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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번 호 : 5 / 76 등록일 : 1999 년 05 월 13 일 15:12 등록자 : 귀니사랑 조 회 : 312 건 제 목 : [귀니] 죽음과 즐거운 여자 - 엘리스 피터스 </PRE> 제 1 장 도미니크 펠스가 처음으로 키티 노리스를 보았을 때, 그녀는 남색 나일론 가운으로 몸을 감싸고, 양손에 은빛 샌들을 들고는 보트 클럽 테라스의 굵은 난간에서 맨발로 춤을 추고 있었다. 코마번 레가타(보트 경주)가 벌어진 이튿날 밤, 시즌이 한창일 때 클럽 댄스 파티에서 그런 곡예에 버금가는 댄스를 보는 것은 별로 희귀한 일도 아니다 -- 대개 그런 무용수는 남성이었지만 말이다. 그날은 또한 레슬리 아마이저의 결혼 첫날밤이기도 했다. 하기야 도미니크로서는 그런 것은 알지도 못했지만. 비록 알았다고 해도 그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매주 가야 하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피아노 레슨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맑게 개인 포근한 밤이었기에, 그는 버스를 타지 않고 1 킬로미터가 조금 넘는 코마퍼드까지 강변도로를 따라 걸어서 돌아가기로 했던 것이다. 거리를 벗어난 언저리에서 길은 클럽 하우스 바로 곁을 스치고 지나가게 되어 있었다. 밴드의 음악소리가 주위에 넘쳐 흐르고 시끄러운 사람들의 말소리가 거기에 섞여 들려왔다. 그리고 그의 머리 위 3 미터 높이에 있는 테라스의 난간 곁에는 화사한 옷차림을 한 키티가 8cm 가량의 홀쪽한 굽과 거미줄 같은 가는 끈이 달린, 구두라고 하기에는 어울릴 것 같지도 않은 물건을 손에 들고, 양팔을 활짝 벌린 채 춤을 추고 있었다. 몇몇 남자들이 엉뚱한 짓은 그만두고 돌아오라고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곧이어 남자 두 명이 그녀의 춤을 멈추게 하기 위해 테라스 위의 테이블을 누비며 급히 달려왔다. 그중의 하나가 너무 정신없이 달려온 바람에 잔이 수북한 쟁반을 받쳐든 보이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모양이다. 마실 것이 왕창 날아간 곳 근처에서 당황하는 사람들의 아우성과 동요가 일어났다. 하지만 키티는 모른 척 춤을 계속 추었다. 테이블 위 램프의 빛이 살짝 열린 입술로 혀끝을 약간 빼문 개구쟁이 어린애와도 같은 얼굴을 희게 비치고 있었다. 도미니크는 그녀처럼 즐거운 빛을 발하는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그의 머리에 문뜩 떠오른 생각은 약간은 경멸에 가까운 것이었다. "저 사람들이 10 시도 채 되기 전에 저렇게 들떠 떠들고 있다면 새벽 1 시쯤에는 도대체 어떤 꼴이 될까?" 하고. 하지만 그런 소년다운 우월감에서 나오는 반항적인 감정은 곧 호기심으로 자리를 바꾸었다. 그는 1 년 반 전부터 부모 몰래


담배를 피워 보았지만, 그 맛을 알지 못한 채 담배에 대한 신기한 느낌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은 알코올이 대신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어른들이 저렇게 즐거운 듯 마시는 것이니까 아마도 그 맛이 기가 막힐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여러모로 상상을 하고 그것을 자유롭게 마실 수 있는 어른에 대해서 질투심 같은 것까지 느끼고 있었다. 지금 그의 머리 위에서 흐느적거리는 기묘한 춤도 술좌석의 구경거리 중 하나가 틀림없겠지. 도미니크는 그렇게 떠들썩한 사람들에 대해 불쾌감을 느꼈지만, 그 반면에 야릇한 호기심이 일어나 파티 광경을 훔쳐보기 위해 테라스의 그늘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그리고 빨려들어가듯 키티를 지켜보는 가운데 다른 모든 것이 그의 시야에서 부옇게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소란의 중심이기는 했으나, 그녀 자신은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뭔가 가까이 가기 어려운, 신성할 정도의 아름다움을 느낀 것은 아마도 그녀가 끝내 침묵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보통의 키였지만 후리후리한 몸매였기 때문에 키가 커 보였다. 더구나 어두운 감색 하늘을 배경으로 그의 머리 위에서 춤추고 있었으므로 한결 더 커 보였을 것이다. 그녀의 팔다리는 실제로는 불테리어(불독과 테리어의 잡종개)처럼 강인하고 건강하고, 얼굴도 검게 탄 편이었으나, 그때는 투명할 정도로 희고 푸른 기가 감돌았다. 그녀 주위의 모든 것은 그녀의 몸과 마찬가지로 투명한 환상의 구름 속을 헤엄치고 있었으나, 그 환영의 소용돌이 속 한복판에는 키티가 -- 하나의 현실이 있었다. 그는 그녀의 아래쪽 어둠 속에서 그녀가 굴러떨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숨을 죽인 채 서 있었다. 청년 하나가 희고 검은 얼룩 무늬의 까치 모양 난간 쪽으로 달려와 그녀를 잡으려고 했다. 그녀는 슬쩍 몸을 빼어 빙그르르 한 바퀴 돌았다. 그 순간, 그녀의 스커트가 꽃처럼 활짝 펴지며 그녀의 몸을 감고 돌아갔다. 황홀한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고 있던 도미니크의 눈에 길고 늘씬한 다리가 매끄럽고 흰 허벅지 언저리까지 보였다. 그는 당황해서 눈길을 돌렸으나, 다시 그것 이상 재빠르게 원래의 위치로 얼굴을 돌렸다. 그가 거기에 있다는 건 아무도 모를 것이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까. 그녀조차도 모를 것이다...... "키티, 떨어지겠어, 바보 같으니라고!" 뒤로 몸을 빼어 피하려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머리 위의 청년이 겁먹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녀는 갑자기 날카롭고 반항적인 소리를 지르며 한쪽 샌들을 놀라서 들어올린 도미니크의 손으로 던졌다. 이 소우주 속에는 남보랏빛 구름 그늘에 숨어 있는 확고한 현실이 있었던 것이다. 하찮은 물건일지는 모르나, 그것은 생생하고 현대적인 6 인치대의 발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도미니크는 마치 그것이 무진장한 마법의 보화라도 간직된 것인 양 공손히 앞으로 받들고 서 있었다. 그는 그저 멍해져서 머리 위의 소음이 딱 멈춘 것도 잠시 동안은 깨닫지 못했다. 마침내 눈을 들어 보니 나무로 된 난간에서 몸을 내밀어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얼굴이 서넛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중에서 하나의 얼굴밖에는 의미가 없었다. 다른 얼굴에 눈을 돌린다는 것은 시간의 낭비였던 것이다. "어머, 미안. 다치지는 않았나요? 나는 그런 곳에 누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그만 집어던졌는데......용서해 주세요." 하고 키티가 말했다. 맑고 매끄러운 목소리였다. 다소 당혹스런 느낌을 주기는 했지만 그것이 무척 정중한 투였기에, 아까까지의 그녀의 방만한 행동 이상으로 그를 당황하게 했다. 의외로 그녀에게선 술기운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발견하자 마치 예의바른 어린아이가 낯선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과를 한 것이다. 아까까지의 들뜬 태도는 어디로 날아간 것일까? 길게 늘어뜨린 부드럽고 엷은 갈색 머릿결 그늘에서 어딘지 모르게 애조를 띤, 큼직한 자줏빛 눈이 찬찬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상대방이 어린 소년이라는 것을 알고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도미니크는 많은 어른들과 마주했을 때, 상대방의 얼굴에 그의 연령적인 미숙을 의식한, 자못 관대한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여러 번 보아 왔다. 하지만 키티는 마치 동년배의 대등한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공손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엉뚱한 말 같은 것밖에는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긴장을 풀어야 할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격심한 자기혐오감에 빠졌다. 그는 얼굴이 달아올라 귀밑까지 빨개졌다. 곧장 집으로 갔어야 했다는 후회도 들었다. 밤의 어두움이 보다 짙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실실 웃는 것이 못 견디게 역겨워, 꺼져 버리라고 고함을 치고 싶었다. "다시 던져 줄래요? 걱정 말아요, 쉽게 받을 수 있으니까." 하고 키티가 말했다. 그는 신중히 거리를 재고는, 그녀가 뻗은 팔 속으로 샌들을 사뿐히 던져 올렸다. 그녀는 그것을 엉겅퀴의 관모처럼 허공에서 가볍게 받아, 손을 흔든 건지 절을 한 건지 분간하기 어려운 몸짓으로 샌들을 받쳐들어 그것을 그에게 보여주고 나서, 그것을 신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그것이 이 작은 사건의 끝이었다. 청년 하나가 그녀의 등에 팔을 두르고는 그녀를 댄스 홀 쪽으로 인도해 갔다 -- 걸음을 옮기며 그녀는


미련섞인, 그리고 용서를 비는 듯한 눈길을 흘끔 보냈다. 그것은 마치 그녀가 저항 없는 소년의 평화를 무참히 짓밟은 것을 사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굴곡이 뚜렷한, 온화하고 갸름한 얼굴이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 아래에서 우유빛으로 빛나고, 오랑캐꽃색의 눈망울은 어둡게 가라앉아 우수의 그늘이 깃들어 있었다. 도미니크는 그렇게 서글픈 표정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다시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집에 돌아가는 길 내내 그의 마음을 떠나지 않았으며, 그로부터 몇 개월 동안이나 그의 생활을 헝클어뜨려 놓았다. 그 학기의 성적은 수석에서 5 번째로 떨어졌으며 그 해 겨울의 럭비 시합에서도 그의 플레이는 엉망이었다. 하지만 그는 키티에 관한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절친한 친구라고 해도 그 이야기를 들으면, 비록 악의는 없더라도 그의 인생을 절망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릴지 모른다. 하물며 부모는 더욱 그러했다. 어머니도 결국 여자여서, 만일 어떤 여자에 관한 관심을 털어놓는다면 아들을 빼앗긴 심정이 될 것이었다. 한편, 그의 아버지는 남성인데다가 그에게는 강력한 라이벌로 등장할 만한 젊음과 용모를 갖추고 있다. 또한, 비록 부모에게 상의를 한다고 해도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좋을지 몰랐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미니크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14 살의 사랑은 전혀 이해력이 없는 나이 그것만큼이나 더욱 강렬한 경험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도미니크는 그 갑작스러운 경험에 견딜 만한 정상적인 적응력을 지니고 있었다. 식욕은 늘기는 했어도 줄지는 않았다. 잠도 잘 잤다. 자기의 신변에 일어난 일에 대해 불안하게 마음을 설레면서도 그것을 즐기고 극복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한 해가 지나, 그 첫사랑의 여자를 만났을 무렵에는 학교 성적은 수석으로 올라가고, 스포츠 카를 동경했으며, 운전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는 곧 모터사이클을 사달라고 아버지를 졸라댔다. 키티의 모습조차 어느덧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녀가 어떤 여성인지도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 것을 알아보는 일은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그녀는 그냥 키티이며, 우수에 잠긴 미인......이미 어렴풋해진 추억이었다. 그들의 두 번째 만남은 9 월 마지막 주, 헌혈봉사대의 기동대가 코마번 고등학교로 가을의 정기적인 출장을 나왔을 때였다. 도미니크는 방과후 럭비 연습을 하고, 샤워를 끝내고는 역사 숙제를 하기 위해 도서실에서 한 시간 가량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나서 집에 돌아가기 위해 운동장을 가로질러 뒷문 쪽으로 갔을 때는 이미 저녁 노을이 깔리고 있었다.


체육관 옆에 헌혈봉사대의 자동차가 세워져 있고, 간호사가 기구와 장부를 한 아름 안고 뒷문으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이 행사는 매년 4 회에 걸쳐 이루어지지만 그는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만일 그때 검붉은 커먼 기어 한 대가 체육관 곁을 돌아 병원차 뒤의 좁은 공간에 주차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쪽을 돌아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커먼 기어의 멋진 아름다움에 마음이 끌려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런 멋진 차를 가진 사람이 누굴까 하는 호기심에서 소로브레드(영국 말과 아라비아 말을 교배한 경주용 말)처럼 단정한 차체에 도취되어 문이 열렸을 때도 눈길을 옮기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 차조차 빛을 잃었다. 한 여인이 길고 우아한 다리를 내밀면서 밖으로 나와 체육관 입구 쪽을 향하여 콘크리트 위를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자기가 과연 환영을 받을 만한 존재인지를 살피듯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걸음을 멈추었다 -- 그 여자는 키티였다. 비록 그것이 해질 무렵이든, 또는 대낮이거나 캄캄한 밤중이었다고 해도 도미니크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15 개월이 지나기는 했지만, 그녀는 잠시 모습을 나타낸 것만으로도 그녀와 관계가 없는 주위의 모든 것을 도미니크의 눈에서 사라지게 했던 것이다. 곁에 서 있는 병원차나, 간호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체육관의 밝은 창이나, 채혈용의 여러 가지 기구들이 갑자기 격렬한 현실감을 띠고 도미니크를 몰아세웠다 -- 키티가 헌혈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빨리 집에 돌아가 남은 숙제를 해야 했지만,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잠시 뒤 간신히 걸음을 옮기기는 했으나, 발은 교문 쪽이 아니라 체육관을 향하고 있었다. 하기야 그가 타려고 했던 버스는 이미 떠났기 때문에, 다음 버스까지는 25 분을 기다려야 했다. 또한, 이대로 그 자리를 떠나면 두 번 다시 그런 기회는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이번에는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거니와, 그의 머리 위에 높이 3 미터짜리의 테라스가 있는 것도 아니다. 불과 1 파인트 분량의 혈액을 기증하기만 하면 누구라도 안으로 들어가 그녀와 나란히 있을 수 있다. 더구나 헌혈이라면 훌륭한 구실이 되는 것이 아닌가 ? 비록 정규 헌혈자의 명단이 작성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지 않은 사람의 헌혈을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이런 사회사업에 좀더 관심을 가졌어야 했는지도 몰라." 그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더구나 아버지가 그런 지위에 있으니까, 아버지의 명예도 될 수 있지." 어쨌든 기회는 지금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그녀를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악마가 노골적으로 그를 충동질했다. 그녀는


직접 운전을 하고 왔으므로 아직은 혼자지만,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전용 버스로 헌혈지원자들이 한 떼로 몰려온다면 네놈이 그녀에게 가까이 갈 기회는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악마는 짓궂게 덧붙였다. 그렇게 되면 공연히 1 파인트의 피만 손해보는 것이다 -- 사회봉사를 위한 자기희생을 가장한 가면으로......하지만, 그는 그런 내면적인 갈등에 귀를 기울일 틈도 없이 이미 체육관의 스윙 도어를 밀고 홀 안으로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그녀는 벽을 등지고 나란히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무엇 때문에 거기에 그렇게 앉아 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 약간 멋적은 표정이었다. 타이트한 스커트에 짧고 보기 좋은 짙은 녹색 저지천 윗도리를 입고 있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미끈한 다리는 아름답게 햇볕에 그을려, 발목에서부터 무릎까지 매끄러운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으므로 나일론 스타킹을 신고 있는 건지 아닌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가 들어가자 그녀는 홱 고개를 돌려 그를 보고는,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마음 든든히 여기는 듯한 미소를 띠었다. 우유색의 긴 머리칼이 그녀의 볼 위에서 사르륵 흔들리더니, "안녕." 하고 약간은 부끄러운 듯, 상냥하게 인사를 했다. 그녀는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건 같은 헌혈자로서의 친근감에서 나온 인사에 지나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그는 멋적은 웃음을 띠고서, 창틀에 교과서와 노트 묶음을 올려놓고는 그녀에게서 약간 거리를 둔 의자에 가서 걸터앉았다. 키티가 말을 걸었다. "우리는 좀 이른 것 같네요.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나 봐요. 이런 일로 기다려야 하다니. 이런 곳에 처음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도미니크는 약간 무시당한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잘 돌아가지 않는 혀로 대답했다. "나도 처음이랍니다." 그녀는 솔직하게 말했다. 곧 그는 자기가 오해를 했던 것을 후회했다. "나는 이따금 남을 위한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답니다. 하지만 별 재주가 있어야 말이죠. 그러나 피를 나누어 주는 것이라면 쉬울 것 같더군요. 그쪽도 그런 양심적인 동기에서 왔겠죠?" 그녀는 입가에 주름을 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꽤나 장난스러운 미소였다. 도미니크는 햇빛을 받아 얼음이 녹듯, 굳었던 마음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잠시 마음이 움직였나 봅니다." 그는 멋적은 웃음으로 말을 얼버무리며 말했다. "학교에서 돌아가려던 참에 여기에 헌혈봉사대 차가 서 있는 게 보여서요. 왜 그런지 헌혈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서......실은 우리 아버지가 경찰관이거든요. 그래서 -- "


"어머, 그래요?" 키티가 감동적인 투로 말했다. 큼직한 눈이 더욱 크게 휘둥그래졌다. 그 눈동자는 정확히 말해서 오랑캐꽃색이 아니라, 그보다는 약간 갈색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네, 형사예요." 도미니크는 반사적으로 대답을 하고는, 필요 이상의 말을 한 것 같아 얼굴을 붉혔다. 형사라고 하면 듣기는 좋으나, 군(郡) 경찰 범죄수사관의 일상생활은 권태로움밖에 없었다. "어머!" 키티는 존경과 횐희가 뒤섞인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난 더욱 그쪽과 친해져야겠네.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누가 알아요? 주말에는 여기저기에 교통이 제한되고, 시내 중심에서 1 마일 이내는 모두가 노상주차가 금지되잖아요? 당장에라도 교통위반으로 걸릴 것만 같아 겁이 난다고요." 그녀는 황홀하게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듯이 바라보며 웃었다. "농담이 지나쳤나? 하지만 왜 이런 수다를 떠는지 이해를 해야 해요. 실은 곧 피를 뽑힌다는 것이 게이 나서 그러는 거예요. 하여간 술병마개를 따는 것처럼 당할 테니 좋은 기분은 아니잖아요?" "나도 속으로는 무서워요." 도미니크가 말했다. 그건 거짓말이었다. 그 자신은 피를 뽑는다는 것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단지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친 것이다. 그렇게 대답했기 때문에 그녀가 그의 자존심을 만족시킬 만한 답변을 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을 그는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순간적인 기지로 이야기의 물꼬를 텄다. 상냥스러운 표정을 의아하다는 듯이 짓더니 곧 생긋 웃었다. "어머, 그렇지 않을 텐데. 하지만 그쪽이 그렇게 말해 주니 기쁘네요. 만일 내가 혈액검사를 하기 위해 귓불을 딸 때 비명을 지른다면, 그쪽도 마찬가지로 비명을 질러 줄 건가요? 그러면 겁쟁이는 나만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위로가 될 거예요, 틀림없이." "아니, 내가 먼저 비명을 지를지도 모릅니다." 도미니크는 환희와 당혹감으로 가슴이 부듯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정중하게 대답했다. 안쪽의 문이 활짝 열리며, 약간 뚱뚱한 간호사가 홀 쪽으로 얼굴을 내밀고서 말했다. "어머나, 이렇게 일찍 두 분이나 기다리고 계시네! 고맙기도 해라." 간호사답지 않은 호들갑스럽고도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결심이 서면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성미라서." 키티는 웃음을 십어삼키듯이 말을 받았다. "그래요? 그럼, 시작합시다. 들어오세요." 두 사람은 나란히 희생양을 기다리는 제단으로 들어갔다. 좁은 조립식 침대가 나란히 늘어서 있고, 젊은 간호사 둘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테이블을 앞에 놓고 장부를 뒤적이던 나이든 간호사가


테없는 안경 너머로 그들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서 오세요. 성함은?" 그녀는 활발하게 그렇게 말하다가 키티를 알아보더니, "아, 알겠습니다." 하고 말하며 명단에 있는 이름 한 개를 체크했다. "당신 같은 젊은 분이 앞장서 주시니 고맙네요." 그 간호사의 태도로 보아, 키티는 상당한 명문집 딸이라는 짐작이 갔다. 생각해 보니 커먼 기어를 타고 다닐 만한 여성이 그렇게 흔할 수는 없다. 그 나이든 간호사가 단 한 번이라도 이름을 말해 주면 좋을 텐데......그가 명단의 이름을 거꾸로나마 읽으려고 몸을 내밀었을 때, 엷은 하늘빛의 눈이 반짝 빛나며 그를 쏘아보았다. 그는 흠칫 뒤로 물러섰다. "이름은?" 도미니크는 이름을 댔다. 하지만 그건 이미 짐작한 바를 재빨리 확인해 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학생 이름은 여기에 실려 있지 않은데? 예약을 하지 않았지?" 그녀는 그의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딱딱하게 살피는 듯하던 표정이 갑자기 관대하게 웃는 얼굴로 변했다. "네, 그냥 지나가다가 -- "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나무라듯 손가락을 들이대고, 묘하게도 친밀하고 단호한 투로 말했다. "학생은 아직 18 살도 되지 않았잖아? 규칙을 몰라요?" "난 이미 16 살이라고요." 그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녀가 곧장 그의 나이를 알아보고는, 마치 길에서 호외 돌리는 사람처럼 큰소리로 떠들어댄 것이 얄미웠다. 그녀는 18 살이라는 나이를 젖비린내가 난다는 투로 말했으므로, 16 살은 마치 갓난아기 꼴이 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가 불과 1 주일 전에 만 16 살이 되었을 뿐이라는 숨겨진 사실이 그의 입장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 겁나는 여자는 그를 한번 보기만 하고서도 그런 사실을 밝혀냈으니, 그것으로 또 한 번 그를 몰아세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일어났다. "나는 16 살부터 60 살까지로 생각했는데." 하고 그는 어리벙벙한 투로 말끝을 흐렸다. "아니야. 18 살부터 65 살까지야. 네 마음가짐은 기특하지만, 우리가 아이들의 피를 뽑는 것은 허락되어 있지 않아. 성장에 지장이 있으니까. 자, 집에 가서 2 년 뒤에나 와요. 단, 그때도 부모의 허락이 있어야 하지만." 젊은 간호사가 낄낄 웃었다. 키티조차도 윤기나는 긴 머리칼에 가려진 저쪽에서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그를 비웃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의 굴욕감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정말로 헌혈의 최소 나이가 16 살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정말인가요? 그전에는 16 살로 알았는데?" 그녀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거 안됐네. 내가 이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줄곧


18 살이었어. 하지만 뭐 기분나빠 할 것 없어 -어리다는 건 조만간 시간이 해결해 줄 테니까." 그는 이젠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키티는 침대 위에서 간호사의 어깨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풀이 죽어 문 쪽으로 걸어가는 도미니크를 바라보았다. 도미니크는 너무도 부끄러워서 그녀에게 작별의 인사말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키티가 그의 등뒤에서 호소하듯 말을 걸었다. "그냥 가지 말아요! 내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요. 차로 바래다 줄께!" 어린아이가 응석을 부리는 듯한 말투였다. 일부러 그에게 응석을 부려, 그의 자존심을 회복시켜 줌으로써 굴욕감을 거두어 주려고 했던 것이다. 발길을 돌린 그의 눈에 생기가 되살아났다. 그녀가 생각한 것이 적중한 것이다. "이리로 와서 나와 이야기를 하지 않을래요? 피뽑는 걸 잊고 싶으니까." 그녀가 그렇게까지 채혈에 겁을 먹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키티와 같은 여성에게는 그런 독선이 허용되어도 좋았다. "원하신다면 그러지요." 그는 다소 자신을 되찾으며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수간호사 같은 나이먹은 간호사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이렇게 협조적인 아이를 쫓아내는 것도 뭣하니까." 도미니크는 당신 같은 여자야 내 알 바 아니라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행동은 잠깐 어린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건지는 모르지만, 그에게는 뼈저린 모욕이었다. 하지만 키티가 불러주었으므로 이미 그까짓 수간호사의 말 같은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자, 이리로 와요." 젊은 간호사가 키티의 침대 곁에 의자를 끌어다 놓으며 말했다. "여기에 앉아 말동무 해드려요. 이따가 맛있는 홍차를 갖다 드릴 테니." 도미니크는 의자에 앉았다. 키티는 점차 자기의 피로 채워져 가는 병에서 애써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는 그녀가 정말로 피를 뽑는 것에 겁을 집어먹어서 그러는 것은 아닌 성싶었다. 그녀는 킥킥 웃음을 참느라고 애쓰고 있었다. 간호사의 모습이 뒤로 돌아갔을 때 재빨리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 사람들이 내 피를 말릴 생각인가 봐요." 이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이 확 뒤바뀌었다. 모든 것이 우스꽝스러웠으며, 각기 맡은 일로 바람개비처럼 돌아가는 간호사들이 다소 과장되게 생각해서 그녀를 죽이려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마음이 느긋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녀에게 이끌려 웃음을 띄우면서 아까부터 마음에 걸렸던 이야기를 했다. "나는 정말 16 살부터는 헌혈을 해도


되는 나이로 알고 있었습니다." "알 만해요. 나는 나이 제한 같은 게 있는 줄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일리는 있는 것 같네요. 그런데 아직도 끝나지 않았나? 내가 직접 보기가 겁이 나는데." 그 역시 그걸 확인해 보는 것은 꺼림칙했다. 그녀의 상아색 팔에서 그녀의 피가 천천히 빨려 나간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팠다. "조금 남은 것 같습니다." 그는 건성으로 말했다. "아, 이제 끝난 모양입니다. 홍차를 갖고 오는군요." 그 홍차는 대단히 진하고 단데다가, 연유를 넣어 탁한 적갈색을 띠고 있었다. 두 사람만 남자 키티는 상체를 일으켜 새롭게 붕대를 감은 팔을 갑갑한 듯 구부리고서 찻잔을 입으로 갖고 가 한 모금 맛을 보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나도 이렇게 단 건 좋아하지 않지만, 당신은 금방 피를 뽑은 뒤니까 이런 게 몸에 좋지 않을까요? 기운을 복돋우기 위해서." "난 전혀 내 몸에서 무엇을 빼앗겼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키티는 의외라는 듯이 붕대를 보고 나서, "저 병에 든 것이 대체 뭔지 이상할 정도예요. 그쪽은 혹시 맥주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하고 그의 멍해진 시선을 알아차리고서 급히 이렇게 덧붙였다. 그는 더욱더 당혹감을 느끼며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키티라는 여자를 점점 알 수가 없어졌다. 사실 그는 그녀에 관해서 거의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알고 있는 거라고는 그녀가 대단히 매력적이라는 것과, 전에 보트 클럽의 테라스에서 목격한, 이해하기 어려운 광경뿐이었다. 그녀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인사가 늦었지만, 내 이름은 키티 노리스. 별로 대단한 이름은 아니지만, 노리스 맥주의 딸이랍니다." 마치 자기 자신은 벌써 익숙해졌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는 의심스러울지도 모를, 타고난 가벼운 신체적 결함을 설명하는 듯한 말투였다. "아, 그러세요?" 도미니크는 일단 그렇게 대꾸를 하고는, 갑자기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도대체 내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 이상한 일이다. 맥주회사의 여자상속인인 캐서린 노리스라면 자주 지방신문의 사교란에 오르내리고 있으니만큼, 가끔은 그녀의 사진을 보았을 것이 아닌가? 물론 그 사진들은 그녀를 충실하게 촬영한 것이 못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야 내가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곧 알아보았을 텐데......아마이저스 에일사(社)의 독점판매조직 외에, 이 군(郡)의 술집 간판 중 거의 3 분의 1 은 그녀의 이름을 내걸고 있었다. 더구나 그녀는 아마이저스의 아들과 약혼했다는 소문도 들은 것 같은데......? 도미니크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으나, 그가 신문 스크랩을 만드는 습관에 지방


사교계의 결혼이나 약혼 같은 기사는 들어 있지 않았고, 또 두 회사의 합병이 어떤 사정으로 유산되었다는 보도도 그의 기억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런 사실만으로 충분했고, 그 전후 사정 같은 건 알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내가 멍청해서 몰랐습니다. 나는 도미니크 펠스라고 합니다." 그는 어른스럽게 말했다. "자, 건배해요, 도미니크!" 그녀는 그 달착지근한 홍차 잔을 들어올렸다. "그전에는 헌혈한 다음에 기운을 차리게 하기 위해 스타우트(영국제 검은 맥주)를 마시게 했다나 봐요. 셸레이 아저씨에게서 들은 적이 있거든요. 어쩐지 속은 것 같네." "그건 노리스의 스타우트가 아닌가요?" 도미니크가 엉거주춤하게 농담을 해봤다. 그런데 그게 대성공을 거두어, 그녀는 배꼽이 빠지게 웃었다. "어머, 세상에! 두손들었어요." 그녀는 박차듯 침대에서 내려와 손목 근처까지 흘러내린 붕대를 거칠게 풀어 내동댕이쳤다. 그는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가며 이젠 됐다고 중얼거렸다. 전용 버스가 도착하고, 헌혈 지원자들이 줄을 이어 교정에 내려서고 있었다. 9 월달도 하순으로 접어들어, 밤의 장막은 벌써 짙어져 있었고, 더구나 건조한 냉기가 주위에 감돌고 있었다. 그녀는 커먼 기어에 올라타고는 아마 열심히 -- 하지만 무관심하게 -- 손을 흔들고 자기 갈 길을 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혼자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 버스에 흔들리며 집으로 가게 되겠지. 그리고는 그녀와는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키티는 차에 올라타자 운전석에서 손을 뻗어, 반대쪽 문을 열고는 쾌활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까지 모시면 되지요?" 그녀는 그녀의 호의를 어찌하면 될지 잠시 망설였다. 혹시 그녀에게 실례가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비록 그렇다고 해도 사양하고 싶지는 않았다. "고맙습니다." 그는 거기에서 꼴깍 침을 삼켰다. "하지만 버스 정류장은 바로 저기에 있는걸요." "어머나, 정류장에서 먹고 자고 하나 봐?" 키티는 일부러 딴전을 폈다. "아니, 거기서 버스를 타는 겁니다." "자, 어서 타고, 집주소를 말해 줘요. 그렇게 서 있기만 하니, 내 차가 마음에 들지 않는 투네. 이런 차 타본 적 없어요?" 그는 그녀와 나란히 앉았다. 플라스틱 커버를 씌운 시트에서 금빛 구름이 -- 영광의 구름이 -피어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옆에 앉은 여인은 천상의 여신처럼 우아하고, 차는 너무나 훌륭했다. 키티는 시동을 걸고서 관목 쪽으로 후진을 했다. 전용 버스가 앞을 막고 서 있어서 그대로는 차를 돌릴 수가


없었다. 관목 숲이 차 뒤쪽의 어둠 속에 검게 웅크리고 있었다. 그녀는 후진등을 켜고서 공간의 넓이를 확인한 다음, 도미니크의 활기 넘치는 자부심과 그녀에 대한 기대에 응하듯 단숨에 차를 돌려, 전용 버스 뒤를 스치듯 빠져 나와서는 화살처럼 교문 쪽을 바라보고 달렸다. 차는 하워드 가(街)를 질주하다가 교통신호 앞에서 속도를 늦추었다. "그쪽 주소 가르쳐 주지 않을 거예요?" 키티가 말했다. 그는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억제하기 어려운 기쁨에서 굳은 혀놀림으로 자기 집 주소를 말했다. "코마퍼드는 곧장 가면 별로 멀지도 않겠네. 우리 돌아가기로 해요." 그녀는 방향지시등을 켜고서, 아름다운 손짓으로 뒤차로 하여금 앞으로 가라고 신호를 했다. 그 차의 운전사는 커먼 기어의 뒷바퀴 쪽을 가리키며 뭐라고 큰소리를 지르며 지나갔다.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었던 도미니크는 키티에게 편든다는 생각에서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키티는 알겠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늘 그렇다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후진등을 껐다. "난 늘 이 모양이야. 이번에 차를 살 때는 자동점멸장치가 달린 걸로 사야지. 그쪽 아버지에게 이런 이야기 하지 말아요. 나는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늘 조심해요. 기억력이 둔한 편은 아닌데도, 자동차에 대한 거라면 묘하게도 늘 잘 잊거든. 후진등만 그러는 게 아니고, 휘발유도 그래요. 휘발유를 떨어뜨린 적이 일년에 몇 번이나 있는지는 부끄러워 이야기도 못할 지경이라고요." "휘발유 표시기가 달려 있을 텐데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계기판 위를 여기저기 두리번거렸다. "아, 그건 예비 탱크의 표시기예요. 나는 그걸로 바뀌었을 때 정확히 1 갤런 남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붉은 등이 켜져도 안심을 하거든요." "그게 뭐 나쁩니까?" 도미니크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장단점이 있지요. 먼 거리를 갈 때는 확실히 도움이 돼요 -- 다음 주유소까지 어느 정도의 거리가 되는지는 모르더라도 기름이 떨어지면 예비 탱크의 것을 쓰다가, 처음 나타나는 주유소에서 꼭 탱크를 채우게 되니까. 하지만 쇼핑이나 다른 일로 시내를 돌아다닐 때는 예비 탱크로 전환되고서도 여기저기에 얼마든지 주유소가 있으니까 안심을 해버린다니까요. 그러다가 그만 하이 가(街) 한복판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되거나, 골프장으로 가는 산속에서 서버리곤 하는 거예요. 여러 번 애를 먹고도 버릇을 고치지 못해 나 스스로도 정나미가 떨어진답니다. 그전 차에는 휘발유 표시기가 달려 있었지만, 그때부터 통 그걸 보는 걸 잊곤 해서 표시기 같은 거 있으나마나예요. 정말 그러고도 차를 몰고


다니니......" "하지만 운전은 아주 잘하시는데요." 도미니크는 그녀를 위로했다. 그녀의 자학적인 말투가 굳게 닫혔던 그의 마음의 문을 열었던 것이다. "어머, 정말?" "정말입니다. 운전이 능숙하세요." "어머 -- 그런가? 하여간 듣기 좋으네. 이런 차 좋아하나요?" 차에 관해서라면 그가 좋아하는 화제이기도 했고, 더구나 키티의 차에 관한 이야기여서 그는 갑자기 말수가 늘었다. 그들은 코마퍼드까지 가면서 여러 가지 스포츠 카에 관해서 알고 있는 바를 모두 이야기했다. 마침내 그녀가 그의 집 앞에서 차를 세웠을 때, 그는 눈에 익은 주위의 풍경을 알아보고는 전기에라도 감전된 듯 퍼뜩 제정신이 들었다. 그녀와 지낸 즐겁고 자유스러웠던 얼마 동안의 시간이 마치 한 순간의 꿈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그녀를 다시 만난 작은 기적을 감사해야 했다. 그는 허전한 마음으로 천천히 차에서 내려, 이 굉장한 체험을 시시하게 끝내지 않기 위한 그럴듯한 말을 생각하면서 그녀의 창가에 엉거주춤 섰다. "일부러 바래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오히려 내가 감사를 해야지 -- 그쪽과 함께 드라이브를 할 수 있어서 즐거웠으니까. 그쪽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피도 나누어주고 싶은 기분이 드는걸요." "기분상한 일은 없습니까?" 고작 그런 말이 나왔다. 키티의 옷소매에 붕대의 실오라기가 한 가닥 붙어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손가락 사이에 끼고서 창밖으로 버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의미도 없이 웃었다. "아주 좋은 기분. 혹시 나 혈압이 높은 건 아닌지 모르겠네. 피를 뽑으니 아주 개운해졌거든요." 잠시 이야기가 끊어졌다. 엷은 레이스의 커튼이 쳐진 창으로부터 불빛이 새어나와 그녀의 입술 언저리를 비치고 있었다. 눈이나 이마는 어두운 그늘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꼭 다문 입술, 그 양끝으로 야무지게 패인 작은 골, 얼마나 촉촉하고 야무진 입매인가. 그건 아주 똑똑하고, 그러면서도 상처받기 쉬운, 슬픈 그림자가 드리운 입이기도 했다. 그 입매가 천천히 흐트러지며 작별의 미소로 바뀌는 것을 보기만 하고도 도미니크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환희의 핵이 불덩어리처럼 커졌다. "그럼, 조심해 가십시오." "안녕. 다음 헌혈 때 또 만나요." 키티는 쾌활하게 말하고는, 손가락을 눈썹 위에 대고서 손을 흔들려고 한 것인지 고개를 까딱하려고 한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몸짓을 남기고 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는 숨을 죽이고 눈을 깜빡거리지도 않은 채 차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맥박이 귓속에서 우레처럼 쿵쾅거리고, 치통보다도 예리하고 격한 무엇인가가 가슴속을 치밀고 올라왔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녀가 예고한 것보다도 빨리, 또한 판이한 상황에서 다시 만났다. 그리고 그때 문제가 된 피는 그의 피도, 그녀의 피도 아니었으며 -- 또한 엄청난 양의 피가 흐른 뒤였다. <PRE>번 호 : 6 / 76 등록일 : 1999 년 05 월 13 일 15:21 등록자 : 귀니사랑 조 회 : 217 건 제 목 : [귀니] 죽음과 즐거운 여자 2 장 -엘리스 피터스 </PRE>

제 2 장 새로 단장하여 문을 연 앨프리드 아마이저의 술집 '더 졸리 바 메이드'(즐거운 술집 하녀)는 9 월말에 개장했다. 그것은 B 거리 곁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코마퍼드에서는 반 마일, 코마번에서는 1 마일 이상 떨어져 있었다. 얼핏 보기에 너무 외진 것 같았으나, 돈벌이라면 이름난 수완가인 아마이저의 사업이어서 그가 그 술집을 성공으로 이끌 것이라는 점을 의심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 술집을 누가 경영하게 되는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 중 몇몇은, 여러 해 전부터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우회도로에 관한 비밀정보를 그가 알아낸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서, 그것이 실현되면 그 새로운 호텔 옆으로 아스팔트 도로가 뚫리게 되는 것이 틀림없다고 수군거렸다. 그가 그 건물을 사들여 자기 밑의 건축업체와 설계사, 실내장식업자를 총동원해서 개축에 손댄 것이 7 개월 전이었다. 따라서 개업 축하의 밤에는 그 결과를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군 경찰 범죄 수사과의 부장형사인 조지 펠스는 근무가 끝난 뒤 그런 호기심에서 그곳에 들렀다. 그는 오래 전부터 네모 길쭉한 창이 아름다운 그 낡은 석조건물에 늘 감탄의 눈길을 보내면서도, 그것이 자꾸 퇴락하여 그림의 소재로밖에 쓸모가 없는 비경제적인 폐옥으로 변해 가는 것을 언짢게 생각해 왔었다. 당시에는 늙은 여인 두 명이 살고 있었는데, 옛날의 자매들에게 흔히 있었던 것처럼 얼마 안되는 사이를 두고 자매들이 세상을 뜨고 나서 그 집은 1 년 가까이 빈 집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 뒤 그녀들과 먼 인척관계에 있는 유산 상속자가 그 집을 인수하여 팔기로 했다. 엄청나게 크고, 더구나 낡을 대로 낡은 그 건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과연 살 사람이 있겠느냐는 것이었는데 -결국은 살 사람이 나섰다. 군(郡) 내에서는 물론이고, 인근의 여러 개의 군을 무대로 싼 부동산을


사들이기로 유명한 앨프리드 아마이저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하지만 조지는 새로 만든 찬란한 튜더 왕조식 문을 밀고 홀의 우아한 거울벽과 검은 오크재(材)의 대들보, 조각이 된 긴 나무 의자, 구리빛 유리의 샹들리에 등을 보았을 때까지도 미심쩍은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 개축공사에는 적어도 1 만 파운드가 들어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마이저는 과연 어떻게 그 자금을 회수하려는 것일까? 이 건물을 통째로 시내 번화가로 옮긴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그것은 아마이저의 그 유별난 수완으로도 바랄 수 없는 일이다. 어쨌거나 비록 오늘밤처럼 손님으로 법석대는 호황이 매일 저녁 계속된다고 해도 -- 그런 요행은 도저히 바랄 수 없는 일이지만 -- 이 술집을 운영하기 위한 비용이 매상을 초과하지는 않을는지. 오늘밤은 확실히 호황을 보이고 있다. 램프에 불이 켜지고, 벽난로에는 장작이 수북이 쌓였다. 예스러운 정취를 살린 왼쪽의 대중 술청에는 주로 코마번의 보헤미안족들이, 그것도 대부분 젊은 층들이 들끓고 있었다. 멋진 턱수염과 모헤어(羊毛) 스웨터가 그 방의 분위기를, 뭐라고 할까, 산양과도 같은 감촉과 퀴퀴한 냄새로 채우고 있었다. 홀의 오른쪽에 있는 두 개의 작은 라운지 바에는 발판이 달리고 비단천으로 싸인 18 세기풍의 고급 의자며 보기에도 푹신한 소파가 놓여 있고, 다소 점잖은 축의 군(郡) 내의 젊은이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식당과 살롱 바로 마실 것을 나르기 위해 분주하게 오가는 흰 옷의 보이들의 수를 보건대 상당한 매상이 올라갈 것이 틀림없었다. 보이들의 대부분은 이 부근에서는 보지 못했던 얼굴인 것으로 보아, 아마도 모집되어 온 외부 사람들이 틀림없었다. 눈에 띄는 얼굴 중 조지가 알 만한 사람은 코마번에 있는 화이트 하우스의 베니 영감이 고작이었다. 아마도 이 지방 사정에 정통하다는 것 때문에 고용되었을 것이다. 지방의 유지는 물론, 꼬리표가 붙은 불량배들까지 모조리 알고 있는 사람을 고용한다는 것은 충분히 수지가 맞는 일이리라. 살롱 바의 손님은 이 지방 유지도 아니거니와 보헤미안족도 아닌 잡다한 계층의 남녀들이었다. 이 엄청난 크기의 방은 완전히 개조가 되어, 완벽한 튜더 왕조풍으로 구석구석 꾸며져 있었다. 천장의 통나무 서까래는 유난히 낮게 천정을 떠받치고, 다양한 모양의 구리로 된 샹들리에는 거리낌없는 광채를 내뿜으며 한 줄로 매달려 있었다. 아마이저는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것이 당장에 손에 넣기 어려운 것이라면 특별히 그것을 만들게 했다. 비록 그것이 돈이 들고 황당무계하게 시대착오적인 것이라 해도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이곳의 손님들은 적어도 진솔한 데가 있었다. 대부분은 농부, 장사꾼, 여행자, 노동자 등이며,


개중에는 이러한 술친구들 틈에 끼고 싶어하는 노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조지는 끈기 있게 사람들 틈을 헤집고 들어가 저쪽 바로 가서 맥주를 주문했다. 영국 왕실의 깃털 장식 같은 리본을 머리에 달고 긴 핑크색 손톱을 한 금발의 아가씨가 맥주를 그의 앞에 놓고는, 만들어 붙인 듯한 미소를 띠고서 오늘밤은 아마이저 씨의 특별봉사로서 무엇이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얘기를 생색내듯 말했다. 그래서 아직 초저녁인데도 이렇게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구나 -- 그는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실 것이 무료라는 말을 듣자, 그는 맥주 한 잔으로 그만두기로 했다. 만일 그가 이런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호기심을 채우는 일을 다른 날 저녁으로 연기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일단 이곳에 발을 들여놓았을 뿐이지만 주위의 광경이 흥미진진한 것만은 틀림없었다. 시의회 의원의 거의 과반수가 이 집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군의 대의원들 모습도 간혹 눈에 띄었다. 아마이저가 살짝 손가락 하나만 까딱거려도 별의별 사람들이 달려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 중 몇 사람이나 진심으로 아마이저를 존경하고 있을까 ? 그가 가장 깊숙한 구석 쪽으로 걸음을 옮겨 가려는데 묵직한 손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것은 놋쇠처럼 단단하고 자신에 차 있으며, 역시 놋쇠가 울리는 듯한 목소리가 귓전에 와닿았다. "오늘 저녁엔 축하를 해주러 온 거요, 아니면 경고를 하러 온 거요?" 호랑이도 제말 하면 나타난다는 건 빈말이 아니다. "천만에요!" 조지는 맥주를 공짜로 마시게 선심을 쓴 당사자를 어깨너머로 뒤돌아보고는 미소를 흘렸다. "비번이라서 잠깐 들러본 것인데, 공짜로 술을 대접받을 줄은 몰랐는걸요. 하여간 축하드립니다." 아마이저는 위스키 잔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는 잔을 번쩍 들더니 한 모금 마셨다. 키는 크지 않아 평균치를 밑돌았고, 어깨가 위로 올라가 있어서 목을 움츠린 듯이 보였고, 큼직한 머리가 앞쪽으로 기우뚱한 것이 그 뚱뚱한 몸집과 함께 황소를 연상시켰다. 실제로 그는 사업이나 인생, 열광적인 관심사, 라이벌, 거추장스러운 인물 등, 그의 안주머니나 자존심에 대해 일시적이든 항구적이든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에 대해 황소와도 같은 돌진을 서슴지 않는 사람이었다. 얼굴은 거무죽죽하고, 햇빛에 탄 반(半) 대머리에, 숱이 적은 머리칼을 옆에서 길게 빗어 붙였고, 윗입술 위에 돋은 짧고 검은 콧수염은 발산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여 안테나처럼 빳빳했다. 턱의 깨끗이 민 푸른 수염 자국과 벽돌색 볼은 그가 아무리 점잖은 옷차림을 해도 감추기 어려운 무엇인가를 느끼게 했다. 오늘밤의 -- 장삿속이기는 하지만 -- 멋진


선심쓰기도 그의 그러한 성격의 일면을 엿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아니면, 새로운 도락에 큰 보람이랄까 마음이 들떠서 수지를 무시하고 어른 노릇을 하고 싶은 마음이라도 생긴 것인지 모른다. 어쨌든 그는 옛날만 해도 그런 선심에는 인색했기에, 자신이 직접 나서서 부하들을 오랫동안 자기 식으로 훈련시켜 놓고, 지금에 와서는 방임하고 있는 것일 거라는 소문은 진짜 같지가 않았다. 그는 흥분과 자기만족으로 얼굴이 훤했고, 교활한 눈이 수시로 빛을 발했다. "그래, 이 술집 분위기 어떻소?" "예, 근사합니다." 조지는 정중히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시내에서 외진 곳에 가게를 차려 과연 수지가 맞을까 모르겠습니다. 가게 유지비만도 상당할 텐데 말입니다." "천만에. 나는 벌 만한 확신이 서지 않으면 투자하는 사람이 아니지. 걱정 마시오. 벌어들일 테니까." 그는 자못 자신에 찬 미소를 띄우고는 다시 한 번 조지의 어깨를 툭 치고는, 인파 속을 머리부터 내밀고 우람한 어깨를 흔들고 지나가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아는 척하고 악수도 나누었다. 그가 발산하는 에너지는 주위를 제압하고, 거울로 만든 벽에 반사되고, 머리 위의 샹들리에를 진동시켰다. 자수성가한 거물 앨프리드 아마이저......그의 성공을 향한 일념 앞에 얼마나 많은 약자가 압도당하고 허물어져 갔던가. 상처를 입은 패자들 중 몇 사람이 오늘밤 여기에 와 있었다. 튜더 왕조풍의 복도를 당당히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시선 중 얼마는 가능하다면 그를 죽이고 싶은 원한을 담고 있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남의 머리를 짓밟고 나갈 때는 꽤나 의기양양하단 말야." 그렇게 속삭이는 소리가 조지의 귓전에 들렸다. 그것은 건설국의 버니 윌슨이었다. 그는 조지와 나란히 소파에 앉아, 팔꿈치를 테이블에 고이고 있었다. 키가 후리후리하고 음산한 느낌이 드는 청년인데, 언제나 환멸에 찬 눈을 하고 있었다. "아니, 내가 하는 말을 일일이 귀담아 들으면 곤란합니다 -- " 그는 조지의 의아한 시선과 마주치자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편견을 갖기 일쑤랍니다. 실은 나는 그전부터 이 집을 사서 낡은 부분은 손을 보아 우리 가족을 위해 집을 개조할 생각이었답니다. 그런데 그가 선수를 쳐서 좀 배알이 꼬인다 이 말입니다. 도대체 새로운 술집을 또 만들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그는 이미 수많은 술집을 거느리고 있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집에 손을 대서 이만한 가게를 꾸미는 일도 보통 사람으로는 흉내내기 어려운 일이


아니겠소?" 조지는 생각이 깊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야 그렇지만......나라고 해서 필요한 부분만 개축해서 아내와 아이를 살게 하고 나서, 천천히 시간을 두고 나머지 부분을 개조하면 못할 것도 없었지요. 더구나 최근의 주택 매매 경향을 보면, 우리로서는 이 집처럼 덩치가 크고 낡은 집이 아니고서는 손을 내밀 수가 없답니다. 모두가 현대적인 설비가 된, 작지도 크지도 않은 집이나 방갈로를 원하기 때문에 그 시세가 엄청나요. 하지만 이런 헌 집은 값이 자꾸 내려가서 거저나 다름없는 헐값이 되지요. 하인이나 식모를 두지 않고서는 꾸려나가지 못할 것 같다 -- 적어도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 더구나 유지비만도 엄청나게 들고. 하지만 나로서는 집수리는 본업인데다가, 집사람인 넬은 웰시에 있는 농장에서 자란 여자니까 많은 방을 최소한도의 노력으로 관리하는 일에는 전문가이거든요. 그래서 나는 정말로 이 집을 살 생각이었고, 또 개조에 필요한 설계도까지 작성을 했는데 말입니다. 경매가 있었던 날, 나는 그의 부하를 한번 본 순간 이 집은 내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밖에는 응찰할 사람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놈이 후려치는 가격에 조금만 올려 값을 내도 내게 떨어질 것으로 생각한 거지요." 그는 침울한 눈으로 맥주잔을 들여다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그가 거기에 직접 나타나 내 코앞에서 이 집을 사들여 이런 해괴한 모습으로 바꾸어놓은 겁니다. '즐거운 여자'를 '즐거운 술집 하녀'로 바꾸어 버리는 작자니까 무리도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허, 그런 명칭이 있었던가요? 전혀 몰랐었는걸." 조지는 처음 들어보는 말에 놀란 듯 말했다. "나는 이 집의 내력을 살펴보았지요. 이 집을 살 생각이 들자 여러 가지 문헌을 뒤적거린 겁니다. 이 집은 개인 주택으로 쓰이기 전에는 몇 세기에 걸쳐 술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간판이 '즐거운 여자'였답니다. 멋진 이름 아닙니까? 1600 년대의 이야기이지요. 그리고 그전에는 개인주택이었고, 또 그 이전은 봉건제도가 무너질 때까지 채노크 수도원의 농장 건물이었지요. 그런 것이 지금은 '즐거운 술집 하녀'이니 많이도 변한 거지요." "장사는 장사니만큼 할 수 없는 일이지." 조지가 못을 박듯 말했다. "장사라고요? 천만에! 그는 이 집을 아들 녀석이 쓸까 봐 손해를 무릅쓰고 사들여서 술집을 낸 거라고요. 처음부터 목적이 다르지." "아들이 여기를 쓰다니?" "그의 아들이 나와 함께 이 집을 살 예정이었거든요. 함께 돈을 투자해서 사들인 뒤 그는


진을 위해 별채를 개조해서 아틀리에를 만들고, 넬과 나와 아이는 안채에서 살 생각이었답니다. 별채를 아십니까? 지금은 주차장이 된 가운데 마당 저쪽에 있지요. 단단한 석조건물이어서, 그걸 손보면 이상적인 아틀리에가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가 사랑하는 애비라는 자가 그런 냄새를 용케도 맡고, 아들의 일을 방해하기 위해 수천 파운드의 돈을 내던진 거라고요." 아마이저 가문의 내분에 관해서는 조지도 소문으로 들어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아마도 코마번의 주민들 태반은 그런 낌새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고집스럽게 재물 모으기에만 몰두한 정력적인 야심가 아마이저가, 아들에게 사업을 물려주면서 동시에 맥주회사 사장의 외동딸과 결혼을 시켜 자신의 세력범위를 넓히고 더욱 견고히 하려 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동시에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인품에 반발하고, 아버지의 계획에 반항하여 맥주왕이 되는 것을 거절했다는 것 또한 당연한 이야기인지 모른다. 소문에 의하면, 아들인 레슬리는 화가 지망생이었기에, 비록 그의 아버지가 골라준 결혼상대를 물리치고 아버지 회사의 가난한 여직원과 약혼을 하는 파란을 불러 일으키지 않았다고 해도 부자지간의 결렬은 피하기 어려웠을 것라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소문은 여러 갈래로 가지를 쳐서 황당무계한 소문까지 진실인 양 떠들어대기에 이르렀지만 확실한 것만은 -- 레슬리는 돈 한푼 없이 집을 뛰쳐나왔고, 여자는 회사를 그만두었다든가 해고를 당했다든가 한 뒤, 곧 두 남녀는 어느 등기소에서 결혼수속을 밟았다. 결혼을 한 그들은 곧 자취를 감추었고, 그들의 뉴스 가치도 없어지고 말았다. 굳이 그 뒤를 캐보자면, 아마이저가 집요하게 그들을 추적하여 평온한 가정을 가지지 못하게 한다는 정도였다. "그가 그런 일에 고집을 피워 돈을 쓰는 데도 한도가 있겠지. 그는 돈벌레니까." 조지가 차분히 말했다. 그러나 윌슨은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 쪽이 먼저 한계에 달했답니다. 그는 아직 여유만만한데 말입니다. 그야 그가 돈벌레일지는 모르나, 그게 하도 엄청나고, 또 뚝심까지 세서 말이지요." "하지만, 레슬리가 어디서 돈을 빌릴 마음만 먹는다면 쉬운 일이 아니겠소? 막대한 재산의 상속자니까." "그게 그렇지가 않아요. 그에게는 이제 아버지가 없는 겁니다. 부자(夫子) 관계를 끊겼고, 소문은 퍼질 대로 퍼진걸요. 세상 사람들은 아마이저가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레슬리에게 돈을 빌려 줄 사람이 있겠습니까? 레슬리에게는 어머니의 유산 1,000 파운드 가량과, 나머지는 자기가 벌 수 있는 돈이 전부지요. 아마이저가 선전포고를 한


상대와 자진해서 동맹을 맺을 얼간이는 이 근처에는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조지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가 지닌 재력이나 권력이 아니라, 냉혹하기 짝이 없는 성격에서 오는 위협이었다. 세상에는 영웅이 아니고서는 손을 댈 수 없는 인간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 영웅은 드물게 나타난다. "그럼, 레슬리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답디까?" 조지가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레슬리 청년은 영웅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커다란 핸디캡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말든 상회에서 상품 포장과 배달일을 하고, 주급 8 파운드를 받고 있지요." 윌슨이 쓰디쓴 얼굴이 되어 말했다. "불쌍하게도 그는 스스로 생활비를 벌 수 있게끔 교육을 받지도 못했고, 그림을 팔아 봐야 우유배달만큼의 돈도 생기지가 않는 겁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이가 생길 것 같아 진은 곧 맞벌이에서 손을 떼야 할 것 같고." 아마이저가 급히 살롱 바로 모습을 나타내더니, 목에 힘을 주고 새로 온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고는 앞장서서 안내를 했다. 새 손님들은 그가 대포알과도 같은 머리를 내밀어 낸 길을 뒤따라가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그는 그들과 한잔할 모양이었다. 이윽고 그는 이 큰 방의 가장 구석진 곳에 그들을 끌고 가 자리를 권했다. "아무리 사이가 벌어졌다고 해도, 아버지는 결국은 자식에게 꺾이는 법이 아니겠소?" 조지가 확신없는 말을 했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렇겠지요. 하지만 목석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하기야 레슬리는 편모 슬하나 다름없이 컸지요. 그런데 그 어머니가 3 년 전에 돌아가셨으니 -- 어머니만 살아 계셨다 해도 그의 편을 들어주었을 겁니다. 물론 그녀 자신도 무력했지만." 윌슨은 사람들이 물결치는 어깨너머로 저쪽 구석에 자리잡은 새 손님들을 살펴보았다. 마실 것을 담은 쟁반을 받쳐든 보이가 사람들 틈을 헤집고 그리로 다가갔다. 둘레의 사람들도 그쪽에 흥미가 있는 모양이었다.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빈정대듯 말했다. "귀빈들이구먼." 거기에 남자의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역시 내가 지금 본 주차장의 빨간 차가 키티의 것이었군. 그런 차가 이 부근에 또 있지는 않을 테니까." 아마이저와 함께 테이블을 둘러싼 손님은 세 사람이었다. 여성이 둘, 남성이 하나. 그 남성은 아마이저에게 결여된 모든 것을 구비하고 있었으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아마이저에게는 귀중한 존재였다. 조지는 두 대조적인 인물과 그 관계에 대해 상당히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아마이저의 저돌적인 공격법이 환영받지 못하는 상대에게는 레이몬드 셸레이의 우아한 풍채와 품위있는 예의범절이 통했다. 또한, 거래의 교섭에서 아마이저로서는 흉내내기 어려운 미묘한 절충이 필요할 때는 셸레이가 그의 장점을 살려 그 교섭에 임하는 것이다. 명목상으로는 그의 회사의 전속 법률고문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나타나는 그림자 같은 존재, 아니 아마이저의 또 하나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이는 지긋한 편이고, 몸놀림이 점잖고 인상이 좋으며, 유별나게 정력적이거나 활동적이지도 않으나, 그만의 특징을 살려 아마이저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하고, 셸레이가 필요로 하는 것 -- 돈을 제공받는다. 셸레이는 또한 키티 노리스의 아버지와는 옛친구였기에, 그녀의 후견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그의 곁에 앉아 있는 것은 그 키티였다. 아래쪽이 풍성한 검은 드레스가 22 살의 그녀를 그 이상으로 젊어 보이게 하고, 어깨를 감은 주홍빛 스카프가 그 젊음을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손에 든 잔에는 맥주가 반쯤 담겨져 있었다. 조지는 차분한 장미빛 조명에 드러나 보이는 그녀의 흰 옆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 저 아가씨가 지난번에 도미니크를 집까지 태워다 주었단 말이지? 도미니크는 그녀의 차에 관해서만 이야기했어! 아직 어린 나이라 철이 덜 든 것도 무리는 아니야 ! 세 번째 인물은 아름답고 솔직한 얼굴의 45~46 세 가량 된 영리해 보이는 여자인데, 검은 양장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마침 짤막한 검은 파이프에 담배를 끼우는 참이었다. 긴 손가락의 움직임은 검소한 디자인의 양장에 감싸인 그녀 몸의 윤곽과 마찬가지로 우아하고 민첩했다. 그녀는 남자들에게만 이야기를 시키고 자기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이지적인 눈이 얼굴에서 얼굴로 소리도 없이 움직였다. 그녀는 키티를 바라보았을 때만 키티와 결탁한 남자들과의 사이에 얼마간 거리를 두려는 것처럼 의미있는 미소를 눈가에 살짝 띠었다. 루스 해밀턴만큼 유능하고 고용주의 비밀에 정통한 여성이라면, 고용주가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사원(寺院)이나 거기에 모셔지는 우상들을 가끔은 경멸할 수도 있는 법이다. "저 여비서는 20 년이나 근무를 했다는군. 사장의 편지를 타자치는 것만이 아니고, 좀 껄끄러운 일도 돌봐 준다는 거야." 등뒤에서 누군가가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뭐 새삼스러운 소문도 아니었다. 조지는 적어도 10 년 전부터 그런 풍문이 나도는 것을 들어 왔다. 믿건 말건 그 소문에는 곰팡이가 슬어 더


이상은 소문이랄 것도 없게 되었거니와, 새삼스럽게 그런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사람이 오히려 쑥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하여간 해밀턴 양은 아마이저의 아내가 오래 전에 병석에 누운 이래, 그의 비서로 일하는 것 외에도 실질적으로 아마이저 집안의 가사까지 돌보게 되었으니 그런 전설 같은 소문은 피하기 어려웠다. 윌슨은 큼직한 조끼(손잡이가 달린 맥주잔)를 말끔히 비우고 그것을 저쪽으로 밀어냈다. "진도 보통 여자는 아니지만, 레슬리에게는 저 키티 노리스가 있는데도 왜 그녀에게 빠졌을까요? 나는 가끔 그걸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그 녀석이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 하지만 키티를 보시라고요." 조지는 진이라는 여자를 모르고 있었지만, 윌슨과 거의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젊은이란 아버지에게서 지나친 강요를 받으면, 그것이 비록 절세의 미인이라고 해도 흔히 반발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특히 아마이저는 무슨 일이든 일단 마음만 먹으면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사람이다. 하지만 -- 그녀를 보라고. 10 시쯤 조지가 살롱 바를 나왔을 때 마지막으로 뒤돌아본 사람은 키티였다. 그녀는 자리를 지킨 채 말이 없었다. 반쯤 남은 맥주잔을 만지작거리고는 있었으나, 마실 기색은 없었다. 그냥 만지작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아마이저가 무슨 급한 일로 자리를 뜬 뒤, 해밀턴 양이 장갑과 핸드백을 챙기고 돌아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는데도 키티는 조용히 앉은 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눈부시게 빛을 발하는 스카프의 진홍빛이 그 언저리에 떠도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는 스윙 도어의 육중한 문이 그녀의 갸름한 얼굴을 가려 버리자, 조지는 코트의 옷깃을 여미고는 9 월의 선선한 밤을 향하여 홀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마르기는 했지만 제법 단단한 체구의 베니 블록사이드 영감이 빈 쟁반을 들고 지나가다 그와 마주쳤다. 천장의 샹들리에가 붉은 기를 띤 그의 대머리에 눈부시게 반사되었다. 그는 조지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걸음을 멈추고, 가운데 마당으로 통하는 문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우리 보스는 오늘밤 대단히 신이 나서 가만히 못 있겠나 봅니다." 보스란 물론 아마이저를 가리킨다. "아까 어디론가 급히 가더니만, 이제부터 또 다른 행사가 있는 모양이군. 이만큼 성대한 개업축하라면 양이 찰 만도 한데 말이오." 조지가 말했다. "어느 분에겐가 새로운 댄스 홀을 보여 드린다고 하더군요. 샴페인 병을 갖고 가셨지요. 댄스 홀이라는 곳은 가운데 마당 저쪽의 별채를 개조한 것인데, 이번


주 중에 개장할 예정었습니다만, 지금 막 실내장식이 끝난 참입니다. 보스는 거기에 무척 힘을 쏟으셨지요 -- 뭐, 무리도 아닙니다 -- 상당한 돈을 발랐으니까요." 그곳이 아들 레슬리의 아틀리에가 될 뻔한 곳이어서 그랬을까? 조지는 곧 뒤이어 살롱 바에서 나온 두 손님에게 길을 비켜 주기 위해 옆으로 몸을 뺐다. 그래서 해밀턴 양과 레이몬드 셸레이가 함께 홀을 가로질러 현관문을 거쳐 밤의 장막 속으로 걸어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곧 주차장 쪽에서 자동차의 시동 소리가 들리고, 정문으로 향한 길을 따라 코마번 쪽으로 미끄러져 나가는 셸레이의 오스틴 차체가 얼핏 보였다. "보스는 일이 끝나면 곧 돌아올 테니 성가시게 굴지 말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스의 차는 10 시에 오도록 되어 있기에, 곧 10 시가 된다고 말씀드렸더니 보스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비록 12 시가 돼도 상관없으니 기다리라고 해.' 라고 하시더군요. 운전사인 클레이턴은 벤틀리 속에서 불평이 많겠지만 별 수 없는 일이지요. 벌어놓은 것이 많지 않고서야 보스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할 테니." "그래, 영감도 벌어놓은 게 없어 이 직장이 좋아졌소?" "내가요?" 베니는 쓴웃음을 짓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난 이제 산전수전 다 겪어, 흐름을 거스를 생각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훨씬 나쁜 보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래서 이왕 그 양반 아래에서 일하기로 한 이상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답니다. 하기야 젊은 층에서는 그렇지도 않은 모양입디다만." "아마이저가 빨리 샴페인을 마시고서 클레이턴의 일이나 빨리 끝내게 해주십사고 바랄 수밖에 없겠군." "그런데 그 샴페인 병이 엄청나게 큰 겁니다. 보스는 뭐든지 크고 우람한 것이 아니면 직성이 풀리지 않거든요." "하기야!" 그렇게 생각하니 '즐거은 술집 하녀'는 아마이저의 통 큰 성격에서 나온 소산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 수고하시오, 베니 영감." "안녕히 가십시오, 펠스 씨." 조지는 걸어서 코마퍼드의 집으로 돌아와, 개업 축하 파티에 관해서 아내와 아들에게 대충 이야기해 주었다. "네 여자친구도 왔더라, 돔." 그는 방 한구석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도미니크에 장난기 어린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도미니크가 그 시간까지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은 의무감보다는 학업이 뒤떨어졌다는 초조감에서였다. 그는 볼이 붉어진 것을 감추기 위하여 전기 스탠드를 끄고, 궁지에 몰린 짐승의 교묘한 보호색으로 몸을 감싸며 진지하게 되물었다. "네, 그 여자가요? 아버지도 그 차를 보셨나요?


어때요, 굉장한 차죠?" "차 같은 건 눈에 띄지도 않았다." "체! 이야기가 되질 않네." 도미니크는 투덜거리며 휑하니 자기 침실로 올라가 버렸다. 그가 그날 밤 커먼 기어를 타고 집에 돌아온 것을 부모에게 실토한 것은, 비록 그들이 그걸 목격하지 않았다 해도 틀림없이 이웃의 누군가가 보고, 거기에 부풀린 억측을 가미해서 소문을 퍼뜨릴 게 뻔해서였다. 그렇다면 미리 부모에게 적당한 설명을 해두는 것이 상책이다. 그리고 그 차가 그럴듯한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오늘밤 그 여자를 보고 그 일을 미심쩍게 생각하고는 이상한 촉각을 곤두세운 것이라면, 도미니크로서는 그 예봉을 피하기 위해서도 부모에게 등을 돌리거나 자기 방으로 꽁무니를 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밴디 펠스는 한밤중이 지나 뭔가 묘한 의혹을 느끼고 문득 선잠을 깨고는, 조용히 남편인 조지를 흔들어 깨웠다. 남편이 그녀의 붉은 머리칼에 불만스러운 숨을 내쉬자 그녀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봐요, 조지. 지난해 여름 웨스턴 해안에서 돔을 무대로 끌어낸 그 여자가수를 기억하시죠?" "뭘?" 조지는 아내의 난데없는 질문에 잠이 달아났다. "그래, 그 여자가 뭐가 어떻다는 거요?" "돔은 그 여자를 빤히 쳐다보았죠, 아마?" "그야 보지 말라는 것이 무리겠지. 곁에서 이리저리 맴돌았으니까. 그런데 그 여자가 어떻게 해서 돔을 스테이지로 끌어올렸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걸 -뭔가 속임수가 있었던 것 같던데. 덕분에 쑥스러운 생각이 들었지." "그래요. 당신 얼굴도 빨개졌고." 밴디는 자못 진지하게 말했다. "그런데 그 애는 아무렇지도 않았으니 말예요. 그러고 나서 얼마 동안은 그걸 자랑삼고 다녔잖아요. 아주 멋진 여자라고 말이에요!" "그거야 그 녀석이 요즘에 읽는 페이퍼백 북 탓일 거요." "그게 아니라, 유행가의 레코드가 나쁜 게 아닐지 몰라요. 하여간 문제는 이번의 노리스라는 여자가 아주 잘생긴 여자라는 데 있어요. 그런데도 돔은 그녀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없잖아요. 왜 그럴까요?" "그 녀석 취미에 맞지 않는 거겠지. 돔으로서는 그녀를 미인이라고 생각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니까." "그게 이상해요. 대단한 미인이라는 평판이 자자하잖아요. 더구나 당신도 그런 말을 했고." 밴디가 계속해서 도미니크의 수상한 태도에 의문을 늘어놓으려 했을 적에 머리맡의 전화가 울렸다. "쳇! 성가시게!" 조지는 잠이 말끔히 달아나, 윗몸을 일으켜 수화기를 들었다. "이 시각에 무슨


일이오?" 저쪽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곧 베니 블록사이드 영감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펠스 씨이십니까? 당신에게 전화를 드리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지 망설였습니다만, 당신이 가장 가까운 곳에 사시고, 또 오늘 저녁에 이곳에 오신 일도 있고 해서요. 그리고 저도 당신과 안면이 있는 터라 이렇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 실은 엄청난 사고가 일어나서요. 보스인 아마이저 씨가 영 돌아오시지 않아서 조금 전 -- 11 시 반경까지도 거기에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만, 캘버리가 걱정이 된다며 -- 귀찮게 굴면 안된다는 보스의 말을 거슬리더라도 가보자고 해서 -- " "도대체 무슨 일이오? 간단히 말해요, 간단히." 조지는 슬리퍼를 발 끝에 걸치며 재촉했다. "나는 지금 비번이지만, 일이 있다면 달려갈 수도 있으니 긴 말 집어치우고 요점만 말해요." "보스가 죽었습니다." 베니가 요점만 말했다. "그 별채에서 혼자, 돌처럼 차갑게 쓰러져 죽어 있는 겁니다. 주변은 온통 피바다고." <PRE>번 호 : 7 / 76 등록일 : 1999 년 05 월 22 일 09:23 등록자 : 귀니사랑 조 회 : 193 건 제 목 : 죽음과 즐거운 여자 3 장 엘리스 피터스 </PRE> 제 3 장 거의 투우장만한 넓이의 모랫빛 바닥 한복판에 아마이저는 결정적인 현실과 마주하고 있었다. 양눈은 신형 플래시처럼 부릅뜨고, 손발은 이리저리 뒤틀린 채, 오른쪽 뺨을 모자이크 바닥에 갖다댄 상태로 엎어져 있었다. 허리를 구부려 자세히 보니 햇볕에 타고 탱탱한 그의 옆얼굴에는 상처 하나 없었지만, 살갗이노출된 뒤통수는 움푹 패어 있었고, 그 벌어진 구멍에서 피가 뿜어져 나와 바닥 위에 고인 피바다의 면적을 서서히 넓혀 가고 있었다. 그 피 웅덩이는 붉은 피와 거의 투명한 샴페인이 섞이면서 핑크색의 긴 종려나무 잎과도 같은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그의 머리와 어깨 주변에는 피와 샴페인이 2~3 피트 거리까지 튀기는 했지만, 시체의 등뒤로부터 피가 튄 사이를 살펴서 간신히 가까이 갈 수는 있었다. 또한, 범인이 피해자를 덮친 것도 그 위치가 틀림없을 것이라고 조지는 추측했다. 아마이저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적은 그가 누구든지간에 정면으로 그에게 덤벼들 생각은 갖지 않을 것이다. 커다란 샴페인 병의 병목은 으깨진 뒤통수 바로 곁의 피웅덩이 속에 떨어져 있었고, 불룩한 양어깨


위에는 유리 파편이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병의 나머지 부분은 2 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깨어졌을 적에 마룻바닥에 떨어지며 굴렀는지 가는 핏자국이 점점이 거기까지 이어져 있었다. 하여튼 사고사인지, 자살인지, 또는 타살인지를 가리는 상투적인 논란은 하나마나여서, 그런 수고는 생략할 수가 있겠다고 조지는 무거운 마음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웬지 모르게 아마이저에게 썩 어울리는 죽음이라는 점에서도 아무도 이의를 내세울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머리를 스쳤다. 조지는 집을 나서기 전에 코마번 경찰서로 전화를 걸어두기는 했었지만, 현장을 대충 조사해 본 다음 다시 전화를 하고, 경찰차가 도착하기까지 아무도 댄스 홀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했다. 하여간 15 분 가량은 현장에 혼자 있고 싶었다. 아마이저의 악마적인 에너지가 갑자기 지상으로부터 사라졌다는 너무나 뜻밖의 사실에 의한 충격으로 그저 망연자실하여, 잠시 동안은 생각을 가다듬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널찍하기만 한 플로어 위의 검붉은 피의 웅덩이 속에 있는 시체는 유리창 위에서 파리채를 맞은 파리 한 마리를 연상시켰다. 그는 튀긴 핏자국을 조심스럽게 피하면서 뒤로 물러나와 홀 안을 둘러보았다. 실내의 광경은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아, 어쩐지 음산한 탐정극의 무대장치를 보는 기분이었다. 이 방은 옛날에는 안채와 연결되었었고, 건물의 구조는 품위 있고 장대한 것이어서 아마이저가 사들이기 전에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치밀어 올라간 지붕이 참으로 아름다웠었다. 그런데 아마이저는 그것을 말끔히 뜯어고치고 말았다. 그는 대들보며 기둥이며 서까래까지 모두 황금으로 도장하고, 추녀도 번쩍번쩍 광이 나는 흰 페인트로 칠을 하고, 천장의 대들보 한가운데에는 거미줄 같은 네 개의 현대식 샹들리에를 매달아 놓았다. 그 반사광은 실로 무자비할 정도로 밝고 휘황찬란했다. 그는 벽을 따라 그 위쪽에 복도를 두르고, 한쪽 끝으로는 악단의 연주석과, 다른쪽 모퉁이에는 유리와 크롬으로 술좌석을 만들고, 한 쌍의 계단이 댄스 플로어에서는 어울리지도 않는 바로크 양식의 나선형을 그리며 연결되도록 해놓았다. 그 복도 아래쪽 벽으로는 좌석을 배치한 반원형 장식대가 늘어서 있는데, 그 장식대 하나하나에는 댄서의 석고상이 놓여 있었다. 이러한 치장을 구태여 명칭을 붙여 말하자면 제왕 양식이라고나 할까......복도에는 난간으로 둘러싼 좌석이 마련되어 있는데, 각기 작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그 뒤쪽의 벽에는 흑백의 거울이 모자이크식으로 구성되어, 여기에 발을 들여놓는


손님들은 눈이 휘둥그래질 것이 틀림없다. 불쌍한 레슬리 아마이저......그는 소박하지만 널찍한 아틀리에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밖의 설비는 그냥 그렇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새로이 단장된 공간 속에서 눈에 띄게 헝클어진 것이 시체를 제외하고 둘 있었다. 하나는 입구의 오른쪽 벽을 파고 만든 장식대 위에 놓여 있었던 작은 석고상으로, 아래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왜 떨어졌는지 까닭은 알 수가 없었다. 아마이저가 쓰러져 있는 곳에서는 5 미터나 떨어져 있었고, 흰 파편 외에는 격투의 흔적은 고사하고 발자국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또 하나는 웬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을 비웃는 듯했다. 누군가가 -- 아마도 아마이저 자신이었을 테지만 -복도의 술좌석에서 샴페인 잔을 둘 들고 와, 나선계단 위의 황금으로 도장된 연주대 가까이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 그걸 놓은 것이다. 분명히 그는 위험을 예상치 못했었던 모양이다. 그는 여기에서도 축하 기분에 들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샴페인의 병마개는 끝내 따지 못하고 말았다. 조지는 수제화를 신은 아마이저의 발에서 계단 아래까지의 몇 미터를 생각에 잠기며 천천히 걸었다. 바닥의 광택 위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깨어진 커다란 샴페인 병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아마이저를 살해한 흉기가 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코르크 마개에 입힌 금박에는 피가 묻어 있었고, 병 아래 부분 깨진 밑동에 붙어 있는 그의 머리칼과 피부는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육안으로도 볼 수가 있었다. 조지는 새삼스럽게 댄스 홀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서, 가운데 마당으로 나가 초조하게 서성거리는 세 남자를 만났다. "당신들 중에서 처음으로 아마이저의 시체를 발견한 건 누구요?" "클레이턴과 제가 함께 들어갔었습니다." 캘버리가 말했다. 아마이저가 이 업소의 관리직원으로 고른 이들 세 사람은 전체적으로 어딘가 닮은 데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조지는 그제야 그 이유를 알았다. 그들은 모두가 아마이저를 닮았던 것이다. 아마이저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자기와 비슷한 유형의 인간을 골랐다는 것은, 생각하기에 따라 극히 이치에 맞는 방식이었다. 이 캘버리라는 남자는 꽤나 젊고 약간 뚱뚱한 편이지만, 살이 단단한 것이 막 은퇴한 럭비 선수를 연상시켰다. 짤막한 콧수염을 기르고, 자신에 차 있으며, 굳건한 느낌을 풍긴다. 하지만 지금은 별로 의기양양한 상태는 아닌 모양이었다. 애교스러웠던 얼굴은 창백하고 굳어 있었으며, 이해타산에 빨랐던 눈은 이제 재난을 향해, 그것이


일신상의 문제로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으로 차 있었다. 그리고 동료와 손을 잡아 재난과 타협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이저의 측근으로 생활을 이어가는 사람들은 금세 경계심이 발동하는 모양이다. "그게 몇 시였소?" 그들은 시간을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시바삐 아마이저를 업소에서 돌아가게 하여, 그날의 일과를 끝내기 위한 마음에서 그들은 한 시간 가량을 내내 손목시계에서 눈을 떼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12 시 4 분인가 5 분쯤이었습니다." 캘버리가 혀로 입술을 축이고 말했다. 시간은 아직 1 시를 넘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12 시까지 기다리기로 했었습니다 -그래서 보스의 시체를 발견한 시간을 확실히 알 수가 있지요. 우리는 상점이 끝나고 나서 계속 보스를 기다렸습니다 -- 방해하지 말라는 엄명 때문에요. 하지만 11 시 반이 지나자 웬지 걱정이 되어, 12 시까지 기다리다가 아무런 기척이 없으면 들어가 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12 시가 되자 스낵 바를 나와 곧장 이리로 왔지요." "전등은 모두 지금처럼 켜져 있었소? 아무것도 손댄 건 없지요? 입구의 문은 닫혀 있었소?" "닫혀 있었습니다." 클레이턴은 몸에 착 달라붙는 운전사 제복 윗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마르기는 했지만 강인한 몸매인데, 젊었는지 늙었는지 얼핏 분간이 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35 세 전후일 것이나, 보기에 따라서는 60 세 가량으로도 보일 만했다. 억센 모랫빛 머리를 좁은 이마로부터 곧장 뒤로 넘겼는데, 이지적인 날카로운 눈은 깜박거리지도 않은 채 똑바로 조지를 바라보고 있었고, 눈부신 전등 불빛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예, 전등은 켜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보스의 시체를 본 뒤 아무데도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보스의 곁에 가서 죽은 걸 확인만 했지요. 그리고는 안채로 달려가서 베니 영감에게 경찰에 전화를 걸어달라고 했고, 캘버리가 문 곁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마이저 씨가 이리로 온 뒤 누가 그를 만났소?" 조지는 두 사람 뒤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영감을 바라보았다. "아뇨. 내가 아는 한 상점에서 여기에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보스도 냉장고에서 샴페인을 들고 간 이후 한 번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나는 보스가 옆문으로 나가는 것을 바래다 드렸지요. 그리고는 곧바로 당신이 살롱 바에서 홀로 나오셨습니다." "그는 누구에겐가 댄스 홀을 보여줄 생각이었던 모양인데, 그가 누군지 짚이는 데가 없소? 보스와 함께 나갔다던가 하는?" "보스가 나갈 때 아무도 함께 가지 않았습니다."


"방해하지 말라고 다짐을 했다면서?" "예 -- " 베니는 약간 망설였다. "아마이저 씨는 만사에 다짐을 받는 버릇이 있어서 그때는 별로 이상하게 생각지 않았지요." "하지만 좀 흥미가 있는 이야기로군. 그가 한 말을 정확히 기억하시오? 어디 그대로 옮겨 봐요." "예. 내가 보스에게, '클레이턴이 차를 대기시켜 놓고 있습니다만.' 하고 말씀드렸더니, '그럼, 내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게 -- 비록 12 시가 되더라도 말이야. 이제 젊은 친구에게 댄스 홀을 보여줄 참이야. 돈과 기업적인 재능만 가지고 그 별채를 얼마나 훌륭한 것으로 바꿀 수 있는가를 보면 그 녀석은 아주 기뻐할 테지. 아무도 우리를 방해하지 않도록 해야 되네. 일이 끝나면 곧 돌아올 테니까, 그때까지 절대로 부르러 오지 말도록.' -- 그렇게 말하고 나갔던 겁니다." "화가 난 말투는 아닙디까?" 다른 사람이라면 그런 걸 물어볼 일도 아니었지만, 아마이저는 평상시에 부하나 친구에게까지 곧잘 화를 내는 버릇이 있었던 것이다. "아뇨. 아주 기분이 좋으셨습니다. 당신도 초저녁에 보셨듯이 말입니다." "그가 그 친구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는 건 좀 이상한 일이군." "그분만큼 돈이 많으면 어떤 이상한 짓을 해도 할 수 없지요." 클레이턴이 단조롭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여간 댄스 홀을 구경시킨다는 말씀을 할 때의 보스는 희색이 만면해 있었습니다." 베니가 말했다. "누군가가 그 상대의 얼굴을 보았을 텐데......이곳 종업원 모두와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여기에서 숙식을 하는 사람 외에는 모두 돌아갔겠지?" 시체를 의사에게 인계하고 나면 우선 착수해야 할 일이 그것이 될 것이다. "베니 이외에 여기에서 기거하는 보이는 있소?" "둘 있습니다." 캘버리가 대답했다. "그리고 하녀가 둘. 모두 방에 있습니다. 도움이 될 만한 게 없긴 하겠지만, 일단 조사를 하실 것 같아 모두 방에 있으라고 일러두었습니다." "좋소. 가능한 한 속히 끝내겠소." 그때 조지는 도로에서 이쪽으로 가까이 오는 차소리를 들었다. "경찰차로군. 베니, 달려가서 정문의 불을 켜 주시오. 그리고 당신들 세 분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저쪽 집에서 기다리시오." 그들은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물러갔다. 긴장했던 신경이 풀리면서 그들의 첫발은 거의 비틀거리는 걸음걸이였다. 이윽고 구급차가 뒤뚱거리며 가운데 마당으로 들어왔는데, 데이켓 총경의 차가 조바심을 내며 구급차를 밀어붙이듯 그 뒤를 따랐다. 이렇게


해서 군 경찰의 범죄수사과 전원이 앨프리드 아마이저 살해사건으로 몰려와서 수사에 착수하기에 이르렀다. 범죄수사과의 주임이 새벽 1 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직접 진두지휘를 하게 된 것은 피해자 생전의 강압적인 권력의 영향이었다. 아마도 경찰서장이라도 살해되지 않는 한, 그가 이보다 더 긴장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밤이슬을 대비해서 두터운 코트를 입은 그는 시체 위에 허리를 구부리고서, 다시는 동업자간의 합병이나 배반을 꾀할 수 없게 된 변형된 머리를 들여다보았다. "이거 큰일이 벌어졌는걸. 솔직히 말해서, 전화로 자네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자네 머리가 어떻게 된 줄 알았지."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될 뻔했답니다. 하지만 이건 잘못 판단할 여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조지가 말했다. 이 피해자만큼 타살이 명확한 경우도 드물었다. 데이켓 총경은 시체와 흉기 및 주변의 상황을 대충 살펴보고는 별다른 의견 없이 의사가 피해자의 일그러진 뒤통수를 신중한 동작으로 조사하는 것을 기다렸다. 그리고 코트깃 사이로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무뚝뚝하게 물었다. "몇 번이나 후려갈겼지?" "아직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적어도 여섯 번이나 일곱 번은 타격을 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이미 죽었는데도 계속 내리친 것 같습니다." 그 의사는 군의관 출신으로 아직 젊으며, 티크 재(材) 나무처럼 다부지고, 또한 자기의 일을 사랑했다. 즉, 도취된 듯 애정을 갖고 앨프리드 아마이저의 시체를 이리저리 만지고 살펴보는 것이다. 아마이저는 생전에 이만큼 정성어린 애무를 받아본 적이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데이켓이 말했다. "뇌졸증이라도 일으키지 않는 한 이 양반은 절대 죽지 않을 걸로 생각했는데......죽은 지 얼마나 됐지?" "늦어도 11 시 반, 그보다 좀 일찍 죽은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겁니다. 어차피 나중에 좀더 정확한 시각을 보고드리겠습니다만, 대충 10 시 15 분에서 11 시 반 사이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타박상 중 대부분은 그가 여기에 쓰러진 뒤에 가해진 것입니다만, 그때는 이미 심장이 움직임을 멈추었을 겁니다." "요컨대 최초의 일격으로 즉사했다는 거군. 그런데도 범인은 피해자가 되살아나지 못하도록 미친 듯 머리를 짓이겼다--?" "아니, 미친 듯 내리친 게 아닙니다. 이렇게 정확히 집중적으로 타격을 가한걸요. 하나도 목표점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무자비하다고는 말할 수 있겠지요 -- 필요가 없는데도 게속 짓이겼으니까." "으음, 병이 깨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는


이야기군. 병이 좀더 빨리 깨지지 않은 것도 이상하지만, 유리라는 것은 흔히 묘한 재주를 부리거든. 조지, 피해자가 머리를 얻어맞고서 살해된 것이 확실하니까 그것만은 발표해도 무방하겠으나, 기타 상세한 사항은 잠시 덮어두기로 하세. 보도진에 대한 발표는 내가 맡지. 그리고 시체를 발견한 친구들에게는 입을 다물라고 일러 두게. 수사에 진전이 있기 전까지는 쓸데없는 소문은 바람직하지 못하니까." "그러지요. 그 친구들도 자기들 신상에 직결되는 사건이라 재미로 떠들고 다니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저 부서진 석고상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데이켓은 그리로 가까이 가서 눈을 찌푸리고 한참 지켜보고 나서, 옆에 있는 장식대에서 다른 석고상을 집어들었다. 탱고를 추고 있는 남녀의 상이었다. 그는 그것이 너무나 가벼운 데 놀라며 거꾸로 해서 텅 빈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다른 실내장식처럼 이것도 겉만 번지르르하군." 그는 그것을 제자리에 놓고서 시험삼아 아래쪽을 건드려 보았지만, 그것은 가볍기는 해도 밑이 펑퍼짐해서 움직이지 않았다. "바로 옆의 벽에 몸통을 부딪친다고 해도 떨어질 것 같지 않은걸. 직접 손을 대지 않고서는 떨어질 리가 없겠어. 그리고 뭔가를 집어던진 흔적도 없고. 겉면의 칠이 전혀 벗겨진 데가 없거든. 그리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떨어진 것이라면 벽에서 약간 떨어져서 깨져야 하는데 수직으로 벽 쪽에 바짝 붙어서 깨진 것도 이치에 안 맞는다면 안 맞는 것 같고. 하여간, 로더, 이것도 기록에 남겨두게. 표면이 거칠어서 지문을 채취할 가망이 별로 없지만, 존슨에게 맡겨 보기로 하지." 그 말에 로더 사진사는 아마이저의 시체 옆을 돌아가며 순순히 따르겠다는 뜻의 말을 하고는 사진을 찍어댔다. "그리고 저쪽의 샴페인 잔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지가 말했다. "응, 아까 보았네. 저기에 남아 있는 지문이 누구의 것인지는 자네도 짐작이 갈걸. 그걸 물에 닦은 하녀와 피해자 이외의 지문이 나온다면 기적일 수밖에. 아무튼 조사해 보세. 존슨, 문이나 그밖에 손이 닿을 만한 물건은 모두 조사해야 하네. 물론 계단의 난간과 거기에 흩어진 병 조각도." 데이켓은 발끝으로 병 조각을 가리켰다. "그의 장사 밑천이 그를 배반했군." "그 병목을 쥐고 피해자를 내리친 놈은 튀긴 피를 맞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조지가 말했다. "저 병은 코르크 마개까지 피가 묻어 있으니까 말입니다. 따라서 범인의 구두나 바지에는 비록 양은 적더라도 정밀히 검사해 보면 상당한 핏자국이 묻어 있을 겁니다. 그리고 범인은 이쪽에 서서, 피웅덩이로 발을 들여놓지 않으려고 세심한 주의를 한 것 같습니다.


바닥에 발자국이 하나도 없는 것으로 보아." "그럴 것 같군." 데이켓은 불만스럽게 몸을 추스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면 자네가 알아낸 것을 모두 이야기해 주게." 조지는 그날 밤 우연히 베니 영감을 만난 것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끝에 가서야 데이켓이 질문을 했다. "그래, 나머지 두 사람은 어떤가? 10 시 이후의 행동에 관해서 어떻게 설명하던가?" "제가 이 술집을 나온 것은 10 시 5~6 분경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때 클레이턴은 차 안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의 이야기에 의하면 아마이저가 여간해서 돌아올 기색이 없자, 20 분 가량 뒤에 차를 주차장에 옮기고, 문닫을 시간까지 바에서 맥주를 1 파인트 가량 마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10 시 반에서 11 시 가까이까지 차 둘레를 서성거리며 기다렸는데 보스가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에 캘버리가 자기 방에 들어와 기다리라고 권하는 바람에 그는 그때부터 캘버리 부부와 함께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 점에서 세 사람의 증언은 일치합니다. 그리고 베니 영감은 다른 보이들과 함께 여기저기 바에서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아마이저가 돌아오면 곧 클레이턴에게 알리려고 문 쪽을 두리번거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11 시 반이 지나자, 칼버리와 클레이턴은 가볼 것인지 더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어찌해야 좋을지를 몰랐다는군요. 그들은 늘 아마이저의 명령에 따라 행동할 뿐, 좀 신경이 쓰인다고 해서 멋대로 행동을 했다가는 호되게 야단맞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래저래 잔소리를 들을 각오를 해야 했는데 -- 문제는 단지 아마이저가 방해받고 싶지 않을 때 얼굴을 내미느냐, 아니면 명령을 어기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마이저가 참을 만할 때 가보느냐로, 즉 어느 쪽이 덜 꾸지람을 듣느냐가 문제였던 거지요. 다시 말해서 그들은 아마이저 자신의 신상을 걱정한 것이 아니고, 그에게 매달린 자신들의 처지를 걱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12 시까지 기다려 보아, 그래도 보스가 돌아오지 않으면 가보기로 합의를 하고서, 결국 12 시가 조금 지나 이곳에 와서는 아마이저가 이런 꼴이 된 것을 발견한 겁니다. 그들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치지 않은 시간은 대충 10 시 반에서 11 시 사이인데, 그 동안 캘버리의 알리바이에 관해서는 상점의 다른 사람들이 입증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클레이턴이 밖에서 서성거렸다는 것은 아무도 본 사람이 없을지 모르지만......저는 다른 사람들을 모두 만나볼 틈이 없어 아직 그 점을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만, 그들에게 모두 저기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일러두었습니다." "입을 막게 하기에는 사람들의 숫자가 좀 많은 것


같군." 데이켓이 말했다. "지금쯤은 그 세 사람의 입을 통해서 소문이 퍼졌을걸."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이 술집은 어젯밤에 처음 문을 열었고, 또 베니 블록사이드 외에는 모두 다른 지방에서 그러모은 사람들이라 아직 서로 얼굴을 익히지 못한 상태입니다. 따라서 서로 서먹서먹한 중에 이런 파문이 일어나면, 그들은 재잘거리기보다는 오히려 입을 다물려고 할 겁니다. 아마이저를 살해한 범인이 곁에 앉아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게 상책이지요." "하여튼 그들을 만나보게. 현장 조사를 끝내고 시체를 치우고 난 뒤의 일은 자네에게 맡기겠네, 조지. 일이 일단락되거든 전화로 보고해 달라고. 그러고 나서는 푹 쉬게 해주지." "과장님이 온종일 일하는데 제가 어떻게 쉬겠습니까?" 조지가 잘라 말했다. 낮에 혼자 선잠을 자는 것보다는 밤에 푹 자는 것이 낫다. "아마이저의 변호사를 만날까 합니다만, 과장님이 만나시겠습니까?" "뭣 때문에?" 데이켓은 멍하니 되묻다가, "아, 내가 만나도록 하지. 자네는 이 술집 종업원들을 철저히 조사하도록. 출퇴근하는 직원들이 나오거든 그로코트에게 어젯밤 이곳에 온 손님들의 명단을 작성하게 하고." 했다. 조지는 현장사진을 찍으랴 지문을 채취하랴 바쁜 그들을 남겨두고 겁먹은 하녀들과 보이, 백금색 블론드의 미인인 캘버리 부인을 만나보기 위하여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예상한 대로 그들에게서는 별로 알아낸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어붙은 듯한 침묵에서, 그들이 공포를 남과 나누어 갖기보다는, 자기의 깍지 속에 움츠러들 것이라는 자신의 예상이 옳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간신히 아마이저의 생애 마지막 한 시간 내지 두 시간 사이의 행적을 더듬어 종합할 수가 있었다. 캘버리 부인의 이야기에 의하면, 코마퍼드에 사는 터너라는 젊은 보이가 10 시 조금 전에 살롱 바로 가서 아마이저에게 무슨 말인가를 전했다. 아마이저는 곧 합석한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서 보이의 뒤를 따라 일단 바를 나갔다가 2~3 분 뒤에 돌아와서는, 친구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나가더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젊은 친구가 아마이저를 만나러 왔을 때의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길로 그는 식당 곁의 술창고로 가서 직접 커다란 샴페인 병을 들고 나와, 옆문으로 가던 도중에 베니를 만나 클레이턴과 차에 대한 지시를 내린 것을 끝으로 아무도 살아 있는 그를 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조지가 그들 중 마지막 사람을 심문하고 있을 무렵에는 이미 동이 트고 있었다. 아직 존슨이 댄스


홀에 남아 지문이 묻어 있을 만한 곳을 면밀히 검사하고 있었으나 구급차는 이미 시체를 실어가고 없었다. 조지는 집으로 돌아가 목욕을 하고서, 아침식사를 하고 아내 밴디와 간단한 대화를 나눈 뒤에, 도미니크가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와 질문공세를 펴기 전에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그는 그 길로 터너라는 보이의 하숙집을 찾아갔다. 터너는 아직 면도도 하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의자에 앉아 오늘 경마의 예상판도를 점치기에 골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런던 태생에다 몸은 깡마르고, 여름철과는 무관한 도회지 특유의 창백한 얼굴에서는 눈만이 유난하게 빛을 내고 있었는데, 벌써 코마퍼드에는 정이 떨어졌다는 기색이었다. 조만간 다시 런던으로 되돌아갈 사람이다. 아무튼 그는 이번 사건에 말려든 다른 친구들과는 전혀 친분이 없는 모양인지 그들의 이름을 하나도 몰랐다. 갑자기 경찰관이 찾아왔는데도 가벼운 당혹감과 호기심 외에는 불안한 표정은 조금도 살필 수가 없었다. 그는 조지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정확히는 기억할 수 없지만, 10 시 5 분경 그가 홀을 지나가고 있을 때 젊은 남자가 정면 현관으로 들어서며 그를 불러세웠다. 청년은 이름은 밝히지 않은 채 '아마이저가 있는 데로 가서 중요한 용건으로 만나뵙고 싶다고 전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의 말을 아마이저에게 전하고는 두 번 다시 그 작은 일을 머리에 떠올리지도 않았다. 아무튼 아마이저는 곧 바에서 나와 홀에서 기다리고 있는 청년을 만나러 갔다. 한편, 터너는 곧 식당으로 돌아갔기에 두 사람의 모습을 본 것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젊은이가 아는 사람이었느냐는 물음에, 터너는 이 마을에는 처음 왔으니 알 리가 있겠느냐는 대답을 했다 -- 그 사람의 특징은? 이렇다 할 특징도 없다고 했다. 나이는 25~26 세? 거무스름한 오버를 입고, 양복은 회색, 모자는 쓰지 않았다. 약간 키가 컸지만 유별나게 큰 것은 아니고, 면도를 깨끗이 했으며 머리칼은 갈색. 그밖에는 이렇다 할 특징은 없으나, 다시 한 번 그 청년을 만나면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 사진으로는? 알아볼 수 있을지 모르나 자신할 수는 없다 -- 시험삼아 응해 줄 수는? 그럴 수는 있다. 하지만 왜?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조지는 터너의 파리한 입술에 물려 있는 담배를 바라보면서, 생각에 떠오르는 가장 간결하고도 충격적인 말로 아마이저의 죽음을 알려주었다. 담배의 긴 재가 떨어지기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그의 눈은


처음으로 완연한 호기심과 흥분의 빛을 발하며 크게 열렸다. 거기에는 공포도, 경계심의 그림자도 엿볼 수가 없었다. 물론 그로서는 보스에 대한 어떤 원한이 있을 턱도 없겠고, 동시에 서너 번 얼굴을 마주한 보스가 죽었다고 해서 비탄에 빠질 일도 없을 것이다. 아무튼 가까이 알았던 사람의 살인사건에 놀란 것뿐이다. "허, 그렇습니까! 세상에 그럴 수가!" 그의 목소리가 흥분에 차올랐다. "그럼, 당신은 내가 만난 그 청년이 범인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아니, 이건 하나의 수사활동에 지나지 않소." 조지는 무표정한 투로 말했다. "나는 어젯밤의 사건에 관한 정보를 여러 각도에서 얻으려는 것뿐이오. 그런데 당신이 그곳을 나온 것은 몇 시쯤이었소?" "10 시 40 분경이었을 겁니다." 자신의 확고한 알리바이를 입증해야 할 판국에 와서도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숙집에 돌아온 것이 11 시 조금 전이었습니다. 아래층 아주머니에게 물어보시면 돼요. 더구나 같은 술집에서 일하게 된 스톡스라는 친구와 함께 걸어서 돌아왔지요. 그는 길 건너의 루이스 부인 댁에 살고 있습니다." 그는 경마신문을 옆으로 집어던졌다. 이젠 경마에도 흥미가 가신 모양이었다. "자, 가서 확인해 보시지요. 엉뚱한 수확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조지는 지저분한 계단을 내려오면서 터너의 비비꼰 마지막 말을 되십어 보았다. 그리고 비록 터너가 다시는 그 술집에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고 해도, 오늘만은 제 시간 전에 출근하리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내기를 걸 필요도 없을 만큼 확정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사건에 관한 뉴스는 아직 널리 퍼지지는 않은 모양인지, 조지가 '즐거운 술집 하녀'로 돌아왔을 때 새롭게 단장된 현관 언저리에 호기심 많은 구경꾼의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데이켓에게 전화를 걸어 현재까지의 자신의 행적과, 입수한 보잘것없는 정보를 보고했다. 그리고 나서 베니 영감의 도움을 받아 어제 개업 축하에 참석한 사람들의 명단 작성에 착수했다. 물론 가게는 오늘은 영업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이저 황제가 없는 마당에 감히 영업을 맡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 뻔하다. 10 시 반경에 어떤 손님이 굳게 닫힌 현관 앞에 차를 멈추었으나, 휴업을 알리는 간단한 푯말을 보고서 돌아갔다. 하지만 문을 닫게 된 비밀은 곧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의 기억을 종합해서 가능한 한 완벽한 명단이 만들어졌을 무렵, 그로코트와 프라이스 두 형사가 와서 조지의 지시를 기다렸다. 조지는 그들에게 명단에 기재된 인물들을 방문해서 정보를 수집하라고 지시하고, 다시 데이켓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때쯤에는 변호사들도 사무실에 출근했을 테니, 이제는 범죄의 '동기'를 파악하는 것이 선결문제였다. 아마이저는 정말로 외아들과 관계를 끊은 것일까? 아니면, 아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당분간 고생을 하도록 내버려둔 것일까? 하지만 그런 수단으로 아들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남녀간의 애정의 끈은 비록 아마이저의 힘으로도 그렇게 간단히 끊을 수가 없는 것이니까. 따라서 아마이저는 화가 난 김에 그런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아들에 대한 벌로써 가난의 맛을 톡톡히 보여주고, 더 이상 견디지 못할 정도에서 받아들일 생각은 아니었을까 ? 한편, 사무원 출신의 그 여성은 시아버지에 대한 증오는 눌러 참고, 두둑한 보상을 받고서 남편이 항복하도록 유도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이건 지나친 억측이겠는걸......조지는 다이얼을 끝까지 돌렸다. 아마도 십중팔구는 아들 레슬리의 이름은 어떤 굴욕적인 조건이 붙지 않는 한 유언장에는 올라가 있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아마이저의 아내는 몇 년 전에 죽었으며 달리 혈육은 없다. 따라서 누군가의 호주머니에 생각지도 못한 큰 유산이 굴러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는 생전에는 물론, 비록 죽은 뒤라도 자기의 제국이 무너지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그가 유언장을 다시 쓰는 것을 번거롭게 생각하거나, 심사숙고하기 위해 그것을 연기하는 일도 거의 있을 수 없다. 그는 결코 생각을 번복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일단 생각을 굳히면 저돌적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 그의 성격이 아니었던가. 이번의 경우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하틀리 변호사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네." 데이켓이 말했다. "유언장의 내용은 얼핏 보아 우리에겐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흥미가 있던걸. 아마이저는 아들과 관계를 끊던 바로 그날, 과거의 유언장을 파기하고 새로운 것을 작성한 모양인데 -- 거기에는 아들의 이름이 거의 눈에 띄질 않아. 그에게는 아들이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던 것 같더군." "그렇다고 자기의 재산을 잘게 나누어 누구에게 주거나 기부할 사람도 아닌데, 그 점은 어떻던가요?" "맞아. 그는 대단한 수전노였으니까, 죽는다고 해도 재산을 나누어주고 싶지는 않았겠지. 하기야 극히 얼마 안되는 돈을 남겨주고 싶다는 사람들의 명단은 들어 있었네만, 그건 문제도 되지 않는 푼돈이지. 생각지도 않은 돈을 남겨준다는데 그 액수가 적다고 해서 살해할 사람도 없을 테고. 더구나 그는 부하들에게는 두둑한 보수를 주었지 -- 그 점에서는 결코 인색하지가 않았던 걸세. 그리고 그건 그가 자기의 제국을 구축해 나가는 정책이었는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그런 친구들에게 푼돈을 나누어주고 난


나머지를 -- 그건 그의 재산의 태반이 넘지 -상속받는 사람이 누군지 상상이 가나?" "아뇨, 전혀......설마 손자가 태어날 것을 기대하고, 그 아이에게 재산을 남긴다는 건 아니겠지요?" "그건 전혀 잘못된 억측일세. 그는 과거의 아마이저 왕국의 계보를 버리고 전혀 새로운, 그리고 경이적인 재출발을 꾀했던 모양이야. 상속자의 이름은 캐서린 노리스. 자네는 이걸 어떻게 생각하나?" <PRE>번 호 : 8 / 76 등록일 : 1999 년 05 월 23 일 17:15 등록자 : 귀니사랑 조 회 : 191 건 제 목 : 죽음과 즐거운 여자 3 장 - 엘리스 피터스 </PRE>

제 4 장 사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저 단순한 화풀이일까? 레슬리가 키티 노리스를 제치고 다른 여성과 결혼한 데 대한 화풀이로서 키티 노리스를 돋보이게끔 끌어올린 것인가? 레슬리가 기대하고 있는 것을 챙겨, 그것을 그가 결혼하기를 거절한 여성 앞에 넘겨줌으로써 아들에게 뼈저린 보복을 하려 했단 말인가? 키티에 대한 위로의 의미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아마이저가 비록 며느리로 삼고 싶었던 키티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었는지는 몰라도, 그런 엉뚱한 짓을 할 만큼 정에 약한 사람은 아니다. 아니면, 그에게는 무엇인가 보다 깊은 의도가 숨겨져 있었던 것은 아닐는지 ? 이것은 분명히 아마이저의 에일(고급 맥주의 일종) 회사와 노리스의 맥주회사를 합병하여, 그의 사후 소유권의 태반을 키티에게 귀속시키겠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마이저의 원래의 의도는 그의 세력을 교묘하게 구사해서 하나의 도박을 시도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만일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그것이 성공하면, 키티는 그의 사후에 그 사업을 계승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여간 그의 후계자로서 그녀를 지명한 것은 그 거래에 대한 그의 열의와 진심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깊은 뜻이 숨겨져 있다. 거래에 성공하면 곧바로 노리스 재단을 그의 산하로 편입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기야 아들 레슬리가 떨어져 나간 이상, 아마이저는 소유한 모든 것을 키티에게 증여한다는 것을 선언하는 데 아무런 희생을 치를 필요가 없었을 테지. 그에게는 레슬리 외에는 가까운 친척도 없거니와, 또한 자기 재산을 저 세상으로 갖고 갈 수도 없는 것이므로 언젠가는 어떤 형태로든 그것을 처분해야만 한다. 하긴, 살아 있는 동안 그걸 활용하고 충분히 즐기는


일보다 나은 방법은 없을 것이지만. 아마이저는 실제로 합병을 제안했고, 거기에 대해 노리스의 경영인이 난색을 표명했는지도 모른다. 두 개의 회사가 합병될 경우, 그 대표가 누가 되리라는 것은 뻔한 일이기에 경영인이 반대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장래의 보장 내지는 배려가 아마이저의 설득력을 크게 강화시킨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더구나 아마이저로서는 어느 쪽으로 뒨굴든 손해날 건 없다. 만일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없다면 그 유언장을 파기하는 것쯤은 식은죽 먹기일 테니까. 하여튼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아마이저는 원하는 것이라면 거의 손에 넣어 온 사나이다. 그만큼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경우의 그의 보복은 극도로 잔인하고 철저해서, 누구든 상대방을 놀라게 하고 떨게 하는 데 충분했다. 조지는 차에서 내려서, 한동안 차체에 기대어 다음 행동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우선 키티의 작고한 아버지 노리스 씨가 아마이저의 심복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물을 딸의 후견인으로 선정한 것도 기묘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 세 사람은 상당한 친분을 맺고 있었고, 또한 셸레이 변호사는 그 성실성을 세상에서 인정받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러한 연관관계가 의외로 잘 유지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기야 키티는 성년이 되었으므로, 현재는 아마도 재산의 신탁도 그 기한이 지났을 것이다. 거기에 관련된 사항을 그가 알고 싶은 바는 적지 않았으나, 공식적으로 그걸 조사할 권리는 그에게 거의 없다. 그가 만나서 키티 노리스의 행동이나 신변에 관해 알아볼 권리가 있는 상대는 단 한 사람 -- 그건 키티 노리스 자신이었다. 그녀는 어젯밤 '즐거운 술집 하녀'에 와서 아마이저와 테이블을 함께 했었다. 아마이저가 방금 완성된 화려한 완구와도 같은 댄스 홀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자리를 뜨기 전까지는 그녀들과 담소를 나누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조만간 그녀를 만나야 할 것이다. 어차피 만날 일이라면 빠를수록 좋다 -그는 이렇게 생각을 굳히고는 다시 차에 올라타서 달리기 시작했다. 키티는 코마번에 아파트를 갖고 있었다. 번화가에서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집이 교구 교회 뒤켠의 한적한 거리 쪽에 자리잡고 있어 낮인데도 차의 왕래가 뜸했다. 하지만 그런 거리인데도 주차를 하기가 쉽지 않아, 조지는 차를 세워둘 공간을 찾기 위해 키티의 아파트에서 저만치 더 가야 했다. 다행히 빨간 커먼 기어가 길가에 서 있는 것을 보고 키티가 집에 있다고 짐작했다. 시간은 정오가 가까웠다. 스웨터에 스커트 차림으로 굽낮은 어린이용 샌들을 신은 그녀는 문을 열고 약간 당혹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그가 용건을 말하기를 기다렸다. 조지가 말했다. "나는 경찰인데 -- 펠스라고 합니다." 당혹스런 표정이 사라지며 그녀가 곧 통로에서 뒤로 물러섰기에, 그는 그녀가 사건에 관해서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리스 양, 아마이저 씨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겠지요?" "셸레이 씨에게서 전화로 이야기 들었습니다. 자, 어서 들어오세요." 그녀는 진솔한 호기심을 드러낸 채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것은 경찰이라는 그의 직무에 대한 관심만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그에 대한 흥미도 포함된 것이었다. 조지는 그녀의 시선을 눈부시게 느꼈다. 별로 마음에 꺼리는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키티는 그 반대로 비록 꺼림칙한 무엇이 있다 해도 태연히 상대방을 마주 보며, 눈길을 피하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것은 그녀의 천성이며, 의식적으로 바꿀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닌 성싶었다. "아마이저 사건을 수사하고 있습니다만, 당신의 협력을 얻을 수 있으면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아 찾아왔습니다. 결코 긴 시간은 걸리지 않을 겁니다." "저로서는 별로 바쁜 일도 없으니 천천히 하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파스텔풍으로 담백한 색조의 상당히 넓은 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4 층인데다가 앞을 가로막는 높은 건물도 없었기에 햇빛이 창마다 환히 비쳐들어 방안은 놀라울 정도로 밝았다. "자, 앉으십시오, 펠스 씨. 마실 것을 가져올까요? 어머, 마치 레이몬드 챈들러의 소설 속 대사 같아졌네요." 그녀는 뒤돌아다보고 약간은 일그러진 미소를 보냈다. "하지만, 저는 막 셰리주를 마실까 하던 참이었답니다. 더구나 댁은 뭐 사립탐정도 아니시고......" "하긴 공적인 탐정이지요." 조지가 얼버무렸다. 아마도 이야기가 그가 기대한 방향을 벗어날 것 같았지만, 그는 대세에 맡기기로 했다. 또한, 그러는 것이 의외로 재미있는 수확이 있을지도 모른다. "셰리주는 드라이도 괜찮을까요? 그것밖에 있는 것이 없어서." 그녀는 양해를 구했다. 그런데 잔을 갖다놓는 손이 침착치 못했다. 하지만, 그 손이 다소 떨린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제 됐습니다. 그런데 아마이저 씨 사건은 아가씨에게도 큰 충격이었겠습니다, 노리스 양." "네, 깜짝 놀랐어요."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는 그와 마주앉으며 예상한 대로 정면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셸레이 씨와 해밀턴 양이 전화로 알려주더군요. 정말 믿어지지가 않았어요. 그렇게도 건강하고 정력적인 분이었는데. 남들이 그분을 달갑게 생각하든 말든 그분은엄연히 존재했고, 그분이 없는 세상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거든요. 어쨌든 여러 가지 면에서 훌륭하고 뛰어난 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남다른 용기가 있는 분이었지요. 비천한 집안에 태어나서도 세상을 자기 뜻대로 움직여 그만한 재산을 이룩했다는 것은 불굴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대개의 사람들은 큰 부자가 되면 그것을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지만, 그분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때로는 관대한 면도 있었고, 때로는 재치있는 이야기로 사람들을 웃기기도 했지요. 어린애들과 어울려 천진난만하게 노는 것도 보았고요. 그렇게 냉엄한 사람인데도 말이에요. 그분에게 어린애란 장난감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죠. 아이들이란 마구 뛰어노는 것으로 만족할 뿐, 어른들처럼 번거로운 문제의 대상이 되지는 않으니까......그래서 어릴 적에 저는 그분과 아주 친했답니다. 커 가면서 점점 대하기가 어려워지긴 했지만." 그녀는 잔 속을 들여다보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 조지는 도미니크가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진한 애수의 그림자가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도미니크와 마찬가지로 거기에 놀라고 관심이 고개를 들면서, 그녀의 그 외로운 그림자의 비밀에 대하여 고개를 갸우뚱하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마치 자신의 인생의 항로가 이미 정해져 있기나 한 듯이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 라고 그는 생각했다. 먼 옛날에 어떤 큰 힘이 그녀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결정해 버리고, 그녀의 의지는 거기에 대해서 전혀 무력한 것처럼 말이다. 그건 아마이저의 영향은 아닐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녀가 그를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을 테니까. 아마도 누구의 영향도 아니면서 무엇인가 그녀를 압도하는 일련의 사건이 그녀의 신변에 일어나, 그녀는 거기에 휩쓸려서 저항할 방편도 없는 채로 몸을 맡기고 만 것이리라. "인간이란 누구나 결점은 갖고 있는 법입니다." 조지는 자기의 말이 교훈 비슷한 것이 되지 않도록 신경을 쓰며 말했다. "만일 고인이 지금 아가씨의 말을 들으면 기뻐할지는 모르지만......" "저는 그분에게 섭섭한 점도 갖고 있답니다." 그녀는 신중히 방향을 돌렸다. "그러기에 그분에 대해서는 공평한 입장에 서고 싶은 거예요. 물론 댁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기꺼이 협력하겠어요." "아가씨는 어제 적어도 한 시간은 그와 함께 있었지요? 어느 보이의 이야기에 의하면 10 시 조금 전에 누군가가 아마이저 씨를 찾아와서 중요한 일로 잠깐이라도 만나야겠다는 말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마이저 씨는 일단 살롱 바에서 나와 그를 만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당신들에게 그 까닭을


말하고 다시 자리를 떠났다는데, 사실입니까?" "예, 시계를 정확히 본 것은 아니지만 대충 그 시간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아마이저 씨는 우리에게 돌아와서 손님과 만나야 할 일이 있으니 15 분 가량만 기다려 달라고 했어요." "그것뿐이었나요? 그 손님의 이름이라든가, 그에 대한 신원 같은 건 말하지 않던가요?" "아뇨. 그냥 그렇게만 말했어요. 그리고 아마이저 씨가 가버리고 나서 비서인 루스 해밀턴 양이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런던의 동생이 15 분 전 11 시에 전화를 걸어 오기로 되어 있다면서요. 그래서 그녀를 차로 데리고 온 셸레이 씨도 그녀를 집까지 태워다 주기 위해 자리를 뜨고, 전 혼자가 되어버렸답니다. 저는 처음에는 아마이저 씨를 기다릴 생각이었지만, 결국엔 도중에서 돌아와 버리고 말았어요. 피로해서 빨리 집에 돌아와 쉬고 싶기만 했거든요. 그곳을 나온 것은 아마 10 시 15 분쯤이었을 거예요 -- 누군가 다른 분도 기억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제 차는 사람들 눈에 잘 띄니까요." 키티는 얼굴에는 물론, 말에도 조금도 비웃는 투를 섞지 않고 말했다. "제가 차를 몰고 나가는 것을 누군가는 보았을 게 틀림없다고 생각해요." 그건 사실이었다. 클레이턴이 가게 앞에 세워두었던 보스의 벤틀리 속에서 투덜거리고 있었을 때, 그녀가 주차장에서 차를 몰고 나와 곧장 코마번 쪽으로 달려가는 것을 목격했던 것이다. 그는 상당한 자동차광이었지만, 커먼 기어보다는 그녀의 모습에 눈길을 빼앗겼던 터였다. "그렇다면 10 시 반이 지나 집에 돌아왔겠군요?" "10 시 반은 넘지 않았을 거예요. 주차시키는 시간을 계산에 넣어도 10 분 정도밖에 시간이 걸리지 않으니까요......어머, 나 좀 봐!" 키티는 다급하게 손바닥을 입에 가져갔다. "이런 것까지 댁에게 말하다니......" "괜찮습니다. 연필과 딱지는 갖고 오지 않았으니까." 조지는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상대방을 웃기는 그런 순간에도 어딘지 어둡고 축축한 그림자를 지니고 있었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다. 그녀는 고인과 관련된 자기의 입장을 자세한 점까지 정확히 진술하고 있다 -- 어디 하나 흐트러진 구석이 없다. 충격은 받았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극히 자연스럽게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장난스러운 말투나 미소의 그늘진 그림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노리스 양, 아가씨의 개인적인 문제에 관해서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그런 건 사건과 관계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우리의 앞으로의 수사전개에 크게 도움이 될 수도 있기에." "네, 그러시지요. 하지만 우리 집 사업이라면 전


거의 아는 게 없으니 대답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아가씨의 아버님은 아가씨가 어릴 때 작고하셨는데, 그때 유산을 신탁에 맡겼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가씨가 성년이 되면 그 신탁이 풀리기로 되어 있는 것 아닙니까?" "아, 그런 일이라면 대답할 수 있어요." 그녀는 가벼운 놀라움을 얼굴에 나타내며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예요. 저는 이제 유산을 자유롭게 쓸 수가 있어요. 아무의 허락도 필요없게 되었으니까. 거기에는 손 하나 대지 않고 있기는 하지만, 법률적으로는 그렇답니다." "그렇다면 만일 아마이저 회사와 노리스 회사 간의 합병문제가 논의될 경우, 거기에 대처하는 권한은 전적으로 아가씨에게 달려 있게 되는군요." "맞습니다." 그녀가 대답했다. 침착한 말투로 보아, 그녀가 다음 질문사항까지 짐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아마이저 씨는 실제로 두 기업체의 합병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상당히 오래 전부터 적극적으로 추진을 했었지요. 우리 회사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이저 씨는 그 열의가 대단했어요. 이번 사건이 없었다면 아마도 보다 강력한 수단을 썼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아무런 구체적인 진전이 없었으니까, 다시는 이 문제가 거론되지는 않겠지요." "아가씨는 어떻게 할 생각이었습니까?" "저는 뭘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이 없었어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그런 문제로 골치를 썩는 것을 피하기 위해 멀리 여행이라도 떠나고 싶었어요. 저 자신은 내심 회사를 아마이저 씨에게 맡기고 깨끗이 인연을 끊고도 싶었지만, 회사에는 여러 사람이 일하고 있으므로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요. 회사는 저보다도 그 사람들을 위하여 더 중요한 것이니까요. 저 이외의 여러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일을 제 마음대로 처분한다는 것은 안될 일이잖아요. 레이 셸레이만 설득할 수 있다면, 회사를 그 사람들에게 넘겨 주고 싶은 생각도 굴뚝 같았답니다." 조지는 세찬 조수에 휩쓸려 생각지도 않은 방향으로 떠밀려, 그 걷잡을 수 없는 물결에 실려서 진실의 바다 쪽으로 운반되어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스스로는 진로를 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마 그녀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타고난 경쾌하고 구김살없는 처신으로 소용돌이치는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헤엄치고 있었다. 그녀는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고, 그것을 그가 솔직하게 받아들여 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질문을 계속해야 했다 -- 그녀를 혼란에 몰아넣기만 할


것이라는 걸 잘 알고는 있었지만 말이다. 그는 다시금 굳은 대지를 꽉 딛고 일어서는 기분으로 말했다. "하지만 두 회사를 합병한다는 계획은 근래에 시작된 것은 아니잖습니까? 지나치게 세부적인 내막까지 물어보는 것 같습니다만, 아마이저 씨는 훨씬 전부터 그런 계획을 갖고 있으면서 그것을 또 다른 방법 -- 즉, 두 가족 사이에 혈연관계를 이룩하는 것 -- 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려 한 것으로 아는데요." "그래요. 레슬리를 저와 결혼시키려고 했었지요." 그녀가 너무나 쉽게 대답을 했기에 조지는 거창하게 이야기를 끄집어낸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녀는 빈 유리잔 너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붉은기가 감도는 자색 빌로드 같은 커다란 눈동자 속으로 빨려들어가듯 마주보았다. 그 깊은 안쪽 유리의 성 속에 그녀의 모습이 아련히 보였지만, 그것은 손이 미치지 않는 거리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마이저 씨 혼자의 생각이지 우리의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런 일은 남이 강요할 수 없는 거잖아요. 아마이저 씨도 그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을 거예요. 아무튼 저와 레슬리는 정식으로 혼약을 맺은 일조차 없었어요." 잠시 침묵이 있었다. 그를 바라보고 있는 키티의 볼이 조금 창백해 보였다. 조지는 또 한 가지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그것을 마음에 접어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을 고하고 문 쪽으로 갔다. 그리고 문득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생각이 났다는 듯이 뒤를 바라보고 물었다. "아, 참......아가씨는 아마이저 씨의 유언장 내용을 알고 있습니까?" "아뇨. 뭐 특별한 --?" 그녀는 짧게 반문하며,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빌로드 같은 눈동자가 크게 부풀며 뜨거운 시선이 그의 얼굴에 와 닿았다. 그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희망의 등불이 켜지는 것을 보았다. 고독한 유리의 성 안에 환희의 불꽃이 밝게 불타오른 것이다. 그녀는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거의 수도원에 가까운 이 아파트와 의상이나 자가용차로도 짐작이 가듯이 비교적 검소한 생활로 만족하고 있는 그녀에게 금이나 보석이 별로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조지는 그녀에게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과연 그녀가 기대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확인해 보기 위해서라도 이야기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재산의 거의 전부를 아가씨에게 남겼답니다." 조지가 말했다. 그녀의 눈속의 등불이 피식 꺼졌다. 아니, 그것뿐이 아니었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서 있는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그리고는 무릎에서 힘이 빠지며, 그녀는 뒤로 손을 돌려 의자의 팔걸이를


더듬어 찾더니 무너져 내리듯 의자에 앉아, 무릎 사이에서 양손을 꼭 쥐었다. "어머!" 땅이 꺼지는 듯한 한숨과 함께 신음소리가 나왔다. 실망과 낭패와 노여움과, 알 수 없는 절망감이 섞인 목소리였다. "어머나, 무슨 그런 못할 짓을 --! 그분은 그냥 위협으로 그랬을 뿐, 정말로 그러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럴 줄 알았다면 그러지 못하시게 말렸을 텐데. 저는 레슬리를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단언을 했고, 저 자신도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느냐고 믿었는데 -- 그럴 순 없어요!" 그녀는 절망적으로 외쳤다. "도대체 어쩔 셈이었을까? 저는 그런 걸 필요로 하지도 않으며 탐내지도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 왜......" "그는 누군가에게 남겨주어야 했던 겁니다." 조지는 합리적인 해석을 내렸다. "더구나 그가 자기의 소유물을 어떻게 처분하든 그의 자유니까요. 아가씨는 남의 재물을 그냥 줍다시피 하게 되었지만, 그건 전혀 아가씨의 책임이 아니니까 괴로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멍하니 그렇게 말하고, 무엇인가 말을 이을 생각으로 말끝을 흐렸으나,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나서 그를 배웅하기 위해 다시 발에 힘을 주어 일어나 예의바르게 문 있는 곳까지 나란히 갔다. 막막한 듯 공허한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감돌았다. 두 사람 사이의 문이 닫히자, 그는 계단 쪽으로 저벅저벅 서너 걸음 걸어가다가 조용히 뒤돌아서서 발소리를 죽여 현관 쪽으로 되돌아왔다. 그녀는 문 저쪽에 그대로 기대어 서 있는 모양이었다. A"아아, 어쩐담......? 몹쓸 짓이야!......아아......" 마치 어린아이가 부당한 하나님을 원망하고 한탄하는 듯한 비통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도대체 아마이저가 그녀에게 뭘 잘못했다는 것일까 ? 그녀가 비록 그의 유산을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또한 그것이 레슬리에게 물려져야 한다고 해서......단순히 그런 것이라면, 그러한 사실을 통고받았을 때 마치 잔인한 가혹행위라도 당한 것 같은 태도를 취할 필요까지는 없을 텐데. 사실 그가 무엇인가 흥미 있는 반응을 기대하고 그녀를 떠본 것은 사실이지만, 막상 그 반응을 손에 넣고 보니 이번에는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한 지경에 빠지고 만 것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화가 나고, 수치심까지 느끼면서 카펫이 깔린 계단을 내려갔다. 이 기묘한 그림맞추기 퍼즐을 구성해 볼 기력조차 없었다 -- 하기야 그림의


조각 자체가 아직 그 수가 적고 헝클어져, 그 중의 서너 개를 손에 들어봤자 갈피를 잡을 수는 없었다. 그가 거리로 나와 차 있는 곳까지 가보니, 도미니크가 차에 기대 서서 멍하니 기다리고 있었다. 도미니크는 아버지가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에 차까지 달려온 모양인지 아직 숨이 차 있었다. 하지만 조지는 다른 일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으므로 아들의 그런 기색을 알아채지 못했다. 도미니크의 살피듯 두리번거리는 얼굴이 언제나와 다를 바 없고 또한, "아, 아버지!" 라는 인사말이 천연덕스러워 조지는 아들의 모습을 눈여겨 살펴볼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라? 여기에서 뭘 하는 거냐?" 아버지가 물었다. 도미니크가 점심시간에 학교에서 빠져 나와 시내에서 가벼운 식사를 하고, 키티의 모습을 먼발치에서라도 보기 위해 교회 뒷골목을 서성거린 것은 이것이 세 번째였다. 전화번호부에 그녀의 이름이 올라 있었고, 또 그녀의 이름은 그녀 자신의 입을 통해서도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그녀의 아파트 건물 현관 앞을 지나치려 했을 때 열려 있는 현관문 안쪽에서 막 계단을 내려오는 남자의 모습이 아버지가 틀림없다는 것을 그 순간의 충격에서 그는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만일 길가에 세워둔 아버지의 차를 본 그때 어떤 영감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그는 아직도 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처크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나온 길이에요." 도미니크는 신중히 숨을 고르면서 말했다. 처크 선생을 골라낸 것은 아버지가 알고 있는 교사 중 가장 무난한 사람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심부름?" 조지는 캐물어 볼 까닭도 없는데 그렇게 물었다. "저기 신부님에게요." 도미니크는 잘라 말하고 교회 담벽 모서리를 턱으로 가리켰다. 안성맞춤으로 교회의 신부는 학교의 이사 중 한 사람이자 전임강사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모리스 차가 여기 서 있기에 잠시 기다리던 참이에요. 이제 12 시가 다됐으니까, 잘하면 점심이라도 얻어먹을까 해서." 그런 말을 듣고 보니 조지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술재벌이 몇 명 죽었다고 해서 산 사람이 먹지 말라는 법은 없다. "자, 타거라." 그는 아들을 태우고, 오후의 수업에 늦지 않게끔 학교에서 멀지 않은 레스토랑으로 아들 녀석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처크 선생이 무슨 심부름을 시켰는데? 곧 전해 드리지 않아도 되는 일이냐?" "별로 답장 같은 건 필요없는 일이에요. 심부름은 끝냈으니 제가 신경쓸 건 없어요." 이상하게도 도미니크는 전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거짓이 드러날 염려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는 조금도 가책 같은 것을 느끼지 않았다. 하여간 그는 지금까지 꼭 필요한 비밀 같은 걸 가져본 적이 없었다. 5 살에 학교에 들어간 이래, 그 역시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을 숨기기 위해 가끔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뚜렷한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었고, 또한 그의 부모는 -- 특히 어머니는 -정직하게 자백해도 결코 화를 내지 않고, 또 털어놓기 쉽게 유도했으므로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런데 이번은 사정이 달랐다. 털어놓기보다는 죽어 버리는 것이 나을 정도로 중대하고 절실한 문제였던 것이다. 더구나 그는 그 비밀이 탄로날 위험을 무릅쓰고 행동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 키티가 살고 있는 아파트 건물 속에서 아버지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마이저는 어젯밤 살해되었다. 키티는 그날 밤 '즐거운 술집 하녀'에서 그와 함께 있었다. "네 여자친구도 와 있더라......"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었는데, 방금 그녀를 찾아간 것이다. 물론 경찰관으로서 간밤에 그곳에 갔었던 사람을 모조리 만나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왜 키티가 그 첫째 손가락에 꼽혔는가 ? "아버지는 아마이저 사건을 수사하고 계신 거죠?" 도미니크는 호기심이 말소리에 드러나는 것을 경계하면서 말했다. "아침에 엄마한테서 들었는데, 아마이저 씨가 살해되었다면서요? 엄청난 일이 벌어졌군요! 물론 저는 아무에게도 말을 퍼뜨리진 않았지만, 이런 소문은 발이 빠르거든요. 이미 시내에 좍 퍼졌어요. 이미 열 명 가까운 사람이 경찰의 조사를 받았고, 용의자가 한두 명 체포되었다는 소문도 돌고 있어요." "이런 사건이 일어나면 어중이떠중이 명탐정이 많이 나타나게 마련이지. 하지만 우리로서는 아직 오리무중이다. 그래, 소문으로는 누가 범인이라더냐?" 새우로 도미를 낚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니다. 도미니크는 미끼를 드리우고 물고기가 걸려들기를 기다렸다. "그 클레이턴이라는 운전사래요. 아마 아버지는 모르시겠지만, 그 사람은 해고당할 참이었다나 봐요." "허, 그래!" 조지는 그로코트와 데이켓도 아직 그런 정보는 입수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학교 내에 재빨리 그런 뉴스를 퍼뜨린 것은 과연 어떤 학생일까 ? "역시 아버지는 몰랐군요! 실은 아마이저 씨의 정원사 아들이 우리 반에 있는데, 그 애에게서 들은 바로는 사흘 전쯤 클레이턴이 호되게 야단을 맞자 아마이저 씨에게 덤벼들면서, 밤이고 낮이고 24 시간 부려먹으니 견딜 수 없다고 대들더래요. 그러자


아마이저 씨가 이렇게 말했다나 봐요 -- 네놈은 절도와 자동차 도둑으로 두 번이나 콩밥을 먹은 전과자였으니, 일자리를 얻은 것만도 감지덕지해야 해 -- 하고요." "뭐냐, 그 말투가!" 조지는 차를 길가에 세우면서 꾸짖었다. "들은 대로 말한 거예요. 하여튼 그런 일로 그는 모가지가 달아날 판이었대요. 그 사람이 전과자라는 거 알고 계셨나요?" "응, 알고말고. 10 년 전의 일이란다. 교수형을 당할 일은 아니었고." "살인죄가 아니니까 물론이지요." 도미니크가 말했다. "이봐, 서툰 변호사 흉내는 그만둬. 나는 그냥 해본 소리야." 조지는 차에 열쇠를 채우고, 아들을 앞세우고서 '플라잉 호스'라는 간판이 걸린 식당으로 들어가 구석진 테이블을 차지하고는 메뉴를 훑어보았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 도미니크는 초조한 생각이 들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나갈까 ? "무슨 단서라도 잡았나요?" 하고 물었다. 그 진지한 표정과 살피는 듯한 눈초리는 조지의 마음에 들 것이다. 도미니크는 자신에게 대단히 중요하고 절박한 문제를 서툴게 얼버무리는 것이 괴로웠다. 그의 아버지는 형사로서 상당한 활약을 보이고 있었고, 도미니크는 아버지가 담당하는 모든 사건에 늘 진지한 흥미를 느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다른 경우와는 틀리게, 마음속의 불안을 숨기기 위해 더더욱 아버지에 대한 예찬의 가면을 뒤집어써야 했다. 따라서 아버지가 애정어린 웃는 얼굴로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을 때, 그는 몸을 에이는 듯한 아픔까지 느꼈다. "그저 그렇지. 방금 시작됐을 뿐이야. 시간이 걸리겠지." "그 교회 뒷골목에는 누구를 만나러 갔었나요? 그 부근에 용의자라도?" 조지는 잠깐 생각을 하더니 조용히 말했다. "노리스 양을 만나러 갔었다. 방금 말했던 것처럼 뻔한 용건이지. 간밤에 그 가게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모두 만나볼 생각이야." "그렇다면 아직 이렇다 할 실마리가 없는 거로군요. 그 여자는 무슨 특별한 사실이라도 알고 있던가요?" "아니. 거의 모두가 이미 우리도 알고 있는 것뿐이었지. 자, 그런 이야기는 그만하고, 어서 먹자." 도미니크는 그러고도 서너 번 탐색을 해봤지만 허사였다.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 자신이 아직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몰랐지만, 그래도 도미니크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살인사건은 키티 곁을 너무나 가까이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에 그녀는 그 검은 그림자에 뒤덮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PRE>번 호 : 13 / 76 등록일 : 1999 년 06 월 12 일 12:22 등록자 : 귀니사랑 조 회 : 176 건 제 목 : 죽음과 즐거운 여자 5 장 -엘리스피터스 </PRE> 제 5 장 "네, 그 사건은 알고 있습니다. 신문에 나왔으니까요. 그래서 경찰이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지요." 진 아마이저가 말했다. 몸매가 가늘고 살갗이 약간 검은 여자로, 풍성하고 검은 머리카락이 얼굴 둘레에서 보기좋게 파도치듯 움직였다. 둥글면서도 정열적인 외모에 눈이 싱싱하게 빛났다. 나이는 스물서넛. 변두리 뒷골목에 있는 해크니스 부인의 초라한 집 2 층의, 허름한 가구로 둘러싸인 거실 겸 침실 한복판에 서 있는 그녀는 창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밝은 오후의 햇빛과 조지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조금도 움츠리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품이 넉넉한 푸른 스목(옷 위에 덧입는 길고 넉넉한 작업복) 아래로 아랫배가 불룩해지기 시작해서 수은처럼 경쾌하고 민첩한 움직임은 덜했지만, 그런데도 그녀의 손이나 머리의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그런 특징을 똑똑히 엿볼 수가 있었다 -- 키티가 주위 사람들에게 어두운 느낌을 주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 조지는 이런 발랄하고 매력적인 여성을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윌슨이 말한 대로, 진은 정말 굉장한 여자였다. 레슬리 아마이저가 어릴 적 친구인 아름다운 키티가 있는데도 어째서 이 진에게 마음을 빼앗겼는지 능히 짐작이 갔다. "아시겠습니다만, 수사상 형식적이나마 몇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당신은 어젯밤 계속 집에 있었습니까?" 그녀는 입을 오므리고, 조지가 집이라고 표현한 방안을 돌아다보았다. 계단 옆의 공간에는 싱크대가 장식품처럼 마련되어 있었고, 마당의 헛간에다가는 레슬리의 캔버스와 이젤과 물감 등을 넣어두기로 허락을 받아 놓았다. 하지만 이것을 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 ? 그녀는 시선을 어디에 멈춰야 할지 망설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네, 저녁 내내 이곳에 있었습니다." "그럼 바깥양반은?" "레슬리는 9 시 반경 산책삼아 편지를 우체통에 넣으러 잠시 외출했을 뿐, 여기에 있었어요. 어제는


짐싸는 일이 바빠서 하루종일 직장에서 일했기 때문에 신선한 바람을 쐬고 싶어했었지요. 하지만 밖에 나가 있었던 시간은 불과 30 분 가량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10 시까지는 집에 돌아왔겠군요?" "그보다도 빨랐을 거예요. 아무튼 10 시쯤에는 틀림없이 집에 있었습니다." "그밖에 외출한 일은 없고요?" "네. 뭣하시다면 직접 레슬리에게 물어보시지요." 그녀는 얼마간 경멸이 섞인 투로 말했다. 모든 것이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그로코트 형사가 레슬리 아마이저를 그가 일하고 있는 말든 상회의 지배인실로 불러 같은 질문을 하고 있을 것이다. 상회의 점원들이 소동을 일으키고, 그가 범인으로 체포당하는 것이 아닌가 지레짐작을 하지 않도록 그에 대한 심문은 은밀히 하라고 지시를 해두었다. 물론 진은 모르는 일이다. 어째서 두 심문이 동시에 이루어지도록 해놓았는지 조지 자신도 명확한 설명은하기 어려웠다. 억지로라도 말하라면, 아마이저 사건을 둘러싼 다른 용의자에 비해 이 젊은 부부에게 보다 짙은 혐의를 둘 이유는 아직 없었지만, 그에게는 자신의 예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비록 그들에게 거짓이 없다고 해도 그는 그들을 부당하게 다룰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겠습니다만." 그는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당신은 결혼한 다음 시아버지를 만나본 적이 있었습니까?" "아뇨, 한 번도." 그녀는 명백히 말했다. 그 잘라 말하는 투가 그녀의 마음가짐을 그대로 나타내 주고 있었다. "남편께서도?" "예, 남편도 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한 번 편지를 쓴 일 외에는 -- 두 달 가량 전입니다만." "화해를 하기 위해서였나요?" "도움을 청했지요." 진은 내뱉듯 말하고는 입을 꼭 다물었다. "당신의 양해를 얻고 그랬나요?" "아뇨!" 그녀는 스스로의 감정을 구태여 감추려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과장을 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돌렸다. "그래, 그 결과는?" "헛일이었어요. 멸시에 찬 말로 도움을 거절했지요." 그녀는 오히려 그렇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투였다. 레슬리가 그녀 몰래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함으로써 상처입은 그녀의 날카로운 자존심이 그로써 약간은 위안이 된 것 같았다. "그 뒤로는 아무런 내왕도?" "제가 아는 한은요. 하지만 단언할 수는 없어요."


조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마이저의 유언장 내용을 알려주었다. 수사 전개상 그럴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어때요,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별로요." 그녀는 조용히 대답했다. "놀랄 게 뭐 있나요? 그분은 재산을 누군가에게 주어야 했고, 그렇다고 해서 버린 아들 외에는 이렇다 할 친척도 없었으니까요." "노리스 양을 유산 상속인으로 한다는 그의 계획을 당신은 전혀 몰랐던 모양이군요." "레슬리의 이름이 유언장에서 완전히 삭제되고,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졌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어요. 그이의 아버지가 그걸 분명히 통고해 왔었으니까요." 그녀는 왼손에 낀 가느다란 결혼반지를 오른쪽 손가락으로 뱅글뱅글 돌리며 말했다. 반지가 헐거워진 것이다. 검은 머리가 맴을 그리며 내리덮인 그녀의 뺨도 어지간히 여윈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임신과 이 가난한 살림살이와, 생계를 돕기 위한 허드렛일 같은 것으로 몸과 마음이 지쳐서 그럴까? 아니면, 무엇인가 걱정거리가 그녀의 육신을 좀먹고 있기 때문일까 ? 레슬리가 아버지에게 굴욕적인 편지를 썼을 때, 아마도 그는 자신의 힘으로는 벅찬, 무엇인가 중요하고 파괴적인 문제에 맞부딪쳐 있었을 것이다. 냉혹한 아버지 덕택에 그는 역설적으로 아내의 자존심을 더 이상 상하게는 하지 않았지만, 물론 그걸로 문제가 해결되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그것과 씨름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리라. 조지는 그때까지 그녀로부터 신뢰를 한몸에 받고 있었던 레슬리의 마음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것 말고는 고생을 각오하고 집을 뛰쳐나올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그녀가 이곳에서 비참한 생활을 꾸려나가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 또한 몇 달 뒤에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고는 본의는 아니지만 아버지에게 무릎을 꿇을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 그의 태도는 그녀의 그것보다 한결 이치에 합당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선의의 행동에 그들의 결혼생활을 파멸시킬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협조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조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말없이 문 앞까지 그를 따라나왔다. 무엇 하나 물어보려고도 하지 않았고, 덧붙이려고도 하지 않았다. 무엇인가 숨기는 건 없을까? 그는 의심을 해보았다. 필요하다면 그녀는 능히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만일 감추는 것이 있다면 금세 알게 될 것이다...... 계단은 어둡고 좁았으며, 집안에는 페인트 냄새가


감돌고 공기는 싸늘했다. 해크니스 부인의 부자연스러운 고상한 몸가짐도 경찰이 자주 드나들게 되면 오래 갈 것 같지가 않았다 -- 비록 사복을 입고 오더라도 말이다. 조지는 이 집에는 전화선이 가설되어 있지 않다는 것과, 공중전화 박스는 50 미터 가량 떨어진 길모퉁이에 있다는 것도 눈여겨 두었다. 그는 일단 반대쪽으로 차를 달렸다가, 다음 골목에서 왼쪽으로 꼬부라져 한 바퀴 빙 돌아서는, 빨간 전화 박스가 보이는 가로수 그늘에 차를 멈추고 그쪽을 지켜보았다. 10 분, 20 분, 25 분......그러나 진 아마이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그녀가 정직하기를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과거에 그는 몇 번인가 쓴 맛을 보기는 했지만, 그런데도 자신에게 좋은 인상을 준 사람들의 동기나 행동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를 경계할 마음은 내키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일단 할 일은 다했다. 지금쯤 본서에 돌아와 그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을 그로코트 형사에게 전화를 걸기까지는 그녀를 완전히 믿지는 말아야 한다. 그 전화는 진이 정직하고 그녀의 증언이 믿을 만하다는 인상을 확실하게 굳혀 주었다. 듀크 가(街)의 큰 점포 뒤쪽에 있는, 먼지가 푹석거리는 창고에서 은밀히 불려나와 심문을 받은 레슬리 청년의 증언은 모든 점에서 아내와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편지를 우체통에 넣은 그는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공원을 잠시 서성거렸다. 하지만 집에 돌아왔을 때 교회의 시계가 아직 10 시를 치지 않았으므로, 30 분 가량밖에 나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극히 설득력있는 이야기였을 뿐만 아니라 레슬리와 아내 사이에 이야기를 맞출 시간도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결과가 나오고 보니 조지는 오히려 좀더 의심해 보고 싶어졌다. 의심을 하자면 그럴 만한 여지가 있었다. 진이 신문을 보고 사건을 알았다고 경솔하게 말한 것처럼, 그날 낮 신문에는 데이켓 총경의 간추린 공식발표가 실려 있었다. 그것은 어젯밤 '즐거운 술집 하녀' 구내에서 아마이저가 머리에 상처를 입고 죽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는 간단한 내용으로, 데이켓 총경은 그것이 살인사건이라는 규정은 내리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럴 것이라는 암시는 충분했다. 따라서 의절당한 아들과 그의 성실한 아내는 신문을 보고 놀라는 것과 동시에 죄가 있든 없든, 지난밤의 자기들의 거동에 대한 심문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 자기들의 알리바이를 증명할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경찰조사를 받기전에 서둘러 말을 맞추어, 둘의 증언이 일치하도록 했다 -- 이런 추리도 가능한 것이다. 신문의 초판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간에서부터 조지가 진을 방문한 2 시 반까지, 두 사람이 전화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충분했다. 조지는 그런 의혹을 몰아낼 만한 반증을 찾아보았지만 이렇다 할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진만큼 영리한 여자라면, 남편과 짜고 이야기를 사전에 맞추어 두는 것은 쉬운 일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여겨졌다. "레슬리의 태도는 어떻던가?" "별로 수상쩍은 면은 없었습니다. 물론 상당히 놀라는 기색이긴 했습니다만, 부자간의 사이가 남이 생각하는 것처럼 나쁘지는 않았다는 듯이 일부러 슬퍼하는 수작도 부리지 않더군요. 정말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그런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을 겁니다 -- 대단히 내성적이고 입이 무거운 청년이라서." "겁을 먹고 있는 것 같지는 않던가?" "그렇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세상의 달갑잖은 관심의 표적이 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는 것 같더군요. 어쨌거나 그는 똑똑한 사람이어서 그가 아버지를 살해하더라도 얻는 것이 없다는 점이 자신에게 유리한 카드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자네가 그런 말을 비쳤나?" "아뇨. 선배님은 그를 과소평가하시는 것 같군요." 그로코트는 피식 웃었다. "그는 우리가 이미 그 점을 익히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단지, 형세가 조금이라도 불리해지면 그 카드 뒤로 몸을 사리겠다는 기색을 엿볼 수는 있었지만 말입니다." "그가 일하고 있는 점포의 창고 담당자나 운전사들과의 사이는 어떤 것 같던가?" 조지는 캐물었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고등교육을 받은 젊은이를 백안시하고, 특히 그 이단자가 자기들을 멀리하는 태도를 취하면 사소한 일로도 으르렁거리기 마련이다. "그게 뜻밖에도 원만합니다. 동료들은 그를 레스라는 애칭으로 부르는데, 모두가 그를 좋아하는 눈치가 뚜렷합니다. 이번 사건에서도 그들은 그에게 극히 동정적이었습니다. 아마도 그가 진실한 성격이기 때문일 겁니다. 동료들과 친해지려고 일부러 그들의 말투를 흉내내거나 하면 오히려 더 역겨워할 텐데......어떤 의미에서 그는 그만큼 똑똑한 거죠. 긍지가 높다고도 할 수 있지만, 여하튼 원만한 편입니다." 심증은 좋은 쪽으로 기운다고 생각하며 조지는 차를 세워 놓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레슬리 아마이저를 무혐의로 단정할 수는 없었다. 금전만을 살인의 동기로 생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자 상속인이 된 키티의 경우는 이미 상당한 재산을 지니고 있어, 돈 때문에 사람을 해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한편, 이 젊은 부부는 돈에 궁한 것은


확실하지만 아마이저의 죽음으로 무엇 하나 얻는 것이 없다. 오히려 아마이저가 살아 있다면 언젠가는 그 완고한 마음이 풀려 그들을 받아들일지도 모르므로, 그는 그들에게 상당한 잠재적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물며 손자라도 태어나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아마이저는 결코 태도를 바꾸는 법이 없는 인간이었다고 하는,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비록 아무런 소득이 없더라도, 격렬한 증오심이나 복수심으로 인한 발작적인 충동에 휩쓸려서 순간적인 살의로 사람을 해칠 수도 있다는 일반적인 사실도. 생각해 보면 아마이저에 대해 적의를 품고 있는 사람은 그 자신의 아들 외에 또 있다. 운전사 제복을 입고 있는 전과자 클레이턴은 쫓아내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더구나 그는 클레이턴에게 창피를 주고, 직업을 갖게 해준 것만도 감지덕지하게 생각하라고 윽박질렀다고 한다. 그건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 한 말이었을까? 아니면, 아마이저는 클레이턴의 태도 여하에 따라 중부 어느 군에서도 일자리를 얻지 못하도록 조치를 할 셈이었을까? 세상에는 그보다 더 하찮은 일로 살인을 하는 사람도 있다. 아들에 대한 아마이저의 앙갚음 때문에 탐내던 집을 손에 넣지 못한 버니 윌슨도 같은 경우이다. 오히려 그의 경우는 그 앙갚음이 직접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것보다 한층 더 그의 감정을 상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 밖에도 아마이저 때문에 사업을 망친 사람이나, 그에게 이용당하여 큰 손해를 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차 속에 막연히 앉아, 대책없이 수사범위가 광대하다는 것을 한탄해 봤자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조지는 머리를 흔들어 망상을 떨쳐 버리고 차를 달려 아마이저 에일의 본사로 갔다. 콘크리트와 크롬으로 된 그 빌딩은 강가의 깍아지른 언덕 위에 있었고, 공장은 철로 저쪽에 있었다. 공장은 오래 된 코마번 거리의 매연으로 찌들어 있었지만, 본사는 넓은 잔디밭에다가 아름다운 수목이 창가를 덮고, 테니스 코트에 현대적인 주차장까지 갖추고 있었다. 주차장에는 호화로운 새 차가 즐비했다. 그중에서 낡은 것이라고는 해밀턴 양의 라일리 정도여서, 그 위엄있는 겉모양과 광대한 규모가 한결 두드러져 보였다. 그녀는 운전에 능숙했다. 조지는 가끔 그녀가 핸들을 잡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녀의 여유 있으면서도 빈틈없는 운전 솜씨에 감탄하곤 했던 것이다. 여름철 주말에는 열댓 살 안팎의 소년을 서너 명 태우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소년원의 신입생들인데, 그녀는 거기에서 보호감찰의 일을 돕고 있는 것이다. 낡은 라일리를 소중히 다루는


그녀의 심성이, 과거 여러 해에 걸쳐 여러 건의 소년들의 잠재적인 비행을 사전에 막았다고 할 수 있다. 조지가 정면 현관의 홀로 들어섰을 때 막 나오던 레이몬드 셸레이를 우연히 만났다. 셸레이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며 말을 걸어 왔다. "나에게 볼일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잠깐 외출할 일이 있었습니다만, 당신의 용무를 끝낸 다음으로 하겠습니다." 그는 가방을 옆에 끼고, 은빛이 도는 회색 모자를 손에 들고 있었다. 길쭉한 얼굴에 윤곽이 뚜렷한 생김새였으나 피로의 기색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볼을 두서너 번 신경질적으로 씰룩거렸지만, 몸가짐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귀족적인 관대함도 그대로였다. "오늘 아침 경찰관이 한 분 찾아왔기에 오늘은 더 이상 별일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지요 -- 지금 막 노리스 양을 만나러 가려던 참이었습니다만 상관없습니다. 전화로 좀 늦겠다고 해두지요." "아닙니다. 나는 해밀턴 양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찾아온 겁니다. 상관 말고 가보도록 하십시오." "아, 그렇습니까? 그럼, 그렇게 하지요. 아무튼 모처럼 오셨으니 루스 양의 방까지 안내해 드리지요." 그는 광택을 낸 난간에 가느다란 손가락을 올려놓으며 계단을 앞장서 올라갔다. "우리들에 대한 조사는 대충 끝난 게 아닌지요?" 그는 일그러진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당신이 어젯밤 해밀턴 양과 함께 그 가게를 나오는 것을 우연이지만 나 자신도 목격했는걸요." 조지는 미소를 돌려보내며 말했다. "나는 그때 홀에 있었지 뭡니까." "그거 다행이군요. 덕분에 우리의 입장은 대단히 유리하게 됐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하튼 빨리 해결이 되어야 할 텐데." 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정말 반갑지 않은 사건입니다." "그야......더구나 살인사건이니......" 그 말에 셸레이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역시 살인사건이 분명하군요. 신문발표는 거기에 대해 모호했고, 오늘 아침에 온 경찰은 입이 무거워 이렇다 할 언급이 없었거든요." 그는 다시 계단을 올라가, 2 층의 넓은 복도를 오른쪽으로 구부러졌다. "하지만 모든 점으로 판단해서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니 나로서는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처음에는 뭐가 뭔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습니다만, 차차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 보게 되었지요 -하지만 웬지 꿈이라도 꾸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아마이저 씨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그 기분 이해가 갑니다. 당신은 오래 전부터


아마이저 씨와 함께 일을 해왔으니까요. 당신과 해밀턴 양은 누구보다도 그를 잘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만큼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마음은 더하겠지요." "그야 -- " 그는 막연히 대답을 얼버무렸을 뿐, 자기의 느낌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비록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앨프리드 아마이저가 생전에 남긴 깊은 도랑에 새삼스럽게 놀라는 결과로 끝났을 것이다. 그는 비서실의 문을 가볍게 노크하고서 얼굴을 방안으로 들이밀며, "손님이 오셨어, 루스." 하고 말하고, 조지를 방안으로 들어가게 한 다음 그 자리를 떠났다. 그녀는 책상 뒤에서 조용히 일어섰다. 호리호리한 몸매를 검은 사무복으로 감싸고 있었다. 그 옷은 뜻하지 않게 상복과 같은 구실을 하고 있었다. 윤기가 도는 암갈색의 머리를 뒤로 묶고 있었다. 그녀는 20 년 동안이나 아마이저를 섬겨 왔다. 그와 그의 가족에 관해 그녀는 속속들이 모르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극히 관대해지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그녀의 차분한 몸가짐은 평소와 다름없이 훌륭했지만, 얼굴은 심한 충격으로 굳은 표정을 띠고 있었다. 조지를 알아보고는 아름답고 검은 눈썹을 약간 찌푸리는 것 같았지만 상냥하게 그를 맞이하며, 하고 있던 일을 중단한다는 것을 명백히 드러내면서 책상을 떠나 조지 앞에 앉았다. "실은 아마이저의 집안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당신에게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조지는 솔직히 말문을 열었다. "아마이저 씨의 신변에 관계되는 일이 이 사건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이해가 가실 겁니다. 그래서 아마이저 씨와 그 아들에 관하여 공평한 입장에 있는 당신의 시각에서 부자간의 갈등의 내력과, 거기에 얽힌 여러 가지 사실을 상세하게 이야기해 주면 고맙겠습니다." 그녀는 뚜껑이 열린 담배 상자와 무거운 유리 재떨이를 두 사람의 중간에 옮겨놓고 나서, 질문에 답하기 전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사이에 조지는 그녀의 차분한 취향에 맞게 꾸며진 방안을 조용히 관찰했다. 명쾌한 글씨체로 된 문자판과 깔끔한 디자인의 검은 벽시계는 한눈에도 그녀의 취향을 잘 나타내 주고 있었고, 우아한 책상의 꾸밈새도 그녀의 주문이었을 것이다. 벽에 걸린 큰 액자 속의 사진 두 장과 책상 위에 세워놓은 작은 사진틀 속의 것은 모두가 소년원의 아이들을 찍은 것이다. 그 중 두 장은 그녀 자신이 여름 캠프에서 촬영한 것 같았고, 책상 위의 것은 소년원에서 개최된 파티의 사진으로, 그녀는 소년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자못 즐거워 보이는 그녀는 굳건한 품위를 갖추고는 있었지만,


반할 정도로 아름답고 또한 여성적이어서, 열댓 살 사춘기 소년들은 그녀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거나, 그녀에게 안겨 춤을 출 때는 180cm 나 키가 커진 느낌이 들 것 같았다. 유능한 여성이 20 년간 이 사무실에 묻혀 지내온 것을 조지는 애석하게 생각했다. 한 다스나 아이를 낳아서는 돌보지 않는 부랑자의 가정에서 쓸어낸 못된 아이들을 주워다 돌보는 것보다, 그녀는 유망한 자신의 아이를 두서넛 낳아 양육해야 했었던 것은 아닐지. "두 분 모두에게 잘못은 있었습니다만 -- " 그녀는 생각을 지나치게 했는지 진부한 말을 불쑥 입 밖에 냈다가, 곧 그 명확치 못한 내용을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책임은 모두 아마이저 씨 자신에게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이저 씨는 사장으로서나 아버지로서 대단히 다루기 어려운 분이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제가 말씀드릴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분은 고집을 세운다기보다는, 천성이 남의 의견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만사에 남들이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가 뜻하는 바대로 움직이는 것으로 믿었지요. 레슬리는 어릴 때부터 그런 아버지의 성격에 심한 영향을 받았어요. 하지만 아버지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한,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어릴 때는 이렇다 할 충돌은 없었습니다. 그림이라든가 그밖의 여러 가지 재능은 단지 아버지를 기쁘게 해주는 것일 뿐, 문젯거리가 되지는 않았지요. 그러던 중에 부인이 건강이 나빠져 자리에 눕게 되자, 저는 그 댁 사람들의 부탁으로 그 집으로 거처를 옮겼지요. 그 무렵에는 아직 본사 건물이 세워지기 전이어서 거의 모든 사무는 집에서 보았어요. 저는 그 집에서 기거하는 몇 년 동안 부자 관계가 원만해지도록 할 수 있는 한 노력을 했습니다만, 그때는 이미 레슬리를 다독거리기에는 시기가 늦었을 뿐 아니라 마음의 고랑도 상당히 깊어진 뒤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레슬리가 성장하고 스스로의 생활을 추구하게 되자 충돌이 시작되었습니다. 부자 관계가 파국에 이를 때까지 4~5 년 동안 그들은 몇 번이고 돌발적인 충돌을 거듭했는데, 처음에는 아마이저 씨가 아들을 누를 수가 있었지요. 모든 힘이 아마이저 씨 손아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의 내용이 차차 중대해지면서 그렇게 만만치만은 않게 돌아갔습니다. 레슬리는 그림을 잘 그려서 그 길로 나가려고 발버둥쳤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걸 허락치 않고 막무가내로 회사에 끌어넣었습니다. 아마이저 씨는 누구든지 자기의 의도대로 따르게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즉, 레슬리를 키티 노리스와 결혼시켜 지금의 회사보다도 더 큰 규모의 맥주회사로 육성하는 것이 목표였던 거지요. 그런데 레슬리의 화가 지망을 둘러싼 갈등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그는 진을 알게 되었고, 더욱 격심한 갈등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는 이 회사에서 진을 알게 됐다면서요?" "그래요. 그들은 자유롭게 교제를 시작했고, 누구의 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곧 그 사실이 아마이저 씨의 귀에 들어가게 됐고, 아마이저 씨는 불같이 화를 냈지요. 그래서 서슬이 시퍼렇게 레슬리를 야단치고, 다시는 진을 만나서는 안되며, 만일 명령을 어기면 레슬리에 대한 장래의 법적인 권리를 일체 박탈하겠다고 한 겁니다. 저는 아마이저 씨가 진정으로 그런 것이 아니고, 다만 레슬리를 굴복시키기 위한 위협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아마이저 씨는 실제로 그것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 사이는 완전히 갈라지고 만 거지요. 레슬리가 잘못했다고 순순히 무릎을 꿇었다면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텐데, 그는 결연히 집을 뛰쳐나가 진을 데리고 가서 그 길로 그녀와 결혼을 해버린 겁니다." "만일 그가 단순히 아버지에 대한 반항의 수단으로써 그렇게 했다면, 무모한 결혼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조지가 말했다.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렇지는 않습니다. 레슬리는 아버지에게서 부당한 압력을 받음으로써, 문제의 소재와 그 중요성을 똑똑히 파악한 거지요. 똑똑한 청년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자기에게 미치는 화가 아무리 큰 것이라 해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 겁니다. 그는 그 이튿날 이 회사 사장실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와 책상 앞에 꼿꼿이 서서 결혼했다는 폭탄선언을 아버지에게 내던졌습니다. 아마도 그가 그때까지 당한 속박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한편, 아마이저 씨는 그때까지도 자기의 명령 하나로 그런 결혼은 쉽게 깨뜨릴 수 있을 것으로 마음을 놓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그런 방심이 완전히 빗나간 것을 알고 아마도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레슬리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아버지의 명령에 따를 수 없다고 말했던 거예요. 그 순간 아마이저 씨는 마치 자기의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멍하니 레슬리를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곧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자, 벌컥 화를 내며 이렇게 호통쳤습니다. 좋다. 그렇게 그 여자가 소중하다면 당장 데리고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그 말에 레슬리는 각오했다는 듯이 계단을 달려 내려가 진의 팔을 잡고 나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잠시 동안 그녀는 자기의 하숙집에 머물고, 레슬리는 호텔에 묵으면서 결혼해서 살 집을 물색했습니다. 레슬리는 자기의 소지품을 가지러 꼭 한 번 집에 갔었습니다만, 제가 아는 한 다시는


아마이저 씨를 만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간신히 셋방을 얻기는 했지만, 다음에는 일자리가 문제였습니다 -- 자격증이나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죠. 그가 옥스퍼드에서 공부한 거라고는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었으니까. 결국 그는 육체노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고비만 잘 넘긴다면 앞으로 어떤 고난에도 대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돼요." "그래, 아마이저 씨는 그 뒤 아들을 용서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나요?" 조지가 물었다. "네. 아마이저 씨의 명령을 무시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모독이었던 것이지요. 그분이 아흔 살이 넘은 할아버지라도 된다면 정에 약해져서 화해를 할지는 모르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지요." "그때 아무도 아마이저 씨를 설득하려 하지 않았던가요, 해밀턴 양?" 그녀는 그 질문에 일그러진 미소를 보였다. 아무도라는 말에 그녀도 포함된다는 것을 민감하게 알아차린 것이다. "설득이야 했지요. 레이 셸레이는 몇 주 동안이나 그 일로 골치를 썩혔고, 키티 노리스도 열심히 설득을 했습니다. 그녀는 마치 자기에게 책임이 있는 것처럼 몹시 안타까워했어요. 하지만 저는 가만히 일이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았을 뿐입니다. 혹시 아마이저 씨가 아들을 용서할 마음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 희망에서였지요. 만일 그렇다면 섣불리 설득을 하는 것이 오히려 그분의 고집만 북돋우는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두 달 전쯤에 레슬리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를 본 적은 없습니까?" 조지가 질문의 방향을 돌렸다. 아름답게 균형이 잡힌 검은 눈이 그의 기색을 살폈다. "레슬리가 당신에게 그런 말을 털어놓던가요?" "아닙니다. 레슬리의 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나는 아직 레슬리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조용하게 목소리를 가다듬어 대답했다. "네, 읽었습니다. 당신도 그 내용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조금도 비굴한 구석이라고는 없었지요. 그런 식으로 헤어진 아버지에게 편지를 쓴다는 것은 일종의 항복일 수도 있겠지만, 그 편지는 당당했습니다. 진이 임신을 했고, 레슬리는 아버지로서 져야 할 책임을 다할 수 있을지 상당히 불안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마이저 씨에게 그들이 집을 가질 수 있게 내버려두라는 요구를 했던 것입니다 -- 아마이저 씨가 그들이 기대를 걸었던 집을 가로채 버렸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말씀드리면 알아들으실지 모르겠네요." "네, 그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게속하시지요."


"아마이저 씨는 자기 아들의 요구에 대하여 마치 장사꾼의 편지처럼 냉담하고 경멸에 찬 답장을 보냈습니다. 일단 부자지간의 인연은 끊어진 것이니까, 레슬리의 가정적인 문제는 독자적인 책임 아래 있으며, 자기가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화해 같은 건 생각지도 말라는 의도가 명백한 문장이었지요. 더구나 아마이저 씨는 레슬리가 그 별채를 탐내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만일 그 집에 그렇게 흥미가 있다면 그 집을 사고 난 뒤에 생긴 기념품을 하나 보내주마 -- 단, 그건 마지막 선물이라고 -- 화가 지망인 너에게는 제격인 선물이지, 하고......그 선물이라는 것은 그 집이 선술집이었을 때의 낡은 간판입니다." "'즐거운 여자'라는 거 말입니까?" "어머, 그런 상호였던가요? 전 거기까지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 그리고 보니 이해가 가는군요. 아마이저 씨가 그것을 이리로 가져와서 아래층에서 포장할 때 얼핏 보았는데, 웃고 있는 여자의 상반신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 집 다락방에 있었다는데, 두꺼운 판자가 먼지투성이더군요. 아마이저 씨는 답장을 보낸 이튿날, 회사 차에 그것을 실려 레슬리의 셋방으로 보냈습니다." 진은 아마이저의 그 냉혹한 편지에 대해 잠깐 비쳤을 뿐, 그 선물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것은 뭐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선물은 그들에 대한 모욕임과 동시에 편지의 내용을 강조하기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 너희들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물론이고 죽고 난 뒤라 하더라도 이것밖에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 그리고 그 '즐거운 여자'의 집에서 너희들 손에 들어갈 것이라고는 그전에도 그 뒤에도 이것이 전부일 것이다. 그러니 신주단지 모시듯 하라 -- 고. "레슬리는 그 뒤 다시는 편지를 쓰지 않았다는 거군요. 전화도?" "네, 제가 아는 한은 전혀. 만일 그 뒤에 편지나 전화를 걸었다면 대개는 제가 알게 되었을 겁니다." 역시 그렇군 -- 조지는 어떤 가능성이 차츰 흐려져 가는 것을 느꼈다. 왜냐하면 비록 레슬리가 만나자고 했다 해도 아마이저가 쾌히 그것을 승낙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고, 가령 그가 아들을 만날 생각이 들었다고 해도 기분이 좋아서 샴페인을 대접하거나 개조된 댄스 홀을 구경시키는 둥, 환대를 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각도를 달리해서 생각하면 그것은 짓궂은 아마이저다운 행동일 수도 있다. 돈이 탄생시킨 기적을 레슬리에게 자랑함으로써 상처에 소금을 문지르듯 그를 괴롭히는 수법이 그것이다. 직접적으로 화를 내는 대신 그러한 음성적이고


야만적인 잔혹행위는 승리와 성공에 도취된 밤의 행사로서 어쩌면 아마이저가 해볼 만한 일이기도 한 것이다. '돈과 야망이 풍부하면 그 별채를 얼마만큼 훌륭하게 개조할 수 있는지 놈에게 실컷 보여줄 테다' -- 더구나 아마이저는 그런 비슷한 소리를 하며 크게 웃었다고 하지 않던가. "해밀턴 양, 혹시 최근의 레슬리 사진을 갖고 있는 것 없습니까?" 조지는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것이 과연 어떤 좋은 목적을 위해 필요한 건지, 만일 그것을 거절한다면 불가피한 사태의 발생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는 것인지를 신중히 저울질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그녀는 아무 말없이 책상 뒤쪽으로 가서 서랍을 열고 명함 크기의 인물사진 한 장을 꺼내어, 입가에 굳은 미소를 지으며 그걸 조지에게 건네주었다. 그 사진은 상당히 오랫동안 틀에 넣어져 있었는지, 흰 배경이 햇빛에 다소 변색이 되고, 모서리만이 반 인치 가량 원래의 흰색으로 남아 있었다. 더구나 그것은 두 조각으로 찢겼던 것을 풀과 셀로판 테이프로 정성들여 붙인 흔적이 역력했다. 그 찢긴 부분은 민첩하고 어딘가 무뚝뚝해 보이는 청년의 머리 부분에 칼자국처럼 흔적을 남겨 놓았다. 조지는 사진으로부터 시선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아마이저 씨의 쓰레기통에서 주워 붙여둔 겁니다. 왜 그랬는지 저 자신도 잘 모르겠습니다. 레슬리와 저는 특별히 친한 사이도 아니고 -- 하지만 저는 그가 어릴 때부터 곁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모습이 담긴 마지막 물건이 그런 식으로 버려지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말씀드린다면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이 가실 거예요." 그녀는 곧 말을 이었다. "이건 2 년 전의 사진인데, 아마이저 씨가 사무실에 갖고 있었던 것은 이것뿐입니다. 하지만 집에는 남아 있는 사진이 없을 거예요." 조지도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레슬리는 어릴 때부터 많은 사진을 찍혔을 것이다. 귀여운 유아시절, 아장아장 걷던 눈이 큰 아기, 진지한 얼굴의 국민학생, 열의가 대단한 스포츠맨, 수줍음을 잘 타는 청년 -- 그 많은 레슬리의 사진이 아마이저 씨의 벽난로 속에서 몇 시간이고 푸른 연기를 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곧 이걸 돌려 드리려 찾아오겠습니다." 조지는 그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밖으로 나와서 차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사진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레슬리 아마이저는 아버지와 닮은 데가 하나도 없었다. 키가 훨씬 크고 몸집이 날씬해서 군살이 없다. 아버지에 비해 한결


밝은 색깔의 머리가 넓은 이마에 알맞게 곱슬거리고, 눈은 기백에 넘치는 청년의 야성적인 빛을 담고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덜 익은 애송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누구라도 그의 얼굴을 보면, 그가 아버지의 의도를 배반하고 정면으로 도전할 만한 적수가 못 된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 분명했다. 그의 사진은 대부분 재가 되었겠지만, 청년 레슬리는 현재 살아있다 -- 투우는 땅을 박차고 최후의 돌격을 감행한 것이다. 4 시 정각에 도미니크는 버스 정류장에 가기 위해 힐 가(街)를 걸어가고 있었다. 도중에 경찰서 앞을 지나가게 되므로, 자전거를 타지 않고 학교에 가는 날에는 그곳에 들러보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다. 아버지가 근무를 끝내고 퇴근할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 희망을 걸고 말이다. 때로는 행운을 잡을 때도 있었다. 그날 길가에서 아들을 만나게 된 조지는 일단 본서에 들러 보고서를 제출하고 함께 집에 가기로 했다. "도중에 잠시 들를 곳이 있으니, 잠시 기다리거라. 별로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게다." "그걸로 오늘의 일은 끝나나요?" 도미니크의 불안한 시선이 아버지의 기색을 살펴 그 마음속의 움직임을 읽으려고 했다. 만일 어떤 확증을 잡은 거라면 -- 즉, 키티가 완전히 사건의 권외에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는지?-- 물론 곧이곧대로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가장인 조지의 일에 관한 가족 사이의 규범을 만들고, 신성한 그 불문율에 의해 엄한 규제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오늘도 이미 한 번 그것을 범할 뻔했다가 주의를 받은 참이었다. 그것은 '묻지 말라'는 규범이었다. 만일 자발적으로 정보를 알려준 경우에는 그것을 들을 수 있고, 협력을 요청받는다면 의견을 말하는 것은 허용되지만, 질문은 일체 금지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떤 사건의 수사에 관련된 사항은 고해와 마찬가지로 신성한 것이어서, 그것에 관해 침묵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도미니크는 초조감을 억누르고 순순히 기다렸다. 가슴이 설레었다. "아니, 그건 알 수 없구나. 여기서 어떤 결과가 얻어지느냐에 달렸지." 조지는 '즐거운 술집 하녀'의 텅 빈 주차장으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 "어쨌든 만나보아야 할 상대가 이곳에 있다면, 결과야 어떻든 5 분 내에 끝날 거다." 하지만 실제로는 5 분도 걸리지 않았다. 터너는 커튼을 내린 대중 술청에 앉아, 담배를 입에 물고는 경마의 성적표를 살펴보는 데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레슬리 아마이저의 사진을 보이자 단번에 알아보았다. "어, 이 사람입니다. 아마이저 씨를 만나러 온 그


젊은 친구는 틀림없는 이 사람입니다. 아마이저 씨가 나올 때까지는 현관의 돌계단 위에 서 있었는데, 처음 걸어 들어올 때 밝은 곳에서 그 사람을 보았었습니다. 물론 복장은 다르지만, 틀림없는 이 청년입니다. 지금 본다고 해도 알 수 있습니다." "맹세할 수 있나?" "네, 언제든 증인이 되지요, 형사님. 그 사람은 대충 5 분 전 10 시쯤에 왔는데, 아마이저 씨는 그를 만나러 밖으로 나오셨던 겁니다. 내가 두 사람을 본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좋아, 고맙네. 그 정도면 충분해." 조지는 사진을 주머니에 집어넣고서 씁쓸한 생각을 십어삼키며 차로 돌아왔다. 10 시에는 집에 돌아와 있었다고? 그렇다면 자네는 어떻게 같은 시각에 두 장소에 있을 수 있는가?-- 늘 나를 당황케 하는 문제를 풀어줄 수 있느냐 이거야. 자, 그 비결을 알려주겠나 ? <PRE>번 호 : 17 / 76 등록일 : 1999 년 06 월 22 일 15:03 등록자 : 귀니사랑 조 회 : 141 건 제 목 : 죽음과 즐거운 여자 6 장 -엘리스피터스 </PRE>

제 6 장 레슬리 아마이저는 능란한 거짓말쟁이가 못 되었다. 사진에서 시선을 들어 다시 조지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그의 눈에는 공포와 함께, 그것과 거의 같은 만큼의 안도의 빛이 감돌았다. 진은 그의 곁으로 다가와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그녀를 감싸듯이 어깨에 손을 두르려 했지만, 곧 그 손을 내려놓았다. 그녀를 꽉 껴안아 주려고 했지만, 조지가 거기에 있다는 사실과 궁지에 몰린 자신의 번민, 또는 그녀의 차가운 태도 중 어떤 것이 그 충동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이렇게 된 바에야 모든 것을 있었던 그대로 털어놓는 것이 좋을 걸세." 조지는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겠지? 부인,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될 때까지 숨기지 않고 처음부터 정직하게 이야기를 했어야 했습니다." "잠깐!" 레슬리의 코끝이 신경질적으로 경련했다. "진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아내는 시간 감각이 둔한 사람입니다. 그냥 막연히 내가 10 시쯤 돌아온 것으로 생각했을 뿐이지요." "그런데도 시간과 상세한 이야기 줄거리까지 딱 들어맞는 것은 어찌된 일이지? 미리 사전에 둘이서 이야기를 맞추어 두었다는 것은 뻔한 일이 아닌가?" "아니, 그건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건 진이 잘못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러면 자네는 부인을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가 않아 일부러 부인의 증언에 말을 맞추었다는 건가? 그런 속 들여다보이는 소리는 하지 말게. 자네는 부인과 1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증언을 했다는 것을 잊었는가? 제기랄, 자네의 말을 들을수록 자네를 교수형에 처하고 싶어지는걸." "아아, 난 왜 이렇게 이야기가 서투를까!" 레슬리는 절망적인 표정이 되어 의자에 몸을 내던졌다. "아냐, 나는 오히려 자네가 그걸 깨달아 준 것만도 고맙네. 자, 그럼, 우리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어 보세. 정직하게 말해 줘야 하네." 진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뒤로 물러서며, "저는 커피를 끓여 오지요." 하고 조용히 말하고, 임시로 만든 그 모양뿐인 부엌 쪽으로 갔다. 하지만 조지는 그녀가 문을 조금 열어놓은 채로 나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가 내심 남편에 대해서 어떤 불만을 품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만일 이 형사가 남편을 고문이라도 하다시피 해서 불리한 자백을 얻어내려 한다면 곧장 달려올 것이 틀림없다. "자, 이번에는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 주게. 자네가 실제로 집에 돌아온 시간은 몇 시였지?" "11 시 10 분경으로 생각합니다." 레슬리는 힘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분명히 그 술집에 가서 아버지를 불러냈지만, 진은 그런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건 정말입니다. 진은 단지 시간적으로 40 분 가량의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고 적당히 얼버무렸을 겁니다. 내가 어디를 다녀왔는지, 그녀에게는 일언반구 말을 해주지 않았으니까요." 조지는 쉽게 그 말을 믿을 수가 있었다. 이 젊은 부부가 서로 주고받은 시선 속에도, 그리고 서로 거북해 하고 주저하는 행동에서도 그것이 엿보였다. 그들은 서로가 멀리 떨어져 버린 것을 깨닫고, 또한 그 거리가 엄청나다는 것에 겁을 먹은 것 같았다. 대가 센 진은 지금 문 저쪽에서 귀를 세우고, 아마도 남편으로 선택한 남자에 대한 회의에 마음을 졸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과연 그는 인생의 고난을 견뎌낼 용기가 있을 것인가......조금 전에 알게 된,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었다는 저주스러운 그 사실은 어떤 유전적인 결함을 나타내는 것은 아닐까......그들은 지금까지 이미 몇 번이나 심하게 다투고,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주었을 것이라고 조지는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들의 공동의 적이며, 그들은 그에게 대항하기 위해 긴밀한 동맹을 맺고 있는 것이다. 억지로 말을 만들어 하자면, 그는 그들을 결속시키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부인에게 그걸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되는걸. 다른 사람을 통하는 것보다 자네 자신에게서 듣는 것이 확실하고, 또


부인으로서도 모르는 것보다는 마음이 편할 테니까." "아, 그것도 그렇군요." 그는 어정쩡하게 대답을 했다. 어떤 길로 발을 들여놓을지 망설여진다는 투였다. 하지만 그는 곧 그들 부부 자신의 문제에 대해 설교를 당한 수치를 깨물어 십으며 말문을 열었다. "실은 편지를 부치러 나갔다가 곧장 그 술집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고 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아버지가 나올 때까지 현관에서 기다린 거죠.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만나지 않아서 -- 연락을 부탁한 보이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습니다 -- 오늘 아침에서야 이 사건을 알고는, 나만 잠자코 있으면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생각이었습니다만, 어쨌거나 진이 나를 감싸 주려 했다고 해서 진을 추궁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자네 부인에게 혐의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닐세. 그래, 왜 아버지에게 만나자고 했지? 또 도움을 청하려고?" "천만에요." 레슬리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에는 질린 지 오래입니다. 나는 아버지가 내게서 훔쳐간 것을 되찾으러 갔었던 겁니다. 만일 그것을 되찾을 수 없는 경우에는 최소한 화풀이라도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그제야 엔진이 걸려 달릴 채비가 된 것 같았다. 조지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한마디의 의견도 꺼내지 않고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레슬리는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썼던 일, 거기에 대한 대답, 레슬리의 패배와 아버지의 전리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냉혹하고 모욕적인 낡은 간판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물론 조지는 그 이야기를 두 번째로 듣는다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약 2 주일 전,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버지가 갑자기 변덕을 부린 겁니다. 어느날 밤 내가 집에 돌아오고 얼마 안 있어 레이 셸레이 영감님이 기쁜 소식을 갖고 흐뭇한 표정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분은 그 동안의 가정불화 중에도 나를 위해 여러 가지로 애쓴, 나에게 잘 대해 주시는 노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말을 전하면 분명히 내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하고 찾아왔었던 거지요. 그분의 이야기에 의하면, 아버지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조용히 반성해 본 결과, 나를 완전히 용서할 기분은 아니지만 그런 모욕적인 선물을 보낸 것은 비열하고 지나친 처사로 생각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일을 철회하고 싶은데, 그렇다고 아버지로서 아들 앞에서 자기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도 뭣하니, 그 역할을 셸레이에게 부탁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분은 그 간판을 되돌려받으면서, 미안한 마음의 표시로 500 파운드를


나에게 주라는 의뢰를 받고 찾아왔었던 겁니다. 단, 아버지는 그것이 우리에 대한 최후의 도움이라는 것을 통고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당장 가난에 허덕이는 것을 볼 수 없어 돈을 보내지만, 다시는 도움이 없을 것이니 자기 힘으로 해결해 나가라는 말이었죠." 진은 커피를 날라와 말없이 탁자 위에 놓았다. 하지만 남편이 이야기에 열중한 나머지 팔꿈치 옆에 놓인 찻잔을 거들떠보지도 않자, 그녀는 남편의 뒤로 돌아가 거기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살며시 그의 팔에 손을 댔다. 완전한 남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될 정도로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레슬리는 흠칫 몸을 떨고, 순간 빈틈없고 예리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곧 스스로를 비난하듯 일그러졌다. 두 사람 사이의 가벼운 경악이 팽팽한 활시위처럼 조명이 어두운 방안의 공기를 흔들었다. "그래, 그 제안에 대해 자네는 어떻게 대답했나?" 조지는 대답을 재촉하듯 물었다. "거절했지요." 마침내 레슬리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여러 가지 모욕적인 앙갚음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분노를 되십고는, 그 울분이 원인이 되어 용기를 되찾는 것 같았다. 애써 감정을 억제하려는 목소리에 열기가 느껴지고, 그 목소리가 높아짐에 따라 어딘지 박력 있는 아마이저의 목소리를 연상시켰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를 위해 애써 준 셀레이 영감님이 내 화풀이를 받았던 것은 본의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입장이 난처해져서 자기 돈이라도 빌려 줄 테니 받으라고 하더군요. 물론 그분은 상당한 수입을 갖고 있었지만, 나는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어요. 그리고 그분이 잘못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그분을 위로하다시피 해서 돌려보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그걸로 인연이 끊어지는 것은 애석하니 가끔 들러서 우리가 몸 성히 지내고 있는 거라도 보고 싶은데, 그건 허락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런 누추한 곳이라도 괜찮다면 언제라도 들러달라고 했지요. 단, 이곳을 방문할 때의 주의사항 몇 가지를 그분에게 이야기해 드렸습니다. 아래층 아주머니는 우리들의 손님을 위해 일일이 현관에 나가는 것을 꺼려 해서, 집에 있을 때는 현관문을 젖혀만 둘 뿐 잠그지 않기 때문에 손님은 곧장 2 층으로 올라올 수가 있습니다. 하기야 울타리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집 욕심쟁이 할머니의 경망스러운 손님들이 가끔 이 집에 잘못 발을 들여놓는 일이 있어 아주머니가 늘 눈을 번뜩이고 있기는 합니다만. 그리고 우리가 돌아오기 전에 찾아왔을 경우에는 안에 들어와 기다릴 수 있게끔 방 열쇠를 숨겨두는 장소도 알려드렸습니다. 당신은 그런 이야기가 사건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궁금해 하시는 모양이군요 -- " 레슬리는 조지의 얼굴을 바라보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크게 관계가 있답니다! 실은 엊그저께 오후, 아내가 밖에 나가 있는 사이에 누군가가 이 방에 들어와 아버지의 편지를 훔쳐간 겁니다." "편지를? 그 낡은 간판과 함께 보내온 편지 말인가? 누가 왜 그걸 훔칠 필요가 있었을까?" "만일 당신이 그럴듯한 이유를 생각해 낸다면 정말 천재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는 그 간판을 되찾고 싶었던 겁니다. 셸레이를 보냈던 것도 그 때문이었고요. 아버지는 무슨 까닭에서인지 그 간판이 탐났던 것입니다. 그건 500 파운드 이상의 값어치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첫번째 계획이 실패하자, 이번에는 아버지가 나에게 그것을 주었다는 유일한 물적증거를 없애버려고 한 것입니다. 그 편지만 없으면 소유권은 아버지에게 있다고 주장할 수가 있으니까 -- 내가 아무리 아버지에게서 선물로 받은 거라고 주장해도 소용없는 일이니까요." "아니지,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 조지는 조리있게 말했다. "우선 해밀턴 양은 그 편지를 타이프로 쳤으니까 그 내용을 정확히 알고 있고, 그것을 포장해서 이곳에 배달한 직원도 있지 않은가. 따라서 자네의 주장이 전혀 증거의 뒷받침이 없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 레슬리는 딱하다는 표정으로 씩 웃었다. "당신은 아버지가 어떤 식으로 직원들을 다루는지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다. 해밀턴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다음이니까 순순히 그런 내막을 당신에게 이야기했는지 모르지만,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틀림없이 아버지가 원하는 방향으로 행동했을 겁니다. 그것이 그녀의 신분을 보장받는 기본조건이니까요. 그녀는 아버지에게 불리한 일은 절대 입 밖에 내려 하지 않을 것이며, 간판을 배달한 직원이나 운전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아버지는 그런 것은 전혀 개의치 않았을 겁니다. 유일한 증거인 그 편지만이 문제였던 거지요. 아버지는 그 간판을 되찾기 위해 500 파운드를 썼지만 거기에 실패하자, 비록 내가 내놓지 않겠다고 발버둥치더라도 강제로 빼앗을 소지를 만들고자 했던 겁니다." "그렇다면 셸레이 씨는 그 음모에 가담한 걸까?" "아니, 적어도 의식적으로 협조한 것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진상은 나 자신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에게 이용된다는 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기는 해요. 아버지는 상대방의 기분을 누그러뜨릴 필요가 있을 때는 그분을 대역으로 내세우곤 했지요. 그런 식으로 이용당하는 사람의 기분 같은 건 당사자가 아니고는 알 수 없습니다만,


자기가 대역을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과연 조금도 깨닫지 못하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군요. 그것도 여러 해 동안에 걸쳐서 말입니다. 혹시 그분은 그런 것에는 눈을 감고 그냥 일이 돌아가는 대로 체념을 하고 살아왔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무튼 그분이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서 현관은 잠겨지는 법이 없으며, 내 방 문의 열쇠는 문 옆 시렁의 윗선반에 숨겨둔다고 한다는 둥, 알고 간 사실을 의기양양하여 자진해서 보고했을 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아버지의 유도심문에 걸려들어 아버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은 확실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아버지가 그런 것을 알 리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아버지는 -- 또는 대역의 누군가가 -- 이곳에 와서 그 편지를 훔쳐간 것입니다." "해크니스 부인이 그 사람을 보았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나? 그녀는 집에 있었을 텐데." "네. 아주머니는 집에 있었을 겁니다. 나갈 때는 현관문을 잠그니까요. 그리고 우리가 없는 사이에 찾아온 그 사람을 보았을지도 모릅니다만, 아주머니에게 물어봤자 소용이 없을 게 뻔합니다. 아주머니는 아마도 우리를 찾아온 손님한테는 흥미 없다고 잡아뗄 뿐만 아니라, 아주머니가 늘 부엌문 틈으로 남몰래 엿보거나 엿듣는 걸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오히려 화를 낼 게 뻔합니다. 전혀 말상대가 될 분이 못되니까요." "그렇다면 별 소득이 없겠군. 그런데 또 하나 의문점이 있네. 자네는 간판 그 자체에 관해서는 조금도 언급을 하지 않았는데, 만일 자네 아버지가 그 선물에 관한 문서상의 증거를 없애려 했다면, 편지뿐만이 아니라 그 간판도 가져갔어야 했을 텐데 왜 가져가지 않았지?" "훔쳐 가려고 해도 여기에는 없었습니다. 사실 나는 그 간판에 흥미가 생겼거든요. 그 간판은 원래 그 밑판에 뭐가 그려져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몇 번이고 덧칠이 되어 있었고, 그 그림이나 구성도 19 세기 이전의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물론 나는 그 그림에 금전적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림의 내력에 관해 알고 싶었고, 그 밑판의 그림이 상당히 흥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래서 그 얘기를 버니 윌슨에게 하자, 그는 시내 저쪽에서 화랑을 경영하고 있는 잘 아는 화상(畵商)을 소개해 주며, 그 사람이라면 기꺼이 간판을 봐줄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간판을 그 화상에게 갖다주고 감정을 부탁했습니다. 따라서 그건 지금 거기에 있을 겁니다." "간판을 그 화상에게 건네준 것이 언제지? 편지를 도둑맞기 전인가? 셸레이 영감이 다녀가기 전이었던가?"


레슬리는 손가락을 꼽아 날수를 세었다. 볼에 핏기가 살아나며 눈에 생기가 돌았다. "그렇군! 셸레이 씨가 여기에 온 것은 목요일 저녁입니다. 그리고 버니가 차로 간판을 가져간 것이 월요일 아침이었으니까, 그보다 사흘 전이 됩니다." "암시적이군." "절대적입니다! 나는 그것을 6 주 동안이나 집에 두었는데도 그 동안 아버지는 전혀 그 물건에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걸 화상에게 맡기고서 바로 3 일 뒤에 아버지는 갑자기 그것을 되찾으려고 일을 꾸미기 시작한 겁니다. 어떤 꿍꿍이속이 있는 게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 간판이 상당한 값어치가 있다는 정보를 아버지는 화상에게서 들어 알게 됐다?"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 간판을 감정 의뢰했다는 사실이 아버지 귀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겁니다. 아버지는 아차 실수로 대단히 귀중한 것을 나에게 준 것이, 거꾸로 아버지 자신이 당한 꼴이 되었다고 생각만 해도 견딜 수가 없었을 겁니다." 레슬리는 자신의 미묘한 입장을 깊이 자각하고, 말을 신중히 골라 하는 것 같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 " 조지는 침착하게 이야기의 방향을 돌렸다. "편지를 잃어버린 다음, 어떻게 했지?"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어젯밤 나는 아버지에게 그 일에 대해 따지려고 진에게는 아무 말 없이 그 개업식에 갔었던 겁니다. 아버지를 만나러 집으로 간다는 것은 꺼림칙했고, 어제 저녁에는 아버지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쌓이고 쌓인 울분이 미칠 정도의 적개심을 부채질해서 가만히 있지 못하게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광란 상태에 있었다는 건 아닙니다 -- " 레슬리는 조지의 얼굴을 살피듯 바라보며 말을 바로잡았다. "나는 흥분했었지만 아버지에게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으니까요. 10 시 조금 전에 그곳에 도착해서, 그 보이에게 아버지를 잠깐 불러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름을 대면 아버지가 묵살할까 봐 일부러 말하지 않았는데, 그 뒤에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름을 댔다고 해도 만나 주었을 것 같기는 합니다. 아버지는 기분이 거나해서 나오더니, 나를 보자 껄껄 웃으며 등을 툭 쳤습니다 -- 마치 아버지의 개업 축하연을 위한 여흥을 돋굴 연예인이라도 맞이해 들이는 그런 식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잠깐 손님에게 인사를 하고 오겠다며 나를 문 앞까지 데리고 가서, '별채에 가보려무나. 그 낡고 지저분했던 도깨비집이 얼마나 훌륭하게 탈바꿈했는가를 보면 놀랄 거다. 문은 잠겨져 있지 않으니까, 들어가 기다리도록 해. 그렇지 않아도 나는 조금 뒤에 거기로 갈 참이었거든.' 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시키는 대로 그리로 갔습니다. 아버지가 어떤 심보로 나를 거기로 가게 하려는 것인지 짐작은 했습니다만, 아버지와 단둘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에 바라는 바이기도 했거든요. 당신도 그곳에 가보셨을 테니까 아버지가 어떤 식으로 개조를 했는지는 잘 아실 겁니다. 아버지는 곧 커다란 샴페인 병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걸어 들어오더니, '어떠냐, 놀랍지? 네가 탐내던 도깨비굴이 이렇게 달라질 줄은 몰랐을 거다.' 하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자랑을 한 귀로 흘려 버리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버지의 비열한 음모를 밝히고, 편지를 훔쳐낸 것을 따졌던 겁니다. 아버지는 낄낄 웃으며 정면으로 부정했습니다. '바보 같은 소리! 내가 무슨 필요가 있어 내 자신의 편지를 훔쳐?' 하고 말입니다. 아마도 나는 가슴속에 쌓인 울분을 터뜨리는 것 외에는 다른 만족을 바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악랄한 사기꾼이라고 소리지르며, 그 간판에 관한 것은 물론 그 밖의 모든 일로 끝까지 싸우겠다고 떠들어댔습니다." "그리고 그 약 30 분 뒤에 아버지는 살해되었다?" 하고 조지는 의미심장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아닙니다." 진이 가만히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레슬리의 손등에 겹쳤다. 단지 그뿐이었으나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불꽃 같은 것이 방안의 모든 것을 뒤흔든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입니다. 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레슬리는 한결 가라앉은 차분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회랑으로 올라가 바의 선반에서 잔을 꺼내기에, 나는 부자간의 마지막 결별의 축배라도 들거냐고 악을 썼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이건 너에게 줄 술이 아니다. 좀더 귀중한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어서 그 준비를 하는 거야.' 라고 빈정대더군요. 그래서 나는 홱 등을 돌려 기운이 넘치는 아버지를 그곳에 남겨두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주차장의 차가 불과 한두 대 움직이기 시작했을 뿐, 아직 돌아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으니까 10 시 반도 안되었을 겁니다. 나는 걸어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때까지는 화가 풀리지 않았으므로 자연히 걸음이 빨라져서 11 시 10 분쯤에는 집에 도착했습니다." "자네가 그곳에서 나오는 걸 본 사람은 없나? 돌아오는 길에서라도 좋아. 그 시간을 확인할 필요가 있으니까." "글쎄요......" 레슬리는 얼굴이 굳어지며 말했다. "설마 그런 확증이 필요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서. 그럴 줄 알았다면 어떻게든 손을 써두는 건데. 나는 그냥 울분을 삭히기에 골몰했거든요." "레슬리가 돌아온 시간은 제가 똑똑히 기억해요."


진이 그렇게 말하며 남편의 손을 꼭 쥐었다. "이 골목 저쪽에 교회의 차임 시계가 있는데, 레슬리가 돌아오기 2~3 분 전에 15 분 전을 알리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아무튼 돌아오는 걸 누가 보았을지도 모르니 수소문해 보지요." 조지가 말했다. 하지만 비록 그런 증인이 있다고 해도 아마이저는 아들이 그 댄스 홀에서 떠나기 전에 죽어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경찰의의 검시보고에 의하면 그는 빠르면 10 시 15 분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지 않던가. "해크니스 부인이 자네가 들어올 때 문을 열어준 것은 아니겠지? 자네도 열쇠를 갖고 있을 테니까." "네. 그리고 내가 돌아온 것을 알지도 못했을 겁니다. 아주머니는 일찍 자고, 또 침실은 구석진 곳에 있으니까요." 그는 자기에게 불리한 모든 상황을 남이 밝혀내기 전에 스스로 제공해서, 마치 스스로를 궁지에 몰고 가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것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네 -- " 조지는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는 일이 먼저야. 만일 자네가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다면, 사실을 숨기거나 실없이 자포자기할 필요가 없는 거야, 알겠나?" 조지는 나오는 하품을 삼키며 윗도리의 단추를 채웠다. 커피가 일시적으로는 잠을 쫓아 주었지만 졸음이 밀려든 것이다. "그건 그렇고, 당분간은 연락에 차질이 없도록 이 집을 떠나지 말아 주게." "네, 그러지요." 레슬리는 갑자기 되살아난 공포심으로 목이 메어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마지막으로 조지가 계단을 다 내려가지 않은 곳에서 뒤를 돌아다보았을 때 눈에 보인 것은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는 두 사람의 창백한 얼굴과 그를 지켜보고 있는 근심스러운 눈, 그리고 마치 그들을 떼어놓으려는 세상에 대항하듯 두 사람의 몸을 서로 얽어매고 있는 두 개의 팔이었다. <PRE>번 호 : 18 / 76 등록일 : 1999 년 06 월 22 일 15:04 등록자 : 귀니사랑 조 회 : 172 건 제 목 : 죽음과 즐거운 여자 7 장 -엘리스피터스 </PRE>

제 7 장 "레슬리의 이야기는 믿어도 될 것 같아." 조지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커피잔 옆의 메모지를 보며 아내인 밴디에게 말했다. "아마이저는 그를 별채로 가게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더군. '문은 잠겨져 있지 않으니까, 들어가 기다리도록 해. 그렇지 않아도 나는 조금 뒤에 거기로 갈 참이었거든.' 하고 말이오. 그리고 처음부터 내 골치를 썩게 한 샴페인 말인데,


아마이저는 그에게 이러더라는 거야. '이건 너에게 줄 술이 아니다. 좀더 중요한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거든.' 이라고. 이건 정말일 거요. 사실과도 맞아 떨어지고. 만일 아마이저가 아들 앞에서 그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샴페인을 가져갔다면 당연히 마개가 뜯겼어야 하거든. 그런데 실제로 마개는 그대로였어. 따라서 레슬리가 말한 대로 생각하는 것이 이치에 맞아. 아마이저는 누군가 다른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어서 그 사람과 축배를 들 준비를 한 것이지, 아들에게 마시게 할 생각은 없었던 거야. 레슬리는 그 손님이 오기까지의 막간을 메꿀 뜻밖의 희롱거리였던 거라오. 무대는 그 뒤에야 막이 올라가게 되어 있었던 거지. 따라서 만일 내 생각이 정확하다면, 아마이저가 방해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린 것은 레슬리와 만나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 또 하나의 손님을 만나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지. 그는 아들을 지분거리는 것을 누가 본다고 신경쓸 사람이 아니니까. 오히려 누가 봐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를걸." "하지만 당신 이야기로는 키티 양이 아마이저 씨가 15 분 가량 뒤에 돌아오겠다고 하며 자리를 떴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시간이 좀 촉박하지 않을까요?" 아내가 의문을 던졌다. "그건 그래. 하지만 그 아가씨는 별 생각 없이 그런 말을 했을지도 모르지. 해밀턴 양이나 셸레이 씨의 이야기로는 그는 다시 돌아올 테니 될 수 있으면 기다려 달라고만 말했다고 하니까. 어쨌든 그 아가씨의 기억이 반드시 정확했다고는 할 수 없고, 아마이저 자신도 상당히 막연한 표현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거든. 더구나 아무리 중요한 만남이라도 15 분 내에 끝날 수 있는 일이고." "그리고 가령 레슬리가 10 분 전 11 시에 집에 돌아왔다면 아버지를 살해할 시간이 있었을지 모르겠네요. 그는 차도 없었고 버스도 끊어졌으니까 걸어서 돌아온 건 확실할 거예요. 아무리 빨리 걸어도 20 분은 걸릴 테니까, 늦어도 10 시 반에는 현장을 떠났어야 해요." 그녀는 그런 식으로 끼어드는 게 허용되었을 때도 조지의 추리의 실마리를 흐트러뜨리지 않기 위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남편 머릿속의 자료를 일깨워주기도 하고, 때로는 그것을 이끌어내 주기도 했다. "아냐, 그럴 시간은 있었어. 물론 촉박하기는 했지만. 의사의 보고로는 사망 추정시간이 10 시부터 11 시 반으로 되어 있거든." "하긴 병으로 사람의 머리를 내리치고 달아나기만 한다면 별로 시간이 걸리지는 않겠군요." "그게 그렇게 간단히 끝나지가 않았어요. 일격으로 그를 숨지게 한 게 아니야. 적어도 아홉 번 뒤통수와 왼쪽 머리를 난타한 거라오. 두개골에는 뼈가


부서지고 깨진 곳이 여러 군데 있거든. 그리고 오른쪽 관자놀이와 뺨에 상처가 있었는데, 그건 처음의 일격으로 넘어질 때 바닥에 부딪혀 생긴 것이겠지. 그때 그는 기절했는지는 모르지만 아직 죽은 건 아니었을 거야. 하지만 적어도 네 번째에는 숨이 끊어졌겠지. 인간의 머리를 그렇게 묵사발로 만드는 데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겠지만, 아무튼 일격에 살해하고 달아나는 것보다야 몇 배나 시간이 걸렸을 거야. 만일 레슬리가 한 짓이었다면, 급히 서둘러야 했을 테지." "더구나 피투성이가 되었을 텐데." "응, 그 점은 소홀히 하지 않았지. 존슨의 보고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하나만은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있었소. 그건 범인이 범행 뒤에 피범벅이 된 장갑을 어딘가에 버렸을 거라는 점이야. 샴페인 병이나 잔에는 아마이저의 지문 이외에는 다른 사람의 것은 없었고, 부서진 석고상에서는 전혀 지문이 채취되지 않았거든. 또한, 실내 여기저기에 묻은 지문은 모두가 아마이저와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것이라는 것도 밝혀졌지만, 아직 규명되지 않은 것이 둘 가량 남아 있고. 문의 손잡이에는 클레이턴의 지문이 있었지만, 그밖의 장소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어. 그 문에는 다른 사람의 지문도 남아 있었는데, 곧 레슬리의 지문과 대조해 보게 될 거야." 그는 메모지를 챙기고 토스트 쪽으로 손을 뻗었다. "과장이 허락해 준다면, 나는 이제부터 간판을 조사해 볼 참이오.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있을 것 같거든." 도미니크는 책가방을 옆에 낀 채 방 입구에 서 있었다. 아버지가 그의 모습에 눈길이 멈추기를 기다리면서 아까부터 거기에 서 있었던 것이다. 시선이 마주칠 때까지는 아버지의 추리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아서 만사가 잘 풀릴 것만 같았고, 부모님의 이야기 중에는 키티에 관한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물론 그밖의 사람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키티가 대상에서 빠진 것만은 기뻤다. 마침내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도미니크가 말했다. "저, 오늘 자전거 타고 가지 않아도 되죠? 아버지는 출근 안하실 건가요?" "아, 곧 나가자. 데리고 가 주지. 5 분만 기다려 주겠니? 준비를 할 테니까." 도미니크는 아버지가 운전 중에 행여 속에 있는 말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아버지는 자기 생각에 몰두한 나머지 경찰서가 있는 길모퉁이에서 헤어질 때까지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도미니크로서는 물어보고 싶은 말을 꾹 참는다는 것이 어렵기는 했지만, 수사의 방향이 명백히 키티를 벗어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안 이상


호기심을 누르는 것이 훨씬 쉬웠다. "집에 갈 때도 함께 돌아갈 수 있을까요? 전 럭비 연습으로 좀 늦어질 것 같은데. 5 시 15 분쯤은 어떨까요?" "그때까지 일이 끝나면 같이 갈 수 있겠는데......하여튼 들러 보려무나. 아마 경찰서에 있을 테니까." 조지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 멀어져 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도미니크는 요즘 들어 부쩍 키가 커서 어른의 키에 가까워지긴 했지만, 아직 어깨가 좁고 가느다란 몸집이었다. 하지만 키는 더 이상 자라기는 어려울 테고, 차차 우람한 어른의 몸으로 변해 가겠지. 그 나이에서는 어째서 그토록 무럭무럭 자라는 걸까? 매일 보면서도 석 달에 한 번쯤은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 스스로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얼굴은 주근깨투성이고 머리는 밤색이어서 아버지의 눈으로도 핸섬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어머니를 닮았다고 해서 어머니처럼 아름다움을 지녀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조지로서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아내와 아들에게 충분히 만족을 느끼니까. 그는 어제 저녁 진과 레슬리 아마이저와 가졌던 대화 내용을 머릿속에서 정리하면서 데이켓 총경과 협의했다. 데이켓은 조지에 못지 않은 관심을 보이며, 술집 간판에 얽힌 묘한 비밀을 밝혀보겠다는 그의 요청을 쾌히 승낙했다. 피묻은 장갑-- 범인의 것으로 생각되는 지문이 달리 채취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범인은 장갑을 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 이나 옷의 행방을 쫓는 일, 개업식에 참석한 손님들을 차례로 만나보는 일은 오늘도 하루종일 계속될 것이다 -아니, 앞으로도 여러 날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의외의 방법으로 해서 수사일정을 단축시킬 수 있다면 그보다 기쁜 일도 없을 것이다. 조지는 외출하기 전에 건설국의 버니 윌슨에게 전화를 걸어 레슬리가 한 이야기를 확인해 보았다. "네, 맞습니다." 윌슨은 기꺼이 설명을 해주었다. "내가 레슬리의 부탁으로 그 간판을 차로 클렌머 화랑으로 실어다 주었지요. 그 양반은 믿을 만합니다. 적지 않은 그림도 수집해 두었고......아니, 나나 레슬리는 그 간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물론 보기는 보았지만 두드러지게 이렇다 할 물건도 아니었습니다 -- 그 판자 자체가 너무나 딱딱하고 무거워서 그 재질에 약간 호기심이 일기는 했습니다만. 그렇게 단단한 나무를 과연 벌레가 먹을 수도 있을까 하는......아니, 클렌머와 별로 친한 사이라고는 할 수 없지요. 우연히 그의 화랑에 들러 작은 그림을 두 점 산 것이 서로 알고 지내게 된 계기였으니까요. 그는 화랑을 연 지 5~6 년이 되는데, 지긋한 나이에 호도껍질처럼 완고한데다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전형적인 골동품상 타입입니다." 조지는 애비 플레이스의 그 작은 화랑으로 들어가, 그가 그냥 그림을 구경하러 들어온 사람인지, 아니면 살 요량으로 서성거리는 손님인지 판단을 내리기까지 이야기를 걸지 않고 한구석에서 저울질하고 있는 그를 흘끔흘끔 관찰했다. 그리고 윌슨의 말이 이 클렌머라는 남자를 잘도 표현했다고 느끼고는 감탄했다. 이 부근은 튜더 왕조 초기에 형성된 거리의 일부였는데, 그에 어울리는 고풍스러운 화랑의 꾸밈새도 그럴듯했다. 예스러운 흑과 백을 기조로 한 겉치장은 이 거리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고, 내부에도 거대한 대들보가 천장을 가로질러 있어서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클렌머는 보통 키에 약간 허리가 구부정하고, 살갗은 머리칼과 마찬가지로 잿빛을 띠었으며, 깡마른 몸집은 나무뿌리나 힘줄처럼 강인한 무엇을 연상시켰다. 두터운 안경 때문인지 그의 눈은 겁날 만큼 크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푸르게 보였다. 그에게로 다가가 갑자기 그 푸른 섬광을 받으면 마치 전기에라도 감전된 것처럼 몸이 오그라들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 역시 잿빛 살갗이나 머리카락에 어울리게, 쉬고 단조롭고, 또한 조심스러웠다. 아닌게아니라 물샐틈이 없어서, 조지가 신분을 밝히기 전에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으며, 고의로 숨기는 듯한 기색도 엿볼 수 없었다. 하지만 조지가 신분을 밝히자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으나, 고분고분 입을 열기 시작했다. 문제의 간판을 자기가 보관하고 있으며, 그것이 '즐거운 술집'이라는 술집의 간판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대단히 귀중한 물건은 아니지만 상당한 가치는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건 간판으로 쓰이고 있었을 때 오랫동안 비바람에 시달려 몇 번이고 난폭하게 덧칠을 하고, 자주 수정이나 겉치장이 가해졌더군요.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 이건 직감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그것은 코츠워스라는 이 지방 화가에 의해 그려진 18 세기의 초상화가 밑그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코츠워스라고 해도 잘 모르시겠지만, 만일 그의 것이라면 귀중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상당한 흥미는 가질 만합니다. 수집가에 따라서는 몇백 파운드를 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는 거기에서 말을 끊고 종종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가더니, 사방 30cm 짜리 액자에 든 유화를 들고 나왔다. "이게 코츠워스입니다." 그것은 귀족풍의 남자 초상화였는데, 자기가 그린 얼굴이겠지만 못생긴 얼굴이었다. "그런데 당신이 그 간판을 맡은 지는 한 2 주일이 지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감정은 해보셨는지요?


아마이저 씨의 아들이 당신에게 감정을 의뢰한 건가요, 아니면 의견만 물었나요?" "의견을 물어 왔더군요. 하지만 나로서는 그분이 동의한다면 간판의 페인트를 벗겨, 내 추측이 맞는가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추측이 맞는다면 그걸 내가 250 파운드에 사겠다고 아마이저 씨의 아드님께 얘기할 생각이었지요." "상당한 값이로군요. 당신이 그것을 여기에 받아두었다는 이야기나 상당한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의 아버지나 또는 아버지 회사의 관계자 누구에게라도 이야기한 적은 없나요?" 250 파운드라면 적지 않은 액수다. 그만한 값을 매긴 것으로 보아 아마도 1,000 파운드 이상은 받을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 클렌머의 그런 계산에 생각이 미치자 조지는 실내가 온통 그의 푸른 눈동자 속에 잠겨드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노인은 잘라 말했다. "그건 윌슨 씨를 통해서 아마이저 씨 아드님의 소장품으로 맡은 것으로서,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것이 못 됩니다. 물론 경찰에서 협조를 당부한다면 몰라도 말입니다." 마치 실레된 질문을 나무라는 투 같아서 조지는 더 이상 묻는 것을 삼가기로 했다. 하지만 조지가 물어보지도 않은 그 간판의 값어치를 자진해서 말한 것은 속셈이 있음이 분명하다. 아마도 무지한 경찰관을 통하여 그가 매긴 값이 간판의 소유주에게 전해지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것이 직접 말하는 것보다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야기가 전달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밑질 건 없다. 이 영감은 보통내기가 아니야 -- 조지는 밖으로 나와, 헨리 7 세풍의 낮은 진열장 속에 장식된 세 점의 평범한 근대화 앞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면 아마이저가 살해된 마당에 섣불리 입을 놀렸다가는 휘말릴지도 모른다는 조심성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아마이저가 죽기 전에 그 영감이, '당신이 아들에게 준 간판은 보통 물건이 아닙니다.' 하고 몰래 귀띔해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은 가시지 않았다. 아마도 클렌머는 아마이저가 500 파운드를 주겠다고 하며 그것을 되찾으려고 했다는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는 250 파운드라는 값을 매길 수는 없을 테니까. 레슬리를 움직이기에는 그 차이가 너무 크지 않은가. 물론 영감은 실제로 그 값으로 사겠다고 제안한 것은 아니고, 단지 그랬으면 좋겠다는 의사표시를 했을 뿐이지만, 영감의 속셈은 충분히 짐작이 간다. 만일 영감이 아마이저에게 가담해서 레슬리를 궁지에 몰면 상당한 반대급부를 받을 수도 있고, 아마도 그 부호와 썩 괜찮은 거래를 약속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이저가 죽어 그런 가능성이 사라지자 영감은 스스로 거래에 나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조지는 천천히 차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물론 이러한 추정은 모두 그 간판이 레슬리의 손에 들어가게 된 내력을 클렌머가 알고 있다는 가정 위에 세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보면 '즐거운 술집'이라는 술집의 간판이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으므로, 비록 윌슨에게서 자세한 설명을 듣지 않더라도 그건 아마이저가 무가치한 것으로 생각하고 아들에게 주었을 것이라는 짐작은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윌슨은 입이 가벼워 자초지종을 모두 털어놓았을지도 모른다. 조지는 자동차의 클러치를 밟으며 결론을 내렸다. 일이 이렇게 된 바에야 레슬리는 영감의 제안을 거절하고 간판을 되찾아와서, 누군가 다른 결백한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 보라고 하는 게 좋을 것이다. 만일 레슬리가 남의 충고에 귀를 기울일 마음의 여유를 되찾고, 또 예기치 못한 사태의 급변이 그를 궁지에 몰아넣는 일이 없다면 내가 그에게 그런 충고를 해주기로 하자. 조지는 오전 내내 사무실에서 밀린 보고서를 작성하고, 오후가 되자 데이켓 총경과 함께 서장을 찾아갔다. 서장은 사건 해결을 재촉했다. 그것은 영국 중부지방에서 이름이 알려진 가족과 관계되는 사건이기도 하거니와, 가장 큰 이유는 서장은 주말에 사냥을 나가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방문은 결국 아무에게도 위안이 되지 못했다. 서장은 아직도 모든 사람을 군대식 계급제도의 틀에 끼워 생각하고 그렇게 다루었으며, 데이켓은 중대한 사건일수록 신중을 기하고 무뚝뚝하게 침묵을 지킴으로써 건방진 느낌마저 들게 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시간낭비야." 데이켓 총경은 코마번으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혀를 찼다. 정확하게 제한속도를 지키는 그의 운전 태도도 그가 별로 복종적인 기분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자네 아들은 절대로 경찰관 같은 걸 만들지 말게, 조지." "그놈 자신이 싫다고 합니다." 조지가 대꾸했다. "어떻게 된 셈인지 때로는 범인 편을 들기도 하지 뭡니까." "하기야 그 나이 또래에서는 모두가 반사회적인 기질을 갖기 마련이지." 데이켓은 쓰디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그건 단순히 궁지에 몰린 사람에 대한 소박한 동정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사회가 범죄를 낳게끔 돌아가니까 사회 자체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지요." 조지는 그것이 자기의 생각이면서도 도미니크에게 떠맡긴다는 내색은 하지 않았다. 실제로 수사과정에서 많은 애를 써서 마침내 범인을 검거하고서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서장에 대해서는 너무 신경쓸 필요 없습니다." 하고 조지는 달래듯 말했다. "우리가 이러고 있는 사이에도 돌발적인 사태의 진전으로 결정적인 단서가 잡혔을지도 모르니까요." 이윽고 그들이 교차로를 돌아 힐 가로 접어들었을 때, 경찰서 앞 공터에 웅성웅성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조지의 예감대로 무슨 일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경찰서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거리 쪽에 있는데, 창 밑에는 작은 화단과 두 개의 벤치가 있고, 그 앞 콘크리트 포장이 된 빈터는 차 네 대가 설 만한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 빈터에 양철통이며 고철과 넝마 등을 가득 실은 두 바퀴짜리 짐마차가 세워져 있고, 그 위에 아이들 셋이 놀란 얼굴로 앉아 있었다. 아버지의 바지 밑자락을 잘라 걸치고, 다 떨어진 회색 재킷을 입은 형뻘 되는 아이가 털이 많고 살찐 조랑말의 고삐를 틀어잡고 있었다. 제복 차림의 경찰 하나가 구경꾼들을 정리하는 데 이골이 난 경험을 살려 군중의 접근을 능숙하게 막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데이켓은 차에서 내리며 소리질렀다. 경관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로코트 형사가 머리가 이상해져서 이런 쓰레기를 모아들인 건가?" "아닙니다. 이건 진짜 쓰레기 장사가 끌고 온 겁니다. 무슨 중대한 정보를 갖고 왔다나요." "그래, 대낮에 거리마다 그걸 선전하고 다니며 사람들을 끌어모아 여기까지 행진을 한 모양이군." 데이켓은 투덜거리며 마차 위의 아이들을 흘끔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그가 야만인이라 취급해도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태연했다. 그들은 순수한 집시는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인디언 특유의 부드럽고 신비로운 얼굴 생김이나 물기가 있는 눈이며 늘씬한 골격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때투성이의 올리브색 살갗이나 야성적인 몸매, 거칠어 보이는 성격 같은 것에서 집시 혈통을 느낄 수가 있었다. "누구라고 했지, 저 개구쟁이들 애비가? 레이인가?" "아니, 클리비입니다." "아무려면 어때. 누가 누구와 결혼했는지, 어느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도 알 수가 없는 사람들인데." 그는 성큼성큼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가, 계단을 세 개씩 뛰어넘어 자기 방으로 갔다. 그곳에는 이미 그로코트 형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조지도 뒤따라 들어갔다. "자, 이야기를 들어보세. 저건 조 클리비의 마차라지?" 조는 클리비 일족 중에서는 무난한 사람이었다. 어쩌다가 순모 넝마를 줍거나 쇠붙이의 값이 후할 때는 술이 곤드레가 되어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하고,


자기 여편네를 집적거린 어느 쓰레기 인부를 때린 적은 있었지만, 전과라고 할 정도의 죄는 지은 일은 없다. 처자식을 잘 돌보고, 남에게 지나친 피해를 끼치지도 않으며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려는 좋은 친구였다. "네, 맞습니다. 조는 지금 로키와 함께 아래층에 있습니다. 한 시간 전쯤에 아마이저 사건에 관한 증거를 입수했다며 나타났습니다." 조는 정기적으로 마차를 끌고 고물을 모으러 다니는, 코마번 변두리의 주택가에서는 제법 얼굴이 알려진 남자였다. 주민들은 자진해서 고물을 모아 두었다가 그가 오기를 기다렸는데, 잘못 버렸다가는 시의 청소과 직원들에게 싫은 소리를 듣거나, 쓰레기로 버리기에는 아까운 고물을 모아두면 깨끗이 가져가 주는 요긴한 존재였던 것이다. 물론 그가 그 고물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는 오늘 아침 우연히 해크니스 부인의 집이 있는 우중충한 골목길을 돌다가 무슨 쓸 만한 것은 없을까 해서 그 부인 댁의 쓰레기통을 열어보았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조의 눈으로 보아 멀쩡한 구두도 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 쓰레기통에는 구두는 없었지만 장갑이 있었다. 헌 것이기는 했지만 고급 가죽으로 만든 목이 긴 장갑이었는데, 안쪽에는 LA 라고 자수가 놓인 테이프가 달려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챙겼다. 그리고 일을 끝내고 변두리 선술집에서 맥주 한 잔을 들이키고 나서야 그것을 꺼내어 면밀히 살펴보았다. 오른쪽 장갑의 손바닥과 손가락 부분에 검붉은 얼룩이 있고, 그 부분의 감촉이 뻣뻣했다. 왼쪽 장갑에서도 여기저기 검붉은 반점이 보였다. 해크니스 부인은 그의 단골 중 하나였으므로 그녀의 2 층에 누가 세들어 살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고, LA 라는 머리글자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도 알 만했다. 그리고 동시에 장갑의 얼룩이 무엇이며, 그것이 왜 쓰레기통에 버려졌는가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니, 짐작이 갔다. 그는 또한 그걸 경찰에 알리는 것이 자기의 의무라는 것도 알았다. 우쭐해진 그는 경찰서로 오는 도중에 그럭저럭 술집을 네 군데나 들러서 그때마다 레슬리 아마이저가 아버지를 죽인 증거를 이 나 조 클리비가 경찰에 갖고 가는 길이라고 허풍을 떨었다. 그리하여 이 어마어마한 뉴스를 코마번 마을 사람들 중 아직 모르는 이가 있다면 아직 두 시간은 더 쏘다닐 판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 여기까지 몰려온 겁니다. 그 친구가 곤드레만드레된 것은 아닙니다만 -- 이건 그 친구의 기준입니다 -- 상당히 취한 상태입니다. 만나보시겠습니까?" "내버려둬." 데이켓이 말했다. "내가 만나고 싶은 건 그 장갑과 -- 그리고 아마이저의 아들이야. 장갑이


별게 아닐지는 모르지만,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의 해명을 들을 필요가 있으니까. 아무튼 장갑부터 먼저 만나게 해주게." 그 장갑이 책상 위에 손바닥을 위로 하여 나란히 놓여졌다. 뻣뻣하게 얼룩진 부분은 핏자국이 분명했다. "이게 뭐겠나, 조지?" "크레오소트 냄새가 납니다만 -- " 조지는 손가락 언저리의 냄새를 맡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크레오소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음, 지붕에 칠하는 페인트 냄새도 나는걸. 아무튼 실험실로 보내서 존슨에게 조사해 보도록 해야지." "조를 유치장에서 하룻밤 재울 필요는 없겠지요?" 그로코트가 물었다. "그 친구를 재운다고? 그리고 그 지저분한 작은 악마들은 소년보호소에라도 맡긴다는 건가? 그랬다가는 보호소의 교관들이 나를 때려죽이려 할 거야. 그건 그렇고, 조지, 자네는 수고스럽지만 아마이저의 아들을 데려와 주게." 조지는 그 달갑지 않은 임무에 최선의 배려를 했다. 아무에게도 용건을 말하지 않고 은밀히 지배인실로 들어가, 소환이라는 형식이 아니라 참고인으로 동행하는 것이라며 레슬리를 불러달라고 했다. 그런데도 창고에서 급히 온 레슬리는 조지의 모습을 본 순간 얼굴빛이 달라지며 몸이 굳었다. 하지만 지배인의 설명을 듣고는 조금은 안심이 되는 듯 안색을 되찾고, 눈을 반항적으로 번뜩이면서 마치 친한 친구에게 불려나가는 것처럼 가벼운 걸음걸이로 조지와 나란히 지배인실을 나왔다. 거기서부터는 점포 내를 가로지르거나 가운데 마당을 통과해야 했는데, 조지는 레슬리에게 비교적 호의를 지니고 있다는 하급직원들이 일하는 가운데 마당에 난 길을 선택했다. 물론 소문은 벌써 퍼진 모양인지 모두가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런데도 트럭 운전사 중 하나는 레슬리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며 미소를 보냈고, 포장반의 한 직원은 반쯤 담긴 담뱃갑을 내밀었다. 레슬리는 그것을 기뻐하기보다는 당혹스럽게 받아들였으나 미소로써 답례했다. 곁눈질로 보니 그의 입가에 맴돌던 짙은 주름의 그림자가 조금은 스러져 있었다. 조지 옆자리에 올라탄 레슬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그러는지 몇 번인가 긴 숨을 들이마셨다. 조지가 신호등 앞에서 속도를 늦추었을 때 그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펠스 씨, 부탁이 있습니다......될 수만 있다면 아내에게 들러 잠시라도 만나게 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왜 그러지? 자네는 한 시간 정도면 아내에게 돌아갈 수가 있을 텐데." 조지는 애써 태평스럽게


말했다. "그래요?" "물론 그건 자네가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는 있지. 그 해답은 자네만이 알겠지만." "그러면 오죽 좋겠습니까." 레슬리가 열띤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용건으로 나를 데려가는 건지 말해 줄 수는 없겠지요?" "글쎄......이해하겠지만, 이런 일은 미리 말해 주기가 어렵다네. 그런데 지금껏 미뤄 온 질문이 하나 있네......자네는 아버지를 살해했나?" "아뇨." 레슬리는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그렇다면 자네는 곧 집에 돌아가게 돼. 최악의 경우라도 좀 늦어질 뿐이지. 자네 부인은 우리가 만일 자네를 협박이라도 하면 용서해 줄지 그건 모르겠지만, 좀 늦게 돌려 보내는 건 용서해 줄 걸세." 레슬리는 그 말에 안심이 된 듯, 협박이라는 가설에 화를 내는 일도 잊은 것 같았다. 그는 마치 자기 앞을 가로막은 장벽이라도 뛰어넘듯 힘차게 경찰서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으나, 갑자기 자기 곁에 조지가 없는 것을 알고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지는 계단 아래에 서 있던 그래머 스쿨(시험에 붙은 학생 중 상위권에 드는 학생들에게 대학 진학 준비 교육을 시키는 중등학교) 제복을 입은 소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 아들이라네." 조지는 급히 레슬리 쪽으로 돌아오며 설명을 했다. "함께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해서 들렀지. 나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는걸. 이제 근무시간도 끝나갈 시간이고." "그거 안됐군요." 레슬리는 눈에 생기를 되찾으며 말했다. "나는 언제든 출두할 각오가 되어 있었는데......당신에게 시간 외의 일을 하게 하면 어쩌지요?" "바로 그거야!" 조지는 청년을 격려하듯 어깨를 두드렸다. "그런 기개라면 걱정없네. 정직해서 좋아. 자, 3 층까지 걸어 올라가세. 납세자들은 아직 우리에게 엘리베이터를 사주지 않았거든." 도미니크는 아버지가 젊은 남자의 어깨에 손을 얹고 계단을 올라가 처음의 모퉁이를 구부러져 모습을 감추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제 사건이 해결되었다는 소문은 정말일까? 레슬리 아마이저는 범인 같아 보이지는 않던데 -- 하기야 살인범이라고 써붙이고 다니는 사람은 없지. 하지만......그는 도저히 범인 같지가 않다 ! 도미니크는 환경의 재물이 되어 밀리고 밀린 끝에 죄를 범하고는, 당연한 응징이라고는 하나 법률의 파수꾼에 의해 끌려가는 사람을 보면 남의 일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자기 안에 무엇인가 어둡고 불안한, 비밀스러운 것이 있는 것이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그 악마적인 것을 의식할 때마다 그는 몸서리가 쳐졌다. 그와 동시에 붙잡힌 사람에 대한 동정이 고개를 든다. 그것은 자신도 범죄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더 겁나는 것은 그에게 아주 소중한 사람도 그런 신세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키티! 그렇다고 이번 사건의 용의자가 지금 목격한 낡은 고급 윗저고리에 굳은 미소를 띤 불안한 눈초리의 청년이라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는 마음속에 밀려드는 안도의 파도를 외면하면서, 당번 순경의 친근하면서도 살피는 듯한 시선을 피해 9 월의 해가 지기 시작하는 밖으로 나와 화단 옆 벤치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마침 그때 빨간 커먼 기어가 멋진 곡선을 그리며 고물상 마차 옆에 서더니, 키티의 늘씬한 다리가 운전석 문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순간 그의 심장이 숨이 막힐 정도로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천천히 차에서 내려, 어딘지 부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문을 닫고는 경찰서 현관을 향해 걸음을 옮겨갔다. 하지만 그녀의 걸음은 자꾸 느려지더니 마침내 돌계단 몇 미터 앞에서 멈추어섰다. 그리고는 손을 앞으로 해서 꼭 쥔 채로 머뭇거렸다. 이윽고 그녀는 마치 앞으로 나갈 용기라도 찾아 헤매듯 좌우를 둘러보았다-- 그때 가방을 겨드랑이에 꼭 끼고 나무 벤치에 굳어져서 자기를 지켜보고 있는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 도미니크는 그녀의 눈길이 그에게 멎었을 때 그 눈길에 어떤 변화가 생기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그가 우연히 단 한 번 만난 소년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다시 그를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을 것이며, 아마 그를 알아보지도 못할 것이다......그런데 그녀의 눈이 눈부실 정도로 빛나더니 밝은 미소가 얼굴에 번졌다. 그녀는 방향을 바꾸어 그에게로 걸어왔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심장의 고동이 온몸을 흔들어 그녀의 첫마디를 알아듣지도 못했다. "어머나, 도미니크! 여기에서 만나다니!" 그는 충족감과 도취의 구름 속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와 그녀의 손에 손을 잡힌 채로 나란히 앉아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녀의 커다란 눈이, 그 깊은 곳의 빌로드 같은 어두움이 그의 얼굴 앞에 다가왔다. 그녀의 절망적이고 절박한 목소리가 말했다. "레슬리가 와 있다면서요? 거리의 소문으로는 마든 상회에서 그를 체포해 왔다던데? 그게 정말일까? 레슬리가 붙잡혀 온 게 사실이래요?" "그는 아버지와 함께 왔습니다. 불과 5~6 분 전에." 도미니크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녀가 자기의


이름을 기억해 준 것과 자기를 만난 것을 반가워하는 모습이 그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가슴의 고동도 한결 가라앉은 느낌이다. 하지만 이건 그가 꿈꾸어 온 재회와는 많이 달랐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전에 보지 못했던 근심 어린 얼굴을 보고서, 자신의 실망감 같은 사소한 일에 언제까지나 매달려 있을 수는 없었다. "어머! 그럼, 역시 체포된 거로군요?" "거기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체포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 " "당신 아버지와 함께라니 그나마 다행이네요. 이봐요, 나 당신 아버지에게 이야기할 것이 있어요. 꼭." 그녀는 깊이 한숨을 들이마시더니 그의 손을 놓고는 이마에 내려온 머리카락을 시름에 잠긴 손길로 쓸어올렸다. 그녀는 지치고 가냘픈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형사들은 그걸 레슬리의 탓으로 돌리고 말 거예요. 이미 그는 시달림을 받고 있을지도 몰라요. 불쌍하게도......그에게 그런 고통을 받게 할 수는 없어요."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치 어린아이가 잘못을 털어놓고, 아무리 힘든 벌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듯한 절실한 눈으로 도미니크를 바라보았다. "실은......내가 그의 아버지를 죽였어요." <PRE>번 호 : 22 / 76 등록일 : 1999 년 07 월 28 일 21:23 등록자 : 귀니사랑 조 회 : 135 건 제 목 : 죽음과 즐거운 여자 8 장 - 엘리스피터스 </PRE>

제 8 장 도미니크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지만, 잠시 동안은 그것이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더구나 간신히 목을 넘어온 말소리도 이미 끝난 줄 알았던 변성기의 쑥스러운 목소리였으나, 키티는 그런 건 눈치챈 것 같지도 않았다. "그,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비록 당신에게 책임을 느끼게 할 만한 어떤 일이 있었다고 해도, 그건 당신의 지나친 가책입니다. 그런 엉뚱한 소리를 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일을 저질렀는걸요, 도미니크.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그렇게 되어버린 거예요. 어제 저녁에 아마이저 씨가 나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어요. '잠깐 레슬리 녀석을 쫓아버리고 올께. 다시는 얼굴을 마주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지. 그리고 나서 네게 할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가 아니라 별채에서. 그곳이라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그 말썽꾸러기를 쫓아보내는 데 15 분이면 충분하니, 그 뒤에 그리로 오도록. 내가 거기에서 기다릴 테니' -- 하지만 나는 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가지 않기로 마음먹고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지요. 그런데, 그대로 가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마음이 달라져 옆의 지름길로 구부러져 별채 뒤쪽 나무 그늘에 차를 세우고는 뒷길로 해서 가운데 마당으로 들어갔었던 거예요. 다시 한 번 내가 아마이저 씨에게 간청을 하면 아마이저 씨도 마음이 누그러져 레슬리와 화해를 하고 아들 내외를 받아들여 주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거지. 뭐니 뭐니 해도 부자간의 일이니 언제까지나 그런 상태가 계속될 수는 없지 않겠어요? 보통 사람들의 경우 대개는 화해할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 그래서 거기에 들어가 보니 레슬리는 보이지 않고 아마이저 씨가 혼자 있었어요. 아마이저 씨는 기분이 좋아서 장래의 사업계획을 의기양양하게 떠들어대더군요. 샴페인 술병과 잔을 테이블에 늘어놓고 말이에요. 아아,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져요.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아요, 도미니크. 그런 불결한 이야기를 그쪽에게 한다는 것은 -- " 도미니크의 입은 그녀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로 꽉 차고, 그의 심장은 가슴을 가득 메워 거의 숨을 쉴 수도 없었다. "키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께요."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당신은 그렇게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나를 도와주는 거예요. 그쪽은 마치 친구를 보듯 나를 바라보고, 조금도 피하려 하지 않는걸. 하지만 내 이야기를 다 들으면 도망칠 거예요." "아니,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도미니크는 결연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요, 그쪽은 그런 사람이 아닐 거예요. 그럼, 내 이야기를 들어봐요. 모두 이야기해 버리는 것이 속이 편할 것 같네. 더구나 이야기할 연습도 해두어야겠고. 요약을 하지 않고서는 밤새도록 해도 한이 없거든요." 이번에는 도미니크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그녀의 손가락이 얼마간 떨며 그의 손을 마주잡았다. "아마이저 씨는 머리가 돌아버린 거예요." 키티는 약간 더듬거리며 그렇게 말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레슬리가 나와 결혼해서 회사를 합병할 생각이 없다면 아마이저 씨가 나서겠다는 거였어요. 즉, 자기 자신이 나와 결혼하겠다는 거예요. 글쎄! 샴페인을 준비하고 들떠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고요. 내 마음 같은 건 무시하고 그런 말을 선언이라도 하듯 떠들어대니 세상에 그럴 수가 있어요? 내 생각은 물어보지도 않고 말이에요. 그가 별안간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키스를 하려 했을 때만 해도, 성적인 폭행이라기보다는 회사의 합병계약서에 사인이라도


하는 듯한 태도였다고요. 나는 레슬리에 관해서 열심히 이야기를 하려 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어요. 난 그만 화가 치밀어올랐지요. 기가 막히고 겁이 나서 -- 머리에는 그저 달아나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나는 미친 듯이 그를 떠밀어 버렸지요. 우리는 계단 가까이의 테이블 옆에 서 있었어요 -- 테이블에는 샴페인 병과 잔이 놓여 있었고. 자세히는 몰라도 그는 뒤로 비틀거리다 계단 끝에서 발을 헛디뎌 '억' 소리와 함께 계단을 굴러서 계단 밑으로 나가떨어졌어요. 나는 정신없이 계단을 달려 내려가 그의 곁을 스쳐 입구 쪽으로 달려갔어요. 그가 다시 일어나서 나에게 달려들 것만 같아 정신이 없었거든요. 두렵다기보다는 그가 너무나 엉뚱한 소리를 해서, 더 이상은 그런 미친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하지만 그는 엎어진 채 움직이지 않더군요. 하지만 난 그런 걸 신경쓸 겨를이 없었어요. 그가 얼마나 다쳤는지 살펴볼 정신도 없이 차로 달려갔지요. 그러니 말이에요 -- 내가 죽인 거라고요. 자수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나는 물론 죽일 생각은 없었어요. 차를 달리면서도 그가 죽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은걸요. 하지만 내가 죽인 거나 다름없어요. 아무런 잘못도 없는 레슬리가 죄를 뒤집어쓰는 걸 그냥 볼 수는 없어요." 그녀는 말을 끝내고 도미니크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참혹하고 파렴치한 고백을 알아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나, 정당하게 평가할 만큼 어른스럽지는 못한 소년에게 이야기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사과하는 듯한 눈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길을 마주 바라보고 있는 상대는 소년이 아니라 어엿한 남자였다. 조금 어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 순간의 그는 틀림없이 그녀보다 의젓했다. 그는 그녀가 움츠리려는 손을 힘주어 잡고, 그녀가 피하려는 눈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미안해요. 난 참 몹쓸 여자예요. 그쪽에게 이런 이야기를 다 하다니!"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정당한 일을 한 겁니다. 정말입니다. 그 이유를 말할까요? 당신이 아는 건 그것뿐이지요? 그게 전부지요? 당신이 그를 떠밀자 그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쓰러져 버렸다. 그것뿐이지요?" "그야......하지만 나중에 다른 사람이 갔을 때 죽어 있었으니 어떡해요?" "네, 죽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죽인 건 아닙니다." 도미니크는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안 기쁨이라든가, 자기에게 매달린 그녀의 결백을 확신시켜 주는 보람에 앞서, 그가 이제 중대한 결심 끝에 그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아버지를 통해서 알게 된 정보를 한마디도 남에게 누설한 적이 없었다. 만일 잘못 그런 짓을 했다가는 그들의 생활의 동력원이 망가지고, 그것을 잃은 그의 장래는 암담하게 될 뿐 아니라 가장 친한 대인관계며 자기의 학업에까지 지장을 초래할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 규범을 깨뜨려야 하며, 또 물러설 수도 없었다. "키티, 그 까닭을 말씀드리지요. 아마이저 사건에 관해 신문에서는 그가 머리에 상처를 입고 죽었다고만 간단히 보도했지만, 그건 계단에서 떨어져 생긴 상처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그걸 알고 있는 것은 아버지가 이 사건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게서 들었다고 다른 사람에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아버지 말에 의하면 아마이저 씨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뒤, 누군가가 샴페인 병으로 그의 머리를 마구 때려 짓이겼다는 겁니다. 아홉 번이나 말입니다. 병이 깨지지 않았다면 더 두들겨 팼을지도 모른다더군요. 설마 당신이 그럴 수는 없었겠지요?" 그녀는 놀라움과 안도와 공포로 멍해지면서 열린 입술 사이로 신음소리를 냈다. "어머나 -- 그런 -그런 짓 나는 못해요 -- " "물론 당신은 할 수 없지요. 하지만 누군가가 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여튼 당신은 그를 죽인 것이 아니고, 단지 떠밀어 기절시킨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뒤에 누가 나타나 그를 때려 죽인 겁니다. 따라서 당신은 경찰에게 얘기할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장갑에 대한 것은 아마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습니다. 레슬리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좀더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기다려도 늦지 않을 거라고 생각되니까요." 그녀는 도미니크의 말을 건성으로 듣고 있었다. 그가 되찾아준 자유와 해방감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볼에 되살아난 핏기와 눈에 깃들기 시작한 희망의 빛이 도미니크로 하여금 지금껏 맛보지 못한 보람을 느끼게 했다. "그게 정말인가요?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지어서 하는 말은 아니고? 내가 진짜 살인범이 아니라는 건가요, 도미니크? 어제 아침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내 심정 이해가 가요?" "네, 이해가 갑니다. 그리고 내가 한 말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러니 경찰에 갈 것도 없습니다." "아니에요. 말을 해야 해요. 그쪽이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겠지만, 이젠 괜찮아요 -내가 살인범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러니 더더욱 레슬리를 위해 경찰에게 이야기를 해야 해요. 별채에서 그가 돌아간 뒤에도 그의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어야 해요 -- 아마이저 씨는 아들을 돌려 보내고 나서 나를 만났으니까." 그녀는


도미니크가 곤혹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멈칫했으나 결심을 바꾸지는 않았다. "그런 내막을 안 이상 더더욱 뒤로 물러설 수는 없어요. 그쪽 덕분에 모르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으니 레슬리를 위해 힘을 써줘야 한다고요." "안됩니다." 도미니크는 일어서려고 하는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다. "당신이 그 별채에 있었던 극히 짧은 시간 동안은 그가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되돌아왔다고 생각할 여지도 충분히 있잖아요. 그것이 누구든 당신 다음에 거기에 들어간 것은 사실이니까요. 또한, 당신이 나에게 이야기한 그대로를 경찰에게 말하면 그들은 아마도 당신이 마지막 부분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 당신이 달아나기 전에 기절한 그의 머리를 난타한 걸로 말입니다." 키티의 눈이 둥그래졌다. "왜죠? 그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그쪽은 내 말을 믿죠? 그런데 경찰은 못 믿다니." "그들의 일은 믿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어쨌든 당신은 그걸 어떻게 증명할 셈인가요?" "증명할 수야......" 그녀는 다시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되돌아갈 수는 없어요. 내 일은 더 이상 걱정하지 말아요. 그쪽은 나에게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도움을 주었어요. 고마워요, 도미니크." 만일 그녀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 또한, 그녀가 갑자기 그의 달아오른 뺨을 쓰다듬어 주지 않았다면 -- 그는 다시 한 번 그녀를 만류하고 설득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볼을 매만진 그녀의 손길은 그의 목으로부터 숨길을 거두어가고 혀까지 마비시켰던 것이다. 그는 단 한마디의 말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숨을 죽인 채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 뒤돌아보고 말했다. "그쪽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테니 걱정말아요." 그는 하마터면 왈칵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천만에 -- 내가 걱정하는 건 당신이라고요 -- 나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 -- 나에게 가장 소중한 건 당신인데 -왜 이런 심정을 몰라주는 걸까 -- 아아 -- 키티, 난 당신을 사랑한다고요 -- 하고 그녀를 향해 소리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갔다. 어두운 정면 현관의 복도가 그녀의 모습을 삼켜 버렸다. 이젠 그녀에게 소리칠 수도 없다. 그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으며 머리를 감쌌다. 이윽고 마음이 가라앉으며, 지금까지의 과정에 섞여 들어가 있는 엄청난 의미가, 마치 마술사가 트럼프 다발 속에서 에이스 한 장을 빼내는 것처럼 별안간 그 냉혹하고 엄연한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그녀에게서 모르고 말할 수 있는 해명의 기회를 빼앗아버린 것이다! 다른 사람 아닌 그 자신이 !


만일 그녀가 그를 만나지 않고 곧장 경찰서로 들어가, 그에게 말한 그대로를 진술했다면 그들은 곧 그 조리에 맞지 않는 자백을 일소에 붙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흉기나 머리의 부상 상태에 관해 설명을 해주었을 것이고, 원래의 그녀라면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어리둥절했을 것이며, 그녀의 그런 어정쩡한 표정은 그들에게 진실을 전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알려 주고 만 것이다. 그녀는 결정적인 신빙성을 지닐 무기를 보여주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더구나 그녀는 도미니크에게 피해가 미칠까 봐 그런 정보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해명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아마이저의 죽음에 대한 진짜 원인을 알고 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입 밖에 낸다면, 그들은 그녀가 거기에 중대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확신을 굳힐 것이 뻔하다. 죽음의 진짜 원인은 공표되지 않고 극히 제한된 범위의 관계자들과 범인 자신만이 알고 있으니까. 도미니크는 결과적으로 그녀를 혐의를 짙게 받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것이다. 조금 전까지 부듯하게 느껴졌던 보람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그는 급히 그녀를 뒤쫓아 들어가서 그들을 만나 정보를 그녀에게 누설한 사실을 솔직히 고백해야 했으나 그럴 용기도 없었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움츠러드는 것이다. 그를 그런 비겁자로 만든 것은 그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의 직업과 지위에 대한 의구심이었다. 수사과의 경찰관은 수사 중의 사건에 관해 자기의 가족이라 해도 누설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미니크의 가정은 예외여서, 결속이 단단하고 서로를 신뢰했기 때문에 서로를 믿지 못하는 것이 수치스러웠던 것이다. 그리고 가족간의 결속이 유지되고 있는 동안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도미니크는 그걸 깨뜨린 것이다. 그 결과 어떤 사태가 일어나려 하고 있는가? 그의 아버지에게 큰 누를 끼칠 단계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도미니크 자신이 위기에 몰아넣은 키티를 구출하기 위해서는 그 사실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로서는 그 사실을 아버지에게만 은밀히 털어놓는 것이 가장 무난해 보였다. 어쩌면 키티의 무혐의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나타나, 그의 고백을 아버지 이외의 사람들에게까지 알릴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서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말을 듣고 어떻게 생각할까? 혹시 사직을 해야 한다고 마음먹지는 않을는지...... ? 그는 한시바삐 그 무서운 고백을 끝내고 싶어 아버지가 나오기를 조바심을 내며 기다렸다. 하지만 한참 뒤에야 복도에서 발소리가 나고, 그가 가슴을 두근거리며 올려다보았을 때 그곳에 나타난 것은


안도의 기쁨에 찬 표정으로 발걸음도 가볍게 걸어나오는 레슬리 아마이저였다. 그가 그림 도구 등을 챙겨두는 마당의 헛간에 페인트를 칠하고 나서 버린 장갑에서는 크레오소트나 역청질(아스팔트)의 도료 및 그림 물감과 래커 등이 검출되기는 했지만, 한 점의 핏자국도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심문이 시작되고 나서 곧 장갑이 문제가 된 것을 알자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어 버렸다. 그러면서도 그런 불확실한 물건 때문에 공연히 불안에 떨어야 했었던 것에 화가 치밀었다. 하기야 그의 입장이 전보다 나아지거나 못해진 것은 없지만, 이번 일로 그의 신용을 한층 높여 준 것만은 확실했다. 특히 그 스스로에게 끼친 심리적 효과는 뚜렷한 것이어서, 그 해방감은 그 동안의 두려움을 없애버리고도 남음이 있었다. 조지 펠스 부장형사는 심문 도중에 면회인이 왔다고 해서 자기 방으로 갔지만, 레슬리로서는 그 면회인이 누구라는 것을 알 리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의혹이 풀린 자유로운 몸으로 그는 진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향했다. 조지가 나와서 아들에게 말을 건 것은 그로부터 10 분 가량 지나서였다. 더구나 그는 일이 상당히 늦어질 것 같으니 버스를 타고 먼저 집에 가라는 말만 전하고 되돌아가 버렸다. 도미니크가 말을 꺼낼 틈도 주지 않았던 것이다. 도미니크는 참담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아무런 뾰족한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어머니의 말에 건성으로 몇 마디 대꾸를 하는 둥 마는 둥 침묵에 잠겼다. 그는 어머니가 갖다 준 홍차를 홀짝거리다가 피하듯 자기 방에 틀어박혀 교과서를 펼쳐 보았으나 걱정이 앞서 글씨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혹시 감기 기운이 있는 게 아닌가? 어머니는 그런 생각으로 열을 재보려고 했지만, 도미니크는 그 손을 홱 뿌리쳤다. 어머니는 자기의 진단이 잘못된 것을 알아차렸다. 아들에게 어떤 걱정거리가 생긴 것이다. 더구나 그 애가 자기를 상대하려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아버지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조지가 돌아온 것은 9 시 40 분이 지나서였다. 피로에 지쳐 입도 열기 싫다는 표정이었다. 오랜 세월 속에서 터득한 암호로 해석하건대 남편에게도 무슨 근심거리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곧 그것이 표면에 나타나리라 짐작하고 그녀는 모르는 척 식사를 준비했다. 아닌게아니라 식사가 끝나갈 무렵, 조지는 기지개를 켜며 자못 싱겁다는 듯이 말했다. "사건은 끝났어. 용의자가 체포됐거든. 범인은 키티 노리스." 접시를 치우던 밴디의 놀라는 말소리가 도미니크의 의자가 뒤로 끌리는 소리에 지워졌다. 도미니크가


벌떡 일어서며 부르르 떨었다. "아니에요, 아버지! 틀려요!" 그는 그렇게 외치고 나서 절망적인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버지, 할 이야기가 있는데 들어주실래요? 그 일에 관한 거예요. 아주 중요한 -- " 그리고 그는 애원하는 듯한 눈으로 어머니를 돌아보며 입술을 떨었다. "어머니, 죄송하지만 -- " "그래, 알겠다." 밴디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릇을 치우며 대꾸했다. "엄마는 접시를 닦고 있을 테니까." 언제나 그렇지만, 너그러운 어머니의 태도를 보자 도미니크에게는 새삼스럽게 어머니도 그 자리에 있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겼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버지와 대결을 해야 하는 것이다. 밴디는 테이블 위를 치우고는 개어놓은 테이블보로 도미니크의 귀를 간질이듯 스치며 부엌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식탁에 남은 도미니크와 조지는 잠시 서로를 마주보았다. 가정 최대의 위기에 직면했다는 것을 두 사람은 직감했다. 조지 역시 도미니크와 마찬가지로 불안에 사로잡혀 몸을 움츠렸다. 피로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어쨌거나 운수 사나운 아들은 지금 그들의 협력이나 선의로도 피하기 어려운 곤란한 사태를 일으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사태에서, 그것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에만 매달려 있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도미니크는 긴장을 하여 쉰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오늘 키티 노리스가 경찰서에 갔을 때, 저는 밖에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보다도 먼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지요. 그녀는 밑도끝도없이 아마이저를 죽인 것은 자기라고 했어요. 이유를 물어보니 아마이저가 무례한 행동을 하기에 그를 계단 위에서 밀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녀는 그를 죽인 게 아니잖아요! 그녀는 단지 기절한 그를 거기에 남겨둔 채 도망친 것뿐입니다." "왜 그런 것을 여기에서 이야기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 " 조지는 이미 결론이 난 사건을 들먹이는 것이 마음애 내키지 않았지만 애써 참았다. "네가 그래야만 직성이 풀린다면 이야기를 해보기로 하자. 만일 그녀가 기절한 그를 버려두고 달아났다면, 그의 머리를 내리친 것이 대형 샴페인 병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네 말대로 그녀가 범인이 아니고 그녀가 달아난 다음에 누가 와서 그의 숨통을 끊은 것이라면, 흉기가 무엇인지 키티가 어떻게 알고 있느냐 말이다. 신문에는 머리에 상처를 입고 죽었다고밖에는 발표가 나지 않았는데. 그런데 그녀가 어떻게 그런 구체적인 것까지 알 수가 있었을까?-그리고 그런 그녀가 결백하다고 주장하는 네 생각이


뭔지 궁금하구나." 역시 키티는 형사들의 능숙한 유도심문에 걸려 꼬리를 잡히고 만 것이다. 도미니크는 그녀에게 그런 책략을 쓴 형사들을, 아버지까지 포함해서 미워했으나, 그런 결정적인 실수를 한 자기 자신이 더욱 증오스러웠다. 그가 아무리 설득을 해도 그녀는 형사들을 찾아갈 것이라는 걸 계산에 넣었어야 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희생하더라도 레슬리를 지켜 주려는 마음에 불타 있었던 것이다. 비록 그녀와 결혼하는 것을 외면한 레슬리이지만 그녀는 그를 미워하지 못하는 것이다. 레슬리 이외에는 안중에 없을 정도로 그를 사랑했던 것이다. 아아, 얼마나 바보스러운 여자란 말인가!-- 도미니크는 땀이 밴 손바닥을 겹치며 갈라진 목소리를 약간 높여 잘라 말했다. "키티가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은 제가 이야기를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있었던 것을 감사했다. 그 때문에 그의 위신이 얼마간 손상된다 하더라도 자세는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 그는 허리에 기운이 빠져 상체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조지는 상체를 앞으로 구부려 식탁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도미니크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눈을 감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고 견뎠다. 아무리 혹독한 맛을 보더라도 그것은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울상을 지을 처지가 아니었다. "이야기를 해줬다고? 뭘?" 조지가 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그녀가 거기에 갔었던 것을 경찰에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까닭을 말해 준 겁니다. 그녀는 자기가 아마이저를 살해했다고 아버지에게 자백하겠다고 했는데, 이야기를 듣고 보니 아마이저가 병으로 머리가 깨져서 살해된 것을 까맣게 모르고, 그저 계단에서 굴러떨어질 때 머리를 다쳐 죽은 것으로만 알고 있었어요. 그녀의 말에서 저는 그를 죽인 사람은 키티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았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생각으로 괴로워하는 그녀를 빤히 눈앞에 보면서 모르는 척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진상을 얘기해 주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는 자포자기하여 반항적인 말까지 덧붙였다. "언제고 또 이런 일이 있다면 저는 역시 또 그렇게 할 겁니다." 조지는 팽팽한 침묵을 잠시 지켰다가 와락 소리를 질렀다. "너, 아버지에게 매를 맞아야 하겠니?" 궁지에 몰린 도미니크는 때려 달라고 소리쳤지만, 조지의 건전한 사고력이 그 고비를 넘겼다. 그런 방법으로는 더 이상 아무런 해결책도 마련될 수 없는 것이다. 하기야 매를 들어본 지도 2 년이 넘는다. 그때와는 달리 이제는 그 후유증이 훨씬 심각하고 복잡하며, 고통스러운 부담이 오랫동안 계속될 것이 분명했다.


도미니크가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잘 알면서도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요. 하지만 그런 호의가 역효과를 낼 줄은 -- " "그런 것보다도 네가 한 짓은 우리로 하여금 키티가 어느 정도 진실을 말하는 건지 분간을 못하게 만들어 놓고 말았구나. 그리고 또 하나 있다. 너도 뭔지 알겠지?" 조지가 기가 찬 얼굴로 물었다. 물론 도미니크는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집안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을 흔들어 놓은 것이다. 일이 이렇게 꼬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는 어안이벙벙해진 아버지와 유치장에 들어가 비참한 꼴이 된 키티 사이에서 고뇌에 빠졌다.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로서는 마땅히 이 일을 주임에게 보고해야 돼." 조지가 신음하듯 말했다. "하지만 너를 탓하기 전에 나 자신을 책망해야 하겠지. 경솔한 짓을 지금껏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해 온 사실을 주임에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다. 도대체 수사 정보를 아무런 생각 없이 식구들 귀에 들어가게 한 나의 큰 실수였어. 그건 엄연한 직무태만이지. 난 너무나 안이했던 거야. 네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이야기는 입 밖에 내지 않으리라고 기대했던 내 실수지." 하지만 조지로서는 기대 정도가 아니라 그렇게 믿어 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런 스스로의 자유재량에 조금도 불안을 느끼지 않았었다. 도미니크는 아버지의 절대적인 신뢰를 저버린 지금에 와서야 그 가치가 얼마나 헤아릴 수 없이 큰 것이었던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제가 꼭 경솔한 탓으로 입을 놀린 건 아니에요, 아버지.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었는데......" 도미니크는 더듬더듬 변명을 했다. "그 한 번이 문제가 되는 거란다. 난 내일 아침 데이켓 총경을 만나 책임을 지겠다고 하겠다. 그게 옳은 일이니까." "죄송합니다." 도미니크는 풀이 죽어 말했다. "하지만 꼭 그래야만 할까요?" "그래. 키티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너에 대해서도 공명정대하기 위해서야. 상관이 나에게 사직하다고 할지 안할지는 그가 정할 일이지." 그건 지나친 과장이었다. 왜냐하면 수사가 급진전해서 사건은 끝난 거나 다를 바 없는 단계여서, 비록 키티에게 조금은 유리할지 모를 이 사태도 도미니크가 상상하는 만큼의 중요성을 지닐 것 같지가 않았다. 데이켓 총경은 조지의 보고에 귀를 기울이는 것조차 번거롭게 생각할 것이고, 비록 그를 나무란다고 해도 말로 견책하는 것 이상의 징계조치는 취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조지 자신이 대충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앞으로는 수사중인 사건에 관한 이야기는


삼가기로 하겠다.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곤란하니까. 그리고 너는 이번 사건에 더 이상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야겠다. 나로서는 이 일로 크게 피해를 입었으니 말이다." "싫어요! 그렇게는 할 수 없어요. 키티는 제가 그 이야기를 할 때까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아버지, 제 이야기를 믿어 주세요. 그것밖에는 그녀에게 불리한 증거가 없잖아요? 그녀는 풀려나야 합니다. 제 이야기를 듣고 사실을 안 이상 붙잡아둘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녀는 무죄입니다. 만일 아버지가 그걸 증명하기 싫으시다면 제가 하겠습니다." 조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아마도 내뱉고 난 직후에 후회할 말 -- 그리고 밴디가 부자 사이를 원상회복시키기 위해 끈질기고 교묘한 수습책을 며칠이고 계속해야 할 -- 그런 말을 내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그를 향해 내뿜어진 젊은이의 격렬한 열기가 그의 기세를 꺾고, 돌이키기 어려운 후회를 면하게 해주었다. 조지는 그의 시선을 퉁기듯 노려보고 있는 도미니크의 분노로 창백해진 얼굴과 핏발이 선 눈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이윽고 어떤 이해가 그의 머리를 때렸다. 오랫동안 어린아이로 다루어지고 응석받이로 생각했던 아들이 갑자기 어른의 엄숙함과 심각한 비탄의 눈으로 그를 응시하여 그를 놀라게 함으로써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키게 한 것이다. 물론 그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지는 못할 것이다. 아직 지속성을 갖기에는 이른 것이다. 어른과 소년 사이를, 완전히 어른으로 탈바꿈하기 전까지는 몇 번이고 오락가락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조만간 도래할 것이 분명한 전조였다. 조지는 당황스런 마음을 억누르며 생각했다. 아아, 나는 키티에 대한 일로 도미니크를 놀리고 못살게 굴어왔던 거야! 자기 자식의 일에는 왜 이렇게도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것일까 ? 조지는 마치 발소리 하나에 두 사람이 깜짝 놀라고, 또 유리잔이 서로 부딪치는 것 같은 소동을 일으키는 것을 두려워하듯 가만히 걸음을 옮겨,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아들과 마주보는 위치에 걸터앉으며 온화하고 이성적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좋다. 이번 일은 그 정도로 해두자. 나 자신도 너에게 공평을 잃은 점이 없지는 않았지. 네가 나로 하여금 머리를 숙이게 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지만, 어쩌다가 그런 일이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구나. 나는 결코 네가 부질없이 입을 놀렸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리고 너의 판단을 과소평가하지도 않는다. 또 네가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해 책망할 생각도 없다. 나도 만일 네 입장이었다면 역시 너와 같은 행동을 했을지도 모르지. 더구나 누구보다도 먼저 규칙을 어긴 사람은 나고, 또 그런 위반을 오랫동안 계속해


왔으니. 따라서 내친 김에 꼭 한 번만 규칙을 어기고 이번 사건의 진상을 설명해 주마. 단, 이건 너에게 조금도 반가운 이야기가 못되겠지만 -- " 거기에서 그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되었다. "하지만 궁금증은 풀리겠지. 실은 키티 노리스의 자백을 듣고, 우리는 그 방증 수집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그녀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주민을 이잡듯 만나본 결과, 1 층에 살고 있던 어느 부부가 그날 밤 그녀가 돌아오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그 시각은 그녀가 처음에 주장한 10 시 반도 아니고, 나중에 바꾼 11 시 10 분도 아닌 12 시 조금 지나서였어. 키티는 그 시간 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해명하기를 일체 거부하고 있어." "그건 목격했다는 사람들의 착오일 수도......" 도미니크는 궁지에 몰린 느낌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아냐, 그렇지가 않아, 알겠니? 그녀는 그걸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걸 해명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거다." 조지의 목소리가 보다 부드러워졌다. "더구나 그것뿐만이 아니란다, 돔. 우리는 키티가 그날 밤 입었던 드레스도 압수했지. 그날 밤 나는 그녀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그녀는 길고 검은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었어. 그걸 골라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 그녀는 또 인디언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있었는데, 약간 붉은기가 도는 푸르고 엷은 것이었고, 모서리에 금색 장식이 있었지. 사실과 부합되는 증거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전혀 뚱딴지 같은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그 스카프의 끝부분이 찢겨 있었으나 우리가 아무리 찾아봐도 아무데서도 그 조각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스커트의 오른쪽 끝단을 따라 몇 군데 얼룩이 있었다. 천이 검어서 육안으로는 식별하기가 어려웠지만 정밀검사에서 반응이 나왔다. 그것은 피였어. 아마이저와 같은 혈액형으로. 나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었지만, 형사 하나가 그녀의 왼쪽 구두 앞쪽에 있는 갈색의 반점이 핏자국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역시 아마이저와 같은 혈액형이고, 키티의 것은 아니었지." 도미니크는 눈을 감았다. 그때 보트 클럽에서 그녀의 손에서 은빛으로 반짝이던 샌들이 눈에 선했다. 그것은 지금 문제가 된 구두와는 다를지 모르지만, 그 선명한 인상은 그의 눈까풀에 인화된 채 지워지지 않았다. "안됐지만, 지금의 상황이 이렇단다." 조지는 일어서서 가만히 도미니크의 뒤로 갔다. 도미니크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등뒤에서 본 그의 양 어깨는 석상처럼 굳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걸로 이 세상이 -- 아니, 이 사건이 -- 끝난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앞날이 장미빛으로 물들어 있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돔. 나는 너를 공평하게 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했다마는 너무


신경을 쓰면 몸에 해로울 게야." 그는 잠시 도미니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가 그의 굳은 볼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순간 도미니크는 벌떡 일어서더니 와르르 문 쪽으로 돌진했다. 그리고는 하마터면 부딪칠 뻔한 밴디 옆을 빠져 나가 계단 쪽으로 달려갔다. 밴디는 아들을 돌아다보던 눈을 남편에게로 돌렸다.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망설이는 눈치였다. "내버려둬요!" 조지는 엄하게 말하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녀가 도미니크의 뒤를 따라나간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좋아. 그냥 그렇게 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약이니까." 조지가 말했다.

<PRE>번 호 : 23 / 76 등록일 : 1999 년 07 월 28 일 21:24 등록자 : 귀니사랑 조 회 : 133 건 제 목 : 죽음과 즐거운 여자 9 장 - 엘리스피터스 </PRE>

제 9 장 이튿날 아침, 식탁으로 내려올 때까지 도미니크는 생각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어떤 확고한 결론에 도달하여 단단한 결의를 세웠다. 그것은 하룻밤 사이에 어른의 모습에 가까워진 것처럼 보이는 창백해진 얼굴빛이나 야무진 턱의 윤곽에 은연중 나타나 있었다. 또한 부어오른 눈두덩이나 눈 둘레의 검은 그림자는 잠자야 할 시간을 내내 지새웠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애써 차분한 태도로 식탁으로 다가와, 위험스러운 혼란상태가 말끔히 가신 것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 언제나 그렇듯이 천연덕스럽게 부모에게 아침인사를 했다. 특히 밴디에 대해서는 남자다운 늠름한 태도를 보였다. 그녀는 거기에 진지하게 대응했다. 그리고 집안에 남자가 둘이 되었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꼈다. 남편인 조지에 대해서 이렇다 할 불만은 없었지만, 두 라이벌이 한 지붕 밑에서 살아가게 된 것을 남몰래 즐기기로 했다. 하지만 도미니크가 그렇게 되기 위해 이런 과정을 겪어야 하는 것이 원망스럽게 생각되었다. 그녀와 조지는 도미니크가 걱정되어 새벽부터 몇 시간 동안이나 목소리를 죽여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다. 지금도 두 사람은 마찬가지로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지켜보고, 의식적으로 억제되고 있는 그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그가 말을 꺼내기 전의 망설이는 모습으로부터 말의 선택에 애를


먹고 있는 깊은 마음속까지 그들은 놓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저, 아버지. 어제 저녁 이야기 말인데요 -- " 도미니크는 태연을 가장했지만 목소리가 떨려 어색한 고음이 되었다. "전 어떻게 해야 할지 여러 가지로 생각해 봤어요. 아버지가 한 말을 하나하나 생각에 떠올리고, 제게 이야기해 준 걸 고맙게 생각하며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절대적인 확신을 갖고 있는 것이 하나 있어요. 아버지는 그걸 알지 못하시지만, 저로서는 그것이 절대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키티는 저와 이야기를 할 때 정말로 아마이저가 어떤 상태로 살해되었는지를 모르고 있었어요. 따라서 그녀가 그를 죽인 범인일 수가 없는 겁니다. 아버지는 그때 키티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 보지 못해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발견된, 그녀에게 불리한 증거는 모두 그녀가 유죄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설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됩니다." "그야 우리 역시 아직은 증거를 갖추는 단계라서, 결코 그녀를 범인으로 단정하고 있는 건 아니야. 사건은 끝난 게 아니지." "그렇게 말은 하지만, 증거를 갖추는 것이란 결국 범인으로 추정하고 하는 일이 아닌가요? 다시 말해서 죄를 단정하기 위한 논리적인 각본을 만들려는 작업일 테니까요." 조지는 절반은 덮어두기 어려운 마음의 상처에서, 절반은 맹목적인 남자의 본능에서 그들이 대등한 입장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무슨 소리야! 이 사건이 그렇게 마무리되는 것은 너보다도 내 마음이 더 아프단 말이다." 그 순간의 조지는 그의 비통한 말투 속에 내포된 개인적인 감정이 밴디로 하여금 의아한 마음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는 것도, 도미니크의 눈뜨는 자아를 자극하게 된다는 것조차도 개의치 않았다. 하룻밤 사이에 움푹 들어가 버린 눈이 놀라움의 눈길로 흘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급히 아래로 떨어졌다. 살피는 듯하던 그 눈길은 앞으로 더 자주 조지에게 쏠리게 될 것이다. "그야 그럴지 모르지만 -- " 도미니크는 신중히 말했다. 아버지의 격한 말 속에 숨겨져 있는 의미에 관해서 좀더 깊이 생각해 보고, 그 속에 무엇인가 보다 절실한, 지금이라도 곧 대처할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를 검토하고 싶어 망설이는 듯한 말투였다. "어쨌든 저는 제가 확신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겠습니다. 물론 모든 것이 뒤집듯 달라질 수는 없겠지만, 아버지가 빠뜨리고 있는 것을 찾아낼지도 모르지요. 아무튼 그 결말이 어떻게 되든 저는 제가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겠습니다."


"네 기분은 이해가 간다." 조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하지 않으시겠죠?" "네가 우리를 방해하지 않는 한 반대할 이유가 없지. 하지만 결정적인 것이 나타나면 경찰에 알릴 의무도 있다는 걸 잊지 말아라." "그렇다면 아버지는 저에게 아무것도 알릴 필요가 없다는 말씀인가요?" 그 묻는 태도가 너무나 건방져서, 조지는 아들의 자아발달을 도와줘야겠다는 방침을 취소하기로 했다. 하기야 그것은 그 스스로의 힘으로 성장하는 것이지 도와준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는 잘라 말했다. "어제 말한 것처럼." "네, 잘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도미니크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겸연쩍은 듯 말했다. 그는 깊이 마음먹은 바가 있는 듯한 표정으로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없이 밖으로 나갔다. 토요일이라서 무미건조한 교과서나 강의에 번거로움을 겪을 일은 없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학교에서 하는 강의 같은 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밴디는 그의 뒤를 따라 마당으로 나가 자전가 타이어에 바람을 넣고 있는 아들 곁으로 가서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고 그냥, "잘해야 한다." 하고 말하고 키스해 주었다. 그것은 도미니크가 시험을 보러 갈 때라든가 그래머 스쿨 입학식날 등, 어떤 중대한 사건에 직면하는 그를 내보낼 때 그녀가 아들에게 하는 행동이었다. 그는 그런 관례에 따라 펌프를 밀던 손을 멈추고 얼굴을 들어 다섯 살짜리 아이처럼 가련하고도 스스럼없는 키스를 어머니에게 돌려보냈다. 그리고 손등으로 입술을 쓱 문지르거나 곧 펌프질을 계속하려고 하지 않고 잠시 동안, 아직 어린애로 남아 있을 것인지 어른 행세를 할 것인지를 망설이는 듯한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설픈 나이에 있는 자신의 모습이 그를 충동질해서, 마치 배드민턴 공처럼 모자(母子) 사이를 오가게 하는 것이다. "고마워요, 엄마." 그는 키스의 여운을 마음에 접어두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밴디는 지갑에서 10 실링짜리 지폐를 꺼내어 그의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이건 네 경비의 선불이다." 도미니크는 놀림을 당한 느낌이 들어, "나는 진지하다고요. 그냥 해보는 게 아니라니까." 하며 어머니에게 눈을 흘겼다. "나 역시 장난으로 그러는 게 아니란다." 밴디가 정색을 했다. "나는 그 아가씨를 잘은 모르지만, 네가 그녀가 범인이 아니라면 나도 그렇게 믿어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해줄 테니까, 난처한 일이 생기거든 말하도록 해라. 알겠니?" "응, 고마워요, 엄마!"


그가 고맙다고 한 것은 비위를 맞추어 주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던 10 실링 때문도 아니고, 또한 어머니가 도와주겠다고 했기 때문도 아닌, 어머니가 그와 키티와의 관계에 대해 한 말 속에 암시된 모든 의미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 관계가 동등한 어른 대 어른의 것이라는 것, 현실성과 정당성을 갖는 중대한 관계이자 경건한 태도로 다루어져야 마땅하다는 것 등이었다. 그는 어머니에 대한 따사로운 애정과, 어머니의 숨겨졌던 한 면을 발견한 놀라움을 지긋이 음미했다. 그것은 어른이 되었다는 변화에 대한 예기치 못한 보상의 일부이기도 했다. 한편, 밴디는 퇴장해야 할 시기를 잘 알고 있었다. 아들의 젊음만큼이나 가슴 부듯한 젊음 같은 것을 가슴 가득 느끼며 서둘러 집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섬광처럼 스쳐간 환희나 가슴설레임은 키티의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자전거를 굴려 농장길을 가로질러 코마퍼드의 거리를 벗어난 도미니크의 머릿속에는 무겁고 어두운 그림자가 더욱 숨막히게 밀려들었다. 그 길은 '즐거운 술집 하녀' 가까운 곳을 지나가게 되어 있었다. 그는 잡초가 우거진 네 갈래길 한쪽에 한 발을 딛고 그 집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 주변을 서성거리며 사건이 일어난 집을 기웃거리던 하릴없는 사람들의 그림자는 이제 눈에 띄지 않았다. 사람들의 관심이 키티에게로 옮겨간 것이다. 이미 조간신문이다 뉴스의 속보판이다 해서 집집마다 뒷담 벽에 붙여지고, 거리 여기저기에 뿌리가 뻗어있는 귀가 밝은 포도넝쿨을 통하여 그 소문은 사방으로 퍼져 있었다. 키티 노리스가? 뜻밖의 일인 것이다. 소용돌이 조각이 된 철문 위에 걸린 천한 색깔의 새 간판이 그 길이 끝나는 저쪽에서 햇빛을 눈부시게 반사하고 있었다. 어제 연기된 검시재판에서 매장허가가 내려져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는 저 문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만일 아마이저가 살아 있다면, 종업원 하나 죽었다고 해서 주말의 한창 벌어들일 시기에 가게 문을 닫는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소문에 의하면 장례식은 월요일에 거행되는데, 상주는 레슬리 아마이저가 아니라 레이몬드 셸레이가 될 것이라고 했다. 위선과 인습에 젖은 세상 사람들은 벌써 레슬리를 불효자로 낙인찍고, 그는 장례식에 얼굴도 내밀지 않을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당연한 일이라고 도미니크는 생각했다. 레슬리는 아들로서의 지위를 공적으로 박탈당했고 부자간의 감정을 가지는 것조차 금지당했다. 따라서 가령 레슬리가 죽은 아버지의 -- 또 그전의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고 상복을 입는다고 해도, 그것은 그의 관대한 마음에 의한 행동일지언정 결코 그에게 요구할 성질의 것이 못된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에게로


번진 불길을 잡으려고 스스로 불 속으로 뛰어든 키티에 대해서 레슬리는 어떤 심정을 갖고 있을까? 지금쯤은 그도 그 뉴스를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으니까. 도미니크가 첫번째 동네를 지날 때에도 주위의 공기는 그 뉴스로 가득 차 있었다. 얕은 나무 울타리를 사이에 둔 두 여자도 키티의 등장에 대해 줄기찬 상상력을 덧붙인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도미니크는 그날 밤 키티가 거쳐 간 길을 뒤쫓아가 보기로 했다. 그녀는 저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져 잠시 차를 멈추었을 것이다. 그것이 10 시 15 분경이었다. 도중에서 마음이 변하여 아마이저를 만나기로 했다. 그 앞에 '우즈엔드'로 통하는 이리저리 구부러진 길이 있다. 그녀는 그 길에서 전진하여 '즐거운 술집' 뒤쪽으로 통하는 밭길로 접어들었다. 경작된 둔덕과 낮은 개울가에 축축한 풀밭이 있는 오래 된 시골길이다. 아마도 그녀는 이 길을 신중하게 운전해 나갔을 것이다. 그녀는 스피드 내는 것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무모한 운전사는 아니다. 더구나 밤이었고, 길은 좁았으며, 커브가 심한데다가 길 양쪽의 나무 울타리가 헤드라이트의 빛을 자주 가로막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마이저를 만나기로 생각을 고쳐먹고 되돌아가려 했을 때, 왔던 간선도로를 U 턴하지 않고 이 사잇길로 접어든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만일 이 네 갈래길이 보였을 때 갑자기 결심을 굳힌 것이라면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네거리란 종종 문득 멈추어서서 생각을 가다듬고 방향을 정하게 하는 길목이 되기도 한다. 그곳에서 그녀는 다시 한 번 아마이저를 설득해 봐야겠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핸들을 틀었던 것이다. 500 미터 가량 가서 그녀는 다시 네거리에 다다르게 된다. 우즈엔드라는 푯말이 서 있다. 그곳은 마을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작아서, 드넓은 농장 한구석에 길가로 몇 채의 농가와 구멍가게가 하나, 그리고 전화 박스가 있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꺾어 시골길을 약 400 미터 가량 달려 '즐거운 술집 하녀'의 높은 담 가까이에 이르렀고, 길가의 나무 그늘에 차를 세웠을 것이다. 그 지점에 도착한 그는 그 사실을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길 왼쪽으로 발에 밟힌 풀밭이 있어 길이 넓어진데다가 우거진 나무 그늘이 자연의 주차장처럼 널찍해서 그녀도 거기에 차를 댄 것이다. 아마도 그 시각이 10 시 반 가까워서, 이럭저럭 술집의 문을 닫을 시각이었다. 대부분의 손님은 간선도로로 돌아가겠지만, 이 부근에 사는 몇몇 손님은 이 길로 돌아갈 가능성도 있었기에 그녀는 좁은 길 한복판에 차를 세워둘 수는 없었으리라. 도미니크는 그녀가 주차했을 지점으로부터 건물


가운데 마당 뒤쪽 출입구까지 50 미터 가량의 거리를 자전거를 끌고 천천히 걸었다. 출입구에는 문이 달려 있지 않고, 높은 벽이 거기에서 양쪽으로 끝나 뒷길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차의 통행을 막기 위해 한복판에 두 개의 쇠말뚝이 박혀 있었다. 댄스홀로 개조된 별채는 바로 그곳에 있었다. 가운데 마당을 비스듬히 가로질러 출입문이 있는데, 그녀는 그 문으로 안에 들어갔을 것이다. 아마이저는 새로운 계획에 가슴이 부풀어, 그녀가 쾌히 자기의 생각을 따라주리라는 자신을 갖고 거기에서 그녀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 안에서 일어난 일은 몇 분이나 걸렸을까?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녀는 레슬리를 위해 그를 설득하려고 했다. 한편, 아마이저는 자기의 원대한 계획에 그녀가 찬성해 줄 것으로 지레짐작하고 거기에 대해서만 떠들어댔겠고. 마치 서로 통하는 언어를 갖지 못한 두 인간이 자기의 주장에만 침을 튀기는 그런 꼴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그녀가 10 시 반에 이 지점에 도착해서 차를 세우고, 문에 열쇠를 잠그고, 다시 한 번 결심을 가다듬는 등의 시간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11 시 전에는 이곳에서 도망쳤을 것이라고 도미니크는 짐작했다. 아마이저는 단도직입적인 성격이라서 거래의 내용을 설명하는 데는 15 분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11 시 10 분경에는 아파트에 돌아가 있었다는 최초의 진술도 그녀가 별채를 나온 시간을 추정하는 데 상당히 유력한 단서가 된다. 왜냐하면 그녀의 진술은 이웃사람의 증언으로 번복이 되었다고는 하나, 그것은 그녀가 이야기의 앞뒤를 정리하기 위해 일정한 시각을 기준으로 계산해 낸 시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5~10 분 전 11 시에 계단 아래에 쓰러져 있는 아마이저를 그대로 두고 댄스 홀에서 정신없이 도망쳐 나온 것이라고 도미니크는 확신했다. 그리고 다음에는 어떻게 했을까? 그녀 자신이 말한 것처럼 그녀는 단지 도망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다음 네거리까지 곧장 가서, '즐거운 술집 하녀'를 오른쪽으로 돌아 다시 간선도로로 나갔을까? 아니면, 나무 밑에서 방향을 바꾸어 왔던 길을 되돌아갔을까? 도미니크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고 나서 그녀는 여기에서 방향을 바꾸었을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했다. 이 길 쪽이 훨씬 조용하고 거리도 가깝다. 그리고 나무 밑에서 차를 돌릴 공간은 충분했다. 아무튼 그녀가 우즈엔드 쪽으로 차를 달린 것은 거의 확실했다. 그렇다면 15 분가량이면 집에 도착할 수 있었을 텐데 --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 그는 거듭 생각해 보았다.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그점뿐이다-- 그는 그런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왜 거짓말을 했을까? 한 시간 가량의 공백이 있다. 그녀가 그 동안에 무엇을 했는지는 몰라도 댄스 홀로


되돌아가 앨프리드 아마이저를 살해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사실을 밝히지 않는 것일까? 그 이유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거기에 관계되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녀와 마찬가지로 결백하면서도 그녀가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은 누군가가. 그녀는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도미니크는 자전거를 끌고 가랑잎을 밟으며, 우즈엔드 쪽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타지 않은 것은 머릿속에 얽히고 설킨 사실들을 천천히 풀기 위해서 거기에 보조를 맞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차를 돌려 돌아갔는데도 자정이 넘도록 코마번에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는 분노와 낭패감, 그리고 수치심 때문에 아마도 날듯이 차를 몰았을 것이다. 그리고 도중 어디에선가, 아마이저가 어느 정도나 다쳤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과 두려움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차를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 낭패감은 그녀로 하여금 더욱 속도를 내게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당연히 11 시 조금 지나 집에 도착해야 했는데 왜 그러지 않았을까 ? 그는 문득 그 이유를 생각해 냈다. 그건 극히 단순하고 어처구니없는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더욱 사실과 맞아떨어질 법도 했다. 도미니크는 그녀 차의 엔진이 푸드득거리면서 급속히 속력이 떨어지는 상황을 머리에 그렸다. 그리고 마침내 엔진이 멎는다. 기름이 떨어진 것이다. 허탈한 키티의 멍한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미 벌써부터 예비 탱크의 휘발유를 쓰고 있었는데도 평상시의 버릇처럼 느긋했던 것이다. 그녀는 아마도 반나절 동안을 이렇게 중얼거리며 돌아다녔을 것이다. "아직 걱정할 것 없어. 1 갤런은 될 테니까. 코마번을 벗어나기 전에 로의 가게에 들른 김에 리 그린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어야지 -- " 그렇게 미루다가 끝내 기름이 떨어지고 만 것이리라. "여러 번 뜨거운 맛을 보았는데도 고쳐지지가 않아요. 고속도로에서 차가 멈추지를 않나, 골프장으로 가는 산길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되지를 않나 -- " 그때 함께 차를 타고 가며 하던 그녀의 푸념이 지금도 귀에 쟁쟁했다. 자신의 두 가지 단점에 대해서 스스로를 비웃던 그 말이 하나하나 기억에 되살아났다. 그녀의 그런 면을 모르는 사람, 그런 그녀의 숨은 허점을 고백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허공에 뜬 이 한 시간에 대한 극히 간단한 설명을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그냥 기름이 떨어졌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건


그녀에게 흔히 있었던 일이 아니냐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다음 문제는 그것이 어느 지점에서 일어났느냐는 것이다. 그는 생각 끝에 '즐거운 술집 하녀'에서 가깝고 코마번에서 떨어진 지점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만일 코마번에서 가까운 곳이었다면 그녀는 간선도로를 지나가는 차를 세워, 그 운전사에게서 약간의 휘발유를 얻거나, 그녀의 단골 차고에 연락을 해달라고 부탁했을 것이다. 더구나 코마번 가까이의 간선도로상에서 11 시를 전후해서 꼼짝 못하게 되었다면 11 시 10 분을 지나 집에 돌아간 것이나 마찬가지로 혐의는 엷어지고, 한 시간의 공백도 없을 뿐 아니라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키티는 거짓말을 했다. 그것이 그녀에게 불리한 심증의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실제로는 이 부근에서, 불쾌한 그 술집 바로 옆에서 족쇄가 채워지고 만 것이다. 더구나 그녀는 이런 장소에서 지나가는 차를 세워 도움을 청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차고 직원에게 기름을 갖고 오게 하기도 꺼려했다. 그녀는 사람들 눈에 띄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자기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도미니크는 너무나 골똘히 그녀의 심리상태를 상상해 보았기 때문에 심장의 고동이 빨라지고 관자놀이가 깨질 듯이 아팠다. 초조와 불안 속에서 지나는 1 초 1 초가 그녀를 광란상태로 몰고 갔을 것이다. 만일 아마이저가 중상을 입고, 그녀가 그걸 아랑곳하지 않고 도망쳐 나온 것이라면? 아니, 그보다도 만일 그가 죽어 버렸다면......? 아마도 그녀는 그의 곁으로 돌아가 볼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용기가 없었다. 그녀는 그런 무서운 일을 저지를 생각이 없었는데, 우연히 그런 불행이 초래되어 가책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한 심리상태에 있는 그녀의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본능적인 상념밖에 떠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10 시 15 분에 간선도로를 지나 그 술집을 떠난 뒤에 다른 길로 다시 한 번 거기에 간 사실을 숨기려는 생각이다. 도미니크는 한산한 시골길 왼쪽을 천천히 걸어가면서 생각에 잠겼다. 만일 이 부근에서 기름이 떨어졌다면 길이 좁고 덜컹거려 그녀는 차를 될 수 있는 대로 길가에 붙였을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지점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녀는 나무 울타리에 차를 바짝 대야 했을 것이므로 어딘가 차의 페인트 흔적이 남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즈엔드의 농가가 보이는 곳까지 왔을 때 그는 그럴만한 장소를 발견했다. 어떤 차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울퉁불퉁한 길가의 풀밭에 자동차의 한쪽 바퀴가 나무 울타리 뿌리까지 파고든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무성하게 땅을 덮은 잡초가 밟히고 울타리의 나뭇가지가 꺾여 있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었다. 그러한 흔적은 소나기와 바람과 시간의 경과로 절반은 지워져 있었지만, 눈여겨보면 분명했고 타이어 자국도 식별이 가능했다. 그것이 키티의 차의 것인지는 당장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녀가 이곳에서 기름이 떨어졌었다고 가정하고 추리를 전개한다면, 다음에 그녀는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 물론 그녀는 누구에겐가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녀는 우즈엔드의 전화 박스까지 걸어갔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녀는 그곳에서 누군가 개인적으로 친한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했을 것이다. 그 상대는 그녀의 부탁을 받고 그녀가 집에 돌아가기에 넉넉한 휘발유를 갖고 왔다. 그런데도 키티가 거기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는 것은 그 별것 아닌 행위 때문에 그녀의 구원자가 살인사건의 공범으로 의심받을 위험에 처하기 때문일 것이다. 경찰에서 만일 그녀를 유죄로 판결하면 그녀를 도운 사람도 처벌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키티는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곤란한 처지를 도와주려고 달려온 사람에게 피해가 되는 일을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그런 마음을 가진 여자였다. 이러한 긴 자문자답은 어느덧 도미니크로 하여금 전화 박스로 걸음을 옮기게 했다. 그는 그 앞에 서서 잠시 바라보다가 별다른 목적도 없이 문을 열고 먼지가 앉은 내부를 둘러보았다. 전혀 개성이 없는 현대의 무미건조한 기계 한 대와 흔해빠진 낙서가 보였다. 그는 떠밀다시피 벌컥 문을 밀어 닫았다. 그때 무엇인가 금빛 같은 것이 그의 눈을 스쳤다. 그는 황급히 문을 다시 열었다. 가장자리를 수놓은 금실 외에는 거미줄처럼 가는 실로 짠 천조각이 눌린 나비처럼 문의 경첩에 걸려서 찢겨진 채로 매달려 있었다. 그는 그걸 벗겨내려고 손을 뻗었다가 생각을 바꾸어 손가락으로 그 섬세한 천을 만져 보고, 거의 감촉이 없을 정도로 얇은 천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것은 감색에 붉은 무늬가 있는 인디언 스카프 조각으로, 금실의 자수로 모서리가 장식되어 있었다. 키티가 사건이 있었던 날 목에 감았던 스카프다. 경찰이 만족스런 설명을 얻을 수도 없었고, 또 현장의 상황과도 부합되지 않은 증거로서 그 행방을 알 수 없었던 그 찢어진 조각이었다. 하지만 도미니크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당시의 상황과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 것이다. 건드려서는 안된다. 그대로 놓아둔 채 아버지에게 보여야 한다. 그는 전화 박스 안으로 들어가서 떨리는 손으로 다이얼을 돌렸다.


"도미니크 펠스입니다. 아버지를 바꾸어 주십시오......이번 사건에 관계되는 중대한 일입니다." 서류정리에 바빴던 조지는 일을 중단하게 되는 것이 화가 났지만, 어제의 일도 있고 해서 도미니크에 관한 한 다시는 객기를 부릴 생각이 없었다. 그는 별다른 기대도 없이 수화기를 들었다. "전 지금 우즈엔드의 전화 박스에 있는데, 아버지가 말했던 키티의 스카프 조각을 찾아냈어요." "아니, 뭘 찾아냈다고?" 도미니크는 차근차근 설명을 했다. "그게 문 경첩에 걸려 찢겨져 있었어요. 아마 그녀가 너무 서둘러 잡아당겼기 때문에 찢어진 모양입니다. 물론 건드리지 않았고, 아버지가 올 때까지 기다릴 참입니다." "그런데 넌 어떻게 그걸 발견할 수 있었지?" 조지가 놀라서 물었다. "말하자면 육감을 발휘한 거죠. 빨리 오세요, 이야기해 드릴께요." 도미니크는 약간은 아버지를 놀릴 마음이 생겼지만, 그렇다고 우쭐해질 수도 없었다. 아직 길은 멀고, 많은 고비를 넘겨야 한다. 그는 기다리는 동안, 아버지에게 어느 정도까지 설명해야 되는가를 검토했다. 구체적인 증거로서는 잠자리 날개 같은 천조각 하나지만, 그건 그의 추리가 실제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것을 설명하려면 모든 걸 털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자동차 운전상의 그녀의 게으름도 그의 추리에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고, 길가로 치우친 자동차 바퀴나 부러진 나뭇가지 등도 그를 전화 박스로 가게 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아버지가 달려오자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조지는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스카프 조각을 떼어내 봉투 속에 넣고는 쑥스러운 마음으로 그것의 발견자인 아들의 이름을 기입했다. "허, 솜씨가 제법인걸." 조지는 나무 울타리 쪽을 살펴보며 아들을 칭찬했다. "나중에 키티의 차를 조사해서 긁힌 자국이 있는지를 확인해 봐야겠군. 이 인디언 스카프 조각은 상당한 증거가 될지도 몰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도미니크가 신중하게 말했다. "키티를 한번 만날 수는 없을까요?" "그건 좀 어렵겠는걸. 부탁을 해봐야 당장에 거절당하기 십상이지. 지금으로서는 변호사나 그녀의 가족이 아니고는 면회가 쉽지 않아." "그렇겠지요. 저 역시 만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지만......그러나 아버지라면 만날 수 있잖아요? 아버지만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물어보고 싶은 걸 대신 그녀에게 물어볼 수 있을 텐데......예를 들어 그녀가 어디에서 휘발유가 떨어졌는지, 누구에게 전화를 걸었는지와 같은 내용 말입니다. 물론 그녀가 아버지에게 순순히


이야기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설마 아버지가 그런 사실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을 테니까, 자신도 모르게 진상을 비칠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그녀는 거짓말하는 데 역시 서투니까요." 도미니크는 목이 메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 "물론 그녀가 누군가를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더더욱 신중해질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는 나무 울타리 가까운 부드러운 지면에 깊이 새겨진 바퀴자국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며 말을 계속했다. "아버지, 키티에게 말을 전해 주지 않으시겠어요? 별로 법에 위반되는 일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 제가 그녀를 위해 열심히 뛰고 있더라는 말을......" "그래, 전해 주도록 하마." 조지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키티의 차 운전석 끝에 그녀의 스커트 자락이 스쳐 묻은 것으로 생각되는 작은 핏자국이 두서너 개 발견된 것이나, 차 앞쪽 펜더에 무엇인가로 심하게 문지른 것 같은 흔적이 있어, 경찰에서는 이미 몇 시간 전부터 그것을 규명하고 있다는 사실 같은 것은 도미니크에게 말하지 않았다. 도미니크가 이런 뜻밖의 공훈을 세웠는데도 그런 사실들을 감추는 것이 약간은 미안하기도 했지만 별 수 없었다. 하기야 그는 휴전조약에 동의한 바 있는 것이다 -- 도미니크는 경찰의 수사정보에 대해서는 기대하지 않겠다고. 그날 오후 조지는 키티를 만났다. 마침 레이몬드 셸레이가 그녀와의 면회를 끝내고 돌아가는 참이었다. 복도에서 조지와 맞닥뜨렸을 때, 그는 초췌한 얼굴로 배가 부른 서류가방을 마치 키티의 생명을 그 안에 넣어둔 것처럼 유별나게 소중한 태도로 옆에 끼고 있었다. 그와는 이제 아무런 격의 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마저 서먹서먹해졌다. 서로 대립하는 관계에 놓이게 된 탓이다. "물론 당신도 짐작은 하겠지만, 그녀의 변호사로서 죄상을 일체 부인하게 될 겁니다." 셸레이가 말했다. "유능한 의사라면 단순히 육체적인 면에서 보더라도 그런 범행을 저지를 수 없다는 것을 쉽게 입증할 수 있을 겁니다." 조지는 거기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셸레이는 이미 데이켓 총경에게도 같은 도전을 했던 것이다. 그때 총경은 비웃음에 찬 미소를 띠우고 말했다.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그녀의 표적은 새로 깐 상아처럼 딱딱한 마룻바닥에 나동그러져 있었거든요. 그런 사람을 내리치는 건 10 살짜리 말괄량이 아가씨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그걸로는 승복할 수 없습니다." 셸레이는 힘없이 고개를 흔들며 항변했다. "키티에게 그런 짓이 가능합니까? 나는 그녀가 태어났을 때부터 알고 있소이다만, 그녀는 벌레 한 마리 죽이질 못해요. 그런 여자가 사람을 죽이다니 -- 그런 엉뚱한 말이


어디 있습니까. 나는 그날 저녁 그녀를 남겨두고 자리를 떠난 걸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어요. 만일 내가 아마이저 씨가 그런 마음을 먹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면 말릴 수도 있었는데." 조지는 신경질적으로 뒤로 돌아 멀어져 가는 셸레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런 의문을 되십었다. 큰소리는 치고 있지만 과연 그는 아마이저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갖고 있었을까? 레슬리는 그를 평하여 아버지의 대리인 역할을 했다고 했다. 요컨대 이용물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목적을 위하여 그를 정면에 내세우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이 내려질 때에 한해서 그는 아마이저의 심복 노릇을 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 그에게 멧돼지의 돌진 같은 아마이저의 추진력을 저지할 힘이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섣불리 성가시게 굴었다가는 희생자가 한 사람 더 늘어나는 결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키티는 어제 비운과 고독과 굴욕의 눈물에 젖어 조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었다. 도미니크는 다행히 그 반 시간에 걸친 애절한 장면을 전혀 알 수가 없었고, 앞으로도 알 기회는 없을 것이다. 또한, 그의 상상력이 아무리 풍부하다 해도, 그건 실제로 조지가 보고 들은 현실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 오늘의 키티는 처음부터 솔직하게, 멋적은 표정조차 보이지 않은 채 담담했다. 어제 같은 눈물은 이미 지나가 버려서 다시는 반복될 것 같지 않았다. "어제는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그런 심정이 되리라고는 저 자신도 생각지 못했거든요. 저 스스로도 놀라고 말았어요. 정말 인간이란 언제 어떤 반응을 일으킬지 모를 일이에요. 저는 스스로를 상당히 냉정한 성격으로 생각했었는데." 조지가 말했다. "나는 아들 녀석이 말을 전해 달라고 해서 왔습니다. 당신을 위해 힘껏 애쓰고 있다고 전해 달라더군요." 그녀는 얼굴을 들어 미소를 띠었다. 그건 당연히 도미니크에게로 던져진 미소일 것이라고 조지는 생각했다. 그녀의 얼굴은 혈색은 좋지 않았으나, 극심한 비탄이 그 겉모습에 끼친 변화라고는 단지 그녀의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만든 것과 가냘픈 입 언저리의 곡선이 한결 애처롭게 일그러져 있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아파트에서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중간색의 스커트와 스웨터를 입고 있었는데, 옆에는 책 한 권이 읽던 페이지에서 엎어져 있었다. 마치 졸업시험을 일주일 뒤에 앞둔 초조해진 여대생을 연상시켰다. "제가 진심으로 감사하더라고 전해 주십시오. 제가 살해하지 않았다는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그뿐일 거예요. 아직 아기처럼 순진해서 -- " 그녀는 문득 말을 끊고, 마치 그 조심성 없고 용서하기 어려운


말을 거두어 들이기라도 하려는 듯 황황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런 말은 그에게 전하지 마세요. 그건 진심이 아니고, 그가 들으면 기분을 상할 거예요. 그냥 마음으로부터 고마워하더라고 -- 그리고 사랑하고 있다고 -- 만 전해 주세요." 그녀는 끝머리의 말을 약간 주저했으나 취소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야무지게 다문 입이 활처럼 굳은 곡선을 그렸다. "그런데 당신이 휘발유가 떨어져서 차를 나무 울타리 곁에 댔던 장소를 알아냈소." 조지는 지나가는 말처럼 운을 뗐다. "왜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하지 않았지요? 우리가 조만간 그걸 알아낼 것이라는 것쯤은 당연히 짐작할 수 있었을 텐데." "그가 찾아냈군요." 키티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는 미소를 띠었다. 그 미소 역시 도미니크에게 던진 것이리라. "정말 똑똑한 아이군요! 그런 것까지 기억하고 있다니! 하지만 그라고 해도 잘못 생각할 수 있는 거지요, 펠스 씨. 어쨌든 저는 거기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 이야기는 그만두세요. 강요해도 소용없어요. 내친 김에 말씀드립니다만, 저는 더 이상 사람들의 보살핌 같은 건 받고 싶지 않아요. 아무도 저를 찾아오지 말라고 하세요.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것보다는 당신을 만나는 것이 한결 마음이 편해요. 셸레이 영감님은 너무 슬픈 얼굴만 하시니 저까지 슬퍼지고 말아요. 달리 누가 찾아올 사람도 없겠지만." "친구들이 많을 텐데요?" 조지는 슬쩍 화제를 바꿨다. "많았었지요. 사교계에 발을 들여놓고 나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사람이 저였으니까요. 더구나 레슬리의 가치가 떨어지고 나서는 저와 결혼하겠다는 젊은 구혼자가 아주 많았지요. 그 중의 일곱 명은 실제로 정식 결혼신청을 했고, 그럴 생각으로 만나기를 원한 사람이 다섯 명 가량 되었어요. 그런데 오늘 저를 사랑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만나러 온 사람이 몇 명이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단 한 사람, 그것도 저를 사랑한다는 내색조차 하지 않던 레슬리뿐이었다고요." 그녀는 웃었다. 하지만 그것은 비웃음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우러나 얼굴에 번지는 아름답고 기쁨에 찬 웃음이었다. 조지는 그때서야 비로소 어떤 사실이 이해가 갔다. 키티는 결국 이 불행한 재난 속에서 어떤 귀중한 것을 움켜잡았던 것이다 -- "레슬리가 여기에 들어올 수 있는 허가를 받았던가요?" "네, 그는 피살자의 아들이고, 또 저와는 남매처럼 자란 사이니까요. 그는 정말 상냥하게 저를 위로해 주었어요." 키티는 앞자락에 모은 손을 내려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남자라면 누구나가 사랑과 충성을 맹세하고 싶어질 그런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하지만,


무척이나 놀라는 얼굴이었어요." 그녀는 자신의 개인적인 슬픔이나 개인적인 기쁨이 남의 눈에 드러나는 것을 조금도 마음에 두는 것 같지 않았다. 인생에서 커다란 위기에 직면하고 거기에 마음이 온통 쏠렸을 때는 위장이나 망설임이나 수치조차 말끔히 가셔지는 것이다. "살해된 사람이 그의 아버지였다는 단순한 이유로 그는 저에게 책임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어요 -- 마치 자기가 잘만 했다면 이런 불상사를 미리 방지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가 이런 꼴이 된 것이 자기 탓이라는 -- 그런 가책을 받고 있는 거지요. 하지만 이건 저 자신이 불러일으킨 일이지 다른 누구의 책임도 아닙니다. 단, 오해가 없도록 말해 두겠습니다만, 이건 고백이 아닙니다." "즉, 당신은 어느 특정 인물을 감싸기 위해 이런 재난을 감수한다는 거군요." 조지가 갑자기 말했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확실한 반응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눈에 띄는 움직임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그녀가 그의 이야기에 관심을 나타낸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신이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한 상대 말입니다." 조지는 추적을 멈추지 않겠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당신이 그렇게 했다는 것은 규명이 되었습니다. 우즈엔드의 전화 박스 문에 당신의 스카프 끝자락이 걸려 있더군요. 당신은 설마 우리가 거기까지 밝혀내랴 하고 마음을 놓았던 모양입니다만. 자, 그 막간의 사건에 대해서 진실을 털어놓는 것이 이로울 겁니다. 어차피 밝혀질 이야기니까. 단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저는 별로 서둘지 않아요." 키티는 그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하지만 조지는 그녀의 행동거지나 말투 여기저기에 긴장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도대체 그게 누굽니까, 키티? 우리가 밝혀내는 것보다는 당신 스스로가 말해 주는 편이 현명할 텐데."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네요. 참, 궁금한 일이 있어요. 만일 제가 유죄로 확정되면 저는 아마이저 씨의 재산을 상속할 수 없게 되겠죠? 그러면 그 재산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저, 셸레이 영감님을 달래느라고 그걸 여쭈어보는 것을 깜박 잊고 말았네요. 당신은 아시죠?" "글쎄......자세히는 모르지만 자동적으로 가장 가까운 혈연에게 넘어가는 게 아닐까 -- 그걸 거부하는 별도 조항이 유언장에 없는 한 말입니다." 조지는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옳은 해답인지는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그 일이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엄연한 현직 경찰관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그는 그녀가 말을 돌리려고


일부러 그런 걸 물어본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게 아니면 허세를 부려 유산에 관한 생각을 마음에서 떨쳐 버리려고 그러는 것으로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어느 쪽도 아니라는 것을 그는 직감했다. 분명히 그녀는 질문의 방향을 돌리고 싶어하기는 했지만, 그 질문을 하게 된 것은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라 정말로 그 답을 알고 싶어서였던 것이다. "어머나, 잘됐네!" 그녀는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그렇게만 되면 레슬리와 진은 더 이상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네요. 엄청난 돈이 생기니까요. 저도 유언장 같은 걸 만들어 둘까 봐요." 조지는 할말이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단절된 세계가 그의 충격에 의한 침묵 때문에 한 순간 흔들린 것이다. 거기에서 그녀는 그 까닭을 깨닫고 엉뚱한 지레짐작을 했다. "어머,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녀는 잽싸게, 그리고 정중하게 말했다. "본심으로 한 말이 아니니까. 저는 잘 알고 있다고요! 비록......최악의 경우가 생긴다고 해도, 그건 1 급 살인사건은 되지 않는다는 것을."

<PRE>번 호 : 24 / 76 등록일 : 1999 년 08 월 11 일 15:45 등록자 : CYBER105 조 회 : 103 건 제 목 : 죽음과 즐거운 여자 10 장 - 엘리스피터스 [귀니사랑] </PRE> 제 10 장 "저것이 그 여인입니다. 이른바 '즐거운 여자'이지요." 레슬리는 테이블에서 뒷걸음질치며 말했다. "당신의 조언에 따라 어제 클렌머 화장에서 이걸 다시 가져왔습니다만 --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여자?" 조지가 만일 그 질문에 대해서 솔직히 답변했다면, "별로 신통치 못한걸!" 하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창에서 들어오는 광선을 받게 하기 위하여 벽에 기대놓은 그 그림은 구름이 낀 오늘 일요일의 아침 하늘처럼 우중충했다. 여자의 살갗의 엷은 황갈색과 그 짙은 그림자는 비바람에 시달려 전반적으로 탁해져서, 담배와 같은 갈색으로 퇴색되어 있었다. 술집의 간판으로는 그다지 큰 편이 아니며, 가로와 세로의 길이가 각기 50cm 가량으로, 더구나 그 안에 있는 여자의 초상은 화면에 상당한 여백을 남기고 있었다. 그전에는 짙은 녹색이나 청색이었을 바탕색이 갈색의 니스로 여러 번 덧칠이 된 위에 그 여자는 거의 허리까지 상반신만 그려져 있었다. 화판의


아래쪽에는 아무렇게나 그려진, 모슬린 숄에 싸인 소녀처럼 작은 가슴 아래 그녀의 양손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 숄 아래로 여자의 어깨는 조금 뒤로 젖혀져 있었고, 목은 유난히 길고 불안정하게 묘사되어, 시든 꽃대처럼 뒤로 쏠린 머리와 평형을 이루기 위해 앞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여자는 오른쪽으로 얼굴을 비스듬히 해서 넓고 부드러운 이마를 광선 쪽으로 향하여 웃고 있었다. 서툴고 거친 화법과 그녀 얼굴의 조잡한 조형에도 불구하고, 그 웃음이 우스워서 웃는 것이 아니라 환희의 웃음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여자는 누군가 이야기 상대와 웃음을 나누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웃음은 그녀 혼자만의 것이었다. "나는 그림에 관해서는 아는 게 없지만 -- " 조지는 솔직히 털어놓으면서 의견을 말했다. "그림이 웬지 어수선해 보이는걸. 목 둘레의 장식이라든가 날개 모양으로 땋아올린 머리와 양쪽의 소용돌이 모양의 귀밑머리 같은 건 빅토리아 시대 초기 리얼리즘의 흔적이 엿보이긴 하지만, 여자의 포즈는 빅토리아 시대의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리얼리즘적이라고도 할 수 없는걸. 오히려 수녀 같은 포즈라고 생각하는데 -엉터리 비평일까?" "아니, 훌륭한 안목입니다. 그런데 어수선해 보인다는 것은 전체적인 인상입니까, 아니면 세부적으로?" "아마 세부적일 걸세. 전체적으로는 균형이 잡힌 느낌이니까. 물감의 사용도 전체적으로는 거칠긴 하지만, 그건 그림이 낡아가면서 아마추어가 몇 번이고 덧칠을 한 탓으로 생각되네." "상당하십니다. 조심해야 되겠습니다 -자칫하다가는 미술 평론가가 될지도 모를 일이니 -- " 레슬리는 우중충한 이 미술품에 열중한 나머지, 그와 조지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의심과 잠재적인 반목의 관계에 있었던 것까지 말끔히 잊고 있었다. "이 여자는 지금 말씀하신 대로 수난을 거의 2 세기 동안이나 겪어왔습니다. 수선이 필요할 때마다 사람들이 덤벼들어 솔질을 하고 값싼 물감으로 모자이크 모양의 덧칠을 한 것 같습니다. 때로는 화가가 지나가다가 멋대로 고친 흔적도 있는데, 저 소용돌이 모양의 귀밑머리 같은 것이 그겁니다 -- 즉, 당신이 웬지 어수선해 보인다고 한 것도 그런 이질적인 것이 뒤섞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이질적인 것은 두서너 겹에 지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이 여자의 균형잡힌 모습이나 아름다운 포즈 등, 이른바 구도는 원래 그대로의 것이며, 매우 잘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저 여자를 관에서 꺼내주려고 합니다. 팔려 나가기 전의 그녀를 보고 싶은 거지요. 그 여자는 처음부터 술집 간판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간판이 되기 전에 어떤 내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때 진은 명색뿐인 부엌으로 가다 말고 잠깐 걸음을 멈추고서 간판의 웃고 있는 여자를 눈여겨보고는, 들고 있던 포크의 자루를 입에 물며 끼어들었다. "누군가를 닮은 느낌이 들어요 -- 누군지는 꼬집어 말하기 어렵지만, 처음부터 웃고 있는 그림이었을까?" "그럴걸. 머리가 조금 젖혀진 걸 보더라도. 어쨌든 곧 알게 될 거야." 거기서 레슬리는 조지에게 설명했다. "실은 오늘 오후 대학에서 화랑을 경영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걸 갖고 가기로 했습니다. 어제 브랜던 루카스라는 그분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흥미 있을 것 같다면서 곧 갖고 오라더군요. 나는 그분의 아들과 옥스퍼드에서 친하게 지냈었습니다." 조지가 물었다. "클렌머 화랑에서 간판을 갖고 올 때 그 영감이 딴소리는 하지 않던가?" "아뇨, 전혀. 하기야 좀 아쉬워하는 것 같기는 했습니다만, 당신이 드나들기도 한 그림이라 무작정 붙들고 늘어질 수도 없었겠지요." "간판을 팔라는 말도?" "팔라고는 했습니다." "값은 얼마에?" 조지는 그 순간 방안의 온도가 갑자기 내려가는 듯한 쑥스러운 냉기와, 부부 사이에 흐르는 전류 같은 것을 느끼면서 급히 입을 다물었으나 이미 늦었다. 정말 쑥스러운 질문이었다. 금전적인 궁핍, 재산 상속의 부당한 소외, 경제적인 원조를 구하기 위해 자존심을 굽혀야 했었던 굴욕감 -- 그런 것들이 그들의 짧은 결혼생활에 줄곧 그늘을 던져 온 것이다. "600 파운드라더군요." 진이 내뱉듯 말하며 문 쪽으로 갔다. 담배를 쥔 레슬리의 손가락이 갑자기 떨렸다. "당신은 아버지가 500 파운드 주겠다고 했을 때 들은 척도 하지 않았어. 그리고 내가 그 제안을 거절했을 때 당신은 기뻐하기까지 했소. 이번 이야기도 그것과 별 다를 게 뭐 있지?" "100 파운드 많잖아요." 그녀는 단조롭고 차갑게 말했다. "그리고 당신 아버지의 돈이 아니라는 점. 그림 가게에서 직접 받는 돈이라 꺼림칙하지도 않고 마음편하게 쓸 수가 있거든요." 딴은 맞는 말이었다. 제시된 금액이 상당한 액수여서 그녀가 그것을 팔고 싶어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임신중이다 --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도 편안한 둥지가 아쉬운 것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지불해야 할 희생은 그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어야 했다. 만일 레슬리에 대한 믿음이 지금도 확고한 것이라면, 그녀는 남편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길을 그대로 받아들여 충실하게 그를 따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어떤 성급한 행위가 신혼의 맹세를 한꺼번에 날려 버린 것이다. 이제 그는 그녀의 믿음에 어긋남이 없음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다시는 신용을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감시받고, 냉혹한 평가를 받아야 되는 것이다. 그건 그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태어날 아이를 위해 탐욕스러워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집인 이 초라한, 발들여놓을 곳조차 넉넉지 못한 방안을 둘러보며 조지는 미래의 호강을 꿈꾸기보다는 오늘의 실리를 잡고 싶어하는 그녀를 책망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일 내가 간판을 처분하고 난 다음에 그것이 10 배가 넘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쩌지? 말이 쉬워 단념이지, 단념할 수 있을 것 같아 ?" 레슬리는 신랄하게 퍼붓고 나서, 불현듯 자신의 가시돋힌 말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이런 하찮은 말싸움을 그만두기 위해 흥미가 가시고 만 간판 그림을 주워들었다. 그는 조지 앞에서 부부간의 불화를 드러낸 것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었다. 아마 진도 그랬을 것이다. 복도에서 걸음을 멈춘 그녀는 그에게 등을 돌린 채로 말했다. "어쨌거나 이미 팔지 않겠다고 한 것을 새삼스럽게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해서 뭐해요. 이젠 운에 맡기는 수밖에." 조지는 그녀를 위로했다. "걱정할 거 없어요, 부인. 만일 그 그림을 클렌머가 600 파운드로 봤다면 그것보다 비싸게 팔 자신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 사람은 재미로 그런 장사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요. 감정 결과가 나올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 보십시오." 조지는 레슬리 곁으로 가서 그림을 다시 한 번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소녀와도 같은 가슴 사이에 뭔가 기묘한 장식이 달려 있었다. 조각이 된 문양이 있는 타원형의 커다란 브로치 같은 것이었다. 그 아래쪽에 길고 파리한, 형태가 분명치 못한 손가락이 깍지를 낀 채로 모아져 있었다. "자네도 이 그림에 대해 나름대로의 의견을 갖고 있을 텐데?" 조지는 살피듯 물어보았다. "네. 하지만 확신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조금 엉뚱한 생각이라서, 누군가 이런 것에 박식한 사람의 의견을 들을 때까지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낡은 천으로 그것을 싸서 방 한구석에 소중히 세워놓았다. "죄송합니다 -- 저 그림에 정신이 팔려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당신은 설마 간판 이야기를 하러 오신 것은 아니겠지요? 키티에 관한 일입니까?" 레슬리는 그녀에 관한 것이 머리에 떠오르자 그림에 대한 가슴 설레는 기대감 같은 것도 날아가 버리고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맞아, 그녀에 관한 일로 왔지......자네는 어제 아침 키티를 만나러 갔었다더군."


"네, 가게 일의 틈을 보아 급히 찾아가 보았습니다. 나는 직장에 나가기 전까지는 그녀가 체포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녀를 만나러 간 것이 무슨 문제라도 됩니까?" "그게 문제가 될 리야 없지. 나는 단지 그녀가 우리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을 자네에게 이야기했나 해서......실은 그날 밤 11 시에서 12 시까지 한 시간 동안의 그녀의 행동이 밝혀지지 않고 있네. 그녀는 거기에 대한 설명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어. 우리가 조사한 바로는 아마도 누군가 또 한 사람이 그녀가 침묵하고 있는 원인인 것 같아. 내가 생각하기에는 오히려 그날 밤의 행동을 모두 털어놓는 것이 그녀에게 유리할 것 같은데." "유죄든 무죄든 말입니까?" "그럼." 레슬리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말했. "그렇겠지요. 당신이 하는 말이니 틀림이 없겠지요. 하지만 그녀가 숨기고 있는 것을 나에게 이야기했으리라고 생각한 것은 잘못 짚으신 겁니다. 그녀는 나의 아버지나 그날 밤에 관한 것은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거든요. 우리는 그런 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야기도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녀는 자기는 사람을 해친 적이 없다고 했고, 나 역시 그녀가 그랬으리라고는 절대로 믿지 않는다고 대꾸했을 뿐입니다. 생각해 보니 나는 그녀의 결백을 믿기 때문에 이렇게 협력을 하는 겁니다." "그야 자네가 그렇게 믿는 건 나무랄 수 없지. 그런데 얼마 동안이나 키티와 함께 있었나? 30 분 가량? 그래, 그 동안 별로 하는 이야기도 없이 뭘 했나?" 레슬리의 잘생긴 광대뼈 언저리에 갑자기 노여움이 떠올랐다. "그녀는 울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달래고 위로하느라고......" 그의 눈에 한 순간 격정의 빛이 스쳤는데, 그건 불꽃처럼 확 타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 "그녀는 필요한 것 이외에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당신이 문제로 삼고 있는 한 시간 동안의 일에 관해서도 전혀 말한 것이 없습니다. 하기야 나에게 그것에 관해 물어본 사람은 당신뿐만은 아닙니다. 실은 어제 당신의 아드님이 나를 만나러 왔었지요." "허, 그래? 그건 몰랐군, 놀랄 일도 아니지만." 도미니크는 수사 결과를 전혀 보고하지 않았었다. 아마도 얻은 바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우리 부자는 마치 합동수사라도 하는 모양이 되었군." 조지는 멋적은 웃음을 띠었다. "그래, 그 녀석이 이 문제에 대해서 질문을 하더라 이 말이지? 만일 키티가 궁지에 빠져, 급히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필요가 생겼을 때, 한밤중에라도 달려와 그녀를 도와줄 만한 사람은 누굴까 하고?"


"아뇨. 정확히 말해서 그런 건 묻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같은 문제를 파고들었다고는 할 수 있겠죠. 옛날에는 키티가 여러 가지 문제로 자주 나를 찾아오곤 했었습니다. 우리는 사이가 좋았고, 그녀는 나를 오빠처럼 따랐으니까요. 하지만 아버지의 탐욕스러운 계획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만 겁니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몰고 간 거지요. 키티는 구김살없고 쾌활한 성격이지만, 상당히 외로움을 잘 탑니다. 나는 그녀를 좋아했고, 그녀 역시 아버지가 일을 엉망으로 만들기 전까지는 나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제 그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그녀가 어려움에 빠졌다면 왜 나에게 전화 한 통화라도 걸어 상의하지 않았느냐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나에게 전화가 없는 것이 그녀의 인생에서 나를 제외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바보스러운 말을 하며 울기만 하지 뭡니까......뭐라고 하셨나요?" 조지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이야기를 계속하게. 만일 그녀가 자네에게 부탁할 수 없었다면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까?" "하기야 그녀 주위에는 놈팽이들이 벌떼처럼 둘러싸고 있기는 하지만, 키티가 그런 치들에게 도움을 청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녀가 정말로 누군가를 필요로 했다면 좀더 나이가 든 사람을 골랐을 겁니다. 그녀를 길러준 숙모가 살아 있다면 물론 숙모에게 부탁을 했겠지요. 하지만 2 년 전에 돌아가셨고......그녀의 관리인 -- 부드러운 성품의 노인인데 그녀를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지요 -- 그가 아니면 레이몬드 셸레이 정도입니다. 셀레이 변호사는 그녀의 친척이나 다를 바 없어서 키티는 어려서부터 그분을 따랐고, 특히 나와 아버지 사이에 분쟁이 생기고 나서는 나를 위해 애를 쓰면서 더욱 친해진 것 같습니다. 대충 그런 정도입니다만, 별로 도움이 안되겠는걸요." "아니, 그렇지도 않네." 조지가 말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십시오. 내가 돕고자 하는 것은 키티지 당신이 아닙니다. 언짢아 하실지는 모르지만 -- 당신은 이런 일이 하나의 일거리겠지만, 나는 경찰관이 아닙니다. 키티의 친구이지요." "아, 그건 잘 알고 있네." 조지는 시민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것을 선선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도미니크는 자기의 입장을 분명히 하던가?" 그는 레슬리의 눈에 떠오른 미소가 반짝 빛나는 것을 보고, 도미니크가 그것을 실행하고 동시에 그의 입장이 쾌히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알았다. 조지는 문까지 걸어가서 뒤돌아보았다. "또 하나, 이건 자네에게 좋은 소식인데, 자네가 그날 밤 집에 돌아온 시간을 어떤 남자가 확인해 주었네. 워렌 탄광의 광부인데, 이 골목 안쪽에 살고


있지. 그날은 잔업 때문에 늦게 돌아왔는데, 저 앞 네거리에서 탄광 버스에서 내렸을 때 자네가 집에 들어가는 걸 보았다는 거야. 그걸로 15 분 전 11 시라고 한 자네의 귀가시간은 1~2 분 차이는 나지만 거의 정확하게 들어맞는 셈일세. 지금으로서는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지만." "하지만 그게 입증됐다니 기쁩니다. 이틀 전이었다면 더욱 좋았을 텐데." "탄광 버스를 조사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른 것은 바로 어젯밤이었거든. 좀더 일찍 그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아무튼 자네의 그 '즐거운 여자'에 행운이 깃들기를 비네. 어떻게 가져갈 생각인가? 버스로 갖고 가기에는 너무 큰걸. 차를 마련해 줄까?" "감사합니다. 하지만 버니 윌슨의 차를 쓸 수가 있습니다. 그는 예비 열쇠를 만들어, 내가 필요할 때는 쓰라고 주었습니다. 그는 우리같이 차고도 없는 터라, 그 차를 주차장에 세워두어서 아주 편리합니다." "자네는 사람들의 신망이 두텁군." 조지는 계단 위에서 말했다. "자네라면 마누라를 빌려줘도 안심이 된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거야." 그는 동쪽으로 천천히 차를 몰며 계속 생각했다. 어떻게 연관이 되는 것인지 알 수 없고 울화가 치밀 정도로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하여간 레슬리와 한 대화에서 상당한 수확이 있었다는 느낌만은 확실했다. 그 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것은 그 '즐거운 여자'다. 별로 대단해 보이지도 않는데 그 빈틈없는 그림 장사가 600 파운드나 내겠다던 그 그림 말이다. 그 간판의 여자가 아마이저의 죽음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 그림은 어제 키티를 만나본 이래 그의 가슴속 깊이 뿌리를 내린 어떤 추리와는 들어맞지 않았지만, 일단 대단히 값진 물건일지도 모른다는 전제를 앞세운다면 그 가능성은 상당히 중대한 의미를 갖게 된다. 하지만 만일 이 사건의 동기가 돈이었다면, 범인이 계산하고 있는 보수는 -- 그걸 크게 웃도는 막대한 금액이 틀림없다. 아마이저가 생애의 마지막에 도락을 위해 쓴 돈만이 아니라 그가 갖고 있는 돈의 전부가 바야흐로 그 사람의 품속으로 굴러 들어가려 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레슬리는 그런 막대한 유산이 남의 손에 들어간다는 현실을 진짜로 단념한 것일까? 비록 그가 생활력이 없어서 자초한 생애 최초의 고생에 길들여졌다고 하더라도, 만일 운명이 뜻하지 않게 엄청난 유산을 되찾을 절호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 그날 밤 레슬리가 걸어서 집에 돌아간 것 이후로는 아무런 악한 의도도 품지 않고 '즐거운 술집 하녀'를


떠났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그럴 생각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 광부의 증언이 명확하게 그걸 증명하고 있다. 그가 밖을 어슬렁거리다가 키티가 황급히 달아나는 것을 목격하고, 다시 한 번 되돌아가서 그녀가 우연히 떠밀어 기절시킨 아버지를 짓이겨 놓았다는 가정은 성립되기 어렵다. 그 시각에 레슬리는 현장에서 2 킬로미터나 떨어진 코마번에 있었으니까. 만일 그가 범인이라면 그는 아버지를 죽일 목적으로 되돌아간 것이 된다. 그리고 그 살의는 마치 번갯불처럼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쳤을 것이다 -- 아니면, 어떤 계기가 있었던 것일까? 예를 들어 뜻하지 않는 키티의 비명소리와 같은 계기가. 그런 가정에 도달했을 때, 조지는 자신이 키티의 결백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 입장에 서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 원인이 키티에게 있는 것인지, 아니면 도미니크의 탓인지 확실히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 스스로의 변화에 조금도 놀라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적어도 지난 24 시간 동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늦게나마 깨달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키티가 아니다. 다른 사람이다. 우즈엔드에서 그녀가 전화를 건 사람일지도 모른다. 가령 누군가가 당황한 키티의 입을 통해 아마이저가 기절해서 별채에 쓰러져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고 가정해 보자. 평소에 아마이저를 죽이고 싶은 절실한 이유를 갖고 있었거나, 그 순간 갑자기 그런 생각을 품게 되었다고 하자. 키티가 살인죄를 뒤집어쓸 무대는 마련되어 있고, 더구나 그녀 자신이 범인으로 하여금 아마이저의 숨통을 끊을 절호의 기회를 제공해 준 것이다. 그런 기회는 생전에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 착상을 조지의 머릿속에 떠오르게 한 것은 키티 자신이었다. 그것은 비탄의 나락에 빠지긴 했지만, 만족스럽게 내뱉은 그녀의 말 한마디가 그 계기가 된 것이다. "만일 제가 유죄로 확정되면 저는 아마이저 씨의 재산을 상속할 수 없게 되겠죠? 그러면 그 재산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리고 자못 만족스럽다는 듯이 말했었다. "어머나, 잘됐네! 그렇게만 되면 레슬리와 진은 더 이상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엄청난 돈이 생기니까." 우연이라고는 하나 무대는 완벽했다. 더구나 그녀가 말한 대로 이건 1 급 살인사건이 아니므로, 범인은 키티가 사형이 되는 것을 지켜봐야 할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1 급 살인이든 가벼운 살인이든 그런 구별은 살인범이 피해자의 재산을 상속할 수 없다는 법규에는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 유죄가 선고된 키티는 당연히 상속권을


박탈당할 것이다. 하지만 형기를 마치고 출감한 그녀는 여전히 부유하고 또 젊을 것이다. 100 만 파운드의 4 분의 1 을 걸고 있는 범인은 그녀가 그 정도의 희생을 치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타이를 수도 있다. 큰 돈은 때때로 사람의 양심을 마비시킬 수도 있으니까. 조지가 갑자기 생각을 굳히고 일요일 아침 레슬리를 방문했을 때만 해도 납득하기 어려운 장애물이 둘 있었다. 우선 레슬리는 차를 갖고 있지 않아서 그날 밤 급히 별채로 되돌아갈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또 하나는 레슬리가 키티가 했다는 말로써 깨우쳐 주었듯이 그의 셋집에는 전화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가 뛰어넘기 어려운 장애였지만, 그중의 하나는 가까스로 극복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버니 윌슨의 차를 언제라도 쓸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예비 열쇠는 가지고 있었고, 차는 가까운 시청 주차장에 세워져 있다. 그럼, 나머지 하나의 장애는 어떤가? 그것도 과연 허망한 장애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을까 ? 사건은 시시각각 복잡성을 더해 가고 있다. 하지만 진실은 자로 그은 직선처럼 혼돈 속을 꿰뚫는 한 줄기 실이며, 그것이 공교롭게도 동기나 감정 등의 색실과 얽혀 있을 뿐이라고 조지는 낙관하고 있었다. 더구나 명백한 실타래가, 그리고 분명한 동기에다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 이미 거기에 있었다. 100 만 파운드의 4 분의 1 이 눈앞에 오락가락하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이라면 불과 600 파운드의 푼돈을 참아 넘긴다는 것은 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 레슬리의 집에는 전화가 없다.

<PRE>번 호 : 25 / 76 등록일 : 1999 년 08 월 11 일 15:46 등록자 : CYBER105 조 회 : 102 건 제 목 : 죽음과 즐거운 여자 11 장 - 엘리스피터스 [귀니사랑] </PRE> 제 11 장 그날 저녁, 도미니크는 진지한 얼굴로 아버지를 찾아갔다. 무엇인가 중대한 제안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이 그의 표정에 역력했다. 밴디는 교회에 가고 집에 없었다. 조지는 아내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아마도 도미니크는 살인사건이라는 충격적인 문제 토의에 여성인 어머니를 참가시키는 것은 피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할 것이 뻔했다. 뿐만 아니라 지난번 일도 있고 해서, 조지가 오랜 세월 동안 어머니에게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 온 것을 비난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버지, 저는 장갑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봤는데요." 도미니크는 조지의 의자 반대쪽의 테이블 끝에 의젓이 앉아 말을 꺼냈다. "그래서?" 조지가 재촉했다. 꺼내놓은 이야기가 그가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들을 만했다. 장갑 문제는 어쨌든 피할 수 없는 것이니까. "레슬리의 장갑은 깨끗이 결말이 났지만, 범인은 그날 범행 뒤에 피투성이의 장갑을 없애버려야 했겠지요? 샴페인 병은 코르크 마개가 있는 데까지 피가 흥건히 묻어 있었으니까요. 물론 경찰에서 그 장갑을 찾느라고 동분서주하고 있다는 건 저도 알아요 -- 그런 페인트투성이의 장갑을 갖고도 소동을 벌였을 정도니까요. 입고 있던 옷에도 피가 튀었을 테지만, 장갑에는 틀림없이 피가 묻어 있을 거예요. 그리고 범인이 장갑을 끼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고. 안 그래요?" "그야......그래서?" "그런데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키티가 그날 밤 장갑을 끼고있었나요?" 그는 무엇인가를 증명하기 위해 그 해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의 추리의 전개에 필요한 한 요인이었던 것이다. "실내에서는 끼고 있지 않았었지." 조지가 대답했다. "하지만 차 속이나 어디에 벗어둘 수도 있지. 그녀는 정장을 했었으니까. 아마도 차를 운전할 때는 장갑을 꼈을걸." "알겠습니다. 하지만 가택수색에서는 피묻은 장갑이 나오지 않았고요?" 그는 질문을 한 것이 아니라 그냥 혼자 단언하고는, 상대방의 기색을 살피듯 예리한 눈길을 보내더니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는 마치 만족할 만한 결과라도 얻은 듯 말했다. "저는 말입니다. 그 장갑을 염두에 두고 그날 밤의 사건을 정확히 추적해 보았습니다. 키티는 그 댄스 홀에서 정신없이 달려나가 집을 향해서 차를 몰았어요. 그러나 몇 백 미터도 못 가 기름이 떨어졌지요. 그녀는 당황했습니다. 아마이저에게 뜻하지 않은 상처를 -- 혹시 치명적일 수도 있는 상처를 입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한시바삐 달아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차고 같은 곳에 전화를 걸 수는 없었죠. 그래서 전화 박스로 달려간 키티는 믿을 수 있는 친구에게 자기가 있는 곳을 알려주고, 집에 돌아갈 수 있을 만큼의 휘발유를 한 통, 또는 휘발유를 차에서 차로 옮길 수 있는 호스라도 좋으니 급히 갖고 와달라고 부탁한 겁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고 하면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했겠죠.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빠졌으니까요. 여기에서 가령 그녀가 말을 건 사람이 아마이저를 죽이고 싶어할 어떤 강력한 이유를 갖고 있었다고


해보세요. 그는 실제로 그런 일을 실행할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었지만, 키티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별안간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바로 지금이다, 그를 해치울 수 있는 기회는 -- 그렇게 혼자 생각을 합니다. 아마이저는 지금 댄스 홀에 기절해 있어요. 만일 자기가 거기에 달려갈 동안에도 그대로 있다면, 마치 나무인형을 두들겨 부수는 정도밖에 안 되겠지요. 더구나 그녀는 그 죄를 뒤집어 씌워달라는 듯이 기다리고 있고요. 어쩌면 그는 그때 아마이저를 죽이려는 생각을 완전히 굳히고 있었던 건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지도 않고 지나쳐 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기회였던 겁니다. 모험이기도 했겠지요. 아마이저는 그냥 몇 분 동안 정신을 잃은 것인지도 모르고, 혹시 그 남자가 도착했을 때는 의식을 회복할지도 모르고, 아니면 의식을 회복해서 그 자리를 떠났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이든 그 남자에게는 밑져야 본전일 겁니다. 아마이저가 자취를 감추었다면 그뿐이고, 만일 그가 몸을 일으켜 머리를 감싸고 있다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차 있는 데로 데려가 직원들에게 데려다 주고 나서 그곳을 떠나, 키티를 만나서 안심시키면 그만이니까요. 그런데 만의 하나 아마이저가 굴러떨어진 자리에 그대로 뻗어 있다면 -그건 바라고 바라던 100 만분의 1 의 기회가 된다, 이겁니다. 그래서 그 남자는 총알처럼 차를 몰아 달려갔습니다. 키티가 있는 곳이 아니라 댄스 홀로 말이지요. 그곳에 가보니 정말로 아마이저는 그대로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100 만분의 1 의 기회가 온 거지요." "음, 그럴 수도 있겠군." 조지는 낮게 신음하듯 말하고, 테이블 너머로 자기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진지한 얼굴을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들 부자는 아무리 손을 저어 아니라고 해도 서로 놀랄 만큼 닮은 데가 있었다. 특히 그들이 밴디의 속을 썩일 때 보면 그것은 명백히 나타난다. 조지가 보기에 아들의 추리는 마치 자신의 마음을 거울로 비춰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전에도 그들이 한 가지 관심사에 마음을 빼앗겼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도미니크가 마치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자기 뒤에 착 달라붙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쪽이 실체고 어느 쪽이 메아리인지 구별도 할 수 없었다. "그래,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졌다는 거냐?" "대충 이렇습니다." 도미니크가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일을 저지를 생각은 있었지만, 현장을 직접 볼 때까지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흉기도 준비하지 않았지요. 그러는 편이 안전하기도 했고요. 그가 장갑을 끼고 있었던 것은 서늘한 밤중에 차를


운전했기 때문이었을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바라고 바라던 기회를 만났습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아마이저가 아직도 거기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본 그는 순간적으로 눈에 띄는 흉기를 손에 들었습니다. 그것은 입구 가까이 벽을 파고서 올려놓은 석고상이지요. 이건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지만, 그 석고상은 속이 텅 비어 의외로 가벼웠습니다. 그는 그걸로 아마저의 머리를 내려치려고 들어올렸지만 너무나 가벼워 생쥐의 머리도 깨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집어던졌을 겁니다. 석고상은 벽에 부딪쳐 깨졌습니다. 그는 급히 주위를 둘러보고는 계단을 달려올라가 이번에는 샴페인병을 들고 내려와 그걸로 아마이저의 머리를 짓이기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병이 깨지자 제정신이 든 그는 아마이저가 완전히 죽은 것을 알았습니다. 다음에는 증거가 될 만한 것을 치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장갑을 말입니다. 더구나 신속히 없애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지요. 따라서 그는 현장에서 몇 백 미터 범위 내의 어딘가에 그것을 버려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한시바삐 키티에게로 가서 약속한 대로 그녀를 도와주어야 했으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살인사건이 발견되었을 때 비록 아무도 그 사건을 그와 연관시키지 않는다 해도 그녀만은 의심을 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그의 마음을 움직여 범행을 결행하게 한 무대 설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느냐는 아무도 모를 겁니다. 그가 나중에 경찰을 유도해서 키티에게 혐의를 두게 하는 방법은 있다고 해도, 그녀나 또는 그녀의 차를 내버려둘 수는 없었던 겁니다. 만일 현장 가까이에서 그녀가 붙잡힌다면 그녀는 자초지종을 말하지 않을 수 없을 테지요. 예를 들어, '이러이러한 이유로 그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는데 그는 곧 가겠다고 약속을 하고서 오지를 않았습니다.' 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비록 키티는 그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다 해도 경찰은 그렇지 않을 겁니다. 틀림없이 그에게 혐의를 둘 것이 뻔하지요. 안 그래요?" "그야 키티가 그렇게 말하면 우리로서는 감을 잡게 되겠지." 조지는 아들의 추리에 동의했다. "아마도 그는 처음부터 키티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예요. 만일 그 자신이 주목을 받게 되면 그때 가서 그녀에게 방향전환을 꾀했을는지는 모릅니다만. 어쨌거나 그는 그녀에게 아무런 악의를 품고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녀가 무사히 빠져 나오기를 바랐을 겁니다 -- 물론 그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이 확실한 경우에 말입니다만. 아무튼 그는 곧장 그녀에게로 달려간 것처럼 보여야 했습니다. 댄스 홀에서 있었던 일은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아서 시간상으로 크게 늦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그래서 그는 우선 장갑을 처리하고, 그리고 나서 키티를 만나 휘발유를 넣어 주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장갑을 주머니에 넣거나 자기 차 속에 숨겨둘 수는 없었을 겁니다. 만일 주머니에 밴 얼룩이 키티의 눈에 띄면 의심을 받게 되고, 또 차 안 어딘가에 피가 묻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니 결국 그녀를 만나기 전에 장갑을 마땅한 곳에 버리거나 숨길 수밖에는 없었겠지요." "그래, 너는 그 장소에 대해 짐작되는 거라도 있다는 거냐?" 조지가 결론을 서둘렀다. "자, 그가 어디에 장갑을 치웠는지 말해 봐." "시간이 급해서 먼 곳까지 가지는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키티에게 발각되면 큰일이지요. 그래서 그는 주위를 경계하며 댄스 홀을 나와 왼손으로 문을 닫았습니다. 왜냐하면 왼쪽 장갑에는 피가 별로 묻어 있지 않았을 테니까요. 저는 그가 문의 손잡이에 지문을 남기지 않아야 했었던 것처럼, 비록 댄스 홀 안에 장갑을 숨길 만한 장소가 있었다고 해도 거기에는 감추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손잡이에 지문을 남기는 것보다는 장갑의 피가 조금 묻는 것이 안전하니까요. 그리고 나서 그는 장갑을 벗어, 그것을 뒤집어서 피가 다른 데 묻지 않도록 아마도 오른쪽 장갑을 말아 왼쪽 장갑 속에 넣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부근을 샅샅이 살펴봤어요. 그 별채 뒤쪽에 쇠창살이 덮인 하수구가 있더군요. 거기에 관심이갔었지만, 그건 너무나 눈에 띄기가 쉬워요. 하수물이 세차게 흘러내려간다면 몰라도 거의 물이 없는 상태라, 장갑은 하수구에 그냥 남아 있게 되고, 그러면 경찰의 눈이 맨 먼저 미칠 것이 뻔하니까요 -- " "으음, 거기는 우리도 벌써 조사를 해봤었지. 물론 별채 안을 샅샅이 조사한 뒤였지만, 그래서?" "그 밖에는 도로와 나무 울타리 속과 도랑이 그럴듯한 장소였고, 반대쪽에는 제법 울창한 숲이 있더군요. 그 숲은 의심은 가지만, 상당히 넓어서 샅샅이 뒤지려면 많은 인원과 시간이 걸릴 것 같았습니다. 도로 가까운 곳을 집중적으로 수색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것도 보통 일이 아니고요. 땅에는 여러 해 동안 쌓인 낙엽이 꽉 차 있거든요. 그러므로 아무리 공을 들인다고 해도 지나쳐 버릴 가능성이 짙습니다. 어쨌든 저라면 거기를 택할 겁니다. 급히 숲속으로 뛰어들어 낙엽이 썩은 흙 속에 그 장갑을 묻어버리는 겁니다. 감쪽같죠. 그리고 나서 그는 차를 몰아 키티에게로 달려갑니다. 걱정에 가득한 표정으로 달려온 그는 키티의 차에 휘발유를 넣어주고는, 그 악바리 영감은 별일 없을 거라고 -- 키티의 신경과민이라고 -걱정할 것 없으니 안심하고 집에 돌아가라고 -- 하며


그녀를 달랩니다. 그를 보고 마음이 놓인 키티는 기뻐서 그에게 매달렸을 테지요. 그녀는 폭이 넓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앞자락이 피가 튄 그의 바지에 스쳤고, 그의 소매 어디에선가 피가 한 방울 떨어져 그녀의 구두 끝에 떨어졌지만, 어둠 속이어서 두 사람은 모두 그걸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경찰측의 이른바 증거가 되어버리고 말았다......대강 이런 걸로 짐작합니다만, 잘못 짚었나요?" 조지는 도미니크의 추리에 크게 무리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무거운 숨을 몰아쉬고 나서,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다음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범인은 키티를 집에 돌려보내기 전에 이미 아마이저를 살해했다 -- 돌려보내고 난 다음에 저지른 일이 아니라고 너는 생각하는구나." "물론이지요! 아마이저가 언제까지나 기절한 상태로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만일 키티를 먼저 돌려보내고, 그자가 뒤에 남았다면, 기회가 아직도 그를 기다리고 있는지 어떤지 알 수는 없었을 겁니다." 도미니크는 추리를 전개하는 동안 대단한 자신에 차 있었으나, 조지가 침묵에 잠기자 마음이 초조해졌다. 모든 희망을 한꺼번에 건 뒤에 허전하고 불안한 바람이 그 빈 자리를 채운 것이다. 그는 무엇인가 용기를 북돋워 줄 만한 말을 기대하는 눈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살폈으나, 아버지의 무표정한 침묵은 그의 용기를 깎아내릴 뿐이었다. 조지가 잠시 동안 마음속의 거울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그가 알 턱이 없었다. 참다못해 도미니크가 외쳤다. "아버지, 잠자코 계시지만 말고 뭐라고 말씀 좀 하세요. 아버지는 키티가 유죄를 선고받아 한평생 형무소 생활을 해도 아무렇지 않으세요? 아버지는 그녀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거로군요. 아무런 손도 쓰지 않고 구경만 하겠다는 거예요!" 그 말에 놀라 생각에서 깨어난 조지는 아들의 가슴팍을 쥐고 가볍게 흔들었다. 그저 해보는 시늉으로 심하게 흔들지는 않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힘이 들어가 있었다. 도미니크의 입에서 튀어나오던 외침이 뚝 끊어졌다. 그의 뜻하지 않은 역습이 앞서 조지가 받은 것보다 훨씬 큰 충격을 아들에게 주었다. "좀 지나치구나, 돔. 조심해."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일언 반구 말씀이 없으니 너무하세요. 제가 그만큼 이야기를 했으면 무슨 말씀이 있으셔야지요." "그래, 나보고 실토를 하라는 거로구나. 그것도 좋겠지. 만일 네가 오늘 오후 그 숲에 가보았다면, 그 부근에 경찰이 쫙 깔려 있는 것을 보았을 거다. 장갑


수색작전을 펼친 거야. 지금까지 여러 곳을 그런 식으로 집중수색을 해봤지. 우리로서는 그곳이 논리적인 필연성을 갖는 장소인지는 너만큼 확신을 갖지 못한다고 해도, 그 장갑을 찾으려는 열의만은 너보다 못하지 않을 거다. 그리고 드레스 자락에 묻은 피 얼룩이 정말로 상황에 들어맞는 것인지 아닌지도 공정한 판단을 내리려고 애쓰고 있다. 그런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은 너만이 아니란다, 돔. 그리고 그날 밤 키티가 전화를 건 상대가 누군가에 대해서도 수사를 진행하고 있지. 너도 그 방면으로 머리를 돌려 봐. 그리고 만일 어떤 해답을 얻거든 곧 알려주고." 그 뒤를 이은 침묵에 내포된 날카로움과 암시로 해서, 도미니크는 말이 적은 편이 오히려 쉽게 이해를 얻어낼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비로소 깨달았다. 그는 침착한 척하고 아버지를 지켜보며 앞자락을 매만지면서 점잔을 빼기로 했다. 한결 밝고 부드러워진 그의 눈길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역시 그랬군요! 경찰들은 사건을 마무리짓기 위해 그 장갑을 찾고 있을지 모르지만,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군요. 사건을 원점으로 돌리기 위해 그걸 찾고 있는 거였어요. 아버지도 그녀의 짓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아요! 죄송해요, 그런 소리를 해서. 아버지도 저도 결국은 같은 길에 다다른 거예요...... 도미니크는 자기의 신념을 관철하는 데 있어 더 이상 고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 위안을 얻고 용기를 되찾았지만, 주근깨가 두드러진 아버지의 이마에 어린 신중을 가장한 고요의 그늘에는 다른 무엇인가가 -- 무엇인지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신경쓰이는 무엇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협력자가 나타난 것을 기뻐하고 용기를 얻기는 했지만, 그 얼굴에는 환영의 빛과는 거리가 먼 어떤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너무나 꼼꼼이 그 협력자를 관찰한 것이다. 예민한 감수성으로써, 비상한 통찰력으로써 아버지의 얼굴에서 번민을 보았던 것이다. 그는 협력자는 필요했으나, 경쟁자는 달갑지 않았다. "예, 나도 그쪽으로 신경쓰고 있어요. 아니, 신경을 쓰고 있다기보다는 해답을 거의 얻었다고 할 수 있지요." 도미니크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 해답이라는 것을 아버지에게도, 다른 누구에게도 털어놓으려 하지 않았다. 조지는 지평선상에 또 하나의 깃발을 보았다. 그것은 미녀의 수호자로 자처할 경주가 벌어지는 경기장을 향해서 곧장 달려가고 있었다.

<PRE>번 호 : 26 / 76 등록일 : 1999 년 08 월 11 일 15:46 등록자 : CYBER105 조 회 : 101 건 제 목 : 죽음과 즐거운 여자 12 장 - 엘리스피터스 [귀니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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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 장 월요일 아침, 앨프리드 아마이저의 유해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침울한 얼굴의 아들을 거느리고 묘지로 향하기 한 시간쯤 전에, 키티 노리스는 법정에 2 분 가량 출두해서 일주일 간의 재구류 선고를 받았다. 그녀는 그 간단한 법정수속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앉은 채로 주위의 누구에게도 -- 그녀 때문에 출두한 레이몬드 셸레이에게조차 -- 미소는 고사하고 눈길 한번 보내지 않았다. 낯선 장소에 혼자 떨어져서, 제멋대로고 위압적인 낯선 사람들의 중압에 눌린 소녀처럼 그녀는 어정쩡한 모습으로 피고석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선고를 들었다. 이틀 전까지 계속된 눈물과 불면 때문에 움푹 들어간 그녀의 눈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적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천천히, 기죽은 기색도 없이 둘러보았다. 그녀는 자신을 떠밀어 흘려 보내려는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어떠한 고난도 달게 받아들이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를 법정에 데리고 나온 조지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리고 도미니크가 보았다면 얼마나 가슴 아파했을 것인가 생각했다. 그녀가 법정에서 머문 몇 분 동안에 뉴스는 삽시간에 퍼져, 상당한 인파가 재판소 앞으로 모여들어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조지가 그녀를 감쌀 틈도 주지 않고 카메라맨 하나가 바로 그녀의 눈앞에서 플래시를 터뜨렸다. 차에서부터 의상은 물론 데이트 상대까지 늘 지방신문에 오르내리던 키티 노리스는 예고도 없이 새로운 역할로 잠시 모습을 나타낸 것만으로도 톱기사감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둡게 가라앉은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에 비로소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 거친 호기심을 무서운 악의로 받아들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조지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그녀를 껴안다시피 해서 차에 태웠다. 차가 달리기 시작한 다음에도 군중의 눈과 수군거리는 소리가 얼마 동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수선을 피우지요? 도대체 내가 저 사람들에게 어쨌다는 거죠?" 키티가 몸을 떨며 물었다. 차에 함께 탄 여순경이 달래듯 말했다. "저 사람들은 무슨 악의가 있어 그러는 게 아니에요. 그저 구경삼아서......신경쓸 거 없어요." 조지는 자기의 옷소매와 키티의 옷소매가 스치는 것과 아까 가슴을 파고들던 그녀의 체온의 짜릿한 기억을 되새기면서, 안정을 되찾게 해줄 적절한 말이 없을까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여순경의 그 간단한


위로가 의외로 키티의 마음을 가라앉게 해준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에게는 아무 말도 없었거니와 도중에 지친 머리를 기댄 것은 여순경의 어깨였다. "용기를 내요, 키티." 그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차에서 내리게 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이름이 그의 의지를 거스르고 튀어나오려고 혀끝에 대기하고 있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네, 하지만 왜죠?" 키티는 그를 빤히 쳐다보면서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당신 자신을 위해서도 -- 그리고 당신을 믿고 있는 친구들을 위해서도 꿋꿋할 필요가 있어요." 그런, 경찰관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감상적인 말을 입 밖에 내고 나서 그의 목 근육이 화를 내듯 굳어졌다. 잠시 뒤, 그는 그녀가 그 말을 오해한 것을 알고 씁쓸한 뒷맛을 십어 삼키며, 역시 나에게는 아내인 밴디가 알맞다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왜냐하면, 키티는 갑자기 감동한 듯 거리를 좁히더니,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조용히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네, 알겠어요. 도미니크를 슬프게 해서는 안되지요. 저, 링의 공이 울리면 당당히 싸울 거라고 아드님에게 전해 주세요. 도미니크만 제 옆에 버티고 있어 주면 절대로 지지 않는다고요." 하기야 그것이 나에게 알맞은 역할일지 모른다 -하고, 조지는 코마번 중심가 쪽으로 되돌아가며 생각했다. 나는 주춧돌과 같은 존재지. 어쩌면 인간이 아니라 관청의 창구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결코 호의적이 아닌, 적의까지 품고 대하는 창구. 하지만 왜 가슴이 설레는 걸까......그는 내뱉듯 혼잣말을 해봤지만, 씁쓸한 뒷맛은 더할 뿐이었다. 질투란 언제나 굴욕적인 것이다. 특히 자신의 아들에 대한 질투는 견디기 어려운 굴욕이다. 마음의 아픔과 양심을 찌르는 죄책감이 밴디에게 좀더 사려깊고 짙은 애정으로 대하게 만들었다. 밴디는 여러 해에 걸쳐 자기를 알고 있고, 내색은 하지 않지만 현명한 여자이므로 그런 유별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오히려 위험하다. 하지만 오랫동안에 걸친 원만한 결혼생활은 그녀의 경계심을 말끔히 가시게 했고, 어쩌다가 교활한 속임수를 쓰는 일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어린아이처럼 천진스러운 것이어서 뒤탈이 없었다. 어쨌거나 아내는 마음으로부터 그를 사랑했고, 아내로서의 위치는 움직일 수 없는 것이었다. 성과도 없는 며칠을 보낸 어느 날 밤, 조지는 얕은 잠에서 깨어나 아내를 더듬었다. 좌절로 마음이 무거울 때면 그것을 떨쳐 버리듯 아내의 품안을 파고드는 것이다. 그녀는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않았지만, 자신이 두 사람의 여성이 될 것을 요구받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두 팔을 벌려


그를 받아들였다. 그녀는 조지가 원하는 -- 필요로 하는 -- 어떤 여성이라도 될 수 있었다. 그가 가장 마음 편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은 대개 한밤중이 지나서였다. 키티가 그날 밤 전화로 도움을 청한 사람이야말로 아마이저 살해범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확신에 가까운 가설을 밴디에게 들려준 것도 수요일 새벽이 가까운 한밤중이었다. "하지만 키티 자신은 조금도 그런 의심을 하고 있지 않은 게 아닐까요?" 밴디가 말했다. "만일 그녀가 곰곰이 생각해 본 끝에 그런 결론에 도달했다면, 가만히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휘발유를 조금 갖다 주었다고 해서 그 범인을 감싸주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겠어요?" "응, 그건 그럴 거야. 그녀는 친밀하고 절대로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을 테니까. 실생활에서는 책에 나오는 비인간적인 퍼즐 같은 수사방법을 취하거나, 동기나 기회가 있다고 해서 모두 의심하지는 않아. 즉, 각 대상자에 대해 알고 있는 걸로 어느 정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한다는 거요. 쉽게 말하자면, 살인을 할 만한 사람과 어림도 없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지. 예를 들어 당신의 가족이나 친구들은 당연히 제외가 되지. 키티가 전화를 건 상대도 키티로서는 당연히 제외될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가령 당신이 도움이 필요해서 나에게 전화를 걸고, 내가 달려갔는데 그 부근에서 수수께끼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그 살인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과연 당신 머리에 떠오를 것 같소?" "그런 생각은 백만 년이 지나도 내 머리에 떠오를 리가 없어요 -- 나에게는 둘도 없는 당신이니까요. 다른 사람을 의심할 게 뻔하지요." "그럼, 돔은 어떨까? 아니면 스티브 아저씨나?" 그녀는 잔소리가 심하기는 하지만 부모 대신에 자기를 키워준 인자한 외삼촌의 얼굴을 눈앞에 떠올리며 픽 웃었다. "못하는 말이 없네요! 그런 성자 같은 분을 끌어들이다니." "그럼, 데이켓 총경은?"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다 알아요. 지금 당신의 머릿속에서 당신을 괴롭히고 있는 사람은 도저히 악한 일은 할 것 같지 않은 사람인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눈 딱 감고 철저히 파헤쳐 보지 그래요. 키티에게 그런 방향으로 접근해 보셨나요?" "응, 모든 수단을 다 써봤지." 키티를 머리에 떠올린 순간, 흥분과 불안이 그의 숨결을 흐트러뜨렸다. 밴디의 머리에 입을 가까이 하고 목소리를 낮게 깔아보았지만 자신을 속일 수는 없었다. 어쨌든 사랑하는 아내를 속이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말이야, 그 전화에 관한 질문에는 전혀


대꾸를 하려고 들지를 않아. 그녀가 그날 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실토를 하지 않는 거라오. 그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척하거나 아예 외면해 버리고 마는 거야. 나는 물론, 데이켓 총경의 심문에도 꼼짝도 하지 않아. 도대체 입을 열지를 않는 거요. 물론 그녀가 전화를건 사람이 범인일지 모른다는 말도 했지. 구슬러도 보고 얼러도 보고 부탁까지 해봤지만 입을 다물 뿐이라고." "도움을 청한 그 사람이 사건과 관계가 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걸 거예요, 아마." "틀림없어. 내색은 하지 않지만." "자기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죄가 없는 그 사람에게 그녀 자신의 고통을 나누어 갖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겠죠." "바꾸어 말해서, 우리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그 사람에 대해서도 유죄로 할 만한 증거를 잡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지." 조지는 투덜대듯 말했다. 그리고 어떠한 외부 압력에도, 무거운 짐을 진 그의 절망적인 혼란에서조차도 변함이 없는 밴디의 존재가, 그녀와 그의 동질성이 갑자기 고마워져서 그녀를 와락 껴안고는 아내의 목덜미의 따뜻한 살갗 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는 남편을 좀더 편하게 해주기 위해 살며시 몸을 돌려 그를 가슴에 안았다. "그럼, 데이켓 총경은 아직도 그녀의 범행으로 믿고 있나요?" 그는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그렇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갑자기 피로가 느껴지면서 말조차 제대로 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 우물거리는 입모양이 마치 키스할 때의 그것과 흡사했다. 사실 그는 도중에서 그대로 키스로 바꿨다. "그렇다면 총경은 그녀를 유죄로 몰고 가려고 하고, 당신은 키티가 결백하다고 믿는 그 남자를 유죄로 믿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이야기네요. 하기야 키티도 딱한 입장이군요. 잘못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가는 뜻하지 않은 폐를 끼치게 되니까. 그녀가 자기의 무죄를 증명하는 것을 단념하고 입을 다물려고 하는 것도 당연할지 몰라요." 조지는 한 순간 울컥해서 거기에 반박하려고 했다. 그는 그런 일에 죽자사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단죄를 위한 단죄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X 의 행동을 신중히 논리적으로 규명하려는 것이다. 그는 입안에서 그렇게 말했다. 동트기 전의 고요 속에서, 도미니크가 토요일 저녁에 조지의 마음속에 있었던 그 말을 그에게 선전포고로 내던졌을 때 이상으로 감동적으로 느껴졌다. 잠시 사이를 두고 밴디가 말을 이었다. "그런 상태라면 키티는 당신에게 입을 열 것 같지 않군요.


누군가 그녀가 그것을 털어놓을 만한 상대에게 부탁을 하면 어떨까요? 나는 당신만큼 키티를 모르지만 -- " 그녀의 손이 조지의 볼을 애무하고 있었다. 그의 굴욕적인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녀는 그런 남편의 비밀을 알 까닭이 없으니까......하지만 그는 그녀가 마음을 꿰뚫어보고 있다는 공연한 망상을 뿌리칠 수 없었다. "혹시 레슬리 아마이저에게 부탁해서 그녀에게 진상을 물어보게 하면 그녀도 결심이 꺾여 모든 걸 고백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 생각이 틀렸는지 모르지만 - 20- " 밴디는 자기의 생각이 틀림없다고 확신하면서도 조심스럽게 그렇게 말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 "두 젊은이는 거의 남매처럼 자란 사이고, 또 지금도 서로 사랑하고 있으니까 말이에요."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아." "왜죠?" "레슬리가 바로 그 남자일 것 같아서 말이오! 아직 깨뜨릴 수 없는 벽이 하나 가로놓여 있기는 하지만, 레슬리가 틀림없다고 나는 생각해." 그는 그녀가 놀라움과 의아스러움으로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머리를 매만지던 아내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의 셋방에 전화가 없는 것은 사실이야. 그는 은연중에 그런 말을 비치기도 했지. 하지만 막대한 재산이 굴러들어갈 곳이라고는 그곳밖에 없거든." 그는 신체적으로는 그녀의 품에서 반은 잠들어 있었지만, 정신적으로는 괴로울 정도로 말똥말똥해서 아내의 숨소리를 피부로 느끼고, 그녀가 그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을 의미의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그게 어째서 레슬리라는 건지 나는 모르겠네요." 밴디가 명백히 잘라 말했다. "그야, 나도 단언할 수는 없어요. 전화가 없으니 말이야 -- 아무래도 그 벽을 뛰어넘을 수 없거든." "아니, 그런 뜻이 아니에요. 나는 말이에요, 비록 레슬리에게 전화가 있었다 해도 키티는 그에게 전화를 걸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따라서 당신이 왜 레슬리를 지목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는 이야기랍니다." 하지만 그녀가 그런 말을 했을 때 그는 이미 그녀의 볼에 입을 댄 채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키스를 했다.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정말 불쌍한 양반!" 그렇게 중얼거리고 그녀 역시 남편을 품에 안은 채 어느덧 잠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새벽에 눈을 떠 문득 아내의 말을 기억해 내고는 벌떡 윗몸을 일으켰다. 사건 전체를 원점으로 돌려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면 뭔가 서광이 비칠 것만 같은 기분이 든 것이다. 이윽고 그는 밴디가 잠을 깨지 않도록 가만히 몸을 눕히며,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전력을 다하여 수사를 개시했다.


그날 저녁 늦게, 노력에 비해서 별 소득이 없는 하루의 근무를 끝내고 집에 돌아온 그는 가방을 챙기고 모자를 벗어 거는 동안에 거실에서 달려나온 도미니크를 보고도 여느 때처럼 웃는 낯을 보일 기력이 없었다. 넥타이를 푸는 그의 앞에 걸린 거울 속에는 회갈색 머리가 이마 위에 몇 가닥 축 늘어지고, 피로에 지친 41 세의 그의 얼굴이 있었다. 그 곁에 별안간 신선한 우유처럼 싱싱한 16 살난 소년의 얼굴이 나타났을 때, 그는 자기도 모르게 멈칫해서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린 듯 짙은 눈썹, 풍성한 머리칼......삶의 어려움이나 걱정은 물론 얼룩이나 때 같은 것과는 인연이 먼 젊고 순진한 얼굴이었다. 그것과 대조를 이룬 자신의 몰골이 불쾌할 뿐만 아니라, 그의 기대가 배반당한 어떤 뉴스를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는 듯한 도미니크의 진지한 눈길조차도 사정없이 그의 마음을 난도질했다. "안됐다만,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조지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도미니크는 움직이지 않았다. 코트를 들고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조지의 움직임을 불안한 눈이 따라 움직였을 뿐이다. 문제의 장갑을 찾는 일을 오늘까지만 경찰에 맡기기로 했던 도미니크였다. 하지만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면 더 이상 경찰에 기대를 거는 일은 부질없는 일일 것 같았다. 더 기다린다고 해서 경찰에 요행이 있을 것 같지가 않은 것이다. 행운의 여신은 그 손목을 잡고 끌고 오기 전에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강이 뗏목으로 막히면 누군가가 돌파구를 만들어 흘러가게 해야 한다. 도미니크는 그 돌파구를 열 다이너마이트의 구실을 할 능력이 있다고 스스로를 평가할 생각은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자부심과 용기가 필요했다. 더구나 도미니크의 가슴에 숨겨진 당돌한 작전에 경찰의 지원 같은 것은 도저히 바랄 수 없었기에 아버지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아버지에게 자칫 한마디라도 누설했다가는 즉시 작전 전체가 산산조각날 것이다. 그 혼자의 힘으로 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고, 비록 도중에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해도 아버지의 도움을 청할 수는 없었다 -- 하지만 작전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완벽을 기할 필요가 있었다. 아직 미심쩍은 것이 몇 개 남아 있었다. 아버지와 맺은 묵계도 있고 해서 그에게는 물어볼 수 없었고, 레슬리 아마이저에게 물어보면 말해 줄 것 같았다. 도미니크는 밴디의 뒤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가며, "저, 잠깐 나갔다 올께요, 어머니." 하고 말했다. 8 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그녀는 놀란 얼굴을 했으나, 행선지나 이유는 묻지않고 단지 이렇게민 말했을 뿐이다. "그러려무나. 너무 늦으면 안된다, 돔." 좋은


어머니다. 도미니크는 별안간 어머니를 꼭 껴안고 싶었지만, 그녀가 뜨거운 다리미를 들고 있어서 그만두었다. 그는 아직 숙제에 손도 대지 않고 있었으나 그녀는, "너는 학교 숙제가 남아 있지 않니?" 라고 아픈 곳을 지적하지 않았다. 아들이 며칠 동안이나 공부에 열중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대개의 어머니들은 잔소리를 하기 마련인데 말이다. 그는 자전거를 몰아 코마번으로 가서, 해크니스 부인의 낮은 철대문을 들어섰다. 밖에 아마이저 부부의 셋방으로 통하는 벨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고장이 잦았으므로 현관으로 들어가 계단을 뛰어올라, 직접 그들의 방을 노크하기로 마음먹었다. 셔츠 차림의 레슬리가 담배 연기가 자욱한 속에서 테이블에 수북히 쌓인 책 너머에 앉아 있었다. 학교 숙제에 손도 대지 않고 있는 도미니크에 비하여 레슬리는 공부에 파묻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을 학위도 얻기 전에 나와 버렸다. 그의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행동했고, 돈을 쓰고 싶은 대로 쓰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사교적으로는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으나 학업은 낙제하지 않을 정도로만 꾸려 나갔었다. 늙은 지도교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교수의 보수적인 대학관에 보답하기 위해 교수를 만족시킬 만큼의 공부만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결혼과 책임이 그의 긴 청춘시대의 막을 하루 아침에 닫게 한 지금에 와서, 그걸 만회할 필요에 쫓기고 있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공부에 방해가 돼서." 도미니크는 당황해서 양해를 구했다. "상관없어. 어서 들어와." 레슬리는 읽던 책을 덮고, 책더미를 옆으로 밀었다. "덕분에 좀 쉴 수 있게 됐구나. 그런데 무슨 변화라도 생겼나? 키티에 무슨 일이라도?" 도미니크는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은 그 뒤 한 번도 그녀를 만나러 간 일이 없었나요?" "그래. 너무 자주 찾아가면 면회금지가 될지도 모르고. 달리 내가 도와줄 일이라도 있니?" "네. 이런 일을 물어보면 이상할지 모르지만 -- 그 간판 그림 말입니다. 그걸 되찾으려고 여러 가지 책략이 오고간 모양이던데, 거기에 관해서 설명을 좀 해주시겠어요? 사실 저는 어떤 추리를 해보고 있는 중입니다만, 세부적인 것에 모르는 것이 있어 그것이 정확한지 모호해서요." "허, 너는 그 '즐거운 여자'가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레슬리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담배연기 너머로 그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건너다보았다. 이 소년의 특별한 점은 전혀 특별한 점이 없다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키가 크고 얼굴도 잘생겼으며, 적당하게 외향적인데다가 건전한 정신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이 무대에서 자신의 역할을 조금은 과대평가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하기야 그러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할지도 모른다. 이런 종류의 소년은 어떤 사립학교에 집어넣어도 큼직한 발로 우뚝 서서 곧장 자기의 기반을 확보할 것이다. 모든 상황에 대응할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아마도 스포츠에서는 남달리 뛰어나며, 학업에서는 또래들보다 우수할 뿐만 아니라 지적인 취미 한둘은 무난히 익힐 만한 여유를 가질 것이다. 예를 들어 학생 연극에 십분 재능을 발휘하는가 하면 모터사이클에 열중하고, 금발의 아름다운 소녀에 넋을 잃기도 하는......너무나 평범하고 정상적인 그가 지금 살인사건이라는 아주 동떨어진 세계에 뛰어들어, 최대한의 지혜를 짜내어 사건을 해결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레슬리는 그를 바라보면서 눈에 초점이 맞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각각의 구성 부분이 너무나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어 서로 다른 차원으로 분산되어 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모두가 통상적인 화법에서 이탈하는지도 모른다 -- 하고 레슬리는 생각했다. 도미니크의 경우는 젊은 만큼 그런 경향이 더욱더 두드러지는 것 같다. 레슬리는 긴의자에 그와 나란히 앉아 '즐거운 여자'의 내력부터 설명했다. 도미니크는 가끔 짧은 질문을 하며 눈을 반짝이고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 도중에 진이 그를 위해 코코아와 비스킷을 가져왔다. 그녀는 세 명의 동생과 함께 자랐기 때문에 남자아이에게 마실 것이나 과자를 내주는 버릇에 익숙했다. "그렇다면 클렌머라는 화상이 그 그림이 대단히 값비싼 물건이라는 것을 당신 아버지에게 은밀히 알렸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되는군요." 도미니크의 눈은 생기가 넘치고 빈틈없는 빛을 발했다. 그가 추리한 대로 일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당신을 만나러 온 것은 셸레이 씨였잖아요." "그야 아버지의 대리로서지."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요? 당신은 셸레이 씨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렇게 믿고 있는 게 아닐까요? 예를 들어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지요. 클렌머는 그 그림이 상당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또 당신 아버지가 그걸 쓰레기 같은 것으로 여겨 당신에게 보냈다는 사실도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당신 아버지에게 알려 환심을 사두면 장차 좋은 고객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회사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아마이저 씨는 그때 회사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클렌머는 셸레이 씨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고 사장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셸레이 씨는 그 말을 전하지


않고 자기가 직접 단물을 챙기기로 한 겁니다. 그분은 당신이 아버지와 화해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 따라서 전화나 편지로 왕래하거나 직접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틈을 잘 이용하기로 한 겁니다. 그분은 클렌머에게 자기들이 짜기만 하면 큰 돈을 벌 수 있으니까, 아마이저에게는 아무 소리 말고 이익을 반씩 나눌 생각이 없느냐고 이야기를 건네고서, 클렌머의 동의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셸레이 씨는 당신에게로 와서, 당신의 아버지가 굴욕적인 선물을 보낸 것을 후회하고서 자기를 보내어 500 파운드를 주고 그 그림을 되찾아오게 하더라는 말을 사실처럼 한 겁니다. 제가 듣기에는 그분이 500 파운드를 현금으로 갖고 왔다면서요? 좀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아니, 별로......아버지는 평상시에도 그만한 돈은 현금으로 갖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너의 추리도 일리가 있어. 현금이라면 수표가 아니어서 아버지의 사인을 받을 필요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가령 그 사람이 그런 음모를 꾸몄다고 해도, 내가 단호히 거절한 이상 더는 끼어들 용기가 나지 않았을 것 같은데? 모험이 지나치니까." "하지만 적지 않은 돈이 걸려 있는 일입니다. 당신이 거절하자 그분은 몰래 여기에 와서 그림의 소유권을 나타내는 유일한 물증인 그 편지를 훔쳐냈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에 대한 당신의 감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어느 정도 안심하고 다음 계획으로 옮겨갈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아버지를 만나는 것이나, 뭘 받는 것조차 싫어할 뿐더러, 간판 때문에 받은 모욕으로 아버지를 공공연히 비난할 생각도 없을 것으로 단정한 겁니다. 기껏해야 화풀이로 편지 한 통 보낸다고 해도 그걸로 끝나리라고 계산한 거지요. 왜냐하면 당신은 곧 클렌머에게서 그 그림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거짓 통보를 받게 되어 있었으니까요. 정말 야비한 사기꾼이지요! 하지만 그 통보를 받은 당신은 아마도 이렇게 말하며 손뼉을 치고 좋아했을 겁니다 -- 욕심꾸러기 아버지 같으니라고. 내가 화상에게 그림을 감정케 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값나가는 건 줄 알고서 그걸 되찾으려 했지만, 쓰레기나 다름없다는 감정이 나왔어. 이젠 자신이 바보스럽게도 성급했다는 걸 알았겠지. 약을 올려줄 셈으로 그 늙은이 방에 그림을 갖다 걸어놔 줄까? 아마도 울화가 치밀어 펄펄 뛰겠지 -- 하기야 자업자득이지 만." 도미니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보수적인 기준으로는 버릇없는 말을 입에 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비록 고인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걸 입에 담을 수는 없는 것이다. 레슬리가 죽은 아버지를 아끼고 사랑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하나, 자식으로서의 도리라는


것은 있지 않을까? 비록 진보적인 사람들이라고 해도, 한 겹 벗기고 보면 무섭게 보수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도미니크의 얼굴이 입술까지 창백해졌다가는 곧 귀밑이 빨개졌다. "죄송합니다, 나도 모르게 버릇없는 말을 해서. 당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그만 잊고 말았어요. 용서하세요." "아니, 신경쓸 거 없어요." 레슬리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일이 그렇게 돌아갔다면. 하기야 아버지라는 분은 남이 뭐라고 욕을 하든 개의치 않았지. 그것이 아버지의 장점이기도 했고. 남이야 뭐라든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만 밀고 나가거든. 부하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렇게 격려하는 거라네. '상관할 거 없어! 당당히 해치우는 거야!'" "어쨌든 죄송합니다. 말이 지나치다면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셸레이 씨가 실제로 그런 음모를 꾸몄다면 그것이 어떤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이해가 가십니까? 만일 클렌머가 당신에게 아버지가 그 그림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면, 당신은 별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명된 그림 때문에 시달리는 것이 번거로워서라도 곧 아버지에게 돌려보낼 겁니다. 셸레이 씨가 노린 점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셸레이 씨와 클렌머가 몰래 그림을 처분하여 그 돈을 나눌 작정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날 밤 셸레이가 개업축하 파티에서 집에 돌아가 있는데 뜻밖에도 키티에게서 전화가 온 겁니다. 당신은 그녀가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줄 만한 사람으로 그분을 꼽았었지요. 실제로도 그녀는 그분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을 겁니다. 그녀가 당신이 댄스 홀에서 아버지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하는 순간, 그것은 그에게 의미심장한 암시를 주게 됩니다. 하기야 그녀가 당신의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는 것뿐이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셸레이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겁니다. 당신이 그림을 깨끗이 포기하기는커녕, 오히려 아버지의 비열한 속임수를 공박하기 위해 직접 쳐들어간 것이니까요. 물론 그때 그는 당신이 아버지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대충 짐작은 했을 겁니다. 이제 그 음모가 드러나면 셸레이의 일생은 끝장이 납니다! 그는 10 여 년을 당신 아버지 덕으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것이 이젠 물거품이 되고, 더구나 당신 아버지를 적으로 돌리고서 새 출발을 해야 할 형편이 된 것입니다. 더구나 고소라도 당한다면 창피도 이만저만이 아니지요. 그런데 키티가 그는 속사정도 모르고 당신 아버지를 계단에서 밀어 떨어뜨려 기절시켜서 쓰러져 있다는 말을 전화로 한 겁니다.


만일 셸레이가 그 불명예를 미리 막고, 동시에 그 그림을 차지하려면 그 기회를 놓쳐서는 안되겠지요. 그래서 셸레이는 곧 갈 테니 기다리라고 키티에게 말하고는, 차를 달려 댄스 홀로 가서 쉽게 당신 아버지를 해치웠을 겁니다." 레슬리와 진은 놀라움과 의아스러움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윽고 레슬리가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군. 아버지와 등을 졌다가는 그 사람도 끝장이니까. 따라서 그로서도 어떻게든 궁지를 벗어나려고 발버둥쳤을 거야. 피를 볼 각오도 했겠지. 더구나 적지 않은 돈이 날아갈 판이었으니까. 또한, 그런 음모가 세상에 알려지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일이고." "당신이 아버지에게 편지를 훔쳐간 것을 따졌을 때, 전적으로 부인을 하시더라면서요?" "응, 부정은 했지만......" 레슬리는 동의는 했다. "아버지는 웬만한 분이 아니거든. 나는 그때 아버지가 시치미를 떼는 걸로 알았지. 사실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진은 양손으로 턱을 고이고 도미니크와 남편을 번갈아 바라보며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반박하고 나섰다. "아니, 그렇지 않아요. 그럴 리가 없다구요. 지금 한 이야기 중에서 꼭 하나 틀린 곳이 있어요 -- 하지만 그 하나 때문에 전체가 달라지게 돼요. 어머, 미안해요. 이런 밑도끝도없는 말을 해서. 나는 셸레이 씨의 짓이 아니라고 잘라 말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셸레이 씨의 짓이라면 그렇게는 되지 않았을 거라는 뜻이예요." 그들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얘기?" 두 남자의 입에서 동시에 의문이 튀어나왔다. 진은 유치원 선생이 개구장이들을 가르치듯이, 그러면서도 당당한 권위를 가지고 입을 열었다.

<PRE>번 호 : 27 / 76 등록일 : 1999 년 08 월 11 일 15:47 등록자 : CYBER105 조 회 : 103 건 제 목 : 죽음과 즐거운 여자 13 장 - 엘리스피터스 [귀니사랑] </PRE>

제 13 장 나뭇잎이 떨어지고 서리가 하얗게 내리는 10 월이 되었다. 아마이저스 에일 사의 본사 건물 앞 잔디밭에는 성장을 멈추고 겨우살이에 들어간 앙상한 나무가 검은 구름이 흐르는 하늘을 배경으로 가지를 흔들고 있었다. 한편, 본사 건물 내부에는 금년에 새로 설치된


난방장치가 가동을 시작했다. 목요일 오후 5 시, 루스 해밀턴은 계단을 내려오면서 창 밖에서 들려오는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오늘밤에는 폭풍우가 몰아칠 것 같았다. 푸른 하늘의 계절은 끝나고, 여름에 이어 가을로 접어든 계절은 하룻밤 사이에 사라져 버릴 것이다. 건물 입구에 마련된 수위 책상에서 채롯 노인은 이미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해밀턴 양이 늘 늦게까지 남아 일하는 것이 이 노인의 불만이다. 회사의 핵심적인 일을 맡아 하는 그녀를 함부로 비난할 수는 없었지만, 노인은 그녀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일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노인은 눈꼬리로 시계를 보고, 다른 한쪽 눈으로는 계단을 살피면서 초조하게 해밀턴 양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면서도 감색 털실로 짠 장갑을 끼고서, 어떻게든 노인의 관심을 끌고 싶어 서성거리는 소년을 애써 모르는 척했다. 도대체 그래머 스쿨 학생이 이 시간에 여기에 무슨 볼일이 있단 말인가? 하기야 어떤 시간대라고 해도 마찬가지이지만. "무슨 일이지요, 채롯?" 계단을 내려와 번쩍거리는 대리석 위를 당당하게 걸어나오던 해밀턴 양이 말했다. "무슨 볼일로 찾아온 거지?" 제기럴! 그녀가 1 분만 더 늦게 내려올 일이지......그러면 저 애송이는 제풀에 지쳐 돌아갔을 것이고, 나 역시 곧 퇴근할 수 있었을 텐데! 일이 이렇게 틀어진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녀는 애송이의 용건을 듣게 될 것이니, 문단속을 하고 집에 가려면 한 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되겠는걸. "이 아이가 셸레이 씨를 만나러 왔다고 합니다. 셸레이 씨가 이미 퇴근했다고했는데도 믿지 않는군요. 별로 급한 일도 아닐 텐데......" 소년은 가방을 옆에 낀 채 노인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니, 급한 일입니다. 급히 그분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요. 하지만 정말 안 계시다면......" 의기소침한 목소리가 되었다. 그리고 불안스럽게 깜박거리는 큰 눈동자가 안타까운 듯 해밀턴 양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슨 도움될 만한 것이라도 기대하는 듯한 눈길이었다. 그녀는 소년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본 것 같았다. 소년이 혼잣말을 했다. "이 일을 어쩌지?" "셸레이 씨는 오늘 일찍 나가셨어. 지금 바쁜 일을 맡고 계셔서." 그녀는 구체적인 말은 하지 않았다. 이 소년이 레이 셸레이의 시간과 머리를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그 사건에 관해 관심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마 오늘은 만나뵙기 어려울 거야. 어떤 분과 만날 약속이 있어 나가셨으니까. 상대방과 밤늦게까지 일을 처리해야 될 텐데." 그 약속 상대는 변호사였다. 당연히 키티와도 상의를 할 것이다. "내일은 안되겠니? 내일은 계속 회사에 계실


텐데." "저는 학교를 빼먹을 수 없어요." 소년은 시무룩하게 말했다. "오늘도 좀더 빨리 오려고 했습니다만 럭비 연습이 있어서 그걸 끝내고 오느라고......" 정말로 그는 샤워를 급히 끝내서 그런지 왼쪽 관자놀이 쪽의 짙은 밤색 머리에서 귀에 걸쳐 운동장의 흙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해밀턴 양은 그런 것을 재빨리 알아보았다. 그녀는 청소년들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이 소년의 차분하면서도 긴장된 태도의 그늘에는 무엇인가 중요한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바다의 부표보다도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었다. "학생하고는 어디서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은데......얼굴이 낯익거든." 창백한 미소가 굳은 그의 얼굴의 선을 흐트러뜨렸다. "지난 여름에 두 번, 학급 친구들과 당신의 클럽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티 파티에서 만나뵈었지요. 저는 크리켓 시합에도 나갔었습니다 -별로 잘하지는 못했지만요. 내 이름은 도미니크 펠스입니다." "펠스? 그럼, 부장형사 펠스 씨의?" "제 아버지입니다." 소년은 그렇게 말하며 가방을 더욱 힘주어 안았다. 온몸의 근육이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듯 부르르 떨린 것 같았다. "실은 셸레이 씨를 만나뵈려 한 것도 그 사건과 관계가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설마 아버지가 보내서 --?" "아버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제 개인적인 일로 셸레이 씨를 만나뵈려고요." 도미니크가 급히 해명했다. 그건 정말인 것 같았다. 무엇인가 중대한 문제가 그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조금만 어깨를 다독거려 주어도 딱딱한 긴장이 풀리면서 그의 마음속에 꽉 차있는 것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해밀턴 양은 소년들의 속마음을 알아보는 데 익숙했다. 그 또래의 아이들 중에는 이런 얌전한 모범소년과는 비교도 안되는, 다루기 힘든 비행소년도 있었다. 도미니크가 흘끔 홀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채롯 영감도 아까부터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감의 시간은 어디까지나 영감의 시간이다 -- 무시당할 성질의 것이 아니잖는가. 이런 애송이의 응석에 귀를 기울일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영감은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두 사람의 대화를 일부러 듣지 않으려고 아까부터 딴전을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안될까?" 그녀는 부드럽게 물어보고는, 채롯의 눈에 역력한 불만의 빛이 감도는 것을 보았지만 모르는 척하고 다시 소년에게 말을 건넸다. "나라도 상관없다면 얘기를 들어줄 수 있는데. 이리로 와."


그때 채롯 영감의 열쇠 다발이 못 참겠다는 듯이 쩔렁거렸다. "영감님은 현관문 한쪽만 열어두고 돌아가셔도 돼요. 내가 퇴근할 때 잠글 테니까요." 늙은 수위는 해밀턴 양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코트의 단추를 채우고 모자를 집어들고 있었다. "문단속을 모두 끝내고 돌아가는 것이 내 의무지만, 당신이 정 그러시겠다면 -- " 누가 그 속을 모를 줄 알고 -- 그녀는 뭐라고 한마디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자칫 비위를 거슬렸다가는 난방장치의 조절을 태만히 하거나 티 타임을 늦추거나 해서 애를 먹이는 영감이다. 머지않아 퇴직을 시켜야겠다. "그래요, 어서 할머니한테 돌아가세요. 현관문 단속은 잘할 테니까." 그녀는 도미니크의 손을 잡고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 내 방으로 가자. 그래야 차분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테니까." "미안합니다. 폐를 끼치는 건 아닌지 -- " 도미니크는 죄송한 마음으로 손을 이끌린 채 뒤를 따랐다. 그녀는 소년이 안도와 희망으로 손아귀의 힘이 한결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꼈지만,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번민의 그늘이 가시지 않는 것을 눈여겨 보았다. 아마도 그것을 그리 쉽게 걷어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충분한 이야기를 하고 나면 나누어 가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녀는 자기 사무실로 들어가서, 그를 손님용 의자에 앉게 하고 의자 하나를 끌어다가 책상 옆에 놓고 거기에 앉았다. 그 위치는 소년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보는, 그가 그녀의 시선을 피하기 어려운 각도였다. 사실 그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려는 기색도 없이 어둡고 진지한 눈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소년을 떠볼 생각으로 천천히 담배 상자에 손을 뻗어 한 개비를 꺼내 들었다. 소년은 후다닥 일어나서 탁자 위의 라이터를 켜 그녀의 담배에 가져갔다. 상당히 어른스러워져 있다는 증거다. 단, 그의 손이 떨리고 있어 그 손을 꼭 잡아주어야 했다. 만일 그녀가 잡은 손길에 좀더 감정이 실려 있었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와락 울음을 터뜨렸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자, 앉아요." 그녀는 야무지게 말했다. "그래, 무슨 이야기지? 셸레이 씨에게 하고 싶다는 것이?" "실은, 저 -- 셸레이 씨는 키티 노리스의 법정대리인을 맡아보고 계시니까, 그분과 함께 의논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아서요 -- 실은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도미니크의 말이 혀끝에 걸려 매끄럽지가 못했다. "난처한 일이 생겼어요. 저로서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누구하고 의논을 했으면 해서요 --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경찰에서는 장갑을 사건 발생 이래로


찾고 있었는데, 마침내 그것이......" "장갑이라니, 무슨?" 해밀턴 양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범인의 장갑 말입니다. 아마이저 씨를 살해한 범인은 장갑을 끼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고 경찰에서는 보고 있어요. 더구나 그 장갑은 피투성이가 되어, 범행 직후 어딘가에 버려지거나 숨겨졌을 것으로 생각하고 범행의 결정적인 증거가 될 그 장갑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었던 겁니다. 저도 그 장갑을 찾고 있었지요. 왜냐하면 -- " 그는 절망적인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는 그것이 키티의 장갑이 아닐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걸 찾아내 그녀의 결백을 증명하려고 했던 거예요. 그리고 마침내 저는 그것을 찾아냈습니다." 그의 말소리가 꺼질 것처럼 작아졌다. "그럼 잘됐네. 네 생각대로 된 것 아니니?" 그녀는 신중하고 조리있게 말했다. "아마 너는 그걸 아버지에게 건네드렸을 테고, 그럼 만사는 순조롭게 풀릴 텐데?" 그는 학교 가방을 옆의 바닥에 놓았다. 가방에서 해방된 손을 무릎 위에서 마주잡았다. 그는 깍지낀 굳은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뇨, 저는 그걸 아버지께 드리지 않았습니다. 입 밖에 내지도 않았어요. 차마 그럴 수가 없었어......저는 이제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저는 그것이 남자 장갑일 것으로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그렇지 않았어요. 여자의 것이었습니다. 키티의 -- 키티의 장갑이었던 겁니다." 깍지꼈던 손가락이 갑자기 퉁기듯 갈라졌다. 그 손으로 자제력을 잃은 얼굴을 감싸며 그는 소리를 죽인 오열에 잠겨 어깨를 들먹였다. 그 흐느낌은 쉽게 멎을 것 같지가 않았다. 해밀턴 양은 담배를 재떨이에 놓고 그의 양 어깨에 손을 얹었다. 처음에는 부드러웠으나 차차 세차게 힘을 주어 흔들었다. "자, 그만 울고, 좀더 자세히 이야기해 봐. 그걸 어디서 발견했지? 경찰이 못 찾은 것을 넌 용케도 찾아냈구나." "그것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어깨를 들먹이며 간간이 말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어요. 우연히 발견했을 뿐입니다. 만일 제가 당신에게 자세한 것을 이야기해 버리면 당신까지 거짓말을 하게 될 겁니다." "애, 난 너의 힘이 되어주려는 거야. 네가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면 정말로 그것이 얼마만큼 중대한 일인지 판단을 할 수가 없잖겠니? 네가 잘못 생각한 건지도 모르는 일 아니야? 어쩌면 그것은 범행에 쓰인 것이 아니어서, 네가 조금도 괴로워할 일이 아닐지도 모르고." "아닙니다. 그건 절대적으로 범행에 쓰였던 겁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만일 경찰에서 안다면 --


그녀는 이제 -- 모면할 길이 -- " 흐느낌이 심해져서 그의 몸에 경련이 일고, 그녀가 아무리 참을성 있게 질문을 해도 계속 울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반은 광란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일단 단념을 하고 사무실과 이어진 욕실로 가서 컵에 냉수를 담아 왔다. 그녀는 위엄을 갖춘 태도로 말없이 컵을 그의 입술에 대주었다. 그는 아직 띄엄띄엄 격하게 파도치는 경련으로 몸을 비틀면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순순히 물을 받아마셨다. "그 장갑에는 피가 --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아아, 나는 어떻게 해야 되죠?" 그녀는 도미니크의 등뒤에 서서 착잡한 생각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손등으로 마구 눈물을 닦고 구겨진 손수건으로 흐느낌을 억눌렀다. "그래서 셸레이 씨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했구나?" 그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은 그녀의 대리인입니다. 사실대로 얘기하 면 그 장갑을 맡아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분이 책임을 지시고......저는 아버지가 경찰관이어서 -- " 해밀턴 양이 의미심장한 투로 말했다. "네가 그런 마음이라면 아예 그 장갑을태워 없애버리고 모르는 척하지 그러니?" "예? 그런 짓은 할 수 없어요! 그런 짓을 할 수 있다면 쓸데없는 걱정을 왜 하겠습니까. 제 입장을 모르시나요? 제 아버지는 -- 아아, 생각만 해도 미칠 것 같아요. 아버지는 진심으로 저를 믿고 있답니다!" 그는 격하게 몸부림 쳤다. 얼굴이 일그러지고 다시금 울음을 터뜨릴 기세였다. "전, 저는 키티를 살려내고 싶다고요!" 16 살의 비련은 보기에도 딱했다. 그의 심정에 동정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그녀는 이해했다. 해결책은 어찌되었든 문제의 소재는 명백해졌다. 그는 스스로 찾아낸 무거운 짐을 오랫동안 짊어지고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언젠가 그것은 그의 아버지의 어깨 위에 얹힐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우선은 누가 그를 대신해서 그 시급한 짐을 져주어야 한다. "도미니크, 너는 진심으로 키티가 아마이저를 살해한 것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구나?" 그녀가 물었다. 키티는 어디서 이 갸륵한 숭배자를 만나고, 어떻게 해서 서로 세례명으로 부를 만큼 친한 사이가 되었을까 -- 하고 해밀턴 양은 의아해 했다. 하긴, 키티는 원래 사교적이고 종잡기 어려운 여자였으니까.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너는 용기를 내어 그 신념을 관철해야 해. 셸레이 씨에게는 아무 말 하지 않는 게 좋아. 그분은 법률 전문가니까. 그런 분에게 그런 짐을 지게


하는 것은 잔혹하거든. 정 뭣하면 내가 맡아 주지. 나는 법률가가 아니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시치미를 뗄 수 있어." 도미니크의 긴 눈썹이 치켜 올라가며, 큰 눈이 당혹감과 희망으로 눈부시게 빛을 발했다. 그는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잘라 말했다. "합법적이든 비합법적이든, 나는 키티를 형무소에 보내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도움이라도 주고 싶어 -- 비록 그녀가 정당방위나 어떤 이유로 그 거친 영감을 죽였더라도. 물론 나도 너와 마찬가지로 키티가 한 짓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지만 말이야. 그러니 그 장갑을 발견한 것은 나라고 해두는 것이 어때?" "정말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그는 엉거주춤 일어섰다. "그렇게 해주시면 전 살 것 같겠는데 -- " "내가 그걸 어떻게 처분하든 너는 신경쓸 거 없어. 너는 장갑을 내게 넘겨주고 그걸로 말끔히 잊어버리면 그만인 거야. 네가 그걸 발견한 일도, 나에게 준 일도 모두." "다행입니다! 하지만 저는 학교에서 곧장 이리로 왔기 때문에 그 장갑을 지금 갖고 있지 않아요. 그런 재수없는 것을 하루 종일 갖고 다닐 순 없거든요. 잘못해서 흘리면 큰일이고, 또 교실에는 악의는 없다 하더라도 짓궂은 친구들도 있어서요 -- 만일 그 녀석들이 끄집어내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지요. 그렇지만 저는 오늘 저녁 피아노 레슨 때문에 다시 한 번 코마번에 나와야 합니다. 그때 갖고 와서 당신에게 드렸으면 좋겠는데 괜찮을까요?" "물론 상관없어. 그런데 오늘밤 클럽에 나가기로 했는데......피아노 선생님 댁은 어디지?" 그는 차츰 기운을 차리고 침착하고 어른스러운 목소리로 되돌아갔다. 그 집은 교외의 브룩 가(街)에서 헤딩턴 골목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었다. "레슨은 9 시에 끝나는데, 저는 대개 9 시 20 분 버스로 코마퍼드로 돌아갑니다." "오늘밤은 버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그녀는 상냥하게 말했다. "그때쯤에는 클럽의 모임도 끝나니까, 내가 브룩 가까지 차를 몰고 가서 너를 태워 집에 데려다 줄께. 9 시에 거기에서 만나기로 하자. 됐지?" "네, 됐습니다. 수고를 끼쳐 죄송합니다." 그는 부끄러운 듯 손등으로 재빠르게 눈을 닦고는, 그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올렸다. "이성을 잃은 모습을 보여 드려서 부끄럽습니다. 정말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서 -- " "이젠 괜찮아?" "네, 안심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기 세면장으로 가서 얼굴을 닦고 집에 돌아가도록 해. 이제 걱정 같은 건 그만하고. 하지만


이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면 안돼. 잘못되면 우리 둘 다 모두 난처해지니까." "네, 절대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굳게 약속했다. 그녀는 앞장서서 계단을 내려가, 쥐죽은 듯 고요한 홀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갔다. 조명을 끄고 현관에 자물쇠를 채우고 밖으로 나왔을 때, 소년은 힘을 되찾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의 어린애 같은 추태를 부렸던 것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이 애써 어른스럽게 달려가 그녀를 위해 문을 열어주기도 하고, 그녀의 크고 낡은 라일리가 세워져 있는 주차장까지 의젓하게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버스 정류장까지 태워다 줄까? 어서 타." "아, 아닙니다. 자전거를 타고 왔거든요. 정문 곁 자전거 세워두는 곳에 있어요." 그러면서 그는 자동차 문을 열어, 그녀가 운전석에 자리잡은 다음에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그녀가 계기판 옆의 대시보드(자동차 운전석 앞에 붙어 있는, 물건을 넣어두는 곳)에서 검은 가죽장갑을 꺼내어 손에 끼고서 시동을 걸 때까지 차 곁에 꼿꼿이 서 있었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는 뒤쪽으로 가서 그녀가 차를 돌릴 공간을 살펴준 뒤, 미소를 짓고서 손을 흔들며 멀어져 가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녀가 떠나고 나자 그는 차가운 바람에 문득 잠이 깬 것처럼 자전거 있는 곳으로 달려가, 날렵하게 올라타고는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가게 문이 여기저기 닫히기 시작하고 있었으며, 듬성듬성해진 거리의 불빛이 젖은 보도 위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PRE>번 호 : 28 / 76 등록일 : 1999 년 08 월 11 일 15:47 등록자 : CYBER105 조 회 : 97 건 제 목 : 죽음과 즐거운 여자 14 장 - 엘리스피터스 [귀니사랑] </PRE>

제 14 장 브랜던 루카스 교수가 어느 주말에 열리는 미술강습회에 가는 도중에, 큰맘먹고 길을 돌아 아마이저 내외를 방문한 것은 목요일 해질 무렵이었다. 별로 마음에 내키지 않는 강습회였지만, 경솔하게도 약속을 해놓았던 것이다. 앞서 큰맘먹고라고는 했지만, 방문 그 자체가 예정에 들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교수는 '즐거운 여자' 간판에 관한 조사자료를 갖고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번거로운 강습회 장소까지 가는 길이 지루하지 않고, 또 곧장 그곳으로 가는 데 대한 저항감이 일어나지만 않는다면 이번 방문은 뒤로 미룰 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역시 마음이 달라진 것이다. 뭣 때문에 저녁식사 때에 맞추어 강습회에 도착할 필요가 있지? 에란스우드 대학에서 지낸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이번에도 형편없는 식사를 먹게 될 것이 뻔했다. 거기에 비해서 코마번에는 작지만 상당히 고급스러운 호텔 식당이 있다. 하기야 엷은 안개가 늦게 도착한 핑계가 되기는 어렵겠지만, 아마이저 내외에 대한 방문과 그 용건은 훌륭한 핑곗거리도 되겠고, 또한 그것은 요즘 보기 드문 이야깃거리라서 덕분에 다른 사람들의 변변치 못한 예술 논의를 들어야 하는 번거로움을 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상당한 근시에다가 그때는 안경을 끼고 있지 않아서 레슬리 전용의 초인종을 눈여겨 보지도 못했고, 또 그런 사소한 일에는 구애받지 않는 성격이라 해크니스 부인의 노커를 마구 두들겨 대서 해질 무렵의 고요를 깨뜨리는 동시에 깜짝 놀란 부인 자신을 끌어내고 말았다. 하지만 루카스 교수는 해크니스 부인에게 정중한 태도를 취했고, 그것이 그녀에게 적지 않은 감명을 주었기에 이 신사의 방문은 레슬리에 대한 그녀의 평가를 끌어올리는 효과를 낳았다. 교수는 아마이저 내외를 내려오랄 것도 없이 직접 계단을 올라가, 열린 문 저쪽의 이름뿐인 싱크대에서 접시를 닦고 있는 셔츠 차림의 레슬리를 발견했다. 마침 주전자에서는 향기 짙은 커피 냄새가 뿜어나오고 있었다. 교수는 일부러 탄성을 올렸다. 이거 잘됐군! 플라잉 호스 호텔의 요리는 먹을 만했지만 커피만은 못 봐주겠었는데 -- 라고 임기응변식으로 말을 꾸며댔다. 그렇게 해서 아마이저 내외로 하여금 저녁식사 걱정을 덜게 하게끔 선수를 쳤던 것이다. "실은 주말 약속에 가는 도중이라 오래 머무를 수는 없지만, 잠시 들러 얘기해 줄 게 있어서 들렀네. 간단히 말해서 자네가 의뢰한 그것은 대단히 흥미진진한 것이었다네." 레슬리는 걷어올렸던 소매를 내리며 싱크대에서 돌아와 커트글라스를 꺼내어, 버니 윌슨이 여름 휴가중 프랑스 여행 선물로 갖다준 반쯤 남은 코냑을 조심스럽게 따랐다. 한편, 진은 레슬리가 지금껏 보지 못했던 예쁜 유리 그릇에 초콜릿 비스킷을 수북히 담아 들고 왔다. 그런 것이 입맛이 까다로운 노교수에게는 달갑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비스킷은 자주, 그러면서도 두드러지지 않게 교수의 입안으로 사라졌다. 진은 낡은 바지를 벗고 벌꿀색 원피스로 갈아입고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그것이 그녀의 머리를 짙은 밤색으로 돋보이게 했고, 살갗을 밤이슬처럼 정갈하게 느끼게 했다. 30 분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말다툼이 될까 봐 마치 남남처럼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주고받았으나, 일단 남편의 체면을 세워 주어야 할 일이 생기면 진은 돌변해서


이런저런 현모양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 그것이 상당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나요? 제가 직접 살펴보고도 싶었습니다만 섣불리 손댈 수가 없어서......" "그 그림에 대해서 뭐 짚이는 거라도 있나?" "아, 확신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만 대충 짐작은 갔습니다 -- 제작 연대라든가 작가의 스타일 같은......" "그걸 누구 다른 사람에게도 보였었나?" "네, 이 근처의 화상에게 감정을 부탁한 적이 있었지요. 그 사람 말에 의하면 그 간판의 원화는 코츠워스라는, 18 세기 무렵의 상당히 이름이 알려진 향토화가가 그린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거 지독하군!" 교수는 그렇게 말하며 카이젤 수염 끝을 창처럼 천장을 향하게 하고는 크게 웃었다. "장삿속이 빠른 사람이라, 팔라고 하면서 600 파운드까지 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런데도 자네는 그 제안을 거절했단 말이지? 그거 잘했군! 그렇다면 자네는 그 그림이 코츠워스 같은 엉터리 그림쟁이의 작품보다 월등하리라는 것을 꿰뚫어 본 거로군. 정말 용하네. 하기야 실제적인 시장 가격은 그렇게 높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런 뜻밖의 물건이 발견된 초기 단계에서 얼마만한 값이 매겨질지는 나 자신도 알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 그림의 중요성이 널리 알려지고 충분한 검토가 끝나면 상당한 가치가 인정될 게 틀림없어." 레슬리는 놀라움과 흥분으로 손을 떨면서 교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아내 쪽으로는 시선을 보내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이 교수의 이야기로 밝혀진 이상, 득의만면해진 것으로 오해받기 싫어서 그랬다. 그녀가 저번 기회를 붙잡고 늘어지려 했었던 것은 돈에 대한 욕심보다도 불안한 살림을 생각해서 그런 것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녀에게 시선을 보내어, 그녀 역시 자기처럼 흥분하고 있는지를 보고 싶었다. 이 올림퍼스의 신과도 같은 노교수를 믿기 어려울 만큼 감동시킨 것이 분명한 그 발견에 대한 얘기가 나올 참이다. 부부 사이에 불꽃처럼 오가는 무엇이 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 제작 연대 말인데, 자네는 언제쯤으로 생각하나?" 루카스 교수가 이야기를 원점으로 끌고 갔다. 물론 그들을 놀릴 생각은 아니었겠지만, 마치 먼저 현상금 액수를 알려주고 나서 퀴즈 문제를 내는 것 같은 그 방법은 희롱하는 거나 다를 바 없는 모양이 되었다. 하지만 레슬리는 진지하게 문제를 받아들이고, 당당히 소신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14 세기 이전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잘라 말하고는 지나치게 건방진 소리를 했다고 생각하고서 급히 입을 다물었으나, 이미 입 밖에 나간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었다. 그는 스스로의 교만을 지우려고나 하듯, 멋적게 턱을 문질렀다. "그 포즈라든가 손의 묘사 -- 즉, 손가락의 관절을 무시한 매끄러운 묘사는 14 세기 이후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또한 양 어깨나 머리를 뒤로 비스듬히 젖힌 포즈나, 드레스의 채색에 관해서도 같은 생각입니다. 혹시 덧칠한 물감을 잘만 벗겨낸다면, 아마도 15 세기 이후로는 볼 수 없게 된 의상이 나타날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스타일이라고 할까, 유파(流派)는? 자네는 그 점에서도 대략 짐작이 간다는 식으로 말했는데." 레슬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아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눈부신 듯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로 완전한 그의 편이 된 것인지, 아니면 그의 당돌함에 놀라서, 그가 마각을 드러내는 것이 언제쯤일까 하고 지켜보고 있는 건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저는 그 그림이 이 지방과 연고가 있는 화가의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더욱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이유는 그 그림이 여러 세기 동안 계속 이 지방에 머물러 있었기에 멀리까지 옮겨간 일은 없을 것 같아서입니다. 더구나 그것은 원래 술집의 간판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 당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중에서 다른 점은 그 웃음뿐입니다만 -- " "으음, 그걸 신경쓸 필요는 없네." 루카스 교수는 사려깊은 눈길을 젊은 상대에게 보내면서 말했다. "그 웃음은 어느 시대의 것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니까. 천재적인 무명작가가 그린 것을 후대의 유명작가들이 모방한 것일세. 그렇게 온당치 못한 일도 그들에게는 얻기 어려운 경험이 되었을 거야. 이야기를 계속하게. 그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라는 게 뭔가?" 레슬리는 자기의 상상이 비약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몸을 사리듯 입을 열었다. "제가 처음에 거기에 대해서 생각이 미친 것은 그 여인의 가슴을 장식한 브로치 같은 타원형의 장신구를 눈여겨보고 나서부터입니다. 그 원형은 형이상학적인 세계로 통하는, 일종의 X 선의 감광판과도 같은 부적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허, 그런가?"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그 여인이 뱃속에 갖고 있는 태아의 상징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녀는 수태고지(기독교에서,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성령에 의한 임신을 알린 것)를 받은 뒤에, 아니면 요한의 어머니를 방문한 -- 하여간 그리스도 탄생 전의 성모 마리아인 거지요." "정확히 말하자면 찬양하고 있는 성모 마리아란


말이지? 어쨌거나 자네는 남의 도움없이 혼자서 그만한 것을 알아냈구먼. 실로 대견하네."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그저 막연히 생각만 한 것이지, 아직 자신을 갖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레슬리는 멋적은 듯 피식 웃었다. "이런 엉터리 추측이 웬지 공상만은 아닌 것 같기는 했지만, 실은 교수님이 힌트를 주셨기에 용기를 얻은 겁니다. 말하자면 교수님에게 휩쓸려 떠들어댄 거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감히 입 밖에 내지도 못했겠지요. 하여튼 그런 그림이 14 세기 이래 헛간에 방치되거나 술집 간판으로 내걸렸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 사실이지요." "그런 대접을 받게 된 것은 틀림없이 16 세기 후반부터였을 걸세. 그 그림이 발견된 것은 원래 채노크 수도원의 헛간이었지, 아마? 그리고 그 수도원의 마지막 원장은 종교개혁으로 그 지위를 잃었고." "예, 제 친구가 건축학적 측면에서 그런 것을 조사한 끝에 제게 이야기를 해주어서 처음 알았습니다." "그랬군. 하기야 나 자신도 자세하게는 모르지만 지금까지 캐본 결과는 그런 것 같더구먼. 그래서 그걸 알고 나서 자네의 그림이 채노크 교구교회에 보존되어 있는 벽화의 단편 중 하나와 구성이나 화풍이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게네. 자네는 그곳 목사를 알고 있는지 모르겠군? 중세 미술에 상당히 조예가 깊은 노학자라네. 유리공예 전문가이네만, 벽화와 패널화의 화가에 대해서도 상당한 연구를 쌓았다네. 그분은 특히 종교개혁 때에 흐트러진 채노크 수도원의 미술품에 대해 오랜 세월 동안 열중해 있는 중이지. 물론 현재의 그 교구교회는 옛날 수도원의 축소된 유적이지만, 그분은 수집할 수 있는 한 이러한 유품들을 모아 옛 모습을 재현하려고 애쓰고 있다네. 하지만 제단 뒤쪽의 비교적 큰 벽화 -- 아마도 '성모의 기도' 중 일부분으로 그분이 소장하고 있는 것은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 여자의 초상화뿐이지." "그러면 우리가 발견한 것이 그 벽화의 주체인 성모 마리아란 말이군요?" 레슬리는 극도의 긴장을 견딜 수 없어 자기도 모르게 노골적인 질문을 했다. 노교수는 잠깐 나무라는 듯 시선을 가다듬었으나, 결코 비난의 빛은 띠지 않았다.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네. 나는 그 목사를 만나봤어. 그분은 채노크 수도원의 마지막 원장이 물러날 무렵에 내부의 장식품 중 일부가 유실된 것을 나타내는 기록이나 그밖의 흥미 있는 자료를 사방에서 모아들이고 있더군.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 여자는 성모의 찬양에 등장하는 천사라는 것이 그분의 의견인데, 우연히도 그 그림의 전모를 추정할 만한 그 시대 이후의 문헌을 몇 가지 갖고 있더군. 그래서


나는 자네의 패널화가 그 제단 뒤쪽 벽화 속의 성모가 틀림없다는 확신을 갖게 된 걸세. 그것을 그린 화가의 이름은 아직 밝혀내지 못했지만, 같은 화가의 작품으로 보이는 스테인드 글라스를 포함한 몇 작품이 발견되어 있다네. 그 중의 하나는 자네의 성모 마리아와 아주 비슷한 특징을 지니고 있지." "그 웃음의 표정도 말입니까?" 진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아마도 이젠 그 그림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갖추어졌다고 보아도 무방할 게요. 그 교회의 목사도 같은 의견이고. 만일 내가 좀더 세밀힌 준비를 갖추어서 발표하기만 하면 이의를 내세울 사람은 없을 걸세. 그분은 분실된 성모 마리아에 관한 여러 가지 자료를 근거로 해서 원래의 그림을 재생했는데, 그것이 자네의 패널화와 대단히 흡사하다네. 그분은 내 이야기를 듣고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원화의 모양을 스케치해 주더구먼." 루카스 교수는 테이블 위에 놓았던 가방을 열어 자료를 꺼내어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면서 그것을 늘어놓았다. "오늘 모임에 가는 도중에 시간이나면 자네에게 보여 주려고 참고문헌과 그분이 그려 준 스케치를 갖고 왔다네. 이것이 그 스케치인데, 원화는 이런 모양으로 그려져 있을 거라고 하더군." 그것은 작은 도화지에 그려져 있었기에 모두는 이마를 맞대다시피 해야 했다. 그 '즐거운 여자'는 모슬린 숄이나 소용돌이 모양의 앞머리, 소매 끝의 폭넓은 장식 등이 제거되고, 사프란(연보랏빛)색의 로브에 푸른 겉옷을 걸치고 머리는 흰 베일 아래 말끔히 빗어넘긴 모습이 완연한 영국 초기 연대의 단아한 형태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녀는 뱃속에 지닌 무거운 짐과 균형을 이루기 위해 상반신을 약간 뒤로 젖혔고, 백합꽃처럼 섬세한 손으로 아랫배에 겹친 손바닥 아래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리스도의 태동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약간 위로 젖혀진 얼굴의 웃음은 환희를 머금은 잔잔한 미소였다. 그 그림 속에는 그 여인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 세계에 오로지 혼자, 마치 그녀 자신이 이 세계 그 자체인 양 고고하게. 레슬리는 진이 돌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지 않고는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놀라운 기분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입술을 축이고서 조급한 질문을 던졌다. 점잖지 못한 질문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그것을 묻지 않고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애를 써왔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 그림을 내어준다면 얼마만한 금액이 될까요? 물론 그 그림이 우리가 예상하고 있는 그런


그림이라면 말입니다." "글쎄 -- 이런 일은 기회라는 것이 크게 좌우하지만, 그 화가는 상당히 이름이 알려진데다가, 또 이런 종류의 그림은 다른 화가들도 거의 그리지 않아 거기에 견줄 만한 작품이 거의 없다네. 따라서 수집가의 관심도 고려에 넣어야 하겠지. 자네가 급하게 처분한다고 해도 최저 7~8 천 파운드선은 밑돌지 않을 것으로 짐작되네." 그 순간 레슬리와 진은 장승처럼 우뚝 서서 한동안은 숨을 죽인 채 이야기된 금액의 숫자를 머릿속에서 다시 세어 보았다. "그렇다면 그 목사님이 그림을 인수해 줄까요? 그분이라면 그 그림에 대해서 잘 알겠고, 수도원 시대의 소장품을 수집하는 것이 소원이라면 그것만은 꼭 되찾고 싶으할 텐데." "물론 그분은 탐이 나겠지. 이 사실을 알고 난 이후에는 자나깨나 그 그림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네. 하지만 그는 낡은 교회의 복구비로 2 만 파운드 가량 모금한 일이 있으므로, 새삼스럽게 그 성모 마리아 그림을 사들이기 위해 돈을 걷어들이기는 어려울 거야." "그 그림을 원래의 자리에 끼워넣는 것도 말입니까?" 레슬리는 그런 말을 하고서 진의 기색을 살피기 위해 살짝 몸을 틀었다. 하지만 그녀는 외면하고서 그 작은 스케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 진은 그림의 여인처럼 기도라도 드리는 모양으로 양손을 가슴 아래 모으고 있었는데, 그런 자신의 자세를 의식하고 있는 것인지 레슬리는 궁금했다. "아마도 그럴 걸세. 하지만 살 만한 사람이 달리 있을 거야. 더구나 그 그림의 출현이 널리 알려질 때까지 기다리면 내가 지금 말한 금액보다 두 배 이상으로 팔릴지도 모르지." 루카스 교수는 가방을 챙기고 의자를 뒤로 밀었다. 이 청년은 상당히 돈에 궁한 모양이다. 더 이상 그를 들뜨게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인지도 모르겠다. "실은 저로서는 그 패널화를 제자리에 복원하는 데 필요한 비용조차도 감당할 처지가 못됩니다." 레슬리는 굳게 먹은 마음으로 해서 목소리를 떨며 말했다. "만일 그 그림을 채노크 교회에 돌려보낸다고 하면,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그 동안 드는 비용을 부담해 주실 수는 없겠는지요?" 루카스 교수는 어안이벙벙해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말을 제정신으로 하는 겐가?" 물론 레슬리는 본심이었다. 되도록 빨리 그렇게 말해서 다시는 거두어들일 수 없게 해야겠다고 조바심을 냈지만, 공포에 가까운 것이 목을 틀어막아 이치에 합당한 말을 철저하게 막으려고 했다. 이젠 진의 얼굴을 보는 것이 두려웠다. 그가 지금 마음먹은 일이 그녀에게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또한 도저히


용서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알고도 남았지만, 그는 그렇게 해야만 했던 것이다. 만일 이 순간을 어물쩍 넘겼다가는 앞으로 살아갈 기력조차 잃을 것만 같았던 것이다. "그건 제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동안 그 그림이 겪어온 우여곡절 끝에 우연히 제 손에 들어온 것뿐이지요.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있었던 자리에 되돌아가야 하며, 그곳이 교회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 뜻밖의 말이 상대방을 의심케 한 것이 화가 나는 듯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비록 종교와 관계가 없더라도, 그렇게 내력이 있는 작품이라면 저는 역시 같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 그림은 어느 특정한 장소와 목적을 위해 그려진 것입니다. 따라서 그곳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단지 제가 지금 그대로 그 교회 목사님에게 돌려보낸다 해도 돈이 없어 복원할 수 없다면 그것이 마음에 걸릴 뿐......" "잠깐, 자네가 본심으로 그런 말을 한다면 그 점은 걱정말게. 우리 작업실에서 복원해 줄 수도 있으니까. 실은 나 자신도 그것이 어느 특정인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네. 아무튼 이번 주말까지 좀더 신중히 생각을 해보게." 교수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 쾌활하게 말했다. "어떻게 처분하느냐는 그때 가서 결정해도 늦지 않아. 자료는 놓고 갈 테니, 마음의 결정을 하기 전에 그 그림이 얼마나 뛰어난 작품인가를 한번 검토해 보게나." "결심은 섰습니다만, 자료는 기꺼이 읽어 보겠습니다. 제가 그러한 제안을 한 것은 세상에 이름이라도 팔려는 심산에서가 아닙니다." 레슬리는 침착함을 되찾고 말을 이었다. "가령 제가 그림을 최고의 값으로 팔아 넘겼는데 그것이 미국으로 건너가거나, 이 나라라고 해도 어느 부유한 개인 수집가의 손에 들어간다면 어찌되겠습니까? 저는 한평생 그것을 고통스럽게 생각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원래의 위치로 돌려보내고 싶은 것입니다. 만일 그 교회의 신자들이 그 그림을 살 돈을 마련할 수 없다면 그건 상관없습니다. 저는 그 그림이 어디로 가든, 그것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 전부의 것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나로서는 자네에게 생각을 바꾸라고 권하는 것은 아닐세. 단지, 성급한 결정을 내리고서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뿐이야. 심사숙고 끝에 내리는 결정이라면 자네의 생각대로 한다고 해도 말릴 생각은 없네. 그러니 4~5 일 뒤에 전화를 걸어 주게. 그리고 사정이 허락한다면 그 문제로 다시 만나지. 그럼, 이만 가보겠네." 교수는 가방을 손에 들었다. "부인, 안녕히 계십시오. 커피 맛있게 마셨습니다." 진은 꿈에서라도 깨어나는 것처럼 황급히 레슬리의


작별인사말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그리고 레슬리가 손님을 문밖까지 배웅하고 돌아왔을 때 그녀는 테이블 곁에 그대로 서서 목사의 스케치를 바라보며, 창백하지만 해맑은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레슬리는 등뒤로 문을 천천히 닫으며 그녀가 뭐라고 말을 하기를-- 아니 고개라도 들어 자기를 바라보기를 --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기에 그는 어떻게 해야 침묵을 깨뜨릴 수 있을는지 잠시 망설였다. 비굴한 태도로 나가든가, 아니면 고자세로 나가든가 두 길밖에는 없었지만, 그 어느 쪽이나 심상치 않은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것을 그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긴장이 지나쳐 신경이 철사처럼 곤두서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깊은 생각에 젖어 있는 것이다. "할 수 없는 일이야." 그는 내뱉듯 말했다. 변명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그 말에 흠칫 놀라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은 쇼크를 받은 여자의 눈처럼 그냥 크고 어둡게 열려 있을 뿐, 어떤 기색도 살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내 그림이니까 내 마음대로 처분해도 상관없겠지?" 그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말을 내뱉었다. "잘 알고 있어요." 그녀는 뜻밖에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말없는 눈동자 깊은 저쪽에서 아련한 미소 같은 것이 어른거렸다. "당신을 실망시켜 안됐지만, 그걸 돈받고 팔았다가는 우리가 언제까지나 무거운 짐을 질 것 같아서 -- " 갑자기 그녀가 뭔지 항의라도 하듯 묘한 몸짓을 하고 그에게 다가왔다. "이제 그만! 바보 같은 양반! 마구 흔들어주고 싶어요!" 그녀는 그에게로 달려들며, 마치 협박을 실행에 옮기려는 듯 거칠게 그의 어깨를 잡았으나, 그 손길은 곧 그의 양팔 겨드랑 밑으로 파고 들어가서 그의 몸을 힘차게 끌어안으며 얼굴을 남편의 가슴에 묻었다. "당신을 좋아해요! 좋아한다고요! 사랑해요!" 그녀는 감동어린 목소리로 그의 가슴에 대고 말했다. 그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멍해지고 말았다. 혼이 날 일을 저지르고 만 것 같은데, 어째서 그것이 갑자기 잘한 일이 되었을까? 여자라는 것은 극히 비논리적이며 또한 충동적이고, 주책없이 소유본능만 날카로워 남편의 약점을 거머쥐기만 하면 바가지를 긁어대는 것 -- 그런 생각이 머리에 박혀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하여튼 이 순간에서는 아내의 말을 믿어볼 수밖에 없었다. "사랑해요." 진이 같은 말을 거듭했다. 그는 기계적으로 그녀의 등뒤로 팔을 감아 조심스럽게, 마치 손가락을 부러뜨릴까 봐 겁먹은 투로 어정쩡하게 그녀를 포옹했다. 하지만 밀고 들어오는 그녀의 몸의


무게와 따사로움과 감미로움이 그를 놀라게 하고 그의 온몸을 희망에 떨게 했다. "모처럼 생긴 큰 돈을 날려버려 미안해, 진." 그는 몸을 조여드는 듯한 환희와 사랑스러움과 불안의 소용돌이 속을 허우적거리며 헛소리를 하듯 소곤거렸다. "하지만 어떻게든 살아나가겠지. 무책임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는걸 어떻게 해. 그 그림은 내것이라는 기분이 나지를 않아. 진, 울면 안돼."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웃고 있는 것이다. 그의 가슴에 볼을 대고, 어처구니가 없어서가 아니라 순수한 기쁨으로 채워진 환한 웃음을. 그녀의 얼굴이 스케치 속의 여인처럼 보였다. "그런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요!" 그녀는 멍청한 소리로 또 중얼거릴지 모르는 그의 말문을 막으려는 듯이, 그리고 사랑이 복받쳐 그의 입 위에 그녀의 입술을 눌러댔다. 그녀가 내적으로 체험한 계시를 -그와 그녀와 태어날 아기 세 사람이 문제로 삼기에 족한 모든 면에서 얼마나 풍요로운가를 갑자기 깨달은 그런 심정을 말로 남편에게 전하기란 무리였던 것이다. 여하튼 그녀는 더 이상 사소한 어려움에 애를 태우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의 마음은 풍족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그녀는 또한 막대한 부를 갖고 있었으면서도 동전 한 푼 남에게 베풀어 줄 수 없었던 앨프리드 아마이저에 대해서도 깊은 연민의 정 이외의 것은 느끼지 않았다. 하물며 무일푼이나 다름없는 신세이면서도 이렇듯 값진 것을 베풀어 줄 수 있는 남편에 대해서 불만이나 실망을 느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 레슬리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확인했다. 하지만 그 답변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갑작스럽게 찾아든 부부간의 절대적인 융화가 어떤 원인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캐보든 말든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 그녀를 되찾을 수 있었는지를 물어본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다만 그녀가 되돌아왔다는 현실이 눈앞에 있는 것이다. 모든 마음의 장벽은 사라졌다. 그들은 감사의 마음에 휩싸여 말없이 포옹했다. 그때 뜻하지 않은 노크 소리가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 재촉하는 듯한 두 번의 잇달은 큰소리는 틀림없는 해크니스 부인의 것이었다 -- 그리고 대개는 뭔가 싫은 소리를 하게 마련이다. 레슬리는 마지못해 아내의 몸에서 팔을 풀면서 다시 한 번 잽싸게 키스를 하고는 문을 열었다. 해크니스 부인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상냥한 태도를 보였다. 루카스 교수의 영향이 아직 무지개빛


구름처럼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아까 어떤 남자아이가 이 편지를 갖고 왔습디다. 곧 전해 달라고 했지만 손님이 계셔서." "남자아이라고요? 누굴까." 그러나 그는 곧 도미니크를 머리에 떠올렸다. 하지만 이런 시각에 도미니크가 편지를 전할 이유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비록 전할 말이 있다고 해도 일부러 편지로 써서 직접 갖고 올 리가 없었다. "이 골목 저쪽의 무어 부인 집 아들이라고 하더군요. 곧 전해 줘야 한다고 했지만, 15 분 가량 늦는다고 해서 별 탈은 없을 것 같아서." "아, 그렇습니까. 수고하셨습니다." 그는 문을 닫고, 까닭을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끼며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레슬리가 알기로는 무어 소년도 역시 그래머 스쿨에 다니는데, 도미니크와 같은 나이 또래로 보였다. 동급생인지도 모른다. 도미니크가 무어에게 편지를 부탁한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이상하네요." 진이 그의 얼굴을 살폈다. "알 수 없군. 아무튼 읽어 봅시다." 레슬리가 봉투를 뜯었다. 그리고 읽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팔에 매달린 그녀의 몸의 온기에 취한 기분이었다. 세상의 어떤 긴급한 일보다도 그녀가 그의 가슴속을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이저 씨에게 저는 이 편지를 정확히 8 시 반에 당신에게 전해 달라고 친구인 믹 무어에게 부탁해 놓았습니다. 그 까닭은 오늘밤 9 시에 당신이 도와주기를 바라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대단히 중대한 일인데, 그 시각으로부터 30 분 전까지는 그것을 아무에게도 알려서는 안됩니다. 만일 우리 아버지가 그보다 빨리 이 일을 아신다면 제 계획을 모두 망가뜨리시겠지만, 마침 알맞은 시간에 목격자로서 현장에 온다면 아마도 저를 말릴 수 없어 계획을 그대로 진행하게 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저는 집에 전화를 걸 수도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어머니가 달려오실지도 모르지요. 저는 어머니에게 위험스러운 장면을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따라서 결말이 날 때까지는 어머니에게 아무것도 알려 드리고 싶지가 않기에, 당신에게 이 편지를 보내 두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제가 부탁드릴 것은, 우리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9 시에 브룩 가 헤딩턴 골목 모서리 쪽을 지켜보라고 말해 주십시오. 경찰관을 몇 명 동원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장소에는 차 한 대가 와서 저를 코마퍼드의 집까지 태워다 주기로 되어 있는데, 제가 그 차에 타거든 그 뒤를 미행하라고 하십시오. 놓치지 않고 미행을 해야 합니다 -- 그 점이 중요합니다. 저는 어떤 사태가 일어나도록 손을 써두었는데,


경찰로서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되어 키티에게는 오히려 역효과가 날지도 모릅니다. 저에게 무슨 일이 생기거든 부디 키티를 도와주십시오. 그녀만 무사해진다면 저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도미니크 펠스' "이게 뭐지? 장난도 아닐 테고." 레슬리가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 리가 없어요. 키티에 관한 일이라는데 그 애가 장난으로 이런 편지를 쓸 리가 없어요. 상당히 진지한 글이에요, 레슬리." 그녀는 남편의 팔을 꽉 쥐며 말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그 애한테 위험이 닥치고 있는 것 같아요. 손을 써두었다고 하는데, 무슨 일일까?" "하나님만이 아실 일이지!-- 엉뚱한 일에 발을 들여놓고는 -- 아, 큰일이군! 시간이 없는걸!" 레슬리는 손목시계를 보고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리고는 문을 박차고 나가서 단숨에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11 분 전 9 시였다. 문제의 시간까지 11 분밖에 여유가 없다. 이젠 편지를 의심하고 말고 할 여유도 없었다. 그는 진이 뒤따라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를 듣고는 집에 남아 있으라고 소리질렀다. 하지만 그가 길모퉁이의 전화 박스로 뛰어들면서 뒤를 흘끗 보니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코트 소매에 팔을 끼고 있었다. 조지 펠스의 전화번호를 찾는 시간이 1 년쯤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서 다이얼을 돌려 상대방이 나오기까지도 몇 해가 흐른 느낌이었다. 더구나 전화를 받은 것은 밴디였다. 어머니를 놀라게 해서는 안된다는 도미니크의 말이 레슬리의 입을 다물게 했다. 펠스 씨가 안 계시면 다시 전화를 걸겠다고 하고서 전화를 끊고는 다시 다이얼을 돌렸다. "코마번 경찰서입니까? 나는 레슬리 아마이저입니다. 실은 아마이저 사건에 관한 시급한 용건으로 펠스 씨를 만나고 싶습니다. 아니, 시간이 없어요. 이렇게 전해 주십시오 -- " 진이 그의 귓가에서 속삭였다. "내가 가서 버니의 차를 이리로 몰고 올께요." 그리고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달려갔다. 그녀의 구둣발 소리가 바쁘게 달가닥거리며 멀어져 갔다. " -- 아셨습니까? 브룩 가 헤딩턴 골목 모퉁이입니다. 9 시에."레슬리가 시간과 장소를 강조했다. "나도 곧 그리로 갈 겁니다만 -- 아무튼 당신들은 거기에서 그 차를 미행해야 해요. 부탁합니다." 그는 수화기를 놓은 것은 2 분 전 9 시였다.


<PRE>번 호 : 29 / 76 등록일 : 1999 년 08 월 11 일 15:48 등록자 : CYBER105 조 회 : 96 건 제 목 : 죽음과 즐거운 여자 15 장 - 엘리스피터스 [귀니사랑] </PRE>

제 15 장 도미니크는 오늘밤 백 번째의 실수를 하고 나서, 정확한 위치에 손가락을 놓고서 부서져라 건반을 두드려 실수를 바로잡고는 한탄스러운 듯 한숨을 쉬었다. "쳇! 엉망진창이군! 이젠 그만할래요." "그야 나로서는 상관없는 일이지." 크레그혼 양은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네 부모님은 한 시간분의 레슨비를 내시니까, 시간을 채우는 게 어떻겠니 -비록 날 끝끝내 미치게 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나 역시 미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오래 된 박달나무 자를 찾아와서 네가 내 신경을 긁어댈 때마다 그걸로 네 손바닥을 때려 줘야겠다." 도미니크는 조소적인 한 소절을 딩동댕 치고는 흘끗 그녀를 노려보는 척했다. 토실토실하게 살이 찐 이 노부인은 예순을 넘겼는데도 테리어(애완견의 일종)처럼 쾌활했고, 제자들과도 사이가 좋았다. 도미니크의 입장으로서는 이렇게 목요일 밤마다 피아노 레슨을 그럭저럭 계속해 올 수 있는 것도 전적으로 그녀의 그 후덕한 인품 탓이었다. 적어도 악기 하나쯤은 다룰 만한 재주는 익혀 두는 것이 젊은이에게 헤아리기 힘든 가치가 된다고 주장하여 싫어하는 그의 귀를 잡아당겨 피아노 앞에 앉힌 것은 어머니인 밴디였다. 물론 그렇게 쉽게 익힐 수 있는 재주는 아니었지만, 헤아릴 수 없는 가치가 있는 일이라던 어머니의 말은 오늘밤의 일을 생각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옳았다고도 할 수 있다. "헤, 박달나무 자라니 겁나는데요!" 도미니크는 픽 웃었다. "선생님이 그런 흉기를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지만, 정말로 사람을 때려 본 적이나 있으세요?" "조심해! 나이는 먹었지만 아직 매질할 기운은 남았단다. 꼭 박달나무 자가 아니라도 말이야. 자, 허튼 소리로 나를 홀려 레슨을 흐지부지 해보려고 그래도 소용없어요. 다시 쳐봐. 정신을 집중해서!" 그는 제딴에는 최선을 다했다. 그렇지만 마음은 저절로 오늘밤 감행하게 되는 계획으로 쏠렸다. 이 죄없는 목요일의 레슨은 그것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단지 기회를 제공해 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텨 보았지만, 그의 상념은 시간을 뛰어넘어, 이제부터 맞부딪치게 될 사태를 여러


측면에서 상상하고, 거기에 대한 대응책을 생각하게 했다. 가장 근심스러운 것이 아무래도 광범위한 가상(假想) 에 기반을 두고 행동해야 했으므로, 예상이 빗나갈 여지가 많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때늦게 그러한 차질을 겁내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이젠 물러설 수가 없는 것이다. 그가 마지막 화음으로 옮겨가다가 실수를 했을 때, 크레그혼 양은 단발머리를 호들갑스럽게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다. 넌 지난주 목요일 이래 한 번도 피아노 앞에 앉아본 일이 없구나. 그렇지? 자백해!" 도미니크는 그렇다고 깨끗이 자백했다. 연습을 못한 것 자체는 비난받을 일이 아니지만, 그걸 숨기려는 심보야말로 비난받아도 마땅하다는 그녀의 지론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레슨이 그에게 다시금 중요성을 지닐 수 있게 되리라는 확신이 서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기에는 눈앞에 닥친 현실이 너무나 무겁게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식사시간이나 피아노 레슨 같은 일이 중요성을 지닐 수 있는 평범하고 안락한 세계가, 지금의 그에게는 놀랄 만큼 매력적이고 부러운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그는 거기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 유도장치가 말을 듣지 않는 미사일에 올라탄 것처럼 그는 무턱대고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연습도 하지 않고 잘 치겠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라는 걸 모르니? 그런 식으로 두드려 날 속일 생각이란 집어치워. 저런! 내가 이야기를 할 때는 건반에서 손을 떼고 잘 들으라고 했잖아." 그녀의 잔소리가 여간해서 끝날 것 같지 않아, 도미니크는 연습을 멈추고 예의바르게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았다. 그의 눈은 곧장 그녀를 향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그의 방심상태를 얼버무리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사실 그녀의 잔소리는 거의 그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그녀는 건전했고 평범하며 어두운 구석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아낼 수 없었다. 그에게 공포심을 주기 시작한 창 밖의 어두움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노부인인 것이다.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수편직의 윗도리와 짧은 모직 스커트, 단정하게 빗은 잿빛 단발의 곧은 가리마, 잔소리를 할 때마다 움직이는 턱의 사마귀. 그런 것들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으면, 그녀와 같은 차원에는 사악한 것이나 두려운 것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에 가까운 것이 우러나서 저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하지만 그가 눈길을 돌리거나 눈을 감는 순간 순식간에 번거로운 것들이 자기를 둘러싼다는 것, 그것도 스스로가 자초했다는 것, 더구나 거기로부터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넌 그렇게 미소만 짓고 있으면 만사태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냐?" 그녀는 엄하게 말했다. "애교만 부려서 사람을 잡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너의 큰 오산이라는 걸 알아야지!" 물론, 그녀는 좀더 명랑한 말의 선택이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그녀는 냉철한 진리를 알아낸 것이다. 그는 달래듯 말했다. "아니, 그럴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 주에는 여러 가지 신경을 쓸 일이 있어서 연습을 못한 게 사실입니다. 다음 주에는 잘 할께요." 만약 무사하게 살아, 여기에 다시 올 수 있다면 말입니다 -- 하고 그는 마음속으로 덧붙였다. 심장이 오므라들고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어? 9 시가 다 됐군요. 선생님의 골치도 곧 나아질 거예요." "이번에는 네가 골치를 좀 썩혀야 할 차례인가 보다." 그녀는 지지 않고 대꾸했다. " -- 만일 그렇게 멍한 정신으로 쏘다니다가는 말이다. 또 뭐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다만?" "네, 설탕을 좀 많이 타주세요." 그는 으스스한 밤에는 언제나 그녀의 부엌 스토브 위의 주전자 속에 코코아가 끓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싱긋 웃고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코코아 잔을 들고 나온 그녀가 말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와주지. 집에 갈 준비를 하거라." 하지만 9 시까지는 몇 분 남아 있었고, 그는 약속한 시간보다 비록 1 분이라도 먼저 거기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만일 레슬리가 그의 편지 내용대로 했다면 경찰은 이미 골목 언저리에 잠복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약속시간보다 빨리 가면 그는 그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게 되며,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아버지가 달려나옴으로써 만사가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 비록 이해심이 있는 아버지라 해도 자기의 권위를 짓밟고, 자칫하면 자식에게 치명적인 위험이 닥칠 일을 용서할 리가 없다. 도미니크는 자신이 초래한 위험이 크다는 데 조금도 의심을 갖지 않았다. 또한, 그 위험이 커야 일이 해결을 보는 것이다. 만일 아무런 위험이 없이 그냥 넘어간다면 그건 그의 추리가 엉터리였다는 것을 의미하고, 쓸데없는 소동만 벌인 것이 된다. 그리고 키티는 영영 혐의를 벗어날 길을 잃는다. 그렇지만 도미니크는 자기의 추리가 틀림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거기에 따르는 위험을 결코 회피해서는 안된다. 그는 그 위험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며, 최면술에 걸린 것처럼 가만히 앉아 그것이 자신을 덮치게 내버려두어야 한다. 만일 도중에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허둥대다가는 그가 애써 무대를 꾸며 실증하려 했던 것을 할 수 없게 될지 모른다. 자신은 저항할 생각을 하지 말고, 그를 구출해 내는 일은 경찰에 맡기고, 다만 그들이


늦지 않기를 기원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기 몸을 던져 미끼의 구실을 자청하는 것이다. "너 아무래도 오늘은 이상한 것 같다." 크레그혼 양은 그의 밤색 머리를 한 움큼 잡아 흔들며 말했다 "내가 비스킷을 먹으라고 했는데 들은 척도 하지 않는구나. 너 같은 애는 오늘밤에는 저녁도 주지 말아야 할 텐데, 난 뭣하러 비스킷 같은 걸 갖다 주었을까? 도대체 왜 그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니?" 학교라고요! 세상사람들은 고작 그 정도밖에 생각지 못하는 걸까? 16 살 사내아이가 고민을 하면 그 까닭이 학교에서 생긴 일인 줄로만 생각하거든. 어리석다고요, 정말로 ! "아뇨, 별로. 괜히 요 며칠 묘하게 기분이 산만해서 이렇답니다. 곧 괜찮아질 테니 걱정마십시오." "암, 그래야지. 자, 이걸 마셔라. 밖은 상당히 추울 거다. 그 고물 버스를 기다리고 있자면 뜨거운 것을 마셔 몸속을 따뜻하게 해두어야 한다. 내가 늘 말하지만, 그 버스 정류장은 이 도시에서도 가장 바람이 센 곳이란다." 그는 천천히 9 시 정각을 지날 때까지 코코아를 마셨다. 해밀턴 양이 클럽에서 약간 늦을 경우를 계산에 넣어, 조금 늦게 갈 생각이다. "엄마에게는 선생님께서 제 솜씨가 많이 늘었다고 말씀하시더라고 알려 드리겠습니다. 괜찮죠?" 그는 코트를 입으며 천연덕스러운 소리를 했다. "널 때려 줘야 되겠다고 말씀드려야 곧이들으실 텐데? 어쨌든 조심해 가거라. 길에는 서리가 하얗게 내리겠구나. 10 월달이 되어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서리가 내리다니, 원!" "편히 쉬십시오." 그는 이미 현관문을 나서고 있었다. "잘 가거라, 도미니크!" 그녀는 천천히 문을 닫으며 말했다 -- 저 앤 왜 저럴까? 아무래도 무슨 고민이 있는 모양이야. 어머니에게 알려줘야 할까? 하지만 그 애는 사춘기의 나이인데다가 어머니에게는 쑥스러운 내막인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섣불리 고자질이라도 했다가는 한평생 원망할지도 몰라.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상책이겠는걸 -- 그녀는 TV 를 켜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도미니크에 관한 일은 머릿속에서 잊어버렸다. 그는 골목 끝까지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로 -발걸음이 차츰 느려지는 데 대해 신경을 쓰지 않게끔 애쓰면서 -- 걸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한다. 나는 이미 마음의 짐을 떠맡긴 걸로 되어 있으니까. 그런 연극을 천연덕스럽게 하지 못하면 의심을 받을지도 모른다. 계획한 것이 진행중에 있는 것이다. 키티를 생각하라! 그녀를 머리에 떠올리자 갑자기


뜨거운 것이 가슴에 차오르며 그의 신경을 가라앉게 하고, 한결 긴장이 풀렸다. 위험 같은 게 겁날까 보냐! 너는 키티를 살려 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 전개될 일은 그녀의 결백을 증명해 줄 것이다. 그는 용기를 복돋웠다. 위험이 닥친다고 해도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여, 결코 무릎꿇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물론 그녀가 -- 해밀턴 양이 -- 이 약속을 어길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그녀가 공정한 입장에서 생각을 고쳐 먹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녀가 약속대로 온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성실하게 행동하여, 그가 건네주는 것을 받아 그를 안심시키고 아무 일 없이 그를 집에 데려다 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야 할 난처한 입장에 빠져, 그녀를 시험대에 올려놓은 실례를 어떻게 사죄할 수 있을 것인가? 실패의 함정은 얼마든지 있었다. 많은 길이 실패의 가능성과 닿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자기가 택한 길이 틀림없다는 확신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첫번째 골목에 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바람이 몰아치는 인기척 없는 골목길 어귀 가까이로 갔을 때, 서리가 내린 보도 옆에 세워져 있는 구식 라일리의 우아한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보도 쪽 문을 열어 그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 부근이 밤이 되면 이렇게도 인적이 끊어지고 쥐죽은 듯 적막에 잠기리라고는 지금까지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그가 라일리 곁에까지 이르렀을 때에야 차 한 대가 길 한복판을 휭하니 지나갔을 뿐이다. 그것이 멀리 자취를 감추자 고요함은 더해지고 그의 구둣 소리만이 서리가 하얀 별하늘 아래 뚜벅뚜벅 요란한 소리를 냈다. "어서 타요, 도미니크." 해밀턴 양은 옆의 조수석에 놓여 있던 잡다한 물건들을 뒷좌석으로 옮기며 말했다. 스카프와 핸드백, 클럽의 통지서로 생각되는 종이 뭉치, 큼직한 손전등 중 몇 가지는 뒷좌석 발판에 굴러떨어지기도 했다. "아, 해밀턴 양, 일부러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정말 폐를 끼쳐드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저는 버스로 돌아갈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런 쓸데없는 걱정말고 어서 타요." 그녀는 대범하게 말했다. "기껏해야 15 분 정도 걸릴 테니 상관없어. 더구나 오늘밤은 추워서 버스를 기다리는 것도 고역일 테니까." 그가 올라타자 그의 몸 앞으로 팔을 뻗어 문의 손잡이를 잠갔다. "문이 허술해서 새 걸로 갈아야 할까 봐. 일일이 문을 잠그지 않으면 커브를 돌 때 문이 저절로 열리거든. 더구나 손님을 가끔 태워야 하니 위험천만이지." "오늘밤에는 아무도 안 태웠나요?" 그는 뒷좌석을 흘끔 바라보며 물었다.


"도중에서 두 사람을 내려주었지. 클럽이 아직 끝난 건 아니지만, 언제까지나 눌러앉아 있을 수도 없고......" 그녀는 운전석에서 자리를 고쳐 앉으며 웃음띤 얼굴을 그에게로 돌렸다. 그것은 그의 어린 티도, 극단적으로 예민한 감수성도, 오늘 오후의 흐느낌과 눈물도, 그런 걸 잊어달라던 그의 애원도 모두 계산에 넣은 웃음으로 생각되었다. "그래, 그건 갖고 왔니?" 그녀는 부드럽게 물었다. "아니면, 생각이 달라져서 아버지께 드렸니? 그렇게 했다면 역시 잘한 일이야. 네 마음은 내가 잘 아니까. 그리고 그건 네 자유고." "아니, 갖고 왔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래? 그럼, 지금 내게 맡기도록 해. 내가 적당히 처리할 테니까. 그리고 나서 너는 그 길로 잊어버리면 그만이야. 난 두 번 다시 네가 그런 걸 생각나게 하지도 않겠고, 또 나 외에는 아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물론, 너는 장갑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말 안했지?"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됐어. 이젠 신경쓸 거 없어, 알겠지? 키티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곧 풀려날 테고. 됐지?" "네, 물론입니다." 그는 악보 가방에서 작게 접어 플라스틱 포장지로 둘둘 만 것을 꺼냈다. 포장 방법이 서툴러서 모서리 쪽으로 검은 가죽이 보였다. 그는 그것을 해밀턴 양에게 건네주고는 그 큰 눈에 신뢰의 빛을 모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거운 짐을 벗어 시원하다는 듯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눈은 단 한 번 그의 얼굴에서 벗어나, 받아든 작은 포장으로 옮겨졌으나 곧 대시보드를 열어 그 속에 그걸 챙겨넣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이걸 여기에 넣어둔 채 잊어버리지는 않을 테니까." 그의 불안스러운 시선을 의식했는지 그렇게 말했다. "내가 맡은 한, 절대로 안심해도 돼. 다시는 볼 필요도, 생각할 필요도 없으니까. 단, 장갑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해서는 안돼. 몇 번이고 말했지만. 알겠지?" "감사합니다!" 그녀는 비로소 시동을 걸었다. 그때 오토바이 한 대가 요란스러운 폭음을 내고 지나갔으나, 순식간에 멀리 사라져 갔다. 노신사가 한 사람 우체통에 편지를 넣고는 종종걸음으로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고요해서 사람이 뜸한 세계, 겹쳐진 소리도 없는, 서리가 소리 없이 내리는 밤의 세계에 도미니크는 있는 것이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아서는 안되었다. 그의 머리는 자꾸 옆을 살펴보려 했고, 눈은 등뒤에 잠복해 있을 경관들을 찾아보고 싶었으며, 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동을 건 엔진 소리를 들으려고 긴장해 있었으나, 그는 주위를 둘러볼 수도 없었고, 둘러볼


기색을 나타내는 것조차 참아야 했다. 순진하며 전혀 의심을 품지 않는 백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만남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것으로 끝까지 시치미를 떼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가정 아래 그녀가 무거운 짐을 내려준 지금, 과연 어떤 일에 생각을 집중해야 할까? 그렇다. 자동차다. 그것은 얼마간 그의 관심사이기도 하거니와 16 살짜리 소년이라면 어떤 걱정거리가 있다고 해도 언제까지나 거기에 매달려 있다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차 같은 것에 정신이 팔린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차가 달리기 시작했을 때, 도미니크는 그녀의 익숙한 손놀림을 지켜보면서, 조용히 미끄러지는 쾌적한 움직임의 한 순간을 틈타 물었다. "이 차는 몇 년형인가요? 구식이라는 뜻이 아니고요." 그 차는 구식이기는커녕 2~3 년밖에 되지 않은 신형차였다. 그녀는 그의 질문을 받고, 거기에 대답하면서 빙그레 웃었다. 그 웃음은 소년의 철없는 관심사를 쾌히 받아들이고, 그것을 함께 나누면서 그런 것에 몰두할 수 있는 소년의 위치를, 멀리 지나가 버린 자신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는 것 같은, 은밀하면서도 부러움이 섞인 눈으로 지켜보는 어른의 억압되고 관대한 웃음이었다. 그것은 그녀와 같은 처지의 여성에게는 특히 어울리는 미소였기에 그는 거기에서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몇 가지 암시를 얻어낼 기회는 있었다. 예를 들어 그가 신중하게 포장한 것을 그녀가 흘끔 보았을 때에, 만일 엉뚱한 추측이 문득 머리에 떠올라 그것이 그의 입 밖으로 튀어나갔다면 그녀의 눈이 무엇인가를 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날카로운 빛 하나 스치지 않았고, 이마에는 주름이 깊이 패이지도 않았다. 지금 새삼스럽게 그것을 살펴 생각해 본다는 것은 때늦은 일이었다. "이 차의 컨디션이 늘 이랬으면 좋겠네요." 그가 아주 자연스러운 투로 말했다. "고마워. 그래야겠지." 그녀가 진지하게 대꾸했다. 도로가 다소 좁아지면서 갑자기 가로수가 끊겼다. 벽돌담이며 판자 울타리가 듬성듬성해지며 밭이 나타났다. 그는 고개를 돌려 백미러를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물론 그래서는 안되었지만, 정말로 경찰이 미행하고 있는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일 그들이 오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위험을 무릅쓴 이 고생을 해야 하는가 ? "강기슭 쪽의 길로 가야겠다. 그 길이 가까우니까." 해밀턴 양이 말했다. "너는 아직 운전 안 배웠지?" "네, 그게 어렵더군요. 마땅한 연습장이 있어야 말이죠. 도로에서 할 수도 없고. 기껏해야 차고 앞을


5~6 미터 왔다갔다해 볼 뿐입니다. 학교에서 자동차 운전 과외수업을 해주겠다고는 하지만, 아직 실현되지 못하고 있어요. 우리 학교 운동장은 넓어 운전연습에는 안성맞춤인데." "그거 좋은 생각이네. 학교에서 한다면 쉽게 배울 수도 있고, 또 사회생활에서도 운전기술은 중요한 교육과정 중 하나이니까." "하지만 학교측에서는 화단이 망가질까 봐 망설이는 모양이에요. 장미가 더 중요하다는 거겠죠." 도미니크는 불안과 긴장과 격심한 심장의 고동으로 타는 듯 목이 마른데도 그런 한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신을 놀랍게 생각하면서, 마지막 가로등 불빛 속에 떠오른 그녀의 옆얼굴을 흘끔 엿보았다. 콧날이 뚜렷한 냉엄한 얼굴, 입가에 남은 알 수 없는 미소, 검은 머리의 광택, 목 둘레에서 크게 소용돌이치는 리드미컬한 머리카락...... 이윽고 그들은 숲속의 어두운 길로 접어들었다. 헤드라이트가 전방의 어두움 속으로부터 차례로 크고 작은 나무등걸을 뽑아내어, 그것이 하프의 현처럼 팽팽한 빛의 선화를 그리며 다시 등뒤의 암흑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 길 오른쪽으로 약간의 거리를 두고 흐르는 강이 서리에 언 별빛을 받아 나뭇가지 사이로 너울거리고 있었다. 이 부근은 여름 한철에는 길가의 풀밭에 차를 세우고 젊은 남녀가 부둥켜안고 꿈속을 헤매기도 하고, 숲속을 산책하거나 강둑에 눕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런 계절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영화관 뒷자리가 한결 더 포근했고, 카페의 연기가 자욱한 테이블에도 두 사람만의 세계가 있을 것이다. 오늘밤처럼 차디찬 바람 속에 이런 곳에 찾아들어 사랑을 속삭이는 얼빠진 연인은 없을 것이다. 젊은 연인들이 오지 않는다면, 이곳은 사람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는 적적한 길이다. 예상한 일이 벌어진다면 이곳이다 --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 숲을 빠져 나가기까지의 약 반 마일이 문제다. 그는 발작적으로 접고 젖힐 수 있는 좌석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과연 무사하게 해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였다. 겁을 먹어서가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살의에 찬 일격이, 아니면 총탄이 나를 향하여 날아오는 것을 보았을 때, 몸을 피하거나 상대방의 손을 붙잡고 매달리지 않고 그냥 그 위험에 몸을 맡겨야 한다면 누구라도 무사하리라는 자신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주물렀다. 시트의 가죽 벨트를 힘껏 쥐고 있어 손가락이 저려온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에게는 힘이 있었다. 강인한 신체가 있었다. 몸을 지키려고만 한다면 그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목격자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에 대한 음모를, 그 현장을 그들에게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이다. 말로만은 불충분하다. 한편, 비록 그들이 미행해 오지 않거나 그들의 도착이 때를 놓친 경우라고 해도, 그의 신상에 일어난 일이 키티의 결백을 증명하기에 충분한 증거가 될 수 있다는 마지막 희망도 있다. 그 이유는, 키티로서는 오늘밤의 살인사건에 관한 한 손톱만큼의 혐의도 받지 않을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감옥 속에 있기 때문이다. 해밀턴 양은 왼손을 뻗어 대시보드를 열고는 잡다한 물건 속에서 담뱃갑을 더듬어 꺼냈다. 차의 속도를 늦추고 한 손으로 운전을 하면서 그녀는 담뱃갑을 흔들어 한 개비를 나오게 해서는 그것을 입술 사이에 물었다. 그 능란한 솜씨는 그녀가 지금까지 같은 동작을 몇 천 번이나 했으리라는 것을 짐작케 했다. 그녀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라이터를 찾는 모양이었으나 고개를 갸우뚱했다. "참, 핸드백 속에 넣었지." 그녀는 그렇게 혼잣말을 하고 급히 차를 세웠다. "핸드백을 집어주지 않겠니, 도미니크?" 그는 뒷좌석에 흐트러진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핸드백은 손전등과 더불어 발판에 떨어져 있었다. 이 낡은 차의 내부는 상당히 널찍해서 앞과 뒷좌석 사이의 공간도 넓었기에 핸드백까지 손이 미치려면 완전히 몸을 뒤로 돌려 좌석 위에 무릎을 꿇다시피 해야 한다. 그는 어떤 예감에 바르르 심장이 조여드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대로 했다. 몇 백 번이고 생각하고 치밀하게 계산해 낸 그 예감이 지금 현실로 나타나려는 것이다. 그는 덫에 걸린 들짐승처럼 허우적거리려는 자신의 육체를 필사적으로 억제하면서, 그리고 공포와 맞싸우면서도 앞으로 몸을 굽히고 팔을 곧장 뻗어 자신의 밤색 뒤통수를 다소곳이 그녀에게 내주었다. 아아, 하나님, 그녀로 하여금 빨리 해치우게 하소서! 더는 이대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뒤를 돌아다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요! 아아, 키티......아냐, 하나님은 몰라도 됩니다 ! 어떤 강렬한 충격이 그의 머릿속에서 새까만 어두움을 폭발시켰다. 그는 순간 뒷좌석으로 거꾸러졌다. 고통과 공포에 의한 두 번째 쇼크로 숨이 막혔다. 곧이어 암흑이 소용돌이를 이루고 진공 속으로 몰려들더니 작열하는 빛을 순식간에 지우고, 그와 동시에 무엇인가 텅빈 구덩이 속으로 그를 잡아끌더니 그 속으로 그를 밀어넣었다. 그는 한없이 떨어져 내려갔다. 마침내 낙하가 멎었을 때 거기에는 고통도, 공포도, 노여움도, 숨막히는 불안도, 번민도, 무력한 사랑도, 아무것도 없었다.


<PRE>번 호 : 30 / 76 등록일 : 1999 년 08 월 11 일 15:49 등록자 : CYBER105 조 회 : 101 건 제 목 : 죽음과 즐거운 여자 16 장 - 엘리스피터스 [귀니사랑] </PRE>

제 16 장 "무엇을 찾으려는 것인지 우리 자신이 모르고 있으니 곤란해요." 진은 버니 윌슨의 베드퍼드 밴의 앞 유리창에 얼굴을 갖다대다시피 하고 두리번거리며, 헤드라이트가 미치는 범위 안을 살폈다. "차라고 해도 한두 가지야지. 택시일지도 모르고, 다른 차라면 차종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아무튼 택시는 아니야." 레슬리는 단언했다. "도미니크는 '어떤 사태가 일어나도록 손을 써두었다'고 했는데, 그건 1 대 1 의 대결이라는 느낌이 들어." "더구나 그들이 과연 이 길로 올지도 확실치 않잖아요. 간선도로일지도 모르고." "그런 식으로 말하면 한이 없지 -- 어쩌면 그들은 어느 길도 택하지 않을지 모르니까. 어쨌거나 경찰은 두 갈래로 나누어 수색하기로 했으니까, 그쪽은 그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우리는 어느 쪽이든 하나를 선택해야 돼. 이쪽 길이 한결 통행이 뜸해서 적적하니 -- 아, 저기 헤드라이트가 보이네! 잘 살펴봐." 이쪽으로 달려오는 그 헤드라이트는 아직 구불구불한 커브 두서너 개 저쪽의 듬성듬성한 나무들로 가려져 있었으나 상당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의 차가 춤추듯 첫번째 커브를 돌자 그 차와의 사이에는 두 개의 커브가 남았는데, 두 번째 커브를 돌았을 때 시야를 가리는 것은 사라지고 그 차와 마주 보고 달리게 되었다. 레슬리는 헤드라이트를 하향 조정하지 않고 약간 속도를 줄인 채 길의 중앙선 쪽으로 차를 가까이 했다. 저쪽 차 운전사의 눈을 부시게 해서 속도를 줄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두 차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상대방은 예의바르게 불빛을 낮추었으나, 레슬리의 차가 그대로 달려오자 다시금 눈부신 불빛을 던져서 그의 교통법규 위반을 경고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방 차의 앞 유리창 너머로 초점을 모았다. 거기에는 얼굴이 하나 보였지만,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분간할 수는 없었다. 밝은 길이었다면 가능했을 텐데. 상대방 차는 스쳐 지나가며 항의의 경적을 울렸다. "아, 실례!" 그는 무의식중에 그런 말을 하고 차를 길가로 붙였다. 상대방 차는 맹렬한 속도로 달려가는데 왜 그런지 긴급한 일로 서두는 감이 역력했다. "남자아이는 보이지 않던데요." 진은 그렇게 말하며


정신이 아찔해져서 계기판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남편이 급브레이크를 밟았던 것이다. "어머나, 레슬리, 왜 그래요!" 그가 어떻게 할 생각인지는 곧 알 수 있었다. 그는 차를 돌리기 위해 바쁘게 핸들을 돌렸다. "왜 그래요? 무엇을 봤나요? 도미니크는 타고 있지 않았어요." "보이지 않았을 뿐이야." 레슬리는 일상생활에서 보기 드문 결연한 태도로 차를 돌렸다. "그 차가 누구의 것인지 몰라?" 그들의 차는 풀섶에서 세차게 길 위로 올라서며 멀리 가물거리는 앞 자동차의 밝은 후미등을 뒤쫓기 시작했다. "해밀턴 양의 차라고. 도저히 우연의 일치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다행히 나는 그녀의 차를 잘 알고 있었기에 저 차를 알아볼 수 있었지. 하지만 그녀는 우리의 밴을 알아볼 리가 없어. 내가 여러 가지 스포츠카를 몰고 다닌 것은 알고 있겠지만, 이걸 타고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할 거야." 진은 그의 어깨에 떨리는 몸을 바짝 붙였다.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이봐요, 레슬리, 만일 저 여자가 범인이라면 -도미니크는 이미 저 차에 없을지도 몰라요. 벌써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닌지 모르겠네." 해밀턴이 흉악한 범죄자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 고는 말하지 않았다. 이제는 '도저히'라는 말은 통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모든 예외가 빛을 잃고, 모든 규제가 그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도미니크를 어딘가에 버리고 오는 것이 아닐까요?" 진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는 이미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런 우려가 그의 마음을 몹시 애타게 했다. 저 육중한 라일리라면 어떤 살인자에게도 쓸 만한 흉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가물거리는 후미등에 뒤질세라 액셀러레이터를 힘차게 밟았다. "경찰차가 따라와야 할 텐데......" "하지만 길은 캄캄하고 목표가 막연해서......" "아, 그녀가 길에서 벗어났다!" 레슬리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만일 그녀가 혼자서, 아무런 거리낄 것이 없는 일로 야간 운전을 하고 있다면 무엇하러 이 도로의 오른쪽으로 구부러질 필요가 있을까? 그쪽은 연인들의 오솔길로도 가장 외진 곳이며, 그 앞은 강둑으로 길이 막혀 있는 곳이다. 아니, 길이라기보다는 숲과 풀밭을 누비는 마차길로, 그전에는 나무문으로 폐쇄되어 있었으나 최근에 와서 낡은 문이 길 옆으로 젖혀져 출입이 자유로워진 터이다. 레슬리는 전에 몇 번인가 이리로 피크닉을 온 적이 있어서 어느 정도는 이 부근 지리에 밝았다. 강기슭은 널따란 풀밭이어서 차는 물가까지 갈 수가 있고, 차를 돌릴 공간도 넉넉하다. 하지만 10 월의


이런 서리가 내리는 밤에 여자 혼자 무슨 볼일이 있어 거기에 가는 것일까 ? 그는 마차길 초입에서 차를 멈추고 진에게 말했다. "당신은 여기에서 경찰차를 기다려." "싫어요 -- " 그녀는 남편의 팔에 매달리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과 함께 가겠어요." "내리라니까! 당신이 여기에 있지 않으면 경찰에게 어떻게 알리지? 그들은 반드시 이리로 올 거야. 우물쭈물할 때가 아니야, 진!" 그녀는 등을 떼밀리다시피 해서 차에서 내렸다. 숲속의 어두움을 향하여 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레슬리는 파랗게 질린 아내 얼굴의 커다란 두 눈이 깜박거리지도 않고 그를 지켜보고 있는 것을 뒤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그를 혼자 보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지금 흉악범죄자와 추적자가 등장하는 검은 회오리바람 한복판에 있는 것이다. 권총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지금 여기에서 헤어진 뒤, 다시는 살아 있는 남편을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녀는 바퀴 자국으로 깊이 패인 길을 이리저리 흔들리며 멀어져 가는 남편의 밴을 떠나 보내고, 한번 몸을 부르르 떨고는 충실히 길을 지키기 시작했다. 레슬리로서는 그들 내외가 협조라든가 다툼 같은 것을 염두에 둘 겨를이 없는 상황에서 단호하게 내린 결단으로써 주도권을, 또한 우월성을 확보한 것이다. 경직되어 버린 일상생활에서는 도저히 먹혀 들어갈 독단이 아니다. 그녀가 그에 대한 인식을 달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그는 가장 통렬한 명령을 내린 것이다 -- 나 혼자의 힘으로 할 테니까 당신은 물러서 있어 -- 하고. 단단하게 언 바퀴자국의 흙이 뜻하지 않게 그의 손으로부터 핸들을 빼앗아,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숲속으로 밴을 메다꽂으려고 했다. 라일리의 후미등은 보이지 않았다. 엔진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핸들을 힘주어 잡고 평평한 강가의 풀밭을 향해 급히 차를 몰았다. 이윽고 주위의 나무 그늘이 듬성듬성해졌다. 그는 속도를 늦추고 헤드라이트를 껐다. 숲을 빠져 나와 목표를 명확히 볼 수 있을 때까지 상대방에게 눈치를 채이지 않기 위해서다. 그녀는 서리가 하얀 강가의 낮은 습지 가까이 차를 몰고 가, 곧 되돌아갈 수 있게끔 이미 차를 돌려놓고 있었다. 양쪽 문이 마치 막 날아오르려는 딱정벌레처럼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차와 강둑 끝 중간지점에서 무엇인가 축 늘어진 것을 질질 끌고 있었다. 불구가 된 짐승처럼 옆으로 천천히 움직이는 두 개의 그림자 저쪽으로는 도도한 강물이 별빛을 반사하며 바쁘게, 그러나 소리도 없이 흐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숲속 마차길에서 간신히 빠져 나오면서 레슬리는 스스로도 뜻밖일 만큼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냉정하게 생각했다. 우선 적의 퇴로를 차단해야 한다. 차를 옆으로 세워 길을 막으면 그녀는 빠져나가지 못하게 된다......하지만 그는 그런 생각을 실천에 옮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이미 강기슭 가까이까지 이르러 있었으며, 그는 그 부근의 물의 흐름이 얼마나 빠른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물이 얼마나 차가운지도 짐작이 갔다. 이젠 생각할 틈이 없었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아우성을 치며, 헤드라이트를 확 켜고서 액셀러레이터를 힘차게 밟아 곧장 그녀를 향하여 돌진했다. 그녀가 차를 피해 도망간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그녀를 놀라게 하여 도미니크를 놓치게 하는 것이 당장 급한 일이었다. 마차바퀴 자국에서 빠져 나온 차는 울퉁불퉁 기복이 심한 풀밭을 마치 성난 야수처럼 달렸다. 헤드라이트 불빛 속에 그녀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굉음과 불빛에 놀라 소년을 놓고는 목을 비틀어 이쪽을 바라보았다. 대리석처럼 굳고 매끄러운 얼굴이, 숨이 차서 벌어진 입이, 무의미하게 번뜩이는 눈이 헤드라이트 불빛 속에 뚜렷이 떠올랐다. 그 눈에는 여전히 이지(理知)와 권위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녀가 미쳤다는 기미를 나타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다시 허리를 굽혀 소년을 겨드랑이에 끼고서 비틀거리며 강기슭을 향하여 급히 걸음을 옮겼다. 무겁게 축 늘어진 소년은 그녀의 허리에서 미끄러져 내려오곤 했지만, 그녀는 허둥지둥 낡은 문을 향하여 마구 끌고 갔다. 그 낡은 문 앞에서 레슬리의 차가 예리한 커브를 그렸다. 그녀에게서 겨우 몇 미터 앞에서 브레이크가 비명을 질렀을 때, 그녀는 마침내 단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소리를 지르며 소년을 내던지더니, 사냥개처럼 그녀의 차로 달려갔다. 달아나는 그녀의 팔을 잡으려고 했지만, 그녀는 그 손끝을 피했다. 그는 보다 급한 목적으로 그녀를 포기하고 소년에게로 달려갔다. 그녀는 거의 목적을 달성할 뻔했다. 불과 2~3 초의 시간만 더 허용되었어도 소년을 물에 밀어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머리와 한쪽 팔이 풀밭 끝의 작은 벼랑에서 축 늘어진 채 힘이 빠진 손이 물가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레슬리는 소년 곁에 쪼그리고 앉아 그를 안아 일으켜서는 풀 위에 반듯이 눕혔다. 밤색의 숱이 많은 머리카락 밑으로 도미니크의 얼굴은 고통에 일그러져 있었고 눈은 감겨 있었다. 그리고 간신히 열린 입에서는 무겁고 짧은 고통스러운 리듬의 호흡이 이어지고 있었다. 레슬리는 바삐 그의 온몸을 살펴보고, 시체처럼 무거운 그를 팔 안에 안아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발끝에 힘을 주어 일어서려고 했을


때, 라일리가 엔진 소리도 요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가 아직도 치명적인 흉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 둘을 해치울 수단을 남겨두고 있었던 것이다. 강기슭과 그의 차 사이에는 그녀가 맹렬한 속도로 차를 돌려 그들을 덮치기에 충분한 공간이 있었다. 더구나 이미 한 사람을 죽이려 했던 그녀로서는 두 사람을 살해하는 것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라일리의 헤드라이트는 베드퍼드 밴의 차체를 반쯤 돌아, 강줄기와 평행한 위치에 다다르자 눈부신 광선 속에 엉거주춤 서 있는 그를 향하여 곧장 달려들었다. 그는 소년의 무게 때문에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며 풀밭을 박차고 도망쳤다. 숲속으로 뛰어들기만 하면 그녀가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거기까지 도달할 가망은 없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밴의 차체 밑으로 몸을 피할 생각을 했다. 아마도 그녀는 밴과 충돌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기 자신의 도피수단을 못 쓰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정신이 말짱하다. 무서울 정도로 이성적인 것이다. 제정신을 갖춘 사람이 하는 일이라면 대개는 짐작이 갈 만하다. 강력한 불빛이 그의 눈을 멀게 했다. 밴도, 지면도, 별빛아래 밤의 풍경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단지 그녀 차의 진로를 가로질러 반대쪽 어둠 속으로 몸을 옮기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는 더듬다시피 해서 밴의 뒷바퀴 밑에 소년을 밀어넣고 그 위에 엎드렸다. 그녀의 차는 차 밑으로 빠져 나온 그의 다리를 스치다시피 하며 지나쳤다. 그는 서릿발이 선 흙이 그의 발꿈치에 튀는 것을 느꼈다. 헤드라이트의 불빛과 라일리의 큰 차체가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지나가자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숨을 몰아쉬었다. 레슬리는 소년에게서 얼굴을 떼어 소매에 파묻었다. 까닭 모를 흐느낌 같은 것이 치밀어 올라왔다. 공포의 한 순간을 되십으며 그는 그 자리에 벌렁 누웠다. 루스 해밀턴의 라일리는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진이 기다리고 있는 쪽으로 멀어져 갔다. 레슬리는 허탈한 몸과 마음에 매질을 하다시피 하며 차 밑에서 기어나와 뒤쫓아 달렸다. 하지만 안간힘을 써서 뛰어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2 분이 못 되어 라일리는 도로에 도달할 것이다. 그는 입가에 두 손을 갖다대고서 나뭇가지의 서리가 흐트러질 만큼 큰소리를 질렀다. "진, 조심해. 길 옆으로 비켜 서!" 아마도 진은 무리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는 생각해 보았지만, 보통 성질이 아닌 그녀이니만큼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몸을 사려 항복하기보다는 능히 죽음을 택할 여자다. 이리 구부러지고 저리 구부러진 코마번 쪽의 도로를


타고 두 대의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진은 길 한복판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 마침 그때 마차길을 되돌아오는 라일리의 울부짖는 엔진 소리에 섞여 레슬리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급히 숲속의 마차길 쪽을 살펴보려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레슬리의 밴이 아니라 아까의 그 차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어쨌든 해밀턴이라는 그 여자를 그냥 달아나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 수상쩍은 그녀를 잠자코 놓아 보낸다는 것은 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진은 달려가 낡아서 젖혀둔 통나무의 가장 위쪽 토막을 어깨에 매고 질질 끌다시피 해서 반대편 문기둥에 걸쳐 놓았다. 그 문기둥에는 큼직한 걸림쇠가 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마차길을 막아놓고는 급히 문을 덤불 속에 숨겼다. 그러는 사이에 라일리는 전속력으로 장애물을 향하여 달려들었다. 부딪치는 순간 가로지른 통나무가 부러져 나가며 그 여세에 문기둥까지 꺾여 쓰러졌다. 나무토막이 요란하게 튀며 차는 중심을 잃더니 길 옆 도랑으로 머리를 처박으며 정지했다. 앞유리창은 산산조각이 났고, 한쪽 헤드라이트도 날아갔다. 진은 웅크리고 앉아 그 처참한 광경을 지켜보았다. 온몸이 떨려 움직일 수도,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잠시 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막았던 귀에서 손을 떼고 나뭇가지를 헤치며 덤불 속에서 나왔다. 움직임을 멈춘 라일리 저쪽에서 밴의 차체가 춤추듯 흔들거리며 완만한 경사면을 굴러 내려왔다. 레슬리의 흐트러진 앞머리와, 핸들 위로 전방을 응시하고 있는 걱정스러운 얼굴이 보였다. 옆좌석에 뉘어져 버니 윌슨의 낡은 모포를 어깨까지 걸치고, 고개는 떨군 채 흔들거리고 있는 것은 의식을 잃은 도미니크가 틀림없었다. 때마침 코마번 쪽에서 달려온 두 대의 차가 길가에 멈춰서더니 다섯 명의 사복형사가 달려나와 지체없이 활동을 개시했다. 두 사람은 도랑에 처박힌 차 양 옆으로 다가갔고, 두 사람은 마차길에 널린 통나무 문의 잔해를 치워 차가 통과할 수 있도록 했다. 다섯 번째의 형사는 베드퍼드 밴으로 달려가 아들의 머리를 자기의 어깨에 올려놓고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었다. 도미니크는 공포와 아픔의 파도를 넘나들다가 문득 의식을 회복하고는, 자기가 아기처럼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을 희미하게 느꼈다. 그 누군가의 손길이 찢어지는 듯한 머리의 통증을 사라지게 해주었다. 그는 멍한 머리를 그 아늑한 어깨 위에 파고들듯이 기댔다. 뜨거운 것이 눈꺼풀 속에 차오르는 듯한 느낌이 그의 의식회복을 재촉했다. "엄마, 머리가 아파!" 헛소리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거기에 대꾸한 것은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응, 알고 있다. 곧 아픔이 가실 약을 갖다주마."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것이 그를 놀라게 했다.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려고 잠깐 눈을 뜨려고 했으나 힘에 겨워 그만두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 자기를 위에서 들여다보고 있는 얼굴을 볼 수는 있었다. 틀림없는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그의 예상과는 달리 그 얼굴은 조금도 험악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화가 난 얼굴도 아니었다. 그가 예상했던 바로는 운이 최고로 좋다고 해도 개집에 처박힐 벌은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의사를 묵살하고 큰일을 저질렀다면 아무리 가혹한 처벌을 받은들 지나친 일이겠는가. 완전한 의식보다 그 표면의 밑을 오락가락하던 그의 생각이 꼭 확인해야 할 중대한 일을 머리에 떠올렸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역시 키티가 아니었어요." 그가 말했다. 조지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도 이젠 아셨죠?" "응, 알았다. 이젠 모든 것이 해결되었지. 안심하고 쉬거라." 도미니크는 피로와 안도에 따른, 저항하기 어려운 혼수상태로 빠져들었다. 눈물이 감은 눈까풀 사이로 흘러나와 아버지의 어깨를 적셨다. 그때 가슴을 찌르는 듯한 갑작스러운 소리에 다시금 정신이 들었다. 누군가가 큰소리로 웃은 것이다. 그 비꼬는 듯한, 거침없는 웃음소리는 마치 비명처럼 귀에 거슬렸다. 그는 번쩍 눈을 떴다. 상처입은 신경이 짜르르 아픔을 몰고 왔다. 아버지의 얼굴과 데이켓 총경의 딱 벌어진 어깨, 그리고 그 어깨너머로 손을 마주잡고 있는 레슬리와 진, 그 저쪽에 미친 듯이 허둥대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검은 양장은 갈기갈기찢어지고, 볼에는 유리 파편으로 피가 흐르고 있었으며, 검고 긴 머리가 크고 무거운 열쇠 모양으로 얼굴을 가리다시피 출렁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도전적인 말을 내뱉을 때마다 입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네, 그래요, 내가 그 자를 죽였어요. 나는 이제 누가 알든 말든 상관하지 않아요. 당신들이 날 고발한다고 해서 겁날 줄 알아요? 내가 그 자를 죽였다는 게 뭐 어때서요? 당신들은 나를 교수대로 끌고 가려 할지 모르지만, 그렇게는 안될걸요. 1 급 살인은 아니니까. 난 법률을 알고 있어요 -- 알지 않을 수가 없지. 그자는 내 생애에서 20 년을 망쳐놨다구요 -- " 그녀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20 년이나 말이에요! 난 결혼할 마음만 먹었으면, 그 동안 열 번도 결혼을 할 수 있었다고요. 하지만


그러질 못했지. 그놈에게서 눈을 뗄 수가 있어야지. 그자의 마누라가......그 다 죽어가는 할망구가 숨이 넘어가는 것이 이제냐 저제냐 하고 10 년 동안이나 기다렸다고요 -- " 도미니크는 아버지의 팔 안에서 몸을 부르르 떨고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단 울음이 터지자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 범하기 어려운 위엄도 기품도 교양도 모두 그의 눈앞에서 내던져 버리고, 그걸 그의 탓으로 돌린 것이다. 보기에도 처참했다. 그는 조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울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서 귀를 막을 수는 없었다. " -- 그런데 20 년이나 버티다가 할망구가 죽었는데도 그자는 보상해 줄 생각이 없었지. 나는 닭 쫓던 개꼴, 세월만 허송한 거라고요. 그놈 때문에! 그리고 그날 밤 그 여자가 뜻밖의 전화를 걸어 왔지. 고르고 골라 나에게 도움을 청하다니 정말 바보스러운 여자라고 -- 더구나 그자가 자기와 결혼하자고 한다는 말까지 내게 알려주었지 뭐야. 세상에 그럴 수 있는 일인가. 나는 여자의 전성기를 그자에게 바쳤는데, 과연 얻은 게 뭐죠? 아무런 권리나 지위도 얻지 못하고 그저 다람쥐 쳇바퀴 돌듯 했으니. 낮에는 비서질시키고, 밤에는 마음 내키는 대로 내 침대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 전부였어! 그러더니 키티를 마님 자리에 끌어다 앉히려 하다니 천벌을 받아도 싸지. 그래서 내가 죽여버렸다고." 그녀는 가슴을 벌렁이며 숨을 헐떡였다. "하지만, 그냥 죽이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지. 그자를 몇 번이고 되살아나게 해서, 내 심정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고 짓이겨 죽여야! 그자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서는 열번을 죽이고도 다시 죽여야 속이 후련했다고!"

<PRE>번 호 : 31 / 76 등록일 : 1999 년 08 월 11 일 15:51 등록자 : CYBER105 조 회 : 132 건 제 목 : 죽음과 즐거운 여자 17 장(끝) -엘리스피터스-귀니사랑 </PRE>

제 17 장 도미니크는 밴을 타고 집에 돌아온 과정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나중에 진이 해준 이야기에 의하면, 조지가 그를 안고 열심히 간호를 했고, 레슬리는 마치 임산부를 둘이나 구급차에 싣고 운전하는 것처럼 조심조심 차를 몰았다고 한다. 그는 의식은 있었으나 수시로 가물가물했다. 의사의 진단으로는 가벼운 뇌진탕이어서 오래지 않아 기억력도 정상상태로 회복될 것이라고는 했으나, 그날 밤은 끝내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들은 그를 침대에 눕히고 약을 먹였다. 그 약은 서서히 아픔을 가라앉혀 주기는 했으나 그의 세계까지 잠재웠다. "걱정할 건 없습니다. 내일 아침 다시 한 번 가벼운 진정제를 먹이면 저녁때까지는 소나기 지나간 것처럼 멀쩡해질 테니까요." 의사가 말했다. 그는 밤중에 한 번 눈을 떴다. 여러 시간 동안 억제되어 있었던 저항 본능이 꿈속에서 폭발하여 멋대로 날뛰고 울부짖어, 그 바람에 잠이 깬 것이다. 밴디는 그에게 마실 것을 주었다. 그는 그것을 마시고, "내가 어떻게 된 거지?" 하고 이상하다는 듯 묻고는 어머니의 팔을 베개삼아 다시 잠들었다. 새벽녘에 다시 한 번 잠들은 채 흐느껴 울었으나, 어머니가 뜨거운 물수건으로 이마를 축여 주자 발작이 가라앉고 깊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아침이 되어 눈을 떴을 때는 아직 얼굴은 창백했지만, 시장기를 느낀다며 먹을 것을 찾았고, 기운을 차리고서 아버지와 이야기하고 싶다고 졸라댔다. "밤까지 몸조리나 해." 밴디가 달랬다. "아버지는 지금 키티 양 석방수속으로 바쁜 모양이야. 그게 궁금한 거지? 자, 입을 다물고 조용히 안정을 해야지. 뒷일은 아버지께 맡기고." "어머니는 저렇게 무사태평하다니까!" 도미니크는 원망하듯 말하고 돌아누웠다. 어젯밤 네가 업혀 들어왔을 때 내 얼굴을 보았다면 그런 소리 못할 거다 -- 그녀는 마음속으로 그런 말을 했다. 도미니크는 조금씩 정리가 되는 기억을 더듬다가, 문득 어떤 것을 회상하고는 멋적게 물었다. "내가 한 일, 화나세요?" 밴디는 체온계를 뽑아, 그의 체온이 정상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별로 칭찬할 일은 못되지." "죄송해요. 그런데......참, 그렇지. 엄마가 준 경비가 초과해 버렸어요. 그 가죽장갑, 33 실링하고도 11 펜스나 됐어요. 여자 장갑이 그렇게 비싼 줄 몰랐네. 청구해도 되죠?" "탐정 흉내에는 손해보험 같은 건 붙지 않는단다." 그녀가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네가 헤이워드 상점에서 그걸 살 때 엄마 앞으로 달아놓는 걸 잊어버린 게 불찰이지." "그래요? 그걸 몰랐군!" 도미니크는 정말 약이 올랐다. 저녁때가 되어서야 평상시대로 이야기를 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물론 나중에 공식적인 진술서를 작성할 필요는 있겠지만, 코앞에 둔 중요한 일은 그의 가슴속에 간직했던 일을 남김없이 아버지에게 털어놓는 것이었다. "수속은 끝났나요?" 집에 돌아온 아버지가 의자를 그의 침대맡에 끌어오는 틈도 못 기다리겠다는 듯이 다그쳐 물었다. "키티는 풀려났느냐고요?" 그녀의


이름을 입에 올렸을 때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응, 석방이 됐지." 조지는 그 말밖에는 하지 않았다. 도미니크는 아버지가 그녀를 위하여 얼마나 애썼는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새삼스럽게 조지가 거기에 관해 말한다고 해서 그에게 영광이 더할 일도 아니었다. "이제 넌 여한이 없겠구나. 계획대로 일이 풀렸으니까. 머리는 괜찮니?" "목언저리가 좀 쑤시지만, 대수롭지는 않아요. 그런데 해밀턴은 뭘로 저를 때린 건 가요?" "그게 보통 물건이 아니더라. 권총 탄환을 가득 채운 튜브 모양의 방망이지. 테드 단(불량 소년이라는 뜻) 애들이 사용하는 거." "그래요!" 도미니크가 아연실색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해밀턴은 그런 걸 어떻게 손에 넣었대요?" "짐작이 안 가지? 그녀가 관여하고 있는 무위탁소년협회의 한 아이가 갖고 있었던 거란다. 몇 주일 전에 그녀는 그 소년에게서 그걸 빼앗고서, 그런 흉기를 갖고 다니면 안된다고 설교를 했다더구나. 그런데 너는 어떻게 해서 그 여자를 범인으로 지목하게 됐지?" "솔직하게 말해, 그건 진의 덕택이었어요. 저는 먼저 이 사건을 둘러싼 사람들이 모두 아마이저 씨와 잘 알고 있는 사람들뿐이라는 것을 발판으로 해서, 왜 그중의 하나가 그날 밤 갑자기 그를 원수처럼 원망하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죠. 그리고 이 살인사건의 진정한 동기는 그날 밤에 일어난 어떤 일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 그리고 그것은 그 문제의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뿌리 채 뒤엎는 거나 다를 바 없는 일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다음에 키티가 전화한 것이 밝혀진 뒤에, 그녀가 전화를 건 상대가 그 사람일 거라는 가정과 더불어, 그 갑작스러운 살인동기는 아마도 그 전화의 내용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거기에서 머리를 짜낸 것이 셸레이 씨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레슬리와 진을 만나 그걸 확인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진은 그런 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 그녀의 주장은, 그러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키티는 남자에게 매달리지 않고 여자에게 하소연을 할 가능성이 절대적이라는 거예요. 아무리 노인이라도 이성에게는 못할 말이 있으니까요. 사실 키티는 그날 밤 욕심꾸러기 아마이저에게 청혼을 -아니, 타산적인 거래를 강요받은 것 외에 일종의 성폭행까지 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더더욱 어이없는 일은 -- " 그는 베개 위에서 머리를 돌려 벽을 바라보았다. 지금에 와서도 도미니크는 그것을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변함없이 레슬리를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바로 그의 아버지에게서 무리한 청혼이나


강요된 키스를 받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이었으리라는 이야기를. "아무튼 그런 상황에 놓여 누군가의 도움을 청한다면 키티는 여성 중 아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을 것이라는 것이 진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럴듯하군." 조지는 그날 밤 밴디 역시 비슷한 말로 그의 수사방향을 재고하라고 하고는, 도미니크의 그것보다 완만하고 전통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마찬가지로 같은 혐의자를 찾아보게 했던 것을 머리에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너는 키티보다 나이가 많고 그녀를 잘 알고 있으며, 더구나 그 사건이 있었던 밤 함께 있었던 여성이 누구일까 하고 생각해 본 거로구나." "그래요. 그리고 키티가 그녀에게 전화로 한 이야기 중에서 불현듯 아마이저 씨를 죽이고 싶어질 이야기가 있었다면, 과연 그것이 어떤 내용일까를 생각해 보았어요. 그리고 곧 짐작이 갔습니다." 그것은 그의 나이 또래의 청소년들이 일부러 탐구해야 할 정도로 필요한 지식은 아니지만, 그걸 모르는 소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이 경멸하는 가십에조차도 왕성한 지식욕을 보여 주고 있었다. "하지만 저는 키티가 아마이저와 해밀턴 양과의 관계에 관해서 떠도는 소문조차 모르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해요. 그녀는 그런 종류의 일과는 전혀 거리가 먼 여성이니까요. 그런 걸 그녀에게 이야기한다고 해도 한쪽 귀에서 다른쪽 귀로 빠져 나갈 겁니다. 아나, 그녀는 흥미가 없는 이야기는 귀에 담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조지는 도미니크의 뒤를 따라 키티의 마음 깊은 곳에 감춰진 비경을 탐색할 생각은 없었다. 거기에 그들이 머무를 땅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 우리가 그 장갑을 찾아내지 못한 것을 계기로, 너는 한바탕 연극을 꾸며 그걸 발견한 것처럼 설쳤다 이거로구나. 그건 어떤 생각에서지?" 도미니크는 마음의 짐을 더는 듯한 홀가분한 심정에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지금 이 정들고 안락한 장소에서 그때의 공포를 그대로 되살릴 수는 없었지만, 그런데도 가끔은 몸서리가 처졌다. "저는 셸레이 씨가 회사에서 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나서 그곳에 들어가 그분을 만나고 싶다고 수위를 못살게 굴다가, 자연스럽게 해밀턴 양을 붙잡고 이번 사건에 관해서 셸레이 씨와 상의할 일이 있다고 속을 떠보았어요. 그녀가 그 미끼에 달려들어 어떤 이야기인지 자기에게 하라고 말했을 때, 저는 비로소 그녀가 범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추리가 틀림없을 것 같다는 확신이 섰습니다. 그래서 저는 장갑을 발견했다는 것, 그것이 여자의 장갑인데 키티의 것이 틀림없어, 그걸 몰래 처분하고 싶다는 말을 한


겁니다. 그러자 그녀는 그런 짐을 덜어 주겠으니 장갑을 자기에게 넘겨 달라고 하더군요. 그걸 태워 없애겠다는 속마음이 엿보일 정도로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혐의가 한결 짙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일에 연관되는 것을 꺼려 할 텐데 -더구나 처음 만나는 상대에게 그런 것을 맡겠다고 나설 사람은 없을 겁니다. 여간한 관심사가 아니면 말이지요. 그녀는 제가 그것을 어디에서 발견했는지, 어떤 장갑인지 하는 것을 물었습니다. 그녀는 어느 정도 위험이 가까이까지 밀려왔는지를 알고 싶었던 거지요. 하지만 제가 천연덕스럽게 연극을 꾸며 울고짜고 하는 바람에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어요. 제 이야기가 진짠지 가짠지조차도 캐볼 수가 없었던 거예요. 어쨌든 해밀턴 양은 내가 그녀에게 위험을 초래할 가능성이 비록 1,000 분의 1 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무시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 장갑을 자기에게 맡기자고 저를 구슬렀지요. 만일 거기에서 곧바로 그렇게 했다면 저는 그녀에게 어떤 위험을 당했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때 그녀는 제가 그 장갑과 마찬가지로 치명적인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둘 다 없애버릴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테니까요. 그도 그럴 것이, 제가 너무나 순진하게 연기했기 때문에 이 애송이의 입을 영원히 봉하지 않고는 언제고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할 것으로 생각한 거지요. 마침 회사 안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 자리에서 저를 해치워 차로 먼 곳으로 싣고 가 버리는 건 쉬운 일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반 친구들 중에 남의 소지품을 뒤지는 고약한 녀석들이 있어 갖고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날 밤의 피아노 레슨 때문에 다시 시내에 나오게 되니 그때 갖고 오겠다고 둘러댔습니다. 그녀는 두말없이 거기에 달라붙더군요. 아무도 모르게 만나는 거라면 그때 저를 없애버려도 자신에게 혐의가 걸릴 걱정은 없으니까요. 그래서 그녀는 클럽의 모임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골목 입구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해서는 안된다고 못을 박고 말입니다. 그러저러해서 저는 흔들지 못할 확신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녀가 아마이저를 살해했을 때 피묻은 장갑을 현장 부근 어디엔가 숨긴 것이 확실해진 거죠. 그렇지 않고는 그런 음모를 꾸밀 이유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왜 너는 그때 그런 사실을 아버지에게 알리지 않은 거지?" 조지는 조용히 물었다. "왜 혼자서 그런 위험을 무릅써야 했느냐 말이다. 나를 믿을 수 없었니?" 하지만 아들에 대한 그런 비난은 당위성이 부족했다. 조지는 급히 말을 돌렸다. "아냐, 알 만하다! 그런 것으로는 증거가 되지


않기에, 너는 확실한 증거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스스로를 희생양으로 바쳐 가며 증거를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저는 이미 뒤로 물러설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제가 아버지에게 그런 말을 한다면, 아버지는 그만두라고 호령하실 테니까요. 제가 나름대로 해낼 수 있는 일이지만, 아버지는 제게 그 일을 시킬 수 없다는 건 뻔하거든요. 저만 탓하실 게 아니잖아요." "아니, 아버지는 너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나무라는 거다. 너에게 좀더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아버지가 되었어야 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도 잘못이 있었다. 자기비하는 도미니크 나이 또래의 소년에게는 나쁜 영향을 끼칠 수도 있으니까. "뭐 그런 건 신경쓰지 말도록 하자." 조지는 부드럽게 다독거렸다. "너는 대단한 각오로 한 일이었겠지 -이제 와서 왈가왈부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고. 그런데 그 문제의 장갑이 어떤 종류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 그 점이 어려웠을 텐데. 만일 엉뚱한 장갑이었다면 한눈에 네가 연극을 꾸미고 있다는 것이 들통이 났을걸." "하긴 그녀는 제가 자기에게 의심을 품고서 자기를 덫으로 몰아넣으려 한다고 눈치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모처럼 만들어진 그 기회에 처치해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 만도 하지요. 그러니까 그 점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가능한 한 신중히 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회사에서 나올 때 저는 그녀가 장갑을 끼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차가 떠날 때까지 유심히 지켜보니 그녀는 대시보드에서 검은 장갑을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장갑은 가죽으로 된 새 것인데, 손가락 관절 부분에 아직 주름도 생기지 않은 것이었어요. 그래서 그녀가 버린 장갑과 같은 것을 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급히 상점에 들러 비슷한 것을 산 거지요. 그걸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 비틀어 구기기도 하고 흙에 문지르기도 해서 헌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애를 썼고, 그것을 포장할 때 한쪽 모서리로 조금 보일 수 있도록 해놓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뒤의 일은 아버지가 알고 있는 그대로고요." 도미니크는 천장을 마주보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데 레슬리에게 보낸 편지가 뜻밖의 사정으로 그렇게 늦게 전해질 줄은 몰랐어요. 그럴 줄 알았다면 8 시 반이 아니라 8 시로 해두는 건데." "그랬군. 그때 나는 마침 그녀의 집 부근 차고를 조사하고 있었단다. 본서에서 연락을 받았을 때는 이미 9 시가 넘어서였지. 그 길로 네가 알려 준 골목 모퉁이로 달려갔었지만, 그때는 네 모습이나 라일리의 모습도 보이지 않더라. 레슬리가 움직여 주지 않았더라면 -- " 그는 도미니크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도 말끝을 흐렸다. "그런데, 아버지, 가령 그녀가 끝끝내 자백을 거부했을 경우 어떻게 되었을까요? 진짜 장갑 없이도 유죄를 증명할 수 있었을까요?" "아, 그 점은 문제없다. 그녀의 차에서 핏자국이 많이 검출되었으니까. 운전석 여러 군데에서 피묻은 흔적이 발견되었거든. 씻기야 잘 씻어냈겠지. 하지만 흔히 있는 실수로 더운 물을 썼더구나. 하기야 아무리 공을 들여도 섬유에서 완전히 피를 우려낼 수는 없지. 그녀가 그날 밤 입었던 스커트의 지퍼나 앞자락의 장식 단추, 그밖의 금속이 그녀의 아파트 벽난로 잿속에서 발견되었는데, 그건 그녀가 범행시의 피묻은 옷을 태웠다는 이야기가 되지. 더구나 그녀는 재킷에는 피가 튀지 않은 것으로 알고 교회의 자선 바자에 내놓았었는데, 거기에서도 미세한 핏방울이 발견되었고 -- 하여간 그녀의 스커트에는 태워 버리지 않으면 안될 만큼 많은 피가 묻어 있었던 거다. 그것이 키티의 드레스에 스쳤을 때 키티의 옷에 옮겨 묻었겠지." 도미니크는 손가락 끝으로 만지작거리던 시트 자락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물었다. "오늘 그녀 만나셨어요?" "그녀라니? 루스 해밀턴?" "아니, 키티 말입니다." 도미니크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석방될 때 거기 계셨어요?" "물론이지." "무슨 말 없던가요? 그리고 어떤 모습이었죠?" "약간은 어리벙벙한 얼굴이더구나." 조지는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데도, 그 자유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멍한 얼굴을 하던 그녀의 오랑캐꽃 빛깔의 눈을 머리에 떠올렸다. "2~3 일 지나면 옛날의 그녀로 돌아가겠지. 사건의 진상을 들었을 때는 쇼크가 큰 것 같더라만, 석방절차가 끝났을 때는 기운을 차리더구나. 그 길로 시내에 가서 머리도 고치고 새 옷도 사야겠다고 하더라." 도미니크는 얼굴을 돌린 채 말이 없었다. 시트 자락을 매만지던 손길이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말이다. 만일 네 상태가 손님을 만날 수 있을 정도로 회복이 되었다면, 오늘 저녁 방문해서 너를 만나보고 싶다더구나." 도미니크가 덮은 것을 걷어차다시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눈이 금빛으로 타올랐다. "예? 정말요?" 그는 그 굉장한 말 한마디에 달려들어 혼신의 힘으로 끌어안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경계심이 그걸 가로막았다. "하지만 아직 안정이 필요하다고 거절해야 되는 것 아니었나요?" 하고 의심스러운 말투로 중얼거렸다. "천만에. 너는 머리에 혹이 생겼을 뿐, 아무렇지도 않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니 새삼스럽게 안정이니 뭐니


한다 해서 그녀가 곧이들을 것 같지가 않구나." 조지가 피식 웃었다. "여하튼 키티는 8 시경에 오겠다고 하더라. 네가 그 참담한 모습을 매만지려면 15 분의 시간밖에 남지 않았어." 도미니크는 침대에서 반은 기어나와 큰소리로 밴디를 불렀다. 조지는 그를 원래의 자리로 끌어들이고, 새로 산 진 녹색 실크 가운을 가지고 왔다. 그것은 지난번 생일 선물이었는데, 너무나 고급품이어서 특별한 경우에나 입게 하려고 아껴둔 것이었다. "자리에 가만히 있어야 한다. 모처럼 병문안 오는 거니까. 하지만 그 새둥지 같은 머리는 안되겠는걸." 그는 거울을 가져다가 침대맡에 세우고 빗을 손에 쥐어주고는 흥분한 도미니크를 남겨둔 채 방을 나갔다. 아버지가 막 문을 닫으려 했을 때, 도미니크가 소리질렀다. "잠깐만요!" 조지가 뒤돌아보자, "제가 뭘 어떻게 했는지, 누가 그녀에게 이야기를 했군요. 그렇지 않고는 그녀가 알리가 없는데 -- 일부러 찾아오다니 -- " 하고 말했다. "글쎄다. 경찰에 있는 누가 입을 놀렸는지도 모르지. 그게 누굴까?" 조지는 계단 중턱에서 밴디와 마주쳤다. 그녀는 자기 병아리의 흥분된 울음소리에 응답하기 위해 급히 계단을 올라오는 길이었다. 조지는 갑자기 양팔을 벌려 감사와 안도의 충동이 시키는 대로 그녀를 안아 올려 허공에서 키스를 하고는, 한 계단 위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따사로운 키스를 남편에게 되돌려주고는 나는 듯이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는 남편과 아들, 어느 쪽이 더 소중한지 스스로도 분간이 가지 않았지만, 둘 다 치명상을 입지 않고 일이 끝난 것은 확실한 것 같았다. 한편, 조지의 마음은 생각했던 것보다 밝았다. 그는 지금까지 도미니크에 대해서 지나치게 자존심과 흥미를 가진 탓으로, 자기 스스로를 질투의 가시로 찌른 결과를 초래하고 만 것이다. 도미니크가 자기의 외모에 관해서 품고 있는 서툰, 그러면서도 열렬한 관심을 밴디는 조지보다 한결 존중했다. 그녀는 그것을 웃지 않고, 도미니크 자신과 마찬가지로 열의를 갖고 바라보았다. 하기야 그 결과로서 도미니크가 7 살쯤은 더 나이를 먹은 감을 풍기는 것이 탐탁지는 않았지만......그녀는 남편의 페이즐리 무늬 스카프를 멋진 모양으로 아들의 목에 매주었다. 도미니크는 감격에 젖어, 어머니의 관심이 바람직한 성과를 올리고 있는 한 멋적게 보채지 않고, 앓고 일어난 아이처럼 다소곳이 얼굴을 솝으로 닦게 하기도 하고, 머리에 빗질을 하게 했다. "그 여자를 너무 흥분시키면 안돼요." 밴디는 익숙한 솜씨로 빗질을 하면서 말했다. "그 아가씨는


차마 겪지 못할 일을 막 겪고 나오는 판이니 사소한 일로 이성을 잃을지도 모르거든. 그러니 침착하고 곰살맞게 굴어야 한다." 그녀는 그 대답으로서, 긴장에 의한 그의 굳은 몸이 풀리고, 깊고 고른 호흡이 다리 끝까지 스며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키티는 약속된 시간에 찾아왔다. 도미니크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보다 상당히 수척해지고 안색도 좋지 않았으나, 그녀의 독특한 그 우수어린 작은 미소는 마치 오랫동안 잊었다가 다시 발견한 것처럼 일종의 경탄의 표정을 곁들여 조용히 감돌고 있었다. 새 옷은 벌꿀색과 호박색 중간쯤 되는 색상의 거친 실크로 만든 것이었고, 아름다운 머리의 가벼운 움직임은 새로운 헤어 스타일을 오랫동안 연구해 온 사람이 손질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주위에 흐르는 향기는 그에게도 옮겨 밸 만큼 진했다. 그녀는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거의 눈으로는 식별이 가지 않을 만큼 얇은 나일론 스타킹을 신은 발을 가지런히 하고서 갸름한 구두코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도미니크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한 순간 부끄러움 같은 것이 붉은 거품처럼 두 사람을 감싸고, 그들은 침묵을 깨는 것이 겁나는 듯이 잠시 숨을 죽였다. 이윽고 그녀는 코 언저리에 잔주름을 잡으며 그에게 미소를 띠었다. 그걸로 된 것이다. 막은 아직 오르지 않았고, 그 미소는 진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될 때가 올 것이 틀림없다. 비록 그에 대한 미소가 아니더라도, 그의 선물에 대한 미소가 말이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네." 키티가 입을 열었다. "우연이라는 것을 깊이 생각해 봤어요. 만일 그때 내가 공교롭게도 1 파인트어치의 피를 헌혈하러 가지 않았다면 우리는 만나지도 않았겠고, 그럼 나는 지금쯤 지옥의 문턱을 서성거리고 있을 게 아니에요?" "아닙니다. 나 같은 사람이 없었더라도 경찰이 해결해 주었겠지요." 도미니크가 점잔을 뺐다. "알고 보니 아버지도 같은 범인을 쫓고 있었더군요. 그런 줄도 모르고 범인을 정확히 점찍은 것이 나뿐인 줄 알았죠. 나라는 녀석은 그런 인간이거든요-- 자만심이 강한." 조지가, 또는 밴디가 그가 지금 한 말을 들었으면 어떻게 생각할까? 키티에 대한 아첨에 가까운 마음이 그를 하인처럼 허리를 굽히게 하고, 그 자신은 결코 만족시킬 수 없을 고백을 하게 하고, 보다 더 적절히 행동하지 못한 일 때문에 용서를 빌고, 동시에 또한 그녀가 그런 그보다도 한결 멋진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내심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소리 해도 소용없어요. 난 다 알고 있으니까." 키티가 힘주어 말했다."몸은 좀 어때요? 아직 아파요?" "이젠 아무렇지도 않지만, 아버지나 엄마가 내일까지는 일어나면 안된다고 억지로......그런데


당신은?" "고마워요. 난 아무렇지도 않아요. 감옥에서 10 파운드는 살이 빠졌지만." 그녀의 미소가 차차 자연스러운 빛을 더해 갔다. 그녀는 상체를 돌려 닭털 이불자락을 다독거리며 말했다. "실은 계획한 것이 있어요.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는 않았지만. 돈 얘기 말이에요. 지금도 난 그런 유산은 조금도 탐나지 않아요. 그래서 거절을 할 생각인데, 그전에 내가 포기하면 그 재산이 레슬리에게로 간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요. 그렇게 될 수 없다면, 일단 내가 받았다가 레슬리와 진에게 넘겨주는 방도를 찾아봐야겠고......하여튼 어떤 방법을 쓰든 나는 그 돈을 그들에게 쥐어줄 생각이에요. 내일 셸레이 씨를 만나, 그런 문제의 법률적인 것을 상의드릴 참이에요." "레슬리는 달가워하지 않을지도 모르잖아요?" 도미니크는 엉거주춤한 표정으로 말했다. 레슬리에 대해 아는 게 적은 그가 그녀에게 그런 의견을 말한 것이 약간 주제넘은 일 같아서였다. "그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받아줄 거예요. 왜냐하면, 나를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그 말은 '지금보다 더 불행하게'라는 뜻으로까지 들렸다. 처음으로 사랑을 안 외곬 소년의 영혼은, 자신도 남몰래 마음을 앓고 있다는 것을 머리에 떠올리는 것이 괴로웠다. "진 역시 같은 이유에서 레슬리를 설득할 거예요......그리고 나서 난 멀리 갈까 해요. 만일 이번 사건에 증인으로서 재판에 참석해야 한다면 그때까지 이 도시에 머물러 있어야겠지만, 끝나면 곧 떠날 생각이에요. 더 이상은 이곳에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그녀는 얼굴을 들어 큰 오랑캐꽃 빛깔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도미니크는 고독의 단단한 깍지 속에 스스로를 가두어두고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 그녀에 대한 막중한 책임이 그의 양 어깨에 무겁게 찍어누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를 멀리 쫓아보내려 하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을 빼고 누가 있단 말인가 ? 심장이 가슴속에 자리잡고 있을 수 없을 만큼 부풀어 오른 것을 느끼며 도미니크가 말했다. "네, 그 기분 이해가 갑니다. 그것이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내가 감옥에 들어갔다든가, 세상 사람들을 대하기가 겁이 난다든가 하는 이유에서가 아니에요. 단지 이곳을 떠나 살고 싶다는 생각에서에요." "네, 압니다." "안다고요?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을 언제까지나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안다는 거예요?" 그는 거기에 대해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미쳐


날뛰는 심장이 목을 메워, 그의 말소리를 가로막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때 비로소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 동시에 도미니크가 입 밖에 내지 않은 대꾸를 알아차렸다. 그녀는 의자로 옮겨앉으며 회한과 애정이 교차되는 목소리로 흐느껴 울더니, 그의 침대 곁에 무릎을 꿇고 그의 양손을 잡아 볼에 갖다댔다. 그녀의 풍성한 머리가 그의 무릎 언저리에 파도처럼 퍼졌다. 그는 마침내 심장이 터져버린 느낌이 되었다. 간신히 다시 숨을 쉬고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살며시 한쪽 손을 빼내 그녀의 머리결을 쓰다듬다가 그 손을 긴 명주실 같은 머리칼에서 볼로 옮기고 마침내 입술에 댔다. "틀림없이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는 남자다운 투로 말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묵묵히 기다리면 돼요. 당신이 이 도시를 떠나면 기분도 달라질 겁니다." 그는 스스로의 목소리에 놀라고, 그 어른스러움에 존경의 마음까지 우러났다. 그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은 비통한 것이어야 했는데도 마치 꿀처럼 달았다. 단념의 넋두리가 아니라 소원을 성취한 기쁨의 여운이 실려 있었다. "단지 이곳을 떠나 다른 곳에 가서 눌러 살 생각은 하지 말고 여행을 떠나는 것입니다, 키티. 세계를 두루 돌아다니며 기회를 잡는 겁니다. 반드시 당신이 좋아할 만한 사람이 나타날 테니까요." 그녀는 그의 애무에 몸을 맡긴 채, 어른으로 향해 가는 길을 성큼성큼 걷고 있는 소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그에게 대한 사례로 어떤 선물을 할 것인가를 하루 종일 생각했었지만, 그의 승리를 깎아내리지 않고 그 대단원의 막을 장식할 만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생각해 낼 수가 없어, 결국은 빈 손으로 왔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그에게서 훌륭한 보답을 받고 만 것이다 -- 그것은 정한 곳 없이 방황하던 고독한 그녀에게 쏟아진 사랑의 격려에 의해, 새로운 인생 항로를 향해 출범하는 그녀 자신의 미래상이었다. 그녀의 목숨을 구해 준 그에게는 그녀가 갈 길마저 정해 줄 권리 같은 것이 있었다. 더구나 -코마번만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다. 그녀가 모든 남성을 외면하는 것이 아닌 이상, 어딘가에 한 사람쯤은 그녀의 마음을 줄 수 있는 남성이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닌가 -- 나는 살아야 한다 --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 나는 이 사춘기 소년의 우상이었던 것이다. 그를 위해서도 살아나가야 한다. 그녀는 그의 손바닥에 입술을 대며 말했다. "맞아, 그쪽의 말이 옳아요. 정말 그렇게 해야겠어." "인도라도 좋아요. 남아메리카도 좋고요. 세계의 이름난 곳은 모두 둘러보세요. 어느 곳에든 남성은 있습니다. 멋진 남성 말입니다. 당신은 그 중의


누구엔가에 마음의 문을 열어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쪽과 같은 멋진 남자에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손을 웃음이 번지는 자기의 볼에 비볐다. 그의 기쁨을 오래 가게 하기 위해, 그와 함께 계획을 짜볼까 하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지만,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그런 감정을 매정하게 끊어버리고, 그의 인생으로부터 완전히 빠져나와 미련을 대신해서 그에게 아름답고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추억으로 남겨주고 떠나는 일이다. 클라이막스에서 끝내는 것이다! 그는 얼마 동안은 괴로워하겠지. 하지만 그것은 찬란한 슬픔이 될 것이다. 나날이 여위어가면서 몇달이고 질질 끌려온 그녀의 경우와는 달라야 한다. 그건 내가 미련을 남겼기 때문이다. 도미니크는 그래서는 안된다. 생각해 보면 나는 나쁜 여자였다. 만일 내가 좀더 정신을 차렸다면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마이저 씨도 아직 살아 있을지 모르고, 그 계산이 치밀하고 집념이 강한 해밀턴도 살인범이 되지 않고서도 고비를 넘길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 눈에는 내 슬픔만 보였던 것이다. 지금 이렇게 도미니크와 함께 있으면 내 자신의 모습은 뚜렷하게 보이지 않고 그가 아주 믿음직해 보인다. 그와 함께라면 실수를 범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정말 그렇게 해야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그런 남성을 발견하게 되면, 맨 먼저 그쪽에게 알려 줄께요."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로 상체를 도미니크 쪽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망설이듯이 손을 머리가 짧게 깎인 그의 목 뒤로 조용히 뻗었다. 그녀의 열을 띤 큰 눈, 동정적인 입매, 그리고 얼굴 전체가 그의 눈의 초점에서 벗어났다. 그는 숨을 죽이며 와락 그녀를 가슴에 안고 세 번 키스를 했다 -- 그녀의 목 언저리에서 시작해서 끝내는 그녀의 입술에 익숙지 못한, 그렇다고 마냥 서툴지만은 않은 키스를 -당돌한, 순결한 정열을 품고서. 차갑고, 상쾌하고, 매끄러운 그의 입술은 희망과 흥분과 웃음과 애정이 뒤섞인 회오리로 그녀를 뒤흔들었다. 그녀는 그의 입술과 스칠 때마다, 그가 그녀에게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그가 하는 대로 포옹을 시키고, 그리고 끝나게 했다. 그가 그녀를 껴안고 싶어하는 동안에는 그녀도 그를 포근히 끌어안아 주고, 이윽고 그가 스스로의 입장을 깨닫고 그녀로부터 살며시 몸을 떼려 했을 때에는 그녀 역시 손을 풀어, 자연스럽게 몸을 빼어 무릎을 세우고 서너 걸음 물러나 섰다. "그럼, 안녕, 도미니크. 난 언제까지나 잊지 않을 거예요." 그가 넋을 잃고서 간신히 이런 말을 했을 때는


그녀는 이미 방을 나서서 조용히 문을 닫고 있었다. "안녕, 키티. 행복해야 해요." 그녀는 물론 짐작하고도 남았다. 도미니크는 자기를 언제까지나 생각할 것이다 -- 그리스인이 마라톤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30 분 뒤에 밴디가 방안을 기웃거렸을 때, 도미니크는 배가 부른 갓난아기처럼 만족한 작은 미소를 띠고 잠들어 있었다. 키티는 약속을 지켰다. 그로부터 9 개월 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어느 여름날 아침, 도미니크는 아침식사 테이블 곁에 리오 만(만)의 그림 엽서가 한 장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마침내 그 사람을 발견했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우선 알려 드립니다. 이름은 리처드 베인햄. 기술자이지요. 우리는 9 월 중에 결혼할 예정. 우리는 지금 무척 행복하답니다. 행복을 빌어요. 키티로부터' 도미니크는 낯선 필적에 당혹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리며 그것을 읽었다. 하지만 읽고 나서도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편지 내용이 금방 머리에 와 닿지 않았던 것이다. 9 개월이란 기간은 길었다. "키티? 누구더라......" 그는 딴전을 피웠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고 나서 아주 점잔을 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그 키티 말이군." 그것으로 끝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엽서를 소중히 들고 자기 방으로 올라가 서랍 깊숙한 곳에 간직했다. 그리고 나서 아무도 그 엽서를 본 사람은 없다. 그는 숙제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 속에서 추억의 빛이 반짝 스치고, 키가 몇 인치는 더 큰 것처럼 보였다 -- 어떤 과거와 미래를 가진 어른처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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