수가 있었다. 채플린의 최후의 작품인 "백작 부인"에서는, 그가 주연인 소피아 로렌과 말론 브란도를 앞에 놓고, 그 역할을 스스로 구체적으로 연기해 보였다. 그 당시의 체험에 대해서 소피아 로렌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드물게 보는 여배우다'라는 말을 들어 왔습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그저 나이 어린 아가씨에 불과했습니다. 지금 나는 참다운 역이라는 거시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에게서 새로운 능력을 이끌어 내는 것이 진짜 교사라고 한다면 채플린은 그러한 교사이기도 했던 것 같다. 제대로 공부를 해야만 잘 가르칠 수 있는 법이다. 그리고 잘 가르치려면 사전에 명확한 이미지와 탁월한 아이디어가 마련돼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채플린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가장 많이 고생을 한 것은 새로운 영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발견하는 일에서였다. 그런 아이디어를 찾아 2 년이고 3 년이고 시간을 소비하는 일도 드문 일이 아니었다. 오랜 동안의 경험에서 아이디어라는 것은 그것을 오직 한마음으로 구하기만 하면 반드시 그쪽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줄곧 구하고 있는 동안에 말하자면 마음이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런 사건을 지켜보는 감시 초소가 돼 버리는 것이다. 한 편의 음악이라든가 저녁의 일몰 광경에서 아이디어가 태어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채플린은 또한 아이디어 발견의 비결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당신의 마음을 자극하는 대상을 채택해 그것을 추구하여 파헤쳐 내려간다. 만약 그 이상으로 발전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 체념해 버리고 다른 대상을 찾도록 하라. 많은 것들 속에서 체로 쳐서 버려 나가는 방법이 원하는 것을 찾아내는 지름길이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해서 아이디어를 붙잡을 수 있는가. 거기에는 거의 발광일보 직전이라고 할 정도의 인내력이 필요하다. 고통을 견뎌 내고


오랫동안 열중할 수 있는 능력을 몸에 익히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 정의를 위하여 "심판"등 주요 작품으로 유명한 부조리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는 채플린의 초기 단편 영화를 보고 이런 말을 했다. "채플린의 눈에는 저속한 것을 배제치 못하는 어려움을 생각하는 절망의 불꽃이 작열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결코 항복하지 않는다. 진짜 희극 작가가 그러하듯이 그는 맹수의 이빨을 갖추고 있으므로 그 이빨로 세상에 덮여 든다." 채플린의 웃음은 단순한 웃음이 아니라 독을 품고 잇는 웃음이다. 그 독으로 사람들을 깨우쳐 놓으려고 하는 것을, 카프카는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의 어리석기 그지없는 모양을 듬뿍 담아 묘사한 "어깨총"(1918)은 그 작품이 지닌 반전적인 내용 때문에 배급 회사로부터 재편집을 요구받았으며, 또한 탈옥수가 목사로 바뀌어 일으키는 소동을 묘사한 1923 년 작품인 "가짜 목사"는 미국의 몇 개 주에서는 상영 금지 처분을 받은 일도 있었다. 카프카는 1924 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채플린의 장편 영화를 볼 기회는 없었지만, 가령 사회나 권력에 대한 비판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는 "모던 타임스"(1936)나 "독재자"(1940) 등을 볼 수가 있었다면 채플린의 맹수의 이발이 한층 더 날카롭게 다듬어져 있었던 점을 깨달았을 것이다. 채플린이 말하는 보다 엄숙한 내용을 특히 날카롭게 느끼게 되는 것은 "모던 타임스" 이후부터의 일이다. 이 영화는 신문 기자한테서 들은 이야기가 계기가 되어 탄생되었다. 자동차의 거리 디트로이트에 건강한 젊은 농부들이 큰 공장을 공경해 찾아오지만 일관작업으로 4, 5 년쯤 일하게 되자 모두가 신경 쇠약에 걸리고 만다는 이야기였다. 채플린은 무서운 이야기라고 자서전에서 말하고 있지만, 신문 기자가 아무렇지 않게 한 이야기가 아이디어를 구하는 그의 촉수에 잡힌 것이다. 말하자면 채플린은 단순히 웃고만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완성된 기계의 세계 속에서 멋대로 다루어지고 있는 한 사나이가 자신을 되찾기 위해 악전고투한다고 하는, 20 세기의 끝을 눈앞에 둔 현대인에게 충분히 호소력이 잇는 제 1 급의 문명 비판 영화를 제작한 것이다. "모던 타임스"에는 사람들을 웃음으로 유도하는 연구가 충분히 담겨 있지만, 누구나가 이것은 단순히 웃어넘기기만 하면 되는 영화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또한 톱니바퀴의 세계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주인공의 모습이 바로 자기들과 닮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또한 제 2 차 세계 대전이 발발해 독일의 히틀러가 유럽을 유린하는 사태를 앞에 놓고 더욱더 웃기만 하고 있을 일이 아님을 인식했다. 채플린은 히틀러의 야망을 꺾어 놓기 위해 미국에게 참전을 호소하는 한편, 이미 새로운 영화의 아이디어를 포착하고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영화를 가지고 그와 같은 반전 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사회 또는 국제 정치의 부도덕에 대해 항전하려는 자세를 갖춘 것이다. 이를테면 사회의 불의에 대해 항전하려는 자세를 갖춘 것이다. 이를테면 사회의 불의에 대해 자기 나름의 선전 포고를 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미국에서는 히틀러의 독일을 그다지 나쁘게 보지 않는 풍조가 적지


않게 퍼져 있었으며 할리우드에서도 히틀러를 비판하는 영화의 제작을 삼가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한 상황의 한복판에서 정면으로 히틀러를 비판하는 영화 "독재자"를 제작하는 데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채플린에게는 이 영화를 제작하는 중에 이미 협박장이 전달되었으며 주위에서는 제작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이에 전연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뉴스 필름을 통해 히틀러를 보고 그의 행동을 연구한 뒤 히틀러를 연기면에서 보면 채플린 자신보다 한 수 위인 연기자로 간주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히틀러의 뉴스 필름에서 갓난애를 안아주는 모습이라든가 부상병을 문병하는 것은 진심이 아니면서 그런 척 연기로 해 보인다는 말이다. 채플린은 히틀러에 대해서 "저 친구는 진짜로 연기자야. 나 같은 것은 도저히 미치지 못해"라고 말했을 정도라고 한다. 독일은들은 채플린이 너무나도 재치 있게 히틀러와 똑같았으므로 깜짝 놀랐을 정도였다고 한다. 실제로 얼굴의 생김새나 몸의 동작까지도 똑같았는데, 흥미로운 것은 두 사람이 태어난 날이 고작 4 일 차이였다는 점이다. 히틀러를 타이르다 2 시간 이상이나 상영되는 영화 "독재자"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채플린이 히틀러로 분장해 완전히 독재자가 되었으면서도 동시에 유대인 이발사가 되어 렌즈를 보면서 지껄이는 일은, 영화 제작상의 터부로 되어 있지만, 채플린은 그와 같은 터부를 깨고 직접 스크린에서 관객을 향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더 더욱 의표를 찌른 것은 채플린 본인을 통해 메시지를 직접 그대로 전해 듣는 연설의 내용이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들은 모두 피차 서로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들입니다. 우리들은 남의 불행에 의해서가 아니라 남의 행복에 의해서 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병사 여러분, 당신들은 기계가 아닌 인간입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인간입니다.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을 모르는 인간, 사랑받은 일이 없는 인간만이 남을 미워합니다. 예속 때문에 싸워서는 안 됩니다. 자유를 위해 싸워 주십시오. 당신들은 이 인생을 멋진 것으로 할 수 있는 힘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힘을 동원해, 그리고 모두 하나의 손으로 연결하시지 않으시렵니까. 독재라는 것은 자기만은 자유로 할 수 있지만 인민은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세계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지 않으시렵니까. 나라와 나라의 장벽을 부숴 버리고 탐욕이나 증오나 또는 관용하지 않는 태도를 추방하기 위해, 이상적인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과학과 발전이 우리들 전부를 행복으로 이끌어 갈 줄 아는 세계를 창조해 내기 위해, 자 여러분 함께 싸웁시다. 민주주의 깃발 아래서 모두 손을 연결합시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면 하나같이 이 연설 장면은 영화사상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연설을 삽입시킨다면 영화의 흥행 수입이 100 만 달러는 줄어들 것이라고 측근에서 만류했다. 그러나 채플린은


"비록 500 만 달러가 줄어든다고 해도 난 꼭 그 연설을 삽입시킬 거야"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채플린의 영화가 그저 사람을 웃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느끼기 시작하게 된 구체적인 계기가 된 것이 바로 "독재자"에서의 그 유명한 연설인 것이다. 그 후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취임식 축전에서 이 연설의 전문을 낭독했으며, 이것이 온 미국에 라디오 방송으로 전달되었다. 그리하여 이 연설은 링컨 대통령의 게티스버그 연설에 비유되었다. 한편 이 연설을 크리스마스 카드에 인쇄해 사용한 사람이 있기까지 했다. 다시 말해서 이 연설이 많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던 것이다. 전쟁 후 독일에서 이 영화가 상영되었을 때, 영화 평론가들은 기분 나쁜 걸작이라 평했다고 하며, 젊은이들은 크게 웃었으며 연로한 사람들은 죄악을 느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채플린의 사나운 짐승으로서의 이빨은 무뎌지지 않았다. 즉 그의 "살인광 시대"(1947)는 주식값이 크게 떨어지자 파산해 버린 전 은행원이 돈 많은 집의 미망인을 계속적으로 살해한 다음 그 재산을 빼앗은 나머지 법의 심판을 받고 마침내 사형에 처해진다는 이야기의 영화였다. 그런데 막판에 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범인이 사형을 내린 재판장을 향해 "엄청난 살인에 대해서는 세계가 이를 권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대량 살인이라는 오직 하나의 목적을 위해 파괴 무기를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항변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그 범인은 처형당하기에 앞서 또 한마디 항변한다. 즉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악당이고 100 만 명을 죽이게 되면 영웅이라 호칭하지 않느냐"고 대들었다. 이것은 당시의 미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었던 핵폭탄이라고 하는 대량 살상 무기에 대해서 이를 비판하는 채플린의 음성이었다. 그 당시 미국에서는 중세의 마녀 사냥과 거의 똑같은 매카시즘이라는 빨갱이 사냥의 폭풍이 무섭게 불고 있었다. 할리우드 역시 그 대상이 되어 반체제 파괴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여러 영화인들이 유죄 선고를 받고 투옥되었다. 채플린 자신도 그와 같은 선풍 속에 휘말려,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위험한 인물의 리스트에 올랐다. 그렇지만 그는 사회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에게 상표를 붙이고 싶다면 아나키스트나 또는 완고한 낭만주의자로 불러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채플린은 다시 말해서 그 영화에 담은 독 때문에 국가에 위험한 인물로 간주되었으며, 한편 매스컴에서는 여성을 중심으로 한 스캔들로 그를 얽어 버렸으며, 그가 제작한 "살인광 시대"는 미국 여러 주에서 상영이 금지되었으며 워싱턴 국회에서도 상영 금지 제안이 있었다. 얼마 후, 채플린은 영국을 방문하기 위해 뉴욕에서 배편으로 출국했다. 그런데 그 직후 미국 정부는 그의 재입국을 불허한다고 통고했다. 이는 실제로 미국에서 그를 추방한 것과 같은 처사였다. 그 후 채플린 일가는 스위스에 정주했으며, 런던에서 촬영한 "뉴욕의 임금님"(1957)에서는 화면에서 웃음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으며 보다 엄숙한 내용이 전면에 드러나 있었다. 그리하여 더 이상 웃을 일이 없다는 식의 영화가 되었다. 채플린은 그 후 1931 년의 인터뷰에서 "애국심이란 지난날의 세계에서 가장


미친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애국심을 예찬한다면 다시금 새로운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채 10 년도 되기 전에 다시 전쟁이 발발해 그의 예언대로 돼 버리고 말았다. 웃음이라는 것이 가져다 준 쾌감을 충분히 체험케 해 준 것이 채플린의 영화였지만, 그와 같은 웃음 속에서 깨닫게 되는 것이, 인간이나 사회 혹은 세계가 드러내게 되는 그지없는 바보스러움과 어리석음 또는 부조리였다. 다시 말해서 채플린의 웃음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은 그건 것들을 사람들 앞에 이끌어 내는 힘, 즉 세상에서 비판 정신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와 같은 비판 정신은 대로는 단순히 웃고 있어도 좋지만, 때로는 반대로 웃고 있는 것만으로는 다 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전해 주고 있다. 이를테면 채플린의 영화는 이 20 세기라는 시대를 충분히 깨달음과 동시에 그 시대를 비웃기 위한 귀중한 예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뛰어난 관찰력과 열망의 주인공 다윈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__1882) 에든버러, 케임브리지 두 대학에서 의학과 신학을 전공했으나, 전공보다 박물학 연구에서 더 몰두했다. 졸업 후에는 영국 해군의 측량선 비글호에 박물학자로 승선, 5 년에 걸쳐 남반구를 향해하면서 동물과 식물 및 지질을 관찰해 "비글호 향해기"를 저술했으며, 1869 년에는 "종의 기원"을 간행해 근대적인 진화론을 확립했다. 그의 학설, 특히 진화 요인론은 다위니즘이라 일컬어지고 있는데 자연 및 인문 과학에 완전히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으며 철학이나 종교에 이르기까지 근본적인 변혁을 가져오게 했다. 지나치게 성장한 어린이 다윈의 집안은 본래 링컨셔에 거주하는 상당한 신분의 집안이었다. 선조 중 한 사람이 크롬웰의 혁명 때 왕당파에 가담해 집안이 상당한 타격을 입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집안은 예로부터 학자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모양으로 증조부인 로버트 다윈은 잡다한 일에 흥미를 가지고 연구했으며, 그의 장남인 로버트 워링은 식물을 연구해 "식물학 요의"라는 저서를 냈으며, 그의 막내인 에라스무스는 영국 문화사상 불후의 이름을 남겼다. 즉, 당초 의사였던 그는 식물학을 연구해 "식물원", "생물계의 법칙", "자연의 전당" 등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기록했다. 그의 저서 가운데 이미 생물 진화 사상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한편 찰스의 사촌 동생인 프랜시스 골튼(F. Galton)은 우생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는 범죄자의 인정에 지문을 사용할 것을 최초로 제창하기도 했다. 또한 찰스의 자식인 프랜시스도 식물학자로 유명해 부친의 일을 도와주었고, 부친의 전기를 편집했다. 이렇듯 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난 다윈은 젊었을 때부터 오랜 시간을 두고 차분히 자기 자신의 개성과 호기심을 키워 나가면서 학문의 새로운 세계를 개척한 학자이다. 그는 자연의 각종 현상을 관찰해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론을 생각해 냈으며,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 자세히 관찰해 "나는 지나치게 성장한


어린이 같다"고 자신을 분석하고 있다. 그를 천재로 만든 원동력이 바로 이 말 속에 숨어 있다. 모든 사람은 가정이나 사회 환경 속에서 스스로의 개성이 개화하느냐, 아니면 시들어 버리느냐 하는 중대한 시련에 노출되곤 한다. 이는 다윈이, 생물이 자연 환경 속에서 이에 대응하며 어떻게 진화했는가를 조사해서 얻은 결론이다. 이러한 시련 속에서 개성을 꽃피우게 하는 데 힘이 되는 것은 바로 본인의 의지이다. 6 남매 중 다섯번째이면서 차남으로 태어난 다윈이 유, 소년 시대에 가장 인상에 남았던 일로서 자서전에 적고 있는 것도 그러한 시련의 이야기이다. 두 살 손아래인 여동생보다 기억력이 떨어졌던 일고, 또한 초등 하교 때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게으름뱅이라는 말을 들은 일이, 70 세가 지나서 쓴 자서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로서는 그런 일이 전혀 뜻밖의 일로서 항의하는 기분을 담아 기록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린 시절에는 그러했지만, 지금은 이렇듯 훌륭해졌다고, 똑똑지 못한 어린이를 가진 부모들에게 자신감을 주기 위해 기록해 두었는지도 모른다. 어떻든 게으르다거나, 기억력이 부족하다는 말은 틀림없이 어린 마음에 상처를 입힌다. 이렇듯 어린 시절에 입은 마음의 상처는 그의 인생 행로에 그야말로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데, 이를테면 최초의 시련기라고 할 수 있다. 다윈은 화학을 좋아하는 형을 도와 화학 실험을 한 일이 있었는데, 이런 사실이 학교에 알려지자, 친구로부터 '가스'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그런가 하면 교사로부터는, 그렇듯 도움이 되지 않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는 꾸지람을 들었다. 그 무렵에는 학교 교과목에 화학 실험 같은 것은 없었던 시대였다. 그렇지만 다윈은 친구나 교사가 뭐라고 하든, 그런 것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도중에 그만두는 의지가 약한 소년이 아니었다. 이런 점은 발명왕인 에디슨하고 닮은 점이라 하겠다. 열성적인 수집가 그는 유, 소년 시절에 조개 껍질, 우표, 화폐, 조약돌 등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모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듯 무엇이든지 모았다는 점이 다윈이 어릴 적부터 수집가였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수집하는 것이 진짜 수집가일 것이다. 다윈은 후에 남아메리카를 비롯해서 남태평양의 섬 등에서도 각종 진귀한 동식물을 수집해 진화론을 구상하는 중요한 계기로 삼기도 했지만, 그에게 있어 수집은 유, 소년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된 평생의 흥미거리였다. 어떤 사물을 수집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세계의 극히 일부분을 약간 잘라서 자기의 것으로 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그 세계의 단편을 소유함으로써 만족하여 마음의 안정으로 얻는 것이다. 이를 바꾸어 이렇게 말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즉 물건을 수집함으로써 세계의 어떤 질서를 발견하려는 시도라고 말이다. 세계의 대해 그다지 경험이 없어 익숙하지 못해, 동시에 세계라고 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에 압도당하기만 하는 어린이는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세계를 알아내어 납득하려고 한다. 잘 알지 못한 다는 것은, 일종의 공포하고도 통한다. 그리하여 부분적이지만 이를 알게 됨으로써 공포가 적어진다. 동시에 안심할 수 있는 세계도 탄생한다. 세계 속의 어떤 질서나 법칙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나이 어린 소년 소녀가 주워 모으는 조약돌은 세계의 질서를 암시해 주는 상징이 되는 것이다. 조약돌을 잘 아는 것으로 세계의 일부분을 알 수 있게 된다. 조약돌을 모은다는 것이 지구의 일부분을 알려고 하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면 수집에는 교육적인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 수 가 있다. 인간이 자에 대해서 지식을 모으고 쌓아올린다는 것도, 그 본래를 규명해 보면 자연의 각종 생물이나 무생물을 주워 모아, 이에 이름을 붙이는 일에 그 출발점이 있었다. 어린이는 그와 같은 인류의 지적 활동의 초기 단계를 무의식중에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물건을 수집하는 일은 어린이가 자연을 몸에 익히는 최초의 공부법이다. 다윈의 경우는 이와 같이 수집이 평생 동안 계속된 공부였다. 의사였던 부친은 아들에게 가업을 잇게 하기 위해서 다윈을 에든버러 대학의 의학부에 입학시켰다. 그리하여 이 무렵부터 다윈이 자신의 개성을 어떻게 발전시켜 나가는가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아버지와의 사이에 조용한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부모가 강요하는 것 중에는 자식으로서 감수하기 어려운 것들도 많다. 부모가 자식으로 하여금 자신이 뜻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끔 다그치는 만큼 자식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겠노라고 완강하게 버틴다. 자식으로서는 이것이 개성을 개화시켜 나가는 방법이 된다. 당시의 다윈의 부친으로서는 아들이 장차 과학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게 되는 위대한 학자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어떻든 다윈은 대기 만성형의 인간이었지만, 그것은 평생을 마무리하게 되는 무렵이 되어 비로소 판명되었다. 따라서 어릴 적에는 그런 것을 알 까닭이 없었으니 부친이 다윈을 꾸짖는 것도 당연하다고 하겠다. 다윈은 모친을 8 세 때 잃었으며, 그 후부터는 부친의 감독하에 성장하게 된다. 그런데 어릴 적 그의 취미였던 수집 취미 같은 것은 부친이 전연 평가하지 않았다. 다윈은 조금 커서도 사격이라든가 개나 쥐를 잡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부친의 눈에는 보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가문의 수치가 된다고 부친에게 꾸중을 들었다고 자서전에 기록되어 있다. 이런 점을 보면 다윈의 부친은 어릴 적에 그런 일을 전연 겪지 않고 어린이 된 것같이 여겨진다. 다윈이 16 세 무렵이었다. 휴가로 집에 돌아와 있을 때면, 부친의 가업을 돕곤 했다. 가끔씩 대진도 했으며 입원중인 환자 중 10 명 정도를 맡아서 어떻든 치료의 흉내를 내어 약을 지어 본 일도 있었다. 그러므로 부친은 그가 의사 공보를 하게 되면 상당한 수준이 될 것이라고 혼자서 생각했다. 자신은 그 지방에서 수십 년 동안 개업을 해 왔으므로 기반도 잡아 놓았으니, 장차는 자기의 뒤를 계승토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렇지만 다윈에게는 대학에서의 강의가 그지없이 지루하게 생각되었으며 해부학 실습 같은 것을 기피하게 되었고, 수술도 마지막까지 볼 수가 없어서 도중에 도망쳐 나온 뒤로 두 번 다시 수술 실습에는 출석하지 않았다고 자서전에 기록하고 있다.


의학 강의를 듣는 일에 대해서 다윈은 환멸을 느꼈다. 이런 식이어서는 의사가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했으며, 한편 그는 부친이 한평생 안락한 생활을 보장할 정도의 재산을 남겨 줄 것이라는 점을 알고는 의학 공부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다. 의학에는 취미가 없었지만, 이와는 반대로 박물학에 대한 관심은 높아, 그 방면의 교수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리하여 교수를 따라 바다로 나가 어패류를 수집하는가 하면 해산물을 잡기도 했다. 그리하여 동물학상의 작은 발견을 학회에 보고하기도 했다. 의와 같은 아들의 외도를 알게 된 부친은, 처음엔 화를 냈지만 아들의 적성에 의사는 도저히 맞지 않는다는 걸 알고 결국 양보해 다원의 의학 공부는 2 년으로 끝나고 말았다. 부자지간의 조용한 투쟁의 첫 라운드는 이런 식으로 해 아버지의 양보로 끝난 것이다. 강의실에서는 배울 게 없다. 드디어 다윈이 19 세(1828)가 되었을 부친은 그에게 신학 공부를 시키기 위해서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시켰다. 아들을 목사로 만들려는 생각에서였다. 의사를 만들려다가 궤도 수정을 한 셈이다. 부친의 너그러움도 너그러움이지만, 부친의 그러한 결정에 순종한 다윈의 처신도 주목할 만하다. 실제로 그 후의 다윈의 처신을 보면 특별히 부친에게 반하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해 나갔던 것이다. 목사가 되는 것은 의사의 경우처럼 특별하게 공부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대학 교육 전반에 걸친 지식을 몸에 익히면 되었지만, 제일 싫은 학과는 수학이었다. 그는 수학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몰랐으므로 수학 공부가 지루했다고 말했다. 그에게 흥미가 있고 의미가 있는 것은 조개 껍질이나 조약돌처럼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괴테도 그러했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의 공부 방법이 있으며, 그런 방법을 통해서 커다란 성과를 탄생시킨 대표적인 학자라고 해도 좋은 사람이 다윈이었다. 그가 얼마나 수학하고 인연이 없었는가는 그의 다음과 같은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수학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특별한 감각의 소유자처럼 생각된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는 거의 기숙사 생활을 했다. 이 유명한 대학이 그에게 가져다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은근과 겸허, 그 밖에는 영향을 받을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며, "케임브리지에서 지낸 3 년은 학문이라는 점에서는, 완전히 에든버러나 가정 학교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고 터놓고 말했다. 언젠가 그의 사촌 동생인 골튼이 자기 저서인 "영국의 과학자, 그 천부와 교양"의 자료로 삼기 위해 다윈에게 보낸 질의서에 그는 이렇게 답변했다. 문:당신은 어떠한 교육은 받았는가? 답:적어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일은 전부 독학으로 얻었다. 문:대학 교육의 결함은?


답:수학도 현대 어학도 아니고 관찰 내지는 추리의 습관을 키우는 교육이 하나도 없는 점이다. 이와 같은 답변으로 미루어 보아, 그야말로 학교 교육의 무가치함을 통감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렇고, 어떻든 다윈은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했고 부친이 기대한 대로 목사가 될 수 있는 조건은 갖추어졌다. 그렇지만 그의 나이 22 세가 된 그 시점에서 부친과 자식의 조용한 싸움은 거의 결말이 나버렸다. 다윈에게는 목사가 될 생각이 전연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케임브리지에서의 생활 전부에 있어 수확이 없었느냐고 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는 최상급이 표현으로 자기가 받은 커다란 감화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바로 그 대학에서 식물학을 가르치던 노교수 헨슬로(J. S. Henslow)와의 만남이었다. 이 교수가 다윈에게 불가사의한 감화를 안겨다 주었던 것이다. 19 세 때 친구의 소개로 평판이 좋은 그 교수를 만나러 갔다가 그 후부터는 늘 그 교수를 찾아갔으며 함께 산책 등을 했다. 마침내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도, 헨슬로 교수와 함께 걷는 사나이 하면 다윈으로 알 정도가 되었다. 다윈은 다른 교수의 강의에는 거의 출석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교수의 식물학 강의에만은 사전에 공부를 해 가지고 빠짐없이 출석했다. 교실에서의 강의보다도 산책 또는 여행을 통한 실물 교육이 그를 사로잡았다. 교수는 식물뿐만이 아니고 곤충, 지질, 광물, 화학 등에도 통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여간 아는 것이 많은 교수였다. 동시에 솔직하고 겸손한데다 친절해서, 잘 모른다고 해서 바보 취급하는 일이 없었으며, 하찮은 질문을 해도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교수는 젊은 학생들을 자기 집으로 초청해 식사 대접과 함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가 하면, 유명한 선배 등을 소개시켜 주기도 했다. 이런 때는 다윈도 단골 손님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그와 같은 교수의 초대를 대단히 기뻐했으며, 교수의 각종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었다. 또한 교수하고 같이 산야를 누비고 다니며 식물을 채집했는가 하면 진귀한 나비를 뒤쫓아가며 즐기기도 했다. 교수는 이들 식물이나 곤충 하나하나에 대해서 풍부한 지식을 재미있게 설명해 주어 학생들을 기쁘게 해 주었다. 이때의 일을 다윈은 평생을 두고 있지 않았다. 헨슬로 교수와 다윈의 이와 같은 관계는 오래도록 변하지 않았다. 훗날 비글호에서 편승 박물학자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윈을 추천한 것도 이 교수였다. 그 덕택으로 그는 채용되어 그 배를 타고 남미나 남양 등지에서 채집한 것을 본국으로 보낼 때 수신자를 전부 이 헨슬로 교수로 했다. 이것을 교수는 전연 귀찮아 하지 않고 정성껏 정리해 보관해 두었다. 다윈에게는 여러 모로 이 교수가 큰 은인이라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가치가 있는 것은 학계에 소개해 귀국 후의 준비를 해 주는 등 최선을 다해 준 것도 이 교수였다. 어떻든 다윈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도 목사가 되는 공부는 제쳐 놓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만 정성을 바쳤다고 할 수 있다. 대개 자식들은 부모의 뜻에 신경을 쓰면서도 자기가 갈 길은 착실하게 나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개성이 뚜렷한 사람은 특히 그러하다. 때로는


부친이 하는 말을 못 들은 척하는 일도 있다. 다윈도 아마 그러했던 것 같다. 다윈이 죽을 때까지 계속 걸어간 길은 우선 유년 시대에 시작한 수집가의 길에서 시작되며 부친이 무슨 말을 하든 거기서 벗어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의학을 공부해야 할 에든버러 대학에서 박물학자의 모임에 참석해 최초의 연구 발표를 한 일도 있으며, 어부와 같이 해산물의 수집을 즐기기도 했다. 한편 목사가 되기 위해 들어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는 투구벌레의 수집에 열심이었다. 이렇듯 학교의 강의는 등한시하면서도 곤충 채집에는 열심이었다. 그것도 자기 혼자서만이 아니고 여러 명의 친구들까지 끌어내어 각각 채집병을 갖게 하여 틈만 나면 곤충 채집에 나섰다. 곤충 중에서도 특히 투구벌레 잡기에 열중했다. 그는 대학생이 된 후에도 어릴 때와 똑같을 일을 계속했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그가 특히 친하게 지낸 사람은 헨슬로 교수 등 식물학이나 동물학 교수들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박물학 또는 생물학, 다시 말해서 생태학이라는 학문을 향해 전진하게 되는데, 그것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든 것이 비글호를 타고 향해한 일었다. 비글호는 영국 해군이 남미 대륙을 측량하기 위해 파견한 배로서, 다윈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헨슬로 교수의 추천으로 박물학자로서 승선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5 년 후 향해에서 돌아온 다윈은, 그대는 이미 어엿한 한 사람의 박물학자가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다윈은 5 년 동안의 향해 생활에서 어떤 일을 체험했으며 또한 어떤 것을 배웠던 것일까? 뛰어난 관찰력 다윈은 조사선 비글호에 박물학자로서 승선해 대서양에서 남미, 남태평양, 오스트레일리아, 인도양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의 남단을 돌아 영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세계 일주 여행에 올랐다. 4 년 10 개월에 걸친 항해를 계속한 끝에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나이는 27 세가 되어 있었다. 항해 동안에 있었던 자세한 내용은 "비글호 항해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는 항해기인 동시에 다윈 자신의 가장 중요한 공부의 기록이기도 했다. 그는 타고난 수집가였는데, 수집가로서의 재능도 항해 연구에 도움이 되었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탁월한 관찰력이 가장 크게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수집가에게 관찰력은 가장 중요한 능력으로, 수집가는 동시에 관찰자가 되어야만 수집한 결과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능력과 마찬가지로 관찰력도 이를 충분히 활용함으로써 한층 더 예리해지는 법이다. 이 능력은 시련에 직면하면 할수록, 자극을 받으면 받을수록 뻗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항해를 한다고 하더라도 늘 배만 타고 있으면 소용이 없다. 그는 배가 들르는 기항지마다 어김없이 상륙해 탐험 여행을 했으며 진귀한 동식물 등을 관찰하는 기회를 만들었다. 그때 보고 들은 것이 다윈에게도 그야말로 크게 공부가 되었는데, 예를 들면 "비글호 항해기" 속의 1 절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가 있다.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 상륙했을 때의


기록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영국에서의 박물학 애호가는 걷다 보면 문가 주의를 끄는 것에 부딪침으로 산책을 통해서 많은 것을 얻는다. 그렇지만 이 지방은 풍요로운 풍토였으므로, 생물이 도처에 가득하고 눈을 끄는 것이 한이 없어서 거의 걸어 나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 문장은 남미가 지니고 있는 풍토의 풍요로움을 강하게 인상지어 주는 동시에 다윈이라는 사람의 걸출한 관찰력을 느끼게 해 준다. 그가 자연에 사로잡혀 걸어 나갈 수도 없는 상태에 있을 때, 평범한 사람은 그 옆을 그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쳐 버린다. 즉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보면, 그러한 다윈은 특별한 감각의 소유자였다. 그 자신도 이를 자각하여 자서전 속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나는 흔히 놓쳐 버리고 말 그런 사물을 알아차렸으며 이들을 주의깊게 관찰하는 일에 있어서는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그와 같은 뛰어난 관찰력을 키워 준 것이 비글호의 항해였는데, 이 항해에 대해서 그는 자서전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비글호의 항해는 내 한평생 중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것이 나의 전생애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항해가 내게 진짜 훈련 또는 교육이 되었다고 믿고 있다. 이것에 의해 나는 박물학의 갖가지 분과에 정말로 친숙해질 수 있었으며, 나의 관찰력은 그런대로 날카롭기는 했지만, 이 항해에 의해서 한층 더 깊어졌으며 더욱 날카로워졌다. 그와 같은 관찰욕이 항해기의 도처에 넘칠 듯이 나타나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갈라파고스(Galapagos) 제도 부분이 가장 유명하다. 어떤 페이지를 펼쳐 보아도 물고기가 파득파득 튀어오르는 듯한 싱싱한 그의 호기심과 관찰력이 약동하고 있다. "눈을 끄는 것이 한없었으므로 거의 걸어 나갈 수가 없었다"고 한 그의 기분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중 한 예를 들면 낙지가 배경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몸빛깔을 미묘하게 바꾸는 모양을 상세히 기술한 것이 있으며, 개똥벌레(반딧불)의 발광 구조를 조사해 이 벌레가 죽은 후에도 24 시간 동안 계속 빛을 발하는 것을 확인한 것이 있다. 그런가 하면 방아깨비가 어느 정도의 높이까지 뛰어오르는가를 보고 즐겼다는 부분도 있다. 동물이나 식물 혹은 광물에 대해서 조사하는 박물학자라고 하지만 어린이가 가지고 있는 그러한 왕성한 호기심이 관찰의 출발점이 되는 것은 보통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때로는 왕성한 호기심은 박물학이라고 하는 테두리를 뛰어 넘는 일도 있다. 다윈은 해변가에서 벼락이 모래에 떨어지자 그 자리에 환하게 길다란 유리관이 만들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 일이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다윈의 호기심은 커다란 강의 하구에 벼락이 많이 치면, 대량의 담수와 바닷물이 혼합되어 전기적인 균형이 깨지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고찰에 이르렀다. 이 정도까지는 박물학자로서의 당연한 관심이지만, 다윈은 여기서 더 나아가, 벼락이 떨어져 피해를 입은 집까지 찾아가 그 상황을 자세히 조사했다는 점에서 흥미를 느끼게 한다. 벽의 일부는 화약이 폭발한 것처럼 부서졌으며 그 파편이 방의 반대쪽 벽을 울통불퉁하게 만들 정도로 강하게 날아갔다. 거울의 가장자리는 검게 눌었으며 금빛 페인트가 증발한 것으로 여겨졌다. 난로의 선반에 있었던 담배 상자는 반짝이는 금속성의 물질이 뒤덮고 있었으며 에나멜처럼 굳어 있었다. 이처럼 벼락이 친 피해를 기록하는 것은 박물학자의 일은 아니지만, 그는 어떤 일이든 상세히 관찰해 이를 기록하는 훈련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처럼 정해진 테두리를 벗어나는 왕성한 호기심이 다윈의 연구 비결이었던 것이다. 커다란 발견은 많은 경우에 기존의 테두리를 넘어선 관찰, 다시 말해서 일탈한 관찰로부터 탄생되기 때문이다. 비글호가 파견된 본래의 목적은 1828 년부터 1830 년까지 함장인 킹 밑에서 시작된 파타고니아와 티에라 델 푸에고(Tierra del Fugeo;미대륙 남단 푸에고 제도로 되어 있는 지역)의 측량을 완성시키는 일과 칠레, 페루 및 태평양 안의 여러 섬을 측량하는 일, 그리고 세계 각지의 시차를 측정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렇듯 큰 항해에 동원된 비글호는 지금으로 보면 놀라울 정도로 작고 초라한 군함이었다. 불과 230 톤밖에 안 되었으며 마스트 2 개에 포가 6 문이 있는 구식 배였다. 또한 배의 중심이 비교적 높은 곳에 있었으므로 풍랑이 심하면, 배가 형편없이 흔들렸을 뿐만 아니라 전복될 위험까지 있었다. 그러면서도 세계의 바다 중에서도 가장 풍랑이 심한 곳에서 5 년 동안이나 항해에 쓰였으므로 1831 년경에는 상당히 손상되어 거의 개조할 필요성까지 있었다. 다윈은 곧잘 배멀미에 시달려야 했으며, 가끔씩 가슴에 통증을 느끼면서도 의사에게 보이지도 않고 참아 나갔다. 병이 틀림없다는 의사의 진단이 내려지면 하선을 명령받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윈이 거처하는 방이란 것이 상당히 비좁았다. 그러므로 자연적으로 사물을 깨끗이 정리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래도 가끔씩 지저분한 것들을 가지고 함내로 들어와 어지럽혔으므로 사관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수부들은 그를 '파리잡이'라는 별명으로 불렀으며, 사관들은 그를 철학자라 불렀다. 사관과 수부를 합쳐 약 60 여 명이 승무원의 전부였다. 선원 전부가 그와 친했으며 한편 그를 존경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오랜 항해 동안 항상 웃는 얼굴로 지냈으며, 단 한 번도 화를 내거나 남과 언쟁을 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윈은 처음에는 박물학의 아마추어에 불과했지만, 그를 제대로 된 한 사람의 학자로 단련시켜 낸 것은, 그 5 년 동안의 항해 덕택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소개한 바가 있다. 비글호의 항해에서 그가 거둔 성과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마음가짐을 갖게 된 점이다. 다윈은 어릴 적부터 스스로 관찰한 사항에 대해서는 무엇이든지 이해한 끝에 설명하고 싶어하는 매우 강한 소망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데 필요한 것이 이와 같은 마음가짐이었다.


나는 생각했거나 읽거나 한 모든 것을, 내가 본 것과 볼 것으로 여겨지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관을 시켰다. 이와 같은 마음의 습관은 항해를 했던 5 년 동안에 단련되었다. 어떻든 과학적으로 행한 것을 가능케 한 것은 분명히 이와 같은 단련에 있었다고 느끼고 있다. 다윈은 항해중에 부친 앞으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저는 자연 과학에 조금이라도 공헌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좋은 생애를 보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노예 제도에 대한 분노 오랜 향해 끝에 집으로 돌아온 것은 1836 년 10 월 5 일이었다. 배의 흔들림이 심해 배멀미 등으로 괴로운 일도 더러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유쾌한 항해였다. 그렇지만 다윈의 마음을 무겁게 한 일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브라질에서 목격하게 된 노예 제도의 비인도성이었다. 브라질에 도착해 그렇듯 기뻐했던 그가 이 나라를 떠나면서,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그렇지만 두 번 다시 노예의 나라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기록해 놓았을 정도였다. 본래 성격이 온순한 그였지만, 이 문제를 놓고 비글호 함장인 로이와 입씨름을 해 거의 하선을 각오한 일까지 있었다. 비교적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서술된 자신의 책에도 노예의 일을 기록한 부분에서만은 분노와 연민으로 가득한 글을 남겼다. 지금까지도 먼 곳에서 소리치는 것을 듣게 되면 지난날 브라질에서 어떤 집 앞을 지날 때 들었던 그지없이 불쌍한 그 외침소리를 생각하게 된다. 노예가 가엾게도 고문을 당하면서 울부짖는 소리임에 틀림없다고 여겨졌지만, 나는 어린이처럼 무력해 항의 할 수조차 없었다.... (중략). 내가 묵고 있었던 집 앞에서 노예로 일하고 있었던 젊은 흑백인 혼혈아는 매를 맞으며 혹독한 일을 당하고 있었다. 짐승보다도 못한 대우였다. 또한 6__7 세의 어린이가 나에게 깨끗하지 않은 물을 가져왔다는 이유로, 내가 말리는데도 아랑곳없이 말을 때리는 채찍으로 머리를 세 번 얻어맞았다. 그 아이의 모친은 주인이 한 번 흘기기만 해도 겁에 질려 몸을 떨었다.(중략) 노예에게 냉혹한 태도로 가진 사람은 한 번도 지신을 노예의 경우는 놓고 생각해 본 일이 없을 것이다. 그 얼마나 절망적인 전도인가! 자녀를 가진 노예가, 누구든 돈을 내는 사람에게 자녀가 팔려 가는 사실을 상상해 보라. 더구나 그러한 일을 서슴없이 자행하는 사람들이, 다같이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한다는 사람들이며,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이 지상에서 안 되는 일을 성취케 해달라고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다. 그는 또 이런 말도 했다. 우리 영국인 몇 그 자손들인 미국인들이 입으로는 자유를 외치면서도 이렇듯 엄청난 죄악을 과거에 저질렀으며, 또한 현재도 범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내 가슴은 비통함으로 파가 들끓으며 온 몸이 떨리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렇듯 그는 과학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과 인도주의적인 열렬한 소망이 똑같이 누구보다도 강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또한 고향의 누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저는 총선거의 결과로 세상 사람들이 노예 제도에 크게 반대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만약 영국이 그 밖의 다른 나라들에 앞서서 노예 제도를 완전히 없게 버린다면 그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경험한 것을 이론으로 체계화 이렇게 하여, 다윈이 착수하게 된 것은, 자신이 수집했거나, 혹 관찰한 각종 동물이나 식물에서 볼 수 있는 불가해한 사항을 이해하고 설명해, 법칙이나 이론을 발견해 내는 일이었다. 수집하는 사람 혹은 관찰하는 사람이 이제는 이론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다윈이 시작하게 된 불가해한 일은, 한 마디로 말하면 이 지구 위에 존재하는 각종 생물이 어떤 식으로 해서 탄생해 현재에 이르렀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와 같은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관찰이나 이론을 기자고 어느 정도까지 대답할 수 있는가. 비글호의 항해에서 돌아온 후부터 죽을 때까지 40 년 이상에 걸쳐, 그가 계속 생각해 온 것을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입부리의 크기나 모양이 다른 핀치라는 작은 새를 발견해 그것이 13 종류나 되는 것을 알아냈다. 지금은 이 새가 다윈 핀치라 불리고 있지마, 같은 종류의 새이면서 그렇듯 다른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라고 생각한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이 작은 새에게 볼 수 있는 것처럼, 똑같은 종류의 생물이라도 자연 환경 등의 원인으로 변종이 나타나는 일, 그리고 자연 환경에 잘 적응한 것이 신종으로 살아남게 되는 일, 다시 말해서 자연 속에서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선택된 것이 살아남게 된다는 일, 이를 요약하면, 이것이 자연 선택에 의한 생물의 진화라고 하는 다윈의 이론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비판도 있지만, 현재도 진화를 생각할 때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 이 이론이다. 물론, 그가 여기에 이르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시간을 두고 차분히 연구하는 타입의 학자로서, 이와 같은 획기적인 발견도 스스로 납득하는 것만으로는 불만이었으며, 다른 학자들이 생각할 수 있는 온갖 비판에 대해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 완성될 때까지는 발표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자연 선택에 따른 진화의 원리를 구상한 것은 29 세 때의 일이었지만, 이를 "종의 기원"으로서 발표한 것은 50 세가 되어서 였다. 그것도 윌리스(A. R. Wallace)라는 영국의 박물학자가 다윈과 완전히 똑같은 진화의 원리에 대해 언급한 논문을 집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서둘러 집필했던 것이다. 오랜 시간을 들인 것은 진화론만이 아니다. 난의 수정 연구는 12 년 이상이나 되는 세월을 들여 연구한 결과이며, 죽기 전해에는 "지렁이의 작용에 의한 식물성 토양의 형성" 이라는 책을 써냈는데, 이 역시도 10 년 이상을 두고 연구한 것을 종합 정리한 것이었다. 인간에서는 기다릴 수 있는 사람과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의 두 종류가 있다.


다윈은 전자에 속하며, 아이디어가 숙성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 지신의 사고 내용을 관철시켜 나갈 수 있는 것도 다윈의 개성이었다. 어린 사절, 부친이나 교사가 뭐라고 하든 자신의 생각을 밀고 나갔다는 말은 이미 앞에서 한 적이 있지만, 그는 사회에 대해서 혹은 학문의 세계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행동해 왔던 것이다. 그렇지만 "종의 기원"의 발표가 늦어진 것은 다윈이 지니고 있는 개성 이외에 당시의 과학 세계의 동향이라든가, 가치관에 대한 배려가 또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당시는 아직 과학자가 종교를 상대로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시대였다. 이를테면 각각의 생명체는 하나님에 의해 참조된 것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성서의 가르침이 널리 믿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그는 종은 변화하며, 하등 동물이 진화해 인간이 탄생되었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이와 같은 생각은 당시의 가치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사고 방식이었다. "종의 기원"의 발표가 늦어진 것은 다시 말해서 그런 일탈을 사회가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신이 발견해 낸 이론이 신앙심이 두터운 부인을 슬프게 할 것이라는 걱정과 함께, "지난날 천문학자들이 받은 박해를 명심하라"고 자신의 노트에 기록해 두었다.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가 종교 재판에 회부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시대였던 것이다. 또한 성서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우주론을 발표했기 때문에 화형에 처해진 조르다노 브루노라는 과학자의 사건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음에 틀림없다. 그런가 하면, 어떤 식물학자는 "당신의 명성이 확립될 때까지는 이론을 발표하는 것을 삼가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관찰을 사람들이 의심 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종의 기원"을 발표했을 무렵에는, 그는 이미 몇 가지 저작을 발표해 명성을 얻은 학자가 되어 있었다. 이렇듯 학문의 세계에서도 전투에서의 전략과 같은 것이 때로는 필요하다는 것을 다윈의 예가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인생을 살아가면서 졸속을 피하고 대기 만성을 이루라는 교훈을 가르치고 있다. 사랑을 통해 자기 완성을 이룬 괴테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1749__1832) 독일의 시인.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의 명가에서 태어났다. 슈투름 운트 드랑(Sturm und Drang;질풍 노도) 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실러와 함께 독일 고전주의를 완성시켰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장관 및 재상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친화력", "파우스트", "서동 시집" 등의 작품과, 정신의 보편성과 인격의 조화로운 발전을 보여 준 그의 생애, 그리고 예술 및 사상이 후세의 정신 생활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 일생 동안 13 명 이상의 여인을 사랑 괴테의 작품 하면, 일반적으로 고등 학생 무렵부터 접하게 되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을 비롯해 그가 82 세 생일 한 달 전에 완성시켰다는 대작 "파우스트(Faust)" 등이 떠오른다. 전자는 나폴레옹이 싸움터에까지 휴대하고 가서 일곱 번이나 읽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주인공 베르테르의 옷차림까지 당시의 젊은이들이 흉내를 냈을 뿐만 아니라,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으로 끝내는 권총 자살을 하자, 이를 모방해 자살하는 청년도 적지 않았다고 할 만큼 크게 영향을 주었다. 또한 후자는 세 번쯤 통독한 친구가 다시 읽을 때마다 새로운 세계와 접촉하는 것 같은 감동을 느꼈다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 작품을 60 년에 걸쳐서 씌어졌다고 한다. 한마디로 그는 문학에 있어서 천재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어떠한 수업을 쌓아 문학의 천재가 되었을까? 14, 15 세 무렵에 사랑한 그레트헨(Grechen)을 비롯해 74 세 때 구혼한 19 세의 처녀 레베초에 이르기까지 그는 열네 차례(실제로는 그 이상이 될지도 모름)나 소녀에게 연정을 느껴 사랑을 고백했으며, 그때마다 그 사랑을 바탕으로 한 편의 작품을 완성시켰다. 흔히 우리의 유행가 속에도 '사랑을 하며는 예뻐져요'라는 말이 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을 하게 되면 전신에 생기가 돌게 되고 혈액 순환이 왕성해지고 환희를 느끼는 나머지 얼굴이 예뻐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괴테가 쓴 작품을 통해서, 즉 그 작품이 지니고 있는 재미라든가 우수성을 통해서 우리는 두말 없이 그를 천재의 이름에 필적할 만한 인물로 보게 된다. "천재는 보통 사람들이 딱 한 번밖에 경험하지 못하는 청춘을 여러 차례 거듭해서 경험한다." 이 말은 괴테 자신이 한 말로서, 청춘이란 생명력의 고양이며 그와 같은 생명력의 이상한 고양 속에서 뭔가 획기적인 일을 완성시켜, 인류에게 오래오래 기억되는 인간, 그것이 천재라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천재로 불리는 사람들은 다 같이 청춘을 경험하고 있는 것일까. 예를 들어 뉴턴 같은 이는 창조력의 절정기가 두 차례 있었지만, 그런 시기가 지나자 두 번 다시 청춘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뉴턴의 경우처럼 생애 두 번씩이나 청춘을 맞이한 과학자란 그 수에 있어서 얼마 되지 않는다. 단 한 번의 청춘이나 단 한 번의 대발견에 의해 천재라 불리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앞에서 한 말은 아마도 자신을 빗대서 한 이야기인 것도 같다. 즉 다음과 같이 바꾸어 표현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보통 사람들이 한 번밖에 갖지 못하는 청춘을 여러 차례에 걸쳐 되풀이해서 경험했다." 실제로 이 말은 괴테의 한 평생을 요약한 말로서, 그의 일생이란 그야말로 청춘의 계속되는 반복이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청춘을 반복해서 경험했다는 점에서는 괴테를 당해낼 천재 또는 남자는 없을 것이다. 앞서도 약간 언급했듯이 그는 74 세가 되어서도 19 세의 아가씨를 사랑하게 되어 서슴없이 청혼을 했을 정도였다. 조금도 주저하거나 남의 눈치를 살피는 그런 태도가 아니었다고 한다. "예쁜 꽃은 다 꺾고 싶다"


60 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들여 완성한 "파우스트"에서 그는 "예쁜 꽃은 이것도 저것도 다 꺾어 보고 싶다"라고 적고 있다. 괴테라고 해도 모든 꽃을 다 꺾을 수는 없었겠지만 그러나 상당수의 꽃을 꺾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그러면서 그는 꽃을 꺾을 때마다 이를 작품화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경험을 어떤 식으로 시나 작품으로 승화시켰을까? 이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시란 모든 기회의 시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그의 생각은 이러했던 모양이다. 시 또는 기타 작품을 쓰기 위한 동기와 소재란 현실의 어떤 사실(사건)에서 주어지는 것이어야 하며, 그와 같은 현실적인 어떤 특수한 사건도 시인의 손에 의해서만 보편적인 것이 된다. "나의 시는 모두가 기회의 시이다. 전부가 현실에 의해서 자극을 받은 것이다. 아무런 근거 없이 만든 시를 나는 좋다고 평가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기회란 현실의 세계에서 체험하게 되는 사건을 의미한다. 거기서 시는 탄생된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천재라는 것은 밖으로부터 제공된 것을 자신을 위해 도움이 되게 할 수 있는 재능이며, 모든 것을 자기라고 하는 토양에서 빨아올리려고만 한다면 위대한 천재는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괴테의 또 하나의 천재관이었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은 말로 부연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무엇을 만들어 낸 것일까. 나는 내가 들은 거의 전부의 것과 관찰한 모든 것을 흡수해 자기 것으로 만들어 왔다. 나의 작품은 수천 명의 사람들에 의해서 키워져 온 것이다. 그의 위와 같은 말을 통해서 우리가 흥미롭게 느낄 수 있는 것은, 그가 자기 생애에 여러 차례 청춘의 고양을 느꼈으며, 그것이 바로 천재라는 정거라고 망설임 없이 주장한 것을 보면 대답이 명백하다는 사실이다. 인생을 살아가다가 가끔씩 만난 여성들이야말로 괴테의 창작의 동기가 되었으며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는 점이다. 천재인 괴테는 어떤 식으로 공부를 한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그는 여성 편력에서 배우고 익혔다고 즉각적으로 대답할 수가 있다. "파우스트"에서 괴테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장미를 보았거든 시를 지어라 사과를 보았거든 깨물어 버려라 다시 말해서 괴테에게 있어 장미이며 사과는 바로 여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어떤 일을 배우는 방법과 그 대상이란, 그 사람의 개성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다. 스위스의 심리학자인 융(C.G. Jung)은 사람의 성격을 내향형인가 외향형인가 또는 직관형인가 감각형인가 하는 몇 가지 지표를 가지고 분류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떤 것을 공부하는 데 관계가 있는 것은 직관형인가 감각형인가의 차이에 있다. 직관형의 사람은 직관 혹은 인스피레이션에 따라 어떤 일을 이해하는 경향이 강한 사람으로 추상적인 것을 상대로 하는 일도 전연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


이런 형의 사람은 수학 문제도 잘 푸는 경향이 있다. 이에 대해서 감각형의 인간은 구체적인 것을 손으로 만져 보거나 또는 눈으로 확인하고 혹은 스스로 시험해 보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며, 추상적인 것을 싫어하고 무엇이든지 형태가 있는 것으로 바꾸어 놓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물론 이런 형의 사람은 수학 문제 푸는 것을 즐겨하지 않는다. 이렇듯 인간은 인생에서 부딪치는 여러 가지 사건을 배우면서, 혹은 뭔가에 대해 가르침을 받으면서 살아가는데, 거기에는 스스로 잘할 수 있는 일과 못하는 일이 있으며, 스스로에게 어울리는 일 또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괴테는 이 중 어떤 형에 속하는 것일까. 그의 모든 언행으로 보아 감각형으로 판정할 수가 있다. 그의 자서전 "시와 진실"에서 소년 시대를 돌이켜보면서, 학교에서 수학 시간이 되면 두꺼운 종이를 삼각형이나 장방형으로 잘라서 노는 일에 열중했노라고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그런 놀이라면 어떤 아이들이나 다 하는 놀이라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수학을 좋아하는 학생이라면, 선생의 수업에 열중하게 되고, 제시된 문제를 푸느라 그런 일을 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종이를 접는 그런 행위는 말하자면 수학이라는 것을 전연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온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기하학에서 이를 이해하고 있는 어린이는 종이 위에 표시된 삼각형을 보기만 해도 삼각형이 어떤 것인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소년 괴테는 두꺼운 종이를 오려서 삼각형을 만들어 이를 손에 들고 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떤 일을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감각형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괴테는 수학을 싫어했으며 수학은 전연 알지 못하는 형의 인간이었으므로 당연히 추상적인 것을 생각하기 싫어했다. 물론 철학과도 인연이 없다. 친구이며 유명한 시인이었던 실러(J.F. Schiller)가 철학을 연구하는 것을 보고 그렇듯 도움이 되지 않는 일에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인다고 생각하니 슬퍼진다고까지 말했을 정도였다. 다시 말해서 괴테는 그렇듯 추상적인 철학 같은 것보다 구체적인 지질학 또는 광물학에 흥미가 있어, 각종의 광석 수집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겨, 그의 집은 그와 같은 수집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괴테로서는 손으로 접촉할 수 있는 것만이 최고이며 현실인 동시에 진실이었다. 그의 말이나 행동으로 보아 괴테에게 있어서는 손으로 말질 수 있는 최고의 것은 바로 여성이었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자기가 관심을 The 는 대상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여성을 통해서 배우고 익히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와 같은 자신의 생각을 괴테는 "파우스트"의 마지막에서 아름다운 말로 이렇게 말했다. 영원한 여성은 우리들을 높은 곳으로 이끌어 간다 말하자면 괴테의 생애는 이 '영원한 것'에 의해 높이 이끌려 가는 이야기이며, 그의 작품은 이를 기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랑의 경험을 작품으로 형상화 괴테는 평생에 과연 몇 명이나 되는 애인 혹은 연인이 있었을까. 그 진짜 숫자는 영원한 수수께끼이다. 그렇지만 괴테 자신이 자서전과 시를 통해 이름을 밝힌 것을 종합해 보면, 적어도 12, 13 명이 된다고 여겨진다. 그는 자서전인 "시와 진실"에서 이들 연인과의 만남에서 헤어질때까지의 과정을 각각 아름다운 단편 소설처럼 묘사해, 하나하나의 사랑을 자신의 80 년 넘는 긴 인생을 수놓는 전설로 완성시키려 한 듯이 보인다. 그 최초를 장식하는 그레트헨이라는 소녀와의 첫사랑의 이야기는 그가 14 세 때의 일이었다. 술집에서 잔심부름을 하고 있었던 그 소녀는 괴테를 마치 어린이처럼 취급했다. 이것은 뒤에 안 일이지만, 그럼에도 괴테는 그녀를 '믿기 어려울 정도의 아름다움'이란 예찬했다. 일반적으로 때묻지 않은 청춘 시대의 첫사랑이란 정신적인 방향으로 흐르기 쉽다. 그리하여 괴테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의 경우도 이 소녀를 사랑함으로써 아름다운 것, 뛰어난 것에 대한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말하자면 괴테의 이 첫사랑은 실연으로 끝나게 되었다. 그렇지만 실연을 통해서도 뭔가를 배운다고 하는 점이 괴테가 사랑의 달인이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는 이와 같은 실연의 쓰디쓴 경험을 기억으로부터 지워 버리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자서전의 이 부분에서는, 60 세가 넘어서도 기억이 신선하다. 이와 같은 쓰디쓴 기억에 대한 만년의 시인의 대응 방법은 이를 기분이 좋은 말로 미화해 문학사에 남는 불멸의 전설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 소녀의 예에 한하지 않고, 괴테에게는 스스로의 사랑의 이야기를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묘사해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하나의 전설처럼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 점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비판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일이란 말하기에 달려 있다. 지나가고 난 일은 모든 게 아름답다. 그 자신의 경험을 대부분 미화한 데서 성립되고 있는 것이 괴테의 자서전으로, "시와 진실"이라고 그야말로 잘 표현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 말은 거짓과 진실이라는 말이며, 거짓도 아름다운 말로 옷을 입히게 되면 진실이 된다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괴테가 그녀한테서 어린이 취급을 당했다는 것을 알고 대단히 분개해 그녀의 일을 다 잊을 때까지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소년의 나이였던 괴테로서는 '아름다운 세계'가 열린 감격을 맛보고 뭐고 할 처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괴테에게도 충분히 할 말이 있었을 것이다. 괴테 자신은 그런 말을 어디에서도 하고 있지 않지만,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과거의 일을 아름답게 장식해 표현하는 일만큼 멋진 것은 없다." 실제로 잘 생각해 보면 시인의 일이란 괴테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어느 특수한 경우를 보편적인 것으로 승화시키는 일일 것이다. 괴테가 죽을 때까지 참회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던 여성으로 알려진 사람이 그가 21 세 때 열렬히 사랑한 프리데리케 브리온(F. Brion)이라는 시골 목사의 딸이었다. 당시 브리온은 18 세였다. 그리고 괴테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그는 '시골 하늘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세상에서도 아름다운 별'과


같은 프리데리케에게 한눈에 반해 버려 마침내 두 남녀는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게 된다. 그녀는 괴테와의 결혼을 원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괴테 쪽에서는 그녀를 버리고 떠나가고 만다. "파우스트"의 제 1 부에는, 주인공인 파우스트에게 유혹당했다가 버림을 받았으며 자기 자식을 죽였기 때문에 사형에 처해지는 처녀의 이야기가 묘사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사건에서 힌트를 얻어 유사하게 이야기를 꾸며 나간 것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도 그가 편력한 많은 여성에 대한 참회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풀이할 수가 있다. 물론 자신이 사랑했다가 버리고 떠나 버린 프리데리케의 일도 포함해서. 프리데리케와는 서로 사랑했으며, 그녀가 결혼할 것을 원했지만 괴테가 일방적으로 버리고 떠나는 그런 이야기로 요약되지만, 그러한 일 속에 인생의 대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는 아무리 많이 써도 부족할 정도의 풍부한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괴테는 프리데리케를 예찬하는 말은 많이 기록해 두었지만, 그러나 어떤 이유로 그녀를 버렸는가 하는 가장 중요한 점에 대해서는 분명한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단지 헤어질 때 말 위에서 손을 내밀자 그녀의 눈에 눈물이 넘쳐 흐르는 것을 목격하고 그녀의 슬픔을 알게 되었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그야말로 간단한 표현이며 냉담한 반응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이별 방식을 보면 아무래도 괴테는 대단히 냉정한 사나이였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친구인 실러는 괴테에 대해서, "어디를 살펴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대단한 에고이스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렇듯 냉정한 에고이스트의 한 면이 우연히 노출된 거라고 여겨진다. 그는 프리데리케와의 체험을 통해, 슈베르트의 작곡으로 잘 알려져 있는 "들장미"를 비롯해 몇 개의 놀랍고 멋진 시를 썼는데, 그중 하나가 "환영과 이별"이라는 제목의 시이며, 그 시의 마지막은 이렇게 씌어져 있다.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리고 하느님이시여, 사랑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사랑을 받는 일, 그리고 사랑하는 일, 그리고 이에 의해 행복을 느끼는 것 모든 일이 괴테 자신만의 일이다. 그리하여 상대방 여성의 일은 전연 염두에 없다. 자기 자신만의 행복을 구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1787 년부터 동거 생활을 하기 시작한 조화 가게 주인의 딸인 불피우스(C. Vulpius)와 19 년 후인 1806 년에 정식으로 결혼한 것도 그러한 괴테의 일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해에 장남인 아우구스트(J. August)가 탄생했다. 이 또한 괴테가 후에 프리데리케와의 체험을 되돌아보며, "나는 최초의 죄책감을 느꼈다"고 한 것처럼, 19 년 동안을 결혼식도 올리지 않고 같이 산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껴 결혼식을 올린 것으로 짐작이 간다. 그리고 이와 같은 죄의식이야말로 대작인 "파우스트"를 쓰게 된 유력한 동기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베르테르는 괴테의 분신 어떤 것을 배운다는 의미는, 경험을 통해서 뭔가를 창조하는 데 있다. 뭔가를 배운 다음 자기 혼자서만 이해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배운 것이 완결되지 못한 셈이다. 일단 배운 것은 언젠가 살아나서 표현되는 일을 요구하고 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황제 고문관이라고 하는 부유한 관리의 아들로 태어난 괴테가 라이프치히와 스트라스부르에서 공부해 변호사 자격을 획득하고, 그 실지 연수를 위해 가게 된 베츨라(Wetzlar)라는 작은 마을에서 만나게 된 것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모델이 된 로테라는 여성이었다. 프리데리케와 헤어진 다음해의 일로 괴테는 23 세였고 로테는 19 세였다. 로테에게는 약혼자가 있었지만 주인공 베르테르는 이를 무릅쓰고 로테를 열렬히 사랑했으며, 로테 역시 베르테르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베르테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한 나머지 권총 자살을 하게 된다. 마지막의 권총 자살만을 제외하면 사실 그대로의 상황을 묘사한 소실이다. 여주인공인 로테라는 이름도 실명 그대로이며, 베르테르는 다시 말해 괴테 자신이 또 하나의 작품상의 이름이라 할 수 있다. 괴테는 이런 점으로 볼 때 그야말로 착실하고 근면한 학생이었다. 하나의 사랑을 경험한 다음에는 반드시 몇 편의 시나 소설을 탄생시켰다. 언제나 똑같은 전개였다. 이렇듯 그는 배운 것 또는 경험한 것을 항상 창작과 연계시켰는데,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경우라고 하겠다. 괴테는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었던 한 친구가 권총 자살을 한 것을 알게 되어 이 작품의 구상이 완성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대부분, 작가의 작품이란 순수하게 픽션인 경우도 더러는 있지만, 자신이 경험한 갖가지 일어나 사건 가운데서 힌트를 얻어 그것을 기초로 소설 등 문학 작품으로 완성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거의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괴테가 여성 편력의 경험을 작품화했지만, 여성 편력에서 그것을 작품화한 작가는 그가 아니라도 많다. 그렇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 혼자만의 특수한 체험을 기반으로,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보편적인 작품으로 만들어 냈다는 사실이다. 애당초 어떤 것을 배운다는 것 자체가 지식이라고 하는 보편적인 것을 상대로 하는 일이므로, 문학 작품 역시도 보편으로 통하는 것이어야 걸작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로테를 만난 지 2 년 만에 발표된 "베르테르"는 그야말로 특수한 것에서 출발해 보편적인 것으로 통하는 데 성공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어 파란 연미복에 노란 조끼차림이라고 하는 '베르테르 모드'가 유행했으며 베르테르의 경우와 똑같이 자살하는 사람도 적지 않게 나타났다. 그런가 하면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이라는 제목의 비슷한 소설까지 등장하기도 했다. 앞서도 말한 바 있지만, 괴테와 만난 나폴레옹이 이 작품을 싸움터까지 휴대하고 가서 일곱 번이나 읽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괴테는 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다. "이 작품을 젊었을 때 읽어 보고, 자신을 위해서 씌어진 것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그런 사람은 불행하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이 젊었을 때 느끼는 사랑의 격렬한 심리가 전편에 피력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백만 명의 독자에게 통하는 그런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할 수 있다. 혹 이 작품을 읽고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 젊은이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그 만큼 열렬하게 이성을 사랑해 본 일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여성을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괴테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그러한 현대의 젊은이는 불행하게 보였을 것이다. 극한 상황에서 씌어진 작품 괴테는 "베르테르"의 성공으로 20 대 중반에 이미 독일의 일류 작가로서 등단한 셈이다. 그리하여 평생을 두고 "베르테르"의 작가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만년에 이 소설을 돌이켜보며, 그 작품을 다시 읽은 것은 딱 한 번뿐이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이 작품을 탄생시킨 '병적인 상태'를 다시금 체험하는 일이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작품은 말하자면 젊은이의 마음을 미치게 하는 정신적인 인플루엔자의 병원체로 간주돼 있어서, 괴테 자신도 상당한 정도로 이 병원체의 침식을 받고 있었다고 하겠다. 소설 속에서 로테 아가씨가 어떤 일이든 지나치게 열광하게 되면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갈지도 모른다고 자기를 꾸짖었다고 하며, 자신이 좀더 대범한 사람이었다면 세상에서 가장 복이 많은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베르테르가 반성하는 장면이 있다. 괴테 자신도 중대한 정신적인 위기의 엄습을 받고 소설 속의 베르테르와 똑같은 운명을 더듬어 갈 위험성이 충분히 있었던 것이다. 괴테 자신이 당시의 병적인 심리 상태에 대해 돌이켜보면서 자서전에 다음처럼 기록하고 있다. 나는 항상 잘 갈아진 단검을 침대 옆에 놓아 두고는 불을 끄기 전에, 그 날카로운 칼끝으로 자신의 가슴을 과연 찌를 수 있는가의 여부를 시험해 보았다. 그렇지만 도저히 그 일을 잘해 낼 수 없었으므로 마침내는 자기 자신을 비웃었으며, 그와 같은 우울병과 같은 행위를 내던져 버리고 앞으로 살아나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렇지만 살아나가려면 시인으로서의 임무를 실행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 때문에 나를 괴롭히고 불안하게 만든 여러 장면을 눈앞에 떠올려 보았다. 이렇듯 괴테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갈 뻔한 정신적인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친구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것을 자기 자신의 체험에 연결시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살 충동에 시달리면서 자살의 한 걸음 앞에까지 도달한 그는 소설을 씀으로써 스스로를 구제하게 된 셈이다. 그리하여 그와 같은 극한 상황 속에서 씌어진 작품인 만큼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것뿐이다"라든가 "자신이 실제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고서는 남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가 없다"고 "파우스트"에 쓴 걸 보면, 괴테 자신이 실감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그 자신이 말하고 있는 '병적인 상태'를 통한 경험에서 과연 그는 어떤 것을 배운 것일까. 자신의 격정을 제어하는 일이라든가, 또는 마음을 빼앗길 것 같은 광적인 상태에서 자신을 지켜 나가는 일이었다. 격정이라는 것은 곧잘 인간을 파멸로 이끌어 가는 격류와 이웃하므로, 이로부터 자신을 피신시키지 못하는 젊은이는 이에 말려 들어가 생명을 잃기 쉽다. '베르테르의 체험'으로부터 배운, 즉 격정 상태에서 피신하는 방법은 그 후의 그의 일생에서 힘을 발휘해, 만년에는 바이마르 극장의 무대 감독으로 있었던 무렵의 일을 돌이켜보며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나의 마음을 격렬하게 끌어당기는 여배우도 많았으며, 내 쪽으로 다가오는 여성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는 내 마음을 긴장시켜, 이제는 그만, 하고 말했던 것이다. 이렇듯 그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씀으로써 정신적인 위기를 모면할 수가 있었지만, 반면에 많은 젊은이들이 이 작품을 읽고 자살했다는 사실은 무척 아리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베르테르의 흉내를 내어 자살한 젊은이들은 베르테르처럼 괴로워한 것이 아니고, 단지 그 스타일에 매혹되었을 뿐인 것 같다. 고민 끝에 결정한 자살이라면 구태여 특별히 연미복을 입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며 또한 철저하게 고민했다면 자멸로부터 피신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온갖 경험으로 원숙해진 만년의 괴테가 무엇보다도 싫어했던 것은, 자기의 세계에서 친숙하지 못하면서 격렬하고 예기치 못한 일들이었다. 그는 63 세 때 42 세의 베토벤을 만난 일이 있다. 이때 그는 베토벤의 제 5 교향곡인 "운명"을 피아노 연주로 듣고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그야말로 대단한 음악이다. 이것을 모두 함께 연주한다면 집이 쓰러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다시 말해서 베토벤의 음악은, 그에게 있어 사나운 불의의 공격과 같은 것으로, 괴테에게는 젊은날의 '베르테르의 체험'을 상기시켜 준 것 같다. '베르테르의 체험' 이후 그는 조심스럽게 배우게 되었다. 이는 그의 다음과 같은 말이 의미해 주고 있다. "나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나는 많은 것들을 획득했다. 그렇지만 완전히 새로운 것 혹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말하자면 '베르테르의 체험'이 다시없는 좋은 공부가 되었던 것 같다. 계속되는 새로운 사랑 이렇듯 "베르테르의 체험"은 그의 생애에 있어 대단히 큰 사건이었을 텐데, 당시의 그의 언동을 더듬어 보면, 사태의 심각성과는 반대로, 그는 이내 재빠르게 변신해 버렸다. 이는 감탄스럽다기보다는 오히려 어이없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왜냐하면 마음을 다친 끝에 로테의 곁을 떠난 그가 우연히 들른 지인의 거처에서 다시금 사랑의 꽃을 피우며 다음과 같은 말을 했기 때문이다. 먼젓번 사랑의 정열이 아직 채 가시기 전에 새로운 사랑으로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분 좋은 감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당시의 상대는 16 세의 맥시밀리아네라는 소녀였다. 괴테는 이 소녀와 수주일에 걸친 사랑을 즐긴 다음, 고향인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가 그곳 은행가의 딸로 역시 그때 16 세인 릴리 쇠네만(L. Schoncmann)을 만나, 한눈에 반해 약혼까지 했다가 얼마 후 약혼을 파기해 버렸다. 이때 릴리에게 반해 쓴 것이 "새로운 사랑, 새로운 생명"이라는 시였다. 그는 새로운 감격에 휩싸여 이렇게 노래했다. 마음이여, 내 마음이여, 이게 어찌된 것인가. 내가 사랑한 것 나의 슬픔의 씨앗 모든 게 마치 거짓 같다.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그 마법의 실로 약간 순진한 그 여자는 꼼짝 못하게 나를 묶어 버렸다 나는 그 여자의 마법의 동그라미 안에서 그 여자가 하자는 대로 내맡겨져 있지만 그야말로 얼마나 많이 변했는가! 사랑이여! 사랑이여, 부탁이니 놓아다오 말할 것도 없이 사랑이 그를 놓아줄 리가 없었다. 그는 그녀와 봄에 약혼을 했으면서도 가을에는 이를 파기시켜 버렸다. 그리하여 역시 그해 가을에, 그 이후의 그의 평생의 정착지가 되는 바이마르로 가서, 그곳에서 슈타인(C. Stein)부인을 만나게 되어 다시금 새로운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녀는 괴테보다 일곱 살이나 연상이었으며 이미 세 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 시인은 "운명에 붙인다"라는 시를 썼다. 그 시 속에, 이런 구절이 있다. 당신이야말로 전세에서는 나의 누이였던가, 나의 아내가 아니었나? 말하자면, 하나의 사랑이 그를 놓아 주게 되면, 다시금 이내 새로운 사랑이 그를 사로잡아, 여기서 다시 새로운 시가 태어났다. 이를테면 괴테의 생애에서 여러 차례 볼 수 있는 정경이 재현되었다. 이런 식으로 괴테의 여성 편력과 동시에 시를 쓰는 일은 진행되지만, 여기서 또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가 학문의 세계에서도 플레이보이였다는 점이다. 당시의 바이마르 공국은 인구가 불과 6,000 명밖에 안 되는 독일의 작은 나라로서, 괴테는 그 영주의 고문관으로서 초청을 받아 국정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런데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오래된 광산의 재개발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 사업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그는 광산에 대한 현지 조사 등을 하는 동안에 광물학을 비롯해 지질학에까지 흥미를 느끼게 되었으며, 후에는 진귀한 광석을 모으는 일에 열중하게 되었다. 그밖에도 해부학을 비롯해서 식물학 및 화학 그리고 색채론 등의 연구에 노력을 기울였으며, 해부학에서는


'악간골'이라고 하는 그때까지는 인간 이외의 동물에게만 있는 것으로 여겨졌던 뼈의 흔적이 사람에게도 있다고 하는 큰 발견을 해냈다. 그렇지만 사실은 괴테보다 4 년 전에 프랑스의 학자가 이를 발견한 바가 있어 별도로 독자적인 큰 발견에 대해서 학자들이 전연 평가해 주지 않자 괴테는 평생을 두고 학자라는 사람들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자연관은 당시는 물론 오늘의 시점에서 보아도 독특했다. 즉 그는, 생물에는 기본이 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각종 모양으로 변형되어 여러 가지 생물이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식물의 경우에는 그 원형이 잎이며, 동물의 경우는 추골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와 같은 견해는 한 사람의 아마추어 연구자의 가설에 지나지 않지만, 여기서도 흥미로운 것은 자연 속에까지 자기 자신의 살아가는 방식의 원리를 도입했다는 점이다. 생명을 가진 것을 움직이는 원리로서 그가 생각하는 변형은 바로 여성 편력을 통해서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낸다고 하는 그 자신의 생존 방식의 원리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자연 연구라고 하는 그 자체도 그에게 있어서는 자신을 단련하고 변신시켜 나가는 유력한 방법이었다. 그것은 그가 자연 연구의 의미를,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감수성과 판단력에 새롭게 받아들이는 방법이라든가 새롭게 반응하는 방법을 계속 습득시켜 자기 자신을 무한으로 완성시켜 가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완성시켜 나가는 일'이었다. 모든 학습이나 경험은 그 때문에 있는 것이다. 많은 여성도, 많은 시간을 소비한 자연 연구도 다 같이 그 때문이었던 것이다. 자기 완성을 위하여 괴테는 많은 여성을 사랑했다. 그렇지만 그가 사랑한 여성의 공통점은 모두 각별히 미인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지나치게 아름다운 여성을 피했던 것 같다. 그것은 상대방 여성에게 깊이 빠져 자신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적당히 달콤한 사랑의 정열을 불러일으켜 주지만, 결단코 정신적인 불안을 일으키게 하지 않는 여성, 그는 그런 여성을 좋아했으며, 동시에 시를 쓰게 되는 동기와 소재가 된 것이 거의가 그런 여성들이었다. 그가 38 세 때 사귀게 되어 동거 생활을 시작한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 역시도 그러한 여성의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괴테보다 15 세나 나이가 어렸으며 바이마르의 조화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이었다. 동거를 시작한 다음해에 장남인 아우구스트가 태어났지만, 바이마르의 사교계 부인들은, 괴테가 언젠가는 그녀와 헤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괴테 정도로 지위가 높은 남자가 하층 계급의 여성과 동거 생활을 한다는 것은 다소의 스캔들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후에(19 년 후)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했으며,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28 년 동안이나 함께 생활했다. 그녀는 글씨를 쓸 줄도 읽을 줄도 모르는 문맹이었기 때문에 괴테는 그녀에게 글을 가르치려고 노력했지만 헛수고였다. 괴테 정도가 되는 사람도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을 변신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주변에서는 그녀를 가리켜 '침대의 애인' 어쩌구 뒷공론을 했지만, 괴테는


그녀를 소재로 가장 뛰어난 서정시의 하나로 일컬어진 "방문"이라는 시를 지었다. 소파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살그머니 방으로 들어간 그는 아내의 잠자는 얼굴에 반한다. 눈꺼풀에 어린 평안함 입술에 간직된 말없는 절개 볼에 깃든 사랑스러움 다소곳한 가슴의 입김에는 마음씨 착한 천진함이 깃들어 있다. 괴테는 그렇듯 무심하게 자고 있는 모습에 완전히 매료되어 깨울 마음이 나지 않아 오렌지와 장미꽃을 책상 위에 놓고 살짝 그 자리를 떠난다. 40 세에 가까운 플레이보이의 순진한 마음이 잘 전해지는 시이다. 결혼했다고 해서 사랑의 정열로부터 해방된 것은 아니었다. 바이마르에서 국무장관으로서 정사를 봐 나가는 한편에서는 자주 여행을 떠나, 여행지에서 '청춘의 회귀'를 여러 차례 경험했다. 그런데 그 주기가 대체로 7 년이었던 점이 흥미롭다. 예나에서는 18 세의 민나 헤르츨리베(M. Herzliebe)를 만나,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고 계속 사랑해 왔다"는 말을 했다. 그의 나이 58 세 때의 일이었으며, 그녀는 그의 만년의 걸작 "친화력"이라는 장편 소설의 모델이 되었다. 다시 그 7 년 후에는 프랑크푸르트에서 30 세의 빌레머(Wilemer) 부인을 사랑해 역시 만년의 걸작인 "서동 시집" 속에서 다음과 같이 시로 노래했다. 이는 사실인가, 별속의 별, 당신을 다시 이 가슴에 안는 것은. 가엾게도 떨어져 있는 밤은 과연 지옥인가 그 어떤 고민인가. 그리고 다시 72 세 때에는 곧잘 찾아가는 휴양지 마리엔바트에서 17 세의 소년 울리케 레보초(U. Levetzow)를 만나 "정열 삼부곡"에서, "인간에게 생기를 주는 것이 사랑이라 한다면, 나야말로 멋있는 증거가 아닌가"라고 쓰고 있다. 괴테는 72 세의 나이로 결혼하면 몸에 독이 되는가 하고 의사에게 물은 결과, 걱정할 게 없다고 대답하자, 2 년 후 사람을 통해 그녀에게 구혼했다. 괴테가 그녀에게 구혼했다는 이야기는 이내 소문으로 돌았지만, 당초부터 결혼할 마음이 없었으며 후에 수녀가 된 울리케는 이를 거절했다. 그는 82 세의 생일을 맞기 약 1 개월 전에 오랫동안 써 왔던 대작 "파우스트"의 제 2 부를 완성했는데 끝까지 쇠퇴할 줄을 모르는 창작력의 원천은 이렇듯 여러 차례 회귀해 생기를 안겨다 주는 '청춘'바로 그것이었다. 젊음과 생기가 있어야만 뭔가를 배우겠다는 의욕과 창조하겠다는 의욕이 생기는 법이다. 여러 차례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괴테에게 있어서는 젊음과 생기를 안겨다 주는 여성들이야말로 창작의 원동력이었다. 괴테가 숨을 거두기 전에 "좀더 빛을"이라는 말을 남겼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말은 죽음이 임박해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방을 좀더 밝게 해달라고 부탁한 말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 말보다 한층 더 흥미로운 것은, 더 이상 말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이불 위에 손가락으로


썼다고 하는 W 라는 문자이다. 이것은 자신의 이름 Wolfgang 의 머릿글자인 W 라고도 풀이할 수 있는 동시에 세계(Welt)의 W 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여성(Weib)의 W 였을 것이라고 추리하는 사람도 많다. 그래야만 그의 생애를 결말짓는 데 가장 어울리는 인용이 될 것 같기 때문이다. 그의 생애는 이 W 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으니 말이다. 다시금 인용하는 것이 되겠지만 "파우스트"의 끝에서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영원히 여성인 자 우리를 높이 유도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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