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하가뭐어때 1 회. 가을이 시들고 있다. 가을은 길 거리의 낙엽이 되어 이름없는 청소부의 빗질에 저만치 쓸려 가 버리고 있다. 공항의 아침은 제법 추웠다. 해외 여행의 붐은 아임 에프 이전의 그것과 비슷했 다. 공항에는 막 겨울 방학을 시작한 학생들이 베낭을 메고 여행 출발 준비로 부 산하다. 곳곳에 신혼여행을 떠나는 듯한 젊은 남,녀들도 보인다. 김포 공항 국제 청사 안, 한쪽 구석에 베낭 여행을 떠나는 한 팀이 있었다. 여행 을 떠나는 사람들은 아직 모르는 사이인 듯 통성명을 주고 받는다. 이제 갓 대학 생이 된 20 대 초반에서부터 30 대까지의 연령층이다. 여행을 떠나는 그 팀 중의 세 여자가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떨어져 베낭을 옆에 두고 앉자 통성명을 하고 있다. 한 여자는 이제 돌을 지난듯 한 아기를 안고 있고, 그 옆에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그 여자 주위에 두 여자가 아기를 보며 말을 주고 받는다. "남편하고 아기를 두고 혼자 떠나는 거에요?" 세 여자 중 제일 나이가 들어 보이는 한 여자가 물었다.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 는 미소를 지으며 답을 했다. "남편이 내가 요즘 힘든 것 같다고 여행이나 떠나 보라고 권유하더군요. 이왕 갈 거 멀리 가고 싶었어요. 우리는 맞벌이 부부라서 둘이 같이 시간을 내기가 힘 들어요. 아이를 오랜 시간 맡길 만한 곳도 없구요.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남편 이 자기가 다 알아서 할테니 혼자라도 맘 편하니 다녀 오라고 하는군요." 여인은 답을 하고서 곁에 말없이 서 있는 남편의 손을 잡았다. 보기 좋은 장면이 었다. "아기가 너무 귀엽다. 몇개월 됐어요?" 가장 나이가 어려 보이고, 예쁘장한 아가씨가 물었다. "13 개월째 접어 들었어요." "사내죠?" "네." "첫 아기에요?" "네." "그럼 아직 신혼이시겠네요." 그 여자는 아기에게 관심을 많이 보이며 밝은 얼굴로 여인과 그의 남편을 쳐다 보았다. "계속 신혼일거에요. 우리 그이는 항상 신혼처럼 살자,라고 말하거든요." "나도 이런 아기 하나 낳고 싶네요." "호호. 귀엽죠? 애기 아빠를 많이 닮았어요." 여인은 자기의 남편을 한번 씩 쳐다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남편은 낯선 여자 둘 에게 쑥스러웠는지 머쩍은 웃음이다. "그 쪽은 몇살이에요?" 가장 나이 들어 보이는 여자가 아기에게 관심을 보였던 여자에게 물었다. "내년이면 스물 여덟이에요." "생각보다 나이가 많네요. 나는 스물 대여섯살 쯤으로 봤는데..." "어머 저랑 동갑이네요. 반가워요. 전 김 남희라고 해요." 이야기를 듣던 아기 안은 여자가 반가움을 표시했다. "저도 반가워요. 전 홍은정이라고 합니다." "내가 나이가 제일 많네요. 난 서른 하나인데. 아마 이 여행이 내 처녀 시절 마 지막 여행이 될 것 같네요. 전 이 수연이라고 해요."
여자 셋은 서로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아직 결혼 안 하셨어요?" 은정이라고 하는 사람이 수연씨에게 물었다. "아직 임자를 못 만났네요. 연애는 몇번 해 봤는데 남자들 다 속물인 것 같아 요." 그 말에 아기를 안고 있던 여자가 시큰둥한 답을 한다. "우리 남편은 아니에요." "우리 팀에는 대부분 나이 어린 학생들이죠? 유럽 가면 우리 같이 다녀요." "그거 좋죠." 아기를 안은 여자는 흔쾌히 답을 했으나 은정이라는 여자는 새큼한 미소를 짓더 니 고개를 흔들었다. "전 같이 다닐 사람이 있어요." "누구 같이 온 사람이 있어요?" "네." 그 답에 때를 맞춰 저기 이 팀의 다른 일행들 속에 있던 한 남자가 빠른 걸음으 로 세 여자 쪽으로 왔다. "누나, 베낭을 짐칸에 맡긴다고 들고 오래." "알았어. 이제 일어서죠." "그래야 겠네요. 저 남자하고 같이 다닐거에요?" 다가왔던 남자를 보고 그렇게 묻는 남희라는 여인은 아기를 남편에게 맡기며 천 천히 일어섰다. "네." 은정이라는 여인의 눈망울이 사랑스럽다. 방금 말을 던지고 간 그 남자를 보는 시선의 눈망울이었다. "친동생? 동생하고 같이 온거에요?" "아니에요." 은정이라는 여인은 이번에도 고개를 흔들었다. 수연씨는 베낭을 짊어 지며 천천 히 일어섰다. 남희씨도 베낭을 짊어 지려 했다. "자기, 베낭도 내가 짊어 질까?" "자기는 현철이나 잘 돌봐요. 베낭 정도는 내가 짊어 질 수 있어요." 은정씨는 그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은정씨가 들고 있는 베낭은 다른 이들 에 비해 작았다. 두툼하기는 했지만 학생들이 등,하교시 메고 다니는 이스트 팩 멜빵 가방이었다. "베낭이 작네요." 수연씨가 자기가 들어야 할 베낭과 곁에 있는 남희씨의 베낭을 번갈아 보더니 은 정씨에게 물었다. "대부분 짐들이 아까 그 사람 베낭 속에 다 들었어요." "누구에요? 짐을 맡길 정도면 꽤 가까운 사인가 보네요." "학교 후배였었어요." "과거형인데..." 수연씨는 계속 물었다. 남희씨는 베낭을 짊어 진 채 남편이 안고 있는 아기를 보 며 곧 헤어질 것이라는 아쉬움을 달래 듯 사랑스런 말들을 주고 받았다. 수연씨 와 은정씨는 그들과 조금 떨어져 걷고 있다. "졸업을 했으니까 과거형이겠지요?" "나이로 보니까 은정씨도 아가씨로서 가는 마지막 해외 여행이겠다. 나처럼 노처 녀가 되면 기회가 더 생길수도 있겠지만 은정씨는 남자들이 그때까지 놔두지 않 겠네요." "호호, 아가씨로 보이나요? 저 결혼했어요." "응? 결혼 했어요?"
"네." "근데 남편이 마중도 안나왔어? 그리고 남편이 학교 남자 후배랑 베낭 여행 같 이 가는 거 알고 있어요?" "마중이라... 흠, 아직 인식이 그렇군요." "뭐가? 아무리 팀을 구성해 떠나는 팩키지 여행이라도 다른 남자랑 같이 가는 걸 좋아 할 남편이 어디 있어요." "그 인식 말구요." "후배랑 남편이 잘 아는 사인가 보네요 그럼.?" "흠, 너무 잘 아는 사이지요. 한 번 물어 봐야 겠네요." "그렇군요. 근데 뭘 물어본다는 거에요?" "아까 남희씨처럼 내가 힘들 때 혼자 여행간다고 그러면 보내 줄 수 있는지." "아, 아까 그 남희씨 남편 분은 대단한 사람이야. 한달 가까이 부인을 멀리 외국 으로 떠날 보낼 생각을 했으니까. 갓난 아기까지 있으면서 말이에요. 참, 은정씨 는 결혼한지 얼마나 됐어요? 완전 아가씨로 보이는데." "저요? 저 지금 신혼 여행 가는거에요." "네?" "아까 그 후배란 남자하고 엊그제 결혼했어요. 아까 저보고 누나라 불렀던 그 남 자가 제 사랑하는 남편이에요. 저 먼저 가 볼게요. 나중에 봐요." 답을 들은 수연이란 사람은 멍한 표정이었다. "뭐야? 연하하고 결혼 한 거에요?" "연하는 남편 하면 안되나요." "베낭 여행인데?" "이것도 좋지 않나요?" 은정이라는 여자는 지금 행복이 넘치는 표정으로 자기의 남편이 있는 곳으로 뛰 어 갔다. "철수씨." "낯간지러워요. 그냥 하던대로 해요." "그럼 자기야." "언제 나한테 자기야, 한 적 있어요?" "그래 철수야." "왜요. 은정씨." "네가 그렇게 부르니까 나도 어색하다. 후후." 팀의 일행 중 저 둘이가 부부라 생각하는 사람은 금방 사실을 알게 된 수연씨 말 고는 아무도 없었다. 1993 년 깊은 가을이었다. 수원 근교의 어느 대학이었다. 철수는 이학기부터 집에 서 통학하는 것을 포기했다. ""내 서울에 살면서도 어째서 원서 쓰고 날 때까지 이 대학 자연계가 이런 촌구 석 에 쳐 박혀 있었는지를 몰랐을까? 대학로가 그립다. 전국에서 단일 캠퍼스 내에 서 이 학교처럼 남학생 대 여학생 비율이 절박하게 불균형한 곳이 있을까? 아, 있다 참. 이화여대, 숙명 여대, 기타 등등 여대. 그래도 거긴 여자가 많지 쩝."" 철수는 좋은 집 놔두고 자취를 시작하면서 불만이 많았다. 더군다나 자기가 자취 하는 방 주위로 모두 지저분한 공대 남학생들의 자취방들 뿐이었다. ""오피스텔처럼 꾸며져 있으면 뭘하나, 주위 환경이 지저분한데..." 철수는 공대생이다. 물론 공대생이기 때문에 여자친구가 없다. 고 삼일 때 이 학 교에 원서를 내면서 후일 대학생이 되면 마후라를 휘날리며 한 쪽 옆구리엔 든든 한 여자친구를 데리고 눈 내리는 대학로를 활보할 것이란 꿈이 있었다. 대입 시
험도 저기 명륜동에 있는 캠퍼스에서 치루었다. 시험을 보면서 천정에 쥐가 지나 다니는 것을 보며 좀 지저분하다,라는 생각은 했어도 근처에 있는 대학로를 보 며 꿈을 키웠다. 진짜 몰랐을까? 진짜 몰랐다. 철수는 이런 촌구석으로 오게 될 지 진짜 몰랐다. 철수는 난생 처음 집을 떠나 혼자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 부모님은 말할 여지도 없었고, 자주 다투던 두살 터울의 여 동생도 보고 싶었다. 제발 이사 가기를 바 랬던 보기 싫던 뒷 집 싸움쟁이 할머니도 보고 싶었다. 철수는 혼자만의 공간에 서 혼자 잠드는 것에 외로움을 느꼈다. 전철을 타면 한시간 반이면 가는 거리에 좋은 집을 두고서 도저히 계속 별 보고 등,하교 하는 것에 자신 없어서 두달 전 부터 외로움과 한판 정면 승부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건 자기가 자취하는 곳에서 멀지 않는 곳에 좋아하는 여자 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여자는 철수의 외로움을 달래 주는 사람이었다. 철 수는 친한 누나가 한명 있었다. 자기 동네에서 몇 년을 살았던 두살 위의 누나였 다. 그 누나를 어떤 동아리에 가입을 하면서 다시 만났다. 예전 어릴 적 같은 동 네에서 친했던 사이라 다시 만난지 채 반년이 되지 않았지만 친남매처럼 보일 정 도 까지 가까워 져 있었다. 그 누나는 같은 학교 약대생이었다. 두 살위니까 삼 학년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겠다. 철수는 하교를 하고 혼자 있기가 싫으면 그 누 나를 찾아 갔다. 집에 없을 때가 간혹 있었지만 연락하지 않고 가도 만날 수 있 는 경우가 더 많았다. "누나야." "철수 왔니?" "오늘은 방에 있네. 커피 한잔 얻어 먹으러 왔어요." "잘 왔어. 안 그래도 오늘 나 쓸쓸했는데." "아니, 왜 쓸쓸해요. 애인도 있는 사람이." "흠, 그래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렇게 혼자네." "그럼 누나 방이니까 혼자 있어야지." "누나 오늘 생일이야." "정말요? 근데 왜 궁상맞게 집에 혼자 있어요. 그 애인이라는 사람 안 만나요?" "오늘이 내 생일인지도 모를거야. 그 사람은 바쁘잖아." "누나가 먼저 연락했어야지요." "초라하지 않을까? 그냥 알겠지, 기대만 하고 있다가 그 기대가 받아 들여 졌을 때 느끼는 기분은 정말 좋지 않을까, 그래서 연락하지 않았어." "참내. 그나저나 오늘이 누나 생일인데 난 뭐 해 줄게 없네요. 월요일날 용돈 받 아 가져 온 거 이제 남아 있지도 않아 선물도 못하고." "흠, 괜찮아. 제과점에서 빵 좀 사올테니 축가나 불러 줘." "알았어요." 철수는 빵에다 촛대를 꽂고 열심히 생일 축가를 불러 주었다. "너처럼 귀여운 동생 같으면서도 그 사람처럼 든든함을 주는 사람이 곁에 있으 면 좋겠다." "네?" "아니다." "누나 이 기회에 바꿔 버려요." "뭘?" "애인 말이지요." "호호, 누구로?" "나는 어떨까요?" "내가 너 성격을 좀 알지. 어릴 때도 같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자연스럽게 말하
는 것을 보니까, 넌 날 누나 이상으로는 보지 않아." "허허, 나 누나 좋아 한다니까요." "알아." "하하, 힘 내세요." "그래. 고마워." "우리 선배 중에 좋은 사람들 많으니까, 말만 해요. 내 소개팅 주선 해 줄게요. 누나 정도면 다들 좋아할 거에요." "후후, 생일 한 번 모르고 지나쳤다고 좋아하는 사람을 바꾸냐. 니가 그 얘기를 하니까 은정이가 생각이 난다." "은정이가 누군데요?" "나와 동긴데, 과에 관심이 별로 없었는지, 아니면 다른 일 때문인지 작년 겨울 에 외국 나갔다 아직 돌아 오지 않은 애가 있어." "근데 걔가 왜 생각이 나는데요?" "걔라니, 누나 친구 보고." "쏘리." "걔가 우리과 퀸카였어. 근데 남자 친구를 사귀면 길면 두달, 짧으면 일주일도 못가서 깨지더라. 물론 걔가 찬 것이지만." "나쁜 년이네. 남자를 쉽게 생각 하다니." "그래, 그 나쁜 년이 내 제일 친한 친구다. 너 누나랑 맞먹을려는 경향이 있어. 누나 친구보고 년이라니." "근데 그 누나가 왜 생각이 나는데요." "니가 나에게 남자 소개 시켜 준다고 그러니까. 나 애인 있잖아. 내가 체인징 파 트너니. 나는 옅을지라도 길게 사귈거야. 그게 편할 거 같아." "체인징 파트너?" "은정이 별명이야." 잠시간의 시간이 흘렀다. "누나 생일 선물 해 줄거 생각이 났다." "뭔데?" "눈감아 봐요. 정희씨, 내 뽀뽀해 줄게." "뭐야. 정희씨? 이게 맞먹네 진짜." "볼에다 해 줄게 볼에. 놀라긴." "후후, 철수야 난 연하에는 관심 없다." "나도 편하긴 해도 연상에는 관심 없어요. 누나가 좀 쓸쓸해 하는 것 같아서 하 는 소리지 뭐." "오른 쪽 볼? 아니면 왼쪽 볼?" "눈감아 봐요. 그건 내 맘이지." 철수는 정희가 눈을 감자 댑다 입에다 입을 맞추고서는 문쪽으로 도망치듯 나갔 다. "너, 이씨." "에이. 입만 살짝 맞춘건데 왜 그래요. 내가 손해지. 누나는 내가 고려해 볼 맘 이 있으니까 나중에 애인한테 차이게 되면 나 찾아 와요. 그때까지 내가 이렇게 솔로로 있진 않겠지만." 열린 문으로 고개를 내민채 철수가 장난스런 말을 뱉었다. "내가 차일 일은 없겠지만 미팅 가서 항상 바람 맞는 넌 솔로일 가능성이 크겠 다." "내가 이래뵈도 우리과 킹카에요. 여학생이 없어서 그렇지. 내일 봐요." "그래 잘난 철수야 잘 가. 나중에 은정이 오면 소개시켜 줄게." "연상은 관심 없어요. 제 또래를 소개시켜 달란 말이에요. 제 또래를..."
"관심 없어도 같은 동아리니까 자주 보게 될거야." 1994 년 이월 달이었다. 철수는 자취하는 방을 그대로 둔 채 방학 동안은 계속 집 에 있었다. 어쩌다 하루 학교를 가게 되어도 자취방에서 자지는 않았다. 철수는 수강 신청을 할 겸 학교를 갔다. 그제 내렸던 눈이 이제야 녹기 시작했다. 곳곳 에 눈이 죽은 흔적으로 지저분 했다. 철수는 혹시 아는 놈을 만날 까 두리번 거리면서 이제 막 약대와 마주 보고 있 는 학생회관을 지나쳤다. 공대는 아직 멀었다. 철수가 혼자 걷고 있는데, 외제차 한대가 자기를 지나치면서 녹은 눈을 철수 쪽 으로 튀겼다. 철수는 바지를 버렸다. 운전사는 그 사실을 몰랐는지 차를 세우지 않았다. "뭐야 이씨. 니가 고급차면 다야. 바지 물어 내, 씨." 철수는 그렇게 투덜 거리면서 차 뒷창문에 대고 알밤을 깠다. 운전사가 백미러 로 그걸 본 모양이었다. 차를 세웠다. 철수는 차가 멈추자 그리로 뛰어갔다. 따 질 생각이었다. 근데 차에서 내린 사람을 보고 별말 하지 못했다. 운전한 사람 은 아주 예쁜 아가씨였다. 내 누누히 말했지만 철수가 별말 하지 못했던 이유는 여자가 예쁘면 많은 것에 용서를 받는 안타까운 현실 때문이었다. "왜 이상한 제스춰를 보냈던 거에요?" "예?" "보니까 어려 보이는데, 몇학번이에요?" "저요? 저 93 학번인데요." "조심해요. 이제 93 학번이면서 아무나 보고 하는 그런 나쁜 제스춰는 좋지 못해 요." "그게 아니라." "나보고 한 게 아니라 변명할 셈이에요? 그래도 내가 봤으니까 기분이 좋지 못하 네요. 나는 댁보다 이 년 선배에요. 앞으로 조심 하세요." "네." 여자의 태도는 차분하고 고자세였다. 철수는 따지려다 야단만 맞았다. ""내가 왜 저 여자에게 야단을 맞았을까? 난 바지를 다 버렸는데..."" 여자는 차를 약대 앞 어느 곳에 세우더니 철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철수는 눈 치를 살피며 그 차 있는 곳으로 갔다. 눈 때문이었는지 차의 겉모습이 그렇게 깨 끗하지 못하다. ""제법 비싼 차군. 베엠베 삼이공아이. 누구야 근데."" 철수는 그 차를 동전으로 긁어 버릴 생각으로 다가 갔으나 그러지는 못했다. 그 냥 손가락으로 아주 긴 문장만 적어 놓고 떠났다. ""니가 나이가 많으면 많았지 왜 날 야단치는 거야. 고급차 타고 다니면 다냐. 울 아버지도 자가용 있다. 내 바지 물어내라 이 뇬아. 니 잘난 자가용이 흙탕물 을 튀겨 내 잘난 바지를 엉망으로 만들어 놨다 이뇬아. 니가 예쁘면 다냐? 우리 뒷집 쌈쟁이 할매도 젊었을 땐 예뻤었다더라. 너도 늙어 그 할매처럼 되지 않으 란 법이 있냐? 앞날이 훤하다. 잘난 척 하지 마라. 내 바지 어떡할겨. 철수가. 철수가 누군지 궁금할거다. 알려고 하지마 다쳐.""
2. 2회 94 년의 학기가 시작되고 철수는 다시 자취 생활을 시작했다. 학기 초의 어수선 한 틈을 타 통학을 해 보았지만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었다.
'야! 별이다. 오늘 밤에 집에 가게 되면 다시 인사하마.' 철수는 다시 별에게 인사하지 않았다. 다음 날 철수는 자취방에서 배를 긁으며 늦게까지 잠에서 깨지 않았다. '하하, 올해부터 나에게도 후배가 생기는구나. 과에는 희망이 없을 터이고, 동아 리에나 희망을 가져 봐야지. 동아리에 참한 여자 후배가 들어오면 학기 초의 정 신 없는 틈을 타, 아주 잘 대해 주는거야. 밥도 사주고 말이지. 나도 여자 친구 한 번 만들어 봐야 겠다. 약대생도 괜찮고, 이과생도 괜찮고, 농대생도 괜찮다. 공대생만 아니면 된다.' 철수는 동아리 방에 갔다가 정희 누나를 만나 점심을 얻어 먹었다. "우리 동아리는 아직 새내기가 들어 오지 않았나요?" "아직 시원찮네. 그래도 몇 명 가입을 하겠지." "참한 여학생 있으면 꼭 저에게 알려 주세요." "왜? 꼬셔 보게." "네." "우리 과 후배 하나 소개 시켜 줄까?" "인위적인 만남은 자신이 없어요. 자연스럽게 만나고 싶어요." "쯔쯧, 미팅에서 얼마나 깨졌으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나한테 하는 걸 보면 여자애들에게 인기가 있을만도 한데." "그렇죠? 애들이 보는 눈이 없나 봐요. 나같은 킹카를 매번 나가리 시키는 걸 보 면." "나가리?" "그 있잖아요. 학고팅 해서 선택받지 못하면 나가리 됐다고 그러잖아요." "우리말 써라." "하여튼, 이제 인위적으로 해서 만나는 만남 보다 같은 소속으로 자연스럽게 만 나고 싶어요. 혹시 제가 없을 때 예쁜 새내기가 가입 의사를 밝히면 아주 잘해 주세요." "알았어. 아주 잘난 선배 오빠도 있다고 자랑해 줄게." "기왕이면 박철수라고 밝혀 주세요." "알았어. 참, 너 은정이 봤니?" "은정이가 누군데요?" "내가 전에 얘기 했던 내 친구 있잖아. 체인징 파트너." "아, 그 누나요?" "올해는 학교를 다닐거거든. 학교에 몇 번 왔었는데 못 봤구나. 보면 인사 해. 아주 예쁜 누나야." "알았어요. 누나 보다 예쁜가요?" "인정하기 싫지만 나보다 예뻐." "그래요? 나는 이 세상에서 누나가 제일 미인인 줄 알았는데." "아부 하지마." 철수는 밥 사주기로 마음 먹는 첫날부터 밥을 얻어 먹었다. 그래서 계속 얻어 먹 게 될 것이다. 철수는 개강하고 2 주 정도 개강 파티다, 신입생 환영회다 바빴던 탓인지 정희 누나의 방을 찾아가지 못했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풀리고 본격적인 학업으로 돌 입하는 삼월 중순이 되어서야 혼자 잠이 드는 자취방에 불만을 가졌다. "우쒸, 심심하다." 혼자 앉아 레포트를 쓰다 철수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연락도 하지 않고 정희 누나를 찾아 갔다. 걸어서 5 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라 굳이 연락을 취할 필요 성을 못 느꼈다. 없으면 그냥 돌아 오면 된다.
정희 누나의 방이 있는 건물 앞에 좋은 차가 한 대 주차 되어 있었다. 철수에게 는 조금 낯이 익은 차였다. 그렇지만 별 의식을 하지 않고 지나쳤다. "누나야. 안에 있어요?" "응, 철수 왔구나. 잠깐만." 방 문이 열리자 철수는 생각없이 자연스럽게 들어 섰다가 움찔 놀랐다. 낯선 여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 철수는 낯선 여자에게 꾸벅 인사를 한 다음 정희 누나에게 시선을 주면서 말을 던졌다. "들어 와서 인사 해. 전에 말했던 은정이 누나야." "아,안녕 하세요." "그래요. 누구니?" 은정이란 사람은 철수의 인사에 답을 한 다음 철수와 마찬가지로 정희에게 시선 을 주고 물었다. "우리 동아리 후배. 귀여운 구석이 많은 녀석이야. 안 그래도 소개 시켜 주려고 했어. 정보 공학과 93 학번인데, 공대생 같지 않고 감성이 풍부한 애야. 글을 제 법 잘 써. 작년에 우리 학회지에 글을 가장 많이 올렸던 녀석이야." "오, 그래. 만나서 반가워요. 여기 과자 먹어요." "네." 철수는 멀뚱 멀뚱 은정이란 사람을 쳐다 보았다. 정희 누나와 더 가까운 자리에 앉아 차려져 있던 과자를 하나씩 주워 먹으며 은정이 누나의 얼굴을 살폈다. 아 주 예쁜 얼굴이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이다. "자주 보겠네요. 난 정희와 같은 약학과 91 학번 홍은정이라고 해요. 반가워요." "얘, 후밴데 말 놔라." "나중에 친해지면 자연스럽게 낮아 지겠지 뭐." 철수는 은정이라는 누나의 말투가 차분하고 약간 차가운 느낌을 주는 것이 어디 서 들어 본 듯하다. "저기, 은정이 누나." "어, 왜요?" "혹시 저 한 번 만나지 않았어요?" "그러고 보니까 낯이 익기도 하다." 정희 누나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둘이 어디서 만난 적 있니. 철수야 얘는 남자 얼굴 잘 기억 못해. 만났던 남자 가 한 둘이어야지." "내가 무슨? 남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후배는 이름이 어떻게 돼요?" "저요? 전 박철수라고 하는데요." "박철수. 음... 철수. 철수?" "제 이름인데요. 왜요?" "혹시 뒷 집에 쌈 잘하는 할머니가 살지 않아요?" "어! 어떻게 알았어요?" 은정이 누나의 표정이 갑자기 차가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얘,얘가 귀염성이 많은 애니?" 은정이는 정희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차분하지 않은 어투로 물었다. "어? 바로 말이 낮아 졌네. 응, 선배들에게 잘 해. 왜?" "근데 아무나 보고 이러니?" 은정이는 갑자기 알밤을 깠다. 그제서야 철수도 은정이 누나가 괜히 낯이 익은 것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응? 그러고 보니까... 내 바지 망가뜨린 그 BMW 승용차의 주인공?" "그래 내가 그 뇬이다. 너 진짜 조심해야 겠다. 내가 차에 적힌 그 말들을 보고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 줄 알아? 나는 여자에게 상스런 말이나 제스춰 보내는 남 자를 아주 싫어 해. 특히나 어린 놈이 말이야." "그때 전 옷을 다 버렸는데요. 그 누나 학교에서는 조심해서 차를 몰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괜히 잘 걷고 있는데 지나가던 차가 흙탕물을 튀기면 기분 좋겠어 요? 그리고 잘못은 그쪽이 했는데 야단은 오히려 제가 들었잖아요. 동전으로 긁 어 버리려다 그 정도 한거에요." "뭐어? 정희야 너 얘하고 친하니?" "응." "얘 버릇 많이 없지?" "약간 버릇 없어 보일 때도 있지만 생활하는 데 지장을 주지는 않겠던데. 선배들 에게 인기 있는 녀석이야." 정희는 친구와 후배가 다투던 모습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재밌게 감 상한 모습이었다. 은정인 친구가 자기 편을 들어 주지 않자 철수에게 아니꼬운 눈짓을 하며 툭 쏘듯 말을 내 뱉었다. "너 박철수라고 했지?" "그런데요." "너 빨리 나한테 사과 해." "뭘요?" "내 차에 썼던 그 말들에 대한 사과 말이야." "나도 봤지만 그냥 웃어 넘길 만도 하더만. 왠지 그 철수가 이 철수인거 같더 니." 정희는 은정이의 표정과는 대조적으로 얼굴에 웃음기 까지 띄기 시작했다. "누나가 먼저 사과해요." "싫어." "그럼 나도 싫어요." 그렇게 해서 철수와 은정이는 서로 아는 사이가 됐다. 철수가 은정이 누나를 알게 된 그 주의 금요일 저녁이었다. 철수는 집에 갈 요량 으로 천천히 전철역으로 걷고 있었다. 철수 옆으로 은색 베엠베, 영어로 비엠더 블유 승용차 한대가 씽하니 지나쳤다. 학교에 한대 밖에 돌아다니지 않는 차였는 지라 철수는 금방 저게 은정이 누나의 차란 걸 알 수 있었다. 승용차가 지나치 고 난 다음 그냥 뒷 유리창에 대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친하지는 않았지만 알 게 된 기념으로 손을 흔들어 준 것이다. 잘 가던 그 승용차가 갑자기 섰다. 그리 고 비상등이 깜박 거리기 시작했다. 철수는 같은 속도의 걸음걸이로 그 차가 있 는 곳까지 걸어 갔다. 어짜피 가던 방향으로 걸어 간 것이었다. "얘?" 승용차 안에 있던 은정이가 창을 내리더니 철수를 불렀다. "왜요?" "집에 가는거야?" "그런데요." "어딘데?" 다소 쌀쌀한 어투다. "알아서 뭐하게요?" "강남이야 강북이야? 그것만 말해." "강남인데요?" "강남 어딘데?" "신사동이요."
"신사동? 강남구 신사동? " "아까 강남이라고 말했잖아요. 뭐 들었어요?" "사과하면 태워줄게." "차라리 전철 타고 갈래요." "내 차 타고 가면 시간이 절반 가량 덜 걸릴텐데..." "누나가 먼저 사과해요." "나는 흙탕물이 튀겼는지 몰랐단 말이야." "나도 내가 알게 될 사람이 탄 줄 몰랐어요."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런 제스춰를 보내도 되는거야?" "몰랐다고 하면 피해를 끼쳐도 용서가 되는구나 그럼." "타기 싫음 말어." 철수는 자가용 타고 가는 것이 훨씬 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전철을 타고 가 면 많은 인파와 씨름해야 되고, 두번이나 갈아 타야 했다. 그리고 역을 내려서 도 상당한 거리를 걸어야 했다. 철수는 솔직히 은정이 누나의 차를 타고 가고 싶 다. "누나는 집이 어딘데요?" "나는 청담동." "성남쪽으로 해서 갈거에요?" "그래." "그럼 나 중간에서 내려야 되잖아요." "신사동까지 태워 줄게." "그럼 서로 사과한 걸로 할래요?" "내가 손해지만 그럴까?" 철수는 손해라는 그 말에 보조석 문을 열지 않고 뒷좌석 문을 열었다. "갑시다." 은정이는 철수의 행동에 기분이 좋지 못했다. 태워 주면 고맙다고 탈 것이지. 아 주 빼는 행동도 불만이었는데, 옆 자리에 앉지 않고 뒷 좌석에 가 앉는 철수가 못마땅했다. 왜 태워 주려고 마음 먹었던 걸까,하는 후회도 있었다. "니가 귀빈이니? 상석에 앉고 말이야. 빨리 자리 바꿔." 철수는 자연스럽게 운전석 바로 뒷자리로 옮겨 갔다. "됐지요? 갑시다." "너 같은 애가 어떻게 정희에게 후한 점수를 받았는지 모르겠다." "나는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는 잘 해요." 은정이는 운전하는 동안 계속 철수에게 시비를 걸었고, 철수는 맞받아 쳤다. "너, 정희에게 얘기를 들었는데 미팅 나가서 매 번 깨졌다며? 나한테 하는 걸 보 면 당연한 거 같아. 너 졸업할 때까지 여자친구 하나 없겠다. 안됐다. 나는 제 법 잘나가는 편이거든." "왜 갑자기 우리 뒷집의 쌈쟁이 할머니가 생각이 날까?" "야, 중간에서 내리고 싶어?" "속이 참 좁네요. 타라고 했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음악 좀 틀어 줄 수 없 어요? 그 얼굴만 예쁘면 뭐하나, 마음이 고와야지. 그거 있으면 틀어 봐요." "응?" 일단 철수가 이긴 상태로 철수는 집까지 오게 되었다. "태워 줘서 잘 왔어요. 고맙습니다." "너 두고 보겠어." "제가 물건인가요? 어디다 두고 볼 수 있는게 아니지요. 그냥 보세요. 하여튼 조 심해서 들어 가요."
3.
3회 다시 한 주가 시작되고 철수는 자취방으로 돌아 왔다. 철수는 당구에 흥미를 느 끼고 있었다. 수업이 끝이 나면 동기들과 어울려 당구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 가 많았다. 대충 다른 학교들을 살펴 보더라도 당구 고수는 자취생들에게서 많 이 나왔다. "요건 어떻게 치면 되냐?" "이런 기본구도 모르냐?" "50 이 뭘 알아 임마. 잘 좀 가르쳐 줘." "오시로 밀어." "오시가 뭐냐? 우리 말 좀 써라 새꺄." 철수는 이제 초보 단계였다. 한 동안 당구의 묘미에 빠졌던 철수는 정희 누나를 찾아 가지 않았다. 물론 동아 리 방도 자주 찾지를 않았다. 철수는 동아리 사정이 어떻게 돌아 가는 지도 몰랐 고, 은정이 누나를 볼 수도 없었다. '우쒸, 심심하다. 게임비가 없어 당구도 치지 못하겠고... 정희 누나를 찾아 가 티비나 봐야 겠다.' 목요일이다. 저녁을 갓 멋은 시간이었다. 철수는 일찍 레포트 하나를 마무리 짓 고 또 혼자 있는 자취방에 불만을 가졌다. "누나야? 있어요?" "응, 잠깐만." "뭐해요?" "그냥 책 보고 있었어." "누나는 혼자 있으면 심심하지 않아요?" "나는 혼자 있는 게 좋아." "그럼 내가 찾아 오는 게 싫겠네요?" "아니야. 커피 한 잔 할래?" "좋죠. 티비 좀 봐도 되죠?" "별로 재밌는 거 하지 않을 걸. 온통 청문회 중계 뿐이야." "저녁인데요." "낮에 했던 거 재탕이야." "청문회도 생각보다 잼 있어요." 문민 정부가 들어 선지 일년동안은 별 정치적 보복이 없었다. 그렇지만 요즘은 전직 대통령 둘이가 모두 잡혀 들어갈 처지에 놓여 있었다. "싸가지 없네. 질문하는 놈이나 답하는 놈들이나." "정치에 관심 있니?" "없어요." "나도 정치에는 관심이 없어." "그래도 요즘 약대는 문제가 있어 보이던데요. 대자보도 약대에만 붙는 거 같 어." "그건 우리 생계 문제니까."
철수는 자연스럽게 티비를 보며 정희 누나와 일상적인 말에서 아주 쓸데 없는 말 까지 주고 받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때였다. "정희야." "응? 은정이니?" "응." "집에 안 갔어?" "그래. 문이나 열어 주고 물어라." 철수는 갑자기 인상을 찌푸렸다. 은정이는 별로 기분이 좋지 못한 표정으로 정희의 방으로 들어 왔다. 뭔가 기분 나쁜 일이 있었나 보다. 들어 오자 마자 한 소리 내 뱉었다. 은정이는 철수가 있 는지 몰랐다. "태수 오빠가 나 때문에 동아리 활동 그만 둔다 했다면서. 왜 그래 진짜. 엉? 얘 는 또 왜 여기 있어." "놀러 오면 안되나요? 태수 선배 얘기는 왜 하는데요?" 은정이가 자기를 보고 아니꼽다는 표정을 짓자 철수도 퉁명스런 어투로 답을 하 며 꼬아 봤다. "너 가. 나 정희랑 할 얘기 있단 말이야." "싫어요. 가만히 티비나 볼 테니까 저 신경쓰지 말고 서로 얘기 하세요." 철수는 은정이 누나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듯, 바로 시선을 티비로 돌려 버렸다. 은정이는 못마땅한 듯 입을 쭝긋거리며 철수에게 눈을 흘기더니 정희앞에 털썩 주저 앉았다. 입고 있는 옷차림은 요조 숙녀였으나 행동은 그렇지 못했다. 정희 는 은정이와는 다르게 차분한 모습이다. "너도 태수 오빠 얘기 들었구나." "그만 둔 건 상관하지 않는다 이거야. 근데 왜 내가 이유가 되어야 돼?" "태수 오빠가 너에게 마음을 다쳤잖아. 너 보니까 동아리 방 나올 용기가 서지 않나 봐." "왜?" "몰라서 묻니? 니가 작년에 태수 오빠를 찼었잖아." "우리가 뭐 사귀었니? 태수 오빠 혼자서 난리쳤던 거잖아." "태수 오빠는 너에게 상당히 마음이 있었나 봐. 우리가 보기에 너도 태수 오빠에 게 마음을 주는 것 같았어. 많은 사람들이 둘이 사귀는 줄 알았어." "왜 남자들은 조금만 잘해 줘도 착각하는 거니?" "그건 쟤한테 물어 봐. 그리고 너도 착각하게 만들어." 은정이와 정희는 동시에 티비를 보고 앉아 있는 철수를 쳐다 보았다. 철수는 시 큰둥한 눈빛으로 그 둘을 잠시 쳐다 보다 이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쟤가 뭘 알어. 나는 진짜 태수 오빠에게 별 감정 없었어." "너도 조심 좀 해." "내가 뭘. 나 이제 어떻게 동아리 방 나가니? 나 동아리 내에서 미움 받지?" "조금." "정말 미치겠네. 오늘 또 누가 날 보고 정식으로 사귀자 그래서 거절하고 왔는 데, 왜 그러니 진짜." "너 또 누구 사귀었니?" "아이 몰라. 우리 빌라 옆 동에 괜찮은 총각이 이사를 왔더라. 내 차가 아침에 시동이 안 걸린 적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고쳐 주었어. 그래서 좀 친해지는가 싶 었는데 자꾸 추근대잖아. 내 참, 지가 날 알면 얼마나 안다고 벌써 사랑한다는 말을 해." "큰일이다 너. 귀국한지 몇 달이나 됐다고 벌써 그러니. 좀 변해서 올 줄 알았더 니 마찬가지구나."
"내가 왜 변하니. 그냥 서로 좋아하는 마음 가지다가 서로 잘 알게 되면, 서로 확신이 서면 그때 사랑한다고 말해야 되는 거 아니니? 난 잘못 없어. 남자들이 앞서 가는 것 뿐이지." "그래도 니가 뭔가 틈을 보였으니 남자들이 그런 말 하는 거 아냐?" "내가 쉽게 보인다는 거야?" "그런 말이 아니라, 너도 뭔가 마음을 주었으니 남자들이 그러는 거 아니냐구. 그냥 자기에게 무덤덤한 사람에게 사랑한다 이런 말 하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잘 대해 주는 게 죄야?" "모르겠다." "남자들이 쉽게 말하는 사랑한다는 말에 속아 넘어가면 항상 나중엔 여자가 상 처 받아. 조금 가까워 졌다고 그런 말 하는 놈들 중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 너." "왜 나에게 열을 내니?" "나도 너에게 불만 있어. 나는 네가 철규씨랑 계속 유지 되고 있는 게 불만이 야." "내 일에는 상관하지 마." 철수는 둘의 모습을 쳐다 보았다. 분을 푸는 듯 말을 틀어 놓는 은정이가 힐끗 자기를 쳐다 보자 바로 고개를 또 티비로 돌렸다. "정희 누나 요즘 애인 분하고 잘 안되요?" "넌 빠져 임마." "임마? 나 언제 봤다고 임마에요. 나는 은정이 누나에게 말한게 아니에요." 정희는 철수가 은정이의 분위기를 파악 못하고 대답을 하자 바로 말을 받았다. "아니야. 그냥 예전처럼 그대로야. 내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신경이 쓰여 나는. 밋밋한 게 좋니? 너 그러다 나중에 상처 받는다. 싫으면 싫 다 그래야지. 너 요즘 철규씨랑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나냐?" "내 얘기는 그만 해라." "그나저나 태수 오빠 때문에 내가 난처 해졌어. 내가 왜 체인징 파트너니. 조금 좋아지면 날 부담스럽게 만드는데. 내가 그들을 잘 모르는데 어떻게 그들이 함부 로 말하는 사랑을 받아 들일 수 있냐구. 나는 나중에 울기 싫어." 철수는 은정이 누나의 음성에 울음기가 섞이자 또 실 쳐다 보았다. 은정이 누나 의 눈에는 자기 분에 못 이긴 듯한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첫눈에 반하는 시간이 몇 초래더라. 사랑하면서 서로 알아가 는 것도 좋을텐데. 앞서 가던 뒤서 가던, 그것 보다는 사랑하는 맘이 중요한거 지 암." "허," 은정이는 그렇게 말한 철수를 멍하니 쳐다 보았다. "왜 쳐다 봐요?" "쪼그만게 뭘 안다구." "내가 왜 쪼그만해요?" "좋게 말하겠는데 넌 끼어 들지 마." "에구 태수 선배 정말 좋은 사람이었는데... 이제 동아리 방에서는 못 보는구 나." "이게 진짜." "혼잣말이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철수는 고개를 티비에 고정 시킨 채 자기에게 눈을 흘기는 은정이 누나의 시선 을 받고 있다. 정희는 조금 전부터 침묵한 상태다. "너 가." "내가 먼저 왔어요." "나 정희와만 있고 싶어." "정말 싸가지 없네. 저 뻔뻔한 태도 좀 봐."
"뭐어? 너 지금 뭐라 그랬어. 이 녀석 진짜 버릇 없네." 은정이의 음성이 아주 날카롭게 변했다. 아까까지는 그래도 화난 어투는 아니었 다. 그렇지만 지금은 표정에도 아주 불쾌한 감정이 스려 있었다. 철수는 고개도 돌리지 않는다. "티비 보고 하는 소리에요. 청문회 증인으로 나온 사람이 참 싸가지 없네요." "너?" "좋게 생각해요. 누나만 떳떳하면 됐지요. 사람 사귀는 데 있어 생각을 많이 하 지 마세요. 누나가 한 말 처럼 서로 좋아하는 맘 가지면서 알게 될 때까지 사귀 면 되잖아요. 사랑한다는 것도 좋아하는 것에 포함 되는 것이고, 그런말 했다고 남자를 차요." "니가 뭘 알어. 아직 여자 친구 하나 없는게. 사랑하지도 않는데 그런 말 듣고 나면 얼마나 어색해지는 줄 아니? 그런 말 들었다고 내가 찬 줄 아니? 나는 당시 는 거절을 했어도 바로 그 사람과 모르는 사람처럼 되고 싶지는 않았어. 그렇지 만 상대방은 한 번 고백하고 거절을 당하면 다 날 피했어." "누나는 보통 때도 좀 차가워 보이거든요. 오죽 하겠어요. 상대방이라... 불쌍 한 놈들. 자기가 마음을 고백한 사람에게 고작 상대방이라는 말로 불리워 지는 지 알기나 할까?남자가 그런 말 할때는 얼마나 용기를 내서 하는 말인 줄 모르 죠? 비록 약간의 거짓이 포함 되어 있더라고 쉽게 내 뱉는 말은 절대 아니에요. 그런 용기가 꺾였는데 다시 볼 용기가 서겠어요. 안 그래도 차가워 보이는 사람 한테..." "내가 차가워 보이니?" "오늘 보니까 도도해 보이기도 하네." "그만 해라. 은정이 넌 태수 오빠 한 번 만나 봐. 다들 너 때문에 태수 오빠가 관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너 보는 시각이 별로 안 좋을거야. 다시 활동하 게 만들 지는 못하더라도 오해는 풀어야 될 것 아냐." "알았어." "나는 태수 선배가 관둔다는 것도 몰랐고, 저 누나가 이유가 되는 것도 몰랐어 요." 철수는 다시 장난스런 말투로 돌아왔다. "92 학번 이상 애들만 알아." "은정이 누나." "왜?" "나한테 잘해요. 내가 모르는 애들에게도 다 소문 내 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너 정말 정이 가지 않는 애다." "상관 없어요." 철수가 속한 동아리는 한 동안 어수선한 분위기였으나 곧 정상을 찾아 갔다. 하 지만 태수란 선배는 더 이상 동아리 방에 모습을 드러 내지 않았다. 은정이도 한 동안 보이지 않았으나 모습을 감추지는 않았다. 약대는 한약 분쟁으로 계속 대자보고 붙어 있었다. 사월이 시작하면서 약대생들 은 학생들을 상대로 무슨 서명 같은 것을 받으려 했다. 철수는 생각없이 학교로 들어 오다 은정이 누나에게 잡혔다. "얘." "왜요." "너 서명 안했지?" "무슨 서명이요?" "안 했으면 이리 와서 서명 해." "뭔지 알아야 서명 할 거 아니에요."
"뉴스도 안 보냐? 한약 분쟁 몰라?" "알아요." "그것 때문이야. 그러니까 빨리 서명해." "그 티비에서 보니까 한의사 측에서 주장하는 말들도 일리가 있더만." "뭐가 일리가 있어." "내가 서명할 수 있게끔 잘 설명해 봐요." "그냥 하면 됐지 뭘 설명을 해." "지성을 가진 대학생으로서 사리 판단을 해야 할 거 아니에요." "너 그냥 가." "싫어요." "서명 할거야." "밥 사주면 할게요. 아침을 안 먹었더니 배가 고파요." "아침 안 먹었어?" "자취하면서 거의 굶어요." "너도 자취하니? 너 서울에 집 있잖아." "통학하기 얼마나 힘든 줄 알아요? 누나 처럼 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학생식당에서 사줘도 되니?" "그럼 학생 식당이면 됐지. 어디 레스토랑이라도 데리고 갈 생각이에요?" "못 데려 갈 것도 없지." "누나 돈 많아요?" "그래 많다." "그럼 뭐 한약 조제권 이거 한의사들에게 뺏겨도 누나는 상관없겠네요. 누나 이 거 재미로 하죠?" "밥 안 사줄래. 너 가." "아이 서명할게요. 밥 사주세요." "너 나한테 잘해라." "내가 못하는 건 또 뭐 있어요?" 은정이는 철수를 한 번 꼬아 보고는 서명 받는 애들에게 잠시 실례한다는 말을 건넸다. 그리고서는 철수를 데리고 학생 식당으로 갔다. 아직 점심 시간이 아니 라 학생 식당은 한적한 편이었다. 철수와 은정이는 나란히 배식기에서 밥을 담 아 왔다. 구석의 테이블에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며 말을 주고 받았다. "너 나에게 안 좋은 감정 있니? 아직도 그때 일 때문에 꿍해 있는거야?" "내가 무슨 벤뎅이에요? 그때 일을 아직 담고 있게." "근데 왜 나에게 쌀쌀 맞은거야?" "내가 말했잖아요. 나는 내게 잘해주는 사람에게는 잘한다고." "내가 잘해 주는 것은 없다 하더라도 특히 내게 쌀쌀맞은 이유가 뭐야?" "누나가 먼저 쌀살맞게 대하잖아요." "피." "왜 웃어요." "너처럼 나를 쌀쌀맞게 대하는 남자는 처음이야. 날 안 좋게 생각하는 사람도 날 대함에 있어서는 쌀쌀맞지 않거든." "내가 남자로 보여요?" "미쳤니." "앞으로 쌀쌀 맞지 않으면 밥 사줄거에요?" "에그 궁상아. 밥 한끼에 정을 파냐?" "아이, 요즘 당구치느라 밥값이 딸리거든요." "당구 쳐? 얼마 치는데?" "이제 곧 80 될 거에요."
은정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맺혔다. 뭔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 다. "언제 나랑 한게임 하자 그럼." "누나는 얼마 치는데요? 포켓 볼 좀 친다고 사구도 잘 칠거라 생각 말아요." "후후, 나는 포켓볼도 잘 치지만 일본 식 당구도 잘 쳐." "일주일 점심 밥 사주기 내기 당구 한 번 칠래요 그럼?" "밥은 내가 사 줄게. 내가 후배에게 밥 얻어 먹는 쪼잔한 여자는 아니거든." "그럼 무슨 내기 할래요?" "니가 지면 날 아주 상전으로 모셔야 돼." "기간은요?" "일주일 정도로 해 줄게." "내가 이기면요?" "내가 한달동안 너 집에 갈때 태워 줄게." "전 금요일날 집에 갔다가 월요일날 자취방으로 돌아 오거든요. 한달이라 해 봤 자 네 번 밖에 안되네." "그럼 너 월요일날 너네 동네로 데리러 갈게." "정말요?" "응." "내가 지면 어떻게 상전으로 모시면 되는데요?" "내가 시키는 일 있으면 군말 않고 하기." "알았어요. 언제 한 판 해요?" "오늘 오후에 당장 하지 뭐." "그러지요. 진짜 태워 줘야 돼요." "걱정마." 철수는 수업을 받으며 옆 자리의 한 녀석과 공책에 당구 다이를 그려 놓고 열심 히 이론 연습을 했다. 약속 시간이 되어 약대 건물 현관 앞에서 은정이 누나를 만났다. 철수는 당구장을 아주 의기양양하게 들어갔다. 기분이 좋았다. 아주 미 인하고 같이 간다는 기분도 좋았고, 자기가 이길 것이라는 생각으로 또한 기분 이 좋았다. '여자가 당구 쳐 봤자지...' 다음 날 오전이었다. "어, 철수야." "정희누나 이제 학교 와요?" "응. 근데 너 여기서 뭐하는거야?" "보면 몰라요? 차 닦잖아요." "이거 은정이 차잖아." "200 이나 되면서 50 하고 내기 당구를 쳐? 진짜 세상에 믿을 놈, 아니 년 없다.." "무슨 말이야?" "몰라요. 씨." 그날 오후였다. 철수는 약대생들 틈에 끼여서 열심히 소리쳤다. "서명 좀 해 주세요." '내 복수 하고 만다.' 4. 4회
철수는 몇 일을 은정이 누나에게 시달렸다. 심심하면 찾아 가던 정희 누나네도 가지 못했다. 은정이가 오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계속 밥은 얻어 먹 을 수 있었다. 금요일날도 철수는 은정이 누나에게 밥을 얻어 먹었다. 철수는 남학생들이 많 은 학생 식당에서 예쁜 누나와 단둘이 밥을 먹는다는 즐거움보다는 오후에는 뭘 시킬까 하는 불안감이 더 있었다. "오늘 아침에 차 닦은거야?" "깨끗해 보이지 않던가요." "별로." "쪽팔림을 무릅쓰고 닦은 거란 말이에요. 침까지 발라 가면서 닦았는데..." "침을 발랐어? 지저분하게 그게 뭐야. 다음부터 침은 바르지마." "그러면 세척제라도 좀 줘요. 벌레 죽은 거 붙은 것은 잘 안 닦인다 말이에요. 달랑 마른 걸레 하나 주고 닦으라 했는데 얼만큼 깨끗해지길 바랬던 거에요? 그 리고 월요일까지 유효기간인데 다음부터란 말하지 마요. 나 월요일날 학교 안 나 올거야. 씨." "어머 얘 좀 봐. 내가 말한 일주일은 날짜로 일주일이 아니라 일 수로 일주일 을 말했던 거야." "그런게 어딨어요." "여깄다 왜." "진짜 나쁜 녀..." "너 년이라 말하려 했지?" "녀자요. 녀자. 됐어요?" "하여간 삼일 남았으니까. 이 번 토요일, 일요일 빼면 수요일까지는 내가 시키 는 일 해야 된다." "그럼 좀 맛있는 거 사주면서 부려 먹어요." "니가 학생 식당 밥이면 된다고 했잖아." "그건 보통 때 말이구." "나중에 예쁘게 보이면 그땐 생각해 볼게. 그리고 오늘 집에 갈 때 같이 가자." "왜요?" "차 태워 주면 고맙다고 할 것이지 왜요는." "오후에 수업 있어서 서명 받는 일 못해요." "그건 빼 줄게. 수업 끝나면 나에게 연락해." "누나도 삐삐 있어요?" "아니. 헨드폰 번호 가르쳐 줄테니까 이리 연락해. 이거 아무나 가르쳐 주는 거 아니다." "헨드폰이요? 어디 한 번 봐바요." 철수는 은정이가 헨드폰을 꺼내 보여 주자 신기한 듯 이리 저리 돌려 보았다. "헨드폰 처음 보니?" "처음 보는 것은 아니지만 만져 보는 것은 처음이에요." "허!" "누나 전화 한 통 해 봐도 돼요?" "해 봐." 철수는 이상한 번호를 띡띡 눌렀다. "통화가 안돼잖아요." 은정이는 아주 바보를 쳐다 보 듯 철수를 꼬아 보았다. "어디 근처에 있는 곳에 전화 한거니?" "네." "국번 눌렀어?" "눌러야 돼요?"
"으응." 은정이는 아주 거만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 거려 주었다. "그래도 안되잖아요." "send 눌러라." "어디요?" "거기 있잖아 바보야." "아, 통화가 간다." 은정이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철수가 하는 모양이 귀여운가 보다. "여보세요? 아저씨에요?" "어디다 한 거야?" "저 동엽이 친구 철순데요. 모르시겠어요?" "..." "모르신다구요? 내가 얼마나 자주 갔었는데.... 저 번에 어떤 이상한 여자하고 치러도 갔잖습니까. 그 여자한테는 졸라 아는 척 했잖아요." "너 당구장에 전화 한거니?" "이거 헨드폰이거든요. 아저씨 헨드폰 알아요?" "뭐하는 거야 지금." "네? 안 바꿔 줘도 돼요. 안녕히 계세요." 은정이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철수를 꼬아 보았다. "아까 말한 이상한 여자는 나를 말함 이겠지?" "알아서 생각하세요. 그 헨드폰 참 신기하네. 저 수업 들어 가 봐야 겠어요. 천 원 짜리 밥 잘 먹었습니다." 철수는 인사를 꾸벅 한 다음 은정이가 일어 서기도 전에 도망치 듯 학생식당을 나가 버렸다. 그런 철수를 보고 은정이는 뭐, 저런게 다있냐 하는 식으로 쳐다 보며 웃을 뿐이다. 철수는 학생 식당을 나오자 마자 공대로 돌진 한 것이 아니 라 당구장으로 뛰어 갔다. 철수는 은정이 차를 타고 서울로 갔다. 여전히 뒷 좌석이다. "갑시다." "너 계속 뒤에 앉을거야?" "여기가 편해요. 출발합시다. 홍기사." "뭐어?" "운전하면 기사지. 기사 좋은거에요. 우리 선배들 기사 자격증 따려고 도서관에 서 밤 늦게까지 공부하는 사람들 많아요." "니가 그런 말 할 수록 월요일날 더 고생스러울거다." 철수는 월요일 아침 학교에 오자 마자 은정이 누나를 만나게 되었다. 만난 것 이 아니라 붙잡혔다. "차 열쇠를 왜 줘요?" "여기 마른 걸레랑 세척제도 있어. 오늘은 실내도 닦아 놔." "이런 법이 어딨어요?" "금요일날 내가 말했잖아." "수업 있어요." "너 월요일 오전에는 열한시 반부터 수업 있는 거 아냐?" "에?" "지금 일교시 수업 시작 시간은 지났지? 그럼 일,이교시 수업은 없다는 말이고 니가 이 시간에 학교를 나온 거 보면 3 교시부터는 수업이 있다는 거 쉽게 추리 할 수 있잖아. 너 바보지?"
"틀렸네요. 4 교시부터 수업 있어요. 동아리 방 가려고 나온거에요." "4 교시부터 있어? 오호, 그럼 차 닦아 놓고, 나 수업 끝날 때까지 여기 있어." "누나는 수업이 언제 끝나는데요? 3 교시부터 수업이면 적어도 1 시 넘잖아요." "3 교시까지 실험 수업이야. 그래서 나 지금 지각한거야." 철수가 아주 못마땅한 눈초리를 보냈다. "학생 맞아요?" "실험은 조금 늦어도 돼. 여하튼 잘 닦아 놔. 안녕." 은정이는 뒤에서 철수가 알밤을 까고 있는 것을 모른 채 약대 건물 안으로 사라 졌다. 철수는 차를 열심히 닦아 주었다. 실내도 열심히 닦았다. 실내를 청소하면서 은 정이 누나가 가지고 가는 것을 잊었는지 남겨 놓은 다이어리를 보았다. ''참 정신없는 여자네.'' 철수는 생각없이 다이어리를 뒤척거렸다. 전화 번호부란에 썼다 지운 전화번호 가 몇 있었다. 지워져 버린 전화번호는 모두 남자 이름의 것이었다. ''쯔쯧, 근데 이승주는 누구야? 남자야 여자야? 여자들은 따로 적혀 있는 걸 보 면 남자 같은데... 요즘 사귀는 놈인가? 근데 제일 위에 있잖아. 오래 버티는 놈 인가? 다른 놈들과는 다르게 주소도 적혀 있고 어라? 생일까지 적혀 있네. 나보 다 세살이 많군. 그럼 졸라 늙었네.'' 사진도 있었다. 두장이 있었다. 한 장은 어떤 잘생긴 놈의 사진이었고 다른 한 장은 그 놈과 같이 찍은 은정이 누나의 사진이었다. ''사진은 생각보다 적네. 새끼 나 정도 생겼구만.'' 철수는 조금 더 다이어리를 뒤적거렸다. 안에 적힌 내용에는 무관심했다. ''이거 바보아냐? 이걸 차 안에 놔두면 무슨 소용이 있나? 쯔쯧.'' 철수는 다이어리에서 자동차의 보조키를 발견하고는 또 한 번 혀를 찼다. 철수는 다이어리를 눈에 잘 보이는 계기판 위에다 놔 두고 청소를 계속했다. 철수는 청소를 다하고 난 다음 시계를 봤다. 이제 겨우 열한시다. 철수는 멀뚱 멀뚱 서 있다 묘한 웃음을 지었다. 손에 들려 있는 열쇠가 참 유혹적이었다. ''복수할 수 있는 기회다.'' 철수는 열쇠를 호주머니에 넣고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도망을 쳤다. 차 문들을 꼭 잠궈 놓고 말이다. 철수는 그 날 당구장에도 가지 않았다. 수업을 마치자 마 자 기숙사 뒤로 난 개구멍으로 바로 자취방으로 날랐다. 철민은 자기 방에 앉아 라면을 끓여 먹으며 킥킥 됐다. ''좀 황당할거다. 전철을 타 보기나 했을까.'' 시간이 아홉시 쯤 되었을 때 철민이 방 초인종이 울렸다. "철수야 안에 있니?" 정희 누나의 목소리였다. "네. 잠깐만요." 철수는 문을 열어 줌과 동시에 꿈쩍 놀랐다. 정희 누나의 뒤에는 화가 난 모습 의 은정이 누나가 서 있었다. "열쇠 줘 빨리." 은정이의 음성은 얼굴 모습과는 다르게 차분했다. 그렇지만 너무도 딱딱했다. 분위기가 어두웠다. 철수가 호주머니에서 열쇠를 건네자 은정이는 바로 돌아서 가 버렸다. "내일도 차 닦아요?" "필요 없어." 은정이는 정희에게도 아무말 하지 않고 사라졌다. "화 많이 났던가요?"
"그럼 화가 안 나겠니?" "장난으로 한 짓인데. 분위기가 좀 틀리긴 틀리네요." "은정이하고 잘 지내라. 알고 보면 착한 애야." "들어 와서 차 한잔 하실래요?" "아니, 나 졸업반이잖아. 할 일이 많아." "누나." "왜?" "은정이 누나에게 미안했다고 전해 주세요." "그게 미안한 표정이니?" "당한게 많아서 그래요." "칫! 쟤 많이 삐치기 전에 니가 가서 사과 해. 쟤 한 번 삐치면 아예 상대를 안 해 버리는 경우도 있어. 그건 싫지?" "흠. 별로 알게 된지 오래 되지도 않았는데..." "내가 보기엔 많이 친해 진 것 같더라." 철수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약대 앞에서 은정이 누나가 오기를 기다렸다. 은정이 를 알게 된지 이제 한 달 보름 정도 되었지만, 좋은 말 오고 간 적 없지만 그래 도 친해지긴 친해졌나 보다. 정희 누나의 말대로 은정이 누나와 모르는 사이가 되기는 싫었다. 어제 은정이 누나의 표정에서 잘못하면 그런 사이가 될 수도 있 다는 느낌을 받았다. "안녕하세요." 은정이는 차에서 내려 자기에게 인사하는 철수를 보지도 않고 지나쳤다. "차 닦아 드릴게요." 은정이가 고개를 돌려 철수를 쳐다 보았다. 하지만 아무말이 없다. "화 풀어요. 그것 가지고 말이야. 참 속이 좁네요." "너, 좀 좋아 지려고 해도... 아니다 너같은 애랑 말해서 뭐 하겠니." "말이 틀리잖아요." "뭐가?" "먼저 모른 척 하진 않는다면서요?" "뭘?" "에이, 그 전에 한 말 있잖아요. 그 남자가 용기내어 고백 한 것을 받아 들이 진 못해도 헤어질 마음은 없었다고 했잖아요." "푸우, 어제 니가 한 짓하고 그것하고 무슨 상관이야?" "나도 어제 용기내어 한 짓이거든요." "참나!" "어제 누나 표정이 내가 누나 본 이후로 가장 무서운 얼굴이었어요." "그럼 그 표정 안 짖게 잘 닦아 놔." "알겠습니다. 수업 잘 들으세요." 철수는 얼굴에 생긋한 미소를 지으며 은정이에게 인사를 했다. 은정이의 표정 은 밝아졌다. 뒤에서 철수가 알밤을 까고 있는 걸 보지 못했기에... ''복수는 끝나지 않았다.'' 중간 고사 기간에는 철수도 나름대로 공부 하느라 동아리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 다. 철수가 동아리 사람들을 보게 된 것은 시험도 끝나고 학기 초에 하지 못했 던 신입생 환영 파티 겸 정기적으로 하는 모임에 나가서였다. 오랜만에 본 정희 누나의 모습과 은정이 누나의 모습이 반가웠다. 철수는 은정이 누나에게 제법 좋은 말도 해주고 잘해 주었다. 열쇠 사건 이후 로 완전히 기가 꺽인 듯한 모습처럼 보였다. "누나 잘 지내셨죠? 많이 예뻐지신 것 같네요."
"니가 왠일이야? 내게 좋은 말을 다하구." "이제 잘 할게요. 예쁜 누나 알게 된 것만도 기쁜 일인데, 친해 지면 얼마나 좋 겠어요." "그래, 네가 그러면 충분히 친해 질 맘은 있어." "당연하죠. 어려운 일 있으면 부탁하세요. 누나 컴 사용 할 줄 알아요?" "아니. 잘 몰라." "혹시 레포트 예쁘게 꾸미실 생각 있으면 저에게 부탁하세요." "허허, 그래." "누나는 호호 웃는게 더 예쁘요." "그래. 호호." 철수는 은정이에게 잘 했다. 노래 방 가기 전까진 말이다. 가벼운 술 자리를 파 하고 동아리 회원들은 노래방이란 것을 가게 되었다. "누나는 집에 안가요?" "나 술먹었잖아. 정희네 방에 가서 잘거야." "그래요." 노래방의 분위기는 좋았다. 은정이에게 서먹한 마음을 품고 있던 다른 회원들 도 노래 따라 그 서먹함을 없앴다. "에, 저도 노래 한 곡 부르겠습니다." "그래 한 곡 불러라." 은정이는 기분이 좋다. "이 곡을 홍 모씨, 다른 말로 모은정양께 바칩니다." "나에게? 얘가 오늘따라 귀엽게 구네." 철수는 열창을 했다. "얼굴이 예쁘다고 여자냐, 마음이 고아야 여자지~" 5. 5 회. "앵콜 없습니까?" "너 나뻐 씨." 은정이 누나의 모습이 멍해 지자 철수는 씩 웃었다. '그래도 복수는 끝나지 않았다.' 철수는 여전히 은정이에게 다정한 모습 보다는 악동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 다. "안녕하세요. 누나." 이틀 뒤 철수는 학생 회관 앞에서 우연히 은정이를 만났다. 은정이 옆에는 모르 는 남자가 서 있다. "내가 어떻게 너 누나니? 나는 마음이 곱지 않아서 여자가 아니라며?" "누구에요?" 철수는 은정이 누나의 말을 씹었다. "니가 알아서 뭐 하려고. 나중에 봐. 안녕." 철수의 시야에서 은정이가 어떤 키 큰 남자의 팔 장을 끼고 멀어져 간다. 사진 속의 남자는 아니었다. '남자 친구가 생겼나? 정희 누나 말대로라면 얼마 안가 깨지겠지? 불쌍한 놈.' 철수는 한 동안 은정이를 보지 못했다. 철수는 그 사이 미팅을 한 번 했었다.
은정이에게 하던 버릇 때문이었을까? 철수가 여자들이 묻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 은정이에게 답 하는 것 처럼 쏘아 붙이는 느낌을 주었다. 거기다가 철수는 다른 놈에게 물은 질문까지 가로채는 경향이 있었다.철수가 미팅에서 깨져 본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좀 비참했다. "무슨 기분 나쁜 일 있어요?" "네? 갑자기 그건 왜... 아닌데요." "그럼 참 싸가지가 없는 편이네요." 여자 쪽 사람중에 마음 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내 뱉은 솔직한 여학생이 한 명 있었다. 철수가 틱틱 거리 듯 말을 내 뱉자 보다 못한 한 여학생이 자기 속에 있 던 말을 내 뱉었다. "저는 재밌게 하려고 하다 보니까..." "말투가 내 기분을 많이 건드리네요. 그냥 조용히 있어 주면 좋겠네요." 그 말을 듣고 철수는 머리를 땅바닥에 묻고 꺼이 꺼이 울었다. '내가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철수는 더 이상 자리에 앉아 있기가 무안했다. 한 여학생의 말에 철수는 충격 을 받았다. 철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분위기를 망쳐서 죄송해요. 저 없어도 재밌게 노세요. 그리고 한 마디만 하고 갈게요." 철수가 혼자 자리에서 이탈하려고 하자 남학생들 측에서도 표정이 별로 좋지 못 했다. 여학생들 측에서는 더 그랬다. 삼인칭 철수 주인공 시점이지만 잠시 전지 적 작가의 입장으로 가 상대편 한 여자의 마음을 훔쳐 보겠다. '뭐 저런 싸가지 없는 게 다 있냐? 정말 재수 없네.' 철수는 아까 자기에게 싸가지 없다는 말을 한 소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한 마디 말을 뱉고는 미팅 장소를 빠른 걸음으로 빠져 나갔다. "야, 너! 넌 좋겠다, 싸가지가 많아서." 철수는 미팅 장소를 나오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이 정도 용기가 있을 줄이야. 놀랍군. 그나저나 내가 은정이 누나에게 너 무 건방졌나 보다. 앞으로는 좀 조심해야지.' 철수가 미팅에서 처참하게 쫓겨난 다음 날부터 학교 축제가 있었다. 철수는 수 업 몇 개가 빠져서 좋았을 뿐 축제라 뭐 특별히 할 만한게 없었다. '아! 세상 여자들, 나 같은 킹카를 이런 자취방에서 혼자 뒹굴게 만들다니. 이 건 국가적으로도 낭빈데...' 철수는 주제 파악을 못하고 있다. 그래, 그렇게 살면 자기는 편하지 뭐. 철수 는 아침을 굶은 채 자취방 침대에 누워 멀뚱멀뚱 천정 만 바라 보았다. '정희 누나가 요즘 바쁘단 말이야. 은정이 누나는 남자 친구가 생긴 게 맞는지 통 보이지를 않고... 올 겨울이 오기전에 나도 빨리 여자 친구가 생겨야 하는 데, 벌써 마후라도 사 놓았는데. 아! 눈오는 마로니에 거리여.' (저는 대학 이학년 때 저 정도 까지는 아니었음을 밝히는 바입니다. 간혹 글을 쓰는데 내 얘기를 바탕으로 쓰지 않나 궁금해 하는 분들이 있어서요. 절대 아닙 니다.) "우쒸, 학교나 가 보자." 철수는 학교를 걸었다. '우리 학교에 예쁜 사람들이 많네. 수원대에서 왔을까?' 철수는 홀로 사람들을 구경하며 캠퍼스를 걸었다. "얘. 박철수." 철수는 누가 자기를 부르자 고개를 돌렸다. 저기 가판대를 하나 세워 두고 약
사 복인지, 실험 복인지 하얀 가운을 입고 서 있는 학생들 틈에 그들과 같은 옷 을 입고 있는 은정이 누나가 눈에 들어 왔다. 철수는 짤래 짤래 그 곳으로 걸어 갔다. 철수는 반성한 것이 있어 환한 웃음을 지었다. "누나가 불렀어요." "그래." "무슨 일인데요. 누나 약사복이 참 잘 어울리네요." "오늘은 나중에 뭘로 놀리려고 아부성 발언이야?" "이제 누나에게 잘 하기로 했어요." "왜?" "깨달은 바가 있어요. 어떤 여자에게 싸가지 없다는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까 누나에게 제가 좀 버릇 없이 군 것 같아서요." "누군지 몰라도 참 고맙네." 철수는 가판대 위를 살펴 보았다. 뭔가 이상한 약들이 많다. "왜 불렀어요? 누나 장사해요?" "응, 우리가 몇 가지 약을 만들어서 팔거든? 손수 만든거야. 누나도 몇개 만들 었어. 너 하나 사라." "무슨 약인데요?" "그냥 피부에 좋은 영양 크림하구, 안티 프라민 같은거." "부작용은 없나요?" "없어. 간단한 것만 만들어서 파는데. 너 피부 보니까 크림 하나 사야겠다." 은정이 말을 듣고 철수는 자기 볼의 피부를 매만지면서 말을 돌렸다. "누나 요즘 잘 안보이던데, 그때 내가 본 남자랑 연애한 거에요?" "연애는 무슨." "그 남자 계속 만나요?" "아니." "또 찼구만." "아니야." 철수는 은정이 누나 얼굴을 한 번 꼬아 보고는 크림 하나를 손에 쥐었다. "이거 얼마에요?" "2000 원만 받을게. 그거 사면 내가 맛있는 거 사줄 수도 있다?" "학생 식당 밥이요?" "오늘은 좀 예뻐 보이니까 딴 거 사줄 수도 있지." "누나가 그럼 그 돈으로 이거 몇개 사면 되잖아요." "그것하고는 느낌이 틀리지." "그럼 이거 하나 살게요." "오늘 내일은 이 일 때문에 바빠서 안되겠고, 축제 마지막 날은 너랑 놀아 줄 게. 보아하니 따로 만날 사람도 없는 것 같은데." "만날 사람 많이요. 씨." 철수는 은정이 누나의 말이 사실이라 강한 부정을 했다. 강한 부정.... "그런데 왜 혼자 돌아 다녀?" "이제 첫 날이잖아요." "그러지 말고 내게 연락 해." "이 번엔 차였어요?" "응?" "이젠 차여서 만날 사람이 없냐구요?" "니가 좀 예뻐지려 했는데, 나 지금 다시 기분 나빠지려고 한다. 이제 나한테 잘 한다는 말투가 그거야?" "아, 맞다. 그럼 예쁜 누나 모레 연락 하겠습니다. 여기 2000 원." 철수는 공손히 두손으로 천원 짜리 두 장을 은정이에게 바쳤다.
"그래. 피부에 좋은 거니까 열심히 발라. 내가 모레는 맛있는 거 사줄게." "네, 감사합니다. 열심히 파세요. 안녕." 철수는 꾸벅 각도 있는 인사를 한 다음 자리를 떠났다. 은정이는 그런 철수가 귀여워 보이는 듯 쌩긋 웃는다. 철수는 친구를 만나 당구 한 게임 치고 자기 방으로 돌아 왔다. 세수를 깨끗이 한 다음 아까 산 크림을 얼굴에 질퍽하게 발랐다. 그리고 저녁 밥을 먹고는 일 찍 잠자리에 들었다. 철수는 다음 날 세수 하러 화장실에 들어 갔다가 거울을 보았다. '진짜, 믿을 년, 아니다 그래도 잘하기로 했으니까 년이라는 말은 쓰지 말자. 진짜 믿을 여자 못 되네. 이딴 식으로 복수를 한단 말이야?' 철수의 얼굴에 여드름이라고 보기에는 무겁고 종기라고 보기에는 가벼운 것들 이 덤성 덤성 돋아 있었다. 철수는 바로 어제 산 크림을 들고 은정이 누나를 찾으러 학교로 갔다. 철수는 사람들이 자기를 쳐다 보는게 꼭 얼굴에 난 종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래 서 얼굴을 바로 들지 못했다. 고개를 숙이고 어제 은정이 누나가 있던 장소로 빠 른 걸음을 걸었다. "어이, 박 철수." 철수는 고개를 들었다. "동엽이냐?" "축젠대 학교는 왜 왔냐? 당구나 치러 가자." "불쌍한 놈. 축제 기간에 당구나 치러 다니구. 쯔쯧." "어제 너랑 같이 쳤잖아 임마." "그렇다고 오늘도 치냐?" "근데 너 얼굴이 왜 그러냐? 너 연애하냐?" "뭐?" "나이가 몇 살인데 얼굴에 여드름이야." "여드름 아니야. 너 지금 당구장 가는 길이냐?" "응." "나중에 갈테니까 기다리고 있어라." "불쌍한 놈." 철수는 동엽이와 헤어지고 이제는 누가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 며 빠른 걸음을 걸었다. 은정이 누나는 사람들에게 사지 않으면 안되게 만드는 미소를 지으며 열심히 장 사를 하고 있었다. 철수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은정이 누나 앞에 떡 크림 을 내려 놓았다. "어, 철수 왔네." "물어 줘요." "왜?" "내 얼굴 봐요. 이게 뭐야." 철수는 가렸던 손을 치웠다. "어? 얼굴이 왜 이래?" "어제 이거 바르고 자고 일어 나니까 이렇잖아요." "너 알러지 있니?" "그런 거 없어요. 빨리 물어내요." 은정이는 혹시 약품이 변질이 되지 않았나 크림의 뚜껑을 열어 보았다. 그리고
는 피식 웃었다. 통 속의 크림이 거의 반이나 소모되어 있었다. "이거 누구 다른 사람도 발랐니?" "저 혼자 발랐어요." "그럼 너 혼자 한 번에 이 만큼 바른거야?" "그럼요." "이 정도 양을 어떻게 다 발랐니?" "보여 줘요?" "응." 철수는 나머지 크림을 손가락에 푹 찍어서 자기 얼굴에 바를려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은정이 누나의 볼에다 찍어 발랐다. "야, 뭐하는 거야?" "누나도 나나 안나나 봐바요." "이게 무슨 크렌징 크림이니? 그렇게 많이 찍어 바르게." "많이 발라야 좋지 않나요?" "조금씩 발라야지. 집에 가서 비누 거품에 깨끗이 세정하고 나면 내일은 괜찮을 거야. 넌 여전히 바보 같구나." "그럼 이거 안 물어 줘요?" "남자가 쪼잔하긴. 내가 맛있는 거 사준다고 했잖아." "그럼 이 번만 참는거에요. 내일도 내 얼굴이 계속 이러면 맛 있는거 사줘도 안 돼요?" "알았어. 너 장사하는 거 좀 거들래?" "싫은데요." "내게 잘한다며?" 철수는 따지러 갔다가 두 시간동안 약 파는 걸 거들어야 했다. "이 크림 바르면 절대 나처럼 되지 않습니다. 이 크림을 바르면 이 피부가 이 누나 피부처럼 됩니다." 철수 덕에 크림이 제법 많이 팔렸다. 6. 6 회.
철수는 바로 집으로 가려다 당구장을 들렸다. 두 시간 정도 은정이 누나 곁에 있다가 왔는데도 당구장에서 친구인 동엽이를 볼 수 있었다. "아직도 치고 있냐? 불쌍한 놈, 축제 기간 내내 당구장에서 살아라." "오늘 얘랑 편 먹고 편게임 해서 게임비 안 물었어." 철수는 동엽이와 같이 있는 자기과 동기인 승헌이를 꼬아 보았다. 키도 크고 참 잘 생긴 놈 치고는 불쌍한 놈이다. "축제 기간인데 당구치러 예까지 나왔냐?" "오늘 집에 안들어 갈거다." "왜? 그럼 너 어디서 잘건데?" "동엽이 방에서 자고 갈거야." "넌 축제 기간인데 만날 사람 없어? 생긴 걸 보면 여자 친구가 있을 법도 한 데." "없어. 너도 한 판 할래." "불쌍한 놈. 집에 가 새끼야. 그리고 내일은 학교 나오지 마. 당구장 아저씨가 우리 과를 어떻게 생각하겠어? 저기 보니까 선배들도 잔뜩 있는데..." "나도 축제 기간에는 집에 안 들어 갈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다. 오늘 집에 안 갈거다. 축제 기간인데 집에 있어 봐. 그러지 않아도 우리 누나들이 휴
일에는 집에만 박혀 있는 나를 보고 혀를 차는데..." "계속 당구 칠거냐?" "응." 철수는 큣대를 하나 들고 와 당구장내를 훑어 보았다. 당구 치는 사람들 모두 가 공대 내에서 봤던 사람들 같다. "너도 뭐 별수 없네. 쯧쯧!" 철수가 당구 큐대 잡는 모습을 보자 승헌이란 녀석이 혀를 찼다. "나는 그래도 임마. 동아리 내에 아는 누나들 있어. 나는 최소한 내일 맛있는 거 얻어 먹는 약속도 잡아 논 사람이야." "너, 나이 많은 여자들 하고 놀지 마라. 내가 누나들이 많아서 아는데, 빨리 늙 어. 기를 빼앗기거든." "기를 빼앗긴 놈이 하루 종일 당구 칠 체력은 있냐?" "정신력으로 치는 거야. 나는 최소한 당구장에서는 서럽지 않거든. 내 또래에 200 치는 사람 봤냐?" "나도 금방이야 새꺄. 공 좋게 함 놔나 봐. 동엽아 저기 셈 판, 다섯 개만 떼 주라." "아직도 오십이냐? 너 이제 80 놔도 돼." "그래. 80 놓고 치지 뭐." 철수는 당구를 쳤다. ''나쁜 놈들, 150, 200 이나 되는 것들이 겨우 50 치는 놈 다마수를 올리게 해 놓 고 이겨? 담에 은정이 누나랑 편 먹고 함 이겨 줄테다. 이 녀석들은 여자라면 무 조건 얕보는 경향이 있는 전 근대적 사고방식의 놈들이니까. 하하.'' 철수는 당구에서는 무참히 패했지만 최소한 이 녀석들 보다는 자기 처지가 낫다 는 생각을 했다. 축제 기간, 당구장 밖에는 갈 데가 없는 놈들. 철수의 머리 속 에는 정희 누나가 떠 올려 졌고, 은정이 누나의 모습이 지나갔다. ''아, 내 나이가 두 살만 많았어도...'' 철수는 깨끗이 세수를 한 다음 별 생각 없이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철수는 세면대로 갔다가 씩, 웃었다. ''진짜 없어졌네. 가만 근데 거울 속 댁은 누구쇼? 내 주위에는 이렇게 잘 생 긴 사람이 없는데... 댁의 부모님은 참 좋겠수, 이렇게 잘난 아들을 두어서. 근데 다른 부모님들은 한 달 용돈을 주는데 왜 우리 부모님은 이렇게 잘난 아들에게 일주일 용돈을 주는거야. 그것도 쥐꼬리 만하게...'' 철수는 어제 당구비로 남은 용돈을 날린 관계로 아침을 굶었다. 그래도 철수는 점심 이후는 배불리 먹을 것이라 기대를 했다. "여보세요. 거기 핸드폰 맞아요?" "네? 누구?" "으이쒸 돈이 왜 이리 빨리 떨어지는 거야." "철수니?" "예, 우쒸." "뭐야 너?" "뚜뚜뚜..." "여보세요?" "왠일이니? 오랜만에 전화 하구선 우쒸,만 남발하더니."
"동전 바꾸러 갔다 왔어요." "밖인가 보네?" "예. 어? 또 떨어졌다 씨." "어디야?" "여기 약대 현관 앞 공중전화요." "거기 내 차 보이니?" "예." "그럼 내 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곧 나갈게." "뚜뚜뚜..." 은정이가 자기 차 앞으로 왔을 때, 철수는 거기 없었다. 학생 회관 쪽에서 열심 히 뛰어 오는 철수는 은정이를 보지 못하고 다시 약대 건물 현관 안으로 사라졌 다. 은정이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리고는 철수를 따라 현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삐리리리." 은정이는 전화가 울리자 어이가 없는 웃음을 지었다. "여보세요?" "또 동전 바꾸러 갔다 왔었니?" "네. 빨리 말해요. 차 보이는 데 뭐요?" "아까 내 말 못들었어?" "네." "이 번엔 동전 많이 바꿔 왔니?" "이 백원 밖에 없어요 빨리 말해요." "잠시만." "우쒸 또 떨어졌어." "박철수!" "목소리가 참 생생하게 들리네요." "나 너 뒤에 있어. 넌 아직도 바보 같구나." 철수는 은정이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은정이의 말에 별로 신경쓰지 않는 모습 이다. "야, 신기하다. 헨드폰 잠깐 줘 봐요." "왜?" "빨리 줘 봐요. 돈 떨어진다 말이에요." 은정이의 웃음은 약간 거만하게 바뀔 정도였다. 철수는 한심한 모습이지만 귀여 워 보이긴 했다. 한손에는 공중전화 수화기를 잡고, 다른 한 손엔 헨드폰을 쥐 고 번갈아 귀에 댔다 때었다 한다. "여보세요? 어 들리네. 그러는 댁은 누구세요? 여기도 들리네. 나 박철수요. 나 도 박철순데... 그참! 신기하네." "동전 "예." "그럼 "거긴 "너는
바꾸러 학생회관 까지 갔다 온거야?" 거기서 전화하지." 누나 차가 안 보이잖아요." 계속 바보 같겠다."
철수는 아쉬운 듯, 헨드폰을 은정이에게 넘겼다. 은정이는 철수를 데리고 어디 먼 곳으로 갈 모양이다. 바로 자기 차로 철수를 안내했다. "너 계속 거기 앉을거니?"
"여기가 편하다 했잖아요. 근데 어디 멀리 갈거에요?" "너, 오늘 서울 올라 갈 거 아니니?" "맞아요." "그럼 서울 가서 사줄게." "나, 집에 갈 준비 안했는데." "가다가 너네 자취방 들리지 뭐 그럼." "내 자취방 알아요?" "저번에 가 봤잖아." "아, 맞다. 근데 좀 지저분할텐데." "누가 니네 방 들어 간대니? 밖에서 기다릴테니 준비하고 나와." "알았어요." "저번에 보니까 별로 지저분 하지 않던데?" "내 방이요?" "응." "내 방이야 깨끗한 편이지요. 근데 주위가 지저분해요." "혼자 사니까 좋아?" "자유로운 건 좋은데, 심심해요. 홍기사? 출발합시다." "헛! 그래 알았어." "나도 운전 면허증을 따야 할텐데." "니가 운전 면허증 따면 내가 도로 주행 시켜 줄 수 있어." "이 차로요." "응." "이런 비싼 차, 잘못해서 긁어 버리면 나 물어 줄 돈 없어요." "흠." 철수는 자기 방에 들어 갔다가, 생각 보다 자기 방이 깨끗하고, 가져갈 물건이 없자 들어 갔던 그대로 다시 나왔다. 내가 철수를 너무 바보처럼 꾸미고 있다. "어디 가는 거에요?" "뭐 맛있는 거 사줄까?" "사주는 사람 맘이지요." "양식으로 할까? 한식으로 할까? 아니면 피자 같은 패스트푸드?" "탕수육은 어떨까요? 우리 동네 가까운 곳에 큰 중국집이 있거든요. 울 아버지 따라가서 얻어 먹어 본 적이 있는데 맛있대요. 내가 요즘 약 먹기 때문에 돼지고 기는 못 먹어요. 쇠고기 탕수육 사주세요." "사주는 사람 맘이라면서 니 주장은 다 밝히네? 어디 말하는 거야? 만리장성?" "아니요. 중국성이요." "근데 무슨 약 먹어?" "보약이요. 저 일 년에 사개월 정도 약을 달고 다녀요." 은정이는 제법 차분한 어투다. 걱정하는 투로 물었다. 은정이 표정이 잠시 어두 워 졌다. 철수는 뒤에 앉았기 때문에 그걸 알리가 없다. "너 몸이 약하니? 어디 안 좋은 데 있어?" "제가 말입니다. 고 삼때 체력장에서 1000 미터 오래 달리기 일등한 사람이에 요. 삼일을 굶어 봐요. 내가 얼굴이 누렇게 뜨나." "몸이 튼튼하다는 말이야?" "네." "근데 왜 약을 달고 다니는데?" "그럴 일이 있어요. 저 약먹기 진짜 싫거든요. 제 자취방 냉장고에 먹지 않고 쌓아 둔 약봉지가 제법 있지요. 누나 피곤하면 말해요. 몇 개 줄테니까."
"그래. 그럼 중국성으로 간다?" "어딘 줄 알아요?" "너네 동네랑 우리 동네 별로 멀지 않아." "맛있니?" "그럼요." "너 몸무게 얼마야?" "그걸 왜 물어요? 나한테 관심 있어요?" "키는 175 쯤 되겠다?" "176 이에요. 어떻게 해서 키운 일센티인데 깎아 내리면 섭하죠." "몸무게는?" "65 키로 정도 나가요. 왜요?" "그럼 보통 체격인데, 그 많던 걸 어떻게 다 먹을 수 있니?" "누나도 자취해봐요." "예쁜 누나 잘 먹었습니다." "그래." "그럼 전 이만 집에 가 보겠습니다. 여기서 걸어가도 되니까 태워 줄 필요 없어 요. 잘 가세요." "어머 얘 좀 봐. 너 여자 친구 만나서도 이러니?" "여자 친구가 없어서 이런지는 잘 모르겠는데요." "어떻게 볼 일 끝났다고 그냥 가니?" "그래서 인사하고 가잖아요." "너 여자친구 사귀기 진짜 힘들겠다." "누나가 그런 말 안해도 충분히 힘들어 하고 있어요." "밥을 얻어 먹었으면 차 한잔 대접해야지." "어제 당구비로 날려서 돈이 없는데요." "우리 동네 가서 차 한잔 하고 가라." "돈 없는데요." "빌려줄게." "좀 치사하네요." "그럼 내가 사줄게." "진짜에요? 근데 왜 하필은 누나 동네에요?" "남자가 여자를 만났으면 집에 데려줘야지. 안그래?" "누나 아무나 보고 그런 말 해요?" "왜?" "그런 말 하면 남자들이 착각해요." "뭘?" "저 년이 내게 맘이 있구나." "너 또 년이라고 했어." "아, 실수. 저 여자분이 나에게 마음이 있으시구나." "칫! 그래서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모든 여자들이 내게 맘이 있다고 생각을 하죠. 왜? 나는 잘났으니까. 그 러나 버트. 난 연상에게는 관심이 없어요." "이렇게 착각하고 사는 녀석한테 어떻게 정희가 좋은 점수를 주었을까?" "아, 잠시 정정을 하겠습니다." "뭘?" "정희 누나는 내 연상이라도 좀 생각해 볼 마음이 있어요." "치. 갈거야 말거야?"
"갑시다. 뭐 사준다는데." "후후." "왜 웃어요?" "그냥." 철수는 또 은정이 차의 뒷자석에 앉았다. 은정이도 이젠 별 신경을 쓰지 않았 다. 은정이가 철수를 데리고 간 곳은 고급 의류점이 즐비한 고급스런 분위기 뒷 골목의 괜찮은 찻집이었다. 둘이의 모습이 제법 친해진 느낌이다. 이런 저런 얘 기를 나누었다. "누나도 대해 보니까, 괜찮네요." "그럼. 나 괜찮은 여자야." "취소다. 괜찮은 여자면 겸손 할 줄 알아야지요." "그럼 넌?" "나야 뭐 겸손하면 오히려 더 욕 먹어요." "큰일이다." "나야 그렇게 말해도 다 농담처럼 들리니까 괜찮지만 누나는 그렇지 않기 때문 에 겸손해야 된다 말이에요." "오호, 니가 왠일로 바른 말을 다 하니?" "누나 차 얼마짜리에요?" "그건 왜?" "누나 집 부자에요?" "못사는 편은 아니야." "학생이 그런 차 타고 다니면 나쁜 시선 많이 받을텐데." "흠. 너도 내가 외제차 타고 다닌다고 날 나쁜 시선으로 봤니?" "좋게 보지는 않았지요." "나쁜 시선으로 봐도 어쩔 수 없어." "등,하교 하기가 힘드니까 자가용 몰고 다니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학생 신분 에 맞는 차를 타고 다녀야지요." "학생 신분에 맞는 차가 어떤 차종인데? 어짜피 돈 못 버는 학생인데 다 부모 님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산 거 아냐?" "대부분이 그렇지만." "저 차는 외할아버지가 선물 한 차야. 하나 밖에 없는 자기 자식, 그 자식의 또 하나 밖에 없는 딸이 귀여워 선물 한 차가 저 차야." "무슨 말이에요?" "나도 재작년까진 전철 타고 다녔어. 우리 외할아버지 독일 계신다?" "갑자기 외할아버지가 독일 계신다는 말은 왜 한거에요?" "나 작년에 외할아버지 하고 살았어." "아, 독일 나가 있었던 거에요?" "응. 그때 할아버지가 저 차를 선물해 주셨어. 우리 할아버지가 좀 잘 사시거 든. 독일에는 저 정도 차 몰고 다니는 학생들 많아." "그럼 독일에서 타던 차를 한국에 가져 온 거에요?" "응." "돈 많이 깨졌을텐데." "그 돈을 보태도 여기 이 차 가격에 비하면 상당히 싸게 구입한 거야." "그래도 그런 사정 아는 사람이 없잖아요." "어짜피 나 모르는 사람들인데 그런 시선이 뭐 중요하니?" "그래도 같은 학교 학생들인데?" "상관없어." "음, 정신 자세가 상당히 서구화 되셨네요."
"안 좋은 말이지?" "그건 누나가 맘대로 받아 들이시구요. 어머님이 외동딸이세요?" "응. 나도 외동딸이야." "그래요?" "네가 투덜거려도 내가 잘 받아 들이는 편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내가 뭘 투덜거렸다고 그래요. 이제 잘한다고 했잖아요. 예쁜 누나님." "후후, 나는 나보다 네,다섯 살 정도 적은 동생하나 갖는게 꿈이었어. 그게 남 자든, 여자든 상관 없이 말이야." "음." "뭘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니?" "한마디로 내가 귀여워 보이니까 동생 삼고 싶어 잘해 줬다는 말 아닙니까? 별 로 잘해 준 건 없지만." "그래. 투덜 거리든 말든, 친한 동생하나 곁에 있으면 좋겠다. 일단 널 그 대상 에 넣었으니까 내게 잘 해." "잘하고 있잖아요. 근데 나는 누나 보다 두살 밖에는 적지 않은데?" "하는 짓을 보면 네,다섯살이 뭐야? 여섯, 일곱살 어려 보여 임마." "으응? 누나 별로 안 늙어 보여요. 아직 이십대로 보인다 말이에요. 너무 자책 하지 마세요." "그래, 말싸움으로 널 어떻게 이기겠니. 넌 참 편하게 한 세상 살겠다." "잘났으니까 당연하죠." "착각 속에서 살면 편하대." "누나도 그럼 편하겠네요." 창 밖 거리의 조명등이 수줍게 웃고 있다. 여운 미소를 머금고 둘이 참 잘 논다 는 식의 일종의 비웃음 섞인 조명등도 보인다. "우리집 하고 반대 방향이잖아요." "우리 집에 가는거다." "근데 왜 날 태웠어요?" "여자를 만났다가 헤어 질 땐 집까지 배웅하는거야." "전 지금 강제로 끌려 가는 듯한 인상을 받는데요. 집 가르쳐 주려고 이러는 거 에요?" "아니. 배웅 받으려고." "진짜 삭막한 여자네." "삭막해도 할 수 없어. 니가 옆자리만 앉았어도 내가 너네 동네까지 태워 주려 고 했는데 넌 계속 뒤에 앉잖아? 우리 집 가까운 곳에 버스 정류장 있으니까 너 거기서 버스 타고 가." "그렇게 살고 싶어요?" "응." "살긴 편하게 살아도 죽을 땐 편하지 못하겠네요." "이건 나쁜 말이란 걸 바로 알겠다. 쏭알 쏭알..." 은정이는 갑자기 알아 듣지 못하는 외국말을 주절되기 시작했다. 아마 독일어인 거 같다. "갑자기 못 알아 듣는 외국말을 하고 그래요." "답을 못하겠지? 독일말로 네 욕한거다." "그런다고 내가 답을 못할 줄 알아요?" "해 봐." "you too." 조금 차를 몰고 간 곳에는 괜찮은 빌라가 있었다. 지하 주차장 문이 열려 있었
고, 수위도 쌈 잘하게 생겼다. "저기가 내 사는 곳이야." "집 자랑 하는거에요?" "그렇다." "내려 줘요. 집에 가게." "내가 말을 그렇게 했다고 진짜 널 버스 태워 보낼 줄 알았니?" "진짜 그럼 집 자랑 한거네." "내려서 앞에 타." "싫다고 그러면?" "그럼 진짜 버스 타고 가야지." 철수는 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입을 야물거렸다. 철수는 은정이 누나 옆으로 가 앉았다. "이제 됐나요?" "응." "그럼 출발합시다." "이제 기사 소리는 안하네?" "뒷 좌석에서는 그런 말 해도 되지만, 옆 좌석은 얻어 타는게 바로 표가 나잖아 요." 철수가 자리를 바꿔 타고 차가 출발한 지 채 이,삼분 지나지도 않았을 때였다. 남청색 샤브 승용차 한대가 은정이 차의 앞을 가로 막았다. 철수가 본 은정이 누 나의 표정은 가히 좋지 못했다. "저 차가 왜 앞을 막는거에요?" "우리 빌라 옆 동 총각이야." "아, 예전에 말했던 누나에게 차였던 남자?" "응." "저 차가 좋은거에요? 이 차가 좋은거에요?" "분위기 파악 좀 해라." "저 차가 좋은건가 보다. 그럼 비켜 줄때까지 기다려요." "야!" "왜요?" "이 차가 좋은거야." 승용차에서 제법 건장한 청년하나가 내렸다. 그리고 이 쪽으로 걸어 왔다. "저 사람 표정 보니까 농담할 때가 아닌 거 같은데요." "니가 먼저 했잖아." 청년은 철수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고 은정이가 앉은 쪽의 창문 유리를 두들겼 다. "뭐라 말 하잖아요. 문 열어 봐요." "열지 마." "멋있게 생겼는데 왜." "느끼 해." "생긴 건 멀쩡한 게 저 새끼도 불쌍한 놈이구나." 철수가 말한 불쌍한 새끼는 불쌍하지 않은 표정으로 은정이가 앉은 쪽 창문을 계속 두들겼다. "넌 가만히 있어." "안 그래도 가만히 있을 거에요." 은정이는 그 청년이 가지 않고 계속 창을 두들기자 할 수 없이 유리창을 내렸 다. "차 좀 비켜 주시겠어요?" "계속 날 피하는 인상이네?"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니까요. 빨리 차나 치워주었음 좋겠네요." "흠, 옆에는 누구야? 취미가 희한하네. 저런 어린 놈을 데리고 다니는 거 보 면?" ''그럼 내가 좀 어려 보이긴 어려 보이지. 미소년이라고나 할까.''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저 번엔 군복 입은 놈하고 같이 있더니, 금방 다른 놈 꼬셨어?" ''군복? 저 번에 학교에서 본 놈은 군인 같진 않았는데. 그건 그렇고 쌩판 처 음 보는 놈이 놈이라고 그러니까 기분 더럽다. 씹쉐이야.'' "그런 식으로 말하면 기분 좋나요?" "내려서 얘기 좀 하자." "싫은데요." ''싫대잖아 새꺄.''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냐? 딴 여자 따로 만난 것도 아니고 차인 이유는 알아 야 할 것 아냐." "우리가 뭐 사귀었어요? 댁이 딴 여자 만나던 말던 저하고 상관 없는 일이잖아 요." ''잘한다. 홍은정. 그렇게 톡톡 쏘아 부치면 떨어지게 되어 있어. 진짜 차가워 보인다.'' "나는 사귄다고 생각 했었어. 잠깐만 내려 봐." 청년은 갑자기 실내로 손을 넣어 은정이의 팔을 잡았다. "이거 놔요." "아!" ''참 행동 빠르네. 한 팔을 잡히고서는 어떻게 저렇게 빨리 창을 올렸을까?'' 청년의 팔이 창 유리문에 끼였다. 청년은 힘을 들여 팔을 빼고서는 험한 인상 을 지었다. "야! 이 년이 보자보자 하니까. 내려 씨." 청년은 차 앞바퀴를 걷어 차기 시작했다. ''새끼 그래도 이차가 비싼 줄은 아는지 다른 곳은 걷어 차지 않네? 하는 짓을 보니까 별로 쌈도 못하겠군.'' 철수가 갑자기 문을 열고 내리려 했다. "너 왜 내리는 거니?" "안 갈 것 같잖아요." "그래서?" "누나에게 년이라고 했잖아요." "너도 자주 했잖아." "나는 직접적으로 하진 않았어요." "그냥 모른 척 있으면 갈 거야. 괜히 일 크게 만들지 말고 들어 와." "왜요? 제가 저 사람에게 두들겨 맞기라도 할 것 같애요?" "응." "나 싸움 못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철수는 기어이 밖으로 나가 그 청년 앞에 섰다. "아저씨, 그냥 가세요. 제가 잘 말씀 드릴게요." 은정이는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운전석에 그대로 앉아 유심히 철수가 하는 모 양만 지켜 볼 뿐이다. "뭘 임마?" "나도 미팅 나가 많이 나가리 되어 봐서 아저씨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데 요. 이러면 더 초라해 질 뿐이에요."
"너 뭐야 새꺄." "새꺄라고 그러면 안되지요." "이 새끼가 놀려." "놀린게 아니에요. 아저씨가 이러면 더 밉게만 보여 질거에요." "날 가르치려 드는거야?" "한 번 만났던 사람은 언젠가 한 번은 그리움이 되지요. 저도 가을 바람 불면 무수한 소녀가 떠 올라요 여자라고 그런 생각 안들겠어요?" 철수의 말이 길어 지자 청년은 말문을 잊고 기분 나쁜 표정이 더 커져 갔다. 그 래도 철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아저씨가 저 여자분을 봄이 오는 계절에 만났죠? 여자는 봄을 타거든요. 내년 봄이 되면 저 여자도 분명 아저씨가 한 번 쯤 그리움 되어 떠 오를거에요. 그 때 좋게 말하세요." "뭐야 새끼야?" 참다 못한 청년은 철수의 멱살을 잡았다. 분위기가 좋지 못하자 은정이가 차에 서 내렸다. 그리고 그 청년을 바로 꼬아 보며 말했다. "놔주지 못해요? 한대라도 때리면 바로 신고할거에요." "그래요. 표정이 신고 할 거 같지 않아요. 놔 줘요." "넌 뭔데 아까부터 장난스런 말이야?" "내딴에는 진지하게 해 준 말이에요." "이 새끼가 진짜." "인생은 아름다운 거에요. 어딘가 자기를 짝사랑하는 사람이 살고 있다 생각하 면서 저 여자는 그리움으로 묻어 두세요." "뭐야?" 청년의 한 주먹이 올라 오려 했다. 철수의 모습이 그것을 보고 갑자기 변했다. "좋은 말 할때 놓는게 좋을거다. 오늘 병원에 실려 가기 싫으면." "뭐어?" 청년의 손이 내려가자 철수는 다시 인상을 풀었다. 아직까지 멱살은 잡혀 있다. "우리 아버지 변호사야 임마. 나 한대 때리면 그 즉시 넌 구치소 행이야. 우리 아버지 부장검사까지 지내시다 변호사로 전향하셨어. 너 정도 잡아 넣는거 문제 도 안돼." "거짓말 하지 마 임마." "거짓말인거 어떻게 알았어요?" "퍽." 철수는 참다 못한 그 청년에게 얼굴을 한대 맞았다. 그 모습이 은정이에게는 아 주 무서운 모양이었나 보다. "아아아악!" 저기 지나 가던 사람도 쳐다 보고 100 미터도 더 떨어진 곳의 은정이가 사는 빌 라의 수위실 문도 열렸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자 방금 철수를 때린 청년은 자리 를 비키기 시작했다. 자기 차로 돌아 가더니 금새 차를 출발 시켰다. 철수는 주저 앉아 얼굴을 부여잡고 있다. 은정이가 놀란 가슴을 부여 안고 주위 의 시선들에게 어색한 미소를 보여 주고 쭈그러 앉아 있는 철수에게로 왔다. "안 아프니?" "맞았는데 안 아프겠어요?" "그러게 왜 그랬어?" "아깝다. 저 새끼 진짜 잡아 넣을 수 있었는데. 누나가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허사로 돌아 갔잖아요." "너네 아빠 진짜 변호사시니? 한대 맞았으니까 잡아 넣을 수 있겠네 그럼?" "거짓말이라고 했잖아요."
"뭘 믿고 그럼 그런 짓 한거야?" "내가 쌈을 좀 잘해요. 두들겨 맞지 않을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런 거지요." "정말? 근데 왜 맞았어?" "진짜 때릴 줄은 몰랐죠. 대충 보면 저 사람이 때릴 용기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어요. 못 때릴 줄 알았는데." "그렇게 놀렸는데? 나 같아도 한대 쥐어 박았겠다." "우리 아버지 얘기까지 했는데 날 때렸단 말이야? 제법 용기 있는 놈이에요." "치, 너네 아버지 변호사 맞구나?" "아니에요. 우리 아버지 한의사에요. 진짜 보약 먹기 싫다." "엉?" 7. 7회 철수는 은정이가 운전하는 바로 옆에 앉아 거울을 가지고 계속 자기 얼굴만 보 고 있다. 철수는 맞은 곳이 약간 부었다. 아니 많이 부었다. 은정이는 철수를 보며 걱정 스러운 표정이다. 철수는 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렇게 잘 생겼던 얼굴이 이게 뭐야." "푸우우!" "그냥 참지 말고 웃어요. 우리 아버지한테 야단 맞겠네." "너네 아버지 진짜 한의사니?" "그걸 왜 자꾸 물어요?" "너네 아버지가 한의사인데, 전에 넌 서명도 하고 서명하라고 떠들고 다녔잖 아." "말은 똑바로 하세요. 그게 제가 하고 싶어 한 것은 아니잖아요." "그래도. 허, 참!" "울 아버지가 그러시는데, 어짜피 그 법률에 관계된 인사들이 죄다 약대 출신이 라 약사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계속 갈거래요. 우리 아버지는 별로 신경을 안 써 요." "그래도 주장할 건 주장해야지." "우리 아버지는 세상에 대해 관조적인 면이 많아요." "그래도 너 서명한 것은 잘못한거야." "시킨 녀자가 더 나쁘죠 그죠? 그나저나 큰일이네. 맞은 거 이거 표 안나게 하 려면 어떻게 해야 되죠?" "몰라. 그냥 반창고나 하나 붙여. 그리고 너 녀자라고 하지 말고 여자라고 해. 꼭 년이라고 말하려다 바꾼 것 같잖아." "이제 잘한다고 했잖아요. 예쁜 누나님. 근데 예쁜 누나님?" "왜?" "약대생 맞아요?" "응. 학생증 보여줘?" "나 이런 모습으로 들어가면 울 아버지께 야단 맞아요. 우리 아버지 세상에 대 해서는 관조적이지만 가족 일에 대해서는 관조적이지 못해요." "무슨 말이야?" "보약까지 먹였더니 두들겨 맞고 들어와? 이러시며 야단 치실 거 분명하단 말이 에요." "넌 더 때렸다고 하면 되잖아." "누나 바보구나. 내가 이제 성인인데 누굴 두들겨 패면 집에 연락이 가지 않았 겠어요? 고등학생일 때도 파출소에서 집으로 연락이 바로 가던데."
"엉? 너 고등학생일 때 깡패였니?" 철수는 대답을 회피했다. 그냥 아주 상대방 기분을 더럽게 만드는 표정과 눈짓 을 은정이에게 보여 주고 자기 걱정만 말했다. "큰일이네. 우리 아버지는 맞고 들어 오는 걸 상당히 싫어 하시는데..." "그럼 걸어가다 잘못해서 넘어 졌다고 말씀드려. 아니면 문 열다 찍혔다고 하던 지." "아, 맞다. 그러면 되겠구나." "넌 그냥 한 평생 바보로 살아라." "자꾸 바보라고 그러지 마요. 나는 남자를 쉽게 생각하는 여자를 경멸해요." "치, 경멸받기 싫어서 오늘은 너네 집 앞에까지 태워줄까?" "됐어요. 저기 신호등 앞에서 내려 줘요. 누나는 조금만 더 가면 유턴하는 곳 있으니까 횡하니 집에 가세요. 사람 뜸한 밤에 아까 같은 일 당하면 곤혹스러울 거 아녜요." "꽤 위하는 척 한다 너?" "나는 내게 잘하는 사람에게는 잘 한다고 말씀 드렸잖습니까. 맛 있는 것도 얻 어 먹었는데." "그래. 다음 주에 학교에서 보자." "네, 조심해서 들어 가세요. 안녕." 은정이는 뛰어가는 철수를 바라 보고 있다. 그 모습이 귀여운 지 상큼한 미소 가 맺혀있다. 시간이 흘렀다. 녹음이 짙어졌고, 철수의 자취방으로 가는 길에 심어진 강냉이 의 키도 많이 자랐다. 햇살은 더 이상 따사롭지 못하다. 뜨겁다. 유월달이다. "내가 촌에 있는 학교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촌에 사는 것도 아닌데 등,하교 하면서 강냉이가 익어 가는 걸 보게 될 줄이야. 나중에 다 자라면 몇개 서리해야 겠다." 철수는 여전히 자취하는 것에 불만이 많다. 한 학기가 저물고 있다. 철수가 속한 동아리는 일 년에 두번 발행하는 회지를 만드느라 부산한 편이었다. 철수는 작년에는 수필, 꽁트, 시 부문에 걸쳐 제법 많은 양의 글을 올렸으나 올해는 꼴랑 시 한편만을 거의 십분 만에 작성하여 던 져 주었다. 당구 때문이었으리라. "앗싸!. 백 고지가 멀지 않았다. 동엽아 잘 쳤다." "한 게임 더 해." "밥 먹어야 돼." "이기고 가는 놈이 어딨냐?" "그런 말 하지말고 자네 실력을 키워. 알았나?" "80 주제에 말이 많다." "요즘 당구장에서 승헌이를 보기 힘들다?" "그 녀석 여자 친구 생겼잖아." "정말?" "부러워 하지마. 한 번 봤는데 머리 스타일도 벼락맞은 거 같구, 키도 짤막한 게 승헌이가 참 아깝다는 생각이 들더라." "야, 남,녀 관계에 아까운 게 어딨냐? 근데 진짜 아니디?" "응." "불쌍한 놈. 나는 밥 먹으러 간다. 안녕." 철수는 밥을 먹고 나서 또 당구 생각이 나 당구장으로 달려 갔다. 동엽이는 보 이지 않았다. 대신 저 구석에서 어떤 남,녀가 눈꼴 시려운 모습으로 당구를 아 주 재미없게 치고 있었다.
"여기서는 공의 약간 오른 쪽을 맞추면 돼." "이렇게?" "응. 야, 잘한다." '미친놈. 그게 잘하는 거냐? 큐대도 제대로 못잡는군. 진짜 머리 스타일 웃기 네.' 철수는 자기와 당구 칠 사람이 보이지 않자 할 수 없이 그 남,녀에게로 다가 갔 다. "야, 송승헌." "응? 어, 철수 왔구나." "누구냐?" 철수는 곁눈질을 하며 물었다. "내 여자 친구야. 이리 와. 소개 시켜 줄게." 철수는 무감각한 표정으로 승헌이 여자 친구에게 인사를 꾸벅 했다. "같은 과 친구 박철수입니다." "이 의정이에요." 철수는 한 동안 자리에 앉아 승헌이와 지 여자친구가 당구 치는 꼬락서니를 지 켜 보았다. "나는 안 끼워 줄거냐?" "얘가 실력이 안되잖아." "그럼 나는 예전에 실력이 되어서 너네들이랑 당구 쳤냐?" "니 게임비 나가는 것은 괜찮지만 얘는 그게 아니거든." "그럼 나는 뭐하냐?" "구경 해. 정 게임을 하고 싶으면 1 대 2 로 치던지." "내가 너 여자친구랑 편 먹어라구?" "미쳤냐? 너 혼자 하구 우리 둘이는 편 먹구." "싸가지 물개 털 만큼도 없는 놈." 철수는 아주 못마땅하게 쳐다 보는 승헌이 여자친구의 눈빛을 받아야 했다. '너네 둘이 떨어지기 싫다는 거야? 아니면 승헌이 욕해서 그런거야?' "박 철수. 심심하냐?" "응." "그럼 집에가 새꺄." '섧어라.' 철수에게 문득 떠 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이 섧음을 갚아 줄 수 있는 사람이었 다. "송 승헌." "왜 자꾸 우리 승헌이에게 말을 시키고 그래요?" '무서운 년.' "왜? 말해 봐." "편 게임 한 번 하자. 내 편을 데려 오겠다." "그래. 근데 동엽이나 우리과 애들은 안됀다." "여자면 되냐?" "그래. 그건 되지." "게임비에다 커피도 한잔 내기." "니가 여자와 편을 먹는다면 그렇게 하지." "알았다. 잠시만 기다려라." 철수는 기쁜 표정으로 당구장 아저씨 앞으로 갔다. "아저씨 전화 한통만 할게요." "시외 전화는 안됀다?"
"알았어요." '핸드폰은 더 비싼디? 아저씨는 핸드폰을 모르는 구나.' "여보세요?" "누나에요?" "철수니?" "응." "니가 비싼 헨드폰에다 전화를 다 하구..." "누나 아직 서울 안 갔죠?" "응. 나 정희네 방이야." "에? 거기서 자고 갈거에요?" "응." "왜?" "학회지에 오를 글들 내가 선별하잖아. 정희 도움도 좀 받구. 너도 놀러 올래?" "누나 지금 당구 한게임 쳐요." "지금? 나 조금 바쁜데." "흑흑, 제가 지금 얼마나 설움을 받고 있는지 모르죠?" "그건 또 왜?" "내 친구가 여자친구를 데려와서 내게 엄청난 설움을 주고 있어요. 그래서 누나 랑 편먹고 걔들 깨부수고 싶어요." "후후, 나랑 편 먹으면 이길 수 있니?" "그 새끼는 누나가 당구 고수인 걸 모르잖아요." "이기면 뭐가 있는데?" "게임비하고 커피 한잔." "치, 그걸로 나 같은 비싼 몸을 부르진 못하지. 넌 내게 해 줄거 없어?" "치사하다 진짜." "알았어 알았어. 그때 그 당구장?" "네. 지금 바로 와요." "정희에게 미안한데." "나중에 저도 도와줄게요." "알았어. 곧 갈게." 철수는 의기양양하게 승헌이에게로 돌아 왔다. "나중에 딴 말 하기 없기다." "나혼자 해도 이겨." "내가 좀 손해지만 같은 점수 놓고 치자. 그래야 뒷말 하지 않지." "어쭈. 너 돈 많냐? 나 200 중에서도 잘 치는 편이야." "둘 다 서른 개 놓고 치자. 나도 이제 100 정도 실력 된다." "알았어." 철수는 의미있는 미소를 지었고, 승헌이는 자기 여자 친구를 불러 작전 구상 중 이다. "자기는 공만 맞추면 돼.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게." "그래." 철수는 기대를 했다. 은정이 누나가 아주 예쁜 모습으로 나타나 처음부터 기를 꺽어 줄 것으로... 그러나. "아저씨 오랜만이에요."
"그래." "누나 여기에요. 엉?" "안녕 철수야." "옷차림이 이게 뭐야?" "이게 뭐 어때서?" "추리닝에 슬리퍼? 누나 자취생 아니잖아." "자고 갈 거라 옷 갈아 입었지." "누나 집에서도 이렇게 자요?" "아니야. 섹시한 잠옷 입고 잔다. 정희가 이것 밖에 없다잖아." 은정이의 모습은 세수를 한 탓으로 화장기도 없었고 옷차림도 남자 자취생같은 차림이었다. 그래도 당구장에 있던 많은 남자들은 은정이에게 눈길을 주고 있었 다. "승헌이 이리 와서 인사 해. 우리 동아리 친한 누나야." "안녕하세요. 철수가 좋아하는 누나에요." "네." 승헌이는 은정이를 쳐다 보더니 철수에게 귓속말을 했다. '너, 내가 전에 말했지? 나이 많은 누나하고 친해지면 빨리 늙어 임마.' '넌 사자머리하고 놀면 좋냐?' 은정이는 승헌이와 그의 여자친구의 경이로운 시선을 바라 보며 신들린 듯 당구 를 쳤다. "호호, 게임 끝났네요. 잘 쳤어요." "당구비 내고 너 나한테 커피 사내야 돼." "저 누나 얼마 치냐?" "너랑 같애." "그것 참 신기하다. 저 누나 200 더 되겠다. 나보다 당구 잘 치는 여자가 존재 할 줄이야. 나 세상 헛살았나 봐." "나 오늘은 커피 못 얻어 먹지만 꼭 사 줘야 돼. 자판기 커피 사 주면 죽을 줄 알어." "철수야 가자." "알았어요. 누나. 잘 쳤다 승헌아." 철수는 히히, 거리면서 은정이 옆을 걷고 있다. 밤 바람에 강냉이 코고는 소리 가 정겨운 길이다. "너 친구 참 잘 생겼다." "나보다는 못하죠." "호호, 그래. 어떻게 철수 보다 잘 생길수 있겠니. 근데 그런 말 다른 사람에게 는 하지 마." "누나 남자들하고 당구치러 많이 다녔죠?" "제법 다녔지." "거의 살았지 뭐." "내 당구 실력은 우리 아빠 때문에 늘었어. 다른 오해가 없기를 바래." "아빠하구요?" "우리 아빠 당구 실력이 오백이야. 나이가 있으시니까 마땅히 같이 당구 칠 상 대가 없어셔서 나를 가르치셨지. 우리 아빠 자식이라고는 나밖에 없잖아." "아빠하고 참 친한가 보네요." "그럼." "글 선별 작업은 끝났어요?" "아직 반도 못했어."
철수는 은정이를 따라 정희 누나네 방으로 갔다. 정희는 미소를 띠우며 철수를 맞아 주었다. "당구는 이겼니?" "당연하죠. 요즘 누나가 그리워요. 동아리 방도 자주 좀 나오고 해요." "알았어. 은정이 너 자고 갈거면 집에 연락해 줘." "맞다." 철수는 방에 늘려 있는 에이 4 지랑 원고지를 뒤적 거려 보았다. 자기가 쓴 시가 적힌 B5 연습지 하나가 초라하게 보였다. '또 한 소리 듣겠군.' "아빠 난데." "아버님한테 난데가 뭐야." 철수는 자기 아버지에게 깍듯한 존댓말이었기 때문에 한 말씀 하셨다. "쉿. 아빠 오늘 나 집에 못 가겠어." "..." "여기 정희네 방이야. 아까 그 놈은 정희 동생 목소리야." "..." "왠만하면 가겠는데, 나도 아빠 보고 싶지." "..." "지금 가면 가로등도 없는 깜깜한 국도를 지나쳐야 되는데? 덤프 트럭이 얼마 나 과속을 하는데. 총알 택시들도 있구 혹시 폭주족 만나게 될지도 몰라. 거기다 가 나 지금 졸려서 졸음 운전 할것 같기도 해. 그래도 오라고 하면 갈게." "..." "알았어. 내일은 꼭 집에 갈게요. 엄마에게도 잘 주무시라고 말씀해 주세요. 네." 은정이가 전화를 끊자 철수와 정희는 멀뚱하게 그녀를 쳐다만 볼 뿐이다. "갑자기 누나 부모님이 가엾단 생각이 들어요." 철수는 글을 읽다 연신 하품이었다. 오늘 당구장에서 보낸 시간이 장난이 아니 었다. 철수는 피곤했다. "저는 잠이 와서 더 이상 못있겠어요. 집에 가야 할 것 같아요." "너, 도와 준다고 했잖아." "지금 시간이 열한시를 넘었잖아요. 저 레포트도 써야 하는데..." 철수는 집으로 돌아 왔다. 그리고 당구를 오래 쳤던 탓에 지쳐 바로 침대에 쓰 러져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철수는 동아리 방에 갔다가 바로 은정이 누나에게 잡혔다. 은정이의 얼 굴이 새큼하다. "밥 사주려구요?" "아니. 이거 니가 직접 쓴 거니?" 은정이 손에는 연습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 철수가 십분만에 적어 낸 좀 성의 없는 시였다. 어쩐지 어제 저걸 보았을 때 한 소리 들을 것 같더니... 시가 서정 주의 문둥이를 닮았다. "맞는데요." "진짜? 이거 학회지에 내지 말고 그냥 나 줘." "에?" "내 맘에 들었거든.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서 그래. 나 주라." "그거 그냥 생각없이 쓴 신데." "그러니까 나 줘."
"뭐하게요."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고 했잖아." "누구요?" "넌 몰라도 돼." "밥 사줄거에요?" "사 줄게." "그럼 가져요." 잠시 삼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변신해 어제 정희의 방을 엿 보겠다. 시점 변화하 는데 불만이 계신 분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제 맘이요. 은정이와 정희는 회원들이 제출한 글들을 차근차근 읽고 있었다. "철수도 글을 제출했네?" 은정이가 철수가 낸 글을 보았다. "걔 글 참 잘 지어. 올해는 이상하게 시 한편 뿐이네." "작년에는 더 많이 냈었니?" "응." "공대생인데?" "겉모습과는 다르게 감수성이 많은 애야." 은정이는 철수가 적어 낸 시를 읽어 본다. 그리고 살핏한 미소를 머금었다. "잘 썼니?" "생각 외네. 훗!" "그래 잘 쓴다고 했잖아." "갑자기 누가 생각이 나." "누구?" "내가 좋아하는 사람." "누구 승주씨?" "응." "저 번에 휴가 나왔을 때 봤다면서." "변한게 없더라 그 사람." "곧 제대 하겠다." "응." "철수가 쓴 시가 그 사람을 생각나게 했다는 거야?" "그래." 어지러운 그리움 하나 먹고 노을따라 눈물하나 삼키고 어두운 밤하늘 나는 그믐 달 빛같은 날카로운 미소를 지었다. 멀어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생각은 나지 말아야 할텐데 노을은 매일 갈수 없는 저 산에 걸리고 달은 어지러운 밤 하늘에서 웃고 있다. 8. 8회 "오늘은 바깥 식당에서 사주네요. 허허." "선물 하나 받았잖아."
"그 시요?" "응." "그거 누나가 뺏어 간 거잖아요. 난 선물 할 마음 없었어요." "하여튼 너 계속 말대꾸하는 것은 못 고치는구나." "친하니까 그렇지. 에, 누나가 시를 좋아하는구나. 그럼 내 자주 써 줄수 있어요." "됐어." 철수는 그윽한 배를 붙들고 학교로 걸어가고 있다. "누나 수업 있어요?" "아니. 왜?" "당구 한게임 쳐요." "싫은데." "밥 값 굳었으니까 내기 당구 한게임 쳐요." "시도 선물 받았는데 그럼 가볍게 한 게임 칠까?" "그래. 선물 받았으니까 보답을 해야지." "보답은 벌써 밥으로 해결했잖아." "밥이야 자주 얻어 먹는거구." 당구장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다. 수업 빼먹고 온 놈들, 수업도 없는데 당구 때문에 내려 온 놈들. "뭘 봐?" 철수는 공이 놓여진 당구대 앞에서 큐대를 기대고 서서 약간 허무한 표정이다. "내가 누누히 말했잖아. 나이 많은 여자하고 놀면 빨리 늙는다구." 당구장 내 의자에 걸터 앉아 만화책을 보고 있던 승헌이가 그런 철수를 쳐다 보며 말을 던졌다. "니 여자친구는?" "학교 갔지." "우리 학교 학생 아니냐?" "우리 학교에 그런 이쁜이가 어딨냐?" "하기야 내 학교를 그렇게 돌아 다녀도 그렇게 특이한 애는 못봤다 참." "예쁘지?" "나한테는 그런 말 해도 다른 사람에게는 그런 말 하지 마 새꺄." "한 게임 할래?" "싫어. 그 여자 참, 자라나는 새싹을 위해서라도, 선물을 받은 기분을 생각해서라도 한 게임 져 주면 안돼나? 바로 배신 때리고 가 버리네." "그러게 나이 많은 여자하고는 놀지 말랬잖아." "조용히 새꺄. 사자머리하고 노는게." 철수는 학교를 제법 신나게 돌아 다니는 편이었다. 누나들 하고 놀면서 겨울까지 여자친구 만든다는 생각도 잊고 캠퍼스를 히히,거리며 돌아 다녔다. 철수는 졸업학년이라 바쁜 정희는 예전만큼 자주 만나지 못했으나 대신에 은정이를 자주 만날 수 있었다. 강냉이의 키가 철수의 어깨 높이까지 커지고, 에어콘이 없는 자취방에 대한 철수의 불만이 커져 가는 칠월이 되었다. 거의 모든 학과에서 시험이 끝이 나고 여름 방학에 들어 갔다. "누나!" 철수는 시험을 마치고 자취방으로 가려다 신나게 뛰어 가는 은정이 누나를 보았다. "어, 철수구나. 안녕." "어딜 그렇게 신나게 뛰어가요?" "나 시험 보러 가잖아." "도서관에 있었어요?" "응." "시험 잘 봐요."
"나 마지막 시험이거든. 두시간 후에 전화 해." "왜요?" "서울 같이 올라가게." "당구쳐야 되는디..." 철수는 방학때는 학교를 자주 나오지 않을 것이기에 짐정리를 했다. 제법 두둑하다. 전철 타야 된다면 상당히 버겁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철수는 전철을 타지 않을 것이다. '그 차가 있으니까 상당히 도움이 되네. 나도 자동차 하나 사달라고 할까? 근데 면허증이 없네.' 철수는 떠날 준비를 마쳤다. 방이 깨끗해 보인다. 주위는 지저분 할지 몰라도, 자취방 안은 오피스텔 부럽지 않았다. 최근에 유행하기 시작한 오피스텔형 자취방이었기 때문에 생긴 건 오피스텔 같이 보였다. 에어컨이 없는것만 빼고. 전화기도 없다. 티비도 없다. 자세히 보니까 없는게 많다. 철수는 은정이와 연락이 되었다. 은정이는 고맙게도 철수를 데리러 집 앞에까지 와 주었다. 철수는 드렁크에 짐을 넣고 보조석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짐이 제법 많네." "방학 때는 집에서 살아야지요. 누나는 방학 때 학교 자주 나오나요?" "나와야 될 일이 있겠지만 거의 모른 척 하지. 개강하는 주까진 아마 내려 오지 않을거야." "그럼 자주 못 보겠네요." "누나 보고 싶으면 연락하면 되잖아. 집도 알겠다. 내 연락처도 알겠다. 자주 못 볼 이유가 없잖아." "그렇네요." "언제 바보 수준을 면할래?" "보고 싶으면 항상 내가 연락해야 되나요?" "왜? 나도 연락해 줄까? 근데 나는 동네만 알지 너네 집이 어딘지도 모르고, 전화 번호도 모르잖아." "이거 아무나 가르쳐 주는 거 아닌데 울 집 전화 번호에요." "잠시만. 너 여기 헨드폰에다 입력 시키는 번호는 특별한 거다. 넌 영광으로 생각해야 돼." "헨드폰에 전화 번호가 기억이 돼요?" "헛!" "헨드폰 잠깐 줘 봐요." 철수는 또 헨드폰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아주 신기한 표정으로 말이다. "헨드폰만 보면 신기해 한다 너?" "당연하죠. 신기한 거 맞잖아요. 근데 입력된 전화 번호 보려면 어떻게 해야 되요?" "그건 개인적인 사항이기 때문에 보여 줄 수 없지." "남자들 수두룩하게 입력되어 있어서 그렇지? 안 놀릴게요." "그런거 아니야." 은정이는 입력된 전화 번호들을 보여 주었다. 입력된 전화 번호가 생각보다 적었다. "아빠, 엄마. 아버님이랑 어머님이 전화를 따로 써요?" "응. 직장이 다르니까." "어머님도 직장 생활 하세요?" "응." "이승주. 엄정희... 이승주는 여기도 있네요." "엉?" "저번에 누나 자동차 청소하면서 다이어리를 봤어요. 다른 거 안봤으니까 걱정은 하지 마시구요. 전화 번호부 제일 위에 적혀 있던 사람이라 기억해요." "뭐 봐도 별 내용은 없지만 훔쳐 보는 건 기분 나쁜 일이다." "그래서 안 봤다니까요. 근데 사진은 봤는데..." "너 다른 것도 봤지?" "안 봤어요. 사진 속에 있는 남자는 누구에요?" "너는 알 거 없어." "그 너무하네. 아무리 바보라도 바보 취급 당하는 건 기분 나빠요."
"앞으로 다이어리는 손대지 마." "다이어리 볼 일이 뭐 있다고. 흘리고 다니니까 한 번 봤지. 그 남자 누구에요? 다정하게 서로 찍은 사진을 봐서는 친한 사이같고, 잘 차고 다니는 걸 보면 과거의 남자 같고." "너 아직 나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니?" "남자 잘 차고 다니는 거요?" "그래. 이제 반년 정도 날 겪어 봤으니까 알 거 아냐." "들은 것 보다는 뭐." "나 그런 사람 아니니까 날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알았어요. 근데 사진 속 남자는 누구냐니까요?" "니가 그게 왜 궁금하니?" "가르쳐 주기 싫음 그만둬요." 철수는 삐친 척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삐쳤니?" "출발합시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조용히 갑시다." "삐쳤구나. 삐치는 것도 못하는 사람이 하면 웃길 뿐이야." "누구에요?" "으이그. 그 사람이 승주다 왜." "요즘 사귀는 사람이에요?"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하던 사람이다. 됐니?" "오잉? 누나도 그렇게 길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식으로 얘기 하지 말랬지." "그럼 애인을 놔두고 그 동안 다른 사람 사귄거에요?" "이 사람 애인 아니야. 내가 처음으로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사람인데 거절 당했었어." "누나도 차인 적이 있어요?" "차인 건 아니야. 그 후로도 간혹 만났으니까. 지금은 군에 있어. 곧 제대할거야." "의외네. 누나도 차인 적이 있단 말이야. 허허. 하기야 나정도 킹카도 미팅 나가서 죽을 쑤는데 뭘." "차인 거 아니랬잖아." "차인 쪽에서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해요. 꿋꿋하게 살면 돼요." 철수는 놀리기 위해서, 그리고 격려차 은정이 어깨에 손을 올려 다독 거려 주었다. "운전하는데 뭐하는거야. 그리고 어쭈 지금 내 어깨에 손 올린거야?" "아, 운전하고 있었구나. 쏘리." "너 많이 컸다." "운전이나 똑바로 해요." 창밖 풍경에 건물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철수는 밝은 표정으로 창 밖을 쳐다 본다. "오늘 짐이 많은데 너네 집 앞에까지 태워 줄게." "그러세요." "어딘 줄 가르쳐 줘야지 그럼." "우리 동네 알잖아요. 거기 보면 한의사 건물이 있을거에요. 거기가 우리 집이에요." "그렇게 말해서 어떻게 찾니?" "대충 근처에서 내려 줘요." "너 우리 아빠가 뭐 하시는 줄 모르지?" "당연히 모르죠." "약국 사장이다." "그 말을 갑자기 왜 하는데요?" "너네 아버님이 한의사라고 하니까." "한의사하고 약사하고 너무 안 좋은 사이로 보지 마요. 편가를 필요 없다구요." "우리 엄마는 뭐 하시는 줄 아니?" "뭐하시는 데요?"
"의사야. 약사하고 의사하고도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야." "에이, 자꾸 편가르고 있어." "좀 웃기지 않니?" "하나도 안 웃기다. 울 엄마가 뭐 하시는 줄 알아요?" "뭐하시는데?" "가정 주부시다. 웃겨요?" "안 웃겨. 썰렁 해." "마찬가지에요." 9. 9회 방학이 시작 된지 열흘 가량 지났다. 철수는 이른 아침 바깥의 소란스러움 때문 에 일어 났다. 날씨는 점점 더워져 자고 일어 나면 이마에 땀이 맺혔다. '잠 좀 자자.' 철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창 밖 풍경은 검은 아스팔트 도로가 나 있었고, 그 주위로 가정 집들이 모여 있었다. 멀리 언덕에는 높은 건물들이 보인다. "니가 이 차 주인이가? 차를 요로코롬 세워 놓으면 어쩌란 말이고. 니 이 동네 사는 사람 맞나?" 철수 뒷집 대문 앞에 하얀 차가 한대 세워져 있었다. '쌈쟁이 할매, 아마 저 차 주인이 나올 때까지 이를 갈며 새벽부터 기다리고 있 었겠지? 잘한다.' 철수의 방은 삼층이다. 하지만 쌈쟁이 할매의 목소리는 바로 곁에서 듣는 것 처 럼 선명했다. 철수는 창 밖으로 고개를 내 밀어 쌈 구경을 했다. 쌈쟁이 할매의 저력은 대단했다. 상대방이 반격할 틈을 주지 않았다. 차 주인은 반격할 기회만 찾으며 말이 없다. "차도 흰 고무 딸딸이처럼 고물이거만, 이 딴걸 여기 세워 놓는 배짱은 어디서 나왔노? 까 봐라카이." 철수는 그 할머니를 보면서 감탄을 하고 있다. "쌈쟁이 할매 화이팅!" "뭐이 디런 놈아!" 철수는 창 밖으로 고개를 내 밀어 괜히 한 소리 했다가 욕만 들어 먹고 방안으 로 몸을 숨겼다. '저 할매하고 은정이 누나를 비교했던 것은 내 잘못인 것 같다. 미안해요 누 나. 아이, 시끄러워 죽겠네. 자취방이 다 그립다.' 철수는 아침밥을 먹고 난 뒤, 늘 하던대로 일층 아버지가 경영하는 한의원으로 내려 왔다. 철수가 집에 온 뒤의 일과였다. 철수는 오전을 한약방에서 사람들 구 경하며 보내고 오후에는 집에서 음악을 듣고, 책도 보며 자기 감성에 빠져서 살 았다. 학기 중 자취할 때와는 다르게 바깥 출입을 하지 않고 집에만 틀여 박혀 지냈다. 철수는 손님 대기실 소파에 앉아 창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의미없는 미소만 짖는다. 건물 입구 쪽에 세워져 놓은 감청색 승용차 한대는 먼 지가 쌓인 채 몇 일을 움직이지 않고 세워 놓았는지 차 밑의 땅 색깔이 주변의 땅 색깔과 달랐다. 철수는 그 차를 보면서 갑자기 외출 생각이 났다. "할 일 없으면 집에 올라가 책이나 봐라. 그렇게 앉아 있으니 처량해 보인다. 이놈아." 철수의 아버지가 약재를 정리하다 그런 철민이를 보고 한 말씀 하셨다. "아버지." "왜?" "차를 왜 사셨어요?"
"타고 다닐려고 샀지." "어디로 타고 다니실건데요?" "그건 잘 모르겠다." "아버지는 매일 일층하고 삼층만 들락 거리시잖아요." "너도 요즘은 그래." "저거 그래도 명색이 제법 고급차인데, 저대로 썩히기 아깝지 않아요?" "왜? 타고 다니고 싶냐?" "네." "면허증은 있냐?" "없는데요." "그럼 나 말고는 운전할 사람 없네. 썩일 수 밖에." "아버지." "왜?" "20 만원만 주세요." "난 그렇게 큰 돈 없다." "보약 한 재 가격을 제가 아는데요. 저에게 보약 주실 생각하지 마시고 현금을 주세요." "너에게 주는 보약이야 팔다 남은 거 주는거구. 20 만원이 왜 필요한데?" "자동차 학원 등록하게요." "넌 아르바이트 같은 거 안 하냐?" "예?" "다른 집에 있는 너 또래 자식들은 자기 용돈은 자기가 번다고 하던데." "너무 하십니다 아버지. 안 그래도 적은 용돈 그것마저 안 주실려구요?" "니가 한의대만 갔어도 내가 이러지는 않지." "그러시지 마시고 20 만원만 죠요." 아버지는 뒷짐을 지신 채 철수를 꼬아 보다가 지갑을 꺼내었다. "자동차 학원 등록비가 20 만원이냐?" "잘은 모르지만 아마 그 정도일거에요." "갑자기 면허증 딸 생각은 왜 한거냐?" "저 차가 불쌍해서요." "면허증 따면 차는 빌려 줄 수 있지만 기름값은 니가 충당해라." "그러실 때 마다 제가 이집 아들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너 우리 집 귀한 아들 맞다. 그렇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이라고는 17 만원 뿐 인데?" "뒤져서 나오면 제가 가져도 돼요?" "아버지에게 무례하다 이놈아. 17 만원 받고 물러 날래? 아니면 땡전 한 푼 못받 고 물러 날래?" "17 만원 주시고 엄마께는 20 만원 줬다 그럴거죠?" "당연하쥐." "너무 하십니다. 그거라도 주세요." "한 두푼 씩 모아나야 나중에 니 장가갈 때 집이라도 하나 사주지." "나중에 잘 안해 주셔도 되니까 지금 잘해 주시면 안될까요?" "가 봐." 거리의 공기가 덥다. 하늘에 걸려 있는 해님은 따가운 햇살을 놀리 듯 내리 쬐 고 있었다. 철수의 이마와 목에는 땀송이가 피어 났다. '졸라 덥네. 집에 있을 걸.' 철수의 외출은 즐겁지 않았다. 번화가에서 별로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한 집 때문 에 얼마 걷지 않았는데도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거기에는 아니꼬운 장면도 많았
다. '저 아가씨 참 시원하게 입고 다닌다. 옆에 놈 조오컸다.' 극장가 앞에는 벌써 연인들의 데이트가 시작되고 있었다.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 어느 놈은 집에서 외로움과 싸우고 있고, 또 어느 놈들 은 직장에서 쌔가 빠지게 일하고 있을 텐데, 저 놈들은 대낮부터 여자들과 희희 낙낙 거리냐. 나는 왜 만날 여자가 없는거냐? 정희 누나는 수원에 있겠지?' 철수는 자동차 학원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나왔다. 머리를 잘래잘래 흔들었 다. '나 바본가 봐.' 철수는 자동차 학원이 어디 있는지도 알아 보고 잠시 휴식을 취할 겸 더운 햇살 을 피해 어느 커피 숖으로 들어 갔다. "아가씨, 팥빙수 하나." 철수는 팥빙수를 들면서 자리에 앉아 시원한 에어콘 바람을 맞았다. 그러다 자 기가 무엇 때문에 외출을 했는지도 까먹었다. 주위를 둘러 보며 예쁜 여자가 있 으면 유심히 쳐다 보았고, 공대생 처럼 보이는 남자가 보이면 바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혼자서 와도 괜찮네. 음악도 있고 잡지도 있으며 시원하기까지 하다. 근데 내 가 왜 여길 혼자 들어 왔을까?' 철수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극장가가 멀지 않은 탓일까, 영화 얘기를 하며 자 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참 많이 보였다. 자리는 연인들이 하나 둘 메워 갔다. 저 기 남자 둘이가 마주 보며 앉아 있는 것을 제외하곤 모두 연인들이었다. '이래서 내가 외출하기가 싫다는 거여. 불쌍한 놈들. 남자 둘 보다는 차라리 남 자 하나가 낫다.' 철수는 팥빙수가 팥 덩어리가 든 물이 되도록 앉아 있었다. 철수는 두가지를 잊 고 있었다. '나도 어딘가에 만날 수 있는 여자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오늘 내가 외출 한 목적이 뭐더라?' 철수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환한 웃음에 가까운 미소였다. '불쌍한 놈들, 나는 생각해 보니까 만날 수 있는 예쁜 여자분이 계시더라.' 철수는 공중 전화 앞에서 남자 둘이만 앉아 있는 테이블을 보며 중얼거렸다. "여보세요." "전데요. 누나." "철수?" "네." "목소리 잊어 먹겠다. 내가 전화 번호 가르쳐 준 남자 중에 너처럼 전화하지 않 았던 사람은 첨이야. 아, 첨은 아니구나." "그러면 누나가 연락을 좀 하지." "나는 체질 상 내가 먼저 연락을 못해요." "공주 티 내는 거에요?" "응." "편히 살겠네요." "그러니까 니가 연락 좀 자주 해." "잠시 잊었어요." "뭘 잊어?" "누나도 여자라는 거." "무슨 말이야? 나같은 예쁜이 보고." "에이, 진짜 동전 빨리 떨어지네." "또 통화 중에 동전 얘기다. 무슨 일로 전화 한거야? 누나가 보고 싶디?" "아, 보고 싶었다기 보다 누나가 여자라는 걸 기억하고선 전화하는 거에요."
"너 놀리는 거지?" "그게 아니고 오랜만에 외출을 했는데, 온통 연인들 투성이잖아요." "그래서?" "배가 아팠어요. 왜 내 곁엔 만날 여자가 없는거야. 이렇게 배가 아파했었는 데, 한참만에 누나를 생각해 냈지 뭐에요." "훗! 홍은정, 값이 참 많이 떨어졌나 보다. 나 제법 예쁘다는 소릴 듣는 여자니 까 잘 기억해 둬. 그건 그렇고 지금 어디야?" "여기요? 우리 동네요. 누나 안 바빠요?" "응? 내가 왜 바빠?" "남자들 만나러 다니지 않아요?" "그런 말 하지 말랬지. 나 그런 식으로 취급 받는 거 싫어." "전 누나가 예쁘니까 당연히 남자들이 불러 낼 거라 생각하고 한 말이이에요. 다른 뜻은 없었어요." "그래도 그런 말 하지 마." "진짜 안 바빠요?" "응. 나 요즘 거의 집에서만 살아. 혼자 있으니까 생각을 많이 할 수 있어 좋 아. 여유도 만끽하고." "나도 거의 집에서 살았는데." "너야 만날 사람이 없었던거구, 난 나만의 자유를 느끼기 위해 애써 외출을 피 한거야." "좋으시겠수. 근데 전화비는 자꾸 떨어지는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못한 것 같 아요."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잠깐만요. 아, 혹시 우리 동네 근처에 자동차 학원 아는 데 있어요?" "자동차 학원?" "네, 나도 면허증이나 따 보려구요." "자동차 학원에 등록하게?" "그러니까 물어 보잖아요." "면허 시험 접수는 했어?" "자동차 학원 등록도 안했는데 무슨..." "접수 해놓고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 거기 너네 동네 어디 쯤이야?" "여기요? 씨네마 천국있는 곳 건너 편 어느 커피숍이에요." "혼자 있는거지?" "네." "혼자라면서 커피숖에 왜 갔는데?" "더워서요." "오랜만에 외출이나 해 볼까 그럼." "하세요." "한 시간만 시간을 줘. 한 시간 뒤에 그 곳 길 가에 나와 있어." "나 보러 오려구요?" "응." "그럼 조심해서 오세요. 안녕." "야, 바로 끊을거야?" '오면 만나서 얘기하면 되지. 우쒸, 고거 얘기했다고 오백원이 날아 갔네. 헨드 폰 있는 사람은 가급적 사귀지 말자. 쩝.' 철수는 그냥 있기가 미안했는지 팥빙수를 하나 더 시켜 먹었다. 아까 보다 표정 엔 너그러움이 보인다. 커피 숖으로 들어 오는 여인들을 보면서도 다소 관조적일 수 있었다.
'나도 여자 만날 건데 뭘. 저들이 우릴 보면 누나, 동생 사인 줄 어떻게 알겠 냐. 헤헤.' 팥빙수를 두그릇을 해치운 철수가 바깥으로 나갔다. 햇살을 여전히 놀리 듯 따 갑다. 철수는 오래 기다리지 않고 은정이를 만날 수 있었다. "하하, 누나 참 예뻐 보이고 좋은데." "무슨 말 하려고 그래?" "선글라스는 더 멋있어요. 나도 한 번 써보고 싶어요." "집에 있으면서도 변한 게 없구나." "누나 반가워요." "그래. 타라." "그러지요." 은정이는 아무말 묻지 않고 차를 몰았다. "어디 가는데요?" "너 사진은 있니?" "사진도 필요하나요?" "하긴 거기서 찍으면 되지." "어디 가는데요?" "면허 시험장." "아직 자동차 학원 등록도 안했다니까." "오래 기다려야 된댔잖아. 자동차 학원 다 마쳐도 시험 보기 힘들거야." "그래요?" "너 누나 보고 싶었지?" "에이, 아까 지나가는 여자들 보고 겨우 생각해 냈다니까." "내게 잘한다고 얘기 했던 거 같은데?" "아, 맞다. 이른 새벽을 그리워 하는 샛별같은 심정으로 누나를 보고 싶어 했었 어요." "호호." "근데 누나는 애인 없어요?" "잘 나가다 왜 삼천포로 빠지니?" "그 생각해 보니까 말인데요." "뭘?" "내가 부른다고 쪼르르 달려 나오는 것 봐서는 누나 인기인 아닌 것 같어." "쪼르르 달려 나와?" "요즘은 사귀는 사람 없어요?" "없다. 됐니?" "누나 좋다고 따라 다니는 사람도 없어요?" "없어. 참한 남자 하나 소개 시켜 주게?" "누나에게 맞는 상대는 찾기가 힘들겠어요." "누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이승주씨요?" "응, 그 사람 곧 제대할 거야." "그 사람 군대 가 있는 동안 다른 남자 사귀고 그랬던 거였어요?" "너 차에서 내리고 싶니?" "아니요. 그 사람에게는 차였다면서요." "차인 거 아니라니까." "어떤 사람이에요?" "궁금하니?" "별로 궁금하지는 않지만, 응 누나가 먼저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다면 아주 잘 난 놈 같아서요."
"놈? 그 사람 잘나지 않았어.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났는데 나보다 한 학년 위였 었어. 그 사람이 재수하고 나서부터는 그냥 친구처럼 지냈지." "운전이나 해요." "왜 듣기 싫어?" "뻔한 스토리네. 친구에게 감정이 생기면 어색해 진다. 남녀간에 친구가 어딨 냐. 그냥 처음부터 연인으로 사귀지 친구는 무슨." "그래 말 참 잘한다." "차였는데 만날 용기가 나요?" "쌓였던 정이 있잖아. 나 그 사람처럼 오래 알고 지내는 남자가 없어." "다음에 내가 교육을 좀 해 드릴게요." "어린 게 뭘 안다고. 여자친구도 없으면서." "없기 때문에 생각을 많이 해서 이론에는 밝아요." "잘났다." "정희 누나도 내 시간나면 교육을 좀 시켜야 되는데, 수강생이 둘로 늘었구만 쩝." "정희 걔, 아무래도 남자친구 때문에 상처 받을거야." "왜요?" "그런 느낌이 들어. 나와 비슷하거든." "무슨 말이에요?" 오후의 햇살이 기울 거리고 있다. 방학을 맞이하고 철수가 첫 외출을 한 것은 은정이와 함께였다. 10. 10 회 방학이 깊었다. 철수는 열심히 운전 학원을 다니며 더위와 싸웠다. 아직 까지 철 수와 은정이 사이는 친한 선,후배 관계의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참 멀었 다.(이제는... 처럼 고민이 되기도 한다. 언제 28 살까지 진행시키나?) "아, 은정씨네 집입니까?" "그런데요. 근데 너 누나에게 은정씨가 뭐냐?" "어, 내 목소리를 아네요." "왠일이야? 집에다 전화를 다하고." "집 전화는 싸잖아요. 누나 엿 사줘요." "엿? 전화해서 대뜸 하는 말이 엿이야?" "면허 시험날이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그런 것도 엿받아 먹니?" "삼차까지 있는 어려운 시험이란 말입니다. 국가 고시급이에요" "그래, 나중에 사 줄게. 너처럼 그렇게 바라는 걸 말해 주는 게 오히려 낫겠 다." "무슨 말입니까?" "그런게 있어." "전 호박엿을 좋아합니다." "너무 많이 바래도 싫어." "싫어도 할 수 없지요. 잘 사세요." "그래." "어? 오랜만에 전화 했는데 오늘은 만나자는 소리가 없네요." "너 만나서 뭐하게?" "우이쒸. 잘 살아요." "그래 다음에 내가 연락할게."
철수는 조금 섭했다. 철수는 학원도 끝이 나 달리 할 일이 마땅히 없었다. 책가방을 짊어 지고 학교 를 가 볼 생각에 집을 나섰다. 집 앞의 승용차는 여전히 먼지만 머금은 채 복지 부동이다. ''조금만 기다려라.'' 두 시간의 전철 여행은 그렇게 즐겁지 않았다. 삼호선에서 이호선으로 다시 국 철로, 갈아 탈 때마다 점점 더워졌다. ''갈 때는 조금씩 시원해 지겠군.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할머니 여기 앉으세요." 철수는 국철 구간에서 겨우 잡은 좌석까지 어떤 할머니에게 양보해 주었다. 철 수는 지금은 즐겁지 않지만 뭔가 즐거운 일이 있을 거란 기대를 가지고 학교로 향했다. 철수는 눅눅해 진 자기 방 청소를 하고 당구장, 동아리 방, 도서관 등 아는 놈 들을 찾기 위해 부지런히 돌아 다녔으나 허탕만 쳤다. '너무하네. 아무리 방학이래도 학생이 학교를 나와야지. 괜히 내려 왔다 씨.' 철수는 투덜 거리다 약대앞 그늘 진 곳에 주저 앉았다. "누나야." 철수는 주저 앉아 있다가 약대 건물에서 나오는 정희를 보고 소리쳤다. "응? 철수 니가 학교에는 왠일이니?" "누나! 보고 싶었어요. 요즘은 왜 연락이 되지 않았을까?" "나 보러 내려 왔니?" "그럼요." 철수는 눈만 껌벅 거리면서 거짓말로 답을 했다. "나 오늘 서울 갈건데." "집에 갈 거에요?" "그것 보다 은정이가 나 좀 보자고 해서." "오늘 은정이 누나하고 연락했었는데." "은정이하고는 자주 연락하나 보구나." "누나보다는 자주 하지만 그렇게 잦은 편은 아니에요. 누나는 학기중 일 때처 럼 계속 자취방에 있었던 거에요?" "응." "그럼 자주 내려 와 볼 걸 그랬나?" "너 내려 와도 볼 시간이 별로 없었을거야." "은정이 누나 보고 내려 오라고 그래요. 차도 있는 사람이... 왜 바쁜 누나가 올라가요?" "어짜피 오늘 올라가면 당분간 여기 내려 오지 않을거야. 그리고 은정이만 보 는 게 아니라 누구 하나 같이 만날 사람이 있거든." "누구요?" "은정이 남자 친구." "남자 친구? 은정이 누나가 또 남자를 사귀었어요?" "아니야.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남자인 친구. 얼마전에 제대했었어. 혼자서 만 나면 될텐데, 어색할 것 같다고 나더러 꼭 나오래." "혹시 승주라는 사람?" "너 아는구나. 은정이가 얘기해 주던?" "구체적으로 얘기해 주지는 않았지만 대충. 누나도 그 사람 알아요?" "같이 자주 만났었어." "누나?"
"왜?" "나도 따라 가면 안될까?" "너도?" "짝이 안 맞잖아요. 저거 둘이만 놀면 누나가 외로울 것 같아서 내가 옆에 있 어 주려구." "호호, 은정이가 좋아할까?" "걔가 무슨 상관이여." "너 또 누나보고." "참, 누나는 애인 안 만나요?" "요즘 서로가 좀 바빠서." "방학인데 뭐가 바빠? 아참, 그 사람은 직장인이구나." "흠." "같이 가요." "그럴까? 그러지 뭐."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철수는 정희 누나와 전철 좌석에 나란히 앉아 서울로 돌아 왔다. 옅은 미소만 지으며 먼 창가를 바라 본채 다소곳이 앉아 있는 정희누나의 모습은 은정이 누나 보다 훨씬 여자다와 보였다. "은정이 누나하고 있으면 누나가 손해를 많이 보겠다." "왜?" "누나하고 은정이 누나하고 친자매라고 가정하면 누나가 언니고 은정이 누나가 동생일 것 같거든요. 누나가 은정이 누나 투정을 많이 받아 주고 할 것 같아요." "흠, 그렇지만은 않아." "은정이 누나는 자기 주장은 강해도 실수를 많이 할 것 같아요. 누나는 소심한 것 같아도 속이 깊을 것 같고." "훗! 좀 더 겪어 봐. 속은 오히려 은정이 걔가 더 깊어. 오늘 승주라는 사람을 대하는 은정이는 니가 지금까지 보던 은정이와는 조금 다를 걸?" "은정이 누나가 그 사람에게 차였다면서요?" "은정이가 그렇게 말하던?" "좋아한다고 고백했다가 거절당했으면 차인 거 맞잖아요." "많이 달라." "뭐가 달라요." "다르다니까. 그 사람 은정이를 참 좋아해." 철수는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생각하더니 강렬한 눈빛으로 정희를 바라 보았다. "누나, 나 누나하고 사귀고 싶어요." "응? 지금 농담하는 거니?" "농담이라니요. 연하라 생각하지 말고 나를 애인으로 받아드리면 안될까?" 철수의 표정이 느끼하게 바뀌었다. 정희는 갑작스런 철수의 행동에 당혹스럽 다. 주위에는 사람들도 많았다. "지금 뭐하는거야." 정희는 주위 사람들을 둘러 보며 표정이 어색하다. "나 누나 많이 좋아한다 말이에요. 누나도 나 좋아하잖아요." "그건 널 귀여운 동생이라 생각하니까 그런거구." "에이씨 뽀뽀까지 했는데..." 주위에 정희와 철수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제법 생겼다. "너 왜 그래?" "내가 싫은 거에요?" "자꾸 이러면 싫어할거야."
"지금 내가 싫은 건 아니잖아요?" "장난하는거야? 진심이야?" 정희의 표정이 점점 어색해지는 것과는 반대로 철수의 표정은 갑자기 예전 모습 으로 돌아 왔다. "이게 바로 차이는 거에요. 누나가 나를 싫어 하지는 않지만 방금 태도에서 보 듯이 날 받아 드릴 수 없다는 그 모습. 실제 상황이었으면 아마 내 마음은 찢어 졌을 거에요. 은정이 누나도 차인 거 맞다니까." 정희는 다소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그거 설명하려고 연기 한거야?" "네. 긴장 풀어요. 내 누누히 말하지만 연상에는 관심 없어요." "너, 정말." 정희는 눈짓으로 주위 사람들을 가리킨다. 철수는 눈을 껌벅 거렸다. "보는 사람들이 많았네요." "너랑 같이 못다니겠다 정말." "좀 쪽팔리네요." 전철은 방금 잠원역을 지났다. 정희가 철수의 팔을 붙잡아 일어 섰다. "여기서 내려요?" "응." "이 근처에서 만날 거에요?" "응." "우리 집에서 엄청 가깝네요." "그렇네." "그러면 나도 좀 데리고 가지 쩝." "데리고 가잖아." "누나 말고 은정이 누나요." 정희와 철수는 약속을 잡아 놓은 어느 커피숖으로 들어 갔다. 은정이는 아직 오 지 않았다. "아무도 안 왔네." "우리가 조금 일찍 왔어요." "저기 창가에 앉자." "그러지요." 창 밖에는 서서히 노을이 물들고 있었다. 코팅이 되어 있는 창이라 실제 바깥 보다 많이 어두워 보였다. 가로등이 켜지지 않은 바깥은 마음을 다소 가라 앉히 는 색이다. "너 왜 내 옆에 앉아?" "거 둘이 오면 같이 앉혀야죠." "어색할텐데." "내가 아까 이상한 짓 했다고 어색하단 말이에요?" "우리 말고 여기 올 사람들." "진짜 차고 차였던 사이 맞나 보네." "그래 니 말대로라면 그렇다." 승주라는 사람 보다 은정이가 먼저 커피숖으로 들어 왔다. 은정이의 모습은 가벼 운 캐주얼 복장과 거의 화장기도 없는 얼굴로 많이 어려 보이는 모습이다. "넌 왜 왔어?" "정희 누나가 꼭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 왔어요." 정희의 표정이 또 어이 없어 보인다. "내가?"
"아니 내가 꼭 따라 가고 싶어서 따라 왔어요." "얘를 왜 데리고 왔니? 그리고 너네 둘이 왜 나란히 앉아 있어?" "오늘 전화에서도 섭한 말 하시더니." "너 나하고 자리 바꿔 빨리." "싫어요. 나는 정희 누나가 좋단 말이에요." 정희는 웃을 뿐이다. "너네 둘이 나 모르는 사이에 제법 친해졌나 보다." 철수는 결국 넓은 자리를 독차지 하고선 혼자 앉게 되었다. "은정이 누나 오늘은 제법 어려 보이네요." "고맙다." "나 여기 있어도 돼요?" "이미 와 놓고선 그런 말 하고 싶니?" "여기 올 사람이 어색하지 않을까요?" "괜찮아." 저기 건너 편에 앉아 있는 사람의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연기로 다 변해 버릴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철수는 사람들이 들어 올 때마다 변하는 은정이 누나의 시선을 살폈다. 은정이 누나의 시선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현관 쪽으로 향하자 철수도 현관쪽으로 눈을 돌렸다. 짧은 머리가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 을 알려주는 청년 하나가 들어 서서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철수와 비슷한 키와 체구다. 철수는 그 사람의 표정에 긴장이 스려 있다는 것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은정이의 시선에도 긴장이 스려 있었다. "여기에요." 그 사람에게 소리 친 사람은 정희였다. 그 사람이 철수가 앉은 자리로 다가왔 다. 은정이가 일어 서자 철수도 따라 일어섰다. "오랜만이네." "그래. 정희씨도 오랜만이네요." "저하고는 이년만에 처음이죠?" "저하고는 평생 처음이죠?" "누구?" 철수는 유심히 자기가 아는 누나들과 인사를 나누는 그 사람을 살펴 보았다. '사진이 훨씬 잘 나왔네.' "안녕하십니까. 박철수라고 합니다. 제가 훨씬 동생이니까 부담 갖지 마십시 오." 11. 11 회 철수는 악몽이 되살아 나고 있다. 철수는 맞은 편에 여자 둘이를 마주하고 옆에 는 남자를 앉혔다. 꼭 미팅하는 모양이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때 누굴 데려가고 싶을까? 참, 나는 내가 따라 왔구나.' 철수는 예전 미팅에서 싸가지 없다는 소리를 들은 기억을 상기했다. 되도록 조 용히 있을 것이라 맘 먹었다. 철수 맞은 편 은정이의 얼굴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철수 옆의 승주라는 사람의 표정도 그렇게 자연스럽지 못했다. 철수는 자연스럽다. 은정이 누나의 외모는 분 명 90 년대 모양이지만 태도는 70 년대 모양같다. "제대한 지 일주일 됐지?" "응." "그런데 어제가 되어서야 연락 했던거야?" "흠. 조금 바빴어. 잘 살았니?"
승주의 말투는 상당히 조심스럽다. "그건 내가 물어야 되는 것 아니니?" 은정이는 팔장을 끼고 앉아 있고, 승주는 비어 있는 물컵에 손이 자주 간다. "이름이 철수라고 했어요?" 승주는 무얼 말할까 고민하더니 괜히 철수에게 말을 붙혔다. "네. 말 놓으세요. 전 은정이 누나 후배에요. 제가 형보다 세살이나 어립니다." "나중에 낯이 익으면 그때 놓지요." "둘이 나중에 따로 만날거야? 아니면 날 계속 보겠단 소리야?" 은정이가 승주에게 무안을 주었다. 정희는 창밖을 보며 어둠과 조명 불빛과 그 리고 먼지가 함께 낀 노을을 구경하고 있다. "승주씨는 예전 보다 보기가 좋아. 그땐 너무 말랐었어." "흠." "아무리 휴가 때 한 번 만났다지만 내게 궁금한 것 없어?" "잘 살았니?" "그건 아까 물었었잖아." "그때 그 사람하고는 계속 만나니?" "누구? 우리 빌라에 산다는 사람? 그 사람 자기 혼자서 그러는 거라고 했잖아." '그때 날 때린 놈을 이 형도 만났었구만. 그 놈이 말했던 군복 입고 있던 놈은 이 형을 말했던 것이군.' 은정이와 승주는 서로 오랜 만에 만난 사람들 치고는 별 의미 없는 말들만 주 고 받았다. 정희는 창가에 앉아 하품까지 하며 창 밖 어두워 진 풍경을 쳐다 보 고 있다. 의외로 철수는 승주와 은정이의 말들을 유심히 듣고 있다. "내가 부담스러워?" "조금." "승주씨." "그렇게 부르지 마라 야." "오빠 소리도 어색하다며." "그냥 친구처럼 대해." "아직도 그때 내가 했던 말이 한순간 감정에 못이겨 한 말이라고 생각해?" 승주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누나가 뭐라고 말했는데요?" 철수가 승주를 보며 물었다. 철수는 분위기 파악을 못했다. 은정이가 철수를 보 며 눈을 흘겼다. "넌 가만히 있어." "흠." '이 형은 왜 자꾸 어색한 미소를 짓는거야. 그거 잘못하면 비웃음으로 비춰 질 수도 있는데...' "아직 내가 친구 이상으로는 부담스러워?" "흠." "그렇게 웃지 마." '그것 봐요. 한 소리 듣잖아.' "그냥 친구가 편해. 친구로 있는 게 널 가장 오래토록 편하게 만날 수 있는 길 인 것 같아." "왜 사람이 그리 소극적이야." 은정이가 그 말을 했을 때 철수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정희가 발로 철수의 다리를 쳤기 때문이다. 정희가 나가자는 눈짓을 보낸다. "조금만 더 들어 보구요. 아얏!"
정희가 이번에 찬 것은 조금 전 보다 훨씬 강한 발길 짓이었다. 정희가 은정이 를 보고 아주 크고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이제 가 봐야 겠다." '은정이 누나 참 개인적이네. 불렀을 때는 언제고, 이제는 그냥 가라는 듯 아무 말 없네.' "나도 가야 돼요?" "아니 더 있어도 돼요." 승주는 철수를 있게 하고 싶었지만 정희가 철수의 팔을 잡고선 끌고 나가려 했 다. "쟈스트 모우먼트!" "뭐?" "갈 때 가더라도 한 마디만 하고 갈게요. 내가 미팅에서 수없이 깨지고 나서 터 득한거에요. 말해도 돼요?" 정희는 팔을 놓았다. 철수가 정신이 없어 보여도 간혹 일리 있는 말들을 내 뱉 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빨리 말해." "미팅에서 상대방이 어색한 것은 공유한 기억이 없기 때문이지요. 상대방이 편 하게 느껴질 때까지 같이 나눌 수 있는 두 사람 사이의 기억이 필요하다고 봅니 다. 음, 좋은 말이다. 그 기억은 추억이 될 수 있어요. 추억은 나중에 좋은 그리 움이 되지요. 두 사람 보아하니 추억이 될 만한 기억을 많이 공유하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 서로가 별로 편하게 보여지지 않아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잘해 봐요. 본론은 잘해 보라는 거지요. 커피 값은 누나가 내고 2 차는 형이 내세 요. 안녕." 철수와 정희는 커피숖을 나왔다. "누나는 이제 어디 갈거에요?" "집에 가야지." "저 둘 서로 친했던 사이 맞아요?" "응." "내가 보기에는 별로인 것 같은데?" "둘이 좀 문제가 있긴 하지." "누나 배 고프지 않아요?" "조금 고프긴 하다." "햄버거라도 하나 먹고 가요. 내가 최고급 햄버거 하나 사 드릴게요." "진짜?" "얻어 먹으면 더 좋지만 나도 햄버거 정도는 사 줄수 있어요." "그럼 하나 먹고 가지 뭐." 근처에 패스트 푸드점이 많았다. 정희는 먼저 가 자리를 잡았고 철수는 주문한 것들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정 희가 있는 곳으로 왔다. "맛있게 드세요." "그래. 아까 지겨워 죽는 줄 알았다." "나는 별로 지겨운 줄은 몰랐어요." "이제 니가 은정이에게 맘이 많이 가 있기 때문이야." "그런가요?" "그럼. 니가 승주씨에게 관심이 있어서 그네들이 하는 말 유심히 들은 것은 아 니잖아." "맞나 보네요."
서로 배가 고팠긴 고팠나 보다. 아무말 없이 햄버거 하나를 해치웠다. "넵킨 좀 갖다 줄래?" "저에게 화장지 있어요." "고마워." "누나. 은정이 누나가 체인징 파트너라고 했잖아요." "응. 하지만 실제로는 은정이 걔도 일편단심 형이야." "무슨 말이야." "은정이 쟤는 친구가 별로 없어. 좀 잘나 보이잖아. 그래서 그거에 대한 보상 심리로 자기가 관심이 있고 상대방이 잘해 주면 상당히 잘해 주지. 그리고 또 한 편으로 얼음같이 차가울 때도 많아. 그 태도 때문에 은정이와 친해진 남자들은 잘해 줄 땐 착각을 하고 차가워 졌을 때 마음을 아파했지." "오호. 은정이 누나 말이 대충 맞네요." "그런셈이지. 하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자주 연인을 바꾸는 여자처럼 보이지. 그 래서 친구는 더 없어지고." "좀 가엽네요." "뭐 자기가 가엾단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별로 가엾진 않아." "누나는 친한 친구라면서 은정이 누나를 내게 처음 소개할 때 체인징 파트너라 고 했잖아요. 친구면 변명을 해 주어야죠." "내 맘이다. 걔 그 버릇은 고쳐야 돼. 쟤, 남자들이 자기에게 잘 넘어 오니까 아무나 금방 친구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 "그건 별로 안좋은 생각이지요. 난 남자를 쉽게 생각하는 여자는 진짜 싫어요. 암. 그리고 사람은 오래 될수록 좋지요." "그래. 주위의 가벼운 사람 여러 명은 공허함만 주고 더 외로움을 타게 만들 수 도 있어." "그럼 아까 승주씨는 뭐에요?" "예외." "에?" "승주씨는 모든 면에 있어 예외야." "좀 쉽게 말해요." "은정이에게 나보다 더 친했던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 나보다 먼저 알고 있었던 사람이구." "그건 대충 알아요. 왜 저렇게 어색한 사이가 되었냐구요." "은정이가 승주씨를 좋아하는 것은 확실해. 근데 그걸 승주씨는 못 믿지. 솔직 히 승주씨 다른 사람들이 보면 은정이에게 부족한 면이 많아 보여. 그걸 승주씨 는 알지. 그리고 승주씨도 은정이가 체인징 파트너라는 걸 알아. 여자인 내가 은 정일 이해하는 것과 남자인 승주씨가 그걸 이해하는 것은 많이 달랐나 봐.승주 씨가 자주 마음을 다쳤어. 승주씨는 성격이 또 내성적이야. 은정이가 다른 남자 에게 자기 보다 더 친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씩 하나씩 마음에 쌓아만 두고 아파했을거야. 나는 그런 은정이의 태도가 단지 친근함의 표시 정도로만 보 였는데 승주씨는 그게 아니었겠지." "아, 그랬구나." "대충 이해가 되니?" "아니요." "승주씨는 다른 남자들 처럼 은정이에게 적극적이지 못했고, 은정이는 그런 승 주씨에게 또 마음을 다쳤어. 은정이가 제일 좋아하는 남자가 승주씨이고, 승주씨 도 은정이를 사랑하는 것 같어. 근데 자꾸 승주씨가 은정이를 피하는 인상을 주 었어. 그건 나도 느꼈지. 그래서 은정이가 대뜸 먼저 자기 마음을 고백을 했어. 그 후로 계속 어색한 편이야. 승주씨가 냉담한 반응을 보였거든. 또 중간에 승주 씨가 군대를 가 버렸잖니. 이제 대충 알겠니?"
"네. 둘이 성격이 안맞네요." "몰라." "누나는 잘돼가요?" "흠." '그렇게 웃으면 비웃음 같다니까. 아니면 한 발 물러선 관조적인 태도 같아 보 이구.' 방학이 끝이 나고 있다. 철수는 방학 동안 뿌듯한 일을 만들고 싶었으나 실패했 다. "여보세요." "저에요. 제 목소리 알죠?" "철수구나. 꽤 쌀쌀한 어투다?" "누나 때문이에요." "뭘? 오랜만에 전화 해 놓구선 왜 그래?" "내가 누나보고 엿 사달라고 했어요? 안 했어요?" "아, 맞다. 너 시험 언제 보니?" "오늘 필기 일등하고, 코스까지 떡 합격을 했는데, 주행에서 바로 떨어 졌잖아 요. 누나가 엿만 사주었어도..." "오늘 시험 본거야? 연락을 하지." "에이, 얻어 먹는 처지에 조를 순 없잖아요." "에그. 졸라도 되니까 누나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승주형은 자주 만났어요?" "아니. 하지만 간혹 만날거야. 네 말대로 추억이 많은 사람이야." "잘 살아요." "그 말만 하고 전화 끊을거야?" "누나 목소리가 제법 차분하네요. 곧 개강이니까 학교에서 봐요. 다음 시험때 는 엿 꼭 사주세요." "알았어. 내일 한 번 볼래?" "싫어요. 내일 학교 가 봐야 돼요." "흠. 너까지 왜 그래?" "에? 제 원래 태도가 이랬는데?" "그랬니? 오늘 내가 그걸 못 받아 들이나 보다." "목소리가 힘이 없네요. 힘내서 잘 살아요. 개강하면 봅시다. 안녕." "그래. 엿 사주지 못한 거 미안해." "괜찮아요." 12. 12 회 오랜 기다림과 방황 끝에 나는 내일 서울을 뒤로하고 수원 저기 촌구석으로 유 학을 떠날 것이다. 방학이 끝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야한다. 섧다. 다른 놈 들은 고향 내려 갔다가 개강이라 서울로 올라 오는데, 나는 반대로 내려가야 하 다니... 여기서 제가 누군지 궁금해 하시는 분이 있을 줄로 압니다.박철수. 철수가 접 니다. 작가를 사칭한 이모씨가 광고 클릭수가 50 번도 넘지 않는다고 글 쓰는 걸 포기할까 생각 중이랍니다. 밥 벌어 먹기 위해 직장 구해야 되기 때문에 바쁘답 니다. 쩝. 그래서 시점이 바뀌었습니다. 학교 가기가 예전 보다 조금 즐거운 것은 친한 누나들이 있기 때문일까? 방학
동안 당구실력을 100 으로 만든 뿌듯함 때문일까? 가을 하늘은 분위기가 있어 좋다. 가만 아직 팔월달이구나. 그럼 아침 하늘은 시원해서 좋다. 11 시도 아침은 아침이지 암. 어제 밤 습기 찬 자취방에 들어 갔 을 때는 기분이 울적했지만 오늘 아침 학생들이 많은 교정의 모습은 더없이 해맑 다. "나 잡아 봐라." 세상엔 참 제정신 못 갖고 사는 년, 아니 녀자들이 많다. 무슨 아침부터 교정에 서 저 지랄이냐? 새내기인 듯한 소녀 둘이가 장난을 치며 어린 아이처럼 뛰어 간 다. 농대 앞의 잔디 밭에는 아침부터 고무줄 놀이를 하는 여학생들이 보였다. 방 학 때 더위를 너무 많이 먹었나? 자꾸 헛것이 보인다. 요즘은 대학생들도 고무 줄 놀이를 하나? 학기 초는 휴강하는 수업이 많다. 강의실 보다는 저기 여학생들처럼 잔디밭에 서 고무줄 놀이를 하거나, 교수들 차 세워 놓은 곳에서 족구를 차거나, 또는 공 중 전화기 붙잡고 휴강됐다는 거 자랑하는 놈들이 대부분이다. 나도 마찬가지 다. 배울 책도 없는 전공 과목이 수업을 할 리가 없다. 멀리 보이는 공대는 왠 지 가기가 싫었다. 밥 할때까지 학생 회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내 주위로 몇 사람 더 쪼그려 앉아 있다. 대부분 자취생일테지? 내가 아는 놈들은 하나도 지나 가지 않았다. 눈에 익은 승용차 한 대가 내 앞에 섰다. 고개를 들어 보니 유리 창이 부드럽 게 내려가고 있다. "철수야? 너 거기서 뭐해?" 약간 거만한 듯한 예쁜 얼굴. 황금 빛 태양 빛을 받아 은빛 찬란한 외제 승용 차. 연상만 아니었어도 내 아주 반가워 했을 여자다. "누나 왔어요? 오랜만이네." "응. 나 반갑지 않니? 반가운 사람 만났으면 일어 나야지?" 반가운 사람 만난 태도가 유리창만 내리고 고개만 내밀어 가소롭게 쳐다 보는 것인가. 그 승주라는 사람하고는 잘 되었는지 모르겠다. 은정이 누나의 얼굴 표 정이 밝다. "일어 나서 뭐 하게요?" "밥 먹었니?" "지금 기다리고 있잖아요." "학생 식당 밥?" "네." "잘 먹고 수업 잘 받아라. 앞으로 나 보게되면 반가운 척 해라." 뭐야 저거, 겨우 그거 물어 보려고 내 앞에 차를 세웠단 말이야. 차 뒷 유리를 통하여 손을 흔드는 은정이 누나의 모습은 정말 얄밉다. 방학 동안 학생 식당이 많이 바뀌었다. 분명 네모난 돈까스였는데, 어느새 동그 랗게 변했다. 그리고 값도 1200 원에서 1500 원으로 올랐다. 양식은 일주일에 한 번만 사먹어야 겠다. 개강 첫 주는 개강 파티 한 번 한 것과 은정이 누나 한 번 본 것 말고는 당구장 에서 살았던 것 같다. 개강을 했지만 정희 누나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금요일날 서울로 올라 갈까 망설였던 나는 당구 꼬임에 빠져 하룻 밤 더 자취 방 신세를 지게 되었다. 당구를 끝내고 커피나 한 잔 얻어 먹을까 하여 정희 누 나네 방을 찾았지만 그녀는 없었다. 엔터테이먼트라고는 컴퓨터 하나 밖에 없는 삭막한 내 방에서의 깊은 밤은 잠자 는 것 말고는 할 것이 없다. 밖에는 여름의 끝을 알리는 비가 주섬주섬 내리기 시작했다. 이런 날 내 오피스텔을 가장한 자취방 앞 길은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음산한 분위기를 마련해 준다. 이젠 내 키보다 더 큰 수수밭의 풍경은 언제 어디 서 무엇이 나올 지 모르는 무서운 모습이다. 아직은 덥다. 그리고 비가 오니 습 기가 차 잠이 잘 오지 않는다. 불을 꺼 놓은 밤, 시계 소리와 빗방울 소리가 또 한 음산하다. 그리고 밖에서 들리는 또박 또박 발자국 소리. 그리고 내 방 근처 서 멈추어 선 구두 발자국 소리. 겁난다. 씨바 집에 갈 걸. "딩동!" 뭐야? 지금 시각 새벽 열두시 35 분. 나를 찾아 올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세요?" 밖에서는 대답이 없다. 문을 열기가 두렵다. "딩동, 딩동, 딩동!" "누구세요?" 또 대답이 없다. 마음을 가다듬고 문을 열어 보았다. 시크먼 물체가 문에 기대 어 서 있다가 내 앞으로 푹 쓰러진다. 심장이 멎는 듯 했다. 내 품에는 지금 얼 굴 없는 긴 머리, 입에서는 음냐, 음냐 소리까지 내는 검은 물체가 있다. 향기 좋은 냄새도 있지만 또한 고약한 소주 냄새도 있다. 나는 놀라 뒤로 물러 섰고 내게 기대었던 시크먼 물체는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졸라 겁이 났다. 마음을 가 다듬고 불을 켰다. 이 여자가 진짜. 참 이지적이고 멋있는 외모를 가졌던 저 여자의 지금 모습은 마냥 비웃어 주고 싶은 모습이다. 내 방바닥에 쓰러져 있던 검은 물체는 검은 자 켓과 검은 바지를 입고 술에 취한 은정이 누나였다. "누나 왜 그래요. 여기 왜 왔어요?" 엎드려 자고 있는 여자에게 내가 하는 말이 들릴 리 없다. 들었나 보다. 누나 가 히죽 웃으며 방 바닥에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핸드백을 뒤지더니 자동 차 열쇠를 꺼낸다. 뭐 할려고 저러지? "정희가 없어. 미안한데 넌 내 차에 가서 자. 음냐." 은정이 누나는 열쇠를 던져 주며 또 방바닥에 픽 쓰러졌다. 저게 날 믿는 행동 일까? 아니면 무시하는 행동일까? 나도 남자기 때문에 확 덮쳐 버릴까 하는 생각 도 했다. 앞으로 배 고플 때 저 여자만큼 밥을 자주 사 줄 여자는 없을 것 같 다. 그래도 열쇠 건네 주며 날 자기차에 가서 자라는 말은 심히 기분 나쁘다. 자 기 맘대로 찾아 와서 자기 맘대로 날 내 쫏는 행동은 참을 수 없다. 발로 엎드 려 있는 은정이 누나의 허벅지를 툭툭 건드려 보았다. 반응을 살피기 위해서다. 왜 내 방을 찾아 온겨. "박철수!" "네?" 누나가 벌떡 일어나더니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리고 다시 푹 쓰러진다. 한 번 더 해 볼까? 툭,툭! "박척수!" "네?" 재밌네. 하지만 더런 땅바닥에 누워 자는 은정이 누나의 모습은 좀 가엾다. 누나 앞에 가 앉았다. "오해 하지 마세요." "응." 그냥 저대로 둬 버릴까 하다가 구두와 자켓은 벗겨 주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누 나 앞으로 갔다. 자켓 벗길 때는 가슴이 조금 떨렸다. 자켓을 곱게 옷걸이에 걸 고 방바닥에 아직도 쓰러져 있는 저 간 큰 여자를 달랑 들었다. 졸라 무겁다. 솔 직히 내가 힘이 없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침대에 던져 놓고 눈물을 머금 고 밖으로 나갔다. 나, 참 착하고 말 잘듣는 학생 같다. 이 여자가 차를 세워놔 도 하필이면 수수밭 옆에다 세워 놔 가지고... 누나가 차에서 자라고 한다고 나 는 진짜로 차에서 잤다. 보조석에 누워 집 쫓겨난 설움을 맛보아야 했다.
차에서 자니까 해가 뜨자 마자 눈을 뜨게 되더라. 어깨가 쑤시고 허리가 아프 다. 해 뜬 기념으로 과감하게 내 방으로 갔다. 내 방 문을 열면서 그렇게 가슴 조였던 적이 있을까. 흠, 누나는 아직 한 밤 중이었다. 침대 위에 엎드려 자는 모습이 사랑스럽다고 해야 되나, 귀엽다고 해야 되나. 손가락으로 허리를 한 번 찔러 봤다. 반응이 없 다. 댁 부모님이 참 가엾수. 아주 오랜만에 내 방에서 밥을 지어 보았다. 찌개라야 즉석 찌개에다 계란 하 나 푼 것이지만 해장하는데는 좋을 것이다. 누나는 밥을 다 지어 놓고 십 여분 이 지나서야 부시시 일어 났다. 주위가 낯설었는지 은정이 누나는 눈을 비비며 고개를 두리번 거렸다. 내 베개는 좀 내려 놓지. 저거 때가 많이 탔는데 누나는 인형처럼 꼭 껴 안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나를 보자 흠찟 놀라기 보다는 피식 웃는다. 아직도 술이 덜 깼나. 나에게 뭐라 말을 던질 것 같다. "누나 지금 제 정신이야? 원래 그런거야? 진짜 간 큰 여자네. 세상 말세다 말 세." 누나는 할 말을 잊고 꾸중하는 나를 멍하게 쳐다 보고 있다. "내가 어젯밤 여기로 왔었니?" "응." "그 참. 내가 왜 여기로 왔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너 아무짓도 안했지?" "했으면?" "했으면 너랑 사귀는 거지 뭐." "저 여자 말하는 것 좀 봐요." "열쇠 줘." "응?"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차 열쇠 줘. 차에서 가 자랜다고 진짜 차에 가서 자니?" "엥?" 뭔가 이상하다. "숙녀를 침대에 던질 땐 좀 살살 던져라." "지금 뭐야 이거?" "후후, 웃겨 죽겠어. 어제 나 소주 딱 두 잔 마셨어. 정희가 없길래 집에 갈까 말까 하다가 네 생각이 나서 혹시나 여기 와 봤었거든. 네 목소리 들으니까 괜 히 장난기가 발동하더라. 넌 진짜 연상엔 관심이 없나 보다. 누나가 다음에 참 한 후배 하나 소개 시켜 줄게." "어제 그럼?" "말짱했었지. 철수야, 오해 하지 않을께. 쿠쿠." 무슨 저런 여자가 다 있냐. 발자국 소리가 또박 또박 들렸을 때 뭔가 짐작을 했 어야 했는데... "아침에 내가 찔렀을 땐?" "기억에 없어. 그땐 내가 진짜 잠이 들어 있었지. 차에 가서 자랜다고 진짜 차 에 가버리는 애한테 무슨 경계심이 들겠니? 푹 잤지." "누나 지금 당장 나가." 쪽팔려 죽겠다 우쒸. "서울 같이 가자. 밥 했나 보네? 아휴 귀여운 것. 밥 먹고 천천히 가자." 구미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오늘 아침까진 믿지 않았지만 이제 믿기로 했습니 다. "홍기사 갑시다." "너 앞으로 안 와?"
"나도 삐칠 줄 알아요." "서울 도착하면 맛있는 거 사줄게." "내가 뭐 밥 한공기에 자존심을 파는 배알도 없는 놈인 줄 아세요?" "스테이크 사 줄게." 스테이크 때문에 할 수 없이 앞으로 갔다. 나는 토요일 날 이상한 여자와 내 방 식탁에서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그 여자의 차를 타고 서울로 와 진짜 두꺼 운 고기살이 푸짐한 스테이크를 또 그 이상한 여자와 마주하며 먹었다. 그 여자가 솔직히 좋다. 그래도 난 연상하고는 사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여자는 좋아하는 남자가 따로 있다. 13. 13 회 철수가 삐쳐서 이 번회는 제가 진행합니다. 제가 누구냐구요? 이 글의 여자 주인 공 홍은정입니다. 계절은 가을로 물들고 있습니다. 꽃같은 햇살은 이내 푸르게 하늘 속에 퍼져 버 리네요. 승주와는 여름부터 좋지 못했습니다. 그가 나를 피하는 인상은 나를 짜 증나게 만들었고, 그를 못나 보이게 했습니다. 그의 제대를 기다리며 자주 만날 것을 꿈 꿔 왔지만, 그가 제대하면서 자주 하게 된 것은 다툼이었지요. 그를 좋아하는 내 맘은 변함이 없는데, 그는 왜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내 마음을 의심할까요. 그냥 풋풋하게 좋아하는 마음 가지고 친구일 때가 좋았다. 그의 말은 소극적인 그를 변명하는 것에 불과 했습니다. 내게서 한 발짝 물러서 나와 친한 사람들에 게 느끼는 그의 약한 감정을 변명하는 말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너는 사 람들에게 빨리 싫증을 느낀다. 그리고 사람을 잘 잊는 것 같다. 그의 말은 나를 슬프게 했지요. 그것이 누구 때문이었는데, 늘 생각나는 자기 때문에 다른 사람 들을 잊어 가며 실증을 내었던 것을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내 마음을 고백한 것 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늘상 하는 것처럼 그는 받아 들였습니다. 내가 가장 오래 가슴에 묻은 남자. 승주는 지금 애처롭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나는 잊혀 지는 게 싫다. 너에게 사랑하는 마음 가지는 것이 두렵다. 간혹 생각 이 나면 예전처럼 친구로 만나자. 그는 그 말을 하고 돌아 선 뒤 지금까지 연락 이 없습니다. 난 만나고 싶어도 연락하기가 어려운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를 통 해 배웠습니다. 간혹 생각이 나면 친구처럼 만나자. 마음을 털어 놓은 상대에게 그가 남긴 말은 자기를 잊어라는 말보다 더 가혹했습니다. 그가 어색합니다. 내 잘못일까요. 그가 요즘 애틋하게 그립습니다. 하늘에 그려지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청아하 여 보고 싶네요. 그러나 가을 하늘은 알고 있습니다. 높고 푸른 그 하늘 끝에는 이별이 있다는 것을... 이별을 준비하기에 가을 하늘은 구름 하나 반기지 않고 홀로 곱다는 것을... 그의 모습이 곱게 그리운 것은 곧 잊혀 진다는 것을 가을 하늘처럼 나도 알고 있습니다. 정희는 요즘 졸업 준비로 바쁘더군요.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또한 마음이 아플 겁니다. 서운한 감정이 하나 둘 쌓이면 엉어리 되어 아플때가 오지 요. 정희에게는 지금이 그때인가 봅니다. 바쁘고 힘든 시기 사랑하는 사람이 있 다면 곁에서 위로 받고 싶은 것이 당연하겠지요. 그러나 정희가 사랑하는 사람 은 너무나 개인적이며 정희에게 무관심 해 보입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다 할지라 도 분명 정희에게 무관심해 보였습니다. 정희는 그 사람을 이해한다 하면서도 서 운한 감정이 하나 둘 쌓이고 있지요. 나는 정희처럼 그렇게 서운한 감정 쌓아 두 고 살지는 않을 겁니다. 밋밋하게 유지되는 관계도 싫구요. 그래서 난 승주를 오
랫동안 그리워 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 번 가을이 끝나기 전 그가 내 사랑을 믿 는다 말하지 않으면 잊을 겁니다. 그가 요즘 많이 보고 싶지만 내가 먼저 연락하 지는 않을 겁니다. 사랑하는 사이가 되느냐, 잊혀 지느냐,는 이제 그의 몫입니 다. 나는 그에게 분명 사랑한다고 말을 했습니다. 나는 아쉬울 게 없어요. 제가 사귄 남자들이 한 둘이 아니지요. 비록 난 친구라 생각하며 사귄 것이지만, 마음 만 먹으면 사랑하는 사람 하나 쯤 못 만들겠어요. 요즘들어 많은 사람들이 그립 더군요. 승주 그 사람 때문이겠지요. 잊혀지는 모든 사람들이 지위지면서 그립습 니다. 어떤 녀석의 말처럼 잠시 스친 인연이라도 그 스친 시간 만큼은 그리울 때 가 있더군요. 그 말을 한 녀석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당구장에서 자기 친구들과 한 게임 하고 있겠지요 뭐. 말만 잘하는 녀석이지요. 어디서 그런 말들 을 배웠는지 모르겠네요. 오늘은 실험이 늦게 끝이 나 집에 가려면 서둘러야 겠어요. 벌써 열시가 넘었습 니다. 약대 앞에 바로 차를 주차시켜 놓기가 눈치가 보여 농대 뒷 쪽에다 차를 주차시켰지요. 밤이 되니까 그 곳이 조금 무섭습니다. 기숙사에서 오는 시크먼 남학생의 모습도 나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을 주기도 했습 니다. 그래도 무사히 차 앞까지 왔습니다. "아앙!" 가슴이 덜컥 내려 앉고 눈물까지 질끔 쏟아 졌습니다.키를 문에다 갖다 대는 순간 누군가 내 다리를 덜컥 붙잡았습니다. 주위는 깜깜하고 보이는 사람도 없는 데 누군가 내 종아리를 꽉 잡았습니다. 덜썩 주저 앉았습니다. "무섭지?" 내 뒤에서 누군가 있습니다. 이 번엔 어깨까지 잡았습니다. 비명이 나오다가 목 에 떡 걸려 아무말 할 수 없었습니다. 위축된 어깨 너머로 고개를 살며시 돌려 봤습니다. 손가락으로 내 볼을 찌르네요. "누구?" "누나 아직 집에 안 갔어요?" 낯이 익은 목소리네요. 그래서 힘껏 고개를 돌려 보았습니다. 쪼그리고 앉아 키 득 되고 있는 녀석을 보았습니다. 치마만 입고 있지 않았어도 바로 다리로 목을 감아 졸라버리고 싶을 정도로 얄미운 얼굴입니다. "너 뭐야, 놀랐잖아." "복수야, 복수. 그때 나도 이 만큼 놀랐어. 누나는 쪽팔리지는 않잖아. 헤헤, 많이 놀랐어요?" 내 뒤에 있는 녀석은 박철수 그 녀석이었어요. 내 모습이 그럼 장난으로 놀란 표정이니? 한 대 때려 줄려다 웃는 얼굴이라 양 주먹으로 죠 패 주었습니다. "이 여자가 진짜. 졸라 아프네." "넌 집에 안가고 뭐 했어?" "나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오는 길이잖습니까. 나도 도서관을 갑니다. 누나 차 가 보이길래 복수할 기회다 하고 숨어 있었지요. 장장 삼십분이나 차 뒤에서 숨 어 있었습니다. 다리가 다 저리네." 제 정신 가진 녀석은 아닌 것 같네요. 진짜 한심한 녀석입니다. 그래도 귀여운 녀석입니다. 순진하구요. "다음 부턴 이러지마. 다음에 이러면 죽을 줄 알어." "누나 하는 거 봐서. 늦게 가네요?" "오늘 실험 때문에." "참! 누나 참한 후배는 언제 소개시켜 줄거에요? 가을이 되니까 참 허전하네 요." "잠시 잊고 있었네. 곧 소개 시켜 줄게. 내 고등학교 후배 중에 예쁜 애들이 많 아. 니가 확실히 딸리지만 내가 광고 잘해 줄게." "저도 따지고 보면 못난거 없어요. 너무 그러지 말아요."
"그래. 누나 이제 가 봐야 겠다. 밥은 꼭꼭 챙겨 먹어라." "흑흑, 오늘 저녁 굶었어요. 당구 실력 나만 는게 아니었어요." 녀석의 표정이 불쌍하네요. 시간만 이렇게 늦지 않았어도 밥 사주고 가고 싶을 정도로... 불쌍한 얼굴도 무기가 되네요. 14. 14 회 가을의 향기 짙은 10 월이 중순을 넘어 섰습니다. 하늘은 더욱 높아 고왔고, 그 에 반한 초목의 색깔은 울긋 불긋 해 졌지요. 승주는 아직도 연락이 없습니다. 한 주가 새로 시작되었습니다. 시험이 끝난 다음 주라 맘 편하게 등교를 했지 요. 나처럼 착한 선배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세요. 그냥 지나치는 후배 하나를 뛰어 가 붙잡고서는 밥 사주겠다고 했습니다. 감사 할 줄도 모르는 나쁜 놈이지 만 녀석하고 밥을 먹으면 그냥 재밌어요. "아, 올해도 눈오는 마로니에 거리를 나 혼자 걸어야 하는구나. 어떤 여자는 후 배하나 소개시켜 준다더니 여태 깜깜 무소식이다. 아마 후배를 만들어서 소개시 켜 주려나 보다. 아, 풍성한 수확의 계절 가을이라더니 나는 홀로 가슴만 태우는 구나." "궁시렁 거리지 말고 밥이나 먹어." 철수 녀석은 내가 후배 소개시켜 준다는 말을 뱉은 후로 계속 후배 언제 소개시 켜 주냐고 치근됩니다. 말을 했으니까 소개 시켜주어야 겠죠. 시험도 끝이 났는 데, 이 번 주말에 녀석에게 소개팅이나 주선해야 겠네요. 녀석이 좋아할 만한 예 쁜 후배가 하나 있긴 하지요. 근데 저 녀석이 걔의 눈에 찰까요? 시간이 갈 수 록 정이 가는 녀석이니까, 첫인상만 잘 심어 주면 후배가 녀석에게 호감을 가질 수도 있겠군요. 앞에 나같이 예쁜 숙녀를 앉혀 놓고 저기 미니 스컷 입고 가는 여학생을 쳐다 보는 녀석에게 소개팅 시켜 주기가 꺼림직 하기 하지만요. "그럼 너, 이번 주말 오후에 시간 비워 놔." "저 항상 시간 비워 놨었어요. 왜? 진짜 소개팅 시켜 주게?" "그래. 예쁘게 꾸미고 나와." "사내에게 예쁘단 말이 뭡니까? 멋있게, 쌈박하게, 섹쉬하게... 가만, 섹쉬하게 는 좀 그렇다." "알았어. 멋있고 쌈박하며 섹쉬하게 꾸미고 나 와. 만날 장소로 어디가 좋을 까?" "섹쉬하게는 빼요. 플라타너스 마른 잎이 날리고, 무명 가수의 기타 소리가 좋 은 곳. 마로니에 공원에서 만나기로 하죠." "엉? 공원에서 만나게?" "그 근처 커피 숖 말이죠. 공대생도 아닌데, 꼭 끝까지 설명을 해야 알아 들어 요? 케에프씨 뒤편에 세커피숖에서 만나죠. 저녁 다섯 시 정각 작전을 수행합시 다." "후후, 그래. 그 시간, 그 장소로 약속을 잡으마." "꼭 약속 지켜요. 근데, 누나도 나올 거에요?" "그럼, 내가 소개 시켜 주는건데." "예전부터 내려 오는 정설이 있지요. 소개팅이나 미팅에서 주선자는 항상 자기 보다 미모가 떨어지는 애들을 데리고 나온다." "나는 어쩔 수 없잖아. 나 보다 예쁜 여자를 아직 못 봤거든." "그렇게 한 평생 살다 가세요. 우리 뒷 집 쌈쟁이 할머니도 그렇게 생각하며 살 았을 거에요. 그러니까 아무에게나 시비 걸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지." "치, 한번 더 너네 뒷집 할머니 얘기하면 소개팅이고 뭐고 없다? 그리고 내가 소개시켜 주는 걔 예뻐. 그러니까 많은 기대하고 나와도 돼. 쯧쯧, 니가 좀 많
이 딸리겠다." "이 봐요 홍은정씨. 제가 진짜 여자 애들에게 인기가 없게 생겼나요? 왜 미팅 나가서 계속 죽을 쑤는 지 모르겠어요." 녀석이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물어 보네요. 아픔이 있나 보지요? 철수는 생긴 거 뭐 그렇게 나무랄 데 없고, 키도 그런대로 작은 편은 아니고, 하는 짓도 귀여 운 구석이 많지요. 그리고 글도 잘 쓰는 것 같고, 또 순진한 것도 맘에 드는 괜 찮은 애지요. 내가 느낀 녀석에 대한 평가는 좋은 쪽이에요. 근데 뭐, 홍은정 씨? 맞먹어라 짜샤. "이 봐요. 박철수군." "네, 제 앞이라 거짓말 하지 말구요. 솔직히 말해 주세요. 제가 진짜 인기 없 게 생겨 먹었어요?" "응. 생긴 거 떨어지지. 키 작지. 이상한 말들 잘 하지. 너 잘하는 건 있니? 여 자에게 매일 밥이나 얻어 먹는 주제에." "밥 사준게 아까웠어요? 매일은 아니잖아요." "누가 아깝대? 그래 하는 짓도 얄밉잖아. 나에게 하는 짓 보면 미팅 나가서 죽 쑬만 해." "그렇군요. 밥 잘 먹었습니다." 철수는 밥 숟가락을 턱 내려 놓았습니다. 불쌍한 표정을 짓고선 고개를 푹 숙이 고 일어 났습니다. 힘이 없어 보이는군요. "왜 그래? 밥 그만 먹을거야?" "누나에게 진실을 듣고 나니 밥 맛이 없네요. 나 먼저 갈게요." "야, 같이 가. 소개팅은 어떡 할거야?" "당연히 해야지요. 한 시간 정도 지나면 잊어 버릴 거에요." "뭘?" "누나가 나 씹은 말이요. 누나는 잘나서 좋겠수." 상당히 속이 좁은 녀석이네요. 내가 한 말을 모두 그대로 받아 들였나 보네요. 어떤 때는 상당히 똑똑해 보이다가도, 녀석은 자주 상당히 바보스럽습니다. 녀석 은 어깨가 쳐진 초라한 모습을 한 채, 무거운 발걸음으로 학생 식당을 나갔습니 다. "야, 박철수." "왜요?" "어디가?" "누나는 수업 들어 가세요. 나는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요." "너 그렇게 인기 없게 생기지 않았어." "한 번 내뱉은 말은 줏어 담을 수가 없지요. 밥 잘먹었어요." "어디가? 나 수업 시작하려면 조금 더 있어야 된다 말이야. 자판기에서 커피 뽑 아 줄까?" "당구장에도 커피는 줘요." "뭐?" "밥을 먹었으니께, 한 게임 해야지요." 철수는 어깨가 쳐진 채, 무거운 발걸음으로 당구장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앞으 로 저 녀석 불쌍한 표정에 넘어 가지 말아야 겠다는 각오를 해 봅니다. 이번 주도 목요일까지 생각없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시월달도 얼마 남지 않았어 요. 녀석이 시험이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도서관을 다닌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저 녁 시간 열람실을 가 보았지요. 철수를 찾기가 힘들었어요. 엎어져 자고 있었거 든요. 저럴 걸 왜 열람실에 나왔는지 모르겠네요. 녀석의 등뒤에 서서 그가 연습장에 적어 놓은 무언가를 보았습니다. 내가 가을이 되고, 가을이 내가 되니
가을 속에 내가 있고, 가을 또한 내 마음 같다. 그리움을 잡고자 내가 그리움이 되니 그리움이 내 곁에 있어 나는 행복하다. 가을은 그리움의 계절이다. 뭘까요. 전공 책 옆으로 연습장에는 시 한편이 적혀 있었습니다. "은정아." 누군가 내 등을 쳤습니다. "어? 정희구나. 약사 고시 때문에 바쁘지?" "응, 도서관에는 어쩐 일이야?" "응? 이 녀석 보러 왔지. 동아리방에 갔더니 요즘 얘가 계속 도서관 나 간다고 해서." 녀석이 엎드려 자는 좌석의 옆자리는 정희의 자리였습니다. 그럼 아까 철수가 적어 놓았던 시는 정희를 위한 시였나요. 이 녀석 연상은 싫다더니, 정희를 흠모 하고 있었던 거 아닙니까. 기분이 좀 나쁘네요. "커피 한 잔 할래?" 정희가 나를 보자 다시 밖으로 나가자 하는군요. 철수야 침은 흘리지 말고 자 라. "저 녀석 깨워서 갈까?" "얘는 놔 둬. 나오기 싫은 도서관 나 때문에 억지로 나오고 있는데." "왜?" "요즘 내가 좀 외롭다 했거든." "그 좀 조용히 합시다." 어머, 내게 조용히 하라고 하는 남학생도 있네요. 남자들은 나에게 저런 말 잘 못하는데. 도서관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바깥 공기가 제법 쌀쌀하네요. "나, 당분간 그 사람 잊을거야." "누구? 철규씨." "응. 저번 주에 싸웠어. 투정을 좀 부렸더니 나보고 너는 왜 네 생각만 하니, 그러더라. 그 사람도 요즘 힘든가봐. 편해질 때까지 잠시 잊기로 했어." "그게 무슨 잊는거니? 아예 헤어져라." "넌 친구에게 고작 한다는 말이 그거니?" "아휴, 그렇게 유지되는게 좋니?" "몰라. 이렇게 사귀어도 없는 것 보단 나아." "그건 그렇고 철수 쟤는 왜 도서관에 나오는 거야?" "저 녀석이 월요일 밤에 내 방을 찾아 왔었어. 내가 녀석에게 넋두리를 좀 늘 어 놨었지. 훗훗, 자기가 곁에 있어 주겠다더군. 너무 외로워 하지 말라면서 말 이야. 그리고서는 자주 날 찾아 왔어. 저렇게 도서관에서도 내 옆에 앉아 자다 가곤 해." "시를 하나 적어 놨던데?" "심심하니까 그랬겠지. 레포트 있으면 레포트 쓰다 가고, 그렇지 않으면 연습장 에 시를 쓰거나 당구대 그려 놓고 이론 연습을 하기도 하지. 날 배웅해 주기 위 해 내가 자리에서 일어 날 때까지 도서관 자리를 지키는 것을 보면 대단하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해." "그 녀석 참... 혹시 널 좋아하는 거 아냐?" "모르지 뭐. 쟤가 내 입술을 처음 뺏은 애야." "엉?" "장난으로 한 입맛춤. 녀석은 그게 내 첫 입맞춤인 걸 모를거야. 너한테도 혹 시 눈감아 보라고 그러면 눈 감지 마." "엉?" "눈감아 보라기에 눈 감았다가 당했어."
"너하고는 오랫동안 친했나 보다?" "어릴 때 같은 동네서 살았댔잖아. 녀석이 개구장이였거든. 옷이 헝클어져 있으 면 내가 바로 잡아주기도 했고, 코를 흘리고 얼굴이 지저분하면 씻어 주기도 했 지. 녀석은 날 친누나처럼 생각했을거야." "너 그러다 연하 사귀게 되는 거 아냐?" "훗, 남자같은 느낌이 들어야 사귀지." "하여튼 챙겨 주는 사람 있어서 좋겠다?" "응, 저 녀석 때문에 마음에 위로가 되긴 해. 참, 넌 어때? 승주씨와는 깨진거 야?" "좀 더 기다려 봐야지." "너 요즘엔 같이 다니는 남학생이 없다? 승주씨 제대할 때만 기다리면서도 남학 생 하나는 꼭 붙이고 다니던 너였잖아. 승주씨가 한 말 때문에 그러니?" "아니야, 나 남학생 하나 달고 다니잖아." "누구? 못봤는데?" "철수 있잖아. 걔는 남학생 아니니? 걔 깨워서 밥이나 먹으러 가야 겠다." "그러다 니가 연하 사귀는 거 아냐?" "그 녀석이 연상은 죽어도 싫다는 데 뭘." "나는 예외적으로 고려해 볼 맘이 있다던데?" "내가 녀석에게 너만큼 고운 존재는 아닌가 보지 뭐." 솔직히 정희에게 질투가 나긴 했습니다. 내가 정희보다 예쁘고, 세련되고, 맘씨 도 곱고. 맘씨 고운 건 잘 모르겠네요. 그리고 잘하는 것도 많은데, 철수 고것 이 나보다 정희를 더 좋아하고 있단 말이지요? 확 진짜 연하고 나발이고, 그냥 철수를 꼬셔 버릴까? 에그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요. 이런 생각이 드는 것 은 아마 승주 때문에 내 마음이 공허해 졌기 때문일겁니다. 저녁 가을도 한 몫 거드네요. "뭐해요? 출발 합시다." "오늘은 바로 앞으로 와서 앉네?" "누나 운전하는 거 잘 봐야지요. 곧 주행 시험이 있는데." "엿 사줘야 되니?" "당연하죠. 그게 이만 저만 어려운 시험이 아니잖습니까. 참, 누나 면허증 잠 깐 줘 봐요." "왜?" "줘봐요 좀." 백에서 다이어리를 꺼내 면허증을 빼 주었습니다. "푸헬헬, 뭐야 이거? 이종 보통이잖아. 푸하핫, 전 일종 보통입니다. 그리고 이 사진 누나 맞아요?" "그렇다." "푸헬헬, 누나 성형 수술 했어요? 아니면 화장발인가? 이 사진 대학 갓들어 갔 을 때 찍은 사진이죠? 누나도 이때는 뭐 별로 예쁘지 않았네요." "그때는 급히 찍은 사진이라 그래. 내 주민등록증 보여줄까?" "됐어요. 출발 합시다 이종 기사." "아직 면허증도 없는게." "곧 생깁니다. 일종 보통으로 말이지요. 출발해요, 이종 보통 홍기사." "너 자꾸 날 그런식으로 부를래? 확, 내일 소개팅 취소 시킨다?" "쩝! 출발하세요 예쁜 누나님." 짜식이 말이야. 면허증에 붙은 사진도 그런대로 예뻐 보이는데... 면허증 다시 만들어야 겠네요.
철수에게는 말을 그렇게 했지만, 후배에겐 괜찮은 놈이라 해 주었죠. 솔직히 철 수 자랑을 좀 많이 했죠. 그랬다고 후배 이 기집애가 이런 예쁜 모습으로 나올 줄이야. 나는 그냥 청바지에 스웨터 하나 걸치고, 화장도 하지 않고 나왔는데 후 배는 미니 스컷 세미 정장에 세련된 화장을 하고 드라이를 곱게 했는지 긴 머리 칼이 여린 바람에도 찰랑찰랑 흔들리네요. 제가 좀 위축되는군요. 하기야 뭐 전 주선일뿐인데요. 근데 이 자식은 왜 안나오는거야. 후배와 마주 앉아 십여분 이 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얘도 상당히 공주네요. 철수는 지딴에는 아주 꾸미고 나왔습니다. 그런대로 봐 줄만 하네요. 나와 내 후배를 보고 나서 이 녀석의 분위기가 많이 다릅니다. 뻣뻣하게 서서 인사를 하 더니 수줍게 내 옆으로 와 앉았습니다. "누나, 정설을 깨셨군요." 뭐야 임마? 내가 꾸미면 어디 얘 정도겠냐. 녀석이 내 외모를 몰라 주네요. "서로 소개들 해." "아, 안녕하세요. 참 예쁘시네요. 전 섹스바이러스하우스 유니버시티 정보 공학 과 93 학번이구요. 박철수입니다." 어이가 없다. 딱딱하게 굳어서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애한테 학교 이름가지고 유 머랍시고 말하는 철수가 어이가 없다. 후배에게 내가 대신 미안하다는 웃음을 던 져 주었다. "안녕하세요. 전 명륜동에 있어요. 국문학과 93 학번이구요. 이름은 송춘옥이에 요." "아 네, 이름도 참 예쁘시네요." 녀석이 무슨 생각으로 그 말을 내 뱉었을까요. 철수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 주 었습니다. 후배가 자기 이름에 대해 컴플렉스가 많아요. 철수가 오고 난 뒤 십 여분 동안 엄청 썰렁하고 어색한 분위기가 계속 됐습니 다. "전 콜라요." 메뉴판을 갖다 준 서빙 아가씨가 왔을 때, 후배는 콜라를 시켰어요. 철수는 후 배를 빼꼼히 쳐다 보다가 넌지시 말을 뱉었습니다. "코,콜라는 상대가 맘에 들지 않을 때 시키는 건데요. 다른 거 시키시면 안될까 요?" "네? 전 모르고 시킨건데, 그냥 갈증이 나서요. 그럼 닥터 페퍼로 할게요." "그것도 콜라거든요?" "네? 나는 또 후배에게 웃음을 띄워 주었습니다. 그리고 철수의 허리를 쿡 찔렀지요. "누나는 집에 안가요?" 이게, 후배에게는 발음도 제대로 못하며 떨고 있는 주제에. 내게는 큰 소리를 치는군요. 내 앞에서 식은 땀을 흘리던 남자들이 다 그립네요. 내가 가 봐라, 이 어색한 분위기 완전 파토나지. 주문 할 때 오고 갔던 말들은 참 재미난 말들이었군요. 철수 녀석은 아주 썰렁 했습니다. 지나간 농담 어쩌다 한 마디 뱉고선 혼자 웃었습니다. 그리고 후배 가 족 조사 할 일 있습니까? 보약 얘기는 왜 했을까요? 취미는? 당구는 쳐요?소용 없는 질문만 던지는 철수가 무척이나 안탔갑습니다. 또 왜 저리 떤 답니까? 후배 는 답만 간단히 하고 자꾸 저만 쳐다 봅니다. 자리를 지키고 있는 후배가 대견스 럽습니다. 철수는 더 이상 물어 볼 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골똘히 머리를 굴리다 가 십초동안 말을 하고 간단히만 답을 하는 후배를 보고 웃습니다. 그리고 삼분 정도 침묵하는 군요. 십초 정도 말을 걸고, 이 삼분 침묵하고... 내가 만약 철 수 같은 애와 소개팅을 했다면, 난 그냥 아무 말없이 나가 버립니다. 저 녀석이 왜 미팅에서 죽만 쑤는지 이해가 되네요. 재미 진짜 없는 놈이에요. 가만 나랑
있을 때는 재밌는데? "저 담배 펴도 돼죠?" 어머 얘 좀 봐. 언제 담배를 배웠지? 후배는 한쪽으로 비스듬히 자세를 고쳐 앉 고서는 다리를 꼬았습니다. 참, 섹쉬하네요. 그리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습니 다. 철수는 정자세로 앉아 있습니다. "담배는 몸에 좋지 않은데..." "야아." 허리 찌르는 것만으로는 이제 안되겠더군요. "누나는 집에 안가요?" "이런 분위기 만들어 놓고선 나보고 집에 가라구?" "처음엔 다 이런 거죠 뭐." "처음에 이러면 누가 다시 만나 주니?" "나보고 어떡하라구요?" 후배가 담배 피는 동안 철수는 나와 얘기했습니다. 나한테는 얘기 잘 하네요. "뭘 어떡해? 재밌게 좀 해 봐. 어색하고 따분해서 앉아 있기 진짜 싫다." "하, 그럼 가세요." "이 자리 파토나게?" "내 잘못만은 아니잖아요. 저 분도 별로 말을 안해요." "니가 그렇게 형식적인 질문만 하니까 그렇지. 서로의 공통적인 관심사가 뭔지 알아보고 그 쪽으로 대화를 이끌어야지. 그리고 넌 유머 감각도 없니?" "아, 내가 말을 많이 하면요. 싸가지 없다 그래요. 상대도 뭔가 내 관심사에 대 해서 물어 보면 좋잖아요. 말을 않고 가만히 있어도 뭐라 그러고, 말은 많이 하 면 촉새같다 그러며 촐랑되지 말아라 하고. 나보고 어떡하란 말인데?" 후배는 둘이서 잘 논다는 식으로 쳐다 보네요. "말도 더듬고, 재미 없는 질문만 하고 그렇다고 매너가 좋냐? 쯧쯧, 넌 여자 사 귀기 진짜 힘들겠다." "재수 없는 말 하지 마요. 안 그래도 뼈아픈 현실 때문에 고민이 쌓여 가는데. 누나는 이제 집에 가요. 주선이 염치도 없이 끝까지 개기고 있어 씨." "뭐야?" "왜 자꾸 허리를 찔렀냔 말이에요. 그것 때문에 더 소극적으로 되잖아요." "니가 점수 깍이는 말을 하니까 그렇지." "사람이 실수를 할 수도 있는 거죠. 그렇게 배워가는 거 아닙니까. 저 아가씨 예쁘긴 한데 너무 고자세에요. 자기는 가만히 있으면서, 왜 내가 분위기를 맞춰 야 돼요?" 후배는 물고 있던 담배를 끄고 철수를 꼬아 보더니 다시 담배 하나를 물었습니 다. "그건 그렇네." 그래, 따지고 보니 그렇네요. 철수는 어색하기는 했지만 무언가 말을 하려고 노 력했습니다. 근데 후배는 고자세로 앉아 답을 제외하곤 거의 말이 없었어요. 분 위기를 썰렁하게 만든 건 춘옥이 잘못도 있네요. "춘옥씨?" 어쭈 나하고 말을 좀 나누었다고 자신감을 얻었을까요? 철수가 과감히 후배의 이 름을 불렀습니다. "말씀하세요." "술 좋아하고 나이트 가는 거 좋아하죠? 그리고 친구들 만나면 생각없이 떠들 죠?" "어떻게 알았어요?" 이 녀석 갑자기 말을 잘하네요. "우리 또래 여학생들 놀면 대부분 그렇게 놀죠? 노래방은 좋아해요?"
"간혹 가요." "저는 그런거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근데 여자분이 그걸 좋아하면 나도 그 런 걸 좋아하도록 강요 받아요. 미팅 나가면 전부 여자들 비위에 맞추고 말이 야. 그리고 하는 것도 꼭 같아요. 인사 나누고 술먹고 노래방 가고. 맨날 그거 야. 낙엽지는 공원을 말없이 걸어도 보고, 그냥 손잡고 서서 어느 화가의 그림 도 구경하며, 솜사탕 가지고 벤취에 앉아 비둘기를 반겨도 보는 그런 것도 한번 해 보면 좋잖아요.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을 수 있어요. 상대방 표 정이 저런데 내가 자연스럽게 말을 건넬 수 있겠어요?" "바보야, 그런 건 연인들이 하는 거지. 처음부터 그렇게 하는 남,녀가 어딨냐?" "못할 건 또 뭐 있어요. 서로 관심사가 다르면 하나는 포기하고 하나는 받아 들 이고 해야지요. 왜 저 여자에게 내가 전적으로 맞추어야 되는데?" "넌 여자 친구가 없잖아. 잘 보여야 쟤가 네게 호감을 가질 거 아냐." "나 안해 씨. 나 담배 피는 여자 싫어. 예뻐서 참을려고 했는데 자기는 내게 전 혀 말을 하지 않으면서 어색한 분위기는 다 나 때문이래." "전 그런 말 안했어요. 처음부터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아 말을 아꼈던 것 뿐이에 요." 역시 후배는 공주 다웠어요.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철수에게 잘라 말하네요. 쟤 나보다 더 공주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춘옥씨 태도 보고 나도 알았어요. 그리고 이 여자가 자꾸 내게 무안을 주었단 말이에요." 철수 녀석이 내게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뭐 이 여자? "너 죽을래?" "누나. 저 고등학교 때 쌈 잘했습니다. 나보다 한 뼘도 더 큰 놈들이 내 앞에 서 벌벌 기었어요. 그런 나한테 한 주먹거리도 안되어 보이는 누나가 지금 겁주는 거에요?" "너 쌈 못한다 그랬잖아." "잘 합니다. 누나 집 앞에서 만났던 그 놈에게 했던 짓 보면 모르겠습니까? 자 신이 있었으니까 대들었던 거 아닙니까." "너 요즘 나하고 많이 맞 먹는다?" "그 한 학년 차이 가지고 너무 재지 맙시다." "얘 좀 봐. 학번으로 따져야지." "같이 늙어 가는 처지에 너무 그런 거 따지지 말자구요." "같이 늙어 가? 나 한창 때야. 그리고 연상이라서 싫다고 말할 때는 언제고 이 제 같이 늙어 가는 처지라고라?" "헤, 누나하고 친하니까 그러는 거지. 한 마디만 더해도 돼요?" "뭐?" "곱게 늙어요. 누나 이런 모습 보니까 우리 뒷집 쌈쟁이 할머니가 생각이 나네 요." "이게 진짜." "잘못했어요. 누나." 한대 죠패 버릴까? "맞먹을 때 맞먹더라도 이 여자, 저 여자라는 말은 하지 마라." "응?" "왜?" 내가 철수랑 싸우는 동안 후배는 집에 가버렸네요. "누나 때문에 갔잖아요." "처음부터 텄었어." "잘 할 수 있었는데..." "뭘 잘해. 넌 소개팅이나 미팅 타입은 아니다."
"진짜 갔을까요?" "걔 보니까 완전 공주로 변했더라. 미련 갖지 마." "나는 그럼 이제 뭐해요?" "나랑 놀지 뭐." "에이, 연상은 싫다니까." "그럼 아까 잘 하지." 녀석과 난 낙엽지는 마로니에 공원을 말없이 걸어도 보고, 벤취에 앉아 솜사탕 도 먹었습니다. 그리고 역술하는 아저씨께 사주도 봐 보구요. "누나 생일이 참 늦네요. 나랑 꼴랑 1 년 하고 5 개월 차이 밖에는 나지 않아요." "그래서 맞먹을려구?" "11 월 14 일이라." "그 날은 신경 꺼. 만날 사람 따로 있으니까." "앞서 가지 마요." 철수의 팔짱을 끼고 그림 그리는 거 쳐다 보다가 모델도 서 봤죠. "팔짱 끼지 마요. 오해 받아요." "왜? 연인처럼 보일까 봐? 넌 오히려 영광이잖아." "제가 연하잖아요. 21 살이 23 살 보다는 엄연히 비싼 나이에요." "넌 항상 미팅 나가서 깨지는 별 볼일 없는 애고, 나는 인기있는 미모의 여대생 인데?" "함 봐준다. 십분당 밥 한끼씩." "뭐?" "아까 그림 구경하면서 한 삼십분 끼고 있었으니까 세 끼는 사줘야 겠네요." "뭐 이런 놈이 다 있냐." "소개팅도 이상하게 시켜줘 놓고선. 차 값만 14000 원이 나갔어요. 당구를 쳤으 면 세시간은 쳤다. 짜장면도 시켜 먹으면서 말이야." "이 그림 너 줄려고 했는데. 그만 둬야 겠다." "그걸 왜 나 줘요?" "예쁜 얼굴 그린거잖아." "아주 상공주네요." "그거 이제 알았니? 아까 걔도 내 적수가 못되지. 나는 너 같은 애 만났으면 그 렇게 오래 앉아 있지도 않아." "그런데 왜 앉아 있었어요?" "나는 주선이었잖아." "주선이 한 시간도 더 앉아 있었어요? 어느 나라 주선이 그런데요?" "니가 불쌍해서 그랬다 왜." "아휴, 그나저나 오늘도 혹시나 했다가 역시나 하고 깨지고 돌아 가는구나." "나하고 데이트 했으면 됐지 뭐." "연상은 관심 없다니까..." "관심이 없어도 내 얼굴 가져다 니 방에 걸어 놔. 다음에 확인하러 간다?" "진짜 나 주는 거에요?" "응." "배 고플 때마다 한 번씩 쳐다 봐야지." "무슨 말이야 그건?" "누나를 생각하면 밥이란 단어가 떠 오르거든요. 내 밥 줄." 쪼로로 도망가는 녀석이 제법 귀엽네요. 철수 녀석하고 이렇게 공원을 놀러 나가는 것도 괜찮네요. 앞으로 학교에서 뿐 만 아니라 서울 와서도 자주 데려다녀야 겠어요. 후훗, 박철수는 오늘 고소하게
내 후배에게 깨졌습니다. 15. 15 회 밤에 무서움을 참고 강냉이 두개를 서리해 왔다. 그런대로 맛 있다. 밤에 배고 플 때마다 서리해 먹어야 겠다. 은정이 누나가 가을을 타는 관계로 당분간 철수가 진행합니다. 시월도 마지막 밤을 향해서 빠르게 흘러 가고 있다. 밤에 당구장을 갔다가 어색 하게 웃고 있는 승헌이를 만났다. 그 녀석이 지금 내 침대를 차지하고 잠에 빠 져 있다. 그래서 오랜만에 방바닥을 쓸 고 닦았다. 나는 방 바닥에 이불을 깔고 커다란 인형을 베고 잠을 청하고 있다. 노랗고 귀여운 호랑이 인형이다. 그 사자 머리가 승헌이에게 사 준 것이다. 승헌이가 내 베개를 가로 챘기 때문에 난 뭔 가 베고 잘 물건을 찾아야 했었다. 나는 가급적 내 방에 친구를 재우지 않는다. 나는 어릴 때부터 혼자 자던 습성이 있어 누가 내 옆에 있으면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 근데 이 녀석은 어쩔 수 없이 재워야 했다. 녀석이 입대 날짜가 정해졌 다고 말했다. 한달 보름이 채 남지 않았다고 했다. 오늘 인형을 준 여자친구에게 는 차마 그 말을 못하고 어색한 웃음을 안고 당구장으로 왔다고 했다. 녀석의 표 정이 불쌍해서 술까지 사주고 내 방으로 데리고 왔다. 내 년이면 내 많은 동기들 이 군대를 갈 것이다. 신난다. 나? 나는 중간에 군대를 가지 않을 것이다. 대학원까지 졸업하고 병역 특례 업 체에 취직할 것이다. 나 군대 못간다. 고무신 거꾸로 신을 여자친구도 만들지 못 하고 군대 가기는 싫다. 그거 만들 때까지는 절대 못간다. 설사 헌병들이 날 잡 으러 와, 내 배에 총구를 들이 밀어도 못간다. 공대 보다 더 삭막한 군대를 여자 친구 하나 못 만들어 놓고 가 버리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다. 졸라 눈 쌓인 전방 지역을 군발이들과 총 메고 거니는 것은 내 즐거운 상상과는 너무 상반되는 것이 다. 난 마후라를 휘날리며 고운 눈 쌓이는 마로니에 공원을 내 여자친구와 팔짱 끼고 거닐어야 한다. 호랑이 배가 제법 푹씬하다. 내일 녀석을 정신없이 내 쫓고 이 걸 내 것으로 만 들어야 겠다. 녀석은 진짜 호랑이를 놔 두고 내 방을 떠났다. "철수야?" 내일 중대한 일이 있어 화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서울로 가기위해 교문을 나서는 데 은정이 누나가 날 불렀다. 아마 동아리 방을 갔었나 보다. 누나는 동아리 선 배 형과 같이 있었다. 나에게 밥을 잘 사주는 누나지만, 그녀 역시 동아리 선배 오빠들에게 밥을 잘 얻어 먹는다. 저 형은 동아리 방에 잘 있다가 누나에게 걸 려 밥을 사주러 가는 모양이다. 누나가 밥 얻어 먹을 땐 학생 식당을 이용하지 않는다. "어디 가는 거에요?" "수원. 나 지금 저녁 먹으러 가." "형이 누나 밥 사줄거죠?" 누나 옆에 서 있던 예비역 선배가 머리를 긁는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 거렸다. "은정이가 밥 사달라고 해서..." "형은 학생 식당에서도 가급적 분식으로 때우면서 저 여자 밥을 사 줘요? 뭐 먹 을건데요?" "응? 은정이가 초밥 잘 하는 일식점을 알고 있다 해서."
"그럼, 형 일주일 밥 값 다 날리겠네요. 쯔쯧." 선배 형은 약간 부끄러운 표정이다. 누나는 나를 보고 불만스럽다. "너, 또 나보고 저 여자라는 말 했어?" "그럼 누나가 여자지, 남자여?" "넌 어디 가는데?" "서울이요. 참, 누나 빨리 엿 사줘요. 나 내일 주행 시험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지금 서울 가는거야?" "응." 누나가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렸다. "현철이 오빠! 밥은 다음에 얻어 먹을게요." 고개를 푹 숙이는 선배를 보았다. 비참해 보였다. 그리고 누나는 나를 보고 빤 히 웃더니 내 팔을 잡았다. "같이 서울 가자." 누나와 함께 선배형에게 인사를 하며 난 씩 웃었다. "형, 내가 형 돈 안쓰게 했으니까 다음에 나 보면 밥 한끼 사줘요." 그 형이 날아차기 하는 모습은 상당히 날카롭고 멋있어 보였다. 맞다, 저 형 특 전사 출신이다. 전철비가 굳어 좋았지만 뭔가 뒤가 꺼림찍하다. "너 주행에서만 두번 떨어 졌다고 했지?" 자기가 운전 하는 걸 과시하기라도 하는 듯한 표정으로 누나는 내게 질문을 던 졌다. "네. 처음엔 출발이 어색해서 떨어졌고, 두 번째는 트럭이 꼬물이라 시간내에 못 들어 왔지요." "바보구나?" 누나는 자랑스럽게 경운기를 추월 하고선 웃는다. "이 차는 오토잖아요. 이런 건 두 손 놓고도 운전하겠다." "치, 두 손 놓으면 뭘로 운전하게?" "발 하나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 "너 면허증 받으면 도로 주행 시켜 줄테니까 어디 한 번 보자." "차 긁으면 물어 줄 돈 없다니까." "금방은 발 하나로도 몰 수 있겠다며?" "말이 그렇다는 거지. 진짜 공대생도 아닌데 꼭 끝까지 설명하게 만드네." 내 이런 말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지금 운전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생긋 웃고 있다. 아무도 건너지 않는 국도 작은 길의 건널목 앞에 정차를 하고 선 또 자랑 스럽게 웃는다. "모범 운전자는 건널목 정지선을 넘어 가지 않는거야. 나처럼 말이지." 못 들은 척 해야 겠다. 도심으로 들어 섰을 때는 더했다. 뒤에서 경적을 울려 되던 말던 신호등 노란 불이 켜지면 그대로 서 버렸다. "노란 불이 켜졌을 때는 급히 지나기 보다는 정지하는거야." 교차로는 한 참 남았는데 일찍 깜박이를 켜 고선 또 가증스런 웃음을 지었다. 차라리 잠이나 자야겠다. "갈 방향을 알리기 위해서 턴하기 150 미터 전부터 시그널을 해 주어야 돼. 어 머, 저기 저 사람 봐. 저 사람처럼 방향을 바꾸면서 깜박이를 켜는 저런 무식한 행동을 해선 안된다는 거지." 서울 청담동 쪽으로 들어 섰다. 건널목이 있는 교차로 앞에 차가 정차했다. 누 나는 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뭐라는 거야? 난 보조석 창 문으로 바로 옆에 정차한 차의 어떤 아가씨만 쳐다 보았다. 멋있
다. 새로 나온 감청색 소나타 투 승용차의 스티어링을 여유롭게 잡고있는 긴머 리 연한 선글라스, 과하지 않은 화장 발, 예쁜 얼굴, 고급스런 옷차림의 아가 씨다. 옆에 앉은 얼빵하게 생긴 놈은 참 좋겠다. 둘이 연인 사인가 보다. 둘이 서 재밌는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다. 부럽다. 나처럼 일방적으로 잼없는 말들 듣지도 않고 말이다. 옆에 앉은 놈이 날 쳐다 보았다. 내가 씩 웃어주자, 그 놈 도 날 보고 씩 웃었다. 저 놈도 아마 면허증이 없나 보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누나는 아직도 중얼거리고 있었다. "건널목 앞에서는 신호등을 주시하기 보단 건너는 보행자에 신경을 써야 하는거 야." 니 혼자 다해라 씨. 잠시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이동을 해서 아까 철수가 쳐다 본 승용차 안의 대화 를 들어 보겠다. "차 긁으면 죽을 줄 알어? 니가 누나면 다냐? 이 차 뽑은 지 겨우 두 달 된 새 차인데 면허증 받은 지 겨우 이틀 된 사람 도로 주행이나 시켜 줘야 되고 진 짜." "조용히 안 해? 옆 차에서 누가 보잖아." "어휴,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도심으로 도로 주행으로 나가자고 했냐? 그렇게 여유로운 표정으로 앉아 있다고 완전 초짜가 베테랑 되냐? 제발 뒤에 초보 운전 이라고 좀 붙여 놓자." "야!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겠어." "옆 차에 앉은 놈은 좋겠다. 연인 사인가 보네? 비엠더블유 승용차에 누나보다 백배는 예쁜 아가씨가 운전도 해주고 말이야. 무슨 이야기를 주고 받을까? 여자 가 운전을 잘 하나 봐. 그러니까 저 놈이 저렇게 웃으며 편히 앉아 있지." "그럼 너도 빨리 웃어. 그리고 니가 친누나라서 잘 못느끼나 본데, 나 나가면 미인이란 소리 들어 이사람아." "그런 소리 듣고 웃어야 돼?" "그럼. 나도 빨리 저렇게 되야지. 그래서 옆 차의 풍경처럼 치완씨 태우고 다녀 야지." "너 내차 끌고 나가면 죽을 줄 알어." "이게 어디 너 혼자만의 차니?" 다시 철수 시점으로 갑니다. "초컬릿도 괜찮아." "엿 사줘요." "안 파는 걸 내가 어떻게 사주니?" "내일 시험 떨어지면 누나 때문이라고 생각 하겠어." "치, 누나가 내일 같이 가줄까?" "누나 내일 수업은 어떡하구?" "오전에는 좀 여유가 있는데..." "그래요? 내일 몇 시에 학교 갈건데요?" "한 시 정도?" "그럼 시험 끝나고 누나에게 연락해 볼게요." "같이 가서 응원해 줄까?" "됐어요. 무슨 대단한 시험이라고 응원까지 나와요?" "그럼 엿 사달라는 말은 뭐야?" "태워줘서 고맙습니다." "그래, 잘 들어가."
좀 시끄러웠지만 누나 때문에 서울 잘 왔다. 그리고 고급스런 초컬릿도 선물 받 았다. 하나만 빼 먹고 발렌타인 데이 때까지 가지고 있다가 나도 초컬릿 받았다 고 자랑해야지. 늦게까지 끼어 있는 안개 때문에 고전을 했지만 난 무사히 주행 시험을 마쳤다. "얏호! 나 드디어 해 냈어." "자기 축하 해." 나는 세번 만에 붙었지만 그래도 씩 웃고만 말았는데, 도대체 저 사람들은 뭐 야? 쪽 팔리게 큰 함성을 지르고 응원 나온 마누라인지, 애인인지 모르는 여자 와 서로 부등켜 안은 채 눈물까지 글썽인다. 면허증 나오는 수속 까지 마쳤다. 이제 얼마 안 있어 내 이름 적힌 면허증이 나 올 것이다. 신난다. 요즘들어 신나는 일이 많다. "진짜 합격 했어?" "네." "한 세 네번 더 보게 될 줄 알았는데?" "무슨 그런 악담을..." "실제 운전은 틀리다 너?" "다 아니까 오늘은 조용히 갑시다." 누나에게 초컬릿 받아 먹은 게 효과가 있었나? 누나 생일도 얼마 안 남았는데, 선물이나 하나 해야 겠다. 내 방에 싱싱한 강냉이가 한 이십개 있다. 어제 그제 새벽에 날 잡고 서리를 했 다. 오늘부터는 자제를 할 것이다. 수수 밭 주인이 오늘부터는 대비책을 세웠을 것 같다. 강냉이 두개를 가슴에 숨기고 정희네 누나 방을 찾았다. 일주일 누나 곁에 붙어 다니고 난 뒤 또 한 동안 정희 누나를 보지 못했다. 밤 열한시를 넘었 지만 누나는 요즘 공부하느라 분명 잠 들지 않았을 것이다. 배가 고플텐데 강냉 이라도 하나 삶아 줄 요량으로 정희네 누나 방을 찾았다. "어! 은정이 누나도 있었네요." "그래, 너 전화기를 놓던지 삐삐를 사던지 좀 해. 연락할 길이 없잖아." "오늘 자고 갈거에요?" "응." "추리닝 입고, 화장 지우고 나니까 누나도 별 수 없네요." 예전 당구장 갔을 때 본 모습이다. 방금 세수를 했는지 물기가 묻은 얼굴이 뽀 얗게 보기 좋았지만 좋은 말 해 줄수 없다. 정희 누나는 잠옷으로 쓰기에 손색 이 없는 추리닝이지만 은정이 누나의 그것은 새마을 운동 한 창 할 때의 복장 같 다. 실컷 비웃어 줘야지. "얘는 피부가 고와서 화장을 지워도 뽀얗게 예뻐 보이잖아." "그건 누나들 생각이지." "어떻게 왔어?" "정희 누나 보러 왔지요. 누나는 있을 줄 몰랐는데?" "널 보니까, 갑자기 니 방가서 자고 싶다." "우쒸, 또 그런 장난 하면 진짜 같이 자 버릴거다." 정희 누나는 그 사건 전모를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웃었다. 강냉이 두개를 꺼 내었다. "왠 옥수수?" "정희 누나와 단 둘이 옥수수나 삶아 먹으려고 했는데... 은정이 누나도 먹을거 죠?"
"응." "나는 집에 가서 먹지 뭐." 밤 늦은 시간 누나 둘이와 강냉이를 먹으며 커피 한 잔 괜찮네요. "너 내 생일 그냥 지나쳤다?" "아, 정희 누나 생일이 시월달이었지 참. 미안해요." "괜찮아. 나 그때 좋은 시간 보냈어." 정희 누나의 말에 은정이 누나가 약간 어색한 미소를 띄우고 나에게 설명을 해 주었다. "얘, 지 애인에게 장미 백송이랑 반지 선물 받았대." "진짜요? 외롭다 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좀 다른가 보지 뭐. 정희 쟤 표정에 웃음이 가득하지 않니?" "그렇네요." "철수 너, 작년 생일 때 정희에게 키스 해 주었다며?" 무슨 소리야 이거. "그게 무슨. 그냥 살짝 입술 닿은 것 뿐인데..." "정희는 당했다고 하던데?" "좋아서 살핏하게 웃을 때는 언제고. 여자들은 믿을 동물이 못되는구만." 은정이 누나 저거, 질투하는 거 아냐? 은정이 누나에게도 함 해줄까? 그러고 보 니 은정이 누나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정희 누나하고 틀려서 은정이 누 나는 나 말고도 챙겨 줄 사람이 많다. 그리고 만날 사람 따로 있고. 그래도 선물 하난 해야 겠지? 쯔쯧, 입고 있는 옷차림 봐라. 집에서도 저렇게 입고 자는 거 아닐까? "철수 이제 가야지?" 정희 누나의 저 냉정한 목소리. 음, 12 시가 훨씬 넘었구나. "네, 가야지요. 은정이 누나?" "왜?" "여자에게 잠 옷 선물해도 오해 안 받죠?" "그게 뭐라고 오해를 받니? 근데 무슨 오해?" "뭐 그대를 사랑하오. 받는 사람이 이런 오해는 하지 않지요?" "여자 친구가 없으니까 참 별 생각을 다 하는 구나." "음. 누나는 무슨 색을 좋아해요?" "나? 밝은 색. 가을 하늘색이 특히 좋아." "정희 누나는요?" "나는 핑크색." "의외네요. 둘이 바꿔야 되는 거 아닌가? 핑크색은 보통 상공주들이 좋아하는 색인데... 분홍색도 아니고 말이야." "나둬라. 정희가 요즘 지 애인이 잘해 준다고 공주가 되어 있으니까." "음. 잘 자요. 나 갑니다." 푸른 색 여자 잠옷 하나를 샀다. 일주일 용돈, 밥 값 다 날아 갔다. 상당히 섹 쉬한 걸로 살려다가 누나가 오해 할까봐 상당히 귀여운 걸로 바꿨다. 이 걸 건 네 줘야 하는데, 꼭 찾을 때는 눈에 안 띈다고, 누나는 한 동안 내 시야에서 사 라졌다. 어쩌다 봤을 때는 분위기가 많이 어두워 있었다. 누나의 생일이 있는 그 주에는 진짜 누나 보기가 힘들었다. 인기인이 맞나 보다. 하여간 생일이 내일 로 다가 왔는데도 난 누나에게 잠 옷을 주지 못했다. 16. 16 회
아하, 늦 가을 날씨 한 번 좋다. 살갗을 애이는 바람은 냉정한 여인의 뒷모습 같아 좋았고, 낡은 잎들만 조금 달고 있는 활엽수의 가지들은 내 모습 같아 좋았 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비수 같은 하늘은 그 자체로도 환상이다. 은정이 누 나 생일날의 날씨라서 한 번 분위기를 잡아 보았다. 아름다운 숙녀라는 말까지 적고 예쁘게 포장된 잠옷 상자를 종이 가방에 넣고 기분 좋게 학교로 갔다. 약대 근처 이과대와 농대 주위를 다 뒤졌지만 누나의 차 가 없었다. 마음을 굳게 먹고 그 비싼 헨드폰에다 전화를 해 보았지만 받지를 않 는다. "에이, 꼭 찾으면 없어요. 누나 생일 축하 해요. 푸하하!" 다섯 번째도 그냥 끊을려다 음성 하나 남겨 주었다. 수업도 끝이 나고 늦은 오후가 되었지만 누나는 발견 할 수 없었다. 동아리 방 에는 늙어 보이는 후배들만 보이길래 얼른 도망 나왔다. 저것들이 밥 사주라고 하면 낭패기 때문이다. 선배체면에 잠옷 산 바람에 돈 없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잠옷이 든 종이 가방, 당구장에서 뺏길 뻔 했다. 그냥 치자고 할 때는 언제고, 게임비 물리니까 돈 되는 것은 다 내놓고 가란다. 삭막한 놈들이다. 그러니까 니 네들은 공돌이 수준을 못 벗어나는거야. 오늘따라 방 청소가 하고 싶었다. 깨끗하게 부는 가을 바람 때문이었으리라. 밤 은 깊어 가지만 내 방은 깨끗해져 가고 있다. 방 바닥을 깨끗이 닦았다. 오늘 아 침에 본 가을 하늘 같다. 창을 열고 싸늘한 밤 바람을 맞았다. 공기 한 번 좋다. 바람 부는 그 깨끗한 방바닥에서 금방 삶은 따끈한 강냉이 두개를 먹었다. 전 원 생활의 낭만이다. 그렇다고 내가 여기 내려 온 것을 좋아할쏘냐. 천만의 말씀 이다. 서울 가고 싶다 씨. 졸라 심심하다. 호랑이 인형을 발 받침대로 쓰고 푹신한 베개를 벤 채 침대에 누웠다. 발이 편 해야 잠이 잘 오지 암. 앞으로 인형은 발 받침대다. 누나는 오늘 학교를 나오지 않은 것 같다. 만날 사람이 많아서 아침부터 바빴 나 보다. 부럽다. 내 생일 때는 동아리에서도 챙겨 주는 사람이 없다. 시험 기간 이라서. 하기야 지금도 시험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지만, 그래도 시험 기 간은 아니다. 아까 동아리 방 칠판에 보니까 오늘이 은정이 누나 생일이라는 것 을 누가 적어 놓았더라. 챙겨 주는 사람들 많은 은정이 누나는 좋겠다. 잠이 들 찰나였다. 12 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딩동." "누구세요?" 대답이 없다. 겁이 조금 났지만 예전 만큼은 아니다. 강냉이 서리 하면서 내 담 력이 많이 세졌다. "딩동!" "에이씨, 이런 야심한 시간에 누구야?" "똑똑!" 누구야 진짜. 문을 열어 보았다. "안녕, 헤헤." 좌우로 흔들리는 은정이 누나가 나를 보자 씩 웃었다. 그리고 그냥 내 방으로 들어 왔다. 약간 당황이 되어 말 문이 막혔다. 술냄새가 난다. 얼굴이 불그스럼 하다. 그렇지만 술취한 행동을 보이진 않는다. 오늘이 지 생일이었다고 옷차림 이 멋있다. 최신 유행하는 검은 스타킹과 약간 짧은 검정 스컷이 잘 어울린다. 스카프와 실크 브라우스가 멋있다. 멋있는 옷차림은 흩어 지지 않고 단정했다.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놓고 내 방으로 들어 선 누나는 나를 보고 씩 웃고는 쟈켓 을 벗어 옷 걸이에 걸었다. 스카프도 가지런히 걸어 놓는다. 차라도 한 잔 하러 온 걸까? "누나, 이런 늦은 시간에 여긴 왜 왔어요?" "응? 으응..." 날 보며 실실 웃던 누나가 침대에 덜썩 앉았다. 아니 저 모습은? 에로 영화에 서 자주 보던 장면이다. 치마 조금 올려 스타킹 말아 내리기. 졸라 섹시했다. 오 늘도 장난치는 것일까? 지 생일이라서 순진한 내게 장난치는 것이라면 눈을 돌리 기 보단 빤히 쳐다 봐야 된다. 그래서 빤히 쳐다 보았다. 검은 스타킹 속에는 곱 고 하얀 누나의 다리가 있었다. 뭐하는 거야 씨. 스타킹 두짝을 다 벗은 누나는 그냥 침대에 몸을 누이고 이불을 덮었다. "누나 지금 뭐하는 거야?" "음냐." 장난인 것 같아서 한 참을 옆에 서 있었다. 오랜 시간 누나는 자는 척 했다. 누 나에게 다가가 볼을 찔러 보았다. 우쒸, 진짜 잔다 이거! 이건 나를 믿기 보다는 나를 무시하는 행동이다. 새벽이다. 나는 방 바닥에 이불을 깔고 호랑이를 베고 누워 있다. 내 침대를 어 떤 아름답고 선녀같고 또 섹쉬하고 마음씨 고운 여자가 술을 먹고 꼬장을 부린 건지, 장난으로 하는 짓인지 모르겠지만 당당하게 뺏어 갔다. 억울하다. 잠을 청 하려다 도저히 분해서 잠이 오지 않는다. 아무래도 누나가 장난치는 거 같다. 불을 켜 보았다. 누나의 고운 다리 하나가 이불 밖으로 나와 있었다. 누나는 한 쪽으로 돌아 누워서는 이불을 감고 잠이 들어 있었다. 진짜 잠이 든 것이 맞는 거 같다. 화장을 지우지 않은 옆으로 돌아 누운 그녀의 얼굴이 측은하다. 측은 해 보였던 것은 돌아 누운 누나의 얼굴 모양새가 밝지 못했고, 눈에 눈물이 새 고 있었기 때문. 오늘 무슨 일 있었나? 대단해 보이던 사람이라도 누나와 같이 있을 때 보면 별거 아닌 것 처럼 된다. 조금 불안해 보일 때가 있으나 누나는 상 처를 주는 쪽이지, 받는 쪽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누나의 지 금 표정은 왠지 상처 받은 모습이다. 흠, 내가 마로니에 공원 얘기를 자주 하는 것은 어릴 때 본 영화 때문이다. 겨 울 나그네였다. 아마 명륜동 그 학교가 배경이었던 것 같다. 아니면 말고... 거 기 보면 마후라, 그러니까 목돌이지. 그걸 메고 눈을 맞는 주인공의 모습은 더 없이 멋있어 보였다. 자전거에 걸려 넘어 진 여자 주인공의 겨울 모습에도 분명 목도리가 있었다. 내가 이 이야기를 왜 하냐 하면 침대에 누워 있는 누나의 모습 이 거기 나온 여자 주인공이 그 누군가를 그리워 할 때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이 다. 누나를 바로 눕혀 주었다. 이불도 바로 덮어 주었다. 이 여자가 진짜. 누나는 자꾸 돌아 누우며 이불을 감아 한쪽으로 안았다. 나 지금 전공책에 수건 말아 베개로 사용하고 있다. 혹시나 해서 누나에게 호랑 이를 줘 보았다. 그러자 누나는 이불을 감지 않고 대신 인형을 안았다. 누나가 이불을 바로 덮고 자게 하기 위해서 나는 그나마 베개 대용으로 남아 있던 것까 지 뺏겼다. 내 방에 여자가 자고 있기 때문에 빨리 잠이 들지 않았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정신 없이 지나쳤다. 조금 야한 생각도 해 보았다. 여자가 깊이 잠 들었을 때, 가슴을 만지면 반응을 보일까. 잠시 동안만 했다. 나를 이상한 놈으로 생각지는 말기를... 침대 옆 방바닥에 누워 이 여자가 왜 여길 왔을까,란 생각으로 빨리 잠이 들지 못했다. 그래도 분명 잠이 들었었다. 그런데 씨. "우욱!"
잘 자던 나는 봉변을 당했다. 누가 내 배를 사정없이 밟았다. "누구 있어요?" 뭐야? "발 좀 치워요. 아파요." "누구?" "누구긴 이 방 주인이지." "철수? 철수니?" "네. 발 좀 치워요." "니가 여긴 왜 있는거야?" "내 방이라니까." "엉?" 누나는 놀란 음성이다. "왜 깼어요?" "내가 왜 니 방에 있는거니?" "씨, 지 발로 떳떳하게 찾아 왔을 때는 언제고..." "내가 찾아 왔어? 너 아무짓도 안 했지?" "물에 빠진 놈 구해 주었더니 보따리 찾아 내라는 속담이 괜히 있는게 아니구 만." "뭐야? 불 좀 켜 봐." "자다가 중간에 깨면 배 고픈데 씨." 불을 켜 주었다. 누나는 자기 옷 모양을 바로 하면서 밝은 불 빛에 눈살을 찌푸 렸다. "내가 니 방을 찾아 왔구나." 방 주위를 살피더니 인정을 하는 듯 차분한 음성이다. "진짜 술 취했던 거에요?" "응. 아직 머리가 아파. 니 방을 찾아 와서 다행이다." "뭐가 다행이에요. 술 취해 남자 방 찾아 온 게 다행이야?" 누나는 머리가 아픈지 상을 찡그렸지만 나에게는 미소를 보여 주었다. "니 생각이 났었나 보다. 넌 내가 믿잖아." "참 내, 어제 생일이었다면서 누가 챙겨 주지 않던가요? 생일 파티하면서 술을 제법 많이 마셨나 보네?" "나 어제 혼자 술 마셨어." "에? 그 많던 남자들이 아무도 안 챙겨 주던가요? 맞다, 그 승주라는 사람도 안 챙겨 줬어요?" 누나의 표정이 밝지 못하다. 승주 그 사람 애기를 하자 그나마 짓고 있던 미소 도 가셨다. "나 이제 잊을거야. 진짜 다시는 생각하지 않을거야." "무슨 말이에요?" "내 생일 챙겨주려는 많은 사람들 다 물리치고 그 사람 혼자를 기다렸는데, 근 데...주위에 여러 사람 있는 것 보다 필요한 한 사람 있는게 낫다고 생각했었는 데..." 누나가 갑자기 왈칵 눈물을 쏟아 냈다. 우쒸, 나는 여자가 울면 마음이 아프 다. 동생하고 말다툼 하다가도 걔가 울려고 하면 무조건 내가 잘못했다고 빈다. 여자가 울면 당혹 스럽다.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기 때문, 그리고 여자가 우는 모습은 이유없이 슬프다. 누나는 제법 많은 눈물을 흘렸다. 난 그냥 내 자던 자 리에 앉아 물끄러미 쳐다만 보았다. "왜? 그 사람이 약속 잡아 놓고 나오지 않았던가요?" "아니야, 그 사람 삐삐에 음성만 남기고 기다렸어. 헨드폰도 꺼두고 그냥 기다 렸지. 그 사람이 수원 오면 간혹 같이 갔던 카페에서 마냥 기다렸어. 혹시 내게
음성이 들어 왔을까 확인은 했지만 그 사람 목소리가 없어서, 오겠지 하고 그냥 기다렸어. 흠, 네 목소리 들었어. 고마워." "못 들을 수도 있잖아요." "열 번 가까이 남겼는 걸. 나 어제 양주 한 병을 다 마셨다? 비싼 거 마셨어. 기분이 엉망이었거든." "에? 뭐 마셨는데?" "발렌타인 21 년산. 작은 거였지만..." "그 독한 걸 다 마셨어요?" "응." "가만, 여기 올 때 뭐타고 왔어요?" "운전하고 왔어." "엉? 그럼 음주 운전이잖아. 이 여자가 사고 났으면 어떡했을라고... 그리고 술 먹는데 가면서 운전을 하고 가?" "처음엔 커피 마셨어. 술은 속상해서 마셨다." "얼마나 있었어요?" "오후 한 시부터 밤 11 시까지. 나 어제 무서웠어." "뭐가?" "어떤 남자가 내게 자꾸 추근 됐거든. 난 술에 취해 갔구, 취한 정신에 그 남자 를 따라 갈 뻔 했어. 진짜 따라 갈 뻔 했어. 그 사람이 내 다리를 만지고 입술 에 키스 하려고 해도 별 거부 반응을 보이지 못했었어." "뭐에요? 이 여자가 진짜. 자기 몸뚱아리를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그래, 내가 모르는 남자에게 어디로 끌려 갈지도 모르는데, 내가 기다리는 사 람은 그런 나를 외면하고 어디서 무얼 하는 지 나타나지 않았어. 화가 났어. 그 자식 때문에 화가 나니까 정신이 들더라. 그리고 무서웠어. 그 사람이 날 자꾸 따라 왔거든. 정신은 자꾸 흐려져 가고. 정신을 잃으면 그 사람을 따라 갈 것만 같았어. 그래서 바로 차를 몰아 무작정 그 곳을 떠났는데. 니네 방에 왔네. 왜 정희네로 가지 않고 네 방으로 왔지?" "이씨, 누나! 오늘 추근 된 사람하고 그럼 키스한거야?" "모르겠어." "뭐야. 왜 그러냐? 누나 혹시 술 먹으면 아무 남자하고나 키스하고, 음... 그 래, 아무 남자나 생각 나는 사람 있으면 찾아 가고 그래요?" "기분 나쁘다 너. 난 널 믿고 찾아 왔는데. 너 내가 술 취하고 맘이 외로우면 아무 남자와 자고 하는 그런 여자로 보는 거니?" "좀 그렇잖아요. 오늘도 봐요. 나도 남잔데 내 방을 떡 찾아 온 것도 그렇고, 자기가 추행당한 일도 꺼리낌 없이 말하잖아요. 오늘 그 남자가 진짜 누나에게 키스도 하고 추태 부렸는지 모르잖아요." "흠, 그 정도 까지 정신 잃진 않았어. 너 좀 과민 반응 보인다? 너 나를 남자로 서 좋아하는 거니?" "마음으로 걱정해 주면 좀 진지하게 받아 들여요." "키스까진 당하지 않았어. 그리고 나, 사랑하는 사람과는 감정에 충실하다 보 면 같이 잘 수 있다는 생각은 해도, 아무하고나 기분 따라 키스하고 잠자리 같 이 하는 그런 여자는 아니다. 나 아직까지 한 사람 하고만 키스 해 봤어." "누구요? 승주 그 사람?" "흠, 그 사람이 그럴 용기라도 있으면..." "그럼 누군데?' "그냥 급습에 당해서 한 번 뺏겼었지. 다음날 바로 헤어진 사람이라 이름도 기 억 못하겠어." "어떻게 첫키스 한 사람 이름도 기억 못하냐?" "못할 수도 있지."
"몸가짐 잘 해요. 불쑥 불쑥 남자방 찾지 말고." "넌 남자로 보이지 않는데?" "날 무시하는 행동이다." "니가 먼저 연상은 싫다고 했잖아. 널 보니까 기분이 좀 풀린다." "치, 머리 많이 아파요? 타이네놀 드릴까요?" "나 속도 안좋아. 토할 것 같아." "그럼, 화장실 가요." "등 두들겨 줄래?" "여자들은 남자에게 등 두들겨 달란 소리 안하던데?" "자꾸 자기가 남자인 걸 강조한다 너? 나하고 사귀고 싶은거야? 그 사람 잊기 로 했는데, 이제 연하하고 사귀어 볼까? 철수야 우리 사귈래?" "그렇게 웃지 마요. 내가 무슨 바본 줄 알아요. 얼굴에 바로 이건 장난이다라 는 웃음이 맺혀 있거만." "그럼 진지하게 말하면 사귈래?" "연상은 싫다니까 씨. 빨리 화장실이나 가요." 누나는 약간의 오바이트를 한 다음, 깨끗하게 세수를 하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뭔가를 바라더군요. "나 좀 더 자야되는데..." "나보고 차에 가서 자라구?" "그건 아니야. 나 이빨 닦아야 되거든. 근데 치솔이 없다?" "나보고 지금 나가서 사오라구? 아예 필요한 거 다 말해요." "기분 나쁜 표정이다?" "그럼 이런 꼭두 새벽에..." "사다 줘. 그럼 널 남자로 생각해 줄게." "나 남자 맞아요." "이빨닦고 일어나면 갈비탕이라도 사줄 참이었는데..." "가그린하고 컨디션도 사올까요?" "그래 주면 고맙구. 그리고 뭐 추리닝 같은 거 없니?" "아, 맞다 참." "뭘?" "내 책상 밑에 보면 누나 생일 선물 사 놓은거 있거든요. 나 칫솔하고 다른 거 사올 동안 봐 보세요." "참, 철수야 열쇠 줄테니까. 내 차 어딨는 지 좀 찾아보고 근처에 제대로 주차 시켜 줄래?" "나 면허증 나온 거 어떻게 알았어요?" "후후, 열쇠 여기?" 새벽 날씨는 몸시 추웠다. 학교 앞에 딱 하나 있는 편의점까진 상당히 멀다. 차 주차 참 잘 시켜 놓았다. 사고 안나고 온게 정말 하늘이 도왔나 보다. 차는 내 오피스텔 자취방 건물 현관 바로 앞에 비딱하게 주차시켜져 있었다. 저걸 타고 갔다 올까? 음, 내 처녀운전을 외제차를 가지고 할 줄이야. 자리가 좀 좁다. 가자 은정아. 편의점 점원들이 날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 보았다. 그럼, 이 밤에 외제차 몰고 편의점 오는 사람은 이 근방에선 없을 것이다. "저 차 은정이 선배 차인거 같은데?" "에?" "우리과 선배 누나 차라구요." 점원 새끼가 그걸 왜 물어보냐? 하긴 귀한 차라 눈에 띄기는 하는구나. "어제 술 마셨다고고 차를 제게 맡겨 놓고 갔어요. 은정이 누나 보면 제가 차
탔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어떤 사이에요?" 이 새끼가 뱀 눈을 하고 보네. 애인이면 어떡할겨 니가? 확 죠패 버릴까 보다. "전 동아리 후배에요." "차 긁지 마요." 이 새끼가 진짜. 차를 주차시키는 것도 초짜치곤 잘 했다. 옆 차 때문에 난 보조석 좌석 문으로 내렸다. 옆 차에 너무 붙여 주차를 시켰다. 나는 뒤로는 주차시키기가 힘들어 앞 으로 주차시켰걸랑. 옆 차 주인도 아침에 보조석으로 타야 될거다. 거의 예술적 으로 주차를 시켜 놓았다. 하하. 방에 들어 가서 꿈적 놀랐다. "예쁘지?" 너무 밋밋한 거 같다. 그냥 남자 잠옷하고 별로 차이가 없는 잠옷이다. 점원이 귀여운 잠옷이라 했는데... 누나는 잠옷으로 갈아 입고 밝은 웃음을 짓고 있었 다. 그리고 내게 자랑을 했다. 진짜 웃기게 됐다. 남자 방에서 잠옷까지 갈아 입 고, 저 누나는 뭐가 저리 기쁜 표정이냐? 다른 사람들에게 저 모습 들키면 시집 가기 어려울 텐데... 나도 마찬가지다. 이제 손은 좀 내리지. 진짜 공주다. 내 가 멀뚱 멀뚱 쳐다만 보고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자, 계속해서 양팔을 벌인 채 잠 옷 자랑 포즈를 취하고 있다. 구름 무늬만 없고 좀 더 짙은 푸른 색이고 단추 에 인형 모양이 없으면 저건 딱 죄수복이다. 저게 면이 좀 고급이긴 하지. 섹쉬 한 걸로 살 걸 그랬나? "예뻐요." 거짓말 한 번 했다. "고마워." "뭘요." 아휴, 나는 바깥 바람을 먹었더니 잠이 들지 않는데, 누나는 참 잘도 잔다. 꼭 자기 방에 있는 것 처럼 말이다. 누나가 내 방을 떠난 건 10 시가 넘어서였다. 바쁘다면서 그리고 미안했다면서, 또 그리고 고맙다면서 일어나자 마자 날 내 쫓고는 자기 몸단장을 했다. 30 분도 넘게 밖에서 추위에 떨었다. 누나는 갈비탕 사주지 않고 수업이 있다며 학교로 달려 갔다. 지 선물이라고 준 잠옷은 고이 개어 침대 위에 올려 놓고선 갔다. 내 발에 깔고 자는 인형도 예 쁘게 다독거려 침대 베개 옆에 세워 놓았다. 잠 옷은 왜 안가져 갔을까? 어제 내 가 속으로 생각한 것들을 읽었을까? 다음에 가져가라고 해야지. 그나저나 누나 때문에 수업하나 땡땡이 쳤다. 17. 17 회 가을이 끝났군요. 가을의 말미에서 난 한 사람을 잊기로 했습니다. 잠시 스쳐 떠 나는 여러 사람들보다 더 큰 내 마음 속 자기만의 공간을 가졌던 친구 하나는 연 인이 되려다 잊혀 지기로 했습니다. 내년 가을 때도 생각이 나겠지요. 후 내년 봄에도 설레임으로 남아 있겠지요. 그래도 잊혀 질 겁니다. 잊기로 마음 먹었으 니까. 아직도 이해가 안되네요. 사랑한다고 고백한 여자를 그 이유 때문에 부담 스러워 했던 것을, 난 승주를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하니 열 받네요. 나
같은 미녀가 사랑한다고 고백을 했으면 감격하며 받아 들였어야지, 별로 잘난 것 도 없는 게 나에게 상처를 주었어요. 23 살 인생을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남자에 게 차여봤다. 사방이 벽으로 둘러 쌓인 도서관 열람실은 다가오는 기말시험 때문에 학생들로 붐비네요. "미안한데요, 그 자리 주인 곧 들어 오거든요." "아, 예." 난 메뚜기 하면 그 자리가 내 자리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난 메뚜기를 하 면 공대 남학생 자리에 잘 앉아요. 순진한 공대생들은 간혹 내 미모를 의식하고 가방을 빼 버리는 경우가 있지요. 호!호!호! 근데 이 녀석은 어딜 간 거야? 내 옆자리는 철수 그 녀석 자리지요. 제가 자리 좀 잡아 달라고 부탁을 했었습니다. 화장실 가는 척하고 나가더니 30 분이 지나도 록 나타나지 않네요. 자꾸 메뚜기들이 녀석의 자리를 탐 내는데, 녀석은 어디로 갔는지 나타나지 않습니다. 녀석이 요즘들어 더 귀엽습니다. 생각보다 순진한 구석이 많아요. 그런 순진한 녀석에게 난 잘못한 게 있습니다. 바로 내 생일 다음 날 새벽이었지요. 내 생일 날, 난 승주에게 상처를 받았고 외로웠지요. 그 외로움 때문에 잠시 철수 녀석에 게 보상 심리를 느꼈습니다. 승주를 잊기로 한 공허함에서 그리고 뭉개진 자존 심 때문에 철수에게 하지 말아야 했을 말을 하고 말았네요. 사귀자고 말했던 것 말입니다. 그 날 기분따라 뱉은 말에 철수가 장난스럽게 받아 들이지 않았다면, 철수는 며칠 동안 내게 연인의 정을 느꼈을 것이고 짧은 시간 후에는 그가 어색 해 졌겠지요. 솔직히 철수는 남자로서 매력은 없어요. 너무 어려 보이거든요. 그 냥 동생으로 생각하니까 붙어 다니는 거죠. 철수에게 상처를 줄 뻔 했어요. 내 기분따라 철수를 아무렇게나 대해서는 아니 되겠다고 생각 했습니다. 후훗, 철 수 방에서 두 번이나 잤네요. 나 같은 정숙한 여자가 남자 방에서 두 번이나 밤 을 보내다니. 날 믿는 울 아빠가 그 사실을 알면 땅을 치겠네요. 처음은 의도한 일이었지만, 두번째는 나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아요. 왜 술취한 상태에서 철수를 찾아 갔었는지, 철수가 내게 뭔가 위안을 줄 거라 생각했을까요. 그래요 철수 때 문에 엉망이었던 기분이 많이 풀어 졌어요. 그가 준 잠옷은 예쁘진 않았지만 맘 에 드는 것이었지요. 철수의 성의가 참 고마웠습니다. 참, 그러고 보니 그 잠옷 을 철수네 방에 그대로 두고 나왔네요. 내가 니 침대에 벗어 논 잠옷 가져 와, 뭔가 어감이 이상하네요. 녀석이 한 시간 째 들어 오지 않습니다. 나도 오래 앉아 있었네요. 잠시 바깥 바람이나 쐬고 와야 겠습니다. "군대 잘 갔다 와. 내가 그 사자머리 잘 다독거려 줄게." "이 새끼가. 당구 강의 해 달라더니, 내 군대 가는 얘기는 왜 해? 그리고 의정 이 얘기를 또 왜 하냐?" "걔하고 진짜 연인 사이냐?" "응." "걔는 뭐 고무신 거꾸로 신을 일은 없겠다." "그럼, 내가 제대할 날짜만 기다리면서 내 생각만 할거야." "미친 놈. 걔가 딴 남자 생각을 해도 딴 남자들이 걔 생각을 안 할거야." "너, 예쁜 의정이를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결투다!" "그래, 나 80 놓고 칠테니 넌 250 놓고 칠래?" "미쳤냐? 100 대 200." 내가 밖으로 나갔을 때, 난 철수를 바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참 잘 생긴 그의 친구와 함께 별 시덥지 않은 얘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춥지도 않나? 벤취에 구겨
진 종이 컵을 각각 들고서 계속 이야기 중이네요. 무슨 얘기를 하는 뒤에서서 들 어 봤습니다. "눈에 콩깍지가 씌으면 달라진다더니, 나와 비슷한 외모를 가진 잘생긴 네가 그 런 독특한 여자를 좋아하게 될 줄이야." "내가 잘 생긴 건 아는데, 니가 내 정도 된다는 말은 괴변이다." "나도 잘났어 임마." "그래서 미팅 나갔다 오면 예외없이 꺼이꺼이 울었냐?"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래도 나는 내가 찍은 여자가 날 찍어 주었어. 유지를 못해서 그렇지." "그런데 어떻게 사자머리와는 유지가 되었냐?" "응, 날 위해서 자기를 많이 희생을 하니까. 만날 수록 편해지고 또, 나도 자 길 위해 희생할 수 있는 무언가가 생기니까 자꾸 가까워 지더라." "연인사이에 희생이란 말은 쓰지 마라. 그냥 배려하는 맘이지. 무식한 놈." "그래, 배려하는 맘. 넌 요즘도 그 나이 든 누나들 따라 다니니?" "내가 따라 다니는 게 아니지, 친구야. 솔직히 당구 잘치던 그 누나 졸라 예쁘 지 않냐?" 철수가 나를 알아 주는군요. "그런대로." 뭐야 이 자식. 나는 자기를 참 잘생겼다고 생각해 주는데, 뭐 나보고 그런대로? "그 예쁜 누나가 날 따라다니잖아. 사자머리하고 사귀는 너 하고는 차원이 틀리 단 말이야. 내가 연상만 아니었어도. 그 누나가 언젠가 내 발을 잡고 눈물을 뚝 뚝 흘리며 연하도 괜찮으니까 제발 좀 사귀자고 그러는 걸, 내가 거절했어. 나 너무 매력적인 놈인가 봐." "의정이도 그 누나 만큼 예뻐." "너 장님이냐? 둘을 세워 놓고 지나가는 사람 100 명한테 물어 볼래? 사자머리 예쁘다고 하는 사람 세 명만 되어도 내가 니 대신 군대 간다." "나는 목에 칼이 들어 와도 의정이가 더 예뻐." "그래 넌 의정이하고 한 평생 살아라. 하여튼 너 정희 누나도 잘 알지? 그 누나 도 내가 연하만 아니었어도 자기 애인을 만나지 않았을 거라 말했어. 하지만 버 트, 나는 절대 연상에게는 넘어 가지 않지."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을까. 이런 놈에게는 내 기분따라 아무렇게나 대해도 순전 히 자기 맘대로 해석해서 자기 유리한 쪽으로 생각할 놈이다. 그래도 내가 예쁜 것은 인정을 해 주는군. "그래, 잘했어. 나이 든 사람은 나이 어린 사람에게 뭔가 꼴리는 게 있는가봐. 절대 유혹에 넘어 가서는 안된다? 내가 우리 누나들에게 시달려 봐서 아는데, 나 이 든 여자들이랑 놀면 빨리 늙을 뿐 도움 되는 게 없어. 이제 우리 결투 하러 가자." "그래. 나 100 놓을 테니까, 넌 250 놔라." "좋다. 내 선심 한 번 쓸게." 유유 상종이네요. 도대체 한 시간 동안 무슨 얘기를 나누었을까요. 이제 열람실 을 들어 와도 상당히 오랜 시간 좌석을 비운게 되는데, 뭐 이제 당구장을 가겠다 는 저 놈. 의기 양양하게 일어서는 두 녀석 중 철수의 목덜미를 잡아 챘습니다. "뭐야, 씨?" "사귀자고 따라다니지 않을테니까, 이제 열람실로 들어 가시죠 철수씨?" 잘 생긴 철수의 친구가 나를 보며 머쩍게 씩 웃는군요. "철수야, 내 말 상기하고 꿋꿋하게 버텨." "야, 같이 가." "나는 누나들을 상대해 봐서 아는데, 저 누나 모습은 아까 우리들 대화를 모두 들었다는 표정이거든?"
자식이 잘 아네요.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지요. "그래서 임마?" "나 나이 많은 여자들 무서워. 나 먼저 간다." 총알 같이 뛰어 가는 친구를 물끄러미 바라 보다가 철수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 며 웃습니다. "헤헤, 진짜 다 들었어요?" "응. 내가 눈물을 흘리며 니 발을 잡고 사귀자고 매달렸었니? 기억이 끊겨서 잘 모르겠네." "나 당구장 가야 되요." "너 도서관은 왜 나왔니?" "누나 자리 잡아 줄 목적이었잖아요. 나는 시험 보려면 며칠 더 있어야 되요." "들어 가서 공부 해." "누나가 뭔대?" "정희에게 이른다? 아까 니가 한 말 다 들었어." "일러요. 목 깃 좀 놓으면 안될까요?" "싫다." "나 잡으러 나온거에요?" "응." "아무리 그래도 난 연상에겐 관심이 없어요." 철수가 일어섰던 그 벤취에 도로 앉았습니다. 무슨 얘기 하는거야 근데. "흑흑, 왜 나는 안된다는 거죠? 정희는 고려해 볼 맘이 있다면서." 녀석 때문에 나도 장난스럽게 되 버렸네요. 쩝. "정희 누나가 내게 그런 말을 하면 그건 진짜 결심한 마음에서 나온 거에요." "무슨 말 하는거야?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정희에게 질투심 생기네." "정희 누나는 오래전부터 알아 온 사이잖아요. 누나에게 말하지 말아요. 내가 짝사랑 했던 사람이에요 헤헤. 정희 누나가 간혹 내게 연하만 아니었으면 하는 말을 했어요." "안 들어 갈거야?" "정희 누나 때문에 연상에겐 잘못된 감정 가지지 말자라고 생각했지요." 녀석이 들어 가기 싫어서 자꾸 다른 말을 하네요. "내가 사귀자고 했던 말은 장난이었어. 왜 그래 너?" "내가 생각하기로 연상의 여자가 연하의 남자를 대할 땐 사랑하는 맘이 있어도 가벼운 것 같아요. 가볍다는 것은 어느 누군가 스며 들기가 쉽다는 거겠지요. 나 도 한 구석에는 성숙한 면이 있는데, 자꾸 어린 쪽으로만 보더군요. 남자는 다스 리려는 심리가 강하고 여자는 기대고 싶은 심리가 강하죠. 내가 누나를 다스리려 고 생각한다면 누나가 비웃겠지요? 감싸 주고 싶은 생각도 누나는 그냥 헛웃음으 로 던져 버리죠. 여자들은 연하의 남자에게서 보다 나이가 들고 성숙한 남자에 게 더 기대기를 원하나 봐요. 그리고 연상의 남자가 자기를 이해하고 더 잘 감 싸 줄 것이라 믿나 보죠." 녀석이 자뭇 심각하네요. 이 녀석 정말 정희를 좋아 했나 봐요. 진짜 질투 나 네. "치, 그런 말들을 어디서 줏어 들었니?" "줏어 듣다니. 많은 연구에 의해서 스스로 깨달은 건데." "이제 21 살짜리가 뭘 안다고 그런 말들을 내 뱉는거니? 내가 나이가 조금 더 들 고, 인생 경험이 늘면 그걸 반박해 줄게. 들어가서 공부 해 빨리." "봐요, 누나도 내가 어리다고 바로 깔아 뭉개잖아. 우쒸. 당구 한 시간만 치고 오면 안될까요?" "들어 가자? 안 그러면 동아리 방 칠판에다 은정이는 철수와 사귀기로 했음,이 라고 적어 놓는다? 그러면 너 학교 다니기 힘들어 질 걸. 정희에게도 니가 짝사
랑하고 있다는 말 전한다?" "정희 누나 반 만 닮아라 씨. 정희 누나도 내가 자길 좋아하는 거 알아요." "그래, 그건 아는 거 같더라. 들어 가지 이제." "결투 해야 되는데, 씨." 철수를 결국 도서관으로 데리고 왔지요. 말을 물가에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먹 이지는 못한다. 그는 바로 엎드려 자 버리는군요. 한 동안 철수와 잘 지내었습니다. 여름 방학 때와는 달리 시험이 끝나고 서울 로 돌아 간 철수와 자주 만났지요. 철수와 같이 있을 때면 그냥 편하고 재밌고 좋았어요. 심통을 부리긴 하지만 배려하는 맘도 있었고, 말을 잘 듣는 편이었지 요. 12 월 중순을 넘어선 어느 날, 그와 함께 겨울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나는 그에게 뭔가 종이 상자를 건네었습니다. "이게 뭐에요?" "선물." "선물인건 알겠는데, 뭐냐니까요?" "뜯어 봐." "음, 그러지요. 이런다고 내가 누나에게 연민의 정을 가질거라 생각지는 말아 요." "알았어, 알았어." 나는 철수에게 삐삐 하나를 선물 했습니다. 자식에게 연락 할 방법은 집에 전화 를 하는 수 밖에 없는데, 녀석의 아버님이 받으시면 뭘 자꾸 꼬치꼬치 물어 보시 더라구요. 그리고 집에 없으면 도저히 연락할 길이 없어서요. 올 겨울 크리스마 스는 할 수 없이 녀석과 보내야 겠군요. 그냥 당분간 다른 이들에게 다가갈 마음 이 생기지 않는군요. 누군가 잊고 싶어서 그런 거지만 철수도 한 몫 하고 있다 는 것은 부인하지 못하겠네요. "삐삐네? 근데 디자인이 너무 여성스럽잖아." "주면 그냥 고맙게 받아라." "번호는요?" "***.272.0865. 달달이 고지서 너에게 줄테니까, 그건 니가 내라." "알았어요. 이름은 내 이름으로 했지요?" "응. 주소만 우리 집으로 했어." "나도 삐삐가 생겼구나. 누나 헨드폰 잠깐 줘 봐요." "왜?" "개통식 해야 될 거 아닙니까. 줘 봐요." "에그, 내가 해 줄게." 녀석 앞에서 삐삐를 쳐 주었지요. "지이잉!" "아니 이것은 진동? 푸하하!" 철수는 바로 일어서 쪼로로 어딘가로 달려 갔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제 헨드폰 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여보세요?" "아, 0865 로 삐삐 치신 분이요?" 철수는 좀 황당하게 귀여운 녀석이군요. 18. 18 회
그해 겨울은 따뜻했지만 외로웠습니다. 아니군요. 외로웠지만 따뜻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 하라는 눈이 오네요. 오늘 아침 내 창가에 눈이 기웃거렸습니 다. 기분 좋게 내리지만 쌓이지는 못하고 눈물을 떨구어 버립니다. 하늘에서는 반가운 것이 내리지만 쌓였던 것은 지워져 버립니다. 요즘은 철수 그 녀석이 자주 보고 싶어요. 무슨 감정이 생긴 것은 아니지만 그 래도 같이 있고 싶은 녀석입니다. 눈이 오면 누군가와 그 눈 속을 거닐고 싶어 요. 아무리 방학이지만 철수 녀석, 일어 났겠죠? 삐삐를 쳐 보았습니다. 호호, 바로 전화가 오네요. "0865 로 삐삐 치신 분인가요?" 에그, 항상 이렇죠. "너 내 헨드폰 번호 모르니?" "아, 알지만 다 이렇게 물어 보더라구요. 왜 삐삐를 치셨나요?" "눈 오거든?"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눈 온다구." "겨울에 눈 오는 거 당연하잖습니까." "에그 인간아. 여자가 눈 온다고 전화를 하는 것은 어디 근사한 곳으로 가고 싶 거나 낭만적인 만남을 기대하는 것이거든? 뭐? 겨울이니까 눈 오는 거 당연하다 구?" "그런 걸 왜 나한테 기대를 해요?" "자기 생각을 해 주면 감사할 줄 알아야지. 어디 교외로 드라이버 나갈래?" "눈 오는데 차를 몰고 교외를 나가요? 눈 오면 교통 체증이 얼마나 심한데..." "내가 어쩌다 이런 지경까지 됐을까? 너 그러면 진짜 여자 못 사귄다." "어디 가고 싶은데요?" 내 의도대로 따라 오지만 꼭 기분좋게 따라 오지는 않죠. 그것이 녀석의 매력 인가 봅니다. 크리스 마스가 다가 온다. 오늘 같은 눈은 크리스마스 이브날 내려야 하는데, 나 태어나서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감성이 물들지 않았던 초등학교 1 학년 때를 제 외하곤 한 번도 이루어 지지 않았다. 서울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먼지가 끼여 별 로 하얗지 못할 것이다. 우리 학교 근처만 해도 그런대로 깨끗한 하얀 눈일게 다. 서울 하늘은 매연이다, 먼지다 하여 눈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 잔뜩 끼여 있다. 우리집 옥상에서 맞는 눈은 먼지 바닥에 잘 못 넘어진 신부의 웨딩 드레스 같은 빛이다. 오늘 아침에 밥을 먹는데, 창 가로 하얀 것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감성이 풍 부한 것 같다. 아무도 눈오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나는 밥을 먹고 난 뒤, 옥상으로 올라 갔다. 그리고 눈을 반겼다. 아래를 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쌓인 눈을 모아 내리는 것보다 많은 눈을 던 져 주고는 숨곤 했다. "어떤 놈이 눈을 던진겨?" 쌈쟁이 할머니에겐 함부로 장난 치지 말아야 겠다. 눈이 내린다. 제 죽을 곳이 땅 임을 알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냥 내리고 있다. 눈물 흘려야 할 이별을 알진데 무슨 깊은 그리움이 있는지 잠시간의 만남을 위해
제 죽을 곳으로 부질없이 내려 앉는다. "지이잉!" 옥상에서 추위에 떨면서도 눈을 반기며 청승을 떨고 있는 데 삐삐가 울렸다. 나 에게 삐삐 쳐 주는 사람은 은정이 누나 뿐이다. 삐삐 번호를 친구 두 명에게 알 려 주었지만 그 놈들은 아직 한 번도 삐삐를 쳐주지 않았다. 하기야 한 놈에겐 군 입대하는 날 가르쳐 주었으니 하고 싶어도 못할 것이다. 내 추리닝 바지 호주 머니에 넣어 두었던 삐삐가 울렸다. 거의 죽어 있는 삐삐라서 집에 있을 때도 항 상 가지고 다닌다. 은정이 누나가 연락해 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삐 삐를 꺼내 보았다. 눈을 맞으며 삐삐 번호를 확인하는 것도 낭만이 있다. 삐삐 가 울리면 만남이 있다. 보나마나 은정이 누나의 헨드폰 번호가 찍혀 있겠지만 드물게 잘 못 걸려 온 번호일 수도 있기에 확인을 했다. 은정이 누나구만. 눈 오 는 데 어디 교외라도 나가자고 했으면 좋겠다. "용인 쪽으로나 내려 가 볼래?" 이 여자가 날 닮아 가나요? 그 쪽 눈은 깨끗하겠지요? 눈이 많이 오진 않지만 분명 운전하는 데 있어 애로사항이 있을 법 한데. 무모하네요. 그래도 반가운 말 이다. "용인 쪽은 왜 가는데요?" "자연농원 가자. 눈 오는 날, 공원 가면 재미 있을 것 같아." "가까운 곳에 롯데 월드 있잖아요." "거긴 실내잖아." "얼어 죽고 싶어요?" "가기 싫음 말아. 예전부터 꼭 토를 달아요." "내가 따라 갈 줄 알고 연락한 거 아니었어요?" "응." "가기 싫음 말아라는 소린 뭐에요?" "그냥 해 보는 소리." "진짜 운전해서 갈려구요?" "응." "데리러 올 거에요?" "30 분 뒤에 길가로 나와." 눈 오는 마로니에 공원을 여자친구와 팔짱 끼고 거니는 것은 언젠가 실현이 되 겠지요. 오늘은 자연농원이나 가자. 추위에 단단히 대비를 했다. 큰 장갑을 끼고 두툼한 목도리를 했다. 모직 자켓 은 이런 날 쥐약이다. 무스탕도 쥐약이다. 내 외투중에 모직 자켓이나 무스탕은 없다. 그냥 있는 척 해 봤다. 우주복 같은 조끼 패딩을 속에 받쳐 입고, 스키복 같은 다운 파커를 또 껴 입었다. 그래도 불안해서 패션 돌돌이 모자까지 썼다. 밑이 허전해서 속바지를 껴 입었다. 준비 완료다. "어디 가냐?" "자연 농원에요." "눈 오는데 미쳤냐?" 우리 아버지가 근엄하시게 말씀 하셨다. "용돈 좀 주십시오." 그래서 근엄하게 대답을 했다. "자주 전화 오던 그 아가씨가 꼬시던?" 또 근엄하시게 물으셨다. "네." 당연하다는 듯 대답을 했다. 우리 아버지가 혀를 차신다. 혀를 차시는 울 아버 지가 별 말씀 하지 않고 근엄한 표정으로 거금 10 만원을 주셨다. "올 때 같이 정신병원이나 들렸다 와라."
마지막 말씀을 하실 땐 근엄하시지 않으셨다. 나는 모르겠는데, 은정이 누나는 정신 상담을 받아야 겠다. 심각한 공주 증세 가 있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누나는 꼴랑 니트 하나에 바람이 잘 통할 것 같 은 정장용 바지를 입고 있었다. 뒷좌석에 벗어 던져 놓은 쟈켓 또한 별로 두꺼 워 보이지 않았다. 차 안의 따뜻한 온도에 바깥 기온을 인식하지 못했나 보다. "그런 차림으로 안 춥겠어요?" "너처럼 두툼하게 입으면 둔해 보이잖아. 내 날씬한 몸매가 죽어 버리거든." "자연 농원 그냥 구경만 하다 올거에요?" "무슨 소리야, 탈 거 다 타야지." "추울텐데..." "옷 벗어 달란 소리 안할테니까 염려 마. 나 보기는 이래 보여도 감기 한 번 안 걸려 본 여골이야." "진짜에요?" "그럼. 그리고 나 추위를 별로 타지 않아." 보통 한 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였지만 두 시간이 넘게 걸려 자연 농원에 도착했 다. 눈은 많은 양은 아니지만 계속하여 그치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운전해서 피 곤했을 만도 한데 누나는 자연 농원의 놀이 기구들을 보자 흥분이 되는 모습이 다. 나이 많다고 자랑을 하더니 나보다 더 어려 보이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청룡열차도 타고, 후룸라이드도 타고 음, 바이킹도 타자." 후룸라이드는 물이 얼어서 타지 못했다. 차에서 내리자 마자 추위가 바로 느껴졌다. 얼레? 누나는 춥지 않은 듯, 벗어 놓은 외투를 걸치고 즐거운 표정으로 매표소 앞으로 뛰어갔다. 너무 얻어 먹을 수만 없었다. 용돈 받은 것도 있는데... "자유 이용권으로 두장 주세요." 내가 표를 샀다. 사고 나니까 좀 아깝다. 하루 종일 당구 치고 탕수육 시켜 먹 어도 남을 돈이 나갔기 때문이다. 자연 농원을 입장한 시간은 12 시 정도였다. 푸하하, 그 동안 당했던 설움을 한꺼번에 씻는 듯 했다. "이제, 바이킹을 타러 갑시다." 사람들이 거의 없던 관계로 타고 싶은 거 맘대로 탔다. "나 추워. 이제 가자." "무슨 말씀, 자유 이용권인데 다 타 봐야지요." 누나가 너무 추위에 떠는 것 같아 파커를 벗었다. 그리고 패딩 하나를 벗어 주 었다. 옷 벗어 달라는 소리 하지 않겠다는 말을 불과 몇 시간 전에 했던 거 같은 데, 누나는 파커를 탐내는 눈 빛이다. 이건 줄수 없다. 그래도 목도리는 벗어 주 었다. 그래도 추웠을 것이다. "야, 신난다!" 바람을 가르며 청룡열차가 하늘을 날았다. 청룡 열차에 탄 사람? 누나하고 나 뿐이다. 두 번 탔다. "나 이제 갈래." "어허, 무슨 말씀. 한 번 더 탑시다." 돌돌이 모자를 내리 쓰고 신나게 탔다. 내 옆에서 청룡열차의 무서움 보다 추위 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은정이 누나의 모습이 가여워 보였다. 그렇지만 또 한편 으로 고소하기도 했다. 눈 바람에 화장이 지워지고 빨갛게 솟은 가는 핏줄들로 누나의 모습은 더 이상 세련된 미인이 아니었다. 머리도 엉망이고 콧물까지 흘렸 다.
"나 이제 안 타. 너 나뻐 씨." "누나가 먼저 오자고 했잖아요." "겨우 이것만 벗어 주고 말이야. 그리고 내 생각은 않고 계속 타자고 졸라되기 나 하고..." 누나가 진짜 삐쳤나 봐요. 아무말 없이 그냥 밖으로 나가 버리네요. 따뜻한 커 피 두잔을 사가지고 누나를 따라 갔다. "옷은 벗어 주고 가야지!" 세시가 못 되어 자연 농원을 나왔다. 자유 이용권 괜히 끊었다. 차 안에서 누나는 히터를 최고로 틀어 놓고 코를 풀고 있었다. 그래도 튼튼한 여자다. 나도 상당히 추위를 느꼈는데, 겨우 저 것만 입고 내가 조른다고 탈 거 다 탔으면서 저 정도면 아주 튼튼한 여자라고 인정을 해 주어야 한다. 코를 풀 고 난 다음 팩을 꺼내서 화장까지 고친다. 그 곱던 하얀 손은 검붉게 변해 있었 지만 물수건으로 몇 번 문지르고 크림을 바르니까 빠른 시간 내에 제 모습을 찾 았다. "약한 여자는 아니네요?" "그럼, 내가 얼마나 튼튼한데. 그런 내가 코감기 걸렸어 너." "여기 끌고 온 건 누나에요. 커피 드세요." "원두 커피?" "자판기에서 원두 커피도 팔아요?" "그럼 나 안 마실래." 마시긴 싫음 마라. 창 밖은 눈이 제법 쌓였다. 하지만 눈은 더 이상 내리지 않 았다. 운전대 앞에선 누나가 코를 풀고, 거울 보고. 코 풀고 거울 보고. 한 참 동안이나 차를 출발 시키지 않았다. 따뜻한 차 안에서 누나 옆에 앉아 있는 이 시간이 쌓인 눈 속에서 그냥 곱다. 그 고운 기분으로 옆에 앉은 누나가 또한 그 냥 좋다. 저 누나를 연상이고 뭐고 간에 꼬셔 볼까? 불가능하겠다. 그리고 연인 으로서 유지 시킬 자신도 없다. 아무리 장난 스럽게 말했다고 날 인정하지 않았 던 정희 누나의 가벼운 말들에도 상처를 받았던 내가, 옆의 저런 여자를 어떻게 감당을 하겠냐. 요즘 누나가 외로움을 타는 것 같다. 좋아하던 사람에게 바람을 맞았는데, 외로움 탈 만도 하다. 잘난 여자기 때문에 다른 남자 만날 때까지 별 로 긴 시간이 흐를 것 같지는 않지만 그 시간동안 가볍게 대할 수 있는 나를 자 주 찾을 것 같다. 그러면 됐지 뭐. 시간은 네시에 가까워 졌다. 그러고 보니 밥도 먹지 않았다. "출발 안 해요? 나 배 고픈데." "그래, 가면서 식당 나오면 밥이나 먹자." 차는 아주 느릿하게 움직였다. 쌓인 눈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늘에선 또 눈송이 가 하나 둘씩 떨어졌다. 외대 근처 어느 식당에서 따뜻한 갈비탕을 먹었다. "갈비탕 사 주었다?" "어, 기억하고 있었네. 그때 갈비탕 사 주지 않고 그냥 떠나 버린 누나를 얼마 나 원망 한 줄 모르죠?" "치, 먹는 것에 삶의 목적을 두는 것 아니니?" "누나도 자취 해 봐요." "나도 내년엔 자취나 할까?" "차도 있는 사람이 자취는 무슨..." "정희가 병원에 취직이 되었으니까, 자취방을 비우겠지? 그걸 내가 인수할까?" "왜? 등,하교 하기가 힘들어요?" "그건 아닌데, 4 학년 때는 아무래도 늦게까지 학교에 있어야 될 일이 많을 것 같거든. 그리고 대학원 가게 되면 또 밤샐 일이 많을 것 같고."
"누나 대학원 갈거에요?" "응. 어짜피 나는 직장이 정해 졌잖아. 울 아빠 약국 아니면, 울 엄마 병원." "좋겠수." "넌 군대 안가니?" "나도 대학원 갈거요." "잘됐네. 그럼 나하고 하나, 둘, 셋. 삼년은 더 학교에서 보겠다. 이렇게 데리 고 다니다, 진짜 연인 사이로 발전하면 어떡하지?" 누나는 손가락질을 하고 난 다음 미소를 지었다. 그렇네. 삼년 동안 저 누나의 곁에 있으면, 오늘 같은 기분이 제법 많이 들 것이고, 혹시나 사랑하는 마음도 생길 수 있겠다. 안되는데... 누나가 연상이라서가 아니라 너무 버거운 상대 다.에이, 될대로 되라. "연상은 관심 없다니까." "훗! 너 그 소리 언제까지 나오나 한 번 보겠어." 식당에서 속도 따뜻하게 만든 다음 밖으로 나왔다. 눈 졸라 온다. 뭉치면 산다 는 식으로 떼거지로 땅에 내려 앉고 있었다. 그리움이 많으면 이별의 시간도 늦 어 지겠군. "이래 가지고 서울 갈 수 있을려나?" "그래, 눈 오는 데 차 끌고 나올 때부터 뭔가 찜찜했어." "너, 씨." 누나는 차를 조심스럽게 몰았다. 쌓이는 눈 때문에 차가 불안하게 흔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중으로 서울 가기는 힘들 것 같았다. "누나 차라리 학교로 가요." "학교?" "나는 내 자취방에서 자면 되거든요. 누나는 밤새 부지런히 운전 해 가면 내일 새벽에는 집에 들어 갈 수 있을거에요." "뭐야?" "나 졸라 심심해요. 누나는 운전이라도 하지." "이게 진짜. 눈길이라 초보에게 운전을 맡길 수도 없고, 이런 날씨의 운전이 얼 마나 짜증나고 피곤한 지 모르지?" "한 시간이 지났는데 2,3 킬로 미터 왔어요?" "그거 보단 더 왔다." "수원은 가까우니까, 학교로 가요. 정희 누나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정희 없어도 돼. 내가 니 방에서 자면 돼. 넌 친구 자취방 많을 거 아냐." "내 방이에요?" "두 번이나 잤는데, 못 잘것도 없지." "나도 내 방에서 잘거야." "자라." "남자 방인데 꺼림찍하지 않아요?" "내가 너를 의식해? 아서라 얘야." 이건 분명 나를 무시하는 언사다. 학교까지 가는데도 세시간이나 걸렸다. 나는 혹시 누가 볼까 봐 주위를 살피면 서 내 방문을 열었는데, 은정이 누나는 아주 당당하게 걸어 들어 왔다. 아무리 나를 동생으로 취급한다고 이 건 너무했다. 아까 혹시나 했던 생각 접어야 겠다. 나는 누나가 샤워한다는 얘기를 듣고 밖으로 나갔다. 눈은 하염없이 계속 내리 고 있었다.
떼거지로 내려도 언젠가는 죽게 되어 있다. 암만 쌓여 봐라. 해 한번 기분좋게 내리면 금방일 걸. 내가 들어 갔을 때 누나는 죄수복을 입고 있었다. 옷장 속에 넣어 놓은 거 어떻 게 찾았을까? "나도 옷 갈아 입어야 되요." "갈아 입어라." "나도 남자에요. 그리고 진짜 여기서 잘 거에요?" "응, 넌 바닥에서 자." "옷 갈아 입게 나가요." "고개 돌리고 있을게." "나도 자존심이 있어요." 좀 심각한 어조로 답을 했다. "삐쳤니? 진짜 기분 나쁜거야?" "너무 어린 애 취급 말아요." "나 잠옷 입고 있는데, 밖에 나가 있어야 돼?" "우쒸!" 내 방에서 내가 눈치 보며 화장실 가서 옷을 갈아 입게 될 줄이야. 침대도 뺏기 고 말이야. "집에 전화는 했어요?" "응, 정희네서 자고 간다고 했어." "딸자식 키워나도 소용없다는 말이 누나 때문에 생겼구만." 남아 있던 강냉이 누나가 다 먹어 치웠다. 티슈도 코 푼다고 다 써 버렸다. 그 러고선 또 요구를 했다. "티비도 하나 사고, 오디오도 하나 사라. 방에 문화시설이라곤 컴퓨터 한대 밖 에 없네? 책도 모두 전공 서적들 뿐이고, 가서 만화책 좀 빌려 와. 참 먹을 것 도 좀 사와라." 누나가 만원짜리 한 장을 내 손에 꽉 쥐어 주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밖으로 나갔지요. 섧어라. 추리닝을 입고 딸딸이 신은 맨발로 쌓인 눈을 밟으며 만화방 으로 갔다. 내가 순정 만화를 빌려 보게 될 줄이야. 누나가 말한 책은 200 원짜리 도 아니고 300 원을 줘야 빌릴 수 있는 그런 만화책이었다. 10 권에다가 먹을 거 사고, 티슈 사니 내게 떨어지는 것은 없었다. 그래도 기분 좋게 내 방으로 왔다. 발은 시렸지만 방학이라 사람들 발자국이 없 는 서울보다 깨끗한 눈이 쌓인 거리를 마냥 밟으며 달렸다. "삼권 좀 던져 줄래?" "나는 아직 일권도 다 안봤는데?" "재밌지?" "뭐가 잼있어요. 과자 흘리지 마요." "알았어. 삼 권 줘." 난 또 전공책에 수건 말아 베개 삼고, 싸늘한 방바닥에서 무거운 찬공기 마시 며 만화책을 보았지만, 누나는 스팀 모락 나는 침대 위에서 두터운 이불을 덮고 깨끗하지는 않지만 푹신한 베개를 가슴에 묻으며 한 쪽팔은 호랑이 배에 얹은 채, 그 손으로 과자를 집어 먹으며 만화책을 보았다. 한참 뒤, 나는 만화책 보다 잠이 든 누나를 바로 해 주어야 했다. 엎드려 자면 몸에 좋지 못하다. 누나의 불안하게 자는 모양을 바른 자세로 해 주는 내가 어찌 보면 누나보다 훨씬 어른 스러운데... 호랑이를 뺏으면 또 이불을 말겠지? 니 다 해라 씨. 누나를 바로 눕혀 이불을 덮어 주고는, 나는 방바닥에서 추위에 떨며 만화책을 끝까지 다 보았다. 순정만화 치곤 괜찮네! 나도 자야지 이제.
일어 나 괜히 누나의 자는 모습을 한번 더 쳐다 보았다. 자는 모습이 상당히 사 랑 스럽다. 저 누나가 내 곁에 오래 있어 주었음 하는 마음이 크다. 자자, 이제. 19. 19 회 은정이 누나가 내 방에서 세 번을 자고 갔다. 그 많던 눈은 다음날 오전 따스한 햇살 속에 가여븐 모습으로 죽어 갔다. 누나 는 내가 일어나기 전에 옷을 갈아 입었으며 아침도 먹지 않고 서울로 떠났다. 난 같이 가지 않았다. 그냥 자취방에 더 있고 싶었다. 누나는 또 잠옷을 가지고 가지 않았다. 고이 개어서, 다독거려 놓은 인형 옆에다 놓아 두고는 그냥 떠나 버렸다. 조금 전까지 은정이 누나가 잠 들었었던 침대에 홀로 누워 생각을 해 보았다. 은정이 누나는 일년 전만 해도 모르던 사람이다. 그 사람이 내 마음 속에 존재 의 영역을 넓혀 간다. 어린 시절 친누나처럼 생각했던 정희누나 만큼의 넓은 공 간을 차지했다. 난 정희 누나를 좋아했다. 그녀가 이사를 가버린 다음 난 슬퍼서 울었다. 어린 마음에 상처가 컸었다. 그것을 그 누나는 모를테지. 연상엔 관심이 없다고 말하 지만 난 정희 누나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그 관심을 그냥 우스개로 받아 넘 기는 정희 누나에게 남들은 모르는 상처를 받았다. 정희 누나와 함께 했던 시간 의 10 분의 1 도 안되는 시간을 은정이 누나와 보냈다. 그런 은정이 누나가 벌써 정희 누나를 가려 버리고 있다. 정희 누나는 곧 학교를 떠날 것이다. 그렇지만 예전 이사를 갔을 때보다 큰 아픔을 줄 것 같지는 않다. 나도 이제 컸다. 그리 고 정희 누나는 은정이 누나에게 많이 가려졌다. 누나를 가리는 사람이 하필이 면 또 누나다. 그것이 문제다. 은정이 누나는 정희 누나와는 다르게 연인이라는 말과, 사귀자는 말을 먼저 내 뱉고 있지만 역시 정희 누나만큼이나 장난스럽다. 마음 단단히 먹어야 겠다. 내 마음 뺏기지 않도록 말이다. 한 번 뺏기면 큰일 날 것 같다. 잘못하면 은정이 누 나에게 큰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은정이 누나 주위에는 잘 난 남자들이 기회 를 엿보고 있다. 나에게 버거운 상대들이다. 맘 뺏기지 말자. 누나가 잠시 하룻 밤 묵고 떠난 빈 방의 허전함이 이 시간 너무나 크다. 왜, 내가 좋아하는 여자는 다 연상인거냐. 사주를 한 번 봐야 겠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집에서 홀로 보냈다. 그래도 덜 비참했 다. 만나자고 한 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하, 올해는 할 수 없이 크리스마스 를 혼자 보낸 것이 아니고, 자의로 혼자였다. 내가 심심풀이 땅콩이여 뭐여. 진짜 연상들 너무한다. 그러니까 내가 연상은 관 심을 줄래야 줄 수가 없다. 나도 비싼 몸이여. 재미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 란 걸 가르쳐 주고 싶었다. 배짱 좋게 거절 했지만 졸라 심심했다. 나도 나이가 들었다고 티비 만화영화가 재미있지가 않았다. 그냥 만나자고 할때 쪼르르 달려 나갈 걸. 뒷일은 뒤에 생각 해야 되는데, 내가 너무 먼 훗날의 일을 생각했나 보다. 크리스 마스가 지나고 한 해의 마지막 날이 되었는데도 은정이 누나에게서 연락 이 없었다. 삐쳤나?
올해 크리스 마스는 내게 외로움을 주었지요. 캐롤송이 들리고 화려한 조명등 이 아름다운 청담동 이브의 밤 거리를 홀로 거닐다 왔습니다.
그냥 웃고 싶었어요. 고귀하신 분이 태어난 그 화려한 날에 아무 생각 없이 웃 고 싶었습니다. 근데 웃지 못하고 외로움을 탔습니다. 외로움은 누군가를 생각나 게 하지요. 나, 연락하면 만날 수 있는 사람들 많아요. 동아리 선배 오빠들도 있구요. 우 리 과에도 내가 만나자 하면 바로 달려 올 선배 오빠나 동기 녀석들 많아요. 그 렇지만 그들에겐 내가 관심을 두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만남 뒤에 오는 공허함 이 싫었습니다. 차라리 여자 친구들 만나는게 낫죠. 내가 잘못 된 것일까요? 나 남자들 오래 사귀지 못했습니다. 내가 만나던 남자들은 어느 시점에선가 어색해 지더군요. 하지만 내가 어색하게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색한 사람 은 만나기 싫었고, 관심없는 사람들은 만남 자체가 공허할 뿐이지요. 내가 진짜 좋아했다고 생각한 사람도 이제 어색해 졌습니다. 어색한 사람은 잊혀지지요. 크리스 마스 날은 그냥 홀로 집에 있었습니다. 핸드폰도 꺼놓고 전화도 받지 않 았습니다. 내가 나를 혼자 있게 만들었지만 자의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내게 생각나 는 사람들은 나를 찾지 않았습니다. 어색한 승주는 잊혀지는 중이고, 제일 친했 던 정희는 남자 친구와 학생시절의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보내겠지요. 침대에 홀로 앉아 생각했습니다. 가볍게 사랑을 내 뱉은 사람들, 그 가벼운 사 람들에게 나를 지켜줄 수 없다고 생각 한 그 사람 모두를 잊겠다는 생각을 해 봅 니다. 내년엔 새로운 사람이 생기겠지요. 조급하지 않으며, 조금씩 서로를 공유 해 가는 소박한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 내년엔 가랑비를 맞고 싶습니다. 언제 젖 었는지도 모르게 가는비를 맞으며 흠뻑 젖고 싶습니다. 최소한 승주 보다는 오래 토록 내 곁에 머무를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이런 생각들을 하게 만든 놈이 밉습니다. 그 녀석을 만났다면 그냥 생각없이 웃 었을 텐데... 아무래도 올 해 크리스마스는 뭔가 다른 기분이 들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만나 면 생각없이 웃게 만드는 그 녀석과 함께 할 것이라고 한달 전부터 계획했었는 데, 녀석이 날 만나 주지 않았습니다. 여자 친구도 없는게 무슨 똥배짱이랍니까. 이브 날 아침부터 한 시간 간격으로 다섯 번이나 호출을 했습니다. 점심 때가 지나서야 전화가 왔더군요. "0865 로 호출 하신분이요?" 짜증도 났지만 반가운 목소리였지요. "내가 오전부터 호출했는데, 왜 이제 전화하는거야? 너 늦잠 잤지?" "일찍 일어 났습니다." "저녁에 나와라. 누나가 맛있는 거 사줄게." "나 바빠요." "어쭈, 튕기네? 맛있는 거 사준다니까." "우리집에도 먹을 거 많아요." "나올 거면서 그렇게 튕기면 좋니?" "누가 나간데요? 내가 부르면 항상 쪼르르 달려나가는 그런 사람인 줄 아세요?" "너 오늘 만날 사람 없을 거 아냐." "그렇긴 하지만, 나도 바쁠 수 있단 말입니다." "교회나 성당 나갈거니?" "아니요. 나를 왜 만나고 싶은데요?" "그냥 심심하니까. 너 만나면 재밌잖아." "우쒸, 나 바빠요. 전화 끊어요." "야, 박철수." "뚜우..." 녀석이 쌔게 나왔습니다. 집에다 전화를 했더니 아버님이 받으시더군요. 나보
고 처자라고 말씀하시는 아버님이 무서워 그냥 끊었습니다. 나 철수에게 삐쳤습 니다. 그래서 한 일주일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연인 사이도 아닌데, 내가 삐치네요. 지금 내가 좋아했던 사람에게 차이고, 남 자 친구 만들지 않아 녀석한테 이런 수모를 당했지만 나중은 달라질거라 봅니 다. 일주일 째 철수도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강적이네요. 너그러운 누나가 용서 를 해야지요. 한 해의 마지막 날 울적하여 내가 먼저 철수에게 연락을 했습니 다. 오늘은 바로 연락이 왔습니다. 그리고 새벽까지 집에 들어 가지 않았습니다. 타종식 하는 것을 꼭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종각을 갔었습니다. 11 시부터 사 람들 틈에 끼어 있었지요. 사람들 엄청 많았습니다. 바깥에 있으니 많이 추웠지 요. 그렇지만 기분은 좋았습니다. 찬 공기 속에 뿜어져 사라지는 입김처럼 한 해 가 떠나 갔습니다. 종각 앞에서 철수 녀석 손을 잡고 한 해를 떠나 보냈습니다.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폴짝 폴짝 뛰더군요. 사람들은 또한 카메라가 보이자 손 을 흔들기도 했습니다. 나도 죄다 따라 했습니다. 녀석이 그런 나를 어린애 쳐 다 보는 듯한 모습을 하며 비웃네요. "누나 이제 24 살 된 거 맞아요? 하는 짓 보니까 아닌 것 같애." 타종식이 끝나고 사람들은 하나 둘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지요. 그래도 새벽 한 시를 넘길 때까지 많은 사람들이 종각 주변에 모여 있었습니다. 철수가 자꾸 시 계를 쳐다 보길래 더 있고 싶었지만 자리를 떴습니다. 주차 시킬데가 없어서 종 각에서 아주 먼 곳에 차를 주차 시켜 놓았습니다. 종각에서 인사동을 거쳐 차 있 는 곳으로 걸었습니다. 인사동은 고운 빛을 하고 저녁 같은 모습이었지요. 따끈 한 새벽 녹차나 한 잔 했으면 했는데, 철수는 시계를 쳐다 보며 짙은 입김만 뿜 더군요. 그냥 지나쳤습니다. 새해 첫날이라 돌아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래 도 밤 거리가 신경이 쓰였지요. 차 주차 시켜 놓은 곳은 사람이 뜸한 곳이었거든 요. 철수가 쌈 잘한다고 했으니 괜찮겠지요. "나 이제 집에 못 들어가요." 철수는 걸으면서 투덜 거렸습니다. "왜?" "나, 차라리 외박은 가능해도 열두시 넘겨 집에는 못 들어가요." "열쇠 가지고 나왔어야지." "나는 누나처럼 작정하고 나온 게 아니잖아요." "그럼 찻 집에서 밤을 샐까?" "잠 와요." "그럼 우리 집 가서 잘래?" "이 여자가 진짜! 새벽에 싸돌아 다니는 것도 모자라서 집에 남자를 끌어 들여 요? 부모님이 아시면 진짜 좋아하시겠다." "싸돌아 다녀? 나 여기 간다고 얘기하고 나왔어. 당당히 허락 맞고 나온 거란 말이야." "안 추워요?" "조금 춥긴 하다." "누나는 집에 가요." "너 집에 못 들어간다며? 벌써 새벽 두시다. 나 가버리면 너는 갈 데 있니?" "그런다고 마냥 이렇게 있을 수는 없잖아요. 나는 집에 아침 아홉시를 넘겨야 들어 갈 수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집에 몰래 숨어 들어 갈거야?" "나 집에는 못 가요. 유일한 출입구인 현관문 잠궈 놨을 거 분명하거든요. 그리
고 울 아버지 주무시다 깨시면 엄청 무서워요." "그런데 너 어디 갈데 있냐구? 아까 찻집이나 가자니까." "여관." "뭐? 나도 따라 가야 되는거야?" "그런 농담 하면 내가 재미있어 할 것 같아요? 웃지 말아요." "호호, 이럴 때 보면 참 귀여운 데 말이야. 말투는 항상 톡톡 쏜다 말이야. 그 냥 우리 집 가자." "에, 그 자꾸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구요. 누나는 집에 가요." "우리 집 가자니까." "누나 집은 그래요? 밤 늦게 남자 데리고 가도 괜찮은 그런 집이에요?" "당연히 아니지. 그렇지만 우리 부모님은 지금 주무셔. 나는 집 열쇠를 가지고 나왔구." "그래서요?" "우리 집에 방 많아. 몰래 들어 가서 내일 아침에 밥 먹고 가면 되잖아." "헛, 부모님은요?" "우리 아빠, 엄마 아침 일찍 출근 하실거야." "내일 노는 날이에요." "그렇네. 그럼 다음에 재워 줄게." "놀리는 거에요?" "그럼 우리 집 근처 여관에서 자라. 우리 부모님 노는 날이라도 하루 종일 집 에 계시지는 않아. 오전 중으로 다 어디 가실거야. 아침은 우리 집에서 먹어. 내 가 차려 줄게." "정말요?" "응." "누나 나따라 여관에서 자는 것은 아니죠?" "왜? 진짜 따라 가 줄까?" "자꾸 어린 애 취급 하지 말아요." "그럼 니가 나보다 나이가 많니?" "됐어요. 그럼 누나 동네로 갑시다. 나는 여관가서 잘테니까, 부모님 어디 가시 고 나면 꼭 밥 차려 줘요." "알았어." 철수가 나를 자주 놀렸죠. 나도 그것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아 냈습니다.
나, 새해 첫 날부터 여관 신세를 지었다. 요즘들어 누나가 날 어린애 취급 하 는 게 못마땅하다. 예전보다 강도가 심해졌다. 저 여자에게 다시 한번 마음 단단 히 먹어야 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정희 누나는 저거 애인하고 깨지면 뭔가 나에 게 기댈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이 누나는 그게 아닌 것 같다. 진짜 동생으 로 밖에는 생각 하지 않는 것 같다. 여관 아줌마가 낮 열두시가 되니까 날 내 쫓았다. 그때까지 누나는 연락이 없었 다. 어떻게 된겨? 밥 차려 준다더니... 할 수 없이 집으로 갔다. 집에 다 도착하 니 삐삐가 울렸다. 전화를 했더니 내가 어딨냐고 묻는다. 아침 차려 주겠다던 여자가 낮 1 시까지 자빠져 자? 누가 남편 될지 골치 아프겠다. 할 줄 아는 음식이나 있을려나? "다녀왔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근엄하게 날 맞으셨다. "타종식은 잘 보았느냐?" "네."
"누구랑 갔었느냐?" "어제 전화 드렸잖아요." "널 자주 꼬시던 그 여자하고 있었느냐?" "네." "밤은 어디서 샜느냐?" "여관이요." "물론 너 혼자 잤겠지?" "물론이지요. 이상한 생각하지 마십시오." "안했다 녀석아. 음, 그 여자가 두 살 연상이라고 했느냐?" "네." "앞으로 그 아가씨 자주 만나지 마라." "싫은데요." "자식이 바로 싫다고 그러네. 나는 너네 엄마하고 동갑이지만 별로 좋은 대우 못 받았다. 여자를 사귈려면 나이를 좀 더 먹은 후에 한 여덟 살 어린 여자하고 사귀어라." "전 그냥 선후배 사이로 만나는 거에요." "지금은 그렇게 생각을 하겠지. 어제는 새해라 그러려니 했지만 여자하고 밤을 지새고 오는 그런 일은 삼가해라. 특히 연상의 여자하고는 말이다." "네." 그 여자 내 방에서 세 번이나 자고 갔는데요. 그렇게 답을 해 버릴까 생각을 해 보았다. 그 말을 했다간 자취방 빼고 등,하교 여기서 하라고 할 것 같아서 참 았다. 그리고 들고 계시는 티비 리모콘도 맞으면 상당히 아플 것 같았다. 우리 아버지도 상당히 도둑님 심보시네요. 여덟살 차이? 나보고 중, 고등학생하 고 사귀란 말은 아닐테고 그러면 28 살까지 여자 사귀지 말라는 말 아닌가. 너무 하십니다 아버지. 안 그래도 비참한 현실 속에 살고 있는데... 침대에 누워 어제 일을 떠올려 보았다. 은정이 누나와 손을 잡아 보았다. 추운 겨울 날씨였지만 장갑을 끼지 않은 채 오 랫동안 손을 잡고 있었다. 그 곳을 촬영 나온 리포터 한 명이 옆의 사람 손을 잡 고 흔들어 보라고 부탁을 했지만, 누나는 나 말고 다른 사람의 손은 잡지 않았 다. 따뜻했는지 오랫동안 내 손을 놓지 않았었다. 나도 좋았다. 연상에 대해서 연구를 한 번 해 봐야 겠다. 겨울 방학 동안 누나를 자주 만났지만 늘 그런식이었다. 의식해서 받아 들이니 까 너무 표가 났다. 누나는 분명 나를 좋아하고 있고, 나를 편한 존재라고 생각 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예전보다 더 날 남자로 취급하지 않는 것 같다. 이월 달이 되고 정희 누나에게서 몇 번 연락이 왔었다. 정희 누나는 일월 달부 터 이미 학생이 아니었다. 출근을 했으니까. 강북 어느 종합 병원 약재부에서 어 엿한 약사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다. 졸업식 때 보자며 연락이 몇 번 왔었다. 방은 나 모르는 사이 이미 빼 버렸다고 한다. 야속한 사람... 병원에 자주 놀러 오라고 하지만, 학교에서 노원구까지면 졸라 먼데 가능한 일이냐. 이제 안 보이니까 조금씩 잊혀 질거라 생각하니 가심이 좀 시리다. 날 참 좋아 해 주던 그 누나가 이제 잊혀지겠구나. 그 누나에겐 연상이라도 고려해 볼 마음 이 있다고 말해 주었는데, 한 번도 진지하게 받아 준 적이 없어서 그냥 잊혀지 게 생겼다. 그런 내 마음을 모르고 은정이 누나는 날 가지고 놀았다. 마음이 허 한데 말이다. "진짜 해 줘요?"
이월의 어느 날이었다. 저녁에 영화 한 편 같이 보고 날 집으로 데려다 준 누나 가 며칠 전 부터 놀리던 발언을 또 했다. 그래서 차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 다. 자뭇 심각한 표정으로 누나를 쏘아 보며 말했다. 날 집 앞에 데려다 주던 누나가 요즘 새로운 장난을 쳤다. 생글 생글 웃으며 말 이다. "잘 들어 가." "그래요.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작별 하는데 키스도 안해 주고 가?" "뭐여?" "영화에서 봤을 거 아냐? 키스 해주며 달아 나는 사람도 봤을거구, 그냥 분위 기 있게 키스 해 버리는 남자도 봤을테지? 하기야 거긴 대부분 남자가 운전을 했 었구나. 그럼 내가 해 주어야 되나?" 해 주지도 않을 거면서 저런 말 내뱉으면 잼있을까? "무슨 말 하는거에요? 장난 치지 말고 조심해서 잘 가요." 내 표정을 보며 웃는 누나가 귀엽기도 했지만 얄밉기도 했다 한 일주일 그런 표정을 보니까 기분이 살 나빠지대요. 나도 남잔데... 그래서 그 날은 바로 떠나지 않았다. 영화를 봤기 때문에 뭔가 배운 것도 있었 다. 생글 웃는 누나에게 자뭇 진지하게 대답하고는 누나에게로 다가 갔다. 누나 어 깨를 잡고 얼굴을 디밀어 버렸다. 진짜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누나의 운전대를 잡고 있던 한 손마저 꽉 붙들고 제법 강하게 밀어 붙였다. "야, 박철수. 너 뭐하는거야?" "해 주라며?" 머리로 날 받아 버리는 누나 때문에 많이 슬펐다. 누나가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나를 씩씩되며 쳐다 본다. 진짜 슬프다. 그리고 억울하다. 난 진짜로 할 생각은 아니었단 말이다. 그냥 놀리길래 잘못하면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고 했을 뿐인데, 이 여자가 머리로 날 받았다. 그럴 거면서 그런 얘기들은 왜 했 냐. 섧다. 연상에겐 진짜 맘주지 말아야지. 아프고 슬프다. "이제 그런 장난 하지 말아요." 난 조금 어색하게 돌아섰다. 내가 했던 짓도 어색하고 날 받아 버린 누나도 어 색했다. 말이 조금 서툴게 나왔다. 한 동안 삐친 척 해야겠다. 손잡이를 잡은 손 이 다 떨렸다. 더 이상 안 놀릴 줄 알았는데, 누나는 문을 열고 나가려는 나를 잡았다. 그리 고 또 놀렸다. "하고 싶으면 해 봐." 이 여자가 진짜. 또 받을려구 그러나? 잠시 어색했던 마음도 없어졌다. 누나는 웃음이 가신 얼굴로 말똥히 나만 쳐다 보고 있다. "진짜로 해요?" 기분이 별로 안 좋다. 누나 표정이 얄밉다. "해 봐." "진짜로?" "그래." "뽀뽀 아니고 키스로 합니다?" "그래. 키스할테면 해." 무슨 작정으로 저러는지 진짜 헛갈린다. 지 머리 단단한 걸 믿나 보다. 어쩌냐 이걸. 누나는 내가 못할 거라 알고 있었더군요. 잠시 그걸 생각했나 봐요. 내가 한참
동안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씩 웃더군요. "넌 아직 어려." 두살차이 가지고 이 여자도 되게 잰다. "누나는 뭐 많아요?" "내가 올해는 진짜 좋은 애하나 소개 시켜 줄게." "됐어요. 나는 소개팅 타입이 아니라며?" "그렇긴 하더라. 정희 졸업식 때 나올거야?" 그냥 나가려 했을 때 보다는 맘이 편하다. 말을 돌리면 어떻냐 분위기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 왔는데. "네." "그때 보자." "그러지요. 조심해서 들어가요." "미안했어." "뭐가요? 머리로 받은 거?" "아니, 너에게 장난친 거." "그러니까 앞으로 그런 말은 하지 마요." "그래도 너 이건 알아라. 아까 같은 상황에서는 아무리 장난같이 해도 전혀 맘 이 없었으면 그런 말 못해. 훗, 너도 어찌 보면 그 사람을 좀 닮은 것 같다." 그 사람? 승주씨를 말하는 거야? 내가 더 잘생겼지. "누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장난 많이 쳤죠? 그래 놓고 하려고 하면 머리로 다 받아 버렸죠?" "훗! 너 알아서 생각 해." 진짜 해 버릴걸 그랬나? 그랬다면 어색했겠지? 저 여자가 어떤 맘을 먹고 있는 지 짐작이 안된다. 일편단심파일거 같은 느낌도 주고, 아무나 홀리는 불여우 같 기도 하고, 헛갈린다. 에이 모르겠다. 그냥 이렇게 친한 사이로 지내면 되지 뭐. 단순한 공대생이 복잡한 걸 생각하면 다치겠지? 암 그렇지. 잘가라 잘 난 여 자야. 내가 철수를 너무 많이 놀렸나 봐요. 너무 어린 애 취급을 했나요? 철수는 내 행동에 맘 상하지 않을 거라 믿었는데, 철수도 남자였다는 것을 잠시 잊었네요. 아무렇게나 대해서는 안되겠어요. 철수가 내 어깨와 한 손을 잡고 내게 키스하려 고 달려 들었을 때, 잠시 당황이 되었지요. 상대가 철수라는 생각을 잊고, 예전 누군가에게 내 입술을 빼앗겼을 때가 생각이 나더군요. 머리로 받아 버렸지요. 철수의 모습이 순간 슬퍼 보였습니다. 내가 잘 못한 것인데, 순진한 철수에게 내 기분따라 마음을 다치게 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저 녀석 지금 표정 을 보니까 아까 진짜로 할 마음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네요. 억울하다는 표정이 에요. 지금 이대로 보내면 나도 그렇고 저 녀석도 그렇고 한 동안 어색하겠지 요. 그래 할테면 해 봐라.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아요. 키스 한 번 하면 어때 요. 그거 하고 나면 쟤가 남자로 보일까요? 훗! 그는 아직은 나에게 남자로 보이기를 꺼려 하는 것 같습니다. 흠, 할까 말 까 망설이다가 하지 말자라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표정이 승주를 닮았네요. 녀석과는 이런 식으로 오랫동안 지내고 싶어요. 지금 심정은 어색한 사이가 되 어 버릴지도 모르는 남,녀 사이가 아니라 지금처럼 계속 편하게 만날 수 있는 동 생과 누나 사이가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녀석은 내게 이미 잊혀지기 싫은 존재 가 되었습니다. 내년엔 정희도 곁에 없는데, 학교에서 녀석처럼 친근하고 맘 편 한 사람은 곁에 있기 힘들겠지요. 잘 가라 귀여운 녀석아. 20.
20 회 친한 친구는 나보다 먼저 학교를 떠나 갔습니다. 정희의 졸업식장에는 그녀의 부모님과 오빠와 그리고 철규씨, 그도 나왔더군 요. 아, 철수와 저도 있었어요. 철수는 그날 무시당했습니다. 철수의 표정이 약 간 슬퍼 보였던 것은 그것 때문이겠지요. 그의 말처럼 철수는 정희를 상당히 마 음에 두고 있었나 봐요. 철수는 철규씨를 그날 처음 봤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 기가 상상한 것보다 멋있지 않은 놈이라서 실망했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훨씬 낫 다고 말하더군요. 뭐,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면 살 때는 즐겁죠. 정희의 부모님에 게 철수는 어릴 적 같은 동네에 살 때의 꼬마 모습으로만 기억되어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그냥 정희의 귀여운 동생 정도로만 배려해 주었지요. 확실히 철규씨와 는 차이를 두는 모습이었습니다. 정희도 마찬가지였어요. 철수는 무시당했습니 다. 철규씨는 철수에게 별다른 경쟁의식도 느끼지 않았고, 철수에게 별 시선도 두지 않았습니다. 철수는 나와 정희 사이에서 사진 한 장을 찍은 다음 그냥 집으 로 가버렸습니다. 가족들과, 그리고 정희와 단 둘이 사진을 찍는 철규씨의 모습 이 싫었나 보지요. 정희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 나도 자리를 떴습니다. 다음 날 나는 수원으로 내려 갔습니다. 철수가 수원에 있다고 전화가 왔더군 요. 내가 단지 그 녀석을 보러 학교를 간 것은 아닙니다. 학교에서 볼 일을 보고, 철수의 오피스텔을 찾아 갔지요. 철수가 자기 자취방 을 오피스텔로 불러 달라고 하더군요. 침대까지 있으니까 일반 자취방들과 다르 게 불러 달라고 했어요. 내가 철수네 방을 찾았을 때, 그는 침대 앞에서 상도 없 이 끓여 놓은 라면을 먹고 있더군요. 쫌 불쌍하네요.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기대하는 대답이 있는 것인지 의미 파악이 되지 않는 말을 꺼내었습니다. "두고 보자 새끼." "뭐?" 철수는 내가 뺏어 먹을까봐, 국물까지 후루룩 마신 다음 남비를 턱 놓더니 장엄 한 표정으로 말을 뱉었습니다. "어제 그 새끼가 나보고 귀여운 녀석이라며 머리를 쓰다듬었어. 지가 나보다 나 이가 많으면 몇살이나 많다고." 코트를 옷걸이에 걸며 대답을 해 주었지요. 그리고 침대에 걸터 앉았습니다. "아, 철규씨 얘기구나. 다섯 살." "내가 올해 한 살을 더 먹었는데, 그래도 다섯살 차이래요?" 바보새끼. "하여튼, 내가 정희누나를 알아도 10 년은 먼저 알았을텐데, 애인이 되고 나서 도 내가 더 자주 만났는데 새끼가 날 아주 무시하는 투로 내려다 봤어. 사람들 만 없었어도 쌈 났다 진짜. 얼굴살은 쪘는데, 팔 다리는 가는 것 같았어. 목 선 을 보면 알지. 새끼 맨날 야한 상상만 하고 있을거야." 무슨 말을 저리 쉬지도 않고 한답니까. "겨우 졸업식장에 남자 친구 한 번 나타난 걸로 그 정도면 결혼 식장에서는 진 짜 난리 나겠다. 결혼 식장에선 어디 정희가 네게 말 한마디 할 정신이 있겠니? 그리고 정희의 남편 되는 사람하고 나란히 있는 모습 보면 상당히 소외된 느낌 받을텐데." "내가 먼저 가면 돼." "니가 어떻게 먼저 가니? 같은 나이라도 여자가 먼저 가는데." "정희 누나가 그 새끼하고 결혼 한대요?" "모르지. 근데 철규씨가 니 친구야? 왜 새끼라고 그래? 너 예전에 승주 보고도
새끼라고 그랬니?" "아니에요. 그 사람에게는 질투심을 별로 못 느꼈지. 그때 누나는 정희 누나에 게 상대가 안됐어. 누나가 누굴 사귀던 뭔 상관이야?" 이게 진짜 질투심 유발하는 발언을 심각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내 뱉네요. 승주 는 많이 잊혀졌나 봅니다. 이제 나에게 조연같은 느낌으로 이름이 거론 되어지네 요. "너 기분 나쁘다아?" "지금은 둘이 비슷비슷 해요. 에, 정희 누나가 자주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났기 때문에 곧 누나가 더 좋아 지겠지요. 하지만 배운게 있어서 정희 누나하고는 조 금 다를 거에요. 하하." 뭘 배웠는지는 대충 알지요. 자주 내 뱉던 말이니까요. 연상에게는 관심이 없 다. 그 뜻이겠지요. 그래라 뭐. "후후, 나한테 잘 해라. 앞으로 학교에서만 3 년을 더 봐야 하는데." "알았어요. 라면 끓여 드릴까요?" "옥수수는 없니?" "그때 누나가 다 먹어 치웠잖아요." "라면은 염분 많고, 칼로리 많아서 잘 안 먹는데..." "벨 이상한 소릴 다하네. 라면 없으면 이 곳 율전에서만 1000 명 이상이 굶어 죽 을 거에요. 자취생들 주식량인데. 자취생들은 그럼 맨날 염분 하고 칼로리 쌓아 두면서 살게요." "그래, 하나 끓여줘." 짜식이 라면은 잘 끓이더군요. 라면 하나를 먹었지요. 배가 부르고 스팀이 모 락 모락 나는 실내는 따뜻하고 몸을 나른하게 만들더군요. 집에 갈때까지 여기 서 조금 자다 일어 날까? "너 오늘 서울 안 갈거야?" "곧 개강인데 왜 가요?" "나 혼자 가면 심심한데. 너 당구장 안가니?" "왜? 한 게임 할래요?" "그게 아니고, 나 여기서 좀 자다 일어 나면 안될까?" "날 무시하는 행동이다." "널 믿는다는 행동이라곤 생각 못하지?" "안돼요. 저기 삼층의 어떤 녀석이 동거한다는 소문 나가지고 주인 아줌마가 쫓 아 낼 생각만 하고 있단 말입니다. 나도 그런 소문 나면 쫓겨 난다 말입니다." "그런 소문 두려운 녀석이 내가 여기 찾아 온 건 왜 말리지 않았니? 별 희한한 생각하고 있어." "진짜 쫓겨 나는데..." "나도 방 하나 얻을까? 이 오피스텔에 빈 방 있니?" "이게 무슨 오피스텔이야?" "그렇게 불러 달라며. 여기가 정희네 방보다 훨씬 크고 깨끗해." "음, 그렇지요. 누나 진짜 자취하게요?" "몰라. 이 번 학기까지는 다녀 보다 안되겠다 싶으면 방 하나 얻지 뭐. 얻으면 이 곳에다 얻어야지." "에이쒸." "내가 가까이 있는 게 싫어?" "너무 가까워 지면 안되는데?" "왜?" "당신이 그리운 건 내게서 조금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치, 너 간혹 시를 적던데, 그 대상이 누구야? 정희지?"
녀석이 또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리네요. "내가 가지고 간 그 시도 그럼?" "어떤 신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뭐 그립다, 못 잊겠다 그런 말 적어 놓았으면 맞을 거에요. 이제 끝이다. 신난다." "뭐가?" "아, 이제는 떠났으니까 정희 누나에 대해서는 안 쓰야지. 그 새끼하고 잘 살아 라 그래. 이제 누나를 대상으로 한 번 적어 볼까?" "그래, 그래라." "그러지요. 그래도 오늘 여기서 조금 자다 일어나는 것은 안돼요. 그냥 지금 서 울 갑시다." "너는 여기 있고?" "따라 가죠 뭐." 정희 누나는 졸업을 하고 학교를 떠났다. 허전하다. 이제 허전하고 생각나면 찾 아 가던 정희 누나의 방은 딴 사람이 들어 서 내가 가지 못하는 곳으로 변했다. 은정이 누나가 곁에 있지만 통학을 하기 때문에 앞으로 잠들기 전 밤이 외로우 면 찾아 갈 곳이 없다. 여자 친구를 사귀면 이런 느낌이 안들텐데, 내가 연상들 틈에서 이 무슨 꼴이냐. 은정이 누나가 자취를 할까 생각 중이다. 아주 환영하는 바이지만, 너무 티를 내면 은정이 누나가 거만해 질 것이기 때문에 관조적인 태도를 취했다. 당신이 그리운 건 내게서 조금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헛소리 하지 말라고 그 래. 그리운 사람이라면 붙어 있는게 좋지 떨어져 있는게 좋냐. 붙어 있으면서도 충분히 그리울 수 있다. 당신이 그리운 건 내 곁에 있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정희 누나가 그랬는데... 아직 춥다. 주위의 색깔들도 아직은 겨울 색이다. 아침엔 입김이 안개처럼 퍼 져 나간다. 그래도 봄이랜다. 나, 삼학년 됐다. 삼학년이 되고 학교를 가 보니 까, 모르는 놈들 투성이다. 동기들 대부분이 군대로 사라져 갔다. 동기들은 자퇴 하지 않는다. 다만 군대로 징집되어 사라졌을 뿐이다. 90, 91 학번 늙은이들과 같이 수업 들을려니 별로 신나지 않았다. 군대 갔다 오 더니 곱게 늙지 못하고, 모두들 이상하게 변한 것 같았다. 공부도 좀 해야 겠 다. 내가 그런대로 성적이 좋지만 군발이들을 상대하려면 조금 더 노력이 필요 할 것 같다. 당구장에서는 조금 낄낄 될 수 있었다. 군대 가서 당구 실력이 줄은 선배들 탓 에 난 승승장구 했다. 난 이제 120 을 넘어 섰다. 150 도 머지 않았다. 기다려라 홍은정, 그대를 따라 잡을 날도 멀지 않았소. 누나는 삼월 초에는 자주 보지 못했다. 그리고 삼월 말이 되면서도 자주 보지 못했다. 약대 내에서도 복학한 형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 사귀어라. "아버지, 오늘은 잠실까지 갔다 오겠습니다." "빨리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도록 노력해라. 그래야 내 심부름도 하고, 네 엄마 도 나 대신 모시고 다니지. 이건 오면서 배달하고 오너라." "그러지요. 저걸 배달까지 하고 오는데, 오늘도 제가 기름을 넣어야 합니까?" "당연한 것은 자주 묻는 것이 아니다." 젊은 놈이 타고 다니기에는 대형차라 바로 아버지 차 타고 나온게 티가 나지 만 그래도 기분 좋다. 산지 이년 가까이 됐는데, 계기판을 보면 이제 8 천 키로 밖에 되지 않는다. 거의 새차구만. 우리 아버지 차도 오토매틱이다. 에이비에스
브래끼에다 에어백도 있다. 실내도 넓다. 의자도 전동식이다. 실내가 우드 그래 인으로 장식 되어 있다. 2500 씨씨 6 기통이다. 쉽게 말해서 고급차란 뜻이다. 신 형 그랜져다. 그렇지만 그 잘난 은정이 누나차가 더 비싼 차다. 내가 그런 것에 꼴리면 안되 는데, 요즘들어 내가 누나보다 잘난 게 뭐가 있는지 따지는 짓을 자주 한다. 마 음이 가고 있다는 뜻이겠지? 봄 색깔이 초록으로 물들고 있다. 여자는 봄에 약하 다더니, 이 여자가 봄 바람이 났나? 최근들어 누나를 자주 보지 못했다. 운전 연습을 하면서 누나 동네를 가 보았다. 누나가 사는 빌라 앞에서 차를 정 차 시켜 놓고 음악을 듣다 왔다. 집에 누나가 있을까? 요즘들어 삐삐도 쳐주지 않는 누나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다. 진짜 봄바람 났나? 여자는 색조에 약하지요. 가슴 떨리게 하는 봄의 색조들은 많은 그리움을 떠 올 리게 하더군요. 봄이 되니까 승주 그 사람이 자주 생각이 났어요. 그립기 때문 에 잊혀지지 않는 것일까요. 잊혀지기 때문에 그리운 것일까요. 꽃이 하나 피어 날 때 그 사람 기억하나가 피어 나고, 꽃 잎 하나 떨어 질 때 설레이는 느낌 하나가 내 맘에 내려 앉았지요. 봄의 색깔은 점점 나를 유혹해 갔습니다. 그 유혹 따라 설레었지요. 군대 갔던 동기들이 돌아 왔어요. 어른 스러워 진 모습들이었지요. 그들과 어울렸습니다. 공허함을 지우기 위해서, 봄의 유혹에 못 이겨서 여러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괜 찮더군요. 철수와 아옹다옹하는 것도 좋았지만 내 또래와 내 위 사람들을 만나면 서 철수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그런 감정들을 느낄 수 있었지요. 승주에게서 느꼈 던 그런 것들 말입니다. 나도 연하를 좋아하고 할 타입은 아닌가봐요. 동기 한 명과 사귈뻔 했지요. 내게 적극적인 녀석이 한 명 있었어요. 제법 남 자 다웠지요. 매너도 있었고, 여자에 대해 아는 것도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도 서둘렀습니다. 그는 나를 너무 쉽게 봤나 봐요. 이제 호감이 가려는 시점에 서 그는 내가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지요. 그의 서두름으로 과 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 소문은 나에게서 그를 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중 간 고사 기간에 그가 나에게 사랑한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과 내의 다른 시선 은 상관없이 그는 나를 원했지요. 편지는 시도 적혀있고 제법 애틋한 말들로 꾸 며져 있었지요. 그렇지만 난 어색함이 싫었습니다. 나는 그 편지를 무시했습니 다. 나를 어색하게 찾아 온 그에게 나는 또 쌀쌀함을 보였지요. 내 버릇일까요? 시험이 끝나고 과 동기들이 모인 어느 술좌석에서 술에 취한 그가 내게 서운했 던 것을 털어 놓더군요. 그리고 자기 분에 못이겨 나쁜 술버릇이 나왔습니다. 한 마디로 꼬장을 부린 거지요. 귀엽게 술주정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사람은 다 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친구들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나가 서도 심한 언사를 내 뱉더군요. 나는 저런 게 싫어요. 술을 먹고 아무렇게나 말 하는 거. 취중진담? 추한 모습일 뿐입니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무례를 범하 는 행동이 싫었습니다. 그나마 가지고 있던 좋은 기억들도 그는 스스로 던져 버 렸습니다. 한 달 고작 친하게 지냈다고 내게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싫었습니 다. 내게 심한 말도 했지요. 무시했습니다. 다른 남자 동기들이 술에 취했으니 이해해 달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 사람 편 을 들었어요. 같이 술에 취한 그의 친구가 심하게 그를 편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다 똑같을 수는 없지요.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대쉬하는 남성을 좋아하 는 여자도 있지만, 적어도 난 그렇지 않아요. 술에 취한 그는 내가 너무 이상적 인 사랑을 꿈꾸고 있다고 하더군요. 뭐, 어때. 난 여자 후배들과 집에 가지도 못하고 그의 술주정을 들어 주어야 했습니다. 남 자 동기들은 그를 어디론가 데려 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나에게 달 려 왔어요.
나 그 사람 술버릇 때문에 한 대 맞았어요. 눈물이 나오고 사람이 싫어지더군 요. 너 이제 끝이야. 나, 그 남자에게 심하게 뺨을 맞았습니다. 주위에 있던 여 자 후배들은 놀란 듯 나를 둘러쌓았지요. 남자들에게 끌려간 그 남자는 여전히 씩씩되며 나를 노려 보았습니다. 그때 왜 그 녀석이 생각이 났을까요. 울면서 삐삐를 쳤습니다. 내게 다시 전화 가 올때까지 앉아서 울었습니다. 주위 후배들이 의아한 표정이더군요. "0865 로 호출하신 분이요?" "나 장난칠 기분 아니야." "오랜만이네요?" "나 좀 데려가." "누나가 어디있는 줄 어떻게 알아요. 나 지금 당구친다 말이에요." "나 누구한테 맞았어. 심하게 뺨을 맞았단 말이야. 앙..." "에? 거기 어딘데요?" "여기? **호프집 뒷 골목이야." 녀석은 5 분만에 달려 왔습니다. 그리고 나를 데려 가려 했지요. 철수는 아무말 없이 주위 사정 살피지 않고 그냥 나를 데려 가려고 했습니다. 그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나 봅니다. 술취한 그 남자가 달려와 철수의 머리를 때렸습니다. 아주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짓는 철수를 보았지요. 주위에 선 술 취했으니까 참아라 그러며 대신 사과하는 녀석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다 른 과의 모르는 남자가 와서 나를 데려가려 하자 못마땅해 하는 모습이었지요. "누나, 얼굴이 빨갛거든요. 나보다 더 쌔게 맞았어요?" "응." 그때부터 나는 무협 영화를 보았지요. 두 사람이 철수의 어깨를 잡고 늘어 졌으 며, 술취한 그 사람 말고 다른 한 명도 철수에게 맞았습니다. 그 사람을 포함해 우리 과에 다섯 명의 남자들이 있었는데 철수 혼자를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잡 고 있던 두명에 의해 나에게로 왔다가 잡고 있던게 풀리자 날 때린 그 사람에게 쫓아 가서 다시 날아차기 하는 철수를 보았습니다. 철수는 진짜 쌈을 잘했습니 다. 기분 좋았지요. 근데 문제가 될 것도 같아요. 술에 취한 그 사람은 철수에게 계속 시비를 걸었고, 철수는 날아차기 하려 했습 니다. 그리고 주변에선 철수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나보 고 누나,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버릇 없는 놈이라며 하나, 둘 날 때린 그 사람 편을 들기 시작했지요. 1 대 5 였지요. 그래도 철수는 계속 날아차기 하려 했습니다. 다섯명이 험한 표정을 지으며 철 수를 위협했지만 철수는 하나도 기가 죽지 않더군요. 진짜 큰 싸움 날 뻔 했어 요. 그러자 여자 후배 중에 누가 신고를 했어요. 우리나라 경찰차 빨리 오더군 요. 경찰차 두대에 나를 포함해 철수, 그리고 우리 동기 남자들 다섯명 모두가 파출소로 끌려 갔더랬습니다. "이 새끼가 날 다짜고짜 팼어요." 날 때린 녀석은 분함을 표시하며 큰 소리로 떠들었지만 철수는 조용하더군요. 다른 말은 안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계속 그 말만 했습니다. "얘는 나 때문에 그랬어요. 저 사람이 술 먹고 날 때렸단 말이에요." 제가 대신 변명을 해 주었지요. 동기들에게도 사실을 말하도록 잘 타일렀습니 다. 옥신 각신하며 동기들끼리 의견이 나누어져 쟤가 잘했니, 철수가 잘했니 말을
주고 받았습니다. 조서는 꾸미지 않더군요. 그냥 훈방 조취 되었지만 철수는 한 동안 고개를 들 지 않고 계속 죄송하다는 말만 내 뱉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철수는 별 다른 취조 를 당하지 않았어요. 날 때린 그 남자만 계속 깡을 부리다 출석부 같은 걸로 두 들겨 맞고 야단도 맞았지요. 한 때 저 남자에게 호감을 가졌던 게 다 원망스럽습 니다. 근데 철수는 왜 그 난리를 부렸던 것일까요? 내가 한 대 맞았던게 기분이 나빴을까요. 자기가 한 대 맞은 게 기분이 나빴을까요. 오늘 집에 가긴 걸렀습니다. 11 시가 넘어 파출소로 끌려 갔었는데, 지금은 새 벽 한시가 다 되었습니다. "야, 너 왜 그랬어?" "저 새끼들 91 학번이에요?" "응." "큰일났네. 우리 과 선배들에게 알리면 안되는데... 그리고 말입니다. 파출소 끌려 갔을 때는 고개를 숙이고 무조건 잘못했다고 비는게 가장 빨리 풀려나는 지 름길이거든요. 웬만하면 다 훈방 조취인데, 변명할 거 없어요. 죄를 뒤집어 쓰 지 않을 정도의 경범죄는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는 게 최고에요. 경험으로 배운 겁니다. 누나도 앞으로 파출소 끌려 가면 그러세요." "뭐야? 나 오늘 너 아니었으면 파출소 가지 않았어. 앞으로 갈 일 없단 말이 다." "누가 알아요 그걸. 그리고 누나 왜 그래요? 또 그 버릇 나온거야?" "뭘? 남자 차는 거? 모르겠다. 조금 서글프네." "오늘 누나 때문에 3 년만에 파출소 구경했네. 집에 연락하면 어쩌나 졸라 떨었 잖아요." "내가 맞은게 기분 나빴던 거니? 아니면 니가 맞아서 열 받은거니?" "저 새끼가 내 머리 때렸을 때 졸라 아팠거든요. 누나 뺨은 더 세게 맞았다면서 요. 누나가 때릴 데가 어딨다고..." "후후, 그 말 믿어도 돼?" "그럼요." "오늘 나 잘데 없는데?" "오늘만 내 방에서 재워 준다." "열쇠 줘. 나 먼저 몰래 들어가 있을 테니까, 넌 숙취제거제 하고 치솔하고, 뭐 내게 필요한 거 있으면 다 사가지고 와." "돈을 줘야죠." "그래. 만화책도 빌려 올래?" "만화방이 지금까지 열었을래나?" "후후, 한 번 가 봐. 그리고 너 진짜 쌈 잘하나 봐?" "정의를 위해서만 사용하지요." "푸후!" 나는 철수의 방에서 네 번째 밤을 맞이 했습니다. 모르겠어요 아직은.연하가 뭐 어때? 이런 감정이 생길지도 모르겠네요. 철수는 내 잠옷을 따로 한 서랍에다 넣어 두었습니다. 자기 서랍에는 꾸깃 꾸 깃 여러 옷들을 겹쳐 넣어 놓았으면서 내 잠옷은 넓은 서랍의 공간에 홀로 넣어 두었더군요. 녀석이 오기 전에 옷을 갈아 입고 세수를 했지요. 그리고 녀석의 침 대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거울에 얼굴을 보니 말이 아니네요. 핏줄이 튀겼어요. 그 자식 내가 다시 보면 인간이 아니다. 철수가 열받을 만도 했겠어요. 호호. 철수 때문에 뺨을 맞았던 기분 나쁜 감정 을 지울 수 있었습니다. 내 곁에 있는 호랑이가 자세히 보니 철수를 닮았네요. 이런 인형을 왜 사다 놓 았을까? 한 마리 사줘야 겠군요. 내가 방에 들어 온지 30 분이 훨씬 더 지났는데
도 녀석은 들어 오지 않았습니다. 푸우 "누나, 만화방 열었어요. 누나? 드래곤 볼 다 안봤죠? 38 권까지 나왔더라구요. 이거 다시 봐도 잼있어요." 녀석은 드래곤 볼만 20 권 가까이 빌려 왔더군요. 저것 때문에 늦었군요. 한 쪽 엔 만화책을 잔뜩 들고, 다른 한 쪽엔 먹을 것과 칫솔 하나가 든 비닐 봉지가 들 렸군요. 연하는 저렇군요. 21. 21 회 베개 하나 사야 겠다. 친하지 않은 전공책에 수건 말아 베개 대용으로 사용했더 니 목이 뻐근하다. 누나가 네번 째 내 방 신세를 지고 있다. 앞으로 몇 번을 더 자고 가는지 세어 봐야 겠다. 10 번을 넘어 가면 그때부터는 방 값을 받아야 겠 다. 치솔도 일회용이 아닌 누나 전용으로 하나 사다 놓고, 수건도 따로 하나 사 놓 아야 겠다. 그래 은정씨 니는 좋겠다. 푹신한 침대에서 얼마전에 빨아 놓은 깨끗 한 베개를 베고, 통통한 호랑이 인형을 안고, 거기다가 깨끗한 봄 이불까지 덮 은 채 참 잘도 잔다. 아이, 목이야. 이거 나도 남잔데, 여자를 저렇게 내 방에서 재워도 되나? 친구들과 상의를 해 봐야 겠다. 저게 무슨 의도로 내 방을 들락거리는지, 잘 때 건드려도 되는지. 근 데 건드린다는 의미가 잘 파악이 되지 않는다. 날 믿고 저렇게 고이 잠들어 있는 데 음흉한 생각을 한다는 게 양심에 찔린다. 하지만 나도 남잔데, 여자가 내 방 에서 무방비 상태로 잠들어 있는 현 시점에서 아무 음흉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는 것은 남자로서 수치다. 벌떡 일어 섰다. 누나 앞으로 갔다. 잘 때 보니까 누나가 참 예쁘다. 뭐 낮에 봐도 예쁘다. 나는 누나를 건드려 보기로 맘을 먹었다. 손가락으로 누나 볼을 찔 러 보았다. 어쭈, 웃어? 두 손가락으로 코를 잡아 막았다. 코가 막혔으니까 입 을 벌리겠지. 입까지 막아 버릴까? 잘못하면 죽을 것 같다. 코를 판 손가락을 입 에다 집어 넣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내가 그렇게 지저분한 놈은 아니다. 이만하면 됐다. 별로 수치스럽지 않다. 좀 건드려 먹었으니까. 잘 자쇼. 손가락 으로 볼 한 번 더 찔러 보고 누나가 씩 웃자, 다시 내 자리에 누웠다. 다음엔 용 기를 내어 가슴도 한 번 찔러 보자. 저 누나가 좋아진다. 사랑이란 감정까지 얼마 남지 않은 듯 하다. 큰일이다. 오 늘 누나에게 차인 놈을 보았다. 비참해 보였다. 그 사람 누나의 기억에는 나쁜 놈으로, 그냥 스쳐가는 인생의 엑스트라로 묘사 되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꿈꾸는 세상에서 그는 분명 주인공이다. 그가 아름다운 사랑을 생각하면 그는 멋 있는 남자였을 것이고, 누나는 잠시 그 주인공의 상대였을 뿐이다. 누나의 관점 에서 보면 오늘 내가 한 행동은 혹시 멋있는 모습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관점에서 보면 나는 나이도 어린 게 버릇없이 싸가지 없는 행동을 한 것에 불과 하다. 나는 지금 누나에게 뭘까? 조연 쯤 될려나? 조연은 오래 출연해야 된다. 내가 꿈꾸는 세상에서 누나는 뭘까? 잠시 스쳐가는 인연이 아니라면 누나는 비중있는 역할을 맡고 있다. 마음을 줄 여자 친구가 나타나지 않으면 누나가 주인공이 될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누나에게 쉽게 잊혀 질 것 같지만 누나는 내게 그렇지 않 을 것 같다. 오늘 누나에게 좋은 인상 심어 주지 못하고 배역을 잃어 버린 그 놈 은 다시 등장하기 힘들 것이다. 이름 없는 놈으로 사라질 것이란 말이지. 나는 그렇게 되기 싫다. 길게 끌어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런 관계를 계속 유지해 야 된다. 파출소에서 누나가 나를 편들 때, 오늘 그 자식은 형편없는 놈으로 묘
사 되어졌다. 나도 그렇게 되지 말란 법 없다. 저 여자는 맘이 떠난 사람에게는 독한 여자다. 보통 연하는 멋있는 놈이 나타나거나, 옛사랑이 나타나면 별 볼일 없는 놈으로 그냥 사라지는 것을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서 많이 보아 왔다. 사랑 하지 말자. 이런 관계를 유지하다가 나중에 멋있는 놈으로 사라지자. 근데 왜 내가 이런 쓸데 생각을 해야 되는겨? 아, 잠이 오지 않는 밤이구나. 그 리고 오랜만에 파출소도 끌려 가 보았었구나. 저런 쓸데 없는 생각 충분히 할 수 있다. 내게서 저 여자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 누나와 다시 자주 만났다. "푸하하, 갈비탕 한 그릇 벌었다." "너 진짜 80 맞아?" "응." 나 150 다 되었는데, 80 이라 속이고 누나와 당구 쳐 이겼다. 당구 정도는 수단 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도 별로 욕 들어 먹지 않는다. 욕 들어 먹는다. "너 120 치잖아." 확 단골 당구장을 바꿔 버리던지 해야지. 주인 아찌가 괜히 나한테 친한 척 했 다.누나가 당구채를 뒤집어 들길 래 다 시 한판 쳤다.120 놓고 쳤다가 개 박살 났다. "맛있어요?" "응, 나도 종종 얻어 먹어야 겠다. 너 이제 3 학년이니까 얻어 먹어도 별로 양심 에 걸릴 것도 없어." "누나 진짜 대학원 갈거에요? 대학원은 꼭 우리 학교가 아니라도 갈 데 많잖아 요. 이화여대 좋지 않아요?" "왜? 후배 꼬셔서 너에게 소개시켜 달라고?" "내 의도를 잘 파악하시는 군요." "내가 곁에 있는 게 싫어?" "싫은 건 아니지만, 누나 공부 못하죠? 그러니까 다른 대학으로 갈 자신이 없으 니까 어드벤티지가 많이 작용하는 우리 학교 대학원을 생각하는 중이죠?" "후후, 너 그래 내가 다른 대학원 원서를 썼을 때 반응이 어떤지 두고 보겠어. 너 때문이라도 다른 대학원에 떡 합격해 주겠어." "진짜루?" 그러면 안돼는데, 괜히 말 꺼냈다. 오월달은 밝은 모습이었다. 은정이 누나 덕에 여자 친구 생각도 별로 나지 않았 다. 내가 그냥 생일을 말해 버리자, 내 생일 선물도 사주었다. 내 생일은 음력으 로 따진다. 내가 어린애도 아닌데... 동아리에서 내 생일 파티를 해 주었다. 누나가 술을 제법 마셨다. 오늘 마신 술 의 양으로 누나가 취한 행동을 보이진 않았으나 운전을 하긴 힘들 것이다. 눈치 를 살폈다. 여자 후배들도 제법 있는데, 누나는 잠자리를 의뢰하지 않았다. 아무 래도 또 내 방을 의지할 것 같았다. 동아리에 소문이라도 나면 좋을 거 하나도 없는데, 누나는 나를 쳐다 보며 생긋 웃었다. 누나가 내 생일 선물로 차 뒷 좌석에서 꺼내 준 것은 내 방에 있는 호랑이의 큰 형 쯤 되는 무식하게 큰 호랑이 인형이었다. 다 큰 사내 자식한테 인형이 뭐 냐. 그리고 사 줄려면 좀 빨리 사주지. 우리 집에 베개가 두개 있다. 얼마전에 혹시나 해서 3 만원이나 주고 라텍스 고무로 된 고급 베개를 하나 샀다. 인형이 하나 생길 줄 알았다면 사지 않아도 되는 물건이었다. 생일 파티 한 곳에서 내 방까지 별로 긴 거리가 아니었으나 들고 가기 졸라 쪽팔렸다. 모두가 인형을 들 고 가는 나를 보고 비웃는 것 같았다. 근처의 웃는 사람들은 모두 나 때문인 것
같았다. 은정이 누나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가 않는다. 침대 위에 베개도 두개고, 인형도 두개다. 푸짐했다. 인형을 주고 갑자기 사라 진 누나는 그날 내게로 오지 않았다. 누나가 준 인형 앞에 베개를 대고 누웠다. 사자머리가 준 인형은 발 밑에 깔았다. 그리고 고급 베개는 배 밑에 깔았다. 졸 라 불편했다. 그냥 옛날 베개를 제외 하곤 방바닥에 던져 놓고 잠을 이루었다. 누나는 어디 간걸까? 내 방에서 자도 되는데, 가슴 찌르는 것은 나중일인데, 눈 치 챘나 보다. 누나는 여자 후배 하나를 데리고 여관에서 잤다고 했다. 그 애가 갈 데가 없어 서 같이 자주었다고 했다. 제법 배려하는 마음도 있는 여자다. 근데 왜 남자친구 를 사귀면 오래 못 끌지? 유월이 시작 되었다. 오전에 수업을 끝내고 집으로 오는 길에 난 아주 가슴이 내려 앉는 줄 알았다. 번호판은 보이지 않았으나 저 은회색 비엠더블유 승용차 는 우리 학교에 한대 밖에 굴러 다니지 않는다. 정문 부근이었다. 나는 걸어 나오다 갑자기 식은 땀이 흘렸다. 엔진 부근에서부 터 앞 운전대 있는 곳 까지 심하게 일그러져 견인차에 끌려 가고 있는 누나의 차 를 보았다. 사고가 난 것 같았다. 은정이 누나가 많이 다쳐 어디론가 실려 간 것 같다. 큰일이다. 누나가 많이 다치진 않았나 걱정이 심하게 되었다. 난 전화 기를 찾았다. 저 멀리 상점에 공중 전화가 보였다. 뛰었다. 그냥 정신없이 누나 의 생각으로 전화기를 향해 달렸다. 누나 헨드폰으로 전화를 했다. 다친 사람이 전화를 받을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무작정 누나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누나의 소식을 듣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상 점 문이 열리고 전화벨이 실감나게 울렸다. "너 지금 나에게 전화하고 있는거니?" 분명 통화음이 가는 중인데 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았다. 누나 가 아주 기분 나쁜 표정으로 캔커피 하나를 뜯어 마시고 있었다. 한 손에는 울리 고 있는 핸드폰을 들고 말이다.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무사하네요?" "엉?" "누나 차 끌려 가는 거 봤어요. 혹시 누나가 다치지나 않았나 얼마나 걱정했는 데요. 무사해요?" 누나 볼을 잡아 당겨 보았다. 무사한 것 같다. 탱글탱글 했다. "야, 아파." "다행이에요." "아이 몰라 씨. 얘기 하지마." "뭘?" "누군지 잡히기만 해 봐. 완전 폐차 시키게 생겼어." "누나 차 말이에요? 어떻게 된건데?" "일요일에 학교를 왔다가 역 부근에 차를 주차시켜 놓고 그냥 갔어. 술을 조금 마셨거든." "누구하고 마셨는데?" "우리과 여자애들하고 마셨다. 됐니?" "그래서요?" "아침에 와 보니까 차가 저 지경이 됐잖아. 새벽에 누가 받아 버리고 도망갔다 는데 알 수가 있어야지. 2.5 톤 트럭이었대." 얘기 하지 말라더니 지가 알아서 다 얘기해 주네요. "저 차 꼬물 된거에요?" "응."
"외할아버지가 사 주신 귀한 찬데 어떡해요?" 꼬시게 잘 됐다. "몰라. 집에서는 차 사줄 생각 않을텐데." "이 근방 정비소 한 번 돌아다녀 봐요. 손해 배상은 받아야 할 것 아네요." "신고해 놨어. 짜증나 죽겠어." "안됐네요." "앞으로 학교는 어떻게 다니지?" "전철 있잖아요. 아, 그리고 우리 건물 오피스텔 몇 개 비었어요. 알아 봐 줄까 요?" "진짜 자취할까?" "내가 주말마다 차를 몰고 다녔어요. 물론 한약 배달을 위한 거였지만, 나름대 로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었죠." "무슨 말 하는거야?" "기름 넣어 주면 차를 사던지, 방을 얻던지 그때까지 누나 태우고 다닐 수 있는 데?" "치사하다 진짜. 내가 너 태워 줄 때 기름 넣어 달란 소리 했니?" "치사하다는 말은 제 아버지께 하세요. 나는 배달 나가면서도 기름은 내가 넣어 요."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누나와 함께 서울로 돌아 갔다. 국철, 퇴근 시간에 장난 이 아니지. 신도림 가까이 가면 이건 차라리 전쟁이 났을 때, 방공호보다 더 빽 빽히 사람들로 채워진다. "누나 버터야 살아요. 이호선 타면 좀 나을거에요." "내 뒤에서 잘 버텨." 누나를 앞에 세우고 밀리지 않을려고 힘을 써 보지만, 역부족이다. 나 혼자면 모르겠는데, 누굴 보호하는 입장에서 제 힘을 내기는 힘들다. 그래서 궁지기신에 서 미소 때문에 정환이가 죽는구나. "기름 넣어 줄래요?" "알았어. 치사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호선에서는 앉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할머니가 보이자 일어 서 주었 다. 푸하하, 나 이런 사람이요. 뭘 그리 쳐다 보나?
"너 어디 놀러가냐?" "운전할 때, 선글라스 끼는 놈이 부러웠어요. 멋있는 점퍼에다가 깃을 세운 티 셔츠, 자기 아들이지만 멋있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약재를 정리하시며 나를 아주 희한한 놈으로 쳐다 보셨다. 학교 가는 데 별 지랄을 다 떠냐,하는 표정이시다. 상관없다. 저런 표정 어제 오늘 본 것 도 아니다. "조심해서 운전해라. 그리고 차에 상처가 나면 니가 다 물어내야 한다." "너무하십니다. 제가 돈이 어딨다고?" "내가 니 결혼할 때, 해 줄거 생각한 게 있거든. 거기서 까지 뭐." "아버지 이거 말고 다른 선글라스는 없어요?" "그 나이 많은 여자한테 사달라고 해. 꼬락서니 보니까 누구 태우고 갈려고 하 는 모양인데. 남자는 아닐거고, 그렇다고 사귀는 여자 애도 없을거고. 그 처자 맞지?" "네." "나이 많은 여자하고 살면 니가 고생한다. 막내는 모르겠는데, 장남은 연상하 고 안 맞아 임마."
"그냥 선,후배 사이라고 말했잖습니까." "하여튼, 요 며칠간 만 차 빌려 주는 거다. 학생이면 대중교통을 이용해야지." "알겠습니다." "베스트 드라이버는 말이죠? 사자가 토끼를 사냥하면서도 최선을 다하 듯, 경운 기를 앞 지를 때도 주위 상황을 잘 살펴서, 깜박이를 켜주고 하는 겁니다." "진짜 시끄러워 못 듣겠네." "에, 그리고 베스트 드라이버는 말이죠? 다이아몬드 표시가 보이면 무조건 브레 이크를 한 번 밟아서 속도를 늦추어야 돼요. 이렇게요." "오늘 집에 갈때도 이럴거니?" "누나도 그랬잖아요." "내가 언제?" "그랬어요. 잘 봐요. 베스트 드라이버는 말이죠? 저기 보기 싫은 짭새들이 속도 계를 들고 숨어 있는 것을 봐도 손을 흔들어 줄 줄 아는 여유가 있어야 되요." 복수 했다. 녀석이 운전 하면서 말이 많았어요. 초보라 불안할 줄 알았는데, 꽤 운전을 잘 했어요. 철수 덕에 서울로 잘 왔습니다. 아침에는 말이 많더니 저녁엔 조용히 왔어요. 운전하는 것 보다 옆좌석에 앉아 있는게 더 편하네요. 청담동 사거리에서 신호등 때문에 주차를 했지요. 옆에 감청색 소나타 2 가 정차 를 했었어요. 그 차안의 풍경도 괜찮더군요. 남,녀가 아옹다옹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어요. 저쪽도 남자가 더 어려 보이네요. 철수랑 아옹다옹하며 지낸 시간이 좋은 추억이 될 것 같네요. 옆좌석 운전하던 남자가 나를 쳐다 보며 웃는군요. 나도 옅은 미소로 여유로움 을 보여 주었습니다. 잠시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돌아 가서 옆 차의 실 내용을 다시 설명하지요. "우쒸, 한 번 더 견인 되어 간 차 끌고 오게 만들어 봐. 가만히 안 있겠어." "그래도 돈은 내가 냈잖아." "그럼 니가 내야지. 친누나라고 하나 있는 게 어찌 그리 속을 썩이냐." "옆 차를 봐라. 얼마나 조용하냐. 저 남자가 저 여자에게 잘 하나 봐. 여자가 여유로운 모습이잖아. 너도 남자라면 저 차 운전하는 사람을 본 받아라. 남자는 여자에게 저런 표정을 짓게 해줄 수 있는 아량이 있어야 하는거야. 시간날 때마 다 누나를 구박하니까, 밖에서도 그런 버릇이 나올 거 아냐. 너 그러면 여자친 구 못 만든다." "내가 지금 구박하지 않게 생겼냐? 내가 차 끌고 나가지 말랬지? 견인 푯말 아 래에 차 주차 시킬 배짱은 어디서 나온거야?" "여유로움을 가져라 얘야." "누나가 옆 차의 아가씨 정도로 예쁘면 내가 차를 다 부숴 놓아도 암말 않겠 다." "나도 나가면 미인 소리 듣는다니까?" "아니야, 옆 차의 아가씨가 훨씬 더 예뻐. 헤."
쇠뿔도 단 김에 뽑으랬다고 바로 부모님께 학교 근처에 방을 얻겠다고 했습니 다. 흑흑, 내 차는 폐차 시켰어요. 엔진 룸이 엉망으로 찌그러져 엔진이 재생 불 가능이래요. 내 차를 박살 낸 그 트럭은 찾지 못했구요. 아빠는 그냥 승용차 한 대 사줄테니 통학 하라고 했지만 자취도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철수가 있는 곳이 그래도 깨끗하고 넓었지요. 오피스텔처럼 꾸며져 있는 방이 맘에 들었어요. 마침 빈 방이 있어서 계약을 했습니다. 토요일날 방을 구하고 일 요일날 아빠 도움으로 짐을 옮겼지요. 인테리어는 내가 좀 더 신경을 써야 겠군요. 내 방엔 철수 방보다 짐이 많아 요. 철수 방에는 없는 티비, 작은 오디오도 있었고, 작은 냉장고, 전자 레인지. 욕실에 세탁기도 있었어요. 전화도 놓아야지요. 원래부터 있던 침대도 바꾸어야 겠네요. 그냥 쓸까? 그럼 침대보만 예쁜 걸로 하나 사야겠네요. 아침에 차를 마 시기 위한 둥근 유리 탁자도 하나 사구요. 화분도 몇개 사야죠. 벽에 걸 수 있 는 액자들도 몇 개 사야겠지요. 나 혼자 들고 오기 힘들겠죠? 철수 데리고 수원 한 번 나갔다 와야 겠네요. 내 옆방의 옆이 철수 방입니다. "내일 운전해서 올거니?" "응." "아침엔 나 데리러 오지마." "왜요?" "그냥 와." "그럼 내가 차 끌고 갈 필요 없잖아." "내일은 필요할테니까 가지고 와." 철수는 차를 자기 자취방 건물 앞에 세워 놓지요. 제법 이른 시간인데 일찍 왔 더군요. 내 방 창을 통해서 철수를 보았습니다. 철수는 학교를 가지 않고 자취방 으로 들어 오더군요. 철수를 찾아 갔지요. "어, 아침부터 왠일이에요? 누나 여기 있었어요?" "응. 역시 니 방은 썰렁하구나. 근데 학교로 가지 않고 여기로 왜 온거야?" "책은 가지고 가야 할 것 아닙니까. 근데 누나 복장이 밖에 돌아다니기에는 좀 가볍네요." "잠깐 나 따라와 봐." "나 수업 들어가야되요." "잠깐이면 돼." 철수에게 내 방을 구경 시켜 줄 참이었지요. 철수는 내 방을 지나쳐 계단으로 내려가 버리더군요. "누나 거기서 뭐해요?" "넌 어디 가는데?" "밥 사주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요?" "차나 한 잔 하고가." "어? 그 방으로 왜 들어가?" "여기 내 방이야. 나 어제 이사했다?" "엥?" 내 방에 처음 들어 온 이방인이 철수가 되었네요. 이방인? 오후에는 철수 덕을 좀 봤지요. 필요한 걸 사다보니가 제법 많이 사게 되더라구 요. 차가 없었으면 고생할 뻔 했어요. "이런 거 다 필요 없어요. 그냥 살면 되는데..." "내가 너하고는 다르지. 너 오늘 집에 갈 거지?" "네, 차가 내 차가 아니라서." "우리, 내일 집떨이, 아니 입방식 하자. 뭐 필요한 거 있음 준비해 와." "누나 진짜 자취하는 거에요?"
"내 방 봤잖아. 좋지?" "왜 내가 사는 곳으로 왔는데?" "내가 자취해 본 적이 없어서 여기 밖에 모르잖아." "그렇다고 같은 건물에서 살아?" "싫니?" "아, 앞으로 어떻게 될려고 이러지?" "뭐가?" "내일 집떨이는 둘이서만 하는 거에요?" "응." 누나가 내 방 바로 근처에 방을 얻었다. 좋아해야 되는지, 싫어해야 되는지 아 직 갈피를 못 잡겠다. "야, 임마 똑바로 말해 봐." "내일 그래서 그 여자 방에서 단 둘이 집떨이 하기로 했단 말이지?" "응." "기회네. 술을 잔뜩 먹인 다음 덮쳐." "뭐 임마?" "눈 딱 감고 덮쳐. 그럼 넌 연상의 콧대 높은 여자를 사귀는 거야." "그러다 잘못해서 잡혀 가면 어떡하냐. 누나가 싫어 할 것 같은데." "자기 방에 스스로 널 불렀는데 잡혀 가겠냐. 널 유혹하는 거잖아. 넌 맨정신으 로 불가능할 것 같으니까 술을 먹고 덮쳐. 이왕이면 독한 술로 해라." 친구에게 내일 일에 대해 상의를 해 보았다. 그래, 더 좋아지기 전에 덮쳐 버리 는 거야. 성공하면 연상사귀는 거고, 실패하면 차이는 거다. 차여도 지금 차이 는 게 낫다. 하필이면 내 옆으로 와 가지고 말이야. 안 그래도 좋아지는데, 앞으 로 큰일 날 것 같다. 밤에 아버지가 양주 모아둔 곳에서 그럴 싸 한 양주 한 병 훔쳤다. 많이 있으니 까 표도 안 날것이다. 그리고 양주 한 병이 비싸면 얼마나 비쌀거냐. 좀 큰 걸 로 한 병 꼬셨다. 헤네시? 그거 한 병 훔쳤다. 사람들 많은 지하철에서 양주 한 병 가슴에 고이 품고 학교로 왔다. 교수의 말도 잘 들리지 않았고, 친구들의 당구 치자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자 마자 내 방으로 달렸다. 누나의 방 현관을 지나치면서 가슴이 뛰 었다. 방에 홀로 앉아 양주병과 맞대면을 했다. 너만 믿는다. 나에겐 용기를 주고, 누 나는 정신을 잃게 만들어야 한다. 저녁을 먹고 난 다음 누나가 날 불렀다. 누나 방은 여자가 사는 방이 맞는 거 같다. 내 방하고는 격이 다르다. "오늘 침대 보 샀어. 예쁘지?" "예쁘네요." "나 인형하나 사줘. 나는 껴안고 자는 버릇이 있거든." "알았어요." "티비 보고 싶으면 자주 놀러 와." "그러지요." "말이 딱딱하다 너? 가슴에 품고 있는 건 뭐야?" "에? 수,술인데요." "집떨이 한다고 술 가지고 온 거야? 그래 한 잔 하지 뭐. 테이블에서 마실래?" "그러지요. 이거 양준데."
"거기에 맞는 잔이 또 있지요. 내가 과일 사다 놓았거든? 깎아 올게. 그리고 딴 거 먹을 거 필요 없니? 내가 집떨이 한다고 먹을 거 많이 사 놓았어." "필요 없어요. 누나는 그렇게 입고 자는 거에요?" "이거? 그냥 집에서 입고 다닐려고 추리닝 하나 샀어. 잠 옷은 따로 있지. 참, 니 방에 내 잠 옷이 있구나." "그거 가져가요." "알았어." 나는 테이블에 양주병을 꺼내 놓았다. "너만 믿는다." "뭐? 어, 그거 헤네시잖아. 상당히 비싼 건데? 너 그거 어디서 났니?" "알거 없어요." 누방 방에서 가슴 떨리는 술을 마셨다. 독하다. 과일을 안주 삼아 처음엔 테이 블 탁자에서 마시다 나중엔 방바닥에서 마셨다. 나는 앞이 희미해 져 가는데 누나는 아직 말짱하다. "그만 마시자." "어허, 한 병은 다 비워야지요." "이런 건 두고 마시는거야." "여기 누나 방이고, 바로 옆이 내 방인데 취해도 되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너는 더 마시면 안되겠는데. 나도 많이 취한거 같아." 취해? 당연히 취해야지. 그래 취해서 빨리 정신 잃어라. "끝까지 마시기." 덮쳐야 되는데... 덮쳐야 되는데... 다음 날 나는 누나의 침대 위에서 누나 베개와 누나 이불을 덮고 잠들어 있었 다. 기분 좋게 윗도리도 벗고 있었다. 근데 가장 중요한 누나가 내 옆에 없었 다. 그리고 누나가 술에 취해서 화장실 간다고 가는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뒤 로는 기억이 없다. 누나가 화장실 가서 돌아 오지 않은 것 같다. 나는 기다리다 지쳐 침대로 들어 온 것 같다. 그럼 누나가 화장실에서 자고 있는 거 아녀? 누나 는 화장실에 없었다. 누나는 내 방에 있었다. "나, 어제 화장실 간다고 갔는데, 왜 니 방에서 자고 있니? 너 나에게 수작 부 렸지?" 뜨금했다. "누나는 현관문하고 화장실 문하고도 구분 못해요?" "아, 그랬나보다. 넌 어디서 잤니?" 이 여자 정신 대게 없네. 근데 왜 못 덮쳐을까? "누나 침대에서요." "어, 그거 어제 처음 산 침대본데, 나보다 니가 먼저?" 우쒸, 못 덮쳤다. 큰일이다. 앞으로는 힘들텐데... 그래도 누나 침대에서 자 봤 다. 앞으로는 좀 더 능숙한 놈에게 상담을 받아야 겠다. 양주 훔친거 들켜서 석달 간 내 용돈에서 10 만원씩 아버지에게 차압 당하게 생 겼다. 쫌 비싼거였나 보다. 누나가 내 근처로 왔다. 22. 22 회 어제는 본의 아니게 철수 방에서 잤네요. 아직 내 방보다 익숙한 방이죠.
철수가 내 방으로 술을 가지고 왔을 때, 녀석이 무슨 꿍꿍이 속이 있지 않나 했 어요. 아무리 동생 같다지만 철수도 남자죠. 녀석이 나에게 술을 먹여서...후 훗, 좀 조심 했었지요. 기우였나요? 녀석은 나보다 많이 마셨어요. 무슨 의도가 있었다면 그렇게 마시지 못 했을 겁니다. 별로 술에 쎈 것 같지도 않던데, 나 좋 아하는 느낌으로 비싼 술 자랑할 겸 그렇게 왔었나 봅니다. 녀석의 술 취한 버릇 은 어떨까요? 녀석이 술에 완전히 취한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언제 한 번 실 험을 해 봐야 겠네요. 꼬장 부리면 어떡하죠. "불편한 거 없어요." "주말에는 집에 오너라." "네, 금요일날 오후에 들어 갈게요. 잘 주무세요." 삼일 째 자취방 신세를 집니다. 집에서도 나 혼자 잠을 청했지요. 형제 없이 나 혼자 자랐기 때문에 혼자 있는 것에 강할 거라 자신했는데, 오늘 밤은 그렇지 않 네요.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지 잠이 오지 않습니다. 혼자 산다고 설레인 것도 많았는데, 옆 방엔 모르는 사람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좁은 생각이 드네요. 아빠, 엄마가 있는 집 생각이 나요. 첫날 밤은 그냥 설레임으로 생각없이 잘 잤 었는데, 오늘은 그렇지 못하네요. 할아버지 만나러 외국 나갔을 때, 할아버지를 만나 반가웠지만 한편으로 집 생각이 한 동안 계속 났었지요. 그거 하고 비슷하 겠지요? 아닌가? 옆 방 옆방엔 반가운 녀석이 분명 살고 있습니다. 하루 정도씩 외박했던 적이 있었지만 그것하고는 느낌이 다릅니다. 침대의 빈 공간이 너무 크게 느껴지네요. 이리 뒤척이다, 저리 뒤척이다 해 봅니다. 철수는 오늘 나를 찾지 않았습니다. 12 시가 다 되었습니다. "딩동!" 응? "누구?" "박철수입니다." 후훗! 이런 야심한 시간에 남자가 여자 방을 찾아와도 되는 겁니까? 나 잠옷으 로 갈아 입었습니다. 조금 야한 잠옷이에요. 어깨끈이 아슬하게 있는 거요. 가위 뼈와 어깨가 다 보이는 속 옷 같은 원피스형 잠 옷이에요. 속 옷이 많이 비치네 요. 걸치는 가운도 없는데... "무슨 일이야?" "문 안 열어줘요?" "그냥 가. 내일 보자." "뭐 줄 거 있어요." "뭔데?" "문 안열어 줘요? 이렇게 소리치면 옆 방에서 다 듣는다 말이에요." 난처하네요. 옷을 갈아 입기도 귀찮고, 그렇다고 이 모습을 보이기도 어색하 고. 저 녀석 그냥 돌려 보내면 뭐라 할 것 같고. "오래 있을 거 아니지?" "네." "그럼, 문 열어 줄테니까 바로 들어 오지 말고 내가 들어 오라고 하면 들어 와." 문을 열어 주고 얼른 이불 속으로 숨었습니다. "들어 와." 녀석은 커다란 인형을 하나 들고 있었습니다. 하얀 곰 인형이네요. 녀석이 진 짜 인형을 좋아하나 봅니다. "이거 주러 왔어요. 이거 사러 수원까지 갔다 왔네."
"이걸 왜 샀어?" "어제 인형 하나 사 달라고 했잖아요. 근데 더운 날씨에 이불을 왜 돌돌 감고 있어요?" 녀석이 인형을 침대에다 툭 던져 놓더니 날 빼곰히 쳐다 보네요. "잠 옷 입고 있어서 그런다." "내 방에서 잠 옷 입고 잔 적도 있잖아." "칫, 그런 잠옷 말고 야한 잠옷." "어디 한 번 봐바요. 잠 옷이 야하면 얼마나 야하다고. 나는 뭐 다 벗고 있는 줄 알았잖아요." "뭐야?" 왜 그랬을까요. 목까지 감고 있던 이불을 가슴까지 내렸지요. 내 어깨 살 빛이 곱지? 가위뼈가 예쁘지 않니? 조금 눈부실거다 짜식아. 녀석이 흠찟 놀라는 표정 은 지었으나, 내 뱉은 말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브라자 끈 보여요." "뭐?" "내 방에서 잠 옷 갖다 줄테니까, 그거 입어요. 자취하는 사람이 주제 파악을 해야지. 이 건물에 여자라고는 누나말고 한 사람밖에 더 없을걸요. 무난하게 입 고 있어요." "그거 이제 덥잖아." "그럼 반 바지에 면티 하나 입어요. 아니면 추리닝을 입던지. 그게 뭐야 씨. 이 곳은 거의 늑대들 소굴이란 말입니다." "헛! 나 혼자 있는데 이렇게 입고 있으면 어때?" "그래도 안돼. 조심해야 된다 말이에요. 되도록 창 열어 놓고 있지 마요. 창 열 어 놓더라도 바인더 하나 사서 가려요. 남자 중에는 여자의 사는 모습에 대해 불 필요하게 궁금증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단 말입니다. 그리고 항상 문을 잠궈 놓 고 있어요. 나 있을 때는 괜찮지만..." 말투는 별로지만 그런대로 날 위하는 말 같네요. "그래, 알았다." "안고 자요." 던져 놓았던 인형을 내쪽으로 당겨 주네요. "인형 고마워. 너 보다 잘 생겼네." "우쒸!" 녀석이 돌아 갔습니다. 잠이 오지 않았던 이유가 안을 만한 물건이 없었기 때문 이었나요? 철수가 준 인형을 안고 잠이 들었습니다. 여름이 시작되려나 봅니다. 유월의 날짜도 두자리가 되었습니다. 자취방에는 에 어콘이 없지요. 조금 덥네요. 그래도 괜찮아요. 선풍기가 팽팽 돌아 가는 이 방 의 소음이 꽤 낭만적입니다. 자취 생활에 적응이 되어 갑니다. 옆방 옆방 녀석 이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서울 집에서 듣는 풀벌레 소리보다 더 화려한 이 곳 의 풀벌레 소리가 여유롭습니다. 이 곳으로 오는 길가의 옥수수가 제법 자랐습니 다. 녀석 말대로 바인더를 치고, 헐렁한 면티에 짧은 추리닝을 입고 있습니다. 문 은 잠궈 놓고 있구요. 철수 방에 한 번 놀러 가 봐야지요. 방금 아홉시 뉴스가 끝이 났습니다. 남자들은 참 편하군요. 복도 끝방이라 현관 문도 열어 놓고, 창문도 활짝 열어 놓은 채, 반쯤 걷어 올린 넌닝 셔츠 사이로 나온 배를 긁으며 철수는 침대에 누 워 있습니다. 내가 준 인형의 배를 베고 있네요. 철수 방은 삭막하지요. 보기가 좀 민망해요. 침대 하나 컴책상, 그냥 책상 하나가 다 지요. 싱크대 쪽에 뭔가
있긴 하지만 썰렁합니다. 그나마 주황색의 인형 두개가 분위기를 쇄신하려고 노 력하는 중입니다. "야!" 내 목소리를 듣더니 철수가 넌닝셔츠를 슬며시 내리는군요. 그리고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습니다. "누나 왔어요?" "뭐하는거야?" "레포트 써다 잠시 쉬는거에요." "덥니?" "응." "네 방에는 선풍기도 없다?" "방학이면 집에 갈텐데요 뭘." "너 요즘들어 내 방에 자주 안 오는 거 같애." "나도 바빠요." "무슨 기분 나쁜 일 있니? 표정이 밝지 못하다?" "누나?" "왜? 너 표정이 꼭 배 고픈 얼굴이야. 너 배고프면 기분 나쁘지?" "우쒸. 나 레포트 마저 써야 되요. 가세요." 서 있다가 녀석의 책상 위로 눈이 갔었습니다. 그리고 뭔가 낙서 같이 적어 놓 은 것을 보았지요. 멀리 있어 그리운 것 보다 가까이 있는 그리움을 잡기가 더 참기 어려운 것. 그 리움이 내 가까이 있다. 나를 생각하고 쓴 것 같기도 합니다. 호호, 공주병 증센가? 녀석이 가라니까, 가야지요. 철수가 적었던 말을 내 방에 와서 생각해 보았지요. 그 짧은 글의 상대가 나라 면 좋겠단 생각을 해 봅니다. 만약 그렇다면 녀석이 나를 누나가 아닌 여자로 그 생각을 바꾸고 있다는 뜻이 되지요. 녀석이 나를 여자로 생각하고 접근하기 시작하면 내가 그를 피하게 될까요? 지금까지 스쳐 지나갔던 남자들처럼 한 순 간 어색해 질까요? 이미 시간이 많이 흘렀네요. 녀석과 보낸 시간 말이지요. 이 제는 철수가 남자로서 접근한다 해도 피할 자신이 없어요. 철수는 잊혀지기 싫 은 존재가 되었거든요. 하지만 조금 더 후의 일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철수를 피 할 자신은 없지만 아직은 어색해질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철수는 아직 남자보다는 동생이란 느낌이 강합니다. 철수가 날 누나로서 따르는 시간들이 좋 습니다. 철수가 나를 여자로서 좋아한다해도 어쩔수는 없지요. 기분 좋은 일 일 겁니다. 그렇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근데 내가 왜 이런 쓸데 없는 생각을 하는 걸까? 창 밖 어둠이 내렸고, 옥수수 가 자랐고, 풀벌레 소리가 애처롭기 때문이라고 변명하자. 그리고 짧은 문구에 서 내가 괜히 가정을 잘 못한 것이라고 변명하자. 한 번쯤 이런 생각들, 충분히 할 수 있다. 조금씩 철수에게 젖어 가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단지 착각을 하고선 미소 지 었을 뿐입니다.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일까요. 괜한 생각들이 듭니다. 유월달이 또 십여일 제 살을 파 먹었습니다. 조금 있으면 시험 기간입니다. 오 늘도 난 늦은 밤이 되어서야 내 방으로 돌아 왔어요. 도서관에서 늘 혼자였습니 다. 철수 녀석이 사라졌어요. 혹시나 하고 찾아 간 철수 방은 잠겨져 있었습니 다. 이 녀석이 도대체 어디 간거야? 최근 며칠 동안 늘 그랬습니다. 철수는 밤 늦게까지 돌아 오지 않은 적이 많습니다. 도서관에서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밤에 잠자리에 드는 시간, 집에서라면 그래도 부모님과 하루의 일들을 얘기할 수 있었습니다. 근데 지금은 혼자네요. 요 며칠동안 내가 방에 들어 와 할수 있 었던 말들은 가끔 전화하고 전화 받으면서 했던 말들이 다 였지요. 어제 정희에게 전화가 왔었습니다. 그냥 자기 사는 얘기 였지만, 내 기분을 씁 쓸하게 만드는 말이 있었습니다. 토요일날 철수가 자기를 찾아 왔었다고 하더군 요. 뭐 그럴 수도 있지요. 근데 내게서 보이지 않던 철수가 정희는 찾아 갔었다 는 게 기분 나빴습니다. 그리고 철수가 적었던 짧은 문구가 내가 아닌 정희 때문 이었다는 생각이 드니 부끄럽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그냥 못 넘어 간다. 열두시가 다 되어 들어 오던 철수를 붙잡았지요. 발자국 소리를 듣고 바로 나 가 보았더니, 철수가 있더군요. "너 요즘 보기 힘들다?" "에? 나도 고학년이잖습니까. 텀 프로젝트 때문에 조 원들하고 해야 될 일이 많 아요." "그렇다고 이렇게 안 보일 수는 없어. 차 한잔 하고 가." "나 피곤한데..." 녀석을 데리고 내 방으로 들어 왔지요. 숙녀 앞에서 하품을 늘어 지게 하네요. "너 정희 찾아 갔었다며?" "응. 저번 주 토요일에 찾아 갔었어요." "왜?" "왜긴, 보고 싶으니까 찾아 갔지." "너 요즘 나한테 소홀하다?" "레포트다, 텀 프로젝트다 바쁘단 말입니다. 시험도 얼마 안 남았잖아요." "근데 정희는 어떻게 찾아 갔어?" "이 여자가 진짜. 지금 따지는 거에요?" "그래 따진다 왜?" "하여튼 누나라고만 생각하려 해도..." "응?" "나 가서 잘래요. 다음 주면 시험 끝나고 방학이잖아요. 그때 잼있게 놉시다." "나도 바빠 임마." 철수가 한 말 중에 어색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쩝 모르겠다. 시간은 또 흘렀지요.(시간 맞추려면 빨리 빨리 시간을 흘려 보내야 되요.) 시 험 기간에는 정신이 없었어요. 시험 하나가 끝이 나고 잠시간의 여유는 많은 잡 념들을 몰고 오지요. 도서관에 앉아 시선의 초점을 잃어 버리면 누군가 떠오릅니다. 승주 생각이 좀 났었어요. 그리고 철수 생각도 나네요. 철수 녀석이 계속 안 보입니다. 시험 기 간인데 도서관도 나오지 않고 뭐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난 혼자만의 도서 관 자리를 잡았습니다. 철수를 찾아 봤지만 이 녀석은 도대체 어디로 숨었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집에 오다 삐삐를 남겼지요. "나 피곤해서 내일 도저히 일찍 못 일어 나겠다. 내일 도서관 자리 하나 부탁학 게. 네 옆에 내 자리 하나 잡아 놔." 녀석이 전화가 없네요. 못 들었나? 에이 모르겠다. 배짱 한 번 부려보자. 다음 날 일찍 일어 났어요. 배짱 못 부리겠더군요. 오후에 시험이 하나 있었기 때문에 삐삐의 멘트와는 다르게 일찍 도서관으로 나갔지요. 일찌기였지만 사람들
이 많았지요. 도서관 현관 앞에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있다 나를 보자 꿈쩍 놀 라는 철수를 만났습니다. "오랜만이다 너?" "그렇네요." "내 자리 잡아 놨어?" "응, 여기 이석표. 근데 이렇게 일찍 나올거면서 자리를 왜 잡아 달라고 했어 요?" "내 맘이다. 진짜 잡아 놨어?" "잡아 놔라며?" "진짜 잡아 논거야? 너는?" "누나 옆 자리. 오늘은 도서관에서 공부 하죠 뭐." 시험기간인데 이 녀석 어디서 공부를 한거야. 그건 뭐 별 상관할 바가 아니지 요. "너 시험 언제 끝나니?" "내일. 누나는?" "나도. 내일 술 한잔 할래?" "어디서요?" "니 방이나 내 방." "정말?" "응." 녀석이 장난 삼아 남긴 내 음성을 듣고 꼭두 새벽에 나와 좌석을 잡아 놓았네 요. 이 녀석 헛갈리네요. 시험을 끝 마치고 전 바로 학교를 나왔지요. 실험 준비를 해야 했거든요.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철수를 알아 보기 위해서였죠. 철수가 점점 내 마음에 들어 오네요. 그것 때문이에요. 썸씽 작은 걸로 두병을 샀죠. 한 병은 반 이상 따라내고 물을 탔죠. 맛이 없었 어요. 저녁에 내 방에서 철수와 종강 파티를 했습니다. 아자! 테이블에 앉아 양주 두 병을 꺼내 놓고 고운 잔 하나씩 놓았지요. 분위기 있게 작은 조명등을 켜고 서 로 마주 앉았습니다. 큰 접시에 보기 좋게 과일 안주를 담았어요. 철수에게 한 잔 따라 주었지요. 가득히... "자자, 부담 갖지 말고 마셔." "저도 한 잔 따라 줄게요." "응. 난 이 병에 있는 걸로 따라 줘." "근데 왜 작은 병으로 따로 샀어요? 큰 거 한 병이 더 싸지 않나?" "이게 더 분위기 있잖아. 뭐 해 원 샷!" "원샷?" 자식이 의심스러운 듯 머리를 갸웃 거리네요. 저기 따라 낸 남은 것도 있으니 까 나중에 다 마셔라. "기분 좋지?" "아이쒸, 계획했던 거 하고 달라지잖아. 내가 덜 마셔야 되는데..." "뭘?" "친구가 나보고 쫌만 마시라고 했단 말이에요." "무슨 얘기야. 조금 더 있으니까 더 마셔." "어지러운데..." 녀석이 한 병을 비웠을 때 방바닥에 내려 앉더군요. 아까 부워 놓은 양주를 녀
석의 병에다 또 따라 놓았지요. "원 샷!" 폭탄주도 먹여 볼까요? 아, 전 작은 병의 삼분의 일도 못 마셨어요. 녀석이 꼬장을 부리면 방어를 해 야 했기 때문에 맨정신이 필요 했지요. 녀석은 거의 600 미리를 마셨죠. 소주로 치면 네병 정도 되는 알콜 양입니다. 너무 많이 먹였나요? 8 시부터 마신게 12 시 가 다 되었습니다. 녀석이 제법 술이 쌔네요. 지금 꼬장을 부리면 분위기가 좀 어색한 시간인데... 녀석이 나를 보며 웃네요. 꼬장 부려봐 씨. 꼬장 부리면 좀 좋아 졌던 마음이 가라 앉겠지요. 녀석이 실 웃더니 한 손으로 내 허벅지를 치네 요. 그래 너도 별수 없이 수작 버리지? 한 손을 주먹쥐었습니다. 여차하면 팰려 구요. 근데 녀석이 실 웃더니 내 허벅지를 베개 삼아 그냥 누워 버렸습니다. 그 리고 때릴 수 없는 웃음 맺힌 얼굴로 그냥 잠들어 버렸습니다. 이거 어쩌나요. 홍조 빛 얼굴에 미소를 맺고 내게 누워 있는 녀석이 사랑스럽네 요. 십분 정도 그렇게 녀석을 내 다리위에 앉히고 바라 보았습니다. 무언가 그리 움을 잡고 있는 듯한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손을 뻗어 침대 위 내 베개를 받 쳐 주고 주위 정리를 했습니다. 내 힘으로 녀석을 침대에 눕힐 수는 없었습니 다. 담요 하나를 덮어 주었지요. 그리고 한 참 동안이나 철수의 자는 모습을 쳐 다 보았습니다. 더워 하는 거 같아 물수건으로 땀이 맺힌 목 주변을 닦아 주었지 요. 그래도 깨지 않네요. 많이 취했나 봅니다. 녀석은 꼬장을 부리지 않고 그냥 사랑스런 모습으로 잠이 들어 버렸네요. 어쩌면... 녀석도 내 방에서 두번을 자고 갔습니다. 인형 베고 자는 것도 괜찮네요. 새벽에 누나보다 먼저 깨어 내 방으로 달아 났다. 쪽팔렸다. 방 바닥에서 이불 다 차내고 큰 대자로 자고 있던 날 발견하고선 얼마나 비참했는지 모른다. 누나 는 날 어린 녀석으로 밖에는 안 봤을테지? 누나에게 감정이 생기는 것 같아 잠 시 피해다니고 있었는데, 누나 방에서 이런 모습으로 자게 될 줄이야. 정희 누 나 말로는 은정이 누나가 연하에게 감정 가질 애가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어른 스러운 모습 보여주려고 했는데... 내 은정이 누나가 술 한잔 하자고 한 말을 듣고 친구에게 교육을 받았다. 저 번 처럼 그런 교육이 아니다. "성숙한 모습을 보이고 싶다 이거지?" "응. 저 번 처럼 덮치라 하지 말고 좋은 쪽으로 가르쳐 줘." "오늘도 밀폐된 공간에서 둘이서 술을 마실거란 말이지?" "응." "니가 좋은 놈이란 걸 보여 주고 싶다? 인내심이 필요한 건데 해낼 수 있을려 나?" "말해 봐." "여자에게 무조건 술을 많이 먹여. 넌 되도록이면 먹지 마. 맨 정신으로 있다 가 여자가 픽 쓰러지잖아?" "응." "그러면 곱게 들어다 침대에 눕혀. 그리고 주위 청소를 해 주고 난 다음, 물 수 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닦아 줘. 그러면 깰 수가 있어. 그럴 때 미소를 지어 주면 서 걱정하지 말고 편히 자요. 이렇게 말하는거야." "옹, 그래서? 깨지 않으면 어떡하는데?" "니가 침대 맡에서 그녀가 깰 때까지 앉아 있는거야. 아침이 될 때까지 말이 지. 그 자세로 잠이 들어도 돼. 병원에서 의식 잃은 환자를 걱정하며 간호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말이지. 니가 깨어 있는데 그녀가 잃어 나면, 이제 깼어요? 하 며 미소를 지어 주면 되고, 그녀가 먼저 깨도 자길 지켜준 널 보며 감격할 거
야." "그 좋다 야." "너는 술을 많이 먹으면 안돼. 니가 꼬장 부리면 만사 꽝이야. 여유로운 모습 을 보여 주는거야. 여유로움은 곧 성숙함이거든." "알았다. 역시 넌 뭔가 다른 놈 같다. 승헌이보다 못생겼으면서 여자 친구가 더 예쁜 건 확실히 이런 능력들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고맙다 동엽아." "잘해 봐라." 나 시키는대로 하려고 했다. 근데 원샷! 할 때부터 뭔가 꼬이기 시작했다. 나 술먹고 자면 배를 꺼내 놓고 긁는 버릇이 있는데... 누나가 내 자는 모습을 보 고 많이 비웃었을 것 같다. 누나는 거의 취하지 않은 모습이었던걸로 기억한다. 쪽팔린다. 오늘 짐 챙기자 마자 바로 서울로 튀어야 겠다. 우쒸. 23. 23 회
나 아침에 짐 챙겨서 홀로 서울로 가 버렸었다. 별로 한 것도 없이 괜히 누나에 게 부끄러웠다. 책 몇가지와 빨아야 할 옷들만 챙겨서 서울로 왔었다. 전철에서 계속 잤다. 알 콜 냄새가 나지 않았나 모르겠다. 자는 동안 삐삐가 여러 통 왔었다. 아직도 내 겐 은정이 누나 말고는 삐삐 쳐주는 사람이 없다.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 다. 안타까운 현실이기에 외면하고 그냥 잤다. 집에 도착해서 들고 왔던 옷 가지들을 세탁기에 넣고 엄마가 차려 주시는 점심 을 맛있게 들고 있는 데 또 삐삐가 왔다. 음성이다. "너 도대체 어디 간거야. 너 혼자 서울 갔으면 죽을 줄 알어. 십분 내로 연락 해." 누군지 밝히지도 않고 자기 말만 하는 누나가 존경스럽다. 말투가 점점 날 닮 아 간다. 나 쌈 잘한다고 자주 말해 주었는데, 뭘 믿고 저런 협박을 하는 지 모 르겠다. "왜요?" "서울 안 갈거야?" "여기 서울인데요" "뭐야? 너 혼자 간 거야 그럼?" "네." "그래 알았어. 전화 끊어." "누나는 언제 올라 올거에요?" "알 필요 없잖아." "살펴 오세요." 누나의 음성에 서운함이 많았다. 내가 서울에 있다는 말을 듣고 내 뱉은 누나 의 음성은 아주 차가웠다.누나가 그냥 전화를 끊어 버렸다. 다시 전화를 할 까? 어제 내 자는 모습이 누나에게 어떤 느낌으로 들어 갔을까? 나는 부끄럽다. 여름 방학이다. 더운 날씨는 그냥 설레임 뿐이다. 추억을 되짚기 보다는 주위 의 사람들과 여름의 더운 풍경 속에서 재미있게 어울릴 것이라는 설레임 뿐이 다. 여름은 화려한 계절이다. 화려한 설레임으로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이 그렇 게 크지는 않다. 지이잉! 이것은 또 삐삐가 왔다는 신호? 누굴까, 또 누나다. 전 화 끊을 때 누나의 음성이 다시는 연락하지 않을 투였다. "왜요?" "나 짐이 많아서 혼자 못 가겠어."
방학을 했을 터이니 서울 올라오는 학생들이 많을 것이다. 동아리 사람들에게 부탁을 해 보지. 동아리 방에 가서 누나가 부탁을 하면 거절할 남학생 하나도 없 다. 동아리 남학생들, 선후배 관계없이 자기들끼리 있을 땐 은정이 누나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할 지라도 누나 앞에선 다 생긋생긋 웃는다. 남자들이 예쁜 여자들 에게 약하다는 안타까운 현실은 어쩔수 없나 보다. "동아리 방에 가면..." "너 왜 그래? 나에게 화난거 있어?" 없는디... "에이쒸, 밥 한끼 사줄거에요?" "갑자기 밥 얘기는 왜 하는거야?" "짐 챙겨서 기다리고 있어요. 한 시간 후에 그 쪽으로 갈게요." "진짜? 진작 그렇게 나올 것이지. 운전하고 온다는 말이지?" "네." "누나가 그럼 방학때도 자주 만나 줄게." 만나 줄게?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은 만나 주는게 아니다. 그 사람이 보 고 싶어 만나는 것이다. 저런 말에도 내가 신경을 쓴 다는 것은 아마도 내 마음 이 거의 한계까지 왔나 보다. 내 요즘 연상은 관심없다.라는 말을 거의 하지 않 는다. ""누나! 나 누나를 사랑하게 된 거 같아요."" ""푸하하핫!"" 누나가 배를 잡고 웃는 것을 보면 나 자살해 버릴 것 같다. 연상이면 좀 어리숙 한 여자이던지, 아니면 나이라도 아주 어려서 세상 물정이나 남자에 대해 잘 모 르는 소녀라던지, 많고 많은 여자 중에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해 주는 여자가 하필이면 다 연상이고 잘나 보이는 여자들이냐. 정희 누나는 그래도 좀 만만했 다. 경운기 뒤를 졸졸 따라 가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본다. 나도 잘난 남자다. 은정이 누나의 연인이 될 수 있다. 씨바, 한 달안에 차일 것 같다. 누나, 동생이니까 지금은 이렇게 친하지만 누나가 제 짝을 만나면 나 는 그냥 지나쳐 버릴 것 같다. 경운기를 운전하는 아저씨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었 다. 앞 질러 가주지. 그래 내가 경운기라면 누나는 고급 승용차일 것이다. 이렇게 쉽게 앞질러 멀어 져 버리는 걸. 백미러에서 점점 조그맣게 사라져 버리는 경운기가 애처롭다. 박 철수, 왜 자꾸 쓸데 없는 생각을 하냐. 지금 누나를 만나러 가고 있잖아. 경운기 뒤에 오래 붙어 있었더니 예상 시간 보다 좀 더 걸렸다. 누나가 오피스 텔(?) 건물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핸드백 같은 거 하나, 멜빵 가방 하 나, 그리고 한 손에 들고 있는 옷이 들어 간 두툼하지만 가벼울 것 같은 종이 가 방 두개. 혹시 저게 자기가 챙긴 짐이 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누나는 나를 보자 반가운 얼굴로 뛰어 와, 뒷 좌석에다 짐을 던져 놓고 내 옆으 로 와 앉았다. 문 열어 달라는 소리는 하지 않는 걸로 봐서 불치의 공주병까진 조금 여유가 있나 보다. "짐 가지러 안 가요?" "저게 다야." "짐이 많다면서요?" "많잖아." "저거 들고 혼자 전철 타기가 힘들까요?" "응." 우리 나라에선 치유가 불가능하겠다.
내가 아무리 베스트 드라이버라고 우기지만 아직 초보 단계인데, 옆에서 말을 참 많이 시키네요. "오늘 아침에 왜 그냥 갔어?" "어디요?" "내 방에서 왜 그냥 나갔냐구?" "남자가 여자 방에서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스프라도 끓여 먹여 보낼려구 했더니. 너 머리 안 아파?" "아직 제 상태는 아니에요. 혹시 음주 단속하면 걸릴 지도 몰라요." "낮에 단속하는 경우가 어딨니." "내 방가서 자라고 깨우지 그랬어요." "물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주었는데도 일어 나지 않던데 뭘." "물 수건으로 제 얼굴을 닦았어요." "응." "왜요?" "땀이 나고, 술 마신 거 때문에 좀 지저분 했어." 그건 내가 했어야 되는 건디... "누나가 베개 받쳐 주고 이불 덮어 준거에요?" "응. 너 술 주정 하지 않고 그냥 애기처럼 귀엽게 잠만 자더라? 그래 자는 모습 이 아기 같기도 했어." 저 여자가 슬픈 말을 했습니다. 이제는 동생도 모자라 아기라고 하는군요. 나 는 누나에게 있어 어려 보이는 존재일 뿐이가 봅니다. 성숙해 보이기 위해 교육 까지 받고 갔었는데, 난 더 어린 모습으로만 비추어 졌나 봅니다. "누나 술이 아주 쎈가 봐요?" "아니야." "누나!" "왜?" "누나가 좋아하는 남성상은 어떤거에요?" "그건 갑자기 왜?" "그냥." "내가 생각하기로 좋아하는 남성상은 만들어지는 것 같아. 좋아하는 사람이 있 으면 아마도 자기가 좋아하는 남성상이 그 사람을 닮아 가겠지." "연하도 괜찮을까요?" "왜? 이젠 연상에도 관심이 있나 보지? 너 나에게 맘이 있지?" "착각하지 마요."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생각해 보지 뭐." 누나를 집에다 모셔 드렸다. 아직 이런 표현 밖에는 쓸 수 없다. 누나를 한 동안 만나지 않았다. 7 월달에 누나를 본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내가 일주일 간은 피해 있었고, 누나가 3 주간 독일로 떠나 있었다. 좋겄다 독일 에 가까운 친척도 있고... 며칠 간 피해 있으려고 했던 건 내 마음이었지만 삼주 일간은 너무 길다. 누나는 전화 한 통으로 외국으로 떠났다. 곧 올 것이지만 멀 리 있다 생각하니 더 그립다. 방학 때 자주 만나 준다더니, 언제 만나 주려고 외 국을 나갔더냐. 외국 간다는 말도 없었는데... "갑자기 왜 외국을 나가요?" "할아버지가 오라고 했어. 그래서 갑자기 나가게 됐어." "잘 갔다 와요." "나 보고 싶을텐데 어쩌니?" "누나 혼자 다 생각하지 마요."
"갔다 와서 보자." 왜 나는 은정이 누나 말고 자주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드문거냐? 은정이 누나하 고 붙어 다녔으니 더 이상 발전이 없었던 거 같다. "약재실이 상당히 넓네요." "응. 차한잔 끓여 줄까?" "네, 누나 혼자 당직 서는 거에요?" "아니 한 명 더 있어. 그 언니는 외래에 나가 있어." "계속 이 병원에 있을 거에요?" "모르겠다. 친한 언니가 한 명 있는데 자기 아파트 단지 내에 약국을 차릴 생각 이래. 나랑 같이 하자고 해서 마음이 동요되고 있긴 해. 여긴 얽매인 시간이 많 거든." 일요일 날, 정희 누나가 당직한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 종일 거기 있었던 적이 있다. 자판기 컵에 자판기 커피보다 맛이 없는 커피를 담고 사람들이 텅 빈 종합 병원의 약사부에서 정희 누나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오붓한 시간을 보냈 다. "여긴 대부분 여자죠?" "응. 과장님하고 다른 한 분을 제외하곤 모두 여자들이야." "좋겠다." "뭐가 좋아. 참, 너 요즘도 은정이 만나지?" "은정이 누나 독일 갔잖아요." "그래서 심심해서 나 찾아 온거지?" 맞는 말인거 같기도 하다. 은정이 누나 덕분에 정희 누나는 많이 잊혀지고 있었 다. 은정이 누나가 있었더라면 어쩌면 찾아 오지 않았을 것이다. "누나가 보고 싶어 찾아 왔는데 그런 말 하면 섭하지." 정희 누나는 대화를 하다가 간혹 전화를 받았으며 약들을 챙기러 자리를 뜨기 고 했다. 간호사같이 보이는 사람들이 약을 찾으러 오기도 했으며, 아줌마가 쓰 레기 비울거 없냐고 물어 오는 경우도 있었다. "요즘 은정이와 친한 남자 안 보이지?" "응. 나랑 자주 다녔어요. 삼월경에 동기 한 명하고 자주 붙어 다니던데, 깨졌 어요." "동기 누구?"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하여튼 그 새끼 때문에 내가 파출소까지 끌려 갔다 는 거 아닙니까." "푸후, 그건 은정이에게 들었다. 동윤이도 괜찮은 앤데." "다 알면서 내게 왜 물은거야? 은정이 누나가 따로 사귀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걸 왜 내게 묻니? 은정인 봄이 되면 마음이 좀 오락가락 하긴 해. 작년 가 을 이후엔 계속 너만 만났지?" "그 승주씬가 하는 사람하고는 몇 번 만났을걸요." "거의 깨졌지 뭐. 작년 9 월 이후에는 둘이 한 번도 안 만났어. 그건 내가 알 아." 은정이 누나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면 귀가 솔깃해 진다. 관심 때문인가? "누나?" "왜?" "누나는 연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너에 대해서 얘기해 달라는 거지?" "에?"
"니가 날 좋아 했던 거 알아. 그리고 누나에게 가지는 감정이 아니라 여자에게 가지는 감정이 있었다는 것도 알아. 은정이에게 들었어." "그 여자가 진짜." "후훗, 내가 니 마음을 장난처럼 받아 들였다고 상처 받았었니?" "조금." "니가 나에게 장난처럼 대했다고 생각지는 않니? 자기가 진지하지 못하면 상대 방도 진지해 지기 어려운 거야. 니가 진지했다면 나도 흔들렸을거야. 나는 혹시 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네 태도를 보고 날 누나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판단했어. 그만큼 넌 장난스러웠어." "누나는 애인이 있었잖아요." "그거하고는 상관이 없어.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없고 와는 별개의 문제야." "나쁜 여자네. 나는 그 방법 밖에는 몰랐어요." "훗, 너 은정이에게 맘이 많이 갔구나." "에?" "나에게 많이 담담하잖아. 예전보다 더 담담해진 거 같애." 나이 많은 여자들에겐 마음을 잘 들키는군요. "내가 장난스럽게 말했던 것은 넌지시 내 맘을 표현한 것과 상대방의 마음을 알 아 보기 위한 거였어요. 누나가 한 번쯤이라도 진지하게 내 마음을 알려고 생각 했던 적이 있었어요?" "후, 그래. 나는 너보다 철규씨가 더 좋아. 하지만 니가 은정이에게 마음이 있 다면 나에게 하던 식으로는 하지 마." "내가 은정이 누나에게 마음이 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응. 너 저번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나 만나서 은정이 얘기만 하잖아." "누나가 먼저 꺼냈잖아요." "꺼내긴 내가 먼저 꺼내었지만, 너도 기다렸다는 듯이 은정이 얘기만 하고 있잖 아." "우쒸. 은정이 누나는 연하를 좋아할까요?" "그냥, 널 좋아하게 될까,라고 물어라. 은정이 너 좋아 해." "그게 아니고, 내가 최근들어 은정이 누나에게 감정이 생기는 것 같아서요. 이 거 누나에게 말하면 절대 안돼요." "알았어. 은정이가 호감을 가지는 사람들을 보면 연하에게 마음을 줄 것 같지 는 않아. 은정인 성숙해 보이고 적극적인 사람에게 기댈려는 경향이 있거든. 근 데 은정이가 진짜 좋아한 승주씨는 또 그게 아니야. 내가 그 둘을 보기에 은정이 가 오히려 승주씨를 감싸주는 입장이었어. 둘이 만나서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내 가 보기에 승주씨가 은정이 보다 약해 보였어." "그거 말고 연하에게 맘을 줄 것 같냐고 묻잖아요." "넌 은정이를 잘 챙겨 주는 편이야. 연하니까 은정이가 또 감싸주고 싶어 하는 맘이 생길거야. 서로 서로 챙겨주고, 감싸주고 하면 뭐 쉽게 연인 사이 될 수도 있겠네." "에이, 연하에 대해 묻는데 진짜. 그리고 말처럼 쉽게 되면 사람 사귀기 참 편 하겠다. 현실 문제도 있잖아요." "은정이 걔는 약간 비현실적이야. 자기 생활에 있어 물질적으로 부족했던 게 없 는 애라 아주 이상적으로 사람을 평가 해. 사회에 나가서도 자기 힘으로 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애거든. 맘에 들기만 하면 그 사람의 배경이나 다른 조건 은 안 따질거야 아마. 아직 어려서 그런가?" "연하에 대해서 묻잖아요 나는." "자신감을 가지라고 말해 주었더니. 연하도 다른 조건에 포함되는 거 아닌가? 은정이도 요즘 전화를 하면 네 얘기를 많이 해."
"자주 어울렸잖아요. 동생, 누나 사이지만요." "너 은정이랑 붙어 다닌게 벌써 일년하고도 반이지? 은정이에겐 그거 대단하거 다. 나도 솔직히 좀 놀랬어. 내가 니 칭찬을 좀 했었지만 그렇다고 은정이가 너 와 그렇게 붙어 다닐줄은 몰랐어. 그리고 일년 반이야. 승주를 제외하고 그렇게 오래 붙어 다닌 남자는 니가 처음이거든." "누나, 동생이라서 그런거라니까요." "그럴수도 있겠지. 은정이가 좀 매력적이긴 하지?" "응." "확 잡아 버려. 걔 버릇도 좀 고쳐주고." "무슨 소리 하는거야?" "감정이 생기고 있다며? 은정이도 비슷할거야." "제가 연하거든요." "연하가 뭐 어때. 확 꼬셔 버려. 널 쉽게 버리지는 못할거야. 걔가 하는 얘기 를 들어 보면 확실히 그럴거야." "내가 많이 부족한데요. 특히나 연한데." "너 잘 났어. 미팅 나가서 깨졌다고 사기가 많이 죽었지? 하지만 나는 너에게 많이 반해 있었거든?" "하하, 그렇지요. 절 좀 아는 사람들은 다 나에게 반하지요." "후후, 그래. 자기가 맘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마음을 표현하는거야." "그래, 자신감을 가지자. 하지만 내가 은정이 누나에게 사랑하는 감정이 생기 고 있다는 거 누나만 알고 있어요. 은정이 누나에게 이 사실을 말하면 누나고 뭐 고 없어요?" "후후, 알았어." 정희 누나에게서 용기를 얻었다. 그 용기로 인해 자신감이 생겼다. 자신감은 딱 일주일을 갔다. 은정이 누나는 자신감이 꺽일 때까지 돌아 오지 않았다. 은정이 누나는 정희 누나하고 많이 틑릴 것 같다. 정희 누나는 한 번 좋아하면 끝까지 좋아하는 타입이지만 은정이 누나는 좀 다르다. 상대해야 할 주위의 남자 들도 다르다. 그리고 은정이 누나가 진지한 모습을 보였던 적이 몇 번 있지만 그 건 정희 누나가 장난스런 모습을 보일 때보다 더 어색했다. 누나는 내일 온다.
24. 24 회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르면 아무리 가슴에 품었던 사람이라도 잊혀지게 마련이다. 사람의 뇌는 자기 편의에 의해서 시간속으로 기억했던 것을 잊게끔 만들어져 있 다. 짧은 시간에 쉽게 잊혀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긴 시간을 두고 잊기 위해 노 력해야 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많은 시간 그리워하면서 잊음을 외면하는 경우 도 있다. 은정이 누나가 멀리 있는 동안 그리웠다.그 짧은 시간을 통해 은정이 누나는 내게 있어 이미 많은 그리움을 주는 존재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내 마음이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앞서 걸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어느새 하늘 속에 있게 된 것일까. 사람들은 하늘이 자기의 머리 위 멀리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하늘 속에 살고 있다. 누나를 사랑하게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랑하지 말자고도 생각했다. 훗, 내가 그런 생각들을 한 것은 아무래도 누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 뱉은 말 같다. 작년엔 이렇지 않았는데... 올 해는 가을을 유난히 탈 것 같다.
절대 티를 내지 말자. 그리고 배를 째는 한이 있어도 아니라고 시치미를 떼야 겠다. 외할아버지 댁에 간다고 간 것이지만 거의 베낭 여행을 하는 것 같았어요. 곳 곳을 많이 돌아 다녔거든요. 일 년 가까이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렀을 때보다 더 많은 곳을 돌아 다녔습니다. 그 곳의 좋은 기억들을 품고 난 귀국 비행기를 탔습 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한국에 도착합니다. 외할아버지는 여전히 건강하셨구요. 내년에는 한국을 한 번 나오실거라 하셨습 니다. 할아버지를 떠난 아쉬움이 있지만 한국에는 내 사람들이 있지요. 아빠, 엄 마가 보고 싶네요. 그리고 그 녀석 생각이 많이 납니다. 오스트리아로 놀러 갔을 때, 아주 인상에 남는 곳이 있었어요. 호수위에 작은 마을이 떠 있는 듯한 모습이었지요. 후후, 그 곳을 떠나면서 문득 철수와 한 번 쯤 다시 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녀석 데리고 다니면 재밌지요. 한국이 가까워 질수록 철수 녀석 생각이 자꾸 나는 것은 왜일까요. 좋은 기억 을 공유했던 사람이 그녀석 뿐만이 아닐진데, 철수 녀석 생각이 납니다. 한 달정 도 헤어져 있었다고 이렇게 보고 싶은 건 녀석이 내게 있어 큰 의미가 되었다는 것을 뜻 하겠지요. 연하도 괜찮을까? 녀석이 연상은 싫다고 했지요. 녀석의 그 런 생각 쯤 바꾸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철수는 재밌고 같이 있고 싶기는 하지 만 멋있고 기대고 싶은 그런 성숙함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시간을 흘러 보낼 까 합니다. 이국에선 이국적 정서 때문에 묘한 그리움이 있지요. 승주 생각도 많이 났습니 다. 철수 녀석은 승주 분위기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 보단 밝은 모습 이지만요. 승주는 생각이 났지만 이제 같이 있고 싶다는 느낌은 그 사람이 아닙 니다. 아직 다른 인연을 꿈꾸고는 있지만 지금 흘러가는 생각 속엔 승주 그 사람 은 잊혀지는 중이고, 철수는 혹시나 하며 마음이 가고 있지요. 승주 선물을 하나 샀어요. 그게 예의일 것 같아서, 잊혀지기 싫다고 말한 사람 이었으니까 작은 선물 하나를 샀지요. 포장이 예쁘게 되어 있지만 그렇게 큰 의 미가 있는 건 아닙니다. 차라리 스위스에 갔을 때 찐한 그리움을 가지고 산 볼품 없는 상자의 목동 인형이 훨씬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별에 나오는 목동 있지요? 철수가 생각 나 하나 샀습니다. 비행기 내에서 전화해 봤어요? 후훗, 평일이기에 날 마중 나올 사람이 없습니 다. 아빠가 마중 나와 줄 것이라 했지만 그냥 나 혼자 들어 간다고 말했었지요. 근데 생각해 보니까 부려 먹을 수 있는 놈을 놔두고 나 혼자 많은 짐들을 들고 초라하게 귀국하기는 싫었습니다. 삐삐 치기는 어렵겠지요? 철수 집에다 전화를 해 보았습니다. 지금 한국은 아침 8 시 정도 됐을 겁니다. 세 시간 쯤 후에는 한 국에 도착할 겁니다. 또 아버님이 받으셨습니다. "그 처잔가?" "네." "아침부터 무슨 일인가?" "네? 부탁할게 좀 있어서요." "24 살이라고 했던가?" "네." 나중에 카드 결제할 때, 돈 많이 물게 되면 철수더러 갚아라고 해야 겠다. 아버 님, 이거 비행기에서 거는 전화란 말이에요. "철수 아직 자거든? 잠깐 기둘려 봐." "네."
이게 내가 오늘 한국 도착하는 걸 알텐데 아직까지 자고 있단 말이야? "철수야 그 나이 많은 여자한테 전화 왔다." 다 들려요 아버님. 24 살이 많은건가? 2 분 동안 비싼 기내 전화기를 들고 침묵했습니다. "여보세요." 전혀 반가워 하는 목소리가 아닙니다. 이런 녀석을 내가 그리워 했다니... "나야." "한국에 돌아 온거에요?" "지금 가고 있어." "가고 있어요? 어디로?" "지금 서울가고 있단 말이야." "어디 딴데서 내렸어요?" "지금 비행기 안이야." "에이, 비행기에서 어떻게 전화를 해요." 바보 같은 놈. "넘어가자. 본론만 말할게. 11 시까지 김포 공항으로 나와." "거긴 왜요?" "나 그 시간에 입국 할거야. 대한항공이고 뮌헨에서 탔어." "진짜 비행기 안이에요?"" "응. 너 오늘 할 일 없지? 누나 마중 나와." "아이쒸, 나도 할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다." "나올거지? 누나가 네 선물도 몇 개 샀다?" "11 시까지 가면 돼요?" "응. 2 청사야." 녀석의 선물을 산 건 사실이에요. 미소가 담긴 선물입니다. 아침 옅은 잠 속에 은정이 누나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 애틋한 내용은 아니다. 그냥 보약 배달하러 갔다가 우연히 누나 만나 인사하는 꿈이었다. 그래도 누나 가 나왔기 때문에 애틋했다. 약속을 잡고 어디로 놀러 갈 수도 있었는데 울 아버 지가 날 깨우셨다. 방학인데 늦잠 좀 자게 놔두지. 전화 왔댄다. 나이 많은 여자 에게서. 처음엔 누군지 몰랐다. 누나가 오늘 한국으로 오는 날이었지만 아침부 터 날 찾을거라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나는 아버지를 겁내기 때문 에 거의 호출을 한다. 잠결에 전화를 받았는데 은정이 누나였다. 반가워 할 틈 도 없었다. 누나에게서 비행기 안에서도 전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다이 하드에서 보았던 것이 사실었다니... 아침이 바빠졌다. 나는 공항하고 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찍 서둘러야 했다. 버 스를 타고 갈까 생각하다가 외국 나갔다 오는 사람들의 짐이 가볍지 않을 것이 라 생각하고 직접 운전 해 가기로 했다. 어제 아버지가 외출을 하셨기 때문에 차 에 기름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다. 빨간 불 들어 오더라. 기름 넣어라고... 우리 아버지 만원치 이상 기름을 넣는 일이 거의 없다. 하루에 만원씩 7 만원 주 던 주급이 방학이다 술값이다 까여서 4 만원으로 줄어 있는 상태였다. "기름 2 만원치만 넣어라." 울 아버지 내게 열쇠를 주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너무 하십니다 아버지. 공항에서 많이 헛갈렸다. 주차 시킬 곳을 찾지 못해서. 공항 주차비 졸라 비쌌 다. 한 시간 째 누나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다. 3 주만에 누나의 모습이 낯설게 느 껴지거나 변했을 거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누나의 모습이 어떨지 기대되고 궁금했 다.
뽕뽕! 저 비행긴가벼. 게시판에 도착을 알리는 불빛이 빛나는 비행기의 이름이 누나가 말한 그것이다. 이제 곧 나타나겠지. 20 분이 흘렀다. 엄청 긴 시간이 흘 렀다. 드렁크 하나를 끌고 선글라스를 낀 채 짧은 면바지에 푸른 색 티를 입은 예쁜 아가씨가 두리번 거리더니 나를 보고 웃는다. 저 아가씬가벼. 촌스럽게 선글라스 가 너무 크다. 얼굴이 작은건가? 쪽 팔린다 손은 흔들지 마라 야. 씩 웃으면서 누나에게 다가 갔다. "오랜만이네요?" "응. 나 많이 보고 싶었지?" 검지 손가락을 세워서 누나의 볼을 찔러 줌으로서 그 답을 대신했다. "야간 비행기 타고 왔어요? 아침에 도착하네?" 누나가 선글라스를 벗고 날 아주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쳐다 보았다. 11 시도 아침이 맞는데... "시차에 대해서 전혀 개념이 없구나? 별 일 없었지?" "응. 누나는 재미있었어요?" "그럼." "나도 내년엔 배낭 여행이나 가 볼까?" "군대 갔다 오지 않은 애는 힘들걸." 또 애라고 그랬다. 으쒸! "내 선물 뭐 사왔어요?" "트렁크에 있어. 나중에 꺼내 줄게. 누나가 오늘은 피곤해서 집에 가 자야겠 다." "데려다 줄게요." "그래, 담에 맛있는 거 사줄게. 나 없는 동안 심심했지?" "너무 그렇게 단정하지 마세요." 심심하긴 심심했다. 주차비 3500 원은 누구에게 받냐? 누나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내 옆에서 계 속 생글생글 웃는 누나의 모습이 곱다. 여름 햇살처럼 말이다. 내 선물까지 사오 고 맘에 든다. "차 한잔 하고 가. 누나 방 구경시켜 줄게." "집에 아무도 없어요?" "아줌마 와 계실걸." "파출부 아줌마요?" "응." "남자 데려가면 뭐라 그러지 않아요?" "니가 남자니?" 또 무시 당했다. 그렇게 큰 빌라는 아니었지만 상당히 고급스러웠다. 거실에 원목의 가구들과 가 죽 소파가 멋있게 놓여져 있었고, 발밑에는 카페트까지 있다. 우리 집 마루에는 대로 만든 돗자리가 깔려 있다. 비교 된다. 누나하고 어머님 옷들을 위한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방이 네개 있었는데 서재로 이용하는 방은 구경 못했다. 부모님 방에도 침대가 놓여져 있었다. 우리 부모님 온돌을 고집하신다. 나도 온 돌이다. 재수생 내 동생도 온돌이다. 나 자취하면서 침대 첨 써 봤다. 우리 집에 도 짐 방이 두개나 있다. 내가 자취 생활 한 이후로 내 방이 짐방이 되었다. 우 리 아버지가 약재를 모아 놓는 방이 따로 하나 더 있다. 우리 집도 잘산다 뭐.
우리 아버지 한약방 주인이다. 아참 우리 아버지는 한의사라고 불러 달라셨다. 우리 아버지 우리 집과 한약방이 들어 선 그 건물의 건물주다. 우리 아버지 고 정 고객이 많으신 잘 나가시는 한약방 주인이다. 아참 한의사시다. 근데 은정이 누나집의 실내 분위기에서 기가 좀 죽었다. 은정이 누나 집은 꾸 며 놓고 사는 집이었다. 누나 방엔 바로크 양식? 대충 저렇게 등받이가 긴건 다 그렇게 말하더라. 하여 튼 고급스런 의자와 테이블도 있었고, 울 엄마 화장대 보다 고급스런 원목의 화 장대와 진열장도 있었다. 침대도 더블 침대로 침대보가 상당히 이국적이었다. 피 아노는 칠 줄 아는 걸까? 피아노도 방안에 있었다. 그리고 많은 책들...벽에 걸린 4 절지 만한 액자 속의 누나의 모습은 조금 어려 보였지만 예뻤으며 그 옆 에 서 계시는 아버님과 어머님의 모습 또한 멋있고, 세련되고 젊어 보이셨다. "저거 누나 몇 살때 찍은 거에요?" "대학 갓 들어와서 찍었지 아마." "부모님 연세는?" "왜? 사진의 모습이 젊어 보이시지? 두 분 다 이제 50 이야." 우리 아버지하고 같네. 우리 아버지도 보약을 많이 드셔서 그런지 나이보다 젊 어 보이신다. 세련되어 보이시지는 않지만... 누나 부모님도 동갑이시네? 연애 결혼 하셨나? 누나 방의 테이블에서 커피 한 잔 얻어 먹으며 누나가 짐을 푸는 광경을 목격했 다. 왠 인형을 저렇게 많이 사왔다냐? "너 선물. 인형을 보니까 네 생각이 많이 나더라. 그래서 생각 날 때마다 하나 씩 샀어." 저 인형들이 내 선물? 우리 나라에도 있는 인형들이다. 포장되지 않은 박스 속 도자기로 된 목동의 인형만이 조금 이국적이다. 작은 인형에서부터 승헌이가 놓 고 간 인형 크기만한 것 까지 총 다섯개다. "다섯 개 다 내꺼에요?" "응." "정희 누나 선물은 안 사왔어요?" "정희에게는 이거." 멋있는 쇼울이다. 나도 목돌이 같은 마후라나 하나 사 줄 것이지. 으이쒸, 또 어린 애로 취급 받았다. 내가 그래도 남자거든요. 근데 남자에게 인형을 선물 해? 그것도 다섯개 씩이나? 저거 나이 많은 여자 많아? 웃고 있는데 기분 나쁜 표정 지을 수도 없고... "감사합니다." "네 방이 좀 삭막하잖아. 인형으로 분위기 살려 봐." 노란 오리 인형을 볼 때 내가 왜 생각이 났을 까? 서양 도깨빈가? 이거 볼때도 내 생각이 났단 말이여? "그건 뭐에요?" 누나가 물건을 꺼내는 것에서 예쁘게 포장 된 무언가를 발견했다. 내 인형들 보 다 비밀이 담겨 있고 있어 보이는 물건 같다. "이거? 혹시나 해서." "부모님 선물?" "부모님 것은 따로 있어. 이건 주지 못할 것 같아." "누구 승주 그 사람 선물이에요?" "응." 누나의 미소가 곱다. 그렇게 느껴졌다. 그 사람 생각으로 그에게 줄 선물을 보 는 누나의 시선또한 부러운 것이었다. 조금 슬프다. 누나의 집에서 오래 있지는 못했다. 점심 먹고 가라는 걸 그냥 나왔다. 종이 가 방이 두개가 필요했다. 내게 필요없는 인형들이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누나가 선
물한 거라 소중히 보관해야 겠다. 8 월 남은 방학 동안 기분 좋은 일이 생길까. 그냥 누나하고 만나는 시간엔 기분 이 좋을 것 같다. "가볼게요." "그래. 마중 나와서 고마워." "나오라고 시켰잖아요." "훗! 내일 연락할게." "그러세요." "나 보고 싶었지?" 응, 많이 보고 싶었어. "한 번쯤 생각은 나더이다." "치. 나는 네 생각 많이 났었어 임마." 친한 후배의 기억으로 동생의 기억으로 많이 생각나면 뭐 합니까. 그리움이 있 는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 한 번이면 가려질 덧 없는 것일 걸.
25. 25 회 아닌 척 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보통 사람들은 거짓말을 할 때 표정이 변한다. 나도 보통사람이다. 아닌척 하려니 내 행동 자체가 어색하다. 방학이 끝이 나면 은정이 누나를 하루에 한 번씩은 보게 될 것이다. 누나의 보 금자리는 내 바로 곁에 있다. 내 어색한 모습을 금방 들켜 버릴 것 같다. 누나가 한국으로 돌아 온 다음 날 누나를 다시 만났다. 내 마음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 미소 짓는 누나가 연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스트리아 잘츠카메르부트 남부 지방에는 할슈타르 호수가 있어. 그 호수 바 로 가에 마을이 하나 있는데 동화 속에 나오는 풍경 같았어. 안개 낀 아침에 멀 리서 보면 마을이 꼭 호수 위에 떠 있는 것 처럼 보였거든?" "가 봤다고 자랑하는 거에요?" "응." "나도 꼭 외국을 나가 봐야지." 누나는 내 말에 별 신경을 쓰지 않네요. 머리 속에 무언가 그리고 있는지 턱을 고은 채 자기의 이야기만 하고 있다. "호수 속에 나무 기둥을 박고 그 위에 지어 논 작은 호텔에서 이틀을 지냈어. 밤이면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너무 낭만적이었거든. 참, 사진 나오면 그 곳 풍경을 보여줄게. 언제 한 번 같이 갈래?" "사진 찾으러 가는 거 말입니까? 같이 가 주죠 뭐." "흠, 거기 말고, 할슈타르 호숫 가 그 마을에 언제 한 번 같이 가자." "오스트리아가 어디 마음만 먹으면 그냥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인 줄 아나 보 죠?" "멀지. 시간이 흐른 뒤 기회가 되면 같이 가자는 소리야. 근데 말이야? 다시 찾 을 기회가 있다면 하필 너와 함께였으면 하고 생각했을까?" 그런 말하면 내가 더 빠져든다 말입니다. "부려 먹을려고 생각했나 보지요." "그 이유 때문일까?" "그 이유 때문일거에요."
그래 어디라도 좋으니 누나와 단 둘이 여행을 가고 싶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 은 빨리 변하는 구나. 그냥 누나라고만 생각했는데, 불과 한 달이 지나지 않아 나는 감히 누나를 사랑한다고 단정까지 짓게 생겼다. 내가 누나에게 남자로서 다 가가면 누나가 날 어색해 하겠지? 누나가 남자를 오래 사귀지 못한 이유를 조금 이나마 알 것 같다. 말은 내 뱉기 쉽다. 내가 누나를 거의 모르던 작년 봄, 나는 누나에게 책임지 지 못할 말들을 생각나는대로 내 뱉은 거 같다. 사람을 사귀는 데 있어 많은 생 각을 하지 말라고? 어떻게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생각한다, 고 로 존재한다. 생각을 많이 해서 누나 곁에 오래 존재해야 겠다. 이틀 뒤에 누나가 찍어 온 사진들을 보았다. 누나는 스위스와 오스트리아를 여 행 다녔다고 했다. 이국적인 풍경 속에 누나의 모습은 멋있었다. "누구 같이 다닌 사람 있어요?" "아니, 나 혼자 다녔어." "어깨 동무하고 있는 이 새끼는 누구야?" "너 또? 이 새끼가 뭐니? 베낭 여행 온 한국 사람들 자주 만났어." "혼자서 사진을 참 많이도 찍었네요." "응. 예쁘지?" "예쁘긴 한데..." "뭐?" "마음까지 예쁠까요?" 여름 방학 동안 난 어디 놀러 간 곳이 없다. 여름도 끝이 나고 있다. 이 무슨 처량한 신세더냐. 누구는 바다다, 계곡이다 잘도 놀러를 가는데, 나는 수영장도 한 번 못 가보고 방학을 끝마치게 생겼다. 수영장? 수영장에는 사람들이 대부분 속 옷만 입고 다닌다. 방수용 속옷. 크크, 누나 생 각이 났다. 누나와는 같은 방에서 자 본적도 있지만 속 옷이라고는 브라자 끈 한 번 본게 다다. 야외 수영장은 파장 분위기라서 별로 일 것이고 실내 수영장이 라도 한 번 가 봐야지. "누나 수영복 있어요?" "그럼 수영복 없는 사람도 있니?" 나. "날씨도 더운데 수영장이나 함 갑시다." "날씨 별로 안 더워." "수영장 가기 싫어요?" "그래 가자. 정희도 데려가자. 얘가 심심하다고 주말에 놀러 오라고 했거든. 주 말에 얘도 데리고 가자." "정희 누나 애인은 어떡하구요?" "그 사람하고 만날 약속이 되면 나더러 놀러 오라고 했겠니? 근데 어디 수영장 갈건데?" "아파트 단지 내에 보면 수영장 많잖아요." 멀리 가지 않아도 되는데. 누나는 저기 무슨 체육관인가 거기가 좋다고 한다. 물 이 깊어야 수영할 맛이 난다나? 나 수영 못한다. 십여초간 물에 떠 있는 것이 전 부다. 허우적 거려 보지만 1 미터도 나가지 못하고 꼬로록 가라 앉아 버린다. 그 래서 나는 물과 별로 안 친하다. 누나와 수영장 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순전 히 속 옷을 보기 위해서다. 나도 남자다. 수영복 하나와 수영모, 그리고 물안경 하나를 샀다. 방수용이라서 그런지 그냥 팬티 하고는 비교가 안되는 비싼 가격의 수영팬티다.
누나가 토요일날 날 데리러 왔었다. 저 엄마 차를 빌렸댄다. 은정이 누나는 정 희 누나를 데리고 나에게로 왔다. "정희 누나 오랜만이죠?" "그래. 은정이 돌아 오고 나서는 전화도 한 통 없네?" 조수석 자리 정희 누나에게 뺏겼다. 작년 여름까지만 해도 누나 차를 타면 뒷좌 석을 고집하던 나였다. 그런데 오늘은 아쉽다. "근데 수영장 갈 생각을 어떻게 했니? 너 누나들 수영복 입은 거 보려고 계획한 거지?" 눈치 잘 채네. 운전이나 똑바로 해요. 수영장에는 8 월이 끝이 나는 무렵인데도 사람들이 많았다. 여자들은 탈의실에 서 시간을 많이 보낸다. 다리만 담그고 누나들이 나올 때까지 수영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내 등뒤로 지나가는 아가씨들의 속 옷 입은 모습도 쳐다 보며 앉아 있었다. 여자들의 속살 이 하얗고 곱다. 물이 그런대로 따뜻하다. 놀고 있네 진짜. 어디가나 연인들 투성이다. 수영 가르쳐 준다면서 저 놈은 아 까부터 지 여자친군지 모르겠지만 여자를 물에 띄워 놓고 잘록한 허리를 만지고 있다. 나도 누나에게 수영 가르쳐 준다 그래놓고 저래 볼까? 나 수영 못한다 참. "으악!" 누가 갑자기 등 뒤에서 나를 밀었다. 그래서 준비 운동도 못한 채 물에 빠졌 다. 심장 마비 걸렸을 수도 있다. 내 비명 소리를 듣고 수영하던 사람 몇 명이 나를 쳐다 보았다. 물에 빠진 생쥐 모양으로 뒤 돌아 보았다. 쪼그려 앉아 나를 보며 생글생글 웃는 은정이 누나를 보았다. 팰 수도 없고 진짜. "그렇다고 그렇게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니?" 누나가 일어섰다. 야, 저 여자 진짜 이쁘긴 이쁘다. 하얀 속살과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등살이 파인 수영복 사이로 보였다. 브라자 끈이 없다? 흐흐. 진짜 파랑 색 좋아하나 보다. 누나의 수영복은 푸른색에 가까운 파랑색이다. 정희 누나는 하얀색. 핑크색으로 메이커가 크게 적혀 있는 하얀색 수영복이다. 저들 좋아하 는 색깔대로 수영복을 구비하고 있었구만. 정희 누나도 봐 줄만 하다. 솔직히 많 이 예쁜데, 은정이 누나 때문에 내 눈이 높아졌다. 수영 가르쳐 주는 것은 포기하고 누나에게 수영이나 배워야 겠다. 누나 둘이는 이 긴 풀장 끝에서 끝까지 장난치 듯 왔다 갔다 했다. 자유형으로 갔다가 배형으 로 돌아 오기도 했다. 나는 몸은 물에 담그고 머리만 내 놓은 채 구경만 했다. "넌 수영 안해?" "하고 있잖아요." 손을 젓는 척 해 주었다. 수영 못한다는 말은 차마 못하겠다. 누나 둘이가 풀장을 몇 번 왔다 갔다 하더니 휴식할 만한 곳을 찾아 나가더이 다. 뭔가 모르는 야릇함과 알수 없는 충동과 가슴이 떨려 온다. 누나의 수영복 차림과 물에 젖은 살갗을 보니까 이상한 기분이 막 든다. 조용히 물에서 나와 누나가 앉아 있는 테이블 쪽으로 갔다. "음료수라도 좀 사와." "어디 파는데? 돈은?" "수영복 입고 있는데 돈이 어딨니?" 갖은 고생을 해서 콜라 세개를 사 가지고 왔다. 내가 탈의실에서 옷까지 갈아 입고 가서 사온 성의를 몰라주고 누나들은 어디 한 곳에 시선이 가 있었다. "저 남자 괜찮지 않니?" 정희 누나의 말에 은정이 누나도 배시시 웃으며 동의를 한다. "어, 근육질이다. 차인표 닮았다 그지?"
"저기 다이빙대 근처의 안전요원 봐. 가슴에 털도 있다?" "그래 저 남자 멋있다. 키가 180 이 훨씬 넘겠는데? 수영을 해서 그런지 근육도 멋있고 가슴이 넓다." 여자들도 별수 없구나. 은정이 누나가 안전요원을 쳐다 보고 나서 나를 안됐다 는 듯이 아래 위로 쳐다 본다. 그래 나 근육도 별로 없고, 가슴에 털이라고는 젖 꼭지에 난 긴 털 하나 뿐이다. 키도 170 대 중반밖에는 안된다. 그러는 댁은 잘났 수? 좀 잘났군. "어! 저 여자 좀 봐요. 글래머네요. 나올 땐 나오고 들어갈 땐 들어가고. 가슴 이 볼록한게 섹쉬해요. 누나들 작은 가슴하고는 비교가 안돼네요. 빈약원, 빈약 투." 은정이 누나와 정희 누나에게 손가락 질 했다가 사람들 쳐다 보는데서 은정이 누나에게 세대, 정희 누나에게 두대를 맞았다. 같이 가슴 얘기 했는데 왜 나만 맞아야 하는 걸까. 하긴 여자들은 가슴을 가리고 다니지. 그것도 일종의 관습인 데... 여자가 가슴을 가린 이유는 활동하는데 불편하기 때문에서이지 결코 부끄 러워서가 아니었다. 고정시키기 위해 가려졌고, 그것이 시간이 흐르고 모두들 가 리고 다니니까 당연 가려야 되는 것으로 고정 관념화 된 것이다. 근데 여자가 남 자들 가슴 얘기하는 것은 괜찮고, 남자가 여자 가슴 얘기하는 것은 잘못하면 성 희롱으로 걸린다. 우쒸. "나 내년 봄에는 관둘까봐." "병원 말이야?" "응. 개인적인 시간을 갖기가 힘들어. 철규씨랑 시간 맞추기도 힘들고. 초년생 이라고 당직 서는 날이 너무 많아." "나도 병원에 취직할까 생각했는데." "너네 아빠 약국에 약사가 몇 명이야?" "다섯 명." "넌 약국에서 근무해라. 병원은 힘들어. 나도 약국이나 알아 봐야지." "약국 한 번 알아 봐 줄까? 참, 지은이 언니가 약국 차릴거라며?" "계획만 세우고 있어. 조금 크게 시작하고 싶나 봐. 언니가 일산에 있잖아. 자 기 아파트 단지 내에 약국이 없대. 나더러 동업하자고 자꾸 꼬셔. 3000 만원 정도 만 투자하면 그 이자하고 월급은 따로 계산해 준다고 하는데. 해 볼까 하는 생각 도 들긴 해. 하지만 안정적이지 못해 망설여 지기도 해." "차라리 네 스스로 약국을 차려?" "나 돈 없어. 그리고 사업 수완도 없고." "울 학교 근처도 약국이 적잖아. 한 번 생각해 봐. 학교 근처는 아무래도 도심 보다 점포세가 약할 거 아냐." "모르겠다." 둘이서만 이야기 하네요. 섧다. 계속 얘기해라. 아까부터 나는 저기 다이빙 하는 곳에 시선이 가 있었다. 스프 링 보드에서 모두들 장난처럼 뛰어 내렸다. 대부분 다리부터 떨어지는 어정쩡한 모습이다 그게 그렇게 무섭나? 내가 멋있게 다이빙 한 번 해 주지. 내가 슬 일어 서자 이야기하던 은정이 누나가 한 번 쳐다 봐 준다. 하하, 의연하게 침묵한 모 습으로 다이빙대 있는 곳으로 갔다. 줄을 서 기다리다가 내 차례가 되어 다이빙 위에 올라 섰다. 생각보다 높다. 저 기 보니까 누나가 이쪽을 보고 있다.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자! 머리부터 들어 간다. "풍덩!" 잘 들어 갔다. 계속 들어 간다. 뭐야 이거! 한 없이 들어 간다. 나는 잠시 착각
했었다. 저기 아까 수영하던 풀장과 같은 수심일 것이라고... 머리부터 다이빙 을 했더니 더 깊이 들어 가 버린 것 같다. 순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허우 적 거렸다. 그렇지만 맘대로 몸이 물에 뜨지 않았다. 왜 아무도 안 도와 주는거 야. 겨우 발버둥 쳐 수심위로 머리를 내 밀었으나 그냥 또 가라 앉고 만다. 나는 10 여초 이상 물에 떠 있지 못한다. 발버둥 치면 사람들이 구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 는데 나는 그렇게 허우적 거리지도 못했다. 물 속에서 허우적 거려봤자 밖에서 는 고요하게 보일 뿐이다. 그래도 이렇게 오래 나오지 않으면 구해 주어야 되는 것 아닌가. 마신 물 때문에 숨이 가픈지도 모르고 나는 목숨에 위협을 받고 있었 다. "으!" 한 번 더 머리를 수면위로 내 뱉고 한 웅큼 소리를 내 뱉고 또 빠져 들어갔다. 이젠 정신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풍덩!" 푸른 수영복이다. 내 목을 감고 위로 올라 가는 사람은 참 낯이 익은 사람이 다. 허우적 거림을 멈추고 내 목을 감은 사람을 따라 그냥 수심위로 올라 갔다. 물을 많이 먹었지만 인공호흡 받을 정도 까진 아니다. 그냥 힘없이 끌려 나와 바 닥에 누웠다. "수영도 못하면서 다이빙을 했나 봐." 쪽팔렸다. "괜찮아?" 훗, 은정이 누나다. 제법 걱정하는 얼굴 표정이다. 옆에는 아주 근육질의 수영 안전 요원도 있었다. 그 놈이 날 야단쳤다. 내가 눈을 뜨고 무사한 걸 보니까 안 심이 되는지 야단을 막 쳤다. "아니, 수영도 못하면서 다이빙 하러 왔단 말입니까. 뭐에요? 이 곳 수심이 9 미 터인거 몰라요? 사고 나면 전부 제 책임이란 말입니다." 새끼가 덩치 믿고 날 구박한다. 내가 수심이 9 미터인지 9 센티인지 어떻게 알 아. 경고 문구하나 달아 놓지도 않았으면서. 수영도 못하면서 잘난 척하러 다이 빙하면 죽음이야. 이런 문구를 달아 놓았어야지. 에구 힘없다. "이봐요. 안전요원이라는 사람이, 사람이 빠졌는데 뭐 한거에요? 얘가 이 지경 이 될 때까지 뭐 했어요? 모르고 들어 갈 수도 있는 거지 되려 야단을 쳐요? 도 대체 정신을 어디다 팔고 있는 거에요?" 아까 멋있다 할 때는 언제고 그렇게 화를 내면 안돼지. 내가 잘못해 빠진건 데... "내가 눈이 여러개 달린 것도 아니고 못 볼수도 있죠. 수영 못하는 사람이 다이 빙하러 온게 그럼 잘한거야?" "뭐야? 안전요원이 왜 있는데? 저 풀장 근처를 잘 못 거닐다 빠져 허우적 거려 도, 모른척 할거야? 아니면 구해놓고 수영 못하는 사람이 여길 들어와? 그러며 야단 칠거야? 제 직분을 다하지 못했으면 정중하게 사과를 해야지. 뭐 이런 사람 이 다 있어." "나도 달려 왔어요. 그 아가씨가 먼저 왔다고 너무 재는 거 아냐? 충분히 이 사 람할 구할 시간안에 나도 왔었다구요. 에이씨." 내가 빠졌을 때 날 구해준 사람은 은정이 누나였다. 짧은 찰나 내가 물 밖으로 나왔을 때 날 보고 달려 온 것은 은정이 누나였다. 안전요원보다 먼저 달려와 날 구해 놓고는 안전 요원과 싸우고 있었다. 참아라 잘못하면 맞을 수도 있다. 나 물 먹어서 지금 속이 느끼하거든요. 허우적 거려서 힘도 없어요. 저 녀석하 고 싸우면 이길 자신이 없는데, 뭘 믿고 저렇게 대드냐? 누나가 안전요원에게 분풀이 하고선 날 봤다. 시선이 사랑스럽다. 주위 사람들 이 모여 있어서 쪽팔렸지만 누나의 시선 때문에 그걸 느끼지 못했다.
"놀랬지?" "내가 그래도 2-3 미터는 나가거든요.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였어요." "그래, 이만하길 다행이다. 일어 설 수 있겠어?" "그럼요." 다리가 후들거리고 옆에서 보는 사람들 때문에 쪽팔렸지만 누나가 있었기 때문 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누나는 내 생명의 은인이다. 물론 누나가 아니었더라도 안전요원에게 구조가 되었을테지만 날 구하기 위해 뛰어와 준 누나가 너무 고맙 다. 내 마음이 한 걸음 더 가버렸다. 아까 안전 요원에게 따지던 누나의 모습은 진짜 화가 난 것이었다. 동생으로만 생각해도 괜찮다. 누나가 날 위하는 마음이 크다는 것을 알았다. 정희 누나가 나와 은정이 누나를 쳐다 보았다. "후훗! 대충 내 예상이 맞을 거 같애." "뭐가?" "나중에 가 보면 알겠지. 철수는 내가 예전에 했던 말 기억하고 있지?" "다 까먹었어요." 혹시나 내가 은정이 누나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말할 까봐 한 주 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수영 배우기 전에 다시 수영장을 오진 말아야 겠다. "아까 저 사람 다이빙 풀에서 빠져 죽을 뻔 한 사람이지?" "응, 저 여자가 애인인가봐. 자기 애인 죽을 뻔 했다고 사납게 굴던데?" "남자가 수영도 못하고 쯔쯧, 여자가 아깝다." 나는 뛰어난 청각으로 인해 사람들이 궁시렁 거리는 소리를 여럿 들었다. 여자 가 아깝다? 치명적이다. 26. 26 회 내 대학생 신분의 마지막 학기가 시작 된 지도 벌써 5 일이 지났습니다. 자취방 의 팽팽 돌아 가는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집에 돌아 갈 준비를 합니다. 오늘은 개강한 첫 주라 동아리와 학과들 모두 개강 파티를 한다고 떠들썩 할 겁니다. 우 리 동아리도 오늘 모임이 있지요. 그렇지만 나는 집에 가렵니다. 철수는 개강한 첫 주엔 꼭 보기가 힘들었습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녀석은 내 곁에 오래 머물러 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며칠 보지 못했지만 그러려 니 하겠습니다. 퇴근 시간을 피해 저녁 8 시경에 전철을 탔습니다. 그 시간에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이 많네요. 자리 하나를 잡고 오랜만에 다이어리에 몇 자 끄적여 봤습니 다. 맞은 편에 신입생으로 보이는 두 남학생에게 누나 행세를 하는 여학생 하나 가 눈에 들어 옵니다. 귀엽네요. 내 눈에는 다 같은 또래의 친구로 보이는데 저 여학생 말 머리에는 꼭 누나가 뭐 어쩌고, 누나가 잘해 줄게, 그래 누나가, 그 말을 꼭 붙이네요. 훗! 나도 철수에게 저러나요? 그래도 철수는 나보다 많이 어 려 보일거에요. 내가 맞은 편 여학생처럼 어린 나이도 아니고 말이죠. 수영장 갔던 일이 생각이 나네요. 미소를 지어 봅니다. 수영장에서 잠시 불안 한 미소를 맺었던 적이 있습니다. 스프링 보드에서 다이빙 풀로 제법 멋있게 뛰어 내리고는 철수가 허우적 거렸지 요. 나는 철수가 장난치는 줄 알았습니다. 철수의 허우적 거림을 보고 나는 웃었 어요. 그것이 철수가 물 속으로 영영 사라질수도 있었던 위급한 상황이었음을 모 른 채 그냥 웃었습니다. "은정아, 쟤 장난이 아닌 것 같애."
정희의 그 말을 듣고도 한 동안 난 철수가 장난치는 것이 아닌가 관찰까지 했었 어요. 그러다 웃음이 가시고 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 줄 알았습니다. "쟤, 장난 아냐!" 정희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서야 난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철수를 건져 내고 많이 미안했습니다. 창백한 철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입술 도 푸른 빛으로 변해 있었지요. 내가 구해내긴 했지만 철수의 위급함을 알아 챈 것은 정희였어요. 이젠 내가 더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철수가 정희를 좋아했 던 이유를 알겠네요. 헤아려 주는 마음. 나는 정희보다 헤아려 주는 마음이 적나 봐요. 정희가 밋밋하지만 철규씨와 오래토록 유지되는 것도 그 것 때문이겠지 요. 다이어리에 철수 이름을 적어 보았습니다. 후배, 동생. 어쩌면... 그리고 세모 표. "은정이 누나십니까?" 새벽 1 시경에 철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녀석은 서울로 돌아 오지 못했나 봅니 다. 밤 늦게 예의도 없이 그것도 술에 취한 목소리로 내게 전화하는 철수의 목소 리가 그렇게 싫지만은 않습니다. "왜?" "아, 제 목소리 아시겠습니까?" "철수야, 누나가 지금 자다가 일어 났거든? 용건만 말해." "오늘 왜 안 나왔어요?" "뭐? 동아리 모임 말이니?" "네." "나는 4 학년이잖니. 이제 자중해야지." "에이, 그럼 나도 서울 올라가는건데. 누나 나올 줄 알고 끝까지 남아 있었잖습 니까." "나 보고 싶던? 근데 이번 주엔 왜 연락 한 번 없었어. 내 바로 근처에 살면서 한 번 찾아 오지도 않았잖아." "좋아하기 때문에 못 찾아 갔죠." "그게 말이 되니?" "당연히 되죠. 누나가 삐삐를 좀 치지." "바로 옆에 사는 데 삐삐를 왜 치니? 그 말하려고 전화 한거야?" "누나!" "왜?" 철수가 날 불러 놓고선 한 참 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잘 사세요. 안녕." 싱거운 놈이네요. 술을 먹은 것 같으니까 방으로 들어가 금방 잠이 들겠네요. 내일 아침 철수의 자는 모습이 상상이 갑니다. 침대 위에 넌닝 차림으로 배를 내 놓고 자겠죠? 술 기운에 머리도 좀 아프겠네요. 아마 내게 전화한 것을 기억 못할지도 몰라요. 잠이 들었다가 깨니까 금방 잠이 오질 않습니다. 아까 전철에서 끄적이던 다이 어리를 꺼내 보았습니다. 올 해 다이어리에는 별로 적힌 게 없습니다. 잠시 옛 기억을 잡고 싶었습니다. 책 상 서랍에서 작년 다이어리를 꺼내 보았습니다. 그 속엔 올 해보다는 많은 내 용의 글 들이 적혀 있네요. 그리고 사진 두장을 발견했습니다. 내가 승주를 좋아 했던 것은 사실인가 봅니다. 승주 옆에 서 있는 내 모습이 참 예쁘네요. 그리움 은 공백기가 있지요. 사년 전 다이어리와 삼년 전 다이어리를 모두 꺼내 보았습 니다. 제가 그때 보다는 철이 들었겠지요? 기억에 없는 이름들이 제법 눈에 띕니 다. 그리고 승주라는 이름을 또 많이도 적어 놓았네요. 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기대를 했었나 봅니다. 이름 한자 한자에는 내 기대 하나 하나가 들어 가 있었습 니다. 철없이 말입니다. 승주의 사진은 옛 다이어리에 그대로 꼿아 두겠습니다. 철수 녀석 말대로 만난 시간 만큼은 그리울 수가 있으니까, 기대한 한 만큼 생각 날 수가 있으니까, 한때의 감정으로 흔적을 지워버리고 나면 나중에 후회한다고 합니다. 올 해 자주 만났으면서도 철수의 이름은 별로 적히지 못했습니다. 연하라 기대 하지 않아서일까요. 조금 미안하네요. 그래 기분이다. 열 번정도 적어주자. 밤 의 기분 때문에, 아늑한 내 방의 기분 때문에 한 페이지 가득 철수의 이름을 적 어 주었습니다. 걔하고는 사진도 같이 찍은 적이 없네요. 아직 정리하지 못한 올 여름에 찍은 사진들 중 호숫가의 내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을 철수 이름이 적힌 그 페이지에다 끼워 놓습니다. 그때 철수를 생각했었거든요. 9 월부터는 나름대로 대학원 갈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학기 초부터 밤 늦게까 지 도서관에 붙어 있자니 체질상 힘드네요. 11 시 경에 집으로 돌아 가는 길은 조 금 무섭습니다. 길 가에 늘어선 옥수수들의 키가 나보다 커요. 바람이 불면 으시 시한 소리를 내지요. 멀리 내 자취방 건물의 불빛들이 보이긴 하지만 옥수수 밭 에서 누군가 뛰어 나와 나를 끌고 들어가도 나는 도움을 받지 못할 것 같습니 다. 옥수수 밭을 지나칠 때면 항상 발걸음이 빨라지지요. 철수의 방에 불이 켜 져 있네요. 내일부터는 마중 나오라고 그럴까? 도서관에 혼자 있기가 심심한데 저 녀석 공부를 좀 시킬까? "왜 내 방으로 먼저와요?" "좀 놀다 가려고." "이런 야심한 시간에 아녀자께서 남자 혼자 사는 방을 찾는 것은 보기가 좋지 못하옵니다." 녀석은 아직 나에게 장난기 섞인 말 밖에는 내 뱉지 못하는군요. "뭐 했어?" "학기 초부터 레포트가 많네요." "물 끓는 소리 들린다." "아, 레포트 쓰는 일은 체력 소모가 많기 때문에 중간에 새참을 먹어줘야 되거 든요." "나도 하나 끓여 줘 그럼." "라면은 고칼로리, 고 염분인데 괜찮겠어요?" "괜찮아." 라면 하나 먹고 잔다고 내 외모가 급작스레 변하지는 않겠지요. 철수 방에서 라면을 먹습니다. 그냥 바닥에 앉아 철수를 마주보며 약간은 초라 한 모습으로 라면을 먹습니다. 철수 방에는 그릇이 빈약했기 때문에 냄비 통째 로 들고 와 나눠 먹었지요. 저 녀석 입에 들어 갔던 젓가락이 그대로 다시 냄비 속으로 들어 가네요. 먹지 말까? 이런 고민하고 있을 동안 철수는 계속해서 라면 을 먹습니다. 그래서 아무 생각않고 먹기로 했습니다. 자취생들이 라면을 잘 끓 인 다는 말은 사실입니다. "너 삼학년이니까 공부할 거 많지?" "응." "냄비는 내가 씻어 줄게." "냄비 다 씻었으면 누나 방에 가요." "갈 때되면 어련히 알아서 가겠니." 철수는 진짜 레포트 쓸게 많나 보네요. 바로 책상 앞으로 가 앉습니다. 침대 위 에는 인형이 다섯개로 늘어 있네요. 녀석이 내가 주었다고 여기로 몇 개 갖다 놓
았습니다. 호랑이 두개. 도깨비 하나. 노란 오리 하나. 외계인 같은 이상한 놈 하나. 이 방에 목동 인형은 보이지 않습니다. 인형 하나를 보듬고 침대 위에 앉 았습니다. "안가요?" "누나가 주었다고 인형을 여기에 모두 갖다 놓았구나. 많이 발전했다." "집에 놔두기 쪽팔려서 가지고 왔어요." 그래 자식아, 이제 좋은 답 기대하지 않을게. "너 시험기간에 어디서 공부하니?" 녀석을 도서관에 보디가드 겸 동반자로 데리고 다녀야 겠어요. 하지만 시험 기 간이 아니라, 나 때문에 도서관 나오라는 소리를 하기가 좀 머뭇거려 집니다. 작 년 정희가 부탁했을 때는 잠을 자는 한이 있어도 옆에 있어 주었으면서 내게는 거절을 할까봐 바로 부탁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내 방에서요. 문 잠궈 놓고 방에서 하는 편이에요." 뭐야? "그럼 저 번 학기에도? 내가 찾아 갔을 때 너, 방에 있었던 거야?" "누나가 찾아 왔던 거에요? 진작 말을 하지. 나는 내 친구들인 줄 알았잖아요." "너 도서관엔 잘 나가지 않니?" "시험 소스 구하고 어려운 프로그램 짤 일 있으면 나가요. 나도 제법 도서관 나 가는 편입니다." "정희가 외롭다고 했을 때, 같이 있어 주었지?" "응." "내가 같이 나가자고 하면 안 들어 줄거지?" "왜? 누나도 외로워요?"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너 도서관 나와라. 나는 계속 도서관 나가야 된다 말 이야. 내 옆에 앉아서 공부도 좀 하고 레포트 같은 것도 도서관에서 쓰면 되잖 아. 누나가 맛있는 거 사줄게. 나 혼자 밤길 오는 거 무서워. 내일부터 나랑 도 서관 다니자." "그러지요 뭐." 엉? 이 녀석이 대답을 너무 쉽게 해 버리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어렵게 부탁하 는 게 아니고 내 식대로 하는건데. 이렇게요. "야, 내일부터 도서관에 나와. 아침에 나랑 같이 가자. 그리고 집에 올 때 나 랑 같이 와." 그냥 혼잣 말인데 철수가 날 빤히 쳐다 보면서 고개를 끄덕거립니다. "그럴게요. 어짜피 나도 공부를 해야 되는 처지고..." 괜히 말돌리고 어렵게 부탁했네요, 씨. 내 방으로 돌아 왔지요. 9 월 들어서니까 밤에는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기도 합 니다. 철수가 준 잠옷을 꺼내 입었습니다. 촌스럽긴 하지만 자취방에선 올 가을 이 잠옷으로 하렵니다. 철수는 나를 따라 계속 도서관을 나왔습니다. 작년 정희에게 그랬던 것처럼 하 기 싫은 공부였지만 도서관만큼은 꼭 나왔습니다. 철수는 낮에는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녁 먹을 시간에 왔다가 저녁을 먹고 는 또 한 시간 정도 보이지 않아요. 7 시 쯤부터 조금 공부하는 척 하지요. 나는 집에 돌아 갈 시간이 되면 거의 일상으로 내 뱉는 말이 생겼습니다. 엎드린 철수 의 등을 쿡쿡 찌르면서 하는 말입니다. "철수야 일어 나아. 이제 집에 가자." 철수는 10 시를 못 넘기고 꼭 잠이 들었습니다. 그래 자라. 철수는 계속 내 옆에 있어 주고 있습니다. 남,녀 관계로 사귀는 것은 아니지만
녀석 덕분에 나는 다른 사람을 곁에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추석도 지나갑니 다. 완전한 가을이 왔습니다. 철수를 먼 곳에서 유학 온 학생으로 잠시 착각을 했었네요. 추석이 끝나고 철 수 생각에 집에서 먹을 것을 바리바리 싸 왔는데, 철수도 마찬가지로 내 생각을 하고선 먹을 것을 많이도 싸가지고 왔네요. "누나 집에서도 송편을 만들었어요?" "그래." "우리 집에서 만든 게 더 맛있을 거에요." "아니야. 우리 집 것도 맛있어." "그럼 바꿔 먹읍시다." "그러지 뭐." "그런대로 먹을 만 하네요." 내 방을 찾아 온 철수가 내 삶의 하나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참, 나 집에서 사진기 가져 왔어." "사진 찍게요?" "여기서 사진 한 판 찍을래?" "나하고 말인가요?" "응. 그리고 주말에 어디 사진 찍으러 가자. 가을이잖니. 단풍이 물들 dj 가고 있는 풍경이 멋있을 것 같지?" "사진 찍는 거 좋아해요?" "뭐, 예쁘니까 결과에 만족하는 편이지." "좋겠수. 나는 결과에 별로 만족하는 편이 아니라 사진 찍는 거 즐기는 편이 아 닌데..." "너도 괜찮게 생겼어." "그렇죠? 나도 자세히 보면 잘 생겼죠?" 녀석에겐 되도록 칭찬을 아껴야 겠어요. 조금 띄워 주면 끝을 알 수 없을 것 같 네요. 그래도 오늘은 띄워 줘야 겠네요. 녀석이 웃는 모습이 좋거든요. "그래, 자세히 안 봐도 잘 생겼어." "푸하핫! 드디어 나보고 잘생겼다 하는 여자가 셋이나 생겼다." "응? 누가 너보고 또 잘 생겼다 그래?" "우리 엄마하고, 정희 누나요." "그래, 나를 포함해서 세 명? 좋겠다." "뭐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나보고 잘 생겼다 그러면 만족해요." 훗, 그것도 괜찮겠네요. 그 말을 하는 녀석이 부럽기도 합니다. 저런 녀석이 사 랑하는 사람은 행복할 것도 같습니다. "촛점 잘 마춘거에요? 근데 추리닝 차림인데 괜찮을까요?" "너 아무거나 입어도 멋있어." "자꾸 띄워주면 농담인거 표가 난다 말입니다." 타이머를 맞추고 철수 곁으로 갔습니다. "웃어 빨리." "뒷 배경이 누나 침댄데 좀 어색하지 않아요? 더군다나 누나는 잠옷차림이 구..." "찰칵!" "에이, 너 말하고 있을 때 찍혔잖아. 다시 찍어." "그 필름 학교 근방에선 맡기지 마요. 오해 받기 딱 좋거든요." "좀 그렇다 그지?" 위에 스웨터 하나를 껴 입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사진 한 장을 찍었지요.
"너무 붙지 마요." "뭐 어때." 녀석 곁에 꼬옥 붙어서 후일 미소 짓게 만들 수 있는 사진 하나를 찍었습니다. 거의 볼이 맞닿을 정도로 얼굴을 붙였더니 녀석이 일순간 굳어 지더군요. 그때 사진이 찍혔습니다. 주말에 관악산을 갔었습니다. 정상까지 가면서 철수와 같이 찍은 사진이 하나 도 없었습니다. 대부분 그녀석과 나 독사진이었지요. 철수는 생각보다 산을 잘 탔습니다. 높은 산이 아니었지만 빈 손으로 가는 내 손을 잡아 주며, 그리고 베 낭까지 짊어 지고 잘 올라 갔습니다. 정상에서 비로소 철수와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어떤 아저씨께 부탁 을 드렸습니다. "둘이 부부에요?" "네?" "제가 그렇게 늙어 보여요?" 나보다 철수가 더 열을 받더군요. 확 밀어 버리고 싶었습니다. 내가 더 기분 나 빠했어야 했는데 철수의 그 말 한마디를 듣고 그런 생각들 떨쳐 버렸지요. 철수의 팔짱을 꽉 끼고 사진 찍는 아저씨께 미소를 보여 주었지요. "제 약혼자에요. 예쁘게 찍어 주세요." "아, 그러세요. 자 사진기를 보지 마시고 저기 먼 산을 보십시오." 철수가 아무말 없네요. 철수가 산을 내려 가면서도 별 말 하지 않았습니다. 녀석이 또 기분 나쁜 표정 이었습니다. "너 왜 그래?" "누나 남자들 만나서 아까 같은 말 잘해요?" "뭐?" "약혼 했다는 그런 말 쉽게 내 뱉을 수 있던가요?" "뭐 어때 모르는 사람에게 장난삼아 말한건데." "내 생각은? 그런 말하면 남자들은 착각한다고 했잖아요." "뭐 또? 저 년이 내게 맘이 있구나. 이거? 나 너한테 마음이 있어 왜?" "나 사랑하는 건 아니잖아요. 요즘 내가 뭘 참고 있느라 힘들거든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뭘 참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녀석은 삐친 모양으로 나를 앞서 휭하니 산을 내려 갑니다. "같이 가 철수야." 흠, 내가 아까 아저씨에게 농담삼아 철수를 약혼자라고 말했을 때 가슴이 떨렸 었거든요. 기분 좋은 농담이었는데 저 벤댕이 녀석은 삐친 모양으로 나를 기다리 지 않고 산을 내려가 버립니다. 저거 삐친 척 해 봤자 금방 풀어질 것을 압니 다. 가소로운 놈. "철수씨, 같이 가. 웨잇 포 미 달링!" "우이쒸!" 모든 사진은 사람수에 관계없이 두장씩 뽑았습니다. 그리고 철수와 똑같이 나누 었습니다. "누나 사진 잘 보관해라. 액자 같은 곳에 끼워 두면 더 좋고." "누나하고 나하고 제법 키 차이가 나네요. 상당히 큰 줄 알았더니..." "나는 너 키 작다고 놀린 적 없다?" "176 이 작아요?"
"그럼 작지. 요즘 키크고 잘난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우쒸, 여기 이 사진 우리 동아리 방에다 걸어 놓는다? 이건 암만 봐도 신방 분 위기 같애. 이 사진 돌면 누나 시집 못가요?" 녀석이 내 방에서 찍은 사진을 들고 협박하는군요. 웃음기 맺힌 얼굴로 말입니 다. 시켜도 그렇게 하지 못할 녀석이 말로만...진짜 해 봐? 내가 눈하나 깜박거 리나... "누나는 그 정돈 극복할 수 있는 미모가 있잖니." "장기 치료가 필요할 것 같군요." "이렇게 살아도 별 불편함 못 느끼고 살았어." "그럼 남편 될 짜식이 고생할 것 같군요." "내 낭군님을 욕하지 마라." "낭군님?" "난 결혼을 할 것이고 그럼 내 남편 될 사람이 어딘가 살고 있을 거 아냐. 그 사람 욕하지 말라고. 그 사람이 네가 짜식 이러는 걸 알면 기분이 좋겠니? 니 마 누라 될 사람 걱정이나 해. 너 보니까 네 마누라 될 사람도 그리 편치 만은 못하 겠다." "으이쒸. 빨리 내 반쪽을 만나야 되는데. 하여튼 사진은 잘 보관할게요." "누나 사진 끼울 액자 하나 사서 네 책상위에 놓아 둬. 니 방 분위기가 살거 다. 액자에다 존경하는 누님과 함께. 이렇게 써 놔라." 내가 자꾸 이런 말 하는 건 철수에게 맘이 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전보다 더 나를 표현하는 말에 누나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을 내 뱉고 나 서 꼭 후회를 하기도 합니다. 도서관엔 계속 나갔습니다. 철수는 실험 때문에 도서관 내 옆자리에 앉지 못하 는 경우는 있어도 집에 갈 때쯤에는 꼭 나를 데리러 왔습니다. 오늘은 9 시 못되 어 자기 시작하더니 여태 일어 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은 거의 11 시 가 다되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 섰어요. 철수를 깨우려다 연습장에 적어논 글들 을 보았습니다. 녀석이 또 공부는 거의 하지 않았군요. 곧 중간 고사 기간인 데... 내 팔 길이 만큼의 그리움. 방 하나의 공간만큼 떨어져 있는 아련함. 곁에 있어 면서도 다른 사람을 꿈 꾸어야만 하는 아쉬움. 딱 좋다. 언젠가는 제 사람을 만 나 남남이 되겠지만 그 시간까지는 이것으로 만족해야 겠지. 그녀와의 지금 이 거리가 딱 좋다. 뭐야 이녀석. 이건 아무리 봐도 나를 생각하고 쓴 글 같네요. 흠, 아쉽네요. 녀 석의 이런 생각이... 모른 척 해야 겠습니다. 남남이라는 말이 내 마음을 조금 아프게 합니다. "철수야 가자." 그냥 침묵으로 집까지 걸었습니다. 최근들어 난 철수를 남이라고 생각하지 않았 습니다. 점점 철수에 대한 생각들을 고쳐 가고 있었는데, 내 마음을 붙들어 두어 야 겠네요. 더 이상 가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열매가 보기 좋게 맺힌 옥수수가 바람에 흔들립니다. 녀석이 내 침묵한 모습이 어색했는지 옥수수를 보더니 딴 말을 합니다. "누나 옥수수 좋아하죠?" "잘 먹는 편이야." "올해도 서리를 해야겠군. 오늘 밤에 할까?" "너 작년에도 그게 서리한 거였니?" "네." "치! 나이가 몇살인데 그런 짓을 하니?" "오늘 밤에 서리 합시다."
"응?" "누나가 망 좀 봐줘요. 아직 제대로 익은 건 많지 않을거라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작년에 내가 제법 서리를 했고, 다른 자취생들도 몇 개씩 뜯어 갔을 거 에요. 올해는 뭔가 감시가 있을 것 같기도 하거든요. 새벽에 같이 서리 합시다." "싫어." "같이 하자니까요. 누나가 작년에 옥수수를 많이 먹었기 때문에 누나도 공범이 야." "뭐가?" "발빼지 마요. 오늘 새벽 한시에 행동에 들어 갑시다." "나 공부해야 돼." "한시에 누나 데리러 갈게요." 자기 맘대로군요. 늦게까지 잠들지 않았습니다. 책상에 앉아 생각을 해 봅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뭘까. 자기가 외롭기 때문에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 나는 누군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나는 결혼을 하겠지요. 길어도 3 년 안에는 제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릴 겁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잊고, 그 사람 세계의 사람들 을 받아 들이겠지요. 녀석의 글처럼 제 사람을 만나면 철수와 난 서로를 잊어 갈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거라 다짐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자기도 모르게 잊어갈 겁니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배우자가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과거의 사 람들은 잊어 주는게 예의입니다. 나는 분명 철수의 짝에게 필요없는 사람으로 생 각되어 질 겁니다. 남남이라... 철수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해 보지 못한 단어군요. "딩동!" 뭐야? 초인종 소리에 시계를 보니 새벽 1 시입니다. 진짜로 왔어. "이런 야심한 시간에 아녀자 혼자 사는 방을 남정네가 찾는다는 것은 무례한 일 이 아닌지요?" "빨리 옷 입고 나와요." "진짜 갈려구?" "옥수수 먹고 싶지 않아요? 윗도리만 하나 걸치고 바로 나와요." 자기 생각으로 내가 고민했다는 것을 알까? 전혀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군요. "망 잘 봐요. 혹시 주인 아저씨가 나오면 말 붙여서 시간 끌어요." "이런 시간에 주인이 왜 나오니? 그리고 내가 주인 아저씨가 누군줄 어떻게 알 아?" "대충 보면 알지." 잠옷에 가디언 하나 걸치고 이런 야밤에 밖에 나와 보기는 처음이다. 그냥 자 기 혼자 서리해도 되겠네. 지나가는 사람이라고는 술에 취한 양복 입은 어떤 아저씨 뿐이었다. 그냥 봐도 저 사람은 이 밭 주인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겠다. 저 아저씨가 날 보고 배시시 웃더니 혀를 찼다. 제법 무서웠었는데 철수가 가까이 있다는 생각으로 같이 혀 를 차 주었다. 집에 들어 가면 마누라에게 바가지 많이 긁히겠수. 내가 이게 무 슨 꼴이야. 저런 술취한 아저씨에게 놀림이나 당하고... 엄마야! "누나 왜?" "고양이가 뛰어 나왔어." "주인 아저씨 아니면 소리 지르지 마요." 검은 밤은 옥수수 밭이 부스럭 거리며 흔들렸다. 무서운 풍경이다. 그 어두운
옥수수 밭에서 검은 물체가 툭 튀어 나왔다. 함박 웃음을 지은 채 말이다. "이제 갑시다." 세상에나... "그렇게 많이 떼어 오면 이 밭 주인은 어떡하라고?" "다른 사람이 서리 하지 않으면 괜찮을거에요. 빨리 튑시다." 녀석이 근 스무개 가까이 되는 옥수수를 안고도 나보다 빨리 뛰어 갑니다. 철수가 새벽이지만 내 방에 있습니다. 옥수수를 잔뜩 내려 놓은 채 말입니다. "불 켜면 의심 받으니까 그냥 스탠드 불 빛으로 놔 둬요." "치, 새벽 2 시가 다되어 이게 무슨 짓이냐." "자 누나 몫." 녀석이 내 배분으로 옥수수 다섯개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방으로 가려고 하네요. 밖에 나갔다 와서 잠도 오지 않는데 그냥 가 버리면 안돼지요. "야, 난 왜 다섯개야. 반반으로 나눠야지." "다섯개면 많이 준거야. 그래 기분이다. 2 개 더 줄게. 됐어요?" "그 두개 삶아 먹자." "지금?" 옥수수는 영양식으로 괜찮죠. 새벽 두시 경에 서리한 옥수수 삶아 먹기도 처음 입니다. 옅은 스탠드 불빛 아래에 녀석의 웃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자기 것이 라고 남은 옥수수를 꼭 챙겨서 안고 내 방을 나갈 때 지어준 녀석의 웃음도 보 기 좋았고, 걸어가는 뒷 모습도 사랑스럽습니다. 저 녀석하고도 언젠가는 남남 이 될 것이다? 싫네요. 27. 27 회 헤, 기분이 좋다. 가을 하늘처럼 내 마음이 곱다. 내 옆에는 은정이 누나가 공부 하고 있다. 사각 사각 불펜 구르는 소리가 좋고, 책장 넘기는 소리도 좋다. 발자 국 소리까지 좋은 도서관 풍경이 맘에 든다. 이 번 중간 고사는 성적이 좋을 것 같다. 도서관에서 지낸 시간이 많기 때문이 다. 비록 도서관 나온 시간만큼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공부를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그 사랑하는 사람이 날 좋아해 주고 있다. 올 가을은 맘에 든다. "오늘은 어떻게 자지 않는다?" "내가 매일 자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거의 매일 잤어." "이제 가시렵니까?" "응." "갑시다." 10 월이 되니까 밤 공기가 차갑다. 차가운대로 매력이 있다. "팔짱 끼면 너 뺄거지?" 누나가 요즘 날 대함에 있어 조금 조심스럽다. 종종 누나의 태도에서 그런 걸 느낀다. "껴요." 하하, 차운 공기가 매력이 있는 건 이런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 가 는 길에 누나가 간혹 팔짱을 껴 준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이제 적응이 되어간 다. 연인 사이가 아니면 어때.
"철수는 좋겄다. 얼레리!" 저런 놈들 때문에 공대 내에서 커플이 만들어지기가 어렵다. 그나마 적은 여학 생들, 치열한 경쟁율을 뚫고 한 여학생에게 마음을 주려고 해도 꼭 옆에서 홰방 을 놓는 놈들이 있다.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다. 넌 눈도 없냐? 푸헬헬, 공대 여 학생을 사귀다니. 그리고 사귀기도 전에 갖가지 소문들이 퍼져 버리기 때문에 왠 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공대생이 공대 여학생을 사귀기는 너무나 많은 시련을 이 겨내기가 어렵다. 나도 제법 놀려 봤다. 누나와 팔짱을 끼고 가는데 저기 어둔 구석에서 어떤 놈이 놀렸다. 동엽이다. 뻔히 상대가 누나라는 걸 아는 녀석이 날 놀렸다. "쟤 누구니?" "잠깐만요." 누나에게서 떨어져 그 녀석 있는 곳으로 가 날아 차기 한 번 했다. "졸라 아프다 새꺄." "넌 선배한테 예의도 없냐?" "둘이 사귀는 거냐?" "아니다. 그냥 누나 동생 사이로 지내는 것도 괜찮은 거 같다." "저 누나 공대에서도 아는 사람들이 많던데." "예쁘지?" "우리 희진이 보단 안 예쁘다. 그리고 너 공대생이야. 공대생들하고 놀아 임 마." "싫어 새꺄. 너 다시 한 번 놀리면 죽을 줄 알어." "동네 사람들 이 놈이 연상하고 사겨요." "누나 듣겠다 임마." 들었나 보네요. 누나가 더 이상 팔짱을 껴 주지 않습니다. 누나와 두 살의 거리 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나 봅니다. 마음을 붙들어 두고 있으니 아쉬움은 있으나 어색해지진 않는다. 처음엔 내 스 스로 어색해 했는데 그럴 필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음을 묶어 둔채 하던 대로 하면 된다. 지금 이런 관계도 괜찮은데 굳이 내가 판을 깰 필요는 없다. 누나 방에 나처럼 자연스럽게 들락 거릴수 있는 남자는 없다. 누나 침대 위에 나처럼 편히 앉을 수 있는 남자도 없다. 자기 베개를 껴안고 있어도 저 여자가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누나 요즘 공부하는 게 대학원 준비하는 거에요?" "포함되지." 누나가 나를 위해 원두 커피도 끓여 준다. 푸하하, 연인 사이가 아니면 어떻 냐. 누나는 팔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곳의 그리움이다. "약사 고시는?" "그것도 준비하고 있어." "다른 학교 대학원을 가진 않을거죠?" "니가 나보고 공부 못한다고 했던 말 때문에 이를 악물고 노력해서 서울대 쪽 을 뚫어 볼까 했는데, 내가 떠나면 니가 또 울겠지? 그래서 그냥 여기 다닐까 해." "우리 학교는 뭐 그냥 받아 주나요/" "너 그러면 나 진짜 딴 학교 간다?" 저 여자 말하는게 꼭 나 때문에 이 학교 대학원 다닐 거란 뜻으로 들린다. 그런 게 어딨냐. 다 자기 계획에 의해서 딴 학교 못 갈거 같으니까 하는 말이지. 그래 도 누나가 이 학교를 계속해서 다녔으면 한다. 멀리 있으면 아무래도 만나기가 어려워 진다. 그렇게 친했던 정희 누나도 한 달에 한 번 보기가 어려워 졌다. 누나를 자주 보니 좋았다. 자기 전 누나 방에서 종종 얻어 마시는 커피의 향기
가 밤을 아름답게 했다. 가을이 깊어 가고 있다. 중간 고사 기간도 지나갔다. 도서관 내 자리에 앉아 문 제 풀이가 막히면 옆을 쳐다 본다. 내 옆에 누나가 공부를 하고 있다. 내 옆에 누나가 앉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미소가 맺힌다. 잠시간 지을 수 있 는 미소가 좋아 난 시험이 끝이 났지만 계속 도서관을 나오고 있다. 저 여자가 요즘은 다른 남자들도 만나지 않고 나랑 붙어 다닌다. 솔직한 표현은 공부하기 에 바빠 도서관을 찾는 누나 곁에 내가 붙어 다니는 것이지만 아무려면 어떻냐. 가을 바람이 분다. 낙엽들이 곱게 쌓인다. 간혹 누나의 맑은 얼굴을 볼 때면 묶 어 두었던 마음을 풀어 버리고 싶다. 흠, 올 가을은 그냥 묶어 둔 채 넘기자. 먼 훗날 어떻게 될 지는 모르지만 당분간 누나는 내 곁에 있어 줄 것 같다. 곁 에 있는 것만으로 행복해 할 수 있다. "이 번 주말에 대학로 가자." "에?" "작년 이 맘때 내가 너 소개팅 시켜 주었잖아." "응. 시켜 주긴 했죠." "그때 너랑 나랑 데이트했지?" "그게 무슨 데이트야?" "너 내 초상화 벽에 안 붙여 놨지." "응. 그래도 가지고 있어요." "다시 그리자. 그리고 뭐 볼 것도 있어." "뭐요?" "참, 너도 내 시험 볼 때 엿 사줘야 된다?" 마로니에 공원은 플라타너스 나무가 많다. 그 큰 나무들이 옷을 벗고 있다. 토 요일 마로니에 공원은 연인들의 장소다. 가을 옷을 입은 누나가 내 옆에 앉아 있 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날 쳐다 본다. 나는 쪽팔려 죽겠는데 누나는 태연하다. 공주 기질은 고쳐지지 않는구만... 누나와 나를 각각 다른 무명화가 둘이가 그려 주고 있다. 이런 거 좋아하는 줄은 몰랐다. 내 그림이 더 빨리 완성되었다. 음, 제법 잘 생겼다. 그림을 보면 이렇게 잘 생겼는데 왜 나를 미남이라 불러주 는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은지 궁금하다. 누나 얼굴을 그려 주는 화가 보다도 잘 생겼고, 저기 어떤 여자와 걸어가는 괜찮게 생긴 놈보다 그림 속 내가 더 잘 생겼다. 가만, 저 사람 어디서 본 것 같다. 누나의 그림이 완성 되어 간다. 누나는 태연하게 꼼짝않고 앉아 있다. 누나에 게 시선을 오래 둘 수 없었다. 아까 본 그 남자에게 자꾸 시선이 갔다. 저 사람 이 나 쪽으로 쳐다 본다.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저기 지나가는 저 남자가 눈에 익 다. 그 녀석이다. 승주라는 사람. 기분이 이상하다. 누나는 다행히 저 사람을 못 본 것 같다. 승주씨의 옆에는 평범한 아가씨 한 명이 밋밋한 웃음을 지으며 그 와 동행하고 있었다. 훗! 여자 친구가 생겼나 보다. 승주씨는 이 쪽을 한 번 쳐다 보다가 제 갈길을 가 버렸다. 다행이다. "야, 네 그림 줘 봐." 누나의 그림이 완성 되어졌다. 누나가 자기의 초상화를 보고선 내 그림도 보여 달라고 했다. 두 개가 나란히 놓이게 되니 그런대로 어울려 보인다. "나도 괜찮게 그려졌죠?" "넌 너무 잘 그려 줬다. 나는 실물보다 못한 것 같고." "그렇게 살면 좋아요?" "응."
누나가 그림을 돌돌 말더니 자기가 둘 다 가져 버린다. 뭐여? "누나가 들고 다닐 거에요?" "이거 둘 다 나 가질거야. 괜찮지?" "에?" "전에 그린 내 초상화 가지고 있다 했지?" "네." "그거 벽에다 걸어 놔. 이건 그냥 내가 보관할게." "돈은 내가 냈는데?" "내게 선물 한 걸로 생각 해." 거의 뺏어가다시피 가져 갔지만 내 모습이 담긴 그림을 누나가 보관해 준다고 생각하니 고맙기도 하다. 벽에 걸어 놓고 칼 던지지는 마요. 바람이 불면 큰 나뭇잎들이 그네를 탄다. 오늘 이 공원을 거니는 것이 비록 눈 오는 날 내 여자친구와 거니는 만큼은 아니겠지만 가슴을 떨리게 하는 낭만이 있 다. 어디 음악이 좋은 찻 집에 앉아 누나와 조금 무게 있는 대화를 나누고도 싶 다. 잉? 누나는 길을 걷다 이상한 곳으로 들어 가 버렸다. 그리고 내게 손 짓을 했다. "거긴 왜 가요?" "전에부터 사주를 한 번 보고 싶었어." 사주, 팔자, 궁합? 작은 천막에 이상한 도인이 한 명 누나를 보고 배시시 웃는 다. 나를 보고는 기분 나쁜 듯한 시선을 주었다. 차별 하는 겨? "종이에다 한 자로 이름을 써 봐요." 洪恩情, 한 자로 지 이름 쓸 줄은 아는구만. "1972 년 11 월 14 일 유시생에요." "음..." 알고서 고개를 끄덕거리는 거여 뭐여. 책 뒤져서 읽어 주는 거 나도 하겠다. 쌀 알을 몇개 던지더니 손위에 올려 놓고 만지작 거렸다. "제 결혼 운은 어떨까요? 제 배우자 될 사람은 제가 만나 본 사람이에요? 아니 면 아직 나타나지 않은 건가요?" "이미 만나 본 것 같구만." 누나가 씩 웃습니다. 꼴랑 십분 별 시덥지 않은 이야기 듣고 만원을 주다니 바 보 같은 뇬. 아참, 사랑하는 사람에게 뇬이라고 그럼 안돼죠. "너도 한 번 볼래?" "싫어요." "봐 바. 넌 팔자가 사납잖아." "에? 내 팔자가 왜 사나워?" "미팅 나가서 매 번 깨졌다면서?" "그거 하고 팔자하고 무슨 상관이여?" 나도 종이에 이름을 쓰고 생년 월일을 말했다. "태어난 시간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울 아버지가 종종 꼭두 새벽에 니가 나오는 바람에 잠 설쳤다 하는 말씀을 하세요." "그럼 축시 정도 되겠구만." "대충 어떻게 나와요?" "팔자 사납네." 책도 안 보고 니가 어떻게 아냐? "애정운 그런 건 잘 모르나요?" "주위에 여자가 없어." 어, 이 새끼 그런대로 맞추네.
"결혼은 할 수 있을까요?" "쩝, 자네도 이미 자네 배우자를 만나 본 거 같으이." "예쁜가요?" "만원 내고 너무 많은 걸 알려고 하지마. 다쳐!" 순 사이비 아녀? 허! 내가 미팅을 제법 많이 했는데, 혹시 내 배우자가 그들 중 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별로 맘에 드는 여자가 없었는데... 누 나는 내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리고 있다. "가자." "사주 똑바로 봐요." 별로 늙어 보이지도 않는게 수염은 졸라 길러가지고 말이야. 마로니에 공원이 저녁을 맞이 하고 있다. 누나랑 여기서 저녁까지 해결하고 차 라도 한 잔 마시고 집에 들어 갈 생각이었다. 이 여자가 노천 극장에서 무명 가 수가 부르는 노랫 소리를 듣더니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노래만 듣고 가자." "좋아하는 노래에요?" "아니, 그냥 노랫가락이 듣기 좋네. 저 가수가 너 좀 닮은 것 같다." "그래 뭐 듣고 가죠. 저 자식이 진짜 날 닮았나요?" "조금. 이 노래만 듣고 밥 먹으러 가자." "그래요 그럼." 무명 가수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열창을 했다. 저 사람의 삶이 어떤지는 모르겠 지만 지금 노래 부르는 모습은 행복해 보인다. 흠... "...이젠 혼자 아니에요. 언제 어디서나~ 잊지 말아줘요 그대." 박학기 노래다.(제목 아시는 분 좀 가르쳐 주세요.) 누나와 나란히 서서 무명 가수의 애절한 노랫 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노래를 듣 고 있는데 노래에 취해 가수만 쳐다 보고 있는 누나 곁에 누군가 다가 섰다. 그 사람이 나에게 어색한 미소를 짓다가 씩 웃는다. 나 꿈쩍 놀랬지만 고개를 끄덕 여 눈인사를 보내 주었다. 하기 싫은 인사였다. 내 표정이 지금 굳어 있다.별 로 반가운 녀석이 아니다. 나한테 잘못한 거 하나도 없는 녀석이지만 갑자기 등 장한 저 사람이 싫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다. 녀석의 표정을 보니 자뭇 그리 움에 쌓인 모습이다. 누나의 허리를 찔렀다. 나를 쳐다 보는 누나에게 고개 짓으 로 반대편을 보라는 시늉을 했다. 훗, 기분 더럽다 씨. 저 새끼 왜 나타난겨. 아 까 같이 있던 여자는 어디로 보낸겨. 누나의 밝았던 표정이 일순간 굳어졌다. "오랜만이지?" 녀석의 굳은 목소리. "엉? 응." 누나의 멍한 답.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서 누나와 승주씨는 몇 걸음 뒤로 물러 섰다. 나도 따라 물러 섰지만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그래 떨어져 주는게 예의겠지. "아까 네 후배 보고선 혹시나 했었어. 우연히 만났네." "응?" 누나가 말을 아끼고 있다. 굳은 표정이 알 수 없는 질투심을 불러 일으킨다. 나 는 누나가 저 사람을 좋아 했던 것을 안다. 누나는 그냥 멀어져 갔던 그 사람에 게 화를 내지 않았다.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다. 연락이나 한 번 해 주지." 저 사람, 예전에 내가 처음 보았을 때와는 다르게 말을 부드럽게 한다. "너도 연락하지 않았잖아." "잠깐 시간 좀 내 줄 수 있겠니?"
그 사람의 질문에 누나가 머뭇거렸다. 그리고 나를 쳐다 본다. 인상을 더럽게 지어 줄려다 그냥 웃어 주었다. 웃어 주는게 아닌데... 누나가 내게 던진 말이 서럽다. "철수야 미안한데, 오늘은 먼저 들어가라." 만족했던 누나와 나의 관계는 누나에게 누군가 다가오면 나는 피해 주어야 되는 구나. 후후, 이젠 내가 제일 친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누나는 나에게 등을 돌린 채 일년 만에 만난 그 사람에게 가 버렸다. 슬펐다. 그냥 슬펐다. 졸라 슬플 줄 알았는데 그냥 슬펐다. 묶어 두길 잘했다. 배가 고프다. 집으로 오는 지하철에서 배가 고파 슬펐다. 그 새끼, 내가 뻔히 있었는데 뻔뻔스럽게 누나 곁에 나타났다. 나는 도대체 뭐야. 집에 와서 밥 졸라 먹었다. 그리고 방에 이불 깔고 아무생각 없이 자려고 했다. 삐삐가 울렸다. 누나다. 뭐 야 씨. 그냥 등 돌릴 때는 언제고 삐삐는 왜 치나. 전화 하지 않았다. 연달아 계 속 울렸다. 나 잘들어 갔는지 물어 볼려고 그러나? 그런 친철은 넘어가도 된다. 신경 써 주는게 더 섧게 만드는 것이다. 세 번째 삐삐가 왔을 때 삐삐를 집어 던 져 버렸다. 불쌍하게 밧데리가 터져 나왔다. 쯧쯧, 가여븐 놈. 우연한 스침으로도 이별을 맛 볼수 있다. 내가 기분 좋아 했던 것, 그 뒤에는 불안함이 있었다. 될대로 되라. 하지만 슬프다. 오늘 내 자신이 가여워서 슬펐다. 누나 때문이 아 니다. 훗! 나는 오늘 일을 조만간 잊어 버리고 누나가 좋아하는 척 해 주면 또 웃겠지. 누나가 만약 오늘 그 사람과 좋은 사이가 되면 남남이 되는 시간이 빨 리 올 수도 있겠다. 슬픈 일이지만 적응이 되겠지 뭐. 누나의 등돌린 모습이 너 무나 냉정해 보였다. 배 터진 삐삐는 내일 치료해 주어야 겠다. 그냥 이부자리 를 펴 놓고 생각하기 싫어 잠을 청했다. 28. 28 회 으쒸, 옅은 잠이 든 채 뒤척이다가 잠에서 깨고 말았다. 엄마가 곧 수능을 볼 내 동생 때문에 벌써부터 보일러를 가동 시켰나 보다. 덥다 씨. 다시 잠이 오지 않는다. 불 꺼진 방안에서 잠이 오지 않아 이런 저런 생각들을 했다. 그냥 피식 웃었다. 은정이 누나 생각 때문에 웃었다. 학교에서도 종종 오늘 같은 일이 있었 다. 누나 과 동기들이나 동아리 선배들이 종종 나와 같이 있던 누나를 빼앗아 가 버린 적이 많다. 내가 모르는 놈과 웃으며 지나가는 누나를 만난적도 있다. 아무 렇지도 않았다. 근데 오늘 일은 조금 다르다. 오늘 누나를 빼앗아 가 버린 놈은 누나의 마음 속 내 앞에 서 있을 것 같은 자식이다. 기분이 이상하게 나쁘다. 분 명 나는 누나와 데이트 중이었다. 누나 입으로도 데이트라고 말했다. 근데 내가 뻔히 옆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염치 없이 나타난 승주 그 자식은 뭐야? 도대체 나 를 어떻게 생각한거야? 나는 안중에도 없다 이거지? 그 자식이 밉다. 그리고 너 무 쉽게 그 자식에게 가버린 누나도 밉다. 그래 너들 맘대로 다 해라. 나는 무 시 당했다. 기분 나빠 다음 주는 누나 안 본다. 가만, 잠시 다시 생각 해 봐야겠다. 다음 주에 내가 누나를 피해 버린다고 해 서 누나가 아쉬워 할 것 같지도 않다. 누나가 좋아하던 사람이 곁에 나타났는데 내 생각을 하겠냐. 괜히 나만 손해일 것 같다. 잠이 오질 않아 불을 켰다. 그리고 이불 위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일어서 창 을 열었다. 하늘 한 번 쳐다 보았다. 밤 하늘 색깔이 영 맘에 들지 않는다. 율 전 내 자취방에서 보는 하늘은 이 보다 맑고 예쁘다. 그 예쁜 하늘 아래 내 옆에 는 또 예쁜 여자가 살고 있다. 오늘 일을 너무 신경쓰면 그 여자가 어색해 할 수 있다. 그래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 주도 늘 하던 식으로 해야 겠다. 밥도 더
사달라고 조르고 염치 없이 누나 방에도 불쑥 찾아 가는거야. 나가라고 쫓아 내 면 눈물 대신 배째라고 배짱을 부리자. 그래 그러자. 차라리 잘됐다. 더 마음이 가다가 누나에게 사랑 고백까지 하고선 퇴짜 맞는 것 보다 오늘 일을 계기로 해 서 내 마음을 더 잡아 둘 수 있게 되어 오히려 잘됐다. 조금만 물러서 뒷 짐을 쥐어주자. 한 걸음 뒤에서 행복을 빌어 줄 수 있는 멋있는 놈이 되자. 그래도 승주 그 자 식 생각을 하면 열 받는다. 나한테 한마디 양해도 구하지 않고 누나를 가로채 가 버리다니. 언제 집을 알아 놓았다가 밤 길에 혼자 오면 졸라 패버려야지. 누나 가 그 사실을 알면 날 나쁜 놈이라고 욕하며 쳐다도 안 보겠지? 차라리 멋있는 놈이 되자. 아니다, 복면 쓰고 패면 난 줄 모를거다. 졸라 패고 멋있는 놈도 되 자. 뭐야,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거여.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쯔쯧, 웃기다. 하핫, 슬프다. 그리고 찬 바람이 들어 와 춥다. 한 숨 한 번 허공에다 내 뱉고 창 문을 닫았다. 이불위에 다시 쪼그려 앉았다. 눈을 밑으로 깔아 밧데리가 터져 나간 삐삐를 보 았다. 짜식아 아프냐? 삐쳤어? 불쌍해서 치료해 주었다. 완쾌 중인 삐삐를 책상 위에 놓아 두고 다시 불을 껐다. "지이잉!" 으! 뭐야. 꿈쩍 놀랐다. 삐삐가 왜 울리는 거야. 다시 불을 켰다. 지금 새벽 2 시가 넘었다. 그런데 삐삐가 울렸다. 밧데리가 나가 있을 때 왔던 호출을 이제 받은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거 같다. 그냥 전원을 꺼 버렸다. 내 방 의 불도 껐다. 마음에 상처를 좀 받긴 했어도 평상시처럼 누나를 대할 것이라 다 짐을 하고선 잠을 청했다. 연상의 여인. 내 곁에 있는 연상의 여인은 손이 닿는 곳 내 팔 길이 만큼 떨어 져 있는 그리움이지만 팔을 당겨 껴 안을 수 있는 그리움은 아닌가 보다. 잠이 나 자자. 대학로 저녁 무렵의 조명을 받은 어느 무명 가수의 모습이 내 옆에 있는 녀석 을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얼굴이 닮은 건 아니었지만 잔잔한 노랫소리 따라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있던 가수의 얼굴이 철수를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의 노래 가사처럼 사람들 속에서 그는 혼자가 아닌 듯 했습니다. 그리고 나도 혼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감상에 젖어 이런 생각들을 하는가 봅니 다. 내 시선을 받고 있는 철수가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있는 저 가수와 닮았다 고 생각하는 건 그냥 감상에 젖은 내 마음 때문일겁니다. 노래를 듣고 있던 내 옆에 누군가 다가 서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철수 가 그 걸 알려 주었지요. 내 옆에 어색한 모습으로 서 있는 사람은 오랜만에 보는 낯 익은 얼굴이었습니 다. 일 년이나 보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그렇게 낯 설지는 않습니다. 솔직히 반갑 기도 했습니다. 많이 그리워 했던 사람이네요. 승주 그 사람을 우연찮게 만났습니다. 큰 감정의 변화를 불러 일으키진 않았지 만 그의 모습에서 지난 일 년이 궁금했습니다. 잠시 내 옆에 있던 철수의 존재 를 잊었습니다. "철수야 미안한데, 오늘은 먼저 들어가라." 그 말을 남긴 채 나는 철수에게 등을 돌리고 승주에게로 갔습니다. 승주에게 아직 감정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나를 떠난 이유가 듣고 싶 었을 뿐입니다. 그렇게 승주는 잊혀진 존재가 된 상태였고, 난 그의 이름 앞에 누군가 새겨 놓았음을 잠시 잊었습니다. 승주와 나란히 걸어가다 뒤를 돌아 보았 습니다. 어깨가 쳐진 채 지하철 역으로 걸어 가는 철수를 보았습니다. 현재 내 곁에 있어 주는 녀석의 모습이 조금 슬퍼 보였습니다. 내 곁에 있어 줄 것 같은
사람을 떠나 보내고 잠시 나를 찾아 온 옛 사람 따라 갑니다. 잠시만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승주 그 사람은 나를 철수가 소개팅 했던 그 커피숖으로 데려 갔습니다. 걸어 가면서 내내 침묵한 채였고 그와 마주 앉아서도 어색한 웃음만 지었을 뿐이지요. "여기 놀러 왔었니?" "응. 오늘 오후에 여대생과 미팅을 했었어. 주말 오후 여기는 낯선 사람들끼리 의 만남이 많잖아. 나도 그 중 한 사람이었지." 기껏 일년 만에 만나 하는 소리가 저 것인가요? 별로 변하지 않았네요. "나는 콜라 주세요. 니가 사는 거지?" 내 목소리가 내가 듣기에도 좀 차갑습니다. 승주에게 받은 서운함이 작지가 않 거든요. "어? 응. 전 모카 커피요." 내 앞의 승주의 모습이 담담해 보입니다. "일 년동안 뭐 했니?" "그냥 복학하고 평범한 학생 신분이었지. 아까 그 후배하고는 계속 잘 지내나 보네?" "그래." "너 여전히 예쁘구나." "그래. 넌 조금 어른스러워 보인다." "흠. 잘 지냈어?" "잘 지냈지 그럼." "그냥 잊혀 질 줄 알았는데 오늘 이렇게 우연찮게 만나게 되네?" "훗! 내가 너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했을 때는 고개 돌리더니, 그리고 그냥 연락 을 끊어 버릴 때는 언제고 오늘은 왜 모른 척 지나치지 않았니?" "그냥 반가웠기 때문이다." "반가워?" "후회했었어. 연락 끊은 거 후회했어. 난 네가 연락해 줄 거라 믿었거든. 그 연 락을 기다리다 흘러 버린 시간은 내가 너에게 연락할 용기를 꺽어 버리더군." "니가 그런 말도 할 줄 아니?" "오늘은 그냥 반가워서 아는 척 했어." "날 떠난 이유나 좀 알자. 내가 부담스러웠니?" "응." "왜?" "그냥 좋아했으니까." "그게 이유가 돼?" "사귀게 되면 차일 것 같았거든. 사랑에 빠지면 상처 받을 것 같았어." "너 바보니?" "사람을 만나면 느낌을 받게 되어 있어." "내 느낌이 어땠는데?" "넌 나를 많이 헛갈리게 했어. 넌 내게 믿음을 주지 못했거든. 나는 너를 사랑 한다고 생각했는데, 넌 많이도 장난스러웠다." "네 맘대로 판단하지마." "모르겠다. 하지만 난 너에게 서운했던 적이 많아. 그렇지만 또 한 편으로 고마 웠던 적도 많았지. 넌 나보다 높아 보였어." "어려운 말도 하지마." "흠! 너하고 멀어질 마음은 없었어. 그냥 곁에 있고 싶어서 네 고백을 받아 들 이지 않았을 뿐, 니가 날 예전처럼 대해 줄 때까지 조금 떨어져 있겠다고 생각했
을 뿐 다른 이유는 없었어. 근데 이렇게 되어 버렸다." 내가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걸까. 자기들 맘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선 어색 해 진 이유를 내게서 찾는다. "승주 오빠." 나보다 한 살 많으니까 오빠라고 불러줘야 겠지? "응?" "기분 나빠." "그래, 기분 나쁘겠지. 시간이 흐르고 곰곰히 생각해 보니까 내가 생각한 것 보 다 네가 날 좋아했었다는 걸 알겠더라. 그 고백이 괜히 한 것이 아니라는 걸. 후 후, 그래도 너에게 다가갈 자신은 생기지 않더라. 네 생일 날 네가 호출하지 않 았다면 찾아 갔을 거야." 진짜 기분 나쁘네요. 나에겐 괴변으로 밖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말하지 마. 지나간 일이야." 말하지 말랬다고 승주는 한 동안 침묵했습니다. 커피숖 바깥 풍경이 빠르게 지 나갑니다. 한참 만에 승주가 입을 열었습니다. "오늘 같이 있던 후배에게 미안하네. 나도 너하고 있을 때 몇 번 느꼈었지." "뭘?" "나도 녀석이 후배라고 잠시 그 생각을 못했어. 녀석이 네게 좋아하는 마음이 없진 않겠지? 그때도 제법 친하게 보였는데, 일년이 지나고도 계속 같이 있는 걸 보면." "무슨 말이야?" "훗, 넌 오늘 걔를 보내지 말았어야 했어. 우연히 만난 사람 때문에 같이 있던 사람을 보내 버리면 그 사람은 어떤 기분이겠니? 오늘은 같이 만났어야 했어. 나 중에 나를 따로 만나는 한이 있어도 그렇게 보내 버리는 건 아니야. 후배가 나에 게도 너에게도 기분 나빠 했을 거야. 만약 너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상처 받았을지도 몰라. 니가 그 사람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다 면 그렇게 해선 안돼지." 엉? 정말 그렇네요. 어깨가 쳐진 채 돌아 섰던 철수의 모습이 떠 올려 졌습니 다. 내가 지금 옛 그리움이나 잡고 있을 때가 아니네요. 예전에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모습이 조금 가엽습니다. 다시 만나 잠시간의 반가움은 주었지만떨어 져 있었던 일 년이란 시간 속에서 어색하고 평범한 존재로 변해 버린 그는 더 이 상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철수 생각만으로도 그는 완전히 한 쪽으로 치워져 버립니다. 단지 철수 생각? "나 이제 가 볼래." "나에게 연락하지 않을거지?" "응. 그냥 잊을래." "훗,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나 보네? 뭐, 넌 항상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지." "그런식으로 말하지 마. 지금은 아니지만 난 오랫동안 오빠를 가장 좋아했었 어. 그것만 알아 둬. 난 처음 고백에서 퇴짜 맞은거야." 그 말 한마디로 그에게 가졌던 답답함이 조금 풀렸습니다. 승주는 내가 자리에 서 일어 섰지만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쓸쓸한 미소를 지어 준 채 잘가 라는 손짓을 해 주었습니다. 멋있는 척 하기는... 커피 숖을 나와서 빠른 걸음을 걸었습니다. 또 모를 답답함이 옵니다. 쓸쓸한 표정으로 앉아 나를 떠나 보낸 승주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철수 그 녀 석 때문입니다. 내가 그를 가볍게 생각했나요? 절대 그건 아닌데, 오늘 난 생각 없이 철수를 집에 보내 버렸습니다. 승주의 말을 듣고 나니 영 찜찜합니다. 좋아하니까 피했다는 말은 승주보다 철수에게서 먼저 들었습니다. 장난처럼 술 기운으로 말한 것이었지만 철수가 한 번 내 뱉은 적이 있는 말입니다.
승주와 오랜 시간 앉아 있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7 시를 갓 넘겼을 뿐입니다. 철 수를 다시 만나자. 그렇게 생각하고 철수네 집에다 전화를 했지요. "여보시오." 아, 또 아버님이시네요. 그냥 전화를 끊어 버렸습니다. 철수가 아직 집에 들어 가지 않았을까요. 삐삐를 쳤습니다. 나무에 매달린 야윈 나뭇잎이 기분 좋게 부 는 여운 가을 바람에도 불안해 보입니다. 그 밑 벤취에 앉아 철수에게 전화가 오 기를 기다렸습니다. 전화가 오지 않습니다. 그 곳에서 한 시간 동안 나 혼자 앉 아 있었습니다. 초라 하네요. 문득 혼자라고 생각을 하니까 내 자신이 초라하다 고 느껴졌습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은 이호선 삼성역이나 삼호선 압구정 역입니다. 집으로 가려면 다시 버스를 타야 하지요. 그 이유 때문에 택시를 탄 것이 아닙니다. 혹시 지하철을 타면 철수가 전화하는 것을 받지 못할까 봐 택시를 탔습니다. 집에 들어 와 철수에게 호출을 했지만 전화가 오지 않습니다. 내가 왜 계속 철 수에게 호출을 하는지도 의아하지만 이 녀석이 또 전화 한 통 없다는 것이 마음 에 걸립니다. 녀석이 진짜 상처를 받았을까요. 내게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마음 이 있다면... 한 줌 미소를 지어 봅니다. 그리고 울었습니다. 침대에 앉아 창 밖을 보며 울었습니다. 내 가벼운 말을 듣고 돌아 서 가던 철수 의 어깨 쳐진 뒷 모습과 나를 떠나 보내며 쓸쓸히 웃던 승주의 모습이 동시에 떠 올라 울었습니다. 왜 우는지도 모른 채 두 사람 생각이 나 그냥 울었습니다. 울고 나니까 기분이 좀 맑아 지네요. 오늘 승주에게도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에 게 좀 따뜻한 느낌을 주고 떠나 오는건데, 한 동안 그 사람 때문에 아파하고 눈 물 흘린 적이 많은데, 오늘 난 너무 쉽게 그 사람을 떠나 온 것 같습니다. 승주 그 사람 생각을 하다가 또 웃습니다. 내가 집에 가랜다고 아무런 말도 없이 집으로 가 버린 철수 때문에 웃습니다. 어깨가 쳐진 채 돌아 선 철수의 모습이 조금 슬프게 느껴져 웃습니다. 오늘 그 린 철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눈물이 맺힌 미소를 지어 봅니다. 내가 오 늘 왜 이럴까. 작년 다이어리에서 승주 사진을 꺼내 보았습니다. 그리고 또 울었 습니다. 기분 더럽네요. 어머, 내가 철수나 하는 이런 표현을 쓰다니... 이 자식 이 왜 전화를 하지 않는거야. 오늘 사주 본 것을 되 짚어 봅니다. 믿는 것은 아니지만 내 배우자를 내가 이 미 만나 보았다고 했습니다. 누굴까? 철수도 이미 만나 보았다고 했었지요. 그녀 석 상대는 누굴까? 지금 난 승주 사진을 들고 철수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 쒸! 어머, 내가 또 철수나 쓰는 이런 표현을...? 열 번째 호출을 했습니다. 이젠 오기가 생겼습니다. 도저히 못 참겠어요. 새벽 에 몰래 집을 나왔습니다. 엄마 차를 몰래 훔쳐 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곧장 철수 집 앞으로 갔습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냥 철 수에게 이기고 싶었을 뿐이라고 변명해 봅니다. 나는 자기 전화를 기다리다 잠 도 이루지 못했는데 녀석은 잘 자고 있는지. 후후, 녀석이 오늘 나 때문에 상처 받고 불켜진 방에서 잠 못 이루고 있을것이라 생각하며 그 걸 확인하러 갑니 다.녀석은 그래야만 합니다. 자고 있기만 해 봐라. 나 철수방을 직접 들어 가 보진 못했지만 철수 방의 창이 어떤 건지는 알고 있 지요. 철수 네 집은 방 하나를 제외하곤 모두 불이 꺼져 있었습니다. 철수 방의 창은 깜깜하네요. 아무래도 넌닝 차림으로 배를 내 놓고 잘 자고 있는 것 같습니 다. 기분 나쁘네요. 훗, 저런 녀석 때문에 내가 사랑했던 사람에게 매정함을 보이고 떠나 왔다니,
저 녀석 때문에 그리웠던 사람을 이젠 과거의 사람이라고 한 쪽으로 치워 버렸다 니... 연인 사이도 아닌데 이런 생각하는게 좀 우습긴 하지만, 야이 박철수! 내 가 네 생각하는 것 반 만큼만이도 내 생각을 해 봐라, 내 당장 달려가 서방님 그 런다 씨. 취소! 철수의 방에 불이 켜졌습니다. 그리고 철수가 창 밖을 쳐다 보는 모습이 보였습 니다. 아직 자지 않았군요. 하늘에 무슨 그리움이라도 박혔는지 고개를 들어 하 늘을 보고 있습니다. 저 모습을 보니까 오늘 내가 녀석을 생각없이 매정하게 돌 려 보냈던 게 마음 아픕니다. 저렇게 깨여 있었으면서 전화를 하지 않았다는 건 마음에 상처를 입었기 때문인가 봅니다.사랑하는 마음이 조금만이라도 있다 면... 녀석은 승주를 닮은 구석이 많습니다. 감싸 주고 싶네요. 날 사랑하냐고 물어 보고 싶습니다. 만약 사랑한다고 대답을 한다면 오늘 내 마음은 키스라도 해 주고 싶습니다. 삐삐를 쳤습니다. 깨어 있으니까 전화를 할 것 같습니다. 불 러 내서 물어 봐야지요. 울린다. 울린다... 핸드폰을 보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러나 끝내 울리지 않았습 니다. 고개를 들어 창을 보니 철수 방의 불이 꺼져 있네요. 조금 아쉽습니다. 그 냥 돌아 가야 겠네요. 다음을 기약하지요. 승주 덕에 철수 마음을 조금 헤아려 본 것 같네요. 잘 자라. 29. 29 회 하룻 동안의 고민으로 내 여러 마음들이 바뀔리는 없습니다. 승주는 잊었다 생각 했고, 철수에게는 마음이 가고 있다 느꼈습니다. 그 사실이 갑자기 싫었습니다. 집에 돌아 와 갑자기 나 자신이 씩씩 거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잠들기 전 생각해 보았지요.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 생각을 많이 하지 말고 자연스러워 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나이를 먹기 때문일까요. 잊혀지고 있던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났다는 게 기분 나빴습니다. 요즘은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 나쁘지 않았어요. 어제 철수와의 데이트도 승주를 만나지 않았다면 고운 미소를 가지고 집에 돌아 와 많은 생각없이 잠 자리에 들었을 겁니다. 어제 철수에게 미안했지 요. 그렇지만 내가 철수의 집 앞에까지 갔다 온 것은 기분 나빴습니다. 갑자기 틀어 졌습니다. 승주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승주는 생각나지 말았어야 하지 않나 요. 자꾸 생각이 납니다. 승주가 생각이 날 수록 철수에게 미안한 감정이 생깁니 다.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자기 생각으로 나를 어색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 승주 가 생각에서 지워지지 않는 게 기분 나쁩니다. 집에 가란다고 불평 한 마디 없 이 등을 돌린 철수가 또 싫어 집니다. 지워져야 할 놈은 다시 생각이 나고, 마음으로 들어 오던 놈에겐 미안해 지 고... 이것들이 진짜... 늦게 잠든 탓에 늦은 아침에 일어 났습니다. 승주에게 삐삐를 쳤습니다. 잊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 섰지만 할 말이 있어 삐 삐를 쳤습니다. 그리고 철수집에 전화를 했습니다. "또 그 처잔가?" "네." "잠깐 기둘려 봐." 철수야 나이 많은 여자한테 또 전화왔다. 그래 저 소리 언제까지 하나 두고 보 자. "여보세요?" "너 철수지?"
"응." "너 어제 기분 나빴지?" "뭘요?" "내가 승주 만나 너는 집에 가라고 했던 거." "기분 좋지는 않았어요." "삐삐 쳤는데 왜 연락하지 않았어?" "내 맘이요." "나 승주 다시 만날거야. 그점에 대해 넌 어떻게 생각 해?" "만나던지 말던지." "야!" "왜요?" "너도 다 같이 나쁜 놈이야." "에?" "전화 끊어." 그냥 기분따라 철수에게 화풀이를 했지요. 전화를 끊고 나니 승주에게서 전화 가 왔습니다. 내 생일 날 그렇게 삐삐를 쳤을 때는 연락이 없더니, 어제 한 번 만났다고 그도 그리움이 일었나 보지요. "어떻게 전화를 했네?" "무슨 일이야?" "나 좋아 했었다고 했지?" "흠, 그래." "웃지마. 그렇게 웃으면 멋있을 거라 생각하나 보지?" "응?" "야이 바보야. 나 연하 사귀기로 했어. 고백하고 잊혀지는 것 보다 붙잡아 둘 수 있도록 만들겠어." "무슨 말이야?" "너 내 앞에 다시 나타나지마!." 아침 바람이 쓸쓸하게 부네요. 어제의 일이내 생활에 변화를 줄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오늘 아침 바람은 어제 보다 많이 차겁습니다. 거실 창 밖으로 이름 모를 낙엽은 인연을 찾아 바람 속을 뛰어 갑니다. 새벽에 철수네 집 앞으 로 갔을 때까지 내 마음은 이러지 않았습니다. 아침 기온이 뚝 떨어진 것처럼 오 늘 집에 돌아 와 나도 모르게 기분이 나빴습니다. 오늘 아침은 그 분풀이를 했습 니다. 낙엽은 어딘가에 제 쉴 곳을 찾아 내려 앉겠지요. 나도 내려 앉고 싶어 집니 다. 내려 앉으려다 잠시 바람을 맞아 오늘 아침은 차거웠습니다. 내게 전화 해 준 승주에게 내가 했던 말이 웃깁니다. 아침에 나 혼자 이상한 짓 한 것 같네요. 철수에게 삐삐를 쳤습니다. 어제 승주 때문에 돌아 선 그가 마 음에 상처를 받은 거 같았습니다. 오늘 아침 내가 한 말엔 더 상처를 받았겠지 요. 녀석의 말투는 퉁명스럽지만 지난 시간 때문에 거기 묻어 있는 감정들을 조 금은 느낄 수 있습니다. 다시 삐삐를 쳤습니다. 전화가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 오지 마라. 그게 너다운 모습이다. 근데 전화가 왔습니다. "누나 화 났어요?" "왜?"" "내가 전화 하지 않았다고 화났던 거에요?" "화 났으면?" "화 풀어요. 그리고 승주 형 만난 거 저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신경쓰지 마세 요." "그걸 니가 왜 신경을 써?"
"어제 삐삐친 게 승주형과 누나 사이에 낀 내가 괜히 신경 쓰여서 그랬던 게 아 닌가 해서." "아까 했던 말 너무 신경 쓰지 마." "노력하지요 뭐." 녀석의 말투가 상당히 조심스럽습니다. 아침 바람이 차웁다. 누나가 전화를 해서 새벽에 했던 내 다짐을 여지없이 뭉 개 버렸다. 내가 왜 나쁜 놈 소리를 들어야 하나.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내 방 창 아래로 쌈쟁이 할머니가 지나간다.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 한 참 동안 쌈쟁 이 할머니가 동네를 돌아 다니는 모습을 내려다 봤다. 누나에게 삐삐와 왔다. 잘 됐다. 아까 했던 말 따져야 겠다. 근데 왜 이러냐, 누나의 목소리가 차갑다. 그리고 누나에게 자신이 없다. "오늘 한 번 볼래?" "됐어요." 갑자기 머뭇거림이 생겼다. 시월도 며칠 남지 않았다. 학교 갔다가 내 방으로 돌아 오는 길에 누나 방 현관 문을 쌔게 걷어 찼다. 누나는 도서관에 있을 것이다. 누나가 승주씨를 다시 만나던 내가 무슨 상관이 냐. 조금 떨어져 있어야 겠다. 철수는 도서관을 찾지 않았다. 은정이는 빈자리가 많은 도서관 한 구석에서 옆 좌석에 가방을 올려 놓고 홀로 공부 했다. 은정인 사흘 동안 핸드폰만 만지작 거렸을 뿐 철수에게 연락을 취하지는 않았 다. 같은 건물에 살면서 둘은 잘도 피해 다녔다. 늦은 밤 도서관에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 오던 은정이가 자기 방을 지나쳐 철수 방 앞으로 갔다. 그리고 씩씩 거리다가 현관문을 쌔게 걷어 찼다. "누구야?" "나다 짜식아." 현관문을 열고 나온 철수는 조금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누나도 그런 말 할 줄 아네요?" "나도 잘 해. 너한테 배웠잖아." "발 아프지 않아요?" "아프다." "밤이 늦었어요. 가서 자요." "씨, 너 내 생일 그냥 지나치면 죽을 줄 알어." "누나 왜 그래요?" "뭘? 넌 왜 그러는데?" "내가 뭘요." "잘 자라." 다음 날 아침 일찍 철수는 방을 나왔다. 그리고 은정이 방을 지나치다 문을 쾅 하고 찼다. 그리고 쌔가 빠지게 달아 났다. 은정이가 문을 열고 나왔을 때 철수 는 벌써 옥수수 밭을 지나치고 있었다. "이씨!" 은정이는 전철 안 많은 사람들에게 콩나물처럼 끼여서 짜증 섞인 말을 뱉어 내 야 했다. 그 사람들 많은 전철 안에서 은정이는 핸드폰을 꺼내었다. 그리고 철
수에게 삐삐를 쳐 음성을 남겼다. "야이, 나쁜놈아." "너 칠 차례야." "잠깐 기다려. 음성만 확인하고... 뭐야?" 철수는 은정이의 격려를 받고 150 을 놓고도 200 인 동엽이를 이길 수 있었다. "내가 왜 나쁜 놈이여!" "짜식이 이겨 놓고 뭐라 그러는 거야?" 철수는 일요일 새벽 세 시에 은정이에게 전화를 했다. 잠에서 금방 깬 듯한 은 정이의 목소리르 듣고서 철수는 짧은 말 한마디만 남기고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내가 왜 나쁜 놈인데? 우쒸." 수화기를 내려 놓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철수의 삐삐가 사정없이 울렸다. 은정이 핸드폰 전화 번호와 함께 18181818 이 남겨져 있었다. 철수는 자연스럽게 삐삐 밧데리를 빼 버렸다. 그 새벽에 철수네 집 전화 벨이 여러번 울렸다. 안 방에서 아버지가 받았는지 전화 벨 소리가 끊겼다. 그리고 다시 울렸다. 삐리리리! "누구야 너? 잠 좀 자 자." 아버지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철수 방까지 들렸다. "강적이다!" "새벽에 우리집에 전화 한 거 누나죠?" 철수는 일요일 오전 집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은정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 나다." "어린애처럼 왜 그래요?" "니가 먼저 전화 했잖아." "나한테 화난 거 있어요?" "너 요즘들어 왜 날 피하는데?" "누나 승주씨 다시 만날거라며?" "그거 하고 니가 날 피하는 거 하고 무슨 상관이야?" "내가 있으면 신경 쓰일 거 아냐." "왜?" "나도 남자에요." "훗! 집에 가랜다고 그냥 가 버리구. 옛 사람 다시 만난다고 자리 피해주고, 그 게 남자냐?" "누나!" "뭐?" "나를 너무 어린애 취급 말아요. 꼭 내가 누나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네요?" "그럼 아니야?" "착각하지 마요. 난 연상엔 관심 없어요." "그래, 내가 연상이지. 그래도 너랑 나랑은 친군데 그깟 일로 삐쳐서 잘 나오 던 도서관도 안 나오냐?" "누나가 삐치게 만들었잖아. 승주를 다시 만나면 만나는 거지, 그걸 꼭 나한테 알려야 돼요?" "그것 때문에 삐쳤어? 나도 너에게 삐쳤어. 그 말 듣고 왜 갑자기 조심스러워 진거야?" "허, 예전에 만났던 남자들이 갑자기 어색해져 싫었다고 했죠? 그 사람들이 조 심스러워 지면 어색해 지고 그러던가요? 누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랬어요? 그러 니까 어색해 하지. 승주형 한테도 그랬을 거 같애."
"야,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말랬지?" "누나가 감정이 있듯 상대방도 감정이 있는 거에요. 자기는 아무렇지도 않은 데, 상대방은 자기 맘대로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생각하죠? 그런게 어딨냐?" "그 사람들하고 너하고는 달라." "나는 늘 누나에게 한결같아야 되는 거에요? 내가 누나를 좋아하게 된 것은 누 나가 날 그렇게 만든거야. 그 마음 때문에 집에 가랜다고 갔고, 승주씨 만난다 고 자리 피해 줬다. 그게 기분 나빠서 누나 피한거다. 됐어요?" "너 날 좋아하는구나." "그럼 좋아하니까 만나는 거지." "날 여자로 생각하고 좋아한거야?" "아,아니. 그 말이 아니고 누나로서 좋아한거지만 그래도 좀 서운했다 이거지. 우쒸!" "왜 또 우쒸야?" "열 받아서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했잖아요." "내일 학교에서 봐. 도서관 자리 잡아 놓을 테니까 도서관 나와." "싫어요." "싫긴 뭐가 싫어. 나 승주 안만나니까 도서관 나와." "승주 얘기가 거기서 왜 나와?" "내 맘이다. 너 승주씨 다시 만난다고 했던 것 때문에 삐쳤다며?" "내가 언제 그랬어?" "그랬어 씨." "진짜 안 만나요?" "너 자꾸 헛갈리게 할래?" "알았어요. 내일은 도서관 나가 보리다." 철수는 전화를 끊고 배시시 웃었다. 30. 30 회 한 주의 시작은 지하철에서부터 시작된다. 삼호선에선 그렇게 비좁진 않았으나 2 호선에선 장난이 아니었다. 아무리 예쁜 아가씨라도 지하철 내 사람들 틈에 끼이 면 보잘것 없는 존재로 변해 버린다. 내 주위에도 그런 여자분들이 많이 보였 다. 저렇게 꾸밀려면 바쁜 아침에 시간을 제법 투자했을 터인데, 여지없이 뭉개 지고 있다. 엉? 참 우연이다. 창에 손을 짚었다가 저쪽 끝 문 앞에 상을 찌푸리고 있는 낯 익은 여인을 보았다. 그 여인도 창을 짚고 사람들이 밀릴 때마다 표정이 안스럽 게 변한다. 나 도서관 자리 잡아 주겠다더니, 이제서야 학교를 가나 보다. 누나 하고 같은 전철을 타게 되다니 기분이 괜찮다. 누나 등 뒷 쪽에 서 있는 남자들 때문에 누나가 불안해 보였다. 으쒸, 아침 밥 먹은 힘을 사람들 파 헤치고 지나 가는 데 모두 소비했다. 한 구역이 지나치는 시간 동안 나는 한 오미터 정도를 전진해 누나 있는 곳 까지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누나 뒤에 섰다. 어제 먹은 밥 심으로 뒤에 붙어 있던 사람들을 밀치고 조금 여유로운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누나의 머리결 냄새가 좋다. 머리는 감고 다니다 보다. 꽃 냄새 샴푸 향기가 좋 다. 누나가 주위의 공간이 갑자기 편히 서 있을 정도가 되자 이상한 듯 뒤를 돌 아 보았다. 나는 아주 힘을 쓰고 있기 때문에 죽을 상이겠지? 밀리지 않을려고 졸라 힘 쓰고 있다. "어? 너." "헤, 우쒸 밀지 좀 말아요? 누나 안녕." "교대서 탄거야?"
"예." "우연이네?" "그렇네요." 나 지금 말할 힘 없다. 침묵했다. 같은 전철을 탄 것은 우연이지만 내가 누나 에게로 온 것은 많은 노력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우연을 인연으로 만드는 내 노 력이 가상하지 않나요? 누나가 미소 짓는다. 그렇지만 날 보고 짓는 미소는 아닌 것 같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그래 누나를 보호하려는 그 정신 고맙게 생각하마. 이왕 힘 쓰는 거 자리 생길 때까지 계속 힘을 써. 지하철이 비좁을 것 같으면 항 상 널 데리고 다녀야겠다. 조그만한게 제법 힘이 있나 봐?" 나 평균 키보다 크다. 결코 조그만 놈이 아니다. 지금 힘을 빼면 누나에게 밀착 이 될 것이고 날 믿고 무사태평으로 힘 들이지 않고 서 있는 누나는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로 픽 꼬꾸라 지겠지? 함 해볼까? 말자. 두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모 진 힘을 쓰고 있는 내 엉덩이에 여러 가지 물건들의 감촉이 지나갔다. 각진 핸드 백, 아프다. 이건 여자 손? 고개를 돌려 보니 이상한 변태 같은 자식이 웃고 있 다. 이건 남자 엉덩이야 새꺄, 험한 인상으로 답례해 주었다. 엉덩이를 흔들어 보았다. 이건 뭘까? 둥글고 따뜻하다. 또 고개를 돌려 눈으로 확인해 보았다. 어 느 여고생 손에 들려 진 보온 도시락이 내 엉덩이에 밀착이 되어 있었다. 벌써부 터 보온 도시락이 등장했나? 밥 맛 좋게 방귀나 한 방 뀌어 줘야 겠다. 약간 인 상을 찌푸리는 내 주위의 사람들. 내는 모른다. 진짜 너무한다. 내가 이렇게 고생하며 자기가 서 있을 공간을 확보해 주었음 뭔 가 답례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누나는 자리가 생기자 마자 자기만 홀로 가 앉 아 버렸다. "편해요?" "응. 넌 계속 서 있어." 사당을 지나니까 서 있기가 한 결 수월해 졌다. 그리고 내리려는 사람들 틈으 로 자리가 하나 생겼다. 사람들 타기 전에 거기로 가면 앉을 수 있다. 빈 자리 로 갈 수 없었다. 누나가 내 옷자락을 꽉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놔요." "그냥 여기 서 있어. 나 심심하단 말이야." 자기 때문에 힘 다 빼 버린 나는 심심풀이 땅콩이 되어 자리가 생겨도 그 사람 옆이 아니어서 앉을 수 없었다. "누나는 어디서 탔어요?" "삼성역. 너 가방 이리 줘." "괜찮아요. 책 한 권 들었는데요 뭐." "기분 풀렸어?" "내가 언제 기분 나빴었나요?" "흠. 오늘은 도서관 올거지?" "그럴게요." 신도림에서 열차를 갈아 탔다. 재수 좋게 빈자리가 하나 있었다. 달려 가 앉으 려는 순간 누나의 새침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마워." 우쒸, 내가 앉을 자리란 말이여. 결국 나는 학교까지 서서 갈 수 밖에 없었다. 누나는 학교로 바로 갔고, 나는 수업에 필요한 책을 챙기러 자취방을 들렀다. 심 심한데 문이나 한 번 차고 가야겠다. "쾅!" 듣기 좋다. 종종 누나 방을 지나칠 때마다 현관문에 발길질을 해 보자.
수업이 끝나고 누나가 숫자로 남겨 준 도서관 열람실을 찾아 갔다. 지도 자면 서 나만 맨날 잔다고 구박했단 말이지? 모질지 못한 삶 속에서 잊겠다 말하는 것은 차마 잊을 자신이 없어 하는 말입니 다. 별 시덥지 않은 소리 써 놓고 있네. 누나의 연습장 한 쪽에는 몇 자 글이 적혀 있었다. 저건 내가 잘하는 짓인 데... 옆 자리 누나의 가방을 치우고 앉았다. 시험 기간도 아니고, 공부할 것도 뭔지 모르겠다. 오늘 강의 노트한 것들을 꺼내 훑어 보다가 누나가 하도 일어 나 지 않기에 누나 연습장을 빼어 왔다. 답을 달았다. 멋있다. 모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기억되는 사람을 받아 들이는 순간부터 사람은 모질지 못합니다. 근데 누굴 못 잊겠단 거야? 승주씨하고 다시 만날려고 이러나? 누나의 엎드린 모습을 곁눈질 해 보았다. 승주 그 새끼는 안돼, 내가 그 새끼는 방해 할거야. 밤에 누나하고 자취방으로 돌아 오는 길에 팔짱을 끼고 왔다. 누나가 쌩긋 웃 고 있다. "누나." "왜?" "승주형하고 만났을 때 기분이 어땠어요?" "그걸 왜 묻는데?" "말해 봐요." "질투하니?" "진지하게 묻는 겁니다." "그냥 처음엔 무덤덤했다가 헤어지고 나니까 생각이 또 나더라?" 잊기 힘들겠군. 내가 그 느낌 좀 알지. 내가 정희 누나를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렇게 보고 싶었던 사람이지만 막상 만나고 나니까 무덤덤했었다. 그렇지 만 누나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 와 만난 반가움과 참아 왔던 그리움으로 밤 새 누 나 생각만 했던 적이 있다. 또 기분 나쁘다 씨. "아까 연습장에 써 놓았던 거 승주 형 생각하고 쓴 거야?" "엉? 그거 봤니? 나도 너 따라 해 봤어. 대상이 누군지는 잘 모르겠다. 꼭 승주 를 생각하고 쓴 건 아니야. 너 지금 질투하는 거 맞지?" "저 진지하게 말하는 거라고 했잖아요." "그렇게 말하니까 더 장난같아 임마." "누나도 자기가 별로 모질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응. 그런 거 같애." "그럼 모진 척 하지마요. 모질지 못한 사람이 모진 척 하면 안스러워요. 더 초 라해 보이구요." "후훗, 그런 말을 왜 하는데?" "진지한 척 하려고." "참 내. 사람이 아무리 장난스러워도 그 내면엔 모두 심각한 고민들과 진지함 이 있는 거 알아. 진지한 척 안해도 돼." "알았어요. 우리 아버지가 누나 한번 데리고 오래요. 우리 아버지 새벽에 잠에 서 깨는 것 무지 싫어 하신다고 했죠? 다 일러 줬어요." "엉? 뭐야?" "장난이야 장난." "너 말하지마? 참, 그리고 다음주 화요일이 내 생일인거 알지?" "그래요?" "너 작년에 나 잠옷 사주었잖아. 겨울에 입기는 좀 가벼워. 겨울에 입을 만한
걸로 예쁜 거 하나 사와." "선물은 주는 사람 마음이지." "그건 평민들이나 하는거구." "진짜 자기가 공주라고 생각해요?" "응." "다음에 성공해서 돈 벌면 성하나 지어 줄게요. 거기서 천년 만년 잠이나 자 요. 도서관에서 자지 말고." "야, 도서관에서 잠시라도 졸지 않는 사람이 어딨냐?" "일곱 난장이 소개시켜 줄까요?" "가게에 가서 사과나 사가지고 가자." "아줌마 독이 든 사과는 없어요?" "야?" "공주라며?" 누나 방에서 과일 깎아 먹고 자취방 생활을 시작했다. 겨울 잠옷은 얼마나 할려 나? 가을 잠옷 보다는 비싸겠지? 근데 잠옷도 계절따라 입나? 나는 추리닝 하나 면 사계절 다 해결되는데... 후후, 철수와 다시 도서관을 다니게 되었어요. 홀로 도서관 열람석에 앉아 있다 가 하얀 연습장에 쓴 메모는 아마 시인들이 즐겨 썼던 말일거에요. 내가 승주에게 했던 말 때문에 썼지만 꼭 승주를 생각하고 쓴 건 아닙니다. 내 가 만났던 사람들을 난 잊혀지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채 잊어 버렸습니다. 그렇지 만 막상 생각 나는 사람들은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았어요. 나는 제법 모질 다 생각했는데, 가만히 되짚어 보니 그렇지도 못한 거 같습니다. 오늘 아침에 지 하철에서 철수가 보여준 고마움에 미소가 맺힙니다. 녀석을 잊어야 된다고 생각 하는 시간이 오면 나는 울 것 같습니다. 지금 까지 그와 보낸 시간만으로도 철수 는 남 같지 않습니다. 친동생이었다면? 친동생 하기는 싫어요. 순백의 연습장 위에 한 줄로 써 놓은 그 글 밑으로 꿈을 꾸어 봅니다. 하얀 웨 딩 드레스... 철수의 손을 잡고 서 있는 내가 모르는 여인. 철수의 손을 잡고 서 있는 여인은 나보다 훨씬 예쁠 것 같습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그 냥 미소 한번 짓고 연습장에 검은 볼펜 자국들을 휘갈겨 메꿔 갑니다. 철수야 놀자. 공식들로 휘갈기던 연습장에 갑자기 이상한 말을 썼지요. 그래 철 수에겐 이말이 어울립니다. 위에 쓴 말은 승주에게 내가 했던 말이 웃겨서 써 본 말인거 같습니다. 또 한 동안 철수와는 이 처럼 지내겠지요? 내 방에 들어 온 철수가 빨간 사과를 들고 나를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짓습니다. "이거 한 입 베고 쓰러져 봐요." "니가 깎을래?" "공주 아니네. 공주면 공주가 했던 일은 다 한다 말이야." "백설 공주 안해. 착한 거 빼고 별 볼일 없는 그런 공주는 하기 싫어.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백설공주, 또 뭐 있니?" "인어 공주." "그래 걔들이 예쁘고 착한 거 믿고 남자 잘 만나서 공주 된거지. 걔들이 잘난 거 뭐 있어?" "그럼?" "차라리 명성황후 할래." "칼 조봐요." "왜?"
"내가 일본 사무라이 할테니까. 누나는 의연한 자세로" "나는 한 나라의 황후다. 니깐 이름없는 칼잡이가 함부로 할 수 있는 그런 사람 이 아니다. 이렇게 말이지?" "진짜 강적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나한테 잘 해." 사과가 맛있네요. 독은 안 들었나 봐요. 철수가 칼을 들고 있는 바람에 빨간 사 과를 그냥 한 입 베어 먹었습니다. 철수가 나를 빤히 쳐다 보네요. 나 예쁘지? 녀석과 나는 이런 식으로 또 몇 일을 보내겠지요. 철수와 나를 그린 그림은 내 방 어딘가에 잘 보관해 두었습니다. 어딘지는 비밀 이지요. 철수가 다음 날 잠시 자기방으로 와 보라고 해서 갔더니 컴퓨터를 떡 켜 주더군 요. 신기했습니다. "야, 내가 어떻게 저기 있니?" "스켄했어요. 멋있지?" "스캔이라니? 그림을 컴퓨터에다 입력 시킨거야?" "그런게 있어요. 스켄해 놓으니까 제법 볼 만하지요?" "신기하다. 나 유명인인가봐. 컴퓨터에도 뜰 줄이야." 철수가 약간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 봅니다. 알아, 스캔. 그 복사하는 것하고 비슷한거지? 후후, 녀석이 날 좋아하는 것은 맞는데, 어떤 마음을 품고 좋아하는지 아직은 헛갈립니다. 내 생일 때 한 번 확인을 해 봐야 겠습니다. 31. 31 회 연하 4 금요일 날 철수와 함께 수원으로 가서 버스를 타고 서울로 왔어요. 내 옆에 앉 아 있는 철수가 제법 믿음직 하네요. 제법 늦은 밤에 서울에 도착했는데 녀석이 나를 집까지 배웅해 주었지요. 잘 키운 연하 하나 열 연상 안 부럽다? 이렇게 한 번 만들어 볼까요? 나를 집 앞까지 배웅해 주는데 팔짱 정돈 껴 주어야 겠지 요. 연인 같은 모습으로 집이 가까워 오는 골목을 걸었습니다. 빌라에 심어 놓 은 나무들에서 보기 좋은 낙엽이 내립니다. "올 겨울은 눈이 자주 왔음 좋겠다." "왜?" "내가 여자 친구하고 눈 오는 마로니에 거리를 팔짱 끼고 걷는 게 꿈이잖습니 까. 목도리 같은 마후라를 차운 바람에 휘날리면서 말이지요." "그래서?" "눈 오면 마로니에 거릴 한 번 걷자구요." "난 네 여자친구가 아닌데?" "누나는 뭐? 내가 좀 봐주지." "허허? 뭘 봐줘? 그냥 솔직하게 눈 오는 거리를 나하고 팔짱 끼고 거닐고 싶다 그래라." "그럴까?" "내가 선심 써 줄게. 그래 뭐 눈 오면 잘 생긴 철수하고 마로니에 거릴 팔짱 낀 채 한 번 걸어주지. 아니다 지금 날을 잡자. 올 해 첫 눈 오는 날, 그 날 마 로니에 거릴 나하고 걷는거야. 괜찮지?"
"응. 하하, 음 내가 잘 생긴 건 사실이니까 잘 생겼단 말은 해 주지 않아도 되 구요. 근데 첫 눈이 누나 시험 보는 날 같은 바쁜 때에 오면 어떡해요?" "후후. 저녁에 시험 보진 않잖아. 정 바쁜 날이라 서울 가기 힘들면 학교를 거 닐지 뭐. 학교에 쌓이는 눈이 대학로에 쌓이는 눈 보다 깨끗할거야." "그래 그러지 뭐. 자, 이제 들어 가요." "데려다 줘서 고마워." "뭘요." 손 한번 흔들어 주고 웃으며 돌아가는 철수가 사랑스럽네요. 미소 지은 채 내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책장 밑에서 양면으로 코팅해 놓 은 그림을 꺼내 보았지요. 한 쪽엔 내 얼굴, 다른 한 쪽엔 철수 얼굴입니다. 이 렇게 코팅 해 놓으니까 서로 붙어 있어 좋긴 한데 마주 보진 못하네요. 그래도 뭐 그릴 때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요. 자정 무렵에 헨드폰이 울렸습니다. 이 시간에 전화 할 놈이 철수 밖에 더 있겠 어요.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습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헨드폰이라 수신이 잘 안돼나? 전화 건 사람의 목소리가 한 동안 들리지 않았습 니다. "누구야? 철수니?" "나, 승주야." 응? 밝았던 내 기분이 가라앉습니다. 하지만 전화를 끊진 못했습니다. 그냥 끊 어 버리고도 싶었는데 승주가 왜 전화 했는지 궁금했습니다. 단지 그 이유로 계 속 핸드폰을 들고 있었습니다. "왜 전화 한거야?" "곧 네 생일이잖아. 작년에 너무 미안해서." "흠, 내 생일 챙겨 주지 않아도 되니까 이젠 전화 하지마." "그냥 네 생각이 나서 전화 해 봤어. 잊혀 지는 듯 했는데 요즘은 네 생각이 많 이 난다." "헛, 소극적이던 애가 왠일이니?" "좋아했었다고 했잖아. 곁에 있을 땐 모르다가 헤어지면 그립다더니 그 말이 맞 는 거 같다." "그런 말 필요없어. 다른 할 말 없으면 전화 끊어." "그럴게. 참, 네 생일 날 뭐 받고 싶니?" "지금 와서 괜히 이러지 마." "작년에도 네 생일 선물 준비 했었어. 작년엔 다가갈 용기가 서지 않더라." "훗! 삐삐에 답변 전화만 하면 됐었는데? 그것도 못했으면서 올해는 어떻게 전 화를 다했어?" "시간이 흘렀잖아. 일 년은 내 마음을 되 짚어 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필요 없어." "그냥 뭐 받고 싶은지만 말해 줘. 받지 않아도 돼." "내 앞에 나타나지 마." "후, 뭐 받고 싶냐니까?" 승주가 제법 언성을 높였습니다. 그 같지 않네요. "지금 네 행동이 너 같지 않은 거 알아?" "그러니까 받고 싶은 것만 말 해." "빨간 장미. 내 나이에서 열을 곱한 수 만큼. 거기다가 내 생일 달수 만큼의 노 란 장미. 또 내 생일 날 수 만큼의 분홍 장미. " "그것 뿐이야?" "그거 제법 많은거다?"
"알았어." 승주가 전화를 했네요. 항상 소극적인 애가 올 해는 왠일일까? 잊자니 미련이 남았을까요? 아니면 그가 지금 외로운가요. 승주가 내 마음을 또 심난하게 만드 네요. 왜 전화 한거야? 내가 생각없이 뱉은 장미의 수가 생각해 보니 265 송이네 요. 들기도 힘들겠다. 그런대도 그는 그것 뿐이야,라고 말했습니다. 진짜 그 수 의 장미를 들고 내 앞에 나타날 것도 같습니다. 생각 못한 승주의 전화를 받고 그냥 철수 목소리가 듣고 싶었습니다. 삐삐를 쳤 더니 금방 전화가 오네요. "왜요?" "너 내 생일 기억하고 있지?" "응." "장미 266 송이 사 줄수 있어?" "잠 옷 사달라며?" "그것하고 따로 장미 266 송이 사 줄수 있냐고?" "진짜 공주해라." "후후, 그래 잠 옷만 사줘." 녀석에게 혹시 모를까봐 승주에게 부탁한 것보다 한 송이 더 많은 266 송이의 장 미를 요구해 봤지요. 공주 해라? 니가 그렇지 뭐. 승주가 만약 내 생일 선물을 가지고 내 앞에 나타난다면 난 흔들릴 것입니다. 분명히... 난 승주에게 모질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 여자가 진짜, 집에 잘 들어 가는 것을 봤는데 밤에 뭘 잘 못 먹었나? 야밤 에 삐삐쳐서 장미 266 송이를 사달라고? 266 송이면 몇 그루의 장미나무에서 꽃을 싹쓸이 해야 되는겨? 어린 왕자는 자기 별의 한송이 장미가 정원에 이름없이 핀 수백 송이의 장미보다 소중하다고 했는데. 그 많은 장미를 어따 쓸려고 그럴까? 근데 하필이면 이상한 숫자 266 송이여? 뭔가 의미가 있는 숫자인가? 토요일날 용기를 내어 아버지 앞으로 갔다. "다음 달 용돈 좀 가불해 주십시오." "뭐 하려고?" "방학 때 한약방에서 잔신부름 할 테니까 20 만원만 빌려주십시오." 작년에 잠 옷을 사 봤기 때문에 대충 겨울 잠 옷 가격을 예상할 수 있었다. "간판 못 봤냐? 한의원이다." "그럼 한의원에서 잔신부름 할테니까 20 만원만 빌려 주세요." "어따 쓸려고?" "나쁜 데 쓰지는 않습니다." "혹시 그 나이 많은 여자 때문이냐?" "에?" "돈은 빌려 주겠는데 나이 많은 여자에게 너무 정 주지 마라." "예." 혼자 들어가기 졸라 쪽팔렸지만 경험 해본 바 있다. 여성 언더웨이 전문점. 잠 옷도 언더웨인가? 누나 잠 옷 입은 모습을 많이 봤는디... 좀 더 밝은 하늘색으로 투피스 잠옷 하나를 샀다. 저 번보다 세련되고 성숙해 보이는 잠 옷이다. 가격이 좀 비쌌다. 용돈 가불한 것에서 꼴랑 2 만 5 천원 남았 다. 이미 각오 했던 일 초연하게 받아 들이자. 기분 좋게 거리를 걸었다. 그러다 꽃 집에 눈길이 갔다. 꽃 집 앞 철제 통에 보 기 좋게 꼿혀 있는 장미들이 눈에 들어와 버렸다. 266 송이.
"아가씨 요즘 장미 한 송이 얼마해요?" "품종에 따라 조금 다른데?" "저기 꼿혀 있는 장미들은 한 송이 얼마에요?" "요즘은 겨울이 가까워 좀 비싸요. 한 송이에 700 원씩이에요." "에? 266 송이면 얼마에요?" "에?" 아가씨야 같이 놀라면 안돼지. "계산 되요?" "잠깐만요. 186200 원이네요." 아가씨가 계산기를 두들기더니 답을 해 주었다. "아, 그래요?" "사시게요? 근데 지금 있는 장미가 그 정도가 되는지 잘 모르겠어요." "아네요. 됐어요." 물어 보고 그냥 나오기가 좀 그랬다. "저기 아가씨? 화분에 장미를 키울 수 있어요?" "그럼요. 화분에 장미 나무 심어 놓은 거 팔아요." "조그맣겠네요?" "그래도 두 세송이 피어요. 얼마나 예쁜데요." "그건 얼만데요?" "2 만원이요." "오? 그래요?" 장미 한 송이 열리지 않은 장미나무 화분을 하나 샀다. 한 손엔 장미 화분을 들고 다른 한 손에 여자 잠옷이 든 종이 가방을 들고 집으 로 돌아 왔다. 가족들 중 한 사람이라도 날 본다면 오늘 나 집에서 좋은 소리 못 들을 것 같아 숨어 들어 갔다. 흐흐, 화분은 꽃이 필 때 누나에게 선물 해야 겠다. 그때까지 죽지 말아야 할텐데... 누나의 잠 옷이 든 종이 가방을 고이 감싸서 율전으로 갔다. 그리고 아버지가 술 모아 놓은 곳에서 또 한 병 훔쳤다. 저 번 보다는 비싸 보이지 않았다. 와인 이 비싸면 월매나 비쌀겨?월요일 아침은 특히나 지하철 내에 사람들이 많다. 종이 가방이 구겨지지 않도록 애 많이도 썼다. 술병은 예전처럼 가슴에 꼭 껴안 고 갔다. 와인은 냉장고가 없는 관계로 창 밖에 올려 놓았다. 자취방에 들어 와 시 한편 적어 보았다. 그리고 그 시를 적은 종이를 옷 가방 에 넣었다. 박철수 많이 발전했다. 이런 짓도 해 보고 말이다. 전설 속에 나오는 선녀는 달빛 위에서 춤을 추고 그 옷자락이 옅은 구름처럼 흘러 내린다. 아른한 빛, 긴 머리칼을 돌리우고 짙은 속 눈섭, 어둠이 비켜 가는 햇결 미소는 어둔 밤 하늘도 사랑할 수 밖에는 없으리라. 하늘에 백일 정성이 닿아 그 선녀는 달 빛 아래 백 년 정화수 떠 놓고 소원을 빈 어느 아낙에 와 안기니 천상의 옷을 벗고 비로소 세상에 울음을 터뜨렸다.
한 송이 수련 같은 아름다운 아기의 모습은 당신의 처음 세상에 나온 모습 그리고 지금 23 번째 그 날을 기억하니 오늘 당신은 하늘나라 고운 옷자락을 날리던 선녀의 모습입니다. 하늘에 맺은 축복으로 곱디 고운 당신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음, 이만하면 됐다. 푸하핫! 내가 썼지만 졸라 유치하다. 우히히! 낯 간지러버 라. 오늘이 내 생일입니다. 어제 일부러 집에 갔었지요. 그리고 오늘 아침에 미역국 을 얻어 먹고 학교로 왔습니다. 부모님에겐 죄송하네요. 오늘 집에 오라는 걸 바 빠서 안된다고 했어요. 철수의 웃음이 생각납니다. 후훗, 그리고 이상하게 승주 가 날 찾아 왔으면 하는 기대도 해 보았습니다. 저녁 무렵에 철수를 만나 자취방으로 왔습니다. 승주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 습니다. 그리고 철수를 만나자 승주를 잊었습니다. "오늘 조촐하게 우리 둘이서 생일 파티하자." "그래요." "내 생일 선물 준비했어?" "겨울 잠 옷 사오라며?" "사 온거야?" "응." "후후, 나중에 어떤건지 한 번 보자. 아, 저기 제과점에서 케익하나 사 가지고 가자." 생크림 케익을 하나 샀습니다. 옆에서 철수가 씩 웃네요. 그래도 돈은 내지 않 습니다. 내 방에 들어 왔습니다. 철수는 자기 방으로 갔다가 종이 가방을 하나 들고 왔 어요. 아마 저게 내 생일 선물인가 봅니다. 귀여운 것. 테이블에 케익을 올려 놓고 촛 불을 켰습니다. 촛 빛이 참 곱네요. 불을 껐어 요. 철수가 고운 잔 두개를 꺼내어 가지고 왔습니다. 꼭 자기 집인양 내 방 싱크 대에서 잔을 두개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종이 가방에서 와인 한 병을 꺼내더 군요. 어디서 많이 봤구만. "얘야, 와인은 케익하고는 맞지 않아." "에이 그냥 마시면 되지 뭐." "컵 바꿔 와라." "왜요?" "와인은 손잡이가 있는 컵에 따라 마시는거야. 체온이 와인에 전달되면 맛이 변 한데." "이거 가지고 올 때 가슴에 품고 왔는디?" "치, 이리 줘 봐." 녀석이 저 번에도 고급 술을 가지고 오더니 이 번에도 마찬가지네요. 보르도 생 쥴리앙에서 생산되는포도로만 만드는 적색 포도주인 샤또 딸보(Chateau Talbot)입니다. 내가 와인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이건 워낙 유명한 거라 알고 있 습니다. AOC 급 중에서도 최고급으로 통하는 와인입니다. 이거 시중에서 사려면
근 20 만원 가까이 줘야 되는건데... 병 표면이 차겁습니다. "좋은 거 같죠? 철수가 잔을 바꿔 오면서 묻네요. 얼굴 표정이 약간 불안합니다. 제대로 가르 쳐 줘야겠죠? "아니 뭐 그냥 그런거야." "다행이네요." 엉, 다행? "이거 어디다 보관 했었니?" "그런대로 차갑죠?" "응. 이게 아마 15 도 쯤에서 먹으면 제 맛을 낼거야." "지금 바깥 기온이 그것 보다 낮을텐데?" "딱 좋아." "따는 것 있어요?" "없어." "그럴줄 알고 맥가이버 칼을 준비했죠." 잘 딴다? 코르크를 아예 병 속으로 집어 넣어라. 철수가 진짜로 코르크를 병 속 으로 집어 넣어 버렸습니다. 병 따는 실력이 영 형편 없네요. "야, 분위기 있게 마셔야지. 그런 고급 와인을 그 따위로 밖에 못 따니?" "그냥 그런거라며?" "소주 보다는 고급이잖니." "잔 줘봐요." 철수가 내게 와인 한 잔을 따라 주었습니다. 병 속에서 돌돌 거리는 코르크 마 개가 우습네요. 철수가 자기 잔에도 한 잔 가득히 따라 놓습니다. 유리컵에 담 긴 루비 빛깔의 포도주. 분위기를 끌어 줍니다. 어두운 실내에 촛불을 켜고 와인 을 앞에 놓으니까 은은함 마저 듭니다. "노래 불러 줘야지?" "그것도 해 줘야 돼요?" "응." "잘 태어 났니? 고생은 않했니? 왜 살고 있니?..." 세상 살다 저런 가사로 생일 축가 불러 주는 놈은 처음입니다. 촛불을 껐습니 다. "야, 한꺼번에 꺼졌다." 내가 박수를 치니까 철수의 표정이 좀 어이없게 변하네요. "24 살 맞아요?" "주민등록증 보여 줘? 이제 생일 선물을 받아야지?" "헤헤, 그렇죠?" 철수가 약간 쑥스러운 표정으로 종이 가방을 건네 줍니다. 녀석이 정말 겨울 잠 옷을 사 가지고 왔어요. 곱네요. 제법 가격이 나가겠는데요? 고급 포도주, 거기 다가 잠 옷까지. 내 생일 때문에 얘가 알거지 되는 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성의가 참 고맙습니다. 생일이라고 쪽지도 하나 들었네요. 읽어 보았습니다. 아 까 생일 축가 불러 줄 때의 분위기와 너무 틀립니다. 날 너무 띄워 주는거 아닌 가 겁이 날 정도네요. "너 이렇게 날 띄워주다가 나중에 뭉갤려고 그러지?" "내 정성을 그렇게 밖에는 못 받아 들여요?" "흠, 고마워. 곱게 간직할게." "헤헤, 시가 좀 유치하죠?" "괜찮아." 오늘 내 생일 파티가 맘에 듭니다. 작년 어느 카페에서의 나쁜 감정들과는 비교 도 되지 않게 화려하고 곱습니다
철수와 마주 보며 미소 짓습니다. "생일 축하해요 누나. 건배 한 번 해야죠?" "그래." 와인도 제법 독하죠? 철수가 자주 웃습니다. 실 방바닥으로 내려 앉으려고 하네 요. 그러더가 갑자기 일어 섰습니다. "벌써 가려구?" "벌써가 아니에요. 시간이 제법 되었건만." "내 생일인데?" "내일 수업있어요. 에, 마지막으로 생일 선물 하나 더 해도 되죠?" "또 있어? 지금도 나 행복해." "행복해요? 허허. 듣기 좋네요." "하나 더 있는 생일 선물이란게 뭔데?" "뽀뽀 한 번 해도 될까요?" "응?" "음, 정희 누나도 해 주었는데요 뭘. 그냥 부담 갖지 말구요." "헛! 그래, 해 줘." "눈 감아 봐요." 녀석이 제법 떨지 않고 말을 잘 연결 시키네요. 그래 바라던 바다. 눈을 감았습 니다. 그리고 철수의 입술이 언제 내 입술에 닿을까 기대를 했었습니다. 훗! 철 수는 아직은 아닌가 봅니다. 그는 내 이마에 그의 입술을 갖다 대고는 곧 떼어 버렸지요. 그리고 씩 웃습니다. "잘 자요. 저 갑니다. 다시 한번 생일 축하해요." "응, 그래." 조금 아쉽네요. 생일 날 밤은 따뜻했습니다. 철수의 미소 덕이었지요. 겨울 잠옷을 입고 방에 서 홀로 돌아 보았습니다. 괜찮습니다. 거울에 옷을 비추어 보다 미소 짓고 있 는 날 발견했습니다. 아, 어제 그냥 입술에다 뽀뽀를 해 버리는건디. 와인은 그게 문제야. 별로 독하 지 않다는 거. 왜 누나의 입술로 가다가 그냥 이마에서 멈추어 버렸을까. 아깝 다, 좀만 더 술에 취했으면 프렌치 키스도 할 수 있었는데.... 그래도 누나와 한 발짝 더 다가서 마주한 느낌이다. 누나의 생일 파티에 단독으로 초대되어 축 가도 불러주고 생일 선물도 했다. 음, 현재 누나와 가장 친한 남자는 나다. 하 하! 어제 생일 선물도 했는데 오늘 점심은 누나에게 얻어 먹어야 겠다. 수업 시간 중간 쉬는 시간에 누나에게 전화를 했더니 점심 때 약대로 오라고 했다. 가지 뭐. 수업이 끝나자 마자 약대로 신나게 뛰어 갔다. 신나게 뛰어 갔다. 약대 현관 앞에 몇 몇 사람들이 두 사람에게로 시선이 가 있었다. 현관을 들어 갔다가 어떤 한 새끼 때문에 자판기 뒤로 몸을 숨겨야 했다. 현관 앞 복도에 난 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 쪽으로 돌린 누나의 모습을 보았다. 매정하게 서 있는 약사복을 입은 누나의 모습 앞에는 승주 그 새끼가 있었다. 뭐하는 짓이냐 쪽팔 리게... 그의 두 손에는 아주 많은 장미들이 담긴 큰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안 세어봐 도 이백송이는 넘겠다. "어제는 그 동안 떨어져 있어서 예의상 찾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 왔어." 새끼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부끄럽지도 않은지 유치한 대사를 늘어 놓는다. 누나는 말문이 막혔는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누나의 매정한 모습이 좋다. 그래
그런 매정한 모습 지으면 저 새끼 그냥 갈 것이다. 승주 저 새끼가 떨어져 나가 면 그때 내가 떡 웃음짓고 나타나는 거야. 누나가 지금 표정과는 다르게 언제 그 랬냐는 듯 미소 지어 줄거다. 푸하하! 매정한 모습 지어야 하는데, 누나의 표정이 점점 변해 가고 있다. "가!" 단 한마디의 말은 매정했으나 어감이 그렇지 않다. 느낄 수 있다. 조금 불안하 다. 승주가 건네는 꽃을 받지는 않고 있으나 망설이는 모습이다. 받아서 던져 버 려. 갑자기 헛 웃음이 나왔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넋이 나간 듯 한 곳에 시 선이 모아졌다. 흠, 나는 저렇게 못한다. 참으로 쪽팔리고 유치하고 보기싫고 초 라한 모습이지만 부럽기도 하다. 저렇게 할 수 있는 승주의 모습이 부러웠다. 은 정이 누나가 꽃을 받지 않자 승주는 그 사람들 많은 약대 현관 앞 복도에서 무릎 을 꿇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다 들릴만한 소리로 그의 마음을 고백했다. "몰랐었어. 그때는 그 방법 밖에는 몰랐었어. 뒤에 남는 그리움을 몰랐었단 말 이다." 승주의 목소리는 울음이 섞이고 떨렸으나 또박했다. 승주의 손에 들려진 꽃 송 이가 혹시 266 송이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거 같다. 흠, 누나가 내게 왜 266 송이의 장미를 원했는지 짐작이 갔다. 승주가 들고 있는 꽃다발이 얼마 안 있어 누나의 품에 안길것 같다. 그럴 것만 같다. "너 왜 그래? 부끄럽지 않니? 니가 이러면 내가 난처할 거란 생각은 못해 주 니?" 고개 돌렸던 누나가 승주를 내려다 보고 있다. 부끄러우면 사람들 없는 곳으로 도망가면 되잖아. 누나는 승주 곁을 떠나지 않았다. "부끄러운 거 그거 아무것도 아냐. 그건 금방 지워져 버려." "너 정말..." 승주 새끼가 누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꽃을 건네주려고 한다. 누나는 주위 의 시선을 의식하는 듯 받지 않으려고 했으나 승주는 끝내 누나에게 꽃을 전달하 고 말았다. 누나야, 던져 버려라. 누나는 꽃을 던져 버리지 않았다. 자리가 어색해서 떠났는지는 모르나 누나는 꽃을 버리지 않고 승주와 함께 나 를 지나쳐 밖으로 사라졌다. 멍하니 그 둘의 모습을 바라 보았다. 승주 새끼도 차가 있는겨? 둘이가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까지 지켜 보았다. 보조석에 꽃을 안 고 있는 누나의 모습 때문에 슬펐다. 오늘 나는 삼류 영화 한 편을 보았다. 허허! 참 슬픈 삼류 영화였다. 그 사건 이후로 누나는 내게 연락이 없었다. 어디가서 무엇을 했는지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알게 되면 슬플 것 같다. 삼류 영화를 보고 난 뒤 나는 통학 을 했다. 아침 일찍 새벽 기차를 타고 와 공대에서만 놀다 수업 끝나면 바로 집 으로 떠났다. 날씨가 춥다. 금요일날 내 방으로 왔을 때까지 누나는 내게 삐삐 한 번 치지 않았다. 멀리 짙 은 구름 밑으로 겨울 해가 지고 있다. 저녁에 밥 대신 라면을 끓여 먹고 있는데 동생이 한마디 했다. 그래, 내게도 예 쁜 여동생이 있다. 얘가 재수생이라 나와 얼굴 보는 시간이 적어 간혹 생각 못하 고 살지만 얘는 평생 나를 기억에 담고 살 애다. "엿 안 사줄거야?" "참, 곧 네 시험이 있지?" "오빠 너무한거 같애." "미안하다. 큰 걸로 하나 사줄게. 꼭 붙어라." "그래. 내가 대학 가면 친구 소개 시켜 줄게." "치, 한의대에 예쁜 여학생이 있니?"
"나도 가는데 뭘." "그래, 넌 내 동생이지만 참 예쁘긴 예쁘다." "올해는 꼭 붙을거야." "그래, 아버지가 너에게 거는 기대가 클거다." "참, 밖에 눈 오더라." "응?" "첫 눈 온다구." "첫 눈?" 누나가 나에게 약속 했던 것을 기억한다. 삼류 영화 괜히 봤다. 안 봤으면 내 가 연락해 억지라도 부릴텐데. 약속 지키라고 말이다. 전화 할 용기가 없다. 삐삐를 호주머니에 넣고 먹던 라면을 그대로 들고 옥상으로 올라 갔다. 소주라 도 한 병 사올까? 청담동쪽과 압구정동 쪽, 논현동 쪽 모두 네온사인 불빛들로 아름답다. 잠원동 쪽은 아파트 불빛으로 또한 곱다. 흰눈이 너무나 곱게 내린다. 나 혼자만 있는 옥상이 분위기 있다. 너무 어둡지 도 않고 주황빛으로 물든 하늘이 오늘은 율전 깨끗한 하늘보다 더 곱다. 끄억! 눈을 맞으며 라면 국물을 비웠다. 쌓이기 시작하는 눈을 남비에다 담았 다. 그리고 밖으로 던졌다. 길 가는 사람들에게 첫 눈의 축복을 내리고 싶어 서... "야, 첫눈이다!" 나 혼자 옥상에서 쇼를 했다. 좀 추웠다. 입에선 입김이 연신 뿜어져 나온다. 그래도 나는 내려가지 않았다. 춤을 추듯 눈 쌓이는 옥상을 뛰어 다녔다. 얼굴 이 빨개져선 옥상 난간에 기대어 청담동 쪽을 바라 보았다. 한 손엔 삐삐를 움 켜 쥔 채 말이다. 삐삐는 울리지 않았다. 멍하게 바라 보다가 도저히 추워서 더 있을 수 없었다. "그래 잘 살아라. 에이, 잘 사나 보자." 작은 소리로 중얼 거려 주고는 옥상에서 내려 왔다. 거실에서 아버지의 근엄한 목소리를 들었다. "와인 니가 꺼내갔지?" "에?" "니가 꺼내갔지?" "네." "15 만원 추가." "반은 제가 안 마셨어요." 15 만원? 포도주 한 병이 뭐 그리 비싸. 우쒸, 아깝다. 은정이 누나에게 내가 왜 내 용돈을 날렸을까? 후후, 그건 별로 아깝지 않다. 내가 설레고 누나 생각하 며 웃었던 기대가 너무 아깝다. 삼류 영화 한 편으로 그냥 떠나가 버릴 것을 나 는 혹시나 했다. 철부지 생각? 아깝다. "너 자꾸 양주 꺼내 갈거야?" "앞으로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죄송합니다." "표정이 별로 안좋다?" "추운데 있어서 그래요. 눈 왔잖아요." "이번엔 봐 줄게." 헤, 15 만원 굳었다. 그래도 아깝다 씨. 첫 눈은 왜 이리 빨리 온겨. 누나 생일 날 입술에 뽀뽀하지 않았던 거 천만 다행이다. 그랬다면 오늘 내가 더 초라했을 것 같다. 방에 들어 와 내가 사 놓은 장미 없는 장미 나무를 보았다. 후후, 저기 두 세송 이 피어나 봤자 승주 새끼가 들고 온 266 송이의 장미와는 비교조차 안되겠지. 그
래도 피워 보리라. 내게는 저기서 핀 장미 한 송이가 그 새끼 266 송이의 장미 보 다 소중하리라. 내게만... 그래서 슬프다. 32. 32 회 헤, 토요일 날 나는 계속 혼자였다. 아무나 만나고 싶었지만 만날 사람이 없었 다.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정희 누나가 생각이 났지만 그녀는 임자가 있는 몸이다. 어디 외로운 사람이 없 나? 내 친구들? 학교 가면 만날 그 새끼들 만나서 뭐 하겠나. 혼자 있으니까 좋 다. 쓸쓸해서 좋다. 예전엔 혼자 있어도 그러려니 했는데... 날 이렇게 만든 은정이 누나야, 잘 살아라. 토요일날 하루 종일 집에만 있었다. 삐삐는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귀가 하시고 잠시 거실에 나와 같이 앉아 있었다. 요즘들어 아버지는 동생이 학 원 차를 타고 오게 하지 않으신다. 아버지가 직접 가서 데리고 온다. 곧 수능 시 험이 있다. 그래 아버지, 공부 잘하는 딸 두셔서 좋겠수. 나는 장가갈 때 집한 채 사주는 걸로 끝내고, 이 건물을 포함 한약방은 동생이 한의대만 합격하면 바 로 물려 주실 것 같다. "여보세요? 철수 바꿔달라구?" 누가 이 시간에 내게 전화를 한겨?" "아, 알겠다. 너도 철수보다 나이가 많지?" "제 전화면 그냥 주세요. 그 자꾸 나이 이야기 하지 말구요." "잠깐 기둘려 봐. 너 임마 왜 나이 많은 여자들하고만 놀아?" "저도 그러고 싶지 않아요." 은정이 누나는 아닌거 같다. 승주가 날 찾아 왔었어요. 학교까지 찾아 올 줄은 몰랐었는데... 그는 나를 난 처하게 만들었지요. 사람들 많은 약대 앞 현관에서 승주 때문에 난 아주 난처했 었습니다. 그런데 날 난처하게 만든 그가 싫기는커녕 오히려 좋아 보였습니다. 그에게 그런 면이 있었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는 내가 장난삼아 말한 265 송이의 꽃을 품고 내 앞에 나타났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무릎까지 꿇은 모습으로 그 꽃을 내게 주었지요.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어색한 것을 싫어 했어요. 좋아하는 마음만 있으면 그 것으로 만족하던 사 람이었지요. 그래서 자기가 보여 주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에겐 늘 한 발 물 러서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승주는 남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비집고 들어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든 뺏길 수 있 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내게 다시 돌아 오려 합니다. 내 가 누구를 마음에 품고 있는지, 내가 또 누군가를 사귀고 있는지 그런 것은 염두 해 두지도 않은 모습으로 말입니다. 나를 다시 만나야만 한다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왔습니다. 정말 예전 승주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작년 봄, 그가 휴가 나왔을 때 우리 빌라에 사는 청년과 마주했을 때가 생각나 네요. "당신 뭐야?" "그냥 친굽니다." 승주는 나를 집에 데려다 주다 우리집 옆 동 청년을 만났지요. 내 손을 잡아 자 기에게서 나를 뺏앗아 가는 그 청년에게 그가 대답한 답은 그냥 친구라는 말 뿐 이었습니다. 자기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한 사람에게 그 말은 비수 같았지요. 그 청년이 나와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몇 발짝 떨어져 주기까지 했었지요. 그리고
자기 때문에 흘린 눈물을 그 청년 때문에 흘린 것이라 오해를 하고선 힘없이 미 소 지으며 돌아 섰었지요. 그런 그가 용기를 내어 내게 다시 왔습니다. 남자는 첫사랑을 꿈 꾸고, 여자는 마지막 사랑을 꿈 꾼다고 합니다. 하지만 남 자는 마지막 사랑을 간직하고 여자는 첫사랑을 못 잊는다고 합니다. 승주는 내 첫사랑입니다. 솔직히 그를 아직 잊지 못했습니다. 자리가 어색했던 탓도 있었지만 나는 그를 따라 가고 싶었습니다. 그냥 편히 승주를 따라 승주의 마음을 받아 드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는 내가 먼저 마음을 고백했던 사람이니 그의 마음을 받아 들이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았습니다. 자존심? 그런 것 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예전으로 아니, 좀 더 발전된 관계로 돌아 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나를 찾아온 승주의 모습에서 는 분명 그럴 것 같았습니다. 흠, 승주를 따라 나오다 자판기 뒤에 숨어 있던 철수를 보았습니다. 내 난처한 모습을 다 지켜 보았던 것 같았어요. 철수는 승주 보다는 소극적이지 않았지요. 옆 동 청년이 나타났을 때에도, 올 봄 내가 술취한 과동기에게 맞았을 때도 철수는 물러서는 느낌이 아니었습니다. 자판기 뒤에 숨어 있던 철수에게서 옛 승주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한 발짝 물러 나는 것도 모자라 숨어 있는 철수, 그런 철수가 내게 다시 다가 온 승주에게 쉽 게 가지 못하게 할 것 같습니다.
아까 약대 앞에서 모습과는 다르게 승주는 단 둘이가 되자 어색해 했습니다. 침 묵의 시간이 흘러 가고 승주는 계속 목적지 없는 곳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승주 가 준 꽃 다발을 안고 조수석에 앉아 바깥 풍경을 쳐다 보았지요. 오후가 물든 늦가을 논 바닥의 허수아비는 홀로 외롭지만 시선을 받네요. "다시 학교로 돌아가자." "그래. 꽃 받아줘서 고맙다." "흠, 널 다시 봤어." "전에 내게 고백했던 거 지금은 받아 드릴 수 있겠어." "그렇게 쉽게 될 줄 알았니?" "힘들겠지." "그래." "후, 그래도 잊혀지는 것 보단 친구로 남아 있는게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다시 그 고백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할게." "훗! 왜 변했어?" "네가 잊혀지지 않으니까. 그리고 가을하늘이 너무 높더라." "추상적인 말은 싫어." "자주 연락할게." "다시 널 만나는 것은 자신있지만 널 예전처럼 사랑할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괜찮니?" "괜찮아." "오늘은 그냥 집에 데려다 줘." 어디까지 갔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학교 앞으로 오니 겨울 해는 일찍 져 버 리고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승주는 날 그냥 보내지 않더군요. 뭔가 망설이더 니 내 어깨에 손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입술만 닿았지만 그는 나에게 짧은 입맞 춤을 해 주었습니다. 그의 각오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지요. 그렇게 달콤하 지는 않았지만 가슴을 떨었습니다. 피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짧은 그 순간 난 그 만을 사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창 밖으로 아주 희 미한 노을의 흔적이 하늘에 걸려 있습니다. 골목길...옥수수가 죽어 있습니다.
한 동안 내게 다시 다가온 승주 때문에 가슴이 떨렸지요. 고운 미소가 맺히기 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잠옷으로 갈아 입을 때 이 옷을 준 녀석이 생각이 났습니 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오늘 승주가 내게 보여 주었던 행동과 자판기 뒤에 숨어 있었던 철수를 번갈아 떠 올려 보았습니다. 모르게 내 마음 속으로 헤집고 들어 온 철수는 잊기 싫은 존재가 되어 버린지 오래 전이지요. 승주가 없는 동 안 철수와 지냈던 그 정겨움을 계속 갖고 싶습니다. 연하라 생각치 못했던 철수 에게 품었던 감정들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님을 알아 가고 있습니다. 철수와 지냈던 시간은 승주와 지냈던 시간보다 오히려 더 정겨운 것이었습 니다. 박철수. 그와 지내면서 승주 생각을 자주 했었지요. 그리고 철수 때문에 승주 를 잊어 갔었습니다. 승주를 만나면 그 반대가 되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하기가 싫어요. 철수와 지내면서 승주 생각은 하겠는데,승주를 만나면서 철수를 잊어 가 는 건 하기 싫습니다. 내가 연인을 만들어 가면서 동생같은 철수를 생각하며 아 파하는 꼴은 참 웃길 것 같습니다. 연하면 연하 답게 굴 것이지. 우연히 만났던 승주 때문에 일주일 동안 나를 피했던 철수가 오늘 승주가 내 앞에 나타난 것을 보았으니 또 날 피하겠지요? 내가 승주를 만나 연인사이가 된다면 철수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 같습니 다. 훗, 녀석은 나를 독차지 하고 싶은가 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를 자기 의 연인으로 만들어야지요. 연인 사이였다면 오늘 찾아 온 옛사랑은 눈물을 흘리 며 가지고 왔던 꽃다발을 어딘가에 버렸겠지요. 내 마음이 누군가로 완전히 채워 지지 않았기 때문에 옛사랑을 받아 들였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승주에겐 좀 미안하지만요. 그러지도 못하면서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볼 자신이 없 다? 참 이기적이네요. 연하라서 그런가요? 내가 더 이기적인가 봅니다. 내가 철 수를 연인이라 생각한 적이 있던가요?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이 철수와 승주를 재고 있는 것 같네요. 철수를 잃기가 싫어서 내게 유리한 생각들만 하나 봅니 다. 승주를 만나도 철수와 지냈던 그 시간들을 공유할 수 있다면 승주를 부담없 이 만나겠습니다. 철수 생각 때문에 밤 늦게 승주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나야 은정이." "응. 왜?" "오늘 입맞춤 그거 친했던 친구와 다시 만났기 때문에 한거지 다른 뜻은 없는 거야?" "그 말을 왜?" "한 번 더 말할 게. 오늘 우리는 친구로 만난것이지, 연인으로 만난 건 아니라 는 거. 내가 예전에 고백했던 것은 잊어." "어, 응. 그럴게." "잘 자." 승주와 함께 내게 온 저 화려한 265 송이의 장미는 올 해를 넘기기전에 모두 시 들어 버리겠지요. 훗! 지금 입고 있는 이 잠옷은... 철수는 예상대로 연락을 끊었습니다. 승주를 만난 바로 다음 날부터 철수는 도 서관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이없게도 철수는 자취생활도 포기했나 봅니다. 내 근처엔 오기도 싫다 이건가요? 이틀전에 철수 방 문틈에 끼워 놓았던 어느 음식 점의 광고 전단이 오늘도 그대로 꼿혀 있습니다. 철수는 통학을 하나 봅니다. 내 가 자기를 찬거야 뭐야. 그거 아니잖아. 그리고 같이 있다가 어색한 상황 벌어 진 것도 아니고 자기가 숨어서 봤으면서 왜 날 피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대학원 시험 때문에 금요일날 서울로 가지 않았습니다. 밤 늦게까지 도서관에 있었어요. 열한시가 다 되어서 도서관을 나왔는데 눈이 내리고 있더군요. 철수에 게 약속한 게 있지요. 녀석은 내게 전화하지 않았습니다. 방에 혼자 있다 철수에
게 삐삐를 쳐 줄까 하다 그냥 포기했습니다. 니가 그렇게 나오면 나도 널 찾지 않을테다. 옛사랑도 돌아 왔는데 내가 아쉬울 게 뭐 있냐. 그때. 승주에게 전화 가 왔습니다. "밤 늦게 앤일이야?" "대학원 시험 때문에 요즘 바쁘지?" "응." "주말에 한 번 봤으면 좋겠는데." "이 번주는 힘들겠다. 다음 주에 대학원 시험 봐야 돼. 또 곧 기말 시험 있잖 아. 약사 고시도 떡 버티고 있고." "계속 바쁘겠구나." "응. 오빠는 바쁘지 않아? 참 오빠는 코스모스 졸업이지?" "오빠 소리 하지 마라 야." "하하, 아직 조금 어색한가 보다. 예전엔 그러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오빠 소 리가 나왔어." "너, 사귀는 사람 있니?" "왜? 예전처럼 피해 주려구?" "아니야. 그냥 내가 받은 느낌 때문에 물어 본거야." "사귀는 사람 없어. 그리고 내가 언제 연인 사이로 사귄 사람이 있었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제법 있었지." "훗, 그랬었나?" "참, 거기도 눈 오니?" "응. 서울도 눈이 와?" "제법." "오늘 전화는 내일 만날까 하는 것 때문에 한거야?" "안부 묻는 것도 포함 돼. 열심히 하되 건강도 생각 해." "알았어. 전화 해 줘서 고마워." "별말을. 참, 그 후배는 잘 살고 있니?" "철수? 녀석이 또 삐쳐서 날 안만나 주네." "안 만나 줘? 너에게서 처음 들어 보는 말 같다." "응?" "정희씨는?" "걔는 뭐." "그래 오늘 밤 좋은 꿈 꿔라." "알았어. 오빠도 잘 자." "또 오빠라고 그랬다." "곧 예전으로 돌아가겠지 뭐. 안녕" 철수 생각하다 승주 전화를 받으니까 승주가 다소 어색하게 느껴졌나 봅니다. 승주에게 밤 늦게 안부전화를 받으니 기분이 괜찮네요. 철수야 날 피하면 너만 손해다. 승주와 전화 통화를 한 후 얼마 안 있어 전화가 한 통 더 왔지요. 늦은 밤이었 기에 철순가 했었지요. 정희였어요. 얘는 양반 되기는 힘들겠어요. 정희의 목소 리가 많이 가라 앉아 있었습니다. "나 대학원 시험 본다고 전화 한거야?" "아니. 그냥 전화할 사람이 없어서." "뭐야 너?" "그거 한 번 알아 봐 줄래?" "뭘?" "학교 앞에 빈 상가가 있는지." "왜?"
"나 약국 차리게. 나 저 번주에 사표 냈어." "응? 사표를 내? 일년도 못채우고?" "헤헤, 육개월만 넘으면 경력으로 인정 되잖아. 나 철규씨랑 헤어졌다? 한 달 가까이 됐어." "응?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그냥 잊기로 했어. 잊을 자신이 충분히 있으니까." "왜? 싸웠어?" "그런 건 아니지만 내가 너무 손해 본다고 생각했어." "뭐야? 너 잊을 자신은 있는거야? 많이 좋아했었잖아." "그 얘기는 접어 두자. 상가 있는지만 알아봐 줘. 내가 모은 돈은 턱없이 부족 하지만 부모님 도움을 좀 받아서 작지만 내가 직접 약국을 경영할거야. 난 지금 까지 너무 끌려 가는 생활만 했던 거 같아." "정말 그렇게 할려구?" "응." "근데 왜 학교 앞에서...?" "니가 예전에 학교 앞을 생각해 보라고 했잖아." "그럼 학교 근처에서 살겠네?" "당연히." "야, 잘됐다. 나랑 계속 보겠다 그럼." "그래 기집애야. 학교 근처서 하게되면 심심하진 않을 것 같애. 친구들도 종종 찾아 와 줄테고 바쁘면 너에게 약국을 맡겨도 될테니까. 그리고 셔터 맨도 있잖 아." "셔터맨? 누구?" "철수. 녀석에게 전화를 했더니 자기가 셔터맨 해 주겠대. 아주 잘됐다고 그러 던데?" "그래? 치. 철수가 내 얘기 안 하던?" "했어. 네 얘기 하니까 잘 먹고 잘살아라.라고 전해 달라던데?" "뭐야?" "너, 승주 다시 만났다며?" "응." "그래 예전 느낌이 들던?" "아직은..." "나는 철규씨와 헤어지고 나서 딱 일주일을 울었어. 그 걸로 끝이야. 더 이상 철규씨에 대한 미련은 없어. 아니다라고 생각하니까 그 사람에게 가졌던 감정이 깨끗이 없어 졌어. 훗, 그리고 다시 그런 감정들이 생길 것 같지 않아." "무슨 말 하는거야?" "물론 넌 나와 다르겠지만 그냥 추억 속으로 묻어 두는게 오히려 나을 수도 있 어." "나는 잊고 싶어서 잊은게 아니잖아." "예전 보다 더 조심스러울텐데?" "그럴까?" "나도 잘 몰라." "사람마다 틀리겠지." "참, 너 철수에게 잘 해라?" "응? 그 녀석 내게 삐쳤어." "삐칠만 해." "왜 삐쳤대?" "그걸 왜 내게 물어 보니? 하여튼 나 약국 차릴만한 상가 있으면 연락해 줘. 이 번달 말에는 몇 일 네 방 신세를 좀 져야겠다."
"그래." "전화 좀 해라 기집애야." "너도 안 했잖아." 정희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매정하지 못할 것 같던 그녀가 연인과 헤어졌다는 말을 참 담담하게 했습니다. 정희가 내 곁으로 온다. 내가 질투하게 될 지도 모 르겠군요. "전화 바꿨습니다." "나야, 정희." "어? 누나가 왠일이에요?" "너 목소리 듣고 싶어서. 사랑하는 사람 생겼다고 통 연락이 없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어딨어? 잠깐만요." 아버지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변했다. 씩 웃어 주고는 전화기를 들고 내 방으로 들어 왔다. "왜?" "울 아버지 옆에 계셨어요. 어쩐 일이에요?" "나 잘하면 다시 학교로 갈 것 같애." "그래요? 대학원 갈거에요?" "아니. 약국 차릴려구." "에? 좋은 직장 놔두고 왜 약국을 차려?" "철수 보고 싶어서." "나 보고 싶어 하는 건 아는데, 약국 차리는 거 하고 무슨 상관이야." "너네 학교 앞에다 차릴려구." "우리 학교 앞에다? 누나는 우리 학교 안 나왔수?" "차리게 되면 자주 놀러 와." "약국 차리면 내가 셔텨맨 해 주지 뭐. 누나는 내 첫사랑이잖수." "후후, 은정이와는 잘돼 가?" "은정이 누나, 승주 그 새끼 만나잖아. 요즘 통 보이지도 않아요." "은정이가 승주씨를 만나?" "승주 그 새끼가 꽃을 무식하게 많이 싸가지고 학교로 찾아 와 완전 쌩 쇼를 했 다는 거 아닙니까. 누나가 그냥 좋다고 따라 가 버리대요." "질투하니? 승주씨보고 자꾸 새끼라 그런다? 너보다 세살 많아." "대통령도 안 보는데선 욕하는데 뭐 어때. 그나저나 오늘 누나가 전화해 줘 서 조금 위안이 되네요." "나도 위안 좀 받으려고 했는데 접어 둬야 겠다." "위안?" "흠, 나 철규씨랑 헤어졌다? 그리고 병원도 그만뒀어." "정말요?" "잘됐지?" "뭐가 잘돼? 왜 그랬어요?" "잘됐잖아. 너 예전에 했던 말 물리면 안됀다. 나중에 애인에게 차이게 되면 너 찾아 오라고 했지?" "차였어요?" "내가 찼다." "헛! 누나는 생각보다 매정한 거 같애요." "그 말을 왜?" "누나가 그 사람하고 사귄게 몇 년이야? 누나는 참 순정파인거 같았는데, 결국 은 헤어지는군요. 누나가 항상 그랬죠? 밋밋하지만 그게 편할 것 같다.라는 말.
왜 이제는 헤어지는 게 더 편할 것 같던가요?" "응." "지금 그 사람 많이 생각나지는 않죠? 누나가 그 사람 얘기를 할 때 목소리가 전혀 바뀌지 않았어요." "헤어진 지 한 달 가까이 되어가." "혼자서 너무 많은 걸 정리하지 말아요." "니 걱정이나 해. 은정이가 승주씨를 다시 만난다? 넌 차이겠네?" "내가 언제 은정이 누나하고 사겼어요?" "사랑한다며?" "우쒸, 내가 언제 사랑한다고 했어요. 맘이 있다고 했지." "그게 그거지 뭐. 은정이는 철수를 후배로만 생각했을테고, 그리고 옛사랑이 다 시 나타났다? 승주가 언제 찾아 왔었니?" "삼일 전에요. 둘이 잘 먹고 잘 살아라 그래!" "은정인 나보다 덜 매정해. 끊고 맺고 하는게 겉으로 보기에는 확실한 거 같지 만 나 보다 더 여린 애야." "그래서요?" "그렇다는거지. 네 생각 많이 할걸 아마." "됐어요. 누나 언제 약방 차릴건데요?" "약국이다 임마. 아마 12 월달 중순?" "이제 애인도 없으니까 크리스마스가 참 쓸쓸하겠네요?" "철수하고 보내면 되지 뭐." "내가 뭐 항상 솔로로 있을 줄 알아요?" "후후, 은정이 아니면 나겠지 뭐." "철수야 전화기 가져 와!" "저 소리 들었죠?" "응. 이만 끊을게." "네. 약방 차리게 되면 자주 놀러 갈게요." "그래. 안녕." 나이 많은 여자 하나가 내 삶 속으로 돌아 오려 한다. 내 주위엔 왜 나이 많은 여자들만 있는 겨. 정희 누나를 좋아하지만 이제 은정이 누나에게 갖는 그런 감 정은 없다. 그래도 쓸쓸했던 기분이 조금 풀어졌다. 은정이 누나가 승주를 만나 면 난 정희 누나를 만나면 된다. 잘해 봐라 그래. 정희 누나가 했던 말이 기분 나쁘다. 자기 아니면 은정이라구? 세상 반이 여자 다. 다 공주병 환자들이여. 씨.
33. 33 회 일요일날 곰곰히 나 혼자 생각하다 답도 없는 답을 내렸다. 은정이 누나가 좋긴 하지만 나도 자존심이 있다. 누나는 승주가 준 그 꽃다발을 들고 내 곁을 내겐 시선도 주지 않고 지나쳤다. 내게 좋은 모습 많이 보여주며 내 마음을 빼앗아 간 것은 누나가 외로웠기 때문이었나 보다.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누나 본의에 의해서다. 내게 승주 그 새끼가 가져 온 꽃다발을 원했던 건 나를 그 사람에게 잠시 견주어 본 것. 누나에게 가졌던 마음을 이 쯤에서 접자. 흠, 이제 더 이상 누나 곁에 있는다 는 건 무의미하다. 나 승수를 질투한다. 그런 질투심에서 나오는 추잡한 행동들 로 난 비겁해질 것 같다. 은정이 누나는 그런 나에게 실망을 하고 날 나쁜 놈으
로 정의 내리겠지. 그리고 이름없이 사라져간 누나 인생의 엑스트라들처럼 그렇 게 잊혀 질것이다. 나도 내 인생에선 내가 주인공이다. 헛! 헛웃음이 나온다. 누나에게 아직 사랑한다고 말한 적도 없고 사귀는 것도 아니다. 내가 왜 누나를 피해 다니면서 며칠 통학을 했을까? 늘 하던대로 하면 된다. 누나와 친하게 지냈던 그 시간 전의 모습으로 말이다. 은정이 지가 뭔대. 은정이 누나를 봐도 절대 어색한 표정이나 초라한 모습 보이지 말고 당당하자. 그리고 더 이상 누나에게 마음이 가지 않도록 불친절해지자. 옛사랑이 꽃다발 들 고 찾아 왔다고 그냥 가버린 여자에게 내가 무슨 의미가 되었겠나. 나는 그냥 친 한 후배였을 뿐이다. 나만 홀로 앞서 갔었던 것일 뿐, 누나는 나를 의미있는 존 재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승주가 그런 모습 보여 준게 고맙다. 내가 하지 못했던 그런 짓, 그래 승주 넌 아주 쪽팔리고 밥 맛 떨어지는 그런 유치한 짓을 했지만 누나나 나에게 잘 한 것이다. 박 철수, 은정이란 나이 많은 여자에게 태 연해 지자. 아버지 말씀처럼 나이 많은 여자에게 너무 정주지 말자. 월요일 아침에 새로운 기분으로 학교를 갔다. 아침 수업 포기하고 아주 늦은 아 침에 집을 나왔다. 레옹처럼 모자를 쓰고 한 손엔 화분을 들고 전철을 탔다. 롱코트는 없어서 못 입었다. 화분을 들고 자취방으로 들어 가다 은정이 누나 방 문을 쌔게 걷어찼다. 지금 이 시간에 방에 있지는 않겠지. 나에게 상처를 주었으니 아무리 태연해 지기로 마음 먹었지만 방 문 걷어차는 것은 한 동안 계속 해야 겠다. 걷어 차자 마자 문 이 열렸다. "너, 뭐야?" "엉?" 은정이 누나의 모습을 보자 많이 반가웠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아무일도 없 었다는 듯 날 쳐다보는 저 가증스런 얼굴. 내 숨어서 다 봤어. 아휴, 친한 척 하 기도 싫다. 그냥 모른 척 내 방쪽으로 갔다. "야, 박 철수!" 부르면 내가 대답할 것 같냐? 못 들은 척 내 방 문고리에다 열쇠를 꼿았다. 문 을 따고 그냥 방으로 들어가는 행동을 보였다. 그래도 한 번 뒤돌아는 봐야 겠 지? 멀뚱히 날 보고 서 있는 누나가 얄밉다. 지나간 사랑도 못잊는 바보 같은 뇬. 어디 잘돼나 보자. 이제 내 사랑은 이 화분이다. 볕이 잘 드는 창가에다 화분을 올려 놓았다. 그 승주가 준 266 송이의 장미는 한 번 시들면 그 뿐, 다시 피어나지 않겠지만 이 장 미나무는 내년에도 후 내년에도 꽃을 피울 것이다. 266 송이를 피울 때까지 살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겐 어린 왕자가 꿈 꾸던 그 장미다. 내 여인이 생기면 이 화분에 핀 장미를 마주 보며 사랑의 속삭임을 나눌 것이다. 에이쒸, 문을 잠궈 버리는 건데. 지 방이여 뭐여. 왜 남의 방을 저렇게 맘대로 들어오냐. 은정이 누나의 옷차림이 외출하려는 모습인데, 갈 길이나 가지 여긴 왜 들어온 겨?. "왜 남의 방에 맘대로 들어와요?" "너 또 삐쳤지?" "내가 뭐요?" "너 왜 날 또 피하는거야?" "내가 누나 안 만나면 그게 피하는거에요? 그냥 보기 싫으니까 안 찾는거지. 누 가 피했다고 그래." "그게 그거지. 너 저 번주에 통학했지?" "통학 하면 안돼나?" "말투가 왜 그래?"
"이런 말투 한 두번 듣는 것도 아니잖아요?" "너 그럼 나도 삐친다?" "삐치던지 말던지. 누나는 좋겠수, 첫사랑이 돌아와서..." "너 정말. 니가 내 애인이야 뭐야. 그 일로 니가 날 왜 피하는데?" "피한거 아니라니까. 꽃다발이 좋던가요? 그냥 따라 나가 버리대?" "그런 상황에서 내가 따라 가지 않았음? 나 사람 많은 그 자리에서 매정히 그 사람 행동을 물릴 칠 수 있을 만큼 나쁘고 독한 여자는 아니야. 자리가 어색했잖 아." "누가 뭐래요? 참내, 예전 태수형에겐 잘만 그러더만. 밥 사준다고 오랬으면 서. 첫 눈 오면 눈 쌓인 거릴 같이 걷자고 하고선. 옛 사랑 나타나니까 나는 하 나도 생각나지 않죠? 나는 뭐 사랑하는 사람 생길 때까지의 심심풀이였나봐. 에 구 불쌍한 박철수." "야, 말은 똑바로 해. 니가 내게 뭔대 그런 말을 해? 눈 올때 나 보고 싶었음 니가 연락해야지. 내가 옛사랑을 다시 만나던 니가 무슨 상관이야?" "누가 상관을 한다고 그래요? 지금 상황은 누나가 내 방 들어와서 따지고 있는 거에요." "나를 다시는 안 볼 작정이야? 나 지금 심하게 기분 상했어?" 다시는 안 볼거다? 조금 위협적인 말이다. 여기서 지면 난 놀이개감 밖엔 되지 않는다. "다시 안 볼거다. 왜?" "뭐야?" "나 볼 시간이나 있을까? 어색해서 자리 피하는 행동이 그 승주씨가 준 꽃다발 을 꼭 껴안고 승주씨 걸음걸이와 보조 맞춰서 간 거였나? 어디가서 뭐 했어요? 보조석에 다소곳이 앉은 모습이 다시 만났으니 어디 멀리 같이 가고 싶어하는 표 정이더만..." "기분 나쁘다 너?" "나도 기분 나빠요. 누나가 지금 나한테 따지는 태도가 날 아주 어리게 보는 것 같네요? 누나가 누굴 만나던, 어떤 짓을 하던 난 동생이고 후배니까 그냥 계 속 누나를 좋아해 주겠지하는 생각. 웃기지 마요. 누나 분명 이 생각도 했을 거 야. 승주를 애인이라 생각해도 아닌 척 나와 밋밋한 인연을 남겨 놓고 필요할 땐 부려 먹는다." "너 그 말 취소해." "못해." "너 내가 다른 남자 만날 때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잖아." "이 번 경우는 다르지. 나하고 생일 파티 하고 난 바로 다음 날이야. 아무리 내 가 동생이고 후배지만 숨어 있는 걸 봤으면서 아무런 말도 없이 그냥 지나치냐? 그것도 오라고 해 놓고선. 그 때 마로니에 공원 갔을 때도 마찬가지야. 누나는 그 승주란 사람을 항상 생각하고 있었으면서 그 걸 잊기 위해 나를 가지고 논 거 잖아." "말이 심하다 너? 넌 연하잖아. 넌 내가 아끼는 후배야. 승주는 승주고 넌 너 야." 누나의 목소리가 갑자기 약간 울먹거리는 투다. "연하는 뭐 감정도 없어요? 연하는 뭐 남자 아닌가? 승주씨 만났으니까 이제 승 주 형 힘들게 하지 말아요. 아무나 보고 꼬리치지 말라구요." "짝!" 으씨, 씨바. 졸라 아프다. "너 나뻐!" 누나의 눈동자에 눈물이 조금 고여 있다. 저거 아무래도 자기 분에 못이겨 나 온 눈물 같다.
"누나 방 가서 울어요. 누나 이제 안 볼거야 씨." "너 나보고 사귀잔 말도 한 번 없었잖아. 그래 놓구서는..." "아휴, 그랬으면 나만 비참한 꼴 당했지. 그리고 난 연상에겐 관심없다 그랬잖 아요!" "그랬으면 그냥 동생처럼 굴어야지." "동생이라 생각하면 왜 따져요? 순전히 자기 편한대로야." "나도 너 이제 안 만나." "아끼는 동생이라고 말했으면서 이런 말 했다고 걷어 차냐? 만나던지 말던지." "쾅!" "쾅!" "쾅!" 앞에 것은 누나가 문을 쌔게 닫아서 난 소리고 바로 뒤에 것은 누나가 내 방문 에 발길질해서 난 소리다. 그리고 그 다음 것은 누나 방문 닫히는 소리다. 정희 누나 오면 누나 빈자리 매꿔 줄거다. 안 본다고 그러면 내가 쫄 줄 아냐? 나 지 금 쫄고 있다. 저 여자가 내게 왜 저럴까? 창 가에 놓여 있는 장미 나무를 보았다. 아까 내 방에 온 그 여자를 생각하고 산 장미 나무다. 내게 삐삐를 쳐 주던 사람, 공주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연 락하기를 꺼려 하던 저 여자는 새벽에 우리 집에 전화한 적도 있다. 옥수수 서 리 할 때 망을 봐주던 여자. 수영장에서 내 목숨을 구해준 여자. 그리고 내가 사 랑한 여자다. 다시 안 보면 내가 상당히 골치 아파질 것 같다. 내가 지금 뭔 짓 을 한거야? 어제 괜히 이상한 생각을 해 가지고 말이야. 지금 가서 잘못했다고 한 번 빌어 볼까? 나를 아끼긴 아꼈던 사람이다. 내가 서운한 감정 들어 너무 심 한 말을 했던 건 아닐까? 우쒸, 그런 거 같다. 가서 빌자. 사나이 한 번 칼을 뽑 았으면 밀고 나가야지. 꼴랑 십분도 지나지 않아 이랬다 저랬다 하냐? 아니다. 이런 생각했다가 나중에 후회한다. 그래, 내가 누나 애인도 아닌데 왜 저딴 대화 를 누나와 나누었어야 했나? 그래도 내 자존심도 있으니까 딱 10 분만 있다가 싹 싹 빌러 가야지. 시계 바늘 참 늦게 간다. 누나가 외출을 했을려나? 누나 방문 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누나는 방에 있다. 이제 가자. "딩동!" "누나 문 좀 열어 봐요." 대답이 없다. "내가 잘 못했다니까." "야이, 홍은정. 문 좀 열어 봐요." "누나, 승주 형 왔어요." "야이, 잘난 여자야. 제가 잘 못 했어요." "진짜 안 본다 그럼." 문 앞에다 대고 독백을 소리내어 지르니까 졸라 쪽팔리다. 쪽팔린게 지금 문제 야. 경험상 빨리 빌면 누나는 내게 크게 삐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문이 슬며시 열였다. 누나의 눈 동자가 빨갛다. 울었나 보다. 그깐 일로 우냐. 태수형 찰 때 모습과 그 옆동 빌라 사는 놈과 말싸움 할 때도 그렇고 승주형이 다시 왔을 때도 울지 않았던 게. 겨우 나이 어린 나랑 싸웠다고 우냐? 공주 맞 어?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의 눈물에 약하다. 여자도 마찬가지일까? 돌아서 손가 락에 침을 발라 눈에다 찍었다. 누나가 갑자기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뀌었 다. "나 다시 너 안 볼거야." "내가 잘못했어요 누나. 정희 누나가 여기 온다는 말 듣고 내가 간이 커졌나 봐 요. 누나가 승주형 만나는 거 아무렇지도 않아요."
"내가 그런 말 듣는다고 맘이 풀어 질 것 같니?" "누나하고 나하고 좋았던 기억들이 많잖아요." "너, 말 잘했다. 그래 그 좋았던 기억들이 많은데 난 이유도 모른채 그 기억들 을 잊어야 할 뻔 했어.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니?" 할 뻔 했어? 벌써 풀어 진거네 뭐. 박철수 승리다. 그래도 좀 더 빌어야지. "내가 아직 어리잖아요. 속이 좁았어요." "허? 너도 너 유리한 쪽으로 말하네? 그럴때만 연하지?" "화 풀어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혹시나 니가 이렇게 내 곁을 떠날까 봐 얼마나 가슴 졸였 는 줄 아니?" "누나도 나 좋아하는 거에요?" "그럼 좋아하지. 아닌 거 같니?" "흠, 그래도..." 사랑하는 감정으로 좋아하는 건 아니죠? 이렇게 물어 보고 싶은데... "이번만 참는다?" "화풀린 거에요?"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너에겐 왜 이렇게 화가 빨리 풀리는지." "헤, 잘생겼잖아요." "그래." 누나가 내 볼을 사랑스럽게 어루 만졌다. 아까 때릴 때는 언제고... 사랑스런 모습이다. 승주 그 새끼가 밉다. 왜 나타난겨? "승주형하고 잘 되길 빌어 줄게요. 이제 옹졸해지지 않으렵니다. 나 참 변덕스 럽죠?" "사람 감정이란게 그렇지 뭐. 나 승주하고 잘 될 수 있을까?" "왜요?" "다시 만났지만 예전 감정은 아냐." "그래도 사랑했던 사람이니까 곧 예전으로 돌아 가겠죠." "그럴까?" "누나 방에서 차 한잔 얻어 먹을게요." "그래, 문 앞에서 우리가 뭐하는 짓이니?" "누나 시험 잘 봐요. 우리 학교 대학원 다닐 수 있도록 말이에요." "정희가 오면 더 재밌겠지?" "헤헤, 그렇겠네요." 재밌을까? 누나하고 단 둘이 있을 때 보다 승주 그 새끼랑 정희 누나가 끼어든 미래가 더 재밌을까? 오늘 나도 쇼를 했다. 친구로 생각하며 누나라 생각하며 감정을 죽이며 이 여자 곁에 버틸수 있을 때 까지 버텨 보자. 나는 그 날 밤부터 다시 누나 곁으로 돌아 갔다. 도서관을 나가기 시작했고, 한 동안 예전처럼 지냈다. 뭐 나도 시험 기간이라 도서관을 나가야 했다. 커다란 엿을 두개 샀다. 포크 하나 샀고, 두루마리 휴지 하나 샀다. "나, 대학원 시험 본다고 이렇게나 많이 사왔어?" "착각하지 마요. 누나 몫은 이 엿 하나 뿐이야. 나머진 내 동생꺼." "아참, 너에게 수능 볼 동생이 있지?" "응. 누나 시험 잘 봐요." 엿 하나를 꺼내 주었다.
"그럴게." "나는 내일 동생 시험 때문에 이만." "동생에게 나도 합격 빌어 줬다고 얘기해 줘?" "우리 동생은 누나 몰라요." 수능 시험 아침에 내가 직접 운전해서 동생을 시험장까지 데려다 주었다. "잘 봐." "내가 대학 가면 꼭 오빠 애인 만들어 줄게." "시험 보러 들어가는 애가 쓸데 없는 말 한다." "오빠는 내 우상이야." "다른 집엔 두살 터울 남매끼린 많이 싸운다 그러더만." "어릴 때부터 아빠랑 엄마가 오빠에게 대들면 야단쳤잖아." "참 신기하지 그치? 난 구박받았고 넌 귀하게 컸는데, 왜 너한테 그렇게 교육시 켰을까?" "그게 좋잖아." "모르겠단 말이야. 같은 말썽이라도 니가 저지르면 용서가 됐고 내가 저지르면 야단 맞았던 적이 많은데 너하고 나하고 싸우면 널 야단쳤어." "후후. 나 이제 들어간다? 시험 잘 볼게." "그래 임마. 올해는 안전하게 원서 함 넣어 보자." "특차로 합격해 줄게." 내년엔 또 하나의 응원군이 생기겠군요. 우리 여동생 공부 잘하고 이쁜이에요. 내 동생이지만 참 예쁩니다. 앞에 등장하 지 않았던 것은 공부하느라 바빴기 때문입니다. 최근 이년간 나하고 대화 나누 는 시간이 적었지만 친남매 사이거든요. 내 말 한마디면 꿈벅 죽는애에요. 날 서 럽게 했던 여자들아 두고 보자. 내 여동생, 아버지가 참 곱게 길렀어요. 나 처럼 막 키우지 않았거든요. 같은 국민학교를 다녔는데 학창 시절 나 쟤 오빠라는 이유 때문에 제법 거들먹 거리 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쟤 중 고등학생일 때 쟤 짝사랑 한 놈들이 우리 집 앞까 지 따라 온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에요. 중학생에서부터 고등학생까지. 아, 대학생 도 한 명 따라 온 적 있어요. 이름이 이 하늘이랬나? 내 여동생 따라 온 놈 중 한 놈을 잘 못 팼다가 저 파출소 끌려 간 적 있어요. 우리 여동생 수희는 정희 누나도 인정한 우리 동네 귀염둥이였지요. 그런 내 동생이 올해 못다 이룬 대학 생의 꿈을 내년엔 꼭 이루기를 바랍니다. 제가 좀 기가 죽겠지만, 한의대 거 뭐 좋다고... 걔 성적이면 이대 약대정돈 문제 없을텐데... 참, 우리집이 한약방 하 지. 아 그렇구나. "시험 잘 봤어?" "응. 오빠, 올 크리스마스는 내가 곁에 있어 줄게." "치. 오빠도 만날 사람 있어." "웃기지마." 으이쒸. 나에겐 미소 하나 남겨주고 승주 그 새끼에게로 가 버리는 누나. 누나가 대학 원 합격하던 그 날 난 방학이 시작됐는데도 불구하고 서울로 올라가지 않고 자취 생활을 하며 누나를 축하해 주기 위해 학교를 갔었다. 승주 그 새끼가 어떻게 알 았는지 율전까지 찾아 왔었다. 시험 치기 전에 엿까지 먹였건만 누나는 내게 어 슬픈 미소 하나만을 남겨 준 채 그 새끼에게로 가 버렸다. 섧어라... 또 한 판 싸울까? 성격 좋고 맘씨 착한 내가 참자.
밤에 홀로 내 자취방에 누워 있다. 베개를 베고 누나가 준 커다란 호랑이 인형 을 발 밑에 깔고 그렇게 누워 있다. 마지막 달 12 월이 벌써 두 날짜를 차버렸 다. "딩동." "여긴 왜 왔어요?" "왜 오긴. 너 서울 안 갔어?" "안 갔으니까 여깄지. 애인 만났으면서 일찍 돌아 왔네요?" "우리 아직 애인 사이로 만나는 거 아니야." "그럼 무슨 사인데? 별 이상한 짓 하고 있어." "너 또 삐칠까 봐 일찍 돌아 왔다. 너 배고프지?" "라면 끊여 줄까요?" "이게 뭘까?" 누나가 등 뒤로 숨겼던 넓다란 판때기를 꺼내었다. 피자구만. 나 피자 별로 안 좋아하는데... "무슨 피자에요?" "슈퍼 슈프림." "나 피자 별로 안좋아해요." "난 좋아해." "그럼 자기가 먹을려고 사온거네." "응. 나 다 못먹으니까 너도 좀 먹어." "틈만 주면 자기가 공주라는 걸 일깨우네요?" "응." 누나하고 내 자취방 방바닥에 신문지 깔고 앉아서 피자를 먹었다. 제법 따끈하 다. 꼴랑 승주 만나서 예 근처에서 놀았나 보다. 멀어 봤자 수원이다. 콜라 한 병을 옆에 끼고 누나랑 마주 앉아 피자를 먹었다. 호호, 저 여자 피자 먹는 모습 이 제법 귀엽다. 혓바닥은 왜 내미냐? 피자도 그런대로 먹을 만 하네. "애인 만났으면 오래 놀다 와야지?" "치, 너 아까 표정 보니까 또 질투하는 것 같던데? 넌 바로 근처에 살지만 승주 는 멀리서 왔잖니." "왜 지레 겁먹고 그래요? 나 태연해지기로 했어요. 누나가 애인 만나는데 날 왜 신경쓰나?" "너 삐치지 마?" "나 안 삐쳤어요." "나 합격해서 기쁘지?" "응. 뭐 자기 학교 대학원도 떨어지면 죽어야지." "너 씨. 그래도 공부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약사 고시나 준비 잘해요. 근데 승주형은 어떻게 알고 왔대요? 갑자기 발표 난 거 아닌가?" "저 번 주부터 계속 연락이 왔었어. 언제 합격 발표 나냐구? 왜만하면 다 합격 하는 거라 챙겨주지 않아도 된다 그랬는데, 예전에 자기가 내게 소홀했던 걸 만 외하고 싶은지 꼭 오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오라고 연락 했어." "그렇게 소상히 알려 주지 않아도 돼요." "너 삐치면 무서워." "아휴, 높으신 공주분이 절 무서워해요?" "참, 너 여기 몇 일 더 있다 가라." "왜요?" "정희가 한 삼일 정도 내 방 신세를 질거야. 내일 온다고 그러네?" "그래요? 그럴까? 그러지 뭐."
누나는 더 이상 핏자를 먹지 못하고 내가 먹는 모습을 쳐다 보고만 있다. "맛있니?" "누나도 먹어요." "나는 더 못 먹겠어." 피자 별로 안좋아하지만 자취생이 먹는 걸 마다하리... 누나 꼴랑 두조각 먹었 다. 나머지 다 내가 먹었다. "다음 부턴 치킨이나 족발 같은 걸로 사오세요." "다 먹어 놓고선..." "커억! 어 좋다." "야, 숙녀 앞에선 고개 돌리고 트림 해." "누나가 무슨 숙녀야. 나 그냥 동생하기로 했어요. 누나는 내게 있어 더 이상 여자가 아니야." "그래?" 누나가 약간 서운한 표정이다. 에구, 그런 마음먹고 태연하게 지내고 있지만 곧 또 한계가 올 것 같다. 여자를 어떻게 여자로 안 볼수가 있냐.
34 34 회 추운 겨울 아침이 좋다. 창을 열고 아침 공기를 마셨다. 장미 나무도 한 번쯤 찬 공기를 마실 필요가 있다. 이른 아침은 아니지만 서리는 창 틀에 그대로 남 아 있었다. 오늘 제법 춥겠다. 멀리 보이는 학교 분위기는 썰렁하다. 가방을 챙 겼다. 아침을 먹었다. 집이었다면 엄마가 차려 주시는 따끈한 밥을 부담없이 많이 먹 을 수 있었을 테지만 어떤 여자가 온다고 오늘은 집에 가지 못할 것 같다. 도서관에선 내 자리까지 잡아 논 누나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내 자리를 왜 잡아 놓았을까? 옆 자리에다 왜 가방을 올려 놓았을까? 사방이 다 빈자리다. 대부분 빈자리지만 그래도 자기 옆 좌석에 가방을 올려 놓은 건 자기는 예쁘기 때문에 남학생 누군가가 앉을 것이라 생각했나 보다. 저 공주병을 누가 치료해 주나? 공부하는 누나 옆으로 가 앉았다. 누나 가방을 치우자 그 밑에 뭔가 궁금 한 서류 봉투만한 종이 봉투가 놓여져 있었다. 누나는 공부하는 척 나를 쳐다 보 지 않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래." 좀 쳐다 봐라. "누나 가방 가져 가요. 그리고 이 종이 봉투는 뭐야?" "어제 하나 샀어. 너 가져." "뭔대?" "목도리." 내꺼야? 호호. 나 마후라 목도리 있는데... 어제 언제 샀을까? "승주 형 만났을 때 산거에요?" "아니, 헤어지고 돌아 오다." "시장에 떨이로 파는거지?" "나는 싸구려는 안 사. 어느 옷 점을 지나치다 마네킨 목에 걸려 있는 게 예뻐 서 하나 샀어." "승주형이나 주지?" "승주보다 너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너 주는거야."
"내가 옷걸이는 좋지, 암. 뜯어 봐도 돼요?" "그러렴." 후후, 마후라 같은 목도리는 아니지만 제법 좋아 보인다. 음, 올 겨울 목은 따 뜻하겠구만. 어울려 보이냐? 당연히 좋은 조화를 이루겠지. "괜찮아 보여?" "응, 그런대로." 좀 솔직해라. 졸라 잘 어울려 보이잖아. "누나는 공부하고 있어요." "왜? 넌 가방만 던져 놓고 바로 갈려구?" "도서관 나온 것만도 나에겐 대단한 일이야. 열심히 하고 있어요." 목에 목도리를 감고 도서관에서 정문까지 거만하게 걸었다. 보는 사람들이 너 무 없다. 방학이라 학교가 썰렁하다. 어디 사람 많은 곳이 없나 생각하나 전철로 뛰었다. 바로 서울로 갔다. 깜박 잊 고 있었다. 오늘 울 동생 원서 넣는 날이다. 기집애가 시험 잘 봤다더니 다른 사 람들도 잘 본 모양이다. 특차는 낙방했다. 목도리를 날리며 신사역에서 울 집까지 거의 일키로 미터가 넘는 거리를 뛰었 다. "너 왜 이제와 임마." 계단을 뛰어 올라 가는데 약방에 계시던 울 아버지가 근엄하게 꾸짖었다. "헥헥, 제 방에 전화 놔주세요. 수희는 원서 넣으러 갔어요?" "오후에 간단다." "아 예, 제가 데리고 갔다 오겠습니다." "그래라. 차 열쇠 내 서제 서람에 있을거다." "오늘도 제가 기름 넣어야 합니까?" "당연하지." "지하철 타고 갔다 오겠습니다." 집에 들어 갔더니 못보던 신발이 있었다. 예쁜 여자 구두. 누구야? 수희 얘가 구두를 샀나? 새 구두는 아니다. "똑!똑!" "누구세요?" "나다." "어! 오빠 왔어? 들어 와." 동생 방으로 들어 갔다. 저게 오늘 원서 집어 넣는 학생의 자세냐? "그쪽은 누구세요?" 방에는 여자가 둘이 있었다. 동생 얼굴에 열심히 화장을 해 주고 있는 제법 예 쁜 숙녀가 하나 있었다. "오빠는 얘 모르나? 중,고등학교 때 우리집에 자주 왔었는데. 중학교때도 고등 학교 때도 내 단짝이었던 은정이잖아." 은정이? 왜 하필이면 이름이 은정이야. 전에 본 것 같기도 하지만 낯선 얼굴이 다. "안녕하세요? 전 오빠 기억하는데... 서은정입니다." "아, 네." "왠 존댓말?" 이것아, 숙녀를 처음 보았을 땐 존댓말을 해야지. 수희 친구면 대학 일년생이거 나 아니면 같은 재수생일텐데 은정이라는 애는 제법 성숙한 숙녀의 모습이다. "하던 일 계속 해요." 화장발이 무섭구나. 방 바닥에 앉아 한참 동안 내 동생이 변신해 가는 모습을
관찰했다. 19 살에서 22 살로 수수함에서 섹쉬함으로. 저 애가 화장 기술이 제법 있나 보다. "은정이는 대학생이에요?" "네. 수희하고 친했는데 작년엔 거의 못만났어요. 올해는 다시 뭉칠려구요." "얘, 올해도 떨어지면요?" "오빠!" "미안. 은정이는 어디 학교 학생이에요?" "말 놓으세요. 숙대 약학과 95 학번입니다." 제법 예의가 바르네. 뭐여, 얘도 약대생이여? "참 예쁘네요." "쿠쿠, 오빠한테 안 예뻐 보이는 여자가 있긴 있어?" "야!" "오빠 목도리나 좀 풀고 얘기해라." 은정이라는 애가 참 귀엽게 웃는다. "수희도 참 예쁘잖아요." 헤헤, 자네도 참 예쁘다. 동생 방을 나왔다. 은정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대체로 예쁜가? 은정이 누나 와 같은 이름에 같은 약대생? 쟤하고 묘한 인연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가? 거울에 내 얼굴을 비춰 보았다. 목도리를 감은 내 모습이 겨울 나그네에 나 오는 강우성 같다. 푸하하! 잘 생겼단 말이지. 식탁에 앉아 라면을 먹었다. 어머니가 끓여 주시는 라면은 참 맛있다. "이 번엔 합격하겠지요?" "그래야 되는데." "만약 떨어지면. 지방 쪽으로 내려 보내야 되나?" "꼭 한의대 갈 필요 있나? 불안해서 어떻게 지방 내려 보내니. 그리고 성적이 아깝잖아. 약대 보낼까?" "약대요? 쩝." 엄마와 식탁에 앉아 동생의 진로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특차에서 아쉽게 떨어졌으니 합격하겠지?" "공부 잘하는 애들은 그냥 갈데 많아 좋겠구나 했는데 그것도 아닌가 봐요." "니가 공부를 조금만 잘했어도 지방쪽으로라도 한의대 넣어 봤을텐데. 그러면 쟤 아무데나 편히 가라고 할수도 있고 말이야." "수희는 우리집에서 참 귀한 자식이군요." "원서 넣을 때 따라가?" "그럴게요. 근데 쟤 자신 있나 봐요. 화장하고 난리도 아니던데?" "불안하니까 그런거야. 어제 코트하고 겨울 정장한 벌 사줬다." "나는요?" "넌 집에 없었잖아." "너무 하십니다 어머니. 저도 무스탕 같은거 하나 사주면 안될까요?" "무스탕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럼 롱코트라도?" "다리도 짧은게." "저 제법 큰 키에요." "수희 합격하면 고려해 볼게." 미치겠네 진짜. 지이잉! 어랏 삐삐가 왔네. 음성이다. "야, 너 어디로 사라진거야? 밥 안 먹을거야? 오후에 정희 온다고 했으니까 빨
리 연락 해." 아, 맞다. 목도리 자랑하려다 서울까지 왔구나. 전화 해 줘야 겠다. "나 저녁에 갈게요." "왜?" "오늘 동생 원서 넣는대요." "그래? 따라 갈려구?" "네. 일 마치고 저녁에 갈게요." "니 가방은?" "누나는 가방 두개 들 힘이 없어요?" "니 가방은 좀 무식하게 생겼잖아." "야이 씨, 그렇게 살면 말년에 고생해요." "알았어. 나 오후에 자리 뺄거니까 도서관으로 오지말고 내 방으로 와." "그러지요. 참, 오늘 누나하고 이름 같은 애가 우리 집에 왔어요. 내 동생 친군 데 무지 예뻐요." "호호, 그래? 원래 은정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다 예뻐." "걔나 꼬셔 볼까?" "후후, 또 차일려구?" "내가 미팅 가서 많이 당했지만 여자한테 차인 적은 없어요." "그게 차인거지. 니 맘대로 하세요." "나중에 봐요." "그래." 원서 넣으러 가는 애가 참 멋을 부렸다. 수희는 어제 산 옷을 입고 아주 숙녀같 은 모습으로 방에서 나왔다. "오빠, 나 예뻐?" "그런대로." "솔직히 예쁘지?" "그런대로." "그런 우유부단한 성격을 가지면 오빠 애인 못 만든다? 나 화장하니까 연예인 같지?" "그런대로." "은정이 얘는 예뻐?" "응, 참 예쁘다." 수희도 예쁘지만 은정이의 모습도 참 예쁘다. 아까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서 있으니까 키도 제법 크고 긴 머리칼을 찰랑거는게 상당히 고급스럽게 보였 다. 은정이 누나보다 큰 것 같다. 수희보다 한 삼,사 센티미터 커 보인다. 은정 이 누나의 외모와 맞 먹을 만한 저 애와 나란히 걷는 모습을 은정이 누나에게 보 여주고 싶다. 그러면 누나가 기가 좀 죽겠지? 별로 그럴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 만 나도 가능성을 보일 수는 있다. 푸하하, 얘한테 잘해 줘야 겠다. "수희 넌 키가 얼마야?" "나? 164 정도 돼." "그럼 친구는 167 이나 8 정도 되겠다?" "흠, 169 에요." 어휴, 고운 미소가 남자 여럿 잡겠다. "너 표낸다? 키도 막 가르쳐 주고?" "응?" 뭘 표낸다는거야? 진짜 지하철 타고 가고 싶었는데, 동생 친구도 같이 간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아
버지 차를 빌렸다. 타자마자 계기판에 들어 오는 빨간 불. 기름 넣어라. 울 동생도 상당히 공주 기질이 있는 것 같다. 떡 상석에 앉았다. "이게 학교냐? 공원이지. 저 병원이라고 적어 놓은 건 꼭 호텔 같다. 공원 앞 에 있는 호텔." "오빠야 동생이 다닐 학교를 그런식으로 말하면 안돼지." "아직 너네 학교 아니다? 자가용 들어 갈 수 있나? 입장료 받지 않나?" "들어 가 보자." "관광하는 셈 치고 들어 가 보지. 돈을 쓸데 없는 데 참 많이 틀어 박았다." "뭐야?" "그렇지 않냐? 우리 학교 와 바. 허허 벌판에 참 경제적으로 지어 났다?" "수원에 있죠?" 동생 친구가 내가 어디 다니고 있는 줄 아나 봐? "수원 시내에 있으면 내가 말도 안 해. 깡촌이야 깡촌." "왜 거기로 가셨어요?" "난 대학로에 있는 줄 알았지." "울 오빠 좀 바보야." 경쟁율을 별로 높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이 원서 접수 마지막 날은 아니다. 원 서 넣을 때 주위 원서 넣는 남학생들이 동생하고 은정이란 애를 힐끔 쳐다 본 다. 은정이란 애가 참 예뻐 보이고 동생도 참 예쁜 축에 속해서 그런가 보다. 후 후, 그래도 성숙미나 조숙함, 그리고 섹시함에서 은정이 누나에게 못 미치는 것 같다. 은정이란 애는 나하고 사귀면 참 좋을 듯한 나이지만 내 느낌엔 어려만 보 인다. 나이든 여자들하고 어울리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그 나이 여자들에게 시선 이 맞추어졌나 보다. 나 지금 분명 앞서가고 있다. 은정이란 애가 나랑 무슨 관 계라고 이런 생각을 하나? 앞날이 불길하다. 은정이란 애를 집까지 태워 주었다. 아직 해도 지지 않은 이른 시간이지만 내 동생이 걔를 집에다 보내 버렸다. 그 덕에 은정이란 애가 사는 아파트를 알게 되 었다. 잠원동이면 우리 동네 근처네. 하기야 수희하고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으 니 우리 집하고 멀지 않은 곳에 살았겠지. "태워줘서 고마워요." "아, 아네요. 내 동생 때문에 오히려 번거로운 걸음을 했을텐데..." "다음에 보면 말 놓으세요." 다음에? 그래 동생하고 어울리다 보면 자주 볼 수도 있겠다. 잘 가라. "오빠 쟤 예쁘지?" 친구가 사라지자 동생은 내 옆으로 와 앉았다. "제법 예쁘네." "쟤 남자 친구 없거든?" "그래서?" "소개시켜 줄까?" "벌써 소개 받았잖아." "내가 생각했던 것과 오빠 태도가 다르다?" "뭘? 니가 생각했던 건 뭔대?" "헤헤, 빨리 소개시켜줘 언제 날 잡아 좋은 자리 한 번 마련하자. 이럴 줄 알았 는데." "나 많이 가지고 논다 너?" "쟤가 오빠한테 관심있는 거 모르지?"
"허허, 기분 좋은 말이네. 쟤가 날 언제 봤다구?" "오빠 상당히 거만하게 나오네? 이런 반응 보이면 안돼는데?" "왜? 니가 생각한 반응은 또 뭔대?" "내가 생각한 거? 나한테 관심이 있어? 그럼 이야기 다 끝났네. 당장 사귀자고 연락해 줘라." "후후, 쟤가 진짜 나에게 관심이 있었어?" "오빠 쟤 진짜 기억안나?" "모르겠는데?" "오빠가 쟤하고 제법 마주쳤는데? 오빠가 내 방 문 함부로 열었다가 나하고 걔 하고 속 옷만 입고 있는 걸 본 적도 있고, 오빠가 쟤 여드름도 짜 주었을 걸. 걔 울었던 적도 있잖아. 얼굴에 뽀드락지 난 거 기어이 여드름이라고 우기더니 가만히 있는 애 얼굴 잡고 난리쳤던 거 기억 안나? 오빠 시화 만들어 놓았던 것 중에 쟤가 하나 들고 갔을 걸." "엉? 걔가 아까 쟤니? 걔는 그렇게 예쁘지 않았는데. 머리도 졸라 짧았고 선 머 슴애 같았는데." "조금 기억이 나니? 내가 친구가 주었다면서 발렌타인 데이 때 초컬릿 준 건 기 억나?" "그게 걔가 준거였니?" "응. 여자는 변하는 거야." "몰라. 매치가 안돼. 걔 이름이 은정이었어?" "너무한다." "너하고 나하고 자주 보질 못했잖아. 너네들 중학생일 때 난 고등학생이라 바빴 고, 나 대학 가서는 니가 바빴으니. 야, 나 이제 대학 4 학년이다. 벌써 4-5 년 지 난 일인데 내가 어떻게 일일히 기억하니." "그렇다고 이름도 까 먹냐?" "너 내 친구중에 이름 기억하는 애 있냐?" "그건 그렇고. 쟤하고 자주 만날 수 있도록 다리 놔 줄까?" "됐어 임마. 니 걱정이나 해. 아직 합격 발표 안 났어?" "왠 배짱? 혼자 사는게 적응이 됐나 봐?" 우쒸, 나 좋아 하는 여자들 많아. 은정이 누나, 정희 누나. 다들 나이가 좀 많 다는 게 흠이지만... 집에 들어 갔다가 동생 앉혀 놓고 몇 마디 했다. 합격해야지 암. "실험 할 게 있어서요. 저 이 번주는 자취방에 있어야돼요. 오늘은 수희 때문 에 잠깐 올라 온거에요." "그래. 그럼 넌 가봐." 매정하신 부모님. 뭐 먹을거라도 좀 챙겨 주시지. 저녁만 먹고 집에 올 때 모 습 그대로 집을 떠났다. 집 앞에 주차 시켜 놓은 승용차. 저거 탈 사람 없다. 아까, 내 돈 내고 기름 넣 은 게 졸라 아까웠다. 아버지 어짜피 출근 하실 때 삼층에서 일층 아니십니까. 푸하하, 내 손에 들려 있는 자동차 키. 바로 차를 타고 안전벨트를 맸다. 부르 렁. 자취방 앞에다 차를 주차시켜 놓고 누나 방 창을 보았다. 불이 켜져 있다. 주 차 시켜 놓은 차가 좀 불안하다. 괜히 가져 온 것 같다. 아버지가 내일 당장 차 가져 오라고 할 것 같다. 아니 지금 당장 갖다 놓으라고 하실 것도 같다. 내 삐 삐 번호 알까? 에이, 모르겠다. "딩동!"
"누구세요?" 이 목소린 정희누나 목소리? "접니다. 박철수." 문을 열었다. 반가운 정희 누나의 모습이다. "오랜만이다 너?" "그렇죠? 하하." 웃다가 웃음이 싹 가셨다. 정희 누나 뒤에 있는 은정이 누나의 모습이 참 곱지 만 어색했다. 테이블 의자에 앉아 있는 은정이 누나 맞은 편에 꼴 보기 싫은 놈 이 앉아 있다. 내가 즐겨 앉던 자리에 승주 그 새끼가 앉아 있다. 저 새끼 왜 온 겨. "어제 보고 또 보죠?" "네." "내가 불렀어. 상가에 대해서 아는게 있어야지. 우리 학교 말고 다른 데도 알 아 보고 다녔지." 정희 누나가 내 표정을 보더니 말했다. 승주 저 새끼가 뭐 좀 아나? "상가는 구했어요?"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잖아. 일단 우리 학교 앞에 좋은 상가가 하나 있긴 해. 들어 와서 얘기 해." 누나 침대에 가 앉았다. 승주 저 새끼가 곁눈질 해 나를 쳐다 보았다. 확 들어 누워 버릴까 보다. 그려, 나 이 침대에서 자 보기도 한 사람이여? 부럽냐? "승주형은 올 해 졸업반이에요?" 이야기 하기 싫었지만 그냥 예의상. "아니에요. 복학을 애매하게 해서 내 년에 코스모스 졸업할 겁니다." "아, 네. 전공이 어떻게 되시는데요?" "도시 공학과에 다녀요." 도시 공학? 도시 공학과에 다니는 새끼가 상가에 대해 뭘 안다고... "제가 형이 어느 학교 다니는 거 모르거든요? 물어 봐도 돼요?" "시립대 다녀요." "부동산 시세 같은 거 잘 아시나 봐요?" "아니에요. 그냥 뭐." 은정이 누나가 승주 형보다 나쪽을 더 살핀다. 내 말투가 조금 거슬릴거다. "난 이제 가볼게?" "그럴래?" 그래 가라 새끼야. 제법 눈치가 있구만. 승주 형은 내가 자리에 앉자, 채 십분 이 지나지 않아 일어 서 집에 갈 차비를 했다. 나란 존재가 좀 어색했나? 승주형 이 일어 나자 은정이 누나도 따라 일어 섰다. 조심스런 모습이다. 서로 잘 어울 려 보이기도 한다. 두 사람 사이엔 장난스러움이 없어 보였다. 다소곳하고 수줍 어 하는 연인의 모습이다. 부럽다. "집이 어디신데요?" 내가 왜 물어 봤지? "왕십리 쪽이라 지금 출발해도 10 시 훨씬 넘겨야 집에 들어 갈 거에요." 새끼가 끝까지 존댓말 쓰네. "정희 누나는 오늘 여기서 잘 거에요?" "응." "승주형은 직접 운전해서 온 거에요?" "하하, 저 자가용 없어요. 전철 타고 가야죠." "에?" 은정이 누나가 내 손을 잡더니 쿡쿡 찌른다. 맞다, 저 형은 내가 그때 그 삼류 영화를 봤던 것을 모르겠지? 그때는 그럼 아버지 차였나?
저 형 태도가 날 어려워 하는 것 같다. 내게 잘못한 거 하나도 없는 자식인 데, 내가 너무 쌀쌀맞게 대한 거 같다. 아버지 차도 오늘 밤 여기 두어서는 아니 되겠다 싶다. "제가 태워 드릴게요." "엉?" 정희 누나가 날 빤히 쳐다 보며 묻는다. 나도 베스트 드라이버에요. "너 차가지고 왔니?" "네. 아무래도 집에 차를 갖다 놔야 겠어요. 저 아버지 차 몰고 왔거든요." "아, 안 그래도 되요." "어짜피 가야 돼요. 말도 안하고 가져 온 거라." "다시 오기 힘들텐데." "집에 들어 가 자면 돼요." 내가 왜 이럴까. 적과의 동행이다. 은정이 누나의 표정이 별로 좋지 못하다. 억지로 승주 새끼를 차에다 태웠다. 정희 누나는 춥다고 방에서 나오지 않았지 만 은정이 누나는 배웅을 했다. "조심해서 가." "알았어요." "나중에 연락할게." 승주 새끼가 은정이 누나에게 고운 미소를 보냈다. 누나도 그런 미소를 지어 보 인다. "그래. 잘 가." 보조석에 앉혔지만 거의 침묵한 채 서울로 왔다. 왕십리 역 가까이 와서야 몇 마디 나누었다. 승주 형이 질문을 던졌기 때문에 대답을 해 주어야 했다. "은정이와는 어떻게 알게 됐어요?" "에? 정희 누나 때문이지만 은정이 누나가 내게 잘못을 했죠. 흙탕물을 튀겼거 든요." "흠, 은정이 좋아해요?" "에?" "부러운 모습이네요. 은정이 곁에 철수씨 만큼 자연스러워 보였던 사람이 없었 던 것 같아요." "아, 친한 후배라서 그렇지요 뭐." "은정이가 철수씨한테는 조금 조심스러워 하더군요." 에? 안 그런데. 자네한테 훨씬 더 조심스럽더만. "헛! 전혀 아닙니다." "난 항상 은정이에게 조심스러웠죠. 지금도 자신있게 대할 수 없어요." 그런 말을 내게 왜 하냐. "너무 소극적이지 마세요." "흠. 자기 앞에 보이는 모습이 너무 당당하면 그 사람에게 소극적으로 변할수 밖엔 없어요. 날 좋아한다면서 내 마음을 참 아프게 했지요." "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습죠? 요즘은 은정이에게서 그 동안 한 번도 느끼지 못 한 그런 감정을 느껴요." 사랑한다는 말 같은 거 하려구? "다시 만났으니까 조금 다르겠죠." "후후, 전에 내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그래도 날 대할 땐 내가 젤 앞이었어요. 그런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죠. 근데 요즘 은정이의 모습을 보면 내가 누군가에 게 밀려 난 느낌이에요."
무슨 말이야. 무시하자. "저기 왕십리 역 보이거든요. 어디 세워 드릴까요?" "제일 가까운 곳에 세워 주세요." "그러죠." 좋겠다 새꺄. 은정이 누나와 오래 사귄거 자랑하냐? 밀려난 거 같어? 맨날 동생 으로만 취급 받는 나는 죽어야 되게? "태워줘서 편히 왔습니다. 고마워요." "뭘요." "훗, 은정이에게 저처럼 그런 모습은 보이지 마세요." "에?" "조심해서 가십시오." 내가 니가 했던 그런 삼류 버라어티 쇼를 할 수 있을 것 같냐? 집 앞에다 차를 갖다 놓았다. 지금 시각 열 시 오분. 아슬 아슬 하다. 집으로 들어 갈까. 다시 율전으로 내려 갈까? 쌈쟁이 할머니가 웬 보따리를 들고 지나가 는 모습을 보았다. 율전 가자. 신도림 역에서 아슬하게 수원 가는 전차를 잡아 탈수 있었다. 자취방 앞에 도착 하니까 11 시 50 분 가까이 됐다. 늦은 밤이다. 오늘 참 많이 돌아 다닌 거 같다. 피곤하다. 그냥 자야지. 내 방으로 그냥 들어 갈까 하다 은정이 누나 방에 불 빛이 새어 나와서 초인종 을 한 번 눌러 보았다. "누구세요?" "아직 안 자요?" "응? 너 다시 내려 온거야?" 그럼 여기 안 오고 이렇게 말할 수 있나? 아무리 내가 거리감 없는 연하지만 그 렇게 잠옷을 입고 나와 문을 열면 안돼지. "정희 누나는요?" "침대에 있어. 걔 옷차림이 지금 좀 야해." "후후. 안 자고 뭐했어요?" "이런 저런 얘기. 들어 올래?" "들어가도 돼요?" "허, 니가 그런 말 하니까 좀 우습다. 승주는 잘 갔니?" "네." "데려다 줘서 고마워." "훗, 뭐 둘이 사귄다고 대신 감사하는 거에요?" "아니 그것보다 오늘 니가 좀 성숙해 보여서." "하하, 저 원래 성숙해요." "에그, 칭찬 좀 해주면 도로 돌아오지?" 누나 방에 들어 갔다. 이불을 감싸고 날 빤히 쳐다 보는 정희 누나에게 괜히 장 난을 치고 싶었다. "야, 밤 늦게 숙녀 방을 이렇게 꺼림낌 없이 들어와도 되는거야?" "여기 누나 방 아니잖아요." 화장 지운 정희 누나의 얼굴을 본 게 얼마만이냐. "철수야, 차 한잔 끓여 줄까?" "차 한잔 하고 가도 될까요?" "그래라." 은정이 누나가 차 끓이는 동안 이불을 감싸고 안은 정희 누나 곁에 앉아 보았
다. "누나 얼만큼 야한 옷차림인데?" "궁금해?" "나 같이 반가운 사람이 왔는데도 침대에서 나올 생각을 안했다? 이거 문제 있 는데?" 이불을 잡아 당기는 포즈를 취해 보았다. "난 은정이 하고 틀리다?" "뭐가?" "이불 당기면 그 날로 넌 날 책임져야 돼." 그러니까 더 궁금하다. 눈 딱감고 이불을 잡아 당겨 볼까? 지가 야하면 얼마나 야하다구... "책임질게." "야!" 잠시간의 어색한 눈이 마주쳤다. 정희 누나가 이불을 꽉 붙들고 있는 줄 알았는 데, 그래서 잡아 당겼는데 이불은 힘없이 내게로 와 버렸다. 누나의 허리 아래까 지 이불은 걷어져 버렸다. "누나 안 추워요?" "너 죽었어." 그날 밤 참 남사스런 꼴을 봤다. 아무리 입을 게 없다고 저딴 걸 얻어 입었냐. 정희 누나는 씩씩 거리며 침대 속에 있다. 나하고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그렇 게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이건 비밀인데, 나 어릴적에 엄마 따라 대중탕 갔다 가 정희 누나 알몸도 봤다. 뭐 같이 놀았는데... 은정이 누나와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며 키득 거렸다. "정희 누나가 입고 있는 저거 누나 꺼죠?" "응." "저런 거 입고 잤었어요?" "너 한 번 봤었잖아. 니가 잠옷 사주전에 간 혹 저거 입고 잤었어." "그게 저거였어요?" "응." "참 자연스럽게 말하네요." "뭐 어때." 고개를 돌렸다. 정희 누나에게 한 마디 하고 싶어서... 정희 누나를 빼꼼히 쳐 다 보았다. 속옷 같은 하얀 잠 옷에 정희 누나 진짜 속 옷이 확연이 드러 났었 다. 물론 위만 봤지만. "나이를 생각해라. 까만 브라자 뭐냐. 다 비치더라 다 비쳐." "너 씨. 내 나이가 어때서?" "너네 둘인 진짜 친했나 보구나?" 은정이 누나가 날 보며 고운 미소를 보냈다. 지금 상황이 그런 미소 보낼 때가 아니지. 하여튼 나이 많은 여자들은 나이 어린 남자에게 별 조심성이라던지 부끄 러워 하는 표정을 잘 보이지 않는다. 서럽다. 내가 정희 누나를 은정이 누나보 다 덜 부담스러워 하는 건 아마 사소한 감정 하나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래 사소한 감정이다. 그 감정만 없어진다면 은정이 누나에게도 정희 누나에게 하 는 것처럼 할 수 있다. 이마가 아니라 입술에 키스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35 회.
내가 대학원 합격한 날 철수는 한 동안 내 곁에 없었어요. 도서관엔 철수의 가 방은 있었지만 그는 어디로 달아나고 없었지요. 약속했던 것이 있어 승주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승주가 최근 자주 연락을 해 주 었어요. 내가 합격하는 날 축하해 주겠다고. 승주는 그도 학교 다니느라 바빴지만 애써 우리 학교까지 내려 왔었습니다. 오 후의 해가 키작은 나무에도 가려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승주가 도서관으로 왔을 때 하필이면 철수가 곁에 있었습니다. 철수는 왜 그런지 승주에게 과민 반응을 보였었지요. 그 날도 표정이 좋지 못했습니다. 차라리 철수가 곁에 없었다면 승 주와 좀 더 오붓한 만남을 가졌을 겁니다. 내가 철수를 왜 신경쓰는 지,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철수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면 나도 어색해져요. 녀석이 내 뱉 었던 다신 날 보지 않겠다던 말, 그 말 때문에 울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이 현실이 될 것 같아 내 앞으로의 생활이 그려지지 않을 것 같은 막막함, 알수 없 는 답답함으로 울음이 나왔습니다. 아마 그런 생각을 했던 내 분에 못 이겨서 울 었을 거에요. 다시 그런 생각을 하기가 싫습니다. 철수 녀석에게 끌려 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녀석이 내게 삐치는 것이 요즘은 장난 같지 않습니다. 승주 와 내가 만났을 때, 철수의 표정은 또 삐칠 것만 같은 모습이었어요. 그 녀석 표정에도 신경을 써야하는 내가 조금 우스워요. 철수 걔가 뭔대, 좋아 하는 것은 맞지만 결코 다른 감정이 서려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대 도 자꾸 끌려가는 느낌이 드는 것은... 승주와 오래 있을 수 없었습니다. 수원 역 근처는 지저분 합니다. 허름한 커피숖에서 차 한잔과 한 시간 가량의 대화를 공유하고선 승주를 보냈습니다. 저녁이 기운 시간에 승주와 버스 터미널 까지 걸었습니다. 호호, 내가 남자를 바래다 주는 일도 생기네요. 아니다, 철수 와는 이런 일 많이 해 보았지요 참. 승주가 떠나면서 내게 남겼던 말이 승주의 어색한 미소와 함께 그를 서글프게 합니다. "만났던 사람에게서 사랑 고백을 받아 본 적 있니?" "응? 그럼 제법 있었지." "그 사람들하고 어색해졌었지?" "응." "나 때문이었니?" "그런 셈이지." "왜 몰랐을까?" "뭘?" "그때의 니 마음을." "후후, 그 말이 꽤 멋있는데?" "잊고 사는 것 보단 어색해도 만나는 게 낫겠지?" "그 말을 왜 해?" "넌 사람들과 잘 어울려 다녔지만 마음 속에 간직하는 사람은 한 명을 넘지 못 하는 것 같다." "무슨 말이야?" "그 매력을 예전에 알았으면 좋았을텐데. 이 번엔 내가 어색해 지겠어." "뭐야 너? 그런 말 하면 나 못알아 들어." "그래도 잊혀지진 말자." "야!" "나 갈게. 흠!" 승주는 버스 터미널에서 미소를 남겨 주고 가볍게 떠났습니다.
철수가 삐치기 전에 달래 놓아야 겠지요. 저 참 착한 누난거 같아요. 솔직히 철 수가 삐치면 좀 겁나요. 전에는 삐치는 게 표가 났는데, 승주를 만나고 나서부터는 삐치면 저대로 돌아 서 가버릴 것도 같거든요. 녀석은 먹을 것에 약하지요. 그래서 핏자 한 판을 샀습니다. 자취방으로 갈 때 까지 이 피자가 식지는 않을 겁니다. 전철 역으로 가는 길에 화려하진 않지만 포 근하게 밝은 쇼윈도의 목도리를 감고 있는 마네킨을 보았습니다. 녀석이 간혹 말 하던 눈 오는 날의 풍경. 철수는 목도리 얘기를 자주 했었지요. 그래서 그 마네 킨의 목도리를 빼앗아 왔습니다. 자취방으로 오는 길은 수원역 근처 보다 훨씬 정감이 있고 깨끗하네요. 후후, 먹을 것으로 철수를 달랜 탓에 다음 날 도서관에서 철수를 볼 수 있었지 요. 목도리는 괜히 사 주었네요. 철수는 목도리를 목에 감더니 과시하 듯 웃고 는 도서관을 떠나 버렸습니다. 그런 철수의 모습이 좋긴 하지만 저런 모습에 이 성의 감정을 품고 있다면 무척이나 쪽 팔릴 것 같습니다. 어머, 쪽 팔리다라는 말은 내 신분에 맞지 않는 말인데... 이 녀석 어디로 간 걸까. 철수는 점심 시간이 지났는데도 나타나지 않았습니 다. 서울을 갔었군요. 공부도 하지 않을 녀석이 책은 무식하게 많이도 가져왔네요. 가방이 무거웠어 요. 정희 때문에 오후에 도서관 자리를 뺐습니다. 녀석의 가방을 메고, 내 가방 은 한 쪽 어깨에 걸고 학교를 나왔습니다. 철수 때문에 내 모습이 많이도 구겨지 는군요. 점심은 정희와 내 방에서 중국 음식으로 해결했지요. 침대에 앉은 정희가 여기 온 이유를 말하네요. "조금만 쉬었다가 상가 알아 보러 가자." "너 돈은 있니?" "없어. 내가 모은 돈이랬자 2000 만원짜리 적금 든 것 밖에는..." "야, 대단하다." "푸후, 아직 이년을 더 부어야 돼." "뭐야?" "부모님이 기반은 잡아 주신댔어. 그 뒤로는 죽이되던 밥이 되던 내 소관이야. 나 시집갈 때 아무것도 해 줄 필요 없으니 지금 도와 달라고 했어. 나 약국 차렸 다가 망하면 시집도 못가." "대단한 용기다." "우리 둘이 돌아다니는 것보다 누구 남자 한 명 데리고 다니는 게 낫겠지? 아무 래도 여자 둘은 좀 쉽게 볼 것 같아." "그런가?" "철수 데리고 다니자. 근데 이 녀석 어디 간거야?" "서울에 있대. 저녁이 되어야 온다는데." "내가 오는 걸 알고서도 서울로 내뺏다 이거지." "동생 원서 넣으러 가는 데 따라 간댔어." "그럼, 승주씨 데리고 다니자." "엉?" "왜? 너 요즘 승주씨 다시 만난다면서?" "그 사람 있는 데서 여기까지 거리가 얼만데." "삐삐쳐 봐. 남자는 부려 먹을 수 있을 때 부려 먹어야 돼. 내가 겪어봐서 아는 데, 만날 수 있는 사이라면 껀수를 자주 만들어야 돼." "호호, 니가 지금 날 가르치니?" "난 너처럼 건성으로 사람을 사귀지는 않았잖아."
"내가 사람을 건성으로 사귀었다구? 넌 사귀는 사람에게도 감정 표현을 잘 못했 잖아." "후후, 감정이라는 건 금방 생겼다 없어질 수도 있고, 다시 생겨나기도 해. 사 귄다는 것은 그 사람을 알아 가는거야. 자기도 잘 못하면서..." "내가 뭘 못해. 최소한 난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먼저 고백은 할 줄 아는 사람이야. 그래 그 사람을 알고 나니까 헤어지고 싶던?" "시비거는거야 지금?" "아니다. 오래 붙어 있으면 정이 드는 걸까?" "응. 여자는 정 때문에 우는거래." "철수가 승주를 보면 과민반응을 보여." "그럴만도 하지." "왜?" "철수가 승주를 적이라 생각했나 보지." "무슨 적?" "연적" "치. 둘이 상대가 되니?" "그건 니 마음에 달린 거구. 빨리 승주씨 불러." "올까?" "올거야. 약속이 잡혀 있어도 올거야 아마." 삐삐를 쳤더니 금방 전화가 왔어요. 그리고 한 마디 불평도 없이 여기로 온다 고 했습니다. "정말 쉽게 대답하네. 여기로 바로 온대." "그렇지? 나도 그랬거든. 그가 보고 싶을 땐, 그가 무슨 부탁을 하던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던 적이 많아." "그래. " "철수가 도서관 나가는 것도 그 이유일 걸." "그건 좀 틀려. 가방만 던져 놓고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더 많아. 기분 상하면 아예 나오지 않는 경우도 많아." "후후, 너 연하를 사귀어 볼 마음은 없니?" "내가 철수를?" "나는 철수라고는 말 안했다? 너 말하는 투가 승주씨에게 예전 감정은 아닌가 보구나?"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승주는 나에게 자연스럽게 행동하려고 노력한 탓에 조금 어색합니다. 그와의 거 리감이 왜 생겼는지. 일년의 공백 때문이겠지요. 그가 군대간 이년 동안의 시간 을 놓고 보면 그건 변명거리가 안되겠군요. 사랑했다 헤어진 연인들이 다시 만나 는 경우보다 그대로 잊어버리고 사는 경우가 더 많지요. 그것 때문이라 생각해 봅니다. "아무래도 학교 앞이 낫겠지요?" "근데 다른 곳 보다 가격이 높네요." "그게 제일 문제에요." "왜 아파트 단지 내를 생각해 보지." "거긴 재미가 없을 것 같아요." 그냥 그런 사이. 정희와 승주는 나를 통하여 알게 된 그냥 그런 사이다. 둘의 대화는 저런 식일 수 밖에 없다. 요즘 승주를 만나 나누는 대화들이 저런 대화들 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마음을 여는 대화는 다소 어려운 말들로 변해 갔
다. "내 방에서 차한잔 하고 가." "그래도 되니?" "안될 이유라도 있어?" "아니, 하하 숙녀가 혼자 사는 방이라." 철수는 자기 집 드나들 듯 들락 거리는데. "정희도 같이 있잖아." 승주는 조용하게 내 방에 있었습니다. 테이블 의자에 앉아 주는 차를 마시며 고 운 표정으로 내 방을 둘러 보았지요. 저런 모습에 내가 반했던 것 같습니다. 나 에게 태연한 모습, 뭔가 사색하는 듯하고 고독해 보이는... "방이 예쁘다." "내가 좀 꾸몄지." "흠, 이런 곳에서 살았구나." "자취 시작한 지 오래 되지 않았어." "밤에 혼자 있으면 좀 쓸쓸하지 않니? 잠이 오지 않을 때도 있을텐데." "전혀." "아,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게 하는 녀석이 근처에 살아요. 내가 자취할 때도 자 주 찾아 와 재롱을 떨고 가던 애가 바로 옆 방에 사는데요 뭘." "아, 그 철수라는 후배말이군요." "이 옆 방, 옆방이 걔 방이에요." 정희가 조금 얄밉네요. 왜 내 얘기를 자기가 하고 그런담. "오늘은 고마웠어요." "뭘요." "그래 오늘 고마웠어. 내 친구 때문에 고생했지?" "아니야." "다음에 보답할게. 오늘은 이만 돌아가고 곧 크리스마스니까 그때 한 번 보자." "그래 이제 일어서야겠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집에 도착하면 열시 넘겠 다." 내가 승주를 쫓아내는 듯한 인상이 드네요. 이제 여덟시인데. 승주와 철수를 다 시 마주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미안한 마음에 승주와 다음 만날 약속을 잡고 말았습니다. "전철 타고 갈거야?" "응. 크리스마스 때까진 시간 내기 힘든거야?" "약사고시 때문에. 나 계속 여기서 공부해야 돼." "약대는 4 학년 때도 많이 바쁘구나. 그래 열심히 하고 크리스마스 때 한 번 보 자." "응?" "이브날 내가 한 턱 낼게. 그때는 서울에 있겠지?" "응. 그래 그때 만나자." 승주가 일어서려는 그 무렵에 철수가 내 방 초인종을 눌렀어요. 저 밴댕이 새끼 가 승주가 내 방에 있는 걸 보면 또 삐칠텐데... 철수는 삐치기 보다는 오히려 승주에게 친절을 보였어요. 의외였습니다. 승주와 나란히 서 있는 철수의 모습 이 결코 그 보다 작아 보이지 않았어요. 철수는 애써 여기로 내려 왔다가 승주 때문에 다시 서울로 갔습니다. 승주를 일찍 보내는 것이 미안했는데 철수의 행동 이 그 마음을 좀 들어 주었습니다. 철수가 고맙네요.
"철수가 좀 고맙네." "넌 밖에 나오지도 않았잖아.너 때문에 온 사람을 배웅도 안하냐?" "승주씨가 왜 나 때문에 왔니? 너 보고 싶으니까 왔지." "그래도 네 일 봐준거잖아." "니가 대신 고마워 했잖아. 그리고 철수가 차 태우고 갔는데 뭘." "그래, 어떻게 승주를 차에 태우고 다시 돌아 갈 생각을 했을까? 오면 고맙다 고 해야겠다." "고맙다? 왜?" "승주를 태워다 주었으니까." "네 사람인 승주를 남인 철수가 배려해 주어서 고맙다는 거야. 남인 승주에게 미안했는데, 네 사람인 철수가 그걸 만외해 줘서 고맙다는거야?" "너, 자꾸 그런식으로 얘기할래?" "아휴, 피곤하다. 우리 일찍 자자." "너 그렇게 입고 잘거야?" "아니, 내가 씻고 나올 동안 잠 옷하나 꺼내 줘." 오늘 정희가 좀 얄밉네요. 이 방에 내 잠옷이 세개가 있습니다. 그 중 두개는 철수가 준 것이지요. 철수가 내게 준 걸 정희가 입고 있는 걸 보면 좋아하지 않 겠지요. "야, 예쁘다. 너 이런 거 입고 잤었니?" "좀 야하지 않니?" "뭐, 우리 둘이만 있을 건데." "철수가 올지도 모르잖아." "걔가 어떻게 오니." "너 내일도 내 방에서 잘 거 아냐?" "괜찮아. 철수는 어릴 적에 목욕탕에서 같이 논 적도 있어." "응?" "걔 국민학교 2 학년때까지 엄마 따라 여탕 온 애야." "정말? 2 학년이면 제법 컸을 때잖아." "지금은 생각하기 힘든 일이지만 그 시절은 뭐 종종 있었던 일이잖아. 볼 것 다 본 사인데 이 정도야 가뿐하지." "그래도 이젠 성인인데." "어릴 때 기억이 너무 진하게 남아 있어서." "지금 철수가 사는 동네에 네가 살았던거야?" "응. 내가 중 2 때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지 아마." "많이 친했었나 보구나." "응, 아주 친했었지. 10 년 가까이 한 동네서 살았는데." "그래서 오래만에 만나도 나보다 더 거리감이 없어 보이는구나." "걱정 마, 걔가 내게 남자로 보일 일은 없을테니까." "걱정 말라니?" "혹시 질투할까봐." "야!" "내일은 철수하고 놀아야 겠다. 한 번 더 돌아다녀 보고 좋은 데 없으면 학교 앞에서 본 그곳으로 해야 겠어. 내일은 너 방해하지 않을게." "열쇠 주고 갈테니까 나 없으면 니가 문 열고 들어 와 있어. 그리고 철수 얘 오 늘 올 것 같애." "안 올걸. 나 보러 올려나? 아니다, 참."
"뭐가?" "오면 너 보러 오는거다." "너 자꾸 왜 그래?" "철수가 내게 고백한 게 있거든." "응?" "아직은 비밀이야. 쿠쿠, 잘하면 성공하겠는데?" "무슨 말이야?" "말해 버릴까?" "뭐야?" "다음에 얘기해 줄게." 이게 진짜. 철수가 정희에게 뭘 고백했을까요? 철수가 정희에게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말을 장난스럽게 내 뱉은 적이 제법 많지요. 장난스럽다고 그게 전 부 장난일리는 없다는 것을 압니다. 진지하게 고백했나? 그래 잘 놀아 봐라. 철수는 밤 늦게 다시 율전으로 내려 왔습니다. 아침에 봤었지만 참 반갑네요. 호호, 철수는 내 예상대로 내려 온거에요. "너 내일 나랑 좀 돌아 다니자?" "나 도서관 가야 돼." 우끼고 있네 짜식아. 오늘 도서관에 가방 던져 놓고 한 번 열어 보기나 했니? 철수에게 줄 커피를 준비하다 둘이 하는 얘기 때문에 웃음이 납니다. 정희도 우 끼네요. 볼 것 다 본 사이라면서, 저 정돈 가뿐하다면서 철수가 이불 한번 들쳤 다고 엄청 많이 패더군요. 불쌍한 박철수. "수희는 한의대 아니면 안된대?" "모르죠." 철수 가족에 대해서 나는 별로 아는게 없네요. 정희는 아직 나보다 철수에 대 해 아는게 많나 봅니다. "너 은정이 방에 이렇게 늦은 시간에도 자주 찾아 왔었니?" "응." "너네 둘이 사귀니?" "이씨." 야이 짜식아, 너랑 사귀면 내가 손핸데 니가 왜 화를 내냐? 그나저나 아까 정희 에게 들었던 말을 물어봐야 겠습니다. 철수에게 커피잔을 건네며 물어 보았습니 다. "야, 박철수." "왜요?" "너 정희에게 뭐 고백한게 있다며? 뭘 고백했는데?" 철수가 정희를 째려 보는게 무섭습니다. "혹시, 누나 그거 말한 거 아냐?" "아니야." "진짜?" "안 말했어." 철수가 정희 표정을 살피더니 안도의 한 숨을 내 쉬네요. 뭐야 저것들. 철수가 나를 보며 씩 웃습니다. 이불을 돌돌 말아 안고 있는 정희와 함께 침대에 앉아 있던 철수가 테이블 의자 에 가 앉으며 나를 쳐다 봅니다. "고백이란게 뭐 있겠습니까." "정희와 관계된거야?" "아니에요." "내가 아니라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하고 관계된 일일걸."
정희의 장난스런 말에 철수가 벌컥 화를 냈어요. "야!" "어쭈, 야?" "누나, 그러면 재미없어요?" "말 안해 걱정 마." 철수가 사랑하는 사람? 철수가 날 사랑하나? 푸후후, 그럴지도 모르지요. 아니 면 다른 사람 얘긴가요? 그러면 기분이 많이 나쁜데요. 철수는 정희에게 약이 올랐던지 자기 방으로 돌아 가기에 앞서 또 정희가 감고 있던 이불을 홱 들쳤지요. "야!" "보면 볼 수록 남사스럽네. 까만 브라자가 뭐냐? 추태다 추태. 이제 꼴랑 24 살 인게." "내일 당장 널 성희롱으로 고소할거다." "은정이 누나? 잘 자요." 철수가 정희의 말을 씹어 버리는군요. 흠, 둘이는 많은 시간을 이미 공유한 모 습입니다. 조금 부럽네요. 내가 철수와 지낸 2 년. 더 지속해야지요. 정희와 보 낸 시간 만큼은 말입니다. 정희는 내 방에서 이틀 밤을 지내고 갔습니다. 철수도 서울로 갔지요. 방학인 데 나 때문에 여기 계속 머물수는 없었겠지요. "너 그거 뭐야?" "이거 화분이요." "너 나무도 키워?" "응. 누나 주말에도 여기 있을 거에요?" "그래야지." "많이 바쁘네요?" "왜, 주말에 누나하고 데이트라도 하고 싶어?" "승주형이나 만나요." "만날 시간이 없을 것 같다." "누나 성탄절에는 뭐 할거야?" "응? 왜?" "승주형 만날 거에요?" "그럴것 같다." "음, 그래요?" "너 또 크리스마스 혼자 보내야 되는구나? 잘 부탁하면 내가 만나 줄수도 있 어." "됐어요. 승주형이나 만나요. 다음주에 한 번 내려 올게요. 정희 누나가 상가 계약하면 바빠 질거래요. 내가 좀 도와 주어야죠." "흠, 그래 내려 와. 그리고 새해 타종식 하는 거 또 보러가자. 정희도 꼬셔서 같이 가면 되겠다." "그럴까? 승주형은?" "너 왜 자꾸 승주를 꺼집어 넣는거야?" "애인인데 신경 쓰야 되지 않아요?" "우리 둘이 연인으로 만난 거 아니랬잖아." "열 내지 마요. 가끔씩 내려와 보리다." "나도 다음 주까지만 여기있다 서울 갈거야." "그럼 그 안에 몇 번 내려 오리다." 철수는 무거운 가방을 짊어 지고 한 팔로 화분을 감싸 안은 채 내 곁을 떠났습 니다.
하루를 나혼자 보내고 그 다음날 도 나혼자 보냈습니다. 그 혼자 있으니까 심심 하기도 하고 밤에 무섭기도 하네요. 철수가 없던 날이 제법 있었는데, 오늘은 방 학이라 사람들 흔적이 거의 없어 무섭네요. 내일 부터 귀가 시간을 조금 당겨야 겠습니다. 밤 길이 무서웠어요. 만날 껀수라... 정희의 말이 생각이 납니다. 철수에게 한 번 써먹어 볼까요? 이 게 투덜되지나 않을까 모르겠어요. "밤에 무섭다." "그 말하려고 이 밤에 삐삐를 쳤어요?" 니가 그럼 그렇지. "무섭다구 그냥. 너 다음주에 그냥 율전에 내려 와 있으면 안돼니?" "에?" "공부한다고 내려 와서 지내면 안돼냐구?" "그럴까?" 어, 바로 긍정의 답을 해? 녀석 답지 않은데요. "그럼 이 번 주말에 그냥 내려와라. 주말엔 나도 좀 쉬어야지. 수원가서 영화 도 보고 맛있는것도 사먹자." "그 승주형 놔두고 왜 나를 찾고 그래요?" "니가 더 재밌잖아." "그런가? 하하. 근데 이 번 주말은 약속이 있어요. 나 이번 주말에 여자 만나 요." "정희 만날거니?" "내가 만날 여자가 모두 연상 뿐이라는 그런 전 근대적 사고 방식은 버리세요. 은정이 만날거에요." "나? 나도 연상이잖아." "누나 말고 다른 은정이. 내 동생 친구 중에 은정이 있다 그랬잖아요." "그래? 잘 놀아라." 조금 기분 나쁘네요. "내가 다음주는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내려갈 테니까 너무 삐치지 마요." "내가 넌 줄 아니, 삐치게?" "열심히 공부 하세요. 무서운 얘기 해 줄까요?" "지금도 충분히 무서워. 하지 마." "나 서울 간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벌써 무서워 하나? 정 무서우면 내일부터 정 희 누나 불러서 같이 있어요." "걔 약국 오픈 준비 때문에 바쁘잖아. 나도 바빠. 밤에 혼자 있기가 무서울 뿐 이야." "다음 주 월요일 부터는 내가 안 무섭게 해 줄게요." "그래 봤자 뭐 일주일 뿐이잖아." "가지 마요? 잘 하면 일월 달에도 내려 가 있을 수 있는데." "흠, 새해는 나도 집에 있을거야. 다음 주에 꼭 와." "알았어요." 후후, 녀석도 내가 보고 싶긴 하나 보네요. 은정이가 누구야? 나잖아. 나만큼 예쁜가? 그럴리 없겠지. 승주에게 미안하다 그러고 이브 날 철수를 만날까? 모르겠다.
36 회 방학은 날 편하게 하긴 하지만 외롭게도 한다. 학교 앞 내 자취방을 떠나 온지
도 닷새가 지났다. 방학이면 늘 그랬듯이 할 일이 별로 없다. 아버지와 약속한 것이 있어 한약 배달 심부름을 하지만 오후에 잠깐이다. 여동생은 시험을 끝냈다 고 집에 잘 붙어 있질 않았다. 정희 누나는 학교 앞 상가를 택하기로 했다. 약 국 오픈 할 때까지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방에 혼자 있으면 자주 하는 일이 있다. 오전에 차운 공기를 마시기 위해 창을 열고, 창문 밖으로 사람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쳐다 보는 것. 지나치는 사람들이 외로움에 떨 듯 움츠려 있다. 쌈쟁이 할머니만 의기양양하게 아침 거리를 활보 한다. 흠, 은정이 누나는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내가 왜 은정이 누나를 저 할머니와 비교를 했을까. 은정이 누나에게 미안하다. 내 기억 속의 은정이 누 나가 참기 힘든 고운 모습으로 변해간다. 내 방에 있는 저 장미나무는 언제 쯤 꽃을 피울까? "오빠 이 번 주말에 시간 있지? 늘 집에서만 노는데 없을 리 없지." "시비 거는 거냐?" "내가 오빠에게 시비 걸어서 덕 될게 뭐 있다고. 이 번 주말에 은정이 좀 만나 줘라." "니가 은정이 누나를 어떻게 아냐?" "엉? 누나?" "아, 헛갈렸다. 그때 왔던 니 친구?" "응. 내가 울 오빠가 맨날 방 콕하고 있어 불쌍하다 했더니 한 번 만나 주겠 대." "너 내가 불쌍해 보이냐?" "응. 내가 보기에 오빠는 모자란게 하나도 없는데 매일 집에만 있잖아. 그래서 내가 은정이에게 부탁을 했어. 싫어하는 눈치가 아니어서 내가 밀어 부쳤어." 훗, 동생이 내 생각을 해 주는 건 고마운데 좀 처량하네요. "집에 있는 것도 괜찮아. 괜히 니 친구에게 부담 주지마." "부담이라니. 걔 오빠에게 마음이 있어. 맘 편히 가지고 토요일날 은정이 만 나." "말하는 투가 넌 나오지 않을 것 같다?" "둘이 좋은 시간 가져. 내가 나가면 걔가 오빠와 이야기 할 시간이 줄 거야." "하하. 내가 걔 혼자 만나 할 얘기가 많을 것 같냐? 나 니 친구에 대해 아는게 없어." "소개팅 하는 셈치고 만나. 영화를 보던지, 아니면 드라이버를 시켜 주던지." "나 소개팅이나 미팅 하면 성공하는 경우가 없었어. 너까지 어색해질라." "자신감을 가져. 오빠는 여자들이 싫어할 타입이 아니야." "그 말은 참 고맙다." "약속 잡는다?" "그래." 동생 때문에 소개팅도 해 보네요. 하하, 참 예쁜 애와의 소개팅 약속이 잡혔지 만 별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넌 소개팅이나 미팅 타입은 아닌가 보다." 은정이 누나의 말이 떠 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거 의 99 퍼센트 이상의 확율로 좋은 만남이 되지 못할겁니다. 소개팅에선 거의 무참히 깨졌지만 날 좋아하는 여자가 없는 건 아닙니다. 누나 들이 있지요. 은정이 누나가 밤에 무섭다며 내가 곁에 있어 주기를 바라네요. 푸 하하, 내가 은정이 누나의 데이트를 거절할 수 있는 신분까지 올라 갔습니다. 선 약만 되어 있지 않으면 은정이 누나와 좋은 시간을 가졌을 텐데...
토요일날 오전에 깨끗한 옷차림으로 내 방을 나왔다. 동생이 날 보더니 씩 웃으 며 옷 매무시를 다듬어 주었다. "멋있다." "너에게만 그렇게 보이겠지 뭐." "오빠는 약간 거만해 질 필요가 있어." "너 내가 얼마나 거만한지 모르는구나?" "오늘 잘 해? 은정이 정도면 퀸카지 않나?" "후후, 그래 그런 퀸카가 내가 눈에 차겠니?" "오빠도 절대 빠지지 않으니까 기죽지 마." 말은 이렇게 해도 솔직히 나 잘났습니다. 암, 그렇지 그렇고 말고. 아버지 차를 타고 나갔습니다. 소개팅에서 아픔을 받으면 바로 율전으로 내려 갈 요량으로 차를 끌고 나갔습니다. 잘난 누나에게 위로 받아야지요. 누나 나 오늘 소개팅 했는데 또 깨졌어요. 그러면 누나가 이러겠지.. 왜 그랬 지? 내가 보기엔 참 잘나 보이는데. 수희가 얘기해 준 약속 장소로 가지 않고 은정이 아파트로 갔다. 집에서 너무 일찍 출발을 한 탓도 있고, 차를 끌고 나온 이유도 있었다. 아파트 입구에 차를 주차시켜 놓고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같은 이름이 두개니까 내가 둘을 따 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큰 은정이 작은 은정이로 구분할까? 크기로 따지면 오늘 만날 은정이가 은정이 누나보다 크다. 그냥 은정이 누나와 은정이로 구분해야 겠 다. 아휴, 상당히 예쁘네요. 아파트 현관에서 뛰어 나오는 은정이를 보았다. 두 번 째 봤을 때도 예쁘면 쟤는 예쁜게 맞다. 차에서 내려 은정이를 불렀다. "은정...!" 그 호칭 참 애매하네. 은정씨? 은정아? 둘 다 어색하다. 그냥 이름 두자만 부르 고 어색하게 웃었다. "어! 오빠 여기서 저 기다린거에요?" "응." "왜, 약속 장소로 가지 않고?" "차를 끌고 나와서." "차? 차를 왜 가지고 나왔어요?" 사실대로 말할까? 바로 차이겠지? "드라이버나 할까 해서. 나 처음 만나서 이상한 짓 하지?" "아니에요. 어디로 갈 건데요?" 내가 아는데가 있나? 학교 가는 국도 주변 풍경도 괜찮다. 처음 만나서 에버랜 드 가자고 하면 어색하겠지? 겨울에 얼어 죽을 일 있나. 이왕 깨질 거. "에버랜드 갈래?" "네?" "춥겠지?" "아니에요. 거기 가요." 요즘 애들은 낯 선 사람에게 참 친하게 대하는구만. 후후, 작년 눈 올때 은정이 누나와 자연 농원 갔던 게 기억난다. 얘도 지금은 밝게 웃어도 나중엔 벌벌 떨겠지? 가까이서 보니까 낯이 좀 익다. 저 찰랑거리 는 긴 머릴 싹둑 잘라버리고 화장을 지운 다음 여드름 몇 개 심어 보면? 안경도 썼었지 아마? "오빠, 아직도 시 잘 써요?" "응? 너 그때 걔 맞니?"
"네?" "머리 짧고, 잘 울던 걔 맞냐구?" "기억나요?" "그렇게 긴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참 많이 변했다." "흠. 우리 집에 오빠가 준 시화가 아직 있어요." "내가 언제 시화도 줬었나?" "네. 제가 초컬릿 주었던 적 있잖아요. 수희가 고맙다면서 오빠 시화 하나 가져 다 주었어요. 그거 수희가 그냥 몰래 가져 온 거 알아요." "어? 그랬구나." "시가 좋아서 계속 가지고 있었어요. 누구를 생각하고 쓴 시에요?" 내가 어떻게 아냐. 난 없어 진 것도 모르는데... 저 먼 산에 오르고 싶다. 저 멀리 보이는 산 뒤 편의 풍경을 모르기에 사랑은 알지 못하는 데서 시작된다. 뭐여? 그게 다야? 내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고등학생일 때 만들었던 시화가 열 대여섯 개는 될 거다. 저렇게 짧게 쓴 것도 있나? 그때 감성에 의해 쓴 건가 보 다. 얘도 미소가 곱네. 으이씨, 괜히 에버랜드 데리고 왔다. 강적이다. "오빠, 바이킹 타러 가요." "바이킹? 춥지 않냐?" "시원해요." 청룡열차, 청룡열차보다 더 무서븐 공중에서 한 바퀴 도는 열차, 메달린 열차. 다 탔다. 나 지금 어지럽고 춥다. 근데 또 바이킹 타러 가자고? 추운데 바이킹 탔다. 속이 울렁거린다. "한 번 더 타요." 죽갔네 진짜. 나 운전해야 돼. 이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현을 이딴 식으로 하는 건 아닐까 의심이 간다. 내가 이 무슨 꼴이냐? 이 나이에 펌프카 타고 회전 목마까지 타야 되냐? 줄이라 도 길게 늘어 섰음 기다리는 동안 기운을 차릴텐데, 추운 날씨에 사람들이 많을 리 없다. 얘는 춥지도 않나? 은정이와 벤취에 나란히 앉았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 다. "겨울엔 야간 개장을 하지 않아 좀 아쉽네요." 참말로 다행이지. "이제 집에 가자." "오빠, 다시 만나 반가워요." "엉? 그래, 하하." 힘이 빠졌지만 집에는 가야겠지? 운전하기가 힘들다. 서울 가는 길에 국도 가 에 모셔져 있는 나무로 된 커피숖이 맘에 들어, 내 마음에 든게 아니다. 은정이 맘에 든거다. 잠시 차를 주차 시키고 차를 마셨다. "야, 분위기 좋다!" "그래." "한적한 곳에 도시 분위기의 찻집이 너무 좋다. 다음에도 한 번 데리고 와 줘
요." 다음에? 소개팅 해서 처음 들어보는 말 같다. 얘는 처음 볼 땐 참 다소곳해 보 이더니 내가 잘못 본 것 같다. 상당한 쾌활한 아가씨다. 차 마시다 말고 어디가냐? "여기요? 저 피아노 연주해 봐도 되죠?" "네. 그러세요." 커피숖에 피아노는 왜 갖다 놓았을까? 장식용으로? "제가 이 곡이 참 좋아서 연습했어요. 가요는 간단한 곡이라 며칠 만 연습하면 악보 없이도 연주가 가능해요." "너 피아노 칠 줄 아니?" "저 중 2 때까지 피아노 학원 다녔어요." "언제부터?" "6 살 때부터요." "야, 상당히 오래 다녔네?" "네." 은정이가 연주한 곡은 마법의 성인가 그 곡이였다. 상당히 아름다운 음이 은정 이가 치는 피아노에서 울려 나왔다. 커피숖에 있던 사람은 적었지만 연주가 끝나 자 박수 소리가 크게 나왔다. "오빠는 왜 박수 안쳐요?" "응?" 잠시 감상에 젖어 있었는데... 얘도 상당히 공주네요. "넌 미팅 나가면 인기가 많겠다?" "한 번 나가 봤는데 재미가 없었어요. 그리고 좀 난처했어요." "왜?" "미팅 나온 남학생 모두가 날 일지망으로 찍었어요. 같이 나간 친구들에게 미안 해서 그 이후로 나가지 않았어요." 은정이 누나에 필적하는 공주다. 그런 공주 앞에서 난 이상하게 떨지 않고 평상 심을 유지한 채 자연스럽게 말을 하고 있다. 신기하다. "여드름 나면 말해 내가 짜줄게." "그때 너무 아팠어요." "지금은 피부가 제법 곱네?" "감사. 아..." 왜 내가 은정이의 볼을 잡아 당겨 봤을까? 걔가 귀엽기도 했지만 내가 얼만큼 더 자연스러울 수 있을까 시험도 해보고 싶었다. 내 행동이 싫어서 얘가 날 예쁘 게 봐주지 않아도 된다는 심리 때문이었을까? "볼이 분바른 찹쌀 떡 같다." "하필이면 비유를 그런 곳에다?" "그게 얼마나 고운데. 나중에 찹쌀 떡 하나 사 줄게." "흠, 오빠는 여전히 재밌네요." "내가 예전에도 재미있었냐?" "네. 전 재밌는 사람이 좋아요. 그리고 순하게 생긴 사람이 좋구요." "난 좀 터프하고 섹쉬하게 생기지 않았냐?" "오빠는 참 순하게 생겼어요." 얘가 내가 애 패서 파출소 끌려 간 적이 있다는 건 모르나 보다. 집에 가다가 농담삼아 말한 것에 책임을 지기 위해 제과점에서 찹쌀 떡 한 상자 를 샀다. "진짜 하얗고 탱클탱클 하네요?"
"그렇지? 하얀게 참 곱지? 대입 시험 보는 학생에게 찹쌀떡을 주는 건 고운 대 학생활을 쫄깃하게 시작하라고 주는거야." "정말요?" "물론 내가 지어냈지." "호호. 오빠 크리스마스 이브날 뭐 할거에요?" "집에 있을거다." "후후. 수희 말이 맞구나." "뭐가?" "아니에요. 그럼 그 날 저랑 만나요. 집에 있지 말구요." 이상하네. 소개팅 해서 이런 적이 없었는데... "그날 넌 할 일 없니?" "시간 비워두죠 뭐. 오빠 학교 구경 시켜줘요." "우리 학교? 수원에 있는데." "대학로에도 있잖아요." "거긴 문과생들 학교야. 우리 학교 아냐." "성대 한 번 둘러 보고서 대학로에서 놀면 되잖아요." 그럴까? 푸하하! 인간 승리다. 박철수에게 이런 날도 오는구나. 기분으로 은정이를 집 앞까지 데려다 주고 문도 열어 주었다. 박철수 많이 오버한다. 악수도 했다. 여 자의 차가운 손은 매력적이다. 하늘에 달 떴다. 철수도 떴다. "잘 가." "오빠도 조심해서 들어 가세요. 찹쌀 떡 잘 먹을게요." "응." 집에 기분 좋게 들어 왔다. 수희가 날 보자 씽긋 웃는다. 수희 손에 전화기가 들려 있다. 조금 전까지 전화 통화를 한 듯 하다. "은정이가 오늘 즐거웠대." "전화 해 줘야 되니?" "됐어. 이제 내가 은정이에게 오빠를 띄워주면 오빠도 여자친구가 생길 수 있는 거야." "한 번 만나고 무슨 애인 사이가 되냐." "노력하란 뜻이지." "전화기 죠 봐." "은정이에게 전화 하려구? 방금까지 나랑 통화했어." "그래도 줘 봐." "은정이 맘에 들지?" 내 방에 들어 와서 전화를 때렸다. 푸하하! "은정이?" "철수씨구나." "철수씨?" "니가 먼저 내 이름 불렀잖아. 오늘 은정인 잘 만났니? 씨, 은정인 내 이름인 데..." "나 오늘 걔와 소개팅 한거였거든?" "그랬니?" "누나 나 성공했어요. 살다 보니 오늘 같은 날도 다 있네." "정말? 왠일이니?" "내가 잘 생겼잖아요." "좋겠다?"
"그럼." "예쁘던?" "예쁘다고 했잖아요." "언제 한 번 봐야겠네." "누구? 은정이?" "응." "누나가 걔를 왜 보는데?" "그냥 궁금하잖아. 철수가 소개팅 한 애니까." "참 내. 오늘은 안 무서워요?" "무서워." "내일 내려 갈까?" "소개팅 성공했다며?" "응, 걔가 먼저 애프터 신청했어요." "그럼 걔 만나야지?" "하하, 오늘 만났는데 다음 날 바로 만나자고 하면 속 보이잖아요." "사귈려면 속을 보여야 돼." "내일 내려갈까 말까?" "내일 진짜 내려 올래?" "그럴까 생각중이에요." "왜? 오늘 소개팅하고선 바로 내가 보고 싶은 건 왜일까?" "내가 즐거우니까 누나가 좀 초라하게 느껴져서." "초라하다는 말은 나와는 어울리지가 않지. 화려하다는 말이 내게 어울리지 암." "한 평생 참 화려하게 살겠수." "당연하지." "내일도 도서관 나갈거죠?" "응." "도서관으로 갈게요. 내일 점심 사 주세요?" "오전에 내려 올려구?" "그럴게요." "그래, 기다리고 있을게." "그럼 내일 봅시다." "응. 잘 자라 철수야." "누나도." 흠, 그 참 신기하다. 오늘 맘에 드는 애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그래서 마 음이 따스한데, 은정이에게서 받은 따스한 마음을 은정이 누나와 나누고 싶은 건 왜일까? 은정이 때문에 은정이 누나가 더 보고 싶다. 철수가 만났던 애가 누군지 궁금하네요. 나와 이름이 같은 소녀. 철수의 말이 조금 의심스럽긴 하지만, 오늘 철수는 좋은 만남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그의 웃 음소리가 가식적이지 않았거든요. 처음을 잘 못해서 그렇지 철수는 분명 여자들에게 호감을 줄 만한 사냅니다. 가 볍게 보일때가 많지만 넓은 마음을 느끼게 할 때도 있지요. 자주 내 마음을 움직 였는걸요. 내게 전화해서 오늘 있었던 일을 자랑하는 철수가 천진난만하여 좋습니다. 정 말 오늘 만난 애와 좋은 인연이 되어서 철수에게도 여자친구가 생기는 것은 아닐 까요? 그렇게 쉽게 되지는 않겠지요? 그럼 내가 떡 버티고 있는데... 헤, 내가 또 이상한 생각을 하네요.
내일 철수가 온다니 그의 표정을 살펴 봐야 겠습니다. 오전에 철수를 좀 기다렸어요. 언제 올까? 철수는 내가 생각한 시간에 오지 않 았습니다. "왜 삐삐쳤어요?" 오전 11 시경에 도서관을 나와 삐삐를 쳤지요. 12 시 경에 전화가 오더군요. "어디야?" "여기요? 역 앞 공중전화박스요." "어디역?" "울학교 역." "왔어?" "응." "그럼 방으로 와. 나 지금 내 방에 있어." "오늘 도서관 안 나갔어요?" "아니야. 잠시 자리 비운거야." "알았어요." 내 방문 앞 복도에서 철수가 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무겁게 보이는 가방, 한 손엔 화분을 들었네요. 저거 왜 계속 들고 다니는지 모르겠네요. 오는 모양새가 정말 일주일을 여기서 묵을 것 같습니다. 어제 소개팅 해서 성공했다는 말에 많 이 의심이 갑니다. "화분은 왜 들고오니?" "물 줘야죠." "집에는 사람이 없니?" "이 건 내사랑이란 말이에요. 내가 키울거에요." "치." "이거하고 가방하고 내 방 갖다 놓고 누나 방 갈게요." "밥 먹으러 안 가?" "짱개 시켜 먹죠 뭐." "오후에 영화나 보러 가자." "누나 공부 안 해요?" "어제 쉴려고 했는데 공부 했잖아." "왜, 승주형 만나지." "서울에 있잖아." "난 서울에 안 있었나?" "넌 부담이 안되잖아." "이씨." 아주 누워라 짜식아. 철수가 내 침대위에서 배게를 기대고 거의 눕다시피 앉아 있습니다. 승주는 방 안에 들어오는 것 조차 부담스러워 했는데... "너 소개팅 얘기해 봐." "성공했다니까. 크리스 마스 이브 때 보재요." "일주일이나 남았잖아. 성공했으면 바로 다시 만나야지." "특별한 날에 만나자 그러는 거 보면 몰라요?" "너 진짜 애프터 받은거야?" "왜 사람 말을 못 믿나?" "여기로 쪼로로 내려 온 모양새가 위로 받으러 온 것 같은데?" "신경 써서 내려왔더니?" "진짜 성공한거야?"
"아이쒸. 헨드폰 줘 봐요." "헨드폰은 뭐하게?" "확인시켜 줄게." 녀석이 헨드폰을 가져가더니 어디다 전화를 걸었습니다. "여보세요? 은정이니?" "철수 오빠에요?" 참 빨리도 헨드폰을 내 귀에 대었다가 떼네요. "어제 즐거웠어." "저도 즐거웠어요. 오늘은 집에서 쉬는거에요?" 또 내 귀에다 댔다 뺏어 가네요. 지금 철수와 내 머리가 닿아 있습니다. 둘이 헨드폰에 귀를 마주 대고 있으니까요. "아, 오늘은 학교에 볼 일이 있어서 수원 내려와 있어." "그래요? 계속 거기 있을거에요?" "당분간은. 좀 아쉽지?" "에? 네." "이브 날 내가 맛있는거 사줄게. 뭐 먹고 싶니?" "아니에요. 제가 사드릴게요. 어제 에버랜드 구경시켜 주고 커피 사준 거 보답 해야죠. 드라이버도 시켜 주었잖아요." 철수 이 녀석, 별 짓을 다했구만. "하하. 오늘은 뭐 할거니?" "나중에 수희 보기로 했어요." "그래, 재밌게 놀아라." "나중에 오빠 삐삐에다 음악 넣어드릴게요." "어? 니가 직접 연주해서?" "그럴게요." "일요일 재밌게 보내." "네, 오빠두요." 녀석이 전화 통화를 마치고 푸하하, 웃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째려 보는군요. "들었죠? 내가 이런 사람이야." 그래 들었다. 소녀의 말투와 억양이 철수에게 제법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흠, 좋겠다?" "올 해는 크리스마스 때 혼자가 아니다. 하하. 확, 화이트 크리스 마스나 되 라." "이제 나와는 자주 못 보겠네?" "왜?" "여자친구 사귀면 나 볼 시간이 있을까?" "지금 질투해요?" "그래 질투한다." "질투해요 그럼." 장난처럼 말했지만 거짓은 아니에요. 철수가 소개팅 한 번 한 걸로 이런 마음 이 든다는게 문제가 좀 있네요. 아까 전화기에서 듣던 나와 이름이 같던 소녀의 음성이 날 불안하게 합니다. 그 은정이란 애, 완전 여우 같았어요. 나긋한 목소 리로 대답을 하는게...
37 회
우쒸, 내가 이런 삼류 극장에도 오게 될 줄이야. 녀석에게 영화 보러 가자고 했 다가 겨울인데도 곰팡이 냄새가 나는 2 본 동시 상영관을 오게 되었네요. 나 혼자 선 이런 곳에 못 오지요. 해가 빨리 져 벌써 어둡기 시작하는데 나 혼자 이런 영 화관을 미쳤다고 옵니까. 철수라도 있으니까 오는 것이지요. "너 다른 여자하고 영화 볼때도 이런 극장에 오니?" "아니요." "좀 지저분하다." "극장 보고 오나? 영화 보고 오지. 얼마나 좋아요. 맘대로 앉을 수 있지. 영화 끝났다고 나가라고 하지도 않지." "두 편 다 보고 나갈거니?" "아니에요. 중경삼림만 보고 나가요." "그래, 빨리 나가자." "영화 시작도 안했는데?" 영화가 제법 재미있었어요. 철수 곁에 앉아 한참이나 미소를 지었지요. 연인들 이 극장을 자주 찾는 이유를 알겠네요. 영화를 보고 생각한 게 있지요. 녀석도 영화 속 주인공처럼 무디고, 사물들과 이야기 하며 살까요? 나도 영화 속 여 주 인공처럼 일을 저질러 봐야 겠어요. 일요일 오후는 그냥 포근했습니다. 녀석이 중경삼림 O.S.T 시디 하나를 사주었어 요. "난 시디로 들어." "테프도 괜찮아요." "싫어. 시디로 사 줘." "이거, 내 성의로 사주는 거에요. 사 주어야 되는게 아니고, 사주는 거란 말이 야." "그러니까 시디로 사 줘." "이 여자가 정말." 테프 보다는 시디가 비싸고 음질도 좋죠. 녀석이 뭔가 선물을 했기에 먹을 것으 로 보답했어요. 족발. 포장해서 방으로 가지고 왔죠. 저 음식은 내 방하고는 어울리지 않기에 철수 방 에서 먹었습니다. 간단하게 맥주도 곁들여서... "미개하게 그런 걸 어떻게 먹냐?" "발냄새 안 나요. 먹어봐요." "난 저기 살만 있는 거 먹을래." "어짜피 족발인데." "야, 맛있다!" "먹을만 하죠?" "응." "소주 사올걸 그랬나?" "빨리 뛰어가서 한 병 사와." "내가 사와야 돼요?" "응." 곧 시험이고 뭐고 없이 그 날 기분따라 소주 한 병 했지요. 기분 좋아요. 알딸딸 하게 취하니까 말이 술술 나오대요. 별로 마시지도 않았는데 그 날따라 빨리 취 했어요. 다 기억해요. 취하지 않은 것 같으면서 필름이 끊기는 수가 있지만, 또 많이 취해 헤롱됐지만 다 기억나는 수도 있거든요. "박 철수, 너 나 좋아하지?"
"응." "얼만큼 좋아하는데?" "그건 비밀이지. 유치하게 그런 걸 왜 물어요?" "재밌잖아. 나도 너 좋아하거든?" "그래서요?" "서로 좋아하니까 결혼하자." "이 여자가 지금 장난치나. 술은 같이 먹었는데 술주정은 혼자서 다하고 있어." "그럼 뽀뽀하자." "누나 방 가서 자." "하기 싫어? 그럼 내가 해 주까?" "머리로 받을려구?" "안 받을게." "그래도 안 해. 승주형하고나 해요." "이씨, 승주하고는 친구로 만난댔잖아." "나 상처 받기 싫어." "무슨 말이야?" "그런게 있어." "너, 사람에게 상처 받아 본 적 없구나?" "항상 상처 받고 살았다. 미팅 나가서 받았지. 정희 누나에게 받았지. 그리 고..." "후후, 어린 것." "자꾸 어리다 그러지마요." "알았어. 나 내 방가서 잘래." "그냥 가요?" "그럼 그냥 가지." "날 너무 가지고 노는 것 같애?" "아니야." 아침에 나 말짱하게 일어 났어요. 후후, 어제 밤의 일을 기억합니다. 철수도 귀 엽고 나도 귀엽네요. 나 철수 가지고 노는 것 아닙니다. 내가 철수를 대하는 표 현이 점점 내 마음에 들지 않게 변해 갑니다. 오죽 하겠니? 방학인데 도서관 나오고 싶었겠니? 철수는 오전 내내 엎드려 잤습 니다. 도서관에 가방도 가져 오지 않은채, 내게서 책 하나 달라더니 오전 내내 그거 베고 잤습니다. 저럴거면서 도서관을 왜 나왔냐? 나 때문에 나왔지요. 철수 가 또 내 마음 하나를 빼앗아 가네요. "으으으!" 잘 자던 철수가 갑자기 벌떡 일어 났습니다. 에구, 삐삐가 왔어나 보군요. 호주 머니를 뒤지더니 삐삐를 꺼냅니다. 철수는 참 우스운 꼴을 하고 있습니다. 헝컬 어진 머리, 바닥에 닿았던 곳이 빨갛게 변해 있고, 입가도 좀 지저분하네요. 그 런 모습으로 날 보며 웃습니다. 저런 걸 내가 좋아하고 있다니... "누나 헨드폰 잠깐 줘 봐요." "밖에 나가서 전화 해." "음성이야. 여기서 들어 보고 자던 잠 마저 자야지." "집에 가서 자." "누나 챙겨 줘야지." "안 챙겨 줘도 돼." "그래도 여기 있을거야. 핸드폰 줘봐요 빨리."
음성을 확인하던 철수가 씩 웃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날카로운 눈초리를 보내네 요. "들어 봐요." "내가 왜?" "들어 봐 빨리." 음성엔 피아노 음이 들리네요. 이렇게 길게 녹음할 수도 있나? "잡음이 심하다?" "직접 연주하면서 녹음했으니까 그렇죠. 은정인가 보다 하하. 근데 이 곡 제목 알아요?" "많이 들어 본 음인데 제목은 몰라." "무식하네요? 으으으." "너 또 왜 그래?" "잠시 핸드폰 다시 줘 봐요." 철수가 음성을 확인하더니 다시 날 째려 보네요. "또 피아노 음이니? 이리 줘 봐, 들어 줄게." 녀석이 핸드폰을 떡 꺼버렸습니다. 그리고 날 비웃 듯 거만하게 쳐다 봅니다. "좀 배워라 좀. 아까 그 곡은 바다르체프스카의 소녀의 기도,란 곡입니다. 그 연 습장에 열 번 적고 외워나요. 그런 유명한 곡도 모르다니. 무식하게시리." "그 은정이란 애가 피아노 전공이니?" "약대생이다 약대생. 같은 약대생인데 어찌 그리 다르냐." "너? 내가 그런 구박 받을 정도까지 추락하지 않았다?" "아, 고운 음악을 들었더니 다시 잠이 오네." 철수는 다시 엎드려 잤습니다. 그 은정이란 애 당돌하네요. 어떻게 생겼는지 정 말 궁금합니다. 그리 예쁘진 않나 보네요. 저런 성의를 보이는데도 철수가 내게 와 있는 걸 보면요. 호호. 그래도 가볍게 볼 애는 아닌 것 같네요. 철수와 같이 걷는 죽은 수수밭 길 가가 그렇게 무섭지 않습니다. 한 방에서 같 이 자는 건 아니지만 바로 근처에 철수가 자고 있다고 생각하니 어둔 밤이 무섭 지 않고 포근합니다. 그 참, 내가 연하에게 감정이 생겨 가는 건 아닌지... 철수는 목요일 날 짐을 챙겨 떠났어요. 푸하하! 웃더니 자기 동생이 합격했다는 기쁨으로 짐을 싸 서울로 올라 갔어요. 알지 못하는 철수의 동생이지만 축하를 해 주었지요. "너네 동생에게 뭐가 필요한지 한 번 물어 봐." "왜요?" "합격 선물 하나 하고 싶어서." "누나가 왜요?" "내 맘이다." "물어 보죠 뭐." "너 화분은 꼭 들고 다니는구나?" "응. 얘가 나 없으면 쓸쓸해 할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손 수 키워야 하기 때문 에..." "겨울엔 자주 물주는 게 아니야." "토요일까지 있을려고 했는데." "네 방 열쇠 좀 주고 가." "그건 왜?" "그냥." "내 방 뒤져 봤자 뭐 나올 것도 없어요." "안 뒤져."
"그런데 왜 열쇠를 달래요?" "혹시 승주 내려 오면 니 방에서 재울려구." "이씨." "그럼 내 방에서 재울까?" "승주형 내려 온대요?" "모르지 뭐." "같이 자지 마요?" "얘가 지금 무슨 말 하는거야?" "여깄어요." 야, 철수 방 열쇠를 얻었다. 호호, 중경삼림 따라 해 봤어요. 녀석이 뭐가 변했는지 알까요? 시험이 얼마 남 지도 않았는데 철수가 떠난 그 날 반나절을 투자했죠. 철수의 침대에 있던 인형들, 때가 좀 묻었더군요. 특히 제일 오래 철수의 침대 위에 있었던 노란 호랑이는 때가 많이 묻었더라구요. 다 빨았지요. 일일이 손으 로 빨았어요. 그리고 헤어 드라이기로 곱게 말렸습니다. 철수의 베개보도 빨아 주었지요. 철수의 침대위가 깨끗해 졌습니다. 눈치 챌 수 있을까? 95 년도 크리스마스는 일요일이었다. 화이트 크리스 마스는 되지 않았다. 철수에 게도 약속이 있었고, 은정이에게도 약속이 있었다. 크리스 마스 캐롤과 성탄 축가의 노래가 곳곳에 들리는 마로니에 공원의 모습은 참 정겨운 축제의 거리 같다. 무명 가수들의 열창 소리도 있었고, 수많은 연인들 의 모습도 있었다. 화려한 쇼윈도를 자랑하며 찻집들도 그 흥겨움을 돋구었고, 성탄 트리들을 내 걸고 많은 상가가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많은 사람들 속에 철수가 있었고, 은정이도 그 곳에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물드는 저녁 시간, 주위 조명들이 더 없이 아름다와 지는 그 시간, 마로니에 공원을 거니는 사람들 중에 어색한 마주침이 있다. 참 곱게도 하고 나왔다. 주인공 은정이는 승주 곁에 여운 미소를 띄고 팔짱을 낀 채 거리를 거닐다 철수를 만났다. 철수 곁에는 엑스트라 은정이가 나란히 서 있었다. 주인공 은정이는 철수를 보자 승주에게 꼈던 팔짱을 풀었고, 철수는 어 색하게 엑스트라 은정이의 손을 잡았다. "너도 여기 나왔니?" 은정이가 늘 하던 말투가 아니라 조심스럽다. "네. 승주형 오랜만이에요." 철수의 어감이 밝지 못하다. 승주와 은정이의 모습이 참 잘 어울려 보였기 때문 이다. 엑스트라 은정이 그냥 밝은 모습 그대로다. "오빠 아는 사람이에요?" "응. 우리 학교 선배. 그냥 아는 누나야." "아, 그래요. 안녕하세요." 주인공 은정이가 살포시 웃는다. 그리고 엑스트라 은정이에게 묻는다. "혹시 이름이 은정이?" "맞아요." "철수에게 얘기 자주 들었어. 나도 이름이 은정이고 약대생이야. 만나서 반가 워." "네. 전 언니 얘기 못 들었는데." "흠. 생각했던 것 보다 예쁘네?" "누나 우리는 갈 데가 있어서. 승주 형 다음에 봐요." 철수가 자리가 어색했는지 가던 길을 재촉하고선 승주와 은정이를 떠나 가 버린 다. 은정이가 한 참을 철수 쪽을 쳐다 봤다.
"조금 서운 하겠다?" "그렇네. 아까 철수 곁에 있던 소녀가 나보다 예쁘던?" "아니야. 흠. 네 표정에 저 철수를 좋아한다는 게 보여." "그러니?" "맞니?" "오늘은 아니야. 오늘은 너와 보내기로 했으니까 쟤 생각 안해야지." "허허! 그 말이 더 비수같다야." "미안해." "저녁 먹었으니까 차나 한 잔 하자." "여기 말고 신사동으로 가자." "왜?" "거기 근사한 찻 집이 많아. 우리 집도 가깝고." "흠. 그러자." 철수는 앞만 보고 길을 걸었다. 엑스트라 은정인 아무것도 모른 채 옆에서 걸었 다. 제법 걸었을 때 철수는 뒤를 살폈다. 그리고 피식 웃는다. "아까 내가 만났던 누나 예쁘던?" "네." "아까 그 둘이 잘 어울려 보이던?" "상당히요." "그렇군." "친한 선배에요?" "아니여. 그냥 동아리에서 몇 번 봤던 선배야." "몇 학번인데요?" "학번은 91 인데, 졸업반이야." "그렇다고 나한테 바로 반말을 해? 날 언제 봤다구." "헤, 원래 그런 여자야. 아닌데 나한텐 처음에 존댓말 썼는데..." "우리 이제 어디 갈까요?" "대학로를 벗어나자. 청담동 거리 갈래?" "그래요. 거기가 운치 있을 것 같아요." "지하철이 없는데?." "여기서 택시 타고 가요." "택시를?" "나란히 앉아서 시내 구경하는 것도 재밌잖아요?" 38 회 그 참 기분 묘하네. 뻔히 승주형하고 만나고 있을 거란 걸 알았지만, 실제로 둘 이 있는 걸 보니 괜한 질투심과 내 옆에 있던 은정이란 애와 누나를 비교하는 마 음이 일었다. 내 마음 속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기억되고 있는 자. 그녀의 옆에는 딴 놈이 있었다. 그것도 그녀와 아주 잘 어울려 보이고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졸라 배 아프다. 은정이와 청담동 언젠가 누나와 같이 갔던 찻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에도 내 머리 속에는 누나와 승주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았다. 누나를 지우지 못하면 내 앞에 있는 여자에게 마음을 풀지 못할 것 같다. 내가 얘와 얼마나 봤다고 벌 써 이런 생각을 하냐. 앞서 가지 말자 철수야. "은정이니? 잘 들어 갔어?"
"네." "크리스마스 잘 보내라." "오빠두요." "오늘 만나서 즐거웠다." "저두요." "헤." "왜 웃어요?" "그냥." 그냥은 아니다. 네게 좀 미안하고 어색하니까 그런거다. "그럼 나도 헤." "잘 자라." "네." 예의상이다. 은정이 얘도 참 괜찮은데, 난 예의상 집에 잘 들어 갔는지를 묻 는전화를했다. 그런 다음 삐삐를 움켜진 채 누나에게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 다.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오빠, 전화 받아." 오전 열 한시다. 나 주워 온 자식인가벼. 밥 시간이 지나도록 날 깨우지 않았 단 말인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굶겨? 아무리 내가 집에만 있다고 귀한 아들 에게 우리 부모님 너무하신다 진짜. "여보세요." "박철수 뭐 하냐?" "누군데 반말이여?" "나? 너 첫사랑." "누가 그래?" "은정이가." "아침부터 왜 전화했어요?" "지금이 아침인가? 은정이가 점심 사준다고 나오래." "왜 누나가 그 말을 전해요? 은정이 누나가 직접하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한 시간 뒤에 저기 길 가에 나와 있으래." "누나는 지금 어디야?" "은정이네 집." "은정이 누나도 같이 있어요?" "응." "그 참! 여자들 그 이상하네." 나 크리스마스 그냥 집에서 혼자 보냈다. 은정이는 교회 간다고 갔고, 내 동생 도 어디를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 날도 집에서 혼자 하루를 씹었 다. 나 집에만 오면 방에 쳐박혀 잘 나가지 않는다. 군대 안 간 비애다. 심심풀 이로 놀 만한 남자들도 내 근처에 별로 남아 있질 못했다. 내 동생이 제일 신나 는 겨울을 보내고 있다. 내 동생이 은정이를 가로채 가 버렸기에, 승주가 은정 이 누나를 가로채 가버렸기에 난 만날 사람이 없었다. 은정이는 그래도 연락은 취해 주었다. 은정이 누나는 뭐여? 연락 한 번 없던 은정이 누나가 야속했다. 나 쁜 여자. 수요일까지 난 내리 삼 일동안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 연락이 없던 은 정이 누나가 정희 누나를 통하여 내게 연락을 취했다. 왜 직접 연락을 하지 않 고 정희 누나를 통하여 만나자 했을까? 승주형과 같이 있던 누나를 만났을 때, 내가 또 삐친 것처럼 행동했나? 그래도 그렇지. 내가 자기 때문에 방학인데도 일 부러 학교에서 자취생활까지 해 주었는데, 연락 한 번 없었다는 것이 밉다. 나 도 곁에 날 좋아하는 것 같은 예쁜 여자가 있다. 은정이 누나에게 배짱 한번 부 려봐야 겠다. 내 경험상 누나가 이제 날 쉽게 버리지는 못할 것 같다.
"탁!" "어디로던 갑시다." 정희 누나가 보조석에서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은정이 누나는 운전 중이다. 고개도 안 돌려? "나 오랜만에 봤는데 인사도 안해?" "성탄절 날 내게 연락했어요? 누나는 나 필요할 때만 찾잖아." "필요할 때가 있는 것도 좋은거다 너?" 정희 누나가 날 대하는 태도는 항상 저렇다. 친근하기는 하지만 늘 그런 모습. 사랑했던 사람에게도 저랬을까? "훗! 별로 듣기 좋은 말 아니에요. 그리고 은정씨?" "엉? 은정씨? 야아 많이 발전했다." "정희 누나는 좀 빠져요." "너무 해 흑흑." 이게 지 애인하고 헤어지더니 참 유치하게 노네. 손으로 눈물을 훔치는 연기까 지 하는 정희 누나가 참 가소롭다. 나도 곧 23 살이다. 그만 어린애 취급해라. "나 왜 불렀는데?" "직접 연락하지 왜 정희 누나를 시켜요?" "정희가 자기가 연락하겠다고 했어." "아무리 승주형이 좋다지만 그 동안 나한테 연락한 번 없었어요? 누나 밤에 무 섭다고 율전까지 내려가 있었는데." "너 애인 있잖아. 그래서 안했지." "애인은 무슨 애인이야. 내가 누난 줄 알아요? 만난지 몇 일이나 됐다고 벌써 애인이야?" "후후. 나도 애인 만들어 사귄 적 없어. 너 그 말은 하지 말랬지?" 누나의 말투가 차갑다. 아직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작전상 후퇴다. "오늘 뭐 사줄건데?" "너 먹고 싶은 거." "그래요? 정희 누나는 뭐 먹고 싶어?" "너 먹고 싶은 거." "허허. 정말 둘 다 나 먹고 싶은 거 먹을거야?" "그래." "그럼 굶읍시다." 실없는 말을 하니까 그제서야 은정이 누나가 날 돌아 보았다. 운전이나 똑바로 해요. 은정이 누나가 다리를 건너 이상한 데로 몰고 가더니 차를 정차 시켰다. 그리 고 정희 누나를 내려 보냈다. "어? 정희 누나 왜 내려요?" "갑자기 할 일이 생겨서 오늘 점심 같이 못하겠다. 나 약국 오픈 때문에 바쁘잖 아. 거래처 알아 봐야 돼." "그랬으면서 왜 연락했어요?" "은정이 아버님에게 약국 경영에 필요한 조언 들을려고 어제 저녁에 은정이네 갔었던 거야. 너네 둘이 좋은 시간 보내." "에? 처음부터 누나는 같이 점심 먹을 생각이 없었던 거야?" "응. 약국 차리면 자주 놀러 와. 일 월이 가기전에 오픈 할거야." "정말 가게요?" "응." "섭섭하네." "속에도 없는 말 하지마."
"잘 가. 시험 끝나면 자주 연락할게." "그래." 정희 누나가 가 버렸다. 별로 섭하지 않다. 내 첫사랑이라면 첫사랑인데... 앞 에 앉은 저 여자 때문이다. 참 예쁜 은정이란 애도 별 감정 들게 하지 않고 참 좋아했던 정희 누나도 단지 친한 선배로 만들어 버린 건 저 여자 때문이다. "앞으로 와." 싫어요. 버릇처럼 그 말이 나올 뻔 했다. 바로 쫄래 쫄래 앞 좌석에 가 앉았 다. "누나 나에게 기분 나빴던 거 있어요?" "아니. 넌 내게 기분 나쁜 거 있니?" "응." "응? 왜?" "이브 날 지나고 내게 삐삐 한 번이라도 쳤어요?" "니가 연락하지? 삐삐치면 어짜피 니가 연락할 거잖아." "날 찾지 않는데, 애인 있는 여자에게 내가 왜 먼저 연락을 해?" "승주와는 친구로 만난댔잖아. 왜 자꾸 질투하고 그래." "질투?" "그럼 질투하는거지 뭐야. 나도 네가 만나는 그 은정이에게 질투하면 좋겠니?" 그런가? 나는 누나 친구인 승주를 예전 사랑한 사이라고 단지 질투하고 있는건 가? 근데 헤어졌다 다시 만난 옛 사랑을 친구로만 생각할 수 있나? 나보다 이년 많이 살았다고 별 짓 다하는구만. 그래, 은정이 누나도 은정이에게 질투해 주 었음 좋겠다. 질투 받고 사는 남자, 멋지지 않은가? "누나 다음 주는 집에서 공부 할거야?" "응. 시험이 곧 있어. 집에서 정리해야지." "내가 다음 주에도 내려가 줄테니 학교에서 공부하자면 율전 내려 올래요?" "너 공부 할 거 있니?" "아니." "그런데 왜?" "나 서울 있으니까 심심해요." "그 은정이란 애 있잖아." "누나하고 있는 것 보다 재미없어요." "후, 그래? 제법 듣기 좋은 소리네." "내려 올래요?" "나 공부해야 돼. 내려갈 순 있어도 같이 놀지는 못해." "언제는 뭐 놀아 줬나? 그냥 누나는 공부해요, 나 혼자 놀테니까." "그렇게 보내도 그 은정이란 애하고 노는 것보다 나하고 있는게 좋아?" 쉽게 긍정의 대답을 하면 저 여자가 더 거만해 질텐데. 그래도 내려오게 하려 면 어쩔 수 없다. "응." "철수가 부탁하는 거니까 그래 볼까? 그럼 3 일날 같이 내려가자." "그럴래요? 푸하하." "왜 웃어?" 좋아서 웃지 임마. "누나 이브날 이후로 승주형 몇 번 만났어요?" "안 만났다." "애인 맞아요?" "아니라니까 얘가." 여자들 심리가 어떤지 참 애매하다. "타종식 보러 갈거에요?"
"올해는 힘들겠다. 타종식을 보면 다음날을 망칠 것 같다." "그렇겠죠?" "응. 그건 그렇고 뭐 먹을래?" "스테이크." 장난삼아 말했다가 씨즐럿인가 스테이크 전문점에서 졸라 큰 스테이크를 얻어 먹 었다. 저 여자 확실히 날 좋아한다. 그래도 의심스럽다. 내가 연하기 때문에... 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내 대학생활 마지막 해다. 세월 참 빠르다. 올 해는 뭔 가 내게 뜻깊은 해가 되기를... 뜻 깊은 해가 될 것 같지 않다. 작년에는 그래도 은정이 누나 때문에 새해 타종 식도 보고 했는데, 올해는 연휴기간 내내 집에만 있었다. 은정이에게 연락을 했 었지만 만나지는 않았다. 3 일날 오전 누나가 준 목도리를 감고 내 사랑스런 화분을 들고 집을 나섰다. 그 리고 누나와 신사역에서 만났다. "또 화분을 들고 왔네?" "그럼요. 나, 누나가 준 목도리 하고 왔어요." "흠. 그래 예쁘다." 누나의 미소가 곱다. "어허, 남자에게 예쁘다가 뭐냐. 멋지다 그래줘요." "그래 멋지다. 이거 장미 나무지?" "네." "찬 바람 자주 씌워도 될려나?" "장미는 겨울을 나야 예쁜 꽃을 피워요." "장미가 7-8 년생 나무지 않나?" "그래요? 그럼 그 후엔 죽는거야?" "나도 잘 몰라. 오래 사는 나무는 아닐걸." "이름 붙일려고 했는데 관둬야 겠다." "너 나무에도 이름 붙이니?" 은정이라고 지어 주려고 했는데. 죽어버리면 이별을 뜻하는 것일테고 은정이 누 나와는 헤어지기 싫다.. 아니다 이름 지어주어야 겠다. 이 나무가 죽을 때 쯤에 아마 은정이 누나는 잊혀지는 상태일거다. 누나는 시집을 갔을 테이고 나도 장가 를 가야되는 시점이다. 서글픈 생각이지만 고운 이별을 위해 이름을 지어주자. "그럼요. 그래, 오래 살지 못해도 이름을 지어 주어야 겠다." "뭐라 지을건데?" "노코멘트." "노코멘트가 이름이야?" "누나 바보지?" 방학이고 늦은 오전이라 전철안이 한산했다. 따스한 햇살이 창가에 맺혀 좋다. 누나와 나란히 앉아 좋은 기분으로 율전으로 내려갔다. 누나가 급한 시간은 급 한 시간인가 보다. 누나는 바로 도서관으로 갔다. 누나가 가지고 있던 열쇠를 받았다. 흠, 그러고 보니 누나에게 열쇠를 맡겨 놓 았던 것을 잊어 버릴 뻔 했다. 내 자취방에 들어 와 창가에 화분을 올려 놓고 잠 시 방에 쌓인 먼지들을 틀어 냈다. 나는 별로 공부할 게 없다. 잠시 쉬어도 된 다. 목도리를 감은 채 침대에 누웠다. 큰 호랑이 배에다 베개를 안기고 누웠다. 좀 작은 호랑이 인형에 발을 올려 놓았다. 누나가 왜 내 방 열쇠를 달랬을까? 급 히 일어 나 책상 서랍을 열어 보았다. 열어본 흔적이 아니다. 옷 장 서랍도 열 어 보았다. 나 서울갈 때 속 옷 다가지고 갔었다. 변한 게 없다. 열쇠는 그냥 가 지고 있었나 보다.
다시 침대로 가 누웠다. 베개가 새해가 되었다고 제법 깨끗해져 있다. 인형들 털이 뽀송하다. 털 갈이 했나? 누나가 내 생일 선물로 준 큰 호랑이가 오늘따라 예뻐 보인다. 은정이 누나와 같이 있다는 느낌이 사물들을 깨끗하게 보이게 하나 보다. 쪽팔리지만 화분에 매직으로 조그만 글씨를 썼다. 내사랑은정이. 은정이 누나가 볼 수도 있기에 고민했다. 내 사랑을 지울까, 은정이를 지울까? 랑,자를 시크멓게 칠했다. 정,자를 또 시크멓게 지웠다. 내사#은#이. 음 좋다. 도서관엔 아주 가벼운 가방을 들고 갔다. 어짜피 자러 가는건데... 누나는 내게 관심을 두지 않고 공부만 했다. 나는 누나 옆에서 가벼운 책을 보 거나, 잠 자는 것이 전부지만 심심하지 않았다.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즐거움을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내게 있어 어 떤 존재인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그리움이 되어 버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내게 있 어 어떤 의미인가. 신께서 사랑한다는 고백을 강요한다면 나는 이 사람에게 하고 싶다. 좋은 말이 다. 강도라도 들어 왔음 좋겠다. 날 붙들고 칼을 겨눈 채 니가 지금 사랑하고 있 는 사람이 누구냐,하고 물었으면 좋겠다. 그럼 난 할 수없이 고백을 할 것이다. 저 누나요. 미친 강도가 아니고서야 도서관을 털러 올까. 누나는 내가 무슨 생각 을 하고 있는지 전혀 관심이 없다. 그냥 공부만 하고 있다. 그래, 열심히 해 요. 일주일을 그렇게 보냈다. 그리고 누나는 시험을 보러 갔다. 누나에게 엿대신 초 컬릿을 사 주었다. 허허. 시험이 끝나는 날 난 서울로 가지 않았다. 누나가 내 자취방에서 기다리고 있으 라 했기 때문이다. 그래 쫑파티 해야지. 승주와는 진짜 친구사이인가? 시험이 끝 나는 날 누나는 승주를 선택하지 않고 날 선택했다. 하긴 내가 그동안 옆에 붙 어 있어 준게 얼만데 당연히 나와 시험 끝난 자축을 해야지. 술 마시면 나보고 또 뽀뽀하자 말할까? 그렇게 바라는데 한 번 해줄까? 기대가 된다. 하지만 하라 고 해도 난 못할 것 같다. 왠지 그럴것 같다.
이브날 철수와 같이 있던 그 어린 여자에게 난 질투심을 가졌었지요. 흠, 잠시 철수 곁에 있던 그 여자애가 내가 철수 곁에 있을 때보다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 을 해 보았어요. 손을 잡은 수줍은 모습이 고왔습니다. 내 곁엔 승주가 있었는 데, 난 철수를 생각해야 했지요. 승주 곁에 있던 나보다 더 곱고 예쁜 모습의 철 수 곁에 있던 그 소녀의 모습. 내 마음의 빈자리는 컸습니다. 그 날은 철수를 생 각하지 않겠다 승주에게 말했지만 그 거짓말로 승주에게 미안했습니다. 철수는 어느샌가 승주 앞에 서 있습니다. 그것은 승주가 내 곁으로 돌아오기 전부터일겁 니다. 철수가 잠시 어려웠던 이유가 무얼까요. 철수가 삐친 모습 보이지도 않았는데, 난 며칠동안 철수에게 연락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후후, 감정이 생기면 그가 어 려워지나요? 괜한 것에 질투를 하게 되나요. 철수 곁에 있던 예쁜 소녀 때문에 그에게 한 동안 연락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녀석이 날 대하는 태도가 참 고맙습 니다. 하지만 퉁명스럽죠. 그런데 나만 감정이 생겨 가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난 감정 표현을 할 줄 안다고 자부했 습니다. 근데 철수에겐 그렇지 못하네요. 승주가 곁에 있어서 그럴까요? 아니면 연하에게 품은 감정 주위로 울타리를 친 자존심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내가 철수에게 품은 감정이 연인의 사랑이 아니고 다른 그 무엇일까? 그래도 철수를 남 주긴 싫습니다. 철수에겐 내가 제일 앞이어야 합니다.
철수를 이기긴 힘들 것 같습니다. 점점 그럴 것 같은 확신이 듭니다. 내 곁에 있어 주는 사람. 그리고 곁에 있어 미소를 안기는 사람. 그래 연하가 뭐 어때. 난 철수를 맨 앞에 두기로 했습니다. 시험을 끝 마치고 철수에게로 가면서 난 마 음을 가다듬어 보았습니다. 오늘 철수의 마음을 알아 보겠습니다. 그리고 내 마 음도... "시험 끝난 자축 행사가 겨우 이거야?" "이게 어때서?" 내 방에 철수를 초대했지요.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홍차를 마셨습니다. 테이블 엔 작은 케익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뭐 근사하게 와인을 한 잔 한다거나. 아니면 뽀자게 술을 마신다거나 그래야 죠." 너 그러면 주저 앉잖아. "술은 몸에 해로와." "아휴, 그래요? 누나 몸 많이 망가져 있겠네요." "오늘은 조용하게 보내자." 케잌을 한 조각 먹고 차를 마시다 철수와 눈을 마주쳤지요. 미소 지으며 한 참 동안 침묵한 채 철수를 쳐다 보았습니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 봐요?" "사랑스럽지 않니?" "뭐가?" "내 눈 빛 말이야." "헛! 또 공주병 자랑하는거야?" 짜식아, 분위기 좀 잡아라. 케잌 한 조각 더 먹었습니다. 찻잔을 입가에 대고 옅은 미소를 지었지요. 그리고 또 철수를 빤히 쳐다 보았습니다. 철수가 어색해 하길래 사랑스럽게 철수의 이름을 불렀지요. "철수야." "왜요?" "나 시험 끝났는데 선물 없어?" "합격할 자신 있어요?" "응." "너무 자신은 하지마요. 헤헤, 합격하면 내가 축하 뽀뽀라도 해주겠는데, 아직 확실치 않으니까..." "지금 해 줘." "에? 뭐,뭘?" "축하키스." "에이 아까는 농담으로 한 말이야. 누나 합격도 안했잖아." "나 합격할 자신 있어. 그러니까 지금 해 줘." "합격 못하면?" "그래도 해 줘." "오늘은 술도 안 마셨는데 왜 그래요?" "그래 나 오늘 맨 정신으로 말하는거야." "왜 그래요?" "뽀뽀 해달라니까." "분위기 어색해지잖아요." "눈 감을까 그럼?" "연인 사이도 아닌데 왜 그래요?" "하면 되지." "누난 쉽게 말하지만 난 자신 없어."
뭐가? 뽀뽀? 짜식아 그냥 해. "훗, 그건 나중 문제고 빨리 뽀뽀해 줘." "원래 여자가 먼저 뽀뽀하자고 그러는 거에요?" 녀석이 말은 장난스럽지만 많이 떨고 있네요.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조용한 음조로 말했지요.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아. 그냥 입맞춤이라도 좋으니까 키스해 줘." 한 참 동안 반응이 없었습니다. 뭐 하는거야. 멍석까지 깔아주고 분위기까지 잡 아 줬는데도 철수는 내게 입맞춤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철수와 나 사이에 있는 테이블이 너무 큰가요? 아닌데... 10 분 정도 가슴 저리며 눈을 감고 있었습니 다. 후우, 아닌가 보다. 답답해서 눈을 떴지요. 푸, 하필이면... 철수가 용기를 내며 내 입술 바로 앞까지 다가 왔다가 눈을 뜬 나를 보자 다시 엉거주춤 뒤로 물러 납니다. 이런 분위기 어색하죠. 저대로 물러나면 앞으로 어 려워 질 것 같았습니다. 물러나던 철수의 머리를 잡아 댑다 키스를 해 버렸습니다. 후, 철수의 입술은 떨렸지만 참 순수한 것이었나 봅니다. 꼭 다문 입술, 끝내 열지 않았습니다. "야이, 바보야." "이씨." 멍한 모습으로 날 쳐다 보는 철수의 눈망울에서 왠지 원망기가 있어 보입니다. "너 키스 할 줄 몰라?" "나 어린 애 취급한 건 아니죠?" "아니야. 니가 좋아서 한거야." 왜 사랑한다고는 말하지 못했을까. 철수의 삐친 듯한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네 요. "흠! 이런 식은 아니야." "뭐가?" "잘 자요." 녀석이 자뭇 심각한 표정으로 일어서 나갔습니다. 왜 저러지? "쾅!" 정말 쟤 왜 저래. 내가 뭘 잘못했나요?
39 회 내가 뭘 잘못했나? 일이 참 이상하게 돌아가네요. 녀석의 표정에 눈치를 살펴야 하는 나 자신이 우스워요. 철수가 무언가에 삐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네요. 침대에 쪼그려 앉아 생각해 봅니다. 작은 불 빛만 켜놓고 철수와 닿았던 내 입 술의 느낌을 다시 짚어 봅니다. 참으로 흔하다 생각되는 남,녀간의 입맞춤. 내 첫 입술을 뺏어간 남자에게 난 아무런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키스 한 번에 중요한 의미도 부여하지 않습니다. 입맞춤도 일종의 스킨쉽이지요. 철수에게 내가 원했던 건 느낌이었습 니다. 지금까지 느낀 것과 조금 다른 감정의 느낌, 뭔가 사연이 될 만한 느낌 말 이지요. 하기 전 많은 가슴 떨림과 하고 난 다음 밀려 오는 야릇한 그낌. 그리 고 시간 흐른 다음 아련하게 떠 오르는 기억. 키스 한 번으로 연인이 되지는 않 겠지만 그 가능성을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난 지금 그런 것들을 느낄 수 가 없네요. 지금 난 삐친 것 같은 철수를 어떻게 다시 예전으로 돌려 놓을까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기다릴 걸 그랬습니다. 조금 더 눈을 감고 있을 걸 그랬습니다.
내가 근데 잘못한 게 있나? 예쁜 누나가 뽀뽀해 주면 고맙다고 그러며 한 번 더 하자 그럴 것이지. 이씨, 삐쳐라 그래. 이 녀석 지금 뭐하고 있을까? 속이 좁은 놈이니까 내일 또 나 모르게 서울로 가 버릴것 같기도 합니다. 흠, 왜 잠이 오지 않은 걸까? 어색했지만 그와 닿았 던 내 입술의 느낌을 보존하고 싶어서일까요? 철수의 삐친 모습 때문일까. 잠이 오지 않아요. 잠이 오지 않아 오늘 철수와 닿았던 내 입술을 느껴 봅니다. 철수는 서둘지 않 았습니다. 어쩌면 내가 녀석보다 먼저 사랑의 감정을 가질 것도 같습니다. 헤헤, 오늘 누나와 입맞춤을 했다. 그런데 기쁘지 않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의 그 기쁜 입맞춤을 하고 난 뒤 밀려 오는 공허함. 왜일까? 오늘 입맞춤으로 난 누나에게 느꼈던 두 살의 거리를 지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 다. 자주 누나와의 입맞춤을 기대했었다. 승주를 이길 수 있는 계기를 가져다 줄 것 같았던 입맞춤. 눈을 감고 내 입술을 기다리는 누나의 아름다운 모습에 난 한 동안 꿈 속을 거닐었다.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그 짧은 시간의 망설임 과 두근거림. 거기까진 참 좋았다.. 난 어린가 보다. 이제는 그렇지 않을 거라 생각하기도 했다. 서투름! 누나가 내게 입맞춤을 한 건 소녀가 꼬마에게 해 주는 설익은 입맞춤이었고, 그 것에도 난 당황을 했다. 누나 주위의 다른 남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겠지? 승주 란 녀석보다 내가 더 앞설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여지 없이 무너졌다. 난 더 비교 되어 질 것만 같다. 내 수줍었던 망설임, 그리고 누나의 당돌함. 첫 입맞춤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누나가 해 준 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더 기분 좋은 것일 수도 있으나 그건 동등 한 위치에서나 느끼는 것. 난 연하다. 난 누나에게 늘 받기만 하는 것 같다. 그 런 내가 누나를 감싸 줄 수 있겠는가. 난 누나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 지 못하다. 그냥 친한 동생일 뿐 그래서 누나와 단지 그 사이로 친한 것일 뿐. 오늘 어찌할 수 없는 아름다운 입맞춤은 누나가 나를 귀여워 한 탓에 해준 것. 난 참으로 서툴렀다. 행복한 순간이었지만 내 머리속은 그것을 받아 들이지 못하 는 진공상태였다. 받아 드릴 수 있는 감정의 공간은 가지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없음으로 인해 또한 받아 들일 수 없는 어색함. 그런 내 자신이 싫다. 좀 더 길 게 그 꿈 같은 순간을 소유하고 싶었으나, 누나는 내 서툰 마음을 알아 차리고 금방 입술을 떼어 버렸다. 차라리 내게 아무 감정이 없었으면 난 그것을 자연스 럽게 받아 들였겠지? 누나가 날 바보라 했다. 난 어린가 보다. 누나를 상대하기에는 아직 어린가 보 다. 내가 누나와 연인이 된다면 난 내 곁에 누나를 오래 둘 수가 없을 것 같다. 내 서툰 감정으로 인하여... 누나의 태도에, 그리고 내 어린 마음 때문에 난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지금 가 슴은 떨리고 있지만 답답하다. 한 동안 누나가 어색할 것 같다. 잠이 오질 않았다. 첫 전철을 타고 집에 가자. 옷을 입고 가방을 챙겼다. 목도리를 감고 화분을 들었다. 누나는 날 좋아하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고 내 가 느낀 어색함이 사라지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 갈 것 이다. 문을 열고 밖을 나왔다. 아침의 적막 속에 문 여는 소리가 제법 크다. 주위가 깜깜하다. 그리고 춥다. 누나가 입맞춤 해준 내 입술 사이로 진한 입김이 뿜어 져 나간다. 누나는 잠들어 있겠지? 그래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지키는 장미 덩쿨도 괜찮다. 발걸음을 뗐다. 끼이잉. 갑자기 누나 방의 문이 열렸다. "야, 박철수. 내 그럴 줄 알았어."
에? 누나는 벌써 일어 나 있었나 보다. 방 문이 열리고 누나가 모습을 드러냈 다. 몰래 도망가려고 했던 내 생각은 틀어 졌다. 복도를 막고 날 이상한 눈빛으 로 쳐다 보는 누나의 모습. 자연스럽게 행동 하자. "벌써 일어 났어요?" "왜 그래 너?" "에..." "삐쳤어? 뭣 때문에 삐쳤는데?" "누나에게 삐친 것 없어요." "그런데 왜 몰래 집에 가려고 한거야?" 지키고 있었나? 내 복장이 집에 가는 거 맞지? 이미 들킨 거 뭐라 말해야 되나? "누나 오늘 승주형 만날 거 아니에요? 시험 끝났으니까 사람들 만나야지. 그래 서 나 먼저 서울 가려고..." "후, 왜 자꾸 승주에게 경쟁 심리를 갖구 그래?" 그래 그게 참 웃기다. 누나도 우습게 생각할 것이다. 나이도 어린 놈이 주제 파 악도 못하고 자기가 사랑했던 사람에게 질투심 갖는 것처럼 보일테니까. "아니에요. 그냥 물어 본거야. 내가 뭐 그럴 자격이라도 있나." "그 뜻은 아니야. 내 방에 잠시 들어 와." "왜요?" "밖이 춥잖아. 내가 서울 갈 준비를 하는 동안 내 방에 들어 와 있어." "누나 옷 갈아 입지 않고 그냥 갈거야?" "너 도망 갈 것 같아서 내가 보는 데 있어야 돼." "그럼 옷 갈아 입을 땐?" "너 욕실에 들어 가 있어." "에?" 자기가 들어 가 갈아 입는 것도 아니고 나보고 들어가 있으라고? 날 믿는거야, 어린 애 취급하는거야? 욕실에 들어 와 있다. 문을 열면 누나가 옷 갈아 입는 걸 볼 수도 있다. 허허, 누나의 저런 태도가 날 믿는다거나 가깝게 생각하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까진 생각할 수 있다. 그 생각 때문에 조금 슬프기도 하다. 저 행동은 어제의 입맞춤 이 누나가 날 귀여워 해 준것에 불과하다는 걸 확신시켜 준다. 사랑이 아닌 단 지 좋아해서 해 준 가벼운 입맞춤. 아니다, 유혹하는 건가? 그 생각하니까 더 초 라해진다 철수야. 전철 안 누나와 계속 나란히 앉아 있지만 할 말이 없다. 누나에겐 끊임 없이 할 말이 쏟아져 나왔는데, 생각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말이 나왔는데 오늘 아침 은 다르다. 누나도 아침의 자연스러움이 없이 침묵한 채 앉아 있다. "신사역에서 내려요?" "응." 지하철 역을 나올 때까지 그냥 걸었다. "조금만 더 걸을래요? 누나 집에 태워 드릴께요. 우리 집까지 걸어가요." "아니야, 됐어. 버스 타고 갈래." "그래요? 그럼 버스 타고 가세요." 버스가 오지 않아 한 동안 정류장에 서 있었다. 누나가 날 본다. 나도 누나를 보았다. "아침 먹고 가자."
"내가 사 줄게요." "됐어 내가 살게." 아침을 먹었다. 설렁탕. 누나가 자주 밥숟갈을 떠다 말고 멍한 모습으로 날 쳐 다 보았다. 그 모습 그대로 버스 정류장으로 나왔다. "오늘은 푹 쉬어요. 시험 보느라 고생했을텐데 잠이라도 푹 자요." "흠, 너 연락하지 않을거지? 며칠 간은 봐줄게." "에?" "너 삐치지마? 너 그럴때마다 내 생각이 복잡해져." "무슨 말이에요?" "어제 내가 잘 못한 거 없지?" "네." "흠, 잘 가. 그 동안 참 고마웠어." "꼭 작별 인사 같다." "내가 시험 공부하는 동안 고마웠다는 말이야. 그런 말 하지마." "안녕히 가셔요." 자연스러워 지자. 허리를 굽히고 귀여운 발음으로 인사를 했다. "흠. 그래." 집에 와 잤다. 어제 잠을 못잤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 수록 누나와 짧은 입맞 춤이 아쉬워 진다. 그리고 그때의 느낌이 점점 잊혀져 간다. 느끼고 싶지만 잊혀 져 간다. 그것과 함께 그때 가졌던 내 생각들도 잊혀지고 있다. 서울 올라 온 지 사일 만에 정희 누나가 날 찾았다. 약국 오픈 식 준비 하는 거 도와 달랜다. 옛 정을 생각해서 다시 율전으로 내려 간다. "너 왜 자꾸 집 밖을 나가는거야?" 방학인데도 불구하고 자꾸 짐을 챙겨 집을 나가니까 아버지께서 한 말씀 하셨 다. "이제 저도 사학년입니다." "너 여자 사귀냐?" "아닌데요. 정희 누나가 약국 차린다고 도와 달래서 내려 가는 겁니다." "정희면 예전에 우리 동네 살던 예쁘장한 애 맞지?걔가 너보다 두살 많았지 아마?" "네." "그 나이 많은 여자는 요즘도 만나냐?" "네." "수희보고 친구 소개시켜 달래. 왜 나이 많은 여자들 하고 노냐?" "벌써 소개 받았습니다." "그럼 걔하고 놀아." "나이 많은 여자가 편합니다." "왜 그러냐?" "팔잔가 봅니다." "뭐 임마?" "누나들하고 노는게 재밌습니다. 누나 하나 낳아 주시지 그랬어요." "지금 나하고 말장난 하는거냐?" "아닙니다." "이 녀석 혹시 나중에 결혼할 사람이라고 데려온 게 나이 많은 여자가 되는 거 아녀?" "그럴수도 있겠지요. 반대하실 겁니까?" "그 상황이 되어 봐야 알지 임마."
"한 삼일만 있다가 오겠습니다." "딴 짓은 안 할걸로 믿는다?" "저 아직 어린가 봅니다. 그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여자 조심 하란 말이다." "아버지 제가 어려 보입니까?" "니가 내 나이가 되어 봐라. 그때가 되어도 니가 나이 들어 보이겠냐?" "다녀 오겠습니다." 정희 누나는 내가 코흘리게 꼬마일 때부터 보았으니까 날 계속 어리게 보겠군. 은정이 누나는? 은정이 누나가 날 처음 보았을 때, 내게 존댓말을 했다. 은정이 누나완 조금 다를 것도 같다. 흠, 정희 누나와 있으면 은정이 누나를 편히 볼 수 있겠군. 약국에서 하루를 보냈다. 약을 정리하는 누나를 도우며 정희 누나와 단 둘이 약 국에 있었다. 은정이 누나는 내일 온다고 한다. "내일 오픈 식이에요?" "응." "약국이 아담하네요." "손님 좀 많이 끌어 와." "누나가 끌어야지. 그 누나 수영복 입은 사진하나 확대해서 밖에다 걸어 놔요. 우리 학교 학생들한테 인기 캡일거야." "뭐야?" "약대, 농대, 이과대. 여학생들 다 합해 봤자 얼마나 돼요? 우리 학교 학생 중 80 퍼센트 이상은 남학생이잖아. 누나가 성공을 하려면 그 남학생들을 잡아야 한 다니까. 괜히 아침 등교길에 누나 보려고 소화제 하나 박카스 하나 사러 오게 할 수 있어야 하고, 콧물만 흘려도 누나 때문에 감기약을 찾게 하려면 그 방법 밖 엔 없어. 응, 그래 이게 좋겠다. 수영복 입고 약사 가운 걸치고 있는 사진하나 찍읍시다?" "너 상당히 저질이구나?" "요즘도 까만 브라자 차고 다니슈?" "흠, 너 내겐 완전히 맘이 떠났구나?" "에?" "예전엔 농담도 가려서 하는 예의가 있더니, 은정이 만나고 나서는 영 아니네?" "누나?" "왜?" "그게 표가 나요?" "그럼." "내가 은정이 누나 좋다는 말해서 그런게 아니구?" "그럼 임마. 너랑 나랑 같이 보낸 시간이 얼만데, 그 변화를 못느끼겠니?" "은정이 누나도 알까요?" "서로 좋아하는 사이는 그런 변화에 민감하면서도 잘 몰라하지. 생각을 많이 하 기 때문에 간단한 것도 복잡하게 만들어 버리거든." "제법 아는 척 하네요?" "은정이도 네가 자기를 좋아하고 있는 것쯤은 알거야." "그래요?" "호호." "왜 웃어요?" "은정이도 너에 대해서 자꾸 묻거든? 은정이가 많이 헛갈려 하고 있어." "그게 무슨 말이야?" "너 바보니? 널 그냥 동생으로만 생각한다면 자기 생각들이 헛갈리겠니?"
"나도 은정이 누나가 날 좋아하는 거 알아요." "그렇지만 너도 헛갈리지? 가능성이 있어. 하하, 옆에서 보면 참 재밌을 거 같 애." "잘 아는 척 하지 마요." "잘해 봐라, 철수야." "뭘 잘해 씨." "너 제법 매력 있는 놈이니까 밀어 붙여. 내가 보기에 승주씨 보다 니가 은정이 에게 더 잘 어울려." "정말요?" "그럼." 그것 참 듣기 좋은 말이다. "그렇지만 난 연하잖아요." "그래, 그게 좀 문제다." "씨, 저 번엔 연하가 뭐 어때, 그러더니?" "문제가 안 되는 건 아니잖아. 잘 극복해 봐." "누나? 내가 은정이 누나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거 절대 비밀이야?" "알았어. 비밀 유지하려면 나 많이 도와 줘야 돼?" "지금도 돕고 있잖아요." "그래도 더 노력해야 될 걸?" "그걸 누나가 은정이 누나에게 말하면 난 은정이 누나뿐만 아니라 누나도 볼 자 신이 없을거야. 그건 싫죠?" "나에겐 제법 자신감이 있네? 알았어 어느 순간까진 꼭 비밀로 해 둘게." 말하기만 해 봐라. 약국 유리창 매일 하나씩 새로 끼워야 할 거다. 약국 오픈 식에는 정희 부모님과 은정이 누나, 그 밖에 정희 누나 친구들, 그리 고 승주 그 새끼도 왔었다. 승주가 날 보더니 좀 어색해 했다. 그리고 나와 눈 이 마주칠 때마다 실없이 웃었다. 쪼개는 거여 뭐여? 은정이 누나는 정희 누나와 친구들 틈에 끼여 남자인 승주와 나에게 신경을 별 로 쓰지 못했다. 약대 선,후배들이 많이 찾아 왔다. 대부분 여학생들이었지만 남 자들도 몇 있었다. 약국 내 자리가 비좁아져 나와 승주는 밖으로 쫓겨 났다. 약 국 문 앞에서 승주와 난 괜히 어색했다. 약국 출입문 밖에 서서 난 입김을 그는 담배 연기를 뿜어 내며 재미없는 말들 만 주고 받았다.. "코스모스 졸업하시면 아직 취직은 안하셨겠네요?" "그렇죠. 할 수 없이 한 학기 쉬어야지요." "저도 이제 사학년인데." "그렇네요. 정보공학과가 뭐하는 과에요?" "전산학과와 비슷해요. 이름만 그렇게 붙여 놓은 거에요. 저보다 세살이나 많으 신데 말 놓으세요." "이게 편해요." 그럼 계속 존댓말 해라. "당구 얼마 치세요?" "120 정도 되요. 근데 즐기지 않아요." "형제가?" "위에 누나가 한 명 있고, 남 동생이 하나 있어요. 철수씨는 형제가?" "여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음. 아버님이 한의사시라고 했죠?" "네. 형은요?" "교직생활 하세요."
"네." 졸라 재미없는 대화였다. "승주씨?" 뭐야? 은정이가 승주를 씨자 붙여서 불렀다. 내게는 별로 친한 척 하지 않는 다. 은정이 누나가 문을 열고 나와 승주를 자기 친구들과 어울린 자리에 불렀 다. 난 계속 찬 밥 신세다. 설버라. 약국 유리문을 통해 안을 살펴 보았다. 정희 누나를 비롯해 여러 누나 친구들 과 승주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나도 저런거 시켜 주면 안돼나? 좀 부럽고 서럽 다. 승주 새끼가 어색한 웃음을 웃는다. 그리고 머리를 긁적 되더니 한 여자와 악수까지 한다. 좋것따 새까. 난 추위에 떨며 밖에서 아주 초라한 모습이다. 누 구 하나 날 들어 오라 하지도 않는다. 정희 누나는 한 쪽에서 부모님과 얘기를 주고 받고 있다. 한 쪽엔 약대생들과 승주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승주는 아까 부터 은정이 누나의 얘기를 듣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얼굴 표정이 흐린 날의 저문 오후의 모습이다. 춥다. 어제 쌔가 빠지게 약 정리하는 거하고 쓰레기 치우는 거 도왔는데 정작 오픈식 때는 밖으로 쫓겨나 추위에 떨고 있다. 씨바, 당구나 치러 가야겠다.
40 회 정희의 약국 오픈식 날 철수를 앉혀 놓고 정희와 밤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습 니다. 그리고 새벽이 오는 시간에 내 방 침대에 누워 그 날 약국에 왔었던 승주 의 전화를 받았지요. 승주는 아주 또박한 발음으로 자기의 서운함을 얘기했습니다. "아프더라도 그냥 잊을 걸 그랬나?" "응?" "많이 어색하더라." "뭐가?" "내 편이 없었어. 그리고 다음에 만나면 그러지 마라." "무슨 소리야?" "나, 여자친구 소개 받으려고 너에게 간 거 아니야. 나에게 미안 해 하지마." "뭐야? 금방 그 말 이해가 안돼." "흠, 자주 느꼈어. 거기 괜히 갔었던 것 같다." 겨울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아니 한 발짝씩 뒤로 물러서고 있습니다. 올해는 뭔 가 기억되는 일이 내 손가락 수만큼만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나도 모르게 승주보다 철수 쪽으로 마음을 돌렸다는 걸 표현해 버렸나 봅니다. 난 승주에게 내 친구를 인사 시키다 그와 참 잘 어울려 보이는 한 명을 그가 마 음이 있다면 정식으로 소개시켜 주겠다고 한 모양입니다. 내가 그런 표현을 자 주 했었나 봐요. 난 생각없이 내 뱉었지만 승주는 자기를 떠 넘기려는 느낌을 발 견했었나 봐요. 승주는 오픈식에서 철수를 내 버려두고 자기만 챙겼다는 것에도 서운함을 받았답니다. 곧 떠날 보낼 사람이기에 배려했다는 그 느낌. 내 옆방에 있는 철수에 대해 생각을 해 봅니다. 철수가 승주를 이젠 포기해야 할 정도로 내게 있어 큰 존재인가. 철수는 정희가 약국 오픈을 했다고 율전에 있던 사흘 동안 계속 약국에만 있었 습니다. 둘 만의 얘기가 있는 듯 내 눈치를 살피며 정희와 하루를 완전 공유해
버리더군요. 약각은 서운함과 질투심이 생기네요. 남주기는 싫은데 내가 연하에게 마음을 뺏겨가고 있음을 인정하기가 껄끄럽네 요. 특히나 저런 녀석에게 말입니다. "처음이고 방학이라 학생들이 없어서 손님이 뜸한거에요. 조급해 하지마요." "그래도 너무 파리 날린다." "한 겨울에 파리가 어딨어요? 정희 누나! 내가 가르쳐 준 방법을 한 번 고려해 봐요." "철수가 무슨 방법을 가르쳐 줬는데?" "나더러 사진 찍어 유리창에 걸랜다. 수영복에 약사복 걸친 사진. 남학생을 잡 아야 한대나?" 철수는 비장한 눈 빛으로 나를 바라 봤습니다. 눈 빛이 꼭 나도 같이 찍으라는 것 같네요. 이월 달에는 대학원 연구실에 내 자리가 하나 생겼습니다. 매일은 아니지만 자 주 학교를 갔었어요. 승주는 전보다 더 연락이 뜸 해지고 있었고, 철수와는 더 자주 연락을 하고 지냈습니다. 가까이 있고, 자주 만나면 그 만큼 또 보고 싶은 가 봅니다. 반대로 안보면 잊어진다는 사실, 그것도 맞는 거 같습니다. 내가 약사 자격증을 따는 날, 그 날도 철수와 작은 파티를 했었어요. 서울 어 느 카페에서 좋은 시간을 가졌었지요. 고운 음악소리 따라 웃음을 띤 채 철수를 자주 바라 보았습니다. 내 눈 빛에 철수가 내 뱉은 말은 아직 진지한 사이가 되 기에는 이르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여긴 보는 사람들이 있어요. 자꾸 그런 눈 빛으로 쳐다 보지 마요." "왜? 내가 또 뽀뽀하자고 그럴까봐?" "응." "그게 싫었니?" "그건 아니지만 남,녀간에 지킬 건 지켜야지." "뭘 지켜? 수많은 남녀들이 서로 키스하며 살고 있는데..." "에이, 그네들은 사귀거나 서로 사랑하는 사이니까 그렇지."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자주 할 걸?" "그런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끼리 놀라고 그래." "후후, 철수야." "왜요?" "내가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해도 저번 처럼 입 꼭 다물고 있을거니?" "무슨 말이야?" "다시 키스할 일이 생길 때, 내가 감정에 못이겨 사랑한다 말하면 그때도 입 다 문 채 있을거냐구?" "다시 키스할 일이 생길 때? 허허." "왜 웃어?" "누나가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 "할 수도 있지." "감정에 못이겨?" "응." "그런 말 농담으로도 하지마요. 나 진짜 믿어 버리니까." 그럼 한 번 해봐야 겠네요. "철수야 사랑해." 배시시 웃다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지요. "이씨, 나도 이제 4 학년이야. 왜 자꾸 어린애 취급하고 그래요?" "헛, 믿어버린다며? 내가 널 어린애 취급하는 것처럼 보이니?" "종종 그래요."
그날 밤, 겨울 바람을 맞으며 철수가 나를 집까지 바래다 주었어요. 집에 들어 가다 잠시 돌아 보았습니다. 혼자 서 있는 녀석이 그렇게 어려 보이지 않았습니 다. "박철수." "왜요?" "너 가볍게 받아 들여야 할 것하고 신중하게 받아 들여야 할 것하고 구분 못하 니?" "그 말을 갑자기 왜 해요?" "모르겠다." "사랑한다는 말은 가볍게 하는 것이 아니죠?" "응?" "잘 들어 가요." 누나가 대학 졸업을 한다. 그래도 앞으로 이 년을 더 이 학교에 머물것이다. 흔 쾌이 누나의 졸업을 축하해 줄 수 있다. 학교 졸업식이 있는 그 전날에 짐을 싸 자취방으로 갔다. 정희 누나 약국 안을 쳐다 보았다. 짙은 입김을 연신 뿜어 내고 있는 난로위의 주전자. 형광빛으로 밝 은 실내에서 하얀 약사복을 입은 정희 누나는소파에 앉아 졸고 있었다. "누나야." "어, 철수 내려 왔구나." "약 많이 팔려요?" "이왕이면 손님들이 많이 찾느냐고 물어라. 약 많이 팔려요? 내가 무슨 장사꾼 이냐?" "약국 차린 거 후회하지는 않죠?" "조금 심심하기는 하지만 벌써 후회하면 안돼지." "차 한잔 끓여줘요. 심심하지 않게 해 줄게." "그래 잘 왔다." 누나 약국에서 병든 겨울의 오후를 보냈다. "누나. 그 말 한번 해 줘요." "뭐?" "철수야 사랑해." "실없이 왜 그래?" "한 번 해 줘요." "사랑하는 철순데 못해 줄 것도 없지 뭐. 사랑해 철수야." "에이, 철수야 사랑해라니까." "그래, 철수야 사랑해." "그래,는 빼구." "철수야 사랑해." 참 시키는대로 잘하네. "비슷하네." "뭐가?" "누나 금방 그거 농담으로 한 말이죠?" "너가 시켰잖아." "하여튼 진담은 아니죠?" "당연히. 그래도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지?" "그럼요. 훗, 농담 맞구나." "누가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던?"
"응." "좋겠네. 누가 그래?" "은정이 누나가. 근데 많이 장난스러웠어요. 금방 누나가 한 것처럼." "니가 시켰니?" "아니요." "왜 그랬지?" "그래, 왜 그랬지?" 은정이 누나 졸업식에 나는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었다. 작년 정희 누나의 졸업 식 분위기와는 많이 틀렸다. "아빠, 내가 자주 말하던 후배녀석." "안녕하세요." "그래요, 반가워요." 나 정희 누나 만큼, 아니 한 장 더 사진 박았다. 은정이 누나와 단 둘이, 은정 이 정희 누나와 둘 사이에 끼어서. 그리고 은정이 누나 가족 틈에서 사진이 찍혔 다. 은정이 누나는 공주 기질을 발휘해 찍을 수 있을 때까지 사진을 찍어댔다. 오죽하면 은정이 어머님이 다 지쳤겠나. "야이, 기집애야. 사진 그만 찍고 밥 먹으러 가자." 나 가기 쑥스러웠는데 은정이 부모님따라 밥도 얻어 먹었다. 샤브샤브를 다음 날 아침을 굶어도 삶에 지장이 없을만큼 얻어 먹었다. "이름이 어떻게 된다고 했지?" "박철수라고 했잖아요." "아, 맞다." 나에게 물으신 말인데, 은정이 누나가 가로채 답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약대생인가?" "아니, 저기 공대생이야. 전에 얘기했잖아요." 나 그래서 별 방해 받지 않고 샤브샤브 먹을 수 있었다. 정희 누나도 따라 왔었 다. 약국 차린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땡땡이를 칠까? 하여튼 은정이 누나가 졸라 친한척 해서 졸업식 날이 즐거웠다. 푸하하, 승주 그 새끼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나의 일방적 승리다. 졸업식이 끝난 다음 날부터 난 다시 은정이 누나가 곁에 있는 자취생활을 시작 했다. 앞으로 여름방학이 될때까지 누나를 곁에 두는 생활. 괜찮을 것 같다. 제법 늦은 시간에 누나가 내 방을 찾아 왔다. 잠 옷바람에 누가 볼까 봐 몰래 뛰어 온 모양이 우릴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영락없이 저 여자가 날 유혹하러 온 것 내지는 밀회를 즐기러 온 모양이다. 누나는 침대에 털썩 앉더니 공주같은 말을 내뱉었다. "나 졸업 선물 없어?" 그 말하러 이 밤에 직접 내 방을 찾아? "5 월달에 줄게." "야. 그 때는 그때 따로 주면 되고, 지금은 뭐 없냐구?" "5 월달에는 내 생일 있어요. 그때는 내가 받아야 돼." "그러니까 지금 줘." "없는 걸 어떻게 줘?" "애정이 식었구나?" "애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누나 방 가요." "오늘부터는 여기 살아야지." "농담하고 진담하고 좀 가려서 해라."
"넌 어떻게 사랑하는 누나가 졸업을 했는데 선물하나 준비 안 했니?" 사랑하는 누나? 저건 의례히 붙이는 말이지? 저 것까지는 봐준다. "저 화분 꽃 피면 누나 줄게." "그래? 저거 니 사랑이라며? 진짜 나 사랑하는구나?" 맞긴 맞는데 장난같이 말하면 기분 별로 좋지 않다.. "누나는 이제 일학기생이고 난 사학년이니까 날 좀 어른 취급 해 줘요." "후후. 그럴려구 해도, 아니다. 화분 좀 가져다 줄래?" 화분을 들고 와 누나 곁에 앉았다. 한 밤 중에 그 것도 단 둘만 있는 방의 침대 에 여자와 나란히 앉아 있으면 다른 남자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일상이 되어 버 리면 아무 느낌 없어진다. "그거 꽃 피면 드릴게요." "내사은이? 이거 뭐야?" "그 화분 이름." 저거 눈치 채는 거 아닐까? 괜히 적어 놨다. "지운 글자가 뭐야?" "지운거 아냐." "내사은이 아무런 뜻도 없잖아. 지운 글자 알아 맞춰 볼까?" "알아 맞추지 않아도 돼." "너 내사랑은정이 라고 적은 거지?" "에?" "너 이거 혹시." 들켰다 씨바. "뭐요?" "저 번에 그 은정이 주려고 샀다가 차이고 나니까 나에게 주려는 거지?" 무슨 저런 여자가 다 있냐. "걔한테 안 차였어. 종종 만나요." "그럼 나야?" "에..." "이 장미 나무 죽이지 말고 키워?" "그럴거야." "나 갈게. 망 봐 빨리." "망?" "이런 차림으로 남자 혼자 사는 방을 이 밤에 찾아 간 걸 누가 보면 나 시집 가 기 어렵단 말이야." "그래, 다음에 올때는 좀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와요." "싫어. 이거 니가 사준거잖아." "허허. 잘 자요." "안녕." 은정이가 후다닥 뛰어 가 누나 방으로 사라졌다. 무슨 배짱으로 방 문도 잠그 지 않고 왔다냐. 학기가 시작되고 난 참 재미없는 교양과목 하나를 들어야 했다. 은정이 누나가 약대에서 주관하는 유일한 교양과목을 들어라 했다. 자기가 조교를 한다나 뭐라 나? 학교를 파하고 정희 누나나 보려고 약국을 향하는 데 눈익은 차 한대를 봤다. 예전 은정이 누나가 타고 다니던 차와 똑같은 형의 자가용. 색깔만 흰색으로 바 뀌어 있다. 한 참동안 쳐다 보았다. 약대 앞에 그 차가 주차되어지더니 제법 멋
을 부린 남자가 내렸다. 양아치 같구만.
41 회 저 대학원생 됐어요. 연구실을 나온 것은 한 달 가까이 되어 가지만 그래도 학기 가 시작되어야 제대로 신분을 찾는거죠? 우리 연구실 박사 과정에 멋을 부리고 발음을 꼬는 남자가 한 명 있습니다. 학기가 시작하고 처음 그 사람을 보았습니 다. 외국에서 대학을 다녔나 봐요. 상당히 티를 냅니다. "오, 예쁜 아가씨. 이름이 은정 홍?" "홍 은정이에요." "반가워. 나 이 학교 88 년도에 입학 했다가 일 년정도 다녔어. 선배니까 말 놓 아도 돼지?" "안되는데요. 졸업을 하셔야 선배죠?" "흠. 꽤 귀여운 구석이 있네? 잘 해 봅시다. 마이 네임 이즈 성준 배." 잘해 보긴 뭘 잘해 봐. 성 준배? 중배? 이 수일과 심순애에 나오는 그 중밴가? 그래 부티가 줄줄 흐른다. 낮에 철수나 볼까 하여 건물 밖으로 나왔다가 그리운 무언가를 보았습니다. 흰 색 비엠더블유 승용차. 예전 내 자가용이 생각나네요. 흠, 외할아버지가 선물하 신거라 제법 아끼며 탔던 차였는데. 318i. 호호, 제 것보다 한 단계 아래 레벨이 군요. 그래도 뭐 같은 3 시리즈라 겉모습은 색깔만 빼고 꼭 같습니다. 괜히 이 차 주인이 부럽네요. 누구 차일까? "은정씨." 철수가 웃으며 다가 옵니다. "너 그렇게 부르지마? 다른 사람들이 보면 오해하잖아." "장난으로 그렇게 불러 봤다. 오해하긴 누가 오해 해? 괜히 자기가 찔리니까." "그래 철수씨. 팔짱 껴줄까?" "안돼. 누가 보면 오해 해." "치, 자기도 그러면서." 철수 녀석은 내가 팔짱을 껴주자 바로 피해 버리네요. "누나. 나 불렀으니까 빨리 밥 사줘요." "그래. 학생 식당이면 되지?" "응." "너, 내가 수강하라던 교양과목 신청 했어?" "내가 꼭 그거 들어야 돼?" "응." "수강 신청 했어요." "잘 했어. 출석 잘 해?" "알았어요." "오후에는 수업 없어?" "수업이 있어도 개강 첫 주는 휴강이지 뭐. 그리고 이 번 학기는 제법 한가해 요. 14 학점만 신청 했거든요." "왜?" "공부를 잘했으니까. 전 누나와 달리 4 학년 때는 참 편할 거 같애."
"좋겠다?" "그럼요. 언제 당구 한 게임 합시다?" "그래 원한다면 도전을 받아주지. 내가 한 동안 당구를 안 쳤지만 너 정도야." "큰 코 다쳐요?" "오늘 오후에는 뭐 할거야?" "당구 칠거야. 그리고 저녁 먹고 난 다음 정희 누나 약방에 가서 놀지 뭐." "치, 놀 궁리만 하지말고 공부도 좀 해." "그 자꾸 날 어린애 취급하네요? 나도 내 할 일은 내가 알아서 해." "또 삐칠려구 한다? 그렇게 잘 삐치니까 내가 널 어린애 취급 하잖아." "나도 이제 4 학년입니다. 최고학년." "대학은 학번이야." "하여튼, 나도 다 컸으니까 어린애 취급 말아요." 제법 쌔게 나오니까 더 귀엽네요. 녀석의 귀를 잡아 당겼습니다. 그리고 귓속말 을 해 주었지요. "다 큰 놈이 키스도 제대로 못하냐?" "우쒸! 나 밥 안 먹어." 밥 안 먹는다고 하면서 철수가 뛰어 가 버립니다. 학생 식당으로 말입니다. 그 리고 내게 손 짓 하네요. 저런 녀석에게 내 사랑의 감정이 물들고 있다는 게 내 가 생각해도 조금 의아스럽습니다. "밥 안 먹는다며?" "빨리 뛰어 와 식권 사요. 난 줄 서 있을테니까." 3 월달은 예년과 다름없이 빨리 지나가 버렸습니다. 철수와 학교에서는 자주 보 지 못했습니다. 제대한 동기들이 제법 있는지 밥을 사 준대도 당구장이라며 내 성의를 거절한 적이 제법 됩니다. 그래도 저녁엔 내 방을 찾아 와 제법 재롱을 떨고 갔어요. 승주는 연락이 뜸해졌습니다. 승주가 3 월 중순에 내게 전화한 적이 있습니다. 철수가 옆에 있을 때였죠. 그는 철수의 목소리를 듣고는 피식 웃더군요. "철수란 후배에게 잘해 줘라." "후후, 그래. 언제 한 번 볼래?" "나 이번 학기 휴학했어. 코스모스 졸업보다 다른 이들과 같이 졸업 하는 게 나 을 것 같아서 휴학 했어." "그래?" "응. 나 어학 연수 떠날 거다. 6 개월 단기간이라 어느정도 실력이 늘지는 모르 겠지만 그냥 노는 것 보단 나을 것 같아서." "어디로 갈 건데?" "캐나다가 비용이 저렴하더라. 벤쿠버 쪽으로 갈거야. 간혹 편지 쓸게." "그래. 언제 떠나는데?" "한국엔 3 일 더 있을 거다." "엉? 그럼 수속 다 밟고, 떠날 준비 다 해놓고 연락한거야?" "응." "좀 더 일찍 연락하지?" "그래야 되니?" "내일 나 좀 봐." "바쁠텐데 그러지 마. 오래 떠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멀리 가는데." "내가 돌아 올때 쯤 넌 변해 있겠지?" "응?" "네 곁에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겠지?"
"흠. 모르겠다." "철수에게 안부 전해 줘라. 잘 살라라고." "그래. 잘 갔다 와." "하하, 한번 더 물어보지 않는구나?" "너 만나러 가는 거?" "응." "갈까?" "됐다. 떠나는 날 전화 한 번 하마." 승주는 전화를 하지 않고 떠나 버렸습니다. 조금 슬프다는 생각은 현재가 아니 라 과거의 기억 때문입니다. 승주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는 어쩌다 한 번 생각나 는 사람으로 변해 버린지 석달도 넘었습니다. 어쩌다 한 번 까 먹는 내 옆의 철 수 때문에. 철수는 승주에 대해 묻지를 않았습니다. 철수가 얼마나 자주 정희네 약국을 찾는지 알 수는 없지만 상당히 자주인 것 같 습니다. 연구실에서 일직 나오는 날은 항상 정희네 약국을 찾는데 그때 마다 철 수는 거기 있었습니다. 뭐야. 그네 둘만의 대화가 있는 듯 철수는 내가 나타나 면 나와 정희 눈치를 살폈습니다. 나도 이상합니다. 조금 씩 저 둘의 그런 모습 에 질투심이 일고 있습니다. 4 월이 시작하는 무렵에 교양 과목 레포트를 걷으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 참 재 밌네요. "학생 이리 와 봐요." 철수가 레포트를 던져 놓고 가는 걸 불렀지요.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말입니 다. 정희와 나 모르는 얘기들을 주고 받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는데 화 풀이 할 겸 철수를 사람들 보는 앞에서 불렀습니다. "왜요?" "이 레포트 베낀 거죠?" "에?" "베낀 거 맞죠?" "봤어요?" 녀석이 전혀 누나라는 말을 하지도 않을 뿐더러 떡 모르는 사이처럼 굴었습니 다. "다시 써 와요." "그 참 교수도 아니면서 대게 거만하네." 박수 치는 놈은 누구야? 철수에게 보기 좋게 깨졌습니다. 철수의 레포트를 살 펴 보았습니다. 철수의 레포트는 화려했습니다. 컴퓨터로 작성한 문서가 참 보기 좋게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래 철수 너 정보공학과 공돌이다. 대학원 생활은 나름대로 매력이 있네요. 좀 더 깊이, 그리고 좀 더 자유롭게. 연구실 사람들과 제법 친해 졌습니다. 학생일 때 잘 모르던 선배와는 친구처럼 맞먹을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혀 꼬는 박사과정 선배와도 친해졌습니 다. 좀 건방져 보이기는 해도 그도 역시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근데 바람기가 좀 있는 것 같아요. 아무 여학생이나 붙잡고 예쁘다는 말을 남발 했습니다. "철수야 저 여학생 예쁘니?" "아니요." "그럼 저 여학생은 예쁘니?"
"아무리 내가 공대생이지만 기분 나쁘네요." "그렇지? 나는 어때? 예쁘지?" "돈 일억만 줘요." "내가 그런 돈이 어딨어. 근데 왜?" "당장 성하나 지어줄테니까 거기서 살아요." 그 배성준씨는 철수보다 눈이 낮은 가 봅니다. 4 월의 둘째 주가 시작하는 첫 날에 철수 방을 찾았습니다. 녹음이 피기 시작하 고 봄 기운이 만연하니까 괜히 내가 센치해졌나 봅니다. 겨울을 사랑했던 목련 은 이미 지고 없습니다. 아무말 없이 철수를 바라만 보았지요. 철수는 컴퓨터 앞에 앉아 내가 모르는 프 로그램을 짜기만 했어요. "바쁘니?" "조금요. 커피 한 잔 타줄까요?" "됐어." "이 것만 끝내 놓고 놀아 줄게요." "후후. 이 장미 언제 피는거야?" "5 월달 쯤엔 피겠죠." "이거 나 준다고 했지?" "네." "그냥 줄거니?" "네? 그럼 그냥 주지." "뭔가 의미 있는 말이나 다른 게 포함되지는 않니?" "없어요." "우리 심심한데 뽀뽀나 할래?" "하, 누나?" "왜?" "내가 심심풀이 땅콩이야?" "치. 내가 이런 말 쉽게 했다고 생각하니?" "뽀뽀하면 누나하고 나하고 어떤 사이가 되는데?" "어떤 사이가 되다니?" "애인 사이 되는거야? 나에게 철수씨 하며 학교 다닐 자신 있어요?" "미쳤니?" "잠시 외로움을 느꼈다고 곁에 있는 사람에게 착각하는 맘 심어 주지는 마세 요." "그래서 넌 어린거야. 나 안 외로워." "후, 그 다행이네요. 승주형은 잘 있대요? 그 먼 캐나다까지 가서 누나 생각 많 이 한대요?" "됐다. 내가 누구 때문에 외롭지 않은지 모르지?" "너무 늦게 까지 제 방에 있진 마요?" "지금 갈거다." "삐쳤어요?" "그래, 삐쳤다." 철수는 여전히 승주를 의식하고 있었고, 자기가 어리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 태도에도 문제가 있을까요? 봄의 색조는 나에게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 라고 합니다. 내 곁엔 철수가 있네요. 아휴, 모르겠습니다. 녀석은 내 곁에 오 래 머물러 줄 것 같습니다. 너무 서둘지 않으렵니다. 나 시험 조교로 들어 가 봤어요. 우리 과 학생들. 내 남자 동기들 여럿이 날 보
더니 움츠립니다. 치팅 하기만 해 봐? 아주 깐깐하게 시험 감독을 했습니다. "거기 김 성종씨 컨닝 하지 마." "너 봤어. 동민이 너 걸렸어." 싹싹 빌길래 봐 주었지만 엄청 쪽 팔게 만들었습니다. 여자 후배들이 상당히 웃 었습니다. 드디어 철수가 수강을 하고 있는 교양과목도 시험 감독을 하게 되었습니다. 철 수는 중간 정도의 위치에서 복도가에 앉아 있습니다. 시험지를 돌릴 때 철수가 날 보며 씩 웃었습니다. 저 번 레포트 던져 줄때는 완전 안면 몰수를 하더니 저 웃음에는 잘 봐달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겠죠? 절대 그럴 수 없다. 조용한 실내. 볼펜 구르는 소리. 그리고 조교들의 구두 발자국 소리. 나는 철수 를 지나치다 철수 뒤에 잠시 서 있었습니다. 녀석이 답을 잘 달고 있는지 궁금했 기 때문입니다. 제법 공부를 했나 보네요. 8 문항 중 벌써 7 개 문항의 답을 달아 놓았습니다. 1 번부터 읽어 보았지요. 호, 제법 열심히 수강을 했나 보군요. 4 번 까지 모두 점수를 줄 수 있었습니다. 근데 5 번이 문제네요. 헛기침을 한 번 했습 니다. 철수가 고개를 들어 날 쳐다 보네요. 들고 있던 볼펜으로 5 번 문항을 톡 톡 쳐 주고 허공에 가위표를 그려 주었습니다. 날 보는 눈 빛이 "정말요?" 하고 묻는 것 같습니다. 고개를 끄덕 거려 주었습니다. 철수가 머리를 벅벅 긁었습니 다. 나는 강의실을 한 번 돌았습니다. 그리고 철수 뒤에 가 다시 섰지요. 철수 의 답안지를 보고 어이가 없었습니다. 철수는 제대로 답을 해 놓았던 6 번 문항 을 고쳐 놓았습니다. 진짜 바보네요. 다시 오번을 톡톡 쳐주고 가위표를 그렸습 니다. 그리고 6 번 문항에는 동그라미를 그려 주었지요. 이 번에 어떻게 하는 지 뒤에서 지켜 봤습니다. 6 번 문항을 벅벅 지우네요. 그리고 날 쳐다 봅니다. 그리 고 내가 보라는 듯 글자를 씁니다. "맞는 거 같은데?" 고개를 끄덕 거려 주고 가위표를 그렸습니다. 5 번이 틀렸단 제스쳐를 한 것이었 는데, 날 의아하게 또 올려다 봤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벅벅 긁더니 답지에다 뭘 썼습니다. "나는 맞는 것 같은데 조교가 답이 아니래서 할 수 없이 씁니다. 배째." 시험을 장난으로 생각하는거야 뭐야. 틀린 5 번 문항은 손도 되지 않고 제대로 답을 했던 6 번 문항으로 곤란을 겪고 있는 철수가 안스럽기도 하고 바보같기도 합니다. 더 이상 나도 모르겠다. 머리 한 대 쳐주고 앞으로 갔습니다. "왜 때려요?" 순간 조교들을 비롯해 수많은 학생의 시선이 나와 철수에게로 왔습니다. 엄청 부끄러웠어요. 저거 4 학년 맞습니까? 저런 녀석을 난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까. 철수는 큰 소리로 그렇게 말하고선 바로 고개를 숙였습니다. 나만 바보 됐습니다. 결국 철수는 5, 6 번을 틀렸습니다. 꼬시다 짜식아. 날 잠시 황당하게 만들었지만 철수는 여전히 내 바로 곁에 있습니다.
42 회
많은 낯선 사람들 속에서 낯설지 않은 사람을 보았을 때, 낯설지 않은 사람이 낯선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야 되는 위치에 있을 때, 그 낯설지 않은 사람이 나 와 공유한 기억이 많은 사람이라면 그에게서 받는 느낌은 뭘까. 다른 사람들은 거저 바라만 봐야 하지만 나와는 같이 한 기억이 많다면... 교양 시험 감독을 하러 온 누나의 모습은 왠지 나만의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었 다. 시험지를 받고 문제를 푸는 동안 누나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지 않는 배려
를 내게는 해 주었다. ""오번이여, 육번이여? 육번이 틀렸다고라?"" 누나는 5 번 문항과 6 번 문항 사이를 볼펜으로 톡톡 쳐 주며 허공에 가위표를 그 렸다. 그런 누나에게 난 약간의 과시하고 싶은 마음,. 여기 시험 보고 있는 사람 들아 여기 예쁜 조교는 나와는 잘 아는 사람이다. 어울리지 않는 공간에서 나는 저 사람과 사랑하는 사이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기분 좋은 생각이었 다. 한 대 맞기 전까지는... 답지를 제출하면서 누나를 심하게 째려 보았다. 날 동생으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지? 요즘들어 저 여자가 간혹 날 남자로서 사랑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 었는데. 누나는 답지를 보더니 날 한심스럽다는 듯 쳐다 보았다. 모르겠다. 은정이 누나에게서 난 나이 어린 후배란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누나에 게 사랑한다는 말을 아껴야 하는 이유도 그 것 때문이다. 난 누나를 사랑하고 있 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렇다. 헤어질 수 없는 공간이라면 난 누나에게 예전에 벌써 사랑한다는 고백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충분히 헤어질 수 있는 매 정한 공간이고 잊혀질 수 있는 사람들의 미로다. 후, 누나를 사랑할 것 같은 남 정네들이 너무도 많다. 승주는 잊혀지는 사람일까, 내가 모르는 시간에 누나의 그리움을 받고 있는 사람일까. 시험 보고 와서 시험 문제에 대한 생각보다 조교 로 들어 왔던 누나 생각을 해 본다. 오늘 강의실에서 누나의 배려를 받은 사람 은 나뿐이다. 맞은 사람도 나뿐이다. 그런 누나 곁에 오래 버티는 방법은 사랑한 다는 고백을 버틸 수 있을 때까지는 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어색해지면 미로 속으로 빠진다. "누나, 사랑하는 느낌이 뭘까요?" 난 시험을 마치고 정희 누나의 약국을 찾았다. "갑자기 그걸 왜 묻니?" "어느 때 저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라고 느낄까?" "은정이가 뭐라 그러던?" 약국에 손님이 들어 와서 정희 누나는 잠시 내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정희 누나는 손님을 내 보내고는 내게 다가와 웃었다. "내가 은정이 누나에게 느끼는 감정이 사랑이 맞을까? 그냥 곁에 오래 있은 정 때문에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걸까?" "흠. 나를 느끼는 감정과 은정에게서 받는 느낌 중, 어느 것이 더 가슴 떨리 던? 그 차이점을 잘 생각해 봐. 정 때문이라면 가슴 저리고 하지는 않을거야." 차이점? 가슴이 떨린다? 내가 은정이 누나를 생각할 때 가슴이 떨리나? 자주 붙 어 다녀서인지 그런 게 있는지 잘 모르겠다. 하하, 숨이 막혀 본 적은 있다. 누 나가 내게 키스해달라고 말했을 때. "누나는 남자를 사귀어 봤으니까 알 거 아냐. 그 사람 없이는 못 살겠대요?" "사람마다 차이가 있어. 그 사람 없이는 못 살것 같아서 사랑을 느끼는 사람과 그 사람이 가장 적당할 것 같아서 사랑하는 감정을 키우는 사람도 있지. 나는 아 마 후자 쪽이었을거야. 은정이는 너에게 있어 어떤 사람이야?" "에? 그걸 왜 물어요?" "어짜피 나와는 까놓고 상담하기로 했잖아?" "사람들 틈에서 저 사람은 내 사람이다,이라고 느꼈어요. 그 밖에 남 주기 아까 운 사람, 저 사람이 없는 생활은 참 답답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구요. 그냥 누나 가 좋아할 만한 사람이 없는 곳에서 단 둘이서만 살고 싶다는 생각도 해 보았어 요. 그러면 차이지 않을 테니까." "나도 같이 가 살면 안돼?"
"지금 내가 농담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호호. 은정이에게 차일 것 같애?" "응. 만약 연인 사이가 된다면 얼마 못가서 난 차일 것 같아. 헤헤, 생각이 너 무 앞서 가나? 하긴 연인이 된다는 생각도 너무 앞서 간 생각이긴 하다." "은정이에게 상처 받는 걸 두려워 하는구나. 하긴 니가 언제 사람들에게 상처 를 받아 봤겠니." "참내. 정말 상처를 주는 입장에서는 그 걸 모르는구나." "응?" "누나 다른 동네로 이사 갔을 때, 나에게 이사 간 곳 알려 주지 않았죠? 이사 간다는 말은 있었지만 그 날이 언제인지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진 않았죠? 학교 갔다와서 누나네 집이 빈 집으로 변해 있었을 때, 그때 어린 마음에 난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모르죠?" "후후. 그랬니? 다시 만날 걸 알고 그랬나 보지." "다시 만났을 때, 누나는 여전히 날 어린애로만 봤어. 그리고 임자도 있었고. 은정이 누나에게 가지는 생각들이 누나에게서 받은 영향 때문이기도 해요." "후후." "왜 웃어요?" "귀여워서. 나도 느낀 게 있어서 은정이와 잘해 보라는 거야." "뭘 느낀게 있는데?" "그런게 있어. 연하라는 생각 너무 많이 갖지마." "그건 그렇고. 내가 은정이 누나에게 가지는 감정이 사랑이 맞긴 맞나요?" "맞는 거 같애." 정희 누나의 눈 빛이 오늘따라 참 곱다. 매정했던 사람아 잘 살아라. 밤에 은정이 누나가 내 방을 찾았다. 내 방에 들어서며 날 보고 피식 웃는다. "바보야?" "왜 그래요?" "어떻게 5 번이 틀렸다고 가르쳐 주었는데, 6 번을 고치냐?" "오늘 시험 말하는거에요?" "응." "그 시험감독이면 모두에게 공평해야지. 나에게만 그러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 겠어요?" "니가 좋아서 그랬다 왜?" "후후." 그래 누나는 날 좋아한다. 이런 현재의 생활이 좋기 때문에 난 사랑이라는 말 을 미루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나는 자기 방에 들어 가기 전 잠시 내 방을 들렀다. 종종 있는 일이다. 이런 시간들을 굳이 깨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래 잠시 쉬었다 가세요. 누나가 내 침대위 걸터 앉았다. 그리고 장미 나무를 쳐다 보았다. "어? 꽃봉오리가 졌네? 이거 곧 피겠다." "꽃 피면 줄게." "근데 두 송이 밖에 없네?" "두 송이면 됐지." "이 나무 이름이 내사랑은정이랬지?" "아이, 그렇게 적은 거 아니라니까." "훗훗. 요즘 그 은정이라는 애 만나니?" "학교 내려와 있는데 어떻게 만나요?" "연락은 자주 해?" "거의 안해요."
"왜? 사귀어 보지 그랬어?" 그런 말 하면 나 헛갈려요. 별로 기분 좋지 않네요. "누나." 제법 음조를 낮춰 분위기 있게 누나를 불렀다. "왜?" "난 누나에게 어떤 존재에요?" "어떤 답을 듣고 싶어?" "이런 질문 하는게 어색하지 않아요?" "전혀." "우쒸." "흠, 가만 잠시 생각 좀 해 보고. 응, 남주기 싫은 사람." "뭐야 씨." "그거 좋은 거다?" "별로다. 나 시험 공부해야 돼. 누나 방 가요." "요즘들어 나 자주 쫓겨나는 것 같애." "시간이 늦었잖아. 저거 꽃 피자 마자 누나 갖다 줄게." "꼭 그렇게 해야 돼? 참, 네 생일 선물 뭐 해 줄까?" "난 음력 생일로 해요." "알아." "내 음력 생일 알아요?" "응." "뭐 해줄건데?" "너 갖고 싶은 거 말해 봐." "이것 저것 말해도 돼요?" "응." "겨울 목도리. 참, 그건 있구나. 손장갑, 털모자, 그리고 겨울에 신을 만한 구 두." "지금은 봄인데?" "첫 눈 오면 마로니에 공원 거닐려고 그런다? 난 지금부터 월동 준비 해야 돼. 대학생활 마지막인데, 첫 눈 올 때 여자 친구랑 공원 거니는 걸 아직도 못해 봤 어." "하하." "웃지 마요." "작년 첫 눈 올때 내가 그 약속 지키지 않았다고 꼭 시위하는 것 같다? 올해는 꼭 같이 있어 줄게." "참 내. 착각하지 마요. 올해는 여자 친구가 생길거야." "후후. 그래, 여자 친구 만들어. 철수야, 나도 여자란다?" 저 여자 또 날 착각하게 만드네.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자꾸 누나를 여자로 생 각하잖아. "잘 자요." "응." 시험이 끝이 났다. 봄 기운이 만연해 이제는 얼마 안 있어 여름이 올 것도 같 다. 오월의 햇살이 나리기 시작한다. 한가한 시간을 틈 타, 은정이 누나가 있는 약대 연구실로 갔다. 누나는 연구실에 있을 것이다. 약대 가서 연락 할 생각으 로 무턱대고 찾아 갔었다. 저 새끼 뭐여? 복도에서 누나를 보았다. 어떤 멋을 부린 놈과 같이 있었다. 내가 보기에 그 녀 석이 누나에게 추근되는 것처럼 보였다. 손을 잡으려고 하고 어깨를 툭툭 치기
까지 한다. 누나가 날 봤다. 반가운 웃음을 던져 주었지만 난 기분이 나빴다. 옆 에 새끼 누구여? 잠시 떨어 져 누나가 내게로 올 때까지 기다렸다. "나랑 밥 먹으러 가자. 수원 잠시 나갔다 와도 되잖아." "안될 것 같은데요. 나에게 밥 사달라고 조르는 사람이 왔어요." 누나의 그 말에 그 멋을 부린 녀석이 날 쳐다 보았다. 늙어서 저러고 싶을까? 브리지라고 해야하나? 녀석은 머리 앞부분만 똥색으로 부분 염색을 하고 있었 다. 발음도 되게 꼬고 있다. "쟤 누구야? 애인? 내가 더 나은 것 같은데? 맛있는 거 사줄게, 수원 갔다 오 자." 저런 더런 새끼가 있나. 지나가는 사람, 100 명에게 물어 볼래? 내가 나은지 니 가 나은지? "싫어요. 선배님 혼자 가셔서 맛있는 점심 드시고 오세요. 전 다음에." "예쁘고 섹시한 은정이가 저런 애하고 사귀는 줄은 몰랐는데? 쟤 젓비린내 나잖 아." 뭐 저런 새끼가 다 있냐. 다 들려 임마. 내가 젓비린내가 나는 지 안 나는지 맡 아 봤어? "저 가볼게요." "할 수 없지 뭐. 다음에는 꼭 같이 가자?" "알았어요." "거기 학생." 나 말이여? 그 밥맛 없는 놈이 날 부르길래,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답을 했 다. "나 말이에요" "그래요. 만나서 반가워요." 뭐야 저 새끼. 난 안 반가워 임마. 날 언제 봤다고 인사를 해? 누나가 미소 지 으며 나를 잡아 빠른 걸음을 걷는다. "저 사람 누구냐?" "신경 쓰지마." "누나 사귀는 사람이에요?" "이씨." "엄청 친하게 보이던데?" "저 사람 여학생에게는 다 친한 척 해. 아무나 보고 예쁘다 그러는데 뭘." "날 언제 봤다고 아는 척이야?" "나쁜 사람은 아니야. 우리 연구실 박사과정 선배." "계속 추근되면 말해요." "후후, 니가 무슨 상관이야?" 누나를 흘겨 보았다. 웃지마, 정 들어요. "이 차 알지?" 약대 앞에 주차시켜 놓은 BMW 승용차. 이 번 학기 초부터 보이던 차다. "응. 누나가 예전에 타고 다니던 거랑 같은거잖아." "아까 그 사람 차야." "새끼 부잔가 보네요?" "흠. 몇 번 얻어 탔었어." "밤 늦게 단 둘이 타고 가지는 마요? 남자는 다 늑대야." "호, 그래? 너도 늑대니?" "하하. 나는 열 외." 누나와 학생 식당에서 밥을 먹는 시간은 즐겁다. 아는 놈들이 간혹 부러운 눈길
을 보낸다. 한 두번 보는 것도 아닌데. "모레 너 생일이잖아." "응?" 음력 생일이라 나도 그 날 집에서 가르쳐 주지 않으면 내 생일을 모르는 수 가 있다. 근데 저 여자는 그 걸 세고 있었나 보다. "생일 파티 해야지?" "모레가 내 생일이에요?" "뭐야. 자기 생일도 몰라?" "음력 날짜 세는 사람 드물잖아요." "누구 초대할거야?" "간편하게 하지 뭐. 정희 누나네 약국 문닫고 간단하게 거기서 놀자." "흠, 정희네에서?" "왜, 싫어요?" "너, 나, 정희 세명만 모일거니?" "왜 동아리 방에다 내 생일 파티 해 줘. 이렇게 광고 때릴까?" "그래, 정희랑 세명이서 모이자." 내 생일 날 오후에 수희가 다녀갔다. 내 생일이라고 엄마가 수희를 내려 보냈 다. 하하, 그래 귀한 아들이 객지 생활하니까 챙겨 주고 싶었겠지. 수희는 고운 도시락을 들고 왔다. 이 더운 봄에 보온 물병이 어울리지 않지만 따뜻한 미역국 이 참 좋았다. 늦은 점심이었지만 그 날 점심은 미역국에 콩 밥 먹었다. 수희가 내 생일 선물이라고 넥타이를 하나 사가지고 왔다. 정장 한 벌 없는 놈에게 넥타 이가 필요할까? 하긴 곧 졸업 사진을 찍는구나. "이건 은정이가 주는 거야." "뭔데?" "풀러 봐." 좋은 케이스에 든 것은 넥타이 핀이었다. 둘이서 짜고 산 모양이다. "은정인 잘 사니?" "연락 좀 하고 살아." "아직 날 안 잊었대?" "헛, 오빤 안 보면 금방 잊어버리나 보지?"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은정이만한 애 없는데." "후후. 내가 오빠라고 제법 날 챙기네." "참, 오빠 오기전에 어떤 여자가 다녀갔어." "여기를?" "응." 누군지 알겠다. "예쁘지?" "뭐가 예뻐. 이름이 은정이라고 하던데? 날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뭐라 그러던데?" "적반하장이라고 나보고 누구냐 묻더라." "그래서?" "댁은 누구쇼? 되 물었지." "하하, 그 누나 너보다 네살 많아." "그래, 이 방 주인 친동생이라고 하니까 엄청 친한 척 하대. 바로 말도 낮아지 고 호호, 거리는 게 꼭 불여우 같더라." "야, 불여우가 뭐야." "오빠하고 친한 사람이야?"
"응." "나이 많은 여자 조심해야 된다." "너 꼭 아버지처럼 얘기한다?" "하여튼, 그 언니 조심 해. 첫 인상이 별로 좋지 못했어." "너 대학 합격했다고 상품권 주었던 사람이 바로 그 누나야." "치, 왜 줬대?" 얘도 공주인 것 같다. 자기 보다 좀 예쁘다 싶으면 앞,뒤 안 살피고 바로 적으 로 삼는 것. 얘야, 니가 말하는 그 언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수희는 나와 같이 있다 해가 지기 전에 서울로 돌아 갔다. 내 생일 파티. 참 좋았다. 약국 문을 평소보다 한 시간 빨리 닫고 나이는 많지 만 예쁜 누나 둘의 축하를 받았다. 생각해 보니까 내 주위에 여자가 없는 게 아 니다. 저 둘이 제법 긴 시간 내 곁에 있어 주었다. 내 복이다. "축하 해 철수야." "하하." 은정이 누나가 케잌까지 사 왔다. 정희 누나는 생일 선물로 연극표 두 장을 주 었다. "주말에 둘이 보고 와서 얘기 해 줘." "누구랑?" "너네 둘이." 은정이 누나와 날 위한 표다. 그럼 내 생일 선물은 꼴랑 연극표 한 장이네? 은 정이 누나는 내가 말했던 걸 그대로 선물했다. 손 장갑, 털 모자, 그리고 부츠 형 구두. 나, 더운 날 손장갑 끼고 털 모자 쓰고 조금 더워 보이는 구두까지 신 고 나이 많은 여자들 앞에서 재롱 떨었다. "고마워요." "이왕 태어 난 거 잘 살아라." 은정이 누나의 내 생일 축하 멘트다. 내 자네 생일 때 그대로 써 먹으마. 술 먹지 않았다. 그냥 생일 케잌 잘라 나눠 먹고 청량 음료 마셨다. 잔잔하게 흘러 가는 시간이 좋았다. "이제 그만 파하자. 난 내일 또 약국 열어야 되고 이쯤에서 끝내자." 열시 조금 넘은 시간이다. "왜 쫓아 내는거야?" 난 더 있고 싶었다. "나 자야 돼." "은정이 누나 방 가서 더 놀지 않을래요? 차라도 한 잔 하면 좋잖아." "됐어." 은정이 누나는 아무 말 없었다. 그래서 아쉬운 생일 파티를 끝마쳤다. "너네 동생, 너 닮지 않아서 참 예쁘더라?" 다시 자라고 있는 수수밭을 은정이 누나와 거닐었다. "나 닮아서 이쁜거죠." "닮았었나?" "나도 못생긴 얼굴은 아냐." "나 너보고 못생겼단 소리 한 번도 안했다. 오히려 잘생겼다 했지." "그럼, 나 잘 생겼어." "어휴, 아직 애 같애." 우쒸. 그 말 슬픈 말이야. 특히 누나가 하면 더 그래. "누나?"
"응?" "이제 한 살 차이다." "뭐가?" "나 생일 지났으니까 만으로 22 살이잖아. 누나는 아직 만으론 23 살. 한 살 차 이 맞잖아." "줄이고 싶니?" "그럼요." "왜?" 뭘 묻냐. 그냥 그러려니 하면 되지. 누나는 누나 방으로 가고 나는 내 방으로 갔다. "나 옷갈아 입고 있을 테니까 나중에 차 한잔 하러 와." "그럴까?" "그래." 내 방으로 들어 왔다. 옷을 갈아 입고 추리닝 바람으로 겨울 멋을 냈다. 목도리, 장갑, 털모자. 거울 에 비친 내 모습이 참 웃기다. 내 얼굴이 웃고 있다. 내 모습이 웃겨서 웃는 게 아니다. 침대에 앉았다 잠시 시선이 다른 곳으로 갔다. 하하하. 드디어 피었다. 오늘 오 후까지 꼭 다물고 있었는데 오늘이 내 생일인 걸 아는 것 처럼 두 송이의 장미 중 한 송이가 꽃 봉이를 열었다. 한 송이는 수줍은 듯 아직 봉오릴 모으고 있지만 다른 한 송인 장미 모양을 냈 다. 은정이 누나와 내 모습 같다. 다문 꽃 봉오리는 나, 그리고 오늘 입술을 연 저 장미는 누나. 화분을 가슴에 안았다. 그리고 달려 갔다. 누나 방으로... "누나야." "어, 들어 와." 문을 열고 들어 가 누나 책상에 화분을 놓았다. "이것 봐요." "어? 한 송이가 봉오릴 열었네?" "응. 그래서 누나 주려고 가져왔어." "야, 귀엽다." "그렇죠. 내 생일을 어떻게 알고 시간을 맞춰 피었을까?" "한 송이는 아직 피지 않았는데 지금 나 주는 거야?" "한 송이는 누나가 피게 만들어요." "그럴까? 근데 그냥 주는거야?" "그럼?" "멋있는 말 해 봐. 아니면 시를 적어 주던지." "시?" "응. 그냥 주면 밋밋하잖아. 시라도 멋있게 읊어봐." "내 생일인데 내가 지어야 돼?" "이건 네 생일하고 상관없는거잖아." "시 짓는 건 문제 없지. 남사스럽지만 오늘은 내 생일이니까 한 번 읊어 볼까? 나 시 금방 지어요." "그래. 멋있게 읊어 봐." "잠깐만 기둘려 봐. 아무래도 말로 하긴 쪽팔리다. 잠시 혼자 있어요." 내 방으로 다시 갔다. 그리고 짧은 시 하나를 지었다. 헤헤, 아까 두 송이의 장 미를 보고 나와 누나라고 생각했었다.
먼저 핀 장미 한 송이. 수줍게 입 다문 다른 한 송이. 먼저 핀 장미는 입다문 장미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까. 같이 피었으면 좋았을텐데 서로 사랑하는 모습으로 같이 피었으면 좋았을텐데. 두 송이의 장미는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먼저 핀 장미는 알지 못하고 피지 못한 장미는 마음을 숨기고 있다. 다시 쪼르르 누나에게로 달려 갔다. "자." "금방 지었네." "그럼요. 별 의미는 없는거야." "읽어 보고 나서." "그래." 누나가 내 시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뭔가 알아 차린 듯한 표정. 또 들켰나? "이거 우리 둘을 생각하고 쓴 거지?" 씨바, 또 들켰다. "에?" "피지 못한 장미가 나인 것 같다?" "응?" 뭐야. "커피 한잔 끓여 줄게." "그래요." 테이블에 누나와 마주 앉았다. 누나가 또 참기 어려운 표정으로 아무말 없이 날 쳐다 보았다. "또 왜 그런 눈으로 봐요?" "그냥." 그래, 오늘은 내 생일이다. 일 한 번 저질러 봐도 용서 받을 수 있다. 지가 먼 저 뽀뽀하자고 한 적도 있다. 나도 아무말 없이 누나만 쳐다 보았다. 내 얼굴이 자연스럽게 누나 입술 쪽으로 가고 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서로 얼굴만 가 까이 하고 있다. 왜 이럴까. "흠." 웃으면 안되었는데... "왜 웃니?" "입 맞추어도 되요?" "후후." 저 웃는 표정은 분명 긍정의 표시다. 에라 모르겠다. 내 마음에 맞기자. 서로 껴안지 않았다. 테이블를 사이에 두고 조심스럽게 마주한 얼굴. 그리고 입맞춤. 두 번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고 그리고 짧은 타액의 교환이 있었다. 나는 잠시 꿈 을 꾸었다.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는 바램이 드는 기분. 그러나 자세가 불안했 다. 떨어져 있었기에 나는 몸을 일으키고 탁자에 손을 올렸다. 누나와 입술이 닿 아 있다는 기분이 너무 좋아 누나에게 더 다가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탁!" 우쒸, 잘못하여 내 앞에 있던 찻잔을 넘어뜨렸다. 그리고 테이블 위를 타고 가 는 커피... 시간이 흘러 가고 있다는 걸 일깨워 주었다. 누나는 미소를 짓고는 내게서 입술을 뗐다. 나는 꿈을 깨고 현실로 돌아 왔다. 갑자기 누나가 어색하
다. "고마워." 누나가 탁자를 닦으며 던진 말이다. "뭐가요?" "저기 화분. 두 송이가 다 피면 네게 얘기해 줄게." "흠. 내 생일이라 키스해 준거야?" "아니야." "나 아직 어리죠?" "그래." 씨. "나 갈게요." "철수야?" "왜?" "나 너 사랑하는 거 같다." 하하. 고개를 돌려 누나를 보았다. 저 표정. 참 아름답지만 금방 번복할 것도 같은 표정. 나도 그녀를 사랑하면서 그녀가 날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지금, 나 는 왜 내 마음을 숨기는 걸까. 여자는 분위기에 약하다는 말로 변명해 보자. 나 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 나는 내 감정에 이기지 못하여 누나를 내 곁에 오래 두 지 못할 것 같다. 지금 나는 행복하다. 너무 행복해서 다음을 생각하기가 두렵 다. "잘 자요." 43 회 내 방에 돌아 왔다. 누나는 그냥 자나 보다. 밖이 조용했다. 누나가 날 사랑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참 기분 좋은 말이다. 나도 그녀를 사랑 한다. 근데 난 누나와 사랑하는 관계를 지속 시키지 못할 것 같다. 그 생각을 지 울 수가 없다. 연애 한 번 제대로 못해 본 놈이 더군다나 두살의 연하인 내가 은 정이란 여자에게 어린 애 취급 밖에는 더 받겠냐. 그렇지만 그녀와 사랑하는 사 이가 되면 내 철없는 감정은 커져 갈 것이고 누나를 소유하러 들 것이다. 그런 감정들은 누나를 귀찮게 할 것 같다. 내 감정 때문에 누나에게 서운함을 가지게 될 것이고 누나가 어색해질 것이다. 누나는 상대방이 어색해 하는 걸 싫어 했 다. 난 분명히 차인다. 내 마음을 드러 내지 않길 잘했다. 학교 다니면서 나를 차버린 누나를 모른 척 할 자신이 없다. 난 누나에게 매달리겠지? 그러면 누나에 게 심어 주었던 내 좋았던 기억까지 지워버릴 수가 있다. 누나와 약간은 거리를 유지해야 할 것 같다. 약간의 정을 떼 놓아야 겠다. 기분 좋은 말을 듣고 기분 나쁜 상상을 해야하는 나는 정말 어린 것일까. 사람 에게 상처를 받아 보지 못했기에 상처 받는 것이 두렵다. 키스의 달콤함만 기억하며 누나에게 태연해 지자. 후후, 그냥 갈 줄 알았습니다. 그럴 것 같았어요. 철수는 승주와 닮은 구석이 많았습니다. 철수는 내 사랑 고백을 듣고 단지 잘 자라,라는 말만 남겨 놓고 그 냥 갔습니다. 한 동안은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래서 잠이 들지 않고 있었습니다. 달려가서 철 수의 멱살을 잡고 하소연을 하고 싶기도 했습니다. 내가 만났던 남자들. 자기들 은 맘대로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서 내가 그들에게 한 사랑이라는 말은 받 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녀석의 멱살을 잡고 너도 빨리 날 사랑한다고 말해. 이러 고 싶었습니다. 괜히 웃음이 나왔습니다. 상대가 철수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 각입니다.
철수가 주고 간 장미 나무를 보았습니다. 저 화분을 처음 봤을 때, 그 것이 내 게 올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철수가 적어 온 시는 그가 연하기 때문에 내가 그 를 몰라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습니다. 피지 못한 꽃을 철수라 생각하면 답 은 금방 나오지요. 철수는 날 사랑하고 있습니다. 오늘 철수는 삐치지 않았어요. 내가 그에게 사랑한다고 했던 말은 승주에게 했 던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난 승주 때보다 많이 조심스러웠습니다. 철수와 나의 관계는 승주와 나의 관계보다 조심스럽지 못했는데도 말입니다. 철수는 승주처 럼 당황하거나 피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내일이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모른 척 하겠지요. 그러나 승주처럼 피하는 인상은 주지 않을 것 같습니다. 철수는 내 마 음을 멀지 않아 받아 들일 것 같습니다. 조금은 일렀나 봅니다. 철수의 굳게 다물었던 입술이 오늘은 열렸어요. 그의 마음도 열리고 있다는 거겠 지요. 연하에게 느끼는 사랑의 감정이조심스럽습니다. 철수는 날 사랑하고 있 습니다. 그는 단지 헛갈려 하고 있을 뿐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철수와는 예전처럼 지낼 겁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했지만 달라 질 건 없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그와 난 연인 사이 같아요. 내가 했던 말은 그 냥 서로의 마음을 알아 보려고 했을 뿐입니다. 내 마음은 이제 헛갈리지 않습니 다. 철수의 헛갈리는 마음을 내가 바로 잡아 주어야 겠네요. 내일 태연하게 철수 를 만나겠습니다. 연하? 그게 무슨 상관이야. 아침에 일어 나 철수 방 문앞으로 갔습니다. "쾅!" 문을 걷어 차고 초인종을 눌렀지요. 그는 푹 잤다는 표시를 긴 하품과 헝컬어 진 머리칼로 대신 보여주었습니다. 조금은 나를 어색해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 니네요. 내가 그를 조금 어색해 하는 느낌이 듭니다. 먼저 고백한 사람이 어색함 도 먼저 느끼나 봅니다. "아아암, 아침부터 왠일이에요?" "바,밥 먹으러 가자." "아침은 우유 한 잔 마시면 되요." "밥 사줄게 가자." "어제 그 말 했다고 이러지 않아도 돼요. 번복하려면 하세요." "엉? 번복하라니?"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 어색해지는 것 보단 자연스러운 게 낫겠죠?" "뭐야?" "흠, 어제 했던 말 장난이죠?" 나 많이 화가 났습니다. 녀석은 내가 생각했던 태도와 달랐습니다. 약간은 날 어려워 하며 어제 내가 했던 말을 못 들은 척 할 줄 알았는데, 그는 아예 내 말 을 부정하려고 했습니다. "야! 너 말이 좀 심하다?" "나 사랑한다는 말 진짜에요?" 녀석이 상당히 뻔뻔하게 나옵니다. 자신있게 대답하지 못했어요. "응." "나는 잘 모르겠어. 괜히 어색해질 것 같애." "훗! 너 승주처럼 그럴래? 너도 이제 날 피할거야?" "아니요. 누나 옆에 붙어 있을거야. 절대 누나에게 넘어가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무슨 말이야?" 내 옆에 붙어 있겠다는 말은 기분을 좋게 하지만 그 뒤의 말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학교 안 가요?" "넌?" "시험도 끝났고 오늘 수업도 없어요. 집에 있을거야." "그럼 점심 때 연구실로 와." "싫어요." "또 삐쳤니?" "무슨 삐칠 일이 있어야 삐치죠." "그럼 집에 있어. 내가 점심 때 올테니까." "오지 마요." "뭐야?" "어제 했던 말 때문에 그러죠?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테니까 괜히 어색하게 만들 지 맙시다." "왜 어색해 지는데?" "누나 날 사랑하지 않잖아요. 어제는 분위기 때문에 그랬을거야. 사랑이라는 말 함부로 하지 마요. 나 헛갈리니까." "넌 날 사랑하지 않니?" "당연히. 그래도 좋아는 해요." 철수를 빼꼼히 쳐다 보았습니다. 슬프네요. 철수에게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너도 똑 같구나." 그냥 돌아 섰습니다. 내 마음은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내 마음을 그에게 보 여 주기 위해 그와 많은 얘기를 하고 싶지만 철수의 태도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돌아 섰습니다. 내 분함 때문일까요. 난 눈물을 훔쳐야 했습니다. 다음 날 아주 태연하게 내 방에 들어 와서 연극표를 꺼내는 철수가 미웠어요. 난 심한 배신감을 느꼈는데 철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 방을 찾아 와서 퉁명 스럽게 얘기 했습니다. 난 철수가 삐쳤을 때 저렇게 아무렇지 않았어요. 나 지 금 삐쳐 있는데, 내가 그에게 끌려 가는 인상이 정말 싫네요. "연극 보러 가요? 내일 대학로 같이 갑시다?" "싫어." "우쒸, 왜 싫어요? 이거 정희 누나가 나랑 누나 보라고 선물한거야. 같이 가야 돼." "나 안갈거야. 너 그 은정이라는 애와 같이 가면 되겠네." "삐친거야?" "흥, 내가 너같은 줄 아니?" "그럼 왜 그래요?" "너 하고 얘기 하기 싫으니까 나가." "오늘 서울 같이 안 갈거야?" "안 갈거야." "그 말 했다고 어색해 하는 거지? 난 잊어버렸으니까 누나도 잊어 버려요." "야! 너 보기 싫으니까 네 방 가." "이거 이 번 주말까지만 유효한 거야. 정희 누나 성의를 봐서라도 이 번주에 보 러 가요." "나 바뻐. 그리고 빨리 네 방 가." "진짜 삐쳤어요?" "말하기 싫으니까 빨리 가." 내 표정이 상당히 날카로운데도 철수는 장난기 어린 표정을 바꾸지 않았습니 다. 결국 내 방을 나가기는 했지만 한 마디 하고 갑니다. "벤뎅이!"
"쾅." 금요일 저녁 따로 서울로 왔습니다. "은정아, 내가 태워 줄까? 나도 오늘 서울 갈건데." "됐어요." "예쁜 은정이 태우고 가면 내 기분이 좋을 것 같애. 내 아는 카페가 있으니까 차도 한 잔 하자." "나는 별로 기분 안 좋아요." "내가 기분 풀어 줄게." "선배님은 분위기 파악 할 줄 몰라요?" "허, 화 내니까 참 섹시해 보인다." "에이 씨." "내가 태워 줄게, 기다려." 30 살 맞어? 어떻게 철수만큼 어리게 보이냐.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역으로 가 전철 타고 서울 왔어요. 또 사람들과 씨름했지요. 월요일 까지철수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월요일 오전에 학교로 내려 왔 지요. 저녁 무렵까지 철수도 내게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집에 오다 철수가 정희네 약국에 있는 걸 보고 가 보았지요. "어, 은정이구나. 어서 와." "누나는 여기 왜 왔어요?" 그래 자꾸 시비 걸어 봐. 정말 차버리는 수도 있어? 이씨, 그러진 못할 것 같네 요. 그냥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나 철수에게 많이 삐쳤습니다. "나 정희하고 할 이야기 있으니까 넌 집에 가." "싫어요. 지금 나 연극 얘기 하고 있던 중이야. 누나가 나중에 와요." "너네 둘이 싸웠니?" "누나하고 나하고 싸움이 되나요." 그래 내가 이기나 니가 이기나 한 번 해 볼래? 내가 그렇게 만만히 보이니? 이 말을 하고 싶었는데 철수는 내게 다시 시선을 주지 않습니다. 녀석을 발로 한 대 차고 물었지요. "너 연극 누구랑 보러 갔었어? 그 은정이라는 애와 보러 갔었니?" "왜 때려요? 그건 누나가 알 바 아니잖아요." "너 4 학년 맞어? 군대 안 간 티를 내는구나? 왜 그렇게 어리니?" "이씨, 누나는 갔다 왔냐? 1 학년 티를 내네 진짜. 누나는 어려 보이지 않을 것 같지? 정희 누나 내가 어디까지 얘기 했어요?" "흠. 둘다 애야, 애." 철수가 날 쳐다 보길래 눈을 흘겼습니다. "야, 삐질이." "왜, 밴댕이." "너 가." "싫어." 그래서 나란히 앉았어요. 그냥 져 줄까? 좋은 말로 내 마음을 다시 얘기 해 볼 까? 근데 조심스러웠던 내 고백을 장난이라고 말했던 철수에게 받은 배신감은 그 러지 못하게 만드네요.
44 회 이게 아닌데, 내가 생각했던 건 이게 아닌데. 그냥 예전처럼 편안하게 지내고 싶
었을 뿐인데, 누나는 예전 같지가 않았다. "진짜 안 갈거야?" "너 보기 싫으니까 내 앞에서 사라져." "진짜루?" "그래." "삐쳤어요?" "내가 너 같은 줄 알아?" "뭐 때문에 삐쳤어요?" "몰라서 물어?" 누나가 날 피하기 시작했다. 일시적이겠지? 잘못하면 일시적이 아닐 수도 있겠 다. 누나가 일이 바쁠때면 나 홀로 서울을 올라 간 적은 있어도 둘 다 서울로 돌아 가면서 따로였던 적은 참 오랜만인 것 같다. 지하철 안에 나 혼자만 있는 듯 하 다. "수희야?" "응. 왜?" "내일 안 바쁘냐?" "약속 잡힌 건 없어." "불쌍한 뇬." "뭐야?" "그럼, 내일 친구랑 연극이나 봐라." 나 연극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은정이 누나와 같이 보러 간다는 것에 의미를 두었을 뿐이다. 그 의미가 사라진 연극표는 나에게 불필요한 것이었다. 동생에 게 던져 주었다. "어? 오빠 연극도 보러 다녀?" "가끔씩. 너네 오빠 제법 문화 생활을 즐긴다?" "호호, 같이 갈 사람이 없어 내게 주는거지?" "아니다. 참, 은정이하고 보러 가라. 은정이에겐 좀 미안한 감정이 있어." "그럼, 오빠가 은정이 불러 내어 같이 보러 가." "싫다." "치, 은정일 왜 피하는거야?" "흠, 상처 줄 것 같아서." "오빠가 누구에게 상처를 줘? 별 생각을 다하네. 그래 오빠가 준 거니까 보러 가 줄게." "되도록이면 은정이와 같이 가." "알았어." "그리고 그런 말은 쓰지 마라." "무슨 말?" "뭐뭐 해 준다는 말. 네게 조금이라도 원하는 마음이 있을 때, 상대방이 베푸 는 호의에 대해서 뭐뭐 해 준다는 말은 실례야." "그냥 습관적으로 쓰는 말이잖아." "그래도." "그래,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러 갈게." "내 동생 답다. 보고 나서 무슨 내용의 연극이었는지 얘기해 줘." "알았어." 누나는 내게 삐삐를 쳐주지 않았다. 전화를 해 볼까 했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니
까 내가 누나에게 잡혀 살았던 것 같다. 누나는 내게 뭐뭐 해준다는 말을 즐겨 썼다. 항상 자기가 날 배려한다는 마음. 그건 날 어린 애 취급한다는 것을 뜻한 다. 날 사랑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사랑하면 하는거고 아니면 아닌거지 같다 가 뭐냐. 그날 분위기 때문이었을것이다. 날 좋아는 하지만 자기도 내가 연하기 때문에 헛갈려 하고 있는게 틀림없다. 내가 약하게 나가면 분명 그 말을 물릴 것 이다.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다. 아자! 그래 나는 누나와 키스를 나눈 사이다. 예사 사이가 아니다. 에구, 난 내 마음을 한번도 제대로 표현 해 보지 못했구나. 사랑하는 것 같다. 난 누나를 사랑하지만 같다라는 말도 못해 봤다. 난 바본가? 월요일 아침 일찍 율전으로 내려 왔다. 오후에 교양 수업만 있는 한가한 날이었 지만 아침 일찍 율전으로 내려 왔다. 마음이 공허해서 아침에 가만히 있지를 못 했다. "너 왜 오전부터 찾아 와 계속 여기 있는 거니?" "누나는 누나일이나 봐요." "참 내." 정희누나 약방 소파에 앉아 턱을 기대고 오후를 맞이했다. "누나?" "왜." "짜장면 하나만 시켜 줘요." "밖에 나가서 먹고 오자." "시켜 먹으면 되지. 누나 약국 자주 비우는 버릇 그 좋지 못한거야?" "여기서 먹으면 냄새 나잖아." "약 냄새 보다는 그게 나아요." "넌 짜장면?" "이왕이면 삼선짜장으로." "니가 사주는거지?" "그럼 그냥 짜장으로." 정희 누나와는 감정이 생기지 않으니까 이렇게 편한 사이가 되는데, 은정이 누 나에게 괜한 감정을 키웠나? 그래 어짜피 남의 여자 될 사람 내가 괜한 감정을 키운 게 아닌가 싶다. 아니다, 내가 그런 감정 키우는 건 내 맘이다. 요즘 좀 불 편한 사이가 된 건 누나 탓이다. 왜 나에게 그런 말을 해 가지고 사람 헛갈리게 만드냐. 난 내 마음 충분히 숨길 자신이 있었는데... 내가 뭘 잘못 했는지 모르 겠다. 그냥 싹싹 빌까? 내가 뭘 잘못했는지 가르쳐 주면 시정하겠다고 싹싹 빌 까? 지금까지 내가 빌어서 그 여자가 용서를 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 그래 빌 자. 지금 전화를 해서 싹싹 빌어야 겠다. "누나 전화 한 통만 쓸게요." "식사 왔습니다." 그래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먹고 나서 전화 하자. 짜장면 한 그릇 먹고 배가 부르니까 배짱이 생겨서 또 빌기가 싫어 졌다. 삐삐 라도 쳐 주었으면 내가 빌었을텐데... 내가 왜 이랬다 저랬다 하지? "누나?" "왜?" "은정이 누나가 나한테 삐친것 같애요." "왜?" "그럴 일이 있었어요."
"무슨 일?" "그건 알 필요 없구요. 누나는 날 어떻게 생각해요?" "뭘?" "나 어려 보이죠?" "조금은." "누나는 나에게 사랑하는 감정 가질 수 있겠어요?" "후훗, 왜 은정이가 너에게 사랑한다고 고백이라도 하던?" 저 여자 눈치밥 먹고 자랐나. "그게 아니고 연상으로서 나에게 사랑하는 감정 가질 수 있겠냐구요?" "모르지. 니가 나 좋다고 죽어라 따라 다니면 귀찮아서라도 가지게 될지." "우쒸. 나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니잖아." "지금 모습으로는 이성으로 보이지 않지만 상황에 따라 달라 질 수도 있겠지." "누나는 예전에 내가 했던 말들을 전부 농담으로만 받아 들였잖아." "니가 농담처럼 했으니까. 네가 속마음을 숨기고 건성으로 말했는데 어떻게 내 가 진지하게 받아 들이니?" "근데 은정이 누나는 내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호호, 은정이가 뭐라 그랬구나?" "난 은정이 누나에게 특별히 누나와 다르게 대했던 게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조 금 더 붙어 다녔을 뿐인데..." "달랐어." "에?" "많이 달랐어.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는 게 있는거야. 은정이에게 하는 네 모습은 나에게 하는 것 보다 더 진실되고 진지하게 보였어. 그래서 은정이가 좀 부럽더라." "달랐어요?" "응. 충분히 은정이가 너에게 마음을 뺏길 만큼. 은정이가 너보고 뭐라 그랬 지?" "어렵다." "안 가르쳐 줄거야?" "응." 또 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그러다 졸았다. 수업 빼 먹고 잤다. "야, 박철수." "예?" "너 언제까지 여기 있을거야?" "내가 있는게 부담되요?" "그건 아닌데 너무 오래 있잖아. 그렇게 불편하게 자는 것 보다 집에 가 자는 게 낫지 않니?" "이제 잠 안 와요." "참, 연극은 보러 갔었니?" "당연히." "은정이와 보러 갔었어?" "은정이 누나 삐쳤다니까요." "그럼 너 혼자 보러 간거야?" "표가 두장인데 왜 나혼자 보러가요." "후후. 그러니까 넌 어린거야." "자꾸 어리다 그러지 마요." "재밌던?" "그런대로."
"연극 얘기나 해 봐." 동생에게 줏어 들은 연극 내용을 그대로 정희 누나에게 해 주었다. 정희 누나 참 단순했다. 내가 수희에게 질문했던 부분에서 내가 수희에게 했던 질문을 그대 로 내게 던진다. 연극 봤다는 거짓말. 그거 참 쉬웠다. 그때 보고 싶었던 여자 가 들어 왔다. 날 피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찬 바람이 일었다. "누나 잠깐 나하고 얘기 좀 해요." "싫어." "정희 누나는 약국 문 닫을 시간 아니에요?" "곧 닫아야지." "우리 먼저 가도 되죠?" "가라." "은정이 누나 갑시다." "싫어. 나 정희랑 있을거야." 이게 아닌데. 은정이 누나의 팔을 잡았다. 나 지금까지 누나에게 너무 어린 모 습만 보여 준 것 같아 터프하게 누나 팔을 잡았다. 은정이 누나가 날 째려 보았 다. 멋있게 입가를 올려 주며 웃었다. "가요 빨리." "어디로?" "누나 방에." "너도? 니가 내 방에 왜 가는데?" "한 두번 간 것도 아니잖아요. 갑시다 빨리." "이 손 놓지 못해?" "안 갈거야?" "무슨 얘기 할 건데?" 싹싹 빌려구요. "일단 가서 얘기해요." 봄 바람이 막 자라나는 어린 수수의 싹을 어루 만지고 지나가고 있다. 하늘이 노랗다. 하늘이 까만 노란색이다. 가운데 떠 있는 달 때문이리라. 누나의 손을 잡아 이끌고 있다. 누나가 날 보는 눈 빛이 어떨까 궁금하다. 홱 고개를 돌려 보 았다. 누나는 날 멀뚱히 바라 보다 딴 청이다. "누나 지금도 나에게 기분 나쁜거야?" "네 하는 거 봐서 달라질 수도 있어." "오늘 진지하게 얘기 좀 해 봅시다." "그래." "그러니까 빨리 좀 걸어요." 누나 방에 들어 왔다. 분위기가 좀 어색하지만 표정을 부드럽게 하고선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냉수 한 컵을 앞에 두고 누나와 마주 앉았다. 이제부터 빌자. 얼 굴을 어린애처럼 하고 귀엽게 웃었다. "내가 잘못했어요." "뭐가?" 어? 누나의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내가 잘못했다니까요." "뭘?" 나도 잘 모르지. 누나의 표정이 조금 더 날카롭게 변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가르쳐 줘요." "넌 항상 그런 식이지?"
"뭐가요? 누나 화 풀어요." "그런 모습 보일때마다 네가 더 어려 보이는 거 모르지?" "자꾸 어리다 그러지 마요." "행동은 어리게 하면서 어리다는 말만 하지 말라고 하잖아." 기분이 살 나빠졌다. 팔짱을 낀 채 날 쳐다 보는 저 여자의 모습이 맘에 들지 않는다. "내가 뭘 그렇게 어리게 행동했는데? 누나가 날 어린애 취급하니까 그런 거잖아 요." "내가 네게 했던 말이 장난이라며? 그게 어렵게 마음을 고백한 사람에게 할 말 이니? 승주가 어색해 하며 피해 버리는 것보다 더 기분 나빴어." "승주 얘기는 왜 해요?" "너 승주와 닮은 구석이 있어." "안 닮았어." "하여튼." "나 사랑하는 것 같다라는 말 진심이었어요?" "그래." "내 마음은 알아요?" "대충은." "내가 아직 어려 보이죠.?" "조금은 그래." "후후, 그것 때문에 내가 느끼는 감정은 알지 못하죠?" "나이 두살 적은 게 무슨 상관이야." "상관있지. 누나가 날 대하는 태도를 보면 두 살 어린 게 자주 걸려요." "난 잘 모르겠어." "내가 나이 어린 후배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누나와 친해지지 못했겠죠?" "그건 그래." "후움! 그걸 나도 알거든요." "지금 난 너와 연인 사이가 될 마음이 있어. 널 동생으로 생각하지 않고 연인으 로 생각해 줄 마음이 있단 말이야. 그래서 한 말인데 넌 장난이라고 했어." "해 줄 마음이요?" "그래." "왜, 준다고 생각을 해요?" "그건 무슨 말이야?" "자주 그런 말 하잖아요. 뭐 해줄까? 눈오면 같이 걸어 줄게. 팔짱 껴줄까? 장 난으로 했던 말이지만 뽀뽀 해줄까,까지." "그런 말하나까지 신경을 썼었니?" "내가 연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거잖아요." "씨. 너 왜 그래?" "누나는 왜 그래요?" "내가 뭘?" "난 차이겠죠?" "또 이해되지 않는 말이다." "연인 사이가 되면 나 누나에게 차이겠죠?" "왜 그런 생각을 해?" "누나를 내 곁에 붙잡아 둘 수 없을 것 같으니까." "왜?" "그럴 것 같아요. 누나를 곁에서 봐 왔으니까." "곁에서 봐 왔으니까?" "그래요. 누나에게 사랑 고백한 사람들 중에 누나 곁에 있는 사람 있어요?"
"오호,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하는거야?" "그럴지도 모르죠." "허, 너도 나 사랑하지?" "엉?" "나와 멀어지는 게 두렵지?" 누나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왜 그러지? "그래. 나 누나하고 멀어지기 싫어요." "나는 남자에게 사랑 고백을 딱 두 번 했던 것 같다. 예전에 승주에게 한 번 했 었어. 승주가 자꾸 멀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그게 싫어서 한 번 했었어. 그리고 한 번은 너에게 한 거야. 그냥 너하고 있는게 좋아서.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 지. 우리가 누나, 동생으로 지내왔던 시간도 충분히 남들 눈에는 연인 사이로 보 였어. 계속 이렇게 지내면 돼. 내가 왜 널 차버리니?" 두번 했던 것 같다? 두번 했었으면서 같다라는 말을 왜 하냐. 하하. "아니야. 나 아무래도 내 마음을 말하고 나면 누나를 소유하러 들 것 같아." "흠. 그게 잘 될까? 그냥 서로의 마음을 알고 지금처럼 같이 있으면 돼. 괜히 네 마음으로 앞 일을 미리 판단하지는 마. 너도 나 사랑하지?" "꼭 말해야 되요?" "응." "말하면 뽀뽀해 줄거야?" "너 4 학년 맞니?" "우쒸. 또 어린 애 취급 했다." "말해 봐. 말하면 뽀뽀해 줄게." 뽀뽀라는 말은 해 줄게라고 해도 된다. 주위에 보는 놈 없나 살폈다. 그냥 망설 였단 표현이다. 야아 ! 화분의 장미가 하나는 활짝 피었고, 다른 하나도 보기 좋게 꽃 봉오리를 열고 있었다. "장미가 두 송이다 꽃 봉오릴 열었네요. 둘이 사랑하나 봐." "치, 그렇게 날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가 힘드니?" "이런 맘 가진 건 오래전이야." 그래 사랑한다고 말하고 예전처럼 지내도 되는구나.
45 회 새로운 날이 밝았다.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사나이 박 철수가 어제까지는 애인이 없었지만 오늘 부로 애인이 있는 삶을 살아 갈 것이 다. 나는 한가지 맹세를 하겠다. 나는 내 애인이 나가라, 나가라 할때까지 곁에 서 버틸 것이다. 절대 내가 먼저 떨어져 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방 문을 열고 복도에 서 아침 공기를 마셨다. 좋은 아침이다. "덜컹." 누나 방 문이 열렸다. 저 방 문을 열고 예쁜 숙녀가 나 올 것이다. 저 여자가 바로 내 애인이다. 푸하하. "너 나와 있었니? 일찍 일어 났네?" "응. 지금 학교 가는 거야?" "응." "일찍 가네?" "그래. 아침 먹으러 갈래?" "나는 아침은 대충 먹거나 거른 버릇 때문에 잘 안 먹어요. 은정씨."
"후후. 왜 철수씨?" "그 듣기가 아직 어색하네. 나 누나 애인 맞아요?" "그래, 이제 날 사랑한다는 말도 들었는데 애인 하지 뭐." "하하, 그 참 신기하네." "뭐가?" "나에게도 애인이 생겼다는 게 말입니다."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지는 마. 연애도 건강한 삶의 한 부분일 뿐이야. 생활과 따로 생각하지 마." "알았어요. 음, 좋은 말 해줄게요." "해 봐." "당신의 그림자 속에는 내가 있습니다. 박철수." "무슨 뜻이야?" "좋은 말을 해 줘도 알아 듣지 못하면 소용이 없구나." 누나를 곁눈질해 보았다. "치." "누나 곁에 항상 그림자가 붙어 다니죠? 힌트 끝." "그래 알았어. 그 마음 변치 마." "당연하죠." "호호. 사랑해 철수야." 으으, 졸라 낯간지럽다. 뭐야? 애인이라서 함 봐줬다. 저 여자가 어린아이 얼 르 듯 내 엉덩이를 톡톡 쳐 주고 갔다. 날 어린 애 취급하는 게 틀림없다. 그렇 지만 이제 날 어린애 취급한다고 고민하지는 않겠다. 나 저 여자에게 귀여움 받 는 남자가 되고 싶다. 하하, 우리 아버지 아시면 땅을 치며 통곡을 하시겠다. "낮에 밥 사줘요?" "그래 와." 내가 남자기 때문에 내가 애인의 밥을 사주어야겠다고 생각을 해 보지만 급격 한 생활의 변화는 몸에 해롭다. 단지 그 이유다. 앞으로 저 여자에게 밥 얻어 먹 는 것은 계속 할 것이다. 이제 앞으로 누나에게 애인으로서 남들 하는 것들을 하나씩 다 해 보리라. 잠 시 하늘을 보며 상상을 해 보았다. 아이, 부끄러버라. 근데 저 여자가 날 애인 시켜준다고 해 놓고 말 뿐이었으면 어떡하지? 경험이 없기 때문에 머리 잘 써야 겠다. 그래 다음 주에 애인 된 기념으로 술 파티를 한 번 해야 겠다. 푸하하. 방에 들어 와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 입었다. 외출 준비를 마치고 바로 정희 누 나네로 달려 갔다. "안녕 누나." "오늘도 아침부터 여길 왔어?" "나 오는게 싫어요?" "아니. 왜 왔어?" "음, 나 애인 생겼어요." "정말?" "푸하하, 좀 늙었지만 졸라 예뻐요." "후후, 너 그 말 은정이에게 이른다?" "아, 누나는 은정이 누나를 알지 참. 다른 사람에게 먼저 자랑을 하는건데?" "진짜 너네 둘이 연인사이 하기로 한거야?" "응." "야, 박철수 축하한다. 결국 해 냈구나." "응. 근데 은정이 누나가 날 차 버리지는 않겠죠?"
"모르지. 걔 곁에 멋있는 사람이 나타나 걔 마음을 흔들면..." "우쒸." "후후." "왜 웃어요?" "둘이 결혼 하면 재밌을 것 같아서." "에? 그건 다른 문제에요." "얘 봐? 너네 둘이 오래 사귈 거 아냐? 그러다 보면 결혼도 하는거지." "정말요?" "그럼. 그러니까 은정일 꽉 붙들어 둬." "알았어요. 누나 뭐 하나 물어 볼게요." "뭘?" "수면제 있잖아요. 많이 먹으면 죽어요?" "응." "한 번에 얼마만큼 먹으면 안 죽고 잠 들 수 있어요?" "왜 잠이 안 오니?" "수면제 안 죽을 만큼만 줘요." "왜 사랑하는 사람을 애인으로 만들었는데 잠이 안 오니?" "너무 기뻐서요." 거짓말 한 번 했다. 영화처럼 놀아 볼 생각이다. 은정이 누나, 즉 내 애인에게 한 번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예전 누나가 내 방을 술에 취해 찾았을 때 느꼈 던 것이다. 나보고 음흉하다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꼭 해 보고 싶다. 누나 가슴 을 한 번 찔러 보는 것. 그 뿐이다. 저 번에 누나와 위스키 한 병을 마신 적이 있다. 누나는 그 독한 썸씽을 물 마시듯 마시고 아무렇지도 않았다. 같이 술을 마셔 누나가 먼저 정신 잃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수를 쓰자. "이 번엔 주지만 수면제 먹는 버릇 들지마?" "알았어요. 누나?" "왜?" "나 나쁜 놈 아니죠?" "그럼." "누나는 왜 애인이 없어요?" "뭐야?" 학교를 졸라 거만하게 갔다. 수업도 졸라 거만하게 받았다. 내 동학년들은 대부 분 군대를 갔다 온 선배들이었지만 나 그들을 졸라 거만하게 대했다. 왜? 그들 은 불쌍한 공돌이고 나는 잘난 애인이 있기 때문이다. "형 우리과는 졸업 사진 언제 찍는대요?" "다음 주 쯤에 찍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보니 양복도 한 벌 사야겠네." "음, 그래요? 형은 애인 있어요?" "포기했어. 직장 잡으면 만들지 뭐." "그러고도 졸업 사진을 찍고 싶어요?" "뭐야?" "애인도 못 만들고 졸업하고 싶냐구요?" "넌 있냐?" "당연하죠." "누군데?" "노코멘트." "외국 여자 사귀냐?" 우리 과에도 내가 누나와 같이 다니는 걸 본 사람들이 많다. 누나가 내 애인이라 는 사실은 나만이 간직해야 겠다. 저런 무식한 늑대들에게 누나를 소개시켜 주기
가 싫다. 애인이 있는 현실을 4 일 동안 즐겼다. 금요일 서울로 돌아 가는데 누나가 나에 게 삐삐를 쳤다. 전철 같이 타고 가자고 삐삐 친 줄 알았다. "언제 올라 갈거에요?" "너 7 시에 약대 앞으로 와라." "왜? 누나 집에 들렀다 갈 거 아냐?" "누가 차를 태워 준대. 우리 차비 아끼고 편하게 가자." "누가 태워 준대?" "한 번 봤잖아. 우리연구실 박사 과정 선배." "그 겉멋 든 놈?" "응." "싫은대..." "나도 별로 내키지 않지만 너랑 나랑 뒷 좌석에 앉아 가면 되잖아." "그럴까?" 약대 앞에서 누나가 나오 길 기다렸다. 그 흰색 비엠더블류 자동차 앞에서 멀뚱 히 서 있었다. 심심해서 드렁크가 있는 표면에 '이 차 주인은 밥 맛없는 늙은 놈.'이라고 써 보았다. 이 차 주인은 내게 첫인상을 좋게 심어 주지 못했다. 누나가 보였다. 옆에 그 박사과정이라는 놈이 히히덕 거리며 같이 걷고 있다. 넌 브라운 계통으로 염색했다고 생각하겠지? 노을에 물든 그의 머리는 한 마디 로 똥색이었다. 한 일년 푹 썩힌 것 같은... "철수야." 누나에게만 미소를 지어 주었다. "같이 갈 사람이 얘야?" 얘? 날 언제 봤다고 날 어린애 취급하남? "네." 누나 때문에 내키지 않는 인사를 녀석에게 했다. "안녕하세요." "그래, 자네 93 학번이라고 했지? 나 배 성준이야." "어? 이 번엔 성준 배가 아니네요." "여긴 한국이잖아." 녀석이 내게 악수하러 손을 내 밀다 누나의 말에 고개를 홱 돌려 손을 빼 버렸 다. 괜히 손을 내민 나만 바보 됐다. 녀석이 자기 차로 달려 가더니 조수석 문을 홱 열어 재쳤다. 뭐여? 누나가 날 멀뚱히 쳐다 보았다. 할 수 없다. 내가 조수석에 앉으려고 했다. "자네는 뒷 좌석이야." "누나도 뒷 좌석에 앉을 건대요." "그건 자네가 상관할 바 아니지." 나 자네에게 삐쳤어 씨. 뒷 문을 열고 뒷 좌석에 가 앉았다. 누나가 그 사람을 보고 웃었다. 그래야지 암. "저도 뒷좌석에 앉을래요." "야, 태워주는 사람 성의를 봐서라도 여기 앉아라." "선배님이 태워 준다고, 준다고 해서 타는거잖아요. 제가 앉고 싶은 자리에 앉 을래요." 결국 누나는 나와 뒷 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녀석은 바보 됐다. 차 타고 가니까 편하네. 작년 이맘 때 누나 차가 아작났던 거 같다. 그 시절을 잠시 회상하게 만들었다.
"자네는 집이 어디야?" "저요? 신사동이요." "은정이는 청담동이랬지?" "네." 녀석은 누나가 몰던 길로 가지 않았다. 과천 쪽으로 운전을 해서 갔다. 아무래 도 나부터 먼저 내려 주고 누나에게 수작 부릴 것도 같다. 역시 그렇다. 차는 사 당동으로 해서 신사동을 거쳐 날 먼저 내려 보낼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럴 수 없 다. "둘은 어떤 사이야?" "제가 동아리 후배였어요." "철수군, 너무 은정이 곁에 붙어 다니는 거 아냐?" "에?" "선배님?" 누나가 말을 이어 받았다. "왜?" "얘랑 나는 선배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운 사이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건 실례에요." 그럼, 나 이 여자는 내 애인인데. "하하, 은정이 너하고 내가 연구실에서 같이 생활하는 시간이 하루 중 얼마야? 금방 역전될거야." 이 새끼 말하는 것 좀 봐. "아저씨." "엉?" 내 말투가 좀 그랬나? 은정이 누나가 내 손을 잡았다. "선배에게는 선배님이라고 불러. 신사동 어디에서 내려 주면 돼?" "나도 청담동 갈래요." "자네가 왜 가?" "누나랑 차 한잔 하려구요. 그리고 누나 집에 데려다 주려구요." "자네 후배 주제에 주제 넘은 짓을 하려고 하는군?" "이봐요 배성준씨." "엉? 은정이 화났니?" "말을 좀 함부로 하는 것 같지 않아요?" 누나야 그러지 않아도 돼. 난 남자에게는 심한 말 들어도 꿋꿋해 할 수 있어요. "친한 후배에게 내가 말이 좀 심했나? 미안해." "철수는 자주 날 집까지 배웅해 주었거든요? 오늘도 그럴거에요." "암." "둘이 사귀냐?"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죠." "둘이 안 어울려. 은정이가 아깝다 야." 이 새끼가 진짜. "차 세워요." 멀리 고속 터미널이 보이는 구 반포 정도였을 것이다. 누나가 차를 세우라고 했 다. 신호등에 걸려 차가 멈추어 서자 마자 은정이 누나가 차 문을 열고 내려 버 렸다. "누나 왜 내려요?" "철수야 너도 내려." "에?"
"선배님 당분간 저 아는 척 하지 마세요." "화 난거야? 왜?" 몰랐어 묻냐 새꺄? 너 같으면 니 애인 열받게 하는데 가만히 있겠냐? "누나 남자한테 매정한 것 같애." 누나랑 내린 곳에서 우리 집까지 걸었다. 좋다. "나 매정하지 못해." "조금 헛갈리네. 누나?" "왜?" "나도 싫어지면 아까처럼 매정한 모습 보일거에요?" "넌 왜 차일 생각만 하는거야?" "난 내 곁의 사람을 차 버릴수 없을 것 같거든요." "그럼 됐네." "뭐가?" "후후, 그래 이렇게 붙어 있다가 나중에 서약서 제출하면 되겠네." "무슨 서약서?" "혼인 서약서." "이 여자가 진짜. 내 나이 이제 23 살이다. 결혼은 한 참 뒤의 문제에요." "난 25 살인데? 곧 결혼 적령기야." 그건 그렇네. 요즘같이 연애 따로, 현실 따로, 결혼 따로인 세대에 연인 사이였 다가 부부 사이가 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그래도 몇 년 누나 옆에 붙어 있으면 곧 누나가 결혼을 해야 할 나이가 될 것 같다. 어떻게 될까? 차도에는 소음을 내며 차가 달리고 있지만 바로 그 옆을 걷는 내 마음은 참 고 요하다. 누나와 팔짱을 낀 채 도심을 걸었다. 하하, 연인 사이가 좋긴 좋네. "너 내 애인 맞니?" "왜요?" "아까 선배가 하는 말에 넌 한 번도 내 애인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잖아." "학교에서는 선,후배 관계가 먼저였잖아요. 누나에게 피해 줄까봐." "무슨 피해?" "괜한 소문 돌면 안 좋잖아." "그 이유야?" "응." "후후" "내가 차 태워 줄게요." "그래." "참, 승주 형은 연락와요?" "아니." "편지나 한 통 써 줘요." "너 승주보면 자주 삐쳤잖아." "승주형과는 추억이 많을 거 아니에요. 쉽게 지워 버리지는 마세요." "그럴게." 그럴게? 그냥 잊어라 그래 볼까? 누나를 집에까지 배웅해 주었다. 참 많이 망설였는데 끝내 아무일 없이 그냥 집 으로 들여 보냈다. 티비에서 보던 차 안에서의 키스. 그거 하고 싶었는데, 하필 이면 수위 아저씨가 빤히 쳐다 보는데 차를 세워 그러지 못했다. 나 바본가봐. 토요일 새벽에 아버지 술 모아 놓은 데서 또 술 한병을 훔쳤다. 샴페인이 비싸 봤자지 뭐. 레미 마땡? 별로 비싸지 않을 것 같다. 샴페인은 뭔가 축하할 일이
있을 때 많이 마신다. 누나와 연인이 됐다는 축하주로 안성 맞춤이다. 별로 독하 지도 않기 때문에 내가 술에 취하지 않을 것이다. 푸하하. 근데 이것도 비싼거 면 어떡하지? 우리 아버지 의외로 비싼 술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번엔 아니겠 지. 누나와 마주 앉아 이 샴페인을 마시는 거야. 누나방에서 마시는 게 낫겠지? 누 나 안 보는 틈을 타 수면제를 타고 모른 척 건배를 해야지. 누나가 잠이 들 면... 푸헤헤, 낯 뜨거워라. 46 회 내가 누나보다 두살 어리지만 애인 하기로 한 이상, 누나에게 남자의 거만함과 대단함을 보여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요일 오전에 전화를 걸었다. 발신음이 가고 있다. "난데." "어, 철수씨?" "오늘 나 좀 봐." "저 오늘 바쁜데,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나보다 더 중요한 일이야?" "그건 아니지만..." "나 볼거야 말거야." "볼게요. 언제 어디로 가면 철수씨 볼 수 있죠?" "다시 연락할게 기다리고 있어." 음, 기분 좋은 상상이다. "여보세요." "전데요." "응, 철수구나. 주말은 잘 보냈어?" "그럼요. 오늘 뭐 할거에요?" "오늘? 집에서 쉬어야지." "나 좀 봅시다." "넌 학교 가면 매일 보잖아. 참, 나 오늘 오후에 약속 있다." "무슨 약속이요?" "결혼식 가야돼." "여자 친구?" "응." "벌써 결혼하는 친구가 있어요?" "벌써라니? 25 살이면 빠른 거 아니다." "내가 아는 친구에요?" "모를걸. 고교 친구라 잘 모를거야. 학과 친구래도 넌 내 얼굴 보기 바빠서 어 디 다른 여자가 눈에 들어 왔었겠니." "에구, 성에 가둬 버리고 싶다." "정 나보고 싶으면 기사 노릇이나 하던지?" "에스코트 하라구요?" "아니, 운전 기사. 나 보려면 한 시까지 우리 집 앞으로 와." 내 상상과 아주 조금 빗나갔다. 남자의 거만함과 위대함을 살려 일요일 오후, 누나 기사 노릇을 했다. 누나가 결혼 예복 입고 있는 여자는 다 예뻐 보이기 때문에 들어 오지 말래서, 또 호텔 식당 앞에 식권 있나 없나 지키는 놈들 때문에, 결혼식 열리는 시간에 나는 주차 시켜 놓은 차 안에서 빵하고 우유로 점심까지 때우는 대단함까지 발휘했다.
그래도 기분이 좋았던 건 이 말 때문이다. "똑, 똑." 잠시 졸았나 보다.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니 누나가 왠 여자 를 하나 데리고 와 있었다. 누나 친군가 보다. "끝났어요?" 문을 열어 주었다. "응. 인사 해, 내 친구야." "안녕하세요." "얘 먼저 집에 데려다 주고 나도 집에 데려다 줘." "그러죠 뭐. 집이 어디세요?" 여기까지는 별로 기분이 안 좋았다. 누나와 누나 친구는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내게는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누나 친구 집으로 가는 도중에 둘이 얘기하는 말 을 들었다. "누구야?" "얘?" 백미러로 뒤를 보니까 누나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응. 사귀는 사람?" "잠깐만." "아니니? 저 분이 너에게 존댓말 쓰는 것 같은데?" "저거 바뀔거야 아마. 철수씨?" 둘이서 얘기하다 말고 누나가 날 불렀다. "왜요?" "내 친구가 네가 누구냐고 묻는데 뭐라고 답할까?" "맘 내키는대로 대답하세요." "우리 둘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답해도 될까?" "에? 에..." 내가 좀 당황해서 머뭇거리자 누나는 피식 웃고는 자기 친구에게 속삭였다. "쟤 내 애인이야." 그 말은 날 아주 기쁘게 하는 것이었다. 흐흐, 애인 사인인데 가슴 한 번 찌른 다고 무슨 큰일이 일어 날 것 같지가 않다. 내일 반드시 성공하자. "아자!" "뭐야 너?" "아닙니다." 월요일 아침, 좀 늦게 학교로 출발해도 되지만 누나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전 철 안, 사람들이 많을 경우 누나를 내가 아니면 누가 보살펴 주리. "가슴에 품은 거 뭐야?" "오늘 집에 일찍 들어 와요?" "왜?" "에, 애인 된 기념으로 한 잔 하자구요." "너 또 술 훔쳐 왔니?" "어? 훔쳐 온 줄 어떻게 알았어요?" "니가 가져 왔던 술, 다 비싼 거잖아. 너 그런 고급 술 살 능력은 안되지? 답 이 금방 나오네 뭐." "이번엔 별로 안 비싼거야." "한 번 봐바." "레미 마땡이에요." "에? 꼬냑이니? 제법 비쌀텐데." "샴페인이에요. 비싼 거 아니에요."
"그래, 저녁에 가서 한 번 보자." "올 때 작은 케익 하나 사 와요." "그러지 뭐." 하루 종일 계획을 세웠다. 내 방에서 마실까? 누나 방에서 마실까? 약은 언제 탈까? 저녁을 먹지 않고 집에 와 망설임을 억누르고 성공할 수 있다,라는 말을 계속 되내었다. 그리고 침대 위에 술 병을 올려 놓고 너만 믿는다, 너만 믿는다.라고 도 중얼거렸다. 누나가 어둠이 제법 내려 앉았는데도 불구하고 내게 연락을 주 지 않았다. "딩동!" 여덟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드디어 내 방 초인종이 울렸다. 가슴이 뛰었다. "누구세요?" "술 가지고 내 방으로 와." "그러지요." 비장한 모습으로 술병을 안고 누나 방으로 갔다. 누나는 테이블 위에다 작은 케익을 올려 놓고 잔도 두개를 올려 놓았다. 분위 기 있는 모습, 어디서 구했는지 장식 초에 불도 밝혀 놓았다. 꼭 분위기가 바깥 으로 싸도는 남편을 꼬시기 위한 새댁의 정성이 들어 간 모습이다. "그 샴페인 지금 찹지 않지?" "그냥 먹어요." "안 돼. 한 시간만 냉장고 넣어 두자." "우쒸." "왜? 오렌지 주스 줄게." "싫어요." "후후, 애인 되고 나서도 별로 바뀐 거 없지?" "응." "그냥 이렇게 지내면 돼. 달라진 게 있다면 조금 더 배려하는 것. 조금 더 생각 해 주는 것. 그리고 간혹 사랑한다는 말도 하고, 뽀뽀도 한 번씩 하는 거지 뭐." "많이 바뀌네요." "사실 나도 연인 사이로 남자를 대해 본 경험이 없어서 잘 몰라." "승주형은?" "뭐 계속 마음을 숨기고 친구 사이였잖아. 연인 사이 되려다 어색해 졌었구." "음, 누나." "왜?" "우리사이 오래 유지 될까요?" "노력해야지. 참을 줄도 알아야 되고." 참을 줄 알아야 돼? "안주가 근데 케익 뿐이에요?" "샴페인 먹는데 안주가 필요하니?" "과일 없어요?" "다 떨어 졌는데, 그래 과일이라도 사먹자. 좀 사가지고 와." "나 애인 맞죠?" "응." "누나가 사 와라." "내가 사와야 돼?" "응, 누나도 한 번 사러 갔다 와. 그래, 사랑하는 은정씨가 사 가지고 와. 푸짐 하게..."
"후후, 사랑하는 은정씨라고 해서 내가 갔다 온다." 야, 기회다. 은정이 누나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냉동실에 넣어 두었던 샴페인을 바로 꺼내 어 뚜껑을 땄다. "펑!" 흔들어서 딸 걸. 소리가 너무 작았다. 내 잔에다 한 잔 가득히 따랐다. 그리고 낄낄 거리며 누나 잔에도 가득히 따랐 다. 정희 누나에게서 받은 수면제 모두 탔다. 영화에서 봤던 것처럼 별 표가 나 지 않았다. 은정이 누나는 과일과 함께 정희 누나도 데리고 왔다. 뭣 때문에 데리고 왔을 까. 정희 누나가 피식 웃고는 나에게 삐친 적 했다. "그래, 둘이 사귄다고 나는 빼놓고 이런 파티를 하고 있었구만? 철수 너?" "누나도 한 잔 해요 그럼." "나를 이제는 찬 밥 취급을 한다 말이지?" 눈 흘기지 마라. 늙어서 그러고 싶냐. 누나가 컵을 한 개 더 가지고 왔다. "벌써 따라 놓았네. 난 김 나간거 안 좋아 하는데. 나는 새로 따라 줘." "에?" "정희 넌 이거 마셔라." "그래, 너도 날 찬 밥 취급 하는구나?" "마시기 싫어? 이거 고급 샴페인이다?" "에?" 고급이라는 말과, 정희 누나가 수면제 탄 잔을 드는 것에 무척이나 놀랐다. 으 이쒸. "야, 건배 한 번 하자." 정희 누나가 잔을 들더니 내 뱉은 소리다. 힘 없이 정희 누나를 바라 보았다. 약 탔는디... 은정이 누나의 공주 건성을 원망하여 빈 잔에다 샴페인을 따랐다. "이거 진짜 고급이에요?" 그 병 잠깐 줘 봐. 이 숫자 보이니? "뭘요?" "1983 이라는 숫자." "비싼 거에요 그럼?" "나도 잘 몰라. 근데 왠지 그럴 것 같지 않니? 병도 장식용으로 어울리는 각진 원통형 검은 색." "비싸 봤자지 뭐." "그래. 오늘 다 마시자." "잠깐." 정희 누나가 따라 놓은 잔 두개를 들어 어느게 많은 지 열심히 비교를 하더니 내게 떡 잔 하나를 주었다. 좀 헛갈린다. 정희 누나의 독촉으로 헛갈리지만 나 도 잔을 들었다. "건배." 은정이 누나, 정희 누나, 그리고 나. 모두 한 잔을 쭈욱 마셨다. 그리고 담소 를 나누며 그 뒤로 한 잔을 더 마셨다. 케익도 먹고 과일도 깎아 먹으며 이런 저 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이 왔다. 그 뒤로는 나도 모르겠다. 분명 정희 누나가 약이 든 잔을 들었었는데... 놀다가 보니까 잠이 오는 건 나였다. 어디서부터 잘 못됐을까. 헤헤.
"야!" 잠이 들기 전 내 마지막 기억속에 은정이 누나가 날 째려 봤다는 것이 떠 올랐 다. 둘이서 나 하나 옮기는 것도 못했을까? 나는 잠에서 깨어 보니 누나 침대 위 에 누워 있었다. 제법 늦은 아침에 나는 누나 침대에서 누나 베게를 베고 누워 있다 잠에서 깼다. 누나는 학교를 갔나 보다. 아무도 없다. 테이블 위에 스프를 담은 그릇과 쪽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일어 나면 전화 해." 정희 누나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보았다. "어제 내가 언제 잠이 든 거에요?" "11 시쯤." "왜 잤대요?" "몰라." "누나는 잠 오지 않던가요?" "아니." "누나하고 은정이 누나가 날 침대로 옮긴거에요?" "아니. 너 스스로 자연스럽게 가던데? 자기 침대도 아니면서 참 자연스럽게 눕 더라. 그리고 이불을 덮더니 우리 보고 소리 쳤었어. 불 꺼, 그래서 은정이랑 내 가 얼마나 황당했는 줄 아니?" "에? 어제 잠이 들때 쯤 은정이 누나가 내게 뭐라 그랬던 것 같은데 그것 때문 이에요?" "그거 기억 안나니?" "뭘요?" "호호, 은정이가 너 베게 바로 해주려고 다가 갔다가 봉변 당했잖아." "내가 어떤 다른 짓을 했어요?" "뽀시시 웃다가 가만히 있는 애 가슴은 왜 찌르니?" "에?" "너 은정이 가슴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어. 안 맞은 걸 다행으로 생각 해." "내가 정말 그랬어요?" "응." "왜 그랬대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아니? 근데 너 술에 그렇게 약했니? 아니잖아." "나도 잘 몰라요. 누나는 어제 언제 갔어요?" "나 네 방에서 잤어. 은정이랑." "에?" "은정이가 잘 곳이 없었잖아. 네 방에서 혼자 자기가 좀 그랬나봐. 나랑 같이 잤어. 인형들 많더라. 근데 이불에서 냄새가 좀 났어. 그래서 아침에 둘이서 빨 아 놓고 갔단다. 방 청소도 했어." "왜 그런 짓을..." "그런 짓? 고맙다고 해야지." "뭐 뒤지고 그러지는 않았죠?" "응. 너 아직 은정이 방이구나." "그럼요. 내 방엔 전화도 없는데..." "둘이 그냥 같이 살아라." "은정이 누나와 제가 가까운 사이처럼 보이나요?" "그걸 말이라고 하니?" "은정이 누나가 화 났던가요?"
"가슴 찔렀다고?" "네." "화났는데 아침에 방 청소도 해 주고, 이불 빨아 놓고 학교 갔겠니?" "스프도 끓여 놨던데." "잘해 봐. 걔가 도도한 것 같기도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간도 쓸개도 빼 줄 애야." "누나는요?" "나? 나는 그럴 것 같지 않지만 또 모르지 뭐." "약 장사 잘 해요." "그래." 약은 내가 먹었나 보네. 음... 내가 약을 먹어도 찌르는구나. 근데 기억이 잘 안나는디...
47 회
바라지 않고 해주고만 싶은 사람이 존재하지는 않겠지요. 나도 철수에게 바라 는 것이 자꾸 생기겠죠. "여보세요?" "나 철수에요." "이제 일어 난거야?" "응. 누나 내 방에서 잤다면서?" "응. 그건 어떻게 알았어?" "정희 누나에게 전화 해 봤죠." "정희에게 먼저 전화 했었니?" "응. 누나에게 먼저하기 미안해서. 그리고 상황 판단도 해야죠." "앞으론 나먼저 생각해." "화나지 않았죠?" "왜?" "그거 있잖아요. 어제 밤에..." "너 겨우 삼페인 두 잔에 골아 떨어질 정도로 술에 약하진 않았잖아." "당연하죠." "어제 일부러 그랬지?" "그건 절대 아니에요." "앞으론 그러지마." "나 기억나는 거 없어요. 내가 진짜 찔렀어?" "그래 임마." "기분이 어땠어?" "황당했다." 후후, 철수는 아직 어린애죠? 저럴 때 보면 아주 어린애 같아요. 그래도 종종 나보다 커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항상 커 보이는 존재보다 내게는 간혹 커 보이 는 사람이 더 매력적이에요. 철수처럼 말이죠. "또 베꼈죠?" "왜 자꾸 나만 갖고 그래." "그래?"
"그래요." 교양 수업을 마치고 학생들이 하나 둘 레포트를 내고 갑니다. 이게 모이면 상당 히 무겁죠. 연약한 여자 혼자 이걸 어떻게 들고 가라고... 중간 고사가 끝나고 또 한 번 레포트 숙제가 나갔었나 봅니다. 내가 조교로서 또 레포트를 걷으러 갔었어요. 수 많은 학생들 중에 유독 내 눈에 띄는 애가 있 죠. 모르는 학생들 투성인데 그 중에 아는 사람, 맘을 주고 받은 사람 하나가 있 다는 게 이렇게 재밌고 정겨울 수가 없네요. 다른 학생들은 그냥 묵답으로 레포 트를 받았는데 특별하게 철수 것은 넘겨 보았어요. 철수는 내게 특별하니까 그래 도 되지요. 또 모른척 조교 역할만 했습니다. "의심이 가니까 그렇죠." 철수를 장난스런 눈빛으로 쳐다 보았습니다. 딴청 부리 듯 나와 시선을 마주하 지 않습니다. "나이가 드니까 의심만 늘어나나." "흠, 너 다시 써 오고 싶어?" "재밌지? 재밌어서 이러는 거지?" "후후. 가지 말고 좀 기다려." 모르는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을 받는 것, 재밌긴 하네요. "으쒸." "무겁니?" "누나가 들어 볼래?" "싫다, 그걸 내가 왜 드니." "이거 누나가 들고 가야 하는거야." "지금은 니가 들고 있잖아." "이거 누나가 점수 매겨요?" "아니. 내 임무는 레포트 거두어서 교수님 책상에 갖다 놓는 것 뿐이야." "누나." "왜?" "나 누나 애인 맞아요?" "뭐 애인이라는 게 별거 있니. 나는 이렇게 편한 사이가 좋아. 그리움도 있고, 좋아하는 감정도 있고 거기다가 곁에 있는 사이. 그럼 됐지." "그런건가? 뭔가 특별한 게 있어야 하지 않나?" "내가 너에게 특별한 존재가 아니니? 넌 내게 특별한데." "예전과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달라지려고 애쓰지 마." 한 동안 무난하게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학교 생활은 그 나름대로 평안했 고, 철수와의 관계도 별 탈 없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조금 철수의 신경을 거슬리 게 하는 게 있다면 배 성준씨. 그리고 내 마음에 조금 여운을 일으키는 승주에게 서 간혹 오는 편지. "야이, 밥 맛 없는 놈아. 여자에게 신경쓰지 말고 공부나 해라." 약대로 들어 가다 참 많이도 웃었습니다. 배 선배 차의 본네트 표면에 손가락으 로 써 놓은 글씨. 저건 아마 예전 내 차에 쓰인 글씨체와 같을 겁니다. 배 선배 가 보기 전에 내가 지워 버렸어요. 철수가 배 선배에게 괜한 신경을 쓰는 것 같 아서요. 연하라서 그럴까요. 난 철수에게 조금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꼭 그렇지만도 아닌 것 같아요. 실험실에서 약간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철
수를 찾게 되죠. 그때 만약 철수가 정희와 같이 있으면 기분이 나빠요. 그냥 웃 어 넘기다가도, 내 친구와 서로 친하다는 게 고마울 때가 있다가도 어느때면 질 투심이 일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가벼운 문제들 뿐입니다. 난 철수에게 여유로운 편이고, 철수도 날 구속 하려 하지는 않았어요. 연하의 핸디캡을 그대로 안고 그것을 굳이 떨쳐 버리려 고 하지 않았기에 철수는 내게 여전히 조심스러운 면이 남아 있었어요. "철수야." 철수와 종종 집에 같이 올 때면 난 자주 그의 엉덩이를 쳐 주었습니다. 이름을 불러 주며 엉덩이를 쳐주는 것, 잘 들어가라는 인사였습니다. "자꾸 이러면 나도 친다?" "이건 어린애 취급하는게 아니고 애정의 표시야." "사람이 항상 좋을 수만은 없는거야. 승주형에게도 이랬어요?" "승주 얘기는 하지 말라니까. 네 입에서 승주 얘기가 나오면 부담스러워." "부담스러워? 쩝, 간혹 연락 오죠?" "응." "흠, 그리울 때가 있을 거에요." "너 태연한 척 하는거야?" "아직은." "무슨 말이야?" "나중엔 힘들어 질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또 어려운 말 쓴다." "잘 들어 가요." "그래 잘 들어 가." 엉덩일 톡톡 치는 것, 이것도 버릇이 되어 가네요. "으쒸. 또 쳤어." 철수가 엉겁결에 내 엉덩이를 치려다 손을 내리네요. 아직 그의 마음엔 뭔가 불 안함이 있나 봅니다. 그래서 조심스럽습니다. 한 학기가 또 지나갑니다. 철수와 같이 했던 시간, 삼년으로 접어 든 시간도 반 이 흘러 가네요. 교양 과목 시험 감독을 들어 갔습니다. 조금 아쉽네요. 철수를 강의실에서도 볼 수 있었던 기회는 이 것으로 끝이 나겠죠. 여러 사람들 중에 신경이 가는 한 사람. 비록 철수 외에 아는 학생이 거의 없다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찾아 볼 수 있게 했는데. 철수 뒤에 섰습니다. 기말 고사는 거의 상식에 가까운 것들로 단답형으로 냈는 데 철수는 여러 개를 공란으로 비워 놓았습니다. 내가 뒤에 서 있는걸 눈치 챘는 지 고개를 들어 씩 웃네요. "4 번 힌트 좀 줘요." 철수가 아주 작게 속삭입니다. "싫어." "애인인데 그것도 못가르쳐 줘요?" "공과 사는 구별해야지." "그럼 딴 데 가서 서 있어요. 신경 쓰이잖아." "내 마음이다." 철수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습니다. "교수님!" 엉? 교수님을 왜 찾아? 교단에 서서 책을 읽으시며 딴 일이시던 교수님이 멍하
니 이 쪽을 보았어요. 그것보다 또 한 번 많은 학생들의 시선을 받아야 했습니 다. 쑥스럽더군요. "왜 그러나?" "옆에 조교가 계속 서 있어서 문제 푸는 데 방해가 됩니다." 교수님이 철수의 얘기를 듣더니 나를 뚜러지게 쳐다 보시면서 말했습니다. "자네는 왜 거기만 서 있나? 거기 꿀 발라 놓았나?" "네?" 두고 보자 너. 중간 고사 때는 왜 때려요? 그 걸로 날 골탕을 먹이더니 이제는 교수님을 불러? 다음 시험때는 눈길도 안 줄거다. 흠흠, 다음 시험은 없군요. 앞 으로 계속 곁에 있을 녀석이지만 오늘 이 자리의 작은 헤어짐 하나 때문에 다소 허전합니다. 그를 볼 수 있었던 자리 하나가 사라지는 것에도 아쉬움이 남네요. 혹시 더 큰 의미가 되는 헤어짐이 있다면...
48 회 날씨가 참 덥습니다. 길 가의 옥수수들이 다시 내 키만큼 자랐고 더운 거리에는 사람들의 모습이 별로 없습니다. 시험이 끝이 난 학생들은 여름 방학에 들어 갔 습니다. 철수는 뭔가 실험할 게 있어 아직 자취방에 머물지만 곧 서울로 올라 가 버릴 것 같습니다. 철수는 날 위해 애써 자취방을 지켰던 적이 있지요. 멀지 않은 과거의 일이네요. 이 번 여름 방학 때 전 학교에 있어야 합니다. 학기 중일 때보다는 한가하겠지만 연구실을 지켜야 하는 신세입니다. 철수더러 학교에 내 려 와 있으라는 부탁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도 자기만의 시간이 있는데 날 위 해 희생시킬 수는 없겠지요. "낮에 더운데 수원가서 시원한 냉면이라도 한 그릇 먹고 오자." 연구실을 찾은 배선배는 내 핀잔에는 아랑곳 없이 계속 내게 친한 척입니다. "학교 근처도 냉면하는 집 많아요." "이왕이면 맛있는 곳을 찾아가자." "저 애인 있거든요." "하하, 진짜 연하 사귀는거야?" "연하 사귀면 안되나요?" "걔는 너하고 안 어울려." "왜요?" "걔는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데 은정인 나이보다 성숙해 보여. 걔는 은정이 상대 가 안돼." 살 기분이 나쁘네요. "그럼 제 상대는 어때야 되는데요?" "나 정도는 되야지. 그 철수라는 애 공대생이지?" 애? 나보다 나이가 적지만 그래도 이제 대학 4 학년인데 애라고 그러냐. "네." "걔 졸업하면 취직할테지?" "아니요. 대학원 갈거에요." "그래 봤자지 뭐. 어디 취직해서 평범한 회사원 되겠지?" "그래서요?" "아깝지 않냐? 너 정도면 잘난 남자들과 어울려야지. 평범한 사람과 평범하게 사는거, 그거 재미없는 거다." "철수도 잘났어요." "너 나이 이제 곧 26 살이다. 너 학위 받고 나면 곧 바로 결혼 문제 생각해야 될
거다. 거추장스럽게 그런 애 옆에 데리고 있으면 나중에 귀찮아 진다?" "말이 너무 심하네요. 철수가 어때서요. 나 걔랑 이렇게 지내다 결혼 할 거에 요." "야, 결혼은 현실이야. 좋다고 하는 게 아니야. 감정은 일순간이고 현실은 평생 이야. 걔 졸업하고 기반 잡으려면 적어도 5 년 후의 일일텐데, 넌 그때 서른 살이 야." "같이 살면서 기반 잡아도 돼. 배선배 그렇게 까진 안 봤는데 물이 잘못 들었네 요?" "나이 드니까 다 그런 생각 가지게 되더라. 너도 그렇게 될거다. 사람만 보고 좋아할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어." "난 그렇게 되지 않을거야. 그렇게 되기 싫어요." "그래, 학생일 때가 그래서 좋지." 기분이 나빴습니다. 나도 배선배가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현실을 따지며 사람 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그리고 철수를 잘나지 못하다고 말한 것 때문에 기분이 나빴습니다. 철수에게 삐삐를 쳤습니다. 배 선배는 홀로 점심을 해결하러 떠났습니다. "왜 삐삐 쳤어요?" "뭐해?" "밥 같이 먹자고 삐삐 친거에요?" "아니. 뭐 하냐니까?" "당구쳐요." "뭐야?" "왜요? 오늘 실험 끝내고 선배들과 당구 한 게임 치는 중이에요." "너 졸업하고 뭐 할거야." "나? 대학원 갈거라니까." "대학원 마치고 나면?" "거기까지 생각 안해 봤는데. 뭐 정해진 거 아닌가? 군면제 해주는 회사에 취직 해야지." "그래서?" "그래서는 뭐 그래서야. 취직하면 나가라, 나가라 할 때까지 월급 받으며 사는 거지." "뭐야?" "왜요?" "넌 꿈 같은 거 없어?" "다 그렇게 사는데 뭘. 그렇게 살면서 재밌고, 가치있는 꿈 하나 만들고 하는거 지." "훗, 그럼 결혼은 언제 할래?" "결혼? 우리 아버지가 집은 하나 사준다고 했지만 그래도 내가 내 밥그릇은 해 결해야 될테니까 28 살에서 30 살 정도 되야 하겠죠." "나는 그때 노처녀 소리 듣고 있겠다." "왜 그래요. 누나는 누나에게 맞는 사람 찾아서 일찍 결혼하면 되잖아." "야! 너 지금 나하고 그래도 연인 사이다? 애인에게 그런 말 하는거 모진말이 야." "흠, 그건 알지만 나 아직 결혼에 대해 생각할 나이도 아니고 평범한 회사원이 잘난 약대출신 여자하고 결혼하는 게 어렵다는 것도 알아요. 나 아직 누나를 내 반려자로 생각해 본 적 없어요." "너 나뻐 씨." 그렇나요. 철수는 그냥 학생의 신분으로서 다른 생각없이 나를 사람이라는 한 가
지만 보고 좋아하고 있나 봅니다. 나도 아직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요. 결혼은 현실이다. 현실을 생각해야 될 시점이 오면 난 철수를 져 버릴까요. 과연 져 버릴수 있을까요. 난 내 자신을 능력있는 여자라고 생각합니다. 내 능력 만으로도 남들 만큼은 살 자신이 있다고 생각해요. 현실? 그게 뭐. 지금은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다. "너 내일 서울 갈거야?" "응." "방학 내내 서울에 있을거야?" "종종 내려 올게. 누나는 학교 와 있어야 되지?" "그래." "누나 보기 위해서라도 자주 내려 올게요." "이 번 주말에 영화나 보러가자." "그래요." "짐도 가져 갈거야?" "가을 되면 겨울을 생각해야 할 것이고 그러면 짐이 많아 질거에요. 필요없는 것들은 집에 갖다 놓아야지." "인형은 내 방에 갖다 놓고 가." "왜요?" "깨끗하게 빨아서 안고 자려고 그런다." "흠. 그럼 갈 때 주고 갈게요. 이제 누나 방 가세요." "그래. 잘 자." "누나!" "왜?" "뽀뽀라도 한 번 해주고 가면 안될까요?" "아직까지도 그러니?" "뭘?" "계속 물어보고 하잖아." "처음엔 안 그랬어." "네 마음속에 나와 입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 나도 그런 생각이 들고 있다고 생각을 해. 나도 네 마음과 비슷하다고 그렇게 생각해." "진짜루?" "그래." 하루 밤이 지나면 철수는 한 동안 내 옆에 있지 않겠네요. 너무 친근하면 종종 그 존재를 기억못하는 수가 있습니다. 기억한 시간이 많기 때문에 그를 생각하는 것에 익숙해져 버려 종종 다른 사람의 모습에 치워져 버리 는 수가 있습니다. 그 좋은 사람이 곁에 없으면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도 하지요. 철수가 서울로 떠난 다음 날, 승주 편지를 받았습니다. 나는 아직 그에 대한 여 운이 많이 남아 있나 봐요. 철수를 완전히 내 사람으로 받아 들였지만 내 곁에 그가 없는 지금 멀리 있어 그리운 승주는 날 가슴 떨리게 합니다. 그의 편지 내 용에 이런 물음이 있었습니다. 아직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지 않았니? 내 지금 마음으로는 승주에게 떳떳하게 철수를 얘기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불 과 반 년 전에는 반대였지요. 그때 보다는 덜 하지만 난 잠시 철수를 치워 놓고 혼자라 생각하며 승주의 편지를 읽었습니다. 그래도 주말에 서울로 올 때는 철수 생각만 했어요. 많이 설레었어요. 고작 3
일 철수를 내 옆에 두지 못했는데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혹시 낯설지 않을까 하 는 생각도 했어요. "은정이? 그 나이 많은 처자 맞지?" "네. 근데 저 이제 25 살인데요." "허허, 우리 철수는 23 살인데?" "네?" "처자가 철수보다 나이 많은 거 맞지?" "네." "그러니까 내가 나이 많은 처자라고 해서 기분 나쁘고 그러지 않지?" "네." "철수는 오늘 집에 안들어 올텐데." "네?" "군대 간 친구가 병원에 입원했다고 면회 갔어. 오늘 면회가 안되었던 모양이 야. 벽제라고 했나? 그 근처 여관에서 하룻 밤 묵고 내일 친구 면회하고 온다고 전화 왔었어." "저에겐 그런 말 없었는데..." "우리 철수가 처자 꼬봉인가?" "네?" "그런 것 까지 일일이 처자에게 보고해야 되냔 말이지." "아니에요." "어디 김씬가?" "김해 김씨인데요." "음. 철수 오면 전화 왔었다고 전해 줄게." "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그래." 저녁이었지만 가는 길에 얼굴이라도 볼 생각으로 철수집에 전화를 해 보았어 요. 아버님이 받으시더군요. 이제 저도 목소리만이지만 상당히 친근한 존재가 되 었나 보네요. 아버님이 예전보다 전화 받으시는 목소리가 부드럽고 다른 질문도 하셨습니다. 그래도 말투는 여전히 딱딱하시네요. 친구 누구 면회 간 거야? 오늘은 그냥 집으로 바로 가야 겠네요. 저녁에 엄마가 병원 일로 집에 오시지 않아 아빠와 단 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냈 습니다. 거실에 앉아 과일을 먹으며 베스트 극장 드라마를 봤어요. "아빠." "왜." "저 결혼 안하고 있으면 뭐라 하실거에요?" "뭐라고 하다니?" "시집 가라고 강요하실거냐구요." "무남독녀 외동딸인데 그럴려구. 그래도 28 살 안에는 시집 가라." "에? 강요하겠단 말이네요 그럼." "흠, 자식이 너 하나라고 니가 결혼을 늦게 하면 행여 여러 잡념들이 많이 생 길 것 같아. 남들 시집갈 나이에 너도 시집 가." "저 그럼 얼마 안 남았어요." "그래, 니가 대학 졸업할 때부터 그걸 인식하기 시작했다. 흠." "자식이 저 하나라고 사위 고르실 때 까다로우실 것 같아요." "아니다. 난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찬성이다. 난 너를 믿지. 내가 널 못 믿었으면 학교 근처서 그렇게 자취생활 하게 하지 못했다?" "엄마도 그럴까요?" "그럴거야."
"아빠." "왜?" "저 그냥 회사원에게 시집 가도 되죠?" "회사원이 어때서?" "그럼. 음..." "사귀는 남자 있니?" "네." "응? 넌 남자 친구는 많아도 사귀는 사람은 없다고 했잖아." "이젠 있어요." "누군데?" "아빠도 한 번 봤잖아요." "언제?" "제 졸업식때요." "으엉? 그 남자애?" "네." "걔 너보다..." "네, 두살 연하에요." "허허." "왜 웃으세요?" "너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지?" "네." "너 걔하고 결혼 할 마음도 있는거야?" "아직은 결혼에 대해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래도 못할 건 없잖아요." "그 애 아버지가 한의사라고 했지?" "네." "더 깊이 생각해 봐라. 그리고 기회 있으면 걔 한 번 집에 데리고 와." "나중에 시간이 좀 더 흐르고 난 뒤에 데리고 올게요." "그래, 넌 아직 학생이다. 그에 맞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네." 왜 이런 말을 물어 봤을까. 대학원 졸업하려면 아직 일년 반도 더 남았는데. 배 선배가 했던 말이 그냥 지나치는 말이 아니었나 보네요.내 가까운 한 사람에 게라도 철수의 존재를 인식시키고 싶었나 봅니다. 그게 아빠였다.
49 회 누나와 연인 사이가 된 지 두 달이 다 되어 간다. 그 기간 누나를 대하는 데 있 어 특별히 달라진 것이 없다. 단지 가끔 뽀뽀 한 번씩 한다는 게 예전과 달라진 것이다. 쿠쿠, 뽀뽀 한 번 한다는 거. 그걸 단지라고 말하다니 내가 주제 파악 을 잠시 못했나 보다. 감히 가슴 떨리는 일이라 꿈에 조차 잘 나타나지 않는 그 런 일을 두고 단지라고 말하다니... 생 후 처음 와 보는 이런 낯선 곳의 여관 방 에서 하룻밤을 묵을려니 별 생각들이 다 떠오른다. 병장 되기 꼴랑 한 달 남겨 두고 탈장인가 뭔가에 걸려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승헌이를 보러 이 곳에 왔지만 그 새끼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 난 지금 낯선 여관 방에 혼자 누워 냄새 나는 베개를 꼭 껴안고 누나 생각을 하고 있다. 그 잘난 여자가 내가 뽀뽀 하자고 하면 한다. 처음엔 장 난 같기도 했는데, 요즘은 결혼 얘기도 나오는 것이 나를 진짜 애인으로 생각하 는 것 같다. 나는 누나와 애인하기로 했지만 끝까지 책임질 수 있다고는 아직도 생각지 못하고 있다. 헤어짐이 오면 웃어 줄 것이라 다짐하고 누나는 언젠가 딴
남자의 여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연애와 결혼은 항상 같을 순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최근들어 누나에 대한 그런 내 생각이 많이 틀려지고 있다. 누나와 키스하면서 눈을 말똥히 떠고 누나의 표정을 살폈던 적이 있다. 그 잘난 여자는 내게 뽀뽀 를 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영화에서 숱하게 보아왔던 수줍고 행복한 여 인의 모습이 바로 누나에게 있었다. 한 남자에게 입술을 맡긴 채, 잠시 세상의 일은 한 쪽으로 치워두고 그 남자만을 생각하는 듯 눈을 감은 모습, 누나도 그랬 다. 조르는 동생에게 마저못해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누나는 나를 느끼고 마음에 새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여자를 딴 사람에게 줄 수 없을 것 같다. 장하다 박 철수, 이런 생각을 하기까지 정말 수고 많았다. 베개를 꼬옥 더 껴 안았다. 헤헤... 그래서 그럴까? 예전에는 누나가 어떤 모르는 남자와 팔짱을 껴고 걸어 가던, 같이 차를 타고 어디를 가던 별 상관을 하지 않았다. 조금 서운했던 적은 있지 만 질투심 나서 기분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너들이 암만 그래봤자 누나 는 나하고 더 친하다. 이렇게만 생각했었다. 근데 더 친하게 된 연인사이가 되었 는데 요즘 누나하고 친한 척 하는 놈들이 보이면 불안하고 질투심나고 기분 나쁘 다. 분명 요즘이 예전보다 더 친해졌고, 더 가까웁게 지내지만 예전보다 태연하 지 못한 것 같다. 그 새끼... 한 번 날 잡고 싶은 새끼가 있다. 그 자식 참 밥 맛 없는 놈인데 누나 곁에 오래 붙어 있다. 그래서 조금 불안하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여전히 불안한 사람이 있다. 예전 누나의 연인이었던 사람, 승주 형. 승주 형이 돌아 와서 누나 곁에 나타나면? 나는 예전처럼 그냥 삐친 모양으로 나 혼 자 내 기분을 삭일 수 있을까? 차라리 내가 조금 떨어져 주면 더 편할 것이라 생 각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을까? 누나에게 따지고 들지도 모른다. 껴 안았던 베개를 풀었다. 베개를 머리 쪽으로 옮기고 이불을 덮었다. 한 여름 이 가까이 왔는데도 난 이불을 덮고 별 생각을 다 하다가 잠이 들었다. "꼬끼 오~" 율전 그 촌 동네에서도 듣기 힘들었던 새벽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여기 겁나 게 촌 동네인거 같다. 새벽 동이 밝아 온다. 내가 누나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니 고 이렇게 일찍 일어 날 필요 없다. 다시 잤다. "삐리리~" 잠결에 전화 벨 소리를 들었다. 얼떨결에 전화를 받았다. "누구세요?" "방 빼야죠?" "아, 지금 몇시인데요?" "12 시 다 되었어요." 내 온 몸이 땀에 젖어 있다. 나, 덮었던 이불을 돌돌 말아 껴안고 있었다. 후 후, 이불 말고 자는 건 은정이 누나가 하던 짓인데... 외모에 별 신경을 쓰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군발이 면회 가는데 외모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 아무리 겉모습에 별 신경을 쓰지 않고 가지만 군 발이 보다는 확실히 잘 나 보일거다. 면회하는 매점에 앉아 승헌이를 기다렸다. 외모에 좀 신경을 써고 오는건데 그 랬다. 제법 예쁜 아가씨 둘이가 내 가까운 곳에 앉아 나를 흘깃 쳐다 본다. 그 려, 나 금방까지 자다 온 사람이여. 승헌이가 나왔다. 몇 일동안 세수 안한 모습, 그 짧은 머리가 한 쪽은 눕고, 한 쪽은 섰을 정도니 물 근처를 아예 안 간 것 같다. 초라한 국군 병원 복을 입 고 플라스틱 딸딸이에 다리를 절며 반가운 모습 반, 아픈 모습 반으로 나에게 오 는 데 불쌍하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제 저기 앉아 있는 여자들이 날 쳐
다 보아도 된다. 왜? 나 확실히 승헌이 보다는 몰골이 괜찮아 보일 것이기에. "어찌 된거냐?" "응? 탈장. 탈장은 말년에는 잘 안 걸리는데..." "탈장이 뭐냐?" "한 마디로 장이 탈났다는 거지. 장이 밑으로 떨어져서 수술해서 끄집어 올려 야 되는 병." "왜 걸렸냐?" "낸들 아냐." "병원에 얼마 동안 있은거냐?" "2 주 다 되어 간다. 모레 수술 날짜 잡혔다." "다리를 절던데?" "다리가 아픈게 아니고 아랫배가 결려서 그런거다.너 다음주에 한 번 더 와라. 심심해 죽겠다." "이 더운 날 훈련 안 받고 병원에 있으면 더 좋지 않냐?" "그건 그렇지만 너무 심심하다." "그래서 우리 집에 전화 했었냐?" "응." "그 사자 머리더러 자주 오라고 하지?" "헤헤, 의정이 걔랑은 당분간 모른 척하고 지내기로 했다." "걔가 고무신 거꾸로 신었냐?" "아니다. 그 애인 사이라는게 말이다. 자꾸 속박하려고 해서, 내가 좀 괴롭더라 구. 걔가 뭐하고 지내는지 자꾸 신경이 쓰이는데, 신경 써 줄 처지가 못되었잖 아. 그래서 그냥 모른 척 내가 의정일 피했어." "그럼 니가 군화 거꾸로 신은거냐?" "하하, 그런 셈이지만 사회로 나가면 다시 시작해야지. 친구는 오래만에 만나 도 어색하지 않지만 연인사이는 다르거든." "군발이다운 생각을 하는군." "야, 나는 메인 몸인데 애인이 딴 남자 만나고 돌아다니는 상상을 해 봐. 기분 어떻겠냐?"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먹을 거나 좀 사와." "지금 내 복장이 이런데 내가 돈이 있을 것 같냐?" "야, 비싼 차비 들여가며, 어제 면회가 안 되어 비싼 여관방 신세까지 지며 너 만나러 왔으면 대접을 해야 할 거 아냐." "진짜 싸가지 말년 병장 군기보다 더 없네. 아픈 놈 면회 왔으면 니가 날 대접 해야지."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냐. 대접도 못할 거면서 무슨 배짱으로 날 불렀냐?" "너 내 친구 맞어?" "다른 놈들이나 부모님 오셔서 뭐 먹을 거 사다 놓고 갔을 거 아냐. 그거라도 좀 가져 와." "여기가 무슨 민간 병원인 줄 아나. 잔말 말고 빨리 먹을 거 사 와." "나 진짜 돈 없어. 어제 여관비 내고 나니까 돌아 갈 차비 밖에 안 남더라." "참 내. 그럴려면 뭐하러 왔냐?" "그래, 나 갈게." "야. 나 심심해. 그럼 커피라도 한 잔 뽑아 와." 승헌이 녀석하고 자판기 커피 한 잔으로 두 시간을 앉아 놀았다. "너, 모레 수술하고 나도 일주일 더 여기 있어야 하거든? 다음 주 수요일 쯤에 여기 한 번 더 와라." "그때 오면 잘 대접해 주냐?"
"면회 오는 사람이 대접하는 거 아니냐?" "고정관념을 버려라 임마." "그건 그렇고 너 요즘도 나이 많은 여자들하고 노냐?" "응." "너 그러다 빨리 늙는다? 너 이런 심보 가진 것도 아마 나이 많은 여자들 영향 일거야." "승헌아." "왜?" "너 은정이 누나 알지?" "자가용 타고 다니던 누나 말이지?" "응. 그 누나 어떻던?" "예쁘긴 한데 남자를 잡고 살려는 경향이 있어 보이더라. 우리 큰누나와 비슷 해." "하하, 예쁘긴 하지?" "졸업했지 않냐?" "대학원 다녀. 푸하하." "왜 웃어?" "너 여자랑 뽀뽀해 봤어?" "야이씨, 내 나이가 몇 살인데. 의정이하고 근 육개월 사귀다 군에 들어 온 나 다." "해 봤구나." "못해봤다. 흑흑. 다른 놈들은 군대 들어오면서, 와서도 잘만 하더만..." "불쌍한 놈. 너 진짜 공대만 안 들어 왔으면 진짜 잘난 남자 됐을거야. 내가 봐 도 넌 잘 생겼어. 어쩌다 삶이 그렇게 꼬였냐?" "공대가 어때서 임마." "넌 눈이 아주 낮잖아. 그 잘난 외모로 그 사자머리하고 사귄걸 보면." "니가 몰라서 그렇지 의정이 걔 참 예쁜 여자야. 근데 갑자기 뽀뽀 얘기는 왜 했냐?" "그 사자머리보다 백 배는 예쁜 은정이 누나가 내 애인이다. 그 누나하고 나 시 도때도 없이 키스하고 그런다." 확실하게 기를 죽이기 위해서 약간의 거짓말은 괜찮다고 본다. "푸헬헬! 거짓말 치지마. 그 잘난 여자가 대가리 총맞았냐 너하고 키스하게. 술 먹고 장난삼아 뽀뽀 해 준걸로 너 뻥치는거지?" 왜 안 믿지? 그럼 좀 더 강한 거짓말로... "내 애인 맞다니까. 나 누나 가슴도 만져 봤어." "뭐! 가슴을 만져?" 야이, 저 옆에 아가씨들이 다 듣잖아. "아니, 찔러 봤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 누나가 내 애인이라니까." "야, 나이 많은 여자는 나이 어린 놈에게 종종 애인처럼 잘 대해줄 때가 있어. 거기에 속아 넘어 가면 넌 하인되는 거야. 내가 힘으론 우리 누나들 셋이 다 덤 벼도 이기지만 막내 누나에게도 쩔쩔 매는 것은 다 그런 그녀들의 수법에 넘어 갔기 때문이야." "이 새끼 군발이 되더니 의심만 늘었나." "애인이라고 생각하고 싶으면 너 혼자만 아무도 몰래 그렇게 생각 해. 쯔쯧. 나 중에 아픔이 커겠구만." "나 수요일 날 다시 온다. 그때 보자." "야, 좀 더 놀다 가, 삐쳤냐? 다섯시까지 있다 가." "너 혼자 놀아 새꺄." 내가 은정이 누나의 애인이라는 사실을 친구가 믿어 주지 않았다. 별로 기분 나
쁜 것도 없다. 하지만 누나가 나와 애인사이 된 것이 대가리 총맞을 정도인가? 내가 내 가까운 친구에게도 그 누나에 비해 턱없이 모자랗게 느껴졌나? 지하철 역으로 들어 가 화장실을 찾았다. 내 모습이 별 볼일 없어 보였다. 히 죽 웃었다. 은정이 누나에게 이런 내 모습이 잘 어울릴까? 집에 와서 바로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친구 면회 갔었다며?" "어, 어떻게 알았어?" "너네 아버님이 그러시더라." "우리집에 전화 했었나 보네요?" "응." "누나 내 애인 해 주기로 했죠?" "해 주기로? 그거 너 싫어하던 말이었잖아." "하여튼. 내 애인 맞죠?" "왜 자꾸 그런 걸 묻니?" "그 새끼가." "좋은 말 좀 쓰라. 면회갔던 친구 말하는거니?" "응." "걔가 왜?" "누나가 내 애인이라고 막 자랑했는데 그 새끼가 막 놀렸어. 거짓말하지 말라 고." "후훗, 너 장난스럽게 말했지?" "씨, 누나 수요일날 바빠요?" "바쁘진 않지만 연구실에 있어야 돼." "그때 결석해요." "왜?" "나랑 그 새끼 면회 갑시다." "응?" "가서 내 애인 맞다고 좀 말해줘요." "너 이럴 때보면 참 어린 애 같다." "내가 누나보다 두살 적다고 그러는거지?" "또 삐칠려고 그런다." "갈거야 말거야." "꼭 가야 되니?" "응. 내가 오늘 참 많이 수모를 당했단 말이에요." "너 아직 불안한거지? 그런 생각 언제 떨쳐 버릴래?"" "에?" "그래, 가서 확인시켜 줄게. 화요일날 서울 올라 오지 뭐. 하루 정도 빠진다고 날 제적시키겠어 어쩌겠어." "정말 갈래요?" "가자며?" "하하, 그럼 내가 화요일날 누나 데리러 갈게요." "흠. 철수야." "왜?" "두 살차이에 대해서 너무 많은 의미를 두지마. 그리고 내가 너보다 대단한 사 람이라고도 생각지 마."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 보여요?" "응, 많이."
"그게 보여요?" "응." 보이나? 어떻게 해서 보이지? 두 살 많다고 나보다 제법 많이 아네. 그건 그렇 고 푸하하, 승헌아 수요일날 보자.
50 회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 여전히 불안한 존재이다. 내가 그녀에게 기대고 싶은 만 큼 나도 그녀를 안아 주고 싶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기댈만한 존재가 못되고 있 다. 지금 그녀는 힘들지가 않다. 그녀가 힘들면 나는 그녀를 위해 뭘 해 줄수 있 는가? 현실 문제에 대해서 나는 아직 생각해 본 것이 없다. 화요일날 점심을 먹고 학교로 내려 갔다. 아버지 차 훔쳐 타고 은정이 누나를 데리고 올 생각으로 내려 갔었다. 누나는 실험실에 있을 것이고 내가 머물만한 공간은 내 자취방 아니면 정희 누나의 약국 뿐이었다. 내 자취방은 썰렁하다. "약장사 잘 되고 있어요?" "야, 그 좋은 말 놔두고 약장사가 뭐니? 방학인데 어쩐 일이야?" "은정이 누나 데리러 왔어요. 누나 안 심심해요?" "흠, 그래 잘왔어. 놀다 갈거지?" "응. 뭐 좀 물어 볼 것도 있구요." "방학이라 많이 한가해. 학교 앞은 학생들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 방학이 라 이번 달은 영..." "허허. 누나 외롭지 않아요?" "왜?" "이 약국을 혼자 경영하며 심심하기도 하겠지만 또 혼자라 외롭기도 할 것 같 애." "지금은 약국에만 신경 쓸거야." "힘들면 누구 생각나는 사람 없어요? 옛 애인 생각나지 않아요?" "그런 건 니가 알 필요가 없단다." "누나는 여전히 날 어린애 취급하네요.? "나는 널 어릴 때부터 봐왔기 때문에, 너 어릴 때 모습이 뇌리에 박혀있어. 아 마 그것 때문일거야." "누나, 나 말고 연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또 묻는구나?" "은정이 누나에게 아무래도 차일 것 같애." "왜, 싸웠니?" "아니, 은정이 누나에게 내 속마음이 다 읽혀 지는 것 같아요. 뻔히 보인다는거 죠. 뻔히 보이는 사람에게 사랑의 감정이 오래 가겠어요? 아니면 기대고 싶은 마 음이 생기겠어요?" "후후, 넌 필요없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해." "내가 생각을 안하게 생겼어요? 누나가 갑자기 결혼 얘기를 했어요. 내 나이만 생각했지 누나 나이는 생각을 못했거든요. 누나는 얼마 안 남았어요. 쩝, 누나 가 대학원을 졸업하면 결혼 생각하게 될 것이고, 난 그때도 철없는 학생일텐데 현실 문제를 생각하면 내가 결혼 상대자로 보이겠어요? 그때 차이면 나는 은정 이 누나에게 상처를 많이 받을 것 같아요. 그럴바에야 예전처럼 그냥 누나 동생 하고 지내는 게 나아요.."
"현재에 충실 해. 참 쓸데없는 생각 많이 한다. 헤어진다는 생각을 왜 하니?친 구사이였다가 연인사이는 되어도 연인사이였다가 친구사이 되기는 힘들어." "그래, 은정이 누나가 승주형하고 친구 사이랬어요. 그게 가능해? 둘이가 다시 가까이 있게 되면 그것도 또 문제야. 헤어져 버리면 차라리 속이 편하겠어." "왜 그리 생각이 많니?" "은정이 누나는 좀 어렵다니까. 누나도 연하 사귀어 봐." "네 말대로 연하에게 감정이 생기면 아무래도 힘들 것도 같아. 난 곁에 누군가 있으면 그에게 의지하려는 버릇이 좀 있어. 그것 때문에 철규씨랑 헤어졌을거 야." "에?" "은정이가 그러더라. 철규씨와 나 사이는 너무 밋밋해 보인다고. 그건 아무래 도 서로 무관심해 보였다는 말일수 있거든. 그에게 기대고 싶은데 그가 내게 무 관심하게 보이면 서운한 마음 하나가 생겼어. 그게 쌓이다 보니까 너무 힘들어 지더라. 그래서 포기했지. 연하는 그것보다 문제가 더 클 것 같애. 스스로 그 기 대고 싶은 마음을 치유해야 할 경우가 많을 것 같거든. 널 보면 그게 느껴져." "왜 또 날 걸고 넘어져?" "넌 나와 은정이에게 배려하는 게 많았어. 부탁하지 않아도 우릴 보살피려고 했 던 게 많아. 남자 다웠지. 그것 때문에 은정이가 너에게 감정이 생겼을거야. 근 데 너, 니가 배려하고 베풀었던 것 보다 더 많이 응석을 부리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 그래서 많이 어려 보여. 또, 넌 가정환경이 좋잖아. 너네 집이 좀 살만하 고 어려웠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넌 너무 밝아. 그래서 많이 여려보여. 낙천적이 어서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도 없어 보여. 귀여운 동생으로 생각하면 더 없 이 좋지만 연인으로 생각하기엔 모자라는부분이 너무 많아." 마음이 아프다. 저렇게 싸잡아 말하니까, 그것이 맞는 말 같으니까 가슴이 너 무 아프다. "씨이. 전엔 은정이 누나하고 연인 사이 충분히 될 수 있다고 날 부축였잖아. 근데 지금와서 그런말 하는 의도가 뭐야." "후후, 이건 내가 생각하는 것일 뿐이야. 너 맏이지?" "응." "너 겉으로 보면 맏이 같지 않아. 하자만 너 나름대로 마음에 짐이 된 게 많았 겠지?" "그럼요.." "그 짐이 나중엔 상당히 큰 힘이 돼." "누나는 은정이 누나보다 더 많이 아는 것 같네?" "나하고 은정이하고는 틀려. 맏이는 보통 누나 하나 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며?" "맞아요." "은정인 무남독녀야. 예전부터 편한 동생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랬거든. 걔는 오빠나 언니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지는 않았어." "그래서요?" "내가 알기로 은정이는 기대고 싶은 마음보다 감싸고 싶은 마음이 큰 애야. 니 가 응석 부리는 걸 좋아할거야. 혼자 자라서 고집이 세고 독립심도 있지만 또 혼 자 살아서 많이 여리거든. 응석을 받아주면 그 여린 마음 때문에 기분 좋을거 고, 외로움도 가실거야." "쉽게 말해요 좀." "넌 은정이가 마음에 딱 들어 할 타입이야. 장남도 고집이 세지만 혼자 자란애 하고는 경우가 틀려. 맏이는 아주 큰 일이 아니고는 자기가 양보하는 편이지. 그 래도 둘 다 고집이 있어서 자주 다툼이 있을 수 있겠지만 거기서 남자가 연하라 는 장점이 있어. 서로 조금씩 양보하려고 할 걸. 네 낙천적인 성격을 약간 독선
적이기도 한 은정이가 보완해 줄 수 있어. 은정이가 속으론 많이 여리다고 했잖 아. 니가 어리기 때문에 걔 여린 마음이 많이 바뀔 거야. 넌 여린 구석이 많지 만 대범한 구석도 있어. 동생을 원하는 사람과 누나를 원하는 사람이 만났으니 까 여리고 대범한 게 조화를 이룰 것 같애. 맏이는 또 조금의 리더쉽은 다 가지 고 있어.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그 대처 능력은 맏이, 특히 장남이 가장 많이 가 지고 있다고 하더군. 그것 때문에 혹시 은정이가 기대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 너 에게 기댈 수 있을거야." "누나 심리학 배웠수?" "아니, 가정생활이란 교양 들었었다." "그런것도 가르쳐 줘요?" "배운 거 대충 내가 정리한거다." "그럼 현실 문제는?" "걔는 현실문제에 대해 너보다 더 개념이 없어. 걔 얼마나 귀하게 자란 앤데. 걔는 현실 문제에 대해 별 생각도 없을 뿐더러 힘들 것이라 생각도 안해. 너 한 번 생각해 봐라. 자기 아빠가 엄청 큰 약국 가지고 있지, 자기 벌써 약사 자격 증 따 놓았지. 엄마가 또 병원하지. 걔가 현실에 대해 뭐 걱정할 게 있겠니? 걔 는 잘난 남자 만나면 바보 돼. 아예 현실에 대한 생각이 없어질거야. 그냥 살아 도 살만할테니까. 그런 사람들은 어려움이 닥치면 못 이겨내." "무슨 말이여 씨." "걔는 좀 바보 같은 애를 만나야 현실에 대해 생각할거야. 걔도 널 배우자로 생 각하면 좀 답답할거다. 학생에다가 결혼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이 없는 놈 을 보고 있자니 얼마나 답답하겠니. 걔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다 주고 싶어하는 애야. 그 좋아하는 사람이 바보 온달 같으면 장군 만들려고 할거야. 그럴려면 자 기가 똑똑해야 겠지? 너 때문에 현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거고 어려움이 닥쳐 도 이겨낼 수 있는 용기가 생길거야." "지금 나 바보라는 소리지?" "응." "내가 왜 바본대?" "야, 군대도 안 갔다 오고 사회 진출하려면 2 년을 더 학생 신분으로 보내야 하 는 녀석을, 거기다가 2 살이나 어린 녀석을 결혼 문제가 닥치면 배우자로 생각해 야 하는데 답답한 생각이 들지 않겠니? 왠만하면 다 포기해. 당장 모셔야 할 부 모님 계시고 생활비 걱정해야 되야하고, 빨리 기반 마련해서 잘 살고 싶은 사람 이라면 지금의 널 절대 배우자로 생각 못하지. 은정이니까 그런 생각 할 수 있는 거야. 걔 복이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다른 문제를 개입시키지 않을 수 있 는 배경이 있으니까. 걔 진짜 사랑한다면 붕어빵 장사가 뭐야, 거지하고도 결혼 할 생각을 할 애야. 지가 먹여 살릴 생각하며 똑똑한 사람 만들려고 하겠지. 그 래, 은정인 갖추어진 배우자를 만나는 것 보다 채워야 할 공간이 많은 배우자를 만나는게 훨씬 나을거야." "그래요? 하하." "다른 연상인 여자와 연하인 남자 사이는 몰라도 너네 둘이는 잘 어울려." "그럼 내가 두살 연하인 거는 제쳐두고 승주 형이 돌아 와 날 밀어내면 어떡해 요?" "니가 알아서 해야지. 하지만 염두해 둘게 있어. 그건 절대 미덕이 아니다?" "그게 뭔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떠난다, 사랑하기 때문에 잊겠다. 이런 거 말이지. 은정 이가 승주하고 더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피하거나 둘을 맺어주려고 하지는 마." "우쒸, 누나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은정이와 너에 대해서는 잘 알지. 은정이도 나에게 많이 물으러 오거든. 둘이 하는 얘기가 비슷해. 둘이 하는 얘기 들어보고 종합해서 따로 얘기하는 부분만
얘기해 주면 되는데." "은정이 누나가 내 얘기를 많이 해요?" "너 만큼은 해." "왜 그렇지?" "니가 불안해 하는 모습이 보이니까 걔도 불안한거야." "누나가 얘기 해 주었구나." "대충 걔도 느끼지 않겠니? 그래서 니가 고민하고 있는 부분을 조금 얘기해 주 었어." "은정이 누나하고 연인 사이 된 것이 마냥 기분이 좋았거든요. 별 생각없이 좋 았는데 갑자기 누나가 결혼 얘기를 하잖아. 그 것 때문에 생각을 하다 보니까 자 꾸 어렵게 느껴지는 게 떠오르잖아." "흠, 참 좋아 보인다. 서로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한다는 건 좋은거야. 너네 둘이 는 밋밋하지는 않겠다. 그렇지만 너, 쓸데없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해." "초보라서 그렇죠 뭐." "이겨 내." 오후 다섯시에 누나 삐삐를 받고 약대 앞으로 갔다. 언제 한 번 꼭 날을 잡고 말리라. 배씨 성을 가진 저 박사과정 새끼가 아무래도 누나에게 찝적 되는 것 같 다. 왜 같이 나오냐. 그 사람이 차에서 내린 날 보더니 인사를 해 준다. 웃어 주 는 모습이 날 비웃는 것 같다. 누나는 내게 반가움을 표시하고 차에 올라 탔지 만 난 한참을 배군을 째려 보았다. 그가 돌아서자 마자 알밤을 까주었다. 자꾸 누나에게 치근덕 되면 못으로 지 차를 긁어 버려야지. 그래도 안되면 백미러나 유리창을 깨 버려야지. 그래도 안되면 날 잡는다. "누나!" "왜?" "그 다른 사람들은 잘 떼어내더만 저 사람은 왜 못 떼어 내는데? 누나, 저 사람 이 좋아요?" "나도 저 선배에게는 졌어. 아무리 쌀쌀 맞게 굴어도 허허 웃고, 모진말 해도 아주 태연해. 완전 능구렁이야. 그렇게 지내다 보니까 적응이 되었나봐. 싫지는 않아." "우쒸." "걱정마. 저 사람 백명을 갖다줘도 철수 너하고 안 바꿀테니까." "정말?" "너 진짜 어린애 같다." "어린애는 베스트 드라이버가 될 수 없지. 갑니다?" "그래, 갑시다." "자취방 안 갔다 가도 되요?" "뭐 다시 내려와야 하는데. 대충 정리하고 나왔어." "저녁은 서울가서 먹어요? 오늘은 내가 사줄게." "그래라." 해는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지지 않고 붉게 물들어 있었다. 피곤했을까? 누나 는 서울에 들어설 무렵부터 조용해 지더니 청담동에 도착했을 때는 고개를 내 쪽 으로 기울고 잠이 들어 버렸다. 그리고 신호등 앞에 차가 대기하고 있을 때 내 어깨에 기대고 말았다. 흠, 내게 기댄 누나의 모습이 좋다. 누나가 좀 더 자라고 쓸데 없이 워커힐 쪽까지 차를 몰고 갔다가 다시 청담동 쪽으로 돌아 왔다. "어?"
"인제 일어 났어요?" "아직도 여기야?" "밥 어디서 먹을거야?" "여긴 별로 먹을 데가 없잖아." "뭐 먹고 싶은데?" "너 사주고 싶은 거 사줘." "굶읍시다." "나하고 장난치고 싶어 죽겠지?" "국밥 먹을래요? 곰탕 잘하는데 있던데." "곰탕 먹을까?" "그럽시다." 누나는 내가 밥 먹는 모습을 보며 웃었다. 뭐 때문에 웃었는지 모른다. 밥 먹 다 말고 내 밥 먹는 모습을 보고 웃었다. 얼굴에 아무것도 묻은 게 없었는데 그 냥 실없이 웃었다. 내일 승헌이 새끼가 저런 누나의 모습에 기가 죽을 것이다. 푸하하. "안녕." 아침 8 시에 누나 집 앞으로 갔다. 아버지 차를 또 하루 더 빌렸다. 누나는 먹 을 걸 잔뜩 들고 있었다. "그 병원이 있는 곳이 여기서 머니?" "한시간 반 정도 걸릴거야. 근데 그 싸가지고 온 게 뭐야?" "이거? 김밥하고 수육, 음료수. 그리고 떡도 좀 샀어." "어제 나하고 헤어진 다음 산거야?" "응." "승헌이가 좋아하겠네." "걔 수술하고 나서 많이 아프겠다." "좀 불쌍해 보이긴 했어요." "친구한테 잘해 좀." "우리는 서로 구박하며 우정을 쌓아요." "어휴, 누가 공돌이 아니랄까봐." "근데 이거 승헌이 때문에 준비한 거 치고는 너무 과하다. 승헌이가 잘생겨서 그러는거지?" "너 요즘 질투 많이 한다?" "이 정도면 양호하지요 뭘." "네 친구에게 널 잘 보이려고 그런다." "걔한테 내가 잘 보여서 뭐 하게?" "사람이 가장 큰 재산이야." "하하. 누나 그런 말은 우리 나이에는 잘 어울리는 말이 아닌데." "에구, 출발이나 해." "그러지요." 벽제 가는 길은 구파발을 넘어서자 좋은 주위 풍경을 누나에게 선사했다. 누나 는 율전하고는 분위기 틀린 그 길을 따라 소풍가는 기분을 냈다. 창을 열고 밖으 로 고개를 내 밀어 마냥 웃었다. 저 여자도 그러고 보면 온실 속 화초같고 고운 집의 소녀같은 여리고 밝은 모습이 대부분인 사람이다. 군부대가 많은 곳이라 간 혹 못보던 것이 보이기도 한다. "야 탱크다!" "저게 어떻게 땡크냐?" 이상하게 생긴 장갑차 같았는데 포 달렸다고 누나는 탱크라고 우겼다.
"탱크 맞잖아." "탱크는 포가 더 길지." "너 군대 갔다 왔어?" "아니." "근데 니가 어떻게 알아? 저건 탱크야." "그래 탱크다." 벽제 군 병원 앞에 도착했다. 면회 신청을 하는데 그 문 앞에 서 있던 군인 하 나가 자꾸 누나를 쳐다 보았다. 너 보다 나이 많으니까 관심 끄라. 이제 일병인 새끼가... 병원 안 매점에서 승헌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많은 남자들이 누나를 쳐 다 본다. 그 시선이 느껴졌다. 누나는 신기한 듯 주위만 살필 뿐이다. 저 여자 가 예뻐서 쳐다보는거야, 아니면 어쩌다 찾아 오는 여자라 쳐다 보는거야? 불쌍 한 놈들... 조금 가엾다. 다들 귀한 자식들인데 어디 한군데 다쳐서 병원 복을 입고 있는 나 또래의 군인들이 겉 모습만 보면 좀 많이 안되어 보인다. 그래도 그들은 자신의 처지에 상관없이 누나를 흘깃 쳐다 보며 밝은 모습이다. 한 놈이 아주 이상한 걸음걸이로 딸딸이를 끌며 걸어 나온다. 저번 보다 더 초 라하고 지저분한 모습이다. 승헌이가 아픈 모습으로 걸어 나오지만 내가 반가웠 는지 웃음을 띄우고 성하지 않은 몸을 이끌고 이쪽으로 걸어 나온다. 그러다 누 나를 보았다. 꿈쩍 놀라는 승헌이. 새꺄, 오늘 내 확인시켜 주마.
51 회 벽제란 곳은 철수 때문에 처음 가 보는 곳입니다. 서울 위쪽은 거의 가보지 못했 었는데, 벽제 가는 길은 율전 내려오는 길의 풍경과는 달랐습니다. 군부대들이 많이 보였고, 헌병들이 지키고 있는 초소들도 보였어요. 승주가 군에 있을 때도 면회를 가지 않았었는데 나와 별 상관이 없는 승헌이란 애를 면회하러 갑니다. 철수 때문에... 군 병원 앞에는 철책이 쳐져 있었고 역시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무슨 죄 수 수용소도 아닌데 입구 분위기는 꼭 교도소 같은 모습이었어요. 조금 겁이나 철수의 팔을 잡았지요. 면회 하는 곳은 80 년대 남자 고등학교의 매점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까까머리 군인들이, 군인들이라 하기에는 몰골이 영 시원찮네요, 뭘 사먹으러 오고 또 면 회하러 온 사람들을 만나러 오곤 했습니다. 어디가 아픈지 잘 구분이 안되는 사 람들도 많았습니다. 근데 승헌이라는 애는 아픈 애라는 게 표가 나더군요. 저 모 습 쟤 부모님이 보시면 상당히 마음이 아프겠어요. 참 잘 생겼던 앤데 입고 있 는 옷이라던지 신고 있는 슬리퍼라던지, 그리고 세수를 안했는지 얼굴에 때도 끼 여 있었어요. 무엇보다 걸음걸이가 제대로가 아니었습니다. 아픈 곳 때문에 간 혹 인상을 찌푸리지만 친구가 왔다고 얼굴은 밝네요. 호호 저 지금 시선을 많이 받고 있어요. 여기 여자가 저 뿐이거든요. 하긴 여자 가 나 혼자가 아니더라도 내가 제일 많은 시선을 받겠지요. 이 말을 철수에게 하 면 상당히 닭살 일어나는 표정을 지을겁니다. 나 혼자만 생각해야지요. 승헌이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아는 척을 했습니다. 승헌이는 나에게 꾸벅 인 사는 했지만 철수를 잡아 나에게서 조금 떨어져 등을 보입니다. 저들 끼리 할 말 이 있나 봅니다. 철수 친구를 위해 준비한 음식이나 풀어 놓아야 겠습니다. "너, 나이 많은 여자 왜 데리고 왜 왔어?" 뭐야 저 녀석. 여기 여자가 나 하나 뿐이니까 승헌이가 말한 나이 많은 여자는
분명 나일 겁니다. 누가 철수 친구 아니랄까봐. 저 녀석도 그렇게 나에게 친절 한 아부를 하지는 않네요. "너 저 여자가 내 애인이라는 거 안 믿었잖아." 철수는 여전히 남들에게 나를 얘기할 때 저 여자, 이 여자라고 하나 봅니다. 두 고 보자. 뇬이라고 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여기 병원이기에 망정이지 부대였으면 난리났다." "왜?" "내가 일병 사호봉 때 쯤 우리 누나 세명이 모두 날 면회 왔었던 적이 있거든. 고참님들 보다 나이 많다고, 나이 많은 여자들은 아무 소용없다고 그렇게 말했는 데도 소개시켜 달라고 하는 바람에 내가 좀 곤욕을 치뤘지." "다 들려 승헌씨." 승헌이가 날 멀뚱히 쳐다 보네요. 어쭈, 날 무시하고 다시 철수와 얘기 합니 다. "내 목소리가 좀 크냐?" "응." "내가 포병이라 가는 귀가 먹었어. 하여튼, 군 면회 갈 때는 혼자 가라. 그리 고 나이 많은 여자와 붙어 다니면 일찍 늙는다고 내 누누히 말했건만..." 이 번엔 철수가 나를 빼꼼히 쳐다 봅니다. "누나 이 번에도 들었죠?" "응, 네 친구 손 좀 봐야겠다." 승헌이가 머쩍은 듯 날 보며 씩 웃습니다. 저 녀석 예전부터 날 대하는 태도가 그렇게 애교스럽지 않았어요. 내 미모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태도였지요. "누나 빨리 얘한테 얘기해줘요." "뭘?" "누나가 내 애인이라는 거." "후후. 승헌씨?" 철수와 승헌이가 돌아 앉아 나와 마주 보았습니다. 승헌이는 한동안 무뚝뚝한 표정이었어요. 음식을 쳐다 보더니 그제야 승헌이가 내게 밝은 모습입니다. "절 면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반말해도 되지?" "그러세요. 뭐 존댓말 해 줄거라 기대하지 않습니다." 태도가 영 삐딱하네요. "내가 철수랑 사귄다는 거 안 믿었다며?" "네." "후후, 나이 많은 여자가 연하 사귀면 안됀다는 법 없지?" "그렇지요. 이거 제가 먹어도 되요?" "너 먹으라고 싸 온거야." "고맙습니다. 그래도 배려하는 마음이 있으시군요. 철수야 이런 건 배워야 돼." 철수는 대답 없이 나와 승헌이만 번갈아 쳐다 봅니다. 이런 건 배워야 돼? 그 럼 다른 것들은 배울 게 없다는거야 뭐야. "예전부터 나와 철수가 친한 거 봤지?" "네." "연인 사이 같지 않던?" "아니요." "뭐?" "철수가 매번 당하는 것 같던데요." "당해?" "우리 누나가 저한테 하는 거랑 비슷했어요. 우리 누나도 자기가 좋을 땐 저한 테 엄청 잘해주거든요. 근데 자기가 기분 나쁘면 나는 신경도 안 쓰고 자기 기분
대로만 행동해요. 나는 나이 많은 여자는 나이 어린 놈에게 좀 이기적인거 같아 요. 자기 편한대로,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이 녀석 말이 내게 조금 가시가 되네요. 나도 철수에게 그런 적이 많은 것 같 긴 해요. 흠, 철수가 고맙네요. 삐친 적은 있지만 내 기분 맞추어 주려고 노력 해 준 모습이 많이 떠올려 지거든요. "야, 저 번에 내가 면회와서 먹을 거 못 사준것까지 이 번에 다 만회한거다? 내 가 누나에게 부탁해 이렇게 맛있는 거 준비한거야." 철수가 그 말을 하며 내게 미소를 짓습니다. 그래, 그런 척 해 주마. "누나 진짜 철수 애인이에요." "응." "장난으로 그러는 거 아니죠?" "그래." "근데 왜 장난처럼 대답해요?" "응?" "수줍게 고개 숙이며 대답해야죠. 너무 당당하니까 오히려 장난스럽잖아요." 유유상종이라더니 완전 철수 말투 그대로네요. "그래야 되니?" "그럼요. 그리고 아무리 연하지만 철수는 아직 높임말 쓰는데 누나는 반말 하네 요. 그리고 내가 남자 친구의 친군데 누나는 날 후배로만 대하네요." "야, 임마." 철수가 중간에 끼어 들었지만 승헌이는 말을 계속했습니다. "누나 만약에 철수 가지고 논 것이라면 저 가만히 안 있습니다. 누나 소문 별 로 안좋았어요. 그래서 나도 누나를 좋게 보진 않았어요. 이왕 사귀기로 했다면 누나 마음이 진심이었으면 좋겠어요. 철수가 누나에게 하는 것을 보면 얘는 분 명 짐심이에요." 철수가 약간 어이 없다는 듯 승헌이를 꼬아 보고 있습니다. 나도 뭔가 한 방 맞 은 기분입니다. 그냥 기분 좋게 승헌이에게서 철수 얘기랑 군대 얘기를 들으며 좋은 대화의 시간을 가질까 하고 찾아 왔는데 승헌이가 처음부터 가시 있는 말 을 내 뱉는 바람에 다소 당황스럽기까지 합니다. "흠, 겉으로 어떻게 보였는지 모르지만 내가 철수 좋아하는 거 진심이야. 친구 로서 철수를 아끼는 마음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너무 염려하지 않 아도 돼. 호, 그런말을 하는 거 보니까 철수를 제법 좋아하나 보네?" 철수가 대화 분위기 무겁게 느껴졌는지 웃으며 장난스런 말을 뱉었습니다. 철수 가 조금 난처했을 만도 합니다. 친구에게 이런 말을 들은 내게 조금 미안한 마음 도 들었을 것이고 자기를 위하며 이런 말을 한 친구에게 고마움도 들었을테니 말 입니다. "이 자식 내게 매일 구박만 하더니..." 대화는 점차 밝아졌습니다. 승헌이라는 애도 철수처럼 밝았습니다. 꾸밈이 없었 고 생각하는게 참 소박하더군요. 자기 누나들에 대해 좋은 말보다 나쁜 말을 많 이 했지만 누나들을 아끼고 상당히 좋아하고 있는게 보였어요. 철수가 하는 말투 에도 저런 심리가 포함이 되어 있겠지요. 내게 툭툭 내 뱉는 말들에는 분명 저 런 마음이 들어 있을 겁니다. "너도 철수처럼 미팅 나가면 항상 깨지는 편이었어?" "나는 철수보다는 나은 편이지요. 저는 그래도 간혹 애프터를 신청하면 상대가 날 만나주기는 했어요." "후후, 그 뒤로는?" "철수와 똑 같았지요 뭐." "왜? 너 참 잘생겼는데?"
철수가 가소롭다는 듯 승헌이를 쳐다 보며 말을 받습니다. "누나 얘가 얼마나 썰렁한 줄 모르죠? 얘 미팅 나가면 하는 말이 네, 아니요, 그것 뿐이에요." "그래도 그런 말만 하는 나는 싸가지 없다는 말은 안들었다. 철수 얘, 자기는 친한 척한다고 내 뱉는 말들이 엄청 퉁명스럽고 톡톡 쏘거든요. 같이 나간 우리 가 들어도 그렇게 느껴지는데, 처음 보는 여학생들은 당연히 기분 나쁘겠지요. 근데 얘는 그걸 모르나 봐요. 오죽하면 한 번은 어떤 여학생이 얘 면전에서 싸가 지 없다는 말을 뱉었었어요." "나에게도 참 퉁명스럽게 말을 해. 에구 불쌍한 박철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미팅 나가면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평소처럼만 해 도 상당히 인기 있을 것 같은데..." 철수의 얼굴이 찌푸둥합니다. "누나 이 새끼는 말이죠? 내가 유일하게 나보다 잘생겼다고 생각하는 앤데도 불 구하고 여자 앞에선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샌님이에요. 완전 바보야. 얘가 애 프터 신청하고 나와 같이 어떤 여학생을 만난 적이 있는데 걔가 얼마나 답답했으 면 그렇게 싸가지 없는 나하고만 얘기를 나누었겠어요. 얘는 또 여자 보는 눈이 낮아서 조금 예쁘다 싶으면 저런 애가 감히 나를 마음에 두겠냐는 생각을 해요. 에고 불쌍한 놈." 둘이서 제 살 까먹기를 하네요. "나한테는 얘기 잘 하는데?" "얘는 자기보다 나이 많은 여자들에겐 말을 또 잘해요. 아무래도 누나들 영향 인 듯." "후후." 둘 다 참 순진한 청년들이네요. 어려 보이기도 하지만 또한 매력적이기도 합니 다. "나는 그래도 군 입대하기 전에 여자 친구 있었다?" "나도 있잖아 임마." "넌 나이 많은 여자잖아." "그래도 예쁘잖아." "의정이도 예뻤어." "뭐가 예뻐 임마." "나이 많은 여자하고 노는게." "사자머리 하고 놀았던 게." 이것들이 진짜. 날 앞에 앉혀 놓고 나를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자기 하고 싶 은 말만 하네요. 오후가 깊어 집에 갈 차비를 했어요. 이 곳에 남겨지는 승헌이가 좀 가엾게 느 껴 집니다. "나 아무래도 다음 달은 사회에 나갈 일이 많겠다." "왜?" "여기서 퇴원하면 병원에서 휴가를 줘. 그리고 또 병장 된다고 휴가 받잖아. 둘 다 9 박 10 일짜리니까 다음 달은 사회에서 날 자주 보게 될거다." "그럼 승헌이 나오면 철수와 같이 나도 한번 봐.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헤헤. 그러면 좋지요. 제 여자친구도 한 번 보여줄게요." "그래. 몸조리 잘 해." "오늘 와 주셔서 고마워요." "철수에게 고맙다고 해." 철수가 나와 승헌이에게서 멀어 졌다 뒤돌아 보았습니다. 뒤돌아 가는 승헌이 의 모습이 안되어 보였는지 내게 잠깐 기다리라더니 승헌이에게 뛰어 갔습니다.
우정이라도 확인하려고 저러나 생각했습니다. "너 수술했지? 어디야?" "배 아래." "아프냐?" "응." "잘 들어가." "퍽!" "으...억! 나쁜 새끼." "다음에 보자." 철수 저거 나쁜 놈이네요. 헤어짐이 아쉬워 승헌이에게 간 줄 알았더니 승헌이 수술한 곳을 장난스럽게 가볍웠지만 한 대 쥐어 박았습니다. "왜 그래 너?" "날 구박했잖아요. 그리고 누나에게도 좋지 않은 말 했고." "후후, 아니야 걔가 했던 말 생각해 볼 문제야. 널 많이 아끼나 봐." "대학와서 사귄 몇 안되는 친구 중 하나에요. 제일 친한 두 명중의 한 명이기 도 하구요." "너도 쟤를 많이 아끼니?" "뭘 아껴. 쟤 좀 불쌍해." "왜?" "내 눈엔 상당히 잘난 놈인데 쟤는 전혀 그렇게 생각을 안해요." "흠, 후후." "왜 웃어?" "너도 마찬가지야." "뭐가?" "너도 잘난 구석이 참 많은데 그걸 인식 못하잖아." "나는 너무 잘난 척해서 탈이지." "그런데 왜 내가 너보다 훨씬 대단하다고 생각하는거니?" "에?" 오늘은 기분이 좋네요. 그냥 기분이 좋았어요. "학교까지 데려다 줄게." "아니야, 집으로 갈래." "내일 내려가게?" "내일도 그냥 집에 있을까 봐." "연구실 나가야 되지 않아요?" "하루 쯤 더 빠진다고 달라질 건 없어. 내일 우리 귀여운 철수하고 데이트나 할 까?" "우쒸. 귀엽다 그러지 말고 멋있다고 해 줘 봐요." "내겐 멋있는 것보다 귀여운 게 더 좋은데?" "나는 멋있는게 좋아." "어휴, 그러니까 더 귀엽네?" "나 또 삐친다?" "흐흐." "그렇게 웃지 마요." 얘기하다 보니까 어느새 차는 우리 집 앞에 도착하고 말았습니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내가 있을 곳으로 데려다 주는 사이. 저녁은 어둡습니다. 늦 게까지 밝았는데 지금은 해가 빌딩 아래 어느 지하로 숨어 버렸습니다.
"내일 집에 있을거면 연락해요." "그럴게. 근처에 가서 차라도 한 잔하고 갈래?" "차를 가지고 나와서 안돼요. 갖다 놓아야죠." "흠, 그래 나 들어가 볼게." "네. 내일 봐요." "참, 헤어지는게 아쉬우니까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데?" 그냥 내리기 아쉬웠어요. 내 말이 조금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철수가 막 대하기 어려워 지면 곤란한데... 내 말이 조금 틀려졌습니다. 그걸 철수도 아네요. "싶은데? 말투가 좀 달라졌네요. 누나가 뽀뽀 해줄게. 이게 맞잖아. 누나라는 말도 안쓰고, 끝이 싶은데?" "하지 말까?" "그래 그게 정상이지." "어휴, 이런 말하면 분위기 좀 잡아라." "움." 입술을 내민 폼이 영 장난스럽습니다. 짧은 입맞춤만 해주고 그냥 웃으며 차에 서 떨어졌습니다. 철수가 차를 돌릴 때까지 집으로 들어 가지 않았습니다. 철수 도 차를 돌리고 나서 바로 떠나지 않고 창문을 내려 이제 진짜 간다는 말을 해 주네요. "잘 들어 가요." "그래 조심해서 가." "누나 나 사랑해요?"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야." "에?"" "그냥 사랑해요. 이렇게 말을 던져야 그것과 같은 답을 듣는거야." "후후, 잘 자요." 철수는 언제 쯤 자연스럽게 날 사랑한다는 말을 할까요. 방금 내게 말한 질문 은 이미 자기의 마음이 그렇다는 답을 가지고 있지만 받는 입장에선 많은 아쉬움 이 있지요. 사랑하는 마음을 이미 고백했으니까... 밤에 거실에서 수희랑 비디오 한 편을 보았다. 이제 일학년인데 수희는 학교 생 활에 많이 바빠했다. 오붓한 시간을 자주 갖지 못했었다. 오늘 나란히 앉아 이렇 게 비디오 보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아직도 약사 분쟁 그거 계속 하냐?" "그건 약대생들이 하는거지. 우리는 그저 밥그릇 뺏기지 않으려는 것 뿐이야." "쩝, 너네 그러다 또 집단 유급 사태 나고 하는 거 아냐?" "몰라." "네 친구 은정이와 그것 때문에 싸우고 그러지는 않냐?" "걔하고 만났을 때는 가급적 그 얘기는 안해. 그 얘기하면 분명 말다툼이 생길 테니까." "한약 조제 문제 그거 중요한거니?" "그럼, 우리는 그걸 6 년을 배워. 약대생들은 4 년 중에 겨우 일년을 배울 뿐이 야. 그러면서 약사들은 자기들 챙길건 다 챙기잖아. 뺏어와야 돼." "나는 모르는 일이니까 뭐. 너 겨우 한한기 학교 다니더니 말은 완전히 한의대 생이다?" "비디오나 봐." 아무리 친동생이지만 그리고 얘도 이제 성인이지만 둘어서 같이 보기에 비디오 내용이 남사스럽다. 수희는 뚜러지게 비디오만 쳐다 보고 있다. 한 남자가 분위기 있는 모습으로 여자의 팔을 잡아 위로 올렸다. 그리고 여자
를 벽에 밀어 붙였다. 남자와 여자가 눈싸움을 하더니 여자가 눈을 떨구고 고개 를 숙여 버린다. 남자가 다른 한손으로 여자의 고개를 들어 다시 눈을 마주치게 한다. "하겠지?" "그렇겠지?" 남자가 여자의 입술을 훔치고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여자는 거부하 지 않고 남자가 하는대로 이끌린다. "수희야 저런게 실제에서도 통할까?" "마음이 맞으면. 분위기가 있잖아." "진짜로?" "남자의 눈빛이 강렬했어." 그래? 누나에게 한 번 써 먹어 봐야 겠다. "너 뽀뽀 해 봤냐?" "그런 걸 왜 물어? 아직은 못해 봤어." "그래 니 나이가 아직 어리지." "이거 왜 이래. 내 또래 애들 중에 남자들 하고 자 본애도 수두룩 해." "이게 말하는 것 좀 봐. 너 그런 애들 본 받으면 내가 가만히 안 있는다." "알았어. 근데 내가 말하지 않는 한 오빠가 어떻게 알거야." "조신하게 살어?" "그럴거야. 근데 오빠는 뽀뽀 해 봤어?" 그럼, 내 나이가 몇 살인데. 오빠는 애인도 있단다 얘야. "왜? 해 봤을 거 같니, 아닌 거 같니?" "못해 봤을 거 같애." "이게 오빠를 무시하네?" "후후, 해 봤어?" 쉽게 말하지 못했다. 얘 친구가 날 좋아했던 기억 때문에 쉽게 말하지 못했다. 은정이라는 애가 어느 정도 내게 마음이 있었다는 걸 난 알고 있다. "노코멘트." "히, 못해봤으니까 그러는 거지?" "비디오 봐." 저거 한 번 써 먹어야지. 승헌이 면회 간 다음 날 은정이 누나와 점심 때부터 같이 놀았다. 누나 백화점 에 쇼핑 하는데도 따라 가고 저녁도 같이 먹었다. 여자 쇼핑하는데는 함부로 따 라 다니지 말아야 겠다. "이거 나한테 잘 어울리니?" 누나 옷 살 마음은 없었는데 괜히 마네킨 보고 "저거 누나 입으면 잘 어울리겠다." 라는 말 잘못 했다가 장장 세시간을 누나 옷 집에서 옷 입어 보는 거 봐야 했 다. "정말?" "응. 다음에 옷 사러 가면 저런 풍으로 한 벌 사요." "그래, 오늘 너도 같이 나왔는데 옷이나 한 벌 살까?" 누나 백화점에서 옷 고르지 못했다. 저거 동네까지 가서 여러 옷집들 돌아 다녔 다. 누나는 상당히 고급 의류점을 꺼리낌 없이 들어 가 옷을 사지 않고 당당하 게 나왔다. "누나 돈 있어요? 아까 그 옷은 백만원도 넘던데." "나도 저런 비싼 옷은 사 입기 힘들어."
"그럼?" "그냥 입어 보는 거지 뭐." "제법 당당하네요?" "입어 봤다고 다 사야 되는 것은 아니잖아." "나는 안 그런데." "그러니까 그 모양이지. 내가 너 졸업 사진 찍을 때, 너 입고 있는 정장을 보 고 느꼈어. 내가 같이 가는건데..." "왜 안 어울리던가요?" "너 점원이 사라는대로 샀지?" "응." "쯧, 다음에 살 때는 날 불러." "그건 그렇고 누나 진짜 옷 살거야?" "응. 몇 군데만 더 돌아 다녀 보자." "몇 군데? 아까 그 마네킨이 입은 옷 사면 되잖아요. 그것 때문에 옷 사입고 싶 었던 거 아냐?" "나는 마네킨이 아니란다." "나는 왜 데리고 다니는데?" "잘 어울리는지 봐줘야지?" "잘 어울린댔잖아요." "후후, 나 못됐지?" "에?" "결국은 내 맘에 들어하는 걸 살거면서 널 데리고 다니는 게 밉지?" "그건 아니에요." "여자 심리라는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자기에게 잘 어울리는 옷을 입으면 막 자랑하고 싶거든. 거울 속 내 모습이 참 예쁘다 생각되면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어 해. 누나가 그런 심리로 널 데리고 다니는 거니까 조금만 참아." "쳇, 뭘 그렇게 다 가르쳐 주냐. 누나 좋아하는 모습 보니까 나도 기분 좋아 요. 근데." "근데 뭘?" "너무 힘들어." "아휴, 나도 알아. 남자들 여자 쇼핑하는 데 그래서 잘 안 따라 가려고 하는 거." "그래도 오늘은 기분 좋게 따라 다닐게요." "다음에는 아니라는 거니?" "다음은 그때 생각하지 뭐." 그래서 장장 세시간을 누나 옷 한 벌 사러 다니는 파트너 역할을 했다. 날 데리고 다녔던 게 미안했던지 누나가 저녁을 사 주었다. 그때 누나에게 전화 가 왔었다. 연구실인가 보다. "내일은 갈게요." 아무래도 배군인 거 같다. 교수님까지 들먹거리며 누나를 연구실에 나오라고 협 박하는 거 같다. "그럼 오늘 내려 갈게요. 내일 아침 일찍 등교하면 되잖아." 누나는 그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진짜 오늘 내려 가게요?" "내일 아침 일찍 내려 가지 뭐." "오늘 같이 내려 갈래요?" "너도 내려가게?" "내 보금자리가 거기 있는데 못 갈것도 없지."
"니가 간다면 오늘 내려가도 돼." "그러지요 뭐. 잠깐 핸드폰 좀 줘 봐요." "아무것도 안 가지고 내려가게?" "뭐 필요한게 있나? 거기도 짐 많이 있어요." "너 짐 싸갖고 올라 왔잖아." "핸드폰 줘 봐요." "에, 컴퓨터로 작업할게 있어서 학교 내려 가봐야 겠어요." "너 놀려고 내려가는거지?" "프로그래밍 할게 있어요." "내일 아침에 가면 되잖아." "친구가 연락이 왔는데 내일 오전 중으로 제출해야 할 프로그램이 있는데 제 도 움을 필요로 해서요. 제 컴퓨터에 그 프로그램 소스가 깔려 있거든요." "나 그렇게 말해도 잘 몰라 임마." "아버지도 컴퓨터 좀 배우세요. 제가 가르쳐 드릴게요." "후후, 아휴 난 컴퓨터 화면만 봐도 머리가 어지러워." "그건 모니터 화면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럼 언제 올라 올건데?" "내일 올라 올게요. 그게 안되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라 그럼." "네. 오늘 편히 주무십시오." 전화를 끊자 누나가 날 보며 배시시 웃는다. "너 거짓말 잘한다?" "누나에게 배웠어." "나에게? 내가 언제 그랬어?"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에 물어 봐요." "나도 그랬나?" 어제 비디오에서 본 거 오늘 써 먹을까? 그래 볼까? 하하.
52 회
전철 안에서 못 볼 것 봤다. 수원으로 가는 전철 안, 금정역을 지나면 사방은 가는 빛들을 몇 개 머금었을 뿐 깜깜해 온다. 그런 창 밖이 참 정겹다. 그런데 마주 앉은 년,놈들이 주위 시선에는 아랑곳 없이 서로 거의 부둥켜 안고 있다. "누나 저런 거 좋아 보여요?" "좋아하면 저럴 수 있겠다, 이해는 가지만 좀 그렇다 그지?" "그렇죠? 이런 게 차라리 괜찮지 않아요?" "뭘?" "손 한 번 줘 봐요." 누나의 왼 손을 내 오른 손으로 꼭 잡았다. 누나가 피식 웃었다. 누나 손을 잡 고 나는 마주 앉은 놈,년 중 놈을 째려 보았다. 근데 년이 날 째려 보는 바람에 눈 싸움에서 질 것 같았다. "너 그렇게 째려보다 쟤들이 시비걸면 어떡할래?" 누나가 내 얼굴을 살피더니 귓속말을 했다. "그렇게 귓속말 하지 마요. 그러면 쟤들이 더 기분나빠 해. 누나도 빨리 째려 봐요." "뭘?"
"저 자식이 날 째려 보고 있잖아요. 누나는 여자를 째려봐요." "야, 너 23 살 맞어?" "에이씨, 졌다." 찬 바람이 분다. 어디서 불어 오는 바람일까? 한 여름에 부는 찬 바람은 마음 을 시원하게 했다. 정희 누나는 어디로 갔는지 약국 문은 닫혀 있었다. 자취방 가는 길 앞의 내 키보다 작은 옥수수가 바람에 흩날렸다. "올 해도 서리 합시다." "올 해는 반반으로 나눠." "안 한다는 소리는 하지 않네?" "후후." 누나 방 앞에 잠시 서 있었다. 누나가 방 문을 따며 내게 묻는다. "내가 네 방 갈까? 니가 내 방 올래?" "그런 말 크게 하지 마." "왜?" "누가 들으면 이상하게 생각 해." "체에, 니가 흑심만 품지 않아 봐. 아무렇지도 않은거야." 갑자기 가슴이 아팠다. 저 여자는 자주 내 마음 속 품었던 생각을 콕 찍어 내 어 내 가슴을 아프게 한다. "내 방에 뭐 놀게 있나? 나중에 누나 방 갈게요." "그래, 그럼 한 10 분쯤 후에 내 방으로 와." "아, 아니다. 누나가 내 방으로 와라. 올 때 차 한잔 끓여서 와요." "왜 마음이 바뀌었냐?" "응." 누나는 내가 방 정리를 하고 옷을 갈아 입고 세수까지 다하고 난 다음 삼십 분 을 더 놀았는데도 오지 않았다. 차 끓이느라? 누나는 젖은 머리칼에 괴물같은 얼굴을 하고 후다닥 내 방으로 뛰어 왔다. "뭐여? 얼굴에 뭘 바른거야?" "여름은 습기가 많잖니. 전에도 이런 거 많이 발랐었어." "괴물이잖아." "넌 내 얼굴 알잖아." "으쒸." 누나가 내 침대 위에 인형을 기대고 눕다시피 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 뭐여 저 폼은, 지가 무슨 공주인 줄 아나. 자네가 암만 공주같은 포즈 취해봐라 내 방이 이렇게 썰렁한대. 하기야 백설 공주는 난쟁이 집에 살았지? 나는 책상 앞에 앉 아 누나만 쳐다 보고 있다. "누나." 보조개도 없는게, 입을 오무리더니 손가락을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 를 보여준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거야?" 누나가 손 가락 하나를 펼쳐 보여준다. "일분?" 고개를 흔든다. "10 분?" 누나가 고개를 끄덕 거렸다. "들어와서는 말했잖아. 말 좀 해." 주먹을 쥐어 보여 주는 게 자꾸 말시키지 말라는 뜻 같다. 확 덮쳐 버려? 그래
도 지가 말 안하나 볼까? 누나를 강렬한 눈 빛으로 쳐다 보았다. 누나는 눈을 껌벅거리기만 할 뿐 별다 른 변화가 없다. 나 일어서면서도 누나를 강렬한 눈으로 계속 쳐다 보았다. 무표 정이던 누나 얼굴에 약간 변화가 왔다. 눈을 더 자주 껌벅 거렸다. 나 아무말도 하지 않고 누나 앞으로 갔다. 너 뭐하는거야, 이런 말 할 줄 알았다. 누나는 아 무말도 하지 않았다. 한 발짝, 한 발짝 누나 앞으로 다가 갔다. 누나가 날 올려 다 보았다. 눈에 힘을 풀지 않고 멋있게 씨익 웃어 주었다. 누나가 눈 깜박임을 멈추고 큰 눈으로 날 올려다 본다. 그래, 저 눈빛 영화에서 여배우가 보여준 눈 빛이다. 됐다, 오늘 누나를 한 번 껴안아 보자. 두들겨 맞을까? 누나가 갑자기 일어 섰다. 떡 내 앞에 서더니 비켜 달라고 하는 폼이다. 내 속셈 을 알아차린 것일까? 비켜 줄 수 없었다. 누나가 한 발짝 옆으로 옮겼다. 눈에 힘을 풀지 않고 나도 옆으로 옮겨가 누나를 가로 막았다. 누나가 날 노려 본다. 눈에 힘을 더 주었다. 그리고 누나 한 손을 잡았다. 누나가 뭐하는 짓이냐는 표 정을 보인다. 솔직히 그 표정인지는 모르겠는데 누나의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 다. 벽에다 밀어 부쳤다. 가슴이 진정이 되지 않는다. 내 뛰는 가슴이 점점 누 나 가슴으로 가고 있다. 강렬한 눈 빛으로 내 입술을 누나의 입술 쪽으로 가져가 고 있다. 갑자기 누나의 표정이 피식 피식 거리더니 소리 나지는 않지만 아주 웃 기다는 듯 웃었다. "팩 하고 웃으면 안된다 말이야. 나 지금 씻으러 가야 돼. 비켜." 뭐여, 고개를 떨구고 비켜 주었다. 잡았던 손도 그냥 풀려 버렸다. 내가 지금 했던 짓이 누나에게는 코메디로 보였나 보다. 슬프다, 내가 아무리 연하라고 이 런 모욕을 주다니... 내가 흑심을 품고 이런 짓을 했는데 누나는 피식 웃고는 지 방으로 간 것도 아니고 내 방 욕실로 갔다. 그리고선 한 다는 말이 이랬다. "박철수." "왜요?" "내 방 가서 수건 좀 갖다 줘." "내 수건 써요 그냥." "이게 수건이냐 걸레지." "우쒸, 그래 난 걸레로 얼굴 닦는다. 수건 욕실에 있어요?" "그래." 누나는 방 문을 잠그지 않고 내 방으로 왔었다. 예전부터 느꼈는데 좀 조심성 이 없어 보인다. 챙겨 주어야 겠다는 마음이 팍팍 생긴다. 누나 방 욕실에 가서 수건을 찾았다. 뭐여, 이거. 누나는 내 방으로 오기 전에 샤워를 했었나 보다. 이런 칠칠 맞지 못한... 아무리 자기 혼자 산다고 속 옷을 이렇게 아무데나 벗 어 놔도 되남? 세탁기 위에 벗어 놓은 저 것은 어디를 가리는 옷인고? 나는 저 런 거 안차고 다니는데... 쿠헤헤, 팬티도 있네. 복수할 수 있는 기회다. 수건을 갖다 주고 누나를 째려 보며 콧 방귀를 뀌었다. "속 옷을 벗었으면 세탁기에 넣던지 좀 해라. 다 큰 여자가 칠칠맞게..." 누나가 입을 벌리더니 약간 부끄러운 표정이다. 날 째려 보는 듯 하더니 바로 표정이 싹 바뀐다. "너 보기만 하고 그냥 왔지?" "응." "세탁기에 좀 넣어 놓고 오지." 이건 절대 날 애인 취급하는 게 아니다. 아주 어린 애 취급하는 것이라고 밖에 는 생각할 수 없다. 고개를 푹 떨구고 방으로 나왔다. 뭐, 저런 여자가 다 있 냐. 내가 아무리 자기하고 친하지만 조심스러움이나 수줍어 하는 게 있어야 되 지 않나? 나에게 감정 같은 걸 가지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누나가 얼굴 을 닦으며 나왔다. 누나가 말이 없다. 왜? 내가 말이 없었으니까. "누나 방 가."
"왜 또 삐친 표정이야?" "내가 아까 이상한 행동 했잖아. 그게 그렇게 웃기던가요?" "응." "우쒸." "그거 혹시 날 유혹하려고 했던 그런..." "그래." "그런 건 너답지 않잖아. 너 표정에 아니다라는게 다 보여." "그건 그렇다 치고 나에게는 수줍음 같은 거 없어요? 일부러 속 옷 봤다고 말했 으면 좀 부끄러워 할 줄도 알아라." 누나의 얼굴이 홍조 빛이다. "그,그래. 네가 일부러 날 부끄럽게 하려고 하는 말인 줄 알았어. 그런데 부끄 러운 표정 짓고 아무말 못해 봐, 더 이상하지. 그냥 네가 아무말 하지 않았고 내 가 욕실에 갔을 때 벗어 논 속 옷을 봤다면 많이 부끄러웠을거야." "잘났어, 아주 잘났어." "그래, 나 잘난 거 이제 알았니?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잖아." "나 언제 누나 한 번 이겨 봐요?" "뭣하러 이겨?" 하긴 져 주면서 기분이 더 좋다면 이길 필요가 없다. 가까운 사이일 수록 져 주 는 경우가 많다. 음, 내 넓은 아량으로 져 주마. 그래도 사나이로 태어나서 아녀 자에게 항상 지기만 해서야 되겠나. "이리 와 봐요?" "아까 처럼 이상한 짓 하려고?" "내가 팔 목 잡아 줄테니 팔 씨름 한 번 해." "뭐어?" "이이잉." 가소롭군. "힘 좀 더 써 봐요." "두 손으로 하면 안돼?" "해 봐." "이이잉." "아자!" 내 힘 한 번으로 누나는 몸까지 디비졌다. 누나와 침대 위에 밥상 깔고 마주 보 며 팔씨름 한 판 했다. 그래 영화 보고 어설프게 했던 행동 보다는 이런 게 훨 씬 낫다. "갑자기 힘을 주면 아프잖아." "두 손으로 해도 못 이기냐? 앞으로 까불지 마요." "잼있다." "왜? 한 판 더할래요?" "그게 잼있다는 게 아니고 너하고 이렇게 같이 있는 거 말이야." "우쒸." "왜 또?" 내가 좋은 이유가 재미있다는 것 뿐인가? 나와 같이 있다는 이유가...
53 회 간혹 아무생각없이, 저 여자가 나와 친하지 않는 미지의 여자라고 느껴질 때 누 나는 참 아름답고 잡념이 스며 들지 않는 고운 대상으로 보여 진다.
오늘 아침 나와 조금 떨어져 있는 누나는 그런 모습이다. 들판에 피어 있는 장 미처럼 오랫동안 바라 볼 수 있는 아름다움. 나만의 꽃이라 생각하며 꺾어 화병 에 꼿아 놓은 장미 보다 더 오랫동안 볼 수 있는 아름다움. 화병에 꼿아 놓은 장 미는 나만의 것이라 생각할 수는 있지만 곧 시들 것을 걱정해야한다. 서울로 돌아 가야 하는 아침, 누나와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은 생각에 누나를 약대까지 배웅했었다. 나는 약대 건물 안 로비의 의자에 앉아 있고 누나는 조금 떨어진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았다. 그냥 좋아하는 마음만 가지고 사랑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대로 놓아 두고 조금 떨어져 바라만 볼 수 있는 사랑 은 참 아름다울 것 같다. 나는 행복하다. 이 행복한 시간들을 잃기 싫기에 작은 일에도 점점 신경을 쓰게 된다. 질투심이 생기고,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들고, 또한 바라게 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누나에게 자주, 삐쳤니, 라는 소리를 듣 는다. 자주 삐치는 내 마음이 표정에 드러나나 보다. 들판에 있는 장미를 누군가 손을 댈까 봐, 싫은 바람이 불어 와 꽃 잎을 다치 게 할까 봐 그 꽃을 꺾어 화병에 꼿아 두는 순간부터 이별의 아픔은 시작되는 것 이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냐고? 나 지금 삐치고 기분이 나쁘다. 나 지금 못마땅하다. 내가 졸라 싫어하는 녀석 에게 저런 다정한 모습으로 이야기 나누는 누나에게 삐쳤다. 누나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고 있을 때 배군이란 작자가 살금 살금 다가와 누나의 어깨를 툭 치며 돌아 보는 누나의 볼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뭔 저런 새끼가 다 있나. 근처에 내 가 있는 것을 보고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게 날 신경쓰지 않고 누나 에게 친한 척 이다. 실실 웃으며 이틀 결석한 사유를 묻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게 주려고 뽑았던 커피를 뺏어가 버렸다. 누나는 왜 화를 내지 않고 그런 행동 에 같이 웃는 걸까. 누나가 내 여자라는 생각 때문에 졸라 기분 나쁘다. 나는 내 장미에게 누군가 관심을 두는 것이 싫다. 배군은 누나에게는 빨리 들어 오라는 말을 남기고 내게는 머쩍한 손 인사를 해 주고 떠났다. 친한 척 하지 마 새꺄. 뒤돌아 선 배군의 등을 보고 조까,라는 뜻 의 알밤을 까 주었다. 누나가 다시 커피 한 잔을 뽑더니 내게 건네 준다. 그리 고 내 행동이 우스운지 웃는다. 연상이기 때문에 저 표정에 의심이 간다. "후후, 배선배에게 너무 악감정 갖지 마. 저 사람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다 저러니까." "그 말을 왜 하는데요?" "너 아까 배선배가 내게 친한 척 하니까 삐칠려고 했잖아." 기분이 팍 나빠진다. 누나의 말투와 표정이 날 아주 어린애 취급하는 것 같다. 화난 투로 답을 했다. "왜 자꾸 내게 삐친다는 말을 해요? 내가 그렇게 자주 삐쳐요?" "장난삼아 한 말이야. 왜 그래?" "그 삐친다는 말 하지마요?" "화났어?" "안 났어요. 배군이 연구실 안에서도 아까처럼 그래요?" "뭐? 내 볼 찌른 거?" "그런 식으로 친한 척 하냐구요?" "응. 자주." "씨." "뭐 내게만 그러는 것도 아니고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별 신경 안 쓰이던데? 선배가 후배에게 친한 척 하는거라고 생각 해." "저 사람은 좀 심해." "그래, 그런 부분도 많이 있지." "많은 게 아니고 대부분이라니까. 내가 있는데도 자주 그랬지?" "너 승주가 없으니까 배선배에게 질투 하는구나?"
그 말에 누나를 째려 보았다. 누나가 요즘은 내 변한 말투와 눈 빛에 겁을 먹 는 경우가 있지만 금방 도로 아미타불이다. 지금도 내 표정에 신경을 쓰고 아무 말 못했지만. "나 이만 가 볼게요. 좋은 하루 보내요." "그래. 잘 가." 자꾸 엉덩이 치면 애인이고 선배고 상관없이 성희롱으로 고소해 버릴거다. "씨이..." "예쁘니까 치는 거야. 나중에 전화 해." 누나가 손을 흔들어 주고 연구실로 들어 가 버렸다. 배군 때문에 좀 불안하다. 오늘이 목요일이니까, 내일은 누나가 서울로 오겠구나. 철수와 같이 있으면 외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독자로 커 왔기 때문에 내 방에 혼자 있는 경우가 많았어요. 아빠, 엄마가 바쁠때면 그 혼자 있던 시간이 너무도 길게 느껴져 외로웠지요. 나는 오랫동안 동생 하나만 있었으면 하는 생각 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나는 친구들이 자기 동생하고 싸웠다는 말을 들으면 오히 려 그게 부러웠어요. 가족이기에 아무리 심하게 싸워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감싸 고 위해 주는 마음이 생겨 버리는 동생을 가진 친구들이 많이 부러웠지요. 잘 따 를 때도 있으나 심술도 부리며, 나를 위하며 헤아릴 줄도 알지만 투정도 부리는 그런 동생 하나 갖기를 꿈 꾸었지요. 철수는 내 그런 꿈 속 동생의 모습과 가장 잘 맞는 녀석이었어요. 그 마음 때문에 연인 사이가 된 지금도 철수를 보면 꿈 속 동생에게 하고 싶었던 내 행동들을 표현하게 됩니다. 철수는 요즘도 여전히 내가 꿈 꾸어 온 동생의 모습과 잘 맞습니다. 날 위하는 마음이 많고 투정도 부 리며, 내가 부탁하는 것에 빈 말을 잘 하지만 대부분 들어 주려고 하는 편이지 요. 그렇지만 항상 동생으로만 대할 수는 없겠지요. 나도 조금씩 양보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철수는 두 살 연하의 핸디캡을 여전히 갖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 다. 그는 내가 동생처럼 대하면, 거기에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잘 모 른 채 자주 삐치는 모습을 보이지요. 흐음, 내 마음을 알까요? 그래도 싫은 게 있나 봅니다. 나도 태도를 조금씩 고쳐 나가야 겠습니다. 그는 장남이지요. 동생 으로 지내 본 경험이 없을 겁니다. "여보세요?" "어, 철수 네가 바로 받네?" "어떻게 삐삐를 치지 않고 전화를 다 했어요?" "이제 너네 아버님이 하시는 말씀에 적응이 됐거든." "누나 나 지금 뭐하고 있는 지 모르지?" "뭐 하는데?" "흑흑, 나 혼자 집 봐요." "응?" "우리 부모님 계 모임에서 부부 동반으로 어디 놀러 가는데 따라 가셨어요. 이 틀 정도 안 들어 오실거야. 분명히 우리 엄마가 내 동생보고 나 밥 챙겨주고 나 심심하지 않게 같이 놀아 주라고 했거든요." "쿠쿠, 그래서?" "여자들은 믿을 게 못돼." "뭐야?" "내 동생이 내 말을 얼마나 잘 듣는지 모르죠? 나는 그래서 믿었어. 얘가 저녁 은 차려 줄거다. 근데 이 기집애가 그냥 배신을 때리고 아무말 없이 도망을 가 버렸네." "그래서 저녁을 안 먹은거야?" "점심도 굴머써. 점심 굶고 자고 일어나니까 깜깜하고 아무도 없는데 저녁을 어
떻게 먹나." "차려 먹지 그랬어?" "집에 와서까지 내가 챙겨 먹어야 돼?" "후후, 누가 아들 아니랄까봐. 내가 가서 차려 줄까?" "누나가 뭘 차려 줘. 근데 지금 어디에요?" "율전, 지금 전철 타려고 가고 있는 중이야." "이제 올라 오는 거야?" "집에 도착하면 10 정도 되겠다." "누나 밥 사줄래요?" "그때까지 굶을려고?" "그게 아니고 음 잠깐만, 그래 신림에서 만나자." "응?" "어짜피 누나 전철 내려서 버스나 택시 타야 되잖아. 신림 정도면 누나가 거기 까지 오는 시간이랑 내가 여기서 거기 시간이나 비슷할거야. 내가 누나 집까지 태워 줄테니까 밥 사줘요." "허허, 그래 고맙다." "사 주는 사람이 고마워 해서는 안돼지." 신림 역에서 철수를 한 시간 가량 기다렸어요. 삐삐를 쳐도 전화가 오지 않더군 요. 차가 막히나? 기다리면서 포장마차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어 떡볶이 한 접시 를 사 먹었습니다. 철수는 10 시 가까이 되어 아주 미안한 표정으로 차창을 내리 더군요. "너 뭐야?" "타요." "밥 안 먹을거야?" "미안해서 못 얻어 먹겠어. 일단 타요." "여기서 순대 볶음 사먹자." "많이 기다렸죠? 근데 별로 화를 내지 않네?" "차 막히던?" "흠..." 그냥 웃지요? 저 표정은 혹시 다른 이유가 있다는 뜻? 녀석의 복장은 집에서 별 지체 않고 바로 나온 모습입니다. 그가 문을 열어 주길래 탔지요. 녀석에게 이런 면이 있었단 말인가? 그냥 웃어 준 그가 제법 어른스러웠습니 다. 집으로 가는 길에 반대 차선의 교통 상황을 보았습니다. 엄청 막히더군요. 날 데리러 오던 그가 상당히 짜증이 났을 법 한데 오히려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 서 변명하지 않았다는 것에 놀라울 따름입니다. 저 삐돌이가...? "너 밥 안 먹을거야?" "집에 가면 소희가 와 있겠죠 뭐." "내가 너네 집 가서 차려 줄까?" "누나가 우리집에 왜 오나." "못 갈건 뭐야?" "우리집은 누나 집보다 보수적이야." "나중에 그럼 너네 아버님 계실 때 한 번 간다?" "와요." "그럼 뭐 사먹고 가자." "됐어요." 오늘 철수에게 좀 감명을 받았기에 그냥 보낼 수 없었지요.
"너 여기 주차 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어." "왜?" "샌드위치 만들어서 우유하고 가져 올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누나 샌드위치 만들 줄 알아요?" "그것도 못 만드는 사람 있니?" "나." "치이." "누나는 저녁 먹었어요?" "응. 아까 너 기다리면서 포장마차에서 이것 저것 줏어 먹었어." "누나도 배신녀네. 나는 누나 생각하며 꽉 막힌 도로 위에서 쌔가 빠지게 고생 했는데, 차 졸라 막히대. 무단횡단 오징어 장수의 유혹을 뿌리치며 누나와 저녁 먹을 생각만 했는데, 그 한 시간 가까이 늦었다고 오뎅을 먹었단 말이야?" "오뎅이란 말은 안했다? 떡볶이 사 먹었어." 그래, 넌 그런 식으로 변명을 해야 너 답지. 오늘 감명 받은 거 취소. 그래도 해 줄건 해 주어야지요. "기다리고 있어." "알았어요." 옆에서 녀석이 샌드위치 먹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빼꼼히 쳐다 보는 내가 머쩍 게 느껴졌는지 씩 웃네요. 지금 모습은 연인이라기 보다 데리고 살고 싶은 동생 같습니다. 내가 데리고 살까? "배가 많이 고팠구나?" "응." "우유도 마셔가며 천천히 먹어." "샌드위치를 제법 맛있게 만드네?" "그래, 샌드위치는 내가 평생이라도 만들어 줄 수 있다." "평생?"
54 회 집에 오니까 수희가 친구를 데리고 와 있었다. 조금 껄끄럽다. "안녕, 오빠." "어, 오랜만이다." 작은 은정이가 왔다. 허, 몇 달만에 다시 봤는데 더 숙녀티가 났다. 대학 생활 일년의 차이가 제법 큰가 보다. 수희는 은정이에 비해 많이 어려 보인다. 누나하 고 난 이년 차인데... 우리 집에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수희따라 자러 왔나 보다. 둘이 노는 데 나도 끼워 주었다. 남자들 무리에서 여자 하나는 공주 된다. 하지만 여자들 무리에서 남자 하나는 바보 아니면 노리개감 밖에는 되지 않는다. 둘이서 날 엄청 놀렸다. 내가 간혹 바보 같은 우스개 소리를 하면 작은 은정이가 날 때렸다. 자기는 재밌다고, 애 교 부린다고 때리지만 맞는 나로서는 상당히 아팠다. 내가 속이 좁아 그런지 몰 라도 한 대 더 때리면 싸울려고 마음 먹었었다. 사람은 아무래도 자기 중심적이고 모두들 약간은 이기적인가 보다. 둘이가 참 친하게 보였다. 내가 왜 그 얘기를 했을까. "너네 둘 약대생하고 한의대생인데 참 친하다? 그 약사들이 주장하는 게 옳냐, 아니면 한의사 측에서 주장하는게 타당한거냐?" 그렇게 친하게 보였던 둘이가 입싸움하다가 서로 삐쳤다. 저들 저러다가 우정
에 금 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12 시가 훨씬 넘은 시간인데 은정이 고년이 집 에 간다고 내게 투정을 부렸다. 뭐여? 나보고 태워 달라고? 니가 내 애인이냐 뭐 냐, 나는 나이 어린 여자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 어랏, 내가 왜 이렇게 됐지? 은정이 누나 저 아버지가 약사고 우리 아버지는 한의사다. 뭔가 문제가 될 것 도 같다. 어제 괜히 저들 둘을 싸움 붙였나 보다. 둘이 토라져 얼굴도 마주 보지 않는 다. 어린 티를 내는구만. 나 귀한 아들인데, 여동생하고 걔 친구 아침 밥까지 차 려 주었다. "오빠 고마워요." "네 오빠야?" "뭔 상관이야." 여자 둘이 있을 땐 둘이 종종 싸우게 만들어도 괜찮을 것 같다. 각자 참 많이 오버하며 내게 친한 척 했다. 아니다 바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음, 나 잘난 놈이다. 다 내가 잘 났기 때문에 저 둘이가 내게 친한 척 하는거다. "수희야 니가 참아라." 은정이가 조금 더 오버하길래 은정이 편을 들어 주었다. 은정이가 수희를 대하 는 태도가 참 귀엽다. 내게 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은정이 쟤가 맘에 들지만 내게는 쟤 보다 더 좋아하는 다른 은정이가 있다. 그냥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맘으로 좋아하는 것. 여자를 바라볼 때 그 것의 차이를 조금씩 느껴가고 있다. 어쩌면 그냥 좋아하는 마음으로 연인을 사귀다 후 다닥 결혼해 버리는 게 편할 수도 있겠다. 누나와 영화 한 편 보고 차 한잔의 시간을 가졌다. 이야기 도중에 핸드폰이 울렸고 저 여자가 전화 끊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졸라 반가운 표정이다. 승주 그 새끼 저 집 졸라 돈 많은가 보다. 캐나다에서 여 기로 그것도 헨드폰에다 국제 전화를 때렸다. 아, 열 받는다. 예전엔 안 그랬는 데 내가 속이 좁아졌나? 누나의 저 태도가 맘에 들지 않는다. 새끼, 잠이 안 오 면 동네 한바퀴 뛰고 오지 왜 바다 건너 지구 반대편에다 전화를 했을까. 승주 는 아직 누나를 사랑하고 있나 보다. 바보 같은 놈 그러면 붙잡아야지. 아니다 붙잡았으면 저 여자가 나와 사귀자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승주를 미워하지 는 않지만 누나와 친한 척 하는 건 싫다. 승주가 한달 뒤에 온댄다. 돌아오면 은정이 누나는 나와 애인 사이니 신사답게 물러 나라고 그래야 겠다. "한달 뒤에 온대요?" "응." "거기서 눌러 살아도 되는데..." "치, 너 표정이 왜 그래?" "내 표정이 뭐?" "승주는 내가 너하고 사귀는 거 알아. 예민한 반응 보이지 마." "내가 그렇게 보여요?" "응." "내가 표정 관리를 잘 못하나? 표가 잘 나나 봐요?" "흠, 그게 좋은거야. 아직 때가 덜 묻었다는 증거거든." "그래요?" "띠리리." 또 핸드폰이 울렸다. 이 번에 배군이다. 아까 승주에게 전화가 왔을 때와 다른 느낌으로 기분이 나빴다. 새끼 왜 저러냐. 그 새끼는 졸라 싫다.
"왜 전화 했대요?" "그냥 안부 전화." "진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래요?" "응." "누나에게 마음이 있어 그런 게 아니고?" "잘 모르겠어. 그런 거 같다고 생각 되다가 다른 여학생에게 하는 거 보면 외국 에서 산 탓에 사교적일 뿐이다라고 느껴져." "여학생에게만 친한 척 해요?" "헤헤, 응." "나보다 몇 살 많지?" "다섯 살." "후배가 선배 패면 안돼겠죠?" "응. 그냥 그러려니 해." "나 누나하고 연인 사이 되고 난 뒤 점점 속이 좁아지는 거 같애." "불안해서 그런거야. 나 너 진심으로 좋아하고 사랑하고 있으니까 불안 해 하지 마." "그래서 그런가?" "그래." 나 다음 주 수요일부터는 율전 내려가 있을 것이다. 승헌이가 휴가를 받아 목요 일 쯤 학교 찾아 온다고 했다. 내 방에서 남자 재우는 거 싫지만 동엽이도 없고 승헌이를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그 녀석 사자머리가 보고 싶은가 보다. 지가 힘들다고 사자머리하고 연인 사이였다가 친구 사이로 바꿔 버렸지만 그렇게 생각 한다고 마음까지 그렇게 되지는 못할 것이다. 걔하고 놀다가 집에 가기 힘드니 까 내 방 신세를 좀 지자고 부탁했다. 그래 내 방에서 차 한잔까지 대접해 줄 수 있다. 나도 학교 내려가면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누나 나 이번 주에는 율전 내려가 있을거야." "왜? 누나 보고 싶어서?" "내 친구 때문에, 하지만 누나 보고 싶어서 내려 가는 것도 맞아요." "흠, 너 많이 솔직해 졌다?" "그럼. 참, 정희 누나는 잘 지내고 있나? 누나 요즘 정희 누나 잘 안 만나죠?" "응. 요즘 개 선 본 남자 만나고 다녀." "응? 나이가 몇인데 벌써 선을 봤어?" "선봐서 맘에 드는 사람 있으면 사귀면 되고, 그러다 더 좋아지면 결혼하는 거 지. 맞선 보는 거, 그거 꼭 결혼을 전제로 하는 거 아니다. 올해 좋은 사람 만나 서 내년에 시집가게 되면 딱 좋은 나이에 시집 가는거야." "그런가? 예전 사귀던 그 사람은 완전히 잊혀진거야?" "정희가 생각보다 매정한 구석이 있어. 헤어졌다고 말한 후로 철규씨 얘기 한 번도 안했어." "그래요? 못 잊어서 그럴 수도 있잖아." "그런 거 같지는 않아. 저 번에 선 본 남자가 맘에 드나 봐. 그 사람하고 자주 만나는 것 같던데." "오, 그래요? 그 사람이 누군지 한 번 봐야 겠네. 누나는 선 안 봐요?" "야아!" "아, 맞다. 누나는 사귀는 사람이 있구나. 누나도 사람 매정하게 잘 잊지?" "사람마다 틀려. 잘 잊혀 지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어." 흠, 대충 내 알지. "수요일날 내려 갈테니 손 발 씻고 기다리고 있어요."
"응? 손 발을 왜 씻어?"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 승헌이가 내 방에서 잘테니까 내 방 잠옷 입은채로 찾 아오고 그러지 마요." "알았어." 승헌이는 상병 계급을 달고 아주 불쌍한 몰골로 잠시 사회로 나왔다. "나, 이 번 휴가 받고 들어 가잖아. 그럼 다시 일주일 뒤에 병장, 들어 나 봤 나? 병장. 그거 달고 또 나올거야." 새끼가 어깨의 계급장을 툭툭 치며 과시를 했다. 아직도 배가 아픈지 걸음걸이 가 어색했다. "나는 오늘 율전 내려 갈거다." "그래 먼저 내려가 기다리고 있어라. 오늘은 집에 가야지." "집에 바로 들어가지 날 왜 불렀냐?" "내 모습이 괜찮냐? 아, 저 번주에 너 면회오고 난 다음 날 우리 엄마하고 작 은 누나하고 면회 왔었는데 날 보더니 엄마가 막 우시잖아. 작은 누나도 눈물을 글썽 거렸어. 지금 그때하고 비교해서 괜찮아 보이냐?" "응." "나 갈게." "꼴랑 그거 물어 보려고 이 더운 날, 날 불렀냐?" "응." "더런 새끼." 55 회 하, 많이 덥다. 해가 기운 늦은 오후인데 학교 앞 아스팔트가 끓는다. 내 자취 방으로 바로 가기가 싫다. 학교 오면 갈 데 많다. "정희씨, 안녕." "야, 후후. 너 왜 왔어?" "나? 반기지는 못할 망정 왜 왔냐구? 섧다 진짜." "반가우니까 그러는거지." "헤헤, 내가 그 마음 알죠. 더워요 반가운 사람인데 시원한 냉커피라도 한 잔 타 주면 안될까?" "냉커피?" "응. 얼음 동동 띄운 커피 말이지." 애인 아니라도 괜찮네. 친하니까 자연스럽게 들어 와서 자연스럽게 곁에 가 앉 을 수 있고 또 무언가를 요구할 수도 있다. "방학인데 여기 내려 온 걸 보면 은정이가 불렀나 보다?" "학교가 여기있기 때문에 왔다니까. 누나는 요즘 만나는 사람이 있다며?" "은정이가 그러던?" "응. 진짜 선 봤어요?" "그래 선 봤다." "좋겠다. 언제 결혼 할거야?" "아직 생각없어." "누나." "왜?" "그 결혼하면 부케 이렇게 던지잖아." 우아한 제스쳐를 보여 주었다. 누나가 커피 타다가 몹쓸 인상을 지었다.
"응." "그거 내가 받으면 안될까?" "야, 내가 언제 갈 지 니가 어떻게 알아. 그리고 남자인 주제에... 너 장가 가 고 싶니?" "내 나이가 누나처럼 많은 줄 알아요? 난 한창 때야." "오호 그러니? 그럼 은정이는?" "선 보면 가는 거 아닌가?" "아니야. 자, 커피 다 탔어. 마셔." 누나가 약국에 제법 신경을 썼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 에어콘을 다 설치해 놓았다. 여기 좋네. 더우면 종종 찾아 와야 겠다. "누나는 방학인데 어디 놀러 안가요?" "내가 학생이니?" "후후, 그러보니까 누나는 벌써 사회 생활 2 년차다. 적은 나이가 아니네." "그래." "그럼 은정이 누나도..." "걔는 학생이잖아. 나하고 상황이 틀리지. 너 걔도 선 볼까봐 걱정 되지?" "에이씨, 애인이 이렇게 두 눈 뜨고 살아 있는데." "하하, 둘이 참 재밌단 말이야. 너 걔하고 나하고 같이 있을 때 나와 너무 친 한 척 하지마." "왜?" "걔 삐쳐. 나보고 표현은 하지 않지만 그냥 철수가 우리 철수로 바뀌면 내게 삐 친거니까 그렇게 알아." "무슨 말이야?" "그런게 있어. 최근에는 셋이 같이 있었던 적이 드물지? 오늘 셋이서 놀아 볼 까? 히히." "그럴까? 참, 누나 약장사는 잘 되요?" "씨, 너 자꾸 약장사라고 그럴래?" "에구, 내가 여기 들어 온지 한 시간이 넘었는데 아직 아무도... 저기 파리 떠 었다." 밤에, 그러니까 깜깜한 밤에 은정이 누나 방에서 재밌게 놀았다. 어떻게 놀았냐 고? 가볍게 맥주 한 캔 뜯어 먹고 은정이 누나 놀리며 놀았다. 그 때문에 내가 삐쳤다. 내가 왜 자꾸 삐치는지 모르겠다. 정희 누나가 오버하며 내게 친한 척 했었다. 은정이 누나가 처음에는 장난으로 받아 들였는데 어느 순간 내 호칭을 종종 우리 철수로 바꾸더니 뽀로통 해졌다. "우리 철수는 나 보러 온 거지?" 닭살 돋을 뻔 했다. 뭐여. "너 은정이 만나기 전에는 나 좋아 했었지?" 이, 여자들이 진짜. 남자, 공대생인 우리도 이딴 식으로 놀지는 않는다. "응." "뭐야?" 은정이 누나의 저 민감은 대사와 표정. "정희 누나 때문에 누나 만났고, 정희 누나는 누나보다 십 몇 년을 더 일찍 만 났는데 뭘, 누나가 이 세상에 있는 지 그것조차 알지 못했을 때 정희 누나는 내 사랑이였지 암. 정희 누나 나 사춘기때 누나 많이 그리벘소." "그래, 철수 착하다. 내가 니 마음을 조금만 알았어도..." 정희 누나가 살포시 등을 두들겨 주었다. "퍽, 퍽!"
은정이 누나는 졸라 아프게 내 등을 때렸다. 야이, 장난은 장난처럼 해야지. "왜 때려 씨." "내 맘이다." 씨, 나도 몇 대 패 놓고 내 맘이다 그래볼까? 은정이 누나를 위,아래로 훑어 보 았다. 잘못 때리면 죽을 것 같다. 때릴 데가 없어 참았다. 야, 김정희씨, 오버하 는 것 까진 이해하는데 팔짱은 이제 그만 빼라. "에, 지금은 은정이 누나하고 여,연인 사이지만 먼저 좋아한 사람은 정희 누나 가 맞아.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그러엄. 내가 연하에게 관심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그래, 내가 양보할테니 너네 둘이 사귀어라." "쓰으... 나도 연하를 사귀어 볼까?" "정희씨?" "어, 왜? 철수씨." 은정이 누나 표정이 참 재밌게 변했다. "야, 너네 둘이 얘 방 가서 놀아." "누나 질투하는 거야?" 저거 나를 잘 알고 태연할 줄 알았더니 이런 장난에 반응을 보인다 말여? 호 호. 이 때까진 좋았다. "따르릉." 승주 그 새끼한테 전화가 왔고 누나가 정희누나와 내게 당한 것 때문인지 모르 겠지만 엄청 친한 척 하며 전화를 받았다. 야심한 밤에 승주는 나와 같이 있는 줄 모른 채 누나에게 전화를 했다. 분명 역습이라고 생각했지만 전화 통화가 길 어 질 수록 나는 삐쳐갔다. 나는 아직 누나 상대가 안되나 보다. 누나는 삐친 척 했지만 그래도 웃을 수 있었는데 나는 얼굴이 굳어지며 진짜 삐쳐 갔다. 저 번 주 토요일날 전화하고선 또 전화를? 국제 전화를 무슨 동네 전화로 생각하 나. 전화를 끊고 은정이 누나가 날 보며 배시시 웃었다. "씨이..." "어! 너 질투하는거니?" "승주가 며칠마다 한 번씩 전화해요?" "승주가 니 친구니? 형이라 그래. 요즘은 매일 하는 것 같네. 나 너보다 승주 를 훨씬 이전에 알았고 좋아 했었다? 인정할 건 해야지." "그래 승주하고 둘이 살아라. 정희 누나 진짜 우리 둘이 살래요?" "아니, 난 연하에게 관심 없어." 지가 먼저 시작하고선 배신을 때리다니... 하여튼 누나에게 삐쳤다. 예전처럼 가볍지가 않다. 누나에게 삐칠 때 내 생각이 맘에 들지 않는다. 점점 무거워지 고 그런 게 하나 둘씩 쌓여 가고 있다. "잘 자요. 나 내일 아침에 밥 얻어 먹으러 올테니 밥 해 놔요." "싫어." "씨..." "그래 몇 시에 올래?" "일어나면." "헨드폰 가져가. 내가 모닝 콜 해 줄게." "승주에게 전화 오면 어떡할려구?" "쓰, 승주에게 신경 쓰지 말라니까." "누나도 정희 누나에게 신경 썼잖아."
"넌 틀리다는 게 표정에 나타나." "내일 봐요 그럼." "그 승헌이는 내일부터 자러 올거니?" "응, 한 이틀 정도만 재워 달래요." "그래, 내일 내가 걔하고 같이 있으면 저녁 사줄게." "걔 사자 머리 만나고 늦게 올텐데." "그럼 오면 피자라도 한 판 사먹지 뭐." "그래요. 잘 자요." "응." 아침에 뭔 요상한게 울려 일어 났다. 헨드폰 울리는 소리였구나. "여보세요?" "일어 났니?" "누구세요?" "나다." "목소리가 좀 틀리네. 헨드폰이라 그런가?" "세수하고 내 방으로 와." 그 괜찮네. 저 여자 아무래도 할 줄 아는 음식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스프에 밥 말아 먹게 될 줄이야. "너 오늘 뭐 할거야?" "도서관 가서 공부 해야죠." 누나의 표정이 이상하다. 돌을 씹은 것처럼... "진짜?" "진짜 공부할거야." "언제까지?" "승헌이 올 때까지." "걔가 언제 오는데?" "아침에 온댔으니까 곧 오겠지. 으으으..." "왜?" "삐삐 왔다 헤." "승헌이니?" 삐삐를 꺼내 보니까 이상한 숫자가 적혀 있다. 이 새끼 자기 군발이 인 걸 이딴 식으로 표현하나? 아무래도 지 군번인거 같다. 이제 출발한다는 뜻이겠지? "누나는 오늘도 계속 연구실에 있을거야?" "응." "방학인데 안 놀아요?" "뭐 놀만한게 있나?" "정희 누나하고 우리 셋이서 어디 바다라도 놀러 갈래요? 텐트 치고 놀 수 있 는 곳이나 민박할 수 있는 곳 말이지." "그럴까? 근데 정희가 갈려고 할까?" "안간다면 우리 둘이라도..." "하하, 둘이 가서 뭔 일이라도 생기면 어쩔려구?" "이상한 생각하지 마요." "흠, 그건 나중에 생각해 보고 오늘 공부 열심히 해라. 내가 오후에 도서관 가 본다?"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철수를 보게 될 겁니다."
내가 도서관에서 도착해서 신문을 보고 난 뒤 자리에 앉아 책을 펴서 공부를 하 려는 순간 삐삐가 요동쳤다. 확인하러 나갔다가 도서관 현관에서 승헌이를 만났다. "어?" "심심한데 당구장이나 가자." "잠깐만 음성 확인하고." "새꺄 내가 쳤어." "응. 사자머리 안 만나냐?" "나중 오후에. 너 요즘은 당구 얼마 치냐?" "150." "야, 많이 늘었네." "200 놓고도 간혹 쳐." "한 판 치자. 쿠션으로 칠래?" "그래 죽빵으로 치자." 군발이 새끼는 사회에 있던 모든 것을 퇴보시키며 사나 보다. 당구는 일방적으 로 내 우세였다. 당구비를 제외하더라도 난 돈을 벌어가며 당구를 치고 있다. 저 새끼 이렇게 돈을 잃으면 나중 사자머리 만날 때 계속 얻어 먹어야 될텐데... "너 돈은 있냐?" "하하, 우리 누나들이 용돈 줬다. 나 돈 많어 임마." "걸음걸이가 많이 나아 진 거 같다?" "응." "오늘 몇 시쯤 올거야?" "늦게 까지 있진 않을거다." "되도록 10 시 이전에 들어 와라. 누나가 피자 사준다더라." "나이 많은 여자하고 놀지 말라니까 쓰." "나하고 애인 사이라니까." "그 누나 눈이 참 높을 줄 알았더니 어떻게 너와 그렇게 됐냐? 혹시 일 저질렀 냐?" "생각하는 거 봐라? 우린 순수하게 만났다." "후후, 나 이제 그만 가봐야 겠다. 밤에 보자." "그려. 이 돈은 내가 잘 쓰마." 당구장을 나오자 마자 전화를 걸었다. 멀어지는 승헌이를 보면서 말이다. "누나, 눈먼 돈 생겼어. 밥 사줄게." 56 편 철수에게 점심을 얻어 먹고 도서관을 갔습니다. 누나가 동생에게 얼르 듯 철수에 게 꼭 공부하라는 당부를 하고선 연구실로 갑니다. 더운 날씨, 연구실에 있기가 답답할 것 같았습니다. 금방 공부하라고 당부해 놓고 온 철수를 찾아가 내가 심 심해졌어, 같이 놀아. 이렇게 말하기가 쉽지가 않네요. 약대로 가지 않고 바로 교문을 나와 버렸습니다. 한산한 거리, 더운 햇살. 내 시야에 정희의 약국이 놀다가라고 손 짓하는 것 같 네요. 약국 문을 열었습니다. 정희는 약국 구석에 앉아 책을 보고 있더군요. 너 참 심 심한가 보구나. "어? 너 이 시간에 왠일이야?" "학교에 있기 싫어서."
"어제 내가 철수 가지고 놀린 거 따지러 왔니?" "내가 어린애니? 그런걸로 따지게." "제법 삐치던데 왜?" "좀 놀다 갈게." "그래라. 안 그래도 심심했었는데..." 진짜 심심했군요. 시원한 약국 안에서 보는 바깥, 이 약국 만큼이나 무료해 보 입니다. 더운 날씨 때문에 지나는 사람들도 드물고 학교만 아니었으면 교외의 한 적한 시골마을 같았을 이 곳, 방학이라 학생들이 빠져나간 이 곳은 이름 낯선 면 소재지 같은 느낌입니다. "차라도 한 잔 끓여봐." "씨, 어제 철수도 들어 와 바로 차나 한잔 끓여 달래더니... 완전 한통속이야. 둘 다 약 지어 가는 꼴을 못봤어." "훗. 내가 철수와 사귀는 게 웃기니?" "아니 왜." "지금 네 말투가 아주 재밌다는 투다?" 정희는 내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시원한 냉커피를 대접했습니다. "어제 철수가 냉커피 달랬어. 너도 이거 마셔." "후후. 고맙다. 요즘 약 장사는 잘 되니?" "너도 약 장사라고 그러니?" "어머, 미안. 철수에게 배웠어." "방학 때는 뭐. 그래도 지난 달과 평균 내면 병원에서 받던 월급보단 나아." "병원에 있을 때보다 더 힘들지 않니?" "아니. 이 약국 차릴 때 내 결혼 자금 저당 잡혔지만 내 결정을 후회하지는 않 아. 내가 노력하던 하지 않던 병원에서 받는 월급은 거의 같았어. 한 달 월급을 받고 다음달도 이만큼의 월급을 받을 것이다. 물론 보너스란게 있었지만 거의 고 정적이었지. 미래도 비슷할 것 같았어. 하지만 여긴 달라. 내가 약국 차린지 얼 마 되지 않아서 이런 생각을 가지는 건 모르지만 이번 달에 이만큼 수입을 올렸 다고 다음달도 이만큼이다라는 보장이 없거든. 물론 첫 두달을 제외하곤 그 다음 달부터는 수입이 비슷했어. 그래도 정해져 있는 급료를 받는 것하곤 느낌이 틀 려. 다음달은 더 나을거다... 흠, 재밌어." "철수가 약장사, 약장사 그러는 이유가 있구나." "훗, 또 철수를 꺼집어 넣는다." "우리 잘 어울려 보이던?" "쿠쿠, 참 재밌어 보여. 부럽기도 해." "너 철수 알고 지낸지 오래 되었잖아. 진짜 연하라는 이유 때문에 관심이 없었 던 거야? 우리 사이가 부러우면 네가 사귀지 그랬어?" "허허, 어제 질투한게 맞구만." "그거 아니라니까." 어제 기분이 좋았던 것은 절대 아니에요. 기분 나빴어요. 철수와 단 둘이 있을 땐 모르겠는데 정희와 셋이 있게 되면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나보다 정희가 철수에 대해 아는 것도 많고 정희가 철수와 더 친해 보인다는 생각. 그 생각에 솔직히 질투심이 생깁니다. "나 너무 신경 쓰지마라. 내가 철수를 좋아하긴 해도 한 번도 남자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까." "왜에? 연하라서?" "아니야. 내가 기댈 수 있는 구석이 없어서 그래. 걔는 참으로 밝아. 세상을 아 름답게 보는 부류야. 현실에 대한 생각이 없어 보이기도 하고 틀에 갇힌 소년처 럼 이상적이기도 하지. 사람 때문에 고민은 해도 그 사람 뒤에 있는 현실 문제
때문에 고민하지는 않아." "어렵다?" 정희가 타 준 냉커피가 좀 쓰네요. 기집애가 커피 맛을 잘 모르군요. 정희는 읽 던 책을 덮고 나를 빤히 쳐다 봅니다. "너 장난 아니지?" "뭐가?" "철수 사귀기로 한 거?" "응." "상처 주지마. 상처 받아 본 적이 없어서 너에게 버림 받으면 상처가 오래 갈 것 같애." 철수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안다는 식으로 말하는 정희의 말투가 맘에 들진 않지 만 내가 가진 생각과 비슷합니다. "내가 상처 줄 것 같니?" "아니." "그런데 왜?" "어줍잖은 현실 문제 꺼내면서 너네 둘 사이 멀어지게 하지 말라구." "무슨 말이야?" "내가 철수를 남자로 보지 않았던 건 걔는 자기 주위의 삶에 대해서 밖에는 알 지 못해. 자기와 비슷한 수준의 밝은 생활밖에는 모르는 애야. 그 속에서는 많 은 고민도 하고 경험도 해 보았겠지만 틀을 벗어나면 세상에 갓 태어난 아이 같 을 거야. 철수는 앞으로의 삶도 지금과 별로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 해. 삶의 여 러모습에 대해 알지도 못할 뿐더러 알 기회도 없을 것 같아." "너 철수에게도 이렇게 어려운 말 했지?" "그렇다." "사회생활 2 년차가 뭘 그리 많이 안다고?" "후후, 나는 좀 약았어. 예전부터..." 약았다? 뭐가 약은거지? 나는 정희가 좀 밋밋하다는 생각은 해도 약았단 생각 은 해 본적이 없어요. "네가 왜 약았는데?" "아직 멀었어. 난 좀 더 약아야 돼. 그럴려고 생각 중이야. 우리 집은 너도 알 다시피 그렇게 여유가 있는 형편이 아니야. 요즘 좀 나아졌지만 그래도 늘 이것 저것 걱정이 많아." "갑자기 그 말을 왜 해? 너네 집 못살지는 않잖아." "못 살지는 않다. 그 말은 현실 문제에 대해 걱정할 게 많다는 수준을 뜻하지. 여유보다는 부족한 게 많은, 그로 인해서 돈 문제로 고민해야 할 게 많다는 그 런 뜻이야. 난 앞으로 내 삶의 여유를 부모님에게 떠 넘길 수 있는 처지가 못 돼. 대학 사학년 때 학비는 내가 마련해서 냈어." "이 약국?" "훗, 부모님 이름만 빌린거지. 부모님 이름으로 돈을 빌리고 내가 갚는 식이 야. 물론 부모님 주머니에서 얼마간의 돈이 나왔지만 내가 부담한 게 훨씬 많 아." "그랬구나." "음, 철수가 왜 남자로 보이지 않냐고 물었잖아. 철수네는 부자였어. 걔를 보 면 어둔 구석이 없었어. 단란하고 부유한 가정에서 어려움을 못 느끼고 자란 애 란게 표가 나. 그런 애들은 자기의 현재 삶에 만족하지 못해도 쉽게 벗어나려고 하지도 않지. 어찌보면 참 답답할 때가 많아. 벗어나지도 못할 거면서 그리고 또 그럴 마음도 없어면서 쓰잘데기 없는 고민들은 왜 그렇게 또 많이 하누. 사치 스럽다는 거지. 철수도 그랬어. 철수가 별 것도 아닌걸로 고민이랍시고 나에게 틀어 놓았던 게 얼마나 많은 줄 모르지? 너에 대한 문제도 그렇고. 모두 현실과
는 무관한 하늘의 뜬 구름 잡기식의 고민들이었어. 철수를 보면 참 생각없이 보 이는 경우가 많아. 현실에 대해 무감각할 뿐더러 별 꿈도 없어 보여. 그치만 그 런 철수가 참 좋았어. 그래서 남자로 보이지 않아." "이게 지금 날 놀리나. 조,좋다면서 남자로 보이지 않다니." "내 계산상으로 철수는 남자로 보여선 안돼. 그게 서로를 위해 좋아. 철규씨와 헤어지고 철수가 남자로 보일뻔도 했어. 바보같이 말이야." "너..." "더 들어 봐 이 기집애야. 난 사랑은 밋밋하게 해도 현실 고민은 하지 않고 살 고 싶어. 약국을 차린 것은 많은 부담이 있지만 좀 더 나은 생활을 꿈꿀 수 있다 는 생각 때문이고 예전 철규씨를 오랫동안 사귀었던 것은 그 사람 배경 때문이었 는지 모르겠다, 밋밋하지만 그 사람하고 살게되면 현실 문제로 걱정은 하지 않 을 것 같았어. 나 약대출신 여자야. 약대 출신 여자가 맞선 시장에서 인기 있는 거 알지? 내게 주선 들어 오는 남자들 꽤 괜찮던데? 철수는 생각없이 보여서 미 래를 생각하면 두려워." "철수가 그렇게 생각없이 보이니?" "최소한 내가 보기에는." "아직 학생이고 어리니까 그런거겠지." "너도 생각없이 보여." "응?" "생각없는 애는 생각없는 애와 살아야 돼." "야! 너 무슨 말을 그 따위로 해." "기분 나빴니?" "그럼 그 말 듣고 기분 좋겠니?" "난 좀 약았어. 분명 그래. 사람을 볼 때 이것 저것 계산을 많이 해." "그건 나도 그래." "후, 넌 사람 그 자체를 가지고 계산하지. 나와 성격이 맞니, 그 사람 순수하 니 착하니 이딴 거, 그리고 유치한 사랑 문제들. 난 그런 걸로 계산하지는 않 아. 니가 예전에 내게 꺼내 놓았던 고민들, 지금와서 하는 얘기지만 참 웃겼어. 그 나이때는 그럴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게 네게는 참 중요한 문제였구나 라고 생각했지만 가벼워 보였어. 내 방에 철수가 있을 때 네가 찾아와 동아리 선 배와의 어색한 관계를 걱정 했었잖아. 난 별로 관심도 없었을 뿐더러 대수롭지 도 않게 여겼어. 잠시 가졌던 감정들, 시간 지나면 그냥 없어지는 데 뭘 그리 심 각해 하냐라고 반문하고 싶었어. 근데 철수는 그게 아니더라. 툭툭 내 뱉긴 했어 도 자기가 많이 생각했던 거라 소신있게 대답을 했었지. 그때 너네 둘이 친해 질 것 같다라는 생각을 했어." "너, 계속 듣기 좋은 말이 아니다?" "어줍잖게 약은 내가 보기에도 너네 둘은 참 철부지들이야. 사회의 어둔면과 약 은 면은 하나도 모른 채 누가 봐도 참 유치하게 노는 것 같애." "야!" "그래서 부러워. 세상이 너네들을 속이면 너네 둘은 아마 껴안고 울기는 해도 너네들을 속인 세상을 미워하지는 않을 것 같아. 속이면 속이는대로 울리면 울리 는대로 그렇게 살 것 같애. 밝아서... 너네 둘, 지금 생활에 여유가 있어서 그런 가? 꼭 그렇지만은 않겠지. 부자집 자제들이 오히려 욕심이 과해서 더 약게 구 는 수가 많지만 너네 둘은 아닌 거 같애. 욕심이 없는 건지 바본지... 하여튼 너 네 둘은 앞으로도 별 이상한 것들로 고민하고 계산하겠지. 결혼 문제를 생각할 때도 저 녀석과 살면 사랑하며 재밌게 살수 있을까, 이딴 고민만 하겠지? 나처 럼 저 사람 가정환경이 어떻고 저 사람 수입이 얼마니 어느 정도 수준으로 소비 를 맞추고 어느 정도 사회가 준 부를 누리며 또한 어디서 무슨 명함을 내밀고 살 건지, 이런 고민은 하지 않을거야. 그래서 너네 둘이 좋아 보여. 참 바보 같
지만 순수해 보여서 좋아. 하지만 난 아냐, 세상이 날 속이면 나도 세상을 속일 것이고 날 울리면 나도 울릴거야. 아니 밟고 일어 설거야. 만약 철수가 내 남자 라면 날 울릴거야. 내 마음에 들지 않은 구석이 많으니까. 그러면 난 철수를 미 워하겠지. 그래서 철수는 동생으로 좋아는 해도 남자로 생각하면 안돼는 녀석이 야." "허어..." 조금 어이가 없네요. 정희가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와 다르게 말을 막 합니다. 자기 생각을 말해 놓고 나를 보며 웃는 정희가 못마땅하긴 해도 밉지가 않은 건 정희가 했던 말이 틀리지 않기 때문일까요, 나와 철수가 잘 어울린다는 말 때문 일까요. 내가 알기에 정희는 약지 않습니다. 약은 척 하려고 애쓰는 거지요. 사 회 생활을 하면서 결혼에 대해 생각을 하면서 정희는 상처를 받고 있나 봅니다. 내 생각은 그렇습니다. 정희는 싫게 변하는 자기 방어를 위해 지금 변명을 하는 겁니다. 자기는 약았다는 말로써... 정희도 철수에게 약간의 감정은 가지고 있었 군요. 그 정도는 알 수 있어요. 아무리 생각이 없어도. 대학 때 가장 친했고 마 음이 맞았던 친구가 정희입니다. 아주 약았다면 철수와 날 부러워 하지 않을 겁 니다. "넌 철수 같은 애를 만나야 돼. 철수가 승주씨와 닮은 구석이 많다고 했지? 내 가 보기에는 많이 다르더라. 둘이가 너에게 하는 걸 보면 닮은 점이 보이긴 해. 마음을 잘 표현 못하고 네 마음이 어떤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이지. 맞 지?" "응." "승주는 유약해 보이지만 매정한 구석도 많을 것 같애. 이랬다 저랬다 하면서 자기 삶에 널 맞추려고 할 거야. 그리고 승주는 어두워. 왠지 어두워 보였어. 그 래서 난 승주가 처음부터 별로 탐탁치 않았어. 철수는 정신 없어 보이지만 흔들 리지는 않을 타입이야. 네 마음을 몰라서 그렇지 널 좋아하는 마음은 쉽게 변하 지 않을거야. 너도 좋아하는 맘이 쉽게 변하는 애는 아니지? 승주가 철수보다는 현실적으로 보여. 하지만 승주는 부러지기 쉬울 것 같애. 좌 절감 같은 걸 느낄 타입이야. 다시 일어서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사람이란 거 지. 만약 네 곁에 승주가 머물고 네가 부러진 승주를 보살펴야 할 입장이라면 넌 견뎌내기 힘들어 할 거야. 철수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일 타입이지만 툴툴 털 고 일어나 웃을 수 있는 애야. 내가 느낀바로는 그래. 승주는 부러지면 마냥 너 에게 의지할 타입이고 철수는 어려울 때 네 곁에서 웃어줄 애야." "너무 철수 편드는 거 아냐? 그리고 승주는 이제 철수 상대가 못 돼." "그걸 좀 제발 철수에게 인식시켜 줘라. 하긴 너도 좀..." "뭐어?" "아휴... 둘이 똑같은 것들끼리 만나 가지고..." "누구 나랑 철수?" "그래 너랑 철수. 철수가 만약 연상이었으면 뭘로 트집 잡아 고민했을까? 쉽게 사귀지, 쩝!" "철수가 아직 나에 대해 안심을 못하는 건 알아. 고쳐줘야지." "쉽게 될까?" "야, 김정희!" "왜?" "너 그렇게 변하지 마." 커피 컵을 내려 놓고 메롱하고 약국을 나왔습니다. 내가 현실 문제에 대해 민감 하지 않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게 나쁜 건가요? 그런대로 사회로 나 와 먹고 살 자신 있고 부모님을 좀 의지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나 경제적으로 힘 든데 부모님이 모른척 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 부모님 재산이면 날 충분히 원상복 귀 시켜 줄수 있습니다. 사람 좋으면 됐지.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 만나서 재밌
게 살면 됐지 복잡한 현실 문제를 왜 따집니까. 나는 사랑하는 사람 만나면 아 무 생각없이 그 사람이 필요해서 결혼 할 겁니다. 이런 생각하며 사는 내가 생각 이 없는 건가요? 주어진 만큼 혜택을 누리면서 과하지 않게 살면 되지요. 욕심 이 없어서 그렇나요? 혜택 받은 게 많아서 하는 소리로 들릴까요? 그럴수도 있겠 죠. 하지만 난 인생을 복잡하게 이것저것 계산하며 따지고 살지 않을 겁니다. 다 른 삶은 다른 사람들의 몫입니다. 나는 나대로 재밌게 살 겁니다. 그래도 고민 이 없이 생각없이 살지는 않습니다. 에구, 이런 녀석하고 내가 닮았다니... 정희 말 때문에 철수가 생각나 도서관을 가 보았습니다. 그냥 엎드려 자는군요. 세상 만사 태평이다. 진짜 생각없이 자네 요. 책은 왜 펴 놨누. "야." 들은 척도 안하는군요. "야, 박철수. 야아, 박철수!" 아무리 방학이고 사방 열람석에 학생이 없는 한산한 도서관 내이지만, 에어콘 때문에 시원하고 조용한 분위기가 자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준다지만 박 철수 너 너무 깊은 잠 잔다. 에라이! "으쒸, 왜 때려. 누구야?" "나다 니 애인." "어? 누나 왜 다시 왔어요?" 한 쪽 볼이 아주 빨갛다 못해 탄다 타. "집에 가자 그냥." "지금 몇 신데?" "다섯 시 다 되어 간다." 철수가 주위를 살피면서 정신을 차릴려는 모양입니다. 손가락을 하나, 둘, 두개 를 오므리는 것을 보니까 세시부터 잤나 보군요. 그럼 삼십분 동안은 뭐 했을까 요? "누나 집에 바로 갈거에요?" "그럴 생각이야." "밥은 안 먹고?" "어휴, 그러니까 정희가 너보고 생각 없는 놈이래지." "갑자기 무슨 말이야?" "너네 집 잘 사니?" "뜬금없이 왜 그래?" "잘 사냐구?" "못 사는 편은 아니다." 정희 말하고 틀리지요? 아직 잠이 덜깬 모습입니다. 정희가 내 마음은 잘 읽었네요. 나 저런 철수가 더 좋아 보입니다. 반듯하게 앉아 열심히 공부하다 내가 온 것도 모르는 철수의 모습 보다, 여기까지는 공부해 놓고 가야 되니 누나 먼저 가요 하는 것보다 내 가 왔다고 그냥 책상위에 있던 모든 것들을 가방 안에 넣어 버리고 일어서 반가 운 웃음을 짓는 철수가 더 좋아 보입니다. 그리고 철수의 말에 또 기분이 좋습니 다. "뭐 해? 가요." "너 이런 식으로 공부해도 학점은 나오니?" "할 때는 피 터지게 해요. 이 번 시험 때 코피도 터졌는데... 내가 마냥 노는 것처럼 보여도 다 계산하고 논단 말이에요. 생각없이 놀지는 않는단 말이지. 오 늘은 체력 비축." 잠에서 덜 깬 얼굴이 비장하게 바뀌면서 철수가 말했습니다. 그렇죠, 세상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딨겠습니까. 가치관 차이일 뿐이죠. 나도 많은 생각을 합니 다. 저 녀석을 어떻게 데리고 살까 하는 것 말이지요. 저 녀석이 어떤 녀석인지 이해하려고 많은 생각을 합니다. 참 철없고 가치 없는 생각으로 보일 지 모르나 내겐 참 중요하고 재밌는 생각입니다. "너 체력 엄청 남아 돌겠다?"
57 편 이 여자가 갑자기 왜 이럴까? 해는 하늘에서 빤히 쳐다 보고 있고 아무리 방학이 지만 학교에는 지나다니는 학생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낭자 이 무슨 희괴한 짓이요?" "뭐? 낭자? 참 여러 가지로 부른다. 너 체력 남아 돈다며?" "누나가 그렇게 물어 보는데 없다 그래 그럼?" "야아~, 철수야." "나 장가 가야 된다 말이야." "이거하고 장가가는 거와 무슨 상관이야?" "이런 짓하고 나면 여자들이 날 어떻게 보겠어. 신세 조지는 일이란 말이야." "치, 야아." "나중에 깜깜한 새벽에 하면 안될까?" "지금 해 줘." 이 여자가 쪽팔리게 왜 이래. 내 체력 남아 도는 것은 사실이지만 업어 줘? 이 여자가 뭘 잘 못 먹었나, 아니면 누가 던진 돌에 머리를 맞았나? 도서관에 잘 자 고 있는 날 깨워서 집에 가자더니 집까지 업어 달라고? 누나를 위, 아래로 꼬아 보았다. 25 살 맞어? "왜 그러는데요?" "재밌잖아." "업히는 사람은 재밌겄지. 무슨 일 있었어?" "생각없이 이런 것도 해봐야지 안그래? 철수야아."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는데 저 여자의 눈망울이 그래, 박철수 망가져 보는거야. 라고 꼬드긴다. 그래 조금 심심하기도 한 세상, 이런 쪽팔린 짓도 해 봐야 나중에 웃을 수 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가방 들어요." 가방을 벗어 누나에게 주었다. "가방은 왜 주는거야?" "그럼 내가 가방까지 들어요?" "업어주는 거야?" "그 손수건 같은 거 없어요?" "그건 왜?" "복면하게." "그렇게 쪽팔리니?" "그럼 안 쪽팔리겠냐?" 예전 승주가 꽃 받치며 꿇어 앉았을 때보다 더 쪽팔린 상황이다. 그래, 승주 그 새끼도 그런 짓을 했는데... "진짜 업혀?" "업어 달라며? 빨리 업혀요." 졸라 달렸다. 초인적인 힘으로 엄청 빠르게 달렸다. 씨바, 누나 업고 달려 나
가는데 학교 들어 오던 과 선배들과 마주쳤다. 바보같이 웃어주고 안면 몰수 했 다. 위에서 누나가 무슨 포즈를 취했는지 모르지만 선배들, 졸라 웃을 줄 알았는 데 걱정스런 표정으로 날 봤다. 내가 그렇게 걱정 되 보여요? 내 모습이 웃기도 힘들만큼 불쌍해 보여요? 선배들은 나 때문에 걱정스런 표정을 지은 것이 아니었 다. 뛰다가 고개 돌려 누나 얼굴을 보았다. 다 죽어 가는 환자의 얼굴 표정이 다. 날 보더니 혈기를 찾고 씩 웃으며 혀를 쫑긋 내 미는 것이 나 잘했지?라고 묻는 거 같다. 여우다. 나는 어리숙하고 착한 늑대고.... "헤엑. 헥 헥." "야, 집까지 가야지." "숨 가파 죽겠어. 잠시 쉬었다 가요." 교문을 벗어나 자취방 건물로 들어 가는 골목의 옥수수 밭 옆, 보는 사람이 없 길래 잠시 멈춰 섰다. "나 가볍지?" 쪽팔린데 가볍고 무거운게 어딨냐.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진짜 너 생각없다. 업어 달란다고 진짜 날 여기까지 업고 와? 후후." "아까 사정할 때는 언제고?" "너 데리고 살면 즐겁긴 즐겁겠다." "누나!" "왜에 철수씨?" "밥 먹고 갑시다." 오랜 만에 운동을 한 탓인지 밥 맛이 좋았다. 홍은정, 저 여자가 밥 먹다 자주 날 쳐다보며 웃는다. 왜 그러지? "왜 그렇게 쳐다 보는데?" "후후, 좋아서." "그럼 밥 값은 누나가 내요." 식당에서 집까지 또 그짓 했다. "이제 그만 합시다." "그런게 어딨어? 밥까지 먹였더니 얘가 배신 때리네." "예까지 업고 왔잖아요." "그러니까 마저 업어 줘야지." 또 업고 뛰었다. 이런 모습을 자취방 건물주가 본다면? 내일 자취방 쫓겨날 수 도 있다. 그러면 승헌이는 어디다 재우지? 누나 방 앞에서 누나를 내려 놓았다. "허억! 헉." 땀이 폭포수처럼 흘러 내린다. 숨도 가프다. "후후, 나 오늘 저녁엔 계속 집에 있을 테니까 승헌이 오면 놀러 와. 네 방은 썰렁하지?" "지금은 뭐할건데?" "너 때문에 내 몸에서 땀 냄새 나. 샤워하고 손님 맞을 준비 해야지." 이상한 뉘앙스의 말이다. 쌔가 빠지게 고생하고 좋은 소리 못 듣는 박철수가 불 쌍하다. "그럼 나중 승헌이 오면 놀러 갈게." "그래, 그때 시원한 냉커피 타 줄게. 정희가 타준 것보단 맛있을거야." 갑자기 정희 누나는 왜 튀어 나와. 그려 나중에 보자. 승헌이는 밤 열시를 조금 넘어 내 자취방을 찾았다. 들어 와 별 다른 짓하지 않
고 침대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손에 잡히는 인형 하나를 껴안더니 푹 한 숨을 쉰다. "뭔 일 있었냐?" 더울텐데 물이라도 먹어라. 뜨끈 미지근한 물 한잔 따라서 녀석에게 건네며 물 었다. "그녀는 여전히 내 사랑이였어." "미친놈 지랄하고 자빠졌네." "힘들더라도 다시 나만의 여인으로 해야 겠어. 조금 구속하는 것이 영영 떠나 보내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아." "야, 공대생은 그런 말 하면 안돼." 녀석이 심하게 나를 째려 보았다. "너?" "내가 그런 말 했다고 기분 나쁘냐?" "이 인형 의정이가 준 거잖아." 내가 뺏었냐 새꺄. 지가 놔두고 가 놓고선. 여태까지 보관해 주었음 고맙다고 할 것이지. "가져 가려면 가져 가." "내 제대할 때까지 잘 보관해. 발베개로 쓰면 죽는다?" 저 새끼가 어떻게 알았지? "오늘 뭐 했냐?" "그냥 지나간 우리들의 추억들을 되새겼지. 스티커 사진도 찍어보고 짧은 입맞 춤도 나누었다. 왜 여름이었을까? 오늘이 시월의 마지막 밤이었으면..." 이 새끼 완전히 돌았네. "군발이 되면 다 그러냐?" "오 오, 나의 줄리엣이어. 철책의 변방에서 난 총을 들고 있지만 내 마음에 는..." "너 있는데 철책 안 보이잖아." "가만 있어 봐 새꺄. 총을 들고 있지만 내 마음은 항상 그대만을 품고 있다오. 오오 나의 줄리엣이여...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곳에 가 있지만 내 마음은 언제 까지나 그대 곁에 머물 것이오. 오 나의 줄리엣이여, 내 뜨거운 피는 그대를 향 한 내 사랑. 내 피가 식지 않는 한 나는 그대를 사랑할 겁니다. 멋있지?" "전쟁 터지면 제일 먼저 총맞을 새끼가 여깄었네." "새꺄, 공대생도 이런 말을 한 번쯤은 하고 살아야 돼. 지나가는 여학생만 보 면, 어이 예쁜데, 지나가는 연인을 보면, 어이 그림 좋은데? 그러니까 욕 들어 먹는거야. 군발이도 그러지는 않는다." "공대생 중에 그러는 놈 있냐?" "동엽이." "그 새끼는 좀 그렇지. 그럴 때보면 꼭 대마초 핀 놈처럼 느끼해." "너 대마초 피워 봤냐?" "아니." "그럼 새까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지." "말이 그렇다는 거지. 참, 씻고 나서 누나 방 가자. 커피라도 한 잔 얻어 먹 게." "그럴까?" "빨리 씻고 와." "그냥 가면 안될까?" "씻고 와 새꺄. 그 여자가 얼마나 공준 줄 모르지?" "그럼 잠시만 기다려라."
누나는 잠들 때 더 예뻐 보이기도 한다. 화사한 조명등 아래, 화장기가 가신 얼 굴. 성숙함을 벗고 조금 소녀다와 진다. 조금만 덜 예뻤으면 저 모습처럼 나보 다 어려 보이는 소녀였으면 내 이런 불안함은 가지지 않았을텐데. 기분 좋게 승헌이와 누나에게 냉커피를 얻어 마셨다. 이상하게 기분이 나빠지 고 있다. 누나 방, 남자는 나만 들어 올 수 있는 곳이라 생각했다. 특히 이 시간 에는... 근데 승헌이가 들어 와 있다. 누나가 또 승헌이에게 졸라 친한 척이다. 승헌이 참 잘 생겼다. 묘한 질투심, 기분이 살 나빠지고 있다. 참 친한 승헌이 가 일순간 밉게 보였다. 승헌이까지 누나에게 친한 척이다. 아까 내 사랑 뭐라해도 예쁜 여자가 꼬리치 면 금방 헤, 하고 달려갈 놈 같다. "나이 많은 여자도 누나 같으면 그런대로 괜찮네요." "그렇지?" 나 말고 승헌이를 위해 웃어주는 저 웃음. "괜찮긴 뭐가 괜찮아. 계속 겪어 봐. 너네 누나들이랑 똑 같애." 누나가 날 꼬아 보았다. "얘 왜 저러니?" "몰라요." 어쭈, 너 둘이 더 친한 척 한다 이거지? "승헌아. 네 말이 옳았다. 넌 나처럼 절대 나이 많은 여자와는 사귀지 마라. 빨 리 늙는다." 멀뚱히 날 바라보는 누나, 의아한 표정이다. "너 또 기분 나쁜 거 있니?" "승헌이에게 물어 봐." "너 간혹 감 잡을 수 없을 때가 많아. 왜 그래?" "위에 단추 좀 바로 해라. 잘못하면 가슴 보이겠다." "야!" "네?" 그렇다고 화낼 것 까진 없지. 승헌아 커피 다 마셨으면 자러 가자.
58 회
철수는 또 삐쳤습니다. 이젠 헛갈립니다. 무엇 때문에 삐치는지 보다 왜 자꾸 저런 모습으로 삐치는지 헛갈립니다. 내 마음을 안다면 저렇게 삐친 척 하지는 못할 겁니다. "야, 너 삐친거야?" "내가 뭘 삐쳐. 가자 승헌아." 나이도 어린 게 속 많이 썩이네요. 나이도 어린게? 내가 이런 생각을 하기 때문 에 그는 그 걸 느껴서 저러는 걸까요? "왜 금방 가는거야?" "자야지." 아주 퉁명스럽게 답을 합니다. 이게 진짜 삐쳤네. 도대체 내가 뭘 잘못 한거 야. 자기 친구라 승헌이에게 좀 친한 척 한 것 뿐인데 벤댕이 같은 저 녀석 또 삐친 표정입니다. 철수와 나 둘만 있을 땐 참 잘하는데, 누구 하나 섞이면 달라 지네요. "내일 아침에 밥 차려 줄테니까 여기 와서 먹어. 승헌아 너도 와아?" "네." "뭐가 네야 새꺄. 너 스프에 밥 말아 먹고 싶어? 내가 찌개 사 줄게. 누나는 스
프에 밥 말아 먹고 학교 가요. 우리 아마 일찍 일어 나지 못할거야." 저 녀석 살 열 받게 만드네요. "야, 박철수." "왜요?" 너 자꾸 이러면 안 만난다고 해 버릴거다,라고 말할까요? 내가 차일 것 같습니 다. 녀석은 아마도 그만 만나자고 으름장을 놓으면 그래 그만 만나, 그럴 것 같 거든요. 저 녀석이 날 좋아하는 것은 확실한데 간혹 어디로 튈지 모르게 하는 경우가 잦 네요. 저녁에 날 업고 뛰어 올 때만 해도 그냥 좋았는데... "그럼 내일 아침은 밖에서 사 먹자. 내가 사줄게." "나 때문에 사 주는거야, 승헌이 때문이야?" 하아, 어이가 없네요. 그럼 저 삐친 모습은 역시 내가 승헌이에게 좀 친하게 군 것, 그것 때문이었습니까. 이건 두 살 어린 게 아닙니다. 숫제 유치원 생하 고 사귀는 것 같네요. 내가 자기 아니면 뭣하러 승헌이에게 밥을 사준답니까 아 침부터... "그럼 넌 스프에 밥 말아 먹어. 승헌아 내일 아침에 밥 사줄게 너 혼자라도 나 와?" "네." 유유 상종이네요. 승헌이 저 녀석도 아주 눈치가 없는 놈이군요. "쩝, 그래 둘이서 맛있게, 아주 맛있게 아침 먹어라." "알았다. 넌 늦잠 자, 내 밥 먹고 들어 와서 깨워 줄게." 그래, 같은 놈들끼리 잘 논다. 철수는 인사도 하지 않고 그냥 가 버렸습니다. 아무래도 저 녀석을 위해 시간 을 좀 내야 겠네요. 어린 놈 비위 맞춰 주기 힘들군요. 그래도 재밌어요. 동생같 은 연인, 아니다 연인 같은 동생. 난 어릴 적 철없이 다투다가도 금방 되돌려 지 는 남매들을 부러워 했습니다. 아침에 밥 얻어 먹으러 온 건 진짜 승헌이 뿐이었습니다. "철수는 안 온대?" "잘 쳐 먹고 오래요." "일어 났어?" "네." "달래서 같이 오지." "놔두세요. 누나 좋아서 저러는게 표가 나잖아요." "누나가 많다더니 제법 잘 안다?" "하하. 누나도 쟤 진짜 좋아해요?" "아닌 것처럼 보여?" "그건 아닌데..." "그건 아닌데 뭐?" "아니에요." 나도 삐쳐서 승헌이에게 밥을 사주고 난 다음 그냥 등교해 버렸습니다. 오늘도 날씨가 참 덥겠습니다. 창 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걸음 걸이가 무겁게 보이네요. 오늘 점심 때에도 정희를 찾아 가 볼 요량입니다. 언제나 히죽 웃는 듯한 표정, 배 선배가 차가운 캔 커피 하나를 던지며 접근을 해 오네요. 푸우. "고마워요." "뭘. 이 번 일요일에 뭐할거야?" "왜요?"
"시간 있으면 소개팅 하나 하라고..." "으엉?" "같이 공부했던 친구 하나가 귀국을 했는데... 예쁘고 멋있는 아가씨 한 명 있 으" "이 봐요, 배 성준씨!" "에? 왜 화를 내? 그 녀석 멋진 놈이야." "선배, 나 사귀는 사람 있다는 거 몰라요? 일부러 그러는거야, 몰라서 그러는 거야?" "진지하게 사귈 수 있는..." "이씨! 그만 말해요? 후우..." 진짜 짜증 나네요 저 사람. 철수에게 화도 나고 미안하기도 하네요. 바로 연구 실을 나와 버렸습니다. "안녕." "후후." "왜 웃어?" "철수도 오전에 여기 왔었어. " "치." "점심 때 다 됐는데 뭐 좀 시켜 먹을래?" "됐어. 차가운 물이나 있음 한 잔 줘." 냉수 먹고 속 차리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네요. 얼음이 띄워진 냉수가 속 을 시원하게 합니다. 정희네 약국에서 한 시간 동안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했고 뭔가 구체적인 일 하 나를 계획하기로 했습니다. "은정이 너 철수 잘 모르니?" "그래도..." "나는 너네 둘 사이에 끼기 싫다." 학교로 들어 오는 길에 도서관을 찾아 갔습니다. 승헌이는 오늘도 자기 여자 친 구를 만나러 간댔습니다. 막 자랑을 하던데요. 작년에 당구도 같이 한 번 쳤지 만 별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예뻤는지 어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철수 말에 따 르면 영 시원찮은 것 같은데 승헌이 말 표현을 빌리자면 크고 화려하진 않지만 너무나 섬세해 감히 그 아름다움을 범할 수 없는 미인이라고 하더군요. 후후, 공대생들도 그런 비유를 할 줄 알더군요. 도서관에서 철수를 한 참 찾았습니다. 허허,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더군요. 그 래서 못 찾았어요. 전 엎드려 자는 녀석들만 유심히 보았거든요. "야." 철수 특유의 모습, 슬며시 고개를 들고 눈꼬리를 치켜 올리며 뭐야,라는 저 표 정. 한 손으로 쓰고 있던 걸 슬 가리네요. "왜 왔어요 또" "또?" "오늘은 아침, 점심 다 굶어서 업어 줄 힘 없어요." "아침도 안 먹었어?" "그 나가서 얘기해요." 철수 옆, 옆에 앉은 기집애가 별 말 하지도 않았는데 조용히 하라고 하네요. 아 주 어려보이는 데 버릇이 참 없군요. "너 몇 학번이야?"
이것도 아마 철수에게 배운 걸 겁니다. 철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제 친구에게 잘 해 줘서 고마워요." "응? 그 말 진심이야?" "제 표정 보면 몰라요?" "그러면서 같이 있을 땐 왜 그래?" "그건 나도 잘 모르지." "치, 밥 먹으러 가자." 후후, 녀석이 배가 고팠나 보네요. 그래, 삐치면 너만 손해지, 아침에 그냥 승 헌이따라 나왔으면 넉넉하게 배불리 먹었을텐데... "너 다음주에 시간 있어?" "왜요?" "너 정희더러 며칠 휴가내어 어디 놀러 가자 그랬다며?" "정희 누나에게 갔었어요?" "응." "여름이고 방학인데 계곡이나 바다 같은 곳을 가보고 싶지 않아요?" "너 나와 가고 싶은거야, 정희와 가고 싶은거야?" "그것도 눈치 못 채냐?" "그럼 넌? 내가 승헌이에게 친한 척 한다고 삐친 게 누군데." "난 누나에게만 삐친게 아니라니까. 승헌이 그 새끼 말 끝마다 나이 많은 여자 는 안된다 그래놓고 누나에겐 졸라 친한 척 하대. 내가 안 삐치게 생겼냐?" "어떻게 그렇게 속이 좁을 수가 있니? 승헌이 걔 참 착하더라." "나도 알지 그건." "하여튼 다음 주에 그럼 시간 한 번 내 볼까?" "진짜 갈려구? 정희 누나는 뭐래요?" "같이 갈 생각이 있나 보던데?" "헤, 그래 어디로 갈까? 바다가 좋을까 산이 좋을까?" "멀리 갈래?" "멀리?" "저기 밑에 지리산 갈래? 아니면 무주도 괜찮고... 그 쪽 계곡이 화려하대." "바다는?" "여름 바다는 너무 경솔해." "응? 이과생이 그런 말 하면 안되지." "계곡이 나을 것 같다." "다음 주 언제 쯤?" "넌 아무때나 시간 되지?" "응." "가만 교수님이 화요일부터 어디 가신다고 했지? 수요일이나 목요일 쯤 출발하 자." "며칠간?" "2 박 3 일정도... 내가 엄마 차 빌릴게." "차 몰고 가려고?" "그래, 여러 곳 둘러 보려면 차가 있는 게 낫겠지?" "헤헤, 진짜 가는거야?" "응." 정희는 삼,사일 약국 비우기도 어렵고 우리 따라 갈 생각도 없다 했습니다. 철 수와 단 둘이 갈 생각입니다. 남자와 단 둘이 간다는 게 조금 꺼림칙 했는데 정
희 말 듣고 맘을 고쳐 먹었지요. 저 녀석? 후후. "그럴때만 남자지?" "무슨 소리야?" "철수만 탓하지 마. 네가 철수 대하는 것을 보면 남자친구라기 보다 동생으로 대하는 것 밖에는 안 보여. 은정이 너 철수 잘 모르니?" "그래도..." "나는 가기 힘들어. 그리고 너네 둘 사이에 끼기도 싫어." "진짜 철수와 단 둘이 가도 괜찮을까?" "니가 알아서 해. 니 애인이니까 네가 판단해야지." "쿠쿠. 하긴..." "쿠쿠." "너 왜 웃어?" "넌 왜 웃니?" 웃을 이유야 많지요. 철수 지가 남자라고 날 어찌해 보려 하면 쿡쿡 웃어 버리 면 됩니다. 그러면 우쒸 그러겠죠? 아휴, 딴 맘이나 먹을 수 있을까요? 차라리 내가 유혹하는 일은 있어도 철수는 그러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한 번 시험 해 볼 까? 시험은 무슨 시험, 바로 옆에 살면서 밤 마다 그렇게 내 방을 들락 거려도 입맞춤 하잔 소리 제대로 못하는 놈인데... "박철수?" "왜?" "넌 꼭 가야 된다. 나중에 물리면 안된다." "알았어요." 밥을 먹고 난 뒤 철수는 기분 좋게 어디론가 내 뺐습니다. 도서관으로 가는 것 같진 않았습니다. 아휴, 좀 삐쳤던 게 마음에 걸려 저녁 무렵에 또 도서관을 갔습니다. 철수와 같 이 올 생각으로 말입니다. 철수의 열람석은 낮에 자리를 비웠을 때 모습 그대로 입니다. 아까 어디론가 사라지고 난 뒤 철수는 한 번도 이 자리에 앉지 않았나 봅니다. 연습장을 뒤적여 봤지요. 흠, 아까 이런 낙서를 한다고 손으로 가렸군요. "참 아름다운 크리스탈 잔이 있다. 깨지기 쉽다. 내 손에 쥐고 있다 깨지면... 차라리 플라스틱 컵이었으면 좋았을텐데." 한 놈은 섬세해서 뭐 범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고 그러지 않나 그리고 한 놈 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말을 연습장에 써 놓질 않나. 어렵다. 내 님은 아직 절 믿지 못하나 봅니다. 근데 이 녀석 어디 간거야. 59 회 "야, 공부 열심히 한다?" 당구장 외 다른 장소에서는 잘 아는 척 하지 않던 선배 하나가 도서관에서 내 게 친한 척 했다. 키득 키득 웃는 폼이 어제 내가 누나를 업고 뛰는 모습을 본 것 같다. "형은 방학인데 학교엔 어쩐 일로 왔어요?" "나? 집에 있음 심심하잖아." "집에 안 내려 갔어요?" "다시 올라 온거야. 학생이 학교에서 놀아야지." "학교가 노는 데구나..." "말대꾸가 늘었네. 너 몇 학번이야?"
"에이, 90 학번들 왜 그래요. 말꼬리 잡혔다 싶으면 학번이나 따지고..." "그랬냐? 넌 언제 내려 왔냐?" "전 어제 내려 왔어요. 공부나 할까 해서." "그러냐? 나도 공부나 해 볼까? 전공 책 아무거나 하나 줘 봐." "없는데. 형 가방 안 가져 왔어요?" "응. 전공책 하나 줘 봐." "공부는 무슨... 형 대부분 과목 이수했잖아요. 이학기 때 몇 학점이나 들어 요?" "5 학점, 취직도 됐겠다 2 학기는 별 걱정 없어." "저보다 4 학점 적게 듣겠네요. 진짜 공부 하시게요? " 선배의 얼굴은 공부하고 싶은 표정이 아니다. 대충 왜 도서관을 나왔는지 알 지. 형 얼마나 늙고 삭막해 보였으면 열람실에서 이렇게 떠드는데 누구하나 뭐 라 그러는 사람이 없냐. 쯔쯧. 형 얼굴에 나는 예비역 노땅 고학번임,이라는 표 가 나나 봐요. "음, 졸업하면 언제 당구치겠냐. 우리 당구장 가서 공부하자." "네?" "난 못다 이룬 삼백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넌 200 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당 구 공부하러가자." 옆에 앉은 쪼그만 여학생이 이쪽을 힐끗 쳐다 보더니 킥킥 웃었다.90 학번이 나 되어서 비웃음이나 사다니... "도서관엔 왜 오신거에요?" "애들 만날려면 도서관 와야지. 넌 공부할거냐? 당구나 치러 가자." "저 지금 당구 칠 기분이 아닙니다. 저 공부할래요." "어제 이상한 짓 하더니 이상하게 변했네." "형도 봤어요?" "응. 그 예쁜 약대생 어디가 아팠니?" "쩝. 모른 척 해 주세요." "너 그 여학생하고 사귀는거야?" "사귄다? 그 의미가 뭐에요?" "가깝게 지내면 사귀는 거 아니냐?" "열심히 치세요." "그려, 열심히 해라." 당구 치자는 유혹도 뿌리치고 밥 먹으러 가는 것도 참고 열심히 공부했다. 오 늘 누나가 날 보러 도서관을 오지 않는다면 진짜 삐칠 것라는 각오를 하고선 도 서관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잠도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공부가 잘 된 것도 아니다. 시간이 흐르고 누나가 나타나지 않자 잡생 각이 들었다. 좋다, 단 둘이 있을 땐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하지만 난 아직 어린가 보다. 지금 난 누나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근데 먼 미래를 생각하면 불안하다. 헤어짐 이 분명 있을 것 같다. 거기다 내 어린 맘으로 누나에게 삐치는 횟수가 늘어 간 다. 승헌이에게도 삐치는 내 자신이 싫다. 친구였다면, 예전처럼 그냥 동생이었 다면 삐치는 횟수가 많지 않았을텐데... 감당할 수 없는 여자를 연인으로 삼은 건 아닌가. 삐쳤을 때 내 마음은 누나를 하나씩 구속하려 드는 것 같다. 앞으로 계속 구속하려 들것이고 그러면 헤어짐이 있을 때 난 아주 비참한 모습으로 매달 려야 할 지도 모른다. 그냥 예전처럼 친한 동생이라면 슬플지라도 멋있게 웃으 며 떠나 보낼 수 있을텐데. 누나가 내 여자라고 생각하면 난 비참해질 것 같다. 누나를 구속하려 들면서... 크리스탈 잔이 있다. 쇼 윈도우 안에 고고한 조명을 받고 화려하게 빛나는 고
급 크리스탈 잔이 있다. 밖에서 바라볼 땐 그저 아름답단 생각 뿐이다. 한 참 동 안 그 진열장 앞에 서서 그 잔을 바라보다 웃으며 내 갈 길을 떠나면 된다. 떠나 면서 뒤 돌아 보는 시선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쇼윈도의 아름다운 크리스탈 잔 은 바라보다 갖고 싶다는 고운 미소하나 띄우고 그냥 지나치는 게 낫다. 만일 그 아름다움에 못 이겨 그 잔을 사 버렸다면 그때부터 걱정 하나가 생길 것이 다. 깨질까? 내가 잘못해 깨진다면, 누군가 잘못해 깨 버린다면... 그 걱정 때문 에 난 그 잔이 깨지지 않도록 그 아름다움을 구속해 버릴거다. 아무도 보지 않 는 깜깜한 혼자만의 진열장 속에. 크리스탈 잔? 그 좋은 비유네. 그렇담 한 자 적어 놔야지. 크리스탈 잔이 있다. 깨지기 쉽다. 내 손에 쥐고 있다 깨지면... 차라리 플라스 틱 컵이었으면. "야." 에이쒸, 좀 더 써야 되는데... 꼭 이럴 때 온다 말이야. 공부하고 있을 때 오던 지 아니면 마저 써 놓고 연습장을 넘기고 난 뒤 왔어야 되는데. 꼭 지 생각으로 뭘 적고 있으니까 온다 말이야. 누나 니도 양반 되긴 걸렀다. 공준디... 양반 보 다 높구나. 누나를 만나고 밥을 얻어 먹으니까 아까 가졌던 잡 생각들이 말끔히 없어졌다. 또 생기겠지만 지금은 누나가 날 달래 주었기에 그저 좋을 뿐이다. 그리고 좋은 약속이 하나 잡혔다. "누나도 꼭 가야 돼." "알았어."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을 떠나는 것, 예전부터 꿈 꾸었던 일이다. 멀리 떠난다, 비록 누나와 단 둘이 가는 것이 어색해 정희 누나를 끼워 넣었지만 마냥 좋을 수 있다. 정희 누나는 나 이전에 은정이 누나 친구고, 은정이 누나 이전에 내 친 구다. 삐칠 일이 뭐 있겠냐.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사랑하는 여인과 좋아하는 누나와 여름의 낭만을 즐기며 아름답게 놀다 오면 된다. 그리고 훗 날 미소 지 을 수 있는 추억 하나를 가지면 되는 것이다. 헤헤, 기분이 매우 좋아 졌다. 다음 주가 너무 기대 된다. 기대하는 마음, 설레는 마음. 공부할 수 있겠냐. 누 나와 헤어진 뒤 바로 당구장으로 달렸다. 선배들이 다 치고 갔을까봐 숨을 헐떡 이며 뛰어 갔다. 당구장 문을 열었고 선배들을 봤다. "내가 왔소이다. 헉헉, 한게임 더?" 당구장 주인 아저씨가 서비스로 박카스 한 병을 주었다. 저녁 무렵에 도서관으로 돌아 왔다. 공부하기 싫어 졌다. 집에 가야지. 가방을 챙겼다. 연습장을 뒤적이던 순간 내 글씨 아닌 무언가를 보았다. 내가 잡념에 사 로잡혀 몇 자 적은 글 밑에 답글이 달려 있었다. 난 크리스탈 잔이 아니란다. 누나가 왔다 갔나? 집에 들어 올때 보니 누나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벌써 들어 왔구나. 그날 밤은 누나가 승헌이에게 친한 척 해도 암말 하지 않았다. 그냥 같이 어울 리며 소박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마음이 편했다. 후후. 밤에 승헌이와 단 둘이 누워 또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일은 집에 갈 것이다. "오늘은 사자머리와 뭐했냐?" "사자머리 아니야. 걔 머리 길게 늘어 트렸어." "그러냐?" "오늘은 영화 한 편 보고 찻 집에서 이야기만 했다. 걔가 그러대. 내가 야속했
대. 자기를 붙잡아 주었으면 좋겠는데 놓아 주려고만 했다나, 내가 그랬대. 푸하 하, 다시는 나 같이 잘생기고 소박한 사람 만나기 어려울 것 같아 기다리고 싶었 는데 나는 떠나갈 준비를 하는 사람 같았대. 음. 멋있는 말이지 않냐?" "무슨 소리냐? 어이가 없다. 하여튼 요즘 젊은애들 영화는 많이 봐 가지고... 너들이 뭘 안다고, 사랑이 뭔지도 모르면서 이상한 말들을 엄청 많이 해요. 안 그렇냐? 조금 구속하는 것이 영영 잃는 것 보단 낫다. 자기를 붙잡아 주었으면 좋겠는데... 영화 대사를 써라 써." "오늘은 참는데 내일부터는 그러지 마라. 육군 병장 송승헌 열 받으면 무섭다? 그러는 너는 사랑에 대해서 뭐 아는 거 있냐?" "나? 없지 당연히. 그래서 힘들다." "후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의심하지 마라. 네 맘 같다고 생각 해." "아는 척 하네?" "답은 없는거야. 아는 척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생각을 말한 것 뿐이다." "엉? 야." "왜?" "너 예전엔 이러지 않았잖아." 승헌이는 일요일날 잡혀 있는 약속을 기약하고 나와 같이 서울로 올라 왔다. "너 휴가 끝날 때까지 나 만나기 힘들거다." "들어가서 일주일만 있다 또 나올거야." "그럼 그때 연락해라. 나는 이제 할 일이 많을 것 같다." "알았다. 다음에 보자." 할 일이 많았다. 놀러 갈 계획을 잡아야 되기에... "아버지, 삼일간 제가 약 배달 하겠습니다. 용돈 좀 주세요." 여행 경비도 모아야 했고, 이 것 저것 필요한 것들도 생각해 내야 했다. 이틀이 지나 갔다. 누나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지리산 가기로 합의를 봤다고 한 다. 나는 합의한 일이 없는데... "잠은 어디서 잘 건데." "엄마 차 못 빌렸어. 그냥 버스 타고 갔다 오래." "그래요?" "어, 내가 다 계획을 짰어." "어떻게." "수요일 오후에 출발하자. 진주 가는 버스를 타는거야. 첫 날은 진주에서 자고 아침 일찍 지리산으로 가는 거지. 어찌어찌 해서 하루는 콘도를 잡았어. 근데 휴 가철이나 더 이상은 무리더라. 하루 지리산 계곡에서 놀고 그 다음날은 노고단 을 가는거야. 거긴 차가 가니까...히치 하이킹을 하는고야. 니가 좀 걸리긴 하지 만 내 외모로 충분히..." "거기서도 공주하려고?" "응. 그리고 남원으로 가서 밤 기차 타고 서울로 올라 오면 돼. 계획 잘 잡았 지?" "콘도는 어딘데?" "나도 잘 모르지. 알려 준대로 찾아 가면 돼." "누나네 콘도 아냐?" "아니." "나는 뭐 가져 가야 돼?" "너 필요한 거. 날 즐겁게 할 수 있는 거." "정희 누나는 뭐 필요하대요?"
"정희? 음..." "사진기는?" "내 사진기 있어." "모래 고속 터미널에서 보는거야?" "그 전에 나 보고 싶으면 연락 해." "누나 거기 어딘데?" "여기? 학교." "모레 봅시다." 배낭에 옷 가지들을 넣었다. "아버지, 왠만하시면 선글라스 하나 사시죠." "필요하면 니 돈 주고 사." 내 옷가지들과 수건같은 거 넣고 나니 뭘 더 가져가야 할 지 난감했다. 기분으 로 술 한 병 훔쳤다. "병이 허약해 보이는 군. 비싼거 아니겠지?" 여행 떠나기 전 날 누나와 이야기를 많이 주고 받았다. 설레는 맘으로 말이다. 정희 누나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같이 갈 거면서 한 번도 전화가 없었다. 내가 전화 안 해서 삐쳤나? 모르겄다 내일 볼텐데 뭘. "내일 12 시에 진주행 버스 타는 곳에서 봐." "같이 안 가고?" "너네 동네서 바로 거긴데 너 혼자 못 가니?" "그려, 거기서 봅시다." 작은 배낭, 33 회 동창회 기념,이라는 글이 새겨진 등산 모자, 차마 선글라스는 쓸 수 없었다. 무릎을 덮는 반바지에 양말을 신고 등산화를 신었다. 멋있어 보였 다. 빨간 폴로 티. 정열의 사나이 박철수도 피서를 떠나 보는구나. 대학 사년동 안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은정이 누나 고마바요. 흑흑... 짧다 싶은 반바지에 발목까지 올라 온 이상한 샌달에 팔없는 티. 까만 썬글라스 를 끼고 아주 요염한 척 누나가 배시시 웃으며 나타났다. 야하지는 않지만 색다 른 섹시함... 저런 여자하고 같이 여행을 떠난다니...푸하하, 잘났다 박철수. 누 나는 가방을 두개 들고 있었다. 등에 메고 있는 가방은 평상시 핸드백 대용으로 들고 다니는 깜직한 가방. 나머지 한 손에 들고 있던 큼지막한 베낭을 나에게 던 져 준다. "안녕, 이건 니가 들어라. 12 시 반 표가 있었어." "벌써 끊어 왔어요? 정희 누나 아직 안 왔어." "응? 자 여기 네 표, 서울 올 때 차비는 니가 내라?" "나, 경비는 충분히 가지고 왔어. 정희 누나에게 연락해 봐요." "정희 안 가. 우리 둘만 가는거야." "에?" 60 회
길 가에 늘어 선 가로등이 쏜 살같이 사라진다. 야, 고속 버스 빠르다. 우등 고 속 버스, 내가 이거 생기고 어디 멀리 여행 떠난 적이 있던가? 없네. 그려 처음 타 보는거구나. 신난다! 의자 신기하게 생겼네. 남,녀가 유별한데 이렇게 은정이 누나와 단 둘이 여행을 떠나도 아무일 없을런
지... 막 기대된다. 밖으로 따가운 햇살, 초록에 못 이겨 남빛이 감도는 벼 이싹들. 나무들. 좋다! 창 가에 앉아 있는 누나는 밖을 쳐다 보며 고요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은정씨." "왜에?" 폼 잡는다고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눈은 잠시 감았다 뜨고 한 손으로 숙여진 머 리결을 쓸어 올리는 저 행동은 전형적인 공주병 환자의 모습이다. "둘이서 간다고 진작 말을 해주지." "단 둘이 가자고 했으면 니가 망설이지 않았을까?" "뭘 망설여. 기횐데..." "무슨 기회?" 고개를 잘래 잘래 흔들어 말을 잘못했다는 제스쳐를 보내 주었다. 무슨 기회? 나도 알 것 다 아는디... "누나야." "으응?" "왜 둘이 갈려고 생각했는데?" "좀 믿어라구. 사람 사귈 때 기간 정해 놓고 사귀니? 왜 헤어질 걸 염두해 두 니?" "내가 그렇게 보여요?" "그래. 그리고 삐치지 좀 마. 나를 좀 여유롭게 바라 봐." "이렇게?" 초롱 초롱한 눈망울로 마요네즈 왕창 찍어 먹었을 때 표정으로 누나를 바라 보 았다. "에그 화상아. 마음을 좀 여유롭게 가지라구." 그래 여유를 가지자. 박철수 잘난 놈이다. 누나 귀를 잡았다. "귀 좀 줘바요." "아아, 왜?" 귓속말로 사랑하오, 낭자. 라고 말하고 나, 사랑해? 라고 귀엽게 물었다. "푸우우." 누나가 참지 못하는 웃음을 웃었다. 내가 생각해도 유치했지만 그런 반응을 보 이는 데 내가 여유로움을 가질 수 있겠냐. 하여튼, 고속 버스 참 빨리 달린다. 이렇게 빨리 달리는데 그 진주란 곳은 나타 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우리 나라가 이렇게 큰 줄 몰랐다. 출발한 지 꽤 시간 이 흘렀는데 버스는 휴게소란 곳에서 떠 멈춘다. 차가 서자 마자 쪼로로 앞으로 달려 나가 기사에게 물었다. "아저씨 얼마나 더 가야되요?" "이제 반 왔어." 그럼 앞으로 두 시간도 더 넘게 버스를 타야 되는겨? "은정씨." 나가자고 커피 마시는 포즈를 취해 주었더니 하품을 하는 폼이 나보고 사오라 는 뜻 같다. 아랫 것이 어떻게 여유를 가져? 버스에서 나머지 시간은 졸라 재밌었다. 박는다, 박는다, 박았다. 제자리. 주 위 한 번 살피고 다시 눈이 감기고 기울어진다 기울어진다, 숙인다, 박는다, 박 는다, 박았다. 또 제자리, 주위 한 번 살피고 어랏? 이번엔 입주위도 한 번 닦 네. 멀뚱히 앞을 쳐다 보다가 또 고개가 픽 숙여진다. 내가 잠시 졸고 일어 나니 옆에서 참 재밌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누나의
자는 모습. 아무리 우등 버스라 편안한 의자지만 그래도 버스 안에서 앉아서 자 는 폼은 자연스러울 수가 없다. 저 여자 자는 모습이 저 여자를 처음 봤을 때의 그 도도하고 이지적인 모습과는 매치가 안된다. 그려, 다 같은 인간인데. 조금 은 불안해 보이고 조금은 허술해 보이기도 하는 모습. 누나의 얼굴이 또 창 쪽으 로 기울어 지길래 조심스럽게 누나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응?" "내 어깨에 기대요. 나는 이제 잠이 안 오거든." 버스는 다섯시간 조금 넘게 달려 진주란 곳에 도착했다. "뭐여?" "왜?" "지리산 어디 있는겨?" "이거 완전 바보 아냐."
고속 버스 대합실에 앉아 있었다. 누나가 숙박할 곳을 알아 보러 전화하러 간 동안 혼자 버스 대합실에 앉아 있었다. "니 왔나?" 억양이 이상해 주위를 곁눈질 해 보았다. "야이 가시나야. 이 년이 미쳤나." 뭔 얘기를 저렇게 상스럽게 하냐. 또 한 쪽으로 곁눈질을 했다. "총각 부산 가는 버스는 오디서 타노?" 어떤 아줌마가 가만히 있는 내게 이상한 억양으로 물었다. 주위를 두리번 거렸 다. 버스? 서울, 부산, 대구, 광주 가는 버스 밖에 없는데 뭘 물어 보십니까? 가 운데 서 있다가 부산 가는 버스 타면 되지. "저긴가 본데요?" 야, 처음 온 곳에서 길 가르쳐 줬다. 자랑해야지. 누나가 몇 몇 촌넘들의 시선 을 받으며 나타났다. "가자." "어디를?" "짐 갖다 놓고 시내 구경해야지." "이런 촌 구석도 시내가 있어요?" 주위에서 겁난 시선들이 내게 고정이 되었다. 미안한 표정으로 씩 웃어 주었 다. 다리를 건너서 버스를 탔다. 강가는 제법 아름다웠다. 아 새끼들, 졸라 떠들었다. 고등학생인 것 같았다. 어디 근처에 학교가 있나보 다. 보충수업 받고 하교하는 애들인가? 누나를 의식해 졸라 크게 떠드는 놈 들... 시선이 몰래 몰래 누나에게 오는 것을 보았다. 야이 녀석들아 나도 애 취 급 받는데... 신경 꺼. "어디 가는거에요?" "예약했어." "에?" "호텔 예약 했다구." "어디?" "저기 보이는 걸꺼야 아마." "무슨 돈이 있다고 호텔을 예약 해?" "이런 촌 구석에 있는 호텔이 뭐 비싸겠니?" 이 번엔 누나가 주위의 겁난 시선을 받아야 했다. 나도 따라 겁난 시선을 보냈
다. "어? 방 하나 잡았어요? 나는?" "너? 나랑 같이 자면 되잖아." "이 여자가..." "같은 방에서 몇 번 자 봤잖아." "누가 듣는다 좀 조용히 말해라." 엘레베이터를 탔다. 단둘이서... "침대 두개 있는 방 얻었어. 괜한 상상하지마." 눈을 똥그랗게 오므리고 입을 쭝긋 내 밀고 물었다. "그래도 같은 방이지?" "응." "나를 우습게 보는거야 뭐야." "너를 믿기 때문에 그런다." "같은 방이면 아무래도... 밤에 내가 덮치면 어떡할래?" "너네 아버님에게 일러 주고 당장 식 올리지 뭐." "장난하냐 지금." "너 내 말 잘듣잖아." 호텔 방에 들어서고 난 꼭 신혼 여행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친구들끼리 왁 자지끌 떠들고 고생하며 떠나는 여행. 좋지. 그리고 연인과 떠나는 이런 여행? 이것도 괜찮네. 근데 저 여자 돈을 제법 쓰네. 방은 하나지만 욕실 쪽에 칸막이가 있어 흡사 두개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방 중간에 탁자 하나가 놓인 한 50 센티의 공간을 두고 싱글 침대가 두개 놓여 져 있었다. 잘때 손 잡고 잘 수도 있겠다. 푸헤헤! "나가자?" "안 씻구?" "갔다 와서 또 씻어야 될텐데. 니가 밥 사줘야지. 저기 짱어 구이집 있더라." "그래요?" 누나 엄청 많이 먹더라. 장어 졸라 비쌌다. 나는 이런 여행 꿈 꾼것이 아닌데. 천막 쳐놓고 라면 하나에 목숨 걸며 누나 쫌만 먹어. 나도 좀 먹자. 이런 거 생 각했는데... 에라 모르겠다. 돈이야 뭐... 밥 먹고 시내 구경도 했다. "이런 촌 구석에 지하상가도 있네." "그렇네. 호호." 주위의 위협스런 눈 빛들. 많이 쫄았다. 시내 돌아 다니다 괜찮은 커피 숖이 있어 들어 갔었다. "여기요. 음... 넌 모카골드라고 했지? 전 아이스커피 한 잔 주시구요. 화장실 이 어디 있죠?" "저기 또이레또 글자 보입니꺼? 거기라예." "아, 고마워요." "뭘예. 괜찮심더." 누나가 사투리 쓰면 상당히 재밌겠다. "아뜨뜨..." 나도 냉커피 시킬걸 씨... 근데 이런 촌구석까지 내려 와 커피숖은 왜 왔을까? 아까 호텔에 보니까 스카이 라운지에 커피숖 있더만... 굳이 시내를 나와 가지
고 말이야. "철수야 개한나?" "에?" "괜찮니? 이 걸 여기 사람들은 개한나? 이렇게 묻던데?" "어디서 배웠어?" "화장실에서. 어떤 기집애가 화장을 고치더니 친구보고 자꾸 개한나? 나 개한 나? 묻길래. 개한나가 뭐냐구 물어 봤지." "재밌다. 말 낯선 곳으로 베낭여행 온 것 같네." "그렇지 응? 다음에 철수랑 외국으로 배낭 여행도 같이 가 볼까?" "기회되면." "내가 유럽 쪽은 잘 알잖니. 스위스, 오스트리아, 독일은 꽉 잡고 있지." "좋겠수." "다음에 같이 한 번 가자." "돈 생기고 시간 나면." "생각하니까 진짜 너랑 가보고 싶은 곳이 많이 떠 오르네." "후후, 많이 힘들었던 곳이죠?" "응?" "부려 먹을 놈 생각났을 거 아냐." "쯔쯧, 하여튼 좋은 말은 못해요." 시내 구경하며 이리 저리 돌아 다니다가 호텔에는 11 시 넘어 들어 갔다. 관광호 텔이라고 나이트 클럽도 있었지만 둘이서 놀려고 외면했다. 졸라 기분 묘하다. 아무리 칸 막이가 있고 입고 나올 옷 다 들고 들어 갔지만 물줄기 떨어지는 소리가 온 몸을 전율케 한다. 저 소리는 누나의 하얀 피부, 고 운 선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의 소리. 샤워기에서 나온 물줄기가 슬픈 목을 타고 가녀린 가위뼈에 잠시 머물다 꿈 꾸는 젓가슴에서 푸후후, 깊은 배꼽을 지나 즐 거운 골반 선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앙증맞은 종아리를 흘러 땅에 부닺쳐 깨지 는 소리. 칸 막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이상한 상상을 했다. 덮치지도 못할 거 이 런 상상하면 뭐 하냐. 맞다, 술 가지고 왔다. 누나가 머리를 탈탈탈 틀며 밖으로 나왔다. "이제 너 씻어." "누나 금방 샤워하고 나왔는데 내가 바로 들어가도 되나?" "왜?" "누나 체취가 남아 있을 거 아냐." "무슨 말이야?" "누나 샤워 옷입고 했어? 다 벗고 했을 거 아냐." "이게, 야시시한 생각을 하고 있어." "나도 남잔데 씨. 니가 방 하나 잡았잖아." "어? 이제 니가,라는 소리까지 나왔어? 호호." "재밌어요?" "응. 너 말 높이지 말고 반말 해라. 그리고 이름 불러." "후후, 내 편한대로 할 거야." "그래 너 편한대로 해. 자기야 빨리 씻고 와." "으흐, 살 떨리네." 누나랑 새벽 한 시까지 침대에 앉아 창 밖을 보며 놀았다. 진짜 신혼 여행 온 기 분이었다. 창 밖 강 빛이 고왔고 거기에 담긴 별 빛이 아름다웠다. 강 건너 편 에 은은한 조명을 받고 있는 예술 회관의 전경도 좋은 느낌으로 다가 왔다. 나란 히 앉아 바깥을 보며 이야기 했다. 창을 열어 길 떠나는 바람에 밤이 시원하다.
침대 밑에 마주 앉았다. 종이 컵에 삼분의 일 만큼 술을 따랐다. "우리 절대 냉장고는 손대지 맙시다." "응." "이건 비싼 술인가요?" "이거? 엑스오 샤보떼? 별로 안 비싼 술이야." "음 다행이군. 딱 한 잔만 마시고 바로 잡시다." "그래." 진짜 딱 한 잔 마시고 잤다. 기분 좋게 각자 침대 위로 올라가 잤다. 이 정도 시간에 같은 방에 있었던 적이 많아 별 요시런 느낌은 들지 않는다. 단지 낯선 곳이라 알 수 없이 피어오는 정감, 누나를 바로 곁에 둔 묘한 설렘이 있을 뿐이 다. 미소 지으며 잠을 청했다. 여행 끝나면 내 마음이 좀 달라질까? "철수야 손 줘 봐." 난 팔 하나를 건네 주었고 누나는 내 손을 꼭 쥐었다. 누나는 건너 편 침대에 서 한 손을 내어 한 동안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저 여자가 진짜 아주 많이 날 사 랑하고 있는 걸까? 누나는 십분 쯤 내 손을 잡고 있다 힘 없이 스르르 떨구어 버 린다. 침대 밖으로 내려 져 있는 누나의 하얀 손. 누나는 잠이 들었나 보다. 난 벌떡 일어 났다 . 기회다. 누나의 고운 미소를 보았다. 내 손을 잡고 있었다는 느낌 때문이었을까? 놀러 와 신나서 저러는 걸까? 누나의 얼굴 표정이 너무 아기같고 천진난만하게 즐겁 다. 저런 얼굴 보고 어떻게 덮치냐. 침대 밖으로 나온 누나의 한 손을 이불 속에 다 넣어 주었다. 잘 자게나.
61 회 여행은 즐거웠어요. 여행을 다녀 오고 난 뒤 철수는 내게서 조금 어른스러워 졌 어요. 뭐랄까? 나를 예전보다 믿기 시작했다는 거죠. 정희와 있을 때, 배선배와 있을 때, 그리고 승헌이가 다시 휴가를 받아 나왔을 때 철수의 모습과 행동은 여 유가 있어 보였습니다. "여기서 폭포 있는 곳 까지 갔다가 거기서 조금 놀다 해지기 전에 내려 오자. 그리고 예약 해 놓은 콘도로 가는거야 좋지?" "그럽시다." 그러긴 뭘 그래 치. 철수는 산을 잘 못타더군요. "누나 뭐해요. 빨리 못 걸어요?" "가방이 무거워." "그게 가방이냐 핸드백이지." "그래도 무거워." "이리 줘요." 철수는 진짜 산을 못탔어요. "또 쉬는거야?" "철수야, 그냥 여기서 놀자." "폭포까지는 가 봐야지." "여기 계곡도 좋다." "사람이 너무 많잖아. 좀 더 위로 가면 사람이 적을거야." "그럼 나 좀 업고 가라."
"나 체력 비축된 거 별로 없어요." "여긴 학교 아니잖아. 저기도 누가 여잘 업고 간다. 저 업힌 여잔 참 좋겠 다." "이렇게 부려 먹다 버릇되면 다른 남자 못 만난다?" "쓰, 또 그런 말 한다. 기간 정해 놓지 말랬지?" 철수는 날 십여미터 업고선 올라 갔어요. "안되겠다. 그냥 여기서 놀자." 산을 잘 탔으면 날 업고 계속 갔어야죠. 겨우 십여미터 가더니 숨을 헐떡이면 서 날 욕하더군요. "에이쒸, 누나 몇 키로 나가? 더럽게 무겁네." "뭐야?" "여기 계곡도 괜찮네. 여기서 조금 놀다가 갑시다." 그렇게 오래 놀지는 못했어요. 다른 짓 했거든요. 맑은 계곡 물의 유혹은 참기 힘들더군요. 수영복 가져가지도 못했고 옷 갈아 입을 만한 곳도 없었어요. 커다 란 바위에 앉아 발을 물에 담궈 놓고 있었지요.. 철수도 등산화를 벗더니 맨 발 을 물에 담궜구요. 찹고 맑은 물은 더욱 더 날 유혹하더군요. "여기서 헤엄치고 놀까?" "누나 수영복 가져 왔어요?" "아니. 나중에 옷 갈아 입을 생각하고 그냥 물에 들어가 볼래?" "맘대로 해요." "넌?" "난 안들어 갈거야. 계곡 물 간지럽힌 발은 시린 듯 시원코 녹음 진 이 산의 그림자와 하늘구름 스치는 땃땃한 바위 우에 앉아 덥지도 차겁지도 않은 여기 여름은 참으로 좋구나." "시 쓰니?" "시조 지은거다 바보야. 예전 양반들은 이렇게 더위를 피했을거 아냐. 난 양반 이라 함부로 물에 들어 가지 않을 거라는 얘기지요." "너 지금 나보고 바보라 했지?" "풍덩!" 물 튀기는 소리 참 좋다. "우쒸! 들어가려면 혼자 들어가지." 철수를 떠 밀어 넣고 나도 입고 있는 옷차림 그대로 물에 들어 가 보았지요. 살 떨림. 짜릿했어요. "들어 갈때는 좋았지?" "춥다. 어디 옷 갈아 입을 때 좀 찾아 봐." "허! 사방에 사람들이다. 어디서 갈아 입을래? 누나 옷 금방 마르겠네." "그래서?" "여기 누워 옷 말리면서 낮잠이나 잡시다." 주위 사람들이 뭐라 그랬을까요? 다큰 년,놈 이건 철수나 쓰는 말인데, 둘이 와 서 옷 입은 채로 물에 들어 가 놀다 바위 우에 나란히, 전 등을 돌려 다소곳이 누웠지만 철수는 큰 대자로 눕더군요. 하여간 잠시 잠이 들었어요. 조금 더 시간 이 지나면 아주 좋은 추억이 되겠더라구요. 지금은 조금 부끄럽기도 하지만요.
결국 목적한 폭포 있는 데까진 반도 못 올라 가보고 내려 왔어요. "발 안 아파요?" "아퍼." "샌달이 좀 불안해 보인다." "나 발톱 나간 거 같애." "업어 줘요?" "싫어." "왜?" "더 이상 쪽팔리기 싫어." "치. 근데 콘도가 어디야?" "아까 버스 내리는 곳에서 봤잖아." "그거에요?" "응." 피곤했던지 콘도에 들어가자 마자 옷 갈아 입고 잤어요. 이 번엔 방이 두개라 손 잡고 잘 수는 없었지요. 철수는 온돌 방에서 자고 난 침대 방에서 잤어요. "한 잔 만 해요?" "그러지 뭐." 자다가 일어 나 술 한 잔 마셨어요. 아마 새벽 한 시쯤에 일어 났죠. 밤 새도 록 재미없는 훌라만 쳤던거 같애요. 둘이서 말이죠. "이제 그만 하자." "그래. 누나가 몇 번 받을 거 있지?" "나 12 번." "나는 14 번이니까. 누나가 내게 두 번만 해 주면 되겠네." "무슨 남자가 그래?" "왜?" "아니다. 눈 감어." "다른 감정 안 들게 조심스럽게 해." "다른 감정이라니?" "덮치지 않게 하란 말이지." "덮쳐 봐. 서울 가서 당장 아버님게 이르고 식 올리자." "말 자알 한다. 빨리 해." 뭐 했을까요? "안 들린다." "서방님." "꼭 눈감고 들어 야 되나?" "그래야 느낌이 들지. 서방니임." "오냐." "서방님." "어? 두번 인데..." "너도 한 번 해." "꼭 해야 돼?" "응." "아씨 마님." "기분이다 뽀뽀한 번 해 주께." "덮칠 수도 있는데?" "그러고 싶니?"
참 유치하게 놀았지만 재밌었어요. 둘이 있을 땐 참 좋았는데... 다음날 늦게 일어 났지만 고생 고생 하며 노고 단 구경도 하고 계획대로 남원 가 기차 타고 서울로 왔어요. 이제 당분간은 철수가 삐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잠시 잊었던 사람이 돌 아 왔습니다.
62 회 창 속에서 사라지는 밤 빛 작은 조명들, 기차 소리는 적막을 깨고 달렸고 난 어 딘지 알 수 없는 어둔 바깥의 풍경을 상상하며 철수의 어깨를 기대고 서울로 돌 아 왔습니다. 그 기억 당분간은 잊혀지기 힘들 것 같네요. 해 트는 서울역 부근 식당에서 마주보며 먹은 설렁탕의 맛도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졸린 눈을 하 고 나를 보던 철수의 미소가 습기 찬 아침을 담백하게 해 주었고 그 모습은 여전 히 내 곁에 머물고 있습니다. 지금은 내 곁에 없지만 철수는 승헌이 때문에 이 번주도 삼 일을 율전에서 보내 고 갔어요. 내가 자기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걸 어느 정도 깨달은 모양입니다. "누나가 생각해도 얘보단 누나가 낫지?" "응. 당연히." 철수가 승헌이 애인 사진을 들고 와 묻더군요. 승헌이는 불만 스런 표정이었어 요. "야, 본인에게 그렇게 물어 보면 열에 아홉은 다 자기가 낫다고 그러지." "나의 은정씨는 열에 아홉이 아니야. 하나야. 오니 원." "후후, 고맙다 철수야." "그래도 누나 공주병 증세는 고쳐야 돼. 하여튼 승헌이 니 연인보다 내 연인이 훨씬 더 예쁘다는 건 알아 둬라. 그렇죠 누나?" "그럼." 철수가 서울로 돌아 간 지 이틀이 지났습니다. 내일 오전엔 다시 철수를 만나겠 군요. 금요일 밤 내 방침대에 누워 풋풋한 웃음을 맺어 봅니다. 잠 들 준비를 마치고 눈을 감았는데 헨드폰이 울렸습니다. 철순가? "여보세요?" "안녕. 나 누구게?" "엉? 승주씨?" "그래 나 승주. 지금 공항이야. 수속 다 밟고 비행기 탈 준비 하고 있어." "귀국하는거야?" "응. 내일 오후 두시 이후에는 한국 땅을 밟고 있을거야." "그래? 야, 잘됐다." "하하, 반겨 주는구나. 너 어디니 지금?" "여기 율전." "서울 안갔니?" "내일 아침에 가야지." "부탁하나 하자." "뭐?" "내일 나 좀 마중 나와 주라." "응?"
"6 개월 어학 연수 갔다 오는건데 부모님 나오시라 하기가 그렇잖아. 그렇다고 외국 나갔다 귀국하는 건데 아무도 마중나와 있지 않으면 서운할테고..." "나 보고 싶었다고 얘기해 그냥." "그래, 많이 보고 싶었다." "외국물을 먹긴 먹었나 봐. 영어 실력은 늘었니?" "뭐 가벼운 대화는..." "내일 두 시쯤 도착하니?" "응." 승주는 반가운 사람이지요.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니까요. 오랜만에 그를 본다 는 생각이 철수를 잠시 치워버리더군요. 토요일 아침 일찍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외모에 신경을 좀 썼어요. 엄마 차 를 빌렸습니다. 병원까지 가서 말이죠. 철수에게 연락 한다는 걸 생각지 못했어 요. 약속 시간 거의 다 되어 오늘 바쁘다는 연락을 했습니다. "나갈 준비 다했는데..." "미안해. 오늘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어. 다음에 만나자." "할 수 없지 뭐. 근데 무슨 급한 일이야?" "안 가르쳐 줄래." 철수에게 승주 만난 다는 얘기를 할 수가 없죠. 아니다, 해서는 안되죠. 녀석 이 승주 때문에 자기 만날 약속 취소한 걸 안다면 분명 삐칠 겁니다. 미안해. 승 주가 반 년만에 귀국하는데 모른 척 할 수가 없잖니. 승주는 환한 웃음을 띠고 귀국 했습니다. 예전과 좀 달라 보였습니다. 멋있어 졌다고나 할까요? 낯선 땅에서 혼자 육개월을 보냈으니 성격 하나 쯤은 달라졌 을 수 있습니다. 여유가 있어 보였습니다. "흠, 여전히 예쁘네." "응? 넌 조금 샤프해 진 것 같다?" "거긴 모두가 운동 하나 씩은 취미생활로 하고 있더라. 나도 어쩔 수 없 이..." "좋아 보인다." "예전 나보고 살 좀 쪄야겠다고 했잖아. 운동한 덕에 체중이 좀 늘었어." "얼굴은 오히려 더 갸름해 졌어." "이 팔 안 보이니?" 후후, 얘도 귀여운 구석이 있었군요. 팔 근육을 자랑삼아 보여 줍니다. "집까지 태워줄게." "차 가지고 왔니?" "응." "흠, 집에 바로 들어가기 싫은데..." "너네 동네서 차 한잔 하지 뭐." 승주는 육개월 만에 날 보았는데 예전보다 오히려 더 자연스럽습니다. 군대 갔 다 와서도 날 대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오늘 그의 모습은 호감을 많이 주 는군요. 잠시간 나눈다는 차 한잔의 시간이 두 시간을 쉽게 넘겨 버리더군요. 이런 저 런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그의 입에서 철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철수와 진짜 연인사이 하기로 한거야?" "흐음. 응." "하하. 둘이 잘 어울려 보이긴 해도 니가 연하에게 감정을 가질 줄은..."
"미안 해." "나에게 미안해 할 거 없어." "그렇지만... 예전 학교에서 내게 꽃 다발을 안겼을 때, 나와 친구할 생각으로 찾아 왔던 건 아닐 거 아냐. 친구였으면 헤어지지도 않았을테지만." "흠, 그래도 그때 일 때문에 이렇게 네가 날 마중나와 주었잖아. 그럼 됐지 뭐." "어른스러워 졌다?" "그렇게 보이니?" "응." "참, 대학원 생활은 할 만 해?" "그런대로. 너 가을에 복학 할거지?" "응. 하하, 내 대학 생활의 마지막 학기네. 하하." "철수랑 같이 졸업하겠다."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그 애와 진짜 사귀는 거니? 그냥 예전 친하게 보였던 남자들 처럼 그런거니?" "나 그런 말 듣기 거북해. 남들에겐 어떻게 보였는지 몰라도 당시 내가 마음에 두었던 남자는 너 하나였고 지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철수 걔 하나야." "흠. 진짜 사귀나 보구나." "그럼 가짜로 사귀니?" "흠, 기대하긴 힘들겠군." "뭘?" "아니야." "기대하지마. 걔하고 결혼 할 마음까지 생겼으니까." 편하더군요. 승주에게 선을 그어버리니까 그가 친구로서 마냥 편하더군요. 예 전 내가 그에게 괜한 부담을 주었구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들어 가 봐." "그래, 마중나와 줘 고맙다." "당분간 바쁘겠다?" "응." "편할 때 연락 해." "그럴게. 철수에게도 안부 전해 줘라." "하하, 그건 잘 모르겠다." "응?" "잘 들어 가." 승주와 헤어졌을 때 해는 하늘 가를 빨갛게 물들이고 있더군요. 철수 얘를 만나 서 저녁이나 먹을까? "저기 저 은정인데요..." "누구? 나이 많은 처자?" "네." "우리 철수 자는데?" "저녁은요?" "나 말인가 철수 말인가?" 철수 아버님은 꼭 제가 전화하면 장난을 치시는 것 같아요. 내 꼴이 좀 우습지 만 싫지는 않습니다. 철수 아버님은 무뚝뚝하시고 근엄하신 것 같지만 또 한 재미도 있으세요. 어렵게 느껴지던 느낌들은 가신지 오래 되었지요. 이러다 가 아버님과도 정드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아버님은 드셨어요?"
"아버님? 내가 왜 자네 아버님인가?" "네?" "그 듣기 싫은 말은 아니구만. 철수 깨워 줘?" "아니에요. 그냥 저에게서 전화 왔었다고만 전해 주세요." "예쁘게 생겼나?" "네?" "자네 예쁘게 생겼냐고?" "에... 솔직히 말씀드려도 될까요?" "응, 그래." "매일 듣는 편이에요." "예쁘다는 소리 말인가?" "푸 네. 죄송합니다." 웃음이 나오는 걸 참지 못했어요. 우리 아빠보다 나이가 많으신 걸로 아는데 최 근들어 많이 친한 척 하시네요. "말해놓고 웃는 걸 보니 그렇게 예쁘진 않나 보네." "예쁜데요." "자네 아버님 연세가 어떻게 되시나?" "오십 둘입니다." 우리 아빠 나이는 왜 물어보지? 다음 날 철수가 우리 집에 찾아 왔었어요. 하품 하며... "아침부터 왠 일이야?" "이거 우리 아버지가 갖다 주래요." "뭐야?" "보약인가 보죠. 우리 아버지가 누나 좋게 봤나 봐. 누나 아버님 드리래." "어? 허허." "나 갑니다." "야, 오늘 뭐 할거야?" "개강이 한 주 밖에 안 남았잖아요. 오늘은 쉬어야지." "어제도 쉬었잖아." "내일 부턴 학교 내려 가 있을거야. 내일 봐요." "또 삐쳤니?" "뭘?" "어제 내가 약속 취소했다고 삐친거야?" "내가 무슨 어린애냐?" "어린 애잖아." "씨이..." "오늘 야외로 드라이버나 갈래?" "안 가. 승주형 오지 않았어요?" "응?" "돌아 올 때쯤 되었는데..." 물끄러미 철수를 쳐다 보았습니다. "왔지?" "몰라. 아버님께 이거 감사하다고 전해 드려." "그러지 뭐. 왔지?" "왜 그래 너?" "그냥 물어 보는거야. 괜히 신경쓰고 있어. 나 갑니다." "잘가. 나중에 연락 해."
63 회
"요즘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냐?" 솔직히 네,라고 대답하고 힘들다. 그래도 마냥 논 것은 아니다. "그런대로 하고 있습니다." "이제 대학 생활 마지막 학기다. 앞으로 뭘 할지는 생각하고 있느냐?" "네. 대학원 진학해서 석사학위를 받고 연구원으로 취직할 생각입니다." "너무 일찍 직장 생활 시키기는 싫지만. 하긴 군대를 안갔으니까 사회 경험이 남들 보다 늦은 편이구나." "네." "그 은정이라는 애는 너보다 두살 많다고 했지?" 우리 아버지시지만 기억력 진짜 나쁘시네. 수십 번은 물어 보신 것 같다. "네." "걔가 니 애인이냐?" "에?" 울 아버지 기억력은 별로신데 눈치는 빠르십니다 그려. "애인도 아닌데 그렇게 자주 연락하고 만나고 하진 않을 거 아니냐. 이 번에 반 쯤 마시고 넣어 논 양주도 걔랑 마셨지?" "보셨습니까?" "이 번엔 개 중에 그래도 좀 싼거더라?" "헤헤." "걔 나이가 내년엔 몇 살이냐?" "제 나이 모르십니까?" "26 살이라... 언제 한 번 집에 데려 와라." "왜요?" "쓰으, 녀석이 아버지가 말하는데 왜요라니?" "진짜 데리고 와요?" "그래. 예쁘냐?" "네, 헤헤." "너 요즘 사귀는 여자 있지?" 아버지 시선을 피하며 천정 보고 히죽거렸다. "눈치 채셨습니까?" "하필이면 연상이냐?" "아버지 닮아서 그런가 봅니다." "인석아, 난 니 엄마하고 동갑이다." "아버지가 생일이 늦잖아요." "하여간 잘 생각해서 사귀어라." "제 나이 이제 23 살인데요. 이런 말씀 듣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습니다." "넌 이를지 몰라도 걔는 아니잖아." 아버지도 누나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다. 옛 분들은 여자 나이 25 살 넘어가면 시 집가야 된다고 생각하시나 보다. 짐 싸고 학교 내려 가기 전날 저녁 아버지와 잠시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아버지도 싫어하시는 것 같지 않고 누나에게 가지는 감정도 여유가 있어 기분 이 좋다. 개강 준비로 조금 바빴다. 취직 문제로 신경 쓸 일이 없었지만 정보 공학과는
울 학교가 제일 낫다고 우겨 다른 학교 대학원 갈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신경 쓰야 할 일이 많았다. 자격증 하나 따 볼 생각이다. 우리 과 특성상 자격증 이 큰 비중을 차지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없는 것보단 낫다. 자격증 따면 누나에 게 자랑할 수도 있다. 수강 신청 마치고 계속 도서관을 나갔다. 누나는 개강 하려니 오히려 편한가 보 다. 수,목, 금요일 서울서 등교를 했다. 화요일 오후는 몰랐는데 수요일 오후는 기분이 좀 나빴다. 목요일 점심 때 누나를 찾아 갔다. 연구실로 찾아 가 과감히 노크를 하고선 누 나를 불러 냈다. 연구실 문 안으로 고개를 들이 밀어 배군에게 험한 눈 길로 째 려 보고선 누나를 불러 냈다. "요즘 무슨 일 있어요?" "아,아니. 왜?" "배군이 또 찝적거려요?" "아니. 어제는 내가 태워 달랬어." "그 사람은 믿음이 가지 않아요. 누나? 조심성 같은 건 없냐?" "내가 왜 그 사람에게 조심을 해? 그 사람 우리과 선배야." 또 속 좁다 할까봐 더 이상 말은 하지 않았지만 기분 나쁜 놈 차 얻어 타며 그 것도 조수석에 앉아 호호 거리던 누나가 좀 못마땅했다. 기분 살 나빠지네. 근 데 내 내려 오고 난 다음 왜 서울서 등,하교를 하는거야. 주말에 집에 가지 않았다. 벌써 군 복무를 마치고 학교로 찾아 오는 놈들도 있 었고 방학 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들도 대거 학교로 몰려 왔었다. 술도 한 잔 해 야했고 녹 슬지 않게 당구 실력도 다듬어야 했다. "야 새꺄 음주 당구 치지마." "끄덕 없어. 너도 마셨잖아." 물론 나도 마셨지만 난 적당히, 넌 왕창이잖아. 동엽이 새끼 저거 분명 대마초 피는 것 같다. "야이, 아무리 음주 당구라고 빨간 공을 치냐?" "그랬냐?" "너 새꺄?" "뭐?" "히로했는데 왜 안 박냐?" 여러 친구들과 어울리니까 좋았다. 수업도 별로 없는 이학기, 누나 없었으면 이 놈들과 마냥 망가질 것도 같았다. 학기가 시작 되었다. 가슴이 뛴다. 4 학년 2 학기. 취직을 생각하는 선배들과는 마지막 학교 생활이 시작되었다. 월요일 아침 기분이 별로 좋지 못했다. 토요일 일요일 신나게 친구들과 어울렸 지만 월요일 오전 홀로 등교하다 기분이 나빠졌다. 이틀 동안 누나에게서 삐삐 가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오늘도 연락이 없다. "누나." "어서 와." "약 장사 잘되요?" "개강 하려니까 그런대로... 오늘은 왠 일로?" "누나 요즘 얼굴이 펴이네요?" "흠."
"짜장면 하나 만 시켜 줘요." "여기서 먹게?" "네." "안돼." "왜요?" "낮에 누구 올거야." "누구?" "흠." 배시시 웃는게 남자 생겼나 보다. "선 봤던 남자와 사귀는 거야?" "으응." 누나가 고개를 끄덕 거렸다. "잘하면 식 올리겠네." "내년 쯤에는 아마." "진짜?" "내가 식 올리게 되면 부케는 은정이더러 받으라 할게." "참, 은정이 누나와는 자주 연락해요?" "간혹, 가까운 곳에 있지만 코 앞이 천리길인가 보다. 자주 안 만나지네." "친구끼리 좀 잘 지내요." "그렇게 해야지." "참, 승주씨 왔나 보던데?" "에?" "하하, 말하지 말랬는데..." "은정이 누나가 그랬어요?" "응, 니가 자주 삐치니까 승주 얘기는 가급적 하지 말랬는데. 내가 요즘 좀 정 신이 없다." 승주가 왔다. 내가 그렇게 자주 삐쳤나? 씨이, 저번 주는 그럼 승주 만나기 위 해 서울 갔었던 건가? 왜 숨기지? 그것도 내가 이해 못할까봐. "누나 오늘도 서울 가는거야?" "응, 집에 일이 생겼어." "무슨 일인데?" "너에겐 말하기가 좀 그렇다." "남자 만나러 가냐?" "그런 쪽으로 밖엔 생각 못하니?" 이해 할수 없다. 승주는 애매할 때 외국을 나갔었다. 그가 다시 접근해 온다면 누나는 분명 흔들릴 것이다. 누나가 그를 사랑하고 있을 때 난 그냥 타인이었 다. 그가 없을 때 누나와 연인이 되었다. 내가 승주를 질투하는 것이 이상한가? 내 속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 개강을 한 주 앞두고 이제 다시 철수와 자주 만날 것이라 생각해 기분이 좋았어 요. 철수 아버님이 주신 보약은 아빠께 전해 드렸고 껄껄 웃으시는 아빠를 보고 철수가 더 좋게 생각 되었지요. 승주는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들이 많았나 보네요. 귀국 한 뒤로 딱 한 번 연락을 하고선 소식이 없었습니다. 내 마음이 이미 그를 떠났다지만 그래도 한 때 좋아한 사람인데 내게 너무 무심한 것 같아 좋은 기분은 아니었어요.
한약 분쟁이 또 터졌어요. 학기 시작하려니 매년 꼭 불거져 나오는군요. 에고, 철수 집안은 부녀께서 한의사고 우리 집안은 부녀가 약사네요. 철수가 아무 말 하지 않으니 저 또한 뭐라 말 할수가 없습니다. 아빠가 좀 바빴어요. 그 문제로 아빠가 약국 비울 일이 자주 생겼지요. 우리 아 빠가 약사 협회 감투 하나를 썼거든요. 저, 엄연한 약사입니다. 약사 자격증 있 는 몸입니다. 아빠 약국엔 약사가 여럿 고용되어 있지만 좀 못 미더우셨나 봅니 다. 저보고 바쁘지 않으면 약국 일 좀 도우라 하시더군요. 목,금 아빠 약국에서 약 팔았습니다. 오후부터요. 초보라고 많이 무시하대요. 처방전 던져 주면 약 찾아 주는 것만 했던 거 같아요. 주말, 휴일도 약국에서 힘 들게 일했습니다. 무보수로... 다음 주도 며칠은 아빠 약국을 나와야 될 것 같아 요. "넌 별 문제 없니?" "이런 변두리 작은 약국이야 뭐." "철수 만나 봤니?" "응." "걔네 아버님은 별 말씀 없어시대?" "몰라." "이게 또 삐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푸후후, 너 애를 하나 데리고 사는거 같애." "그러게 말이야. 내일 한 번 찾아 갈게." "서울이니?" "응." "나 잘하면 내년에 식 올릴 수도 있겠다." "응?" "나 만난다는 사람 있다고 했잖아. 저번 주말에 그 사람 집에 갔었어." "치, 맘에 든대?" "호호, 좋게 본 것 같던데?" "니가 좋아야지." "그런데로 괜찮아." "내일 가서 얘기하자. 잘 자." 약대 생들 또 들고 일어 났다. 심심하면 들고 일어 난다. 학교 등교 길에 약대 생들 줄지어 뭐라 외치는 걸 들었다. 그리고 또 서명을 받는 일을 하고 있다. 후 후, 예전 누나에게 처음 밥 얻어 먹을 때가 생각난다. 저들 속에 누나도 끼어 있 었는데... 그때부터 누나와 친해지기 시작했다. 저들이 지금 어떤 심정인지 몰라 도 내겐 그 모습 속에 좋은 추억 하나가 있다. 배시시 웃었다. 약사, 한의사가 서로 싸우던 말던 나랑 별 상관 있겠냐. 엉? 상관 있잖아. 집에 전화를 해 보았더니 아버지는 별 문제가 없어시다는데 수희가 문제가 있단 다. 수희 잘못 하면 내년에 선배들과 같은 학년이 될 지도 모른다고 한다. 일학 년이야 별 문제가 없다지만 선배들 유급 당하면 어쩔 수 없이 같은 학년에 선 배, 후배로 나뉠 것이다. 피해가 있을 것 같다. 우리처럼 군대 때문에 동학년에 선,후배 나뉘는 것이 아니라 한 학년 정원이 늘어 나는 결과가 온다. 가벼운 문 제가 아니다 이건. 수희는 머리에 이상한 것을 두르고 티비 앞에서 연신 부르르 떨고 있댄다. "어머니, 걔가 이상한 짓은 안해요?" "모르겠다. 직접 와서 봐." "아버지는요?" "아버지야 단골들이 워낙 많고 예전부터 그 문제에 대해선 관조적이셨잖니."
"저 공대가기 잘했죠?" "공부 못한게 자랑이냐?" 내가 한의대 갈 정도는 못됐지만 공부 못한 건 아닌데... 누나가 요즘 내게 소홀하다. 집 안일이 겹쳐 누나에게 상한 감정들이 쌓여간 다. 차라리 한 번 삐치고 나면 풀어지는 데 그러지 못하니까 더 기분이 나쁘다. 속이 좁아 지는 내 자신까지 싫기 시작한다. "뭐 바쁜 일 있어요?" "조금." "승주형 언제 왔어요?" "응?" "승주형 왔다며?" "나 승주 한번 밖에 안 만났다?" "왜 묻지도 않은 말에 답하고 그래요?" "내가 그랬니? 니가 승주 때문에 삐친 일이 한 두번이니?" "자꾸 삐친다 그러지 마요." "화난 거 같다?" "내가 아직도 어려 보여요?" "응." "이...씨." 저 여자 태도는 날 헛갈리게 하고 있다. 내가 그녀의 연인인 것처럼 생각들게 할 때보다 날 여전히 동생으로만 생각하는 것 같아 보일때가 훨씬 더 많다. 그럴 거면 차라리 사귀자는 말을 하지나 말지. 그랬으면 내가 자주 삐치지 않았을텐 데... 내가 근데 자주 삐치나? 구월달도 둘째 주로 접어 들었다. 화요일이었다. 나는 분명 보았다.
64 회 저녁 무렵이었다. 누나는 꽃을 안고 있었고 옆에는 남자가 있었다. 나는 누 나를 만나러 약대로 가다 그 모습을 보고는 숨어 버렸다. 왜 숨었을까? 예전과 는 다른데... 지금은 내가 누나의 연인인데 나는 그냥 숨어 버렸다. 예전처럼 어 설프게 자판기 뒤에 숨은 것이 아니라 밥맛 없는 배군의 차 뒤에 꼭꼭 숨었다. 누나는 뭐가 좋을까? 밝은 모습이다. 나쁘게 말하면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아무래도 누나는 승주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승주도 역시. 그 둘은 여전 히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내가 누나 곁에 있는 모습 보다 더. 승주가 찾아 왔었다. 화요일 저녁 무렵에, 아니 그 전일거다. 내가 그 둘을 본 게 저녁 무렵이었을 뿐이다. 승주가 연구실은 어떻게 알았을까? 승주가 온 뒤로 그 둘은 자주 만났나 보다. 그렇다면 진짜 내가 생각한대로 누나가 서울서 등,하 교를 했던 이유가 승주 때문에?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나 기분 나쁠 만 하지?" "너 의처증 있냐?" "그게 뭐냐?" "니가 거기서 왜 숨냐? 병신이냐?"
"나 지금 심각하게 물어 보는 거다." "이 새끼 진짜 결혼하면 의처증 생길 놈이네. 친구면 만날 수 있지." "시립대 다니는 새끼가 여기까지 왜 내려 오냐. 그리고 누나가 유일하게 마음 을 주었던 남자가 그 새끼야. 내가 잘 삐치긴 해도 의처증 가질 놈은 아니다. 그 냥 불안해서 그래." "하여튼 잡생각 많은 놈은 다르다니까. 승헌이도 그러더니..." "승헌이는 왜?" "그 새끼도 군대가기 전에 얼마나 말 많았는줄 아냐? 내가 너무 걔를 구속하는 게 아닐까?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2 년 넘게 못 볼텐데 그녀에게 기다리라 강요 할 수 있나? 자연스럽게 친구로 생각하면 편하지 않을까? 하여간 공대 새끼 들..." "넌 공대생 아니냐?" "나는 사귀는 여자가 없잖아. 난 사귀는 여자가 생기면 그냥 맘 편한히 내 마 음 이끌리는대로 하겠다." "그렇게 쉬운게 아니다. 내가 왜 이런 놈에게 조언을 받으러 왔을까?" "상대도 네 맘같다고 좀 생각을 해라." "나는 아무래도 그냥 동생인가봐. 누나가 날 대하는 태도가 그래." "니가 누나라고 그러고 너 하는 짓을 보면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 강하게 밀어 부쳐 임마." "처음에 그랬어. 강하게 밀어 부치면 뭘 강하게 밀어 부쳐." "편히 생각해 임마. 같이 학교 다닌다고 너 보면 그 여자를 진짜 선배, 누나처 럼 대해." "그랬냐? 나도 그렇게 생각 될 때가 있지만 잘 안되네." "하긴 너에겐 버거운 상대다." "그렇지? 그냥 맘 좋고 무던하게 생긴 후배나 사귈걸. 그건 그렇고 방 좀 치워 놓고 살아라 새꺄. 나 갈래." "이거 치운건데?" "돼지 마굿간도 아니고... 야, 신동엽?" "왜?" "대마초 피지 마? 나 간다." 답답해서 친구 방에 가 조언을 좀 받았다. 기분이 묘하다. 더런 쪽으로... 내 방에 돌아 오다 누나 방에 불이 꺼져 있는 것을 보았다. 벌써 자는가 했는 데... "딩동!" 한 댓번 눌렀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으으으..." 내 방에 돌아 와 외출했던 복장 그대로 침대에 누워 희한한 상상을 하고 있는 데 삐삐가 울렸다. 누나다. 전화하러 나가기 싫었다. 계속 희한한 생각이나 하련 다. 승주가 작년 가을부터 누나에게 적극적이었다. 누나의 첫사랑. 여자는 첫사랑에 게 약하다. 수많은 영화에서 보아 왔다.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여자에게 아픔을 겪는 두번째, 세번 째 남자들을... 사라져 버리면 모르겠는데 그 첫사랑이 다시 나타나면, 십중 팔구 두번째, 세번 째 남자는 물러나야 하는 것을 보아왔다. 내가 누나를 사랑하는 모습이 영화 같았다. 물러나야 하는가? 마음이 아프다. 왠 떡이냐 싶었다. 그 잘난 여자가 내 애인이라는 사실이 그랬다. 누나를 못 본다면 살기 싫어질 것도 같다. 지난 겨울 첫 눈 올때가 생각난다. 누나와 그렇게 좋은 약속을 했고 기대를 했
었는데, 첫 눈 오는 날 난 혼자였다. 옥상에서 쓸쓸히 첫 눈을 가지고 나 혼자 놀았다. "으으으..." 내가 왜 삐삐를 차고 있는겨. 삐삐를 툭 던졌다. 밧데리가 터져 나가 방바닥에 쳐 박히는 누나가 사 준 삐삐. 나도 쫌만 더 값이 떨어지면 핸드폰 산다 씨. 나는 왜 삐치는가. 속이 좁다. 그래서 슬프다. 승주 새끼는 속이 좁지 않았다. 내가 봤을 때 그는 누나 앞에서 여유로와 보였고 별 희한한 짓을 할 정도로 용기 도 있었다. 그는 이제 곧 사회인이다. 버젓한 직장을 구하면 여전히 학생일 나보 다는 누나와 누나의 사람들에게 더 좋은 느낌을 줄 것이다. 철 없는 나, 그냥 동생만 할 걸. 누나는 외로웠던 것 같다. 옆에서 귀여운 척 하는 나를 자기의 마음을 잘 헤아 리지 못하고 연인으로 받아 들인 것 같다. 더 빠지기 전에 헤쳐 나와야 한다. 난 지금도 많이 빠져 있다. 계속 연인인척 하다가 차이면 누나를 쳐다 보는 것조차 포기해야 될 지도 모른다. 친한 후배고 동생이라면 누나가 딴 남자를 사귀어도 누나가 결혼을 하여도 어쩌다 한 번씩 만 날 수 있다. 존경하는 울 아버지도 누나는 곧 결혼을 해야 할 나이라고 인식했 다. 후, 승주에게 떠 넘기고 난 그냥 동생할까? 내가 잘못 된 것인가? 배군에게 삐치고 친구인 승헌이에게 삐치는 내가 잘못 된 것인가? 잘못됐으면 어쩔겨. 어줍잖은 연인이라는 이름이 날 그렇게 만들었다. 예전에 난 그 정도로 삐치는 인물은 아니었다. 난 경험이 없었고 누나는 버거운 상대였다. 불쌍한 삐삐. 예전에도 저런 적이 있었던 같다. 저건 내가 누나에게 단지 동생 일 때 받았던 선물이다. 밧데리를 끼워 주고 바지에다 넣었다. "으으으..." 이런 씨, 왜 자꾸 치는거야. 다시 던져 버렸다. 아침에 일어 나니 어제 생각했던 것들이 피식 웃음 짓게 만들었다. 내가 왜 그 런 생각을 하는겨. 나는 누나와 연인 사이다. 조금 더 지켜 보자. "여보세요?" "너 어제 왜 전화 안했어?" "내 방에 전화가 없잖아." "부탁하나 해도 되니?" "뭘?" "너 며칠 간만 등,하교 서울서 하면 안되니?" "왜요?" "아, 아!" "주위가 시끄럽다?" "여기 전철 안이야." "누나 전철 안에서 보호해 달라고?" "응." "나를 뭘로 보는거야." "그것 때문이겠니? 요즘 바쁘다 보니 너 만나는 시간이 적으니까 그러는거야." "나도 바빠 씨." "흠, 너 이번 학기에 편하다고 했잖아." "그래도 바빠." "어휴, 저런 걸 애인이라고..." "하기 싫으면 물러." "뭐?"
"왜 자꾸 서울 가는거야?" "그럴 일이 있어. 참, 너네 아버님 별 말씀 안 하셔?" "뭘?" "아니다. 며칠 만 서울서 안 다닐래?" "힘들것 같아요. 어제는 뭐 타고 올라 갔어?" "어제? 헤헤, 배선배 차 타고 올라 갔어." 살 열받네. 아니 많이 열받았다. 어제 승주 왔었다는 얘기는 끝까지 하지 않고 날 뭘로 보는지 갈때 올때 심심하다고 같이 다니자고? 날 배려하는 게 하나도 보 이지 않는다. "어제 밤엔 왜 삐삐친거야?" "너 연락 닿을 방법이 그것 뿐이잖아." "한 번 쳐서 연락이 없으면 자는 줄 알아야지." "왜 그래 너?" "으이씨, 동전 진짜 많이 떨어지네. 끊습니다?" 나 이틀 동안 서울서 등,하교 했다. 기분은 나쁜데 누나 부탁을 거절할 수 있 는 배짱이 없었다. "들어 줄거면서 꼭 처음엔 튕기고 보는 이유가 뭐야?" 이게 날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말이지? 목요일 날 수희가 아주 기분 나쁜 투로 집에 들어 와 머리에 뭘 또 두르고선 전 화기를 들고 내 방으로 오더라. 정신 산만한게 별게 다 심기를 건드린다. "넌 또 뭐하는 짓이냐?" "이 것은 전쟁이다." "무슨 말이야?" "앞으로 은정이 하고 놀지마." 이게 무슨 권리로 누나와 놀지말라는 거야. 아니 참, 얘 친구 중에도 은정이가 있지. "내가 언제 은정이와 놀았다고 그래?" "오늘 걔랑 싸웠어." "뭐 때문에?" "이게 친구 앞에서 약사를 옹호 해?" "한약 분쟁 그것 때문에 싸웠니?" "응. 뭐어? 배운건데 당연히 써 먹어야지?" 그럼 배운건데 당연히 써 먹어야지. 수희는 아주 오랫동안 내 방에 앉아 전화기 만 뚜러지게 쳐다 보았다. "너 뭐하니?" "이게 전화를 안하네?" "무슨 말이냐?" "강하게 나오네. 오빠 내가 먼저 전화 할까?" "뭘?" "은정이하고 싸웠단 말이야. 걔가 전화해서 사과를 해야 내가 그 사과를 받아드 릴텐데..." "니가 먼저 해 그럼." "싫어." "그러면서 전화는 왜 기다리냐?" "친구잖아 그래도." "후, 참."
"이게 진짜 삐쳤나?" "줘 봐. 내가 전화 해 줄게." 나 별로 속 좁은 놈 아닌 것 같다. 내가 은정이에게 전화를 걸어 둘 사이를 대 충 화해 시켰다. 에구, 집단 이기주의 속에 개인의 친한 감정이 괜히 상하는게 아닌가 싶어 씁쓸하다. 은정이와 여러말을 나누었다. 나보고 잘 지내냐고 물었 다. 후후, 얘는 내게 있어 좋은 감정의 소녀다. "대충 화해한 거니?" "네." "가급적 그 문제로 수희와 네가 싸우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너네 둘은 약대 생과 한의대생으로 나뉘기 이전부터 친구였잖아. 둘 사이에선 그 문제에 대해 조 금 관대했으면 좋겠다." "그럴게요." "넌 잘 지내고 있지?" "네." "언제 한 번 영화를 보던지 식사를 같이 하던지 하자?" "후후, 오빠가 사주는거에요?" "내가 잘 얻어 먹고 다니지만 동생들에게까지 얻어 먹겠냐?" "다음에 꼭 사주세요." "그래. 좋은 꿈 꾸고 내일부터는 이 철 없어 보이는 수희랑 다시 잘 지내는거 다?" "후후, 알았어요." 그래 난 이렇게 멋있는 놈이 될 수도 있다. 어른스러워 보이는 행동을 하면서 말이다. 누나는 토요일, 일요일 또 소식이 끊어졌다. 어딜 돌아 다니는거야. 집에 전화 를 해도 핸드폰에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다. 내 의심은 커져 갈 뿐이다. 누나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게 되는 건, 아무래도 요즘 들어 서운한 게 많이 쌓 여 가기 때문일거다. 그리고 의심이 늘어 간다. 진짜 내가 의처증이 있는 그런 이상한 놈인가? 싫다. 그래선 안된다. 나는 누나에게 관대해 질 필요가 있다. 그 럴려면 어짜피 깨질 이 연인 사이라는 관계, 청산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난 누나 와 연인이었을 때나 선,후배 관계였을 때나 별로 달라진 것 없이 친했다. 연인 사이가 되어 괜히 나만 속이 좁아진 것 같다. 맘 편안히 선,후배 관계로 돌아가 고 싶다. 그러면 좀 더 좋은 느낌으로 누나에게 남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럴 까? 누나는 날 그렇게 만들려고 작정을 하는지 날 연인으로 대하지 않고 소홀해 갔다. 승주 얘기는 끝까지 하지 않으면서... 계속 기분이 나빴던 난 추석이 지나고, 우리 아버지가 나이 많은 여자하고 사귄 다면 날 놀리고 뭔가 알 수 없는 기대를 하시는 것 같아 다짐을 굳혔다. 중간 고사가 끝이 나고 누나 방을 찾아 가 내가 생각했던 걸 말했다. "이제 안 바빠요?" "이젠 좀." "승주형하곤 잘 되어 가요?" "무슨 말이야?" "그냥." "너 제발 부탁이니까 승주 의식하지마? 배 선배나 다른 사람에게 삐치는 것은 참을 수 있는데 승주 의식해서 이상한 말이나 태도 보이지마?" "누나가 더 의식하는 것 같은데?"
"너 때문에 그래." "후우." "왜 한숨은 쉬는거야?" "나 다시 그냥 동생하면 안될까?" "응?" "나 누나가 승주형 만났던 거 봤어. 요즘 자주 만났지? 곰곰히 생각해 봤는 데..." "야!" "좀 들어 봐요. 누나에겐 나같이 철없는 나이 어린 놈보다 승주형 같은 사람이 더 어울려 보여." "혹시나 했는데... 너 그러지 마. 너 승주 때문에 삐치면 오래 가고 불안해." "내가 지금 삐쳐서 장난같이 하는 말로 들려요? 왜 날 자꾸 어린 애 취급 해? 그러니까 이러잖아." "그래 그건 내가 고칠게. 그러니까 너도 고쳐." "그냥, 예전처럼 선,후배 사이 합시다. 누나는 누나대로 좋아하는 사람 찾고, 나는 나대로 좋아하는 사람 찾는거야. 그래도 선,후배 사이니까 어색한 사이는 안될거 아냐." 누나가 겁나게 날 째려 보았다. "그런 얘기 하지 말랬지?" "그 말투가 싫었어. 예전에는 몰랐는데 동생이 아니고 애인이라 생각하니 듣기 가 싫었어. 그리고 계속 내가 생각하는 속이 좁아져." "나도 반성하는 게 있어. 천천히 고쳐가면 돼. 너 나중에 또 빌거지? 나도 너 그런 태도는 힘들다? 이 번엔 내가 삐칠지도 몰라?" "맘 편안히 승주형 만나요. 누나가 좋아했던 사람이잖아." "야, 박철수! 나 진짜 화낸다?" "지금 그 말투? 아니다. 내 표정이 지금 삐친 표정같이 보여요?아니잖아." "허! 나중에 다시 얘기 해." "나중에? 그럼 뭐가 달라지는데? 나 오래 생각하고 얘기하는 거야." "어째 승주 얘길 한 동안 안한다 했다. 정 못 믿겠으면 같이 승주 만나. 승주 앞에서 우리 둘이 사귄다고 얘기 해 줄게." "유치하게 그 무슨 짓이냐." "너 지금 유치하게 굴고 있어." "누나, 나 방 뺄까? 당분간이지만 충분히 집에서 등,하교 할 만한데 괜히 방 잡 고 있는 것 같애. 졸업 할 때까지만 집에서 등,하교 하고 싶어. 그리고 누나 학 교 떠나면 보기 힘들텐데 지금부터 준비해야지. 이제 일년 정도 밖에 안 남았 네." "함부로 말하면 나중에 후회한다 너?" "삐쳐서 하는 말 아니라니까." "지금 절교 선언하는거야?" "절교라니, 헤어지기 싫어서 다시 동생하고 싶은건데." "그게 가능하니? 너 지금 이러는 건 헤어지자는 소리야." "헤어질 일이 뭐 있다고. 예전으로 돌아가기 위해 당분간만 떨어져 살자는 소리 지. 어짜피 학교에서 보잖아.." "말이 이상하잖아. 너 왜 그래?" "참 많이 듣는다. 너 왜 그래. 이런 소리 듣는게 싫어. 그 말은 내가 싫게 변 해 간다는 말이잖아요. 그 소리 너무 많이 들었어. 앞으로 그 소리 안 듣도록 노 력할게." "야!" "나 내 방 갑니다."
"그래 가." "화났어요?" "너 같으면 아무렇지도 않겠니?" 째려 보지 마라. 갑자기 기분 나빠 지려고 한다. "울어요? 누나 그거 고쳐요. 분에 못이겨 눈물 흘리는 거." 졸라 두들겨 맞았다. 화가 나서 그런지 몰라도 제 분풀이로 누나가 날 때렸다. 야이, 넌 안 아프겠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맞는 나는 아프다 씨. 기분 풀어지면 예전으로 돌아가는 거야. 나 멋있는 놈 되고 시퍼요. 누나의 행복을 빌어 줄 수 있는 멋있는 놈. 푸하하, 가슴이 아프다. "나중에 니가 한 말이 후회스럽다 생각되거든 바로 와. 아니면 늦을거야. 나도 지금 많이 삐쳤거든." 에이 모르겄다 씨. 내 방으로 그냥 와 버렸다.
65 회 후회 되었다. 방에 돌아 오자 마자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후회되었다. 왜 나는 속이 좁은 놈인가. 내가 싫다. 다른 사람에게도 이럴까 두려움도 들었다. 누나에게 맞은 데가 아프다. 왜 때린거야. 누나가 눈물 흘리는 모습이 내 마음 을 아프게 하고 있다. 돌아 가서 잘못했다고 빌까? 그러기 싫다. 난 속 좁은 놈 이 되기 싫다. 나는 왜 누나를 믿지 못하고 불안한 존재로 생각했을까. 그건 아 마도 내가 불안했고 나를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다 미래를 생각해 보면 난 너무도 평범하고 무료한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아침 일찍 누나를 찾아 갔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다. 한 번 삐쳤다가 바로 잘못했다고 빌었던 거. 내가 잘못 한 것이 무엇인가? "학교 안 가요?" 누나는 잠옷은 아니지만 가벼운 옷차림으로 침대에 앉아 나를 물끄러미 쳐다 보 았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너 또 빌러 왔지?" "뭘요?" "이 번에는 받아 주지만 다음엔 그러지마?" 왜 또 내 기분이 살 나빠지냐. "내가 그처럼 이랬다 저랬다 했어요?" "가끔씩." "누나하고 사귀면 점점 더 어린애처럼 되겠다. 학교 안가요?" "어제 했던 말 없었던 걸로 하는거지?" "아니요. 시간을 갖고 난 내 모습을 찾을래요." "으응?" "연인사이 하기 싫다." 나 누나 방에서 쫓겨 났다. "그 맘 바뀌기 전에는 나 찾지 마. 빠른게 좋을거야. 내 마음 완전히 돌아서기 전에..." 왜 나만 바뀌어야 돼? 내가 한 두번 당하냐. 누나는 날 쉽게 버리지 못할 것이 다. 잠시만 시간을 갖고 좀 더 여유를 찾으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누나 가 삐치지 않는 철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졸업을 하고 대학원을 가게 되면 좀 나아지겠지. 이제 누나가 누구를 만나 건 나를 어떤 식으로 대하던 난 삐치지 않을 것이다. 난 이제 사소한 것에 삐치지 않을거다. 그래야 자연스럽게 누나를 대할 수 있고 좋은 모습 보여줄 수 있다. 누나에게 연락이 없다. 기다려지기도 했으나 난 여유롭게 대처해야 했다. "일찍 와 있었네요?" 일주일 째 누나를 보지 않고 난 잘 견디어 냈다. 떠났다는 마음이 들지 않으니 그리고 좁은 속이 아니라 보고 싶기는 해도 딴 생각은 스미지 않았다. "나 어려 보이니?" "아뇨." 그렇지. 휴일을 맞아 은정이와 데이트를 했다. 내가 생각하기로 난 은정이에게 좋은 모습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어른스럽고 여유가 있는 모습으로 말이 다. "넌 남자 친구 없어?" "아직은. 제 또래 남자들은 어려 보여서 친구 이상으로 안 보여요." "내 친구 소개 시켜 줄까?" 이 얼마나 여유로운 모습인가. 얘는 별로 여유로와 보이지 않는다. "오빠는 여자친구 있어요?" "나? 없지." 학교 생활은 단조로왔다. 그냥 내 느낌 상으로 무료했다. 대학원 갈 준비를 했 고 나름대로 기사 자격증 따려고 공부도 했다. 좀 재미가 없다. 허전해서 그런 가 보다. 아침에 학교 가서 밤이면 자취방으로 돌아 왔다. 누나 방을 지나치면서 불이 켜 져 있으면 미소 지었고 불이 꺼져 있으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바로 근처에 살 고 있는 누나가 많이 그립다. 다시 한 주가 지났다. 가을이 다 가고 있다. 자취방 길 가의 강냉이들이 올해도 변함없이 탐스럽게 영 글고 있다. 후후, 언제 한 번 누나와 또 서리를 해야 겠군. 작년 이 맘 때 누나 와 저 것들을 서리할 때가 생각난다. 참 좋았던 기억이다. 난 누나를 사랑하지만 그 느낌을 아직 잘 모른다. 그냥 좋은 것일까? 뭔가 변하 는 것이 있다는 데. 느낌으로 주체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는 데, 나는 누나와 사 귀면서 그런 것들 보다는 싫게 변하는 나를 보았다. 나는 그냥 누나를 좋아한 것 일까? 후후, 맏이로 커 오면서 느낄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누나 때문에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도 정서가 비슷한 사람에게 기대고 싶었나 보다. 응석도 부려보고 투정도 해 가면서 맏이가 가질 수 없었던 그 무언가를 느끼며 누나를 좋아했었나 보다. 그걸 서툰 사랑의 감정이라 생각했으니 삐쳤겠지. 이제 자연스 럽게 예전의 나로 돌아 가자. 누나에게 연인 하기 싫다는 말을 뱉은 지 20 여일 만에 누나 방을 찾아 갔다. 바 로 이웃에 살면서도 제법 긴 시간 왕래도 아무런 소식도 주고 받지 않은 채 잘 도 보낸 것 같다. 어! 어랏! 이런... 누나가 방을 빼 버렸다. 언제 빼 버린겨. 심한 배신감이 들었다. 내게 한 마디 말도 없이 방을 빼버려? 아참, 내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 쫓아 갔다. 전력 질주로 학교로 뛰어 갔다. 급회전!
"누나!" "철수 왔구나." 정희 누나 약국을 찾아 갔었다. 그녀에겐 누나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기 에... "모르겠는데?" "에? 은정이 누나 안 만났어요?" "몇 번 보긴 했는데 아무말 없었어." "그래요?" "은정이에게 무슨 일 있니?" "방을 뺐대." "응? 왜?" "모르지." "너네 둘은 여전히 잘 지내고 있는거야?"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어요?" "응. 혹시 싸우고 삐쳤니?" "아니. 은정이 누나가 내 얘기 안해요?" "별 다른 얘기 없었어. 야, 나 좋은 일 있다?" "별로 안했어...?" "나 좋은 일 있다니까?" 좋은 일? 있으면 있는거지... "뭔대요?" "나 아줌마 된다?" "아줌마 되는게 좋냐? 아가씨가 더 좋은거야." "씨이... 나 결혼 해." "언제?" "내년 2 월달에." "아직 한 참 남았잖아." "이게 진짜. 야, 축하해 줘야지." "누구랑 하는데?" "그 남자." "이 남자도 저 남자도 아니고 그 남자? 그 남자가 누군데?" "선 보고 사귀기 시작한 남자." "그래요? 좋겠수." "흠. 그래." "왜 결혼하기로 한거야?" "잘 모르겠어. 하지만 괜찮을 것 같았어." "그런 맘 가지고 결혼을 결심한 거야?" "뭐 다른 게 필요해?" "많이 필요하지." "부족한 것은 살면서 메꾸지 뭐." "내년이면 아줌마야? 약국은?" "계속 할 거야. 그 사람도 수원 쪽에 있을 테니까." "포스트 아가씨라 불러야겠네." "뭐야?"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고 은정이 누나 어디로 이사 간 줄 몰라요?" "이사 간 줄도 몰랐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씨, 내 결혼한다는 것보다 은 정이가 방 뺀게 더 중요해?" "그걸 말이라고 해요? 누나가 딴 남자에게 시집가는 게 나한테 뭔 의미가 되
냐." "치이." "은정이 누나에게 전화 한 번 해 봐요." "싫다." "누나도 속이 참 좁네요." 누나! 어디로 간겨. 왜 방을 뺀겨. 약대 연구실로 찾아 갔다. 아주 망설여졌지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연구실 문을 노크했다. "저기요." "어! 철수군." "누나는 어디 갔어요?" "잠시 나갔는데. 곧 올거야." 여유를 갖기로 했지만 배군은 여전히 꼴 보기 싫다. 누나와 많은 시간 같은 공 간에서 지내는 사람. 연구실이 보이는 자판기 앞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이 자판기 커피 누나가 참 많이 뽑아주었던 것이다. 커피 맛이 좋다. 여운과 기억 때문에. 뭐야 이거. 누나가 오는 모습이 보여 자리에서 일어 서 반갑게 웃었는데 누나 가 날 본척도 않고 내 앞을 지나쳐 갔다. "누나!" 불렀는데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은정이 누나! 홍은정씨." 에이쒸, 연구실로 들어 가 버리면 이야기 하기 어려울 것 같아 뒤쫓아 가 붙잡 았다. "왜 잡는거야?" "불렀는데 왜 대답을 안해요?" "내가 왜 대답을 해야 되는데?" "방 뺐어요?" "무슨 상관이야?" "왜 그래요?" "내게 무슨 볼 일 없지? 나 들어가야 돼." 이거, 누나도 삐칠 줄 아네. 상당히 심각하네 이거. 이런 모습은 분명 누군가 가 누군가에게 차일 때 상황하고 비슷하다. "잠깐 얘기 좀 해요." "싫어." "아 진짜 속 좁네." "뭐야?" "방 왜 뺀거야? 어디로 이사 갔어?" "너 서울서 학교 다닐거라며? 나 때문에? 그래서 뺐어." "에? 나 계속 여기 있을 건데." "있어라." 흠, 저 표정 저 말투 왜 마음에 들지 않는걸까. 당연히 나에게 화내는 것인데 마음에 들리 없지. 하지만 위협적이지 못했다. 나는 누나의 표정을 보고 큰 어색 함을 느끼지 못했다. 저 태도는 익숙하다. 내가 잘못했다는 말을 해 주길 바라 는... 그리고 날 어린 애 취급 하는 것이란 걸...
"잘 지냈어요? 커피 한 잔 뽑아 드려요?" "됐어." "한 잔 마셔요." 종이 컵을 누나에게 건넸다. 누나가 그 걸 받았다. "정희 누나 시집 간다고 그러대?" "그래." "누나 나이가 벌써 그렇게 됐나?" "적령기지." "승주형은 잘 있어요?" "야!" "배군도 그런데로 괜찮을 것 같다." "무슨 말이야?" "괜찮으면 결혼하는 건가봐." "뭐야?" "어디로 이사 갔어요?" "집에서 다닐거다." "가능해?" "나 차 뽑았어." "허허! 돈이 많긴 많나 봐." "그런 식으로 얘기할래?" "올해는 나 혼자 서리해야 겠네. 들어 가 봐요." "엉?" "나 갈래. 뭔가 씁슬하다." "너 빌러 온거 아냐?" "뭘? 내 왜 비는데?" 누나가 갑자기 울먹거리더니 날 때렸다. 쪽팔려 죽는 줄 알았다. 왜 껄핏하면 우는거야. 그리고 왜 때리는거야. 우쒸, 도대체 남자 알기를 뭘로 아는거야. 날 원망스럽게 쳐다 보는 누나를 흘낏 흘낏 뒤돌아 보며 약대를 나왔다. 좀 더 시간이 필요한가? 근데 내가 뭔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약대 앞에 임시 넘버를 달고 있는 흰색 아반떼를 보았다. 안을 살펴 보았다. 이 찬가? "저 비켜 주시겠어요?" 뒤를 돌아 보니 멀쩡한 아가씨가 열쇠를 들고 날 수상한 눈초리로 쳐다 보고 있 었다. "이 차가 댁의 차요?" "그런대요." "잘 타고 다녀요." 아닌가 보다. 약대 건물 주위를 다 돌아 다녀 보았다. 새 차는 보이지 않았다. 하여간 은정이 누나 저거 집에서 귀한 자식인가 보다. 대학원 생이 중형차를 타 고 다녀? 공주병은 여전하군. 자취방 건물 앞에 주차 되어져 있는 은색 소나타 승용차 안에서 누나의 헨드백 을 발견 했다. 새차다. 왜 여기다 주차 시켜 놓은겨. "잘 사시오. 홍은정씨. 철수가? 철수가 누군지 알지?" 너무 깨끗해서 손가락에 흙묻혀서 본네트 위에다 저렇게 써 주었다.
66 회 세상 모든 장남들이 세상 작은 일에 따지지 말고 대범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요 받는다. 의미심장한 말이다. 정희 누나가 결혼 한댄다. 참 오랫동안 사귀었던 그 철규란 놈은 그냥 잊혀지 게 생겼다. 그런겨? 나도 이제 곧 대학을 졸업한다. 언제까지나 어린 애처럼 굴 수 없다. 난 좀 더 현실적이 되어야 하고 철이 들어야 한다. 내가 은정이 누나에게 했던 일들이 참 우습다. 연인이라 생각하며 사소한 것에 삐치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연인 사이를 관둬야겠다고 생각했으며 내 마음대로 상황 판단을 하고 그 결과 난 지금 누나를 그리워 하며 혼자 청승을 떨고 있다. 나 왜 이런겨? 생각이 많은거야, 아니면 철이 없어 그런거야. 누나가 참 황당하 겠다. 하지만 난 변명을 해 본다. 정희 누나, 그럴 것 같지 않던 정희 누나가 결 혼을 한다. 단지 괜찮을 것 같다는 그 이유로. 은정이 누나도 곧 그럴 것이다. 난 괜찮을 것 같지가 않다. 그 이유로 누나에게 버림 받기가 싫었다고 변명해 본 다. 밤 깊은 시간에 자취방 건물 밖을 나왔다. 누나가 살던 방은 깜깜하다. 저 방 의 불이 다시 켜 질 때는 아마 다른 사람이 이사 와 있겠지. 십중 팔구 남자다. 으, 싫다. 주위를 살폈다. 바스락 소리가 날까 주의를 기울이고 도둑 고양이처럼 강냉이 밭에 숨어 들었다. 누나 생각 때문에 웃었다. 하하, 그 여자 참, 망을 보라 했다고 진짜 망을 서 주었던 내 기억 속 그 여자가 참 좋다. 오늘은 왜 나 혼자인가? 나 때문이지비. 세 개만 서리를 했다. 아주 탐스럽게 익은 걸로 더 할 수 있었지만 세개만 꺾었 다. 포획물을 보고 씩 웃었고 누군가가 그립다. 나 태어나 이런 짓은 처음 해 봤다. 서리한 강냉이를 허리에 차고 공중 전화 박 스를 찾아 갔었다. 간도 커지. 새벽에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은 강냉이 때문에 누나 목소리가 듣고 싶 었다. 참 쉽게 했던 전화였는데 지금은 어렵다. 왜 어려운 거지? 그냥 예전처럼 동생으로 돌아 가면 따지려 들지 않고 사소한 것에 삐치지 않으며 누나가 자연스 러울 줄 알았는데, 전화 한 번 하는데도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받으면 끊었다. 여보세요, 그 목소리를 다 듣기도 전에 끊었다. 난 누나의 목소 리를 들을 용기도 생기지 않을 만큼 누나가 어렵게 느껴졌다. 왜 그런거지? 아, 늦은 밤이구나. 한 번 더 해 보았다. 이 번엔 여보세요, 그 말은 다 들을 생각이었다. "여보세요?" 하하. "이 봐 학생, 그 옥수수?" "네?" "그 옥수수를 왜..." "네?" 잠도 없나? 옥수수 밭 주인인 것 같진 않은데 야밤에 전화 박스를 지나가던 어 떤 사람이 내 허리 춤에 찬 옥수수를 보고 말을 걸었다. 수화기를 들고 있다는 것을 잊은 채 그 사람에게 변명을 해야 했다. "그 남이 심어 논 옥수수를 그리 서리해 가면 되나. 다 큰 사람이 남 생각을 그
렇게 못하나?" "전 오늘 처음 한 건데요." 거짓말 한 번 했다. "그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땅 놀리지 않고 텃 밭 일구어 심어 놓으면 대학생 이라는 것들이 반도 넘게 서리해 가 버리니... 쯔쯧." "주인이세요?" "이 동네 사람이야." "죄송합니다." "대학생이라는 것들이, 여기 학생 맞지?" "죄송합니다. 얼떨결에..." 눈치를 보다 바로 도망을 쳤다. "이 봐 학생 전화 카드?" 전화 카드가 문제냐, 주인에게 일러 주면 작년 것 까지 다 물어 줄 판인데. 나 말고도 서리하는 놈들이 제법 많은 가 보다. 왜 그 남이 심어 놓은 걸 몰래 서 리 해 가냐. 그게 도둑질하고 뭐가 다르냐. 각성하자 좀. 그 뒤로는 전화도 못했다. 누나는 같은 학교 안인데도 정말 만나지지가 않았 다. 이렇게 되면 안돼는데.. 몇 일이 또 흘렀다. 도서관에서 집으로 돌아 오는 길이 재밌지가 않다. 세상을 재미로 사는 건 아니지만 재밌게 사는 것도 보람된 일인데. 하루 나름대로 열심 히 공부했다는 보람은 있지만 재미가 없다. 11 월달도 두자리 날짜가 되었다. 11 월 11 일 월요일. 한 주일의 시작이 1 포카 다. 푸하하. 내 생각과는 다르게 누나에게 차인 듯한 느낌이 든다. 누나에게 연락이 없다. 나도 찾아가기 힘들다. 시간이 흐를 수록 더 어려워 질텐데... 이게 아니었는 데... 아뿔싸,곧 누나 생일이다. 하하, 기회다. 누나를 찾아 갈 수 있는 기회. 용기를 내어 약대를 찾아 갔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노크를 했다. 열자 마자 누나와 눈이 마주쳤다. 느낌이 비참했다. 누나의 표정에서 받은 내 모습이 버림 받은 누군가가 무언가를 구걸하는 것 같다. 누나는 나 때문이 아니 라 주위 사람들 때문에 나오는 것 같다. "왜 왔어?" "그 있잖아요. 이 번주에 누나 생일 있잖아요." "그래서?" "뭐 받고 싶어요?" "니가 그걸 왜 물어보는데?" 누나의 말이 날카롭다 못해 에인다 에여. "그냥 누나 편하게 대할려고 그랬지 이렇게 어색한 사이가 될 줄은 몰랐어요." "너 참 네 중심적이다? 나도 이제 너 싫어." "안되는데..." "왜 왔어?" "뭐 받고 싶냐니까요?" "너한테 뭘 받아?" "그게..." "그 날은 좀 바쁠거야. 승주 만나기로 했거든, 선물은 주면 받을게." 이거 좀 이상하네. 어째 승주 얘기에 기분이 더 나쁘냐. 승주 만나기로 했다는 말에 내가 저 한 쪽 구석으로 치워 진 느낌이다. "뭐 받고 싶은지만 말해요."
"그럼 꽃이나 사 와. 금방 시들어 버릴 꽃으로..." 서럽다 씨. 갈테면 가라지. 나 혼자 있으면서 많은 고민을 했다. 뭘 선물할까? 어떻게 하면 누나 곁에서 예 전처럼 자연스러울 수가 있을까? 그 놈 생각이 났다. 승주 새끼. 이렇게 된게 다 승주 그 새끼 때문이지만 배울 건 배워야 된다. 승주 그 새끼가 그 선물을 하 고 난 다음 누나와 다시 가까워 졌었다. 그 놈보다는 많아야 한다. 진짜 그러긴 싫었는데 누나 생일 날 장미 267 송이를 샀다. 들기도 버겁다. 안그 래도 얼마 되지 않는 용돈 다 날아 갔다. 꽃을 들고 학교 들어 가기가 졸라 쪽팔렸다. 예전 승주는 그 꽃을 들고 무릎까 지 꿇었는데 이 정도 쪽팔림 쯤이야. 그래도 힐끗 힐끗 쳐다 보는 학생들의 시선 이 못마땅했다. 난 승주 보다 확실히 못한가 보다. 약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게 망설여 졌다. 약대 건물 앞에서 누나 차를 보았다. 저거 맞을거다. "전데요." "허, 니가 어쩐 일이니?" 결국 난 약대 앞 공중 전화기 앞에 섰다. 도저히 내가 삐치는데 일조한 배군이 같이 있는 곳에서 누나에게 꽃을 선물할 자신이 없었다. 내 예전처럼 연인사이라 면 자신감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잠깐 나와요. 약대 앞이에요." "내가 왜 나가는데?" "선물 받아 가요." "니가 가져 와." "싫어요. 씨..." "안 삐친다며? 씨, 소리 하지마." "9312 쏘나타 누나 차 맞아요?" "그래." "그 위에 올려 놓을테니까 가져 가세요. 다른 사람이 가져 가도 전 모릅니다." "야!" "왜 그리 쌀쌀 맞은거야? 하여튼 생일 축하 해요." 이대로 영영 잘못 돼 버리는 건가? 누나 목소리가 많이 차가웠다. 오늘 선물을 해서 누나가 조금이라도 웃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헤헤, 웃으며 예전 같이 친한 모습 보여 주려고 했는데... 집에 들어 왔다. 승주 그 놈하고 잘 놀아라. 누나 자네가 아무리 쌀쌀 맞게 굴 고 날 모른 척 하려해도 같은 학교에 있으니 나를 종종 볼 것이다. 자연스럽지 는 못해도 난 모른 척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 아직 차이지 않았다. 절대 모른 척 하지 않을 것이다. 예전 누나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자기는 헤어질 생각이 없었지만 상대가 어색해 했다고? 지가 그렇게 만들거만... 일단 난 누나 생일을 모른 척 넘기지 않았다. 가져 가던 말던 난 분명 생일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내 생일 때 두고 보겠어. 내 생일 때까지 언제 기다리냐. 침대에 엎드려 누워 배게에 머리를 묻었다. 곧 기사 시험이 있지만 그 딴건 아 주 사소한 것으로 여겨 졌다. 사소한 것과 중요한 것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나 보 다. 지난 여름 방학 때 지리산 놀러 가서 같은 방을 쓴 사이였는데 불과 두달여 많에 이처럼 낯설게 될 줄이야. 아무 이유도 없이 말이다. 고쳐 생각해 보니까 지금도 이런데 누나가 시집 갈 때쯤 진짜 내 생각엔 아무 이유도 되지 못하는 것
으로 난 차이는 신세가 될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 땐 내가 많은 것 들을 기대하고 있겠지? 지금보다 훨씬 더 빠져 있을테지. 헤어나지 못할 만큼 사 랑하고 있다고 믿고 있을 테지. 그 땐 아마도 살기 싫을 만큼 견디기 힘들어 할 것이다. 지금은 차였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누나가 영영 떠났다고 생각하지도 않 는데 시간이 흐를 수록 세상이 무료해지고 있다. 매도 일찍 맞는게 낫다고 오히려 잘 된 일인가? 뭘 잘돼 씨. 호랑이 인형만 조 패다가 할 일이 없어 밖으로 나갔다. 저녁을 먹고 답답해서 정희 누나 약국을 찾아 갔었다. "어? 은정이 생일인데 여길 왜 와." "나 차였나봐요." "엉? 왜?" "그냥." "뭐야? 은정인 별 말 없던데." "솔직히 말할게요. 나 누나에게 차인지 오래 됐어." "엉?" 고개를 묻고 약국 안에 앉아 멍하니 창을 바라 보고 아무말 없이 있었다. 정희 누나는 오늘도 약속이 있나 보다. 일찍 문 닫을 테니까 8 시 안에 집에 가랜다. 섧어라 씨. 창 밖에 은색 승용차가 섰다. 그리고 꽃을 든 여자가 내렸다. 어떤 놈인지 몰라 도 저 여자에게 꽃 사준 놈 참 무식한 놈이다. 한 이백송이는 되어 보인다. 여자 가 좀 예뻐 보이긴 한다. 옷차림이 참 화사하고 귓밑 머리까지 오는 단발 머리 도 섹시해 보인다. 뭐야? "누나?" "왜?" "저거 은정이 누나죠?" "그러네." "머리는 왜 깎았냐?" "어, 그래 머리를 깎았네." "나 때문인가?" "무슨 말이야?" "나 좀 카운터 밑에 숨을게." "왜에?" "나 차였다니까. 누나 마주치면 안된다 말이야." "니가 왜 차여?" "나 여기 있다 하지 마요." "헤어졌어?" "아직은 아니지만 그런 셈이지요." "뭐야 너?" "아무 말도 하지 마요?" 후다닥 카운터 밑으로 가 숨었다. 저거 오늘 승주 만난다더니 여긴 왜 온겨. 다행이 누나는 약재실 안으로 들어 오지 않고 카운터 앞 의자에 앉았다. 정희 누나가 물끄러미 날 쳐다 보더니 진짜 모른 척 해? 라고 묻는 표정을 짓는다. 주 먹을 불끈 쥐어 보여 주었다. "생일 축하 해." "그래."
"왠 꽃을 그렇게나 많이?" "이거? 철수가 준거야." 내 머리 위 카운터에 꽃이 놓여졌다. 저거 여기다 버리고 가는 거 아녀? 그랬 단 봐라. "허허, 하나 물어 볼게." "물어 봐." "철수 말로는 차였다던데." "엉? 걔가 왜 차여?" "안 찼니?" "차? 치. 걔 때문에 속상해 죽겠어 진짜." "왜? 무슨 일 있어?" "후후, 걔 아마 지금 후회하고 있을거야." "무슨 일인데?" "당분간 모른 척 해." "뭘?" "버릇 고쳐놔야지." "무슨 버릇?" "걔가 날 찼잖아." "엉?" "안 좋은 일이 있었긴 해. 철수는 자기가 싫게 변한다고 생각했나 봐. 내 잘못 도 있긴 있어. 철수 걔 미리 생각해. 어줍잖게 듣고 배운 게 있나 봐. 사람 사귀 면 그런 거 있잖아." "뭐?" "괜히 간섭하고 따지고 삐치고 하는 거. 연인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소유하러 드 는 거 말이지. 그래서 깨지는 커플들 많잖아. 자기가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나 봐. 애야 애. 바보거나." "후후. 철수 답다." "처음엔 당황했었어. 얘가 뭔가 애정이 식었거나 이대로 헤어지는 건 아닌가 해 서. 매달리고 싶었다? 승주에게도 그렇게 까진 생각들지 않았는데... 후후, 웃음 이 다 나오네. 철수 걔 지금 많이 힘들거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내가 다신 안 만날 것처럼 하고 있거든." "그러다 진짜 헤어지는 거 아냐?" "아니야. 오늘 이 꽃 봐. 세어 보니까 267 송이더라. 후후, 예전 승주가 주었던 것보다 두 송이가 많아. 두 송이 많은 이유를 알지. 그리고 며칠 전 밤에 철수 가 전화 한 적 있는데 옥수수 서리한 모양이더라. 지금 나 보고 싶어 죽을거다. 걔 마음 변한 거 없어. 나도 변한 거 없구." 뭐여? 아직도 날 어린애 취급하고 날 가지고 놀고 있단 말이여? 근데 기분은 좋 다. "승주씨는 잘 있어?" 어? 정희 누나가 내 마음은 어떻게 알고 그걸 다 물어 보냐. "흠, 간혹 연락은 하지만 자기도 바쁜가 봐. 나 승주한테 야단 맞았다?" "왜?" "내가 잘 어울리는 여자 한 명 소개시켜 줄까,라고 말했었거든." "너도 참. 앞으로 철수는 어떡할거야?" "내 버려 둬. 내가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라는 걸 보여 줘야지. 걔 마음 을 알았으니까 지 풀에 꺾일 때까지 기다려 볼 참이야. 뭐, 언젠가 싹싹 빌러 올 거야. 종종 그랬던 것 처럼. 그때 못 이기는 척 받아 주지 뭐. 그러면 당분간은 삐치거나 이상한 짓 안하겠지. 사귀는 게 뭐 장난 인 줄 아나. 참, 꽃 이쁘지?
너 이렇게 많은 장미 받아 봤니?" "쳇! 나 결혼 할 때 니가 부케 받을래?" "내가? 나 그때도 학생인데?" "그렇게 유치하게 놀 봐에야 차라리 식 올려라." "그럴까? 쿠쿠, 재밌잖아. 철수랑 살면 참 재밌을 것 같아. 아옹다옹 하면 무료 하진 않거든. 세상은 재밌게 살아야 돼." "그래 그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도 있어야지. 철수야?" 이씨, 이런 씨, 왜 내 이름을 부르는겨. "엉? 철수라니?" "오늘 네 생일인데 놀아 줄 사람이 있어야 되잖아. 나 오늘 그 사람 만나야 되 거든. 철수야아?" "헤헤, 누나 안녕. 아직도 어린 애 취급이여?" 카운터에서 나와 고운 웃음으로 모습을 드러 냈지만 바로 표정을 바꿨다. 그것 때문에 연인 사이를 포기했건만 아직도 어린애 취급을 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 다. "어?" "연기였단 말이지?" "니가 왜 여기있어?"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였단 말이지. 지풀에 꺾여? 나도 나 좋아하는 사람 있 어, 왜 이래?" "야아! 김정희!" 정희 누나는 왜 부르냐. 오늘 기회 봐서 빌자. 내 기분이 많이 좋아졌고 누나 가 다시 자연스러워진 느낌이다. 바로 경어 대신 늘 하던 투의 말이 나왔다. 67 회 정희 누나가 유치해서 못 봐주겠다며 누나와 날 내 쫓았다. 누나와 조금 어색했 지만 아까 전화했을 때 만큼은 아니다. "머리 왜 짤랐어요?" "내 맘이다." "여자는 마음의 변화가 생기면 머릴 짜른다면서요?" "나는 그냥 짤랐어. 너 때문 아니야." "누나 나 보고 싶었지?" 내가 떫은 감자냐? 누나의 눈꼬리가 마녀처럼 올라 갔다. "에휴, 너란 애는 정말..." "헤헤, 나 누나에게 안 차일려고 그랬던 거야. 내 본심을 몰라주냐. 이렇게 될 줄은 몰라쏘." 누나에게 헤헤,웃고 애교를 좀 떨면 분위기가 바뀌던데 이 번엔 아니다. 누나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다. "이 것 좀 들어. 한 송이라도 상하지 않게 똑바로 들어?" 혹시 그냥 가져 가 버려라 할까봐 실실 웃으며 누나의 팔을 잡았다. "얘기 좀 해요." 그랬더니 누나가 꽃을 떡 내게 맡기곤 명령했다. "나 따라 와." "어디 가는데?" "너네 방." "내 방?" "얘기 하자며?"
연상라고 명령조의 말들이 많다. 그것 때문에도 난 어린애 취급 받는다고 생각 을 했었다. 그러나 이 번엔 저런 투의 말이 너무 좋다. 다시 친근해진 느낌이 다. "열쇠 줘." "내 방인데..." "주라면 줘." 난 꽃을 들고 누나를 따라 내 방으로 들어 왔다. 이런 상황에서 적반하장이라 는 말을 써도 될까? 누나는 내 방을 둘러 보고선 쯔쯧,거렸다. "왜요?" "바뀐 거 하나도 없네?" "그럼. 뭐 바뀔거나 있나?" "그런데 왜 바꿀려고 했어?" "뭘?" "우리 사이 말이야." "승주 형이 왔잖아요. 그리고 나 자주 삐치는거 싫지 않았어요?" "그래서?" "보통 내가 알기로 첫사랑 나타나고 옆에 있는 사람이 싫어지면 십중 팔구 깨지 더라."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태연해지자. 누나가 애인이면 어떻게 태연할 수 있겠어요. 그 래서 후배, 동생으로 돌아 가고 싶었지." "그래서 좋던?" "누나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지." "헛! 일곱살 꼬마도 네 생각대론 안될거다.. 후우.... 커피나 한 잔 끓여 봐." "이 꽃은?" "책 상위에 놔두면 되잖아." "아아..." "보면 볼 수록 바보같니?" 씨. 누나와 오랜 시간 얘기를 했다. 누나는 갈 생각을 않고 나를 타이르 듯 자기 생 각을 말했고 나는 누나 말에 동의를 했다. "차라리 헤어지자." "에? 왜 헤어져?" "너 이러면 나 지친다?" "그래 지치게 되어 있다니까." "나하고 진짜 헤어지고 싶어?" "싫지. 난 누나하고 살고 싶다니까." "그런데 왜 안좋은 쪽으로만 생각 해?" "불안하니까." "지금까지 내 말 어떻게 들었어?" "잘." "지금 장난하니?" "아니." "다시 말해?" "진짜 변하지 않을까?" "변해도 그건 나중이야."
"그래도 변할 수 있다는 말이잖아." "안 변한다 했잖아." "변하면?" "야! 진짜 차이고 싶어?" "아니. 그 내 마음 알았다고 협박조로 말하지 마요." "현재가 싫지 않은데 왜 어둔 미래를 생각 해?" "철없는 행복은 어이없는 미래를 가져오곤 하지." "말이나 못하면..." "누나 집에 안 가?" "여기서 자고 갈거야." "엉?" 저 얘기가 나오기 까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밝혀야 겠지. 누나에게 찻 잔을 건 네고 나는 책상 의자에 앉았고 누나는 침대에 앉았다. 그때부터 누나는 내게 자 기 마음을 털어 놓기 시작했었다. 나도 내 생각들을 얘기했고 분위기는 예전으 로 돌아 갔었다. 누나는 찻 잔을 받고 한 참 동안은 아무말 없이 내 방과 나를 번갈아 쳐다 보았 었다. 벽에는 예전 대학로에서 그렸던 누나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조 패긴 했어 도 침대 위에는 누나가 준 인형들이 그대로 있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너 마음 변한 거 없지?" "뭘요?" "나 좋아하는 마음." "응." "그건 참 자연스럽게 대답하네?" "좋아하니까. 헤헤, 나 누나 사랑한다니까요." "허! 고맙다." 고맙다는 말은 내가 싫지 않다는 말, 하긴 어색한 사이가 된 건 순전히 내 탓이 지. "누나는 변한 거 같애." "내가 뭘 변해?" "승주 오자 마자 서울서 학교 다녔고 내게 소홀했잖아요." "내 그럴 줄 알았어. 혹시나 했는데..." "내 속이 아무리 좁아도 승주형 만난다는 것까진 이해할 수 있었어. 근데 왜 내 게 비밀로 했냐 말이야." "니가 그렇게 만들었어." "그렇다니까. 내가 그것 때문에 의처증 증세가 있지나 않나 고민했어요. 그게 싫었어. 내 자신이 말이야." "참 멀리까지 생각한다. 서울서 등,하교한 건 아빠 약국 때문이었지 승주 때문 이 아니었어." "변명하지 마요." "야이, 속 좁은 놈아." "그래 나 속 좁은 놈 맞다니까요." "쩝, 바로 동의해 버리네. 너네 한의사 집안이지." "응." "학기 초에 무슨 문제 없었니?" "울 아버지는 모르겠는데 내 동생은 약대생하고 막 싸우더라." "우리 아빠는 너네 아버님처럼 태연하시지 않았거든." "무슨 말이야?" "그 문제 때문에 약국 비울 일이 많았단 말이야. 나 약사 자격증 딴 거 알지?"
"응." "나 울 아빠 약국에 임시 고용됐었다 됐니?" "승주와는 상관없었던거야?" "거기서 승주가 왜 나와." 누나를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누나는 말똥히 날 쳐다 보고 있었다. 그런 상황 에선 뭔가 찌릿한 게 있다. 살며시 다가가 키스하면 백발백중이다. 영화에서 분 명히 그랬다. 근데 왜 내 입가는 이렇게 히죽되는 걸까. 에쒸, 분위기 망쳤다. "하여튼 누나와 헤어지기 싫었는데 누나가 과민반응 보였어." "니가 과민 반응 보였던 거라곤 생각 못하니?" "매번 누나만 옳잖아. 내가 옳은 건 없어?" "후, 니가 왜 그런 생각들을 하는 지 모르겠어. 너 삐친다고 내가 많이 화내 던?" "그건 아니지만 쌓이잖아." "나 밋밋한 거 싫어하는 거 알지? 티격태격 하는 게 오히려 나아. 연인 사인데 질투하고 따지는 게 하나도 없다 생각해 봐. 그게 연인 사이니?" "난 너무 자주 삐쳤잖아." "자주 아니야. 그리고 그건 쉽게 고칠 수 있어. 넌 날 아직 못 믿고 불안해 하 고 있어. 그러지 않으면 그냥 고쳐지는 거야." "누나가 그렇게 만든것도 있어요." "고친다고 했잖아." "어떻게?" "잘 몰라. 하지만 사랑하는 사이라면 분명 자기도 모르게 고쳐질 거야." "하긴 조금씩 달라지긴 하더라." "내 마음 지금도 여전해." "뭘?" "나 너 사랑한다 말이야." 응? 저 여자가 저렇게 사랑 고백한 적은 없는데... 내가 무슨 매력이 있다고 저 럴까? "그 홀로 자라 내가 친동생처럼 느껴져서 그런 거 아냐? 착각하는 걸수도 있 어." "내가 어린 애니?" "진짜 날 사랑해요?" "난 너 없는 미래를 생각하지 못해. 지금은 그래. 근데 넌 아닌거 같애."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아요?" "나하고 헤어지려고 했잖아." "헤어지려고 했던 게 아니라 차이지 않으려고 후배로 돌아가려 했지." "그게 그거지. 나 대학원 졸업하면 결혼 할거야. 후배로 돌아가면 헤어지는 거 지." "보수적이네. 후배는 말이지 남자, 여자가 없는거야. 결혼해도 충분히 만날 수 있어." "칫, 난 네 옆에 사랑하는 사람 있음 딴 사람 안 보여." "웃기지 마요. 예전 승수 좋아한다면서 여러 남자 만나고 다녔잖아." "야!" 할 말 없으면 소리부터 지르고 있어. "누나." "왜?" "나하고 결혼할 생각까지 하고 있어요?" "응." "참 철없는 여자네. 내가 뭐라고 결혼을 생각해요. 나 학생이고 대학원 나와도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야." "그게 뭐 어때서?" "철든 여자라면 말이지, 지금의 내게 결혼할 마음은 생기지 않을거야. 나 봐 요, 내가 무슨 사회 생활에 잘 적응할 사람처럼 보여요? 너무 철없고 어려보이잖 아." "너 나 속상해 하라고 그렇게 말하는거지?" "아주 나중이면 모르겠는데 우린 지금 결혼 얘기 하고 할 입장이 아니야. 아니 다 누나는 모르겠는데 난 아직 아니야. 나중에 내가 철이 들고 현실에 대해 뭔 가 깨달은 게 있을 때 그때도 누나가 내 곁에 있으면 그땐 생각해 보지요." "철 드는게 뭔대? 남을 생각한다면서 사람보단 그 뒷 배경을 따지고 마음보다 편안 삶이 더 가치있어 사랑은 뒷 전으로 밀쳐 버리는 거? 사람을 이용하고 정 에 얽메이기 보다는 합리적이라는 핑계로 내게 덕이 되는 지 따지고 그러는 거? 가졌던 꿈 하나씩 버려가며 일이 있는 현실에 지쳐 가는 거? 돈? 그걸 제일 가 치 기준으로 섬기는 삶? 자기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철 없다고 몰아 세우는 거? 그게 철 드는 거라면 난 사양하겠어. 나도 철 없긴 마찬가지야. 하지만 난 철들 고 싶다는 생각이 많지 않아." "철 들어야 돼. 사회 생활은 학생때와는 달리 쉽지 않을거야." "서글플 것 같아. 너 재밌게 살고 싶지? 네 미래를 누구에게 의지한다는 생각 않지? 부모님? 조금 의지 할 수 있어. 철 들었다는 다른 사람들은 안 그런가? 그 렇지만 우리가 부모님에게 끌려 가며 사는 건 아니잖아. 그러면 되지 않아?" "지금은 이래도 누나도 시집 갈 때 쯤 되면 막 따질 걸. 정희 누나 봐요. 결국 은 선 봐서 괜찮을 것 같다는 이유로 시집 간대잖아. 괜찮다는 게 뭐겠어." "난 정희가 아니야." "에이, 누나 부모님에게 내가 무슨 ... 나 같아도 반대하겠다. 우쒸, 왜 그러 는 거야?" "니가 어때서? 음..." 뭘 말할려고 그렇게 뜸을 들이며 생각하냐. "누나 무남독녀야. 나 같은 놈에게 주긴 분명 아까울거야." "내가 데리고 살면 되지." "내가 물건이냐? 인생에서 부모님을 제외시킬 순 없어요." "그건 그래. 난 우리 부모님에게 친 아들처럼 여겨질 수 있는 사람 만났으면 좋 겠어." "하하, 내가 그건 할 수 있지." "치. 그래 너 사람에게 모질고 나쁜 짓 할 놈은 아니더라. 정이 있어." "그럼, 나 정 빼면 시체지. 하지만 나는 우리 부모님 모시고 살 건디." "재밌겠다." "뭐야? 이거 진짜 철없는 아가씨네." "그래 나도 너만큼 철이 없어. 그러니까 너 철없다고 자책하지마." "그런가?" "그럼. 너 잘난 놈이야. 날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내가 왜 널 차니?" "응. 생각해 보니 나 못난 놈 아니다." "그렇지? 그러니까 제발 어줍잖게 멀리 보지 말고 현재 우리가 사랑하면 미래 도 사랑하고 있을거라 생각해." "그래도 누나 시집갈 때 쯤엔 차일 거 같아." "야!" "변할거야." "안 변해." "아니야 변할거야. 그러면 내가 너무 비참해져." "너 도대체 뭐니? 설사 그렇다고 해도 지금 이러는 거 이상하다고 생각 안해?"
"이상해." "현재에 충실 해. 헤어진다해도 그건 그 때 일이야. 지금은 그냥 좋은거야. 알 았어?" "헤어지는 데 지금 어떻게 그냥 좋냐." "왜 헤어져? 말꼬리 잡고 늘어 질래?" "안 헤어질까?" "지금 좋은 데 왜 헤어지니? 안 헤어지도록 노력해야지." "그 어쩔 수 없이 헤어지는 남,녀가 한 둘이니?" "우린 어쩔 수 없는게 존재하지 않아." "많다니까. 누나가 연상이고 승주형도 있고..." "야! 승주 얘기는 하지 마." "알았어요. 그리고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거야." "첫사랑? 너 정희가 첫사랑이잖아." "응." "나 승주가 첫사랑이고..." "그렇지." "근데 뭐?" "첫사랑이 옆에 있으면 또 이루어지지 않지." "이게 진짜. 너 자꾸 안되는 쪽으로만 생각할래?" "누나하고 살면 참 행복할 것 같거든?" "응. 그렇지 그지?" "근데 참 철없이 살거 같애." "그게 뭐 어때서?" "철들면 깨져." "야!" "누나 분명 변할거야." "너어?" "왜?" "차라리 헤어지자." 이렇게 된 거다. 누나는 진짜 집에 갈 생각을 안 했다. 결국 내 방에서 자기로 했다. 난 어디서 자라고 씨. "이거 저 번에 서리하고 남은 건데 같이 노나 먹어요." "몇 개나 했었니?" "세 개." "겨우?" "나 혼자였으니까." "나 없으니까 당장 표나지?" "응." "전화 받고 얼마나 웃었는 줄 아니? 그 시간에 전화할 사람 너 밖에 더 있니? 그리고 수화기 들고 다른 사람하고 얘기까지 해? 치. 몰래 끊으면 모를 줄 알았 어?" "아, 그때 내가 수화기 든 채로 얘기 했다 참." "좋아하는 마음은 그대론데 왜 바꿀려고 해." "에이 쒸." "이게 더 커잖아."
"똑바로 잘랐어야지." "누나께 더 크다니까."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 볼래?" "알 수 세어 봐." "니가 많으면 어떡할래?" "모자라는 만큼 떼어 줄게." 진짜 저게 25 살 아가씨인지 의심이 갔다. 강냉이 삶아서 반으로 나눠서 알 세 어 가며 누가 많은 지 결국 따져 봤다. "봐, 누나께 다섯 알이나 더 많이 박혔잖아." "이상하네. 내가 봤을 땐 네께 더 커 보이던데." "남의 떡이 커 보이는거야." "남의 떡? 니가 남의 떡이 되면 참 아깝겠다." "내가 떡이냐?" "앞으론 그러지 마." "그건 모르지." "이게 진짜." 새벽이 깊었다. 나 누나하고 잤다. 이상한 쪽으로 상상하지 마요. 여행가서도 술 먹고 같은 방 썼지만 아무일 없었는데... 남자들,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 는 건 왜 일까? 우린 철이 없어 그냥 잤어요. 본능이 강하면 이성을 누른다지만 누나는 날 어린아이처럼 만드는 재능이 있어서요. 충분히 그냥 잘 수 있어요. 안 되나? 누나는 침대에서 잤고 난 방바닥에서 잤지요. 그래 자다가 벌떡 일어나 조심스럽게 가슴 한 번 찔러 보긴 했다. 나는 다른 건 몰라도 누나 가슴은 꼭 한 번 만져 보고 싶다. 누나 가슴은 참 예쁘다. 어릴 적 엄마 젓가슴 같은 느낌이 누나에게 있다. 나는 누나를 사랑한다.
68 회
내 잘못이다. 괜히 투정 부린 것 같다. 누나하고 다시 친해졌지만 내 곁에 누나 가 살지 않는다. 쩝, 티비는 나 주고 가지... 밤이 되면 심심하다. 어디 차 한잔 얻어 먹으며 시 간 때울 때가 없다. 동엽이 집은 가기 싫다. 내 대학 생활 마지막 시험이 다가 온다. 졸업 작품과 논문은 이미 심사를 마친 상태다. 기말 고사? 듣는 학점도 얼마 되지 않는데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 저녁 무렵에 약대로 찾아 가 보았다. 저 배군 새끼 여전히 껍죽되네. 둘이 같 이 나오길래 험한 인상으로 다가가 배군을 째려 보고는 누나 손을 잡아 채어 왔 다. "저 가볼게요. 내일 봐요." "그래 잘 들어 가. 철수군도..." 빠큐다 새꺄. "왠일이야?" "그렇게 물으면 안돼지." "그럼?"
"다시 친해졌으니까 반가워, 이래야지." "칫, 똑같애. 변한 거 없어." "응?" "배선배에게 좀 친한 모습 보여 봐." 누나와 차 앞으로 갔다. 자동차와 누나를 번갈아 쳐다 보았다. 하하, 참 철없 는 아가씨다. 하긴 누나는 무남독녀 귀한 딸이지. "내가 기사 해 줄게." "후후. 밤에 나 없으니까 심심하지?" "별로. 나도 곧 대학원생이야." "심심하지?" "응, 누나 다시 와 살면 안돼나?" "그러길래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냐. 너 방 뺀다는 말은 비수였어." "그래? 그렇다고 바로 방을 빼버리나?" "아빠가 집에서 다니래. 거절하기 싫었어." "차는?" "새 차 같지?" "새 차 아냐?" "새 차야." "이게 놀리나 지금." "누나보고 이게?" "오늘 내가 운전해 가면 안될까?" "목요일인데 서울 가게?" "내일 수업 없어요. 그리고 이 번주 일요일 기사 시험도 봐야 하거든. 일찍 올 라 가려구요." "기사 시험 본다고 기사 해보고 싶은거야?" 얘 이거 바보 아냐? 한심 스럽단 시선으로 누나를 아래 위로 쳐다 보았다. "불안한데..." "내가 면허증 언제 딴 줄 알잖아. 나 베스트 드라이버야." 불안하다더니 잘 자네. 우리 집 앞에 와서 둘 다 내렸다. 누나는 운전석으로 나 는 집으로. "조심해서 가요." "알았어. 시험 잘 봐." "엿 사줘야지." "연락해." "참, 우리 아버지가 누나 한 번 데려 오라던데..." "엉? 너네 집에?" "네." "왜?" "모르지." "오늘 갈까?" "오늘은 안돼지. 말씀 먼저 드려 놔야지." "일요일날 갈까? 너 시험 언제 끝나?" "오전 중으로 끝나요." "그럼 일요일에 가자." "괜찮아요?" "안 괜찮을게 뭐 있어." "어색하지 않을까?"
"후후, 너네 아버님 전화상으로 이미 친숙 해." "그래도..." 시간은 잘 갔다. 아버지께 누나를 일요일에 한 번 데려와도 될까,라고 말씀드렸 다. "근데 아버지." "왜?" "왜 데려 오라고 하시는거에요?" "혹시나 해서." "혹시라니요?" "나 그리 꽉 막힌 사람 아니다. 남,녀 교제에 대해서 신세대적인 사고를 가지 고 있지." "그런데요?" "걔가 연상이지?" "네." "걔가 우리집에 전화하기 시작한지가 2 년이 훨씬 넘었어." "그래서요?" "걔 말고 너 찾는 여자 없었어." "에이, 설마요." "없었어 임마." "정희 누나도 몇 번 했는데요." "따지지마 임마. 하여튼 예사롭지가 않아." "뭐가요?" "걔가 우리집 며느리가 될 것 같은 예감." "예? 저 아직 대학 졸업도 안했습니다." "녀석아, 너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야. 걔 이제 26 살이야. 뺏기기 싫을 정도면 잡아야지." 허허, 내가 왜 미리 생각하고 멀리 미래의 일에 대해 잡생각이 많은지 이제 알 았다. 아버지 닮아서다. "설마, 누나 왔을 때 그런 얘기를..." "나도 눈치 없이 이런 저런 말 막 할 사람 아니다. 그냥 어떤지만 볼거야. 니 가 고급 술 가져가도 별 말 안한 건..." "제 용돈에서 제하셨잖아요." "쓰으? 아버지 말하는데 끼어 들기는... 이 번 일요일에?" "네." 일요일 날 시험 보고 누나 데리고 들어 갔는데... 세상에나 이럴 수가... 일요일 날 시험 보고 누나가 날 데리러 왔었다. "자 엿!" 어디서 샀는지 막대 엿 하나를 던져 주었다. 시험 다 본 사람 엿 주는 심보는 도대체 뭘까? 누나는 회검정 바지 정장에 하얀 셔츠를 입고 머리를 자연스럽게 검정으로 물들이고 화장도 옅게 한 상태였다. 손에는 선물 꾸러미까지 들고 있 다. "손에 든 것은 뭐에요?" "이거? 곧 겨울이잖니. 아버님, 어머님 목도리하고 다과야." "에?" "잘 보여야지. 내 옷차림 어때? 이 차림이 어른들에게 가장 좋은 인상을 주는 복장이래."
허허, 완전 여우다. "아버님에겐 말씀 드리고 나오는 거에요?" "그럼." "아무말 안하시던가요?" "잘 다녀 오라고 하던데?" "철수 집 간다고 한 거에요?" "응." "우리 아버지가 뭐 때문에 오라고 한 줄 모르죠?" "대충 알아. 나 괜찮은지 보시려는 거 아냐." 이 여자가 진짜 날 결혼 상대로 생각하는 거 아냐? 잠시 동엽이와 승헌이가 생 각이 났다. 바보 같은 놈들... 그 놈들하고 난 동년배다. 사고 차이도 별로 없 다. 아직 이러기엔 한참 이른데... 에이 모르겠다. 누나에게 한 번 놀랬다. 집에 가서 더 놀랬다. 둘이서 아니 셋이서 짰나 싶었 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 모두 한 복으로 갈아 입고 계셨다. 명절이나 되어야 입 는 거창한 한 복. 거기다 안 방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고 다과상까지 차려 놓 고 기다리고 있었다. 수희는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쫓아 낸거 같다. 내 친구 들 왔을 때하고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누나는 쑥스러워 했다. 처음이니까 할 수 없지. 우리 집이 가까워 질 수록 많 이 떨기 시작하더니 우리 부모님을 보고는 한 동안 어쩔 줄 몰라 했다. 우리 부 모님, 문 앞에서 누나를 맞았다. 당황스러울 수 밖에... 안 방에 들어 가서 누나는 정식으로 인사를 올렸다. 하마터면 절까지 할 뻔 했 다. "거기 않게나." "네." 허허, 거의 꺼내 놓지 않는 방석. 어머니는 아버지를 보고 고개를 끄덕 거렸 다. 나는 말없이 다과상 앞에 앉아 과자만 집어 먹었다. 별 할 말 없었다. 어머 니도 별 말씀 않으셨다. 아버지하고 은정이만 주로 얘기했다. "우리 철수가 좋아하는 누나라고 해서..." "네." "우리 철수하고 사귀는 거 맞나?" "네?" "아무리 연상이지만 내가 보기에 친구 사이는 아닌 거 같은데..." "네에." "둘이 사귀는 거지?" "네." "음. 참하게 생겼구만. 안 웃어도 되겠어." "네?" "누가 예쁘냐고 물으면 웃지말고 네, 그래." 누나가 히죽 웃는다. 우리 아버지도 참.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인자하신 모습이네요." "하하. 철수가 나만큼만 생겼어도 참... 그래 아버님이 약사시고 어머니는 의사 시라고?" "네." "아버지가 어디 나오셨나?" "학교 말씀인가요? 경희대 나오셨습니다." "그래? 우리 마누라도 거기 나왔는데..." "당신은 거기 안 나와쑤?"
"그러네. 하하, 여기서 동문을 만날 줄이야. 연세가?" 아직 안 만났는데... "곧 쉰 둘 되시는데요." "그래? 그럼 내 마누라 후배네." "당신 후배도 되겠네요." "그러네. 우리 마누라는 나하고 대학 때 처음 만났는데 나 만난 이후로 그냥 놀 았어." 아, 우리 아버지 저런 말을 해 하시나. 우리 엄마 무안하게 우스시더이다. "나이 많은 사람하고 얘기하려니까 답답하지?" "아니에요. 아직 말 버릇이 다듬어지지 않아서요... 솔직히 말씀드려도 될까 요?" "그래. 자네 요즘 애들 같지 않게 예의가 바른 것 같네." 외할아버지 영향인가? 아버지 속으시면 안되옵니다. "재밌으시네요." "허허. 내가 좀 유머 감각이 있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울 아버지하고 누나는 제법 친해진 모습으로 변했다. 아버지 가 껄껄 대시고 누나도 호호 웃었다. "그럼요. 철수가 아버님만큼만 되도 바로 시집가죠." "우리 마누라는 복 받았다니까." 저래도 되나? 누나는 그리 오래 있지는 않았다. 내가 내 쫓았다. 무슨 얘기까지 나올까 두려 웠다. 우리 아버지 누나가 마음에 드셨나 보다. 누나 갈 때 아주 비싼 보약 꾸러미 두 개를 누나에게 떡 안겼다. "이건." "아버지, 어머니 드리게." "아버지, 그거 내일 배달해야..." 우리 어머니가 내 허리를 쿡 찔렀다. "내일 다시 만들면 돼. 그거 아버님 나이에 맞는 보약이니까 괜찮을거야." 약사, 의사 부모님들이 보약 받아 좋아하실까? 왜 그러냐고 따지실텐데... 이해 가 안가네. 누나 부모님이 몇 번 보지도 못한 날 대단케 생각지 않을텐데. 우리 아버지가 하시는 행동은 분명 오버하는 것이다. 그러나, 누나는 마냥 좋아하고 있다. "안녕히 계세요." "그래, 다음에는 저녁 한 번 살테니까 놀러 와." "네. 기대하겠습니다." 누나가 돌아 가고 아버지가 날 불렀다. "괜찮죠?" "너 생각보다 능력있네? 약사라고 했지?" "자격증은 땄지만 원생인데요." "약국 차려주면 너 먹여 살릴 수도 있겠다." "제가 못 미더우십니까?" "연상만 아니면..." "네?" "좀 아깝다."
이상하네. 후후, 철수와 제법 긴 시간 삐친 척 하느라 마음 고생이 좀 있었지만 다시 친 해 질 줄 믿고 있었어요. 녀석이 날 좋아한다는 건 표정이나 행동에 바로 나타나 거든요. 철수 아버님이 부르셔서 철수 집에 갔다 왔어요. 부모님께도 말씀드렸는데 아버 지는 좀 민감하게 반응하시더군요. "그 집안 왜 그러냐?" "철수랑 저 많이 친해요." "그렇다고 널 왜 불러. 갈거냐?" "네." "잘 생각해서 행동해라. 가더라도 쉽게 보이지 마." "쉽게 보이다니요?" "쩝, 그 집안 착각하고 그러는 거 아냐?" "흠, 아빠. 철수 좋은 애에요." "친구로서는 그렇겠지. 어휴..." 아직은 긴가민가 하셔서 이렇지만 나중에 혹시 아빠를 설득해야 된다면 조금 힘 이 들겠구나 싶어요. 엄마는 의외로 절 응원해 주시더라구요. "네 아빠가 나와 결혼할 때 맘 고생이 심했어. 참 미안했었지. 흠... 나는 내 딸이 결혼하는 데 있어 많이 따지지 않을거다." "엄마 너무 앞서 가지 마." "대충 부모들 심리는 비슷한거야. 왜 불렀겠니?" "걔는 아직 어린앤데?" "걔 인상이 참 좋아보이더라. 나는 네가 부려 먹을 수 있는 사람 만났으면 좋겠 어. 괜히 똑똑한 사람 만나서 기 펴지 못하고 사는 건 원치 않아." "치..." "아주 매정한 사람이거나 아주 건방져 보이는 사람은 난 반대야. 그리고 모르 지 또 따질런지. 하지만 철수란 애는 그런데로 괜찮았어." "엄마 왜 그렇게 앞서 가?" "응? 그냥 이제 내 딸이 결혼할 때가 멀지 않았다 생각이 드니까.." "아직 멀었어." "흠, 나와 네 아빠는 학교 다닐 때 만났어. 나 졸업하기 전에 식 올린 거 알잖 아. 너네 아빠도 마찬가지였어. 후후. 외할아버지가 지금은 네 아빠를 좋아하시 지만 그땐 참 못마땅해 하셨다." "알고 있어요." 엄마가 내가 입고 갈 옷을 정해 주셨고, 다과도 손수 만들어 주셨어요. 그리고 백화점에서 고급 목도리도 사 오셨더군요. 포장까지 해서 말입니다. 후후, 나도 모르겠습니다. 보약 들고 들어 갔더니 아빠가 이런 거 왜 받아 오냐고 그러더군요. 저 번에는 잘 드셨으면서...
69 회 11 월도 다 지나 갑니다. 우리 집에서 요즘 철수가 자주 입에 오르 내려요. 부모
님들은 저보다 더 앞서 가시네요. 아빠는 혹시나 어느날 갑자기 제가 깜짝 발표 라도 할까봐 걱정하시더군요. 오늘 아침도 식탁에 가족이 모였을 때 철수 얘기 가 나왔어요. "네 맘대로 결정 하지마라. 아무래도 불안 해." 아빠는 고상하게 말씀하시죠. 후후, 엄마 눈치를 좀 보시면서 말입니다. "무슨 결정이요?" "그 철수 말이다." "네? 걔는... 음... 걔하고 연인 사이 맞아요. 하지만 아빠가 생각하시는 건 나 중 문제인..." "그게 말이다. 결혼해서 살면 말이다, 남자가 여자보다 잘나야 돼. 너 남자 속 이 얼마나 좁은 줄 모르지? 우리나라는 아들들을 그렇게 키웠어. 여자보다 잘나 야 한다." "철수 못나지 않았어요." "그렇게 말한다는게 이미 마음이 갔군. 연하에다 공대생이라며? 학위 받을 생각 은 아닐거 아냐. 평범한 직장인... 사회 생활하면 니가 더 많이 벌거다 아마. 넌 아무렇지도 않겠지. 하지만 걔가 못견뎌 할거야. 아내가 자기 보다 모든 면에 서 잘났다고 생각되면 처음엔 좋아할 지도 몰라. 그러나 남자들, 하나 씩 스트레 스를 받지. 나중엔 자기 염치에 못이겨 아내를 괴롭히지. 다 그래." "당신도 그랬우?" 엄마가 끼어 들었죠. 아빠는 말을 그만 두시더니 벌컥 화를 냈습니다. "우리 약국 이 약사 소개 시켜 줄게." "네? 이 종석씨 말하는거에요? 저 약사 싫어요. 죽어도 약사는 싫어요." 아차, 울 아빠가 약사신 걸 잠시 잊었군요. 아빠가 입을 턱 벌리시더군요. 아빠 가 괜히 앞서 생각하시고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시니까 저에게 반항심 같은 게 일 었다고 할까요. 제 목소리가 조금 커졌습니다. "에잇! 누가 지 애미 안 닮았다 할까 봐..." 아빠는 그 말을 남겨 놓고 거실로 나가 버렸습니다. "엄마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 네가 날 닮았단 말이잖아." 학교로 오는 동안 자주 웃었습니다. 지금까지 왜 몰랐을까? 아빠가 대학 졸업 도 하기 전에 결혼을 하게 된 실제 이야기를 오늘 아침 엄마께 들었어요. 후후, 나도 그래 볼까? 30 년전만 해도 연애 결혼보다 중매 결혼이 많았을때죠. 우리 엄마 대단했어요. 호호. "집에서는 결혼 얘기 들리지. 니네 아빠는 철없는 학생으로 밖에는 안 보였지. 답답하더라..." 엄마 얘기를 검토해 보면 이런 상상이 되는 군요. "여기서 뭐하는거야!" "당구 치잖아." "나 집에서 또 선 보래." "봐." "뭐에요?" "어짜피 너하고 난 안되는거야. 난 먹고 살 자신 있으니까 넌 좋은데 시집 가." "이봐요. 홍영훈씨." "가서 선 봐. 나 당구 쳐야 돼." "나쁜 놈!" "지금 내가 뭘 할 수 있어? 기다릴 수 밖에. 나 먼저 가지는 않을게. 가서 선
봐, 맘에 들면 후딱 헤치우구." "야!" "이게 어따 되고 하늘같은..." "하늘 같은?" 이때 우리 엄마가 눈물을 찔끔 흘려야 그림이 되지요. 원망하는 눈빛에 아빠는 당황을 하고 당구대를 던져 버리고 엄마 곁으로 가 다독 거립니다. 같이 당구 치 던 놈, 아니 분들이라 해야 겠군요. 투덜 되겠죠. 못봐 주겠네 진짜, 애인 없는 놈 서러워 살겠나.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아빠는 엄마를 달래고 엄마는 훌쩍 거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당장 결혼 해. 오늘 우리 부모님 찾아 가 그렇게 말씀 드려?" 아빠는 당황이 되겠지요. 아직 결혼 생각은 못했기에. 엄마를 떼어 놓으며 황당 한 말투로 얘기했겠죠. "얘가 진짜. 나 작년에 뭐 한 줄 알지? 선배 꼬임에 빠져 집에서 올라 온 등록 금 전부 털어 잠실 쪽에 땅 샀어. 나 그 등록금 벌려고 온갖 잡일 다해 봤다. 참 돈 벌기 힘들더라. 그 일 때문에 나 졸업하려면 아직 일 년 더 있어야 돼. 너 네 부모님이 날 달갑게 여기겠냐. 그리고 결혼하면 뭐 먹고 살래?" 알고 봤더니 울 엄마가 아빠 마지막 두 학기 등록금 대 주었더군요. 어떻게 등 록금으로 땅 살 생각을 했을까요? 그게 나중엔 제법 큰 재산이 되었고 10 여년 전 에 엄마 개인 병원 차릴 바탕이 되었지만... 약간 화가 난 엄마는 또박한 발음으로 따지듯 말했을 겁니다. "영훈 씨는 내가 먹여 살려. 자기는 그냥 자신감과 맷집만 있으면 돼. 오늘 우 리 집 가서 아버지만 물고 늘어 져." "뭐? 무슨 말이야?" 아빠의 얼굴은 좀 우스운 표정이야 합니다. "나 자기랑 사고 쳤다 그럴테니까 자기는 아버지께 무조건 나 데리고 살거라 그 래!" "엉?" "임신 진단서 그거 위조해 갈테니까 자긴 무조건 우리 아버지께 잘못했다고 빌 어." "야..." "왜요?" "많이 맞을텐데... 너네 아버지 무섭던데..." "씨... 맞더라도 장인어른 그러며 끝까지 버텨. 남자가 그럴 용기도 없니?" "맞다가 죽으면?" 상상한 게 철수 때문에 좀 이상하군요. 아빠 모습에 철수가 자꾸 끼어 들었어 요. 엄마 모습엔 제가 끼어 들었고... 저도 안되면 저 방법 써 먹어야 겠군요. 호호, 근데 요즘 들어 결혼 얘기가 많이 나오네요. 철수와 결혼 하겠단 생각은 있지만 이,삼 년 뒤의 일일 줄 알았는데, 며칠 전 철수 집에 갔다 온 이후로 우 리 부모님이 좀 과민 반응을 보이시네요. 철수는 요즘 대학원 시험 때문에 열심인 척 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하고 있는거야?" "이거 완전히 거저 먹기야. 시험 보는 전 날 여관방에 모이기로 했어요. 우린 시험 소스 다 풀고 들어가는 거야. 영어 공부만 하면 돼." "너네는 그러니?" "아무래도 자기 학교 학생이 부려 먹기 쉬울테니까. 타학교 생들보다 유리한 점 이 많아요. 내가 들어갈 연구실 담당 교수님하고는 면담도 끝났고 프로젝트도 통 보 받았어요. 겨울 방학 때부턴 연구실로 출근해야 돼."
"아직 시험도 안 봤잖아." "에이, 그 다 붙는거라니까." "공대는 왜 그러니?" "공대니까." "넌 대학원 졸업하곤 뭐 할거야?" "병역 특례 업체 간다고 했잖아." "끝이야?" "나름대로 생각하는 건 있어요. 아주 생각없이 살진 않을거야." "후후. 우리 철수 잘나야 되는데..." "엉? 암." 하루 하루 날짜가 지나갑니다. 학생들은 기말고사를 보고 있고 학교는 곧 또 방 학에 들어 가겠지요. 오늘 날씨는 많이 흐리네요. 초라한 겨울 풍경, 특히나 학교 오는 국도 주변의 겨울 풍경은 아련한 그리움 과 작은 가슴 떨림을 주지요. 허전한 느낌. 잘 몰랐는데 철수가 가슴 깊이 파고 들어 와 버렸나 봅니다. 이 년동안 바로 이웃에 살았던 기억. 지금은 그게 아니 죠. 가족과 함께 있으니 하나의 허전함은 들지 않는데 불과 몇 개월 전까지 좋았 던 기억들은 추억이 되어 날 허전하게 만드네요. 잠시 나갔다 온 사이 약대 로비 자판기 앞에서 철수와 배선배가 종이컵 하나씩 을 들고 다정하게 얘기를 하고 있는 걸 보았습니다. 철수가 상당히 여유를 찾은 것 같네요. 이젠 자주 삐치지 않을까요? "선배님 나와 있었네요?" "어? 응. 얘가 너 찾아 왔길래." "철수 왔니?" "응." "난 이만 들어 가 볼게. 철수야 언제 셋이서 당구 한 번 치자." "그러죠." 배선배도 이제는 철수를 인정하는 듯 내가 오자 여유있는 미소를 던져 주고 자 리를 피해 주었습니다. "배선배와 제법 친해졌나 보다?" "친해져 보여요? 빠큐다 새꺄!" 바로 고개를 돌려 배선배가 들어 간 방향에다 대고 손가락질을 해 버리네요. 니 가 그러면 그렇지. "같이 커피마시더니 왜 그래?" "새끼가 친한 척 하잖아요." "야, 말 버릇 고쳐." "계속 반말해 놓고선 뭐 선배니까 반말해도 되지? 왜 묻나 그걸..." "왜 그래?" "헤헤. 괜히 그래 보는거야. 그래도 기분 나쁘네." "뭐가?" "짜식이 지가 은정일 알면 얼마나 안다고 말끝마다 은정인 말이지... 저 사람하 고 그렇게 친해요?" "너만큼은 아니니까 걱정 마." "하하, 당연히 그래야지." "당연히?" 철수 방에 가 차 한잔 하고 집으로 돌아 갑니다. 나올 때 내가 살던 방 문을 쳐
다 보았습니다. 그립네요. 저 곳이 말입니다. 나하고 얘하고 많은 추억이 깃든 곳인데... "발표 언제 나?" "곧 나겠지." "흠, 어, 나 갈게." "조심해서 가요." 밤에, 새벽인지 모르겠어요. 잠이 들었었는데 전화 벨 소리 때문에 깼어요. 얼 떨결에 받았죠. "여보세요." "누나야." "어, 철수구나. 근데 몇 시야?" "모르지." "야, 나 자다 받았어." "꼭 전화할 일이 생겨서..." "뭐?" "거기 눈 와요?" "눈? 잘 모르겠는데?" "창 밖에 함 봐바요." "잠깐만." 창 밖엔 흠, 조금씩 눈 발이 흩날리고 있었습니다. 올 겨울 첫 눈인가 봅니다. 하지만 눈이라고 하기엔 너무 초라한 진눈개비 였습니다. "오긴 오네." "와요?" "근데 별로야." "거긴 별로야? 여긴 엄청 많이 와. 아마 거기도 곧 많이 올거야." "그것 때문에 전화 한거야? 너 어디야?" "여기? 공중전화 박스." "안 추워?" "좀 춥지만 첫 눈이잖아." "애처럼 왜 그러니?" "애처럼? 그게 말이지, 음..." "뭐?" "작년에 누나가 첫 눈오면 데이트 하자고 했잖아. 작년엔 승주 때문에..." "치. 그래 내일 첫 눈 온 기념으로 근사하게 데이트 하자." "그래. 내일 대학로 갑시다." "그럴게." "하하, 그 대답 들을려고 전화 한거에요. 가르쳐 줄까?" "뭘?" "지금 새벽 두시 이십 팔분이네." "나도 시계 봤어." "그럼 오늘 봅시다. 다시 잘 자요." "알았어. 너도 잘 자." "푸하하! 눈사람 만들어야지." "그렇게 많이 왔어?" "자꾸 쌓여. 그럼 안녕. 돈은 여전히 빨리 떨어지네. 누나!" "왜?"
"사랑하옵니다." "으으으..." "뭐야?" "닭살 돋아서..." "엉? 그러니까 누나가 그런 말 못 듣는거야." "후후, 나 잘래." 철수란 애, 말 그대로 애네요. 데리고 살면 심심하진 않겠어요. 창 밖에 작고 하얀 것이 조금 씩 떨어집니다. 눈, 철수는 눈이 오면 마로니에 거리를... 목도 리를 휘날리며 여자 친구와 걷고 싶다고 했죠. 작년 첫 눈 올 때 그렇게 하자고 약속 하고선 그냥 지나쳤죠. 이쒸, 철수 그 녀석 잘 자던 날 깨워 밍숭맹숭하게 만드네요. 한 번 깼다가 다 시 잠이 들기가 쉽지가 않았습니다. 닫았던 창을 열어 다시 밖을 보았죠. 눈이 내리긴 하지만 쌓이긴 힘들겠어요. 수원 쪽은 어느정도로 눈이 올까? 괜히 궁금 하네요. 철수가 보고 싶네요. 잠도 오지 않은데... 그럴까? 갑자기 떠 오른 생각에 서둘렀습니다. 옷을 갈아 입고 학교 갈 준비를 했죠. 어 짜피 가야할 학교 몇 시간 앞 당긴다고 해 될 건 없죠. 자기 내 단잠을 깨웠으 니 나도 걔 단잠을 깨운다 해도 녀석이 뭐라 투덜되지 못할겁니다. "오늘 일이 있어 일찍 학교 갑니다." 식탁에 메모 한 장 남겨 놓고 새벽 세시경에 집을 나섰습니다. 새벽에 국도 길은 위험하지요. 더군다나 서울을 벗어나자 눈 발이 굵어 졌습니 다. 평소 같으면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지만 조심하다 보니 거의 두시 간 가까이 걸려 율전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철수 말대로 율전엔 눈이 많 이 왔어요. 지금도 함박 눈에 가까운 눈이 내리고 있고 쌓인 눈은 큰 눈사람을 만들수 있을 만큼 쌓여 있었습니다. 허허, 철수 방에 불이 켜져 있더군요. 히죽 웃으며 철수 방으로 갔죠. 근데 철수가 없더군요. 초인종을 마냥 누를 수도 없었 습니다. 다들 자고 있을텐데 초인종 소리가 부담되었습니다. 이 녀석 어딜 간거 야. 어랏! 철수 방 문은 잠겨 있지 않았습니다. 이불, 자다가 일어 났다는 게 이불 모양에서 바로 표가 나네요. 어디 잠시 나갔 나 봅니다. 한두번 들락 거렸던 곳이 아니라 혼자 들어가 있는 것에 부담스러움 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십 분이 지나고 이십분이 지나도 철수는 들어 올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딜 간 걸까? 이 새벽에 말입니다. 발자국 소리가 들렸습니다. 뛰어 오는 소리. 그리고 방문을 열고 철수가 들어 왔습니다. 푸하하! 얼굴은 빨갛다 못해 검붉었고 목도리는 목을 감고 있는게 아니라 머리와 턱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추리닝 바지에 위에는 패닝조끼를 입고 두툼한 장갑엔 눈 을 이따만큼 묻히고는 방 문을 열고 들어 와 나를 보고는 놀랐습니다. "앗!" "너 갔다 온거야?" "누나가 여기 왜 있는거야?" "니가 잠 깨운 바람에 그냥 학교 와 버렸다." "에? 그 깜깜한 새벽에 여기 내려 온거야?" "그래." "이 여자가... 사고라도 나면 어떡할려고 그래?" "조심해서 왔으니까 걱정 마." "언제 온거야?" "한 삼십분 쯤 전에." "남자 방에 맘대로 들어와도 되는거야?" "한 두번 들어왔니? 넌 도대체 어디가서 뭘 하고 온거야?"
"헤. 뭐 했는지 보여 줄까?" "뭐?" "옥상으로 따라 와 봐요." 녀석은 장갑과 목도리를 풀다 말고 내 손을 잡아 이끌더군요. 녀석의 손이 얼음 처럼 차가웠습니다. 푸우! 진짜 애군요. 옥상 바닥은 엉망이었습니다. 곱게 쌓였다면 너무나 아름다 웠을 옥상은 파헤치고 뭉쳐지고 밟힌 눈 때문에 아주 지저분해 보였습니다. 옥 상 한 구석에 놓인 눈사람 두개. 제법 컸어요. 거의 내 허리 높이 까지 오는 눈 사람 두개. 박철수, 홍은정. 이름을 파 놓지 않았다면 누가 누군지 알 수없을 만큼 닮은 두 개의 눈사람. "새벽에 이거 만들었니?" "응." "내일 학교는?" "파장 분위기잖아. 내가 사랑스럽지 않아요?" "참, 철없이 보인다." "재밌게 살아야지. 다음에 눈 오면 같이 만들어요. 이따만하게..." 철없이 보이는 철수가 참 순수하게 사랑스러워 보이는 건. 저 행동, 아이처럼 두 팔로 커다란 원을 그리는 저 모습 때문은 아닐거에요. "에구. 야, 박철수?" "왜?" "이게 나야?" "응." "이게 여자 같아 보여? 내 엉덩이가 이렇게 크니?" "바보네에... 그거 허리야. 머리 엔드 몸뚱이. 누나가 짚은 곳은 허리 쯤 되겠 다." 녀석이 손으로 가리키며 설명을 하는군요. 나도 그 정돈 알지. "두개가 똑 같잖아." "얘도 진짜 애네. 대충 생각해라. 눈사람이 다 거기서 거기지. 그런 거나 따지 다니... 낭만이 없어 낭만이..." "치. 춥다 내려가자." "헤헤, 누나!" "앗 차가워! 너 어디다 손을 집어 넣는거야." "어? 나의 실수." "너 죽었어." 녀석이 장난친다고 손을 집어 놓은 곳은... 흠,흠. 목 뒤로 넣었는데 내가 놀 라 몸을 빼다가 그의 손이... 흠,흠. 눈 뭉치를 만들어 어색함을 무마하기 위해 냅다 던졌습니다. "퍽!" 그것도 못 피하냐. 그의 얼굴에 눈 뭉치가 주루루 흘러 내립니다. 히히. "어쭈, 댐비네?" "퍽!" 짜식이 여자라고 봐주지 않더군요. 그래 너죽고 나죽자.
70 회
헤헤, 히죽! 아까 그 감촉은 뭐랄까? 누나와 자칫집 옥상에서 내가 만든 작품들 을 감상했었다. 장난 삼아 차가운 손을 누나 목 뒤로 넣었는데, 누나가 놀라 몸 을 빼는 것이 아니고 돌리는 바람에 모양새가 이상하게 되었었다. 빼도 박도 못 하고... 아무래도 그 뭉클했던 감촉은... 하하. 누나가 시비를 걸어 왔다. 눈뭉치를 내게 던졌다. 가소로왔지만 누나의 웃는 모 습이 좋아 좀 놀아 주었다. 아무도 보는 사람 없는데 이런 애들이나 하는 눈싸 움 쫌 하면 어때. "씨, 껄핏하면 울고 있어." 나 솔직히 많이 봐주었다. 누나가 내게 눈뭉치를 던졌을 때 피할 수 있었지만 하는 모양새가 귀여워 그냥 맞아 주었다. 나중에 누나가 하는 짓은 장난이 아니 더라. 저 여자의 내면에 깔려 있는 폭력 성향을 느낄 수 있었다. 저 번 어색한 사이 될뻔 했을때 부터 눈치 채고 있다. 내가 맞아만 주니까 자기 실력이 대단하 다고 생각했는지 마구잡이로 던졌다. 내 표정엔 상관 없이 에잇, 에잇! 하면서 마구잡이로 던졌다. 그러나 나 그냥 맞으며 웃었다. "이제 내려 가요." "호호, 나 눈싸움 잘하지? 이거 재밌다." "맞는 나는 별로 재미없어. 추워요, 이제 내려 가요." "나 눈싸움 처음 해보는거다? 너도 던져 봐. 바보 같이 맞지만 말고." "맞아 준거야. 그만하고 내려가요." "에이, 맞아주긴 뭘 맞아 줘? 내가 잘 던졌잖아." "안 내려 갈거야?" "철수야? 던져 봐, 던져 봐 빨리." "가소롭..." "퍽!" 말하고 있는데 맞으니까 아팠다. "헤헤. 아프지? 너도 던져 봐." "장난이 아니잖아!" 아픈 것 까진 참을 수 있었는데 쌩글 웃으며 놀리는 누나의 얼굴은 참을 수 없 었다. 그래서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았다. 눈 뭉치를 재빨리 만들어 파파팟, 뛰어가서 바로 일미터 근방에서 누나 얼굴에 대고 냅다 던졌다. 조준 사격했다 는 말이다. 퍽! 그랬더니 울었다. 씨... 그 눈 좀 맞은게 뭐라고, 나 누나를 부축하고 내려와야 했다. 간접 포옹이라 기 분은 좋았지만 엄살 엄청 심한 거 같았다. 누나는 눈물을 찔끔거리다 침대 위에 앉아 계속 거울만 쳐다 보고 있다. "많이 아파요?" "내 얼굴 봐 지금 어떻게 됐는지?" "그러길래 왜 잠 자는 사자의 코털을..." "너 나에게 감정 남아 있지?" 째려 보니까 무섭다야. 누나 콧등 위가 다른 부위에 비해 유난히 빨갛다. 저기 맞았나 보다. 감정? 생긴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없어지면 안돼지. "응. 누나에게 감정 많아." "뭐야?" "연인 사이에 감정 없이 지낼 수 있나? 러브! 애정." "치." "거울 그만 봐요. 미안하잖아."
누나가 거울을 놓더니 주위를 살폈다. "아침 차릴 거 있어?" "없는데..." 아침? 해가 뜨려면 한 시간 가량 지나야 한다. 고로 아침 얘기가 나올 시간이 아니다. 아침 밥이야 해 뜨면 나가서 사 먹으면 된다. "그럼 뭐 먹을 거 없어?" "없어. 배 고파요?" "응. 잠도 오구." "뭐 좀 사올까?" "지금 문 연 곳이라야 편의점 밖에 없지?" "그쵸." "그냥 자자." "응?" "아침 먹을 때까지 자자구." "뭐야? 이 여자가 정말." "깜깜해도 아침이잖아." "방바닥 차가워. 나는 어디서 자라고?" "너? 그럼 넌 자지 마." "에? 같이 자자는 말은 안하네?" "이 좁은 침대서 어떻게 같이 자." "허허! 내가 남자라서 같이 못자는 건 아니고?" "다음엔 내가 껴안고 자 줄게." "허허! ... 정말? 언제?" "너랑 나랑 같이 살게 되면." 참 자연스럽게 말하네. 진짜 나 데리고 살려고 저러나? 생긴건 참 현대 여성으 로 보이는데 생각은 ... 누나는 내 보호(?)아래 내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피곤할만도 했겠지. 책상 의 자에 앉아 잠이 든 누나를 보았다. 사랑스러웠다. 보고만 있어도.... 나도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모른척 누나 옆에 가 자 버릴까? 보고만 있으려니 눈이 자 꾸 감겼다. "으허! 따뜻하다." 나 대중 목욕탕 왔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에헤라, 그러며 잠대신으로 피 로를 풀었다. 오늘 하루가 신날 것이다. 첫눈 온 날, 누나와 난 대학로가서 데이 트 하기로 했다. 생각만 하고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게 삼년이다. 하하. 잠이 많이 왔다. 시간도 이른데 수면실 가서 잠시 잠을 청해 보기로 했다. 아 침 먹을 수 있을 때 돌아가 누나 깨워 주고 밥 얻어 먹을 생각이었다. "에이쒸!" 잘 자는 내 배 위에 시크먼 털로 뒤덮힌 근육질의 다리 하나가 떡 올라 왔다. 우욱! 엄청 역겹다. 옆에서 빨가 벗고 자던 어떤 아저씨가 몸부림 치다 나를 덮 쳤다. 우욱! 재수 열라 없다. 자던 잠 다 달아 났다. 욕탕에 다시 들어 가 샤워 를 하고 나왔다. 아까 그 털많고 시커먼 다리를 생각하면 여전히 몸이 건질거리 만... 내 다리를 쳐다 봤다. 아까 그 다리에 비하면 내 다리는... 호호, 섹쉬함 그 자체다. 적당히 자란 털, 하얗고 미끈한 모양새. 어떻게 이렇게 섹쉬할 수 가... 나중에 누나 배 위에 올려도 그녀가 별로 싫어하지 않을 것 같다. 헤헤. 가볍게 몸도 풀고 머리도 말리고 가푼하게 아침을 맞이 할 준비가 끝났다. 아 침? 근데 욕탕의 시계는 아침이 아니었다. 12 시 10 분. 분명 가고 있는 시계였 다.
"아저씨, 저 시계 맞아요?" "응." 그때까지 별로 못 느끼던 허기가 갑자기 몰려왔다. 의식적으로 저 정도 시간이 니 엄청 배가 고플 것이라고 느꼈나 보다. 집으로 뛰어 가다 배가 고파 식당에서 밥 한끼 먹었다. 누나가 내 방에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벌써 등교 했을 것이다. 어엉! 내 방문을 열고 난 배시시 웃었다. 누나는 내 침대 위에 이불을 돌돌 말 고 입을 헤, 벌리고 그대로 자고 있었다. 완전 태평천하다. 어떻게 남자 방에서 저렇게 태평스럽게 잘 수가 있나. "누나! 이봐요, 누님! 야, 홍은정! 자기야, 부인! 여보 마누라. 헤이 걸!" 천정이 참 멀리 느껴져 천정 한 번 쳐다 보고 배시시 웃었다. 이렇게 불렀는데 도 안 깼으니까 분명... 흐흐. 검지 손가락을 세웠다.뾱! 뭉클한 느낌이 너무 도 좋다. 진짜 안 일어 나네. "누나!" 마구 흔들어 깨웠따. 누나는 일어 났지만 얼굴 표정이 별로 좋지 못하다. "머리 아파." "내 새벽에 그 짓할때 알아 봤어. 많이 아파요?" "응." 누나는 콧물까지 흘렸다. 안돼는데... 머리에 손을 짚어 보니 제법 따뜻했다. "감기 걸린거야?" "모르겠어." "약사도 감기 걸려요?" "씨..." "학교 안 가?" "못 가겠어." "오늘 데이트는?" "응? 저녁엔 괜찮아 지겠지." "뭐 좀 먹어야 되지 않나?" "나 좀 더 누워 있을게. 한 시간 뒤에 깨워 줘." 그 좀 놀았다고 감기가 걸리나? 누나는 일어 났지만 다시 누워 버렸다. 지 집인 양 참 자연스럽다. 밥 먹은 것도 있고 해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밖으로 뛰어 나갔다. 오 호, 오늘 날씨는? 청아한 겨울 빛을 머금은 한 송이 늦게 핀 국화같다. "25 살 여자. 눈싸움 하다 감기 걸렸음. 약 지어 줘요." "어떻게 아픈지 말해야지." "머리에 열이 있고 콧물을 찔끔 흘림. 그리고 일어 날 생각을 안함." "누구 말하는거야?" "이름 홍은정. 지금 내 방에서 자고 있음." "응?" "새벽부터 날 찾아 와서는 눈싸움 했어요. 그러고서는 못 일어 나네." "자알 한다아! 너네 둘이는 시간이 갈 수록 애 같아지니?" "애? 애같아 지는게 뭔데? 그런 생각은 스스로 족쇄 채우는 거야. 재밌게 살아 야지." "말은 여전히 잘하네. 그래 많이 아픈 것 같던?" "멀쩡했는데... 그렇게 많이 아픈 것 같진 않아."
"요즘 감기 잘 못 걸리면 며칠 앓아 눕는데..." "그러면 안되는데. 나랑 놀아야 되요." "첫! 철수야? 철 좀 들어라." "언젠간 들겠지. 참 누나는 날 잡았어요?" "요즘 식장 알아 보고 있어. 3 월달 둘째주나 셋째 주가 될 것 같애." "좋겠네." "바빠서..." "언제 한 번 소개시켜 줘요." "누구? 그이? 그럴게. 아저씨 같을텐데?" 그이? 얘도 맛이 갔네. 아저씨라면? "결혼 한 번 했던 사람이에요?" "뭐얏!" "약 줘요 빨리." "잠깐 기달려 봐." 약국 안은 처음 시작할 때보다 제법 약국 같아져 보인다. "내 앞으로 달아 놔요." "뭐야?" 표정이 약 값 안내고 가면 고소해 버릴 것 같다. 표독하다고 해야 되나? 그렇다 고 내가 낼 것 같냐? "약 값 이거 얼마나 한다고... 아픈 사람 누나 친구야." "너 애인이잖아." "나는 그럼 뭐야?" "너? 정리해야 될 사람 제 1 호." "에?" "나 이제 결혼하면 도움 안돼는 남자들 다 정리할거야." "거, 말이라도 참 섭하네요." "허허, 너 그런 생각 많이 했잖아. 결혼하면 잊어진다며?" "기분 나빠서 외상!" 결혼하면 정리해야 될 사람 1 호? 아무리 장난이었지만 씁쓸하다. 내가 어딜 봐 서 정리 될 사람이냐. 은정이 누나도 그러면 어떡하나? 맞다. 같이 살면 된다. 내가 같이 못 살 이유가 없다. 그래도 빨라야 이년 뒤인데... "누나 이거 식후에 먹어야 되지?" "응." "집에 먹을 거 없어요. 우리 은정씨 아무것도 안 먹었어. 죽이라도 좀 만들어 줘요." "여기서 어떻게 만들어?" "누나 여기서 밥 잘 만들어 먹잖아. 그 친한 친구가 아프다는데..." "씨. 약 값도 안주구선." 냄비 하나 들고 뛰었다. 식기 전에 먹여야 된다. 가픈 숨을 몰아 쉬며 방에 들 어 갔더니 누나가 침대 위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어?" "너 어디 갔다 오는거야?" "아프다 해서 약 지어 왔지." "들고 있는 건 뭐야?" "이거? 죽." "니가 만들었어?"
"나 이런거 못 만들어. 좀 괜찮아요?" "아니 추워. 여기 더 못있겠어." "추워요? 난 괜찮은데." "너 학교 안가?" "파장 분위기랬잖아. 누나는?" "나 집에 갈래." "아프댔잖아. 죽 좀 먹고 약도 먹고 조금만 더 있다 가요." 아프다면서 누나는 머리 감고 세수 하고 간단하게나마 화장도 했고 옷 매무시 도 신경을 썼다. 죽 다 식었다 씨. 누나가 머리를 말리는 동안 잽싸게 죽을 다 시 댑혔다. "이거 좀 먹어 봐요." "맛있어?" "모르지." 누나가 한 숟가락 떠 넣더니 쌍을 찌푸렸다. "이거 누가 만들었니? 디게 맛없어." 몸 상태가 안좋긴 안좋은가 보다. 입 맛도 잃었나 보다. 나도 한 숟갈 떠 먹었 는데 먹을 만 했다. "진짜 맛없네. 이래 가지고 시집 가겠나." "누구? 이거 정희가 끓였니?" "응." "너 가서 또 일러 줄거지?" "맛 없다고 한 거? 당연하지." 억지로 먹이고 약까지 먹였다. "나 집에 좀 데려다 줘." 그럴 줄 알았어. 내 그럴 줄 알았다. 서울엔 옅은 눈이 쌓여 있었다. 그런데로 낭만이 있어 보였다. 젖은 도로는 선명했고 가로수 잔가지에 붙어 있는 눈꽃들 은 추운 날씨 덕에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었다. 지금 쯤 대학로는... 겨울 을 시작하는 연인들의 모습, 차운 공기 속에 즐거운 입김을 뿜어되는 수많은 사 람들의 모습, 팔짱을 끼고 걷는 여인들. 목도리를 한 청년... 좋겠다. 누나는 뒷 좌석에 앉아 내 겉옷을 감고 덜덜 떨고 있다. 히터를 거의 최고에 올려 놓았는데 도 추운가 보다. 저 모양을 보고 오늘 첫 눈 왔으니 대학로 가자라는 소리를 어떻게 하겠는가. 올해도 텄다 c 바. 왜 새벽부터 날 찾아와 가지고서는 오늘 잡아 논 그 데이트를 망쳐 버리냐. 아 침에 눈싸움 할 때부터 오늘 데이트는 파장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년 첫 눈 오 는 날을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으이쒸. "몸조리 잘해요." "고마웠어." "왜 새벽에 찾아 와가지고..." "재밌었잖아." "푹 쉬고 빨리 나아요?" "알았어. 나 들어 가 볼게." 나 아무래도 시험의 사나인가 보다. 푸하하! 학력고사 마지막 세대로서 나에게 다가왔던 그 수많은 시험들. 학력고사. 운전 면허 시험. 기사시험. 대학원 시 험. 실기까지... 나 다 패스 했다. 푸하하. 비록 면허 시험 주행에서 한 번 고배 를 마셨지만 눈감아 줘도 된다. 아자! 철수 잘 난 놈이다. 대학 사년간의 생활
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서러웠던 시간, 미팅했던 기억을 말하는 것이다. 암담 했던 시간, 아버지께 구박 받던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슴 졸였던 시 간, 누나에게 차일까봐 애태웠던 시간. 모든 게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 푸헤헤, 은정이 누나도 내 곁에 남아 있다. 기분 좋다 헤헤. "오빠 대학원 들어 갔다면서요? 축하해요." "어? 그래. 그거 뭐... 수희에게 들었니?" "네." "음. 너도 열심히 해라." 축하를 제일 먼저 해 준 것은 큰 은정이가 아니라 작은 은정이었다. 작은 은정 이. 헤헤. 그 뒤에 또 전화가 왔다. 어떻게 알았을까? "누구세요?" "흠, 나야 이승주." "어, 승주형이 어떻게?" "너 대학원 간다고 했잖아." "네." "오늘 너네 학교 대학원 발표 났다고 들었어. 어떻게 됐어?" "저요? 당연히..." "떨어졌어? 하하 농담이야." 이게 진짜. "근데 어떻게 알고...?" "너네 학교에 친구 있어." "누나 말인가요?" "걔 말고도 있어. 하여튼 축하 해." "네." 아무리 연적이었지만 고맙네. "은정이와는 잘 지내지?" "네." "흠, 그래 둘이 참 잘 어울려 보이더라." "형은?" "나? 나 취직했어. 새해가 되면 연수 들어 갈거야." "잘됐네요." "다 그렇지 뭐." "전화해 줘서 감사합니다." "그래. 다음에 기회되면 한 번 봐." 작은 은정이에게 전화를 받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승주에게 전화가 왔었다. 우리 집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지? 새끼 나 뒷조사 한 거 아니야? 근데 가장 먼 저 축하해 주어야 할 은정이 누나는 뭐하는거야. 바로 큰 은정이에게 전화를 걸 었다. "누나!" "철수구나. 안그래도 전화 하려고 했어. 오늘 대학원 발표 났다며?" "승주형 전화 번호 어떻게 돼?" "엉? 갑자기 그건 왜?" "갈쳐 줘요." "왜에?" "소개팅 시켜 주게." "뭐어? 야!" "배 아프니?" "그건 아니지만..."
"다섯살 차이면 좀 많을까?" "누구 소개 시켜 주려구?" "은정이." "나?" "누나가 나보다 두살 적냐? 은정이가 자기 혼자 뿐인 줄 아나 봐. 심각하다 심 각해." "뭐가 심각 해. 잠깐 기다려. 참, 축하 해 철수야." "뭐 다 붙는건데 새삼스럽게." 하하, 겸손하게 한 손으로 앞머리를 뒤로 쫙 넘겼다. 겸손하게 아랫배에 힘을 줘 보기도 했다. 승주에게 연락했다. 누구 예쁜 여자애와 같이 나갈테니 만나자고 했다. 은정이 에겐 수희 시켜서 소개팅 시켜 준다고 꼬셨다. 그리고 수희를 내 대신으로 내 보 냈다. 전혀 안면이 없는 사이가 아니라서 대충 만날 것이라 생각하고 나는 일선 에서 빠졌다. 나 몰라라 했다는 말이다. 어떻게 될런지 모르겠지만 승주 그 새 끼, 싫은 척 하지 않았다. 나쁜 놈이다. 아무래도 누나에게 마음이 많이 떠났나 보다. 아니면 너무 강한 상대를 만나 포기를 했던지. 나? 하긴 넘을 수 없는 태 산같아 보였을 테니 돌아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겠지. 그 둘이 잘되기를 빈다. 작은 은정이는 나이만 적었지 누나와 비슷한게 많다. 이름 같지, 같은 약대생이 지. 키 크지. 잘 빠졌지. 성격 더 좋지. 잘난 척 안하지. 여러모로 누나보다 나 은게 많다. 승주 땡 잡았다. 승주? 나보다 나이 많은 것 빼면 같은 공대생이지, 키 더 크지, 쩝! 생긴거? "수희야? 내가 더 잘생겼지?" "그 오빠가 훨 낫던데." 수희는 대학 가더니 날 대함에 있어 예전 같지 않다. 성격? "성격은 내가 낫지?" "그 오빠는 매너도 있고 그릇이 커 보이더라. 오빠처럼 쫌생원 같지 않던데?" 수희는 대학 가더니 애가 영 맛이 간 것 같다. "근데 은정이가 소개팅 하려고 하던?" "응. 못할 건 뭐야?" "둘이 어떻던?" "처음엔 늘 그렇듯이 어색했지만 그 오빠가 잘하더라. 은정이도 애교가 있잖 아." "둘이 잘 될 것 같던?" "응." 난 착각 속에서 살았나 보다. 은정이가 날 좋아하고 있지나 않았을까. 승주가 아직도 은정이 누나를 못잊고 있지 않았나. 아니었다. 그 년,놈들! 그래 그딴 식 으로 잘 살아 봐라. 내겐 은정이 누나 뿐인가 보다. 은정이 누나 곁에도 이제 나 뿐인가 보다. 은정이 누나, 이제 착각에서 벗어날 때야, 누나에겐 나 밖에 없는 거 같어. 쪼금 걸리는 배군이 있지만 내 상대가 되지 못한다. 푸하하! 그래 한 사람이면 됐지. 누나는 내가 아니면 가엾게 된다. 그 거만한 아가씨가 챙겨주고 떠 받드는 사람이 없어지면 이 험한 세상 헤쳐나가기 힘들 것 같다. 그 잘난 아 가씨는 계속 착각하면서 살다가 어느 순간 현실을 깨닳겠지? 그래 그녀 곁에는 바보 같은 내가 있어야 한다. 나 밖에 없다. 아자! 이제 따지지 말자. 은정이와 승주가 소개팅을 한 날, 그날 한 밤중에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헨 드폰에 전화한 것 아니다. 그리고 핸드폰이면 어쩔거여. 집 전화비 아버지가 내 는건디...
"홍은정씨 되십니까?" "이 밤에 왠일이야? 나 방금 잠자리 들었는데." "아, 제 목소리를 바로 알아 보시는군요." "여전히..." "바보 같다구?" "잘 아네? 무슨 일이야?" "사랑하옵니다." "으으으으..." 이게 진짜. 아직도 날 가지고 노네. 그냥 전화 끊어 버렸다. 그랬더니 바로 전 화가 왔다. "야!" "왜요?" "잠 깨웠으면 놀아 줘야지." "내가 장난감이냐?" "응." "이런 씨." "넌 내가 사랑하는 장난감이야. 사랑해에 철수야." "으으으으...." 꼬끼요오! 졸라 닭살 돋았다.
71 회 방학이 한 창 깊어 간다. 크리스 마스도 코 앞으로 다가 왔고 96 년 한 해도 얼 마 남지 않았다. 나는 한 동안 신경 쓸 일이 없었다. 연구실에 내 자리가 마련되 지 않았고 학사 과정 모두 이수한 뒤라 진짜 한가한 한량 신세라고나 할까? 오 죽 심심했으면 군 제대 한 달 조금 더 남은 승헌이 면회까지 갔다 왔겠는가. "이거 미친 놈이네? 잘 자던 잠 너 때문에 깼잖아."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냐? 면회 왔으면 고맙다고 해야지?" "그건 일,이병 때나 그런거구. 일요일이라 잠 좀 자려고 했더니." "진짜 싸가지 없네." "이왕 온 거 먹을 거 좀 사와라? 그 은정이 누나하고 같이 좀 오지." "나 혼자 와서 불만이냐?" "응. 엄청!" 기껏 친구 군대 면회 갔다가 좋은 소리 못듣고 돌아 왔다. 이런 걸 두고 유식 한 말로 헛수고 했다라고 한다. 기분 나쁘다. 근데 말병장 높아 보였다. 헤헤. 내 친구가 군 제대할 나이인데 나 결코 어린 놈 아니다, 하하. "푸하하! 이거 누나 맞아요?" "야아." "고등학생일때는 디게 이상하게 생겼네. 이 얼굴이 이렇게 됐단 말이야?" "그때도 예뻤어." "저 번 면허증 사진도 이상하더니만. 대학 졸업 앨범 줘 봐요." 크리스마스 주간을 맞이하야 누나 집에 놀러 갔었다. 누나가 날 초대했었다. 어 머님이 날 한 번 보자고 하신 모양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여전히 이른 것 같지 만 어머님이 부르시는데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다 진짜 누나하고 맺어지는 건 아닌지... 헤헤, 그럼 봉 잡았지! 하여간 누나와 함께 있는 시간이 좋다. 누 나가 사는 이 공간이 그리 낯설지 않은 이유는 누나 때문이겠지. 어머님이 퇴근 하실 때까지 긴장도 풀 겸 누나 방에서 앨범들을 구경하며 놀았
다. "대학 때는 그런대로 예쁘게 나왔네? 누나 성형 수술 했어요?" "그런거 안 해." "근데 고등학교 앨범에는 왜 이래?" "씨." "다른 앨범 줘 봐요." 내가 끼어 있지 못한 시절의 누나 모습, 누나 솔직히 어릴 쩍 모습도 예뻤다. 참 곱게 자란 것 같다. 아주 어릴 적 사진을 봤는데 입고 있는 옷차림이라던가, 표정, 그리고 그녀를 품고 있는 배경들이 그 시대와는 맞지 않게 고급스럽고 세 련되어 보였다. 가족 사진, 그래 아버님, 어머님 외에 누나 곁에 있는 사람이 없 다. 친척들도 별로 많지 않은지 누나 가족 사진들은 내 그것에 비해 조금 단조롭 다. 누나 부모님은 그것이 아쉬웠는지 누나를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참 곱게 키 운 모양이다. 사진에서 바로 표가 났다. 누나의 포즈와 표정? 어린 애 치고는 부 끄럼도 없고 상당히 발랄하고 끼도 있어 보였고, 어린 공주? 연예인 같아 보이기 도 했다. 좀 꿀린다 씨. 내 가족 사진 보면 대부분 어슬프게 우스며 정 자세다. 쉽게 말하면 누나는 사진기를 의식하지 않고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이고 내 어릴 쩍 사진들은 자, 사진 찍을 테니 포즈 취해라, 그래 놓고 아, 이제 찍는구나 생 각하며 다소 떨리는 행동을 한 모습들이 대부분이다. "자, 이건 고등학생 일때의 앨범." "그래요? 여기 그럼 승주 있겠네." "그래 있다." 찬찬히 넘겨 보았다. 아주 뒷 쪽에 승주와 같이 찍은 사진도 있었다. 둘이 장난 치나? 마네킨이 따로 없다. 승주는 차렷 자세, 누나도 뻣뻣하게 굳어 있다. 뭔 가 이거 어릴 적에는 그렇게 자연스럽더니 이건 영... "야, 예쁘다." "이쁘지?" "누나 말한 거 아니야. 여기 두 명이 제일 많이 나오네? 요즘도 만나는 친구들 이에요?" "응." "이 누나가 제일 예쁘네." "얘? 얘가 예쁘니?" "응. 이름이 뭐에요?" "그거 알아서 뭐하게?" "그 질투하지 말고 갈쳐 줘요." "내가 질투를 왜 해? 걔? 배지수." "이름도 예쁘네. 다음에 소개시켜 줘요?" "남자들 이상하네. 난 잘 모르겠는데 다들 얘가 예쁘대." "뭐가 이상해. 척 봐도 예쁘네, 누나는 택도 안되는디?" "뭐야!" "여자 앨범이라고 여자들이 많구나." "정말 내가 턱도 안된단 말이야!" 이 여자 진짜 단순하네. 하여튼 여자들이란 쯔쯧! "다른 거 줘봐요." "이건 대학 때 사진들." "두 권이나 돼요?" "끼우지 못한 게 더 많아." 신입생 엠티 간 사진, 약대생들 떼거지로 어디 간 사진. 아까 그 두 명은 몰랐
는데 자주 만나고 돌아 다녔는지 대학 때 사진에도 제법 등장했다. 우리 동아리 아는 형들도 보였고 정희 누나도 자주 보였다. 다른 앨범, 푸헤헤! 여기 주역은 나였다. 하하, 나하고 누나하고 사진을 이렇게 많이 찍었던가? 나하고 같이 찍 은 사진이 승주보다 훨씬 많고 모습도 자연스럽다. 나, 어릴 적 사진처럼 어색 한 포즈가 아니다. 연예인 뺨친다. 좀 잘나온 내 모습 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 다. "낭자!" "응? 낭자?" "여기 잘 생긴 청년은 누군지요? 참 잘 생겼구료." "그러고 싶니?" "진정 궁금해서 묻는 말이요." "갖다 버릴래." 공주는 공준가 보다. 정리 했다는 앨범들만 열 권이 넘는 것 같다. 앨범에 끼우 지 못한 사진들 다 합치면 얼마나 된다는 말인가? 난 기껏해야 두 권? 그나마 가 족 사진, 수학 여행 때 사진 빼 버리면... "이 것들은?" "이건 외국 나가 찍은 사진들." "음." "그 때 그 사진 봤지?" "뭐요?" "할슈타르 호수 가에서 찍은 사진." "에? 그렇게 어려운 이름을 어떻게 기억하나?" "흠." 저건 세살짜리 꼬마가 봐도 비웃는다는 것을 바로 알겠다. "그거 왜요?" "꼭 한 번 같이 가자." "돈이 어딨나?" "신혼 여행을 거기로 갈까?" 참 생각하는거라곤... 나하고 같이 가고 싶다와 신혼 여행을 같이 말했다는 건? 진짜 그런 꿈 같은 일이 일어 날까? 확인 사살을 해 보자. 말이 좀 그렇다. 그냥 확인을 해 보자. "신혼 여행이라 함은... 저하고 신혼 여행 간다는 말입니까?" "갑자기 왠 깍듯한 존댓말? 응." 누나는 고개까지 까닥 거린다. "에이 쒸!" 기분은 좋았지만 버릇 때문에... "왜 또 에이쒸야?" "이게 뭐야. 백한번째 프로포즈 안 봤어요? 다른 영화도 마찬가지야. 나 아직 누나에게 프로포즈 안했어. 결혼 얘기는 말이지. 남자가 하늘이 내려 준 어떤 계 기가 있어 여자에게 멋있는 프로포즈를 하고 여자는 거기에 감동을 받아 그래, 저 사람이야. 그런 느낌을 받은 뒤에 나와야 하는거야. 누나는..." "내가 뭐?" "야아~ 오늘 날씨도 좋은데 결혼 할래? 이런 식이잖아. 그것도 여자가 먼저." "훗! 상상도 못하니? 프로포즈 그 딴게 무슨 소용이 있어? 그건 확신을 못하는 연인들이나 하는거구. 우리 같이 좋아하는 사이는 자연스럽게 결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싹 트는거야." "나는 자연스럽지 못한디?" "왜?" "누나야, 우리 만난지 삼년도 안됐어. 뭐가 확신이 드는데? 나는 급작스럽다."
"너랑 살면 재밌을 거 같애. 아기자기 할 것 같지 않니?" "무슨 결혼을 재미로 하는 줄 아나. 어째 나보다 더 철이 없어 보이냐?" "흠, 나도 생각하는 게 있어서 하는 말이야. 네가 보기에 어쩌면 단순해 보일 지 모르지만 내 머리속에는 수많은 계산들과 가정들이 들어 있어. 그래서 내린 결론이야. 이제는 확신이 섰어. 너 데리고 살거야." 데리고 살아? 내가 무슨 애완 동물이냐. 장난감이라고 하지를 않나. 아무리 연 상이지만 너무 한다. 데리고 산다는 거에 반박을 하면 저 여자 분명 말꼬리 잡 고 늘어 지겠지? 안되면 삐치는 행동하다가 또 울어 버릴지 모른다. 때릴 수도 있다. 여기 누나 집이다. 전적으로 내게 불리하다. 좋은 말로 타일러야 겠다. "삶이 생각처럼 쉬우면 차암 좋지. 어려운 문제들 코 앞에 닥처 봐. 부부 싸움 하는 남,녀들 다 연예시절 사랑하던 사이였고, 행복할 거라 확신하고 결혼했을거 야. 그렇지만 싸워요. 이혼하려고 법정에 서는 부부들? 다 서로 사랑했던 사람들 이야. 그들이 왜 싸우고 갈라서는데? 생각처럼만 됐다면야..." "너 그런 말을 왜 해?" "지금은 우리 둘이가 이리 좋아 보여도 나중은 어떻게 될 지 모른다 이거지. 결 혼을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말라구. 나 학생이야. 내 친구들 군 제대하면 이제 삼 학년이야. 그런 내가 지금 결혼 얘기할 때냐?" "씨, 지 생각만 하고 있어. 내 친구들 학교 졸업하구 결혼 얘기 많이 해. 아까 말한 지수란 애는 직장 삼년 차구, 맞다 정희는 곧 결혼한다." 씨이... 연상을 사귀면 이런데서 불리하구나. "그래도... 누나 나이도 아직 일러. 현실은 생각처럼 재밌지도 쉽지도 않아요." "그래 내 말대로,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세상, 생각처럼 재밌지도 쉽지도 않은 세상, 그래도 기대는 하고 살아야지. 우리가 살아가야 할 현실 문제들, 좋은 상 상들도 꾸며 놓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 왜 굳이 어렵고 나쁜 쪽으로 생각을 해?" "내 얘기 들은거야? 재밌게 살려면 뭔가가 있어야지. 나 아무것도 없어요. 좋 은 쪽으로 생각해도 결혼 얘기는 너무 일러. 그리고 여자가 먼저 하는 게 어딨 냐?" "아무것도 없긴 뭐가? 나 있잖아. 그리고 여자가 먼저 하면 어때서?" 이 여자 답이 없다. 아무리 외동딸로 곱게 자랐다지만, 그리고 뒷머리 한 번 넘 기고 내가 아무리 멋있어 보이고 사랑스럽다고... 나도 누나하고 살고 싶지. 뭐 먹고 살겨? 결혼하면 독립하는건디... 우리 힘으로 헤쳐 나가야 된다 말이야. 학 비는 어떡할겨. "나중에 내가 직장 구하고 기반 잡으면 그때 얘기 합시다." "언제? 이년 뒤에? 그때까지 이 관계가 유지될까? 설사 유지 된다치더라도 그제 서야 결혼 이야기 나오면 준비과정이다 뭐다 일년 그냥 가 버릴테고 그러면 나 그냥 서른 되는데? 내가 그때까지 너만 보고 아가씨로 남아 있겠니?"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면서?" "그래, 나 그냥 생각한거야. 결혼 얘기 나오면 과민 반응 보인건 너야. 지금 생 각하고 확신을 해도 결혼은 빨라야 내년 말이나 후 내년이야." "그때도 빨라. 그때도 나 학생인데... 너도 아직 학생이잖어? 뭐 먹고 살래?" "너? 어쭈, 박철수? 이제 완전 맞먹는다?" "엉? 제가 그랬어요?" "동아리 91 학번 중에 내가 아는 애들이 많지? 93 이 91 에게 이런 식으로 대하는 걸 알면...?" 연상의 여인을 사귈지라도 학교 선배는 가급적 피해야 되는구나. "나도 이제 원생이야. 학번 그 너무 따지지 마요." "그래 너 원생이야. 설마 대학원까지 나와서 굶어 죽겠니? 나 약사 자격증 있 어. 먹고 살 수 있단 말이야. 너도 기사 자격증 땄잖아."
"우리는 이걸로 취직 안돼요." 누나 어머님이 오셨다. 아버님은 아무래도 약국 문 닫고 오시면 조금 늦으시나 보다. 개인 병원이야 뭐 다섯시나 여섯시 넘으면 의사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 는다. 약국은 열 시 넘어서도 문 연 곳 봤다. "안녕하세요." "오, 그래. 철수 왔구나." 몇 번 보긴 했지만 참 친하게 대해 주시네? "저녁 안 먹었지?" "네." "나가서 먹을래?" "나가서? 그럼 아빠는? 아줌마 곧 갈 거잖아." "밥 솥에 밥 있겠다. 냉장고 열면 반찬 있겠다? 너네 아빠는 손이 없니 발이 없 니? 챙겨 먹겠지 뭐." 푸훗, 잘못하면 웃을 뻔 했다. 우리 엄마도 간혹 저러시는데. 우리 아버지 그 럼 굶으신다. 울 아버지 챙겨 주실때까지 단식 투쟁하신다. 우리 엄마 우리 아버 지 못 이기신다. 우리 엄마는 우리 아버지께 쨉도 안되시는데. 누나 집은 좀 다 른가 보다. 하긴 방법이야 다 다르겠지. 그치만 서로 아껴주는 마음은 다 같은 것 같다. 우리 아버지 우리 엄마 의견에 따르는 일 많다. 아버지가 이기는 척 해 도 엄마 말을 무시하지 못하고 이끌린다. 맞벌이 부부. 누나 어머님은 바로 떠나지 않았다. 파출부 아줌마 보내고 난 뒤 아버님 저녁 차려드실 수 있게끔 상을 차려 놓고 외출을 하셨다. 누나 어머님 덕에 샤브샤브 얻어 먹었다. 저녁 잘 대접받았다는 말이다. 어떻 게 된게 누나와 어색해지고 다시 친하게 된 지 한 달 조금 넘었는데, 그것보다 누나와 사귀기로 한 지 이제 반 년 조금 더 됐을 뿐인데 어머님 얘기에는 작년까 지 포함해서 누나와 첫 만남 때부터 누나가 좋아하는 연인은 나였다. 어떻게 된 겨? 어머님 말씀을 들어 보면 누나와 나의 교제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으로 생각 하시는 것 같다. "얘는 혼자 자라서 버릇 없이 보일 수도 있어. 참는 성격도 약할걸. 가급적 자 기 하고 싶은대로 키웠거든." "아닙니다. 남을 잘 배려하는 것 같던데요. 그리고 윗사람 대하는 태도도..." "흠, 그건 겉으로 보이는 거지. 같이 오래 지내다 보면 감출 수 없는 무언가가 드러나게 돼." "네에." "얘는 좋아하는 사람에겐 간도 쓸개도 내 줄 애지만 그 좋아하는 사람 폭이 좁 아.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거나, 누르려고 하는 사람하곤 안 어울려. 만약 선 봐 서 서로 잘 모르는 상태서 잘난 배경만 보고 시집 보내면 얘 몇 달 못 살고 소 박 맞을거야. 아니다 지가 못살겠다고 뛰쳐 나오겠지." 이야기는 즉 나는 잘나지 못했다? 너무 하십니다 어머님. "나는 철수가 마음에 들어. 쟤가 하는 얘기를 들어 보면 그렇게 느껴져. 친구 같구 동생같구, 어떨 땐 오빠 같게도 느껴진다는 그 말. 그리고 서로 이제 잘 알 잖아." 오빠? 얘가 언제 날 오빠 같게 느꼈다구, 구라가 심하십니다 어머님. 누나는 별 말 않고 앉아 있었다. 어머님 말에 동의한다는 뜻인가 보다. "철수는 참 착해 보이네. 우리 은정이가 얘기 했던 대로 일거 같아. 나는 둘이 사귀는 데 있어 나이는 별로 안 따질게. 그러니 철수는 나이 가지고 너무 신경 쓰지마. 알았지?" "네."
누나 어머님은 나를 지칭하거나 부르실 때 꼭 이름을 불러 주셨다. 참 고맙고 정겹다. 우리 아버지는 누나를 처자라고 불렀는데. 하여간 내가 좋은 쪽으로 비 춰졌다니 기분 좋은 일이다. 진짜 누나와 같이 살게 되는 건 아닌가? 그러면... 그 생각은 너무 기분 좋은 상상이 된다.
72 회 되짚어 보면 누나와 같이 지낸 삼년동안의 추억이 참 많다. 현재 공유하고 있 어 잘 못 느끼고 있지만 혹시나 헤어져 살다 보면 난 이 추억을 회상할 때 눈물 흘리지도 모른다.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날, 난 내가 대학 들어 오면서부터 꿈 꾸었던 그, 여자 친 구와 팔장을 끼고 대학로를 걸어 보자던 그 꿈을 현실로 만들고 있다. 은정이 누 나와 대학로를 나왔다. 후훗! 예전 누나에게 그 꿈 얘기를 했던 적이 있다. 오래 전 일도 아니다. 그 이야기를 들어 주었던 사람이, 당시는 연상이라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그 여자가 오늘 내 여자친구가 되어 나와 팔짱을 낀 채 겨울 나그네 가 연상 되고 앙상한 나뭇가지 그림자가 놓여진 마로니에 공원을 걷고 있다. 기 분 좋다. 누나도 내 말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걷는 동안 한 번도 팔을 빼지 않았 다. "아!" "왜?" "목도리를 안 가져 왔다." "꼭 목도리를 해야 되니?" "여자도 내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다. 눈도 안온다. 내 상상과 다르다." 누나 질문을 무시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솔직히 너무 기분이 좋으면 긴가 민가 할 때가 있다. 내 기분이 지금 그렇다. 지금 이 곳에 나온 행복해 보이는 수많은 연인들, 그 중에서 내가 제일 행복한 것같다. 내 옆에 있는 이 여자, 사 랑스럽고 예쁘고 나이도 많고... 나이 많은 것은 빼자. 하여튼 다들 공주겠지만 내 공주가 제일 잘나 보이고 예쁘고 사랑스럽다. 누나가 나를 째려 본다. 기분 나쁜 일 있나? "너어? 팔 빼버린다?" 빼 봐? 확 따져볼려다 참았다. 이 행복을 깨기가 싫다. 후후, 내 상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오히려 더 좋다. 누나를 데리고 정처 없이 돌아 다녔다. 그냥 오늘은 마냥 걷고 싶었다. 자랑하고 싶었다. 이 공원에 오신 신사 숙녀 고삐리 여러분! 나도 애인과 여기 나왔습니다. 너네들 재지 마 란 말이야. 이런 기분에서 커피 이나 카페 같은 곳을 들어 가지 않고 벌써 여러 번 지나쳤던 마로니에 공원을 걷고 또 걸었다. 누나의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지 기 시작했다. "우리 어디 들어가자." "다리 아파요?" "응, 그리고 추워." "저기 빈가지 밑 벤취에 앉을래요?" "춥다니까." "이왕 내 소원 들어 주는거 확실히 들어줘요." "쩝. 에구 어쩌다 이런 애같은 애와 사귀게 되어 가지고..." "누나도 애야." "치."
겨울이라 그냥 놓여 있는 빈 벤취. 지나는 사람은 많은데 앉는 사람이 없는 걸 로 봐서 바닥이 많이 차가울 것이다. 영화 같은 걸 보면 남자가 숙녀를 위해 손 수건을 깔아 주기도 했다. 나? 손수건 안가지고 나왔다. 목도리라도 있었으 면... 참내, 이 여자 바로 앉아 버렸다. 겉옷이라도 벗어 깔아 주려고 했는 데... "왜 안 앉자?" 찹지 않나?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 나를 올려다 보는 누나를 신기한 듯 내려다 봤다. 저건 공주가 하는 짓이 아닌데. 옆에 앉았다. 그냥 별말 없이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 했다. 누나 입에서 섹쉬한 입김이 플래폼에 반가운 사람을 태우고 도착한 증기 열차의 연기 같이 뿜어져 나온다. "장갑 한 번 벗어봐요." "왜?" "손 시럽지 않아요?" "응. 그런데 왜 장갑을 벗어?" "벗어봐요." 헤헤, 누나의 손을 따뜻하게 해주기 위해 내 두손으로 누나의 한 손을 포개었 다. 따뜻하지? "앗 차가워. 너 손 데울려고 그런거야?" 무드라곤 지렁이 뒷다리 만큼도 없네. 하긴 내 손이 누나 손보다 훨씬 차가웠 다. 누나 한 손을 잡고 내 두툼한 무스탕 호주머니에 넣었다. "따뜻하지?"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 마음에서 우러나와 이런 짓 하면 감동할 줄도 알아야지. 헤헤, 그래도 이젠 누 가 봐도 연인처럼 보일 것이다. 혹시 승헌이나 동엽이가 이 모습을 본다면 어 이, 얼레리 꼴레리, 그런 짓 하면 안 쪽팔리냐? 이렇게 놀릴 수도 있다. 그러면 나 자신있게 대답할 것이다. 부럽냐 새꺄! 해가 지고 가로등이 켜질 때까지 벤취에 앉아 사람 구경 했다. 그냥 같이 있는 게 좋아서 추위도 잊고 별 말도 없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언제까지 앉아 있을거야?" 누나가 한 참만에 입을 열었다. "이렇게 앉아 있으니까 좋지 않아요?" "추워 죽겠어." 누나 얼굴을 보니 콧물이 찔끔 새어 나오는 모습이다. "그런데 왜 안 말 않고 앉아 있었어요?" "너 때문이잖아 씨." 씨? 누나는 억지로 앉아 있었나 보다. 뭐 이런, 아니다 돌려 생각해 보니 또 날 웃음 짓게 만든다. 그동안 추위에 벌벌 떨었으면서 나를 위해 내 옆에 다소곳 이 앉아 주었던 이 여자가 마구 사랑스럽다. "우리 내기 할래요?" "무슨 내기?" "누가 늦게 얼어 죽나." 우쒸, 농담 한마디 했기로 서니 한 대 패 버리고 바로 일어 서 버리나. 따뜻한 커피로 몸을 녹이고 9 시 조금 넘어 일찍 대학로를 떠났다. 누나는 공주 기 때문에 집에 데려 줘야 했다. 줘야 했던 것이 아니다. 나 스스로 그러고 싶었 다. "잘 들어 가요."
"잠깐 기다려. 집까지 태워 줄게." "후. 그럴 걸 왜 데려다 달랬어요?" "싫어?" "그건 아니지만." 집 앞까지 누나의 배웅을 받았다. 떠나는 누나의 뒷 모습을 보면서 참 헤어지 기 싫다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 느낀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참으로 누나와 더 같이 있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다. 같이 살고 싶다. "해피 뉴 이어. 일천 구백 구십 칠년!" "야, 박철수. 해피 뉴 이어를 영어로 했으면 끝까지 영어로 해야지." "그냥 넘어 갑시다." 작년은 걸렀지만 올 해는 다시 누나와 타종식 구경을 갔다. 이 번에는 당당히 허락 맞고 열쇠 얻어서 집을 나왔다. 졸라 추웠다. 사람들도 엄청 많았다. 곳곳 에 피어나는 사람들의 입김, 그 속에는 올 한 해를 꿈 꾸는 수 많은 희망들이 섞 여 있겠지. "철수 넌 올해 소망이 뭐야?" "응? 그냥 잘 사는 거. 대학 졸업 하는 해니까 올해는 조금만 특별했으면 좋겠 다. 누나는?" "나? 몰라. 나도 그냥 살 사는거." "누나야." "왜?" "어쩔 때 보면 누나와 난 천생연분 같아. 하늘이 내려 준 연분." "그래? 호호. 언제 그런 생각이 드는데?" "방금 같은 경우." "응?" "누나를 보고 이 여자 참 정신없는 여자네. 이런 느낌 들 때." "뭐야!" 누나는 정말 정신 없는 여자였다. 내가 목도리 매고 즐거워 하니까 기분 삼아 대학로까지 걷자고 했다. 무서움? 여기서 대학로까지 얼마나 된다고. 깜깜한 밤 거리를 누나와 걸었다. 그리고 대학로, 종각과는 다르게 조금 썰렁한 분위기. 그 곳에서 또 걸었다. 빈 벤취에 앉아도 보고 우연히 보게 된 몰래 뽀뽀하는 연 인에게 혀도 차 보았으며 나 잡아 봐라는 식으로 뛰어 다녀도 보았다. 가로등에 서로 등을 대고 기대어 하늘도 보았다. "이제 저 하늘은. 알기나 할까, 이름이 바뀌었다는 걸?" "갑자기 왠 분위기? 알 수 없겠죠. 1997 년. 그 건 사람이 자기 편의에 의해 지 어준 건데." "그렇겠지? 왜 한 해 한 해 이름이 바뀌고 있는 지 저 하늘은 모르겠지? 태연하 겠지, 나이가 들어 감을." "나이 들어 가는 게 싫어요?" "모르게 잊혀 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이유도 모른 채." "승주 생각 나요?" "야! 또 한 해가 갔구나. 그리고 내 년엔 올 한 해도 잊혀 지겠지?" "갑자기 왜 그래요?" 누나가 피식 웃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멍한 표정으로 날 봤다. 그리고 살 포시 입을 열었다. 날 사랑한다는 말을 할 줄 알았다. 그래서 분위기를 잡은 거 라고 잠시 기대했었다. 가로등 아래서 짧은 입맞춤, 너무 낭만 적일 것 같다. 누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우리 아까 종각 갈 때 뭐 타고 갔었지?" 뭐여 이거. "누나 차." "그거 어디 세워 놓았니?" "여긴 아닐 걸." "그렇지?" 홍은정. 누나를 처음 봤을 때 느낌은 이렇지 않았다. 이지적이고 약간은 차가 워 보이는 모습. 뉴스 앵커에나 어울릴 것 같던 누나가 점점 개그맨이 되어 간 다. 내가 옆에 있어서 날 닮아 그러는 건가? 얼빵해졌다고나 할까? 그래 내가 죽 일 놈이다. 아까 보다 훨씬 썰렁하고 무서운 밤 거리를 다시 걸어 종각으로 갔다. 나는 깡 패라도 나타날까봐 겁나 죽겠는데 누나는 뭘 믿고 저렇게 히죽 웃는 밝은 표정인 지 모르겠다. "겁 안나요?" "너 쌈 잘하잖아." 날 믿고 저런거였나. 나 솔직히 두 명 이상만 나타나도 누나 지켜주지 못한다. 내 한 몸 지키기도 힘들다. 깡패 나타나고 나 바로 도망 가버리면 졸라 억울해 하겠지? 내 옆에 이 사랑스러운 여자가, 음 한 떨기 꽃 같은 이 여자가, 무슨 꽃 인지는 말 못하겠지만 하여튼 내 여인이 깡패에게 휩싸인다면? 나 혼자 살자고 도망갈 수 있을까? 그 상황이 되면 나는 과연 어떻게 행동할까? "은정씨." "응?" "깡패 세명 이상 나타나면 나 솔직히 누나 못 지켜줘." "왜?" "왜긴. 두 명이 나 엄청 두들겨 패고 한 놈은 누나 이상한 곳으로 끌고 가 면..." "그래서?" "혹시 깡패 나타나면 누나는 바로 도망가요. 뒤돌아 보지 말고 도움 청할 수 있 는 곳으로 뛰어 가란 말이지." "넌?" "난 졸라 깡패들 약올린 다음 누나와 반대편으로 도망을 가는거지." "깡패들이 너 안 따라가고 나 따라오면? 아니면 너 바로 잡힐 경우는?" "할수 없지. 나 생각보다 잘 달려요. 만화처럼 남자 주인공이 여자 뒤에 세우 고 뒤돌려차기 몇 번, 기합 몇 번해서 깡패들 물리치는 거. 그래서 여자가 뿅 가 는거. 말짱 거짓말이야. 어쩔 수 없어. 그 점은 여자들이 알아야 돼. 솔직히 깡 패들 만나면 피차 겁나는 건 마찬가지야. 왜 남자가 여자를 못 지켜주면 나쁜 놈 이 되는거야?" "그 얘길 왜 하는데?" "남자가 여자 버리고 도망가는 거, 그거 꼭 욕할 문제만은 아니다?" "그래서 넌 나 버리고 도망갈거라는 거야?" "응." "너 혼자 살려고?" "그 말이 아니지. 나라도 살자." "야!" 한 대 맞았다. 누나 상당히 기분 나쁜 표정이었다. 팔짱을 풀고 쪼로로 혼자 앞 서 가 버린다. 이런 걸 두고 긁어 부스럼 만든다는 거다. 가만히 있었으면 되었 을 것을. 에고. 쫓아 갔다. "화 났어요?" "너 정말 그랬단 봐?"
"하하, 고래사냥 2 봤어요?" "봤나? 잘 모르겠어. 왜?" "거기 보면 김수철이가 그 여자 주인공과 도망다니다가 깡패들 만나잖아. 결국 여자를 깡패들에게 뺏기지만 걔 노력하잖아요. 엄청 두들겨 맞으면서도 깡패들 발 붙잡고 늘어지는 모습. 그게 오히려 진실이야. 세상에 덩치 세명 때려 눕히 는 멋있는 놈이 몇 명이나 돼." "넌 그렇게 할 수 있어?" "때려 눕히지는 못해도 물고 늘어질 수는 있지." "그래?" "응." 호호, 누나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런 걸 말 한마 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라고 하는거지. 맞나? "근데 누나?" "왜?" "두들겨 맞을 수는 있는데 요즘 깡패들 무섭잖아." "또 무슨 말이야?" "칼로 푹 찌르면 어떡하지? 그래서 나 죽으면?" "그런 말을 왜 해?" "야, 영화 같겠다. 칼을 맞고 피를 흘리면서도 누나를 지키기 위해 깡패 발을 붙잡고. 하하, 누나는 도망가면서도 안타까워 뒤 돌아 보고 난 누나를 향해 어여 가, 라고 헤치며 한 손을 흔든다. 캬!" "치. 진짜 영화 하나 만들어라. 말이 씨가 된다고 진짜 깡패들 나타나겠다." "나 죽으면 누나 몇 년 안에 딴 놈에게 시집갈까?" "이게?" "나 없더라도 행복하게 살아요." "야아." "아, 슬프다." "너 진짜 유치하구나?" "인제 알았어요?" "네가 만약 그런 일로 세상을 떠나면 나 널 그리며 평생 혼자 살거야." "참 내, 말로는 누가 그런 말 못 해." "잊을까?" "그럼." "정말 잊어 버릴까?" "그럼 세월이 다 약인데." "훗! 우리도 서로 떨어져 살다 보면 서로에게 잊혀져 갈까." "아마도." "진짜 데리고 살아야 겠다." 우쒸, 여전히 같이 살아야겠다,가 아니고 데리고 살아야 겠다네. "내가 애완 동물이니? 왜 데리고 살겠단 말을 해?" "왜 그런 말 하는 지 가르쳐 줄까?" "뭔대?" "나 졸업하자 마자 결혼 할 생각이거든. 너 그때 학생이잖아. 어떡하니, 데리 고 살아야지." "엉?" 그 참, 이제 이 여자가 나 사랑한다는 것은 믿겠는데, 그렇다고 요즘처럼 연애 따로 결혼 따로인 세상에 이런 사이 됐다고 바로 결혼할 생각을 갖는다는 건. 이 건 둘 중 하나다. 이 여자가 보기와는 다르게 좀 구닥다리 생각을 하고 산다는 것과 내가 남주기에는 너무 아깝게 아주 멋있다는 거.
새해 첫 날부터 참 많이도 걸었다. 새해 연휴가 끝나고 난 졸업식을 하기도 전에 대학원 연구실에 자리가 생겼다. 방학이었지만 난 다시 율전에서 자취 생활을 시작했다. 누나도 곧 학교를 나오기 시작했다. 아쉬움, 공대와 약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하루 중 누나를 보는 시간은 짧았다. 어둠이 물들고 하루를 떠나 보내는 시간 누나는 잠시 내 자취방에서 차 한잔의 시간을 가져 주고 서울로 떠났다. 그런 하루, 하루들도 한 달을 꾸려 갔다. 같이 있고 싶다는 아쉬움은 커져 갔다. 다 내 잘못이다. 삐치지만 않았어도 누 나는 내 바로 이웃에서 밤을 보내고 나와 좀 더 긴 시간을 가졌을텐데. 나는 꿈을 키워 나가기 시작했다. 진짜 누나와 내 미래를 같이 하겠다는 꿈. 과 연 이루어 질까.
73 회 "초컬릿 먹어라." "에?" "오늘이 발렌타인 데이란다." 후후, 괜시히 한 번 기대했었다. 오늘이 발렌타인 데이라는 걸, 여자들보다 남 자들이 아마 더 잘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쿠쿠 누나 는 날 사랑한다. 왠일이냐 저 여자가 초컬릿을 다 사주고... 쿡쿡 아이 좋아, 아 이 좋아. 그러나 버트 "그래요? 근데 이게 뭐야? 수퍼에서 파는 오백원짜리 달랑 하나? 포장도 안 되 어 있고 카드도 없어?" "초컬릿 줬으니까 다음달 14 일에는... 알지?예쁘게 포장 된 사탕 박스 기대할 게." 누나는 집에 가기 전 잠시 내 방을 들렀다가 판대기 초컬릿 하나 달랑 던져 주 고는 많은 것을 기대했다. "승주형에게도 이랬어요?" "아니, 난 발렌타인데이 같은 거 안 좋아했어. 초컬릿 처음 줘 보는거야." "칫! 이 것도 초컬릿이여?" 상표가 훤히 보이는 초컬릿을 흔들어 보이며 누나에게 따졌다. "성의가 중요한 거야. 다음달에 기대할게 철수야." "요즘 누룽지 사탕이 유행하더라. 그거 하나 사서 노나 먹읍시다. 내 마음을 듬 뿍 담아 몇 개 던져 줄게." "오늘부터 딴 남자 찾아봐야 겠다." 에이 여우야! 후후, 그래도 기분은 좋다. 기대 받는 다는 것, 괜찮은 거다. 내가 방을 뺀 것이 잘 한 것일까요? 많이 아쉽네요. 사랑한다고 인정해 버리니 까 철수와 마냥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들어요. 하지만 하루 동안 철수 를 곁에 두는 시간은 많지가 않네요. 그래서 아쉬습니다. 사랑하게 되면 예뻐지고 싶고 예뻐지면 보여주고 싶고 같이 있는 시간은 아쉽 고 그래서 그리움은 곁에 있지만 커져 가나 봅니다. 주위 사람들이 행복해 보이 고 나 또한 행복하며 내가 살고,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가는 이 세상이 아름다와 보이는 것, 느껴보지 못했던 기분, 나는 아직 애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철수 를 정말로 사랑하나 봅니다. 자주 하늘을 쳐다 보며 내 감성을 들추어 내고 따스 해지는 바람 따라 내 마음 저며 보는 이유도 내가 지금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이
겠죠. 승주를 마음에 두고 있을 때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후후, 만 삼년 전 이군요. 백 미러에 비쳐진 철수의 첫 모습, 후후, 상당히 못마땅한 모습이었죠. 근데 그 녀석이 내 사랑이 될 줄이야. 나른한 오후가 지나고 저녁 바람이 불어 오는 시간에 철수에게 삐삐를 치고 연 구실을 나왔습니다. 약대 앞 현관에서 철수를 기다렸지요. 오늘 저녁은 잠시간 같이 걸을 수 있는 데이트라도 할 요량으로 약대 현관 앞에서 철수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호호, 저기 철수가 보이는군요. 공대 쪽에서 철수가 빠른 걸음으로 씩씩하게 걸 어 오다 나를 보고는 웃습니다. 그리고 손을 한 번 흔들더니 뛰기 시작합니다. 그도 나만큼 나를 보고 싶어 했나 봅니다. 귀여운 것. 푸후! 웃으면 안되지요. 철수는 나만 보고 신나게 뛰어 오다 돌부리에 걸려 진 짜 완벽하게 앞으로 꼬꾸라졌습니다. 이걸 연인사이의 사랑이라고 믿어야 될까 요? 분명 사랑하는 건 맞는데 잠시 헛갈립니다. 걸음마 시작한 아기가 엄마를 보 고 아장 아장 걸어오다 뭐에 걸려 넘어 졌을 때 그걸 본 엄마의 느낌. 난 철수 를 보고 바로 그 느낌이 들었습니다. 많이 놀라 철수에게 달려 갔어요. 철수는 상당히 아픈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푹 숙이고 아파하기 보다는 억울해 하는 표정 을 짓더니 더 빠르게 내게 달려와 바보스럽게 씩 웃고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나와 걷기 시작했습니다. "하하! 누나." "안 아파?" "하하. 내 뒤에 사람 많아요?" 머쩍은 듯 웃더니 간사하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널 보는 사람이 제법 되네." "빨리 뜹시다." 철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빠른 걸음으로 교문까지 왔어요. 나오자마자 다리를 절 룩 거리네요. "다친거야?" "아까는 쪽팔려서 몰랐는데 아파요. 정희 누나네 잠깐 들렸다 갑시다." 철수는 손바닥을 펼쳐 내게 보여 주었습니다. 두 손바닥이 모두 까져 있습니다. "안 아파?" "아프지. 누나 얼굴이 제법 안스러운 표정이네요. 하하." "지금 그런 말이 나오니? 많이 아프겠다." 정희를 찾아 갔어요. 소파에 앉은 철수는 바지를 걷어 올렸습니다. 그리고 정희 와 나를 번갈 아 봅니다. "생각보다 많이 까졌네." 철수의 무릎 팍은 심하게 까져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어요. "너 왜 그리 조심성이 없니?" "얘 왜 이런거야?" "소독할 거 좀 찾아 줘." 남자는 좀 다르군요. 친구도 다르군요. 다친 놈은 철순데 걱정은 나만 했어요. 철수는 날 빼꼼 히 쳐다 보더니 바로 바지를 내려 버리더군요. "에이, 이 정도로 무슨 소독이냐. 그냥 놔두면 다 낫아요." "바지 걷어 소독하게." 철수는 바지를 걷는 대신 나와 자기를 손가락질하며 정희에게 묻더군요.
"정희 누나. 누나가 볼 때 우리가 연인사이처럼 보여요?" "아니, 남매 같애." 이것들이... 억지로 바지를 걷게 해서 소독을 하고 연고를 발라 주었어요. 덧나 면 어쩔려구... "야, 여기가 무슨..." "누나는 뭐 먹을겨? 우리는 볶음 밥." 정희 약국에서 중국음식으로 저녁을 때웠습니다. "누나 집에 몇 시에 갈거야?" "나 이제 학교 안 갈거야." "그럼 바로 집에 갈거야?" "네 방에서 좀 놀다 갈건데." "잘됐네. 지금 바로 서울 갑시다." "응?" "나 곧 졸업식이잖우. 오늘 정장 한 벌 맞춰야 돼." "그래?" "저 번 앨범 찍을 때 누나가 못 마땅했잖아. 좀 골라줘요." "하하. 그래 이 누나가 섹쉬한 걸로 골라 줄게." "섹쉬할 것까진 필요 없고 멋있기만 하면 돼." "벌써 졸업이니? 세월 참 빠르다." "너도 졸업한 지 일년 밖에 안됐잖아." "너도? 많이 맞먹네 너?" "그럼 홍은정씨." "왜 박철수씨?" "헤헤." 정희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같은 모습으로 사랑하 는 것은 아니죠. 좀 유치하면 어때. "정희야 다음에 봐." "잘 있어요. 포스트 아가씨." 철수를 옆에 태우고 신나게 서울로 왔습니다. 그리고 갤러리아 백화점, 명품관 을 포함해서 말이죠. 청담동 일대를 철수에게 맞는 옷이 아니라 내 마음에 드는 옷을 입히기 위해 돌아 다녔습니다. "누나야, 아무거나 사면 안될까?" "조금만 더 돌아 다녀 보자." "나 50 만원 넘어가는 옷은 못 사요." "입어 보는 건데 뭐." 철수는 지치는가 봅니다. 내가 너무 내 입맛에만 맞추었나? 그래도 별 투정 안 하고 같이 다니는 걸 보면 철수와는 성격적인 트러블도 많지 않을 것 같네요. "이거 그냥 살래." "아니야, 이건 좀..." "누나야, 옷걸이가 별론데 너무 많은 기대하지 마요." "니가 어때서?" 예전 미팅 깨진거 들먹이며 날 깎아 내릴 때가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 오른 다. 근데 오늘은... 그래서 여자 마음은 갈대라 그러나? 좀 이상한 비유같다. "으씨. 누나하고 나하곤 성격이 안 맞는것 같애. 같이 살면 힘들 것 같다."
"그렇게 힘드니?" "응." "오늘은 솔직히 너무 늦게 나왔다. 내일 다시 올래?" "에?" 무슨 이런 여자분이 다 있냐. 일곱시경에 왔다가 지금 아홉시가 넘었다. 나혼 자 왔으면 벌써 집에 들어 가 발닦고 새로 산 옷 들춰보며 히죽거리고 있을 시간 이다. 누나가 그런대로 맘에 들어 한 정장은 조끼도 없는데 60 만원이 넘어가는 거였 다. "나 최대가 오십만원이야." "특별한 날 입는 거잖아." "나 돈 없어요." "내가 조금 부담할게." "나 그리고 셔츠랑 넥타이도 사야 된다 말이야." "그건 내가 졸업 선물로 하면 되잖아." "누나 돈도 못 벌면서 그래도 되는거야?" "응." 우리 얘기가 이상했나? 옆에 서 있던 점원 아가씨가 미소 지으며 물었다. "두 분 사이가...?" "에?" "남매 사이에요?" "닮아 보여요?" 이건 누나가 한 질문이다. 날 보고는 한 번 비웃어 주고 점원에게는 아장되는 미소를 보이며 누나가되물었다. "연인 사이 같기도 하고..." "은정씨 이걸로 합시다." 난 남매 하기 싫다. 나 장남으로 자랐다. 내가 더 이상 저 여자에게 동생으로 인식되어져서는 아니되었다. 집에 가서 수희에게 자랑을 했다. 옷을 입고 온 갖 포즈를 취하며 자랑을 했 다. "너네 오빠 멋있지 않냐?" "옷은 잘 골랐네. 근데..." "근데 뭐?" "옷걸이가 좀." "뭐야? 너 예전엔 안 그랬잖아." "그때는 주위에 남자라곤 오빠 뿐이었잖아." 돌아 다닌 보람이 있었다. 누나에게 끌려 다닐 땐 피곤했지만 아버지도 어머니 도 수희도 다들 옷 잘 샀다고 말해 주었기에 피곤했던 것은 잊혀졌고 사랑스런 누나의 모습만 더 선명하게 기억된다. 하하. 내 옷에 대한 우리 아버지의 평가? "얼마 줬냐?" "30 만원도 못 줬어요." "그럼 잘 샀네." 내 대학 사 년간을 마감하는 졸업식 날, 우리 가족 모두가 내 졸업을 축하해 주 기 위해 학교에 모였다. "오빠? 시골서 다녔는데 졸업식은 왜 서울서 해?" 더 이상 수희는 날 존경하지 않는다. "그 은정이는 안 오냐?"
"어? 아버지. 이름을 기억하시네요." "올거냐?" "온다고 했어요." "그래? 흠." "은정이? 걔 온다고 했어? 오빠 나 은정이에게 연락해 볼까?" 자다가 봉창 두들기나. 졸업식? 졸업식이 거행되는 곳에선... 따분하다는 이유로 나 혼자 있었다. 졸 업 앨범하고 학위 받아서 주차장에서 기다리시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 갔을 때 어 떻게 알았는지 은정이 누나와 정희 누나가 거기 있었다. 둘 다 나는 본체 만체 했다. 우리 아버지와 이야기를 정답게 나누던 누나들은 내가 오자 이번엔 수희와 인사 를 나누기 시작했다. "너 많이 이뻐졌다?" "언니 시집 간다며?" "그래, 오랜 만이지?" 은정이 누나는... 요조 숙녀의 모습으로 정희 누나 옆에 서 있었다. 정희누나 도 역시 정숙한 예비 아줌마의 모습으로 수희 곁에 있다. 수희? 많이 어려 보였 다. 수희는 은정이 누나와는 초면이다. 정희 누나에게는 반갑게 인사를 했으나 은정이 누나에게는 아래 위로 꼬아 보는 태도를 취했다. 정희 누나가 웃으며 은 정이 누나에게 수희를 소개하는 식의 눈 표정을 지었고 은정이 누나도 안다는 듯 웃음으로 수희에게 고개를 돌려 반갑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희가 기분 나쁜 투로 먼저 은정이 누나에게 말을 붙였다. "언니 이름이 은정이에요?" "네." 네? 가증스러운 것. "언니가 그 나이 많은 처자에요?" "응?" 누나 내 동생 교육 다시 시키리다. 내 졸업식 날 회식? 점심때 소갈비 집을 갔었다. 그 자리에서 난 아무것도 아니 었다. 그 자리의 주인공은 은정이 누나, 조연은 정희 누나와 아버지. 비중있는 배역으로 우리 어머니. 양념으로 엑스트라 한 명 내 동생 수희. 나? 나는 그냥, 그냥 끼어 있는 사람 1. 나한테도 질문 좀 해 줘요. 74 회 철수 졸업식 날 점심 식사 자리에서 저 참 당돌했던 거 같아요. 아버님께 거리 감을 느끼지 못해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무남독녀로 자라 버릇이 없어서 그랬을 까요? 후후, 철수 아버님은 철수는 뒷 전이고 저에게 질문을 많이 하셨지요. "그래, 자네는 졸업하고 계속 공부할 생각인가?" "아니에요. 아빠 약국에 약사로 취직할 생각이에요." "근데 왜 대학원까지..." "훗 날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를 염두해 두었어요. 독일에 외할아버지 가 계세요. 의학이나 제약 쪽은 독일이 알아주거든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독일 서 학위하나 받고도 싶어요. 외국서는 여기 학위라는게 석사 과정을 마쳐야 그런 대로 인정을 해 주거든요. 그래서 굳이 대학원 등록을 했어요." "하하. 제법 앞 날에 대한 설계를 해 놓고 사는구나. 철수 저 놈은..."
"네? 하하." 철수는 고기를 집어 먹다 아버님 눈치를 보고선 머쩍게 씩 웃습니다. "철수도 다 생각이 있을 거에요." "허허,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는 건 확실히... 졸업하면 27 살인가?" "네." "그럼 결혼은? 취직하고 공부 염두해 두면 결혼 생각은 없는 것 아닌가?" "흠, 지금 마음으론 졸업하면 바로 결혼 할 생각이에요. 제가 독자라서 늦어지 면 부모님이나 저나 서로 부담이 될 것 같아요. 머뭇거리다 보면 부모님 마음과 제 마음이 따로 놀 것도 같거든요. 차라리 조금 생각이 짧을 때 결혼을 해 버리 려구요. 결혼 해서 행복하게 살면 그것도 효도라고 생각하거든요." "하하. 결혼할 사람은 있나?" "네? 저... 제가 연상이라서 부담 되세요?" "응? 하하." 아버님은 계속 웃으시더군요. 조금 허한 웃음 말이죠. "당돌한 말인지는 알지만 제가 생각하는 사람은 철수에요." "하하, 그 말이 고맙긴 한데 철수는 아직 어려. 그리고 결혼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깊이 생각해야 되는 문제야." "네, 제가 이런 말씀 드리는 게 이르다는 것은 알아요. 하지만 가볍게 생각해 말씀 드리는 건 아니에요. 다시 깊이 생각해 봐도 철수라는 결론이 나오면 그때 다시 말씀 드려도 되겠는지요?" "나는 자네가 마음에 들어. 솔직히 우리 철수가 많이 모자라 보일 정도로 자네 를 내 며느리로 삼고 싶어. 하지만 내 마음과 자네 마음이 그렇다고 해서 우리 철수를 장가 보낼 수는 없네. 결혼은 집안 끼리의 문제도 있고 당사자의 현재 문 제를 떼어 놓고도 생각할 수 없는거야. 지금 자네가 한 말 부모님 동의를 구하 고 하는 말 같진 않네. 둘이서 친한 선 후배로, 아니 사귄다는 것 까진 이해를 해. 하지만 여자가 나이가 많다는 것, 남자가 나이가 적다는 것은 나나 자네 부 모님에게 부담이 될 거네. 그리고 자네는 모르겠지만 철수에게 결혼 문제는 너 무 일러." 이상하네요. 아버님은 제 편일줄 알았는데. 내가 너무 경솔하게 결혼 얘기가 나 오자 아버님께 철수를 개입시켜 얘기해 버렸네요. 하나 다행인 것은 철수 어머님 의 모습이었어요. 아버님만 허락하시면 저와 철수의 인연에 대해 별 말 하실 것 같진 않네요. 어머님은 고개만 끄덕거리실 뿐 이런 저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 다. 그럼 철수 아버님만 설득하면? 호호. 저 철 없죠? "정희 누나? 심심하죠? 고기나 먹어요. 수희 너도 먹어라?" 야, 박철수. 자기 얘기하는 데 저렇게 태연하게 고기 먹는데만 열중할 수 있을 까요? 아버님이 저런 말씀 하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군요. 내가 했던 말이 당돌하기는 했지만 아버님 마음에 제가 결코 가벼운 존재가 아 니란 걸 인식 시켜 드렸습니다. 제 부모님을 설득해서 제 편으로 만들어야지요. 안되면... 후후. 엄마가 했던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제 생각은 사랑하는 마음이 나를 감싸고 있을 때 결혼을 하고 싶어요. 그럴려면 제가 생각했던 시기를 넘어 가서는 안됩니다. 나이가 들고 부모님이 늙어 가시는 걸 보면 저 결혼 할 생각 을 잃어 갈 겁니다. 자식이라곤 저 밖에 없는데 나이가 들어 갈 수록 부모님 생 각에 집을 떠나는 것에 미련이 많이 남을 것 같아요. 그런 내 마음이 오히려 부 모님을 더 힘들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압니다. 일찍 가 버려야지요. 행복해 하면 서 말입니다. 철수는 제쳐두고 너무 제 생각만 하나요? 철수는 내가 아버님과 얘 기하는 동안 히죽 히죽 웃는 것을 보았습니다. 은정이 누나 저거, 단단히 마음을 먹었나 보다. 우리 아버지께 저렇게 자신있 게 나와 결혼할 것이라고 밝히다니. 고맙다. 너무 고맙다. 아버지 작년까진 내
가 독립할 수 있을 때 그러니까 한 서른 되어서나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했 는데. 근데 이제 생각이 바뀌었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생겼고 그리고 그 사 람이 꿈같은 결혼 얘기를 내 뱉는데 제가 안 흔들리게 생겼습니까? 아버지, 저 장가 보내 주면 안될까요? 결혼하면 더 빨리 철들지도 모르잖아요. 학생일 때 아 저씨 되는거? 결혼은 청춘의 무덤이라는 말도 있지만 은정이 누나면... 누나와 같이 할 수 있다면 무덤이면 어때요. 어둠만 있는 저 우주 저편에 둘 만 남겨둬 도 살겠습니다. 하여튼 졸업식 누나의 말을 계기로 아버지가 다시 한 번 내 배우자로 누나를 생 각해 볼 것이다. 우리 아버지도 지금 헛갈리고 계실 것이다. 저는 장장 이년을 헛갈렸습니다. 아버지! 인생의 경험이 저보다 월등하시니 결코 오래 헛갈려 하시 지는 않을걸로 믿사옵니다. 졸업식날 은정이 누나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결혼 얘기는 잊혀져 갔다. 나는 원 생이란 새로운 직분으로 다시 학교 생활을 시작해야 했으니까. "똑똑" "들어 오세요." "야, 박철수." "어?" "학기 초부터 바쁜가 보다?" "내가 제일 막내잖아. 언제 제대했냐?" 개강하는 날 연구실로 날 찾아 온 반가온 사람이 있었다. 송승헌. 저 녀석이 드 디어 제대를 했나 보다. 잠시 시간을 내어 자판기 커피 한잔과 함께 해후를 즐겼다. "제대한 지 일주일 됐다. 복학 신청도 사흘 전에 했어. 푸하하! 나 민간인이 다." "좋겠다 새꺄. 방은 구했냐?" "오늘부터 알아봐야지. 너 자취하는 건물에 빈 방 있냐?" "잘 몰라. 거기서 살게?" "좀 비싸지만 나도 이제 고학년이니까." "내 근처에 오지마 새꺄." "어떻게 넌 졸업을 해도 변한 게 없냐?" "넌 제대해서 변한 거 많냐?" "앞으로 보게 될 거다." "두고 보겠어." "참, 은정이 누나와는 잘 지내냐?" "하하, 놀라지 마라 임마." "뭐?" "결혼 이야기 오고 간다." "엉?" "놀랍지?" "안돼 임마. 나이 많은 여자하고 결혼하면 안돼." "뭐여? 너도 변한거 없네 임마." "결혼을 왜 하냐? 결혼은 부페 식당 놔두고 급식 찾아가는 거야." "뭐여? 군대 갔다 오면 그렇게 변하냐? 너 그래도 순수했잖아. 의정일 그렇게 놀려도 일편 단심 내 사랑은 걔다. 그럴때가 너다웠어 임마." "그냥 해 본 말이다, 아직도 내 사랑은 의정이야.. 근데 너 그 누나와 진짜 결 혼 얘기 나왔어?" "응." "부럽다 새꺄."
원생 되니까 바쁘더군요. 특히나 우리 교수님 밑으로 의뢰 들어오는 프로젝트 가 많아서 석사 과정 원생들 학기초부터 엄청 시달렸습니다. "너 어디가?" "지금 제 컴퓨터 랜더링 중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선배님들처럼 옆구리 허전한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애인 만나러 가냐?" "부럽습니까?" "조올라 부럽다 새꺄." 나 실험 조교도 뛰게 되었다. 한 학기 급료 60 만원. 나에게는 어마어마하게 큰 돈이다. 그 돈으로 얻어만 먹던 누나에게 선물하나 할 생각이다. "혹시 뭐 갖고 싶은 거 없어요?" "화이트 데이 그냥 지나갔어. 너 나한테 찍힌거야." "그러니까 뭐 갖고 싶은 거 없어요?" "음... 뭐 선물하고 싶은데?" "나 실험 조교하잖아요. 급료 받는걸로 누나 선물하나 하게." "흠... 통장으로 갖다 줘." 뭐여 이거. "돈으로 달라는 거야?" "응. 나중에 여행 경비에 보태게." "여행경비?" "응." 무슨 여행경비인지는 비밀. 누나는 나와 결혼할 생각을 굳힌 모양이다. 나도 이 제 믿기로 했다. "거기 뒤에 예비역들 조용히 실험 해." "뭐야 임마?" "91, 92 학번 빼구요 그럼 93 학번 밑으로만 조용히 해." 실험 조교 이거 못해 먹겠다 씨바. 선배라고 조교 알기를 개 똥으로 알구. 옛날 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고 했는데... 조교도 스승이라면 스승인데. "어이 조교 이리 와 봐." 서럽다 진짜 씨. 조교님이라고 부르는 꼴을 못 봤다. "이런 간단한 프로그램도 못 짜요?" "못한다." "형 애인 있어요." "있다." "그래요? 몇 살인데요?" "22 살이다." "에게 스물두살? 완전 도둑놈이네." "뭐야 임마?" "야 송승헌, 내 애인이 몇 살인지 얘기 해 줘라." 시간은 그렇게 조교 생활과 연구실 생활로 빠르게 지나갔다. 중간에 큰 사건 하 나가 있었다. 정희 누나가 결혼식을 올린 거. 식장에 누나와 같이 갔었다. 부조 돈도 누나와 한 봉투에 담아 넣었다. 아직 학 생이라 하지 않아도 된다 했지만 성의를 담아 조금 부조를 했다. 결혼 식장은 내게 부담이 되었다. 결혼 식장 온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 전과
느낌이 달랐다. 신부가 아까워 보였다. 웨딩 드레스를 입고 있던 정희 누나는 나 름대로 꾸민다고 꾸민 신랑보다 훨씬 곱고 아름다웠고 아까웠다. 누나의 밝은 모 습과 또한 고운 눈물을 흘리던 모습. 왜 그런지 몰라도 부담이었다. 예전 정희 누나에게 마음이 있었던 것 때문이 아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누나 때문에 부담 이 된 것이다. 누나와 내가 식장에 서로의 삶을 공유하기 위해 이 곳에 신랑과 신부로 서 있다 면 분명 누나가 아까울 것 같았다. 결혼 식장 정희 누나의 모습과 신랑의 모습 은 아름다웠고 부러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마냥 부러워 할 수만은 없었다. 나도 나이에 맞지 않게 결혼이라는 것을 멀지 않은 현실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나 보 다. 나는 기분 좋게 기대했다. 하지만 내가 지금 내 옆에 서 있는 사람 때문에 행복함을 느끼다가도 초라하다는 생각이 정희 누나의 고운 모습 때문에 생겨나 있었다. 주위 사람들의 소곤거림도 흘려 들을 수 없었다. 신랑이 뭐뭐래, 신부가 어떻 니 하는 말들, 그냥 흘려 들을 수 없었다. 내가 신랑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무 슨 말들로 소곤 거릴까? 신랑이 연하래. 아직 학생이라네 뭐 먹고 살려고 저러지? 신부가 먹여 살리겠 지. 내 자신이 초라했다. 하지만 또 내 옆의 누나 때문에 그런 생각들을 떨칠 수 있었다. 연하면 어때. 잘 살면 되지. 배째! 정신이 없었을테지. 정희 누나는 나와 누나에게 신경을 써주지 못했다. 누나와 난 신부 대기실에서 짧은 인사만 하고 사진 한 장만 찍었을 뿐이다. "아줌마 잘 살아요." "나 아직은 아니다?" "그 웨딩 드레스 어깨가 너무 파였다." "야, 박철수 너 나가." "오늘은 까만 브라자는 아닌가 보네?" 잘못하면 내게 부케 날아 올 뻔 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의 만남 뒤로 누나와 난 내내 로비에 있어야 했다. 서로 한 쌍의 청춘 남녀가 되어 사람들 틈에서 여기 있는 사람들처럼 오늘 부부가 될 사 람의 한 인연으로서만 있었을 뿐이다. 오늘 나 누나와 잘 어울려 보일 것이다. 나 정장 입고 나왔다. 누나다 정장이다. 부러운 한 쌍으로 보였을 것이다. 안 보 였으면 또 어때. 남들이 뭐라던 누나와 난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정희 누나, 그리고 신랑. 하나도 안 부럽다. "잘 어울려 보여?" 낯이 조금 익은 누나 친구가 다가 왔다. 누나는 나를 가리키며 그 친구에게 잘 어울리냐는 말을 물었다. 아마 내 얘기를 많이 했나 보다. "철수씨?" 헤헤, 이름까지 알 정도면 누나가 내 자랑을 많이 했나 보다. "네? 네. 누나가 지수 누나죠?" "어? 날 아네? 반가워." "말 놓지마." "알았어 기집애야." 그 참! 자기는 완전 날 애 취급하면서 친구에겐 말도 놓지 말라고? 저 여자 도대 체 무슨 속 마음일까? "누나는 고등학교 친군데 어떻게 여길 왔어요?." "나도 은정일 통해서 정희를 잘 알아요." "네에..."
대기실에서 예전 누나 앨범에서 본 지수라는 여인을 보았다. 누나보다 늙어 보 였다. "쟤 내가 턱도 안되게 예쁘니?" 아직까지 그걸 마음에 담고 있었다니. 여자에겐 사소한 말 함부로 할 게 아니구 나 싶었다. "솔직히 말해 줄까요?" "응." "누나가 훨씬 예뻐." "후후." "참, 오늘 피로연 하죠." "응. 호텔에서 하룻밤 묵고 내일 신혼 여행 떠난다지?" "누나는 피로연에 가겠네?" "넌 안가게?" "나 신랑 몰라." "당연히 넌 신부측이잖아." "피로연 할 때 신부측에서 남자 가는 거 봤냐?" "그래, 나도 안 가련다. 임자 없는 애들만 가라고 하지 뭐." "내가 누나 임자야?" "그래. 나 예쁘다고 해 주었으니까 임이라고 한 번 불러 줄게." 부케는 어떤 뚱뚱한 여자가 받았다. 삼개월 안에 시집 갈 수 있을까? "하하. 내가 지금 겉 모습만 보고선 누나보다 많이 어린 것 같진 않지?" "안 어려 보이니까 신경 쓰지마." 누나 친구들 틈에서 끼어 있기가 좀 어색해서 물어 본 말이다. 괜찮나 보다. 정희 누나의 결혼식을 다녀와서 느낀 점은 부담감, 그리고 기대감이었다. 내가 과연 신랑이 섰던 자리에 서도 어색하지 않을까란 부담감과 누나의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을 상상하며 떠 올린 기대감. 그 두가지였다. 시간은 다시 흘러 갔다. 벗꽃이 피었다 지었고 은행잎도 제 모습을 갖추어 가 고 있었다. 중간 고사 기간도 후딱 지나가 버렸다. 승헌이는 중간 고사를 마치 고 결국은 내가 사는 자취 건물 예전 누나가 살던 옆 방을 얻었다. 그리고 그 때 부터 난 승헌이 방에 자주 가 잤다. "나 오늘 집에 못 가겠어." "에?" "너 승헌이 방 가서 자라." "오늘도 내 방서 자게?" "오늘 실험 많이 늦어 질 것 같아." "그렇게 자주 안들어 가도 집에서 암 말 안해요?" "날 믿잖아." "문제다 문제." "언제 갈지 모르니까 열쇠를 주고 가던지 먼저 자고 있던지 해. 가서 깨울게." "잠 깨우는 게 실례라는 생각은 안드나?" "흠, 연애 시절 땐 다 참을 수 있는거야." "내일 보조 열쇠 하나 줄게요. 오늘은 와서 깨워요." "그래 그럼. 너무 깊이 잠 들진 마." 오월 달엔 내 생일이 있다. 근데 누나도 나도 계속 바빴다. 나 심심하면 연구실 에서 컴퓨터 켜 놓고 잔류한 적도 많았다. 축제 기간도 나 몰라라 연구실에 쳐 박혀 넘겼다. 나는 내 생일도 까먹고 지나갈 뻔 했다. 그래서 그 날 잠자리에 들
때까지 누나가 생일을 챙겨주지 않아도 별로 서럽지 않았다. "누구야?" "문 좀 열어 봐." 내 생일날 거의 열한시 쯤이었을거다. 내가 지친 몸을 이끌고 방에 들어와 막 잠자리에 들려는 그 시간에 누나가 내 방을 찾아 왔었다. "누나?" "응." "열쇠 있잖아." "손에 든게 많아서 그래." 누나는 내 생일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나 감격했오. "벌써 잤어?" "아니." 누나는 케익 하나와 삼페인 한 병을 사서 내 방을 찾았다. 선물도 하나 사 왔 다. "생일 축하 해 철수야." "오늘이 내 생일있어요?" "집에서 전화 없었어?" "나 들어 온 지 얼마 안 되었어. 그리고 내가 전화가 어딨냐?" "나중에 핸드폰 하나 사줘야 겠다. 어휴, 박철수 나 없으면 생일도 못챙기고 넘 기겠네?" "흑흑, 나 내 놓은 자식인가봐." "치." "하하. 선물도 사 왔어요?" "응. 조금 있다 풀어 봐." "이 늦은 시간에 생일 파티라. 승헌이 불러 올까?" "우리 둘이만 있자." "그럴까? 누나 집에 갈거죠?" "이 시간에?" "승헌이 불러와야 겠네 그럼." "흠. 그냥 우리끼리 해." 석사 과정 첫 학기 째. 다음 학기 말부터는 누나는 학교에 있지 않을 것이다. 요즘 바빠도 누나를 조금씩이나마 하루도 빠짐없이 만난다. 오늘 같이 누나가 고 맙게 느껴지는 날을 회상하면서 내년엔 나혼자겠구나 하는 생각에 아쉬움이 밀 려 왔다. 촛불을 꺼며 왠지 눈물이 글썽거렸다. 매일 봐도 아쉽고 그리운데... "누나씨." "하나로 통일 해." "누나." "응?" "나 잘 태어 났지?" "그래." "진짜 누나와 결혼해 버릴까?" "결혼이 무슨 애 장난이니?" 이거 말하는 것 좀 봐요. "결혼은 장난같이 해도 진솔하고 정답게 살면 괜찮지 않을까?" "흠. 그럴 자신은 있어?" "그럼요."
"선물 뜯어 봐." 포장된 선물은 판대기 모양이다. 선물 포장을 뜯지 않고 누나를 뚜러지게 바라 보았다. 누나는 작은 미소를 머금고 나를 바라 보고 있다. "많이 고마워요." "조금씩 변하네 그래도." "내 년엔 누나 만나기가 올해보다 힘들겠지?" "너 혼자 여기서 지낼 걸 미리 생각한거야?" "응." "힘들 것 같지?" "응." "그래 그게 정상일거야. 나도 간혹 그 생각하면 많이 슬프거든." "하하. 이거 뭐에요?" "뜯어 봐." 선물은 내가 누나에게 생일 선물로 한 적이 있는 것과 같은 품목이었다. 75 회 생일도 모른 채 혼자 잠자리에 든 철수가 조금 안되어 보였습니다. 내가 그의 곁 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 그와 나의 행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집에서 잠 옷을 챙겨 나왔습니다. 예전 철수가 생일 선물로 주었던 그 잠옷입니다. 하늘색, 뭉개 구름 피어 있던 오늘 오후의 하늘 같은 색 잠 옷입니 다. "하하, 잠 옷이네요?" "그래." "난 추리닝으로 만족하고 사는데..." "내 것하고 짝을 맞췄어. 그래서 색깔을 하늘색으로 했어." "언제나 자기 중심적이네?" "야아." "고마워서 그러지. 헤헤." 연노란빛 샴페인에 케익 한 조각. 철수의 생일은 그 것을 먹는 동안 지나가 버 렸습니다. "누나야, 열두시 지나 버렸다." "그럼 이제 니 생일도 지나간거네." "그렇죠." "자자." 자연스러움, 농담 같은 말 한마디 속 자연스러움, 그 것은 철수와 지내 온 시 간 속에 묻어 있던 것입니다. 철수는 어이없는 반응을 보이지만 내게 미소를 잃 지 않는 것도 이제는 둘이 하나가 될 수가 있다는 것을 뜻할 겁니다. 이 시간 단 둘이 있어도 어색하지 않다는 것, 다른 한 사람을 철수처럼 만들려면 얼마의 시간과 추억이 다시 새겨져야 할까요. 철수는 내 말한마디에 욕실로 들어 가 잠 옷으로 갈아 입고 왔습니다. 나는 아직 그대론데... "야, 예쁘다." "전에도 말했지만 멋있다고 해 줘요." "야, 귀엽다." "멋있지는 않고?" "응." "쩝! 그나저나 승헌이가 잠이 들었으면 어떡하나? 그 케익 조금 잘라 놔요."
"여기서 자." "응?" "나랑 같이 자." 후후, 철수가 이상하다는 표정과 함께 바닥을 쳐다 보네요. 바닥이 조금 지저분 합니다. 여분의 담요도 없을테지요. "나 맨바닥에서 자기 싫어." "누가 맨바닥에서 자래니? 침대에서 자." "누나는?" "나? 나도 침대서 잘거야. 잠옷도 비슷하잖아." 푸우, 철수의 얼굴 표정이 참 재밌네요. 참담하게 변했습니다. 어색한걸까요? 아닌것 같은데. 나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것은. 정말 철수가 남자로 보이지 않 는 건 아닐까? 알수 없는 기분이라는 게 있습니다. 분위기와 연민, 오늘은 왠지 밝게 웃는 철 수가 지친 내 기분따라 가엾게도 보였습니다. 오늘은 철수를 한 번쯤 껴안고 자 고도 싶습니다. 동생처럼 안아 보고 연인처럼 기대어도 보며 꿈 속으로 스며 들 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철수의 표정이 마냥 재밌어요. 저 녀석 뭘 기대하고 저러 는 걸까? "나 남자야." "누가 뭐래?" "남자는 다 흑심이 있는거야." "무슨 흑심?" "에... 남 녀가 같은 침대에서 자면 뭔 일이 일어 날 수 있다." 우물쭈물하면서도 잘도 말하는군요. 흑심만 있으면 뭐 하니? "무슨 일?" "에... 애 생기는 일." 내 눈을 피하면서 피식 한 마디를 내 뱉는 철수는 아직은 소년이라는 인상이 깊 어요. "오호 그래? 애가 어떻게 생기는데?" 철수가 아주 기분 더럽다는 표정을 짓네요. 내가 또 어린 애 취급했나요? 그는 내게 여전히 조심스럽죠. 꿍꿍이 속은 있을지라도 내가 가만히 있는 한 그도 날 어쩌지는 못할 겁니다. 그냥 일 한 번 저질러? 오늘 내 기분은 그런 본능적 감정 보다는 애틋하고 포근한 그리운 감정을 느끼고 싶네요. "나 씻고 올 동안 좀 치워 놔? 넌 씻었니?" "에? 나도 씻어야 돼?" "그걸 왜 내게 물어?" 녀석이 진짜 무슨 기대를 했었나 봅니다. 하긴 뭐, 분위기가 좀 묘하긴 하네 요. 내가 양치질과 세안만 하고 잠옷으로 갈아 입고 나오자 침대 위에 앉아 날 아래 위로 훝더니 조심스럽게 묻더군요. "다 씻은 거에요?" "응. 너 잠옷이랑 많이 닮았지?" "샤워 안해요?" "내일 집에 가서 하지 뭐." "이상하네." "뭐가?" "그 영화 같은데 보면..." "너 딴 생각 했지?" "분위기가 이상하잖아. 결혼 얘기 나왔고 같이 자자. 뭐 어쩌구 저쩌구..." 상당히 어색한 말투네요.
"뭐가 어쩌구 저쩌군데?" "그냥 자는거에요?"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데?" "씨, 빨리 잡시다. 불꺼요." "안 씻어?" "왜 씻어." 철수도 남자였군요. 그의 옆에 등을 돌려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한 동안 가 슴만 콩딱거렸습니다. 내가 그냥 잠이 들은 줄 알았는지 철수는 무언의 시위를 많이 했습니다. 천정 보고 누워서 한 쪽 다리를 괜히 내 허리에다 올리질 않나, 손가락으로 볼도 찔러 보고 그리고 등 뒤쪽에 브라 끈도 잡아 당겼다 놓았어요. 무슨 이런 놈이 다 있나! "야?" "안 잤어요? 왜요?" "집에 가 버린다?" "갈테면 가라지..." "같이 있는게 어색하니?" "덮쳐 버릴까?" "덮쳐? 그래 덮쳐 봐." "혼잣말 한거야." "에구, 딴 생각하지 말고 그냥 자." "어떻게 딴 생각이 안드냐." "그럼 덮쳐 봐." "씨이." "에구. 바보야 바보야. 쿠쿠." "웃지마요. 우쒸!" "바보야?" "놀리다 진짜 당하는 수가 있어?" 놀리니까 재밌네요. "안아 줄까?" 등을 돌려 그를 쳐다보며 녀석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 조금 섹쉬하게 말했지요. 그랬더니... "야, 홍은정!" 짜식이 벌떡 일어 나 화를 냈어요. 하루 이틀이니? 내가 쫄 것 같애? 그 뒷 얘기는 생략합니다. 아침 해가 참 신기하게 떴다. 세상이 노랗다. 내 눈이 지금 시퍼렇다. 밤 새 뜬 눈으로 새다 보니까 정신이 없다. "이제 그만하고 자자." 이불 속에 누나가 등을 보이고 누워 이상한 눈 빛으로 날 은은하게 바라보고 있 다. 뭘 그만 해 씨. 누가 들으면 진짜 오해하겠네. 내가 뭐했다고 씨. 내 생일 날 누나가 내 방와서 나랑 같이 잤다. 한 침대에서... 무슨 일 있었냐 고? 나 누나 노리개 됐었다. 저 여자 성격 진짜 이상한 여자다. "닭 우는 소리 안들려요?" "안 잘거야? 아직 아침 되려면 멀었어." "내가 지금 잠이 오게 생겼냐?" 저 여자 개그맨이다. 날 보고는 쿡쿡 거리며 머리를 긁는 모습이 딱 개그맨이 다. 어색한 분위기 만들어 놓고 나 바보 만들어 혼자 낄낄 웃던 썰렁한 개그맨이 다.
뭔 일 있었냐고? 기분 나빠서 말 못하겠다. 하여튼 그 날 나 누나에게 농락 당했다. 입 맞추려 했더니 이빨 닦아? 닦고 왔 더니 그냥 자는 척 날 무시하지를 않나. 깨워 놓으면 이상한 쪽으로 먼저 몰고 갔다가 갑자기 뜬금없이 끔찍한 얘기를 하질 않나? 에라 모르겠다 껴 안았더니 학번 얘기, 울 아버지 얘기 김 팍 새는 소릴 하지 않나. 기분 나빠 그냥 자려고 하면 내 허리는 왜 만지나. 또 그냥 자려고 하면 괜히 내 배에다 다리 올려 놓거 나 안길려고 하고 그래서 내가 또 흥분되서 껴 안으려고 하면 별 희한한... 더 이상 말하기도 싫다. 난 그 날 이후로 내가 남자가 맞나 고민했고 누나가 날 남자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내가 지 동생이야 뭐야. 나 은정이 자네 동생이 아 니고 애인이다. 이 무식한 여자야 그 점을 좀 상기해라. 그 다음날 승헌이 방에서 티비를 보며 내 고민을 말했다. "넌 의정이와 잘 되어 가냐?" "그럼. 내가 꽉 잡았지." "나는 잡힌 것 같다." "힘이 없어 보인다 너?" "그 여자가 날 갖고 논다." "엉?" "지가 내 친누나라고 착각하나 봐." "니가 항상 누나,누나 그러며 쫓아 다니니까 그러잖아. 그러게 내가 늘 충고했 지. 나이 많은 여자는 골치 아파." 티비에서는 최민수가 한 껏 폼을 잡고 있었다. "내가 어려 보이냐?" "하는 짓을 보면 좀." "어떻게 하면 남자 같이 보일까?" "은정이 누나에게 말이냐?" "응." "우선 누나라고 그러지 마. 그래, 저 최민수가 하는 것처럼 해." "농담으로 묻는 거 아니다." "봐바 임마. 쟤 하는 거 멋있지 않냐?" "너한테 상담받는 내가 바보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 시선은 그때부터 최민수에게 고정 되었었다. 내가 기집애냐? 내가 왜 꼭 삐쳐야 돼? 그래서 한 일주일 삐치고 싶었지만 그러 지 않았다. 이틀 누나 만나지 않다가 연구실을 찾아갔었다. "홍은정 잠깐 나 좀 보자." 누나 연구실로 찾아 가서 목소리를 깔고 주윗사람 다 듣게 누나를 불러 냈다. 다들 날 빼꼼히 쳐다 본다.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눈 마주치는 사람 있으면 누나 좀 불러 주세요. 이러던 내가 변신했다. 성준씨가 의아하게 날 보고 웃고 있다. 비웃음이냐? "너 무슨 일 있니?" 누나가 재빨리 뛰어 나와 의아하게 물었다. 누나의 손을 잡고 자판기 있는 곳까 지 끌었다. "정리는 하고 나와야 돼." 손을 빼려 하는 걸 놓아주지 않았다. 걸음을 멈추고 손에 더 힘을 준 채 강렬 한 눈빛으로 누나를 내려 보며 최민수처럼 말했다. "내가 뭐냐?" "손 아파."
"동생이냐 애인이냐?" "푸우." "웃지 마라." 계속 최민수처럼 말하고 있는거다. "왜 그래 또? 어제 그제는 왜 연락 없었어?" "가라." "응?" "날 동생취급하려면 멀리 가라." "무슨 소리 하는거야?" "니가 찾아 오면 안돼냐?" "삐삐 쳤잖아." "앞으로 날 보고 싶으면 좀 더 남자로 대하라." "말투가 왜 그래?" "다시 묻는다. 내가 뭐냐?" "야, 박철수!" "왜?" 그냥 왜, 아니고 터프하게 왜,라고 물었다. 최민수처럼. "너 그런거 안 어울려." "그런 말 해도 안 통한다." 나 여전히 최민수 말투를 고집하고 있다. "느끼하다 너?" "내가 뭐냐?" "그만 해에?" "다시 묻겠다. 내가 뭐냐?" 한 대 맞았다 씨바. "왜 때려요?" "금방 돌아 올거면서." "씨. 날 애인 취급해 주기 전에는 누나 소리 안하기로 했어." "니 맘대로 해." "홍은정 밥 먹으러 가자." 다음 날 연구실 찾아가 이름을 불렀더니 "철수씨 93 학번 아니에요?" "93 이 91 에게 저래도 되나?" 연구실에 있던 여러 명의 선배들이 날 보며 한 마디씩 했다. 비겁하게 동료를 동원하다니... 누나와 티격태격 했으나 둘 사이가 예전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에 어긋나는 일 은 없었다. 둘 다 서로를 믿어 버리니까 왠만해서는 금 가는 일이 발생하지는 않 았다. 나도 예전보다 누나에게 많이 태연해졌다. 느슨해졌다는 것이 아니고 누나 를 품고 있는 마음의 넓이를 넓혀 갔다는 말이다. 대학원 첫 학기는 후딱 지나가 버렸다. 방학이 되고 날씨가 많이 더워 졌지만 나와 누나는 계속 학교를 나와야 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주말이 되면 우리는 약속하지 않아도 서로를 위해 시간을 비워 두고 만 남을 즐겼다. 그러는 와중에 누나와 나에게 잊혀지는 사람이 있었다. 승주라는 사람. 칠월이 끝나는 마지막 주에 우연같은 일이 벌어졌다. 누나와 더운 여름의 햇살
을 피해 강남의 한 극장을 찾았다가 우연한 만남이 있었다. "어? 승주씨." 표를 끊고 남는 시간을 이용해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가 표를 끊어 들 어 오는 승주를 누나가 보았다. "엉? 은정이네." 나는 안 보이나? 나도 누나의 시선을 따라 승주에게 싱겁게 손을 흔들어 주었 다. "여긴 왠일이야?" 바보냐? 영화보러 왔지. 승주는 어색해 했다. 저 사람 아직도 누나에게 마음이 있나? 그럴수도 있지. 하 지만 이제는 포기해야 할 걸세. "형 혼자 왔어요?" "아니." 형은 표를 두장 보여 주었다. 우리하고 같은 시간 같은 영화다. "누구하고 온거야?" "응? 하하. 곧 올거야." 하하! 승주가 어색했던 이유는 기다린 사람이 내가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 다. 그래 곁에 없는 사람은 곁에 있는 사람 때문에 잊혀지나 보다. 작은 은정 이. 키는 더 크지만 하여튼 작은 은정이가 승주가 기다린 사람이었다. 은정이는 내게 반가운 인사를 해 주었다. 저 둘이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자주 만나는 사이인 것 같다. 휴게실에서 마주 앉아 이야기가 오고 갔다. 예전 작은 은정이가 내 곁에 있고 큰 은정이가 승주 옆에 있었을 때보다는 훨씬 자연스럽 다. 다섯 살 차이라. 승주 형 도둑놈 심봅니다. "회사는?" "잘 버티고 있어." "좋아 보인다." 누나의 미소가 곱다. 아쉬운가? 잊혀지다 뒤 돌아 봤을 때 아쉽지 않은 사람이 어딨겠는가. 잊혀지는 사람은 아쉬운 것이다. 곁에 존재하는 사람, 아쉬움이 물 들지 않게 소중히 해야할 필요가 있다. 누나의 한 손을 잡아 주었다. 승주와 작 은 은정이가 보는 앞에서. 누나가 날 위해 씩 웃어 주었다. 저 표정을 보면 날 연인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다.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승주, 작은 은정이와 술자리를 가졌었다. 생선회가 좋았 고 광고처럼 청하도 괜찮았다. 기분도 좋다. 승주를 마주 앉혀 놓고 내 곁을 지 켜주는 누나가 그날따라 더 사랑스러웠다. 영화 보기 전엔 자연스럽다고 느꼈는 데 누나는 말 수가 적었다. 승주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조금 어색했지만 그래도 그 둘 보다는 자연스러웠다. 작은 은정이는... 날 좋아했다는 생각은 진짜 착각 이었나 보다. "오빠" "왜?" "언니와 잘 어울려 보여요." "이 여자랑?" "네." "내가 아깝지?" "딱 좋아 보여." "아니에요. 언니가 조금 아깝긴 아까워요." 승주가 대신 한 답에 은정이가 초를 쳤다. 누나는 지 얘기하는 데 먹는 데에만 열중하며 딴 청이다. 그래 누나의 그런 모습 때문에 승주가 나와 딱 맞다라고 말 했는지 모른다. 나와 누나 단 둘이 있을 때 하는 짓을 본다면 짝은 은정이 너도
딱 맞는다라고 말할 거다 아마. 곁에 있는 사람에게 아깝다, 아깝지 않다라는 말을 쓰지 말자. 내 맞은 편에 있 는 두 사람의 모습이 참 아름답다. 누나와 나를 보며 살포시 미소 짓는게 우리에 게서 그 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나도 그렇다. 마음을 맞추어 좋 은 관계 유지한다면 모자라고 아까울 게 어딨겠는가. 술 몇 모금, 그리고 초장 의 새콤한. 히죽 웃다가 누나의 손을 살며시 잡아 보았다. "왜 자꾸 손을 잡고 그래?" "흠." 누나의 대답과 표정이 웃겼지만 포근하게 미소 지으며 고운 눈 빛을 보여 주었 다. 사랑스럽기 때문에. "비웃는거야?" 앞에 말 취소해야 겠다. 누나는 딴 청 부리는 짓을 자주 했다. 누나와 승주는 다음을 기약하지 않고 수줍은 듯한 안녕이란 말을 남기고 헤어졌 다. "수희보러 한 번 놀러 와." "가끔씩 가는데 오빠가 없는거에요." "그런가?" "네." "다음에 볼 날 있으면 보자." 작은 은정이는 날 아쉬워 하지 않고 승주를 따라 가버렸다. "어색하던가요?" "그건 아닌데. 내가 딴 청을 좀 부렸지?" "그래도 보고 싶었던 사람이죠?" "아니, 미안했었어." "내게?" "아니, 승주에게. 한 때 좋아했던 사람인데, 너무 쉽게 잊어버린 것 같아서." "아쉽죠?" "후후, 그래 조금 아쉽긴 하다." "그게 정상이야." "너 또 삐치는 건 아니지?" 내가 쫌생이냐? 보이지 않으면 잊혀진다. 가려지는 사람이 있으면 더 빨리 잊혀 진다. 하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나도 그럴까? 헤어진다면 누나 곁의 새로운 사람 에게 나는 오늘 승주처럼 얘기되어 질까? 싫은데... "누나." "응?" "진짜 나 데리고 살거야?" "프로포즈 하는거니?" "나 데리고 산다는 말 한 두번 했니?" "그래서?" "결혼하는 거 같이 사는거야. 데리고 사는 거 아니다." "후후." "진짜 내 년에 결혼 할 거에요?" "그럴 생각이야." "누구랑?" "그렇게 물으면 좋니?" "나 일년 정도 데리고 살 자신 있어요?" "일 년?" "누나와 결혼하고 싶은 건 사실이지만 졸업 후의 일이라 생각했어. 누나 하는
말도 실현 될까 의심스러웠고." "근데?" "진짜 내 년에 결혼해 버릴까?" "결혼 할 사람은 있니?" "지금 내가 장난치는 것처럼 보이냐?" "아니." "그럼 진지하게 좀 답해요." "방학 때 우리 집 자주 와. 울 아빠랑 친해 지란 말이지." "그래서?" "나도 너네 집에 자주 갈게. 추석 지나고 가을 때 쯤 이야기 해 버리자." "진짜루?" "너도 우리 부모님께 자신있게 말해야 돼." "노력해 볼게요. 하하. 한 번 진지하게 물어 봅시다." "물어 봐." "나하고 진짜 살고 싶어요?" "응." "혹시 헛갈리는 거 없어?" "흠, 너 남자로 보이니까 걱정 마." 그 참, 내가 묻고 싶은 걸 알고 있네. 하하, 기분 째지네. "하하, 누나, 내가 지금은 별 볼일 없지만 누나 하나는 내가..." "치, 이제 그만 가 봐라. 나 들어 갈게." "말 끊고 있어." "훗, 나 사랑하지?" "그럼요." "그럼 됐어. 잘 가." "나 오늘 프로포즈 한거다?" "알았어." 끝까지 들었으면 더 좋은 말이 막 나왔을텐데... 누나가 히죽 웃고는 등을 돌리 고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 지금은 별 볼일 없지만 누나 하나는 내가 재밌게 살게 해줄게요. 나 세상의 모든 행복 다 안겨 줄 순 없겠지만 나 때문에 행복하다는 말 할 수 있게 하겠습 니다. 나 평생 당신에게 누나라는 생각 잃지 않을 것이며 또한 연인이라는 생각 도 간직 할 겁니다.50 년 후에도 지금처럼 사랑하겠습니다. 살다보면 티격태격 할 수도 있고 다툼도 있겠지만 절대 깨지지 않게 누나 소중히 생각하겠습니다. 많은 시간 행복한 웃음, 고운 미소 맺고 오손 도손 아기자기 좋은 말들 많이 넣 어서 잘 살게 해줄게요. 아들 하나 딸 하나 낳아 잘 삽시다. 나와 인연이 닿아 준 것 너무나 고맙구요. 사랑합니다 은정씨.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요 누나 때문 에... 우쒸! 여기까지 말할 려고 했는데. 누나 집 앞에서 한 참 동안을 서 있었다. 등 돌리기가 아쉬워. 조금 더 누나를 느끼고 싶어 발 걸음 떼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누나 집 앞에서 한 참 동안을 누 나 방을 쳐다 보며 서 있었다. 누나 방 창에 불이 켜지는 걸 보고 그 앞에 앉아 보았다. 하늘은 어둡지만 구름은 거기 있었고 흘러가고 있었다. 길 가에 앚아 괜 히 누나 생각에 누나가 고마워 눈물도 흘려보고 감격해 가슴 떨어 보기도 했으 며 아직 곁에 있는 느낌이 좋아 추억을 회상해 보기도 했다. 창에 불이 꺼지지 않는 한 나 이 자리를 떠나지 않으리. 불 켜 놓고 자나? 더럽게 불 안 꺼지네. 불 꺼질 때까지 못 있겠다. 뒤 돌아 섰다 근처 공중 전화를 찾아야 했다. 우쒸!
"누나?" "어 철수구나. 잘 들어 갔어?" "나 누나 집 근처야." "응?" "누나 방 불 꺼지는 거 보고 가려고 계속 집 앞에 있었어." "허! 괜시리 감격되네. 일찍 꺼줄 걸 그랬나?" "뭐 했어요?" "그냥 이런 저런 생각하며 있었지." "내 생각도 했어요?" "훗. 니 생각 하고 있었어." "잠 와요?" "아니, 잠시 나가 볼까?" "안 그래도 불러 내려고 전화 한거야." "도저히 나 안 보고는 못 가겠던?" "버스 끊겼잖아. 택시비 없어요. 돈 좀 꿔줘요." 76 회 철수와 헤어지고 난 뒤 방에 들어 와 곧바로 다시 보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습니 다. 내일이면 다시 볼 수 있는 녀석이지만, 헤어진 지 불과 몇 십분도 지나지 않 았지만 그리움이 인다는 것은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겠죠. 오늘 처음으로 철수가 결혼에 대해 제법 진지한 말을 했습니다. 정말 그와 같이 살게 될까.앞으로 의 인생을 재밌게 살겠다는 생각만으로 결혼을 꿈 꾸는 것은 아무래도 남들이 듣 기에 장난스러울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뒤돌아 갈 수 없는 인생, 남에게 보이 기 위해 사는 것도 아닌 삶, 어짜피 가야만 하는 인생이라면 재밌게 살고 싶어 요. 그 것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니지요. 재밌게 산다는 것에는 많은 것이 포함될 겁니다. 결코 장난스럽거나 가벼운 것이 아닐 거에요. 하나의 거창한 목표를 세워놓고 악착스럽게 사는 것, 그러다 무료하고 외로운 사람이 되기는 싫어요. 평범하지만 결코 무료하지 않는, 이 세상 너무나 아쉽게 잃어 가고 있는 소중 한 것들, 그냥 지나쳐 버릴수도 있지만 눈 여겨 보면 찾을 수 있는 작지만 참으 로 고운 인생의 묘미를 찾으며 아기자기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사랑하는 사 람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과 눈 감는 그 날까지 내 남은 인생의 길을 손잡고 갈 수 있다면 그 것으로 만족합니다. 참고 인내하는 것을 배우며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도 가꾸며 사람들 속에서 세상이 아름답다 생각하며 그냥 평범하 게 살아가고 싶어요.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서 사랑하는 사람과 내 인생의 등장인 물들과 재밌게 살고 싶은 것, 가볍나요? 철수가 주었던 장미 나무는 꽃을 피웠다 지금은 그냥 잎사귀만 달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꽃이 없는 지금의 장미 나무와 같은 철수의 현재 모습. 하지만 내 년 다시 꽃이 필 걸 기대하며 아끼고 보살피며 가꾸는 재미. 나는 철수와 꼭 결 혼 할 겁니다. 그런 생각에 잠이 들지 못하고 불 밝혀 놓은 밤. 철수에게 전화가 왔어요. 으이 그... "차비 가지고 나와요." 바보같은 녀석. 철수는 날 감격하게 했지만 여전히 바보 같군요. 차비가 없으 니 차비 가지고 나오라고? 그냥 내 생각에 떠나지 못했다는 말만 했다면. 한번 더 보고 싶다는 말만으로 날 불렀냈다면... 후후, 아니에요. 오히려 저렇게 불 러 내는 게 철수 다워요.
"정말 내 생각에 집에 안 갔던거야?" 빌라 입구 쪽에서 철수를 바로 볼 수 있었지요. 헤어진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많이 반가웠어요. "차비 줘요." "어디 근처서 놀다가 돈 없어 돌아 온 거지?" 철수 특유의 어이없다는 표정! 저 표정만으로도 몇 년은 날 재밌게 할 것 같네 요. "에이 삭막한 여자야! 그런 말 하면 좋아요? 자기 생각에 발 길 떨어지지 않던 사람에게." "정말 여깄었던거야? 내 생각하면서?" "누나 방 창 밑에 있었어." "정말?" "차비 줘요." 조금 시큰둥한 말투군요. 또 삐쳤나? "차비도 없어면서 무슨 배짱으로 있었던거야?" "시간이 그리 갈 줄 알았나? 돈 없는 줄도 몰랐어." "후후." "빨리 차비 줘요." "안 가져 왔어." "뭐?" "지갑 안 가지고 나왔어."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냐." 자동차 키를 꺼내 흔들어 보였지요. "지갑 차에 두고 내렸냐? 왜 그리 정신이 없냐?" 바보 같은 놈. 철수를 태워 그의 집 앞까지 갔습니다. 수고스럽지 않았어요. 즐기는 기분이었 으니까. "하하." "왜 웃어?" "고마바서 그러지." "나랑 살고 싶지?" "응." "앞으로 잘 해?" "이 이상 어떻게 잘 하나?" "너네 아버님하고 우리 아빠 잘 설득하란 말이야." "알았어요." 대답은 쉽게 했지만 철수의 얼굴은 좀 막막하다는 표정입니다. 바보 같은 놈인 데 잘 해 낼 수 있을까요? 나도 거들어야 겠지요. 그리고 내 낭군 될 사람인데 바보 같다는 말 나말고 딴 사람은 하면 안됩니다. 내가 많이 거들어야 겠군요. "잘 자고 내일 오전 중으로 연락 해." "알았어요. 조심해서 가요." "잘 자." 철수는 손을 한 번 흔들어 주고는 건물 안으로 바로 사라졌지만 나는 차를 출발 시키지 못했습니다. 여운이라는 걸 느껴보고 싶었어요. 내 옆에 있던 철수의 흔 적, 그 여운을 느끼며 철수 방 불이 켜지는 걸 지켜 보고 싶었어요. 나도 철수처
럼 그를 느끼며 그 곳에 조금 더 머물고 싶었습니다. 불이 나갔나? 한 참이 지나 도 철수 방은 불이 켜지지 않았습니다. 몇 분 뒤 헐레벌떡 뛰어 내려오는 철수를 보았습니다. 집에 가야 되는데 왜 또 그 모습이 반가울까요.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나? 그렇게 생각한 나는 착각했었 던 거였어요. 차에서 내려 철수를 반겼는데... "너 또 왜 내려 왔어?" "안가고 있었네. 하하." "왜? 헤어지는 게 아쉬워?" "그게 아니고..." "작별 키스라도 하고 싶은거야?" "그게 아니라니까?" "흠, 이왕 나온 거 조금 더 있다 갈까?" "그래 줄래요?" "후후. 오늘은 결혼 얘기 하고선 내가 자꾸 보고 싶은가 보다?" "착각하지 마요." "응?" "현관문 잠겼어. 어떻게 아들이 안 들어 왔는데 문 잠궈놓고 한 밤중이냐. 나 열쇠 안 갖고 나왔어요. 흑흑, 나 내 놓은 자식 맞나봐요. 옥상에서 별 보고 잘 줄 알았는데 누나가 안가고 있대. 그래서 내려 왔어." "뭐야." 바보 같은 놈에다가 지극히 솔직한 놈이네요. 오늘 철수는 제법 솔직 했습니다. 나 철수네 옥상에서 밤을 샜어요. 야 밤에 다 큰 처자가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어요. 한 밤중에 추리닝 차림으로 부모님 몰 래 나와 자기 아들이랑 자기 집 옥상에서 밤을 새고 있다는 걸 철수 아버님이 아 신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요. 눈여겨 보지 않는다면 찾지 못할 서울 밤 하늘의 별들을 헤아려 가며 이런 저 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런 것도 괜찮군요. 철수와 옥상 난관에 팔을 고으고 밖 을 쳐다 보며 나란히 섰습니다. "아직 불 밝힌 집들이 많죠?" "맞다. 내 방에 불 켜놓고 나왔는데." "무드라곤 말병장 싸가지 만큼도 없군요." "군대도 안 갔다 온게." 나 왜 이럴까요? 오늘따라 철수 얼굴을 쳐다 보는게 재밌어요. 사랑스럽네요. "누나야." "응?" "나 누나 많이 좋아했었어요. 내가 누나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품은 게 언젠지 모르죠?" "나 처음 봤을 때?" "그땐 무슨 저런 싸가지 없는 여자가 다 있냐. 이렇게 생각했는데?" "치. 그럼 언젠대?" "확실히는 말 못하지만 하여튼 나 누나 일년 이상 짝사랑 했었어." "후후. 나도 헛갈려서 그랬지 제법 오래전에 널 사랑하기 시작한 거 같다." "누나도 헛갈렸어요?" "나라고 뭐... 하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걱정 마." "그럼 나 좀 남자로 대해 죠요."
"이렇게 대하는 게 싫니?" "그건 아니지만 헛갈릴 때가 있단 말이야." "자연스럽게 바뀔거야. 헛갈리지마." "내가 남자로서도 사랑스러워?" "널 동생으로서만 사랑하는 것 같니?" "간혹." "너 바보니? 그러면 너 말고 다른 남자 생각나야 돼. 그리고 결혼하고 싶단 생 각도 하지 않았을거야." "나 말고 딴 남자 생각 안 나요?" "으응." "나도 그런데 헤헤. 그 말이 맞대요. 사랑하면 그 사람 밖에 안 보인다." "그래. 그 때 결혼하는게 가장 좋은거야." "정신 없는게 아니고?" "정신 없으니까 다른 상념들이 끼어 들지 못하잖아." "말은 잘해요." "너도 잘하잖아." 날씨도 따뜻하고 옥상 바닥도 따뜻했어요. 난간에 기대어 앉아 소곤 거림은 계 속 되었습니다. 주홍빛 서울 벽 사이로 어렴풋이 동이 터옵니다. "재 작년이었구나. 첫 눈 올 때 나 여기서 많이 슬펐어요." "왜?" "누나가 첫 눈 오면 만나준댔다가 승주 때문에 나 몰라라 했잖아요." "니가 연락하지?" "하여튼 그 날 여기서 눈 사람 만들고 눈 뿌리고 별 희한한 짓 다 했어요. 라면 에 소주까지 마셨다." "에구 박철수." "그 날 진짜 누나 보고 싶어 눈물이 났어요. 청담동 쪽을 보며 혹시나 하는 그 리움으로 눈물이 다 나더라." "무슨 혹시나 하는 마음?" "짝사랑 안 해 봤어요? 시적으로 표현해도 되냐?" "해 봐." 자식이 갑자기 표정을 우아하게 하면서 초롱한 눈망울로 하늘에 시선을 두고 속 사이기 시작하더군요. 뭘 많이 봤군요. "내 임은 한 마리 기러기처럼 잠시 내 마음녘에 앉았다 내 마음 혼란스럽게 하 고 님 찾아 떠나 버렸다." "후후. 다야?" "말 끊지 마요. 호숫가 발 담근 임의 모습은 고요한 표면에 어지러히 잔 물결 만 일으키고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계속할거야?" "계속?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내 감성 건들면 무서워." "그래 계속해 봐." "나 그 당시 누나가 잘 대해 주면 고맙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부담스럽기도 했어 요. 누나와 친해지니까 자꾸 기대하는 맘 생기는데. 난 단지 후배였기에 마음이 가면 갈 수록 상처 받을 줄 알았어요. 그래서 좋아하는 맘 꼬옥 숨기고 있다 나 중에 떠나 보내고 난 뒤 아름답게 눈물 흘리자라고 생각했는데... 계속해요?" "말이 좀 유치하다." "으이 쒸." "알았어. 계속 해 봐." "아름다울 줄 알았는데, 내 마음 드러 냈다가 찢어지는 것 그래서 눈물도 안 나
올만큼 쪽팔리며 아파하는 것보단 나을 줄 알았는데 서럽대요. 누나 좋아하는 맘 붙들려고 노력했고 승주 다시 나타나자 더 맘 가지전에 차라리 잘 됐다라고 생각했는데 많이 서럽대요. 내 사랑이고 싶은데, 내 곁에 두고 싶은데 뺏긴 거 같아서 첫 눈 온 날 누나 집 쪽을 보니까 눈물이 났어요. 눈물 훔치며 그래 이 잘난 여자야 승주랑 잘 먹고 잘 살아라. 이랬다니까." 하하. 그렇게 말하는 철수가 귀여워 죽겠어요. 귀여워 볼을 잡아 주었더니 또 못마땅해 하네요. "이것 봐바. 이게 어디 남자로 대하는거야?" "사랑스러워 그런다." "신기해요. 누나가 날 사랑한다는 게." "그게 뭐가 신기해." "신기하지. 꿈 같은 일이 일어 났는데 신기하지 않겠어?" "그래서 좋아?" "너무 좋아서 깨질까봐 두려울 정도야." "후후. 뽀뽀해 줄까?" "진짜 결혼 해 줄거야?" "왜 말을 돌려?" "뽀뽀해 주는 건 좋은데 애 취급 하는 거 아니지?" "내 낭군이 사랑스러워 그러는거야." 또 표정이 재밌게 변하는군요. 한 쪽 눈을 아래로 실 깔고 입 주위는 올려 미소 짓는 모습. 저거 버릇 됐군요. 손가락으로 내 볼 찌르는 것. 나도 엉덩이 쳐 주 는 걸 버릇화 해 버릴까? 화 내겠죠? "야!" 비겁하게 급습을 하다니. 철수는 그 표정으로 가만히 있다 내 입술을 급습해 빼 어 버렸습니다. 한 두번 한 것도 아닌데 뭐. 할 때마다 조금의 수줍음은 간직하 고 있는 것. 입맞춤을 애틋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 중 하나일 겁니다. "우리 추억이 제법 되지?" "그렇지." "철수야." "왜?" "결혼하면 아무래도 생각했던 거완 다른게 많겠지?" "그렇겠죠." "싸우기도 할까?" "싸울지도 몰라. 그래도 나 잘 풀려요. 그리고 나 참을 수 있어요. 화를 내는 경우는 있겠지만 때리고 할 놈은 아니야. 나 누나 소중히 생각하며 한 평생 살 자신 있어. 믿어 줘요." "물릴까봐 겁나니?" "에?" "대충 네 성격 파악됐어. 그래도 우리 혹시나 다툴일이 생기면..." "생기면?" "오늘처럼 옛 적 니가 나 좋아하던 맘, 내가 너 좋아하던 맘 꺼내어 이야기 하 는거야. 좋았던 추억도 꺼집어 내며 서로 같이 회상해 보는거야. 그럼 힘든 일 이 생겨도 다투지 않겠지?" "하하. 내 특기네." 동이 틀 무렵 철수가 집에 들어 가는 걸 보지 못하고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아 침에 아빠께 꾸중을 들었어요. 불 켜 놓고 나가는 게 아닌데... 나 야밤 도주 했
던 거 들켰어요. 아빠가 화를 내시더군요. 외동딸이라 어지간해선 화를 내시지 않던 아빤데... "왜 사람을 못 믿게 만드니?" "네?" "밤에 몰래 싸 돌아 다니는 거 어디서 배웠어?" "그냐. 별 일 없었어요."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그 철수란 얘 만나러 갔었어? 자주 몰래 나가나 보 다?" "그게 아니고..." "아예 같이 살아라." "그래도 되요?" "뭐야!" 농담할 때가 아닌데. 철수 때문에 분위기 파악도 못해지다니... 아빠에게 애교 를 좀 많이 떨어야 겠군요. 엄마 때문에 아빠가 더 이상 화를 내시진 않았지만 혀를 많이 차셨어요. 철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잘 살 자신 있어요. 아빠가 들어가시고 난 뒤 엄마도 절 꾸중하 시더군요. "조신해야지!" "아빠가 내 방 왔었어요?" "내가 일러 줬다." "어?" "너 이러면 나도 싫어진다?" "죄송해요. 하지만..." "아빠가 철수를 반대하시던? 그게 아니잖아. 너네 둘이 철이 없어 보이니까 호 응을 안 할 뿐이지 반대하는 건 아니잖아." "말씀 드리면 반대하실 것 같아요." "니가 잘해야 철수도 좋아 보이는거야. 잘 해." "네." "아빠도 대충은 알고 있을거야." 알고 있으면서도 별 말 안하신다는 건 ... 희망이 보이는군요. 말은 자신있게 했지만 막막했다. 우리 아버지는 그렇다치더라도 누나 아버님에 게 어떻게 설득시키지? 뭐라 말씀드려야 되나? 내가 이 나이 이 처지에 누나 집 가서 아버님께딸을 저에게 주십시오. 이런 말 해도 되는건가? 너 뭐야? 박철숩니다 장인어른. 딸을 왜 달라는데? 같이 살려구요. 버젓한 직장은 있나? 학생인데요 제가 누나보다 두 살 적어요. 그럼 뭘 믿고 딸을 달라는데? 믿는게 있겠습니까? 누나가 시키니까 이러는 거 죠. 뭐야? 뭐 먹고 살건데? 누나가 일년동안은 저 먹여 살려야 되요. 그 뒤는 제가 어떻게 해서라도... 저 취직하면 월급 받습니다. 취직할 자신은 있어요. 그럼 그 때가서 말하게. 맘 변하기 전에 잡아야 되는데요. 제 정신인가? 제가 생각해도 황당하시겠어요. 어떻게 하지? 아버지 술 모아 놓은 데서 아주 그럴싸한 양주 한 병을 훔쳤다. 레미마땡 엑스 트라. 이번엔 비싼거야 되는데... 포장을 손수 예쁘게 했다. 그리고 약국을 찾아 갔다. 누나도 모르게 아버님 만나러 나 홀로 약국을 찾아 갔다. 약국 졸라 컸다. 혼자라서 많이 떨렸다.
"저기..." "네." 곱상하게 생긴 약사 청년 앞에 섰다. "여기 사장님..." "잠시 나가셨는데. 무슨 일로?" "낯이 좀 익네요?" "응?" "종석이 형?" "어? 철수?" 이런 일이. 울 엄마 친한 친구 분 아들이 누나 약국 약사였을 줄이야... "여기 취직했어요?" "그래. 하지만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야." "어머님은 잘 계시죠?" "그럼. 야 얼마만이야?" "어머님은 대전 내려 가시기 전에 한 번 뵈었었는데... 형은... 몇 년 만이야?" "하하, 내가 좀 바빴다. 그건 그렇고 사장님은 왜 찾아?" "홍은정씨 알아요?" "응. 사장님 따님이잖아. 참 은정씨가 성대 다니는구나." "예뻐요?" "상당히." "예쁜 건 맞구나." "연상이야 꿈 깨." "하하. 일 봐요." 종석이 형 덕에 카운터 안에 들어 가 있을 수 있었다. 거느린 약사가 네 명이 나 되는 큰 약국이다. 약사들 쳐다 보며 양주를 꼭 껴 안고 아버님을 기다렸다. 가슴이 떨린다. 아버님은 한 시간 뒤 저녁 먹을 시간에 들어 오셨다. 날 보며 아는 척은 했으 나 영 무뚝뚝 하시다. "자네 왜 왔나?" 내 얼굴 기억하는 것도 어디냐. 아버님은 내게 아는 척만 해주고 어떤 여자 약 사와 말을 주고 받더니 조제실인지 모르겠지만 작은 방으로 들어 가셨다. 따라 들어 갔다. 종석이 형이 의아하게 쳐다 봤다. "이거 드십시오." 날 멀뚱하게 쳐다 보는 아버님께 양주를 떡 안겼다. "이거 뭔가?" "양줍니다." "이걸 왜 주나?" 딸하고 바꿉시다. 한 대 맞겠지? "그냥 인사 드리고 싶었습니다." "은정이가 시키던?" "네?" "그렇게 일찍 결혼하고 싶나?" 저렇게 물을 줄은 몰랐는데... "그게 아니구요..." "좋다면야 갈라 놓을 생각은 없어. 하지만 자넨 너무 어려. 한 삼년 뒤에나 와." "안되는데요." "뭐가 안되는데? 자네 학생이야."
"그건 알지만." "나 바쁘네." 아버님은 그 말을 남겨 놓고 밖으로 나가 버리셨다. 따라 나갔다. 양주도 들 고... 누나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그냥 돌아 갔을 것이다. 나 그러지 않았다. 아 버님 서 계시는 곳 앞에다 양주 떡 갖다 놓고 카운터에 앉아 놀았다. 아버님은 모른척 하시던 말던 떠나지 않고 카운터에 외롭게 앉아 쪽팔림을 무릅쓰고 있었 다. 종석이 형이 간혹 와 말을 걸어 주었지만 침묵한 채 비장한 표정을 잃지 않 고 개겼다. "너 왜 그러냐?" "..." "왜 그래? 사장님께 무슨 볼 일이야?" 말 시키지 마세요. 나 아버님 퇴근 하실 때까지 약국에 있었다. 아버님은 다른 약사들보다 조금 일 찍 퇴근 하셨다. 사장이 제일 늦게 퇴근하지 않나? 아버님이 나가시는 걸 보고 재빨리 따라 나갔다. 아버님이 리모콘으로 뾱하며 차 문을 여는 걸 보고 먼저 달 려가 문을 열어 드렸다. "제가 운전해 드릴까요?" 비겁하게 그냥 혼자 타 버리시다니... 차 안에서 아버님은 나에게 무뚝뚝한 표 정으로 가 보라는 손 제스쳐만 해 주시고 가 버리셨다. 내일 또 오겠습니다. 차 는 이미 떠났지만 꾸벅 인사를 하고 그렇게 소리쳤다. 내일은 양주는 못 가져 오 는데... 내일은 보약을 훔쳐 와야지. 아버지 용서하세요. 예쁜 며느리로 바꿔 오 겠습니다. 근데 내가 왜 이럴까? 나 솔직히 급할 거 없는데. 그래 누나가 급하구 나. 까짓 것 누나 위해 좋은 일 함 해 보지 뭐. 아자! 힘내자. "너 뭐냐?" 차 떠나는 걸 보며 그 자리에 서 있었는데 뒤에서 누가 날 쳤다. "아, 종석이 형." "사장님 잘 아냐?" "당연하죠. 내 장인 어른 될 분인데." "응?" 77 회
그 의심 디게 많네. 은정이 누나와 내가 안 어울려 보이나? 아버님 약국에서 우 연히 만난 종석이 형이 나와 누나 사이에 관해 자꾸 물었다. "맞다니까요." "에이, 은정씨가 뭐가 아쉬워서?" 야, 내가 어때서? "다음에 혹시 누나 보게 되면 물어 봐요." "진짜야?" "아쒸! 결혼 얘기 누나가 먼저 했어요. 나 보다 그 여자가 적극적이라니까." "그 이상하네. 그 도도하고 쌀쌀맞은 여자가..." "누나가 쌀쌀해요?" "응. 여기 간혹 일 봐주러 오는데 찬 바람이 쌩쌩 불어. 특히 내게 쌀쌀 맞다니 까." 생긴 거 곱상하게 생겼고, 학벌 좋고 집안 괜찮고 내가 알기로 성격도 괜찮은
데 종석이 이 사람 누나에게 뭘 밉보였을까? "훼방 놓지 마요?" "하하, 오히려 도와 줄게. 은정씨 새로운 면을 보는 것 같다. 그 잘난 여자가 연하를 사귀고 있었단 말이지? 그 것도 철수를..." 날 도대체 뭘로 보는거야? 재밌냐? 잘 있으쇼. 술 훔치고 하루 만에 들킨 건 처음이었다. 좀 비싼 거였나 보다. 다행이다. 집 에 오니까 아버지가 근엄하게 날 부르셨다. 술 한 병 그 얼마나 한다고... "마시진 않았지?" "네." "왜 가져 갔어?" "좋은 걸로 바꿔 오겠습니다." 우리 아버지께는 조금 농담을 해도 된다. "또 은정이 때문이냐?" 그 참, 우리 아버지도 어느샌가 나이 많은 처자 대신 누나 이름을 불러 주신 다. "네. 아버지!" "왜?" "장가 보내 주세요." "뭐야 임마?" "누나 괜찮지 않아요?" "결혼이 장난이냐 임마!" "나이 많다고 반대하시진 않죠?" "조금 걸리긴 한다만... 너 졸업하기 전엔 안돼." "누나를 반대하신다는 말씀은 아니시죠?" "치이면서 살고 싶냐?" "아버지께 배운게 있는데 치이면서 살기야 할라구요." "그건 그렇고 술은 왜 가져 갔는데?" "아들 장가 가는 것 보다 술 한 병이 더 중요하십니까?" 술 값 깐다는 얘기 하시기 전에 말을 원상복귀 시켜야 된다. "그게 얼마 짜린 줄이나 알아?" "아버님 드렸습니다." "엉?" "장인 어른 될 분에게 갖다 드렸습니다." "뭐야!" "빨리 손수 보고 싶지 않으세요?" "너 혹시...?" "네. 결혼 문제 때문에 찾아 갔었습니다." "갑자기 왜 그러는데?" "누나 졸업하자 마자 결혼해야 된대요. 장가 보내 주십시오." "너무 서두른다. 그리고 사내 자식이 여자가 그런다고..." "대충 예상 하신 일이잖아요." "그래도 이 놈아. 이건 좀 너무 하잖아!" "좀 서둘러야 될 사정이 생겼어요." 그럼요, 이제 누나 없이는 못 삽니다. "사고 쳤냐?" "네?" "사고 쳤나고? 너 진짜...?" 뭐라시는거야? 사고 쳤던 아니던 손주는 빨리 낳아 드리겠습니다. 하하.
"손주가 귀여울 겁니다." 우리 아버지 머리가 많이 아프신 표정을 지으신다. 쓰러 지실 것 같은 모습. 그 런 모습 한 두번 봅니까? 우리 가족 중에 아버지 연기에 속아 넘어갈 사람 어머 니 뿐입니다. 피! 오늘 누나 아버님도 귀찮다는 듯 손짓으로 가라고 하더만 우 리 아버지도 마찬가지네. 울 엄마는 아버지를 보살피는 척 날 패죽이겠다는 표정 이시다. 내가 사고쳤나? 에라 모르겠다. "배 부르기 전에 식 올려야 되요." 아들과 딸의 문제에 있어 아직은 많이 다른가 보다. 만약 수희가 사고 쳤으니 시집 보내 달라고 했다면 우리 어머니 저렇게 태연하실 수 있을까? 어머니가 날 따라 나와서 이 놈아, 이 놈아 그러시는데 뭐 표정은 별로 걱정하는 모습이 아니 다.. "너 진짜야?" "엄마도 반대해요?" "걔가 괜찮긴 한데 나이가 많다는게... 그리고 너?" "네?" "네가 지금 결혼 할 나이냐?" "좀 이른 건 알지만..." "병원엔 가 봤어?" "에?" 우리 엄마께 몇 대 맞았다. 이유 없이... 괜히 히죽 웃은 것 뿐인데... 내가 뭘 사고쳤다고. 아들을 그렇게 못 믿습니까? 그리고 누나 떡 봐도 요조숙녀같지 않던가요? 사고는 무슨... 농락만 당했는데. 사고라도 한 번 쳐 봤으면 좋겠습니 다. "내일 나 좀 보자고 그래." "누나를요?" "그 누나 소리 하지마. 너 결혼해서도 누나라고 할래?" "누나 소리 하면 안되나요?" "당연하지. 나이 차도 많지 않잖아. 겨우 두살차이면서..." 호. 겨우 두살 차이? 어머니 존경합니다. 누나는 암 껏두 모르고 있겠지? 뭐 어때. 지가 자초한 일인데. 내 방에 누워 자 꾸 히죽 웃었다. 진짜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누나하고 내가 식을 올릴 수 있 을까? 그 생각에 자꾸 웃음이 났다. 으으으...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여보세요? 0865 호출 하신 분 부탁드립." "너 울 아빠 찾아 갔었니?" "응." "허! 정말?" "그래." "그랬구나." "화 내시던가요?" "괜찮아." "내일도 찾아 갈건데." "후후. 시키는데로 잘 하는구나?" "내 스스로 간거야." "후후. 사랑해 철수야." "그 정도야 뭘." "내가 아프지만 않았어도."
"아파요?" "오늘 아침부터 좀 앓았어." "왜?" "피로가 겹쳤나 봐. 편도선이 많이 부었어. 그것 때문에 열도 나고 구토 증세 도 있네." "안돼는데." "좀 괜찮아 지긴 했는데 내일도 집에 있어야 겠어. 내일도 너 혼자 가야겠다." "그건 괜찮지만 내일 울 엄마가 누나 좀 보자던데." "엉? 왜?" "아프면 연기하지 뭐." "아니야. 날 왜 보시자고...?" "내가 장가 보내주라고 했거든. 헤헤." "그럼 내일 약속 잡아서 내게 연락 줘." "나올려구?" "어쩔수 없잖아." "누나야!" "왜?" "솔직히 서두른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거든?" "얘기 했잖아." "나는?" "너 잃기가 싫어서 그래." "엉? 하하." 다음 날 아버지께 부탁해서 보약 한 꾸러미 얻어 냈다. 그 참 이상하네. 일반 보약하고 좀 다르다. 나도 대충 안다. 서당개도 삼년이면... 아버지 지금 성의 를 보이시고 있는거다. 저 보약은 하루 이틀 만에 지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미 리 준비했었다는 말이다. 내가 굳이 부탁하지 않았어도 아버지는... "이 건 좀 비싼거잖아요." "갖다 드리고 잘못했다고 빌어." "왜요?" "왜요는! 그리고 빠른 시간 내에 그 집안 어른들 좀 만나봐야 겠다." "반대 안 하시죠?" "솔직히 아까운 처자야. 나이 많다는 건 살다보면 잊혀지게 되있어. 한가지 걸 리는 건 네가 너무 어리다는 건데..." "헤헤." "군대도 안 가고 사회 생활도 못 해 본 놈이라 많이 걱정이 돼. 철이 너무 없 어." "빨리 들겠습니다." "일이 이 지경이 됐으니까 그 쪽 집안에서 반대하더라도 밀어 부쳐." "네." "150 만원 제했다?" "네?" "너 장가 보낼 때 쓰려고 생각한 돈에서 어제 술 값, 오늘 보약 값 제했다는 말 이다 녀석아." 너무 하십니다 아버지! 엄마에게 말씀 드리고 누나와 만나게 했다. 나도 따라 나가려고 했는데 엄마는 굳이 누나와 단 둘이만 만나시겠다고 했다. 무슨 말씀하시려고 저러실까? 혹시 따끔한 말로 우리 사이를 갈라 놓으시려구? 안돼는데.
"연속극처럼 그러지 마세요." "뭘?" "그 아주 매정하고 악랄하게 구는 아줌마들 많이 나오잖아요. 이거 먹고 떨어 져. 이제 그만 내 아들은 잊어. 이런 식으로..." "뭐야?" 한 대 맞았다. "갈라 놓으시려고 그런 거 아니죠?" "그런거 아니니까 염려 마. 이구 이 놈아!" 내가 동네 북이여 뭐여. 여러 대 맞았다. 엄마는 오후에 나가셔서 저녁 시간이 되어도 돌아 오시지 않으셨다. 나는 엄마 가 오시는 걸 보지 못하고 약국을 갔다. 한 손에 보약 꾸러미를 들고 당당하게 찾아 갔다. 약국에 들어서자 마자 바로 아버님을 볼 수가 있었다. 날 째려 보시는 표정이 무섭다. 쫄지 말자. "왜 또 왔나?" "이거 드십시오." "이건 또 뭐야?" "보약입니다." "난 보약 안 먹어. 저 번에 준 것도 아직, 먹긴 먹었네만..." 코메디 하십니까? 표정이 웃기십니다. 우리 아버지와 잘 어울릴 것도 같습니 다. 하하. 아버님 표정에서 좀 자신감을 얻었다. "이 번 건 더 좋은 겁니다." "양약 집에 한약 들고 와 이 무슨 짓이야!" 갑자기 아버님이 화를 버럭 냈다. 이게 아닌데... 주위 사람들이 막 쳐다 본 다. 아버님 목소리가 좀 커셨나 보다. 불쌍한 표정 지을까? "전 그냥..." "자네 부모님은 또 왜 그러시는거야?" 씨.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아버님 표정이 너무 차가워 보였다. 보약을 아버님 계시 는 곳에다 놓아 두고 인사를 하고선 등을 돌렸다. "안녕히 계세요. 저는 그냥..." 인사를 하고 그냥 밖으로 나왔다. 서러버라. 내 아무리 철이 없어 보이고 나이 도 어리지만 그래도 누나 사랑하는 마음에서 아버님 찾아 온건데. 뭐 아버님이 좋아서 찾아 온 줄 아세요? 설버라. 내가 솔직히 잘난 건 없지만 누구에게 문 전 박대 당할 만큼 못난 놈은 아니라구요. 한 없이 불쌍해 보이도록 노력했다. 어깨 툭 떨구고 발걸음도 아주 무겁게... 고개도 숙이고... 문을 나오면서 여린 눈망울로 아버님 한 번 돌아다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이 드신 분들 정에 약 하다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반대 당하니까 기분 나빴다. 배도 고프고... 약국 나와 당당하게 밥 집으로 갔 다. 갈비탕 먹었다. 아자! 밥 먹고 나니까 용기가 생겼다. 밥! 역시 좋은거다. 배짱 부렸다. 다시 약국을 찾아 갔다. 아버님이 어이없게 날 바라 봤지만 씩 웃어 드렸다. 종석이 형에게도 손을 흔들 어 주고 약사 형, 누나들에게도 인사를 했다. 그리고 손님들이 기다리는 의자에 앉아 멀뚱히 아버님만 바라 보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버님 퇴근 시간까지 기다 렸다.
"자네 집에 안 가나?" "가야죠. 아버님 가시는 거 보고 가려구요." "이거 자네 생각 아니지?" "누나, 아니 은정씨가 아버님과 친해지라고 하긴 했습니다." "솔직하군. 그리고 누나라는 말 해도 되네." "네." "같이 나가세." 오잉! 그냥 날 모른 체하고 나가실 줄 알았는데 아버님이 나를 부르고선 같이 나가잰다. 보약도 한 손에 들으셨다. "저녁은 먹었나?" 아버님 차 있는데까지 따라 갔었다. "네." "집이 신사동이라 했지?" "네." "타게나." 이틀 만에 이러면 너무 쉽잖아요. 좀 더 버티시죠? 제가 불쌍한 표정 지었다고 바로 이러시면 좀 미안한대요. 아버님 옆에 앉았다. "자네 당구 칠 줄 알지?" "당연하죠." "얼마 치나?" "200 놔도 됩니다." "하수군." 엉? 200 이 하수야? 아 맞다, 아버님이 500 정도 되신다고 들었다. "한 게임 할텐가?" "정말 한 게임 해도 되겠습니까?" 은정이 누나 걸고 내기 당구라도... 진짜 한 대 맞겠지? 신사동 어느 당구장에서 아버님과 당구 한 판 즐겼다. 아버님은 오랜만이라 400 을 놓으시고 난 200 을 놓고 쳤다. 그 날 따라 참 당구장이 낯 설었다. 아버님은 당구 치시면서 많은 말들을 하셨다. 특히 내가 칠 차례에... "은정이가 좋아하는 걸 보면 기분은 괜찮아. 그치만..." 당구 치는데 말하려니까 집중력이 들지 않았다. "제가 생각해도 좀 이르죠. 누나도 저도 철이 없어 보일거라 생각은 합니다." "나는 은정이를 철들게 하고 싶지가 않아. 그냥 저런 모습 간직하고 사는게 좋 아." 그럼 내가 못마땅하다는 말...? 서럽습니다 아버님. "제가 못마땅 하십니까." "부모 맘이란게 다 욕심이 있네. 자네가 모자라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어." "저도 제가 모자라는 건 알지만 잘 살 자신 있습니다!" 뭘로? 이렇게 물어 보시면 안돼는데... 틱! 삑사리 났다. 말하면서 치려니 힘들 다. "삶은 자신감만으로 사는게 아니야." 아버님은 피식 웃으며 공 놓이신데로 가셨다. "아버님! 그냥 식올리면 안 될까요?" "틱!" 아버님 삑사리! 400 놓은 사람도 삑사리 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군요. 아버님이 어이없이 나를 쳐다 보신다. "이렇게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하기도 한단 말이야."
아버님도 말씀은 잘하시는군요. "예기치 않은 일이 생겨도 은정씨 마음 다치지 않게 할 자신 있습니다." "은정이가 저래 보여도 똑 소리 나는 애야. 내 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참 사리 판단은 잘하던 애였어. 어쩌다가 자네에게 마음을 뺏겼는지 모르겠네. 어떻 게해서 은정이 마음을 뺏었나?"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후후. 내 어제도 말했듯이 반대할 마음은 없어. 하지만 은정이가 저래도 좀 기 다려 줄 수 없나? 내 솔직한 심정은 누구에게도 내 딸 주는게 아까워. 그리고 마 음에 준비도 안되었단 말이다." 하긴 자식이라고는 누나 하나 밖에는 없지. 너무 우리 생각만 한 건 아닌지 모 르겠다. 좀 죄송스런 마음이 든다. 아버님은 당구를 오랜만에 치셨는지 영 400 같 지 않으셨다. 나도 무리를 해서 200 을 놓았고. 한 판을 끝내고 나니 30 분 가까 이 흘러 버렸다. 그래도 첫 째판은 내가 이겼다. "뭐 하나? 공 놓게." "계속 치실 겁니까?" "세 판은 쳐야지." 나 역전 패 당했다. 그리고 아버님, 아무리 진 사람이 당구비 낸다지만 오늘 같 은 경우는... 보약까지 드렸는데... "좀 더 실력을 기르게." "네." "훗! 다음에 부모님 따로 한 번 뵙자고 하게나." "네. 말씀 드려 놓겠습니다." "그리고 너무 서둘지 말게." 몸 상태가 좋지 못했지만 오늘 철수 어머님과 만날 약속을 잡았습니다. 팔레스 호텔? 엄마에게만 말씀을 드리고 아빠께는 모른 척 했어요. "뭐 때문에 부르실까?" "너무 긴장하진 마." "저 괜찮아 보여요?" "얼굴이 좀 상했다." "하필 이럴 때 아파가지고는..." "내가 시간 내 같이 갈까?' "아니에요. 제가 알아서 잘 할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그래. 몸이 계속 안 좋으면 내게 왔다 가." "네." 오늘 아침 먹은 것도 개웠어요. 편도선 때문에 음식을 씹기가 힘들었고 넘기기 도 어려웠었거든요. 체온도 많이 높아요. 그래도 나가야 겠지요. 어머님 의중을 알아 봐야 겠기에. 오전에는 푹 자고 그 기운으로 일어 나 외출을 했습니다. 여름인데 바람이 싸늘 하네요. 저만 그렇겠죠. 입에서 단내가 나는 것 같아요. 철수 어머님은 집에서 봤던 거완 다르게 아주 고풍스럽고 약간 도도하신 모습으 로 호텔 커피?에 먼저 와 앉아 계셨습니다. 창 밖을 은은하게 바라보고 앉아 흘 러 나오는 음악을 즐기시는 모습이 저 번 집에서와는 좀 다른 느낌이네요. "안녕 하셨어요?" "응 그래. 오랜만이에요." "네. 어머님은 더 젊어지신 것 같으세요."
"호호 그래? 이렇게 불러 내 미안해요." "아니에요." "점심 먹었어?" "네." 도저히 점심 먹을 자신이 없었어요. 어머님은 제 생각과는 다르게 세련된 모습을 자주 보였습니다. "그 인삼 즙 있지? 난 그걸로 주고 이 아가씬..." "전 그냥 커피로..." "커피는 몸에 안 좋아." "그럼 저도 어머님과 같은 걸로." 인삼 즙은 도대체 뭐야. 과일 칵테일에 인삼을 갈아 넣은 요상한 음료를 그 날 처음 마셔봤습니다. 빈 속에 별로 좋지 못하죠. "우리 철수가 떼 쓰는 건 아니지?" "아니에요." "정말 결혼 할 마음이 있는거야?" "네." "올해 안으로?" "네?" "일이 그렇게 됐으니 양가가 따로 한 번 만났으면 좋겠어. 어짜피 철수 졸업하 기를 기다리는 것도 무리일 것 같구 그럴바에야 빨리 결정을 봐야지." 철수가 뭐라 말했기에 어머님이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실까? "욱!" 결국은 속에서 반응을 보이는군요. 어머님이 놀라며 바라 보았습니다. "진짜였어?" "네? 죄송합니다. 제가 어제, 오늘 몸이 좀 안좋네요." "철수 아버지한테는 내가 다 알아서 말해 놓을 테니까 은정이가 부모님을 잘 설 득해 봐요." "네." 또 구토가 나오려고 하는군요. "욱! 죄송합니다. 화장실 좀 다녀 오겠습니다." 그 날 커피?에서 오래 있지 않았어요. 어머님은 제 걱정을 많이 하면서도 간 혹 웃으셨어요. 어머님은 저 만나러 나오셨다는 핑계로 친구분을 만나시러 가시 더군요. 뉴코아 백화점까지 왔다가 헤어졌어요. 그 근처가 주로 모이는 장소였나 봐요. 그나저나 약한 모습 보여서 좀 찜찜합니다. 아빠는 좀 늦게 퇴근을 하셨어요. 절 한 참동안 아무말 하시지 않고 쳐다 보았 어요. "시간을 갖고 우리 서로 생각해 보자. 달라질거야." "네?" "철수가 나쁘지 않다는 건 인정하지만 같이 살 정도는 아니다." 너무 해요. 욱! 욱? 그날 저녁 엄마와 얘기를 좀 했어요. 골똘히 생각하니까 별로 아픈 줄 모르겠더 군요. 엄마와 식탁에 앉아 커피 한 잔으로 아버지를 설득시킬만한 게 뭘까? 담소 를 나누었어요. "엄마는 서운한 거 없지?"
"난 그런 거 없어." "너무 서운해 하시지 마세요. 나 나이 들어가면 집 떠나기가 두려워 질 것 같 아 그래요." "그 맘 알아. 나도 너와 같이 외동딸이었잖아." "흠. 엄마도 아빠 만날 때 그랬어요?" "응. 특히나 외할아버지가 외국 나가실 걸 알았기 때문에 더." "외할아버지도 아빠 반대하셨다면서요." "많이 하셨지. 학생인데다가 네 아빠는 그 때 철수보다 더 철이 없어 보였어. 공부 보다는 딴 짓 한 게 훨씬 많을 걸. 당구장에 살았지, 자취하는 집을 가보 면 혼자 있는 걸 못봤다니까. 돼지 우리가 따로 없었어." "후후." "내가 그렇게 사정해도 너네 할아버지 겁난다고 도망쳤던게 한 두번이 아니야." "근데 아빠가 왜 좋았어요?" "사랑하는 맘에는 이유가 없잖니. 그게 좋은거구." "흠, 엄마. 아빠가 사고 쳤다니까 할아버지가 어떻게 나오셨어요?" "그때 울 아버지 성깔이 대단하셨어. 후후, 그 날만 생각하면 아직도 웃음이 나 와." "응?" "너네 아빠가 얼마나 철이 없었는 줄 모르지? 울 아버지가 그 소리 듣고 목침 을 던지셨어." "정말요?" "응. 너네 아버지 반사 신경은 좋더라. 피하고선 목침을 들고 나 살려라 내 방 으로 도망갔었어. 울 아버지 잡으러 따라 가시고." "호호." "할아버진 문 열어라 고함 치시고 아버지는 문을 열지 않고..." "그래서요?" "처음에는 아빠가 장인어른 잘못했어요, 그렇게 말했었는데. 나중엔 안에 있으 니까 자신감이 들었는지 막 대들더라." "어떻게?" "장인어른은 뭐 잘난게 있다고 그래요?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장인 어른 딸도 별로 안 비싸요. 나도 울 집에선 잘난 아들이란 말입니다. 목침 잘 못 맞으면 죽어요! 나도 사람이란 말입니다." "뭐야 이놈아?" "응?" "계속 해 보시라구요." "그래 외할아버지가 그렇게 말했어. 내게 열쇠 가져 오라고 고래 고래 고함치셨 지. 문 열고 들어 갔더니 너네 아빠 창 문 열고 벌써 도망갔더라." "그런데 어떻게 허락을 받아 냈어요?" "너네 아빠가 그래도 내 말을 거절하진 못했어. 잘 따르는 편이었어. 날 위하 는 마음은 대단했거든. 그렇게 할아버질 겁 냈지만 다시 우리집에 왔었어. 두들 겨 맞고 대들고... 그러면서 정이 들었나 봐. 한 한달 그러고 나니까 할아버지 가 승낙하셨어." "철수랑 좀 닮은 거 같애." "그럴지도 모르지. 나도 철수를 보면서 네 아빠 젊었을 때가 떠 올랐거든." "엄마, 나도 엄마처럼 사고쳤다고 거짓말 할까?" "뭐야?" "임신했다고 거짓말 할까?" "얘 좀 봐?" "흠! 흠!"
깜짝 놀랐습니다. 엄마와 얘기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아빠가 나와 계신 걸 눈 치 채지 못했어요. 방금 내가 한 말을 들었을까요? 아빠는 주방에 멋쩍게 들어 오셔서 엄마와 날 둘러 보시고는 헛기침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물 한 컵 따라 가시네요. "애 데리고 못하는 말이 없다." 나가시다 엄마를 보며 다소 차갑게 한 말씀 하셨어요. 하지만 엄마는 웃으시네 요. "이젠 둘 만 사는것을 준비해야 될 땐가 봐요." 엄마의 말은 무슨 뜻일까? 아빠는 엄마의 말을 받아 날 쳐다 봤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가고 싶니? 처녀 입에서 임신이라는 말이 그렇게 쉽게 나와?" 다 들었군요. "쯔쯧!" 아빠는 등을 돌리고 혀를 차시면서 나가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제가 무안해 하자 엄마가 또 웃으시네요. "너네 아빠는 철수가 싫어서가 아니고 많이 서운한가 봐." "죄송해요." "난 들어 가련다. 몸은 좀 괜찮아?" "네." 너무 서둘렀나요? 저도 참 철이 없긴 없나 봐요. 그렇다고 철수 어머님까지 만 나 뵙고선 없었던 얘기로 하지는 못하겠어요. 좀 찬찬히 생각해 볼까? 철수에게 전화가 왔었어요. 아마도 자주 했었나 보군요. "왜 전화 안 받아?" "식탁에 있었어." "몸은 좀 괜찮아요?" "응." "오늘 아버님하고 당구 쳤어요." "호호, 그러니?" "응. 참, 울 엄마는 잘 만났어요?" "그래. 오래 있진 않았어. 내가 몸이 좀 안 좋았거든." "울 엄마 늦게 들어 오셨다는데..." "흠, 친구분들하고 노시다 가신댔어." "별 말 안하죠?" "응. 근데 어머님이 빨리 날짜 정하자고 하시는 것 같던데..." "그래요? 하하. 누나 오늘 엄마 있는데서 구토 증세 보였죠?" "응. 내 말했었잖아." "큰일이네." "왜?" 이 녀석이 왜 실실 웃는거지? 녀석이 말을 하지 않고 한 참을 웃었어요. "나 어제 장가 보내달라면서 누나와 사고쳤다고 얘기했었거든." "뭐야!" "직접 말한게 아니고 우리 부모님이 넘겨 짚었어. 곧 손주 볼거라 얘기 했지." "야, 박철수!" "뚜우..." 78 회 하늘이 물구나무 서 발을 담그고 싶을 정도로 맑고 푸르다. 이 많은 사람들 속 에서 그런 짓 하면 반응은 둘 중 하나다. 돈을 던져 주거나 정신 병원에 신고가
들어 가거나... 바람은 차겁고 노란 은행 잎들이 보도 블럭을 타고 흐른다. 쉽게 말해 가을이라 는 거다. 11 월도 중순을 가리키고 있다. 오늘이 누나 생일이다. 논문 준비는 잘 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 지금 종로 어느 외국어 학원 앞에 서 있다. 누나 생일이라는 핑계로 연구실 일들 내 팽개치고 나왔지만 그렇게 여유롭지가 못하다. 내일은 주말임에도 불구 하고 다시 학교로 내려가 봐야 된다. 왜 안오는겨? 오늘 누나 만나 갈 곳이 있다. 하하! 누나 기다리면서 그 동안 일들을 회상해 보았다. 그 참, 나 누나하고 결혼하기 로 합의 봤다. 양가 부모님 허락 다 받아 냈고 두달 후에 식 올린다. 내 생각보 다 장장 오년이나 일찍 결혼하는 거다. 내 나이 그 때 25 살, 뭐 그리 어린 나이 는 아니지만 이 애띤 얼굴, 학생이라는 신분, 내 철 없는 행동들, 우리 부모님이 나 누나 부모님이 생각하시기에 좀 어이가 없을 것도 같다. 나도 다시 생각해 보 니 좀 아깝다. 돌리도 내 청춘! 그래도 한마디로 꿈 같은 일이 내 앞에 펼쳐지고 있다. 우리 부모님들, 푸후, 괜히 넘겨 짚고 서두르시다 쪽만 팔으셨다. 양가 부모님 이 만났던 8 월의 어느 날, 장인 어른 될 분이 뭔 소리냐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 께 구박을 주셨다. 나 우리 부모님께 그 날 맞아 죽을 뻔 했다. 하지만 존경하 는 우리 아버지 말씀이 일을 저지르고 쪽을 팔겠다 싶을 땐 당황하지 말고 더 힘 껏 밀어 부쳐야 쪽을 덜 판다고 하셨다. 우리 부모님이 누나 부모님 학교 선배였 다. 물론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이점이 작용했다. 우리 아버 지, 가족 일에 대해서는 작은 일도 그냥 넘어 가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내 누누 히 말했었다. 우리 아버지 어느 날 전화 한 통을 받고 홀홀 단신 장인 어른 약국 을 찾아 가셨다. 다녀 오시고선 나를 불러 별로 근엄하시지 못한 모습으로 말씀 하셨다. "너 꼭 걔한테 장가 가. 내 년에 가. 아니다 올 해 갈래?" "아버지, 결혼이 장난입니까?" "그 놈하고 합의 봤어." "그 놈이라니요?" "니 장인 될 사람 말이다." "사돈 될 분인데..." "은정이가 어제 전화가 왔더라." "네? 어디 있대요?" "들어간다는 조건으로 합의 봤다." "에?" 아버지가 합의를 받아 온 것에는 누나의 가출 사건이 컸다. 누나가 우리 부모님 의 오해로 아버님에게꾸중을 제법 들었었나보다. 울 아버지가 약국을 찾아 간 그 전 주에 누나가 일주일 동안 연락도 없이 가출을 했었다. 나와도 연락이 끊겼 고 아무도 누나가 어딨는지 몰랐다. 단지 승헌이가 내 방에서 몇 일 자고 간 적 은 있다. "니 방 가서 자." "내 방에 누구 있어." "누군데?" "몰라도 돼." "걔랑 같이 자 임마."
"그래도 되냐?" "그걸 왜 나한테 묻냐?" "여자야." "사자머리 왔냐?" "아니. 입 간지러워 죽겠네." 알고 봤더니 누나는 승헌이 자취방 신세를 졌었다. 누나 가출한 사일 째 되던 날 누나 아버님이 누나 찾으러 왔다가 내 방에서 주무시고 간 일이 있다. 내가 누나를 숨기고 있다고 믿은 아버님이 밤 새도록 내 옆에서 감시를 섰었다. "니가 숨겼지?" "저 진짜 몰라요." "기다리면 반대 안한다고 했잖아." 내 누나에게 다 들었어요. "저도 일찍 갈 생각 없어요. 누나가 서둔다니까요." "책임을 전가하지 마 임마." 당구 몇 번 같이 쳤다고 제가 참 만만했던가 봅니다. 그 날 밤, 그러니까 누나 를 바로 옆 방에 두고 아무것도 모른 채 나 아버님과 동침했었다. 졸업 논문 때문에 한 창 바쁜 시간에 누나는 무엇 때문에 가출을 했을까. 바로 아버님이 배신을 때리셨던 것 때문이었다. 아버님이 누나에게 이랬다는군요. (시간을 갖고 잘 생각해 보자. 분명 생각이 달라질거야. 너 당장 내년만 되도 딴 사람 생각 날거야. 지금은 걔랑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고 학생이니까 걔 밖 에 안 보일지 모르지만, 사람이라는 거 안보면 잊어지는거다. 너 사회생활하고 또 다른 남자들 만나고 하면 어디 그런 애하고 살고 싶은 마음이 들겠니. 그래, 할아버지 있는 데로 유학 보내줄까? 너 시집가면 이런 생활 끝이다? 공부다 뭐 다 다 포기하고 삶에 찌들리게 돼. 왜 일찍 시집가 고생하려고 하니? 그 집 봐 라. 시부모 될 사람도 그렇고 시누이 될 애도 그렇고 맘에 드는 애 있던? 인생 은 즐겨야지. 졸업하면 외국 보내 줄게. 너 취직 안해도 약사 월급 그대로 주고 용돈도 지금처럼 계속 줄게.) 그 말 듣고 누나가 더욱 더 결심을 굳혔다고 했다. 진짜 날 잊어 버릴 수도 있 다. 정말 그렇게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누나의 결심을 더 확고하게 만든 계 기가 되었다. 푸하하! 그건 그렇고 아버님 그 안 보는데서 말이 좀 심하십니다. 누나 잠버릇이 누굴 닮았나 했더니 아버님을 닮았더군요. 밤에는 좀 쌀쌀했는데 이불 다 걷어서 똘 똘 말아 혼자 안고 주무신 아버님 때문에 여름감기 들 뻔 했었다. 우리 아버지는 누나 전화 받고 아버님을 찾아 갔었고 누나 집에 돌아 온다는 구 실로 그냥 보내 버리자고 합의를 보셨다. 그 뒤로 누나는 학업에 충실하는 척 했다. 부모님께 미안했던지 주말이면 항상 집에서 부모님과 보냈다. 나도 멀리하고 아버님 약국 일을 도우며 서운한 감정들 을 풀어 갔다. 누나는 아버님 어머님을 위로하며 학교와 집만 왔다 갔다 했다. 나 소외 받았다. 하지만 뭐 같이 살 사람인데... 싸우며 정든다고 나 누나 아버님과 친해졌고 우리 부모님과 누나 부모님도 그 런대로 친하게 지내신다.그들의 과거에는 같은 공간을 누렸던 추억이 있었다. 그런 추억을 꺼집어 내시는 것이 즐거우신가 보다. 간혹 가족끼리 만날 때면 우 리 부모님, 누나 부모님 서로서로 이제는 찾을 수 없는 젊은 시절 대학 얘기를 하며 추억을 잡으신다. 우리 집에 한 동안 수희가 왕따 당한 적이 있다. 고 것이 믿는 것도 없으면서 은정이 누나를 가족으로 받아 들이는 걸 반대했었다. "난 그 언니 싫어요. 오빠가 뭐가 못나 이런 수모를 당해요."
수희 그 말 할때마다 바보취급 당했었다. 나도 덩달아 걔 바보 취급 하다가 어 머니께 아이고 이 철없는 놈아,라는 소릴 자주 들었다. 하여튼 수희 고 것이 누 나 못살게 굴면 호적에서 파 버릴 거다. 그리고 걔 누나에게 쨉도 안 될것 같 다. 그렇게 삼개월이 후딱 지나가 버렸다. 결혼 날짜가 구체적으로 정해진 건 불과 보름전이다. 그 전까지는 두 집안이 가까워 지는 시기였다고 보면 된다. "왜 이리 늦었어?" "많이 기다렸니?" "응." "오늘 나 생일인 거 알지?" "응." "그럼 용서 되겠네." "집에서 오는거야?" "응." 오늘 갈 데가 많다. 처음으로 간 곳은 내 여권 신청하러 갔다. 그리고 다음에 간 곳은 어느 여행사 였다. "너 갈 수 있는거지?" "학장님 도장만 받으면 돼. 그냥 해 준대. 교수님께도 말해 놨어." "군대 안 갔다오니까 걸리는 게 많다 그지?" "대신 가 줄려우?" "너 고무신 거꾸로 신을려구?" 내가 고무신 신은 거 봤냐? 어디서 줏어 들은 건 있어 가지고. 누나하고 나 베낭 여핼 갈 거다. 그 할슈타르 호순가 뭔가 그 거 같이 보기 위 해 신혼 여행을 오스트리아로 가기로 마음 먹었었다. 그리고 며칠은 누나 외갓댁 에 머물면서 독일도 구경할 참이었다. 그랬다가 괜히 지하철서 베낭 짊어진 어 떤 놈을 보고서 누나가 생각 없이 꺼낸 말이 베낭 여행이었다. 그려, 나 신혼 여 행 베낭 여행으로 대신 할 거다. 신혼 여행인데 유스 호스텔 같은데 자기 싫어 서 숙박이라도 제대로 정해 놓고 떠나고 싶어 호텔 팩키지를 선택했다. 사실은 내 영어 실력이 딸려서 전적으로 누나에게 의지해야 하는 게 싫어서 내 호텔 팩 키지를 고집했다. 누나는 단 둘이 정처 없이 떠나자고 했는데 나 국제 미아 되기 는 싫었다. 둘이서만 가면 삐칠 일 생겨도 맘 놓고 삐치지 못한다. 확 성질에 삐 쳤다가 여기가 어딘겨? 나 길 잃으면 그 걸로 그 곳에 뼈를 묻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단 둘이 가고 싶었지만 여행사에 의탁하기로 마음 먹었다. 호텔 팩키지로 단체 베낭 여행을 가면 혹시 중간에 삐칠 일 생기면 그냥 삐져 버리면 된다. 다 앞 날을 내다 본 나의 선견지명이라고 할 수 있다. 하하! "꼭 여행사에 의지해야 되나? 나 회화 실력 못 믿어?" "단 둘이도 좋지만 사람들에 섞여서 우리 사이 자랑도 하고 또 사람들도 사귀 고 하면 좋잖아요. 그리고 어짜피 숙박만 같이 하는 거고 우리 둘이서만 돌아 다 닐건데." 내 속마음 그대로 말했다간 무시 당할 것 같아서요. "비싸잖아." "신혼여행인데 호텔에서 자야지. 싫으면 내 돈 육십만원 내 놔 씨." "니 돈 내 돈이 어딨냐? 아버님이 얼마 주셨어?" "600 만원." "그럼 여행 경비는 그 안에서 다 해결하자."
"여행사에 내는 게 오백만원데? 그럼 100 만원 가지고 둘이서 한 달을 버텨?" "네가 준 60 만원 있잖아." "누나는 안 보태냐?" "나도 너 만큼은 부담할게." "부조금 많이 들어 올 것잖아." "너 학생이다? 등록금은 뭘로 할래?" "그 돈은 울 아버지가 주지." "그렇게 하기 싫어. 결혼하면 한 가정을 꾸리는건데. 너 이제 가장이야, 가장." "나는 일찍 결혼하잔 말 안했다?" "그럼 물릴까?" "씨. 한 꼬마가 있어." "갑자기 무슨 말이야?" "들어 봐. 꼬마는 그냥 있었는데 누나가 사탕을 줬다가 도로 뺏었어. 꼬마가 울 겠냐 안 울겠냐?" "허, 비유를 그딴 식으로 하지? 내가 결혼하자고 했던 게 사탕 준 꼴 밖에는 안 되었구나. 그래 알았어 박철수." "헤헤, 물리면 내가 죽고 싶을거란 그 말이지." 여행사 안에서 별 이야기를 다한다 진짜. 여행 상품을 알아 보면서 둘이 앉아 여행과는 별 상관없는 말로 새고 있다. "하여튼 결혼하면 우리끼리 사는거야? 부모님 의지 않고." "약사하면 봉급 많이 받아요?" "그 돈은 적금 들거야." "어휴, 부잣집 외동 따님께서 적금을 들어? 그럼 생활비는?" "결혼할 때 뜯어 낼만큼 뜯어 내야지." "뭐 이딴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냐? 좀 야무진 여자라고 생각이 들었다가 그냥 확 깨 버리네." "아버님이 아파트 사주신 댔지?" "응." "돈으로 달라고 해." "에?" "너 어짜피 일년은 율전 있을거잖아." "그렇지." "집 얻는 건 너 졸업하고 직장 얻을 때까지 미루자. 그 돈 은행에 넣어두면 이 자로 생활비는 나올거야. 그리고 우리 집에서도 모른 척하진 않을거야." "그게 독립하는거냐? 누나는 어디서 살게?" "나? 왔다갔다 하는거지. 너네 집에도 있다가 우리 집도 갔다가 또 율전도 내려 가고 하는거지 뭐." "여우야, 여우야." "하여튼 결혼하면 똑바로 살아야 돼?" "나 지금도 똑바로 살고 있어요." "앞 날을 생각하며 살자고. 우리 사이에 태어날 아이도 생각해야지." 아이? 아이를 낳으려면... 푸하하! 흐흐... "애는 날 생각인가보네?" "그럼 낳아야지." "설마 나 졸업하기 전에..." 뭘 또 손가락으로 세냐. "잘하면 너 졸업하기 전에 낳겠다. 울 엄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형제가 귀한 집안이라 애는 꼭 낳고 싶어. 우리 힘 닿는데까지 낳자?" 저거 현대 여성 맞냐? 하나나 그래 넉넉잡고 둘이면 됐지.
인생은 책임지고 사는 것? 모르겠다. 스스로 책임져야 할 일들을 떠 맡으며 사 는 건지도 모른다. 내 인생을 가꾸기 위해서...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 그 것 은 처음부터 부모로서 책임지고 희생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 어쩌면 막막하게 즐기기 위한 것에서 출발하는 건지도 모른다. 전적으로 주기만 할 수 있는 사랑 을 스스로 만들어 그런 참사랑으로 희생이라는 것을 배워가는 건지도 모른다. 지 금 누나와 내가 하는 말을 보면 후후, 철이 없어 그런지 몰라도 우리는 아무것 도 모른채 우릴 위해서 애를 낳으려고 하고 있다. 세상 모든 부모들이여. 스스 로 원해서 낳은 자식, 자식에게 권리를 요구하지 말자. 푸하하, 아직 장가도 안 간 놈이 이런 오만한 말을 하다니.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내 현재 처지 가 좋다. 옆에 있는 여자가 곧 내 마누라가 된다. 그리고 누나와 나도 부모가 될 것이다. 푸하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누나 부모님, 이런 날까지 낳아주시고 길러 주셔서 우리 가 만날 수 있게 해 주신 거 너무 감사합니다. 다 갚지는 못하겠지만 잊지 않고 살겠습니다. 자식 낳으면 또 잘 기를게요. 하하. 뷰티풀 월드다. 예식장은 처가? 하여튼 누나 쪽에서 이미 준비를 했다. 우리 집에서 가까운 아 뭐시기 호텔에서 하기로 했다. 호텔? 잠만 자는데가 아닌가벼. 결혼식 날짜는 일 천구백구십팔년, 에이쒸 욕들어 갔다. 일월십일 오후 두십니다. 그래서 여행 출 발 날짜는 일월 십이일짜로 정했고 29 일짜리 팩키지로 했다. 독일까지 일행들 따 라 다니다가 중간에서 한 일주일 일행과 헤어져 둘이서 누나 외할아버지 댁과 오 스트리아 할슈타르 지방으로 빠졌다가 이탈리아에서 다시 합류하기로 결정을 봤 다. 돌아다니다 보니까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팠다. 근처 경양식 점을 찾았다. 나 아까부터 들고 있던 게 있다. 누나 생일인데 그냥 지나칠수가 있었야지. 생일 선 물을 저녁 다 먹고 후식 나올 시점에서 누나에게 건넸다. "이건?" "생일이잖아." "호호, 그래서 선물 준비한거야?" "그럼." "고마워. 뭐야?" "집에 가서 뜯어 봐요." "싫어 여기서 뜯어 볼래." "여기서 뜯어 보면 안돼." 안돼는데. 누나는 그 자리서 뜯어 버렸다. 그리고 웨이터 참 시간 잘 맞춰 커피 를 쥬스를 가져 왔다. 누나가 선물을 개봉할 바로 그 때에. 누나는 웨이터에게 멋쩍은 웃음을 웃었고 웨이터 새끼 이상한 표정 짓고 돌아 갔다. "그러게 여기서 뜯어 보지 말랬잖아." "뭐 어때." "섹쉬하지?" "후후, 그래 많이 섹쉬하다. 니가 가서 산거야?" "응." "대단한 용기네." "뭐 사모님 드릴거에요, 그러길래 그렇다 했지." "여행가서 이거 입고 잘까?" "그래도 되지." "야, 이거 다 비치겠다." "여행가면 같이 자는 거 맞지?"
"따로 자고 싶어?" 그러면 섧지. 옆에 사람 보겠다, 이제 그만 집어 넣어라. 나 누나에게 그 뭐 냐, 실크로 된 레이스도 곱고 속도 많이 비치는 한 뼘이 뭐야, 무릎보다는 배꼽 에 더 가까울 정도로 짧은 원피스 야한 잠옷을 선물했다. 곧 결혼할 사인데 이 런 거 충분히 선물할 수 있다. 저거 입고 같이 잔다? 흐흐흐. 그 날만 와라 아자! 허니문 베이비 만드는 거 나 도 할 수 있다. ============== 1 회. 겨울이 추위에 떨고 있다. 길 거리의 추위는 사람들의 입김으로 하늘 속으로 마 냥 퍼져 가고 있다. 공항의 아침은 제법 추웠다. 해외 여행의 붐은 아임 에프가 곧 올 거라는 걸 알 기나 하는지 계속 되고 있었다. 공항에는 겨울 방학에 들어 간 학생들이 베낭을 짊어 지고 여행 출발 준비로 부산하다. 곳곳에 신혼여행을 떠나는 듯한 젊은 남, 녀들도 보인다. 김포 공항 국제 청사 안, 한쪽 구석에 베낭 여행을 떠나는 한 팀이 있었다. 여 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아직 모르는 사이인 듯 통성명을 주고 받는다. 이제 갓 대 학생이 된 20 대 초반에서부터 30 대까지의 연령층이다. 여행을 떠나는 그 팀 중 의 세 여자가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떨어져 베낭을 옆에 두고 앉자 통성명을 하 고 있다. 한 여자는 이제 돌을 앞 둔 듯한 아기를 안고 있고, 그 옆에 남자 하나 가 서 있었다. 그 여자 주위에 두 여자가 아기를 보며 말을 주고 받는다. "남편하고 아기를 두고 혼자 떠나는 거에요?" 세 여자 중 제일 나이가 들어 보이는 한 여자가 물었다.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 는 미소를 지으며 답을한다. "남편이 내가 요즘 힘들어 하는 것 같다고 여행이나 떠나 보라고 권유하더군요. 이왕 갈 거 멀리 가고 싶었어요. 우리는 맞벌이 부부라 둘이 같이 시간을 내기 가 힘들어요. 아이를 오랜 시간 맡길 만한 곳도 없구요. 조금 불안하긴 한데, 남 편이 자기가 다 알아서 할테니 혼자라도 맘 편하니 다녀 오라고 하는군요." 여인은 답을 하고서 곁에 말없이 서 있는 남편의 손을 잡았다. 보기 좋은 장면이 었다. "아기가 너무 귀엽다. 몇 개월 됐어요?" 가장 나이가 어려 보이고, 예쁘장한 아가씨가 물었다. "10 개월째 접어 들었어요." "사내죠?" "네." "첫 아기에요?" "네." "그럼 신혼이시겠네요." 그 여자는 아기에게 관심을 많이 보이며 밝은 얼굴로 여인과 그의 남편을 쳐다 보았다. "계속 신혼일거에요. 우리 그이는 항상 신혼같이 살자고 하거든요." "나도 이런 아이 하나 낳고 싶네요." "호호. 귀엽죠? 애기 아빠를 많이 닮았어요." 여인은 자기의 남편을 한번 씩 쳐다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남편은 낯선 여자 둘이가 쑥스러웠는지 머쩍은 웃음이다. "그 쪽은 몇살이에요?" 가장 나이 들어 보이는 여자가 아기에게 관심을 보였던 여자에게 물었다.
"올 해 스물 일곱 됐어요." "생각보다 나이가 많네요. 나는 스물 너댓 살 쯤으로 봤는데..." "어머 저랑 동갑이네요. 반가워요. 전 김 남희라고 해요." 이야기를 듣던 아기 안은 여자가 반가움을 표시했다. "저도 반가워요. 전 홍 은정이라고 합니다." "내가 나이가 제일 많네요. 난 서른 하나인데. 아마 이 여행이 내 처녀 시절 마 지막 여행이 될 것 같아요. 전 이 수연이라고 해요." 여자 셋은 서로 반갑게 악수를 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아직 결혼 안 하셨어요?" 은정이라고 하는 사람이 수연씨에게 물었다. "아직 임자를 못 만났어요. 연애는 몇번 해 봤는데 남자들 다 속물인 것 같아 요." 그 말에 아기를 안고 있던 여자가 시큰둥한 답을 한다. "우리 남편은 아니에요." "우리 팀에는 대부분 나이 어린 학생들이죠? 유럽 가면 우리 같이 다녀요." "그거 좋죠." 아기를 안은 여자는 흔쾌히 답을 했으나 은정이라는 여자는 새큼한 미소를 짓더 니 고개를 흔들었다. "전 같이 다닐 사람이 있어요." "누구 같이 온 사람이 있어요?" "네." 그 답에 때를 맞춰 저기 이 팀의 다른 일행들 속에 있던 한 남자가 빠른 걸음으 로 세 여자 쪽으로 왔다. "누나, 베낭을 짐 칸에 맡긴다고 들고 오래." "알았어. 이제 일어서야 겠어요." "그래야 겠네요. 저 남자하고 같이 다닐거에요?" 다가왔던 남자를 보고 그렇게 묻는 남희라는 여인은 아기를 남편에게 맡기며 천 천히 일어섰다. "네." 은정이라는 여인의 눈망울이 사랑스럽다. 방금 말을 던지고 간 그 남자를 보는 시선의 눈망울이었다. "친동생? 동생하고 같이 온거에요?" "아니에요." 은정이라는 여인은 이번에도 고개를 흔들었다. 수연씨는 베낭을 짊어 지며 천천 히 일어섰다. 남희씨도 베낭을 짊어 지려 했다. "자기, 베낭도 내가 짊어 질까?" "자기는 현철이나 잘 돌봐요. 베낭 정도는 내가 짊어 질 수 있어요." 은정이는 그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은정이가 들고 있는 베낭은 다른 이들 에 비해 작았다. 두툼하기는 했지만 학생들이 등,하교시 메고 다니는 이스트 팩 멜빵 가방이었다. "베낭이 작네요." 수연씨가 자기가 들어야 할 베낭과 곁에 있는 남희씨의 베낭을 번갈아 보더니 은 정씨에게 물었다. "대부분 짐들이 아까 그 사람 베낭 속에 다 들었어요." "누구에요? 짐을 맡길 정도면 꽤 가까운 사인가 보네요." "학교 후배였었어요." "과거형인데..." 수연씨는 계속 물었다. 남희씨는 베낭을 짊어 진 채 남편이 안고 있는 아기를 보 며 곧 헤어질 것이라는 아쉬움을 달래 듯 사랑스런 말들을 주고 받는다. 수연씨 와 은정씨는 그들과 조금 떨어져 걷고 있다.
"어린 애 취급하지 말래요." "에? 은정씨도 나이가 아가씨로서 해외 여행 가는 건 마지막이겠다. 나처럼 노처 녀가 되면 기회가 더 생길수도 있겠지만 은정씨는 남자들이 그 때까지 놔두지 않 겠어. 호호." "저 아가씨로 보이나요? 하긴. 저 결혼했어요." "응? 결혼 했어요?" "네." "근데 남편이 배웅도 안 나와? 그리고 남편이 남자 후배랑 같이 가는 거 알고 있 어요?" "배웅이라... 흠, 아직 인식이 그렇군요." "뭐가? 아무리 팀을 구성해 떠나는 팩키지 여행이라도 다른 남자랑 같이 가는 걸 좋아 할 남편이 어디 있어요." "그 인식 말구요." "그럼 후배랑 남편이 잘 아는 사이에요?" "흠, 너무 잘 아는 사이지요. 한 번 물어 봐야 겠네요." "그렇군요. 근데 뭘 물어본다는 거에요?" "아까 남희씨처럼 내가 힘들 때 혼자 여행간다면 보내 줄 수 있는지." "아, 아까 남희씨 남편 분은 대단한 사람이야. 한 달 가까이 부인을 멀리 외국으 로 떠날 보낼 생각을 했으니까. 갓난 아기까지 있으면서 말이에요. 참, 은정씨 는 결혼한지 얼마나 됐어요? 완전 아가씨로 보이는데." "저요? 저 지금 신혼 여행 가는거에요." "네?" "아까 그 후배란 남자하고 엊그제 결혼했어요. 아까 저 보고 누나라 불렀던 그 남자가 내 사랑하는 남편이에요. 저 먼저 가 볼게요. 나중에 봐요." 답을 들은 수연이란 사람은 멍한 표정이었다. "뭐야? 연하하고 결혼 한 거에요?" "연하는 남편 하면 안되나요?" "베낭 여행인데?" "이것도 좋잖아요." 은정이라는 여자는 지금 행복이 넘치는 표정으로 자기의 남편이 있는 곳으로 뛰 어 갔다. "철수씨." "낯간지러워요. 그냥 하던대로 해요." "그럼 자기야?" "언제 나한테 자기야, 한 적 있어? 아줌마 티 내지 마요." "야아, 나 아직도 아가씨야." "웃기고 있네. 여자는 식장에 들어서는 순간 아줌마야." "뭐야? 야, 박철수." "이제 제대로 나오네. 아니다, 어디 하늘같은 남편 이름을..." 팀의 일행 중 저 둘이가 부부라 생각하는 사람은 금방 사실을 알게 된 수연씨 말 고는 아무도 없었다. ========================= 79 회 뭐 어떻게 해서 철수와 결혼하기로 했어요. 한 번 마음이 갔는데 어떻게 그 걸 물릴 수가 있겠어요. 연구실 생활이 조금 여유를 찾자 철수와 다시 예전으로 돌아 간 느낌입니다. 결
혼을 약속한 사이가 됐지만 별로 달라진 게 없어요. 아직은 말이지요. 철수가 간 혹 둘 만 있을 때 가슴을 쿡쿡 찌르는 버릇이 생겼기는 하지만 여전히 소년 같 은 모습을 잃지 않고 있어요. 아니다 더 애같아 지더군요. 철수가 제 생일이라고 좀 야하다 싶은 잠옷을 선물했어요. 응큼한 자식. 내 낭 군 될 사람은 잠옷 선물을 참 많이 하는군요. 나 사실은 철수 만나기 전에 이런 잠 옷 잘 입고 잤어요. 집 안에선 이런 잠옷 차림으로 돌아다니기도 했는데요. 우리 철수 별로 응큼하지 않아요. 근데 가슴은 왜 찌르지? 후후, 철수는 여전히 처음 선물한 잠옷처럼 풋풋한 모습입니다. 내게 독일 마르크화가 제법 있었어요. 독일에 있을 때 모았던 돈인데 환전하지 않고 계속 가지고 있었지요. 그 걸 신혼 여행비로 쓰게 될 줄은 몰랐네요. 유럽 에선 달러보다 오히려 마르크화가 더 많이 쓰이지요. 제가 가지고 있는 돈만으로 도 여행 경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철수가 준 돈 60 만원은 제 쌈짓돈으로 해 야 겠군요. 나중에 그 돈으로 철수 옷이나 한 벌 맞춰 줘야 겠군요. 바보같은 철 수는 환전하러 가야되는지도 모르네요.우리 신혼 여행 베낭 여행으로 대신 할 거에요. 언제 둘이 베낭 여행 한 번 가보겠어요. 석사 논문 준비로 바빴고 또 한 동안 여행 준비로 바빴어요. 결혼식 준비도 해 야 되는데 식장이 마련되고도 한 동안은 신경을 못 썼습니다. 주말에 어머님들끼 리 따로 뭘 준비하시는 것 같기는 했지만 난 아직 결혼식에 대해 제대로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하면 하는거지 뭐. 그냥 철수랑 만나서 놀고, 주말이면 아버님 한의원 찾아가 약 냄새 맡으며 시 간 보내고, 또 울 아빠와도 자주 같이 했습니다. 후후, 울 아빠 처음엔 반대를 좀 하셨지만 철수와 마음이 맞나 봐요. 자주 연락 하시더군요. 아예 철수에게 핸드폰을 하나 사주었어요. 아버지들은 처음엔 안그 러다가도 나중엔 아들을 찾게 된다는군요. 철수는 철이 없어 그런지 어색하지 않 게 아빠와 어울렸어요. 울 아빠 별로 격을 차리는 고리타분한 사람은 아니거든 요. 셋이서 당구 치러 간 적도 많았는데 장인, 사위가 아니라 선,후배 같은 모습 이더군요. "에이, 안 맞았다니까요." "흔들렸어 임마." "400 이 그런 걸 속여요? 아버님 체통을 지키시옵소서." "짜식이 흔들렸다니까." "에이 그대로잖아요. 쩝, 간혹 착각하는 경우가 있지요. 제 보약 한 제 다시 갖 다 드릴게요. 제 칠 차롑니다." 철수는 아빠의 고집에 의연해 했어요. "삑!" "푸후! 야, 가서 박아. 바로 벌 받잖아." 아빠는 저는 신경도 안쓰나 봐요. 철수 약올리다 나도 같이 끼여 있다는 걸 인 식못하시고 절 건너 뛰려고 했어요. "아빠, 이제 제가 쳐야 되는데요." "그러냐? 저 자식 때문에 헛갈렸잖아." "왜 저만 갖구 그래요." 철수는 뽀로통 해지긴 했지만 즐거운 표정을 잃진 않았습니다. 철수가 고맙네 요. "오늘 바쁘냐?" "아니요. 논문 작업도 거의 끝났고 한가해요. 왜요?"
"시간나면 철수 옷 몇 벌 맞춰 줘라. 아직 학생이지만 그래도 정장 입어야 될 일이 있을 거 아냐." 후후, 아빠가 제게 금일봉을 주셨어요. 철수를 위한 것이었지만 내가 받는 것처 럼 기분이 좋더군요. 그럼 철수가 준 돈은? 아버님 옷 맞춰 드려야 겠네요. "고마워요 아빠." "너무 끌고 다니지는 마. 일찍 마치게 되면 집으로 데리고 와." "그럴게요." 철수는 여전히 율전 그 허전한 자취방에서 지내고 있죠. 요즘 시험 기간이라 좀 바쁠거에요. 별로 안 바쁜가 보군요. 율전에는 거의 10 시가 다 되어 도착했어요. 연구실로 바로 가려다 철수 자췻방을 찾았죠. 학교 가고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열쇠 도 있고 방청소나 해줄까 해서 찾았더니, 두 놈이서 좁은 침대 위에 엉켜 잠들 어 있더군요. 같이 자는 놈이 낯은 익은데 아직 잘 알지 못하는 녀석이네요. 날 씨가 제법 쌀쌀한데도 불구하고 두 녀석 다 옷차림이 많이 경망스러웠어요. 이불 이나 제대로 덮고 자지. 철수만 있다면 가서 깨우던지 덮어 주던지 할텐데 친구 가 같이 있어서 들어서기가 껄끄러웠어요. 반바진지 사각 팬틴지... 남편 될 사 람 친군데 후배라고 엉덩이 걷어 찰수도 없고... 승헌이에게 가 봐야 겠군요. 가 서 있으면 차 한잔 얻어 마시고 대신 깨워 달라고 해야 겠어요. 문을 열어 주는 승헌이의 모습도 잠에 취한 상태더군요. "너 시험 기간 아니니?" "어제 밤샘 쳤어요. 시험 하나 남았어요. 오늘 오후에." "허, 이럴 걸 왜 밤을 새? 차라리 일찍 일어나 도서관 가지." "그렇네요. 아줌마가 여긴 왜 왔어요?" "야!" "철수가 누나더러 아줌마라고 부르래요." "뭐야? 그건 그렇고 차 한잔 얻어 마실 수 있어?" 승헌이는 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어요. "철수 없어요?" "친구랑 자던데?" "내 방에도 두 놈 있어요." "방에서 밤 샌거야?" "네." "철수하고 그 녀석도?" "걔들은 원생인데요." "그럼 걔들은 밤 새 자고 여태 안 일어난거야?" "그건 아니에요. 쟤들 아주 질 나쁜 놈들이에요." "응?" "저네 둘이는 어제 시험 끝났대요. 오늘 오후에 있을 시험 쟤들이 조교로 들어 오거든요." "근데?" "어제 맥주를 한 다스나 사가지고 와 둘이서만 쫑 파티했어요. 우리가 바로 옆 방에서 공부 하는 줄 알면서 엄청 떠들고 놀았단 말입니다. 야단 좀 쳐요. 그것 만 했으면 말도 안 해. 술 먹고 심심하면 내 방 와서는 술 냄새 풍기며 공부 잘 돼냐? 열심히 혀. 시비 졸라 걸었어요. 공부도 안되는데 철수 때문에 돌아가시 는 줄 알았다니까요. 총각들 열심히 혀. 그 새끼 인간도 아니야. 나중엔 아예 내 방으로 자리를 옮겨서 술 마셨어요. 뭐 너들은 공부해? 그 새벽에 한 시간도 넘게 건배하고 노래 부르고 별 지랄 다 하고 갔어요. 나가라고 화 내면, 조교라
는 직위를 내세워 우리를 갈구었죠. 철수 그 새끼 질도 나쁠 뿐더러 아주 악랄 한 놈이에요." 푸후, 미안하다 승헌아. 일방적으로 니가 참아라. 어쩌겠니 내 낭군될 사람인 데... 철수 더 이상 욕하면 화낸다? "내가 대신 사과할게. 철수 좀 깨워줄래?" "그 녀석 꼴도 보기 싫지만... 누나 봐서 참는 거에요." "흠. 고마워." "쯔쯧. 누나 앞날이 깜깜해요." "왜?" 녀석이 문을 열다 말고 날 보며 혀를 찼어요. 왜 그러지? 걱정마 우리 잘 살게. "우리 결혼식 피로연 때 누나에게 복수하기로 했어요. 미안해요. 부부는 일심동 체라서 말이죠." "무슨 말이야?" "우리 시험 끝나고 뱀 잡으러 갈거에요. 없으면 사지 뭐. 지금부터 뱀 술 담궈 가지고... 푸하하, 우리가 담그는 뱀술, 그거 제대로 되겠어요. 푸욱 썩지. 누 나 그거 마셔야 돼요? 우리 원망마요. 남편 잘 못 둔 기구한 팔자려니 해요." 이게 무슨 말 하는거야. 피로연? 맞다, 곧 결혼식이구나. 이제 한 달 조금 더 남은 것 뿐이다. 철수 저 자식 그런데 아직도 쳐자고 있단 말이야. 승헌이가 문 을 열자 마자 바로 달려가 철수 엉덩이를 걷어 찼습니다. 승헌이는 친구를 깨웠 죠. 철수는 일어나 멀뚱하게 나를 쳐다보고 옆에 녀석은 나를 보자 이상한 포즈 를 취하더군요. "어머! 누구세요?" 이불을 가슴에 보듬고 친구녀석은 아주 부끄럽다는 표시를 했어요. 여자처럼 요. 주위에 제대로 된 녀석이 하나도 없네요. "그러는 댁은 누구세요?" 낯은 익지만... "아, 은정이 언니구나. 아이 부끄러버라." 녀석은 이불을 보듬고 있던 두 손을 볼로 갖다 되며 귀여운 척 합니다. 욱! 내 모습을 보고 철수가 그 녀석을 빼꼼히 돌아다 보더군요. 그리고서는 뭐가 불만이 었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그 녀석을 침대 밖으로 걷어 차 버렸어요. "에구구!" "야! 신동엽. 대마초 피지 말랬지?" "내가 언제 대마초 폈다고 그래!" "느끼한 짓 하지마 새꺄. 형수될 사람인데 눈 뜨자마자 장난이냐?" 참 경망스럽네요 둘 다. 한 녀석은 침대에서 떨어 져 뭐 반바진데 아주 부끄럽 다는 듯 이불 돌돌 말아 느끼한 짓을 하고 있고 다른 한 녀석은 아무리 같이 살 녀석이지만 숙녀 앞에서 속 옷차림 비슷하게 앉아 뱃 살을 벅벅 긁지를 않나. 이 런 놈들을 내 남은 인생의 등장인물로 설정해야 하는 내 신세가 참 처량하다고 느껴지네요. 확 결혼이고 뭐고 없었던 걸로 해 버릴까? 뱀 술? 으으. "야, 박철수. 시험 끝났다며?" "응. 아침부터 왠일이야?" "그냥 들려 봤어." "밥 사줄거야?" "그럴게. 네가 동엽이니?" "그런데...(철수와 날 번갈아 쳐다보고 나서는) 요." 이것 봐라. 철수가 반말한다고 이 녀석도 은근슬쩍 말을 놓으려고 하네요. 정보 공학과에 어...내가 아는 사람이 있나? 없군요. 그래도 동아리 방 가면 저녀석 교육 시킬 만한 사람은 있겠죠. 너 찍혔어. "은정씨, 옷 갈아 입게 좀 나가 있어. 승헌인 공부 열심히 했냐?"
승헌이는 아무말 없이 맛이 간 듯한 눈망울로 서 있다가 삐친 척 고개를 홱 돌 리고 아무말 없이 나가 버렸어요. 잘 논다. 은정씨? 친구들 앞이라고 태도가 영 불순하네요. 승헌이는 그래도 참 착했어요. 홀로 복도에 기다리고 있는데 승헌이가 차를 끓 여다 주더군요. "고마워." "뭘요. 누나가 가여워서 그러지. 누나 뱀 술?" "진짜 줄거니?" "당연하쥐." 그럴 수 있을까? 차 한잔을 들고 늦가을 바람을 맞으며 복도 바깥을 바라 보고 서 있었습니다. 바깥 모습, 조금씩 율전의 모습도 변했군요. 변화를 느끼지 못하다가 오늘 같이 어느 순간 뒤 돌아 보면 많이 변해 있는 게 인생의 모습이겠죠. 율전의 모습이 내가 입학하던 때와는 많이 변했네요. 옥수수 밭의 면적도 많이 줄었어요. 옥수 수는 이미 수확되어 나갔지만 시들어 가는 줄기들은 그대로 밭 가장자리를 장식 하고 있습니다. 철수도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내 가슴에 심으며 이제 는 지우지 못할 내 님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옆에 놈들? 누나가 재밌게 대해 주마. "헤헤. 저 신동엽입니다. 제가 철수에게 많은 걸 가르쳤습니다." "그래.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그리고 낯이 익네. 말 놔도 되지?" "그럼요. 들어 가 보세요. 그럼 전 이만. 야! 문 열어 임마." 동엽인가 하는 애는 저 때문에 바로 쫓겨 나왔더군요. 참 낯이 두꺼운 애에요. 어제 그런 짓 했다면서 바로 승헌이 방 문을 걷어차며 노크하더군요. 들어가기 전 구박을 참 많이 받더니만 그래도 결국은 자던 잠 마저 자러 승헌이 방에 들 어 가 버리더군요. 경계해야 할 인물입니다. 적어놔야지 신동엽. 이제 철수와 단 둘이 됐군요. "누나야." 혼자 있다고 바로 돌아 오네요. "왜 계속 은정씨라고 부르지?" "아, 눈치 챘어요?" "시험 끝났으면 연락하지." "밤 열시에 끝났어." "그럼 나 기다리라고 하지." "오늘 시험 감독해야 돼." "후후, 넌 감독이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내가 어제 복수를 좀 했지." "승헌이 방 가서 술 마신거?" "알고 있네? 동엽이랑 나 조교 생활하면서 얼마나 구박 받았는줄 모르지? 옆 방 에 있는 새끼들. 아주 극악무도한 놈들이야. 내가 저들 심부름 꾼이야 뭐야." "됐어 그만해." "나 연구실에서 막내라 서럽고 복학생들 놀림에 서러웠어요. 나 한 번 안아 주 면 안될까?" "너 곧 결혼 할 애 맞아? 어떻게 더 어려지는 것 같니?" "쩝. 둘만 있을 땐 어려져도 돼." "치, 둘만 있을 때만이라도 좀 어른스러워 져라." "누나 가슴에 한 번 안겨 보면 안될까?"
"가슴 찌르면 알아서 해?" 치이, 이런 모습이 사랑스럽긴 한데, 같이 살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고쳐 주 고 싶기도 해요. 침대에 나란히 앉았더니 바로 안겨 오네요. 어린애 취급 말라더 니 스스로 어린애처럼 굴어요. "누나야?" "왜?" "우리 진짜 결혼할 사이 맞지?" "응." "은정씨." 안겨서 별 짓 다하는군요. 내가 안겨야 되는데... "왜요 철수씨." "가슴 한 번 만져 보면 안될까?" 이게 진짜.
80 회 깃털을 뿌린 파아란 하늘 속에 짜잔 하고 무지가 그려지고 파이프 오르간의 장대 한 G 화음이 울려 퍼지면 수백마리의 비둘기가 하늘로 솟구친다. 꽃잎들이 흩날리 고 턱시도를 입은 졸라 멋있는 놈이 무지개를 타고 내려오면 그때부터 수십명의 합창단이 일제히 노래를 부른다. 잘살아 보세. 잘살아 보세. 우리도 한 번 잘살아보세... 왜 이게 나오는 거여. 졸라 멋있는 나를 어이 없이 바라보는 하얀 웨딩 드레스의 그녀. "야, 일어 나!" 뭐여? "누구세요?" "아직도 자니?" 춥다. 문이나 좀 똑바로 닫고 오지. "누나가 어떻게 여길..." "나 걱정된다?" "이렇게 맘대로 내 방 들어 와도 되는겨?" "오늘 바쁘단 말이야. 여태 자고 있었어?" 여기 내 방이다. 율전 아니고 분명 서울 우리 집 내 방이다. 지금 시각 이제 아 홉시 십분. 근데 저 여자가 왜 내 눈에 들어오고 있나? 참 예쁘다. 오늘 어디 가 나 보다. 세련된 도시풍의 쓰리피스 치마 정장을 입고 내 앞에 다소 곳이 앉아 내 볼을 잡아 끈다. "아, 아. 아침부터 왠일이야?" "오늘 무슨 날일 줄이나 아니?" "알지. 토요일." 결혼이라는 거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처음 하는 결혼 내가 뭘 알겠는 가? 산다는 것은 어짜피 배워 가며 사는 것. 둘이서 머리 맞대고 배워가며 오손 도손 살면 된다. 결혼식 대충 하면 안되나? 내가 뭘 안다고 말이야. 여자가 말이야, 아침부터 남 자 집에 와 노크도 없이 방에 떡 들어 와 단잠을 깨우는 이런 경우가 어디 있냐 말이다. 아이, 부끄러버라. "나가요." "왜?"
"옷 갈아 입어야지." "세수는 안 하니?" "해야지." "이불 개어 놓고 방 청소 좀 하고 있을 테니 빨리 씻고 와." "그걸 왜 누나가 해?" "잘 보여야 될 거 아냐." "그럼 깨끗이 치워 놔요." 하품을 하면서 거실로 나왔더니 거실에 두 모녀께서 날 빤히 쳐다 보며 앉아 있 다. 우리 집은 아침에 모닝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색다른 분위기다. "엄마, 오빠 잡혀 살 것 같지?" "당연히." "아빠처럼 살아야 되는데..." "니네 아빠도 잡혀 살아." 내가 동물원 원숭이냐, 뭘 그리 쳐다 보세요. "엄마, 저 모습이 곧 장가 갈 사람으로 보여?" "내 자식이지만 솔직히 불안하다." "어머님, 이거 드세요." 머리까지 감고 욕실을 나왔더니 세 여자가 거실에 앉아 있다. 우리 집은 아침 에 저렇게 다과를 즐기지 않는다. 누나가 열심히 과일을 깎고 있고 두 모녀는 나 를 보다 누나에게 애처로운 눈 빛을 보이고 있다. 방에 들어 왔더니 음, 그런대로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나 아직 장가 안갔 는데... 밥은 나혼자 먹었다. 다들 식사를 마쳤나 보다. 멋있는 연카키색 스웨터에 새 미 면바지를 입고 목도리를 했다. 거울을 보며 장장 십분간 머리를 매만지고 패 딩 조끼를 걸쳤다. 믿음직 스럽고 멋있다. 가뿐하게 방문을 열고 나갔다. "쯔쯧!" 우리 엄마가 혀를 차셨다. "다녀 오겠습니다." "은정이 말 잘들어 임마." 으이쒸, 장가는 내가 가고 누나는 시집 오는건데... 약방에 내려가 아버지께도 인사를 드리고 누나 차에 탔다. "꼭 오전에 가야 돼?" "먼저 가 입어 봐야지. 정희도 오후엔 남편과 어디 간대." "정희 누나가 온대요?" "응." "아줌마가 왜 온대요?" "너 나 결혼해도 놀릴거야?" "당연하쥐." 오늘 12 월 6 일. 내 결혼식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 옷 입어 보러 간다. 예쁘고 멋있는 옷. 아무리 나는 그냥 캐주얼이고 누나는 정장 차림이었다지만, 그래서 내가 좀 어 려 보였다지만. 에이, 웨딩 드레스 고르는 데 동생 데리고 가는 것 봤냐 씨. 이 웨딩? 내 결혼하고 난 뒤 팍 망해 버려라씨. 날 빤히 옆에 세워 두고 남편 될
분은 안 오냐구? "니가 자꾸 누나라 부르니까 그렇잖아." "입에 익은 걸 어떡하냐. 그리고 이름 부르면 많이 컸다, 그러면서 씹퉁 됐잖 아." "씹퉁? 너 말투 좀 고쳐. 이제 어른이야." "저 여자 기분 나쁘네." "나두." 결혼 예복 참 많았다. 카달록을 보니까 예쁜 여자도 참 많았다. "철수야, 이거 어때?" "괜찮네." "이건?" "그것도 괜찮네." "야?" "왜." "니 신부 될 사람 입을 옷이다. 신경 좀 써." "카달로그만 보고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 "직접 입어 봐요." "그럴거야. 우리 신랑 건 어떤걸로 할까?" "나야 뭐 아무거나 입어도 다 잘 어울리지." "후후, 다리도 짧은 게." "뭐어? 나이도 많은 게." "이게." "뭐? 예비 아줌마야." 카달로그에 있는 모델들이 참 예쁘다. 웨딩드레스 탓일까? "이건 어때?" "레이스가 너무 많다." 직접 옷을 보며 골라 보았다. 비슷비슷 한게 다 그거 같은데. 또 살펴보니 많 이 달랐다. "은정씨, 이런 건 어때?" "이건 너무 밋밋하잖아." 한 번도 입어 보지 못하고 시간 만 갔다. "이건?" "이렇게 레이스 없는 게 좋아?" "백합 꽃 같지 않아? 금강 초롱 엎어 놓은 것 같기도 하다." "이 걸로 입어 봐?" "입어 봐요." 누나는 탈의실로 들어 가더니 나올 생각을 안했다. 누나가 탈의실에 가 있는 동안 정희 누나가 두리번 거리더니 웨딩 ? 안으로 들 어 왔다. 날 보더니 반갑게 웃는다. 당연히 아줌마는 총각에게 꿀리는 게 있다. 하하. "철수야." "어, 아줌마 왔네. 오랜 만이야."" "너 혼자 있어?" "누나는 옷 입으러 갔어요."
"그러니? 후후, 너 진짜 장가 가는 거야?" "나도 좀 긴가 민가 해."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 혹시나 했는데 진짜 이런 일이..." "그럴수도 있지 뭐. 하하! 누나는 잘 살고 있어요?" "응." "애는 안 낳아요?" "조금 있다 가질려구." "우리는 허니문 베이비 만들건디." "치이. 벌써 그런 생각까지 했어?" "응." "하여튼 축하 해 박철수." "말로만 그러지 말고 선물은 없어요?" "오늘 내가 점심 살게." "그러쇼." 에이쒸 우쒸, 왜 저리 예쁜겨. 누나가 수줍은 듯 하얀 천사의 모습으로 내 눈 안에 들어 왔다. 살포시 웃으며 속눈섭을 보이며 눈망울을 살포시 내리고 자기 를 봐 달라는 표정. 저 사람이 진짜 내 신부가 되어 내 옆에 설 사람인가? 땡 잡 았다. "괜찮니?" "가슴 쪽 노출이 조금 있네. 가위뼈가 보인다는 게..." 이 여자가 진짜. 아줌마가 뭘 안다고 그래. 예쁘기만 한데. 나는 침묵으로 감상 만 했다. 카달로그 한 쪽으로 던져 버렸다. 앞에 말 취소다. 카달로그에 예쁜 여 자들 하나도 없다. 울 마누라 될 사람 앞에선 명함도 못 내밀 것들이 어디 모델 이라고 말이야. "철수야 침 닦아라." "누나야?" 입을 실 닦고 정희 누나를 게슴치레 쳐다 보았다. "왜." "내가 누나 결혼예복 입은 것도 봤잖아." "그래서?" "누나는 쨉도 안된다." "니 신부될 사람이니까 그렇지. 나도 예뻤어." "누나가 예전에 한 말 있잖아." "뭘?" "은정이가 더 예쁘다구 직접 말했잖아." "치." "다시 수정한다." "응?" "앞으론 비교가 안되는 대상하곤 비교하지마." "너무하네 너?" "헤헤, 울 은정씨 너무 예쁘다. 하하." 사브작, 고운 옷소리를 내며 누나가 내 앞으로 다가 왔다. 자태가 차마 고와 라. 누나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다. 차마 고와서 차라리 곱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이 들 정도로 누나가 아름다웠다. 푸헤헤, 저 사람이 내 마누라 될 사람이다. 뷰 티풀 월드다! "어때?" "다, 다른 것도 한 번 입어 봐요."
"그럴게. 예쁘지?" "그런대로." 다른 예복 두 벌을 더 입어 봤다. 입고 나올 때마다 나는 입을 벌렸고 침을 흘 렸다. 정희 누나가 아예 손수건을 꺼내 내 턱 밑에 받치고 있었다. 오늘 만큼은 침흘리는 게 쪽팔리지 않다. "어떤게 제일 나아?" "다 천사 같은데, 처음 천사가 제일 낫다." "후후, 어떻게 제법 예쁜 말 한다?" "예쁘니까." "아까는 그런대로라며?" "경이로우면 표현을 까먹는거야." "치, 그래 고마워." "뭘, 내 신부 내가 예쁘다는데." 처음 것으로 하기로 했다. 내가 그렇게 좋은 말 해 주었는데... "다리가 짧아 보이지?" "그렇네." "안되겠다. 다른 거 입어 보자." 아줌마하고 예비 아줌마하고 날 갖고 놀았다. 벌써 몇 번째여. 내가 보기엔 다 잘어울려 보이고 멋있거만. 나도 턱시도 입어 봤다. 상당히 멋있었다. 어려보이 지도 않았고 둔해 보이지도 않았다. 다리도 절대 짧아 보이지 않았다. 나도 반올 림하면 180 이여. "조금 퉁퉁해 보이지?" "얘는 하얀색은 안되겠다." "좀 그렇네." "얘 생각보다 짜리몽탕하네." "작은 키는 아닌데. 허리가 꽤 굵어 보이긴 해." "배 나온 거 아냐?" "그건 아니야. 근데 왜 작아 보일까?" "그래, 은정이 니가 더 커보이겠다." 나는 거울 보며 만족하고 있는데 나이 많은 여자 둘이가 못마땅한 듯 날 모욕했 다. 은정이 누나가 그러는 것은 어짜피 지 남편 될 사람에게 하는 거니까 하늘에 침 뱉기지만 딴 남자랑 사는 아줌마가 내게 저런 말 하는 건 참기가 어렵다. "이씨. 정희씨는 가. 지 남편도 별로더만..." "너어?" "후후, 솔직히 네 남편 보단 철수가 낫다." 그럼 당연하지. 배 나왔지. 다리 짧지. 꿔다 놓은 보릿자루도 아니고... 그러니 까 누나 정도도 아까워 보였지. 다른 걸로 갈아 입고 나왔다. 연주가 같다. 또 두 여자가 달라 붙어 험담하기 시작했다. 거울 속에 멋있는 남자 하나가 두 여자들 때문에 기가 죽어가고 있다. "아가씨, 기단이 왜 이리 다 길어요?" 누나가 내 입고 있는 옷의 바지 밑을 만지작 거리다 점원 아가씨께 물었다. "키 커 보이잖아요. 키 높이 구두신으면 맞을 걸요." "얘는 그런대로 키가 큰 편인데..."
"요즘 신부들 다 휠 신고 들어 가잖아요. 남자들도 굽 높은 구두나 키높이 신 신어요. 180 되는 사람도 키 높이 구두 신는데요 뭘." "그래요? 얘 이걸로 할래? 이게 개중에 제일 낫다." 이게 진짜. "아가씨." 내가 물은 말이다. "네?" "남편 될 사람한테 얘라고 해도 되나요?" "네? 호호, 요즘은 친구처럼 보이는 커플이 제법 많잖아요. 동갑내기들이 많아 요. 호호." 동갑내기 말해 놓고 왜 웃어 씨. "이게 애취급 하는거지 친구 취급하는 걸로 보여요?" "호호. 싫게 보이지는 않아요." "어른들이 보면 안 그렇겠죠?" "그건 그렇네요." "은정씨. 누나도 말버릇 고쳐요." "호호. 그래도 계속 누나라고 하네요?" 점원의 말을 듣고 누나가 어이가 없다는 듯 올려다 본다. 이 걸로 하죠. 불만이 냐? 그렇다. 나부터 말투를 고쳐야 겠다. 처음부터 연인사이였으면 이러지 않았을 텐데. 나 너무 저 여자를 누나로 깍듯이 모시고 살았나 보다. "야, 박철수 멋있다." 누나가 내 어깨를 툭툭 쳐주며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칭찬 안해줘도 되니까 아까 씹지나 말지. 나는 빌리는 걸로 하고 누나는 샀다. "이주 뒤에 오면 되죠?" "네." "그 다음 날 야외촬영할 거니까 꼭 그 날 부탁해요." "염려 마세요." 점심 먹고 나서도 할 일이 많다. 우리 아버지가 독립 하랬다. 돈으로 달래니까 그렇게는 못하시겠다고 하셨다. 22 평 아파트 하나를 장인어른께서 장만 해주셨 다. 그래도 아버지는 돈을 못 주시겠다 했다. 무슨 배짱이신지 모르겠다. 오늘 오후에 가구점에도 들려야 하고 용산 전자상가도 가야된다. 밥 빨리 먹어 야 된다. 아까 누나 웨딩 드레스 입은 걸 보고 머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내 결 혼 예복 입은 모습을 보고 나도 이제 가볍게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무언 가 책임감 같은 걸 느꼈다. 그 아름 다웠던 누나의 모습을 계속 아름답게 유지시 킬 수 있게 하려면 나도 삶을 더 책임지고 살아야 된다. 아줌마 됐다고 씨. "정희 누나가 산다고 했어. 누나가 왜 내나." 앞으로 삶에 대해 책임을 지고 살 것이다. 81 회 피곤 했겠지요. 이리 저리 불려 다니고 보금 자리 꾸며야 했고 그리고 날 위해 또 뛰어 다녀야 했으니까요. 고맙네요. 조용한 기분으로 성탄절을 보냈습니다. 한 창 바빴기 때문에 그 날은 그냥 철수
와 단 둘이 조용히 있고 싶었습니다. 성탄절 기쁜 마음으로 사람들 많은 대학로 로 갔다가 둘 만 있고 싶어 율전으로 내려 갔었습니다. 새로 난 4 호선의 지하철 보다는 다소 멀지만 겨울 풍경을 찻 장으로 감상할 수 있는 국철을 타기 위해 신 도림까지 갔었습니다. 전철 속에도 추억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 를 지켜주려 했던 그의 배려가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그는 지금 졸음에 겨운 듯 한 쪽으로 고개를 기우리고 눈을 감고 있습니다. 휴일이라 전철안의 사람들이 적 었습니다. 그는 내 곁에 앉아 졸음을 받아 들이고 있습니다. 저녁 빛이 물들고 사람들의 불 빛이 찻장 속에 그려 집니다. 기차의 바퀴소리 가 또한 정겹네요. 나는 율전으로 가는 동안 내 곁에서 졸고 있는 철수의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 일도 아니지만 그의 방에서 그와 마주 앉아 차 잔속에 이야기를 담던 것이 벌써 추억과 그리움이 되어 있었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있기 때문일까요. 곁에 있어도 그리움이 되는데 잊혀지다 떠오를 땐 그 느낌이 어땠을까요. 슬펐겠 지요. "집에 안 갈거야?" "우리 그냥 여기서 자자." "이 여자가... 저 번처럼 그럴려구?" "아니." "헤헤, 그럼?" "넌 바닥에서 난 침대에서." "같이 자는게 아니구?" "아직 결혼 전이다?" "그래요? 그럼 집에 갑시다." 이거 못 믿을 녀석이네. 얼굴에 실망스럽다는 게 역력하네요. "너 내일 학교 나가야 되지 않니?" "나 장가 갈 때까지 연구실 땡이야." "응? 너 장가 가니?" 내가 못마땅하냐? 눈초리가 뭐 그래. "부조금이나 준비해요." "얼마나? 신부될 사람 예뻐?" "누나 보단 예쁘지." "그럼 엄청 예쁘겠다. 혹시 천사 아니니?" "아니, 봐줄만은 해." "어쭈? 결혼식이 언젠대?" "허허! 유치하게 놀고 싶냐?" "응. 재밌는데." "진지하게 묻겠는데..." "물어 봐." "결혼하면 나 뭐라고 부를거야?" "철수." "우쒸. 지아비가 무슨 친구냐." "그럼 자기?" "그건 좀 낯간지럽구." "그럼 뭐?" "서방님." "하여튼 남자들이란... 넌 뭐라 부를건데?" "많지. 누나, 은정씨, 여보야, 그리고..."
"그리고?" "마누라." 그래 니 맘대로 하세요. 애 하나 키우는 걸로 하죠 뭐. 집에 가기 싫었습니다. 왠지 집에 가면 허전할 것 같았거든요. 철수와의 잠시 간 헤어짐이 허전한 것이 아니라 이제 떠나야 할 가족의 품이 허전하게 느껴질 것 같았습니다. 철수와 같이 있다면 집에서 뭐라 하지 않겠지요. 이제 결혼식 날 짜 보름 남았습니다. 오늘은 그 걸 잊고 예전의 한 때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서방님? 오늘은 늦었으니 여기서 자고 갑시다." "유혹하는 겁니까?" "아니옵니다. 서방님은 땅바닥에서 주무세요." "싫은데?" "많이 컸다?" "그래 보름만 참는다." "후후. 뭘 참는데?" 뉘앙스가 아까부터 좀 그렇네요. 흑흑, 나도 곧 아줌마네요. 하지만 결혼에 대 한 회의는 아직 느끼지 못했습니다 철도 없었고 바빴기 때문에 그런 생각들 가 질 여유가 없었어요. 바쁘지 않았다면 많은 상념 속에 쌓일 뻔 했겠어요. 급하 게 일을 꾸미지 않았다면 회의를 느꼈을 수도 있었겠네요. 사랑한다면 오히려 정 신없이 후딱 헤치우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뭐해?" "이불 깔잖아." 후후, 어떻게 변할 지 확신은 서지 않지만 그는 여전히 내 말을 잘 듣는군요. 그 날 밤 철수 방에서 만화책을 보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기분으로 인형 하 나 던져 주었습니다. 다음 날 오전에 서울로 올라 왔습니다. 내려 갈 땐 이런 느낌 들지 않았는데 연 속으로 이러니까 기분이 별로네요.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지요. 지하철 안, 좋아 하는 사람 곁에 두고 어떻게 잠을 잔답니까. 철수는 또 잠이 들었습니다. 이제 곧 같이 산다 이거지? 내 어깨까지 빌리고 태연하게 눈을 감고 있습니다. 그래, 오늘은 참지만 다음에도 이러면 내 가만히 안 있을거다. 4 호선 안이었습니다. 아, 저런 걸 지아비라고 모시고, 아니다 참, 데리고 살아야 되다니... 철수는 전철 문 밖에서 두리번 거리다 불쌍한 표정으로 나를 떠나 보냅니다. 이별이 슬 픈 듯, 아쉬운 눈망울로 천천히 멀어지는 나를 보며 울상을 짓고 있습니다. "너 바보지?" "그렇다고 암 말 않고 보고만 있었냐." "급작스레 뛰어 가는 걸 나보고 어쩌라고?" "하하." "웃지 마. 바보 같애." "하하, 4 호선이라 헛갈렸지." "걱정된다 진짜. 도대체 무슨 생각한거야?" "꿈 꿨지." "내가 곁에 있는 거 생각 못했어?" "내가 누나 꿈 꿨거든." "응?" "아쉬웠던 적이 있었지." "뭐가?"
"나하고 전철 같이 타고 오다 누나가 어떤 놈 따라 몰래 내려 버리잖아." "뭐야 너." "아직 불안한 존잰가?" "그럼, 나한테 잘해라." "그러지. 근데 그 새끼가 왜 또 나타났지?" "누구?" "승주 그 새끼가 왜 내 꿈에 나타 났을까? 기분 나쁘네." "에구, 이런 놈을 믿고 살아야 되는 내 팔자가..." "누가 일찍 하재요?" "이게? 물릴까 보다 씨." "물려 봐." "어?" "농담으로도 그런 말은 하지 맙시다. 물린다는 말보단 잘 살아야지, 이런 말이 좋잖아." "니가 먼저 그랬잖아." "나는 한다는 것에는 토를 달지 않았어." "나도 뭐." 바보같은 짓 해놓고 짐짓 심각한 표정이네요. 이제 물릴 수 없으니까 물린다는 농담을 할 수 있는거야. 철수는 내 어깨에 기대어 잘 자다 전철이 역에 정차하니까 눈을 떴습니다. 그리 고 갑자기 일어 나 문이 닫히기 전에 나가 버리더군요. 나는 놀랬습니다. 쟤가 왜 저러나 하고 궁금해 했어요. 나는 그런 철수 따라 내리려 일어 섰고 철수는 나를 보고 다시 타려 했지만 전철은 그냥 모른 척 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문을 사이에 두고 철수와 난 마주보며 아쉬운 작별을 했었어요. 나 괜히 다음 역에 내 려야 했습니다. 철수는 잠결에, 국철에 익숙했던 탓이었겠죠, 철수는 아마도 역 이 지하였기 때문에 신도림을 지났다고 판단했나 봅니다. 앞 뒤 생각없이 그냥 내려 버렸습니다. 내가 곁에 있는지도 생각 못할 만큼 꿈에 취해있었어요. 내 꿈 이라 참는다. 안산선이 뚤렸지만 철수는 옛 추억이 있던 국철의 바깥 풍경을 기 억하고 있었나 봅니다.바보 같은 놈. "너 때문에 자리 뺏겼잖아." "한치 앞도 알수 없는게 인생이야. 알겠어요?" 무슨 말 하는거야. 철수는 이틀 뒤 다시 학교로 내려 갔었어요. 함들고 올 놈들 섭외하러 간다고 학교로 내려 갔습니다. "내가 바보 같은 놈들로 잘 섭외 할게." "섭외 안해도 다 그런 놈들 뿐이잖아." "어허! 어디 지아비 친구 분들을?" "그래 봤자 내 후배잖아." "그럼 고등학교 친구들로 한다?" "니 맘대로 해." "하여튼 말 잘 듣는 놈들로 할게." "후후. 나도 오후에 한 번 가볼까?" "안 바빠요?" "몰라." "그럼 시간 되면 내려 와요." 섭외는 무슨... 함은 키가 큰 승헌이가 질 것 같고 꼬장 부리는 역할은 아마도 낯이 두꺼운 동엽인가 걔가 하겠지요. 눈에 훤하다 짜식아.
오전에 어머님 따라 주단 보러 갔다 온 뒤론 조금 한가합니다. 피곤한 탓에 내 방에 누워 율전 내려 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때마침 배선배에게서 연락이 왔 어요. "논문 제출했다고 보기가 꽤 힘드네." "저 바쁘잖아요." "준비는 잘 되어가?" "네." "후회 안 해?" "아니요." "잘 살아." "후후, 그럴게요." "왜 웃어?" "선배 말투가 꼭..." "좋아하는 마음 있었어." "후후, 그래요 그 말투에요." "에구, 난 언제 노총각 신세 면해 보나?" "학교에요?" "아니, 이제 가 볼려구." "그래요? 그럼 저 좀 데리고 가요." "학교 오게?" "학교는 못 들어 갈거에요." "철수가 율전 있나 보네." "네." "알았어. 그 쪽 들렸다 가지 뭐." "고마워요." 해 질 녘에 철수 방에 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철수 방에는 철수를 포함 네 명 이 모여 있더군요. 두 녀석은 이름까지 아는 녀석이고 한 녀석은 좀 낯선 놈이었 어요. 함 배달 준비로 모였다는 녀석들은 소주 댓병 있죠? 그 걸 중앙에 놓고 옥신 각 신 하고 있더군요. 비암! 소주 병 안에는 비암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것 들이 진 짜. 저 번에 승헌이에게 들은 적이 있지요. 공돌이 녀석들 진짜... 나한테 먹인다 고 해 놓고선 저들끼리 먹고 얼굴이 빨개져 있었어요. 철수에게 두 번 감격했어요. 한 번은 그 뱀소주를 철수가 날 위해 친구들의 구 박에도 불구하고 들고 튀었다는 거죠. 어디다 버렸는지 모르겠지만 삼분의 이도 더 남은 그 뱀소주를 나에게 마시게 할 수는 없다며 분개하고선 갖다 버렸습니 다. 비암은 어디서 구했을까? 두번 째는 내가 좀 많이 감격 했어요. 저녁 8 시경에 율전을 출발했습니다. 마침 배선배가 퇴근을 할 시간이라 배선배 신세를 좀 졌죠. 철수는 아직도 배선배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더군요. 쫌생이 녀 석이죠. 우리 사고 났었어요. 성남 부근이었나봐요. 차 안에서 배선배는 말이 많았어요. 난 배선배 바로 뒤에 앉았고 철수는 내 옆 에서 아까 먹은 술 탓인지 빨간 얼굴로 헤롱되고 있었죠. 난 철수 신경쓰랴 배선
배 말에 답하랴... 배 선배는 쉴세 없이 저와 철수에게 말을 걸더군요. 뭔가 재 밌다는 듯 배 선배는 우리 사이의 일들을 묻고 자기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깜 깜한 밤, 그렇게 배선배는 국도를 운전 해 오다 마주 오던 트럭의 헤드 라이트 에 놀라 차선을 벗어나는 우를 범했습니다. 불 빛에 놀라 헨들을 꺽지 못했죠. 다행히 천천한 속도 였고 주위에 장애물이 없어 큰 사고는 일어 나지 않았습니 다. 배선배가 몰던 차가 국도를 벗어나 비탈길을 불안하게 걸쳐서 달리더니 그대 로 논 두렁에 처 박혔습니다. 배선배가 베스트 드라이버였는지 아무도 다치지도 않았고 차도 그렇게 망가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차는 볼쌍스럽게 앞부분이 그대 로 논 두럼에 처박혀 뒷 꽁지를 들어 버렸습니다. 철수는 안전벨트를 하고 있었지만 전 하지 않고 있었거든요. 차가 한동안 흔들렸고 논두렁에 처박히면서 몸이 앞으로 기울어 졌지만 전 배선 배 쪽으로 밀려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 짧은 찰라 철수는 날 꼭 껴안고 있었습니 다.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면 난 아마도 타박상 정도 상처를 입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게 중요한게 아니죠. 철수의 마음이 중요했습니다. 어떻게 그 순간 날 껴안을 생각을 다 했을까? 철수는 내 쪽으로 몸을 돌려 내 허리와 내 한팔을 붙들어 날 보호하려 했었습니다. 그리고 난 철수 덕택에 몸이 앞으로 쏠려 가지 않았습니다. 견인차가 올 동안 철수와 난 배선배를 홀로 두고 택시를 잡아 탔죠. 미안해요. 아니다 배선배 때문에 처녀 귀신 될 뻔 했잖아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어?" "그 새끼 일부러 그랬을꺼야." "응?" "차가 앞으로 처 박히면 누나가 밀려 잘하면 자기에게로 후딱 디비져 떨어질 수 도 있을거다. 그런 꼴은 내 못 보지. 그런 식으로 한 번 안아 보려구? 그렇게는 안되지, 암! 내가 그 놈 수를 미리 읽었다고나 할까. 하하!" 에구, 그냥 나 보호하려는 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일었다고 말하면 오죽이나 좋 을까. 그 생각 진짜 너 답다. 장가 가기 전에는 다시 내려 오지 않으려고 했는데... 서울서 봐도 되는데 동엽 이가 거기 있다는 이유로 승헌이를 비롯 얼마 전에 제대한 공돌이자 아직 군발 이 티가 무성한 현구란 놈이랑 율전으로 가는 전철을 타게 되었다. 전철 안 셋 이 나란히 앉아 이야기가 오고 갔다. 이 새끼들이 날 아저씨라고 놀렸다. 부러우 면 부럽다고 하지. 아직 제대로 된 애인하나 없는 것들이... "나 있어 임마." "나도." "승헌인 사자 머리 사귀고 있는 걸 알지만 넌 의외다?" "사자 머리 아니라니까. 걔 머리 풀었어." "한 번 사자머린 영원히 사자 머리다. 현구 너 군대 가기 전 솔로였잖아. 제대 한지도 얼마 안되었구..." "송우 다방 백양이라고 있어. 제대했지만 편지 주고 받기로 했다." "바보 같은 새끼. 같은 공돌이지만 너무한다 새꺄." 말 잘했다 승헌아. "걔 예뻐 임마. 걔 때문에 내 말년이 편했어." "걔가 너 기억할 줄 아냐? 걔들은 민간인 상대 안해. 오르지 못할 나무는 포기 해. 편지는 무슨... 에구 한심한 놈아." 승헌이는 그 말과 함께 현구의 등을 도닥거려 주었다. 현구는 진짜?라고 묻는 표정으로 불쌍하다. 이런 것들이 내 친구라니...
점심 시간이 지나고 동엽이가 내 방을 찾았다. 저 새끼 같은 원생으로서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진짜 의문이 드는 놈이다. "그 뭐냐?" "승헌이가 만들어 오랬어." "뭔대?" "피로연 때 쓸거야." "응?" "뱀 술. 뱀 잡으러 한 동안 다녔지. 겨울잠 자나? 안 보이길래, 이건 사서 넣은 거야." 미친놈, 모형 장난감 뱀을 소주병에다 담궈 놓으면 그게 뱀술이냐. 이것들이 진 짜. 내가 생각해도 이 것들 곧 25 살 될 놈들 맞는지 의심이 든다. 처음엔 진짠 지 알고 몸 보신 할겸 마셨더니 그냥 소주였다. 비암? 젓가락으로 억지로 꺼내 봤더니 플라스틱 모형 뱀이었다. "에이 몹쓸 새끼야. 너 또 대마초 폈지?" "그 대마초 얘기 자꾸 하는데, 하나 사줘 봐라." "이게 제 정신에 할 짓이냐?" "뱀이 없는 걸 어떡 하냐 임마." 소주 한 잔씩 마셔가며 함 짊어질 사람은 승헌이, 흥정 할 사람은 동엽이, 그리 고 현구는 군발이 특유의 버티기 정신으로 어떤 유혹에도 참고 견디며 자기들의 요구를 들어 주지 않을 때 배째는 역할을 맡기로 했다. "대충 해라. 너무 뻐팅기면 나 너네 편들어 주지 못한다?" "야, 학생이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돈 버냐. 안 그냐 승헌아?" "응. 이번에 성공하면 최신형 컴퓨터로 바꿔 볼까?" "나는 복학 등록금을 마련해야지." "나는 그 돈으로 철수 여행가는데 따라 갈까?" 이것들이 미쳤나.
82 회 해가 바뀌었다. 새로운 한 해가 밝았다. 딩, 딩. 텔레비전에서 타종식 장면을 보여준다. 옛 기억이 떠 올라 웃어 보았다. 수희가 나를 보며 안됐다는 미소를 보여준다. 내가 측은하게 보인다며 라면을 끓여 주었다. "고맙다." "아디오스!" "무슨 말이냐?" "이제 총각 오빠는 어디서 보지? 화려했던 오빠의 청춘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 겠지?" "나 화려하지 않았어. 불쌍했지." "쯔쯧, 좋니? 일찍 아저씨 되는게 좋아?" "응." "우리 오빠지만..." "뭐?" "아니다. 나는 이만 잘테니까 오빠가 설거지 해. 오빠가 오늘은 우울해 할 줄 알았어. 의미있는 한 해가 가버렸는데... 저렇게 좋을까? 에구." 수희는 등을 보인 채 섰다가 고개를 흔들고 혼잣말을 하면서 내 방을 떠났다.
내 방에 혼자 앉아 라면을 먹었다. 밖은 어둠이지만 미래는 밝다. 하하. 내 년 에는 수희가 아닌 다른 여자가 라면을 끓여 줄 것이다. 설거지? 나 안하지. 내 가 왜 해. 반갑다. 1998. 어머니 멋 있습니까? "가서 잘 해. 경망스럽게 굴지 말고, 어른들 말씀 잘 듣고 소란 피우지 마." 어머니는 아들의 옷 매무새를 봐 주며 걱정이시다. 뭐가 걱정일까? "애들이 곧 올거에요." "내 걔들에게는 따로 잘 말하마." "그러세요. 경험이 없어서 뭘 모를거에요." "너는 경험 있냐?" "제가 제일 먼저 가는데 있을리 없죠." "자랑이다 임마." "그럼요. 저 태어나 처음으로 일등 하는 거 같애요." "좋겠다. 좋겠다 짜식아." "아니, 어머니. 그건 아버지 말투신데..." "하여튼 가서 잘해." "그러겠습니다. 그럼 소자 이만." 가자 함 받으러! 아버지께 들렸더니 금일봉을 주셨다. 오늘은 대충하고 내일이나 모레 시간 내 어 친구들 섭하지 않게 하라는 말씀이다. 걔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면 깜짝 놀라실텐데... 오후는 누나 집에서 다과상을 앞에 놓고 장인 어른의 말씀을 들으며 꿇어 앉아 있었다. 딸 데려가는 죄인? 그 것 때문에 꿇어 앉은 것이 아니다. 아버님이 어른 에게 술잔을 받을 때는 꿇어앉아 받아야 된다 하셨다. 한의사인 우리 아버지는 양주를 무척이나 좋아하시는데 양약을 취급하는 아버님은 약주로 집에서 담그는 고유 국산주를 좋아하셨다. 도자기 술 잔에 도자기 주전자에서 흘러 나오는 고 운 노란 빛의 국화주. 딱 한 잔만 마셨다. 한 잔 더 주셔도 되는데... 누나는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가 말이야. 결혼이 장난이야 뭐야. 함 받는 날 신부 될 사람이 어딜 싸돌아 다니는 거냔 말이다. 아버님 인생 덕담 을 들으며 두 시간을 보냈다. 누나 집에는 남자가 아버님 뿐이었다. 처형 될 사람도 없었고 처남도 없었다. 내 친구들 뻐띵기면 무슨수로 데려 올까? 밖이 어둠으로 내려 앉을 무렵 전화가 왔다. 동엽이다. "야, 출발한다?" "조심해서 들고 와." "알았다. 봉투 많이 준비했냐?" "나는 잘 모르지. 대충 해라, 내 맛있는 거 사줄게." "대충은 임마." "세 명 가지고 되겠냐?" "충분하다. 우리는 배 짼다는 각오이기 때문에 괜찮다." "그 여자 친구들 무서워. 진짜 배 짼다 말이다." "열사가 되는 한이 있어도 우리는 요구사항을 관철 시킬테다." "될까?"
누나는 친구들과 함께 저녁 먹을 시간에 집에 왔다. 다들 여자다. 혹시나 승 주, 아니면 배군을 데려 올 것도 같았는데 순전히 여자들 뿐이다. 미인계를 쓰려 나? 정희 누나도 지 남편은 어디 갔는지 혼자 왔다. "오랜 만이야. 기집애 연락 좀 하고 살지." "호호." "안녕하세요. 지수와 친하다 들었어요." "네." 모르는 사람도 데려 왔나 보네. 지수씨와 정희 아줌마는 누나 때문에 알게 된 사이니 서로 모르는 친구가 있을 수도 있다. 여자들 틈에서 나는 별말 못하고 저 들 노는 거 구경만 했다. 호호, 여자들 여섯이 모이니까 진짜 말 많고 별 것 도 아닌것에 많이 웃는다. "저 송혜정이에요. 나 잘 모르겠죠." "네? 네." 아까 정희 누나와 인사한 여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내가 어떻게 아남. "한 번 놀러 오지 그랬어요." "네?" "호호." "혜정씨만 믿을게요." 키가 좀 크고 예쁘장한 그 여자에게 누나가 야릇한 미소로서 한 마디 하자 그 여자도 야릇한 눈 빛으로 고개를 끄덕거려 준다. 둘이 친구는 아닌가 보다. 저 누나는 지수씨와 친한 사이일 뿐인가 보다. 나랑 별 상관없는 여자가 내게 친한 척 한다는 건 내가 멋있기 때문이지. 하하. 그럼, 정장 빼 입고 왔는데... 아버님은 자리를 피해 약국으로 다시 가셨고 누나는 주방으로 왔다 갔다 하며 바빴다. 거실에는 아녀자들의 웃음과 소곤거림? 아니 졸라 떠드는 거에 가까운 재잘거림이 있었다. 나? 남자는 나 하나 뿐이었다. 거실 한 구석에 앉아 그녀들 의 대화에 안주가 되다가 눈치 봐서 실 누나 방으로 들어 가 버렸다. 침대에 누 워 천정을 보며 눈만 껌뻑 거렸다. 향기가 좋다. 내 침대 이불과는 차원이 틀리 다. 자주 들어 와 봤기 때문에 낯설지는 않지만 이 방은 왠지 내게 잦은 가슴 떨 림을 준다. 방에 있는데 누가 들어왔다. 내 마누라 될 사람이다. "너 여기 있었니?" "응." "여자 침대에 그렇게 맘대로 누워도 되는거야?" "자기는 안그랬나." "거실에 가 있어." "싫어. 여자들 모아 놓으니까 참 말이 많네." "후후, 치. 남자들은 안 그렇니?" "꽤 바쁜 척 하네?" "너네 친구들하고 내 친구들 입이 몇이냐." "누나 요리 잘 해? 자취할 때 보니 영 아닌거 같던데?" "특별히 맛있는 거 안해 먹었잖아. 나중에 맛있는 거 많이 해 줄테니 감탄하지 나 마라." "뭐 잘하는 데?" "노코멘트." 장가가서도 내가 밥해 먹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너네 친구들 바보 맞지?" "좀 그런면도 있지만 그렇다고..."
"금방 전화 왔어. 근처 까진 왔는데 집을 못 찾겠대." "그 녀석들 참. 내가 나갈까?" "너랑 나는 집에 있어야지. 정희가 데리러 갔어." "푸우!" "너 거실에 가 있어." "왜?" "나 옷갈아 입어야 돼." "갈아 입어." "안나가?" "이불 뒤집어 쓰고 있을게." "서방님? 나가 주세요." 거실에 앉아 또 여자들의 안주거리가 됐다. 설버라. 잠시 후 정희 누나가 히죽 웃으며 돌아 왔다. 그리고 멀리서 들리는 함성! "함 사시오!" 자식들, 내 덕인줄 알아라. 그 나이에 그런 거 해 보겠냐. 친구 잘 만났는 줄 알아야 할텐데... "왔다!" 여자들 일제히 일어 나더니 우르르 나간다. 정희 누나가 어머님께 봉투 몇 개 를 받더니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 녀석들 어디쯤 왔을까? 현관 쪽으로 나가 보 았다. 보이지 않는다. 한 복 입는건가? 내 마누라 될 사람은 단아한 한복으로 갈아 입고 거실로 나와 다소곳이 자리에 앉는다. 가슴 옷고름을 매만지며 청아한 미소를 머금고 나에게 손짓 한다. 현관에 서 있다 그 모습을 보았다. 헤, 그려 내 그대 옆으로 가 앉 아 주리라. 누나 옆에 앉아 녀석들을 기다렸다. 어머님은 나오셨다 웃으며 다시 주방으로 가셨고 아줌마는 현관에서 기웃거렸다. 많이 뻐팅기면 안되는데... 오분 만에 승헌이가 들어 와 나를 보며 머쩍게 웃는다. "야, 너 어떻게 된거야?" "응? 하하! 나이 많은 여자들 진짜 너무한다." "승헌씨, 이리 와 앉아요." 에구, 완전 어린애 취급하면서 존칭은... "함은?" "현구가." "넌 왜 들어 왔어?" "누나, 우리 막내 누나 알아요?" "나는 잘 몰라요. 그냥 우연히..." "지수 누나와는 친해요?" "고등학생일 때 단짝이었어요." "그래요? 근데 왜 존댓말로..." "내 모습이 양반댁 규수같지 않아요? 어떻게 후배라고 막 할 수 있겠어요." 푸헤! 누나 말하는게 웃기다. 그리고 세상 참 좁네. "야! 아무리 누나를 만났다고 바로 들어 와?" "나 많이 시달린다고 했지? 막내 누나가 젤 무서워." "에구 한심한 놈아." "이런 경우가 어딨냐? 함들고 온 사람 귀를 잡고 빨리 안 들어 와? 이러는 경우
가 어딨냐고!" "나도 좀 황당하다. 다른 놈들은 잘 뻐팅기고 있냐?" 그 말과 동시에 밖이 북적거리더니 두 놈이 여자들 틈에 둘러 쌓여 현관문 앞 에 떡 들어섰다. 이상한 모습을 보았다. 동엽이는 현관문을 잡고 안 들어 오려 고 애를 쓰고 있고 함을 맨 현구가 그를 안으로 잡아 당기고 있었다. "나는 못 가. 배신자들!" "이쯤 하자 동엽아!" "십분을 못 버티냐?" 정희 누나가 그 모습과 같이 들어 온다. 정희 누나는 나갈 때 들고 있던 봉투 를, 그러니까 몇 개 빠진 것 같지도 않다. 그대로 들고 나를 보며 웃는다. 내 친 구들 완전 초보였다. 하긴 아저씨가 한 명도 없으니 여자들에게 약할 수 밖에. 공돌이의 한계다. 등록금? 컴퓨터? 바보 같은 놈들, 그들은 참으로 쉽게 안으로 인도 되어졌다. "현구 넌 왜 그래?" "누나들이 다 예쁘잖아. 헤. 그리고 동아리 선배도 있더라. 내 어떻게 힘을 쓰 리." 동엽인 아직도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다. "넌 그래도 꿋꿋했네?" "승헌이와 현구에게 나 진짜 실망했다." "너도 약대생 소개 시켜준다니까 솔깃 했잖아." "나는 그래도 버텼다." 무슨 소리 하는거야. 도대체 함 들고 들어 오면서 무슨 흥정을 한 거야. (약 오분전 은정이 집 앞. 정희와 은정이 연구실 후배 한 명은 동엽이와 쪼그려 앉아 흥정을 벌이고 있고 함을 맨 현구는 누나들에게 둘러 쌓여 헤헤 거리고 있다. "너 이제 제대 했니?" "그럼요. 누나는 졸업했죠?" "응, 동아리 방에서 보다 여기서 보니까 신기하다." "몇 년 만이야?" "일 년 넘었다 그지?" "하하, 안녕하세요. 정보공 93 안현구입니다." 현구는 누나들에게 둘러 쌓여 이리 저리 인사를 하고 있다. 쑥쓰러운 듯 머리 를 긁적이면서... "여기 우리 학교 아닌 누나들도 있으니까 잘 보여." "하하. 그러지요. 잘 부탁합니다." "남주 동아리 후배야? 잘하면 은정이처럼..." "무슨 소리야. 현구 너 그냥 들어 갈거지?" "그럼요. 참, 누나 많이 예뻐졌네요." "호호, 다음에 내가 저녁 한 번 살게." 한 편 그들과 조금 떨어져 쪼그리고 앉은 동엽이는 "95 학번에 이 소라라고 알아요?" "응, 나하고 친한 후배야." "그래요? 걔 소개 시켜 줄 수 있어요?" "걔가 점찍어 둔 애야?" "네." "혹시 짝사랑?"
"그건 알 거 없구요." "걔가 누군데?"(정희) "예쁘고 키 큰 애 있어요." "걔 소개 시켜 줄 수 있냐구요?" "근데 걔는 애인이 있는 걸로 아는데?" "에?" "다른 애 소개시켜 주면 안돼?" "나 못들어 가!" ) 아무리 연하 남편이지만 분위기가 영 이상하다. 좁은 학교 탓일까? 학교 내 약 대 여학생들이 공대생의 관심을 많이 받았기 때문일까? 두 명을 제외하곤 모두들 내 친구들에게 반말이었다. 내 친구들은 꼬박 존댓말 이고... 이런 경우가 어딨냐. 뒤바꼈다. 시중도 내 친구들이 하고 있다. 음식상을 앞에 두고 내 친구들이랑 누나 친구들이랑 모여 앉아 재밌는 시간들 을 주고 받았다. "네 친구는 벌써 이런데..." "누나 걱정이나 해. 여기서 누나가 제일 딸린다." "이 새끼가." "욱!" 승헌이 막내 누나 진짜 무서웠다. 승헌이를 사정 없이 패 버렸다. 쯔쯧, 나이 많은 여자 조심하라더니 좀 이해가 간다. 은정씨는 부드러워, 걱정 마. 아니다, 예전 누나가 날 저런식으로 때린 적이 있다. 애인 했다가 그만하자 했을 때. 헤 헤, 그거야 뭐. "누나도 나 때릴거야?" "왜 때리니. 오손도손 잘 살아야지." "그렇지. 하하." 처음엔 마주 앉아 있다가 어느새 섞여 버렸다. "걔 진짜 애인 있대요?" "응." "안되는데..." "내 다른 애 소개시켜 줄게." "누나는 92 에요?" "응. 은정이 언니와 같은 연구실에 있어." "간혹 놀러가도 될까요?" "놀러 와. 밥 사줄까?" "하하, 내가 철수같진 않죠. 밥은 제가 살테니까 누나는 간혹 영화를 보여 주던 지 차를 사주던지... 하하." "그럴까? 근데 어쩌니 나 애인 있거든." "우쒸!" 동엽이 녀석은 아무래도 노총각으로 늙을 것 같다. 예전 누나 꼬시는 법이라고 가르쳐 줄 때부터 조짐이 보이더니... "누나는 졸업했죠?." "응. 넌 올해 복학 할거니?" "네. 누나 있을 때가 참 좋았는데." "연락처 알려 줄테니까 연락 해." "그러죠. 누나도 곧 시집 가겠네?" "아직은. 나도 연하나 한 번 사귀어 볼까?"
"충성! 안 현 구" "조용히 해 임마!"(동엽)
83 회 하루 하루가 지나갔다. 철수와 은정인 결혼식 준비와 여행 준비로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아버지. 바쁘세요?" "어째 장가갈 놈은 넌데 내가 이렇게 바쁘냐?" "원래 그런거에요." "뭐야 이놈아." "아버지는 한 번 해 보셨고 저는 처음이잖습니까. 경험이 있는 사람이 일을 맡 아야죠." "허허, 결혼식이 낼 모렌데 넌 어찌 그리 태평하냐?" "모르니까요. 제가 할 일은 청첩장 돌리는 거 하고 결혼식날 출석만 잘하면 되 는 거 아니겠습니까." "쯔쯧." "당일에는 제 친구들이 또 도와줄거잖아요. "참, 부조금 받을 놈들에겐 단단히 이야기 해 놓았냐?" "그럼요. 공돌이들이 그런 단순한 일은 잘 해요." "그래. 저쪽은 누가 한다던?" "형제가 귀해서 아마 아버님 약국 약사들이 도울 거 같아요." "흠, 너 걔한테 잘해라. 이런 너하고 살겠다는 용기가 가상하지 않니? 그리고 아닌 것 같아도 널 아주 대단케 생각해서야. 기대 꺾이지 않도록 잘 해." "위하며 잘 살겠습니다." "혼자 커서 어떤 때는 가여워 보이기도 해." "감사합니다. 아버지." "뭘?" "누나 생각해 주시는게요." "어구 이 놈아. 걔도 이제 한 식구야. 그리고 누나라고 그러지 마. 언제까지 그 럴래?" "고치겠습니다." "장가가면 달라져야 된다. 니 스스로 살 수 있어야 돼." "네." 철수는 서류 같은 걸 펼쳐 놓고 뭘 적고 계시던 아버지 옆에 앉아 한 쪽으로 치 워논 약재를 매만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철수의 얼굴은 계속 헤헤, 거리고 있 었고 아버지는 아들이 아직은 불안해 보이는지쯔쯧,거리고 계셨다. 결혼식 이틀 전 여행사의 예비소집이 있었다. 예비소집에 나온 사람들은 곧 여 행을 떠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얼굴이 모두 밝다. 여행 일정에 대한 공지와 출발 당일 모이는 장소를 통고 받은 사람들은 설렘으 로 가득찬 얼굴로 돌아 갈 준비를 했다. "박철수씨, 홍은정씨는 잠깐 남았다 가세요." 안내원 한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 "당신 잘못한 거 있어요?" "아니. 근데 왠 당신?" 둘은 모였던 일행들과 떨어져 안내원을 따라 갔다. 안내원은 서류를 살피면서
철수와 은정일 꼬아 보았다. "같은 방으로 해 달라셨죠?" 철수는 헤헤, 웃고 은정인 고개를 끄덕거렸다. "좌석도?" "당연하죠." 철수가 헤헤 거리며 답을 했다. "두 분 어떻게 되시는..." "우리 떨어지면 안돼요. 죽을 때까지 붙어 살아야 되는데요." 은정이는 살포시 미소지으며 답을 하고 있는 철수를 쳐다 본다. 안내원은 다시 물었다. "남 녀가 같은 방을 쓴다는 게... 일행들 시선이 곱지 않을텐데요." "그런거 상관 없어요. 님도 오실래요?" "네?" "모레 우리 결혼식이거든요. 부조금 안 받을테니까 와요." "두 분 그럼."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사랑하며 살아야 할 사이요." "신혼 여행이세요?" "그렇죠. 하니문 베이비 만들어야 되거든요? 같은 방을 꼭..." 철수는 신나게 답을 하다가 은정이의 제재를 받았다. 철수가 어디를 꼬집혔는 지 대답 중간에 말을 끊고 얼굴을 찌푸렸다. 은정이가 약간 무안하게 웃으며 안 내원을 바라 보았다. "호호. 같은 방으로 잡아 주실 수 있죠?" "그럴게요. 두 분 진짜?" "마누..." 철수는 답을 하려다 은정이 눈치를 살피고 머뭇거렸다. 히죽 웃고 있는 그의 입 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염려가 되었는지 은정이가 답을 했다. "맞아요. 우리 신혼 여행 가는 거에요." "아앙, 하하, 좋아 보이네요. 티씨더러 특별히 신경 쓰라고 해야 겠어요." "티씨가 남자여 여자여?" 철수는 또 꼬집혔다.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온 터라 철수는 머리 속에 많은 상상을 했다. 은정 이의 차를 타고 집으로 오면서 그의 머리 속에는 이런 것들이 있었다. 비행기 뜰 때 느낌이 어떨까?처음 갈 곳이 영국인데 영국 여왕은 예쁜 딸이 몇이나 있 을까? 길 거리에서 뽀뽀해도 쯔쯧, 소리 안들을까? 해변을 나가보면 젖가슴을 자 랑하고 돌아 다니는 여자들이 실제로 존재할까? 그리고... 기타 등등. "예비 마누라." "한 가지로만 불러." "우리가 처음 갈 곳이 런던이랬잖아." "응." "영국 놈들은 미국 놈들이랑 거의 같지?" "뭐 비슷하겠지." "우리 길 거리에서 뽀뽀 한 번 해 보자." "으이그, 우리 서방님 언제 철들래?" "해보자니까 씨." "기회되면." "헤헤. 기회야 만들면 되지 뭐. 그리고 곧아줌마?" "야, 호칭 통일시켜." "연습하는거야."
"무슨 연습?" "누나 소리 안하기." "치. 자연스럽게 바뀔거야." "둘이 있을 땐 모르지만 어른들 앞에선 바로 바껴야 돼." "지금 둘만 있어." "연습하는 거라니까." "그래, 서방님 맘대로 하세요." "홍여사." "이게 진짜." "어허, 서방님보고 이거라니." 결혼식 전 날, 참으로 바쁜 날이었지만 바쁜 것은 양가 부모님들이었고 철수와 은정인 오히려 다른 날보다 한가했다. 결혼식 전 날 오후에 둘은 자신들이 결혼식을 올린 호텔의 커피숖에서 커피잔 을 기울리는 여유를 갖고 있었다. "야, 호텔이 상당히 고급스럽네. 돈 많이 줬겠다." "벌써 그런거 신경쓰니?" 은정인 호텔을 둘러 보는 철수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런 건물 지을려면 얼마나 필요할까?" "졌다." "새댁은 결혼하고 나면 일 년동안은 나 먹여 살려야 되는데 앞으로 계획은?" "잘살테니까 걱정 마." "삶이 그리 만만한 줄 알아요? 나 일년 동안은 소위 밥만 축내는 놈이야. 누나 가 번 돈으로 생활해야 되는데 나 구박하지 않고 잘 살 자신 있어요?" "구박안할테니까 공부나 열심히 해." "그리고 올 한해 동안은 학생이니까 내 생활에 너무 간섭 말아요." "뭘 간섭 말라는 거야?" "혹시나 미팅 건수 들어 오면 나 나갑니다. 그리고 당구장 가는 것도 시비 걸 지 마요." "그럼 나도 뭐. 예전에 찼던 남자들 만나고 돌아 다니고 학생 때처럼 배선배랑 드라이버도 가고..." "쓰... 그건 안돼지. 누나는 나 신경 쓰야지." "그런 법이 어딨냐?" "나는 학생일 때 결혼 할 생각이 없었어. 그러니까 누나가 많은 부분 책임을 져 야 돼." "치, 물린다?" "이씨." "미안, 그런 말은 하지 말랬지 참." "해도 돼. 물릴 수 있으면 물려 봐. 내일이 결혼식인데 니가 무슨 수로 물릴 래?" "너? 또 니가라고 했어." "내가 결혼하고 나면 누나더러 존댓말 쓰라고 할 참이었어. 그건 내가 양보한 다. 하지만 이제부터 내게서 예전처럼 깍뜻한 존칭은 기대하지 마." "허! 너도 별수 없구나." "그래도 더 위하고 살테니까 걱정마요. 참, 학기 중엔 나 보러 자주 내려 와 요. 서울 갈 때 데리러도 와야 돼." "알았어." "그리고 보니 우리 주말 부부 되겠네." "걱정마. 자주 내려 갈테니까." "헤헤. 잘 삽시다."
"잘 살아야지. 근데 좀 걱정된다." "걱정 거리는 나눕시다. 하하." "내일 잘 해?" "당연하지." 철수와 은정이는 저녁을 먹고 일찍 헤어졌다. 각자 자기 방에 누워 설렘과 두근 거림을 안고 잠을 청했다. "여보세요? 나." "누나도 잠 안와요?" "응. 많이 긴장 돼." "누구나 처음엔 다 그래." "치, 꼭 해 본 것처럼 얘기한다?" "다 이런 말 하더만. 내일 아침에 뭐 할거요?" "미용실 가야지." "내일 많이 예쁘겠네?" "평상시는 안 예뻤니?" "겸손할 줄도 좀 알아라." "내일 드디어..." "피로연 끝마치면 우린 바로... 헤헤." "음흉하긴." "마누라하고 같이 잔다는 생각이 음흉한 것이면 아휴 세상엔 전부 음흉한 놈들 뿐이네." "그런 걸 티를 내니?" "그럼. 내일 결혼식이야 대충 해도 돼. 난 첫날 밤이 중요하단 말이야." "제대로나 할 수 있을까?" "이 여자가 씨." "기분이 좀 묘하다." "나는 기분이 야한데." "좀 진지하게 받아 들여." "이런 기분일 때 진지해지면 더 가라앉아. 가볍게 웃어요. 웃어봐요." "히..." "좀 산뜻하게 웃어라. 살포시 미소짓듯..." "보이니?" "느낌이라는게 있잖아요. 여자가 무드가 없냐." "..." "미소 지었어요?" "응." "편안히 자고 내일 봅시다. 사랑해요." "그래, 나도." "하늘 땅 별 땅 만큼 사랑하니까 푹 자요." "나도 하늘 땅 별 땅 만큼 사랑해." "27 살 먹은 여자가 참 유치하네요." "씨." "이제 그만 자요." "응. 잘 자." 84 회 밤이 깊었지만 철수도 은정이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철수는 걸지 않을 전화기를 들었다 놓는 것을 반복하더니 이불을 뒤집어 쓰고 끼끼 거렸다. 그러다 벌떡 일어 나 태권도 발차기 같은 걸 하더니 또 이불을 뒤 집어 쓰고 낄낄 거렸다. 잠이 들었다 싶었는데 또 벌떡 일어나 뺨을 꼬집고 헤 헤 거렸다. 그렇게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 철수는 결국은 옥상으로 올라 갔다. "잘 삽시다!" 뒷 집을 향해 큰 소리를 질렀다. 하늘에 두팔을 벌리고선 멋있게 외쳤다. "어떤 놈이여!" 철수는 급히 옥상 난간에 몸을 숙이고 가슴을 쓸어 내렸다. 고개를 조금 내 밀 고 뒷집을 빼꼼히 쳐다 보았다. 쌈쟁이 할머니가 무슨 일인지 잠이 들지 않고 밖 을 나와 있었다. 그 시간 은정이도 잠을 못 이루긴 마찬가지였다. 침대에 누워 이리 뒤척이다 저 리 뒤척이다 결국은 잠을 포기하고 방에 불을 밝혔다. 그리고 사진첩을 꺼내 침 대에 앉았다. 어린 시절 철수를 모르던 때의 사진첩을 펼쳐 놓고 부모님과 함께 있던 작은 소녀를 보고 그리운 미소와 작은 눈물이 맺히는 가슴떨림을 느꼈다. 자기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모습을 떠 올리며 고운 시선으로 생각에 잠기 는 표정이다. 방에 걸려 있는 가족 사진을 보고 눈을 붉혔다. 철수와 알게 된 시 절의 사진첩을 펼쳐 보면서 살포시 웃음을 맺었다. 그러고도 잠이 안 오는지 은 정인 조용히 거실로 나왔다. 주방에는 내일 결혼식에 필요한 것인지 보자기에 쌓 인 물건들이 많았다. 은정인 그 것을 보고 또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은정인 주 방 한 구석에 담궈 놓은 과일주 유리병에서 술을 한 잔 따랐다. 그 술잔을 들고 자기 방에 들어 가 내일 입을 웨딩 드레스를 보며 쭈욱 들이켰다. 그리고 히죽 웃다가 입술을 떨다가 눈물을 맺기도 하면서 또 미소짓곤 했다. 둘이 언제 잠이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새벽 두 세시는 넘긴 거 같다. 날이 서서히 밝아 온다. 아직은 주위가 어둡다. 하지만 철수네와 은정이네는 새 벽부터 불을 밝히고 부산하다. "오빠 일어 나." "으응... 아직 해도 안떴는데... 새벽부터 왜 그래?" "안 일어 날거야?" "나 늦게 잠 들었어." "안일어 날거야?" "쫌만 더 자자. 무슨 일인데 깨우는거야?" "엄마!" 철수방으로 들어 왔던 수희가 그 소리를 듣고 쪼로로 달려 나간다. 철수는 왜 저럴까? 의아해 하면서 부시시 이불을 밀치고 일어 났다. 아직 잠에서 덜 깼는 지 허리멍텅한 표정으로 담요 위에 앉아 있는 철수에게로 엄마와 수희가 다가왔 다. 둘 다 동시에 혀를 찬다. "쯔쯧, 저거 오늘 결혼 할 놈같이 보여?" "아니. 엄마 나는 저런 사람에겐 시집 안 갈거야." "그래 내 딸은 저런 놈에게 시집 안 보내지. 암." "에이쒸! 서운하면 서운하다 그래요. 저 정신 차렸어요." "니가 할 일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일찍 일어 나 있어야지. 우린 바빠. 아침 먹 을 준비 해." "알았어요." 엄마와 수희는 철수가 일어 나 이부자리를 정리하는 걸 보고 주방으로 돌아 갔 다. 철수는 세수를 하고 난 다음 식탁으로 와 앉았다. 아버지는 평상시처럼 식탁에
앉아 신문을 보신다. 아직 식탁 위에 밥은 올라와 있지 않다. "오늘 네 평생의 가장 중요한 날이다. 잘 해라." "아버지, 저에게 시선을 주시고 말씀해 주세요." 아버지는 철수 말대로 눈은 신문에 가 있었다. "장가가는 게 뭐 그리 대수냐? 나도 갔었다 임마." "앞의 말씀하고 틀리잖습니까." "너야 뭐. 사돈 댁에선 많이 서운하겠다." "저도 따로 나가 살거잖아요" "이 놈아. 당분간만이야. 나중엔 같이 살아야지. 하지만 은정인 그게 아니잖 아. 딸자식하고 사내는 달라." "구세대시군요." "그래, 나 구세대다. 신세대야! 잘 살아 임마." "네." "먹자." 밥 그릇과 국 그릇이 식탁 위에 놓여지자 아버지는 신문을 놓으시고 말씀하셨 다. "제 총각 시절 마지막 식사네요." "묘하냐?" "기분이요? 그렇죠 뭐." "허허, 대답이 영... 오손도손 잘 살아. 우리 집엔 이혼 같은 거 없다? 한 번 가족이 된 이상 끝까지 우리 사람이다. 알았냐?" "인내하며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조금 철 든 말같다." "하하." 은정인 아침부터 바빴다. 새벽에 술을 약간 마셨던 탓인지 늦잠을 잤다. "좀 깨워 주시지 그랬어요." 은정인 식탁에 앉자 마자 빵을 먹는 듯 마는 듯 입에 넣고는 바로 다시 일어 섰 다. "잘한다. 이런 중요한 날 늦잠이니?" 엄마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딸의 볼을 두 손으로 감싸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은정인 엄마와 같은 미소로 답을 한다. "잘 살아." "네." "미용실은 누가 따라 갈 거니?" "정희가 온댔어요." "그래. 나는 병원 갔다가 먼저 식장에 가 있으마." "아빠는요?" "출근하셨어." "벌써요? 나 일어 나는 것도 안 보구요?" "너 자고 있는거 보고 가셨어." "흠. 저 너무 서둘렀을까요?" "아니야. 늦어지면 아빠도 나도 더 힘들었을거야. 너도 그랬을거구." "동생 하나 낳지 그랬어요." "흠, 그게 맘대로 안돼더라." "고마워요." "그래, 이렇게 예쁘게 키웠으니 그 말 들을 자격은 되지. 흠...내가 미용실까 진 태워 줄게." "참, 외할아버진..."
"내일 도착하신데." 미용실 은정이는 꼼짝을 못하고 있다. 은정이 헨드폰이 울리자 책을 보고 있던 정희가 대신 받았다. "왜 누나가 받아요?" "신부 화장 때문에 바빠." "많이 예뻐지고 있어요?" "그래." "조금 있다 간다고 전해 줘요." "알았어. 결혼 축하 해. 이제 아저씨네." "아직 안했어요." "후후. 이제 나 아줌마라 놀리지 마?" "생각해 보고." 붉은 카페트가 깔려져 있고 원탁의 테이블들이 놓여진 호텔의 웨딩 홀에는 사람 들이 한 둘 찾기 시작했다. 호텔 직원들이 테이블에 음식들을 갖다 놓고 있을 때 철수는 결혼 예복으로 갈아 입고 입구에 섰다. 어머니가 철수의 옷 매무새를 봐주며 그 옆에 서 있다. 그때 은정이의 어머니가 나타났다. 철수는 무언으로 환 한 표정을 보이며 허리를 숙였고 옆에 서 있던 어머니가 은정이의 어머니를 맞았 다. "오셨어요?" "네. 신랑이 믿음직 해 보이네요." "철없는 자식에게 귀한 딸자식을 맺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네." "은정인 아직 안왔나 보네요?" "아직 미용실에 있나 봅니다." 어머니 둘은 철수만 남겨 놓고 어디론가 가 버렸다. "왔냐?" "야, 제법 멋있네." "그럼 새꺄." "우린 어디 앉아 있어야 되냐?" "저기 자리 줄테니까 돈 잘 받아?" "신랑이 그런 거 밝히면 안돼." "승헌이는 그런대로 봐줄만 한데 동엽이 넌 영..." "그렇냐? 내가 양복이 없잖아. 울 형 거 입고 왔더니 좀 그렇다." "너네들은 부조금 없어?" "야, 일 봐주잖아." "그래도 낼 건 내야지." "학생인디?" "나도 학생이야." "외상." 시간이 다가 오자 양가 귀빈들이 하나 둘 식장에 입장을 하기 시작했다. 철수 는 잘 알지 못하지만 성의를 다해 인사를 드렸다. 옆에 서 있는 아버지가 허허 웃는다. "아들을 참 잘 두셨네요." "하하, 과찬이십니다."
"하시는 일은 잘 되시죠?" "네." 철수는 긴장이 되기는 하지만 여유있는 표정으로 귀빈들을 맞았다. 계단 쪽이 웅성거렸다. 철수는 고개를 들어 그 쪽을 쳐다 보았다. 아버지께서 손을 잡아 끌 어 내린다. "나중에 봐도 돼." "신부 오는 거에요?" "평생 같이 살 사람인데 좀 있다 봐." 은정이는 화사하게 화장을 하고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신부 대기실로 들어 갔 다. 철수는 하객들과 인사를 하면서도 시선은 방금 문이 닫힌 신부 대기실로 가 있다. "어?" "축하 해." "형 오랜만이에요. 저한테 온 거 아니죠?" "그럼, 난 신부 하객이지." "하하, 미안합니다." "뭐가? 은정인 네 인연이었나 보지 뭐." "잘 오셨어요." 철수에게 승주가 와 악수를 하고 갔다. "오빠! 결혼 축하해요." "은정이구나." "금방 신부 보고 왔어요." "넌 내 하객이잖아." "호호, 그러니까 신부가 궁금하죠." "참, 승주형 봤는데... 그 형 자주 만나지 않았냐?" "신부 대기실에 같이 들어 갔다 왔어요." "승주가 먼저 봤어? 나도 아직 제대로..." 작은 은정이 뒤에 승주가 나타나 히죽 웃는다. 철수는 하던 말을 멈추고 입만 쭝긋 내밀 뿐이다. 화환들이 입구 쪽에 많이 놓여 있다. 성균*대 정보공학과 **연구실 일동. 성균* 대 약학과 **연구실. 두개는 붙어 있지만 나머지 화환들은 패를 지어 나눠 대치 하고 있었다. **한의원 누구. 한약사 협회** 기타 등등. **제약회사. 전국 약사 협회 누구. **약국 누구. 기타 등등. 방송으로 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려 왔다. 긴장 된다. 신랑측 푯말 앞에 서서 신부 대기실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예쁜 미소를 머금은 하얀 천사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았다. 다들 그 모습을 부러워 하는 표정이다. 하하, 진짜 예쁘다. 그녀가 지금 내게로 오고 있다. 사회자를 내 불쌍해서 내 친구들 제쳐 두고 배군으로 했다. 잘해야 되는데... "마이크 테스트! 신랑 신부 준비 하세요. 테스트! 테스트!" 잘못 시켰다. 제기랄... 누나 친구들의 경호(?)를 받으며 신부가 풍선으로 만들어 놓은 식장 입구 쪽으 로 다가 왔다. 나는 넋을 놓고 그 모습을 쳐다 보았다. 그녀는 말도 못 붙일 만 큼 예뻤다. 나는 아마도 선녀의 옷을 훔치고 바위 뒤에 숨어 있던 동화속의 그 사람 같은 모습일게다. 옆에 계시던 아버지가 날 떠밀었다. 따지 듯 실 고개를
돌렸다. "넌 안들어 갈거야?" 아 맞다. 내가 저 여자 신랑이구나. 신부 옆에 가 섰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미소와 다른 무언가를 담은 표정으 로 다소곳하다. 그녀와 팔짱을 꼈다. 그녀가 날 쳐다 보며 어색하게 입을 열었 다. "아직 아니야." 꼈던 팔짱을 풀고 주위를 살피며 머쩍은 웃음을 지었다. 처음엔 다 그러는거지. "신랑 입장!" 드디어 입장이다. 브이자를 그리며 여유있는 모습으로 입장하고 싶었지만 사람 들의 시선 때문에 다소 굳은 모양으로 앞만 보고 걸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나 와 누나의 미래를 축하해주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이다. 엄숙해 보였다. "신부 입장." 피아노와 현악 오중주. 오중주는 아닌 거 같다. 네 명뿐이다. 제법 거창하네. 드디어 신부가 내게로 오고 있다. "이제 팔짱 껴도 되지?" "들려." "헤헤." 원래 큰절 하는 거 아닌가? 텔레비전에서 보니까 신랑은 큰절을 하던데... 사람 들이 웃었다. 처음엔 다 그렇지 뭐. 옆에 아름다운 신부를 두고 주례사를 들었다. 아버지 선배 분으로 한의학계에 서 알아 주시는 분이었다. "... 산삼은 오래 되야 효력을 발휘하고 가치가 높 듯 결혼생활도 마찬가집니 다. 조급하지 말고 세월을 감싸며 오래 된 산삼처럼... ... 요즘 같은 인스턴트 시대에 화톳불에 약탕기를 올려 놓고 쓴 연기를 불어가며 약을 다리던 예전 어머 니같은 그런 모습의 신부가 되기를 바라며 바로 약효를 기대하고 화학 작용으로 언젠가는 부작용을 야기하는 양약 같은 그런 사람은 되지 말고 지긋하게 익어가 는 한약처럼..." 여기 저기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 왔다. 여기 약사 분들이 참 많을텐데... 주례사를 마치고 부모님과 같이 하는 시간이 왔을 때 누나의 눈물을 보았다. 여 자가 평생 흘리는 눈물 중 저 눈물은 분명 베스트 파이브에 들어 갈 것이다. 고 운 눈물이다.
후우, 폐백식 까지 마치고 나니까 좀 정신이 드네요. 아침부터 힘들었어요. 예 쁘게 보이는 것도 좋지만 신부 화장 참 오래 하더군요. 머리 손질도 그렇고... 옷 입을 때도 마찬가지였죠. 배가 다 아프네요. 한복 차림으로 하객들이 모여 있는 뷔페 식당을 다녀 오고 나면 결혼식 행사는 끝이 납니다. 에구, 저 아줌마네요. 엄마, 아빠를 보니 눈물이 났어요. 그냥요. 감사의 눈물이겠죠. 피로연 장이다. 철수 친구 네 명과 은정이 친구 다섯 명이 모여 간단하게 피로 연을 가졌다. "피로연이 무슨 필요가 있나. 그냥 가서 자면 되지." 철수는 공개적으로 그렇게 떠벌렸다. 그러나 친구들은 그런 철수의 마음을 몰라 주며 은정이에게 술을 권했다. 그리고 은정이 친구들은 후배, 동생들의 하는 짓 이 귀여운 지 재잘거리며 철수 친구들에게 호응을 했다.
"야, 송승헌. 그만 줘 임마." "에이쒸. 신랑이 분위기 깨네. 신부만 있으면 되니까 쟤는 갖다 버려." "뭐야 임마!" 둘이 말다툼 하고 있을 때 동엽이가 술 잔을 은정이에게 갖다 바친다. "재수씨 제 잔도 한 잔 받으세요." "너 생일 언제야 임마." "다 그러는 거야. 안 그래요 재수씨?" "후후, 그래 오늘은 봐준다. 하지만 동엽씨? 제가 선배거든요. 다음에 재수씨 그러면 죽을 줄 알어?" "무섭네요?" "그래, 너 철수씨에게 잘해?" "철수씨? 철수야 너보고 철수씨랜다." "이 새끼가 분위가 파악을 전혀 못하네. 그럼 신부가 신랑한테 씨자 붙이는 거 당연하지." 철수는 동엽이를 후딱 밀어 버렸다. "에구구." 동엽이는 땅바닥에 픽 꼬꾸라 지면서도 헤헤 거리며 즐거운 표정이다. 벌써 술 에 취한 듯 하다. 철수는 못마땅했다. 벌써 11 시가 넘었는데 파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야 되는데... 오늘 하루가 피곤했던 이유보다 철수에겐 다른 큰 이유가 있었다. "안 피곤해요?" 철수는 친구들과 즐거운 은정이의 허리를 푹 찔렀다. "응? 헤헤, 너 피곤해?" "안 잘거야?" "헤헤, 자야지." 은정인 술을 많이 마신 것 같다. 하긴 주는 술 넙죽 넙죽 다 받아 먹었으니까. 은정인 기분이 좋은가 보다. 그리고 뭔가 달래고 싶은 마음도 있었겠지. 피로연은 자정이 다 되서 끝이 났다. 철수는 정신이 헤롱한 은정이를 부축하고 호텔 로비로 들어 섰다. "제가 부축해 드릴게요." "됐어요. 제 신부에게 손 대지 마요." "네?" "열쇠나 좀 갖다 줘요." 엘레베이터 안 철수는 자기 부축을 받으며 꾸벅꾸벅 졸고 있는 은정이를 보며 히죽 거리고 있다. 엘레베이터 거울에 얼굴을 비추며 웃어보고 이빨도 비추어보 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야! 누나 방 분위기 죽이지 않아요?" "음냐." 철수는 호텔방의 아늑함과 고급스러움에 환한 말을 내 뱉었지만 은정인 눈이 풀 려 있었다. 그래도 철수는 기대했다. 은정일 침대에 눕혀 놓고는 자기는 바로 샤 워를 하러 들어 갔다. "룰루 랄라! 크크크레이지 러브..." 노래를 불러 가며 온 몸에 비누거품을 묻히고 엉덩이를 실룩거렸다. 그리고 자 신 있게 수건으로 아랫 부분만 가리고 침대 앞으로 나왔다. "뭐야 이거!"
은정이는 철수가 눕혀 논 그대로, 그 옷차림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 다. "음냐." "누나? 일어나요." "아이씨." "아이씨? 첫날 밤인디?" "불 꺼." "플리즈. 제발 눈 좀 떠 봐요." "나 졸려. 불 끄고 자자." "에? 옷은 벗고 자야지." "박철수?" "왜요." "헤헤, 사랑해." "미툰데... 그냥 자는거야? 내가 옷 벗겨 줄까?" "으으응. 빨리 불꺼." 철수의 손이 은정이 가슴으로 가자 은정인 몸부림 치며 등을 돌려 버렸다. 철수 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흑흑, 알았어요." 철수는 불을 꺼고 은정이 옆에 누웠다. "이씨." "음냐." "에이쒸." "음냐." 철수는 잠을 청하려다 도저히 안되었던지 벌떡 일어 났다. 그리고 불을 켰다. 은정인 등을 돌리고 철수 몫의 이불까지 다 뺏어 돌돌 말아 자고 있다. 히터가 켜져 있지만 다소 추워 철수는 구비된 잠옷을 입었다. 그리고 과감하게 은정이 를 일으켜 세웠다. "누나? 겉옷은 벗고 자요." 은정이는 일으켜 세워졌으나 철수의 손이 떨어지자 마자 다시 픽 쓰러졌다. 철 수는 그런 은정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은정인 눈을 뜨지 못하고 있다. 철수는 노력해서 은정이의 겉 옷을 벗겨 주고 그녀가 말고 있던 이불을 빼앗아 다시 잠을 청했다. "우쒸!" 철수는 누웠다 다시 벌떡 일어 났다. 멀뚱히 은정이만 쳐다 보다가 긴 한 숨을 내 쉬었다. "야이 나쁜 놈아." "새벽에 전화해서 무슨 말이야. 첫날 밤 어땠냐?" "니가 제일 나쁜 놈이야. 니가 제일 많이 먹였지?" "응?" "니가 누나에게 술 제일 많이 권했잖아. 나중에 니 결혼식 때 보자." "잘 안됐냐?" "송승헌! 그렇게 살지 마 새꺄." 철수는 한 참을 침대에 앉아 있다 승헌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나서 또 전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어? 수고하십니다." "누구세요?" "저 오늘 결혼 한 박철수라고 하는데요." "아, 아. 근데 이 시간에 어쩐일로...?" "누나 있으면 좀 바꿔 주실래요?" "지금 자는데..." "중요한 질문이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그 참, 잠시만 기다려 봐요." "감사합니다." 철수는 새벽 두시가 가까워 오는 시간에 정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저 철숩니다. 잘 들어 갔어요." "응? 오늘도 챙겨주는거야? 고맙네." "씨이. 내가 누나를 왜 챙기나." "그래 신혼 첫날 밤에 아줌마에게 왠 전화?" "뭐 좀 물어 봅시다." "물어 봐." "은정씨 그러니까 내 신부가 지금 술에 취해 그냥 자빠져 자거든요." "그래서?" "그냥 자야 되는거에요?" "헛! 완전 맛이 갔니?" "응. 아주 맛이 갔어." "좀 많이 마신다 했다." "깨울까?" "그냥 자." "첫날 밤인데?" "할 수 없잖아." "에이 쒸." "에구 박철수!" 철수는 첫 날밤 그냥 잤다. 그 꿈꾸던 가슴도 한 번 못 만져 보고 억울함과 분 통함에 못이겨 이를 바득바득 갈며 어느 꿈나라로 가 있는지 모를 은정이 옆에 서 그냥 잤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은 일어나자 마자 바빴다. 호텔을 나오자 마자 부모님께 인 사 하느라 바빴다. "나 어때? 괜찮아 보여?" "어제보다는 낫네. 에구 불쌍한 박철수." "니가 왜?" "첫날 밤이었는데..." "혼자 심심했어?" "첫날 밤인데... 꺼이 꺼이." "그럼 깨우지 그랬어." "깨워? 깨워서 뭐 하게?" "응?" 오전에는 철수 부모님에게 인사를 드려야 했고 또한 여행 출발 준비도 해야 했 다. 그리고 오후에는 은정이 외할아버지가 한국에 오셨다. 결혼 식 다음 날 오후에는 외할아버지를 맞으며 처가댁에서 철수와 은정인 자리 하고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은정이와 참 격이 없었다. 철수는 그런 외할아버지
께 은정이에게 못되게 굴면 용서치 않겠다는 으름장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덕담 도 들었다. 철수는 저녁까지 처가댁 신세를 지고 저녁 8 시경에 자리에서 일어 섰다. "자네도 여기서 자고 가." 아버님이 그런 철수를 붙잡았다. "내일 일 때문에 준비할 게 많아요." "그럼 은정이 너도 따라 가." "할아버지 오셨는데?" "은정씨는 여기서 자고 와요." "너 혼자 갈거야?" 할아버지와 붙어 있던 은정이가 철수를 쳐다 보며 말했다. "쓰으, 말버릇 고쳐." 어머님이 따끔하게 은정이를 꾸짖었다. "새로 살 집에 가 봐야죠. 은정씨는 그럼 내일 아침 일찍 그 곳으로 와요. 집 에 들렸다 그리 가 있을게요." "잘 가." '서러버라.' 철수는 잠시 집에 들렸다 아버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눈 다음 은정이와의 미래 를 꾸밀 보금자리로 갔다. 그 곳에서의 느낌은 좋았지만 철수는 지금 혼자다. 베낭을 챙기며 많은 상상들 을 하고 웃고 있지만 억울하다는 듯 간혹 우쒸,라는 말을 뱉어냈다. "우쒸, 오늘도... 어떻게 된게 결혼하고 바로 권태기여 뭐여. 전화도 없어? 설 버라." 철수는 짐들을 다 챙겨 두고 침대에 누웠다. 하얀 형광등이 불을 밝히고 있는 천정을 보며 넓은 침대에 홀로 누워 눈을 말똥거리고 있다. "더블 침대라 좋다. 누나는 뭐 하고 있을까?" 철수는 불을 켜 둔채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딩동!" 철수는 벌떡 일어 났다. 그리고 시계를 보았다. 새벽 3 시 17 분. 철수는 그걸 보 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딩동!" 철수는 다시 일어 났다. "딩동! 딩동!" 철수는 달려 나가 문을 열었다. 은정이가 작은 가방을 들고 들어 와 웃는다. "헤헤, 나 보고 싶었지?"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 낭군님 보고 싶어 왔지." "아, 여기 누나하고 내가 살 집이지 참. 할아버님은?" "주무셔. 몰래 나왔어." "허허." "짐 챙겼어?" "응. 누나 것은 다시 한 번 점검 해." "알았어. 잤니?"
"응." "씨." "왜?" "난 네가 보고 싶어 잠이 안오던데. 그래서 달려 왔는데..." "헛! 그런 사람이 어제는 그렇게 퍼질러 잤냐? 첫날밤인데 씨..." "오늘 첫날밤 하면 되지." "정말?" 철수는 갑자기 신났다. "너 어디가?" 철수는 방으로 들어 가지 않고 욕실로 가며 윗도리를 벗으려고 하고 있다. "첫날 밤 하자며?" "준비할 게 많잖아. 내일 아침은 우리집 가서 먹어야 돼. 할아버지께 인사는 하 고 가야지. 그리고 자기 집에도 가야 되잖아." "첫날 밤 하고 준비하면 안될까?" "왜 그리 밝히니? 시간 별로 없어." "내 것은 다 챙겼어." "방으로 들어 와." 철수는 할 수 없이 짤래 짤래 은정이를 따라 방으로 들어 갔다. "야 좋다. 여기가 철수와 내가 잠들고 깰 방이란 말이지?" "그 철수라 부르지 말고 서방님으로 해 주면 안될까?" "흠, 하는 거 봐서. 베낭이나 들고 와 봐." "그러지요. 근데 누나?" "왜?" "옷 안 갈아 입냐?" "무슨 옷?" "야한 잠옷." "으이그." 철수는 베낭 두개를 은정이 앞에 놓아 두고 침대에 앉았다. 베낭 둘 다 여유가 있어 보였다. 신혼 여행이라 보통 베낭 여행 보다는 여유로운 자금이 있다. 베낭 의 가장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먹을 것이 이 둘에게는 빠져 있었다. "큰 베낭 둘은 낭비다." "그럼?" "하나는 작은 베낭으로 바꾸자. 베낭 때문에 괜히 번거롭게 하지 말자구." 은정이는 철수가 챙겨 두었던 베낭 속의 짐들을 하나 둘 씩 꺼내기 시작했다. 철수는 시계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숨을 내 쉰다. 은정이는 큰 베낭 하나를 치우고 학교 가방을 들고 왔다. "그건 아무래도 댁이 짊어 질 것 같수." "맞아. 속옷이나 양말 같은 건 이리 줘." 짐이 배분 되었다. 철수가 짊어 질 베낭은 아까보다 더 뚱뚱해지고 무거워 졌 다. "나는 더 번거롭게 됐는데?" "너 남자잖아. 이 것도 못 드냐? 옷이 많아서 보긴 저래도 안 무거워." "말 잘했다. 베낭 여행인데 무슨 옷이 그리 많냐?" "신부가 예뻐 보이는게 싫어?" "자기 짐은 자기가 들고가기 하자." "여전히 속이 좁구나? 부부는 일심동체 몰라? 니거 내것이 어딨냐."
"내가 안 좁아지게 됐냐?" "왜?" "그제 결혼식 올렸는데... 언제 첫날 밤 할겨?" "푸우! 너 디게 밝힌다. 총각 땐 안그랬잖아." "그때는 내가 누나를 조심해서 그런거구. 이젠 누나 말처럼 부분데." "씻고 올까?" "지금 시계 봐라." "다섯시 반이네?" "누나집 갔다 우리집 갔다 9 시반까지 공항 도착하려면 지금 나갈 준비 시작해 야 돼." "그러네." "씨." "후후, 철수씨?" "왜?" "잠시만 누웠다 가자." "뭐하려구?" "한 번 안겨 보게." 동이 터 오른다. 침대 위에는 철수가 은정이에게 팔 베개를 해 주며 웃고 있 다. 은정이는 그런 철수에게 안겨 있다. '하하, 잘 살아야지. 암. 사랑하며 눈 감는 그 날까지 그대는 내 가장 소중한 사람입니다. 가슴이나 함 만져 볼까?' '따뜻하다. 그래 사랑하는 사람의 품은 따뜻하다. 그의 가슴이 항상 따뜻하도 록 내 그대를 위하며 살겠습니다. 근데 어떻게 잡고 살지?" 창 밖은 아직 어둠이지만 이제는 아침이다. 은정이와 철수는 침대에 누워 마주 보며 웃고 있다. 저렇게 계속 안고 있으면 아침이 참 바쁠텐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