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땅] 1. 연수라는 이름을... 1. 2 월 25 일. 수요일. 또 다시 주파수가 흔들렸다. 해인사 분기점을 돌아내려 대여섯 군데의 소읍을 스쳐 지났을 때부 터 차 꽁무니에 허연 먼지가 꼬리를 물었다. 길은 이제 비포장 도로였 다. 서울에서 리셋 버튼을 누른 주행 미터기는 거의 400km 에 육박하 고 있었다. 천 리 길을 달려온 것이다. 지도에 의하면 금호와 화원을 거쳐 해인사 분기점까지는 320km 남짓이었다. 톨게이트를 빠져나와서 도 80km 를 더 달린 셈이다. 병욱은 눈언저리의 두두룩한 곳이 무거웠기 때문에 가끔씩 눈살을 찌푸렸다. 전면 통유리를 파고드는 빛살은 이 월의 끝자락답지 않게 몹시도 후터분했다. 겨우내 이상 난동은 계속되었고 비가 잦았다. 입빠른 자 들은 엘니뇨 현상 때문이라고 했다. 재앙의 전주곡이라고 혀를 내두르 기도 했다. 후텁지근한 차 안의 열기를 이기지 못하여 차창을 내리면 예리한 바람 줄기가 흙먼지와 함께 살 속을 파고들어 뼈를 아리게 했다. 황급 히 창문을 올린 다음 에어컨을 켰다. 오슬오슬 한기가 돋았다. 이내 에어컨을 껐다. 지루한 운전만큼이나 짜증스런 날씨였다. 병욱은 햇살 때문에 잔뜩 인상을 구긴 채 정면만을 응시했다. 진입 로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정비(里程碑)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사흘 전에 통화했던 천도(天道) 고등학교 교감 선생의 말이었다. 하 늘 천(天), 길 도(道). 하늘의 길? 하늘로 통하는 길? 병욱의 입술 끝 이 지렁이처럼 꿈틀댔다. 찌푸린 눈살과 맞붙은 콧등 아래의 헤벌쩍한 입술은 흡사 하회탈을 연상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행운이었다. 분명 행운이었다. 도둑처럼 불쑥 찾아든 행운을 알게 된 것은 사흘 전의 일이었다. 그 전날 연수에게 밤새도록 시달림을 당하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귀가했 던 병욱은 잠이 채 덜 깬 상태에서 삼촌의 전화를 받아야 했다. 삼촌 은 다짜고짜 시골의 고등학교로 내려가라고 말했고, 한동안 병욱은 그 말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해 혼란스러웠다. 사오 년만에 처음으로 아버지의 기제사에 참석했던 삼촌에게 서울을 떠났으면 좋 겠다고 말했던 것은 벌써 두어 달 전의 일이었고, 그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틀 전, 근무하고 있던 강남의 ㄱ고등학 교에 들러 뜨악해 하는 교장 선생의 앞에 사직서를 제출했었다. 물이 좋기로 소문난 ㄱ고등학교에서 병욱이 근무했던 기간은 고작 이 년이 었다. 그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오롯이 삼촌의 든든한 배경 때문이었다. 어쨌든 개학을 채 일 주일도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 사직서를 제출 했기 때문에 ㄱ고등학교에서는 병욱을 의리 없는 사내라고 욕을 할는 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렴 어떤가? 열기 때문에 콧벽장이처럼 이맛살을 구기적거리면 서도 마음은 여유로웠다. 생각할수록 기막힌 행운이었다. 서울을 떠난 다는 사실도 그랬지만 서울에서만큼의 급여 수준을 보장해 준다는 사
실이 마음을 더욱 들썽거리게 했다. 만신창이가 된 서울 생활을 이제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그러나 통화를 할 수가 없었다. 수화기를 귀에 갖 다 대었을 때 발신음이 툭 끊겨버렸기 때문이었다. 길은 산중턱을 타 고 있었다. 삐쭉삐쭉 머리를 내민 돌들로 인해 가끔씩 차체가 흔들렸 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아마도 연수일 것이다. 오늘은 아직껏 연수 와 통화를 하지 못했다. 휴대폰을 병욱에게 선물한 사람은 연수였다. 우습게도 병욱의 신용 카드에서 결제가 되었지만. 연수라는 이름을 떠올렸을 때부터 병욱은 급격히 마음의 평정이 깨 어지고 있었다. 시골 학교로 부임한다는 사실을 아직 그녀에게는 알리 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녀는 짜증을 내게 될 것이며, 병욱은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아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병욱의 변명을 귀기울 이려 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마음이 많이 아플 것이라고 병욱은 생 각했다.
[약속의 땅] 2. 초라한 비석같은 이정비가 나흘 전의 일이 떠올랐다. 병욱이 하반신 불수인 누나를 목욕시키고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는 약속 시간이 20 분쯤 지난 후였다. 흥. 연수의 콧구멍에서 바람 소리가 새나왔다. 미안해. 누나 목욕을 시켜줘야 했어. 누나에게는 그렇게 잘해 주는 사람이 왜 나에게는 살갑지 못해? 누 나랑 살지 그래? 병욱은 구두코에 묻은 얼룩이 신경에 거슬리는지 머리를 아래로만 처박았다. 연수의 악다구니는 물꼬 터진 봇물마냥 거침이 없었다. 병욱은 연수 의 거침없는 말세례를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 그들은 저녁을 먹은 후 영화를 보았고, 얼마간의 술을 나누었으며 연수의 억지에 의해 여관에 들어갔다. 여관에 들어가자마자 연수는 안 아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병욱은 연수를 안아 줄 수가 없었다. 너를 안게 되면 욕정이 생길 것이고, 그러다 보면 섹스를 해야 할 것이고, 섹스를 하게 되면 서로간에 상처만 남게 될 것이라고 병욱은 말했다. 그러나 연수는 막무가내였다. 그가 그녀를 안아 주지 않는 것은 순전 히 그녀를 사랑하는마음이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녀와의 섹스 를 망설이는 이유도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병욱은 결코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왜 섹스를 망설이는 거냐고 연수는 따지고 들었다. 이 말에 대해서는 따로 반론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은 섹스를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얼버무려야 했다. 그럴수록 연수의 목소리는 높아져 갔고, 그녀의 말이 복도 바깥으로 새어나가 여관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대화 내용을 알아듣게 되어 그의 비겁함을 비웃게 될까봐 노 심초사했다. 그러나 연수의 목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병욱은 누나
때문이라고 말했다. 연수는 그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제는 누나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리고 섹스를 한다고 모두가 누나처럼은 되지 않는다고도 했다. 어쨌든 누나를 생각 하게 되면 발기가 되지 않는다고 병욱은 말해야 했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새벽이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터진다는 휴대폰은 부끄럼타는 첫날밤의 새악시 마냥 잠잠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통화를 하며 운전하기에는 길이 너무나 구불구불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지금은 연수와 다 투고 싶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무너진 봉분 앞에 세워진 초라한 비석같은 이정비가 깊섶에 깡총하니 모습을 드러냈다. 행여 길의 초입을 놓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던 긴장이 가셨다.
[약속의 땅] 3. 딱지의 원리 가파른 고갯길을 버둥거리며 올라서자 길은 급경사를 이루며 아래 로 곤두박질쳤다. 가속도가 붙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병욱의 발은 쉴 새없이 브레이크 위에 머물러야 했다. 분지처럼 움푹 꺼진 길의 양쪽 가장자리에서는 수백 년의 세월을 족히 견뎌왔음직한 아름드리 나무 들이 위협하듯 차창을 스쳐 지났다. 길이 열리자 여행은 끝났다. 병욱은 불쑥 엉뚱한 생각을 했다. 이제는 누나의 알몸을 씻겨줄 사람은 없었다. 어머니에게 누나는 화 냥년일 뿐이었다. 집안 말아먹을 우환 덩어리였다. 목숨줄 긴, 더러운 단백질 덩어리였다. 그러나, 누나의 가슴은 기찼다. 스펀지에 비누 거품을 일으켜 누나 의 가슴을 씻겨줄 때마다 누나의 유두를 입속 가득 빨아들이고픈 강 렬한 충동을 느끼곤 했는데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누나를 죽음으로 내몰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한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 지 보드라운 스펀지가 누나의 가슴을 스칠 때마다 누나는 희미한 미 소를 머금곤 했다. 병욱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누나의 환영을 지우고 싶었다. 누 나는 서울이었다. 불원천리하고 찾아온 길, 서울을 생각하고 싶지 않 았다. 천도 고등학교는 아직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로 통하는 길은 그만큼 요원하다는 의미일까. 길은 이제 끝없는 내리막이다. 어쩌면 길을 잘 못 들어섰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닐 것이다. 이정비를 스 쳐지난 후 갈림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동 기어의 변속 장치를 L 로 바꾸고 브레이크에서 발을 뗐다. 브레이크가 과열될 것 같았기 때문이 다. 하지만 이러한 판단은 이내 잘못임이 드러났다. 구석진 곳을 돌아 서자마자 무척 가팔라 보이는 길이 떠억하니 버티고 서 있었던 것이 다. 서둘러 기어를 변속해야 했다. 딱지 같은 존재. 엎어져 생채기가 난 자리에는 빨간 약만 발라주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상처난 자리에는 딱지가 앉게 마련이었고, 새살이
돋아나 딱지 자국을 밀어내면 모든 게 감쪽같았다. ㄱ고등학교의 교장 선생은 말했었다. 엄 선생, 개학이 며칠 남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이러시면 어쩝니까? 알 만한 사람이……. 하지만 교장 선생도 병욱처럼 딱지의 원리를 알고 있을 것이다. 곧 새로운 사람이 병욱의 자리를 대신하게 될 것이고, 오래지 않아 병욱 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질 것이다. 그뿐이다. 그뿐이다. 병욱은 진언을 외듯 같은 말을 되뇌었다. 길은 이제 평지로 바뀌었다. 그때 갑자기 추위를 느꼈다. 짙은 나무 그늘이 해면(海綿)처럼 빛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전조등을 밝혀야 했다.
[약속의 땅] 4. 술잔을 들고... 2. 멀리서 발광 물질이 널을 뛰고 있었다. 병욱은 가슴을 한껏 벌려 숨 을 들이쉰 후 힘껏 뱉어냈다. 물먹은 솜처럼 묵적지근하게 느껴지던 목덜미가 한결 가벼워짐을 느꼈다. 빙판 위의 썰매처럼 차는 날렵하게 정문을 통과했다. 차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건물의 폭이 점점 줄어들었 다. 불빛은 건물의 한가운데쯤에서 새나오고 있었다. 병욱은 그 앞에 서 차를 세웠다. 탐조등을 꺼버리자 인광 물질은 오직 한 곳으로만 모 여들었다. 사방은 괴괴하여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훅훅대던 낮의 기온과는 달리 음습한 기운이 몸에 닭살을 돋게 했다. 산 속이라 일교 차가 큰 탓일까. 병욱은 차 트렁크를 열어 여행용 가방 속에서 점퍼를 끄집어내어 몸에 걸쳤다. 발광체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흔들린 것은 섬이 아니라 배였 던 것이다. 이제 곧 등대지기가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짐짓 반가움을 표현하리라. 어쩌면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권할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가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라면 위로의 말도 잊지 않을 것이다. 그 때에 는 자신도 너스레를 떨겠다고 생각해 본다. 정말로, 정말로 힘들었다 고. 아수라도(阿修羅道) 서울에서 탈출한 자신을 받아주어 고맙다고. 병욱은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었다. 조바심을 억누르기 위해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러나 한 개비의 담배를 다 태웠 을 때까지도 얼른거리는 그림자가 없었다. 학교 안은 너무나 조용하기 때문에 요란한 차 엔진 소리는 분명 건물 안의 누군가에게 들렸을 것 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면 학교 안 에는 아무도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친 숨을 몰아 부풀린 풍선을 한 순간 손에서 놓쳐버린 것처럼 온몸에 맥이 빠지는 듯했다. 우두커니 붙박이 되어 있던 병욱은 불빛을 향하여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둠을 짚어 현관을 통하여 복도에 올라섰다. 그때,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텔레비전 소리임에 분명했다. 자신을 기다리
고 있던 사람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잠시 학교를 떠나게 된 것이고, 곧 자신을 위해 다시 학교에 들르게 될 것이라고 병욱은 생각했다. 아크릴 판에 교무실이라고 쓰여진 팻말이 빛과 어둠의 접점에서 위 태하게 걸려 있었다. 아크릴 판이 드리운 그림자를 끼고 맞미닫이 문 의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방심한 채로 병욱은 손잡이에 힘을 주었고, 드르륵 하며 문이 열려지는 순간 병욱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구석진 곳에 놓여진 소파에서 밤색 체육복을 입은 깡마른 사내 혼자 서 소주병을 기울이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사내는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병욱을 향해곧장 달려와 손을 내밀었다. "엄 선생님? 어이구, 반갑습니다. 오시는데 고생은 안 했습니까?" 병욱은 얼결에 사내가 내민 한 손을 마주잡았다. 움켜 쥔 사내의 손 힘이 너무 세었기 때문에 하마터면 신음 소리를 뱉을 뻔했다. "자, 자, 저쪽으로 가서 앉읍시다." 사내는 병욱의 손을 잡아 조금 전까지 혼자서 소주를 마시고 있던 자리로 끌고 갔다. 테이블 위에는 기름에 튀겨진 닭이 놓여져 있었다. "한 잔 하시죠." 사내가 종이컵을 내밀었다. 그러나 병욱은 선뜻 종이컵을 받아들 수 가 없었다. 사내의 정체가 궁금했다. "한 잔 하세요. 피곤할 땐 그저 소주 한 잔 마시고 자는 게 최고죠. 엄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병욱은 정체 불명의 사내에게 무어라 대꾸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멀뚱히 그의 얼굴만 들여다보았다. "엄 선생님 맞죠? 아닌가요? 이상하다. 분명히 엄 선생이란 사람이 오기로 했는데……. 다시 확인을 해봐야 하나?"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엄병욱입니다." "그럼 그렇지. 첫눈에 엄선생님이란 걸 느꼈다니까. 자, 자, 한 잔 해요. 피곤할 땐 소주가 최고라니까." 사내는 숫제 잔을 채워 병욱에게 내밀었다. 그러한 태도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대하듯 스스럼없었기 때문에 병욱은 그가 내민 술잔을 덥석 받아 버렸다. "마셔요. 난 술잔 들고 제사 지내는 사람은 질색이야. 자, 자, 마셔 요. 얼른."
[약속의 땅] 5. 우두망찰 서 있던... 사내의 독촉을 받으며 술잔 속의 술을 입속에다 털어 넣었다. 하루 종일 끼니를 때우지 못했던 탓인지 독한 술기운이 위벽으로 흘러내리 는 느낌이 선명했다. "그래, 그래! 한 잔 더 할래요?" 사내가 닭의 살점 하나를 내밀며 말했다. "선생님들은 아무도 안 계십니까?"
병욱은 닭살을 씹으면서 사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행동 하는 품새가 관리인쯤 되는 듯했다. "선생님들? 글쎄요. 나도 선생이긴 한데……. 아직 제 소개를 안 했 나요?" 사내가 머리를 긁적였다. "난 천도 고등학교의 교감입니다." 병욱은 둔기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머리 속이 얼얼했다. "죄송합니다. 몰라 뵙고……." "흐흐. 선생처럼 못 생긴 내 탓이지, 뭐. 엄 선생이 미안해 할 건 없 어요." "……" "한 잔 더 하세요." "아, 아닙니다." 병욱은 손사래까지 치며 말했다. "음. 그나저나 서류는 모두 준비해 왔지요? 서류 검토도 하지 않고 직원을 채용한다는 것은 학교 당국으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일 처리인 데…….그렇다고 생각 안해요?" 병욱은 선생이란 단어가 어느 틈에 직원이란 단어로 바뀌어버렸다 는 사실을 민감하게 느꼈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그럴 수도 있지 뭐. 대신에 엄 선생이 앞으로 중간 다리 역할이나 잘 해줘요. 높은 사람을 알아두어서 우리도 손해볼 것은 없지. 안 그 래요?" 높은 사람이란 아마도 삼촌을 염두에 둔 말 같았다. 삼촌은 자신을 성가신 존재로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차마 밝힐 수는 없었다. "한 잔 더 해요." 교감이 종이컵을 내밀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병욱은 사양했다. 아까처럼 교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 다. "하긴, 요즘 젊은 사람들은 술을 즐길 줄 모른단 말야." 교감은 닭고기를 아작아작 맛나게 씹었다. 언뜻 훔쳐본 그의 입술에 닭기름이 잔뜩 묻어 있었다. "서류는 내일 검토하도록 하고. 난 이제 그만 들어가 봐야겠어요. 쉬 세요." "여기서 말씀입니까?" 병욱은 소리치듯 말했다. "한 사람은 당직을 서야 하거든. 난 오늘 바쁜 일이 있어서 돌아가 봐야 해요. 그러니 엄 선생이 당직을 설 수밖에. 술과 안주는 내가 가 져가도 되겠지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술을 마실 줄 몰라 탈이란 말 야." 교감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것들을 주섬주섬 챙겨들어 종이백 속에 넣기 시작했다. 이력서가 들어있는 흰색 사각 봉투도 쓸려들어 갔다. 그 봉투에 닭기름이 배어들 것 같았다. 그러나 교감은 무신경했 다. 그리고는 교무실을 나가 버렸다. 발뒤꿈치로 걸음을 걷는 듯 복도 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이윽고 발자국 소리가 사라지자 세 상의 모든 흐름이 한순간에 정지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두망찰 서 있던 병욱의 몸이 예리한 칼날에 잘려나간 짚단의 대 가리 마냥 힘없이 소파에 떨어졌다. 방금 전에 일어난 일이 무엇을 의 미하는 것인가를 되짚어보려고 노력했지만 도대체 현실감이 없었다.
서울에서 불원 천리하고 달려온 사람에게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가 수면 상태에서 제어할 수 없는 무의식의 흐름 속에 놓여져 있는 것일 까. 가위에 눌리듯 기분 나쁜 꿈을 꾼 것 같았다.
[약속의 땅] 6. 취하고 싶었다. 불쑥, 삼촌께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만 할 것 같 았다. 이곳에서의 일은, 돌연한 행운이었고 생뚱스런 응대였다. 삼촌만 이 흐릿한 시야에 조명을 비추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병욱은 호주머 니 속을 더듬어 휴대폰을 손에 집었다. 그러나 액정 화면 속에는 송수 신 불가 표시가 선명했다. "제기랄!" 신경질적으로 파워 버튼을 누른 후 호주머니 속에 휴대폰을 집어넣 었다. 저절로 고개가 떨구어졌다. 그때, 교감의 책상 위에 놓인 전화기가 떠올랐다. 교무실 출입문을 밀칠 때 본 것이었다. 병욱은 곧장 몸을 일으켜 전화기를 향해 걸어갔 다. 하지만 전화기 앞에서 병욱은 머뭇거렸다. 삼촌에게 있어 자신은 자 궁 속의 물혹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생활에 불편은 없으면서도 내내 찜찜한 물혹 같은 존재. 오늘과 같은 상황에 내동댕이쳐진 것은 삼촌 의 음모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독사 대가리 들듯 꼿꼿이 치켜들었다. 전교조, 탈퇴하거라. 당장. 지난 해 늦봄, 일 년 동안 단 한 번 주고받은 삼촌과의 전화 통화 내용이었다. 전화기 앞에서 머뭇거리던 병욱은 이윽고 작정한 듯 전화기를 향해 손을 뻗치리는 목구멍에 채인 가래에 가 로막혀 끝자락이 이상한 신음 소리로 변해 입 밖으로 뱉어져나왔다. 수화기 저편에서도 담이 끓는 듯한 소리만 흘러나왔다. 얼마간의 시간 이 흐른 후에야 수화기 저편의 사람이 먼저 말했다. "누구십니까?" 초로에 접어들었음직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당황스러웠다. 전화를 건 사람이 전화를 받은 사람에게 신분을 밝히라고 요구하는 상황. 병 욱은 대꾸할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교감 선생님 안 계십니까?" "……" "교감 선생님 안 계십니까?" "교감 선생님은 퇴근했습니다만……." "그래요? ……, 나 교장입니다." 툭. 뚜뚜뚜뚜. 전화는 끊겨버렸다. 빌어먹을. 병욱은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팽개쳤다. 마치 허깨비 장 난에 놀아나는 꼴이었다. 병욱은 습관적으로 왼손 검지 손가락을 이빨 사이로 가져가 마디 사이를 잘근 씹었다. 순간, 겨자가 듬뿍 묻은 생 선회의 살점을 무신경하게 씹었을 때처럼 눈물이 핑 돌았다.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의 손끝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던 병욱 은 갑자기 어떤 생각에 골똘하는 듯했다. 그 생각에서 빠져나오기 시 작한 것은 웅 하는 기계음 같은 것이 들려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 다. 무척 귀에 거슬리는 소리였다.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신경은 온통 받들어 총 자세로 빳빳해졌지만 소리의 정체는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신경이 예민해졌기 때문일 거야. 병욱은 아까까지 앉아 있던 소파로 가서 털퍼덕 주저앉았다. 그러나 웅 하는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다시 자리에서 일어선 병욱은 교무실 의 구석구석을 살피기 시작했다. 청신경을 집중할수록 소리는 더욱 커 져갔고, 오관(五管)은 더욱더 열려졌다. 바닥에서 벽으로, 벽에서 다시 천장으로, 천장의 구석에서부터 중앙으로 옮겨지던 시선이 한 곳에서 머물렀다. 형광등이었다. 갈아 끼운 지가 오래되었는지 그 형광등은 양쪽 끝에서부터 시커멓게 타 들어간 자국이 선명했다. 형광등에서 소 리가 나는 것이라고 단정을 내렸다. 빌어먹을. 병욱은 연신 욕지거리를 뱉었다. 형광등 소리 따위에 신 경이 곤두서야 하는 상황이 짜증스러웠다. 소파에 가 앉은 병욱은 손목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아홉 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연수를떠올렸다. 연수, 갑자기 가슴 한 켠이 시렸 다. 연수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하고 생각하던 병욱은 그제서야 삼촌에 게 전화를 해보리라 마음먹었던 일을 떠올렸다. 다시 교감의 책상에 놓인 전화기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서두르던 걸음걸이와는 달리 병욱은 전화기 앞에서 한동안 망설였다. 삼촌에게 딱히 할 말이 없었 던 것이다. 이곳에서 벌어진 생뚱스런 사태 때문이었다. 왜 저를 이곳 에 보냈습니까? 삼촌은 무어라고 대답할까? ……. 하지만 이미 엎질러 진 물이 아닐까? 이제는 서울에 돌아간댔자 갈 곳도 없었다. ㄱ고등학 교에서는 벌써 후임을 구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서울에서는 끈 떨어 진 두레박 신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울했다. 한편으로, 날이 밝아지면 상황이 달라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교감은 정말로 바쁜 일이 있어서 부리나케 학교를 떠나야 했을 것이고, 교장 은 전화를 받은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서둘러 전화를 끊었 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병욱은 삼촌께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 대신에 교무실에서 나와 운 동장에 세워둔 차를 향해 걸어갔다. 차의 뒷좌석에는 열 개 남짓의 캔 맥주가 흑색 비닐 봉지에 들어 있을 것이다. 혹시 필요할지도 모른다 는 생각에 서울에서부터 준비해 온 것이었다. 비닐 봉지에서 세 개의 캔을 끄집어내어 교무실에 가지고 갔고, 천천히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 다. 술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마시고 싶을 뿐이었다. 취할 수만 있다면 취하고 싶었다. 팽팽하게 날이 선 신경을 무디게 만들고 싶었 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차에 들렀다와야 했다.
[약속의 땅] 7. 병욱은 머쓱한 표정으로 3.
자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드문드문 턱턱 하는 소리도 섞여 들렸 다. 귓바퀴를 곤두세웠다. 수런거림. 활어 시장 같은 생기는 아니었지 만 그것은 분명 사람들이 연출해내는 소리였다. 의식의 끈이 급속하게 팽창했다.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오른쪽 입 언저리가 축축했다. 소맷자 락으로 쓱 훔쳤다. 점퍼의 소매 끝이 금새 물기를 머금었다. 맥주를 마시다 까무룩히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병욱은 기지개도 맘껏 켜지 못한 채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2 월 26 일. 목요일의 아침이었다. 간밤에는 미처 느끼지 못한 사실이었지만 교무실은 꽤 넓어 보였다. 얼추 사십 여명의 사람들이 책상을 맞대고 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가 만히 자리에 앉아 있거나 혹은 옆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서 류 같은 것을 뒤적이는 사람도 있었다. 유독 한 사람만이 교무실의 구 석진 곳에서 또다른 구석진 곳으로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간밤에 밤 색 체육복을 입고 닭고기를 아작아작 씹으며 교감이라고 자신의 신분 을 밝혔던 사람이었다. 아침에는 말쑥한 정장 차림이었다. 병욱은 교 감에게 목례를 건네려고 했지만 그는 병욱이 서 있는 곳으로는 전혀 눈길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병욱은 안절부절못했다. 교무실 안의 어느 누구도 병욱을 향해 관심을 두는 이가 없었다. 그 때문에 병욱은 안달이 났다. 예의 없는 사람들이라고 욕을 퍼붓고 싶 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 때 여선생 중의 한 명이 병욱이 서 있는 곳으로 걸어오기 시작 했다. 인사를 나누기 위해서일 것이라는 짐작이 들었다. 병욱은 자신 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여선생을 바라보면서 엉뚱하게도 소맷자락으 로 훔친 입 언저리에 신경이 쓰였다. 허옇게 말라붙은 침자국이 남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거의 눈앞에 다가왔을 때 병욱은 잇바디를 훤히 드러내며 고개를 숙였다. 이제 그녀가 인사를 하리라. 그러나 그의 기대는 빗나가고 말았다. 병욱의 웃음에 대해 여선생은 잠깐 동안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을 뿐 이내 소파의 테이블로 시선을 고정했던 것이다. 그곳에는 간밤에 그가 마시고 팽개쳐 둔 빈 깡통들 이 널브러져 있었다. 여선생은 테이블 밑에 감추어져 있던 휴지통을 끄집어내어 그곳에 빈 캔들을 치우고 갔을 뿐 병욱에게는 단 한 마디 의 말도 건네지 않았다.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정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상한다는 느낌보다는 이상하게도 맥이 빠지는 노릇이었다. 털퍼덕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다. 그 때 교감 선생이 병욱 을 향해 걸어왔다. 그리고 말했다. "아, 술을 좋아하시는군요? 난 그것도모르고……. 간밤엔 서운하셨 죠?" "아닙니다." 병욱의 목소리에는 풀기가 없었다. "잘 아는 술집이 있어요. 언제 한 번 같이 갑시다." "……" "곧 교무회의가 시작될 겁니다. 아직 방학중이긴 하지만 개학이 멀 지 않았기 때문이죠. 엄 선생님은 우선은 소파에 그대로 앉아계세요." "알겠습니다." 교감 선생은 그에게서 등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말했 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술을 마실 줄을 몰라 탈이란 말야." 병욱은 머쓱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았다.
[약속의 땅] 8. 영접, 양생, 이해할 수가.. "에, 지금부터 교무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교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교무실 내에서 사각거리던 모든 소리들 이 일제히 꼬리를 사렸다. 병욱이 앉아 있는 소파는 교감이 서 있는 자리에서부터는 가장 먼 거리였기 때문에 그 공간 사이에 앉아 있는 모든 선생들의 얼굴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기묘하다는 느낌이었다. 선생들은 한결같이 밀랍 인형 같은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선생들의 표정을 엿보던 병욱은 무심한 김에 안면 근육이 뻣뻣해졌 다. "에, 교장 선생님께서 다망(多忙)한 관계로 오늘 회의도 제가 주재하 겠습니다. 여러 선생님들께서 주지하시다시피 이제 곧 개학입니다. 개 학일은 마침 우리 천도 고등학교의 개원 3 주년 기념일이며, 1999 년에 있을 천도(天道)의 시간을 예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자고로 유비무 환이라고 했습니다. 여러 선생님들은 이 점을 각별히 인지하시고 준비 에 만전을 기해주시길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신입생을 올바른 영접(靈 接)의 길로 인도해야 할 것이며, 재학생들이 양생(養生)의 도를 지키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도록 지도해야 할 것입니다." 가리사니를 잡을 수 없는 단어들이 교감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 다. 병욱은 당황한 표정으로 교감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병욱의 미심 쩍어 하는 눈길과 마주친 교감은 병욱이 안중에도 없는 듯 거리낌없 이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신입생들은 나그네와도 같습니다. 나그네의 눈빛은 때로는 경이감 과 신비감으로 가득차 있기도 하지만, 때로는 두려움에 젖어 있기도 하는 법입니다. 영접의 길로 인도함에 있어 이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 입니다. 양생의 도 또한 어렵기는 매일반입니다." 병욱의 얼굴 근육이 씰룩였다. 교감의 말을 종잡을 수 없기 때문이 었다. "신학기를 맞아 내리신 교령(敎領)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마침내 어떤 때를 부르는 소리가 온누리에 웅성거린다. 분열의 원죄가 폭로되 고 자연과 우주와 인간이 하나가 될 때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푸르 름으로 부활하리라." 고등학교 교무 회의 석상이라고는 당최 생각할 수 없는 말들이 교 감의 입에서 서슴없이 뿜어져 나왔다. 병욱은 멀뚱한 표정으로교감과 다른 선생들의 얼굴에 시선을 던졌다. 교감만이 상기된 안색으로 변했 을 뿐 다른 선생들은 여전히 밀랍 인형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교감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교령의 말씀을 마땅히 생활의 지침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에, 그 리고, 언제나 유념하셔야 할 것은 공존을 도모하는 공생의 시간에도
분열을 획책하고자 하는 이단의 무리가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러 한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교감의 말에 묵묵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선생들의 눈길이 일제히 병욱을 향해 쏠렸다. 병욱은 인민 재판을 받는 사상범처럼 가슴이 섬 뜩해짐을 느껴야 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들의 시선은 자신에게서 걷혀졌다. 선생들은 여전히 밀랍 인형 같은 표정이었다. 병욱은 황당 했다. 무슨 수작을 하자는 겐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에, 이번에는 행정적인 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입생들의 신상 명 세는 농장에서 이미 건네 받았지만, 보다 정확성을 기하자는 의미에서 선생님들께 협조 사항을 전달하겠습니다. 개학 후 상담 과정에서 부모 의 직업과 재산 정도를 정확하게 파악해 주십시오. 보고서를 제출할 때는 아주 꼼꼼하게 기록해 주십시오. 또한 재학생들의 탈락 정도가 심하면 선생님들께 문책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여러 선생님들 하실 말씀 있습니까? ……. 에, 그러면 오늘 교무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 습니다."
[약속의 땅] 9. 구원은 없다. 교감이 자리에 앉자 교무실 안은 다시금 달그락거리는 소음들이 떠 돌기 시작했다. 병욱은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영접이니 양생이니 하는 말들이 알 듯도 모를 듯도 했다. 아마도 종교 단체가 운영하는 학교인 듯했다. 그렇지만 어떤 종교인지는 짐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제서야 천도 고등학교에 대한 어떤 정보도 가지지 않은 채 부임했다는 사실 을 생각하고는 실소가 나왔다. 병욱은 로댕의 조각품 같은 몸짓으로 어떤 생각에 골똘했다. 가끔씩 눈자위가 씰룩였고 콧구멍이 발름거리 기도 했다. 그러던 병욱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하며 앉은 차려 자세를 했다. 병 욱의 시선은 황급히 교감의 자리를 쫓았다. 그러나 교감의 눈길은 책 상을 향해 붙박이되어 있었고, 선생들은 어느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주는 이가 없었다. 병욱은 자기 소개가 빠졌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안달을 했다. 하릴없이 병욱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교감이 앉아 있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두어 번 미닫이문을 여닫는 소 리가 들렸는데 선생들 몇몇이 교무실에서 빠져나가는 소리였다. "저, ……, 교감 선생님." 병욱이 말했다. "아, 엄 선생님. 하실 말씀이라도?" 교감은 읽고 있던 서류에서 눈길을 떼며 병욱을 올려다보았다. "제 소개가 빠졌습니다만……." "그랬습니까? 저런! 어떡한다? 회의는 이미 마쳤고……. 어쩔 수 없 죠. 내일 교무 회의 시간에 엄 선생님 소개를 하도록 합시다. 그래도 되겠죠?" "……"
"건망증이 심해지니 큰일이야. 좋은 처방이 없을까? ……. 엄 선생님 은 술 좋아하세요?기찬 술집이 있단 말야." "지금이라도 선생님들께 소개를 해 주시면……." "그럴 수는 없어요. 조직체란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는 게 내 신조거 든. 자, 보세요. 자리를 비운 사람들이 많죠? 내일 인사를 하도록 합시 다." "……" 교감은 회전 의자를 돌려 앉았다. 병욱은 교감의 태도에 발끈하는 성질이 돋았지만 참았다.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 생 각했기 때문이었다. "저, 교감 선생님." "아, 엄 선생. 아직도 자리에 안 돌아갔어요? 무슨 볼일이라도?" 교감이 병욱을 향해 돌아앉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제 자리가 어딘지……." "이런. 아직 자리를 안 정해 주었지. 아무래도 건망증이 심해진 것 같군. 우선은 저 자리에 가서 앉아요. 나중에 다시 정해줄게요." 교감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출입문에서 들어오자면 첫 번째 책 상이었다. 지금은 자리가 비어 있지만 교무 회의 시간까지도 어떤 선 생이 앉아 있었다는 사실이 퍼뜩 떠올랐다.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병욱은 아무런 대꾸 없이 그 자리에 가서 앉았다. 책상 위는 너저분했다. 아직은 방학중이고 더구나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서너 권의 책이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었고, 볼펜과 샤프 연 필과 지우개가 널려 있었다. 가위질에 덤벙덤벙 잘려나간 책장도 있었 다. 약간의 여백이 있는 자리는 짜깁기를 한 흔적인 듯 칼이 스쳐간 자국이 선명했다. 그 중에서도 병욱의 눈길을 끈 것은 펼쳐진 수첩의 내용물이었다. 수첩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구원은 없다. 다만 구원을 믿을 뿐이다.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약속 처럼믿음 역시 언젠가는 허물어질 것이다.
[약속의 땅] 10. 불편한 관계를 해소했으면 "이봐. 당신. 내 자리에서 뭐하는 거야?" 수첩에 코를 쑤셔박고 있던 병욱은 별안간 들려온 고함 소리에 놀 라 고개를 들었다. 씩씩거리는 얼굴로 자기를 노려보며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왜 남의 수첩을 훔쳐보는 거야?" "훔쳐보려는 게 아니라……. 펼쳐져 있었습니다. 무심결에……." "내 자리에는 왜 앉아 있어?" "교감 선생님께서……." 병욱은 교감의 자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사이 교감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이런식으로 날 밀어내려고? 이젠 단 물 쓴 물 다 빨아먹었다 이거지? 지옥에나 떨어지라고 해." 사내의 말은 과격하면서도 거침이 없었다. 병욱은 엉거주춤 사내의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 자리는 교무실 안에 없어. 알겠어?" 사내는 윽박지르듯 말했다. "왜 가지 않고 계속 붙어있는 거야? 꺼져. 썩 꺼지란 말야. 내 말 안 들려? 저쪽으로 가." 사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아까까지 병욱이 앉아 있던 소파였 다. 비루먹은 개처럼 병욱은 엉금엉금 소파에 가 앉았다. 병욱의 얼굴은 갓 잡은 황소의 살점에서 묻어나는 선지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숨결마저 성난 황소의 콧구멍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 처럼 거칠었다. 병욱은 열기를 식히려는 듯 양손바닥으로 얼굴을 거칠 게 문질렀다. 졸지에 당한 무안감은 그의 속을 까뒤집어 놓을 듯했다. 병욱은 사내가 앉아 있는 곳을 향해 흰자위를 굴렸다. 하지만 그 곁에 앉아있는 선생의 커다란 머리통 때문에 사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 때 교무실의 맞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교감이 보였다. 병욱 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교감을 향해 걸어갔다. 자리에 앉은 교감은 벌겋게 달아오른 병욱의 얼굴을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교감 선생님." 배수진을 치고 싸움에 임한 전사처럼 병욱은 음절 하나하나에 힘을 주며 말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교감은 느물거리는 듯한 투로 말했다. "제 자리는 어디입니까? 저는 저에게 가해진 부당한 대우에 대하여 분명히 항의하는 바입니다." "부당한 대우라고요? 무슨 말씀인지 제가 이해할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교감 선생님께서는 저에게 저 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말씀하셨습니 다. 그런데……." 병욱은 조금 전까지 자신이 앉아 있던 교무실 출입문쪽 첫 번째 책 상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나 병욱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자리의 주인이었던 사내가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눈빛으로 그 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전 제 자리가 어디인지 알고 싶습니다." "핫핫. 엄 선생은 성격이 무척 급하신 것 같군요. 조금만 기다려 보 세요. 곧 자리를 만들라고 지시할 테니까. 이젠 됐죠?" 교감은 더 이상 말을 나누고 싶은 의사가 없다는 듯 책상 위에 펼 쳐져 있는 서류 뭉치를 향해 시선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병욱은 선선 히 물러나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든 지금의 제 기분은 엉망입니다. 교감 선생님께서도 이 점을 충분히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네, 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감은 고개를 들지도 않고 마른 소리로 대꾸했다. "전 서울의 최고 학군인 강남의 ㄱ고등학교에서 근무했었습니다. 나 름으로 능력도 인정받았고요. 아시다시피 ㄱ고등학교는……." "알아요. 내 눈은 장식품이 아니에요. 이력서를 훑어보았으니 그 정 도는 나도 알고 있어요." 교감은 볼펜을 똑딱거렸다. 여전히 교감의 시선은 서류 뭉치를 향해
서만 고정되어 있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다만……." 교감이 불쑥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ㄱ고등학교에서 연락이 왔더군요. 엄 선생을 채용했느냐고요? 우리 학교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말해 주었어요. 어쩔 수 없이 말입니다." 미간을 찌푸린 채 병욱을 바라보는 교감의 동공이 흰자위의 한가운 데에 뚜욱하니 박혀 있었다. 어, 쩔, 수, 없, 이, 라니. 병욱은 불쾌했다. 그러나 병욱이 미처 불쾌감을 표현하기도 전에 교감이 말했다. "기다려 보세요. 벽지에서 근무하자면 여유가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부를 때까지 가 앉아 있으세요." 교감은 다시 서류 뭉치를 향해 눈을 주었다. 병욱은 우두망찰했다. 그의 안색은 청색 셀로판지를 투과한 빛이 착 색한 듯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에 병욱이 말했 다. "저는 선생님들께 인사라도 나누었으면 하는……." "아직도 자리에 안 돌아갔어요? 허, 참. 젊은 사람이 쓸데없는 고집 은. 교무 회의는 하루에 한 번밖에 열리지 않아요. 그러니 인사를 하 자면 내일 하도록 하세요. " "그렇다면 제가 교무실 안을 돌아다니면서 개인적으로 인사를 드려 도 좋겠습니까?" "조직체란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는 게 내 신조라고 분명히 말했지 않습니까?" "선생님들과의 불편한 관계를 해소했으면 하는 게 제 바램입니다만 ……." 병욱은 자기에게 심하게 무안을 주었던 사내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교무실 출입문쪽 첫 번째 책상의 주인은 고개를 수그린 채 자 신의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허어! 아무도 엄 선생님 때문에 불편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어요. 자, 둘러보세요. 모두들 자기 일에만 열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교감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거짓말처럼 선생들은 교감과 병욱 이 나누는 말에 대해 무신경했다. "그럼……." 병욱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고생각했기 때문에 교감을 향해 가 벼운 목례를 하고 소파로 되돌아갔다.
[약속의 땅] 11. 행운이라는 퍼즐 조각 소파의 눅진한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있던 병욱은 어떤 생각에 골 똘했다. 가끔씩 눈두덩이 씰룩이기도 했다. 병욱의 손길은 뻔질나게 호주머니 속을 들락거렸는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병욱은 무언가를 작정한 듯 휴대폰을 끄집어내어 다이얼을 눌렀다. 하 지만 발신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송수신 불가 상태였다. 병욱 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유선 전화기를 찾기 위해서였다. 얼른 눈에 띄지 않았다. 소파에서 가장 가까이 앉아있는 선생에게 걸어가서 전화 기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그 선생은 대꾸도 없이 고개를 왼쪽으 로 돌려 턱짓을 했다. 교감의 책상이었다. 교무실 안에 전화기가 한
대밖에 없느냐고 병욱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선생은 고개를 주억거리기만 했다. 병욱은 전화를 하려던 생각을 포기하고 소파에 눌러앉았다. 교감과 다시금 마주하는 것이 마뜩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래지 않아 병욱은 다시 소파에서 일어나서 아까의 그 선생을 향 해 걸어갔다. 귀 가까이에 입을 대고 공중 전화는 없습니까? 라고 병 욱이 말했다. 그 선생은 병욱을 향해 힐끗 눈길을 던졌을 뿐 하고 있 던 일을 계속했다. 병욱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 선생의 뒤꼭지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그 선생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먹이를 눈앞에 둔 채 사자의 눈치를 살피는 하이에나처럼 교감을 힐끔거리며 병욱은 소파로 돌아갔다. 쓴내가 목구멍 너머로 솟구치다 제풀에 숨이 죽었다. 꽤 시간이 흘러갔지만 교감은 좀체 자리에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병욱은 안달이 났기 때문인지 허벅지가 저려왔다. 교감이 지켜보는 가 운데 통화를 해서는 안될 것 같았다. 병욱은 쭈뼛쭈뼛 교감의 자리를 내내 지켜보기만 했다. 조용하던 교무실 안에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병욱은 꿈쩍 놀랐 다. 전화기에만 신경이 온통 뻗쳐 있었기 때문에 벨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던 까닭이었다. 교감은 전화기를 귀에 대고 무어라 한참이나 큰 소리를 지껄였다. 이윽고 수화기를 내려놓은 교감은 고개를 책상 위에 고정했다. 채깍채깍.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난스레 크게 들렸다. 병욱은 출 입문쪽 벽의 정중앙에 위치한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시침은 북쪽을 향 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분침이 북북서 자리를 향해 치달리고 있 었다. 허벅지가 더욱 팍팍해졌다. 종아리에는 쥐가 날 듯했다. 근육을 풀어주기 위해서 구두 밑창을 콘크리트 바닥에 네댓 번 부딪쳤다. 그 러나 안달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초등학교 미술 시간, 사생 시간은 끝 나가는데 그림은 완성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때의 초조감 같은 기분 이었다. 병욱은 이빨을 앙다물었다. 어금니가 아렸다. 더 이상은 인내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에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교감의 자리를 향해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그 때 교감이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을 밀치 고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벼르고 벼르던 첫일을 치를 때 조루가 나타 난 것처럼 맥이 빠지는 노릇이었다. 삼촌의 휴대폰 번호의 다이얼을 꾹꾹 눌렀다. 세 번인가의 발신음이 떨어졌을 때 삼촌이 전화를 받았다. "삼촌! 저, 병욱입니다." 병욱은 코끝이 찡하게 아렸다. "소원 풀이를 하고 나니 어떠냐?" "죄송합니다, 삼촌. 서울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즈즈쯔. 전화기에서 잡음이 공허하게 울렸다. 삼촌은 말이 없었다. "서울로 돌아가게 해 주세요." 병욱이 말했다. "못난 놈. ……. 거기 눌러 있거라. 내가 부르기 전에는 서울로 돌아 올 생각은 마." "삼촌, 여보세요……, 삼촌!" 전화는 끊겨 버렸다. 병욱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들고 있 었다. 이윽고 병욱은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고개를 돌려 교무실 안을 둘러보았을 때 몇몇의 시선이 그를 향해 꽂혀 있었다.
병욱은 고개를 숙인 채 소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소파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퍼즐 조각 중의 몇 부분을 잃어버린 채 퍼즐을 완성하겠 다고 낑낑대는 꼴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조각을 잃어버린 이상 퍼즐은 완성되지 않는 법이다. 사람 운명이 팔자 소관이라면 애초부터 자기에게는 행운이라는 퍼즐 조각이 모자랐던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럼에도 시골로 내려가란 말에 행운을 만났다는 생각이 착각이었던 것일까.
[약속의 땅] 12. 곱씹어 보았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화끈거렸다. 그러나 손바닥에서 열이 뿜어져 나오는 것인지 얼굴이 뜨거워진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끄집어내어 불을 붙여 물었다. 그 때였다. "나가서 태우세요." 소파 테이블 위에 널브러져 있던 빈 맥주캔을 치웠던 여선생이 었다. "그 정도 에티켓은 아실 것 아녜요? 여긴 당신보다 훨씬 나이 많은 선생님들도 있어요." "아, 네……." 병욱은 얼굴 가득 송구스런 표정을 지으며 담뱃불을 재떨이에 짓눌러 껐다. 그러던 그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병욱은 한 순간 여선생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여선생은 움찔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병욱은 노기 띤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거리긴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교무실을 나갔다. 상상했던 것보다도 운동장은 훨씬 좁았다. 간밤에는 짙은 어둠 때문에 가시 거리가 넓지 못해 운동장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병욱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코를 킁킁거리며 운동 장을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교무실의 정중앙 맞은 편에서 약 간 왼쪽으로 철봉이 서 있었다. 철봉의 약간 뒤쪽편에 의자가 보 였는데 병욱은 그곳을 향해 곧장 걸어갔다. "이봐요!" 운동장의 가운데쯤에 이르렀을 때 낮은 듯하면서도 앙칼진 목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그 여선생이 서 있었다. "이봐요! 아까는 왜 그런 표정으로 날 바라본 거죠? 내가 교무 실 안의 쓰레기 따위나 치운다고 무시하는 건가요?" 여선생의 숨소리가 쌕쌕거렸다. 넓지 않은 운동장임에도 병욱 을 따라잡기 위해 달음박질쳤음에 분명했다. 병욱은 잠시 동안 여선생을 바라보았을 뿐 대꾸 없이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 다. 그러자 여선생은 더욱 큰 소리로 말했다. "이봐요! 내 말에 대꾸를 해요. 날 그런 식으로 무시하면 나는 결코 당신을 용서할 수 없어요." 병욱의 타박거리던 걸음이 멈췄다. 몸을 돌려 말했다.
"선생님을 무시하고픈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게 느껴졌 다면 죄송합니다." 병욱은 고개까지 숙이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의 얼굴은 전혀 미안하다는 기색이 아니군요. 난 당신의 솔직한 사과를 받고 싶어요." "그러니 절더러 어떡하라는 말씀입니까? 전 솔직히 지쳤습니 다. 쉬고 싶어요.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난 당신이 지금 어떤 상태인가를 묻고 있는 게 아녜요. 솔직 한 사과를 받아야겠다고 말했어요."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던 걸로 기억합니다." 병욱은 짜증기가 더께더께 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여선 생은 병욱의 표정 따위에는 관심 없다는 듯 다부지게 말했다. "다시 한 번 사과해 주세요." "어쨌든 제가 잘못한 게 있다면 사과 드립니다. 조심하겠습니 다." "좋아요. 이 정도에서 내가 양보하죠. 하지만 앞으로 다시 날 무시하는 듯한 행동을 하면 결코 가만히 있지는 않겠어요? 알겠 어요?" 여선생은 병욱의 코앞에다 주먹을 흔들며 말했는데, 주먹이 너 무 작다는 느낌 때문에 전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차라리 어릿광대의 몸짓처럼 우스꽝스러웠다. 여선생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이번에는 병욱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선생님!" 여선생은 꽈배기처럼 반쯤 몸을 틀며 병욱을 돌아보았다. 갈색 동자가 콧잔등 가까운 곳으로 모여졌다. 무슨 일인가요? 라고 물 음직도 하지만 여선생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병욱의 말을 기다리는 듯했다. 병욱은 살풋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말했다. "선생님은 무슨 과목을 맡고 계십니까?" "왜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려고 하는 거죠?" 여선생은 꽈배기처럼 틀어져 있던 몸을 병욱을 향해 완전히 방 향을 잡으면서 말했다. "프라이버시라고요? 전 다만……." 병욱의 목소리가 역풍을 받아내는 환풍기의 소리처럼 흔들렸 다. 그가 다시 입을 벌이려고 했을 때 여선생이 먼저 말했다. "난 당신 같은 사람을 제일 경멸해요. 처음 만나는 사람의 신 상을 꼬치꼬치 캐물으려고 하는 사람들 말예요. 알겠어요? 그러 니 내 신상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 게 예의를 지키는 길이에요. 앞으로는 실례되는 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봐. 무슨 그런……." 자연스레 허리 밑으로 늘어뜨려져 있는 왼손과는 달리 반쯤 부 르쥔 병욱의 오른손이 떨리고 있었다. "……. 그만 두지. ……. 아니, 한 가지만 말하겠어. 나도 이 학 교에 선생으로 부임한 사람이야. 당신이란 호칭만큼은 삼가 주었 으면 좋겠어. 이제는 교무실에서 노려본 이유도 알 수 있겠지?" "지금 당신은 나에게 반말을 하고 있어요. 그 사실은 알고 있 겠죠? 난 분명히 이 사실을 문제 삼겠어요.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께 보고를 드릴 것이고, 당연히 농장에도 이 사실을 알려
야겠죠? 당신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겠어요? 당신은 신출내기예 요. 신출내기의 반항은 우주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만큼이나 나쁜 일이에요. 그래요. 우주의 조화를 깨뜨리는 일이죠. 당신은 벌을 받게 될 거예요. 그러나……." "보고를 하든 말든 선생님 판단대로 하세요. 전 솔직히 너무 화가 납니다. 그 이유가 무언지나 압니까?" 병욱은 윽박지르듯 말했다. "이유 따윈 듣고 싶지 않아요. 분명한 건 당신이 나에게 실수 를 했다는 점입니다. 인정하시겠죠?" 여선생은 웅변 경시 대회에 나온 연사처럼 목에 잔뜩 힘을 주 며 말했다. 특히 실수라는말에 이르러서는 음절 하나하나가 분 명한 힘을 싣고 있었다. "어쨌든 저는 지금 쉬고 싶을 뿐입니다. 보고에 대한 판단은 선생님이 하세요. 이곳은 온통 뒤죽박죽이군요. ……. 피곤합니 다." 병욱은 철봉 뒤에 놓여져 있는 의자를 향해 몸을 움직이기 시 작했다. 그의 등뒤에 대고 여선생이 말했다. "난 상담 선생이에요. 혹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날 찾 아오세요." 병욱의 등뒤에서 바닥에 신발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상담 선생은 슬리퍼 차림으로 운동장에 뛰쳐나왔던 것인지도 모 를 일이었다. 얼결에 콧바람이 새나왔다. 앓느니 죽겠다는 말처럼 상담 선생에게 상담을 받다 보면 없는 병도 도리어 생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자에 앉은 병욱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 물었다. 그리고 어 제부터의 일을 곱씹어 보았다. 염병할 놈의 서울 생활을 청산한 다는 생각에 들떠 있던 일로부터 학교를 찾아오던 험난했던 여 정. 그리고 교감을 만났던 일. 아침 교무 회의. 상담 선생과의 다 툼. 씨팔. 병욱은 불쑥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제라도 서울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아니, 돌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병욱은 앉은 자 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교무실을 향해서 성큼성큼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약속의 땅] 13. 쥐새끼들처럼 숨어서 병욱은 미닫이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곧장 교감의 자리를 향해 걸어갔다. 교감은 신문을 뒤적이고 있었다. 병욱의 코에서는 연신 거친 숨길이 뿜어져 나왔지만 교감은 전혀 기미를 채지 못하는지 신문에만 눈길을 박고 있었다. "교감 선생님." 신문을 뒤적이고 있던 교감이 얼굴을 들어 병욱을 힐끔거리긴 했지만 이내 신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교감 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교감의 시선은 여전히 신문에 못박힌 채였다. "전, ……." "방금 상담 선생으로부터 보고를 받았어요." 말을 하라던 교감이 갑자기 병욱의 말허리를 잘랐기 때문에 병 욱은 멀뚱한 표정으로 교감을 내려다보았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 뭐." 교감은 사돈의 팔촌쯤 되는 사람이 수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심 드렁하게 말했다. "전, 학교를 그만……."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일단은 자리에 가 앉아 있으 세요." "전 이 학교에서 근무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겁니다." 교감이 읽고 있던 신문지를 책상 위에 팽개치며 병욱을 올려다 보았다. "왜죠?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겁니까?" "저는 어제오늘 제가 겪었던 일들이 너무나 부당하다고 생각합 니다. 그래서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허어! 학교 당국에선 엄 선생님께 파격적인 대접을 해드렸다 고 생각하는데, 어째서 엄 선생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 하는 거지요? 무언가 오해가 있는 듯한데." "오해가 아닙니다. 이건 명백히……." "상담 선생을 불러 다시금 사건의 전말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 다. 그러니 엄 선생님께선……." "서울로 돌아가겠다는 결정은 상담 선생님과는 전혀 관계가 없 는 일입니다. 저의 판단으로 볼 때에 어제 오늘의 일든은……." "약속드리죠. 상담 선생을 소환하여 재조사를 하도록 하겠습니 다." "상담 선생님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저 는 제가 당해야만 했던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겁니 다." "그래요. 누구나 오해를 할 수는 있죠. 그리고 언젠가는 오해가 씻어지기도 하는 법입니다. 그러니 엄 선생님께선 잠시동안 자리 에 가 앉아 계시면 제가 깨끗하게 처리를 하도록 하죠." "오해는 교감 선생님께서 하고 계신 것 같군요. 저는 이 학교 를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허어! 이러면 안되는데……." 교감이 눅진한 가죽 소파에서 반쯤 몸을 일으켰다. "엄 선생님을 소개한 분의 체모도 있고, 또……." 병욱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이려는 듯 교감을 향해 턱을 약간 앞으로 내밀며 서 있었다. "교무실 안에서 소란을 피우시면 곤란합니다. 이곳은 여러 선 생님들의 학문 연구 장소이고, 또……." "죄송합니다만 전 서울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 랍니다." "우선 이렇게 하죠. 제가 엄 선생의 자리를 먼저 만들어 드리 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얘기를 계속 하도록 하죠. 자리 때문에 섭 섭해하시는 것 아닙니까?"
"자리 때문이 아닙니다. 전 이미 제가 당해야 했던 부당한 처 사에 대하여 강력하게 항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만 교감 선생님께 서는 묵묵부답이셨습니다." "그래요. 모두 제가 부덕한 탓이긴 하지만, 어쨌든 밖에 나가서 잠시만 얘기합시다. 그러다 보면 서로의 오해도 풀려질 수도 있 는 법이고……. 어때요? 잠시만 바깥으로 나가시죠." 교감은 병욱의 팔목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병욱은 애써 버팅기 지는 않았다. 교감은 이내 병욱의 손목을 놓고 걸었다. 교감이 병 욱을 데리고 간 곳은 양호실이라는 팻말이 붙여져 있는 곳이었 다. 미닫이문을 열고 안에 들어섰을 때 양호실에 걸맞게 포르말 린 같은 냄새가 약간 나는 듯도 했지만 진하게 느껴지지는 않았 다. 방학 기간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가만 있자, 재떨이가 어디에 숨겨져 있었지? 담배를 태우지 말라고 그렇게 주의를 주어도 꼭 쥐새끼들처럼 숨어서 담배를 태 운다니까. 엄 선생님은 요즘 여자들의 사고 방식에 대해서 어떻 게 생각하세요? 난 말이죠……"
[약속의 땅] 베팅을 즐기는 노련한 도박사? 교감은 책상에 붙은 서랍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병욱은 교감의 다소 엉뚱해 보이는 대화와 행동 때문에 멀뚱한 표정으로 교감의 행동을 눈으로 쫓았다. "옳지 여기 있군!" 잘 훈련된 마약 감시견처럼 고개를 마루 바닥에 처박고 콧구멍 을 벌름거리던 교감은 맨 밑의 서랍장과 마루 바닥의 공간 사이 에서 재떨이를 찾아내고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자세를 고쳐 잡 았다. "이런 암코양이들. 저런 곳에 숨겨 놓으면 내가 못 찾아낼 줄 알고. 어림없는 소리." 그러면서 담배를 끄집어내어 불을 붙여 물었다. 병욱은 갑자기 편두통이 찾아오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 를 꾹꾹 눌렀다. "엄 선생님도 한 대 하세요." 교감이 담배 한 개비를 내밀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병욱은 손사래를 쳤다. "아시다시피 이 곳에는 엄 선생님과 나밖에 없고, 그러니 괜히 체면 차릴 건 없어요.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좀 합시다. 자, 우선 한 대 하세요." "아니, 괜찮습니다." "꼭 그러시다면……." 교감은 일수돈을 낚아채는 아줌마처럼 아주 날렵한 솜씨로 끄
집어냈던 담배를 담뱃갑 속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아주 흡족 한 얼굴색을 띤 채 병욱을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를 머금었다. "우리가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교감은 정말로 대화 내용을 잊어버렸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 다. 여전히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편두통이 심해지는 지 병욱은 더욱 눈살을 찌푸렸다. "몸이 불편하십니까? …… 참, 그렇지. 엄 선생의 자리에 대해 서 얘기를 하고 있었죠? 그렇죠?그러니까…… 자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사정이 좀 복잡해요. 그게 말입니다. 교장 선생 님께서 조금만 교통 정리를 해주신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아 시다시피 교장 선생님께서는 행정적인 일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나에게 위임하신 터라 따로이 부탁을 할 수도 없고 해서……." "전 이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헤벌쭉하던 교감은 갑자기 놀란 표정으로 병욱을 보았다. "그 이야기는 이미 끝난 게 아니던가요?" 병욱은 왼손을 들어 이마팍을 감쌌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죄송합니다. 더 늦기 전에 학교에서 출발을 해야겠습니다." "엄 선생님은 정말로 성질이 급하신 모양이군요.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교감은 담배불을 재떨이에 짓눌러 껐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병욱을 바라보았다. 턱이 울대 쪽으로 바싹 당겨져 있었다. 순간 병욱은 당황했다. 교감의 시선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했기 때문 이었다. "엄 선생님이 어떤 경로로 해서 우리 학교에 부임하신 건지는 알고 계십니까? 제가 판단컨대 잘 모르시는듯해 보입니다만." 병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엄 선생님이 무작정 서울로 돌아가시게 되면 여러 사람이 다 치게 됩니다. 그 정도 판단력은 있으리라 믿습니다." "저로서는 잘 알 수 없는 얘기입니다. 정확히 말씀을 해주십시 오." "그래요. 사정을 모를 수도 있겠죠. 한 가지만 분명하게 말씀드 리면 우리 학교는 아무나 채용해 줄 수 없는 독특한 성격을 가진 학교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짐작컨대는 엄 선생님은 그러한 사실 을 모르고 오신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병욱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교감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했기 때 문에 섣불리 토를 달 수가 없었다.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 주겠죠. 엄 선생님은 지금은 떠날 수 없습니다. 그 점을 분명히 해주시기 바랍니다." "왜죠? 왜 떠날 수 없다는 겁니까?" "시간이 해결할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시간이 언제쯤입니까?" "그건 저도 알 수가 없습니다. 오직 어른만이 결정할 문제입니 다." "어른이라고요?" "우리 학교의 모든 일은 어른이 결정하십니다. 저는 다만 그 분의 심부름꾼에 불과합니다. 어른이 엄 선생을 선택한 것은 무 언가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 이유는 유감스럽게 나도 모 릅니다."
"어른이란 교장 선생님을 가리키는 말입니까?" "그것은 지금은 밝힐 수가 없어요. 이곳에 계시다 보면 자연히 어른의 힘을 느끼게 될 겁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영접이라고요? 그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겁니까?" 병욱은 교무 회의 시간 중에 교감이 했던 말을 언뜻 떠올렸다. 교령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마침내 어떤 때를 부르는 소리가 온누리에 웅성거린다. 분열의 원죄가 폭로되고 자연과 우주와 인 간이 하나가 될 때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푸르름으로 부활하리 라. "이제사 생각난 일인데, 어른이란 교령을 말씀하시는 것 같군 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곳은 종교 단체가 운영하는 학교인 것 같습니다. 농장도 종교 단체에서 운영하고 있고, 그렇지 않습니 까?" "벌써 농장 이야기까지 들었습니까?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지 금 당장은 어떤 이야기도 더 이상 해줄 수가 없습니다. 한 가지, 엄 선생님이 아직은 우리 학교를 떠날 수가 없다는 사실만 분명 히 통보합니다." "이유를 밝혀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곤란합니다." "이 곳에 남아야 한다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제는 필연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하지 않습니까?" "필연이라구요?" 병욱은 다소 황당하다는 듯이, 그러나 격앙된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교감은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그래요. 필연입니다. 그리고, 엄 선생님이 어떤 행동을 하느냐 에 따라 여러 사람이 다치게 될 수도 있다는 말 또한 피할 수 없 는 진실입니다. 특히 삼촌에게 해가 미칠 수도 있습니다. 우리로 서도 책임을 묻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삼촌에게 해가 미칠 수도 있다구요?" 널을 뛰듯 말꼬리가 천장을 향해 솟구쳤다. 믿기지 않았다. 일 개 시골 학교 교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교감은 베팅을 즐 기는 노련한 도박사처럼 득의만면한 미소를 머금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병욱은 다소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기다리세요. 기다리면 될 일입니다." 그 때 미닫이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반쯤 열렸다. 상담 선생 이 얼굴을 들이밀다 말고 우뚝 멈추어 섰다. "어머. 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상담 선생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서둘러 문을 닫았다. 다급하게 신발 끄는 소리가 들렸다. "이 곳은 이해하지 못할 일 투성이군요." 병욱이 낮게 중얼거렸다. 교감은 짐짓 듣지 못한 척 엉뚱한 말 을 했다. "양호실은 여선생들의 휴식 공간입니다. 그러니 엄 선생께서는 교무실에 가 계시는 게 좋을 듯 하군요." 할 일을 다 마쳤다는 듯 개운한 얼굴 표정을 하며 교감은 병욱 에게서 등을 돌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고, 무겁고도 느릿느릿한 발걸음이 마루 바닥을 울렸다. "빌어먹을!"
병욱의 입에서 불쑥 욕지거리가 튀어 나왔다. "뭐라구요?" 교감이 걸음을 멈추고 병욱을 노려보았다. 병욱은 겸연쩍은 표 정을 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다시금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점점 작아지던 발자국 소리가 이윽고 자취를 감추었을 때 병욱 은 양호실의 문을 닫고 나왔다. 화장실에 들러 한 차례 오줌을 갈긴 후 교무실에 갔다. 그리고 소파에 앉았다. 몸은 물기를 머금 은 솜뭉치 같았지만 신경을 날카롭게 날이 섰다.
[약속의 땅] 14. 이방인을 싫어해요 4. 삼촌은 행정 관료 출신이다. 여야의 수평적 정권 교체로 인해 위태로워 보이기는 했지만 다가오는 보궐 선거에서 야권의 공천 을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삼촌을 공천 할 정당은 비록 야권이었지만 원내 제 1 당의 의석수를 가진 정당 이었다. 언론에서는 삼촌이 당선 안정권에 가장 근접해 있다는 예상 기사를 싣기도 했다. 지역 기반이 튼튼했던 것이다. 그러한 삼촌이 자기 때문에 곤란한 일을 겪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은 쉽게 믿기지 않았다. 조그만 시골 학교의 교감이 그렇게 엄청난 협박 을 할 수 있다니. 삼촌은 언제나 거대한 벽이었다. 웅장한 산이었다. 높이도 폭도 가름할 수 없는. 거기에 비하면 자신과 어머니, 누나는 형체조차 찾을 수 없는, 먼 기억에나 의지하여 겨우 자리를 확인할 수 있 는 가라앉은 봉분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한편으로 전혀 근거 없이 교감이 그렇게 엄청난 말을 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심하게 배배 틀린 채 웃자라 버린, 손댈 시기를 놓쳐 버린 관 상수를 바라보는 정원사처럼 병욱의 심사가 편치 못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불현듯 허기가 느껴졌다. 그제야 아직 아무 것도 속에 집어넣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손목 시계 를 들여다보았다. 시침과 분침은 11 시 25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등으로 전해지는 햇살의 부피가 꽤 얇았던 탓 이다. 병욱은 뚫어져라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초침이 움직이지 않 았다. 전지가 다 되었을까. 이곳으로 내려온 후 모든 게 뒤죽박죽 이었다. 병욱은 교감의 자리를 힐끔거렸다. 지금쯤은 무어라 말이 있어 야 할 게 아닌가. 그러한 병욱의 심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교감은 책상에만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까짓 것 기다려 보자. 어찌 되겠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눅진 한 인조 가죽 소파의 표면에 등을 붙였다. 속이 아릴 정도로 허 기를 느꼈다. 머리 속에는 뜬금 없는 생각들이 자맥질을 했다. 귓가가 가려웠다. 벌이 앵앵거리며 날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똥파리의 요란한 날갯짓 소리 같기도 했다. 사람의 소리라는 생 각이 들기도 했다. 병욱의 눈썹 꼬리가 보일락말락 흔들렸다. 병욱은 느슨하게 늘어져 있던 신경줄을 곤두 세웠다. 다음 순 간 등받이를 향해 납작하게 가라앉아 있던 가슴을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앞으로 내밀었다. 짜증기가 더께더께 앉은 상담 선생이 서 있었다. "하숙집으로 안내하겠어요. 따라오세요." 멀뚱히 상담 선생의 시선을 받아내던 병욱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가리사니를 잡겠다는 표정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 다. 어느 새 교무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교사(校舍)에서 나왔을 때는 벌써 어둑어둑한 빛이 운동장을 채우고 있었다. 병욱은 손목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11 시 25 분이었다. "나, 참. 빌어먹을." 무의식적으로 말을 뱉고서는 병욱은 옆에 서 있는 상담 선생의 눈치를 살폈다. 공연한 시비를 받게 될까 싶어서였다. 오전에 된 통 당한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상담 선생은 그 말 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저게 선생님의 차죠? 차를 끌고 오세요." 그들이 서 있는 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병욱의 차는 세워 져 있었다. 몇 걸음만 함께 걸으면 될 일을 상전처럼 명령하는 상담 선생의 태도가 아니꼬웠다. 하지만 병욱은 내색하지 않았다. 대꾸없이 걸음을 옮겼다. 키꽂이에 키를 꽂으려던 병욱의 눈길이 상담 선생이 서 있는 곳을 향하여 동그랗게 모아졌다. 상담 선생 외에도 두 명의 여선생이 더 있었던 것이다. 병욱은 세 명의 여선생이 서 있는 앞에 차를 길게 세웠다. 그 들은 아무 말없이 차에 올라탔다. 병욱의 옆좌석에는 상담 선생 이 앉았고, 뒷좌석에는 다른 두 사람이 앉았다. "안녕하세요? 엄병욱입니다. 국어 과목을 맡을 겁니다." 병욱은 백미러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그러나 세 명의 여선생 중 어느 누구도 병욱에게 말대꾸를 하는 이가 없었다. '도대체 이 놈의 학교 선생들은…….' 토사물이 울컥하고 올라오듯 성깔이 치솟았다. 그럼에도 사람 좋은 낯빛을 띤 채 말했다. "어디로 모시면 되죠?" 이번에는 옆자리에 앉은 상담 선생을 향해 말했다. "착각하지 마세요. 당신이 우리를 모시고 가는 게 아니라 우리 가 길을 안내하는 거예요." 상담 선생의 싸늘한 말투에 온몸에 두드러기가 이는 듯했다. 병욱은 얼굴이 굳어졌으나 표정만은 애써 밝게 한 채 말했다. "아, 네." 상담 선생은 간간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하고 말했다. 그 때 마다 병욱은 부드럽게 핸들을 돌렸다. "선생님들이 맡고 계시는 과목이 무엇이죠? 제 말뜻은 앞으로 함께 생활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인사치레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병욱은 상담 선생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선생님은 남의 프라이버시를 침범하는 게 취미인가 보죠?" 갑자기 차가 앞쪽으로 쏠리다가 멈추었다. 뒤에 앉은 누군가의
입에서 아이쿠 하는 신음 소리가 새나왔다. "상담 선생님은 비아냥거리는 게 특기인가 보죠? 수인사나 하 자는데 왜 시비를 거시는 겁니까?" "시비를 건다구요? 갈수록 태산이군요." 상담 선생이 팔짱을 끼며 병욱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이곳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내일이라도 이 곳에서의 일을 집어치우고 서울로 올라갈 겁니다." "우리들이 바라는 게 바로 그것이에요. 그렇게 결정하셨다면 굳이 하숙집으로 가실 필요도 없겠군요. 저희들은 이곳에서 내리 겠어요. 선생님은 곧장 서울로 올라가세요." 병욱의 입이 헤 벌어졌다. 마주친 병욱과 상담 선생 사이의 눈 빛이 튀었다. "도대체 왜 제가 이런 부당한 대접을 받아야 하죠?" "우리는 이방인을 싫어해요." 뒷좌석에 앉아 있던 여선생 중의 하나가 상담 선생을 거들며 말했다.
[약속의 땅] 16. 야릇한 희열이 느껴졌다. "이방인이라구요? 어째서 제가 이방인이죠? 오늘 처음으로 이 학교에 부임하긴 했지만 얼굴이 익숙해지면 저도 한 식구가 되는 게 아닙니까?" "그 생각은 선생님만의 생각이겠죠. 그렇지 않나요? 박 선생?"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이 분은 이곳의 사정을 잘 모르시는 것 같아서……." 박 선생이라 불린 여선생이 말꼬리를 흐렸다. 이 곳에 와서 처 음으로 자신을 감싸주는 듯한 호의적 표현이었기 때문에 병욱의 가슴 한 켠이 괜히 아렸다. "박 선생님! 지난 학기에 당했던 일을 잊었어요?" 상담 선생이 박 선생을 향해 날카롭게 비늘을 세웠다. "그건 그렇지만……. 어쨌든 이 분은 너무나 물색을 모르는 것 같구, 그래서……." "자꾸만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학교 당국에 보고를 할 수도 있어요." 상담 선생이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됐어요. 우리끼리 싸우는 일은 그만 두어요. 당장 급한 일은 엄 선생님을 우리들의 하숙집에 모실 것인가 말 것인가를 판단하 는 일이에요." 병욱을 이방인이라고 지칭했던 윤 선생이었다. "윤 선생님은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상담 선생이 말했다. "글쎄요. 싫은 건 분명하지만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고 이 자리 에서 결정할 수도 없을 것 같구. 어쨌든 전 이방인은 싫어요. 우
리의 순수성을 해칠 수도 있을 것 같구. 어쨌든 싫어요." 윤 선생이 말했다. "그렇게 애매한 태도로 말하지 말고 분명하게 말해 보세요." 상담 선생이 다그쳤다. "본인의 의사가 중요한 게 아닌가요?" 박 선생이었다. "도대체 지금 뭘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까?" 병욱이 발끈했다. "듣고도 몰라요?" 상담 선생이 미간을 곤두세웠다. "미치겠구먼. 내 일을 왜 선생님들이 결정하겠다고 이 난리입 니까?" "국어 선생님의 일이 곧 우리들의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 죠. 그렇지 않나요? 윤 선생님?" "우리는 우리의 순수성이 파괴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따 라서 국어 선생님이 스스로 서울로 돌아가 주셨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강제로 떠밀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병욱은 담뱃갑에서마지막으로 남은 한 개비를 끄집어내어 입 에 물었다. 빈 갑을 꼬깃꼬깃해서 차창을 열고 밖으로 휙 집어던 졌다. 그리고 말했다. "빌어먹을." "윤 선생 봤어요? 그리고 들었어요?" "물론이죠." 윤 선생이 말했다. "저도 증인이 될 수 있어요." 박 선생이 말했다. "엄 선생님. 방금 당신이 하신 일은 자연에 대해서 심각한 해 악을 미쳤다는 사실을 자인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아주 상스런 말을 사용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우 리는 이러한 일들을 학교 당국에 알리고 책임 있는 처벌을 요구 할 것입니다." "마음대로들 하세요. 나는, 지금의 내 심정을 솔직히 이야기하 면 꼭 정신 병원에 수용된 것 같아. 당신들 모두는 병자들이야. 알아? 어쩌면 집단적으로 환각제를 복용하고 있는 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고서야 다같이 미칠 수는 없어. 집단 환각 상태. 난 서 울로 돌아가면 이 사실을 보건 당국에 고발할 수도 있어." "뭐라구요? 우리를 정신병자로 취급하는 거예요? 어떻게 그런 모욕적인 언사를?" 상담 선생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당신들이 하는 모든 언행은 정당하고 내 말 한 마디, 행동 하 나하나는 모두 이상하다는 건가?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 당신 들도 강단에 서서 강의를 하는 선생들이잖아. 사고력에 구멍이 뚫리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럴 수 있어?" "……." "헛, 참. 당신들 얼굴 표정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는 표정들이야. 내가 말해주지. 난 오늘 처음으로 이 학교에 부임 을 했고, 그렇다면 당신들은 나를 편안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도 와줘야 했어. 그런데 쫓아내지 못해 안달복달이지. 그래서 교감 선생님께 찾아가서 학교를 당장 그만두겠다고 말했더니 그만 두
어서는 안된다고 위협을 하는 거야. 도대체가 모를 일 투성이야. 당신들 정체가 무엇이야? 이곳이 정말로 학교 맞아? 그리고 당 신들 선생 맞아?" "자격이 의심스러운 사람은 오히려 국어 선생님이란 사실을 아 세요?" 상담 선생이 주먹을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어떤 면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상담 선생이 열을 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병욱은 오히려 마 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야릇한 희열이 느껴졌다.
[약속의 땅] 17. 밴댕이 소갈머리 "자연은 우리들 생명의 터전이에요. 그런데 당신은 썩지도 않 는 담배 껍질을 버렸어요. 비닐이 썩지 않는다는 사실은 아시죠?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힘없는 여교사라고 반말을 하고 있어요. 그것은 공생의 원리를 거스르는 일이지요. 그 점에 대해서 국어 선생님은 분명히 동의를 해야 할 거예요." "흐으……. 그래서요?" "우리들과는 함께 근무할 수가 없습니다." "흐흐. 공생, 영접, 교령, 도대체 모를 말 투성이군. 이곳이 학 교야, 아니면 종교 집단이야? 혹시 사이비 종교 집단이 학교라는 외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 아니야?" 그 말에 대해서 세 명의 여선생들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짚은 것 같군." 병욱이 기세 등등하게 말했다. "우리 학교가 종교 단체에서 지원하는 학교라는 사실은 인정하 겠어요. 그러나 사이비 종교 단체 운운은 취소해 주길 바랍니다." 상담 선생이 대거리를 했고, 다른 두 사람은 입을 악다물고만 있었다. 그 때 병욱의 차가 세워진 앞쪽 방향에서 서치라이트 불빛이 비쳤다. 불빛은 그들을 향해 점점 가까워지더니 병욱의 차 앞에 서 멈추어 섰다. 마주선 지프차에서 내린 사람은 교감이었다. 걸어오는 교감을 보면서 병욱은 차창을 내리고 고개를 바깥으 로 내밀었다. 그리고 무어라 말을 했지만 병욱의 말소리는 교감 의 호들갑 소리에 묻혀버렸다. "엄 선생님! 지금까지 여기서 뭣하고 계세요? 사고가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하고 찾아 나선 참입니다." "교감 선생님, 마침 잘 오셨어요. 우리는 국어 선생님의 돼먹지 않은 처사에 대해서 지적하고자 합니다." 교감임을 확인하자마자 병욱의 차에서 내려선 상담 선생이 핏 대를 세우며 말했다. 덩달아 두 명의 여선생도 병욱의 차에서 내 려섰다. "그만. 말조심하라고 그만큼 주의를 주었는데도 왜 그래요? 세 분 모두 내일 출근하자마자 시말서를 적어내도록 해요."
세 명의 여선생은 똥그랗게 눈을 뜬 채 눈알을 데록데록 굴렸 다. "제 차를 따라오세요. 하숙집으로 가야죠." 교감이 병욱을 향해 말했다. 병욱은 마뜩찮은 눈길로 교감을 쏘아보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병욱이 먼저 말했다. "저는 서울로 돌아가겠습니다. 제 결심은 분명합니다." "이 밤에 말씀입니까? 가시겠다고 작정을 하셨다면 굳이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어쨌든 오늘밤은 하숙집에서 주무시 고 가세요. 그러다보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아닙니다. 제 생각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좋습니다. 좋아요. 하지만 오늘 밤은 이곳에서 주무시고 갈 수 도 있는 일 아닙니까?" 병욱은 짜증기가 가득한 얼굴로 그러마고 했다.
5. 여선생들은 모두 교감의 지프로 옮겨갔다. 병욱은 앞차의 꽁무 니를 쫓았다. 가끔씩 앞차의 꽁무니가 암흑 속으로 빨려들었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핸들을 꽉 움켜쥔 손바닥에 땀이 배 어져 나와 끈적끈적했다. 하숙집은 학교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 었다. 명도를 잔뜩 낮춘 전구 아래서 속옷을 까 내린 계집의 엉덩이 처럼 희뿌염한 건물이 드러나 보였다. 앞서 가던 교감의 차가 속 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병욱은 브레이크 위에 몇 번씩 발을 올렸 다가 내렸다. 이윽고 교감의 차가 멈추었고 병욱은 그 뒤에서 차 를 세웠다. "다 왔습니다." 먼저 차에서 내린 교감이 병욱의 차창을 두드리며 말했다. 병 욱은 엔진을 끄고 차에서 내렸다. 어둠 속이었지만 주변에는 건 물이라고는 없는 듯했다. 마치 외딴 곳에 덩그러니 서 있는 산장 같은 꼴이었다. "들어가시죠." 교감이 먼저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고, 여선생 셋이 그 뒤를 따랐다. 병욱은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건물에서 새나오는 불빛만 으로 주위를 탐지하기에는 벅찬 노릇이었다. 유리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섰을 때 처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는 신발들이었다. 구두, 운동화, 슬리퍼 등이 애초에 자기의 짝에게는 관심이 없었다는 듯이 다들 엉뚱한 방향으로 코를 내밀고 있었다. 출입문 오른편에 베이지 색 하이그로시 신발장이 놓여져 있었는데 문짝이 너덜너덜했다. 그래서 현관에 신발이 무질서하게 늘려있는 것 같았다. 다음으로 그의 시선에 잡힌 것은 거실이었다. 아마도 인조 가죽임에 분명 한, 한 눈에 싸구려 티가 역력한 검정색 가죽 소파가 아무렇게나 짜맞춘 듯한 나무 테이블을 감싸듯 놓여 있었다. 오른쪽으로 눈 길을 주었다. 2 층으로 올라가는 층계참에는 콘솔이 놓여 있었고, 그 곁에 꽤 오래되었음직한 관음죽 분이 하나 있었다. 그 바로 옆에는 사람 키만큼 커다란 높이를 가진 벽시계가 위태하게 벽면 에 걸려 있었다. 다시 오른쪽으로 약간 비켜간 곳에 미닫이문이
있었는데 그 곳에는 누렇게 변색된 종이 위에 매직펜으로 화장실 이라고 갈겨 쓴 글씨가 붙여져 있었다. 정중앙으로는 방의 출입 문임에 분명해 보이는 손잡이가 두 개 달려 있었고, 왼편으로는 앵글로 짠 장식장 위에 오랫동안 방치해 둔 것 같은 몇 가지 소 품이 놓여져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모두들 잠자리에 들었는지 집안에서는 소음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벌써 소파에 엉덩이를 걸치고 있었다. 병욱은 꼬리뼈 아래 부분에서 지금 막 벌어지려 하는 급한 볼일을 애써 참고 있 는 사람처럼 엉거주춤하게 그들 곁으로 갔다. "앉으세요." 병욱은 교감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소파의 빈자리에 엉덩이를 걸쳤다. "이 곳이 앞으로 엄 선생이 거처할 곳입니다." 교감은 마치 낯선 사람에게 길 안내를 하는 사람처럼 심드렁한 투로 말했다. 병욱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잔뜩 눈살을 찌푸렸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지긋이 눈을 내리감은 채 소파에 등을 기댔 다. "망구는 벌써 잠이 든 거야? 사람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면 냅 다 달려나오지 않고. 망구, 망구!."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망구, 망구!" 교감이 재차 불렀다. 그제서야 정중앙에 위치한 방문의 손잡이 가 돌려지는가 싶더니 허리통이 불룩한 가슴만큼이나 펑퍼짐한 여인이 기지개를 켜며 나왔다. "망구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이제 겨우 오십줄에 든 사람 더러 망구가 뭐야? 점잖지 못하게. 그러고서도 어떻게 교감을 해 먹어? 교감 씨앗이 지난 엄동 설한에 다들 얼어죽었나." "쯧쯧. 저런 말버릇……." "이 사람은 누구야?" "새 학기부터 근무할 국어 선생님이야.엄 선생, 인사하세요. 천도 주막의 주모요." 병욱은 눈알을 덮고 있던 눈두덩을 잠깐 씰룩이긴 했지만 다시 금 눈을 감았다. "쯧쯧. 허우대는 멀쩡한 사람들이 어찌 환자가 되어 가지 고……." 병욱은 감았던 눈을 뜨고 주인 여자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방금 환자라고 하셨습니까?" 병욱이 말했다. "그럼 환자지, 뭐야?" 주인 여자가 내배앝는 소리를 했다. "허허. 망구가 주책은. 이 사람은 우리 식구가 아냐." "식구가 아니라고? 선생님이라고 하지 않았어?" "같은 선생님이라도 격이 다르지. 쌀도 일반미가 있고, 통일벼 가 있잖아. 고깃국도 있고 시래기 국이 있듯이 말야." "그럼 이 사람은 통일벼고 시래기 국이란 말야?" "비유를 하자면 그렇다는 말이지. 엄 선생, 기분 나쁘게 듣지 말아요. 우리끼리 나누는 얘기니까." 병욱의 얼굴이 냉동실에 오래도록 갇혀 있었던 고깃덩이마냥
시퍼러죽죽하게 변해갔다. 한동안 말없이 테이블에 붙박이 되어 있던 그의 시선이 교감의 가슴을 향해 꽂혔다. 그리고 말했다. "전 내일 아침이면 이 곳을 떠나겠습니다. 제 마음은 이미 굳 어졌습니다." 제각기 딴 곳을 바라보고 있던 여선생들의 눈이 병욱을 향해 모아졌다. 환한 기색이 역력했다. 교감은 잠시 입을 쩝쩝거리더니 말했다. "허어, 이 사람 참. 성질만 급한 게 아니라 삐낌까지 타는군. 밴댕이 소갈머리인가?" 끝말을 흐리며 교감이 말했다.
[약속의 땅] 18. 넌 해고야 "무엇이라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저는 서울로 돌아가겠다는 결 론을 내렸습니다." "교감 선생님, 국어 선생님의 의사를 존중해 주는 게……." 상담 선생이 불쑥 끼여들었다. "이봐!" 교감이 고함을 내질렀기 때문에 상담 선생이 움찔한 표정으로 낯빛을 붉혔다. "행정적인 절차는 교감인 나의 고유 권한이란 걸 몰라? 교장 선생님마저도 간섭하지 않는 일을 왜 선생들이 나서서 그래? 세 사람은 오늘 저녁밥 없어. 알겠어?" "밥을 주고 안 주고는 내가 결정할 일이지, 왜 교감이 나서서 배 나라 감 나라 하는 거야. 여기가 학교인 줄 알아?" 이번에는 주인 여자가 고함을 질렀다. "이 놈의 망구가! 이 사람들은 내 부하란 사실을 잊었어?" "부하? 흥. 선생들더러 부하라고 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당신이 유일할 거야. 어쨌든 병정놀이는 학교에서나 하란 말야. 여긴 엄연히 내 집이고 내 세계야. 고까우면 선생들더러 다른 곳 으로 하숙을 옮기라고 해. 나도 이 짓이 넌덜머리가 나. 난들 이 짓이 좋아서 하는 줄 알아? 뭘 알고 깝죽대든지 할 것이지." "이 놈의 망구! 당신을 고발하겠어. 부하들 앞에서 내 체면을 깡그리 무너뜨리다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야." 교감은 분기를 참지 못하겠다는 듯 씩씩거렸다. "고발? 할 테면 해봐. 나는 할 말이 없는 줄 알아? 교감의 비 리가 재단에 알려지면 그 날로 자리 보전도 힘들 걸." "이 놈의 망구가……." 교감은 급기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말했다. 황소가 영각을 하듯 거친 숨을 푸푸 내뿜으며 주인 여자를 노려보던 교감은 한 참이 지난 후에야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여선생님들은 방으로 올라가세요. 오늘 저녁은 없습니다. 알겠 어요?"
세 명의 여선생은 교감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이층으로 가 는 층계를 타박거리며 올라갔다. 여선생들의 모습이 사라진 후에 도 교감과 주인 여자의 신경전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이윽고 교감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망구. 조심해야 할 거야. 후회할 수 있어." "흥. 비리를 재단에 알리기 전에 나에게 잘 보이는 게 좋을 걸." 교감이 막 몸을 돌리려 했을 때 병욱이 교감을 불렀다. "교감 선생님. 전 내일 서울로 돌아가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병욱을 바라보는 교감의 흰 동자가 불빛을 받아 희번덕였다. 입술이 씰룩이긴 했지만 교감은 아무 말도 내뱉지 않았다. 짜증 기가 치솟도록 지루한 시간이 흘렀다. 병욱이 다시 말했다. "전 서울로 돌아가겠습니다." "……" "더 이상 설득하려 하지 마십시오. 제 마음은 이미 굳어졌습니 다." "설득? 설득 따윈 없어. 갈 테면 가. 아무리 가슴을 치며 후회 한들 소용없을 걸. ……. 아니지. 넌 해고야. 내가 널 해고한 거 야. 알겠어? 네가 학교를 그만둔 게 아니라 내가 널 해고한 거야. 이 점을 분명히 해두어야겠군." 교감은 어느 새 출입문 앞에 서서 신발을 꿰신고 있었다. 구두 끈을 묶는 시간이 꽤 길게 느껴졌다. "지금이라도 그 말을 취소한다고 말해. 그럼 용서해 줄 수도 있어." 교감이 말했다. "흥, 아무에게나 공갈 협박이군. 이봐요. 젊은 선생. 이 곳을 떠 나면 그만이에요. 교감의 말 따위는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라니 까." 주인 여자가 말했다. "엄 선생. 생각을 바꾸겠다고 말해. 잠시 흥분했을 뿐이라고 말 야. 그러면 오늘 일은 없었던 일로 해 주겠어." "무시하면 그만이라니까." 늙수그레하고 펑퍼짐한 주인 여자의 입에서 의외로 앙칼진 목 소리가 새어 나왔다. 병욱은 한참동안 생각에 골몰했다. 삼촌과의 마지막 통화 내용이 무자맥질했다. 삼촌은 무조건 진득하게 눌러 붙어 있으라고 말했었다. "좋아. 오늘 밤중으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구. 기회는 다시 오지않아." 교감은 소리나게 문을 밀치며 건물에서 나갔다. 시동 거는 소 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차가 빠져나가는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약속의 땅] 19. 민박집에서 밥 먹는 셈 쳐 "앉아요."
주인 여자가 말했다. 우두커니 서 있던 병욱은 그제야 소파에 다시금 앉았다. 그리고 양손바닥으로 얼굴을 비볐다. 왼손바닥으 로 눈꺼풀을 힘껏 누르기도 했다. 물끄러미 병욱의 행동을 바라 보고 있던 주인 여자가 혀를 끌끌 찼다. "내가 보기에는 젊은 선생은 이곳에서 전혀 환영받지 못하는 것 같군. 재단과 관계가 없으면 내일 당장 학교에서 떠나요. 이곳 은 아무나 있을 곳이 못돼요. 내 말을 따르는 게 좋을 거야." 주인 여자의 말을 귓결로 들으며 병욱은 호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무의식적으로 끄집어내어 다 이얼을 누르려 했다. 신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전원이 나간 까 닭이었다. "전화 있습니까?" "전화? 난 그딴 것들을 좋아하지 않아. 더구나 이런 산골엔 그 런 게 있을 필요가 없지. 시내에 나가면 전화가 있긴 하지만 그 생각은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초행자가 밤길을 나섰다간 길을 잃어버리기가 십상이거든." 그 때 병욱의 배속에서 진흙물이 고이는 듯한 소리가 났다. "쯧쯧. 밥 차려줄 테니 밥이나 먹어. 그리고 내일 아침 일찍 떠 나버려. 아무런 미련 남기지 말고 말야." 주인 여자는 오른쪽 편에 커튼이 드리워져 있던 곳을 밀치고 들어갔다. 달그락거리는 그릇 부딪는 소리와 함께 콧노래 소리가 들렸다. 오래지 않아 주인 여자가 커튼 너머에서 소리쳤다. "젊은 선생. 2 층에 올라가 다들 밥 먹으러 내려오라고 전해." 그러나 병욱은 그 말을 못 알아들었는지 꼼짝도 않았다. "아니, 여태 자리에 앉았으면 어떡해? 내 말 못 알아들었어? 2 층에 올라가 사람들을 데리고 내려오란 말야." 커튼을 걷으면서 주인 여자가 말했다. 그러나 병욱은 자리에서 일어설 기색이 아니었다. "젊은 사람이 가는귀가 먹었어? 딱도 하군." 주인 여자가 혀를 차며 말했고, 병욱은 여전히 테이블을 향해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알다가도 모를 속이군. ……. 밥 먹으러 내려와." 주인 여자는 병욱을 향해 혀를 차다 말고 직접 이층을 향해 소 리를 질렀다. "어서 내려와. 늦게 내려오면 저녁밥 없는 줄 알아. 젊은 선생 도 식탁에 가 앉아. 하루 민박집에서 밥 먹는 셈 쳐. 알겠어. 내 일 아침이면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나는 거야. 나들이 왔다가 집으 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 알겠지?"
[약속의 땅] 20. 몽정 후의 축축하게 젖은 병욱은 묵묵히 식탁으로 자리를 옮겼다. 쑥국에 푼 구수한 된 장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제야 어제 아침 이후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도둑처럼 허기가 찾아들었다. 허
겁지겁 수저를 손에 집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병욱은 수저를 원 래의 자리에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층계를 디디는 수런스런 발 자국 소리들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병욱은 그들과 다시금 눈길을 마주치는 것이 껄끄럽다는 생각 때문에 식탁 위의 수저를 향해 눈길을 내리깔았다. 수런거림이 멎었다. 그 때 누군가가 말했다. "새 식구가 들어온 모양이군요. 수인사나 합시다." 여선생들만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던 집에서 선이 굵은 사내 의 말소리가 들렸다. 병욱은 꿈쩍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자 기에게 말을 건넨 사람을 바라보았다. 식탁을 향해 앉아 있는 사 내는 둘이었다. 저녁 식사시간을 훨씬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병욱 에게 말을 건넨 사내는 머릿기름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반들거렸 다. 얼굴에도 기름기가 돌았다. 또 다른 사내는 얼굴은 다소 푸석 푸석했지만 표정만큼은 밝아 보였다. 낯선 사람은 두 사내만이 아니었다. 갓 스물을 넘겼음직한 아가씨도 한 명 끼어 있었다. 그 아가씨는 식사를 하러 내려왔음에도 불구하고 귀에는 워크맨의 이어폰이 꽂혀 있었다. 음악을 듣는 중인지 가끔씩 양쪽 어깨가 흔들거렸다. 그에 비해 세 명의 여교사는 잔뜩 부어오른 표정이 었다. "인사할 것 없어. 내일이면 떠날 사람이야." 주인 여자가 닭모가지를 향해 칼질을 내리치듯 잘라 말했다. "그래요? 그래도 만났으니 인사는 나누어야지. 홍재석입니다. 한전에서 근무하고 있지요. 고개 너머 변전소가 있답니다. 그곳을 관리하는 게 내 임무지요." 재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며 말했다. 병욱은 앉은자리 에서 사내가 내민 손을 마주잡을 수 없었기 때문에 엉거주춤 자 리에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재석과 악수를 했을 때 그 곁에 있던 사내도 손을 내밀었다. "김진영입니다. 산림청에서 파견 나왔습니다." 병욱은 진영과도 손을 맞잡았다. 진영의 손아구에는 강한 힘이 느껴졌다. 갓 스물을 넘겼음직한 여자는 이러한 일에는 전혀 관 심이 없다는 듯 여전히 어깨를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아마도 템 포가 빠른 음악을 듣고 있음에 분명했다. "인사할 필요 없다는 데도 그래." 주인 여자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밥이나 먹어. 국 식겠어."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두 사내는 밥을 입 속으로 우걱우걱 퍼 넣기 시작했고, 세 명의 여선생은 밥알을 헤아리는 듯 젓가락 으로 밥알을 깨작거렸다. 갓 스물을 넘겼음직한 여자는 경쾌한 손놀림으로 수저질을 했지만 여전히 좌우로 어깨 짓을 했다. 그 들의 동작은 기막힌 부조화를 연출하고 있었다. 병욱은 잠시동안 그들의 동작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시장기를 느꼈기 때문에 밥알 을 아작아작 씹어대기 시작했다. "아줌마, 물 주세요." 재석이 어느 틈에 식사를 마쳤는지 말했다. 거의 동시에 진영 도 식탁 위에 수저를 내려놓았다. "엄 형은 어떤 일을 하시죠?" 재석이 물었다. "내일 아침이면 떠날 사람이라는데 왜 그래?" 주인 여자가 팍팍한 목소리로 말했다. 병욱은 주인 여자의 얼
굴을 멀뚱멀뚱 바라보며 대꾸 없이 있었다. 그 사이 이어폰을 귀 에 꽂은 여자가 식탁에서 일어났고 세 명의 여선생과 거의 동시 에 자리를 떠났다. "아줌마, 괜히 짜증을 내시는 것 같아요. 엄 형은 아줌마를 찾 아온 손님인가요?" 재석이 병욱을 보며 말했다. "아, 네. 저는……." "젊은 선생. 공연히 엉뚱한 말 말고 떠날 마음가짐이나 해." 이번에는 주인 여자가 병욱을 향해 윽박지르며 말했다. "아줌마 표정 보니 일어서야겠어. 엄 형. 나중에 우리끼리 술이 나 한 잔 나눕시다. 내 방은 이층의 맨 끝방입니다. 생각나면 오 세요." 재석은 술잔을 입 속으로 털어 넣는 시늉을 하며 식당에서 나 갔다. 진영도 그 뒤를 따라 나갔다. "젊은 선생. 저 사람들과 어울릴 생각은 않는 게 좋아. 괜한 말 들이 내 집에서 오고가는 것을 원치 않으니까. 내 충고를 무시하 면 오늘 밤중이라도 이 집에서 쫓겨날 걸 각오해야 할 거야." 주인 여자가 오금을 박듯 말했다. "까닭이 있습니까?" "까닭을 굳이 알 필요는 없지. 살다 보면 엉뚱한 곳을 방문할 수도 있고, 예상하지 못한 일을 당하는 수도 있으니까." "……" "가만 있자. 오늘은 젊은 선생이 어디에서 자야 하지? 이층에 빈방이 남아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두 남자가 신경 쓰이고. 내 옆 방이 비어 있긴 하지만……." "……" "어쩔 수 없지. 이층의 빈방에서 자도록 해. 단,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말야. 난 쓸데없는 말들이 내 집에 서 오가는 것을 원하지 않아. 약속을 어기면 젊은 선생을 당장 쫓아내도록 하겠어. 오늘밤에 서울로 출발해야 하는 거야.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길을 말야. 알겠지?" 병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이층의 남자들과 나눌 말이 있 을 것 같지도 않았다. 주인 여자를 따라 이층으로 올라갔다. 천장에 매달린 알전구가 희미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복도에는 퀴퀴한 냄새가 배어져 있었 는데 아마도 나무바닥에서 삐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습기가 스 며들어 있는 것일까. 병욱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복도를 사이에 끼고 양편으로 다닥다닥 방들이 늘어져 있었다. 병욱은 복도 쪽 으로 돌출되어 있는 철제 손잡이를 눈어림했다. 대략 열네댓 개 는 됨직했다. 벌써 다들 잠자리에 든 것인지 스산함을 느낄 만큼 조용했다. " 방이 꽤 많군요." 병욱이 말했지만 주인 여자는 대거리 없이 병욱의 한 발쯤 앞 서 걸었다. 주인 여자가 멈춘 곳은 오른쪽 네 번째 방이었다. 주 인 여자가 손잡이를 돌렸다. 손잡이는 잠금 장치가 채워져 있지 않았는지 저항 없이 돌아갔다. 주인 여자가 벽을 더듬더듬했다. 틱 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는 벽에 연한 형광등 손잡이를 누른 소리 같았다. 이내 방안이 밝아졌다. "이 방에서 자도록 해. 이부자리에서 냄새가 날는지도 몰라. 오
래도록 아무도 안 썼거든. 습기가 많은 곳이라 곰팡이가 슬었을 거야. 바닥이 차긴 하겠지만 하룻밤쯤은 견딜만할 거야." 주인 여자가 왼편으로 약간 비켜섰다. 방안으로 들어가라는 몸 짓 같았다. 병욱은 보일락말락 목례를 하고 방으로 들어섰다. 복 도에서는 미처 깨닫지 못한 사실이었지만 천장이 매우 낮았다. 뜀박질을 하면 머리가 닿을 정도였다. 형광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의 명도는 적당했다. 출입문에서 바라보자면 오른쪽 구석진 곳 에 이부자리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방안에는 세간이라고는 없 었다. "민박집이 아니라 방갈로에 들른 기분이군요. 너무 조용해요." "난 시끄러운 건 질색이야. 곧바로 불 끄고 자." 주인 여자가 문을 닫았다. 이윽고 슬리퍼 끄는 소리가 멈추었 다. 풀벌레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는 산 속의 밤은 너무나 고즈 넉했다. 막막한 심정으로 서 있던 병욱은 불현듯 피곤함을 느꼈 다. 구석진 곳에 놓여져 있던 요를 방바닥에 깔고 그 위에 이불 을 놓았다. 옷을 벗어 벽에 박혀 있는 대못 위에 걸고, 형광등의 불을 끈 다음 이불 속으로 기어들었다. 주인 여자의 말처럼 바닥 은 냉랭했지만 견디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이틀 동안 이곳에 와서 겪었던 일들이 몽정 후의 축축하게 젖 어버린 속옷처럼 찜찜했지만 내일 아침 일찍 이곳을 떠나버리겠 다고 작정하고 나니 홀가분했다. 무거운 눈까풀이 까만 동자를 덮었다. 연수의 다리가 적당한 무게감으로 허벅다리를 누르는 것 처럼 포근했다.
[약속의 땅] 21. 숨겨진 카드를 펼쳐놓는 못난 놈. 진득하니 붙어 있으라고 했잖아. 사내가 그렇게 물러 빠져서야, 쯧쯧쯧…… 삼촌의 소두방 같이 우악스런 손바닥이 병욱의 가슴을 떼밀었 다. 병욱은 자빠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버팅겼다. 먼저 길을 떠나신 네 아버지를 뵐 면목이 서지 않는다. 삼촌은 숫제 가슴팍을 턱턱 쳤다. 서슬에 놀라 병욱은 눈을 떴 다. 낯선 사내 둘이 허연 이빨을 드러낸 채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 었다. "일어나세요. 한 잔 합시다." 사내 중의 하나가 무어라 지껄였지만 병욱은 그 말의 뜻을 이 해하지 못한 듯이 바닥에 드러누운 채 눈알만 데록데록 굴리고 있었다. "아직 초저녁인데 한 잔 하고 자요." 사내 중의 하나가 다시 말했다. 그제야 병욱은 굼뜨게 몸을 일 으켰다. 헐렁한 러닝 셔츠의 틈 사이로 건포도보다도 훨씬 적은, 말라붙은 젖꼭지가 빼짓이 흘러나와 있었다. 겸연쩍은 표정을 하 며 러닝 셔츠의 어깨선으로 젖가슴을 가렸다. "우리 방으로 갑시다. 술을 준비해 놓았어요." 아까부터 홀로 지껄이던 이는 자신을 재석이라고 소개한 사내
였다. "주인 아주머니가……" "지금쯤은 아마 정신없이 잠들었을 겁니다. 우리 방은 맨 끝방 이기 때문에 소리를 죽이면 알지도 못해요. 그렇잖아, 김 형?"" 여전히 재석이 말했고, 진영은 그 곁에서 웃음기를 머금고 있 을 뿐이었다. 우악스런 손의 힘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솔직히 자고 싶을 뿐입니다." 병욱이 떨떠름한 낯빛으로 말했다. 소두방 같은 삼촌의 손길이 가물가물했다. "예의상 사양한다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요. 여기 있는 김 형과 나는 하루의 마지막 일과를 정리하려는 것뿐이니까요. 우리 는 하루를 늘 그렇게 마감하죠. 그리고 우리끼리 나누는 얘깃거 리가 이젠 솔직히 바닥이 보이거든요. 엄 형은 서울에서 왔죠? 말투 때문에 알았죠. 서울 사람들 사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그 러니 한 형이 동석한다면 우리로서도 보람있는 자리가 될 겁니 다." 재석이 말했고 진영은 여전히 헤벌쭉하기만 했다. "저는……." 병욱은 두 사람의 호의가 부담스러웠다. 어쨌든 이 곳은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그 생각뿐이었다. "저는 지금 너무나 피곤합니다. 그래서 잠을 자고 싶습니다. 죄 송하지만 두 분은 제 방에서 나가주셨으면 합니다." 병욱은 애써 얼굴 가득 진심이다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거 참……" 재석은 잠시동안 생각에 골똘한 표정이었다. 이윽고 그가 말했 다. "그렇다면 타협점을 찾읍시다. 맥주를 딱 두 병만 마시는 겁니 다. 한 형은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아도 좋고 우리끼리 나누는 얘 기나 들어주세요. 그러면 되지 않겠습니까?" "전 너무나 피곤하기 때문에……" "천도 고등학교에 대해서 알고 싶지 않으세요?" 재석이 숨겨진 카드를 펼쳐놓는 도박사처럼 말했다. 병욱은 그 말에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내일 아침이면 어차피 떠나버릴 곳이었지만 내막이라도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야만 삼촌에게 둘러댈 변명거리를 만들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좋습니다. 하지만 전 지금 너무나 피곤하기 때문에 조금만 앉 았다가 제 방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좋도록 하세요." 재석이 진영을 쳐다보면서 득의만면한 웃음을 흘렸고 진영은 실쭉한 표정으로 재석을 마주보았다. 병욱은 이부자리에서 아랫 도리를 빼내 옷을 추슬러 입기 시작했다. 그 틈을 기다리지 못하 는 듯 재석이 말했다. "왼쪽 맨 끝방이에요. 옷 입고 오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약속의 땅] 22. 농장에 온 것이 아니라 병욱은 대못에 걸려 있던 와이셔츠를 손에 집었다. 고랑처럼 길게 주름이 가 있었다. 어제부터 줄곧 입고 있었던 것이다. 마뜩 하지 않았지만 몸에 껴입었다. 조금 전까지 욱대기던 모습과는 달리 병욱이 재석의 방으로 들 어갔을 때 그들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짐짓 무시하는 듯하기도 했다. 이곳에서의 일은 모두가 운남바둑 같았다. 병욱은 희미하게 입을 쩝쩝거렸다. 신문지가 펼쳐진 위에 맥주병과 종이컵 세 개, 과자 봉지가 뒹 굴고 있었다. 병욱은 빈 종이컵이 놓여진 곳 앞에 앉았다. "한 잔 하시죠." 재석이 종이컵을 내밀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재석이 따르는 술 잔을 받던 병욱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종이컵의 질감을 통해 전 해져오는 술의 온도가 뜨뜻미지근했기 때문이었다. 맥주는 찬 맛 에 마시는 법이었다. 병욱이 생각하는 맥주란 그랬다. "그러니까 홍 형은 언제 본사로 돌아가게 될지 전혀 예측을 할 수 없다는 말이지?" "글쎄, 그렇다니까. 이곳에 온 지도 벌써 이 년이 지났어. 그런 데도 본사에서는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어. 빌어먹을. 그러니까 난 끝장난 존재란 거지." 진영이 물었고 재석이 답했다. "본사에 문의를 해 보지 그래?" "물론 그랬지. 그랬더니 본사 인사부장이 뭐래는지 알아? 자기 도 알 수 없다는 거야. 무작정 기다려 보래. 이게 말이나 되는 소 리야? 염병할 노릇은 내가 왜 이 꼴이 된 건지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이야. 도대체 왜 나에게 미운 털이 박혀버린 게지?" "홍 형 일을 내가 속속들이 알 수는 없지만……." "없지만?" "……" "없지만, 없지만 뭐야?" "이유는 있지 않겠어?" "그 이유가 뭐냔 말야?" "그 이유는 나도 알 수 없지." "알지도 못하는 말을 왜 끄집어내는 거야?" 두 사람은 병욱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시시껄렁한 이야 기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병욱은 마뜩찮았다. 그러나 기왕에 자리 에 끼여든 이상 짜증을 낼 수도 없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겉돌기만 했다. "맥주는 말입니다, 냉장이 잘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냉장을 똥덩어리놈들은 히야시라고 한다죠? 아, 참. 똥덩어리라니 까 생소하시죠? 학생들 앞에서 즐겨 쓰는 표현인데 그만……. 거, 왜, 왜놈들 땅덩어리 모습을 보면 꼭 파편이 튀어 있는 것 같잖 습니까? 그게 말이죠……, 냉장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맥주 는 너무 텁텁한 느낌이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병욱은 짐짓 호기 있게 그들의 말허리를 자르고 끼여들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적대적인 눈빛을 한 채 병욱을 노려보았다. 그 러나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아 재석은 복덕방 주인 같은 표정을 띤 채 병욱에게 말했다.
"그렇죠? 그러나 우리도 어쩔 수가 없어요. 우리 방에는 냉장 고도 없고, 있어도 쓸 수가 없어요. 보세요. 콘센트가 없잖아요." "그렇군요." 병욱은 그제야 사방의 벽면을 느릿느릿 둘러보면서 말했다. "그럼 TV 같은 것은 어떻게 씁니까?" 병욱이 말했다. 그러자 재석이 껄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재석 을 바라보고 있던 진영도 샐쭉샐쭉 웃었다. 한참 동안 낄낄거리 며 웃고 있던 재석이 말했다. "이 곳에 전근 와서 가장 먼저 배운 게 뭔지 아세요?" 재석은 퀴즈 문제를 내고서 정답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병욱의 얼굴만 빤히 들여다보았다. 병욱은 모르겠다는 시늉으로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포기란 걸 배웠지요. 정치가들이 마음을 비웠다는 소리는 모 두가 흰소리예요. 콘센트가 없는 곳에서 살아보지 못한 사람은 진정으로 마음을 비우지 못해요. 눈물에 밥을 말아먹어 보지 못 한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격언처럼 말예요. 엄 형은 그렇 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로서는 잘 알 수가 없는 얘기군요." 병욱은 수학 공식에 대한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한 학생 처럼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엄 형도 곧 배우게 될 겁니다." 재석은 판결을 내리는 재판관처럼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고, 그 곁에서 진영은 술잔만 홀짝거리고 있었다. "아뇨. 전 내일 아침이면 이 곳을 떠날 것입니다." 병욱이 말했다. "그래요? 흐-!" 재석이 추임새를 넣듯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진영은 여전히 술잔만 홀짝거렸다. 그러나 진영은 술을 많이 마시는 것 같지는 않았다. 병욱의 시신경에 포착된 진영의울대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재석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아뇨. 전 분명히 내일 아침이면 이 곳을 떠날 것입니다." "농장을 찾아왔던 사람이 떠났던 일은 없었는데……. 김 형. 그 렇지 않아?" 진영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 병욱이 말했다. "전 농장에 온 것이 아니라 학교 선생으로 부임한 거거든요."
[약속의 땅] 23. 사이비 종교인가요? "그게 그거지. 그럼 엄 형은 이거 아뇨?" 재석이 오른쪽 검지 손가락을 머리로 가져가 조그맣게 원을 그 렸다. 병욱은 멀뚱멀뚱한 기색으로 그러한 재석을 바라보기만 했 다.
"하! 그렇군먼. 그런데 어떻게 천도고등학교에 올 수 있었죠? 학교의 선생들은 모두가 환자라는 말이 자자하던데……." "환자라뇨?" "하!" 재석은 이상한 소리를 연발하면서 입을 헤벌쭉 벌렸다. 턱이 아래를 향해 툭 떨어진 채 전면부를 향해 돌출된 듯한 그 모습은 우리에 갇힌 오랑우탄을 연상시켰다. 곁에서 진영이 힐쭉샐쭉 웃 었다. "아, 네.……" 병욱은 한참만에야 가리사니를 잡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재석은 입을 다물었고, 진영은 샐쭉한 웃음을 멈추었다. "엄 형은 어떻게 학교에 올 수 있었죠? 환자도 아니면서……?" "삼촌이……." "……?" 병욱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말을 멈추었다. 주변 사람들이 다칠 수도 있다는 교감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일개 시골 학교의 교감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 부탁을 했었어요. 시골 학교에서 근무 하고 싶다고 말입니다." "그 사람이 삼촌이었군요. 그렇죠? 삼촌은 아마도 대단히 높은 지위에 있는 모양입니다. 환자 아닌 사람을 이곳에서 근무하게 할 수 있을 정도라면. 어쩌면 재력가인 지도 모르겠지만." "소개한 사람은 삼촌이 아니고, 삼촌이 알고 지내는 사람 의……." 병욱은 변명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그러면서 생각에 빠져들었 다. 삼촌은 재력가는 아니었다. 재석이 말하는 고위직에는 해당하 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가 행정부서의 고위직을 의미하는 것인지 농장의 고위직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짐작할 도리가 없었 다. 어렴풋하게나마 이곳의 모든 일은 농장과 관련이 되어 있다 는 짐작만이 분명했다. "농장은 어떤 곳이죠?" 병욱이 물었다. "하! 농장은 농장이죠." 재석은 입 속에서 계속하여 야릇한 소리를 흘리고 있었기 때문 에 어쩌면 자신을 희롱하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동안 병욱은 해야 했다. 그러나 짐짓 심각한 표정을 한 채 병욱은 다 시 물었다. "그러니까, 그게……." 갑자기 재석이 검지 손가락을 치켜세워 병욱의 눈앞에서 멈추 었다. 그러한 재석의 눈꼬리가 곤두서는 듯했다. "우리도 알지 못해요. 환자 집단일 것 같다, 그 정도밖에는 몰 라요." "그러니까, 그게 어떤 성격의 환자들이?" 그 때 복도에서 자박거리는 들렸고, 재석은 아무 말도 하지 말 라는 듯한 시늉을 했다. 잠시 후에 소리는 그쳤다. 재석은 여전히 방밖을 향해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사이비 종교 단체인가요?" 병욱이 말했을 때 다시 복도에서 자박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재석과 진영은 낭패가 났다는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소리는 다시 멈추었다. 방문에 귀를 바싹 들이밀고 있던 재석이 말했다. "엄 형은 빨리 엄 형의 방으로 돌아가요. 빨리." "전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만." 병욱은 그들의 갑작스런 호들갑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선 뜻 자리를 털고 일어서고 싶지는 않았다. "이야기는 내일 해요. 빨리 방으로 돌아가요." 이번에는 진영이 병욱의 겨드랑이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억지 로 몸을 일으켰다. 엉거주춤 일어선 병욱을 재석과 진영이 한꺼 번에 방밖으로 밀어냈다. 문 밖으로 밀려난 병욱은 황당한 표정 을 지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병욱의 표정과는 아랑곳없이 서둘 러 방문을 닫아걸었다. 병욱은 층계참에서 올라선 곳에서부터 오른쪽 네 번째에 있는 방에 들어갔다. 이부자리는 조금 아까 자신이 몸을 뺀 상태 그대 로였고, 방바닥은 여전히 눅지근했다. 담배의 새 갑을뜯었다. 한 개비를 뽑아 물고 불을 붙여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병욱은 내심 바깥의 일에 신경이 쓰였다. 재석 과 진영이 서둘러 문 밖으로 밀어낸 것으로 보아 어떤 일이 생겼 음에 분명하다고 짐작했다. 그러나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문 밖 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병욱은 서서히 긴장이 이완되었다. 어느 틈에 까무룩히 잠이 들었다.
[약속의 땅] 24. 빌어먹을 6. 2 월 27 일, 금요일. 그것은 낯선 감각이었다. 가칠가칠한 감촉. 불쾌하지는 않았다. 병욱은 방바닥에 등을 붙이고 눈을 감은 채 손등에 전달되는 낯 선 감각을 즐기고 있었다. 가슴에 희미하게 전해지는 무게감, 병 욱은 천천히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가장자리에 하얀 천으로 홑청이 입혀진 이불이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가칠가칠한 감촉은 이불 홑청에서 전달된 것이었다.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 다. 어제 저녁 입고 있었던 입성 그대로였다. 영창을 통해 들어온 빛의 입자를 타고 미세한 먼지가 나폴거렸 다. 시계는 여전히 손목에 걸려 있었다. 열한 시 이십오 분. 파블 로프의 개처럼 몸이 꿈틀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병욱은 고개를 갸웃했다. 좁은 영창을 통해 들어온 빛살의 두께가 아직 얇기 때 문이었다. 얼마간의 시각이 흐른 후에야 시계가 탈이 났다는 사 실을 떠올렸다. 몇 시쯤 되었을까. 이상하게도 몸은 개운했고, 기 분은 유쾌했다. 엉뚱하게도 간밤에는 숙면에 들었던 것일까. 세면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복도에 나섰다. 하지만 이층의 어 느 구석에 세면장이 붙어 있는지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똑 같 은 크기의 문짝과 똑 같은 크기의 철제 손잡이만이 중앙의 복도 를 향하여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물소리가 새나오는 곳이 있는
지 귀를 쫑긋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일층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층계를 몇 발짝 내리닫던 병욱은 잽싸게 몸을 돌려 조금 전까지 몸을 눕히고 있었던 방으로 돌아갔다. 신병 훈련소의 훈병처럼 절도 있게 이불을 개킨 후 병욱은 다시금 일층으로 내려갔다. 집 안은 목탁 소리마저 끊어진 암자처럼 조용했다. 고즈넉하다는 느 낌마저 들 지경이었다. 잠깐동안 우두망찰 서 있던 병욱은 누렇 게 변색된 종이 위에 화장실이라고 적혀 있는 곳을 가볍게 두드 렸다. 반응이 없었다. 안으로 들어섰다. 화장실에서 병욱이 한 첫 번째 일은 이틀 동안이나 뱉어내지 못한 배설물을 배설하는 일이 었다. 다음으로 그는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얼굴을 훔쳤다. 수염 자국이 꺼칠했지만 일회용 면도기 같은 것은 찾을 수가 없었다. 차의트렁크에 세면 도구가 담겨 있기는 했지만 애써 찾으려 갈 염은 생기지 않았다. 수건으로 물기가 묻은 얼굴을 가볍게 토닥 인 후 거실로 나왔다. 아직도 세상은 너무나 조용했다. 어른 몸뚱아리만큼이나 큼지막한 벽시계에 달린 시계 불알이 움직이지 않았다. 어쨌든 이곳은 모든 게 뒤죽박죽이야, 병욱의 얼굴에 씁쓰레한 웃음기가 머물다 사라졌다. 병욱은 소파에 앉은 채 생각에 골똘했다. 주인 여자에게 인사 치레는 하고 떠나야 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서울로 돌아가는 길을 확인해야만 했다. 주인 여자는 잠의 늪에 흠뻑 빠져든 모양 인지 종내 기척이 없었다. 두 개비의 담배를 필터가 타 들어갈 만큼 태웠을 때까지도 집안에 사람의 그림자는 얼른거리지 않았 다. 병욱의 허벅다리에 경련이 일었다. 팍팍한 허벅지를 가볍게 토닥였다. 다시 담배를 입에 물고 연기를 내뿜었다. 연기는 허공으로 가 뭇없이 사라져갔다. 그 때 현관 쪽에서 기척이 났다. 주인 여자의 방과 이층을 향해서만 청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병욱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소파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나쁜 짓을 하다 들 켜버린 초등학생 같은 표정이었다. "젊은 선생. 아직도 안 갔어?" 현관에서 들어오던 사람은 뜻밖에도 주인 여자였다. "아, 네. 인사나 드리고 갈려고." 병욱은 반쯤 허리를 수그리며 말했다. "쯧쯧. 젊은 사람이 그렇게 굼떠서야. 도대체 언제 일어난 거 야? 혹시 지금 일어난 것 아냐?" "……" "쯧쯧. 점심 차릴게. 밥이나 먹고 출발해." "점심이라뇨?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습니까?" "산 속이라 햇살이 늦게 들고 일찍 떨어지지. 그럼 여태 아침 나절인 줄 알았던 거야?" "네." "하긴 그럴 수도 있지. 특히 이 집은 주변에 수풀이 우거져 있 기 때문에 시간 개념을 잃어버릴 수도 있지. 밥 차릴 테니까 조 금만 기다려. 아니, 밥도 먹지 말고 바로 출발해. 교감이 들이닥 치면 괜히 시끄러울 테니까 말야." "……" "왜? 설마 학교에 남겠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네. 서울로 돌아갈 겁니다."
"잘 생각했어. 여긴 젊은 선생 같은 사람이 있을 곳이 아냐." "질문을 드려도 좋겠습니까?" "난 해줄 말이 없어. 속히 떠나기나 해." "네. 알겠습니다." 병욱은 주인 여자에게 고개를 수그린 다음 옷매무새를 추스르 고 신발을 꿰신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관문을 밀쳤다. 주인 여자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삼림이 집을 포위하듯 둘 러싸고 있었다. 차 한 대가 겨우 들락거릴 정도로 닦여진 자갈길 위의 하늘 외에는 빛 한 줌 들어올 틈이 없었다. 영창으로 들어 온 빛살도 숨골처럼 뚫린 자갈길의 하늘 위에서 쏟아져 들어왔음 에 분명했다. 병욱은 운전석에 올라앉았다. 그리고 400Km 에 육박하는 먼길 의 여정을 출발하기 위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막 시동을 걸려 고 할 때였다. 저만치 허연 먼지를 뚫고 지프 한 대가 하숙집을 향해서 돌진해오고 있었다. 분명 그랬다. 돌진이라고 표현해야 옳 았다. 교감일 것이라고 병욱은 단정지었다. 빌어먹을. 병욱은 주먹을 말아쥔 채 운전대를 쳤다.
[약속의 땅] 25. 누나가 어떻게 해서 돌진해오던 지프는 병욱의 승용차 맞은 편에서 멈추었다. 아니 나 다를까, 지프에서 내린 사람은 교감이었다. 교감은 병욱이 타 고 있는 차의 운전석 차창을 두드렸다. "엄 선생님. 외출하려던 길입니까? 연락도 없이 출근을 하지 않아 걱정이 되던 참입니다." 병욱은 운전대 위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턱을 괸 채 교감을 바 라보았다. 출근이라고? 손바닥 가득 묻어있는, 잘 씻기지 않는 페 인트 자국 같은 끈적끈적함이 역겨움을 불러일으켰다.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괜찮다면 제가 길 안내를 하도록 하겠 습니다." 교감은 다짜고짜 조수석에 올라앉았다. 병욱은 그러한 교감을 외면해 버렸다. "서울로 출발하려던 참입니다." "그 이야기는 간밤에 끝난 것 아닙니까? 여선생들이 엄 선생님 을 불쾌하게 했다면 기분 푸세요. 오전에 징계 위원회에 회부했 습니다. 그 바람에 제가 여기 오는 게 늦어진 겁니다. 그리고 교 무실 안에 엄 선생님의 자리를 마련하라고 지시해 두었습니다. 이제 엄 선생님은 기분 좋게 출근만 하시면 되는 겁니다." "자리 때문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제 결심은 확고합니다. 이 곳은 제가 있을 곳이 못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천도 고등학교는 엄 선생님을 환영합니다."
"전 이미 각종의 불쾌한 경험들에 대하여 교감 선생님께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시정되지 않았죠. 이제서야 주 변적인 일만이 처리되었으니 남으라고 말씀하시는 건 때가 늦은 것 같군요." "그래요. 책임을 통감합니다. 모든 건 제가 사과드릴 테니 마음 을 바꾸세요. 사흘 후면 개학입니다. 엄 선생이 다시 서울로 돌아 가 버리면 우리 학교는 어쩝니까?" "도대체 절 붙잡아두려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전 믿음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학교에 딱히 선생님이 더 필요한 것도 아닌 것 같고.……" "저 집의 늙은 노파가 뭐라고 조잘거렸군요. 그렇죠? 진작에 저 놈의 하숙집을 폐쇄했어야 하는데……. 후우, 그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고민이죠." "아닙니다. 아줌마는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더군요. 온전히 저 의 자의에 의한 판단이란 걸 분명히 밝혀 둡니다." "그럴 수도 있겠죠." 교감은 말은 병욱에게 했지만 눈길은 하숙집에 붙박이 되어 있 었다. 한동안 좁은 승용차 안은 침묵으로 가득 채워졌다. 갑갑한 분위기를 더는 참아내지 못하겠다는 듯 병욱이 말했다. "제가 천도 고등학교에 남을 수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를 밝혀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는 곧장 서울로 출발하겠습니다." "어저께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많은 사람이 다칠 수도 있다 고 말입니다." "누가 다친다는 말씀입니까?" "우선 엄 선생이죠. 당장 실업자가 되는 것 아닙니까? IMF 시 대에 실업자를 면하는 게 쉽지는 않을 텐데요." "……" "그리고 삼촌이 선거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삼촌도 농장과 관계가 있습니까?" "허-. 그것만은……." "'또 있습니까?" "그 이상은 밝히기가 곤란하군요. 그러나 엄 선생을 추천한 삼 촌이 다치게 된다는 데도 엄 선생의 고집만 내세운다는 건 엄 선 생이 그만큼 에고이스트란 말이겠죠?" 병욱의 콧구멍에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삼촌은 결코 자기 때문에 쓰러질 만큼 나약해 보이지는 않았다. "별로 설득력이 없군요. 전 떠나야겠습니다." "그래요?" "……"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죠. 우리는 엄 선생님에 대한 개인 파 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속에는 누나의 일도 들어있죠. 몸도 가 누지 못하는 누나 말입니다. 누나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 죠?" "그게 어쨌다는 거죠? 지금 협박하시는 겁니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는 다만 엄 선생님에게 도움이 되고 싶을 뿐입니다. 원하신다면 어른께서 엄 선생의 누나를 치료해 드릴 수도 있으니까요." "치료를 해준다고요?" "그렇습니다. 제가 특별히 어른께 간청할 수도 있습니다."
[약속의 땅] 26. 통화를 끝낸 후 7. "잘 생각했다. 낮에 교감이란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더구나. 교 감은 네가 성실해 보인다고 말했어. 다행이다. 걱정했는데." 병욱은 재석과 진영을 따라 들어간 술집의 카운터에서 삼촌에 게 전화를 걸었다. 그들은 그곳을 카페라고 불렀으며 주변에서 시외 전화를 할 수 있는 곳은 그곳뿐이라고 했다. 스피커에선 김수희의 노래가 흐느적거리며 흘러나오고 있었다. 코르덴 칠을 입힌 것 같은, 거무죽죽하고 습기가 배어있는 듯 축 축한 마루 바닥에 깔리던 노래 소리가 한 차례 휘감기는가 하더 니 60 촉 알전구를 향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솟구쳤다. "지원금이 증액될 게다. 그러면 학교에서도 널 무시하진 못할 거야." 테이블 사이에서 푸르께한 작업복 상의를 걸친 사내가 뱀의 혓 바닥보다도 짙붉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를 껴안고 풍뎅이처럼 제 자리맴을 하고 있었다. 여자는 사내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 었지만 도드라진 엉덩이 때문에 곰이 고목의 그루터기를 껴안은 채 발톱을 세우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병욱의 입술이 바싹 타들어 갔다. 혓 바닥으로 입술에 물기를 적신 후 병욱이 전화기를 입에 대고 말 했다. "삼촌, 서울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스피커에선 여전히 김수희의 노래가 흘러나왔지만 템포가 점점 빨라졌다. 제법 깨끼춤의 흉내를 내어도 될 것 같았다. 블루스 음 악은 멈추었지만 여전히 두 사람은 바싹 밀착한 채 몸을 비볐다. 애초에 박자 따위에는 안중에도 없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못난 놈. 개구리도 멀리 뛰기 위해서는 몸을 납짝 웅크리는 법이다. 넌 참는 법을 배워야 해." "제가 지금 서울로 돌아가면 삼촌께도 영향이 미치는 겁니까?" "그건 무슨 소리냐?" "교감 선생님의 말이 제가 학교를 떠나면 삼촌께 영향이 미칠 수도 있다고……." "진의를 모르겠구나. 무슨 뜻이지?" 60 촉 알전구의 가는 필라멘트로 지탱하던 실내가 갑자기 어둑 해졌다. 흐느적거리던 음악도 멈추었다. 여자가 어둠 속에서 앙칼 진 목소리를 내질렀다. 왜 이래? 여자의 소리에 섞여 무엇인가가 쿵하는 소리를 내며 나자빠지 는 소리가 들렸다. 병욱은 황급하게 송화기를 손바닥으로 막았다. 잠시 침묵. 삼촌이 말했다. "거기 어디냐?"
"전화할 곳을 찾느라고……." "…… 휴대폰은 어디에 쓰는 거냐? 못난 놈. 촌구석에까지 기 어들어 가 기껏 여자집 출입이냐? 내가 부를 때까지 그 곳에 눌 러있어." 전화는 툭 끊겨버렸다. 병욱은 소리난 곳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어둠에 익숙하지 않은 동자는 소리의 정체를 쉬 식별하지 못했 다. 주머니 속을 더듬어 휴대폰을만지작거렸다.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지역이란 걸 말할 기회도 없이 전화는 끊겨져버린 것이다.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하더니 희뿌염한 빛이 피 어올랐다. 펑퍼짐한 엉덩이를 가진 여자가 촛불을 손에 들고 말 했다. "씨팔, 또 지랄이네. 한전 놈팡이는 세금만 축내고 놀고먹는 거 야?" 여자가 밝힌 촛불 앞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일 복은 더럽게 많군. 오토바이 밖에 있지?" 구석진 곳에서 홀로 술을 홀짝이던 재석이 소리쳤다. "잠시만 기다려. 총알같이 손보고 올 테니까." 재석이 문짝을 밀치는 소리가 났고 곧이어 요란한 오토바이 소 리가 들려왔다. "씨팔, 산동네 아니랄까봐." 걸쭉한 욕설을 뱉으며 마담이 몸을 움직였다. 흔들리는 마담의 몸집을 따라 그림자가 벽면에서 춤을 추었다. 그 모습은 커다란 보자기를 몸 가득 뒤집어쓴 채 귀신 놀이를 즐기는 어린애 몸집 마냥 우스꽝스러웠다. 그러나 병욱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 려 어둠에 감추어진 그의 얼굴은 잔뜩 부어 올라있었다. "선생님, 이리 와서 한 잔 하세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진영과 마주 앉은 마담이 소리쳤다. "한 잔 하자니까요." 마담은 거푸 소리질렀다. 그러나 병욱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퉁퉁 부은 얼굴이었다. "하긴, 선생님들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데……, 나 같은 사람과 어울려 술 마시려 하겠어. 김 씨, 나 잔 비었어." 혼자서 유리컵에 담긴 맥주를 홀랑 비운 마담이 진영에게 잔을 내밀며 말했다. "저 사람 정말 천도 고등하교 선생 맞아? 그 학교 선생들은 헐 떡 벗겨 논 계집의 몸도 쳐다보지 않는다면서? 그 소문 맞아?" 마담이 말했고 진영이 낄낄거렸다. 병욱은 삼촌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고 싶었지만 어둠 속에서는 전화기의 번호판이 구분되지 않았다. 촛불은 테이 블 위에만 밝혀져 있었다. 병욱은 마담과 진영이 앉아있는 테이 블을 향해 걸었다. "한 잔 하실래요?" 테이블 근처에 갔을 때, 마담이 병욱에게 빈 잔을 내밀며 말했 다. 바람구멍이 있는지 촛불이 심하게 흔들렸고, 마담의 얼굴에 기묘한 음영을 만들었다. "술 마실 줄 몰라요? 어머. 그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다. 김 씨 아저씨. 그 소문 정말 맞아요?" 마담의 목소리가 사성점을 찍듯 높낮이를 탔다. 재미있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진영은 계속해서 킬킬거리는 소리를 냈다. "잠시 촛불을 빌려가야겠습니다." "똥줄이 당기는 걸 보니 애인 전화인 모양이지?" 병욱은 그 말에는 대꾸 없이 전화기를 향해 걸었다. 그리고 다 이얼을 꾹꾹 눌렀다. 통화 중이었다. 잠시 휴지기를 가진 후 다시 다이얼을 눌렀다. 아직도 통화 중이었다. 몇 번이나 그 일이 반복 되었다. 뭔가 급하게 걸려온 전화가 있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삼 촌이 일부러 전화를 내려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불쑥 들었 다. 잠시 후에 다시 전화를 하리라 생각하며 병욱은 사람들이 앉 아있는 테이블을 향해 갔다. "그 학교 선생들은 정말로 술 못해?" 마담이 이죽거렸다. "한 잔 주십시오." 병욱은 가만히 있으면 새장 속의 새처럼 사람들의 놀림감이 될 것 같았기 때문에 마담이 내민 잔을 받으며 말했다. "어머, 술 드실 줄 아세요?" 마담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리듬을 탔다. 병욱은 마담의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맥주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소리 나게 빈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기세에 놀랬는지 마담이 말문을 닫았 다. "통화는 했어요?" 진영이 물었다. 그러나 병욱은 잔뜩 인상을 찡그리고 있을 뿐 말이 없었다. 병욱은 당신 때문에 일이 엉클어졌어. 라고 말하며 진영의 멱 살을 잡고 싶었다. 그러나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통화는 가능해질 것이고, 그러면 삼촌에게 변명을 하면 될 일이었다. 마담이 채워준 잔을 또 다시 한달음에 들이켰다. 갈증 난 코끼리처럼 연거푸 술을 마셨다. 그럼에도 속이 허했다. 마담 은 어둠 속을 짚어 몇 번이나 새 병을 가져와야 했다. 사이사이 마담은 진영과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홍 기사 그 양반 사이비 기사 아냐?"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불이 들어오지 않자 마담이 짜증기가 잔 뜩 묻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이비, 사이비, 그 소리는제발 하지 말아요. 그러잖아도 이 상한 종교 탓에 등골이 오싹해질 때가 많건만." 진영이 볼멘 소리를 했다. "하긴……" 마담이 병욱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진영이 마담의 눈동작을 흉 내내며 낄낄댔다. 마담과 진영은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주고받고 있었고, 병욱은 내내 우울했다. 동료 교사들은 그를 백안시했고, 바깥의 사람들은 이단으로 여기고 있었다. 실수로 진흙탕에 빠진 사람더러 저 병 신, 하고 손가락질을 하는 것만 같았다. 어슴푸레한 촛불 밑에서 손목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열한 시 이십오 분이었다. 벌써, 아니 아직도 열한 시 이십오 분이었다. 이곳에 들어온 이후 지구의 자 전과 공전이 멈추어 버린 것일까. 손목 시계는 언제나 같은 시간 만을 가리켰다. 병욱은 어떤 생각에 골똘했다. 진영과 마담, 두 사람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병욱의 편집광적 몰입을 막을 수는 없
었다. 병욱이 그 생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실내에 불이 다시 들어오고 끊겼던 김수희의 흐느적거리는 음성이 귓불을 간 질였기 때문이었다. 산 속의 고요를 깨뜨리며 점령군의 진군 나팔 소리처럼 요란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그 소리는 병욱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멎 었다. 이내 출입문이 열렸고 재석이 들어왔다. "홍길동의 축지법을 배워야겠어." 재석이 마담의 옆자리에 앉으면서 거친 숨을 뿜으며 말했다. 자리는 돌연 신새벽의 활어 거래장처럼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잔이 돌았고, 말의 꼬리가 꼬리를 덥썩덥썩 물었다. "엄 형은 전화 통화했어요?" 재석이 전화 통화 일을 말했을 때 그제야병욱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기를 붙잡았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숙모였 다. 병욱은 삼촌을 바꿔달라고 말했다. 숙모는 삼촌이 이미 잠들 었으며, 내일 아침 일찍 중요한 일을 처리하러 나가야 하기 때문 에 깨울 수가 없다고 말했다. 병욱은 꼭 통화를 해야 할 일이 있 으니 삼촌을 깨워달라고 했다. 숙모는 막무가내였다. 몇 차례 언 성을 높이기도 했지만 끝내 숙모를 설득할 수가 없었다. 병욱은 술자리에 돌아와 거듭 잔을 비웠다.
[약속의 땅] 27. 이방인을 채용할 수밖에 8. 2 월 28 일 토요일. 병욱은 여선생 세 명과 함께 학교를 향해 출발했다. 개학을 이 틀 앞두고 비상 교무 회의가 있다고 했다. 깔깔한 혓바닥과 지끈 지끈한 목덜미 때문에 병욱은 고통스러웠다. 교무 회의가 있다는 사실을 알린 사람은 상담 선생이었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파블로프의 개처럼 몸을 일으켰고, 대충 옷을 추 슬러 입고 문을 열었을 때 상담 선생이 늦었어요, 학교에 가야 해요, 라고 말했던 것이다. 운전대를 움켜쥔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져 나왔다. 어쩌면 알코 올인지도 모르겠다고 병욱은 생각했다. 커브 길을 돌아서면 또 다른 커브길이 가로막았다. 그 때문에 신경이 곤두섰고, 그 때마 다 토사물이 울컥하고 뿜어져 나올 것만 같았다. 병욱의 눈썹이 송충이가 기어가듯 여러 차례 꿈틀댔다. 간밤의 일이 당최 기억나지 않았다. 숙모와 전화 통화를 한 지점에서 모 든 기억은 멎어 있었다. 아니, 세상의 모든 움직임이 멎은 듯했 다. 가슴이 갑갑했다. 어떤 말을 주고받았을까? 서울로 돌아간다 고 했을까. 아니면 최선을 다해 보겠다고 했을까. 그 때 다시 토악질의 기미를 느꼈기 때문에 병욱은 급브레이크 를 밟아야 했다. 그리고는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욱욱 하는 소 리와 동시에 속엣것이 뿜어져 나왔다. 누군가가 등을 토닥였다.
등을 돌려 올려다보았을 때 박 선생이라 불리던 여자가 등을 두 드리고 있었다. "술을 많이 하셨나 봐요." 걱정스런 낯빛이었다. 다시금 속에서 치받아 올라오는 기운 때 문에 병욱은 아무런 대꾸를 할 수 없었다. 두어 번이나 더 속엣 것을 토해내고서야 속은 진정되는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고맙습니다." 병욱은 진정으로 고맙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 곳에 내려온 후 처음으로 사람 대접을 받은 것 같았다. "괜찮겠어요?" 박 선생이 다시 말했다. 병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 선생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아직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것인지 정갈하 게 개켜져 있었다. 병욱이 겸연쩍은 낯빛으로 입가를 닦는 것을 보면서 박 선생은 먼저 차에 올랐다. 시금한 내음이 입 속에 가득했다. 하지만 입을 헹궈낼 방법이 없었다. 욕지거리를 뱉으며 차에 올랐다. 옆자리에 앉은 상담 선 생은 코를 막으며 고개를 돌렸다. 병욱은 아무 말 없이 기어를 변속했다. 학교에 도착한 병욱은 세면실에 들러 입을 휑궈낸 후 교무실에 갔다. 이미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병욱은 아직껏 자기의 지정 자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소파에 가 앉아야 했다. "에, 모든 선생님들이 오신 듯하니 교무 회의를 시작하겠습니 다." 교감은 마치 병욱을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듯 병욱이 소파에 앉자마자 교무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새 학기부터 우리 학교에서 근무하게 될 선생님 한 분을 소개 하겠습니다. 엄 선생님!" 숙취 탓에 잔뜩 인상을 구기고 있던 병욱은 자신을 부르는 소 리에 화들짝 놀라며 교감을 바라보았다. "잠시 일어나세요." 교감이 손짓까지 하며 말했고, 병욱은 고개를 수그린 채 자리 에서 일어섰다. 교무실 마루 바닥이 파도에 흔들리는 조각배처럼 심하게 요동쳤다. "국어 과목을 담당할 엄병욱 선생입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환 영해 주시기 바랍니다." 교감이 말했다. 그러나 병욱은 돌발 사태를 당한 운전자처럼 얼떨떨했다. 어제 밤 어떤 결정을 내렸던 것인가에만 촉각이 곤 두섰다. "엄 선생님, 인사 말씀이라도 하시는 게……" 교감이 채근했다. 우두망찰 서 있던 병욱이 이윽고 어떤 결정 을 내린 듯 겨우 입을 달싹이려 했을 때 소리가 터져나왔다. "저 사람은 우리 가족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소리는 출입문쪽에서 들렸다. 병욱은 소리난 곳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제, 자리 때문에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교무실 첫 번째 교무실 출입문쪽 첫 번째 책상의 주인 이었다. "우리는 가족주의로 뭉친 사람들입니다. 낯선 사람과 함께 근 무할 수는 없습니다." "결정은 학교 당국에서 합니다."
교감은 음성을 잔뜩 낮춘,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칙을 깰 수는 없습니다." 교무실 출입문쪽 첫 번째 책상의 주인의 목소리에도 힘이 들어 있었다. "원칙 역시 학교 당국에서 결정할 문젭니다. 선생님들은 학교 당국의 방침에 부응하는 행동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시겠어 요?" "교무실 안에는 저 사람이 앉을 자리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교장 선생님께서도 알고 계십니까?" 멀리에서 보기에도 교감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듯했다. 교감 은 한참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이윽고 교감이 말했다. "물론입니다. 저는 교장 선생님을 존경하고 있고, 따라서 교장 선생님의 견해와 배치되는 결정은 절대 내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싶습니다." 출입문쪽에 앉은 선생 역시 물러설 기세가 아니었다. 교감은 또 다시 말이 없었다. 병욱은 멀뚱히 선 채 그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오랜 후에 교감이 말했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바쁘십니다. 그리고 행정적인 절차는 저에 게 전권 위임한 상태입니다. 더 이상 의혹을 갖지 않기를 요구하 면서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그렇더라도 이방인을 채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해명해 주십 시오." 교무실 출입문쪽 첫 번째 책상의 주인은 여전히 교감의 말꼬리 를 잡고 늘어졌다. 병욱은 자신을 놓고 벌어지는 공방에 어리둥 절한 표정으로 교무실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두 사람의 공방 과는 달리 다른 선생들은 태평한 표정들이었다. 아니, 될 대로 되라 하는 식의 자포자기 같기도 했다. 두 사람은 그 후에도 오 랜 시간동안 공방을 벌였다.
[약속의 땅] 28. 박 선생을 나꾸어 보았다. "엄 선생님은 자리에 앉으세요." 잊고 있었던 일을 떠올리기라도 한 듯 교감이 말해고, 병욱은 묵묵히 자리에 앉았다. 그저 황당한 심정일 뿐이었다. 그러나 병 욱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어제 밤에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가만 궁금했다. 교무회의는 지리멸렬하게 끝이 났다. 병욱의 일에 대해서 악머 구리 끓듯 악을 써대던 사람과의 다툼에 지쳤는지 교감이 일방적 으로 회의의 종료를 알렸던 것이다. 몇몇이 교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런 얼마 후 교감이 손짓으로 병욱을 불렀다. 교감은 교무실에서 나갔고 병욱은 그 뒤를 따라 갔다. 교감을 뒤따라간 곳은 양호실이었다. 담배를 붙여 문 교감 이 병욱에게도 담배를 내밀었다. 병욱은 사양했다.
"어제는 과음을 하셨다고요?" 사람 좋은 낯빛을 띠며 교감이 말했다. 그러나 병욱은 처삼촌 의 묏자리를 바라보듯 그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후우! 회의 중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괘념치 마세요. 학교를 경영하자니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그래도 엄 선생님이 우리 학 교에 부임하신 게 저로서는 엄청 큰 힘이 된다는 사실만 알아주 시면 좋겠습니다." 병욱의 낯빛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가리사니를 잡을 수 없다 는 표정이었다. "삼촌과 통화할 일이 있으면 고맙다고 하더라는 말씀을 꼭 전 해주시기 바랍니다." "……?" "사실, 엄 선생님에게만 얘기하는 것이지만, 조그만 학교라도 돈쓸 일이 오죽 많아야지요. 모르는 사람들은 학교만 세워두면 저절로 학교가 굴러가는 줄 알지만 천만의 만만의 말씀." "삼촌도 신도입니까?" 병욱이물었을 때 교감은 대답 대신 한동안 생각에 골똘했다. 병욱은 교감의 표정 변화를 읽으려고 애썼지만 당최 읽어낼 수가 없었다. "저로서는 지금은 말씀을 드릴 수가……. 차차 알게 되겠지요." 교감은 서둘러 담배불을 끄고 양호실에서 나가려 했다. 막 양 호실을 나가려던 교감이 말했다. "자리는 월요일에 출근하시면 마련되어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번 학기에 엄 선생님은 담임이 없습니다. 아직은 그게 편하실 듯해서……. 그리고 이번 학기에는 수업 시수가 많지 않을겁니 다. 학교 분위기도 익힐 겸 편하게 생활하세요. 수업이 끝나면 곧 바로 퇴근하셔도 좋습니다. 종례를 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교감은 양호실에서 나갔다. 장승처럼 서 있던 병욱은 서둘러 교감을 따라갔다. 그리고 뒤꼭지에 대고 말했다. "저는 이 학교에 남겠다는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다." "허어, 그 일은 끝난 게 아니던가요? 삼촌께 그렇게 말씀드렸 습니다. 바빠서 이만." 교감은 멀찌감치 멀어져 갔다. 모습이 사라졌던 교감이 어느 새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말했다. "오늘은 이만 퇴근하세요." 교감은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실내화를 벗고 구두로 갈아 신은 병욱은 털레털레 승용차를 향 해 걸었다. 호주머니 속에서 열쇠를 끄집어내어 차문을 열려고 했을 때 뒤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태워주지 않으실래요?" 박 선생이었다. "혼자 퇴근하시는 길입니까?" 박 선생은 대답 대신 미소를 머금었다. 상큼했다. 박 선생은 병 욱의 옆자리에 올라탔다. 교문을 막 벗어났을 때 박 선생이 말했 다. "술을 좋아하시는가 보죠?" 아침의 일을 말하는 듯했다. 병욱은 왼손으로는 운전대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저도 예전에는 술을 좋아했어요. 지금은 아니지만."
"지금은 왜 술을 마시지 않죠? 단체에서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는 겁니까? 교감 선생님은 술을 즐겨하시는 것 같던데요." 병욱은 학교라는 말 대신에 굳이 단체라고 불렀다. 농장을 염 두에 둔 말이었다. 박 선생은 병욱을 향해 잠깐동안 힐끗거렸을 뿐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이 곳에 오신 지는 오래되었습니까?" "개교할 때부터 있었습니다." "아, 네. 개국 공신이군요. 그게 언제죠?" "올해가 개교 3 년째예요." 박 선생은 여전히 창밖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농장에서 학교를 관리한다구요?" "네. 그래요." "농장은 어떤 곳이죠? 제가 알기로는 종교 단체에서 운영하는 것이라고 들었는데요." "네. 그래요." 박 선생은 창밖에 시선을 둔 채 물기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어떤 종교죠? 신도수는 많은 가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은 안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왜냐 하 면……, 전 선생님을 아직 잘 모르고 있고, ……. 그뿐이에요. 저 는 선생님을 잘 몰라요. 그러니 곤란한 질문을 하지 않으면 좋겠 어요." "이런 대화를 나누다 보면 상대방을 잘 알 수 있는 게 아닐까 요?" "우린 이방인과 대화를 나누지 않도록 되어 있어요. 특히 종교 문제에 있어서는요." "그것 참. 그렇게 해서는 교세를 확장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널리 교리를 전파해야만 신도수도 불어날 게고……." "영접을 담당하시는 분들은 따로 있어요." "신도를 입문시키는 과정을 영접이라고 하는가 보죠?" "저를 곤란하게 만들지 마세요." 박 선생의 목소리는 냉랭하게 변해 있었다. 그래서 병욱은 한 동안 입을 닫아야 했다. "이곳에서는 운전을 하자니 꼭 양의 창자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 같아요. 길이 얼마나 험한지. 자칫 하단 사고 나기 십상이겠어 요. 하숙집에서 학교까지 다니는 차가 있었습니까? 거리가 꽤 먼 데." "걸어다녔어요." "아이쿠. 그 먼 거리를 말씀입니까?"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에요. 수양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녜요." "그럼 오늘도 두 분 여선생님은 걸어서 하숙집에까지 오겠군 요. 퇴근할 시간을 가르쳐 주시면 제가 마중을 나오도록 하죠." "아뇨.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그분들이 바라지도 않을 거구 요." 병욱은 가볍게 혀차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말했다. "농장이 학교에서 가깝다고 들었는데, 차라리 농장에서 출퇴근 하시는 게 낫지 않아요?" "농장은 선택받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 말씀입니까? 교감 선생님이나 교장 선생님께서 추천 하시는 겁니까?" "전 이제부터 정말로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겠어요. 그러 니 말시키지 마세요." 박 선생은 정말로 앵돌아진 표정을 지었다. 차는 하숙집 마당에서 멎었다. 먼저 차에서 내린 박 선생이 고 맙다고 말했다. 천만에요, 라고 병욱이 대답했을 때 다시 박 선생 이 말했다. "언제 시간 나시면 술 한 잔 사 주세요." "술 마시는 일은 금지되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 "그럼 오늘은 어떻습니까? 마침 토요일 아닙니까?" 병욱은 박 선생을 나꾸어 보았다. 그녀는 어쨌든 이곳에서는 유일하게 호의를 베풀어주는 사람이었다. "아뇨. 오늘은 안 돼요." "약속이 있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아니, 안돼요. 전 술을 마실 수는 없어요. 결코 그럴 수는 없어요. 그럼 고마웠어요." 박 선생은 부리나케 하숙집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병욱이 차문 을 잠그고 집으로 들어갔을 때 이미 박 선생의 모습은 집안에서 도 보이지 않았다.
[약속의 땅] 29. 그녀와의 잠자리 대신에 9. 윗도리를 벗어 벽면에 박혀 있는 대못에 걸었다. 트렁크에 실 려 있는 옷걸이를 가져와야 한다는 사실을 또 잊어 버렸다. 양복 상의의 목부분이 일그러지지 않을까 조심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바 닥에 팽개쳐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물걸레를 훔친 자국이 없 는 방바닥은 발바닥을 디딜 때마다 어석거렸다. 옷걸이를 가지러 가는 일도 성가시게만 느껴졌다. 점심 식탁에서 마주친 박 선생은 생뚱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 다. 재석과 진영은 토요일임에도 아직 퇴근을 하지 않은 모양이 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병욱은 창틀에 걸터앉았다. 눈앞에는 아름드리 굵은 나무들이 촘촘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해가 어디쯤 걸려있는지 종잡기가 어려웠다. 봄기운을 시샘하는 바람 줄기가 따가움을 느끼게 하리만큼 얼굴을 핥고 지나갔다. 멀리 다람쥐 한 마리가 나무를 기어오르는 게 보였다. 이 곳에 내려온 지도 벌써 나흘째다. 서울을 출발할 때의 설렘 과는 달리 마음은 한없이 침전하고 있었다. 남아야 할 이유도, 딱 히 서울로 돌아가야 할 이유도 없었다. 서울로 돌아간들 이미 끈
떨어진 두레박 신세였다. 강의의 터전을 잃어버린 선생의 꼴이란 구부러진 송곳에 다름 아니었다. 연수를 떠올렸다. 주말이면 백화점에 들러 신용 카드를 긁어대 고, 브래지어와 팬티만을 걸친 채, 소파에 길게 드러누워 양파링 을 집어먹으며 패션 잡지를 읽거나 비디오 화면에만 넋을 두던 여자. 성기를 빨고 싶어 환장하겠어, 라는 말을 심심풀이 팝콘을 집어먹듯 거침없이 내뱉던 여자. 엄밀히 말한다면 병욱은 아직도 연수와 잠자리를 같이 한 적은 없었다. 가끔씩 아주 가끔씩 연수의 브래지어 속으로 손을 밀어 넣어 유방을 주물럭거리거나, 아주 드물게 그녀의 툭 불거진 유 두를 핥아주거나 한 적은 있었다. 그 때마다 연수는 알아듣지 못 할 말을 내뱉으며 병욱의 목덜미를 꽉 움켜쥐곤 했었다. 그보다 도 더 자주 연수는, 병욱의 허리띠를 풀고 팬티를 무르팍까지 끌 어내린 후 주먹보다도 더 큰 상추쌈을 밀어 넣던 입을 사타구니 에 처박은 후 날름날름 그 놈을 핥아먹기는 했었다. 그러나 늘 결정적인 그 일을 치르지 못한 까닭에 연수는 볼멘 소리를 하곤 했었다. 병욱은 그녀와의 잠자리 대신에 신용 카드 의 청구서 내역의 대부분을 대신 결제해 주는 것으로써 그녀와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아마도 연수는 지금쯤 독이 잔뜩 올라 있을 것이다. 연수를 만 난 이후 나흘씩이나 전화 연락조차 하지 않은 적은 일찍이 없었 다. 연수는 이 곳이 전화를 걸기가 용이치 않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려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시골 학교로 내려온다는 사실 을 의논조차 않은 터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숙취 탓인지도 모를 일이다. 숙취에서 해방 하는 데는 잠이 최고다. 그것은 경험이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벌 건 대낮부터 요 위에 드러눕는다는 사실이 당최 마뜩찮다. 그렇 게 팔자 좋은 계제도 아니었다. 어쩌면 단순한 두통인지도 모른 다고 생각했다. 연수를 생각하고 나서부터 한결 머리의 통증을 느꼈던 것이다. 엄지손가락으로 통점을 꾹꾹 눌러댔지만 머리의 지끈거림은 점점 더했다. 현기증마저 일었다. 하릴없이 창틀에서 방구들을 향해 몸을 내렸다. 방구들에 발바닥이 닿자마자 누나가 떠올랐다. 나흘동안 누나 는 전혀 목욕을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어머니가 누나의 알 몸을 욕조로 옮긴 후 씻긴다는 것은 상상조차 힘겨웠다. 어머니 는 누나가 하반신불수가 된 사건 이후 누나를 화냥년이라고 부르 며 집안 말아먹을 우환덩어리로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쯤 누나의 몸뚱이에는 구더기가 슬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 람의 몸에 구더기가 슬 수도 있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로 나타날 수도 있었다. 언제부터 인가 누나의 몸은 시커멓게 타 들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삶이 곪 아 들어가는 징표인지도 모르겠다. 병욱은 발작적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다가 방바닥 에 몸뚱이를 던졌다. 그가 엎어진 바닥에는 아침에 개키지 않은 이부자리가 그대로 깔려 있었다. 별안간 눈자위에 뽀얀 안개가 서렸다. 병욱은 베개를 싸안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깨까지 들썩 였다. 속수무책으로 눈물이 쏟아졌다. 흐느끼는 그의 눈앞에 흑백 인화지가 펼쳐졌다. 밥보다도 병나 발을 더 좋아하던 어머니, 담요를 가슴팍까지 끌어당긴 채 침대
에 드러누워 해말간 웃음을 띤, 그러나 식물 인간에 가까운 누나, 초상화 속의 주인공 같이 언제나 근엄한 표정을 잃지 않는 삼촌, 신용 카드를 긁을 때만 살아있는 것을 자각한다던 연수, 병욱이 술값을 지불할 때마다 매번 멀찍이 등뒤에서 머쓱한 표정으로 서 있어야 했던 해직 전교조 교사, 죽어서라도 이 세상에 복수할 테 야, 라는 유서를 남기고 13 층에서 뛰어내렸던 ㄱ고등학교 여학생 의 얼굴, 대학 입학 시험을 치른 날부터 귀가하지 않고 있는 자 신이 담임을 맡았던 반 학생의 얼굴, 익숙한 조련사처럼 그를 다 루고 있는 천도 고등학교의 교감, …….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는 귀촉도처럼 병욱은 급기야 소리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누군가 어깨를 흔드는 것 같았다. 괜찮아요? 라고 묻는 것 같 기도 했다. 그러나 한 번 내질러진 울음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영 원히 멈출 것 같지 않았다. 한참동안 속 시원히 울음을 뱉어내고 나니 가슴이 개운해진 것 도 같다. 병욱은 납작하게 엎어져 있던 몸을 엉거주춤 일으켰다. 그러던 그의 동작이 한순간 멈추었다. 근육이 굳어진 것도 같았 다. 동공이 커다랗게 부풀어올랐다. 주인 여자, 재석, 진영, 상담 선생, 윤 선생, 박 선생, 워크맨을 귀에 꽂은 여자가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던 것이다. 병욱은 간질 환자처럼 헤벌어진 아래턱을 추스르지 못한 채 망 연자실히 그들을 올려다 볼 뿐이었다. "쯧쯧. 젊은 사람이." 주인 여자가 방에서 나가며 혀를 찼다. 그것을 신호로 모든 사 람이 방턱을 넘어섰다.
[약속의 땅] 30. 오입질을 하다 들켜버린 10. 땡땡땡. 땡땡땡땡. 차임벨이 아닌 쇠와 쇠가 맞부딪쳐 내는 경 쾌한 타음. 한순간, 소금에 절은 배추 이파리처럼 축 늘어져 있 던 아이들이 생기를 되찾기 시작하고 있었다. 병욱은 긴 숨을 뱉 었다. 그리고 아이들을 향해 수업 종료를 선언했다. 국어 교과서와 초록색 표지가 덧입혀진 출석부를 옆구리에 끼 고서 병욱은 복도를 타박타박 걸었다. 저희끼리 낄낄거리던 아이 들이 낯선 선생님의 길을 틔워주며 힐끔거렸다. 등뒤에서 수군수 군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리라 병 욱은 생각했다. 교직이 적성에 맞지 않다고 느끼는 까닭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하다는 얘기지. 아이들에 대해서 사랑하는 마음을 느 껴봐. 이게 내 천직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거야. 신출내기 교사였을 때 선배 선생이 한 말이었다. 병욱은 절망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이곳의 아이들을 사랑하게 될 것 같지 않았다. 병욱이 학생들의 눈에서 발견한 것은 적의였 다. 자기 영토에 들어선 낯선 맹수를 염탐하는 눈빛이었다. 그러 나 그것도 잠깐, 강의 계획을 말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아이들은 병욱의 눈빛을 외면했다. 책상에 고개를 처박기 일쑤였고, 창 너
머로 무심히 눈길을 던지는 학생도 많았다. 아이들에게도 이방인 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일까. 병욱의 책상은 원래 소파가 있던 자리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소파가 치워지면서 TV 도 교무실 안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마 저도 동료 교사들의 구설수에 오를 일이었다. 책상 위에 교과서 와 출석부를 아무렇게나 팽개쳤다. 그리고 눅진한 의자의 등받이 에 몸을 묻었다. 고작 한 시간 수업을 했을 뿐인데 벌써 하루가 끝이었다. 일 주일 수업 시수래야 여덟 시간이었다. 일 학년 네 시간, 이 학년 네 시간. 시간을 죽이기에는 좋았지만 보람을 찾 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새로운 수업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선생들은 제각 각 교무실에서 나갔다. 교무실 안에는 교감과 병욱뿐이었다. 어 제, 시내에서 볼일이 있다던 재석에게 부탁하여 건전지를 갈아 끼운 손목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갓 정오를 지난 무렵이었다. 퇴 근 준비를 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각이었고, 학교 안에서는 딱히 할 일도 없었다. 멀뚱히 천장만 바라보고 있던 병욱은 그래, 어차피 도피 행각 이었어, 라고 생각했다. 한 학기 또는 일 년만 맹탕거리며 살자 고도 생각했다. 갑자기 몸이 나른해졌다. 맨 아래 서랍을 반쯤 열어 서랍의 틀에 발을 걸쳤다. 그리고 의자를 약간 뒤로 뺀 채 머리를 눕혔다. 편안했다. 잠이라도 청하려고 했다. 하지만 병욱 은 깊은 잠을 들 수가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교감이 그를 불렀기 때문이었다. 교감은 교장 선생님을 면담하고 오라고 말했다. 병욱은 교장 선생님이 교장실에 계시는가를 물었고, 교 감은 운동장을 두어 바퀴쯤 돌다보면 교장 선생님을 만날 수 있 을 것이라고 말했다. 얼굴을 모르더라도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는 말도 덧붙였다. 모든 게 뒤죽박죽이야, 라고 중얼거리며 병욱은 구두끈을 매었 다. 가래침 자국 같은 것이 구두코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손가락 으로 쓱쓱 문질러 닦아내기도 했다. 삼월의 따사로운 햇살이 교정을 감싸안고 있었다. 파릇한 새순 이 드문드문 고개를 내민 나무도 눈에 띄었다. 새초롬한 표정을 한 꽃망울도 가끔씩 보였다. 병욱은 그다지 넓지 않은 운동장을 일별했다. 그러나 교장 선 생님의 행색을 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건물을 끼고 한 바퀴 돌았다. 여전히 교장 선생님의 입성은 보이지 않았다. 출입 현관 쪽으로 돌아온 병욱은 담배를 꼬나 물었다. 수수께끼 같은 존재 인 교감이 자기를 희롱하려는 수작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네댓 번 거칠게 담배 연기를 내뿜은 병욱은 교실 이 들어차 있는 건물 맞은 편의 담벼락 밑에서 아까부터 잔뜩 몸 을 수그린 채 일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에게 시선이 머물렀다. 멀 리서 보기에도 그 사람이 걸치고 있는 옷은 추레한 작업복이었 다. 학교의 잔일거리를 도맡아 하는 사람일 것이라는 짐작을 하 며 병욱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그 사람의 곁에 갔을 때 까지 아직도 손가락 사이에서는 잿빛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 다. "교장 선생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아십니까?" 호미를 걸머진 채 잰 손놀림을 하던 사람이 고개를 치켜들었 다. 이마에 깊은 고랑이 몇 가닥 패어 있었다. 얼추 예순은 되어
보였다. 병욱을 힐끗 쳐다본 늙수그레한 그 사람은 다시금 손놀 림만 재게 할 뿐 말이 없었다. 거름기가 묻어 있는 것인지 거뭇 거뭇하면서도 노릿노릿한 흙 몇 줌이 늙수그레한 그 사람의 맨발 을 살짝 가리고 있었다. "교장 선생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모르십니까?" 병욱은 짜증기를 가득 담은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그제야 늙 수그레한 사람이느릿느릿 고개를 들었다. "학교에 볼일이 있으시면 교감 선생님을 찾아가세요." "전 이 학교에 새로이 부임한 국어 선생입니다. 교장 선생님을 만나 인사를 드려야 하거든요. 어디에 계시는지 모르십니까?" "허허. 뒷방 늙은이에게 인사는 무슨." 손가락 새가 뜨거웠다. 병욱은 화들짝 놀란 기색으로 꽁초를 운동장에 팽개치고는 발바닥으로 짓이겼다. 어느 틈에 담배는 필 터까지 타 들어갔던 것이다. 늙수그레한 그 사람이 못마땅한 표 정으로 병욱을 노려보았다. "대지는 모체예요.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곳에다 이물질을 버 리다니, 쯧쯧." 노인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혀를 끌끌 찼다. 그리고는 몸을 일 으켜 몇 발자국을 옮긴 후 방금 병욱이 버린 담배꽁초를 몸을 수 그려 주웠다. 다음에 노인은 허리춤에서 쌈지 같기도 하고 복주 머니 같기도 한 것을 끄집어내어 꽁초를 집어넣었다. 병욱의 얼 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교장 선생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병욱의 말꼬리가 흐물거렸다. 얼굴마저 간질 환자처럼 뻣뻣하 게 굳어져 버렸다. 퍼뜩 머리를 스치는 어떤 생각 때문에 병욱이 자세를 고치며 말했다. "혹시 노인장이 교장 선생님……? 죄송합니다. 미처 몰라 뵈어 서……." "영접하세요. 양생의 도를 잊지 아니하면 온갖 허물은 씻어질 겝니다. 산등성이의 눈이 녹아 내리듯 말입니다. 구렁텅이에도 언젠가는 진흙이 채워지는 법입니다." "……?" "신발과 양말을 벗고 맨발로 대지 위를 걸어보세요. 웅성거리 는 흙의 소리가 들릴 겝니다. 그러면 됩니다." "……" 병욱은 엉거주춤양말을 벗겨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장은 벌써 호미를 챙겨 들고 딴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양말을 양손에 든 채 병욱은 황당한 표정을 했다. 백주 대낮에 도깨비놀음에 놀아난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두어 걸음쯤 깨금 발을 옮겼다. 발바닥을 통해 스며든 냉기가 명치끝을 콕콕 찔렀 다. 꽃망울이 맺히고 새순이 기지개를 켜고는 있었지만 동장군의 기세가 완전히 꺾여버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땅바닥에 퍼더버 리고 앉아 양말을 꿰신기 시작했다. 그 때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 가 운동장을 메웠고, 마침 점심 시간인지라 아이들이 건물 밖으 로 우르르 몰려 나왔다. 오입질을 하다 계집의 서방에게 들켜버 린 한량 같은 표정을 지으며 병욱은 학교 정문을 도망치듯 빠져 나왔다.
[약속의 땅] 31. 바벨탑 전설 병욱은 교문 앞에서 한참동안이나 쭈뼛거렸다. 늘 운전을 하며 다닌 까닭 에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탓이었다. 정문으로부터 길은 세 갈래로 뻗어 있었다. 오른쪽 길은 익숙한 길이었다. 하숙집으로 향하는 길이기 때문이었 다. 왼쪽 길은 국도를 통해 학교로 들어오는 길이었다. 바깥 세상으로의 통 로이기도 했다. 이윽고 병욱은 작정한 듯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우툴두툴한 자갈길이었지만 사람의 손 때 자국이 구석구석 배어 있었기 때문에 신작로를 연상시켰다. 산 속으로 난 길임에도 불구하고 어디가 고갯마루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길은 평탄했다. 두어 번 등성이를 넘은 듯도 했지만 숨이 가쁘거나 하지는 않았 다. 병욱이 중도에 걸음을 한 번 멈춘 것은 순전히 허기 때문이었다. 점심을 걸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회목에 걸려 있는 손목 시계를 들여다보려던 동 작을 멈추었다. 아직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단장된 길의 끝자락이 궁금하 기도 했고, 학교나 하숙으로 돌아간들 딱히 할 일도 없는 터였다. 중간중간 오솔길의 초입이 보였지만 손때에 의해 길들여진 길로만 내처 걸어갔다. 언 뜻 소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하지만 병욱은 여전히 앞을 향해서만 걸어갔다. 구석진 곳을 돌아서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남자였으며, 어깨에 괭이며 삽 같은 농기구들을 걸치 고 있거나, 손에 낫이며 호미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병욱이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스쳐 지났을 때, 그들 무리 중의 하나가 수건으로 얼굴을 훔쳤 을 뿐 그들은 너무나 무표정했다. 산중에서 낯선 사내를 만난 호기심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치 기니 피그 인형 같은 몸동작으로 병 욱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한참을 걸어가던 병욱은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을 스쳐 지났다. 이번에 만 난 사람들은 유난스런 복색이 병욱의 관심을 끌었다. 그들은 남녀가 한 무 리를 이루었는데 모두가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흰색 천으로 몸을 감싼 후에 금방이라도 벌건 핏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짙붉은 천으로 허리를 동여매고 있었다. 병욱은 그들을 할끔할끔 돌아보았다. 그러나 흰색 바탕의 천 위에 붉은 띠로 허리를 동여맨 그들 중의 어느 누구도 병욱을 돌아보는 이는 없었다. 병욱은 계속해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 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모양이 었다. 사방에 희끄무레한 빛이 감돌았다. 병욱은 그제야 돌아가야겠다고 생 각했다. 손목 시계를 들여다보니 고작 네 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산 속이 라 해가 일찍 떨어지는 모양이었다. 학교로 돌아가는 도중에는 어느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되짚어 학교로 갔을 때는 짙은 어둠이 교사(校舍)를 감싸버린 뒤였다. 오 직 한 곳에서만 빛이 새나오고 있었다. 교무실이었다. 승용차의 문을 열어둔 채 한동안 망설이던 병욱은 이윽고 차 문을 잠갔다. 그리고 교무실을 향해 걸었다. 교무실 출입문을 열었을 때 뜻밖에도 교장 선생이 길게 열을 지은 채 늘 어서 있는 책상과 책상 사이의 공간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낮의 작업 복 차림새였다. 병욱은 첫만남의 겸연쩍은 기억 때문에 당황한 속에서도 서 둘러 고개를 숙여 인사를 차려야 했다. 교장은 옅은 웃음기를 머금었지만 병욱의 몸은 아직도 문턱의 바깥에 있었다. 병욱은 얼른 돌아가야겠다고 생 각했다. 교장이 거북살스러웠던 것이다. 그 때 교장이 말했다.
"두고 가신 물건이라도……?" 병욱은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딱히 서랍에 든 물건도 없는 탓이 었다. "게 서 있지 말고 들어오세요." 병욱은 가볍게 목례를 하며 몸을 문 안으로 들였다. 그리고 미닫이문을 닫았다. 유난스레 문소리가 크게 울리는 듯했다. "밤 공기가 차지요? 봄밤이란 널뛰기를 즐기는 처녀의 마음과 같아서 믿 을 수가 없는 법입니다. 이 쪽으로 앉으세요." 교장이 의자 하나를 손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의자 옆에는 전기 히터가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병욱이 자리에 앉기를 기다려 교장도 의자 하나를 책상 사이에서 빼내어 앉았다. 그리고 교장이 말했다. "요즘 서울은 어떻습니까?" "……?" "마지막으로 서울에 들렀을 때 63 빌딩을 보고 난 깜짝 놀랬더랬어요. 미 련스럽게 아직도 바벨탑의 향수를 잊지 못하는 겐지……" "63 빌딩보다 더 높은 건물이 세워진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병욱은 낭패감을 느꼈다. 바벨탑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미처 판단 하지 않고서 말허리를 잘랐던 것이다. "두려움을 잊은 게야. 노여움을 자초하는 짓이지." 교장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리고는 노기를 띤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고있었다. 침묵의 시간이 길었다. 병욱은 괜한 안달이 났다. 이제라도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병욱이 어떤 핑 계거리를 겨우 만들어냈을 때 교장이 먼저 말머리를 치켜들었다. "담당이 뭐죠?" "국어 과목입니다." "국어라……." 교장은 다시금 침묵의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 병욱은 울컥 짜증이 돋았다. 학교 살림을 책임질 위치에 있는 학교장이 부하 직원의 신상 명세조차 파악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곳에서도 자신은 자궁 속의 물혹 같은 존재가 아닐까? 삼촌의 학교 지원금이 없었다면? 병욱은 자괴감 이 일었다. 비누칠을 먹인 스펀지를 누나의 알몸뚱이에 문질러댈 때 그 자 신도 누나를 성가시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누나를 떠올리자 병욱은 금 새 우울해졌다. "이봐요, 선생! 안색이 어둡구먼. 걱정거리라도 있으신가?" "아, 아닙니다." 병욱이 얼굴을 붉혔다. "그러고 보니 아직 선생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구먼. 이름이 뭐라셨지?" "엄병욱입니다." "국어 선생 엄 선생이구먼. 엄 선생님은 종말을 믿습니까?" "……?" "종말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어 버렸어. 자업자득인 셈이지. 모두 가 인간들이 자초한 일이야. 인류가 겸손함을 잃어버렸을 때부터 모든 일은 예정되어 있었어. 감히 섭리에 대적할 생각을 하다니. 그 분은 결코 우리들 을 용서하지 않으실 거야. 두려워. 진정으로 두려워." 교장은 파랗게 질린 얼굴을 한 채 천장의 한 지점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 다. 병욱은 가리사니를 잡지 못해 말똥말똥 교장을 쳐다보았다. 교장의 입 언저리가 씰룩였다. 할 말이 아직 남은 듯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씰룩이던 입술이 한 일자의 분명한 선을 그었다. 병욱은 짜증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 로 호기심에 회가 동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종말이라니. 세상은 밀
레니엄의 끝자락이 아니던가. 이곳이 종교의 외피를 뒤집어쓰고 있음이 확 실한 이상 조금이라도 속내를 알고 싶었다. 말을 채근하고 싶었지만 재주가 없었다. 교장은 그의 앞에 앉은 사람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병 욱은 기다렸다. 호기심이라는 회가 연신 꿈틀거린 때문이었다. 지루한 시간 을 한참이나 흘려보낸 후에야 교장이 탄식하듯 말했다. "불멸을 확신하기에는 그 분의 노여움이 너무 커. 가끔씩 환청이 날 괴롭 히곤 하지. 아니, 어쩌면그 분의 전언(傳言)인지도 몰라. 어둠이 빛을 막아 서고 태초의 정적만이 가득하게 될 게야." "인류가 이제 곧 종말을 맞이한다는 말씀입니까?" 교장이 다시 말문을 닫아걸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때문에 병욱이 불쑥 말 했다. "이제 육백칠십 일이 남았어. 인류의 대재앙은 기계의 혼돈으로부터 시작 할 게야. 숫자를 정복할 수 있다는 인간의 자만이 부른 화근이지. 숫자는 애 초에 신들의 언어였어. 신들의 말씀을 잠시 빌려쓰고 있는 줄 모르고 제것 인 양 남용한 꼴이란." "기계의 대재앙이란 컴퓨터의 연도 혼란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그 문제라면 극복의 가능성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정부에서도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으면서 밀레니엄 버그를 막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고……." "아니야. 노여움이 너무 커." 교장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엄 선생은 성직자가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 알고 있는가?" 교장의 말투는 어느 새 하오체에서 하게체로 바뀌어 있었다. 병욱은 불쾌 감보다는 묘하게도 마음이 누그러졌다. "태초에 인류가 처음 창조되었을 때는 인류가 사용한 언어가 하나밖에 없 었지. 그것은 신들의 언어였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신과 인간의 언어가 일 치했던 유일한 시기지. 인간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나 신들과 교통할 수 있 었지. 통역관이 없이도 말이야. 그러나 오늘날은 인류의 언어가 삼천 개 이 상이야. 왜 그렇게 언어가 분화되었는지 알고 있는가?" "……?" "신과 의사 소통을 할 수 있었던 인간은 교만을 부리기 시작했네. 바벨탑 을 쌓기로 한 거지. 하늘 끝간데까지 쌓아 올라가던 그것은 인간의 세상에 서 신들의 세상으로 직접 나아갈 수 있는 징검다리 같은 것이었지. 신들은 인간들의 오만 방자함에 치를 떨었다더군. 그래서 신들은 신들의 회의를 통 해서 영원히 바벨탑을 쌓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기로 결정했어. 인간의 의사 소통을 막아버리기로 한 거야. 같은 말씨를 쓰며 같은 목적으로 벽돌을 쌓 아가던 인간들의 세계에서 혼란이 생겼지. 어느 날 갑자기 의사가 통하지 않게 된 거야. 결국 인간들은 탑을 쌓을 수가 없었고 저마다 제 갈 길을 찾 아 떠나야 했어." 병욱은 불현듯 담배를 피우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굳이 교장과 평교사의 신분적 격차가 아니더라도 연배 차가 많았던것이다.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인간들은 비로소 두려움이란 감정을 가지게 되었 어. 어떻게 하면 신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제각 각 궁리들을 했지. 그러나 신들은 인간과의 직접적인 대화를 더 이상 원하 지 않았기 때문에 몇몇 소수를 신들의 대리인으로 지목했어. 우리가 사제자 라 부르는 분들이지. 서양에서는 샤먼(shaman)이라 하고, 우리는 무당이라 고 부르기도 하네. 교황을 생각하면 짐작할 수 있을 것이야." "교황도 무당이란 말입니까?" 다그치듯 하는 병욱의 말투에 교장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무속에서 말하는 무당과는 의미가 다르다네. 차라리 서양의 샤먼이라는 말이 훨씬 포괄적이야. 샤먼이란 무엇이던가. 다만 신과 인간의 중개인일 뿐 이네. 어떤 종교의 수장도 샤먼의 신분일 뿐이지. 신들이 그들에게 베푼 첫 번째 은혜는 겸손함을 가지도록 하는 일이었어. 인간들의 무례함에 대한 노 기가 얼마만큼 크나큰가를 가르치려 했지. 하지만 사제자들은 신들의 전언 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어. 그것은 비극이야. 조그만 권력이라도 주어지면 휘두르고 싶은 인간의 사악한 본능이 또 다른 병폐를 낳았다네. 중개인의 역할에 만족하지 못하고 신의 이름을 빌어 인간 위에서 군림하고자 했어. 중세 암흑 사회를 생각해 보게. 교황은 절대 권력을 휘두르려고만 하였어. 그것은 결코 신의 뜻이 아니었던 게야. 통탄할 노릇이지." 교장은 정말로 안타깝다는 듯한 눈빛을 띠며 말했다. 병욱은 긴가민가하 면서도 교장의 다음 말이 기다려짐을 느꼈다. "성직자만 불경스런 짓을 한 건 아니지. 인류 역시 바벨탑 시대로 돌아가 고자 발버둥질을 치지. 어리석게도 말야. 종말을 맞지 못해 안달하는 꼴이 야." "……?" "엄 선생은 인터넷을 해본 적 있으신가?" "예. 서울에 거주할 때에는 일 주일에 두서너 번은 접속을 하곤 했습니 다." "그 인터넷이란 게 영어 일색이라면서?" "미국이란 나라에서 인터넷을 만들었으니까요." "쯧쯧쯧. 왜 인간들의 언어가 나뉘게 되었는지 까닭을 말했었지? 신들은 인간들이 또 다시 바벨탑을 쌓게 되는 걸 원치 않아. 그러니 신들의 노여움 이 커질밖에. 인간의 몽매함이 스스로 파멸의 길로 이끌어 가는 거야." "외람되게도 저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쿨쿨. 엄 선생의 어리석음이 혜안을 덮고 있기 때문이지. 깨닫지 못한 자 는 번연히 눈으로 보면서도 알 수 없는 법이야.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안목 도 그렇지 않던가? 영접하시게. 종말이 멀지 않았어.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 작하게 될 때면 인간의 입이 다시 하나로 모이게 되며, 숫자의 무게를 이기 지 못하여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고 옛 문헌에는 밝혀져 있어. 시간이 거 꾸로 돌아가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이 지구 종말의 예시의 순간이라고도 쓰여있지. 그 날이 되면 쇠붙이 소리가 천지에 진동한다고 되어 있어. 예언 은 적중하고 있네. 안하무인격인 인간들이 인터넷이라는 망령에 씌어 만국 공용어를 시도하는 것도 그러하고, 이진법을 바탕으로 하는 디지털 문화가 스스로의 모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헤매는 꼴도 그러하지." "과학자들은 컴퓨터 연도 계산법의 불합리를 고칠 수 있으리라고 저는 생 각합니다." 병욱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무르팍 위에 올려진 주먹을 움켜쥐었다. "엄 선생이 망각하고 있는 것은 컴퓨터는 유기체가 아니라는 사실이네. 컴퓨터는 제 스스로를 제어할 수는 없어. 일부 보완 프로그램이 개발될 수 는 있겠지. 하지만 실핏줄보다도 더 미세하게 전세계적으로 퍼져 있는 컴퓨 터망의 문제점을 동시간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교장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종말 이론에 선뜻 동 의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겠지. 그러할 게야." 교장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병욱은 처음의 호기심이 어느 새 시들 해짐을 느꼈다. 종말론이라면, 성경의 해석에 기초한 80 년대의 휴거론이 차 라리 더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생 정도의 지적 수준만 갖추 어도 밀레니엄 혼란을 지적할 수 있는 컴퓨터의 연도 계산법을 놓고 종말
운운하는 수작이 유치하다는 느낌마저 불러일으켰다. 잠시 생각에 골똘한 표정을 짓고 있던 교장이 다시 말했다. "헌데, 엄 선생은 방금 종말 이론이라고 했었나?" "네." 병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장도 따라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한 말은 이론이 아니라네. 말씀을 전하는 게지. 겸허하게 마음을 열 어놓고 듣지 아니하면 공허하게 들릴 수도 있어. 혹시 허무맹랑하다는 느낌 은 들지 않았나?" 병욱은 그렇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대놓고 반박을 해서는 안된다 고 생각했다. 특정 종교의 전도사일는지 모를 일이지만엄연히 소속 학교의 교장이기도 했던 것이다. 병욱은 침묵으로써 묵시적 느낌을 전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섭리를 거스르는 일들이 도처에서 그치지 않고 일어난다는 사실이야." 교장은 새로운 화제거리를 꺼내었다. 그러나 병욱은 이제는 흥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교장의 말은 종말이니 구원이니, 그렇고 그런 얘기라는 선입견 이 앞섰던 것이다. "엘니뇨 현상에 대해서 알고 있나?" "자세히는 모르지만 ……." 교장이 물었고, 병욱이 답했다. 하지만 병욱의 머리 속에서는 어떻게 하면 교장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고 자리를 일어설 수 있을까 하는 것에만 생 각이 미쳐 있었다. "한겨울에는 폭풍이 몰아치고 폭우가 쏟아지며, 여름날에는 대지가 쩍쩍 갈라지는 등 이상 기후 현상이 일어나고 있네. 인간의 방자함에 대한 노여 움의 표현인 게야. 하지만 아직도 이건 암시에 불과해. 대재앙이 일어나려 하고 있어. 일천구백구십구 년이 끝나는 시간에 지구상에 어떤 일들이 펼쳐 질 것인지 고작 암시하는 거란 말야. 그런데 인간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 하고 있어. 통탄할 노릇이지." "……"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흐르고,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꽃이 지는 거라든지, 달이 차면 기운다든지 하는 것은 우주의 섭리야. 그럼 에도 사람들은 이 섭리를 무너뜨리려 했어. 흐르는 물을 막아 댐을 만들고, 신들의 놀이 마당인 우주 공간에 인간의 발자국을 남기려 했지. 어떻게 신 들의 노여움이 인간에 미치지 않을 수 있겠나? 엄 선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죄송합니다. 제가 우둔한 관계로……."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으이. 영접하시게. 양생의 도를 알고 나면 길이 보일 것이야. 말씀을 접하고 보면 모든 인간적 고통이 멎을 거네. 그 때가 되면 종말도 두렵지 않게 되지. 구원의 가능성이 열리니까 말야." "영접은 어떤 것이고 양생의 도는 무엇입니까?" 병욱이 질문을 던졌을 때 교장은 지긋이 눈을 감았다. 마치 명상에 잠긴 수행자의 모습 같았다. 두어 번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했다. 이윽고 교장이 말했다. "영접이란 그 분을 체감(體感)하는 것이라네. 양생의 도란 그 분을 내 몸 안에 기르는 것이지. 기른다는 말이 이교도의 관점에서 보자면 어감이 이상 하게 느껴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내 몸 속에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영적 (靈的) 존재를 키워간다는 말이야. 그러나 그 영적 존재는 진정한 힘이지." "그 분이라면……?" "삼라만상을 주재하시는 분이지." "창조주와 같은 의미입니까?"
"기독교주의적인 창조주와는 달라.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주란 얼마나 무책임한 존재인가? 만에 하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심이 옳다면 뒷갈망 을 하셔야 온당하지 않은가? 인간들을 바른 도리로 이끌어야 했어. 그러나 창조했다는 사실만 과장하여 설파할 뿐 인간을 관리하지를 않았지. 그리고 인간의 씨앗을 자신이 뿌렸으니 때가 되면 거두어 가겠다는 위협만 하고 있 네. 아주 고약한 심보지. 일개 범부도 그렇게 하진 않아. 집에서 짐승을 기 른다고 생각해 보게. 혹시 주리지나 않는지, 병마의 고통을 겪는 것이나 아 닌지 노심초사하는 게 인지상정이야. 때로는 사람보다도 더 정성을 들여 치 장을 해주곤 하지. 그런데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란 존재는 어떠한가? 내가 만들었으니 너희들끼리 한 번 놀아보아라. 종기가 곪아 터져 죽든 말 든, 이웃끼리 싸우다 피가 튀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란 태도지. 그러면서도 갖은 선심을 베푸는 척 하네. 일용할 양식을 주셨다는 거지. 세상의 구석구 석에서 하루에도 굶주려 죽는 이가 헤아리지도 못할 만큼 많은 숫자임에도 말야. 당장 북녘 동포들을 생각해 보게." "전 기독교를 믿지 않아 잘은 모릅니다만……?" "그렇지. 정확하게 지적했네." "……?" "만약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게 사실이라면 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이 그렇게 많은가? 동양의 한쪽 끄트머리 땅에서 예수란 사람이 태어나 서 양에다 텃밭을 가꾸었네. 그리고 이제는 동양뿐만 아니라 문명의 손길이 미 치지 못한 오지에서도 하나님이란 존재를 알려 주기 위해서 안달이지. 허나, 가르침 이후에야 겨우 깨달을 수 있는 존재라면 그것은 결코 창조주가 아니 야. 난생 처음으로 아비의 얼굴을 대하는 자식도 이끌림이란 걸 느끼는 법 이네. 그러나 기독교에 대해서는 여전히 배타적인 사람들이 많아. 끌림을 느 낄 수 없다는 게지." "그렇다면 교장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주재자는 어떤 분이십니까?" "단순하지는 않아. 그러나 엄 선생 정도의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몇 마디의 전언을 전해듣기만 하여도 진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게야. 우주의 모든 물질은 점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것을 과학자들은 원자라고 부르더군. 원자가 모여서 분자를 이루고, 분자는 모여서 더 큰 물질을 이룬다고 하지. 그렇지 않은가?" "과학적 지식에 대해서도 문외한이라……." 병욱은 교장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싶지는 않았다. 정치와 종교 이야기는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마약과 같은 독성이 담겨 있는 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꿈틀대는 이야기의 꼬리를 밟고 있다 보면 끝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교장의 말에 대해 건성으로 들어주고 있다는 시늉을 하든지, 아예 발을 빼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은 자리를 털고 일어설 만한 마땅한 핑계거리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엉덩 이를 의자에 붙이고 있을 도리밖에 없었다. "결국 우주는 점과 점이 모인 물질의 집합체야. 우리가 모셔야 할 분은 물질을 주재하는 분이지." "그렇다면 물질을 숭배하는 겁니까?" 참을성 없게도 병욱은 불쑥 교장의 말 중동을 잘랐다. 병욱은 아차 싶었 지만 이미 쏘아 놓은 살이었다. 조만간에 그것은 부메랑처럼 제 가슴을 향 해 치달려 올 살이었다. "숭배? 방금 숭배라고 했는가?" 교장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우리는 어떠한 대상도 숭배하지 않네. 그러한 표현은 혹세무민하는 종교 에서나 사용하는 용어이네."
"……?" "혹시 바다에 갔을 때 마음의 평온함을 느껴본 적은 없나?" 병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병욱의 표정을 살피던 교장의 눈빛이 돌연 광채 를 띠는 듯도 했다. "바로 그것과 같은 이치이네. 태초에 생명은 바다에서 나왔고, 때문에 바 다에 가면 고향집에 들른 것과 같이 편안함을 느끼게 되는 게지. 태고의 생 명체란 게 무엇인가? 단백질 덩어리가 아니었던가? 의식이란 걸 자각하기 이전에는 인간이란 그저 고단위 단백질에 불과했을 뿐이야. 인간의 존엄성 이니 하는 표현들은 의식이 생기고부터 발생한 관념에 불과한 게야. 물질로 부터 나왔으면서 물질과 인간을 분리하기 생각한 거지. 인간의 비극은 이미 거기에서 잉태되었어. 본질을 인정하지 않은 게야. 자신의 태생의 뿌리를 부 정하고서야 어떻게 무한한 영광을 기대할 수 있겠나?" 병욱은 고개를 숙였다. 교장의 눈빛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교장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동양에서는 말하지 않는가.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가자고. 동양 사상 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물질 기원론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네. 인간 태생의 본질을 말야.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은가?" 교장은 대화 속에 병욱을 끌어들이고 싶었는지 질문을 했다. 병욱은 마지 못해 네, 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딱히 부정해야 할 이념도 없었던 것이 다. "그리스 철학에서도 물과 불, 흙과 공기 같은 물질에서 모든 생명체가 발 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네.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현상을 뉴턴 은 만유 인력의 법칙으로 이해했다지만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은 사과의 본질 이 흙이었으니 흙으로떨어지는 것은 귀소본능이라고 표현을 하지. 그 사실 은 알고 있겠지?" 병욱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눈꼬리는 마루 바닥을 향해 있었다. 속히 교장의 말이 끝나기만을 바라는 눈치가 역력했다. "이제 대화의 핵심으로 접근해 보세. 엄 선생은 물질을 숭배하는 거냐고 물었었지? 그렇지?" "네." "그러나 나는 숭배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어. 그렇지?" 교장은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을 즐겨하는지 계속해 질문을 했다. 병욱은 네, 라는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물질에서 나왔으니 물질을 동경하는 것뿐이야. 타관살이에서 외로움을 느낄 때 고향집 느티나무 같은 것을 그리워하는 심정이란 말야. 이해하겠 나?" 여전히 병욱은 낮은 목소리로 네, 라고 대답했다. "엄 선생은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군." 갑자기 교장의 목소리에서 노기가 느껴졌다. 병욱은 잔뜩 굳어진 얼굴로 고개를 들어 교장을 쳐다보았다. 교장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가 되어 있었다. "엄 선생은 지식인이야. 지식인이라면 의당 내 말의 모순을 발견해야 했 어. 그러나 엄 선생은 그렇지 않았어. 허투루 듣는 척했을 뿐이야. 그렇지 않은가?" "무슨 말씀인지?" "정말로 몰라서 묻는 겐가?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하는 겐가?" "……" "나는 영적 존재를 우리의 마음속에서 키워가야 한다고 했네. 그러나 그 영적 존재란 것은 물질과는 적대적 관계에 있는 것이네. 그렇지 않은가?" "……"
"그럼에도 엄 선생은 모순점을 지적하지 않았어. 지식인임에도 불구하고 말야." "저는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열심히 경청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엄 선생은 세상을 영악하게 살아온 것 같으시군.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변명부터 서둔다는 것은 교직자의 올바른 태도가 아니지. 엄 선생의 교육자 적 자질이 의심스러워." 병욱은 전장에서 창졸간에 기습을 당한 병사처럼 어찌할 줄을 몰라했다. 그러나 교장은 이내 수그러진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물질에도 기(氣)라는 것이 있는 법이네. 우리가 모셔야 할 것은 기일세. 오늘은 이 정도에서 그치지. 다른 날 다시 이야기하세. 엄 선생이 진정 올바 른 길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말야." 갑자기 교장이 대화를 중단할 것을 선언했기 때문에 병욱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무언가 크나큰 실수를 저지른 듯한 느낌이었다. 그 때 교무 실 출입문이 열렸고 교감이 들어왔다. 어쩌면 교감은 아까부터 교무실 바깥 의 복도에 서 있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병욱은 출입문쪽으로 등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미처 교감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교장은 창밖에 서성거 리고 있던 교감을 보고서 말을 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병욱은 생각했다. "교장 선생님! 아직도 퇴근 않으셨습니까?" 교감은 허리를 몇 번씩이나 굽신거리며 말했다. 얼굴 가득 비굴한 웃음이 묻어 있었다. 병욱은 그 꼴이 민망스러워 짐짓 고개를 외로 돌렸다. "엄 선생은 바깥에서 잠시 기다리세요. 내가 전달할 말이 있으니까요."
[약속의 땅] 32. 실컷 즐기다가 죽을 교감이 말했다. 병욱은 마치 그 말을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듯 서둘러 교 장에게 목례를 하고 교무실에서 나갔다. 잠시 교무실 출입문 앞에서 우두망 찰 기다리고 있던 병욱은 신발을 꿰신고 현관을 벗어났다. 그리고 세워둔 자신의 차 앞에서 멈추어 섰다. 교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간격을 두고 두 개비의 담배를 태웠다. 아직도 교감은 나오지 않았다. 지루함보다는 짜증기 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 때 불쑥 연수를 떠올렸다. 어쩌면 내내 연수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애 써 생각을 떨쳐버리려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서울을 떠나온 지 벌써 육 일째였고, 그 동안 단 한 차례의 통화조차 없었다. 연수는 병적이다 싶을 만큼 줄기차게 섹스를 요구했었다. 아이스크림처럼 병욱의 성기를 날름날름 핥아먹는 상상을 하며 잠자리에 든다고 연수는 말했었다. 병욱은 벌겋게 달 뜬 얼굴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그 때마다 고개를 돌리곤 했었다. 새로운 담배를 피워 물었다. 아직도 현관에서는 기척이 없었다. 연수를 떠올렸을 때부터 병욱은 호흡이 컥컥 막혀옴을 느껴야 했다. 연수 는 이 세상에서 오직 두 가지의 사명만을 띠고 태어난 것 같았다. 섹스에 대한 집착과 쇼핑. 다달이 연수가 사용한 카드 금액을 결제하고 나면 병욱 의 생활비가 빠듯할 지경이었다. 그러한 연수를 병욱은 끝내 버리지 못했 다.
어느 날 병욱은 심각한 표정으로 연수에게 물었었다. 너, 처녀 맞아? 연수는 대답 대신 까르르 웃음소리를 토해냈다. 나중에는 연수의 눈에서 눈물이 찔끔찔끔 배어져 나왔다. 그 때 병욱은 연수의 목을 조르고픈 충동 을 억누르느라고 어금니를 악다물어야 했었다. 연수가 어떤 말을 하건 어떤 행동을 하건 간에 눈에 차는 구석이라고는 없었다. 그럼에도 연수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전교조 활동의 끝물 무렵에 만난 여자가 연수였다. 자본의 위세와 생존에 대한 힘 의 논리 앞에서 숨을 헐떡이던 시절, 연수는 필연을 가장한 우연으로 그 앞 에 다가왔다. 그 지점에서 병욱의 상념은 끊겼다. 현관에서 인기척이 들렸고, 이내 교 감이 그를 향해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병욱은 꽁초를 운동장에 떨어 뜨려 구둣발로 짓이겼다. 불꽃 몇 점이 인광처럼 흩날리다 가뭇없이 사라졌 다. 교감이 내뿜는 거친 숨소리가 고즈넉한 운동장을 휘감으려 했다. "내 차를 타고 갑시다." 교감이 말했다. 이의를 제기할 틈새도 없이 교감은 그의 지프 운전석에 올랐다. 엔진 소리가 요란했다. 병욱은 교감의 옆좌석에 올라앉았다. 막 차 문을 닫았을 때 교감이 중얼거렸다. "왜 퇴근도 않고 저 난리람?" 찰나의 순간이 지난 후에 병욱에게 물었다. "교장 선생이 날더러 뭐랍디까? 가령…… 어떻게 평가를 내리던가요?" "아무 말씀도 없었습니다." "아무 말씀도 없었다고요?" 교감의 눈두덩이 움씰했고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동자마저 한 쪽으로 쏠린 듯했다. 병욱은 황급히 차창 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전조등이 비켜나 간 창 밖은 온통 흑(黑)이었다. 그래서 더욱 우울했다. 차가 서서히 굴러가 기 시작했을 때 교감이 말했다. "그랬을 테지요. 허허허." 교감은 넉살 좋은 웃음을 흘렸다.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지난 후 그의 입 에서는 휘파람 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익숙한 가락이었다. 퇴폐적이 면서도 감칠맛이 도는 70 년대쯤의 유행가였다. "엄 선생은 술을 즐겨 하신다고 하셨죠? 어때요? 같이 술 한 잔 하지 않 겠습니까?교감의 말투는 심드렁했다. 그러나 병욱은?가래침을 찍 갈겼다.차는 출발했다. 교감은 다시 휘파람 소리를 내기 시작했는데, 노랫소리는 논산 훈련소에서부터 푸 른 제복을 벗는 그 날까지 지긋지긋하게 불러제껴야 했던 군가였다. 그것도 메들리로 뽑고 있었다. 병욱에게 던진 질문을 잊은 것일까. 일언반구가 없 었다. 한참을 달린 후에 지프는 자갈이 깔린 널찍한 마당에서 멈추어 섰다. 삿 갓 모양의 모자를 뒤집어 쓴 알전구가 뿜어내는 불빛에 잘 다듬어진 향나무 몇 그루가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엔진을 끈 교감은 클락션을 울렸다. 마 당과 맞닿은 대청 마루에서 한복을 입은 여자 구석진 벽을 기어 오르는 바퀴벌레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엄 선생님, 앉으세요." 병풍이 둘러친 앞의 두툼한 보료 위에 앉은 교감이 말했다. 그러자 여자 들도 시시껄렁한 소리들을 뱉으며 앉기를 권했다. 그들에게도 쉽게 눈에 띄 었을 바퀴벌레 따위는 대수롭지 않은 모양이었다. 병욱은 교자상을 사이에 두고 교감의 맞은 편에 앉았다. 병욱의 곁에도 한복을 입은 여자 하나가 앉
았다. 술은 적당한 온도로 데워진 정종이었다. 몇 순배의 잔이 돌 때까지 교감과 여자들만 흰소리들을 주고받았다. "엄 선생은 종말을 믿으세요?" 병욱의 앞에 놓인 빈 잔에 술을 채워주던 교감이 말했다. 교감의 음성이 은근하면서도 낮았기 때문에 비밀 결사 조직의 밀담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 다. 느꺼웠다맘年?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믿지도 않 는 사람에게 비밀스런 이야기를 발설하다니. "약속을 하셔야 합니다. 아시겠어요?" 교감은 숫제 윽박을 질렀다. 병욱은 성가신 일에서 벗어나기라도 할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을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병욱이 말했고 교감은 괜찮다고 했다. "학교를 관리하는 종교 단체는 어떤 성격의 종교인지 궁금합니다. 종말을 주창하는 겁니까?" 교감은 별안간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 찰나의 시간이 흐른 후 교감은 술자리에서는 심각한 얘기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병욱은 그렇다 면 학교 선생님들 중에서 비신도는 자기밖에 없느냐고 말했고, 교감은 그렇 다고 했다. 왜 자기를 채용하게 됐는지 알고 싶다고 말했을 때 교감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꽤 시간이 흐른 후에 언젠가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만 하였다. 병욱은 궁금증을 주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어떤 말이든 듣고 싶다 고 했지만 교감은 병욱이 만족할 만한 그 어떤 말도 해주지 않았다. "오늘 제게 하실 말씀은 무엇입니까?" 병욱의 물음에 교감은 손사래부터 친 후 말했다. "없습니다." "없다구요?" "엄 선생이 그 시간에 거기에 있었을 뿐입니다. 자, 술이나 마십시다. 골 치 아픈 얘기들 말고." 마지못한 듯 병욱이 술잔을 내밀었다. 허공에서 술잔이 부딪쳤다. 토기 부딪는 소리가 둔탁하게 들렸다.
[약속의 땅] 33. 연수는 말랑말랑한 젤리였 11. 3 월 7 일. 토요일. 교감과 술자리를 나눈 후 닷새가 흘러갔고 천도 고등학교에서 강의를 시 작한 지 꼭 육 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 날의 술자리는 내내 찜찜한 분위기 였지만 그럭저럭 잘 치렀다. 의식 없는 생활 속에서도 시간은 어영부영 흘러갔다. 강의는 지지부진했 고 교무실 안의 분위기는 여전히 냉랭하기만 했다. 하숙집의 생활에서도 특 이한 일은 없었다. 가끔씩 재석과 진영이 늦은 밤 방문을 두드리곤 했지만 캔맥주를 따며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게 전부였다. 우중충한 빛
깔이었지만 덧칠이 없어도 견딜 만한 날들이었다. 일 주일내 가라앉아 있던 학교 분위기가 방과 시간이 가까워지자 돌연 활 기를 찾고 있었다. 토요일은 기숙사 생활을 하는 아이들에게 유일하게 외출 과 외박이 허락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의 활기는 병욱에게도 까닭 모를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책상을 정리하면서 병욱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천도 고등학교에 부임한 이후 처 음 있는 일이었다. "약속이 있었던 모양이군?" 교감이 등뒤에서 말했다. "꽤 미인이던걸.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어. 학생들 보기 전에 빨리 나가 봐." "누가 말씀입니까?" 교감은 히죽거리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짐작이 되었다. 벽지까지 찾아 올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던 것이다. 병욱은 더 이상 콧노래를 흥얼거리 지 않았다. 오히려 잔뜩 부어오른 얼굴이었다. 책상을 정리하던 손길을 멈 춘 채 의자에 덜퍼덕 주저앉았다. 습관적으로 호주머니 속의 담뱃갑을 만지 작거리던 손길이 멎었다. 책상 사이로 난 공간을 걸어가는 상담 선생을 발 견한 때문이었다. 뒤이어 복도에서 수런거리는 소리들이 들렸다. 수업 종료 시간이 임박해진 모양이었다. 교감이 손짓을 했다. 빨리 나가라는 성화였 다. 병욱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정문을 향해 달음박질치듯 걷고 있었지만, 입 안 가득 알사탕을 물고 있는 것처럼 볼따구니가 부어오른 채였다. 연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병욱은 한 차례 숨 길을 고른 후 천천히 연수를 향해 다가갔다. 연수는 말똥말똥 병욱을 올려 다 볼 뿐이었다. "오랜만이군." "혈색이 안 좋아 보여. 힘든 거야?" 병욱은 수업 중 채워지지 않은 지퍼를 지각했을 때처럼 당혹스러웠다. 예 상했던 연수의 첫 반응이 아닌 것이다. 병욱은 연수의 눈 속을 들여다보았 다. 속내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학생들이 나올 시간이야. 저쪽으로 가지." 학교로부터 난 세 갈래 길 중 가운데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출근 첫날 몇 시간을 무작정 걸었던 길이었다. 연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벽에 기대고 있던 등을 곧추 세웠다. 병욱은 앞서 걷기 위하여 몸을 돌렸다. 그러나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고 우뚝 멈추어 서야 했다. 어느 결에 나왔는지 박 선생 이 서 있었는데 잔뜩 노려보는 기세였다. 낌새가 이상했는지 연수가 병욱의 귀 가까이에서 낮은 목소리로 누구야? 라고 물었다. 병욱은 연수의 물음에 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박 선생에게 고개를 까닥하고는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뒤따라 걷던 연수가 다시 물었다. "아까 그 여자 누구야?" "학교 선생님이야." "그 여자 눈빛이 왜 그래? 왠지 섬뜩해. 전에 그런 눈빛을 본 적이 있어. 어디에서 보았는지 잘은 모르지만……. 그래, 기억이 나. 영화 속에서야. 사랑하던 남자에게 버림받은 후 데이트하던 연인만을 엽기적으로 살해하던 미치광이 여자였지. 그 여자가 사냥감을 발견했을 때의 눈빛이 꼭 그랬어. 그 여자 조심해. 여자의 육감은 무시하지 못하는 거야." 이곳에서 인정을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야, 라고 병욱은 말하고 싶 었지만 말머리를 눌렀다. 공연한 일로 연수의 신경줄을 팽팽하게 만들고 싶 지 않아서였다. 아직은 연수가 짐짓 평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뇌관을 건드
리기만 하면 언제든 터져 버릴 부비트랩 같은 존재였다. 병욱이 생각하는 연수는 그랬다. 봄기운이 선연했다. 햇살은 따사로웠고, 귓불을 살랑거리는 바람기는 차 가우면서도 상쾌했다. 연수는 아직도 닦달하지 않았고 그럴수록 병욱은 조바심을 느껴야 했다. "잠시 쉬어갔으면 좋겠다." 연수가 말했다. 병욱은 걸음을 멈춘 채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스무 발 자국쯤 떨어진 곳의 길 가장자리 연한 곳에 전나무가 둘러싼 가운데 두어 평쯤의 편평한 땅이 보였다. 병욱이 그곳을 손짓으로 가리켰고 연수는 고개 를 끄덕였다. 그들은 그 곳에 가 앉았다. 하지만 그 곳은 쉬어 가기에 썩 좋은 장소 같지는 않았다. 빼곡이 둘러싼 전나무가 햇살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오래지 않아 몸에 오슬오슬 한기가 돋았던 것이다. 봄날이었지만 햇 살이 스미지 않는곳은 아직도 냉기가 돌았다. 병욱은 다른 곳을 찾아보자 고 했고 연수는 대답보다도 몸을 먼저 일으켰다. 대략 십여 분쯤을 걸었을 때 그들은 앉아 쉴만한 곳을 발견하였다. 그곳 에도 빼곡한 나무들이 평지를 옹위하듯 둘러싸고 있었지만 키가 낮았고, 지 난 가을에 이파리를 떨어버린 채 고개를 삐죽이 내밀고 있는 가지는 나부 (裸婦)의 튀어나온 아랫배를 연상시킬 뿐이었다. 연수는 점령군처럼 기세 좋게 달려갔다. 그러던 연수가 걸음을 멈춘 채 갑자기 괴성을 내질렀다. 병 욱은 조건 반사적으로 연수의 곁으로 치달렸다. "뱀 허물이야. 뱀이 허물을 벗는단 얘기는 알지? 하지만 두려워할 건 없 어. 아직은 겨울잠을 깨고 나올 때가 멀었거든. 이건 지난 해 거야." 연수는 아까 앉았던 자리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 곳은 햇살이 들지 않기 때문에 무척 춥고, 뱀 허물은 치워버리면 그만이라고 병욱은 말했지만 막무 가내였다. 그럼 조금 더 앞으로 걸어가 보자고 병욱이 말했다. 그러나 연수 는 이제 더는 걷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햇빛이 스며들지 않아 냉기가 감돌던 곳을 향해 두 사람은 걷기 시작했다. "나, 보고 싶지 않았어?" 땅바닥에 주저앉자마자 연수가 물었다. 그러나 병욱은 대답하지 않았다. 엉덩이를 통해 스며든 냉기가 뼛속을 스쳐 어금니까지 시리게 했다. "안아 줘." 연수는 대뜸 안아달라고 말했다. 그것은 연수의 천성일 수도, 습관일 수 도 있었다. 병욱은 잠시의 머뭇거림이 있었지만 연수를 껴안았다. 제주도 날씨와 여자의 마음, 그리고 개구리 뛰는 방향은 종잡을 수 없는 법이었다. 연수라는 뇌관을 건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연수의 불룩한 가슴이 병욱의 납작한 가슴을 누르자 한결 냉기가 가라앉 는 듯했다. 남녀의 육체적접촉이란 언제나 묘한 감동이 있는 법이다. 이성 은 얼음처럼 투명하면서도 몸뚱이에서는 활화산의 불길을 타오르게 하는 것 이 여체였다. 병욱은 그러한 감정에 휩싸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 다. "키스해 줘." 연수는 눈을 내리 감으며 입술을 느낄락말락 벌렸다. 벌려진 입술 사이로 치아 끝이 내비쳤다. 병욱은 탐탁지 않았지만 그녀의 입술을 찍어누르듯 덮 쳤다. 그것은 순전히 계산속 때문이었다. 부비트랩의 뇌관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연수의 타액이 입 속으로 빨려들자 삭신이 녹아들듯 온몸이 나른해짐을 느꼈다. 불현듯 병욱의 가슴속에 어쩔 수 없는 불길이 치솟았 다. 병욱의 우악스런 손길이 연수의 블라우스 사이로 헤집고 들었다. 그녀 의 다리가 떨리며 벌어지고 있음을 병욱은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병욱은 오래지 않아 연수의 가슴에서 손을 빼내어버렸다.
"왜 그래?" 연수가 블라우스의 단추를 채우며 말했다. "날 사랑하지 않는 거지?" 병욱은 대답하지 않았고 연수는 등을 돌려 앉았다. "이곳은 너무 추워. 일어나 걷자." 병욱은 연수의 말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몸을 일으켰다. 응달에서 빠져 나와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을 때, 거짓말처럼 햇살이 따사로웠다. 무작정 걸어가던 병욱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을 때 연수는 한참이나 뒤떨어져 따라오고 있었다. 병욱은 연수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주었다. 씩씩거리며 다가온 연수가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말은 해주어야 하지 않아?" "이곳에 내려온 건 어떻게 알았어?" "당신의 그 잘난 어머니가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한 마디 의논도 없이 이런 촌구석으로 내려온 이유가 도대체 뭐야? 날 무시 하는 게 아니고 뭐냔 말야?" 연수의 말 속에는 날 선 칼이 묻어 났다. 그 때 그들을 향해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흰색 바탕의 천으로 몸을 두르고 있었고, 허리에는 붉은 띠가 질끈 동여매져 있 었다. 연수는 낯선 사람들의 느닷없는 출현에 똥그란 눈을 하며 병욱의 등 뒤에 붙어 섰다. 하지만 그들은 무심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스쳐 지날 뿐이 었다. "저 사람들 뭐하는 사람들이야?" 사람들의 꼬리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연수가 말했다. 병욱은 모른다고 했다. 사이비 종교 단체 운운하고 싶지는 않았다. 병욱도 아직은 그들의 실 체를 확적히 몰랐던 때문이기도 했다. "돌아가. 무서워." 연수의 두 팔이 병욱의 한쪽 팔을 감싸안았다. "돌아가, 응?" 병욱은 아직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미진한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딱 히 헤아릴 수 없는. 그러나 그 충동은 강했다. "괜찮을 거야." "거야가 뭐야? 이런 산골짜기에 들어온 것부터가 이상해. 갑자기 서울은 왜 떠난 거야? 자기, 나한테 속이는 것 있지?" 병욱은 대답 대신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없어?" 병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종교 같은 것 믿는 것 아니지?" 병욱은 여전히 고개만 주억거렸다. 연수는 새초롬한 표정을 한 채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딴죽을 치는 것은 생각에 잠길 때의 그녀의 오랜 버 릇이었다. 이윽고 생각이 갈무리되었는지 그녀의 표정이 밝아지는 듯했다. "우리, 조금만 더 걸어." 병욱의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밀어 넣으며 연수가 말했다. 두 사람은 걷 기 시작했다. 연수는 병욱에게 바싹 붙으려 했고, 그 때마다 탄력 있는 연 수의 가슴이 병욱의 팔꿈치를 통해 느껴졌다. 병욱은 거북살스러웠다. 그래 서 팔을 떼어놓으려 했지만 연수는 더욱 바싹 달라붙었다. 그러기를 몇 번 이나 했다. 급기야 연수는 짜증을 냈다. 병욱은 더 이상 몸을 떨쳐내려 할 수가 없었다. 구부러진 길을 막 돌아섰을 때 다시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모두가 여자였다. 몇몇은 머리 수건을 하고 있 었고, 허름한 웃옷에 몸뻬 바지 차림이었다. 여자들이 두 사람의 어깨 곁을 스쳐 지났을 때 연수가 키득거렸다. "요즘도 저런 옷을 입는 사람들 있어?" 하지만 병욱은 전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이곳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상한 복색이었다. 농장 사람일 것이라는 짐작은 들었지만 그 이 상은 상상이 미치지 못했다. 그럴수록 그들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은 더해갔 다. "이런 곳에서 살았음 좋겠다. 젖소를 키우면서 말야. 황혼녘엔 양들 울음 소리도 들리겠지? 그럼 얼마나 행복할까?" 연수가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그 바람에 병욱도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물론, 양치기 목동을 두어야겠지. 네가 짐승들을 손수 기르지는 못할 테니 까.' 병욱의 입가에 스쳐간 냉소를 연수는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연수는 아직도 열에 뜬 얼굴색이었다. 어느 결에 연수는 팔짱을 풀고 황순원의 소 나기에 나오는 소녀처럼 팔짝팔짝 내닫기 시작했다. 병욱은 멀뚱히 뒤따랐 다. 저만치서 우뚝 멈춰선 연수가 '이 바보!'하며 집어던진 조약돌이 날아올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병욱은 소나기의 소년처럼 순박하지도 우둔하지도 않았다. 짐작처럼 연수는 달리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조약돌을 던지지 도 않았고, 이 바보라고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연수는 병욱이 다가오기 를 기다렸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입에서는 씩씩거리는 숨소리 가 새나왔다. "자기도 한 번 달려봐. 공기가 너무 시원해.서울 공기가 이곳의 반만 되 어도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서 연수는 병욱의 손의 회목을 잡았다. "함께 달려가는 거야. 알겠지?" 연수는 병욱의 손목을 끌며 달리려고 했다. 그러나 병욱은 뚜레 뚫린 소 처럼 억지 춘향 노릇만 했다. 이내 연수가 달리던 걸음을 멈추었다. "싫어?" 연수의 목소리에 짜증기가 덕지덕지 붙었다. 병욱은 툴툴거리며 상담실에 불려 들어가는 아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한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이럴 수 있어?" 조금 전의 열에 달뜬 모습과는 달리 연수는 금새 독살스런 표정이었다. 여자는 천성적으로 배우야, 라고 병욱은 생각했다. "도대체 서울은 왜 떠난 거야? 사립 학교이기 때문에 전근이 된 것도 아 닐 것 아냐? 그 학교에서 정리 해고당한 거야?" 병욱은 짜증스럽다는 듯이 고개만 흔들었다. "남들처럼 봉사심에 불타 시골 학교를 선택한 것도 아닐 테고? 일언반구 도 없이 서울을 떠나버린 건 날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고 뭐냔 말야? 왜 전 화는 안 해 줬어? 휴대폰은 왜 열어두지 않은 거야?" 탄알은 준비되어 있다. 언제 방아쇠를 당기느냐만이 문제이다. 연수는 준 비된 탄알을 쏘아대고 있었다. 그것이 꿩총이든 조준 사격이든 상관하지 않 을 태세였다. 병욱은 묵묵부답이었다. "좌천당한 거야, 아니면 선택이야? 그것부터 말해 줘." 무차별 난사하던 연수는 전술을 수정했는지 병욱의 닫혀진 입의 지퍼를 열려고 했다. "선택이었어. 하지만 나에게도 얼떨결에 일어난 일이야." "선택이었다, 그러나 얼떨결에 일어났다, 그게 말이 돼?" 연수의 치켜든 턱이 경사를 이루었다. 아이들 눈썰매 타기에 적당한 각도 였다.
"갑자기 결정되었어. 삼촌께 시골 학교에서 근무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난 그 일을 까마득히 잊고 지냈어. 그런데 개학 며칠 전에야 이 곳으로 내려가라고 연락이 왔어. 그뿐이야." "언제까지 있을 거야? 언제 서울로 돌아올 거냔 말야?" 병욱은 대답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결정하지 못한 문제였다. 어쩌면 자포 자기의 심정으로 남아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난 이곳에선 살 수 없어. 나랑 결혼하고 싶으면 서울로 돌아가." 연수가 정색을 한 채 말했는데 병욱은 엉뚱하게도 농지거리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곳에서 젖소를 기르고 싶지 않아? 밤이면 별자리를 꼽으며 신화를 얘 기하면서말야. 양치기 목동의 뿔피리 소리를 들으며 양털 모피 속에서 잠 을 청하는 것도 멋있을 것 같지 않아?" 연수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나 이내 그녀의 눈빛은 한 곳으로 모였고 선언하듯 말했다. "어쨌든 난 이곳이 싫어." 병욱은 숙취 뒤처럼 입 속이 칼칼했다. "그 잘난 삼촌께 말씀드려. 서울로 돌아가겠다고." 날이 선 칼로 무를 내리치듯 연수는 단호했다. 그러나 병욱은 연수의 말 에는 아랑곳없이 어떤 생각에 골똘했다. 단 하루를 같이 해도 평생을 연인으로 기억되는 사람이 있고, 일생을 함 께 한 사람이원수같이 느껴질 수도 있는 법이다. 연수는 어느 축일까? 논리의 벽은 두터웠다. 감상적 치기로만 접근한 경우에는 더욱 그랬다. 전교조 활동이라니, 애초에 가당찮은 일이었다. 얼어죽을지언정 곁불은 쬐 지 않겠다는 사람에게 피에로 복장을 입힌 채 억지 광대 노릇을 요구한다고 제대로 될 턱이 없었다. 화냥기가 득시글한 여인네에게 수절을 요구한다고 지켜질 리 만무했다. 전교조의 긴 터널을 통과한다는 것은 그만큼 암담한 일이었다. 만해 한용운의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어떤 계기에 의해 촉발된 것 이었을까. 병욱이 사회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고등학교 시절 신문의 가십난을 읽고서였다. 무고한 시민이 살인범의 누명을 쓰고 무려 삼 년여의 옥살이를 해야 했다. 진범이 붙잡혀 누명은 벗겨졌지만 이미 사회적 기반은 허물어진 뒤였다. 국가에서 알량한 보상금이 나왔지만 그것으로써 새 출발 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당시 담당 검사가 현장 검증만 철저히 했더 라도 막을 수 있는 불상사였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첫 단추의 채워짐이 고작 이런 정도의 수준이다 보니 이후의 의식 발전이 란 것도 자연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버스에 올라탄 노인에게 젊은이가 자 리를 양보하는 것은 미덕이긴 하지만 의무는 아니다. 그렇다면 노인에게 있 어서도 자리를 양보 받는다는 것이 권리는 아니다. 따라서 고마움을 충분히 표시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한국 노인들은 다소 뻔뻔하다. 그것은 민주적 소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가끔씩 정치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곤 했 는데, 국민의 혈세를 축내는 국회의원들이 '거수기' 노릇밖에 하지 못한다는 내용의 칼럼을 읽고 분개하는 정도였다. 더러는 민족적 문제에 대해서 눈을 돌리기도 했다. 미군 병사들에 의해서 유린당한 여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홧 김에 병나발을 불기도 했던 것이다. 물론, 대학 시절 의식화 수업의 영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노태 우의 속이구(6·29) 선언으로 인해 국내의 정치적 환경이 변하고, 소비에트 체제의 붕괴와 동구권의 몰락으로 인해 사회주의적 이념에 대한 경도는 현 저히 줄어들었다지만, 여전히 캠퍼스에는 N.L 계열이니 P.D 계열이니 하
는 운동권의 헤게모니 싸움이 잔존하던 시대의 학번이었던 것이다. 병욱이 가입했던 동아리나 학회의 선배들은 한결같이 사회과학적 이념 서적 탐독을 요구했다. 선배들이 필독서라고 강요하는 책들을 군말 없이 주워담기는 했 었다. 가끔씩 페퍼 포그가 날리는 도로에서 짱돌을 뿌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사회적 이슈들에 관한 관심은 점차 시들해졌다. 심정적으로는 동 조했지만 이념적으로는 생리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병욱의 뇌 구조는 젤리 처럼 말랑말랑한 감성이 입질할 때는 날름 핥아먹었지만 게딱지 같은 이념 이 비집고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막연히 가슴에 주워담았던 '지성인의 양심'이란 꼬리표에서는 완 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전교조를 기웃거린 것이 그 증표였다. 그러나 전교조 활동 역시 미기적거리기만 했다. 병욱이 전교조에 가입했을 때는 서슬 퍼렇던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교육의 민주화를 외치며 맞서던 기세 등등한 조직체가 아니었다. 교육부 장관을 지냈던 국무 총리 정원식에게 밀가루 세례를 퍼부었다는 사실마저 빛바랜 흑백 사진처럼 아스라한 기억으로 남아 있던 시기였다. 새로운 충격도, 당위성이나 전망도 그곳에서는 없었다. 냉큼 발을 빼지 못한 것은 순전히 천성 때문이었다. 말 하자면,끝물인지 번연히 알면서도 좋은 놈을 골라보겠다며 어판장을 기웃 거리는 꼴에 다름 아니었다. 그럼에도 압력은 드셌다. 피를 토하며 바동거 리는 놈의 가슴속에다 선지피를 흡입하기 위해 빨대를 들이박는 사냥꾼 같 은 심보라고나 할까. 미련스런 짓을 한 건 병욱이었다. 아둑시니처럼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했다. 모두들 약삭빠르게 빠져나간 빈 자리에서 허허로운 흔적을 남기려 했던 것이다. 그 때 만난 여자가 연수였다. 연수는 말랑말랑한 젤리였다.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논리와 논쟁의 틈바구니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던 것이 다. 새로움만이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너무 흔하게 널브러져 있어 식상함과 진부함만을 불러일으키는 일들도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새 로운 것이었다. 연수와의 대화 내용이 그랬다.
[약속의 땅] 34. 악몽을 꾸었을 뿐 거리에는 벚꽃이 휘날렸다. 신문에서 진해 군항제 소식을 언뜻 접했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진해의 벚꽃 나무에는 벚꽃이 없을 것이다. 그 해 봄 은 유난히 따뜻했고 너무 일찍 꽃망울을 터뜨린 벚꽃은 그만큼 일찌감치 제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지 않던가. 봄은 언제나 처럼 남녘에서부터 북상했다. 토요일 오후였다. 발정난 수캐처럼 무작정 거리에 뛰쳐나온 병욱은 막상 갈 곳이 없었다. 희희닥거리며 어깨를 스쳐 가는 연인들을 향해 까닭 없이 눈알을 부라리곤 했다. 볼을 살랑거리는 바람결에도 괜한 부아가 돋았다. 수줍은 듯 자태를 드러낸 진달래 꽃잎을 훑어서는 입김으로 후 불었다. 팔 랑거리며 떨어진 꽃잎을 구둣발로 으깨기도 했다. 급기야 이게 무슨 꼴이 람, 하는 자괴감이 일었다. 울고 싶은 놈에게 윽박지른다고, 마침 미용실이
눈에 띄었다. 머리털이라도 싹둑 잘라버리고 싶었다. 미용사는 날렵하게 가위질을 해댔다. 병욱은 전면 유리 거울에 반사된 자 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면서도 한편으로 옆자리에 앉아 파마 머리를 손질하고 있는 여자를 힐끔거렸다. 처음 병욱의 눈길을 끈 것은여자의 거 시기를 연상하리만큼 깊게 패인 눈두덩이었다. 갈색 아이 섀도 사이로 도드 라진 고랑은 음습한 상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게 했다. 무협 소설에 등 장하는 여주인공 같은 반달 모양의 아미는 선이 길었다. 새초롬히 내려 깐 두덩 밑의 갈색 동자는 금새라도 물기가 배어져 나올 듯 축축했다. 입술은 약간 도톰했으며 적당히 도드라져 있었기 때문에 도발적인 느낌을 불러일으 켰다. 전체적으로는 갸름한 얼굴형이었다. 굳이 언급하자면 동양적 미인형 이라고나 할까. '빌어먹을 날씨 때문이야.' 딱히 어떤 작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계산을 끝낸 병욱은 미용실에서 곧장 나가지 않고 출입문쪽의 휴게 의자에 앉았다. 머리 손질을 마치고 계 산을 치르는 여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건 내 스타일이 아냐. 하지만 날씨가, 그래, 날씨 때문이야.' 병욱은 미용실에서 내려가는 계단 끝에서 여자를 불러 세웠다. 몇 번의 흰소리들이 오간 후에 여자가 말했다. "아저씨, 돈 많아요?" 그날 따라 유난히 두툼한 지갑을 떠올리며 병욱은 호기 있게 말했다. "아가씰 즐겁게 해줄 수는 있어." 연수와의 만남은 그렇게시작되었다. 그러나 병욱은 연수를 전혀 즐겁게 해주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는 젬병이 였던 것이다. 언제나 떠드는 쪽은 연수였고, 병욱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연수가 하는 말이래야 시시껄렁한 얘기가 전부였다. 어느 백화점은 언제가 정기 세일 기간이고, 어느 백화점에는 어느 날 반짝 세일을 한다더라, 어느 백화점에서 세일 기간 중에 판매하는 물건은 거개가 세일용으로 따로이 제 작된 것이기 때문에 품질을 신뢰하지 못한다, 기성복은 어느 메이커가 믿을 만하고, 구두는 어떤 회사의 제품이 편안한 느낌을 주는가따위였다. 연수는 문화에 대한 관심도 주절거렸는데, 요즘 잘 나가는 배우가 누구이 며, 유명 배우가 언제 결혼한다더라, 자주 듣는 재즈 음악은 이런 것이다, 따위였다. 곰팡내 나는 서적에만 코를 처박거나 사회 운동 단체들의 행사장에 얼굴 을 내미는 일, 주일이면 종일토록 방구들에서 비비적거리는 생활이 전부였 던 병욱에게는 이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하기만 했다. 스스로가 쳐놓은 그 물 속에 갇힌 채 바동거리며 살아온 세월이 아니었던가 한탄하기까지 해야 했다. 병욱에게 있어 연수와의 만남은 분명 문화 충격이었다. 그러나 신선한 생 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연수의 지치지 않는 소비벽은 병욱을 질 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연수는 생존의 이유를 오직 소비에서만 찾는 듯했 다. 나 없이도 살 수 있어? 언젠가 병욱이 헤어지자고 말했을 때, 연수는 병욱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 해 까치발을 하며 말했었다. 흡뜬 연수의 갈색 동자에서는 광기마저 서려 있었다. 흠칫 뒤로 물러선 병욱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휴대폰은 그 녀에게만 열려 있었다. 연수와 헤어진다는 것은 더 이상 휴대폰이 세상으로 열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했다. 연수는 이 세상에서 사람이 살 고 있는 단 하나의 섬이었던 것이다. 그 날 이후 연수는 걸핏하면 우리 언제 헤어질 거야?, 하고 투정을 했다.
병욱은 신용 카드 대금을 대신 결제하는 것으로 죄갚음을 해야 했다. "알겠어? 삼촌께 말씀드리란 말야. 서울로 돌아가겠다고." 이명처럼 귓전에 앵앵거리는 소리가 있었다.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병욱은 그제야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연수를 바라보았다. 연수의 노려보 는 품새가 심상찮았다. 금새라도 후두둑 소리를 내며 우박이 내리칠 기세였 다. "우리, 걷자." 폭풍우의 낌새를 채고 서둘러 깃을 접는 날짐승처럼 병욱은 잔뜩 어깨를 움츠린 채 총총 걸음을 옮겼다. 태풍의 눈 안에 든 것일까. 당장은 뇌성 폭 우가 몰아치지는 않았다. 연수는 손에 든 핸드백을 거의 땅바닥에 닿을 정 도로 늘어뜨린 채 질질 끌며 다소곳이 뒤따르고만 있었다. 사정 거리에서 벗어난 안도감을 즐기듯 병욱은 연수를 기다려주었다. "힘들지 않아?" 병욱은 애써 다정함을 가장하며 말했다. 연수는 그러한 병욱을 흘낏 쳐다 보았을 뿐이었다. "힘들면 그만 돌아갈까? 늦어지면 서울로 가는 차편도 끊길 텐데." "무슨 까닭인지 말해주지 않았잖아. 병욱 씨가 이런 촌구석에 들어와 있 는 이유를 짐작조차 못하겠어." 연수는 가출한 남편을 어르는 아내의 목소리처럼 낮고 은근했다. 병욱은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애초에 병욱이 연수를 꼬드기겠다고 작정했을 때 이 건 내 스타일이 아냐, 라고 속으로 말했던 것처럼 연수의 갑작스런 태도 변 화는 분명 그녀의 스타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병욱은 무슨 말부터 끄집어내 어야 할 지 가리사니를 잡지 못했다. 멀뚱한 표정으로 연수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자기, 나 사랑해?" 연수가 병욱의 눈빛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러나 병욱은 고개를 돌려버렸 다. 그 놈의 사랑 타령, 신물나는 소리였다. 연수는 껌을 소리나게 씹으며 안아 달라고 말할 때에도 언제나 나 사랑해? 라고 묻곤 했었다. 그 때마다 병욱은 그녀의 귓불 가까이에 바싹 입술을 들이밀며 사랑해, 라고 속삭여 주었었다. 말랑말랑한 젤리는 삶의 필요 조건은 아니었지만 어금니 사이에 서 씹히는 보드라운 감촉이며 알금알금 배어져 나오는 단물은 사람을 기분 좋게 했다. 말하자면 연수는 젤리였던 것이다. "나 사랑해?" 연수는 대답을 재촉했다. 그러나 병욱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자기에게서 연락이 끊긴 후 자기를 생각했었어. 어쩌면 나도 병욱 씰 사 랑하고 있었던 건지도 몰라." "……" "서울로 돌아가자, 응?" 연수는 비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병욱은 여전히 장승처럼 서 있기만 했다. 갑자기 연수가 앙칼진 목소리를 뱉었다. "무슨 말이든 해얄 거 아냐?" 병욱이 뜨악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연수는 고개를 숙이 며 말했다. "미안해. 이러려고 내려온 건 아닌데……." 병욱은 호주머니 속에서 담뱃갑을 끄집어냈다. 그 새 속이 비어 있었다. 빈 갑을 꼬깃거려 길 가장자리로 집어던졌다. "이거……, 이번 달치 청구서야. 미안해." 연수가 신용 카드 청구서를 내밀었다. 그녀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나
온 것은 그녀를 만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병욱은 묵묵히 그것을 받아 들고는 방금까지 담뱃갑이 들어 있던 호주머니 속으로 쑤셔 박았다. 금액은 확인도 하지 않았다. "급여 수준은 괜찮은 거야? 시골 학교라 걱정이 돼." 연수는 자못 심각한 낯빛을 한 채 말했다. "여긴 괜찮아." 병욱은 괜한 말을 했다고 후회했다. 아니나 다를까 연수가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든든한 후원자가 있대? 시골 학교는 학교 운영 자체가 힘들다고 신문에 서 읽었어. 여긴 사정이 괜찮은가 보다, 그지?" 돌연 연수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병욱은 못 볼 것을 본 것 같은 찜찜함 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쨌든 그건 다행이다." 무엇이 다행이라는 걸까. 그녀의 신용 카드 대금 결제를 꼬박꼬박 치를 수 있게 된 것을 말하는 것일까. "그만 돌아가자. 늦겠어." "늦으면 자고 가지 뭐. 재워줄 방은 있지?" 두 사람은 왔던 길을 되짚어 가기 시작했다. 연수의 말처럼 어쨌든 다행 인 것은 있었다. 연수는 더 이상 서울로 돌아가자고 병욱에게 보채지 않았 던 것이다. 올 때와는 달리 연수는 쉬지 않고 재재거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사성점에 익숙한 중국인의 말처럼 높낮이를 탔다. 그러나 시시껄렁한 얘기 가 태반이었기 때문에 병욱이 귀담아들을 필요는 없었다. 병욱은 한편으로는 연수의 말을 흘려듣고, 한편으로는 타박거리면서도 한 가지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연수와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걷는 동안에 깜박 잊고 지냈던벌레 먹은 어금니가 쑤셨고, 그 바람에 어처구니를 떠올 렸던 것이다. 어렸을 적 집에는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또 한 명의 가족 구성원이 있었 다. 아버지였다. 병욱은 아버지를 떠올릴 때면 늘 어처구니라고 생각했다. 어처구니가 없다가 아니라 어처구니 그 자체였다. 고등학생이었을 때 병욱 은 아버지의 손에 끌려 치과에 갔었다. 반이나 어금니를 파먹은 충치를 때 우기 위해서였다. 입 속을 들여다보던 의사는 혀를 끌끌 찼다. 어떻게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했느냐고 아버지에게 퉁을 주기도 했다. 예민한 신경줄 을 자근덕거리는 치과 기계, 그러나 아버지의 눈길은 병욱의 입에서 흘러나 오는 침을 닦아 내느라 등을 구부린, 그래서 팍팍한 살결이 훤히 드러난 간 호사의 허벅다리를 쫓기에만 급급이었다. 그 며칠 뒤 석고로 땜질한 이빨에 덧씌울 사금값을 어머니께 받아든 아버지는 하루 저녁 술값으로 그 돈을 날 려버렸다. 땜방한 석고는 침에 녹아 한 겹 한 겹 엷어졌고 급기야 충치는 더 깊이 자리를 잡아갔던 것이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병욱의 충치 먹은 어 금니에 대해서는 까마귀 고기를 삶아 먹었는지 일언반구가 없었다. 더 어렸을 때 병욱은 신장염을 앓았었다. 지금에야 사실을 확인할 수도 없고,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는 노릇이지만, 어쩌면 그것은 다소 과장된 말 일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의사는 소생이 힘들 것 같다는 말을 했단다. 그러 나 아버지는 그 주 내내 집이나 병원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고, 아버지 가 돌아가신 훨씬 뒤에 술에 절은 어머니가 말하기도 했었다. 네 아버지를 만난 건 내 인생 최대의 실수였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술추렴으로 밤을 지새우곤 하던 어머니는 이렇게 푸념했다. "저 사람들 또 와."
연수가 병욱의 어깨 뒤에서 몸을 숨기며 말했다. 회상의 끈적이에서 허우 적대던 병욱은 그제야 정면에서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 했다. 흰색 바탕의 천으로 몸을 감추고, 붉은 띠로 허리를 동여맨 사람들이 었다. "왠지 섬뜩해." 무더기의 사람들은 아직 멀리 떨어져 있었고, 고함을 질러도 들릴락말락 한 거리였지만 연수는 겨우 병욱의 귀에만 들릴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말 했다. 양손으로 병욱의 허리를 감싸안은 연수의 팔에서 힘을 느낄 수가 있 었다. 사람들과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연수는 병욱의 몸에 바싹 달라붙었 다. 그 바람에 병욱의 걸음걸이가 흔들렸다. "괜찮아." 병욱의 목소리에 짜증기가 묻어 났다. 평소 같으면 말침을 놓았을 법한 연수는 수더분했다. 그러나 병욱의 말과는 달리 사정은 일시에 험악해졌다. 상대의 호흡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무리 중의 하나가 일행에서 떨어져 나오며 험악한 목소리로 말했던 것이다. "당신들 누구야? 왜 이곳에서 얼쩡거리는 거야?" 병욱은 졸지에 벌어진 일 앞에서 당황했다. 병욱의 양 허리를 부여잡은 연수의 손이 불불불 떨리고 있었다. "당신들 누구냐고 했잖아?" 험악한 목소리의 사내는 왼쪽 눈 밑에 엷은 칼자국 같은 생채기가 나 있 었다. 대뜸 어깃장 놓는 반말지거리도 그랬지만 한 눈으로 헤아리지 못할 머리수라든지 사내들의 노골적인 적의 때문에 병욱은 잔뜩 주눅이 들어야 했다. "우리는…… 산책 나왔던 길입니다." "산책?" 험악한 목소리의 사내는 두 사람을 향해 바짝 다가섰다. 주먹을 올려치면 곧장 턱에 닿을 만한 간격이었다. 병욱은 입술이 타 들어가는 듯했고, 목울 대가 움찔했다. 연수가 등뒤에서 병욱을 껴안고 있었기 때문에 행동마저도 자연스럽지 못했다. "방금 산책이라고 했나?" 험악한 목소리의 사내가 윽박지르듯 말했고 병욱은 공포에 질린 눈빛을 흘려야 했다. "이곳은 사유지야.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란 말야. 가택 침입 죄로 당신들을 고소할 수도 있어. 아니지. 그 전에 우리가 먼저 조사를 해 야겠어. 당신들 무슨 의도가 있어 이곳에 들어온 거지? 그렇지? 무엇을 캐 내려고 삵쾡이처럼 기어든 거야? 솔직히 말하는 게 좋을 걸." 험악한 목소리의 사내는 허공 중에 주먹을 휘두르며 말했다. "이곳이 사유지인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천도 고등학교의 교사인데 학교 정문으로부터 곧장 길이 뻗어 있었고, 그래서 무작정 이 길에 들어온 것입 니다. 맹세합니다." "맹세한다고? 웃기는군. 학교 접장들 중에서 당신 같은 사람은 없어. 내 가 그깟 일도 모를 것 같애?" "정말입니다. 저는 천도 고등학교의 교사입니다. 학교에 조회를 해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으실 것입니다." 험악한 목소리의 사내는 왼손 검지 손가락으로 콧잔등을 어루만졌다. 이 윽고 그가 다시 말했다. "좋아. 그럼 교장 선생님이 누구시지?" 낭패였다. 병욱은 아직껏 교장의 이름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건……" "흐흥. 감히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하겠다는 심보지? 넌 분명히 첩자야. 음 모를 꾸미려고 했던 게 분명해. 이봐. 이 놈들을 어른께 끌고 가자구." "저는 천도 고등학교의……." 병욱은 어쿠 소리를 내며 자빠졌다. 험악한 목소리의 사내가 주먹을 내질 렀던 것이다. 그러나 등짝이 땅바닥에 닿지는 않았다. 등짝에 바싹 붙어있 던 연수가 먼저 땅바닥에 뒹굴었던 것이다. 땅바닥에 뒤통수를 짓찧은 연수 의 단말마의 비명이 울렸다. "엄살 부리지 말고 일어나 새꺄." 험악한목소리를 가진 사내의 빗나간 발길질이 연수를 걷어찼는지 연수가 죽는다는 신음 소리를 내질렀다. 병욱은 엉거주춤 일어섰다. 연수는 땅바닥 에 퍼더버리고 앉은 채 눈물을 꺼이꺼이 흘려댔다. "그 사람들을 보내 주십시오." 험악한 목소리를 가진 사내의 주먹이 다시 허공으로 내지르려 했을 때 무 리 중의 누군가가 말했다. 사내와 병욱은 동시에 소리난 곳으로 고개를 돌 렸다. "학교 선생이 맞습니다." 소리의 주인공은 자리 문제로 병욱을 다짜고짜 몰아붙였던, 교무실 출입 문쪽 첫 번째 책상의 주인이었다. 병욱은구렁텅이 속에서 썩은 동아줄이라 도 움켜쥔 심정이었다. 병욱은 간절한 눈빛을 그 선생에게 흘려야 했다. "어! 이런 사람 없었잖아?" 험악한 목소리의 사내는 교무실 출입문쪽 첫 번째 책상의 주인에게 반말 을 했다. "이번 학기에 새로 온 사람입니다." "아이쿠 이거……." 험악한 목소리의 사내는 금새 사람 좋은 낯빛을 띠며 겸연쩍게 웃었다. "진작 말씀하시지 않구……. 같은 식구에게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사내가 자신의 손수건을 건네주며 입술의 피를 닦으라고 말했다. 병욱은 손수건을 받아 입 언저리를찍어눌렀다가 뗐다. 손수건에 핏자국이 선명했 다. "같은 식구는 아닙니다." 첫 번째 책상의 주인은 굳이 하지 않아도 좋을 말을 했다. 병욱은 잔뜩 긴장했다. "식구가 아니라니?" 겸연쩍은 웃음을 흘리던 험악한 목소리의 사내는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병욱을 노려보았다. 부드러워진 분위기를 탐지하며 몸을 일으켜 눈물을 닦 아내던 연수는 제풀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교감이 데려온 사람입니다." "뭐야? 그렇다면 일이 더욱 낭패잖아. 이 노릇을 어쩐담?" 험악한 목소리의 사내는 왼손의 검지 손가락으로 콧잔등을 한참동안이나 어루만졌다. 이윽고 사내가 말했다. "제가 죽을죄를 졌습니다만……. 우리……, 건설적으로 일을 해결합시다. 없었던 일로 해주신다면 교단에 몸을 담는 걸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병욱은 적이 마음이 놓였다. 교감은 이 사람들에게도 무시할 수 없는 존 재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교감을 등에 업는 것도 나쁠 것은 없었다. 자신을 농장 사람이라고 밝힌 사내는 계속해서 영접에 관한 얘기들을 주 절거렸지만 병욱은 속히 이 사람들에게서 떠나고픈 마음밖에 없었다. 사람 들과 헤어지면 이제는 곧장 서울로 돌아가고 말겠다는 마음도 다잡았다. 얼 마간의 얘기들이 더 오간 후에야 병욱은 사람들에게서 놓여날 수 있었다.
사람들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연수는 툴툴거렸다. 이제 죽는구나, 라고 생각했다는 연수를 토닥이며 학교에 가까이 왔을 때에는 해는 벌써 서산 자 락으로 넘어간 뒤였다. "서울로 돌아갈 거야. 잠시 악몽을 꾸었을 뿐이야." 희뿌염한 모색이 드리운 속에 괴물의 아가리처럼 벌리고 선 교문을 바라 보면서 병욱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난 이 꼴이 뭐야." 연수가 씨부렁거렸지만 병욱은 듣는둥 마는 둥 걸음만을 재촉했다. 막 교문을 들어서던 병욱이 뜨악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연수도 덩달아 섰다. "저 사람은 또 누구야?" 병욱의 승용차 곁에서 땅바닥에 퍼더버리고 앉아 있던 사람이 몸을 일으 켜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어둠에 익숙하지 않은 눈길이었지만 병욱 은 단박에 그 사람을 알아보았다. 교감이었다. "염병할." 병욱의 육두 문자에 연수는 몸이 오그라들었다. 경을 치고 난 뒤끝이라 또 무슨 봉변을 당하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병욱은 서슴 없이 걸음을 옮겼다. 연수는 쭈뼛쭈뼛 뒤따랐다. "큰일날 뻔 했다죠? 나에게 귀뜸만 했어도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말입니 다." "전 서울로 돌아갑니다."
[약속의 땅] 35. 호랑이 아가리 같은 교문과 승용차의 중간쯤에서 맞닥뜨린 교감과 병욱이 거의 동시에 말했 다. 그러나 교감은 걸음을 멈춘 채였고, 병욱은 계속해 내닫고 있었다. 병 욱이 교감의 어깨를 스쳐 지나려 했을 때 교감이 병욱의 팔목을 붙들며 말 했다. "애인도 먼 길 오시느라 피곤했을 텐데, 갑시다. 내가 저녁 살게요." "전 서울로 돌아가겠습니다. 이곳이 이제 넌더리가 납니다." 잠깐동안 두 사람의 눈길이 맞부딪쳤다. 교감은 붙들고 있던 병욱의 팔목 을 놓았다. 그리고 말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대신에 제가 엄 선생의 식사 한 끼 대접하는 것 정도는 허락하시겠죠?" "사양하겠습니다. 저는 이 길로 곧장 서울로 가겠습니다." "흐! ……. 제 성의를 그렇게까지 무시하깁니까? 여자분도 무척 지쳐 보 이시는데. 갑시다. 군불 땐 방이 뜨듯할 겁니다. 아랫목에서 몸도 녹일 겸 저녁 식사만 하시고 서울로 가세요. 붙잡지 않겠습니다." 병욱은 연수를 돌아보았다. 헐떡이던 숨길을 그새 진정시켰는지 연수가 그랬으면 좋겠다고 했다. 병욱은 마지못한 듯 그러마고 했다. "제 차에 함께 타고 갑시다. 여기에서 그다지 먼 거리는 아닙니다." 교감이 말했다.
"아뇨. 우리는 따로 타겠습니다. 교감 선생님의 차를 뒤따라가면 되지 않 겠습니까?" "얘기도 나눌 겸 함께 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IMF 시대에 굳이 에너 지를 낭비할 필요도 없는 게고." "식사를 마치고 곧장 서울로 돌아가자면 제 차를 타고 가는 게 편합니 다." "그렇다면 제가 엄 선생 차에 합승하죠. 그건 괜찮겠죠?" 병욱은 그것마저 마다할 수는 없었다. 엔진 시동을 걸었다. 옆자리에 앉은 교감은 양해도 구하지 않고 사이드 브레이크 뒤편에 놓인 박스의 뚜껑을 열어 카세트 테이프를 뒤적였다. 백 미러에 반사된 연수는 민물에 절은 산낙지 같은 꼴을 한 채 등받이에 널브 러져 있었다. 그새 전조등을 밝혀야 앞길을 가늠할 수 있을 만큼 세상은 어 둠에 흠뻑 젖어들어 있었다. 교감이 손에 든 테이프의 앞뒤면 라벨을 살펴 보다 카세트 테크에 밀어 넣었다. 운전 중 졸음이 올 때면 한껏 스피커의 볼륨을 키워놓고 목청껏 따라 부르곤 하던 뽕짝 메들리 테이프였다. 교감은 손 박자를 맞추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키잡이에게 방향을 지시하는 능숙 한 선장처럼 좌, 우를 외치는 사이사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교감이 볼륨을 높였다. 백 미러에 비친 연수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병욱이 슬며시 볼륨을 낮추었고 교감은 아까보다도 더 크게 소리를 조절했다. 발끈 부아가 솟았지만 내색은 않았다. 이제 곧 헤어질 사람인 것이다. "저기 보이는군." 구불구불한 산길을 힘겹게 돌아섰을 때 편평한 땅이 전조등 불빛 아래 알 몸을 드러냈고, 철판에 붉은 색 페인트로 난곡 산장이라고 쓰여진 조잡한 입간판이 보였다. 병욱은 입간판 바로 밑에서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리자 싸늘한 밤공기가 폐부를 핥았다. 숲의 그림자가 꼬리를 사린 탓일까. 바닥에는 제법 훤한 빛이 감돌았다. 병욱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신월(新月)과 만월의 중간되는 반달인 상현달 은 활 모양의 현이 위쪽을 향해 있었다. 음력으로 초이레 아니면 초여드레 쯤 되는 모양이었다. 건물의 지붕이 반들반들 빛을 발했다. 슬레트 지붕이 달빛을 반사하여 일 으키는 빛이었다. 건물의 주변으로는 돌무지처럼 군데군데 장작이 쌓여 있 었다. 건물을 옹위하듯 야트막한 산들이 주변을 둘러쌌다. 고즈넉한 분위기 였다. "옛날에는 이 주변이 공동묘지였다더군요." 교감은 괜한 말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연수가 괴성을 내지르며 병욱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병욱은 엉거주춤 연수를 감싸안아야 했다. 그들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도무지 손님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임에도 구들장은 적당히 달구어져 있었고, 격자 무늬의 문살에는 창호지가 발라져 있었다. 외풍이 없는 것인지 방안 구석구석 훈기로 가득했다. "갈비에다 밥을 시켰습니다. 된장국이 먹을 만 할 겝니다." 뒤늦게 따라 들어온 교감이 말했다. 산 속에서의 갈비, 왠지 기우뚱한 느 낌이었다. 아니, 교감의 족적이 남겨지는 모든 곳이 기우뚱했다. 산 속인지라 숯불을 예상했지만 엉뚱하게도 주인은 휴대용 가스 버너를 들고 왔다. 교감은 맛나게 고기를 씹었다. 그러나 병욱과 연수는 건성으로 젓가락질 을 했다. 바닥은 기분 좋을 만큼 뜨듯했고, 방안에 가득한 훈훈한 기운은 사람을 늘어지게 했다. 젓가락을 놓고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연수가 꾸벅꾸벅 졸 았다. 그러한 연수를 향해 교감이 야릇한 웃음을 흘렸다. 그 바람에 병욱은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고, 이제는 일어나야겠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보 다 먼저 교감이 말문을 열었다. "세상일이란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습디다." 병욱은 밭은기침을 뱉으며 사방 벽을 기웃거렸다. 얼룩얼룩한 자국들이 불빛 아래서 어슴푸레 드러났다. 지난 여름내 방안을 외가 드나들듯 하던 파리들의 자국인지도 모르겠다. "처음 엄 선생을 만났던 날, 제 심회가 어땠는지 아십니까? 연민의 정 같 은 걸 느꼈습니다. 같은 아픔을 가져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감정이었죠." 이건 또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라고 생각하며 병욱은 교감 을 쏘아보았다. 말꼬리가 이어지지 않도록 냉큼 잘라야겠다고도 생각했다. "국어 선생 앞이라 말 표현이 조심스럽긴 한데,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 고 술 한 잔 나누면서 이야기합시다. 비유가 맞긴 합니까?" 교감은 껄껄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한 교감을 향해 병욱은 입 언저리 를 실쭉였다. "저는 이제 서울로 출발해야겠습니다. 연수야!" 병욱은 벽에 등을 기댄 채 잠들어 있는 연수를 불렀다. 연수는 그새 깊게 잠들었는지 대꾸가 없었다. 병욱이 다시 연수를 소리쳐 부르려 했을 때 교 감이 손사래를 치며 말렸다. "허허, 곤하게 주무시는 걸. 서울에서 예까지 내려오자면 보통 험한 길이 아닌데. 잠시 동안이라도 내버려두십시오. 그 동안만 우리가 얘기를 나누면 되잖겠습니까?" 병욱은 교감의 말에는 아랑곳없이 연수를 소리쳐 불렀다. 연수는 놀란 기 색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나 눈두덩이 무거운 것인지 커다란 몸을 땅바 닥에 늘어뜨린 채 되새김질을 하는 황소처럼 눈까풀을 끔벅끔벅했다. "아까 그 사람들 땜에 너무 놀랬나 봐." 연수는 기어드는 소리로 말했다. 애처로웠다. 연수를 만난 이후 처음 가 지는 야릇한 마음이었다. "쯧쯧. 놀라기도 하셨겠지. 그러지 마시고 방바닥에 몸을 누이세요. 한숨 자고 나면 몸이 개운해질 겁니다." 참섭하기 잘 하는 중매쟁이처럼 말허리를 자르고 달라붙는 교감을, 병욱 은 칩칩스럽게 엉겨 붙는 파리떼를 바라보는 것 같은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교감은 그러한 병욱의 눈총을 의식하지 못한 듯 넉살좋게 바깥을 향해 소리 쳤다. "주인장, 여기 이불하고 베개 좀 가져와요." 주인이 침구를 방안에 들이기 위해 고개를 밀어 넣었을 때 술을 가져오라 는 말을 교감은 잊지 않았다. 연수는 구석진 곳에서 자리를 깔고 누웠다. 고기살을 아작아작 씹으며 교감은 연거푸 혼자서 소주잔을 채웠다. "술은 대작하는 맛으로 잔을 비우는 것인데……." 교감은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는 듯한 표정을 띈 채 말했다. 반 병쯤의 술 을 비운 후 교감은 불콰해진 얼굴로 말했다. "우스운 얘기지만, 세상을 살아간다는 게 호랑이 아가리 속에 머리를 들 이밀고 아등바등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답니다. 호랑이 아가리가 언제 닫혀질 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병욱은 잔뜩 얼굴을 찡그린 채 앉아 있었다. 얼른 연수가 자리를 털고 일 어났으면 좋겠다고만 생각했다. "엄 선생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힘든이유가 뭔지 압니까?" "……" "엄 선생은 호랑이 아가리의 이치를 깨달은 겝니다."
"……?" "가령, 산중에서 백수의 왕이라는 호랑이를 만났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 까? 죽기살기로 싸우든지, 아니면 도망칠 궁리를 해야겠죠? 어리석은 사람 들은 싸울 염을 내지도 못하고, 도망을 치다가는 뒤에서 놈이 덮치면 어떻 게 하나 망설이죠. 그 바람에 꼼짝없이 당하고 맙니다. 미련스러움이 불러 온 화근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 "엄 선생은 도망치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서울에서 멀고 먼 이곳 까지 내려왔던 겁니다." 교감은 입술에 댄 채 빨고 있던 소주잔을 소리나게 탁자 위에 내려놓았 다. 서슬에 머리 위까지 이불을 당기고 있던 연수의 몸이 꿈틀했다. 그러나 연수는 이불을 들추거나 하지는 않았다. 벌써 잠의 늪에 빠져버린 모양이었 다. "부인하고 싶으십니까?" 교감은 턱을 전면으로 돌출시키며 말했다. 불빛을 받은 동자가 희번덕였 다. 광기마저 느껴졌다. "도피처라고 찾아든 곳이 만족스럽지 못했을 겁니다. 배타적 성향을 드러 내는 사람들이 두렵기도 했을 테구요. 그래서 서둘러 발을 빼려는 것 아닙 니까?" "전 이곳에서 너무나 부당한 대우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돌아가려는 것뿐 입니다. 더욱이 오늘의 일은……." "과연 그럴까요?" "……" "술을 한 잔 하시죠. 그게 나을 겁니다." "마시지 않겠습니다." 병욱은 교감이 이죽거린다고 생각했다. 불쾌감이 체모 위를 기어가는 사 면발이처럼 꿈틀댔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두려움이란 감정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다만 짐짓 무 시하는 듯한 태도를 드러낼 뿐이죠. 그러나 현실이 호랑이 아가리 같은 것 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그 두려움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 "종교란 것도 뭡니까?" "……?" "사람들이 종교에서 기대하고 있는 것은 오직 구원밖에 없습니다. 마치, 난리통에 적의 폭격을 피해 대피소를 찾아 기어드는 것처럼 사람들은 종교 에서 안식을 얻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구원은 누가 해줍니까? 신(神)이? 글 쎄요.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 지구상에 과연 얼마나 될까요?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신을 사람들은 확신하는 듯이 말합니다. 아닐 겁니 다. 사람들은 신을 믿는 게 아닐 겁니다. 현실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신이라는 허깨비를 만들어냈을 뿐입니다. 사람들이 신뢰하는 건 '믿음' 이라는 관념일 따름입니다. 그건 엄 선생이 우리 학교에 찾아온 사실과도 맥락을 같이하는 겁니다. 호랑이 아가리를 피해서 온 것 말입니다." "도통 모를 말 투성이군요." "그렇게 말하고 싶으실 겁니다." 교감은 자신 앞에 놓여진 빈 잔에 술을 채우면서 천연덕스럽게 병욱에게 술병을 내밀었다. 병욱은 얼떨결에 잔을 받아들었다. "예전에는 난곡 산장 주변이 온통 공동 묘지였다더군요. 어쩌면 산장이 자리하고 있는 이 땅도묘지터였던지도 모를 일이지요."
교감은 주차할 때 했던 말을 상기시켰다. 병욱의 머리털이 쭈뼛 섰다. "한 잔 하세요. 온갖 두려움을 이기는 데는 술보다 나은 게 없습니다." 교감은 소리나게 술을 들이켰고, 병욱도 얼결에 잔술을 목안에 털어 넣었 다. 목구멍이 싸했고 명치끝이 찌르르했다. "죽음만큼 인간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도 없을 겁니다." "그렇겠죠." 병욱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와 동시에 두 잔째의 술을 들이켰는데 그 순간 교감의 눈빛이 빛을 냈다. 하지만 병욱은 교감의 변해진 눈빛을 알아 채지 못했다. "죽음을 대하는 방식도 가지가지입니다. 식인종 문화에 대해서 조예가 있 으십니까?" 병욱은 도리질을 했다. "제가 알고 있는 식인종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드리죠. 흥미가 있으 실 겝니다." 혐오스러우면서도 어쩐지 흥미롭게 생각되는 식인 문화. 간혹 식인종이 등장하는 영화를 보면 그들은 주로 선교사나 탐험가를 산 채로 잡아 모닥불 에 굽거나 펄펄 끓는 기름 솥에 빠뜨린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영화적 특성 이 반영된 과장적 모습이고, 대부분의 식인 부족은 오히려 죽은 자를 요리 로 즐긴다. 이런 끔찍한 식인 문화의 수수께끼는 다른 합법적인 식량이 충 분한데도, 굳이 인육(人肉)을 먹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의 사고 방식으 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식인 문화권 안에서는 일어난다. 그들은 다른 식량을 두고도 인육을 먹는다. 대부분은 전투나 폭력적 행위 를 통해 얻은 타 부족의 시신을 먹고, 때로는 자연사(自然死)한 동족을 먹 기도 한다. 여기서는 후자의 경우, 즉 자연사한 동족의 시신을 먹는 이야기 를 해 보자. 식인 문화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그의 뼈와 살을 화장한 후 얻은 재를 음료에 타 마시는 일이 제례의 마지막 절차이며 죽은 자에 대한 애정의 표시로 여겨진다. 또는, 이미 오래 전에 매장하여 부식한 시체를 새 로이 파내어 먹기도 한다. 크라키에도 족은 추장이 죽으면 시체가 완전히 마를 때까지 약한 불에 천천히 굽는다. 그리고 그 구운 미라를 집안에 매달 아 둔다. 몇 년 후, 친척들이 모여서 큰 잔치를 열고 걸어 두었던 미라를 태우고는 그 재를, 옥수수로 만든 발효 음료인 치차에 섞어 마신다. 또, 쿠니보 족은 죽은 아이의 머리카락만을 태워 생선 수프와 함께 마신 다. 어떤 부족은 매장 후 십오 년이나 경과한 시신의 뼈를 골라내어 갈아 마시기도 한다. 현대 의학자들은 이러한 행위가 인체에 대단히 위험한 것이라고 경고한 다. 자연사한 시체는 살이 남아 있지 않으므로 아무 영양가도 없고, 노화된 몸이라 전염병 등 여러 가지 질병을 유발하는 균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일례로, 죽은 친척 먹기를 관습으로 지키는 포레 족은 부족 전체가 '느린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다고 한다. 이 느린 바이러스는 암을 유발하는 치명적인 병원균으로 판명되었으나, 포레 족은 이러한 관습을 여 전히 유지하고 있다. 뉴기니의 고원 지대에 사는 여성들은 매장한 시체를 이틀이나 사흘 뒤에 꺼내어 뼈를 발라내고 채소와 섞어 요리하여 먹는데, 이 때문에 그들은 '쿠 루'라는 풍토병에 걸린다. 이 병은 일명 '웃는 병'으로 안면 근육의 경련이 그치지 않아 죽을 때에도 웃는 표정으로 죽는다고 한다. 아주 드문 일이긴 하나, 현대 문명 사회에서도 살인을 한 후 그 시체를 토막내 먹는 자들이 있다. 그런 부류의 인간들은 거의 심각한 정신 이상을 호소하지만, 생각하기에도 몸서리가 처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군가가 죽고 나면 호들갑스럽게 초혼제마저 치르는 우리네와 너무 다 르지 않습니까?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이렇게도 다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교감은 노련한 조련사처럼 말을 늦추었다. 혼자서만 떠벌리던 말을 멈추 고 병욱의 말문을 열려 한 것이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말이라……." 병욱은 더듬거렸다. 그 때 연수의 몸이 이불 속에서 움직거렸다. 일어나는 기척인가 싶어 병 욱은 반가운 마음으로 연수 쪽을 바라보았다. 교감도 흠칫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연수는 다시 곤한 숨소리를 낼 뿐이었다. "자, 한 잔 하시고 제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세요." 교감은 다시 말머리를 세웠다. 병욱은 잔을 들지는 않았지만 조금 전처럼 무조건적인 거부감은 생기기 않았다. 식인종 문화 얘기 때문에 교감의 말에 회가 동했던 것이다. 낯선 문화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사람의 호기심을 끌어당기는 법이다. "호랑이 아가리 이야기를 했었죠?" 병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이 다만 관념의 부스러기라면 호랑이 아가리도 관념의 한 조각이라 고 받아들이면 어떨까요?" 병욱은 멀뚱한 표정으로 교감을 바라보았다. 그 때 교감이 담배를 내밀었 고 병욱은 얼결에 담배를 꼬나 물었다. 교감이 라이터를 당겨 불을 붙여 준 담배에서 자줏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병욱은 흩어져 가는 연기의 알갱이를 희미하게 쫓았다. "호랑이 아가리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엿보는 자가 있는 반면 호피를 벗겨 돈을 만들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법 아닙니까?" "……?" "엄 선생은 자신을 둘러싼 현실이 두려워 이곳으로 도망쳐 왔습니다. 그 리고 이곳에서 또 다시 달아나려고 합니다. 이제 어디로 갈 거죠?" 교감은 병욱을 향해 바싹 턱을 내밀며 말했다. 병욱의 눈썹이 꿈틀댔다. "저는 달아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제가 처한 현실에 대한 부당성을 여러 번 지적했었고……." "압니다. 알아요." 교감은 손사래까지 치며 말했다. "그러나 그 부당성이란 게 뭡니까? 소외된 듯한 느낌 아닙니까?" "……" "소외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종교를 가져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설마 저더러 사이비 종교를 믿으라는 건 아니시겠죠? 제가 생각건대 이 곳은 사이비 종교가 판을 치는 것 같더군요. 오늘 낮에 제가 만난 사람들도 종교 단체의 사람들 아닙니까?" "사이비 종교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제 이야기를 들 어보면 딱히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약속의 땅] 36. 이데올로기적 종교 아직 이성이 발달하기 이전, 자연계에서 진행되는 모든 변화의 과정은 원 시 인류에게 다만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너무나 강렬한 빛으로 인하여 감히 정면으로 마주설 엄두조차 내지 못하 게 하던 햇살이 사그라지자마자 지상을 덮어 버리는 암흑의 시간, 굉음과 함께 숲에서 피어나는 연기. 땅바닥이 거북 등처럼 갈라지기도 했고 강물의 범람과 함께 곡식이 썩어 들어갔다. 갓 태어난 새 생명은 채 걸음마를 배우 기도 전에 싸늘히 시체로 변했다. 잉태와 소멸, 생산과 부패, 미지(未知)의, 또는 불가지(不可知)의 법칙만이 지상을 메우고 있을 뿐이었다. 절대자의 주사위 놀음에 움직이는 말(馬)과 같은 존재가 인류였다. 이 때부터 인간의 역사에 제천 의식(祭天儀式)이 등 장했다. 존재 너머의 존재자에 대한 경외심을 보여주고 분노를 달래주는 일, 그것이 곧바로 제천 의례였다. 집단적 의례였던 제천 의식에서는 의례를 주관할 주체자의 필요성이 대두 되었고, 이른바 제사장 또는 사제자가 나타났다. 사제자에게 주어진 역할은 신과 인간의 '중개인'적 역할이었다. 하늘의 명을 받아 인간에게 그것을 전 달해 주어야 했으며, 인간의 말을 하늘에 보고할 수 있는 자라야 했다.(오늘 날의 교황의 역할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따라서 교황이란 전통적 의미에 서 본다면 샤먼에 다름 아니다.) 의식 절차를 진행함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의례 자체의 신비성을 보장받는 일이었다. 사제의 위치에 오를 수 있는 자는 고작 명상가이거나 아니면 점성술가, 또는 광대와 같이 잡희(雜 )에 능란한 자, 범부(凡夫)의 감탄을 자아낼 수 있는 막강한 힘의 소유자였을 뿐, 진정한 의미에서 신과 의 의사 소통이 가능했던 자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적 의례는 내용성을 담보하는 의식이 아닌, 형식이라는 외피에 치우친 의식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내용성을 확보하기 위한 그들의 각고의 노력이 있 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사제자는 필연적으로 명상가이다. 모든 명상가가 사제는 될 수 없지만 모든 사제자는 명상가이다. 우중이 사제의 말에 귀를 열고, 마음을 열 수밖에 없는 노릇은 그들의 말씀이 곧 깊은 명상에서 나온 울림이 큰 말인 까닭이다.(오늘날 스님의 '말씀'이, 또는 목사나 신부의 '말 씀'이 대중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깊은 사색의 시간이 없이, 경전이나 성경을 피상적으로 읽고, 귀동냥으로 얻은 지식을 진리인 양 떠벌 리고 있기 때문이다. 명상 없이 떠벌리는 말은 정치가의 말처럼 그저 공허 할 뿐이다.) 사제자는 신단 또는 신전 안에서 옛날과의 교통(交通)을 했다. 그것은 옛 사제자와의 대화의 시간이며, 옛 천체의 흐름에 대한 파악의 시간이며, 옛 천재지변의 숙지의 시간이며, 주어진 문제의 극복을 위해 성현의 말씀에 귀 를 기울이는 시간이기도 했다. 오랜 명상과 전례의 파악을 통하여 사제자는 난제에 대한 나름의 해법을 발견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이것을 합법화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 것은 신의 말씀이었다고 스스로 확신을 얻어내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하 지만 어떤 경우에도 신적인 존재가 재림하는 경우는 없다. 그러므로 신의 대역이 필요했다. 신의 대역이란 사제자 자신이 곧바로 신의 역할을 떠맡든 지, 아니면 사제자와 가장 가까운 위치의 사람들이 신의 역할을 대신 맡아 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신전 안에서 오랜 기간 대화(마주 보고 말을 나눔)와 대무(對舞, 마주 보고 춤을 춤), 대창(對唱, 마주 보고 노래를 함)을 하였으 며 그 결과 자신들의 신념 또는 판단이 옳음을 인식한 후에야 신전에서 벗 어났다.
이윽고 사제가 신전에서 나온다는 전갈이 왔다. 일순, 마을 또는 부족, 국 가의 모든 구성원이 침묵에 휩싸여 든다. 사제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은 그 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었고, 그들의 미래의 지남차(指南車)였다. 사제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기나긴 수행을 통해 얻은 신의 말씀을 백성 에게 전달했다. 문제의 해법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 구성원들은 절망하지만 이러한 일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했다. 천체의 흐름을파악할 수 있 는 노련한 점성술가이며, 선인들의 길을 터득한 학자이며, 백성이 무엇을 원 하고 있는가를 잘 파악하고 있는 수완 있는 정치가(통치권자)인 사제는 결 코 백성이 실망할 수 있는 말을 뱉어내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제의 입에서 미래에 대한 안정이 약속되었으며, 신들이 결코 그들을 버리지 않았음을 확 인했고, 풍족한 농산물의 수확이 가능할 수 있음을 받아들인 백성들은 축제 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신비성은 무엇보다도 반복을 통해서만 형성되는 법이었다. 반복적인 행위 는 회의에 젖어들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며, 타성에 젖게 하고 은근한 기 다림을 불러일으키는 묘약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종교 의례의 가장 큰 특 성은 그 행위의 반복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원시 종교가 발생했을 무렵, 신앙의 대상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분명 존재하는 모든 외물(外物)이었을 것이다. 때로는 작렬하는, 때로는 몇날몇일 을 시커먼 빛으로 인간계를 굽어보던 해와 달, 식물을 온통 불태우거나 썩 어들게 하는 불과 물, 인간보다 몇십 배나 강한 힘을 소유하고 있던 동물, 온갖 독소로써 생명을 위협하던 식물, 숲의 정령들. 이 모든 것은 인간에게 두려움을 불러 일으켰고 따라서 이들 모두가 숭배의 대상이었다. 삼국 시대로 들어서면서 우리 나라의 통치 체제는 왕정 사회로서의 모습 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제정 일치(祭政一致)의 시대에서 제정 분리(祭政分離)의 시대로의 이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바로 사제 의 몰락을 의미하는 일이기도 했다. 왕은 천체의 운행을 탐구하기 위한 탁 월한 점성술가일 필요는 없어졌으며, 더구나 명상가가 되어야 할 의무도 사 라졌다. 통치력, 다시 말해서 현대적 의미의 리더십만 갖춤으로써 얼마든지 효과적인 통치가 가능해졌던 것이다. 이제 통치의 핵심은 신의 뜻을 수용하 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다스리는 것으로 변화했다. 그 역할을 성실히 수행한 것은 불교였다. 당시 한반도에 전래되었던 불교 는 '대승 불교'의 갈래였는데 삼국 시대의 통치권자들은 통치 이념으로써 적 절하게 불교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호국 신앙으로서의 '충' 사상을 주입시킬 수 있는 가치면에서뿐만 아니라, 내세를 중시하는 이념 체계는 현실의 고통 을 인내하게 만듦으로써 체념과 달관의 이데올로기를 심기에 매우 긍정적인 작용을 했던 것이다. 불교 의식에서 가장 중시되는 형식 중의 하나인 탑돌 이와 같은 것은 민중의 공동체적 의식을 고양할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었 다. 조선의 건국과 함께 중세 사회에서의 종교적 의미와 성격, 외피 등은 엄 청난 변화의 과정을 겪게 되었다. 이성계의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 때문이 다. 유교 역시 종교적 지향점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유교 자체는 토착 종교인 샤머니즘이나 토테미즘, 그리고 외래 종교의 정착 형태인 불교 와 그 성격을 비교해 본다면 종교적 성격이 현저히 약화되고 있음을 감지하 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유학을 종교적 차원이 아닌 학문적 차원으로 해석하는 이유는 참선과 명상 등의 수양 방법이 아닌 문헌을 통한 지식의 축적에 보다 그 가치를 인정하는 까닭이다. 거기에 수신제가 치국 평천하 (修身齊家治國平天下)가 학문의 궁극적인 본령인 것처럼 내비치게 된 것도 유학을 선뜻 종교의 갈래로 단정짓는 데 장애 요소가 된다.
그러나 유교 역시 종교의 한 갈래임에는 분명하다. 제사 의식에서 그 주 된 근거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종교 의식이라고 불려지는 것들이 절대자를향한 기복 신앙이었다면, 민간의 제사에서는 조상신을 향하여 현 세의 축복을 갈구했다. 결국 주술적 성격에서는 일치한다. 차이점이 있다면 내세를 중시하느냐 현세를 중시하느냐의 태도상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우리 사회는 이른바 변혁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격동 기의 미래에 대한 불안은 필연적으로 믿음을 갈구하게 되었다. 내적 불안감 은 알 수 없는 힘에 의지하고픈 강렬한 충동을 느끼게 함은 어찌 보면 인지 상정인지도 모르겠다. '증산교'의 발흥이나 '정감록'류의 도참사상(圖讖思想) 의 유행, 불교적 '미륵 신앙'이 휩쓸게 되었다. 거기에다 외래에서 유입된 '천주교'는 들불처럼 일어나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었다. 현대 한국의 종교 문화는 갈래의 다양성이라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다 신교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었던 원시나 고대 사회를 제외하면 아마 한국처 럼 갖가지 종교가 혼재한 사회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 이십 세기의 현대 종 교만 나열하더라도 유교, 불교, 기독교, 천주교, 천도교, 원불교, 대종교, 대 순진리교, 남묘호령계교, 여호와의 증인, 도참사상, 미륵 신앙, 풍수설, 무속 등등 나열하기 벅찰 지경이다. 여기에 유사 종교까지 언급한다면 그 숫자는 과히 상상을 불허한다. 한국의 현대 종교를 언급하는 데 있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이비 종교의 범람이다. 얼마 전, 미국에서 집단 자살로 인해 그 실체가 알려진 '천국의 문' 사건이 있었지만 한국도 사이비 종교의 천국 으로 알려져 있다. 단말마적인 사건으로 매듭지어져 버렸지만 '아가 동산' 사건은 한국판 사이비 종교의 대표적 유형이었다. 범부를 신격화하고 신성 시하여 맹목적으로 추앙하는 것이 이러한 종교의 특성이라고 할 것이다. 대 개의 경우 유사 종교의 교주는 스스로를 신의 대리인으로 자처한다. 마치 단군 사제처럼 신과 인간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기말이다. 그것도 백 년 주기가 아닌 밀레니엄이라고 일컫는 천 년 주 기의 세기말이다. 떠오르는 태양의 시간이 아니라, 이윽고 황혼이 찾아올 것 이며, 언제 끝날지 모를 암흑의 시간이 도래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세상을 낙관으로만 바라볼 수 있단 말인가. 흔히 세기말이란 용어는 부정과 불확실, 암담함을 연상하게 한다. 퇴폐와 좌절, 감상, 허무라는 단어들을 떠올리게 한다. 종말에 대한 천착을 강요하 기도 한다. 이십일 세기의 황홀한 미래는 종말적 분위기의 참담한 소용돌이 이후에나 가능한 시간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게 될 때, 사람들의 관심 세계는 사회적 관심 에서 실존적 관심으로 전이될 것이다. 그 때에 실존적 자아가 직시하게 될 내성(內性)의 파괴. 사회적 존재로서의 구원의 길이 막혀 버렸음을 알아차렸 을 때, 우중이 심취하게 될 유일한 대안은 무엇일까? 그것은 종교에의 경도 가 아닐까? 아니, 그밖에는 방법이 없다. 그러나 기성 종교가 흡족한 대안은 되지 못한다. 그 첫 번째 이유는 기성 종교에 대한 식상함이다. 신비성의 외장이 벗겨지고 사제자의 사생활이 폭 로되었으며, 합리성을 바탕으로 하는 학문의 성과가 축적되어 나타난 결과 이다. 다음으로 기성 종교의 내세 지향성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내세의 존재 자체를 회의하고 있다. 세 번째 이유는 두 번째 이유와 그 맥락을 같이 한 다. 현대인들은 현실에서의 만족을 보다 추구한다. 불확실한 미래에서보다는 현재에서 가시적인 행복감을 맛보고자 하는 것이다. 네 번째 이유는 기성 종교의 타락상때문이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면 사람들은 '대안 종교'를 갈구하게 될 것이다.
사이비 종교가 기승을 부리게 된다는 말이다. 사이비 종교는 기성 종교와는 외형을 달리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기성 종 교의 전파는 소외된 자들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이 때의 소외의 개념은 권력에서의 소외와 경제적인 의미에서의 소외를 뜻했다. 그러나 이십 세기 말의 소외는 정신적 공황에서 출발할 것이다. 만약, 이러한 가설이 타당하다 면 새로운 종교의 발흥은 지식인 계층을 토대로 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 것은 이데올로기의 변형 형태에 다름 아니다. 이데올로기적 종교, 그 위력은 가히 엄청날 것이다.
[약속의 땅] 37. 홧김에 서방질
"결국 종교란 게 무엇입니까? 인간의 필요성에 의해서 날조된 것이고, 거 기에다 화려한 치장을 입힌 정도 아닙니까? 마음먹기에 따라서 종교를 얼마 든지 이용할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병욱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관념이니 종교니 하는 따위의 허섭쓰레기 같 은 일들에 휘둘리고자 서울에서 불원천리하고 산골 마을로 내려온 것이 아 니었던 까닭이다. 병욱이 원했던 것은 충동적으로 이루어진 연수와의 만남 과 같이 말랑말랑한 젤리였지 게딱지 같은 논리의 틈새를 파먹는 일이 아니 었다. "전 지금 너무 피곤합니다. 그러니 그 얘긴 이쯤에서 그만 두었으면 좋겠 습니다." 병욱은 짐짓 피곤한 기색을 내보였다. "호랑이 아가리 사이로 다시 머리를 들이밀겠다는 말입니까? 날 잡수, 하 고서 말이죠?" "저는 현실을 그만큼 각박하게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산첩첩 물겹겹한 이곳까지 내려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 피소를 찾았던 것이 아닙니까?" 병욱은 대꾸할 말이 선뜻 떠오르지 않아 머뭇거렸다. 교감의 말에 대해 전적으로 부정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병욱은 부지중에 움쭉거리던 손 놀림을 멈추었다. 습관적으로 빈 잔을 손에 쥐고서 제자리 맴을 시키고 있 었던 것이다. 그제야 무의식적으로 몇 잔의 술을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아연실색했다. 밤중이라도 서울로 돌아갈 요량이었던 것 이다. "조금 쉬시다 올라가세요. 숙녀분도 저렇게 피곤한 기색이니." 교감은 술병을 내밀며 노회한 정치가처럼 수완 있게 말했다. 병욱은 쭈뼛 거리며 잔을 받았다. 그러나 입으로 가져가지는 않고 탁자 위에 조용히 내 려놓았다. 교감은 수증기가 뭉글뭉글 뿜어져 나오는 밥솥에 뜸을 들이듯 한순간 말 을 멎었다. 병욱은 그 사이를 타서 서울에서의 일상을 떠올렸다. 매캐한 배기 가스만 큼이나 가슴을 옥죄던 갖가지 일들. 섹스와 배반, 냉혹한 밀림의 생존 법칙
만이 존재하는 공간. 호언장담과 감언이설, 면종복배(面從腹背)의 거리가 서 울이었다. 속된 말로 눈뜨고도 코 베어 가는 세상이라지만 오직 잔인한 밥 그릇 싸움만이 그곳에 있었다. "내, 제안 하나 하리다." 이윽고 충분하게 뜸이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교감이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 다. 병욱은 말대답 없이 교감의 눈길을 맞받았다. "어느 누구도 엄 선생을 무시하지 못할 자리를 만들어드릴 테니 귀의하세 요. 믿음을 가지건 말건 그것은 전적으로 엄 선생이 결정해도 좋습니다. 다 만, 믿는 체만 하시면 됩니다." "그렇게까지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동병상련 때문이라면 되겠습니까?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안다고 하잖습 니까?" 교감은 사람 좋은 낯빛을 띤 채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 바람에 모퉁이에 서 잠들어 있던 연수가 꿈틀댔다. 하지만 이내 잠잠했다. 가늘게 코고는 소 리가 들렸다. "사실은, 그럴 듯해 보이는 교리를 만들어내어야 하는 게 저에게 맡겨진 과업입니다. 그걸 엄 선생이 도와주셔야겠습니다. 농장에도 사람이야 많지만 믿음에 흠뻑 젖어든 사람은 치장을 할 줄 모르는 법이거든요." 교감의 치켜 뜬 눈초리가 파르르 떨리는 듯했다. "어떻습니까? 서울에서는 일찍이 가져보지 못했던 권력과 부를 움켜쥐는 겁니다. 그 다음은 안락만이 엄 선생의 주변에 그득할 겁니다. 원하신다 면……." 교감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여자를 마음껏 취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세계가 미륵 세계이고 이사야 서의 공간 아닙니까? 내세? 흥. 그딴 것은 없습니다. 죽어보지도 못한 놈들 이 어떻게 사후의 세계를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불교나 기독교 같은 것도 관념의 덩어리일 뿐입니다. 우리는 또 다른 관념을 창조해내는 대신에 안락한 생활을 보장받는 겁니다. 제가 엄 선생의 안락을 보장하겠습 니다." 병욱은 고개를 흔들려했지만 그보다 먼저 교감이 병욱의 머리채를 낚아채 듯 말했다. "자신 없다는 말은 하지 말아요. 유불선 사상이나 기독교 사상, 하다 못해 도참사상 등의 찌끄러기 정도는 알고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럴 듯하게 혼합 만 하면 되는 겁니다. 비빔밥이 때로는 더 맛이 있어요. 포장만 번듯하면 속 도 알차 보이는 법 아닙니까?" "절더러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일에 앞장서라는 말입니까?" "그렇다고 호랑이 아가리 속에다 다시 머리를 들이밀겠습니까?" "……" "새로운 종교를 창건하자는 게 아닙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신도수도 충분 하고 재력도 있습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연결 고리만을 만들자는 겁니다. 단지 그 일을 엄 선생이 해주면 되는 겁니다." "……" "도와주시겠습니까?" 교감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은근했다. "제 양심과 배치되는 일이기 때문에 할 수 없습니다." 병욱은 고개까지 가로 저으며 말했다. "양심의 문제라면 전혀 걱정할 것 없습니다. 신도들에게 희망을 심어줄 수 있다면 좋은 일 아닙니까? 해갈시키는 한 바가지의 물처럼, 문명 생활에 찌들린 사람들에게 정신적 위안을 선사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공익적인 일
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 일은 정치인도, 경제인도, 그 어떤 사람들도 감 히 해내지 못하는 일입니다. 우리만이 해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전 못합니다." 병욱의 태도는 단호했다. "급하게 서둘 건 없고 천천히 생각하세요. 내일 다시 만나서 이야기합시 다." 교감은 몸을 일으켜 문을 밀치려 했다. 그 때 병욱이 말했다. "내일 아침이면 저는 서울에 있을 겁니다. 교감 선생님을 만날 일은 없을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호랑이 아가리 속으로 돌아가게 될까요?" 교감은 야릇한 웃음을 흘리며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병욱이 다시 말했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삼촌도 신도입니까? 그래서 저를 이곳에 내려오 게 한 겁니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죠. 중요한 것은 엄 선생의 판단일 뿐입니다. 좋은 밤 되세요." 교감은 연수를 힐끗거리며 병욱을 향해 한 쪽 눈을 찡긋 감았다 떴다. 그 리고는 문을 밀치고 나갔다. 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병욱은 한 가랑이에 두 발을 꿰어대듯 뜰 로 달려나갔다. 벌써 차의 꽁무니가 저만치 달아나고 있었다. 병욱은 차의 꽁무니를 향해 욕지거리를 뱉었다. 그 차는 병욱의 차였던 것이다. "무슨 일 있어?" 방으로 돌아왔을 때 연수가 잠에서 깨어나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 다. 이부자리는 정액을 닦아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휴지 조각처럼 한쪽 구석 에서 널브러져 있었다. 병욱은 연수를 향해 눈을 흡뜨며 말했다. "아까부터 깨 있었던 거야?" "자기 때문에 깼어. 또 일이 생긴 줄 알고 놀랐단 말야." "오늘 중으로 서울에 돌아가긴 틀렸어. 교감이 내 차를 끌고 가버렸어. 빌 어먹을." "그럼 자고 가지 뭐. 급할 것도 없잖아." 병욱은 연수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연수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방구들이 뜨뜻해 좋아. 꼭 외가에 온 기분이야. 외가 드나들듯 한단 말 알지?" 병욱은 대꾸도 않고 팔베개를 한 채 방구들을 졌다. 연수의 말처럼 구들 장은 기분 좋을 만큼 달구어져 있었다. 금새라도 눈까풀이 감겨질 것 같았 다. 그러나 병욱은 애써 눈자위에 힘을 주었다. 태평하게 잠을 청할 계제가 아니었다. "들판에서 섹스를 하면 강한 아들을 얻는대. 들판이 아니래도 이런 곳에 서 섹스를 하면 튼튼한 아들을 얻겠다. 그지? 요즘은 아파트의 바닥에도 황 토를 깐대. 돈은 비싸게 먹히겠지만 건강에 좋다니까 너도나도 그 난리들이 지 뭐야. 옛날 사람들이 병치레가 적었던 것도 이런 온돌방에서 거처했던 때문일 거야." 병욱은 연수를 등지고 눕기 위해 모를 세웠다. 물색도 모르고 지껄여대는 연수가 당최 마뜩찮았다. 짜증기가 발끈 돋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연수는 뇌관을 건드리기만 하면 언제라도 터질 수 있는 부비트랩 같은 여자였다. 자칫 연수의 신경줄을 긁었다가는 한밤내 무자비한 언어 공습을 감내해야만 하는 것이다. 지금은 그와 같은 성가신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머리 속이 엉킨 실타래처럼 혼돈스러웠다. "낮에 만났던 그 사람들, 사이비 종교 신도들 맞지? 내 느낌이 틀림없다
니까. 얼마나 놀랬던지 지금도 가슴이 쿵쾅거려. 내 심장 박동 소리 들리지? 심장 뛰는 소리 들리냐니깐?" 병욱은 눈을 내리깔고 짐짓 잠든체했다. 그러자 연수는 병욱의 등뒤에 바싹 다가붙어 병욱의 손을 그녀의 가슴에 대려했다. 그러나 병욱의 손길이 닿은 곳은 심장이 있는 곳이 아니라 사발 대접을 엎어놓은 것 같은 커다란 유방이었다. "심장 뛰는 것 느껴보라니깐." 연수는 병욱의 손목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어 그녀의 사발 대접 위로 끌 어당겼다. 병욱의 입 속에 칡내가 고였다. 그러나 그것은 달짝지근한 맛이 아니라 칡을 베어 물었을 때의 첫물인 쓴내였다. 병욱의 얼굴이 기기묘묘하 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연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연수는 병욱의 등뒤 에 있었고, 병욱은 방바닥을 향해 고개를 잔뜩 수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으응?" 연수는 비음 섞인 소리를 냈다. 그때 병욱이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 서슬 에 연수의 몸이 바닥에 처박혔다. 나뒹군 연수의 눈알이 똥그랬다. 병욱은 황소가 영각을 하듯 거칠게 숨을 뿜어내긴 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 다. 팽팽한 긴장감 끝에 연수가 말했다. "왜 그래?" "생각할 게 많아. 그러니 날 내버려두면 좋겠어." 연수의 눈이 금새 젖어들었다. 고등어 살에 박힌 부엌칼을 보고서도 눈물 이 흘러내릴 것 같은 애처로운 눈이었다. 병욱은 연수의 눈길을 맞받아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다시 방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녀에게는 등을 돌린 채. 연수가 벽을 향해 기어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병욱은 질끈 눈을 감았고, 연 수는 말이 없었다. "이곳에까지 내려와서 청구서를 내밀었다고 그러는 거야? 그럼 날더러 어 쩌라는 거야? 개인 파산 청구라도 해?" 연수의 앙칼진 목소리에는 가는 터럭마저 한 칼에 벨 수 있는 예리한 칼 날이 느껴졌다. 병욱으로서는 한껏 용트림을 했지만 그 정도로써는 약발의 효험이 없었던 모양이다. 연수의지청구는 계속되었고 병욱은 호흡이 막히 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연수의 씨부렁거림은 끝간데를 몰랐다. "안아 줘. 응. 그래야 잠들 수 있을 것 같애." 혼자 떠드는 일에 지쳤는지 연수가 병욱의 몸을 흔들어대며 말했다. 하지 만 병욱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안아 주면 옷을 벗기려 들 것이고, 그러다 보 면 살을 섞자고 달려들 여자였다. "나, 지금 너무 심각해. 제발 그냥 자자. 응?" "그깟 섹스 한 번 하는 게 뭐 그리 힘이 들어?" 연수는 급기야 속내를 드러냈다. "미안해.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아." 병욱의 고개는 여전히 연수에게 열려있지 않았다. "혹시 고자나 임포 아냐? 남자들은 섹스를 못해 안달이라는데 섹스 이야 기만 나오면 뻣뻣하게 굳어지는 이유가 뭐냔 말야? 남자들은 단지 섹스를 위해 사랑을 한다는 말도 못 들어봤어?" '홧김에 서방질'이라고 병욱은 연수의 가랑이를 올라타고 싶은 충동이 일 었다. 허리통 아래에서 헉헉대는 연수를 마음껏 조롱해 주고도 싶었다. 그러 나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자리 보전만을 한 채 살아가는 누나를 떠올렸다. 누나의 그림자는 서울에서 천 리 길이나 떨어진 이곳에까지 길게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 연수는 새벽녘에야 씨근거리며 잠이 들었다.
[약속의 땅] 38. 단 한 번의 교미를 위해 12. 얼핏얼핏 잠기가 할퀴었다. 방바닥은 아직도 식지 않았고, 달아오른 온기 는 텁텁했다. 꽤 두꺼운 구들장을 쓴 모양이었다. 몸을 일으켰다. 찬바람이 라도 쐬고 싶었던 것이다. 후텁지근한 방안의 공기와는 아랑곳없이 섬돌을 디뎠을 때 찬바람이 해일 처럼 덮쳐왔다. 어금니가 아릴 지경이었다. 발정난 수캐처럼 봄날씨란 건 믿 을 게 못 되었다. 몸이 오그라들었지만 그런대로 개운한 맛이 있었다. 달빛이 배인 마당은 돌과 맨 흙을 구별하리만큼 훤했다. 달빛에 젖으면 술보다도 독하다고 했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군데군데 퍼즐 조각 같은 구름들이 해초처럼 일렁거렸지만 달은 그딴 것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군자 연(君子然)하게 제 갈 길만 쫓고 있었다. 달은 묘한 마력이 있다. 봄의 달은 봄의 달대로, 가을의 달은 가을의 달대 로. 흐드러지게 핀 오얏꽃 위에 내리비치는 봄의 달빛은 까닭 없이 사람을 애수에 젖게 한다. 첫사랑의 연인을 못 잊어 가슴을 쥐어뜯게 하는 비통에 젖은 달빛이다. 풀밭에 드러누워 팔베개를 한 채 올려다보는 여름 달은 마 음껏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한다. 맹꽁이와 개구락지가 쉬지 않고 울어제낌에 도 도대체가 소란스럽지 않다. 무자비한 모기의 공격도 달빛 아래서는 성가 시지 않다. 내 님은 누구일까? 저 우주 너머에는 어떠한 생명체가 살고 있 을까?를 생각하는 계절이 이 계절이다. 온갖 상상에 젖어있던 사람들은 제 풀에 곤하게 코를 고는 법이다. 가을의 달은 제 아무리 무뚝뚝한 사람일지 라도 시심(詩心)에 젖게 한다. 제 아무리 목석 같은 사내일지라도 마당귀에 내려앉은 달빛에 젖어 순이의 여리디 여린 팔목을 잡게끔 충동하는 달빛이 기도 하다. '순이, 벌레 우는 고풍(古風)한 뜰에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 왔구 나.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아 있다.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고 장만영은 노래하지 않았던가. 겨울의 달은 비수로써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 있 다. 오랫동안 찾아 뵙지 못한 노모를 떠올리고, 눈시울을 젖게 하는 달이기 도 하다. 새삼 잊고 지냈던 전의(戰意)를 일깨우기도 하는 달이다. 병욱도 꼭 한 번 독하게 살아온 인생이 있었다. 어쩌면 겨울 달빛이 있었 기에 가능했던지도 모르겠다. 대응사(大應寺)라는 절을 찾아든 것은 대학삼 학년 겨울 방학 때였다. 사법 시험 합격이라든지 미루었던 장편 소설의 탈고라든지 하는 원대한 꿈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일종의 도피 행각이었다. 집안에 는 어머니가 만들어내는 눅진눅진한 분위기에 절어 곰팡내가 더끔더끔했다. 다용도실에, 베란다에 빈 소주병은 나날이 쌓여갔고, 하루가 멀다하고 어머 니는 누나를 볶아댔다. 화냥년, 집안 말아먹을 우환 덩어리, 목숨줄이 더럽 게도 긴 단백질 덩어리, 어머니의 누나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럴 때 마다 누군가 도와주지 않고서는 기동마저 할 수 없었던 누나는 담요 끝자락 을 잘근잘근 씹으며 울음을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어머니는 당신의 배속에 서 열 달씩이나 누나를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은 것처럼 보였다. 병욱은 손에 집히는 대로 책을 아무렇게나 륙색에 집어넣고 집을 나섰다. 무작정 올라탄 시외 버스의 종착지에서 지나는 사람에게 물어 가까운 절에
찾아든 곳이 대응사였다. 시외 버스 주차장에서 걸어서 고작 삼십여 분의 거리. 다행히도 비워진 공부방이 있었다. 얼마 전까지 고시를 준비하던 학생 이 머물던 방이라 했다. 디룩디룩 살점이 붙은주지 스님은 학생도 고시 공 부하는가? 라고 물었었다. 병욱은 잠시 쉬고 싶어서 왔습니다, 라고 했다.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던 주지 스님은 한 달치 방세로 지불한 지폐를 꼼꼼 히 세어보고서는 더 이상은 아무런 말도 않고 사바 세계에 볼일이 있다며 휑하니 산문(山門)을 나섰다. 앉은뱅이 책상 위에다 륙색을 까뒤집어놓으니 온통 전공 서적뿐이었다. 하지만 병욱은 책장을 뒤적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애당초 어떤 목적이 있어 서 절간으로 기어든 것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처음 며칠간은 목탁 소리에 허둥거리며잠을 깨었다가는 이내 방바닥에 등을 눕히곤 했다. 아침 예불과 공양 사이에 간격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가 까무룩히 잠이 들라치면 주지 스님이 방문을 홱 열어 젖힌 채 고함을 내 질렀다. 아침밥 먹으란 소리 안 들려? 병욱은 눈곱이 떨어지지 않은 얼굴로 몇 명의 식객들이 함께 하는 밥상머 리에 앉아야 했다. 잠이 채 덜 깬 데다, 기미 투성이의 얼굴에 앞이빨이 두 개씩이나 시커멓게 타 들어간 공양주 보살이 지은 밥은 목구멍으로 당최 넘 어가지 않았다. 놋그릇에 플라스틱 주걱으로 밥을 꾹꾹 눌러 담으며 공양주 보살은 매번 많이 드세요, 라고 말했다. 그 때마다 밥을 지을 때 콧물이나 빠진 것은 아닌지 애꿎은 상상을 해야 했다. 그나마 밥상머리에서 물러나고 보면 소일거리가 없었다. 빈둥거리다 보면 하루해가 저물었고, 밤마다 손의 관절을 꾹꾹 누르거나 발가락을 꼼지락거 리며 텅 빈 벽을 마주하곤 했었다. 그렇게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병욱은 소변이 마려워 화장실을 찾았다. 산간의 암자들이 으 레 그렇듯 대응사도 수세식 화장실이 아닌 퍼세식 변소였다. 거기에다 천장 에는 겨우 오 촉짜리 알전등이갓난아기의 꼬치처럼 달랑 매달려 있었다. 서울 생활에 익숙한 병욱에게 퍼세식에서 용변을 본다는 것은 너무나도 낯 선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녁 해가 짐짓할 때쯤이면 하루를 마감하기 위해 일기를 쓰듯 병욱은 오줌을 흘려야 했다. 마지막 한 방울의 물기까지 몸에서 짜내기 위해 끙끙 소리까지 내며 용을 쓰곤 했다. 그러니까, 그 날 밤 소변을 보기 위해 화장실을 찾은 것은 의지력에 쿠데타를 감행한 본능에 굴복한 하나의 사건이었던 셈이다. 성기 끝에 묻은 물기를 떨어내고 지퍼를 올린 후 마당에 나섰을때 병욱 은 우연히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아직은 덜 여문, 어쩌면 농익어 한쪽 살이 떨어져나간 겨울 달을 발견했던 것이었다. 그것은 가슴을 후벼파는 조각칼 같기도 했고, 생살을 도려내는 회칼 같기도 했다. 왠지 모를 아픔이 가슴속 에서 찡하게 묻어 났다. 엄마. 병욱은 철이 든 이후 처음으로 어머니가 아닌 엄마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금새라도 눈물이 묻어날 것만 같았다. 방으로 옮기려던 발이 산문(山門)을 나섰다. 차마 방구들에서 뒹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산문 밖은 좌우로 명암 이 교차하고 있었다. 왼편은 어둠을 잔뜩 집어삼킨 수풀이 산등성을 타고 있었지만 오른편으로는 넓지는 않으나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확 트인 들판 에는 거칠 것 없는 달빛이 쏟아 내렸다. 애써 떨쳐내려 해도 끝내 떨쳐낼 수 없는 어머니와의 끈끈한 굴레. 급기야 병욱의 눈에서는 뜨겁고도 미적지 근한, 마침내 차가워질 수밖에 없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눈물의 체감 온도가 변해감에 따라 병욱의 감성적 치달음이 냉정하고도 객관적인
시각을 갖게 했다. 어머니의 술추렴은, 어머니의 누나에 대한 끝없는 악다구니는 어머니의 원죄만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들씌운 업보였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위해 남 긴 덫이었고, 이 땅의 모든 순종적 여성들이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는 늪지 였다. 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거둘 때, 그래도 가장으로서의 한 가닥 책임감 이 남아 있었던지 삼촌께 어머니를 부탁했었다. 네 형수 불쌍한 여자다. 날 만나서 여태껏 고생만 했다. 보살펴 주려무나. 내 자식들도 너에게 부탁한다. 한 번도 아비 노릇을 제대로 못했구나. 부탁 한다. 동생아. 그러나 삼촌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지도 않았다. 일생을방탕하게만 살아온 형에 대한 무언의 반항이었던 것일까. 그럼에도 삼촌은 우리 가족을 저버리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기제사에 참석하려고 무 진 애를 썼고, 우리 가족의 생활비에도 적잖은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병욱 이 어설프게 학생 운동에 참가하여 철창 신세를 질 뻔했을 때도 삼촌은 조 카를 수완 좋게 빼내 주기도 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러한 사실이 못마땅했을 것이리라. 한 번도 남편에게 살가운 대접을 받아보지 못한 터에 나 어린 시동생의 도움으로 연명한다는 것이 수치심을 자극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하는 일은 어려운 것이 아니 었다. 삼촌은 병욱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었다. 체형에 꼭 맞는 기성복 을 찍어내듯 병욱에게 사회의 보편적 규범에 한 치의 어긋남이 없는 생활을 강요했던 것이었다. 병욱은 어머니를 떠올리며 빈둥거리기만 한 대학 삼 년의 생활을 뼈저리 게 곱씹어야 했다. 무엇하나 이루어놓은 게 없는 대학 생활이었다. 운동도, 학점도, 취업 준비도 벌어놓은 게 없었다. 앞으로 일 년 후면 졸업이었다. 그 때마저도 삼촌께 기댈 수밖에 없다면 어머니의 절망감은 더욱 커질 수밖 에 없으리라. 그 날 병욱은 세상에 나서 처음으로 옹골찬 다짐을 했다. 스스로 취업의 문을 두드려 삼촌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것. 그래서 어머니의 수치심을 조금 이라도 들어주고 싶었다. 그 다음날부터 병욱은 대응사의 공부방에서 틀어 박혀 공부를 시작했다. 목표는 교원 임용 고시였다. 그러나 이러한 병욱의 결심은 오래지 않아 절간을 떠나면서 까마귀 고기 를 먹은 꼴이 되고야 말았다. 끝내는 삼촌의 도움으로 사립 고등학교의 국 어 선생이 되었고 삼촌의 그늘에서 영영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절간을 떠난 이유는 간단했다.어느 날 기미 투성이에다 앞니가 두 개씩 이나 시커멓게 타 들어간 공양주 보살이 주지 스님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핫바지 방귀 새듯이 절에서 나가버렸고, 그 바람에 주지 스님과 식객들이 순번을 정해 밥을 하게 되었었다. 병욱의 식사 당번이 돌아오는 날 병욱은 그 절을 떠났다. 찬물에 손을 담가 설거지를 하기가 싫었던 때문이었다. 올려다보던 달에서 눈을 뗐다. 가슴 한 켠이 아렸다. 밀물이 밀려들자 낮 동안에 버려진 퀴퀴한 쓰레기들이 파도 포말에 뒤섞여 흉측한 배를 까뒤집 듯이 온갖 회한이 소용돌이쳤다. 가능하다면 성장의 몇 페이지에 온통 잉크 칠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인생에는 연습이 없다. 가정도 없었다. 병욱은 구둣발로 마당귀를 거닐었다. 이슬람 국가의 국기에 아로새겨진 칼날 같은 상현달이 내뿜는 빛은 병욱의 걸음걸이마다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그림자는 병욱의 가슴속에서 비수가 되어 날카롭게 꽂혔다. 달빛 때문이야. 저 놈의 달빛. 빌어먹을 날씨 때문이야. 진달래가 수줍은 듯 꽃망울을 터뜨렸고 바람결 에 벚꽃이 휘날리던 날, 병욱은 날씨 탓을 하며 연수를 제 삶의 서브디렉토
리에 가두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삶의 스산함을 이 겨내기 위한 안간힘이었다. 갑각류의 등딱지에서 세간을 옮겨 말랑말랑한 꽈리 속에 똬리를 틀고픈 충동질이었다. 맵디매운 고추장으로 비벼 먹던 밥 에다 마요네즈를 듬뿍 뿌려 부드러운 입맛을 길들이고픈 마음에 다름 아니 었다. 처음 연수는 이러한 그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는 듯했다. 연수의 육질 은 부드러웠다. 싸구려 틀니로도 으깰 수 있을 만큼 그녀가 두르고 있던 껍 질은 연약했다. 하지만 연수에게도 독소가 있었다. 두 겹 세 겹으로 콧구멍 을 틀어막은 탈지면을 비웃을 만큼 강한 독성이었다. 연수는 자본과 관능으 로 얼룩져 있었던 것이다. 달빛에 취한 듯 병욱의 걸음걸이가 비틀거렸다. 하지만 이내 등을 곧추 세웠다. 공허한 달빛을 향해 눈알을 부라렸다. 부질없었다. 현실이란, 호랑이 아가리 속에 대가리를 들이민 꼴이라고? 그래서 두려운 것이라고? 흐흥. 병욱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그러나? 난 치열하지 못했어. 치열하지 못한 사람에겐 현실의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 눈도 있을 수 없지. 교감은 어림짐작을 했을 뿐이야. 병욱의 안면 근육이 콧잔등을 향해 몰려들었다. 콧등이 꿈틀 치솟는 것 같기도 했다. 지각 변동이 일어나기라도 하려는 걸까. 있었다. 치열하게 보낸 한 시절이 있기는 했다. 대학 이 학년. 군 입대 직전 무렵이었다. 병욱이 신입생이었을 때 선배의 권에 못 이겨 딱 한 번 연극 무대에 올랐 던 일이 있었다. 이 일이 인연이 되어 이 학년이었을 때 학과 학생회가 주 최하는 문학의 밤 행사의 연극 연출을 맡았다. 처음에는 조연출의 위치였지 만 연출을 맡고 있던 삼 학년 선배가 갑작스레 휴학을 하게 되었고, 땜방으 로 병욱이 연출을 맡았던 것이었다. 병욱이 그 일을 감당해 낼 수 있으리라 고 믿는 학과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병욱 자신도 긴가민가했다. 병욱이 무엇보다도 감당할 수 없었던 일은 턱없이 주어진 재량권이었다. 하 룻밤새 대본이 수정되어도 누구 하나 따지고 드는 사람이 없었고, 배우들은 오히려 당연시했다. 심지어 배역을 맞바꾸는 일을 할 때조차도 배우들은 묵 묵히 따랐다. 부담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뿌리를 알 수 없는 불길이 치솟기도 했다. 자신감이 붙었고, 서서히 그 일에 미쳐가기 시작했다. 밥을 먹을 때거나 똥을 눌 때, 거리를 걸으면서도, 강의 중에도, 병욱은 오직 연극만 생각했다. 잠자리에 들었을 때조차도 연극은 그의 머리 속을 단 한 번도 떠나지 않았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공연을 관람한 관객 들은 아낌없이 박수를 쳐주었으며 학생회장이 정말로 고맙다며 병욱을 안았 고, 배우들은 울먹였다. 병욱은 무대에서의 주인공이었을 뿐만 아니라 현실 에서의 주체자였다. 막이 내린 지 오래되었어도 희열감은 가슴속에서 사그라들 줄 몰랐다. 불 씨 하나가 병욱의 가슴속에서 오롯이 자리를 잡았다. 병욱의 힘으로 일궈낸 첫 번째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러한 자신감은 무참하게 난파당해야 했다. 고귀한 국가의 부르심이란 가면을 뒤집어쓰고 날아든 입영 통지서 종이 조각 한 장. 훈련소에서 조교들은 병욱을 고문관이라고 불렀다. 동료 훈병들은 너 때 문에 우리가 애꿎은 고생을 한다며 툴툴거렸다. 자대에 배치를 받고서도 상 황은 전혀 역전되지 않았다. 갓 부대에 배치된 신출내기들은 고참인 병욱보 다도 병욱의 아래 기수들을 더 두려워했다. 복학했지만 병욱의 연극 무대를 기억해 주는 사람은 학교에 남아 있지 않 았다.심지어 병욱 자신도 허깨비를 만났던 모양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호랑이 아가리 같은 현실? 머리를 더욱 들이밀어도 놈의 밥이 될 것이고, 자칫 뒷걸음질을 치다가는 놈의 날카로운 발톱에 짓눌려 죽을 것이다.
병욱은 섬돌에 가 덜퍼덕 주저앉았다. 냉기가 똥구멍을 찌르르 핥았다. 연 수의 신음 소리가 들창을 타고 흘러나왔다.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것일까. 병욱은 방문을 열어보거나 하지는 않았다. 연수는 그가 보살펴주어야 할 대 상은 아니었다. 생득적인 욕망을 싸안고 살아가는 연수는 어쨌건 살아갈 것 이다. 병욱을 만나기 전에도 그래왔듯이.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 서울에는 무엇이 있었던가? 어머니의 앙칼진 목 소리와 자리 보전만 한 채 헤픈 웃음을 흘려대는 누나. 밤낮없이 섹스에 주 접스러운 연수. 신용카드 청구서. 그리고……. 들창에서 다시금 암코양이 울음소리 같은 야릇한 신음이 새나왔다. 연수 는 꿈속에서도 교미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병욱은 섬돌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마당귀를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교리를 제공하는 대가로 교감은 안락을 약속했다. 솔직히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준다? 금상첨화(錦上添花)가 아닌가. 하지 만 병욱은 그 방면에서는 너무도 문외한이었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러나 교감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술에 취한 자는 술맛을 느끼지 못하 듯이 믿음에 흠뻑 젖어든 자는 치장을 할 줄 모른다고 하지 않았던가. 만약 에……. 담뱃갑을 뒤적이기 위해 호주머니 속에 찔러 넣은 손에 얇은 종이 한 장 이 잡혔다. 낮에 연수가 그에게 건네준 신용카드 청구서였다. 병욱은 그것을 끄집어내어 달빛에 비추어보았다. 흐릿하게나마 금액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랬다. 서울의 상징은 신용카드 청구서였다. 그리고 연수였다. 그리고 누나 였다. 앙바틈한들 재길 틈 없는 낭떠러지였다. 병욱은 신용카드 청구서를 찢었다. 그리고는 허공에 날렸다. 바람기 한 점 없는 허공에서 종이 조각은 제자리 맴을 돌다가 수직으로 곤두박질했다. 완 성된 퍼즐을 기대하는 퍼즐 조각들처럼 그놈들은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병 욱은 허리를 굽혀 조각들을 하나하나 주웠다. 라이터 불에 태워진 조각들이 가뭇없이 사라져갔다. 연수는 그래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병욱을 만나기 전에도 그랬듯이. 어쩌면 연체 이자까지 지불해 줄 수 있는 수완 있는 놈팡 이를 만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불씨가 남아 있는 곳에는 언제든 부나방 들이 모여들 것이기 때문이다. 여왕벌과 단 한 번의 교미를 위해 일생을 불 태우는 수펄들처럼 말이다.
[약속의 땅] 39. 영접
13. 3 월 13 일. 금요일의 아침. "젊은 선생! 오늘, 영접을 받는다며?" 나물 무침을 식탁에 내려놓으며 주인 여자가 말했다. "교장 선생님께서 직접 인도하신다지?"
"정말 잘됐지 뭐예요." 주인 여자가 물었고 박 선생이 끼여들어 대답을 했다. 박 선생은 말대답 을 하는 한편으로 병욱을 향해 미소를 흘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길(吉)한 날이야. 새벽 댓바람부터 웬 산새들이 그렇게 우짖는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니까. 오늘이 이 월 보름날이란 건 다들 알지? 불가에서는 연등절(燃燈節) 행사가 있는 날이야. 새벽 안개가 짙었던 걸 보면 만삭의 달이 천지를 지켜주실 거야. 여선생들 중에서 혹시 오늘부 터 월경 시작하는 사람 없어? 여자에겐 그보다 좋은 일이 없지. 그게 바로 천리(天理)와 인위(人爲)가 일치하는 게야. 달의 순환 주기와 여자의 생리 주기가 일치한다는 사실들은 알지? 밀물과 썰물의 움직임도 달의 조화에서 비롯하는 일이야." 주인 여자는 떡부엉이 같이 떠들어댔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부터 생리 운 운하는 것에 대해 거리낌이 전혀 없었다. 고작 하숙집 주인치고는 너무 유 식한 언변을 늘어놓고 있었지만 병욱의 생각은 미처 거기에는 미치지 못했 다. 병욱은 딴 생각에 골똘했다. 주인 여자의 말을 통해서야 교감이 오늘을 영접의 날로 받은 이유를 짐작 할 수 있었다. 달구어진 쇠에 망치질을 한다고, 단박에 일을 저지를 것 같던 사람이 엿새나 미기적거렸던 것이다. 믿음을 지니고 있지도 않은 사람이 교 단의 중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다 그만한 까닭이 있는 법이었다. 병욱은 쓴웃음을 속으로 삼켰다. 교감이 관념의 유희를 즐기고 있다는 짐 작 때문이었다. 석가가 제자인 가섭(迦葉)에게 말이나 글이 아니라 '이심전심'의 방법으로 불교의 진수를 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석가는 제자들을 영산(靈 山)에 불러모았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손가락으로 연꽃 한 송이를 집어들 고 말없이 약간 비틀어 보였다. 제자들은 석가가 왜 그러는지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가섭만은 그 뜻을 깨닫고 빙긋이 웃었다. 그제야 석가는 가섭에게 말했다. 나에게는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 : 언어나 경전에 의하지 않고 '이심전심'으로 전하는 오묘한 뜻. 곧, 진리는 마음에 의 해서만 전해지고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함)이 있다. 이것을 너에게 전해 주마. 교감은 앞으로 병욱이 감당해야 할 교리 작업의 방향을 불립 문자의 방법 으로 제시해 주려는 것일까. 그러나 관념의 유희만큼 공허한 장난은 없다. 초승달이 보름달로, 다시 그 믐달로 변하는 일련의 과정이 동양적 천체 운행의 질서를 보여주는 것이며, 보름달이 그 정점에 서 있어 모든 생명체를 배태하는 것이라면, 또 다른 의 미에서는 오늘은 양력으로 13 일의 금요일이었다. 서양에서는 가장 금기시하 는 날인 것이다. 그 생각 때문인지 교감이 선택한 길일(吉日)이 어긋나버릴 것 같은 느낌에 병욱은 사로잡혔다. "엄 형도……?" 식탁의 모서리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숟갈질만 하고 있던 진영이 병욱에게 말했다. 변전소를 관리한다는 재석은 연락도 없이 이틀째 집에 들어오지 않 고 있었다. 맞장구를 쳐줄 위인이 없었던 탓인지 진영은 내내 얼굴에 풀기 가 없었다. "엄 형은 믿을 것 같지 않더니……, 그 종교 정말로 신빙성이 있는 거 요?" 진영이 숟가락을 어기적거리며 말했다. 상담 선생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 러한 진영을 노려보았다. "아니, 난 ……. 좋다면 나도 한 번 믿어볼까 하고……." 진영은 허겁지겁 밥그릇을 비우고 식탁에서 물러났다. 주인 여자가 진영
의 뒷모습을 향해 끌끌 혀를 찼다. "젊은 선생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까닭을 모르겠어." "진실은 언제나 승리하는 법이니까요." 상담 선생이 기숙사 사감 같은 투로 말했다. 주인 여자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큰 일을 맡게 될 것이라고 교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박 선생의 말소리는 유치원에서 선생님께 칭찬 받은 일을 어머니께 자랑 하는 어린아이처럼통통 튀었다. 즐거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아냐. 젊은 선생은 종교에 심취할 수 있는 기질이 아니야. 관상쟁이가 아 니라도 그 정도는 읽을 수 있지." 주인 여자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말했다. 병욱은 주인 여자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숟가락만 재게 놀렸다. 식탁 주변에는 여선생들의 깨작거 리며 씹는 밥알 소리와 국물 홀짝이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앞으로도 하숙을 할 거야? 아니면 농장에 들어가는 게야?" 병욱은 숟가락질을 멈추고 주인 여자를 바라보았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질문이었다. "그건……저도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구?" "교감 선생님께서 판단하시겠죠. 아마도 농장에 들어가게 되겠지만." 박 선생이 말허리를 자르고 날름 뛰어들었다. 병욱은 주인 여자와 박 선 생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왠지 이상했다. 박 선생을 바라보는 주인 여자의 눈꼬리가 잔뜩 치켜져 있었다. 박 선생은 그 사실을 느끼지 못했는 지 계속하여 주절거렸다. "교감 선생님께서 적극 추천을 하셨고, 교장 선생님께서 영접을 인도하시 니 농장으로 들어가는 건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여기에 있는 우리 들 중에는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여태 하숙 신세지요. 하숙 집이 뭐 어떻다는 게 아니라 농장은 선택받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것이 니 사실 부러운 일이에요." 박 선생의 호들갑에도 아랑곳없이 상담 선생과 윤 선생은 식탁에만 눈길 을 내리깔고 있었다. 박 선생은 아직도 할 말이 남은 듯했지만 주인 여자가 말을 끊었다. "공덕을 부지런히 쌓아야지." 주인 여자는 평소와 다른 투의 말을 했지만 병욱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 했다. 자신의 생각에만 너무 골똘했던 탓이었다. 식사를 마친 병욱은 세면장에서 양치질을 한 후 자기 방으로 돌아와 양복 윗도리를 걸쳤다. 병욱은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어둔 채 세 명의 여교사를 기다려 주었 다. 그 일은 매번 반복되었다. 새 학기가 시작한 날부터 줄곧 출근길을 같이 했고, 같은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차창을 내렸다. 시원스럽게 피부를 간질이는 달짝지근한 공기가 사람을 기분 좋게 했다. 어쨌든 오늘은 특별한 날인 것이다. "오래 기다리셨죠?" 분홍색 바탕에 알록달록한 꽃무늬가 아로새겨진 원피스를 입은 박 선생이 제일 먼저 차에 올라탔고, 윤 선생이 그 곁에, 마지막으로 상담 선생이 차에 탔다. 상담 선생은 당연하다는 듯 비워진 운전석 옆자리에 올라앉았다. 병욱은 액셀레이터에 힘을 주었고 차는 미끄러지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첫 번째 굽이길을 돌아갈 때 상담 선생이 말했다. "부탁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후사경에 반사된 윤 선생은 혓바닥을 쑥 내밀고 있었다. 병욱은 묵묵히 운전대만 돌렸다. "교감 선생님께서 맡기실 큰일이란 게 뭐죠?" 박 선생이 말했다. 교감이 선생들에게는 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은밀한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 기분 나쁘지는않았다. "그게, 그러니까……." "우리는 시키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는 거야." 병욱이 머뭇거리자 상담 선생이 잘 벼린 칼날로 닭모가지를 힘껏 내리치 듯 말했다. 개똥도 약에 쓰일 때가 있다더니. 병욱은 속으로 쟁그라웠다. 차는 어느 결에 학교 운동장에 닿았다. 삼 교시째의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선생님들은 제각각 수 업 교실을 찾아 교무실을 빠져나갔다. 교무실에는 병욱뿐이었다. 산 속에 휑 뎅그렁하게 자리잡은 학교에는 간간이 새소리만 울려올 뿐 소음 하나 들리 지 않았다. 고즈넉하고 쓸쓸한 느낌마저 들었다. 병욱은 의자의 등받이에 몸 을 푹 파묻은 채 눈을 내리 감았다. 영접의 절차가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주워들은 게 없었다. 그러나 긴장감 이 들지는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 열을 지어 예방주사 맞기 순번을 기다리 면서 초조감이나 두려움을 가졌을 때보다도 마음은 오히려 평온했다. 영접(靈接)이라니? 영적인 존재를 맞이한다는 말이 아닌가. 가당찮은 말 이었다. 어디 신내림이라도 받는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몸에 신이 지펴야 하 지 않는가. 교장도, 교감도, 어느 누구도 몸에 신이 들렸다는 징후는 없었다. 그것은 말의 끊김, 언어 도단이었다. 그들은 아직도 신의 외피조차도 마련하 지 못하고 있었다. 교감이 병욱에게 맡긴 일, 그것은 곧바로 신을 창조해내 는 일이 아니었던가. 병욱은 코웃음을 쳤다. 영접은 병욱이 받아야 할 게 아 니라 오히려 병욱이 그들에게 내려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찜찜함이 있었다. 어쨌든 그들은 사이비 종교 의 신도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야단스레 호들갑을 떠는 의식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병욱은 어릴 때 치른 무속의 행사에서 끔찍한 기억을 하나 가지고 있었 다. 병욱에게는 여남은의 나이 차가 나는 큰누나가 있었는데, 그 누나가 야 영지에서 돌연 시체로 변해 돌아왔다. 어른들은 너나없이 죽은 이유에 대해 서 쉬쉬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병욱은 정확한 사인을 알지 못했다. 객사한 시체는 집안에 들이면 안 된다는 속설 때문에 누나의 시체는 곧바로 병원 영안실로 옮겨졌고 매장 풍습 대신에 화장을 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한참 후에, 어디에서 주워들었는지 어머니는 가족들에게 이상한 선언을 했다. 처 녀가 죽으면 저승에 들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기 때문에 영혼 결혼식을 올려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떠들썩한 굿판이 열렸다. 남자 귀신은 군대에서 사 고로 죽은 직업 군인이었다.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즈음에 무당이 여 자 귀신의 남동생은 마당 한가운데로 나오라고 소리쳤다. 병욱은 쭈뼛거리 며 마당으로 걸어나갔다. 무당은 병욱에게 마당 한가운데서 무릎을 꿇으라 고 했다. 그리고는 손수건만한 천 보자기를 머리에 덮씌웠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갑갑해도 잠시 동안만 참아야 한다고 무당은 병욱의 귀에 속삭였다. 절대로 눈을 떠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사람들의 수런거림이 귓결을 때렸다. 자기를 둘러싸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막연하게 짐작만 할 뿐 병욱은 일에 대한 가리사니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 때 한바탕 바람이 심하 게 요동을 쳤고, 덮씌운 보자기가 허공을 향해 날아가 버렸다. 병욱은 똑똑 히 보았다. 자기를 향해 날아오는 날이 선 칼날을. 섬뜩한 공포감. 오줌이 찔끔거려짐과 거의 동시에 칼날은 귓가를 스쳐 지났다. 일이 끝난 뒤에 사 람들은 병욱을 칭찬하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어린놈의 심장이 무쇠 솥보다
도 더 두껍다고.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정신을 잃을 기력마저 잃어버렸을 정도로 그 순간 혼이 몸속에서 빠져나가 버렸음을.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기억을 떠올렸을 때, 병욱은 허벅다리가 팍팍해짐 을 느꼈다. 지난 토요일, 연수와 함께 농장 사람들을 만났을 때의 섬뜩함이 떠올랐다. 두려웠다. 하지만 오늘은 영혼 결혼식을 치르던 날의 그 끔찍한 일들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병욱은 짐짓 생각했다. 병욱이 보아왔던 교 장은 어느 모로 보나 그와 같은 끔찍한 일을 저지를 사람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교장은 교감과는 다른 세계의 사람인 것 같았다. 병욱이 바 라보는 교장은 그랬다. "야이 새꺄." 한참 그런 생각에 골똘해 있을 때 고목에 벼락이 떨어지는 듯 요란한 소 리가 울렸다. 병욱은 파블로프의 개처럼 앉은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 고 소리의 진원지를 발견하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느 틈에 교무실 의 출입문이 열려 있었고, 거기 한 사내가 서 있었다. 교무실 출입문 쪽의 첫 번째 책상의 주인이었다. "어디서 개뼈다귀 같은 새끼가 굴러 들어와서는." 사내의 거친 숨소리가 멀리 떨어진 병욱의 귀에까지 생생하게 들려왔다. 병욱은 희뜩머룩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내가 누구를 향해 육 두 문자를 내뿜는지 의아했다. 그러나 교무실 안에는 병욱과 사내 단 둘뿐 이었다. "저 말입니까?" 병욱은 멀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이 개 같은 새끼야. 너 말고 여기에 누가 있어?" 사내는 거칠 것 없는 걸음걸이로 병욱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섰고, 그 바 람에 병욱은 흠씰 뒤로 물러났다. 등뒤에는 회칠이 된 벽이 가로막고 있을 뿐이었다. 사내의 부르쥔 주먹이 병욱의 눈앞에서 얼룽거렸다. "왜 이러십니까?" 사태는 너무나 창졸간에 일어났기 때문에 병욱은 전혀 가리사니를 잡을 수가 없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느라 안간힘을 써야 했다. "왜 이러냐고? 그걸 몰라서 물어?" 사내는 여전히 주먹을 흔들어댔다. 병욱은 고개만 가로저을 뿐 목구멍에 서 말이 새나오지 않았다. "사기꾼 같은 놈. 난 진작에 네 놈의 정체를 알아봤었어." "뭔가 오해가 이, 있으신 것 같은데……." 말더듬이 환자처럼 병욱은 더듬거렸다. 누군가 교무실에 들어와서 사태를 진정시켜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수업 시간이었다. 황 당한 사태에 끼여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아니었으면 넌 그 때 농장 사람들에게 맞아 죽었어. 은혜도 모르는 배은 망덕한 녀석." "아! 그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제가 사례를 드리려고 했 는데 차일피일 하다보니……." 병욱이 사내를 향해 고개를 수그리려는 순간 입에서 에쿠 하는 소리가 터 져 나왔다. 사내의 주먹이 병욱의 면상을 후려친 것이었다. 콧등이 얼얼하게 아렸다. 병욱은 손으로 아픈 콧등을 감싸쥐었다. "네 놈의 정체가 뭐야? 도대체 네 놈의 정체가 뭐냔 말야? 너, 첩자지? 우리를 몰래 염탐하기 위해 이곳에 기어들어 온 거지? 우리를 파멸시키려고 이곳에 온 것 아냐?" 까닭도 없이 매질을 당하고 보니 병욱도 발끈 성질이 돋았다. 눈두덩 주 위의 힘줄이 파르르 떨렸다. 사내가 다시 주먹을 휘두르려 했을 때 병욱은
사내의 복장을 떼밀어버렸다. 짚동이 쓰러지듯 사내는 교무실 바닥에 나동 그라졌다. "이 새끼가 감히……" 몸을 일으킨 사내는 으르렁거리긴 했지만 아까처럼 주먹을 눈앞에서 흔들 어대지는 않았다. "이유라도 알고서 당합시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요?" "이유라고? 교감과 네 놈의 꿍꿍이속이 뭐야? 넌 이 자리에서 그 사실을 밝혀야 해." "……?" "넌 무슨 목적을 띠고 이곳에 잠입한 거야. 틀림없이. 교감이 너에게 요구 하는 게 뭐지? 사실을 밝히는 게 좋을 걸. 그렇지 않으면 내가 용서하지 않 겠어." 병욱은 사내의 터무니없는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한동안 침묵했다. 그리 고 그런 것은 없다고 말했다. "교감이 너에게 요구하는 게 없다고? 이 쌍놈의 새끼가. 그렇다면 왜 내 자리를 위협하는 거야?" "……?" 병욱은 눈알만 데록데록 굴렸다. 당최 짐작 못할 말이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 때 교감의 말이 들려왔다. 천도 고등학교에 부임한 이후 그 때처럼 교 감의 말소리가 반갑게 들렸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패전의 구렁텅이에서 천 군만마를 만난 장수처럼 병욱은 환호작약했다. 병욱은 애원의 빛이 가득한 눈길을 교감에게 보냈다. 속 시끄러운 일에서 비켜서고 싶었던 것이다. 교감 은 바지 호주머니에 양손을 찌른 채 터억하니 서 있었다. "왜들 이러십니까? 다 교단을 위해서 좋자고 하는 일인데." 병욱의 앞에서 길길이 날뛰던 교무실 출입문 쪽 첫 번째책상의 주인은 교감 앞에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교감은 오금을 박듯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 중으로 시말서를 써내도록 하세요." "시말서라고? 모가지를 내놓으라 하고서는 이번에는 시말서를 쓰라고?" 갑자기 거친 숨을 내뿜던 사내는 병욱이 미처 붙잡을 틈도 없이 성난 투 우처럼 목을 길게 늘이뜨리고 교감을 향해 돌진해 갔다. 바지에 양손을 찌 르고 있던 교감은 맥없이 바닥에 자빠졌다. 이번에는 사내가 병욱을 향해서 고개를 내밀고 쳐들어왔다. 병욱도 사내의 몸동작을 피하지 못하고 그만 나 동그라졌다. 여전히 거친 숨을 내뿜는 사내를 중심으로 교감과 병욱이 동시 에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아직은 전의를 불태우지 못하는 듯 엉 거주춤 서 있었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단 물 쓴 물 다 빨아먹고 이젠 날 내쫓겠다는 거 야?" 사내는 여전히 씩씩거리며 교감을 향해 말했다. 교감은 치받힌 가슴께를 어루만지며 표정 없이 서 있었다. 수업을 마칠 시간이 멀었음에도 교무실 안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창을 통해 교무실 안을 기웃거리는 간 큰 학 생들도 더러 있었다. 이윽고 교감이 말했다. "넌 해고야. 물론 교단에서도 영구 제명이야. 오늘 중으로 보따리를 싸서 농장을 떠나는 게 좋을 거야. 삶에 대한 미련이 남았다면 말야." 교감은 판결문을 낭독하는 준엄한 재판관처럼 음절 하나하나를 뚜렷이 발 음했다. 발광이 난 성싶었던 사내도 그 순간만은 고개를 수그러뜨렸다. 사내 의 후들거리는 다리를 병욱은 볼 수 있었다. "믿음이 없는 자에게 구원은 없어."
딱히 교무실 출입문 쪽 첫 번째 책상의 주인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교 무실 안을 메운 사람들에게 들으라는 듯 교감은 일부러 큰소리를 냈다. 수 런거림으로 가득했던 교무실 안은 돌연 팽팽한 긴장감으로 채워졌다. 쿨럭 거리는 기침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선생님들은 각자 교실로 돌아가세요." 교감이 말하자 선생들은 발자국 소리도 없이 교무실에서 빠져나갔다. "엄 선생은 날 따라오세요." 병욱이 사내의 곁을 스쳐 지나려 했을 때 병욱의 팔목을 부여잡은 사내가 귓속말을 했다. "모든 건 네 놈 때문이야. 널 죽여 버리겠어. 꼭." 형광등 불빛을 받은 사내의 흰자위가 번들거렸다. 교감은 흰색 바탕에 청색 글씨로 교무실이라고 양각된 아크릴 판 밑에 우 두망찰서 있었다. 석고상 같은 얼굴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후에야 교감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본보기가 필요해." 왠지 표정이 섬뜩했다. 병욱은 까닭도 모른 채 엄마의 꾸중을 듣는 어린 아이처럼 고개를 숙였다. 가슴이 콩딱였다. "갑시다." "……?" "교장 선생님께 갑시다. 영접을 받으셔야죠." 교감은 걸음을 내디뎠다. 병욱은 교감의 한 걸음쯤 뒤에서 따라 걸었다. "이제 우리는 같은 운명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엄 선생의 뒷배 는 내가 봐드릴 테니 아무 염려 마세요." 무엇에 대한 염려를 말라는걸까? 교무실 출입문 쪽 첫 번째 책상의 주인 에 대해서? 아니면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서? 호랑이 아가리 같은 현실에 편입되지 않아도 좋고, 안락만 보장된다면 좋다, 그러나 오늘 같은 일은 싫 다. 병욱은 이런 생각을 하며 교감의 뒤를 따랐다. 교감이 교장실 문을 두드렸고, 안에서 네, 라는 짧은 대답이 있었다. 교감 이 손아귀에 힘을 주자 드르륵 소리가 들렸다. 천도 고등학교에 부임한 이 후 처음 들르는 교장실이었다. 공간이 좁아 보인다는 점 말고는 서울에서의 교장실 풍경과 비슷했다. 다만 특이한 점이 있다면교장의 신분임을 드러내 는 명패가 없다는 정도였다. 과시 욕구가 없는 듯했다. 공간 가득 빼곡이 들 어찬 난 화분도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교장이 집무용 책상의 의자에서 응접용 테이블의 의자에 앉기를 기다려 교감이 병욱과 함께 앉았다. "교무실에서 소란이 있었다죠?" "아, ……, 네." 송충이가 기어가는 듯 짙은 빛깔의 교감의 눈썹이 꿈틀댔다. 덩달아 눈꼬 리가 꿈틀거렸다. "해고 건은 보류하시는 게 어떨는지요?" 교감이 손톱을 세워 테이블을 툭툭 소리나게 쳤다. 교장은 지긋이 눈을 내리 감고 있었다. 교감은 한 일 자로 다물려진 입의 어금니에 힘을 주었다. 이윽고 교감이 말했다. "학사 행정은 저에게 위임하신 것 아닙니까?" "우리가 추구하는 건 공생의 도이지 공멸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인화에 금이 가는 건 공생을 가로막는 겁니다. 교감의 독선적 행위에 대해서는 농 장에서도 말들이 많아요." 교감의 입 언저리가 씰룩였다. 눈두덩 밑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는 듯도 했다. 그러나 교감은 당장에 말을 되받아 치지는 않았다.
"농장 사람들과 의논을 한 연후에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이 일은 나에게 맡겨 주세요. 교감 선생님께서 서운하지 않게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은 엄 선생의 입도 문제로 찾으신 게 아닙니까? 제가 주재하겠습니 다." 교장은 가래가 그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다소 성가시다는 듯이 말했다. "교무실을 관리하는 것은 저의 고유 권한이 아닙니까? 직원들을 효율적으 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규율이 필요합니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월권을 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직원이 아니에요. 우리는 한 형제입니다." 맨발로 흙을 밟으며 행복한 표정을 띠고 있던 초로의 노인답지 않게 교장 의 말에는 다부진 힘이 실려 있었다. 병욱은 새삼 교장을 뚫어져라 바라보 았다. 그러다 얼른 고개를 숙였다. 불경스럽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왠지 교 장 앞에서는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막연한 느낌이 일었다. "어쨌든 저로서는 오늘의 일이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사태입니다." 교감이 최후 통첩을 하듯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교장은 다시금 지긋이 눈을 내리 감았을 뿐 말이 없었다. 기(氣) 싸움을 하는지 침묵의 시간이 꽤 길어졌다. 예기치 못한 상황 앞에서 병욱은 몸둘 바를 몰라했다. 먼저 말문 을 연 것은 교감이었다. "제 방식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함께 어른께 가십시다. 그분께 판결을 내려주십사 청합시 다. 농장에 기별을 띄우겠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사소한 일인데……. 어른께 자질구레한 일로 심려를 끼쳐 드린다는 것은……." 기세 등등하던 교감이 꼬리를 사렸다. 병욱은 귀이지가 귓바퀴로 흘러나 오는지 불쑥 귀가 가려워졌다. 새끼손가락을 귓구멍에 쑤셔 박아 마구 후벼 파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괜한 안달이 났다. "어른께 판결을 청합시다. 그 방법밖에는 없어요." "알겠습니다." 교감은 병욱에게 눈길을 힐끗 주고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켜 바깥으로 나 갔다. 교장실 출입문이 닫혔을 때 교장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갈등에서 모든 부조화가 비롯하는 걸……." 그리고는 침묵이었다. 지루했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병욱의 긴장줄이 느슨해졌고 얼결에 귀를 후볐다. 그러다 화들짝 놀라, 앉은 차려 자세를 했 다. 교장의 입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한참 후에야 교장은 입을 열었다. 그러나 병욱의 귀에 교장의 말소리는 엉뚱하게 들렸다. "성경을 읽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잠깐동안 병욱에게 눈길을 주긴 했지만 무심한 표정으로 창밖에 시선을 둔 채였다. "없습니다만……?" "그렇다면 교회에 나가보신 적도 없겠군요?" 교회? 있긴 했다. 그때가 언제쯤이었을까? 초등학생 무렵? 아마 그랬을 것이다. 너무도 유치한 이유로 인하여 교회에 다니던 발걸음을 끊었으니까. 동네형을 따라서 일요일 아침이면 교회에 나가곤 했었다. 아마도 무관심 때 문이었겠지만 병욱이 교회에 나간다는 사실에 대하여 집안 사람 중 누구 하 나 탓하는 사람은 없었다. 병욱으로서는 그저 주일이면 나들이 할 곳이 생 겼다는 사실이좋았고, 사람들의 따스한 시선이 살갑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목사의 설교나 성가대의 우렁찬 노랫소리보다는 확 트인
마당에서 마음껏 해바라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교회의 본관 건물 바로 앞에는 소나무가 몇 그루 있었다. 본 관에 연결된 스피커에서는 목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가을 햇살처럼 쏟아 지고 있었지만 그딴 것에는 관심둘 일이 없었다. 경비 아저씨가 소나무에 기댄 등을 떼라는 손짓을 했다. 병욱은 몸을 곧추 세웠고, 그때 병욱의 등뒤 에 서 있던 또래의 계집애가 병욱을 향해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질렀다. 병 욱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병욱을 처음 교회에 데리고 갔던 동네형이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서는 병욱의 등을 내리쳤다. 아프지는 않았다. 병욱은 동네 형을 말똥말똥 바라보았다. 동네형이 무르팍을 쳐들었고 병욱은 바닥을 기 어가는 송충이를 보았다. 동네형은 신발 밑창으로 송충이를 짓이겼다. 퍼런 내장이 사방으로 튀었다. 병욱은 엉겁결에 울음을 놓았다. 그 날 이후로 교 회와는 인연이 없었다. 아니, 또 한 번 있었다. 그 때는 고등학생 무렵이었을 것이다. 토요일이었 는지 방학중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햇살마저 비슬비슬 맥을 놓던 시간 쯤 초인종이 울렸다.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구냐는 물음에 초인종을 누 른 사람은 이웃입니다, 라는 말을 했다. 병욱은 경계심 없이 문을 따주었고, 이웃이라고 신분을 밝혔던 여자는 교회에 나와보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교 회라는 말보다 병욱을 주눅들게 한 것은 여자의 미모였다. 그 때는 사춘기 였던 것이다. 병욱은 여자를 집안에 들여 주스까지 따라주고서는 반드시 교 회에 나가겠다고 약속을 했다. 약속이 되었던 날,병욱은 물어물어 그 곳을 찾아갔다. 기억 속의 교회의 모습과는 어딘지 달랐다. 가지런하게 놓여진 의 자 대신에 마루 바닥에는 방석이 놓여져 있었다. 목사의 설교가 끝나자 사 람들은 목사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앉았다. 그만큼 사람의 숫자도 적었던 것이다. 좌담 형식인지, 토론 형식인지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병욱은 그딴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미모의 여자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그 여자는 그 날 그 자리에 없었다. 묘한 불쾌감이 일었다. 두 번 다시 그곳을 찾아가 지는 않았다. 우연히 그 교회 앞을 다시 지나치게 되었을 때, 통일교회라는 간판을 읽 을 수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 잠깐 다니기는 했습니다." "성경에는 두 가지의 이상향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교장이 두어 번 밭은기침을 뱉은 후에 말했다. "하나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을 분별하기 이전에 그들의 삶의 터전으로 삼 았던 에덴 동산이고, 다른 하나는 이사야서라는 이상향입니다. 이사야서에 대해서 들으신 적 있으십니까?" 병욱은 언뜻 시구 하나를 떠올렸다.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 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하지만 갑자기 이사야서라니. 병욱은 뜨악한 표정으로 교장을 바라보았다. 이 집단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뜻모를 소리들만 주절거렸다. 교장은 병욱의 뜨악해하는 표정에는 아랑곳없이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 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 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 "불교에서도 살생을 금한다는 잠언이 있습니다." "……?" "조화의 원리는 공존과 공생에 있는 겝니다. 우리가 각각 고유한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는 자연의 원소들도 따로 떨어져 있지는 않습니다. 오행(五行)의 운행에 금에서는 물이, 물에서는 나무가, 나무에서는 불이, 불 에서는 흙이, 흙에서는 금이 난다고 합니다. 그게 바로 상생(相生)의 이치인 게죠." 병욱은 교장을 빠끔히 쳐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자는 것인지 짐작 이 가지 않았다. "조화의 질서를 깨뜨리는 건 온당치 못해요." 그제야 병욱은 가리사니를 잡을 수 있었다. 교감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 이었다. 병욱의 양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교감과는 공모자였던 것이다. 더 구나 오늘의 일은 교무실 출입문 쪽 첫 번째 책상의 주인이 자기에게 시비 를 걸어 일어난 일이 아니던가. 할 말을 마친 듯 교장은 오래도록 말문을 닫아걸었다. 그 침묵이 거슬렸 다. 빚을 얻으러 온 사람처럼 마음이 착잡했다. 그러나 기다려야만 했다. 교 감은 말했었다. 교장에게 영접을 받아야 그럴 듯해 보입니다. 하지만 교장은 병욱이 아직까지 이 방에 남아있는 이유 같은 것은 잊은 듯 보였다. 블라인드 틈새로 비집고 들던 빛살이 약해졌다. 희뿌염한 잿빛 내음이 교 장실 안을 유유히 떠돌았다. 소변이 마려웠기 때문에 병욱은 허벅다리를 달 싹여야 했다. 교장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금새라도 오줌이 잘금거려 질 것만 같았다. 하릴없이 화장실에 가야겠다고 말하려 했다. "영접합시다." 교장이 말했다. 병욱은 얼결에 오줌을 두어 방울 팬티 속에 흘렸다. 지금 껏 해야할 일을 잊고 있었던 사람은 오히려 그 자신이었듯이. 그리고는교 장이 다시 어떤 말을 하려했을 때 먼저 화장실에 잠시 다녀와야겠다고 말했 다. "잠시면 끝납니다." "죄송하지만……" "금방 끝내겠습니다. 따라서 하세요." 교장은 무릎 위에 팔꿈치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양손을 모아 쥐고 눈을 감았다. 사타구니 사이에서 금방이라도 물꼬가 터질 듯했지만 병욱은 교장 의 행동을 따라서 했다. "삼가 조화(造化)의 주인께 심고(心告)드립니다. 오늘 당신의 품속에 깃들 고픈 한 대중(大衆)이 있어 인도합니다. 부디 올곧은 길로 이끌어주시길 바 랍니다. ……. 끝났습니다. 볼 일 보세요." "네?" 병욱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믿음은 정성을 바칠 일입니다. 양생(養生)의 도를 게을리 하지 마세요. 교감이 엄 선생을 이끌어 주실 겝니다." "이것으로 영접이 끝났단 말씀입니까?" 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에 힘이 빠지는 노릇이었다. 창부 앞에서 바짓가랑이만 까 내린 채 서둘러 그 일을 마친 뒤끝처럼 허망했다. 교장의 마음이 상한 때문일까? 알 수 없었다. 소변이 마렵다는 사실을 까 무룩히 잊어버렸다.
[약속의땅] 40. 발밑으로 흐르는 젖과 꿀
14. "한 잔 합시다." 양복 윗도리만 벗어 던진 채 이부자리 위에 드러누워 있는데 재석이 노크 도 없이 방안으로 머리를 디밀었다. 문틈 사이로 진영의 얼굴도 얼핏 보인 듯했다. "드디어 엄 형도 사이비 종교의 신도가 되셨다면서요? 축하는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사이비 종교라는 말의 어감 때문에 재석의 말은 비아냥거리는 소리로 들 렸다. 병욱은 등을 보이며 짜증스럽게 몸을 돌려 누웠다. "흐. 벌써 금주령을 당하신 겁니까? 속세에서의 재미는 물 건너갔나 보군 요." "쉬고 싶습니다." 병욱은 한편으로는 술 생각에 회가 동했다. 술기를 빌려 잔뜩 날이 선 이 성을 죽이고도 싶었다. 그러나 재석의 말투가 귀에 거슬렸기 때문에 몸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다. "입도하는 절차를 영접이라고 일컫는 것 같더니, 그게 그만큼 힘이 든 겁 니까? 엄 형을 녹초로 만들 정도로 말입니다." 병욱은 가늘게 한숨을 뱉었다. 강간당한 기분입니다, 라는 말이 울대까지 치밀었다가는 제 풀에 사그라졌다. "한 잔 합시다. 질펀하게 살 테니까." 사실, 병욱은 술 생각이 간절했다. 저물 무렵에 치렀던 황당하기만 했던 영접 절차에 대해서 누구에게라도 떠벌리고 싶었다. 그래야만 속이 조금이 라도 후련해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일들을 떠벌리다가는 희롱이나 당하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것은 영접 의식을 치렀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절차였다. 아니, 절차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은 술을 마실 기분이 아니라고 만 했다. "보름날인데 달구경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진영이 끼여들었다. 아마도 아침 식탁에서 주워들었던 주인 여자의 말을 떠올린 듯했다. 그 때에는 병욱이 몸을 일으켜 양복 윗도리를 몸에 걸쳤다. 교감이 암시하는 불립문자, 교외별전을 직접 확인하고픈 충동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세 사람은 현관문을 밀치고 뜰에 내려섰다. 병욱은 하늘을 올려다보았지 만 달은커녕 달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맥이 풀렸다. 구두코에 걸리는 돌 멩이를 걷어찼다. 저만치 길섶에서 돌멩이 떨어지는 소리가 공허하게 울렸 다. 진영의 키득거리는 소리가 거슬렸다. "달구경이라? 흐. 엄 형은 로맨티스트인 모양이죠?" 아침 식사 자리에 없었던 재석이 말했다. 병욱은 대거리를 하지 않았다. "저번에 갔던 술집 있죠? 마담이 은근히 엄 형을 기다리던 눈치인데……. 그 날 우리들 몰래 무슨 일 있었던 것 아뇨?" 병욱은 물색을 모르는 재석의 흰소리에 짜증이 돋았다. 진영이 달 운운하 며 희롱하는 수작도 마뜩하지 않았다. 그만 집에 들어가 버릴까 하는 생각 이었다.
"엄 형의 애마(愛馬)를 끌고 갑시다. 엄 형이 그 날처럼 곤드레만드레 되 면 내가 무면허에 음주 운전을 또 즐기는 거지 뭐." 병욱은 어슴푸레 기억을 쫓았다. 재석과 마담은 흘레 붙은 듯 홀을 돌고 있었고, 진영은 연거푸 병욱에게 술을 권했었다. 테이블에 마주앉은 마담은 선생 똥은 개도 안 먹는다고 비아냥거렸던가? 삼촌과 통화를 했고……, 인 화지는 거기에서 재생을 멈추었다. 눈을 떠보니 자신의 방이었던 기억만 선 연했다. "키를 방에 두고 나왔군요." 습관적으로 바지 호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있던 병욱이 손을 뒤적이며 말 했다.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방으로 들어가서는 문을 걸어 잠근 채 잠을 청하면 그만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방바닥에 떨어져 있더군요." 재석이 병욱의 코앞에 차 키를 흔들었다. 술집은 입구에서부터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술내, 땀내, 곰팡내, 그 리고 밤(栗)잎 냄새 같은 것들……. 울컥 헛구역질이 나왔다. "흐. 영접이란 게 그만큼 힘든 거요?" 재석이 병욱의 등을 두드렸다. 병욱은 손등으로 입가에 묻은 침을 닦았다. 어질어질한 현기증이 일었다. 벽을 짚고 서 있자니 불현듯 요의를 느꼈다. 그러고 보니 오후 내내 화장실에 들렀던 기억이 없다. 참을 수가 없었다. 병 욱은 뛰듯이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병욱을 알아본 마담이 무어라 지껄이는 것 같았으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화장실에 달려들어가 지퍼를 열었다. 오 줌발이 시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임질 걸린 좆처럼 따끔거리기까지 했다. "흐. 그렇게 급했던 걸 여태 참았어요?" 테이블로 갔을 때 재석이 딱하다는 듯 말했다. 테이블 위에는 벌써 술이 날라져 있었고, 배를 까뒤집고 죽은 흉측한 물고기떼처럼 마른안주들이 눅 눅한 습기를 머금은 채 널브러져 있었다. 스피커에서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가수가 축축하게 물기에 젖은 음악들 을 메들리로 뽑아냈다. 홀 안에 손님이라고는 없었다. 병욱이 내민 술잔에 진영이 술을 채웠다. 병욱은 단숨에 들이켰고 다시 술잔을 내밀었다. 진영은 군말 없이 잔을 채워주었다. 이번에도 단숨에 한 잔의 술을 들이켰다. 눈가에는 차가운 기운이 느껴짐에도 가슴속에서는 알 수 없는 불길이 치솟았다. 무작정 취하고 싶었다. 아니, 그래야만 할 것 같 았다. 잊고 있었던 요의는 엉뚱한 충동질을 했다. 병욱은 빈 술잔을 진영에 게 내밀었다. "성질 급한 건 여전한 모양이네." 마담이 과일이 담긴 쟁반을 한 손에 들고 뒤뚱거리며 걸어왔다. 그새 살 점이 더 오른 것 같았다. 병욱의 옆자리에 앉은 마담이 병욱의 귓불을 만졌 다. 마담의 손길에서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 날, 숙모에게 삼촌을 바꿔 달라고 했지만 숙모는 삼촌이 잠이 들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했 었다. 그 때부터 취기가 소용돌이쳤고, 그리고, 그리고……, 속에서 울컥 역 한 기운이 솟았다. 병욱은 마담의 손길을 거칠게 뿌리쳤다. "사랑싸움인가?" 이죽거리는 재석이 마뜩하지 않다. "영접 의식에 대해 말해 봐요." 진영이 화제를 돌리려 했다. "엄 선생도 사이비 종교에 빠진 거야?" 마담이 돼지 비계 같은 낯짝을 들이밀며 말했다. 병욱은 그러한 마담을
외면했다. "씨팔. 그딴 것보다야 개 밑구녁이 차라리 낫지." "흐흐. 저런 말버릇하고는." 마담이 걸찍한 말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재석은 마담의 말투를 나무란다 기보다는 오히려 추임새를 넣는 듯했다. 그 바람에 병욱은 사면발이가 체모 위를 기어가는 듯한 불쾌감이 일었다. 이런 일을 예상하고 재석이 일부러 이곳으로 끌고 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병욱의 콧구멍이 벌 렁벌렁했다. "엄 형. 교주 이야기 좀 해봐요. 소문에는 양반 다리 자세로 제자리에서 일 미터나 떠오른다던데. 그것 사실이요?" "모르는 일입니다." "그럼 마누라가 수십 명이라는 얘기는?" "저는 교주를 만나 보지도 못했습니다." "농장 사람들은 남녀가 혼음을 한다면서요?" "모릅니다." "신도들은 종말을 믿는다면서요?" "그것도 알지 못합니다." "흐." 재석은 이상한 신음 소리를 뱉었다. "가봐야겠습니다." 병욱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덩달아 재석과 진영도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일어났다. 재석은 벌써 네댓 걸음쯤을 옮긴 병욱의 겨드랑이 속으로 팔을 껴 병욱을 붙들었다.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재석이 말했다. "갑자기 왜 이러냐고요? 몰라서 물으십니까?" 병욱은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재석을 노려보았고, 재석은 서양 사람들처 럼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로 모르겠다는 시늉이었다. "당신들은 지금 날 놀리고 있습니다. 제가 왜 당신들의 놀림감이 되어야 하죠?" "글쎄요. 엄 형이 왜 이러시는지 영문을 모르겠군요. 우리들이 엄 형을 놀 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뭐죠?" 재석은 병욱의 겨드랑이 속으로 껸 팔을 풀며 말했다. "무언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앉아서 차근차근 이야기합시다. 빚 주고 뺨 맞는다는 얘긴 들어보았지만, 술값 치르고 욕을 얻어먹어야 하는 이유를 저로서는 알지 못하겠군요." 재석의 말 태도는 진지했다. 그렇기 때문에 병욱은 정말로 자기가 오해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까칠한 혓바늘이 돋을 정도로 신 경이 서 있는 까닭이었다. 그래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자, 일단 한 잔 하세요. 그리고 왜 우리들이 엄 형을 놀리고 있다는 생각 을 하는지 이야기를 해 보세요." 병욱은 한 잔 술을 들이켰다. 막상 이야기를 풀어놓자니 딱히 할 말이 없 었다. 그래서 정말로 공연한 오해를 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병욱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병욱이 말이 없자 답답하다는표정을 짓고 있던 재석이 먼 저 말문을 열었다. "우리들이 사이비 종교라는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에 화가 난 겁니까?" 병욱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다면 종교에 대한 질문 자체가 역정을 불러일으킨 겁니까?" 병욱은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유가 뭐죠?" 병욱이 꼬나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버렸다. 그리고 구둣발로 그것을 짓밟았다. 조각조각 부서진 불꽃이 가뭇없이 꼬리를 사렸다. "재떨이에 버려." 마담이 어깃장을 놓듯 목소리를 높였다. 병욱의 얼굴은 여전히 벌겋게 달 아올라 있었다. "자, 이제 이야기를 해 보시죠." 재석이 재촉했다. 꿀꺽 침을 삼키던 병욱은 자기의 입을 뚫어져라 바라보 고 있는 세 사람의 눈치를 살피다 이윽고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오늘 너무 황당했습니다." "우리들 때문에 말입니까?" 조금 전까지 병욱의 겨드랑이 속으로 팔을 낀 채 어쩌면 비굴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재석은 포로로 잡은 군사를 향해 고함을 치는 승전군 같은 태도 로 돌변했다. "그것은 아닙니다. 저물 무렵에 학교에서 있었던 일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이상은 밝힐 수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그것은 제가 너무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순전히 엄 형의 기분 때문에 우리 세 사람이 욕을 얻어먹은 셈 이 되는군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병욱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이야기를 해주실 수는 없습니까? 때로는 이야기를 하고 나면 속이 후 련해지기도 하는 법이니까요." 여전히 재석이 말했고 다른 두 사람은 병욱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그러니까…… 아무래도 밝힐 수가 없는 이야깁니다. 제가 조금 전에 짜증을 냈던 것은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 신경이 너무 곤두서 있 었던 것 같군요." 한참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병욱은 자기가 지금 왜 사과를 하고 있는지 의아했다. 그러다 보니 조금 전까지 가지고 있었던 불쾌감이 새삼 떠올랐다. 사면발이가 체모 위를 기어가는 듯한 느낌을 가졌던 일을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떻게 따질 수 있는 성질의 말이 아니었다. 표현을 하자면 너무나 막연한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제가 보기에 엄 형은 다소 과격한 면이 있는 것 같군요." 재석이 말했다. 병욱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재석 을 바라보았다. "학교에서의 불쾌감을 애꿎은 우리들에게 드러낸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 니까?" "……" "어쩌면 우리들이 전혀 짐작도 못하고 있는 불쾌한 일이 있었던 것 같습 니다. 그 일을 한 번 이야기해 보세요. 우리가 만난 지도 오래 되었고, 그렇 다면 이제 마음을 어느 정도 터놓고 살아도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일을 말한다는 것은 저에게 너무 힘든 일입니다. 그러니 그 일에 대 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병욱의 말꼬리가 잔뜩 쳐져 있었다. "꼭 그렇다면 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재석도 한 발 물러서 주었다. 다행한 일이었다. "두 분께는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용서하십 시오." 무언가 찜찜한 기분 때문에 병욱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어……, 그러시면 안 되는데. 우리는 뭘 타고 돌아갑니까?" 재석은 한 쪽 손으로는 병욱의 바지를 붙들고, 한 손으로는 맥주잔을 급 하게 입으로 가져가면서 말했다. "전 지금 너무 피곤합니다. 그러니 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재석은 병욱을 빤히 올려다보며 눈알을 데록데록 굴렸다. "정 그렇다면 할 수 없는 거지. 김 형! 우리도 같이 가지." 진영은 굼뜨게 몸을 일으키며 툴툴거렸다. 주인 여자도 알아듣지 못할 낮 은 목소리로 욕설을 지껄였다. 그러다 재석이 얼마냐고 값을 치르려고 했을 때 마담이 병욱을 끌고 화장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주인 여자가 다짜고짜 말했다. "이렇게 가 버리는 법이 어딨어?" "……?" 마담이 병욱의 가슴에 안겨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안긴 것이 아니라 그녀 가 병욱을 껴안은 꼴이었다. 분무기에서 뿜어진 농약처럼 주인 여자의 입에 서 지독한 입냄새가 났다. 병욱이 매몰차게 그러한 주인 여자를 떠밀었다. "……? 전 지금 너무 피곤합니다. 그러니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쉬었다 가. 편안하게 해줄게." 병욱은 마담이 왜 그러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마담이 벌이는 수작에 몸을 맡길 수는 없었다. 주인 여자가 걸음을 옮기는 병욱의 팔을 붙들려 했지만 병욱은 뿌리쳤다. 재석과 진영은 그들이 함께 앉아 있 던 테이블에서 남은 맥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갑시다." "벌써 다 끝난 거요?" 재석의 허연 이빨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벌갰다. 마치 비웃는 것 같았다. 병욱은 그들을 무시하고 술집에서 나와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시동을걸었 다. 오래지 않아 두 사람이 건물에서 뛰어나왔다. "별 일도 다 있수다. 술값을 안 받겠다는데." 조수석에 올라앉은 재석이 눈을 끔벅이며 말했지만 병욱 역시 짐작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액셀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모퉁이 길을 홱 돌아섰을 때 재 석이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하긴, 치마만 둘렀으면 모두 여자이긴 하지." 병욱의 발이 급작스레 브레이크 위로 옮겨갔다. 차가 기우뚱거리며 멈추 었다. 그 바람에 재석의 몸이 심하게 앞으로 쏠렸다가 간신히 균형을 잡았 다. 병욱은 재석을 쏘아보긴 했지만 아무말 없이 액셀레이터에 다시 발을 올렸다. 차는 우툴두툴한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놀란 뒤끝인지 재석과 진영 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거, 천천히 몹시다. 그러다 사람이라도 불쑥 튀어나오면 어쩌려고?" 하지만 병욱은 재석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병욱은 한 가지 생각에만 골똘했다. 그 날 밤, 숙모와의 전화 통화 내용 중에서 기억해 내지 못하는 부분은 도대체 어떤 내용일까? 무언가 범퍼에 둔탁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났고 차가 한쪽으로 쏠렸다. 병 욱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병욱보다도 재석이 먼저 차에서 뛰어내렸다. 범 퍼 앞을 기웃거리던 재석이 차에 올라타며 말했다. "씨팔. 저 놈의 들고양이는 불빛만 보면 지랄이라니까." 들고양이가 차에 치인 모양이었다. 병욱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뭔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합니까? 저 놈의 게 들고양이였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어쩔 뻔했소?" 들고양이의 주검 때문에 차는 한 번에 전진하지 못했다. 하릴없이 약간의 후진을 했다가 전진을 했다. 들고양이의 시체 위에 바퀴가 올라선 것인지
차체가 요동을 하다 제자리를 잡았다. 가속도를 붙일 자신감이 없어져 버렸 다. "학교에서 어떤 일이 있었던 겁니까?" 재석은 말꼬리를 낚아채려 했다. 하지만 병욱은 해줄 말이 없었다. 뒷좌석 의 진영은 엉뚱하게도 휘파람 소리를 냈다. "교감의 소문에 대해서는 들은 적 있소?" 환자의 아픈 부위를 용하게 긁어 주는 노련한 의사처럼 재석은 교감의 이 야기를 끄집어냈다. 병욱은 귀가 솔깃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같은 배를 타기로 한 처지지만 아직은 교감에 대해서 아는 게 전혀 없었던 것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재석은 뜸을 들였다. 달아오른 사람에게는 뜸을 들이는 게 상대방의 관심 을 집중시키는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재석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속도를 나타내는 계기판은 거의 바닥을 기었다. "별이 몇 개 달려 있다더군요." 병욱은 정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면서도 옆좌석을 힐끔거렸다. "대부분은 사기 전과지만 그 중에는……." "……?" "살인 혐의로 무기 징역을 구형 받았는데 증거 부족으로 풀려난 적도 있 답디다. 물론 확실하지는 않아요. 소문일 뿐이니까요." 뒷좌석에 앉은 진영의 휘파람 소리가 높아졌다. 일부러 그러는 것 같기도 했다. 괜한 부아가 돋았다. 대거리가 없는 병욱의 태도에 자신감이 생겼는지 재석은 말을 이었다. "농장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여자를 덮쳤답니다. 하필이면 그 여자는 교주가 애지중지하던 여자였고, 그 때문에 교감이 송장 신세가 될 뻔했다는 사실도 알 만한 사람들은 다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교주로부터 파문을 당했는데 몇 날 밤을 석고 대죄를 했다지 뭡니까. 핫핫핫. 석고 대죄 를 했단 말입니다." "근거가 있는 얘기입니까?" "있다마다요. 여자를 덮쳤다는 사실이 탄로 났을 때 교주는 이렇게 말했 답니다. 네 같은 놈을 손수 죽이는 것은 내 자신을 더럽히는 일이다. 그러면 서 나무에 노끈을 걸어 주었답니다. 목매달아 죽으라는 게죠. 그래야 바깥 세상에 알려져도 뒤탈이 없을 테니까요. 자살을 했다고 둘러치기 하기도 쉬 운 일이고.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공포에 질린 교감은 생 똥을 쌌고, 지독한 냄새에 사람들은 제 코가 썩는 줄 알았답니다. 사람들이 강제로 교감을 나무에 목매달려 했을 때 글쎄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노끈 이 걸려 있던 둥치가 넘어갔다지 뭡니까. 용비어천가식으로 표현하자면 천 우신조(天佑神助)가 일어난 것이죠. 서슬에 교감과 통정을 했던 여자가 교주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애원을 했답니다. 제발 살려달라고 말입니다. 눈물 콧물 범벅인 채로 말입니다. 교주의 말이 재미있습니다. 이것도 신의 섭리 다, 아직은 너에게 맡기실 일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핫핫핫. 신화의 한 토 막 같지 않습니까?" "신의 뜻일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교감을 두둔하고 나선 병욱은 제풀에 흠씬 놀랐다. 그럴 만큼 막역한 사 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재석은 병욱의 발을 걸었다. "신라 시대에는 처녀가 애를 배면 처녀의 집 앞에다 불씨를 놓았다죠? 화 신(火神)이 아기를 잉태시켰다고 둘러치기 위해 말입니다. 처녀가 애를 배도 할 말이 있다는 말이 거기에서 나온 겝니다.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 라고 모든 건 갖다 붙이기 나름 아닙니까?" "그렇다고는 하지만 죽음의 문턱에서 벼락이 떨어져 목숨을 구해 주었다
는 사실은 예사롭게 들리지는 않군요." "말하지 않았습니까? 신화의 한 토막 같지 않냐구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 은 어쩌면 날조된 이야기일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것도 우습군요. 이렇듯 저렇듯 트집을 잡자는심보가 아니고 무엇입니 까?" "흐! 엄 형은 벌써 교감의 사람이 된 것 같은 말투이군요. 이런! 괜한 얘 길 한 건 아닌지 모르겠어." "……" "그 여자는 어찌된 줄 알아요? 교주가 술집을 내주었다더군요." 언젠가 교감과 함께 들렀던 싸구려 요정 같은 술집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 여자가? 전조등에 비추어진 하숙집의 몸체가 안개 속에 감추어진 성채처럼 우뚝하 니 서 있었다. 모두들 잠들었는지 건물 안에서는 희미한 빛줄기 하나 새 나 오지 않았다. 하숙집 마당에 차를 주차했다. 엔진 소리가 잦아들자 세상은 침묵과 암흑 그 자체였다. "만조(滿潮)가 되었을 거야." 진영이 불쑥 지껄였다. 달의 자전의 법칙에 의해서 밀물과 썰물이 교차한 다지 않는가. 그제야 병욱은 잊고 있었던 일을 떠올리기라도 한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달은 보이지 않았다. 묘하게도 가슴 한켠에서 아쉬움 같은 게 치밀었다. 어쨌든 오늘은 영접을 치른 날이었고, 휘영청 밝은 달밤 이래야 구색이 맞을 것 같았다. "방에 캔맥주가 몇 개 남아 있을 텐데, 술 더 하시겠습니까?" 재석은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는 듯 입을 쩝쩝거렸다. 병욱도 무조건적인 거부감만 이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술 생각이 간절하기도 했다. 오늘밤만 큼은 취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만 방에 들어가서 자야겠다고 말했 다. 그들과 어울리는 일이 불편했고, 그보다도 내일 아침 출근길이 걱정이 되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재석과 진영은 삵쾡이처럼 살금살금 기어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병욱은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지만 그들의 몸짓을 따라 했다. 방문을 열고 방에 들어선 병욱은 어둠 속을 짚어 벽면을 더듬었다. 유두 처럼 돌출된 것이 손에 잡혔다. 부드럽게 힘을 가하자 공명이 났다. 몇 번의 깜박거림 끝에 형광등이 빛을 냈다. 순간 병욱은 동그래진 눈으로 신음을 삼켰다.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몸을 웅크린 채 앉아 있던 것이었다. "내일 당장 저 두 놈을 이 집에서 내보내라고 해야겠군." 허깨비가 아니었다. 교감이었다. 병욱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앉아." 교감은 강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병욱은 엉거주춤 자리를 틀고 앉았다. "어딜 갔다 온 게야?" 오늘 낮까지만 해도 꼬박꼬박 경어체를 사용하던 교감은 어느 새 완전한 해라체를 내질렀다. 병욱은 뜨악한 표정으로 교감을 바라보았다. 그 꼴은 배 꼽을 맞추기만 하면 금방 주인 행세를 하려 드는 고약한 사내의 꼴이었다. "어딜 갔다 왔냐고 묻지 않았어?" "바람도 쐴 겸 술 한 잔 하고 들어왔습니다." "술이라구?" 교감의 눈알은 두꺼비를 노리는 뱀 눈깔처럼 툭 불거져 나왔다. 섬뜩했다. "술을 삼가고 바깥 사람을 접촉 말라고 경고하지 않았던가?"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교감은 아직껏 교단의 일에 대해서는 일언반 구가 없었던 것이다. 병욱은 어이가 없어 눈알만 말똥말똥 굴렸다.
"큰 일을 도모하려는사람이 그래선 안 되는 게야. 심신을 수양하며 미래 를 준비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거늘." 교감은 혀를 찼다. 병욱은 속이 발칵 뒤집히는 듯했다. 오물 세례를 듬뿍 받은 기분이었다. 부라린 병욱의 눈을 읽은 교감은 짐짓 딴전을 폈다. 그러 나 병욱은 할 말은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저로서는 모든 게 엉뚱할 따름입니다. 교장 선생님과 치른 영접이 어땠 는지 아십니까? 그걸 입도식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따위 하찮은 일을 치르느라 마음 졸인 걸 생각하면……." "하찮은 일?말조심하게. 이곳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어." "어쨌든 저는 너무나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 니다." "또 그 부당성 타령인가? 지겹지도 않은가?" "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습니다." "참을 수가 없다니? 대체 무엇을 못 참겠다는 게야?" 병욱은 말문이 막혔다. 막상 말을 내질러 놓고 보니 그 자신도 참지 못할 일이 무엇인지 막막했다. 가슴이 답답했다. 출구를 찾지 못해 허둥대는 실험 용 흰쥐 같았다. "어쨌든 저는……." "됐어. 됐어. 그만하면 알아들었어." 교감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쉽지 않아. 한바탕 돌풍이 불어야 할 것 같애. 모든 건 당신과 시비가 붙 었던 그 놈 때문이야. 진작에 버릇을 고쳐 놓았어야 했는데." 교감은 교무실 출입문 쪽 첫 번째 책상의 주인을 떠올리게 했다. 병욱은 또 다시 호흡이 컥컥 막힘을 느꼈다. 시비가 붙었던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당한 일이었다. 교감도 사정을 번연히 알 터였다. 그럼에도 도매금으로 넘기 려는 태도가 못마땅했다. "그 놈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그래서 위험해." 교감의 눈에 불꽃이 이는 듯했다. "방법은 하나뿐이야. 잡풀은 뽑아낼 밖에. 이 참에 씨를 말려야겠어. 문제 는 교장이야. 그 놈의 능구렁이가 가만있지 않을 텐데." "……?" "엄 선생은 내일부터라도 당장 교리 작업을 시작해. 책이나 돈이 필요하 다면 언제든지 말해. 알겠어? 어떤 종류의 자료든 필요하면 요구하란 말야." "저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딴 소리 들으려고 이 밤길을 달려온 것은 아냐. 내일 당장 작업을 시 작해. 돈키호테가 되란 말야. 머뭇거리는 놈에게는 기회가 없어. 어깆거리던 놈의 끝장을 당신은 보고 있는 거야." 교감은 몸을 일으켰다. 문지방을디디고 섰던 교감이 다시 방문을 닫아걸 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태연해야 해. 알겠어? 우리들의 발 밑으로 무한정 흐르는 젖과 꿀을 퍼 올릴 두레박을 만드는 것만 신경 쓰란 말야."
[약속의 땅] 41. 소문을 통해서
15. 3 월 16 일. 월요일. 사재(四災)가 든 날이었다. 삼경에 접어든 시간이었지만 병욱은 당최 잠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지 않 았다. 아직까지 넥타이도 풀지 않은 입성으로 요 위에 퍼질러 누워 있었다. 하루동안의 일들이 곰비임비 떠올랐다. 모든 게 찜찜했고 모든 일이 성가신 것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밤중에 일어났던 일은 너무나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 날의 불길한 징조는 아침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세 명의 여교사와 함께 학교에 출근했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서울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연수였다. 연수는 통장을 정리해야 할 일이 있 어 은행엘 들렀고, 아직까지 병욱으로부터 신용카드 결제 금액이 입금되지 않은 사실을 알았다고 말했다. 까닭을 말해 달라고 했다. 잠시의 머뭇거림이 있긴 했지만 병욱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 더 이상은 대신 결제해 주지 않 겠다고. 네가 학교에 내려왔던 날 통보하지 않았느냐, 이제는 나를 자유롭게 해 달라고도 했다. 연수의 짜증이 묻은 음성이 전화기의 잡음에 뒤섞여 범 벅이 되긴 했지만 오래지 않아 연수는 전화를 끊었다. 다시 학교에 찾아오 겠다는 말과 함께. 그것이 첫 번째 일이었다. 두 번째 일은, 교무 회의가 끝난 후 눅진한 등받이 의자에 등을 묻고 있 을 때 교감이 손짓으로 불렀다. "서울이야." 교감은 신경질적으로 병욱에게 전화기를 내밀었다. 짐짓 황송하다는 기색 으로 전화기를 건네 받은 병욱은 냅다 고함부터 내질렀다. 연수라고 생각했 던 것이다. "이젠 끝났다고 말했잖아. 날 귀찮게 하지 말란 말이야." 전화기 속에서는 한동안 울먹울먹하는 소리만이 울렸다. 연수가 아니었다.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 병욱의 명치끝이 아렸다. 병욱은 눈을 내리 감은 채 한 손으로 이맛살을 꾹꾹 눌렀다. "병욱아……, 내가…… 귀찮니?" "누나인줄 몰랐어. 정말이야." "…… 보고 싶어, 병욱아. 언제 서울에 돌아올 거야?" "누나, 그게……. 미안해. 이젠 이곳이 내 직장이야. 여름방학이 될 때까지 는 시간을 내기가 힘들 것 같애. 방학이 되면 그 때 누나 보러 갈게." "병욱아. 네가 없으니 난 너무 외로워. ……. 힘들어서 죽을 것 같단 말 야." "어머니가 곁에 있잖아." 울먹이던 소리가 흐느낌으로 변했다. 전화선을 타고 흘러나오는 쥐어짜는 듯한 흐느낌은 속을 까뒤집었다. 병욱은 전화기를 집어던지고픈 충동을 느 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내가 정말 화냥년이었던 걸까? 병욱아, 너도 그렇게 생각해?" "……" "난 어쩔 수 없었어. 한 남자를 사랑했다는 게 죄니?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단 말야. 그게 어떻게 죄가 되는 거니? 말을 해 봐. 병욱아. 응? …… 잠을 이룰 수가 없어. 눈만 감으면 사람들의 손가락이 아 우성을 쳐. 손가락들이 내 눈을 후비고, 심장을 쑤시려 한단 말야. 이러다 나 미치는 건 아닐까 몰라." "누나……" "병욱아. 내 몸에 구더기가 스는 것 같애. 자꾸만 그 곳이 가려워." 어머니가 목욕을 시켜주지 않는 거야? 라고 물으려다 그 말을 목구멍 너
머로 삼켰다. 어머니, 당신은? 울컥하고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 "제발 전화라도 좀 해줘.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단 말야. 나, 정말 미 치는 건 아닐까?" "……" "난 집안을 말아먹은 우환 덩어리가 아니야. 알지?" "누나. …… 미안하지만 지금은 수업을 들어가야 할 시간이야. 다음에는 내가 먼저 전화를 할게." 누나의 흐느끼는 소리를 뒤로하고 병욱은 전화를 끊었다. 수업이 있는 것 은 아니었다. 다만, 누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누나의 응석을 받아 주는 일은 세상의 어떤 일보다도 괴로움이었다. 묵묵히 견뎌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리로 돌아온 병욱은 눅진한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업보. 그것은 누나의 업보였다. 일생을 버팅겨야 할 순전한 누나의 몫이었다. 서울에서의 질기고도 끈덕진 인연은 천 리 길이나 떨어진 산간 마을에서 조차 끊어지지 않았다. 그 날의 찜찜한 또 다른 일은 방과후에 있었다. 혼잡스런 생각을 정리하 느라고 차를 학교 운동장에 남겨 두고 산책길에 나선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 이었다.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는 햇살은 사람의 그림자를 슬리운 몽당 빗자루 만큼이나 왜소하게 만들었다. 무겁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끌며 병욱은 교문 을 향해 타박였다. 하숙집에는 전화가 없다는 사실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 각하면서. 병욱의 머리 속에는 연수와 누나의 일이 온통 뒤범벅이었다. 긴 한숨을 뱉었다. 사람이 쳐놓은 덫에서 진정 자유로워질 수는 없는 일일까. 석고를 입힌 것처럼 목이 뻣뻣했다. 고개를 쳐들 수가 없었다. "엄 형!" 교문앞에는 뜻밖에도 재석과 진영이 병욱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흡사 발정난 수캐가 허덕이는 것처럼 병욱을 향해 더듬이를 내 밀었다. 그러나 병욱의 후각에는 그들의 더듬이가 역한 구린내를 풍기는 것 같았기 때문에 흠칫 뒤로 물러섰다. 두 사람은 망극하신 처분을 기대하는 내시 같은 얼굴빛을 하며 병욱을 향해 바싹 다가섰다. "흐……" 재석이 야릇한 신음 소리를 흘렸다. 그러나 여느 때와는 달리 여음이 치 켜 올라가지는 않았다. 병욱은 벌써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두 놈을 쫓아 내도록 해야겠다고 으르던 교감의 얼굴이 떠올랐던 것이다. "쫓겨났지 뭡니까. 아무래도 엄 형이 힘을 써 주셔야……." "두 분께서 지내시기에 불편해 하시는 것 같더니, 이번 기회에 하숙을 옮 기는 건 어떻겠습니까?" 병욱은 가능하면 그들과 거리를 두고 싶었다. 그들 역시 성가신 존재일 뿐이었다.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언제나 유들유들한 웃음을 흘리고 다니던 재석이 짧은 대화 속에서도 입 에서 침을 튀겼다. 병욱은 제 입가에 묻은 재석의 파편 자국을 손등으로 쓱 닦았다. 교감은 데면데면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로서도 전혀 대책 없는 일 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이 자리를 모면할 수 있는가 하는 궁리만을 했 다. 재석이 끊겼던 말을 이었다. "우선은 근처에 하숙을 치는 곳이 없어요. 시내에 나가면 더러 하숙집이 있기는 하겠지만 그곳은 너무 멀어요. 엄 형도 알다시피 이곳은 전력 사정 이 너무나 불안정하기 때문에 언제 정전 사고가 일어날지 모른단 말입니다.
응급 처치를 위해 달려오자면 거리가 너무 멀다는 뜻입니다. 그 순간을 참 지 못해 주민들 중의 누군가가 본사에 고자질이라도 하는 날에는 당장 모가 지가 날아갈 판이에요. 근무 태만죄로 말입니다. 김 형 사정도 생각해 보세 요. 숲의 생태 변화를 매일매일 관찰해 관찰일지를 작성해야 하는데, 그 먼 거리에서 다니자면 번잡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엄 형이 중간에서 어떻 게든 다리를 놓아 우리가 계속 하숙집에서 살 수 있도록 해주셔야겠습니 다." "하지만 두 분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전혀 힘이 없습니다." 병욱은 엄지손가락으로 눈언저리를 찍어누르며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엄 형의 뒤에는 교감 선생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두 사람은 교감의 입김에 의해서 하숙집에서 쫓겨난 사실을 모르는 듯했 다. 병욱은 굳이 그 사실을 밝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의 일에 휘말리고 싶지는 않았던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연수와 누나의 일 때문에 머리 속은 빅뱅 일보 직전의 상태였다. 그 동안 두 사람과 몇 차례 술추렴 을 하긴 했지만 특별한 정분을 느낀 적은 없었다. "교감 선생님께 부탁을 해보십시오. 엄 형의 이야기라면 틀림없이 들어주 실 겁니다." 주절거리는 건 여전히 재석의 몫이었고 진영은 그 곁에서 짓고 있는 비굴 한 표정만으로도 제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다고 믿는 눈치였다. "하숙집에서 나가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병욱은 짐짓 일의 전말을 모르는 체 말했다. "글쎄 말입니다. 그게 석연치가 않아요. 주인 할망구가 노망이 든 건지 갑 자기 마음이 변해서는 …….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전혀 이유를 짐작 못 하겠어요. 무작정 나가라고만 채근하니……." 짐작대로 두 사람은 교감의 입김을 알지 못했다. 게다가 자기 때문에 일 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못하는 것 같았다. "교감 선생님께 부탁은 드려 보겠지만 기대는 하지 않으시는 게……." "우리는 엄 형만 믿습니다." 재석이 허리를 꺾으며 고개를 수그렸다. 진영도 덩달아 머리를 조아렸다. 그렇게 두 사람을 떠나보내고 집에 돌아왔건만 아직도 한 가지 일이 남아 있었다. 앞의 세 가지 일은 마지막에 겪어야 했던 일에 비하면 차라리 가벼 운 장난 같은 일이었다. 저녁 식탁 자리는 너무나 황량했다. 재석과 진영은 하숙집에서 쫓겨났고, 세 명의 동료 여교사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제야 병욱은 자신의 크나 큰 실수를 깨달았다. 학교에서 하숙집까지 걸어오기에는 꽤 먼 거리였다. 그 래서 개학 이후에는 세 명의 동료 여교사가 늘 병욱의 차를 함께 타고 출퇴 근을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자신의 감정 상태에 휘말려 세 사람의 일을 까 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이라도 마중을 나갈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 만 그것은 적잖이 귀찮은 일이었다. 병욱의 머리 속에는 연수와 누나, 그리 고 재석과 진영의 일 처리 문제가 너무도 크게 자리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그는 식사를 마친 후 곧장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오래지 않아 병욱은 다시 일 층으로 내려왔다. 병욱은 주인 여자의 방을 두드렸다. 주인 여자에게 재석과 진영의 일에 대해서 의논을 했지만 결론은 분명했다. 먼저 교감의 마음을 돌려야 그들이 하숙집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병욱은 씻지도 않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아침에 개키지 않은 요 위에 몸을 눕혔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세 명의 동료 여교사가 돌아왔는지 잠깐동안 수런거림이 일었다. 누군가가 이 층 계단을 다급하게 오르는 소리 가 들렸고 병욱의 방문을 두드렸다. 병욱의 이맛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아마
도 상담 선생일 것이다. 함께 퇴근하지 않은 사실을 따지려 하는 것임에 분 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분명히 상담 선생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병 욱의 예상은 빗나갔다. 방문 앞에는 박 선생이 서 있었는데 파랗게 질린 얼 굴이었다. 병욱은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동시에 박 선생도 어떤 말을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말이 한데 뒤섞여 박 선생이 어떤 말을 했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아니, 박 선생이 너무 급하게 어떤 말을 뱉어냈기 때문에 병욱이 알 아듣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병욱이 다시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 했을 때 박 선생은 손바닥을 펼쳐 병욱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사람이 죽었어요." 병욱은 박 선생이 하는 말의 뜻을 언뜻 이해하지 못했다. 멀뚱한 표정으 로 박 선생을 쳐다볼 뿐이었다. "사람이 죽었단 말이에요." "누가 말입니까?" 병욱은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별다른 일이 없을 때라면 이야기의 상대방 을 권태에 젖어 들게 하는 그런 말투였다. "엄 선생님과 싸웠던 바로 그 사람이에요." 병욱의 몸뚱이가 둔기에 얻어맞은 것처럼 휘청거렸다. 교무실 출입문 쪽 첫 번째 책상의 주인이 죽었다는 말이었다. 병욱의 멀뚱해 하던 얼굴이 뜨 악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났죠? 왜 죽었답니까? 누가 죽였답니까?" "아직은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아요. 저는 다만 엄 선생님께서 아시고 계 셔야 할 것 같아서……. 저는…… 정말 아무 것도 몰라요." "교감 선생님께서도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교감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예요." "그밖에 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특별히 저에게 하는 이야기가 없었습니 까?" "근신하라고……, 입조심하라고……." "알겠습니다." 갑자기 박 선생의 몸이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눈빛 가득 공포 가 어린 것 같기도 했다. 그제야 병욱은 자신의 입에서 새나온 말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가를 깨달았다. 듣기에 따라서는 범인을 알고 있다는 의미 로 해석될 수도 있는 말이었다. 병욱은 교감을 범인으로 지레짐작했던 것일 까. "주무세요. 저는 다만…… 엄 선생님께서 이 사실을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고맙습니다." 박 선생의 방도 이 층에 있었지만 그녀는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계단을 디 디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병욱은 방문을 닫아걸고 방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도대체 누가 죽인 걸 까? 교감이? 어떤 일이 일어나도 태연해야 한다던 교감의 말은 암시였던 걸까? 어떤 이유로? 죽여야 할 만큼 절실함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 박 선 생이 아직은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 공연한 불안감에 휩싸인 것 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왠지 모를 음모의 냄새.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 소 리가 귀에까지 울렸다. 병욱은 단전호흡을 하듯 날숨과 들숨을 길게 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같은 생각의 언저리에서 맴돌던 병욱은 한 순간 화 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손톱으로 유리컵을 퉁기는 듯한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처음 병욱은 그것이 새가 길을 잘못 들어 유리창에 부딪친 소 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그 판단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새가 날아다니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 때 다시 그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정체는 분명 유리창에서 무언가가 부딪치는 소리였다. 병욱 은 급하게 몸을 일으켜 유리문을 열었고, 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재석과 진영이 어둠 속에서 내려오라고 손짓을 했다. 병욱은 뚱한 표정으로 일 층으로 내려갔다. 거실 소파에는 주인 여자와 세 명의 동료 여교사가 밀담을 나누고 있던 중이었다. 병욱을 발견한 그들 은 입을 다물었다. 비밀 결사 조직의 구성원 같은 엄숙한 얼굴들이었다. 병 욱은 주인 여자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하고서는 현관의 신발장에서 구두를 꺼내었다. 신발을 꿰신기 위해서 허리를 굽혔을 때 주인 여자가 말했다. "젊은 선생, 늦은 시간에 어딜 가는 거야?" "갑갑해서 바람 좀 쐬려고요." 병욱은 짐짓 편안한 얼굴을 가장한 채 말했다. "잠깐만 와 봐. 내가 할 말이 있어."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을 재석과 진영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막 무가내로 나갈 수만도 없는 일이었다. 병욱은 쭈뼛쭈뼛 소파로 다가갔다. "앉아. 서 있지 말고." 치질 걸린 환자처럼 병욱은 엉거주춤 소파 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학교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이야기 들었지?" 병욱은 박 선생을 향해 눈길을 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박 선생 은 딴죽을 치듯 그러한 병욱을 외면했다. 병욱의 눈동자가 흐릿해졌다. 박 선생이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덩달아 다른 두 사람의 여선생도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젊은 선생이 며칠 전 그 사람과 심하게 다투었다면서?" 흐릿해졌던 병욱의 동자가 한쪽을 향해 모여들었다. 눈에서 불꽃같은 게 이는 듯도 했다. "사람들이 젊은 선생을 의심할 수도 있겠어." "그 사람이 일방적으로 저에게 시비를 걸었던 겁니다. 저는 영문도 모른 채 당하기만 했구요." "그래서 사람들이 젊은 선생을 의심할 수 있단 말야. 당하기만 했지 대들 지도 않았다면서? 누구든 그런 상황이라면 상대의 멱살이라도 잡으려 했을 거야. 그런데 젊은 선생은 묵묵히 참아냈어. 도대체 왜 그랬지?" "그게 그 사람이 죽은 일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겁니까?" "한풀이를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앙갚음을 하느라고 뒤에서 머리를 내리쳤다고 생각하지 않겠어?" "하지만 저는……. 그리고 아직은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 습니까? 벌써 타살이라고 단정이 내려진 겁니까?" "자살이든 타살이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문제는 젊은 선생이 그 사람 과 싸웠다는 사실이야. 사람들은 가장 먼저 젊은 선생에게 혐의를 덮어씌울 거야." "하지만 저는……. 아주머니의 말대로 진작에 이곳에서 떠났어야 했을까 요?" "쯧쯧. 이젠 그것도 늦었어. 그렇게 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더욱더 젊은 선 생을 진범으로 단정을 내리게 될 걸." "……. 제가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병욱은 가슴이 갑갑해짐을 느꼈다. 무언가 엄청난 음모의 소용돌이에 휘 말린 듯한 느낌이 비수처럼 날카롭게 가슴을 후벼팠다. 농장에서 어떤 일을 은밀히 도모하기 위해서 희생양이 필요했던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병욱 이 알지도 못하는 새에 희생양으로 선택된 것이라면 그를 완벽하게 옭아맬 물증을 이미 마련해 두고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장탄식이 절로 나왔다. "교감이 젊은 선생에게 맡기려던 일이 뭐야?"
"그것은……." "젊은 선생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이번 일도 아마 교감 의 꿍꿍이속에서 나왔을 걸. 교감의 올가미에 걸려들고 나면 모든 게 끝장 이지. 젊은 선생 혼자서 아무리 바동거려 보아도 교감의 그물에서 빠져 나 올 수가 없어. 팔딱거릴수록 옥죄어 드는 벼리처럼 말야. 나에게 모든 걸 솔 직하게 털어놓고 도움을 바라는 게 좋을 거야." 병욱은 말문이 막혔다. 이물질이 기도를 막아 버린 것처럼 숨길이 가빴다. 하지만 주인 여자에게는 밝힐 만한 게 없었다. 교감의 달콤한 유혹은 살인 사건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이건 음모야, 병욱의 머릿속은 금 방 발광이라도 일으킬 것 같이 혼돈스러웠지만 내내 입을 다물었다. "나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도움을 구하라니깐." 주인 여자가 재촉했다. 하지만 병욱의 다물린 입은 열리지 않았다. 결백을 증명할 만한 거리도 갖고 있지 못했다. 아직은 교무실 출입문 쪽 첫 번째 책상의 주인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저로서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습니다." 오랜 침묵 끝에 병욱이 말했다. "이런 아둑시니 같으니. 쯧쯧." 주인 여자는 끌끌 혀를 찼다. "그 사람이 어떻게 죽은 겁니까?" "이런 답답한 화상을 보았나.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니까. 젊은 선 생에게 뒤집어씌울 혐의를 벗어날 궁리를 하라니까." "하지만 아직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저는 결백합니다." "쯧쯧쯧.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게야, 아니면 못 알아듣는 척하는 건가? 교 감은 젊은 선생을 이용하려 할 뿐이야.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어? 교감 이 젊은 선생에게 제의한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해 보란 말야. 젊은 선생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니까." 주인 여자는 답답한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러한 주인 여자를 바라보는 병욱의 가슴은 더욱 갑갑했다. "그 일은 이번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는 듯해서 말입니다." "쯧쯧. 딱도 하군. 아무래도 곤란한 지경을 당해야 입을 벌릴 것 같아. 그 럼 박 선생에게 한 얘긴 뭐야?" 병욱은 박 선생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나 박 선생은 텅빈 벽에다 시선 을 고정해 놓고 있었다. "…… 어떤?"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다는 여운을 남겼다면서?" "그것은 순전히 제 실수로……." "경찰에서도 그렇게 생각할까?" 주인 여자는 병욱의 말허리를 덥석 깨물었다. "젊은 선생은 분명히 이번 사건에 대해서 뭔가를 알고 있어. 그렇지 않 아?"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아직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지도 못합 니다." "알고 보니 젊은 선생은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이구먼. 오늘 밤 곰곰이 생 각해 봐. 무엇이 살 길인지 말야. 밝은 날 다시 이야기하자구." 주인 여자는 설득하기에 지쳤음인지 대화를 그만 두려 했다. 병욱은 주인 여자와 세 명의 동료 여교사에게 고개를 까닥 숙이고는 신발을 꿰신고 바깥 으로 나갔다. "여기요.여기."
어둠 속에서 재석이 소리쳤다. 병욱은 소리난 곳을 향해 털레털레 발을 끌었다. "왜 이렇게 늦은 거요? 안 나오는 줄 알았네." 재석이 병욱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병욱은 코뚜레에 얽매인 소처럼 재석 에게 끌려갔다. "소문 들었어요? 농장에서 끔찍한 사고가 있었다는 얘기 말입니다." 교무실 출입문 쪽 첫 번째 책상의 주인의 사고 얘기는 발이 달렸는지 그 새 외부인인 재석의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이었다. "흐. 한 해에 꼭 한 번씩이군." "아니, 그럼 예전에도 이와 같은 일들이 있었다는 말입니까?" "엄 형은 몰랐습니까? 흐. 글쎄 그렇다니까. 김 형. 내 말이 맞지? 엄 형 은 전혀 모를 거라고 하지 않았어?" 재석은 곁에서 헤벌쭉 서 있는 진영에게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쪽으로 갑시다. 내가 아는 대로 이야기해 드릴 테니." 재석은 계속해서 하숙집을 힐끗거리며 병욱의 팔을 끌려 했다. 그러나 이 제는 병욱이 끌려가는 꼴이 아니었다. 오히려 앞장서듯 걸음걸이가 빨라졌 다. "주인 여자는 뭐라고 합니까? 하숙을 다시 받아 준답니까?" "운을 떼 놓았으니까 좋도록 결정이 나겠지요." "교감 선생님께는말씀을 드렸습니까?" "아직……" "흐. 엄 형이 교감 선생님께 부탁을 해야 일이 이루어진다니까요. 주인 여 자가 겉으로는 교감 선생님께 막 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교감 선 생님 앞에서 쩔쩔맨단 말입니다. 아직도 엄 형은 그 눈치를 몰라요?" "내일이라도 교감 선생님께 정식으로 부탁을 드려 보겠습니다." 병욱은 재석의 입막음을 위해서 서둘러 약을 쳤다. 병욱의 관심은 재석과 는 다른 곳에 있었다. "말씀드렸다시피 하숙에서 쫓겨나면 우리는 매우 곤란한 처지에 빠져 버 립니다. 우리는 오직 엄 형만 믿고 있어요. 아시죠?" 병욱의 팔목을 쥔 재석이 걸음을 멈추었기 때문에 병욱도 따라서 멈출 수 밖에 없었다. 희뿌염한 달빛 아래에서도 재석의 눈빛은 너무나 간절하게 느 껴졌다. 병욱은 몇 번씩이나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세 명이 함께 엉덩이를 걸칠 수 있을 만큼 큼지막하고 펑퍼짐한 바위가 눈에 띄었다. 세 사람은 동시에 그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재석이 호주머니 속에서 담뱃갑을 끄집어냈고 진영과 병욱에게 담배를 꺼내 주었다. 어둠 속 에서 불꽃은 선명하게 타올랐고 이어서 자줏빛 연기가 하늘을 향해 치달았 다. "농장에서 죽었다는 사람, 분명 타살일 거예요. 엄 형도 잘 아는 사람입니 까?" "천도 고등학교의 선생님입니다" "저런! 상심이 크겠군요." "왜 죽었답니까?" "흐……? 같은 학교 선생님이라면서 왜 죽었는지도 모른단 말씀입니까?" 마침 달빛이 구름에 가려졌기 때문에 재석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병욱은 어둠 속에서도 뜨악해 하는 재석의 표정을 느낄 수 있었다. 서둘러 말했다. "제가 퇴근한 후에 그 일이 일어났거든요." 그 사람의 죽음이 저와 관계가 있는 듯해서 가슴이 답답합니다, 라는 말 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제가 들은 소문에 의하면 누군가 농장 안의 물웅덩이에 떠밀어 죽였답니 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지만 그건 분명 앞뒤가 막힌 말이지요. 성인 남자 가 그깟 물웅덩이에 빠져 죽는다는 게 말입니다. 웅덩이는 고작 한 길 깊이 밖에 안 된답디다. 이건 분명히 타살입니다. 단정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재석은 법정에 선 증인처럼 음절 하나하나에 또박또박 힘을 실으며 말했 다. 그 자신의 증언만이 피의자의 죄의 유무를 확정짓게 된다는 뚜렷한 확 신을 가진 듯한 어투였다. 병욱은 담뱃불을 길바닥에 던졌다. 땅바닥에 물기 가 배어 있는 것일까. 뜨겁게 달구어진 난로의 가장자리에서 물기가 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럼에도 불은 간질간질 생명을 유지했다. 바위에 걸치고 있던 몸을 일으켜 구둣발로 담뱃불을 밟았다. 얼결에 꿈틀대는 지렁이를 밟 았을 때와 같은 기분 나쁜 촉감이 구두 밑창을 통하여 느껴졌다. 입안에 고 인 가래를 칵 소리나게 뱉었다. 다시 바위에 엉덩이를 올려놓았을 때는 잊 고 있었던 냉기가 꼬리뼈 속으로 파고들었다. 섬뜩했다. "옛날에 농장에서 사람들이 죽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병욱이 물었다. "정확히는 우리도 몰라요. 농장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은 경찰 조사를 받 기만 하면 모두가 무혐의로 처리되었거든요. 단순 사고사 아니면 자살로 매 듭이 되었습니다." "경찰이 농장 사람들을 보호해 주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짐작컨대 그건 아닐 겁니다. 다만 경찰의 수사도 한계가 있을 게 뻔해요. 농장 사람들만 입을 맞추면 경찰도 어쩔 수가 없는 거죠. 그들은 서로가 서 로의 알리바이를 만들어 주거든요.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농장을 크레믈린 궁이라고 부릅니다. 비밀의 집단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재석의 말은 병욱에게는 한편으로 안도감이 들게 했다. 주인 여자는 교무 실 출입문 쪽 첫 번째 책상 주인의 사인에 대해서 경찰이 병욱에게 가장 먼 저 혐의를 둘 수 있다고 했었다. 그러나 재석의 말에 의하면 설사 경찰이 그에게 혐의를 둔다고 하더라도 농장에서 충분히 그를 보호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주인 여자의 말처럼 교감의 음모가 끼여들어 있다면? 병 욱은 그 다음의 일에 대해서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 밖의 소문은 없습니까?" "아직은……. 하지만 내일쯤 되면 온갖 소문들이떠돌 겁니다. 이 경우에 는 경찰 조사보다도 그런 소문들이 더 믿을 만해요. 경찰이란 시민의 제보 가 없으면 허수아비 같은 놈들이거든요. 이런 산골의 경찰이란 놈들은 힘없 는 사람 붙들고 윽박지를 줄이나 알지, 살인 사건 해결 같은 것은 감히 꿈 도 못 꿀 일입니다. 그런데 농장 사람들은 경찰에게 제보를 하거나 하는 사 람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사건은 미궁에 빠져들 게 분명해요." "소문은 어디에서 듣게 되는 겁니까?" "거진 농장 사람에게서 나오는 얘기예요." "농장 사람들은 스스로 알리바이를 만들어 낸다면서요? 그런데 어떻게?" "그건 경찰에게나 그렇죠.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교주이지 경찰이 아닙 니다." "그래도 소문을 흘린다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흐……. 그걸 꼭 말로 설명해야 합니까?" 재석은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찼다. 하루 동안에 일어난 일들을 병욱은 곱씹어 보았다. 모두가 숨길이 막힐 법한 일들이었다. 그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아직까지 와이셔츠도 끄르지 않은 입성으로 요 위에 드러누운 병욱은 이 리저리 몸을 뒤척였다. 쉽게 잠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멀리서 밤
부엉이 소리가 들렸다.
[약속의 땅] 42. 피를 대가로 치러야겠지
이튿날은 화요일 아침이었다. 벌써 세 번씩이나 여선생들이 출근 준비를 하라며 문을 두드렸지만 병욱 은 못 들은 체 이부자리에 몸을 누이고 있었다. 간밤의 옷차림새대로였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까닭인지 까칠한 혓바늘이 돋아 있었고, 얼굴에서는 푸석푸석한 모래 알갱이가 잡혀질 듯했다. 누군가가 네 번째로 문을 두드렸 을 때 병욱은 마지못한 듯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었다. 주인 여자였다. "젊은 선생! 어디 아파? 안색이 왜 그래? 저런! 몸살이라도 난 게로군." 주인 여자는 아래층 사람들이 들으라는듯 호들갑스럽게 말했지만 얼굴 표정은 이상하게도 심드렁한 기색이었다. "젊은 선생은 오늘 출근 못할 것 같아. 먼저들 출근하라구." 주인 여자는 아래층을 향해 마치 고함을 내지르듯 했다. 병욱은 머쓱한 표정으로 그러한 주인 여자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쉬라구." 주인 여자는 여전히 악을 쓰듯 말했다. 누구라도 환자에게 하는 말로는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아래층에서는 부산한 소리가 났고, 주인 여자는 이번 에는 아래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디디며 외쳤다. "출근 시간에 많이 늦겠어. 다들 서둘러." 문을 닫지 않았기 때문에 주인 여자의 계단을 딛는 발소리가 쿵쾅거리며 요란스레 울렸다. 이윽고 집안은 잠잠해졌다. 병욱은 방문을 닫아걸지 않았다. 주인 여자가 곧 올라올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그의 짐작대로 아래층의 소음이 그치 자마자 주인 여자가 방문으로 들어섰다. "쯧쯧. 한숨도 자지 않은 눈치군." 병욱이 앉으라는 말도 하기 전에 주인 여자는 디룩디룩 살점이 붙은 엉덩 이로 방바닥에 퍼더버리고 앉았다. 조금 전의 심드렁했던 표정과는 달리 딱 딱하게 굳은 표정이었다. 병욱은 주인 여자가 앉은 방향에서 사십오 도쯤 몸을 비틀어 앉았다. 마치 내외(內外)를 하는 꼴이었다. "젊은 선생이 그 사람을 죽인 건 아니지? 그렇지?" 주인 여자는 병욱을 향해 바싹 다가앉으며 말했다. 병욱은 앉은걸음으로 두어 걸음쯤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교감이 죽인 거야. 그렇지 않아?" "그건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왜 교감을 두둔하려고 하지?" "그건……, 제가 알지 못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알지도 못하는 일을 함 부로 말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교감을 변호하려 하다가는 자칫 젊은 선생이 죄를 뒤집어 쓸 수도 있어. 왜 어리석은 일을 하려는 거지? 이곳에서 젊은 선생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 은 나 말고는 없어. 속 시원히 나에게 털어놓는 게 좋을걸."
병욱은 주인 여자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주인 여자는 교감과는 어 떤 관계일까? 주인 여자의 속내를 짐작할 수가 없어 갑갑했다. 갑갑한 노릇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병욱은 밤내 음모의 예감에 사로잡혀 야 했었다. 몇 번씩 되짚어 보아도 교감이 굳이 그를 학교에 붙잡아 두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교감은 병욱이 서울로 돌아가지 못하도 록 붙잡았고, 그 일 때문에 학교에서 사람이 죽었다. 이건 분명히 음모야. 밤새 이부자리 위에서 뒤척이며 중얼거리던 소리를 떠올렸다. 도대체 어떤 이유 때문일까? 알력 때문일까? 교장과 교감의 관계라든지, 교감과 교무실 출입문 쪽 첫 번째 책상의 주인과의 갈등. 개연성은 있었다. 그렇다면 용뺄 재주가 없었다. 치밀한 계획이 마련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과연 주인 여자가 음모의 늪에서 끄집어 내줄만한 힘이 있을까? 병욱은 미심쩍은 눈으 로 주인 여자를 살폈다. 고작 하숙이나 치는 여자. 이 여자도 한때는신도였 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닌 것 같았다. 스스로 농장의 울타리에서 벗어났을 수도 있고, 아니면 파문을 당했을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떤 쪽이 든 현실적인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병욱은 새삼 황소 젖통만큼이나 가슴이 솟아오른 주인 여자의 외모를 살폈다. 너럭지만한 얼 굴에 덕지덕지 눌러 붙은 기미들, 황소처럼 도드라진 눈알, 허리와 가슴을 나누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이었고, 엉덩이는 된장독의 뚜껑만큼이나 넓적했 다. 손바닥도 장화홍련전에 나오는 계모만큼이나 두꺼웠다. 족발의 살점을 혓바닥으로 핥아먹듯 주인 여자의 손의 살점을 도려내면 몇 사람의 안주거 리는 거뜬할 지경이었다. 삶의 지혜 따위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구석이 없는 여자였다. "제가 알고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교감이 젊은 선생을 유혹하기 위해 했던 말은 있을 게 아냐?" 병욱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쯧쯧쯧. 곧 새로운 국어 선생이 부임하겠군." 주인 여자는 협박이라도 하려는 걸까. 병욱의 감방 생활을 염두에 둔 말 같았다. 병욱의 양미간이 찌푸려졌지만 이내 평상심을 찾은 듯 평온한 얼굴 을 가장했다. "다음은 교장 선생님 차례야." "그건 무슨 뜻입니까?" "내가 이 세상에서 존경하는 유일한 분이 있다면 그 분은 바로 교장 선생 님이지. 난 교장 선생님을 보호해 드리고 싶단 말야." 병욱은 주인 여자가 하는 말의 가리사니를 잡지 못해 멀뚱한 표정이었다. "교감은 결코 지금의 자리에 만족할 사람이 아니야. 그 사람의 욕심은 끝 이 없어. 그러자면 교장 선생님도 은밀히 살해할 계획을 세우겠지. 옛날처럼 말이야. 그 사람은 마귀야."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단 말입니까?" "젊은 선생처럼 불쌍한 사람이 국어를 가르치러 천도 고등학교에 올 거 야. 이번에는 눈이 멀지 않은 사람이었으면 좋겠구먼." "전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겁니까?" 병욱은 주인 여자를 정면으로 향하여 몸을 돌려 앉았다. 목구멍 속으로 쉴 새 없이 침이 꿀꺽꿀꺽 넘어갔다. 오줌을 한 방울 잘금거린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한참동안 앙바틈하던 주인 여자는 갑자기 말꼬리를 놓친 사람 처럼, 또는 기억 상실증 환자처럼 멍한 표정을 했다. 그렇다고 생각에 잠긴 것 같지는 않았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병욱은 열에 달뜬 환자처럼 벌겋게 상기된 얼굴이었다. 그러나 주인 여자 는 그 후에도 한동안 말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병욱의 눈자위를 스쳐 지나
는 실핏줄이 시뻘건 피를 토해 내려 할 때쯤 주인 여자는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 결단코 교감의 재목이 아니야. 그런데 어쩐 일인지 어른은 다 른 누구보다도 신뢰했지. 까닭은 알 수가 없어. 아마도 어른께서 눈에 뭔가 가 씌었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그럴 수는 없는 일이지. 학교의 교감 자리 가 비었을 때 두 사람이 경쟁을 했어. 한 분은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매력을 지니신 분이었지. 그 분은 일천구백구십구 년에 종말이 온다 는 강한 믿음을 가지신 분이었고,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 골몰하신 분이야. 그런데 그 분이 어느 날 끔찍한 사고를 당하셨어. 청맹과 니 같은 경찰놈들은 실족사라고 결론을 내리더군. 명백한 정황이 있음에도 말야. 물론, 어른의 힘이 컸던 게지. 어른의 능력이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비범하니까." "이번에 농장에서 죽은 사람은 교감 선생님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겁니까?" "쯧쯧쯧. 정녕 몰라서 물어? 그 사람은 학교에서 교감에게 대놓고 말했던 유일한 사람이야. 교감으로서는 생선 가시처럼 보였겠지. 그러니 죽일 밖 에." 병욱은 어질어질 현기증이 일었다. 울컥 토할 것 같기도 했다. 사태는 이 제 명백했다. 똑 같은 방법으로 사람을 죽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누 명을 덮씌울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리라. "교감과 어떤 일이 있었던 거지? 이제 진실을 밝혀 봐. 젊은 선생 때문이 아냐. 교장 선생님을 도와드리고 싶단 말야." 병욱은 주인 여자에게 매달려 살려달라고 애원이라도 하고 싶었다. 애당 초 출구 없는 대피소에 기어든 것이 잘못이었다.교감의 달콤한 유혹을 덥 석 받아 문 것이 잘못이었다. 눈에 희뿌염한 안개가 끼는 것 같았다. 그 때 교감이 했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태연해야 해. 알겠어? 우리들의 발 밑에 흐르는 젖과 꿀을 퍼 올릴 두레박을 만드는 것만 신경 쓰란 말야.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드는 심정일까. 어쩌면 교감은 이런 사 태까지 예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독사 대가리처럼 고개를 쳐들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한편으로 카오스, 혼돈,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사태는 너무나 명백한 것 같기도 했다. 태고 적, 희생 제의를 치를 때 신전에 바치는 희생양의 꼴이었 다. 희한한 일이었다. 난국에 부닥칠 때면 신전에 갇혀 전례를 탐구하는 노회 한 수도사처럼 불쑥 학창 시절을 떠올렸다. 병욱이 학창 시절 가장 못 견뎌 한 것 세 가지가 있다면 예방 주사 맞는 일과 치과 가는 일, 그리고 매를 맞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매를 맞아야 할 일이 생길 때면 지레 입에서 거품을 물었기 때문에 선생들은 그에게 매 질하는 것을 포기할 지경이었다. 그러던 그가 된통 걸려든 일이 있었다. 한 번 매를 잡으면 참나무 몽둥이 로 쉰 번은 휘두르고야 마는, 또는 두툼한 손바닥으로 뺨을 오십 차례나 갈 기고야 마는, 그래서 별명이 '오십대'라고 붙은 교련 선생에게 걸려들었던 것이다. 매를 맞는데 이력이 붙은 학생들도 오십대에게만큼은 혓바닥을 내 둘렀다. 그만큼 학생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어떻게 해서 오십대에게 걸려들었는지는 아리까리했다. 그 기억은 너무나 갑작스레 떠올랐기 때문이 었다. 내일 점심 시간에 교련실로 와. 살생부에 뚜욱 소리를 내며 도장질을 해대는 염라 대왕처럼 교련 선생은 말했었다. 그 날 밤 병욱은 흰밤을 새야 했었다. 경기 들린 아이처럼 연거푸 딸꾹질이 나왔고, 허벅다리는 감전이 된 듯 찌르르했다. 심장 마비로 급사하
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호흡이 할딱였다. 그러나 묘하게도 새벽 이 되고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을 때부터 새가슴은 진정되기 시작했다. 오기 가 생겼던 것이다. 까짓 것 죽기야 하겠는가 하는 생각. 점심 시간이 되었을 때 병욱은 교련실로 향했다. 심장은 여전히 콩딱였지만 마음은 덤덤했다. 한 데 어쩐 일인지 교련 선생은 그 날 그 시간에 그 곳에 없었다. 그리고는 유 야무야되었다. 주인 여자는 여전히 눈알 한가운데에 까만 동자를 모으고 있었지만 황소 눈깔처럼 큼지막했기 때문인지 상대방을 위압하지는 못했다. 병욱은 이윽고 작정이 된 듯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태연하게 행동하라던 교감의 말을 믿 어보기로 한 것이다. 어차피 교감이 자신을 옭아매기 위한 음모의 덫을 놓 아둔 것이라면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결정적인 순 간에 이를 때까지 버팅길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더욱이 주인 여자에 대 해 믿음성을 가질 수가 없었다. "저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할 말도 없구요." 말을 마친 병욱의 몸에서 지금 막 혼이 빠져나가는지 머리끝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러나 벼슬에 대강이를 쑤셔 박아 낭자한 피가 흐르게 하는 싸움닭같이 길길이 날뛰던 주인 여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갔다. 병욱은 주인 여자가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했 다. 이제는 방에서 나가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려 했다. 그때 갑자기 요란한 기계음이 귀청을 파고들었다. 가슴을 졸이던 뒤끝이라 절로 오금이 저렸다. 기계음은 자동차 엔진 소음 같았다. 소리의 크기로 보아 한대 같지는 않았 다. 병욱은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오시는 모양이군." 주인 여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자동차는 하숙집 뜰에서 멎은 듯했다. 지척에서 소음이 죽어버린 까닭이 다. 잠시 후 계단과 복도에서 여러 개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병욱은 불길 한 예감 때문에 머리털이 곤두섰다. 닫히지 않은 방문의 문지방을 넘어 건 장한 사내들이 들이닥쳤는데 그들은 하얀 도복 차림에 허리에는 빨간 띠를 두르고 있었다. 병욱은 맥을 놓은 듯 흰자위가 까만 동자를 덮었다. 입은 벌 어지지 않았고 종아리가 저렸다. 도복 차림의 사내들이 도열한 사이로 정장 차림의 사내가 들어왔다. 그때에야 병욱의 눈에 깨알만한 동자가 자리를 잡 았다. 정장 차림은 교감이었다. 어느 새 일어서 있던 주인 여자가 교감을 향 해 말했다. "믿을 만합니다." 교감은 고개를 주억거렸고 하얀 도복 차림의 건장한 사내들에게 방에서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처마 밑에서 졸고 있던 태양의 그림자가 저녁나절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사내들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방에서 없 어졌다. 주인 여자도 방에서 나갔다. "앉지." 교감이 외가 드나들듯 자연스런 동작으로 방바닥에 앉았을 때 뜰에서는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 자동차가 미끄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병욱도 덜 퍼덕 주저앉았다. "목숨을 구한 거야. 이제 너는 내 사람이야." 내가 지금 어느 공연장에 와 있는 건가? 라고 병욱은 생각했다.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한가하게 연극 무대를 즐기는 것 같았다. 공연히 발가락을 꼼지락거려 보았다. "이 집은 일종의 통과 의례를 치르는 곳이지. 많은 사람들이 이 집에서 죽어 나갔어. 선택받은 자만이 농장에 들어갈 수 있지. 여선생들은 영원히 농장에 들어가지 못해. 삵쾡이들은 주인 여자에게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곤
하지. 나를 믿지 못한다는 게지. 하지만 그들은 나에게 대해서 아는 것도 없 어." 한순간 느슨하게 풀렸던 병욱의 신경줄이 다시 팽팽하게 당겨졌고, 선형 적으로 간담이 서늘했다. 선택은 옳았다. 살았다는 느낌이 선연했다. "왜 사람들이 죽었는지를 묻지 않는군. 스스로 깨달았다는 뜻인가? 주인 여자가 한 말은 모두가 사실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결코 알아서는 안될 사실을 알게 되는 거지. 비밀을 알고 있으니까 살려둘 수 없는 게야." "……" "이젠 내가 교장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도 우주의 섭리이지. 언젠가는 더 높은 자리에 올라야 한다는 사실마저도." 병욱은 묵묵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교리 작업에 정진하게. 약속은 반드시 지킬 테니까. 한 번도 누려 보지 못한 권세를 마음껏 즐기게 될 거야. 천국의 주인이 되는 걸세. 즐거운 상상 아닌가? 그리고, 이번 일로 성가신 게 싫다면 사흘쯤 병을 빌미로 집에서 쉬어도 좋아. 그 때쯤이면 농장에서 깨끗하게 처리할 거야."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왜 저를 선택하신 겁니까?" "왜냐구? 왜는 없어. 그저 있었기 때문이지. 장작을 패는 나무를 선택할 때 아무도 왜라는 건 따지지 않아. 운 좋게 대들보로 쓰이는 놈도 있고, 불 쏘시개로 들어가는 놈도 있지. 대들보로 쓰일 법한 나무들도 장작더미에 묻 혀 버리기 일쑤인 게 세상의 이치야. 넌 왜 하필이면 많고 많은 학교 중에 서 천도 고등학교로 온 것이지?" "그건……." "삼촌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은가? 아니야. 삼촌이란 사람도 필연은 아니 야." "삼촌도 신도입니까?" "더 이상 질문은 필요하지 않아. 이제부터는 내가 말하고 나만이 질문할 걸세. 네가 지켜야 할 것이 세 가지가 있어. 첫째, 나에게 충성할 것. 둘째, 종말을 믿을 것. 셋째, 교리를 완성시킬 것. 그러면 나도 세 가지를 줄 것이 야. 첫째, 현세에서의 천국을 맛보게 해주지. 내세를 믿는 건 덜떨어진 인간 들이나 하는 짓거리야. 둘째,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능을 주겠네. 마지막으 로 쾌락을 선사하지. 이 정도면 교환 조건으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아직도 뭐가 뭔지……." "판단을 유보하지도, 거부하지도 말게.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야. 우매한 사람들은 우리더러 사이비 종교에심취해 있다고 하지. 만약 그 렇다면 말야, 사이비 종교는 일사불란한 조직과 비밀 유지가 생명이란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교감은 오금을 박듯 말했다. 병욱은 잔뜩 주눅이 든 얼굴로 시선을 방바 닥에 깔았다. "지상 낙원을 선택하겠나? 아니면 파문을 선택할 것인가?" 파문? 이교도로 낙인찍힘을 의미하는 말인가? 병욱은 그 말의 파장을 깨 닫고 몸을 떨었다. "대답을 해." 병욱은 아주 잠깐동안 고개를 들었다. 교감의 눈에서 광기가 번뜩였다. 병 욱은 공포심에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선택을 하라니깐." 교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날선 비수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파편에만 맞아도 살점이 싹둑 잘려나갈 것 같은 섬뜩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병욱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충성 서약을 하란 말야."
"따르겠습니다. 무조건 따르겠습니다." 병욱은 머리까지 조아리면서 말했다. 교감의 흡족한 표정이 한순간에 심 각한 표정으로 변했다. 이윽고 교감이 말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야. 우선은 내가 교장이 되어야 하고, 다음은……. 피를 대가로 치러야겠지. 두려워 할 일은 아니야. 그 일은 차차 의논하도록 하세."
[약속의 땅] 43. 불길한 예감
16. 3 월 18 일. 수요일 오후. 한단(邯鄲)에서 나그네가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개미집 위에서 잠을 청한 것(한단지몽, 邯鄲之夢)이 이맘때쯤이었을까. 햇살은 따갑지 않았 지만 눈부셨고, 백태가 낀 것처럼 눈두덩이 더부룩했다. 하숙집으로부터 얼 추 십 리여는 걸어온 것 같다. 사념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머리와 꼬리는 잘 려나간 채 몸통만이 비대했다. 실타래처럼 엉킨 생각들을 견디다 못해 무작 정 신발을 꿰신고 집을 나선 것은 주인 여자와 어색한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였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이 노곤한 봄기운에 부풀려 있었다. 무거운 발길을 끌 때마다 저절로 몸이 흔들렸다. 발자국이 찍힌 곳마다 땅이 움푹움푹했다. 몸이 움찔했다. 한 움큼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돌부리에 채인 오른쪽 엄지 발가락이 욱신욱신 아렸기 때문에 병욱은 얼결에 흙바닥에 퍼더버리고 앉았 다. 구두를 벗었다. 마사지하듯 오른쪽 엄지발가락을 어루만졌다. 유리 조각 이 살점에 박힌 것처럼 발가락 끝이 따끔거렸다. 교감은 분명 수완 있게 사태를 해결할 것이다. 그뿐이었다. 그러면 모든 게 끝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내 방식이 아니야. 봄기운에 녹아 몽롱하던 의식이 한바탕 찬물을 뒤집어쓴 듯 명징하게 되 살아났다. 이건 내 방식이 아니야. 병욱은 진언을 외듯 또 한 번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 방식이 무 엇이지? 내 방식이 있기나 했던 건가? 병욱은 땅바닥에 퍼더버리고 앉은 채 연이어 치매 환자처럼 씨부렁거렸다. 현기증이 일었다. 햇살을 가릴 만한 적당한 나무 그늘이 없었던 때문인지 도 모르겠다. 넋이 나간 듯 퍼더버리고 앉은 채 씨부렁거리던 병욱은 땅바 닥에서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털어 냈다. 싯누런 흙먼지가 제자리 맴을 돌다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병욱은 흙먼지가 추락한다고 생각했다. 추, 락, 추락이 두려웠던 것일까? 그것은 아니었다. 서울에서의 생활이란 추락할 아무 것이 없었다. 서울은 갑 각류의 등딱지 같은 것이었다. 조총 탄알을 퉁겨 내는 임진란의 의병 대장 곽재우의 솥뚜껑 같은 것이었다. 비집고 들라치면 누군가의 발에 채여 자빠
지기 일쑤였고, 대가리를 들이밀면 자기의 머리통에서만 선혈이 낭자했다. 병욱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는 너무도 견고한 성채였다. 호랑이 아가리? 그렇다면 도피 행각이라도 벌이는 겐가? 배실배실 웃음 이 나왔다. 미친놈처럼 낄낄거리고 싶었지만 엉뚱하게도 입 언저리만 기묘 하게 일그러질 뿐 소리는 새나오지 않았다. 배실배실, 배실배실 …….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던 걸음이 무릎을 찧었다.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다. 병욱은 그 자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흰 눈 위를 마구 뒹구는 개처럼 먼지 날리 는 밭 둔덕에서 몸을 뒹굴어도 보고 싶었지만 움쩍도 하지 않았다. 말년의 아버지는 필로폰 중독자였다. 아버지는 필로폰의 맹독성을 몰랐던 것일까. 당신이 두려워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당신도 호랑이 아가리의 진 실을 알아채 버린 탓이었을까. 젊은 한 때, 아버지도 성실한 가장이었다고 했다. 그 때를 기억할 때만큼은 어머니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알뜰살뜰 돈 쌓이는 재미에 벙글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던 아버지. 꿀물은 달짝지 근하지만 과욕을 부리면 속을 쓰리게 하는 법이다. 아버지의 기세는 기어이 꺾이고야 말았다. 차압 딱지가 집안에 붙던 날, 아버지는 빚쟁이들의 가랑이 를 붙들고 늘어졌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돌아온 것은 채권자들의 무 자비한 욕지거리뿐이었다고 했다. 그 날부터 아버지는 이제 더 이상 성실한 가장이 아니었다. 달짝지근한 꿀물은 또 있었다. 누나는 하필이면 자식이 둘씩이나 달린 발 정기의 수캐를 사랑했던 것이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성애를 즐기던 그들 은 어느 날 서울 근교의 비닐 하우스에서 그 짓을 했다. 할딱이는 숨길로 속옷도 챙겨 입지 않고 상대의 가슴을 애무하던 그들은 그만 그 속에서 잠 이 들었다. 그들이 곤하게 잠든 시간에도 광합성 작용은 계속되었고 하우스 안의 산소는 말라붙었다. 새벽녘에 농부가 하우스를 찾았을 때 발정기의 수 캐는 이미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 버린 후였다. 119 구조대가 누나를 인근 병원으로 옮겨 응급 조치를 했다지만 하반신의 신경을 되살릴 수는 없었다. 병욱은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자신의 눈앞에도 달콤한 꿀물이 담긴 그릇 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사향노루의 분비물보다도 독했다. 들이키기만 하면 영원히 갈증에 허덕이지 않을 것 같았다. 누군가가 그릇 속에 색소마저 뿌 려놓았다. 그것은 현란하여 시각을 어지럽게 했다. 병욱은 콧구멍을 벌름거 리면서 한편으로 입맛을 다셨다. 침샘에서 단맛이 묻어 났다. 병욱은 간질병 환자처럼 고꾸라져 있던 몸을 일으켜 앉았다. 여전히 햇살 은 내리쬐고 있었지만 이젠 더는 의식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이건 내 방식이 아니야. 곧추 세운 무릎 사이로 고개를 처박고는 양팔로 무릎을 감싸안았다. 서울로 돌아가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어머니와 누나, 삼촌, 연수의 신용 카드 청구서와 형형색색의 여관 간판. 그리고 호랑이 아가리, 호랑이 아가리, ……. 병욱은 발작적으로 앉았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내밀어도, 뒤 로 치빼도 어차피 호랑이 아가리에 잡아먹힐 팔자라면 차라리 부닥치지 않 으리라 마음먹었다. 선택은 옳은 것이다. 아니, 이제는 용뺄 재주가 없었다. 하숙집에 가까이 왔을 때는 볼에 스치는 바람결의 열기가 가셔 있었다. "엄병욱 선생님 되십니까?" 현관문을 밀치자마자 거실의 소파에서 낯이 선 두 사람이 소리쳤다. 마치 병욱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다소 유행에는 뒤쳐진 느낌이었지만 말쑥한 정장 차림새였고, 다른 한 사람은 작달만한 키에 우중 충한 빛깔의 겨울 점퍼를 걸치고 있었다. 겨울 점퍼를 걸친 사내의 얼굴은 두꺼비를 연상시키리만큼 볼따구니가 불거져 있었다. 병욱을 향해 소리친
사람은 두꺼비였다. 주인 여자는 그 곁에서 잔뜩 굳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 다. 병욱은 짧은 순간 그들이 형사일 것이라는 짐작을 했다.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야 했다. 교감의 호언장담이 빗나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들어오세요. 소파에 앉으시죠. 서에서 나왔습니다. 농장에서 사고가 있었 다는 사실은 아시죠? 참고인 자격으로 확인할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이제 막 완치된 실어증 환자처럼 두꺼비는 쉴 새 없이 말을 뿜어댔다. "산책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네." "학교에는 병으로 결근했던 게 아닙니까? 병자의 안색이 아닌 것 같은 데……." "아침나절에는 열이 엄청 높았답니다. 오후 들어 열이 내려가는 것 같기 에 제가 산보를 권했습니다. 적당한 운동은 건강을 회복하는데도 도움이 되 니까요." "아줌마에게 물은 게 아닙니다." 두꺼비가 주인 여자에게 눈꼬리를 치켜 뜨며 말했다. 주인 여자의 도드라 진 입술 모양이 더욱 불거져 나왔다. 병욱은 두꺼비의 기세에 눌리지 않기 위해 짐짓 엉덩이에 힘을 주었다. 경찰이 하숙집을 찾아온 이유를 정확하게 알기 전에는 섣부른 대꾸를 해서는 안될 것 같았다. 불길한 예감이 가신 것 은 아니지만 교감의 음모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두려워할 것은 없었 다. "죽은 사람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다 고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엄병욱 선생을 범인으로 의심하는 게 아니라 참 고인 자격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어서 말입니다. 수사상의 절차에 불과할 뿐 입니다. 솔직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남들 눈에는 그렇게 비쳤을 수도 있었겠죠."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 "사고가 일어났던 시간에 어디에 있었습니까?" "알리바이를 묻는 겁니까?" "많이 배우신 분이라 대답하는 게 역시 다르시군요. 그래요. 알리바이를 묻는 겁니다. 그날의 행적을 자세하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저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면서 왜 그런 확인 절차가 필요한 거죠? 더구 나 저는 농장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신분도 아닙니다. 사고는 농장 안 에서 일어났던 게 아닙니까?" "반드시 농장 안에서 사고가 일어났다고 단정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누 군가 바깥에서 사건을 저지른 후 농장 안으로 시체를 옮겼을 수도 있으니까 요. 농장에서 발생한 사건은 미궁으로 처리되기가 쉽다는 것을 악용하는 거 죠. 요즘은 영악한 살인마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어쨌든 저는 농장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건 사실입니다." "천도 고등학교 선생님들은 모두가 농장 핑계를 대는군요. 마치 그곳을 치외 법권 지역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농장 역시 경찰의 수사 관할 지역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서장님은 이번 사건 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어요. 이제 사고가 일어난 시간에 어디에 있었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병욱은 그 날의 기억들을 더듬더듬 두꺼비에게 설명했다. 두꺼비는 펼쳐 놓은 수첩 속에 병욱의 말을 깨알같은 글씨로 기록해 나갔다. 병욱이 말을 마치자마자 두꺼비가 물었다. "한전에서 근무한다는 사람과 산림청 파견 직원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
까?" 병욱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 사람들이 갑작스레 하숙에서 나간 이유는 무엇입니까?" 병욱은 두꺼비의 말에 대한 대답 대신 주인 여자를 바라보았다. 두꺼비 역시 주인 여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주인 여자는 흠칫 놀라는 기색이 역력 했다. 언제나 넉살좋게 지껄이던 주인 여자의 그러한 태도는 병욱을 긴장하 게 했다. 병욱은 조바심을 내며 주인 여자의 거침없는 말투를 기다렸다. 그 러나 주인 여자는 입만 달싹일 뿐 말문이 열려지지 않았다. "그 사람들은 천도 고등학교의 선생님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간 걸로 알 고 있습니다." 주인 여자의 말을 기다리다 못해 안달이 난 병욱이 말했다. 두꺼비의 양 볼따구니가 꿈적꿈적 움직거렸다. "그러니까 이 집에서는 학교 선생님들만 하숙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주머니께서는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 이 일을 할 텐데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질문에마저 병욱이 대신 답을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도 주인 여자가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너무도 떨렸고, 또한 너무도 낮은 소리를 냈다. "그 이유는 학교에서 지원금을 내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아, 그랬군요. 협조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두꺼비와 말쑥한 정장 차림의 사내가 현관문을 통해 모습을 감추자마자 주인 여자가 호들갑을 떨었다. "일났군. 교감 선생님과 입을 맞추지 않았는데……. 젊은 선생이 학교엘 다녀와야겠어. 방금 있었던 일을 전해 줘." "큰일도 아닌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교감 선생님은 완벽한 걸 좋아하신단 말야. 늦기 전에 빨리 다녀와." 주인 여자의 닦달을 못 이겨 병욱은 차를 출발시켰다. 병을 핑계로 결근 한 처지에 수업이 파한 후에 학교에 간다는 사실이 머쓱하기는 했다. 굽이진 길을 막 돌아서자 저만치 여선생 세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병욱 의 발끝이 브레이크 위에서 꼼지락꼼지락했다. 이윽고 작정한 듯 브레이크 를 힘껏 눌렀다. 미세한 기계음과 함께 차폭이 흔들렸고, 뿌연 흙먼지가 전 면 유리창을 덮었다. 조수석 차창만을 내린 채 병욱은 학교에 급히 가야 할 일이 있어 지금은 하숙집에까지 태워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녀들 중 한 사람이 늦은 시간에 학교에는 왜 가느냐고 물었고, 병욱은 교감을 만나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녀들 중의 한 사람이 그렇다면 학교에 들 러봐야 헛일이 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교감은 장례 절차를 협의하기 위해 농장에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직은 병욱에게 농장의 문이 열려져 있 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하숙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차 속에서 어 느 누구도 병욱에게 말을 걸거나 하지는 않았다. 병욱은 괜스레 불편함을 느껴야 했다. "벌써 교감 선생님을 만나고 온 거야?" 주인 여자가 똥그란 눈을 하고서 말했다. "교감 선생님은 농장에 들어가셨어요. 내일 화장을 한대요. 그런 후에 농 장에서 추모 의식이 있을 거라는 소문도 있고……." 박 선생이 말끝을 흐렸다. 확실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병욱은 이 층의 자기 방으로 올라가서는 방문을 안에서 잠갔다. 저녁 식 사 전이었지만 배고픔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의식의 끄나풀을 풀어헤친 채 무작정 쉬고 싶을 뿐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몸뚱이는 소금에 절인 배추 이파리처럼 축 늘어졌지만 머리 속은 너무나도 명징했고, 그럼에도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별안간 창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새가 모이를 쪼는 듯한 소리였다. 아마도 재석과 진영이 잔 돌멩이를 유리창에 던져 집밖으로 나오라는 신호 를 보내는 소리일 것이다. 성가셨다. 방에 불은 밝혀져 있지 않았고, 병욱이 창을 열어 내다보지 않으면 그들은 빈방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곧 조용해질 것이리라. 병욱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창가에 부딪치는 돌멩이의 소리가 차츰차츰 간격이 벌어져갔다.
[약속의 땅] 44. 이미지를 덧칠하면
17. "서울에서 내려왔던 아가씨랑 낭패를 당했던 곳이 이 지점인가?" 병욱이 운전대를 잡은 교감의 지프는 천도 고등학교의 정문으로부터 난 세 갈래 길 중 가운데 길을 달리고 있었다. 연수와 함께 걸었던 길이었다. 운전석의 옆자리에는 등받이를 한껏 뒤로 젖혀 눕다시피 교감이 앉았고, 뒷 좌석에는 동료 교사 두 명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두 사람 사이 에는 흰색 보자기로 싸진 각진 상자가 놓여져 있었다. 상자 속에는 보자기 만큼이나 하얀 빛깔의 가루가 들어 있을 것이다. 그들 일행은 화장터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 아가씨랑 결혼할 생각인가?" "헤어졌습니다." "저런! 종교적 마찰 때문인가? 종교적 갈등이란 주변에서도 어찌할 수 없 는 게야. 당사자가 현명하게 처신할 밖에." 병욱은 정면을 뚫어져라 응시하면서도 뚱한 표정으로 옆좌석의 교감을 향 해 곁눈질을 힐끗했다. 교감은 졸음에 겨운지 반쯤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병욱의 목에서 가래 뭉치가 목젖을 간질였다. 교감은 단순하고 직선적인 것 같으면서도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들의 표현대로라면 영접, 신내림 을 받은 것은 불과 며칠 전이었다. 교감은 그 사실을 번연히 알고 있을 터 이었다. 연수와의 일에 종교를 끌어대는 것은 심심풀이 파적 삼아 지껄이는 것일까. "추모 의식은 어떻게 지내는 겁니까?" 병욱은 말머리를 돌리고자 했다. 하지만 교감의 말은 동문서답이었다. "농장에는 처음 들어가는 게지?" 병욱은 고개만 끄덕였다. 반쯤 눈을 내리깐 교감에게는 병욱의 그러한 몸 짓이 보일 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교감은 병욱의 대꾸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말머리를 이었다. "앞으로는 무시로 통과해도 좋아. 이제는 한 가족이니까 말야." "경찰의 수사는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왠지 께름칙한 느낌입니다." "소경이 잔칫상 받은 꼴이지. 변죽만 울려대다 제풀에 지칠 거야. 용 대가 리에 뱀 꼬리란 말은 그놈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표현이지."
"하지만 왠지……." "믿음에는 가정이 없어. 믿음을 가져. 그따위 하찮은 인간들은 우주의 섭 리를 거스를 수 없는 거야." 교감 선생님은 도인이 되신 것 같군요. 병욱은 교감을 비꼬고픈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러한 말은 목구멍 너머에서 삼켜야 했다. 지프는 양철판에 검은색 페인트로 농장이라고 쓰여진 입간판을 스쳐 지났 다. 어느 사이 교감은 의자를 바로 세우고 몸을 꼿꼿이 했다. 성지에 들어선 수행자의 태도였다. 병욱은 속이 느글거렸다. 립스틱의 재료가 지렁이 기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충격이었다. 비 가 그친 다음 포도 위에서 버둥대는 지렁이는 여자를 경악에 빠뜨린다. 햇 볕 아래 말라비틀어진 지렁이는 여자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러나 그것 이 상품으로 포장이 되어 나왔을 때는 온갖 정성을 들여 입술에 찍어 바른 다. 보습 효과가 뛰어나고 오래도록 광택을 유지하게 해준다나? 남자들은 여자의 입술에 덕지덕지 앉은 지렁이 기름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핥아먹기 위해서 그들의 입술을 분주히 움직여대는 법이다. 도대체 관념이 라는 것은 무엇인가. 묵은 먼지가 켜켜이 쌓인 시멘트 바닥에 뒹굴고 있는 생수통의 밑바닥은 불결한 것이지만, 정수기 위에서 거꾸로 뒤집혀진 생수 통의, 원래의 밑바닥 위에 놓여진 물컵을 들고 물을 마시는 행위에는 거리 낌이 없다. 한 방울의 오줌이 튄 손등에는 살점이 벗겨질 정도로 이태리 수 건을 밀어대지만, 방금 화장실에서 배설물을 흘리고 나온, 아직 짠내가 남아 있는 그곳에는 오럴 섹스에 여념이 없다. 도대체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이란 무엇인가? 해골바가지에 담긴 썩은 물을 맛나게 들이킨, 그럼으로써 깨우침 을 얻었다는 원효 대사의 관념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성자와도 같이 거룩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교감을 힐끗거리며 병 욱은 엉뚱한 사념에 시달려야 했다. 길은 이제 분지처럼 움푹 꺼져 있었고, 길 가장자리에 연하여 난 경사를 따라 촘촘히 줄지어 선 과실나무와 겨우 비바람이나 막을 정도로 얼기설기 얽어놓은 축사들이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퀴퀴한 냄새는 인분을 축인 두엄 냄새이거나 아니면 짐승들의 우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임에 분명했다. 낯 설면서도 후각을 마비시킬 만큼 강렬한 독성 때문에 병욱은 호흡을 잠깐씩 끊으며 지프를 운전해 나아갔다. 구 년이나 이어진 긴 가뭄 끝에 힘겹게 논 두렁에 버팅기며 선 콩대처럼 사람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조금 더 들어가자 길 가장자리에 철조망이 끝없이 둘러쳐져 있었다. 산간 (山間)에서의 그것은 벌거벗은 채 환도를 찬 사람을 만난 것처럼 어색하기 만 했다. "속도를 더욱 줄여." 교감은 전방 시찰에 나선 야전 사령관 같은 말투로 명령했다. 병욱은 다 소곳이 그의 명령을 받아들였다. 오래지 않아 검문소가 나타났다. 검문소, 그것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길 가장자리에서보다도 더욱 굵은 철조망 이 둘러쳐진 앞에 건장한 체격의 사내들이 저마다 나무 몽둥이를 들고 서 있었다. 그들의 복식은 통일되어 있었는데, 하얀색 천으로 몸을 감쌌고 허리 에는 붉은 색의 띠가 동여매져 있었다. 교감을 확인한 그들은 군말 없이 길을 터 주었다. 아름드리 굵은 소나무가 수호 전사처럼 길을 옹위하고 있었다. 나무 그늘 은 시간을 착각하게 하리만큼 짙고도 검었다. 전조등을 밝혀야 할 지경이었 다. 그러나 짙은 나무 그늘은 주행 거리를 나타내는 계기판의 끝자리가 채 바뀌기도 전에 끝이 나려 했다. 빛살의 내음을 맡고 콧구멍을 벌름거리던 병욱은 한순간 얼결에 브레이크를 콱 밟았다. 산중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 지 않았다. 평수를 가늠하지도 못할 만큼 드넓은 마당이 펼쳐져 있었던 것
이다. 아니, 그것은 마당이 아니라 차라리 광장이었다. 광장의 끝자락에는 번듯한 벽돌 건물이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어더욱 그러한 생각을 갖게 했다. 언뜻 보면 그 건물은 회교 사원을 연상시켰다. 사각에 가까운 골격 위 에다 왕관 모양의 지붕을 사각 건물의 한가운데에다 올려놓았던 것이다. 사 방 벽에 칠해진 분칠 빛깔 때문에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 다. "이런, 씨팔 놈의 새끼들." 넋이 나간 듯 헤벌어져 있던 입을 다물게 한 것은 교감의 입에서 뱉어진 욕지거리였다. 방금까지 성자처럼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던 교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당최 믿어지지 않았다. 병욱은 놀란 가슴으로 교감을 바라 보았다. 하지만 교감은 병욱을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사시 환자처럼 동자가 한쪽으로 쏠려 있었다. 병욱은 교감의 눈길이 머문 곳을 쫓았다. 그제야 가 리사니를 잡을 수가 있었다. 유행이 한참 지난 정장 차림새의 형사와 양 볼 따구니가 불거져 있어 두꺼비를 연상시키던 형사가 멀찌감치 떨어진 나무 그늘 아래에 서 있었던 것이다. 교감을 알아본 것인지 두 형사가 지프를 향해 달려왔다. "잔칫상에는 파리떼가 들끓는 법이지. 에프킬라를 준비하지 않은 게 안타 깝군." 교감이 달려오는 두 형사를 향해 이기죽거렸다. 병욱은 교감의 그러한 태 도에 오히려 마음이 든든했다. 두 형사는 차창 바로 너머에 붙어 서 있었지만 교감은 꼼짝도 하지 않았 다. 두꺼비가 손가락으로 차창을 두드렸기 때문에 병욱은 차창을 내려주었 다. "엄 선생님도 함께 계셨군요. 오늘 추모제가 있다지요?" 두꺼비가 교감에게 말했다. "출입 허가가 난 겁니까?" 교감은 그들에게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며 퉁명스러웠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겠습니까? 크레믈린 궁이란 소문이 과장은 아닙디다. 출입이 이렇게 까다로워서야, 원. 누가 피의자고 누가 경 찰의 신분인지 헷갈릴 지경입니다." "피의자라뇨? 그 일은 이미 끝난 게 아니던가요?" 교감이 발끈했다. "상부에서 그런 지시가 내려오기는 했습니다. 사체 부검도 실시하기 전에 장례 절차를 치르다니 우리는 완전히 핫바지 신세가 된 꼴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사건이 완전히 종결된 건 아닙니다. 이 사건의 담당은 저희들이니 까요. 하숙집에서 쫓겨난 두 사람의 외부인 이야기인데, 두 사람을 쫓아내는 대가로 학교에서 지원금을 내기로 하셨다죠?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 다. 학교에서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까?" "내부적인 이야기입니다.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교감의 말은 당당했고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병욱은 하숙집에서 형사들 을 만났을 때 주눅이 잔뜩 들어있었던 것과는 달리 재미난 구경거리를 접한 것처럼 여유마저 생겼다. "엄 선생님께도 질문할 게 있습니다. 두 사람을 다시 하숙집에 들어올 수 있도록 주선하겠다고 했다면서요?" "그건 그 사람들의 생각일 뿐입니다. 저는 결코 약속을 하거나 했던 적은 없습니다." "그 일은 좋습니다. 정작 궁금한 것은 술에 취했을 때면 언제나 천도 고 등학교에 부임한 일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았다는데, 어떻게 하여 종교 일까 지 관여하게 되었는가가 궁금합니다."
"종교의 자유는 헌법에도 보장되어 있는 것 아닙니까?" 호가호위(狐假虎威). 교감을 믿고 병욱은 짐짓 호기를 부렸다. "추모식을 거행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미진한 게 남았으면 학교로 찾아오 십시오." 교감은 병욱에게 이제 차를 출발시키라고 말했다. 병욱은 왠지 아쉬움이 남았다. 학창 시절의 연극 무대를 떠난 이후로 사람들에게 당당했던 기억이 까마득했다. 조직이 그를 보호해 준다는 사실, 병욱은 새삼 가슴이 뿌듯했 다.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고 다니지 말아." 차가 신전(농장 사람들은 광장 끄트머리의 건물을 신전이라고 부른다고 했다.)에 닿기 전 교감은 명령조로 말했지만 병욱은 전혀 기분이 상하지 않 았다. 교감에게 보호를 받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신전 출입문 가까운 곳에 차를 세워놓고 그들은 지프에서 내렸다. 병욱은 신전의 외부에서부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특별히 이목을 끄는 것은 없었다. 분칠이 되어 있는 외벽은 아무런 장식이 없었기 때문에 밋밋 한 느낌마저 들었다. 출입문을 밀치고 내부로 들어갔을 때는 더욱 휑덩그레 했다. 내벽을 타고 시멘트 바닥이 대략 스무 걸음쯤 좁은 복도를 이루었는 데 책상 하나 놓여 있지 않는 그곳은 황량하기까지 했다. 복도 끝에는 원목 으로 짠 여닫이문이 있었다. 여닫이 문 너머는 곧바로 강당이었다. 얼추 사 백 평? 오백 평? 쉽사리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나무로 된 바닥에는 방석 하 나 없이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뒤통수를 드러낸 채 퍼더버리고 앉아 있었 다. 얼핏 명상에 빠져있는 듯했다. 모두가 하얀 천으로 된 옷을 입었고, 허 리를 동여맨 붉은 띠가 바닥에 늘어져 있어 고랑처럼 길게 이어졌다. 내부 구조 역시 밋밋했다. 아니, 구조랄 것도 없었다. 띄엄띄엄 빛의 출입과 환기 를 위해 영창이 나 있었고, 흉물스럽게 시커먼 스피커가 벽에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강당 안에서는 장식이라면 장식이었다. 강당 안에서는 그 랬다. 출입문 가장 맞은편의 한가운데는 우뚝하니 대(臺)가 솟았고, 그 위에 는 연단이 놓여 있었다. "너무 썰렁한 것 아닙니까?" 병욱은 남이 들으면 큰일이라도 일어날 듯 잔뜩 목소리를 낮추어 교감에 게 말했다. 염화미소, 교감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어른께서는 순결하고 순수한 것을 좋아하시네. 그게 우주의 섭리라고 믿 으시는 게지." 고개를 주억거리던 병욱이 두어 번 가로 흔들어 보였다. 교감이 말했다. "그걸 깨달았으면 자네가 해야 할 일이 늘어난 셈이지." 병욱은 어금니를 악다물었다. 부담스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아니, 기꺼 이 매달리고 싶었다. 교감이 병욱에게 가르쳐준 것은 관념의 유희였다. 이 세계는 오직 관념이 지배할 뿐이라고 했었다. "자네들 두 사람은 나를 따라오고, 엄 선생은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게. 추모식이 끝난 후에 어른께 인사를 드리도록 하지. 옷은 예복으로 갈아입도 록 하게. 오른쪽의 구석진 곳으로 가면 몸에 맞는 게 있을 게야." 교감은 하얀 보자기 속의 뼛가루가 들어 있는 상자를 품에 안고 있는 두 사람과 함께 신전의 앞쪽으로 걸어갔다. 대가 놓여져 있는 바로 왼쪽 벽에 쪽문이 있었다. 그들은 쪽문을 통해 모습을 감추었다. 병욱은 예복으로 갈아입고 뒤통수만 보인 채 앉아있는 사람들의 맨 뒷줄 에 자리를 틀고 앉았다. 눈에 보이는 거라곤 밤송이처럼 털이 삐쭉삐쭉 선 뒤통수뿐이었다. 지루함을 느낄 정도로기다림의 시간은 길었다. 신전 안은 너무나 고요했다. 가끔씩 재채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봉분 속에 들앉아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눈두덩이 무거워졌다. 안간
힘을 썼지만 눈두덩의 무게감을 이겨내지 못할 것 같았다.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등을 손가락으로 찔렀기 때문에 고개를 돌렸다. 등뒤의 사내가 눈알을 부라렸다. 조금 전까지는 병욱이 맨 뒷줄이었는데 어느 사이 까마득한 점들이 꼬리뼈에 붙은 꼬리처럼 길게 이어져 있었다. 정면을 바라 보았다. 눈에 띄는 거라곤 여전히 밤송이들뿐이었다. 잠에 빠져들지 않기 위 해서는 무언가 생각에라도 골똘해야 할 것 같은데 사념의 꼬리는 부유물처 럼 흔들리기만 했다. 둥, 둥, 둥, …….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사이에서 무자맥질하던 병욱이 정신을 수습한 것은 북소리 때문이었다. 둥, 둥, 둥, ……. 북소리는 끊이지 않고 신전 안에 울려 퍼졌고, 시체처럼 숨을 죽이고 있던 사람들이 그 소리 에 맞춰서 몸을 일으켰다. 병욱도 무리에 뒤섞여 일어섰다. 사람들이 갑자기 선인장 가시가 돋은 것처럼 양팔을 천장을 향해 뻗쳐 올렸다. 병욱도 얼결 에 그들의 몸짓을 따라했다. 둥, 둥, 둥, ……. 북소리는 계속되었다. 이번에 는 사람들이 두 팔은 공중을 향해 뻗쳐둔 채 몸을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이 광경을 바라보면 무더기의 해초가 물살에 흔들리는 모습처럼 보 일 것 같았다. 병욱은 그들의 몸짓을 흉내내 보려고 했지만 당최 어색하기 만 했다. 북소리의 호흡은 점점 빨라졌고, 사람들의 몸짓은 빛살에 노출된 지렁이마냥 꿈틀댔다. 병욱은 그들의 몸짓을 흉내내는 일을 그만두었다. 도 저히 따라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 일은 차라리 낭패였다. 방금까지 손등에만 부닥치던 사람들의 우악스런 손길이 머리며 어깨를 후려갈겼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몸동작에만 충실할 뿐이었지만 그만큼 닥지닥지 붙 어 있었던 것이다. 병욱은 손깍지를 끼어 머리통을 감싸안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람. 절로 씨부렁거림이 나왔다. 그 때, 회칠만 범벅이 되어 있던 벽에 장식처럼 붙어있던 스피커에서 우 렁찬 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침내 어떤 때를 부르는 소리가 온누리에 웅성거린다. 분열의 원죄가 폭 로되고 자연과 우주와 인간이 하나가 될 때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푸르름 으로 부활하리라. 둥둥둥둥둥둥둥둥둥둥……. 북소리는 거칠어졌고 사람들의 입에서 꺼이꺼 이 신음을 삼키는 듯한 소리가 새나왔다. 한순간 병욱은 몸의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위로 수많은 사람들의 몸피가 덮쳤다. 금새라도 숨이 멎을 것만 같았고 등이 화끈거렸다. 이번에는 또 다른 힘에 떠밀려 뒤로 자 빠져야 했다. 뼈가 바스러지는 듯 온몸에서 통증을 느꼈다. 소용돌이에 휘말 린 조각배처럼 병욱은 속수무책으로 그 일을 감당해야 했다. 물살의 흐름이 그치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우리는 하나였느니라.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하느니라. 선과 악이, 성(聖) 과 속(俗)이, 남자와 여자는 태초에 하나였느니라. 이제 우리는 소리를 듣는 다. 아아, 천지가 개벽을 하는 장엄한 소리를. 이제 우주에는 질서가 깃드느 누나. 조화로운 삶이 펼쳐지는구나. 급박하게 울려 퍼지던 북소리가 긴장을 늦추었다. 사람들은 가쁜 숨을 뿜 어내며 몸피를 추슬렀다. 이제 스피커에서는 너무 낮아서 알아듣지 못할 소 리로 속삭임이 계속되고 있었다. 빠르기만 왔다갔다할 뿐 한결같은 성량이 었다. 두웅. 두웅. 가라앉아 있던 북소리가 길게 여운을 끌었다. 병욱은 본능적 으로 몸을 사렸다. 빠져나갈 틈새를 기웃거렸지만 인의 장막은 너무나 두터 워 보였다. 두웅. 두웅. 무겁고 둔탁한 북소리에 맞춰 사람들은 새로이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몸동작보다는 손놀림이 더욱 컸다. 안면과 가슴팍, 등허리 가 무수한 사람들의 손길에 난타 당해야 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분란을 일으키는구나.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땅에서
는 불길이 치솟아 오른다. 마침내 구년지수(九年之水)가 땅을 적시고 세상의 먹거리는 온통 썩는구나. 사탄의 혓바닥만이 날름거리는 세상. 어둠은 그칠 줄을 모른다. 둥둥둥둥둥둥둥둥둥둥둥. 빛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구원의 손길은 어디에 있는가. 혼돈의 끝날은 언 제인가. 둥둥둥둥둥둥둥둥둥둥둥. 이제 우리는 듣는다. 마침내 어떤 때를 부르는 소리가 온누리에 웅성거린 다. 분열의 원죄가 폭로되고 자연과 우주와 인간이 하나가 될 때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푸르름으로 부활하리라. 두웅. 두웅. 두웅. 그 일은 턱없이 길었다. 마침내 사람들은 딱딱한 마루바닥에 퍼더버리고 앉았다. 병욱은 길게 안도의 숨을 내뿜었다. 제법 정신을 차린 후에야 병욱 은 전면 연단을 향해 눈길을 주었다. 연단 바로 뒤편 벽에는 아까까지는 걸 려 있지 않던 초록색의 문양이 아로새겨진 붉은 깃발이 걸려 있었다. 문양 의 바로 밑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 듯했지만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식별은 불가능했다. 언제 나타났는지 연단을 앞에 놓고 한 사내가 서 있었다. 교령이라고 짐 작이 되었다. 사람들이 어른이라고 지칭하는 존재였다. 교령은 마이크에 대 고 전언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형제를 잃었습니다. 구원의 날이 멀지 않았음에도 말 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추모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형제 자 매 여러분! 우리의 정성으로써 그를 안식의 품으로 인도합시다. 구원에 대 한 우리의 강한 신념만이 그의 영을 편안하게 인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 읍시다." 대중(신도)들은 비손(신에게 손을 비비면서 소원을 비는 일)하면서 이령 수(비손할 때 말로 고하는 일)했다. 교령의 선주문을 맞받아 나무 바닥에 앉 은 사람들은 어떤 주문을 주절거렸는데 병욱으로서는 알아듣지 못할 소리들 이었다. 한꺼번에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주절거리는 그 소리는 벌이 잉잉거 리는 듯도 했고, 날카로운 톱니바퀴가 부딪는 소리 같기도 했다. 병욱은 갑 자기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더 이상 참다가는 토악질을 해대고 머리가 폭발해버릴 것만 같았다. 신전에서 도망치듯 빠져 나왔다. 후텁지근한 안 공기와는 달리 바깥 공기는 폐부까지 상쾌함을 느끼게 했 다. 토악질의 기미는 어느 새 씻은 듯이 나았다. 병욱은 신전을 끼고 돌았 다. 뒤뜰이 한 눈에 들어왔다. 정갈하게 정돈된 신전 앞의 펼쳐진 광장과는 달리 뒤뜰은 어수선했다. 나동그라진 나무들이 군데군데 널브러져 있었고, 손도끼 같은 것들이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다. 뒤뜰로부터 그리 멀지 않 은 곳에서부터 나무들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개간 작업이 한창 진행 중 인 모양이었다. 병욱은 중동이 잘려나간 그루터기에 앉아 담배를 꼬나 물었다. 길게 꼬리 를 늘어뜨리며 승천하는 자줏빛 연기가 씁쓰레했다. 생시에도 꿈을 꾼다지 않는가. 때로는 꿈인 줄 알면서도 꿈속으로 젖어드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병욱은 그 자신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현 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엄 선생님!" 유행이 한참이나 지난 정장 차림새와 두꺼비였다. 병욱의 눈썹이 꿈틀댔 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두꺼비는 담배를 피워 물며 말했다. 신전에서의 일을 염두에 둔 말 같았
다. 그들의 출입을 통제하지 않았던 것일까? 하긴 그랬다. 병욱이 신전 안으 로 들어갈 때 복도에는 출입을 통제하는 사람의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직도 일이 끝나지 않은 겁니까?" 병욱은 그들을 노려보았다. 두꺼비는 먼 산을 바라보는 듯한 무심한 표정 으로 말했다. "내부자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런 경우, 솔직히 경찰의 힘만으로는 한계 가 있습니다.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무엇을 말입니까?" 병욱은 구둣발로 담뱃불을 짓이긴 후에 말했다. "진작부터 우리는 농장을 주목해 왔습니다. 이곳은 분명히 혹세무민(惑世 誣民)하는 사이비 종교 집단입니다. 매해 거르지 않고 일어나는 살인 사건 만 해도 그렇습니다. 정황은 뚜렷한데 물증이 없어요. 어려움 속에서도 사건 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면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와요. 무조건 수사를 종결하라고 말입니다. 거 참." 두꺼비는 입을 쩝쩝거렸다. 병욱이 아무런 대꾸가 없자 두꺼비는 숨을 죽 인 후 말을 이었다. "노스트라다무스인가 하는 말라비틀어진 무말랭이 같은 인간이 일천구백 구십구 년에 지구 종말이 온다고 예언했다지만 엄 선생님도 그와 같은 예언 을 믿으십니까? 구십년 대 초에 휴거 열풍이 드셌지만 휴거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아직도 종말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말이나 되는 얘깁니까? 인공 위성이 떠다니고, 화상을 통한 원격 조종 시스템으로 병을 진단하는 세상에 말입니다." 두꺼비는 제 말에 도취된 듯 자못 웅변조였다. 병욱은 그러한 두꺼비를 못마땅하다는 듯이 노려보기만 했다. "엄 선생님은 자식이 있으십니까? 아직 총각이시라구요? 그렇다면 절실하 지 않을 수도 있겠군요. 전 말입니다. 제 자식놈들을 볼 때마다 이렇게 다짐 하곤 합니다. 너희들이 살아갈 세상은 정의로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 주겠다 구요. 그러자면 인간 영혼을 갉아먹는 사이비 종교부터 때려 엎어야 한다는 게 제 생활 신조입니다. 어떻습니까? 제 말이 어긋난 게 있습니까?" 두꺼비는 병욱의 눈앞에 주먹을 흔들어대며 소리치듯 말했다. 그러나 병 욱은 냉소만 흘릴 뿐이었다. 이윽고 병욱은 얼굴 가득 배어있던 비웃음을 씻어내고 말했다. "왜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왜냐 하면……, 엄 선생님은 저를 도와주게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런 느낌이 들어요. 제 예감은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죠." 장작을 패는 나무를 선택할 때 아무도 왜라는 건 따지지 않아. 운 좋게 대들보로 쓰이는 놈도 있고, 불쏘시개로 들어가는 놈도 있지. 왜 교리 작업 을 맡기려 하느냐고 물었을 때 교감이 했던 말이었다. 두꺼비도 마찬가지였 다. 어느 누구도 왜라는 물음에 속 시원히 대답해 주는 이는 없었다. 어떤 종류의 것이든, 무작정 손에 집히는 것에 이미지를 덧칠하고 관념을 부여하 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게 뛰어난 예감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아직까지 촌구석의 형사로 남 아 있느냐고 비아냥거리려다 병욱은 참았다. 그 대신에 점잖게 말해 주었다. 이번에는 그 예감이 어긋날 것이라고만. 병욱의 말에 두 사람은 풀이 잔뜩 죽은 얼굴이었다. "엄 선생!" 교감이 신전을 막 돌아서며 그를 불렀다. 병욱은 그루터기에서 몸을 일으 켰고, 두 사람은 바람이 빠져버린 축구공 같은 꼴을 하고서 교감의 어깨를
스쳐 지났다. "제의가 끝났네. 그만 돌아가지." "제가 어른을 만나보지는 않습니까?" "그 분께 자네를 만나보기를 권하였지만 바쁘다고 하셨네. 다음 기회로 미루지." 병욱은 왠지 허전한 느낌이었다. 교감은 벌써 발걸음을 저만치 옮기고 있 었지만 병욱은 제자리에서 쭈뼛거리기만 했다.
[약속의 땅] 45. 희생 제의를 치러야겠어
18. 길게 기지개를 켜면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약속 시간은 아직 여유가 있 었다. 재석과 진영에게 오늘은 매몰차게 거절을 하리라고 병욱은 속다짐을 한다. 세 명의 동료 여교사는 방금 전에 이 방에서 나갔다. 벌써 이 개월여 그 들은 일요일 오후마다 병욱의 방에서 교리 연구 모임을 갖고 있었다. 교감 의 지시가 있기도 했지만 그것은 오롯이 병욱의 필요성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이었다. 그럴 듯한 치장을 위해서는 여럿의 상상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세 명의 동료 여교사는아직까지도 주인 여자가 교감의 프락치라는 사실을 까 마득히 모르는 눈치였다. 약속 시간을 기다리면서 병욱은 새로운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 사이 어영부영 시간은 흘렀다. 반소매 셔츠 차림으로도 한낮에는 넉넉 히 지낼 만한 날씨가 계속되었다. 병욱은 최근에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서 울에서부터 가지고 온 옷들이 몸에 조금씩 작았다. 그렇다고 그것들을 몽땅 내버리자니 아까웠고, 한꺼번에 많은 새옷을 들인다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한결같던 몸무게가 근래 들어 부쩍 늘었던 것이다. 그 만큼 농장과 학교에서의 생활은 병욱의 몸과 마음을 여유롭게 만들어 주었 다. 시간에 대한 개념도 단순히 관념의 부산물인지 모르겠다. 아등바등하며 살던 서울에서의 시간은 그 자체가 압박감으로 존재했지만 이곳에서는 그저 자연 순환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모색(暮色) 뒤에는 칠흑 같은 밤이었고, 밤 의 끝자락에는 언제나 새로운 태양이 솟았다. 태양 빛이 고작 한 움큼의 그 림자를 연출해내면 점심 식사시간이었고, 식사를 끝내면 나른한 오수(午睡) 의 시간이 찾아왔다. 해거름이면 보금자리에 깃드는 산새 마냥 깃털을 접으 면 그만이었다. 소금에 절은 배추 잎처럼 생기 잃은 아이들의 얼굴에 떠돌 기 시작하는 화색은 한 주일의 마감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주말이면 참례하 는 농장에서의 제례도 이제 오래 입어 익숙해진 팬티 같은 것이었다. 매번 같은 일의 반복이었지만 지루한 느낌은 없었다. 그렇다고 변화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흘이 멀다하고 카드 결제 를 채근하던 연수에게서 근 한 달째 연락이 끊겼다. 그녀에게 새로운 연인 이 생긴 것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아니, 관심둘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누나에게서 걸려오던 전화도 점점 간격이 멀어져갔다. 누나를 떠올릴 때면 가슴 한켠이 아리긴 했지만 한편으로 홀가분하기도 했다. 조금 유별난 게 있다면 박 선생의 태도 변화였다. 그녀는 언제든 병욱의 요구가 있기만 하 면 옷을 벗어줄 태세였다. 하지만 병욱은 그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누나에 대한 강박 관념 때문만은 아니었다. 박 선생은 분명 연수와는 달랐다. 연수 의 섹스에 대한 집착이 단지 쾌락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박 선생은 헌신이 전제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두 사람 사이에는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유사성이 있었다. 그것은 맹목이었다. 맹목을 속성으로 가진다는 점에서 사랑은 종교와 많은 면에서 닮았다. 종 교적 믿음이란 것도 결국은 맹목이 아니던가. 오관(五官)을 촉수처럼 내밀어 제아무리 시공간을 헤집고 다녀도 인간이란 절대자의 그림자도 밟을 수 없 으며, 내세의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는 법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신앙이 란 이름의 거룩한 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며, 절대자의 망령에 덮씌워져 있는 것이다. 이제는 집 바깥으로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지금쯤은 재석과 진영이 하숙 집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을 것이다. 병욱이 몸을 일으키려 했을 때 누군가 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교감이었다. "나가려던 참인가?" "약속이 있어서……." 병욱은 말맺음을 하지 못하고 속으로 날름 삼켰다. "자네가 이 곳에서 따로이 만날 사람이 있었던가? 누군가?" 교감의 눈매가 날카롭게 병욱을 쏘아보았다. 병욱은 잠깐동안 멈칫거렸으 나 이내 작정한 듯 말했다. "전에 하숙집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을 이 집에서 나가게 한 건 자네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칠까 싶어서였어. 그런데 내 눈을 피해서 여태껏 만나왔단 말이지?" "……" "자네를 만나자는 이유가 뭔가?" "시내에서 출퇴근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먼 모양입니다. 다시 이 집에서 하숙을 했으면 하는 게……." "그 이야기라면 이미 끝난 게 아니던가?" "……" "앉지. 할 이야기가 있어." 병욱은 바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두 사람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교감은 자신을 지배하는 유일신이었다. 교감은 애꿎은 담배만 축낼 뿐 한동안 말이 없었다. 뜸을 들이자는 겐지, 생각에 잠긴 표정인지조차 짐작하기 어려웠다. 연거푸 잿빛 가루만 떨어대 던 교감이 이윽고 말했다. "며칠 새에 책이 많이 늘었군." 얼마 전에야 고작 구색만 갖춰 병욱이 손수 짜 맞춘 앉은뱅이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져 있는 책들을 보면서 교감이 말했다. "점심나절에 시내에 있는 서점에 들렀다 왔습니다. 대부분 오늘 산 것들 입니다. 아직도 필요한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두를 건 없네. 서기 일천구백구십구 년이 되어야 급격한 교세 확장이 가능할 테니까 말야. 교단에서는 본격적인 포교 활동을 낙엽이 뒹군 후에야 시작하기로 의결했어. 마음이 스산해지면 비빌 언덕을 찾게 되는 것이 인지 상정이 아니던가. 더구나 내년은 밀레니엄의 끝자락이니만큼 사람들의 마음 을 파고들기에는 최적의 시기를 맞이하는 셈이지. 어른께서도 엄 선생의 작 업에 많은 관심을 갖고 계셔. 신임을 얻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해."
"하지만 그게 쉽지만은……." 교감은 병욱의 말대꾸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병욱이 입술을 달싹이 자 고개를 외로 꼬았다. 그리고는 새로운 담배를 꼬나 물었다. 고민거리라도 있는 것일까. "교장의 눈치가 심상치 않아." 교감의 무거운 목소리가 길게 여운을 끌었다. 그 때문인지 오랫동안 느슨 하게 풀어져 있던 병욱의 신경줄도 예민하게 곤두서기 시작했다. 어느 새 교감과는 같은 배를 탄 처지였던 것이다. "저도 사이비 종교의 신도인 주제에 날더러 어른 앞에서 사이비라고 매도 하다니, 이게 가당한 얘긴가?" "교장 선생님께서 그렇게 얘기했단 말입니까?" 병욱의 부르쥔 주먹이 떨렸다. 그것은 흡사 비분강개하는 지사 같은 몸짓 이었다. 그러한 병욱의 몸짓을 바라보는 교감의 표정이 뜨악했다. 교감의 눈 자위에 설핏 물결이 얼른거린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말인데, 충격 요법이 필요할 것 같아." 교감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다. 병욱도 덩달아 귀를 곤두세웠다. "교장의 기세를 꺾어버리고, 대중(大衆, 신도)들의 관심을 우리 쪽으로 끌 어들이잔 말야. 이번 기회에 어른도 옭아맬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인 셈이지." "그럴 수만 있다면……. 방법이 있겠습니까?" 병욱의 입술이 바싹 타들었다. 두 달여동안 몸피가 급작스레 늘어난 것만 큼이나 권력이라는 것에도 맛을 들였던 것이었다. 가능하다면 누구도 무시 할 수 없는 견고한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병욱은 밤마다 그러한 상상에 젖 곤 했다. "종말을 앞당기자구. 인위적인 종말을 만들어내자는 말이야. 시험하는 의 미도 있구." 병욱은 교감이 의도하는 바를 얼른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안달 이 났다. 문 밖의 기척을 살피던 교감의 목소리는 더욱 은근하게 변해갔다. "자네만 도와준다면 못해낼 것도 없지. 도와주겠나?" "어떻게 말씀입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 겠습니다." "희생양이 필요해. 이 집에 있는 세 명의 여선생을 유혹하게. 내세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란 말이야." "그 여자들을 죽이자는 말입니까?" "쉿. 목소리가 너무 커.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네. 내 말을 잘 들어보게." 병욱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일천구백구십구 년의 종말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 기초해 있네. 예 수도 종말을 언급했다지만 그 해에 인류의 종말이 올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 았어. 그런데, 왜 하필이면 세상의 종말이 일천구백구십구 년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구라는 숫자가 세 개씩이나 중첩이 되어 있기 때문이야. 구라는 숫 자는 가득함을 의미하는 숫자가 아니던가? 달도 차면 기울기 마련이고, 만 삭의 몸도 때가 되면 해산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네. 인위(人爲)는 천리 (天理)를 따라야 한다는 동양적 사상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것이지. 함정은 여 기에 있어. 만삭의 몸을 풀고 나면 신생아가 태어나는 것이 아니던가? 달이 기울면 초승달이 떠오른다는 사실을 애써 잊으려 한단 말야. 종말을 떠드는 이들은 이것을 간과하고 있어. 우린 이 점을 강조하잔 말야. 종말은 생명이 나 세상의 끝이 아니라 신생(新生)을 의미하는 것이면서 후천 개벽(後天開 闢)이 열리는 시점이라는 것을." 병욱은 교감의 말하고자 하는 가리사니를 얼른 잡지 못해 멀뚱한 표정이
었다. 잔뜩 긴장한 한편으로 멀뚱한 표정이 범벅이 된 얼굴은 탈바가지처럼 기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교장은 종교인이라기보다는 사상가에 가깝지. 맨발바닥으로 땅을 디디고 선 모습을 자주 보았을 것이야. 그것은 노자와 장자를 흉내내는 몸짓이지. 어른께서도 사상적인 면에서는 교장의 영향에 힘입은 바가 크다네." "……" "답답하다는 표정이군. 내 말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건가?" "솔직히 그렇습니다." 병욱은 교감의 눈빛을 정면으로 맞받으며 말했다. "보다 명쾌하게 이야기해주겠네. 종말은 결코 오지 않아. 이천 년이 오면 우리가 믿는 종교는 어찌 되겠는가? 그 때를 대비하자는 말일세. 그리고 교 장의 믿음을 깨뜨려놓자는 말이야. 세계가 자연의 순리대로만 움직이지 않 는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어." "희생양은 왜 필요하다는 겁니까?" "답답한 친구. 종말은 오지 않더라도 종말의 분위기는 만들어두어야 하지 않겠나? 그래야만 이천 년대에도 우리가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는 뜻이야." "……?" "농장은 원시 공동체적 삶을 흉내내고 있어. 그래서 농장에는 소외된 사 람들뿐만이 아니라 한 때는 진보적 사상을 가졌던 많은 지식인들마저 득시 글하지. 그 사람들까지 현혹시키기 위해서는 공감을 얻을 수 있는 큰 일을 벌여야 하네." "어떻게 말입니까?" "종말의 징후를 만들어내세." "……?" "미국에서 있었던 천국의 문 사건을 아는가? 외계에서 온 사람들이 사후 에 영혼을 거두어갈 것이라고 믿고, 집단 자살을 한 일이 있었지. 그들은 그 길만이 구원을 받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우리도 그 일을 흉내내는 거 야. 그 일은 일석삼조의 효과가 있어. 어른이 직접 그 일을 주재하도록 함으 로써 자살 방조죄나 그 이상의 죄명을 언제든 덮어씌울 수 있지. 물꼬를 어 디에서 트느냐에 따라서 물의 흐름은 완전히 달라져버리지. 두 번째 효과는 교장이 가지고 있던 사상을 깨뜨리는 것이고, 세 번째는 대중들에게 구원의 분명한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지. 무엇보다 우리가 그 일에 대한 이론적 배 경을 제시함으로써 교단 내에서 우리의 위치를 보다 굳건히 할 수 있다는 것이 매력이야." "하지만 대중들에게 설득력이 있겠습니까?" "지속적으로 그들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여태까지 존재해 왔던 케케묵은 방법만으로는 안돼. 아직까지 한국의 종교에서 외계에까지 믿음의 폭을 확 장시켰던 것은 없어. 문제는 치장이야. 상품의 질 따위는 신경쓸 것 없어. 외양만 그럴 듯하면 누구든 무릎을 꿇게끔 되어 있어. 내 말 알아듣겠어?" 병욱은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다. 그러나 아직도 알쏭달쏭하다는 표정이었 다. "자네가 영접 의식을 치른 날이 보름날이었지? 달이면 충분해. 일광월광 (日光月光)이라 해서 달은 예로부터 숭배의 대상이었지. 휘영청 밝은 달밤이 면 사람들의 의식을 몽롱하게 만들 수 있을 거야. 문헌들을 뒤적여 보게. 그 럴 듯한 이야깃거리를 찾아내.알겠어?" "아폴로가 달에 착륙한 이후 달에 관한 신화는 허물어진 게 아닙니까?" "쯧쯧쯧. 아직도 이해를 못하겠는가? ……. 여선생들을 설득해. 그들은 얼 간이야. 당근 몇 뿌리만 아가리에 쑤셔 박으면 냅다 달려들 인간들이지." 약속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은 교감이 돌아가고 나서도 한참 후의
일이었다. 하릴없는 노릇이었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병욱은 당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가 감당하기에는 벅찬 노릇이었다. 더구나 여선생들을 설득해 내는 일은. 영창이 희끄무레하게 밝아졌을 무렵에야 까무룩히 잠이 들 수 있었다. 교감이 하숙집을 다녀간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쉴새없이 와이퍼가 움직였다. 앞 범퍼를 도색할 때 전면 유리창에 착색된 왁스는 와이퍼의 몸짓에 따라 뻐억뻑 하는 요란한 소리를 냈다. 스티로폴을 유리창에 긁어대는 것 같은 그 소리는 사람들의 청신경을 날카롭게 했다. 후사경에 비친 윤 선생과 박 선생은 숫제 귀를 틀어막는 시늉을 했고, 옆자 리의 상담 선생은 짐짓 고개를 바깥으로 꼬았다. 그럼에도 와이퍼의 동작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굵은 빗발은 아니었지만 급경사를 돌 때마다 유리 창에 달라붙은 물방울이 시야를 흐렸기 때문이었다. 병욱은 왠지 암울했다. 딱히 빗줄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세 명의 동료 여 교사에게 곰살맞게 굴어야 한다는 생각은 똬리를 틀자마자 제풀에 사그라들 곤 했다. 한순간 차체가 균형을 잃고 흔들렸다. 물기를 머금은 진흙길은 급경사를 내리달리는 눈썰매처럼 차를 곤두박질치게 했다. 눈을 감은 채 제동 장치를 힘껏 밟았다. 흙벽에 진로를 차단 당한 차가 멈추었고, 여선생들이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운전석에도 충격이 전해지긴 했지만 그다지 심하지는 않 았다. 괜찮아요? 라고 병욱이 말했고, 여선생들은 이구동성으로 괜찮다고 했 다. 흙벽에 부딪쳐 우그러진 앞 범퍼가 보기에 흉했지만 운행에는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다. "미안합니다. 잠시 엉뚱한 생각을 했나봐요." 차를 다시 출발시키며 병욱이 말했다. 세 명의 여교사는 큰 사고가 없어 다행이라고 떠들어댔다. 여전히 와이퍼는 뻐억뻑 소리를 내며 유리창을 긁 고 있었지만 아까처럼 청신경을 자극하지는 않는 모양인지 세 명의 여교사 는 쉬지 않고 떠들었다. 박 선생은 위기를 모면한 것이 순전히 병욱의 노련 한 운전 솜씨 때문이었다고 비행기를 태우기까지 했다. 병욱은 내세에 대한 그녀들의 마음을 나꾸어보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끝 끝내 운을 떼지 못했다. 차는 어느 틈에 하숙집의 뜰에 도착했다. 그런 날은 한 주일내 계속되었다. 일요일 오후, 교리 연구 모임을 시작하려고 했을 때, 세 명의 동료 여교사 는 병욱에게 몸이 아픈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병욱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해 주었지만 여선생들은 진심으로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래서 교리 연 구 모임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박 선생은 쉽게 문턱을 넘어서지못하고 멈 칫거렸지만 두 명의 여선생에게 손목이 끌려나갔다. 병욱은 무심한 눈길로 그녀들을 지켜보았을 뿐이다. 그 날 해거름에 병욱은 재석과 진영을 만나주어야 했다. 병욱은 그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기 때문에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 다. 재석과 진영은 한참동안이나 툴툴거렸지만 하릴없다는 듯 떠나갔다. 집으로 돌아온 병욱은 달에 관한 온갖 서적들을 뒤적였다. 이틀 전 금요 일에, 교감은 학교에서 종교와 천체에 관계된 많은 책들을 전해주었기 때문 에 병욱이 기거하는 좁은 방은 마치책을 쌓아두는 창고 같았다. 눅눅한 장 마 기운 때문인지 방안 가득 곰팡내가 배인 것 같기도 했다. 쉽사리 해답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무거운 눈까풀을 어루만 지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연출하다가는 또다시 책 속에 콧구멍을 쑤셔 박고 는 했다. 벌써 여러 날 같은 일의 반복이었다. 아침저녁 출퇴근길에 마주치는 동료
여선생들은 병욱의 가슴을 무겁게 했고, 책에서는 교감의 욕구를 만족시킬 만한 문맥이 눈에 띄지 않았다. 도저히 몸피를 감싸주지 못할 것 같던 옷들은 어느 새 몸에 착 달라붙었 다. 늘어가던 몸무게가 원점 회귀한 것이었다. '몸' 학자들은 주장한다. '몸' 에도 기억력이 있다. 그래서 언제나 한결같은 육체적 상태를 유지할 수 있 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병욱은 그러한 현상이 달갑지는 않았다. 몸집이 붇는 다는 것은 현재적 좌표를 나타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오그라드는 몸 은 궁색한 처지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날 밤에도 병욱은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책이건 뒤적거렸다. 집중이 되지 않았다. 머리 속에서 뿌연 안개가 서린 듯도 했고, 가끔씩은 놋쇠로 만 들어진 솥을 머리 위에 걸친 듯도했다. 병욱은 손가락으로 양쪽 관자놀이 를 힘껏 눌렀다. 그럼에도 머리는 맑아지지 않았다. 신경질적으로 읽던 책을 팽개쳤다. 앉은뱅이 책상에서 방바닥으로 낙하하며 부딪치는 책소리가 더욱 신경을 긁었다. 벌떡 몸을 일으켰다. 좁은 방안을 왔다갔다했다. 혼령이 떠 나는 것인지 뒤통수에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다. 교원 임용 고시에 낙방했을 때였다. 아득한 절망감이 느껴졌다. 그럴 수는 없어. 양손으로 머리털을 움켜잡았다. 머리 속이 아렸다. 호랑이 아가리 속으로 머리를 디밀겠느냐고? 그럴 수는 없었다. 쿵쾅거리는 소리를 내며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냉장고의 문을 열고 냉수가 가득 담긴 플라스틱 통을 꺼냈다. 컵을 집어들 틈도 없이 플라스틱 통의 주둥이에 입을 갖다 대고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냉기가 명치끝을 짜르르 스쳐 지났다. "일이 잘 안돼?" 고개를 돌렸다. 주인 여자였다. 병욱은 겸연쩍은 표정을 띠며 플라스틱 냉 수 통을 냉장고 안에 집어넣고는 문을 닫았다. "오늘밤에 교감 선생님께서 오실 거야. 좋지 않은 일이 생겼나봐." 병욱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무슨 일이랍니까?" "그건 알 수 없어. 술상을 준비해 두란 걸로 봐서 꽤 심각한 일인 것 같 애. 젊은 선생도 알다시피 이 집에서는 한 번도 술을 드신 일이 없거든." 방으로 돌아온 병욱은 벽에 등을 기대고 퍼더버리고 앉았다. 왠지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 생각 때문에 가슴이 아렸다. 빛살은 너무 빨리 스쳐 지나는 것이 아닐까. 잔광이나마 붙들고 늘어질 수만 있다면……. 눈앞에 얼 른거리는 세 명의 동료 여교사를 향해 병욱은 어금니를 악다물었다. 병욱의 귓바퀴는 창 너머를 향해 열려 있었다. 지프의 바퀴구르는 소리 는 아직도 들려오지 않았다.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것 같다는 주인 여자의 말 때문에 머리 속에 자리잡은 불안감은 좀체 사라지지 않았다. 오금이 저 렸다. 아래층의 화장실로 내려가 오줌을 두 번이나 갈기고 올라왔을 때까지 도 교감은 오지 않았다. 기다림에 지쳐 서서히 긴장이 풀려갈 때쯤에야 차 바퀴 구르는 소리가 났다. 느슨해졌던 신경 돌기가 팽창했다. 수런거리는 소 리가 들렸다. 오래지 않아 교감은 방문을 두드렸다. 그 뒤에는 주인 여자가 술상을 받쳐들고 있었다. 언제 준비한 것인지 양주가 덩그러니 얹혀져 있고, 안주거리로는 포가 놓여져 있었다. 술상을 바닥에 내려놓은 주인 여자는 교 감에게 고개짓을 하고는 방에서 나갔다. 교감은 본 척 만 척이었다. 고작 두 순배의 잔이 돌았지만 교감의 얼굴은 벌써 불콰하게 달아올랐다. 심기가 편치 않은 모양이었다. 다시 두어 잔을 기울인 후에야 교감은 눈꼬 리를 가늘게 끌며 말했다. "여선생들을 설득하는 일은 어찌 되었는가?"
"아직……." "교리를 만드는 일은?" "곧 가닥이 잡힐 겁니다." "그렇게 굼떠서야. 쯧쯧쯧.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게지." 교감은 항문을 찌르르하게 할 만큼 독한 술을 한 잔 가득 입 속에 털어 넣고는 빈 잔을 술상 위에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병욱이 잠시의 틈도 없이 잔을 채웠다. 교감은 잠깐동안 뜸을 들였다. "일을 서둘러야겠어." "집단 자살극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런 경망스런 입을 보겠나. 희생 의례라고 하든지 구원의 순간이라든지 얼마든지 좋은 표현이 있잖은가?" "……" "사람이 아직도 덜 여물었군. 타인을 속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부터 완 벽하게 속여야 하는 법이야. 자기 자신부터 지배하지 않고서는 어떤 일도 성사될수 없어. 도박꾼은 어떤 순간에도 자신의 일에 대해서 도박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지." 병욱을 노려보는 교감의 눈두덩이 씰룩였다. 병욱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엄지발가락이 양말 속에서 꼼지락거렸다. 교감이 연거푸 한숨을 내뱉었다. 방안의 무거운 공기 탓에 병욱은 숨이 컥컥 막히는 기분이었다. "교장의 낌새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무언가 일을 꾸미는 기색이 역력 해. 독사 같은 새끼." 꼼지락거리는 엄지발가락만 뚫어져라 바라보던 병욱이 놀란 표정으로 고 개를 쳐들었다. 교감의눈매에서 광기가 느껴졌다. 아니, 차라리 그것은 살 기였다. 병욱의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병욱은 교감의 눈자위를 외면할 수밖 에 없었다. "흐흥. 안될 말." 교감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병욱은 갑갑했다. 교감이 교장을 헐뜯는 것은 자리 싸움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교장이 교감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이유를 여태껏 짐작하지 못 했던 것이다. 병욱이 생각하는 교장은 자리에 연연하는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왜 그러시는 겁니까?" "이런 답답한 노릇을 보았나. 정말 모르겠다는 건가? 아둑시니 같은 놈." 병욱은 교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교감은 쉽게 말문을 열지 않 았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이었다. 한참만에야 말했다. "양두구육(羊頭狗肉)이란 말은 그런 놈에게나 적합한 말이지. 겉으로는 훌 륭한 인격자인 척 하면서 뒤로 호박씨를 깐단 말야. 그 놈은 징그러운 독사 야." 병욱은 그 말에는 선뜻 동의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병욱이 짐 작할 수 없는 속내가 있을 것 같았다. "한데, 자네. 독사는 어떻게 죽여야 하는지 아는가? 독사를 설 죽이면 그 놈들은 반드시 원수 갚음을 하려 한다네. 한밤중에 문풍지를 뚫고 들어와 제 놈에게 해코지를 했던 사람의 허벅다리를 깨물어버리지. 독사에게 물린 사람은 그 길로 끝이야. 영원히 헤어날 수 없어." "그럼 교장 선생님도 희생 제의를 치를 생각입니까?" "쯧쯧쯧. 그렇게도 머리가 돌아가지 않나? 그 때는 희생 제의가 아니야. 사탄을 징벌하는 거지." 병욱은 찰나의 순간 입술이 불거져 나왔다가는 짐짓 평온을 가장했다. 조
금의 시간이 흐른 후에 병욱이 말했다. "교장 선생님이 어떤 일을 꾸밀 것 같습니까?" "그걸 짐작할 수 있다면 내가 가만히 있겠는가?" 교감은 술잔을 입 속에 털어 넣었다. 어느 새 술병의 바닥이 훤히 드러났 다. "어쨌든 자네는 일을 조속히 매듭짓게. 교리를 확립하는 일도 급하지만 조만간 희생 제의를 치러야겠어. 늦어지면 내가 당할 수도 있다는 걸 명심 해. 그것은 자네의 몰락을 의미하기도 하지. 이른바 달의 몰락이라고나 할 까." 달의 몰락이란 달에 대한 상징성 부여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교감 선생님께서 어른의 마음을 붙들어놓기만 한다면 그만 아닙니까?" "그게 그렇지가 않아. 어른은 호락호락하지가 않다는 말이야. 그래서 어른 을 옭아매자는 것이 아닌가? 희생 제의가 잘만 성사된다면 내 뜻대로 움직 일 수 있겠지." 교감은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렸다. 여운을 남기고픈 심사인지도 모르겠다 고 병욱은 짐작했다. "술이 바닥났군. 이젠 가봐야겠어." 교감은 몸을 일으켰다. 독한 양주 한 병을 거덜낸 사람답지 않게 꼬장꼬 장한 몸짓은 날렵했다. 두어 순배만에 얼굴이 달아올랐던 사람이라고는 믿 어지지가 않을 지경이었다.
[약속의 땅] 마지막. 젖과 꿀이 흐르는
19. "엉뚱한 소리 작작하거라." 삼촌의 말소리가 귀에 쟁쟁했다. 보궐 선거에서 낙선한 삼촌은 까칠까칠 한 수염 자국으로 화장터에 모습을 드러냈었다. 삼촌의 낙선은 언론에서도 이변이라는 반응을 드러냈다. 일찍부터 출마 채비를 했던 삼촌은 지역구 관 리에도 남다른 수완을 드러냈고, 그만큼 금배지는 따 놓은 당상이라는 견해 가 팽배했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건국 이후 처음으로 이루어진 여야 의 정권 교체는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세를 타던 삼촌에게마저 다리를걸 었던 것이다. "성실하게 근무한다더구나. 교감 선생님께서 네 칭찬을 많이 하셨다. 하긴 너도 이젠 정신을 차려야지. 한 분뿐인 어머님을 언젠가는 네가 모셔야 하 지 않겠니? 진득하게 눌러 사는 법을 배워. 내년쯤에나 서울로 당겨주마." 교단과의 관련성을 물었을 때 삼촌은 엉뚱한 소리만을 늘어놓았다. 그럼 에도 사태는 너무나 분명해 보였다. 병욱은 하숙집을 향해서 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고속도로 진입로에서 리 셋 누름쇠를 눌러 영에 맞추어 놓았던 주행 미터기는 성큼 400km 를 넘어섰 다. 천 리 길을 달려온 것이다. 사방은 괴괴했다. 부상(扶桑)에서 떠오른 해가 함지(咸池)에 깃들 시간이
멀었음에도 먹빛보다도 짙은 흑운이 천지를 온통 잿빛으로 만들었다. 가끔 씩 우두둑 소리를 내며 빗발이 유리창을 때렸지만 이내 꼬리를 감추곤 하는 일들이 반복되었다. 인근 마을에서는 정전이라도 된 것인지 불빛 하나 번져 오는 곳이 없었다. 가시 거리에 잡히는 것이라곤 전조등 아래 살짝살짝 몸 매를 드러내는 아스팔트길뿐이었다. 병욱은 길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눈을 앙다틈해야 했다. 그것은 흡사 나무 조각에 몸을 의지한 채 무작정 파도에 쓸려 가는 느낌이었다. 암초에 걸릴까 노심초사하는 도사공의 심정이었다. 심호흡을 크게 했다. 부풀려진 가슴 틈새로 한바탕 찬바람이 휩쓸고 지나 가기를 기대했지만 전혀 시원해지지 않았다. 전방을 뚫어져라 노려보면서도 한편으로 고개를 세차게 가로 흔들었다. 운전에만 정신을 집중하고 싶었다. 그러나 가위질을 싹둑 하면 죽겠지 했던 불가사리가 물 속에서 세포 증식을 하듯, 꼬리만 흘리고 달아나는 도마뱀처럼, 서울에서의 질긴 인연은 당최 머 리 속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제 손으로 뼛가루를 바람결에 실어보냈지만 아직도 누나의 죽음은 현실감 이 느껴지지 않았다. 물기를 머금은 보드라운 스펀지가 그녀의 가슴을 헤집고 다닐 때면 누나 는 고개를 틀며 웃음을 머금었었다. 귓불이 빨그레 물들기도 했었다. 그럴 때면 병욱도 행복했다. 그러나 병욱의 손길이 배꼽을 스쳐지나 둔덕에 핀 거웃을 문지를 때면 누나의 얼굴은 한없는 절망감으로 일그러졌다. 그녀는 온힘을 다해 몸을 뒤틀었지만 허리께까지만 힘겹게 달싹일 뿐이었다. 풍성 한 가슴, 윤기가 반지르르 도는 유두와는 달리 아랫도리는 대꼬창이처럼 나 날이 말라 들어갔다. 그 기막힌 부조화. 차라리 질끈 눈을 감아버리고도 싶 었다. 그럼에도 분주한 손놀림을 멈출 수는 없었다. 대소변으로 인한 음습한 추기는 자칫 누나의 살점을 곪게 만들 수도 있는 까닭이었다. 유부남과의 너무도 짧았던 사랑. 금지된 사랑의 대가는 너무나도 참혹했다. 한 때 쾌락 의 절정으로 인도했던 그녀의 성기는 열에 달뜬 신음이 아닌 고통으로 얼룩 진 신음을 누나의 입에서 뱉어내게 했다. 해면처럼 정액을 빨아들이던 그녀 의 질은 폐수를 뿜어내는 더러운 하수관일 따름이었다. 화냥년. 집안말아먹을 우환 덩어리. 지옥에나 떨어지거라. 이 더러운 년. 어머니의 누나에 대한 저주는 그칠 줄을 몰랐다. 뼛가루를 날리는 어머니 의 눈에서는 쉴새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입술로써 도 어머니는 화냥년이라는 소리만 진언처럼 중얼거렸다. 위태위태하던 몸뚱 이는 끝내 두 발로 땅을 버팅겼다. 그랬다. 차라리 그것은 견뎌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만 같다. 어떤 힘이 어머니를 견뎌내게 했던 것일까? 그래도 어머니라는 인연이 한 꺼풀 남아있었던 것일까? 누나의 갑작스런 자살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끈이 끊긴 연을 의미했다. 누나는 끈이었고, 자신은 연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실감개였다. 비닐 하우스 속에서 산소 결핍증으로 신경이 굳어졌을 때 누나는 구부러진 송곳 같은 존재가 되었다면, 이제 어머니와 병욱은 서로가 서로에게 끈 떨 어진 연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병욱은 어머니에게서 아무런 애정을 느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그늘 속에서만 빛을 낼 수 있는 사람이었 다. 순종의 미덕만 갖추었던 여자. 어머니는 아버지가 가장으로서의 자기 책 무를 져버리기 시작했을때 어머니로서의 권리와 의무도 동시에 포기해 버 린 여자였다. 멀리서 천둥소리가 여러 차례 들리는가하더니 기어이 굵은 빗줄기가 퍼붓 기 시작했다. 범퍼에 부딪치는 빗소리는 낮은 고도를 유지한 채 살충제를 뿌리는 헬리콥터의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만큼이나 요란했고, 창 밖은 여 전히 지척을 분간하지 못하리만큼 어두웠다. 길은 이제 겨우 비포장 도로가 열려 있을 뿐이었다. 하숙집에 도착하기까지에는 구절양장(九折羊腸)을 돌고
또 회돌아야 할 것이다. 서치라이트 불빛을 받은 회백색 건물이 떠억하니 버티고 서 있다. 욱신거 리던 눈자위도 제풀에 진정이 되는 듯했다. 나른한 몸기운을 느끼며 병욱은 뜰 한가운데에 차를 세웠다. 콧등이 시큰거리는 것이 반갑지 않은 손님이라 도 찾아오려는 걸까. 큰일 뒤에 큰 병 치른다고, 몸살이라도 찾아들면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차문을 잠그고 현관까지 잰걸음질을 하는 사이에도 빗발은 멈추지 않았 다. 머리 속까지 얼얼함을 느끼게 할 정도로 굵은 빗방울이었다. 집안은 괴괴했다. 가늘게 파장을 일으키는 형광등 불빛이 아니었다면 폐 가가 아닐까 의아스러울 지경이었다. 손짓으로 옷에 묻은 물기를 떨어내는 한편으로 짐짓 기침 소리를 냈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들려오지 않았다. 다들 잠자리에 든 것일까. 아직 잠자리에 들기에는 이른 시각이었 다. 속절없이 맥이 빠졌다. 병욱은 이 층의 자기 방으로 성큼 올라가지 못하고 주인 여자의 방문 앞 에서 맴돌기만 했다. 인사 치레를 하자는 것인지 아니면 위로를 받자는 것 인지는 그 자신도 분명하지 않았다.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손목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고작 아홉 시. 방문 을 두드렸다. 다시 두드렸다. 방안에서는 기척이 없다. 하릴없이 이 층의 자 기 방으로 올라갔다. 잠깐동안 방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병욱은 박 선생의 방을 찾아가 노 크했다. 병욱이 먼저 박 선생의 방을 찾아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 나 박 선생은 방에 없었다. 상담 선생과 윤 선생의 방에서도 인기척이 새나 오지 않았다. 다들 어디에 간 것일까?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병욱은 다시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천 리 길을 쉬지 않고 달려온 뒤끝인지라 육신은 흐느적거렸지만 정신은 묘하게도 맑았다. 잠자리에 들어도 쉽게 잠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병욱은 새삼 방안을 휘둘러보았다. 온갖 자세로 나동그라진 책들. 그곳에서 만 존재의 찌꺼기가 묻어 있는 것 같았다. 찌꺼기. 가슴 한켠이 아렸다. 학 교가 파한 후에 집으로 돌아와 전기 밥솥을 열었을 때 눌러 붙은 밥 알갱이 만 가득한 밥통 속. 어머니는 자기를 위해 밥을 준비해 놓지 않은 날들이 많았다. 병욱은 영원히 서울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어머니는 외로 움을 느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의 밥통 속에서는 언제나 말라붙은 삶의 찌꺼기와 권태만 더덕더덕 붙어 있을 뿐이었다. 어머니가 연줄을 되감 을 수 있는 실패라면 병욱은 줄 끝에 매달린 연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벌 겋게 물이 든 서녘 하늘을 바라보면서 연줄을 되감을 수 있는 튼튼한 실패 가 아니었다. 이제 날이 저물면 연줄은 팽팽하게 날이 선 바람기를 이기지 못하여 끝내는 끊길 것이고, 끈 떨어진 연은 논두렁이거나 개울가이거나 간 에 추락하여 처참한 몰골을 드러낼 뿐이다. 사람들은 뱀 허물을 바라보듯 인상을 찌푸리며 그 곁을 총총히 스쳐지나갈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삶의 어느 한 순간 스산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목구멍 에서 가래가 끓었다. "젊은 선생 돌아온 거야?" 쿵쾅거리는 발자국 소리보다도 주인 여자의 외침 같은 소리가 먼저 귓결 을 파고들었다. 노크도 없이 주인 여자는 벌컥 병욱의 방문을 열어 젖혔다. 병욱은 괜스레 가슴이 미어졌다. 바람결에 하염없이 날려가던 누나의 뼛가 루가 손바닥에 느껴졌던 것이다. 병욱은 얼굴 가득 숙연한 표정을 띠며 주 인 여자를 맞았다. 이제 곧 주인 여자는 누나의 돌연한 죽음을 위로하리라.
그러나 주인 여자의 말은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다. 오히려 병욱을 경악하게 했다. "교감 선생님께서 감옥에 갇혔어. 아니지, 아직은. 감옥이 아니라 경찰서 유치장에서 조사를 받고 있어." 주인 여자의 호들갑스러운 말 뒤편에서 세 명의 동료 여교사가 얼굴을 내 밀었다. 세 여자의 얼굴 표정 역시 잔뜩 어두웠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교장이 교감 선생님을 고발했어. 공금 횡령죄로 말야." "공금 횡령죄요? 왜 저에게는 연락해 주지 않았습니까?" "서울의 전화 번호를 아는 사람이 없었어." 하기는 진작에 연락을 받았던들 병욱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까칠까 칠한 턱수염이 돋아 있던 삼촌의 얼굴이 설핏 떠올랐다. 보궐 선거에 낙선 한 까닭에 한없이 침전해 있던 삼촌. 또다시 삼촌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는 것일까. 이제는 야권으로 전락한 당에서, 더욱이 선거에서 패배한 삼촌에게 그만한 힘이 남아 있기나 할까? 서울로부터의 인연이 질기고도 끈덕진 것이 라면 서울을 바라보는 인연도 그만큼 끈덕진 것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차근차근히 얘기해 보세요. 자, 우선 앉읍시다. 앉아서 얘기하세요." 병욱은 가슴이 콩딱였지만 물색을 자세히 알고 싶었기때문에 애써 냉정 을 찾으려 했다. "앉을 틈이라곤 없군. 이 방은 너무 답답해. 저기 쌓여 있는 책들 좀 봐. 거실로 내려가서 얘기해." 병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 여자의 등뒤에서 세 명의 여선생이 다소곳 이 몸을 옮겼다. 맨 뒤에서 따라 걷던 병욱은 여자들의 느려터진 걸음걸이 에 괜한 부아가 돋았다. 짜증스럽게 발바닥을 틱틱거렸지만 여자들은 병욱 의 그러한 기색을 느끼지 못한 듯했다. 이윽고 거실의 소파에서 그들은 마 주앉았다. 주인 여자의 한숨을 견디지 못한 병욱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도대체 그 일은 언제 있었던 겁니까?" "오늘 낮이야. 점심 시간 무렵에 형사들이 학교에 들이닥쳤대. 그리고는 다짜고짜 교감 선생님에게 수갑을 채웠다는 거야. 교장 선생님은 뒷짐을 지 고 있었다지, 아마? 상담 선생이 자세하게 얘기해 봐." "그래요. 분명히 점심 시간이었어요. 얼마나 놀랬던지 지금도 다리가 후들 후들 떨려요." 말과는 달리 상담 선생의 얼굴 표정은 연기 시험을 치르는 배우 지망생의 낯빛이었다. 벌써 말을 갈아타려는 겐가? 하는 생각이 병욱의 가슴에 스쳐 지났다. 너희들을 반드시 희생 제단에 올리고야 말리라는 다짐도 불쑥 들었 다. "형사는 공금 횡령죄로 조사할 일이 있으니 경찰서에 가야겠다고 말했어 요. 교감 선생님은 교장 선생님을 노려보기는 했지만 순순히 따라갔지요. 선 생님들이 뒤따라나갔지만 교감 선생님께서는 아무 걱정 말라는 말씀을 남겼 어요. 그러나 선생님들은 어느 누구도 오후 수업을 제대로 진행하지 못했지 요. 교감 선생님께서는 아무런 걱정을 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어떻게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그러니 수업을 못한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들이 수갑을 채웠습니까?" "아뇨.수갑은 채우지 않았어요." 병욱은 주인 여자를 흘낏 바라보았다. 주인 여자는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 를 돌렸다. "두꺼비가 왔었습니까?"
"두꺼비가 누구죠?" "그러니까, 볼따구니가 튀어나와 두꺼비 같이 생긴 형사 말입니다." "맞아요.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그런 것 같아요. 그 사람은 분명히 양 볼이 이마보다도 훨씬 넓었어요. 전에도 그 사람을 본 적이 있었지요. 농장에서 사고가 일어나면 언제나 그 형사가 조사하러 왔었거든요." 병욱은 왠지 느낌이 좋지 못했다. 사이비 종교를 반드시 때려 엎고야 말 겠다고 비분강개조로 말하던 두꺼비의 얼굴 표정이 너무나 생생했다. "교감 선생님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박 선생은 걱정이 가득한 얼굴 표정으로 병욱을 향해 물었다. 그러나 병 욱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오히려 그가 묻고 싶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갈 것 같으냐고. "교장이 밀고를 한 건 분명한 겁니까?" "그건 분명해요. 수업이 진행되지 않고 어수선한 분위기가 계속되자 교장 선생님이 비상 교무회의를 소집했거든요. 그 자리에서 말했어요. 학교의 행 정 질서를 바로잡아야겠다고요. 부정과 비리는 조화를 깨뜨리는 거래요. 조 화를 깨뜨리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도 했어요." 상담 선생은 교장의 말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특사처럼 음절 하나하나에 또박또박 힘을 실으며 말했다. 병욱은 세 명의 동료 여선 생이 왜 아직도 농장에 들어가지 못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세 여자는 교감에게 절대적 충성을 하지 않은 것이다. "농장에는 이 사실을 알렸습니까?" 병욱은 주인 여자를 향해 말했다. 상담 선생은 입을 삐쭉거렸다. 병욱은 주먹을 내지르고픈 충동을 삼켰다. "물론이지. 지금쯤은 어른께서도 알고 계실 거야. 조치를 취해 주시겠지." "직접 전한 게 아니란 말입니까?" "난 그런 처지가 아니잖아." 주인 여자는 볼멘 소리를 했다. 하기는 병욱도 마찬가지 처지였다. 농장 출입은 자유로웠지만 교령을 직접 만나기 위해서는 수많은 절차를 거쳐야 했다. "내일쯤은 풀려나실 게야. 어른이 가만히 있겠어?" 이튿날이면 풀려 나리라던 교감은 경찰서에 끌려간 지 사흘이 지나도록 나오지 못했다. 어른이 교장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말도 공공연히 나돌았다. 고발 사건이 어른의 작품이라는 설도 설득력 있게 떠돌았다. 교감의 앞에서 전전긍긍하던 교무실 안의 사람들은 교장실을 들락날락하기에 바빴다. 병욱 은 조바심으로 끼니도 제때 해결하지 못했다. 사흘째 되는 날에는 직접 경 찰서에 찾아가 보기도 했지만 두꺼비는 껌을 짝짝 씹으며 면회는 불가능하 다고 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귀뜸이라도 해달라고 하자 두꺼비는 히 죽히죽 웃기만 했다. 하릴없이 돌아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삼촌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시간 후에 다시 걸려온 전화를 통해 삼촌은 조사가 끝나봐야 알겠다고 말했다. 병욱은 석방이 될 수있도록 힘써 달라 고 말했지만 삼촌은 시큰둥했다. 이제는 딱히 도리가 없었다. 병욱에게 유일한 의지처는 삼촌뿐이었던 것 이다. 병욱은 마지막 수단으로 농장에 들어가 어른을 배알하기를 요청했지만 거 절당했다. 어른과 교장의 공모 혐의는 짙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어른마저 교감을 배척한단 말인가. 병욱으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은 말입니다. 필연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연 투 성이죠. 엄 선생님은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병욱은 어리둥절했다. 경찰서 안마당에 관용차를 세운 두꺼비는 엉뚱하게 도 경찰서 본관이 아닌 정문을 통해 바깥을 향하고 있었다. 차를 운전하면 서도 시종 흰소리를 지껄여대던 두꺼비는 입이 한 바가지라고 표현할 만큼 연신 벙글거렸다. "엄 선생님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나를 도와줄 것 같은 예감이 든다고 했 었죠? 그 느낌이 기가 막히게 적중하지 않았습니까? 제 예감은 한 번도 빗 나간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이건 필연입니까, 아니면 우연입니까?" 병욱은 경찰서 마당에 깔린 자갈에만 눈길을 쑤셔 박고 걸음을 타박였다. 두꺼비는 당최 모를 소리들만 지껄이고 있었다. 병욱은 두꺼비가 자기를 희 롱한다고 생각했다. 두꺼비는 경찰서의 정문을 스쳐 지나 횡단 보도를 건넌 다음 골목길로 접 어들었다. 국밥집이 나오고 만화 가게가 있었고, 대서소를 지나쳤다. 복덕방 안에서는 네댓 명의 훈수꾼을 곁에 두고서 바둑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디에 가는 겁니까?" 병욱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질문했다. "곧 알게 됩니다." 두꺼비는 득의 만면한 웃음을 잃지 않았다. 이제는 허름한 외형의 집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아마도 새마을 운동이 한참 진행이 되었을 때이후에는 한 번도 손질하지 않은 것 같은 그런 집들 이었다. 골목의 끄트머리께 조잡한 여관 간판이 보였을 뿐 유달리 눈길을 끄는 것은 없었다. 병욱은 어리둥절했다. 두꺼비가 여관으로 걸어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병욱 은 쭈뼛거리기만 했다. "이리 오세요." 두꺼비가 유리문 사이로 목을 내밀며 소리쳤다. 병욱은 엉거주춤 여관 안 으로 따라 들어갔다. 두꺼비는 이 층 복도의 맨 끝방에서 문을 두드렸다. 안 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렸고 곧 문이 열렸다. 뜻밖에도 그곳에는 교감이 서 있었다. 반소매 셔츠 차림이었다. "두 분이 말씀 나누세요. 저는 두어 시간쯤 후에 들르겠습니다." 두꺼비는 지르박 스텝을 밟듯 경쾌하게 복도를 빠져나갔다. 두꺼비가 부 는 휘파람 소리가 길게 꼬리를 늘어뜨렸다. 병욱은 한동안 망연자실한 표정 으로 서 있기만 했다. "들어오게." 병욱은 열려진 문틈 새로 몸을 비집고 들었다. 바닥에는 군데군데 신문지 가 찢겨 늘려 있었고, 술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한 쪽 구석에는 살점이 떨어 져 나간 닭뼈가 신문지 위에 흩어져 있었다. "앉아." 교감의 말투는 스스럼이 없었다. 병욱은 바닥에 엉덩이를 내려놓자마자 내쳐 물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무엇이?" 교감은 심드렁했다. 교감은 커피포트의 플러그를 꽂았다. 일의 물색을 모 르는 병욱의 가슴만 답답했다. "설명을 해 주셔야……." "이런 딱한 사람을 보았는가. 자네를 여기에 부른 건 그만한 까닭이 있을 게 아닌가. 조급해하지 말게. 설탕과 프림은 몇 스푼씩 넣으면 되는가?" 교감은 한가하게 커피를 타고 있었다. "담배가 떨어졌군. 담배부터 내놓게. 아니지. 지금 나가서 서너 갑을 사와. 이곳에서 언제 나가게 될지 모르니 말야."
"돌아갈 때 사다 드리겠습니다." "항명을 하자는 건가?" "그게 아니라……." "그렇지. 궁금하기도 하겠지. 우선 자네 담배부터 내놓게." 교감은 맛나게 담배를 빨았다. 병욱은 곁에서 교감의 입술만 멀뚱히 바라 볼 뿐이었다. "제 놈들이 제 무덤을 팠을 뿐이야. 난 이렇게 끝을 보고 싶지는 않았어." "……?" "교주의 죄상을 알려주는 대가로 면죄부를 받기로 했네. 교주만을 기소하 겠다는 각서를 단단히 받아두었지. 그 동안 농장에서 일어났던 모든 살인 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교주가 지목되는 것이야. 그건 모두가 사실이네. 지금 증거와 증인을 확보 중이야. 그 놈은 꼼짝 못해. 다음은 교장의 차례가 될 것이야." "교단은 어찌 되는 겁니까?" "그게 어째 걱정인가? 내가 있지 않은가?" "……" "그래서 말인데, 여선생들을 설득하는 일은 어찌 되어 가는가?" "아직은……." "운도 못 떼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됐어. 자네도 법정에 증인으로 출두해야 할 거야. 집단 자살극을 획 책하는 사이비 교주를 고발해야 해. 사회 정의의 이름으로 말야. 집단 자살 극은 교주가 획책했던 걸로 하세. 그 대가로 자네에게 영원한 안락을 보장 하겠네." 일은 엉뚱한 방향으로 비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교감의 제의는 생뚱같지 만은 않다는 생각이었다. 언젠가 교감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장작을 패는 나무를 선택할 때 아무도 왜라는 건 따지지 않아. 운 좋게 대들보로 쓰이는 놈도 있고, 불쏘시개로 들어가는 놈도 있지. 병욱은 자신이 대들보로 선택되 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족했다. 이제는 호랑이 아가리 속으로 머리를 들이 밀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오히려 노련한 호랑이 조련사를 구할 수 도 있는 것이다. "오늘밤에 다시 한 번 여선생들에게 죽음을 미화하는 말들을 늘어놓게. 내세에 대한 확신을 심어 줘. 가능하다면 말의 성찬을 차려야 해. 그리고 조 만간에 일을 치러야 한다는 암시를 주게. 어느 누구도 내 머리 속에서 그 궁리가 나왔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거야. 나는 지금 교주에게 버림을 받아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고, 자네에게 지시를 내릴 처지가 아니니까 말야." 두꺼비가 다시 찾아왔다. 병욱이 두꺼비를 뒤따라 나가려 했을 때 교감이 소리쳤다. "담배 사다주는 것 잊지 말아."
20. 타종 후 선생님들은 각자의 수업 교실로 들어갔다. 교무실에는 나른한 오 후가 깃들었다. "이 기사들을 보게. 연일 대서 특필이군." 교감이 병욱의 눈앞에 신문을 내밀었다. 병욱은 기사 내용보다는 컬러 사 진에 시선을 박았다. 어른이라고 불리어지던 사내가 허탈한 표정으로 한 지
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듯도 했다. 사내와는 지척에서 생활하면 서도 한 번도 가까이 마주한 적이 없었다. 컬러 사진 속의 사내는 지금 무 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교장을 어른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젠 자네에게도 정보 제공원이 생긴 모양이군. 그게 힘이라는 걸세. 힘 은 가만히 앉았어도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닫게 해주지." "교감 선생님의 덕택으로……." "교장을 의식하지 말게. 교장은 명상가일 따름이지 카리스마가 없어. 힘은 카리스마를 가진 자에게만 집중하네. 여론이 가라앉기를 기다리세. 그 때에 는 자네에게 약속한 모든 것을 지키겠네." 갑자기 바닥이 꿈틀대는 것 같았다. 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거기, 젖과 꿀이 흘러가고 있었다. 병욱은 허리를 숙여 손바닥 가득 젖과 꿀을 퍼담았 다. 교감의 얼굴 가득 흡족한 미소가 흘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