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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인물로 보는 경제사상사) 저자 : 유시민 출판사 : 푸른나무

차 례 책머리에 프롤로그/얼치기 경제학도의 길 안내 1. '보이지 않는 손'의 위대한 탄생 (자유방임시장의 예언자, 아담 스미드) - 아담 스미드의 공짜 여행 - 자유방임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 국부론의 산실, 글래스고대학 - '보이지 않는 손'은 공평하지 않다. - 상인과 제조업자들을 믿지 말라 - 아담 스미드의 인간적 면모와 그의 사상이 남긴 것 2. 대중의 빈곤은 신의 섭리이다. (토마스 로버트 맬더스 목사의 암울한 세상) - 가난한 사람들을 후려친 '보이지 않는 손'의 저주 - 빈곤은 인구법칙이 내린 불가피한 운명이다 - 자비심은 재앙을 부른다 - 냉혹한 천재 맬더스 목사 - 한 세기를 앞지른, 그러나 조롱거리가 된 맬더스의 공황이론 - 부자들은 언제나 맬더스를 좋아한다 3. 지주의 이익은 사회의 이익과 항상 대립된다. (부르주아 계급의 선봉장, 데이비드 리카도) - 경제학의 역사에 남은 나폴레옹의 발자취 - 경제학자로 변신한 주식 브로커 - 지주의 이익은 항상 사회 전체의 이익과 대립한다 - 국제적 자유거래는 세계를 부유하게 한다 - 두 날의 칼 노동가치론 4. 자유무역은 예속으로 가는 길 (우국지사의 경제학, 프리드리히 리스트) - 경제사상에도 국적이 있다 - 급진적 자유주의자 프리드리히 리스트 - 공업력의 발달은 세계 지배의 지름길 - 자유무역론은 강대국의 이데올로기 - 국가의 번영없이는 개인의 행복도 없다 - 비극적이지만 차라리 행복한 종말 5. 분열된 세상, 싸우는 사상 (부자의 경제학과 빈민의 경제학) - 풍요한 세계와 가난한 세계 - 유토피안들의 아름다운 환상 - 쾌락은 선이고 고통은 악이다 - 벤담 - 사람을 계급으로 나누지 말자 - 세이와 시니어 - 모든 재산은 강탈한 것이다 - 톰슨과 호지스킨 - 부자들이여 번뇌하지 말라 - 바스띠아 - 위대한 절충주의자 J.S. 밀 6. 모든 지배계급을 공산주의혁명 앞에 떨게 하라 (칼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 낡은 유럽을 뒤흔든 혁명의 해 -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인간, 칼 마르크스


- 위대한 부르주아지,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트 - 자유거래라는 또 하나의 '파렴치한 자유' - 혁명가 마르크스의 고달픈 생애 - 자본은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태어난다 - 최초의 노동자혁명 파리 코뮌 - 혁명의 가장 무서운 적은 효과적인 개량 7. '보이지 않는 손'의 신성화 ('풍요한 세계'의 신고전파 경제학자들) - '영원한 번영'을 노래한 사람들 - 한계혁명 - 미분학이 경제학을 점령하다 - 레옹 왈라스의 '균형잡힌 세계' - 알프레드 마샬의 '찬 이성 더운 가슴' - 누구나 자기 몫을 가진다 - '부르주아의 마르크스', 빌프레도 파레토 - 아름답지만 비현실적인 신고전파의 세계 8. 모든 지대는 도둑질이다. (불로소득을 규탄하는 영혼의 외침, 헨리 조지) - 우리 시대의 거대한 수수께끼 - 부자가 되려면 땅 한 조각이라도 사두라 - 맬더스의 인구론과 아일랜드의 진실 - 지대는 모든 악의 근원이다 9. 낭비하라, 그러면 존경을 얻으리라 (영원한 이방인, 도스타인 베블렌) - 독점자본과 억만장자의 출현 - 유한계급과 과시적 소비 - 값비싼 것이 아름답다 - 굉장한 학식을 지닌 '건달박사' - 위대한 이방인의 지켜지지 않은 유언 10. 제국주의는 세계를 망친다 (세계대전의 예언자, 존 앗킨슨 홉슨) - 제국주의 - 정복과 약탈의 시대 - 제국주의 시대의 새로운 정복자 금융권력 - 저축은 미덕이 아니다 - 제국주의는 세계를 망친다 11. 저축이 미덕은 아니다 (자유방임주의의 종말을 선고한 존 메이너드 케인즈) - 자본주의를 구원할 천재의 등장 - 가장 부르주아적인 부르주아 경제학자 - 대공황 - '보이지 않는 손'의 파산 - 자유시장의 무정부상태와 경기 변동 - 케인즈 경제학과 전쟁광 히틀러 - 케인즈가 본 칼 마르크스의 사상 12. 유토피아를 위한 '거대한 실험' (사회주의 70 년의 영욕과 고르바초프의 좌절) - 총성도 통곡도 환희도 없는 혁명 - '보이지 않는 손'의 눈부신 성공 - 모두가 '스타하노프'일 수는 없다 - 시장의 폐지, 시장의 보복 - '사회주의 계획 경제'와 공포정치 - '위대한 실험'이 남긴 것 에필로그 / 아직도 끝나지 않은 논쟁 참고서적 지은이 유시민은 1959 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대구 심인고교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에는 민주화운동으로 두 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저서로는 <아침으로 가는 길>, <거꾸로 읽는


세계사>와 공저로 <광주민중항쟁 - 다큐멘터리 1980> 등이 있다. 프롤로그 / 얼치기 경제학도의 길 안내 이 책은 '위대한 경제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쓰는 사람에게도 그러려니와 읽는 사람에게까지 적지 않은 정신적 부담을 안겨주기 쉽다. 왜냐하면 경제학은 지극히 무미건조하고 난해한 학문으로 널리 인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인식은 하나의 그릇된 편견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같은 편견을 유포시킨 사람은 경제학자들 자신이다. 우리 시대에 누구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경제문제를 좀 더 잘 이해해보려는 소박한 희망을 지닌 어떤 보통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아마도 국내외의 저명한 경제학자들이 저술한 <경제학개론>을 펴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십중팔구는 조만간 그 책을 팽개치면서 자신의 '부족한 재능'을 탓할 것이다. 그의 눈으로는 <경제학개론>과 미분학 교과서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처음부터 끝까지 기기묘묘한 방정식과 그래프로 가득한 그 개론서는 그가 품고 있는 소박한 '경제학적 의문사항'들에 대해 결코 속시원한 대답을 해주는 법이 없다. 경제학자들은 모든 문제를 가능한 한 난해한 방식으로 설명하는 사람들로 보인다. 경제학 개론서를 이해하는 일이 이렇게 어렵게 느껴질 정도이니, '위대한 경제학자들의 사상'이야 보통 사람의 상식과 인내심을 가지고서는 감히 범접할 수 조차 없으리라고 지레 짐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경제학은 결코 주술과도 같은 방정식으로 이루어진 상아탑의 과학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회과학 가운데서 가장 흥미진진하고 '위험스러운' 주제를 연구한다. 그것은 '부의 창조와 분배'의 배후에 작용하는 법칙을 연구한다. 그것은 물질적 부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인간의 행동과 인간 사이의 상호관계를 연구한다. 그래서 이 학문은 물질적 부를 차지하려는 인간들 사이의 소란스러운 싸움과 불가피한 관계를 맺게 된다. 경제학은 풍요와 궁핍의 원인을 해명하며 인간 집단 사이에서 벌어지는 모든 형태의 갈등과 투쟁 - 작은 공장의 파업에서부터 대규모의 폭동과 반란, 혁명과 반혁명, 대학살과 세계적 규모의 침략전쟁에 이르기까지 - 의 물질적 근거를 탐색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경제학은 '거의 전부' 이 모든 소란에 관계하기를 거부하는, 그럼으로써 그에 대한 자기의 입장을 표명하는 그러한 경제학이다. 그것은 별로 '흥미진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금도 '위험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이 책에서 만날 경제학자들은 풍요와 빈곤의 원인에 대해, 세상의 그 모든 소란스러운 싸움에 대해, 현존하는 사회 질서의 도덕적 정당성에 대해 뚜렷하고도 의미 있는 견해를 표명한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더없이 선동적으로 표현한 데 반해 다른 사람은 어눌하기 짝이 없는 문장으로 늘어놓았지만, 그들이 말하고자 한 바는 모두 명확하다. 그들은 자기 시대의 중대한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쟁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숨기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세상 사람들로부터 찬양과 존경뿐만 아니라 비난과 박해를 받는 것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책에서 다룬 '위대한 경제학자들'의 사상과 생애는 실로 다양하다. 어떤 영국인은 목사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려는 모든 형태의 노력을 냉혹하게 비난하면서 사람들 사이의 경제적 불평등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옹호했다. 그와 동시대에 살면서 주식 투기로 거부를 모아 스스로 광대한 토지의 소유자가 된 다른 사람은 지주의 이익이 사회의 다른 모든 사람의 이익을 해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전심전력했다. 오직 자기의 조국을 위해 '국적있는 경제학'을 창안했다가 조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만 융숭한 대접을 받은 독일의 한 우국지사는 끝내 뜻을 펴지 못하고 비극적인 권총 자살로 짧은 삶을 마감했다. 그런가 하면 노동자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중산계급 출신의 한 천재는 자본주의 체제와 '풍요한 부르주아 세계'에 불길하기 짝이 없는 파산선고를 내리고 그것을 집행하기 위해 싸우느라 죽을 때까지 마녀사냥과도 같은 박해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학문 탐구에 일생을 바친 대학교수도 있지만, 중학교 문턱도 못 넘고 갖가지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면서 독특한 이론을 세운 방랑자도 있다. 이상주의적 공산촌을 건설하느라 엄청난 재산을 탕진해 버린 걸출한 자선사업가가 있는가 하면, 현대의 부자들을 야만부족과 나란히 세워 신랄한 야유를 퍼붓고서도 아무런 보복을 받지 않은 괴상한 이방인도 있다. 그리고 가장 현대적인 인물로서는 대공황이라는 절망의 골짜기에 빠진 현대자본주의를 구원하러 나섰다가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한 '유쾌한 천재'와 위기에 처한 사회주의 체제를 개축하려다 그 체제와 함께 몰락해버린 '크레믈린의 권력자'가 있다. 학자들 --- 물론 학자라고 하기 어려운 사람도 있다 --- 의 사상은 여러 가지 기준에 의해 다양하게 분류될 수 있다. 필자는 여기서 '부자의 경제학'과 '빈민의 경제학'이라는 분류법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두 진영 사이의 적대적 대립을 강조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두뇌와 심장을 지닌 인간의 학문은


절대로 '중립적'일 수 없으며, '풍요한 세계'와 '가난한 세계'로 분열되어 있는 사회에서 경제학자의 눈은 불가피하게 어느 한편으로 쏠리게 된다. 필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풍요한 세계'로 기운 경제학자들은 대체로 현존하는 경제체제를 선하고 영원한 존재로 간주하여 변화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반면 '가난한 세계'를 중시하는 경제학자들은 현존하는 체제를 사악하고 일시적인 존재로 간주하고 변화를 추구한다. 물론 대립되는 두 흐름의 경제학은 자본주의의 빛과 그림자 --- 자유시장의 축복과 노동 대중의 궁핍 ---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각각 진실의 단면을 포착하고 있다. 그리고 양쪽 모두를 비교적 균형있게 관찰하는 학자들은 온건한 변화를 권고하는 절충주의적 입장을 취하게 된다. 여기서 다룬 경제학자들은 대부분 두 진영의 어느 한 편을 뚜렷하게 대변하고 있다. 경제사상의 역사는 이 두 진영 사이의 사상적 쟁투의 역사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체계적인 경제학설사나 경제사상사가 아니다. 적어도 형식적인 면에서 이 책은 경제학자들의 '약전 모음'이라고 해야 한다. 여기서는 각각의 경제학자들의 사상을 전반적으로 고찰하지 않았다. 사실 제대로 쓰자면 한 사람마다 이 정도 분량의 책 한 권이 필요할 것이다. 필자가 이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권하려는 것은 경제이론에 대한 체계적이고 풍부한 지식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빛과 그림자에 대한 균형감각과 우리 시대의 경제적인 쟁점에 대한 개방적인 자세이다. 그래서 필자는 그들의 경제사상 가운데 몇몇 핵심사항에 관련된 부분을 단편적으로만 차용하였다. "물질적 부의 원천은 무엇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풍요와 빈곤은 어떤 상호관계를 맺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손은 각자가 이기심을 추구하기만 하면 그것을 사회 전체의 이익이라는 공동선으로 인도하는가?" "자본주의의 분배원리는 어떠한 것이며, 그것은 인류 문명이 이룩한 보편적 가치규범에 비추어 볼 때 도덕적으로 정당한가?" "실업과 공황이라는 자본주의의 내부적 모순은 어디에 기인한 것이며, 자본주의는 이 모순을 어떻게 극복해 왔는가?" 우리의 주된 관심사는 이러한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중시한 것은 이러한 의문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해명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와 같은 문제가 중요하게 부각된 시대적 상황과 그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태도이다. 그래서 필자는 각각의 글마다 그 시대의 경제상황과 사회상태, 경제학자들의 개인사와 중대한 논쟁거리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다채롭게 뒤섞어 놓았다. 이런 서술방식을 택한 것은 모든 사상은 그것을 낳은 시대적 상황이나 그 사상가의 구체적인 삶의 궤적과 분리시켜 이야기할 경우 공허한 관념의 유희로 떨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대학에서 가르치는 '공인된 경제학'은 거의 전부가 이 책의 일곱번째와 열한번째에 등장하는 신고전파와 케인즈의 경제학이다. 그리고 그들의 경제학은 우리들 보통 사람들이 지닌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들을 '과학의 영토' 밖으로 추방해 버린 경제학이다. 그래서 그것만을 열심히 배우는 학생들은 극단적인 지식의 편식으로 인해 숲을 보지 못한 채 몇 그루의 나무만을 보고 그것을 경제학의 전부로 오인하게 된다. 반면 그와 같은 '부자의 경제학'의 밑바닥에 놓인 철학을 거부하는 학생들은 반대편으로 달려가 '강의실 밖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편식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대개 '공인된 경제학'의 수학적 기법을 학습하지 않음으로써 시간이 흐르면 그 내용조차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이 책에서 필자는 경제학에 대한 소양을 높이려고 마음먹은 사람들에게 경제학이라는 울창한 숲이 생긴 역사적 과정과 그 숲의 모습을 개괄적으로 보여주고 그 안에 자리잡은 다양한 나무들로 안내하고자 하였다. 그 모두에 대해 조금씩이라도 알아야만 우리가 사는 이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여러 가지 얼굴을 공정하게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자의 경제학'이든 '빈민의 경제학'이든 자기가 사는 세상을 올바르게 인식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모두가 소중한 자산이다. 1. '보이지 않는 손'의 위대한 탄생 (자유방임시장의 예언자, 아담 스미드) 아담 스미드의 공짜 여행 18 세기 영국에 '찰스 타운젠트'라는 사람이 있었다. 한때 재무장관 자리에까지 오른 것을 보면 학식과 재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상류사회에서 제법 발이 넓은 사람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재산이 아주 많은 귀족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델카이드 백작 부인이라는 돈 많은 미망인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이 귀부인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데리고 왔다. 타운젠트는 이 귀공자를 유럽에 보내 견문을 넓히도록 했다. 물론 이런한 수학여행은 당시의 지체 높은 영국의 귀족 가문에서 유행하던 자녀교육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타운젠트는 많은 재산과 높은 학식, 그리고 고귀한 신분과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괴팍한 성격을 가진 탓으로 상류사회에서 존경받는 인격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아내가 데리고 온 귀공자의 여행 수행 가정교사를 제대로 고른 것을 보면 사람 보는 눈만은 매우 정확했던 듯하다. 당시 글래스고대학에서 도덕철학을 강의하던 실력있는 교수를 가정교사로 지목한 것이다. 경제사상사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타운젠트의 이름이 오늘날까지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은 그 도덕철학 교수가 다름 아닌 '경제학의 창시자' 아담 스미드(Adam Smith)였기 때문이다. 41 세의 대학 교수와 귀공자는 1764 년 1 월 런던을 떠나 약 3 년 동안 프랑스의 여러 도시를 여행했다. 엄청난 비용이 든 프랑스 여행에서 그 귀공자가 무엇을 배웠는지, 그리고 그러한 배움을 밑천삼아 영국 사회나 인류 문명의 발전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대학 교수 스미드는 다르다. 그는 이 공짜 여행을 충분히 활용했다. 18 세기 유럽의 지식인 사회를 휩쓸었던 자유주의, 합리주의 사상의 대가들을 만나고 프랑스의 산업 발전과 정치,경제적 변화를 직접 목격했다. 그는 파리와 마르세이유, 남부 프랑스의 학문 중심지 툴루즈 등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데이비드 흄, 튀르고, 달랑베르, 콩디악, 기본, 케네 등의 쟁쟁한 사상가들과 사귀었다. 스위스 제네바로 가서 볼테르와 만난 것도 이 때의 일이었다. 스미드는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을 출간한 철학자로서 이미 만만치 않은 명성을 얻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영국에서 온 젊은 공작의 선생이라는 높은 지위까지 겸비한 덕분에 파리 귀부인들의 살롱에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그는 졸지에 파리 사교계의 총아가 되어 고귀한 여인들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경험이 후일 <국부론>(An Ing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을 집필할 때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타운젠트가 스미드를 매우 후하게 대접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여행 수행 가정교사를 하는 동안 스미드는 3 백 파운드의 연봉을 받았는데, 이는 당시 글래스고대학 교수 연봉의 두 배에 육박하는 고액이었다. 게다가 타운젠트는 스미드가 임기를 마친 후에도 평생 동안 3 백 파운드의 연금을 지급했다. 부잣집 아들이 아니었던 아담 스미드가 평생 동안 연구와 집필에 몰두할 수 있었던 데는 연금이 실제로 큰 기여를 했다. 스미드는 1766 년 11 월 프랑스 여행을 마쳤는데 젊은 귀공자의 동생이 일행에 합류했다가 파리의 노상에서 살해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해 봄 고향인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본격적인 학문 연구를 시작했다. 그로부터 10 여 년이 지난 1776 년, 스미드는 성서 이래 가장 중요한 문헌이라고까지 하는 <국부론>을 출간했다. 대영제국이 가장 거대한 식민지를 잃어버린 아메리카 독립전쟁이 발발하기 석 달 전에 출간된 이 책은 대서양 건너가 아니라 영국 땅 자체에서 탄생한 신세계를 그려 보였다. <국부의 성질과 원인에 관한 연구>라는 따분한 제목을 가진 이 책은 초판 1 천 부가 반년 만에 매진되었다. 이것은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당시 출판계에서는 놀라운 판매 실적이었다. 아담 스미드의 사상은 매우 방대한 것이어서 한 마디로 평하기가 곤란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사상이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는 혁명적이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가장 보수적인 자본가와 정치가들이 자기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걸핏하면 스미드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을 생각하면 이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겟다. 그러나 그것은 시대가 바뀐 탓이지 스미드의 사상이 보수적인 탓은 결코 아니다. 스미드는 자의적이고 불합리한 각종의 법률과 규제를 통해 산업의 발전을 저해하고 사회적 진보를 가로막고 있던 중상주의정책을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자유방임 시장경제, 즉 자본주의 경제질서의 필연적 승리를 예언했다. 영국 사회가 이미 새로운 체제로 이행했으며, 아무도 그러한 신세계의 도래를 막을 수 없음을 선언한 것이다. 이제 스미드가 발견한 신세계가 어떠한 것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자유방임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아담 스미드는 가장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 속에서 진리를 끄집어냈다. 지금이라도 번잡스런 시장통에 나가기만 하면 누구나 스미드가 보았던 그 평범하고 일상적인 무엇을 목격할 수 있다. 그것은 아무도 계획하거나 명령을 내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필요를 느끼는 모든 종류의 재화와 서비스가 공급되고 소비된다는 사실이다. 노예를 시켜 이런저런 재화를 생산하게 하는 노예 소유자도 없고, 농노들로 하여금 한 주일에 며칠씩 자신의 장원에서 일하게 하는 봉건영주도 없으며, 아들이 아버지의 신분과 직업을 이어받아 각종의 산업에 종사케하는 낡은 관습의 힘도 사라졌고, 어떤 재화를 얼마만큼 생산할 것인지 결정하고 그에 따라 사람을 배치하는 중앙정부의 계획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재화와 서비스가 적절한 때, 적절한 양만큼 생산되어 적절한 가격에 판매된다. 예컨대 천만 명의 인구가 밀집된 도쿄나 서울, 혹은 뉴욕 같은 거대도시에서 매일 아침 소비자의 대문 앞에 신선한 우유가 배달되는 데에는 낡은 관습이나 명령따위는 불필요하다. 사람들이 아는 것이라고는 돈만 가지면 무엇이든 살 수 있다는 사실뿐이다. 이것은 마치 숨을 쉬는 일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어서 사람들은 어째서 자기가 원하는 물건이 동네 구멍가게나 슈퍼마켓 또는 백화점에 진열되어 있는지 의문을 품는 법이 없다. 그러나 인간이 이와 같은 사회에서 살게 된 것은 겨우 2 백~3 백년 전부터이다. 아담 스미드가 발견한 신세계는 바로 이런 세상이다. 그는 신분제도에 근거를 둔 낡아빠진 관습이나 중앙정부의 계획 또는 명령 없이도 사회가 필요로 하는 재화나 서비스가 생산되고 거래되고 소비됨으로써 사회가 사분오열되지 않는 이유를 체계적으로 설명한 최초의 철학자이다. 그가 경제학의 창시자라는 칭호를 얻은 것은 이 때문이다. 스미드는 자신의 신세계를 유지하는 기본원리를 '자유방임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경쟁'이라고 설명했다. 이것은 <국부론>에서 제시된 스미드의 사상 가운데 가장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핵심 내용이다. 스미드는 이기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백정이나 양조업자나 제빵업자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자기의 이익에 대한 그들의 관심 덕택에 식사를 기대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의 인도주의가 아 니라 자애심에 호소하며, 그들에게 우리 자신의 필요를 이야기하지 않고 그들 자신이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는지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산업의 모든 분야에서 모든 사람들이 애국심이나 박애정신보다 자기의 이익을 더 귀중하게 여긴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제조업자와 상인은 더 높은 이윤을 원하고, 노동자는 임금을 올리려고 하며, 농민들은 후한 값에 농산물을 처분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것이 스미드가 말하는 신세계의 전모는 아니다. 만약 이것이 전부라면 스미드의 신세계는 금방 욕심쟁이와 사기꾼들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 것이다. 그의 신세계는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욕심을 부리지 못하게 다스리는데, 그 방법은 다름 아닌 '시장에서의 경쟁'이다. 어떤 욕심 많은 구두장수가 주체할 길 없는 이기심에 이끌려 구두값을 두 배로 올렸다고 하자. 다른 모든 구두장수들이 똑같이 하지 않는한 그는 자기의 고객을 모두 경쟁자에게 빼앗기게 될 것이므로 조만간 값을 도로 내리든가 아니면 파산을 감수해야 한다. 상품시장뿐만 아니라 노동시장이나 화폐시장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역시 지나친 이기심에 사로잡힌 섬유회사 사장이나 은행가가 종업원의 봉급과 고객의 예금이자를 반으로 깎아 버렸다고 해보자. 종업원들이 다른 회사로 일자를 옮기고, 고객들이 거래처를 다른 은행으로 바꾸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중학교 수준의 사회교과서에 나오는 일물일가의 법칙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뿐만 아니다. 스미드의 자유시장은 상품의 가격과 아울러 생산량까지도 한꺼번에 결정해주는 해결사이다. 이야기를 간단하게 하기 위해 우산과 소금 두 가지만을 생산하는 경제를 가정해 보자. 그리고 어떤 원인에 의해서 소비자들이 지금 생산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우산을 원하고 소금을 더 적게 원한다고 하자. 그러면 우산값이 올라가고 소금값은 내려가서 우산공장 사장은 한몫을 잡고 소금공장 사장은 적자를 볼 것이다. 그러면 우산공장 사장은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종업원을 더 많이 고용하게 되고 소금공장 사장은 반대로 할 것이다. 소금공장을 집어치우고 우산 생산에 새로 투자하는 사람도 생길 것이다. 이리하여 우산의 공급이 늘고 소금 공급이 줄면 우산값은 다시 내려가고 소금값은 올라갈 것이다. 결국 이런 과정을 거쳐 스미드의 자유시장은 상품의 가격과 아울러 그 상품이 얼마나 생산되어야 하는지까지도 한꺼번에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자유시장의 역할이 여기에서 멈추는 것은 결코 아니다. 스미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유시장이 개인의 이기적 욕망을 '국부의 증진'이라는 사회 전체의 공동선으로 이끄는 '보이지 않는 손'의 축복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고용주가 얻는 이윤의 크기는 산업 생산물의 가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 데 자본을 투자하는 것은 오로지 이윤을 얻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고용주는 생산 물이 최대의 가치를 가지거나 가능한 한 많은 화폐량으로 교환될 수 있는 산업에 투자할 것이다...따라서 각 개인이...생산물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최대한 노력 할 때 필연적으로 그 사회의 연간 생산물을 최대화하기 위해 일하게 된다. 사실


그는 사회 일반의 이익을 증진시키려고 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얼마 만큼 그것을 증진시키는지도 알지 못한다...그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꾀 한다. 그는 다른 많은 경우에서처럼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의도하지 않았던 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사회에 해를 끼 치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오히려 그렇게 하려고 했을 때 보다 더 효과적으로 사회의 이익을 증진하는 것이다. 자유방임적 시장이 개인의 이기적 욕망 추구를 국부의 증진이라는 사회적 공동선으로 이끈다는 것은 스미드의 신념이었다. 그는 이것을 일컬어 "단순명백한 자연적 자유의 질서"라고 했다. 스미드의 이러한 생각은 사상사적으로 대단한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국부론>이 출간된 이후 산업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나 간섭 또는 규제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스미드를 끌어다 댔다. 정부는 제멋대로 굴지 말고 스미드의 충고에 따라 '작은 정부' 또는 '값싼 정부'가 되기 위해 근신하라는 것이다. 스미드는 <국부론>에서 정부가 "단순명백한 자연적 자유의 질서"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임무만을 담당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가 제시한 정부의 역할은 다음 세 가지뿐이다. 첫째 다른 독립된 사회의 폭력이나 침략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는 것, 둘째 사회 구성원들의 불의나 억압으로부터 다른 모든 사람들을 보호하는 일 또는 엄정하게 법을 집행하는 일, 셋째 공공사업과 공공기관을 세우고 유지하는 일 스미드의 자유시장은 칭찬받을 만한 장점을 충분히 지니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무결한 만능의 해결사는 아니었다. 그리고 스미드의 신세계는 자유시장의 결함으로 인해 숱한 시련을 겪었다. 우리는 자유시장의 결점과 그로 인한 신세계의 시련에 대해서 뒤에서 충분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는 일단 스미드의 업적에만 주의를 기울이기로 하자. 스미드가 살았던 18 세기 후반은 아직 산업혁명이 본격화되지 않았던 매뉴팩처(공장제 수공업)의 시대였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초기단계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스미드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핵심을 꿰뚫어 보고 그 기본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이는 무엇보다도 먼저 스미드가 명석한 두뇌와 천재적인 통찰력을 지닌 비범한 인물이었음을 입증한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점은 스미드가 그 일을 해내기에 가장 유리한 환경에서 살았다는 사실이다. 모든 위대한 사상은 시대와 상황의 산물인 법이다. 아담 스미드의 사상 또한 예외는 아니다. <국부론>의 산실, 글래스고대학 아담 스미드는 1723 년 스코틀랜드 커콜디에서 태어났다. 커콜디는 스코틀랜드 동해안의 작은 마을로서 그 일대는 소금, 못, 석탄 등의 제조업과 광업이 발달한 발트해 무역의 중심지였다. 스미드의 어린 시절은 불행의 요인을 안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렇게 불행하지는 않았다. 커콜디 세관 검사원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스미드가 태어나기 두 달 전에 사망했다. 그래서 스미드는 아버지의 이름 '아담'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아버지 아담은 상면조차 못한 아들에게 많지는 않지만 정상적인 교육을 받는 데는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유산을 물려주었다. 그는 아마 자기가 남긴 유산으로 공부한 아들이 관세에 반대하고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것을 보고 조금은 서운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들 아담이 나중에 연봉 6 백 파운드의 스코틀랜드 세관 감독관이 되었으므로 결국은 위안을 받았을 것이다. 스미드는 평생의 벗이자 헌신적인 어머니였던 마거릿 더글러스의 슬하에서 순탄하게 성장하여 커콜디 시립학교에 들어갔다. 고전과 수학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 모범생 스미드는 열네 살 되던 1737 년에 명문으로 손꼽히던 글래스고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3 년 후에는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옥스퍼드 발리올 칼리지로 유학을 떠났다. 그런데 스미드는 6 년 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하지도 않고 도중하차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옥스퍼드의 학문 풍토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후일 스미드는 <국부론>에서 "옥스퍼드대학 교수들은 몇 해째 가르치는 시늉조차 아예 그만 두었다."고 비난하고 대학에도 시장법칙을 도입하여 청강생의 수에 따라 교수 봉급을 결정하자는 과격한 제안까지 내놓았다. 아마도 당시의 옥스퍼드에서는 요즈음과 달리 매우 나태하고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실제로 스미드가 기숙사에서 근대합리주의 철학의 거두이며


경험론의 선구자인 데이비드 흄의 <인성론>(A Treatise of Human Nature)을 탐독하다 적발되어 책을 압수당하고 야단을 맞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스미드는 "발리올을 혐오하면서 그 곳을 떠났다," 그리고 옥스퍼드대학은 성서 이래 가장 중요한 문헌인 <국부론>에서 옥스퍼드를 비난한 것을 괘씸하게 생각했는지 스미드가 학자로서 크나큰 명성과 사회적 존경을 얻은 이후에도 박사학위를 주지 않았다. 스미드는 고향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독서로 소일했다. 그러던 중 그는 학자로서 명성을 떨칠 기회를 잡았다. 그것은 1748 년 에딘버러대학에서 개설한 겨울 공개강좌였다. 그는 이 강좌에서 문학과 법학을 강의하여 청강생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모교 글래스고대학의 도덕철학 교수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지금은 독립된 분야인 경제학은 그의 도덕철학 강의의 일부분이었다. 스미드는 혐오스런 발리올의 기억을 거울삼아 열심히 연구하고 강의하여 성실한 자세와 학문적 역량을 인정받았다. 대학의 재산 관리와 도서 구입을 책임지는 출납관에 이어 글래스로대학 부총장에까지 오른 것도 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였다. 그는 1759 년 <도덕감정론>을 출간함으로써 영국 상류사회와 유럽 다른 나라 지식인 사회에 이름이 알려졌다. 앞에서 등장했던 찰스 타운젠트도 그 이름을 들었다. 그래서 스미드는 프랑스 여행의 기회를 맞이했다. 스미드는 당대의 사회적 난제와 맞대결하는 진취적 자세를 가진 학자였으며, 또한 경제학자로서 매우 유리한 환경에서 살았다. 18 세기 중반의 글래스고는 철강, 피혁, 도기, 견직물 등의 제조업이 크게 번창한 데다 영연방의 식민지였던 아메리카와 유럽 각국을 연결하는 중개무역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글래스고의 인구는 스코틀랜드의 다른 지역에 비해 3~4 배 빠르게 증가했지만 글래스고는 거지가 없고 아이들가지 바쁜 도시였다. 스미드는 그 곳에서 나날이 성장해 가는 자유시장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볼 수 있었다. 글래스고대학의 자유롭고 진취적인 기풍 또한 그에게는 일종의 행운이었다 .이 대학의 분위기를 전해주는 하나의 일화가 있는데, 그것은 산업혁명의 심장 역할을 한 증기기관의 발명자 제임스 와트와 관련된 것이다. 글래스고 출신이면서 런던에 가서 수학기구 제작기술을 익힌 와트는 1758 년 고향에 와서 개업을 하려 했는데 그곳의 동업조합, 즉 길드(Guild)가 허가를 해주지 않았다. 글래스고에서 7 년이상 도제생활을 한 자가 아니면 개업할 수 없다는 길드의 규칙이 그 근거였다. 상심한 와트를 구해준 것은 바로 글래스고대학이었다. 이 대학은 그에게 학교의 천문기구 수리를 맡기고 작업실을 내주었다. 대학은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길드도 이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도덕철학 교수 스미드는 종종 와트의 작업실에 들러 대화를 나누었다. 결국 와트는 글래스고대학이 수리를 의뢰한 구식 엔진을 손보다가 착안한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1769 년에 새로운 증기기관의 특허를 따냈다. 그러나 스미드가 무엇보다 중요시한 것은 자기의 시대가 당면한 문제를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해결하려는 학자로서의 자세였다. 스미드는 학자들 사이의 추상적인 논쟁이나 학생들에 대한 강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제국을 운영하는 올바른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 연구하고 집필했다. 그는 당시의 사회체제를 뒤집어엎으려는 혁명적인 사상가는 아니었다. 그의 관심은 나라의 부 전체를 증진시키는 원리를 찾아내는데 있었다. 그리고 그같은 관심은 불가피하게 스미드의 사상이 진보적인 색채를 띠게 만들었다. '보이지 않는 손'은 공평하지 않다. 스미드는 우선 당시의 정부 각료들과 수많은 철학자들의 사고방식을 지배하던 낡은 편견과 대결했다. 그 낡은 편견이란 중상주의와 중농주의를 의미한다. 스미드는 <국부론>의 첫머리에서 부는 "그 사회의 모든 국민이 해마다 소비하는 생활필수품과 편의품의 양"이라고 규정하였다. 국민들의 연간 노동은 원래 그 국민이 해마다 소비하는 모든 생활필수품과 편의품을 공급하는 자원이며, 그 생필품과 편의품은 언제나 이러한 노동의 직접적인 생산물이거나 그 생산물로 다른 국민들에게서 구입한 물품이다. 이것은 우선 중상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다. 중상주의에 의하면 국부의 크기는 그 나라가 보유한 금과 은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 당시 유럽 여러 나라의 정부는 국부를 증진시킨다는 명목으로 관세와 규제 조치를 통해 수입을 억제하고 장려금제도나 식민지 건설을 통해 수출을 촉진시켰다. 이러한 정책은 그 나라의 소비자를 희생시키면서 상인과 제조업자에게만 막대한 이득을 안겨 주었다. 스미드는 국부를 모든 국민이 해마다 소비하는 생활필수품과 편의품의 양으로 규정함으로써, 마치 금,은의 축적이 생산의 목적인


양 간주하는 중상주의 사상의 근거를 무너뜨렸다. 아울러 그는 상공업은 이미 생산된 부를 이리저리 굴려대는 데 불과하고 오직 농업만이 부를 생산한다는 중농주의자들의 오류를 지적했다. 스미드는 글래스고의 크고 작은 공장에서 '부'가 매일매일 생산되는 것을 직접 본 사람이다. 그는 해마다 생산되는 부의 크기가 그 사회에서 생산적인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수와 노동시간, 그리고 노동의 일반적인 숙련도와 기술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이처럼 노동하는 모든 사람이 부를 창조하며, 왕실이나 귀족, 상인과 자본가의 금고에 쌓이는 금,은이 아니라 그 사회의 모든 사람이 소비하는 생활필수품과 편의품의 양에 의해 국부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다는 스미드의 견해는, 비록 완전무결하지는 않지만 분명 진보적인 철학의 표현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어떠한가? 스미드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큰 기득권을 가진 자본가들과 가장 보수적인 정치가 또는 사상가들의 스승이고 수호신이다. 그가 묘사한 경쟁적 자유시장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그의 사상은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하나의 신앙으로까지 격상되었다. 거대 독점기업을 소유하고 시장을 지배하면서 가격을 제멋대로 조작하는 재벌기업의 총수들도 모두 스미드의 숭배자들이다. 정부가 통화량과 이자율을 통제하고 때로는 임금 결정에까지 간섭하며, 수출산업과 농업에 막대한 보조금을 쏟아 붓고 방대한 재정 지출을 통해 경기를 조절하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일상적인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경제학자와 정치가와 공무원들도 거의가 자칭 스미드의 사상 가운데 사회적 조화를 강조하는 대목만을 뽑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만들어 버린 탓이다. 자신이 보수적인 지배층의 이데올로기적 대변인으로 취급받는 것을 알면 아마도 스미드는 저 세상에서 크게 화를 낼 것이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스미드 자신의 책임도 없지 않다. 왜냐하면 그가 살았던 18 세기에도 이미 자유방임시장이 완전한 사회적 조화를 이끌어 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도처에서 드러났고, 스미드 자신도 이런 점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18 세기 중반의 영국으로 돌아가 보자. 그 곳에는 이미 '보이지 않는 손'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존재하고 있었다. 18 세기 영국 인구는 어림잡아 1 천 2 백만 명 정도였는데 그 중 빈민들의 수는 2 백만 명에 육박했다. 이 빈민들은 대부분 조상 대대로 살던 땅에서 쫓겨나 도시로 흘러 든 농민들이었다. 모직물 공업의 발전으로 양모에 대한 수요가 늘자 지주들은 농민들을 몰아내고 울타리를 친 다음 그 땅에 양을 풀어 놓았다. 물론 지주들은 그 이전에 비해 몇 배의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지주들은 매우 자상했던 보이지 않는 손이 농민들에게는 매우 가혹해서 삶터를 빼앗긴 농민들을 비정한 공업도시의 한가운데로 던져 버렸다. 새로 발명된 기계 때문에 일자리를 잃어버린 수공업자들 역시 마찬가지 운명에 처했다. 그들은 하루 6 펜스짜리 일자리조차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도시의 뒷골목은 빈민과 실업자로 넘쳐 나 임금은 오를 수가 없었다. 작가 다니엘 데포가 18 세기 중엽에 럼부 형제가 세운 유명한 공장을 둘러보고 다음과 같이 개탄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1 분동안 수차 바퀴가 세 번 도는데 한 번 돌 때마다 2 만 6 천 5 백 86 개의 기계장치가 9 만 7 천 7 백 46 회 움직여 7 만 3 천 7 백 26 야드의 견사를 뽑는다. 이 공장에서 특기할 만한 일은 나이 어린 직공들이 열두 시간이나 열네 시간 씩 교대로 일하면서 24 시간 내내 기계를 돌렸고, 먼지투성이 보일러 불에 밥을 짓고, 사람의 체온으로 늘 따뜻하게 유지된다는 바라크 속에서 교대로 잠을 잔다는 사실이다. 공장만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산업혁명의 동력원인 석탄을 캐는 탄광에서는 반나체의 남녀가 뒤섞여 일했고, 열 살 미만의 어린이들까지 이름뿐인 품삯을 받는 대가로 햇빛도 들지 않는 막장에서 부모를 도와 일했다. 임산부가 석탄차를 끄는 모습이나 막장 안에서 해산하는 광경조차 그리 희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도시의 신흥 자본가들은 신세계의 도래를 예찬했고 시골의 지주 역시 흥청망청 사치를 즐겼다. 이발사 출신의 리처드 아크라이트는 획기적인 방적기를 발명한 덕택에 50 만 파운드의 재산을 모았고 대장장이 사무엘 워커는 자기의 대장간 자리에 20 만 파운드짜리 철강공장을 세웠다. 참으로 기괴하고 무질서한 사회였다. 아담 스미드는 그 괴상하고 무질서한 광경에서 보이지 않는 손의 존재를 감지했고 이기심과 경쟁이라는 시장의 법칙을 찾아냈다. 그의 철학은 근본적으로 조화론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스미드는 자기 철학의 노예는 아니었다. 그는 자기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조화롭지 않은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소수만이


점점 더 부유해지고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고통을 겪는 현실이 이 철학자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스미드는 "수많은 백성이 가난하고 비참하게 사는 한 그 사회는 결코 행복하거나 번영하는 사회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가 이런 말을 과감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겸손함과 빈민에 대한 따뜻한 동정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국부론>에서 "철학자는 천재가 아니며, 철학자와 지게꾼의 차이는 마스티프 개와 그레이하운드 개의 차이의 절반도 안된다."고 하면서 사람들의 타고난 능력은 별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사람들의 타고난 재능의 차이는 사실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다. 예컨대 철학자와 평범한 지게꾼처럼 가장 상이한 인물들 사이의 차이도 타고난 것이 아니라 관습과 교육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것 같다. 세상에 태어나 여섯 살이나 여덟 살이 될 때까지는 서로 비슷하다. 그러나, 스미드는 이 문제를 더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그는 역사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학자였으므로 사유재산권의 유래에 대해 좀 더 철저히 따져 볼 수도 있었을 것이고, 만약 그랬더라면 과격한 혁명사상의 창시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미드는 일단 사유재산권을 기정사실로 인정한 상태에서 자유시장이 결국은 대중을 빈곤으로부터 건져 낼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고 말았다. 그의 희망은 다름 아닌 노동의 분업화, 특수화로 인한 생산력의 발전으로서 다음과 같이 <국부론>에 묘사하였다. 한 사람은 철사를 잡아 늘이고, 두번째 사람은 철사를 펴고, 세번째 사람은 그것을 끊고, 네번째 사람은 끊어진 철사를 뾰족하게 만들고, 다섯번째 사람은 못대가리를 붙일 자리를 만들기 위해 한쪽 끝을 간다. 못대가리를 만드는 데도 두세 가지의 다른 작업이 필요하다. 못대가리를 붙이는 일과 못 전체를 희게 만드는 일, 그것을 포장하는 일까지도 모두 하나의 독립된 특수 작업인 것이다. 이리하여 못 제조라고 하는 중요한 업무는 약 열여덟 가지의 개별작업으로 분할되어, 어떤 공장에서는 거의 전부가 모두 다른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다...그들은 대단히 가난 하고 기계설비도 충분하지 않지만 있는 힘을 다해 일하면... 약 10 명의 직공이 하루 4 만 8 천 개 이상의 못을 만들 수 있다. 따라서 한 사람당 하루 4 천 8 백 개를 제조한 셈이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따로따로 작업하고 아무도 이 특수 업무에 대해 교육을 받지 않았다면, 그들은 분명 한 사람당 하루 스무 개의 못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며 어쩌면 단 하나도 만들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담 스미드는 모든 산업의 영역에서 생산업자들이 경쟁자들을 누르기 위해 좀 더 적은 비용이 드는 생산기술과 방법을 도입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생산의 분업화와 특수화의 수준을 그 나라의 문명 발전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로 평가하고, 이것이 인간 사회를 더 큰 풍요와 번영으로 인도할 것으로 믿었다. 문명화되고 번영하는 나라의 보통 직공이나 하루벌이 노동자의 가재도구를 보라. 그러면 아무리 조금씩이라도 이 가재도구를 조달하기 위한 노동에 종사한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예컨대 하루벌이 노동자가 입고 있는 모직 윗도리는 외견상 아무리 볼품없다 할지라도...양치기, 양모 선별공, 염색공, 방적공, 직포공, 표백공, 완성공 등의 수많은 사람들의 기술을 결합하지 않으면 만득 수 없다. 그밖에도 대단히 먼 곳에 사는 다른 노동자에게 원료를 수송하는데...얼마나 많은 조선공, 선원, 돛 제조공, 밧줄 제조공이 일했는가?...그가 입고 있는 싸구려 내의, 신발, 그가 누워 자는 침대, 음식물을 만드는 부엌의 화로, 석탄, 주방기구, 식기, 나이 프와 포크...이러한 모든 것을 점검하고 하나하나에 얼마나 많은 종류의 노동이 사용되 었는지 따져 보면, 문명국가의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가장 평범한 가재도구를 제공하는 데조차 수천 명의 도움과 협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부자의 사치에 비하면 그의 가재도구는 극히 단순한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한 왕후의 가재도구가 부지런하고 순박한 농민의 가재도구보다 얼마나 더 좋든, 그


농민의 가재도구도 일만 명의 벌거벗은 야만인의 생명과 자유를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아프리카 제왕의 것과 비교하면 훨씬 더 낫다는 것이 진실이리라. 요컨대 자유방임시장이 당장 모든 사람을 풍요롭게 해주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문명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시간이 걸리겠지만 결국은 사회 맨 밑바닥의 가난한 이들조차 언젠가는 자유방임시장의 혜택을 입게 되리라는 것이 스미드의 소신이자 희망사항이었던 것이다.

상인과 제조업자들을 믿지 말라 아담 스미드의 신세계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크게 매력적이지 못했던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부자들을 편애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 국민경제의 성패가 자기 어깨에 달린 것처럼 행세하는 경제인들, 즉 대자본가들이 알면 매우 섭섭하게 생각할 일이지만, 스미드는 사업하는 사람들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공의 이익을 도둑질하여 자기 호주머니를 불리려 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정부에 대해서는 그들을 믿지 말라고 충고했다. 같은 업종의 사업가들이 오락을 즐기거나 기분 전환을 위해 모이는 경우에서조차도, 그들 사이의 대화는 결국 공중의 이익을 해치는 음모나 가격을 올리려는 모종의 책략 으로 모아진다. 어떤 부문의 상인 또는 제조업자의 이익은 어떤 면에서 공공의 이익과 다르며, 때로는 반대되는 경우까지 있다...경쟁을 제한하는 것은 언제나 업자들에게 이익이 된다...그러므로 이 계급이 제출하는 상업에 관한 어떤 새로운 법률이나 제안도...주의 깊게 검토한 후가 아니면 채택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일반적으로 공중을 속이고 억압하는 것까지 그들에게 이익이 되고, 또 이제까지 그런 짓을 해온 계급에서 나온 제안이기 때문이다. 스미드는 또한 생산된 부의 분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계급투쟁에 주목했다. 그는 자신의 신세계에서 계급투쟁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양상을 냉정하게 분석했다. 물론 스미드는 두 진영 가운데 한편을 옹호하지는 않았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그는 가난한 사람의 대변인이 아니었지만 동시에 부자의 앞잡이도 아니었다. 그러나 스미드가 <국부론>에서 당시의 계급투쟁을 묘사한 것을 보면 "국가는 부르주아지의 일상사를 처리하는 위원회에 불과하다."는 [공산당선언]의 한 귀절을 저절로 떠올리게 된다. 어느 곳에서나 임금은 그 이해관계가 상반되는 두 집단 사이의 계약에 의해 결정된 다. 노동자들은 가능한 한 많이 받으려 하고 사용자는 최소한으로 주려 한다. 그러나, 보통의 분쟁에서 어느 쪽이 유리한 지위에서 상대방을 자기의 조건에 따르 도록 만들 수 있는가를 예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사용자들은 소수이기 때문에 훨씬 손쉽게 단결할 수 있다. 또 사용자들의 단결은 법률적으로 정당하거나 최소한 금지되 지 않는 반면 노동자들의 단결은 금지된다. 의회는 임금을 낮추기 위해 단결하는 행위 를 결코 반대하지 않는다. 모든 분쟁에서 사용자들은 좀더 오랫동안 버틸 수 있다. 지주, 농업자, 공장제 수공업자, 상인들은 이미 벌어 놓은 재화로 한두 해는 견딜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일자리가 없이는 대부분 일 주일도 버티지 못하며, 한 달 버 틸 사람은 별로 없고, 일 년을 버틸 자는 거의 없다...사용자들은 임금을 올리지 않기 위해 언제 어디서나 암묵적이지만 일사불란한 단결태세를 갖춘다...그들은 종종 특별히 단결하기도 하다. 이러한 행위는 항상 실행되는 순간까지 매우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이루어져, 아무런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굴복한 노동자들에게는 뼈아픈 일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무 소문도 듣지 못한다. 그러나 그런 단결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자기방 위적 단결은...언제나 시끄럽다. 그들은 필사적이다. 굻어 죽든가 아니면 사용자로 하여 금 자신들의 요구를 즉각 받아들이도록 위협해야 하는 필사적인 싸움에서 그들은 어리 석고 방종스럽게 행동한다. 이럴 경우 사용자들은 즉각 상대방을 강력하게 비난하면서,


치안판사가 나서서 하인, 노동자, 직인들의 단결행위를 탄압할 목적으로 제정된 가혹한 법규를 시행하라고 요구한다...노동자들의 단결은 보통 아무런 성과도 없이 주모자들이 처벌받고 파멸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여기서 스미드는 생산된 부의 분배과정에서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투쟁이 벌어질 수 밖에 없고, 부와 권력을 가진 자본가계급이 한층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명백히 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아담 스미드가 발견한 훌륭한 신세계는 결점 없는 파라다이스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주의 정부의 불합리하고 자의적인 전횡에 맞서 합리성과 질서의 필연적인 승리를 예언하는 세계관의 일대 전진이었다. 이기심과 경쟁의 상호작용이 사회를 이끌어 간다는 것을 지적한 사람은 스미드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 누구도 시장이 어떻게 사회를 유지시키는가를 전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나라의 부와 대중의 생활을 발전적으로 촉진시키는 이론을 확립하지는 못했다. 아담 스미드의 인간적 면모와 그의 사상이 남긴 것 아담 스미드는 <국부론>을 저술한 이후 철학자, 사상가, 경제학자로서 최고의 명성과 영예를 누렸다. 그는 찰스 타운젠트가 지급하는 3 백 파운드의 연금에다 스코틀랜드 세관 감독관 연봉 6 백 파운드를 합쳐 연간 9 백 파운드를 벌어 들이는 고소득자가 되어 에딘버러로 주거를 옮겼다. 스미드는 평생 독신으로 지내면서 공부에만 열중했는데, 말년에는 어머니와 사촌누이와 함께 살았다. 그러나 1784 년 어머니가 죽고 4 년 뒤에는 사촌누이 미스 더글러스마저 세상을 떠나 스미드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점차 허약해졌다. 1787 년 겨울, 그는 모교인 글래스고대학 총장에 선임되어 마지막 행복을 누리기도 했지만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1790 년 7 월 마침내 67 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다. 그가 눈을 감은 에딘버러의 집은 오늘날까지 '아담 스미드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아담 스미드의 인간적 면모는 매우 특이한 데가 있다. 그는 자기의 귀중한 장서를 자랑하면서 "나는 이 책들의 애인일 따름이다."고 한 적이 있는데 사실이었다. 물론 스미드는 젊은 시절 어떤 아름다운 여성과 결실을 맺지 못한 사랑 때문에 아픔을 겪기도 했고, 파리 귀부인들의 살롱에 드나들 때 몇몇 여인들의 사랑을 받은 적도 있지만 결국 결혼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독서와 집필에만 몰두했는데 외견상 지성적인 풍모르 지니지는 않았다. 두툼한 아랫입술과 큼직한 매부리코, 부리부리하게 튀어나온 눈, 약간 구부정하고 우물쭈물한 걸음걸이, 초상화에 나타난 스미드의 외모는 이런 것이다. 겉모양만 그런 것이 아니라 행동까지도 별난 데가 있었다. 로버트 헤일브로너라는 학자는 <위대한 경제학자들>(The Worldly Philosopher)이라는 책에서 아담 스미드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정신 나간 사람으로 유명했다. 스미드가 60 세에 가까웠던 1780 년경 에딘버러 주민들은 엷은 색 상의와 무릎까지 오는 바지를 입고 흰색 비단 양말에 장식이 달린 구두를 신은 유명한 시민을 규칙적으로 보았을 것이다. 챙이 넓고 얇은 정장용 모자에 단장을 짚고 허공을 쳐다보며 무슨 말을 하는 양 입술을 움직이며 걸어가는 것이다... 그의 걸음걸이를 두고 어떤 친구는 지렁이가 움직이는 것 같다고 한 적이 있다...어떤 때는 잠옷만 입고 정원을 거닐다가 그만 명상에 빠져 정신이 들 때까지 몇 마일이나 걸어가기도 했다. 또 한번은 어떤 지위 높은 친구와 에딘버러 거리를 거닐고 있는데 경비원이 창을 들어 경례를 했다. 스미드는 전에도 이런 경례를 많이 받아 보았는데도 마치 최면술에 걸리기라도 한 듯 자기의 지팡이를 들어 답례를 하고서는, 그 경비원을 뒤따라다니면서 경비원이 창으로 하는 짓을 일일이 흉내내어 친구를 놀라게 했다. 정신이 들었을 때 그는 친구보다 훨씬 앞에 서서 단장을 번쩍 들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가 이상한 짓을 한 것을 알 리 없는 그는 단장을 내리고 하던 이야기의 끝을 이어 갔다. 그러나 스미드는 결코 괴짜가 아니었다. 그는 매우 진지하고 성실하며 온화하고 낙관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이성의 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로서 손색없는 인품을 지닌 학자였다. 1764 년 귀공자의 가정교사로서 프랑스 여행을 떠나기 전 마지막 강의 시간에 있었던 일은 그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스미드는 강의를 마친 후 고별사를 하면서 청강생들에게 수강료를 되돌려 주었다. 강의를 중간에 마치는


데 따른 조치였다. 학생들은 이것을 단호히 거절하면서 이미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가르침을 받았노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미드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학생들의 마음을 충분히 알고 감명을 받았지만 내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니까 나를 괴롭게 하지 말기 바랍니다." 스미드는 학생들의 호주머니에 수강료를 억지로 밀어넣었고 학생들은 쓸데없이 선생님을 괴롭히지 않으려면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둘 수 밖에 없었다. 또 하나의 유명한 일화는 죽음을 맞이하는 그의 태도였다. 1790 년 6 월 건강이 극도로 나빠졌을 때 스미드는 병문안을 온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한 일은 정말이지 조금밖에 없어. 더 많이 일했어야 했는데 말이야. 내 서류 속에는 굉장히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자료가 있지만 이제 아무 소용이 없네." 그는 자신이 회복될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친구들에게 자기가 죽으면 미완성 원고와 자료를 태워 버리라고 부탁했다. 친구들은 스미드의 당부가 워낙 진지하고 간절했기 때문에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그러겠노라고 약속을 하여 그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스미드는 죽음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친구에게 자기가 보는 데서 그것을 불태워 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해서 스미드가 가지고 있던 10 여권의 노트는 한 줌의 재가 되었고, 그는 그제서야 안도의 빛을 보였다. 스미드는 1790 년 7 월 7 일 약 3 천 권의 장서와 약간의 재산을 남긴 채 영원히 눈을 감았다. 아담 스미드는 죽었지만 그의 사상은 그렇지 않았다. <국부론>은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어 등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스미드 사후 20 여 년간 발췌본, 번역본을 합쳐 약 60 종이나 출판되었다. 그의 사상은 인류의 귀중한 유산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박물관의 창고에 갇혀 있지 않았다. 조화론적 세계관을 정립하고서도 조화롭지 않은 현실사회의 계급투쟁을 직시한 그의 사상은 제자들에게 계승되면서 적대적인 두 갈래의 사상으로 분열되었다. 모두 아담 스미드의 제자임을 자처하는 두 진영의 사상가들을 공히 스승의 사상 가운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취하고 원하지 않는 것은 냉정하게 배격해 버렸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아담 스미드는 나라의 부를 "그 사회의 모든 국민이 해마다 소비하는 생활필수품과 편의품의 양"으로 규정하고 그 부의 원천이 "국민들의 연간 노동"이라고 했다. 이것은 이른바 노동가치론에 대한 가장 초보적인 설명이다. 스미드는 <국부론> 제 1 편에서 "세상의 모든 부의 가치는 근본적으로 금이나 은에 의해서가 아니라 노동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하고, 어떤 상품이 가치를 지니려면 그것이 반드시 인간 노동의 산물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더 나아가 "상품의 교환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데 투입된 노동량에 의해 규정된다."고 했다. 다음은 노동가치론의 단초를 제공한 <국부론>의 유명한 문장이다. 사냥꾼의 세계에서 만약 물개 한 마리를 잡는 데 필요한 노동이 사슴 한 마리를 잡는 데 필요한 노동의 두 배라면, 한 마리의 물개는 당연히 두 마리의 사슴과 교환 되고 그만한 가치가 있어야 한다. 이틀 또는 두 시간의 노동은 당연히 하루 또는 한 시간의 노동생산물의 두 배 값어치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스미드는 이같은 원리는 자본가나 지주가 없는 미개한 사회상태에서만 타당하다는 이유로 노동가치론을 포기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는 기계설비 같은 생산의 조건이 다르면 같은 양의 노동에 의해서도 생산물의 양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미드의 노동가치론은 리카도를 거쳐 마르크스에게 계승되면서 자본가계급을 타도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사회주의 혁명운동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으로 발전하다. 스미드는 <국부론>에서 가치의 원천과 관련된 또 하나의 중요한 이론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그가 자유방임시장에 대한 외부의 간섭이 '자연적 자유의 질서'르 해친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은 자유시장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거래, 즉 교환은 그것이 강압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한 교환의 두 당사자가 모두 이익을 얻을 때에만 성립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스미드 자신은 서로 다른 상품이 교환될 수 있는 이유를 두 상품 사이의 공통점, 즉 그것이 인간 노동의 산물이라는 데서 찾으려는 노력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스미드가 세상을 떠난 후 나타난 그의 제자들은 스미드의 노동가치론은 완전히 배격하고 스미드의 사상에서 서로 다른 상품 사이의 교환은 가능하게 하는 또 다른 공통점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상품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성질, 즉 효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이것을 근거로 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영원히 번영하는 최상의 질서임을 확신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스미드의 사상에서 각자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만을 계승한 두 진영의 경제학자들은 서로 '부르주아계급의


앞잡이' 또는 '과학자가 아닌 증오의 전령사'라느 비난을 퍼부어댔다. 우리는 뒤에서 그 두 진영의 중요한 사상가들에 대해 하나하나 살펴보게 될 것이다.

2. 대중의 빈곤은 신의 섭리이다 (토마스 로버트 맬더스 목사의 암울한 세상) 가난한 사람들을 후려친 '보이지 않는 손'의 저주 스미드의 신세계가 그 치명적인 결함을 드러내는 데는 그리 긴 세월이 필요하지 않았다. 스미드는 국부를 증진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인 시대에 살았다. 그러나 부의 분배를 둘러싼 계급투쟁으로 신세계가 전례 없이 소란스러워진 18 세기 말엽에는 사회 경제적 불평등과 대중의 빈곤이 가장 큰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철학자들은 이러한 사태에 대한 나름의 진단과 처방을 내렸으며, 유럽 각국의 의회와 지식인 사회는 누구의 처방이 옳은 지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에 휩쓸렸다. 스미드는 사유재산권을 인정하고 자유시장을 옹호하면서도 노동의 분업화, 특수화를 통한 생산력의 발전이 대중을 빈곤으로부터 구해 낼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스미드의 희망은 짧은 기간에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그가 사망한 이후 상황은 훨씬 더 악화되었다. 양모 생산을 늘리기 위해 농토에서 농민들을 추방한 엔클로저운동은 1760 년 이후 훨씬 급속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을, 그저 지주들이 농민들에게 토지임대가 끝났음을 통고하고 일꾼들을 시켜 울타리를 치는 그런 식의 거래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농토를 목장으로 바꾸기만 하면 두세 배나 많은 임대료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지주들은 수백 년간 살아온 터전을 지키려고 저항하는 농민들을 말 그대로 "쓸어내 버렸다." 당시 인구통계가 정확치 않기 때문에 엔클로저운동이 얼마만한 수의 농민을 쓸어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니 이 운동의 가장 악명 높은 주역으로 정평이 난 스코틀랜드 서덜랜드의 공작 부인이 자기 땅의 농민들을 어떻게 제거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하자. 이 사례는 탁월한 경제학자인 동시에 또 그만큼이나 뛰어난 역사학자였던 칼 마르크스(Karl Marx)가 <자본론>에서 묘사해 둔 것이다. 경제에 대해 많이 배운 이 인간은...같은 과정을 거쳐 이미 인구가 1 만 5 천 명으로 줄어든 그 지역 전체를 목장으로 바꾸기로 결심했다. 1814 년에서 1820 년 사이에 이 주민들은 조직적으로 제거되었다. 그들이 살던 마을은 모두 파괴,방화되었고, 그들이 경작하던 땅은 남김없이 목장으로 바뀌었다. 이 추방작업을 실시한 영국 군인들은 주 민들과 충돌했다. 자기의 오두막에서 떠나기를 거절한 한 할머니는 오두막과 함께 타 죽었다. 이렇게 하여 이 훌륭한 귀부인은 아득한 옛날부터 자기 가문에 속해 있던 79 만 4 천 에이커의 토지를 사유했다. 땅에서 추방당한 농민들은 맨손을 쥐고 끝없이 공업도시로 흘러 들었다. 그들을 기다린 것은 가난만이 아니었다. 목가적인 농촌생활과 매뉴팩처 시기의 가족적 분위기 대신 냉정하고 무자비한 기계와 더러운 빈민가의 생활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19 세기 중엽의 영국을 예로 들자면 전인구의 1/3 이 도시에 살게 되었다. 그런데 그 도시라는 것이 도무지 사람 살 곳이 아니었다. 하늘은 시커먼 매연으로 뒤덮여 있었고, 뒷골목에는 치우지 않은 쓰레기가 넘쳐 흘렀다. 식수를 공급하거나 쓰레기를 수거하는 등의 공공 서비스는 급속한 도시인구의 팽창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콜레라와 장티푸스가 주기적으로 밀어닥쳤고, 물과 공기는 오염되어 호흡기와 소화기 질환이 급증했다. 스미드의 '보이지 않는 손'은 국부를 증진시켰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문명화된 야만의 상태'에 집어 던졌다. 그가 살았던 글래스고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영국 정부의 한 보고서는 글래스고의 한 노동자 주거지역 실상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1 만 5 천~3 만 명이 사는 그 지역은 좁다란 길과 네모꼴의 구획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 각 구획 사이에 쓰레기 더미가 있었다. 이곳은 겉보기에도 무척 역겨웠지만 그 내 부의 불결함과 비참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밤에 합숙소를 찾아가니 마룻바 닥에 사람들이 빽빽이 누워 있었다. 보통 열다섯 내지 스무 명의 남녀가 옷을 입기도


하고 벗기도 한 채 뒤엉켜 누워 있었다. 가구라고는 전혀 없었고, 사람 사는 곳임을 알려주는 것은 벽난로의 불꽃뿐이었다. 이런 사람들의 주된 수입원은 도둑질과 매춘 이었다. 새로운 발명은 노동자들에게 또 다른 재앙이었다. 새로운 기계들은 노동자들을 단순한 부속물로 전락시켜 극히 간단하고 규격화된 작업만을 강요했다. 그리고 고용주들은 다루기 힘든 남자들 대신 여성과 어린이를 싼값에 고용했다. 가부장제 아래에서 길들여진 여성과 아이들은 최악의 근로조건에서 일하면서도 변변한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특히 어린이들에 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당시 영국 정부는 빈민구제법에 의해 빈민의 자녀를 수용하였는데, 자본가들은 이 어린이들을 선도하고 열심히 일하는 습관을 길러주기 위해 정부로부터 넘겨 받았다. 그러나 이 어린이들이 빈민구제라는 훌륭한 명분 아래 받은 혜택은 하루 14 시간 이상의 긴 노동과 20 분간의 짧은 식사시간이었다. 기계장치에 휘말려 손발이 잘리고 관리자들에게 심심풀이로 린치를 당해 불구가 된 어린이들의 이야기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그리 희귀한 것은 아니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여기서도 한 가지 사례를 들자. 다음은 1833 년 영국 의회에 제출된 아동 고용에 대한 보고서의 일부이다. 이 보고서에서 열한 살짜리 소년 토마스 클라크는 이렇게 증언했다. 우리가 졸 때는 그들이 가죽끈으로 때렸습니다...나는 6 시 조금 못되어서, 때로는 5 시에 공장에 나가 밤 9 시까지 계속 일하는 것이 보통입니다...하룻밤을 꼬박 일했으 며...우리는 스스로 그렇게 했습니다. 돈을 벌고 싶었으니까요. 그저께는 아침 6 시부터 ...다음날 밤 9 시까지 계속해서 일했고...나는 지금 밧줄공장에서 일합니다...내 동생이 나를 돕고 있습니다. 그 애는 꼭 일곱 살입니다. 나는 그 애한테 아무것도 안 주는데... 만약 내 동생이 아니라면 일 주일에 1 실링씩 줘야 합니다...나는 아침 6 시에 그 애를 데려가서 밤 8 시까지 데리고 있습니다. 절망에 빠진 노동자들은 이 모든 가난과 고통을 기계 탓으로 돌려 도처에서 궐기했다. 그들은 공장과 기계를 때려 부수고 폭동을 일으켰다. 노동자들 사이에는 '루드'라는 장군이 그 싸움을 이끌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 이 절망적 저항운동은 '러다이트운동'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이같은 기계파괴운동은 군대의 발포와 주모자들의 처형 이외에 아무런 이익도 가져다 주지 않았다. 그러나 달리 저항할 방법을 찾지 못한 노동자들은 19 세기 벽두부터 약 50 여 년간, 그들이 노동조합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이라는 새로운 길을 찾을 때까지 기계제 대공장이 들어선 모든 산업중심지에서 기계파괴운동을 계속하였다. 마침내 스미드의 자유시장에 대한 사상적 공격이 시작되었다. 최초의 의미있는 공세를 펼친 사람은 프랑스인 콩도르세와 영국인 고드윈이었다. 그들은 자유시장의 결함에 대한 다소 온건한 보완책을 권고하거나 그것을 근본적으로 파괴해야 한다는 과격한 급진주의를 표방했다. 그러나 이러한 공격은 거의 동시에 만만치 않은 반격을 초래했는데, 그 반격의 선봉장이 바로 토마스 로버트 맬더스였다. 콩도르세는 프랑스 대혁명에 열렬히 참여했던 과격한 철학자인데, 로베스 피에르와 한바탕 설전을 벌이고 도망쳐 숨어 지내면서 <인간사상의 진보사 개요>라는 유명한 책을 썼다. 그는 유럽의 불평등한 사회 현실에 주목하면서 "인류가 도덕적 정신적으로 좀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사회 경제적 평등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같은 원대한 이상에 비해 그가 제시한 사회개혁의 방법은 상당히 온건하고 자상한 편이었다. 생활능력이 없는 과부와 고아와 노인들의 복지를 위해 기금을 설치한다거나, 일반 노동자들이 자본가들로부터 독립할 수 있도록 은행 신용을 지원한다든가 하는 그의 개혁안은 오히려 지나치게 미지근한 느낌마저 준다. 그렇지만 당시 상황에서 이러한 주장은 자유시장의 자연적 질서를 침해하는 과격사상의 일종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고드윈은 콩도르세보다 훨씬 더 멀리 나갔다. 그는 <정치적 정의가 일반적 도덕과 행복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라는 긴 제목을 가진 책에서 사유재산제도를 맹렬히 공격하고 부자들의 이익만을 옹호하는 정부에 대해서도 포화를 퍼부어댔다. 그는 정부와 법률을 폐지하고 사유재산과 사회계급을 철폐함으로써 경제,사회,정치적 평등을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공상적 사회주의와 낭만적 무정부주의를 겸비한 이 과격한 사상가는 지나친 열정에만 사로잡혀 있었을 뿐 그 목표를 이루는 방법에 대해서는 뾰족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현재 상태의 해악을 충분히 깨닫게 되면" 자기의 제안이 유일한 해결방안임을 인정하게 되리라는 확신을 표명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두 사람의 사상은 유럽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자유시장에 대한 이들의 어설픈 공격은 즉각 그보다 몇 배나 강력한 반격을 초래했다. 그 반격은 1798 년 어느 날 영국 길드호드 근교 앨버리가에 있는 다니엘 맬더스 목사의 한적한 거실에서 시작되었다. 루소의 철학을 신봉하는 이상주의적 개혁주의자로서 평소 가난한 이웃을 잘 보살펴주기로 정평이 나 있던 다니엘 맬더스 목사는 최근 유행하고 있는 개혁사상에 대해 아들과 토론을 벌였다. 그런데 그는 자신과 아들이 거의 모든 면에서 견해가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무척 놀랐다. 아들의 견해는 무척 논리적이었지만 지나치게 비관적인 결론으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인정 많은 목사는 선뜻 찬성해 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들이 인간 사회의 미래에 대한 의미 있는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러한 견해를 출판해보라고 권했다. 아들은 아버지의 권유를 받아들여 서재로 들어가 집필을 시작했다. 토마스 로버트 맬더스의 <인구의 원리에 관한 에세이>, 즉 <인구론>은 이렇게 해서 세상에 나타났다. 이 책은 '고드윈과 콩도르세, 기타 저술가의 연구를 논평하면서 장래의 사회 개선에 미치는 영향을 고찰함'이라는 긴 부제를 달고 익명으로 출판되었다. 빈곤은 인구법칙이 내린 불가피한 운명이다 <인구론>이 전하는 메시지는 그야말로 단순명백한 것이었다. 맬더스는 고드윈과 콩도르세의 고결하지만 터무니없이 비현실적인 사회개혁론을 비판하면서, 인간 사회는 언제나 필연적으로 부유한 소수와 빈곤한 대중으로 나뉠 수 밖에 없으며 대중을 빈곤으로부터 구제하려는 모든 고매한 노력도 결국은 허사가 되거나 오히려 유해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인구론>의 곳곳에서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했다. 이기심이 아닌 박애정신이 삶의 동기이고, 강압이 아닌 이성에 의해 모든 사악한 성향이 바로잡혀지는...사회라 할지라도, 인간이 원래 사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의 필연적인 법칙 때문에 머지 않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세계와 본질적으로 같은 사 회로 타락해 버리고 말 것이다. 이것은 자산계급과 노동계급으로 구분되고 이기심이 거대한 기계의 동력인 그런 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인간 재능의 모든 고상한 업적과 좀 더 섬세하고 세련된 감성, 야만과 문명을 구별 해 주는 모든 것은 재산권의 확립과 엄격한 이기심의 원리 덕분이다...이 <인구론>의 의의가 오로지 유산계급과 노동계급의 필연성을 증명해 내는 데 있는 것임을 간과해서 는 안된다. 맬더스는 이기심을 원동력으로 하는 스미드의 자유방임시장 원리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노동의 분업화와 특수화에 의한 생산력 발전이 대중을 빈곤으로부터 구제해 줄 것이라는 스미드의 희망을 그는 냉정하게 부정했다. 그래서 스미드의 경제학은 '희망의 과학'이었지만 맬더스의 경제학은 '음울한 과학'이 되었다. 그러나 맬더스가 아무 논리적,실증적 근거도 없이 계급적 불평등을 옹호하고 대중에게 가난이라는 숙명을 선고한 것은 아니다. 인류의 암울한 미래에 대한 그의 호언장담은 이른바 '인구법칙'의 강력한 후원을 받고 있었다. 인구법칙은 중학교 수준의 사회교과서에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식으로 설명되어 있는데, 맬더스 자신의 설명은 이러했다. 세계 인구의 총수를 1 억이라고 가정할 때, 인구는 1, 2, 4, 8, 16, 32, 64, 128, 256 의 비 율로 증가하지만 식량은 1,2, 3, 4, 5, 6, 7, 8, 9 의 비율로 증가한다. 이렇게 될 경우 2 백년 후 인구와 식량의 비율은 259:9, 3 백년 후에는 4096:13, 그리고 2 천년 후에는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커진다. 이것은 무서운 이론이다. 인간은 그 누구도 식량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만약 어떤 시점, 어떤 사회에서 인구가 식량 생산에 비해 현저하게 증가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물론 과잉인구가 줄어들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그 일이 진행될 것인가? 맬더스의 대답은 명확하다. 전쟁과 살육, 자연재해와 기근,


전염병... 실로 끔찍하고 절망적인 과학이다. 맬더스의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종족보존의 본능, 즉 성적욕망의 충족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풍요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해야 한다. 인간의 성욕이 포기될 수 없는 본능으로 남아 있는 한 대중의 빈곤과 비참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맬더스의 인구이론이 당시 영국 의회와 지식인들에게 폭탄 같은 충격을 안겨 준 것은, 이것이 막연한 예언이 아니라 과거에 여러 번 일어났고 오늘날에도 벌어지고 있는 실제 상황을 잘 설명해 주는 현실적인 이론이기 때문이다. 인도와 방글라데시, 아프리카 내륙 국가 등에서 맬더스의 인구법칙은 아직도 위력을 떨치고 있다. TV 를 통해 홍수나 가뭄, 전염병과 병충해의 습격 앞에 속수무책으로 신음하고 죽어가는 이 지역의 어린이들 모습을 보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맬더스의 음울한 과학을 떠올리게 된다. 맬더스 시대에 있었던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아일랜드 대기근'이다. 영연방의 일부인 아일랜드 인구는 1780 년부터 급속하게 늘어나 1840 년경에는 두 배에 가까운 8 백만 명이 되었다. 이같은 인구 증가는 아일랜드 지역의 감자 생산량이 급속히 증가한 덕분이었다. 그런데 1845 년부터 내리 3 년에 걸쳐 아일랜드의 감자밭이 폐허로 변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고온다습한 기후 때문에 발생한 역병균이 감자를 전멸시켜 버린 것이다. 맬더스가 예언한 최악의 사태는 언제 어디서나 그러하듯 갑자기 아일랜드를 덮쳤다. 영국 정부로서는 아일랜드 사태가 하나의 골칫거리였다. 곡물 수입을 자유화했으나 가난한 아일랜드 농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구호양곡을 지급하는 것은 사기업의 이익을 침해하여 자유시장의 거래를 마비시킬 '위럼성' 때문에 거부되었고, 공공 구제사업 역시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은 자연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에 취소되었다. 이렇게 되자 아일랜드의 과잉인구는 모두 굻어 죽거나 병들어 죽거나, 아니면 최후의 탈출구인 아메리카로 가기 위해 목숨을 걸고 대서양을 건넜다. 이리하여 아일랜드의 문제는 --- 당시 재무차관이었던 트리벨리언의 표현을 빌면 ---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므로 전능하신 하느님 스스로 손을 써,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또 짐작도 할 수 없었으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방법으로 치료해 주셨다." 물론 유럽의 산업국가들은 맬더스의 예언처럼 되지 않았다. 영국의 경우에도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긴 했지만 산업화된 도시인구의 자연증가는 결코 폭발적이지 않았다. 산업혁명이 본격화되면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 핵가족화 현상이 시작되었고, 의학의 발달로 사망률이 감소했지만 사람들은 자녀를 점점 적게 낳았다. 인구통계에 의하면 영국 인구는 18 세기 이전까지 1 백 년에 약 1 백만 명씩 증가했다. 그런데 18 세기 1 백년 동안에는 무려 3 백만 명이 늘어났다. 이것은 현존하는 각종 관련 자료를 볼 때 출생률의 증가보다는 주로 이미 태어난 사람, 특히 어린이 사망률의 감소에 따른 결과였다. 맬더스식으로 말하자면 각종 질병의 원인과 치료약을 개발한 과학자와 의사들은 고상한 마음씨를 가진 탓으로 인간 사회에 엄청난 피해를 준 셈이다. 그러나 맬더스의 사상은 사회 지배계급의 이익에 부합되는 것이어서 순식간에 그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으로 자리잡아 갔다. 그 전에는 인구의 증가를 국부 증진의 표현으로 간주하고 기뻐했던 많은 정치가들이 맬더스의 추종자로 개종했다. 대중의 빈곤을 걱정하고 사회개혁을 열렬히 주장하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맬더스가 사람들을 모조리 '반동분자'로 만들어 놓는다고 불평했다. 그들은 맬더스의 철자를 바꾸어 '사악한 괴물'이라는 뜻을 가진 '몬스터(Monster)'라고 불렀다. 사실 생전에 이만한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은 철학자는 별로 없다. 아마도 칼 마르크스만이 그를 능가한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자비심은 재앙을 부른다 맬더스는 인구법칙을 배경삼아 사회개혁론자들의 주장을 구체적으로 공격했다. 그는 노동자들을 불행으로부터 건져 내기 위해 소득을 높여 주어야 한다는 이상주의자들의 견해를 "무익할 뿐만 아니라 유해하기까지 한" 이론으로 규정했다. 이것은 그로서는 당연한 주장이었다. 만약 자본가와 정부가 이들의 고매한 의견에 감복하여 노동자들의 임금을 대폭 인상해 주었다고 하자. 그러면 그들은 더 많은 자녀를 낳아 양육할 능력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 그 아이들은 모두 성인이 되어 노동시장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노동의 공급이 증가하면 반드시 임금은 하락한다. 과잉인구가 존재하는 한 임금은 계속 하락하여 마침내 최저생활 수준 아래로 떨어진다. 그렇게 되면 노동자들은 모두 질병과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고 그 결과 노동 공급이 줄어들면 임금은 다시 최저생활 수준으로 회복된다. 요컨대 인간의 성욕이 절제되지 않는 한 노동자의 임금은 항상 최저생활 수준 주변을 맴돌 뿐이라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소득을 높여 주려는 모든 시도는 그 동기가 고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장차 그들에게 더 큰 재앙을 안겨 줌으로써 오히려 유해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는 맬더스의 이론이 '사심 없는 과학적 탐구의 소산'인 것처럼 보인다. 인구법칙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 한, 이 법칙을 밝혀낸 것이 크나큰 업적은 될지언정 비난의 근거는 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진단이 아니라 처방에 있었다. 그는 마치 복통 환자의 병을 정확히 진단해 놓고서는 팔짱을 끼고 한참 생각하다가 "아프기는 하지만 죽지는 않을 테니 그냥 살아봐요" 하고 말하는 냉혹환 의사와 같았다. 인구법칙이 인간에게 가하는 고통과 재난을 더없이 실감나게 설명해 놓고서는 그 재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산아제한에는 한사코 반대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산아제한에 반대한 이유가 무척 기묘했다. 그는 그 이유를, 지나치게 과격한 표현을 다듬어 자기의 이름으로 출판한 <인구론> 제 2 판에서 이렇게 밝혔다. 산아제한을 할 정도로 난잡한 성적 교제는 인간 본연의 품위를 가장 현저하게 떨어 뜨리는 것 같다. 남자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특히 여성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또 그 온 화하고 여성다운 성품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 맬더스는 불임이나 산아제한 또는 성욕의 절제를 통해 출생률을 낮추는 것을 '예방적 억제'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는 인위적인 산아제한에 찬성하지 않았고, 또 성욕을 절제할 수 있는 것은 도덕적으로 훌륭한 미덕을 갖춘 사람들뿐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실효성 있는 인구증가 억제방법은 사망률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맬더스는 사망률을 높임으로써 인구증가율을 낮추는 것을 '적극적 억제'라고 불렀다. <인구론> 제 2 판에서 맬더스는 이 '적극적 억제'를 권장하는 다음의 유명한 문장을 남겼는데, 그를 혐오하는 사람들은 후일 두고두고 이 대목을 써 먹었다. 적어도 식량이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몫으로 나누어진 후에는 생존수단의 증가율 이 어떠하든, 이것에 의해 인구증가가 억제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수 준을 넘어서 태어난 아이들은 성인의 사망에 의해 여유가 생기지 않는 한 반드시 죽어 야 한다...그러므로 죽음을 가져오는 자연의 작용을 헛되고 어리석게 방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쉽게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기근이라는 무서운 형태의 재난을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자연을 위해 다른 형태의 파멸을 부지런히 준비해 두어야 한다. 빈민에게는 청 결함을 권고하지 말고 그 반대의 습관을 장려해야 한다. 도시의 거리는 더 좁게 만들 고 집집마다 더 많은 사람이 북적거리게 하고 전염병이 잘 돌도록 유인해야 한다. 시 골에서는 썩은 연못 근처에 마을을 만들고 특히 불결한 늪지대에 정착하도록 해야 한 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간을 황펴화시키는 질병을 특별히 퇴치하려는 것을 비난해야 한다. 또 무질서를 추방하는 계획을 추진함으로써 인류에 봉사하겠다는 자비롭지만 잘 못된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비난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매년 죽는 사람이 늘어나 면...아마도 우리는 모두 사춘기에 결혼해도 되고 완전히 굶어 죽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여성의 온화하고 여성다운 성품을 소중히 여기는 맬더스가 대중의 빈곤과 재난에 대해 내린 처방은 이토록 끔찍스러운 것이었다. 그렇다면 탐욕스럽고 편협한 당시의 자본가들조차 "너무 심하다"고 걱정했을 정도의 파격적인 처방을 내린 맬더스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냉혹한 천재 맬더스 목사 토마스 로버트 맬더스느 1766 년 부유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자신의 표현을 빌면 "출생이라는 커다란 제비뽑기에서 제법 큰 행운을 잡은" 것이다. 그 행운을 내린 사람은 증조부 다니엘 맬더스 1 세이다. 그는 앤 여왕 시대에 왕실 약제사를 지낸 유명한 사람인데 명성에 못지 않은 재산을 모아 후손에게 물려주었다. 토마스 로버트 맬더스의 아버지이 다니엘 맬더스 2 세는 천성적으로 겸손한 태도와 상냥한 성품을 타고난 지성적인 목사로서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많은 자선을 베푼 사람이다. 그는 도킹 부근 계곡의 아름다운 농장을 사서 거기에 멋진 저택을 지어 루커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의 여섯번째 자식이자 둘째 아들인 로버트가 태어난 곳도 이 집이고, <인구론> 집필의 계기가 된 부자간의 토론도 이 곳에서 있었던 일이다. 다니엘 목사는 루소의 열렬한 숭배자답게 자녀들이 개성대로 성장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보살펴 주었다. 맬더스는 9 세까지 아버지와 가정교사의 지도를 받다가 역시 루소 숭배자인 목사가 경영하는 한


사립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18 세 되던 1784 년 케임브리지 지저스 칼리지에 입학했는데 어떤 특정 분야에 치우치지 않고 역사와 문학 등 폭넓은 분야의 공부를 꾸준하게 해나갔다. 그런데 증조부 다니엘 맬더스 1 세가 많은 재산과 더불어 언청이라는 신체적 결함까지 물려주는 바람에 그는 발음상의 장애를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맬더스는 그같은 장애에도 불구하고 라틴어와 영어 웅변까지 잘 해내는 쾌활한 학생이었다. 지저스 칼리지를 우등생으로 졸업한 맬더스는 아들 가운데 하나쯤은 성직자로 만드는 18 세기 영국 부유층의 관행에 따라 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길 잃은 양을 인도하는 목자의소임을 열심히 했다는 증거는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그는 하느님의 사업보다는 인간의 사업에 더 큰 흥미를 가졌던 모양인지 30 세 되던 1796 년에 정부의 행정을 비판하는 책을 집필했으나 출판하지는 않았다. 그는 대학을 마친 후 역사와 정치, 경제 등 다방면의 서적을 읽으면서 소일했는데, 루커리 집에서 아버지와 한 토론을 계기로 <인구론> 초판을 출간한 것은 그가 32 세이던 1798 년의 일이다. <인구론>으로 일약 유명인사가 된 맬더스는 1805 년 신설된 동인도회사대학의 경제학 교수로 부임했다. 아담 스미드가 글래스고대학에서 가진 직책은 도덕철학 교수였으므로, 맬더스는 영국 최초의 정식 경제학 교수로 기록되었다. 식민지의 부를 본국으로 들여오는 역할을 한 동인도회사의 간부양성소인 이 대학 교수직은 맬더스에게 잘 어울린다. 왜냐하면 그는 경제학자로서 정교하고 체계적인 경제이론을 창안하지는 못했지만 불평등한 경제체제와 부자들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를 제공하는 일에는 빼어난 재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맬더스는 후일 허버트 스펜서(Hebert Spencer)로 대표되는 사회진화론---자연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에서도 생존경쟁을 통해 우수한 사람들이 선택됨으로써 문명의 발전이 촉진된다는 사회이론---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래서 맬더스는 만약 인구법칙으로 인해 다수 대중의 비참한 생활이 필연적인 사태라면 도대체 부자들은 왜 부유한가 하는 의문에 대답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인구론>에서 명료하지는 않지만 하나의 대답을 제시했다. 그것은 부자들의 생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미덕과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에서 나타나는 현상적인 타락과 방종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가난한 노동자는 속된 표현으로 하루살이처럼 산다. 이들은 눈앞의 궁핍에만 주의를 기울일 뿐 미래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는 일이 없다. 저축할 기회가 있어도 대부분 이를 외면하고 눈앞의 필수품 이외에는 전부 술집에 가서 마셔 버린다. 성경의 글귀와 정신은 이 세계를 도덕적 훈련과 시련의 상태로 표현하고 있는데... 난관과 유혹을 제공하는 한편 이를 극복하는 자에게는 내세는 물론 현세에도 행복으로 보상해 주는 성질을 가진 듯하다. 그러나 인구법칙은 특히 이것과 잘 어울린다. 모든 인간은 자연적으로 주어지거나 종교가 인정한 미덕을 실천함으로써 자신과 사회에 나 쁜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는 능력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미덕 덕분에 생 활조건이 크게 향상되고 이를 실천하는 개인이나 사회 전체가 훨씬 안락해지는 것이 분명하므로, 이 위대한 법칙은 인간에 대한 신의 섭리임이 완벽하게 입증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상이며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고방식이다. 나태하고 방종한 사람들은 가난이라는 벌을 받고, 갖은 난관과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과 도덕적 절제력을 가진 사람은 사회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유유자적이라는 상을 탄다. 부자들의 마음을 이토록 편안하게 해주는 사상이 또 어디 있으랴! 아마 오늘날의 부자들도 대부분 이런 사상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아담 스미드가 "철학자와 지게꾼의 차이는 마스티프 개와 그레이하운드 개의 차이의 반도 안된다.", "인간의 타고난 재능은 모두 비슷하지만 교육과 환경의 차이 때문에 서로 다른 삶을 살게 된다."고 말한 것과 비교해 보면 부자들에게 맬더스의 사상이 갖는 의의는 대단한 것이다. 그런데 맬더스는 자신의 대답이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특히 당시 의회를 지배하고 있던 지주계급이 누리는 부와 사치는 이러한 논리로는 완전하게 합리화될 수 없었다.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단지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유유자적이라는 상을 받는 계급이었기 때문이다. 맬더스는 동시대의 학문적 라이벌이자 일생의 벗이었던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의 인생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리카도는 산업자본가계급의 이익을 옹호하고 지주계급을 아무런 생산적 기여도 하지


않으면서 소비만 하는 비생산적 계급으로 몰아붙인 걸출한 경제학자였는데, 묘하게도 주식 투자로 많은 돈을 벌어 막대한 토지를 사들인 사람이었다. 맬더스는 1820 년에 발표한 <정치경제학원리>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면서 그 밑에다 "리카도 자신이 지주이며 내가 말하려는 알맞은 예이다"는 각주까지 붙여 놓았다. 지주가 받는 지대는 과거의 힘과 능력뿐만 아니라 현재의 지혜와 용기에 대한 보수 이다. 나날이 토지를 구입할 수 있는 것은 근면과 재능의 결과이다. 토지는 모두 칭찬 할 만한 노력에 대해 유유자적이라는 위대한 상을 수여한다. 맬더스가 불평등 그 자체를 예찬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연법칙의 불가피한 결과로 간주했다. 사유재산제도와 결혼제도가 아니었다면 인간 사회는 인구증가로 인한 무정부적 혼란으로부터 벗어나 문명화된 단계로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맬더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유재산제와 가족제도를 통해 부와 빈곤이 세습되는 상황에 대한 개혁주의자들의 비난은 계속해서 지주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사유재산제를 인정한다 할지라도 모든 지주들이 자신의 근면과 재능의 대가로 토지를 획득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맬더스의 증조부나 데이비드 리카도의 경우에는 그렇게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최소한 맬더스나 그 아버지 다니엘 맬더스 목사가 소유한 토지는 그들 자신의 근면과 재능의 소산은 아니었으며, 대부분의 지주들도 사정은 맬더스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맬더스는 그 책임을 신의 섭리 탓으로 돌리고 말았다. 매우 아름다운 다음의 문장은 신의 섭리에 의지해서 부와 빈곤의 상속을 합리화하는 맬더스의 능력을 입증해 준다. 물론 주장의 요지는 "시장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불평등은 신의 섭리로 이해하고 감수해야 한다"는 매우 경제학자답지 못한 것이다. 사회의 두 가지 법칙, 즉 재산권과 결혼제도가 제정되고 나면 반드시 조건의 불평등 이 수반된다. 재산이 분배된 후에 태어난 사람들이 이미 재산을 갖고서 이 세상에 태 어난다. 만약 이들의 부모가 너무나 가족이 많아서 충분히 부양할 수 없다면...자연의 불가피한 법칙 때문에...이들은 인생이라는 제비뽑기에서 꽝을 뽑은 불행한 사람들이다. 이미 다른 사람들이 차지한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 부모로부터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생활의 도움을 받을 수 없고, 또 사회가 그의 노동을 바라지 않을 경우, 그는 최 소한의 식량을 얻을 권리도 주장할 수 없으며 사실상 아무 곳에서도 할 일이 없다. 자 연이 베푸는 대향연에서 그가 앉을 빈자리가 없는 것이다. 그가 만약 다른 손님들의 동정을 받지 못하면 자연의 여신은 퇴거를 명령하고 그 명령을 집행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손님들이 일어서서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 준다면 머지 않아 다른 침입자들이 나 타나 같은 대우를 요구하게 된다. 모든 방문객들에게 음식이 준비되었다고 알려지면 연 회장은 수많은 불청객들로 채워진다. 향연의 조화와 질서는 무너지고 그 때까지 힘을 떨치던 풍요는 결핍으로 바뀌어진다. 그리하여 손님들의 행복은 여기저기에서 벌어지는 비참한 광경과 소문난 잔치에서 음식을 찾지 못해 화가 치민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독촉 에 의해 산산조각이 난다. 손님들은 이 향연을 베푼 위대한 여주인공의 모든 침입자들 에 대한 엄명---여주인공은 손님 모두에게 풍성한 대접을 하고 싶지만 자기로서는 무수 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할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연회가 만원이 되면 신참자 를 받아들이기를 인도적으로 거절하였다.---을 위배한 자기들의 잘못을 깨닫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맬더스는 사유재산의 기원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자기 시대 부의 분배상태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그러한 한계 안에서 인류 사회르 위한 최선의 방안을 찾으려고 했다. 물론 맬더스가 발견한 최선의 방안은 유감스럽게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사회사상의 역사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질나쁜 악당은 아니다. 우리는 이 책에서 맬더스와 똑같은 주장을 훨씬 노골적이고 뻔뻔스러운 어조로 반복한 사상가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한 세기를 앞지른, 그러나 조롱거리가 된 맬더스의 공황이론


맬더스가 유산계급, 특히 지주계급의 이익을 옹호한 것이 그 자신이 그 계급의 일원이기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지주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사상가였다. 그런데 흥미 있는 것은 그가 이렇게 하는 과정에서 자유방임시장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결함을 찾아내고 한 세기 뒤에서야 세상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 효과적인 처방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공황이론이다. 맬더스의 공황이론은 인구법칙과 더불어 그가 경제학자로서 이룩한 가장 귀중한 업적이다. 맬더스가 1820 년에 출간한 <정치경제학원리>는 <인구론>과 달리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맬더스는 현실문제에 극히 민감한 천재적 통찰력을 발휘했다. 다음 장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그는 1814~1815 년에 있었던 곡물법 논쟁에서 곡가 하락과 지대의 하락을 막기 위해 곡물 수입을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그의 주장은 자본가와 노동자, 빈민 등 지주계급을 제외한 모든 계급의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그는 특히 논적 리카도의 날카로운 비판 때문에 수세에 처했다. 이 논쟁은 한 걸음 나아가 지대의 성격과 정당성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맬더스는 자기 견해를 뒷받침할 논거를 마련하려고 몹시 애를 썼는데 때마침 심각한 경제공황이 밀어닥쳐 영국경제를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공황은 1815 년에 이어 1818~1819 년에 또 다시 밀어닥쳤다. 도처에서 실업과 임금 인하에 항의하는 파업과 시위가 일어났는데 1819 년 8 월 맨체스터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는 엄청난 유혈사태까지 일으켰다. 군대가 투입되어 무자비한 발포를 감행한 결과 수백 명의 노동자가 살상당했다. '피터루 대학살'이라고 일컫는 사건이다. 맬더스는 이러한 사태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 '실제적인' 교수는 어떤 이유 때문에 스미드의 '멋진 신세계'가 주기적인 공황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원인을 찾는 일에 착수했다. 맬더스는 <정치경제학원리>에서 이 문제에 대해 이론적으로 세련되지는 않았으나 매우 분명한 해답을 내놓았다. 영국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때때로 너무 많은 상품이 생산되어, 다시 말해 영국사회의 모든 소비자들이 그것을 구매할 수 있는 범위를 넘는 상품이 생산됨으로써 수요와 공급 사이에 크나큰 불일치가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자본가들이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해 자본이 남아돌게 되어 극심한 불황이 닥친다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공급과잉에 의한 공황이다. 맬더스의 공황이론은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이것은 우선 아담 스미드의 <국부론>이 묘사한 자유방임시장의 법칙에 대한 중대한 수정이었을 뿐만 아니라 1803 년 t 이(J. B. Say)가 <정치경제학요론>에서 정식화한 이래 당대 경제학자들의 광범한 지지를 받고 있던 '판로설'---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에도 어긋나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스미드와 세이에 의하면 어느 한 상품이 사회가 요구하는 것보다 많이 생산되었다면 그것은 동시에 어떤 다른 상품이 너무 적게 생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시장이 제 기능을 수행하는 한 몇몇 상품의 일시적 과잉생산은 있을 수 있지만 모든 상품의 과잉생산은 있을 수 없다. 맬더스는 고립되었다. 후일 사상적으로 그와 완전히 적대적인 칼 마르크스가 그의 업적을 인정해 주었지만 같은 편의 사상가들은 공황이론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1930 년대 대공황이 세계자본주의를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 던져 넣자 그제서야 믿을 만한 제자가 나타났다. 존 메이너드 케인즈 (John Maynard Keynes)라는 천재적 경제학자이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케인즈가 한 일은 맬더스의 생각을 체계가 선 이론으로 발전시킨 것뿐이다. 그는 자기에게 큰 가르침을 준 맬더스를 '위대한 경제학자'로 복권시켰다. 지주계급의 이익이 사회 전체의 이익과 조화된다는 것을 논증하려는 비뚤어진 동기에서 출발했지만 맬더스는 공황의 원인을 제대로 진단했다. 그러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탓으로 끝 단추마저 제대로 끼울 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노동자들이 너무 가난해서 자본가들의 상품을 다 소비해주지 못하는 사태를 바로잡기 위해 노동자들의 소득을 올려 주자는 처방을 내리지 않고, 누군가 나서서 노동자들 대신 소비해주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물론 그 '대리 소비자'는 생산에는 전혀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지만 소비에는 일당백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맬더스는 적임자를 알고 있었는데 그게 바로 지주계급이었다. 맬더스는 <정치경제학원리>에 이런 추천사를 써 놓았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물질적 부를 소비하려는 의사와 능력을 지 닌 계급이 존재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상인계급은 계속 이윤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계급으로는 지주들이 유력하다. 계급적 편향성은 천재의 눈을 흐리게 한다. 맬더스는 지주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려고 너무 애쓴 나머지


자기의 사상체계를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말았다. <인구론>에서는 "근면과 재능의 대가로 유유자적이라는 상"을 받은 지주계급이 <정치경제학원리>에서는 "자신이 생산하는 것보다 더 많은---사실을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으면서---물질적 부를 소비하려는 의사와 능력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호의호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맬더스는 "지주계급의 이익이 항상 사회 전체의 이익과 일치한다."고 주장할 수는 있었다. 그는 또 공황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소비할 능력을 가진 모든 사람이 열심히 소비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이 과잉생산 공황의 발견자에게는 저축이 아니라 소비가 미덕이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도로와 공공사업에 가난한 사람들을 고용하는 것, 지주와 자본가들이 집을 짓고 그들의 토지를 개량,미화하고 노동자와 사환을 고용하는 경향은...생산물과 소비의 균형이 교란되어 일어나는 해악을 치유하기 위해 우리들의 능력으로 가장 손쉽고 직접적으로 채택할 수 있는 수단이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다. 이러한 사상이 백 년 동안이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니! 우리는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를 가진 모든 나라의 정부가 맬더스의 충고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지주 대신 정부가 그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금세기 최고의 경제학자로 평가받는 케인즈가 내린 처방은 본질적으로 맬더스 견해의 개정증보판에 불과하다. 그러나 맬더스 시대의 걸출한 경제학자 리카도는 그에게 찬사 대신 다음과 같은 가시돋힌 야유를 선사했다. 리카도 역시 지주계급의 이익이 사회 전체의 이익과 상반된다는 것을 논증하는데 몰두한 나머지 맬더스의 공황이론을 깊이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 사람이 나의 상품을 소비한다고 해서 나에게 무슨 이익 이 되는가?...모직물업자의 창고에서 옷감 1 백 벌을 가져다 군인과 선원에게 옷을 해 입히면...모직물업자의 생산이 촉진될 것인가? 그렇다. (모직물업자의 창고에) 불이 나 면 그런 것처럼. 맬더스의 이론이 사실이라면 군인을 늘리고 공무원의 봉급을 두 배로 올려 주는 것보다 더 현명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부자들은 언제나 맬더스를 좋아한다 맬더스의 경제사상이 전적으로 무시당한 것은 아니다. 스미드의 자유시장이 안고있는 결함에 대한 그의 견해, 즉 과잉생산 공황이론은 동시대는 물론이요 후대의 경제학자들에까지 부당한 냉대를 받았다. 팜플렛과 의회 증언 등 다양한 방법으로 참여했던 곡물법 논쟁에서도 맬더스는 패배했다. 그러나 그가 스미드의 견해에 가한 또 하나의 중대한 수정은 성공을 거두었다. 맬더스가 제출한 수정안은 당대에 널리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후대에까지 계승되어 아주 정교하고 세련된 이론으로까지 발전했다. 물론 이것은 원래 불명료한 상태로 스미드의 사상 가운데 들어 있던 것이다. 맬더스는 <정치경제학원리>에서 부를 토지와 노동의 생산물로 본 스미드와 달리 부란 '인간에게 필요하고 유용하며 바람직한 것으로서 개인이나 국가에 의해 자발적으로 점유되는 물자'라고 규정했다. 이 말은 비록 노동이 투입되지 않은 대상일지라도 인간에게 유용하기만 하면 부로 간주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에 스미드보다 부의 개념을 훨씬 확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사람의 차이는 작은 것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부의 원천을 노동으로 규정하고 생산과정을 통해 생산물의 가치가 증대된다는 입장에서 보면 한정된 가치를 가진 생산물의 분배를 둘러싼 계급투쟁은 필연적이다. 스미드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계급투쟁을 필연적인 사태로 인정한 것은 노동가치론이라는 이론적 기초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동이 생산물의 가치를 증대하는 '유일한 원천'이 아니라고 한다면 문제는 다르다. 그래서 맬더스는 과감하고 새로운 주장을 폈다. 한 나라에서 일어나는 모든 교환은 그 나라의 생산물을 사회에 적합하도록 배분한다. 더 원하는 것과 덜 원하는 것의 교환은 틀림없이 이해당사자 모두에게 생산물의 가치 를 증가시킬 것이다. 만약 생산물의 가치가 노동과정이 아니라 교환에 의해 증대되는 것이라면 계급투쟁은 그릇된 신념과


무모한 탐욕의 산물일 뿐이다.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닌 한 자유시장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거래는 거래의 두 당사자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사고방식을 모든 경제현상에 적용할 경우 당연히 자유시장에서 모든 갈등은 사라지고 완전히 조화만이 지배하게 된다. 상품 거래는 말할 것도 없고 노동과 임금의 교환 역시 자본가와 노동가 모두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다 .물론 맬더스가 이러한 생각이 지닌 이론적, 이데올로기적 중요성을 입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부의 원천이 노동이다", "자유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거래는 양측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스미드의 두 가지 생각 가운데 후자만을 택해 한층 명료하게 정식화한 것 자체만으로도 맬더스는 자본주의 세계르 지배한 하나의 학파를 탄생시킨 산파 노릇을 톡톡히 했다. 우리는 뒤에서 맬더스의 교환이론이 어떻게 하여 스미드의 자유시장을 '신성한 축복'으로까지 미화시키는 이데올로기로 발전하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이제 맬더스에 관한 이야기를 정리할 때가 되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다 간 스미드와 달리 현숙한 아내를 얻어 행복하게 살았다. 그리고 인구법칙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성욕에 대한 도덕적 억제력이 강했던 탓인지 자녀는 셋만 두었다. 그는 <인구론>과 <정치경제학원리>말고도 현실문제에 대한 여러 가지 팜플렛과 논문을 발표했으며, 특히 그가 리카도와 주고받은 수많은 편지는 고전학파 경제이론의 발전과정을 알려 주는 귀중한 유산으로 남아 있다. 맬더스는 노년기까지 동인도회사대학이 있던 헤일리베리에서 독서와 산책과 승마를 즐기면서 건강하게 살다가 1834 년 아내의 고향집을 방문하던 중 갑작스레 사망했다. 맬더스는 죽었지만 그의 사상은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비록 그 자신이 창안해 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들의 머리 속을 지배해 온 사고방식을 초역사적인 자연법칙의 형식을 빌려 정식화하는데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가 찬사보다는 비난을 더 많이 받는 사상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마도 특유의 이데올로기적 편협성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인구론>의 저자 맬더스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지만 <정치경제학원리>를 쓴 경제학자로서 맬더스는 리카도의 그늘에 가리운 채 한 세기 동안이나 박대를 당하였다. 우리는 다음 장에서 리카도가 그에게 가한 사상, 이론적 공격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경제학자 맬더스를 복권시킨 것은 20 세기 최고의 경제학자로 평가받는 케인즈이다. 그는 <경제학자들의 생애>라는 책에서 리카도의 승리를 개탄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만일 리카도가 아니라 맬더스가 19 세기 경제학이 뻗어 나온 근간이었다면 오늘날 의 세계는 얼마나 더 지혜롭고 풍요한 곳으로 되었을 것인가? 그러나 이 유명한 문구는 맬더스의 가치를 돋보이게 할 목적으로 쓴 것이지만 거꾸로 대학자 케인즈의 사상적 편협성을 입증하는 사례로도 널리 이용되고 있다는 점을 마지막으로 덧붙여 둔다. 3. 지주이 이익은 사회의 이익과 항상 대립된다 (부르주아계급의 선봉장, 데이비드 리카도) 경제학의 역사에 남은 나폴레옹의 발자취 스미드의 신세계는 훌륭하고 맬더스의 신세계는 암울하지만 어느 것도 고립된 왕국은 아니었다.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의 본고장 영국은 그들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이미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고 있었으며 세계의 여러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 등 산업화가 시작된 나라들 사이에는 물론이요 산업화된 본국과 아직 산업화되지 않은 각지의 식민지 사이에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종류의 상품들이 끊임없이 거래되었다. 국부의 증진이 중요한 관심사였던 18 세기까지는 누구나 외국무역을 국부 증진이라는 관점에서 관찰했다. 당시 유럽의 왕과 정치인들을 사로잡고 있던 중상주의에 입각하여 보면 외국무역은 국내의 금과 은 보유량을 늘림으로써 국부의 증진을 도모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그들은 수출에 대해 수많은 특권과 장려금을 주고 수입에 대해서는 갖가지 규제와 금지조치를 내림으로써 국부의 증진을 추구했다. 중상주의자들에게 수출은 선이고 수입은 악이었다. 아담 스미드는 무역을 보는 시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국부가 금, 은의 축적이 아니라 그 사회의 모든 국민이 해마다 소비하는 생필품과 편의품을 풍요하게 함으로써 증진된다면 수입 그 자체는 결코 악이 될 수 없었다. 스미드가 일관되게 자유무역을 옹호한 것은 그것이 이런 의미에서의 국부를 증진하는데


기여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19 세기에 접어들면서 무역은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커다란 사회적, 정치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자유무역이 국부의 증진에 기여할 수 있느냐는 다소 해묵은 논쟁과는 무관하게 그것이 그 나라의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익을 주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손해를 입힌다는 것을 명백하게 입증하는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영국의 지배계급은 둘로 나뉘어 치열한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하나는 전통적인 지배층인 지배계급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자본가계급이었다. 그들은 유럽 대륙으로부터의 곡물 수입 제한을 둘러싸고 수십 년에 걸친 길고 지루한 싸움에 돌입했다 이 싸움은 언제건 일어나지 않으면 안되는 숙명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1815 년이라는 시점에서 시작된 것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1814 년에 패전한 탓이었다. 1789 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은 극도의 혼란과 피비린내 나는 유혈사태를 거쳐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로 이어졌다. 왕과 왕비의 목을 잘라 버린 공화국 프랑스의 야만적 정치변혁이 자기의 왕국에 전염될까봐 두려워한 유럽의 모든 군주들은 프랑스를 응징하기 위한 '신성동맹'을 체결했다. 그러나 불세출의 영웅 나폴레옹은 전 유럽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고 마침내는 숙적 영국의 전쟁 수행 능력을 꺾어 놓기 위해 영국과 통하는 유럽 대륙의 모든 항구를 봉쇄했다. 그러자 영국의 식량 사정은 악화일로를 치달았다. 1812 년 영국 국내의 밀값은 쿼터당 1 백 20 실링으로 전쟁 이전의 두 배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1812 년 러시아가 전쟁에 뛰어들면서 나폴레옹의 대륙봉쇄가 허물어지고 1813 년에 풍년이 들자 사태는 반전되기 시작했다. 이어 1814 년 나폴레옹의 패전으로 평화가 회복되자 대륙의 곡물이 수입되어 영국의 밀값은 쿼터당 85 실링으로 하락했고 다음해에는 67 실링으로까지 떨어졌다. 이렇게 되자 영국의 지주들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곡물 가격의 하락은 지대의 하락을 초래했고, 그것은 또한 지주들의 소득 감소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토지귀족들은 자기네가 지배하고 있는 의회를 소집해서 곡물 수입을 원천봉쇄했다. 그들은 1791 년에 쿼터당 54 실링 이하로는 밀을 수입할 수 없도록 법을 만들어 놓았지만 그것만으로는 평화 회복이 가져다 준 뜻하지 않은 재난에 대처하기에는 불안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쿼터당 80 실링 이하로는 밀을 수입할 수 없도록 법을 뜯어고쳤다. 그러나 이미 만사가 그들 마음대로 되는 시대는 아니었다. 우선 소비자인 노동자와 빈민들이 불만을 터뜨렸다. 물론 그들은 아직 조직되어 있지도 않았고 정치적 영향력도 없었으므로 가난한 사람들의 불만이 지주계급의 결정에 장애물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최소한의 생존이라도 보장 받기 위해 자본가들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자 문제는 달라졌다. 자본가들은 곡물 가격이 필요 이상으로 비싸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자신들을 원망한다고 느꼈다. 뿐만 아니라 유럽 대륙의 밀 수출국들은 영국 정부의 밀 수입 제한에 대해 영국 공산품의 수입을 제한함으로써 맞불을 놓았다. 자본가계급은 이중으로 피해를 본 셈이다. 따라서 그들 역시 사태를 좌시할 수 없게 되었다. 유산계급과 무산계급 사이의 계급투쟁은 흔히 잔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무력충돌을 초래한다. 그러나 지주와 자본가 사이에서 벌어진 이 싸움은 다소 시끄럽기는 했으나 끔찍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총칼 대신 자기네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상가들의 이론을 가지고 싸움을 벌였다. 지주들의 대오는 맬더스의 신봉자들로 채워졌고 신흥 자본가계급의 선두에는 데이비드 리카도가 서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일찍이 서로 약속한 일이 하나 있었다. 맬더스가 제안하고 리카도가 찬성한 이 약속은 주로 같은 입장에서 문제를 대하고 있으므로 인쇄물을 통한 장황한 논쟁보다는 사적이고 우호적인 토론을 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곡물법 논쟁에서 드러난 두 사람의 입장은 주로 같기는커녕 완전히 대립되는 것이어서 이 약속은 깨져 버렸다. 그들은 각종의 팜플렛과 저서와 의회 증언을 통해 상대방의 이론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물론 이것은 두 사람이 신의 없는 인간인 탓이 아니라 곡물법 논쟁이 너무나 중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맬더스는 몇 가지 팜플렛을 통해 곡물법을 옹호하는 이유를 여러 가지로 제시했다. 하지만 그가 택한 논리는 그리 신통치 못했다. 곡가가 하락하면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저하된다든가 일반물가를 하락시켜 경제를 침체시킨다는 맬더스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터무니 없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도 명백히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식량을 다른 나라에 의존하는 것은 안보상 좋지 않다든가 곡가 하락이 토지 경작을 저해하고 농업자본을 파괴한다는 주장은 생각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물론 맬더스가 이 논쟁에 뛰어든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주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였으며, 지주계급의 이익은 항상 사회 전체의 이익과 일치한다는 자기의 철학을 조금도 숨기려 들지 않았다. 반면 리카도는 지주계급의 이익은 항상 사회 전체 또는 사회의 다른 모든 계급의 이익과 대립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땅은 농민의 것'이라든가 '지주계급을 타도하자'고 주장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리카도는 지주계급의


존재를 영원한 것으로 보고 있었다. 리카도가 지주계급을 사상적으로 공격한 것은 그들이 자본가계급이 차지해야 마땅할 몫을 빼앗아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주계급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세 가지의 이론적 무기를 사용했다. 차액지대론과 자유무역론, 그리고 노동가치론이 그것이다. 그런데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불과 몇십 년 뒤에 칼 마르크스는 스미드와 리카도의 노동가치론을 잉여가치론이라는 이름의 날카로운 무기로 발전시켜 자본가계급의 목에 들이댔다. 만약 리카도가 그 이론의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위험성을 알았다면 그것을 파기해버렸을지도 모른다. 경제학자로 변신한 주식 브로커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는 1772 년 영국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네덜란드에서 이주해 온 상인이자 은행가였다. 이상주의자인 다니엘 맬더스 목사는 상류사회의 해묵은 전통에 따라 아들에게 가정교사를 붙여주고 대학교육을 받게 했지만 이 수완 좋은 사업가는 아들이 열 네 살이 되자 데리고 다니면서 자기 일을 배우게 했다. 그런데 데이비드 리카도는 아버지를 능가하는 사업 솜씨를 발휘했다. 그는 스물 두 살에 자본금 8 백 파운드로 자기 사업을 시작해서 사업을 그만둔 마흔 두 살까지 무려 1 백만 파운드가 넘는 재산을 모았다. 경제적으로 독립한 리카도는 종교적으로도 독립해서 퀘이커교로 개종했다. 사랑스러운 어느 퀘이커교도 처녀와 결혼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주식매매를 통해 엄청난 재산을 모았는데 나폴레옹전쟁 기간에는 국채를 인수해서 일반인에게 내다파는 신디케이트의 대표를 지내기도 했다. 복잡한 사업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놀라운 판단력, 큰 거래를 손쉽게 성립시키는 능력, 모든 면에서 그는 사업가로서 성공을 거둘 만한 인물이었다. 아침을 잘 먹기로 유명하고 집에 손님을 초대해서 심심풀이 노름판을 즐겨 벌인 이 사업가는, 그렇다고 해서 돈벌이에만 뛰어난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스물 아홉 살 되던 해에 아담 스미드의 <국부론>을 접하고서부터 정치경제학을 연구하는데 골몰했다. 돈벌이에만 재주를 발휘했다면 아마 데이비드 리카도라는 이름은 역사에 기록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스미드의 제자가 된 리카도는 이름은 역사에 기록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스미드의 제자가 된 리카도는 성공한 장사꾼답지 않게 실제적인 문제보다는 추상적인 원리를 탐구하는데 열중했고 또 남다른 재능을 발휘했다. 리카도는 아담 스미드의 자유시장을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그 원리를 국제무역에까지 확대 적용했다. 그는 또한 맬더스의 인구법칙을 승인했다. 그러나 맬더스의 세계를 음울하게 한 것이 인구법칙이었던데 반해 리카도의 세계를 음울하게 만든 것은 맬더스가 예찬한 지주계급과 지대의 존재였다. 곡물법 논쟁에서 곡물 수입의 자유화와 곡물 가격의 하락은 지주계급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이익을 준다고 주장한 리카도는 1817 년 출간한 저서에서 이같은 견해를 끝까지 밀고 나갔다. 그 저서는 리카도의 대표작이자 유일한 저서인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이다. 리카도는 이 책에서 지주계급의 이익이 항상 사회 전체의 이익과 대립하는 이유를 밝히는 지대이론, 즉 '차액지대론'을 개진했다. 여기서 한 가지 독자의 양해를 구해야 할 일이 있다. 우리는 앞에서 스미드와 맬더스의 사상을 살펴보기 위해 그들이 쓴 문장을 자주 인용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리카도의 경우에는 같은 방법을 사용할 수 없다. 리카도의 문장은 대사상가의 문장답지 않게 딱딱하고 지루하며 난해하기까지 하다. 리카도 자신도 생전에 이 문제로 골머리를 썩었는데 아무리 작문 공부를 해도 문장력이 늘지 않았다. 리카도가 곡물법 논쟁이 발생한 1815 년부터 구상하고서도 2 년이나 지난 1817 년에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를 출간한 것이나, 이 책이 유일한 저서가 된 것은 다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리카도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문장으로 옮기는 것이 하도 어려워서 이 책의 집필마저 포기하려 한 적이 있다. 그가 그나마 이 책을 출판할 수 있었던 데는 '19 세기 최고의 천재'로 손꼽히는 존 스튜어트 밀의 부친 제임스 밀의 격려와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당대의 뛰어난 경제학자 가운데 하나인 제임스 밀은 리카도가 쓴 초고를 함께 읽고 내용이 분명하고 이해하기 쉬워질 때까지 많은 충고와 격려르 보내 주었다.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불만스럽더라도 여기서는 그의 견해를 요약하는 도리밖에 없다. 리카도의 문장을 직접 인용하자면 매우 단순하고 명백한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너무나 많은 지면을 낭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리카도가 묘사한 우울한 세계에는 세 사람이 등장한다. 맨 처음에 등장하는 인물은 노동자이다. 그는 땀흘려 노동하는 대가로 자본가에게서 임금을 받아 생활한다. 그는 땀흘려 노동하는 대가로 자본가에게서 임금을 받아 생활한다. 그는 열심히 일하지만 가난하게 살 운명을 타고 났다. 왜냐하면 조금이라도 경제적인 여유가 있으면 더 많은 자녀를 낳기 때문이다. 리카도는 그가 받는 임금, 즉 그가 고용주에게


파는 노동의 가격을 '시장가격'이라고 불렀다. 그의 노동의 시장가격, 즉 노임이 그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데 필요한 식량과 생필품과 설비를 사는 비용보다 많아지면 그는 가족의 수를 늘리게 된다. 리카도는 이같은 식량과 생필품과 설비의 가격에 노동의 '자연가격'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일시적으로 노동 수요가 공급을 능가해서 노동의 시장가격이 자연가격을 초과하게 되면 모든 노동자들이 자녀를 더 많이 낳아 노동 공급이 늘어난다. 그러면 노동의 시장가격은 다시 자연가격 이하로 떨어진다. 다음에는 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 이렇게 해서 임금은 늘 노동자가 자신과 가족을 먹여 살리는데 필요한 식량, 생필품, 설비의 수준을 맴돌게 된다. 이것은 하나의 자연법칙이다. 리카도가 '자연가격'이라는 용어를 선택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며, 그래서 리카도의 임금론을 '임금의 철칙'이라고 부른다. 여기까지 리카도는 분명히 맬더스와 주로 같은 입장에서 문제를 대하고 있다. 그러나, 두 번째 인물이 등장하면 이야기는 좀 달라진다. 이 인물은 자본가이다. 그의 인생 목표는 재산의 축적이며, 그는 이 재산을 투자하여 더 큰 재산을 만들고, 그래서 다시 투자하여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여 또 다시 재산을 늘리는데 일생을 바쳐야 하는 운명을 지닌 인물이다. 그는 자기의 재산을 투자하여 생산을 조직하고 생산과정 전체를 지휘, 감독하는 대가로 이윤을 얻어 생활한다. 그와 동료들은 산업과 국가경제를 책임진 중요한 계급이다. 그는 노동자보다 훨씬 부유하다. 그러나 그의 처지도 완벽히 행복하지는 않다. 마땅히 그가 차지해야 할 몫을 빼앗아 가는 제 3 의 인물이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지주가 세번째 인물로 등장한다. 이 사람은 리카도처럼 자기가 번 돈으로 땅을 샀을 수도 있고 맬더스처럼 조상의 땅을 상속받았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그는 자본가에게 토지를 빌려주고 대가로 지대를 받아 생활한다. 아담 스미드는 생산을 위해서는 노동과 자본과 토지가 다 필요하다고 보고 임금과 이윤과 지대는 그 세 요소의 대가로 보았기 때문에 지주의 소득에 대해 특별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맬더스는 지주의 소득을 특별하게 옹호했다. 그러나 리카도는 이것을 특별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리카도에 의하면 지대는 '토지를 사용하는데 따르는 대가'가 아니다. 지주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면서 사회 발전의 혜택을 독점하는 계급이다. 그들의 이익은 사회 전체의 이익과 항상 대립한다. 그들은 특히 자본가들이 마땅히 차지해야 할 몫을 가져 가 버린다. 곡물법을 둘러싸고 지주계급과 치열한 싸움을 시작한 자본가계급에게 이것은 하나의 복음이었다. 그들은 리카도를 대표로 떠받들었고 그의 사상을 칭송했다. 신흥 자본가 자녀들의 가정교사가 되려고 하는 자는 리카도의 정치경제학을 가르칠 능력이 있음을 입증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리카도 자신은 잘난 체하기 좋아하는 인간이 아니었지만 복음을 전파한 덕분에 신과 같은 숭배를 받았다. 그렇다면 리카도는 무엇을 믿고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지주계급의 이마에 악당이라는 딱지를 붙여줄 수 있었을까? 그가 믿는 것은 자신의 지대이론, 즉 차액지대론이다. 지주의 이익은 항상 사회 전체의 이익과 대립한다. 지대의 발생 원리를 규명하기 위해 리카도가 선택한 경제 모델에는 앞에서 할만 등장인물이 모두 출현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노동자는 숫자는 많으나 맡은 역할은 보잘 것 없는 엑스트라에 불과하다. 주인공은 역시 자본가이다. 그는 자기의 재산을 불리기 위해 먼저 지주로부터 토지를 임대한다. 자본가는 노동자만큼 많지 않지만 지주가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골라잡기에는 충분한 숫자여야 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경쟁상태에 있어야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지주는 일단 세 사람만 등장한다. 물론 꼭 세 사람일 필요는 없다. 둘이나 다섯일 수도 있고 그보다 더 많아도 좋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소유한 토지에 등급별로 순서를 매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주인공은 지주에게 토지를 임대한 후 농업조동자를 고용하여 그 땅을 경작한다. 리카도는 세 사람의 지주에게서 같은 값에 땅을 빌린 자본가들이 같은 양의 자본으로 같은 수의 노동자를 고용했다고 가정한다. 이제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보기로 하자. 가장 비옥한 1 번 토지를 임대한 자본가는 예컨대 10 톤의 밀을 수확했다. 그보다 못한 2 번 토지에서는 8 톤의 밀 밖에 수확하지 못했다. 그리고 가장 메마른 3 번 토지에서는 6 톤을 생산하였다. 자유방임시장에서 형성된 밀값은 1 톤당 1 만원이라고 가정하자. 그리고 자본가들은 각각 1 만원의 임대료를 지불하고 임금과 경작 비용으로 4 만원을 지출했다고 가정한다. 자유시장에서 거래가 종결되면 자본가들은 각각 5 만, 3 만, 1 만원의 이윤을 얻는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불합리한 결과이다. 1 번 토지를 경작한 자본가는 100%의 이윤율을 올렸는데 3 번 토지를 경작한 자본가는 단지 20%의 이윤율을 올렸을 뿐이다. 자유시장은 즉각 이런 불합리를 시정한다. 1 번과 2 번 토지의 지주는 땅을 임대받기 위해 경쟁하는 수많은 자본가들 가운데 더 많은 임대료를 지불하려는 사람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조만간 5 만원이나


3 만원의 임대료를 받는 조건으로 토지를 임대하게 된다. 여기서 1 번과 2 번의 토지의 소유자가 추가로 받을 수 있는 4 만원과 2 만원이 바로 리카도가 '차액지대'라고 이름붙인 것이다. 리카도는 산업이 계속해서 확대 발전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에 따라 인구도 계속해서 증가하게 되고 식량 수요 역시 계속 증가하게 된다. 늘어난 식량 수요를 충족시키려면 예전에는 경작하지 않던 메마른 토지까지 경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리카도의 모델에서 밀의 시장가격은 가장 열등한 토지에서 생산되는 밀의 생산비와 같아지기 때문에 밀값은 계속해서 상승한다. 그리고 열등지를 경작함에 따라 비옥한 토지에 대한 지대, 즉 차액지대도 계속해서 커진다. 이러한 원리는 밀뿐만 아니라 모든 곡물 생산에 적용된다. 곡물값이 오르면 노동의 자연가격, 다시 말해 노동자와 그 가족이 연명할 수 있는 식량과 생필품과 설비의 값이 올라간다. 노동의 시장가격은 자연가격과 일치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점점 더 많은 돈을 임금으로 지불해야 한다. 그들이 재능과 근면의 대가로 벌어 들인 이윤은 결국 지주들의 금고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리카도의 세계 역시 맬더스의 경우만큼 우울하다. 그는 "그래서 지주계급을 없애 버리자."고 주장하는 혁명사상가가 아니라 사유재산제도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는 유산계급의 사상가였다. 그래서 불만스럽지만 이러한 결론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지주계급이 사회 발전의 유일한 수혜자라고 탄식했다. 다만 곡물 수입의 자유화를 통해 영국 국내의 곡물 가격을 가능한 한 낮추는 것만이 세상을 덜 우울하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리카도는 이같은 이론을 근거로 지대는 '토지가 생산에 사용된 대가'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차액지대는 비옥도가 균일하지 않다는 토지의 고유한 성질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만약 토지가 공기처럼 균일한 것이라면 차액지대는 존재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리카도가 전적으로 옳았던 것은 아니다. 그는 가장 메마른 최열등지에서는 지대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아무리 메마른 땅일지라도 공짜로 임대해 주는 법은 없다. 경작되는 토지 가운데 가장 메마른 땅이라 할지라도 자본가가 그것을 임대하는 것은 최소한 제조업이나 상업에 투자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사회적 평균이윤율을 거둘 수 있다는 전망이 섰기 때문이다. 또 리카도는 곡물 가격이 계속해서 오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그가 계속적으로 곡물 가격이 상승한 시대에 살았기 때문일 뿐 자연법칙은 아니다 .곡물 가격은 생산기술의 발전이나 인구증가율의 변화 등 수요 공급의 변화에 따라 등락한다. 리카도의 이론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의미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의 시대에 중요한 것은 어쨌든 이 이론이 "지주의 이익은 사회 전체의 이익과 항상 대립한다."는 것을 논증하는 무기였다는 사실이다. 리카도는 곡물법 논쟁에서 이론적인 우위를 차지했다. 물론 이 논쟁은 오랫동안 계속되어 곡물법이 폐지된 1846 년에야 종결되었다. 리카도는 1823 년에 사망하였으므로 논쟁의 결말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곡물법의 폐지가 리카도의 학문적 승리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산업혁명이 사회의 구조와 인간 삶의 양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19 세기 중반까지도 낡은 지배계급인 토지귀족들은 여전히 의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자본가와 노동자, 빈민 등 사회의 모든 계급이 연대하여 대대적인 곡물법 폐지투쟁을 벌인 뒤에야 이 법은 종말을 고했다. 리카도의 승리는 신흥 지배계급인 자본가계급의 완전한 정치적 승리와 더불어 찾아온 것이었다. 리카도의 차액지대론은 몇 가지 이론적 난점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경제현상을 이해하는데 적지않은 도움을 준다. 리카도는 지주들의 수입이 부당한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이론에 그것이 부당한 수입이라는 가치판단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오늘날 산업화된 나라에서 토지를 농업자본가에게 임대하여 살아가는 계급인 토지귀족을 쉽게 발견할 수는 없다. 더욱이 그들이 정부나 의회를 지배하고 있는 경우는 더더욱 희귀하다. 하지만 토지는 여전히 누군가의 소유물이다. 리카도의 시대에는 토지의 비옥도가 중요했지만 지금은 그 위치가 중요하다. 또 그 때에는 토지를 소유한 계급과 자본을 소유한 계급이 구분되어 있으면서 대립투쟁을 벌였지만 현대에는 그 두 계급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 가장 부유한 자본가는 가장 거대한 땅의 소유자이고 산업자본과 토지 사이의 구분도 모호하게 변해 버렸다. 우리는 땅값과 임대료가 천차만별인 시대에 살고 있다. 도심 한가운데 있는 땅값과 한적한 시골의 땅값은 비옥도와 아무 관계도 없이 천 배나 만 배 차이가 난다. 지주들은 도심의 땅에다 빌딩을 지어 땅 대신 건물의 공간을 임대한다. 오늘날의 임대료는 땅의 비옥도가 아니라 주로 그 땅이나 건물이 제조업이나 상업에 얼마나 유리한가에 의해 결정된다. 산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확대되고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리카도식의 차액지대는 날로 확대된다. 자본가나 영세 상인 또는 집 없는 봉급행활자들은 자기가 재능과 근면의 대가로 획득했다고 생각하는 이윤과 봉급 가운데 점점 더 많은 부분이 지주 또는 건물주의 금고에


흘러 들어간다고 불평한다. 확실히 지주의 이익은 오늘날에도 사회의 다른 모든 계급의 이익과 대립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지주들의 수입에는 '불로소득'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이 붙어 다니지만 당시자인 지주들은 그러한 불명예를 행복의 비용으로 간주한다. 리카도의 시대에 비해 달라진 것이 있다면 권력자나 정치인들이 지주를---사실 가장 큰 지주는 자본가들이지만---제외한 사회의 모든 계급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 불로소득에 대해 다소 무거운 세금을 매긴다는 사실뿐이다. 그러나 지주-자본가들은 세무조사를 피하는 방법을 훤히 알고 있으며, 또 세금을 내는 경우도 그것을 임대료에 얹어 버리면 되기 때문에 조금 성가신 것만 견디면 다른 불편은 별로 느끼지 못하는 편이다. 우리는 헨리 조지의 사상을 다룬 장에서 이 문제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국제적 자유거래는 세계를 부유하게 한다. 리타도는 인생의 절반을 돈벌이에 바쳤지만 나머지 절반은 경제학 연구에 바쳤다. 그러나 그는 취미삼아 공부하는 아마추어 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스미드의 가장 충실한 학문적 제자였을 뿐만 아니라 스승을 능가하는 이론가였다. 리카도의 대학자다운 면모를 가장 확연하게 드러내는 것은 자유무역을 옹호하기 위해 제시한 '비교우위론'이다. 이 이론 역시 곡물법 논쟁과 관련되어 있다. 맬더스나 지주계급이 곡물 수입을 제한하기 위해 노심초사한 것은 물질적 이익을 지키려는 이기심의 발로였다. 결코 그들이 전반적인 자유무역에 반대하는 보호무역주의자였기 때문은 아니다. 그러나 리카도는 곡물법에 반대하는 자신의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가 또 하나의 '자연법칙'을 찾아냈다. 이것은 리카도의 사상 가운데 가장 귀중한 것이며 20 세기 막바지에서까지 국제적 무역분쟁에서 막강한 위력을 지닌 무기로 상용되고 있다. 이 무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나라는 미국이다. 산업 발전이 뒤진 나라의 시장을 지배하기 위해서 미국 행정부나 의회는 2 백년이나 된 이 낡은 무기를 거침없이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 리카도는 개인의 자유로운 욕망 추구를 방임하는 것이 국부를 증진시키는 가장 효과적이고 자연스러운 방법이라는 스미드의 견해를 국제무역에 적용했다. 물론 스미드도 자유무역이 영국의 국부르 증진시킨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리카도는 자유무역이 영국뿐만 아니라 영국과 거래하는 모든 나라의 국부를 증진시킨다고 주장했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입증하기까지 했다. 리카도의 문장이 워낙 무미건조하고 난해한 탓으로 그것을 직접 인용하지 않기로 이미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 바 있지만 여기서 그가 만든 수치 예만은 인용할 가치가 충분하다. 그는 자기의 저서에서 탁월한 장사꾼의 대차대조표만큼이나 알기 쉬운 수치 예를 자주 사용했는데 그 중 하나를 표로 만들어 인용해 보기로 하자. 도표 생략 (p.71) 이 표에서 포르투갈은 옷감과 포도주 두 상품 모두를 영국에 비해 더 적은 비용으로 생산할 수 있다. 리카도의 설명에 의하자면 포르투갈은 두 상품 모두에서 '절대우위'를 가지고 있다. 영국은 옷감과 포도주 한 단위를 생산하는데 각각 1 백 시간과 1 백 20 시간의 노동을 사용하지만 포르투갈은 각각 90 시간과 80 시간의 노동만을 사용하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나라는 무역을 통해 양측 모두 이익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영국은 옷감 생산에서, 그리고 포르투갈은 포도주 생산에서 '비교우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은 옷감 한 단위를 생산하는데 90 시간의 노동을 사용한다. 따라서 포도주 한 단위는 옷감 한 단위에 비해 80/90, 즉 88%의 노동을 필요로 한다. 포르투갈에서는 포도주가 옷감에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적은 노동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이다. 반면 영국에서 옷감 한 단위를 생산하는데는 포도주 한 단위를 생산하는데 드는 노동시간의 100/120, 즉 83%의 노동이 필요하다. 그래서 포르투갈과 영국은 각각 포도주 생산과 옷감 생산에서 '비교우위'를 지니고 있다. 두 나라가 옷감 한 단위와 포도주 한 단위를 1:1 로 거래한다고 생각하여 보자. 포르투갈은 80 시간을 들여 만든 포도주 한 단위를 주고 자기 나라에서는 90 시간을 들여야 만들 수 있는 옷감 한 단위를 받아 온다. 그러면 스스로 옷감 한 단위를 만들 때에 비해 10 시간의 노동을 절약한 셈이 되고, 이 10 시간의 노동으로 다시 1/8 단위의 포도주를 생산할 수 있다. 반면 영국은 1 백시간을 들여 만든 옷감 한 단위를 주고 자기 나라에서는 1 백 20 시간이 소요되는 포도주 한 단위를 가져 온다. 영국은 20 시간의 노동을 절약한 셈인데, 20 시간의 노동으로는 다시 1/5 단위의 옷감을 생산할 수 있다. 이 수치 예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명백하다. 두 나라는 각자 '비교우위'를 가진 상품만을 생산함으로써 양측 모두 더 많은 옷감과 포도주를 소비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발견이다. 물론 리카도의 시대에는 자본이나 노동력의 국제적인 이동이 아직 불가능하거나 희귀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오직 상품의 국제적 이동만을 분석했다. 또 눈이 밝은


독자들은 벌써 알아차렸겠지만 리카도는 상품의 생산비용과 가치가 오직 생산에 사용된 노동량에 의해 결정된다는 전제 위에서 비교우위론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런 것이 리카도 이론의 정당성을 훼손하지는 않는다. 뒤이어 출현한 그의 후예들은 상품시장뿐만 아니라 자본시장과 노동시장까지 개방되어 상품과 자본과 노동이 모두 국제적으로 자유롭게 이동하는 경우에도 이 이론이 여전히 타당하다는 것을 논증했다. 그들은 또 그의 노동가치론을 배격한 상태에서도 마찬가지의 결론을 도출해 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리카도의 자유무역론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이론의 문제점은 이론의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있다. 리카도 이론의 타당성과 문제점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나라는 미국이다. 만약 미국의 51 개 주가 모두 독립된 공화국이어서 각 주 사이에 관세장벽이 있고 자본과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을 막는 국경과 법률이 있다고 생각해 보라. 그 나라는 결코 지금과 같은 번영과 풍요를 누리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연방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독립된 51 개 공화국 모두 상품과 자본과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을 허용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러면 그 곳에서도 반드시 지역간의 빈부 격차가 발생하고 제국주의적 침략과 수탈 체제가 형성되어 그로 인한 지역적 대립과 사회, 정치적 갈등이 폭발하게 될 것이다. 미합중국이 이런 사태를 겪지 않은 것은 연방정부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방정부는 중서부 지역의 농민들이, 자기네가 뉴잉글랜드나 캘리포니아의 자본가들에게 경제적으로 착취당한다거나 미합중국의 시민으로서 특별히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여러 가지 정책을 세우고 집행한다. 국토를 균형있게 개발하고 낙후한 지역 또는 빈곤한 계층에 대해 특별한 지원을 제공하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건 중앙정부가 사회 전체의 통합성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리카도의 자유무역론은 세계의 모든 지역이 특정 지역이나 계급에 편향되지 않고 모든 사람의 이익을 공정하게 보살펴주는 세계정부가 존재할 때라야 온전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세계정부는 존재하지 않으며 현존하고 있는 모든 나라의 정부 역시 모든 지역과 계층에 대해 공정한 정부는 아니다. 이 때문에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은 산업화에서 앞선 강대국의 경제적 패권주의를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로 변질하여 지금까지도 약소국을 괴롭히고 있다. 물론 리카도는 19 세기 최강국 영국 시민이었으므로 이런 사태를 염려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음 장에서 뒤늦게 산업화의 대열에 뛰어든 독일의 한 사상가가 선진 강대국의 이데올로기로 변해 버린 리카도의 이론에 대해 보낸 강력하고 타당성 있는 항의를 접하게 될 것이다. 두 날의 칼 노동가치론 리카도는 자기 시대의 경제현상을 대체로 정확하게 이해했지만 한 가지 문제에서만은 옳지 못한 견해를 표명했다. 자유방임시장에서 주기적인 경제공황이 일어날 가증성을 부인한 것은 잘못이었다. 그가 제시한 모든 이론은 자본가계급으로부터 열렬한 환영과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그 자신이 매우 소중하게 다루었던 한 가지 이론은 그들로부터 배척당했으며 그의 제자임을 표방하는 사상가들에 의해 철저히 부정당했다. 그것은 노동가치론이다. 비교우위론을 설명할 때 리카도가 생산비용의 단위로 노동시간 하나만을 사용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는 실제로 생산물의 가치를 결정하는 궁극적인 요소는 그것을 생산하는데 투하된 노동량이라고 믿었다. 물론 이러한 믿음은 노동가치론의 이데올로기적 성격---모든 물질적 부는 직접적 생산자인 노동자의 손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므로 이것을 착취하는 자본가계급을 타도하는 것이 역사적 필연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는 노동가치론---과는 무관하다. 리카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유산계급의 사상적 대변자였으며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한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리카도는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 제 1 장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을 만큼 노동가치론을 중요시했다. 우리는 아담 스미드가 서로 다른 상품이 일정한 비율로 교환되는 이유를 발견해 내려고 애쓴 사실을 알고 있다. 스미드 역시 리카도와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상품이 교환되는 이유는 그것이 모두 노동의 생산물이기 때문이라고 보았으며, 상품 사이의 교환비율은 그것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량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스미드의 이론은 두 가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는 숙련된 노동자와 미숙련 노동자는 같은 양의 노동으로 서로 다른 양의 상품을 생산하며, 같은 숙련도를 지녔다 할지라도 값비싸고 효율적인 기계를 가지고 일하는 노동자는 그렇지 못한 노동자보다 훨씬 많은 생산물을 생산한다는 엄연한 현실이었다. 두번째의 문제는 희귀한 조작이나 그림, 고대의 동전, 특수한 품질의 포도주 등이 그것을 생산하는데 투여된 노동량과는 전혀 무관하게 높은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스미드는, 노동가치론은 자본주의 이전의 미개한 사회에서나 적용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자본주의 상품 교환에 적용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나 리카도는 스미드의 견해를 수정, 보완하여 노동가치론을 되살려 놓았다. 리카도는 "상품이 가치를 지니려면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효용"을 가져야 한다고 전제하고 "상품이 효용을 가지고 있다면 그 교환가치는 그 희소성과 그것을 획득하는데 필요한 노동량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는 대부분의 상품은 노동을 투여하기만 하면 거의 아무런 제한없이 생산을 증대시킬 수 있기 때문에 자유롭게 재생산할 수 없는 희귀한 상품은 자본주의의 경제원리에 의미있는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생각함으로써 스미드를 괴롭혔던 노동가치론의 두번째 문제를 무시해 버렸다. 이 때문에 리카도의 교환이론은 효용론자로 일컬어지는 일단의 경제학자들로부터 보편적 타당성이 없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그러나 리카도에게는 이같은 예외적 상품의 존재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리카도가 주력한 것은 스미드의 노동가치론이 가진 첫번째 문제였다. 우선 그는 숙련노동과 미숙련노동의 차이는 그다지 주목할 만한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떤 종류의 숙련된 노동을 얻는데 필요한 시간은 여러 세대에 걸쳐 일정하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가 나중에 "숙련노동 그 자체가 노동의 결과이기 때문에 숙련노동은 미숙련노동의 일정한 배수로 환산할 수 있다."고 하여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은 리카도가 남긴 암시와 관련이 있다. 리카도는 노동뿐만 아니라 "토지와 자본 역시 생산성을 증가시킨다."는 비판을 반박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는 동일한 노동으로 더 많은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비옥한 토지나 우수한 기계는 그 자체가 원래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과거 노동의 산물이므로 모든 생산물의 가치는 종국적으로 노동량이라는 하나의 요소로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리카도는 이같은 전제 위에서 현실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상품 거래를 설명하는 정말한 가격이론을 전개했다. 리카도와 노동가치론과 가격이론에는 후일 많은 논쟁을 야기한 다양한 난점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이론적 논쟁을 검토하는 것은 이 책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넘어서는 것이므로 다루지 않는다. 리카도가 노동가치론을 고집한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첫째, 그는 물질적 부가 사회의 여러 계급에서 분배되는 법칙을 규명하는 것을 경제학의 주요한 임무로 간주했다. 그래서 그는 유일한 저서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 서문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했다. 대지의 생산물, 즉 노동, 기계, 자본을 결합 사용하여 지상으로부터 얻어낸 모든 것 은 사회의 세 계급, 즉 토지의 소유자, 그것을 경작하는데 필요한 자재 또는 자본의 소 유자와 자신의 노동으로 토지를 경작하는 노동자들 사이에 분배된다...이러한 분배를 규제하는 법칙을 확정짓는 것이 정치경제학의 주요 문제이다. 따라서 생산물의 가치를 결정하는 요소는 하나여야 한다. 만약 맬더스의 주장처럼 "노동이 투여되지 않은 단순한 교환에 의해서도 생산물의 가치가 증가할 수 있다"면 분배법칙을 가장 중요시한 리카도의 경제학은 설 곳이 없어질 것이다. 둘째로, 리카도의 노동가치론은 지주계급과 지대에 대한 공격과 관련되어 있다. 지주의 이익을 옹호하는 사상가들은 토지와 자본과 노동을 '생산의 세 요소'라고 규정짓고 "이 셋이 협력하여 부 또는 가치를 창조하므로 각각 지대와 이윤과 임금이라는 보수를 받는다"고 주장했다. 만약 이것이 진실이라면 이들 세 계급 사이의 갈등과 투쟁은 있을 수 없으며 지주계급은 자기가 공헌한 만큼의 이익을 받는 셈이다. 리카도가 유산계급의 사상가임에도 불구하고 초지일관 노동가치론을 고수하고 여기에 의거하여 자본주의의 경제현상을 설명한 것은 그가 지주와 자본가의 이해가 명백하게 대립하고 정치적 지배권을 둘러싼 두 계급 사이의 정치투쟁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대에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케인즈는 리카도가 한 세기 동안 경제학을 지배했다고 개탄했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19 세기 중반 이후 나타난 경제학의 두 조류는 모두 리카도의 지배를 거부했다. 칼 마르크스가 창조한 경제학은 스미드와 리카도의 노동가치론을 계승했지만, 개인의 이기적 욕망 추구를 국부의 증진과 사회적 조화롤 이끈다는 자유방임시장에 대한 믿음을 단연코 부정했다. 반면 자유방임시장을 굳건히 옹호한 신고전학파 경제학은 리카도의 노동가치론을 철두철미하게 배격해 버렸다. 이것은 스미드와 리카도로 대표되는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이 원초적으로 두 흐름의 적대적인 사상의 싹을 함께 가지고 있었던 탓이다. 19 세기 중반 이후 한편에서는 자본가계급이 경제적 지배권에 이어 정치, 사회적 지배권을 확립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의 비참한 처지가 자유방임시장과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 탓임을 자각한 노동자계급이


현존하는 사회체제를 타파하기 위해 대대적인 투쟁을 개시하게 되자, 이 적대적인 사상의 싹은 각각 하나의 거대한 신념체계로 성장하여 적대적인 두 계급이 서로를 공격하는 사상적 무기가 되었다. 4. 자유무역은 예속으로 가는 길 (우국지사의 경제학, 프리드리히 리스트) 경제사상에도 국적이 있다. 1806 년부터 10 여 년간 영국과 유럽 대륙 사이의 무역을 차단시킨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는 1815 년 평화 회복과 더불어 영국의 곡물법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논쟁에서 신흥 자본가계급의 사상적 대변자로 등장한 데이비드 리카도는 비교우위론에 입각한 자유무역이론을 제시함으로써 자본가계급의 예찬과 숭배를 한 몸에 받았다. 그는 자유무역이 상품을 거래하는 두 나라 모두에게 이익을 준다는 것을 논증했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영국뿐만 아니라 영국과 무역관계를 맺은 다른 모든 나라들 역시 자유무역정책을 실시해야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정부들은 리카도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현실적으로 영국과의 자유무역에서 손해를 보고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목마른 사람이 샘을 판다"는 세상의 이치는 경제사상의 역사에도 예외없이 통용되는 법이어서 마침내는 이웃 독일에서 스미드와 리카도의 무역이론을 반박하는 사상가가 출현했다. 이 사상가는 여러 모로 나폴레옹전쟁에서 깊은 영향을 받은 인물이다.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는 아직 유치한 단계에 있었던 독일의 공업을 우세한 영국 공업과의 경쟁으로부터 보호해 주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패전으로 대륙봉쇄가 해제되자 사태는 급변했다. 전쟁 기간 동안 재고로 쌓여있던 영국의 값싸고 우수한 공업제품과 산업혁명으로 급격히 생산능력을 확대시킨 영국 기업의 상품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스미드나 리카도의 견해에 의하면 대륙봉쇄의 해체는 "국제무역의 자연적이고 자유로운 질서"를 회복시킨 바람직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상공업자들에게는 이것이 하나의 재난으로 다가왔다. 그들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았다. 바로 이때 프리드리히 리스트가 나타났다. 내가 만약 영국인이었다면 아담 스미드 이론의 근본원리를 의심하는 일은 아마 일어 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로 하여금...스미드의 이론에 대한 견해를 개진하게 한 것은 내 조국의 실정이었다. 또 이 새로운 저서를 세상에 내놓을 용기를 준 것 역시 독일의 이 해관계이다. 독일이 낳은 뛰어난 경제학자이며 동시에 비범한 사업가요 열혈 정치가인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자신의 대표작 <정치경제학의 국민적 체계>의 집필 동기를 이렇게 밝혔다. 이 책은 1838~1840 년 사이에 쓰인 것이다. 그러나 리스트가 보호무역정책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행동에 나선 것은 그보다 20 여년 전인 1818 년경이다. 리스트는 여기서 '스미드의 이론'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의 비판은 사실을 스미드와 리카도로 대표되는 영국의 고전학파 경제학의 무역이론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리스트는 자유방임시장에 대한 고전학파의 믿음을 결코 거부하지않았으며, 단지 보호무역이론을 옹호하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부분만을 수정하려 하였다. 그러면 자유방임시장을 기본적으로 신뢰하면서도 유독 자유무역시장에만은 반대하는 기묘한 자유주의자를 만들어 낸 그의 조국 독일의 실정은 어떠한 것이며 경제학에 민족주의를 도입한 리스트는 어떤 인간인가? 급진적 자유주의자 프리드리히 리스트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1789 년 독일 중서부 지방의 뷔르템베르크 왕국 로이트링겐에서 태어났다. 로이트링겐은 신성로마제국이 직할하는 중세의 자유시였으나 1802 년 뷔르템베르크 왕국에 합병되어 자유시의 특권을 빼앗긴 도시였다. 리스트가 태어날 무렵 독일은 통일된 민주국가가 아니었다. 그의 조국은 2 백 63 개의 왕국과 61 개의 자유도시, 그리고 1 천 5 백여 개의 영주국가로 분열되어 있었다. 나폴레옹은 분열상태의 독일을 손쉽게 점령했다. 전쟁 기간 동안 이같은 분열상태는 다소간 정리되어 갔다. 그러나 1815 년 구성된 독일연방은 아직도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느슨한 연합체에 불과했다. 오스트리아 제국과 프로이센, 바이에른, 작센, 하노버, 뷔르템베르크 등 5 개의 왕국,


그리고 중세 이래의 귀족들이 통치하는 29 개의 공국이 연방에 가입해 있었다. 독일은 중세 봉건국가의 유산이 강하게 남아있는 후진 농업국가였다. 각 국의 황제와 왕과 귀족들은 중세의 신분제도에 기초한 전제정치를 실시했으며 '융커'라고 하는 낡은 지주계급이 정치 사회 전반을 지배했다. 각 지방의 도시를 중심으로 상공업이 싹트기 시작했지만 인구의 대부분은 농촌에 살고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18 세기말의 독일 민족은 세 가지 역사적 과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낡은 전제정치로부터 해방되어 시민적 자유와 민주주의를 찾는 일, 상공업의 발전을 통해 중세기 이래의 빈곤에서 벗어나는 일, 그리고 극도의 분열상태를 극복하여 근대적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일이 바로 그 세 가지 역사적 과제였다. 리스트의 아버지는 건실한 피복공으로 넉넉한 살림을 일구었다. 자애로운 어머니는 둘째 아들 프리드리히가 공부도 별로 열심히 하지않고 아버지의 사업에도 관심이 없어 큰 걱정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열일곱 살이 되자 관리로 출세를 꿈꾸며 행정관청의 서기로 들어감으로써 일단 부모를 안심시켰다. 나폴레옹전쟁이 일어나자 뷔르템베르크는 프랑스 군대에 점령되었다. 비록 점령군이기는 하나 혁명의 이념을 전 유럽에 전파하기 위해 진주한 프랑스 군대를 보면서, 청년 리스트는 자유주의사상과 근대적 관료제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회계와 행정, 정치학과 경제학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쌓는 한편 관리로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덕분에 빠른 승진을 거듭했다. 전쟁이 끝난 1815 년 그는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수도 슈투트가르트 중앙청의 회계관이 되었다. 리스트가 유능한 관리에서 급진적 자유주의 정치가로 변신하는 계기는 1816 년에 찾아왔다. 뷔르템베르크 왕 프리드리히 1 세가 사망하고 빌헬름 1 세가 즉위하면서 시작한 헌법 논쟁이 그것이다. 리스트는 빌헬름 1 세의 총애를 받는 개혁 내각 수반에 의해 전격 발탁되어 튀빙겐대학 국가경제학부 교수로 임명되었다. 자유주의적 행정 개혁을 추진할 행정관리의 양성과 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러나 자유주의 내각이 무너지고 보수파가 내각을 장악하자 그는 하루아침에 야당의 처지로 밀려났다. 보수파는 신분제도에 기초를 둔 헌법안을 제시했다. 그러자 리스트는 자유주의자들의 견해를 집약한 입헌군주제 헌법안을 제시하고 투쟁을 게시했다. 리스트의 초안은 신앙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무기 휴대권, 직업 선택과 외국 여행의 자유, 영업의 자유와 독점 금지까지 요구하는 급진적인 헌법안이었다. 리스트는 뷔르템부르크 왕국 행정관리들의 전횡과 부패를 혐오했다. 그들이 국민 위에 군림하면서 협잡과 횡포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리스트 자신이 관리들의 횡포로 인해 크나큰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나폴레옹을 위한 군대 징집을 위해 서둘러 결혼을 한 리스트의 형이 징집 면제를 신청하자 담당 관리가 뇌물을 요구했다. 이 요구를 거부하자 그 관리는 까다로운 서류를 떼어 오라고 강요했던 모양이다. 리스트의 형은 그 서류를 받기 위해 슈투트가르트로 말을 타고 갔다. 징집일이 불과 하루 남은 탓으로 너무 서둘러 말을 달린 그는 그만 말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물론 이 일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리스트는 낡은 행정체계와 관리들의 권력 남용을 제거해야만 한다는 굳은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리스트는 <슈바벤 민중의 벗>이라는 신문을 만들어 입헌군주제 헌법의 정당성을 널리 알리려고 노력했다. 뷔르템베르크의 열띤 헌법 논쟁은 독일 전역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불온한 사상의 소유자로 낙인찍혔고 신문은 검열에 걸려 자유롭게 발행할 수 없는 처지에 빠졌다.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행정에 대한 그의 비판을 보면 귀족과 지주들이 화를 낸 것이 당연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공평한 관찰자라면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내부 사정을 보고 우리 조국의 입법과 행 정이 국가의 골수를 갉아먹고 시민적 자유를 박탈하는 근본적인 결함에 빠져 있음 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국민으로부터 동떨어져 있고 또 내각이 장악하고 있는 관료 체제는 국민의 요구와 시민의 생활상태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쓸데없는 형식에만 얽매 여 국가행정의 독점만을 주장하며, 시민의 활동을 국가에 유해한 것으로 생각하여 반 대하고, 관료적 형식과 계층적 편견을 국가의 최고 지혜라고 찬양하며, 혈연관계나 공 통된 이해관계, 동일한 교육과 동일한 편견의 유대를 통해서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어디를 가더라도...위로는 관리로부터 아래로는 사환에 이르기까지 영화와 사치 이외 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그 반면 보잘 것 없는 성과, 산업의 정체, 임금의 하락, 세 금과 징세인과 경매인에 대한 불만, 불공정한 공무원에 대한 신랄한 불평, 밀고, 관리 들의 권력 남용...모두 입법은 공명정대함과 건전성을 잃고 있을 뿐만 아니라...관세 수입 증대로 통상이 곤란해지고 공업을 방해하고 차별을 조장하고 소송은 비용만 많 이 들어 아무 도움이 안되고 과세는 불공평한, 바꾸어 말하자면 완전히 무계획적인 국가경제체제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행정의 간단하고도 진실한 축도인 것이다.


리스트는 단순한 급진 자유주의자로 머물지 않았다. 1819 년 프랑크푸르트에서 결성된 '독일상공연맹'의 법률 고문으로 취임하면서 그는 혁명적 민족주의자의 면모를 드러냈다. 독일 각지의 상공업자들이 결성한 이 동맹은 관세동맹을 통해 독일 전역을 하나의 시장으로 결합시키는 운동의 시발점이었다. 리스트는 곧이어 로이트링겐시의 의원으로 선출되어 연방의회에 진출하면서 관세동맹의 실현을 위한 정치활동을 정력적으로 전개했다. 리스트가 독일의 상품 거래에 대한 관세를 폐지함으로써 독일 전역을 하나의 시장으로 묶으려 한 것을 보면 그는 확실히 스미드의 제자이다. 독일 전역을 하나의 자유시장으로 만들고 영업활동에 대한 각종의 규제와 간섭을 철폐시키는 것만이 독일의 산업을 진흥시키고 국부를 증진하는 길이었다. 리스트의 생각은 그가 독일상공인동맹의 전권위원으로서 지지자들의 서명을 받아 연방의회에 제출한 일련의 탄원서에 잘 나타나 있다. 한 나라 안에서 수많은 공장이 문을 닫거나 간신히 유지되었고, 또 정기시와 시장에 는 외국 상품이 범람하고 상인들은 대부분 활동 불능상태에 빠졌으니 그 피해가 최악 의 단계에 이르렀음을 이 이상 더 상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겠는가?...독일 내에서 38 종의 관세와 통과세는 국내 상품의 유통을 마비시켜, 인체에 비유하자면 사지를 결박 하여 피가 통하지 않는 상태로 만들어 놓았다. 함부르크에서 오스트리아로, 또 베를린 에서 스위스로 장사를 나가려면 열 종류의 과세와 열 종류의 통과세 관련 법규를 연구 하지 않으면 안되고 또 통과운송세를 열 번씩이나 지불해야 한다...우리들의 국도는 관 세라는 빗장에 의해 차단당하고 우리의 하천은 항해세와 수로세 때문에 운항 불능상태 에 빠졌다. 스미드와 리카도의 조국에서는 자연스럽게 발전해 가는 자유방임시장에 대한 정부의 간섭이 문제를 일으켰다. 그러나 리스트의 조국은 극심한 정치적 분열상태 때문에 자유방임시장이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 없어서 문제가 일어났다. 리스트가 연방의회에서 자유시장이라는 '자연적 자유의 질서'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역설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는 연방의회에서 뿐만 아니라 각종의 간행물을 통해서도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그러나 국내 관세의 폐지로 정부의 수입 감소를 초래할 것을 걱정한 낡은 지배계급은 리스트의 호소를 묵살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위험한 선동정치가'라는 딱지를 붙여 주었고, 상공인동맹을 '혁명적 결사'로 취급했으며, 그와 동맹의 활동을 '선동적 책동'으로 간주했다. 불온한 사상을 소지한 혐의로 요시찰인 명부에 올라 있던 리스트는 마침내는 "로이트링겐 선거인의 지지를 사칭하여 연방의회에 선동적인 청원서를 낸 혐의"로 의회에서 제명되었고 10 개월의 금고형까지 선고받았다. 박해가 시작된 것이다. 공업력의 발달은 세계 지배의 지름길 모든 선지자가 다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조국을 위해 봉사하려다 조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그는 프랑스로 건너갔지만 조국을 잊지 못해 다시 돌아왔다. 독일 정부는 그를 구금했다가 미국으로 가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고서야 이 선동정치가를 풀어 주었다. 리스트는 1825 년 봄 아내와 네 자녀를 데리고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조국 독일을 제외한 모든 나라에서 환영을 받았다. 일찍이 미국의 독립을 돕기 위해 지원병으로 미국독립전쟁에 참가했고, 프랑스 대혁명의 지도자이기도 했던 라파예트 장군은 독일에서 추방당한 이 자유주의자를 미국의 지도적인 정치인들에게 소개시켰다. 미국 정부와 자본가들은 리스트의 보호무역론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우세한 영국의 공업에 맞설 수 있는 힘을 가질 때까지 관세를 높여 국내의 공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그의 견해는 그들의 이익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보호관세 논쟁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라파예트 장군이 서명한 여권을 지닌 독일의 경제학 교수' 리스트는 저명인사가 되었다. 그는 또한 독일어 주간지 <아들러>의 편집을 맡아 언론인으로서 영향력도 행사했으며, 미국의 7 대 대통령 잭슨이 독일 이민자들의 표를 모을 수 있도록 지원했다. 리스트는 미국시민권을 획득했으며 사업가로도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 필라델피아 부근의 질 좋은 탄광을 찾아낸데 이어 몇몇 유지들과 슈쿠길 철도운하회사를 창립함으로써 미국 철도 창시자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조국을 잊을 수 없었던 그는 잭슨 대통령에게 부탁하여 함부르크


주재 미국 영사의 자격으로 귀국했다. 미국 망명길에 오른 지 5 년만의 일이었다. 리스트는 조국에 돌아오자마자 자신이 오랫동안 그려 왔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것은 독일의 산업지역을 철도망으로 연결하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가 제안한 철도부설계획이 너무나 방대한 것이고 독일 국내에는 그를 미워하는 반동적 권력자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이 포부는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한 가지 위안이라면 1834 년 마침내 통일된 관세구역을 설정하는 관세동맹이 성립됨으로써 독일 전역이 하나의 시장으로 결합된 사실이었다. 이로써 독일은 광대한 국내시장이라는 산업화의 기본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가 <정치경제학의 국민적 체계>를 집필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1838 년에서 1840 년까지 파리에 머물면서 이 책을 집필하는데 몰두했다. <정치경제학의 국민적 체계>는 경제학에 역사와 민족주의를 체계적으로 도입한 최초의, 그리고 훌륭한 저작이다. 그리고 여기서 리스트가 전개한 경제이론은 그가 스미드의 이론에 의심을 품은 동기를 명백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국충정이었다. 리스트는 경제학자이기 이전에 조국의 불안한 미래를 걱정한 우국지사였다. 경제사상의 역사에서 이러한 인물은 매우 희귀하다. 그러면 리스트는 조국의 현실에서 과연 무엇을 걱정하였던가? 광대하고 다양한 자연자원이 매장된 영토를 가진, 그리고 인구가 많고 농업,공업,해 운업과 국내외 상업을 결합시키고 있는 국민은 단순한 농업국가보다는 비교할 수 없 을 정도로 문명화되어 있고 정치적으로 발달되어 있으며 강력하다. 공업은 국내외 상 업,해운과 개량된 농업의 기초이며, 따라서 문명과 정치적 세력의 기초이다. 그리고 지구상의 모든 공업력을 독점하여 다른 나라의 경제발전을 억누르는데 성공하여, 그 들이 단지 농산물과 원료만을 생산하든지 필요불가결한 지방공업만을 운영하게 하도 록 억제하는 국민은 반드시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리스트는 공업력을 독점하는 나라가 필연적으로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고 생각했으며 그러한 가능성을 가진 나라로 영국을 지목했다. 물론 이런 경우 독일은 영국의 지배를 받는 2 등 국가가 될 것이다. 이리하여 점차 영국을 맹주로 하는 영국계 국가들이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고, 유럽 대륙의 다른 국민들은 미약한 제 2 급 국민으로서 영국적인 세계 속에 해소되고 말 것이다. 프랑스는 스페인이나 포르투갈과 함께 이 영국적 세계에 최고급 포도주를 공 급하면서 자신은 저질 포도주를 마시는 신세가 될 것이다. 프랑스인에게는 기껏해야 화장품 제조 정도가 허용될 것이다. 이 영국적인 세계에서 독일에게 맡겨지는 일은 장난감,목재,벽시계,언어학 서적의 제조나, 때로는 러시아와 아프리카의 황무지에 영국 의 상공업 지배권과 언어를 보급하는데 전념하는 지원군의 역할이 고작일 것이다. 아 마도 몇 세기가 지나지 않아서, 이 영국적 세계의 사람들은 우리가 아시아의 여러 국 민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들에 대해서 가지는 정도의 존경심만 가지고 독일인이나 프 랑스인데 대해 말하게 될 것이다. 참으로 선동적인 문장이다. 독일의 반동적 권력자들이 리스트를 추방한 것은 그의 이러한 능력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리스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너무나 뚜렷하다. 공업생산력에서 뒤진 나라가 앞선 나라와 자유무역을 할 경우 반드시 그 나라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리스트가 고전학파의 무역이론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리스트는 자유무역론을 배격함으로써 스미드의 사상을 제한적으로만 승인했다. 자유방임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거래를 통해 개인의 이기적 욕망 추구를 국부의 증진으로 이끄는 '보이지 않는 손'은 오직 한 나라 안에서만 유효한 것이다. 그러나 리스트가 단순히 자유무역을 반대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비범한 사상가라면 자신의 정책적 견해를 사회 발전의 일반법칙으로 표현하려는 의지와 능력을 갖추고 있는 법이다. 리카도가 곡물법 반대에서 출발하여 비교우위론이라는 일반 이론으로 나아간 것처럼 리스트는 생산력이론이라는 독특한 이론체계를 정립함으로써 스미드의 '국부론'을 수정하려 했다. 자유무역론은 강대국의 이데올로기


스미드나 리카도는 노동이 부의 원천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에 의하면 모든 부는 정신적, 육체적 노동의 산물이며 빈곤은 나태의 결과이다. 그리고 부의 증가는 생산적인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의 수와 노동의 효율성 또는 생산성에 의해 좌우된다. 리스트는 이것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도대체 노동과 나태의 원인은 무엇이며 생산적인 노동과 효율적인 노동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는 '부의 원인'과 '부 그 자체'는 다르기 때문에 부 그 자체보다는 부를 창조하는 힘, 즉 생산력이 근본적으로 중요하다고 대답했다. 리스트는 고전학파가 부와 부의 원인을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잘못을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국민의 부는 교환가치의 소유가 아니라 생산력의 소유에 있다. 그것은 마치 어부의 부가 물고기의 소유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얻으려는 욕망을 지속적으로 충족시켜 줄 능력과 수단에 달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학파(영국 고전학파-필자 주)에 의하면 돼지를 사육하는 자는 생산적인데 인간을 교육하는 자는 비생산적이다. 팔기 위하여 피리를 만드는 자는 생산적이고, 가장 위대 한 명인까지도---연주를 시장에 반출할 수 없기 때문에---비생산적이다...뉴튼 같은 사람 은...당나귀나 말보다도 덜 생산적이다. 이러한 비판은 일리가 있으나 다소 지나칠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는 그릇된 것이기도 하다. 스미드 역시 교환가치를 낳지는 않지만 인간에게는 유용한 노동이 있음을 인정한 바 있다. 하지만 리스트가 이토록 과격한 비판을 한 데에는 또 그만한 사유가 있다. 그는 당시 독일이 영국에 비해 물질적 부에서 훨씬 뒤져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조만간 영국을 따라잡을 만한 잠재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독일은 세기마다 흑사병이나 기근, 또는 내외의 전쟁으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곤 했지만 항상 그 생산력의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그리하여 독일은 어느 정도 행복한 활에 도달했다. 그러나 부강했지만 폭군과 사제들이 권력을 좌지우지했던 스페인은 국 내에 완전한 평화를 유지하면서도 가난하고 비참한 처지로 전락했다. 국민은 그 생산력을 각 개인의 정신적, 육체적 힘으로부터, 또는 그 사회적, 시민적, 정치적 상태와 제도로부터, 또는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천연자원으로부터, 그리고 그 수중에 있는 자재와 과거의 정신적, 육체적 노력의 물질적 산물(물질적인 농,공,상 상업 자본)로부터 끌어내는 것이다. 리스트는 스미드가 특히 '사회적, 시민적, 정치적 생산력'의 중요성을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했다고 비판했다. 독일 민족의 우수성에 크나큰 자부심을 지니고 있던 이 우국지사의 심정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의 조국이 "수중에 있는 자재와 과거의 노력의 물질적 산물", 즉 자본과 기술이 부족한 탓으로 일시적으로 영국에 뒤져 있지만 "그 사회적, 시민적, 정치적 상태와 제도"를 개선하기만 하면 반드시 영국을 따라 잡을 수 있다는 것이 그가 강조한 핵심인 것이다. 리스트가 자유주의적 정치개혁과 관세동맹의 결성을 위해, 그리고 독일의 철도 부설과 상공업의 진흥을 위해 투옥과 추방을 마다않고 투쟁한 것은 바로 이러한 확신에 힘입은 것이었다. 물론 리스트 자신은 이것을 결코 숨기지 않았다. 외국에 예속되지 않은 농업을 보유하고 있으며, 도덕적 소질과 국토의 성질로 보아 관세를 부과함으로써 그 나라의 공업력을 증식시킬 자격을 충분히 갖춘 국민은, 처음 에는 비싸게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공업력밖에 보유하지 못한 탓으로 일시적으로는 많은 가치를 희생시킬 것이다. 그러나 장차 그 국민은 그 영토 안에서 대규모의 분업 을 도입하고 농업과 공업 사이의 활발한 교환을 항상적으로 보장함으로써 생산력을 현 저하게 증가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적인 복지의 영속적이고도 급진 적인 성장을 의미한다. 이것이 무역보호제도를 변호하기 위해 우리들이 지배적 이론( 고전학파의 자유무역론-필자 주)에 반대하는 핵심 이유이다.


리스트의 보호무역론은 이미 산업화를 달성한 경제강국과 이제 막 산업화를 시작하려는 후진국 사이의 무역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등 후발 자본주의국가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예외 없이 보호무역정책을 실시했다. 식민지 종속국의 처지에 있다가 2 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한 공업화를 이룩한 나라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나라의 산업자본가들이 높은 관세와 수입제한조치의 보호 아래 수많은 특권을 누리면서 자국의 노동자를 착취하고 부당한 방법으로 자본을 축적한 것을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유치산업 보호를 위한 관세장벽'은 후진국 정부로서는 도저히 회피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무역정책이었다. 우국지사 리스트에게 국내의 특정계급에게는 부를, 그리고 다른 계급에게는 고통을 안겨 주는 보호관세의 문제점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값이 비싸고 품질 낮은 국산 공산품을 사용해야 하는 소비 대중의 고통은 머지 않아 국민 전체의 생산력 증대에 의해 보상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에게는 오직 집단으로서의 국민, 역사적 운명공동체인 '국민국가'만이 중요했다. 이것은 당시 독일의 상황에서는 절실하게 필요한 사상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공업력 발전이라는 리스트의 간절한 소망이 일단 이룩되자 그의 사상은 무자비한 독재체제를 정당화하고 약소민족에 대한 지배와 수탈을 합리화하는 국가주의적, 국수주의적 독극물로 변용되었다. 이러한 사태는 시대상황의 변화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느 정도는 리스트 자신의 책임이기도 하다. 국가의 번영 없이는 개인의 행복도 없다. 리스트의 경제사상을 영국 고전학파의 사상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른바 '국민주의'이다. 리스트는 고전학파가 경제활동의 단위로서 개인만을 중시하면서, 개인을 곧바로 보편적인 인류 사회로 연결시키는 잘못을 범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견해는 분명 타당한 것이다. 스미드나 리카도는 자유방임시장을 '자연적 자유의 질서'라고 불렀는데, 이는 시장의 원리가 모든 나라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이라는 인식을 반영했다. 그러나 리스트는 매우 강력하고 효과적인 반론을 전개했다. 개인과 인류 사이에는 국민이 존재하며 그 국민은 독자적인 언어와 학문과 예술, 고 유한 역사와 전통, 특유한 풍속,관습,법률,제도를 가지고 있으며 존재,독립,진보,영속에 대한 요구와 구획된 영토를 보유하고 있다. 그것은 정신과 이익의 무수한 유대를 통해 독자적으로 존립하는 하나의 전체를 이루어 서로간의 법률을 승인하고, 동시에 현재로 서는 아직 자연적 자유를 향유하면서 전체를 구성하는 다른 사회와 대립하며, 따라서 현재의 세계정세에서는 오직 자신의 힘과 방책에 의해서만 자립과 독립을 주장할 수 있는 그러한 사회이다...인류의 문명릉 여러 국민의 문명과 발전을 매개로 할 때에만 생각할 수 있고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의 정치적 분열과 국내 거래를 제약하는 각종 관세의 존재를 개탄한 리스트가 국제무역에서만은 높은 관세장벽을 주장한 것은 일견 모순되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그는 "인류 사회의 일원으로서 오직 자신의 이기적 욕구 충족만을 추구하는" 원자화된 개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모든 개인은 보편적인 인류 사회의 일원이기 이전에 한 나라의 국민이다. 경제적 이익이 그의 삶을 지배하는 유일한 욕구가 아니며, 추상적인 인류 사회가 그의 안전과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도 결코 아니다. 그는 국민국가의 일원으로서 자기가 속한 나라의 고유한 관습과 문화와 법률과 정치사회적 제도 속에서 살아가며 그것에 의해 자기의 안전과 복지를 보장받을 수 있다. 만일 그가 속한 국민국가가 빈곤과 혼란의 구렁텅이에 빠지거나 다른 국민국가의 지배 아래 들어간다면 그는 결코 지속적인 안전과 복지를 누릴 수 없다. 리스트가 관세동맹을 추진한 것은 장차 독일 민족이 하나의 국민국가로 통합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국내 거래의 자유화는 국민국가 독일의 국부를 증진시키는 길이다. 거기서는 스미드의 '보이지 않는 손'을 신뢰해도 좋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거인과 난쟁이, 정상인과 불구자, 문명인과 반문명인,미개인이 공존하는 불균형 상태"에 있다. 거인과 난쟁이 사이의 자유무역은 난쟁이를 영원히 거인에게 예속시키는 수단이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손'은 지배와 예속이라는 불평등한 질서를 조성한다. 만약 모든 국가가 정상적인 힘을 가지고 하나의 '세계연합'을 결성하여 인류가 모두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결합할 수 있다면, 그 때에는 국민국가 사이의 자유무역이 모두에게 이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리스트는 만민주의의 탈을 쓴 고전학파의 자유무역 이론을 국제사회의 거인, 곧 영국의 이익에 봉사하는


강대국의 이데올로기로 간주했다. 그는 만민주의를 먼 미래의 이상으로 밀어내고 그 자리에 역사주의를 가져다 놓았다. 그가 국민주의 경제학을 정립한 것은 "미개의 국민국가를 문명화하고 국민국가를 강대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리스트의 국민주의는 그 역사적 정당성에 못지 않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 위험성은 "내가 만약 영국인이었다면 아담 스미드 이론의 근본원리를 의심하는 일은 아마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리스트의 고백 속에 청므부터 내포되어 있었다. 그는 국민주의 경제학을 통해 독일 국민을 영국과 대등한 '정상적인 국민'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는데, 그의 '정상적인 국민'은 이런 것이다. 정상적인 국민은 공통된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각종 자원이 풍부하고 광대하 며 잘 가꾸어진 영토와 많은 인구를 보유한다. 농업,공업,상업과 해양업이 균등하게 발 전해 있다. 예술이나 과학,교육 시설이나 보통 교육은 물질적 생산력과 동등한 수준에 있다. 헌법,법률과 제도는 그 국민에게 고도의 안전과 자유를 보장하며, 신앙심과 윤리 와 행복을 촉진하다. 한 마디로 시민의 복지를 목적으로 한다. 또한 자립과 독립을 유 지하고 외국 무역을 보호하는데 충분한 육,해군을 보유한다. 그 국민은 후진국 국민의 문화에 영향을 주어 자국의 과잉인구와 정신적, 물질적 자본으로 식민지를 건설하고 새로운 국민을 생성하는 힘을 갖추고 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자면 이는 확실히 지나친 주장이다. 리스트는 독일의 부국강병을 달성하기 위해서 강자에게는 보호관세로 대항하고 약자는 식민지로 지배하라는 권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정도에서 멈추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유럽의 세계 지배를 자연법칙의 산물인 것처럼 옹호했다. 국제적, 국민적 분업에 관해서, 지구상에서 자연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나라는 가장 양호하고 풍부한 생활필수품을 생산하는데 가장 적합한 토지와 육체적, 정신적 긴장에 가장 적합한 기후를 가진 온대의 나라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들 나라는 공업력이 특히 발달하고 그에 따라 국민의 정신적, 사회적 발달과 정치적 세력이 최 고 단계에 도달할 뿐만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든 뒤떨어진 국민들을 자기의 요구에 맞출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온대의 나라들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국민적 분업을 최고 단계까지 완성시켜 국제적 분열을 이용하여 부유해지는데 적합하다. 리스트가 죽은 지 한 세기가 지난 1930 년대의 히틀러 정권은 대대적인 '리스트 부흥운동'을 벌인 적이 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리스트는 자기 나라의 역사는 중시하였지만 다른 나라의 역사까지 중시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영국의 지배를 우려하여 자유무역이론에 반대했지만 그것은 다분히 독일이 그러한 지위를 누리지 못하는데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결코 전세계 국민의 평등한 발전을 갈망했기 때문은 아니었던 것이다. 비극적이지만 차라리 행복한 종말 <정치경제학의 국민적 체계>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것이 리스트에게 정치적 승리를 가져다 주지는 않았다. 만년의 리스트는 주로 독일에서 지냈지만 독일연방의 보수적인 정객과 권력자들로부터 여전히 적대시되었다. 그는 몇몇 신문과 잡지의 편집인으로서 대규모의 철도 건설과 보호무역의 실현을 위해 애썼지만 성과는 별로 신통치 않았다. 그는 완전한 정치적 명예 회복을 기대했지만 그마저 쉽지가 않았다. 보호무역론자 리스트는 하나의 큰 당파의 중심인물로서 적지 않은 정치적 세력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아무런 공적 지위나 정부와의 관계도 가지지 못한 야인에 불과했다. 영국과의 자유무역으로 피해를 입고 있던 상공업자들은 리스트를 찬양했다. 뷔르템베르크의 국왕도 자기 나라 출신의 이 유명한 학자를 친히 불러 철도문제에 대한 조언을 들었다. 그러나 리스트에게 그의 포부를 실현할 수 있을 만한 권한 있는 지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리스트는 프로이센과 벨기에 사이의 또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사이의 무역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몇 번의 긴 여행을 했다. 그 나라의 권력자들은 역시 리스트의 견해를 경청하기는 했으나 책임 있는 자리에 기용하지는 않았다. 1846 년 영국 의회는 곡물법을 폐지하고 곡물 수입의 자유화를 선언했다. 리스트는 또 다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는 독일산업의 몰락을 회피하기 위한 방책으로 독일과 영국의 정치적 동맹을 구상했다. 물론 동맹의 조건은 영국이 독일의 공업 발전을 저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리스트는 대영제국과 독일연방의 동맹에 대한 건의서를 양국 정부에 보내고 직접 런던으로 건너갔다. 적국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런던의 정치인들을 설득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리스트는 참담한 실패만을 맛보고 런던을 떠나야 했다.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건강은 급속하게 악화되었다. 이 열혈 자유주의자요 민족주의자인 우국지사도 계속되는 정치적 좌절과 병마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참담한 비애와 허무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846 년 11 월 리스트는 건강을 돌보기 위해 휴양을 떠날 계획을 세우고 쿠프시타인의 작은 여관에서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며칠간을 여관방에 틀어박혀 지내다가 친구인 콜브 박사 앞으로 편지를 썼다. 나는 절망에 빠졌소, 주여! 저의 가족을 보살펴 주소서. 저의 가족에게 베풀어주신 당신의 자비와 친구들의 친절에 대해 주께서 보상하실 것입니다. 여관을 나선 리스트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경찰은 오랜 수색 끝에 숲 속에서 피스톨을 손에 쥔 채 쓰러져 있는 시신을 발견했다. 그 후의 사태 전개를 제대로 예측했더라면 리스트는 그렇게 서둘러 자신의 생을 마감할 필요가 없었을지 모른다. 독일에서는 낡은 토지 귀족들의 전제정치의 폐해와 산업화의 결과로 생겨난 계급투쟁 때문에 리스트가 죽은 직후부터 혁명적 정세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프로이센 왕국의 강력한 군대를 중심으로 한 독일의 낡은 권력은 이러한 위기를 무력으로 해결한 뒤 1870 년대에 이르러 강력한 독일국가인 '독일제국'을 건설했다. 그리고 그 이후 리스트의 조국은 단기간에 급속한 공업화를 이루는 한편 뒤늦게 제국주의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어 마침내는 세계 지배를 향한 행진을 시작했다. 독일 국민은 리스트가 말한 '정상적 국민'이 되었고 '부강한 국민국가'로 결합되었다. 그러나 그가 예언했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은 보장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치시대에 이어 등장한 가혹한 국가주의적 독재정권에 의해 억압과 유혈과 죽음이 흘러 넘치는 전쟁터로 내몰렸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리스티가 권총으로 자기 머리를 쏘아 삶을 서둘러 마무리한 것이 꼭 비극만은 아닐 것이다. 5. 분열된 세상, 싸우는 사상 (부자의 경제학과 빈민의 경제학) 풍요한 세계와 가난한 세계 문제가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아담 스미드의 세계는 대체로 밝고 희망찬 곳이엇다. 그러나 맬더스와 리카도의 세계는 어둡고 우울한 곳이었다. 거기에서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대다수의 노동하는 사람들은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소득만을 얻는 대가로 평생 고된 일을 해야 하는 신세였다. 스미드는 노동의 분업화로 생산력이 높아지면 결국 대중이 빈곤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피력했다. 그러나 맬더스는 인구 증가라는 자연법칙을 들어 그러한 희망을 부정했다. 리카도는 인구법칙에다 또 하나 절망의 사유를 첨가했다. 그것은 사회발전의 모든 혜택을 독점하는 지주계급의 존재였다.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자신의 조국이 선진공업국인 영국에 예속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스미드와 리카도의 자유무역이론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독일을 영국과 대등한 공업생산력을 가진 나라로 만드는데만 열성을 다했을 뿐 스미드의 신세계를 특징짓는 자유방임시장의 원리에는 의미있는 수정을 가하지 못했다. 리카도와 맬더스의 세계가 암울했던 것은 그들의 책임이 아니다. 그들이 살았던 실제 세계가 그들의 경제학 그 자체보다 훨씬 우울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이 만들어 낸 거대한 도시와 공장, 엔클러저운동에 의해서 또는 기계제 대공장의 위력에 떠밀려 산업노동자가 된 농민과 수공업자들의 집단적 궁핍, 기계와 고용주에 대한 노동자들의 절망적이고 파괴적인 공격, 어린이와 여성들에게까지 강요된 장시간의 고된 노동과 끔찍한 산업재해, 주기적으로 그들을 덮친 각종의 전염병과 빈민들의 타락과 범죄, 스미드는 이런 상황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다. 그가 본 것은 산업혁명이 본격화되기 이전인 18 세기 중엽 매뉴팩처 단계의 자본주의였다. 물론 스미드는 부의 분배를 둘러싼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대립을 인정했고 그


양상을 냉정히 관찰했으며 정부가 언제나 자산계급을 편들고 있다고 말했다. 스미드의 통찰력은 참으로 넓고도 정확했다. 19 세기에 접어들어 산업혁명이 본격화하자 부의 분배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은 스미드의 신세계 그 자체를 위협하는 수준으로까지 고조되었다. 스미드의 신세계는 둘로 분열되었다. 자산계급, 즉 지주와 자본가들이 세계는 풍요롭고 안락했다. 자유방임시장은 그야말로 '자연적인 자유의 질서'였고, '보이지 않는 손'은 번영과 행복을 약속하는 '신의 손'이었다. 그들에게 인생이란 하나의 축복이었다. 그러나 무산계급, 즉 노동자와 빈민의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가난과 고통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은 냉혹하기 그지없는 '사탄의 손'이었다. 그들에게 인생은 고해였다. 자산계급은 정부가 자유방임시장에 대해 불필요한 개입을 일삼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도 정부로 하여금 노동자들의 단결을 금지하는 각종의 법률을 제정하게 만들었다. 노동자들은 처음에는 기계를 공격했고 다음에는 고용주를 공격했지만 결국은 자산계급이 장악한 정부 그 자체에 증오의 화살을 겨누었다. 이같은 사태는 산업혁명을 가장 먼저 이룩한 영국과 프랑스에서 일어났으며, 이어서 뒤늦게 산업화의 대열에 뛰어든 독일, 오스트리아 등 유럽의 모든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스미드의 신세계가 둘로 분열됨에 따라 그의 경제학도 같은 운명에 빠졌다. 둘로 분열된 경제학은 분열된 세계를 반영하여 서로를 공격하면서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철폐를 주장하거나 그 완전성을 변호했다. 그 둘은 모든 면에서 대립하는 결론을 이끌어 냈다. 우리는 이번 장에서 이 두 진영의 사상가들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그들은 완전히 대립되는 경제학의 두 체계에 주춧돌을 놓았다. 그 위에 번듯한 집을 지은 사람은 칼 마르크스와 한계효용학파로 불리는 한 무리의 경제학자들이다. 그리고 그 이후의 수많은 경제학자들은 그들이 대충 지어 놓은 집을 수리하고 단장하고 증축하는데 힘썼다. 고전학파 경제학의 분열은 단순히 말 많고 고집센 학자들 사이의 싸움으로 끝나지 않았다. 19 세기 중엽 이후 20 세기에 걸쳐 세계의 곳곳에서 벌어진 정치적 반란과 참혹한 유혈사태, 혁명과 전쟁이 많든 적든 이 분열과 관련을 맺고 있다. 우리는 뒷장에서 분열된 경제학의 두 체계를 한층 면밀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는 18 세기 중반에 그 주춧돌을 놓은 경제사상가들의 견해들을 간략하게만 다루기로 하자. 유토피안들의 아름다운 환상 16 세기 영국에 보기 드문 상상력의 소유자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토마스 모어(Thomas More)였다. 이 사람은 번듯한 영국 상류사회의 자제로서 옥스퍼드대학에서 문학 공부를 했는데 집안의 압력 때문에 중도에 법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변호사가 되었다. 재능이나 인품이 매우 특출한 탓으로 영국 하원의장과 대법관까지 지낸 토마스 모어는 영국 국왕이 교회를 관장하는데 반대하는 소신을 굽히지 않은 죄로 그만 1535 년에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지금 저명한 정치가로서가 아니라 공상적 사회주의자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그가 1516 년에 출간한 한 권의 책 때문이다. 모어의 <유토피아>(Utopia)는 정치가로서 탁월한 식견과 아울러 '좌절한 문학도'의 풍부한 소양을 담고 있는 저작이다. 그는 이 책의 1 부에서 영국사회를 관찰하고 그 문제점을 지적했는데, 특히 당시 한창 진행되고 있던 제 1 차 엔클로저운동을 맹렬히 비난했다. 그는 지주들이 농민을 몰아내고 농토를 목장으로 바꾸는 것을 두고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 세상"이라고 비꼬면서 "사유재산제도를 폐지해야 인간의 평등과 복지를 이룰 수 있다"는 엄청나게 과격한 견해를 피력했다. 그러나 좀 더 강력한 사상적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모어가 자신이 그리는 이상사회를 묘사한 이 책의 제 2 부에서였다. 유토피아라고 이름붙인 토마스 모어의 이상사회에는 모든 재산이 공동 소유이고 국민은 도시에 살면서 수공업에 종사한다. 그들은 매일 6 시간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원하는 공부를 하며 번갈아 가며 의무적으로 농사일을 한다. 그리고 모든 생산물은 필요에 따라 분배되며 식사는 공동으로 운영하는 식당에서 해결한다. 어린이들은 교육기관에서 집단적인 교육을 받으며 모든 공무원은 선거로 뽑는다. 여기서는 특히 황금을 돌같이 보는 문화가 정립되어 금,은은 변기나 수갑 따위를 만드는데 쓴다. 물론 유토피아에도 외부와의 전쟁이나 아무도 하려 들지 않은 천한 허드렛일 따위의 골치아픈 문제가 있다. 그래서 인접 지역에 사는 야만인들을 데려다 허드렛일을 시키고 전쟁을 치르게 한다. 너무나 풍부한 상상력과 진지한 사회적 문제의식 때문에 이 고매한 정치가는 공산주의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가 시대를 지나치게 앞서갔기 때문에 무려 3 백 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뒤에야 제자들이 나타났다. 유토피아를 갈망한 숱한 추종자들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인물은 아무래도 영국인 로버트 오웬(Robert Owen)일 것이다. 1815 년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근처 산골 마을 뉴라나크에 진기한 구경거리가 하나 들어섰다. 로버트 오웬이


세운 방적공장이었다. 이 공장은 하나의 거대한 실험실이었다. 그 후 10 년 동안 유럽 각국에서 수만명의 고귀한 왕족들과 귀부인, 실업자와 작가들, 성직자와 개혁주의자들이 이 실험실을 방문했다. 뉴라나크의 방직공장에서 이루어진 실험의 주제는 "공장과 노동자들의 생활에서 빈곤과 타락과 나태를 추방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었다. 오웬의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깨끗하고 질서정연한 공장과 주택, 하루 11 시간 미만의 노동시간, 학교와 유치원에서 재미있게 공부하는 아이들, 체벌이나 강제가 없이도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 민주적으로 만들어진 근로규칙, 주정뱅이가 없는 거리 풍경, 이 모든 것이 방문객들을 놀라게 했다. 이 공장의 소유자이자 경영자인 로버트 오웬은 사업상으로도 크나큰 성공을 거두었다. 뉴라나크의 방적공장보다 더 매력적인 존재는 바로 로버트 오웬이라는 인간이었다. 오웬은 1771 년 웨일즈의 가난한 수공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아홉 살에 도제살이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는 천부적인 사업 수완이 있어서 18 세에 약간의 돈으로 자기 사업을 시작하여 스무 살의 나이에 벌써 맨체스터의 큰 방적공장 공장장이 되었다. 그는 24 세에 한 여성과 사랑에 빠졌는데 마침 그 아버지가 시골 농장을 처분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이리저리 돈을 꾸어 딸과 공장을 한꺼번에 손에 넣었다. 그런데 오웬은 그 공장을 불과 1 년 사이에 딴판으로 바꾸어 놓고 세계적인 명소로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뉴라나크 방적공장인 것이다. 뉴라나크에서 엄청난 돈을 번 오웬은 1824 년 미국 인디애나주 해안에 막대한 땅을 매입하여 유토피아를 건설하기로 결심하고 그 곳에 뉴하모니(New Harmony)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온갖 사기꾼과 잡동사니들이 여기에 몰려들어 일은 하지 않으면서 쓸데없는 갑론을박만 일삼았기 때문에 뉴하모니는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아무런 소득 없이 재산만 거덜낸 오웬은 1828 년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가 완전히 죄절한 것은 아니었다. 로버트 오웬은 언변도 훌륭했지만 정열과 실천력이 그보다 더 앞서는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그는 손수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모범을 보임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려 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의회에서 한 진술이나 저서를 통해 자기의 견해를 전파하기도 했다. 오웬은 토마스 모어의 제자답게 사유재산을 비난했고, 노동자의 빈곤은 인구 증가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모순 때문이라면서 맬더스를 반박했다. 그는 노동자가 생산물을 전유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화폐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기만하는 도구이므로 없애 버려야 한다는 독특한 견해까지 내놓았다. 그는 또한 아동의 취업을 금지하고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공장법 제정운동에 열성으로 참가했으며, 생산과 소비를 공동으로 영위하는 자급자족적 협동조합 부락을 세워 농업과 상공업, 도시와 농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결합시키는 것만이 인류의 평등과 복지에 이르는 길임을 강조했다. 뉴하모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오웬은 여전히 씩씩하고 낙관적이었다. 그는 생산자협동조합과 소비자협동조합의 조직을 촉진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결과 1833 년에는 '대국민통합노동조합'이라는 전국적인 산업부문동맹을 결성했다. 이 동맹은 50 만 조직원을 거느린 대규모 조직이었지만 자본가와 정부의 박해로 인해 2 년만에 와해되었다. 오웬은 87 세의 나이로 여전히 인간에 대한 한없는 신뢰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간직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이룬 모든 것들도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다. 오직 '대국민통합노동조합'만이 산업노동조합으로 계승되어 영국노동운동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오웬은 19 세기 자본주의에 대한 반항아였다. 그러나 자기의 인생과 열정과 재산을 다 바쳐 위대한 희망을 실현하려 한 이 고결하고 낭만적인 '자선사업가'는 그리 위험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는 자본주의를 비난하였지만 폭력으로 그것을 전복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결코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견해를 개진하고 모범을 보이려고 노력했지만 남에게 강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든 반항아들이 다 그랬던 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생 시몽(Saint Simon)은 태어날 때부터 백작이었다. 그러나 선천적으로 황소 고집이었던 이 젊은 백작은 부르봉 왕조에 충성하는 대신 열 여덟 살에 라파예트와 함께 미국독립전쟁에 지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쌓아 훈장을 탔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프랑스대혁명에도 열렬히 투신하였다. 그는 신분제도를 진심으로 혐오했는데 귀족 출신을 선출하면 나쁜 선례가 된다는 이유를 들어 어떤 시의 시장이 되어 달라는 요구를 거절하는가 하면 국회의원이 되자 귀족작위의 폐지를 제안하고 스스로도 백작위를 버린다고 발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혁명이 너무 과격한 독재와 유혈사태로 치닫자 혁명을 그만두고 토지투기사업에 손을 대어 엄청난 재산을 모았다. 부자가 된 생 시몽은 이번에는 정치가 대신 위대한 철학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이름있는 과학자, 철학자, 경제학자, 정치가들을 자기 집에 불러들여 토론하고 그들의 사업을 후원했다. 이 괴짜 철학자는 사회 연구에 필요한 가정생활을 체험하기 위해 '계약결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만년에는 그 많은 재산을 모조리 탕진하고 옛날 하인의 집에 신세를 지는 진짜 가난뱅이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쓴 수많은 사회


연구 책자를 후원자들에게 보내고 "지식과 공공복리를 위한 열정과 전 유럽을 뒤덮고 있는 무서운 위기를 종식시킬 평화적인 방법을 찾으려는 희망 때문에" 거지가 된 자신을 도와달라고 호소했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백작으로 태어난 이 철학자는 실패한 자살의 후유증과 질병에 시달리다가 1825 년 사망했다. 후원자들의 냉대는 당연한 것이었다. 생 시몽은 폭력으로 자본주의에 반항하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선전과 설득에 의해 자본주의의 폐해를 수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한 그의 진단이 너무나 신랄했다. 그는 소유형태가 사회라는 건물의 기초를 이룬다고 보고 자본주의의 사적 소유가 대중의 빈곤과 사회적 갈등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사회의 부를 생산하며 과학과 기술의 진보를 이룩하는 사람들이 피지배계급이 되어 있고, 국왕과 귀족과 관료들이 호강하며, 무익한 인간들이 재능 있는 사람들을 지배하고, 패덕한 인간들이 선량한 사람들을 억누르는" 자본주의 사회는 "흑과 백이 뒤집어진 세상"이라고 비난했다. 특히 다음과 같은 그의 주장은 돈 많은 후원자들---생 시몽이 말한 국왕과 귀족과 관료, 무익하고 패덕한 인간에 해당된다---을 격분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프랑스에서 어느 날 갑자기 지도적인 물리학자 50 명, 화학자 50 명, 생리학자 50 명 ...수학자, 기술자 등 학자, 예술가, 기술자 등 3 천 명이 없어졌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어떻게 될까? 그 결과는 분명히 프랑스의 운명을 위협할 정도의 파멸일 것이다. 그러 나...전문적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모든 천재들을 그대로 둔 채, 한날한시에 왕의 모 든 형제들(그리고 뢍실의 모든 친족들까지)을 잃어버리는 불행이 프랑스를 덮쳤다고 하자...동시에 프랑스 왕실의 모든 근위대와 장관들...의원들, 주요한 고위관리를, 고위 장성과 추기경들, 대주교와 주교들,...판사들, 그리고 귀족처럼 살고 있는 수많은 부유 한 자산가들이 모두 없어져 버렸다고 가정해 보자. 프랑스 사람들은 틀림없이 마음이 아플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음씨가 고와서 그토록 많은 동포들이 갑자기 사라진 사태를 무관심하게 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3 만 명이나 되는 이런 사람들이 사라진다고 해서...국가가 정치적 피해를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생 시몽과 함께 거론되는 또 한 사람의 반항아는 샤를 푸리에이다. 오웬이 자수성가한 사업가이고 생 시몽이 귀족이었던 사실을 고려할 때, 푸리에는 보통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1772 년 프랑스 브장송의 포목상 집안에서 태어난 푸리에는 리옹이나 파리 등의 상점과 은행에서 잔뼈가 굵은 장사꾼이다. 그런데 황당무계한 공상을 즐긴 이 장사꾼은 상인들의 세계에서 치부의 비결을 배우는 대신 투기와 매점매석 등 그 비결의 부도덕성을 연구하는데 몰두했다. 그는 자유니 평등이니 박애니 하는 공화국의 이념은 모두 자본주의 사회의 죄악을 감추기 위한 가식이라고 단정했으며 특히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으면서 치부한 상인계급을 미워했다. 상인계급이 다른 계급이 생산한 부를 갈취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푸리에는 별로 성공하지 못한 소상인으로서 일생을 마감해 가는 시점에서야 비로소 "현대와 장래의 세대를 위해 행복의 근원을 마련해 주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여 세상에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는 생 시몽과 마찬가지로 생산소비협동조합인 '공산촌'의 계획안을 제시했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노동과 자본과 재능을 투자하여 그에 따라 생산물을 분배하며 농업을 위주로 공업을 결합한다는 점에서만 오웬의 유토피아와 달랐다. 푸리에는 지구의 역사와 인류의 미래에 대해 황당무계한 이론을 펼쳤다. 그러나 공산촌 계획만은 제법 추종자를 얻어 실용주의 사고가 가장 강한 미국에서 수백 개의 푸리에식 공산촌이 실제로 만들어졌을 정도였다. 푸리에는 몽상이 지나쳐 미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일으킬 정도로 상상력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상류사회에 그의 사상은 매우 위험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푸리에가 그들 중 상당수를 사회의 부를 낭비하는 족속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푸리에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가장 쓸모없고 파괴적인 노동에 종사하는 자들이라고 단정했다. 1.군인 2.게으른 부자 3.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밥벌레들 4.사기꾼 5.창녀 6.경찰 7.변 호사 8.철학적 궤변자들 9.관료 10.스파이 11.사제와 성직자들 생 시몽과 푸리에, 그리고 로버트 오웬은 엄밀한 의미에서 경제학자가 아니다. 그들은 유토피안 또는 공상적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경제사상의 역사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미드의 신세계를 근본적으로 부정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자유방임시장이 결코 '자연적 자유의 질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억압의 질서'였다. 유토피안들의 사상은 경제학자들의 생각에 강력한 영향을 주어 자유방임시장의 폐기처분을 요구하는 경제이론을 탄생시켰다. 쾌락은 선이고 고통은 악이다. - 벤담 철학이 모든 과학의 왕이라는 것은 경제학의 역사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위험스런 공격으로부터 풍요롭고 안락한 세계를 보호해야 한다고 느낀 19 세기의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을 의탁할 수 있는 철학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들은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만큼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하나의 경제이론을 세우는데는 부족함이 없는 철학적 근거를 발견했다. 그것은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의 공리주의 철학이었다. 이 철학은 한글로 써 놓으면 공리주의로 잘못 이해하기 쉽다. 더욱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표현과 연관되면 그러한 오해의 가능성은 더욱 짙어진다. 그러나 벤담의 공리주의는 개인의 이익이나 쾌락을 선악의 판단기준으로 삼는 철학일 뿐 공공의 이익과는 원천적으로 무관한 철학이다. 제레미 벤담은 18 세기 후반과 19 세기 초반에 활동한 사회이론가이자 철학자이다. 그는 경제문제에 대해 많은 글을 썼다. 그러나 그가 경제사상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 된 것은 그런 글 때문이 아니라 1789 년 출간한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론>(An Introduction to the Principle of Morals and Legislation)이라는 철학적 저작 덕분이다. 그는 이 책에서 인간의 본성과 선악의 기준에 대한 매우 새롭고 정교한 사고방식을 제시했는데, 2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철학은 중,고등학교나 대학에서 가르치는 거의 모든 경제이론을 지배하고 있다. 벤담의 견해에 의하면 도덕적 선악은 어떤 외부적 규범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부합되는지의 여부에 따라서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이 사는 목적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행위는 따지고 보면 모두가 좀 더 큰 쾌락을 얻고 가능한 한 고통을 회피하려는 계산의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사회의 행복이란 개인의 행복을 합친 것이므로 입법의 목적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큰 행복을 누리도록 하는 것, 다시 말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도모하는데 있다. 벤담은 이러한 철학을 경제이론에서 구체화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행복'을 '효용'이라는 말로 바꾸었다. 자연은 인간을 두 개의 최상의 주인, 즉 '쾌락'과 '고통'의 지배 아래 두었다...그것들 은 우리의 모든 행동과 말과 생각을 지배한다...'효용의 원리'는 이러한 종속을 인식하 고 그것을 사회이론의 기초로 간주한다. 효용이란 어떤 대상의 성질, 즉 그것이 이해당사자에게 수익, 이익, 쾌락, 선, 또는 행복(이 모두는 같은 것이다.)을 주거나 (이것 또한 마찬가지인데) 재난, 고통, 악, 또 는 불행의 발생을 회피시키는 경향을 가진 그런 성질을 의미한다. 벤담에 의하면 무엇이 고통이고 무엇이 쾌락인지를 가장 잘 판단하는 주체는 각 개인이다. 따라서 개인이 얻으려고 하는 쾌락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가타부타하거나, 또는 특정한 쾌락의 추구를 제약하거나 의도적으로 장려하는 식의 외부적 간섭을 모두 부당한 것이다. 예를 들어 독서를 함으로써 얻는 쾌락과 포도주를 마셔서 얻는 쾌락 사이에는 우열을 논할 근거가 없다. 술을 마시고자 하는 자는 술을 마시고 책을 읽고 싶은 자는 책을 읽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정당하다. "효용이 같은 한 제도용 핀과 시는 똑같이 유익하다."는 경제학적 표현은 이런 사고방식의 소산인 것이다. 벤담의 '공리주의적 쾌락주의'는 스미드가 주장한 '자유방임시장의 원리'와 맞닿아 있다. 자유방임시장에서 자신의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개인이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쾌락을 극대화하는데 몰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이익과 쾌락 밖에 모르는 사람들을 두고 '속물'이라고 부른다. 칼 마르크스가 벤담을 "현대적 속물을 정상적 인간과 동일시한 속물주의의 시조"라고 비아냥거린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벤담의 철학이 안고 있는 더 큰 문제는 사회를 똑같은 개인---물론 그는 쾌락과 고통의 양을 쉼 없이 계산하여 행동하는 '효용극대화 기계'이다---의 산술적 집합으로 간주한데 있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의 쾌락을 최소화시키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최대화시켜야만 자신의 쾌락을 극대화할 수 있는 그러한 사회관계가 존재한다. 스미드가


일찍이 말한 바와 같이 고용주와 노동자는 일정한 양의 재화---벤담식으로 말하자면 일정한 양의 효용 또는 쾌락---를 놓고 수백 년 동안이나 싸움을 벌여 왔다. 리카도와 맬더스로 하여금 가장 적대적인 논적으로 맞서게 한 지주계급과 자본가계급의 대결 또한 마찬가지의 사례이다. 벤담의 공리주의 철학은 경제사상과 이론의 영역에서 매우 폭넓고 결정적인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효용이론, 더 나아가서 한계효용, 한계생산력, 한계비용 등의 새로운 개념을 낳음으로써 19 세기 중반 이후의 경제학을 고전학파의 전통으로부터 단절시켰다. 그래서 공리주의적 쾌락주의의 기초 위에 19 세기 후반과 20 세기 전반을 지배한 경제학을 신고전학파라고 부른느 것이다. 벤담은 나중 자신의 철학에 중대한 수정을 가하였다. 놀랍게도 자유시장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옹호한 것이다. 벤담은 맬더스와 마찬가지로 자유방임시장이 경제공황에 빠질 가능성을 인정했기 때문에 '정부의 보이지 않는 손'을 승인했다. 그는 또 개인이 부유해질수록 화폐로부터 얻을 수 있는 효용이 감소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말로 "화폐의 한계효용이 체감"한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그가 부자의 금고에서 화폐를 꺼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정부의 소득재분배정책이 사회 전체의 효용을 증대시킨다고 주장한 것은 당연하다. 19 세기의 부자와 권력자들은 벤담의 정책적 견해만을 냉정하게 거부해 버렸다. 왜냐하면 그것은 풍요하고 안락한 세계를 주재하는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모욕이자 침해였기 때문이다. 사람을 계급으로 나누지 말자 - 세이와 시니어 공리주의 철학의 기초 위에 어느 정도 체계적인 경제이론을 쌓아 올린 경제학자는 프랑스인 세이(Jean-Baptiste Say)이다. 자본주의 경제공황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소위 '판로법칙'으로 유명한 세이는 1767 년 리옹시의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상업학교를 나오고 또 실제로 상업에 종사했다. 그는 1789 년 프랑스대혁명이 발발하자 생명보험회사 직원 자리를 박차고 군에 입대하여 혁명에 참가했다. 그러나 자코뱅당이 혁명을 과격한 방향으로 끌고 나가자 혁명에 등을 돌리고 경제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세이는 1803 년 무렵까지 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가르쳤다. 세이는 스스로 스미드의 충실한 제자임을 자랑하면서 스승의 사상을 예찬했다. 그런데 그는 스승의 사상 가운데 한 가지를 확실하게 부정했다. "가치를 창출하는 능력을 인간의 노동에 돌릴 것", 즉 노동가치론이 그것이었다. 세이에 의하면 어떤 상품의 교환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데 투하된 노동량이 아니라 그 상품의 효용에 달려 있다. 그리고 상품의 효용을 창조하는 힘은 인간의 노동력뿐만 아니라 자연력인 토지와 자본에도 존재한다. 이것이 유명한 '생산의 3 요소설'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토지와 자본가 노동 사이의 구분은 무의미하며 이 셋이 협력하여 '생산적 봉사'를 제공한 대가로 주어지는 보수가 지대와 이윤과 임금이다. 특히 자본가는 자본에 대한 이윤과 경영노동에 대한 임금을 합친 것을 보수로 받는다. 세이의 견해에 의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계급투쟁은 오해의 결과이거나 지나치게 무모한 탐욕의 소산이다. 토지와 자본과 노동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여 효용을 생산하고, 각자가 생산적 봉사를 제공한 대가로 지대와 이윤과 임금을 받는 과정에서 착취니 기만이니 억압이니 하는 말은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세이는 자본가들이 재산에 대한 법률적 소유권을 이유로 아무 정당한 권리도 없이 노동자가 생산한 부를 가로채고 있다는 사회주의자들의 비난에 특별히 신경을 써서 자본가의 권리를 보호하는데 특별한 애정을 기울였다. 자본이라는...자산이 다른 계급의 소유자산보다 훨씬 더 신성하고 정당한 것임을 말 할 나위조차 없다...자본, 즉 축적된 생산물은 오직 인간의 절약과 소비능력 행사를 절제한 결과이다. 그 능력의 완전히 행사되었다면 생산물은 생산되는 것과 똑같은 속도로 파괴되었을 것이며, 따라서 그 누구도 기존의 자산을 소유할 수 없었을 것이 다. 따라서, 이와 같은 극기를 실행한 자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그 결과를 요구할 수 없다. 절약은 생산물의 실제적인 창출에 가장 가까운 요소이며 이로부터 생산물의 소유에 대한 의심할 바 없는 권리가 주어진다. 세이는 확실히 재능 있는 경제학자이다. 그의 재능이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대목은 토지와 자본과 노동이라는 생산의 세 요소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무시한 점이다. 이 셋은 효용을 창조하는 생산적 봉사를 제공한다는 면에서 보면 모두 동일하다. 그리고 지대와 이윤과 노동은 생산적 봉사의 보수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따라서 지주계급과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을 구분하거나 그들 사이에 계급투쟁을 논하는 것도 역시 부질없는 짓이다. 참으로 대단한 발상의 전환이다. 세이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제학자나 철학자들은 사회적 계급의 존재를 인정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옹호하는 학자들은, 그 중에서도 지주나 자본가와 같은 부자와 지배계급을 변호하는 사람일수록 "아무리 사회를 평등하게 개혁하려 해도 결국은 자연법칙에 의해 다시 계급사회로 돌아올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기조의 사회상태를 옹호했다. 그런데 세이는 기발하게도 사회적 계급을 구별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없애 버림으로써 같은 목적을 이룬 것이다. 세이가 시도한 '발상의 전환'은 같은 해에 태어난 영국인 나소 시니어(Nassau William Senior)에 의해 한층 발전된 형태로 나타났다. 시니어는 산골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명문 이튼 스쿨과 옥스퍼드대학에서 공부한 수재형의 변호사이지 경제학자였다. 1825 년부터 옥스퍼드의 경제학 교수로 재직한 시니어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따뜻한 동정심을 지니고 있었으며, 맬더스나 리카도와는 달리 생산력의 향상과 교육의 확대에 의해 노동자들의 생활수준과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1830 년 가을 영국 남부지역에서 벌어진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과 폭동, 그리고 그로 인해 야기된 심대한 사회정치적 불안이 그의 마음에서 기난한 사람에 대한 연민의 정을 빼앗아가 버렸다. 시니어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러지 영국 정부는 그에게 빈민과 노동자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는 여러 가지 직책을 주었다. 그러나 19 세기 중엽 영국의 노동자와 빈민들에게 그의 활동은 하나의 재앙이었다. 시니어는 빈민과 실업자에 대한 수당과 빈민구호사업의 범위를 대폭 축소하는 1834 년의 구빈법 개정안 초안을 거의 도맡아 썼다. 또 아일랜드 구빈법조사위원회와 공장위원회 등의 위원으로 일하면서 노동시간의 단축과 노동조합의 결성을 허용하는 공장법 제정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1830 년에 시니어가 쓴 <임금에 관한 세 강의>는 유능한 경제학자가 일단 따뜻한 동정심을 잃어버리면 얼마나 냉혹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곤궁에 처한 노동자의 자원은 좀 더 많은 노력과 엄격한 절약이다...그러고서도 모 자라는 것은 자비로운 사람들에게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는다. 그와 고용주의 관계 는 우정어린 자발적인 결합이며 양자는...그 자신의 복지가...다른 편의 복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러나 임금이 계약이 아닌 순간---노동자가 그 '가치'에 의해 서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 지불받는 순간---그는 이제 자유로운 인간이 될 수 없 다. 그는 노예의 복종이 아니라 나태함과 무계획성, 탐욕과 증오의 버릇에 물든다. 앞에서 말한 1834 년의 구빈법 개정 당시 시니어가 위원으로 일한 '구빈법조사위원회'는 가난한 노동자가 "자유로운 인간이 되도록 하기 위해", 첫째 근로조건이나 임금 액수에 관계없이 노동자는 자유시장이 제공하는 어떤 일이라도 받아들여야 하고, 둘째 일하려 하지 않거나 일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에게는 굶어 죽지 않을 만큼만 주어야 하며, 셋째 구빈수당은 자유시장에서 가장 낮은 임금보다 훨씬 낮아야 하고, 넷째 그렇게 비참하게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아무리 형편없는 일자리라도 구하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시니어는 또 '마지막 1 시간설'이라는 이론을 내놓았는데, 그 요지는 노동자들이 일하는 시간 중 마지막 1 시간의 노동으로 생산한 것이 자본가의 이윤으로 된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뜯어보아도 앞뒤가 맞지 않는 가정과 이상한 계산방법에 의해 도출되는 결론이지만, 어쨌든 이 괴상한 이론은 노동시간의 단축에 반대하는 논거로 사용되었다. 시니어는 노동자계급이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침해함으로써만 이익을 얻을 수 있다거나, 그들의 이익이 지주, 자본가의 이익과 대립된다는 등 계급투쟁을 인정하는 경제사상을 두고 '빈민의 경제학'이라고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경제학을 '부자의 경제학'이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경제학이 도덕적, 윤리적 가치규범이나 특정한 정치적 신념에 오염되지 않은 과학적이고 순수한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시니어의 탁월함이 엿보인다. 그는 세이보다 조금 더 치밀한 논리를 구사함으로써 지대와 이윤과 임금 사이의 차이를 없애 버렸다. 이것은 그의 '순수하고 과학적인 관찰'의 결론이었다. 그리고 특별히 자본가들이 이윤을 얻을 권리가 있음을 '이론적으로' 해명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이윤은 자본가의 '절욕'에 대한 보수였다. 자본가는 자신의 재산을 소비---아마도 낭비이겠지만---하고 싶은 욕망을 참고 이것을 생산에 투자함으로써 효용을 생산한다. 따라서 자본가는 그러한 '절욕'의 대가로 이윤이라는 보수를 받는다. 이름 높은 '절욕설'이다. 그러나 시니어는 공평무사한 사람이어서 노동자에게도 마찬가지의 혜택을 베풀었다. 그에 의하면 '절욕'은 자본을 비생산적으로 낭비하지 않는 자본가의 행위뿐만 아니라 "자신의 노동을 눈앞의 결과가 아니라


장래를 위한 생산에 돌리는 사람의 유사한 행동"까지를 포함한다. 이렇게 해서 쉬고 싶은 욕망을 참고 피땀흘려 일하지만 겨우 먹고 살 만큼의 소득만을 얻는 노동자와, 낭비하지만 않으면 무한히 많은 이윤을 얻는 자본가는 완전히 동질적인 인간이 된다. 시니어는 이런 방법으로 지주와 자본가와 노동자의 이해가 대립되지 않으며 자본주의는 협력과 번영을 보장하는 체제임을 '논증했다.' 그는 1836 년 출간한 <경제과학의 개요>(An Outline of the Science of Political Economy)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지대'를 "자연에 의해 또는 우연하게 자발적으로 제공된 수입"이라고 정의 하였다. '임금'은 '노동의 보수'라고, 그리고 '이윤'은 '절욕의 보수'라고. 조금 떨어져 서 보면 이러한 구분은 매우 뚜렷해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것들은 너무나 뒤섞여 있어서...그러한 분류법에 짜맞출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일정한 수입을 가져오는 그런 자본이 선물에 의해서든 상속에 의해서든 그것을 창출하는데 절욕과 노력을 기여하지 않은...사람의 소유가 되자마자, 모든 유용한 목적에 대해 이윤과 지대의 구별이 없어진다. 특별한 재능에 의해 뒷받침되는 노동자의 그 특별한 보수는...노동자에 의해서만 수령될 수 있는 지대라고 하든, 또는 자연력의 소유자에 의해서만 수령될 수 있는 ...임금이라고 하든 똑같이 정확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임금과 이윤 사이에 선을 긋기란 더욱 어렵다...일반적으로 자본은 이윤을 생산하 기 위해서 반드시 고용되어야 하는 수단이며 그 고용을 지휘하는 사람은 반드시 '노동해야'하며, 어느 정도 자신의 나태를 극복하고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희 생하고, 또...다른 불편을 겪어야만 한다. '자본의 생산적 봉사'에 대한 보수이건 아니면 '자본가의 절욕'에 대한 보수이건, 부자들의 재산권을 옹호하는 경제학자들이 "자본가에게 이윤을 얻을 정당한 권리가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이렇게 다양한 아이디어를 고안해 낸 것은 이윤에 대한 사상적 공격이 그만큼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그 공격의 주역은 나중 '리카도파 사회주의자'라고 불리는 일군의 경제학자들이었다. 윌리엄 톰슨(William Thompson)과 토마스 호지스킨(Thomas Hodgskin)은 시니어가 비아냥거린 '빈민의 경제학'을 대표하는 리카도파 사회주의의 선봉장들이다. 모든 재산은 강탈한 것이다. - 톰슨과 호지스킨 주로 1820 년부터 1840 년대 걸쳐 활동하면서 영국의 노동운동 발전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 '리카도파 사회주의자'들은 스스로 '리카도파'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거나 공동 연구를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은 뚜렷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가져온 생산력의 급속한 발전보다는 그 과정에서 나타난 불평등한 부의 분배에 주목했으며, 시장의 효율성보다는 거기서 벌어지는 냉혹한 경쟁의 폐단을 중시했다. 그들은 오웬이나 생 시몽이 추구한 협동조합사회를 이상으로 삼았으며, 특히 노동자들의 참혹한 빈곤과 고통이 필연적인 자연법칙의 결과라고 하는 유산계급의 사상을 극렬하게 비난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그들이 스미드와 리카도의 노동가치론을 받아들여 "노동만이 부의 원천이므로 노동자가 모든 생산물을 소유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실이다. 이와 같은 노동가치론 때문에 그들은 토마스 모어의 제자이면서도 앞서 말한 공상적 사회주의자와 구별된다. 윌리엄 톰슨 <부의 분배원리>(An inquiry into the Principles of the Distribution of Wealth Conductive to Human Happiness)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노동 없이는 어떤 부도 있을 수 없다." 노동은 부를 구별짓는 속성이다. 자연의 작용은 결코 부를 창조하지 않는다. 노동은 부의 '유일한' 원천이다. 토지, 공기, 열, 빛, 전기, 인간, 말, 물 '그 자체는' 어느 것도 부라고 할 수 없다. 그것들은 욕망이나 행복의 대상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노동에 의해 변형될 때까지는 결코 부가 아니다. 톰슨은 철학적인 면에서 벤담의 공리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개인간의 자유로운 거래는 거래의 두


당사자 모두에게 이익을 준다는 시장의 원리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벤담과 달리 사회이론에 이 원리를 적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체제의 노동자는 "자유롭지 않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는 생산도구나 원료를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가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강제'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은 그 어떤 직접적인 폭력보다 더 무서운 강제력이기 때문이다. 리카도파 사회주의자들이 오웬식의 협동조합을 추구한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런 사회가 아니라면 노동자가 생산도구와 원료를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그들은 '시대에 뒤진' 사상가였다. 자본주의는 이미 공장제 대공업에 의한 대량생산체제로 접어들기 시작했으므로 그들이 바라는 소규모의 생산,소비 협동조합사회는 역사를 되돌리지 않고는 불가능한 꿈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톰슨은 모든 형태의 불평등을 배척하면서 절대적인 평등을 옹호했다. 그는 만년의 벤담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부를 골고루 나룰수록 사회 전체의 효용 또는 행복이 증대된다고 보고 극단적인 소득 격차를 필연적으로 낳는 자본주의를 비난했다. 부의 불평등에 관한 한 어떠한 한계도 없다. 오히려 부는 지배적인 열정이 되고 있 다. 그리고 부가 부여하는 우월성, 부가 자극하는 선망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떠한 수 단을 써서라도 그것을 획득하도록 재촉한다. 다른 사람의 노동 성과를 착취하기 위 해서 그리고 많은 인간들을 무지하고 만족한 채로 일만 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강제적으로 교활하게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방편이 법으로 확립된다. 가능한 한 낮은 임금으로 노동자를 부려멱고 그들의 노동생산물을 가능한 한 많이 짜 내어서 자본가 들의 재산과 지출을 늘이기 위해서...모든 곳에...자본가들의 광범하고 주도면밀한 음 모가 진행된다...그러한 사회에서 모든 부는 소수의 손에 축적된다. 이 고집센 경제학자가 인간 견해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훈련을 받기만 하면 남성만큼 제한한" 가주장적 사회체제를 충분할 것이다.

사회의 불평등을 얼마나 미워하였는가는 성차별에 대한 몹시도 '과격한' "남자가 육체적으로 더 강한 동물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동등한 생산적으로 고용될 수 있는" 여성을 "노예처럼 단조롭고 고단한 일만 하도록 비판했다. 다음의 인용문은 아마도 많은 여성들이 톰슨을 좋아하게 만들기에

가장 사랑스럽고 순결하며 선량한 인류의 절반인...여성에게 남성은, 남성에게 여 성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우주에서 가장 큰 사랑과 기쁨을 주는 존재이다. 따라 서 사랑스러움이라든가 그와 비슷한 허튼 소리에 관한 한 남성과 여성은 서로 동등 하다. 자연은 여성에게 약한 힘을 주고 남자들은 겪지 않아도 되는 커다란 생리적 불편과 고통을 주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어떻게 남성들로 하여금 여성의 자연적이 고 불가피한 고통 위에 얼마든지 회피할 수도 있는 인위적인 억압과 악을 부가하게 하는 그런 이유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보수적인 경제학자들로 하여금 리카도의 노동가치설을 배격하게 만든 유력한 경제학자로서 토마스 호지스킨이 있다. 그는 많은 저서와 논문을 발표한 해박한 경제학자였지만, 그 이론의 초점은 "지대와 이윤이 무자비하게 수탈된 노동자의 생산물"임을 논증하는데 있었다. 리카도에게 지대는 "토지가 서로 다른 비옥도를 지녔다는 이유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며 자본가의 몫이 되어야 할 생산물이 지주의 금고로 흘러 들어가는 합법적인 통로였다. 호지스킨은 이윤에 대해서도 같은 판정을 내렷다. 그에게 이윤은 노동자의 생산물을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자본가의 금고 속으로 빨아들이는 합법적인 통로였다. 호지스킨에 의하면 모든 도구와 기계는 노동의 산물이며, 또한 노동이 닿지 않고는 스스로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또 도구와 기계는 노동에 의해 끊임없이 소모되고 새로이 만들어진다. 따라서 자본이란 자본가의 손아귀에 축적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노동과정과 노동생산물의 한 측면을 가리키는 '일종의 신비한 용어'에 불과하다. 호지스킨은 노동하지 않는 사람이 자본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생산물을 독점하는 19 세기 유럽의 현실에 너무나 분격한 나머지 1832 년에 발간된 저서 <자연적 소유권과 인위적 소유권의 대비>(The Nature and Artificial Right of Property Contrasted)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소유권은 단지 법률적인 것일 뿐이며 오직 입법자에 의해서 확립되고 인정된 것일


뿐이다...입법권은 일보다는 전쟁을 따르고 도둑질이나 약탈 이외에는 아무런 기술도 없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고 현재에는 그 후손들의 손아귀에 있다...유럽 의 입법자들은 부를 창조하는 어떠한 기술도 몸에 익히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생산 물을 수탈함으로써 살아가는 사람들의 후예이다...자연은 이들에게 아무런 재산도 주 지 않았다. 그들이 소유한 모든 것은 자연으로부터 사람들이 받은 것을 강제로 빼앗 은 것이다. 호지스킨이 "부룰 창조하는 어떠한 기술도 몸에 익히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생산물을 수탈함으로써 살아가는" 유럽의 입법자들---귀족과 지주와 자본가들---을 미워하는 이상 그들이 만든 법까지도 혐오한 것은 아주 당연하다. 다음은 <북북독일 여행>(Travels in the North of Germany)이라는 그의 저서에 따 온 것이다. 법은...어디서나 조심하지 않는 자에 대한 함정이며 특별한 계급이 다른 사람을 희 생시켜 스스로를 부유하게 하는 장치이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자비로운 법률의 입법자 또는 자비로운 사회의 우두머리로 보 이게끔 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합법적으로 억압함으로써 부를 추구한다. 그러나 그 러한 사람을 많이 가진 국가는 불행하다. 자연은 인간을 창조하면서 그 자신의 필 요를 만족시킬 능력을 주었다. 자연은 수백만 명의 복지를 결코 한 사람이나 소수 의 인간에게 맡기지는 않았다...한 계급의 수탈과 입법자들의 간섭이야말로...가난과 비참의 원인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호지스킨의 유토피아는 근거 없는 소유권으로부터 나오는 소득, 다시 말해 재산소득이 없는 사회였다. 거기서는 모든 사람이 자기의 생산활동에 필요한 자본을 소유할 수 있고 또 소유해야 한다. 호지스킨과 톰슨은 많은 공개적인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노동가치설에 입각하여 이윤의 정당성을 부정하고 자본과 노동이 분리되지 않는 생산체제를 이상향으로 본 점에서 두 사람은 사상적 동류임에 분명하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부의 불평등을 너무나 미워한 나머지 이미 지배적 생산체제의 지위에서 밀려나 버린 소상품생산 경제를 유토피아로 간주했다. 그들은 노동가치론을 근거로 노동자가 생산물을 전유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지만 이 원리에 의해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체계적이고 이론적으로 해명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바스띠아라는 프랑스의 한 학자로부터 날카로운 조롱과 야유를 받게 되었다. 부자들이여 번뇌하지 말라 - 바스띠아 보기 드문 문필력과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이 프랑스인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과 '빈민의 경제학'을 향해 날카로운 풍자와 야유의 화살을 쏘아 보냈다. 그가 특별히 미워한 사람은 <재산이란 무엇인가>를 쓴 프랑스의 혁명가 프루동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야유는 영국의 사회주의자들에게도 똑같이 따가운 것이었다. 프루동은 "모든 재산은 도둑질한 것이다"는 유명한 슬로건 아래 그 때까지 존재해온 모든 사회를 저주했다. 프루동의 분노 가득한 음성을 들어보자. 지배받는다는 것은 감시받고, 조사받고, 규제당하고, 통제받고, 갇혀 지내고, 사상을 주입받고, 가르침을 받고, 평가받고, 검열받고, 지휘를 받는 것이다. 더욱이 권리도 지혜도 인품도 없는 자들이 이 모든 일을 한다...지배당한다는 것은 모든 움직임, 활 동, 거래 때마다 기록되고, 등록되고, 통계 조사에 들어가고, 세금을 내고, 도장을 받 고, 특허를 얻고, 허가를 받고, 추천을 받고, 훈계를 당하고, 금지당하고, 개조되고 수 정받는 것이다. 정부란 훈련시키고, 배상금을 치르게 하며, 착취하고, 독점하고, 강요 하고, 억압하고, 미혹시키고, 빼앗아가고, 공물을 바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 일은 공공의 이익과 일반적인 선의 이름 아래 진행된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불 평하거나 저항하는 기미가 있는 사람은 억압당하고, 벌금을 내고, 추적받고, 푸대접 받고, 두들겨 맞고, 교수형을 당하고, 감옥에 들어가고, 총살당하고, 재판을 받고, 언


도를 받고, 추방당하고, 희생되고, 팔리고, 배반당하고, 모든 사람에게 조롱당하고, 분 노의 대상이 되고, 경멸당한다. 이것이 바로 정부요, 정부의 정의요, 정부의 도덕이다. ...아! 인간의 모습이라니! 도대체 어찌하여 6 천년 동안이나 이같은 노예 상태에서 움츠리며 살아올 수 있었을까? 자유방임시장이 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신성하기까지 하다고 확신하고 있던 바스띠아는 1850 년에 출간한 <경제적 조화>에서 사회주의 경제학에 대한 비판의 칼을 단호하게 휘둘렀다. 두 학파를 크게 구분짓는 것은 방법적인 차이이다. 사회주의는 점성술과 연금술처 럼 상상력에 의해 나아간다. 그러나 경제학은 천문학과 화학처럼 관찰에 입각하여 나 아간다. 같은 현상을 관찰하는 두 사람의 천문학자도 상이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일시적 으로 의견이 충돌하지만 그들은 조만간 서로를 만나게 할 공통적인 방법에 연대감을 느낀다...그러나 관찰하는 천문학자와 상상하는 점성가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놓여 있다. 이것은 경제학과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경제학자는 인간과 그 본성 에 관한 법칙, 그리고 이 법칙으로부터 유래하는 사회적 관계를 관찰한다. 반면 사회 주의자는 어떤 사회를 상상하고 거기에 맞는 인간상을 관찰한다. 이것은 모욕에 가까운 비판이다. 바스띠아는 벤담의 공리주의를 전적으로 수용하고 세이와 시니어의 이론을 계승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스미드의 '보이지 않는 손'을 '신의 손' 또는 '신의 섭리'로까지 신성화했다. 그는 자신의 경제학을 '과학적 경제학'으로 격상시키면서 사회주의 경제학은 점성술과 연금술의 지위로까지 끌어내렸다. 우리는 오늘날 각종의 경제학 교과서에도 좀더 점잖은 말로 포장되어 있지만 이와 똑같은 주장을 손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요컨대 자신과 다른 가치관을 가진 이론, 특히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 사실이 아닌 규범을 다루기 때문에 과학이 아니라 신념이라는 등의 견해이다. 그러나 바스띠아의 '과학적' 경제학은 사실상 '부자의 경제학'이며 그 자신도 이를 숨기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위선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바스띠아는 신성한 재산권에 대한 근거 없는 공격에 당황하고 있던 부자들을 이렇게 안심시켰다. 재산과 여가를 가진...당신들은 아직도 이상하게 번민하고 있다. 왜? 감미롭지만 유 독한 향기를 지닌 유토피아의 환상이 당신들의 생활방식을 위협하고 있다...당신들의 재산이 당신들의 형제를 희생시켜 얻은 것이라고 폭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당 신들이...소유권이라는 이름 아래 이자, 지대, 임대료라는 공물을 수탈하였다고 비판한 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다...당신들의 손에...들어온 모든 것은 정신적, 육 체적 노력과 피땀의 지출, 위험의 감수와 기술적 기여, 희생과 수고, '서비스의 제공과 수취' 등에 대한 보상이다. 당신들은 당신들 자신만을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 없이 지혜롭고 전지전능한 '신의 섭리' 아래서는 당신들의 이기심조차 모든 사람에게 유용한 좀더 큰 풍요를 가져오는 도구가 되었다. 경제사상의 역사에서 바스띠아만큼 기묘한 인물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1801 년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린 나이에 양친을 잃고 폐결핵까지 걸리는 등 많은 고생을 했다. 대학을 나와서 장사를 해보았지만 신통치가 않았고 그래서 농사일에 뛰어들었지만 그마저 실패의 연속이었다. 혁명에도 참가했지만 혁명 역시 별로 적성에 맞는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세상사에 실망한 바스띠아는 경제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뜻밖에도 이 뒤늦은 출발이 그에게 성공을 안겨 주었다. 그는 어느 신문에 기고한 자유무역에 관한 논문으로 일약 저명인사가 되어 파리에 입성했다. 이 촌뜨기 경제학자는 그 후 파리 지식인들로 하여금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독창적이고 풍자 섞인 글을 수없이 발표했다. 남의 말에서 논리적 모순을 끄집어낸 후 그것을 웃음거리로 만드는데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는 특히 자유무역론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그래서 보호관세를 통해 자기의 이익을 챙기려는


프랑스 제조업자와 그들의 편을 든 국회의원들에게 날카로운 펜을 휘둘렀다. 앞의 장에서 본 프리드리히 리스트와 그 추종자와 독일의 상공업자들이 그토록 싫어한 자유무역론은 사실 리카도의 것이 아니라 바스띠아의 것이었다. 독일의 자유무역론자들은 바스띠아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840 년대 프랑스 하원이 자국의 공업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모든 외국 상품에 대한 관세율을 높이는 법률개정안을 가결시키자 바스띠아는 걸작을 하나 발표했다. 하원의원 여러분 우리는 등화 생산에 비하여 훨씬 우위에 있는 외국인과의 견딜 수 없는 경쟁 때문에 우리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할 수 없이 낮은 가격으로 우리 국내시장 범람하고 있습니다...이 경쟁자는 다름아닌 태양입니다. 바라옵건대 모든 창문과 앞뒤 의 덧문, 커튼, 블라인드 등, 다시말해 모든 개방된 문과 구멍, 틈, 균열을 닫거나 막 도록 하는 법률을 통과시켜 주시기 앙망하옵나이다...자연광에 접근하는 길을 닫고 막 을수록 인조광에 대한 수요는 증가할 것이므로 우리 프랑스의 생산업자들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 아닙니까? 수지가 더 소비되면 소와 양이 많아질 것이고...유류가 더 소 비되면 올리브의 경작을 확대하게 될 것이며 황무지는 수지가 많은 초목으로 덮이게 될 것입니다. 결단을 내리십시오. 귀하가 하시는 바와 같이 그 가격이 거의 영에 가깝다는 이유로 철, 옥수수, 등 외국 상품을 금지한다면 그 가격이 이미 영에 도달한 태양광선을 종일 토록 용납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이 글의 제목은 <초, 등잔, 램프, 가로등, 초심지 자르는 가위와 소화기 제조업자와 유류, 수지, 알코올과 기타 등화와 관계있는 모든 물건의 생산자들이 올리는 진정서>였다. 바스띠아는 국내에서는 자유방임시장을 옹호하면서 국제무역에서는 보호관세를 주장하는 프랑스 자본가와 정치인들의 사욕과 일관성 없는 사고방식을 통박한 것이다. 그는 자유무역론자들의 총아가 되어 영국을 방문했으며 파리에 돌아와 자유무역협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1848 년에는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는 이제 사회주의에 붓끝을 겨누었다. 그는 자본주의의 부분적 결함에 너무 예민한 나머지 맹목적으로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자들이 사회에 위험을 몰고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 목적을 위해 집필하기 시작한 <경제적 조화>를 완성하지 못한 채, 1850 년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러나 그 책은 뒤늦게나마 빛을 보았다. 바스띠아가 자유방임시장을 예찬한 논리는 매우 단순명백하다. "자유시장에서 모든 교환은 거래당사자 모두에게 이익을 준다." 여기까지 바스띠아는 별로 독창적이지 않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인간의 모든 상호행동은 교환으로 환원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이 삼단논법의 결론은 확실하다. 인간의 모든 상호 행동은 그들 모두에게 도움을 준다. 이런 논리적 바탕 위에 바스띠아는 세이와 시니어의 이론을 같은 방법으로 한층 체계적으로 전개했다. 다시 말하자면 자본가와 지주와 노동자 사이의 계급적 차별을 완전히 없애 버리는 이론을 전개한 것이다. 바스띠아는 '생산적 서비스'라는 개념을 폭넓고 일관성 있게 구사했다. 그는 "교환이야말로 경제학이다."라고 선언했는데, 이는 스미드의 기본적인 사상체계로부터 결정적인 단절을 의미했다. 일천 페이지의 <국부론> 가운데 겨우 몇십 페이지에 불과했던 교환이론이 이제 '경제학의 전부'가 된 것이다. 바스띠아의 '과학적' 경제학에 의하면 노동은 지주와 자본가와 제공하는 '생산적 서비스'와 질적으로 전혀 차이가 없다. 그리고 효용을 창조하는 모든 '생산적 서비스'는 인간의 노력과 고통을 요구한다. 임금과 이윤과 자본은 모두 노동자와 지주와 자본가들이 '생산적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감내한 노력과 고통에 대한 보수이다. 따라서 자유로운 교환이 보장되는 한 여기서 적대적 계급관계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 그가 '위험한 맹목적 사회주의자들'을 점성술사나 연금술사와 동열에 놓고 야유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조화론적 세계관 덕분이었다. 그러나 남 눈의 티는 보면서 제 눈의 대들보는 못 보는 것이 인간의 속성인지, 다른 사람 견해의 모순은 곧잘 발견해내던 이 재치있는 경제학자도 자기 생각의 모순에는 극히 둔감했다. '생산적 서비스'가 인간의 노력과 고통을 요구한다는 그의 견해는 노동에 관한 한 확실한 진리이다. 당시의 노동자들은 정말이지 오랜 시간 땀흘려 일했다. 그리고 그 저주스러운 '임금철칙' 덕분으로 자신과 가족이 겨우 먹고 살 만큼의 임금을 그 대가로 받았다. 그런데 지주나 자본가에 대해서 말하자면 설명이 몹시 복잡해진다. 그들은


토지와 자본이 제공하는 생산적 서비스를 위해 어떤 노력과 고통을 치렀는가? 토지를 비옥하게 하기 위해 거름을 져 나르고 물꼬를 돌보고 파종과 추수에 땀 흘리는 지주는 없었다. 굳이 그들이 감내한 고통과 노력을 찾자면 자기 땅을 놀려 두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어 농사를 짓게 하는 것이 고작이다. 바스띠아는 이것을 노력과 고통이라고 한 셈이다. 자본가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경영노동에 대한 보수를 따로 받기 때문에 자본가로서 감수한 노력과 고통이란 돈을 안방 금고에 넣어 두는 대신 수지맞는 사업에 투자하는 일이다. 이 얼마나 고통스런 노력인가? 그들은 이러한 고통스런 노력의 대가로 대궐같은 집에 살면서 평생 동안 호의호식을 즐기는 것이다. 참으로 조화로운 세계이다. 바스띠아는 19 세기 유럽의 지주와 자본가들이 어떻게 해서 최초의 자본을 소유하였는지를 따져 보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의 재산분배 상태를 그대로 인정하고 옹호했다. 따라서 "어떠한 이론, 어떤 장황한 말로도 부모로 하여금 자식을 사랑하지 못하게 할 수 없으며", "사유재산의 상속이 금지된다면 인간의 노력을 방해하게 된다"는 이유로도 모든 사유재산과 부의 세습을 옹호했다. 바스띠아의 사상은 지주와 자본가들을 기쁘게 하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러나 그가 의도했던바 '맹목적인 사회주의자들'을 설득하고 개종시키는 데는 아무 효과도 없었다. 이런 류의 설교를 듣고 자신의 현실적 고통이나 평등한 사회에 대한 갈망을 포기할 노동자와 사회주의자는 거의 없었다. 바스띠아느 스스로 '관찰하는 과학자'임을 자랑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자신이 '상상력에 의지하는 점성술사'가 되고 말았다. 위대한 절충주의자,

J.S. 밀

경제학의 결정적 분열은 불가피한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분열된 세계를 반영하는 현상이었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와 신고전학파의 출현을 앞두고 경제학의 분열과 세계의 분열을 막아 보려고 마지막까지 노력한 천재적인 사상가가 있었다. 그 노력은 물론 무위로 끝났다. 그러나 자유방임시장의 원리를 인정한 위에 사회주의자들의 이유있는 항의를 수용하려 한 이 천재의 사상은 오늘날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에도 충분히 고찰할만한 값어치가 있다. 그는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다. 1806 년에 태어난 이 천재는 타고난 재능에서 남보다 훨씬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출생이라는 거대한 제비뽑기'에서도 행운을 누렸다. 타고난 재능의 싹을 세심하게 돌봐 주기에 충분한 유능하고 지성적인 아버지를 만난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의 아버지는 19 세기 유럽의 대표적 지성인 가운데 한 사람인 제임스 밀이다. 제임스 밀은 철학자이자 역사학자이며, 동시에 경제학자로서 리카도, 제레미 벤담과 가까운 친구였다. 그는 교육에 대해서도 남다른 관심을 가졌는데, 존 스튜어트 밀은 이 철학자가 만들어 놓은 영재교육의 온실 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밀은 결코 흔히 볼 수 있는 신동은 아니다. 세 살에 희랍어를 배우기 시작해서 일곱 살에 플라톤의 <대화>를 독파하고 라틴어 공부를 시작했는데, 열두 살이 되었을 때까지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루크레티우스, 헤로도토스, 크세노폰 등 그리스 로마 시대의 주요한 철학, 역사, 문학 서적을 모조리 읽었다. 기하와 대수, 미분학에 능통하였고 고대 유럽 역사에 대한 저술을 시작했으며 경제학에 대해 배워야할 모든 것을 열세 살에 마쳤다. 제임스 밀은 "노는 버릇을 모르도록 하기 위해" 이 어린 천재를 보통교육이나 어린이에게 알맞은 모든 형태의 놀이로부터 완전히 격리시켰다. 밀에게는 친구도 휴일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보통 아이들과 다른 환경에서 교육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으며 젊은이의 인생살이가 다 그런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밀의 위대함은 타고난 재능이나 영재교육으로 습득한 폭넓은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계가 자신이 영재교육의 온실에서 책을 통해 접한 것과는 매우 다르고, 또 다른 젊은이들이 자기와는 전혀 다른 인생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스무 살의 청년 밀은 심각한 정신적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밀은 정신적인 힘과 진지함을 잃지 않고 새로 발견한 세계와 맞서 나갔다. 사회를 냉정하게 관찰하는 자세로 말하자면 그는 스미드나 리카도에 뒤지지 않았다. 밀은 그들이 말한 자유방임시장의 '자연적' 원리를 인정하고 그것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는 철학적으로 벤담의 공리주의를 받아들여 최대의 쾌락과 최소의 고통을 위해 계산하고 행동하는 '이기적 인간상'을 승인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 사회의 미래에 대한 밝은 낙관과 가난한 이웃에 대한 따뜻한 동정심이라는 면에서는 유토피안 사회주의자들과 닮은 꼴이었다. 요컨대 이 천재의 가슴과 머리 속에는 당대의 모든 사상이 서로 투쟁하면서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밀은 어떠한 사상도 편견에 사로잡혀 배척하는 일 없이 19 세기 중엽의 자본주의 사회와 진지하게


대결했다. <논리학>(Logic), <공리주의>(Utilitarianism), <자유론>(Liberty), <대의 정부에 대한 고찰>(Considerations on Representative Government) 등 밀은 인문사회 각 분야의 권위있는 저서들을 발표했다. 그리고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경제학 분야에서는 <정치경제학원리>(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가 있다. 이 책은 1848 년 출판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밀은 노동계급의 경제적, 지적 발전이 가능하다는 낙관적 소신에 따라 자기 돈을 들여 노동자들이 살 수 있는 염가판을 내기까지 했다. <정치경제학원리>는 스미드, 맬더스, 리카도 등의 이론을 총체적으로 정리한 위에 밀 자신의 독창적인 견해를 첨가한 뛰어난 저서이다. 밀은 이 저서로 인해 스미드와 리카도 경제학의 뼈대를 보존하고자 한 최후의 고전학파 경제학자가 되었다. 밀은 공리주의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순수공리주의가 아니라 만년의 벤담과 비슷한 절충적 공리주의였다. 우선 밀은 개인이 항상 자기의 복지---쾌락과 고통을 가장 훌륭하게 판단할 수 있다는 공리주의의 기본원칙을 부정했다. 자신의 이해관계를 가장 훌륭하게 판단할 수 있다고 가정된 개인은...자기 스스로... 판단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경우 '자유방임주의'의 기초는 완전히 무너진다. 가장 밀접한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이 '항상' 그 문제를 가장 훌륭하게 판단하는 것은 아니며 또 유능한 판단자도 아니다. 벤담은 "효용이 같은 한 제도용 핀과 시는 똑같이 유익하다"고 하여 어떤 종류와 다른 종류의 쾌락 사이에 도덕적, 사회적 차별을 두는데 반대했다. 이것이 순수공리주의의 입장이다. 중요한 것은 오직 쾌락과 고통에 대한 개인의 판단일 뿐이다. 이러한 철학의 입장에서는 경제사상사를 읽음으로써 얻는 쾌락과 사창가에서 성적 서비스를 통해 얻는 쾌락 사이에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러나 밀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어떤 종류의 쾌락은 다른 종류의 쾌락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또 개인이 가장 현명한 복지의 판단자인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런 철학은 사회적,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쾌락을 증진하고 반대의 쾌락을 감소시키기 위해 정부의 개입을 인정한다. 예컨대 빈민으로 하여금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소득을 술집에서 탕진하지 않도록 하는 사회교육을 실시하거나 아편이나 담배와 같이 사람에게 유해한 기호품의 판매를 금지 또는 제한하는 것은 사회 전체의 복지를 증진시킨다. 그리고 정부나 사회가 어떤 종류의 쾌락을 권장하거나 억제하지 위한 모든 조처는 즉각적으로 자유방임시장의 질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방임시장의 장점을 인정했으며 시장의 원리를 '자연법칙'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면에서 그는 분명 충실한 고전학파 경제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자유방임시장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이 저주 섞인 비난에 귀를 기울여 실제적으로 존재한 19 세기 자본주의가 자유방임시장의 이상적 모습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했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점은 그가 부의 분배에 대한 고전학파의 이론을 부정하고, 부의 분배에 관한 한 자연법칙은 없으며 오직 "지배층의 의견과 감정에 의해서 결정되며 시대와 국가에 따라 큰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선택에 의해 더 달라질 수도 있다." 주장한 것이다. 밀의 세계는 그래서 리카도나 맬더스의 세계보다 훨씬 밝고 낙관적이다. 그는 분배문제와 관련하여 노동자의 빈곤이 절대적인 자연법칙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근거였던 '임금기금설'을 부정했다. 임금기금설은 스미드 이래 고전파 경제학자와 자본가들을 사로잡고 있던 하나의 '미신'이었다. 이 이론에 의하면 한 사회에서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는 일정한 규모의 기금이 있는데 이것은 노동자의 수와는 상관이 없다. 따라서 개별 노동자가 받는 임금이 증가하려면 자본가들이 돈을 더 많이 벌어서 기금의 양을 늘리든가 아니면 노동자의 수를 줄여야 한다. 다른 방법은 없다. 따라서 노동조합의 결성이나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파업 따위는 임금 수준을 올리는데 아무 도움이 안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경제를 혼란에 빠뜨릴 뿐이다. 이 이론은 자본가들이 노동조합을 반대하기 위해 전개한 사회정치적 선동의 주요한 무기였다. 밀은 1848 년의 <정치경제학원리>를 통해 임금기금설을 보급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1869 년 5 월 임금기금설을 부정하는 쏜톤(Thornton)의 저서에 대한 서평을 쓰면서 그는 용감하게도 과거의 견해를 파기했다. 지금까지 나를 포함한 거의 모든 경제학자들이 가르친 이론, 즉 노동조합이 임금을 인상시킬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거나 또는 인정하더라도, 그들이 임금 인상에서 하


는 역할은 그들이 없어도 시장경쟁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약간의 초기적 인상에 그친다고 하는 이론은 과학적 근거를 상실하였으므로 파기되어야 한다. 밀은 근면한 사람이 열심히 일해서 재산을 모으는데 반대하지 않았으며 그러한 노력의 소산인 사유재산은 보호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유럽 역사를 깊이 연구한 탓으로 19 세기 영국 부자들이 모두 "아무런 생산적 기술도 없이 오직 다른 사람을 수탈함으로써만 살아온 사람들의 후예"라고 비난한 호지스킨의 견해에 동의했다. 그러나 이 점잖은 사상가는 같은 내용을 좀더 완곡하게 표현했다. 근대 유럽의 사회체계는 노동에 의한 획득이나 정당한 분배의 과 폭력의 산물인 그러한 재산분배로부터 시작되었다. 폭력의 여 노동이 해왔던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 체제는 아직도 그 남아 있다. 재산법이 사유재산을 정당화시키는 원칙과 부합된

산물이 아니라 정복 작용을 완화하기 위하 기원의 잔재가 많이 적은 없었다.

밀은 경제학에 윤리도덕의 문제를 끌어들였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이 똑같은 일을 한 죄로 받아야 했던 비난---바스띠아는 그들의 견해를 과학이 아니라 점성술처럼 취급했다.---을 전혀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고매한 '박애정신'과 높은 학문적 '품격'으로 인해 마치 성인과도 같은 추앙을 받기까지 했다. 그는 무려 30 년 넘게 동인도회사에 재직했다. 만년에는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당시의 기준으로서는 매우 과격한 인권론과 여권론을 주장한 까닭에 다음에는 낙선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자기가 보고 느끼고 생각한 대로 말했을 뿐 남에게 동의를 강요하지 않았다. 밀은 지대, 이윤, 임금이 토지와 자본과 노동이 제공한 생산적 서비스의 대가이며 특히 이윤이 자본가의 절욕에 대한 보수라는 세이와 시니어의 이론을 인정했다. 그러나 지주와 자본가와 노동자가 각각 생산물을 얼마만큼씩 나누어 가져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윤리도덕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교환의 이익을 인정하면서도 노동에 의하지 않는 부의 취득을 비판했다. 밀은 동양식으로 말하자면 '중용의 도'를 지킨 사람이다. 그는 자유방임시장의 원리를 승인했지만 실제로 존재한 19 세기 자본주의 사회를 옹호하지는 않았다. 그는 또한 19 세기 유럽 자본주의가 낳은 사회적 불평등과 부당한 부의 취득을 비판했지만 유토피안 사회주의자 진영으로 기울지는 않았다. 그는 존재하고 있는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좀더 나은 상태로 점진적인 개선을 추구했다. 밀은 지대에 대해 무거운 세금을 매기고 상속과 증여에도 제한을 두는 한편 노동조합의 긍정적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자유방임시장이 낳은 문제를 완화하고자 하였다. 존 스튜어트 밀은 경제, 사회 문제의 해결 방안에서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자의 견해를 대폭 수용했다. 그러나 자유로운 인간 정신에 대한 억압과 획일화에 대한 우려 때문에 공산주의를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선택하기를 거절했다. 그는 자산계급의 안락하고 풍요한 세계와 근로 대중의 빈곤하고 고통스러운 세계로 분열되어 가는 당시의 사회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서는 부의 분배를 좀더 공정하게 해야 한다고 행각했다. 그래서 밀은 공산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은 공감과 우려를 함께 표명했다. 그러므로 만일 모든 기회가 주어진 공산주의와 그 모든 고통과 불공정이 존재하는 현재의 사회상태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만일 사유재산제도로 인해 오늘날 과 같이 노동생산물이 노동의 양에 거의 반비례해서 분배되는---전혀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가장 큰 몫을 갖고 명목적으로 일할 뿐인 사람들이 다음 몫을 가지며...마 침내는 가장 힘들고 기력이 소진되는 육체노동에 대해서는 생필품을 구입할 보수조 차 돌아가지 못하게 되는---결과가 필연적으로 생겨난다면, 그리고 만일 이 제도와 공산주의가 선택 가능한 대안들이라면, 공산주의에 따르는 크고 작은 어려움은 그 좋은 점과 비교해 볼 때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공산주의의 주장을 현존하는 사회의 악조건과 비교하는 것은 부당하다...문제는 그 제도 아래서 개성이 존립할 여지가 남아 있을까, 여론이 폭군처럼 지배하지 않을까, 전체에 대한 개인의 절대적 종속, 개인에 대한 전체의 감시가 인간의 사상, 감정, 행 동에 획일성을 강요하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다...과격함이 행동의 기준이 되어 있는 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할 수 없는 것이다.


19 세기 영국 '지배층의 의견과 감정'은 윤리도덕의 이름으로 자유방임시장에 정부의 손을 개입시키려 한 밀의 권고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풍요한 세계와 빈곤한 세계로 사회의 분열은 한층 깊어져 갔고 밀이 시도했던 두 세계의 절충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래서 마침내는 두 세계 사이의 생사를 건 혈투가 벌어졌다. 그러자 고전학파의 경제사상이 잉태하고 있던 두 아들은 스스로 탯줄을 절단하고 소란한 세상으로 뛰쳐 나왔다. 빈곤한 세계의 경제사상은 기묘하게도 밀의 <정치경제학원리>가 출판된 1848 년 바로 그 해에 충격적인 첫인상과 더불어 나타나 풍요한 세계에 비참한 미래를 선고했다. <공산당선언>이었다. 이 사상은 1867 년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좀더 완성된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풍요한 사회를 지키기 위한 또 하나의 경제사상, 즉 신고전파 경제학은 1870 년대 초에 첫걸음을 내디딘 이래 50 여 년간에 걸쳐 나름의 완성 과정을 밟게 된다. 6. 모든 지배계급을 공산주의의 혁명 앞에 떨게 하라 (칼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낡은 유럽을 뒤흔든 혁명의 해 1849 년 여름 칼 마르크스는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망명했다. 1848 년 유럽의 지축을 뒤흔들었던 반란과 폭동과 유혈사태를 선동하고 조종했다는 매우 과장된 범죄 혐의 때문에 유럽 대륙의 어느 나라에서도 안전하게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붉은 혁명박사'는 조국 독일뿐만 아니라 불온한 공산주의 혁명을 두려워한 거의 모든 유럽 나라의 비밀경찰에 의해 요시찰 인물 제 1 호로 지목되어 있었던 것이다. 칼 마르크스는 미국으로 건너갈 생각을 했지만 여비를 구하지 못해 가까운 영국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낡은 유럽의 모든 권력자들을 놀라게 한 이 '붉은 박사'의 나이는 이제 겨우 31 세에 불과했다. 19 세기 자본주의의 아성이였던 영국은 자본주의의 멸망을 예언한 이 위험한 인물에게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서 두 가지의 중대한 은혜를 베풀었다. 그것은 더할 나위없이 풍부한 정치적 자유와 더할 나위 없이 풍부한 자료를 보유한 대영박물관의 도서관이었다. 마르크스는 이후 죽을 때까지 런던에 살면서 자본주의 영국이 베풀어 준 이 두 가지 풍요를 밑천삼아 자본주의에 대해 시한부의 삶을 선고한 대저작 <자본론>을 집필했다. 참으로 기묘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850 년 이후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정부는 수차에 걸쳐 "국왕 살해를 포함하여 갖가지 위험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공산주의자를 보호하는 영국 정부에 공식, 비공식적으로 항의하고 그의 추방을 요구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그 때마다 냉정하게 거절했다. 학문 연구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영국의 법률에 의하면 "영국 여왕에 관한 것이 아닌 한, 그리고 뚜렷한 계획이 현실화되지 않은 한, 국왕 살해를 논의한 것만으로는 체포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이같이 자유로운 정치적 환경 속에서 밤낮으로 대영박물관 도서관의 자료를 뒤적이며 연구에 골몰했다. 마르크스가 받고 있던 혐의는 분명 과장된 것이었지만 또한 전혀 근거 없는 오해도 아니었다. 그는 그런 혐의를 받을 만한 일을 여러 가지 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1848 년 2 월의 '프랑스 2 월 혁명'과 동시에 내놓은 <공산당선언>이다. 물론 이 선언은 그의 충실한 지원자이고 학문적 동료이며 스스로도 뛰어난 학자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함께 작성한 것이다. 그 선언의 시작과 끝은 다음과 같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교황과 짜르, 메테르니 히와 기조, 프랑스 급진파와 독일의 비밀경찰 등 낡은 유럽의 모든 권력들이 이 유령 을 몰아내기 위해 신성동맹을 체결했다. 공산주의자는 자신의 견해와 목적을 감추는 것을 경멸한다. 공산주의자는 자신의 목 적이 오직 기존의 모든 사회적 조건을 힘으로 전복시킴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 을 공공연히 선포한다. 모든 지배계급을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전율하게 하라. 프롤레 타리아가 잃을 것이라고는 쇠사슬밖에 없으며 얻을 것은 온 세상이다. 전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이

선언이 발표된 것과 거의 같은 시점에서 산업화된 유럽의 모든 나라에서 노동자들의 폭동과 반란이


연쇄적으로 터져 나왔다. 파리, 베를린, 비인, 프라하 등 산업화된 유럽의 주요 도시들이 잇달아 혁명의 포연과 유혈에 뒤덮였다. 유일한 예외는 런던이었다. 대륙보다 오랜 역사를 지닌 영국의 노동자들은 참정권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에 열중하고 있었다. 소위 차티스트운동이다. 런던 시가를 뒤덮은 차티스트대회 참가자들은 목표를 완전히 이루지는 못했지만, 다소 경제적 여유를 가진 영국 자본가계급으로부터 여성과 어린이에 대하 10 시간 노동제 등 몇 가지 양보를 받아냄으로써 반란으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혁명의 해' 1848 년의 진수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은 2 월부터 6 월 사이에 파리를 중심으로 전개된 일련의 사태, 즉 프랑스 2 월혁명이다. 사태의 발단은 1789 년 대혁명의 경우에서처럼 낡은 토지귀족들과 신흥 자본가계급 사이의 권력투쟁이었다. 당시의 프랑스 의회선거법은 연간 2 백 프랑 이상의 직접세를 내는 사람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했다. 그래서 의회는 거대한 토지를 가진 낡은 지배계급---토지귀족들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 액수는 예전에 비해 크게 낮아진 것이었지만 자본가들은 이것을 더 낮춤으로써 의회를 장악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선거법 개정에 대한 공청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접수하려 했다. 그러나 정부는 이 집회를 금지시켰다. 그런데 선거권도 없는 노동자와 수공업자와 학생들이 공청회 예정 장소로 몰려들었다. 시위가 시작되었다. 두려움을 느낀 프랑스 정부는 군대를 투입했고 곧 발포가 시작되었다. 파리의 시가지에는 수천 개의 바리케이트가 만들어졌고 군중은 군부대의 무기고를 점령하여 무장을 갖추었다. 시가전이 벌어졌다. 국왕 루이 필립은 왕궁으로 쳐들어온 군중을 피해 지하도를 통해 파리를 탈출했다. 왕정은 붕괴되고 의회의 진보파, 즉 부르주아 정치인들이 임시정부를 조직했다.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혁명을 일으킨 노동자들이 선거법 개정 따위와는 무관한 요구를 내놓으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을 향해 치달았다. 그들은 1845 년 이후 계속된 흉년으로 인해 식료품값이 폭등한데 불만을 터뜨렸다. 더욱이 1847 년의 경제공황으로 임금이 절반 가까운 수준으로 하락한 것은 더욱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실업의 위협과 힘들고 긴 노동, 형편없는 작업환경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저항의 원인이었다. 그들은 임시정부에 '노동권'의 승인을 요구하고 대중의 빈곤을 치유할 '사회주의공화국'의 수립을 주장했다. 사회의 밑바닥과 꼭대기를 뒤바꾸어 놓으려는 과격한 혁명에 두려움을 느낀 지배계급은 자기네끼리의 패권다툼을 일시 중단하고 이 위험스런 사태를 종식시키로 결의했다. 이렇게 해서 지배계급 내부의 권력투쟁보다 훨씬 무자비하고 살벌한 지배계급과 무산 대중 사이의 대살육전이 벌어졌다. 노동자들은 수가 많고 투지로 충만했지만 군사적으로는 오합지졸이었다. 뚜렷한 지도자도 없고 미래에 대한 확고한 계획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잘 훈련된 정부군에게 이길 수가 없었다. 6 월 23 일부터 사흘 동안 벌어진 파리의 시가전은 반란군의 궤멸로 끝났다. 8 백여 명의 노동자가 전사했다. 무려 1 만여 명의 노동자가 전투가 끝난 후 사살되었다. 감옥과 무인도의 유배지로 끌려간 자는 2 만 5 천 명이 넘었다. 아름다운 세느강은 그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지배계급은 루이 보나파르트를 대통령으로 세워 공화정을 수립했다. 그러나 그는 나폴레옹 황제를 본받아 쿠데타를 결행, 스스로 황제의 지위에 오름으로써 다시 한 번 제정시대를 열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인간, 칼 마르크스 우리는 리카도와 맬더스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19 세기 초엽 노동자들의 생활상태를 살펴보았다. '혁명의 해' 1848 년의 노동자들은 본질적으로 몇십 년 전과 똑같은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들이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다는 사실뿐이다. 그들은 기계나 자기의 고용주에게 가난과 불행의 책임을 돌리는 단계를 지나 국가권력에 그 책임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비밀결사와 노동조합을 만들어 더 크고 강하고 폭넓은 조직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또한 공상적 사회주의자와 '빈민의 경제학자'들이 전파한 '장미빛 미래에 대한 환상'에 '감염되기' 시작했다. 스미드나 리카도에게 이것은 분명 유감스러운 사태였을 것이다. 그리고 맬더스와 세이, 시니어나 바스띠아의 눈에는 신의 축복과 자연적 자유의 질서를 파괴하는 무지몽매한 범죄행위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의 개탄이나 비난도 노동자들의 반란을 막을 수 없었다. 그들은 가난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멸시받고 정치적으로도 아무런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다. 노동조합이나 보통선거 등의 제도가 먼 옛날부터 존재했던 것인 양 착각하는 사람이 흔히 있지만, 이것은 불과 1 백 년전까지만 해도 가난한 보통 시민이나 여성들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공산당선언>이 1848 년 혁명의 봇물에 어떤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당시로서 이 선언은 몇 부 인쇄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리 널리 전파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선언은 1848 년의 혁명적 사태를 불러일으킨 유럽 사회현실을 반영한 것이며, 그러한 사태가 필연적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고통이라고 정당화한 문헌인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칼 마르크스는 30 세도 되기 전에 "폭력과 유혈과 파괴를 선동하는 붉은 박사"라는 악명과 동시에, "인류의 해방을 가져올 새로운 사상의 창조자"라는 명성을 한꺼번에 얻게 되었다. 사실 정치적 선언문으로서 <공산당선언>만큼 거대한 성공을 거둔 것은 달리 없다. 이 선언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나라의 언어로 번역 출판되었고, 그것이 출판된 모든 나라에서 맹렬한 추종자를 얻었다. 그것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아 그들을 공산주의자로 개종시켰다. 단호하고 씩씩하며 박력 있고 함축적인 문장은 정치적 선언문의 교과서가 되었다. 19 세기 중반 이후 발표된 많은 정치적 선언문이---가장 맹목적인 공산주의자들의 것에서부터 터무니없이 반동적인 보수주의자의 것에 이르기까지---많건 적건 <공산당선언>의 말투를 흉내낸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공산당선언>의 성공이 단지 폐부를 찌르는 듯한 번득이는 문장과 박력 있고 선동적인 어조에 기인한 것은 아니다. <공산당선언>은 스미드의 신세계가 결코 영원한 '자연적 자유의 질서'가 아니라 인간 사회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난 '특수한 질서'임을 명백히 했다. 그리고 이러한 질서가 인간의 주관적 희망이나 윤리도덕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의 발전법칙에 의해 붕괴되어 필연적으로 한층 평등하고 풍요한 사회로 나아갈 수밖에 없음을 선언했다. 끝없는 가난과 힘겨운 노동, 완전한 정치적 무권리 상태에서 신음하고 있던 노동자들과 자본주의가 낳은 극심한 불평등에 분개한 지식인들에게 이것은 하나의 복음이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와는 달리 인간의 상상력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운동법칙 그 자체에 의존하고 있었기에 더욱 매력적인 것이었다. 칼 마르크스는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인간이다. 그는 철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 저널리스트였으며, 무엇보다도 뛰어난 경제학자였다. 또한 그는 철학의 목적을 "세계를 해석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변혁하는데" 두었기 때문에 파란만장한 혁명가의 삶을 살았다. 아프리카의 사막이나 남태평양 작은 섬에 미개 종족이 아닌 한 20 세기에 태어나 보통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금씩은 그를 알고 있다. 그러나 칼 마르크스라는 이름이 주는 인상은 천사와 야수의 그것만큼이나 대조적이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지구상의 어떤 나라들에서 마르크스는 성인의 지위에 올라 있었다. 여기서 그의 사상을 비난하려면 반역죄의 혐의와 총살형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어떤 나라들에서 마르크스는 중세기의 마녀사냥보다 더 혹독한 박해를 받아야했다. 심지어는 그가 원래 인도주의자이며 옳고 그름을 떠나 그의 사상이 인도주의적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감옥에 끌려갈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나라는 지금도 여럿 있다. "마르크스의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또는 "마르크스의 사상이 사회를 감염시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그의 추종자나 반대자가 저지른 대량 학살의 사례 또한 너무나 많다. 그들은 또한 자기네들이 마음내키는 대로 마르크스의 흉상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대부분 성인의 모습이 아니면 야수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 마르크스는 마르크스의 흉상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고, 그 자신이 훌륭한 학자이면서 마르크스의 충실한 협력자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그림자에 가리워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에 대한 종교적 숭배가 적절치 않은 것처럼 그에 대한 십자가 처형도 부당한 처사이다. 그의 사상은, 인류 역사에서 명멸한 다른 많은 위대한 사상과 마찬가지로, 완전무결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터무니없는 오류도 아니다. 자본주의의 불길한 미래에 대한 그의 예언 또는 '과학적 논증' 역시 전적으로 실현되지도, 완전하게 어긋나지도 않았다. 그리고 존경심이나 증오감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그의 인생을 살펴볼 때, 좀더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던 혁명적 활동보다는 인류 사회와 자본주의의 운동법칙을 분석한 그의 학문적 저서들이다. 마르크스 자신의 세계관과 역사철학에 입각해서 생각해 보아도 그의 사상은 19 세기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 낸 역사의 산물이지 역사를 뛰어넘는 보편성을 지닌 절대불변의 진리는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함께 또는 혼자만의 손으로 수많은 논문과 사설과 팜플렛과 저서를 썼고 발표했다. <공산당선언>, <신성가족>, <철학의 빈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 일>, <정치경제학 비판>, <자본론> 등 그의 주요 저서는 현대의 인문사회과학과 정치에 지울 수 없이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이 저서들을 통해 그가 정립한 유물론적 세계관과 역사철학은 철학, 경제학, 역사학, 사회학, 문학, 예술 등 인문사회과학의 모든 분야에서 마르크스주의학파를 형성시켰으며 수많은 정치적 추종자와 정치 결사를 만들어 냈다. 우리는 위대한 역사상의 인물들에 대해 흔히 "그가 아니었더라도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해냈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마르크스에 대해서만은 이렇게 단언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만약 칼 마르크스라는 인간과 <자본론>이라는 저작이 없었더라면 20 세기의 세계는 우리가 실제 겪어 온 세계와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마르크스의 저작 가운데 <공산당선언>과 <자본론>에만 관심을 두기로 하자.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적 부의 원천과 그 분배원리, 그것과 관련된 인간들 사이의 싸움, 그리고 풍요와 빈곤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마르크스의 생각을 알아보는 데는 이 정도로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앞서 말한 유토피안들, 생 시몽이나 오웬 같은 공상적 사회주의들과 달리 모든 문제를 엄격하고 냉정하게 다루었다. 그는 19 세기 중엽 노동자들의 처참한 고통을 동정하고 부와 빈곤을 동시에 생산해 낸 자본주의 체제를 누구보다 혐오했다. 그러나 그는 상상에 의해 만든 이상사회를 제시하고 다른 사람들의 정의감과 도덕심과 동정심에 호소한 유토피안들과는 달리, 사람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본주의 사회 그 자체가 발전한 결과 마치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는 것처럼 자본주의의 파멸과 공산주의의 승리가 찾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상상력이 아니라 사회적 현실 속에서 유토피아가 도래할 필연성을 찾아낸 것이다. "고매한 인품을 지닌 자선사업가" 라든가 또는 "터무니 없는 이상주의에 사로잡힌 괴팍한 철학자" 라는 식의 평가를 받은 유토피안들과 달리 칼 마르크스가 사회의 지배계급으로부터 종교재판을 능가하는 박해를 받은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일 것이다. 위대한 부르주아지,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트 경제학자 칼 마르크스는 스미드와 리카도 등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이 이루어 놓은 성과를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가 자본주의를 분석하기 위해 설정한 경제 모델은 스미드나 리카도의 것과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세계에서도 낯익은 주인공들이 다시 등장한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그들이다. 이들은 스미드나 리카도의 세계에서 등장한 바로 그 인물들이지만 마르크스는 새로운 이름을 하나씩 지어주었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이것은 하나의 사회과학적 개념에 불과하지만 속 좁은 부자와 권력자들 앞에서 이런 단어를 쓰다가는 감옥행이 되기 십상인 나라들이 아직도 있다.---이다.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지주의 좌천이다. 이 인물은 마르크스에 의해 하루 아침에 주인공에서 엑스트라로 격하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유력했지만 경제적인 면에서는 자본가에게 주도권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조만간 정치적 세력마저 상실할 위기에 있었던 당시 지주들의 처지를 감안할 때 이런 대우가 특별히 부당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니 이제 우리도 지주에 대해서는 잠시 잊어버리기로 하자. 마르크스는 자유방임시장의 원리에 동의하고 그것이 이룩한 엄청난 업적을 승인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노동자와 자본가, 다시 말해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에 놓여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항상 대립하고 투쟁해야 한다. 이것은 역사가 그들에게 내린 운명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일방적으로 비난하고 저주했다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이다. 마르크스의 세계에서 자본가는 이전의 어떤 지배자보다 훨씬 위대하며 그들이 거둔 성공과 업적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공명정대한 역사가라면 자기의 철학을 위해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법이어서 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에서 이렇게 썼다. 부르주아지는 인간의 행위가 무엇을 이룩할 수 있는지를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그 들은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로마의 수로들, 그리고 고딕 대사원을 훨씬 능가하는 숱 한 경이로운 업적을 달성했다. 부르주아지는...모든 국민을...문명 안으로 끌어들였 다...어마어마한 도시들을 만들어 냈고 그럼으로써 인구의 상당한 부분을 농촌생활 이라는 백치상태에서 구출해냈다...부르주아지는 불과 백 년밖에 안되는 그들의 지 배기간 동안에 그 이전 모든 시대의 업적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더 거대한 생산력 을 만들어냈다. 인간에 대한 자연력의 복속, 기계, 공업과 농업에서 화학의 응용, 기 선, 철도, 전기통신, 경작을 위한 모든 토지의 개간, 운하 건설, 땅에서 솟아난 듯한 거대한 인구---이전 세기에 그와 같은 생산력이 사회적 노동의 품속에서 잠자고 있 으리라고 예감할 수나 있었겠는가? 어떤 부르주아 사상가의 자본주의 예찬도 이보다 웅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필요한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소규모 생산의 시대는 아무리 낭만적으로 회상될지라도 이미 돌아갈 수 없는 '보잘 것 없는 과거'에 불과했다. 마르크스가 그러한 사회를 유토피아로 본 공상적 사회주의를 두고 "낡은


소유관계와 낡은 사회로 돌아가려는" 반동적, 시대착오적 사회주의라고 꼬집은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면 나머지 한 사람의 주인공인 노동자는 어떠한가? 그는 부르주아지가 더 위대해진 만큼 더 비참해졌다. 맬더스와 리카도에 관한 장에서 이야기한 바 있는 19 세기 노동자들의 비참한 인생은 마르크스의 시대에도 그대로 유효하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최저생활 수준의 임금밖에 받을 수 없다는 이른바 '임금철칙'을 인정했다. 그런데 이유는 좀 달랐다. 맬더스는 경제적 여유가 생기는 만큼 자식을 더 낳거나 술집에서 마셔 버리는 노동자의 무절제와 방종을 나무랐지만, 마르크스는 그 누구도 나무라지 않았다. 문제는 자본주의 그 자체였다. 프롤레타리아가 성욕을 절제하고 술을 끊는다 할지라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자본가는 노동절약적인 기계를 도입함으로써 임금 상승에 대처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인구 증가가 아니라 새로운 기계의 도입으로 인해 생겨나는 실업자들이---마르크스는 이런 사람들에게 산업예비군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문제였다. 이들이 있는 한 노동자들은 고용주에게 임금을 올리라고 요구할 수 없다. 고용주는 그 정도의 임금을 주고도 언제든지 산업예비군 가운데 적당한 일꾼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는 데는 특별한 '악당'이 필요하지 않다. 두 주인공이 서로에 대해 적대감을 갖든 호감을 갖든 사태는 마찬가지여서 자본가는 위대하고 노동자는 비참하다. 두 사람은 모두 시장에서 흥정하는 자유인이며 상대방이 없으면 자신도 살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자유로운 노동자'란 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는 "독립적인 인격을 가지고 마음대로 계약할 수 있는 자유인" 이어야 하고 동시에 "모든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로운" 가난뱅이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 <자본론>은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노동력은 그 소유자가 그것을 판매할 때, 즉 상품으로 팔 때에만 시장에 등장 할 수 있다. 이렇게 하려면 그는...자기의 노동능력, 즉 인격의 소유자여야 한다...노 동력의 소유자는 특정 기간 동안 노동력을 팔아야 한다. 만약 그가 노동력을 한꺼번 에 팔아 버린다면 자기 자신을 판매하는 셈이어서 스스로를 노예로 전락시키고 그 자신이 상품의 소유자가 아닌 하나의 상품이 되기 때문이다...두번째로는 노동자가 자기의 노동이 투하된 상품을 판매할 위치가 있지 않고 살아 있는 자아로만 존재하 는 바로 그 노동력만을 판매할 수 있어야 한다...그러므로 화폐를 자본으로 전환시키 기 위해서는 화폐소유자가 시장에서 이중의 의미에서 자유로운---한편으로는 자유인 으로서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처분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이것 이외에는 다른 판매 가능한 상품을 소유하지 않은, 즉...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았다는 의미에 서 자유로운---임금노동자를 발견해야만 한다. 여기까지는 별로 논란거리가 없는 듯하다. 주인공의 성격이 결정되고 둘 사이의 기본적인 관계가 설명되었다. 그런데 이 두 주인공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그 엄청난 물질적 부가 생산되는 비결은 무엇인가" 하는 낯익은 문제에 접하면 사태가 좀 복잡해진다. 마르크스는 자유방임시장에서는 등가의, 즉 같은 가치를 지닌 상품이 서로 교환되다는 고전학파의 견해를 수용했다. 노동력의 가치가 그것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다시 말해 "노동자가 자신과 가족을 먹여 살리는데 필요한" 생필품과 편의품의 양이라는 이론을 인정하고, "상품의 교환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데 투하된 노동의 양" 이라는 학설을 계승했다. 그런데 이 모두를 승인할 때 하나의 중대한 의문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이윤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모든 것이 제값대로 팔리는 상황에서 누구도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터무니 없이 높은 값을 부를 수 없는 자유방임시장의 메커니즘 속에서 어떻게 자본가는 막대한 이윤을 뽑아내고 그것을 다시 새로운 사업에 투자할 수 있는가? 바스띠아, 세이, 시니어 등이 이윤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창안해 낸 갖가지 이론은 이데올로기적으로는 훌륭했지만 이론적으로는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칼 마르크스는 하나의 해답을 찾아냈다. 현실적 타당성은 차치하고서라도, 일단 이론 그 자체로서는 논리적 정합성을 가진 분배이론을 세우 경제학자는 마르크스가 처음이었다. 이윤의 원천을 밝혀내는 것은 곧 부의 원천을 밝혀내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자신이 얻는 소득을 전부 소비해버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축적된 모든 물질적 부는 전적으로 자본가의 이윤이다. 수없이 많은 상품 가운데서 하나가 이윤 창출의 비밀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노동력이라는 상품이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제값에 판다. 노동력의 값은 노동자가 생존하는데 필요한 생필품과 편의품의


양인데, 이것은 또한 그것을 생산하는데 투하되는 '사회적 필요노동량'으로 환원할 수 있다. '사회적 필요노동량'이란 그 사회가 갖는 평균수준의 기술과 노동강도를 기준으로 그 생필품과 편의품을 생산하는데 소요되는 노동량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그것을 생산하는데 하루 6 시간의 노동이 필요하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노동자는 하루 6 시간만 일하지 않는다. 당시에는 가장 선진국인 영국에서조차 성인 남자의 하루 노동시간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12 시간을 초과했다. 이런 경우 노동자는 12 시간을 일하고 6 시간 동안의 생산물을 대가로 받는 셈이다. 여기서 속임수는 없다. 그들은 자신의 '노동력의 가치'만큼 보수를 받았다. 그러면 나머지 6 시간의 노동은 무엇인가? 마르크스는 이것을 '잉여노동'이라고 하고, 이 잉여노동에 의해 생산된 물질적 부를 '잉여가치'라고 했다. 이윤이란 '잉여가치'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잉여가치는 누가 가지는가? 자본가의 소유가 된다. 무엇 때문에? 그가 생산수단, 즉 자본의 법률적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이상이 그 악명 높은 '잉여가치설'의 개요이다. 이렇게 해서 노동자가 생산물의 전부를 가져야 마땅한다고 한 사회주의자들의 사상은 이론적 근거를 얻었다. 물론 자본가들의 편에서 보자면 이것은 몹시 불쾌한 이론이었다. 그러나 <자본론>이 출간되고 몇 해 지나지 않아서 그 불쾌감을 충분히 달래 줄 만큼 멋있는 또 다른 경제이론이 나타났으므로 그들이 아주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는 이 '잉여가치설'을 근거로 하여 곧장 자본가에게서 모든 부를 빼앗아 버리자고 선동하지도 않았다. 그러한 결론이 나오려면 아직도 몇 단계의 과정을 더 거쳐야 한다. 자유거래라는 또 하나의 '파렴치한 자유'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순수한 자본주의를 가정해 놓고 그 구성원리를 매우 추상적으로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그러한 원리가 인간들의 생활을 어떻게 만들어 놓았는지를 보기로 하자. 부의 증진이라는 '신성한 소명'을 부여받은 자본가들은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서 더욱 많은 이윤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이윤이 '잉여가치'의 다른 이름인 이상 그는 잉여가치를 확대시켜야만 한다. 여기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노동시간을 늘임으로써 잉여노동시간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노동자의 생필품과 편의품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이다. 이것은 곧 한층 높은 효율성을 가진 기술과 기계의 도입을 의미한다. 마르크스는 전자를 '절대적 잉여가치의 확대', 후자를 '상대적 잉여가치의 확대'라고 정의한다. 잉여노동에 대한 맹목적이고 무제한적인 열정과 야수같은 갈망 때문에 자본은 노 동일의 도덕적 한계뿐만 아니라 단순 명백한 육체적, 물리적 한계까지도 뛰어넘는 다. 그것은 사람 신체의 성장과 발전, 건강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시간까지 빼앗아 간다. 그것은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햇빛을 쪼일 시간조차 훔쳐간다. 식사시간까지 잠식하여 가능한 한 식사시간을 생산과정의 일부로 결합시키려 한다. 이리하여 보 일러에 석탄이 투입되고 기계장치에 윤활유와 기름이 공급되는 것과 똑같이 노동자 에게는 음식이 제공되는 것이다...이리하여 노동력을 정상적으로 존속시키기 위해서 가 아니라, 노동자가 병들었건 억압당하건 관계없이 가능한 최대한의 노동력을 짜 내기 위해 노동일의 한계가 결정된다...자본의 관심을 끄는 것은 오직 하루 동안에 써 먹을 수 있는 최대한의 노동력뿐이다. 마치 욕심꾸러기 농부가 토양의 비옥도를 떨어뜨림으로써 생산물의 증대를 추구하는 것처럼 자본은 노동자가 노동할 수 있는 기간을 단축시킴으로써 이러한 목적을 달성한다. 리카도의 세계에서 자본가는 '가련한' 존재였다. 그는 열심히 부를 증진시키지만 인구의 압력과 불균등한 토지의 비옥도 때문에 결국 자기의 몫을 지주들에게 빼앗기고 만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지주를 단역으로 좌천시켜 버렸다. 그러나 여기서도 자본가는 여전히 '불쌍한' 사람이다. 그는 끝없이 새로운 기술과 기계를 도입하고 노동자들의 휴식시간을 빼앗고 그들의 아내와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중노동을 시키면서까지 이윤을 추구하지만 특별한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을 아니다. 마르크스는 자본가에게 '돈가방'이라는 풍자 섞인 별명을 붙여 주었는데 이것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다. 자본가는 언제나 다른 자본가와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더 많은 잉여노동을 짜내서 경쟁자를 제압하거나, 아니면 다른 경쟁자의 희생물이 되는 길뿐이다. 자본은 마치 달리는 자전거와 같아서


계속해서 축적하지 않는 자본가는 견뎌낼 도리가 없다. 그는 자본의 소유자이기도 하지만 단지 자본의 인격적 대리인이기도 하다. 그가 자본의 주인이지만 동시에 자본이 그의 주인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자본가를 단순한 수전노와 구별했다. 자본가는 수전노와 마찬가지로 부 그 자체에 대한 열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수 전노에게는 단순한 특질에 불과한 것도 자본가에게는 그 자신이 하나의 톱니바퀴에 불과한 사회적 메커니즘의 결과로 등장한다. 더욱이 자본주의적 생산이 전개됨에 따 라 주어진 사업에 투자될 자본의 양을 계속해서 늘려 나가야 하며, 자본주의적 생산 의 내재적 법칙인 경쟁이 개별 산업자본가에게는 외적인 강제법칙으로 작용한다. 이 때문에 자본가는 자신의 자본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의 자본을 끊임없이 확대시켜야 하지만 지속적으로 축적하지 않고서는 자본을 확대할 수 없다. '출생이라는 거대한 제비뽑기'에 의해서든 자기 자신의 능력과 근면에 의해서든 자본주의가 창조한 거대한 물질적 부의 한 조각을 나눠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불만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아담 스미드는 노동계급의 빈곤에 대해 연민의 정을 표하고 노동의 분업화와 특수화에 의해 생산력이 발전함으로써 그들이 빈곤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피력했다. 그러나 <국부론>이 출판된 지 백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스미드의 희망은 실현될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칼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오히려 자본주의의 생산력은 노동자를 더욱 비참하게 만듦으로써만 이룩될 수 있다고 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을 높이는 모든 방법은 개별 노동자를 희 생시킴으로써 성취된다. 다시 말해 생산의 발전을 도모하는 모든 수단이 생산자에 대한 지배와 착취의 수단으로 전화한다. 그것은 노동자를 불완전한 인간으로 불구화 시키고 노동자의 지위를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시키며, 작업과정의 모든 매력적 요 소를 파괴함으로써 노동을 저주스러운 고역으로 만들어 놓는다...그것은 노동의 환경 을 왜곡시키고 노동하는 사람을 가증스럽고 비열한 통제에 묶어 놓는다. 그것은 노 동자의 생활시간을 노동시간으로 전화시키고 그들의 아내와 어린 아이들까지도 자본 의 희생물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모든 방법은 동시에 축적을 위한 수단이다...그러므로 자본이 축적될수록 노동자의 운명은 그의 보수와 무관하게 반드시 악화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법칙은 자본의 축적에 대응하여 궁핍의 축적 을 확립한다. 부의 축적은 동시에 가난과 고역과 번민, 노예화와 무지와 야만, 그리 고 정신적 타락의 축적인 것이다. 마르크스는 단순한 경제학자가 아니다. 그의 세계에서 모든 것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고립된 것은 하나도 없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노예로 소유한 고대 사회나 인간을 토지와 온갖 형태의 봉건적 인습과 신분제도에 비끄러매었던 중세 사회에 비해 자본주의가 훨씬 문명화되고 진보된 사회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엄청난 부를 창출한 자본주의가 모든 면에서 인간의 삶을 자유롭고 풍성하고 아름답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본주의를 이끄는 부르주아지가 만들어 놓은 사회의 여러 특성들을 조롱하고 혐오했다. <공산당선언>은 부르주아지가 지배하는 사회를 "오직 적나라한 이기심과 냉혹한 현금거래"만이 존재하는 속물들의 세상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새로운 형태의 착취제도라고 맹렬하게 비난했다. 예수에게서처럼 마르크스에게도 인간은 "빵으로만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자신이 지배권을 확립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모든 봉건적, 가부장적., 전원적 관계를 종식시켰다. 부르주아지는 인간을 '타고난 상하관계'에 묶어 놓는 여러 가지 봉건적 유대를 가차없이 잘라 버렸으며 모든 인간관계에 오직 적나라한 이기심 과 냉혹한 '현금 거래'만을 남겨 두었다. 부르주아지는 또한 가장 신성한 종교적 정열 과 기사도적 열정과 세속적 감상주의의 환희를 이기적 타산이라는 얼음물에 빠뜨려 버렸다. 부르주아지는 또 개인의 존엄성을 교환가치로 용해시켜 버렸으며 결코 무효 화할 수 없도록 인정된 무수한 자유 대신 '자유거래'라는 또 하나의 파렴치한 자유만


을 세워 놓았다. 한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종교적, 정치적 환상으로 가리워진 착취를 적 나라하고 후안무치하며 노골적이고 야수적인 착취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마르크스의 사상을 일컬어 '증오의 과학'이라고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은 그의 사상 가운데서 증오만을 보고 진저리를 치거나, 아니면 그 증오마저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과학은 과학이며 증오는 증오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증오가 없이도 성립할 수 있는 그 사상의 과학적 측면을 직시하는 일이며, 그 증오를 19 세기 자본주의가 처했던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이해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잠깐 이 '증오의 과학자'의 파란만장했던 인생을 잠깐 살펴보기로 하자. 혁명가 마르크스의 고달픈 생애 트리에르는 라인강 지류인 모제르강 유역에 있는 작은 도시이다. 1818 년 칼 마르크스가 태어났을 때 빼어난 경관을 가진 트리에르는 인구 1 만 5 천 명의 전원적인 도시였다. 그의 아버지는 유능하고 성실한 변호사 하인리히 마르크스이다. 하인리히는 유태인이었지만 유태교적 종교생활에 얽매인 사람이 아니었으며, 변호사로서 사회생활을 원만하게 하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했다. 후일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유태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악용하여 마르크스를 비난했다. 반유태주의를 반마르크스주의를 선동하는 무기로 악용한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일생에서 유태인적 요소는 전혀 없다. 라인강 유역은 독일에서 산업이 가장 왕성하게 발달한 지역으로서 프랑스 대혁명과 자유주의 사상의 영향을 가장 많아 받은 지역이기도 하다. 트리에르가 속한 라인란트는 나폴레옹전쟁 직후 열린 비인회의의 결정에 의해 프로이센 왕국 라인주로 편입되었다. 마르크스는 어린 시절과 청년기의 대부분을 라인란트에서 보냈다. 하인리히 마르크스는 과격한 자유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 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매우 진보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루소나 볼테르 같은 철학자들의 저서를 두루 읽었으며 아홉 자녀들의 자유로운 정신적 성장을 돕기 위해 많은 정성을 기울였다. 트리에르 김나지움과 본대학에서 마르크스는 그리스 라틴 고전 해독과 수학에서 재능을 보였다. 독서의 폭이 넓고 특히 날카롭고 풍자적인 글솜씨를 발휘했는데 본대학에서의 전공은 법학이었다. 매우 진지하고 정열적인 청년이었던 마르크스는 습작시를 열심히 지었으며 고대문학과 예술사와 역사 분야의 서적을 섭렵했다. 마르크스는 본대학에서 두 학기를 공부한 뒤 1836 년 가을 베를린대학 법학부로 학교를 옮겼다. 마르크스는 재능있고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소년기의 생활에서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와 직결시킬 만한 요소는 거의 없다. 한가지 특기할 만한 것이 있다면 나중 그의 장인이 된 트리에르의 귀족 루드비히 폰 베스트팔렌 남작과의 관계이다. 이 사람은 귀족적인 특권의식이나 오만을 전혀 갖지 않은 자유주의자로서 유태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보기 드문 휴머니스트였다. 그는 침례교파 기독교도로서 하인리히 마르크스의 교분을 맺었는데, 그 아들 마르크스까지도 무척 아끼고 사랑했다. 그의 딸 옌니는 명예로운 가문의 규수였을 뿐만아니라 트리에르에서 무도회가 열릴 때마다 뭇 청년들의 연모를 한몸에 받았던 미모의 소유자였다. 옌니는 베를린대학으로 옮기기 직전의 여름방학에 고향에 돌아온 마르크스와 오랜 우정을 사랑과 헌신으로 발전시키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 약속으로 인해 그녀는 경찰의 감시와 지독한 가난과 병마와의 싸움 속에서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베스트팔렌 남작은 마르크스에게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사랑과 헌신을 바친 아내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사유재산의 폐지 없이는 인간 사회의 발전과 행복이 있을 수 없다는 생 시몽의 사상까지 이야기해 주었다. 소년기에 모제르 강변을 함께 산책하면서 배운 이 매혹적이고 위험한 사상은 마르크스의 인생에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칼 마르크스의 '도덕적 스승'이었으므로 마르크스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그에게 헌정했다. 물론 옌니의 미래를 점칠 수 있었다면 남작이 마르크스를 사위로 삼았을까 하는 의문이 있다. 그러나 당시의 칼 마르크스는 위험한 혁명가가 아니라 낭만적이고 정열적인 청년이었을 뿐이다. 그의 인생에 아직 불길한 요소는 없었다. 마르크스는 옌니에게 매혹적인 연시를 써 보내곤 했는데, 다음과 같은 시는 '붉은 박사'의 순수하고 평범했던 청년기를 증언하는 자료로 남아 있다. 내 가슴 저 깊숙한 곳에 차꼬를 세우고 내 영혼의 눈은 갈수록 맑아지네 내 어렴풋이 그려 오던 것 마침내 당신에게서 찾았구려


저 거친 삶이 가시발길에서 내 끝내 다스리지 못했던 것 당신의 황홀한 눈길과 함께 까닭 없이 내게로 다가왔네 공산주의 사상가로서 인생 역정이 시작된 곳은 베를린대학이었다. 여기에서 마르크스는 법학이 아니라 당대의 독일 지식인 사회를 들끓게한 철학상의 대논쟁에 휩쓸려 들었다. 논쟁의 대상은 헤겔의 사상이었다. 헤겔의 사상은 평범한 인간들로서는 실로 접근하기 어려운 난해한 것이었다. 그는 변증법이라는 변화의 철학을 창안했는데 우리가 정-반-합이라는 도식으로 배우는 바로 그것이다. 헤겔에 의하면 세계의 본질은 변화이다. 그리고 모든 역사적 발전은 사물 자체에 내포된 자기모순에 의해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물은 그 내부에 대립하고 투쟁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대립과 투쟁을 통해 새로운 것으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프랑스 대혁명과 관계가 있다. 부르봉 왕조를 무너뜨리고 국왕의 목을 잘라 버린 대혁명은 유럽의 지식인들을 경악과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신이 부여한 '영원한 질서' 봉건왕조의 붕괴가 "하늘 아래 영원한 것은 없다."는 생각을 가져다 준 것이다. 그러나 헤겔에 의하면 사회 그 자체의 변화가 사상의 변화를 가져 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인간 관념의 변화 발전이 사회의 변화를 일으킨다.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 우선하는 것이다. 이것은 관념론적 변증법이었다. 마르크스는 변화에 대한 헤겔의 사상 위에서 무신론과 공산주의 등 현실의 문제를 연구한 한 무리의 청년 지식인 그룹에 참여했다. 그는 철학적으로 급진주의자가 되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 리스트와 같은 자유주의적 우국지사까지 박해한 프러시아 정부가 그를 정치적 급진주의 쪽으로 몰아갔다. 마르크스는 헤겔철학을 너무나 열심히 연구한 나머지 그만 건강을 해쳤는데, 그때 이후 죽을 때까지 병마에 시달려 했다. 박사학위 논문을 마치고 1841 년 쾰른으로 옮겨 간 마르크스는 저널리스트로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금방 저널리스트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런데 1840 년대 프러시아에서는 '두각을 나타낸 언론인'이란 곧 검열기관과 경찰의 요시찰인 명부에 등록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라인신문>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편집장이 되었다. 그리고 당대의 정치 사회적 쟁점을 날카로운 필치로 다룬 논설과 평론을 발표했다. 그래서 이 신문은 1843 년 3 월 프러시아 정부의 탄압으로 폐간의 운명에 처했다. 검열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난해하거나 모호한 표현을 사용했지만 프러시아 검열기관은 냄새 잘 맡는 사냥개와 같아서 누가 위험한 인물인지를 잘도 찾아냈다. 사사건건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옹호하는가 하면 러시아 황제를 비판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프러시아 정부를 비판하고, 반종교적인 언사를 일삼는 자를 묵인할 정도로 너그러운 정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칼 마르크스는 재빨리 파리로 도망쳤다. 이 때부터 고달픈 망명생활이 시작되었다. 1843 년 6 월 그와 결혼한 옌니에게도 고생길이 열렸다. 파리는 예나 지금이나 망명자의 소굴이다. 마르크스는 같은 처지의 독일인 망명자들과 어울려 이런저런 간행물을 부지런히 만들어 독일로 반입하려 했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 불순분자들이 국외에서 벌이는 활동에까지 감시의 눈길을 뻗치고 있던 프러시아 정부는 이 위험한 인물을 더 멀리 쫓아버리고 싶었다. 프로이센 정부의 항의를 받은 프랑스 내무장관 기조는 이름난 보수주의자였는데 즉각 추방명령을 내렸다. 마르크스는 24 시간 내에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 즉시 벨기에 브뤼셀로 거처를 옮겼다. 1845 년의 일이다. 이 때 옌니 마르크스 부인은 갓난 큰 딸 옌니를 안고 그를 따라가야 했다. 마르크스는 이 야멸찬 추방령을 내린 기조에게 <공산당선언>의 첫머리에 그 이름이 오르는 '영광'을 선사했다. 파리에서 보낸 시간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그 곳에서 "그의 이름이 영원히 마르크스와 나란히 기록될" 프르드리히 엥겔스와 '도원결의'에 버금 가는 우정을 맺었다. 그는 또한 유럽 각지에서 온 수많은 혁명가들과 사상가들을 사귀었다. 프랑스 노동자단체와도 활발히 접촉하고 공산주의적 비밀결사와도 교류했다. <공산당선언>과 <자본론>의 토대가 된 헤겔철학과 고전학파 경제학과 유럽 역사를 깊이 공부하면서 많은 초고를 쓴 것도 파리 망명생활의 성과였다. 엥겔스와 함께 청년헤겔학파의 관념론을 비판하고 변증법적 유물론의 입장에서 근대 철학사를 분석한 <신성가족>을 집필한 것도 파리에서였다. 브뤼셀로 옮겨 온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함께 본격적인 연구와 집필작업에 들어갔다. 가장 발전한 자본주의를 연구하고 필요한 경제학 서적을 구입하기 위해 런던과 맨체스터를 여행하기도 했다. 그들은 사적 유물론을 체계적으로 해설한 <독일이데올로기>와 사회발전에서 실천이 지니는 중요성을 해명한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를 썼다. 마르크스는 또한 부르주아지로부터 그렇게 큰 원성을 샀던 혁명가 프루동---그는 "모든 재산은 도둑질한 것이다."고 했다.---의 <빈곤의 철학>을 비판하기 위해 <철학의


빈곤>을 저술했다. 이 책은 마르크스가 쓴 최초의 정치경제학 저서이다. 마르크스가 브뤼셀에서 집필에 몰두하는 동안 19 세기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배는 반란과 폭동과 혁명을 예고하는 불길한 먹구름으로 뒤덮이고 있었다. 1847 년의 경제공황은 도처에서 노동자들의 파업과 폭동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1847 년 6 월 런던에서는 최초의 국제공산주의단체인 '공산주의자동맹'이 결성되었다. 마르크스는 이 동맹의 사상적 지도자가 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동맹을 위해 <공산당선언>을 집필했다. 그리고 이 선언이 막 출판되었을 때 1848 년 혁명의 폭풍우가 유럽의 자본주의를 강타했다. 독일은 다음 해인 1849 년까지 혁명적 사태에 휩싸였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가난과 고통에 대한 절망적인 증오감과 좀더 나은 세상에 대한 강렬하지만 막연한 희망 밖에 가지지 못하였다. 그들은 아직 사회를 장악하는데 필요한 조직과 사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지주와 부르주아지가 손잡은 기존의 권력은 여전히 막강했다. 마르크스는 독일로 돌아가 <신라인신문>을 창간하여 예의 날카로운 필봉을 휘둘렀다. 그는 낡은 지배권력과 자본주의의 모순을 통렬히 공격하는 동시에 파멸로 끝날 수 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무분별하고 모험주의적인 행동에 대해서도 강력한 경고를 보냈다. 혁명은 남김없이 분쇄되었다. 1849 년 여름 마르크스는 런던으로 건너갔다. 혁명이 분쇄된 유럽은 그 과격한 혁명에 대한 반동의 물결에 휩싸였다. 이 반동의 물결은 유럽 대륙의 모든 곳에서 마르크스가 발붙일 곳을 없애 버렸다. 처음 몇 년간의 런던 생활은 그와 가족에게 최대의 시련을 안겨 주었다. 한없이 마음씨 고운 옌니가 최선을 다해 그를 도왔지만 그들은 런던 최악의 빈민굴인 소호지구의 좁고 어두운 집에서 여섯 자녀 중 셋을 잃는 슬픔을 맛보아야 했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지원을 호소했지만 때마침 형편이 여의치 못했던 탓으로 엥겔스조차 그를 충분히 도울 수 없었다. 옌니 부인과 큰딸 옌니도 병에 걸렸고 마르크스 자신도 지독한 종기를 앓았지만 돈이 없어 의사를 부를 수 없었다. 신문을 살 돈도 없었고 어떨 때는 우표 값이 없어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지 못한 적도 있었다. 빵과 감자만 먹고 살다시피 하면서 근근히 연명한 마르크스는 그 와중에도 <자본론> 집필에 열정을 쏟았다. 이같은 생활은 약 7 년간 계속되었는데 1852 년 마르크스의 집에 잠입한 프러시아 경찰의 정보원은 그의 가정생활에 대해 다음과 같은 귀중한 보고서를 남겼다. 아버지로서 그리고 남편으로서 마르크스는 그 격렬하고 조급한 성격과 달리 대단 히 다정하고 온화한 사람이다. 마르크스가 사는 곳은 런던에서도 제일 지독한 빈민 가여서 생활비가 가장 적게 드는 곳이다. 그의 집은 방이 둘인데 하나는 한길에 접 한 거실이고 침실은 안쪽에 있다. 방안을 둘러봐도 반듯한 가구는 하나도 없다. 하 나같이 삐걱거리거나 낡고 헐어빠진 것들이고, 게다가 도처에 먼지가 반 인치나 쌓 여 있고 가재도구도 아무데나 굴러다닌다. 거실 가운데 고풍스러운 대형 테이블에는 싸구려 테이블보가 덮여 있고 그 위에는 원고와 서적, 신문 따위와 아이들 장난감, 헝겊 조각이 든 부인의 반짇고리에 이 빠 진 찻잔 몇 개와 포크, 나이프, 그리고 램프와 잉크병, 유리컵, 네덜란드 도기 파이 프와 담뱃재---한마디로 온갖 것이 뒤죽박죽으로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다. 골동품 가게나 고물상에 공짜로 갖다 줘도 달갑잖아 할 잡동사니들이다. 마르크스 의 방에 들어서면 지독한 담배 연기와 냄새 때문에 눈이 따가워 한동안은 동굴 속 을 손으로 더듬는 기분이고, 눈이 익숙해져야 물건 모양이 안개 속에서처럼 떠오르 는 느낌이 든다. 온통 더러운 데다 먼지가 앉아서 무심코 앉기가 위험 천만할 지경 이다. 1856 년 고향 트리에르에서 온 약간의 유산 덕분에 마르크스 일가는 지긋지긋한 빈민굴 생활에서 해방되었다. 그 기간 동안 마르크스의 중요한 수입원은 미국 부르주아지와 공화당의 대변자인 <뉴욕 트리뷴>이었다. 그는 이 신문의 통신원이었는데 1857 년 불황 당시에도 마르크스만은 해고되지 않았다. <뉴욕 트리뷴> 편집장이었던 찰스 다나의 사람 보는 분이 좋았던 덕분이다. 어쨌든 1856 년 이후 마르크스 일가는 당시의 기준으로 보아 제법 만족할 만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그야말로 연구와 혁명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1848~1849 년 혁명의 과정과 결과를 다룬 <프랑스의 계급투쟁>과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 일> 등의 저서와 많은 팜플렛을 썼지만 마르크스의 주된 일은 <자본론> 집필이었다. 이 책은 1867 년에 출판되었다. 마르크스는 1864 년 런던에서 조직된 국제공산주의자단체인 '제 1 인터내셔널'의 서기장으로 선출되는 등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단결"을 위해서도 동분서주 했다.


자본은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태어난다.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로 이루어진 그의 세계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아보자.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마르크스의 세계는 "순수한 경쟁적 자본주의"이다. 그 곳에는 오직 경쟁과 이기심과 현금지불과 자유거래만이 존재하며 생산의 전체를 계획하거나 조정하는 정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의 세계에서 스미드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은 다른 이름을 얻는다. 그것은 '생산의 무정부성'이다. 그리고 이 체제는 그 내부에 포함된 대립과 투쟁의 계기를 통해 다른 것으로 발전하게 될 운명에 있다. 일찍이 리카도는 자본이 축적될수록 임금이 상승하여 이윤율이 하락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그들을 구제했다. 자본가들은 더욱새로운 노동절약적 기계를 도입함으로써 임금 상승에 대처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더 심각한 사태를 일으킨다. 모든 자본가들이 똑같이 행동하기 때문에 총산출에 대한 노동의 비율, 즉 잉여가치가 줄어든다. 마르크스의 세계에서 기계나 원료는 과거 노동의 산물이어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기계가 사람을 대신함에 따라 생산은 급격히 늘어나지만 노동자의 소비능력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맬더스가 걱정했던 과잉생산공황이 자본주의를 덮친다. 상품가격은 하락하고 기업은 파산하며 거리는 실업자의 물결에 뒤엎인다. 그러나 공황이 모든 사람에게 해로운 것은 아니다. 좀 더 강한 자본가들은 쓰러진 기업을 헐값으로 인수하여 더 큰 기업으로 성장한다. 이러한 과정이 끝없이 계속되면 결국 사회의 부는 소수의 독점자본가에게 집중된다. 역시 자본가는 불우하다. <자본론>이 묘사한 자본주의 세계에 내포된 대립투쟁의 계기는 다양하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는 서로 대립하면서 통일되어 있다.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역시 마찬가지이다. 공장제 대공업의 시대에는 어떤 상품도 한 사람의 노동자에 의해 만들어질 수 없다. 원료 재배로부터 완성품의 포장에 이르기까지 평범한 옷 한 벌조차도 수없이 많은 노동자와 다채로운 산업분야를 거쳐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모든 생산물은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한 개인에게 귀속된다. 사회의 기초인 경제체제와 그 위에 선 건축물인 민주주의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당시로서는 아직 보통선거가 확립되지 않았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대중의 열화 같은 요구에 의해 그리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원리적으로 평등한 체제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라는 사회의 토대는 소수의 손에 모든 생산수단이 독점되는 체제이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지면서 마침내 자본주의의 파멸이 찾아든다. 이 이론은 <자본론>에 상세히 서술되어 있지만, 그 대체적인 과정과 결론은 <공산당선언>에서 ㅣ이미 제시되었다. 이 전화과정의 모든 이익을 독점하고 횡령한 대자본가들의 수가 지속적으로 감소 함에 따라 궁핍, 압제, 노예화, 타락과 착취도 증가한다. 그러나 이와 함께 수적으로 반드시 증가하고 자본주의 생산과정의 메커니즘 그 자체에 의해 훈련받고 단합되고 조직된 계급인 노동계급의 반항 또한 증가한다. 자본의 독점은 이 생산양식에 대한 하나의 족쇄로 전화한다. 생산수단의 집중과 노동의 사회화는 그것이 자본주의라는 외피와는 양립할 수 없는 점에 다다른다. 이 외피는 산산이 부서지고 자본주의적 사유재산의 조종이 울리며 약탈자들이 약탈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다양한 발전단계를 거친다...처음에는 개별 노동자들이 싸움을 시작했으나 다음에는 한 공장의 노동자들이, 그 다음에는 한 직종 한 지역의 직공 들이 자신들을 직접 착취하는 개별 부르주아를 상대로 싸우게 된다...그러나 산업이 발전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숫자가 늘어날 뿐만 아니라 더욱 큰 무리로 집중되어 힘을 키우고 그 힘을 자각하게 된다...부르주아 사이의 경쟁이 격화되고 상업공황이 일어나면서 노동자의 임금은 날이 갈수록 동요하게 된다. 기계가 급속히 도입되면 서 노동자의 생활은 갈수록 불안정해진다...그 결과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에 반대하 는 결사체(노동조합)를 결성하기 시작하며...싸움은 폭동으로 터진다. 부르주아 계급의 존재와 지배를 위한 본질적 조건은 자본의 형성과 증대이며, 자 본을 위한 조건은 임금노동이다. 임금노동은 오직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에 의해서


가능하다. 부르주아지가 촉진하는 산업의 진보는 본의 아니게 경쟁으로 인한 노동 자들의 고립 대신 단결로 인한 혁명적 결합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현대산업의 발전 은 부르주아지가 생산하고 전유하는 바로 그 토대를 발밑에서 무너뜨리는 셈이다. 결국 부르주아지가 자기 자신의 무덤을 파는 자를 생산하는 것이다. 부르주아지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둘 다 모두 불가피한 것이다. 과학과 이데올로기는 분명 다르지만 둘 사이의 경계선이 그리 뚜렷한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냉정한 눈으로 자본주의를 관찰했다. 그러나 그에게 역사란 연구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인간이 짊어지고 가야만 하는 삶의 일부이기도 했다. 바스띠악가 사회주의를 연금술로 폄하하고 스스로 과학적 경제학을 세웠노라고 자랑하였지만 그는 맬더스와 마찬가지의 이유로 인해 자산계급의 편으로 치우쳤다. 그러나 바스띠아와는 달리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 대한 자신의 도덕적 가치판단과 그로부터 비롯된 증오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의 '과학'이 중대한 결함을 가지게 된 것은 결코 아니다. 마르크스의 '과학'에 대한 가장 중대한 이론적 공격은 노동가치론을 겨냥한 것이다. <자본론>의 세계는 추상적인 경제 모델이며, 마르크스는 모든 상품의 가치를 생산에 투하된 노동량으로 계산했다. 그런데 현실을 지배하는 것은 '가치'가 아니라 '가격'이다. 마르크스는 '가격의 세계'가 '가치의 세계'를 정확히 반영하는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 그리 어렵지는 않지만 복잡한 수학을 동원했다. 이 문제는 아담 스미드와 리카도를 비롯하여 노동가치론을 주장한 모든 사람을 괴롭힌 문제이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약간의 실수를 했다. 그러나 이 실수는 치명적인 것은 아니다. 후일 빼어난 경제학자와 수학자들 사이의 긴 논쟁을 통해 약간의 수정만 가하면 마르크스의 방정식은 유효한 것으로 밝혀졌다. 마르크스의 경제학에 대한 또 하나의 공격은 그가 과학으로서 경제학이 다루어서는 안되는 '규범'의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경제학자는 어떤 이념의 목표가 아니라 존재하고 있는 현실을 분석하는 것에 자기의 역할을 제한해야 한다. 바로 낯익은 바스띠아의 주장이다. 오늘날 중,고등학교와 대학에서 가르치는 거의 모든 경제학 교과서는 이런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교과서에서는 비슷비슷하면서도 수없이 다양한 그래프와 방정식밖에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런 견해 역시 '규범'을 반영한다. 이런 의미에서 "현존 질서를 변경하는데 반대한다."는 견해를 밝히는 것은 자유지만 "과학이 현존 질서의 변경 여부에 관계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주장은 자신과 남을 동시에 속이는 일이 될 것이다. 마르크스의 주장을 경제결정론을 취급하여 "이미 결정되어 있는데 혁명운동은 무엇 때문에 필요하냐"고 비아냥거리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결정되어 있는 일이라 할지라도 하루라도 그것을 앞당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잘못일 수는 없다. 우리가 앞에서 만났던 '고결한 천재' 존 스튜어트 밀은 마르크스의 증오가 근본적으로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를 가르쳐 준다. 그는 정당한 노동에 의해 취득한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재산법의 취지임을 분명히 하면서, 당시 유럽의 사회체제가 그 취지에 부합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그가 역사가로서 유럽사를 연구한 결과 얻은 견해이다. 이 점에서 밀과 마르크스는 일치한다. "자본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든 땀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태어났다." 고 한 마르크스의 말은 표현이 과격할 뿐 밀의 견해와 아무 차이가 없다. 어떤 사람이든 자본주의적 기업을 세우려면 밑천---최초의 자본이 있어야 한다. 체제로서의 자본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탄생한 시점에서 이미 축적되어 있었던 부의 축적과정을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라 명명했다. 마르크스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로 이 과정을 설명했다. 재능 있고 근면한 사람들은 부지런히 저축해서 자본가가 되었고 게으르고 방탕한 사람들은 노동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농노제도와 신분제도에 의해 유지된 중세 봉건사회의 지배계급인 토지귀족들, 그리고 봉건왕조가 부여한 각종의 특권과 식민지에서 약탈을 통해 재산을 모은 자들이 최초의 자본가계급을 형성했다. 새로운 발명으로 자본가가 된 제임스 와트나 아크라이트는 매우 희귀한 사례일 뿐이다. 자본의 원시적 축적과정을 마르크스는 이렇게 묘사했다. 교회 재산의 강탈, 국영지의 기만적인 양도, 공유지의 약탈, 봉건적인 씨족 재산의 횡령 그리고 무자비한 폭력에 의해 이것들을 근대적 사유재산으로 전환시킨 것이 바 로 본원적 축적의 목가적 방법이었다. 그들은 자본주의적 농업을 위해 경작지를 정 복했으며 토지를 자본의 일부분으로 만들었고 농촌공업에 필요한 '자유로운' 프롤레 타리아트의 공급을 창출했다...아메리카에서 금,은의 발견, 광산에서 토착 원주민의


말살과 노예화와 매몰, 동인도에 대한 정복과 약탈의 시작, 그리고 아프리카를 무대 로 한 흑인들에 대한 상업적 착취 등은 자본주의 생산의 시대에 대한 장미빛 새벽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최초의 재산 분배가 이런 과정을 거친 것이었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었다. 더욱이 그 체제는 갈수록 더 큰 부와 빈곤을 동시에 생산해 내는 체제였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극소수의 자본가가 대다수의 빈곤한 노동자를 지배할 수 있는 원인을 따져 보았다. 그래서 <자본론>의 세계에 국가가 끼어든다.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의 견해는 고전학파의 생각과 전혀 달랐다. 아담 스미드는 국부의 증진을 위해 자유시장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않는 '작은 정부', '값싼 정부'를 권장했다. 그리고 '공정하게' 사회 질서를 유지해야 할 정부가 자산계급 쪽으로 편향되는 현상을 걱정스럽게 지켜 보았다. 그러나 마르크스에게 국가란 "부르주아지의 일상사를 처리하는 위원회"에 불과했다. 그것은 '공정한 중재자'도 아니고 '일반의지의 결합체'도 아니며, 다만 소수의 지배계급의 다수의 인민을 지배하는 도구일 뿐이었다. 옛날 그것은 봉건적 토지귀족의 전유물이었지만 이제는 새로운 지배자인 부르주아지의 전유물이 되었다. 따라서 국가권력의 실체는 인민의 반항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한 경찰과 군대의 폭력이었다. 빈곤에 대한 노동자들의 절망적인 저항이 가차없이 분쇄된 당대의 상황과 그 자신에게 가해진 정치적 박해를 고려할 때 이러한 생각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다. 마르크스가 노동자의 비참한 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이런저런 잡다한 개량책 대신 하나의 단순하고 결정적인 수단---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선택한 것은 당시의 시대 상황과 '도구론적 국가관'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이러한 혁명을 보지 못했으며, 최초의 혁명 역시 그가 별로 눈여겨 보지 않았던 러시아에서 일어났다. 최초의 노동자혁명 파리 코뮌 칼 마르크스는 <자본론> 제 1 권을 출판한 후 16 년을 더 살았다. 그러나 만년의 삶은 결코 행복했다고 볼 수 없다. 우선 그는 단 하나의 사회주의혁명도 보지 못했다. 1871 년 수립된 세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정권---파리 코뮌은 단 72 일 만에 붕괴되고 말았다. 그가 본 이 유일한 혁명의 승리는 매우 국지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지나지 않았다. 마르크스의 '과학적 예언'과 간절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아직 유럽의 프롤레타리아트는 권력을 장악할 만한 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파리 코뮌은 마르크스의 '과학'에 내려질 쓰디쓴 시련을 예고했다. 이 혁명의 배경은 전쟁이다.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로이센은 1867 년 오스트리아 제국을 격파하고 북독일연맹을 결성하여 '통일독일'이라는 오랜 꿈에 한걸음 다가섰다. 바야흐로 독일 국민은 프리드리히 리스트가 말한 '정상적 국민'이 되는 중이었다. 그리고 프로이센이 리스트의 조국인 뷔르템베르크 왕국을 포함한 남서독일 4 개국을 향해 손을 뻗치자 나폴레옹 3 세의 프랑스와 프로이센 사이의 충돌은 불가피한 일로 다가왔다. 아무 대책도 없이 승리를 호언장담하며 선전포고를한 나폴레옹 3 세는 개전 두 달만에 프러시아군에 대패하고 말았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조국이 없다"고 단언했지만 양국의 프롤레타리아트는 국적을 초월하여 단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제각기 자기의 조국을 위해 전선으로 달려가 버렸다. 마르크스가 서기장으로 있던 국제노동자협회, 즉 제 1 인터내셔널은 속수무책으로 이것을 바라보아야 했다. 똑같은 사태는 제 1 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 년에도 반복되었다. 더욱 강력한 힘을 자랑하던 제 2 인터내셔널 역시 세계대전이 몰고 온 민족주의의 폭풍에 날아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패전은 정부의 위신을 추락시켰다. 파리에서 폭동이 일어나 나폴레옹의 제정을 무너뜨렸다. 부르주아지가 주도하는 임시정부가 권력을 접수했다. 독일군은 파리로 진격했다. 파리의 노동자와 수공업자들은 국민군을 편성하여 독일군에 맞섰다. 그런데 프랑스군은 바젠 원수가 17 만의 병력을 이끌고 독일군에게 항복해 버렸다. 포위당한 파리에는 추위와 굶주림이 밀어닥쳤다. 사람들은 개와 고양이까지 잡아 먹었다. 파리의 아름다운 거리와 유서 깊은 건물들은 독일군의 포격에 부서졌다. 임시정부와 부르주아지가 주도하는 국민의회는 독일과 휴전을 추진하면서 위험스런 국민군의 무장해제를 결의했다. 전쟁은 내전과 혁명으로 전환되었다. 이런 식의 사태 전개는 1917 년 러시아와 1940 년대 중국과 동유럽에서 그대로 재현되어 사회주의 권력을 출현시킨 바 있다. 1817 년 3 월 18 일 정부군과 국민군 사이의 내전이 시작되었다. 노동자가 이끄는 국민군은 하루 만에 파리의 모든 관공서를 점령하고 공화국 깃발 대신 적기를 올렸다. 코뮌의회 선거가 실시되어 3 월 26 일


최초의 노동자권력인 코뮌정부가 수립되었다. 낡은 지배권력의 무능과 짓밟힌 민족적 긍지, 한맺힌 가난과 굶주림이 그들로 하여금 혁명을 일으키게 했으며, 그들은 부르주아지가 독일에 항복하거나 탈출해 버린 파리의 권력을 손쉽게 정복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차지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지키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혁명군은 블랑키파니 프루동파니 하는 잡다한 사상적 분파와 노동자, 수공업자, 빈민들이 뒤섞인 잡탕이었고 권력을 운용하는데 필요한 지식과 경험이 없었다. 더욱이 마르세이유, 툴루즈, 리용 등 다른 도시의 봉기는 모두 진압되어 파리의 노동자 권력은 바다 위에 뜬 작은 섬처럼 고립되었다. 부르주아지는 베르사이유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독일과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은 다음 파리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했다. 5 월 21 일부터 1 주일간 벌어진 파리의 시가전은 1848 년의 확대판이었다. 혁명은 분쇄되었다. 3 만 명의 코뮌 전사들이 총살되었다. 4 만 명이 감옥과 식민지의 강제노역장으로 끌려갔다. 거리는 시체로 그득했고 이 예술의 도시는 핏자국으로 얼룩졌다. 칼 마르크스는 이 사태와 아무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지만 '붉은 테러박사'라는 악명을 더욱 크게 떨치게 되었다. 그는 혁명이 완전히 끝났을 때 이미 무너진 상태에 있던 인터내셔널에 마지막 인사를 보냈다. <프랑스의 내전>이란느 저서에서 그는 이렇게 코뮌을 애도했다. 노동자의 파리는 코뮌과 함께 새 사회의 빛나는 선구자로서 영원히 칭송받을 것이 다. 코뮌의 순교자들은 노동계급의 위대한 가슴에 소중히 모셔지고 있다. 역사는 그 절멸자들을 성직자들의 모든 기도로써도 구원받지 못할 저 영원한 형장에 못박아 버 린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끝내 '빛나는 새 사회'의 도래를 볼 수 없었다. 지독한 공부와 만성적인 수면 부족, 엄청나게 마셔대고 피워댄 맥주와 담배 때문에 그는 갖가지 질병에 시달려야 했다. 만성기관지염, 불면증, 늑막염, 후두염, 폐렴 등 마르크스가 앓은 병의 이름은 너무나 많다. 그는 여러 곳에서 휴양을 하고 부인 옌니와 엥겔스의 극진한 간호를 받았지만 1880 년대 들어서는 회복할 수 없을 만큼 건강이 악화되었다. 1881 년 옌니 마르크스가 먼저 장암으로 세상을 떴다. 마르크스도 와병증이었다. 이 때를 작은 딸 엘레아너는 이렇게 회상했다. 어머니는 안방에, 무어인은 작은 옆방에 누워 있었다...나는 그가 일어날 만큼 기력 을 찾아 어머니 방으로 들어간 날 아침의 일을 잊을 수 없다. 그들은 둘 다 다시 젊 어진 것 같았다. 어머니는 사랑스런 처녀 같고 아버지는 함께 인생을 출발하는 열렬 한 청년 같았다. 병고에 시달리는 노인과 영원히 사별하려는 임종에 처한 여인 같지 않았다. '무어인'이란 마르크스의 자녀들이 붙여 준 별명이다. 검은 피부, 깊고 빛나는 눈, 무성한 수염, 허름한 옷차림과 늘상 휘감고 다니는 짙은 담배 연기, 서성거리는 듯한 발걸음, 작은 키와 다부진 몸집, 이런 것이 마르크스의 외모였다. 마르크스는 천재인 동시에 지독한 노력가에다 병적인 완전주의자였다. <자본론> 제 1 권의 저술에 15 년이란 긴 세월이 소요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1883 년 1 월초에 큰 딸 옌니가 병으로 죽었다. 인터내셔널의 주요한 지도자 가운데 하나인 롱게와 결혼하여 다섯 아이를 낳은 옌니는 38 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 그 아버지에게 헤어날 수 없는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두 달 뒤 칼 마르크스는 폐렴으로 사망했다. '붉은 테러박사'라는 악명과 '전세계 노동자의 벗'이라는 영예를 한꺼번에 누렸던 이 천재는 방대한 양의 원고 뭉치를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났다. 그 원고 뭉치를 이해하고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프리드리히 엥겔스뿐이었다. 그는 1885 년과 1894 년에 이것을 다듬어 <자본론> 제 2 권과 제 3 권을 출판했다. "마르크스의 그림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탁월한 학자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여러 가지 면에서 마르크스와는 다른 유형의 인간이었다. 그는 1829 년 프로이센 왕국 라인주 바르멘에서 자본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큰 키와 잘생긴 얼굴, 인자하고 사람좋은 표정, 검술과 수렵과 고급 포도주에 대한 취미 등 그는 자신이 그토록 경멸했던 '교양있는 부르주아지'의 외모와 생활습관을 지닌 인물이었다. 게다가 유럽의 거의 모든 주요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재능과 깊은 철학적 사유능력에 비추어 그는 19 세기의 가장 뛰어난 천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철학자임에 분명하다. 엥겔스가 1844 년 마르크스와


손잡은 이래 마르크스나 엥겔스가 발표한 거의 모든 저서와 논문과 팜플렛과 선언문은 두 사람의 공통 토론과 수정을 거쳤다. 그들은 또 일생 동안 여러 권의 책이 될 만한 양의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러나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그림자만은 아니었다. 그는 1842 년 아버지가 주주인 맨체스터의 한 회사에서 일하면서 영국 노동자의 생활상태를 관찰하고 연구하여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라는 책을 집필했는데, 이것은 단순히 노동자의 고통을 고발한 책은 아니었다. 여기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그저 고통받는 계급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위한 정치 투쟁을 목표로 하는 하나의 세력이었다. 이런 말을 한 것은 엥겔스가 최초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마르크스와의 공동 저작 이외에도 <반뒤링론>, <가족, 사유재산과 국가의 기원> 등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의 완성에 기여한 숱한 저서와 논문을 남겼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사상에 활기와 넓이를 제공한 사람이다. 만약 그의 헌신적인 학문적, 인간적, 경제적 협력과 지원이 없었다면 칼 마르크스의 사상은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어느 정도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혁명의 가장 무서운 적은 효과적인 개량 자본주의에 대한 칼 마르크스의 '과학적 예언'은 그대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사회주의 혁명은 자본주의가 가장 고도로 발달한 서유럽에서서가 아니라 러시아에서 일어났으며 나중에 동유럽과 중국, 쿠바, 베트남 등 후진 농업국과 제 3 세계로 확산되어 세계의 절반에 붉은 깃발 아래 놓이게 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20 세기의 막바지에 이르러 헤어나기 어려운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다. 레닌이 최초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성공시켰던 소련은 세계지도에서 사라져 버렸다. '인류의 미래'를 짊어진 각국 공산당은 인민의 증오와 불신을 받아 와해되었으며, 그 위에서 그가 그토록 증오했던 사유재산제도가 부활되고 있다. '멸망의 운명'을 선고받았던 자본주의가 오히려 몰락한 사회주의 국가에 경제원조를 제공하고 있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모든 사태가 마르크스의 사상과 경제학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필연적 멸망을 예언했으나 그 다음에 무엇이 올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토마스 모어가 자신의 유토피아를 상세히 묘사한 것과는 달리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세부적인 모습을 설계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운동과 그 지도자들에게 맡겨졌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의 궁극적인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개략적인 전망만을 밝혔을 뿐이다. 공산주의 사회의 높은 단계에서는 개인의 노동분업에 대한 노예적 종속, 정신노동 과 육체노동 사이의 대립 현상이 사라지게 될 것이며, 노동은 단순한 생활수단만이 아니라 삶의 최우선적 요구가 될 것이다. 또한 생산력은 개인의 전면적 발전과 더 불어 증대될 것이고 모든 협동적 부의 원천들이 풍요로이 넘쳐흐를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시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부르주아 법칙의 협소한 지평선이 완전히 사라 지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사회는 그 깃발 위에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문구를 아로새길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마르크스의 사상이 위력을 떨치고 있는 것은 이같은 그의 유토피아적 소망 때문이 아니라 그가 경제학자로서 행한 자본주의 운동법칙에 대한 분석과 결론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마르스크의 예언을 어긋나게 했지만 결코 경제학자 마르크스와의 대결에서 승리한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자신이 설정한 '순순자본주의', 즉 자유경쟁 자본주의가 그 내적 운동법칙 때문에 필연적으로 거대한 독점자본을 출현시키리라고 말했는데 이는 그대로 실현되었다. 1870 년대에 독점자본주의의 출현을 예고한다는 것은 마치 오늘날의 시점에서 향후 50 년 이내에 미국이나 일본의 자본주의가 소기업체제로 갈 것이라고 말하는 것만큼 파격적인 예언이었다.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와 신기술의 부단한 도입, 그로 인한 주기적 공황의 도래 또한 그대로 적중되었다. 그러나 그의 가장 결정적인 예언---자본주의의 필연적 붕괴는 부분적으로만 실현되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마르크스의 사상은 증오에서 비롯된 망상일 뿐인가? 마르크스는 변화를 세계의 본질로 보는 철학자였지만 자기 시대의 역사에 대해서는 그렇게 일관된 입장을 견지하지 못했다. 이것은 아마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인간적 증오심 또는 자본주의의 붕괴에 대한 간절한 소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똑같은 대본에 따라 수없이 공연되는 세익스피어의 희곡은 아니다. 현명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과거의 경험에서 교훈을 배우며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부르주아지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보이지 않는 손'의 축복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가난한 노동자들의 항의와 저항에 진지하게 귀기울이지 않았다. 실업과 공황이 자본주의의 불가피한 유전병이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많은 나라의 정부와 부르주아지들은 마르크스가 정해준 그들의 행동방침을 준수했다. 러시아 짜르체제와 부르주아지들,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와 중국 자본가들, 나찌 정권과 그에 협력한 동유럽의 자본가들은 그 벌로 권력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생명과 재산을 잃었다. 독점과 카르텔을 공공연히 장려하고 노동조합운동을 탄압한 19 세기말 20 세기초 서유럽 국가들도 체제를 위험스럽게 만든 대파업과 혁명적 정세를 맞아야 했다. 그토록 값비싼 수업료를 지불한 연후에야 부르주아지와 그들의 정치권력은 정신을 차리고,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효과있는 방법으로 자본주의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복지국가'라고 자랑하는 현대의 자본주의는 아담 스미드와 리카도, 그리고 칼 마르크스가 설정했던 경쟁자본주의의 순수한 모델과는 현저하게 다른 모습으로 변하였다. 우리는 케인즈에 관한 장에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자기 수정을 이룩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 멸망에 대한 예언을 빗나가게 한 책임은 마르크스 자신에게도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에서 혁명의 승리를 위해 "경제적으로 불충분하고 무리한 듯 보이지만...생산양식을 전면적으로 혁명화하는 수단으로서 불가피한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은 요구를 열거했다. 1. 토지사유를 폐지하고 모든 지대를 공공목적에 사용한다. 2. 소득에 대해 높은 누진세를 실시한다. 3. 모든 상속권을 폐지한다. 4. 모든 망명자와 반역자의 재산을 몰수한다. 5. 국가자본과 배타적 독점을 가진 국립은행을 통해 신용을 국가의 수중에 집중시 킨다. 6. 통신과 운송수단을 국가의 수중에 집중시킨다. 7. 국가 소유의 공장과 생산도구를 증대시킨다. 8. 누구나 동등한 노동의 의무를 지닌다. 특히 농업을 위해 산업군을 편성한다. 9. 농업과 제조업을 결합시킨다. 인구를 전국적으로 좀 더 균등하게 배분함으로써 도시와 농촌 사이의 차별을 점차 폐지한다. 10. 공립학교에서는 모든 어린이를 위해 무상교육을 실시한다. 현존하는 어린이의 공 장노동을 폐지한다. 교육과 산업과 생산을 결합시킨다. 물론 이것은 공산주의에 대한 대중의 호감과 지지를 높이기 위해 내건 요구였다. 그러나 혁명의 가장 무서운 적은 언제나 지배계급의 무자비한 폭력이라기보다는 대중의 가슴 속에서 반란의 싹을 제거하는 효과 있는 개량인 법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요구를 "가장 선진적인 나라들에서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가 있다." 고 권고했으며 실제로 선진 자본주의 나라의 노동계급은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 싸웠고 수없이 많은 희생을 치렀다. 자본주의의 자기 수정은 부르주아지의 각성과 시혜가 아니라 노동계급의 투쟁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오늘날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 모든 요구 가운데 토지사유의 폐지와 은 행 업무의 국가독점, 그리고 인구의 분산을 제외한 나머지 사항들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상당 수준 실현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가 사회주의혁명을 가져온 것은 결코 아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이 원하지 않은 결과를 얻었다. 이런 정책의 실현을 전적으로 거부한 나라에서만 혁명이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칼 마르크스의 사상은 19 세기 유럽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오늘날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는 "잃을 것이라고는 쇠사슬밖에 없는" 절대빈곤의 나락에 빠져 있지 않다. 지난 한 세기의 경제, 사회적 변화는 마르크스의 사상과 이론, 그가 자신의 유토피아를 추구한 방법을 무비판적으로 적용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한 세기를 뛰어넘어서까지 인류 문명의 귀중한 자산이 되고 있는 것은 그가 추구한 가치이지 그가 선택했던 방법이 아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자기 수정과 그간의 사회, 경제적 변화를 이유로 그가 추구한 이념적 가치까지도 부정하려는 모든 시도 역시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경제적 평등에 의해 뒷받침되는 자유, 소외되지 않는 노동, 정당한 근로에 의한 소득,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는 모든 불합리한 관습과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해방, 개인의 자유롭고 전면적인 발전 등 그가 옹호한 "영원한 진리"는 아무리 먼 미래의 이상이라 할지라도 인류 문명이 지향해야 할 목표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7. '보이지 않는 손'의 신성화 ('풍요한 세계'의 신고전파 경제학자들) '영원한 번영'을 노래한 사람들 칼 마르크스는 직접 생산에 종사하는 근로 대중을 빈곤과 중노동의 나락에 빠뜨린 19 세기 유럽의 자본주의를 경멸하고 저주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가난한 노동자의 세계' 뿐만 아니라 풍요롭고 안락한 '유산계급의 세계'도 창조했다. 그 시대에 이 '풍요한 세계'의 일원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다. 맬더스의 말처럼 자연의 여신은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잔칫상을 차려 줄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출생이라는 거대한 제비뽑기"에서 큰 행운을 잡거나, 그 자신이 '재능과 근면'의 대가로 한몫을 잡은 소수의 사람들만 풍성한 대향연에 초대받았다. 그런데 이 향연은 '초대받지 않은 무뢰한들' 때문에 난장판이 될 위험에 처했다. 그들은 '가난한 세계'에서 온 노동자들이다. 이들 '가난한 세계의 무뢰한들'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퍼뜨린 위험한 질병, 즉 "매혹적이지만 유독한 향기를 지닌 유토피아의 환상"에 감염되어 있었다. 게다가 칼 마르크스는 그 풍성한 잔칫상이 사실은 자연의 여신이 내린 하사품이 아니라 가난한 세계로부터 착취해 간 부로 차린 것이라고 가르쳤다. 심지어 이 향연에 초대받은 사람들 중에까지 그 가르침에 공감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축을 뒤흔든 1848 년의 혁명을 겪은 '풍요한 세계'는 한층 단호한 자세로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나섰다. '풍요한 세계'는 우선 경찰과 군대라는 물리적인 힘을 동원하여 침입지들을 격퇴시켰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유독한 유토피아의 환상'이 더 이상 세계를 감염시키지 못하게 하는 근본적인 조치가 필요했다. 사상적, 정신적인 면에서 현존 질서를 수호하려는 '풍요한 세계'의 노력은 과학의 모든 영역에서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우리는 이번 장에서 경제사상 또는 경제이론의 영역에서 '풍요한 세계'를 옹호하기 위해 가장 많이 노력했고, 또 그만한 성공과 명예를 누린 사람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러나 아쉽게도 그들의 삶에는 우리에게 벅찬 감동을 줄만한 극적인 요소가 별로 없다. 앞에서 만난 경제학자들은 무척이나 다양한 삶을 보여준 바 있다. 그들 가운데는 평생을 학문 연구에 몰두한 사람도 있지만 목사, 주식 브로커, 자선사업가, 괴팍스런 몽상가, 심지어는 열혈 우국지사와 과격한 혁명가도 있었다. 그러나 19 세기 중반 이후 '풍요한 세계'로부터 좋은 대접과 칭송을 받은 경제학자들은 대부분 대학교수이다. 대학제도 그 자체가 '풍요한 세계'의 산물인 만큼 그들은 그 곳에서 학문의 즐거움과 충분한 수입을 한꺼번에 얻을 수 있었다. 지금 만날 경제학자들을 우리는 오늘날 '신고전파'라 한다. 그들은 철학적인 면에서 모두 제레미 벤담의 추종자이며, 이론적인 면에서는 세이, 시니어, 그리고 바스띠아의 후예이다. 그들은 새로운 사상을 창안한 철학의 거성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담 스미드의 사상을 일부 계승하여 이론적으로 완성시켰다. 그들은 칼 마르크스와는 정반대의 위치에 서서 자본주의의 정반대 측면을 관찰했으며, 그 결과 19 세기 자본주의가 창조한 '풍요한 세계'에 '필연적 파멸'이라는 불길한 예언 대신 '영원한 번영'이라는 감미로운 축복을 선사했다. 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인류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난 일시적이고 불합리한 질서라고 생각했지만,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에게는 그것이 인간의 본성에 부합되는 자연스럽고 영원한 질서로 보였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자본가계급이 노동자계급을 착취함으로써 부와 빈곤을 동시에 생산해내는" 부도덕한 질서라고 단죄했지만, 그들은 자본주의를 "모든 사람이 자신이 생산한 만큼 분배받는" 정당한 질서라고 옹호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 존재하는 인간집단 사이의 물질적 이해 대립을 중시하고 모든 사회 현상을 그 대립 위에서 설명하려 했지만 이들은 사회적 계급의 존재 근거 그 자체를 부정했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주기적인 공황과 대규모적 실업이 자본주의의 선천적 질병이라고 진단했지만,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그것을 단지 우연하고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자본주의의 미래에 필연적 파멸을 선고하고 프롤레타리아혁명과 사유재산의 폐지라는 대수술을 주장한 마르크스와 딴판으로, 이들이 자본주의의 미래에 '영원한 번영'이라는 축복을 내리고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동포애와 협력의 증진이라는 달콤한 처방을 내린 것은 이와 같은 견해 차이 때문이었다. 마르크스와 신고전학파는 똑같이 스미드와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사상에서 출발했지만 거의 일점일획의 공통점도 없는 결론에 도달했다.---가난한 노동자의 세계와 풍요한 유산계급의 세계---를 반영한 것이었지만 또한 두 세계의 대립을 더욱 격화시키는 사상적 무기로 등장했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그의 제자들은 '풍요한 세계'에서 과학자가 아닌 '종교적 몽상가' 또는 '증오와 파괴의 선동자'로 낙인찍혀 마녀사냥을 방불케 하는 박해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그 반대편의 세계로부터 '가증스러운 유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앞잡이'라는 불명옐르 선고받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에게 '종교적 숭배'와 '십자가 처형'이 합당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에게도 일방적인 칭송이나 비난은 합당치 않다. 그들의 사상과 이론 역시 어떤 면에서는 진실을 반영하고 있지만, 동시에 불완전하다. 그들은 상품의 가치를 노동량이라는 객관적인 실체에 두고 부의 원천을 실제적 생산과정 속에서 찾아내려 한 마르크스와는 달리 상품의 가치를 인간의 심리적 만족감이라는 주관적 효용에 두고 부의 원천을 자유거래라는 교환과정 속에서 발견해내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학자들 사이의 단순한 논쟁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19 세기 중반 이후 세계의 곳곳에서 벌어진 내란과 혁명, 전쟁과 대살육의 원인은 아니지만 그러한 사태를 부추기고 그 과정에서 일어난 끔찍한 참상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한계혁명---미분학이 경제학을 점령하다 칼 마르크스는 유물변증법이라는 철학적 기초 위에 '과학적 사회주의'를 세웠다. 그러나 묘하게도 사회주의의 사상적 기원은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에 대한 '관념적 몽상'이었다. 그런데 재미난 아이러니는 또 있다. '효용'이라는 인간의 주관적 만족에서 가치의 본질을 찾아낸 신고전파의 관념적 이론이 인간의 신경세포의 작용이라는 물질적 근거 위에서 수립된 것이다. 과학자 헬름홀쯔가 1842 년 신경세포를 발견한 이후 생리학자들은 외부의 자극이 신경섬유를 통해 인간의 두뇌로 전달되는 경로를 밝혀냈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의 결과는 사람들의 경험적 지식과 일치했다. 알다시피 인간이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자극에서 느끼는 고통이나 쾌락의 크기는 그 자극의 절대적인 크기에만 좌우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든 배고픈 상태에서 밥을 먹을 때 첫술의 밥은 배가 어느 정도 차고난 다음의 밥 한 숟갈보다 훨씬 맛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지"라는 우리 속담도 이런 사실을 반영한다. 고통이든 쾌락이든 객관적으로 똑같은 외부의 자극이 계속해서 가해지면 사람은 나중의 자극에 대해서 훨씬 둔감해진다. 고등학교 수준의 생물학에서 '한계자극 체감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다시 말해 사람에게 객관적으로 동일한 자극을 동일한 강도로 반복해서 가할 때, 마지막 자극에서 느끼는 쾌락이나 고통의 크기, 즉 '한계자극'이 체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리학의 발견은 즉각적으로 경제학에 차용되었다. 가장 발빠르게 이것을 차용한 인물은 독일 사람 고쎈(H.H. Gossen)이다. 그는 1854 년 "인간의 교환거래법과 인간 행위의 규칙"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는데 선지자는 언제나 고독한 운명을 타고나는 법이어서 별로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것은 극히 평범하지만 중요한 발견이어서 머지 않아 그는 합당한 명예를 얻게 된다. 그러면 고쎈이 찾아낸 '욕망과 만족의 법칙' 또는 '쾌락의 법칙'을 일별해 보기로 하자. 사람들이 재화를---물론 여기에는 물질적 재화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쾌락을 주는 모든 무형의 서비스도 포함된다.---소비하는 목적은 심리적 만족을 얻는 것이다. 그 심리적 만족의 이름은 '효용'(Utility)이다. 그가 만약 하나의 재화를 여러 단위 소비한다면 단위마다 추가적인 효용을 얻는다. 이 때 마지막으로 소비하는 한 단위의 재화에서 얻는 추가적인 효용을 '한계효용'(Marginal Utility)이라고 한다. 한계효용은 소비량이 많아질수록 감소한다. 이것이 바로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 또는 '고쎈의 제 1 법칙'이다. 제 1 법칙은 또한 제 2 법칙을 낳는다. 사람은 누구나 일정한 화폐 소득을 얻고 있으며 그것으로 여러 재화를 구입하여 소비한다. 여기서는 재화가 밥과 우유 두 가지뿐이라고 가정하자. 그리고 어떤 사람의 소득이 10 원이고 두 재화의 단위당 가격은 각각 1 원이라고 하자. 이 사람은 10 원의 화폐 소득으로 최대의 쾌락 또는 효용을 얻으려고 한다. 그는 우선 밥 한 단위를 산다. 그리고 또 밥을 산다. 이렇게 하면 밥의 한계효용은 점차 감소한다. 만약 다섯 단위째 밥의 한계효용이 첫 단위 우유의 한계효용보다 작아진다면 그는 이제 밥 대신 우유 한 단위를 소비할 것이다. 그러나 세 단위째 우유의 한계효용이 다섯 단위째 밥의 한계효용보다 작아지면 그는 다시 밥을 산다. 이런 식으로 할 때 그가 10 원의 화폐소득으로 최대의 효용을 얻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밥과 우유의 한계효용이 일치하는 점에서, 예컨대 7 단위의 밥과 3 단위의 우유를 소비하는 것이다. 이 예에서 그가 밥이 아니라 우유부터 소비하거나 재화가 둘이 아니라 그 이상이라도 이 법칙이 성립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일정한 양의 화폐로 구입할 수 있`는 모든 재화의 한계효용이 균등할 때 소비자는 제한된 양의 화폐로 최대의 효용을 구입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계효용 균등의 법칙' 또는 '고쎈의 제 2 법칙'이다. 고쎈은 '한계효용'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이 개념이 의미하는 내용을 정확하게 제시했다. 그리고 이 법칙의 발견과 더불어 진정한 혁명을 가장 두려워하고 혐오하는 사람들일수록 쌍수를 들어서 환영한 이상스런 혁명이 시작되었다. 신고전파 경제학의 '한계주의혁명'이다. 한계주의혁명은 스미드


이래의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이룩한 세계관에 혁명을 일으켰다. 특히 이 혁명은 고전파 경제학에 내포되어 있던 '노동가치론'적 요소를 완전하게 거세했다. 이 혁명은 자본가와 노동자와 지주라는 사회의 3 대 계급 사이의 울타리를 붕괴시켰고 부자와 가난뱅이, 방탕한 자와 근면한 자, 일하는 자와 노는 자, 사기꾼과 정직한 시민, 학자와 지게꾼 사이의 모든 차별을 철폐하고 만인을 평등한 존재로 만들었다. '쾌락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이같은 차별이 존재할 수 없다. 세이나 시니어, 바스띠아는 그러한 세계관에 다가서기는 했지만 거기까지 도달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단지 '총효용'에 눈길을 주었을 뿐 '한계효용'이라는 비밀의 핵심을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계급 사이의 경계선을 없애 버리려 한 그들의 지향은 온전하게 계승되었다. 1871 년 한계주의혁명의 원년이라 할 만하다. 자연과학에서 가끔 일어나는 동시발견 사건이 경제학에서 일어났다. 영국인 제본스 (William Stanly Jevons)와 오스트리아이 칼 멩거(Carl Menger)가 각각 <정치경제학이론>(Theory of Political Economy)과 <국민경제학원리>라는 저서를 출간했는데, 두 사람은 전혀 공동 연구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내용의 한계효용이론을 제시했다. 차이가 있다면 제본스가 다소 세련된 수학적 방법을 사용한데 반해, 미분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멩거는 복잡한 수치표와 장황한 말을 동원했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인생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칼 멩거는 1840 년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비인대학, 프라하대학, 크라쿠프대학 등에서 공부한 후 줄곧 비인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한때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개인교수로서 최고의 영예를 얻었고 만년에는 오스트리아 상원의 종신의원으로 임명되어 80 세가 넘도록 유복한 삶을 누렸다. 그러나 제본스의 인생은 그처럼 화려하지도 유복하지도 않았다. 그는 1835 년 철물상의 아들로 태어나 런던대학에서 수학과 생물학, 화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그가 18 세 되던 해에 그만 부친의 사업이 자유시장의 경쟁과 불황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집안이 파산하자 제본스는 대학을 그만두고 조폐국 직원으로 취직을 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대단한 노력가여서 호주까지 나가서 근무하는 등 5 년간의 직장생활에서 최대한의 저축을 한 다음 이번에는 경제학 연구에 뛰어들었다. 그는 경제학을 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심할 여지 없이 진정한 경제이론을 발견"했으나 그 이후 10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 이론을 출간했다. 제본스는 후일 자신이 중퇴한 런던대학에서 교수가 되어 돌아왔다. 그러나 경제학자로서 명성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만 해수욕 도중에 익사하고 말았다. 불과 48 세의 젊은 나이였다. 제본스는 한때 수학을 전공한 사람답게 경제학에 수학적 표현을 도입했다. "나는 경제학을 쾌락과 고통의 미적분학으로 취급하려 한다."는 멋진 말을 한 사람도 바로 제본스이다. 경제학에 관심을 가졌다가 교과서가 온통 괴상한 방정식과 골치 아픈 그래프로 가득 찬 것을 보고 정나미가 떨어진 사람들은 제본스를 원망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는 뛰어난 수학자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자신의 견해를 수학적으로 표현하는데 집착했고 또 성공했다. 그러나 거기에 무슨 특별한 장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말한 고쎈의 법칙을 제본스식으로 표현해 보자. 이것은 분명히 간단명료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뿐이다. 예컨대 하나의 재화를 소비함으로써 얻는 총효용(Total Utility)은 소비량(Quantity of Consumption)의 함수이다. 이것은 수학적으로는 TU=f(Q)로 표현된다. 그리고, 이 재화의 한계효용은 이 식의 미분으로 표현된다. 즉 MU=f'(Q)이다. 한계효용 균등의 법칙은 A 와 B 두 재화만 소비한다고 할 때 Mua / Pa = Mub / Pb 로 표현하는데, 이는 화폐 한 단위로 구입할 수 있는 양의 재화 A 와 재화 B 의 한계효용이 같은 상황을 의미한다. 만약 재화가 n 개라면 Mua / Pa = Mub / Pb = Muc / Pc = ... ... Mun / Pn 이다. 초보적인 미적분학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제본스의 방법은 퍽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골치가 아플 수 있다. 수학적 방법이라는 다소 성가신 장막을 걷어 내고 나면 제본스가 묘사한 세계는 결코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제본스는 이전의 경제학자들이 재화를 소비함으로써 얻는 '총효용'과 그 상품의 아주 적은 최종적 증분의 소비에서 얻는 '최종효용도', 즉 한계효용을 구별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조금도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재화의 가치를 효용에서 찾으려 한 맬더스나 시니어의 시도를 계승했다. 그러나 그는 노동가치론을 지지한 리카도나 J. S. 밀에 대해서는 매우 분개했다. 제본스에 의하면 "가치를 대상 속에 있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한 그 사람의 경제학에 대한 견해가 정확해질 희망은 없었다." 그는 '가치'가 지배하는 추상세계의 원리를 규명한 다음 '가격'이 지배하는 현실세계의 원리로 넘어간 리카도나 마르크스와 달리 처음부터 오직 '가격'의 세계만을 인정했다. 그래서 그의 세계에서는, 생산과정은 증발해 버리고 교환, 유통 과정만이 존재한다. 수학적으로 표현되는 제본스의 세계는 아름답다. 여기에는 착취나 계급투쟁이 없으며 모든 사람은


동포이고 형제이다. 인간은 누구나 '쾌락의 법칙'에 따르는 '쾌락 극대화 계산기'이다. 그는 자기의 제한된 소득으로 최대의 쾌락을 얻기 위해 여러 가지 재화의 한계효용을 비교하느라 분주하며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의 주관적 효용에 대해 간섭할 필요가 없다. 행복은 자기 자신에 달려 있을 뿐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빼앗아서 증진되는 것이 아니다. 자유로운 거래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의 효용을 극대화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만인은 서로에게 이익을 주는 형제이다. 여기서는 노동자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노동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화폐의 한계효용---이것은 그 화폐로 구입할 수 있는 재화의 효용으로서 재화의 양에 따라 체감한다---이 노동의 한계비효용, 즉 한계고통---이것은 노동의 양에 따라 체증한다.---과 균등해지는 시점까지 노동한다. 제본스는 분배이론을 개척하지는 못했지만 자본가를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자본을 보유하는 보관인"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노동조합에 대해 자본가는 적대계급이 아니라 "노동자의 진실한 동맹자"임을 강조하고 그들에 대한 배타적 투쟁을 중지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물론 이 낯익은 충고에 일언반구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본스는 노동자들이 가지고 있는 계급대립의 사상에 대해 화를 냈다. 결국 참다운 경제학 체제가 정립되면 저 유능하지만 그릇된 생각을 가진 데이비드 리카도가 경제과학이라는 차를 그릇된 길로---그런데 이 길 위에서 역시 유능하지만 그릇된 생각을 가진 리카도 숭배자 J. S. 밀에 의해 경제과학은 더욱 더 혼란에 빠졌 다.---잘못 몰았다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참된 이론을 한층 잘 파악한 맬더스와 시니 어 같은 경제학자들도 있었다. 여기서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제본스가 굳이 '경제과학'이라는 용어를 애용한 사실이다. 우리는 앞에서 재치있는 바스띠아가 사회주의 향해 퍼부은 조롱을 연상할 수 있다. 바스띠아는 사회주의를 연금술과 동열에 세우고 자신의 경제학을 진정한 과학으로 내세웠다. 과학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풍요한 세계'에 치우치거나 현존하는 질서를 옹호하는 학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증상이다. 제본스와 멩거, 그리고 이어서 다루게 될 많은 경제학자들 역시 예외는 아니다. 특히 칼 멩거는 시종일관 "순수한 과학은 도덕적, 윤리적 가치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한 사회과학의 방법론 논쟁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들은 이러한 주장을 통해 오히려 "어떤 순수한 과학도 윤리적, 도덕적 가치와 무관할 수 없다."는 반대쪽의 견해를 설득력 있게 입증하고 있다. 우선 제본스에 관해서 말하자면 이른바 '태양흑점주기설'이 대표적이 사례이다. 제본스 자신이 보기 드문 노력형의 학자인데다 천문학과 기상학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을 탓할 필요는 없겠지만, 주기적 공황의 원인을 자본주의 사회 내부에서 찾지 않고 주기적인 태양흑점 증가와 그로 인한 흉작 탓으로 돌린 것은 그의 '과학적인 수학적 방법론'에 비추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에 아무런 내적 모순이 없음"을 입증하려는 지나친 이데올로기적 편향의 소산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멩거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지대와 이자가 윤리적으로 정당한가를 둘러싼 해묵은 논쟁을 '가장 이상한 일'이라고 개탄하고 이것은 과학으로서의 경제학과 무관한 논쟁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윤리적 가치에 무관심해야 마땅한 이 '과학자'는 자신의 주저 <국민경제학원리>에서 기대에 어긋나게도 다음과 같이 자본주의에 대한 자기의 윤리적 판단을 분명하게 밝혀 두었는가 하면, 나아가 자기의 과학적 견해가 현존하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이데올로기적 편향성'까지도 숨기지 않는 자기모순을 범했다. 자본이나 토지가 흔히 같은 기간에 힘든 일을 한 노동자의 소득보다 더 높은 소 득을 제공한다는 사실이 인간을 사랑하는 자에게 한탄스러운 일로 여겨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의 원인은 부도덕하지 않다...이용 가능한 사회의 소비 재 가운데서 지금보다 더 많은 몫을 노동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어하는 자들의 선동은...더욱 평등한 분배를 획득하려는 견해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초 위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의심할 바 없이 우리의 사회 질서는 완전히 변혁 되어야 할 것이다. 레옹 왈라스의 '균형 잡힌 세계'


'한계혁명'의 또 하나의 주역은 3 년 뒤에 나타났다. 프랑스인 레옹 왈라스이다. 이 사람은 1874 년 출판된 <순수경제학요강>에서 제본스와 멩거가 제시한 바로 그 이론을 발표했다. 그러나 영국인 제본스에게 선수를 빼앗긴 사실을 뒤늦게 알고 왈라스는 몹시 낙담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를 미워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미움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무려 20 년이나 먼저 그 법칙을 발견한 고쎈의 존재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왈라스가 학계의 최신 정보에 어두웠던 것은 대학에서 정식으로 경제학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1834 년 경제학자인 오귀스트 왈라스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와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는 작가가 되기를 갈망하는 문학 청년이었는데 엉뚱하게 파리의 광산학교에서 공학을 배웠다. 20 대 중반기에는 여러 편의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것도 쉽지 않았고 또 별 성과도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는 평생 경제학만 공부하기로 맹세하고 부친으로부터 개인 교습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경제학을 연구했다. 그러나 당시의 경제학계가 배타적인 기성 학자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독학자는 마땅히 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신문사, 철도국, 은행 등 갖가지 직장을 전전하면서 공부를 계속한 왈라스에게 새로운 기회를 가져다 준 것은 스위스 로잔느에서 열린 조세제도에 관한 국제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만난 스위스 정치가의 도움으로 그는 1870 년 로잔느 법과대학의 특별 초빙교수라는 직책을 얻게 되었다. 학창시절 왈라스의 수학 실력은 그저 평범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수학지식을 경제학에 응용하는 데에 그는 제본스보다 훨씬 큰 재주를 발휘했다. 왈라스는 비록 선두는 빼앗겼지만 그래도 자기의 논문이 제본스의 것보다 훨씬 우수하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그런데 경제학자로서 명성을 안겨준 것은 한계효용이론이라기보다는 '일반균형이론'이라는 그의 분석틀이었다. 왈라스 자신은 이 이론의 의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지만 다른 경제학자들은 그것을 높이 평가했으며 왈라스는 그로 인해 생전보다는 사후에 더욱 큰 영예를 얻게 되었다. 신고전파 경제학에서 왈라스의 지위는 근대 역학에서 뉴튼의 지위와 비슷하다. 선행한 과학자들이 자유낙하의 법칙을 찾아낸데 비해 뉴튼은 삼라만상의 운동을 지배하는 척력과 인력의 원리를 발견하여 하나의 법칙 아래 균형을 이룬 우주를 묘사했다. 왈라스는 하나의 상품에 대한 수요 공급과 가격 등락이 아니라 시장에 나타난 모든 상품이 수요와 공급이라는 상반되는 두 힘에 의해 전체적으로 균형을 이룬 자본주의 자유시장을 묘사했다. 왈라스의 세계는 한 사람의 전지전능한 경매인이 주관하는 경매장의 모습과 같다. 이 경매인은 모든 상품과 생산적 서비스의 가격을 공시한다. 그러면 모든 경제주체는---여기서 자본가와 노동자와 지주는 각자 자기가 가진 상품과 노동력과 토지를 판매하고 다른 것을 구입하는 동등한 존재이다---각자 그 가격을 전제로 한 거래 계획을 세운 다음 사거나 팔 것의 양을 적어 경매인에게 제출한다. 거래 계획을 접수한 경매인은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는 상품과 생산적 서비스에 대해서는 가격 인상이라는 조치를 취한다. 이런 과정은 끝없이 반복되는데, 그 과정에서 모든 것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만큼 공급되며 또 적합한 가격으로 거래된다. 왈라스는 이와 같은 조정 과정을 통해 시장이 균형 상태에 도달한다는 것을 무미건조하고 또 어느 정도 복잡하기도 한 일련의 방정식 체계로써 증명해냈다. 왈라스는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그리고 이렇다 할 스승도 없이 나름의 업적을 이루었다. 그리고 법과대학 교수였기 때문에 변변한 제자도 양성하지 못했다. 때로는 빚을 얻어서 자신의 연구 결과를 출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자동조절시장'이라는 신화를 만든 '일반균형이론'은 시장의 축복을 받은 '풍요한 유산계급의 세계'로부터 날이 갈수록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으며 숱한 '자발적인 후계자'들을 끌어들인 매력적인 이론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왈라스의 이론이 절대적인 진리인 것은 아니며, 또 '풍요한 세계'에 대한 강력한 도덕적 비난으로부터 그것을 해방시킨 복음인 것도 아니다. 그 이론은 시간이 흐를수록 시장의 객관적 상황과는 동떨어진 '실험실의 이론'으로 변해갔으며, 자본주의는 자유경쟁의 단계에서 독점의 단계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가고 말았다. 왈라스의 자동조절시장은 '완전경쟁'이라는 전제조건 위에서만 유효하다. 왈라스식으로 말하자면 모든 경제주체는 경매인을 속여서는 안되며 그 자신이 경매인의 자리를 차지해서도 안된다. 왈라스의 세계에서는 판매자와 구매자가 무수히 많아서 특정한 경제주체의 판매량이나 구매량이 가격에 영향을 미칠 수 없어야 한다. 독점기업, 판매자나 구매자들끼리의 담합, 상품에 대한 부정확한 정보나 과장, 거래의 상대방에 대한 눈속임, 고용자 단체 또는 노동조합의 압력, 정부의 간섭이나 규제 등등 경매인의 조정 기능에 영향을 미치는 일체의 요소가 배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장에서의 균형은 진정한 자연적


균형이 아니다. 그러나 1870 년대 이후의 자본주의는 이러한 까다로운 전제 조건을 모두 허물어 버렸다. 완전경쟁자본주의를 경제 모델로 설정한 것이 잘못은 아니다. 칼 마르크스 역시 그렇게 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모델은 그 자체의 운동법칙에 의해 필연적으로 거대한 독점기업을 낳는 역동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왈라스의 모델은 똑같은 운동이 영원히 반복되는 정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19 세기말의 자본주의는 마르크스의 예측대로 독점단계로 접어들었다. 주기적 공황과 가차없는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큰 기업이 작은 경쟁기업을 합병했다. 신용제도와 주식회사제도의 발달과 더불어 출현한 거대 독점기업들은 카르텔과 트러스트 등 독점단체를 결성함으로써 상품의 공급량과 가격을 마음대로 통제하기 시작했다. 왈라스의 '경매인'은 많은 산업부문에서 자기의 권한을 박탈당했다. 소비자는 상품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아니라 독점기업이 제공하는 광고에 이끌려 구매를 결성하게 되었다. 이 모든 사태는 왈라스 이론의 현실적 유효성을 와해시켰다. 그러나 '풍요한 세계'의 경제학자들은 별로 슬퍼하지도 안타까워하지도 않았다. 알프레드 마샬의 '찬 이성 더운 가슴' '풍요한 세계'는 쾌락의 법칙을 더 넓은 영역으로 확장하는데만 관심을 쏟았다. 제본스, 멩거, 그리고 왈라스의 '쾌락의 법칙'은 아직까지는 소비자의 행동을 설명하는 법칙일 뿐이었다. 그러나 벤담의 철학적 추종자들은 이 법칙의 기초 위에 생산과 분배의 이론을 건축하는데 전력을 쏟았다. 그리고 알프레드 마샬(Alfred Marshall)이 나타났다. 마샬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경제학부를 창설한 '케임브리지학파'의 시조이다. 그는 1842 년 잉글랜드은행 직원의 아들로 태어나 옥스퍼드대학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서 수학을 공부한 다음 케임브리지대학의 장학생으로 분자물리학을 연구한 수재였다. 그는 뒤늦게 경제학으로 전환했지만 신고전파 경제학에 누구보다 큰 기여를 했다. 1890 년에 초판이 나온 그의 저서 <경제학원리>(Principles of Economics)는 20 세기 초반까지 영어 사용지역 대학을 석권한 교과서였다. 그의 여러 가지 기억할만한 공헌 가운데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한계효용이론에 근거를 둔 기업이론이다. 알프레드 마샬의 세계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낸 등장인물은 자본가이다. 그러나 그의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는 제본스의 세계와 근본적으로 같다. 다만 여기서는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과 형제 사이인 한계수확 체감의 법칙이 중요하다. 그리고 자본가는 단순한 화폐의 소유자가 아니라 이윤을 목적으로 기업을 경영하는 생산자이다. 완전경쟁이라는 전제조건 역시 유효하다. 따라서 임금이나 상품의 가격은 시장에서 경쟁을 통해 이미 결정된 사항으로서 개별 기업가는 이것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무대 설명은 이것으로 그친다. 마샬은 제대로 공부한 수학자여서 그 이전의 어떤 경제학자보다도 세련되고 정밀한 수학적 기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세련미를 감상할 겨를이 없으므로 기업가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만을 이야기하기로 하자. 마샬이 설정한 기업가는 '잉여가치'와 같은 추상 세계의 것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그가 기업을 경영하는 유일한 목적은 제한된 자본으로 최대의 '이윤'을 얻는 것이다. 그는 어떤 시점에서 일정한 규모의 생산설비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단기간에 증가시킬 수 없다. 그 시점에서 그가 마음대로 변경할 수 있는 것은 노동의 투입량뿐이다. 여기서 수확체감의 법칙이 작용한다. 일정한 토지에 추가적인 노동을 계속해서 투입할 경우 마지막으로 투입된 노동이 가져오는 수확의 증대, 즉 한계수확은 노동량의 투입량에 따라 체감한다. 맬더스로 하여금 인간에게 암울한 미래를 선고하게 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나 마샬의 세계는 그렇게 암울하지 않다. 왜냐하면 자본은 토지와 달라서 얼마든지 증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정한 초기의 자본에 점점 더 많은 노동을 결합하는 경우에도 한계수확 체감의 법칙이 작용한다. 기업가는 자신이 소유한 일정한 생산설비에 대해 많은 노동량을 투입하면 총생산물은 체증하지만 마지막 한 단위 노동의 한계생산물은 체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는 언제나 총수입과 총비용의 차이인 총이윤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면 일정한 양의 생산설비를 가진 기업가가 총이윤을 극대화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마지막 한 단위의 노동, 예컨대 한 노동자의 하루 노동과 그것에 의해 늘어난 한계생산물의 가격이 같아지는 점까지 노동을 고용하는 것이다. 이 때 한계비용은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고 한계수입은 한계생산물의 수량에 단위 가격을 곱한 액수이다. 물론 임금과 가격은 그에게 이미 주어져 있다. 만약 이 기업가가 노동을 그보다 적게 고용한다면 그는 더 큰 수익을 포기하는 셈이고 그보다 많이 고용한다면 그만큼 필요 없이 손해를 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시점에서 한 개별 기업이 총이윤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은 한계수입과 한계비용이


균등해지는 점까지 노동을 고용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원리는 기업가가 생산설비를 증감시킬 수 있는 시간 여유를 가진 장기 균형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로 성립된다. 완전경쟁이라는 가정 위에서 이러한 균형의 원리는 자유방임시장이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혜택을 줄 뿐만 아니라 또 만인에게 '공평'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상품과 생산적 서비스는 사회가 수요하는 만큼 생산되어 '합당한' 값으로 거래되고 모든 산업에서 기업의 이윤율 역시 균등화되며, 상품의 생산비는 가장 낮아져서 소비자는 가능한 최저가격에 그것을 구입할 수 있다. "고용주는 최대의 이윤이라는 자기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전혀 그렇게 하려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의도하였을 때보다 오히려 더 효과적으로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킨다"고 했을 때 스미드는 바로 이런 상황을 마음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역시 마샬은 '신고전파'의 중심인물 지위를 차지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알프레드 마샬은 냉철한 이성을 지닌 학자였다. 그러나 마음까지 차가운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대중의 빈곤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그렇지만 자신의 이론이 자유방임시장의 우월성이라는 결론으로 귀착되었기 때문에 부의 분배를 둘러싼 소란스러운 싸움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풍요한 세계'의 손을 들어 주었다. 마샬은 이자와 지대가 자본가와 지주의 '절욕'의 대가라고 한 시니어와 바스띠아의 견해에 대해 마르크스가 퍼부은 비난과 조롱을 쉽사리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풍요한 세계'에게 '절욕' 대신 '기다림'이라는 새로운 '도덕적 면죄부'를 주었다. 요컨대 쾌락에 대한 무한한 욕망을 가진 인간이 미래의 더 큰 쾌락을 위해 현재의 쾌락을 자제하면서 기다리는데 대해 주어지는 대가가 이자와 지대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이라는 요소를 제외하면 본질적으로 '절욕설'과 똑같은 이론이었다. '풍요한 세계'는 오랫동안 자신의 풍요를 당당하게 설명하는 분배이론을 갈망해왔지만 마샬은 이 소망을 실현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이 '따뜻한 가슴'을 지닌 경제학자는 다른 측면에서 해결책을 구하려 했다. '풍요한 세계'에 대한 도덕적 비난은 근본적으로 '가난한 세계'의 존재에 의거한 것이므로 풍요한 세계의 구성원들이 '경제적 기사도'를 발휘함으로써 가난한 세계의 고통을 덜어 주라는 권고였다. 그는 가난을 세상에서 가장 나쁜 악덕으로 단정함으로써 "인구법칙의 재난을 피하기 위해" 일체의 빈민구제사업을 중단하라는 맬더스식의 냉혹하고 편협한 철학을 거절했다. 이런 면에서 그는 신고전파 학자들 가운데서 아담 스미드와 J. S. 밀 같은 '고전파' 경제학자와 가장 가까운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풍요한 세계'는 가난한 사람들의 저항과 반란에 떠밀려 불가피하게 양보하지 않으면 안되는 때를 제외하고는 다음과 같은 마샬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회적 악덕은 경제적 기사도의 사회적 가능성을 광범위하게 이해함으 로써 감소될 수 있다. 공공복리에 대한 부자들의 헌신은 계몽이 확대됨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의 자원을 많이 이용하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으며, 가난 이라는 가장 나쁜 악덕을 지상에서 없애 버릴 수도 있다. 바스띠아의 재치 넘치는 호언장담 이후 많은 학자들이 여러 가지로 예를 썼지만 '풍요한 세계'는 여전히 사회주의자들의 도덕적 비난에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자본주의 그 자체의 전복을 주장하는 사회주의는 이미 물리적인 힘을 가진 하나의 혁명운동으로 성장하였으며, 또한 '잉여가치론'이라는 확고한 분배이론을 근거로 삼아 집요하게 풍요한 세계를 공격했다. 그런데 이 때 자본주의 신천지 미국의 경제학자가 해결사로 등장했다. 미국이 낳은 가장 저명한 경제학자이며 19 세기 말엽 미국 경제학회 회장을 지내기도 한 존 베이츠 클라크(John Bates Clark)가 그 사람이다. 누구나 자기 몫을 가진다---J. B. 클라크 클라크는 수세적으로 풍요한 세곌르 옹호하기에 급급했던 다른 학자들과는 달리 사회주의자의 공격에 대한 정면 대결을 감행했다. 그는 1899 년 출간한 자기의 대표작 <부의 분배>(Distribution of Wealth)에서 분배이론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이자와 지대의 윤리적 정당성에 관한 논쟁은 과학으로서의 경제학과는 무관한 것이다."고 한 '경제과학자'들의 전통적 태도를 단호하게 반박했다. 노동계급의 복지는 노동자들이 받는 양에 달려 있다. 그러나 다른 계급에 대한 그 들의 태도는---따라서 사회 상태의 안전성은---그 양이 많든 적든 그들이 생산한 만


큼을 받는가 아닌가에 주로 의존한다. 만약 부를 조금 생산하고도 전부를 가진다면 그들은 혁명을 꿈꾸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거대한 부를 생산하고도 그 일부 만을 얻는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대부분 혁명가가 될 것이며 또 그렇게 할 권리가 있다. 사회에 제출된 고발장은 '노동 착취'에 대한 고발장이다. 이것은 "노동자들이 자기가 생산한 것을 규칙적으로 강탈당하며, 이것은 또한 법의 보호 아래 자연적인 경쟁의 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만약 이러한 혐의가 입증된다면 의협 심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당연히 사회주의자가 될 것이며, 이 산업체제를 변혁하려는 그들의 열정은 정의감의 척도이고 표현일 것이다. 만약 '풍요한 세계'의 기득권을 정당화할 만한 분배이론이 없이 이렇게 솔직하고 진지하게 이 문제에 접근했다면 클라크는 '위험한 사상의 소유자'로 비난받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클라크는 획기적인 분배이론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더욱이 그 이론은 '쾌락주의적 공산주의'라는 철학적 기반 위에서 신고전파가 이루어 놓은 소비이론이나 생산이론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정밀하고 깔끔한 것이기까지 했다. 클라크가 제시한 결론은 단순 명백했다. 자유방임시장은 만인에게 각자가 생산한 것만큼 분배해주기 때문에 그 누구도 자신이 받고 있는 것 이상의 몫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분배를 둘러싼 모든 사회적 갈등이나 계급투쟁은 오로지 자본주의의 분배원리에 대한 무지와 오해의 산물에 불과하다. 클라크의 분배이론은 결코 난해하지는 않지만 제법 복잡한 수학적 조리법을 거쳐 그와 같은 결론을 끌어냈기 때문에 말로 설명하자면 지나치게 장황해질 우려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그 이론을 최대한 단순화시켜서 살펴보기로 하자. 클라크의 세계에서도 앞에서 말한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과 한계수확 체감의 법칙---여기서는 '한계생산력 체감의 법칙'이라고 한다.---이 그대로 작용하며 완전경쟁시장이라는 전제 조건도 똑같이 유효하다. 그리고 일단 단 하나의 상품을 생산하는 단 하나의 산업만이 존재하는 단순한 국민경제를 상정한다. 그리고 모든 기업가는 총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점까지 노동을 고용하며 일정 시점에서 사회 전체의 노동 공급량이나 자본의 양은 고정되어 있다. 이제 이러한 상태에서 사회는 자본과 노동에 대해 각각 얼마만큼의 몫을 할당하게 되는지를 앓아보자. 그림 생략(P.185 완전경쟁시장에서의 임금 수준과 이자율) 그림(가)의 노동의 한계수입곡선은 사회가 고정된 양의 자본에 점점 더 많은 노동을 투입시킬 때 마지막 단위의 노동이 가져오는 한계수입---이것은 노동의 한계생산물의 수량에 상품 한 단위의 시장가격을 곱한 금액이다.---이 체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완전경쟁시장은 모든 노동자를 다 고용하는 점에서 개별 기업과 산업 전체의 생산비를 최소화시키고 산업 전체의 총이윤을 최대화시킬 수 있게 한다. 이 경우 사회가 노동자에게 분배하는 몫은 시장에서 결정된 임금 수준에 노동자 수를 곱한 빗금친 사각형 (a)총임금이다. 그리고 당연히 총수입에서 총임금을 뺀 삼각형 (b)총이자는 자본소유자의 몫이다. 모든 노동자들은 노동의 한계수입, 즉 자신의 노동이 생산에 기여한 꼭 그만큼을 임금으로 수령한다. 그림 (나)는 노동의 자리에 자본을 넣고 이자율로 임금 수준을 대체한 것이다. 자본의 한계수입곡선은 일정한 양의 노동에 점점 더 많은 자본을 결합함에 따라 자본의 한계수입---이것은 자본의 한계생산물의 수량에 상품 한 단위의 시장가격을 곱한 금액이다.---이 체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완전경쟁시장은 이 경우에도 모든 자본을 다 고용하는 점에서 개별 기업과 산업 전체의 생산비를 최소화하고 산업 전체의 총이윤을 극대화시킨다. 여기서 모든 자본의 소유자는 자기의 자본이 생산에 기여한 그만큼, 즉 자본의 한계수입과 일치하는 수준의 이윤 또는 이자를 수령하며 사회는 자본에 대해 사각형 (b)총이자만큼의 몫을 분배한다. 그리고 노동의 몫은 당연히 총수입에서 총이자를 뺀 빗금친 삼각형 (a)총임금이다. 클라크는 그림 (가)의 삼각형과 그림 (나)의 사각형의 크기가 일치한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이것이 바로 '한계생산력 분배이론'의 핵심 내용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토지라는 제 3 의 생산요소를 등장시키거나 다수의 산업이 존재하는 경우에도 좀더 복잡한 미적분학의 처리과정을 통해 꼭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클라크의 분배이론은 최소한 수학적인 면에서 완벽하며, 그 완벽한 대칭성은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여기서는 착취라든가 분배를 둘러싼 계급투쟁 따위의 이야기가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다. '풍요한 세계'는 이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클라크의 한계생산력 분배이론은 그 외견상의 매력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그것은 자본은 무엇인가, 그리고 '자본의 한 단위'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었다. 사실 '노동 한 단위'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었다. 사실 '노동 한 단위'가 의미하는 것은 명백하다. 예컨대 "평균적 기술과 노동강도에 입각한


노동자 한 사람의 8 시간 노동"이다. 그러나 자본의 형태는 작은 나사에서 산더미 같은 용광로에 이르기까지 무한히 다양하다. 이것들의 가격을 일정한 화폐 액수로 환산할 수는 있다. 그러나 화폐가 생산과정에 투입되는 일은 없다. 자본은 화폐가 아니라 생산에 실제로 사용되는 실체적인 재화이다. 클라크의 분배이론에서 자본의 가격은 이자율이며 그것은 자본의 생산성에 좌우된다. 그리고 자본의 생산성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화폐로 환산된 자본의 가격이 아니라 자본 그 자체의 양적인 측정 단위가 있어야 한다. 만약 자본의 양을 다시 가격으로 측정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순환논법에 불과하며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게 된다. 클라크는 이런 점을 인식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자본을...영구적으로 이동하는---끊임없이 출입하는---소재적 물질에 투하된 생산적인 부의 합계로 생각한다. 이리하여 자본은 말하자면 윤회함으로써, 반복해 서 일련의 실체를 탈각하고 또 다른 일련의 실체로 이동함으로써 영속한다. 이 심오한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든 클라크는 자본을 양적으로 측정하는 방버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마르크스는 자본이 화폐자본---생산자본---상품자본의 형태적 변환을 거듭하지만 본질적으로 '과거 노동의 산물'이므로 일정한 노동량으로 환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풍요한 세계'로서는 이런 생각을 수용할 수 없었다. 이 문제는 양 진영의 학자들 사이에서 길고 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수학자들까지도 논쟁에 참가했다. 그러나 클라크를 계승한 경제학자들은 결코 승리를 거둘 수 없었다. 자본을 측정할 수 있다는 가정은 1960 년에 와서야 수학적으로 붕괴되었다. 신고전파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과 수학을 함께 연구한 영국의 스라파(Piero Sraffa)는 일종의 배리법적 기법을 사용하여 클라크의 이론을 수학적으로 무너뜨렸다. 그래서 20 세기 후반 최고의 경제학자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사뮤엘슨(Paul A. Samuelson)은 자본주의 세계 대부분의 대학을 석권한 저서 <경제학>(Economics)에서 신고전파의 분배이론이 "현실을 설명하는데 유용한 하나의 우화"라는 선까지 물러서는 솔직한 태도를 보였다. 이 논쟁은 자본가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그들에게는 추상적인 '가치와 생산성의 영역'이 아니라 오직 '가겨과 이윤'이라는 현실 세계만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경제학자들"은 분배이론의 논리적, 수학적 모순 때문에 괴로워했지만, "이윤을 생산하는" 자본가들은 클라크의 분배이론이 주는 이데올로기적 축복---그들은 자신이 생산에 기여한 만큼 분배받으므로 항상 떳떳할 수 있다.---을 한껏 누렸다. '부르주아의 마르크스', 빌프레도 파레토 이 장을 마무리하기 전에 한 사람을 더 만나야 한다. 빌프레도 파레토(Vilfredo Pareto)이다. 그는 신고전파 경제학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완성한 인물이며 그의 이름은 후생경제학이라는 용어와 나란히 교과서에 등장한다. 그런데 이 후생경제학이라는 용어는 공리주의(한자 생략 P.188)를 ('골리주의' 한자 생략 P.188)로 잘못 읽을 때와 유사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말하자면 사회 전체와 대중의 후생 또는 복지라는 윤리적 가치를 지향하는 학문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다르다. 후생 경제학은 사회적 총효용을 극대화하는데 관심을 쏟았지만 그 결론은 새롭지도 파격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자유방임시장이 알아서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기 때문에 사회의 총효용을 최대화하기 위해서 사람이 해야할 일은 자유방임시장에 대한 모든 형태의 외부적 간섭을 배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후생경제학의 대표자는 '부르주아의 마르크스'라는 별명을 가진 빌프레도 파레토이다. 그는 <공산당선언>이 발표된 1848 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치적인 이유로 프랑스에 망명해 있던 이탈리아의 후작이고 어머니는 프랑스인이다. 그는 열 살 때에 이탈리아로 돌아와 보통 교육과정을 거쳐 토리노대학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파레토는 기업 경영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젊은 나이에 이탈리아 철강회사의 총지배인이 되었다. 그러나 파레토의 관심은 단순한 기업 경영을 넘어 경제학 연구로 이어져 그는 경제문제에 대한 여러 가지 글을 발표했다. 그런데 그의 경제학적 소양은 제법 좋은 평가를 받아 대학교수직을 안겨 주었다. 파레토는 1893 년 왈라스의 후계자로서 로잔느대학의 경제학 교수직을 이어받았다. 파레토는 이 때부터 20 년간 경제학 연구에 전념했지만 그 이후의 마지막 10 년은 주로 사회학 분야의 연구에 몰두했다. 파레토가 '부르주아의 마르크스'별명을 얻은 것은 주로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로 그는 칼 마르크스가 부르주아나 자본주의라는 말 속에 담았던 것과 똑같은 경멸과 혐오의 감정을 가지고


사회주의와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파레토는 귀족의 후예라는 '신분적 고귀함'과 철강회사 총지배인이라는 '계급적 우월성'을 한몸에 지닌 사람이었던 만큼 우리는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선천적, 후천적 거부 반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두번째 이유는 훨씬 이론적인 것이다. 파레토는 만인의 평등과 복지를 위해 자본주의 질서를 전복시키라고 한 마르크스의 선동에 대해, 그 어떤 고상한 이념을 내건 혁명도 결코 사회 전체의 복지나 후생을 증진시키지 못한다고 맞받아쳤다. 그래서 파레토는 풍요한 세계의 또 한 사람의 '도덕적 수호신'으로 모셔졌다. 파레토의 세계 역시 미적분학과 기하학이 지배한다. 그 곳에는 인간이 없다. 노동자, 자본가, 지주 등은 이 세계의 주인공이 아니다. 그 대신 '예산제약선', '효용가능곡선', '무차별곡선', '생산가능곡선', '노동의 한계생산물', '생산의 한계전환율' 등의 수학적 개념들과 그 사이의 복잡다단한 상호관계만이 중요하다. 그는 이러한 개념들을 수학적으로 조리함으로써 하나의 '빛나는 축복'을 이끌어냈다. 그것은 "어느 시점의 재산 분배 상태를 주어진 것으로 가정할 때 완전경쟁시장은 어떤 사람의 후생을 침해하지 않고는 다른 사람의 후생을 증대시킬 수 없는 점에서 사회의 생산과 소비를 균형시킨다."는 결론이다. 이것을 경제학에서는 '파레토 최적'이라 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미 주어진 재산 분배 상태'와 아울러 '다른 사람의 후생을 침해하지 않고는'이라는 표현이다. 파레토는 사유재산은 신성하다든가, 부자는 근면과 재능의 대가로 부를 얻었으므로 사유재산은 철저히 보호되어야 한다는 해묵은 주장과는 달리 외견상 대단히 냉정한 논리를 전개했다. 기존의 재산 분배 상태가 정당한가 여부는 일단 경제학의 연구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자유방임시장은 기존의 재산 분배 상태에서 사회의 총후생을 극대화시킨다. 만약 사회주의혁명이 만인의 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이 사회 후생의 총량을 증대시킨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그의 세계에서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예컨대 사회주의자들이 주장대로 한 부자의 재산을 빼앗아 백 명의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준다고 하자. 그러면 부자의 후생은 감소하고 그의 재산을 나누어 받은 백 명의 후생은 증가한다. 감소한 부자의 후생과 증가한 백 명의 후생 가운데 어느 쪽이 큰가? 사회주의자들은 후자가 크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파레토는 어느 쪽이 크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후생이란 효용 또는 쾌락이라는 용어와 같은 것을 의미하며 이 효용 또는 쾌락은 인간의 주관적 만족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소된 부자의 쾌락과 증가된 가난한 사람들의 쾌락을 양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순수한 쾌락주의적 공산주의의 기본 원칙이다. 파레토의 세계에서 선은 다른 사람의 후생을 침해하지 않고 어떤 사람의 후생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자유방임시장만이 이것을 해낼 수 있다. 어떤 사람의 후생을 침해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후생을 증가시키는 것은 선이 아니다. 그리고 선이 아닌 것을 위해 사회의 어떤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악이다. 사회주의는 어떤 사람들의 후생을 침해함으로써만 다른 사람들의 후생을 증가시키려는 어리석은 죄악이다. 어떠한 인위적인 소득 재분배도 그것이 사회의 총후생을 증가시킨다는 증거가 없다. 이러한 결론은 다분히 '맬더스주의'의 냄새를 풍긴다. 파레토는 지독한 반사회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당시 문제가 되기 시작한 파시즘의 앞잡이는 아니었다. 그는 단지 자유방임시장을 통해 내린 '신의 축복'을 온전하게 보존하고자 했다. 그가 노동자계급의 '어리적고 탐욕스러운' 반란과 저항을 단호하게 분쇄하고 '사회질서'를 확립한 무솔리니(Bonito Mussolini)의 공적을 승인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파시즘의 시조' 무솔리니는 그를 도덕적 수호신으로 간주한 '풍요한 세계'의 여론을 수렴하여 이 노학자에게 원로원 의원이라는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스스로를 빛냈다." 파레토는 여러 자본주의 나라들의 부의 분배 상태에 대한 "심오한 통계학적, 수학적 고찰"을 통해 어떠한 정책도 재산 분배의 불균형을 변경할 수 없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가난에 대한 소란스러운 항의와 반란은 오직 더 많은 자본의 축적에 의해서만 종식될 수 있다. 그는 '풍요한 세계의 도덕적 수호신'으로 숭배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인물이다. 아름답지만 비현실적인 신고전파의 세계 우리는 이 장에서 여러 사람의 뛰어난 경제학자들의 생각을 주마간산격으로 살펴보았다. 여기서 다룬 것은 그들의 사상적, 이론적 공헌의 극히 단편적인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제본스, 멩거, 왈라스, 클라크, 마샬, 파레토 등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의 세계를 관통하는 공통된 특징을 알아보는데는 이 정도로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가난한 세계'를 대변하는 사회주의 사상의 위협으로부터 '풍요한 세계'를 지키려고 했다. 그들은 소비와 생산과 분배 등 자본주의의 운동법칙을 해명하는 나름의 완성된 이론체계를 정립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달의 한쪽 면밖에 볼 수 없는 지구인과 같았다. 그들의 이론은 그 수학적 아름다움만큼이나 두드러진 편협성 때문에 파산의 운명을 맞았다. 신고전파가 묘사한 세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벤담의 쾌락주의적 공리주의 인간관과 관념적 사회관 위에 서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인간을 '욕망과 만족의 법칙'에 의해 지배받는 '쾌락 극대화 자동인형'으로 취급했다. 인간은 모두가 생산적 서비스의 소유자이고 판매자이다. 이 법칙 앞에서는 자본가와 노동자, 부자와 빈민, 게으른 자와 근면한 자, 고귀한 인격자와 저열한 속물 사이의 구분은 모두 부차적이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쾌락에 대해 간섭할 수 없으며 여러 가지 쾌락 사이의 윤리적 차이도 인정되지 않는다. 독서를 통해 얻은 쾌락과 매매춘을 통해 얻는 쾌락도 동등한 대접을 받는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모든 상품과 서비스는 그것이 아무리 저속한 것일지라도 인간의 후생을 증대시키는 것으로 간주된다. 쾌락의 윤리성을 재는 객관적 기준은 없으며, 인간에게 심리적 만족을 주는 모든 것은 선이다. 이러한 관점을 엄밀하게 적용할 때 금연운동이나 금주 캠페인, 매매춘 금지, 유흥업 규제, 마약 단속 따위는 모든 사회적 후생을 감소시키고 자원의 합리적 배분을 저해한다. "효용이 같다면 제도용 핀과 시는 똑같이 유익하다"고 한 벤담의 말은 제도용 핀을 매매춘으로 바꾸어 놓아도 똑같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은 왈라스의 <순수경제학요강>에서 다음과 같이 반복되었다. 다른 관점에서 볼 때,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약을 수요하는가 아니면 가족 을 죽이려는 살인자가 이 약을 수요하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우 리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런 문제는 전혀 부적절하다. 우리에 관한 한 이 약은 어느 경우에도 유용하다. 어쩌면 이것은 의사보다 살인자에게 더 유용한지도 모른다. 신고전파의 세계에서 두드러진 두번째 특징은 그 아름다운 수학적 묘사법이다. 오늘날 사람들로 하여금 경제학을 지독하게 난해한 학문으로 보고 그 신비한 비법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경제학자들을 외경스런 마음으로 쳐다보게 만든 것은 바로 신고전파의 '공로'이다. 그러나 그들은 수학적 묘사의 정확성과 아름다움에 도취된 나머지 그와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 버렸다. 왈라스의 일반균형이론이나 클라크의 기업이론, '파레토 최적'등의 세계에는 불완전고용이나 과잉생산공황 따위의 혼란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본주의가 이미 독점단계에 접어든 19 세기 후반에 '완전경쟁'이라는 비현실적 가정 위에서 이 이론을 갈고 닦았다. 이와 같은 방법론적 폐쇄성 때문에 그들은 목전에 다가온 대공황의 불길한 그림자를 예감조차 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당연히 그에 대한 아무런 유효한 처방도 내리지 못하였다. 신고전파 경제학의 세번째 특징은 그것이 자본주의의 역사적 특수성을 무시했다는 점이다. '쾌락의 법칙'은 인간의 본성에 근거를 둔 것이다. 이 법칙은 나무 갈퀴로 해초를 긁어 모으거나 돌도끼로 짐승을 잡던 원시인에서 문명화된 현대인까지 동서고금의 모든 인간을 지배한다. 사회가 자본가와 노동자와 지주라는 세 계급으로 구성된다고 보고 그들 사이의 분배원리를 규명하고자 한 스미드나 리카도와 달리 신고전파는 사회계급의 존재 근거를 박탈하고 그들 사이의 차이를 부정했다. 이것은 물론 세이나 시니어, 바스띠아 등의 견해를 계승한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노동자와 생산수단의 분리, 즉 노동력의 상품화가 가장 중요한 특징인 인간 역사 발전의 특수한 단계이다. 자본주의의 역사적 특수성을 철저히 무시한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의 견해는 어디까지나 자본주의가 인간의 본성에 부합되는 영원하고 자연스러운 질서이기를 바라는 '풍요한 세계'의 간절한 소망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8. 모든 지대는 도둑질이다. (불로소득을 규탄하는 영혼의 외침, 헨리 조지) 우리 시대의 거대한 수수께끼 1865 년 어느 날 미국 <샌프란시코 타임즈>의 주필 노아 브룩스는 아래층에서 일하는 젊은 식자공이 올려보낸 글 한 편을 받았다. 처음에는 다른 신문에서 베낀 것이려니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로 어떤 신문에도 비슷한 글이 실려 있지 않았다. 브룩스는 식자실로 내려가 활자를 부지런히 만지고 있는 호리호리한 청년을 찾아 자기 방으로 데려갔다. 이렇게 해서 스물 여섯 살의 식자공 헨리 조지(Henry George)는 갑자기 기자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몇 달 뒤에는 사설을 쓸 정도로까지 유능한 저널리스트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젊고 유능한 저널리스트는 자신의 새로운 직업에 어울리는 경력이라고는


단 한 가지도 없는 밑바닥 출신이었다. 헨리 조지는 1839 년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다섯 달 만에 중퇴한 스코틀랜드계 이민자의 아들이다. 이 방랑기 많은 소년은 불과 열여섯의 나이에 동인도회사 선박의 선원으로 취직하여 호주와 캐나다 등지를 여행했다. 열아홉 살에는 캐나다 남부 지역의 금 열풍에 휩쓸려 금광을 찾느라 산속을 헤매기도 했다. 그는 사환, 노동자, 선원, 금광탐사가 등 갖가지 직업을 가졌지만 어느 곳에서도 성공하지 못했고 또 만족하지도 않았다. 그의 젊은 시절은 온통 방랑과 모험, 가난과 굶주림으로 점철되었다. 열일곱의 꽃다운 나이에 콧수염과 구레나룻을 멋지게 기른 이 잘생긴 청년을 따라 위험한 사랑의 도피를 감행했던 그의 아내 애니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헨리 조지는 아내가 둘째 아이를 낳고 먹을 것이 없어 신음하자 하마터면 강도짓까지 할 뻔했다. 조지가 식자공으로 취직한 것은 이처럼 혹심한 가난의 뒤끝에서였다. 그러나 헨리 조지가 하루 벌어 하루 먹기에 바쁜 그런 범상한 노동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중학교 문턱밖에 가 보지 않은 학력과는 어울리지 않게도 짬짬이 독서를 계속했고 감동적이고 힘있는 문장을 쓰기 위한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가 식자공에서 일약 저널리스트로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노력 덕분이었다. 조지는 날카로운 관찰력과 예리한 필봉으로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제법 유명한 언론인이 되었다. 그런데 그는 저널리스트로서 미국의 각지를 여행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목격했다. 발전된 과학기술과 풍부한 자연자원을 결합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새로운 맹주로 성장하고 있던 미국에서 엄청난 사회적 불평등과 대중적 빈곤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특히 뉴욕의 빈민가와 노동자의 생활상태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조지는 높은 문명의 한가운데서 빈곤이 함께 자라나는 원인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헨리 조지는 한 상원의원이 돈을 댄 <이브닝 포스트>지의 발행인으로서 사회적 불평등과 싸우기 위해 펜을 휘둘렀다. 그런데 이 신문의 자본주인 상원의원이 부당한 요구를 해왔다. 태평양철도회사의 독점을 지지하는 기사를 내든가 신문사를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조지는 모든 형태의 독점과 특권에 반대하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신문사를 떠났다. 이 때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구원의 손길을 뻗었다. 조지에게 별로 할 일없는 공무원 자리를 하나 내준 것이다. 조지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새로운 모험을 시작했다. 그는 정치경제학의 고전들을 연구하면 서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이라는 책을 집필했다. 조지 자신의 말에 의하면, 그는 어느 날 길을 가다가 하나의 거대한 수수께끼를 갑자기 떠올리게 되었고, 그 수수께끼를 해명하라는 일종의 '계시'를 받았다. 그리고 3 년여에 걸친 힘겨운 싸움 끝에 그 수수께끼의 비밀을 밝히는 마지막 페이지를 끝낸 순간 그는 "어린 아이처럼 엎드려 울었다." <진보와 빈곤>은 조지가 '우리 시대의 거대한 수수께끼'라고 이름붙인 문제에 대한 그 자신의 해답이다. 그러면 그 수수께끼는 무엇인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 증기와 전기의 이용, 개선된 생산공정과 노동절약적 기계의 도입, 고도의 분업과 거 대한 생산 규모, 놀라운 유통시설...사람들은...당연히 생산력이 대폭 증대된에 따라 빈곤이 일소될 것이라고 기대했다...그러나 현실은 실망의 연속이었다. 꼬리를 문 발견과 발명은 하층민의 노동을 덜어 주지도 빈민에게 풍요를 가져다 주지도 않았 다...문명세계의 모든 곳에서 불황과 비자발적 실업, 자본의 낭비와 기업의 도산, 노 동자계층의 빈곤과 불안의 소식이 들려 온다...이처럼 진보와 함께 빈곤이 따라오는 현상은 우리 시대의 거대한 수수께끼이다. 이것이야말로 세계를 괴롭히고 정치, 종 교, 교육이 해결하지 못하는 경제, 사회, 정치적 문제의 근원이 되는 핵심적인 사실 이다. 이 수수께끼는 우리에게 조금도 낯설지 않다. 아담 스미드에게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정치경제학자들이 이미 백 년 이상 이 문제로 골치를 앓았고 숱한 논쟁을 격렬하게 벌여 왔다. 그런데 헨리 조지는 1879 년 출판한 <진보와 빈곤>에서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이 수수께끼를 해명하고 그 진단만큼이나 독특한 처방을 제시했다. 부자가 되려면 땅 한 조각이라도 사 두라 헨리 조지의 세계는 미국의 역사를 반영하듯 아무도 살지 않는 평원에서 시작된다. 이 평원에는 풀, 꽃, 나무, 시냇물 등 모든 조건이 같은 토지가 무한히 펼쳐져 있다. 여기에 최초의 주민이 마차를 타고 온다.


그는 모든 자연자원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가난하다. 왜냐하면 협동노동이나 분업을 할 상대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비프스테이크 한 접시를 먹으려면 소 한 마리를 잡아야 하기 때문에" 결코 다양하고 풍족한 소비생활을 누릴 수 없다. 이 때 두번째 이주자 역시 마차를 타고 온다. 그는 아무곳에나 자리잡고 살 수 있다. 하지만 이 신참자에게 경제적으로 가장 유리한 곳은 고참 이주자가 사는 바로 옆의 땅이다. 왜냐하면 협동노동과 분업의 이익이 있는 곳은 거기뿐이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새로운 이주자가 찾아온다면 최초 이주자의 땅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된다. 새로운 이주자들은 더 먼 곳으로 가면 얼마든지 비옥한 토지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마을에서 함께 살면서 얻을 수 있는 협동과 분업의 이익이 그들의 발을 묶는다. 상점, 대장간, 교회, 푸줏간, 구두방, 병원, 학교, 서점, 도서관...각종의 산업과 직업이 생겨나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분업과 교환은 생산력을 높였다. 이제 마을은 큰 도시가 된다. 도시는 산업과 인간 생활의 중심이 된다. 최초 이주자의 땅은 교환의 초점이자 고급 산업의 밀집지역이 되어 그 가격이 치솟는다. 최초의 정착자나 그에게서 권리를 승계한 사람은 부자가 되어 일은 않고 잠만 자도 된다. 이러한 토지 한 조각은 그 소유자에게 어떤 기술자의 임금보다도 많은 소득을 안겨 준다. 어떤 땅은 금으로 포장해도 좋은 값으로 거래된다. 그러나 그 토지는 최초의 이주자가 마차를 타고 왔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똑같은 토지이다. 조지는 "모든 진보하는 국가에서 지대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상승한다."고 말했다. 다음의 인용문은 조지의 '힘차고 감동적인 문장을 쓰는 훈련'의 성과이다. 이제 이론과는 거리가 멀고 돈벌이에만 밝은 어떤 돌대가리 실업가에게 이렇게 물어 보자. "어떤 조그만 마을이 있는데 10 년 후에는 큰 도시로 성장할 것이다. 마차 대신 기차가 다니고, 촛불 대신 전기를 밝히고, 여러 가지 기계와 진보로 노동생산성도 엄청나게 높아질 것이다. 그러면 10 년 후에 이자율이 올라갈 것으로 생각하는가?" 그는 대답할 것이다. "아니다." "그러면 단순노동의 임금이 오르겠는가? 노동말고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독 립적으로 생계를 꾸리기가 더 수월해지겠는가?" "아니다. 임금은 오르지 않는다. 오히려 내릴 가능성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면 오르는 것은 무엇인가?" "지대, 즉 토지 가격이다. 당신도 한 몫 잡으려면 가서 땅 한 조각이라도 사 두 라!" 이러한 상황에서 이 사람의 충고를 받아들이면 더 이상 일할 필요가 없다 그저 가 만히 앉아 담배나 피우든가, 나폴리의 거지나 나병 환자마냥 누워 지내든가, 풍선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든가, 구멍을 파고 땅속으로 내려가든가, 사회의 부를 생산하는 데 한푼어치의 보탬도 주지 않고도 10 년만 지나면 부자가 될 것이다. 그는 그 새로 운 도시의 호화로운 저택에서 살게될 것이다. 그러나 이 도시의 공공건물에는 반드 시 빈민구호소가 설치되어 있을 것이다. 헨리 조지가 그저 이런 재치 있는 비유에만 능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진보와 빈곤>에서 노동, 자본, 토지, 임금, 이윤, 이자, 지대, 부 등 정치경제학의 기본 개념을 명확히 했다. 이런 면에서 그는 일급 이론가로서도 손색이 없다. 조지에 의한면 '부'는 "교환가치를 가진 모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채취, 이동, 결합, 분리 등의 노력으로 변화시킨 자연의 생산물"이다. 따라서 물자의 증감이 부의 총량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것은 진정한 부가 아니다. 예컨대, 증권, 약속어음, 화폐, 토지 그 자체 등은 부가 아니다. '노동'은 사회의 부를 증진시키는 모든 정신적, 육체적 노력을 의미하며, '임금'은 총생산물 가운데 노동의 대가로 지불되는 부분이다. '자본'은 부의 일부분으로서 생산에 참여하여 부의 증진을 지원하는 부분이다. 따라서 토지 그 자체나 화폐, 유가증권 등은 '자본'이 아니다. '토지'는 인간 노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에 의해 무상으로 주어진 모든 자연의 물질과 힘을 의미한다. 조지는 '임금'의 원천은 자본이 아니라는 점을 되풀이 강조했다. 그는 고전학파의 '임금기금설'을 일축했다. 그에 의하면 노동은 임금에 선행한다. 노동자는 현상적으로 화폐 임금을 받지만 사실은 자기가 이미 생산한 것 중의 일부를 받을 따름이다. '이윤' 역시 임금과 마찬가지로 이미 생산된 것 가운데


기업가가 수취하는 부분이다. 이것은 기업 관리에 대한 보수, 위험에 대한 보상, 긔ㄹ고 자본 사용에 대한 대가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기업 관리에 대한 보수는 임금의 일종이다. 위험에 대한 보상은 경제학적으로 의미가 없다. 시회 전체로 보면 위험은 늘 같은 확률로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기업가가 위험을 회피했다면 다른 누군가가 위험의 희생물이 된다. 따라서 이것은 총생산물 가운데 자본의 몫이 차지하는 크기를 변화시킬 수 없다. 분배문제와 관련하여 의미있는 것은 자본 사용의 대가, 즉 '이자'뿐이다. 그래서 조지는 이윤이라는 용어를 파기하고 총생산물 가운데 자본의 몫을 나타내는 용어로 '이자'만을 인정했다. '지대'는 토지 사용에 대한 대가이다. 그러나 이것은 토지가 생산에 기여한데 대한 보수가 아니라 단지 토지의 소유자가 생산물의 일부를 수취할 수 있다는 법률적인 힘의 표현에 불과하다. 인간의 노동에 의해 개량된 부분을 제외하면 토지는 부의 증진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다. 조지의 세계에서 '임금', '이자', '지대'는 사회의 총생산물이 노동, 자본, 토지의 소유자에게 나누어지는 몫의 상대적 크기를 의미한다. 이렇게 무대를 설정하고 나면 조지의 세계는 리카도의 세계와 똑같이 우울하다. 마르크스는 지주를 단역으로 좌천시켰고 신고전파는 지주와 다른 계층 사이의 울타리를 제거함으로써 그들을 보호했다. 그러나 조지는 지주를 다시 역사의 주역으로 복권시켰다. 리카도의 지주는 자본가가 창의와 근면의 대가로 가져야 할 몫을 가로채는 '사회 발전의 유일한 수혜자'였다. 그의 세계에서 비극의 씨앗은 토지의 비옥도가 일정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조지의 지주는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의 등을 밟고 선 악당이다. 여기서는 토지의 자연적 비옥도의 차이가 아니라 토지와 산업과 교환의 중심지 사이의 거리 차이가 비극의 씨앗이다. 리카도의 '차액지대론'은 원인은 다르지만 조지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인구 증가와 산업 발전에 따라 지대가 치솟기 때문에 이자와 임금의 상대적 몫은 언제나 제자리 걸음만을 할 뿐이다. 자본가의 어떠한 신기술과 재능도, 긔ㄹ고 노동자들의 목숨을 건 단결 투쟁도 이 불평등의 원인을 제거할 수 없다. 지대의 악폐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인구가 증가하고 기술 발전이 계속되는 진보하는 사회"에서 토지 가격은 계속 상승하고, 또 앞으로도 상승하리라는 기대 때문에 토지 투기가 일어나 지가를 더욱 상승시킨다. 이렇게 해서 지대는 현존하는 생산조건에서는 노동과 자본에 대한 통상적인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 그러면 생산의 증가 속도가 감소하여 생산이 감축되고 기업은 노동자를 해고시킨다. 공황이 시작된다. 이 공황은 토지 투기가 가라앉고, 기술의 발전으로 지대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생산력이 높아지고, 자본과 노동이 예전보다 더 적은 대가를 받고서라도 생산에 참여할 때까지 계속된다. 공황이 끝나면 다시 진보가 시작된다. 그러면 같은 과정을 밟아 다시 공황이 찾아든다. 여기까지 조지의 세곈느 리카도의 세계만큼이나 우울하다. 그러나 조지는 정치경제학과 세계를 이 비극적인 운명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한 대책을 내놓았다. 그것은 흔히 '토지가치세' 또는 '단일토지세'(single tax)라고 하는 조세제도이다. 지대를 백 퍼센트 세금으로 징수하는 것이다. 그러면 정부는 이것을 유일한 재원으로 삼아 산업과 소비자에 대한 모든 조세를 폐지할 수 있다. 손해를 보는 것은 토지 소유자뿐이다. 그러나 그들의 손해는 불의가 아니라 정의이다. 토지 그 자체는 생산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다. 지주가 지대를 수취하는 근거는 소유권이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다. 지주가 지대를 수취하는 근거는 소유권이라는 법률관계일 뿐이다. 따라서 그들이 그러한 대우를 받는 것은 마땅하다. 조지는 토지의 국유화라는 사회주의적 대수술은 지나친 방법으로 보았다. 그것은 토지의 효율적 이용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누구든 생산에 필요한 토지를 마음대로 이용하도록 하라! 그러나 토지의 소유로 인해 발생하는 불로소득은 모두 세금으로 징수하여 만인의 복지를 위해 사용하라! 참으로 감동적인 선동이다. 그러나 조지의 처방은 '토지 그 자체의 생산력'과 '인간 노동으로 증대된 토지의 생산력' 사이의 구분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은 중대한 문제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토지 소유자의 반대였다. 조지 자신도 이것을 크게 걱정했다. 리카도의 지대이론은 산업자본가들에게 하나의 복음이었다. 하지만 조지의 시대에는 자본가들 자신이 가장 큰 지주였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중산계층 역시 조금씩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지는 리카도와 달리 '풍요한 세계'로부터 "우리 세계의 도덕을 문란하게 하는 자"라는 경멸과 증오를 받아야했다. 맬더스의 인구론과 아일랜드의 진실 헨리 조지의 사상은 우리가 이미 만난 많은 사상가들을 연상하게 한다. 그는 스미드와 마찬가지로 분업과 자유거래의 엄청난 힘을 예찬했다. 그러나 그는 분업과 자유거래에 참가하는 개인의 이기심보다는 그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많은 사람들의 협동 그 자체를 중시했다. 조지는 리카도의 차액지대론을 산업이 발달한 도시에 적용했다. 하지만 그는 지대의 법칙을 불가피한 자연적 질서로 인정하지 않고 그 해악을 제거하려고 했다. 조지는 노동이 임금에 선행하며, 자본이 임금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자본주의가 낳은 소유와 불평등을 혐오한 점에서 마르크스와 닮았다. 그러나 그는 자유시장의 이점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 사회적 정의를 세우려했다. 조지는 유토피아를 꿈꾼 점에서, 그리고 설득과 권고에 의해 현실의 모순을 해결하려 한 점에서 오웬이나 생 시몽을 연상시키지만, 그들처럼 소규모 생산 시대로의 회귀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의 사상은 많은 다른 사상가들의 사상과 닮았지만 누구의 것과는 같지 않다. 헨리 조지는 선뜻 나서는 출판사가 없자 식자공답게 스스로 조판해서 자비로 <진보와 빈곤>을 출판했다. 그러나 이 책은 4 년 동안 미국과 영국 두 나라에서 수십만 부가 팔려 나가는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 책은 도스타인 분데 베블렌이 쓴 <유한계급론>(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과 더불어 19 세기 미국 경제학자가 쓴 책 가운데 백 년 넘게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희귀한 저작으로 남아있다. 대중의 박수갈채를 받은 조지는 캘리포니아의 언론인에서 전국적 명사가 되었으며, 영국까지 건너가 강연하는 등 국제적 명성까지 얻었다. 그러나 풍요한 세계는 그에세 의심에 찬 냉대와 경멸만을 보냈다. <진보와 빈곤>에 내포된 논리적 비약과 단일토지세의 실시에 따르는 현실적 낙관,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존의 경제학에 대한 조지의 독설이 그러한 푸대접을 초래했다. 조지는 <진보와 빈곤>의 첫머리에서 기존의 정치경제학을 서슴없이 비난했다. 정치경제학은 음울한 학문이라 지칭되어 왔으며, 현재 가르치고 있는 내용은 인류 에게 아무런 희망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경제학의 품위와 자유가 제 한되고 그 진리가 왜곡되었으며, 조화는 무시되고 분명히 밝혀야 할 사실이 얼버무 려지고 악에 대해 항의하는 대신 부정의를 옹호하는데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만약 내가 노력한 것처럼 정치경제학이 그 고유한 조화 속에서 자유로워진다면 희망이 넘 치는 학문이 될 것이다. 참으로 자신만만하고 확신에 찬 어조이다. 그런데 헨리 조지는 이런 이야기를 함부로 하기에 적합한 경력을 가진 인물은 분명 아니다. 그는 대학을 다닌 적도 없고 강단에서 남을 가르친 일도 없다. 그의 학계 경력은 <진보와 빈곤>을 발표한 후 캘리포니아대학 경제학부가 신설되었을 때 교수와 학생 앞에서 한 한 차례의 강연이 전부이다. '세상에서 존경받는 정치경제학'에 대해 적당히만 말했으면 그는 교수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지는 이 절호의 기회를 자기 발로 걷어차 버렸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독설은 그의 경력으로 볼 때 전혀 터무니없지는 않았다. 정치경제학은 언제나 노동계급의 임금 인상 노력에 반대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경제학을 공부하는 데는 특별한 지식이나 많은 장서, 값비싼 실험실 따위는 필 요 없다. 교과서나 교수도 쓸데없고 단지 여러분 자신이 생각만 하면 충분하다. 헨리 조지는 오직 인류의 밝은 미래를 실현하려는 신념, 그리고 사회적 불의와 불평등을 제거하려는 유토피안적 이상에 이끌려 <진보와 빈곤>을 집필했다. 그리고 모든 유토피안의 선례에 따라 '가난한 세계'로 부터 더없는 영예를 선사받았다. 그는 가난한 노동자들로부터 '메시아 같은 인물'로 대접받았다. 물론 이런 대접은 조지의 이론이 가진 정밀함이나 현실적 타당성의 대가는 아니었다. 그는 지대를 사회악의 유일한 원천으로 파악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그에 대항했지만 세상 그 자체는 그만큼 비극적이지 않았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자본주의 나라들은 생산력의 진보를 거듭했다. 그러나 국민총생산 가운데 지대의 상대적 몫이 계속 증가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크게 하락하기까지 했다. '가난한 세계'를 감동시킨 것은 지대이론 그 자체의 정확성보다는 밑바닥에 깔린 그의 철학이었다. 헨리 조지의 사상은 대학 강의실이나 도서관이 아니라 그 자신이 파란 많은 인생행로에서 직접 관찰하고 경험한 것에서 나왔다. 그래서 그의 세계는 미국의 역사와 사회상을 반영한다. 19 세기 후반 미국의 '풍요한 세계'는 현존하는 불합리를 정당화하는 나름의 철학과 이론을 가지고 있었다. 그 철학과 이론의 대표자는 영국인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였다. 스펜서는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이론에 도입한 사회진화론자이다. 그는 '자연선택'이라는 다윈의 용어를 '적자생존'으로 변경하여 사회의 진보를


설명했다. 그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점증하는 생계 곤란'의 압력 아래에서 살고 있으며, 이 압력 밑에서 진보하는 자만이 살아 남을 수 있다. 그리고 살아 남은 자는 그 세대의 선택받은 인간이다. 살아 남는다는 것은 곧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며, 쉽게 말해서 부와 권력의 소유자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계의 압력과 경쟁, 그리고 부와 권력의 소유자에 대한 후한 보상이 없으면 사회의 진보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고상한 자비심이나 헛된 이상주의에 이끌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은 진보의 법칙을 저해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이 똑같은 상을 받는다면 누가 잘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겠는가. 우리는 이 철학을 이미 알고 있다. 스펜서는 사상적으로 맬더스의 후예이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너무 많은 사회에서 풍요를 누리는 것이 죄가 아닐까 번민하던 양심적인 부자는 물론이요, 더 많은 몫을 달라는 노동자들의 아우성 앞에서 마땅한 대꾸를 할 수 없어서 불만이던 탐욕스런 자본가까지도 남김없이 구원했다. 그의 이론은 신이 '풍요한 세계'에 내린 또 하나의 복음이었다. 그래서 스펜서의 <사회정태론>(Social Statics)은 미국에서만 수십만 부가 팔렸다. 그러나 '가난한 세계'는 스펜서를 저주했다. 그 세계의 구성원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백만장자의 아들과 경쟁해서 더 큰 돈을 벌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스펜서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불평등한 경쟁의 조건을 전적으로 외면하고서 자신의 이론을 세웠다. 헨리 조지는 '가난한 세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정의와 인간 사회의 보편적 진보를 위해 이 철학의 밑바닥을 뒤엎으려 했다. 그는 <진보와 빈곤>에서 고전학파의 임금기금설을 반박하고, 특히 사회진화론의 근거가 되는 '점증하는 생계 곤란'의 원인, 즉 맬더스의 인구법칙을 비판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조지는 진보와 빈곤이 함께 발생하는 원인을 불합리한 사회제도가 아니라 자연법칙이나 신의 섭리에 돌리는 모든 철학과 이론을 배격했으며, 인간은 이기심이라는 동물세계의 법칙보다 도덕적으로 훨씬 우월한 동기에 살아가는 존재임을 되풀이 강조했다. 맬더스의 이론이 성공한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기득권을 위협하거나 강자의 이익 을 적대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재산의 힘을 휘두르면서 사상을 지배하는 계층을 위로하고 안심시켜 준다는데 있다...맬더스의 인구론의...의도는 현존하는 불평등의 책임이 인간의 제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법칙에 있다고 함으로써 불평등을 정당화 하는데 있었다...맬더스의 이론이 나온 시기는 프랑스 혁명에 의해 기존 사회체제 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기성 권력층은 이를 두려워하던 시기였던 때문에 그들에 게는 맬더스의 이론이 특히 고마운 것이 되었다. 아일랜드는 유럽 국가 중에서 인구 과잉현상이 가장 많이 나타난 나라이다. 아일 랜드 농민들의 극심한 가난과 기근과 해외이민은 문명세계에 대해 맬더스의 이론을 계속적으로 증명해 보였다. 그러나 이론에 의해 형성된 편견이 사람으로 하여금 진 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예로서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지 의문이다...인구 8 백만 명의 아일랜드에 감자 돌림병이...발생했을 때에도 한편에서는 사람들이 굶어 죽었 지만 길가에는 수출용 식량과 고기를 실은 수레가 줄지어 갔다...이것은 생산에 아 무런 기여도 하지 않은 자들이 실제 생산자로부터 짜 내어 징수한 것이었다...아일 랜드 사람들이 영국 경제학자들의 냉혹한 표현처럼 '무분별해서' 감자를 주식으로 삼은 것은 아니다. 감자 이외의 것은 모두 소작료로 강탈당하였기 때문이다...소작 료가 너무 높아 생산물 가운데서 겨우 생활할 정도 이외의 모든 것을 짜 내가는 곳 에서 극빈과 기아가 어떻게 사라질 수 있는가? 인간 행동의 동기를 이기심이라고 보는 견해는 단견이며 이 세상에 가득한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현재도 모르고 과거의 역사도 읽어 보지 않은 사람 의 견해이다. 사람을 움직이려면 무엇에 호소하는가? 돈이 아니라 애국심에 호소한 다...석가가 왕궁을 떠난 것이나 잔다크가 칼을 빼어든 것도 이기심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종교, 애국심, 이해심, 인간성에 대한 열정, 신의 사랑 또는 그밖의 무슨 이 름으로 부르든간에 여기에는 이기심을 극복하고 몰아내려는 어떤 힘이 존재한다.


지대는 모든 악의 근원이다. 헨리 조지는 이러한 철학적 입장에서 빈곤의 일소를 위한 집필활동을 계속했다. <아일랜드의 토지문제>(The Irish Land Question), <사회문제>(Social Problems), <보호무역이냐 자유무역이냐>(Protection or Free Trade), <갈피를 잃은 철학자>(A Perplexed Philosopher) 등 그의 저서는 대부분 맬더스와 스펜서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조지는 자신의 정치적 신조가 된 '토지단일세'의 실현을 위해 미국과 영국, 호주, 아일랜드 등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강연을 했다. 그리고 1886 년에는 가장 거대한 부와 빈곤이 공존하는 '진보와 빈곤의 도시' 뉴욕 시장 선거에 출마했다. 그는 노동단체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후보로서 무려 3 만 4 천 명의 유권자 서명을 받아 입후보 등록을 마쳤다. 조지는 갖가지 악조건 아래서 선전했지만 낙선했다. 나중 대통령이 된 테오도어 루즈벨트 후보를 8 천표 차이로 눌렀지만 민주당 후보 애브람 휴위트에게 2 천여 표를 뒤진 것이다. 뉴욕 시장 후보로서 조지는 '풍요한 세계'의 극렬한 증오와 비난에 직면했다. '무정부주의자', '파괴자', '타인의 권리를 짓밟는 폭군', '약탈자' 등 온갖 흉악한 별명까지 얻었다. 그러나 조지는 자기의 철학과 신조를 버리지 않았다. 끊임없는 집필과 강연과 여해으로 육신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졌지만 1897 년 다시 뉴욕 시장 선거전에 뛰어들었다. 그는 자기의 가슴 속에 간직한 단일토지세의 꿈을 실현해 보고 싶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열화 같은 요청과 지지를 뿌리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생명이 위태롭다는 의사의 만류를 뿌리쳤다. 1897 년 10 월 29 일, 시장 선거를 나흘 앞둔 날 아침 헨리 조지는 못다 이룬 꿈을 안고 세상을 떠났다. 조지는 그 전날 저녁에도 몇 군데서 연설을 했다. 사회자가 그를 '노동의 위대한 친구'라고 소개했을 때 조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노동자의 특별한 친구라고 자처한 적이 없습니다. 노동자에게 특권을 달라는 요구는 하지 맙시다. 노동자에게 특권은 필요 없습니다. 나는 노동자계층을 위해 특 별한 권리를 옹호하거나 특별한 이익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의 평 등한 권리를 대변할 뿐입니다. 생전에 '풍요한 세계'의 냉대를 받은 헨리 조지는 죽은 뒤에도 '존경받는 정치경제학자'들로부터 푸대접을 받았다. 오늘날의 '존경받는 경제학 교과서'에서 그의 이름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조지의 사상이 가진 힘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는 사람이 매우 드물겠지만 세계의 많은 나라에 '헨리조지협회'라는 단체가 조직되어 있다. 이 협회의 한국지부가 조직된 것은 1984 년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한국헨리조지협회'의 주역은 정치인이나 경제학자가 아니라 매우 진지하고 헌신적인 종교인들이다. 이것은 조지 자신이 신앙심 깊은 인물이었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토지 투기와 지가 상승이 서민들의 가슴을 멍들게 하고 한국경제를 어둡게 하는 현실에 분개하여 부동산 투기와 불로소득으로 인한 사회악과 싸우기 위해 이 협회를 조직했다. 각국의 헨리조지협회는 매년 세계대회를 개최하는 등 서로 지원,협력,연대하고 있다. 과문한 탓으로 그 이전의 번역본을 모르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필자가 찾아본 바로, 우리나라에 <진보와 빈곤>이 처음 번역된 것은 유감스럽게도 1989 년이다. 옮긴이의 글을 보면 이 책이 백 년이라는 세월을 건너뛰어 조지 자신이 알지도 못했던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게 만든 사상적인 힘이 어디에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즈음 우리 사회에서는 기존의 체재, 특히 해방 이후 40 여 년간의 체제가 과연 우 리가 기필코 수호할 만한 가치가 있는 체제인가라는 의문이 심각히 제기되고 있어 일종의 위기감마저 느껴지기도 한다...분배의 불공정 문제는 특별한 전문지식이나 소 명의식을 가진 엘리트만이 관심을 갖는 문제가 아니라 시정의 일반 사람들도 누구나 느끼고 있는 보편화된 문제이다. 더구나 토지 가격이 상승하여 가진 자의 불로소득 이 엄청나게 증가하고 서민층의 내 집 마련이라는 소박한 꿈마저 산산조각나는 지경 에 이르자 이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고조되어 아마도 현재 사회갈등의 가장 심각한 원인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이러한 시기에 본인은 헨리 조지의 사상이 시공을 초월하여 설득력을 가진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조지의 사상은 온전히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완전하게 무시당하지도 않았다. 현대 자본주의 나라 정부들은 토지 투기를 막기 위한 각종의 법과 제도를 강화하고 있으며, 불충분하기는 하지만 지가 상승으로 인한 불로소득을 세금으로 흡수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이름으로 조세를 징수하고 있다. 그러나 조지의 말대로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토지 소유는 귀족층의 근거이자 거대한 재산의 기초이며 권력의 원천이다." 그래서 현존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정부는 '부르주아지의 일상사를 처리하는 위원회'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많건 적건 거대한 토지 소유자인 대자본가들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 조지의 호소가 점점 더 강력한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상이 실현되지 않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들은 지가 상승에 따른 불로소득을 세금으로 흡수하려는 모든 형태의 법률적, 제도적 개선을 필사적으로 반대하고 저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지의 이상이 완전히 실현되기 전까지 토지 소유자의 불로소득에 대한 다음과 같은 그의 준엄한 고발장은 대중의 뇌리에서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지대는 과거의 생산물이 아니라 현재의 생산물에서 징수된다. 지대는 노동에 대한 지속적인 부담이다. 인간이 노동을 하는 모든 순간마다 지대가 빠져 나간다. 지대 는 깊은 지하에서 생명을 걸고 일하는 사람에게도, 배를 타고 세찬 파도와 싸우며 일하는 사람에게도 부과된다. 지대는 추위에 떠는 사람에게서 온기를, 배고픈 사람 에게서 음식을, 병자에게서 약품을, 불안한 사람에게서 평온을 빼앗는다. 지대는 인간을 비참하게 한다. 지대는 열 식구가 지저분한 단칸방에서 살도록 만든다. 지 대는 유망한 젊은이를 감옥이나 보호감호소에 갈 후보자로 만든다. 매서운 겨울이 이리를 마을로 몰아넣듯이 지대는 탐욕과 죄악을 사회에 퍼뜨린다. 지대는 인간의 영혼에 대한 믿음을 흐리게 하며 힘들고 어둡고 잔인한 운명이라는 장막으로 정의 롭고 자비로운 창조주의 영상을 가리운다. 지대의 사유화는 과거의 절도일 뿐만 아니라 현재의 절도이며, 이 세상에 태어나 는 어린이들에게서 타고난 권리를 빼앗는 행위이다. 우리는 왜 이 제도를 단숨에 해치우지 않고 머뭇거리는가? 어제, 그제, 그끄제 도둑을 맞았다고 해서, 그것이 오 늘 그리고 내일도 도둑 맞아도 좋은 이유가 되는가? 이러한 도둑을 도둑질할 권리 를 가진 도둑이라고 결론지을 이유가 있는가?...사회 전체가 창출한 지대는 반드시 사회 전체의 것이 되어야 한다. 9. 낭비하라, 그러면 존경을 얻으리라 (영원한 이방인, 도스타인 베블렌) 독점자본과 억만장자의 출현 헨리 조지는 이단자이기는 했지만 틀림없는 미국인이었다. 비옥한 땅이 무한히 펼쳐진 대지에 첫 이주자가 마차를 타고 옴으로써 시작되는 조지의 세계는 미국의 역사를 반영한다. 미국은 이민의 나라이다. 처음에는 종교적 박해와 '인구법칙의 저주'를 피해, 그리고 나중에는 '풍요로운 신세계'에 대한 동경에 이끌려 대서양을 건너온 유럽의 백인들이 이 나라를 세웠다. 노예사냥꾼의 덫에 걸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아프리카 흑인들은 본의 아니게 이 나라의 국민이 되었다. 미국은 여러 모로 낡은 유럽과는 다른 세계였다. "모든 재산은 강탈한 것"이라는 혁명가 프루동의 말은 미국의 역사에 꼭 들어맞는다. 유럽에서 온 백인들은 콜롬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이전에 이미 수천 년 동안 그 땅에서 살아온 원주민의 권리를 부정했다. 그들은 인디언들의 촌락을 파괴하고 그들을 죽이고 황량한 '보호구역'으로 내몰았다. 유럽인의 문명화된 신조에 의하면 유색인종인 인디언은 '인간'이 아니었고 땅에 대한 그들의 권리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백인들은 '신대륙'의 모든 토지를 듬성듬성한 고지대에 마을을 이루어 정착한 다음에야 수목이 우거진 비옥한 땅에 도전했다. 그래서 비옥한 토지에서 메마른 토지로 경작이 확대된다고 한 리카도의 지대이론은 여기서는 어울리지 않았다. 맬더스의 인구법칙도 신경쓸 일이 아니었다. 이주자는 계속해서 늘어났지만 식량은 더 빠른 속도로 증산되었기 때문이다. 일할 능력을 가진 자는 누구나 쉽게 자영농이 될 수 있었다.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예언 가운데서 오직 낙관적인 것만이 이 신대륙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중세적


신분제도가 존재하지 않고 산업과 거래의 자유에 대한 어떤 중대한 장애물도 없었던 이 이민자의 나라에서 스미드가 강조한 자유시장과 분업의 힘은 전례 없이 크고 풍요로운 열매를 맺었다. 비옥한 토지와 풍족한 천연자원, 광대한 시장과 일할 의욕에 넘치는 사람들, 이 모든 조건이 스미드의 축복을 실현시켰다. 고전파의 경제학은 이곳에서는 학문을 넘어 하나의 신앙이 되었다. 그래서 존 베이츠 클라크를 비롯한 똑똑한 미국의 수재들은 유럽의 '선생님들'을 추종하면서 '보이지 않는 손'의 신화를 완성하는데 열심히 봉사했다. 모든 사람들이 너나없이 '풍요한 미래를 가는 기차'의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 '기회의 나라'에서 새롭게 발생한 불길한 징후를 눈여겨 보지 않았다. 헨리 조지의 격정어린 항의도 당시의 들뜬 낙관적 풍조를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남북전쟁으로 노예제도라는 최후의 신분제도를 없애 버리고 성조기 아래에서 거대한 대륙을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한 미합중국에서는 거대한 독점기업이 탄생했다. 철도, 선박, 해운, 석유, 철강, 자동차, 금융 등 모든 주요 산업은 주식회사라는 새로운 형태의 독점기업 수중에 들어갔다. 각 산업부문의 주요한 독점기업들은 카르텔, 트러스트 등 독점연합체를 결성하여 상품의 공급량과 가격을 마음대로 조작했다. 독점에 대한 거센 항의가 독점금지법이라는 견제장치를 만들어 낸 것은 그 폐해가 만인의 눈에 명백히 드러난 이후였다. 독점은 일찍이 존재한 적이 없는 억만장자들을 배출했다. 록펠러, 카네기, 모건, 밴더빌트, 포드 등의 유명한 부자들은 모두 그러한 법인기업과 독점체의 지배자들이었다. 이들 '산업의 왕'은 싸게 만들어 비싸게 팔아 거부를 이룩했다. 경제학자들이 '검약과 저축'이라고 부른 과정의 실체적 진실은 독점력을 이용하여 소비자를 등치거나 주주를 속여먹거나, 아니면 복잡한 금융제도를 이용한 횡령, 또는 전쟁을 방불케 하는 잔인무도한 방법을 써서 경쟁기업을 잡아먹는 그런 과정이었다. 이 '산업의 왕'들은 광대한 토지를 사들여 가장 거대한 지주가 되는 동시에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줌으로써 거대한 고대왕국을 능가하는 대가문을 건설했다. 왈라스의 '자유시장 균형'은 무너졌고 '전지전능한 경매인'은 무장해제되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되지는 못하였다. 19 세기 후반 미국경제를 주도한 철도산업의 예를 보자. 미국의 산업중심지를 종횡으로 연결하는 철도망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철도 건설업자, 레일을 제작한 철강업자, 철도의 소유자, 받침목 공급업자, 철도화물 운송업자, 철로변의 토지 소유자 등 관련 산업의 자본가와 지주, 또는 그들의 일을 대신하여준 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었다. 심지어는 열차강도까지 한 건만 올리면 벼락부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자기 손으로 레일을 제작한 공장노동자, 레일을 깐 건설노동자, 열차를 운행한 운수노동자, 그리고 비싼 요금을 물면서 농산물을 탁송한 농민들은 결코 철도 덕분에 부자가 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모든 산업분야에서 똑같이 일어났다. 미국의 '풍요한 세계'는 유럽에서보다 훨씬 풍요했다. 그러나 '가난한 세계'는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미국의 노동자들도 유럽의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의 단축과 근로환경의 개선을 위해 파업과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지도자들은 교수대와 감옥에서 '불온한 반란'의 대가로 생명과 젊음을 빼앗겼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조국이 없었다." 이 때 도스타인 분데 베블렌이라는 촌스러운 이름과 역시 촌스러운 외모를 가진 학자가 나타나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이야기했다. 그의 견해는 이단적인 면에서는 헨리 조지와 막상막하이고 '괴상한' 점에서는 조지를 능가했다. 그러나 그는 조지와 달리 '풍요한 세계'로부터 저주와 비난을 받지 않았다. 그의 사상은 이단적이었지만 그 인간적 면모가 이단자라기보다는 '이방인'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이지만 영어를 외국어로 배운 국적 불명의 노르웨이 이민 2 세였다. 그에게 사회는 자신이 살아가는 터전이 아니라 자신과는 동떨어진 관찰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는 먼 혹성에서 날아와 가장 문명화된 지구인의 생활을 구경하는 외계인처럼, 또는 폴리네시아 미개부족을 연구하는 인류학자처럼 냉정한 태도로 19 세기말의 미국사회를 관찰하고서는 <유한계급론>(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이라는 보고서를 세상에 내놓았다. 유한계급과 과시적 소비 <유한계급론>은 현대의 부자에 대한 연구서이다. 그런데 빈민과 달리 부자에 대한 연구는 쉽지가 않다. 가난한 사람의 생활은 언제나 가장 손쉬운 사회조사의 대상이다. 몇 푼 안되는 선물만 준비하면 조사요원은 면접조사의 대상을 쉽게 구할 수 있으며 그들 일상생활의 가장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남김없이 알아낼 수 있다. 그러나 부자들에게는 그런 것이 '신성한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범죄행위로 간주된다. 아무리 유능한 조사요원도 부잣집 문전을 마음대로 넘나들 수는 없다. 경비원의 제지나


불법주거침입이라는 법률의 위협 앞에서 사회조사 따위가 설 자리는 없다. 그런데도 베블렌은 '풍요한 세계'의 구성원들에게 '유한계급'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그들 삶의 가장 시시콜콜한 면까지 남김없이 파헤치는 '불경스러운 짓'을 학문 연구라는 이름 아래 해치웠다. <유한계급론>은 학문적 가치 이외에 희귀성이라는 가치를 덤으로 가진 저작이다. 베블렌은 허버트 스펜서와 같은 사회진화론자였는데 그가 사회를 바라본 태도는 다음 인용문에 잘 나타나 있다. 인간의 사회생활은 다른 종의 생활과 꼭 마찬가지로 생존경쟁이며, 따라서 도태적 적응의 과정이다. 사회구조의 진화는 여러 제도의 자연도태 과정이었다. 인간의 제 도나 성격에 대해 지금까지 이루어져 왔거나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진보는 대체로 최적의 사고나 습관의 자연도태 탓으로 돌릴 수 있으며, 또 제도의 변화나 사회의 성장과 더불어 점차로 변해 온 환경에 대한 개인의 어쩔 수 없는 적응과정 탓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그리하여 변화하는 제도는 차례차례로 최적의 기질을 가지 고 태어난 개인의 한층 더한 도태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또 새로운 제도의 형성을 통해 개인의 기질이나 습관이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도록 더욱 더 촉진한다. 베블렌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제도적 환경'이다. 사람들은 모두 특정한 제도 아래에서 생활하는데 그 제도에 가장 잘 적응하는 자는 성공하고 그렇지 못한 자는 낙오한다. 그리고 제도 그 자체도 이같은 생존경쟁과 적응의 영향으로 인해 변화 발전한다. 록펠러와 같은 억만장자 산업왕은 자본주의라는 제도적 환경의 적자이다. 그는 '보통 사람'과 구별된다. 그런데 유토피안과 마르크스, 헨리 조지 등은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불평등한 경쟁의 조건에 처해 있다는 점을 중시했다. 그래서 그 불평등의 해소 또는 경쟁 자체의 폐지를 추구했다. 반면 맬더스와 시니어, 신고전파 경제학자나 스펜서 등 풍요한 세계의 철학자들은 경쟁조건의 불평등을 부정하거나 합리화했다. 베블렌은 어느 편도 들지 않았다. 그는 남들이 '높은 문명'이라고 하는 것을 '야만문화의 높은 단계'라고 했다. 이런 분류법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야만문화의 평화적 단계'에 지나지 않았다. 베블렌의 '야만적 세계'에서 경쟁조건의 불평등이나 약자에 대한 강자의 수탈과 지배는 필연적인 현상이어서 인위적으로 제거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경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야만문화의 낮은 단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야비하고 무지막지한 것이므로 성공한 적자들에 대한 도덕적 예찬이나 숭배는 가당찮은 짓이다. 요컨대 그는 '풍요한 세계'에 대해서나 '가난한 세계'에 대해서난 똑같이 공평하게 냉정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누구의 적도 동지도 아니었다. 베블렌은 야만문화의 역사에 등장하는 모든 지배계급을 '유한계급'이라 했다. 유한계급 제도는 야만문화의 비교적 높은 단계에서 가장 고도로 발달한다. 봉건시대의 유한계급은 신분적으로 뚜렷이 구별되며 대개 정치, 전쟁, 종교의식과 관련된 비생산적 직업에 종사했다. 유한계급은 자신의 높은 지위를 경제적으로 표시하기 위해 모든 생산적 직업으로부터 현격한 거리를 유지한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경제적 특징은 생산적 노동으로부터 면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라는 야만문화의 평화적 단계에서는 '부재소유자---이것은 생산에 종사하지 않으면서 자본이득으로 살아가는 자본가계급을 베블렌식으로 표현한 말이다.---가 유한계급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된다. 그리고 생산적 노동을 면제받지 못한 사람, 즉 유한계급에 끼지 못한 사람은 '보통 사람'이다. 여기까지 보면 <유한계급론>은 경제학보다는 사회학이나 인류학과 가깝다. 베블렌의 경제학적 통찰력을 유한계급의 소비생활을 묘사한데서부터 그 위용을 드러낸다. 장원제도나 신분제도가 사라지고 익명의 수백만의 다중이 모여 사는 자본주의적 대도시에서는 유한계급이 자신의 높은 지위를 과시하기가 쉽지 않다. 부와 실력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없다. 그 부와 실력이 남의 눈에 잘 보이도록 해야한다. 그래서 야만문화의 오랜 인습에 따라 자신은 물론 가족과 식솔들을 일체의 생산적인 노동으로부터 격리시킨다. 야만문화에서 생산노동은 "존경할 만하고 가치있는 생활"과 양립할 수 없다. 자본주의 유한계급의 훌륭한 신사는 사유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돈벌이에 몰두하는 것은 생필품이나 육체적 안락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런 동기는 가난한 보통 사람에게나 중요하다. 유한계급의 신사로 하여금 재산 축적에 몰두하게 하는 힘은 "처음부터 부에 따른 상하의 차별이며 일시적인 예외가 아니고는 다른 동기가 수위를 차지한 적이 없다." 더욱 낮은 야만문화에서는 주먹다짐이나 칼싸움, 결투, 전쟁 따위의 '힘겨룸'에서 승리하는 것이 유한계급의 일원이 되거나 주도권을 장악하는 비결이었다. 이러한 습관은 현대 도시의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깡패들의 패권 다툼에 가장


뚜렷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유한계급의 신사에게 중요한 것은 육체적인 힘겨룸이 아니라 '금전적 겨룸', 즉 돈싸움에서 승리하는 일이다. 보통 사람과 유한계급의 신사는 상이한 동기에 의해 경제활동에 참가한다. 전자는 생필품과 육체적 안락의 획득을 위해 일하지만 후자는 '금전적 겨룸'에서 이기기 위해 부를 축적한다. 이것은 베블렌의 독특한 이분법이다. 이러한 이분법은 소비에 관해서도 똑같이 타당하다. 보통 사람은 생명의 유지와 육체적 안락이라는 효용을 얻기 위해 재화를 소비하지만 유한계급의 신사는 자신의 부와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 소비한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과시적 소비', '과시적 레저'이다. 오늘날 베블렌을 모르는 보통 사람들도 과시적 소비라는 용어는 아는 경우가 많다. 베블렌을 19 세기 후반 미국 유한 신사들의 과시적 소비에 대해 수많은 사례를 제시했다. 사람들은 베블렌의 시각을 빌어 그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더 많은 사례를 쉽게 찾아냈다. 오늘날 사람들이 단지 자기의 부유함을 나타내기 위해 쓸데없는 고가품을 사들이는 이웃을 볼 때 '과시적 소비'라는 빈정거림을 보내게 된 것은 바로 베블렌의 공로이다. 우리는 상류사회의 풍경을 보여 줌으로써 보통 사람들을 사로잡는 '꿈의 공장' 헐리우드 영화들 덕택에 과시적 소비의 진면목을 구경할 수 있다. 어떤 서부극의 주인공은 남의 이목이 번다한 술집에서 백 달러 지폐로 담배를 말아 피우는데 자신이 캘리포니아의 금광에서 노다지를 캔 사실을 광고하는 방법치고는 퍽 애교가 있다. 카지노에서 수십만 달러를 날리고도 얼굴 가득 미소짓는 신사, 애완견을 위해 열린 귀부인들의 개파티, 수백만 달러를 들여 지은 중세기 성과 같은 저택, 호화판 요트, 값비싼 고대 유물과 세계적 명화를 수집하는 '고상한 취미', 이런 것들 역시 자기의 금전적 실력을 과시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밴더빌트, 제이 굴드 등 열차 고객의 호주머니를 털어 거부를 모은 미국의 유한 신사들은 영국의 귀족 집안에 딸을 시집보내는데 각각 1 천만 달러와 5 백 50 만 달러를 지출했다. 3 백만 달러를 투자하여 시카고대학을 세운 석유왕 존 D. 록펠러의 행위는 '과시적 소비' 가운데 그나마 품위있는 사례였다. 유한계급의 신사는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금전적 겨룸'에서 우위를 차지하기에는 벅차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침내는 '대행적 소비자'를 등장시킨다. 그의 아내와 자식, 친구와 친지, 하인, 나아가 금전적 겨룸의 경쟁 상대까지도 이 유한 신사의 무거운 짐을 덜어 주기 위한 대행적 소비에 한 몫을 하게 된다. 베블렌 자신의 표현은 이러하다. 가치있는 재화의 과시적 소비는 유한계급의 세속적 명성의 수단이다. 부가 그의 손 에 축적되면,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그의 부유함을 충분히 증명하기 어렵다. 그리하여 귀중한 선물을 하거나 값비싼 향연과 연회를 베풀어 친구나 경쟁 상대의 도움을 얻으려고 한다...선물을 주고받는 축제나 무도회와 같은 돈드는 향연이 특히 이러한 목적에 적합하다...경쟁 상대는...초청자를 위해 대신 소비함과 아울러 초청 자가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남아도는 좋은 물건을 소비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인이 되고, 또 초청자가 예의 바른 사람이라는 사실의 증인도 된다. 값비싼 것이 아름답다. 베블렌의 이 '심술궂은 야유'가 도대체 경제학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베블렌의 야유는 유한계급의 과시적 소비에 대한 것인 동시에 공리주의철학과 효용이론을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유한계급의 신사가 육체적 안락이 아니라 '금전적 겨룸'에서의 승리라는 정신적 쾌락을 위해 가치있는 재화를 소비하는 것은 신고전파 효용이론에 위배되지 않는다. 정신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이 이론은 인간에게 심리적 만족을 가져다 주기만 하면 모든 재화의 소비를 '합리적인' 것으로 승인한다. 베블렌은 논리적으로 이를 인정함으로써 거꾸로 그 약점이 드러나게 하는 방법으로 효용이론을 공격했다. 그는 <유한계급론>에서 '과시적 소비'를 '낭비'라고 하면서, 그 '낭비'라는 말 속에는 결코 도덕적 경멸감이 내포되어 있지 않다는 단서를 붙였다. 말하자면 보통 사람들이 '낭비'라고 생각하는 것이 경제이론에서는 '합리적 지출'로 간주되는데, 자신이 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순전히 다른 적절한 용어가 없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경제이론의 입장에서 본다면, 문제의 지출이 합리적이라는 것은 다른 어떤 지출에 비교해서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의미한다. 이러한 소비를 여기서 '낭비'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생활이나 인류의 복지 전체에 이바지하지 않기 때문이지, 그 러한 소비를 선택하는 소비자 개개인의 입장에서 노력이나 비용이 낭비나 오용이기 때문은 아니다...그 소비자가 어떠한 형태의 지출을 선택하고, 그가 무엇을 위해 그 것을 선택하였든, 그것은 그의 선호에 따른 것이므로 그에게는 효용이 있는 것이다. 소비자 개개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고유한 경제이론의 범위 내에서는 낭비라는 문제 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의 학술용어로 사용한 '낭비'라는 말은 이러한 과 시적 낭비의 기준 아래에서 소비자가 추구하는 목적에 대한 경멸을 의미하지 않는 다. 이것은 베블렌이 즐겨 사용한 심술궂은 논법이다. 과시적 소비는 경제이론상 결코 재화의 낭비가 아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이것을 낭비라고 말한다. 잘못은 경제이론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에게 있다. 그러나 주의 깊은 독자들은 베블렌 자신의 진심이 그 반대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가 비난하는 것은 보통 사람의 가치관이 아니라 유한계급의 낭비와 그것을 옹호하는 경제이론이다. 베블렌에 의하면 '보통 사람'은 영업적 또는 약탈적 재능이 아니라 '제작 본능'(Instinct of Workmanship)에 입각하여 무언가 생산적인 노동에 종사한다. 유한계급의 과시적 소비를 비난하는 것은 경제이론이 아니라 바로 이같은 제작 본능이다. 제작 본능은 다른 사정이 허용한다면, 생산적인 능력이나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모든 것을 호의적으로 보게 한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물질이나 노동의 낭비를 경 멸하는 마음을 가지게 한다...낭비에 관해서 일반적으로 가해지는 비난은, 보통 사 람이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는 모든 인간의 노동이나 인간의 기쁨 속에서 전체의 생활이나 복지의 증진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경제적 사실이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비개인적 효용, 즉 인류 전체의 입장에서 본 효용이라는 시금석에 의해 인정받아야 한다. 남과 비교한 개인의 상대적, 경쟁적 이익은 경제적 양심을 만족시키기 못한다. 그러므로 경쟁적 소비는 이러한 양심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베블렌은 자신이 유한계급의 과시적 소비를 도덕적으로 비난할 생각이 없음을 되풀이 강조했다. 그는 과시적 소비를 합리화하는 경제이론에 대해서는 한층 강력한 공세를 취했다. 효용이론에 사람들은 재화의 가격이 낮을수록 그것을 더욱 선호하고 더 많이 구입한다. 그러나 유한계급의 소비에서는 이 법칙이 통용되지 않는다. 소비가 단지 '금전적 겨룸'의 수단으로 사용될 때 값싼 소비는 유한 신사의 명예를 더럽힌다. 그래서 유한 신사는 값비싼 재화를 아름답다고 간주함으로써 과시적 소비를 고상한 탐미적 취미로 승화시킨다. 베블렌은 또 한번 재치있는 논리를 전개했다.

그러나 따르면 과시적 재화의 자신의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확실해진 일반적 법칙은, 모든 가치 있는 것이 우리들 의 예술적 감각에 호소하기 위해서는 아름답다는 요구와 비싸다는 요구가 일 치해야 한다는 것이다...재화는 값비싼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습관에 더욱 익 숙해지고, 또 아름다움과 명성을 혼동하는 습관 때문에 아름답지만 비싸지 않은 물건은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다. 유한 신사에게는 "비싼 것이 아름답다." 베블렌의 말대로 아름답기 때문에, 다시 말해 그 아름다움에서 큰 심리적 만족을 얻기 때문에 비싼 값에 사는 것이 아니라, 비싸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큰 효용을 얻을 있다면, 효용의 크기가 가격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격이 효용의 크기를 결정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효용이론은 참 큰일이 난 셈이다. 이렇게 되면 경제이론은 모든 것을 다 설명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세상사를 거꾸로 보고 있는 것이다. 베블렌은 칼턴대학에서 배운 존 베이츠 클라크의 경제이론을 평하는 한 논문에서, 자본주의의 역사적 특수성을 외면한 신고전파의 쾌락주의와 균형이론을 이렇게 조롱했다. 예컨대 조개를 잡기 위해 마법적인 주문을 외면서 해초와 파도 사이를 갈퀴질하


는 알류산 열도의 원주민들도 지대, 임금, 이자의 쾌락주의적 균형이라는 재주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빈틈이 없다. 이러한 종류의 경제이론은 진실로 어 떠한 경제적 상황에 대해서도 빈틈이 없다. 굉장한 학식을 지닌 '건달 박사' 베블렌의 인간적 면모는 그의 이론만큼이나 괴상하다. 그는 1857 년 위스콘신주의 시골 농장에서 태어나 미네소타주의 노르웨이인 개척촌에서 살았다. 그의 부모와 이웃은 노르웨이에서와 똑같은 방식으로 살았고 노르웨이 말을 사용했다. 베블렌은 열두 자녀 중 여섯째였다. 그의 부모는 억척스런 노르웨이 농부로서 상당히 큰 자영 농장을 이루었지마 자식 교육에도 농사일 못지않게 정성을 기울였다. 그들은 열일곱 살 먹은 베블렌을 목사로 만들기 위해 미네소타의 칼턴대학에 보냈다. 베블렌은 칼턴대학의 존 베이츠 클라크 교수에게 경제학을 배웠다. 그러나 대학에서도 베블렌은 재능은 있으나 엉뚱하고 괴팍한 생각을 즐기는 이방인이었다. 그가 동부의 도시인 생활과 부자들의 행태를 냉정하게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은 유년기와 소년기에 경험한 노르웨이식 농촌생활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칼턴대학에서 베블렌이 어떠한 학문적 성과를 거두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촌스러운 외모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여성들의 인기를 모았던 이 이방인은 발랄하고 지성미 넘치는 학장의 딸 엘렌과 로맨스를 일으켰는데 둘은 1888 년 결혼했다. 그러나 베블렌의 다양한 여성편력과 고독하고 무관심한 성격 때문에, 후일 이 로맨스는 격렬하고 잦은 부부싸움과 별거를 거쳐 결국 이혼으로 끝나고 말았다. 베블렌은 칼턴대학을 졸업한 후 존즈 홉킨스대학을 거쳐 예일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는 고향으로 돌아가 '책만 읽는 건달'로서 무려 7 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이 '건달 박사'는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루터교 찬송가, 인류학, 식물학, 신학 등 별별 책을 다 읽었다. 그러나 사회의 어느 곳에서도 촌스러운 외모와 괴팍스런 생각을 지닌 이 학자를 불러주지 않았다. 보다 못한 나머지 가족들은 회의를 열어 그에게 다시 학계로 돌아가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 사이 벌써 34 세가 된 베블렌은 텁석부리 수염에 곰가죽 모자를 쓰고 골덴 바지를 걸친 사냥꾼 같은 차림새를 하고서 코넬대학 경제학부의 보수적 학자인 로렌스 래플린을 찾아갔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보수적 경제학의 중심인물이 래플린은 총장의 특별 허가를 얻어 이 사나이를 조수로 채용했고, 다음 해에 창설된 시카고대학의 경제학부장으로 초청되었을 때는 연봉 5 백 20 달러짜리 강사 자리까지 만들어 주었다. '사람 좋은 존 D. 록펠러'가 3 백만 달러라는 거금을 들여 세운 '과시적 소비'의 상징물인 시카고대학에서 베블렌은 '불경스럽게도' <유한계급론>을 착상하고 저술했다. 베블렌은 거대한 도서관을 가진 시카고대학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굉장한 학식을 지닌 베블렌 박사'라는 칭호를 얻었고 새로운 경제학 잡지를 편집하는 영광도 누렸다. 그러나 대학당국은 그가 대학의 명예를 빛낼 만한 일을 하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물론 베블렌은 그런 의사를 조금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본의 아니게 1899 년의 첫 저서 <유한계급론>으로 대학당국이 만족할 만큼 시카고대학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미국의 독서계에 일대 충격을 일으켜 당시 지식인 사회의 필독서가 되었던 것이다. <유한계급론>이 나오자 급진파와 지식인들은 그를 예찬하고 숭배했다. 그러나 베블렌은 그들의 찬사를 멸시했다. 경제학자들은 그가 사회주의자인지를 의심하였다. 그는 부자들을 냉혹하고 신랄하게 조롱하였지만 유한계급을 타도하자고 선동하지는 않았다. 미개사회를 연구하는 인류학자는 절대로 그 사회의 질서에 개입하지 않는 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베블렌을 '미국의 마르크스'라 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마르크스의 세계는 적대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계급들이 상대방의 목에 칼끝을 들이대고 싸우는 투쟁의 무대였고, 신고전파의 세계는 자유거래를 통해 만인이 만인에게 이익을 주는 평화로운 낙원이었다. 그러나 베블렌의 세계는 낙원도 전쟁터도 아니다. 한편에는 제작 본능에 따라 생산적 노동을 하는 보통 사람, 기술자, 기능공의 세계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생산적 노동을 면제받고 과시적 소비에 몰두하는 유한계급, 영업세력, 기업가의 세계가 있다. 두 세계의 이해관계는 서로 대립한다. 그러나 계급투쟁과 혁명이 필연적인 사태는 아니다. 야만문화의 오랜 습관에 따라 보통 사람들은 유한계급을 증오하고 타도하려 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이 그 대열에 끼어드는 쪽을 선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블렌의 세계는 마르크스의 세계와 달리 안정되어 있다. 베블렌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큰 고통을 받고 있는 노동자계급이 제작 본능에 따라 생산적 노동에 종사하는 집단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을 사회 진보의 주역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사회혁명에


대한 비관적 판단은 유한계급과 '가난한 세계' 둘 모두에 대한 그 나름의 관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유한계급은 보수적인 계급이다...문화양식의 변화에 대한 이 계급의 반대는 본능적 인 것이며 주로 물질적 이해타산에 의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기존의 행동방식이 나 사물을 보는 방식으로부터의 괴리에 대한 본능적인 반발이다. 생활습관이나 사 고습관의 변화는 모두가 싫증나는 것이다...찢어지게 가난한 사람이나 힘겨운 일상 생활에 모든 힘을 빼앗기는 사람은 내일 이후의 일을 생각할 만큼의 여유가 없기 때문에 보수적이다. 이것은 아주 부유한 사람이 오늘의 상황에 불만을 품을 여지가 없기 때문에 보수적으로 되는 것과 꼭 마찬가지이다. <유한계급론>은 베블렌에게 높은 명성을 안겨 주었으나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다. 그의 이단적 사상은 보수적인 미국학계와 역시 보수적인 시카고대학에서 호감을 얻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너무나 많은 여인들의 사랑을 받았고, 또 그때마다 그것을 냉정하게 거절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베블렌은 1906 년에 15 년간 몸담았던 시카고대학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다시 방랑이 시작되었다. 스탠포드대학과 미조리대학, 뉴욕의 '신사회과학원'등을 떠도는 동안 그는 왕성한 집필활동을 계속했다. <영리기업의 이론>(The Theory of Business Enterprise), <제작 본능론>(The Instinct of Workmanship), <독일제국과 산업혁명>(Imperial Germany and the Industrial Revolution), <미국의 고등교육>(Higher Learning in America), <부재소유제도>(Absentee Ownership)등은 모두 <유한계급론>에서 제시한 '이원적 세계관'에 기초하여 자본주의의 경제, 사회, 정치, 문화를 총체적으로 규명하려 한 역작이다. 그러나 미국사회는 더 이상 <유한계급론>에 대해서 보낸 것과 같은 박수갈채를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이방인이 미국의 풍요한 사회로부터 박수를 받아야 할 이유는 애초부터 전혀 없었다. 그는 <유한계급론>의 곳곳에서 현대의 부자들을 야만인들과 비교하여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만약 유한계급의 신사가 베블렌을 위대한 학자라고 말한다면 그는 <유한계급론>의 현학적 문장과 기묘한 논리에 속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대표적인 비유를 몇 가지로 들어 보자. 산보용 단장을 들고 다니는 습관을 하나의 현대생활 양상으로만 생각한다면 하찮 고 대수롭지 않은 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이 관습이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계급---으레 산보용 단장을 들고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는 계급은 고유한 유한계급 의 사람들과 스포츠맨과 하층계급의 건달들이다...산보용 단장은 그것을 가진 자의 손이 유용한 일에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광고하는데 도움이 되므로 한가함의 증거로서 효용을 갖는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무기이기도 하므로 야만부족의 절 실한 필요를 충족시킨다. 이러한 구체적이고 원시적인 공격 수단을 손에 쥐고 있 다는 것은 조금이라도 용맹심을 가진 자에게는 매우 유쾌한 일이다. 결투는 유한계급의 제도이다. 결투는 본질적으로 견해 차이를 해결하는 최후의 수단이며 어느 정도 일부러 싸움에 의지하려는 것이다. 문명국에서 결투는 세습적 유한계급이 존재하는 경우에만 예사로 일어나며, 거의 전적으로 유한계급 사이에 서만 이루어진다...결투에 의존하려는 자는 명문 태생의 신사와 툭하면 주먹을 휘 두르는 건달뿐이다...즉, 그는 일시적으로 무의식중에 고대의 습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근대사회 도덕기준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가 재산권의 신성함이라는 것이 다. 사유재산권의 신성불가침을 유지하려는 습관이 재화의 과시적 소비에서 얻어 지는 좋은 평판을 위해 부를 구하려는 또 하나의 습관과 상충한다는 명제는 주장 이나 설명이 없이도 동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재산권에 대한 대부분의 침해, 특히 눈에 뜨일 정도의 침해가 이 항목에 속한다. 그러나 많은 재산을 침해자에게 안겨 주는 종류의 재산권 침해의 경우, 침해자가 소박한 도덕적 기준만을 근거로 한다면 당연히 받아야 할 극형이나 극단적 비난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일이고 하나의 속담으로까지 통용된다. 범죄를 통해 거액의 부를 손에 넣는


도둑이나 사기꾼은 좀도둑보다도 법률의 엄벌을 면할 기회가 많다...특히 그 장물 을 높은 신문을 가진 사람처럼 소비하는 것은 세련된 예절을 아는 사람들에게 큰 호소력을 가지며 그 사람의 범행에 대한 도덕적 적대감을 완화시키는데 크게 도움 을 줄 정도이다...그러한 경우 관례적인 과시적 낭비를 시인하려는 습관이 사유재 산의 침해를 비난하려는 습관을 가로막아 때로는 신상필벌을 모호하게 만들 정도 이다...사유재산의 불가침이라는 관념에 밀접하게 붙어 다니는 도덕은 대부분 그 자체가 부를 높이 보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의 심리적 침전물이다. 위대한 이방인의 지켜지지 않은 유언 야만사회의 이방인 도스타인 베블렌은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볼 때 결코 행복한 삶을 누리지 못했다. 그는 첫번째 아내 엘렌과 이혼한 후 안네 브래들리라는 온순하고 기품있는 여성과 결혼했지만 그녀마저도 결혼 6 년 만에 심한 정신병에 시달리다 사망했다. 제 1 차 세계대전 중에는 워싱턴에서 전시 식량행정을 취급하는 일을 자원했지만 신통치 않았다. 뉴욕으로 돌아와 자유주의적인 잡지를 운영하였는데 그것도 실패했다. 베블렌은 충실한 몇몇 제자들에게 생계를 의지해야 할 만큼 곤궁해졌다. 뒤늦게 미국경제학회장 자리가 주어졌지만 베블렌은 "정말 필요한 때는 주지 않고서..."라는 말로 그것으 거절했다. 늙고 지치고 실의에 찬 베블렌은 1920 년대 중반에 캘리포니아의 작은 오두막으로 돌아와 칩거했다. 집필도 그만두었고 어린 시절의 고향을 연상시키는 잡초 우거진 오두막에서 혼자 사색에 잠기는 일로 소일했다. 걱정이 되어서 찾아오는 친구와 제자들을 냉담하게 대했고 추종자와 독자들이 보내 온 온갖 편지에도 일체 답장을 하지 않았다. 베블렌은 대공황이 임박한 1929 년 8 월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인생과 사상이 그러하였듯 그의 최후 역시 이방인다운 것이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간 한 제자는 잡초가 우거지고 들쥐가 들락거리는 베블렌의 오두막에서 다음과 같은 유서를 발견했다. 내가 죽거든 가능한 한 어떤 종류의 예배와 의식도 하지 말고 또 되도록 신속하 고 값싸게 화장해 주기 바란다. 내 재는 바다 또는 바다로 흘러가는 큰 강에 뿌려 다오. 어느 때 어느 곳을 막론하고, 명칭이나 성격이 어떠한 것이든, 묘석, 묘판,비 명, 초상, 액자, 비문 또는 기념비를 세워 나를 기념하거나 나의 이름으로 건립하 지 말라. 나의 추도문, 회상기, 초상 또는 전기, 나에게 온 편지 또는 내가 쓴 편지 도 인쇄하거나 공개하지 말고, 또 어떠한 방법으로도 재생, 복사하거나 배포하지 말라. 많은 위대한 인물의 유언이 그러했듯 그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의 재는 태평양에 뿌려졌지만 그를 회상하고 추도하는 글은 무수히 쓰여졌으며 지금도 쓰여지고 있다. 이 이상한 이방인의 이단적 사상은 자본주의의 전모를 일목요연하게 해명하지는 못했지만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을 제대로 보게 하는데 기여했다. 그는 살도 피도 없는 이론으로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고 '야만적 문화'를 신성화하려는 '존경받는 경제학'의 허점을 통박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경제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전승되어 온 낡아빠진 편견과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하고 있는 행동의 동기와 원인을 밝히는 일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별 생각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일상적인 사회현상을 면밀하게 파헤쳐 인생과 사회의 진실한 한 단면을 드러내 보인 '외계로부터 온 방문객'이었던 것이다. 경제사상의 역사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질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10. 제국주의는 세계를 망친다. (세계대전의 예언자, 존 앗킨슨 홉슨) 제국주의---정복과 약탈의 시대 아담 스미드가 <국부론>을 통해 당시의 권력층을 지배하던 중상주의적 편견을 통박한 이래 상이한 세계관과 계급적, 민족적 이익을 대변하는 경제학자들 사이에 갖가지 논쟁이 전개되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 논쟁의 주요한 당사자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들이 묘사한 세계는 살벌한 전쟁터에서 조화로운 낙원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채로운 형상을 지녔다. 그 모든 세계는 실제로 존재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을 부분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그들의 사상은 많든 적든 진리의 한 측면을 포착하고 있다. 그들의 이론 역시 완전무결하지는 않지만 또한 전혀 터무니없지도 않다. 그들은 한결같이 자기가 발견한 사회법칙이 인간 사회의 보편적인 법칙임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론은 하나같이 '유럽적'이다. 그들은 제각기 독특한 개념을 사용하여 자신의 이론체계를 세웠지만 그 이론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자본주의 사회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리카도의 자유무역이론 역시도 '문명화된' 유럽 나라들 사이의 상품 거래를 설명하는 이론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론을 적용할 수 있는 자본주의 자유시장은 어디까지나 지구 표면의 극히 일부분인 유럽에만 존재하고 있었다. 19 세기 후반에 북아메리카와 일본과 러시아제국이 산업화의 대열에 끼어들기는 했지만 세계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수억 민중은 여전히 자본주의와 무관한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베블렌식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여전히 '야만문화의 약탈적 반평화적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일찍이 찬란한 고대문명을 꽃피웠던 4 대강 유역에는 거대한 왕조국가들이 남아 있었고, 아프리카 오지나 남태평양 군도에서는 수천 년 전과 마찬가지로 생활하는 벌거벗은 미개부족들이 있었다. 유럽의 '더욱 높은 야만문화'와 이들 '더욱 낮은 야만문화' 사이의 첫 접촉은 '아름답고 낭만적인' 것이었다. "금은보화가 가득한 동방의 왕국"에 대한 환상을 품고 유럽을 떠난 야심만만한 탐험가들이 세계의 곳곳에서 "신세계를 발견"했다. 그리고 "위대한 기독교 신앙으로 야만적인 이교도들을 교화"한다는 성스러운 사명감에 사로잡힌 선교사들이 탐험가들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근대적 총포로 무장한 제국의 군대가 따라 들어가 정복과 약탈의 길을 열었고 그와 더불어 약삭 빠른 장사꾼들이 군대의 보호 아래 황금을 긁어 모았다. 이것이 바로 중상주의 단계에서 진행된 식민지 개척의 역사이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19 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식민지는 경제학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아담 스미드는 영국 정부가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경영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북아메리카의 가장 거대한 식민지, 즉 미국의 독립을 권고하기까지 했다. 무역에 관한 탁월한 이론가였던 리카도는 예의 비교우위론에 입각하여 자유무역을 하면 본국과 식민지가 모두 이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신고전학파의 무역이론은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을 한층 정교하게 다듬은 것에 불과했다. 상이한 화폐가 사용되고 각종의 관세제도가 존재한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국가간의 무역은 자유시장에서 이루어지는 보통의 거래와 전혀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들은 본국과 식민지 사이의 무역 역시 일반적인 무역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게 취급하였다. 마르크스는 중상주의 시대의 식민지 약탈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태어난" 자본의 출생과정을 도덕적으로 공격하는 효과적인 수단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19 세기의 마지막 30 년 동안 세계를 휩쓴 정복의 열풍---제국주의---은 기존의 경제이론이 세상사와 무관하거나 적어도 세상사를 설명하는데는 불완전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유럽의 자본주의는 이제 광범위한 해외 식민지와의 관계를 떠나서는 존립할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에서 일어난 경제적 현상들은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자유시장에서의 거래'라는 말로 설명하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일찍이 일본의 식민통치를 경험한 우리 나라의 독자들은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경제적 상호관계에 대해 누구나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특히 혹독하게 식민지를 착취한 것은 아니다.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정치, 사회적 차이에서 생긴 방법적 편차를 무시한다면 식민지에 대한 경제적 수탈은 모든 식민지에서 똑같이 가혹하게 자행되었다. 전형적인 사례를 들어 보기로 하자. 1867 년 남아프리카 케이프 식민지의 어떤 거리에서 어린 아이들이 예쁜 돌멩이를 가지고 놀았는데 이것이 다름 아닌 다이아몬드로 밝혀졌다. 몇 년 뒤에는 어떤 원주민이 후일 '남아프리카의 별'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83 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발견했다. 이 지역은 영국이 네덜란드계 보어인에게서 빼앗은 이중의 식민지였다. 영국에게 밀려난 보어인들은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 트랜스바알공화국과 오렌지공화국을 세웠다. 그런데 트랜스바알에서 이번에는 풍부한 금광이 발견되었다. 다이아몬드와 금광 발굴로 억만장자가 되어 케이프 식민지 수상 자리를 차지한 쎄실 로즈는 트랜스바알에 눈독을 들이다가 마침내는 1899 년 트랜스바알, 오렌지 양국과 전쟁을 일으켰다. 소위 보어전쟁이다. 영국은 유럽 각국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3 만 명의 희생을 치르면서 결국 두 나라를 정복했다. 다이아몬드와 사금이라는 귀중한 천연자원은 유럽에서 온 유한 신사들에게는 신의 축복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남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는 죽음보다도 참혹한 고통을 안겨 준 불행의 씨앗이었다. 그들의 촌락은 파괴되었으며 모든 토지는 백인의 손에 들어갔다. 높은 담과 철조망에 둘러싸인 수용소 안의


움집에 살면서 목숨을 걸어 놓고 지하 갱도에서 일하는 것이 그들의 일과가 되었다. 수용소는 갱도와 곧바로 연결되었고 흑인들에게는 외출의 자유조차 없었다. 그 자신이 백인 식민자인 보어인들 역시 불행의 구렁텅이에 떨어졌다. 카키색 군복을 입고 실로 영웅적인 게릴라식 투쟁을 벌였지만 그들의 집은 불태워졌고 농토는 황무지로 변했으며 가축은 도살되었다. 영국군 사령관의 명령으로 수용소에 감금된 채 굶고 병들어 죽은 보어인이 10 만명이 넘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곳에서 채취된 다이아몬드와 금은 영국의 유한계급을 살찌우고 영국의 국부를 증진시켰다. 오늘날 선진국들의 경찰은 중남미를 비롯한 제 3 세계의 오지로부터 반입되는 제 3 세계의 오지로부터 반입되는 마약을 적발하느라 애쓰고 있다. 그러나 불과 백 년 전만 해도 세계적인 마약 상인은 모두 유럽 자본주의 나라의 유한 신사들이었다. 19 세기 중국 정부는 영국 상선의 아편 반입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다. 영국은 중국의 은에 눈독을 들이고 1820 년대 이후 아편무역을 시작했는데 1830 년대 말에는 백 근짜리 상자로 매년 무려 4 만 상자 이상을 중국인에게 팔아 치웠다. 은으로 세금을 내야 하는 중국 농민들은 한편으로는 은값이 올라 곤란을 겪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마약중독자가 급증하여 중국 사회는 극심한 경제, 사회적 혼란에 빠졌다. 경제학적으로 말하자면 아편의 소비에서 얻는 쾌락은 다른 재화의 소비에서 얻는 쾌락과 똑같이 중국인의 쾌락을 증대시킨다. 그런데 중국의 대외무역 창구인 광동의 관리 임칙서라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인지 부임하자마자 외국 상선이 가져 온 아편 2 만 상자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렸다. 그는 외국 상선들로부터 "이후로도 아편을 가져 오면 사형을 당해도 좋다"는 서약서까지 받아냈다. 그런데 영국 상인들만은 서약서를 쓰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무역의 자유에 대한 중대한 침해를 응징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1840 년의 이른바 '아편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영국에 홍콩을 떼어 주고 배상금까지 치르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러한 사태는 남아프리카와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식민지, 반식민지, 종속국에서 똑같이 일어났다. 그러나 유럽의 경제학자들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해외 식민지 개척이나 전쟁은 어디까지나 탐험정신이나 애국적 열정, 종교적 사명감이나 군사적, 정치적 야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수천 년간 끊임없이 저질러온 행위로서 자기네들이 연구하는 경제학과는 별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19 세기 막바지의 가장 중요한 경제현상인 정복의 열풍을 경제학적으로 조명하는 일은 다시 한 번 이단자의 몫으로 남겨졌다. 스스로 이단자임을 자처하면서 평생 학계나 대학강단에 들어서기를 거부한 영국인 존 앗킨슨 홉슨(John Atkinson Hobson)이 기꺼이 그 임무를 맡았다. 제국주의 시대의 새로운 지배자 금융권력 홉슨은 1858 년 영국 미들랜드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중산계층에 속한 평범한 수준이었고 홉슨 역시 외견상 별난 구석이 없는 온순한 학생이었다. 그는 학자가 되기 위해 옥스퍼드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하였지만 몸도 약하고 또 지나치게 수줍음을 타는 성격 때문에, 그리고 정밀하고 무미건조한 이론의 세계보다는 무언가 가치있는 인생을 추구하려는 유토피안적 성향 때문에 대학이라는 제도와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런던대학 과외강사로 있으면서 당시의 '풍요한 세계'가 소중하게 간직하던 신조를 뒤집어엎는 파격적인 이론을 발표한 탓으로 변변치 않은 강사 자리까지도 빼앗기고 말았다. 홉슨은 당시 산업계의 두통거리였던 주기적인 경제공황이나 자본주의가 낳은 대중적 빈곤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페이비언주의(Fabianism)라고 하는 영국식 사회주의의 동조자로서, 노동조합의 육성을 통해 사회적 불평등을 개선하고 의회주의적인 방법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대 로마시대의 영웅 파비우스가 독특한 지구전술로 한니발의 카르타고 군대를 격파한 사건에 명칭의 유래를 둔 페이비언주의는 한 마디로 점진적 사회주의운동을 주장하는 사상으로서 영국 노동당의 사상적 기초를 이루었다. 물론 '풍요한 세계'의 눈에는 마르크스주의나 페이비언주의나 모두 '불온한 망상'의 일종에 불과했다. 홉슨은 이단자로 낙인찍혔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 그러한 낙인은 당시 지배층의 사상적 편협성의 증거일 뿐 홉슨의 사상은 그 자체가 이단적이라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홉슨의 이단적 견해는 저축에 대한 것으로서 맬더스나 마르크스의 견해를 연상하게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저축이 번영을 말살한다."는 것이다. '세이의 법칙'을 신봉하던 당시 학계에서 이것은 잠꼬대같이 취급되었다. '존경받는 경제학자들'은 하나같이 저축이 사유재산의 기원이라고 예찬했고, 자본가들은 좀 더 많이 저축함으로써 더욱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고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홉슨은 저축을 비난함으로써 결국 부자들이 부유함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던 '근검'이라는 자랑거리를 모욕했다. 그는 이단의 낙인을 받았다.


상류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기를 거절당한 홉슨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사회 비판의 길을 걷게 되었다. 홉슨은 보어전쟁을 눈앞에 둔 1890 년대의 뜨거운 정치 쟁점이던 아프리카문제를 취재하기 위해 한 신문의 특파원이 되어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는 케이프타운과 요하네스버그 일대를 돌아보았으며, 보어전쟁 전야에는 '남아프리카 제국주의의 화신' 쎄실 로즈와 식사를 하면서 식민지 경영에 관한 로즈의 견해를 듣기도 했다. 영국으로 돌아온 홉슨은 1902 년 <제국주의론>(Imperialism : A Study)라는 한 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저축과 공황에 대한 추상적이고 이단적인 견해와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서 관찰한 현실이 절묘하게 결합된 이 책은 홉슨이 저술한 30 여 권의 책 가운데서 단연 돋보이는 저작으로서 그 학자의 이름을 인류의 현대사에 영원히 기록되게 만들었다. 홉슨은 19 세기의 마지막 30 년 동안 지구 표면을 남김없이 분할해 버린 정복 열풍의 진원지가 이러저러한 정치적, 종교적, 군사적, 열정이 아니라 이윤 추구라는 경제적 동기임을 명백히 했다. 홉슨은 제국주의를 "국가 내의 부유계층이 사치를 유지하기 위해 정부의 통치를 강탈해서 외국의 몸에 빨판을 박아 그들의 부를 빼내려고 제국을 팽창시키는 기생적인 사회과정"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물론 문명을 전파하고 미개인을 계몽하려고 한 선교사들의 고상한 열정을 인정하고 그들을 모욕하지 않았다. "자기를 희생하면서 그토록 열정적으로 이교도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선교사들은 영국의 무역을 촉진하거나 제국주의를 정당화시키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기업가와 정치가들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제국주의는 고상한 종교적 열정으로 위장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위험한 것이었다. 그는 기업가와 정치가 등 제국의 지배자들이 이같은 종교적 열정의 너울 뒤에서 이윤에 대한 끝없는 탐욕을 채우기 위해 식민지의 원주민과 자국의 국민들에게 엄청난 유혈과 희생을 강요하는 대외전쟁을 일으킨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그가 직접 목격한 바에 의하면 제국주의의 핵심 세력은 개개인의 제조업자가 아니라 독점자본주의의 해외투자를 장악한 은행과 금융회사의 지배자들이었다. 우리가 이해하려고 하는 침략적인 제국주의는, 영업과 정치 사이의 관계를 면밀하게 분석해 볼 때, 맹목적인 열정이나...정치가들의 어리석음과 야망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처음 볼 때보다 훨씬 합리적이다. 국민 전체의 관점에서는 불합리할지라도 그 나라의 어떤 계급의 관점에서는 충분히 합리적이다. 이들 대영업, 즉 금융업, 어음할인, 채권 발행, 회사 발기 등은 국제적 자본주의의 핵 심을 이룬다...새로운 공공 부채를 만들고,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며, 일정하면서도 상 당한 가치 변동을 일으키는 것은 그들의 수익성 있는 영업의 세 가지 조건이다. 각각 의 조건들은 그들을 정치로 유도하고 제국주의의 측면에 던져 넣는다...침략의 공포를 일으키고...상업국가 사이의 경쟁을 부추기는...정책은 대규모의 군비 지출을 야기하고 나날이 공공 부채를 축적시키며...증권 가치를 항상 변동시키는바, 숙련된 금융업자에 게는 이런 일이 큰 이익을 안겨주는 것이다. 어떠한 전쟁이나 혁명, 무정부적 암살이 나 어떠한 다른 대중적 충격도 이들에게는 이득이 된다. 그들은 모든 새로운 강제적 지출과 공공 신용의 돌연한 혼란에서 이익을 빨아내는 탐욕스런 인간들이다...금융은 제국이라는 엔진의 지배자이며...정치가, 군인, 박애주의자, 무역업자들이 일으키는 애 국적인 열정을 조롱한다. 이러한 열정은 강하고 순수하지만 불규칙하고 맹목적이다... 야심만만한 정치나 변방의 군인, 열정이 지나친 선교사나 저돌적인 무역업자는 제국 을 한 단계 팽창시키거나 어떤 새로운 사태 진정에 여론을 적응시키는데 기여할지는 모르지만 최종적인 결정권자는 금융권력이다. 19 세기말의 세계사를 살펴볼 때 홉슨의 이론을 확실히 그 시대를 증언하고 있다. 자본주의 종주국인 대영제국은 '가장 위대한 정복자'였다. 영국은 인도, 이집트,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남아프리카, 수단, 홍콩 등을 포함하는 '해가 지지않는 제국'을 건설했다. 이 나라는 19 세기의 마지막 30 년 동안에만 5 천 7 백만 명의 인간이 사는 4 백 50 만 평방마일의 새로운 영토를 점령했는데, 이는 전체 영토의 1/3 에 해당되는 것이다. 영국의 오랜 경쟁자인 프랑스는 1880 년 무렵에는 알제리와 인도차이나반도 전역을 포함하여 3 천 7 백만의 인구가 사는 3 백 50 만 평방마일의 식민지를 점령했다.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에 점령되었고 아프리카의 동북부와 남서부는 독일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식민지의 지위에서 벗어난지 불과


백 년 만에 제국주의의 당당한 주역으로 성장한 미국은 스페인에게서 필리핀을 빼앗고 사모아, 하와이, 쿠바, 괌, 도미니카, 푸에르토리코, 니카라과, 아이티, 파나마 등 태평양과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지배권을 차지했다. 가장 늦게 정복의 열풍에 합류한 아시아 유일의 제국주의 국가 일본은 중국과 러시아를 연파하고 조선을 합병한 다음 만주로 진출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9 세기 막바지를 휩쓴 제국주의 정복의 광란은 세계를 하나로 결합시켰다. 자본주의 열강은 식민지에 괴뢰 정부를 세우거나 관리를 파견함으로써 그것을 제국의 일부로 편입시켰다. 그리고 자본가들은 식민지에 기업을 세워 본국의 산업에 필요한 천연자원을 조달했다. 19 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광범위한 기술혁명은 유럽에서 전혀 또는 충분히 생산될 수 없는 다양한 천연자원에 대한 수요을 만들어냈다. 코르크, 철, 주석, 고무, 구리, 아연, 니켈, 금, 백금, 은, 수은, 비소, 석유 등이 그것이다. 유럽 각국의 장사꾼들은 이러한 자원을 찾아 아시아와 아프리카, 태평양제도와 말레이반도 등 모든 대륙의 가장 험한 밀림에까지 손을 뻗쳤다. 모든 식민지와 종속국에서 제국주의의 침략과 수탈에 대한 원주민들의 항의, 폭동, 반란, 전쟁이 일어났다. 제국주의는 오직 총칼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천리 타국 식민지의 밀림이나 평원에서 식민지 주민들의 원시적 무기에 살상당한 백인 청년들의 피와 죽음은 애국심의 이름으로 찬양되었다. 그러나 홉슨의 이론은 천연자원의 획들을 위한 정복이나 자본가들의 끝없는 탐욕을 폭로하고 비난하는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자본주의가 스스로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한 칼 마르크스보다 더 냉혹하게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과소소비 또는 과잉생산 공황이라는 자기모순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전세계를 전쟁과 유혈과 학살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는 체제였다. 저축은 미덕이 아니다.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편협한 경제이론에만 사로잡혀 제국주의를 경제학과는 무관한 현상으로 도외시한데 반해 홉슨은 자신이 경제학자였던 탓으로 온갖 탐욕과 야심으로 뒤범벅된 제국주의적 정복의 과정을 더욱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1870 년대 이후 급속하게 진행된 자본주의의 독점화를 눈여겨 보았고 극소수의 손에 집중된 천문학적인 규모의 부가 끔찍한 재앙의 씨앗임을 예감했다. 그때까지 자본주의가 낳은 소수의 풍요와 대중의 빈곤이라는 현상은 어디까지나 도덕적이 논란거리였을 뿐이다. 그런데 홉슨은 이 문제가 자본주의 그 자체에 되돌려 주는 경제적 영향을 문제삼았다. 19 세기의 경제학은 생산과 소비의 자동적 일치를 정식화한 세이의 법칙에 지배되고 있었다. 이 법칙에 의하면 생산된 것은 모두 소비될 수 있다. 모든 생산물은 지대, 이윤, 임금으로 나누어져 지주, 자본가, 노동자의 소득이 된다. 지주와 노동자가 모든 소득을 소비하고 자본가가 쓰고 남은 소득, 즉 저축된 부를 투자한다. 그런데 홉슨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너무 심각해지면 어떻게 되는가? 물론 노동자는 자기의 소득을 다 소비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가는 다르다. 그의 소득은 너무나 커서 아무리 사치를 해도 남는다. 이것은 '자동적인 저축'이다. 세이의 말대로 자본가가 이 저축을 투자하여 소비재를 생산한다고 하자. 그런데 일반 대중은 그 모든 상품을 다 구입하기에는 너무 가난하다. 똑똑한 자본가라면 이미 재고가 쌓인 상품을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해 투자할 리 없다. 예컨대 창고가 이미 재고품 구두로 가득 찼다면 그 구두공장 사장은 자신의 은행구좌에 든 저축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의문은 일찍이 맬더스가 제기한 바 있다. 그런데 반세기 이상 앞서서 문제를 발견한 이 천재적인 목사는 "지주들에게 더 많은 지대를 주어서 소비를 늘리게 하자"는 괴상한 처방을 내놓은 탓에 경제학자들의 웃음거리가 되어버렸고, 따라서 그의 올바른 진단까지 무시당하고 말았다. 홉슨은 자본가들이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해결책은 해외투자이다. 모든 곳에서 과잉생산, 능력, 투자할 곳을 찾는 과잉자본이 나타난다. 그들 나라에서 생산능력이 소비보다 더 빨리 성장한 것, 이익을 남기고 팔기에는 너무 많은 재화가 생산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수익성 있는 투자를 할 수 없는 자본이 존재한다는 것 을 모든 기업가들은 인정한다. 이와 같은 경제적 조건이 '제국주의의 뿌리'를 형성한 다. 국내에서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하는 유럽의 대자본은 더욱 높은 이윤을 찾아 아시아와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모든 지역에 그 촉수를 뻗친다. 그런데 홉슨의 이론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과잉생산


공황이라는 자기모순에서 빠져 나오려는 자본주의 열강의 몸부림은 전쟁과 유혈을 부른다. 그들이 정복할 수 있는 지구의 표면은 무한하지 않아서 새로운 영토와 더욱 넓은 시장을 얻기 위한 그들의 노력 또한 한계에 봉착한다. 19 세기말까지 전세계를 완전히 분할 점령한 제국주의 나라들은 마침내 이미 경쟁 상대가 차지한 땅을 빼앗기 위한 싸움에 돌입한다. 그리하여 인류의 머리 위에는 전대미문의 재앙을 가져올 제국주의 세계전쟁의 음험한 먹구름이 드리워지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발전이 피비린내 나는 세계전쟁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홉슨의 이론은 권위있는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좋은 평판을 얻지 못했다. 홉슨으로부터 '기생충'이라는 비난을 받은 제국의 건설자들---호전적 정치인과 군의 지휘자와 대자본가들---은 신성한 종교적인 열정과 애국심을 모욕하는 그의 이론에 분개했다. "쾌락과 고통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조화로운 자유시장"이라는 감미로운 세계관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경제학자들은 홉슨이 경제학을 아무 관계도 없는 다른 사회현상과 뒤범벅을 만들어 버렸다고 조롱했다. 그들의 이론세계에서 식민지 획득은 보이지 않는 손의 축복을 받는 자유시장의 확대이며, 그것은 식민지의 주민들에게도 풍요한 미래를 가져다주는 문명의 세례였다. 그곳에는 '제국주의' 따위의 생소한 개념이 차지할 자리가 없었다. 이러한 냉대를 감수하면서 평생 이단자임을 자처했던 홉슨은 제 2 차 세계대전의 불지옥이 인류의 머리 위에서 이글거리고 있던 1940 년에 세상을 떠났다. 유럽의 상류사회는 대공황과 두 차례의 제국주의 세계전쟁을 겪고서야 홉슨의 선견지명을 인정했다. 영국의 <런던 타임즈>는 그의 사망 기사를 보도하면서 홉슨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제법 상세한 해설 기사를 실었는데, 이것이 아마도 이 탁월한 경제학자가 받은 가장 후한 대접이었을 것이다. 제국주의는 세계를 망친다. 홉슨은 자본주의가 부와 빈곤을 동시에 생산하고 끝없는 정복과 전쟁으로 세계를 망친다고 비판했지만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노동조합과 의회를 통해 사회주의의 이념적 목표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본 페이비언주의자였다. 그는 폭력에 의한 자본주의의 전복을 추구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그렇지 않았다. 홉슨의 제국주의론은 사회주의를 점진적으로 실현하려는 사람들을 '배신자', '개량주의자'로 몰아붙인 가장 과격한 혁명세력의 가장 강력한 이론적 무기가 되었다. 러시아 사회주의혁명의 지도자 레닌은 1916 년에 쓴 <제국주의론>에서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최고이자 최후의 단계로 규정짓고 식민지 쟁탈전쟁으로 인해 세계체제로서의 자본주의가 파멸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1919 년 우익 군인들에게 살해당한 독일의 여성 혁명가인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도 비슷한 책을 썼다. 20 세기의 모든 사회주의혁명가와 사회주의 나라의 지도자들도 사회주의의 종국적 승리를 의심치 않았다. 그들은 마르크스의 학설을 19 세기말 이후의 변화된 세계에 적용할 수 있게 해준 홉슨의 이론을 뜨겁게 환영했다. 그들의 철석 같은 믿음과 낙관은 칼 마르크스의 사상 못지않게 홉슨의 사상에 등을 기댄 것이었다. 제국주의는 19 세기말에서 금세기 중반까지 세계사를 특정지은 광란의 열풍이었다. 당시 식민지난 종속국의 처지에 있었던 세계의 모든 지역은 2 차대전 이후 생명과도 같은 자유를 되찾은 독립된 주권공화국이 되었다. 그러나 제국주의가 남긴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으며 제국주의 그 자체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영국, 미국, 독일, 네덜란드, 일본 등 주요한 제국주의 나라들은 지금도 여전히 부강하다. 과거 식민지였던 나라들 또한 여전히 가난하며 많든 적든 정치, 경제적으로 옛 종주국에 예속되어 있다. 부강한 나라의 국민들은 자기네들이 식민지배기간 동안 마사를 다 공평하게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로 가난한 식민지의 미개한 인종들에게 문명의 혜택을 가져다 주었다는 은밀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반면 이민족에게 주권과 자유를 빼앗긴 채 갖가지 차별과 억압에 시달려야 했던 아픈 기억을 간직한 제 3 세계의 국민들은 자신의 가난과 불행을 제국주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사실 한 시대에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 있었던 두 나라가 형식상으로 동등한 주권국가로 되었다고 해서 사실상 동등한 이웃이 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주인이던 나라는 원래부터 지니고 있던 우수한 공업력과 막대한 자본에다 수십 수백 년간 식민지로부터 빼앗아 간 부를 보태서 더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반면 제국주의와 필사적인 싸움 끝에 독립을 쟁취한 식민지는 종주국의 자본가들이 자기네의 필요에 따라 운영하던 산업과 가난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날의 강대국들은 훨씬 더 세련되고 문명화된 방식으로 옛 식민지의 나라들을 다루고 있다. 군대의 총칼과 가혹한 법률 대신 우세한 경제력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그렇지 않지만, 오늘날의 상황에서 다시 보면 홉슨은 지나치게 많은 걱정을 한 것인지 모른다. 핵무기를 보유한 현대의 강대국들은 인류를 한 순간에 절멸시킬 수도 있는 세계전쟁의 위험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므로 상호간의 무력행사를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경제공황이라는 내부 모순을 완화시킬 수 있는 몇 가지의 효과 있는 수단을 고안해냈다. 그들은 이제 '미개인종의 문명화'라는 깃발 대신 '자유주의 무역의 이상'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위력있는 대포와 전투기가 아니라 우수한 상품이라는 신종무기를 들고 싸운다. 자본주의는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홉슨의 걱정처럼 세계를 망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부국강병을 주장하고 국민에게 전쟁의 위협을 강조하며 맹목적인 애국심과 호전적 군국주의를 조장하는 집단은 모든 자본주의 나라 안에 위력을 떨치고 있다. 그들은 기회가 날 때마다 제국주의의 부활을 부추기는 세력이다. 그들에 대한 홉슨의 다음과 같은 경계는 1 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제국주의의 상업적, 금융적 세력들은 정당, 언론, 교회, 학교를 통하여 투쟁과 지배와 탐욕 같은 원시적인 욕망을 신성화시킴으로써 여론과 공공정책을 조작한다...장사꾼 같 은 정치가들을 위해 생물학과 사회학은 열등민족에 대한 정복을 지지하는 천박하고 편 리한 인종투쟁 이론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우리 앵글로 섹슨족이 그들의 땅을 빼앗아 그들의 노동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한편 경제학은 그 열등민족을 정복하여 다스리는 행위를 국가간 분업에서 우리가 할 몫이라고 하여 이를 지지하며,...윤리학은 제국주의의 동기를 "어린 아이 같은 민족을 교화하고 향상시키는 짐을 지려는 소망"이 라고 분칠한다. 그리하여 '교양있는', 혹은 약간 교양있는 계급들은 제국주의의 정신적, 도덕적 장엄함을 배운다. 일반 대중은 영웅 숭배와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영예, 모험, 스포츠에 유치한 매력을 느낀다. 오늘의 역사는 조잡한 빛깔로 변조되어 전투적인 본 능을 직접 자극한다...어느 곳에서나 그것은 문명인에게 보편적으로 잠복하고 있는 인 간의 야수 같은 지배욕을 자극하고 북돋운다. 그리하여 국가라는 이름을 찬탈한 소수 기득권층의 물질적 이득만을 위한 정책을 추구하는 것이다. 저축이 미덕은 아니다. (자유방임주의의 종말을 선고하는 존 매이너드 케인즈) 자본주의를 구원할 천재의 등장 1914 년부터 5 년간 계속된 제 1 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가 세계를 망칠 것이라는 홉슨의 예언을 실현시켰다.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영국, 벨기에, 터키, 불가리아, 세르비아, 이탈리아, 그리스, 미국 등 세계의 모든 산업국들이 휘말려든 이 전쟁은 인간과 문명을 말살하는 광란의 폭풍이었다. 약 9 천만 명의 젊은이들이 '조국을 위해' 전쟁에 뛰어들었는데 그 중 1 천만 명이 전사했다. 2 천만 명의 부상자 가운데 3 백 50 만 명이 불구자가 되었다. 전쟁의 혼란과 함께 찾아든 질병과 굶주림은 수없이 많은 민간인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문명세계의 도시와 산업시설이 파괴되었고 방대한 농토와 촌락들이 폐허로 변했다. 그리고 막 산업화를 시작한 러시아제국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 일어난 볼셰비키혁명에 의해 세계지도에서 사라져 버렸다. 제국주의 열강들은 군대를 파견하면서까지 그 '불온한 혁명'을 진압하려 했지만 결국 러시아의 사회주의 권력을 전복시키지 못했다. 자본주의가 일으킨 세계전쟁이 세계를 망치고 있는 동안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과 그의 혁명 동지들이 마르크스가 내린 자본주의의 사형선고를 실제로 집행해버린 것이다.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19 년 1 월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제국주의 열강의 지도자들은 세계전쟁이 남긴 골치아픈 문제들을 처리하고 새로운 국제질서를 세우기 위해 프랑스의 베르사이유에서 강화회의를 열었다. 미국의 윌슨과 프랑스의 클레망소, 영국의 로이드 조지가 이 강화회의의 주역이었다. 그들은 국제연맹을 창설하여 세계전쟁의 재발을 막기로 합의하고 사회주의혁명에 대항하는 '신성동맹'을 체결하여 러시아의 반혁명군에게 막대한 원조를 제공하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또한 주요 공업지역을 포함한 독일 영토의 1/6 을 빼앗고 해외의 모든 이권을 박탈했다. 그들은 독일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기위해 군대의 규모를 제한하고 무려 1 천 3 백억 마르크에 달하는 천문학적 규모의 전쟁배상금을 징수하기로 결정했다. 전쟁의 여진이 남아있던 프랑스는 독일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무렵 영국의 강화회의 대표단의 일원으로 파견된 재무성 실무자 한 사람이 사표를 던지고 집으로 돌아가 버린 일이 있었다. 그는 재무성의 차석 대표였는데 위에서 말한 세계적 지도자들의 언행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역겨운" 나머지 분연히 사표를 던진 것이다. 물론 이 사소한 사건은 세상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런데 두 달 뒤에는 신문을 정독할 정도의 지식을 가진 영국인들은 모두 그 사람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존 메이너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였다. 그는 <평화의 경제적 귀결>(The Eco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이라는 작은 책자를 발표했는데, 무엄하게도 당대의 세계사를 이끈 열강의 지도자들을 향해 맹렬하고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다. 그런데 그는 놀랍게도 이들 정치 지도자들이 '적국 독일'을 너무나도 가혹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을 들어 그들을 비난했다. 케인즈는 승전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자국 국민들의 복수심에 영합한 나머지 유럽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경제문제를 선거전술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고 주장했다. 케인즈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패전국의 국민들이 패전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굶주림의 공포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중시했다. 따라서 그처럼 과도한 배상금을 선고하는 것은 실제로 받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사람들을 '히스테리와 광적인 절망감'에 빠뜨리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는 패전국의 경제생활 파탄이 몰고 온 불행한 사태, 즉 광적인 선동정치와 야만적 나치즘의 전조를 어렴풋이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경고했다. 만약 고의적으로 중부 유럽을 빈곤에 빠뜨리려 한다면 복수는 손쉽고 신속하게 이 루어질 것임을 나는 감히 예언한다. 그러나 반동세력과 절망적인 혁명의 혼란 속에 서 일어나는 궁극적인 내란을 오랫동안 지연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내란이 일어나기 전에 최근의 독일전쟁의 공포는 조금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또 그 내란의 승리자가 누구이건 그는 우리 세대의 문명과 진보를 파괴할 것이다. 케인즈의 예언은 불과 10 년 뒤에 그대로 실현되었다. 사회민주당이 집권한 독일공화국은 패전의 상처와 과도한 배상금이라는 무거운 짐을 감당할 수 없었다. 상상을 초월한 초인플레이션과 대규모 실업은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다.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급진적 혁명세력과 대자본가, 군부를 필두로 한 보수반동세력의 협공이 사회민주당 정권을 궁지에 몰아 넣었다. 빈곤과 실업과 혼란에 넌덜머리가 난 독일 국민은 희대의 독재자 히틀러에게 정권을 맡겨 버렸다. 나치정권은 1 차대전의 패배를 설욕하고 옛날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재무장을 시작했다. 세계사는 다시 한번 광적인 전쟁을 향해 행진하고 있었다. 케인즈는 1925 년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2 차대전의 영웅' 처칠을 곤경에 빠뜨렸다. 처칠은 전쟁으로 와해된 금본위제도를 재건했는데 파운드화의 국제시세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1 파운드당 순금 123.27 그레인과 미화 4.86 달러라는 전쟁 이전의 시세로 복귀시킨 것이다. '위대한 대영제국'이라는 신화가 전쟁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랐던 영국 국민과 의회는 처칠의 결단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물론 이 결정은 파운드화를 너무 과대평가하는데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국민과 의회는 전쟁이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했다고 믿고 싶어했다. 그런데 과도한 배상금을 비판함으로써 "적국 독일 국민을 기쁘게 한 죄"를 저질러 애국심 강한 언론으로부터 갖가지 비난을 받은 바 있는 케인즈가 이번에도 이 열광적인 환호성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는 즉각 <처칠씨의 경제적 귀결>이라는 소책자를 통해 처칠의 결정을 "판단력이 결여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케인즈의 견해가 옳다는 사실이 입증되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전쟁기간 동안 영국의 생산력은 미국 등 다른 나라보다 느리게 발전했다. 따라서 외국의 상인들은 1 파운드로 살 수 있는 영국 상품보다 4.86 달러로 살 수 있는 미국 상품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영국 국내의 물가가 하락하지 않는 한 수출의 감소는 불가피해졌다. 그러자 영국의 자본가들은 물가인하를 위해 임금을 깎으려 했다. 그러니 노동조합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1926 년 5 월 이후 1 년간 길고 지루한 파업의 물결이 밀어닥쳤다. 경제는 더욱 침체되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당시의 화폐는 태환화폐였다. 따라서 영국은행은 고객이 요청하면 파운드화를 금으로 교환해주어야 했다. 그러나 파운드화가 순금에 비해 과대평가되어 있었으므로 국제무역상인들은 파운드화보다 순금을 챙기려 했다. 여기에 대공황의 충격까지 가해져 국제적인 금 부족 사태가 일어났다. 영국 정부는 엄청난 금의 유출 때문에 국제적 위신의 추락을 무릅쓰고서라도 1931 년 마침내 금의 태환을 중지시킬 수 밖에 없었다. 처칠의 실수는 명백한 것이다. 경제는 애국심만 가지고는 다룰 수 없다. 그러나 케인즈의 공개적인 비판이 없었다면 처칠의 잘못이 그처럼 빛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케인즈는 단순한 전직 공무원이 아닌 것은 물론이요, 범속한 경제학자 또한 아니었다. 한 시대의 세계사를 이끈 지도자들을 매섭게 비판함으로써 얻은 명성은 후일 그가 자본주의 세계로부터 받은 영예와 예찬에 비하면 그야말로 예고편에 불과했다. 그는 눈앞에 닥쳐 온 무서운 재앙으로부터 자본주의와 그것이 낳은 '풍요한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애써 보호해주려고 한 바로 그 계급에 속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의 사상을 오해하고 의심했다. 가장 부르주아적인 부르주아 경제학자 칼 마르크스가 못다 이룬 혁명의 꿈을 뒤로 한 채 세상을 떠난 1883 년에 존 메이너드 케인즈가 태어났다. 그는 '출생이라는 제비뽑기'에서 재능과 풍요라는 두 가지 축복을 한꺼번에 움켜 잡았다. 아버지 존 네빌 케인즈는 케임브리지대학 행정책임자를 지낸 상류계급의 신사이자 경제학자였다. 지혜롭고 교양있는 여성인 어머니 플로렌스 역시 케임브리지대학 출신으로서 만년에는 케임브리지 시장을 지내기까지 했다. 케인즈는 '풍요한 세계'의 이론적 수호신이 되기에 적합한 환경에서 태어난 천재였다. 존 메이너드 케인즈의 유쾌한 인생항로는 영국의 상류계급 자녀들을 위한 특별한 학교인 이튼 스쿨로 이어졌다. 5 백년 역사를 가진 이 학교는 역대 영국 수상을 20 명 가까이 배출한 명문이다. 케인즈는 템즈강변에 있는 이 귀족 학교에서 상류사회의 자녀들과 사귀었고 상류사회의 생활습관을 익혔다. 학업 성적은 말할 것도 없다. 이튼을 졸업한 케인즈는 장학생으로 케임브리지대학 킹즈 칼리지에 진학하여 수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당대 최고의 경제학자로 손꼽히던 알프레드 마샬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경제학자가 되라고 간청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케인즈는 뛰어난 학생이었다. 그러나 케인즈가 낡은 관습이나 규칙에 고분고분 따르는 허약한 모범생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이튼과 킹즈 칼리지 시절 내내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더욱 위험시되던 동성연애에 상당히 깊이 탐닉했다. 학교에서 실시하는 고리타분한 예절교육과 종교행사에 대해서도 불경스러운 불평을 늘어놓곤 했다. 보어전쟁이 터져 동급생들 사이에 자원 입대 선풍이 불었을 때에도 그는 "아침밥도 못 먹고 받아야하는 예비훈련이 귀찮아서" 입대를 거절했다. 그러나 그가 상류사회의 가치관에 반항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을 혐오하고 경멸하는 편협한 계급적 우월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도 역사는 소수의 엘리트가 창조한다는 견해를 포기하지 않았는데 그러한 철학은 청년시대부터 원시적인 형태로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튼 근처의 노동자 주거지역을 '곰팡이'에 비유하는가 하면, 근처에서 일어난 끔찍한 열차사고 이야기를 하면서 "부상자들은 대부분 경마를 보러 가던 지극히 불쾌한 인간 쓰레기들"이라고 쓰기도 했다. 케인즈의 사회생활은 더욱 현란하다. 그는 킹즈 칼리지 졸업을 앞두고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철도 관리자가 되거나 트러스트를 조직하고 싶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총명한 엘리트라 할지라도 20 대의 청년으로서는 그런 자리를 얻을 수 없었던지 수재에게 가장 손쉬운 일인 공무원시험에 응시했다. 케인즈는 인도성의 말단 직원이 되었다. 그러나 2 년만에 별로 할 일도 없이 따분하기만 한 말단 공무원 자리는 내차고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버렸다. 그는 인도성에 근무하면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인도의 화폐와 재정에 관한 책을 썼는데, 이것이 뜻하지 않은 행운을 가져다 주었다. 케인즈는 서른도 안된 나이에 인도의 통화문제를 다루는 왕립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킹즈 칼리지의 강사 자리도 얻었으며, 또한 왕립경제학회 기관지인 <이코노믹 저널>(Economic Journal)의 편집인이 되었다. 그의 인생은 탄탄대로에 올라섰다. 케인즈는 제 1 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재무성에 들어가 해외에서 전쟁 비용을 조달하는 일을 맡았다. 무역 대금과 해외에서 영국이 발행한 공채 수입을 받아들이고 해외에서 증권을 사고 팔아 수익을 내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한때 트러스트를 조직하겠다는 야심을 가졌던 이 천재는 남들이 보기에는 꼭 마술사처럼 자기의 일을 해치웠다. 케인즈는 재무성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인물이 되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자 마치 당연한 일처럼 재무성의 차석 대표로서 강화회의에 파견된 것이다. 이 때까지 그는 대중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실력자였다. 그러나 그 직책을 사임하고 <평화의 경제적 귀결>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그는 아직 영향력은 불확실하지만 매우 유명한 경제학자로 발돋움했다. 케인즈는 고색창연한 상아탑에 안주하는 보통의 교수와는 달랐다. 그는 전후의 호경기에 어떤 은행가가 제공한 밑천으로 국제주식시장에 손을 대었는데 2 백만 달러라는 믿기 어려운 액수를 손에 넣었다. 후일 모교인 킹즈 칼리지의 회계사무를 맡아 3 만 파운드의 자산을 열 배로 늘려 준 일은 그로서는 하나의 취미활동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천박한 벼락부자가 아니어서 자기의 인생행로를 아름다운 장미꽃으로


장식했다. 그림과 고서적 수집, 발레 감상, 케임브리지의 극장 건립, 자선단체 지원, 고급 샴페인의 보급 촉진 등 베블렌이 말한 "유한계급의 현시적 소비와 현시적 레저" 가운데 비교적 고상한 것들이 그의 취미가 되었다. 아름다움에 대한 케인즈의 귀족적 취향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사건은 상류사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행한 결혼이었다. 케인즈는 당시 유럽의 신사들을 황홀하게 만든 디아길레프 발레단의 주연 무용수 리디아 로포코바와 1925 년에 결혼했다. 그러나 8 세 연하의 이 러시아 여인은 존경받는 경제학 교수 부인 역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전력의 소유자였다. 매력적인 금발과 천진난만한 아름다움을 지닌 이 발레리나는 미국의 신문기자와 떠들썩한 로맨스를 벌이다 갑자기 무용단의 비서와 결혼하는가 하면, 얼마 뒤에는 남편을 차 버리고 잘생긴 러시아 장교와 사랑의 도피를 감행함으로써 신문지상을 요란스럽게 장식한 열정적인 여인이었다. 그러나 리디아는 교수 부인 역을 빈틈없이 해냈을 뿐만 아니라 남편이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상하고 헌신적인 동반자로 남아 있었다. 정치적 박해와 가난과 질병으로 점철된 칼 마르크스의 생애를 알면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처럼 존 메이너드 케인즈의 풍요하고 유쾌한 인생 역시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의미있는 참고자료가 된다. 마르크스와 케인즈는 둘 다 보통 사람 여럿을 합친 만큼의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인물이다. 그러나 그 재능은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싹텄고 전혀 다른 세계에서 성장했으며, 그래서 결국 상반되는 사상과 인생의 열매를 맺었다. '빈곤한 세계'의 예찬과 '풍요한 세계'의 박해를 받으면서 살았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 대해 시한부의 삶을 선고하고 만인의 행복과 문명의 진보를 위해 고질병에 걸린 환자를 하루 빨리 사망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케인즈는 질병의 원인을 오진한 경제학자들을 나무라면서 간단한 치료약만 있으면 이 체제가 영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공황---'보이지 않는 손'의 파산 제 1 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자본주의는 그리 심각한 불황을 겪지 않고 1929 년을 맞이했다. 전쟁은 옛이야기가 되었고 세상은 '영원한 번영'의 축복을 받은 것 같았다. 특히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를 받지 않은 미국 경제는 그 번영의 정점에 올라 있었다. 사람들의 관심은 나날이 오르기만 하는 주식 가격에 모아져 있었다. 매주 15 달러씩 저축해서 그것을 주식에 투자하면 5 년 안에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황당무계한 계산법이 시중을 떠돌아다녔고, 주식투자로 벼락부자가 된 구두닦이나 간호원의 성공담이 사람들을 주식시장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생산되지 않는 증권거래소에서 종이쪽지를 사고 파는 것만으로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될 수는 없는 일이어서 이 투기의 열풍은 1929 년 10 월 24 일 뉴욕의 월스트리트 증권거래소에서 '암흑의 목요일'을 맞이하고 말았다. 번영의 절정이 가져온 환희가 컸던 만큼 추락의 골짜기 또한 가파르고 절망적이었다. 이날 월스트리트의 증권거래소는 주식 가격이 내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사로잡힌 투자자들이 한꺼번에 쏟아 낸 매물의 홍수에 잠겼다. 주가는 즉각 수직으로 곤두박질쳤다. 운집한 투자자들은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어제까지 주식을 사지 못해 안달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주식을 팔지 못해 아우성을 쳤다. 이 날의 주가 폭락으로 파산한 투자자들 가운데 11 명이 자살했다. 투자신탁회사의 큰손들이 연일 대책회의를 열어 필사적인 매입작전을 전개했다. 사태는 약간 진정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닷새 뒤 화요일에 두번째의 파도가 밀어닥쳤다. 단 하루 사이에 주가는 40%가 넘게 폭락했다. 파동은 계속 되었다. 11 월의 주가는 9 월의 절반을 밑돌았고 해가 바뀌자 8 분의 1 수준까지 내려갔다. 곧이어 런던, 파리, 베를린, 도쿄 등 전세계의 증권거래소에도 폭락의 파도가 밀어닥쳤다. 사람들은 악몽을 꾸고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1929 년 10 월 1 일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주식의 총액은 8 백 70 억 달러였다. 그런데 한 달 후에는 그것이 5 백 50 억 달러로 줄었고 1933 년에는 2 백억 달러에도 미달했다. 사람들은 자기의 귀중한 재산이 증권거래소의 게시판 위에서 솜사탕처럼 녹아 없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하지만 주가 폭락은 단순한 숫자놀이가 아니었다. 은행돈을 꾸어 주식을 매입한 사람들이 맨 먼저 파산했다. 가진 주식을 다 팔아도 은행빚을 갚을 수가 없는 사람들은 집과 땅을 빼앗겼다. 그러나 은행도 안전하지 않았다. 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한 은행들이 부도를 내기 시작하자 예금주들은 은행 앞에서 장사진을 쳤다. 은행들은 예금 인출의 홍수에 휩쓸렸다. 그러나 고객들의 돈은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대출되어 있었으므로 은행의 현금 잔고는 금방 바닥이 났다. 미국 내에서만 5 천 개의 은행이 연쇄적으로 파산해 버렸다. 9 백만명의 예금통장이 쓸모없는 종이조각으로 변하고 말았다. 재산과 예금구좌를 날려버린 사람들은 소비를 축소시켰다. 기업들은 물건을 팔 수 없게 되자 생산을


감축하고 종업원을 해고했다. 실업자가 증가하고 빈곤이 확산되자 상품 판매는 더욱 어려워졌다. 기업은 생산을 또다시 감축했다. 자금난에 빠져 수만 개의 기업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이것은 저주와도 같은 악순환이었다. '암흑의 목요일'이전에 가동되던 생산설비와 기술은 그대로 있고 기술자들도 살아 있었다. 그러나 기업가는 공장을 가동할 수 없었고 기술자들은 일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 창고에는 재고상품이 그득했지만 사람들은 돈이 없었다. 야적장에는 석탄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사람들은 추위에 떨면서 겨울을 보내야했고, 캘리포리아 농장에서는 맛좋은 오렌지가 썩어 가는 동안 뉴욕에서는 어린이들이 썩은 감자라도 찾아보려고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태였다. 세계의 공업생산은 20 년이나 후퇴해 버렸다. 대공황이 시작된지 불과 3 년만에 주요 산업국가의 공업생산액은 공황 이전의 60% 수준으로 떨어졌다. 가장 극심한 피해를 당한 미국의 경우 1928 년에 8 백 50 억 달러이던 국민총생산이 1932 년에는 3 백 70 억 달러로 줄어들었다. 성인 남자 네 명 가운데 한 명은 실업자였다. 국제무역도 마찬가지여서 금본위제도가 무너지고 보호무역주의가 득세하는 가운데 세계 전체의 무역량은 1/3 수준으로 격감해 버렸다. 자본주의 세계와 모든 유대관계를 단절해 버린 소련만이 대공황의 습격을 피할 수 있었다. 대공황은 경제학을 위기에 몰아넣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공황의 가능성을 부인한 신고전파 경제학을 비웃었다. 그러나 '존경받는 경제학'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세이의 법칙'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세이의 법칙'과 '왈라스의 일반균형이론'이 지배하는 경제학의 세계에서는 대공황과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없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변호해 온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반복해서 나타난 주기적 공황이라는 현실을 무시했다. 그러나 대공황이 몰고 온 혼란과 고통은 너무나도 강력하고 광범위한 것이어서 이번에는 그들의 경제학이 쓸모없는 것으로 무시당하는 벌을 받았다. 신고전파의 낡은 고정관념으로는 자본주의를 구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나자 '풍요한 세계'는 케인즈의 진단과 처방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케인즈는 대공황이 세계를 강타하기 이전부터 이 질병의 원인을 탐구하였으며 완전하지는 않지만 제법 효과있는 처방을 생각하여 두고 있었다. 그러나 대공황이라는 절망적인 사태가 아니었던들 그의 진단과 처방은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가 내린 '정부의 계획적인 개입'이라는 처방은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낡은 신앙에 대한 중대한 반역이었기 때문이다. 자유시장의 무정부상태와 경기변동 케인즈가 1936 년에 발표한 <고용, 이자와 화폐의 일반이론>(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vestment and Money)은 경제학의 역사에서 <국부론>이나 <자본론>에 버금 가는 중요 문헌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이 저서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경제학과 수학을 잘 모르는 보통 사람들에게 이 책은 따분하기 짝이 없는 미분학 교과서로 보인다. 그렇지만 케인즈가 말하고자 한 내용까지 그 미분방정식처럼 난해한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케인즈와 그 이전의 경제학자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가장 중대한 견해 차이를 알아보기 위해 오늘날 경제학 교과서에 가장 흔히 사용되는 비유를 들어 보기로 하자. 물이 흐르는 수로가 하나 있다. 그 수로의 한쪽 끝에는 기업이 있고 다른 쪽 끝에는 가계가 있다. 기업은 인간에게 모든 유용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며 가계는 이것을 소비한다. '인간에게 유용한 재화와 서비스'를 간단히 '상품'이라고 하자. 기업이 생산하는 모든 상품은 누군가의 소득이 된다. 상품의 판매 수입은 임금, 이윤, 지대, 이자 등으로 분할되어 가계로 흘러 간다. 원료나 생산설비의 구입 대금은 다른 기업의 수입이 된다. 가계는 그 소득으로 상품을 구입하므로 가계의 소득은 결국 기업으로 다시 흘러 들어간다. 기업과 가계 사이에는 소득과 지출이 연속적으로 흐르고 순환한다. 이 소득과 지출의 흐름을 매개하는 것은 화폐이다. 기업에서 생산한 상품의 총액은 가계 소득의 총액과 언제나 일치한다. 이것이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이 파악한 자본주의의 생산, 유통, 소비의 순환과정이다. 수로에 흐르는 소득과 지출의 흐름이 풍성할수록 그 사회는 풍요롭다. 이 수로는 완전히 폐쇄되어 있지 않다. 어디선가 새는 곳도 있고 또 물이 보충되기도 한다. 만약 가계가 소득을 다 지출하지 않고 그 일부를 저축하거나, 외국에서 생산된 상품에 소득을 지출할 경우 그러한 저축과 지출은 수로에서 외부로 누출된다. 정부가 징수해 가는 세금 역시 누출이다. 만약 아무것도 새로 주입되지 않고 소득의 일부가 누출되기만 한다면 수로의 물은 금방 바닥이 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정부가 세금을 다 지출하면 그것은 다시 수로로 흘러 든다. 외국의 가계가 그 나라의 상품을 구입하는 대금 역시 수로로 흘러 들어온다. 만약 정부가 균형예산을 편성하고 수출과 수입이


균형을 이룬다면 조세와 수입품 구입으로 인한 누출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저축이라는 누출 역시 투자라는 주입에 의해 상쇄된다. 가계의 저축은 대부분 은행예금이나 유가증권 등의 형태로 적립되고 기업가들은 그 기금으로 새로운 투자를 한다. 그런데 저축과 투자의 관계는 다른 형태의 누출, 주입과 다르다. 정부예산의 균형이나 수출,입의 균형은 정부의 노력에 의해 어느 정도 달성될 수 있는 정책상의 문제이다. 그러나 저축과 투자는 그렇지가 않다. 저축은 가계의 결정에 달려있고 투자는 기업의 판단에 좌우된다. 만약 어떤 원인에 의해서 가계의 저축이 기업의 투자보다 훨씬 커지는 일이 일어난다면 조만간 수로의 물이 줄어들어 가계의 소득 과 기업의 생산이 빈약해질 것이다. 하지만 케인즈 이전의 경제학자들---물론 맬더스와 마르크스, 홉슨 등은 그렇지 않지만---은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자율이 저축과 투자를 균형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저축이 투자를 초과하면 이자율이 하락하여 저축을 감소시키고 투자를 증대시킨다. 반대의 경우에는 반대현상이 일어난다. 얼른 생각하기에 이자율이 높을수록 저축이 유리하고 이자율이 낮을수록 기업이 투자하기가 유리하기 때문에 이 법칙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이것을 하나의 신념으로 간직했다. 그래서 그들은 소비자인 대중이 너무나 가난해서 생산된 상품을 소비할 수 없는 과소소비 공황의 가능성을 부정했다. 이러한 이론은 부자들이 '본의 아니게' 너무나 저축을 많이 하는 탓에 저축이 투자를 초과하는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자율이 저축과 투자를 균형시키는 한 둘 사이의 불일치란 언제나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케임브리지대학에서 화폐이론을 강의하던 케인즈 교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투자는 이자율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만 저축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저축은 이자율이 아니라 소득 수준에 좌우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사소한 차이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앞에서 살펴본 신고전학파의 '쾌락주의적 공리주의'와 '한계주의', '한계생산력 분배이론' 등을 모두 승인한 보수적인 경제학자인 케인즈가 공황과 실업이라는 자본주의의 고질병에 대해서만은 마르크스와 홉슨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차이 때문이다. 물론 케인즈는 마르크스와 달리 이 고질병으로 인해 자본주의가 사망할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소득분배를 균등히 하라는 홉슨식의 개혁적 처방 또한 배척했다. 케인즈는 '자본주의의 종말' 대신 '자유방임주의의 종언'을 선고하고 공황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자본주의에 대해 '정부의 계획적인 개입'이라는 손쉬운 처방을 내렸다. 그러면 케인즈는 어떻게 해서 이러한 '파격적'인 결론에 도달하였는가? 케인즈가 묘사한 세계는 신고전파의 세계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그곳에는 사람을 자본가, 노동자, 지주 등으로 구별짓는 계급적 울타리가 없다. 사회는 자본과 토지와 노동이라는 생산요소 중 어떤 것을 시장에 내놓고 그 대가로 얻은 소득으로 최대의 쾌락을 얻으려고 하는 원자화된 개인의 산술적 집합에 불과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각자가 자기의 이기심을 추구하더라도 저절로 사회적 조화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뿐이다. 케인즈 세계의 독특한 점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사람들은 자기 소득의 일부를 소비에 지출하고 나머지를 저축한다. 케인즈는 사람들이 소득을 소비에 지출하는 정도를 '소비성향'이라고 했다. 저축의 정도는 물론 '저축성향'이다. 그런데 소비성향은 이자율이 아니라 소득의 크기에 좌우된다. 이러한 관계를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소비는 소득의 함수이다." 소비는 소득이 증가하면 증가하고 소득이 감소하면 감소한다. 그러나 그 증가의 속도는 같지 않다. 사람이 추가적인 소득을 얻었을 때 소비지출을 늘이는 정도는 '한계소비성향'이다. 한계소비성향은 소득 총액과 소비지출 총액의 관계를 표현하는 '소비함수'를 단순히 미분한 것이다. 이것은 총효용과 소비량의 관계를 나타내는 '효용함수'를 미분하여 '한계효용'을 얻는 것과 똑같은 처리법에 따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학적 처리방법이 아니라 '소비함수'의 실제적 의미이다. 요컨대 소득이 일정 비율만큼 증가할 때 소비는 그만큼 증가하지 않으면 저축은 그보다 더 큰 비율로 증가한다. 그러나 소득이 일정 비율만큼 감소할 때는 소비는 그만큼 감소하지 않으면 저축은 그보다 더 큰 비율로 감소한다. 예컨대 1 백만원의 월급을 받아 70 만원을 지출하고 30 만원을 저축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리고 갑자기 월급이 두 배로 뛰었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추가적인 1 백만원의 소득 가운데 또 70 만원을 지출하고 30 만원을 저축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50 만원을 지출하고 50 만원은 저축할 것이다. 반면 2 백만원을 받아 1 백 50 만원을 지출하고 50 만원을 저축하던 사람이 갑자기 1 백만원을 받는다고 해보자. 그가 같은 비율로, 즉 75 만원을 지출하고 25 만원을 저축하기는 어렵다. 그는 기껏해야 10 만원을 저축하거나 아니면 한푼도 저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예를 사회 전체로 확대시켜 보면 이 관찰의 의미는 좀더 분명해진다. 모든 사람의 소득이 계속해서


상승하는 호경기에는 사회 전체의 저축이 소득의 증가보다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한다. 반면 소비의 증가 속도는 소득의 증가 속도보다 느릴 것이다. 만약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의 생각처럼 저축이 모두 투자된다고 생각하면 그 결과는 명백하다. 더 빠르게 증가는 투자와 더 느리게 증가하는 소비 사이의 격차는 반드시 그 투자에 의해 생산된 상품의 총량과 소비자들의 구매량 사이의 격차로 전환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느 시점에서인가 기업가들은 재고 상품이 창고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현명한 기업가들은 투자를 중단하고 생산을 축소하기 시작한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던 호경기는 그 정점에서 불황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게 된다. 여기서 투자와 저축 사이의 불일치가 발생한다. 정부가 이자율을 낮추기 위한 금융정책을 써도 이 눈사태를 멈출 수는 없다. 앞으로의 경기 전망이 극히 어둡다고 판단한 기업가들은 이자율이 낮아져도 새로운 투자를 주저하게 되기 때문이다. 특별한 악의를 지닌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현명한 시민들은 미래의 행복을 위하여 현재의 소비를 절제하면서 소득의 일부를 저축한다. 지혜로운 자본가들은 경기 전망이 밝은지 어떤지를 꼼꼼하게 따져보고 신중하게 투자 여부를 판단한다. 문제는 투자와 저축이 전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전혀 다른 동기에 의해 지배된다는 사실이다. 양측의 의사가 일치하지 않은 것이 그들의 책임은 아니다. 그러나 공황이 곧 자본주의의 사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똑같은 이치에 의해 시간이 지나면 다시 호경기가 찾아온다. 문제는 공황으로 인해 죄없는 사람들이 당하는 쓰디쓴 고통이다. 투자의 감소는 소득의 감소를 의미한다. 기업이 생산을 축소하고 종업원을 해고할수록 소비자의 구매능력 또한 감소한다. 불황기에는 모든 사람의 소득이 줄어든다. 그러나 소비가 그만큼 빠르게 줄어들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호경기에 마련한 저축을 꺼내 소비지출에 충당한다. 저축은 소득보다 더 빠른 속도로 감소한다. 그리하여 경기가 불황의 맨 밑바닥까지 내려가면 저축은 감소된 투자와 일치하는 수준까지 감소할 것이다. 저축과 투자의 일치라는 신고전파의 오랜 신앙은 마침내 현실이 된다. 그러나 그와 같은 균형상태는 "자유방임시장이 스스로 이룩하는 완전고용균형"과는 다르다. 도처에 실업자가 배회하고 예금 잔고가 바닥난 사람들과 그 자녀들이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절망적인 상황에서의 균형이다. 수로에는 호경기와는 달리 빈약한 물줄기가 흐른다. 경기가 맨 밑바닥까지 내려가면 회복이 시작된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되는 번영은 또다시 그 절정에서 추락할 운명을 지니고 있다. 케인즈는 이러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균형이란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케인즈 경제학과 전쟁광 히틀러 케인즈의 진단은 마르크스의 그것만큼이나 우울하고 비관적이다. 그러나 풍요한 유한계급의 신사로서 유쾌한 일생을 산 이 천재에게 그러한 분위기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자유방임주의라는 낡은 신조에 얽매이지 않은 부자들이라면 누구나 흔쾌히 받아들일 만한 치유책을 제시했다. "이기심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기업가들이 투자를 기피하고 있어서 수로의 물이 줄어들었으니 정부가 빚을 얻어서 대신 투자하라. 정부의 투자는 곧 국민들의 소득이 되어 소비자의 구매능력을 증가시킬 것이고 소비자의 구매능력 증가는 민간의 투자를 유발할 것이다." 케인즈의 처방은 '빚으로 꾸려지는 정부'였다. 그러면 정부는 어떤 사업에 투자해야 하는가? 사기업들이 장악한 산업부문에 투자하는 것은 그들의 반발에 부딪칠 것이다. 케인즈는 학교, 병원, 공원 등의 공공사업에 투자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투자의 유형이 아니라 투자 그 자체이다. 그래서 그는 약간의 익살을 섞어 이렇게 말했다. 재무성이 헌 병에 지폐를 가득 넣어 폐기된 탄광에 적당한 깊이로 묻고 그 위를 도 시의 쓰레기로 메운 다음, 많은 시련을 겪은 자유방임의 원리 위에서 사적 기업으로 하여금 그 지폐를 다시 파내도록 한다면...실업은 없어질 것이다...주택 건설 등은 더 욱 현명할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실제적 난관이 있다 할지라도 이렇게 하는 것이 아 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케인즈의 처방은 위험한 부작용을 일으킬 가능성을 안고 있기는 했으나 그런데로 효과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이 처방을 내린 1936 년 이전에 이미 치료약을 투입하가 시작한 나라들이 있었다. 독일과 미국이다. 경제학자들이 약품제조법을 둘러싸고 갑론을박을 벌이는 동안에 약품이 투입되었으므로 당연히 부작용이 일어났다. 케인즈는 시민의 복지를 향상시키는 공공시설의 건설에 투자하라고 권유했지만, 적어도 치료의 효능에 관한 한 감옥을 짓고 전쟁 무기르 만드는데 투자하는 것이나 공공시설을 짓는데


투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케인즈 식의 처방은 의사가 누구인가에 따라 마약으로 쓰일 수도 있고 명약으로 쓰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금세기 최고의 악당 아돌프 히틀러는 금융자본가, 지주, 중화학공업의 대자본가, 군부, 극우 보수주의자와 왕당파 등 과거 제국주의의 중심 세력을 규합하여 1933 년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실업과 인플레이션에 지친 독일 국민에게 "공익은 사익에 우선한다."고 선언하고, '새시대의 도래'를 약속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년 안에 실제로 실업과 인플레이션을 일소해 버렸다. 그는 유태인과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와 노동조합 간부들, 성직자와 자유주의적 지식인 등 모든 정치적 반대세력을 감시하고 체포하고 구금하기 위해 경찰서와 교도소를 짓고 수많은 정보원과 돌격대와 비밀경찰에게 봉급을 지불했다. 그리고 군복에서 대포와 비행기에 이르기까지 전쟁을 위한 군수품을 생산할 공장을 지었다. 도로를 확충하고 비행장을 닦았다. 이 모든 정부 지출은 국민의 소득이 되었고 소득의 향상은 소비의 증가와 민간투자의 증가로 이어졌다. 실업자가 자취를 감추었고 독일 국민들은 위대한 독일제국의 부활을 기대했다. 영국과 미국의 경제학자들은 '빚으로 꾸려지는 정부 지출'이 곧 파탄에 직면할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히틀러는 독일 경제를 그럭저럭 잘 끌고 나갔다. 역시 1933 년에 집권한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케인즈의 처방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그는 '뉴딜'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개입정책을 사용했다. 농산물의 경작 제한과 공산품의 경쟁 제한, 생산 제한에 대한 보상금 지급, 광범위한 실업구제사업의 실시, 테네시 계곡 개발 등 대규모의 공공시설 투자, 거액의 공채 발행에 의한 투자재원 조달 등이 그 정책의 주요 내용이었다. 뉴딜정책은 히틀러의 전쟁경제보다 훨씬 평화적이고 진보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대공황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것은 제 2 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군수산업이 확대된 이후였다. 미국은 2 차대전 당시 1 천 4 백만의 병력을 동원했는데 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무장시키는 것이 경제의 당면과제였다. 1939 년 이후 미국은 5 년간 30 만대의 항공기와 8 만 6 천대의 탱크, 1 만 2 천척의 전함과 화물선, 2 백 50 만대의 트럭 등 엄청난 전쟁물자를 생산했다. 이와 같은 군수산업은 연관된 산업분야의 민간투자를 유발했다. 이에 따라 1939 년 20%나 되는 실업률을 나타낸 미국경제는 순식간에 노동력 부족이라는 정반대의 상황을 맞이하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독일과 미국 모두에게 전쟁은 불황 탈출의 비상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케인즈는 진정으로 자본주의와 '풍요한 세계'를 옹호한 보수적인 경제학자였다. 그러나 당시의 경제학과 '풍요한 세계'는 여전히 자유방임주의에 지배되고 있었다. 따라서 자유방임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하나의 '죄악'으로 치부되었다. 케인즈는 기자들로부터 "공산주의자가 아니냐"는 질문까지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하버드대학 경제학부의 소장학자들을 맨 먼저 매혹시켰고 이어서 미국 정부의 경제각료들을 설득시켰으며 2 차대전이 끝난 뒤에는 자본주의 세계의 모든 정부와 대학을 정복했다. 그의 이론은 그럴 만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케인즈의 처방은 우선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한 강제적인 소득의 재분배를 배척했으므로 부자들을 안심시킬 수 있다. 게다가 빚으로 꾸려진 것이라 할지라도 정부가 실시하는 대규모의 공공투자는 결국 대기업에게 엄청난 돈벌이의 기회를 제공한다. 더욱이 주택을 짓든 전투기를 만들든 경제적인 효과에는 차이가 없다는 것은 보수적인 군부와 군수산업부문의 대자본가들 모두를 흡족하게 한다. 그들에게 전쟁은 언제나 좋은 것이다. 엄청난 예산을 국방비로 지출하는 것이 애국심의 이름으로만이 아니라 경제학의 이름으로도 칭찬받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인 것이다. 그래서 케인즈는 '풍요한 세계'의 수호성인의 대열에 서도록 격상되었다. 케인즈가 본 칼 마르크스의 사상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경제학의 역사에서 일찍이 저축과잉에 의한 공황의 가능성을 예견하고 지주의 소비를 예찬한 토마스 로버트 맬더스를 복권시켰다. 그는 자신을 훌륭하게 만든 <고용, 이자와 화폐의 일반이론>이 맬더스의 후광을 입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케인즈는 평생을 통해 과거의 위대한 정치가와 과학자와 철학자들의 생애에 관해 많은 글을 썼다. 그는 자신이 쓴 경제학자들의 전기에서 맬더스를 '케임브리지 경제학자의 시조'로 규정하면서 "만약 19 세기의 경제학이 리카도가 아니라 맬더스에게서 뻗어 나왔더라면 오늘의 세계는 얼마나 슬리롭고 풍요한 곳이 되었을까"라고 개탄하기까지 했다. 이것은 결코 형식적인 인사치레가 아니다. 맬더스와 케인즈는 그 천재성과 사상적 편협성 양면에서 몹시도 닮은 인물들이다. 19 세기의 이상주의자들이 대중의 빈곤을 구제하기 위해 자본주의 제도의 개혁을 요구했을 때


맬더스의 인구법칙을 들어 그들의 '고상하지만 그릇된 생각'을 나무랐다. 칼 마르크스를 읽어 보라는 강력한 권유를 받았다. 그런데 정말로 <자본론>을 정독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케인즈는 그 철학자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자본론>에 대한 나의 느낌은 코란에 대한 느낌과 같습니다. 나는 그 책이 역사적으 로 중요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또 바보가 아닌 많은 사람들이 그 속에서 '구세주의 말씀'과 영감을 발견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주의 깊게 살펴볼 때 그것이 어떻게 그런 영향력을 발휘하는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당신은 <자본론>이나 코란이 모두 양식을 갖추고 있다고 믿습니까?...<자본론>의 사회학적 가치가 여하하든간에 이 시대에 그 책이 갖는 경제학적 가치는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케인즈는 편지의 말미에다 "만일 내가 읽는다면 당신도 다시 읽어 보겠다고 약속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달아 놓았다. 아마도 그 때까지 그는 마르크스의 저작을 제대로 읽지 않았던 듯하다. 케인즈는 국가가 경제권력을 장악하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말살하는 전체주의 체제가 탄생할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계획경제의 도입에 반대한 보수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았을 때 "우리는 '무계획'도 '덜 계획'도 아닌 '더 계획'을 필요로 한다."고 대답하면서 "그 계획이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양심적으로 참여하는 가운데 결정된다면 결코 마귀를 섬기는 결과를 낳지 않는다"고 그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진실로 모든 사람의 의견을 경청한 것은 아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주장만은 결코 경청하지 않았다. 다음은 그가 1931 년에 쓴 에세이의 일부이다. 그런데 앞의 편지를 볼 때 그는 아직 <자본론>을 제대로 읽지 않고서 과학의 이름으로 그것을 부정해 버렸다. 과학적으로 보아 과오투성이일 뿐만 아니라 현대세계에 적용할 수도 없음을 뻔히 아 는 낡아빠진 교과서를 성서와 같이 불가침한 진리로 섬기는 사상을 어떻게 수락할 수 수 있는가? 고기보다는 진흙을 택하는 신조, 여러 가지 결점이 있기는 하지만 품위 있는 인간을 대표하며 인간이 성취한 모든 것을 이룩한 부르주아와 인텔리겐차보다 야만적인 프롤레타리아를 상좌에 모시는 신조를 내가 어떻게 채택할 수 있는가? 케인즈는 거의 '본능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경멸하고 적대시했다. 그런 사람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느꼈을 낭패감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잠시 동안의 오해였을 뿐이다. 그는 <고용, 이자와 화폐의 일반이론>을 출간한 후 세계 최고의 경제학자가 되어 미국과 유럽을 오가면서 불황의 격퇴를 위해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그는 2 차대전 중에 재무성의 요청을 받고 <전비조달론>(How to pay for the War)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그는 이 책에서는 임금소득자들이 수입의 일부로 전후에 상환되는 정부공채를 사도록 하는 안을 제시했다. 공황이 끝나고 다시 인플레이션이 시작되었으므로 이번에는 강제저축이라는 반대의 처방을 내린 것이다. 케인즈는 또한 종전이 임박한 1943 년 이후 2 년 동안 전후의 국제금융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작업에 참여했다.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을 설립하기 위한 강대국들 사이의 회의에서 케인즈는 단순한 영국의 대표자가 아니라 전체 과정을 지휘하는 자본주의 세계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케인즈는 63 세 되던 1946 년 4 월 갑자기 재발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어여쁜 리다아 로포코바는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슬픔 속에서도 35 년을 더 살았다. 죽기 마지막 몇 년간은 케인즈의 일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였다. 그는 잉글랜드은행의 이사였고 영국 정부가 후원하는 신예술위원회의 회장으로도 추대되었으며 국제경제회의의 영국 대표였고 유럽의 여러 대학으로부터 명예학위를 받았다. 그 중에서도 케인즈를 가장 기쁘게 한 것은 영국 왕실이 그에게 틸톤 남작이라는 귀족 작위를 내린 일일 것이다. 이로써 케인즈는 케인즈 경이 되었다. 케인즈가 쓴 <경제학자의 생애>(Lives of Economist)를 보면 그가 가문을 얼마나 중시하였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전기의 전반부에서 자기가 좋아한 경제학자들의 가계에 대해서 지나칠 정도로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곤 했다. 영국 왕실은 케인즈 가문의 족보를 샅샅이 뒤진 끝에 그 가문의 한 분파에 속하는 사람 하나가 오래 전에 작은 영지를 소유한 사실을 찾아내어 그것을 근거로 귀족 작위를 수여했다. 케인즈의 이론은 20 세기 후반 들어 많은 비난과 공격을 받고 있다. 전쟁을 혐오하고 평화를 애호한 사람들은 자본주의 정부가 대자본가와 군부와 보수적인 정치인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현실을 중시하여


케인즈 경제학이 군사경제를 조장했다고 비난한다. 그리고 자유방임시장의 효율성을 고집하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정부의 경제계획과 정책이 자원의 배분을 왜곡하고 독점을 촉진함으로써 오히려 시장의 효율성을 침해한다고 비판한다. '빚으로 꾸리는 정부'가 재정적자를 누적시킴으로써 결국 다음 세대가 그 빚을 갚는 부담을 지게 된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비판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1960 년대 이후 세계경제를 괴롭히는 스태그플레이션, 즉 불황과 인플레이션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현상은 케인즈 식의 처방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케인즈의 처방보다 더 나은 다른 처방을 내놓지 못한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악당이 아니지만 또한 구세주도 아니다. 그는 장점과 결점이 다 같이 돋보이는 천재적인 인간이다. 그는 자본주의와 '풍요한 세계'를 수호하기 위해 자유방임주의의 낡은 교조를 무너뜨렸다. 그는 학문 본연의 목적을 망각하고 현실의 상황을 외면한 신고전파 경제학의 '아름다운 세계'에 경종을 울렸다. 그러나 그는 '가난한 세계'의 고통과 항의에 진지하게 귀기울이지 않았으며, 유한계급의 번영을 사회 전체의 번영과 동일시했다. 그가 가치있는 인물로 역사에 기록된 것은 모든 면에서 훌륭한 학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병든 세계를 관찰하는 열린 눈과 낡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진취적인 태도를 가지고 자기 시대의 과제에 열정적으로 맞섰기 때문일 것이다. 12. 유토피아를 위한 '거대한 실험' (사회주의 70 년의 영욕과 고르바초프의 좌절) 총성도 통곡도 환희도 없는 혁명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V. I. Lenin)과 혁명 동지들은 칼 마르크스가 생전에 별로 눈여겨 보지 않았던 러시아에서 그의 예언을 실현시켰다. 1917 년 10 월의 볼셰비키혁명으로 탄생한 '러시아소비에트 연방'은 사회주의 세계 혁명의 본거지로 성장하여 한때 세계 인구의 절반을 붉은 깃발 아래 놓이게 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유럽에서 극동아시아에 걸친 광대한 영토와 3 억에 육박하는 인민을 거느렸던 거대한 나라 소련은 산적한 내부 모습을 지탱하지 못한 채 해변의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버렸다. 마지막 순간에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 했던 보수파의 쿠데타와 그에 저항하는 민중의 궐기가 있었다. 그러나 소련이라는 초강대국이 허물어지는 과정에서 그에 어울리는 정도로 요란한 내전의 포연은 울리지 않았으며 혁명의 유혈도 흐르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소련의 옛 지도자들은 어느 나라의 지도자보다 더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국민들을 향해 그것을 휘두르지 않았으며 그들 가운데 누구도 잃어버린 권력을 그리며 통곡하지 않았다. 대통령직을 사임함으로써 연방의 해체를 확인시킨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tchev)는 자신의 장래에 앞서 나라의 장래를 우려했다. 보수파의 쿠데타에 대한 민중의 반격에 편승하여 재빠르게 크레믈린궁을 차지한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 역시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지 못했다. 권력을 잃은 자와 얻은 자 모두 소련의 경제사회 체제가 그대로 존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 나라가 앞으로 어떤 모습을 지녀야 하며 어떻게 변신해야 할 것이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아담 스미드는 일찍이 자유방임시장이 '자유로운 자연적 질서'라고 단언했다. 스미드의 사상을 추종하면서 자본주의의 축복을 찬양해온 '풍요한 세계'의 경제학자와 철학자들은 지금 기쁨에 들떴다. "보라! 위험한 환상과 맹목적인 증오감에 사로잡힌 광신자들의 사상에 조종이 울렸다. 사회주의는 모든 면에서 완전히 파산하고 말았지 않은가. 자본주의는 마침내 영생을 얻었도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여전히 꺾이지 않은 항변이 들린다.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가 곧 사회주의 사상의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더욱이 그것이 자본주의의 모순과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소련식의 사회주의 건설 방법은 비판해야 하지만 사회주의가 추구한 이념적 가치만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이다.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양측의 주장이 조만간 어떤 합의에 도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다행히도 양측의 견해가 일치되는 대목이 하나 있다. 그것은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가 근본적으로 경제적 실패에서 비롯되었다는 진단이다. 우리는 이 합의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하자.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모든 국민경제는 다음과 같은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즉 어떤 재화를 어떤 방법으로 얼마만큼 생산하여 어떻게 나누어 쓸 것인가? 또 어떻게 해서 국민의 경제생활 수준을 지속적으로 높여 나갈 것인가? 추상적인 수준의 해답은 명확하다. 모든 국민경제는 소비자가 필요로 하는


재화를,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방법으로, 그리고 소비자가 원하는 만큼 생산하여, 각자가 생산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나누어 가지게 해야 한다. 그리고 매년 생산되는 재화 중에서 가능한 한 많은 부분을 소비하지 말고 투자하고 생산의 기술 수준을 향상시킴으로써 경제 규모를 확대시켜 나가야 한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자본주의 자유시장은, 그 방식이 바람직하건 바람직하지 않건간에, 스스로 이 과제를 해결해 나간다. 시장에서 나타나는 수요와 공급의 상호작용으로 등락하는 가격이 '어떤 재화가 얼마만큼' 생산되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자본가들은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비용을 최소화하는 생산방법을 스스로 결정하며 경제의 성장은 근본적으로 투자의 크기에 달려 있다. 물론 이러한 자유시장은 노동자의 빈곤과 타락, 극심한 빈부 격차, 경기변동과 공황 등 갖가지 결함을 노출시켰고 그 결과 자유시장 그 자체를 철폐하려는 사회주의 사상과 혁명운동을 탄생시켰으며,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정부의 개입을 옹호하는 케인즈 경제학을 낳았다. 그러면 그 말썽 많은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출현한 사회주의 경제는 이 과제들을 얼마나 훌륭하게 해결하였는가? 사상이 아닌 현실로 존재했던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어느 정도 다른 모습이었던 것인가? 사회주의 권력의 '보이는 손'은 스미드의 '보이지 않는 손'보다 더 나은 것이었던가?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을 살펴볼 때 대답은 부정적이다.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제국주의의 침략'이 아닌 내부 모순 때문에 붕괴해 버렸다. 소련식 사회주의는 결코 모든 면에서 나쁜 체제는 아니었지만 하나의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핵심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소련에서는 오랫동안 체제 비판이 금지되어 왔다. 그래서 오직 자본주의 세계의 경제학자들만이 사회주의 경제를 비판할 권리를 누렸다. 소련 내부에서 나온 최초의 그리고 매우 종합적이고 진지한 사회주의 계획경제 비판은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인 고르바초프의 연설과 논문에서 드러난다. 물론 고르바초프는 전문적인 경제학자가 아니다. 그러나 레닌과 스탈린, 후르시초프 등 그의 전임자들이 경제문제에 대한 최고의 권위자로 대접받은 전례에 비추어 고르바초프에게도 비슷한 예우를 하는 것이 그리 큰 잘못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자본주의 세계의 독자들을 위해 집필한 저서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는 소련 경제의 실상에 대한 진솔한 고백을 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소련의 개혁주의자들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 대한 견해를 대폭 수정하였다는 사실까지 명료하게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비록 고르바초프가 소련 사회경제 체제를 개혁하는데 실패하고 연방과 함께 몰락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할지라도 사회주의 경제의 실상에 대한 그의 견해를 존중하는 것이 결코 불합리한 일이 아닐 것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1985 년 3 월 불과 54 세의 젊은 나이에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되었다. 남부 러시아 농업지역인 스타브로폴의 시골 마을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모스크바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고르바초프는 공산주의청년동맹과 지방 당조직에서 잔뼈가 굵은 지식인이다.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낡은 교조를 둘러싼 추상적 논쟁보다는 실무적 경험을 통해 성장했다. 그는 사교적이고 친절하며 솔직한 성격에서 소련의 옛 지도자들과 달랐을 뿐만 아니라 서독, 영국, 프랑스 등 거의 모든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사회상황을 직접 목격하면서 지도자 수업을 쌓은 점에서도 전임자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새로운 스타일의 지도자였다. 그가 수많은 난관을 무릅쓰고 페레스트로이카를 감행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급속하게 변화해가는 자본주의 선진국들의 경제사회 상황을 직접 보고 느낀 위기감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앞에는 반세기 동안 누적되어 온 갖가지 난관과 장애가 가로놓여 있었고 그는 결국 그것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보이는 손'의 눈부신 성공 10 월 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한 볼셰비키가 연이어 밀어닥친 반혁명군과 내전을 치르고 자본주의 열강의 간섭전쟁을 뿌리쳤을 때 러시아는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혁명 전야에야 걸음마를 시작했던 공업시설은 거의 다 파괴되었고 그것을 관리하던 상층계급은 해외로 달아나 버렸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붉은 깃발 아래 반혁명군과 싸우다 전사하거나 불구가 되었으며 드넓은 옥토는 황무지로 변해 있었다. 농촌은 농촌대로 피폐하기 이를 데가 없었고 도시는 도시대로 식량과 연료가 없이 빈사상태에 빠졌다. 도처에서 전염병이 창궐하고 외국과의 무역도 완전히 단절되었다. 농산물 징발에 불만을 품은 농민들은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켰으며 수천 년간 짜르의 압제 아래서 살아온 인민들은 아직 혁명가의 이상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칼 마르크스의 가르침은 자본주의 멸망의 필연성에 관한 것일뿐, 사회주의 건설의 방법과는 거리가 멀었다. 혁명가들이 가진 것이라곤 정치권력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해야만 했다.


자본주의는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난 제도이다. 누구도 그러한 체제를 계획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곳에서는 문제야 많지만 어쨌든 이기심과 자유거래와 경쟁이라는 뚜렷한 원리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전혀 다르다. 먼저 인간 사회의 진보와 이상사회를 갈망한 철학자들이 머리 속에서 그림을 그렸고, 다음에 일단의 혁명가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해야 했다. 그리고 그 후에야 사회주의 체제가 실제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 소련 사회주의를 건설한 지도자들은 마르크스의 가르침에 따라 사유재산제도를 완전히 철폐시키고, 자유시장에 맡겨졌던 모든 결정을 자신이 맡아 행사하기 시작했다. 어떤 재화를, 어떤 방법으로, 얼마만큼 생산하여, 어떻게 분배하며, 매년 생산량을 어느 정도 확대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국민경제의 모든 과제가 자유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떠나 사회주의 권력의 '보이는 손'에 맡겨졌다. 그러나 사회주의 권력의 '보이는 손'이 자유방임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보다 훌륭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았다. 1924 년 레닌이 병으로 사망한 후 치열한 내부투쟁을 통해 가장 높은 권좌에 오른 인물은 요제프 스탈린(I. V. Stalin)이었다. 스탈린을 정점으로 한 소련공산당은 사회주의 경제의 기초공사를 단기간에 완수하는 일에 운명을 걸었다. 그들이 봉착한 첫번째 장애는 '자본 부족'이었다. 칼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은 '축적된 과거 노동'이다. 어떤 시점에서 한 사회가 보유한 생산설비와 기술은 그것을 만드는데 투하된 일정한 양의 인간 노동으로 환원할 수 있다. 그런데 혁명과 내전의 폭풍우가 휩쓸고 간 사회주의 러시아에는 축적된 자본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소련은 "자본주의의 망망대해 한가운데 외롭게 떠 있는 사회주의의 섬"이었다. 모든 대외적 교역이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에 외국에서 자본을 빌려 오는 것도 불가능했다.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빨리 자신의 힘으로 중화학공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군사적 요구도 있었다. 소련 정부는 자본주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어떠한 경제이론에 의해더라도 현재의 소비를 절제하지 않고는 자본을 축적할 수 없다. 영국과 프랑스 등 자본주의 선진국에서는 해외 식민지에 대한 약탈과 농민을 추방한 엔클로서운동, 중세적 특권 등에 의해 최초의 자본이 탄생했으며, 노동자에게 최소한의 생존임금을 주고 나머지 생산물을 모두 자본가가 차지하게 함으로써 생산물의 상당한 부분을 계속해서 자본으로 축적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러시아에서는 이 모든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소련 정부는 사회주의적 방법으로 자본 부족문제를 해결했다. 스탈린은 활용 가능한 자원과 인력 가운데 가능한 한 많은 양을 중화학공업에 우선적으로 쏟아 붓고 나머지를 소비재 생산에 투입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생필품과 소비재의 부족 사태가 일어났다. 현재 소비의 절제는 언제나 대중의 생활고를 낳는다. 그러나 이 고통은 공평하다는 면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빈곤보다는 훨씬 결딜 만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자유시장에서는 소비재의 부족 현상이 생기면 가격이 올라간다. 그러면 더욱 많은 화폐를 지불할 능력을 가진 사람부터 그것을 구입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이처럼 '부도덕한' 일을 용납할 수 없다. 그래서 식량을 비롯한 기본적인 생필품은 부족한 대로 만인에게 똑같이 '배급'되고 다른 소비재는 먼저 상점에 도착하는 사람에게 '선착순'으로 판매된다. 이렇게 해서 자본주의 경제학자들로부터 그토록 큰 모욕과 조소를 받은 '줄서기'가 출현했다. 이것이 '부족한 재화'와 인간의 '무한한 욕망'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사회주의적인 방법이었다. 공평하기는 하지만 이것은 분명 일종의 강제저축임에 분명하고 또 대중에게 커다란 생활상의 불편과 고통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소련의 지도자들에게는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이것이 공산주의적 이상향을 건설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치러야 할 대가라고 인민을 설득했다. 물론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를 완전히 철폐시켰다. 모든 생산시설과 원료를 국유화하고 자본가계급의 존재를 말살했다. 기업을 경영하고 생산활동을 지휘하며 생산물을 처분하는 일체의 권리---예전에는 자본가들이 이 일을 했지만---는 소련공산당과 정부의 관료들에게 맡겨졌다. 그들은 실질적으로 자본가의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자본의 소유자는 아니었으며 그들의 권리는 상속되거나 증여될 수 없었다. 스탈린은 생산의 또 다른 요소인 토지의 소유권도 부정했다. 원래 볼셰비키 군대는 노동자와 빈농의 군대였다. 혁명에서 승리한 빈농들은 귀족과 자본가들의 토지를 나누어 가졌다. 그러나 이것 역시 사유임에는 분명했다. 스탈린은 농업부문에서도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확립하고 농업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모든 경작지를 거대한 집단농장으로 개조했다. 그러나 그 재편과정은 자본주의 발흥기의 가장 잔혹한 단면을 보여 준 영국의 엔클로저운동을 능가했다. 스탈린은 당시 농민층의 5% 남짓이던 부농들을 '자본주의의 앞잡이'로 몰아세웠다. 러시아 말로 '쿨라크'라고 하는 유복한 자작농들은 하루 아침에 땅과


재산을 몰수당하고 변방으로 쫓겨나거나 '라게리'(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들은 비밀경찰의 감시 아래 삼림 벌채, 운하와 댐 건설, 철도 부설 등의 중노동에 투입되었다. 1928 년부터 시작된 '쿨라크 사냥'으로 약 백만 명의 농민들이 죽임을 당했다. 1933 년에 대흉년이 몰아 닥쳤을 때는 그보다 훨씬 많은 수가 생명을 빼앗겼다. 이렇게 해서 1930 년대 말까지 거의 모든 경작지가 '콜호즈'(국영농장)로 개조되었다. 스탈린은 콜호즈에 트랙터를 비롯한 농기계를 도입하고 농촌 마을에까지 공산당 조직을 뿌리내리게 했다. 그러나 이 시기가 '암흑의 시대'였던 것만은 아니다. 소련의 지도자들은 '타고난 악당'도 아니며 '독재의 화신'도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아 온 공산주의 이상사회에 대한 확신과 열정에 도취되어 대중의 고통을 합리화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확신과 열정은 지도자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결정체'라고 칭송받아 온 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는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무조건적이고 열광적으로 헌신한 1930 년대 공산당원들의 눈물겨운 삶을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전해 준다. 사회주의 건설 초기의 소련 사회는 분명 "이기심에 지배되는 쾌락주의적 개인의 산술적 집합체"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인류의 미래가 걸린 그 '위대한 실험'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행복한 미래에 대한 확신'이 무수한 난관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 사회를 하나로 통합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제 2 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독일이 소련을 침략했을 때 소련은 혁명 후 처음으로 국제사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불과 20 년 동안에 그 나라는 "낡은 전제정치 아래에서 신음하는 후진농업국"에서 이미 "히틀러와 현대전을 감당할 수 있는 강력한 공업국가"로 탈바꿈해 있었다. 소련은 '조국전쟁'---러시아 사람들은 제 2 차 세계대전을 이렇게 말했다.---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유럽의 동쪽 절반을 '적화'시켰다. 곧이어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나라인 중국 대륙 역시 붉은 깃발 아래 놓여졌다. 소련은 이제 '사회주의의 외로운 섬'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승리와 영광의 뒤안길에서는 사회주의의 미래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불길한 징후들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모두가 '스타하노프'일 수는 없다. 1935 년의 일이다. 우크라이나 돈바스 탄광의 노동자 스타하노프는 당시 노르마(생산기준량)의 10 배가 넘는 엄청난 양의 석탄을 캐 내서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러자 소련 정부는 그를 '노동 영웅'으로 치켜세우고 모든 산업부문의 노동자들로 하여금 효율적인 작업방식과 새로운 기술을 체득하도록 격려하는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이른바 '스타하노프운동'이다. 이 운동은 신발, 섬유, 자동차, 철도운송, 농업, 임업 등 모든 산업으로 확산되었다. 그 결과 1933 년에 시작된 5 개년 계획은 노동생산성을 두 배로 향상시키는 등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표면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밑바닥에는 무기력하고 나태한 분위기가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했다. 볼셰비키혁명으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는 철폐되었다. 또 자본주의의 가장 큰 병폐가 계급간의 경제적 불평등이었던 만큼 사회주의 정부는 임금 수준을 거의 평준화시킴으로써 경제적 평등을 이루었다. 생산수단의 공유와 평등은 소련사회에서 가장 중시되는 가치였다. 그러나 소련 인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상적인 차원의 문제였다. 사적 소유이건 전인민적 소유이건간에 그것이 '소유'인 한 언제나 중요한 것은 생산물을 자유롭게 지배하고 처분할 권리를 지니는 것이다. 그런데 소련의 노동자들에게는 그런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상부에서 정해 준 노르마를 채우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노동자일 뿐이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자본가 대신 국가가 임금을 준다는 사실뿐이었다. 농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부가 정한 가격으로 모든 농산물을 공출해야 하는 이상 그들은 농업노동자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밤잠을 자지 않고 일하거나 창의성을 발휘한다고 해서 특별히 물질적인 이익을 얻는 것도 아니었다. 혁명정신에 의거한 사회주의적 경쟁이란 일시적으로 또는 일부의 사람들을 매료시킬 수는 있었지만 모든 사람을 언제까지나 일에 붙잡아 맬 힘을 갖고 있지 않았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아무래도 빈둥거리는 쪽을 택하기 쉬운 것이 인간인 법이어서 많은 노동자들이 적당히 일하고 술이나 퍼마시는 무기력한 생활에 젖어 들기 시작했다. 소련의 지도자들, 특히 스스로 사회주의,공산주의라는 이념적 목표를 위해 사는 혁명가임을 자처한 공산당의 지도자들에게 이것은 매우 개탄스러운 사태였다. 고매한 '사회주의적 애국심'보다 물질적 이익을 탐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활태도'의 찌꺼지로 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가 없었더라면 '스타하노프운동'과 같은 캠페인은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레닌이나 흐루시초프 등 역대 지도자들은 경제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스타하노프운동'과 유사한 생산성 향상 캠페인을 벌이는 동시에,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노동성과에 따른 차등임금제도 등의 소위 '인센티브제도'를 도입하여 대중과 타협을 시도하곤 했다. 이기심과 사회주의적 애국심 가운데 어느 것이 강한가를 보여주는 가장 단적인 사례는 '텃밭 생산물' 통계이다. 소련 농민들은 집단농장이 아닌 자기 집 텃밭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자유롭게 판매할 권리를 부여받고 있었다. 그런데 1978 년의 경우 전체 농지 면적의 3%도 안되는 텃밭에서 생산된 감자와 야채와 쇠고기의 양은 각각 소련 전체 생산량의 61%, 29%, 34%를 차지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기술적인 요소보다는 '인간적인 요소'가 생산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리고 무조건 똑같은 임금을 인정했다. 나아가 그는 생산물을 처분할 권리를 기업 스스로가 행사하고 노동자들이 기업 경영에 책임성 있게 참여할 수 있어야만 생산의 효율성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이러한 견해는 보수적 관료와 당간부들로부터 '사회주의에 대한 배신이지 자본주의로의 회귀'라는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많았다. 그러나 낡은 체제 속에서 초고속의 출세를 거듭하여 권좌에 오른 고르바초프는 체제 개혁의 대수술을 결행했다. 그는 서기장이 되자마자 알코올중독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금주법을 실시했다. 그리고 연설과 논문을 통해 '격차없는 임금'을 고집하고 '평등화 관념'에 대해 가차없는 비판을 했다. 사회주의는 평등화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 두고 싶다. 사회 주의는 "각자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는 원칙에 따른 생활 조건이나 소비생활을 보장할 수 없다. 이것은 공산주의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사회주의는 사회적 이익의 배분에 이것과는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 "각자는 능력 에 따라 일하고 그의 노동에 따라 분배받는다." 이것이 사회주의의 기준이다. 그러 나 인간이 다른 인간을 착취하지 않으며 사람을 부자와 가난뱅이, 백만장자와 빈민 으로 나주지도 않는다. 모든 국민은 평등하며 직장을 보장받는다. 중등,고등 교육과 의료 서비스는 무료로 제공되며 시민들은 노후생활을 보장받는다. 이것이 사회주의 에서의 사회정의 구현이다. 칼 마르크스가 이 말을 들었으면 혹시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성실성과 성과에 따른 임금 격차를 인정하지 않고는 근로의욕이라는 '인간적 요소'를 활성화할 수 없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나아가 그는 이러한 '평등화 관념'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면서 "사회주의 체제를 착취하는" 인간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정통 사회주의자들이 몹시 불쾌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쨌든 소련 사회주의는 오웬의 '뉴하모니'를 망쳐 놓은 인간들과 비슷한 사람들을 만들어 낸 것이 사실인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실업이 존재하지 않는다. 나태하거나 직장 규율을 지키지 않아 해고 된 사람들에까지 다른 직장을 준다...비록 일을 열심히 안하거나 무능한 인간일지라 도 쾌적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급료를 받는다...우리는 이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사회주의의 이점을 악용하려 하는 악질적인 인간들이 존재한 다는 사실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들은 오직 자기의 권리만을 주장하면서 자기 에게 부여된 의무는 조금도 생각하려 들지 않는다. 이들은 일은 제대로 안하고 빈 둥거리면서 술만 퍼마신다. 현행 법률과 관행을 악용하여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 는 사람들도 허다하다. 이들은 사회에 공헌하는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사회에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은 모두 얻어내고 심지어 차지해서는 안되는 몫까지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불로소득으로 산다. 시장의 폐지, 시장의 보복 자본주의가 초래한 경제적 불평등과 노동자계급의 비참한 처지에 대해 블 같은 적개심을 품고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존재해 온 모든 것을 부정해 버렸다. 그러나 자유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자발적인 거래가 교환의 두 당사자 모두에게 준다는 스미드의 통찰은 그렇게 간단히 무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자본주의와 시장의

있었던 철저히 이익을 관계에


대해서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 바 있다. 그리고 그 논쟁을 거쳐 정립된 결론은 시장이 자본주의 사회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또 시장이 존재하는 모든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인 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시장은 고대나 중세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완전한 형태로 발전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모든 지배적 사회제도를 혐오한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사유재산제도와 아울러 시장의 필요성까지도 부정해 버렸다. 시장의 폐지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존립을 위협하는 중대한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시장이 존재하지 않으면 소비자의 요구와 생산자의 판단이 괴리를 일으키게 된다. 아담 스미드 이래 모든 뛰어난 경제학자들이 강조한 것처럼 생산의 목적은 소비이다. 자유시장에서 형성되는 가격의 움직임은 소비자가 무엇을 얼마만큼 요구하는지를, 그리고 어떤 재화들이 너무 많이 생산되거나 적게 생산되었는지를 알려 줌으로써 생산자로 하여금 재화의 생산량을 조정하게 해준다. 그러나 소련경제에서 '가격'은 이러한 정보 전달 기능을 상실해 버렸다. 모든 재화는 정부가 만든 일정한 기준에 따라 가격이 매겨졌다. 소비자의 다양한 수요는 끊임없이 변화했지만 모든 재화의 생산량은 경제계획을 담당하는 관료들의 판단에 의해 결정되었다. 따라서 소비자들은 언제나 쓸데없는 물건들이 너무 많이 공급되고 꼭 필요한 물건은 잘 나오지 않는다는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가격'이 재화의 사회적 '가치'와 동떨어진 존재로 되면서 기업 경영도 심각한 악영향을 받게 되었다. 왜냐하면 생산의 효율성을 측정할 기준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일등 기업은 무엇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기업이 아니라 최소의 비용ㄹ으로 최대의 수입을 얻는, 즉 가장 많은 이윤을 내는 기업이다. 그러나 생산에 쓰이는 원자재와 생산설비의 가격과 생산된 재화의 가격이 소비자의 수요와 무관하게 인위적으로 결정될 경우 그러한 수익-비용의 비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유한한 자원으로 인간에게 최대의 만족을 주는 것이 효율적인 생산활동임을 인정한다면 소련의 사회주의 계회경제는 분명 정상궤도를 이탈할 수 밖에 없다. 시장이 폐지되고 가격이 고유한 기능을 상실해버린 소련경제에서 생산활동의 성과를 측정하는 유일한 기준은 기업의 총생산고뿐이었다. 그래서 아래로는 개별 노동자로부터 위로는 거대한 국영기업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산활동의 목표는 상부에서 결정한 노르마, 즉 생산할당량을 초과 달성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같은 '총생산고 제일주의'가 반세기 넘게 경제활동을 지배하면서 문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것에 대한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자가 진단을 들어 보자. 총생산고를 올리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가 되고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으며 특히 증공업분야에서는 더욱 심하다...나라의 부의 상당한 부분이 마구 낭비된다. 고도의 과학기술 수준에 현저히 미달된 낭비적인 프로젝트가 얼마든지 있다. 노동력과 원 료와 자본을 최대한으로 사용하는 노동자나 기업을 최고라고 여겼다. 생산자가 소 비자를 '만족시켜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우리 나라에서는 소비자는 전적으로 생 산자 마음대로 좌우되고 해주는 대로 감수할 도리밖에 없다. 이 역시 총생산고 제 일주의이 결과이다. 우리 나라의 경영자들은 일반적으로 어떻게 해서 나라의 자산을 증식시킬까 생각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좀더 많은 원자재와 노동력과 노동시간을 제품에 부어 넣 어 더욱 비싼 값으로 제품을 팔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그 결과 '총생 산고' 중시 경향에도 불구하고 상품은 매우 부족하다. 우리 나라에서 제품의 단위 당 투여되는 원자재, 에너지 등의 자원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훨씬 많았고 지금도 그렇다. 우리 나라의 풍부한 천연자원과 인적 자원이 오히려 우리를 망쳐 놓은 것 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원래부터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그리고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제시된 체제이다.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자본주의가 그 내적 모순 때문에 생산력 발전을 저해하는 단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들에게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체제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효율적인 체제여야 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만천하에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소련의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세운 나라가 경제적으로 미국을 추월하는 것을 지상 과제로 삼고 치열한 체제 경쟁을 벌였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다. 국민총생산과 철강, 석탄, 석유, 자동차, 공작기계 등 핵심적인


산업의 생산력이 절대적인 수준에서는 미국에 못 미쳤지만 상대적인 성장 속도 면에서는 두 배나 빨랐다. 원자폭탄과 수소폭탄 등 군사무기 개발에서도 몇 년 뒤지지 않았다. 더구나 1957 년 가장 먼저 스푸트닉 1 호를 우주로 쏘아 보내 미국인들에게 '스푸트닉 쇼크'를 안겨준 데 이어, 1961 년 보스톡 1 호를 타고 지구 주위를 돌면서 인류 역사상 최초로 지구를 관측한 가가린 소령이 "지구는 푸르다."고 타전했을 때 소련 지도자와 국민들의 자신감은 절정에 올랐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소련 경제는 더욱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 가고 있었다. 다시 고르바초프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철강, 원료, 에너지의 최대 생산국에서 그런 자원이 부족하게 되고...식량으로 쓸 곡물의 최대 생산국의 하나이면서 매년 수백만 톤의 사료용 곡물을 수입해야 한다. 인구 천명당 의사와 병원 침대 수가 가장 많으면서도 의료 서비스는 놀랄 만큼 부 족하다. 우리 나라의 로켓은 너무나도 정확하게 헬리 혜성을 추적하고 금성에까지 비행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기술을 자랑하면서도 이것을 경제활동에 효율 적으로 적용하는 데는 너무나 뒤떨어져 소련제 가전제품은 품질이 형편없다. 1970 년대 후반 소련 대표로 각종 국제회의에 참석하고 선전 자본주의 국가들을 방문하면서 지도자 수업을 쌓고 있던 고르바초프는 '총생산고 제일주의'가 소련 경제를 질식시키고 있음을 통감했다. 그리고 당시 이미 본격적인 단계에 접어든 자본주의 선진국의 '과학기술혁명'은 그러한 위기의식을 한 단계 더 증폭시켰다. 오늘날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등 자본주의 선진국의 산업은 빠르게 변모해 가고 있다. 석유, 철강, 금속, 석탄, 자동차 등의 전통적인 중화학공업은 여전히 중요한 분야이지만 핵심분야는 아니다. 대량의 원료와 에너지를 소모하고 노동자에게 고통스러운 반복작업과 중노동을 강요하며 재앙과 같은 폐기물을 쏟아내는 전통적인 공업 대신 컴퓨터, 반도체, 신소재, 전자, 정보통신, 유전공학, 항공우주산업 등의 새로운 첨단산업들이 이들 선진국 경제의 선두에 서 있다. 물론 이러한 과학기술혁명과 첨단산업의 발전이 자본주의 사회를 어떤 모양으로 변화시켜 놓을 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전통적인 산업과 결합하여 생산의 효율을 혁명적으로 높이고 있다는 사실은 확연하다. 현대의 자본가들은 새로운 제품과 생산기술을 개발하여 이윤을 획득하기 위해 엄청난 자본을 투자하고 있다. 그런데 전통적인 산업에만 집착하고 원자재와 에너지와 인력을 마구잡이로 갖다 쓰면서 오직 총생산고를 올리는 데만 몰두한 소련의 경제관료와 기업경영자들은 미국에 필적할 만한 수준에 도달한 소련의 기초과학과 첨단기술을 생산에 적용하는 일에 극히 무관심했다. 그래서 고르바초프는 시급히 현존 체제를 개혁하지 않는 한 소련 경제뿐만 아니라 국가 자체의 몰락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설득하려고 했다. 어떤 시점---이것은 1970 년대 후반에 유독 현저했지만---에 언뜻 설명하기가 난감 한 사태가 벌어졌다. 소련이 활력을 잃기 시작한 것이다. 실패로 돌아간 경제계획이 더 빈번해지고 난관은 누적되고...사회경제적 발전에 일종의 '브레이크 현상'(성장 저해 메커니즘)이 생겼다. 그리고 과학기술혁명에 의해 경제적 사회적 진보의 새 로운 전망이 열리는 시기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최근 15 년간 국민소득의 신장율은 절반으로 떨어지고...세계의 선진국들에 급속히 접근하고 있던 한 나라가 한 단계 한 단계씩 뒤떨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생산의 효율, 품질, 과학기술의 진보, 하이테크놀로지의 개발과 첨단기술의 이용 등에서 선진국과의 격차가 더욱 커지고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와 공포정치 아담 스미드는 '작은 정부'를 권장했다. 국부 증진은 '자유방임시장'이 스스로 이룩할 것이기 때문에 국가의 역할은 최소한의 국방과 질서 유지, 그리고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서 끝나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러면서도 스미드는 공정한 조정자가 되어야 할 정부가 부유한 계층을 편애하는 현실을 약간 걱정스런 어조로 지적했다. 그러나 칼 마르크스는 국가를 계급지배의 도구로 규정했다. 그의 세계에서 국가는 '부르주아지의 일상사를 처리하는 위원회'에 불과하다. 국가권력의 핵심은 군대와 경찰의 폭력이며 소수의 자본가계급은 이것에 의해서만 다수의 프롤레타리아를 지배할 수 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가


국가권력을 장악함으로써만 인간 해방을 성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자유방임주의의 종언'을 선포하고 국가의 시장 개입을 역설한 케인즈는 마르크스의 견해 때문에 큰 곤란을 겪었다. 그는 자본주의를 공황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해 정부의 개입이라는 처방을 제시했지만 자유방임주의를 옹호해 온 많은 경제학자들은 정부의 시장 개입이 전체주의 독재라는 '마귀'를 불러들일 것이라고 비난했다. 자유주의자들의 항의는 너무 지나친 것이었지만 진리의 한 측면을 포착하고 있었다. 마르크스의 말마따나 국가는 "경제적 토대 위에 구축된 정치적 상부구조"이다. 자본가계급이 경제적 지배력을 기반으로 국가를 손아귀에 넣는 것처럼 국가가 경제를 지배하게 되면 국가 그 자체가 하나의 지배권력이 될 것이다. 히틀러의 독일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소련에서도 비슷한 사태가 벌어졌다. 모든 생산수단을 국가가 소유하고, 공산당이 국가기구를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상황에서는 모든 권력이 공산당의 지도부에 집중될 수 밖에 없다. 더욱이 소련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소수자에 대한 다수자의 독재이므로 진정한 민주주의"라는 모토 아래 어떠한 정치적 반대세력의 존재도 허락하지 않는 완전한 일당독재를 실시했다. 공산당은 모든 경제적 정치적 권력을 자신의 손아귀에 집중시켰다. 그리고 여기에 스탈린이라는 무자비한 독재자의 숨결이 곁들여졌다. 소련이라는 거대한 국가의 몰락은 스탈린의 시대에 이미 잉태되고 있었다. 1934 년 12 월 볼셰비키혁명 당시 페테르부르크의 무장봉기를 지도했던 영웅 키로프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스탈린은 이 사건을 트로츠키파의 소행으로 간주하고 그 악명 높은 대숙청의 칼을 빼들었다. 레닌의 혁명 동지인 카메네프와 지노비에프, 투하체프스키 사령관, 정치국원 르이코프와 부하린, 노동조합 지도자 툼스키 등이 비밀재판을 통해 처형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들의 혐의는 모두 '국제 파시스트의 앞잡이', '트로츠키주의자', '반당분자', '독일 스파이', '인민의 적' 등이었다. 대숙청은 성역이 없었으며, 당의 고위 간부와 군장교, 고위 관료와 외교관, 노동조합 지도자와 작가 등 지도층을 거쳐 일반 국민에까지 확대되어 나갔다. 그 누구도 숙청의 칼날 앞에 안전할 수 없었다. 살아 남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밀고해야 한다는 불신감과 공포가 소련을 뒤엎었다. 비밀경찰은 언제나 새벽에 희생자의 집을 노크했다. 한 번 끌려간 사람은 돌아오는 법이 없었다. 아들이 아버지를 밀고하고 제자가 스승을 고발하는 일도 무수히 벌어졌다. 소련 국민들은 아무것도 보지 않고 말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 대숙청의 피해자가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우수한 인재들이 재능을 꽃피워 보지 못한 채 희생되었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스탈린은 대숙청의 공포 분위기 속에서 '대원수'가 되고 '태양처럼 빛나는 위대한 지도자'로 격상되었다. 이같은 개인 숭배는 '공산당의 지도성 확립'으로 합리화되었다. 사회의 모든 조직은 공산당의 하부조직이나 외곽조직으로 편입되었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사상, 학문, 양심의 자유등 시민혁명을 통해 인류가 획득한 보편적 가치와 권리는 모두 봉쇄되었다. 오직 스탈린주의를 찬양하고 공산당의 지도에 복종할 의무만이 남아 있었다. 소비에트, 노동조합, 농민단체, 청년단체, 여성단체를 비롯한 모든 직능단체들은 자율성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스탈린은 또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라는 명분 아래, 자주노선을 택한 티토의 유고와 국교관계를 단절하고 소련 군대가 점령한 동유럽 나라에 소련식 사회주의를 강요했다. 1953 년 스탈린이 사망한 후 공산당 서기장이 된 흐루시초프는 스탈린 시대의 개인 숭배를 비판하고, 공포 분위기를 완화하기 위해 몇가지 유화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그는 집권 10 년 만인 1964 년 10 월 개혁다운 개혁을 이루어 보지도 못한 채 보수파의 쿠데타에 의해 축출당하고 말았다. 브레즈네프는 스탈린이 만들어 놓은 사회의 기본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20 년 가까운 세월 동안 권력을 유지하다 병사했다. 브레즈네프의 뒤를 이은 노인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는 모두 한두 해를 넘기지 못하고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들의 장례 행렬을 뒤따라 등장한 고르바초프가 혁명 1 세대의 노인 정치를 마감시켰다. 소련 사회주의 경제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심각한 내적 모순을 안고 있었다. 소련의 지도자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혐오감이 지나친 나머지 시장의 기능을 원천봉쇄해 버렸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을 모두 공산당이 독점하고, 또 현존 체제에 대한 모든 비판을 반역죄로 단죄하는 경직된 공포정치를 실시한 탓으로, 그러한 내적 모순이 해결될 수 없었던 것은 더 큰 비극을 초래했다.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 정책을 실시하여 소련 사회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개방해 나가려고 했다. 정치범을 석방하고 언론 자유를 신장시키고 공산당의 권력 독점을 폐지하고 점진적으로 다당제 대의정치를 도입하려고 했다. 차등임금제도를 실시하고 소규모의 개인 사업을 허용하며 원가계산제와 독립채산제를 채택하여 부실기업을 정리하는 것도 그의 개혁안의 중요한 내용이었다. 그는 이러한 정책을 통해 '근로의욕'과 '자발성'이라는 '인간적 요소'를 활성화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70 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온 스탈린주의 체제의 유산은 순조롭게 청산되지 않았다. 흐루시초프 시대의 미온적인 개혁과 그 뒤에 밀어닥친 반동의 시대를 체험한 대중은 쉽게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사회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공감대는 있었지만 그 변화의 선두에 서는 것은 위험한 일로 간주되었다. 오랫동안 특권을 향유해 온 당과 정부와 군부의 보수파들은 페레스트로이카를 사회주의에 대한 배신행위로 간주했다. 그리고 마침내 보수파의 쿠데타가 일어났다. 고르바초프는 무사히 크레믈린으로 복귀하였지만 조심스럽게 추진해온 그의 개혁정책은 파산해 버렸다. 한때 고르바초프의 가장 가까운 개혁파 동지였던 보리스 옐친은 보수파의 쿠데타에 대한 민중의 반감에 편승하여 연방 해체의 폭풍우를 몰고 왔다. 공산당은 해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고르바초프는 연방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소련이라는 거대한 국가는 먼저 붕괴해 버린 동유럽 사회주의와 함께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위대한 실험'이 남긴 것 1917 년에 시작된 '위대한 실험'은 일단 실패로 끝났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사회주의는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이래 인간의 자유와 평등, 복지와 번영을 갈망하는 이상주의자들이 발전시켜 온 사상이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낳은 극심한 사회적 불평등을 불가피한 자연법칙의 산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으며, 인간은 물질적 탐욕과 이기심을 넘어서는 더 높고 고매한 동기에 의해 살고 행동하는 존재라 믿었다. 그러나 금세기의 막바지에 소련과 동유럽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그들의 원대한 꿈이 현실에 의해 거부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것은 사회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와 인간성의 쉼 없는 진보를 염원해 온 모든 사람에게 크나큰 좌절감을 안겨 주었다. 만약 사회주의가 도덕성과 효율성 양면에서 현존하는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우수한 체제임을 입증되었다면 인류의 미래가 훨씬 더 희망차고 밝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라는 틀 속에 점진적으로 시장경제를 도입하려 한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이 좌초한 후 일어난 러시아의 경제적 혼란상은 세인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연방의 해체와 더불어 각 공화국 사이의 경제적 상호관계와 통일성은 순식간에 와해되었다. 옛 소련의 연방정부는 상이한 산업을 가진 공화국들을 국민경제 전체의 유지 발전이라는 관점 속에서 배치하고 통제했다. 그러나 일부 공화국이 독립해 버리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등 주요 공화국들마저 '독립국가연합'이라는 느슨한 결합체를 형성한 상황에서는 옛 소련 영토를 하나의 국민경제로 결합시킬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 낡은 계획경제는 붕괴했지만 새로운 질서는 아직 자리잡지 않았다.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은 사회주의를 악으로 자본주의를 선으로 규정하는 듯한 불안한 진로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러시아 경제상황은 이른바 '자본가 없는 자본주의' 또는 '자본주의의 가장 추악한 면'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옐친이 단행한 가격자유화 조치는 엄청난 부작용만을 초래했다. 아직 유통구조가 확립되어 있지 않은 가운데 소비재의 가격자유화가 시행되자 일부 생산자와 상인들은 값이 더 오를 때를 기다리며 매점매석을 일삼았다. 일부 기업이 민영화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주요 기업이 여전히 국영기업으로 남아 있고 원자재의 조달이 극히 어려운 탓으로 가격 인상은 공급의 확대를 부추길 수 없었다. 일정한 임금을 받아 살아가는 대다수의 러시아 국민들은 더욱 혹독한 생계의 고통에 직면했다. 사회주의의 실험이 실패한 러시아에 어떤 경제체제가 들어설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보리스 옐친은 자본주의로의 복귀를 지향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의 앞길에도 시한폭탄과 같은 장애물이 가로놓여 있다. 자본주의를 뿌리내리게 하려면 자본과 자본가계급이 있어야 한다. 러시아의 자본은 아직도 모두 국가의 소유이다. 누군가가 이것을 인수하여 새로운 자본가계급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모든 국민이 임금노동자의 처지에 있는 러시아에서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가장 유력한 후보자가 과거 공산당이나 정부의 고위직에 몸담고 있으면서 기업 경영과 관련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다. 또 다른 유력한 후보자는 과거 암시장에서 불법 거래와 매점매석을 통해 돈을 번 상인들이다. 새롭게 등장한 유력자가 또 있다. 러시아에 투자하려고 하는 외국 자본의 앞잡이 노릇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순조롭게 새로운 지배계급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러시아의 국민들은 공산당의 공포정치와 사회주의 체제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변혁을 환영했다. 그들은 대부분 자본주의적 악덕과 불평등을 체험해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충분히 만족하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옛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는 국민들에게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했다. 일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직장을, 그들의 자녀와 가족에게 교육의 기회와 의료 서비스를, 노동능력을 상실한 노인들에게는 연금이 주어졌다. 그러나 옐친의


소원대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도입되면 그들은 실업의 비참함과 현저한 빈부 격차와 그에 따른 각종의 사회적 불평등을 몸으로 겪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본주의의 악덕'이 참을 수 없는 정도로까지 악화되었다고 생각할 때 그들은 지난 몇 년 동안의 것과는 정반대의 선택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무릇 모든 정치변혁과 사회혁명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체제에 대한 반동이다. 최초의 사회주의 권력을 수립한 볼셰비키 혁명가와 그 후예들은 자본주의의 모든 것을 가슴 깊이 혐오한 나머지 지나치게 반대의 것만을 고집했다. 그러나 소련을 해체시켜 역사의 박물관에 집어넣고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청산을 추진하는 보리스 옐친과 그 추종자들 역시 비슷한 함정에 빠질 수 있다. 그들은 2 백년에 걸친 사회주의 사상과 혁명운동의 역사에서, 그리고 70 년의 소련 사회주의의 경험에서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것이 전혀 없다는 태도를 취하면서 거의 맹목적으로 반사회주의 노선으로 달려가고 있다. 만약 시장경제의 도입이 명백하고 현저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면 러시아의 민중은 맹목적인 반사회주의의 길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옛 소련에 속했던 공화국과 국민들은 지금 전례없는 사상적 혼돈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다. 적어도 정치체제의 선택에 관한 한 모든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를 선택했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사상, 학문,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는 다당제 의회정치가 그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정치체제를 통해 대중의 의사를 수렴하고 나름의 경제체제를 형성하여 나갈 것이다. 물론 그들이 어떠한 경제체제를 선택하게 될 것인지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합리적인 최선의 판단을 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옛 소련에는 사회계급으로서의 지배집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공산당과 관료집단이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자본가계급처럼 생산수단의 소유관계에 기반을 둔 지배계급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 특권층은 사회주의 소련의 몰락과 더불어 공중분해되고 말았다. 가장 강력한 물리력을 가진 군부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들 스스로가 공화국이 당면한 정치, 경제적 난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음을 잘 알고 있다. 또 공화국들간의 이권분쟁이나 몇몇 공화국 내부의 민족 분규를 제외하면 그들이 강력한 외부의 침략을 받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옛 소련에 속했던 공화국과 그 국민들은 심각한 정치, 사회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많은 토론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인류의 문명이 이룩한 모든 사상적 실천적 성과를 수용하는 선에서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그들의 앞길을 밝혀 줄 새로운 사상과 이론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에필로스 / 아직도 끝나지 않은 논쟁 역사에 빛 바랜 신화들 우리는 경제사상의 역사에 매우 뚜렷한 발자국을 남긴 경제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들은 결코 완전무결하지는 않았지만 나름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세상사를 설명했다. 자본주의를 옹호하거나 변혁하려 했던 그들의 사상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해 왔으며 인류의 현대사에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2 백년에 걸쳐 발전해 온 경제사상의 역사에서 오직 그들만이 훌륭했던 것은 아니며 그들의 사상이론이 자본주의의 모든 경제현상을 다 해명한 것도 아니다. 그들은 각자 자기 시대의 과제와 씨름했을 따름이다. 자본주의는 2 백년 동안 끊임없이 발전하고 변화하였으며 그 변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일생을 걸고 탐구했거나 논쟁을 벌였던 숱한 주제와 쟁점들 가운데 어떤 것은 이미 의미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들은 아담 스미드의 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날카로운 논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들이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거나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문제가 새롭게 부각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위대한 경제학자'들의 사상과 이론은 여전히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자본주의와 경제학의 역사를 이해하고 그 체제의 힘과 결함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해주며, 나아가 그들이 직접 연구하지 않았던 새로운 경제현상에 대해서까지 의미 있는 '인식의 틀'을 제공해준다. 그들은 우리들 모두의 스승이며 그들의 사상은 인류 문명의 가장 귀중한 유산 가운데 하나이다. 1990 년대에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에 사는 우리들이 2 백년 전에 살았던 유럽의 경제학자들을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담 스미드의 <국부론>에 묘사된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경제제도 아래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만난 '위대한 경제학자'들이 우리의 경제현실을 구체적을 해명해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관찰했던 세상과 오늘날 우리가 보는 세상 사이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제대로 알고 그들의 사상을 대면한다면 우리는 정말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위대한 학자의 이론도 역사 그 자체를 속박하지 못한다. 역사는 똑같은 무대에서 되풀이 공연되는 연극이 아니다. 그래서 많은 위대한 경제학자들이 자기가 관찰하고 연구한 상황에 의거하여 보편적인 법칙으로 격상시켰던 가설과 그 연장선 위에서 전개했던 미래에 대한 예언 가운데서 많은 것이 잘못으로 입증되거나 일종의 '신화'로 격화되었다. 자본주의의 영원성과 조화로운 자유방임시장의 효율성에 대한 고전학파와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의 '과학'은 하나의 '신앙'으로 판명되었다. 자본주의의 필연적 파멸을 예고한 칼 마르크스의 '역사법칙' 또한 같은 운명을 면하지 못하였다. 자본주의의 옹호자들은 자본주의의 생존을 위해서 그 신화를 수정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칼 마르크스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이상을 스승과는 다른 방법으로 추구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난폭한 정치적 압제가 제도화되어 있는 일부의 나라들을 제외하면 이들 두 진영은 이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자본주의의 미래에 대한 추상적이고 독단적인 논쟁 대신 자기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 정책을 둘러싸고 힘과 지혜를 겨룬다. 맬더스 목사의 '인구법칙'이나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임금철칙'을 둘러 싼 뜨거운 논쟁 역시 과거의 일이 아니었다. 인구법칙이 결코 '신의 저주'가 아니라는 사실은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의 인구증가율 격감으로 이미 입증되었으며, 노동자들은 계급적 결속과 투쟁을 통해 임금의 절대적, 상대적 크기를 지속적으로 확대시켜 왔다. 대중을 빈곤으로부터 구제할 수 없다는 사고방식은 이제는 과학의 이름으로 합리화될 수 없는 '부자의 편견'에 불과하다. 자유방임시장과 계획경제를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고 벌인 논쟁 역시 의미를 잃었다. 그 둘 모두는 선도 아니며 또한 악도 아니다. 어떠한 국민경제도 자유방임과 계획을 겸비하지 않고서는 존립할 수 없다. 문제는 둘 가운데서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가 아니라 어느 정도의 계획을 도입하며 이 둘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절충하고 조화시키는가에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정책을 실시하는 주체의 성격이다. 부자들이 독점한 편협한 정치권력은 '정부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보이지 않는 손'이 야기한 빈부 격차와 사회적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 반면 자유바임시장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는 다수의 빈곤한 계층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부라면 그와 반대로 행동할 것이다. 경제는 정치와 분리될 수 없으며 어떤 경제법칙도 인간의 의지와 동떨어진 순수한 자연법칙일 수는 없는 것이다. 시간을 뛰어넘은 사상의 힘 그러나 경제학의 역사에 등장하는 해묵은 논쟁들 가운데는 여전히 중대한 의의를 지닌 것들이 많이 있다. 아무리 많은 변화를 겪었다 할지라도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노동력의 상품화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의 기본성격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리카도와 헨리 조지의 지대이론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자본주의 사회가 지금도 골치를 썩고 있는 문제, 즉 '토지 소유에 의한 불로소득'을 다루었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이것이 국민경제를 멍들이고 '경제정의의 실현'을 가로막는 가장 심각한 질병으로 간주되고 있다. 리카도는 지대를 도덕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생산적 기여'의 대가가 아님을 분명히 밝혔다. 헨리 조지는 그것을 가장 파렴치한 강탈행위로 단죄했다. 지대의 정당성 여부를 따지기를 거부하는 경제학자들은 여전히 그들의 이론을 승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적인 상황은 헨리조지의 승리를 선언한다. 모든 자본주의 나라에서 토지 소유에 따른 불로소득을 세금으로 흡수하도록 하는 법률이 강화되어 가고 있다. "지주의 이익이 사회의 나머지 모든 사람의 이익을 해친다."는 리카도의 명제는 대중의 승인을 얻었다. 그러나 이것이 좀처럼 근절되지 않는 것은 땅을 소유한 계층이 나머지 모든 사람들보다 정치권력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전학파의 자유무역론에 대한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항의는 하나의 사상이 얼마만큼 끈질기게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더 좋은 사례이다. 리스트의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자유무역론이 경제대국의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그것을 마음껏 휘둘러대는 주인공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바뀌었다는 점뿐이다. 우루과이 라운드와 미국의 수입개방 압력 때문에 한참 고초를 겪고 있는 우리 경제를 고려하면 리스트의 사상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자유무역론자들의 말대로 전세계가 완전히 자유무역을 실시하고 각국이 비교우위를 가진 상품만을 생산한다면 세계 전체의 생산을 최대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곰팡내 나는 경제학 이론서가


간단히 설명하는 '비교우위 상품으로의 특화'는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을 끔찍스러운 고통의 나락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하나의 국민국가의 독립과 주권을 위협한다. 만약 미국과 한국이 지금 시점에서 완전한 자유무역---상품 거래와 자본 거래의 완전한 자유화---을 실시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저렴한 미국의 곡물과 육류는 우리의 농업을 절멸시킬 것이다. 이것은 한국 농민들에게 앉아서 굶어 죽거나 맨손을 쥐고 도시의 달동네로 옮겨 가거나, 가장 나은 경우에조차 새로운 일자리를 얻기 위한 직업훈련을 받지 않으면 안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방대한 자본을 가진 미국의 금융자본이 자유롭게 돈장사를 시작하게 되면 금융업계의 한국인 사무노동자들은 실업의 공포에 직면할 것이다. 신소재, 반도체, 정보통신, 항공우주 등 첨단산업 분야에서도 한국 기업이 설 자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누가 그러한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인가? 미국 정부인가? 그럴 리가 없다. 수입개방의 대가로 미국시장에서 유리한 지위를 얻게 될 한국의 자본가들, 예컨대 자동차, 조선, 전자 등 이른바 '비교우위 산업'의 자본가들이 해결할 것인가? 그것도 아니다. 게다가 우리 군대가 한국화약이나 풍산금속 등 군수산업체의 탱크와 소총 대신 미국산 패이트리엇 미사일로 무장하게 될 것도 분명하다. 이럴 경우 유사시에 미국 정부가 식량과 무기를 '무기화'하여 한국에 대한 수출을 금지시킨다면 한국의 국토 방위와 한국민 생존의 경제적 기초는 순식간에 붕괴해 버릴 것이다. 어떤 시점에서 전세계가 완전한 자유무역을 실시할 경우 그 시점에서 공업력이 약한 나라는 영원한 2 등국가로서 공업 강국에 예속될 것이라는 리스트의 우국충정은 지금도 여전히 타당하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리스트의 사상은 그것이 파시스트와 국수주의자들에 의해 악용될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같은 경제적 약소국가가 의지할 가치가 충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난 쌀을 먹는 우리의 '존경받는 경제학자와 경제전문가들' 가운데 '비교우위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전파하는 이가 많은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리스트의 말대로 '세계연합'과 공정한 '세계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한 자유무역은 극히 신중하게 다루어야 할 먼 이상에 불과하다. 홉슨의 제국주의론은 세계전쟁의 도래를 경고한 그의 예언이 두 차례나 실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단적 사상'의 하나로 남아 있다. 물론 그의 이론은 완전하지 않다. 그것은 제국주의를 제국주의 국가의 학자로서 살핀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무자비한 군사적 강점과 폭력으로 식민지를 지배하던 때의 제국주의를 다룬 이론이다. 그러나 그가 관찰한 제국주의 시대는 제 2 차 세계대전 이후 나타난 식민지 독립 열풍과 더불어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현대의 제국주의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고 새로운 이론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제국주의의 경제적 공과에 대한 논쟁 또한 끝나지 않았다. 과거의 식민지는 오늘날 '제 3 세계'라고 하는 수많은 독립국가로 바뀌었다. 그 나라들은 국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아직도 식민지 시대의 빈곤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과거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제국주의 세계전쟁의 승자와 패자를 불문하고, 모두가 부유하다. 그들은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자신들이---과정상 불미스러운 점도 없지 않았지만---식민지에 자본주의를 전파하는 혜택을 베풀었다고 믿고 있으며, 제 3 세계 빈곤의 책임이 주로 그 나라들 자체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제 3 세계의 주장은 다르다.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제국주의는 식민지의 소중한 자연자원을 강탈해 갔고, 그 주민들을 우민화시키고 분열시켰으며, 식민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본국의 산업을 위해서 특별한 산업만을 이식시켰다. 힘겨운 투쟁 끝에 정치적 독립을 쟁취했을 때 그들이 가진 것은 가난하고 무지한 국민과 전혀 자립구조를 갖지 못한 빈약한 산업과 낙후한 생산기술과 파괴된 국토뿐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빈곤을 주로 제국주의의 책임으로 규정한다. 제국주의 나라들은 2 차대전 이후 많은 경제원조를 통해 제 3 세계의 개발을 지원했노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제 3 세계의 입장에서 보는 새로운 경제이론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제 3 세계의 개발은 진정한 개발이 아니라 '저개발의 개발'이요, '종속된 개발'이라고 간주하는 이른바 '종속이론'이 그것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군대와 총칼의 위력이 아니라 자본과 기술의 힘에 의해 약소국을 지배하는 새로운 제국주의는 제 3 세계 나라들의 전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위에 자기네들이 이윤을 뽑아가는데 적합한 산업만을 이식한다. 제 3 세계가 그들의 협력과 지원을 받아 개발할 수 있는 산업은 이미 사양길에 접어든 경공업이나 위험스런 공해산업뿐이다. 제 3 세계는 신제국주의 나라들이 꼭대기에 앉는 국제적 분업체계의 맨 밑바닥에서 가장 부가가치가 낮고 위험과 부작용이 가장 많이 따르는 산업을 담당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나라의 정치권력은 제국주의 지원을 받는 군부집단과 외국자본과 연계된 대자본가들이 장악한다. 이것은 분명 희망이 보이지 않는 비극의 시나리오이다. 그러나 제 3 세계 나라들의 실제 상황이 이 시나리오보다 더 희망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한때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도 종속이론의 열풍이 분 적이 있다. 물론 우리나라의 상황이 종속이론의 주된


적용 대상이었던 남아메리카보다는 나어서인지 그 열풍은 몇 년 가지 않아 시들어 버렸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 종속이 늘 비판거리로 등장하는 한국경제의 실상에 비추어 비록 꼭 맞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이 이론은 깊이 음미해 볼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여기에 관심이 있는 독자는 프랑크(A.G. Frank)의 <저개발의 개발>(On Capitalist Underdevelopment ; 최완규 역, 새밭)과 <제 3 세계와 종속이론>(염홍철 편, 한길사) 등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사상의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논쟁은 주로 분배문제를 둘러싼 '부자의 경제학'과 '빈민의 경제학' 사이의 싸움이다. 고드윈, 콩도르세와 맬더스, 고전학파와 리카도파 사회주의자, 칼 마르크스와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의 분배법칙에 대해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견해를 내놓았다. 그들은 분배문제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모든 면에 대해서 서로 대립했다. 하지만 이 길고 치열했던 싸움의 승자와 패자는 모두 분명치 않다. 그들은 모두 어떤 점에서는 옳았지만 다른 점에서는 오류를 범했다. '보이지 않는 손'의 완전무결함에 대한 고전파와 신고전파의 '신앙'은 1930 년대의 대공황에 의해 실제적으로 파산했고 '가장 부르주아적인 부르주아 경제학자' 케인즈에 의해 이론적으로 붕괴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필연적 파멸을 예언한 칼 마르크스의 '과학' 역시 힘겨운 시련을 이겨내지 못했다. 노동계급의 강력한 항의와 대공황의 습격에 의해 강요된 자본주의의 변모는 마르크스의 '역사법칙'에 어긋나게 진행되었고,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로 시작되어 소연방의 해체로 귀결된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는 유토피안과 사회주의자들이 간직해 온 오랜 '소망'을 좌절시켰다. 이렇게 해서 자본주의는 결코 신성하고 영원한 체제일 수는 없게 되었으며, 동시에 문제는 많지만 당장은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빈민의 경제학'과 '부자의 경제학' 사이의 싸움 역시 사활을 건 체제논쟁으로부터 좀더 구체적이고 다양한 정책논쟁으로 전환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경제학적 논쟁이 이 두 진영 사이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같은 진영에 속한 학자들 간에도 의미있는 논쟁들이 진행되고 있다. '공인된 경제학' 내부에서 가장 두드러진 논쟁은 '현대신고전파'와 '케인즈주의자' 사이의 것이다. 대공황의 충격 속에서 잠시 케인즈의 활약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던 자유방임주의자들은 케인즈식 처방의 효과가 약화되자 다시 발언권을 강화하고 나섰다. 1976 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재치있는 칼럼니스트로 유명한 밀턴 프리드만(Milton Friedman)으로 대표되는 시카고학파와 하이예크(Friedrick A. Hayek)의 오스트리아학파가 그들이다. 케인즈 경제학은 불황과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나타나는 현대자본주의의 새로운 질병, 즉 스태그플레이션의 도전에 효과 있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현대신고전파는 정부의 불필요한, 또는 그릇된 개입정책이 문제를 악화시킨 주범이라고 비판한다. 사실 불황이나 인플레이션에 대한 정부의 개입정책은 많은 문제를 내포한다. 우선 어느 시점에 그러한 현상이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심각한 정도인지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고, 재정 지출이나 통화량을 어떤 시점에서 어느 정도 변화시켜야 할지를 결정하기도 어려우며, 또 제대로 판단해서 집행했다 할지라도 예상치 못한 다른 여건의 변화로 인해 엉뚱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그들의 비판은 의미 있는 것이다. 부정확하고 자의적인 경제정책은 역효과를 낸다는 사실을 정부는 유념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이런 정도의 의미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내놓는 정책적 대안이라는 것이 거의 다 '신고전파'의 가르침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유방임시장이 스스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므로" 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제도---예컨대 법인세, 누진소득세, 면허제도, 최저임금제, 각종의 사회보장제도, 식품과 약품에 대한 규제, 심지어는 의무교육과 자연재해 구호제도 그리고 마약판매금지법까지 포함한---를 폐지하라고 주장한다. 물론 '현대신고전파'가 공인된 경제학의 본류는 아니다. 공인된 경제학을 주도하는 것은 공리주의적 쾌락주의라는 공통된 철학적 기초 위에서 신고전파와 케인즈의 이론을 합성한 소위 '현대신고전파종합'이라는 온건한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다. 여기에 관심이 있는 독자는 우리말로 번역 출판된 사뮤엘슨(P. A. Samuelson)의 <경제학>(Economics)을 읽으면 될 것이다. 우리 나라 대부분의 대학에서 교과서로 사용되고 있는 이 유명한 책은 비교적 따뜻한 마음과 이데올로기적으로 겸손한 자세를 지닌 학자에 의해 씌어진 '상대적으로' 쉽고 재미있는 '공인된 경제학' 교과서이다. 사회주의 진영의 경제학은 소연방의 해체와 더불어 무장해제 상태에 빠졌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의회정치를 통해 온건하고 점진적인 사회주의적 개혁을 추구해 온 유럽의 사회주의 정당들은 경제문제에 대한 강령을 더욱 온건하게 바꾸어 나가는 추세이다. 사회주의의 본거지였던 옛 소련과 동유럽 나라들에서는 계획경제 체제가 무너진 폐허 위에 '시장경제'를 도입하느라 극도의 혼란상을 드러내고 있다.


아직 상황이 매우 유동적이고 정확한 자료나 정보가 정리되어 있지 않은 탓으로 성급한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이 나라들에서는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하는 방법과 범위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진행중인 것으로 보인다. 새로 도입하는 다당제 의회정치 구조가 정착되는 것과 더불어 향후 채택할 경제체제가 구체적으로 결정되겠지만 아마도 서유럽보다 사회주의적 요소를 좀더 강하게 띤 혼합경제체제가 현실적인 대안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당분간은 '자본주의적 편견'이 농후하게 섞인 외신 보도와 외국 자료를 통해 사태의 추이를 예측할 도리밖에 없을 것이다. 사회주의의 미래와 관련하여 적지 않은 의의를 가진 것은 중국 대륙에서 진행되고 있는 또 하나의 거대한 실험이다. 중국은 소련이나 동유럽과는 달리 공산당을 정점으로 한 일당독재체제와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온전하게 유지하면서 부분적이고 점진적으로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있다. 이것은 사회주의의 이상을 견지하면서 제한된 범위에서 '이기심의 추구'를 용인하는 정책이다. 중국은 사회주의 40 년을 통해 10 억 인민을 굶주림의 위협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공업 분야에서 자본주의 열강을 추격하는데는 아직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그 나라의 권력층은 전통적인 고립정책에서 탈피하여 국제무역에 참여하기로 결정하고 외국의 자본을 유치하는 한편, 경공업 분야에서 급속한 생산성 향상을 이룸으로써 국제시장에서 '신흥공업국'으로 손꼽히던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등을 추격하고 있다. 광대한 국내시장과 풍부한 노동력을 가진 중국이 미국, 일본, 독일 등이 주도권을 쥔 국제적 분업체계 속에서 성공할 수 있는가 여부는 중대한 관심사항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의문은 중국은 과연 '이기심의 추구'를 용인하는 시장경제의 성장을 사회주의 계획경제와 공산당의 전일적 지배체제의 품 안에서 통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인 체제가 아닐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탈냉전시대의 도래를 예측하면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같은 종류의 문명으로 파악한 견해에 대해서도 더 진지하게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새로운 예언자들 모든 경제학자들이 신화에 몰입해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진보적 경제학자들 가운데는 소연방의 붕괴 훨씬 이전에 현대 인류가 '불확실성의 시대' 또는 '새로운 물결'에 직면하고 있다고 말한 학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과거의 경제학자들과는 달리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아담 스미드와 고전학파의 자유방임시장에 대한 축복과 칼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에 대한 저주---이 실현되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그 어떤 이데올로기적 독단보다도 중요하지만 과거의 경제학자들이 중요시하지 않았던 새로운 문제들을 부각시켰다. 거대도시, 다국적 거대법인기업, 냉전과 군비 경쟁, 환경 파괴, 핵전쟁의 공포, 새로운 산업의 탄생과 과학기술혁명 등은 몇 십년 이전만해도 경제학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불확실성의 시대>(The Age of Uncertainty)로 유명한 미국의 갈브레이드(John Kenneth Galbraith)는 경제학자이다. <제 3 의 물결>(The Third Wave), <권력이동>(Powershift) 등으로 세계인의 관심을 끈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경제학자라기보다는 '미래학자'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물질적 생산에 관한 한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모두 같은 과제에 부딪친다는 사실을 중시했다. 예컨대 옛 동독과 서독, 옛 소련과 미국의 자동차는 거의 똑같은 생산공정을 거쳐 만들어졌다. 적어도 표준화된 상품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데서 두 체제는 기술적으로 똑같은 생산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두 체제 사이의 차이점은 주도권의 소재뿐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사기업의 소유자, 즉 자본가가 생산과정을 지휘 감독하고 생산물의 처분방식을 결정한다. 사회주의에서는 '프롤레타리아의 당', 즉 공산당의 지도자와 경제계획을 맡은 관료들이 그 권한을 행사한다. 앨빈 토플러는 경제학자라기보다 문명사가라고 해야겠지만 어떤 경제학자보다도 명료하게 두 체제의 공통성을 논증한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인류 문명의 '제 2 의 물결', 즉 산업혁명으로 시작된 '공장굴뚝문명'의 산물이다. 이 문명의 특징은 규격화, 분업화, 동시화, 중앙집권화이다. 이런 면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이 문명은 1970 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밀어닥친 '제 3 의 물결'에 의해 퇴조하기 시작했다. 그 '제 3 의 물결'은 '공장굴뚝문명'이 만들어 놓은 부의 생산체계와 사람들 사이의 계급적 구분, 생산된 부의 분배체계를 근본적으로 무너뜨리며 그에 근거를 두고 형성된 모든 이데올로기를 붕괴시킨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서로간의 사상적, 군사적, 정치적 투쟁이 아니라 새로운 문명의 물결에 의해 그 힘과 수명을 다하게 된다. 앨빈 토플러에 의하면 '제 3 의 물결' 문명에서는 전통적인 생산요소인 토지, 노동, 원료와 자본의 중요성이


감소하고 정보와 지식의 교환이 부를 창출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시대가 끝나고 다품종 소량생산 시대가 열리며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관리자와 노동자,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울타리가 무너진다. 폭력에서 시작되어 자본으로 옮겨 온 권력의 원천이 이번에는 지식으로 이동한다. 이것은 아담 스미드나 칼 마르크스의 것과는 사뭇 다른 예언이다. 이 예언이 실현된다면 기존의 경제학은 낡은 골동품을 보관하는 역사박물관으로 들어가야 할지도 모른다. 토플러의 사상은 그 현실성이 논란거리가 되어 있고, 또 엄밀한 의미에서 체계적인 경제사상이라고 보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경제학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포함하고 있다. 젊은 시절 열렬한 마르크스주의자로서 공장노동자로 일하기도 했던 이 석학은 현실에 대한 경제학의 안일한 대응을 질타한다. 그의 말대로 '공장굴뚝문명'은 힘을 다한 것인지도 모른다. 대량의 원료와 에너지를 소비하고 역시 대량의 폐기물을 배출하는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제는 인간이 사는 환경의 존속 그 자체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몇몇 강대국이 보유한 핵무기는 지구를 수십 번 파괴하고도 남을 만큼 많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에 대해서 경제학은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토프러가 중시한 '제 3 의 물결'의 징후들, 즉 새로운 정보통신산업, 신소재, 컴퓨터, 반도체, 우주산업, 유전공학 등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더불어 탄생한 새로운 산업이 인간의 경제생활과 사회체제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인지 경제학은 아직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경제학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너무나 편협한 것이다. 그것은 역사와의 관련을 철저하게 단절해버린 무미건조한 과학이 되어 버렸다. 그러한 경제학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막연한 외경심을 심어 줌으로써 경제학에 대한 무지를 조장할 뿐만 아니라 현실의 경제문제와 사회정의에 대한 그릇된 편견을 조장하기까지 한다. '낙원도 지옥도 아닌 자본주의'를 낙원에 더 가까운 체제로 만들기 위해서는 '풍요한 세계'가 박대해 온 '이단의 경제학자'들의 항의와 새로운 예언자들의 견해를 더 주의깊게 연구해야 할 것이다. 참고서적 * 변형윤, 정윤형 엮음 <경제석학의 생애와 사상> 상, 하. 매일경제신문사 * J. M. 케인즈 지음, 정병휴 옮김. <경제학자의 생애>, 삼성문화재단 * J. A. 슘페터 지음, 정도영 옮김. <10 대 경제학자>, 한길사 * J. K. 칼브레이드 지음, 박현채, 전절환 옮김. <불확실성의 시대>, 범우사 * R. L. 헤일부로너 지음, 김영록 옮김. <세계를 움직인 경제학자들>, 도서출판 시민 * E. K. 헌터 지음, 김성구, 김상화 옮김. <경제사상사> 1,2. 풀빛 * E. K. 헌터 지음, 정연주 옮김. <자본주의 전개와 이데올로기>, 비봉출판사 * 아이작 일리치 루빈 지음, 함상호 옮김. <경제사상사> 1, 지평 * 변형윤, 정윤형 편. <경제학 대논쟁>, 매일경제신문사 * 정윤형 지음. <서양경제사상사연구>, 창작과 비평사 * 레오 후버만 지음, 장찬영 옮김. <경제사관과 발전구조>, 청하 * 위르겐 쿠진스키 지음, 박기주 옮김. <노동계급 등장의 역사>, 푸른산 * 소련 과학아카데미 엮음, 편집부 옮김. <세계의 역사>(근세 1,2), 형성사 * 정해동 지음. <아담 스미드>(경제학 전집 고전편 1), 유풍 * 박기혁 지음. <T. R. 맬더스>(경제학 전집 고전편 2), 유풍 * D. 리카도 지음, 정윤형 옮김.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 비봉출판사 * 한스 리철 지음, 정도영 옮김. <리스트---생애와 사상>, 박영사 *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소 지음, 김대웅, 임경민 옮김. 두레출판사 * 마르크스, 엥겔스 지음, 남상일 옮김. <공산당선언>, 백산서당 * 칼 마르크스 지음, 김영민 옮김. <자본>, 이론과 실천사 * 헨리 조지 지음, A.W 메드센 줄임, 김윤상 옮김. <진보와 빈곤>, 도서출판 무실 * 도스타인 베블렌 지음, 최광열 옮김. <유한계급론>, 양영각 * J. A. 홉슨 지음, 신홍범, 김종철 옮김. <제국주의론>, 창작과 비평사 * 찰스 H. 헤시온 지음, 허창무 옮김. <왜 아직도 케인즈인가>, 매일경제신문사 * J. A. 홉슨 외 지음, 박순식 편역. <제국주의란 무엇인가., 까치

< 마르크스> 상,하.


* 미하일 고르바초프 지음, 고명식 옮김. <페레스트로이카>, 시상영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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