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흔들리는 부모 방황하는 아이들 지은이: 이성호 제 1 부 세기말의 가치 혼란: 우리는 지금 왜 이렇게 흔들리고 있는가? 21 세기는 엄밀히 말하면 2001 년에 시작한다. 그러나 0 으로 떨어지는 10 진법 에 익숙한 우리들은 2001 년보다는 2000 년이라는 숫자에 더 큰 의미를 둔다. 하 기야 2000 년은 20 세기를 마감하는 마지막 해라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21 세기로 들어가는 문턱에 우리 모두는 서 있다. 부푼 꿈으로, 타오르는 뜨 거운 열정으로, 떨리는 가슴으로 21 세기 문안으로 첫발을 떼려 하고 있다. 그 런데 한편으로 새로운 세기에 대하여 희망보다는 불안을 더 느끼는 이유는 무 엇일까? 20 세기를 마감하는 종점에서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고 불안과 혼미스러 움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까지의 삶에서 우리가 너무도 찌들고 지쳤 기 때문일까? 아니면, 21 세기가 큰 변화를 가져올 것만 같아서, 지금까지의 방 식대로는 살아갈 수가 없을 거라는 두려움 때문일까? 우스운 이야기지만, 공항에 들를 때마다 머리를 스치는 한가지 생각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을 때가 있다. 공항에 가면 탑승권을 받아 쥐고 보안 검색 절차 를 받는다. 손에 든 짐은 엑스레이 투시기가 설치된 곳으로 밀어 넣고, 사람은 조그만 문을 통과하면서 검색원들의 검색을 받는다. 검색원들이 긴 전자봉 같 은 것으로 몸을 이리저리 훑는다. 금속성 물건을 탐지하기 위해서다. 바로 그 러한 검색 전자봉이 언젠가는 몸 속에 숨긴 쇠붙이만이 아니라 사람의 두뇌 속 에 담긴 지식의 양과 질을 측정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굳 이 추운 겨울날, 이른 아침에 학생들을 불러 모아 온종일 교실에 가두어 놓고 수학 능력 시험 따위를 치르게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그저 한 학생, 한 학생 오는 순서대로 전자봉으로 머리를 훑으면, 언어 영역 40 점, 수리 탐구 영역 45 점... 하는 식으로 점수가 적혀 나올 것 아니겠는가? 유전자 조작이나 인공 망막 같은 것이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오는 세상이다. 세계 각국에서는 동물을 대상으로 한 복제 실험을 앞다투어 성공시키고 있다. 벌써 양, 소, 원숭이, 돼지, 쥐 등의 복제에 성공하였다고 한다. 어디 생명 공 학만 눈부시게 발전하는가? 1 초에 1 조 회의 연산 속도를 갖는 컴퓨터가 등장하 고, 로봇이 사람의 얼굴을 식별하고,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일본 동경 사이를 불과 2 시간 만에 주파하는 초고속 여객 항공기가 나온다 하지 않는가? 극소 전 자(MICRO-ELECTRONICS)와 신소재 및 에너지 혁명을 축으로 해서 발전하는 새로 운 첨단 과학 기술은 그 끝이 도대체 어디인지 모르게 우리를 놀라움과 경이로 움의 경지로 끌어들이고 있다. 새로운 세기로 이어지는 오늘 이 시대의 발전은 비단 과학 기술에서만 나타 나는 것은 아니다. 불변의 진리로 생각하고 삶의 영원한 원칙으로 삼았던 것들 이 일시에 무너지고 있는 데서도 우리는 놀라움을 느끼게 된다. 한 마디로 기 존의 패러다임이 무너지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는 혁명이 세차게 진행되 고 있다. 예컨데, 가정과 결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그렇다. 대부분의 문명국에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성인이 되어 부부의 연을 맺고, 가정을 이루고, 또 아이 들을 낳고 기르면서, 웬만하면 죽을 때까지 함께 살아가면서, 사회의 가장 기 본이 되는 가정이라는 조직을 가꾸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너무도 다양한 양태의 결혼과 가정이 생겨나고 있지 않는가? 더 중요한 것은, 얼마 전만 해도 그러한 것들을 비정상으로 생각했지 만 이제는 그것도 사람들의 한 가지 가능한 선택으로 수용하면서 정상적인 것 으로 이해하는 정도가 점점 높아져 간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결혼의 적령기 를 깨고 나이가 꽤 들어 결혼하는 사람들, ‘나는 침대’라는 애칭으로 불릴
만큼 쉽게 남편을 바꾸고 아내를 바꾸며 결혼을 아무 때나 몇 번씩 하는 사람 들, 혼인 신고를 해서 법적으로 부부 관계를 맺지 않고 그저 서로 좋을 때까지 동거하는 사람들, 일정 기간 계약을 해 놓고 사는 부부들, 1:1 의 남녀 결합이 아니라 1:2, 2:1, 2:3, 3:2 등 별의별 조합을 통한 남녀 결합, 남편과 아내의 상호 묵인 아래 각기 애인을 따로 두고 사는 사람들... 결혼의 양태가 달라지 고 있다. 그런가 하면 혼자 사는, 즉 1 인 세대가 늘어나고, 결혼은 안하고 아 이만 둔 세대가 늘어나고, 또 같은 성끼리 하는 동성 결혼 세대가 겉으로 드러 나고 있는 현실에 우리는 더 이상 놀라지 않을 정도로 세상이 바뀌고 있는 것 이다. 1997 년 3 월 17 일 월요일 저녁 9 시. 여느 때와 별로 다른 일이 없는 평범한 하루 중 저녁때, 텔레비전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도 여느 때와 별로 다 를 것이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그 내용을 잘 새겨 보면, 실은 엄청난 이야기 들이다. 우리 나라 외채가 이제 1 천억 달러를 넘어섰고, 이는 국민 총 생산액 의 20%가 넘는 규모이며, 더욱이 그 중 단기 부채 비율이 매우 높아지고 있다 고 한다. 17 년밖에 안 된 아파트를 허물고 다시 짓겠다는 재건축 조합의 설립 허가가 났으며, 이러한 주택 과소비 현상이야말로 경제가 어려운 시대에 반드 시 걷어 내야만 할 거품의 한 가지라고 말하는 앵커의 목소리가 우리의 가슴을 파고든다. 대통령의 아들이 국민들에게 사과문을 발표하였다. 청와대 전 경제 수석들이 한보 사태에 관련된 듯하다고 한다. 사람들이 누군가 자신의 행동을 감시 카메라를 통해 보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신경 불안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불법과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는 등, 한 시간에 걸쳐 나오는 이러한 뉴스 들은 잠자리에 들기 전의 사람들 마음을 더욱더 무겁고 착찹하게 만든다. 고도의 정보 과학 기술의 발전, 우리가 순응했던 인습들의 파괴와 새로운 유 형의 다양한 가치 체계의 등장, 더욱더 치열해지는 국가 간, 개인 간의 생존 경쟁,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은 세상, 물리적 힘이 법이나 윤리보다 앞서 가고 있는 듯한 사회 환경의 탈도덕화 또는 도덕적 불감증의 확산, 이제 는 대기 오염 정도가 심해져서 새벽녘에 조깅하는 것조차 힘들 만큼 끝없이 확 산되는 환경 오염.... 이 모두가 세기말에 서 있는 우리들에게, 21 세기라는 새로운 세기 속으로 첫 발을 떼려는 우리들에게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가치 혼란을 겪도록 하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와중에서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 의미 있는 삶인가? 우리가 존재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며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 가치 혼란은 이내 각자의 가슴 속에 응어리져서 온갖 질문을 발한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 깊은 혼란에 빠져드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정말 말세인가? 정말 주께서 이 땅에 재림하실 때가 다가오고 있는 것인가? 그래도 전에는 하 룻밤 자고 나면, 모든 것 다 잊고 별일 없었다는 듯 다시 하루를 옛날처럼 살 수 있었는데, 그런데 왜 요즈음 와서는 하룻밤을 지나고 나고 계속 풀리지 않 는 혼란 속에 빠져드는 것일까? 세상 밖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보아도, 집 안에 서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는 모습을 보아도, 또 직장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려 일을 할 때도, 끊이지 않는 가치 혼란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다른 사람들은 모두 괜찮은데, 나 혼자만 이렇게 가치 혼란에 빠져 드는 것인가? 1. 나 혼자만 가치 혼란을 겪고 있는가? 나이 마흔여섯으로 어느 대기업에서 부장 대우로 일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슬하에는 아들만 둘을 두었다. 중학교 1 학년과 3 학년에 재학중이다. 최근 단행 된 그룹 전체 인사에서 그는 부장으로 승진하지 못하였다. 아직도 차례가 되지 않았다는 상사들의 말에 위안을 받았지만, 그래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는 물 러날 준비를 하라는 우회적 표현인가 싶기도 했다. 퇴근길 그의 머리는 매우
복잡했다. 새해 들어 경영진의 다그치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커졌고, 게 다가 금년에는 작년보다 더 큰 규모의 ‘정리’가 있을 것이라는 소리를 들은 터라, 그는 매우 착잡했다.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묵묵 히 더 열심히 일하면 되는 것인지, 또 그만 둔다면 당장 무엇을 해야 되는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 새 집에 도착했다. 아내가 열어 준 아파트 문 을 들어서자, 중학교 1 학년인 작은아들 녀석이 인사를 한다. ‚아버지! 지금 들어오세요!‛ ‚오냐!‛ 아들을 쳐다보니, 녀석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소파에 반쯤 비스듬히 누워서, 두 발은 딱 하니 탁자 위에 올려 놓고, 무엇이 그리 재미난지 텔레비전에서 시 선을 떼지 않고, 그저 아버지 들어오시는 소리에 입으로만 크게 인사를 한 것 이다. ‚야! 넌 그런데, 그 자세가 뭐냐! 어른이 들어오면 발딱 일어나서 어른을 보면서 인사를 해야지! 그게 뭐야, 이 녀석아! 떡 하니 소파에 누워 갖고는!‛ ‚제가 눕기는 언제 누웠어요? 그냥 앉아 있었는데!‛ ‚야! 그게 누운 거지, 그럼 선 게냐? 하여튼 요즈음 아이들은 모두들 버릇 이 없어! 도대체 여자는 집에서 뭐 하는 건지!‛ ‚아니, 그런데 당신은 왜 집에 오자마자 신경질이세요? 걔가 뭘 그렇게 잘 못했다고 나무라세요? 인사도 멀쩡하니 잘 했는데.‛ ‚아, 시끄러워! 밥이나 줘.‛ 얘기는 여기서 그쳤지만, 그는 다시금 가슴 속에서 일기 시작한 흔들림을 느 꼈다. 그렇지 않아도 낮에 회사에서 입사 4 년 된 신임 대리가 위아래도 없이 덤벼들더니만 집에선 자식놈이 그렇고. 도대체 자식이 무엇이고, 어떻게 길러 야 되는 것인지. 고개 숙인 남자가 어떻다느니, 아버지의 권위가 떨어졌느니 하는 소리가 작년 한 해 우리 사회에 신드롬을 일으켰는데, 이런 것 모두가 그 후유증인가? 저렇게 버릇없이 굴어도 내버려 두어야 하는 것인지? 애 엄마는 하나도 이상한 것 없다 하는데, 왜 내 눈에는 아주 이 상하게 거슬렸지? 저녁을 먹으려니, 소주 생각이 났다. 중 1 짜리 아들 녀석에게 24 시간 편의점 에서 소주 한 병을 사 오라고 시켰다. 소주 한 병을 사 들고 온 녀석은, 아버 지한테 들은 꾸지람은 벌써 잊어버렸는지 신이 나서 아버지에게 말을 붙였다. ‚아버지! 근데 편의점에서 돈 낼려고 서 있는데, 어떤 사람이 콘돔 하나 달 라고 하던데, 아버지 그게 뭐예요?‛ ‚어, 그런 게 있어. 너하고는 상관 없어.‛ 그러자, 중 3 인 형 녀석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야! 넌 그런 것 아직 필요 없어!‛ ‚아니, 그게 뭔데?‛ ‚크면 다 알게 돼!‛ 그러자 부엌에서 된장찌개를 끓이던 애 엄마가 다가와서는 대화에 끼여들었 다. ‚아니, 누구네가 콘도 샀다냐? 왜, 여보! 우리 언제 콘도 빌려서 놀러 가려 구요?‛ 그러자 아버지와 중 3 짜리 큰아들 녀석은 한바탕 웃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비행기 안에서 읽은 어느 외국 잡지의 글 한토막이 얼핏 생각났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대화였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아버지, 내일 저희 학교에서 콘돔 나누어 준대요! 며칠씩 학교를 쉬게 되 니까, 여행을 많이 다녀오라면서 내일 한 사람 앞에 세 개씩 나누어 준대요!‛ ‚야! 거 참 좋겠다. 그러면 나도 하나 얻어 주렴!‛ ‚그래요! 아버지는 무슨 색깔을 좋아하시는데요?‛
‚뭐 아무런 색깔이면 어떠냐?‛ ‚근데, 아버지, 그거 사이즈가 맞아야 되는 거 아녜요?‛ ‚뭐 그리 큰 차이가 있겠냐!‛ 언젠가는 부자 간에 이런 농담을 주고받을지도 모를 만큼 세상이 참 많이 변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기야 콘돔을 편의점에서 아이들도 쉽게 살 수 있 는 정도가 되었으니. 시대 변화를 잠시 생각했던 아버지는 식탁에 앉은 아들에 게 말을 건넸다. ‚야, 너희들이 아버지한테 한 잔 따라 봐!‛ ‚제가 따라 드릴께요!‛ 큰아들 녀석이 술을 따랐다. 그리고는 아버지를 힐끔 쳐다 보았다. 그러자 엄마가 식탁에 앉으며 말했다. ‚너, 또 술 먹으려고 하냐!‛ ‚아니, 이 녀석이 언제 술 먹었나?‛ ‚아, 저번 때, 작년 11 월에, 고입 시험 본 날 있었잖아요! 그 날 어디서 술 을 얼마나 먹었는지 요게 얼굴이 벌개서 들어왔잖아요!‛ ‚그래! 근데 왜 그 때 내가 몰랐지?‛ ‚그 때, 왜 당신 부산 출장 가서 하룻밤 주무시고 오신 날이에요!‛ ‚그래서 그냥 놓아 두었어?‛ ‚왜요? 혼냈죠.‛ ‚야, 너 벌써 술 먹고 돌아다는 거냐? 너, 담배도 피우지?‛ ‚아녜요, 아버지. 그 날 처음 먹어 봤어요!‛ ‚처음은 뭐가 처음이야? 솔직히 말해 봐! 너 조그만 게 벌써 술이나 먹고, 담배 피우고, 포르노 비디오나 보고 그러는 것 아냐? 콘돔이 무엇인지 네가 어 떻게 알아? 너도 그거 언제 써 본 것 아냐?‛ ‚그런데, 당신은 애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요! 아니, 아이한테 그게 무슨 말예요?‛ ‚당신, 모르면 가만 있어! 요즈음 아이들 정말 큰일났어. 내 자식만은 예외 라고, 안 그럴 것이라고 생가하면 안 돼!‛ 식탁을 앞에 두고 식구끼리의 대화는 이렇게 이어져 나갔지만, 결국 끝은 안 좋았다. 아버지 꾸중에 두 아들은 화가 잔뜩 나서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애 엄마는 괜스레 집에 들어와서 식구들에게 시비를 거는 남편이 밉살스러웠는지, 설거지도 안 한 채 방에 들어가 화장을 지우고 앉아 있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텅빈 거실에 혼자 앉아 9 시 종합 뉴스를 보려고 텔레비전을 켜 놓은 채 이 생 각 저 생각을 했다. 그러나 머리 속은 온통 복잡하기만 했다. 뭐 하나 확실한 것이 없다. 세상은 세상대로 직장은 직장대로 뒤죽박죽이고, 집에 들어와 보면 자식도 아내도 그렇고. 도대체 자식을 어떻게 교육시켜야 좋을지도 모르겠고, 내가 이렇게 씩씩거리며 돈 버는 것이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이 다음 늙어서 저 아이들한테 얻어 먹을 것도 아닌데.... 한 마디로 그는 가치 혼란에 빠져들고 만다. 그러면 오늘 저녁에만 이렇게 갈등을 겪은 것인가? 아니면 늘상 그런 것인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허구한 날 그랬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에겐 갈등이 없나? 그는 더욱더 심한 갈등에 빠져 든다. 사실 가만히 따져 보면,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러한 가치 혼란으로 인한 갈등 은 필연적이다. 갈등은 삶의 과정에서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다. 결코 병적인 현상도 아니고, 또 잘못된 것도 아니다. 제아무리 돈이 많아 부족한 것 없이 사는 사람들도, 또 제아무리 학식과 덕 망이 높은 사람들도, 높은 권력과 지위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다 그들 나 름대로 크고 작은 일에서 갈등을 경험한다. 그러나 누구든 갈등 속에 빠져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인간은 어쩌
면 생리적으로 안정을 추구하도록 창조되었는가 싶다. 계단을 내려가다가 그만 발을 잘못 디뎌서 넘어지려 할 때, ‘에라, 이왕 넘어지는 판에 근사하게 넘어 지자’하고 넘어지는 사람이 있는가? 안 넘어지려고, 균형을 찾고 안정을 찾으 려고 팔을 뻗거나 몸을 뒤틀면서 바로 서려고 하지 않는가? 가치 판단이나 의 식과 행동에서 사람들이 흔들리게 될 때, 사람들은 거기서 속히 벗어나 안정을 찾고 균형을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균형을 추구하면서 사람들은 한 단계 승화 된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물론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내 퇴보하는 사람 들도 있고, 또는 갈등을 덮어둔 채 그저 질질 끌면서 현상 유지를 해 나가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흔들림 속에서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그러고 보면, 갈등은 오히려 발전을 위 한 전주곡쯤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지금 우리가 이토록 흔들리고 극도의 가치 혼란을 경험하는 것은 다가오는 21 세기에는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창조와 발전의 전주곡이기도 하다. 어떤 부부가 우리 부부는 이제껏 결혼 15 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소리내어 싸 운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얼핏 듣기에는, 두 사람의 사랑이 얼마나 애틋하면, 그래 단 한 번도 싸울 일이 없었겠는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 러나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 부부가 정말 아무런 갈등 없이 15 년을 살아왔다면 그 부부의 삶은 어쩌면 지리멸렬했거나, 서로 사랑하지 않는 관계 이거나, 지금까지 아무런 발전을 이룩하지 못한 부부일 수도 있음을 부정하기 어려울 성싶다. 그렇다. 사람의 삶에서 가치 판단의 혼란이나 갈등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필 연적이다. 오히려 관리만 잘 하면 새로운 도약과 발전을 위한 하나의 계기가 된다. 갈등은 결코 해소시켜 버릴 것이 아니라, 잘 가꾸고 관리해 나가야 한 다. 그렇다면 어떻게 갈등을 관리해 나갈 수가 있을까? 특히, 자녀의 성장을 도와 주는 부모로서 생각할 때, 자신의 가치 혼란 극복 은 물론, 자녀들이 앞으로 그들의 삶에서 부딪치게 될 가치 혼란을 그들 스스 로 어떻게 관리해 나가도록 도울 수 있을까? 기성 세대가 우리네 젊은 후세대 들, 신세대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그들이 직면하게 될 갈등을 스스로 잘 관리해 나갈 수 있을까? 우선, 지금의 이 혁명적인 세기말 대변혁기에, 특히 코앞에 닥친 21 세기를 염두에 둘 때, 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의 자녀들이, 신세대들이, 어떠한 가치 혼란의 갈등을 경험하게 될 것인가를 분석하는 일부터 시작해야겠다. 그 다음 그러한 갈등을 관리해 나가는 방법들을 구상하는 일이 뒤따라야 한다. 이러한 순서에 따라 제 1 부에서는 우리가 겪게 될 갈등의 내용을 그 근원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따져 보고자 한다. 우선은 나 자신에게서, 즉 자아 내적으로 일고 있는 가치 혼란, 다음은 삶의 과정에서 세상의 숱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하는 가치 혼란, 끝으로 내 가 하는 일이나 업에 관련해서 생기는 가치 혼란을 따져 보고자 한다. 미리 밝 혀 둘 것은 이러한 갈등은 편의상 세 가지 근원으로 나눈 것뿐이지, 모두가 독 립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서로 유기적으로 연계되어서 때로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때로는 서로 뒤엉켜서 동시에 일어나는 성질의 것 들임을 미리 밝혀 둔다. 2. 내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가치 혼란 학교에서 돌아온 대학 2 학년 아들 녀석이 괜스레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저 녁 먹으라고 했더니, 밥 안 먹는다고 소리치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아이가 저녁을 먹지 않아 설거지를 끝내기가 찝찝했던 엄마는 아이의 방을 조 심스럽게 열고 들어간다.
‚아니, 왜 저녁을 안 먹는다는 거야? 학교에서 뭐 먹고 왔니?‛ ‚아녜요.‛ ‚그런데 왜 저녁을 안 먹어? 배 안 고파? 집에만 들어오면 밥 찾는 아이 가?‛ ‚글쎄, 그냥 안 먹는다니깐요!‛ ‚글쎄, 그냥 왜 안 먹는다는 거야?‛ ‚참, 나. 아, 그냥 나가세요! 엄마는 왜 자꾸 신경질나게 하세요?‛ ‚뭐야? 엄마가 널 뭘 신경질나게 했다는 거냐? 밥 먹으라고 한 게, 그게 신 경질나게 했단 말야?‛ ‚....‛ ‚먹기 싫으면 그만둬라! 애 성질머리 하고는, 꼭 지 아버지를 닮아 가지고 는, 닮을 것은 안 닮고, 못된 성질만 닮아 가지고....‛ 엄마는 이내 설거지를 모두 해 버렸다. 부엌을 말끔히 치우고 방으로 들어간 다. 이번에는 묵묵히 앉아 있던 아버지가 아이의 방에 들어간다. ‚야! 넌 근데 왜 그러니? 왜 기분이 그렇게 엉망이냐?‛ 객관식 골라잡기 시험만 치르면서 성장해서 그런지, 아버지의 주관식 질문에 아이는 대답이 없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버지가 선택형으로 묻는다. ‚왜, 오늘 학교에서 친구들과 무슨 문제가 있었니?‛ ‚아녜요!‛ ‚그럼, 왜 엊그제 본 중간 시험 결과가 엉망으로 나왔냐?‛ ‚아녜요!‛ ‚그럼, 여자아이한테 딱지 맞았냐?‛ ‚아, 그런 것 아녜요!‛ ‚그럼, 또 뭐냐. 용돈이 떨어졌나?‛ ‚글쎄, 그런 것 아니라니깐요!‛ ‚그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도대체 왜 그러냐?‛ ‚저도 몰라요! 그러니까 제발 그냥 나가세요!‛ 아이는 정말 몰랐다. 오후 경제수학 수업이 끝난 후 괜스레 화가 나기 시작 했다. 짜증이 났다. 우울해졌다. 여느 때 같으면 학교 앞으로 친구들과 함께 몰려 나가서, 저녁에 도서관에서 공부한다는 핑계 삼아 뭣 좀 먹으면서, 오가 는 여자아이들 쳐다보면서 노닥거렸을 텐데.... 오늘은 그냥 좌석 버스 타고 집으로 일찍 왔다. 가뜩이나 기분이 영 그게 아닌 판에 아이가 탄 좌석 버스는 너무도 시끄러웠다. 기사 아저씨가 라디오를 틀어 놓았는데, 너무 크게 틀어 놓아서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하필 아이가 앉은 자리 위에 스피커가 있어 더욱 그러했다. ‚아저씨! 라디오 좀 꺼 주실래요? 아니면 볼륨을 좀 낮추시거나요!‛ ‚....‛ ‚아저씨! 라디오 소리 좀 줄여 달라니깐요!‛ ‚시끄러우면, 내려요!‛ ‚뭐요? ....‛ 할 말이 없었다. 도대체 고객 어쩌고 저쩌고가 다 무슨 소용인가! 모두가 자 기 배짱 꼴리는 대로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슨 배짱으로 살아가는 것 인가? 아이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집에 왔는데,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고장났는 지 엘리베이터는 5 층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경비원은 어디에 갔는지, 물어 볼 사람도 없었다. 결국 씩씩대면서 13 층까지 걸어 올라왔다. 이러한 사소한 것들 이 온통 아이를 짜증나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그 것이 주된 원인이 아니었다. 아이는 곰곰히 생각해 본다. 왜 요즈음 이렇게 무기력해지고 걸핏하면 짜증
나고 그럴까? 특별히 누가 나를 건드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는 일이 뭐 그렇게 잘 안 되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그럴까? 슬럼프에 빠져드는 주기가 찾아온 것인가? 바이오 리듬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 바로 이것이다 할 만큼 확 실한 원인을 잡아낼 수 없는 요즈음의 흔들림은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 때문에 찾아오는 것일까? 그야말로 괜스레 나 혼자서 화가 나서 그러는 이유가 무엇일 까? 무엇이 정말로 진실이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인가? 원인 불명의 자아 내적인 가치 혼란은 대체로 기본적인 가치나 인식에 대한 자기 정리가 되지 않은 데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무엇이 참으로 진실인가? 무엇이 진정코 선한 것인가? 그리고 무엇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 다운 것인가와 같은 삶의 방향을 잡아 주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에 대한 혼란에 서 비롯된다. 무엇이 진실인가?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가? 교과서에 씌여있는 지식들은 참 인가 거짓인가? 신문에 나면 모두 진실인가? 어떤 절대자가 말하면, 그것은 진 실인가? 내가 이렇게 이런 식으로 사는 것은 진실된 삶인가, 거짓된 삶인가? 어떤 정치인이 당적을 옮기면서 자신은 유권자의 뜻에 따라 당적을 옮겼다고 만인이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그가 말하는 유권자의 뜻에 따른 당 적 변경은 참인가 거짓인가?유권자의 뜻은 어떻게 알았는가? 투표라도 다시 해 보았는가? 과학적인 여론 조사를 해 보았는가? 유권자의 뜻에만 따른다면, 얼 마든지 당적을 변경해도 되는 것인가? 참으로 이 땅에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 이 거짓인가? 마찬가지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부모나 선 생님, 그리고 친구들을 통해 옳고 그름, 좋고 나쁨에 대한 도덕적 판단의 방법 을 배워 왔다. 그리고 그 틀에 따라 지금도 우리는 세상에서 부딪치는 많은 문 제들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가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판단에 자꾸만 회의 가 일기 시작한다는 데 있다. 하다못해 자동차를 운전할 때, 아버지는 늘 혼잣말로 이렇게 말했다. ‚저 사람들 좀 봐! 우리가 이렇게 길게 늘어서서 기다리는데 중간에 끼여드니! 참, 나, 저런 사람들은 모조리 적발해서 한 1 년쯤 운전 면허를 정지시켜야 돼! 우 리 나라는 법이 너무 물러터져서 사람들이 법 무서운 줄을 모른단 말야!‛ 그 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번에는 우리 아버지도 오른쪽 바깥 차선을 달려가다가 좌회전을 하려는지 급히 좌회전 차로 맨 앞으로 끼여들지 않는가? ‚아버지! 그렇게 하면 위험하잖아요! 뒤에 있는 사람들이 욕할 거에요.‛ ‚아, 뭐가 위험해! 다 내가 보고 하는데.... 욕하긴 어떤 놈이 욕하냐? 내 가 자기한테 손해끼친 것 있냐?‛ 아버지의 행동은 옳은가 그른가? 온종일 지내다 보면,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정말 인간의 어떤 행동이 옳고 그른지를 판별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흔히들 60 년대를 전후한 냉전 시대를 3 차 대전으로 보고, 오늘날의 국가 간 의 치열한 무역 전쟁, 경제 전쟁을 4 차 대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오늘의 인류 사회는 그보다 더 심각한 ‘도덕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될 때가 많다. 그런가 하면,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그 비슷한 혼란이 자꾸 생긴다. 참으로 아름답고 보기에 좋은 것은 무엇인가? 근사하다고 흔히들 표현하는데, 그것은 글자 그대로 본래의 모습, 원형에 가장 가까운 모습일 때 그러는 것인가? 그렇 다면 저 여자가 아름답다, 저 사람 참 근사하다고 할 때, 그 여자나 그 사람의 원형은 어떤 모습이어야만 하는가? 아름다움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은 무엇인
가? 사이즈 36-34-36 이면 아름다운 것인가? 그러면, 우리가 언뜻 보기에 정말 외양은 그렇고 그런 여자와 사랑에 빠진 어떤 남자의 가치 판단은 어떻게 해석 하여야 하는가? 그 남자의 눈에는 키 작고, 뚱뚱하고, 그래서 꼭 굴러다니는 것만 같은 그 주근깨 많은 여자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로 보이는 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는가? 그저 미쳐서 눈이 먼 사람쯤으 로, 아니면 여자를 보는 안목이 모자라는 그런 사람쯤으로 해석해 버릴까? 도 대체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가? 무엇이 선이고 악인가? 무엇이 아름답고 추한 것인 가? 이 같은 물음에 대한 가치 혼란은 대체로 절대적인 가치와 상대적인 가치 사이에서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겪는 선택의 어려움인 듯싶다. 아주 옛날에는 절대적인 가치가 세상을 지배하였다. 그 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예외도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헷갈릴 수가 없었다. 흔들림이 없었 다. 혼란에 빠질래야 빠질 수가 없었다. 한 가지 절대적인 답만이 있었기 때문 이다. 일반적으로 혼미나 갈등은 선택의 여지가 둘 이상일 때 생기게 마련이 다. 하다못해 음식점엘 가서도 그렇다. 서울 중구 오장동의 함흥 냉면 전문집에 가면, 선택의 갈등은 없다. 그저 앉으면 함흥 냉면을 가져다 준다. 물론, 비빔 냉면이냐 물냉면이냐 하는 한 가지 작은 선택은 있지만. 그러나 그럴듯한 일반 음식점엘 들어가 보라. 메뉴판에 적힌 여러 종류의 음식들. 무엇을 주문해야 값싸고 맛있게 잘 먹을 수 있을까? 헷갈리기 일쑤다. 옆사람들은 무엇을 먹나 힐끔 쳐다보기도 하고, 또 같이 간 일행에게 ‚넌 그래 무얼 먹을래?‛하고 묻 기도 한다. 그것은 상대방이 무엇을 먹느냐에 관심이 있다기보다, 자신의 선택 에 대한 어떤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아니면 주인이나 종업원에게 묻는다. ‚오늘, 이 집에서 제일 잘 하는 게 뭐에요?‛하는 식으로. 하나님과 같은 절대자가 있어서 또는 절대 군주와 같은 사람이 있어서 그가 말하는 것이 곧 법이요 진리일 때 사람들은 흔들림이 없었다. 옳고 그르고, 참 이고 거짓이고, 아름답고 추한 것이고 모두 그 절대자가 사전에 결정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하늘에 있었던 그러한 절대권은 땅으로 내려 왔다. 땅으로 내려왔다는 것은 사람들이 삶의 경험을 통해서, 그리고 서로의 합의를 통해서 그러한 가치 판단의 어떤 공감대를 형성하였다는 얘기이다. 이 를테면, 어떤 것이 악한 행동이냐 선한 행동이냐 하는 것을 사람들이 함께 살 아가면서 서로 확인하고 서로 약속하게 되었다. 이름하여, 법이란 것이 그 대 표적인 예다. 사람들의 삶이 복잡해지면서 법은 복잡해졌고, 사람들의 삶의 방 식이 바뀌고 공감대가 바뀌면, 법도 바뀌었다. 그러한 법 테두리 안에서 진, 선, 미를 따질 때에도 사람들은 별로 흔들림이나 혼란을 경험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은 다시금 크게 바뀌고 있다. 지금은 땅에 머물렀던 가치 판단의 기준이나 근거가 모두 개개인의 머리 속으로, 가슴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것 은 종종 법을 초월하기도 해 사람들에게 갈등과 혼란을 느끼게 한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살인을 했을 때, 옛날에는 절대자의 계율이나 법의 규정에 따라 획일적으로 악으로 규정되었다. 사람들마다 한 가지 원칙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의 수만큼이나 원칙이 많아지고 있다. 이름하여 가치의 다 원화, 가치의 상대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절대적 가치가 상대적 가치로 대체되 는 가운데, 사람들은 일상 생활에서 수없이 많은 흔들림을 경험한다. 다가오는 21 세기를 우리는 흔히 다원화 시대라고 한다. 문화도, 가치도, 생활 방식도, 소비하는 물건도, 그야말로 다양화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의식이나 가치의 다양화, 다원화는 더욱 심화될 것이고, 그 속에서 우리의 청 소년들이 그들의 삶을 살아가게 될 때, 그들은 지금 우리가 겪는 것보다 더 큰 가치 혼란의 갈등을 자아 내적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나의 적성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인가, 아닌가? 400 점 만점의 수학 능력 시험에서 겨우 119 점을 받아, 결국 아무 대학에도, 전문 대학에도 진학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어디 취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군에 입대하기에도 일러서 별수없이 재수의 길로 들어선 어떤 학생의 경우다. 책상에 앉아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만 도무지 성적이 오르질 않는 다. 흔히 말하는 지능 지수가 남들보다 그렇게 뒤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그렇 다고 공부 못 하는 다른 아이들처럼 떼지어 다니며 별의별 나쁜 짓을 다 하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나는 공부를 못 하는 것일까? 그는 자신을 책상 위에 끌어 내 놓고 밤을 새워 가며 이리저리 분석해 본다. 기초 지식이 모자라 그러는 것일까? 그래도 중학교를 졸업할 때는 반에서 52 명 중 9 등으로 졸업했지만, 이 정도면 중학교 때 갖추어야 할 기초 지식을 못 갖춘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면 공부 방법이 잘못되었나? 다른 아이들은 뭐 별뾰족한 방법이 있을라구. 책상에 앉아 있지만 정신을 집중하지 않고 그냥 시 간만 보내는 것은 아닌가? 학원도 다녀 보고, 그룹 과외도 받아 보았다. 학원 선생님 말로는 머리가 제법 돌아가는 아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내 머리 속에 온통 별의별 잡념이 꽉 차있어, 책을 통해서 얻은 지식이 머리 속 어느 구석에 도 들어갈 틈이 없어, 아무리 공부를 해도 그저 머리 밖으로 흘러 나가는 것은 아닌가? 도대체 왜 나는 공부를 못하는 것일까? 아냐, 내 팔자가 그런지도 몰 라! 내 팔자에 나는 대학에 갈 수 없게 되어 있는지도 몰라. 그렇다면, 나는 무슨 일을 하면서 세상을 살라는 거지? 도대체 내 운명은 어떻게 결정지어져 있는 걸까? 그는 끝없이 자아의 실체를 탐색하지만 아무런 답을 얻지 못했다. 어느 날 우리 대학 여학생이 나를 찾아왔다. 그 여학생은 대학 입학 전 우연 히 엄마와 함께 내가 TV 에 출현한 것을 보았으며 엄마가 나의 팬이라고 말했 다. 2 학년인 그 여학생은 대학 생활에 대해서,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 대해서 고민이 많아 찾아왔다고 했다. 꽤나 영리하고 또 생기기도 예쁘게 생긴 여학생 이었다. 키도 큰 데다, 성격도 명랑해 보였다. 그 때 왜 그랬는지 얼핏 나는 우리 큰아들을 떠올렸다. 녀석은 대학 2 학년을 마치고 지금 군복무중이다. 육군에서는 훈련이 꽤나 고되다고 하는, 그러나 남 자로서 한 번 겪어 보면 좋다는 특전사 공수 부대에 가 있다. 그 녀석이 75 년 생인데 하고 생각하면서, 우선 나이부터 물었다. ‚몇 년 생이냐?‛ ‚저요? 저는 76 년 생인데요!‛ 나도 모르게 내 아들과 이 여학생을 함께 떠올리면서 순간 빙긋이 웃었다. 그리곤 그 여학생이 찾아온 까닭에 귀를 기울였다. ‚선생님, 저는 고등 학교 때, 학교에서 실시한 적성 검사에서는 의사나 약 사, 뭐 그런 계통이 어울린다고 나왔거든요. 그래서 고등 학교 때 공부도 이과 로 하라고 했는데, 제가 고집해서 그냥 문과 공부를 했어요. 대학 올 때도 그 냥 인문 학부가 좋을 듯싶어 그렇게 했고, 또 고등 학교 선생님이 인문 학부에 지원하면 합격할 수 있다고 해서 지원했어요. 그런데 선생님, 고등 학교 때 실 시한 적성 검사 결과가 꼭 맞아요? 그러면 제가 대학에 잘못 온 것 아녜요?‛ ‚글쎄, 왜, 지금 공부하는 것이 재미없니? 지금까지는 그저 교양 과목만 공 부하지 않았니?‛ ‚네, 그런데요, 지금 배우는 과목들은 재미가 없어요. 그래서 지금은 그냥 이 책, 저 책, 책을 많이 읽어요. 그리고 문과 공부가 다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요, 뭐, 무슨 정답을 찾는 것도 아니고, 공부를 열심히 한 과목에서는 성적이 나쁘고, 오히려 그냥 아무렇게나 한 과목에서는 성적이 잘 나오고, 뭐 그래 요!‛ 이야기는 그런 식으로 한 시간이 넘었다. 그 후에도 그 학생은 내게 여러 번
왔다 갔지만, 결국 그 학생이 겪는 혼란은 자아라는 실체를 무엇으로 보느냐에 귀결되었다. 즉, 적성은 타고난 것인가? 도대체 나에게 맞는 적성은 무엇인가? 아니면, 적성은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는가? 적성은 내가 노력만 하면 얼마든 지 새롭게 개발할 수가 있는가? 그런 갈등에 빠져 있는 그 여학생에게 나는 두 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다. 개울가나 강가에 가 보자꾸나. 왜 거기엔 돌멩이들이 물 위로, 흙 위로 조금 나와 있지 않니. 크기도 제각기 다르고, 모양새도 다르고. 그런데 거기에 어떤 작은 돌 하나가 있는데, 작은 돌이려니 하고 발로 건드렸더니 꼼짝도 않는 거 있지. 왜 그럴까?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비록 작고 보잘것 없지만, 속의 뿌리 는 엄청나게 크거든. 사람의 모습, 특히 너희만한 때의 모습은 더욱 그럴 성싶 다. 겉으로 지금 드러난 너는 너라는 실체의 참으로 작은 일부분인 거야. 네게 갖추어져 있는, 드러나지 않은 부분은 지금 드러난 부분보다 훨씬 클 수 있어! 그것이 너의 잠재된 가능성인 것이다. 그러니까, 네게는 무한의 가능성이 있다 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 나는 또 이런 얘기를 했다. 사람이 평생 살아가면서 온갖 노력을 다해도 죽 는 날까지 모르는 것이 자아에 대한 문제가 아닌가 싶다. 나를 이 땅에 태어나 게 하신 조물주에 대하여 우리가 평생 살아가면서 해야 할 책무 중의 하나는 어쩌면,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계속해서 확대시키고 심화시켜 나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도대체 나는 어떤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일까? 그것을 탐구 해 나가는 과정이 곧 인간의 삶의 과정일 듯싶다. 네가 지금 대학에 다니는 것 도 바로 너 자신을 이해하고 탐구하는 너의 노력의 한 부분은 아닐까? 너무 막 연한 얘기같다만, 그래, 1, 2 학년 때는 수업(교과목)도 좀더 폭넓게 받 고, 선생님이나 친구 들과도 폭넓게 사귀고, 또 책을 폭넓게 읽어 보렴. 그러 면 너 자신에 대한 이해를 좀더 잘 할수 있게 될 것이고, 또 너에게 가장 어울 리는 일이나 직업이 무엇인지 스스로 조금씩 깨닫게 될 테니까. 이제 막 2 학년 이 되었는데 전공이 적성에 맞는다 안 맞는다 서둘러 단언하지 말고.... 그래도 그 학생은 다시금 엄습하는 가치 혼란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듯 보였 다. 다만 한 가지 달라진 것은 막연했던 갈등이 이제는 분명한 갈등으로 다가 오고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발전이고, 갈등으로 인하여 얻게 된 한 차원 승화된 성숙이라고 하겠다. 가치 혼란은 지금만 겪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깨닫게 될 것이다. 어른들도, 어떤 분야에서 나름대로 많은 업적을 성 취하고 높은 지위에 오른, 이를테면 성공을 거둔 사람들도 때때로 그러한 가치 혼란을 경험한다. 정말 내가 대학 졸업 후 이 회사에 입사하길 잘 했나? 내 인 생은 원래 그렇게 짜여져 있는 것인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미련을 갖고 있는 그림 공부를 다시 시작해 봐? 가능성은 언제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 아닌 가? 이 역시 자신의 삶, 자아에 대한 운명론적 태도와 발전론적 태도 사이에서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흔들리는 가치 혼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당신, 그래 20 년 만에 만난 동창들하고 저녁 내내 그 집에서 뭘 했수?‛ ‚뭐 하긴 뭘 해! 그냥 먹고 떠들었지!‛ ‚잘 차렸습디까?‛ ‚뭐 요새, 그렇게 먹는 것 신경 쓰나! 몇 가지 내놓으면 되지!‛ ‚그래, 저녁만 먹고 떠들기만 했어요? 고스톱은 안 쳤어?‛ ‚좀 쳤지!‛ ‚얼마 땄수?‛ ‚따긴 뭘 따! 내가 뭐 돈 따러 갔어!‛ ‚그래도 내놓아 봐요! 얼마 땄는지!‛
‚나, 참, 왜 이래, 그런데....‛ 이런 식으로 남편과 아내가 대화를 주고 받는 경우가 글쎄, 그리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부부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간다면 무엇이 문제일 까? 어떤 주부가 저녁 늦게 낚시 갔다가 돌아온 남편을 맞이하면서 물었다. ‚여보! 그래 꼭두새벽부터 나가서 몇 마리나 잡아 왔수?‛ ‚어.... 뭐 오늘 한 마리도 안 물렸어! 잔챙이 몇 마리 걸렸는데 그냥 도로 다 놓아 주었어!‛ ‚아니, 그럼, 이제껏 그냥 앉아 있다가 왔단 말예요? 하여튼, 못 말려! 고 기도 못 잡는 사람이 낚시질은 뭔 낚시질야! 그것도 허구한 날 말야!‛ 그러자 남편은 휑하니 목욕하러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아내는 부엌에서 혼자 긴 사설을 읊는다. ‚낚시하고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길래 쉬는 날이고 일하는 날이고, 하여 튼 틈만 있으면 낚시야, 낚시. 도둑은 뭘 집어가고 저 낚시 도구는 안 집어 가 노. 내가 그냥 놔 두 나 봐라. 언제고 부러뜨려 버릴 테니깐....‛ 남편이 꼭 고기를 못 잡아 와서 아내가 화가 난 것은 아닐 것이다. 휴일을 가족과 함께 지내지 않고 친구들과 어울려 낚시나 다니는 것이 꼴보기 싫어서 화가 난 것이다. 그런데다 고기 한 마리 못 잡았다는 말에 더욱 남편이 밉살스 러워졌던 것이다. 그러나 남편은 자기가 고기를 못 잡아 와서 그러는가 싶어, 목욕을 다 하고 나와서 점잖게 한 마디 응수를 한다. ‚여보! 고기 잡으로 낚시 다니는 사람 봤수? 내가 뭐 어부요? 고기 잡으러 다니게. 낚시는 말야, 고기 잡는 게 중요한 게 아냐. 오고가는 재미로 다니는 거지. 낚싯대 드리우고 앉아서 세상 시름을 잊고, 또 자연의 신선한 공기도 듬 뿍 마시면서 쌓였던 스트레스도 풀고, 그러다가 눈먼 고기가 물리면 잡고, 또 오다가 친구들과 어울려 소주 한 잔 하게 되면 하고, 그런 게 낚시의 재미인 거요!‛ ‚재미 좋아하시네! 아니 그래도 온종일 나가 앉아 있었으면, 된장찌게에 넣 을 붕어 새끼 한 마리라도 건져 와야지! 맨날 실속은 없으면서, 말만 번지르르 해 갖고는....‛ 직장에 다니면서 일을 할 때나, 사람들과 어울려서, 또는 혼자서 어떤 일을 할 때 그 의미를 어디에서 찾는가? 좀더 넓게 생각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어 디서 느끼는 것인가? 사람들이 의미를 느끼는 데에는 두 가지 원천이 있다. 하나는 물량적인 것, 즉 물질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분히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대체로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돈이 그렇 다. 직장에 다니면서 일을 하면 월급을 받는다. 돈을 벌게 된다. 어디 그뿐인 가, 지위도 오른다.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오른다. 돈을 벌면 집도 크게 늘려 가고, 차도 좋은 것으로 바꾸고, 또 식구들과 좋은 곳에 가서 외식도 하고, 각 종 문화 활동도 즐기며, 여가도 활용한다. 이 모두가 일이 가져다 주는 의미요 보람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열심히 일을 한다. 일에서 느끼는 또 다른 물량적 인 의미는 자기가 이만큼의 목표를 설정했는데 이번에는 그것을 뛰어넘어 120% 나 성취했다는 데서 얻는 의미같은 것도 포함된다. 다음 달이면, 내가 3 년을 끌던 일을 완결짓게 된다는 데서도 목표 성취의 기쁨을 느낀다. 대체로 이러한 물량적인 측면에서 의미를 찾는 사람들은 일을 할 때 과정보 다는 결과를 중시한다.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생각에 빠지기 쉽다. 왜냐 하면, 결국 얻게 되는 의미가 과정 그 자체가 아니라 나타나는 결 과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과 위주의 의미 추구는 사람들의 결핍 충족 욕 구에 바탕을 둔다.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채우려고 한다.
집이 없으면 집을 장만하려 하고, 남의 집보다 작으면 다음엔 집을 크게 늘리 려고 한다. 이렇듯 결핍을 채우는 근본 동기는 원래는 모자라거나 없거나 불편 함을 느끼는 데서 비롯되다가, 궁극에 가서는 상대방과의 경쟁에서 쳐지지 않 기 위해, 기죽지 않기 위해,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즉 자기 보호를 위해서 비 롯될 때가 많다. 자녀를 명문 대학에 보내려는 부모님들의 마음 속에는 그러한 이유도 한몫 하고 있음을 주변에서 쉽게 느낄 수 있다. 일의 의미를 정신적인, 심리적인 측면에서 찾는 사람들은 다분히 과정 지향 적이다. 낚시의 의미를 고기를 몇 마리 잡았는가가 아니라 낚시를 갔다 오는 그 과정에서 느끼는 보람과 기쁨에 둔다. 이런 사람들은 인생의 의미 또한 긴 생애를 통해서 성취하는 부, 명예 , 지위, 권력보다는 삶의 과정에서 느끼는 의미에 더 가치를 둔다. 즉 유용한 사회 구성원으로 작은 일에서든 큰 일에서든 자신의 책무를 다하고 있다는 지 극히 평범한 데서 의미를 찾는다. 이러한 삶의 의미는 결핍 충족보다는 내면적 인 자아 성장과 같은 심리적인 특성을 지닌다.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그만큼 성숙해졌다는 것, 삶을 통해서 자신의 가능성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 동안 잠 재되어 있어 몰랐던 자아를 새롭게 발견하고 찾았다는 것 등에서 의미를 느끼 는 것이다. 심리적인 자아 성장에서 삶의 의미를 느끼는 사람들은 남들이 보기에는 지극 히 작은 데서, 별로 보잘 것 없는 데서도 의미를 찾는 경우가 많다. 보통 사람 들은 그게 뭐 그렇게 대수로운 일이냐고 물을 수도 있는 일에다 큰 의미를 부 여하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심리적인 의미는 개별성이 지극히 강하기 마련이 다. 부나 명예, 지위, 권력 같은 것들은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가치를 부여하 는 공통적인 것이지만, 자아 성장과 같은 심리적인 의미는 사람들 저마다 제각 기 다르다. 자아가 그만큼 차이가 있어 독특하기 때문일 것이다. 삶에서 결핍 충족의 의미나 물량적인 성취가 가져다 주는 의미가 사람들의 존재 가치나 삶의 의미를 완벽하게 채워 주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물량적 인 것을 제쳐놓고, 오로지 심리적인 의미만 추구한다고 해서 삶의 의미가 완벽 하게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필요하다. 이 두 가지를 균형 있게 갖출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삶의 의미를 총체적으로 느끼게 된다. 그 러나 삶의 과정에서 이 둘을 균형있게 갖추기는 꽤나 어렵다. 특히, 물량적인 가치 위주의 사회, 물질 만능주의가 팽배하는 사회에서 성장한 우리의 신세대 들은, 지금도 그렇거니와, 훗날 고도의 과학 기술 사회에서 자기들 나름대로의 개별적인 심리적 의미를 추구하는 데 상당히 큰 가치 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특히 오늘의 기성 세대와 그들의 자녀인 신세대를 비교해 볼 때, 기성 세대 는 궁핍함 속에서 성장하였다. 경제적 궁핍은 물론 문화적으로도, 교육적으로 도, 정치적으로도 그들은 궁핍함 속에서 성장하였다. 그렇기에 그들의 삶의 목 표는 언제나 궁핍함을 충족시키는 일이었다. 늘상 그들은 모든 것을 더 원하 고, 더 소유하고 싶어하고, 더 향유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에서 삶 의 의미를 느꼈다. 즉, 소유가 삶의 의미, 무의미를 결정지은 것이다. 그러나 신세대들은 풍요 속에서, 어떻게 보면 잉여 속에서 성장하고 있다. 신세대들은 남아돌아가는 공급 속에, 기회 속에서, 잉여의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의 부모들은 어렸을 때 밥상에서 언제나 좀더 먹었으면 하고 입맛을 다시며 일어났지만, 신세대들은 무엇을 골라 먹을까 하며 음식을 남긴 채 살 찔 것을 걱정하며 일어선다. 이러한 풍요 속에서 성장하는 신세대들에겐 물질적인 충족이 삶의 의미가 되 기는 어렵다. 그들은 오히려 얼마나 특별한 것을, 보통 사람들은 갖지 못한 것 을 자기만이 특별하게 소요하느냐 하는 일종의 자기 과시에서 삶의 의미를 느 낀다. 더 좋은 것, 더 값비싼 것, 더 독특한 것을 찾는 것은 바로 신세대들이 그러한 자기 과시에서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결핍을 충족하는 데서 얻는 삶의 의미이건, 또는 자기 과시에서 찾는 삶의 의미이건, 그 어느 쪽도 기성 세대나 신세대들 모두에게 그들의 흔들림 없는 삶의 의미를 충족시켜 주지는 못한다. 결국 기성 세대이든, 그들의 자녀 가 되는 신세대이든, 모두 가치 혼란에 빠져드는 것은 바로 그들이 추구하여야 할 인간의 본질적인 삶의 의미 를 제대로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곧 자아 내적인 성장이나 자기 발견이라는 삶의 과정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3.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가치 혼란 ‚야! 니 친구 중에 김진구라고 있지?‛ 고등 학교 1 학년인 아들에게 아버지가 다그치듯 묻는다. ‚네, 근데 왜요?‛ ‚그 아이는 왜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고 그러냐?‛ ‚왜요? 언제 전화 왔어요?‛ ‚그래, 어제 밤 11 시에, 아버지가 막 잠잘려고 하는데 전화 왔더라.‛ ‚그런데 왜 안 바꿔 주셨어요?‛ ‚음, 그 때가 너 독서실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 때야!‛ ‚아, 맞아! 그래요, 그런데 걔가 뭐래요?‛ ‚뭘 뭐래! 아버지가 그냥 너 없다고, 독서실에서 안 왔다고 했지! 그런데 너희들 무슨 볼일이 많길래 밤늦게 전화하고 그러니? 걔는 니네 학교 다니는 것 같지도 않던데....‛ ‚근데요, 아버지, 앞으로 제 친구한테서 전화 오면요, 저 바꿔 주세요, 제 친구들이 모두 그러는데요, 우리 집에 전화 걸기가 무섭대요. 아버지가 전화 받으면, 무조건 꼬치꼬치 묻는대요. 이름은 뭐냐, 어느 학교에 다니느냐, 어디 에 사느냐, 그런데 왜 전화했느냐 하는 식으로 아버지가 물어 보셔서 애들이 다 겁난대요.‛ ‚아니, 그게 뭐가 겁나냐! 전화했으면 더욱이 아버지가 받는 줄 알면 우선 인사부터 하고, 그 다음에 저는 어느 학교에 다니는 누구의 친구 아무개인데요 하고 얘기를 해야 되지 않냐? 그러지를 않으니까, 아버지가 꼬치꼬치 물을 수 밖에....‛ ‚근데, 애들이 그러는데 그런 말 할 사이도 없이 아버지가 그냥 꼬치꼬치 야단치고 물으신대요!‛ ‚그런데, 너 진구인가 걔하고 놀지 마!‛ ‚왜요?‛ ‚가만 보니까, 걔는 애가 틀려먹었어. 벌써 몇 차례 전화를 아버지가 받았 는데..., 걔가 그 때 왜, 고등학교 입시 연합고사 때 떨어질 뻔했던 애 아니냐 맞지? 그리고 그 날 밤 너 데리고 어딘가 가서, 조그만 것들이 술 퍼먹고 오지 않았어! 가로꿰져 갖고는, 하여튼 앞으로는 그 아이와 절대 어울리지마, 알았 어? 왜 대답이 없어?‛ 아버지가 소리쳐 다그치자, 아이는 우선 그 순간을 모면해야겠다 싶어 그냥 그러겠다고 대답을 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아버지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 다. 진구는 자기가 보기에 꽤나 괜찮은 친구였다. 중학교 때 3 년이나 같은 반 이었다. 아버지 말씀대로 그 아이가 좀 그런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학교 다닐 때 모든 아이들이 멀리했다. 후딱 하면 주먹도 휘두르고, 학교도 잘 안 나오고, 따라서 성적도 형편없는 아이였다. 그런데 유독 나하고만은 관계가 좋았다. 진구와 대화도 참 많이 했다. 다른 사람 얘기는 귓가장 자리에도 듣지 않았지만, 진구는 그래도 내 얘기만은 잘 들었고, 또 나에게 늘 고맙다고 했다. 그래서 진구는 지금 마음잡고 공부도 열심히 한다. 고등 학교
는 같은 학교로 진학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주 만날 수가 없어 그만큼 전화가 잦은 것이다. 우리 둘이 공부 열심히 해서 이 다음에 대학은 똑같이 같은 명문 대학에 가자고 약속했다. 서로 힘들고 그럴 때는 전화해서 격려해 주기로 했 다. 또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다. 그런 것을 잘 모르시는 아버지는, 설명드릴 기회를 주시지도 않고, 무조건 그 친구와 어울리지 말라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를 존경했다. 아버지를 늘 자랑스러워했다. 회사에서 남달리 승진도 빨리 하셨다. 회사의 ‘별’이라는 이사로 승진하신 것이 아버지가 마 흔 살 되셨을 때의 일이었다. 빽도 없고 돈도 없는 아버지지만, 오로지 노력 하나만으로 날고 기는 사람이 많은 우리 나라 제일의 대기업에서 나이 마흔에 이사가 되셨으니, 하여튼 대단하신 분이다. 언제나 완벽하시다. 그런 아버지를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요즘 들어, 아들은 고민이 더욱 많아졌다. 아버지는 자식에 대한 사 람과 염려가 크셔서 그런지, 친구 사귀는 것까지 일일이 챙기면서 관계를 끊어 라 말라 하시니, 자연히 아버지와의 관계마저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도대체 아버지와 나는 어떤 관계인가? 부자지간이란 어떠한 관계여야 하는 가? 또 나와 친구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친구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친 구와 가까워진다는 것, 사귄다는 것은 무엇인가? 혈연으로 맺은 부자의 관계, 우정으로 맺은 친구와의 관계, 그 외에도 관계는 많다. 엄마와의 관계도 내게 는 꽤나 심각하다. 그런가 하면, 선생님들과의 관계도 그렇다. 어떤 선생님은 정말 나와 인간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느끼지만, 어떤 선생님은 말로 표현하긴 그렇지만, 원수 같은 관계에 놓여 있기도 하다. 사람들과 관계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고 어떤 때는 즐거움도 가져다 주지 만, 어떤 때는 많은 아픔을 가져다 준다. 이렇듯, 아이들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서 가치 혼란을 느끼고 갈등을 경험한다. 그렇다면, 어른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아무런 가치 혼란을 느끼지 않는가?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심 한 갈등을 경험한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직장의 상사나 후배, 동료들과의 관 계에서,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선, 후배 관계에서, 또 가족 구성원들, 특히 부 부간에, 부모로서 자식과의 관계에서, 자식으로서 부모와의 관계에서 어른들은 상당한 가치 혼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가치 혼란은 꼭 이 시대, 이 사회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21 세기를 목전에 둔 이 세기말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심한 가치 혼란을 경험하는 근본적인 까 닭은 무엇일까? 세 가지로 나누어서 우리가 겪는 관계지음에서의 가치 혼란의 양태를 생각해 보자. 나는 사람들 속에 어느 정도나 섞여 들어가야 하는가? 산업 사회의 대량 생산 체제는 규격화, 표준화, 동시화가 특징이다. 이를테 면 부품이 규격화되어 있고, 생산 공정이 표준화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사람 들이 일을 시작하고 끝내는 시간도 똑같다. 이러한 산업 사회의 대량 생산 체 제는 곧바로 사람들의 일상 생활까 지도 규격화, 표준화, 동시화를 이루게 하였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어느 날 아침 아파트의 벽을 모두 열어젖히고 보았다 고 하자. 아마 집집마다 거의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화장실에 들어 가 있는 모습도, 식탁에 둘러앉아 있는 모습도 거의가 비슷할 것 같다. 이러한 대량 생산 체제는 근본적으로 사람들의 삶을 한 가지 모습으로 통합시키는 결 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제는 고도의 정보 통신,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그러한 대량 생산 체제가 서서히 붕괴되고 있다. 산업 생산에서도 다품종 소량 생산이 생산의 주
된 원리가 되고 있다. 말하자면 탈규격화, 탈표준화, 탈동시화가 나타나고, 통 합보다는 개별적인 분화가 촉진되는 것이다. 이는 곧 새로운 세기는 다원주의 시대가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한 가지 패러다임, 한 가지 원칙만이 존재하 지 않고 여러 가지 패러다임, 여러 가지 원칙이 함께 어우러져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의 일하는 시간만 보더라도 그렇다. 9 시 출근 5 시 퇴근이라는 원칙은 무 너져 내리고 있다. 출퇴근 시간이 사람마다 서로 달리지고, 또 굳이 직장에 나 가지 않고 집에서 일을 하거나, 돌아다니며 움직이는 사무실에서 일을 해도 되 는 그런 시대가 되고 있지 않는가! 새로운 분화가 일고 있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어찌 보면, 이러한 통합과 분화로 점철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 할 때가 많다. 2 차 대전 이후, 불과 70 여 개에 불과하던 국가가 지금은 200 여 개에 달하는 여러 국가로 분화, 독립되엇는가 하면, 미, 소 양대국으로 나뉘었 던 양극 체제가 이제는 유럽 연합이나 북미 자유 협정, 아시아 태평양 경제 협 력체, 서방 선진 7 개국 회의, 서방 선진국을 중심으로한 경제 개발 협력 기구 라든가 여러 개의 단극 다중심주의(UNIPOLYCENTRISM)로 다시금 분화와 통합을 이루는 것을 보면 그렇다. 그러한 통합과 분화는 지난 날 우리 나라의 정치 발전을 들여다보아도 쉽게 짐작이 가는 삶의 원리이다. 1997 년은 대선을 치르는 해다. 이번 대통령 선거 를 치르면서, 앞으로 우리 나라 정치판에서 국민이 구경하게 될 재미있는 상황 은 정치인들의 이합집산이나 합종연횡이다. 흔히 정치판을 비판할 때, 정치인 들은 너무나도 정략적으로 쉽게 이합집산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꼭 정치 판만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넓게 생각하면, 모든 인간의 삶 그 자체가 항 상 이합집산 속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통합과 분화가 순환적으 로 또는 동시에 복잡하게 얽혀서 나타나지 않았는가? 그러고 보면, 정치판에서 계속되는 이합집산, 통합과 분화(합당과 분당)가 뭐 그렇게 크게 이상할 것도 없지 않느냐고 생각된다. 서로간의 관계에서 겪는 커다란 가치 혼란은 바로 그러한 통합과 분화를 어 느 선에서 어느 정도로 어떻게 하는 것이 이상적이고 바람직한가를 알 수가 없 기 때문에 일어난다. 통합이란 다른 사람들과 의식과 행동에서 합일을 이룩하 는 것이다. 즉, 남들과 똑같이 생각하고, 남들 하는 대로 똑같이 행동함을 의 미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서로 유대 의식을 갖고, 동류 의식을 형성하면서 그 속에서 어떤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낀다. 반면, 분화는 남들 하는 방식에서 벗 어나 자기만의 방식을 세우고 또 그것을 고수하며 사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분화된 개인들이 모여서 또다른 통합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바로 통합 과 분화의 순환성을 의미한다. 고속 도로 운전을 하다 보면 재미날 때가 많다. 어느 야구 해설가는 야구가 인생의 축 소판이라고 했고, 또 바둑을 두는 사람들은 바둑판이 곧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나는 고속 도로를 운전하면서, 고속 도로가 삶의 철학을 가 르쳐 주는 곳이라고 느낄 때가 많다. 속력을 있는 대로 내면서 다른 차들을 요리조리 위험스럽게 앞질러 내달리던 차가 톨게이트에 와서는 ‘줄’을 잘못 서 오히려 저만치 뒤로 처지는 모습을 보면 그렇다. 톨게이트에 와서도 차로를 왼쪽, 오른쪽으로 바꾸면서 줄이 제일 짧은 곳에 가서 붙긴 붙었는데, 앞차의 운전자가 통행권을 빨리 찾지 못하였는 지 꾸물거리는 바람에 다른 줄에서는 대여섯 대의 차가 톨게이트를 통과할 때 까지 그 줄만은 꼼짝 안하는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얘기는 잠시 빗나갔지만, 주말 같은 때 고속 도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한 가지 있다. 버스 전용 차로도 그렇고 갓길도 그렇다. 그 곳으로는 정해진 차량만 다닐 수 있다. 버스 전용 차로는 글자 그대로 버스들만이 다니지만, 갓 길은 길이기는 해도 일반 차량 통행을 위한 길은 아니다. 갓길 운행은 법적으
로 금지되어 있음을 모르는 운전자는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주차장을 방불할 만큼, 고속 도로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서 움직일 줄 모르는 차량들. 맨 오른쪽 차로에 촘촘이 붙어 있던 차들 중 한 대가 용기 있 게(?) 차선에서 벗어나와 갓길을 쌩쌩 달리기 시작한다. 글쎄, 그 사람 무슨 배짱으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그만한 사정이 있겠지, 뭐, 정말로 그 무엇하 고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시간을 다투는 중대한 일을 눈앞에 두고 있어 그랬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람의 그러한 행동은 그를 바라보는 많은 순진한(?) 사람들에게 혼란을 겪게 한다. ‚어쭈, 저 사람 봐라! 갓길로 막 가네, 나도 갈까? ...에라 모르겠다, 까지 것 걸리면 나만 걸리냐! 나도 가자.‛ 배짱(?) 좋은 한 사람이 그 뒤를 따라붙는다. 그러면 제 3 의, 제 4 의 사람이 또 그 뒤를 따른다. 그런데, 어떤 남자는 계속 머뭇거린다. 갈까 말까, 그 때 조수석에 앉은 아내가 냅다 소리친다. ‚여보! 당신은 뭐해? 지금 남들 다 가는데, 아니 당신만 그렇게 법을 지킨 다고 해서 누가 상을 줍디까, 당신도 차 돌려 따라가요!‛ 아내가 소리치자, 남편은 엉겹결에 망설임을 멈추고 따라나선다. 그러나 이 게 웬일인가. 벌써 갓길도 막혔다. 설상가상으로 뒤에서 경찰차가 따라오면서 마이크로 ‚6278, 6278 거기 서요.‛라고 부르지 않는가? 경찰은 다가와서 딱 지를 떼려한다. ‚왜, 나만 딱지 떼느냐?‛고 항의도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 다. 벌금 고지서에 사인을 해 준 그는 아내와 한참을 다투었다. 모두가 당신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그러나 아내는 당신이 머뭇거려 그렇다느니, 머뭇대 지 않고 진작에 갔으면 딱지 안 떼였을 것을, 남들 하는대로 하려면 애진작 하 든가, 끝까지 법을 지키려 했으면 아내가 소리를 치든 주먹질을 하든 끝까지 지키든가 하면서 언쟁을 한다. 어찌 보면 이는 통합과 분화의 시점을 잘못 잡 아 낭패를 본 셈이다. 이러한 경우는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가만히 살펴보면 수없이 많다. 근 10 년 전쯤 어느 아파트에 처음 입주했을 때의 일이다. 사람들은 새 집에 입주하자마 자 대대적인 개보수 공사를 하는 것 아닌가. ‚여보, 오늘 604 호 공사가 끝났는데, 참 근사합디다. 당신도 저녁때 나랑 한 번 그 집에 안 가 볼래요? 집이 넓고 좋아 보입디다. 돈도 얼마 안 들었대 요.‛ ‚아, 시끄러! 괜스레 멀쩡한 집을 갖고 웬 난리야. 난 불편한 것 하나도 없 으니까, 그냥 살아.‛ 한 달쯤 지났다. 아내가 또 남편에게 말을 건넨다. ‚여보, 내가 왜 그 때 604 호 공사했다고 했지, 이번엔 803 호도 했고, 904 호 도 했는데, 604 호보다 돈도 덜 들이고, 그런데 공사는 더 근사하게 했습디다. 오늘 반상회를 803 호에서 했는데 모두들 어디서 했느냐고 야단입디다....‛ 또 한두 달이 지났다. 아내는 이번엔 비장한 결심을 한 듯 목에 힘을 주어 말한다. ‚지금 우리 라인에서 고치지 않고 사는 집은 우리 집밖에 없는가 봅디다. 그 샌님 같은 1604 호네도 다 했습디다. 그저 남들 하는 대로 하고 살면 속 편 하고 좋지, 뭐 당신만 그렇게 유별나게 굴게 뭐 있수! 여보, 그러지 말고 우리 도 남들 하는 대로 하고 삽시다.‛ ‚아 글쎄, 난 못 한다고 했잖아!‛ ‚글쎄 나는 싫어, 방을 넓혀 베란다에서 자는 것도 싫고, 마루를 넓혀 베란 다에 나앉는 것도 싫고!‛ ‚누가 당신보고 베란다에서 자래요?‛ ‚자다가 굴러가면 어떻게 하냐?‛
‚아이그, 그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고, 우리 합시다.‛ ‚글쎄, 나는 무조건 못 해!‛ 끝내 남편은 아내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런데 몇 년 후, 공사를 한 집은 모두 신고를 해라, 벌금을 부과시키겠다, 구청에서 조사를 나온다더라 등등 복 잡한 얘기가 신문에 나고 방송에서 들려 왔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내가 아무 런 말이 없었다. 해당 사항이 없어서 그런지, 아니면 그 때 안 하기를 잘했다 생각해서인지 아무 말이 없었다. 이런 것도 역시 우리가 겪는 통합과 분화의 갈등이다. 흔히 유행이라는 것이 그렇다. 특히 청소년들이 따르는 유행을 보면, 아무런 생각 없이, 남들이 하니까 그렇게 따라서 한다. 남들 하는 대로 똑같이 섞여 들어가지 않으면 그들 사이에 끼지 못한다거나, 대화가 안 된다거나, 따돌림을 받는다거나 하는 이유로 그들은 그저 남들의 생각과 행동에 무비판적으로 동화 되고 통합된다. 그리곤 그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소속감을 느낀다. 그러나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이게 아닌데 하고 깨닫게 될 때가 많다. 도대 체 나라는 존재의 주체성을 어디에서 찾아야하나? 내가 남들과 다르고 나만이 특유한 나인 까닭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통합으로부터 분화를 시도한다. 그리고 그 분화는 얼마 안 있어 또 다른 통합으로 변질되고, 그러다보면 통합 과 분화의 한계가 무엇이고 또 언제 어떻게 내가 다른 사람들 속에 통합되고 분화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가치 혼미에 빠진다. 지금 여기에서 통합은 나쁘고 분화가 좋다, 또는 그 역으로 통합은 좋고 분 화는 나쁘다는 논리를 전개하자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두 가지 모두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를테면 통합 속의 분화, 분화 가운데의 통합을 균형있게 지향하려는 데서 가치 혼란이 더욱 커지는 것이다. 21 세기, 특히 다원화 시대에는 개인이든 하나의 조직이든 국가든, 모두가 그 나름대로 통합 속의 분화를 이룩하여 개별적 독특성을 추구 하는 것이 삶의 기본 원리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 이는 통합보다는 분화가, 보 편성보다는 개별성이 더 풍미하는 미래가 될 것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통합 없이 개별적 분화만이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서 나타나면 그 사회는 모래알처럼 산산조각 나 파쇄현상을 보이게 될 것이다. 사회 또는 조직 전체의 응집력은 떨어질 것이다. 개인도, 조직도, 국가도 모두 각기의 자 기 보호주의적인 이기주의에만 젖어들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서로 또 통 합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개별성보다는 보편성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개별적으로 분화하면서도 보편적으로 통합을 이룰 수가 있겠는 가? 우리의 젊은이들이,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 21 세기를 살아가면서 직면하 게 될 커다란 가치 혼란의 하나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할 때가 많 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어느 정도로 경쟁하여야 하는가? 다시 운전 이야기를 하겠다. 사실, 요즈음 한적한 시골길이 어디 있겠느냐 만, 그래도 늘 복잡한 도심 속에서 지내다가 교외로 나가면, 비록 거기에도 차 가 많기는 해도, 사뭇 한적하게 느껴진다. 그런 한적한 느낌을 주는 지방도를 달리다 보면 가끔 저쪽편에서 이쪽으로 달려오는 차들이 대낮인데도 전조등을 껐다 켰다 하면서 지나가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무슨 뜻일까? 저만치 경찰이 단속하고 있으니까 조심해서 가라고 친절하게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사실 그 런 친절이 도덕적으로 옳고 그르냐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여기서 얘기하려 는 것은, 사람들이 서로 가는 방향이 다를 때는 그래도 서로에게 친절하고, 또 협력도 잘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가는 방향이, 목표가 같을 때는 그렇지 않 다. 같은 차로에서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달릴 때, 뒷차가 전조등을 껐다 켰다
하면서 쫓아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아주 드물게는 앞차의 결함을 알리는 경우 도 있지만 대부분 꾸물대지 말고 빨리 가라거나, 아니면 비켜 지나가라는 뜻이 다. 때로는 무리하게 끼여든 앞차에 대한 비난과 분노의 표시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지향하는 목표가 같을 때, 경쟁하는 경향이 있다면 우리 모두는 삶 에서 필연적으로 경쟁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평생 살아 가면서 지향하는 목표의 본질이 대개가 비슷하거나 같지 않은가? 높은 지위에 오르고, 권력을 소유하고 싶고, 돈도 많이 벌고, 좀더 풍요롭게 살고 싶고, 뭐 이런 것들이 사람들이 성취하려는 보편적인 목표가 아닌가? 그러면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러한 목표를 향해 지극히 어렸을 때부터 치열한 경쟁을 벌 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부모는 자녀가 어렸을 때부터 다른 집 자녀와 비교해 가면서 경쟁 적으로 교육시킨다. 태어나서 몇 달 지나면 우선 남의 집 아이들보다 빨리 일 어나 걷도록 만들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옹알이할 나이에 말을 가르치려 들고, 그림책을 보아야 할 나이에 글자를 가르치려 들고, 숫자를 식별하면 될 나이에 계산을 할 줄 알도록 만들려고 한다. 우리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아이를 이른 아침부터 영어 회화 학원엘 보낸다. 어디 그뿐인가 ? 손가락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어린 아이에게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게 하 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게 한다. 이 모든 것을 남의 집 아이들보다 빨리 성취 하도록 아이들을 경쟁적으로 가르친다. 그러한 경쟁의식은 자녀가 초등 학교에 입학해서, 중학교, 고등 학교, 대학 으로 올라갈수록 심화된다. 경쟁은 학교 다니는 시절에만 있는 게 아니다. 학 교를 졸업한 후 사회에 나가서도 마찬가지다. 좋은 자리에 앉고, 남들보다 먼 저 높은 직급에 오르고, 집도, 차도 남보다 빨리 장만하고, 해외 여행도 남보 다 많이 다니고, 골프도 남보다 잘 치고.... 별의별 일에서 모두가 경쟁적으로 살아간다. 하다못해 일상 생활의 지극히 작은 일에서도 사람들은 경쟁을 벌인다. 출근 길에서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남들보다 짧은 시간에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자기는 남들이 자기 앞에 끼여드는 것을 용납 못 하면서, 자기는 남의 차 앞에 끼여들곤 한다. 본선으로 가던 차는 우측 차로에서 나온 차들이 본선으로 합류하려 할 때, 앞차와의 틈새를 좁혀 가면서 양보를 하지 않는다. 점심 시간에 식당에 가서도, 저쪽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보다 늦게 갔 는데 음식은 오히려 이쪽이 먼저 나오면 좋아한다. 참으로 별의별 시시껄렁한 일에서까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이기려고 경쟁하면서 산다. 그러면 그 모두가 오로지 지향하는 목표나 방향이 같아서인가? 아니면 인간 의 본성이 태어날 때부터 경쟁적이어서 그런 것일까?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수요는 많은데 공급이 딸리면 경쟁은 나타나게 마 련이다. 만약에 길이 아주 넓고 차가 적다면, 사람들은 경쟁적인 운전을 덜 하 게 될 것이다. 길은 좁은데 차는 많으니, 즉 수요는 많은데 공급이 적으니, 운 전도 경쟁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본다면, 21 세기를 전망할 때 우리 사회에서 경쟁은 더욱 심화될 것으 로 생각된다. 왜냐 하면 사람들의 욕구나 수요는 한층 다양화되고 커질 텐데, 그것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공급이 그만큼 다양화되고 커질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일기 때문이다. 오늘날 국가 간 경쟁이 그토록 치열해지는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자원은 계속 고갈되는데, 그것을 필요로 하는 수요는 늘어나 국가 간 경쟁이 싹트는 것 아닌가? 지구의 자원은 유한해 21 세기에는 그러한 현상이 더욱 심화될 수 밖에 없다. 옛날과 달리, 사람들의 개별적인 소유가 증대돼 사람들 상호간의 경쟁은 더 욱 치열해지는 듯싶다. 옛날에는 공급이 워낙 적다 보니, 사람들 모두가 한결 같이 빈곤하다 보니, 공동의 소유가 많았다. 그리고 그러한 공동 소유를 어떻
게 함께 소유하며 이용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지혜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산업 화가 이루어지고, 경제적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서 사람들의 개별적인 소유력도 증대되었다. 옛날 시골에는 트랜지스터라디오가 그 동네에서 한 집에만 있던 시절도 있었고, 텔레비전 수상기도 어느 집엔가 한 집에만 있었다. 그러면 그 것은 동네 사람들의 공동 소유 비슷하게 이용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디 그런 가? 이제는 각 방마다 텔레비젼 수상기며, 전화기가 있지 않은가? 내 방에서 내 텔레비젼을 내가 보고 싶을 때 내가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본다. 즉 사람들 이 저마다 자기만의 것을 소유하게끔 되었다. 그러다 보니, 상호 우호적이고 협동적인 공동 소유는 줄어들었고, 또 그런 속에서 살다보니 함께 소유하며 살 아가는 버릇도 기르지 못하고, 결국엔 사람들이 저마다 끝없이 자기 소유를 위해 경쟁적으로 노력할 수밖에 없지 않 은가! 경쟁이 가치 개념상 꼭 나쁘지는 않다. 흔히 심리학자들은 경쟁이 성취 동기 를 강화시켜 준다고 한다. 그러니, 국가가 팔을 겉어붙이고 정책적으로 경쟁을 조장하는 경우도 있지 않던가! 이를테면 대학 평가를 통해, 우리나라 대학들을 상호 경쟁속으로 몰아넣는 것이 그렇다. 그런데 문제는 경쟁이 가져다 주는 긍 정적인 효과보다는 때로는 부작용이 너무 크다는 데 있다. 예컨데 경쟁은 언제 고 승리하는 소수에게는 큰 기쁨을 가져다 줌으로써 그 많은 사람들의 삶 자체 를 궤멸시키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경쟁에 낙오하고 탈락하면서 겪는 자기 모 멸감, 포기, 열등, 분노, 좌절 등의 감정은 때로는 그들에게 칠전팔기의 재기 의지를 세우게도 하지만, 많은 경우 그들을 아예 주저앉게 만들기도 한다. 특 히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너무 어린 나이에 청소년들이 경쟁의 대열에 이끌려서 는, 너무 어린 나이에 경쟁의 패배자가 되어서 인생을 조기에 결론지어 버리는 수가 많다. 즉, 나 같은 놈은 결국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하고, 자 신의 긴 생애를 쉽게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우리는 살아가면서 서로 얼마나 경쟁을 해야 하고, 얼마나 협동하 여야 하는가? 어떤 일에서 나는 누구와 어느 정도로 경쟁하여야 되는가? 이 일 은 경쟁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가, 아닌가? 도대체 경쟁은 왜 하는가? 경 쟁의 의미는 무엇인가? 경쟁의 반대는 협동인가? 경쟁을 안 하면, 우리는 서로 협동할 수가 있는가? 기성세대는 물론, 젊은이들 중 많은 수가 그러한 가치 혼 란을 겪고 또 그들은 앞으로 살아가면서 그런 가치 혼란을 더욱 심하게 경험할 것으로 보인다. 위아래 관계가 무너졌다면 옆으로의 관계는 세워졌나? 옛날 대가족 제도에서 한 가지 좋았던 점은 수직적인 문화 전승이 자연스럽 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대체로 3 대가, 때로는 4 대가 한 집에 모여 살면서 그 집의 역사와 문화가 위에서 아래로 이어져 나갔다.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물 려준 가풍이나 전통은 다시 아버지에 의해 아들딸에게 전해졌다. 이러한 수직 적 문화 전승은 그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서도 이루어졌다. 마을의 풍습과 전통 은 동네 노인들에 의해 젊은이들에게 전해졌다. 사람들 간의 수직적인 관계지음은 비단 문화 전승이라는 차원에서만 가치 있 는 것은 아니었다. 위, 아래 상호간의 끈끈한 유대는 그들 간의 질서를 세우는 데도 큰 영향을 미쳤다. 즉, 위는 아래를 사랑하고 감싸고 타이르고 가르치고, 또 아래는 위를 존경하고 따르고 경청하는 질서가 유지된 것이다. 동네 할아버 지는 누구의 할아버지든 모두 할아버지로 불렸고, 동네 형들은 누구네 형이고 가릴 것 없이 또 모두의 형이었다. 이러한 가족들 간의, 그리고 한 동네 사람들 간의 위아래의 수직적 관계지음 은 곧바로 사회의 모든 삶의 과정에서 그대로 이어졌고, 그것은 곧 사회 존속
의 근간을 이루었다. 때로는 그러한 수직적 관계가 자칫 악용되어서 권위주의 로, 독선주의로, 지배 윤리로 둔갑한 경우도 있었고, 그럴 때마다 그것은 유교 전통의 폐습으로까지 치부되면서 없애야 할 악습의 하나로 손꼽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면서, 우리의 전통적인 대가족 제도는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핵 가족화가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그러다 보니 제 1 세대격인 노인 세대와 제 2 세대 격인 부모 세대, 그리고 제 3 세대격인 자녀 세대 간의 이음새가 부드럽지 못하 게 되었다. 제 1 세대와 제 2 세대 간에도 틈새가 벌어졌고, 그러다 보니 제 1 세대 와 제 3 세대 간의 틈새는 더욱더 벌어졌다. 어린 아이들에게 할머니, 할아버지 는 그저 설날에 세배나 드리고 돈을 받는 대상쯤으로, 또 추석날 만나서 그저 절 한 번 하는 정도의 관계로 전락하였다. 일상 생활을 통한 문화나 역사의 전 수는 참으로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단절되고 말았다. 더욱이 부모 세대인 제 2 세대 자신들이 자칭 신세대 부모로 의식하고 행동하는 가운데, 그들은 제 1 세 대의 역사나 문화를 자녀 세대에게 전달해 주는 매개 역할보다는, 오히려 제 3 세대에 더 가까이 밀착해서 제 1 세대를 경원하는 풍조까지 나타나고 있다. 수직적 관계의 붕괴 현상은 우리가 조금만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면 어디에 서나 쉽게 찾을 수 있다. 어느 날 출근길에서였다. 신호 대기를 하고 있는데 옆 차로에서 조그만 접촉 사고가 났다. 20 대 후반쯤 되는 젊은이가 깜박 한눈을 팔았는지 신호 대기선에 서 있던 앞차를 그냥 들이받았다. 앞차의 운전자는 보아하니 나이가 60 쯤 되어 보이는 어른이었다. 엉겁결에 그는 밖으로 나와서는 뒷차의 젊은이를 향해 소 리쳤다. ‚이봐! 뭘 보고 운전하는 거야? 빨간 불인데 그렇게 달려오면 돼?‛ ‚근데, 이 양반이 엇다가 반말이야! 이봐라니! 물어 주면 되잖아!‛ ‚물어 주면 다야! 이 친구가 가만 보니까 안 되겠구먼!‛ ‚뭐가 안 돼, 안 되긴! 나 참 더러워서!‛ ‚더럽다니!‛ 이런 식으로 20 대 후반 젊은이와 60 대 노인의 언쟁은 결국 엄청난 교통 정체 를 불러 일으켰다. 정체를 불러일으키며 언쟁을 벌인 것도 문제지만, 잘못을 한 젊은이가 어른에게 한 언행을 보면, 우리 사회에 이제 위아래의 관계가 없 어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수직적 관계가 붕괴되면서 수평적 관계가 다소 늘어나고 있음은 근래의 추세 인 듯싶다. 청소년들이 어떤 정보를 얻을 때 부모나 선생님에게 수직적으로 얻 기보다는 친구들, 또래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수평적으로 얻는 일이 늘고 있음 을 보면 그렇다. 발달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이기 는 하지만, 청소년들은 부모와 함께하는 시간과 공간보다는 또래끼리 함께하는 시간과 공간을 더 선호한다. 고도의 정보 통신 기술의 발전은 더욱더 그러한 수평적인 문화 전승을 가속시켜 주고 있다. 물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지음에서 수직적 관계나 수평적인 관계가 모두 나 이를 기준으로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지식이나 경험 또는 소유력 등을 기준으로 형성된다. 그러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수직적인 관계와 수평적인 관 계는 양자택일할 성격의 것들이 아니다. 수평적 관계를 많이 한다고해서 수직 적 관계가 어쩔 수 없이 소홀해지는 것은 아니다. 또 수직적 관계를 선호한다 고 해서 꼭 수평적 관계를 싫어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문제는 이 두 관계가 균형을 이루며 나타나야 하는데, 사회 전체적인 흐름에서 보면 수직적 관계가 점차 줄어들고, 수평적 관계는 그 나름대로 필요에 의해서 발전하지 못 하고 수직적 관계를 약화시키는 대안처럼 등장하는데 있다. 사람들이 수직적이든 수평적이든 관계지음을 하여 결속할 때, 그 속에는 반 드시 이데올
로기란 것이 중개 역할을 한다. 여기서 이데올로기란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주 는 이음새 역할을 한다. 우리 나라의 경우, 고향이 사람들을 서로 결속시키는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였 다. 경상도 사람은 경상도 사람끼리, 전라도 사람은 전라도 사람끼리, 또 충청 도 사람은 충청도 사람끼리 함께 모여 끈끈한 관계를 맺고 결속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학벌 이데올로기도 우리 나라의 경우 막강한 것으로 작용하였다. 대졸은 대졸끼리 어울리고, 고졸은 고졸끼리 어울리고, 또 대졸 가운데서도 서 울대 출신은 서울대 출신끼리 고려대 출신은 고려대 출신끼리 잘 어울려 결속 하는 것이 그렇다. 남자들의 경우에는 군복무를 장교로 복무했는가, 아니면 그 냥 사병으로 복무했는가? 사병 중에서도 카투사였나, 아니면 장기 하사관으로 복무했는가, 일반병으로 복무했는가, 또는 현역 징집이 아니고 방위로 소집 근 무했는가가 이데올로기가 되어 서로를 같은 집단에 소속시켜 결속을 이루게 한 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그 외에도 수없이 많다. 과거 우리들의 삶에서는 이러 한 이데올로기가 다양하게 발전되어서 사람들의 수직적, 수평적 관계를 돈독하 게 하고 또 통합된 응집력을 발휘하도록 하였다. 특히, 한 사람이 여러 종류의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이렇게 저렇게 다른 사람과 뒤섞여 어울리게 됨으로써, 사회 전체의 어떤 통합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정보 과학 기술이 발전되고 사람들의 문화 생활 수준이 높아지고 소 유가 증대되면서 사람들은 그러한 이데올로기에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않는 다. 특히 신세대들은 그러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관심이 매우 적다. 서로 동창 이라고 한들 무슨 그리 깊은 관계가 있겠는가? 우리가 같은 고향 출신이고, 같 은 동네에 살고, 같은 학교를 나왔고, 같은 직장에 다니고, 연령적으로 같은 또래라는 것들 따위가 그렇게 큰 의미를 주지 못한다. 그저 각자 자기만이 홀 로 존재할 뿐이다. 필요에 따라서 서로 함께 관계하여 모일 수는 있어도, 그것 은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해서이며, 그 필요가 충족되면 다시 쉽게 흩어지고 만 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이름도 모르고, 또 알려고 들지도 않는다. 하긴 요즈음 어른들에게서도 그런 성향이 점점 강해지는 듯싶다. 같은 아파 트에 살면서 앞뒷집이 인사도 없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나면 그저 속으로, ‘이 친구, 6 층에 사는구먼!’하고 생각할 뿐, 아무런 인사도 말도 없다. 옛날 엔 그래도 물김치 담으면 맛이나 좀 보라고 나누어 주기도 하고, 오랜만에 팥 죽을 쑤었다며 한 대접 가져오기도 하지 않았는가! 이제는 서로 그러한 작은 정을 나누는 일도 매우 보기 어려워졌다. 그저 너는 너, 나는 나, 하는 식의 외로운 삶만이 늘어나고 있다. 한 마디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제각기 홀로 자신을 소외시켜 놓고, 외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들 간의 통합은 깨지고 분화가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분화된 삶, 분화된 관계에서 사람들은 어느 정 도 통합을 이룰 것을 다시 추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수직적이든 수평적이든 관계를 바로 회복해서 세울 수 있는가? 어떤 관계가 진정한 관계인가? 또 관계지음은 옛날처럼 수직 적으로만 이루어져야 되는가? 사람은 서로 관계지음에서 벗어나 홀로 존재할 수 없다. 관계지음 속에서 존재할 때, 서로의 존재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렇 다면 특히, 앞서 얘기한 것처럼 고도의 정보 사회에서 개인의 소유력 증대와 그에 따른 파쇄 현상이 심화되어 나가는 마당에 우리는 어떻게 위아래 또는 옆 으로의 관계를 함께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가 있는가? 이는 우 리의 젊은이들이 지금부터 한층 더 겪게 될 또 다른 가치 혼란의 큰덩어리를 차지한다. 4. 일과의 관계지음에서 일어나는 가치 혼란
지금 인간이 발전시키고 있는 과학 기술, 정보 통신 기술은 어디까지 발전할 것인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으로 궁금하기도 하고 때로는 두렵기까지 하 다. 인터넷, 사이버 스페이스, 펜티엄 칩, 음성 인식 오에스 멀린...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전혀 듣지 못했던 새로운 용어들이 가까이에서 빈번하게 들려온 다. 누군가가, ‚디브이디와 엠엠엑스는 멀티미디어의 수준을 업그레이드시키 게 될 것이다. 인터넷 팩스와 가상 사설망은 인터넷 서비스에서 새로운 부가 서비스를 창출시킬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면, 이 말의 뜻을 모두들 제대 로 이해하는가? 1946 년 계산기 형태의 컴퓨터가 처음 등장한 지 50 년 만에 이 루어진 오늘의 컴퓨터 과학 기술의 발전은 참으로 가공할 만한 일이다. 지난 50 년 간의 발전이 그렇거늘, 앞으로 5 년, 10 년, 50 년에는 또 어떤 발전이 우리 들의 삶에 다가올 것인가? 오늘날 우리 인류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과학 기술, 정보 통신이나 문화 발전 은 우선 그 변화와 발전의 가속성에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게 한다. 옛날에는 사실 사람의 평균 수명이 사회 문화의 변화 주기보다 훨씬 짧았다. 인간의 수 명이 고작 40~60 년이었는데 사회 변화는 몇백 년 만에 한 번 크게 이루어졌으 니, 사람들은 변화에 적응하는 부담 없이 한평생을 편안하고, 여유 있게 살았 을 것 같다. 지금은 그 반대다. 평균 수명이 70~80 년으로 조금 길어졌지만, 과학 기술의 발전이 주도하는 사회 변화 주기는 너무나 짧아졌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세상 이 휙휙 달라지고 있다. 100 년이 안 되는 짧은 생애를 살면서도 우리는 무수한 변화에 새롭게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60 이 넘으신 어른들은 기억할 것이다. 그 옛날 산에서 나뭇가지를 꺾어 다가 아궁이에 불을 때며 가마솥에 밥을 짓던 시절을. 그 다음에는 왕겨도 때 서 밥을 했고, 제재소에서 얻어 온 나무 껍질을 태워 가며 밥을 지어 보기도 했다. 풍구를 돌리면서 톱밥으로 밥을 짓기도 했다. 그러다가 숯불도 피워 보 았고 연탄(구멍탄)도 피워 보았다. 그 다음엔 전기 밥솥으로 밥을 지었다. 또 그 다음엔 가스불에 압력솥을 올려 놓고 밥을 짓는 법을 배웠다. 마치도 옛날 시골 떡방앗간에서 김이 식식대며 흘러나오듯, 솥뚜껑 위에서 조그만 꼭지가 김을 풍기며 씩씩 돌아가는 압력솥에 어떻게 가스불을 맞추어야 하는지를 노인 들은 젊은 딸아이한테 배웠다. 이제는 전자레인지에 찬밥을 데워 금방 새로 한 밥처럼 따뜻하게 먹을 수도 있다. 어디 그뿐인가. 밖에서 전화를 걸어 원격 조 정으로 전기 스위치를 넣어 밥을 짓는 법도 배워야 한다. 이렇듯 70 도 안 되는 짧은 생애를 살아오면서 무수한 변화에 적응해야 했다. 참으로 무섭도록 빠르게 변화되는 세상이다. 이제는 변화 그 자체가 문제가 아 니라, 변화의 속도가 빠르다는 사실에 우리는 더욱 놀라게 된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그 속도로만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정교성, 복잡성, 전 문성, 확산성으로도 우리를 매우 놀라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과학 기술 발전 의 추세와 특성은 사람들에게, 특히 일과의 관계 속에 서 많은 새로운 가치 혼란을 느끼게 한다. 이미 기성 세대들이 그러한 과학 기 술이 선도하는 사회 변화 속에서 일과의 관계지음에 상당한 가치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젊은이들이 21 세기에 겪게 될 가치 혼란은 훨씬 더 크지 않을까 우려된다. 뭐든지 한 가지만 전문적으로 잘 알고 잘 하면 되는가? 여고를 졸업한 지 15 년 만에 30 대 중반의 동창생 다섯 명이 모처럼 커피숍에 둘러앉았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는가? 결혼식 때는 왜 알리지 않았냐? 그래 너희 신랑은 어디 다니니? 애는 하나니, 둘이니? 몇 학년이니? 공부는 잘 하 지? 그런 상투적인 얘기들이 오고간 다음 화제는 점점 고도화, 전문화, 첨단화
되어 간다. ‚얘, 니네 신랑은 사장님이시구나! 그래 딜리버리 서비스는 주로 뭘 통해서 하니? 삐삐와 휴대폰으로 하니?‛ ‚아니, 요즈음엔 티알에스 수신기를 설치했어. 디지탈 방식을 사용하거 든.‛ ‚무슨 수신기?‛ ‚응, 티알에스 수신기!‛ 그러자 모두들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알아들어서 묻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물 어 보았자 창피만 당할 것 같고, 또 들어 봤자 잘 모를 것만 같아서 그랬다. 그러자 또 다른 한 친구가 말을 꺼낸다. ‚나, 여기 오느라 두 시간이나 걸렸어! 마치 남편이 자기도 서울에 볼일 있 어 올라온다기에 남편하고 함께 왔어!‛ ‚좋았겠다. 오랜만에 둘이서 드라이브 데이트도 하고!‛ ‚데이트가 뭐냐! 그 사람이 운전을 날보고 하래잖아! 그리고 자기는 뭐 노 트북 피시로 인터넷에 들어가 신문을 본다나, 웹캐스팅을 통해 라디오처럼 뉴 스를 안 듣나, 차 안이 회사인지, 안방인지 구분이 안 가!‛ 한 친구가 자기도 뭔가 안다는 듯 한 마디 했다. ‚응, 나도 신문 볼 때 이따금 주문형 뉴스 서비스인 뉴스 드림을 통해서 필 요한 기사만 골라 보기도 해!‛ 그러나 다른 친구들은 이 두 사람의 대화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은근히 창피함까지 느꼈다. 자기네들은 신문을 읽어도 정치나 경제면 따위엔 관심 없고, 그저 사회면을 들춰보고 연예 오락 기사나 유심히 보거나, 아니면 신문 밑에 실린 여성 잡지 광고의 목차나 들여다보는 게 고작인데, 얘 네들은 무슨 주문형 뉴스니, 웹캐스팅이니 하니, 창피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어 보면 그저 구석기 시대 사람마냥 웃음거리가 될 성싶어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잠자코 있던 친구들 중 한 친구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려고 튀어나왔 다. 그 애는 엊그제 필드에 나가서 버디를 두 개나 잡았다고, 그랬는데도 그만 오비를 두 번이나 냈고 그래서 트리플을 치는 바람에 간신히 90 을 쳤다고 하면 서 화제를 골프로 돌렸다. 그러자 다섯 중 세 사람은 침을 튕겨가면서 신나게 골프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또 두 사람은 입을 다물고는 시큰둥하게 앉아 있 었다. 트리플이 셋, 또는 세 배, 글쎄 어떻든 삼이라는 숫자와 관계가 있는 것이라서 알아듣겠지만, 버디는 무슨 뜻인가? 혹시 얘네들 이 영어도 제대로 모르면서, 해 대는 소리는 아닌가? 어떻든 골프를 한 번도 쳐본 적이 없는 두 사람은 대화에 끼여들기가 어려웠다. 다섯 명밖에 안 되는 친구가 오래간만에 모여 앉아 네 시간이나 수다를 떨었 지만, 반가움의 인사를 나눈 다음에는 서로 의사 소통이 안 되는 어려움을 느 꼈다. 어떤 화제인가에 따라서 의사 소통의 어려움은 제각기 서로 달랐다. 의사 소통의 어려움은 비단 이러한 정보 통신에 관련된 일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직업이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모이면, 서로 사용하는 언어를 이해 하지 못해서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때도 많다. 그만큼 사람들이 종사하는 일이 전문화되고, 또 세분화, 첨단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는 의사 소통을 위해서, 최소한의 관계지음을 위해서, 그야말로 모든 분야에 걸쳐 최소한의 기초 지식을 골고루 갖추어야 하는가? 그러한 기초 지식이나 정 보를 어떻게 그 많은 분야에 걸쳐 골고루 갖출 수가 있는가? 의사 소통 안 하 고 살면 살았지, 어떻게 지금 배워서 갖출 수가 있겠는가? 머리가 복잡해지고 흔들림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옛날에는 어른들이 그렇게 말했다. 그저 사람은 한 가지만 잘 할 줄 알면 밥 은 먹고 산다고, 오히려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다 잘 알고 잘 하면, 밥을 굶는
수가 있다고. 그러나 한 가지만 잘 알고 잘 해서는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 가기가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을 바로 앞서 예를 든 여고 동창 모임과 같은 기 회를 통해 하게 된다. 어떤 집에서 오고간 대화이다. ‚엄마, 나 피아노 치기 싫은데, 그래도 피아노 학원에 계속 다녀야 돼?‛ ‚피아노쯤은 이제는 누구나 칠 줄 알아야 돼! 이것아, 그러니까 잔소리 말 고 6 학년 졸업할 때까지만 그냥 다녀! 체르니까지만 치면 돼!‛ ‚그럼, 엄마, 태권도도? 그러면 태권도는 안 다녀도 되지?‛ ‚그걸 말이라고 하니. 초단은 따 놓아야 돼!‛ ‚어휴, 엄마 영어 학원에도 다니고, 컴퓨터 학원도 다니고, 태권도도 배우 고, 언제까지 이거 모두 다 배워야 돼?‛ ‚언제까지 배우는 게 어디 있어? 배울 수 있는 대로 다 배워야 되는 거 야!‛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려면 그야말로 모든 분야에 대해 조금씩은 알아야 하므 로 아이에게 모든 것을 시키려는 의도는 나쁘지 않다. 오히려 바람직하다. 그 러나 문제는 모든 것을 무조건 어린 시절에 남보다 빨리 배우도록 하려는 데 있고, 또 어떤 능력을 어떻게 길러 주는 것이 진실로 아이의 성장을 위해 바람 직한가를 구별하지 못하고, 그저 이것저것 모조리 시키려는 데 있다. 요즈음 대학에서는 학부제라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그 동안 막혔던 학과 간의 장벽을 허물어 학생들에게 인접 학문에 대한 폭넓은 전공의 기회를 부여하고, 또한 폭넓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뜻에서 추진 되고 있다. 또한 학부 교육이 너무 일찍 지나치게 전공 위주로 심화되는 것을 막고, 학부 때는 폭넓은 고등 보통 교육을 시키고 미세한 전공 분야별 전문 교 육은 대학원에 가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그러한 학부 제의 바탕에 깔려 있다. 이러한 추세는 결국 앞으로 우리 자녀들이 직면하게 될 다원화, 다변화 사회 에서 의사 소통을 통한 공감대 형성으로 관계지음을 더 원활히 하고, 각자 맡 은 일에서 다른 사람과의 연계를 더 부드럽게 하기 위한 바람에서 나타나는 것 이다. 결국 이 세상 모든 분야에 대해서 조금씩은 알아야 한다는 바람인 것이 다. 그러나 그러다 보면 자칫 자신의 일과 관련되는 전문 분야에 대해서는 깊이 있는 지식과 경험을 갖추지 못할 경우가 생긴다. 이것이 곧 우리 젊은이들이 앞으로 겪어야 할 또 다른 가치 혼란의 양태이다. 즉, 모든 분야에 대한 기초 적인 지식과 경험을 축적하는 동시에 특정 분야에 대해서는 깊이 있는 전문 지 식과 경험을 갖추어야 하거늘, 이 두 가지를 어느 정도로 균형 있게 갖추느냐 가 겪게 될 가치 혼란의 본질이다. 사실 요즈음 들어 가만히 우리의 삶의 모습을 살펴보면, 전문화되지 않은 것 이 없다. 옛날의 다방이라는 백화점식 찻집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 커피 전문 점, 한방차 전문점, 인삼찻집 등 전문점이 등장한다. 음식점은 벌써 그렇게 된 지 오래다. 이발소도 그렇게 변하고 있다. 커트만 전문으로 하는 집이 있다. 각종 상점도 그렇거니와 한 조직체 내에서 사람들의 일의 모습도 그렇다. 전문 성에 기초한 철저한 역할 분담과 책임이 가려져 있다. 각자가 특유한 전문성을 갖추지 않으면 생존하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새로 선임된 축구 국가 대표 팀 감독이 첫 인터뷰에서 밝힌 포부 가운데 하나가, 선수들을 포지션별로 전문 화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전후반 내내 공격과 수비에서 줄기차게 뛸 수 있는 사람으로 선수를 구성하겠다고 했다. 선수들은 전문성을 갖추되, 운동 장에서 뛰는 11 명의 선수들 중 한 사람으로서의 보편성을 함께 갖추어야 된다 는 뜻이다. 앞에서 언급한 통합 속의 분화, 분화 속의 통합처럼, 일에 있어서 도 전문성 가운데 보편성, 보편성 가운데 전문성이라는 양면을 갖추기 위한 노
력이 21 세기를 살아갈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전통을 지키면서 어떻게 새로운 변화를 수용할 것인가? 근래 들어 우리 생활 주변에서 익히 듣는 용어가 ‘파괴’니 ‘혁명’이니 하는 것들이다. 가격 파괴니, 의류 혁명이니 하는 말들이 그렇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실감나게 들리는 말이 ‘시, 공간의 파괴’란 용어이 다. 이는 고도의 정보 통신 과학 기술의 발전에서 연유했다. 우선 시, 공간의 파괴는 그 정교성에서 찾을 수 있다. 옛날에는 시간과 공간 에 대해 어림짐작해서 대충 이야기했다. ‚어이! 저녁 먹고 이따가 응달말에서 보자구!‛ ‚알았어.‛ 옛날 시골에서는 밭에서 함께 일하다가 헤어지는 이웃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 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만남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앗다. 딱히 몇 시 에 가야 하는가는 정하지 않았지만, 저녁 먹고 응달말로 넘어가면 대충 됐다. 공간도 그렇다. 응달말 누구네 집,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정하지 않았지만 그 냥 응달말로 넘어가면 된다. 거기 가면, 이럭저럭 다 만나게 되어 있다. 그러 고 보면, 그 때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 개념에서는 언제 나 여유를 지니고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식으로 약속을 해서는 안 된다. ‚내일 11 시쯤에 서울역에서 봅시다.‛ 이 정도로도 안 된다. 좀더 정확하게 말해야 한다. ‚11 시 정각, 늦어도 11 시 10 분까지는 서울역 대합실 새마을호 타는 4 번 개 찰구 앞, 의자 있는 데로 와야 돼!‛ 최소한 이 정도로 자세히 말해야 만날 수 있다. 그렇기에 이제는 공항에서 비행기 도착을 알릴 때도 바퀴가 활주로에 닿는 시간을 정확하게 나타내 주지 않는가? 옛날엔 그저 10 분 정도의 차이야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겼지만 지금은 10 초 사이에도 엄청난 일들이 벌어질 만큼 꽤나 소중한 가치가 부여되어 있다. 게임 종료 몇 초를 남긴 농구 시합에서 스코어가 동점일 때 양 팀의 감독은 어 김없이 작전 타임을 부른다. 이 몇 초 동안에 승패가 판가름난다는 믿음 때문 이다. 올림픽때 각종 시합을 보면 1 초라는 시간이 얼마나 길고, 또 기록 경기 의 경우 결과에서 얼마나 커다란 차이를 가져다 주는가를 우리 모두 보았다. 그래서 이제는 초 단위 경영 관리 전략까지 나오지 않는가. 공간의 개념도 정교해지기는 시간 개념 못지않다. 우선 지도를 펴 보면 쉽게 느낄 수 있다. 교통 사고가 났을 때도 그렇다. 천안 근처에서 사고가 났다고 말하지 않는다. 경부 고속도로 하행선 서울 기점 92km 지점에서 2 차선을 달리던 승합차 1 대가 뒤따라오던 12 톤 트럭에 받혀서 중앙 분리대를 넘어 상행선 버스 전용 차로로 넘어가는 바람에 달려오던 고속버스를 박아 어떻게 되었다는 식이 다. 뉴스만 듣고도 우리는 그 장면을 충분히 머리에 떠올릴 수 있다. 이렇듯 공간의 정교성은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시, 공간의 정교성 다음으로 우리에게 가치 혼란을 가져다 주는 것은 시, 공 간의 간극이 좁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지극히 멀리만 느껴졌던 과 거가 코앞에 재연되기도 하고, 아주 멀리 느껴졌던 미래가 바로 눈앞에 사실적 으로 펼쳐지고 있지 않는가? 국제 교류에서 시간 사이의 간극이 무너짐을 더욱 실감할 수 있다. 옛날 같으면 감히 꿈도 못 꾸었던 곳엘 불과 몇 시간 만에 날 아갈 수 있게 된 지는 이미 오래다. 이제는 여기 앉아서도 지구 저편에 있는 사람과 마치 마주 앉아 있는 것처럼 얼굴을 보며 얘기도 하지 않는가? 이제 시 간이나 공간의 물리적인 간극은 얼마든지 더 좁혀질 수 있다. 이러한 시, 공간의 물리적인 간극이 붕괴되면서 우리는 예전보다 훨씬 빠른
문화적 접촉을 갖게 되었다. 유행의 물결이 어느 정도나 빠르게 전파되고 있는 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단순히 물량적인 측면에서만 그러한 접촉이 전파, 확산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과 행동에서도 그러한 접촉은 매우 빠르게 이루어 지고 있다. 시, 공간의 간극이 붕괴되면서 우리는 또 다른 새로운 측면의 가치 혼란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가치 혼란은 그 동안 고수해 온 전통을 이제 어느 정도 고수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수용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싹튼다. 예컨대, 전통적으로 우리는 남녀 간의 성차에 따른 역할 분담을 분명하게 지 켜 왔다. 남편은 밖에서 활동하면서 가정의 생계 유지를 위한 돈을 벌어 오고, 아내는 남편이 벌어 온 돈으로 안에서 살림을 꾸려 나가는 역할 분담이 전통적 인 가정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적 전통은 새롭게 대두하는 변화된 의식의 세찬 도전을 받고 있다. 이제는 여 자도 밖에서 돈을 번다. 돈을 버는 일이 꼭 남자만의 책임도 고유한 특권도 아니라는 의식이 싹트고 있다. 그렇다고 집안의 살림, 이를테면 식사 준비, 청소, 빨래, 자녀 양육이 꼭 여자의 몫만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남편도 그런 일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또 해야 한다. 출산만큼은 여자의 생리적인 고유한 특성이지만, 남편과 아내, 남 자와 여자, 오랜 세월 그어져 있던 선이 붕괴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변화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지난 날의 전통을 모두 버리고 새로운 변화만을 수용하 는 삶이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삶인가? 반대로, 새로운 변화는 모두가 인간의 전통적인 윤리나 의식을 깨는 파괴적인 것들인만큼, 모두를 거역하고 그저 옛 날부터 이어져 오는 전통만을 고수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삶의 태도인가? 연세 대학교의 경우 전체 학생 중 여학생의 비율이 25% 정도 된다. 전공학과 나 학부에 따라서는 여학생이 정원의 절반을 훨씬 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우려를 나타내는 사람들이 혹간 있다. 언젠가 아들을 둔 어떤 부모는 내게 이런 말을 해 왔다. ‚연대에 다니는 여 학생들은 어찌 보면 국가적으로 큰 피해를 주는 학생들입니다. 똑똑해서 연대 에 들어가긴 했지만, 졸업한 다음 그냥 시집이나 가서 집에 있을라면, 뭐 하려 고 굳이 자리를 차지해서 남학생들마저 못 들어가게 합니까? 그러니 뭐 학교에 서 제도적으로 어떻게 하는 수 없습니까? 이를테면 남학생을 90%쯤 할당해서 뽑는다든가?‛ 어찌 보면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 없는 발상이고 제안이다. 하기야 대학 들어 가기가 너무 어렵다 보니 그런 이야기를 했겠지 하고 이해는 하지만, 구시대적 인 인습에서 비롯된 편견이 아닌가 싶다. 요즘 대학의 여학생들은 예전의 여학생들과 다르다. 그들은 처음부터 의식이 다르다. 결코 여자라서 어떤 일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난날 남자들의 영역으로 여겨 왔던 학과에 과감하게 도전한다. 공과 대학이 나 법과 대학, 사회과학 대학 등에 우수한 여학생들의 진출이 점차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다. 건국 이래 남자들만의 세계로 여겨지던 삼군 사관 학교 가운데, 공군 사관 학교가 97 학년도에 최초로 여학생 몇 명을 받았다고 해서 매스컴에 서 크게 보도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그렇게 신기하게 보이지 않고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질 날도 그다지 멀지 않았다. 혹자는 전통적인 남성 세계에 대한 여성들의 도전이나 점유를 놓고, 인류의 역사가 다시 태고 때처럼 모계 중심으 로 회귀하고 있으며, 그동안 남자에게 가 있던 땅의 기가 여성에게로 옮겨 가 고 있는 징조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한 주장이 얼마나 과학적 근거를 가진 예견인지는 모르겠으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이제 그와 같은 성역할의 전통은 붕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너져 내리는 전통이 어찌 그뿐인가? 부부 관계의 양태도, 부모와 자녀 간 관계지음의 양태도 사뭇 달라지고 있다. 종래의 우리가 인습적으로 가졌던 무
조건적인 관계가 조건적인 관계로, 무형식의 관계가 형식의 관계로, 정적인 유 대가 계약의 관계로 바뀌고 있다. 그런가 하면, 다시금 우리의 전통이 되살아나기도 한다. 일터에서, 가정에 서,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그런 전통이 되살아 난다. 이를테면, 한복을 다시 일상 생활에서 입으려는 움직임이나, 침대보다는 방바닥에 요를 깔고 자려는 것이나, 케이크나 빵보다는 떡으로 대접하려고 하는 것이 그렇다. 고도의 정보 통신, 과학 기술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가운 데서도 사람들은 토정비결을 찾고, 시골 마을 입구 큰 나무에 돌을 쌓아 가며 복을 비는 모습도 자주 보게 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전통과 개혁, 보 수와 진보, 그 양쪽에서 어느 한쪽만을 선택해야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단 순한 선택의 문제라면 가치 혼란은 줄어들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어느 쪽도 버 릴 수 없고, 그 양극을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일에서 균형 있게 수용하고 유 지하여야 하는 데서 갈등이 빚어진다. 인류의 역사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개혁 의 물결이 드센 지금, 우리의 젊은이들은 우리의 어른들이 어렸을 때보다도 더 큰 가치 혼란을 겪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시간적으로 얼마나 장기적으로, 공간적으로는 얼마나 지구적으로 생각하면서 일하고 살아가야 하는가? 앞에서도 이야기하였듯이 이제 시간의 틈은 좁아졌고(zero-lag), 공간의 벽 은 무너졌다(zero-gap). 이러한 혁명적 변혁기에, 우리가 일하고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또 다른 가치 혼란은 시간성과 공간성의 차원을 어디에 어떻게 두면 서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서 비롯한다. 우선은 시간성의 가치 혼란이 일고 있다. 즉, 우리는 삶에서, 일에서 얼마나 장기적인 안목을 가졌는가, 그러면서도 우리는 지금 당장의 문제를 생각하는 단기적인 안목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세상이 하도 빨리 돌아가고, 하 도 빨리 바뀌다 보니, 그저 따라가기에 급급해서 지금 발등에 떨어진 일만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10 년 후, 20 년 후는 커녕, 당장 1 년 후도 생 각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몇 개년 계획을 세워 보지만, 1 년도 안 되어서 무용 지물이 되고 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더 멀리 내다 볼 필요조차 없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좀더 과학적 으로 멀리 내다볼 수 있는가? 어린아이들이 당장 내일을 위해 오늘 밤 책상에 앉아 숙제를 하는 것도 중요 하지만, 더불어 먼 훗날 자신들의 삶이 어떠한 모습으로 형상화될 수 있는지를 상상하면서 그 날을 위한 준비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나? 그럼에도 가만히 살펴 보면, 많은 학부모들은 그저 자녀의 학교 성적만을 당장 높이는 데 급급 해 하는 것은 아닌가?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진정 바람직하지 않나? 시간성에 따른 가치 혼란이 부모의 가슴 속에 일기 시작하는 것이다. 또 그런 문제 때문 에 부부가 다투기도 한다. ‚여보, 여름 방학에, 휴가 얻으면 아이들과 함께 국토 순례 여행이나 한 일 주일 다녀옵시다.‛ ‚국토 순례라니요?‛ ‚아니 말이 그런 것이고, 내 말은 아이들한테 우리 나라 시골도 보여 주고, 산천도 보여 주고, 그러자는 거요. 문화 역사 기행을 하자는 거요. 자동차 타 고 다니면서 두루두루 살펴보면, 모두 아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거요.‛ ‚당신두, 참, 몰라도 한참 몰라요. 그럴 시간이 어디 있수. 내년이면 중학 교에 올라가는데, 뭐요? 국토 순례요? 다른 집 아이들은 방학만 되면 어느 학 원엘 보낸다, 2 주일짜리 영어 캠프를 보낸다느니 야단인데! 당신은 그래 아무 리 무관심하기로 그런 얘기도 못 들
었수? 하여튼 너희 아버지 말만 듣다가는 아이 바보 만들기 딱 좋다구!‛ ‚아니, 영어는 중학교 들어가서 공부하면 되구! 뭘 벌써부터 그렇게 난리를 펴야 되남! 중학교에 들어가면 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어련히 잘 가르쳐 줄라 구!‛ ‚아, 시끄러워요!‛ ‚뭐라고? 시끄럽다구? 이 사람 애들 앞에서 말하는 것 좀 봐!‛ ‚아니, 왜 말꼬리를 잡고 그래요? 내가 뭘 잘못했다구?‛ 이렇게 해서 부부 간의 싸움은 더욱 커진다. 싸움의 근본적인 원인은 자녀 교육에 대한 시간성의 차이에 있었다. 아버지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문제를 생 각했고, 어머니는 지금 당장의 단기적인 안목에서 문제를 생각했다. 두 사람 이야기가 모두 잘못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느 한 쪽의 이야기만 옳은 것 도 아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결국 그 양극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번민이 바로 가치 혼란인 것이다. 1997 년 초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4 년 임기로 대통령에 다시 취임하면서 한 연설 내용 중 나에게 깊은 인상을 준 대목이 있었다. 21 세기를 맞이하는 미국 의 초대 대통령으로서, 나는 클린턴이 새로운 100 년을 출발하는 미국을 설계하 고, 그에 따른 대통령으로서의 포부를 이야기하리라 기대하였다. 그러나 놀랍 게도 그는 새로운 1000 년의 미국을 이야기하였다. 역시 세계 역사를 주도해 나 가는 거국 미합중국의 대통령다운 안목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놀라운 점은 1000 년을 이야기 하면서도 그는 지금 당장 미국인이 힘을 합하여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당장의 국가적 과제도 잊지 않고 언급한 것이다. 먼 미래에 대한 추상적이고 아름다운 언어적 치장만 하지 않고 구체적이고 매우 실감나는 현실의 문제도 이야기한 것이다. 장기성과 단 기성, 거시성과 미시성, 추상성과 구체성 간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펼쳐나가면서 겪는 가치 혼란을 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의 신세대들이 슬기롭 게 극복하도록 우리가 이끌어야 한다. 다음은 공간에 관한 가치 혼란이 있다. 이는 곧 지구화냐 국지화냐의 갈등인 셈이다. 또는 얼마나 외부 지향적이냐 내부 지향적이냐의 갈등인 셈이다. 지금 세계는 바야흐로 지구화의 물결에 휩싸여 있다. 세계 인구의 4 분의 3 이상이 올림픽 게임을 세계 모든 곳에서 동시에 시청할 수 있다. 시장 체제가 지구 시 장화되어 가고, 각종 금융 거래가 지구화되어 가고 있다. 한국의 지폐가 그 넓 은 중국 땅 안에서 손쉽게 사용되고 있음을 중국을 여행한 사람이면 누구나 경 험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문제도 지구화되어 가고 있다. 환경 문제, 인구 문제, 무역 문제, 산업 생산 문제 등등 지구화되어 가는 그 폭과 깊이가 점차 확산되고 잇다. 바야흐로 지구화된 의식, 지구화된 두뇌가 요구된다. 그렇기에 우리 나라 대통령도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세게화를 내세우지 않았던가!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우물 안의 개구리로 남아 있을 수가 없다. 밖으로 밖으로 나서 야 한다. 그래서 초등 학교 3 학년, 그 어릴 때부터 영어를 가르쳐야 한다고 제 대로 준비도 안 한 채 서둘러 가르치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지구화되어 간다고 해도 밖으로만 눈을 돌릴 수 없다. 우리는 한국인이다. 한국인으로서의 민족적 자긍심, 역사적 의식, 주체적 사고 도 가져야 한다. 외국의 문물에 귀를 크게 열고, 눈을 크게 뜨는 일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것을 듣고 보고, 그래서 가슴 속에 새기는 일도 중요하다. 민족적 정체성, 한국인으 로서의 정체성도 함께 길러야 한다. 어린이들에게 자기 나라 동화 한 편 제대 로 읽히지 못하고서, 외국의 동화를 여러 편 읽도록 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는 없다. 피자와 코카콜라를 마시기도 하지만, 빈대떡이나 식혜를 즐겨 마실 줄도 알아야 한다. 영어를 통해서 미국이나 영국 등 영어권 선진국 사람들의 문화와 사고 체계를 이해하고 터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어 학습을 통해서
한국인으로서의 사고 체계를 갖추는 일도 중요하다. 이 두 가지를 어느 선에서 어떻게 갖추도록 하느냐의 문제가 우리에게 또 다 른 가치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얼핏 라디오에서 들었다. 중간에 들어 사실을 이야기한 것인지 가상 얘기인지는 모르지만 서울특별시 시장님께서 어느 초등 학교엘 가셨던 모양이다. 교실 뒷벽에는 온통 영어로 인사를 했다고 한다. 이 런 모습을 본 시장님께서는 꽤나 착잡한 심정으로 돌아오셨다고 한다. 시장님 께서도 가치 혼란을 경험하셨을 성싶다. 우리의 초등 학교 교육이 이렇게 가도 되는 것인지에 대해 말이다. 시장님이 느낀 가치 혼란은 생각 있는 많은 부모 들에게서도 공통적으로 일고 있을 것이다. 지구화의 세찬 물결에 우리는 어느 만큼 동참해야 하는가? 그러면서도 우리는 어느 만큼 우리 자신의 것을 추구할 수 있을까?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환절기, 일교차가 심한 아침엔 고민이다. 아침을 생각하면 두터운 옷을 입고 나가야겠고, 한낮을 생각하면 좀 얇은 옷을 입어야 겠고 그렇다고 모두 껴입고 나가거나 들고 나가서 갈아입을 수도 없을 때, 어 떤 옷을 입고 나가야 할지 머리 속에선 작은 혼란이 인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금 일상 생활에서, 일에서, 배움에서, 자꾸만 지구화냐 국지화냐, 밖으로 멀 리 내다보고 나가느냐, 안으로 우리 속을 살펴 가면서 나가느냐의 크고 작은 가치 혼란에 빠져 있다. 그 문제는 우리의 신세대가 어른이 되어 살아갈 21 세 기에도 계속해서 그들을 괴롭힐 하나의 과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제 2 부 21 세기의 신인간: 우리 자녀를 어떠한 사람으로 키울 것인가?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의 마음은 한결같이, 자녀가 우선은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라 주길 바랄 것이다. 그리고 공부 잘해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직업을 갖길 바랄 것이다. 또, 남들과 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따뜻한 심성을 가진 사람 으로 자라길 바랄 것이다. 이런 것을 두고 옛날부터 사람들은, 지, 덕, 체를 골고루 갖춘 전인이라 하였다. 하기야 그런 덕목을 쉽게 골고루 갖출 수만 있 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런 것을 골고루 갖추기가 참으로 어렵다. 하 나님의 뜻인지는 모르지만 몸이 건강하고 튼튼하면, 머리가 좀 모자라든지 공 부를 못 한다. 또 공부 하나는 끝내주게 잘 하는데 성질이 못돼먹어서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또는, 공부도 잘 하고 심성은 고운데, 그만 몸이 튼튼하지 못해서 걱정인 경우도 있다. 그렇기에, 부모들은 제각기 자녀에 대한 바람에 우선 순위를 달리 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공부는 좀 못 해도 좋으니, 제발 아프지 말고 건강하기나 하렴.‛, ‚남들하고 좀 어울리지 못해 도 공부만 잘 하면 된다.‛, ‚공부는 좀 못 하는 편이지만 성격이 좋아 사람 들과 잘 어울리니, 저 아이는 훗날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을 거야.‛ 하면 서 제각기 우선 순위를 달리 하면서 모자라는 부분에 대하여 스스로 위안을 찾 기도 한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부모들은 자녀가 지적으로, 정서적으로, 사회적으 로, 신체적으로, 도덕적으로, 골고루 모든 것을 갖춘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란 다. 자녀가 그런 인간으로 성장하도록 온갖 정성과 노력을 기울이다 보면, 뜻 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생기게 마련이다. 특히, 이 세기말에, 21 세기를 목전에 두고, 세상의 온갖 것들이 중심 없이 흔들리고 있을 때, 부모들의 한숨 소리는 커진다. 이러한 세상에 도대체 자녀 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자녀가 무엇을 갖추도록 해야 할지, 자녀가 어떠한 사 람으로 성장하여야만 이 시대를 잘 헤쳐 나가서, 부모의 삶보다도 더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을 한다. 정말 어떤 능력, 어떠한 심성, 어떠한 태 도, 어떠한 기능을 우리 자녀가 갖추도록 해야 할지 몰라 부모들은 걱정을 한
다. 막연히 지, 덕, 체를 골고루 갖춘 사람이 되도록 한다거나, 또는 그저 막 연히 건강한 사람, 더불어 사는 사람, 공부 잘 하는 사람이 되라고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손에 분명하게 잡히는 어떤 방향이나 목표를 찾아 부모들은 오늘 도 헤매고 있다. 맞다. 우리는 그저 막연히 바람직한 사람이 되라고, 이 땅에 쓸모 있는 사람 이 되라고는 말할 수 없다. 분명한 방향을 세워야 한다. 성장의 목표를 더 확 실하게 세워서, 그것을 향해 우리들의 노력을, 가정에서고 학교에서고 한데 모 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구체적으로 자녀가 어떠한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이 끌어야만 하겠는가? 여기에서는 크게 여섯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 여섯 가지는 자녀들이 21 세기를 살아가면서 갖추어야 할, 바람직한 사람이 되기 위한 기본적인 자질이다. 그러나 우리가 늘 경험하듯 자녀들은 부모와 어 른들을 보면서 배우고 성장하지 않던가! 즉, 이 여섯 가지 목표를 세우는 것은 자녀가 이 여섯 가지 자질을 갖추도록 하여야 한다는 뜻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뜻은 우리 어른들이, 우리 부모들이 여섯 가지 목표를 지금까지 잘 갖추어 왔는지 돌아보고 당장의 생활에서 어떻게 이러한 자질을 잘 갖춘 사람으로 자기 스스로를 변화시킬지를 생각하여야 한다는 데 있음을 밝혀 둔다. 흔히 학교 교육에서 학생들을 건강한 사람, 자주적인 사람, 창의적 인 사람, 도덕적인 사람으로 교육한다고 말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선생님들부 터 먼저 건강하고, 자주적이고, 창의적이고, 도덕적이어야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교육의 기본 원리는 가정에서 하는 자녀 교육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 어야 한다. 즉 부모가 건강하고, 부모가 자주적이고, 부모가 창의적이며, 부모 가 도덕적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1. 생각하는 사람으로 키워라 수업을 하고 있는데 창문 너머 바로 옆에서 학생들이 꽹과리를 두드린다. 교 수는 시끄러워 도저히 수업을 할 수가 없다. 그 아이들을 향해 몇 번 눈길을 주었지만 학생들은 꼼짝을 않는다. 결국 교수는 창문을 열고, 학생들에게 이른 다. ‚야! 너희들 거기서 그렇게 두드리면, 시끄러워서 어떻게 수업을 하냐!‛ ‚아니, 이 소리가 그 안에서도 들리나요?‛ ‚그럼 안 들리냐! 저기 다른 곳에 가서 해라!‛ ‚어디로 가서 하란 말예요?‛ 교수는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정말 꽹과리 소리가 수업을 방해하리라는 것 을 생각하지 못했단 말인가? 그리고 어디에 가서 두드려야 하는지를 몰라서 물 어 본 것일까? 사실이라면, 학생들은 생각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초등 학교 5 학년 아이는 물을 먹은 다음, 유리잔을 식탁에 놓았다. 아주 생 각이 깊은 아이 같으면 아마 부엌 싱크대에 갖다 놓았거나, 더 생각이 깊으면 자기가 잔을 닦아서 식기 건조대에 엎어 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그저 식탁 한 가운데 갖다 놓았어도 별 문제가 없었을 텐데, 아이는 식탁 모서 리에 올려 놓았다. 잠시 후, 그 아이의 형이 지나가다가 그만 팔로 유리잔을 쳐서 떨어뜨려 깨뜨렸다. 그러자 엄마는 소리치며 야단을 한다. ‚아니, 눈은 어디다 두고 다니길래, 팔로 그것을 치냐! 하여튼 못 말려! 아 니, 지나가면 그냥 지나가지 왜 팔은 휘두르고 그러냐!‛ 그러면 팔을 휘두르고 지나가다 유리잔을 건드려 떨어뜨린 형이 잘못한 것일 까? 아니면, 유리잔을 식탁 끝에 간신히 올려 놓은 동생의 생각이 모자라서 생 긴 잘못일까? 요즈음 어린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을 유심히 관찰하면 이 아이들이 정말 생각
이 있는 아이들인지, 생각이 없는 아이들인지 의심을 갖게 될 때가 많다. 하기 야, 어른들도 생각 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면, 우리가 어찌 그런 아이들만을 나무랄 수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어른들의 눈으로 볼 때는, 지금의 아이들은 기성 세대가 어렸을 때보다 더 생각 없이 성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느껴질 때도 많다. 지금의 기성 세대는 어린 시절 워낙 궁핍해서, 그리고 결과적으로 모든 것을 얻기가 워낙 어려워서 그랬는지 몰라도, 그들은 끈기와 강인한 의지를 키우며 성장하였다. 무엇을 하나 얻기 위해 몇 날 며칠을 두고 온갖 열의를 다해 노력 하는 모습을 보였다. 공부를 하 다가도 쉽게 풀지 못하는 수학 문제를 만나면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밤을 새워 달라붙어 씨름하는 끈기를 보였다. 물어 볼 사람도 없는 형편이어서 그랬는지 도 모른다. 공부만 그랬던 건 아니었다. 사춘기에 누구에게나 덮쳐 오는 청소 년 특유의 고뇌도, 번민도 밤을 새워 가면서 이겨 냈다. 그러나 요즈음 신세대들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쉽게 얻을 수 있는 풍요의 환 경 속에서 성장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끈기나 의지가 약하다. 밤을 새워 자 기 스스로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푸는 모습도 보기 어렵다. 한두 번 해 보다 잘 안 되면 선생님께 들고 가서, ‚선생님, 이거 못 풀겠는데요, 좀 풀어주세 요!‛ 하고 요구한다. 공부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운동화 끈을 매다가도 한 두 번 해서 잘 안 되면 그냥 엄마에게 내밀면서 매 달라고 한다. 자기 스스로 고뇌하고 생각하는 습성이 약하다. 그러다 보니 생각하는 능력이나, 생각하는 심성이나 태도 및 기능을 스스로 갈고 닦지를 못하는 것이다. 무엇을 얻으려 하고, 찾으려 하면, 으레 부모들이 먼저 나서서 얻어 주고, 찾아 주고 하다 보 니, 스스로 얻고 찾는 노력도, 성의도, 열성도, 끈기도 갈고 닦지를 못하는 것 은 아닌가? 앞에서 여러 차례 이야기하였듯 21 세기는 고도로 복잡하고 정교한 과학 기술 사회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가치가 서로 공존하는 다원 화 시대가 될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각자의 주체적 정체성이 요구되는 시 대가 될 것이다. 컴퓨터가 주도하는 온갖 정보 통신 과학이 우리의 삶 속에 깊 이 파고드는 그러한 미래가 될 것이다. 이러한 미래에, 사람이 가치 혼란에 빠져들지 않고 자신의 주관을 분명히 세 우며, 또한 정보 통신, 과학 기술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생 각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즉, 21 세기를 살아가기 위한 인간의 필수적인 능력의 하나는 사고하는 능력이다. 생각하기 싫어하고 생각할 줄 모르고, 생각 하는 버릇이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21 세기를 슬기롭게 살아가기가 어렵다. 이 는 곧 우리의 자녀들이 생각하는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우리가 도와야 함을 의 미한다. 생각하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구체적인 사고력은 크게 나누어 세 가지를 꼽 을 수 있다. 첫째는 논리적인 사고력이다. 이 말의 뜻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겠지만, 쉽게 이야기하면, 어떤 일에서 앞뒤를 따질 줄 알고, 크고 작음을 가를 줄 알고, 무엇이 더 시급하고,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더 먼저 이루 어져야 하는가와 같은 우선 순위를 구별할 줄 아는 능력이 일종의 논리적인 사 고에 속한다. 일이나 행동의 어떤 체계를 갖추는 능력도 논리적인 사고에 속한 다. 집안에서 주부들이 빨래를 걷어 잘 개켜서 분류하는 모습을 보거나, 저녁 식 사 준비를 하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면, 우리 주부들은 꽤나 논리적이구나 하 고 생각될 때가 많다. 속옷은 속옷대로, 그것도 아래, 위 속옷을 구별해서 잘 개키고, 수건은 수건대로 개켜서, 또 양말은 두 짝을 나란히 포개어 똘똘 말아 서 뒤집어 놓고 해서, 다 갠 빨래를 어느 것은 아이들 침대 밑 서랍에 넣고, 어느 것은 안방 장롱 서랍에 넣고, 어떤 것은 화장실 선반에 갖다 넣어야 되는
지, 주부들은 그것을 체계적으로 잘 분류해서, 순서를 따져 넣는다. 식사를 준 비할 때 보면, 압력 밥솥에 쌀을 안쳐 놓고, 가스불을 당긴 다음, 그 사이에 국을 끓이고, 찌개를 준비하고 콩나물을 무친다. 그래서 모든 것이 동시에 끝 나도록 한다. 도마를 사용할 때도 한 번 사용하고는 그 때마다 씻지 않으려고 어느 것을 먼저 도 마 위에 놓고 썰거나 다져야 하는지 순서를 챙겨서 한다. 모두가 논리적인 사 고로 가득한 일상 생활의 단면들이다. 둘째로 관계적 사고력을 갖춰야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 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우리는 관계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저 어느 단면만을 보고 전체를 함부로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우 리 경제가 왜 이렇게 어려워졌을까? 국제 시장에서 반도체값이 떨어지고, 무역 적자가 생기고, 달러 환율이 올라가서만 그럴까? 아니면 한보 사건 때문에 그 렇게 된 것일까? 거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관계되어 있다. 그 러한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관계적 사고이다. 인간의 삶의 모습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서 우선 부모 자식의 관계를 맺는다. 그 다음 커 가면서, 형제의 관계를 맺고, 부부의 관계를 맺고, 또 이웃과의 관계, 친구 관계, 선후배 관 계, 상사와 부하의 관계, 스승과 제자의 관계 등 무수한 관계를 맺는다. 이것 이 곧 삶이다. 결국 관계에 성공하면 우리는 삶에서 성공을 거두게 되고, 관계 에 실패하면 삶에서 실패를 하는 것이다. 부부 관계에 성공하면 원만한 가정을 꾸리게 되고, 부부 관계에 실패하면 가정은 깨지게 된다. 이렇듯 모든 관계에 서 성공을 거두려먼, 관계적 사고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셋째는 상상적 사고력을 갖추어야 한다. 즉, 창조적 발상을 할 수 있어야 한 다. 어떤 사물을 보면, 거기에 대한 생각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일에 부딪치면,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또 눈에 보이지 않아도 새로운 것을 창 조하여 그려 낼 수 있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모습을 전혀 형상화시킬 수 없다면, 그는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이다. 이렇게 방 안에 앉아 있지만, 우리는 고향 동네 산에 진달래, 개나리가 피어 있는 모습을 그려 낼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지난날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생각해 내는 경우도 포함 하겠고, 앞으로 다가올 날에 대한 예견을 하는 경우도 포함한다. 현실로는 도 저히 믿어지지 않는 상상의 세계를 그려 보는 일도 상상력에 속한다. 그 옛날 어린 시절 여름 밤 앞마당에 멍석 깔고 누워서 토끼가 뛰어노는 달나라의 모습 을 그려 보았듯이 말이다. 2. 학습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 키워라 텔레비전을 보던 초등 학교 6 학년 딸아이에게 엄마가 이른다. ‚얘, 너 이제 그만 들어가서 공부해라.‛ ‚엄마, 나 숙제 다 했어!‛ ‚이것아, 숙제만 공부냐? 학습지는?‛ ‚학습지도 다 했단 말야!‛ ‚그럼 더 할 것 없어?‛ ‚음, 다 했어!‛ ‚그래도 들어가서 공부해!‛ 아이는 마지못해 방에 들어가 책상 앞에 앉지만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공 부인지를 모른다. 그냥 동화책이나 읽을까? 아니면, 교과서나 읽어 볼까? 읽는 것이 공부인가? 문 제를 푸는 것이 공부인가? 아니면, 공책에다 무엇을 적는 것이 공부인가? 아이 는 이 궁리 저 궁리 하면서, 이 책 저 책을 꺼냈다 꽂았다 한다.
어른들이 옛날 초등 학교 다니던 시절, 여름 방학과 함께 학교에서 나누어 준 숙제 중 가장 중요했던 ‘여름 방학’ 책은 아주 간단했다. 간단하다는 것 은 그것을 해내기가 수월했다는 말이다. 왜냐 하면 그 ‘여름 방학’ 책 속의 문제는 매우 분명했기 때문이다. ‚외갓집엘 갔습니다. 외할머니가 참외를 따 오셨습니다. 모두 여섯 개입니 다. 형이 두 개를 먹었습니다. 그러면 몇 개 남았을까요?‛ 그리고 그 밑에는 ‘답 () 개’라고 칸이 주어져 있었다. 아이들은 성격에 따라 숙제를 하는 시기가 달랐다. 성격이 소심하고 조급한 아이들은 방학을 하 자마자 그 이튿날부터 며칠 사이에 모든 숙제를 다 해 놓고 마음껏 놀았다. 또 성격이 좀 느긋한 아이들은 방학 내내 놀다가, 개학 하루 이틀 전에 모여 앉 아, 먼저 숙제를 한 친구들 것을 보아 가며 답을 적었다. 쉽고 간단했고 분명 한 것이 숙제의 특징이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좀 달라졌다. 아이들의 탐구 능 력을 기른다 해서 숙제의 모양새가 달라졌다. ‘여름 방학’ 책의 내용도 달라 졌다. ‘외갓집엘 갔습니다. 물가에서 올챙이가 노는 모습을 관찰하였습니다. 올챙 이는 커서 개구리가 됩니다. 올챙이는 어떻게 개구리로 크는지 한 번 알아봅시 다.’ 아이들은 우선 이게 숙제인지, 숙제라면 어떻게 답을 써야 하는지 몰라 헷갈 린다. 결국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이것 해야 되는 거야?‛ ‚글쎄, 엄마는 모르겠는데, 네가 알아서 하렴.‛ 그러면 아이는 더욱 헷갈린다. 소심한 아이들은 전과 같은 참고서를 보고서 답을 적으려 하지만 칸이 좁아 적지를 못한다. 그래서 노란 종이 같은 것을 옆 에다 덧붙여서 거기다 깨알 같은 글씨로 답을 적는다. 그런가 하면 성격이 느 긋한 아이들은 아예 안 한다. 핑계는 그렇다. 문제가 ‘알아봅시다’였지, 어 디에 답을 적으라고 했는냐는 것이다. 그냥 알아보면 되는 것 아닌가? 만약에 선생님이 개학해서 ‚그래 알아보았더니 어떻게 됐느냐.‛고 물으시면, 알아보 았는데 그 동안 잊어 먹었다고 하면 되지 하고 아예 할 마음을 먹지 않는 아이 도 있다. 그러면 왜 방에 들어가 책상에 앉은 아이는 그냥 미적거리며 공부를 안 하고 앉아 있는가? 왜 ‘알아봅시다’와 같은 문제를 아이들은 불편하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모두가 정말 공부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인 듯하다. 정말, 공부를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배운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행동인가? 21 세기의 또 다른 특징은 평생 학습 사회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조 짐은 벌써 우리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제는 죽을 때까지 배우며 살 아야 한다. 배움의 행동은 이제 일상 생활의 한 부분이 되고 있다. 공부를 학 교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학교를 졸업했다고 해서 공부가 끝나는 것이 아니 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거리에서도 우리는 한평생 삶을 살아가며 학습이 라는 것을 세 끼 밥 먹듯이 늘상 해야 한다. 따라서 학습 능력은 21 세기에 생 존하기 위해, 삶을 더 풍요롭게 가꾸기 위해 지극히 필수적인 능력이 되고 있 다. 결국 우리의 자녀들이 21 세기를 슬기롭게 살아가도록 도우려면 학습하는 능력, 배우는 능력, 특히 스스로 배울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나 학교 교육은 어린이들에게 이러한 학습 능력을 길러 주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새로운 지식이 가속적으로 늘어나는 이 시대에, 특히 그것이 양적으 로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점점 전문화, 고도화되어 가는 이 시대 에, 그리고 학교에서 그 모든 지식을 결코 가르쳐 줄 수 없는 이 시대에, 우리 의 자녀들에게 스스로 지식을 탐구하고 그것을 활용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길 러 줄 필요가 더 커지고 있다. 어찌 보면, 그러한 학습 능력은 일종의 생존권 에 속한다고 할 만큼, 우리 자녀들에게 배우는 능력을 갖추는 일은 매우 중요
하고 시급하다. 배우는 능력의 핵심은 지식을 탐구하는 능력이다. 즉 지식을 찾고, 그것을 이해하고 활용하고, 또 그 지식을 바탕으로 다른 지식을 찾고, 다른 지식과 새 로 찾은 지식을 관계지어 통합하고 분화시키는 등의 여러 가지 탐구 능력이 배 우는 능력의 핵심이다. ‘고기를 잡아 주지 말고,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 라’는 말이 바로 이런 뜻이다. 지식 그 자체를 가르치기 보다는 지식을 찾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이다. 줄여서 비유적으로 말하면, 마치 도서관의 사서들이 하는 지적인 작업 기능(librarian skill)과도 같은 것이다. 배우는 능력, 특히 지식을 탐구하는 능력과 함께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능력 은 학습을 자기 스스로 주도해 나갈 수 있는 능력, 태도, 심성, 기능 등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쉽게 말한다. ‚공부를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가, 자기가 스스로 알아서 해야지.‛ 백 번 옳은 얘기다. 세상 모든 일에서도 마찬가지이 지만 학습 역시 자기 스스로 주도해 나갈 수 있을 때, 학습의 의미도 증대되고 효과도 높아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녀에게 학습만이 아니라 무엇이든 자기 스스로 주도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음으로, 학습하는 능력에서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자기 자신이 주도하여 지식을 탐구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초적인 지식 또는 기본 원리를 완전하게 습 득하는 일이다. 이것은 학교 교육이 반드시 책임져야만 할 가장 중요한 몫이라 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부터 모든 지식 분야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즉 출발의 기초가 되는 원리와 지식 들을 완전하게 이해해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은 자기 스스로 배움을 주도하는 일에서나 또는 앞에서 이야기한, 생각하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데 관건적 요체가 됨을 부모들은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컴퓨터를 다 루는 일에서도 그렇지 않은가? 기본 원리를 먼저 완벽하게 이해한 사람은 얼마 든지 자기 스스로 컴퓨터를 갖고 새로운 지식, 새로운 정보를 탐색하지 않던 가? 기본 원리를 완전히 터득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자기 힘으로 지식을, 정보 를 탐구하는 능력이 곧 배우는 능력인 셈이다. 3. 일하는 능력을 갖도록 키워라 어느 여자 고등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3 학년 여학생들에게 사과와 칼을 하나씩 주고 깎아 보라고 했다고 한다. 먼저 네 쪽으로 쪼갠 다음 깎는 방법도 있지만, 그러지 말고, 껍질이 끊어져도 좋으니 한 손에 사과를 쥐고 돌려가면 서 둥그렇게 껍질을 깎아 보라고 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렇게 깎은 학생이 전체 학생 중 삼분의 일 정도도 안 되었다고 한다. 개중에는 사과를 처음 깎아 보는 학생도 꽤나 많았다고 한다. 또 대부분 의 학생들은 껍질을 한 점씩 도려 내거나, 밖으로 밀쳐 잘라 내거나 했다고 한 다. 사과를 깎는 데 뭐 그렇게 큰 기술이 요구되고, 또 그까짓 것 깎을 줄 모 른다고 해서 그것이 뭐 그렇게 큰 문제가 되겠느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 학생이고, 남학생이고 간에 다 큰 아이들이, 열아홉 살이나 된 아이들이 사과 하나 제대로 깎을 줄 모른다면, 글쎄 우리는 그것을 뭐라고 설명하여야 할까? 수년 전 연세 대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총학생회 간부들이 학교 사랑 실천 운동을 폈다. 이를테면, 담배 피우지 않기, 교실에서 교수님께 수업 시작 전 먼저 인사 드리기, 커닝하지 않기, 대리 출석 하지 않기, 그리고 학교 정문에 서 안으로 길게 뚫려 있는 중앙 도로에 담배 꽁초 따위 버리지 않기, 모두 다 섯 가지 운동이었다. 얼핏 듣기에는 유치원 수준의 일 같지만, 시위와 소요로 들끓던 대학 사회에서 학생들이 생각한 매우 신선한 운동이었다. 그러한 운동의 하나로 학생 간부들은 매월 첫 수요일 아침 8 시에 정문에 모 여, 한 시간 동안 중앙 도로 양 옆으로 난 보도를 따라 청소를 하기로 하였다. 길에 떨어진 담배 꽁초도 줍고, 학생들이 현수막을 걸기 위해 가로수에 마구
박은 못도 빼고, 늘어진 노끈도 풀고, 매우 좋은 제안이었다. 그래서 총장부터 본부의 실, 처장, 학장과 사무직원들까지 모두 동참하기로 하였다. 간부 학생 들의 강한 의지로 매월 첫 수요일 청소하기는 꽤나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당 시 학생 처장이었던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매월 첫 수요일 그 자리에 나갔다. 그러나 그 일을 하고 돌아오면 두 가지가 언제나 내 마음을 괴롭혔다. 하나는 청소를 하는 시간에 수많은 학생들이 등교를 하는데, 대부분 총장님이나 교직 원들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청 소 작업을 그저 남의 일이려니 생각하고 아무런 관심 없이 그냥 지나친다는 점 이었다. 이왕 걸어 올라가는 길임에도 그 일에 동참하며 가는 학생들이 많지 않았다. 그런 경우 학생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행동하는 게 바람직한 행동인가를 몰라서 그랬을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묻는 골라잡 기 시험을 본다면 어떻게 답할까? 이를테면, ‚선생님과 친구 들이 길을 청소 하고 있을 때 다음 중 어떤 행동이 학생으로서 바람직한가요? 그냥 모른 체 지 나간다, 저쪽으로 돌아서 지나간다.‛ 유치원생들이라도 정답을 맞출 것이다. 그렇다면, 무관심하게 지나간 그 학생들은 무엇이 문제인가? 지금 우리의 신세대들이 갖는 문제의 하나는 생각과 지식을 행동과 연계시키 지 못한다는 점이다. 머리로는 다 알지만 실제 행동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는 것이다. 벽에 못을 박을 때는 어떻게 박아야 하는지 설명을 할 수는 있어 도, 실제로 박을 줄은 모른다. 사과를 깎을 줄 모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들 은 무엇이 옳고 그름을 관념적으로, 추상적으로는 판단할 줄 알지만, 실천적으 로, 행동적으로는 잘 할 줄 모른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성장하고 교육받은 환경 탓일 수도 있다. 기성 세대는 어렸을 적에 무엇이든 행동으로 학습하였지 만, 신세대는 책상에서만 공부를 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기성 세대는 워낙 가진 것이 없어서, 워낙 궁핍하였기에 매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습성을 형 성하였던 것에 비하여, 신세대들은 그저 웬만한 일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할 필 요를 느끼지 않고, 그러다 보니 냉담해지고 무관심해져서 그런 것은 아닌가 하 는 생각도 해 본다. 어떻든 우리 는 신세대들이 행동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란다. 머리로 가 슴으로만 알고 느낄 것이 아니라 몸으로 직접 행동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또한 일하는 능력을 기른다는 것은 훗날 필요한 직업적 기초 능력을 연마하 여 체득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포함한다. 훗날 어떤 일에 종사하게 되든, 세 상의 모든 직업에는 각기 가장 기초가 되는 기본적 기능이 있다. 그러한 기본 적인 기능들에는 공통점이 많다. 직업적인 기초 능력을 갖추는, 즉 사회의 생 산적 구성원으로서 필요한 능력을 갖추는 일은 자신의 적성이나 소질을 행동으 로써, 일로써 개발하는 것과도 같은 의미이다. 훗날 언어 행위라고 할까, 언어 적 능력을 바탕으로 어떤 일에 종사할 잠재적 소질을 가진 아이라면 언어적 능 력, 예컨대 웅변술 같은 것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 그렇다. 다음으로, 일하는 능력의 핵심은 생활 실천 기능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다. 즉, 생활인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일상적 여러 가지 일들을 해낼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엄마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저녁 늦게 들어왔다고 하자. 아버지도 아직 안 들어오고, 집에는 고 1, 중 2 두 아들만이 고픈 배를 움켜쥐고서는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면 어떨까? 엄마가 좀 늦게 들어오시면, 그래서 배가 고프면, 라면 하나 끓여 먹으면 안 되는가? 라 면을 끓일 줄 몰라서 못 끓였다면, 그 아이들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겠는가? 그 저 어리디 어린 아이들이라서 그렇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남자 아이들이라서 그렇다고 해야 할까? 집에 수도꼭지가 느슨해져서 물이 새면, 아이들도 그것을 꼭 조여서 새지 않도록 할 줄은 알아야 한다. 벽에 못도 박을 줄 알고, 자기 방은 스스로 쓸고 닦을 줄 알아야 한다. 어디 생활 기능이 그것뿐인가? 모임이
있으면, 노래도 한 곡 그럴싸하게 부를 줄 알아야 하고, 바닷가에 가면 수영도 할 줄 알아야 한다. 살아가는 데 꼭 의식주에 필요한 기능만이 생활 실천 기능 은 아니다. 한 인간으로 존재하는 데 관련된 여러 가지 삶의 기본적인 기능을 행동으로 해 보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일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일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하려면 특히, 머리 속의 지식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 몸에 배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탔을 때, 노 인이나 몸이 불편한 사람을 보면 벌떡 일어나서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곧 지식 과 행동이 이어진 심성이다. 자리를 양보할까 말까를 한참 따져 보고서야 일어 나서는 안 된다. 지식이 곧 행동이어야 하는 것이다. 일하는 사람은 어찌 보 면, 행동하는 지식인과도 같은 의미라고 하겠다. 4. 더불어 관계하는 사람이 되도록 키워라 졸업을 앞둔 한 학생이 찾아왔다. 여기저기 몇 군데 회사에 입사 원서를 냈 지만, 학교 성적이 좋지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면접을 할 때 무엇을 잘못해서 그런지 번번이 떨어진 학생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다른 학생들에게 뒤떨어질 만한 문제는 없는 학생이었다. 생각하는 것이 조금은 부족하긴 해도 원만한 가 정에서 성장했고 품성도 괜찮고 해서, 직접 취업을 주선해 주기로 마음먹고, 이렇게 저렇게 아는 사람들을 만났다. 마침 우리 나라 10 대 기업에 드는 큰 기업의 이사 한 분을 잘 알기에, 그 분 과 의논을 했다. 말은 추천서이지만 각서 비슷한 것을 썼다. 이 학생의 능력이 나 품성 등 모든 것을 가르친 선생으로서 보장하고 또 그 학생이 회사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책임지겠 다며 강력하게 추천을 하였다. 그 회사에서는 교수의 흔하지 않은, 특별히 책 임을 지겠다는 추천서를 믿고 학생의 성적이 좀 좋지 않았어도 그 학생을 채용 하였다. 부서까지 본인이 원하는 쪽으로 발령을 내 주었다. 두 달 간의 연수가 끝난 후, 그 학생은 원하는 곳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얼 마 후 그 학생은 내게 찾아와 너무도 감사하다고, 또 부모님께서 그렇게 기뻐 하신다고 했다. 나는 한 학생의 인생의 길을 열어 주었다 싶어 흐뭇했고, 선생 으로서의 보람, 희열 그런 것을 그 날 느꼈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 달이 채 안 되어서 그 학생은 아주 늦은 밤에 우리 집으로 전화를 해 왔다. 어느 사립 중 학교에 교사 자리가 하나 났는데 그 곳으로 가면 어떻겠느냐고, 그리로 가면, 애써서 자신을 취직시켜 주신 선생님께 누가 안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한 달도 안 되어서 그만두겠다니, 좀 설득을 해 보려 했지만, 부 모님께서도 사립 학교 교사로 가기를 원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만 설 득할 가치나 용기를 잃었다. 그리로 가겠다는 결심을 굳힌 상태에서, 또 그 학 교와 이미 접촉을 다 하고 나서 내게 전화를 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학생은 이미 내일 면접을 하기로 다 해 놓고 내게 전화했 음을 바로 그 다음 날 알았다. 이튿날 저녁 그 학생은 다시 전화를 했다. 그 학교에 면접을 다녀왔는데, 채용이 결정났고, 그래서 내일 회사에 사표를 낸다 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학생은 면접 전 날 밤에 내게 전화를 걸어 의논(?) 을 한 것이다. 이미 모든 것을 다 결정해 두고 말이다. 그리고, 모레부터 학교 에 출근해야 하니까 회사에는 내일 당장 사표를 내겠다는 얘기였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물론 이 비슷한 일을 그 전에도 겪었다. 그 때마다 실망은 컸지만 어쩌겠는가? 선생이고 보니, 그래도 학생들을 취직시켜 주는 일을 열심히 할 수밖에. 내가 그 학생에게 실망한 이유는 그가 꼭 다른 직장으로 옮겼기 때문은 아니다. 자신을 위해 애써 준 선생이나 그 회사의 이 사를 일순간에 배신해서 실망한 것이다. 더욱이 회사에서 돈을 들여서 두 달 동안이나 연수를 시켰는데, 그것도 느닷없이 어느 날 사표를 내고 이튿날부터
안 나온다고 했으니 크게 실망할 수밖에. 뿐만 아니라 일을 다 꾸민 다음에 내 게 그냥 통고하였다는 데도 실망을 했다. 처음 회사 취직을 부탁했을 때, 자신 은 교직으로 가고 싶은데 뜻대로 안 되어서 일단 회사에 취직을 했다가 훗날 교사 자리가 생기면 교직으로 가겠다는 이야기를 미리 했더라면 실망은 좀 적 었을 텐데. 물론 이러한 사례들을 놓고, 오늘의 신세대가 모두 그렇게 신의를 쉽게 저버 리면서 자신의 이득만을 추구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한 가지 자 꾸만 확인하게 되는 것은 지금의 신세대들은 그들의 부모 세대보다는 사람들과 의 관계에서 상호 신뢰, 협동, 희생, 봉사 등과 같은 의식이 너무 희박하다는 점이다. 자신에게 이득이 되면 무엇이든 쉽게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손해가 되 면 무엇이든 쉽게 배척한다. 사람과의 관계지음에서도 그렇다. 이득이 되는 사 람과는 쉽게 연합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무서우리 만큼 냉담하다. 철 저하게 이기적이고 자기 보호주의적인 행동이 그들에게서 자주 나타난다. 그래 서 오래 사귀는 친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드물다. 혼자 지내는 아이들 이 많다. 서로 문을 걸어 잠그고 상대방에게 자기를 노출시키려 들지 않는다. 관계는 지극히 피상적이고, 단속적이다. 공주병과 왕자병에 걸렸는지도 모른다. 서로 나눔이 없고, 교류가 없고, 관심이 없다. 만약, 진실로 많은 신세대들이 이 같은 행동 성향을 계속해서 키워 간다면,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렇지 않아도 세상은 더욱더 모래 알처럼 흩어지는 파쇄 현상으로 가득 차 있는데, 우리의 신세대들이 만약 그러 한 자기 본위의, 자기 중심적인 생각만으로 행동한다면 사회 전체의 응집력은 더욱 약화될 것 아닌가. 사람은 결코 혼자 살 수 없다. 더불어 살아야 한다. 공존이 곧 생존의 길이다. 더불어 사는 사람 즉, 서로 관계하는 사람이 되어야 만 한다. 더불어 관계하며 사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어떤 조직 안에서 우선은 자기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다. 최소한 자기에게 주어진 몫은 반드시 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서로 신의를 지키며 협동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상대 방이 신뢰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더불어 관계하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서로 신뢰하지 않으면 한순간도 생존하기가 어렵지 않은가? 빨간 신호 등에서는 자동차들이 멈춘다는 상호 신뢰가 있기에 우리는 마음놓고 길을 건너 지 않는가? 상호 신뢰가 깨지면, 그래서 우리가 서로 의심하고 서로 믿지 못한 다면, 우리는 도저히 더불어 살아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상호 책임과 신뢰는 곧 사람으로 하여금 조직체 안에서 완전한 심리적 구성 원이 되도록 하는 밑바탕을 이룬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조직에 소속하고 싶은 소속감의 욕구를 갖고 산다. 이러한 소속감은 사람이 조직체 안에서 심리적으 로 완전한 구성원이 될 수 있을 때 결과적으로 나타난다. 완전한 심리적 구성 원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공동체 안 에서 타인과 더불어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 안에서 서로 이해하고, 서로 수용 하고, 서로 존중하고, 서로 아끼는 것이 심리적으로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더 불어 관계하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 자신의 생각, 자신의 감정만을 소중히 여 기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존재, 생각, 감정도 마찬가지로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러면서 공동체 안의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우리가 더불어 관계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상호 의사 소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흔히들 의무 교육이라고 말하면 국가에서 무상으로 교육시켜 주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뜻이 그 속에 서려 있 다. 초등 학교와 중학교 교육이 의무 교육이라 함은 그 9 년 동안 학교에서 가르 치고 배우는 내용은 누구나 반드시 의무적으로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초등 학교에서 읽기, 쓰기, 셈하기를 가르친다. 초등 학교 교육이 의무 교육에 포함되어 있다면 반드시 이 읽기, 쓰기, 셈하기를 모두가 의무적으로 익혀야 함을 의미한다. 그 까닭은 바로 우리가 더불어 관계하며 살아가면서 의사 소통 을 하기 위해서이다. 생각해 보자. 누군가가 글자를 몰라서, 도로 교통 표지판에 쓴 ‘멈춤’이라 는 글자를 모르고 그냥 운전하고 지나갔다고 하자. 그 때 그 사람이 사고를 당 하는 것도 문제겠지만, 더 큰 문제는 그 사람이 그 글자를 몰라서 다른 사람에 게 해를 입히는 것이다. 이는 곧 읽기, 쓰기, 셈하기를 나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더불어 관계하며 함께 사는 데 필요한 의사 소통을 하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다. 줄여서 말하면, 세상을 사는데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지식이나 기능을 갖추는 일은 더불어 관계하며 사는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주요한 목표가 되는 것이다. 5. 느끼는 사람이 되도록 키워라 아주 오래 전 작은아이가 초등 학교 다닐 때의 일이다. 아이를 데리고 아파 트 뒤에 있는 자그마한 산엘 갔다. 산이라기 보다는 언덕이라고 해야 할 만큼 조그만 산이었지만, 나는 특별히 그 곳을 좋아했다. 산길이 내가 어린 시절 시 골에서 초등 학교 다닐 때 넘나들던 언덕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산에는 소나무 숲도 있고, 또 각종 운동 기구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저만치 넓은 곳에는 누군가가 열심히 가꾸어 놓은 깨밭이며, 배추밭, 그리고 대파밭이 있었다. 그 리고 산 언덕 중간에는 편히 앉을 만한 조그만 잔디밭도 있었다. 아이와 함께 그 곳에 가서 배추밭도 구경하고, 나비도 구경했다. 그리곤 잔디밭에 앉아 발 밑으로 기어가는 개미를 보며 놀기도 했다. 문득 어린 시절 놀던 일이 생각나 서, 하얀 클로버 꽃 두 개를 따서 꽃 아래쪽 줄기에 틈을 벌려 서로 엇갈려 끼 웠다. 그러면 팔목에 양쪽 줄기를 붙들어 맬 수가 있다. ‚해석아, 눈 감아 봐! 아버지가 선물 하나 줄게.‛ ‚무슨 선물인데?‛ ‚나중에 보면 알아!‛ ‚그래도... 뭔데에?‛ ‚응, 시계야, 예쁜 손목 시계야!‛ ‚정말?‛ ‚그럼.‛ 그리고 나서 나는 내가 만든 클로버 꽃시계를 눈 감은 아이의 팔목에 매어 주었다. ‚자. 눈 떠 봐! 됐어!‛ ‚이게 뭐야!‛ ‚시계잖아! 꽃시계!‛ ‚에게! 이게 무슨 시계야? 아버지는 참, 내가 언제 이딴 시계 만들어 달랬 어! 전자 시계나 하나 사 주지!‛ 아이의 실망은 너무 컸다. 아버지가 좀 이상해진 것은 아닌가 하는 눈치까지 보였다. 그 때, 아버지인 나도 아이의 그런 반응에 너무 큰 실망을 했다. 예쁜 꽃시계를 보고, 예쁘게 받아들일 줄 모르는 아이의 메마른 감성에 실망을 한 것이다. 복잡한 도심지의 아파트에서만 살아서 그런 것일까? 오직 공부만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까? 자연과의 접촉이 부족해서 그렇게 되었을까? 왜 그 나 이에 걸맞는 따뜻한 감성을 지니지 못하게 되었을까? 언젠가 나는 이른 아침 역시 아이와 함께 아파트 앞에 있는 초등 학교 운동 장에 산보하러 갔다. 주차장 옆, 학교 담장가에 심어 놓은 라일락 나무가 진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야, 꽃 향기 근사하다! 너는 냄새도 맡을 줄 모르냐?‛ ‚어디에서 향기가 나는데?‛ ‚저거 아냐! 저기 저 라일락 나무 말야!‛ ‚저게 라일락이야? 음, 그 꽃 냄새였구나!‛ 아이도 무슨 냄새를 맡긴 맡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이 꽃 향기인 줄은 몰랐다. 꽃 향기를 느끼지 못하는 아이! 어디 그 뿐인가? 슬픈 영화를 보면 슬 퍼할 줄 알아야 하고, 또 눈물이 저절로 솟아야 하고, 불쌍한 사람을 보면 불 쌍하게 느낄 줄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아이들의 감정은 그렇지가 않 은 것 같다. 재미있고 우스우면 소리질러 가며 즐겨도 슬프거나, 불쌍하거나, 힘들어 하는 그런 감정에는 무딘 것 같다. 우리는 어렸을 때, 학교에서 단체로 유관순 누나를 그린 영화를 보러 가서는 슬퍼 울기도 하였고, 울분도 터뜨렸 고, 어떤 장면에서는 극장 안이 떠나갈 듯 박수도 쳤다. 이를테면, 느낌이 있 었다. 물론 요즈음 신세대들은 농구장, 배구장을 찾아가서 소리지르고, 유명한 가수의 노래나 악단 연주를 들으면서 소리를 지르기는 한다. 그럼에도 신세대 들이 더 순수한 감성을 소유하지 못한 것처럼 느끼는 것은 나만의 잘못된 생각 인가 자주 돌이켜보게 된다. 어떻든, 우리의 자녀가 21 세기를 살아가는 사람, 굳이 꼭 21 세기가 아니더라 도, 한 시대를 살아가는 바람직한 인간으로서 성장하도록 도우려면 그들을 느 낌이 있는 사람, 느낄 줄 아는 사람으로 인도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가에 서 흔히 말하는 희, 로, 애, 락, 애, 오, 욕의 7 정은 물론, 정의나 불의, 아름 다움이나 추함, 착하고 그릇된 것 따위에 대하여 바로 느낄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발전된 그리고 앞으로 발전될 정보 통신 기술은 우리의 지적인 행 동이나 기능적인 행동을 많이 대신해 주고 있다. 그러나 결코 그것이 인간의 느낌까지 대신해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더욱이 제아무리 정보 통신, 과 학 기술이 그 지평을 넓혀 간다 해도 그런 것이 우리에게 사랑, 이해, 수용, 지각과 같은 따뜻한 감성을 길러 주긴 어렵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그러한 것을 갖춘 사람으로 우리의 자녀가 성장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느끼는 사람, 느낄 줄 아는 사람은 우선은 열린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 다. 열린 마음은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이다. 친숙하지 않은 것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열린 마음이다. 처음 만난 사람에 대해서 수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처음 보는 음식을 기꺼이 먹어 보려 하는 마음도, 사람들의 낯선 행동도 수용하고 받아들이려는 마음도 열린 마음이다. 타인의 여러 가지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도 열린 마음이다. 또한 느끼는 사람이 되려면 긍정적인 지각을 하여야 한다. 사람에 대해서도, 사물에 대해서도, 어떤 현상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 속 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무조건 부정적이고 폐쇄적이면 우리는 느낌을 가질래야 가질 수가 없다. 긍정적으로 모든 것을 지각하는 사람은 역경 속에서도 새로운 것을 깨닫고 배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남들이 모 두 추하게 느끼는 것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열린 마음, 긍정적인 마음과 더불어 느낄 줄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표현 하는 마음을 갖고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의 생각이나 느낌을 다른 사 람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표현하고 전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이를테면, 동물원에 가서 무엇을 보고 왔냐고 아이들에 게 물었을 때, 코끼리를 설명하려는 아이들은 세 가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 다. 하나는 자신이 손으로 코를 잡고는 앞으로 고개를 숙여 코끼리 모습으로 걸어 가면서 행동적으로 표현하는 아이, 다음은 그림으로 표현하는 아이, 그리고 언어를 통해서 표현하는 아이, 여러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느끼 는 사람은 이 세 가지 표현 방식을 모두 해낼 수 있어야 한다. 타인에게 자신
의 감정을 표현할 줄 몰라서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또 그것이 화근이 되어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문제투성이가 될 것인가! 서로 자 신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다른 사람의 모습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그래서 함께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는 것이 바로 느끼는 사람, 느낄 줄 아는 사람의 모습이 다. 6. 존재하는 사람이 되도록 키워라 1996 년에 실시된 국회 의원 총선거에서 투표율이 63%에 조금 못 미친 저조함 을 보였다. 유권자의 3 분의 1 이상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는 역대 대통 령 선거나 국회 의원 선거, 지방 자치 단체 선거 때의 투표율에 비하면 매우 저조한 투표율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투표를 하지 않았을까?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기본권인 참정권을 포기하였을까? 그 날 투표를 하지 않고, 어디에서 무엇을 하였을까? 그 날은 전국적으로 날씨가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면 날씨가 좋아서 이른 새벽부터 오후 늦게까지 집을 떠나 어디론가 놀러 갔다 왔 기 때문일까?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한 정확한 조사를 하지 않아 까닭을 알 수 는 없다. 누가 당선될 것인가에 대한 예측 조사를 경쟁적으로 실시하였던 여러 여론 조사 기관들도 왜 그 많은 사람들이 투표를 하지 않았는가에는 관심이 없 었던 것이다. 이따금 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한 가지 생각은, 혹 그 많은 사람들이 정치라 는 하나의 사회적 과제에서 마음이 떠났기에 투표에 불참하지 않았나 하는 것 이다. 즉, 정치에 환멸을 느껴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 정치는 그저 정치하 는 당신들끼리 마음대로 하라는 식으로 내버려 두고, 우리는 그저 하루 공휴일 이나 즐기자 하는 생각으로 투표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별별 사람들이 다 국회 의원 되겠다고 나서질 않는가, 그래서 찍을 만한 마땅한 사람도 없고, 꼭 지지해 주고 싶은 신통한 당도 없고, 그런 당, 그런 사람 찍느니 투표장까 지 왔다갔다 하는 내 수고가 오히려 아깝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가? 그 동안 수 없이 투표해 보았지만, 그렇게 해서 뽑은 사람이 진정 내가 뽑아 준 의미를 느 끼게끔 해 온 것이 무엇인가? 누가 뽑힌들 내게는 아무 상관 없다 싶어, 국민 으로서 정치에 참여한다는 신성한 권리마저 포기하고, 이 나라 이 사회의 삶의 터전에서 심리적으로 이탈한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 나의 지나친 분석과 과민 한 해석이 오류이길 바라면서도, 나는 이따금 우리 사회의 진정 심각한 문제의 하나는 그러한 심리적 이탈자가 사회의 여러 계층에서, 여러 조직에서 자꾸만 늘어난다는 점이라고 느낀다. 오늘날 우리의 초, 중등 학교를 가만히 살펴보면서 그러한 심리적 이탈 학생 들이 자꾸만 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대체로 한 학급에 45 명쯤의 학생들이 옹기종기 열 지어 모여 앉아 공부를 한다. 그렇 다면, 그 중 몇 명의 학생들이 몸도 마음도 함께 교실 속에 앉아 있을까? 어림 잡아 절반은 그럴 성싶다. 좀 낮추어 잡으면 3 분의 1 쯤의 학생들은 몸도 마음 도 학교에 와 있다. 그러나 나머지 학생들은 몸만 학교에 와 있지, 마음은 학 교에 가져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한 학급에서 성적으로 따져 중간 안에 드는 학생들은 그래도 대학에 갈 수 있는 가능성도 있고, 또 대학에 가고픈 꿈도 희망도 있다. 이 학생들은 시험을 보고 나면 성적이 궁금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답을 맞추어 보고, 몇 개나 틀렸 는가를 과목마다 따져 본다. 집에 가서도 엄마에게 시험 본 결과를 이야기한 다. 수학은 세 개쯤 틀린 것 같다. 이번에는 내가 10 등 안에 들 것 같다든가, 성적표는 일 주일 있으면 나올 것이라는 얘기도 한다. 이런 학생들은 몸만 학 교에 와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학교에 와 있어, 그리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한 학급에서 성적이 중간 아래로 축 처진 학생들은 어떨까? 이들도 대학에 갈 수 있는 꿈과 희망을 갖고 있을까? 본인들이야 그런 꿈과 희망을 갖 고 싶지만, 선생님이나 부모 들이 그들의 그런 꿈을 가능한 일이라고 믿어 줄 까?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어쩌면 이른 새벽부터 갈 곳 도 없고, 그저 의무적으로 가야 하는 곳이니까 학교에 가는 것은 아닐까 모르 겠다. 몸은 마지못해 학교에 와 있지만, 마음을 학교에 가져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학교에 왔지만, 선생님의 말씀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고, 잘 알아듣지도 못하겠고, 그러다 보면 머리 속에서는 싸 갖고 온 도시락 을 1 교시 끝나면 먹어치울까, 아니면 2 교시 끝나고 먹어치울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찼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마음 같아선 나도 공부를 열심히 잘 해 보고 싶 지만, 워낙 처져 있고 보니 따라가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그런 나를 학교에서 따뜻하게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고 보면, 그들은 마음을 학교에 가져오기가 어 려울 것이다. 학교에서는 온통 공부 잘 하는 아이들, 대학에 갈 수 있는 아이 들, 가능성이 있는 아이들에게만 관심을 쏟지, 우리와 같이 처진 아이들은 그 저 학교에서 말썽이나 피우지 말고 조용히 있어만 주면 될 아이들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마음을 학교에 가져오기가 어려울 것이 다. 그러면 그 학생들은 마음을 어디에다 가져갈 것인가? 집으로 가져가면 집에 서는 부모들이 그들의 그런 마음을 따뜻하게 받아 줄까? 형은 공부를 잘 하는 데 동생은 공부를 잘 못하는 경우, 공부 못 하는 동생이 학교에서 형보다 먼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식탁 위에 엄마가 간식으로 쪄 놓은 보리빵 세 개 중 한 개를 먹었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보았다. 그러나 두 개 남은 것 중 한 개를 더 먹으려고, ‚엄마! 나 이거 하나 더 먹으면 안 돼?‛ 했을 때 엄마는 기다리기라도 한 듯 소리쳐 말한다. ‚야! 공부를 그렇게 욕심내서 해 봐! 공부도 못 하는 게 먹기는, 놔 둬! 형 오면 먹게!‛ 공부 못 하는 죄로 얻 어먹기도 어렵다. 눈치가 보인다. 어디 그뿐인가? 옷 좀 사 달라면 뭐라고 하 던가? ‚공부만 잘 해 봐라! 안 사 달래도 사 주지...‛ 모든 것이 그렇다. 공 부 못 하는 죄 하나로 집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다. 아니, 때로는 존재 그 자체를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껴질 만큼 식구들의 구박이 심하다. 그런 경우, 그 아이들은 어디에다 자신들의 마음을 가져갈 수 있는가? 학교 에도 못 가져가고, 집에도 못 가져오면, 어디에다 마음을 두겠는가? 결국은 거 리로 마음을 끌고 나갈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거리에 나가면, 자신처럼 마음을 둘 곳이 없어 거리로 나온 많은 다른 마음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위 로를 주고받으면서 휩쓸려 돌아다닌다. 그러면 어른들은 그들보고 뭐라고 하던 가? 괜스레 거리를 쏘다니는 불량 청소년들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모멸에 가득 찬 시선으로 그들을 쳐다보지 않던가? 그런 청소 년들이 사소한 시비로 서로 부둥켜 주먹질이라도 몇 번 주고받으면 우리는 그 들을 폭력이나 휘두르는 못된 패거리쯤으로 치부하지는 않았는가? 그래서 결국 그들은 그런 어른들이 더욱 밉고, 또 그렇게밖에 살아갈 수 없는 자신들이 미 워서 자꾸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리 배회나 폭력에 빠져드는 것은 아닐까? 생명 존중을 근간으로 삼는 병원은 제아무리 예방 의학이 발전한다 해도, 일 차적으로는 병들어 고통 속에서 헤매는 사람들을 치유해 주는 데 그 존재의 목 적이 있다. 건강한 사람에게도 병원은 필요한 곳이지만, 병원은 우선 병들어 아픈 사람들을 위한 곳이다. 학교도 그런 것 아닌가? 학교가 공부 잘 하는 아이들만을 위한 곳은 아니다. 비록 영어, 국어, 수학을 남들처럼 잘 못하지만, 그래도 그들도 하나의 존엄한 인격체임에 틀림없다. 그들도 이 땅에 살아갈 권리가 있다. 이 땅에 존재할 가 치가 있어 생명을 얻었다. 학교는 그 모든 젊은이들에게, 그들 나름대로 이 땅 에 유용한 사람이 되도록, 그들 나름대로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 주
기 위한 곳이다. 잠재된 그들의 가능성을 과학적으로 체계적으로 찾아 주고, 키워 주고, 발전 시켜 주어서 그들이 사회의 유용한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도 움을 주어야 하는 곳이 학교이다. 학교가 그러한 일에 충실할 때, 모든 학생들 은 기꺼이 그들의 몸과 마음을 학교로 함께 가져갈 것이다. 그러나 학교가 오 로지 공부(?) 잘 하는 몇몇 학생들만을 위한 기능 수행에 열심이라면, 그리고 나머지 아이들에 대해서는 그저 오든 가든 내버려 둔다면 그들이 어떻게 그들 의 마음을 학교에 가져갈 수가 있겠는가? 그러한 원리는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은 스 스로를 이 땅에 존재할 가치가 있는, 그래서 이렇게 오늘도 존재하고, 또 내일 도 존재할 것이라는 신념을 갖게 될 것이다. 존재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한 이해를 통한 자아 가치의 확인이 이루어져야 한다. 자 신의 적성과 소질, 자신의 관심과 흥미,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바로 이해하는 사람이 바로 존재하는 사람이다. 그러한 이해는 바로 학교에서는 선생님들, 가 정에서는 부모가 어떻게 그들을 도와 주느냐에 따라서 그 이해의 정도가 크게 달라진다. 한 가지 잣대, 이름하여 성적 또는 공부라는 것만으로 그들을 쉽게 판별하고 가르고 해서, 이 땅에 쓸모 있는 존재와 그렇지 않은 존재로 양분하 는 어른들의 횡포가 지속되는 한 우리의 신세대들이 존재하는 사람으로 성장하 기는 어렵다는 것을, 이 땅에 몸과 마음을 함께 묶어 존재하며 성장하기가 어 렵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제 3 부 10 가지 제안: 우리 자녀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가? 사람들은 어떤 일을 좀 잘 해 보고자 할 때 특별히 날乙 잡아 할 때가 많다. 그런 경향은 개인이나 국가나 마찬가지인 듯싶다. 보건의 날, 과학의 날, 법의 날, 바다의 날, 환경의 날, 안전 점검의 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등 그런 날 이 수도 없이 많다. 그런데 그러한 날들 중에, 달력에 표시는 안 되었지만, 재 미있는(?) 날도 있다. 이를테면, 옛날에는 쥐 잡는 날이 있었다. 내무부 장관 이 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전국적으로 같은 날짜에 쥐잡기를 실시했 다. 그 날이 되면 동네마다 방송을 했다. ‚주민 여러분, 오늘 밤은 쥐를 잡는 날입니다. 이미 나누어 드린 쥐약을 잘 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침 일찍 잘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일제히 쥐를 잡는다. 그리곤 동네마다 몇 마리를 잡았 다고 보고를 한다. 각 마을마다, 각 면마다, 각 군마다, 각 도마다 상급 행정 기관에 보고를 한다. 그러기를 수년, 우리는 쥐를 완전히 박멸하었는가? 하기 야 안 접는 것보다 단 몇 마리라도 잡는 것이 좋고, 또 그렇게 날을 정함으로 써 사람들에게 쥐를 잡아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쥐 란 놈들도 영리해서 어쩌면 그 날 밤만은 그야말로 죽은 듯이 가만히 있다가, 이튿날 개나 소, 닭이 먹을까 봐 쥐약을 거두면 다시 기어 나왔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쥐를 엄청 잡았지만 아직도 쥐는 많다. 그렇다면, 그렇게 날을 정해 쥐를 잡은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문제는 평소에 아무 때고, 아 무 데서고 열심히 쥐를 잡아야만 하거늘 그저 정해진 날 마치 무슨 행사를 하 듯 야단 법석을 떨며 형식적으로 쥐잡기를 했다는 데 있다. 그러한 예는, 모르 긴 몰라도, 날을 정해 하는 다른 많은 경우에도 마찬기지인 것 같다. 좀 지저분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옛날 사람들이 이를 어떻게 잡았 는가 생각해 보면 좋을 듯싶다. 저녁때 허리춤이 가려우면 희미한 등잔불 밑에 서 속옷을뒤집어 숨어 있는 이를 찾아 잡았다. 그러다가 아예 옷을 훌렁 벗어 방바닥에 펴 놓고 솔기마다 뒤졌다. 다 못 잡으면 그 이튿날도 잡았다. 낮이고 밤이고 때를 가리지 않고 그저 온 식구가 잡았다. 학교에서 앞에 않은 아이 등 에서 이가 기어가는 것을
보면 수업중에도 잡았다. 그야말로 온 국민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룰 잡았다. 그러다 보니 결국 이를 다 잡아 지금은 구경하기조차 어렵지 않은가!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한 이유는 자녀 교육에서 우리가 어떤 원칙을 세우면 그 것乙 그저 잠깐, 마치 날 잡아 하듯 어떤 날에만 형식적으로 시도해 보고 그 후엔 유야무야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다. 이를테면, 부모와 자녀 간의 대화가 중요하다고 했더니그 말을 들은 어떤 엄마가, ‚자, 우리 매주 토요일 저녁엔 식구들끼리 대화의 시간을 갖자구나!‛ 한다면 그것이 쥐 잡는 날하고 뭐가 다 른가! 생활 실천 교욱이니, 현장 학습이니 하면서 그것을 위해서 모든 학교가 일제히 매주 토요일을 가방 없는 날로 정하는 것도 비슷한 예다. 결코 그 모든 것을 어떤 특정한 시간이나 날짜에만 해서는 안 된다. 필요할 때, 수시로, 아무 때고, 아무 곳에서고, 그야말로 일상 생활 속에 스며들게 해 야 한다. 제 3 부에서는 21 세기를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우기 위한 구체 적 방법을 열 가지로 나누었다. 이런 방법들은 평소 일상 생활을 통하여, 알게 모르게 이루어져야 한다. 무슨 형식을 빌어 한느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때를 정하고, 장소를 정하고, 대상을 정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 야 함을 미리 밝혀 두고자 한다. 또 한 가지 미리 이야기해 두고 싶은 것은 이러한 구체적인 방법들이 결코 신비로운 묘약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글은 읽는 모든 사람들이 평소에 느꼈 던, 지극히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이야기이다. 자녀 교육에는 기가 막힌 묘약이 없음을 우리 모두 알지 않는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꾸만 묘약을 찾아 헤매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마치 건강을 유지하 고, 젊음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 DHEA, 곰발바닥, 웅담, 개구리알, 지네등 별의 별 것乙 찾아 헤매듯이 말이다. 집에서 세 끼 밥 잘 먹고, 그것도 그렇게 특별 한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이것 저것 골고루 먹고, 늘 마음을 즐겁게편안하 게 유지하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그럼 에도 사람들은 그러한 방법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무엇인가 남다른 특별한 것을 경쟁적으로 찾는다. 그런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는 온갖 장사꾼들이 있다. 그래서 이제는 평범한 것으로는 안 되어 그 앞에 특별함을 의미하는 단어를 붙인 것들이 유행이다. 예컨데, 슈퍼-, 엑스트라-,초-, 와 같은 어휘를 사용한 것들이다. 나는 자녀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러한 어휘를 사용하지 않는다. 결코 어떤 특별한, 비상한, 신비스러운 내용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우리네 일 상 생활에서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평범한 이야기들이고, 또 그 원리도 지극 히 평범하기 때문이다. 교육의 성과는 그렇게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교육의 성과는 시간을 두고 끊 임없이 노력하는 가운데 조금씩 누적되는 것이다. 또 어떤 한 가지 방법만이 특별한 성과를 거두게 하지도 않는다. 여러 가지 방법들이 한데 어울려서 오랜 세월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다 보면 조금씩 누적되어 나타난다. 사람이 성장하 고, 성숫하는 데는 그야말로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이 글에서 모두 열 가지 구체적 방법乙 제안하지만, 여기서 굳이 어떤 방법 은 어떤 능력을 키우는 데 절대적으로 효과적 이라든가, 또 어떤 방법은 어떠 한 효과를 당장에 가져온다고 말 할 수 없다. 그저 그러한 방법들이 우리네 가 정 생활의 저변에 흐르면, 모두 한대 어우러져서, 생각을 할 줄 알고, 스스로 배울 줄 알고, 일을 하고, 더불어 관계하고, 느끼고, 그리고 존재하는 사람으 로 성숙하는 데 도음을 주게 되리라는 점을 미리 밝혀 둔다.
1.자율: 자기를 스스로 다스리도록 한다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면서 맞벌이 부부의 자녀 교육에 문제가 많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여자들의 경우, 무슨 일인가 좀 해 보려 하거나 직장을 가 지려 하면 남편들이 반대를 하는데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이들 교육 때문 이다. 하기야, 아이가 너무 어려서 누군가가 옆에서 온종일 지켜보고 돌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엔 그럴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좀 커서 유치원이나 초 등 학교엘 다니는 경우에도 아이들 교육 때문에 맞벌이가 어려운 것인가? 또 맞벌이를 하면 자녀 교육에 정말로 큰 문제가 생기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50 대 전후 연령층의 어른들, 특히 농어촌에서 성장한 어 른들은 거의 모두가 맞벌이 부모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학교에 갔다 오 면 집엔 아무도 없다.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도 이른 새벽부터 온종일 들에 나 가 일하신다. 이 역시 맞벌이 부부가 아닌가? 이러한 맞벌이 부모 밑에서 우리는 어떻게 성장하 였는가? 모든 것을 자기 스스로 다스리고 해결하면서 성장하였다. 까만 보자기에 책을 싸서 여자아이들은 허리에 매고, 남자 아이들은 어깨에 걸어매고 학교룰 다녔다. 집에 오면, 우선 어깨에 걸어맨 책보부터 마루에 내 려놓는다. 배가 고프니 밥부터 찾아 먹으려고 부엌으로 들어간다. 솥이 세 개 걸렸다. 이 솥 저 솥 살펴보니 사발에 강낭콩과 보리를 섞어서 한 밥이 있다. 그것을 꺼낸 다음, 반찬을 찾는다. 넘어질까 봐 돌멩이로 괴어 놓은, 조그만 때묻은 찬장을 열어 본다. 몇 달을 간장에 담가 놓았는지, 한 개 만 있어도 밥 몇 공기를 먹을 수 있을 만큼 짠 고추 두어 개를 손가락으로 집 는다. 그리고 파 좀 썰어 넣고, 고춧가루를 뿌린 물에 담근 짠 무김치도 꺼낸 다음 쪽마루에 걸터앉아 덤벼드는 파리를 쫓아가며 혼자서 꾸역꾸역 밥을 먹는 다. 그리곤 밖으로 친구들을 찾아 나선다. 괜스레 어슬렁거리다 엄마, 아버지한 테 불려 가서 밭에서 일하게 될까 봐 쏜살 같이 내뺀다. 산으로, 들로, 개울로 나가 온종일 놀다가 해가 지면 집에 들어온다. 그리곤 엄마한테 야단을 맞는 다. ‚이것아! 밥을 먹었으면 그것을 도로 갖다 둬야지! 파리가 있는 대로 꼬였 잖아!‛ 농어촌의 맞벌이 부모 밑에서 성장한 어린이들은 그 당시 그야말로 모든 것 을 자기 스스로 다스리고 해결하였다. 그 속에서 그들은 온갖 사고력과 독립심 을 기르고, 친구들과의 어울림 속에서 감성도 키웠다. 물론 부모들이 자녀를 그렇게 키워 야 좋다는 것을 알고서 의도적으로 그러셨던 것은 아니다. 그 땐 그렇게 키울 수밖에 없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자녀들에게 온갖 자율의 기회를 부여한 양욱 방법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지금의 부모들은 잠자는 시간만 빼고는 온종일 자 녀를 감독하고, 통제하고, 아스린다. 이른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에서부 터 통제는 시작된다. ‚일어나! 어서 일어나! 학교 갈 시간 다 됐어!‛ 눈을 부비며 마지못해 일어난 아이에게 엄마는 그 다음 일을 시킨다. ‚자! 가서 씻어야지! 세수부터 하고 밥 먹어라!‛ 어떤 날은 순서가 뒤바뀐다, 밥부터 먹고 세수하라고. 엄마가 어디로 일찍이 행차를 할 모양이다. 그래서 아이 밥부터 먹인다. 하여튼 아이가 세수하러 화
장실로 들어가면 옆에서 엄마가 지켜 서 있다. 그리고 통제는 계속된다. ‚야, 목도 좀 씻어! 그리고 물을 받아서 씻어라! 흐르는 물에 그냥 몇 번 고양이 세수하듯 콧잔등만 씻지 말고…. 자, 다 씻었으면 이 수건으로 닦아! 식구마다 괜히있는 대로 수건 꺼내서 어질러 놓지 말고. 깨끗이 닦아!‛ 다 씻고 난 아이한테 이제 엄마는 밥을 먹으라고 한다. 엄마의 통제는 계속 된다. ‚우선 물부터 먹어! 아침에 냉수 한 잔은 보약이래더라!… 가만 있어! 엄마 가 생선 발라 줄게… 자, 밥 떠… 엄마가 가시 뺐다… 자, 밥에다 얹어 줄께… 아! 똑바로 숟갈을 대!… 꼭꼭 씹어 먹어!… 가만 있어, 너, 정말 밥 그렇게 들이씹다 내씹다 할 거야?… 극에다 말아서 푹푹 좀 퍼 먹어라!‛ 식사가 끝난 아이는 학교에 가기 위해 가방을 챙긴다. 엄마는 방바닥에 앉아 아이와 함께 가방을 챙긴다. ‚가위는 넣었니? 색종이도 가져가야 되잖아! 그리고 풀은 넣었어?… 아니, 뭐 했길래, 아직 그것도 안 챙겼니!… 풀은 학교 앞 문방구에서 사 가!…‛ 학교 갔다 집에 오면, 이런 식의 엄마의 통제는 잠자리에 들 때까지 쉼없이 이어진다. 숙제는 다 했냐, 숙제를 하고 학원에 가라, 학원 갔다 와서 학습지 를 해라, 멀리 가지 말 고 요 앞에서 놀아라, 텔레비전은 그만 보아라, 저녁은 어떻게 먹어라,…. 그 야말로 아이의 크고 작은 행동이 엄마의, 경우에 따라서는 아버지의 통제하에 놓이게 된다. 그 속에서 아이 스스로 자기를 다스릴 수 있는 기회는 없다. 간혹 엄마가 외출을 했을 때도 엄마의 통제는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이루 어진다. 엄마는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쪽지에 적어서 냉장고 문에 붙여 놓는다. ‚은정아, 엄마가 늦는다. 어디 돌아다니지 말고 집에서 공부하렴. 학원에 시 간 맞추어 가고, 엄마가 냉장고에 사과 깎아서 넣어 놓았으니까 꺼내 먹으렴. 배고프면 피자도 시켜 먹으렴. 돈은, 식탁 위에 보면 냄비 받치는 것 있지, 그 밑에 만 원 넣어 두었다….‛ 쪽지만으로 엄마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수시 로 집에 전화해서 아이가 왔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학원에는 갔는지 등乙 확인한다. 또 아이들한테 삐삐를 채워 주고는 수시로 어디에 있는지 확인한다. 아이들이 이처럼 부모의 통제 하에서 그저 부모가 시키는 대로 잘 따라 하면 부모들은 아이가 말을 잘 듣는다, 참 착하다, 속을 안 썩인다고 대견스러원한 다. 과연 그러한 아이가 정말 착하고 속을 안 썩이는 아이일까? 어찌 보면 노 예나 다름없이 변해 가는 아이의 모습을 엄마나 아버지는 한 번쯤 생각해 보았을까? 노예는 주인의 다스림만을 받을 뿐, 자발적으로 일을 하는 법이 없다. 그러 기에 노예는 생각을 안 한다. 생각할 일이 없다.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 니까 골머리를 앓을 필요가 없다.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골머리를 더 앓는 다. 다스릴 사람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옛날부터, 동서 고금을 막 론하고, 지배 계층 사람들에겐 사고 능력을 키우는 내용을 가르쳤지만, 천민, 노예 등 피지배 계층 사람들에겐 생각이 필요 없는 것만을 가르치지 않았던가! 사실 어찌 보면 시키는 대로 그냥 그렇게 살면 속은 편하다. 흔히 남자들은 공처가니, 진처가(아내를 보기만 하면 떠는 남자)니, 경처가(아내를 보기만 하 면 놀라는 남자)니 하지만, 집에 들어가면 그저 아내가 시키는 대로 군소리 없 이 사는게 편하긴 하다. 먹으라면 먹고, 나가라면 나가고, 모든 것을 아내가 결정하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따라만 하면 집에 와서까지 골머리를 앓을 필요 가 없다. 집안에서 다 큰 어른들이 이루는 일종의 화합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 남편에게 꼭 노예적인 성향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이들의 경우 는 다르다. 자기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는 아이들, 자기 자신을 다스려 보는 기회를 갖 지 못하고 성장한 아이들, 그들은 결국 자율의 기회를 통하여 스스로 배우고
익힐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잃게 된다. 생각하는 사람, 일하는 사람, 느끼는 사람, 그 어떤 경우에도 그렇다. 자기 스스로를 다스려 보는 가운데 그런 사람으로서의 능력, 태도, 심성을 기를 수 있다. 그러나 요즈음의 신세대들은 부모의 지나친 사랑과 간섭, 집착과 통제 속에서 그러한 것을 스스로 배우지 못한다. 진정으로 자녀를 사랑한다면, 자녀의 올바른 성장을 원한다면, 제 2 부에서 말 한 그런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아이들에게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자율의 기회를 일상생활에서 최대한 많이 주는 것이 좋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 는 것이 자율의 기회를 많이 주 는 것일까? 네 가지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해 보자. 모든 계획을 아이 스스로 세우도록 한다 아이들이 자기를 스스로 다스리도록 하려먼 우선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스스 로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부터 시작함이 좋다. 밥을 먼저 먹고 숙제 를 할까, 숙제를 하고 밥을 먹을까? 숙제는 어느 것부터 할까? 나가서 뭐하고 놀까? 누구하고놀까? 어떤 옷을 입고 학교에 갈까? 머리는 오늘 깍으러 갈까, 내일 깍으러 갈까? 몇 시에 깍으러 갈까? 문방구는 머리 깍으러 갔다 오다가 들를까, 문방구부터 갔다 오다 이발소에 들를까? 문방구부터 갔다 오고,머리는 이따 저녁 먹고 깍으러 갈까 등등 하루생활 중에서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아이 스스로 계획하도록 하는 것이 곧 자율의 출발이다. 물론 이러한 계획을 세우는 일은 꼭 하루의 생활에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방학 같은 한 달이 넘는 긴 기간의 계획도 아이 스스로 세우게 할 수 있어야 한다. 한 달, 한 주 간의 짧은 기간의 계획도 아이들은 곧잘 자기 스스로 세운 다. 또는 아주 특별한 일, 이를테면 자기 생일날을 어떤 식으로 보낼까, 친구 몇 명이서 수영을 가기로 했는데 어디로 어떻게 가서 수영을 하고 올까 등의 일에 있어서도 아이들에게기회를 주면 아이들은 자기 스스로 계획을 잘 세운 다. 학습에 대한 계획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이 동화책을 일 주일 동안 다 읽 을 것이냐 아니면 열흘 동안 읽을 것이냐, 컴퓨터를 어떻게 어디에 가서 배울 까, 한자 공부도 하고 싶은데 하루에 두 자씩매일할까 아니면 방학중에 집중적 으로 할까? 이런 일에서도 부모는 자녀에게 얼마든지 자율의 기회를 줄 수 있 다. 사실 아이들은 부모가 이야기하기 전에 자기들 스스로 궁리를 많이 한다. 이 궁리가 곧 자기 스스로 계획을 세우는 것이며, 궁리가 곧 자기 스스로 계획을 세우는 것이며, 궁리를 하는 가운데 아이들은 여러 가지 유형의 사고력증진을 경험한다. ‚가만 있어 봐, 내일 오후에 서울에 비가 올 확률이 60%라고 하잖아! 그렇 다면 좀 애매한데….‛ 저녁 텔레비젼 뉴스를 본 초등 학교 5 학년인 아이는 방에 들어가 이 궁리 저 궁리를 자기 나름대로 한다. ‚60%라! 비가 안 오면 갖고 다니는 게 좀 귀찮겠지만 그래도 내일 우산을 갖고 가는 게 좋겠지! 내일 학교에서 공부는 2 시 반에 끝나고, 우리는 4 반 아이들 하고 한강 고수 부지에서 3 시 반부터 축구 시합을 하기로 했단 말야! 5 시 반쯤 끝나겠지!지는 팀에서 사 주든, 아니면 우리가 져서 우리가 사든 떡볶이라도 먹고 집에 오려면 저녁 6 시, 7 시는 넘을 텐데,그 때 만약 비가 오면 어떻게 하 냐! 괸스레 비 맞고 오다가 감기라도 걸리는 날엔 큰일이잖아. 다음 주에는 시 험 본다고 했는데…. 그래 내일 우산 갖고 가자!‚
이러한 계획을 아이 스스로 세우는 데는 꽤나 긴 기간이 걸렸다. 나름대로 여러 가지를 분석했다.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해 보았다. 자기 나름대로 심사 숙고를 한 것이다. 그리고 계획에 따라 아이는 아침에 학교에 가면서 신발장 옆 항아리에 꽂힌큰 우산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엄마의, 예나 다름없는 날카로운 소리가 귓전에 울린다. ‚우산은 왜 갖고 나가냐?‛ ‚오늘 비 온다고 해서요!‛ ‚어제 밤 일기 예보에 60%라고 했어요!‛ ‚야, 일기 예보가 맞는 것 봤냐! 그리고 60%밖에 안 된다며…. 너처럼 우산 乙 갖고 가기만 하면 잃어버리는 애도 이 세상에 없을 거야.‛ ‚안 잃어버리면 되잖아요!‛ ‚안 잃어버리는 것 좋아하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두고가! 그 우산, 아버 지가 골프 다닐 때 쓰시는 거야!‛ 아이는 결국 우산을 놓고 그냥 학교엘 갔다. 어제 밤 자기 스스로 이렇게 저 렇게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정한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그 후로 아이는 다시는 그런 생각을 안 한다. 그저 엄마에게 물어서 해결한다. 그것이 야단도 안맞고, 쓸데없이(?) 고민도 안 할 수 있어 편하기 때문이다. ‚엄마! 저 오늘 두산 갖고 갈까요, 말까요?‛ 엄마가 가져가라면 가져가고, 그냥 가라면 그냥 간다. 어찌 이런 일에서만 그러겠는가? 무엇이든지 아이는 엄마에게 물어서 계획한다. ‚저, 학원 갔다 와서 숙제할까요, 지금 밥 먹고 숙제한 다음에 학원 갈까 요?‛ ‚저, 지금 나가서 놀까요, 아니면 엄마 시장 다녀온 다음에 나가 놀까요?‛ ‚엄마, 나 지금 목욕해, 아니면 내일 할까?‛ ‚엄마,민구 생일날 걔네 집에 오라는데 갈까,말까?‛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결국 그 아이는 커 가면서도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스스로 판단하여 계획을 세울 수 없는 아이가 되었다면, 우리는 그 아이를 그냥 착하디 착한 아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계획이란 시간을 자기 스스로 관리하는 것이고, 또 그것은 부족한 자원의 사 용乙 극대화하기 위한 숙고적 행위이기도 하다. 어떤 목적을 적은 비용을 들여 효율적으로 성취하기 위한 깊은 사고이기도 하다. 하다못해 부모를 따라 뷔페 식당에 가서 무엇을 먹느냐도 경제적인 계획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속에도 여러 가지 유형의깊은 사고 행위가 개입된다. 물론 아이가 계획을 세울 때 부 모는 관련 정보를 제공해 주는 조언자일 수는 있다. 그러나 부모가 계획을 세 워 주거나, 아이에게 어떤 계획을 자기 스스로 세웠는지 물어 보지도 않고, 무 조건 일방적으로 부모의 계획을 따르도록 강요해서는 결코 자녀가 자율을 누릴 수 없는 것이다. 계획을 자발적으로 행동에 옮기도록 한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할 때, 그것을 누가 시켜서 하느냐, 아니면 자기 스스로 하느냐는 일의 과정이나 결과에서 여러 가지 차이를 가져온다. 자발적으로 하 는 경우에는 대체로 그 일을 하는 데 따른 지각의 장이 확대된다. 즉 눈도 더 크게 뜨여서 남이 못 보는 것을 보게 되고, 귀도 크게 열려서 남이 못 듣는 것 乙 듣게 되며, 머리 속의 생각도 아주 다양해진다. ‚엄마 나갔다 올게. 집안 청소나 좀 해 놓거라. 중학교 3 학년씩이나 돈 계 집애가 어찌 그러냐! 생전 치울 줄을 모르니! 네 방부터 좀 깨끗이 쓸고 닦아! 그리고 오빠 방도 깨끗이 닦아 주렴. 부엌은 그냥 놔 둬! 그것까지 어떻게 네 게 시키겠니. 그것은 엄마가 다녀와서 할 테니깐!‛
사실 그러지 않아도 아이는 오늘 자기 방을 청소하려고 했다. 오빠 방까지는 생각 안 했지만, 그래도 내 방은 오늘 한번 대청소하려고 계획을 세웠었다. 그 러나 엄마가 나가시면서 청소해 놓으라고 이르신 다음엔 오히려 하고픈 마음이 싹 가셔 버렸다. 그래도 어쩌겠냐, 해야지. 엄마 들어오시면 또 신경질내실 텐 데. 하기 싫었지만꾹 참고 오빠 방까지 청소를 했다. 정말로 마지못해 항 것이 다. 엄마는 예정하신 시간에 돌아오셨다. 그리고 오빠 방乙 슬쩍 보시더니만 소리치신다. ‚얘! 너 이게 청소한 꼬락서니냐?‛ ‚왜요?‛ ‚왜라니? 이것아, 저기 좀 봐! 저거 언제 벗어 놓은 양말인데 그냥 저 구석 에 있니? 빨래통에 갖다 넣어야 할 것 아냐! 그리고 청소를 했으면, 오빠 자고 일어난 자리 좀 정리해 주면 안 되냐? 도대체 무얼 청소한 거냐?‛ ‚저 양말 아까는 없었는데….‛ ‚그럼, 귀신이 와서 벗어 놓았냐? 아까는 없었다니,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 야?‛ 왜 아까는 안 보였을까? 하기 싫은 일을 하면 보여야 하는 것도 안 보이는 법이다. 반면에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의 경우에는 남들이 눈을 부릅뜨고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 것까지보 보게 된다. 책 읽을 때도 그렇다. 읽고 싶어 읽으 면 글자 뒤에 숨은 의미까지 이해하고 걔닫지만, 읽기 싫은 책을 읽으면 큰 글 자까지도 눈에 잘 안 들어오고 빼먹고 넘어가게 된다. 연애할 때도 그렇지 않 은가. 사랑하면 남들이 발견하지 못하는 상대방의 숨은 아름다움까지도 사랑하 는 사람 사이에서는 서로 찾게 되는 법이다. 문제는 어떻게 자기 스스로 하도록 이끄느냐이다. 우선은 지극히 작은 일부 터 계획을 스스로 세우게 한 다음, 그 계획을 누가 세웠는가를 일깨워 준다. 아이고 어른이고 누구나 다 어느 정도의 자존심이 있다. 자존심은 자기자신과 의 약속을 지키는 데서 일게 마련이다. 자기 스스로 세운 계획은 결국 자기와 의 약속이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 자존심은 상하게 마련이다. 이를테 면, 싸움을 자기 자신과의 싸움으로 유도 하는 것이 자기가 세운 계획을 스스 로 실천에 옮길 수 있도록 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된다. 무슨 일이든 자발적으로 할 때는 그 일에 대하여 그만큼 흥미나 관심이 있 고, 그 일에 대하여 보람과 가치를 스스로 느낄 때이다. 이는 결국 자녀가 일 에 대하여 관심과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보람과 가치를 느낄 수 있도록 이끌 어야 함을 의미한다. 여기에 아무리 예쁘고 귀한 보석이 있어도 그것이 예쁘다 는 것을, 귀하다는 것을, 그만큼 소유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모를 때는 그 보 석에 대한 소유욕이 생기지 않는다. 그런 사람에게는 보석이 예쁘고 귀하며 가치가 있음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공부나 그 외의 일에 대해서도 자녀에게 그것들의 그만큼 중요하 고, 가치 있고,보람 있음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 자발성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또한 성취감을 느끼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성 공의 기쁨이 나 성취감을 느꼈을 때 아이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 일을 자꾸 스스로 해 보고자 한다. 자녀의 자발성을 길러 주는 데는 부모의 인내심이 매우 중요하 다. 부모가 좀더 참고 기다리면 아이들의 자발성은 서서히 싹트게 마련이다. 그러나 부모의 조급한 마음이 때로는 지금 막 돋아나려는 자벌성의 싹을 한 번 에 잘라 버리는 수도 있다. 성취감과 부모의 인내심에 대해서는 뒤에 가서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자기 스스로 냉정하게 평가하도록 한다
재작년이었다. 수학 능력 시험을 치르고 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가지 조사 를 했다. 예상 점수를 적어 내게 했다. 그리고 한달 후에 수능 성적 발표가 있 자, 그들이각기 예상한 점수와 실제 점수가 어느 정도나 차이가 나는가를 비교 했따. 학생들의 반응이 크게 두 부류로 나타났다. 하나는 예상 점수와 실제 점수가 어느 정도나 차이가 나는가를 비교했다. 학생들의 반응이 크게 두 부류로 나타났다. 하나는 예상 점수와 실제 점수 간의 차이가 거의 없는 학생들이다. 차이가 조금 있다 해도 대체로 예쌍 점수 가 실제 점수보다 1,2 점 정도 낮았다. 즉,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이었다. 다른 하나는 예상 점수가 실제 점수보다 매우 높은 부류의 학생들이다. 이를테면, 400 점 만점에서 240 점쯤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실제로는 210 점밖에 안 나 온 것이다. 예상 점수보다 실제 점수가 2,30 점 이상 낮게 나타난 학생들을 모아 놓고 따 져 본 결과, 이들은 학교에서의 학업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았다. 여기서 보면,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평가함에 있어 그 어떤 사람들보다 객관 적이고 냉정하다. 반대로, 공부를 잘 못 하는 학생들은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평가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너그럽고 후하며, 대충대충 넘어간다는 얘기다. 이런 점은 어렸을 때 아이들의 행동에서도 쉽게 나타난다.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은, 또는 공부를 잘 할 가능성을 지닌 아이들은 학교에서 시험을 보고 난 후 집에 와서 그것을 따져 볼 때 냉정하고 철저하다. 예컨대, 두 개는 분명 히 틀렸고, 세 개는 긴가민가하다고 하면 다섯개 개 틀린 것으로 간주한다. 남 이 자기를 후하게 평가해도 자신만큼은 스스로를 무섭도록 냉정하게 평가한다. 그러나 공부를 잘 못 하는 아이들은 긴가민가한 것은 모두 맞은 것으로 간주한 다. 아주 확실하게 틀린것만을 틀린 것으로 말한다. 공부를 잘 못하니 확실히 틀렸음을 아는 경우가 진짜 틀린 것보다 많을 리가 없다. 그러고 보면 열 개를 틀리고도 두 개밖에 안 틀렸다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우수한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에 대하여 잘 안다는 얘기 다. 곧 자아에 대한 냉정한 평가는 남과 경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 와의 싸움이라고 생각함을 의미한다. 사회적으로 큰 업적을 이룬 사람들이나 공부에서 남달리 탁월한 능력을 발 휘하는 학생들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들이다. 남을 의식하고 남과 견주어 보 고, 남과의 싸움에서 이기려고 신경 쓰지 않는다. 자기가 설정한 수준이나 목 표에 도달했는가를 자기가 설정한 기준에 맞춰 자기 방식으로, 객관적으로 냉 정하게 평가한다. 반면에 우수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을 잘 모르고, 또 자신을 과대 평가한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질문하는 것을 보아도 쉽게 느낄 수 있다. 우수한 학생 은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분명히 안다. 따라서 이들은 질문도 많고, 또 질문을 해도 요점이 분명하다. 예컨대, ‚ 선생님, 아까 임진왜란이 일어난 원인의 하나로 국론 분열을 말씀하셨는데, 그러면 당시에 국론이 어떻 게 분열되었습니까?‛하고 묻는다. 그러나 우수하지 않은 학생은 자신이 무엇 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모른다. 즉 자기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져 있 지 않다. 따라서 질문에 요점이 없을 수밖에. 이들은 그냥 전체를 다시 이야기 해 달라는 식의 질문을 한다. 이를테면, ‚선생님, 임진왜란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얘기해 주세요.‛하는 식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녀에게 공부를 열심히 해라, 1 등을 해야만 한다, 100 점을 맞아야 한다면 강요할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보다는 각자가 자기 자신에 대하
여 더욱 냉정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 있는 습성을 길러 주어야 하지 않는 가? 혼자서 공부를 하거나 어떤 일을 할 때, 그가 그것을 잘 했는지 못 했는 지, 했으면 어느 정도나 했는지를 스스로 따져 보고 스스로 평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부모가 따져 주고, 잘 했느니 잘 못 했느니 판정을 내 려 주기보다는 그런 일을 아이 스스로가 해낼 수 있도록 아이들에게 기회와 권 한을 넘겨 주는 것이 공부 잘 하라고야단치는 일보다 더 바람직하다. 그러기에 소크라테스라 말하지 않았는가. 너 자신을 알라고!! 결과를 자기 스스로 책임지도록 한다 중학교 3 학년인 은영이가 중간 시험을 보고 집에 돌아왔다. 아이의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집에 돌아온 아이에게 다그쳐 묻는다. ‚그래, 오늘 시험 어땠니? 잘 봤어?…잘 봤나 보구나. 너, 오늘 세 과목이 었지. 국어,생물,한문….‛ ‚….‛ ‚아니, 왜 대답이 없어! 망쳤니?‛ ‚몰라요, 묻지 마세요!‛ 은영이는 더 이상 아무 말 않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아 버렸다. 아이의 성격을 잘 아는지라 엄마는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은영이는 방에서 혼자 책상 앞에 앉아 분을 삭이려는 듯했다. 씩씩대면서, 책 상 앞에 놓인 거울 속으로 자신을 응시하면서 자책했다. ‚이 바보야! 그래, 그런 것을 틀리면 어떻게 하냐? 어제 기껏 써 보고도 그래, 그것이 생각 안 났 단 말이냐? 한문에서 세 개나 틀린 것이 분했던 모양이다. 좀더 확실하게 익혀 두지 못했던 자기의 잘못을 스스로 질책했다. 그러나 같은 반에 다니는 종원이는 행동이 달랐다. 종원이 엄마 역시 종원이 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가방을 받아 주면 물었다. ‚너, 오늘 세 과목 시험 본다고 했지? 그래 어떻게 보았어? 또 잘 못 보았 냐?‛ ‚엄마, 근데 참 이상해!‛ ‚뭐가?‛ ‚우리 학교는 왜 맨날 시험을 어렵게 내는지 몰라! 오늘 시험은 하여간 엄 청 어려웠어! 엄마도 알지, 우리 반에서 늘상 1 등 하는 아이 있잖아! 은주말 야, 김은주.‛ ‚그래! 근데 걔가 어쨌는데?‛ ‚글쎄, 걔도 모두 열두 개나 틀렸대. 국어에서만 여덟 개나 틀리고, 생물은 다 맞았는데. 또 한문에서 네 개가 틀렸대!‛ ‚너는 그래서?‛ ‚나? 나도 좀 많이 틀렸나 봐! 애들이 모두 어렵다는데…. 딴 애들도 모두 많이 틀렸나 봐!‛ ‚그러면 그렇지! 네가 잘 볼 리가 있겠냐?‛ 종원이 엄마 역시 더 이상 따져 묻지 않았다. 그렇다면 은영이하고 종원이 두 사람 간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어떤 사람 이 일을 하고 난 다음에 그 일이 잘못되었을 때 책임을 따지는 유형은 두 가지 가 있다. 하나는 책임을 자기 안으로 돌리는 경우이다. 자기 밖으로 돌린다는 말은 잘못 된 탓이 자기 밖의 조건, 이를테면 환경의 문제라든가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 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선생님이 시험을 어렵게 냈기 때문에, 시험 보는 날 추워서, 내가 앉은 자리가 바로 스팀 옆이었는데 스팀 나오는 소리에 신경 이 쓰여서, 아버지가 늦게 데려다 주는 바람에 뛰어가서 시험 보느라고 시험을
망쳤다는 등등의 경우가 그렇다. 종원이가 바로 여기에 속한다. 그런가 하면 책임을 자기 안으로 돌리는 사람은 그 일이 잘못된 이유를 자신의 노력이 부족 해서라든가, 자기가 성실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또는 자신이 그 일을 하는 순간 정신을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은영이가 이 부류에 속한 다. 그런데 대체로 큰 일을 성취하는 사람들, 자기 스스로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들은 책임을 자기 안으로 돌리는 성향이 강하다. 남의 탓, 환경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은 자율성이 강한 사람들이다. 자녀에게 자율성을 높여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야 말로 일상의 작은 일에서부터 아이가 스스로 책임을 지는 법을 가슴에, 몸에, 머리에 익히도록 하여야 한다. 특히 무조건 부모의 탓으로 돌리려는 습성이 강한 요즈음 신세대 들의 행동 성향은 자녀를 지나치게 과잉 보호하여 생긴 것은 아닌가 깊이 생각 해 봐야 한다.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도, 대구에서 가수관이 폭발했을 때도, 그리고 얼마 전 한보 부두 사건이 터졌을 때도 우리는 경험하지 않았던가! 누가 하나 나서 서 자신의 책임이라고 떳떳하게 밝히는 사람이 없음을. 지도층 인사는 물론,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자기 맡은 일에서 저마다 책임을 다할 때만 그 사회가 건강해진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만이 더불어 사는 사회, 생산성이 높은 사회가 될 것이다. 가정에서도 남편은 남편의 책임을, 아내는 아내의 책임을, 자녀는 자녀의 책임을 다할 때 온전한 가정이 될 수 있다. 2.경험: 다양한 경험을 하도독 한다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 주변에는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꽤 많다. 입지적인 인 물도 많다. 이들은 대부분 그렇게 학벌이 높지도 않고, 돈 많은 집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성장한 것도 아니다. 어려서부터 찌든 가난 속에서 온갖 것을 경험하면서, 그야말로산전 수 전 다 겪고, 쓴맛 단맛 다 맛보면서, 자기 힘으로 공부를 했고 오늘날 그만한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대체로 의지가 강하다. 어려운 문제에 부딪쳐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스스로 해결하려는 강안한 의지를 지녔다. 이들은 어떤 현상이나 문제를 들여다보는 데도 남달리 예지어린 통찰력을 발휘한다. 생각의 폭이 넓 고 깊다. 사람들에 대한 포용력도 뛰어나다. 그런가 하면, 아주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아쉬움 없이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다 가지며 성장한 사람들, 한 마디로 부모를 잘 만나 어려 움 없이 자란 사람들도 있다. 외국 유학을 가서도 서울에서 부쳐 주는 돈으로 좋은 차를 사서 몰고 다니면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공부하고, 돌아와서도 이렇 게 저렇게 좋은 연줄로 좋은 곳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사람들을 자 수성가한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대체로 문 제 해결 의지도 약하고, 통찰력도 뒤진다. 책을 통해 익힌 지식은 많지만 실제 로 그것이 삶의 터전에서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돌아가는 지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한 마디로 사고의 폭이 좁아 생각머리가 없다는 소리도 자주 듣 는다. 박사면 뭘 하고, 공부를 많이 했으면 뭐 하냐는 소리도 듣는다. 그렇다 면 이들은 무엇이 문제인가? 남자들의 경우, 군대를 갔다 와야 사람이 된다고 한다. 사실 학교에서 학생 들을 가르칠 때 보면 군에 갔다 복학해서 다니는 학생들의 태도는 군에 가기 전과 사뭇 다르다. 행동에서 더욱 사려가 깊어졌고, 말 한 마디에도 생각이 서 렸고, 선생님을대하는 태도도 바르고, 또 스스로 공부하는 태도도 지극히 열성 적이고 주체적이다. 삶의 목표도 분명하게 세웠고 그것을 성취하고자 하는 의 지도 강하다. 흔히들 어른들이 철이 들었다고 말하는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듯싶다. 군대에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쳤길래 그렇게 되었을까? 사실 2 년 넘도록 군에 가 있으면서, 젊은이들은 엄청난 경험을 한다. 단체 생활 속에서의 다양한 경 험을 통해조직 구성원으로서의 자세와 태도도 배우고, 처음엔 결코 해낼 수 없 을 것 같은 일도 끝내는 강한 의지도 기르게 된다. 내 경우에도 그렇다. 큰아 들 녀석이 논산 훈련소에서 공수 부대로 배치되었을 때, 처음엔 안색이 다 바 뀌며, 실망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러나 아이는 이내 적응했고, 지금은 비행기 나 기구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 뛰어내리는 일에 자신있어하고, 자신도 신기해 할 만큼 의지력도 강해졌다. 이처럼 성장기에 겪는 다양한 경험은 지적인 성숙이나 정서적인 성숙 등 모 든 면에서 커다란 밑거름이 된다. 특히 몸으로 부딪쳐 겪는 여러 가지 경험들 은 지적인 능력이나 정서적인 태도, 이를테면 지성과 감성을 골고루 갖추도록 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옛날 사람들이 믿었던 최고의 교육은 직접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감각 적 실물 현장 교육이었다. 그냥 책을 읽어서 아는 것보다 내 눈으로 직접 보면 서 몸으로 해 보고,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 교육에서 진정한 배움을 가져다 준 다. 초등 학교 2 학년 교실에서다. ‚자, 오늘 20 쪽 배울 차례예요. 모두들 조용히 하고….‛ 선생님은 칠판에다‘봄비’라고 크고 예쁘게 적는다. ‚누가 읽어 볼까요?‛ ‚저요!‛ ‚그래, 은준이가 읽어 보자!‛ ‚봄비. 봄비가 내립니다. 보슬보슬, 봄비가 내립니다. 소리 없이 조용히 봄 비가 내립니다.‛ ‚그래, 잘 읽었어요! 우리 모두 박수 쳐 줘요.‛ ‚짝짝….‛ ‚자, 선생님이 다시 읽으면서 설명해 줄게요. 봄비, 봄비가 내립니다. 봄비 가 내린다고 했어요! 그 다음이 중요해요! 봄비가 어떻게 내리는가요? 보슬보 슬, 봄비가보슬보슬 내린다고 했어요! 보슬보슬, 모두 따라 해요! 보슬보슬.‛ ‚보슬보슬.‛ ‚그래, 아주 잘 했어요! 보슬보슬, 여기다 밑줄 그어 두어요! 아주 중요한 표현이에요!‛ 그리고 한 달 후, 시험에 나왔다. 다음 중 봄비가 내리는 모습을 가장 잘 나 타낸 것은? ㄱ) 푸슬푸슬, ㄴ) 부슬부슬, ㄷ) 보슬보슬, ㄹ) 비실비실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맞추었을까? 아이들은 보슬보슬이란 어휘를 어떻게 머 리 속에, 가슴 속에 익혀 두었을까? 그냥 무조건 외웠을까? ‘보슬보슬,보슬보 슬’수없이 반복한다. 나중엔 별의별 연상도 다 한다. ‘아, 봄비, 보-ㅁ 비, 그러니까 보-슬,보-슬이구나!’ 물론 그런 아이가 몇이나 되겠느냐 반문할 수 도 있지만, 지금까지의 공부 방식은 그냥 그렇게 책의 내용을 외웠음을 지적하 기 위한 예다. 그렇다면 정말 제대로 된 공부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정말 봄비가 조용히 내리는날을 택해서 공부를 한다면? ‚어린이 여러분! 지금 창 밖에 봄비가 내리고 있어요. 우리 모두 창가로 가 봐요! 그리고 조용히 내다봐요! 여러분 무슨 소리 안 들려요? 봄비 소리, 아주 부그러운 듯 조용히 내리는 봄비 소리, 보슬보슬, 아주 조용히 내리는 봄비 소 리가 들리지요!들릴락말락 하는 저 봄비 소리! 그 소리를 여기서는 보슬보슬이 라고 했어요! 이런 경우 아이들은 그 소리를 가슴 속 깊이 느낄 것이다. 이것이 곧 감각을
통해 온몸으로, 온 몸 마을으로 느끼는 학습이다. 이것이 곧 감각을 통한 현장 의 실천 또는 경험 교육이다.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 보 고, 가슴으로 느끼는 교육인 것이다. 요즈음의 신세대들은 지금 어른들의 어린 시절보다 정보에 접하는 기회가 휠 씬 많다. 컴퓨터라든가 텔레비젼 등 다양한 정보 매체를 통해서 많은 정보를 접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만큼 영리해 보인다. 특히 지금의 어른들이 그들 나 이였을때 비하여 지금의 아이들은 휠씬 영리해 보인다. 그러나 그대신 그들에 게는 감각적으로, 즉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가슴으로 느끼고, 손으로 만져 보는 경험의 기호가 휠씬 적다. 그래서 그들의 사고는 얄팍하다. 겉으로 는 꽤나 영리한 옷으로 포장되었지만 그 옷을 조금만 벗겨 보면 생각이 짧고, 좁고, 얕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신세대 자녀들의 사고력을 계발하고, 감 성을 풍부하게 하고, 행동적 기능을 성숙시키도록 하려면 가능한 한 그들에게 경험의 기회를 많이 만들어 주어야 한다. 시각적 경험의 기회를 만들어 주어라 엄마는 다섯 살 먹은 어린 성은이를 데리고 백화점엘 갔다. 일전에 사서 허 리를 줄여 달라고 맡겨 좋은 치마를 찾으로 간 것이다. 엄마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 층 왼쪽 코너를 가기 위해 아이의 손목을 꼭 잡고 부지런히 움직인다. 그러나 아이는 백화점 안에 있는 온갖 것들이 모두 재미있는 듯 두리번거린다. 그러다 이윽고 엄마에게 말을 건넨다. ‚엄마, 저것 좀 봐! 저거 참 예쁘지?‛ ‘뭘 봐! 너 때문에 괜히 넘어질 뻔했잖아! 엄마 손이나 꽉잡아! 그렇게 한 눈팔다가 엄마 손 놓쳐서 집에 못 가면 어쩌려구! 자꾸 그러면 엄마 혼자 그냥 갈 거야!…‚ 아이는 엄마의 그런 말에 한눈도 못 팔고 엄마 손을 꼭 잡은 채 앞만 보고 따라갔다. 저녁에 아빠가 물었다. ‚어이구, 우리 성은이. 오늘 엄마따라 백화점에 갔다 왔어요? 그래, 거기 가서 무얼 보았어요?‛ 아이는 대답을 안 했다. 안 한 것이 아니라 대답할 것이 없었다. 한눈 팔다 가 괜스레 엄마한테 군밤만 한 대 먹었다. 그저 앞만 보고 왔으니 뭐 본 것이 있겠는가? 아이들이 세상을 두루두루 보지 못하게 하고 있음은 엄마들이 평소 아이에게 이르는 말을 보면 금방 나타난다. ‚너, 수업 끝나면 곧장 와야 돼! 놀다 오거나, 한눈팔다 오면 안 돼! 알았 니? 엄마가 시간 재 볼 거야!‛ 그렇게 말하는 엄마들은 예날에 어땠는가? 공부가 끝나면 학교에서 한눈 안 팔고 집에 곧장 왔는가? 숙제한답시고 친구네 집에 들러서 고무줄놀이, 공기놀 이, 소꿉놀이 하면서 놀고, 밥 먹고 그러다가 오지 않았는가? 초등 학교 어린 시절 기억이 난다. 우린 학교에서 수업이 끝나면 뒷산을 넘 어야 집엘 왔다. 산중턱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 왔다. 온종일 참았던 오줌을 각자 정해 놓은 개미 구멍을 향해 누고는 그 속에서 개미가 떼지어 기어 나오 는 것을 보면서 깔깔댔고, 물가의 작은 웅덩이에서 올챙이와 개구리도 잡고, 초겨울이면 웅덩이 물을 퍼 내고 그 진흙 속에서 미꾸라지 몇 마리 건지느라고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가을이면 메뚜기 잡아 길고 큰 청주병에 담느라고, 또 는 안골 산을 넘어 밤을 따러 다니다가 해질녘에 집에 들어갔다. 한눈을 엄청 팔았다. 또 5 일장, 7 일장이 서는 날이면 엄마, 아빠 따라 읍내 시장에 가서 온 종일 구경하다 돌아왔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연을 보았고, 계절을 보았다. 비록 백화점 따위는 없었지 만 우리는 떼지어 다니면서 풍성한 자연을 통째로 본 것이다. 그랬기에 지금의 어른들은 EQ 니, 감성 지수니 하고 유난법석을 안 떨었어도 자연스럽게 그런 감 성을 기를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돈 들여 여행은 못 다녔지만 우리는 이 동네, 저 동네, 이 산, 저 산,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자연을 여행하였다. 십 리, 이십 리 정도는 매일 그냥 걸어다녔다. 그리 고 그 속에서 여러가지 문화와 삶을 눈으로 직접 보았다. 어린 시절의 그런 경 험이 오늘의 어른들에게는 사고력을 갖게 했고, 따듯한 가슴과 건강한 몸을 갖 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른들의 어린 시절에 비하여 요즈음 아이들은 자연과의 접촉 기회가 휠씬 적다. 온 식구가 정말 벼르고 별러서, 돈을 들이고 계획을 세워야만 자연 을 볼 수 있다. 도시화가 확산되면서 아이들이 놀이 공간은 좁아졌꼬, 그것도 자연적이기보다는 인위적이다. 그러다 보니 눈으로 직접 보는 것들도 지극히 제한되어 버렸다. 게다가 그나마도 마음놓고 볼 수 없을 만큼 하루가 꽉 짜여 있다. 바쁜 일정으로 아이들은 한눈을 팔 수 없다. 모두들 익히 경험한 일이지만, 아이들이 조금만 크면 엄마, 아버지와 함께 다니려 하지 않는다. 자기들끼리 다니려고 하면 그렇게 하게 해 줌으로써 그들 스스로 많은 것을 보게 해야 한다. 그리고 엄마랑 같이 가자고 하면 군소리 없 이 따라 나설 그런 어린 나이에는 가능한한 많이 데리고 다니면서 세상을 두 눈으로 직접 보게 함이 좋을 것이다. 엄마와 아이가 똑같은 것을 보았을 때도 그것이 두뇌 속에 각인되고 가슴에 새겨지는 것은 크게 다르다. 아이들이 직접 눈으로 본 것은 아직도 순하디 순하고 맑은 아이의 두뇌와 가슴에 엄마의 경우 보다 꽤나 강하게 새겨진다. 어렸을 때 한눈 많이 판 아이들은, 커서는 오히려 한눈을 안 판다. 어렸을 때 그저 방 안에서 공부만 한 아이가 훗날 어른이 되어서 한눈을 파는 경우를 흔히 보지 않는가? 한눈을 팔아서는 정말 안 되는 나이에 말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성인 비디오나 성인 영화를 무조건 보지 말라고 한다. 물론 그것을 보지 않는게 좋을지 모른다. 더욱이 제대로 판단하기 어려운 나이 에 그런 것을 본 아이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그러나 사춘기에 접어든 많 은 아이들은 어른 몰래 저희들끼리 보는 경우가 많다. 내집 아이만은 그러지 않으리라고 단정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그런 것을 만들어 낸 어른들에게 왜 그런 것을 만들어 냈느냐고 따지고 벌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 것을 아이들끼리 보았다는 사실을 나중에 어른이 알았을 때, 어른들은 그런 것을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야단치고, 윽박지르고, 다시는 안 보겠다는 의미 없는 약속을 강제로 받아 내려 한다. 그 러나 이러한 어른들의 행동이 더 문제다. 그런 경우 어른들은 오히려, ‚그래, 그런 것도 한 번쯤 볼 필요는 있어! 문제는 그것을 본 네 느낌이야.‛ 하면서 아이와 함께 이야기하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 그런 성인물을 봤다고 해서 아이 들이 자라는 데 부정적인 영향만을 주지는 않는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 본 다. 오히려, 이와 봤다면 야단치기보다는 그것을 좀더 긍정적인 대화의 기회로 삼아 아이들의 사고력과 판단력의 폭과 깊이를 더해 주는 게 좋지 않을까?
청각적 경험의 기회도 만들어 주어라 옛날 대가족 제도가 지녔던 장점의 하나는 구성원들 간의 풍족한 대화였다. 특히 그 때는 사람의 눈과 귀를 빼앗는 텔레비전 같은 것도 없었기에, 저녁을 먹고 난 후나, 여유가 생길 때마다 어른이고 아이고 모두 모여 이런저런 이야 기를 많이 했다.
어른들이 이웃집에 마을을 가면 아이들도 따라 나섰다. 마을이란 이웃집에 가 서 모여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또래와 함께 장 난치며 놀기도 하고, 어른들 옆에 앉아서 다양한 주제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를 들었다. 말하자면, 귀로 듣는 경험의 기회를 풍부하게 가졌다. 그렇게 따지면 오히려 요즈음의 신세대들이 각종 영상 매체를 통해서 보고 듣는 것은 휠씬 더 많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점은 사람 을 직접 만나서 눈으로 보는 점도 아니고, 서로 감정을 나누며 귀로 듣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대가족 제도에서의 경험은 연령층이 지극히 다양하다는 데 특징이 있다. 아주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엄마, 삼촌, 고 모, 형, 동생, 그리고 이웃에 마을 가면 그 곳의 할머니, 할아버지 ,아저씨, 아주머니 등 다양한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이 지금의 신세대와 다르다. 신세대들은 온종일 세가지 유형의 목소리를 듣는다. 하나는 학교에 가서 듣 는 선생님의 말씀이고, 다음은 학원에 가서 듣는 학원 선생님의 말씀이다. 그 리고 세 번째는 집에 와서 듣는 ‘이북 방송’이다. 이북 방송이라니까 놀라겠 지만, 그것은 비유적 표현이다. 이북 방송 채널처럼, 집에 오면 아이들이 듣는 목소리는 하나뿐이다. 바로 엄마 채널이다. 또 이북 방송은 사상 교육뿐 아닌 가. 마찬가지로 집에서 듣는 유일한 방송인 엄마 방송은 시작했다 하면, 공부 하라는 한 가지 사상 교육뿐이다. 그 외에는 아이들이 들을래야 들을 수가 없 다. 들려 주는 사람도 없고, 또 아이들이 워낙 바빠서 들을 시간도 없다. 어느 집에서의 모습이다. 아이의 할머니는 모처럼 초등 학교 6 학년에 다니는 손주 녀석과 나란히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할머니는 이가 시려서 잘 드시지 못하지만, 그래도 손주 녀석이 떠 준 게 기특하고, 또 같이 있으니 좋 아서 함께 먹는다. 그리고 손주 아이는 할머니에게 이것저것 묻는다. ‚할머니! 할머니도 옛날에 어렸을 때 시골에서 이런 아이스크림 많이 먹었 어?‛ ‚아이스크림? 이런 아이스크림이 그 때 어디 있끼나 했남! 해방 후, 그것도 한참 후엔가 아이스케키라는 것이 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뭐 그런 것 먹었 남!‛ 아이는 자못 신기한 듯 열심히 듣는데, 바로 그 때 부엌에서 나온 엄마는 아 이를 향해 매섭게 묻는다. ‚종옥아! 너 숙제는 다 했니?‛ ‚네!‛ ‚학습지도 오늘 거 다 했어?‛ ‚네, 다 했단 말예요!‛ ‚그럼 공부할 게 없어?‛ 그러자 아이는 엄마의 뜻을 눈치챈 듯 슬그머니 할머니를 보면서 일어설 궁 리를 한다. 그러자 할머니도 역시 알았다는 듯 먼저 손주에게 이른다. ‚자, 종옥이는 이제 그만 들어가서 공부해라! 할머니는 이앞 노인정에나 가 볼란다!‛ 할머니는 마치 큰 잘못이라도 한 듯 괜스레 손주 녀석 붙들고 앉아 공부도 못 하게 했는가 싶어, 며느리 눈치를 보며 힘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할머니가 손주 아이와 그렇게 앉아 이야기하는 것은 모두 쓸없는 시간 낭비 일까? 할머니, 할아버지가 집에 계시다는 것이 자녀 교육에 더없이 좋은 환경일 수는 없는가. 아이가 할머니에게 듣는 이야기는 모두 의미 없는, 쓸데없는 이야기 뿐일까? 한 번 생각해 봄이 좋을 듯싶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것도 여러 유형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어려 서부터듣고 자라면 지력도 기르고 감성乙 높이는 데 도움이 됨을 굳이 강조하 지 않아도 될 성싶다. 남의 이야기를 들어서 얻는 정보도 많겠지만, 그것이 실
마리가 되어 커지고확산되는 생각은 더함 없이 소중하다. 혼자서는 생각 안 나 지만, 남들하고 얘기하다 보면 생각이 마구 솟는다. 또한 다른 사람의 이야기 를 듣는 경험은 듣는 방법이나 자세를 키워 주고, 다양한 표현 방법도 접하게 하며, 말의 숨겨진 의미나 비유도 배우게 한다. 게다가 서로의 언어 행위를 통 해 이해와 수용의 관계도 터득할 수 있다.이처럼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듣는 경험은 아이들의 성장을 크게 돕는다. 대화의 경험을 풍부하게 해 주어라 내가 하루 중 가장 행복을 느낄 때는, 저녁 때 집에서 가족과 함께 밥을 먹 으면서같이 웃고 떠들 때이다. 이 때 우리는 많은 대화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무게 있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은 아니다. 등소평 사후의 중국이 어떻 게 변할 것인가, 우리는 이 경제 난국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뭐 그런 이야 기는 안 한다. 지금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지만, 아이들이 어렸을 때 우리의 식 탁 대화는 주로 그 날 각자가 보고, 듣고, 겪은 얘기들이었다. ‚엄마, 오늘 우리 학교에 영어 선생님이 새로 오셨는데, 첫수업 시간이 얼 마나 재니있었는지 몰라!‛ ‚아빠, 우리 반에 오늘 김포에서 전학 온 아이가 있는데, 그 애가 글쎄 태 권도가초단이래!‛ ‚여보, 오늘 슈퍼에 갔다가 거기서 윗집 할머니 만났는데 그 집 지점장 아 저씨가정년 퇴임을 하셨는가 봐!‛ ‚야! 오늘 아버지가 H 대학교 A 캠퍼스에 갔는데 갬퍼스가 진짜 크고 좋더라! 캠퍼 스 외형만 큰 게 아니라 거기 학생들, 공부도 정말 열심히 하고 교수들도 꽤 열심이더라.H 대가 엄청 발전하고 있어!‛ 뭐 그런 얘기들이다. 그러는 가운데 서로 농담도 하며 깔깔웃기도 하고, 때 론 의견 차이로 티격태격하기도 한다. 큰아이가 대학에 갓 입학해서는 주로 처 음 경험하는 신나는 대학생활 얘기에 온 식구가 귀를 기울였다. 아이 엄마는 마치 자기가 대학에 다니는 양, 매일 저녁 아이의 얘기를 기다렸다. 식구들이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경청하는 자세, 특히 부모가 자녀의 이야기 에 관심과 흥미를 보이는 일은 아이에게 큰 용기가 외어, 아이가 사람들을 열 심히 만나고, 열심히 듣고, 열심히 보게끔 한다. 사실 요즈음 가정의 공통적인 문제의 하나는 가족 간의 대화가 점점 줄어든 다는 점이다. 부부 간의, 부모와 자녀 간의, 형제 자매 간의 대화가 점점 적어 지고 있다.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식당에서 나이가 엇비슷한 남녀가 식사를 하 는데, 서로 별말이 없이 밥만 먹으면, 그들은 부부 사이라고 짐작하게된다. 부 부는 말이 없다. 그냐밥만 먹을 뿐이다. 그것도 싼 것을 먹는다. 운전할 때도 그렇다. 신호등 앞에서 대기하면서 백미러로 뒷차를 봤을 때,앞자리에 함께 탄 남녀가 아무 말이 없이 앉아 있으면 그들은 십중팔구 부부일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왜 이토록 부부 간에, 부모 자녀 간에 대화가 줄어드는 것일까? 모두 이야기 안 해도, 눈빛만 보아도 뜻이 통해서일까? 아니면 사랑이 식어서일까? 모두 제 작기 바빠서일까? 대화를 통한 언어적 경험은 가정 밖에서도 다양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가 정에서 부모와 나누는 언어적 경험은 여러가지 뜻과 가치를 지닌다. 이를테면, 문제 해결의실마리를 찾고, 부모와 자녀 사이에 공감대를 형성하며, 상호 이해 를 통한 완전한 심리적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의식을 돈독케 한다. 그럼에도 대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데는 부모의 책임이 더 크다. 특히 자 녀와 대화하는 가운데 부모가 어떤 것에 관심과 흥미를 갖고 자녀의 이야기를
들어 주며,질문을 던지냐에 따라서 대화의 양과 질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특 히 어린 자녀들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겪도록 이끄는 데 부모의 관심 있는 질문은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모처럼의 연휴인 주말에 중학교 2 학년인 아들을 인천 큰아버지 댁에 다녀오 도록 했다. 하룻밤 자면서 대학 다니는 사촌형과 이야기도 하라고 보냈다. 저 녁에 아이가돌아왔다. 그리고 식탁에 앉아서는 큰집에 가서 보고 들은 이야기 를 한다. 이 때 부모는 어떤 질문을 해야 좋을까? ‚엄마, 거기 있잖아, 연세대 다니는 형 말야! 그 형, 컴퓨터 새로 샀더 라!‛ 엄마는 아이의 말에 아무런 반응을 안 보인다. 그리고는 불쑥 아이에게 묻는 다. ‚음…근데, 큰아버지가 네게 돈 안 주시더냐?‛ ‚무슨 돈?‛ ‚무슨 돈이라니? 용돈말야! 차비하고 공책 사서 쓰라고 용돈 점 안 주시 든?‛ ‚아니, 안 주시던데!‛ ‚그럼, 큰엄마가 주셨냐?‛ ‚아니, 아무도 안 주셨어!‛ 그러자 엄마는 아이들 듣는 데서 큰집에 대한 비난을 퍼붓는다. ‚아니, 그래, 어린 조카가 오랜만에 갔는데, 용돈 한 푼 안주냐. 하긴 너희 큰엄마, 큰아버지가 원래 짜다는 건 시집오면서부터 알아봤지만, 그래도 그렇 지… 그렇게 하니까 그렇게 해 놓고 산다마는….‛ 이 때 아이는 무엇을 느꼈을까? 그리고 무엇에 관심을 갖게 될까? 아마도 아 이는 그 다음에 큰집에 가게 될 때는 이분들이 내게 돈을 왜 안 주시나, 이제 나 저제나 돈 줄 때만 기다릴지도 모른다. 돈을 주었다고 하면 대부분의 엄마들은 어떻게 하던가? ‚그래, 얼마를 주시든? 어서 꺼내 봐!‛ 아이는 주머니 속에서 꺼내기 싫은 듯 만 원짜리 지폐 한장을 꺼내 보인다. 그러면 엄마는 다시 큰 소리로 아이에게 말한다. ‚아니 안 주면 안 주지. 그래 겨우 그거 한 장 주시든? 참,나 원… 그런데 그건 왜 도로 주머니에 넣냐? 이리내놔! 엄마한테 맡겨, 엄마가 맡아 뒀다가 나중에 줄게.‛ 이럴 경우 아이들은 큰집에서 돌아오는 길에 무슨 생각을 할까?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르겠다. ‘집에 가서 엄마에게 오천원만 받았다고 할까? 삼천 원만 받 았다고 할까?’ 아마 삥땅칠 궁리만 할 것이다. 이렇듯 부모의 잘못된 질문은 아이와 관련된 모든 일에서 늘상 일어난다. 소 풍을 갔다 오면 엄마들은 아이에게 다그쳐 묻는다. ‚얘! 너, 그거 선생님 갖다 드리라는 것 갖다 드렸니? 가자마자 드렸니? 가 서 한참 있다가 드렸니? 모여 있을 때 드렸니? 아니면 흩어져 점심 먹으려 할 때 드렸니? 너 혼자 가서 드렸니? 딴 애들 갖다 드릴 때 같이 가서 드렸니? 선 생님이 니가 가져온 줄 알지? 엄마한테 고맙다 말하라고 하든, 안 하든? 선생 님이 나중에 잡술 때,네가 가져간 것으로 잡숫든? 딴 애가 가져온 것으로 잡숫 든?…‛ 그러나 아이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면 아이의 행동은 어떻게 달라질까? ‚얘! 그래, 큰아버지 안녕하시든?‛ ‚몰라. 왜 큰 아버지 아팠어?‛ ‘이 녀석아, 큰아버지 얼마 전에 허리 다치셔서 이틀씩이나 꼼짝 못 하고 누워 계셨잖아! 그래,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으시든?‚ ‚응, 그런가 봐!‛
‚큰 엄마가 네게 뭐라시든?‚ ‚암말도 안 했는데!‛ ‚왜 아무 말씀도 안 하셨겠니? 네가 잘 듣지를 않았겠지!‛ 이 아이가 큰집에 다시 가게 될 때 무엇을 보려 하고, 무엇을 들으려 할까? 우서은 어른들이 안녕하신가를 살펴보고, 어른들의 말씀을 귀기울여 열심히 듣 고 열심히 살펴볼 것이다. ‚그래, 소풍은 재미있었니? 거기 가서 독립 선언문에 적힌 33 인 모습을 이 렇게 해 놓은 것 보았니? 거기서 누가 설명을 해 주든?…‛ 소풍 다녀온 아이와 엄마, 아버지가 이러한 질문을 하면 아이는 그 다음 소 풍 때부터는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보고, 들어야 할 것을 제대로 듣는 일에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이처럼 일상의 대화에서 부모가 무엇에 관심을 갖고 열 심히 을어 주느냐에 따라 아이의 행동이 엄청나게 차이난다. 퇴근길에 라디오에서 학교 폭력으로 어려움을 겪는 자녀를 둔 부모의 하소연 을 들었다. 놀라웠던 것은 자녀가 학교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급우들과 상급 학 년 학생들에게 폭력을 당해 고통스러워했다는 것을 부모가 전혀 눈치채지 못했 다는 점이다. 얼마나 부모와 자녀 사이에 대화가 없었으면 눈치도 못 챘단 말인가? 저녁 식탁에 둘러앉아서 하는 일상의 대화나, 텔레비전을 함께 보면서 나누 는 일상의 대화를 그저 겉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 속에서 부모는 자녀 들의 세계를 , 자녀들의 생각을, 그리고 가슴 속에 묻어 둔 많은 느낌乙 이해 하고 공감해야 한다. 또 스스로 관리하고 해결해 나가도록 도와 주어야 할 것 이다. 대화가 없고,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고, 그래서 자녀가 식구로 완전한 심리적 구성원의 느낌을 못 가져 어느 날 갑자기,‘엄마, 나 집 나가요! 아빠, 죄송해 요.’하고달랑 쪽지 한 장 남기면, 이것을 누구의 책임으로 돌려야 하는가? 아 니면 아이의 친구들에게 그 책임을 돌릴것인가? 말로 주고받는 대화가 언어적 경험의 전부는 아니다. 말대신 글로 하는 대화 도 있다. 부모 자녀 간에, 부부 간에, 형제 간에 주고 받는 메모, 쪽지 편지, 또는 긴 편지도 좋은 대화 방식이다. 밤 늦도록 독서실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 은 아이에게, 부모가 잠자리에 먼저 들면서, 메모를 남긴다. ‚해석아, 많이 힘들지? 엄마, 아버지는 피곤해서 먼저 잔다.‛ 비록 한 줄이지만 그 속에 담 긴 부모의 정은 한아름 가득찼음을 아이도 느끼리라고 본다. 이처럼 짧은 글로 하는 대화도 아이에게는 좋은 언어적 경험이 될 것이다. 무엇이든 직접 해 보게 하라 나는 초등 학교 어린 시절, 시골에서 성장하면서 집안의 여러 가지 일을 했 다. 사내아이였지만 자고 일어나면 방을 쓸고, 걸레를 빨아 방을 훔쳤다. 추운 겨울날에도매일 아침, 밤새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용하신 요강을 들고 나가 개 울에서 말끔히 닦아서는 방에 들여 놓는 일도 내가 했다. 그 때 내가 이 다음에 크면, 내 자식들한테는 절대로 안 시키겠다 생각할 만 큼 하기 싫었던 일이 몇가지 있었다. 씨눈이 깊숙히 박힌 자줏빛 감자 한 바가 지를 갖다가 부엌 봉당에 앉아서 숟갈로 껍질을 긁는 일, 길고 넓은 하얀 광목 을 엄마가 숫불다리미로 다리실 수 있도록 양 손으로 꽉 잡는 일, 엄마가 실패 에다 실을 잘 감을 수 있도록 양 손에 끼고 밖으로 바짝 당기면서 좌우로 흔드 는 일, 약간 덜 마른 빨래를 개켜서 마루에 깔아 놓고 한참이나 서서 발로 밟 는 일, 뭐 그런 일이었다. 요즘 아이들은 도무지 이해 못 할 일들이다. 그러나 우리 세대는 그런 집안 일乙 거들면서 성장했다. 또 그런 일을 잘못하면 야단 도 맞았다. ‚아니, 그런 것 하나 똑바로 못 하면서 공부는 어떻게 하냐?‛
그러나 요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그런 일乙 전혀 시키지 않는다. 아이들은 자고 일어난 자리 하나 스스로 정리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나면 엄마가 아이들 방을 정리한다. 여유가 있는 집에서 아줌마가 와서 다 정리해 준다. 김치를 담그려고 엄마가 식탁에서 마늘을 까고 계신다. 마루에서 놀던 초등 학교 4 학년 사내아이가 저만치서 바라보니 재미있을 성싶었는지 엄마에게 다가 와서 말한다. ‚엄마, 나도 까 볼까?‛ ‚시끄러워! 이게 그렇게 쉬운 줄 아니? 너는 방에 들어가서 공부나 해. 그 런 것네가 안 까 주어도 되니까.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서….‛ 아이는 무안해하면서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이런 일이 어찌 마늘 까는 일에 서만 있겠는가? 공부할 시간이 아까워서, 잡스러운 일보다는 한 자라도 더 공부하도록 하려 고, 또는 다칠까 깨질까 넘어질까 걱정이 되어서인지, 부모는 아이들에게 아무 것도 직접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떤 일을 직 접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떤 일을 직접 경험 해 보면서 배울 수 있 는 많은 것들을 아이들이 놓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사실 지금의 어른들은 어렸을 때, 집에서는 물론, 학교에서도 많은 일을 직 접했다. 교실 바닥을 직접 청소했다. 대청소 때가 되면, 새끼를 나무 둘레에 묶어 바닥의 때를 벗겨 내고, 마르면 바닥을 매끄럽게 하기 위해 양초를 문지 르고, 그것을 다시 마른 걸레로 문질렀다. 마른 걸레에 힘을 모으기 위해 돌을 주워다 얹어 놓고 엉덩이를 하늘로 쳐들고, 엎드려 밀고 다녔다. 유리창을 닦 았고 화장실 청소도 했다.아주 옛날엔 화장실에 쌓인 인분도 지게로 퍼 날랐 다. 여름 방학이면 소집일이 두세 번 있어 운동장에 자란 잡초도 뽑았다. 물론 그 시대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할지 모르지만, 시대가 아무리 변했어도 일의 본질은 그대로다. 그러나 지금의 어른들은 그러한 일을 아이들에게 경험하게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대신 더 발전된, 다른 어떤 일을 시키고 있는가? 그 것도 아니다. 그럴 시간 있으면 들어가 공부하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아이들은 아무것도 체험하지 못한다. 직접 몸으로 겪으면서 해 보는 기회를 갖지 못함을 우리는 안타깝게 여겨야 하지 않는가? 3.창조: 스스로 창조하는 기쁨을 누리도록 한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하나님꼐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 가지씩 특별 한 능력을 주셨다고 믿는다. 살아가는 데 힘이 되고, 다른 사람과 힘을 합칠 때 보탬이 될 수 있는 한가지씩의 능력이나 특장점을 주셨다고 믿는다. 예컨 대, 누구에게는 뛰어난 머리를 주셨고, 누구에게는 아주 따뜻한 품성을 갖추게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언제나 환영받게 하셨다. 물론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주시지는 않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머리도 좋고, 가문도 좋고 건강도 좋은데 경제적으로 어렵다. 그래야만, 사람들은 부족을 느껴 더 노력하게 되고, 서로 힘을 합하여 더불어 살아가는 것 아닌가? 하나님의 섭리는 그처럼 오묘함을 살 아가면서 자주 느낀다. 그러한 하나님의 오묘한 분배의 섭리는 국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아닌가 싶 다. 어떤 나라에는 무한한 석유를 매장시켜 주었고, 어떤 나라에는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줌으로써, 각 나라마다 그것을 국력의 원천으로 삼아 생존하게 하 지 않았는가. 우리 나라 주변국을 보면 중국의 경우에는 막강한 노동력을 주었고 러시아의 경우에는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엄청난 지하 자원을 주었다. 그리고 일본의 경
우에는 세계적으로 뒤어난 상술을 주어 세계 제일의 무역국으로 먹고 살게 하 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우리 나라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우리에게는 바로 뛰어난 머리 를 주시지 않았나 한다. 우리 나라 국토가 넓은 것도 아니고, 엄청난 지하 자 원이 매장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우리에게 엄청난 노동 인구를 주신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우리가 오늘까지 생존해 온 이유는 우리의 뛰어난 머리 때문 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뛰어난 머리를 가졌던 우리 조상들은 세계 어느 나라 보다 많은 것을 만들었다. 640 년대에 세계 최초로 첨성대를 만들었고, 구텐베 르크보다 200 년이나 앞선 1234 년에 금속 활자를 만들어 냈다. 그 외에도 일일 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부존 자원이 가뜩이나 없는 우리 민족이 두뇌가 우수한 민족으로 오늘까지 이어져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꼭 우리 나라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지만,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창조적 두뇌의 개발은 다가오는 21 세기 치열한 국제 경쟁 속에서, 그리고 고도화되어 가는 정보화 사회에서 필수적인 국가적, 국민적 과제이다. 나는 포항에 있는, 세계적인 굴지의 제철 회사인 포항제철 정문 앞을 지날 때마다 늘 새롭게 다가 오는 글귀를 발견한다. ‘자원은 유한하고 창조는 무한하다’라는 구호가 그것 이다. 우리 나라가 부존 자원 빈국에서 두뇌 자원 부극으로 가기 위해서는 우 리의 자라나는 청소년들, 우리의 신세대 자녀들에게 창의력, 창조적 사고력을 개발해 주어야 한다. 이것은 어른들의 몫이다. 이러한 창의력 개발은 근본적으로 무엇인가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데서 형성 됨을 우리는 체험을 통해 익히 안다. 물론 창의력이란 것이 단순히 무엇을 만 들어 내는 경험을 갖는다고 해서 쉽게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스스로 무엇을 만들어 보는 일은 창의력을 개발함은 물론 자기 스스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의미도 발 견하고, 자기 자신의 가치도 확인할 수 있으며, 더불어 이 땅의 역사 창조에 동참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는 데서 매우 값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만들어 내는 기쁨을 아주 어린시절부터 생활 속에서, 크고 작은 일에서부터 느낄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상 생활 속에서 어떻게 자녀들 에게 창조의 기쁨을 누리게 할 수가 있는가? 작은 것부터 자기가 직접 만들어 보게 하라 엄마가 저녁으로 비빔밥을 준비하셨다. 고추장도 양념해서 맛있게 담아 놓았 고, 소고기도 길고 잘게 썰어 볶아서 한 접시 담아 놓았다. 계란도 부쳐서 채 썰어 놓았다. 콩나물도, 시금치 나물도 무쳐 놓았다. 또 생오이도 굵게 채 썰 어 놓았다. 그리고 아이들의 식사량에 맞추어 대접에 밥을 한 공기씩, 반 공기 씩 담아 주었다. 그리고 아빠, 초등 학교 1 학년인 인수, 3 학년인 동수, 엄마, 이렇게 네 식구가 식탁에 둘러앉았다. ‚자, 우리 오늘은 맛있게 비벼 먹자! 엄마가 맛있는 비빔밥을 준비했어 요.‛ 그러면서 엄마는 큰아들 동수의 밥그릇에다 이것저것 반찬을 덜어 넣기 시작 했다. 바로 그때, 작은아들 인수가 고추장을 한 숟갈 퍼들고 엄마에게 내보이면서 말 乙 한다. ‚엄마! 나, 이만큼 넣으면 돼?안 돼?‛ 엄마의 조언을 구한 것이다. 자기가 직접 비벼 보려고, 엄마에게 물어 본 것
이다. 그러자 엄마는 아이의 행동에 놀란 듯 별안간 소리를 친다. ‚아니, 얘 좀 봐! 왜 고추장을 퍼들고 난리야! 빨리 내려 놓지 못해!‛ 엄마의 예기치 않은 큰 소리에 아이가 놀라서 고추장을 푸던 숟가락을 들고 어쩔줄 몰라 한다. 그러자 엄마는 더 크게 소리지른다. :아! 글쎄, 내려놓으라니까! 그냥 고추장 탕기에 도루 담아. 저것 좀 봐! 저 거, 저거, 저 옷에 튀었잖아, 아주 고추장으로 미역을 감네, 저기 식탁보에도 떨어졌잖아, 식탁보를 까는게 아닌데….빨면 뭐 하냐! 지금 엄마가 형 것 비비 고 있잖아! 가만 있으면 엄마가 어련히 알아서 비벼 줄라고! 하여튼 성질 급한 것은 꼭 지 아버지를 닮아 가지구!…가만 있어! 알았어! 손 내리고 있어!‚ 그리고 나서 엄마는 다시 형의 밥을 비비기 시작한다. 아내가 소리치는 바람 에 남편도 두 손을 내린 채 머뭇댄다. 그러자 화살이 이번엔 남편에게로 날아 간다. ‚아니, 그런데 당신은 왜 비비지 않고 그러구 앉아 계슈?‛ ‚난, 당신이 내 것도 비벼 주나 해서….‛ ‚아, 당신까지 왜 난리유? 당신은 손발이 없어요? 나중엔 별일을 다 보곗 네.‛ 아버지는 오히려 가만히 있다가 엄마의 면박을 받는다. 엄마는 어떻든 식탁 에서는 독재자인가 보다. 그릇에 콩나물이 조금 남았다. 시금치도 남았다. 생오이 썰 어 놓은 것도 반이나 남았다. 그러자 엄마는 접시 하나하나를 들고 남은 것을 네 식구 그릇에다 조금씩 분배하여 더 넣는다. 접시를 깨끗이 비우기 위해서 다. 그리고 간단한설거지를 위해서…. ‚이렇게 조금씩 남으면, 버릴 수도 없고 보관하기도 나쁘고….꼭 네 식구 먹을 만큼 준비했는데도 이렇게 남았네! 야, 너 밥 이리 내놔! 이 콩나물 마저 넣어서 비벼야겠다.‛ 그러면서 엄마는 쿤아이의 밥도, 작은아이의 밥도 다 비벼 주었다. 그 동안, 아이들은 엄마의 불호령을 들으며, 숟가락을 입술로 깨물었다 놓았다 하면서 기다렸다. 다 비볐을 때 엄마는 아이의 밥을 한 숟가락씩 떠 먹으면서 말한다. ‚야, 맛있다. 이제 됐어! 자, 이것은 동수 것이고, 이것은 인수 것이다. 어 서들 먹어!‛ 두 아이는 엄마가 비벼 준 밥을 동시에 먹기 시작했다. 첫 숟가락을 떠 먹은 두 아이는 동시에 서로 마주 보고, 또 엄마를 쳐다보았다. 큰아이는 그래도 눈 치가 있는지 아무 말이 없는데, 작은아이가 엄마에게 말을 한다. ‚엄마, 이거 너무 매워! 고추장을 너무 많이 넣었나 봐.‛ 그러자 엄마는 또 다시 큰 소리로 말한다. ‚맵긴 뭐가 매워! 너희들이 정말 매운 것을 아직 못 먹어 봐서 그렇지! 그 게 뭐가 맵냐! 그냥 먹어. 사내아이가 씩씩하게 크려면 매운 것도 먹을 줄 알 아야 돼!‛ 아이들은 더 이상 아무 말이 없다. 그냥 묵묵히 먹을 뿐이다. 매워도 입맛을 다셔가며, 물을 먹으며, 엄마 눈치를 보면서 엄마가 만들어 준, 엄마가 비벼 준 밥을 그냥 먹었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어쩌면 사육당하는 기분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만약, 처음에 작은아이가 고추장을 한 숟갈 떠들고서, ‚엄마, 나 이만큼 넣 으면 돼? 안 돼?‛하고 말했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면 어땠을까? ‚음! 글쎄, 엄마 생각엔 그거 다 넣으면 좀 매울 것 같은데. 너, 아빠 좀 봐라! 아빠는 너보다 밥이 많으데도 저만큼밖에 고추장을 안 넣었는데, 너는 그렇게 많이 넣겠다구?‛ 그러면 아이는 아빠의 밥도, 형의 밥도 보면서 비교를 할것이다. 그리고 생 각할 것이다, 고추장의 양은 밥의 양에 비례해야 한다는 것을. 더 나아가서 아
이는 밥을 비비면서도 많은 생각을 할 것이다. 어느 것이 얼만큼 짜고 싱거운 가! 내 입에는 콩나물이 좀 짠 듯한데, 거기다 고추장까지 많이 넣으면 더 맵 고 짤 것 아닌가? 비빔밥을 멸 번 스스로 만들어 먹다 보면 나중엔 그것도 스 스로 깨달을 것이다. ‚맞어! 생오이 같은 것을 먼저 넣고 비벼서 일단 숨을 죽여 놓은 다음에, 다른 반찬을 넣고 다시 비벼야 그릇 밖으로 밥이 흩어져 나가지도 않고….‛ 이러한 작은 일부터 직접 해 부면서 아이는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고 느끼 며 배운다. 논리적인, 관계적인, 상상적인 사고력도 자신도 모르게 성장한다. 그런데도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보면 크고 작은 일 할 것 없이 엄마가, 때로는 아버지가 전부다 해 주는 바람에 아이들은 창조적 사고력을 스스로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는 경우가 많다. 미술 숙제도 주고, 가방도 엄마가 싸 주 고, 준비물도 챙겨 주고, 종이배도 엄마가 접어 준다. 아이들이 블럭을 끼워 집을 만들고 비행기를 만들 때도엄마가, 아버지가 다 만들어 준다. 어른들은 이런 어린 시절을 기억할 것이다. Y 자로 된 나무만 보면 저것으로 새총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직접 나무를 잘라서 칼로 다듬고 거기다 고무줄을 매서 새총을 혼자 만들었다. 어디 새총뿐인가. 썰매도 직접 뚝닥거리 면서 만들어 탔다. 잠자리채도 아이들이 만들었다. 긴 막대기의 끝에다 철사나 잘 휘는 싸리나무 따위로 동그랗게 원을 만들어 붙들어 맨 다음 거기다 처마 밑에 있는 거미줄을 묻히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것으로 잠자리를 잡고 놀았다. 그러나 요즈음은 어떤가? 아이가 말한다. ‚엄마, 나, 나가서 잠자리 잡고 놀래!‛그러면 엄마는 대답한다. ‚이것아, 잠자리는 왜 잡아? 잠자리가 널 잡 겠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들어가 공부나 해.‛ 또 어떤 엄마는 ‚시끄 러! 들어가서 공부해. 니가 뭘로 잠자리를 잡니? 나중에 엄마가 잠자리채 사다 줄 테니, 지금은 들어가 공부나 해.‛하고 말한다. 그리고 엄마는 정말로 문방 구에서 잠자리채를 사 오신다. 긴 막대기에 모기장 같은 주머니가 달린 것을. 그런데 요즈음 신세대 엄마들은 그보다 더 진일보적이다. ‚들어가서 공부나 해! 나중에 엄마가 잠자리 잡아 줄게!‛ 엄마가 잡아 준다고? 엄마가 어디 가서 어떻게 잠자리를 잡아 오는가? 어떤 엄마는 공부 안 하고 나와 노는 다른 집 아이를 시킨다. 돈 줄 테니 어디 가서 두 마리만 잡아 오라고. 그렇게 해서 사 온 잠자리를 아이에게 내좋는다. ‘자, 여기 엄마가 잠자리 잡아왔다!‚ 그 과정에서 아이는 무엇을 느끼고, 배 울까? 엄마의 눈물겨운 헌신적인 사랑에 고마워할까? 참으로 자녀를 사랑한다 면 무엇이든 엄마가 다 해 주어서는 안된다. 밤새워 공부한는 아이를 보면서 엄마는 안쓰러워한다. 이 엄마가 대신 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공부마저도 해 주고 싶을 정도로 안쓰러워한다. 그러고 보면 공부 빼고는 무엇이든 엄마가 다 해 주려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을 성싶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는 결국 아이의 사고력 발달을 죽이는 결과만 초래한다.후에 아이 스스로 모든 것을 해 내고,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나 심성, 의지를 기르지 못하도록 만 들고 만다. 그런 경우 아이가 나약하고, 의존적이고, 누군가가 돌보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사람으로 자랄 것임을 안식하여야 한다. 스스로 답을 찾도록 호기심을 불러일으켜라 어린 시절 우리가 즐겨했던 놀이 가운데 스무고개라는 것이 있다. 한 사람이 어떤 문제를 내놓으면 다른 사람들이 문제를 풀되, 모두 스무 번에 걸쳐 문제 를 낸 사람에게 질문을 할 수 있다. 질문은 반드시 대답하는 사람이 ‚예‛ 또 는 ‚아니오‛라고만 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말하자면 주관식으로 물어 보 면 안 되고, 양자택일의 객관식으로 물어야 한다. ‚자, 여기 내가 손안에 무엇을 쥐었나 맞춰 봐요!‛
그러면 우리는 돌아가면서 하나씩 물어 본다. ‚먹을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오.‛ ‚딱딱합니까?‛ ‚네.‛ ‚불에 탑니까?‛ ‚아니오.‛ ‚모양이 둥급니까?‛ ‚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가능하면 질문을 조금하고 정답을 빨리 맞추려고 애쓴 다. 이러한 스무고개의 과정에는 두 가지 중요한 교육적 가치가 있다. 하나는 호기심을 자꾸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처음엔 별 관심 없다가도 질문과 대답 이 가고 오다 보면 호기심이 점점 일게 된다. 답을 맞춰 보고자 하는 강한 동 기가 유발되는 것이다. 저 사람이 지금 손안에 꼭 움켜쥔 것은 먹을 수는 없되 불에 타지 않고, 둥그렇고 딱딱하다는데 도대체 그것이 뭐람? 궁금증이 더해간 다. 또 다른 교육적 가치는 아이들이 이 과정을 통해 탐구의 방법, 특히 가설 을 설정하고, 그것을 검증해 가는 탐구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위에서처럼 네 번의 질문과 대답이 오갔을 때 아이들은 그 나름대로 가 설을 세운다. ‘우선, 손에 쥔 저것은 손안에 들어갈 만큼 작은 것으로, 먹을 수는 없고 딱딱하다고 하니까, 나무 조각, 쇠붙이 조각, 아니면 유리 조각일 것이다.’ ‘아냐, 불에 타지 않는다 했으니 분명히 나무 조각은 아냐. 저것은 쇠붙이 아니면 유리 조각일 거야.’ 이러한 가설은 곧바로 그것을 검증하기 위한 단계로 질문이 이어지도록 한 다. ‚그것은 돌 같은 것으로 때리면 깨집니까?‛ ‚네.‛ ‘봐, 맞았어! 그러면 그것은 쇠붙이는 아니고 유리 조각일거야! 그러면 동 그랗게 생긴 유리 조각은 무엇일까?’ ‚우리가 그것을 갖고 자주 놉니까?‛ ‚네.‛ ‘맞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생각하고는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음! 구슬 아닙니까?‛ ‚네! 맞습니다! 모두 일곱 번째에 맞추었습니다.‛ 그러곤 우리 모두 스스로 대견스러워했다. 이러한 놀이를 통해서 우리는 스 스로 어떤 것을 탐구하는 과정, 절차, 방법들을 알게 모르게 익혀 나갔다. 또 그 속에서 스스로 만들어 내고 생각해 내는 창의력을 길렀다. 그러나 요즈음의 많은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그러한 기회를 주지 않는 것 같 아 안 타깝다. 스무고개 같은 놀이도 없어진 지 오래 되었고, 대신 그 자리에 컴퓨터 오락이 들어 앉았다. 물론 컴퓨터 오락을 통해서도 탐구의 과정을 스스로 익히 는 경우도 많다. 이를테면, 여러 가지 시뮬레이션 게임들이 그렇다. 그러나 아 이들은 그러한 것보다는 민첩한 손놀림과 같은 말초적 자극만을 요구하는 게임 을 더 즐기는 데 문제가 있다. 아이들은 원래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 그렇기에 질문도 많이 한다. 어 떤 부모들은 아이들의 잦은 질문을 귀찮아 하고, 모르면 그저 퉁명만 부리고, 아이들을 윽박지르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들의 질문은 질문을 한다는 그 자체 가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질문은 호기심의 발로이고, 또 질문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를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식 교수법에서는 질문을 두 가지 목적으로 사용했다. 하나 는 선생이 학생에게 질문함으로써 학생이 세상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하기 위 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자꾸 질문하는 과정을 통해서 학생이 무엇을 모르는지 를 스스로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렇듯 부모가 아이들에게 질문을 하거 나 아이들이 거꾸로 부모에게 질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우리 부모들은 아이들의 질문에 어떻게 응답하여야 하는가? 아이들 이 어떤 질문을 해 오면, 답을 모를 경우에는 물론이지만 답을 알아도, 가능하
면 답을 일러 주기보다는 아이가 답을 스스로 찾도록 방법과 절차에 대한 안내 와 조언을 해 주는 편이 바람직하다. 특히 아이들의 질문이 엄마나 아버지가 듣기에 수준이 낮고 어처구니가 없다 하더라도 ‚그것을 질문이라고 하느냐 ?‛, 또는 ‚아니, 넌 아직도 그런 것도 모르냐! 어째 너는 중 3 씩이나 되어 가 지고, 그래 초등 학교 애들도 아는 것을 물어 보냐?‛하고 면박을 주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이 무엇인가를 탐구하고 스스로 답을 구하는 데 동기는 부여하지 못할 망정, 아이들의 탐구욕을 아예 떨어뜨리는 부모의 생각 없는 말은 이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엄마 지금 바뻐! 이따 아버지 들어오시면 여쭈어 보렴!‛ ‚야! 뭐? 네 엄마한테 물어 본다구? 네 엄마가 그걸 알면, 해가 서쪽에서 뜬다!‛ ‚얼씨구! 나중엔 별 걸 다 물어 보네! 쓸데없는 생각 말구, 들어가서 숙제 나 해!‛ ‚넌, 무슨 애가 맨날 그런 엉뚱한 질문만 하냐?‛ ‚질문을 하려면, 좀 질문다운 질문을 해 봐!‛ ‚너 생각이 있는 아이냐? 어째, 그런 것을 다 물어 볼 수가 있냐! 좀 생각 을 하고 물어 봐!‛ 아이의 창의적 발상을 격려하고 고무하라 엄마와 아빠는 텔레비전 앞에서 수목 드라마를 보시느라 정신이 없다. 방에 서 혼자 비행기를 만들며 놀던 여섯 살짜리 민석이가 비행기를 들고 거실로 나 왔다. ‚엄마, 이 비행기 좀 봐! 내가 만들었다! 아빠! 아빠! 이 비행기 봐! 내가 만든 이 비행기 좀 봐!‛ 엄마, 아빠 모두 연속극에 정신이 팔려서 아이가 눈앞에 비행기를 갖다 대고 보라고 하는데도 별 반응이 없었다. 재차 아이가 비행기를 보라고 하니까 그제 서야 엄마가 반응을 보였다. ‚그래, 잘 만들었구나! 엄마, 아빠, 지금 텔레비전 보니까, 들어가서 또 만 들고 놀아라. 민석이 참 착하지.‛ 착하다는 말에 민석이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더이상 만들 게 없었 다. 자기 생각에, 자기가 참 기가 막히게 멋진 비행기를 만들었는데도 엄마, 아빠가 비행기에 대한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는 듯해서 좀 섭섭했다. 그래서 민석이는 다시 비행기를 들고 거실로 나갔다. 이번엔 아주 큰 소리로 말했다. ‚엄마! 내가 비행기 만들었단 말이야! 이 비행기 좀 봐아! 아빠아, 아빠 아!‛ 그러자 이번에는 엄마가 매우 차가운 목소리로 아이에게 말한다. ‚아까 엄마가 뭐라고 했어요?‛ ‚잘 만들었다구!‛ ‚그렇지! 잘 만들었다구 했지! 그런데 왜 자꾸 와서 귀찮게 그러지, 응? 엄 마, 아빠가 텔레비전 보는데, 그렇게 자꾸 와서 귀찮게 굴래?‛ ‚아니.‛ ‚그러면 빨리 들어가서 너 혼자 더 만들고 놀아. 알았지?‛ 아이는 힘없이 다시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어쩌면 아이는 속으로 엄마, 아 빠를 원망하였을지도 모른다. ‚하여튼 우리 엄마, 아빠는 연속극이라면 사족을 못 쓰신단 말야! 방송국에 가서 살지, 왜 저녁마다 집에서 텔레비전만 보시려고 하시지? 날보곤 텔레비전 을 보지 말라면서!‛
그러나 엄마, 아버지가 아래와 같이 반응을 하였다면 아이의 행동은 어떻게 달라질까? ‚야! 잘 만들었는데,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비행기를 잘 만들었니?‛ ‚엄마! 내가 가르쳐줄까? 이리루 앉아 봐, 엄마! 이거 원래는 이렇게 된 거 거든. 근데, 처음엔 여기다 이것을 끼울려고 했는데, 그러면 비행기가 우습잖 아. 그래서 내가 이것을 이쪽으로 하고, 그 다음에 이걸 끼웠더니, 이렇게 근 사한 비행기가 됐어!‛ 엄마는 진정으로 아이가 대견스러웠다. 그리고 아이가 비행기를 분해해서 엄 마 앞에서 다시 조립하면서 설명하는 것을 찬찬히 들었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 의 과정에 배인 아이의 창의적 발상에 미소를 머금으며 찬사를 보냈다. 바로 부모의 이러 한 태도가 아이들의 창조적 발상에 큰 원동력이 된다. 물론 엄마나 아버지의 칭찬과 격려는 순수하고 진지하여야 한다. 결코 가식 적인 칭찬이거나 비난이 섞인 조롱이어서는 안 된다. 다음과 같이 말이다. ‚여보! 이게 당신 아들이 만든 비행기랍니다! 참 잘 만들었죠! 내 눈에는 그게 어디 비행기 같아 보이는지 모르겠네요! 야, 너 나가서 길을 막고 한번 물어 봐라! 이게 무엇처럼 보이느냐고. 비행기는커녕 무슨 도깨비 방망이 같다 고나 할까! 하여튼 씨는 못 속여! 너는 비행기도 안 타 보았냐! 도대체가 아니 그래, 날개도 없는 비행기가 이 세상에 어디 있담?‛ 이런 경우, 아이는 무엇을 느낄까? 만약에 엄마가 이렇게 반응을 보인다면 결과는 또 달라질 것이다. ‚야, 비행기 근사한데! 그런데 어째서 이 비행기는 날개가 없냐?‛ ‚음, 엄마! 날개가 없어 이상하게 생각했지? 앞으로는날개가 없는 비행기가 나온다. 날개 때문에 비행기가 날지만 날개 때문에 오히려 방해가 돼서 비행기 가 더 느리게 날지도 몰라. 그래서 이제는 날개없이 곧장 위로 뜨고 내리는 비 행기가 나올 거야!‛ 아이의 생각은 엄마의 인습적인 사고, 타성적인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 었다. 인습이나 타성에서 벗어나도록 하라 비행기에 반드시 날개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나의 인습적 사고이고 타성 적 기대이다. 아이들은 그러한 인습과 타성에서 곧잘 벗어나서 자기 나름대로 의 창조적 발상을 한다. 바로 이러한 인습과 타성에서 벗어남을 격려하고 고무 해 주는 것이 스스로 만드는 기쁨을 가져다 주고, 또 그 과정에서 창의력을 키 우게 한다. 부모들은 자녀 양육에서 인습과 타성에 젖어 있다. 경우에 따라서 그것은 대 대로 이어져 오는 우리 사회의 공통 보편적인 타성과 인습일 수도 있다. 또 경 우에 따라서는 부모 자신의 선입관이나 경험에 근거한 맹목적인 것일 수도 있 다. 바로 그러한 인습과 타성에서 부모는 자유스러워져야만 자녀가 창의력을 갖도록 격려해 줄 수 있다. 부모가 인습적으로 믿는 것의 예를 하나 들면, 사내아이는 부엌에 들어가서 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내아이가 부엌에 들어가서 설거지를 하거나 엄마를 도 와 음식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아들은 남자답게, 딸은 여자답게 키 워야 한다며 어릴 때부터 장난감도 남녀 구별을 해서 사다 주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성고착적인 부모의 자녀 양육은 아이의 지각의 장을 협소하게 만들고, 자유로운 창의적 발상을 억제한다. 많은 연구 결과를 보면, 창의적인 남성들은 남성성은 물론, 여성성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았고, 또 창의적 여성들은 여성성 은 물론, 남성성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이는 창의적인 사람들은 어떤 한 가지 특정한 성역할이나 행동에 인습 적으로 고착되지 않음을 나타낸다. 초등 학교나 중학교 아이들이 사용하는 은어 가운데 병따개라는 말이 있다. 흔히 바보같이 굴거나, 한 가지 생각밖에 못 하는 아이를 일컫는다. 그러면 어 째서 그런 아이들을 병따개라고 할까? 병따개는 그야말로 병 뚜껑을 따는 데만 사용할 수 있다. 그 외엔 별로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은어 그 자체가 의미 있 다기보다는, 나는 아이들이 그러한 은어 속에 갖고 있는 생각, 즉 어떤 물건이 든 꼭 한 가지 목적만으로 인습적으로 사용하기보다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로 활용할 수 있음을 아이들이 안다는 데 의미를 부여한다. 사람도 그렇고, 물건 도 그렇고, 우리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주어진 조건과 상황에 따라서 다양하게 행동할 수 있고, 다양하게 쓸 수 있는 것이다. 그 다양성을 찾는 것이 바로 인 습과 타성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나는 중국집에 가서 자장면을 먹을 때 사람들의 천편일률적인 행동을 보면서 속으로 웃을 때가 많다. 자장면을 주문하면, 자장과 국수를 아예 한 그릇에 담 아 주니까 비벼 먹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삼선 자장면 따위를 주문하면 자장 따로, 국수 따로 두 그릇에 담아다 준다. 이 때 사람들은 으레 자장 그릇을 들 어 국수에다 쏟아 붓는다. 그리곤 열심히 비빈다. 내가 본 사람들 거의가 그렇 게 한다. 그렇게 비벼 먹으라고 누가 그랬을까? 대대로 그렇게 전해 내려온 습 관적 행동을 우리는 아무런 생각 없이 그대로 따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자장 따로 국수 따로 준 경우에는 이렇게도 먹어 보고, 저렇게도 먹어 본다. 이를테 면, 우선 국수를 몇 줄 집어 먹은 다음, 자장을 한 숟갈 먹는다. 국수를 밥삼 아, 자장을 반찬삼아 따로따로 먹는 셈이다. 국수만 입에 넣고 씹으면 그 담백 한 맛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국수가 좀 싱거우니까 자장을 떠 먹는다. 그러 길 한참 하면 사람들이 나를 힐끔거린다. 마치도, 저 친구는 자장면을 먹을 줄 모르는가 싶어 바라보는 눈치다. 드디어 음식을 나르는 웨이터가 와서는 한 마 디 하고 간다. ‚아저씨, 저것을 넣고 비벼 드세요!‛ 그러면 나는 빙긋이 웃 고 만다. 물론 속으로는 나도 응수한다. ‘이 친구야, 나도 알아! 누가 비벼 먹을 줄 몰라서 이렇게 먹는 줄 아냐?’ 물론 더불어 살아가는 데는 상호 약속처럼 여겨지는 인습도 있다. 길을 걸을 때 좌측 통행이 그렇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 꼭 인습과 타성에 젖을 필 요가 있는가? 부모가 아이에게 인습과 타성을 조장하는 태도는 아이에게 이르 는 말에도 잘 나타난다. ‚야! 너 학교에 가면 다른 아이들 하는 것 잘 보고 그대로 따라 해!‛ ‚야! 너 한눈팔지 말고 선생님 하시는 것 보고 그대로 잘하기만 하면 돼. 괜스레 잘난 척하고 제멋대로 하지 말고 말야! 알았지!‛ ‚모를 땐 그저 남들 하는 대로만 하면 돼!‛ 진정으로 자녀의 창의력을 개발시켜 주려면, 그리고 자녀 스스로 모든 것을 만들 어 내는 기쁨을 누리도록 하려면 부모 자신의 인습적 사고와 타성적 행동부터 불식하고, 또 아이들의 그러한 사고와 행동도 불식시킬 수 있어야 한다. 4. 관계: 사람은 물론, 사물과의 관계를 유지하도록 한다. 앞에서도 잠깐 이야기하였듯이,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삶을 한 마 디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관계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 자마자 제일 먼저 부모.자식의 관계를 맺는다. 그 다음엔 형제의 관계를 맺고, 친구의 관계를 맺고, 또 커서는 부부의 관계를 맺고, 학교에 가서는 선.후배와 스승.제자의 관계를 맺는다. 직장에 가서는 동료와의 관계, 그리고 상사.부하 의 관계를 맺는다. 이처럼 우리는 죽을 때까지 관계 속에서 살다 간다. 이는
결국 관계가 인생의 성패를 가름함을 의미한다. 즉 인생에서 성공을 거둔 사람 은 관계에 성공한 사람이고, 인생에 실패한 사람은 관계에 실패한 사람이 아닌 가 싶다. 교육에서도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원만하면 그만큼 학습의 효과가 증 대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학습의 효과가 떨어짐은 익히 밝혀진 사실이다. 관계는 비단 사람에서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사람과 사물 간에도 관계는 중 요하다. 사물의 존재 가치는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 다. 어떤 물건은 어떤 사람과의 관계에서 매우 소중하고 가치 잇는 것이 되지 만, 그 반대의 경우도 허다하다. 어떤 물건은 나와, 또는 다른 물건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여도, 그것을 내가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나 자신, 또는 다 른 물건과 매우 의미 있는 관계를 이루게 된다. 관계는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이해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하다. 왜 우리 나라 경제가 근래에 와서 이토록 어려워졌는가? 30 대 기업 중 세 기업이 부도를 내 고 도산해서일까? 정부의 경제 정책이 잘못되어서 일까? 국제 시장에서 반도체 값이 떨어지고 , 수출이 부진해지고, 그래서 국제 무역 적자가 커지고, 환율까 지 올라서 일까? 그러한 현상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여러 가지 요인들의 관계를 따질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서 이러한 관계지음의 능력은 결코 하루 아침에 형성되 지 않는다. 오랜 세월을 두고 생활을 통해서 알게 모르게 형성된다. 그렇다면 부모는 자녀와의 가정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러한 관계지음의 능력이 나 심성 및 기능을 갖추도록 도와 줄 수 있는가? 여러 유형의 친구들과 폭넓게 사귀도록 한다. ‚더운데, 학원에서 곧장 집에 안 오고 너 어디 갔다 왔니?‛ ‚은수네요.‛ ‚뚝방에 산다는 얼굴 까만 애, 걔네 집에?‛ ‚네.‛ ‚근데, 왜 계네 집에 자꾸 가니?‛ ‚왜, 자꾸 가면 안돼요? 엄만 왜 걔네 집에 가는 것 갖고 맨날 야단치는지 몰라. 걔, 내 친구란 말예요!‛ ‚친구는 무슨 친구냐! 친구도 어렸을 때부터 잘 사귀어야 되는거야. 그저 아무하고나 사귀면 되는 줄 아냐? 걔네 집 어디서 놀았어?‛ ‚걔네 집 안방에서요!‛ ‚안방이 어디 있니? 방 하나뿐이라고 했으면서! 덥진 않았어?‛ ‚선풍기 틀어 놓고, 문 열어 놓고, 그래서 괜찮았어요!‛ ‚뭐하러 더운데 거길 가는지! 아, 그냥 집으로 곧장 와서 에어컨 켜 놓고 시원한 데서 수박이나 먹고, 공부나 하면, 좀 좋니? 하여튼 앞으로는 뚝방에 가지 마! 뚝방 아이들 치고 어디 변변한 아이 있더냐!‛ 초등학교 4 학년짜리 영환이는 엄마의 계속되는 잔소리에 시큰둥했다. 아무 대꾸도 안 하는 것이 상책임을 터득이라도 한 듯이 엄마의 꾸중에 더 이상 반 응을 하지 않았다. 영환이가 다니는 학교에는 아파트 단지 아이들이 절반, 큰 개천 둑에 자리잡 은 뚝방 동네와 인근 야산 동네의 단독 주택 거주 아이들이 절반이다. 뚝방과 애산 동네에는 대체로 경제적 여유가 없는 서민들이 산다. 또 아파트 단지 내 에도 큰 평수와 작은 평수, 그리고 임대 아파트 등에 경제적으로 다양한 계층 의 사람들이 모여 산다. 그러다 보니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겉모양도 여러 가지일 수 밖에 없 다. 좋은 옷 입고, 좋은 놀이감 가진 아이들에서 허름한 옷 입고, 제대로 된 놀이감 없이 지내는 아이들까지 있다. 학원을 몇 개씩 다니는 아이들에서, 학
원 하나 제대로 못 다니는 아이들까지 있다. 경제적인 면에서만 아이들의 모습 이 다른 것은 아니다. 학업성적면에서도 우수한 아이들과 열등한 아이들이 언제고 뒤섞이게 마련이 다. 한 마디로, 특성을 달리 하는 여러 모양새의 아이들이 한 동네 한 학교에 서 지내는 셈이다. 아이들은 그런 특성에 상관없이 잘 어울려 지낸다. 문제는 부모들이 아이들의 어울림을 가로막는데 있다. 아이들이 만남과 사귐을 선별적 으로 하도록 강요한다. 잘 사는 집 아이들은 그런 아이들끼리,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은 그런 아이들끼리, 힘세고 잘 생기고 말끔한 아이들은 그런 아이들끼 리만 사귀도록 부모가 은근히 유도하고 강요한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편협한 생각에만 길들여지게 된다. 그리고 자기들의 생각과 다른 생각에는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이렇게 성장했을 때, 훗날 그들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가? 더불 어 살기는 서로 다른 다양한 가치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것을 수용하지 못할 때 갈등은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적대적 감정이 싹튼다. 결국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은 폭넓은 다양한 만남과 사귐을 통하여 다양한 가치를 이해하고 수용해야 한 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일종의 문화적 접촉이다. 한 사람을 만나고 사귄다는 것은 하나의 독특한 문화와 접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러 유형의 친 구들을 폭넓게 사귀고 만나면 여러 유형의 문화를 접촉하게 된다. 어려서부터 여러 유형의 문화를 접촉한 사람일수록 이해와 수용을 위한 그릇이 크고, 그러 한 큰 그릇은 살아가면서 온갖 종류의 관계지음에 큰 밑거름이 된다. 관계지음에서 안전거리를 확보한다. 시내에서 차를 운전하다 보면, 안전 거리 유지가 제일 힘들다. 앞차에 너무 따라 붙었다가는 자칫 앞차의 뒤를 받을까 신경이 쓰인다. 그렇다고 저만큼 떨 어져서 가면 자꾸 다른 차들이 중간에 끼여 든다. 끼여 드는 거야 양보하면 그 만이지만, 자칫 하다간 뒤에서 따라오는 차의 운전자한테 야단을 맞기 십상이다. 바보처럼 왜 자꾸 양보하느냐고 전조등을 껐다 켰다 하면서 야단을 친다. 살다보면, 이 세상의 모든 사물과의 관계나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안전 거리 유지가 참으로 중요하고 힘든 일이구나 하고 느낄 때가 많다. 야외로 소풍을 갔을 때다. 저만치 나무 그늘이 꽤나 좋아 보였다. 거기 가서 잠시 쉬면서 가져간 도시락을 먹으면 좋겠다 싶어 다가갔다. 그러나 웬일인가. 지저분해서 앉기가 거북했다. 울퉁불퉁해서 불편하기도 했다. 저 만치에서 바 라보았을 때는 그렇게도 부드럽고 깨끗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그렇지가 않았 다. 적당한 거리에서 보면 아름다워 보이는 것도, 너무 멀거나 너무 가까이서 보면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이 역시 도로에서 안전 거리를 유지하는 것과 비슷 하다. 사람과의 사귐에서는 안전 거리가 지각에 더욱 크게 작용한다. 어떤 사람을 아주 몰랐을 때는, 즉 아주 먼 거리에서 보았을 때는 그가 아무리 좋은 사람이 라고 해도 좋다는 것을 못 느낀다. 그런데 좀 사귀다 보면 그가 참으로 좋은 사람임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세월이 지나가면서 그 사람을 더욱더 가까이서 보게 되면, 물론 좋은 점도 발견하지만, 나쁜 점을 좋은 점보 다 훨씬 더 많이 발견하여 실망하기 일쑤다. 지나치면 그 사람과의 사귐 자체 를 후회하기도 한다. 서로가 적당한 거리에서 사귐의 안전 거리를 지켰다면 두 사람은 계속해서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사람들 은 사귐의 거리를 너무 좁혀서 또는 너무 멀게 해서, 즉 적당한 안전 거리를
유지하지 못해서 상호 관계지음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사람들이 모이면 제일 많이 하는 얘기가 사람에 관한 얘기다. 어떤 사람 하 나를 화제로 삼아 서로 자신과의 관계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그 사람이 어쩌고 저쩌고 얘기한다. 사람이 좋다느니, 인격자라느니, 믿을 만한 사람이라느니 하 고 얘기한다. 반대로 그 사람은 근본이 틀려 먹은 사람이라느니, 시건방지다느 니, 깊게 사귈 사람 이 못 된다느니, 온갖 부정적인 얘기들을 한다. 모두가 제각기 그 사람과의 거 리에서 자신들이 겪고 느낀 것을 말한다. 이 때, 그 사람과 적당한 안전 거리 를 유지해서 그 사람에 대하여 좋은 감정을 가졌던 사람들은 그 사람에 대해 부정적으로 얘기하는 사람들로 인해 흔들릴 때가 있다. 그 사람이 정말 그렇게 나쁜 사람인가? 그럼 앞으로 조심해야 겠네 하고 말이다. 물론 그 반대도 있 을 수 있다. 적당히 안전 거리를 유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진 사람들의 해석에 따라 자신의 그릇된 지각을 고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후자의 경우 보다는 전자의 경우가 많은 것이 일상의 모습이다. 이러한 경우 명심해야 할 것은, 자신이 유지하는 거리는 다른 사람이 유지하 는 거리와 꼭 같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제각기 고유한 거리 감각 을 지녔기 때문에 설혹 자신의 거리를 유지하지 못해,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부정적인 지각을 갖게 된 사람이 있다 해도 그 사람 때문에 나 자신의 지 각까지 부정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나는 나니까, 내 나름대로의 거리를 유 지하며 이 세상 사람들과 사물에 대하여 언제고 긍정적인 생각만을 할 수 있으 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부모들은 자녀에게 이러한 제각기의 고유한 안전 거리를 유지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또한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안전 거리를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 다. 제아무리 부모가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놀고, 대화하고, 일하며 생활한다 해도 거기에는 분명히 일정한 선이 그어져야 한다. 그것이 곧 부모와 자녀 사 이의 안전 거리다. 흔히들 결혼 주례사에서 두 사람이 하나가 됨을 강조한다. 그런데 나는 그렇 게 생각하지 않는다.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책임과 역할을 다하고, 아내는 아내 로서의 책임과 역할을 다 하면서, 즉 두사람 사이의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부부 사이의 일정한 안전 거리가 유지되어야 한다. 누가 남편이고, 누가 아내인지를 식별하기 곤란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어느 집 에 가서 누가 부모이고 누가 자녀인지 구별이 안 된다면 어쩌겠는가? 부모 앞 에 벌렁 드러누워서 발을 치켜들며, ‚아빠, 9 번 좀 틀어 봐요!‛하고, 텔레비 전 채널을 돌리도록 요구한다면 그런 가정에 대해 과연 저 집에서는 부모와 아 이들이 하나가 되어 지낸다고 말할 것인가? 아버지는 아버지다와야 하고, 어머니는 어머니다워야 하고, 아이들은 아이들 다워야 한다. 즉, 제각기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바탕으로 자신의 위치를 지켜 야 한다. 서로 간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 곧 안전 거리이다. 그러한 안전 거 리는 각자의 거리 감각에 의해서 서로 균형을 찾을 때 유지될 수 있다. 그렇기 에 우리는 모든 관계지음에서 자신의 거리를 적절하게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해외여행을 하고 돌아온 친구가 그 나라에 가 보니 사람 살 곳이 아니라고 한다. 모두가 틀려 먹었다고 한다. 10 년 전에 나는 그 나라에 다녀온 적이 있 다. 그 때 나는 나 자신의 거리에서 그 나라를 보고 왔다. 그 친구가 뭐라고 하든, 그 때 내가 지녔던 나의 거리에서 그 나라를 바라본 나의 느낌은 앞으로 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남에게 손해도 보고, 질 줄도 알도록 한다.
아침 출근길. 차선이 하나로 합쳐지는 곳에서 본선이라 여겨지는 차선의 사 람들은 저쪽 차선에서 들어오는 차를 넣어주지 않으려고 온갖 애를 쓴다. 앞차가 행 여나 저편 차선 쪽의 차를 바보처럼 끼여 들도록 할까 봐, 뒤에서 밀어붙일 듯 이 조바심을 내며 앞 사람을 재촉한다. 그리고 자기는 다른 차가 하나라도 끼 여 들까 봐 저쪽 차선의 차를 힐끔거리며 앞차 꽁무니에다 차를 바짝바짝 붙인 다. 그래서 결국 한 대도 안 끼여 주면, 마치 승리라도 한 듯 쾌재를 부르면서 백미러로 자기 뒤차를 쳐다 본다. 저 친구도 나처럼 아무 차도 끼여 들지 못하 게 하면서 나를 따라 오는지, 아니면 바보처럼 다른 차에게 양보를 하는지 확 인하려는 듯이 말이다. 이러한 식의 사람들 간의 작은 경쟁은 온종일 많은 일에서 계속된다. 사람들 의 행동 원칙은 단 하나다. 결코 눈꼽만큼도 손해보지 않겠다는 것이다. 손해 를 보면, 그것은 그만큼 똑똑하지 못하다는 것, 또는 이런 치열한 경쟁 사회에 서 살아가기 어렵다는 것과 동일시한다. 아파트에서 이따금 느낀다. 단 4, 5 초를 두고 사람들이 현관에 들어선다. 앞 서가는 사람이 얼른 엘리베이터 스위치를 누른다. 문이 열린다. 몇 걸음 뒤로 따라오는 사람이 있음을 그는 분명히 안다. 그러나 이때, ‚저! 올라가실 거예 요?‛하고 약간 기다려 주거나, 또는 아무 말 없이 열림 버튼을 누르고 뒤에 오는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그저 그 사람이 따라와서 탈까 겁이라도 나 듯, 왜 내가 남 때문에 괜스레 몇 초를 서서 기다리며 손해를 보아야 하느냐고 생각하듯 얼른 닫힘 버튼을 누르고 자기 혼자만 올라가 버린다. 이 역시 사람 들이 벌이는 작은 경쟁이고, 또 눈곱만큼 손해보지 않겠다는 심정에서 나온 행 동이지 싶다. 요즈음 젊은 부부들 사이에 문제가 생기는 것도 어찌 보면 서로 눈곱만큼도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행동에서 비롯된다고 느낄 때가 많 다. 옛날의 부부들은 얼굴도 안 보고 결혼하였음에도 잘 살아온 까닭은 부부, 즉 어느 한 쪽, 특히 여자 쪽의 헌신적 사랑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 나 지금은 헌신과 희생을 상대방에게 요구를 할지언정, 자신이 상대방을 위해 서 조금 손해보며 헌신하고 희생하려 들지 않는다. 양쪽의 똑같은 태도가 결국 은 부부의 틈을 벌리고 갈라서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최근 우리 나라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회사마다 명예 퇴직, 조기 퇴직 붐이 일었다. 실업률이 사상 최고에 달하고 있다. 불황이니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줄 여야 겠다는 것이다. 또 자동화, 정보화의 물결은 그만큼 기존의 일자리를 줄 이도록 촉진한다. 그러나 새로운 흐름이 신종 벤처 기업 같은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실업률은 자꾸 늘어난다. 이러한 때 우리는 독일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배울 점을 발견한다. 그들은 회사가 어려워졌을 때, 사람 수를 줄이기 보다는 근무 시간을 줄여서 너와 내가 모두 함께 일하자는 정신을 발휘한다. 근무 시간을 줄이면 임금의 감소를 감수해야 한다. 임금 감소를 감수하면서라도 회사를 아예 그만 두게 되는 동료가 없도록 한다는 것이다. 어떤 동료가 회사를 그만 두고 물러 나게 되면 어찌 그것이 꼭 그 사람만의 일이겠는가, 나 자신의 일일 수도 있다 는 생각에서 서로 힘을 함하여 함께 생존하는 길을 찾는다고 한다. 이러한 독 일 사람들의 생각 저변에 깔린 것은 서로 조금씩 손해를 보면, 우리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는 포지티브 섬 게임의 정신이다. 그렇다면 서로 조금씩 손해를 보면 모두에게 이롭다는 논리를 아침 출근길이 나 아파트의 공동 생활, 그리고 부부 관계에서도 적용할 수 없는가? 두 개 차 선이 합쳐질 때 양쪽에서 ‚내가 몇 초, 몇 분 늦게 가지.‛하고 조금씩 손해 를 보면서 두 차선에서 한 대씩 교행하여 하나의 차선으로 합치면 결국 모두가
빨리 갈 수 있지 않은가. 엘리베이터 앞에서도 내가 몇 초 기다리면, 즉 몇 초 손해 보면 우리 모두 함께 올라갈 수 있지 않은가. 부부 관계에서도 서로 조금 씩 손해 보면서 상대방의 몫을 헌신적으로 대신해 주고 보탬이 되어 준다면, 부부는 깨지지 않고 서로 화합하여 결국 모두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우리는 자녀에게 경우에 따라서 손해를 조금씩, 그것도 기꺼이 볼 수도 있다 는 마음 자세를 길러 주어야 한다. 손해를 볼 줄 아는 심성이나 행동적 기능은 특히 경쟁 사회에서 공정한 원칙에서 서로 경쟁을 하되 자신이 꼭 승자가 아니 고 패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남에게 질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줄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녀에게 오로지 남을 이길 것만 강 요하지 않았던가! 아홉 살 배기 아들이 밖에 나갔다가 징징 울면서 집으로 돌아온 것을 보고 엄마가 말한다. ‚왜 그래? 너 누구하고 싸웠니?‛ ‚민수 형이 때렸어!‛ ‚걔가 왜 때려? 아니 네가 뭘 잘못 했길래 때려?‛ ‚내가 공차기 하는데, 자꾸만 공을 차 본다고 해서, 내가 싫다고 하니까, 공으로 내 얼굴을 때렸어!‛ ‚이런 바보! 그래서, 그냥 맞고 왔어! 아니 너는 손도 없고 발도 없니? 아 니 그런다고 그냥 맞고 돌아와? 바보처럼. 하여튼 넌 어찌 그러니, 그냥 나가 기만 하면 맞고 돌아오냐! 그 쪽에서 공으로 네 얼굴을 때리면 너도 그렇게 하 면 되쟎아! 하여간 앞으로는 다시 매 맞고 들어와서 울고 들어오기만 해봐! 때리고는 들어와도, 맞고는 들어오지 마!‛ 자기 아이가 밖에 나가서 다른 아이들한테 맞고 들어왔다면, 그 어떤 부모도 심기가 편할 리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남한테 맞고 들어오기 보다는 오 히려 남을 때려주고 오라고 한다면 그것이 정말로 자녀들을 사랑하는 올바른 가르침일까? 아이가 누군가 하고 싸워서 매를 맞고 들어 왔다면 우선은 어떤 아이와 무슨 일로 어떻게 싸움이 일어나서, 어떻게 얼마나 다쳤는가를 차근차근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또 자기 아이와 싸움을 한 다른 아이는 안 다쳤는지, 다쳤으면 얼마 나 다쳤는지도 확인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아이의 교육을 생각하는 바람직한 엄마의 모습이다. 대부분의 경우 아이는 자기 입장에서만, 자기는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그 쪽에서 그냥 때렸다고 주장하게 마련이다. 이 때 엄마는 오히려 다른 아이 편에 서서 자기 아이의 주장을 들어 주며, 아이의 마음을 다독거려 주는 게 좋다. 그러나 이러한 일보다 본질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폭력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음을 아이에게 일러 주는 일이다. 저 쪽에서 폭력을 사용한 다고 해서 이쪽에서도 폭력으로 맞대응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도 한 번쯤 깊 이 생각해 볼 일이다. 특히, 그 어떤 경우에도 다른 사람에게 지고 돌아오는 일이 없도록 아이를 세뇌시키는 것이 잘 하는 행동인지 부모들이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기야 경쟁 사회니까, 그 어떤 경쟁이나 싸움에서든 패자가 되기 보다는 승 자가 되고 싶은 게 사람의 본능이다. 그러나 승자가 되느냐 패자가 되느냐 보 다는 주어진 조건에서 얼마나 최선을 다했느냐가 더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최 선을 다했는데도 어쩔 수 없이 패자가 되었다면 그 패배를 기꺼이 받아 들이는 태도를 갖도록 가르쳐야 된다. 다시 말해서, 경쟁에서 남에게 지는 법도 배워 야 한다. 어떤 면에서는 남들이 나보다도 우수함을 인정할 수 있는 마음도 갖 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의 많은 부모들은 무슨 일에서도, 즉 학업에서든, 놀이에서든, 도는 아이들 사이의 작은 다툼에서든 결코 져서는 안 되는 것처럼 아이들을 몰 아세워 오히려 아이들에게 문제를 일으킬 때가 많다. 부모들은 온갖 수단 방법 을 다 동원해서 자기 아이가 남의 아이들보다 공부도 잘 하고, 힘도 더 세고, 키도 더 크고, 달리기도 더 잘할 수 있도록 만든다. 그러한 부모들의 경우, 아 이가 누군가와 다투고 징징 울면서 집에 들어오면 부모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아이들을 윽박지른다. 비록 남의 아이를 내 아이가 때려서 자신이 치료비를 물 어 주는 한이 있어도, 맞고 들어오는 꼴은 보기 싫다고 소리친다. 앞서 말했듯 이 폭력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무슨 일에서든 작은 버릇이 훗날 돌이킬 수 없 을 만큼 나쁜 버릇으로 굳어지듯, 어린 시절의 작은 다툼이 훗날 감당하기 어 려운 폭력으로 확대될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남의 몫도 내 몫처럼 중요함을 생각하도록 한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그 때는 내륙 농촌에서 생선을 먹기란 소고기나 돼지 고기 먹는 일보다 더 힘들었다. 큰 양은 그릇 같은 것을 머리에 이고 일 주일 에 한 번쯤 찾아오는 아주머니에게 모처럼 엄마가 꽁치 몇 마리를 사셨는가 보 다. 그러면 우리 여섯 형제는 밥상 한가운데 놓인 꽁치 두 마리를 놓고 머리를 굴린다. ‚저기 저 두 마리에서 내가 얼마만큼. 어느 부분을 젓가락으로 집어가면 우리 여섯 명이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식사를 끝낼 수 있을까?‛ 만약 그렇지 않고 내가 낼름 한 마리를 통 째로 집어다 내 밥그릇에 올려 놓으면 언제 누구의 주먹(?)이 날아올지 모른 다. 그것을 모든 형제는 경험을 통해서 터득하였다. 즉, 저 생선 중에는 분명 내 몫도 있지만, 다른 사람의 몫도 있음을 안다. 그러한 원리를 우리는 생활 속에서 알게 모르게 배우며 성장했다. 그러나 요즈음의 신세대는 조금 다르다. 모든 것이 풍족해서 그런지, 아니면 형제의 수가 적어서 그런지 자기 몫만 생각한다. 하기야 어린아이 한 사람에게 굴비 한 마리를 통째로 주다 보면, 또는 두 아이에게 먹고 남을 만큼 굴비를 여러 마리 주다 보면, 그 아이는 남의 몫도 중요함을 깨닫기 어려울 것이다. 그저 자기 좋을 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부위만, 좋아하는 만큼 집어 먹어도 아 무런 갈등이 없으니 말이다. 사실 남의 몫을 생각한다는 것은 곧 타인의 존재를 생각한다는 얘기다. 내 몫이 중요함은 내가 중요한 것이고, 남의 몫을 인정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존 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이치는 공동 생활 속에서 터득된다. 그러나 지금 의 아이들은 대가족이 살았던 옛날과는 달리 가정 내 공동체 생활 경험이 적 다. 또한 밖에서의 공동체 생활, 서로 나누어 쓰고, 서로 함께 살고, 서로 불 편하더라도 어떤 하나의 원칙에 모두가 따르는 생활 경험이 적다. 그러다 보니 남의 몫이나, 타인의 존재를 생각하는 버릇이 길러질 리가 없다. 어느 대기업의 신입사원 연수가 서울 시내 한 유스호스텔에서 7 박 8 일 일정 으로 실시되었다. 교육 담당자는 입소 첫날 저녁때 400 명에게 칫솔, 치약 등 세면 필수품과 몇 종류의 과자 등 간식을 각 방 별로 배분해 주었다. 그러자 몇 명의 신입사원들이 찾아와서 하는 얘기가, 자기가 평소 사용했던 것과 같은 치약을 사 달라, 간식은 이런 것 사 달라 하면서 까다롭게 주문을 하더라는 것 이다. 얼핏 보기에는 개성이 강하고, 자기 주체성이 분명한 듯 보여 좋은 것 같지만, 이들은 우선 공동체 안에서의 생활임을 잊은 자기 본위의 이기적인 생 각을 한 것은 아닌가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교육 담당자 입장에서는 나름대 로 배려하였지만, 400 명 모두의 입에 맞추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설 혹 나누어 준 치약이나 과자가 내 마음에 안 들어도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면,
내가 조금은 손해 보더라도 양보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공동 체 안에는 나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있음을 , 나의 기호나 습관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기호나 습관도 중요함을 먼저 생각하 여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곧 남의 몫을 인정해 주는 것이고, 또 양보할 줄 도 아는 조직 구성원의 자세가 아닐까 싶다. 남의 몫을 인정하고, 남에게 양보할 줄 아는 마음은 타인의 존재를 긍정적으 로 지각하는 데서 비롯된다. 타인의 개성이나 능력, 감정 등을 긍정적으로 지 각할 대 우리는 타인의 몫을 생각하게 된다. 타인에 대한 긍정적 지각은 가정 에서 부모가 평소에 자녀에게 타인을 얼마나 긍정적으로 지각하느냐를 행동으 로 보여 줄 때 자녀의 심성 한가운데 형성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흔히 사람들이 모여 앉아 주고 받는 대화를 요약하면 두 가지다. 하나는 제 3 자에 대한 비난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에 대한 자랑이다.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모 여 앉은 사람들은 누군가를 희생의 제물로 삼아 비난을 한다. 그런 모습은 부 모들의 생각 없는 대화에서도 가끔 나타난다. 자녀들도 있는 식탁에서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아이의 사촌형제들이나 부모의 친형제들의 행동을 비난하 고, 심지어는 아이들의 조부모를 생각없이 비난할 때가 그렇다. ‚하여튼, 당 신 어머니, 하셔도 너무 하셨어! 아, 우리가 그만큼이나 잘 해 드리면 됐지! 무엇이 부족해서 맨날 그러시는지 모르겠어! 자식한테 뭐 해주신 게 있다구! 참 나, 원...‛ 이런 대화를 들은 아이들은 가족 구성원은 물론, 다른 사람들 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지각을 갖게 될 것이고, 결국 그러한 부정적 지각은 남 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의 몫만 챙기도록 하게 될 것임이 자명하다. 5. 자존: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깨닫도록 한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아마도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프거나, 육신이 어떤 물리적 힘 으로 고통을 당한다 해도 사람들은 그런 것을 잘 견뎌 낸다. 그러나 사람이 자 신의 자존심을 능멸당할 때, 사람들은 그것을 견디어 내지 못하고 그래서 예기 하지 않은 막다른 돌출적 행동으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가만히 따져 보면, 우리 사회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 하는 아픔을 가슴 깊이 안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남보다 가난하다고, 배운 것 이 적다고, 지위가 낮다고, 나이가 많거나 적다고, 여자로 태어났다고, 출신 지역이 어디라고, 학벌이 변변하지 못하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조롱 받고, 무시 당하는 경우가 많다. 청소년들도 예외는 아닐 성 싶다. 재 가치가 결정될 때가 많다. 공부를 남보다 못해서, 대학에 갈 가능성이 적다고 해서 부모나 친구, 선생님들에게 외면당하고 무시당하는 청소년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경우, 그 들 자신은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까? 남들에게 무시당하는 사람들, 남들에게 존재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하는 사람 들은 세상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될 것이 틀림없다.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고, 자신을 긍정적으로 생각할 줄 모르고, 그저 자아에 대한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자아 혐오는 자아 부정, 자아 왜곡, 자아 폐멸 등 여러 가지 형태로 발전한다. 결국 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더욱더 소외당하고 무시 당하기 일쑤다. 결국 악순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존 의식이 상실된 사람이 우리 사회에 많아진다면, 우리 사회는 어떠한 모습의 사회가 될까? 어둡고, 병 들고, 삐걱거리고, 다투는 건강하지 못한 사회가 될 것이다. 21 세기에 우리가 진정, 밝은 사회, 빛이 비치는 사회, 모두가 삶의 의미를 느끼며, 함께 나누어
갖는 건강한 사회를 이루려면, 21 세기의 주역이 될 청소년들에게 자존 의식을 가꾸어 주어야 할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자녀의 자존 의식을 길러 줄 수 있을까? 몇 가지만 적어 본다. 누구에게나 잠재된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고 3 에 올라간 혁진이는 고 1 때도 47 등, 고 2 때도 47 등이었다. 굳이 꼭 47 등 을 연거푸 한 것은 그 아이네 반 학생이 모두 47 명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꼴찌였던 셈이다. 고 3 담임을 맡은 선생님은 자기네 반 아이들의 신상을 살폈 다. 아마도 누가 대학에 갈 수 있는지, 어느 대학에 갈 수 있는지를 따져 보는 듯 했다. 그러다가 담임 선생님은 혁진이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생각했을 성 싶다. 이 아이는 대학에 진학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혁진이를 불렀다. ‚너, 김혁진, 요즈음 공부 열심히 하냐?‛ ‚네, 그렇긴 합니다만...‛ ‚이 녀석아, 뭐가 그렇긴 해! 너 임마, 고 1 때 몇 등 했어?‛ ‚47 등요!‛ ‚47 등은, 이 녀석아 무슨 47 등야! 그냥 꼴찌했다고 하지! 고 2 때는?‛ ‚꼴찌했습니다.‛ ‚너, 네 생각에는 대학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냐?‛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게 아니라, 불가능한 것 아냐?‛ ‚그래도 고 3 때는 열심히 해 볼 생각입니다!‛ ‚너, 그러지 말고, 선생님이 하나 제안하는데, 학교에 오지 마!‛ ‚네? 저어, 학교에 다니고 싶은데요.‛ ‚그래, 알아! 그런데 너는 말야! 학교에 올 필요가 없어! 너, 이제부터 내 말 잘 들어! 너는 매주 월요일만 학교에 와! 그러면 일주일 내내 출석으로 인 정해 줄 테니깐, 그 대신 화, 수, 목, 금, 토 닷새는 너 어디든 가서 기술 배 워!‛ ‚기술이라니요?‛ ‚이 녀석아, 기술도 몰라? 예컨대, 자동차 정비 기술을 배운다든지, 목공예 기술을 배운다든지 그런 것 말야! 집에 가서 부모님께도 의논 드리고 너도 잘 생각해 봐! 그래 갖고, 내일 내게 와서 얘기해! 네가 무슨 기술이든 배우고 싶 다 하면 선생님이 주선해 줄 테니깐!‛ 혁진이는 집에 가서 밤잠을 못 이루고 고민했다. 공부를 못했지만 심성만큼 은 누구보다 착한 혁진이는 부모님께 차마 말씀드릴 수가 없었다. 대학 진학 포기는 부모님께는 더할 수 없는 실망일 테니깐. 자식이 많은 것도 아니고, 아 들은 자기 하나, 그 밑에 여동생이 하나 있을 뿐인데, 이 하나뿐인 아들이 워 낙 공부를 못 해서, 고 3 올라와서 아예 대학을 포기한다면, 그리고 어디 가서 기술이나 배운다면, 부모님은 영락없이 쓰러져 돌아가실 것만 같았다. 결국 혁 진이는 부모님께 말씀을 드리지 못 하고 자기 혼자 끙끙 앓다가 학교로 나갔다. 옛날부터 혁진이는 헤어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혁진이는 그런 기술을 배우겠다고 이튿날 선생님께 말 씀드렸고, 선생님은 쾌히 받아들이시고, 미용실도 소개해 주셨다. 한 달 정도 미용실을 다닌 혁진이는 이제 기본적인 기술을 익혔는가 싶다. 매주 월요일 학교에 올 때, 혁진이는 머리 자르는 도구를 바지 뒷 호주머니에 넣고 왔다. 속셈은 학교에서 친구들을 대상으로 실습도 하고 또 아이들에게 한 번 재 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야! 너희들, 내가 머리 잘라 줄까?‛
‚어쭈, 네가 뭘 깎아!‛ ‚나, 배웠다니깐, 몇 주 배웠단 말야! 이제 너희들 머리통 쯤은 깎아 줄 수 있단 말야!‛ ‚뭐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또 꼭 그렇지 않다고는 말 않겠다. 그러나 공 짜로 깎아 줄테니, 누구든 한번 갖다 대 봐!‛ 그 때, 용기 있는 친구가 하나 나섰다. 마침 이발해야 한다고 해서 부모님한 테 5 천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 친구한테 깎으면, 5 천원이 고스란히 굳지 않겠 나, 설혹 잘못 깎으면, 5 천원으로 다시 깎으면 될 터이고, 돈을 벌려면 모험이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한 그 친구가 선뜻 나섰다. ‚야, 깎아 봐! 너 근데, 잘 깎아야 돼.‛ ‚알았어! 내가 잘 깎아 줄께, 나중에 잘 깎았다 생각되면 너 매점에서 빵 사 줘야 돼!‛ ‚알았어.‛ 혁진이는 그 아이의 머리 생김새를 이리저리 살펴가면서 잘 깎아 주었다. 둘 러서서 보고 있던 아이들이 탄성을 질렀다. 멋있게 깔끔하게 잘랐다. 그러자 이번에는 너도 나도 아이들이 모두 나섰다. 결국 바빠진 혁진이는 매주 월요일 머리 깎을 아이들의 예약을 받았다. 2 학기 때는 수요가 넘쳐서, 결국 수고비로 아이들한테 1 천 원씩을 받기로 했다. 그래도 아이들은 타산이 맞는지라 혁진이 한테 머리 깎기를 간청했다. 개중에는 계속 5 천 원씩 떼어 먹으려고 집에 가서 이발 값이 6 천 원으로 올랐다고 말한 친구도 있을 성 싶다. 이렇게 1 년을 친구들 머리를 깎아 준 혁진이가 지금 미국 뉴욕에 있는 유명 한 헤어 디자이너 스쿨에 다닌다면, 우리는 47 등만 연거푸 2 년을 한 그 아이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좋을까? 공부를 못 해서, 대학에 갈 수 없는, 그래서 이 도저도 할 수 없는 다 끝난 아이로만 보았어야 했을까? 선생님이 훌륭하신 분 이었다. 몇 년 후, 혁진이가 유명한 헤어 디자이너가 되어서 돌아 오기를 선생 님이나 친구들 모두는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선생님이 학생의 잠재된 가능성을 일깨워 주고 이끌어 주는 경우는 많다. 나 는 시골 종합 고등학교를 다녔지만, 내가 대학에 갈 수 있었던 것은, 고 2 때 교직에 처음 부임하신 젊은 수학 선생님 덕이었다. 선생님께서는 부임하시자마자 우리에게 수학 시험을 보게 하셨다. 그리고 어느 날 선생님은 나와 다른 친구 하나를 교 무실로 부르셨다. ‚야! 내가 너희들 답안지 채점해 보았는데, 가만히 보니까 너희 두 놈은 공부하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 너희 두 놈은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에도 갈 수 있을 것 같아! 열심히 해 봐!‛ 그날 밤 내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대학에 갈 수 있 다고, 그것도 잘 하면 명문 대학에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그 때 선생님 의 그 한 마디 말씀은 나에게 자신감을 불러 일으켜 주었고, 그것이 힘이 되어 그 후 나는 참으로 신나는 노력을 기울일 수 있었다. 이처럼 학생들의 잠재된 가능성을 일깨워 주는 일을, 부모들 역시 자녀에게 해 주었으면 한다. 자녀의 잠재적 가능성은 그들의 일상 생활을 누구보다 가까 이서 지켜보는 부모, 특히 엄마의 눈에 잘 보인다. 이를테면, 어떤 집 아이는 사람과 사귀기를 즐거워하고, 언제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다른 사 람의 입장을 생각해 주는 특성을 지녔음을 부모는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 한 경우 아이의 장점을 살려서, 잠재된 적성을 표출시켜 주는 것이 부모의 자 녀에 대한 참사랑이 아닐지 모르겠다. 내게는 아들이 둘 있다. 어린 시절 그 아이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해 보니, 두 아이는 판이하게 달랐다. 큰아이는 친구와의 사귐이 비교적 적었고, 혼자서 놀고 혼자서 지내기를 좋아한 반면, 작은아이는 반대로 친구가 많고, 여럿이 어떤 일을 계획하고 함께 하는 것을 좋아했다. 식사습관도 달랐다. 큰아이는
엄마가 새로 개발하였거나 친구네 집에서 얻어 온 반찬에는 얼른 젓가락을 가 져가지 않았다. 늘상 좋아하는 한두 가지 반찬만을 먹는다. 그러나 작은아이는 반찬에 가림이 없다. 옷도 형은 늘 가려 입었지만, 동생은 무슨 옷이든 가림 없이 좋아하고 잘 입는다. 이러한 행동 성향은 곧 그들의 잠재된 적성을 의미 한다. 이 때 부모가 도와줄 일은 그러한 적성이 내포하는 잠재된 가능성이 무 엇일까를 생각하면서, 그것을 아이들이 스스로 찾아가도록 조언해 주는 것이 다. 지금도 아이의 엄마는 그것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아이들 에게 항상 이른다. 네게도 너만의 특별한 잠재적 가능성이 있음을 잊지 말라 고. 자녀를 무시하거나 저주하지 말아야 한다. 집에 들어와 식구들과 함께 저녁 식탁에 않았다. 그 때, 아내가 말을 건넨 다. ‚여보! 당신 오늘 무슨 국제 세미나에서 발표하셨수?‛ ‚음, 왜?‛ ‚근데, 무슨 세미나였길래, 저녁 텔레비전 뉴스에 다 나오나요?‛ ‚21 세기 사회 변화와 고등 교육의 개혁이란 그런 주제로 열린 국제 회의였 어!‛ ‚그런데 당신, 거기서 무슨 얘기를 하셨수?‛ 바로 이 때다. 이 때, 어떻게 대답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하나는 아내를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아내가 무시당했다고 느끼 도록 하는 응답이고, 다른 하나는 아내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는 응답이다. 우선 전자와 같은 경우는 대답이 이렇게 나온다. ‚무슨 얘기를 하긴, 무슨 얘기를 해! 그러구, 내가 말하면, 당신이 뭐 알아 들어?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묻기는! 아, 시끄러워! 밥상이나 어서 차려!‛ 이렇게 응답하면, 더구나 아이들 앞에서 이런 식의 대답을 들은 아내는 무엇 을 느끼게 될까? 아마 속으로 이렇게 응수할 것이다. ‚그래, 난 무식해요! 그래서 아무 것도 못 알아들어요. 당신은 잘났구료, 박사고 교수고 그래요. 세미나나 많이 해요! 나는 그저 이 집 식모유!‛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대답하는 방식이 크게 다르다. ‚21 세기 정보화 사회를 염두에 둘 때, 한국의 고등 교육은 세 가지 점에서 크게 변화되고 발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지! 하나는 당신도 알다시피, 교 육을 제대로 해서 질을 높이는 일이고...‛ 남편은 아내와 그리고 아이들까지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들의 지적 수준을 고려하면서 잘 설명해 준다. 그리곤 한 가지 덧붙인다. "당신 생각은 어떻소?" "뭐, 내가 잘 모르지만, 근데 대학 등록금이 너무 비싼 것 아녜요? 더욱이 교육의 수준에 비하면! 우리 나라 대학교육을 보면 마치 싼 물건 비싸게 사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그래요, 좀 찝찝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아요." "맞아, 당신 예기도 맞는 얘기야! 그러니까 내가 질을 높여야 한다는 얘기를 처음에 한 것이야!" 이런 식의 대화는 분명 아내의 인격을 존중하는 대화이며, 결코 아내를 무시 하는 결과도 초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가 마주 앉아 대 화를 할 때 보면, 종종 자녀의 인격과 존재를 통째로 무시하는 경우를 부모의 분별없는 언어 행위를 통해서 쉽게 찾아 낼 수 있다. "야, 네가 뭘 안다고..." "너, 이제 겨우 6 학년이야!" "어디 네가 그것을 해내나 두고 보자!"
"씨는 못 속인다니깐..." "이런, 바보같은 자식하구... 어째 그러냐!" "너보다 세 살이나 덜 먹은 아이도 잘만 하더구만..." "네가 뭐가 부족해서 남만 못하냐!" "하여튼 꼭 저 같은 자식, 둘도 말고 하나만 낳아 보라지!" "꼴 보기 싫어! 다시는 내 눈 앞에 얼씬대지 마!" 특히 이러한 언어 행위가 사춘기 청소년들에게는 엄청난 상처와 함께 그들이 가정에서, 사회에서 심리적으로 이탈하는 계기가 되므로 부모들은 언어 행위에 더욱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 사춘기 때는 다른 때와 달리 자기에게 부여되는 정체감을 확인하려는 특성이 있다. 이를테면, "야! 이 바보같은 녀석아!"하고 부모가 야단을 치면, 사춘기 청소년들은 '바보'라는 자기에게 부여된 정체감을 실제로 확인하려 든다. '그래, 날보고 바보라고 했지! 그래 어디 바보 자식 두어서 얼마나 좋은가 보 라지! 진짜 바보가 어떤 것인가 보여 주어야지.'하고 바보스러운 행동을 의도 적으로 하게 된다. 이것이 일종의 확인된 정체감이다. 그래서 사춘기 아이들에 게 "너 같은 놈은 집을 나가 버려야 돼! 아까운 쌀 축내지 말고!" 라고 부모가 말하면, 그들은 실제로 나간다. 그러나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 아이나 스물이 넘은 청년에게 부모가 그렇게 말해도 그들은 가출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사춘 기 아이들에겐 함부로 무시하거나 저주하는 언행을 생각없이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긍정적이고, 수용적인 언어 행위를 하면 확인된 정체감이 더욱 굳게 다 져지고, 결과적으로 자존 의식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덧붙이고 싶은 말은, 자녀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나 물건도 함께 소중하게 생각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녀가 애지중지 여기는 물건을 쓸데없는 것, 내다 버려야 할 것으로 규정하거나 자녀가 사랑하고 존경 하고 따르는 친구나 선생님을 비난하거나 무시한다면 자녀는 그것을 곧 자기 자신에 대한 비난과 무시로 받아 들인다. 반대로, 자녀가 가깝게 지내는 친구 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해 주고, 그들이 집에 놀러 왔을 때 후한 대접을 해 주 면 자녀는 그것을 곧 자신에 대한 부모의 사랑으로 받아들인다. 어떻든 저주, 무시, 비난, 비하, 조롱 등은 인간의 삶에서 최소화시킬 수 있을 만큼 최소화 시켜야 한다. "야, 너 이리 앉아 봐! 정말 이젠 너한테 이런 얘기 하기도 지쳤다. 엄마, 아버지로서는 네게 정말 최선을 다했어. 열 다섯 살이면 이젠 철도 들 나이니 깐, 너도 생각해 보면 알 거야. 그래 뭐, 엄마, 아버지가 네게 부족하게 해 준 게 있냔 말야! 잔소리도 한두 번이고, 너 아버지한테 맞을 만큼 맞아도 보았 지! 이젠 더 이상 안 때려! 때려서 될 일 같으면 너 벌써 정신 차렸을 거다. 정말이지 이젠 너한테서 두손 들었어! 엄마, 아버지 이젠 네게 더 이상 상관 안 할 거야! 네 마음대로 해 봐! 공부를 하겠거든 하고, 하기 싫거든 하지 마! 공부해서 엄마, 아버지 달라는 거냐! 다 너를 위해서 하라는 것인데! 하여튼 스무 살까지는 먹여 주고 입혀 줄 거야! 그리고 그 때까지 네가 공부하겠다고 하는 한 공부도 시켜 줄 거야! 이젠 정말 다시 네게 이런 얘기도 안 할 테니깐 정말 네 마음대로 해 봐!" 오죽하면 열 다섯 살짜리 아이를 앞에 놓고 아버지가 그러한 최후 선언을 했 을까 하고 이해하는 부모들이 많을 것이다. 자식을 키워 본 부모라면 그런 식 으로 밖에 아이에게 말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심정에 공감을 표할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 아버지는 자신의 말대로 그 '마지막' 선언을 지킬 수 있을까? 대부분의 부 모들은 지키기 어려움을 안다. 화가 치밀어 오르고 정말 어쩔 줄 몰라서 그 순 간엔 그런 식으로 말할 수 밖에 없었지만, 하룻밤 자고 나면 부모도 아이도 어 제 밤 있었던 그 최후 선언의 감정을 모두 잊고는 다시 옛날의 관계로 돌아가
는 것 아닌가? 부모들은 자녀에 대한 근심과 걱정으로 그래서 안 하기로 마음 먹은 질책을 또 하게 되고 애원과 격려를 반복하는 것 아닌가?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제 밤 아버지에게 최후의 포기 선언을 들었을 때는 속으로 부모가 야속했고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집을 뛰쳐나가 버리고 싶 은 생각도 머리 속에서 오락가락했을 것이다. 공부고 뭐고 다 때려 치우고, 아 파트 옥상에서 떨어져 죽고 싶은 생각도 스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룻밤 자 고 나면, 아이는 모든 것 다 잊어 버리고 다시 일상의 생활로 돌아간다. 결심 하고 며칠은 잘 해보지만 다시 흐트러지고, 그래서 또 꾸중 듣고 그러면서 하 루하루가 지나고, 그 속에서 정말 철도 들고 생각도 행동도 영글어 가는 것 아 닌가? 부모와 자녀의 끊을 수 없는 사랑과 마음의 관계를 굳이 천륜의 관계로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네 젊은 부모들이 꾸미는 가정을 들여다보면 부모 자녀 사이의 끊을 수 없는 천륜의 관계가 쉽게 끊어지고 있다는 데서 문제의 심각성 을 느낀다. 자녀를 그야말로 포기하는 부모가 점차 늘어난다. 화가 치밀어 올 라서 한 말이긴 해도, 부모의 자녀 교육에 대한 포기 선언은 그래도 어디까지 나 교육상의 한 가지 엄포였던 것인데, 그것이 엄포가 아니라 실제 상황으로 이어진다는데 문제가 있다. 자녀의 능력이 남보다 크게 뒤떨어진다고 해서, 신 체적 결함이 크다고 해서,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다고 해서 자녀 교육을 포기 하는 행동은 부모의 편익만을 추구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자기 보호주의적 행동 이 아니겠나 생각들 때가 많다. 어려서부터 성취감을 많이 맛보도록 하라. 초등학교에 갓 입학해서 몇 달만에 처음으로 받아쓰기 시험을 본 영신이는 100 점을 맞았다. 영신이는 시험 답안지를 가방에 넣지 않고 그냥 손에 들고 집 으로 달려갔다. 엄마가 문을 열어 주자 영신이는 소리친다. "엄마, 엄마. 나 오늘 100 점 맞았다! 이것 봐, 100 점이야!" "그래, 참 잘 했구나! 역시 우리 영신이는 엄마를 닮아서 꽤나 똑똑해!" "엄마!엄마! 우리 밥 먹고 받아쓰기 하고 놀자! 음? 그리고 참, 아빠 오늘 몇 시 에 와?" "왜?" "나, 아빠 오면 받아쓰기 하고 놀자구 그럴 거야! 나는 받아쓰기가 제일 재 미있어! 엄마, 우리 선생님 있쟎아! 굉장히 멋쟁이다. 그리고 우리 학교도, 딴 애들이 그 러는데 이 쪽에서 제일 좋은 학교래, 엄마! 저 쪽 왜 뚝방 쪽에 학교 하나 있 는 것 봤지! 그 학교는 똥통 학교래!" 100 점을 맞아온 영신이는 공부도, 선생님도, 학교도 온통 모든 것이 좋았다. 신이 났다. 100 점을 맞았다는 성취감이 아이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렇기에 어렸을 때, 특히 초등학교 시절에는 누구에게나 이렇게 100 점을 맞는 경험을 많이 갖도록 하는 것이 좋다. 그러한 성취감은 성취동기를 강화시켜 주고, 긍 정적 지각을 갖게 하고 또 강한 자발성을 형성해 주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는 앞으로 15 년 넘게 받아야 하는 공교육의 출발선이다. 이 출발선 에 선 아이들이 사뿐히 스타트할 수 있어야 성공을 거둘 수 있다. 마치 마라톤 달리기에서처럼 말이다.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일찍이 행동 연쇄의 원리라는 것을 밝혀 냈다. 행동 은 체인처럼 쭉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앞서 한 행동에서 성공을 거 두면 그 다음 행동에서도 성공을 거둘 확률이 높아지고, 반대로 앞서 한 행동 에서 실패하면 그 다음 행동에서 실패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얘기다. 이런 확률은 평소의 일과에서도 쉽게 경험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분도 가
뿐하고 식사 준비도 잘 되어 있고, 넥타이를 골라 맬 때도 한 번에 잘 되면 엘 리베이터도 그 날따라 자기가 탈 층에 와 있고, 지하철도 내려가자 마자 금방 오고... 이런 식으로 온종일 일이 잘 풀려 나간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 반대 로 되는 때도 있다. 일어나니 어깨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듯 아프고, 세수하고 났는데도 찌개가 아직 덜 끓었으니 평소와 달리 옷부터 입으라 하고, 또 옷을 입고 넥타이를 매려니 한 번에 잘 되질 않아 세 번이나 고쳐 매고, 밥 먹고 문 앞에 나가 엘리베이터를 타려 하니 15 층에서 누가 잡고 있는지 도무지 내려올 기미가 없고, 지하철을 타러 갔는데 사람이 많아서 두 차례나 그냥 보내고... 이런 식으로 온종일 일이 꼬일 때가 있다. 이 모두 느낌의 차이겠지만, 좋은 느낌, 성공의 느낌을 가지려면, 제일 처음 행동에서 성공을 거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어린 시절에 겪는 성공, 성취, 승 리의 느낌은 앞으로의 긴 학교 생활에 무엇보다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 학교에서나 가정에서 선생님과 부모들은 보통 아 이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어려운 것을 요구하여 성공보다는 실패감을 맛보도록 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학교에서 시험을 볼 때, 학급 어린이 모두가 100 점을 받을 수 있는 시험은 잘 안 낸다. 그저 몇 명만 100 점을 맞을 수 있도록 한다. 정상분포 곡선에 대한 그릇된 믿음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아이들을 잘 하는 아 이와 못 하는 아이로 균등하게 분배해 놓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에 따라 초등 학교에 입학해서 낮은 점수를 받는 아이가 생길 수 밖에 없다면, 그 아이는 세 상에 태어나서 처음 보는 시험에서 얻은 성적으로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예 컨대, 받아쓰기에서 20 점을 받은 민구는 집에 가서 뭐라고 할까? 아무 말도 않 는 아이에게 엄마가 먼저 소리치며 묻는다. ‚야, 너 오늘 받아쓰기 안 했니?‛ ‚했어요!‛ ‚근데, 왜 몇 점 받았는지 말이 없냐? 어디 꺼내 봐!‛ 민구는 아무 말 없이 답안지를 꺼내 엄마에게 내민다. ‚야! 너 이게 뭐야! 그래 스무 개 중 겨우 네개 밖에 못 맞았어?‛ 그러자 민구는 울음을 터뜨린다. 그리고는 소리치듯 말한다. ‚엄마, 나 학교 다니기 싫어, 딴 학교 다니고 싶어! 선생님도 싫고, 받아쓰 기 재미 없어! 우리 선생님은 딴 애들만 예뻐하고...‛ 앞서 100 점을 맞은 영신이와 달리 민구는 그저 모든 게 싫고 나쁘다. 초등학 교에 입학해 스타트부터 민구는 실패와 패배를 맛보고, 그래서 자신감을 상실 했다. 그렇게 되면 민구는 앞으로 길게 남은 학교 생활을 어떻게 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초등학교에서는 아예 시험을 없애거나 있어도 모든 아이 들에게 좋은 점수를 받게 해 주는 시험이 바람직하다. 어디 그런 것이 학교에서만 그렇겠는가?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학습지다 뭐 다 해서 온갖 종류의 시험 비슷한 문제지를 아이에게 갖다 디민다. 그리고 해 보라고 하고, 점수를 매긴다. 그러나 그러한 부류의 학습지는 그저 어렵게만 만드는 것이 좋은 줄 알고, 아이들 능력과 학교 수업 진도에 아랑곳없이 만들 어, 아이들이 결코 좋은 점수를 받기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그런 형편없는 학습지나 문제지를 풀어 점수를 나쁘게 얻은 아이들은 어떤 감정을 갖게 될 것인가? 조기 교육을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무엇이든 남보다 먼저 가르치려고 하는 데는 반대한다. 특히 아이가 어려운 것을 많이 알고 잘 풀면 공부를 잘 하는 것으로 착각하면서 조기 교육에 열을 올리는 일은 곧바로 아이를 망치는 일임을 경고하고 싶다. 아이에게 어려운 문제만을 디밀어서 실패만을 거듭하게 하는 것보다는 쉬운 것을 통해서 성공하는 기쁨을 자꾸 맛보게 하는 편이 아이 에게 자신감을 갖게 하고, 강한 내적 성취 동기를 형성해 주고, 결국엔 자존
의식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한다는 사실을 선생님이나 부모가 인식하여야 한다.
자신에 대한 이해와 설명부터 할 수 있도록 이끈다. 10 년 전 쯤의 일이다. 서울 영등포에 있는 어떤 교회에 모임이 있어, 그 교 회의 위치를 알려고 교회에 전화를 걸었다. 그랬더니 전화를 받은 그 교회의 집사 한 분이 대답하기를, ‚우리 교회는 와 보지 않은 사람은 못 찾아와요! 찾아올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는 끝내 교회의 위 치를 설명하기를 거절했다. 그런데 그 비슷한 경험을 작년에 인천에서 겪었다. 한 대기업 계열회사인 생 명보험 회사의 지점에서 강의를 요청해서 그 지점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지도 를 보고 어느 정도는 위치를 파악하고 인천 시내엘 들어섰지만 길이 여러 갈래 라 찾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비는 쏟아지는데 차에서 내려 공중전화를 찾아 그 지점에 전화를 걸었다. 마침 지점장이 전화를 받았다. ‚지금, 경인 고속도로 도화 인터체인지인데, 여기서 어떻게 가면 좋은지를 좀 설명해 주시지요!‛ ‚제가 부임한 지 일주일 밖에 안 되어 잘 모르겠는데요!‛ ‚그러면 직원 중에 누구 아는 사람 있을 거 아니예요. 아는 사람을 좀 바꿔 주시지요!‛ 한참을 기다렸다. 큰 소리로 누구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 없냐고 말하는 것 도 들렸다. 그러나 지점장의 대답은 의외였다. ‚아무도 잘 모른다는데요!‛ 결국 나는 전화를 끊고, 길가에 있는 사람들한테 이렇게 저렇게 물어서 찾아 갔다. 그 회사 지점엘 가 보니 지점장 방 밖 사무실에는 십여 명이 넘는 직원들이 있 었다. ‚아니, 그래 저렇게 많은 사람들 가운데 도화 인터체인지에서 여기가지 오는 길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자동차로 10 분도 안 되는 거리인 데! 당신들이 간청해서 강의하러 왔는데, 모셔오지는 못할 망정, 비오는 날 자 기 차 타고 오는 사람한테 길 하나 제대로 가르쳐 주지 못할 수가 있단 말이 오?‛ 그날 나는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기분 같아서는 강의고 뭐고 다 그만두고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래도 내 강의 를 듣겠다고 모여든 500 멍이 넘는 주부들이 무슨 죄가 있나 싶어서 화를 삭이 고 강의를 하고 돌아왔다. 참으로 믿어지지 않는 현실이다. 교회 집사도, 보험회사 지점장도 도대체 이 해를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자기가 부임한지 일주일 밖에 안 되었다 하지만, 그 동안 자기가 책임맡고 있는 지점의 위치도 모르고 앉아 있었단 말인가? 그 래 가지고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교회나 보험회사 모두가 서비스 정신을 발휘해야 하는 기관인데 말이다. 옛말 가운데 ‘수신’을 먼저 한 다음에 ‘제가’를 하고 ‘치국’도 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수신의 의미는 여러 가지가 함축되어 있거늘, 그 가운데 하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설명일 것이다. 자기의 위치. 역할, 한계 등 을 분명히 이해하고, 또 그것을 남에게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쩌 다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설명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 었는가? 자녀가 어릴 때부터 그들에게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법을 가르쳐 주 지 못해서 그런 어른으로 커 버린 것일까? 내가 우리네 문중에서 어떤 조상님
을 뿌리로 하여 태어났는지, 내가 사는 곳은 어디이고, 내 부모님은 누구이고, 내가 다니는 학교는 어느 곳에 있고, 내가 사는 동네나 도시는 어떤 곳이고, 나아가서 내가 하나의 국민으로 살아가는 내 조국은 어떤 나라인지를 설명할 수 있는 법을 가르쳐 주지 못해서 그런 것일까? 우리는 어린 자녀들에게 자신 에 관해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어야만 할 듯 싶다. 더욱이 자아에 대 한 이해와 설명은 곧바로 자존 의식을 높여 주고, 자아 존재의 가치를 확인해 주는데도 큰 도움이 됨을 생각한다면, 부모들은 그러한 일을 결코 소홀히 해서 는 안 된다. 6. 의미: 모든 일에서 자신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한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삶의 의미를 추구한다. 의미를 찾을 때 활기찬 삶 을 살게 된다. 삶의 의미를 상실하면 힘이 빠지고 삶의 의욕도 잃게 된다. 그 런데 삶의 의미는 결코 누가 가져다 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줄 수 없다. 부모가 자식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줄 수가 없다. 회사의 사장이 사원에게, 대통령이 국민에게 줄 수 없는 것이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른이고 아이고 간 에 사람들은 각기 자기 자신의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야 한다. 죽을 때까지 자기 혼자 지고 가야 하는 십자가의 하나가 삶의 의미 탐구이다. 평생을 살면서 사람들은 의미를 추구하지만, 한번 찾았다고 해서 영원히 지 속되지도 않는다. 아침에 찾았던 의미가 오후에 없어질 수도 있다. 어제만 해 도 삶의 의미를 느끼게 해 준 것이 오늘은 아무런 의미를 느끼게 해 주지 못할 때도 많다. 여자들이 결혼을 하면, 새로 이루게 된 가정의 살림을 꾸려 나가는데 행복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것이 곧 삶의 의미로 다가선다. 보글보글 끓는 우렁 된장찌개 한 숟갈을 떠서 맛을 보면서 곧 아파트 문 앞에 서서 ‚여보‛ 하고 나를 부를 남편을 생각하면서 삶의 환희를 느낀다. 빨래 하면서도 마찬가 지이다. 남편이 벗어놓은 와이셔츠의 목 둘레에 얼마나 때가 끼었나를 살펴 보 면서 남편의 냄새를 맡는다. 아기의 앙증맞은 양말을 빨면서 아이와 남편을 떠 올리는 행복에 젖는다. 청소를 한다. 어제 손톱을 깎더니만, 이리로 하나가 튀 었구나 하고는 집어서 쓰레기통에 담으면서도 전혀 화가 안 난다. 그저 기쁘기 만 하다. 아이를 보면 더욱 그렇다. 어쩌면 저렇게 자기 아버지를 빼 닮을 수 가 있을까?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하구나 하면서 행복을, 삶의 의미를 느낀다. 그러나 얼마만큼 세월이 지나면, 이런 것들 즉, 밥.빨래.청소.애가 오히려 지겨운 일, 의미를 쇠락시키는 장애물로 둔갑한다. 밥을 하면서 화를 참는다. ‚젠장, 꼭 세 끼는 다 먹어야 하나? 다른 것은 다 잘들 만들어 내두구면. 어 째 이런 것은 안 만드노 뭐, 하루에 한 끼만 먹는다든가! 무슨 알약 같은 것으 로 밥을 대신한다든가 말야!‛빨래는 더욱 화딱질나게 만든다. ‚벗었으면 빨래통에 못 갖다 넣나. 어째 부자가 똑같아. 양말을 벗으면 두 짝을 함께 벗어 놓는 법이 없어. 여기 한 짝, 저기 한 짝 집어 던져 놓으니 말야.‛ 청소도 그렇다. ‚이 집엔 어지 럽히는 사람 따로, 치우는 사람 따로 있어? 하여튼 못 말려. 신문도 보고 나서 꼭 펼쳐 놓지. 접어 놓는 적이 없어. 신문엔 무슨 놈의 광고지가 그렇게 허구 헌날 끼여 온담. 종이 공해. 광고 공해야.‛ 아이에 대해서도 화가 난다. ‚그 냥 지 아버지를 쏙 빼 닮아 가지고는, 어쩌면 성질머리가 그렇게 꼭 닮을 수가 있노. 쓸데없는 것은 좀 안 닮으면 큰일나나. 하여튼 씨는 못 속여...‛ 온종 일 혼자 중얼대면서 하기 싫은 밥, 빨래, 청소를 한다. 그리고 이제는 그런 일 에서 아무런 삶의 의미도 발견하지 못한다.
결국 이러다 보면, 우리의 삶은 평생 삶의 의미를 찾았다가 잃어 버리고, 잃 었다가는 다시 찾는 것을 반복하는게 아닌가 생각한다. 에이브러햄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구 피라미드를 제시할 때, 인간 최상의 욕구가 자아 실현이라고 하였 는데, 그 자아 실현은 결국 의미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잠재된 능력을 표출하여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고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닌가 싶다. 그렇 다면, 우리는 우리의 어린 자녀들, 우리의 신세대 청소년들에게 그들 스스로 그들의 삶의 의미를 탐구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특히, 우리가 어떤 일에서 어떻게 의미를 찾을 수 있는지, 어떤 의미가 진정 인간이 오랫동 안 유지하며 추구할 수 있는 의미인지를 제대로 일깨워 주어야만 하지 않겠는 가? 의미는 현상의 기본원리나 본질을 이해할 때 비로소 생긴다. 아주 오래 전, 나는 영국 정부의 초청을 받아 일주일간 영국 대학들을 시찰 할 기회를 가졌다. 첫날엔 영국 정부의 고위 관리가 주최하는 저녁 만찬이 있 었고, 이어서 나는 런던 시내의 유명한 오페라 하우스에 초대 받아 영국 국립 발레단의 발레를 관람하게 되었다. 후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그러한 대접은 꽤 나 융숭한 대접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내게 문제는 전.후반(?)으로 각각 1 시 간 20 분씩 나뉘어서 공연하는 발레를 관람하는 데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나는 발레를 모른다. 춤의 형식이란 것만 알지, 그것 이 진실로 무엇인지를 모른다. 음악을 전혀 모르는 내게 무대에서 펼쳐지는 무 용수들의 움직임은 그저 단조롭게만 느껴졌다. 무대 끝에서 발 뒤꿈치를 들고 종종 걸음으로 걸어가다간 이리 껑충, 저리 껑충 뛰어가고, 다시 반대쪽으로 껑충 뛰어가고, 나중 엔 어떤 남자가 여자 무용수를 번쩍 들어 올렸다가 내려 놓으면, 여자 무용수 는 허리를 중심으로 상반신을 뒤로 젖혔다가 일어나서 다시 이리 껑충 저리 껑 충 짝을 이루어 뛰어 다니는 것 쯤으로 보였다. 동작 하나하나의 섬세함도 모 르겠고, 저런 행동이 음악의 어떤 부분을, 이야기의 어떤 부분을 어떻게 묘사 하는 것인지, 참으로 창피할 정도로 모른다. 한 마디로 발레의 기본 원리나 본 질을 모른다. 그러니 재미가 없고 아무런 의미를 느끼지 못할 수 밖에 없다. 앉은 자리가 로얄박스라는 것을 후에 알았다. 휴식 시간에 객석 바깥 옆에 마 련된 별실에서 포도주를 몇 잔 마시면서 나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친척이 바로 우리 앞에 앉아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제서야 공연 시작 전에 왜 우리 족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었고, 사람들이 왜 박수를 쳤는지 깨달았다. 꼭 그 사람들 때문은 아니었지만 전반부 1 시간 20 분 동안 나는 긴 비행기 여행 끝에 밀려오는 잠을 쫓느라 참으로 곤욕을 치렀다. 양 옆에 앉은 고위 관리들에게 예를 갖추기 위해서도 졸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내려오는 눈꺼풀을 당겨 올리 느라 죽을 고생을 했다. 허벅지도 수없이 꼬집었고, 휴식 시간에 포도주 몇 잔 마시고 정신을 차린다는 게, 오히려 후반부 관람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참으 로 재미없고 의미없는 발레를 보느라고, 나는 내 생애에서 가장 무섭도록 잠과 싸우는 경험을 했다. 하여튼 별별 수단을 다 써서 결국 끝나는 순간까지 코를 고는 무례함을 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우습기보다 는 무서움이 느껴질 만큼 힘들었다. 왜 나는 그토록 발레에서 아무런 재미도 의미도 못 느낀 것인가? 한 마디로 발레에 대하여, 음악에 대하여 너무도 무식 했기 때문이다. 발레의 기본 원리나 본질을 조금만 알았더라도 최소한의 의미 는 찾을 수 있었을텐데. 우리는 어떤 일이나 현상에서 그 본질이나 기본 원리를 모르면 의미를 찾기 가 어렵다. 스포츠의 경우에도 그렇고, 또 아이들이 하는 공부에서도 그렇다. 미식 축구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경기의 기본 원리나 규칙을 모
르기 대문이다. 수학 공부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의미를 찾지 못하는 아이들 은 수학의 기본 원리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공부에서 는 우선 기본 원리나 본질을 철저히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제대로 익 히지 않고, 문제만 많이 풀어 본다고 공부가 되고 성적이 오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공부에 대한 역겨움만 커진다. 공부가 재미없고 하기 싫어지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결혼 생활도 그렇다. 결혼의 기본 원리나 본질이 무엇인가? 사랑하기에 결혼했고, 또 사랑하기에 함께 살지만, 결혼은 사랑 그 자체가 아니다. 사랑은 결혼을 성숙시키는 하나의 조건이 될 수는 있어도 결혼생활을 충족시켜 주진 못한다. 결혼에는 오히려 남녀가 서로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으 며, 그래서 상대방이 없으면 아쉽고 또 때로는 귀찮은 존재일 수도 있다. 이러 한 평범한 원리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면, 일상의 결혼 생활에서 사람들은 쉽 게 그 나름대로 남녀가 함께 살을 붙이고 사는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그렇지 않고, 결혼은 사랑이 전부라는 허상을 쫓게 되면, 사람들은 의미를 찾지 못하 고 방황하게 된다. 어린아이들, 특히 우리의 자녀들에게 어른들이 무엇을 가르쳐 줄 것인가? 무 엇을 그들이 배울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인가? 아마 이 때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대답은 기본 원리나 본질을 가르쳐 주어서 익히도록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 래야만 그러한 원리나 본질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더 많은 것을 스스로 배울 수도 있고, 또 배움에서 살아가는 데서 스스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 어른들은 은연중 아이들에게 본질보다는 그것을 에워싼 껍데기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여 아이들이 본질이나 기본 원리를 멀리 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초 래하곤 한다. 어느 날 아침 10 시, 한가로운 시간에 동네 아주머니 몇이 한 집에 모여 앉았 다. 이웃끼리 차 한 잔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나 나누기 위해서 였다. 주인 집 아주머니는 맛있는 홍차가 있다면서 차를 끓여 내놓았다. 그러자, 차 한 잔 을 넘겨 받은 한 아주머니는 찻잔을 눈 높이만큼 쳐들고는 이리저리 세심하게 살펴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다른 아주머니는 차를 얼른 마시고는 찻잔이며 찻잔 받침을 뒤집어 보는 것이다. 밑에 뭐라고 쓰여 있는가, 어느 회사에서 만 든 찻잔인가, 국산인가, 외제인가를 살펴본다. 그리고는 서로 앞다투어 말을 꺼낸다. ‚어머, 이 찻잔 꽤 비싸겠는데, 새로 샀수?‛ ‚접때 백화점에서 세일하던데, 그 때 산 거유?‛ ‚우리 나라에서도 비슷하게 본떠 만드는 모양인데, 아무래도 좀 못하지, 색 깔도 참 은은하고 예쁘고 또 너무 넙적하게 크지도 않고, 영미 엄마는 어쩜 그 릇 하나를 사도 꼭 자기처럼 예쁜 것을 사는지 몰라...‛ ‚나도 비슷한 것 선물 받았는데, 여우같은 시누이가 접때 와서 보고는 달라 는데 어쩌겠어, 그래서 줘 버렸지.‛ ‚근데, 그릇은 너무 예쁘면 안 좋아. 이 빠질까 봐 어디 마음 놓고 쓸 수가 있어야지.‛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한참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 하나 이제 금 방 마신 홍차의 향기나 맛에 대해서 얘기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참으로 무엇이 중요한가? 홍차의 맛이나 향기인가, 아니면 찻잔인가? 하기야 이왕이면 예쁜 그릇에다 차를 마시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기분도 훨씬 좋고 차 맛도 훨씬 좋을 것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찻잔이 그렇게 좋지 않을 수도 있 다. 그래도 그 찻잔에 담긴 차가 제대로 된 차라면 큰 문제는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차 그 자체보다는 찻잔에만 관심을 쏟는 까닭은 무엇인가? 찻잔에서 의미를 찾기 위함인가? 오랜만에 이웃이 모여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데 서, 그리고 함께 맛있는 차를 나누어 마셨다는 데서 더 큰 의미를 찾아야 되는
것 아닌가? 도대체 어느 것이 본질이고 무엇이 기본 원리인가? 우리는 우리의 그러한 왜곡된 사고와 행동을 아이들에게 은연중 내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무엇이든 돈으로 의미나 가치를 따질 수는 없다. 추석 명절 때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다녀오는 귀경길 차 안에서 이루어진 식 구들 간의 대화이다. 이런 저런 얘기 끝에 화제는 서울로 올라올 때 시골 어머 니가 싸 주신 보따리로 옮겨졌다. ‚그래, 아까 어머니가 트렁크에 넣어 주신 게 뭐야?‛ 남편이 묻자, 아내가 긴 대답을 한다. ‚뭐긴 뭐예요! 뒷 새말 밭에서 거두셨다는 콩이지요! 그저 한두 되나 될까 말까 하는 콩이지요! 그런데, 당신 어머니두 참 너무해요! 주시려면 좀 많이나 주시지. 내가 보니까 건넌방 쪽문 뒤에 깨두 많던데, 참깨나 두어말 주시지! 우리 애들 고구마 좀 잘 먹어요! 올해는 고구마 농사가 그렇게 잘 되었다면서, 그래. 그거 한 부대 주시면 안 되나! 당신 누이네는 보따리가 세 개씩이나 됩 디다.‛ ‚무슨 보따리가 세 개란 말야?‛ ‚아! 어머니가 왜 우리 모두 마당에 나왔을 때, 거기 큰 형님하고 싣는 것 못 봤어요? 하나는 고추 보따리인가 봅디다. 재채기를 냅다 하면서 싣는 것 보 니까!‛ 시골 시어머니가 싸 주신 보따리에 대해 서운함이 가득한 엄마의 푸념을 뒷 자리에서 듣고 있던 초등학교 5 학년 짜리 아이가 엄마에게 말을 건넸다. ‚엄마, 근데 그 콩 서울서 사면 얼마나 해!‛ ‚얼마나 하긴, 그까짓 건 얼마나 하겠냐? 뭐 한 됫박에 그저 칠 팔천 원하 겠지!‛ ‚그럼, 할머니가 싸 주신 게 돈 만원도 안 되는 거네!‛ ‚따지고 보면 그렇지!‛ 그러자, 운전을 하면서 잠자코 듣던 남편이 다시 아내에게 퉁명스럽게 한 마 디 한다. ‚당신, 지금 애하고 무슨 얘기 하는 거야? 기껏 정성스럽게 싸 주신 것을 갖고, 뭐 하는 거야! 돈 만원도 안 된다니? 그리고 그까짓 것이라니? 노인네가 고생 고생하면서 농사지어 싸 주신 것을 갖고, 겨우 한다는 소리가 그까짓 것 이라니! 그리고, 민영이 이 녀석, 너도 그렇지! 그게 꼭 돈으로 값을 따져야만 되는 거냐? 당신이나 애나 생각한다는 게 어찌 그 모양이야!‛ ‚그 모양이라니요? 아, 누가 돈으로 따지려고 했어요? 그냥 민영이가 물어 보니까 말한 거지! 그런데 왜 당신은 당신 어머니 얘기만 하면 그렇게 핏대를 올리고 그래요?‛ ‚핏대라니! 내가 무슨 핏대를 올려? 그리고 어머니면 어머니지 당신 어머니 가 뭐야? 당신이 애하고 무슨 맨날 그런 식으로 얘기하니까, 민영이까지 할머 니를 우습게 생각하쟎아!‛ 이렇게 해서 시골서 올라오는 귀경길 온 식구의 기분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민영이는 괜스레 값을 따져 물었다가 엄마, 아빠가 싸우게 되었다 싶어, 그리 고 자기까 지 야단맞았다 싶어 그 후 서울 집 앞에 도착할 대까지 세 시간 동안 아무 말 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가 값을 따져 물은 것이 뭐가 그렇게 큰 잘못이었는지를, 왜 아버지는 그토록 그 말에 화가 나셨을까 를. 그날 밤 답을 얻지 못했던 아이는 이튿날 저녁 아버지 책상 앞에서 그 답 을 알았다. 아버지는 내가 유치원 때, 아빠 생일 선물로 500 원짜리 조그만 돼 지 인형 하나를 사 드렸는데 그것을 곱게 간직하고 계셨다. 그리곤 이렇게 말
씀하셨다. ‚이것이 값으로 따진들 얼마 되겠느냐만, 네가 아빠를 생각하면서 고르고 포장해서 사다 준 네 마음, 너의 정을 아빠는 늘 의미있고 고맙게 생각 하고, 그래서 오래 간직하는 거야.‛ 이 때 아이는 할머니가 정성스레 차에 실어 주신 콩도 그럴 것 같다고 생각 했다. 어떤 일의 의미나 가치를 그저 돈으로만 따지려는 또 다른 예는 설날 아이들 에게 주는 세뱃돈이 그런 것 아닌가 하고 생각될 때도 많다. 설이 두번 있다는 것이 내게는 그렇게 편하고 좋을 수가 없다. 신정은 학교 와 관련한 공적인 행사로 보내기에 좋고, 구정은 가족과 함께 보내기에 마냥 좋다. 특히, 구정은 추석과 함께 일 년에 한 번 온 친척들이 함께 모이는 기회 라서 좋다. 형제와 삼촌이 남달리 많은 나에게는 조카와 사촌 역시 많을 수 밖 에. 그리고 사촌들도 이제 거의 모두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으니, 거기서 태 어난 그 많은 오촌 조카들을 일 년에 두어번 보는 것은 꽤나 기쁜 일이다. 더 욱이 육촌 형제가 되는 아이들끼리는 어려서부터 자주 만나게 하면 여러 가지 로 좋은 일이므로, 구정은 그런 뜻에서도 의미있는 날이다. 물론 집안의 대소사가 많아 어른들끼리는 자주 만난다. 그러나 어른들이 어 린 오촌 조카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제각기 학교에 다니고, 또 요즘 아이들 은 조금만 크면 부모를 따라 다니지 않으려 하기에 자주 보기가 어렵다. 그러 다 보니, 추석이나 구정이 되어 오랜만에 만나면 누구네 집 애인지 헷갈리기 일쑤다. 모두 다 하나같이 항렬에 따라 돌림자로 이름을 짓고 보니, 엇비슷한 이름도 많아서 헷갈려 부르는 일도 많다. 그래도 피붙이라 그런지, 만나면 쉽 게 서로 다가서고 친해진다. 그러다 보니, 어린아이들은 버릇없이 그저 아무렇 게나 말할 때도 많다. 구정 때, 아이들은 세뱃돈에 관심이 많다. 이번에는 누가 얼마를 주실까? 어 느 아저씨가 이번엔 누구에게 얼마를 주실까? 아이들은 기억력도 뛰어나다. 작 년엔 얼마 주셨는데... 이번엔 좀 더 주시지 않겠는가. 별의별 생각을 그 작은 머리로 다 한다. 물론, 나는 언제나 그런 것에 대비해서 안주머니에 새 돈을 종류별로 마련해 가지고 간다. 그리고 몇 가지 원칙도 세운다. 대학을 졸업한 경우에는 얼마, 대학 재학 중인 경우에는 얼마, 고등학교 재학생은 얼마 하는 식으로 서너 살 아이에게까지 적용될 기본 원칙을 세운다. 그럼에도 해마다 똑같은 고민에 빠지고 만다. 다름이 아니라, 내게 협상을 해 오는 녀석들 때문이다. 세배를 하기 전에 따지고 묻는 것이다. "내가 세배 하면 얼마 줄 건데?" 말버르장머리가 없어서만은 아니다. 또 세배를 아이들이 돈벌이 수단으로 만 생각한다고 해서도 아니다. 얼마든지 아이들의 귀여운 행동으로 볼 수도 있 다.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 것은 저 아이들한테, 세배는 웃어른에 대한 마음을 전 하는 새해 첫 인사임을 어떻게든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해마다 내 딴에는 열심히 가르쳐 주어도 이듬해 설날이 되면 아이들은 작년처럼 내게 또 협상을 하려 한다. 그들의 계속되는 변함없는 태도가 마음에 걸린다. 작년보다 한 살 더 먹었으면, 그래도 나아졌겠지 하는 내 기대가 무너져서인가? 어찌 보 면 아이들의 사고와 행동이 지나치게 경제적이고 타산적으로 변화되는 듯해서 더욱 찝찝함을 느낀다. 돈이면 무엇이든 다 되고, 삶의 의미는 결국 돈에 달려 있다고 벌써 어린 나이때부터 생각하며 성장하지 않나 우려하게 된다. 작년 말 나는 부친상을 겪었다. 모든 일에서 그렇듯, 이번 일에서도 아이들 에게 좋은 배움의 기회가 될 성싶어 두 아들을 장례의 모든 과정에 참여시켰 다. 이리 뛰고 저리 뛰던 큰 아들 녀석이 바삐 나를 찾아왔다. "아버지! 은행 온라인 통장 번호 몇 번이에요?" "온라인이라니?"
"왜, 아버지 온라인 통장 번호 있쟎아요?" "그건 왜?" "지방의 무슨 무슨 대학교 총장실이라는데 거기서 조의금 보내겠다고 온라인 번호 말하래요!" "누가 전화를 해 왔는데?" "몰라요, 여자예요! 비서인가 보죠! 그런데 아버지, 뭐 그런 사람이 있어 요?" "왜?" "그렇쟎아요! 아버지를 찾아 애도의 뜻을 표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느닷없 이 거기 아무개 상가냐고 확인하고는 아버지 은행 통장 온라인 번호 가르쳐 달 라니, 우습쟎아요!" 나는 아이에게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그건 아이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 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나 역시 대학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대학 총장실 에서 그랬다는데 더욱 창피스러움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 아무렴 그 총장님이 그렇게 시켰겠냐? 비서에게 어떻게 조의금을 좀 보 낼 방법이 없겠느냐고 알아보라고 했는데, 그 비서가 그만 상가에다 전화해서 통장 번호를 알아 보려고 한 것이겠지!" "글쎄, 그것은 비서가 실수했다 쳐도 총장님이 정말 애도의 뜻을 멀리서나마 표하려고 했다면 아버지에게 직접 또는 전화를 받은 상가의 어느 사람에게라도 전화상으로 조의를 표할 수 있는 것 아니에요?" "그런데, 이 녀석아. 너는 왜 와서 온라인 번호를 물어 보냐? 그냥 모른다고 해 버리지 않고!" "그랬지요. 그런데 자꾸 아버지한테 가서 물어 보래요!" 어떤 사람들은 결혼 청첩장에 온라인 번호를 아예 적어서 준다는 얘기도 들 은 터라, 장례를 치르고 난 지금까지도 그 일이 자꾸만 가슴 속에서 어설픈 쓴 웃음이 되어 되살아나곤 한다. 감사하는 마음, 슬퍼하는 마음, 기뻐하는 마음 도 모두가 그저 돈으로 계산되는 세상이 된 것인가? 겉치레로 마지못해, 인사 했다는 뜻을 기록으로 남겨두기 위해 돈 몇 푼을 주고받는 식의 인사가 많은 사람들의 관습으로 고착되고, 또 그것이 어린 자녀들에게 신세대들에게 그대로 이어져 간다면, 우리 사회는 훗날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될까? 그야말로 정감이 메마른 타산적 관계만이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세상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우리의 자녀들은 훗날 그 런 세상에서 살게 할 것인가? 돈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만 더 하겠다. 평소 가깝게 알고 지내던 분이 큰아들 혼사 문제로 엄청 속이 썩었다. 대학 원에 다니는 그 집 큰아들은 여러 해 한 여자와 사귀었고, 마침내 두 사람은 양가 어른들의 적극적인 동의 아래 결혼을 하기로 했다. 석 달 뒤로 결혼식 날 짜를 잡고, 예식장 예약도 끝마쳤다. 그래도 일생에 한 번 밖에 없는 일이라 약혼식도 올렸다. 신랑집에서는 두 사람을 위한 새 보금자리로 조그만 아파트 한 채도 장만했다. 신부집에서는 냉장고며 장롱이며 살림에 필요한 가재 도구 를 미리 사서 아파트에 들여 놓았다. 이제 결혼식 날짜가 한 달 뒤로 다가왔 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들은 느닷없이 결혼을 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이 유는 여자가 너무 자기 주장대로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데이트 약속 시간 이며 장소며, 뭐든지 자기 마음대로 정한다는 얘기다. 부모가 아무리 아들을 설득시켜도 안 돼, 시간을 좀 달라고 해서, 일단은 결혼 날짜를 넉 달 뒤로 미 루었다. 그래서 날짜를 다시 잡고, 예식장 예약도 다른 곳에다 했다. 아들도 동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다시 잡은 결혼 날짜가 한 달 앞으로 다가오자 아들은 또 그 여자와
는 결혼을 할 수 없다고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했다. 다른 여자가 생겨서 그러 느냐, 그 여자를 이제는 사랑하지 않느냐, 온갖 추궁을 하고 설득을 했지만 아 들은 막무가내였다. 너하고 나하고 밧줄로 함께 묶고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자 고까지 부모가 협박했지만 아들은 생각을 고쳐 먹지 않았다. 결혼 날짜가 연기된 이유를 알게 된 여자는 앞으로는 무엇이든 남자의 말대 로 따르겠다면서 직장도 남자의 뜻에 따라 그만두기까지 했지만 남자의 마음은 돌아서지 않았다. 그러자 어느 날 그 여자는 남자의 부모를 찾아와서 1 천만 원을 요구했다고 한다. 미리 사 놓은 가재 도구 비용을 물어 달라면서, 그리고 이 돈은 언제든 두 사람이 결혼을 하게 되면 다시 돌려 드리겠다고 했다고 한다. 아직도 두 사 람은 친구처럼 계속 만난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남자의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내뱉었다. ‚요즈음 아이들, 셈 하나는 분명합디다.‛ 나는 웃으면서 그 분의 얘기를 들었지만 웃음 뒤엔 찝찝한 앙금이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 있었다. 정말 그들은 결혼하고 싶을 만큼 사랑하는가? 사랑한다면 서로 상대방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여자가 뭐든지 자기 마음대로 해서, 평소 그렇게 쥐어 살게 될까 봐 결혼을 주저한다면 그 남자는 그 어떤 여자와도 결혼을 할 수 없을 듯 하다. 다른 숨은 이유가 있다면 더욱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다. 남자의 그런 태도에 대하여 미적지근하게 나오는 여 자의 태도 또한 이해할 수 없다. 아직도 두 사람은 친구로 만난다면서 다시 결 혼하기로 하면 가져간 1 천만 원을 돌려 주겠다고? 남녀의 사랑은 서로간 분명한 행동을 필요로 한다. 이는 어찌 보면 분명한 마음의 셈을 의미한다. 1 천만 원어치 가재 도구 값을 챙기는 셈보다는 오히려 마음의 셈을 그 두 사람은 분명하게 밝혔어야 했다. 그들이 그렇지 못한 이유 는 우리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셈해야 되는지 셈 가르치기를 잘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일의 결과와 과정 모두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봄이 오면, 초등 학교 정문 앞에 으레 찾아오는 단골 손님 가운데 하나는 노 란 병아리를 파는 사람들이다. 아이들은 아낀 용돈으로 병아리 몇 마리를 사 들고 집에 온다. 아주 오래 전 내 집 아이가 다른 아이들처럼 병아리 세 마리 를 사 와 아파트 베란다에서 키웠다. 난간으로 떨어질까 봐 라면 박스로 난간 을 막고, 제법 그럴싸한 병아리 집을 만들고, 좁쌀이며, 배추며 사다가 정성스 레 먹였다. 아이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병아리들이 노는 모습, 커 가는 모습을 보며 기뻐했다. 아이들이 느끼는 기쁨은 병아리를 어서 크게 길러서 잡아 먹겠 다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병아리를 기르는 과정, 병아리가 날 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기쁨과 의미를 느꼈던 것이다. 학교 앞에서 사 온 병아 리는 오래 살지 못하고 이내 죽는다고 했는데, 아이들의 정성 때문인지 병아리 세 마리는 죽지 않고 제법 컸다. 그런데 우리가 외출한 사이 병아리 한 마리가 라면 박스로 막아 놓은 울타리를 넘어 5 층 아파트에서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 다. 죽지는 않았지만 많이 다쳤는가 보다. 아이들이 안쓰러워 했지만, 우리는 그 날로 남은 두마리와 함께 아파트 경비원에게 드렸다. 어떤 일에서든 결과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낚시를 가면 뭐니뭐니 해 도 고기를 잡아야 기쁘다. 한 마리도 못 잡으면 재미도 없고 괜스레 짜증만 난 다. 그렇다고 해서 오로지 잡은 고기, 즉 결과에서만 의미를 찾으려 해도, 끝 내 허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는 어떤 일에서든 결과에서만 의미를 찾을 것 이 아니라 과정에서도 의미를 함께 찾아야만 함을 의미한다. 긴 인생을 놓고 보더라도 그렇다. 한평생 살아오면서 무엇을 얼마나 성취했 는가 하는 결과에서 의미를 느낀다. 그러나 그것만 따지면 우리는 또 다른 의
문을 품게 된다. 내가 이제껏 살면서 겨우 이런 것을 성취하고자 그토록 노력을 했고, 온 갖 고생을 감수했는가 하는 의문이다. 이러한 경우 우리는 그 답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다름아닌 살아온 과정에서 겪은 무수히 크고 작은 일 그 자체 에서 보람과 의미를 느껴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공부도 그렇다. 공부를 해서 점수가 오르는 결과도 중요하지 만, 모르는 것을 터득하게 되었을 때의 기쁨, 이렇게 앉아서 공부에 전념한다 는 사실에서 느낄 수 있는 기쁨과 같은 과정에서의 기쁨도 중요하다. 사회가 온통 물질 만능주의, 업적주의, 성취 지향주의로 흐르다 보니,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그저 결과에서만 의미를 찾도록 부추기는 것은 아닌가 하고 느낄 때가 많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이다’는 등의 말을 인용해 가면서, 과정에서야 좀 무리가 있고, 부도덕한 면이 있어도, 어떻든 성취만 하면, 그리고 그 성취 결과가 바람직하면 된다는 식의 사고와 행동이 만연하고 있다. 결국 아이들에게 의미 탐구의 원천을 잘못 설정하게 할 뿐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태도에서도 지극히 왜곡되고 일탈된 가치를 형성하 게 됨을 우리는 주의깊게 성찰하여야겠다. 내가 소속한 학과에서는 대학원 신입생을 전공 분야별로 모집한다. 그렇기에 전공 분야에 따라 입학이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다. 그런데 어떤 학생이 자 신이 공부하기 원하는 분야보다는 입학이 쉬운 분야를 선택하여 진학한다면 어 떻게 되겠는가? 사실 대학 입학 때도 그런 경우를 우리는 자주 경험했다. 그러나 대학원 입 학에서까지, 학문 연구를 평생의 업으로 삼아 계속 공부해 보겠다는 의지와 목 표를 갖고 들어가려는 대학원 입학에서도 그러한 얄팍한 계산을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입학만을 목적으로 이 분야 저 분야를 왔다갔다 하면 서 어떤 전공 분야가 경쟁이 적은가를 따지는 그 학생의 가치관을 뭐라고 설명 할 수 있는가? 하기야 요즈음 세상을 들여다보면, 그런 식의 얄팍한 계산에 능한 사람들의 의리없는, 심지어는 반윤리적인 행동이 얼마나 많이 자행되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 자신을 뽑아 준 유권자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당적을 옮기는 국회 의원 당선자들을 보노라면,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사람은 최소한 의리가 있어야 하 고, 기본적 윤리 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기가 어렵다. 어떻든 붙고 봐야 한다는 생각에서 전공분야를 이렇게 저렇게 바꾸는 학생들이나, 어떻든 당선이 나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당적을 옮기는 후보자들이나, 또 당선된 후에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당적을 옮기는 의원들이나 모두가 다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아 닌가 생각된다. 부모가 아이에게 ‚저녁 때까지 숙제를 해 놓아야 돼! 그러니 지금 들어가서 숙제부터 해라.‛ 하고 이를 때가 있다. 그때 아이들이 불쑥 대답하기를, ‚하 여튼 해 놓기만 하면 되잖아요.‛ 하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어떻게 보면, 과정이나 절차는 따지지 말라는 얘기이다. 무슨 수단을 쓰든 하여튼 결과만 끌어 내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 부 모들은 그런 문제를 지적해야만 옳다. 어떤 부모들은 오히려 그런 사고를 허용 하고 부추긴다. ‚알았어! 네가 무슨 수를 쓰든, 하여튼 해내기만 하면돼!‛ 하는 말이 그렇 다. 결국, 그런 식으로 자란 그 아이들이 훗날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었을 때, 그들이 지금 우리가 만나는 대학생이나 대학원생, 또는 일부 어긋난 정치인들 처럼 행동하게 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지금 우리 사회에 잠재되어 있는 많은 문제는 어찌 보면, 반윤리적이고 비논 리적이고, 이율배반적인 사고와 행동이 사람들의 삶 곳곳에서 확산되고 있는 데서 비롯한다고 할 수 있다. 건강한 사회가 되려면 사람들의 의식이 건강해야
한다. 상식으로 서로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한 이해는 절차와 과정에서 윤리적이고, 합리적일 때 가능하다. 자녀 교육에서도 그런 점 에 신경써야 할 것이다. 자기 나름의 주체적 의미를 세우도록 한다 과외 공부가 없어져야 한다는 데는 모든 학부모가 공감한다. 특히 유치원이 나 초등 학교 어린아이들한테 동시에 몇 가지씩 과외를 시키면 아이들의 건전 한 발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 부모들은 공감한다. 그러면서도 자기 자 식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일까? 왜, 자기 자식부터 과외에서 해 방될 수 있도록 못 하는 것인가? 답은 한 가지인 것 같다. 남들 다 시키는데 어떻게 나만 안 시킬 수 있겠는가? 괜히 잘난 척하다가, 우리 집 아이만 바보 만들면 어떻게 하냐? 아무 과외도 안 시키면 남들에게 뒤지는 것 같고, 그래서 울며 겨자먹기로 시킨다는 얘기다. 학부모들은 정부가 아주 단호한 태도로 모든 과외를 금지시켰으면 하는 은근 한 바람도 갖고 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맨날 불법 과외가 어쩌고, 과외를 단 속하느니 어쩌니 하다가는, 또 어떤 과외는 된다느니 안 된다느니 하기 일쑤 다. 교육 정책마다, 이를테면 조기 영어 교육이나 월반제 같은 것이 과외를 부 채질하고 있어, 부보들의 마음은 더욱 편하지가 않다. 하기야 정부에서는 정책 만큼은 제대로 잘 수립해서 펴나가는데, 학부모들이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 고 쓸데없이 과잉 교육열에 휩싸여 교육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그런 정책을 자꾸 낼 수밖에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학 부모들의 의견은 다르다. ‚교육열, 교육열 하는데, 어디 그런 사람 있습디까, 괜히 가만히 있는데 열내는 사람 말이요? 누군가가 열나게 만드니까 열나는 것 아니오? 과잉 교육열도 그래요. 성실히 노력해서 살면, 노력한 만큼 보상 받 고, 모든 것이 실력 위주의 공정하고 윤리적인 세상이면, 또 상식이 통하는 그 런 세상이면 과잉 교육열을 안내도 될 터이지만, 어디 우리 나라가 그런 나랍 디까?‛ 문제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악순환을 거듭한다. 고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어 문제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어려운 것이 우리네 교육 문제이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문제도 해결하고, 나름대로 의미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것은 결국 확고한 철학과 믿음에 기초하여 주체적인 의미를 찾는 데서 출발 해야 할 것 같다. ‚남들이 여름 휴가 때 가족과 함께 산으로 또는 바다로 여행갔다 오는데 여름 철 삶의 의미를 느낀다 해도, 나만 큼은 그렇지 않다. 나는 오히려 이 여름에 가족과 함께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가서 농사 일을 거들어 드리고, 어린 시절 내가 뛰어 놀던 그 곳에서 내 아이 들이 뛰어놀게 하는데서 의미를 찾는다. 누가 뭐라고 조롱하든 비난하든, 내 생각이 옳다고 민는 한, 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의 도특한 의미를 추구하며 산다.‛ 아마도 이 같은 선언과 함께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분명 흔들림이 없는 자기만의 고유한 현상학적인 삶의 의미를 찾을 사람임에 틀림없다. 주체적으로 찾은 삶의 의미는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 고, 큰 기쁨이 되어 삶의 활력소로 환류될 것이다. 사람은 궁극적으로 혼자이다. 더불어 산다지만, 누구도 나를 대체해 줄 수는 없다.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다. 그러려면 내 삶의 의미는 내가 주체적으로 발견해야 한다. 이것이 곧 우리가 필연적으로 삶의 주체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주체적인 의미 탐구는 약화되고 있다. 특히 신세대 자년들에게서 그러한 주체적인 의미 탐구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야, 너 이번에 동창회에 안 가냐?‛ ‚글쎄 너는 갈 거나? 너 가면 나도 가고, 너 안 가면 나도 안 갈련다! 그래 너 갈 거냐, 안 갈 거냐?‛ 또 다른 상황에서다. 이를테면 중국집에 점심 먹으러 들어가서이다. ‚야! 너 뭐 먹을래?‛ ‚글쎄 자장면 먹을련다.‛ ‚그럼 너는?‛ ‚나도 자장면 먹을련다.‛ ‚너희들이 모두 자장면 먹는다면, 나도 자장면 먹지, 뭐!‛ 주관은 없다. 그저 동일시, 맹종, 타성만이 있을 뿐이다. 결국 이렇게 주관 이 없는 경우엔, 자기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선택하고 결정하지 못하는 경우 엔, 일이나 행동에서의 의미도 결코 주관을 기대하기가 어려운 것 아닌가. 그 렇다면, 우리는 자녀에게 자기 나름의 주관을 분명하게 갖도록 해야 하지 않겠 는가? 그래야만, 의미 탐구도 자기 나름대로 주체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7. 개방: 가정에서도 열린 교육을 하여야 한다.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 유치원, 초등 학교에 열린 교육이란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그 동안 너무 닫힌 교육만 해 왔던 것에 대한 반작용적 심리와 함께, 이 열린 교육은 교육의 새로운 시도로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엄격히 말해서 열린 교육이 굳이 닫힌 교육보다 더 바람직하고 좋은 교육 체제라고 단 언하기는 어렵다. 열린 교육은 열린 교육 나름대로의 장점을 지니고, 또 닫힌 교육은 그것 나 름대로의 쓰임새가 있다. 문제는 열고 닫는 것을 적절하고 조화롭게 해야 한 다. 연다고 해서 무조건 모든 것을 열어젖히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한여름 에 더워서 창문을 모두 열고 잔다 해도 꼭 닫는 문은 있다. 예컨대, 대문만은 꼭 걸어잠그고 자지 않는가? 그렇다면, 열린 교육에서는 도대체 무엇을 연다는 것인가? 그 동안 우리가 무엇을 닫았기에 문제가 되며, 열린 교육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얼마만큼이나 연다는 말인가? 열린 교육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를테면, 교 육에 접근하는 기회를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옛날엔 일정 수준 이상의 요건을 갖추지 않으면 교육에 접근하기가 어려웠지만, 열린 교육에서는 그 문을 누구 에게나 열어 준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육의 과정에서도 교육 기회는 누 구에게나 열려 있고, 또 교육을 마치고 나갈 때에도 성취하는 수준은 누구에게 나 열려 있어 마음껏 성취하고 나갈 수 있도록 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교수 학습의 과정에서 분위기를 수용적으로 바꾸는 것도 열린 교육의 중요한 의미가 된다. 학습자 개개인의 적성, 능력, 흥미 등 여러 가지 특성을 고려하 여 교육을 하는 것도 열린 교육이 의도하는 한 가지 중요한 목표이다. 열린 교육에서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머리를 열고 가슴을 여는 일이 다. 생각과 느낌을 연다는 말이다. 생각을 연다는 말은 곧 사고 능력을 최대한 개발한다는 의미이고 느낌을 연다는 말은 감성을 풍부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사고와 감성을 열 때, 그 차원은 단순히 당면한 문제 즉, 생각과 느낌에서의 어떤 문제를 치료하거나 예방 하는데 멈추지 않는다. 새로운 사고 력과 느낌을 개발하여 사고와 느낌의 차원을 한 차원 높여 승화시키고 발전시 키는 게 더 중요하다. 사고와 느낌의 기회를 아주 풍부하게 경험하도록 함으로 써 각자 잠재적으로 지닌 사고력과 감성을 최대한 개발시켜주는데 열린 교육의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열린 교육은 학교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가정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가? 사실 모든 교육에서 그렇듯, 열린 교육은 결코 학교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지기는 어렵다. 반드시 가정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가정에서는 닫힌 교육이 이루어지고, 학교에서는 열린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또 그 반대로 가정 에서는 열린 교육이 이루어지는데, 학교에서는 닫힌 교육을 한다면, 이는 오히 려 학생들에게 혼란과 부적응만을 초래하기 십상이다. 미국이나 구라파 등에서 몇 년간 학교를 다니다 한국의 중, 고등 학교로 편 입을 하면 아이들이 처음 외국 학교에 입학하였을 때 이상으로 적응에 어려움 을 겪는 것을 직, 간접으로 경험하지 않는가? 교육은 가정과 학교, 사회 이 세 부분이 유기적 으로 상보적으로 이루어져야만 성공을 거둘 수 있다. 그러면 우리 가정에서는 열린 교육을 어떻게 실시할 수 있는가? 몇 가지만 예시한다. 처음부터 생각과 느낌의 기회를 열어 주어라 ‚야, 너 슈퍼에 가서 두부 좀 사 와.‛ ‚어느 슈퍼에 가서 사 와야 하는데?‛ ‚한국 슈퍼에 가서 사 와, 딴데 가지 말고. 지난 번에 엄마랑 가 봤지? 왜 지하로 내려가는 슈퍼 있잖아? 그 슈퍼에 가서 내려가자마자 왼쪽을 봐! 그러 면 거기 두부 많아!‛ ‚몇 모 사 와요?‛ ‚한 모만 사와! 엄마 지갑에 보면 천 원짜리 한 장 있을거야, 꺼내 갖고 가 서 사 와. 그련데, 꼭 양주 두부로 사 와. 그거 없다고 하면 그냥 와! 괜스레 시키지 않은 짓은 하지 말고, 알았어?‛ 열두 살, 초등 학교 5 학년인 태형이는 아무 생각 없이 엄마가 시킨 대로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 갖고 한국 슈퍼엘 갔다. 그리고 엄마 말대로 지하로 내려 갔다. 왼쪽을 봤다. 두부 종류가 많아 엄마가 찾는 그런 두부가 얼른 눈에 들 어오질 않았다. 그래서 태형이는 슈퍼 종업원에게 물었다. ‚양주 두부 있어요?‛ ‚그런 두부는 오늘 없는데!‛ ‚알았어요.‛ 집에 돌아온 태형이는 엄마에게 내뱉듯 한 마디 한다. ‚엄마! 양주 두부, 오늘은 없대! 그래서 그냥 왔어!‛ ‚그럼 무슨 두부가 있대?‛ ‚몰라! 엄마가 양주 두부 없으면 그냥 오랬잖아!‛ ‚그럼 너, 다시 가서 포천 두부 있는가 보고 사와!‛ ‚그럼 아까 그렇게 말하지. 더워 죽겠는데, 또 가란 말야?‛ ‚그래, 한 번만 더 갔다 와! 그리고 가서 그 포천 두부 없다면 정말 그냥 와!‛ 결국 아이는 다시 한국 슈퍼엘 갔다. 다행히도 엄마가 찾는 그 두부가 있어 사 올 수가 있었다. 그래도 아이는 두 번씩이나 두부 사러 갔다 온 게 마냥 억 울하고 분한 모양이다. 여기서 진실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이가 두 번씩이나 똑같은 일로 슈퍼에 간 것이 아니다. 문제는 엄마가 아이에게 심부름 시키는 방법에 있다. 엄마는 아 이에게 모든 것을 완벽하게 정해서 심부름을 보냈다. 어디 가서 두부를 사 와 야 하는지, 어떤 회사에서 만든 두부를, 몇 모나 사 와야 하는지 모든 것을 정 해서 심부름 시켰다. 그리고 그런 것이 없으면 그냥 돌아오라는 것까지 정해서 심부름을 보냈다. 이렇게 심 부름을 보내면, 아이는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명령어대로 작동하는 기 계식 로봇에 불과하다. 심부름을 가면서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여 결정할 수 있
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어쩌면, 그런 로봇 같은 심부름이 아이에게는 더 화 나고 짜증스러웠는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가 닫힌 교육의 예다. 좀 생각이 있는 엄마라면, 같은 심부름을 시켜도 아이에게 생각할 기회를 열 어 주고, 심부름을 통해서도 무엇인가 아이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 해 줄 것이다. 다음과 같이 말이다. ‚얘, 너 엄마 좀 돠오 줄래?‛ ‚뭔데요?‛ ‚응! 요 앞에 슈퍼에 좀 갔다 올래?‛ ‚어느 슈퍼요?‛ ‚거기 슈퍼 많지? 네가 잘 보고 좋은 슈퍼에 가서 사와!‛ ‚뭘 사오는데요?‛ ‚두부 좀 사다 주렴!‛ ‚알았어요! 그런데 무슨 두부요?‛ ‚네가 알아서 사 와! 찌개에 넣으려고 하니까, 이왕이면 양주 두부가 좋은 데, 혹시 그게 없거나, 또 있어도 네가 봐서 썩 좋아 보이지 않으면, 다른 것 으로 잘 골라서 사 와!‛ ‚몇 모 사 와요?‛ ‚좋으면 여러 모 사 와도 돼!‛ ‚알았어요.‛ ‚저기 엄마 지갑에서 돈을 넉넉히 가져가 봐, 한 3 천 원쯤 가지고 가 보 렴!‛ 이런 식으로 심부름을 시키면 아이에게 지워지는 책임도 크고, 또 그만큼 자 율의 폭도 넓다. 우선은 어떤 슈퍼에 가서 사 올까? 또 어떤 두부를 몇 모나 사 올까! 양주 두부가 있어도 잘 보고 사 와야겠고, 또 없으면 어떤 두부를 산 담? 아이는 꽤난 많은 생각을 하면서 두부를 골라 사 올 것이다. 슈퍼를 선택 할 때도 아이는 여러 가지를 생각할 것이다. 겉보기에는 이 슈퍼가 좋은데, 지 난 번에 엄마하고 갔을 때는 저 쪽 슈퍼 사람들이 더 친절했는데, 거기는 좀 멀고, 그러면 가까운 이 쪽 슈퍼로 가 볼까. 많은 생각을 하면서 아이는 슈퍼 를 향해 걸어갈 것이다. 두부를 사 갖고 집에 와서는 엄마에게 자기가 왜 그 슈퍼에 가서 그 두부를 얼마를 주고 사 왔는지 차근차근 설명할 것이다. 논리 적이고 깊이 있는 사고, 그런 사고는 따로 책상에 앉아 책을 통해서만 습득하 는 것이 아니다. 심부름을 통해서도 알게 모르게 조금씩 쌓아 갈 수 있다. 이 런 식의 교육은 처음부터 생각의 기회를 열어 준다. 처음부터 생각의 기회를 열어 주면 다원론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 우리는 그 동안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원론적인 흑백 논리에만 너무 젖어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무심 결에 이를 강요하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사고력을 개발하고 감성 을 풍부하게 하려면, 받아들이는 그릇을 크게 만들어야 한다. 즉, 생각과 느낌 의 바탕을 크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다원론적인 사고와 감성을 개발하 는 것이다. 생각과 느낌의 끝을 열어 주어라 요즈음 나는 치과엘 다니고 있다. 사랑니 하나를 뺐고, 그리고 이 하나를 새 로 해 넣기 위해서다. 의사 선생님 말로는 꽤나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하기야 가운데 이가 빠지면 해넣기가 쉽다. 걸 수 있는 그루터기가 양쪽에 있기 때문 이다. 그러나 맨 안쪽의 이는 걸 수 있는 곳이 한쪽밖에 없으니 해 넣기가 어 렵다. 그래서 이를 나무 심듯 심는 방법을 쓴다고 한다. 생각도 그렇다. 우리가 뭔가 생각하려면 생각의 실마리가 있어야 한다. 생각
의 실마리가 양 쪽에 있는 경우라면, 그 안에서 생각하게 되므로 비교적 쉽다. 연속극을 볼 때, 1 회에서 3 회까지 빠짐없이 보았고, 또 5 회 이후도 계속 보았 는데, 어쩌다 4 회를 보지 못했을 때, 4 회의 내용을 생각하기는 쉽다. 3 회와 5 회가 각각 그 안을 채우는 생각의 실마리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생각의 실 마리가 양쪽에 있고 그 안을 채우는 사고를 내삽적 사고라고 한다. 그렇지 않고 그 어느 한쪽의 실마리만을 갖고, 다른 한쪽을 생각해야 하는 경우에는 생각이 더욱 복잡하고 어려워진다. 예컨대, 텔레비전 연속극을 지금 까지 3 회를 모두 다 보았는데, 앞으로 4 회, 5 회에선 이야기가 어떻게 진전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또는 어느 날 무심코 텔레비전을 틀었더니 연속극이 방영되고 있었는데, 내 가 못 보던 연속극으로, 벌써 7 회째라고 한다. 그렇다면 7 회째를 보면서 그 동 안 6 회까지는 도대체 무슨 얘기가 오고 갔을까를 생각하는 경우도 역시 한쪽의 실마리를 갖고 다른 쪽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외삽적 사고라고 한 다. 내삽적 사고든 외삽적 사고든 모두 생각의 실마리를 갖고, 그겻에 기초해 생 각을 키워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부모가 자년에게 말하고 행 동할 때, 내삽이든 외삽이든 생각의 실마리를 갖고 자녀 스스로 생각을 키워 나가는 것을 억제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집에서 저녁 식사 후, 부모와 중학교와 초등 학교에 다니는 두 자녀가 모여 앉아 TV 종합 뉴스를 시청하고 있었다. 평범하지만, 꽤나 단란해 보이는 저녁 한때의 집안 정경이다. 2002 년 월드컵을 우리 나라와 일본이 공동으로 개최하도록 결정되었다는 소 식이 머릿기사로 전해졌다. 그 뉴스를 끝까지 다 듣고 난 다음에 아버지가 말 문을 열었다. ‚우리 나라 단독으로 개최할 수 있도록 결정되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 도 어 떻든 일본과 공동으로라도 개최하게 되었으니 잘 되었다. 하여간 일본 사람들 알아 줘야 해! 표로 싸우면 질 것 같으니깐, 공동 개최하자고 나온 것 아니겠 어! 사실 말이 쉽지, 저거 공동 개최하려면 단독으로 개최할 때보다도 신경은 배로 더 써야 할 걸. 앞으로 일본과 어떻게 협상 하느냐가 골치 아픈 일일 거 야!‛ 아버지의 긴 혼잣말이 이어지자,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 녀석이 아버지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버지! 공동 개최하면, 그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개회식, 폐회식 같은 것 말이에요? 두 나라에서 각각 개회식, 폐회식을 하는 거예요, 아니면 개회식 은 우리 나라에서, 폐회식은 일본에서 하는 식으로 나누어 하게 되는 거예 요?‛ ‚글쎄다. 바로 그런 것들이 두 나라 사이에 논의가 되겠지. 그렇지만 일본 사람들이 얼마나 약은데....‛ ‚아버지, 개회식, 폐회식 중 하나를 우리 나라에서 한다면 어느 쪽이 더 좋 은 거예요? 개회식을 우리 나라에서 하는 것이 더 좋은 것 아닌가?‛ ‚일장일단이 있지 않겠어! 개회식은 개회식대로, 폐회식은 폐회식대로 의미 있는 일이니깐!‛ 그러자 이번에 초등 학교에 다니는 딸도 끼여들었다. ‚아빠! 공동 개최하면 시합은 어디에서 해요? 일본에서 해요, 우리 나라에 서 해요?‛ 이렇듯 작은아이마저 대화에 끼여들자 월드컵을 화제로 삼은 세 식구의 대화 는 더욱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엄마가 그만 모처럼의 신나는
대화에 찬물을 끼얹는 것 아닌가? ‚야! 너희들 언제부터 그렇게 축구에 관심이 많아졌냐? 너희가 뛰냐, 응? 너희하고는 상관없는 얘기야! 일본과 공동으로 개최하면 어떻고, 우리 나라 단 독으로 개최하면 어떠니? 개회식이고 폐회식이고 그 때 가서 아무 데서나 하겠 지. 그게 너희하고 무슨 상관야! 나중엔 별것 다 가지고 신경들을 쓰네. 얜, 계집아이가 별 쓸데없는 데까지 관심을 두냐! 너희는 그저 하라는 공부만 하면 돼! 시끄러우니까, 방에 들어가 공부나 해! 당신도 졸리면 들어가 자고요, 난 연속극이나 볼 테니깐....‛ 엄마의 느닷없는 꾸지람에 아이들은 그만 머쓱해졌다. 그리곤 자기들 방으로 휑하니 들어가 버렸다. 그렇다면 정말 아이들은 쓸데없는 일에 관심을 가진 것 일까? 엄마의 횡포가 곧 생각과 느낌의 끝을 닫아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생각과 느낌의 전개를 가로막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 주는 것이 진정 생각과 느낌 의 끝을 열어 주는 것인가? ‚엄마, 왜 나하고 유치원 같이 다니던 미선이 있잖아! 나하고 짝하던 아이 말야, 맨날 우리 집에도 놀러왔잖아! 근데 걔네 이사 갔지?‛ ‚그래 맞아. 이사갔어. 어디로 갔다고 하더라?‛ ‚서울인가, 서울 근처 어디 갔다고 했어.... 참, 엄마, 분당이라고 했어. 분당이 맞아. 엄마, 분당이 서울이야?‛ ‚아냐, 분당이 여기서 가자면 서울 거의 다 가서 있어. 서울의 위성 도시 지, 서울서 아주 가까워!‛ ‚엄마, 분당에도 학교 많아?‛ ‚그럼, 많겠지.‛ ‚그러면 걔는 어느 학교에 다닐까?‛ ‚글쎄다, 엄마도 걔 엄마 잘 아는데, 한 번 연락할 수 있으면 해 보면 좋겠 다. 미선이도 많이 컸을 텐데. 너보다 더 컸겠지. 원래 너보다 더 컸으니 까....‛ 이렇게 엄마와 딸은 미선이네에 대해 한참 대화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방에 들어가서도 분당으로 이사한 미선이를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고 느끼고 있었다. 이런 식이 바로 생각과 느낌의 끝을 열어 주는 것이다. 그래야만 사고력도 감 성도 길러지는 열린 교육이 된다. 그러나 만약 미선이와 엄마의 대화가 다음처럼 흘러갔다면, 어떤 결과를 초 래할까? ‚엄마, 왜 나하고 유치원 같이 다니던 미선이 있잖아! 나하고 짝하던 아이 말야, 맨날 우리 집에도 놀러 왔잖아! 근데 걔네 이사갔지?‛ ‚그리, 이사갔어.‛ ‚분당으로 이사갔다고 했지, 엄마?‛ ‚그래, 그런데 왜 밥 먹다 말고 별안간 걔 얘기는 꺼내냐? 분당으로 갔으면 어떻고 합당으로 갔으면 어떠냐? 그게 너하고 무슨 상관이 있냐? 남 어디로 이 사갔건, 그런 쓸데없는 생각 말고, 너나 잘해! 이것아, 어서 밥 먹고 들어가 학습지나 해! 너 학습지 석 장이나 밀렸더라, 엄마가 청소하다 봤는데, 너 그 렇게 안 하고 접어서 서랍에 넣어 놓으면 엄마가 모를 줄 아냐? 그거 모두 돈 주고 하는 거야! 이것아, 잔소리 말고 어서 밥이나 먹고 들어가!‛ 아이는 괜스레 멀리 떠난 친구 미선이 생각을 했다가 야단만 잔뜩 맞았다. 그러나 아이가 야단맞은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생각하는 기회, 외삽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엄마의 닫힌 교육으로 인해 빼앗긴 것이 더 문제다. 무엇이든 다 들어 주는 것이 열린 교육은 아니다
‚여보, 애들이 피자 먹자는데, 오늘 저녁은 그걸로 그냥 먹읍시다!‛ ‚여보, 애들이 에버랜드 가자는데 거기나 갔다 옵시다!‛ ‚여보, 애들이 9 번 보자는데, 당신 꼭 그걸 봐야 되겠수?‛ ‚애들은 할머니 댁에 토요일에 갔으면 하던데, 당신, 꼭 일요일에 가셔야 되겠수?‛ 우리 이웃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대화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제각기 아이들 의 편 을 들어, 아이들의 요구를 서로에게 설득시키고 있다. 저녁 식사도, 모처럼의 주말 나들이도, 텔레비전 시청도, 부모님을 뵈러 가는 일도, 모두가 아이들의 편의가 의사 결정의 최우선으로 여겨지고 있다. 언제부터 우리네 가정에서 아이들을 그토록 최우선으로 대우했는가? 언제부 터 우리네 부모들이 자녀를 신주단지 모시 듯 모시면서 살게 되었을까? 언제부 터 부모들이 자녀들의 요구에 꼼짝 못 하고, 자녀들의 불평과 투정을 마치도 야단맞듯 듣게 되었는가? 그리고 아이들의 모든 잘못을 부모가 책임지게끔 되 었는가?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다. 부모가 자녀를 너무도 사랑하기때문일까? 그러면 옛날 우리네 부모들은 우리들을 그만큼 사랑하지 않아서, 우리들을 엄하게 가 르치셨는가? 사랑하지 않아서 우리들에게 책임감을 키워 주셨던가? 오늘의 젊 은 부모들은 자신의 행복을 오로지 자녀의 성패에다 걸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 면, 옛날처럼 자식을 많이 두지 않아서 자녀 최우선주의로 자녀에게 목숨을 걸 고 있는 것일까? 그러다가 병드는 우리네 가정을, 우리네 자녀들을 훗날 우리 는 어떻게 고치려는 것일까? 한 번쯤 우리 모두가 자신에게 꼭 물어 보아야 할 것 같다. 자녀 최우선주의는 자칫 아이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행동하도록 만든다는 점 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더욱이 자녀 최우선주의에 젖은 부모는 아이를 자유롭 게 혹은 개방적으로 키운 다면서 자녀를 버릇없는 아이로 만든다. 없는 돈에 몇백만 원씩 빚을 얻어, 초등 학교에 다니는 어린 아들을 해외 어 학 연수 다녀오게 한 어떤 부모는 말한다. 몇 날 며칠씩 밥을 안 먹고, 울며 불며 졸라대는데 어떤 부모가 안 들어 줄 수 있겠느냐고. 참으로 있을 수 없는 무리한 주장, 결코 용인될 수 없는 억지 요구를 대학생들이 민주화라는 미명으 로 대학에 대고 하였는데, 그것을 결국 들어 주고만 어떤 대학 총장은, 학생들 이 계속 찾아와서, 학생이 옥상에서 떨어져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는데, 어떤 총장이 그 요구를 안 들어 줄 수 있겠느냐고 한다. 이 두 경우를 보면서, 우리 부모들이 자녀를 키우면서 잘못 사랑한 게 아닌 가 하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자녀가 무엇을 요구하든, 그들이 극단적인 방법으로 요구하면 어쩔 수 없이 요구를 들어 주는 것을 자녀에 대한 사랑으로 잘못 생각한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다섯 살배기 어린아이가 길바닥에 주저앉는다. 엄마가 팔을 끌어 일으켜 세 우지만 아이는 계속 막무가내다. 이젠 아예 길에 드러눕는다. 엄마가 옆에 앉 아서 별의별 소리를 다해 가면서 아이를 설득하지만, 아이는 엄마보다 더 큰 소리로 무엇인가를 엄마에게 계속 요구한다. 엄마가 참다 못해 손찌검까지 하 지만 아이는 그래도 수그러들지 않는다. 오히려 지나가는 사람들의 도움을 요 청하듯, 더 크게 울고, 더 크게 소리지른다. 엄마가 이번에는 아이를 그 자리 에 그냥 버려 두고 저만치 혼자 가 버 린다. 그래도 아이는 끄떡 않고 그 자리에 혼자 앉아 계속 운다. 결국 저만치 혼자 가던 엄마가 되돌아온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가 원하는 것을 들어 주겠다 고 한다. 그러자 아이는 자리에서 털고 일어선다.
아이가 이긴 것이다. 아이가 엄마에게 투쟁(?)을 해서 얻어 낸 것이다. 이 아이가 과연 무엇을 깨달았을까? 어떠한 경우든, 또 어떠한 것이든, 무조건 떼 를 쓰면 그리고 끝까지 물러서지 않으면, 엄마는 결국 내 요구를 들어 준다는 것을 배우지 않았을까 걱정이 된다. 어른들이 쉽게 하는 말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지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자식이 무엇을 원하든, 결국엔 들어 줄 수밖에 없다는 얘기이다. 그렇 다면, 우리는 그것이 정말로 자녀를 위한 바른 가르침이고, 부모의 바른 행동 인가,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옳고 그름, 좋고 나쁨, 합리적이고 비합리적인 것, 또는 정당하고 부단한 것 등에 관한 가치 판별은 지극히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다. 집안에서 부모와 함께 생활하는 가운데 아이도 모르게, 또 부모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그렇 기에 일상 생활에서 부모가 자녀를 어떻게 대하고, 어떤 것을 허락하고, 어떤 것을 거절하느냐가 매우 중요한 일이 된다. 아이가 귀엽다고 해서, 아이를 사 랑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허락해 준다고 했을 때, 그 아이는 과연 어떤 가치 판단 의식을 갖추게 될까? 또 반대로 부모가 자녀에게 무엇이든 힘으로, 명령 으로 안 된다고 거절만 했을 때 그아이는 어떤 가치 판단 의식을 갖게 될까? 이성적으로 따져서 불합리하고, 부당하고, 또는 도덕적으로 따져서 옳지 못 하고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판단해서 부모가 허락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럼에 도 아이가 끝까지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부모에게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요구했을 때, 부모가 결국 아이의 요구를 들어 주고 만다고 했을 때, 아이는 어떤 가치 의식을 형성하게 될까? 부모들이 가정에서 자녀를 그런 식으로 키 운다면, 훗날 그들이 커서 대학을 다니고 회사엘 다니고, 또 사회 구성원이 되 었을 때,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 대학에서 학생들이 교권에 속하는 문제까지 들고 나와 총장에게 온갖 방법을 통해 협상을 요구할 경우, 총장이 결국 학생 들의 거센 움직임에 굴복해서 그들의 부당한 요구를 들어 준다면, 그 학교는 어떻게 될까? 마찬가지로 회사에서도 사원들이 그 비슷한 방식의 행동을 한다 면 그 회사는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그러한 겻이 정말 진정한 의미의 열린 교육인가? 열린 교육은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의 요구를 무엇이든 다 들어 주는 것인가? 그렇게 들어 주었을 때, 그들의 사고와 행동이 삐뚤게 형성되고, 그들 의 그릇된 버릇이 훗날 그들의 삶에 엄청난 어려움을 가져다 줄 것임을 알면서 도 그 모두를 들어 준다면 그것을 우리는 진정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설 혹, 지금 그것을 들어 주지 않아 자녀가 아픔을 겪고 시련을 겪더라도 그것을 자녀와 함께 인내하고 극복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자녀 사랑이고 진정한 열린 교육이 아니겠는가? 우선 당장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또는 아이한테 시달리는 게 귀찮아서, 내가 좀더 편해지고자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 준다면 그것은 사 랑이 아니고 자녀에 대한 부모의 기만이고 위선이라 생각된다.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문제의 하나도 바로 그렇다.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을 그 어떤 수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성취하고자 하는 사람들 때문에 야기 되는 온갖 추악한 모습 말이다. 그러면 그들은 어째서 그런 버릇을 갖게 되었을까? 혹시나 어려서 그들의 부 모가 그들을 그렇게 키운 것은 아닐까? 더불어 사는 일도 서로가 서로에게 부 당하고 무리한 요구를 강요하지 않아야 가능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한 가지 경우를 더 살펴보자. 다섯 살, 세 살짜리 두 아이를 둔 엄마가 아이들을 데리고 어느 아파트의 아는 사람 집을 방문하였다. 그 집 애 들도 둘인데, 둘 다 모두 고등 학교에 다니는 터라, 그 꼬마 아이들을 상대하 여 놀아 주지를 않았다. 게다가 중간 시험이 다가온다고, 그 집 아이들은 제각 기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결국, 엄마들끼리 이야기하는 동안, 두 아이는
저희들끼리 놀 수밖에. 두 아이는 아파트 안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도무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를 않았다. 아파트에서 그렇게 뛰면 아래 층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시끄러워 할까, 아이들은 그런 생각을 할 리가 없다. 앉아서 갖고 놀 수 있는 적당한 장 난감도 없으니, 아이들은 몸이 장난감일 수밖에. 하여튼 아이들은 쉼없이 뛰어 다녔다. 주인집 아주머니는 아이들이 너무 요란스럽게 뛰어다니는 것이 못마땅 한 듯, 아이들을 자꾸 쳐다본다. 그리고 뭐 먹을 것이라도 더 줄 것이 없는가 생각해 본다. 오자마자 주스를 따라 주었지만, 아이들이 반쯤 먹고는 그냥 놓 았다가 카펫 위에 엎지르고 말았다. ‚뭘 줄까? 귤 줄까? 여기 앉아서 귤 까 먹어라!‛ ‚귤은요? 우리 애들은 귤 같은 것은 잘 안 먹어요. 조금 아까 밥들 먹어서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이 없을 거예요.... 야! 너희들 귤 줄까?‛ ‚싫어. 엄마! 근데, 되게 재미있다. 꼭 미끄럼 타는 것 같아. 이 봐, 내가 보여 줄게, 여기서 이만큼 뛰어오다가 탁 지치면 미끄러진다....‛ ‚그러다 너희들 다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 동생 넘어 뜨리면 안 돼!‛ 아이들 엄마는 아이들이 그렇게 뛰어다니다가 혹시나 다칠까 염려되는 모양 이다. 남의 집, 더욱이 아파트에서 뛰어다니는 게 나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 기보다는 뛰다가 자기 아이들이 다치지나 않을까 하는 것만 염려한다. 한참을 뛰던 아이들은 지쳤는지, 이제는 더 이상 재미가 없는지, 이번에는 집안을 이 리저리 다니면서 이것저것 뒤적인다. 비디오 스위치를 눌렀다가 오디오 스위치 를 이리저리 돌리기도 한다. 이스라엘에 갔다가 기념품으로 사 왔다는 조그만 항아리를 아이들은 힘 자랑하듯 들었다가 쾅 놓기도 한다. 주인집 아주머니는 결국 참다가 한 마디를 했다. ‚얘! 그러면 그거 깨져. 그런 것 만지는 것 아니다. 그냥 놓고 보는 거다. 여기 와서 앉아라!‛ 그러자 아이의 엄마가 조금은 미안해하면서 대꾸를 한다. ‚쟤네들이! 하여튼 간에... 속을 썩여!! 너희들 그거 그냥 거기 안 놔? 빨 리 놔! 그리고 저 쪽으로 가서 놀아!‛ 그 다음에 아이들 엄마는 혼잣말인 듯, 아니면 주인 아주머니 들으라는 듯 말을 덧붙인다. ‚전 아이들을 자유롭게 키우려고 해요. 가능하면 하지 말라는 얘기는 안 하 려고 해요, 너무 구속하면 애들 기 죽을까봐! 그냥 자유롭게 내버려 둬요.‛ 자유롭게 내버려 둔다. 주인집 아주머니는 그 말을 손님이 떠난 후에도 온종 일 곰씹어 보았지만, 그 신세대 엄마의 양육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남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버릇없는 어린아이들의 행동이나 엄마의 생각 모두가 못마땅하였다. 그 아주머니는 많은 신세대 엄마들의 자녀 교육 방법이 무엇인가 본질이 크게 왜곡되었다고 생각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할 때 모든 것이 열린다 남녀가 만나서 사랑을 하면, 상대방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 는 곧 상대방을 믿는다는 뜻이다. 이러한 긍정적인 믿음이 생겨서 사랑은 더욱 돈독해진다. 어찌 보면 그것은 상호 순환적이다. 사랑을 하고 긍정적으로 생 각하면, 모든 감각 기관이 열린다. 흔히 사랑을 하면 뭐가 눈에 씐다느니, 눈 이 먼다느니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사랑을 하면, 눈이 머는 게 아니라 눈이 더 크게 열린다. 귀도 열리고 가슴도 열린다. 그래서 남들은 그 사람에 대해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 만은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좋은 감정을 갖게 되면, 그 대상이 사람이거나 사물이
건 생각과 느낌이 활짝 열린다. 심리학적 용어를 빌린다면, 지각의 장이 확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녀에게 개방적인 삶의 태도를 갖게 하고, 가정에서 열 린 교육을 실시하려면 무엇보다도 그들이 세상 모든 존재, 모든 사람, 모든 현 상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학기 초 학급 담임이 새로 결정되고 학급이 편성되면, 그 날 저녁 부모들 은 으레 새 담임 선생님에 대하여 묻는다. ‚그래 이번에 5 학년 몇 반이냐?‛ ‚모두 여섯 반인데, 난 4 반이야!‛ ‚그래, 담임 선생님은 어떤 분이 되셨냐?‛ ‚엄마, 왜 있지, 그 때 운동회 할 때, 우리 매스 게임 전체 지휘한 선생님, 그 선생님이 우리 담임 되셨다!‛ ‚음! 그 남자 선생님, 깐깐하고 무섭게 생긴 선생님 말이지?‛ ‚맞아! 되게 무섭게 생겼지! 오늘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인상 쓰고 겁부터 주는 거 있지! 난 정말 기분이 영 아니더라! 무섭기만 한 줄 알아? 글쎄 말하는데 침이 튀잖아! 애들한테로 튀는 거 있지! 난 앞에서 넷째 줄에 앉았기에 다행이 었다.‛ ‚공부는?‛ ‚몰라! 오늘은 공부 안 하고, 숙제만 내 주셨어. 근데 숙제도 4 학년 때 선 생님처럼 칠판에 적어 주시지도 않고....‛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은연중, 선생님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만 이루어지게 되었다. 원래 그런 뜻은 아니었어도 결과적으로 엄마와 아이는 새 담임 선생님 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만 키우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 아이가 앞으로 그 선생 님과 함께 공부를 잘 할 것으로 기대하는가? 여기서 볼 때, 문제는 엄마가 무 의식중에 담임 선생님에 대한 부정적인 사고와 느낌만을 유도했다는데 있다. ‚음, 그 남자 선생님, 깐깐하고, 무섭게 생긴 선생님 말이지.‛ 하는 표현에 서 깐깐하고 무섭게라는 어휘가 아이에게 그런 반응을 유도하고 만 것이다. 만 약, 엄마가 그렇게 말하지 않고, 그 선생님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음! 그 남자 선생님, 키 크고 아주 씩씩하고 시원시원하게 생긴 멋쟁이 선생님 말 이지?‛ 했더라면 아이의 반응는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부모의 작은 언행은 아이가 사람이나 대상을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지 각하는 데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부페 식당에 가서도 그렇지 않던가? 거기에 가면 먹을 것이 꽤나 많을 것으로 생각하고 들어서는 것과, 가 봤자 뭐 먹을 게 있나 하고 들어서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후자의 경우는 접시를 들고 음식 주위를 빙빙 돌게 만든다. 먹을 것이 별로 없다고 처음부터 지각하고 들 어왔으니, 마음이 닫히고 눈이 가려지고, 생각이 멈추어 먹을 것 맛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처럼 먹을 것이 많다 생각하고 들어오면, 눈이 뜨이고 마음이 열리고 생각이 열려서 맛있는 음식이 자꾸눈에 들어온다. 자녀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도록 한다는 것은 또 다른 각도에서 보면, 부정적 인 선입견에서 아이들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부모가 아이에게 함부로 부정적인 선입견이나 가치를 주입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도 록 열어 주는 것을 족하다. 열린 교육은 한 마디로 특정한 가치에 예속되지 않 도록, 그래서 여러 가지 다양한 가치에 접해 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네 친구라고 하는 아이. 왜 601 동에 산다는 아이 있지?‛ ‚응, 영철이 말예요?‛ ‚그래, 눈 큰 아이 말야!‛ ‚맞아요. 내 친구예요!‛ ‚ 그 아이 교회에 다니냐?‛ ‚아니요! 걔 교회 안 다녀요.‛
‚그 아이 엄마, 아버지도 교회에 안 다니시니?‛ ‚걔네 엄마, 아버지는 절에 자주 가시나 보던데요!‛ ‚음, 그렇구나. 앞으로는 가능하면 그 아이와 너무 어울리지 말거라!‛ ‚왜요?‛ ‚가능하면, 교회 다니는 친구를 사귀렴!‛ 중학교 1 학년인 그 아이는 엄마의 부드러운 충고에 순종하듯 더 이상 엄마에 게 따져 묻지를 않았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서는 엄마의 충고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생각이 강하게 일었다. 영철이는 참 좋은 친구인데, 단순히 교회에 안 나간다고 해서 사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엄마의 말을 아무리 생각해도 이 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자녀가 친구를 사귀는 데 부모가 제한을 가하는 경우는 허다하다. 종교가 다 르다는 이유를 들어서, 거꾸로 교회에 나가는 친구하고는 더 이상 사귀지 말라 는 식으로 또는 공부 못하는 아이들과는 어울리지 말라, 부모가 없는 아이들과 는 사귀지 말라, 누구는 불량해 보이니 만나거나 얘기도 하지 말라 하는 식으 로 수많은 구실을 들어 부모가 아이들의 친구 사귐에 제한을 두는 경우가 맣 다. 그뿐인가. 때로는 어느 동네에 사는 아이와는 놀지 말라, 부모님 고향이 어딘가를 놓고 그 집 아이들과는 놀지 말라, 별의별 이유를 구실로 삼을 때도 많다. 물론, 부모 입장에서는 자기 아이들이 혹 불량한 아이들 틈에 끼여서 알게 모르게 물들지 않을까 걱정해서 미리부터 그런 기회를 차단하겠다는 뜻임을 이 해한다. 그리고 또 어떤 면에서는 자녀에게 일찍부터 세상을 가릴 줄 아는 습 성을 길러 준다는 뜻도 담겨 있음을 이해한다. 문제는 그러한 선별 기준이 부모의 특별한 경험에 근거해서 이루어져 아이들 이 세상을 제대로 폭넓게 보기도 전에 그런 가치를 무조건적으로 주입시킨다는 데 있다. 그림을 그리는 아이에게 검은 색은 기분이 나쁘니 무조건 사용하지 말라고 한다면 그 아이는 평생 검은 색에 대해선 반감만 갖고 살아갈 것이고, 검은 색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갖게 될 것이다. 아이들 스스로 색깔 을 골고루 사용하게 해서, 각 색깔마다 특성과 느낌을 체득하게 한 다음, 아이 가 특별히 선호하는 색깔을 쓰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한 원리는 아이들이 친구를 사귀는 데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한다. 아직 모든 가치 개념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선택과 결정을 하기 어려운 아이들에게 너무 일찍부터 부모가 특정한 가지, 특정한 성향을 강제로 주입하는 것은 생각과 행동이 건전한 아이 로 자라는 데 커다란 위해 요인이 됨을 한 번쯤 생각해 봄이 어떨까? 8. 최적: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오래 전 일이다. 칠십이 넘으신 부모님께서 신촌 근처에 사는 이모님 댁에 들르셨다가 학교로 자식을 모로 오셨다. 마침 점심때라 식사를 하러 모시고 나 갔다. ‚어머니, 뭐 드시겠어요? 아버지, 뭐 잡수시고 싶으세요. 점심 사 드릴게 요.‛ ‚글쎄다. 이모네서 느지막이 아침을 먹어서, 점심 생각도 별로 없고....‛ ‚그래도 때가 되었는데, 뭘 잡수셔야지요! 저도 점심 먹어야 하겠구요.‛ ‚너 좋은 데로 가렴, 아무 데고 괜찮으니까! 너희 아버지가 언제 음식 가 리시더냐! 평생 아무거나 잘 잡숫는 것 하나는....‛ ‚그래요! 그럼 나가세요.‛ 그리곤 나는 머리를 굴렸다. 모처럼 학교까지 오셨는데 뭐 좋은 것을 대접해 야지 하는 마음에서, 가까운 특급 호텔 식당으로 모시고 갔다. 주차도 편하고, 가깝고 해서 그리로 갔다. 그 곳 중국 식당에는 부모님을 몇 번 모셨던 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양식당으로 모셨다. 테이블에는 정신이 없을 정도로 커피잔, 물잔, 접시, 몇 가지 종류의 포크, 나이프 등이 빼곡히 세팅되어 있었다. 무엇 을 드시겠냐 여쭈어 보았지만, 어머니고 아버지고 두 분 모두, ‚우리가 뭐 아 냐, 네가 알아서 주문하렴.‛ 하시기에 나름대로 노인들이 드시기 좋겠다 싶은 음식을 주문했다. 그리곤 앉아 있는데, 옆자리에 우리 학교 총장님이 몇 분 손 님과 함께 오셔서 앉으시질 않는가? ‚아! 이 박사, 웬일이세요?‛ ‚네, 총장님, 부모님 모시고 왔어요.‛ ‚아, 그래요!‛ 그러면서 총장님은 부모님과 인사를 나누었다. 식사가 나왔다. 부모님은 평 소의 지론대로, 그래도 돈 주고 시킨 것인데, 알뜰히 먹어야지 하시면서 끝까 지 다 잡수셨다. 그런데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어머니는 옆자리에 앉아 계신 총장님 일행들이 들을까 봐 조심스럽게 나지막이 한 마디 하셨다. ‚얘! 이런 덴는 왜 이렇게 불편하냐? 어데 가 앉아서 그냥 된장찌개 같은 것을 먹었으면 좋으련만....‛ 아버지는 싱긋이 웃으시며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마치도 속으로, ‘이런, 촌사람하고 다니니, 참, 나 원.’ 하시는 듯했다. 어머니는 식사를 끝낸 후, 택시 잡기 좋은 곳 까지 모셔다 드리는 차 안에서도 다시 한 번 말씀하셨다. ‚얘! 그거 비싸지?‛ ‚비싸면 뭐 어때요! 그래서 한 번 잡숴 보시는 거지요!‛ ‚돈도 돈이지만, 난 도시 그런 게 맞지를 않아, 우리네는 그저 어디 가서 방바닥에 궁둥이 대고 앉아 마음대로 얘기하면서 찌개 같은 것이나 먹으면 좋 지!‛ 그러니까, 어머니는 음식은 물론, 분위기까지도 마음에 맞지 않으셨던 것이 다. 아버지는 그래도 남자니까 그런 대로 좋으셨던 모양인데, 어머니는 영 그 렇지 않으셨던 것이다. 최고 좋은 것으로 잘 해 드리려 했지만, 어머니는 최고 로 좋게 느끼지 않으셨다. 결국 나는 실수를 했다. 늘상 생각을 해 온 일이지만, 가장 비싸고 사람들이 가장 좋다고 하는 것이 누구에게 좋은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나는 다시 그런 착각을 하였던 것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에게 어울리는 것이 있다. 늘상 입는 옷도 그렇고, 사는 집도, 먹는 음식도 그렇다. 또 배우 자를 고르는 일도 그렇다. 각자 자기에게 어울려야 그것이 정말로 가장 좋은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각자 자신에게 어울리는 것, 적합한 것을 찾기보다는, 남들 이 생각하는 가장 좋은 것, 남들이 생각하는 가장 비싸고 귀한 것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다. 흔히들 분수를 모르고 날뛴다, 분수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분수가 무엇일 까?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고 적합한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자 녀 교육에서도 그 원리가 자녀에게 가장 잘 어울려야 하고, 자녀가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을 추구하도록 그들의 능력, 심성, 기능 등을 길러 주어야 하는 것 아니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 내가 소속된 교육학과에는, 학부에서 전혀 다른 분야를 전공한 다음 학사 편 입으로 3 학년에 또는 석사 과정에 입학한 학생들이 제법 많다. 학부에서 4 년 동안 경제학, 기계 공학, 전자 통신 공학, 화학, 독문학, 영문학 같은 분야를 공부하고 교육학과로 다시 진학한 학생들이 그렇다. 나는 이 학생들을 처음 만
날 때마다, 4 년 간 이미 공부한 것을 교육학 분야와 접목시켜 보면 좋지 않겠 느냐고 제안한다. 그러나 언제고 나의 제안은 무위로 끝난다. 이유는 간단하다. 글들은 4 년 간 공부한 것을 교육학 분야와 접목시키려고 교육학과를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 대부분은 4 년 간 자신의 전공 분야에 재미를 못 붙이고 학점만을 따서 졸업을 하였다. 4 년 간 그 전공 분야 에서 알차게 공부를 못 한 것이다. 그리고 4 년 다니면서 이 분야, 저 분야를 한두 과목씩 들으면서 교육학이 적성에 맞다는 사실을 늦게나마 깨달은 것이 다. 애당초 교육학 쪽에 관심이 있었는데, 진학할 당시 어른들의 군유로 다른 분야를 전공하게 된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어찌 보면, 안타깝고 불행하기 그지 없는 일이다.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공부가 무엇인가를 따지지 않고서, 그저 인기 학과와 유망 학과라는 이유로 자신의 희망과는 다른 학과를 지원하는 행동은, 어떤 옷 이 유행이니까 자신의 모습이나 사정은 생각 않고 그런 비싼 옷을 무조건 한 벌 사서 입으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리고 몇 년 후에 이게 아니었는 데 하고 후회한다면 지난 날의 시간과 노력은 어떻게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 겠는가? 대학에 설치된 모든 전공 학과는 다 나름대로의 존재 이유가 있다. 즉, 이 세상에 모두 필요한 학문 분야이다. 결코 좋고 나쁨이 있을 수 없다. 상위의 학과가 있고, 하위의 학과가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학과니 나쁜 학과니, 남 학생이 가는 학과니 여학생이 가는 학과니 하는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어느 학 과든 자신의 적성과 포부에 맞고, 자신이 공부하고 싶은 분야라면 그 사람에게 가장 좋은 학과인 것이다. 어 느 학과를 공부하든, 그 학과에서 자신의 적성과 능력을 최대한 개발하면, 그 에게는 분명 그것을 값지게 받아들이려는 기회가 졸업후에 열리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학과보다는 그 대학에 우선 붙고나 보자, 남들이 그러는데 그 학과가 좋다고 하니 그곳에 진학하자는 식의 맹목적인 전공 학과 선택은 안 된다. 세 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럴 때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다. 나는 이따금 잡지사 인터뷰 같은 것을 할 때, 이런 질문을 받는다. 교육학과 는 어떻게 해서 선택했는가? 부모님이 권한 것인가? 자신이 그렇게 정한 것인 가? 대학 교수로서 삶에 만족하는가? 다시 태어나도 대학 교수를 할 것인가? 그럴 때마다 항상 자신있게 대답한다. 나는 이렇게 학생을 가르치며 학생과 더 불어 사는 것이 가장 재미있고, 내게 가장 어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 기에 참으로 행복하다고 말이다. 그리고 나는 어려서부터 가르치는 데 소질이 있음을 일찍이 발견하였고, 또 그 일이 가장 신난다는 것을 알았기에 중, 고등 학교 선생이 되고 싶어 교육학과에 진학하였다고 대답한다. 물론 대학 재학 시 절 교수님들의 권유로 대학원에 갔고,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그래서 대학 교 수가 되었지만, 대학에서든 어디에서든 가르치는 일을 가장 좋아하기에 다시 태어나도 똑같은 길을 걷고 싶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내가 이 땅에서 가장 부 러워하는 사람은 65 세까지 건강하게, 아무 일 없이 그야말로 조용히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치고 배우며 지내다가 정년 퇴임을 하는 분들이라고 대답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어울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처럼 삶의 의 미를 풍족하게 느낄 때가 없을 성싶다. 그렇기에, 나는 내 아이들에게도 그들 이 가장 하고 싶어하고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도록 도울 것이다. 그것이 어떠 한 형태의 직업이든, 흰색 칼라의 일이든 푸른색 칼라의 일이든 색깔만 보고 따지지는 않으려고 한다. 최고에 오르기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게 더 중요하다
중학교 2 학년인 진환이가 중간 시험을 보고 학교에서 돌왔다. 세 과목 시험 을 치렀다. 집 안에 들어서는 진환이가 가방을 플어 놓자 엄마가 따져 묻기 시 작한다. ‚얘, 너 그래 오늘 중간 시험 잘 뫘니?‛ ‚그런 대로 보았어요!‛ ‚그런 대로라니? 무슨 대답이 그러니? 너, 세 과목 본다고 했지?‛ ‚네. 영어, 미술, 국사, 세 과목 보았어요!‛ ‚그래, 영어는 몇 개 틀렸어?‛ ‚네 개 틀린 것 같아요.‛ ‚너는 꼭 무슨 말을 하면, 왜 맨날 ‘같아요’ 소릴 그렇게 잘 하냐!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지! 그래 미술하고 국사는?‛ ‚미술은 좀 망쳤어요, 일곱 개 틀렸어요! 그리고 국사는 다 맞았어요!‛ ‚그럼 모두 몇 개나 틀린 거야! 벌써 열한 개나 틀렸잖아! 걔 있지, 8 단지 에 사는 아이, 너희 반에서 공부 제일 잘 한다는 아이말야!‛ ‚배영이요? 박배영말예요?‛ ‚잘 몰라요! 걔는 국사에서 오히려 한 개 틀렸나 봐요. 미술하고 영어는 모 두 맞고요!‛ ‚그럼 걔가 또 1 등 하겠네?‛ ‚근데, 너는 왜 맨날 걔한테 뒤지냐! 너는 도대체 뭐가 모자라서 1 등을 못 하는 거냐?‛ 엄마는 아들이 1 등 하지 못해 마냥 분한 모양이다. 아이가 최선을 다했는지 혹시나 시험 준비에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엄마의 생각은 오로지 아들이 1 등 하는 것이다. 몇 개가 틀렸건, 좌우간 1 등만 하면 된다는 것이 진환이 엄마의 믿음이다. 그렇다면 진실로 엄마의 이런 생각, 꼭 자기 자식이 1 등을 해야 한다는 집념 이 자녀 교육에서 바람직한가? 우리나라 엄마들의 자녀에 대한 최고 지상주의 는 꼭 공부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아이에게 먹이는 음식도, 입히는 옷가지 도, 신발도, 가방도, 필기 도구까지도 그야말로 모든 것을 최고로만 갖추어 주 려고 한다. 흔히 쓰는 말로 브랜드나 메이커만 먹이고 입히고 쓰게 하려 한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밖에 나가서 아이가 기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란다. 기라 는 것은 최고를 소유할 때, 남보다 조금도 뒤지지 않을 때 살릴 수 있다는 믿 음이 우리 나라 엄마들 마음 속에 가득 차 있다. 내가 가진 것이, 사용하는 것 이 남의 것보다 못하면 기가 죽는다. 그렇다면, 기라는 것은 정말 무엇인가? 그리고 그렇게까지 해서 기를 살려야 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기는 겉으로 드러 나는 것인가? 아니면 속으로 스며들면서 영그는 그런 것인가? 이런 아이가 있다. 시험을 앞두고 지영이는 어제 밤, 밤새도록 공부를 했다. 공부방이 없어 온 식구가 잠들었을 때, 혼자 조그만 부엌 식탁에 나와 앉아 밤 을 새며 공부를 했다. 시험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최선을 다했 기에 속으로는, 하나님도 자기 편에 서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시험 시작 20 분 전에도 책을 펴 놓고 적 온 쪽지를 보면서 외우느라고 난리다. 모두 들 부유한 집 아이들이다. 공부방도 따로 있고, 아침이면 엄마가 엄마 차로 태 워다 주는 아이들이다. 그 때 그들을 바라보면서 지영이는 가슴 속으로, ‘그 래, 너희들 그리 야단법석이지만 나는 벌써 다 해 놓았어. 너희들이 좋은 점수 를 받건 못 받건 간에 나는 상관 없어. 그냥 나는 최선을, 내게 주어진 조건에 서 할 수 있는 최선만 다했으면 되니깐....’ 하고 생각한다. 그 때, 80 평 빌 라에 살면서 언제고 자기 집이 부자임을 자랑하는 은 영이가 한 마디 내뱉는다.
‚야, 윤지영! 너는 공부 안 하냐?‛ ‚아니, 해.‛ ‚이리 와, 이것 한 번 볼래?‛ ‚야! 너, 공부 굉장히 했구나.‛ ‚음, 미리 찍어 본 거야. 어제 학원에서 찍어 본 거야.‛ 약을 올리듯 시험 시작 5 분 전에 내 보여 준 쪽지였다. 그러나 지영이는 속 으로 기가 죽지 않았다.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최선을 다했다는 것에 그냥 마 음이 편했다. ‘설혹 그 아이들이 나보다 좋은 점수를 받는다고 해도 속상해하 지 않을 것이다. 그저 내가 노력한 결과에 만족할 뿐이다.’ 하고 생각했다. 지영이는 결코 좋은 옷 입고, 맛있고 비싼 도시락 반찬 싸 오고, 좋은 신발 신 고,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 타고 오는 아이들에게 기죽지 않았다. 시험을 보고 지영이가 집에 왔다. 엄마는 반기면서 한 마디 한다. ‚지영아! 그래 오늘 시험 잘 봤니? 어제 밤 부엌에서 공부 하느라고 추웠 지?‛ ‚뭐 그렇게 잘 본 것 같지는 않아요. 여러 개 틀렸어요.‛ ‚괜찮아! 네가 최선을 다했으면 됐어. 그리고 엄마, 아빠는 네가 최선을 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 에미 애비는 아무것도 제대로 도아 주지 못했지만, 그 래도 네가 그만큼 노력을 하니까 10 등 안에는 꼭 들잖니, 꼭 1 등 해야 되는 거 냐? 1 등 못해도 엄마, 아빠는 괜찮아. 언제고 최선만 다하는 그런 사람이 되 렴.‛ 이 말에 지영이는 더욱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뜨거움을 느꼈다. 그것은 엄 마,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고마움과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 그리 고 자아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영이가 가슴 속에 샘솟는 기이기도 했다. 적절한 목표를 세우고 자기와 싸운다 겨울 방학을 맞이한 대학 1 학년생인 해석이는, 12 월은 벌써 그렇게 다 지나 갔으니, 새해 1 월부터는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 볼 계획을 세웠다. 시내 책방 에 가서 토플 책 한 권을 사 왔다. 한 번 훑어보내 모두 340 쪽이었다. 1 월, 2 월 두 달 동안에 이 책 한 권을 완전히 끝내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는 계획을 세 운다. 1 월은 31 일이고, 2 월은 28 일이까 모두 59 일, 그러니까 하루에 여섯 쪽 씩만 해도 1, 2 월 두 달 동안에 충분히 뗄 수 있겠다 싶었다. 그리곤 1 월 1 일 부터 하루에 여섯 쪽씩 하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러면 대체로 2 월 26 일 이면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드디어 1 월 1 일이 되었다. 두 시간 남짓 앉아서 토플 책을 공부 했다. 처음 부분이라 거저 먹는 부분이 많았다. 목차도 있어, 실제로 공부한 분량은 다섯 쪽이었지만, 12 쪽까지 끝낸 셈이 되었다. 책상 앞에 걸린 학교 달력에다 오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했나 메모도 해 두었다. 둘째 날도 똑같이 두 시간 앉아 공부했다. 찾아야 할 단어가 많아서였는지 공부한 양이 어제보다 훨씬 적었다. 네 쪽밖에 못 했 다. 그러나 어제 열두 쪽과 합치면 모두 열여섯 쪽, 아직은 계획엔 아무런 차 질이 없었다. 하기야, 이제 겨우 이틀이 지났으니. 사흘째, 오후에 정해진 시 간에 공부하려고 앉았는데 재수 시절 학원에 같이 다니던 친구한테 전화가 왔 다. 그 친구는 꼭 의대에 가길 원했는데, 성적에 맞추다 보니 할 수 없이 지방 에 있는 의대엘 가게 되었다. 그래서 평소엔 만나기가 어려운데, 새해 들어, 얼굴이나 한번 보자길래 나갔다. 호프집에 들러 맥주까지 한 잔 했다. 오랜만 에 술을 먹어서 그런지 빨리 취했다. 부모님이 걱정하실 것 같아 밤 10 시쯤 집 에 돌아왔지만 토플 책을 마주할 기분은 아니었다. 그래서 현재 모두 열 여섯
쪽을 했고, 설혹 오늘 하나도 안 했어도 별 문제는 없다. 내일만큼은 여덟 쪽 을 하고 다음부터는 여섯 쪽씩 하면 오늘 못 한 것을 만회할 수 있는 것 아닌 가? 오늘 저녁 한 번만은 일찍 자자! 이튿날 해석이는 오후에 토플 책을 꺼냈다. 인내심을 갖고 두 시간 동안 앉 아 있었지만, 네 쪽을 가까스로 했다. 나흘 동안 모두 20 쪽까지 끝냈으니, 계 획에 비하여 벌써 네 쪽이 밀린 셈이다. 닷새째 되는 날이다. 아침 식탁에서 아버지 말씀이 오늘은 오후에 모처럼 할머니 댁에 가서 어른들 뵙고, 저녁 먹 고 오자고 하시지 않는가? 오후에 토플 공부해야 한다는, 그래서 가기 어렵다 는 변명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말하면, 아버지는 그러실 것이 뻔했기 때 문이다. ‚이 녀석아! 긴긴 방학, 허구헌 날 놀면서, 그래 꼭 그 시간에 토플 공부를 해야 하냐?‛ 그래서 결국 할머니 댁에 갔다 오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오늘은 한 쪽도 못 하고 말았다. 그러자 머리 속에 또 다른 생각이 일기 시작 했다. ‘야! 방학은 그야말로 학을 방하는 것, 즉 배움을 잠시 손에서 놓는 것인 데, 뭐 그렇게 머릴 싸매고 그러냐? 고 3 도 아니면서. 남들은 스키장이다 겨 울산 등반이다 하고들 심신을 수련하느라 난리인데, 고작 토플 책을 들고 이렇 게 골방에서 씨름해야만 되냐! 공부는 역시 공부할 때 하는 거고, 남들도 다 놀면서도 토플 준비만 잘 하더구만. 뭐, 너 혼자 유별나게 구냐! 그래, 남들 놀 때는 나도 놀자! 까짓것 1 월 한 달, 정말로 푹 쉬고, 에너지를 축적시킨 다 음에, 2 월부터 해도 늦지 않겠지?’ 자기 합리화가 끝난 해석이는 그야말로 1 월 한 달을 신나게 놀았다. 그리고 2 월이 다가오자 다시 계획을 세웠다. 이번에야말로 이제껏 실컷 놀았으니, 제 대로 해 보자는 뜻으로 목표도 더 높게 잡았다. 340 쪽 분량의 책을 2 월 한 달 에 떼겠다고, 하루에 13 쪽씩만 하면 2 월 한 달 동안에 충분히 뗄 수 있다고 생 각하고, 계획을 밀어붙이기로 마음먹었다. 2 월 1 일, 처음부터 다시 하기로 하고 열심히 했다. 지난달에, 그래도 이미 한 번 봐서 그런지 수월했다. 모두 열다섯 쪽까지 했다. 이튿날, 목표만큼 딱 열세 쪽을 했다. 그러나 사흘 째 되던 날, 또 일이 생겼다. 군에 간 형이 모처 럼 외박을 나왔다. 아버지가 형 외박 기념 고스톱을 치자고 하신다. 사실 아버 지는 고스톱을 잘 칠 줄 모르신다. 아버지 돈은 이내 내돈이라고 엄마도, 형 도, 나도 모두들 생각한다. 용돈은 궁했고, 또 그것처럼 재미난 것도 없다 싶어, 스트레스도 풀 겸, 해 석이는 선뜻 동의를 하고 9 시 뉴스 할 때까지만 하기로 하고, 우선 저녁을 먹 은 다음 7 시부터 네 식구가 둘러앉아 고스톱을 쳤다. 예상대로였다. 아버지가 제일 많이 잃으셨다. 해석이는 모두 3 만 원을 땄다. 그리고 모두 4 만 원을 잃 은 아버지에게 해석이는 팁으로 1 만 원을 드렸다. 아버지는 그 때마다 한 번도 안 받으신 적이 없었다. 하여튼 오래간만에 네 식구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 냈다. 그러나, 이것을 어쩌랴! 계획대로 토플 공부가 되지 않는다. 이튿날도,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그래도 엿새를 끙끙거렸건만 모두 30 쪽까지밖 에 진도를 못 나갔다. 계획대로라면 오늘은 78 쪽까지 했어야 하는데, 이런 식 으로 나가다간 한 달 동안에 떼겠다는 목표 달성은 턱도 없을 성싶게 느껴졌 다. 결국 해석이는 다시 자기 합리화를 통해 계획을 포기하고 수정한다. ‘야, 3 월 개강해서 시작해도 늦지 않아. 공부할 때 확 공부하는 거야. 개강하면 과목 수강하랴 바쁠 것 같지. 바쁠 때 오히려 공부도 잘 되는 거야! 그리고 아직 2 학년도 안 되었는데 뭘 벌써부터 야단이야!’ 그리곤 해석이는 2 월 한 달을 푹 놀았다. 그러나 3 월에 끝낸다는 결심도 지키지 못하고 4 월로 미루다가 또 7 월 부터 하겠다고 다짐했다. 결국 나중엔 그 책이 지겨워서 책을 바꾸기로 했다.
책을 세 번이나 새로 샀지만 맨날 앞부분만 하다 말았다. 그렇다면 내가 의지가 약해서인가? 해석이는 곰곰히 생각 해 본다. 하기야 공부할 의지가 약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처음부터 너무 무 리한 계획을, 내게 맞는 계획을 세우지 못한 것은 아닌가. 그래서 결국엔 제대 로 뭐 하나 성취하는 것 없이 자꾸만 실패하는 경험만 맛보다 보니 공부가 재 미없고 지겨워진 것은 아닌가도 생각해 보았다. 공부도 분수를 지켜야 하는 것 인데, 욕심만 앞세웠지, 그래서 목표만 높이 세웠지, 행동으로 실천 못 한 것 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아닌가? 그래, 이제부터는 좀더 내게 맞는 목표를 세우 자. 공부는 남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내가 목표를 세 우고 의지를 곧추세워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지켜내야 하지 않는가? 자신과의 약속도 못 지키고, 자기와의 싸움에서 지는 내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해석이 는 이제야 자신의 적절한 목표를 다시 확인한다. 각자의 독특한 스타일이 있는 법이다 고등 학교 2 학년인 민지는 자기 아버지를 닮아 모든 것을 꼼꼼히 적는 버릇 이 있다. 그 아이 아버지는 자동차를 한 달에 얼마나 굴렸으며, 기름값으로는 얼마나 썼고, 주차료로 얼마를 지불했고, 잠은 하루에 몇 시간 잤고, 회사에는 몇 시에 출근해서 몇 시에 퇴근했고, 술은 먹었는가 안 먹었는가, 먹었을 땐 누구와 얼마큼 먹었는가, 하여튼 별것을 다 적는다. 골프에 관한 기록을 보면 더울 놀란다. 언제 누구와 어느 컨트리 클럽에 가서 쳤는가는 물론, 버디는 몇 개를, 파는 몇 개를 했으며, 아웃에서는 얼마를 쳤고, 인에서는 얼마를 쳤고, 그래서 이 달은 평균 핸디가 얼마이고, 지난달에 비하여 얼마나 향상됐는지 등 안 적는 게 없다. 그의 수첩 은 온통 숫자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민지 아버지는 누구보다 시간 관념이 철저하고, 또 시간 관리를 잘 한다. 하루를 살아도 밥 세 끼 먹을 만큼의 보람 있고 가치 있는 하루를 만들기 위해 그는 자기 자신을 여러 가지 통계 수치를 통해 관리하고 통제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러한 기록을 혹 누가 보기만 하면 민지 아버지는 펄쩍 뛴다. 마치 자기의 치부를 들킨 것처럼 화를 내고 창피스 러워한다. 민지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그러한 모습에 은연중 영향을 받았다. 민지는 공부할 때 보면, 지극히 냉철하고 분석적이며 통계적이다. 자기 스스 로 집에서 시험을 본다. 그리고 그것을 조그만 공책에 늘상 기록한다. 이번 주 에는 집에서 영어와 수학 시험을 치렀는데 몇 점을 맞았고, 똑 학교에서 보는 시험은 그런대로 몇 점을 받았고, 오늘은 무슨 공부를 몇 시간, 어디에서 어디 까지, 어떻게 했는지 기록을 한다. 민지는 하루에 적어도 30 분 이상을 통계내 는 데 사용한다. 민지와 민지 아버지의 그러한 성격에 대하여 민지 엄마는 지극히 냉소적이 다. 남자가 쫀쫀하게 그런 걸 다 적는다고 생각하지만 남편에게 내색을 안 했 다. 그런데 딸까지 그러니까 민지 엄마는 딸에게 남편에 대한 미움까지 포함해 서 퍼붓는다. ‚야! 넌 맨날 뭘 그렇게 기록해 두냐! 그럴 시간 있으면, 그 시간에 영어 단어라도 하나를 더 외워라. 그런 것 적는다고 공부 잘 하냐! 딴 애들은 그러 지 않아도 공부만 잘 하더구만.‛ 엄마가 이런 잔소리를 할 때마다 민지는 우선 무엇인가를 엄마에게 들킨 것 같아 싫고, 다음은 제각기 자기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통제하는데 그것을 가지 고 엄마가 뭐라시는 것에 대해 화가 났다. 먹기 싫으면 안 먹으면 그만인데 왜 남까지 못 먹게 하냐, 이것이 민지의 생각이다. 내가 그런 것을 적는다고 해서 누구에게 피해 주는 것도 아닌데 말야! 민지는 자신의 프라이버시가 침해당했고, 또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무시
당했다고 생각한다. 맞는 이야기이다. 아이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사실 아이들 은 자기 나름대로 자기에게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방식의 공부 스타일을 갖고 있다. 어떤 아이는 공책에 꼼꼼히 적어 나가야만 공부가 잘되고, 또 어떤 아이는 공책 대신 책에다 자를 대고 줄을 그으며 그 옆에 메모를 해 나가는 방 식으로 공부를 해야 잘 된다. 한두 가지 더 예를 들면, 누구는 대낮에 공부가 잘 되고, 또 어떤 아이는 새벽녘, 어떤 아이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해야, 또 어 떤 아이는 자정이 넘은 시간에 공부가 잘 된다. 장소에서도 차이가 크다. 누구 는 학교에 남아서, 또 누구는 집에서 공부가 잘 되고, 또 어떤 아이는 독서실 에 가야 공부가 잘 된다. 누구는 배가 불러야, 누구는 약간 배가 고파야 공부 가 잘 된다. 이러한 것은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고 적합하다고 스스로 느껴서 고집하는 개성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의 스타일을 존중해 주고 지켜 주는 게 좋 다. 부모가 어렸을 때 하던 방법을 그대로 따라 하도록 강요할 필요가 없다. 또 어느 책에 서 읽었거나 어떤 사람한테 들은 방식을 자녀에게 강요 할 필요가 없다. 스스 로 적절하다고 판단하여 고착된 각자의 스타일을 존중해 주는 것은 바로 그 아 이의 인격을 존중해 주는 것이기도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아이들은 그러한 자신만의 공부 방법, 또는 습관이나 버릇 따위를 노출시키기 싫어한다. 은밀히 하려고 한다. 어떤 아이는 공부를 내색하며 하려고 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공부 안 하는 것처럼 굴지만, 실상 공 부를 많이 하는 아이도 있다. 그런데 가끔 엄마들은 아이의 그러한 마음을 몰 라 주고, 친척이나 동네 아주머니들한테 자기 아이의 독특한 스타일을 까발리 는 경우가 있다. ‚글쎄, 우리 아이는 하여튼 못 말려! 걔는요, 공부할 때 보면 몇 시간씩 꿈 쩍도 않고 있는데, 그 때 보면 쓸데없이 자꾸 거실로 화장실로 기웃거리며 나 오는 자신을 책상 앞에 묶어 두려고, 물을 가득 채운 세숫대야를 책상 밑에 놓 고 거기에 발을 담그고 앉아 있어요. 아마 그런 애는 대한민국 천지에 하나밖 에 없을 거예요. 발을 담그고 있으면 시원해서도 좋지만, 젖은 발로 방으로 카 펫 위로 돌아다닐 수 없고, 그럴려면 마른 수건으로 씻어야 되니까 그게 귀찮 아서, 저절로 앉아 있을 수밖에 없다나요. 공부나 월등히 잘 하면 또 몰라, 그 렇지도 않으면서 유난스럽기는, 하여튼 좀 이상해요.‛ 이 말을 들은 동네 아주머니가 어느 날 아파트 주차장에서 그 집 아이를 보 고 싱긋이 웃으며 물었다. ‚그래! 얘, 너 요즈음도 세숫대야에 물 떠 놓고 발 담그고 공부하니! 어리 지만 넌 그렇게 의지도 강하고, 어쩌면 그렇게 네가 스스로 공부하려고 노력을 하니! 네 엄마는 걱정이 없어 참 좋겠다!‛ 그 아이는 순간이지만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라했다. 자신의 프라이버시가 동네방네 소문이 난 것이다. 집에 들어오자 마자 그 아이는 엄마에게 따져 묻 기 시작했다. 왜 엄마는 동네 사람들한테 쓸데없는 소리를 했냐고, 그래서 왜 망신을 시키느냐고 따져 물었다. 이제 그 아이는 더 이상 그런 방법을 사용하 지 않는다. 자신만의 그런 은밀한 방법이 더 이상 은밀한 것이 되지 못한 데 대한 반작용 심리도 생겼고, 좀 창피하기도 했고, 아무튼 그래서 자기 스타일 을 잃어버린 셈이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방식의 생존 원리를 갖고 산다. 그것은 그 나름의 믿음 에 기초하여, 그 나름의 효과 검증을 거쳐 각자가 개발하여 이루어 낸 것이다. 아이들에게 있어서도 그러한 논리는 똑같이 적용된다. 공부나, 친국 사귀기에 서도 그렇다. 그들 나름대로 개발한 적절한 스타일을 잘 보호해 주고 지켜 주 는 것은 부모의 매우 중요한 책임이다.
9. 여유: 심리적으로 자유로움을 느끼도록 한다 요즈음은 고속 시대다. 21 세기는 더욱 그럴 것이다. 세상이 놀랍게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이제는 변화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변화의 속도가 빠르다는 데 더 경이로움을 느낀다. 그러다 보니, 삶의 속도도 빨라졌다. 모두가 시간에 쫓긴다. 시간이 곧 돈이라는 얘기를 한다. 1 분, 아니 1 초 안에도 엄청난 일이 이루어진다. 1 초까지 그냥 흘려 보낼 수가 없다. 그래서 이제는 시간 관리가 아니라 초 관리라고 하고, 돈을 모으고 불리는 재테크보다 시테크가 더 실감나 게 들린다. 교회에서든 어디에서든 봉사를 할 때, 재물을 바치는 일보다 오히 려 시간을 바치는 것이 더 어렵고, 그래서 시간을 바치는 봉사야말로 더 값진 봉사가 되어간다. 일상 생활에서 시간에 쫓기며 바쁜 삶을 사는 것은 어른이든 아니든 모두 마 찬가지다. 게다가, 우리 나라 사람들의 원래 기질이 그런지는 모르지만 서두르 고, 조급해하고, 기다리지 못하다 보니 모든 일에 허둥대고 바쁘게 지낸다. 일 찍 일어나고, 세수도 후딱 하고, 밥도 급히 먹고, 차도 빨리 몰고, 일도 빨리 처리하고, 사람을 만나도 용무 위주다. 생각도 빨리하고, 결정도 빨리 하고, 행동도 빨리 한다. 뿐만 아니라 즐기는 대상도 빠른 것을 좋아한다. 스포츠에 서도 스코어가 빨리 나는 것을 좋아한다. 속도감이 있는 스포츠를 좋아한다. 성취도 빨리 하려고 든다. 부모들은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빨리 걷기 를 바란다. 빨리 뛰리를 바란다. 글자도 빨리 터득하고, 말도 빨리 배우기를 바란다. 공부도 일찍 시킨다. 유치원 들어가기 전에 유치원에서 익힐 것을 모 두 집에서 엄마가 가르친다. 그러다 보니 유치원에서는 자연스레 초등 학교에 가면 배울 것을 당겨서 미리 가르친다. 그래서 아이들은 초등 학교 고학년에 이르면 벌써 과외 공부를 통해서 중학교 영어, 수학을 배우고, 중학교 3 학년이 되면 고등 학교 영어, 수학을 미리 배운다. 어린아이들의 하루를 보면, 그들이 얼마나 시간에 쫓기면서 어른보다도 바쁜 하루를 보내는가 쉽게 알 수 있다. 어떤 초등 학교 4 학년 아이는 새벽 7 시에 일어나서 아침 운동을 한다. 집에 들어와 아침마다 하기로 되어 있는 한자 세 자를 공부하고 밥 먹고 학교에 간다. 두 시반에 돌아온 아이는 가방을 놓자마 자 1 시간 동안 학교 숙제를 한다. 그리고 세시 반에 속셈 학원에 가서 속셈은 안 하고 산수 과외만 1 시간 반 하고 온다. 다섯 시에 아이는 방문 교사에게서 영어 공부한 것을 점검 받는다. 여섯 시에 컴퓨터 학원에 갔다가 일곱 시 반에 급히 와서 밥 먹는다. 그리곤, 밤 여덟 시에 피아노 학원에 가서 아홉 시에 돌 아온다. 아버지가 텔레비젼 뉴스는 꼭 보라고 해서 아홉 시 반까지 주요 뉴스 를 본다.그리곤 학습지를 해야 한다. 그러면 열 시 반에 끝난다. 가방 싸 놓 고, 이 닦으면 밤 열한 시가 된다. 그리고 잔다. 이처럼 아이는 참으로 고단하 고 바쁜 하루를 보낸다 빨리 성취하지 않으면 남에게 뒤진다는 생각이 들고 마음이 불안하다. 누가 얼마만큼 빨리 하느냐가 모두의 관심사다. 출세도 그만큼 빨리 하려고 든다. 또 남 보다 빨리 무엇인가를 성취하면 세인의 존경을 받는다. 약관 22 세에 사 법고시에 합격했다 하면 신문에 사진과 함께 기사가 난다. 이내 잡지사에서 그 부모를 인터뷰한다. 나는 자식을 이렇게 키워서 그렇게 빨리 출세(?)시켰다고, 그리곤 방송에 나온다. 사람들은 모두 그 부모와 그 젊은이를 선망의 눈으로 바라본다. 또 괜스레 수많은 아이들이 그 약관 22 세의 사람 때문에 비교 받아 야단을 맞는다. 그 아이는 스물두 살에 어땠는데, 너는 뭐하는 놈이냐 욕먹는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재미있을 성싶다. 땅 위로 다니는 사람들도, 차들도, 그야말로 움직이는 모들 것들이 앞다투어 먼저 나가겠다고 바글대는 모습이 재 미있을 성싶다. 눈꼽만큼의 여유도 없이 새벽녘부터 질주해 대는 우리의 모습,
어찌보면 그만큼 모두가 노력하니까 이만큼 먹고 살게 되었다 싶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한줌의 여유도 없이 쫓기는 삶이 가련하고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한 다. 물론 시간을 다투어서 처리해야 할 일도 많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우리는 여 유를 상실하고 있다. 심리적으로 자유로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무엇 때문인 지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모두 구속받는 삶을 살고 있다. 아이들마 저 그러다 보니 문제가 자꾸 생긴다. 쫓기는 삶, 특히 한창 기를 기르고 펴야 할 성장기에, 시간에 쫓기면서 그들의 머리와 가슴이 오그라드는 듯해서 안타 깝다. 생가하며 행동하고, 느끼고, 배우고, 관계하고, 그리고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성장하는 여유를 상실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정말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우리의 후세대들을 그렇게 몰아대야 하나?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 한가? 좀더 그들에게 여유를 갖게 하고, 심리적 자유를 누리게 할 수는 없는 가? 뜸들일 시간을 주라 텔레비전 그만 보고 들어가 공부하라고 아이를 제 방으로 쫓아 버렸다. 5 분 쯤 지났나, 부엌에 가서 물 한 잔을 먹은 엄마는 다시 거실 소파로 돌아오다가 불현듯 아이의 방쪽으로 향한다. 발자욱 소리가 아이에게 들릴까 봐 살금살금 아이의 방으로 다가간다. 살며시 문을 열고 틈새로 들여다 본다. 아이가 무얼 하나 보려고 말이다. 그런데 아이는 책상 서랍을 열어 놓고는 뭔가 뒤적거리다가 볼펜 하나를 꺼 내더니 끝을 눌렀다. 튀겼다 하면서 두리번 거렸다. 그러자 엄마는 문을 확 열 어 젖히면 소리지른다. ‚야! 너 들어간 지가 언젠데, 아직 책도 안 펴 놓고, 뭐하고 앉았는 거냐? 방에 들어가 책상에 앉기만 하면 뭐 해? 집중을 해서 공부를 해야지! 남의 아 이들은 시간에 쫓겨, 엄마가 불러도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꼼짝없이 앉아 공부 한다더구먼! 너는 하여튼, 모르겠다. 이 다음에 뭐가 될려고 그러는지, 네 맘 대로 해라!‛ 그리고 엄마는 문을 쾅 닫아 버렸다. 다시 거실로 돌아와 남편 옆에 앉으면서 계속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자식이라고 저거 하나뿐인데, 어찌 저러는지! 하여간 문제야, 문제.‛ 남편은 뭐라고 했다간 괜스레 자기가 욕먹을 것 같아 그런지 아무 말도 않고 텔레비전만 본다. 사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 곧바로 시작하기가 어렵다. 그 이전에 뜸을 좀 들이는 것이 바람직하며, 또 그러는 경우가 많다. 자동차도 그러질 않던가! 시 동 건 다음에 워밍업을 조금이라도 한 후 끌고 나가라고, 대체적으로 아이들은 공부하러 방에 들어가면 곧바로 공부를 시작하지 않는다. 더욱이 하기 싫은 공 부를 할 때는 몇 분 어물대다가 시작한다. 우선 책상에 앉아서 책도 정리한다. 괜스레 이 책 저 책을 꺼내서 옮겨 꽂기도 하고, 서랍도 열어 보곤 볼펜 하나를 꺼낸다. 이것은 왜 여기 있나 싶어 꺼내 본다. 형광펜도 꺼내 본다. 그리곤 볼펜이며, 형광펜이며 한 번씩 종이에 써 본다. 아직도 잘 나오는 볼펜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나오다 안 나오다 하면 종이 에다 몇 번씩 원을 그려 본다. 아직도 잉크가 남았는데도 굳어서 잘 안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잉크가 다 없어져서 끝물이라 그런 건지 따져 본다. 그 다음엔 콧구멍도 좀 쑤셔 보고, 책상 앞에 놓인 거울을 통해 자기 얼굴도 들여다 본 다. 이런일을 하는 데는 대체로 5 분, 10 분이 걸린다. 그리고 난 다음, 이제 마 음이 정리된 아이는 책을 꺼내 편다. 그리고 궁리한다. 이것을 공부할까, 저것 을 공부할까 하고 말이다. 이것이 바로 뜸을 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럴 때 엄마가 문을 살며시 열어 보고는 ‚너, 지금 뭐 하는
거냐!‛ 하고 소리치면 아이는 소스라치지만, 기껏 뜸을 들여 마음을 가다듬고 준비한 것이 무너져 내림을 느낀다. ‚지금 공부하려고 그러잖아요?‛ ‚야! 그게 공부하려는 거냐!‛ ‚근데, 참, 엄마는 왜 남의 방을 노크도 없이 그렇게 열어 보고 그래요?‛ ‚남의 방? 여기가 무슨 신혼 부부 방이라도 되냐! 나중엔 별 소리를 다 듣 겠네.‛ 엄마가 문을 쾅 닫고 나가면, 아이는 다시 기분을 가라앉히고, 또 다시 뜸들 이는 행동을 하게 된다. 엄마 때문에 기껏 뜸들이던 게 다 망가졌다. 아니는 다시 의자 등받이 너머로 등을 젖힌 채 이 생각 저 생각 하기 시작한다. 새로 운 뜸을 들이기 위한 출발이다. 사람마다 시간과 방법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러한 뜸들이는 여유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옛날에 솥에다 불을 때서 밥을 할 때는 어떻게 뜸을 잘 들이느냐가 제대로 된 밥맛을 내는 결정적 요인이었다. 뜸들이기는 단순히 불의 온도를 낮추는 것 만이 아니라, 한국 사람 특유의 끈기와 인내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였다. 뜸 들기를 조용히 여유를 갖고 기다리면서, 아궁이 앞에 앉아 이 생각 저 생각도 했다. 또 뜸드는 동안 다른 것을 준비하는 예지도 갖추었다. 요즈음의 전기 밥 솥이나 압력 밥솥으로는 그런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 솥에다 쌀을 씻어 넣고 물을 붓고, 전기를 꽂거나 가스불을 당겨 놓으며 밥은 그 안에서 저절로 된다. 뜸도 저절로 든다. 하긴 압력 밥솥은 그래도 가스불을 좀 낮추고, 얼마 후에는 불을 끈 다음 기다리는 여유를 보여야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모두 옛날 무 쇠솥에 밥을 할 때와 다른 것은 시간이 단축되었다는 점이다. 즉, 밥을 손쉽게 빨리할 수 있다. 그래서 집에 들어서자마자 밥을 달라고 하면 몇 분 안되어 밥 상이 차려진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더욱더 뜸들이는 습관을 갖지 못하고, 그래서 여유를 갖지 못하는 것같다. 좀 기다리며 두고 보라 뜸을 들이는 여유를 갖지 못하면 결국엔 참고 기다릴 줄 모르고, 이내 서둘 러 어떤 일을 하기를, 끝내기를, 성취하기를 요구하게 된다. 초등 학교 5 학년 인 동화는 저녁을 먹은 후 동생 동진이와 함께 텔레비젼을 보고 있었다. 가족 오락관인가 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도 저편에 앉아서 보고 계 셨다. 언제 엄마가 소리치며 들어가라고 할 것인가 생각하면서, 그 이전에 들어가야지 하면서 보고 있었다. 3 학년인 동생 동진이는 그 아이 나름대로 머리를 굴렸다. 자기는 형 들어가면 따라 들어가겠 다고. 동화는 마침 이런 생각을 했다. 텔레비젼 속에서 저 사람이 뭐라고 하는 가까지만 보고 들어가겠다고.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엄마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너희들, 정말 엄마가 가만 있으니까, 계속 그렇게 텔레비젼만 볼 거야?‛ 이 때 만약 엄마가 1 분만 더 참고 기다렸다면 어땠을까? 아이들이 쫓겨 들어 가지 않고, 그래도 자기들 의지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을까? 엄마의 인내심엔 한계가 있는 것인가? 엄마의 인내심 시계는 아이들의 생각보다 좀 빨 리 돌아가는 탓일까? 교수 학습 방법에 발문법이란 것이 있다. 교사가 질문을 학생에세 던져 가며 수업을 하는 방법이다. 이 교수법은 근본적으로 학생들의 사고력을 높여 주는 데 목적이 있다. 중요한 것은 교사가 질문을 던진 다음 얼마나 오래 참고 대답 을 기다려 주느냐이다. 이는 학생들의 사고력 진작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교 사가 질문을 한 다음 불과 1, 2 초를 못 기다리고 대답을 강요하거나, 대답할 기회를 다른 학생에게 넘기면 아이들의 사고력은 진작되기 어렵다.
‚김영민! 너, 임진왜란이 왜 일어났다고 생각하냐?‛ ‚네?‛ 2 초쯤 지났을까? 선생님은 다른 학생에게 묻는다. ‚저기 박진수! 너, 임진왜란이 왜 일어났다고 생각하냐?‛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식의 질문은 학생들의 사고 진작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대신에 선생님이 여유를 갖고 말도 천천히 하면서 질문을 했다고 하자. ‚자- 아, 저기 중간에! 김영민!! 영민아! 선생님이 하나 묻겠는데 말야!!‛ 우선 영민이를 불러 주의를 집중하도록 하는 것부터 여유 있어 보인다. ‚너, 임진왜란 알지? 조선시대, 16 세기 말에말야, 왜적이 우리 나라를 쳐들 어온 사건 말야!‛ ‚네!‛ ‚당시 왜 우리는 왜적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하냐? 그러니까 일본 사 람들이 왜 우리나라에 쳐들어오게 되었느냐, 이 말야!‛ 영민이는 생각을 시작한다. 선생님은 뒷짐을 지고 교실 중간을 왔다 갔다 한 다. 적어도 10 초의 시간이 흘렀다. 생각이 미처 정리가 안 된 영민이가 대답을 하려고 한다. ‚선생님! 저 그건요,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어떻게 두 가지로.‛ ‚네, 우선은 우리 쪽에 어떤 문제가 있었고, 또 하나는 일본 쪽에 어떤 야 심 같은 것이 있을 수도 있구요.‛ 이처럼 영민이와 선생님, 그리고 다른 학생들은 생각을 서로 모으며 문답을 하였다. 이렇게 해서 아이들은 나름대로 상당한 생각의 기회를 갖게 된 것이 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생님이 참고 기다렸다는 점이다. 참고 기다리면 생 각의 기회도 그만큼 길어지고, 또 자 발성도 그 만큼 커지는 등 여러 면에서 도움을 준다. 특히, 부모나 선생님이 참고 기다려 아이들의 마음을 자유롭게 해 줌으로써 아이들의 사고와 지각의 폭과 깊이를 크게 열어 주게 된다. 우리 나라 가정 주부들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한다면, 제발 아이를 그냥 내버 려 두고, 또 남편도 그냥 내버려 두라는 것이다. 아이들이 이따금 아무 일도 안 하고 멍하니 앉아 있는 수가 있다. 물론 머리 속에는 이 생각 저 생각 왔다 갔다 할 것이다. 베란다 창 너머로 저편 관악산 쪽에서 김포공항을 향해 꼬리 를 물고 달려오는 비행기를 바라보면서 아이가 멍하니 앉아 있다. 그러면 그런 것을 그냥 참고 기다리면 봐 주지 못하는 엄마는 이내 소리친다. ‚야! 너 지금 뭐 하고 있냐? 비행기 타고 누가 온다더냐! 할 일 없으면, 허 다못해 신문이라도 좀 보렴. 정할 일 없으면, 아니면 하기 싫으면, 들어가 잠 이라도 미리 자 두고 이따 공부하든가. 괜히 왜 그러고 앉았니? 네가 지금 그 러고 있을 때야? 멍청하게시리.‛ 퇴근 후, 남편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아이들은 제각기 방으로 들어갔고, 남 편 혼자 남아 텔레비젼을 보고 있었다.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던 아내는 텔레비 젼 소리만 왕왕거릴 뿐 남편 기척이 없자 고무 장갑을 낀 채로 살며시 거실로 나와 본다. 그러자 텔레비젼은 혼자 떠들고, 남편은 고개를 옆으로 소파 등받 이에 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자 아내는 소리를 친다. ‚여보, 졸리면 들어가 자요! 네? 들어가 씻고 자란 말예요! 저녁을 못 먹어 못자, 꼭 텔레비젼 켜 놓고 졸게! 어느 날이고 텔레비젼 켜 놓고 졸지 않는 날 이 없어!‛ 만약 부엌에서 나와 텔레비젼을 켜 놓은 채 조는 남편을 보았을 때 텔레비젼 을 슬그머니 꺼 보다. 그러면 남편이 뭐라고 하는가? 갑자기 조용해지는 바람
에 깨어난 남편을 소리를 친다. ‚아! 근데, 왜 텔레비젼을 끄고 그래! 도로 켜 놓아!‛ ‚졸면서 무슨 텔레비젼을 본다고 그래요?‛ ‚지금 졸았잖아요!‛ ‚글쎄, 켜 놓으라니깐요!‛ 하기야 졸긴 졸았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그렇게 깊을 잠에 빨진 것도 아니다.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졸았느냐, 안 졸 았느냐가 아니라, 설혹 졸았더라도 그냥 좀 내버려 두는 것이 좋지 않나 하는 것이다. 텔레비젼 볼륨을 낮추고, 방 안에 들어가 숄이라도 가져다가 남편 무 릅에 살며서 덮어 주는 여유, 그 정도의 참고 기다리는 여유가 아내에게 있다 면 남편은 정말 깊은 생각을 더 잘해낼 수 있을 것 아닌가. 아이들에게 서두르라고 압력을 가하지 말라 참고 기다린다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압력을 가하지 않는다는 뜻도 된 다. 부모가 조급해서 아이들에게 압력을 가하면, 아이들은 오히려 그냥 놔 둬 서 더 잘 할 일도 못 하 게 된다. 저녁 식사를 맛있게 해 주려는데도, 남편이 부엌에까지 들어와서 재 촉을 해 대면, 오히려 밥도 잘 안 되고 찌개도 맛있게 되지 않는 것을 아내들 은 많이 경험하였을 것이다. 출근하려고 옷을 입다가는 그만 와이셔츠 소매 단 추를 빨리 달라고 재촉한다. ‚아니, 그러지 말고 아예 벗으시고 다른 와이셔츠 입고 나가시구료!‛ ‚아, 바빠 죽겠는데 언제 다시 입어! 넥타이까지 맸는데! 그냥 달아!‛ 아내는 서둘러 반짇고리를 꺼내고 실을 꿴다. 형광 불빛이라 그런지 실이 바 늘 구멍에 잘 꿰지질 않는다. 그걸 바라보던 남편은 또 재촉한다. ‚아니, 이 사람이 이젠 실도 꿸 줄 모르잖아!‛ ‚지금 꿰잖아요!‛ ‚아, 빨리 꿰.‛ 결국 남편을 소리만 지르다가 모르겠다 하고 그냥 나가 버렸다. 아내가 바늘 에 실을 못 꿰는 것이 아니다. 재촉을 하고, 압력을 가하니 잘 들어가지 않은 것뿐이다. 요즘 세상에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 다. 스트레스는 아이들에게도 만병의 근원이 된다. 부모의 지나친 기대와 압력 은 아이의 생명까지 앗아갈 수도 있음을 우리는 익히 들어왔다. 오래 전, 어느 텔레비젼 방송국에서 특별 기획한 7 시간짜리 생방송 프로그램 에 출현하였다. ‘다음 세대를 생각합시다’ 라는 큰 주제 아래 전개된 이 프 로그램은 청소년들의 가출, 폭력 등 여러 가지 비행 문제를 심층 분석하고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하였다. 특히, 이 프로그램에서는 전화나 팩스를 이용하여 방 송 도중에 전국 시청자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였다. 부모는 물론, 청소년 들도 여러 가지 좋은 의견을 제시했다. 많은 의견 중에서도, 그 날 내게 큰 충격을 주었던 한 가지 내용은 어느 초 등 학교 3 학년 학생이 직접 팩스로 보내 온 자신의 고민이었다. 내용인즉, 부 모님께서 너는 월반을 하여야 한다고 견디기 어려운 압밥을 가하기 때문에 가 출을 할까 생각중인데, 가출을 해도 좋은지 의견을 주셨으면 한다는 내용이었 다. 참으로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힐 노릇이다. 초등 학교 3 학년이라면, 헤아리 는 나이로 열 살이다. 열 살짜리 아이에게 부모가 얼마나 심하게 압박을 가했 으면, 그 아이가 부모곁을 떠나 가출할 생각까지 하게 되었을까? 도대체 뭐라 고, 어떻게 압박을 가했기에 그 아이가 그런 생각을 했을까? 그 날 이후 지금 까지도 그 어린아이의 모습이 자꾸만 내 눈 앞에서 어른거린다. 정부가 월반제 를 실시한다고 발표한 것이 얼마나 되었다고, 그새 그 부모는 어린 자녀에게
압박을 가하기 시작한 것일까? 월반하라고 압박까지 가할 정도면, 분명 그 아 이는 그래도 공부를 잘 하는 편에 속할 듯싶다. 차라리 공부를 아주 못 하면 그런 압박을 받지 않았을 덴데. 나는 월반제라는 새로운 제도에 찬성하지 않는다. 영재를 키워 내겠다는 것 이 그 제도의 본래의 목적이라면 방법을 달리 했어야 한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월반제의 좋고 나쁨을 얘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 은 보통 사람들의 정상적인 흐름에서 빠져 나와 앞서 내달리는 것이 얼마나 큰 심리적 부담을 안겨 주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남들보다 특별한 재능을 타 고 나서, 그리 큰 부담을 갖지 않고도 남들보다 앞서 내달릴 수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보통 사람들과 비슷한 능력을 가졌음에도 무리해서 남들보다 앞서 가려고 할 때, 또 그런 것을 요구할 때, 그런 요구를 받는 당사자는 견딜 수 없는 심리적 압박을 느끼게 된다. 그러한 심리적 압박은 끝 내 그를 파멸로 몰아갈 수도 있다. 이것이 내가 그 날 팩스로 자기의 의견에 대한 나의 생각을 물어 온 그 초등 학생을 잊지 못하는 까닭이다. 고속 도로에서 자동차들이 질주하는 모습을 보다가도 나는 가끔 월반을 강요 받거나, 스스로 무리한 월반을 하고자 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운전자들을 본다. 보통 승용차인데, 뭐 특별한 경주용 자동차도 아닌데 마치 타고난 성능을 갖춘 차라도 되듯 앞서 가는 모든 차량을 무리하게 추월하는 차량이 그 예다. 옆에 탄 사람이 빨리 달리라고 앞박을 가했는지, 아니면 추월을 해서라도 꼭 1 등으 로 가겠다는 욕심을 가졌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러다가 그들은 결국 어린 아이가 가출하듯 아예 도출하여 스스로 파멸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더욱 융통성 있는 마음을 가져라 경기도 일산에 사는 어느 젊은 부부가 계획을 치밀하게 세워 강원도 용평으 로 여름 휴가를 다녀오기로 했다. 차가 많이 밀릴 것을 예상해서 새벽 4 시에 출발하기로 하였다. 아침 식사는 곤지암에 가서 그 유명한 소머리 국밥을 먹기 로 했다. 그러면 12 시 이전에 용평에 도착할 것이고, 여유 있게 쉬었다가 거기 서 점심 먹으면 하루를 실컷 놀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아내는 차 안에서 아이 들에게 먹일 요량으로 샌드위치를 만들고, 또 남편과 함께 마실 커피도 끓여 담았다. 그리고 새벽 4 시에 정확하게 출발하였다. 언제나 서두르고 재촉하는 남편의 성질을 아는지라, 물론 다른 것은 어제 다 싸 놓았지만, 그래도, 새벽 세 시에 먼저 일어나 샌드위치와 커피를 준비했다. 아이들은 잠에서 덜 깨어나서 그런지, 초등 학교 3 학년과 1 학년에 다니는 남 매는 뒷좌석에 그냥 엉겨 붙어 잠을 자고 있다. 자유로를 타고, 반포 대교를 건너 올림픽 대로에 들어서자 이게 웬일인가? 차가 막히기 시작하였다. 가다 서다 보니 아내도 슬며시 잠에 빠졌다. 남편은 혼자 씩씩대며 짜증스런 운전을 했다. 종합 운동장이 옆에 보인다. 그러나 벌써 시계는 6 시가 넘었다. 중부 고 속 도로 톨게이트를 저만치 앞에 두고 섰을 때의 시간은 8 시가 넘었다. 졸던 아내가 일어나 헛소리를 했다. ‚여보! 용평 벌써 다 왔수?‛ ‚그래 용평 다 왔다!‛ ‚가만 있어 봐! 저게 판교 가는 길 아냐! 그러면 아직 톨게이트도 못 왔잖 아!‛ ‚정말 신경질나게 밀려! 서울 사람 모두가 다 떠나나 봐!‛ ‚여보, 언제 곤지암엘 가서 아침을 먹지? 아이들도 보고플 텐데! 얘, 너희 들 배 안 고파?‛ ‚음! 엄마, 우리 배고파! 뭐 먹을 것 없어?‛ ‚엄마가 누구냐? 내 이럴 줄 알고 너희 좋아하는 샌드위치 싸 왔지! 자, 여
기 있다. 차에다 흘리지 말고 꼭 쥐고 먹어! 주스도 줄게. 여보 당신도 하나 안 먹을래? 곤지암 소머리 국밥은 이 다음에 먹고, 여기서 그냥 커피하고 샌드 위치로 아침 때웁시다!‛ 이 때다. 남편은 그렇지 않아도 짜증이 나는데 아내가 ‚내이럴 줄 알고…‛ 하는 말에 신경이 곤두섰다. 그리곤 냅다 소리를 지른다. ‚곤지암 가서 먹기로 했잖아! 그렇게 하기로 했으면 좀 늦어도 그렇게 해야 지! 사람이 어찌 이랬다 저랬다 하노! 그러면 뭣하러 끙끙대고 계획을 세웠노? 난 안 먹을 테니깐, 당신하고 애들이나 많이 먹어! 정말 신결질나게 밀리네. 근데 이 앞 차는 왜 자꾸 꾸물대고 따라가지 못하는 거야! 자꾸 끼여들게끔 말 야!‛ 아내는 모처럼의 즐거운 휴가인데 남편이 소리지르는 게 야속했는지 가만 있 질 않고 한 마디 했다. 혼잣말 비슷하게 했지만, 남편 귀에 들어간 만큼 목소 리가 충분히 컸다. ‚그래요! 당신 혼자 소머리 국밥을 드시든, 말머리 국밥을 드시든, 우린 여 기서 샌드위치나 먹을 테니깐! 얘! 너희들, 어때 맛있니?‛ ‚당신 지금 무슨 국밥이라고 했어? 말머리 국밥? 당신, 지금 누구 약올리는 거야?‛ ‚누가 약을 올려요? 당신은 계획대로 소머리 국밥 드시라니깐요.‛ 결국 두 사람은 차 안에서 떠나가라는 듯 소리치며 싸웠다.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여행이 엉망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경우, 남편이 조금만 융통성을 보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내가 여 기서 샌드위치로 아침을 먹고, 소머리 국밥은 이 다음에 먹자고 했을 때, 이렇 게 말이다. ‚그래! 여기가 곤지암이다!! 여기서 먹자, 이게 소머리 국밥이다. 국밥은 아니지만 소머리 빵이다!! 당신 여기 넣은 것 뭐야? 햄야? 야! 이게 소머리로 만든 햄이다. 하!‛ ‚여보, 소고기로 만드는 햄이 어디 있어요?‛ ‚아무려면 어때! 아무렇게나 먹고, 좌우간 오늘 밤 안에 용평에 가면 됐 지.‛ 이렇게 했다면, 여행은 휠씬 즐거웠을 것이다. 요즘 세상을 살아가려면 여유 있는, 융통성 있는 태도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다. 어느 집에서 네 식구가 저녁을 먹었다. 식사 후 네 식구는 텔레비젼을 보면 서 후식으로 과일까지 먹었다. 이제 더 이상 먹을 것은 없다. 그러자 엄마, 아 버지 옆에서 텔레비젼을 재미 있게 보던 아이들에게 엄마가 소리치듯 이야기 한다. ‚이젠 더 먹을 것 없어! 다 먹었으면 들어가 공부들 해! 괜스레 볼 것도 없 는 텔레비젼 보느라 그리 앉았지 말고!‛ ‚알았어요, 들어갈께요. 자, 영미야 들어가자!‛ 중학교에 다니는 큰 녀석은 혼자 들어가는 게 뭐 손해라도 보는 양 동생을 불러 데리고 일어섰다. 애들이 방으로 들어간 지 얼마나 되었을까. 엄마 생각으로는 한 삼십 분 지 났을 성싶다. 그러나 방 안에서 공부를 하던 큰녀석은 자기 딴에 한 시간 넘어 지났다고 느꼈다. 재미없는 공부, 지루하고 힘들어하던 큰녀석은 거실에서 텔 레비젼을 보고 계시는 엄마, 아버지가 그저 궁금했다. 아직도 보고 계신지? 그 냥 한 번 방에서 나와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아이가 방을 나와 엄마, 아버지가 계신 거실 쪽으로 오자 엄마가 먼저 소리 를 쳤다.
‚아니, 근데, 왜 벌써 나오니? 공부를 하려면 좀 지긋이 앉아 해야지. 사내 아이가 그렇게 궁둥이가 가벼워서야.‛ ‚물 먹으러 나왔어요! 물도 못 먹어요?‛ 실은 아이는 물 먹으러 나온 것이 아니다. 그냥 나온 것이다. 엉겁결에 물 먹으러 나왔다고 대답한 아이는 부엌으로 가서 괜스레 냉장고 문을 열고는 먹 고 싶지 않은 물을 꺼내 한모금 마셨다. 그리곤 엄마 아버지가 보고 계신 텔레 비젼을 힐끔 쳐다보며 방으로 들어갔다. 한 십 분 지났을까. 아이는 다시 나왔다. 그러자 이번에는 더 큰 소리로 엄 마가 따졌다. ‚이번엔 왜 또 나왔니? 또 물이 먹고 싶어 나왔냐?‛ ‚아녜요, 오줌 누러 나왔어요!‛ ‚하여튼 너는 못 말려! 빨리 누고 들어가!‛ 아이는 말대로 화장실에 들어갔지만, 꼭 소변이 보고 싶어 나왔던 것은 아니 다. 괜스레 한 번 나왔던 것이다. 하기 싫은 공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아이 는 들어가 앉아서 또 궁리를 했다. 이번엔 무슨 핑계로 나갔다 올까? 아이는 문을 열고 한 발을 밖으로 내밀고는 거실쪽으로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나 불렀어?‛ ‚부르긴 누가 불러! 안 부를 테니까 염려 말고 들어가 앉아 있어!‛ 세 번이나 거실에 나갔다 들어온 아이. 무엇이 문제인가? 아이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이들이란 원래가 그런 거니까. 문제는 오히려 엄마에게 있었 다. 아이가 처음 거실로 나왔을 때, 엄마는 모른 체 내버려 두었어야 했다. 아 니면, ‚나왔구나? 왜! 공부하기 지루하니?‛ 라고 했더라면 훨씬 더 좋은 엄 마가 되었을 것이다. 아니, 이때도 오히려 엄마나 아버지가 좀더 융통성을 갖 고, 조크로 이렇게 말했다면 어땠을까? 이를테면 아이가 방에 들어간 후 20 분 쯤 지났을 때 즉, 아이가 이제쯤 나오지 않을까 싶을 때 말이다. 아이가 나오 기 전에 먼저 아버지가 부르면 어떨까? ‚야! 영식이, 영미야! 너희들 물 안 먹을래? 나와서 물먹어!‛ 그러면 아이들은 오히려 그럴 것이다. ‚언제 누가 목마르다고 했어요? 아버진 괜히 우리 보고 물 먹으로고 그러세 요?‛ 아이들은 오히려 나오라면 들어가는 법이 아니던가? 아니면 엄마, 아빠한테 먼저 허를 찔렸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아이들은 나오기는커녕 방 안에 한참을 지긋이 앉아 있는다. 이것이 여유 있는, 융통성 있는, 그리고 조크도 서린, 부 모의 자녀에 대한 태도가 아닌가 싶다. 10. 협력: 부모는 서로 협력해 자녀를 도와 주어야 한다. 도대체 사람은 어떻게 크고, 어떻게 성장하는가? 갓난아기를 그냥 내버려 두 면 저절로 클까? 물론 아주 어렸을 때, 그냥 내버려 두면 생존 자체가 어려울 것이다. 그 땐 누군가가 옆에서 돌보며 먹이고, 재우고, 씻겨주고, 입혀 주어 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이가 제법 커서 제발로 걷기 시작하고, 말도 하게 되 고, 밥도 제 손으로 떠 먹게 되었을 때도 엄마가 먹이고 입히고 씻겨 주어야 할까? 도대체 부모의 역할은 어느 만큼일까? 얼마만큼 부모가 해 주는 것이 좋을까? 일거수 일투족 모든 것을 챙겨 주어야 할까? 우리 나라 부모들의 자녀 교육을 보면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사육하 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왜 부모들은 사랑하는 자녀에게 그처럼 사육에 가까운 강요를 할까? 누구를 위해서 그러는 것일까? 자녀가 명 문 대학에 입학한다면,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진실로 자녀를 위해서 좋 은 것인가, 아니면 부모를 위해서 좋은 것인가? 또는 양쪽 모두에게 기쁨과 영
광을 가져다 주기에 좋은 것인가? 인간은 스스로 성장하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믿는다. 그러나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환경적 조건이 잘 갖추어져야 한다. 식물도 그렇지 않은가? 햇빛, 온도, 물, 바람 등 자연적 환경 조건이 어떠냐에 따라 나무의 성장 모습과 그 나타난 결과가 전혀 다르지 않던가? 그래서 우리는 식물을 재 배할 때도 적절한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온갖 투자를 하고 노력을 기울이지 않던가.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부모는 자녀에게 적절한 환경 조건을 만들어 주고 그 안에서 자기들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하지 않 겠는가? 부모는 자녀 교육을 하면서 자녀가 잘 자라도록 도움은 주되 강제로 사육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일관되게 가지고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이 책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어떻게 도움을 주어야 하고, 어떠한 환 경적, 물리적, 심리적, 사회적 조건 등의 조건을 만들어 주어야만, 자녀에게 진정한 도움이 되겠는가를 여러 각도로 얘기했다. 자녀에게 도움을 주는 데에는 부모 양쪽의 도움이 모두 필요하다. 하나님께 서 부모, 즉 아버지와 어머니, 남자와 여자로 가정을 꾸미게 하고, 그 안에서 한 생명이 성장하도록 한 데에는 여러 가지 깊은 뜻이 있다. 그렇기에 부모는 서로 힘을 합하여 자녀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부모는 어떻게 힘을 합하여 자녀를 도와야 할 것인가? 부모는 둘이 모두 뜨거워도, 차가워도 안 된다. 겨울철, 잠자리에 누운 부부가 작은 실랑이를 벌인다. 발이 차가운 아내는 남편의 따뜻한 발에 자꾸 발을 갖다 대려 한다. 남편은 차가운 발을 왜 자꾸 갖다 대느냐고 불평하면서 계속 피하려고 든다. 비록 실랑이를 벌일지라도 이 러한 부부는 매우 이상적인 부부가 아닌가 생각된다. 한쪽이 너무 차가 우면 따뜻한 다른 한쪽이 그것을 녹여 줄 수 있고, 또 한쪽이 너무 뜨거우면 다른 한쪽이 그것을 시원하게 식혀 줄 수 있으니 말이다. 만약에, 두 사람 모두 발 이 차갑다면 어떨까? 이불 속이 냉랭할 것이다. 또 두 사람 모두 열이 많아 뜨 겁다면 이불 속이 후덥지근해서 쉽게 잠을 이루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부부 사이에 이렇게 한쪽은 뜨겁고 다른 한쪽은 차가운 상보적인 관계가 이 상적이라면, 그 원리는 자녀 교육에서도 매한가지로 적용되어야 한다. 자녀를 대하는 태도가 아버지는 차갑고 이성적이라면, 어머니는 반대로 따뜻하고 감성 적인 면을 보여야 한다. 물론 그 반대로 할 수도 있다. 자녀를 대하는 부모의 일상 태도에서 두 사람 모두가 한쪽으로만 몰려서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얘기 다. 학교에서 시험을 보고 집에 돌아온 아이를 앉혀 놓고, 엄마가 한 과목, 한 과목 구체적 으로 따진다. 국어는 몇 개나 틀렸는지, 어떤 것을 틀렸는지, 왜 틀렸는지, 한 시간이 넘게 아이를 붙들고 엄마가 세세히 따졌다. 그런데 두어 시간 후 퇴근 해서 돌아오신 아버지가 또 아이를 불러 앉혀 놓고는 엄마와 똑같은 방식으로 한 시간 넘게 아이에게 따지고 묻는다. 이러한 경우, 아이는 어떻게 될까? 아 이는 엄마, 아버지의 그 자상하고(?) 구체적이고 철저함에 몸서리를 칠지도 모 른다. 엄마든 아버지든 어느 한쪽이 철저하게 따지고 검토하였다면, 다른 한쪽 은 그냥 ‚최선을 다했으면 그것으로 됐다. 다음엔 더 잘 해 보도록 해라. 시 험이 이번뿐이 아니잖냐. 뭐 한두 개 틀릴 수도 있지!‛ 하고 아이에게 좀더 대범하게 이야기해 주는 것이 부모의 조화로운 모습일 성싶다. 이 세상에서 가 장 못된 아버지는, 아이가 잘못해서 엄마가 아주 심하게 때려 주었는데 그 큰 주먹으로 또 어린아이를 때리는 아버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마치도 어른 둘이
서 그 조그만 어린아이를 다시 일어서지 못하도록 만들 생각이라도 한 듯이 말 이다. 엄마, 아버지 두 사람 모두가 너무 뜨거우면 그 가정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은 후덥지근하고 답답해서, 숨이 막힐지도 모른다. 반면에 두 사람 모두가 몹시 차가우면, 그 가정의 아이들은 집 안에 도는 냉기로 가슴이 얼어붙고 생각과 행동이 얼어붙을지도 모른다. 가정에는 뜨거움과 차가움이 적절하게 유지되어 야 한다. 그렇다고 부부 두 사람 모두가 미적지금해야 좋다는 말은 아니다. 부모가 자녀를 도울 때 서로 보탬이 되는 협동을 하여야 하는 것은 그 외에 도 많다. 엄마나 아버지,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성격이 좀 급하고 서두르는 타 입이면, 다른 한쪽은 자녀에 대해 느긋하고 여유를 갖는 행동을 하여야 그것이 상보적이다. 어느 한쪽이 너무 물량주의적이면 다른 한쪽은 정신주의적이어야 할 것이고, 어느 한쪽이 지극히 공격적이면 또 어느 한쪽은 좀 방어적인 태도 를 가져야 한다. 고스톱을 칠 때 보면, 남자들은 피 두 장으로 쳐 주는 똥피나, 국화 10 끝짜 리 피, 비 피 같은 것이 몇 장 들어왔어도 별로 내색을 하지 않는다. 그럴 때 나 안 그럴 때나 쓱 한 번 훑어본 다음 한 손에 접어 들고는 사람들에게 말한 다. ‚모두들 칠 거야, 안 칠 거야, 차례대로들 말해!‛ 아무런 표정이 없다. 그냥 속으로만 생각한다. 그런데 여자들은 그러한 경우 얼굴에 금방 화색이 돈 다. 좋아 어쩔 줄을 모른다. 그래서 자기가 말이면서도 앞 사람들이 칠 것인지 안 칠 것인지를 말하기도 전에 먼저 나선다. ‚야! 나 고다, 고야! 모두들 죽 어! 이번에 내가 끝내 줄 거다! 모두들 죽는 게 곧 사는 길일걸!‛ 한 마디로 잘 들어왔음을 만방에 알린다. 지극히 표현적이다. 아버지의 숙고적인 면과 엄 마의 표현적인 면, 반대로 아버지의 표현적인 면과 엄마의 숙고적인 면이 일상 생활에서 함께 어우러지면 자녀들의 사고와 행동에 좋은 본이 된다. 한 가지만 더 예를 들자. 운전할 때 보면 재미있다. 김포공항에서 잠실 쪽으 로 가려는 어떤 사람이 올림픽 대로를 탈까, 남쪽 강변 도로를 탈 까 망설이다 그냥 올림픽 대로를 탔다. 그러한 경우, 남자들은 운전을 하면서 남쪽 강변 도 로도 힐끔힐끔 쳐다본다. 그리고 저 앞 다리 너머도 본다. 강 건너 강북쪽 강 변 도로도 본다. 그 쪽은 막혔는지, 잘 뚫렸는지를 보기 위해서다. 그러면서 혼자 중얼거린다. ‚잘못 했잖아! 그냥 강변 도로를 탈 것을‛. 또는 ‚잘 했 지, 올림픽 대로 타기를 ! 저것 좀 봐, 강변 도로 막히는 것을!‛ 꼭 남자만 그런 것은 아니고 또 모든 남자가 다 그런 것도 아니지만, 대체로 남자(아버지)들은 그렇듯 멀리 내다보는 경향이 있다. 이름하여 거시적이라고 나 할까. 이에 비하여 여자들은 안전 운전을 최고의 원칙으로 삼아 그냥 앞 차 뒤만 보고 달린다. 저만치 있는 신호들도 잘 안 본다. 안 보는 것이 아니라 볼 겨를이 없다. 앞 차 꽁무니만 본다. 그러다가 앞 차가 갑자기 서면, 자기도 선 다. 그제서야 왜 섰는지 하고 본다. 기껏 따라 왔더니 이 차로는 좌회전 차로 아닌가? 앞 차는 좌회전 화려고 선 것 아닌가? 아뿔사, 그제서야 차로를 우측 차로로 하려고 빼내려 한다. 그래서 옆 거울로 뒤에 오는 차들을 보지만 어느 누구 하나 양보하려 들지 않는다. 조금씩 조금씩 머리를 빼내려다 결국 어떤 사람이 와서는 급브레이트를 잡았는지 탁 와서 서서는 창문을 열고 소리친다. ‚똑바로 운전해!‛ 욕만 먹었다. 물론, 이런 것이 뭐 그리 큰 잘못이겠냐. 이 렇듯 여자(엄마)들은 가까운 것에 더 큰 주의를 기울이고, 작은 것에 더 큰 관 심을 둔다. 그러한 미시적인 행동은 나름대로 필요하고 중요하다. 자녀에게 아 버지가 거시적이면 엄마가 좀 미시적이고, 엄마가 오히려 거시적이면 아버지가 좀 미시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부모의 상보적인 지원이라 할 수 있다. 부모의 도덕성이 바로 서야 한다.
몇 년 전 지존파 사건, 온보현 사건 등이 연이어 터졌을 때 세상은 충격과 예방 대책 수립으로 연일 떠들썩했다. 그 후 여학생 성폭행 사건을 놓고 다시 엄청난 충격을 가슴에 안고 갖가지 예방 대책 수립으로 연일 법석을 떤 적이 있다. 지존파 사건때도 그랬듯이, 성폭행 사건에서도 우리는 참으로 견디기 어 려운 수치와 모멸감을 느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허공에 외쳤다. 도대체 어 떻게 해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사건들이 우리 사회에서 터져 나오는 것 일까? 무엇 때문에 그건 것인가? 나라에서 정치를 잘못해서 그런 것인가? 교육 이 잘못 되어서 그러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반다시 운명적으로 거쳐야만 하는 바로 그러한 가치 혼돈의 시 대이기에 그런 것일까? 언론은 언론 나름대로 전문가들을 동원해서 사건의 본질을 구명하고 그 예방 대책에 대한 의견을 내놓는다. 유관 정부기관은 그들 나름대로 대책 수립에 머 리를 싸매고 있다. 관계 법령을 개선한다느니, 새로운 법령을 만들어야 한다느 니, 친고죄를 폐지해야 한다느니 갖가지 법안들이 거론되고 있다. 여성 단체를 비롯해서 많은 사뢰 단체들이 정부에 성폭력 근정을 위한 대책 수립을 촉구하 고, 또 그들 나름대로 성폭력 근절을 위한 대안을 심도 있게 마련하느라 심혈 을 기울이고 있다. 성교육을 좀더 체계적으로 시켜야 한다는 등의 얘기가 그렇 다. 뿐만 아니라, 인성 교육을 제대로 시켜야만 한다는 목소리도 빠짐없이 제기 되고 있다. 입시 위주의 교육, 경쟁적 풍토의 교육, 물질 만능의 왜곡된 가치, 돈에만 눈이 어두운 일부 어른들의 선정 문화와 퇴폐주의를 조장하는 상업주의 등이 모두 어우러져서 오늘과 같은 문제를 야기했다는 진단이 범람한다. 모든 진단과 예방 대책 하나 하나를 놓고 보면, 모두가 옳은 얘기이다. 지극히 당연 한 얘기들이다. 그러한 얘기들은 유사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언제나 거론된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그러한 문제를 발전적으로 조금도 해결해 나가지 못하고, 이렇게 주기적으로 온 국민이 단체로 모멸감과 자괴감을 느끼는 시련에 봉착하는 것인가. 많은 전문가들이 이야기해온 대책들 이 한낱 공염불이었던 것인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그러한 문제들을 예방하고 해결하는 데 아직도 우리가 생각 못하는 또 다른 무엇이 있는가? 나는 그것을 우리 사회의 모든 어른 들의 도덕성 회복 이라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사회 모든 분야에서 우리네 젊은이들을 이끌어 나가는 어른들, 지도자들이 그들 스스로 그들의 인성을 곧추세울 수 있을 때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도덕성이나 인성, 감성 등은 꼭 교과서를 통해서만 습득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문제가 터질 때마다 학교나 가정에서 마치 인성 교육을 전혀 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사람 들이 있다. 하기야 오늘의 학교 교육에서 인성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학교에서 제아무리 도덕성이나 인성 교육을 제 대로 시킨다 해도 학교 밖에서 그들이 접하는 세상의 현실이 그렇지 않을 때, 학교에서 배운 모든 이론을 현실 속에서 빛을 잃게 된다. 특히 젊은이들이 빈번하게 직접, 간접으로 접촉하는 사회 지도자들에게서 인 성이 무너지고 도덕성이 붕괴된 모습을 볼때, 그들의 인성이나 도덕성이 역시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아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깊이 성찰해야 한다. 몇백억 원씩 떳떳하지 못한 돈을 받아 먹고도 의연한 자세로 법정이나 국회 청 문회에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나, 억 단위의 돈을 떡값으로 여기는 일부 기 성 세대의 모습을 젊은이들이 볼 때, 그들은 무엇을 느끼리라 생각하는가? 이 사회의 지도자라고 믿어 왔던 종교인이, 교육자가, 사회 사업가가 어린 학생을 추행했음을 젊은이들이 알게 됐을 때 그들은 속으로 무슨 느낌을 가질 것인가 를 우리 어른들은 생각해 보았는가? 속에는 온갖 비리와 부정, 탐욕과 흑심이 가득하면서도 겉으로는 자기들은 세칭 이 사회에서 지도 계층에 속한다고 거들
먹거리는 그들의 위선을 보면서 젊은이들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결코 저들처럼 되어서는 안된다, 학교에서 책에서 배운 대로 살아야 지’ 하고 말이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 게 생각하지 않는 젊은이들도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선진국들의 공통된 특성의 하나는 사회계층 구조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많은 수의 어른들이 인성을 바로 갖추고, 도덕적으로 깨끗하다는 점이다. 그것은 곧 그 자체가 그들이 이끄고 나가는 수많은 보통 사람들에 대한 시범적 교육이기 도 하다. 그러한 지도층의 시범 교육이 우리 나라에서도 좀더 엄격하게 이루어 져야만 우리는 오늘의 아픔을 치유하고 다시금 일어설 수 있다. 지도자의 도덕성 회복이 중요하다는 원칙은 가정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 즉, 가정에서 자녀의 지도자는 부모이거늘, 부모의 도덕성이 먼저 회복 되지 않고서는 자녀의 올바른 성장을 기대하기 어련운 것 아닌가? 대수롭지 않 은 것으로 느껴지는 부모의 거짓말 한 마디도, 자녀에게는 알게 모르게 큰 영 향을 미친다는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 어쩌다 보면, 집안에서 어른들이 자녀에게 거짓말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무 의식 중에 가르칠 때가 많다. ‚야! 어디서 전화 오면 엄마 없다고 해!‛ ‚어디 가셨냐고 하면 뭐라고 해요?‛ ‚그냥 모른다고 하면 되잖아!‛ 글쎄, 엄마가 왜 그러시는지는 모르지만, 초등 학교 1 학년인 아이는 그저 엄 마가 시키는 대로, 누가 전화를 할 때마다, ‚엄마, 지금 안 계신데요!‛ 하고 대답했다. 그리곤 속으로 엄마는 왜 거짓말을 할까 생각했을 것이다. 어느 날, 아이가 집에 와 보니 엄마는 안 계셨다. 대신 쪽지가 아이를 기다 리고 있었다. 쪽지엔 학교 갔다 와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자세히 적혔다. 쪽 지에 적힌 대로 엄마는 3 시에 집으로 확인 전화를 걸었다. ‚야! 정식아! 그래, 엄마가 적어 놓은 대로 밥은 챙겨 먹었어?‛ ‚응.‛ ‚잘 했어! 그리고 조금 있다 네 시에 학원 가는 거 잊지 말아야 돼!‛ ‚알았어요!‛ ‚그리고 참, 아빠한데서 전화 안 왔니?‛ ‚아니!‛ ‚혹시 아빠한테서 전화 오면, 엄마 아까 나갔다고 하지 말고, 금방 나갔다 고 해!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아니나 다를까, 엄마와 통화한 다음 아빠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리고 아이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엄마, 방금 나가셨는데요.‛ 하고 대답했다. 아이는 속 으로 엄마가 왜 거짓말을할까 생각했을 것이다. 외출했다가 돌아온 엄마는 어디서 사셨는지, 아니면 어디서 얻어 오셨는지 꽤나 맛있는 빵 두개를 들고 들어오셨다.하나는 학원 갔다고 온 초등 학교 1 학 년인 어린 동생 몫이고 다른 하나는 형 몫으로 가져오신 모양이었다. ‚하나만 먹어! 하나는 이따 형 오면 형 먹으라고 해야지.‛ ‚엄마! 이게 되게 맛있는데. 그냥 내가 다 먹으면 안 돼? 형은 아주 늦게 올 텐데, 뭐!‛ ‚그래, 그럼 네가 다 먹어! 대신, 너 형 온 다음에 맛있는 빵 먹었다는 소 리 하면 안 돼! 그리고 참! 아빠한데서 전화 안 왔었니?‛ ‚응, 내가 막 학원 가려고 하는데, 아빠가 전화했어!‛ ‚그래서?‛ ‚그래선 뭐 그래서야! 엄마가 시키는 대로 말했더! 엄마, 방금 나가셨다
고!‛ ‚그랬더니, 어디 가셨냐고 해서 그냥 모른다고 했어. 근데, 아빠 조금 화나 셨나 봐! 엄마, 어딜 그렇게 맨날 돌아다니느냐고 말야.‛ ‚돌아다니긴, 누가 뭘 맨날 돌아다닌다고 그러시니? 뭐 돌아다니면 내가 쓸 데없이 돌아다니나? 다른 여편네들 보라지! 허구헌날 돌아다니는데, 나만큼만 집에 붙어 있어 보라고 하지! 근데, 참 이상도 하지. 너희 아빠는 어쩌면, 꼭 내가 없을 때 집에 전화하고 그러신다냐!‛ 빵 두 개를 혼자 다 먹은 아이는 더 이상 오래 앉았다가는 엄마의 화살이 자 기에게 날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지, 얼른 일어섰다. 그리고 자기 방으 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면서 속으로 자꾸 생각했다. 어른들은 우리 보고는 거 짓말하면 안된다고 하면서, 왜 자기들은 거짓말을 할까? 어린 아이 때는 거짓 말 하면 안 되고, 어른이 되면 거짓말을 해도 되는 것인가? 분명 집에 있으면 서도 방금 나갔다고 하란 엄마의 말, 오래 전에 나갔으면서도 방금 나갔다고 하라는 엄마의 말, 빵 두 개를 나 혼자 다 먹었는데 형한테는 아무 말 하지 말라는 엄마의 말을 아이는 곱씹으면서 그 날의 일기 제목을 엄마의 거짓말이 라고 적었다. 한 가지 이야기를 더하고 싶다. 아이를 차에 태우고 엄마, 아버지가 가고 있 었다. 운전은 아버지가 했다. ‚당신 지금 좌회선하는 차선에 섰어요! 왜, 좌회전하려고 그래요?‛ ‚아니, 직진할 거야! 직진 차선이 너무 길게 밀렸잖아!‛ ‚그럼, 이따가 어떻게 직진하려고 그래요?‛ ‚뭘, 어떻게 해 ! 동시 신호니깐, 이따가 그냥 우측으로 끼여들어서 직진하 면 되지!‛ ‚어이쿠, 내가 그렇게 해 봐! 소리지르면서 야단하는 양반이, 어찌 자기는 그렇게 하노?‛ ‚난, 괜찮아! 요령껏 잘 끼여드니깐, 당신은 어리벙벙하니까 원칙대로 해야 만 된다는 거야! 다 요령껏 하면 문제 없어! 사람이 요령이 있어야지!‛ ‚그래요! 당신은 요령 있는 사람이고, 난 요령 없는 사람예요!‛ ‚아니, 뭐 그것이 꼭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고.‛ ‚아니긴 뭐가 아녜요!‛ 여기까지 아무 말 않고 뒷자석에 앉아서 아버지와 엄마의 얘기를 듣던 초등 학교 4 학년짜리 아들이 끼여들었다. ‚잘 하면 두 분 싸우시겠는데! 근데, 왜 엄마, 아버지는 차만 타면 그래?‛ ‚뭘 그래, 이 녀석이!‛ ‚지금도 싸우시려고 그러잖아요! 근데, 내 생각엔 엄마 말이 맞는 것 같 아!‛ ‚저것 봐요! 어린아이까지도 당신이 지금 잘못하고 있다잖아요!‛ ‚저 녀석이 뭘 몰라도 한참 몰라서 그래! 야! 그럼 저렇게 긴 줄에 붙어 서 서 신호가 몇 번 바뀔 때까지 서 있어야 되니? 너 인생을 그렇게 살려고 하면 못 살아! 요즈음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요령이 있어야 돼, 이 녀석아. 요령 없이 봐라. 맨날 남들 뒤에 서서 그저 뒷설겆이나 하지. 너, 그런 식으로 살려 면 하루도 못 산다. 공부도 그래. 이 녀석아. 요령있게 공부를 해야 되는 거 야!‛ 공부 얘기로 번지자 아이는 더 이상 아무 말을 않고 그냥 앉아 있었다. 별로 성적이 좋지 않은 아이로서는 괜스레 더이상 말을 했다가는 온통 바가지를 뒤 집어 쓸 것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차 안의 세 식구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생각대로 요 령껏 우측으로 잘 끼여들었다. 그리고 별 사고 없이 남들보다 빨리 쭉 앞으로
빠져 나갔다. 아버지가 얼마나 요령 있게 잘 했는가를 보란듯이 아버지는 힐끔 엄마를 쳐다보기도 했 고, 또 차 안의 거울로 뒷자석의 아들을 쳐다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아이는 자꾸만 생각했다. 정말 저렇게 요령이 있어야 세상을 잘 살 아갈 수 있는 것일까? 그러면 나는 왜 요령이 부족한 것일까? 나도 앞으로 공 부에서고 놀이에서고, 그 무엇에서든 남들을 쉽게 앞지를 수 있는 요령을 터득 해야 하는 것인가? 엄마는 엄마대로 속으로 별 생각을 다 했다. 얘들은 다 어른들 하는 것을 보 면서 자란다고 하더구먼, 그래 얘 앞에서 저렇게 교통 규칙을 위반하면서 요령 껏 빠져 나가는 것이나 보여 주고, 그러면서도 잘못되었다고는 생각 않고, 뭐, 세상은 요령이 있어야 산다고? 공부도 요령껏 해야 한다고? 참으로 어찌 보면 하찮은 사소한 상황이다. 그저 무심코 지나가도 좋을 만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부모의 사소한 행동이 아이들에게는 엄청난 가치 혼란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부모들은 알까? 특히, 학교에서 배워서, 또 살아가면서 얻은 보편적 상식으로 스스로 옳다고 믿었던 어떤 가치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때 말이다. 자녀 앞에서 부모가 서로를 헐뜯어서는 안 된다. ‚엄마, 임진왜란이 왜 일어았어?‛ ‚엄마가 그런 걸 어떻게 아냐? 백과 사전 찾아봐. 백과 사전 괜히 사 주었 냐? 다, 이럴 때 찾아보라고 사 준 건데!‛ ‚어디 나오는지를 못 찾겠어!‛ ‚그래도 잘 찾아봐! 좌우간 엄마는 모르니깐, 자꾸 와서 귀찮게 굴지 말 고!‛ ‚아빠 몇 시에 와?‛ ‚저녁때 되면 들어오시겠지!‛ ‚아빠 오시면 아빠한데 물어 봐야지!‛ ‚얼씨구! 너희 아빠가 그걸 알면 해가 서쪽에서 뜬다! 아빠한테 물어 보느 니 차라리 나가서 길가에 서 있는 전주에다 대고 물어 보렴! 너희 아빠가 그럴 알면 우리가 아직도 이러구 사냐!‛ ‚엄마는 아빠를 왜 그렇게 무시해!‛ ‚무시하는 게 아냐! 사실이 그렇다는 거지!‛ 열 살배기 아들 녀석은 괜스레 엄마한테 그런 것을 물어 보았나 싶었다. 괜 히 아빠만 욕먹인 셈이 된 것에 아이는 마음이 상했다. 또 실은 엄마가 꼭 그 것을 아실 것이라고 생각해서 물어 본 것도 아니다. 그냥 엄마한테 말을 붙여 보고 싶었고, 또 자기는 그러한 공부에 관심 있음을 은연중 내보이기 위해 물 어 보았던 것이다. 굳이 엄마한테 묻지 않아도 아이는 그것을 알아볼 수 있다 고 생각했다. 엄마가 아이의 질문에 그렇게 신경질적으로 대답한 이유는, 꼭 남편이자 아 이의 아버지인 그 사람을 평소에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날씨는 덥고, 남들처럼 에어컨 하나 놓지 못하고 사는 것이 왠지 짜증스 러웠고, 또 저녁 찬거리도 신통치 않아 이 궁리 저 궁리를 하는데 아이가 느닷 없이 질문을 해 왔기에 무심코 그렇게 대답이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가 무심코 던진 그런 말 한 마디가 때로는 한창 자라나는 아이의 작은 가슴에 깊은 홈을 팔 수가 있다. 그래도 이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존경하 는 사람이 바로 자기의 아버지라고 믿는 아이라면 엄마의 그러한 말 한 마디는 충격으로 새겨질 수도 있다.
교육의 근본 원리 중 하나는 교사가 학생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지 못하 는 한 교육은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신뢰하고 존경하지 않는 교사는 제아무리 실력이 있다 해도 그가 가르치는 내용이 아이들의 머리와 가 슴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한 원리는 병원에서도 마찬가지다. 환자가 의 사를 믿고 존경하지 않는 한, 환자의 병은 치유되기가 어렵다. 의사의 진단과 처방을 환자가 전적으로 믿고 따를때에만 병은 치유될 수 있다. 집 안에서의 교육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부모를 신뢰하고 존경하지 않을 때 그 집 안에서 교육이 어떻게 가능해지겠는가? 우리 아버지 엄마는 순 사기꾼이고 거짓말쟁이 이며, 무식하기 이를 데 없고 겉과 속이 다른 부도덕한 사람이라고 아이가 생 각한다면, 부모가 그 자녀를 어떻게 가르치고 인도 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부모는 자녀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 있도록 서로 힘을 합하여 행동하 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네 가정 생활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부모가 자녀들 앞 에서 서로 상대방을 헐뜯고 무시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물론 때때로 농담삼아 그런 일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부모가 서로 신뢰하고 존경하는 태도를 아이 들 앞에서 보여 주어야만 부모에 대한 자녀들의 신뢰와 존경도 커진다는 사실 을 유념해야 한다. 부부 관계 못지않게 부모, 자녀 관계도 소중하다. 오래 전, 울산에서 초등 학교 6 학년에 재학 중인 열두 살 남자 아이가 자기 키 두 배가 조금 안 되는 짧은 밧줄에 목을 매 목숨을 끊었다. 평소에 공부도 잘 했고, 명랑했도, 그래서 학급에선 반장까지 하던 아이였는데. 왜 그랬을까? 무엇이 그 아이를 죽음으로 몰았을까? 왜 우리 어른들은 그 아이를 죽음에서 구해 내지 못하였을까? 언론 보도에 따르면, 그 아이는 부모가 이혼하는 바람에 아버지와 세 살 위 인 형하고 셋이서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아이는 항상 가슴 속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살았다고 한다. 어머니가 계셨더라면 선생님 생일에 좋은 선물을 했을 텐데, 어머니가 안 계셔서 그렇게 하지 못하였음을 아이는 한스럽 게 생각하다가 결국엔 목숨을 끊었다는 얘기가 전해졌다. 미루어 생각하건대, 선생님 생일에 선물을 드리고 안 드리고 간에, 아이는 엄마와 헤어져 살면서 얼마나 엄마를 많이 생각하고 그리워했을까. 순간순간 이런저런 일이 있을 때 마다 그 아이는 엄마가 곁에 계셨으며 하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겠는가. 자 식을 키우는 부모라면, 굳이 부연을 안 해도 족히 짐작되는, 그리고 눈에 선히 떠오르는 어린아이의 가련한 모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차라리 이 땅에 계 시지 않는 엄마라면 그저 가슴 속 저 깊츤 곳에 묻어 버릴 수 있었을 테지만, 어디에선가 엄마도 나를 보고 싶어하고 계시겠지 생각하면 그 아니는 엄마를 가슴에서 지우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부부란 살다 보면 이혼할 수도 있다. 또한 극단적으로 부모가 이혼을 해서 부모 중 어느 한 쪽과 살아야만 하는 자녀들의 경우, 그것은 그들의 운명이라고, 팔 자라고 치부해 버리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 아이의 슬픈 죽음을 보면서 우리 부모들의 자녀에 대한 태도에 무책임하고 현명하지 못한 일면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혼은 부부 간의 관계를 매듭짓는 것이지, 자녀와의 관계를 매듭짓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럼에도 우리는 부모가 이혼을 하면, 그 동안 부부였기에 생 겼던 모든 관계까지 매듭짓는 우를 범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청산할 바에야 눈 딱 감고 모든 것을 깨끗이 청산해야 한다. 처음엔 고통이 뒤 따르더라도 훗날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좋을 수도 있다는 반박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또한 뜨거우면 아주 뜨거워야 하고, 차가우면 아주 차가워 야 하는, 즉 선이 분명하고 관계가 분명한 우리 나라 사람들의 화끈한 기질의 일면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그럼에도 부부의 관계를 매듭짓는다고 해서 한 인간의 삶을 존재케 한 부모로서, 자녀에 대한 일단의 책임까지 면제 받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해마다 5 월이면 가정의 달이라고 곳곳에서 많은 연례 행사가 열린다. 그러나 겉치레 행사보다도, 우리 모두 한 번쯤, 자녀에게 왜 아버지와 어머니가 필요 하고 소중한가를 깊이 생각해 보면 좋을 성싶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의 책임에 대해, 어머니는 어머니로서의 책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으면 한 다.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가 부부 관계 못지 않게 중요하게 생각되는 5 월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꼭 가정의 달 5 월에만 할 것이 아니라 1 년 내내 늘상, 평생에 걸쳐 모든 부모가 해 주면 좋겠다. 평생을 함께하셨던 아버지를 저세상으로 먼저 떠나보내야 하셨던 어머니께 이 책을 바칩니다. 어머니, 잘 생각 안 나시지요? 지금부터 30 년도 더 전 일입니다만, 제가 왜 연세대 입학 시험에 합격했을 때말입니다. 그 때, 어미니께서는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합격자 명단에서 제 이름을 들으시고는 모든 공을 제게 돌리셨습니다. ‚어미가 잘 해 주지도 못했는데. 모두 다 네가 그 만큼 열심히 노력했기 때 문이지!‛ 어머니께서는 언제고 모두가 저희들이 다 열심히 했기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생각이 부족했던 저 역시 제가 잘나서, 제가 열심히 했고 똑똑해서 그런 줄 알고 으쓱해지기도 했습니다. 어머니, 그러나 제가 그렇지 않음을 깨달은 것은 거의 1 년이 지났을까 한참 후 어느 날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때 방안에서 양말을 꿰매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따뜻한 아랫목이 좋아, 어머니 곁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리곤 이 런 저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때 어머니는 참으로 대수롭지 않은 듯 말씀하 셨습니다. ‚너, 몰랐었지?‛ ‚뭐요?‛ ‚너 왜 작년에 입학 시험 보러 가던 날 말야! 그 전날 밤에미가 네 잠바 등 속에다 네가 갓난 애기 때 입었던 배냇저고리를 집어 넣고 꿰맨 것 말야!‛ ‚몰랐는데요! 그걸 제가 입고 갔었나요?‛ ‚그래! 미신이겠지만, 옛날 돌아가신 할머니들이 그러셨는데, 배냇저고리를 몸에 지니고 다니면 행운을 가져다 준다기에 그때 그걸 네 잠바 속에다 꿰매 넣었었지!‛ 그런 걸 꿰매 넣은 것을 모르고 있어야 한다기에, 그리고 또 제가 알면 혹 안 입고 간다 할까 봐 제가 잠든 사이에 어머니께서는 몰래 꿰매 넣으셨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런 이야기를 피식 웃으시면서 그야말로 그냥 지나가는 얘기로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도 따라서 피식 웃었던 것 같 습니다. 참으로 별것도 아닌 일이라 생각하여서 말입니다. 그 후,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또 직업으로 선생의 길을 택해, 수많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자꾸 만 어머니의 그 때 그 모습이 생각나고,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그 드러나지 않은 작은 행동들이 얼마나 숭고하고 지대한 어머니의 참 사랑인가를 자꾸 깨 닫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20 년 넘게 그 배냇저고리를 보관해 두신 어머니, 훗 날 언제고 아이에게 요긴하게 쓰일 때가 있을 성싶어 그것을 고이 보관해 오신 어머니, 그 동안 6, 25 전쟁도 있었고, 그래서 부산으로 짐보따리 싸들고 피난 도 하셨는데, 또 그 후 몇 차례나 이사를 다니셨는데도 , 그 숱한 혼란의 긴 세월 동안 그것을 고이 보관하신 어머니, 그것은 참으로 하잘 것 없는 작은 행
동이 아니었습니다. 20 년 넘게 지속된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깊은 사랑이셨습 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식을 위한 어머니의 깊고 끝없는 희생이 어떠한 것인가 를 보여 주는 수많은 예들 중의 한 가지였습니다. 그러한 어머니의 참사랑과 희생으로 오늘 제가 여기에 이렇게 존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머니, 이 세상 모든 다른 어머니들처럼 당신의 사랑은 어찌 글 몇 줄로 다 적을 수 있겠습니까? 그저 여기 이렇게 이 책 맨 끝에다 어머니께 이 책을 드 린다는 뜻을 적음으로써, 어머니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표하는 것 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약 꼬박꼬박 드시고, 더욱 건강하게 오래 사시길 바 라면서 이 책을 바칩니다. 1997 년 4 월 불효자 성호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