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허브는 서울의 청년들이 시도와 실험을 통해 청년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다양한 활동을 지원합니다. 동료를 만나 가치를 공유하고 즐거움을 나누는 일, 경제적 자립을 넘어 직업과 자아실현을 함께 성취하는 일, 삶의 기반인 도시가 건강하게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일. 주체적으로 자기 삶의 경로를 찾는 청년들의 활력이 도시와 사회를 지속시키는 바탕이 되리라 믿기에 청년허브는 경계 없는 지원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목차
① 청년업 사업소개
CONTENTS
② 서문 ‘배우는 법을 배우는 <청년업>’ | 장대철(KAIST 경영대학 교수) ③ 왜 직업실험인가? | 옥민아(2019청년업 아카이빙북 책임기획) ④ 2019청년업 참여팀 아카이빙 사용 설명서 ⑤ 팀별 아카이빙 (가나다 순) ㉠ 골든에이지 / 김소정 ㉢ 당신의 물건 / 동그란 자취 ㉤ 멋질 / 무치 ㉥ 반반몬스터 / 반스웍스 / 방앗간 / 붐 ㉦ 시바견 ㉧ 아야어여 / 여기공 / 영상IN / 유선아 / 윤지수 일요일의 사람들 / 일이삼컬렉터 ㉨ 젊은연구자모임 / 쪽프레스 ㉫ 타나크라프트 ㉭ 한세리 / 한주희 / Fromto ⓕ FEEL ROOM ⓟ Piece of peace ⑥ 부록 | 오뚜기 지수 자가 진단 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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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업 사업소개
1. 사업 배경
•사회적 성공보다는 자신만의 경험과 가치, 취향을 중시하고 일과 취미 활동을 병행하며 자아실현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 증가 •평생직장·직업에 대한 개념이 사라지면서 N잡러, 긱 이코노미 등의 새로운 업무 방식의 등장과 4차 산업혁명을 통한 기술 변화 등으로 다양한 일을 시도할 수 있다는 사회적 인식 확산
2. 사업 목표
•다양한 진로와 삶의 경로 탐구 및 변화하는 직업 생태계에 대한 청년의 적응 방법 모색 •청년들이 각자의 관심 분야에서 재능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역량 강화 •청년 직업실험에 대한 다양한 사례 발굴 및 확산
3. 사업 개요
•사 업 명 | 2019 청년 직업실험 지원사업 <청년업> •사업기간 | 2019.03~12 (활동기간: 2019.5~10) •사업대상 |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청년 개인 및 단체(만 19세~39세) * 단체의 경우, 대표자와 단체구성원 과반수 만 19~39세
•선정규모 | 총 26인/단체 지원분야
세부설명
가업
친족으로부터 이어져 온 집안의 일, 가게, 또는 기술을 이어받아 지속함
덕업
취미나 관심사를 바탕으로 전문화하여 취·창업의 형태로 발전
부업
직장을 가진 상태에서 보다 적성에 맞는 일을 부업의 형태로 시도하여 전업까지 이름
•지원내용 | 서울에서 활동하는 청년의 진로 모색을 위한 직업실험 지원금(500~1000만원) 및 교육·멘토링 지원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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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업 내용
•[직업실험 지원] 서울에서 활동하는 청년의 다양한 진로 모색을 위한 직업실험 지원 •[역량강화 지원] 효과적인 사업 추진을 위해 세무·회계·기획 등 교육 및 멘토링 운영 •[파트너십 구축] 분야별 전문가·유관기관 등으로 구성된 파트너십 구축 및 연계 •[사업결과 확산] 아카이빙 및 결과공유회를 통한 활동 공유 및 사례 확산
5. 사업 일정
청년업
구분
일정
내용
①
2019.04.08.(월)~04.25(목)
참여자 모집
②
2019.04.16.(화)
사업설명회
③
2019.04.29.(월)
서류심사
④
2019.05.02.(목)
서류심사 결과 발표
⑤
2019.05.07.(화)~05.11(토)
사전인터뷰
⑥
2019.05.14.(화)~05.16(목)
대면심사
⑦
2019.05.21.(화)
최종선정자 발표
⑧
2019.05.25.(토)
오리엔테이션
⑨
2019.05.31.(금)~10.20(일)
사업 운영
⑩
2019.06.29.(토)~08.24(토)
세무·법률교육
⑪
2019.07.31.(수)~10.05(토)
개별·그룹멘토링
⑫
2019.11.23.(토)
결과공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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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배우는 법을 배우는 <청년업>’
장대철
최근에 다시 읽었던 책이 있습니다. 시어도어 다이먼이 쓴 ‘배우는
KAIST 경영대학 교수
법을 배우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청년업>
2019 청년업 멘토
사업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이 바로 “배우려면, 실험하라!”이기 때문입니다.
청년허브에서 수행하는 직업실험 프로젝트인 <청년업>은 우리나라 청년들의 삶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실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프로젝트이기에 너무나 소중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배우는 방법’은 외우고 따라하는 모방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방법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만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실패가 학습됩니다. 우리는 종종 실패할 구실을 만드는 자신의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또한 새로운 시도를 할 기회를 스스로에게 주지 않으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또는 가질 수 있는 ‘초능력’을 평가 절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청년업> 사업에서와 같이, 실험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실험은 가설을 세우고 이 가설이 맞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과정이고, 이러한 과정에서 가설이 맞으면 하나의 인과 관계를 배우게 되고, 가설이 맞지 않으면 내가 가지고 있는 가설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배움을 얻게 됩니다. 실험의 과정은 우리의 이해를 확장시킬 기회를 주며, 자신에게 틀릴 수 있는 자유를 주고, 따라서 성장하게 합니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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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완벽함을 향해서 나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완벽함을 모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우리 자신의 가능성을 키워 내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배움이라는 것은 그리고 성장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는 것이고, 직업이라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우리의 ‘초능력’을 개발하고 발전시켜서 사회에 기여하는, 활동을 의미합니다.
그 자체로 실험적인 시도의 하나인, 청년허브의 <청년업> 사업이 참여한 모든 청년들에게 배우는 법을 배우고, 자신을 찾고, 타인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좋은 기회가 되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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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직업실험인가?’
옥민아
‘먹고사는 일’의 엄정함은 청년이든 중년이든 장년이든,
2019 청년업
모두에게 공평합니다.
아카이빙북 책임기획 아키비스트
4차 산업 시대의 ‘먹고사는 일 _ 업業’이라 해서 새삼스레 세련되고 대단히 신선한 방식이 등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통적인 직업의 의미가 살금살금 확장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한듯 보입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당대의 청년들이 고민했던 질문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듯합니다.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갖는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일까?” 가 바로 그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청년업은 ‘왜 그러면 안 되는가? 를 되묻고자 합니다.
청년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이를 통해 돈까지 버는 그 꿈같은 일을 일단 시도해 보는 것. 성공이든 실패든 그 낱낱의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것. ‘청년업’은 청년에게 먹고사는 일을 위한 직업으로서의 ‘업’과 한 개인이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로서의 업이 즐거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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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청년업을 통해 ‘기꺼이 즐기는 일이 업이 되는 실험으로서의 덕업’, ‘부모의 일을 이어받아 그것이 자신의 업이 되는 가업’, ‘본업 외에 또 하나의 업을 마련하는 부업’의 영역 안에서 가열찬 실험이 이루어졌습니다.
여기 26팀의 직업실험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생생한 육성을 꼼꼼히 기록한 아카이빙북은 ‘왜 직업실험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성실한 대답이 될 것입니다.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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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청년업 참여팀 아카이빙 사용 설명서
팀 소개 & 청년업 프로젝트 소개
각 팀이 스스로 밝힌 나, 혹은 구성원에 대한 소개 & 지원 당시의 프로젝트와 사업을 수행하며 변화한 프로젝트에 대한 소개
한땀한땀 인터뷰
한 명의 인터뷰어가 만난 26팀의 이야기
손수 인터뷰
‘업’의 의미에 대하여 팀별로 손수 작성한 서면 질문지
프로젝트 연대기
프로젝트의 시작과 끝을 돌아보는 현재진행형 프로젝트 연대기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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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연대기 순서
1) 마음먹기의 시작 머릿속으로 그리던 프로젝트의 원대한 아이디어, 그 시작은 어디인가요? 2) 프로젝트의 시작 내 머릿속의 아이디어를 끄집어 내어 몸으로 움직이고 프로젝트에 실체를 부여한 그 처음을 알려주세요. 3) 만남 팀원들을 처음 만난 순간이 궁금합니다. 4) 위기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위기는 수없이 많았겠지만, 가장 정점이라 기억되는 위기의 순간은 언제였나요? 5) 극복 그 위기의 순간을 어떻게 극복했나요? 혹은 극복 중인가요? 또는 극복하지 못했나요? 6) 현재 사람의 생애 주기를 프로젝트에 대입해 본다면 당신의 프로젝트는 지금 어디쯤 있나요? “아동기, 청소년기, 또는 청년, 중년, 장년기중 우리 프로젝트의 생애 주기는 여기입니다!”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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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별 아카이빙
INTERVIEW.
골든에이지는 대표 최정은과 그녀의 어머니, 여동생.
골든에이지
이렇게 3명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패션 디자인을 전공한 대표(최정은), 옷을 만드는 작업을 담당하는 어머니, 그 외 마케팅, 관리를 맡아 주는 동생이 함께합니다.
최정은
제 어머니는 40년 경력의 미싱사입니다.
골든에이지
오랜 시간 한길만을 쭉 걸어오시는 장인 중에 장인입니다. 우리의 부모세대는 각자 분야에 있어서 젊은세대들이 따라올 수 없는 본인만의 기술과 노하우를 이어가는 꾸준한 삶을 살아 왔습니다.
미싱사인 어머니를 보며 어렸을 적 저는 패션 디자이너라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디자인한 옷을 제 어머니가 만듭니다. 나를 생각하며 어머니가 만들어 주었던 정성스럽게 지은 옷을 이제는 함께 만들어 나가고 싶습니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나의 세월은 이제 지났다고 손을 놓으시려는 어머니를 도와, 엄마와 딸이 함께 만드는 옷을 통해 이제부터 시작인 엄마의 진짜 황금기를 함께 이어 나가려고 합니다.
골든에이지는 친환경 천연염색을 활용한 옷을 제작합니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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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든에이지의 연대기
마음먹기의 시작 패션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갖게 된 건 2009년이었어요. 졸업 후 바로 대기업 입사를 했었거든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패션 디자인라는 걸 시작한 때는 16살, 중학교 3학년 때예요. 그때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엄마를 졸라서 미술학원에 보내 달라고 했어요.
만남 : 가족
프로젝트의 시작 3년 정도 회사를 다니고 퇴사한 후, 무언가 내 것이라고 생각되는 작업을 해 보고 싶어 시작하게 됐어요. 처음에는 엄마한테 도움을 요청해서 조금씩 같이 하다가 학교에 다니고 있는 동생에게도 이것저것 부탁하다 보니 지금은 가족끼리 팀이 되어서 협업하고 있죠.
위기 처음 퇴사를 하자마자 시작한 분야는 기성복이었어요. 그러다가 중간에 웨딩 쪽에 도전해 보고 싶어서 바꾼 게 29살 때였고요. 그 시기에 가장 일이 많았던 것 같아요. 회사 생활에서 경험했던 일들을 기성복을 하면서 반복하는 것 같아 위기가 왔는데, 성격이 급해서 그걸 견디지 못하고 조금 섣불리 종목을 바꿔 버렸었죠. 지금은 후회가 돼요.그때는 조금 쉬었다가 새로운 일을 해 보고 싶다 생각해서, 그냥 몇 개월 정도 놓고 있다가 지금 일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극복 저는 성격이 급하고 빨리빨리 해야 되는 성향을 가진 반면
그럼 동생이 “하나만 똑바로 해, 이건 아닌 거 같애”하면서
뒷수습을 제대로 못해요. 그래서 자꾸 일만 벌리게 되는
말리죠. 그러다 보면 싸우기도 해요. "이미 하고 싶어서
것 같아요. 지금은 그러면 동생이 항상 잡아주는 역할을
얘기한 거 아니냐",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안 듣고
해줘요. 제가 “이거 어때? 이렇게 하는 거 어때?” 하면서
있다"하면서요. 제가 중심을 더 잘 잡으면서 성장해 나가야
아침이나 오후, 다음날 저녁까지 생각나는 대로 계속 얘기를
한다는 생각을 해요.
하거든요.
현재 청소년기 같아요. 다른 사업을 하시는 분들이 봤을 땐, '기간이 적지 않게 됐는데 아직 못하고 있는 거 아니냐'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또 앞으로 더 성장해
청년업
나가고 싶은 부분이 많은 것 같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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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 본인 소개부터 부탁드릴게요. G | 골든 에이지의 최정은이라고
O | 본인도 이제 30년 더 하면
40년을 하게 되잖아요. 그렇게 할
다니셨던 경험이 있다고
것 같으세요?
들었는데, 그건 말하자면 패션
합니다. 저희 팀은 저와 저희 엄마, 제 동생, 이렇게 셋으로 구성돼
O | 일종의 직업병이네요. 대기업에
G | 저는 할 것 같아요.
디자이너가 꿈이라고 했을 때 가장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있어요.
이 일을 하면서 너무 짜증나고
저희는 의류 만드는 일을 하고
힘들 때도 있어요. 이상과 현실은
있고, 신랑이 지원 사업 같은
다르니까요.
것들이 있으면 해 보라고 권유를
학생 땐 너무 멋져 보이고 창의적인
많이 해줬어요. 그러다 알게 돼서
직업인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하는 게 제게는 너무 괴롭고
하게 됐어요.
사실은 그렇지 않은 부분도
힘들었어요.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꿈꾸게 된
많잖아요. 그럴 때마다 ‘다른 일 한
옷을 제작한다는 일 안에서,
건 엄마 영향이 큰데요. 엄마가
번 찾아볼까’ 하기도 했어요.
회사에서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어렸을 때 옷도 만들어 주시고,
그런데 어딘가 돌아다닐 때나
있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요.
하시는 일들을 보면서 어린 나이의
여행을 가거나 하면 옷이
누군가의 확인을 받아야 무언가를
저로선 재밌어 보이기도 하고,
보이잖아요. 그냥 '예쁘구나' 하고
만들 수 있고, 작은 단추 하나를
‘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갖게
끝나는 게 아니라 어떤 디테일을
쓰고 싶어도 누군가가 허락을
되었고요.
써야 이 옷을 만들 수 있는지,
해줘야 쓸 수 있었거든요. 이런
어느 부자재에서 특별한 느낌이
과정들을 겪으면서 시간이
나오는지 계속 뜯어 보는 자신을
흐를수록 내가 무언가를
40년이 되셨다고 들었는데,
발견하게 되는 거죠. 일이 하기
디자인했다는 자료는 남지만,
짐작이 가시나요? 한 직업을
싫은 와중에도
O | 어머니께서 봉제 일을 하신 지
루트인 것 같아요. 그걸 그만두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G | 단순하게 말하면, 기업에서 일을
40년 간 가진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요? G | 제가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나이가 16살이거든요. 요즘은 워낙 사람들이 직업이나 꿈이 매번 바뀌기도 하고, 주변에서 어떻게 중3 때 직업을 정할 수 있느냐는 얘기도 해요. 하지만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 하나가 생기면 끝까지 쭉 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저희 엄마 모습을 봐도 그렇고요. 그래서 그때, 16살 때 나는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그런 것들을 보면서 ‘그럼 다음에
그 결과물을 내 거라고 생각하기
마음을 먹고 엄마한테 ‘미술학원에
디자인할 때는 이런 식으로 한
힘들어졌어요. 그러다 보니 일을
보내 줘’ 요구한 후부터 바뀐 적이
번 해 볼까?’ 하고 또 다음 일을
하면서도 재미가 없고 하기 싫다는
한 번도 없어요. 그런데 이제
생각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런
생각만 드는 거죠. 회사에 가기가
나이가 좀 들어서 보니까 한 직업을
순간이 올 때 이 일을 계속할
싫어지더라고요.
그렇게까지 오래 가질 수 있다는 건
수밖에 없을 거라고 느끼게 돼요.
대단한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O | 그래서 그만두고 브랜드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신 건가요? 어떻게 가족끼리 협업을 하는 쪽으로 진행됐는지도 궁금하네요.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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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어요. 동생은 연극영화과를 재학 중이었는데, 처음에는 '이런
제 비중이 가장 크다 보니까
업무들을 해줄 사람이 필요한데
엄마나 동생에게 심하게 말할 때도
학교 다니면서 조금씩 해줄 수
있더라고요.
있어?' 하고 부탁했다가 같이
그래서 서로 상처 주거나 삐쳐
쭉 하게 되었고요.
가지고 대화도 안 하고 있다가도
O | 혹시 수익이 나고 있나요?
만약 그렇다면 직업적으로는 나름대로 성공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G | 네, 수익은 나고 있지만 아직
성공했다고는 생각 안 하고요. 지금은 3명이 같이 하고 싶은 일을
가족이라는 게, 언제 그랬냐는 듯 풀리기도 하고… 그런 것 같아요. O | '직업'이란 게 네이버 사전에는
‘먹고 살기 위해 꾸준히 하는 일’로 되어 있는데, 직업이란 뭐라고 생각하세요? G | 먹고 살기 위해서 꾸준히 해야 하는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일은 맞지만, 일요일이 되면 '나
이게 잘 쌓인다면 나중에는
내일 일하러 가기 싫다', '월요일이
우리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너무 싫다'는 직장인들이 아주
같아요.
많잖아요. 저는 이 일이 스스로를 힘들게도
G | 그렇게 제가 회사를 그만두었던
때가 26살이었거든요. 뭔가 내
G | 3인이 일을 하고 있지만 나름대로
O | 온 가족이 뭉쳐서 사업을 하는 데
하고 웃게 할 때도 있고 그렇지만,
거를 해 보고 싶은데 사실 창업에
대한 특이한 어려움이 있을 것
어쨌든 스스로가 좋아서 할 수 있는
가장 실질적으로 필요한 건
같은데…?
일이 직업이 되었으면 해요.
자금이잖아요? 또 디자인하고 원단 구매하고 하는 것들은 문제가 없었지만 제작을 맡길 사람이 필요했어요. 그런 부분들을 부탁드리다가 같이 시작하게
청년업
G | 남이면 말을 해도 좀 걸러서 하게
되는데, 식구끼리 하다 보니 말을 직설적으로 하게 돼요. 그러면 그게 때로는 상처가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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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VEY.
골든에이지 Q. 당신에게 업(직업)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A.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Q. 어린 시절의 꿈은(직업으로서) 무엇이었나요? A. 패션 디자이너
Q. 현재의 일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에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천연 염색 실험을 통해 만난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의 색상들
Q. 직업 실험에 꼭 하나 필요한 요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일 수도 공간일 수도 자금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스타트업으로 시작되는 작은 사업체는 늘 자금이 부족해요. 그래서 하고 싶은 것, 만들고 싶은 것, 패브릭 개발이나 염색 등의 다양한 실험이 어려웠는데요. 이런 실험을 조금 더 자유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
Q. 직업 실험을 통해 실제로 자신의 직업으로서 현재의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월급을 책정한다면 얼마입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A. 특정 금액을 적을 순 없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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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성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5년 후의 본인을 상상한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A. 브랜드 팬층이 두텁게 쌓여 있는 모습
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장렬하게 실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직업 실험의 경험이 남았습니다. 실패의 경험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A. 지금보다 더 노력해야 하는 것
Q.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 본인의 작업에 새롭게 도전하고자 하는 청년에게 해주고 싶은 말, 혹은 조언이 있다면? A. 지금 해 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고민하지 말고 시작하고, 안되더라도 후회는 나중에.
Q. 본인이 청년업을 통해 경험한 ‘업’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면, 당신의 직업은 어떤 명칭을 갖게 될까요? 자유롭게 직업의 명칭을 상상해 주세요. (여러 개를 작성해 주셔도 좋습니다.) A. 놀이터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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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김소정
김소정
관악구 행운동에 위치한 엠프티폴더스라는 작은 동네 책방의 주인입니다. 팀원 없이 혈혈단신으로 책방과 청년업을 꾸려 나가고 있지만 주변에 든든한 동료가 많아 외롭진 않습니다. 책방을 하며 만난 독립출판 작가님들과 또 같은 꿈을 꾸는 수강생분들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대해, 후후 프로젝트'는 퇴사 혹은 작가 데뷔와 같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어떤 선택, 그 이후의 삶에 방점을 찍습니다. 그 선택은 삶의 큰 굴곡을 주는 터닝포인트가 되기도 혹은 물 흐르듯 자연스레 흘러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후(after)의 이야기를 누군가(who)에게 듣는 후후 프로젝트로 이름 붙였습니다. 책방에서 '독립출판을 위한 워크숍, 모두의 첫 책'과 '워크숍을 위한 워크숍, 너와 나의 첫 수업'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열두 명의 수강생들과 함께 첫 출판과 첫 강의의 시작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작가와 강사 데뷔를 꿈꾸는 이들에게 7주 동안 멘토가 되어주고 책방 공간을 내드리고 있습니다. 워크숍 이후 프로젝트를 함께한 분들 중 2~3인을 선정해 인터뷰를 진행하고 인터뷰집을 독립출판으로 출간하고자 합니다.
이 '후후 프로젝트'가 제게 있어서도 저의 그 다음 업이 되어 주길 소망합니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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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소정의 연대기
마음먹기의 시작 작년 연말이요. 퇴사 이후 한창 인터뷰 요청이 많이
만들어 사람들을 모아 봤어요.그때 많은 얘기를 들으면서
들어왔죠. 인터뷰를 요청하는 쪽에선, 퇴사 후 책방을
알게 됐어요. 생각보다 사람들은 퇴사한 사람들, 그리고
연 것을 사람들에게 판타지로 제공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퇴사 이후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관심을 기울인다는
그런데 그보다 제가 먼저 그런 사람들의 얘기가 듣고
걸요. 그래서 작년 연말에 생각을 하고 올해 2월에 ‘후후
싶었거든요. 퇴사하고 다른 무언가를 하는 사람들의
프로젝트’ 첫 번째를 연 다음, 청년업에서 8월부터 다시
얘기가요. 그래서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어요.
프로젝트의 시작 1월 초에 텀블벅(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오픈하면서 시작되었고, 그때 세미나랑 워크숍 신청이 다 매진됐어요. 그런데 마무리하던 시점에 정산을 해 보니 금액이 마이너스였죠. 강연을 하는데 강의료는 받지 못하고 사비를 써서 일을 한 셈이 되니까 조금 지치더라고요. 그때 주변 사람들이 그 얘기를 듣고 ‘청년업’을 추천해 줬어요. 그게 결심의 계기가 되었고요.
위기 멘토링을 받으면서 그런 말씀을 들었어요. 저의 인건비도
또 좋은 수업인데 무료로 제공해 버리게 되면, 똑같이
책정해야 하고, 수업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수업료가
독립 출판 수업을 하는 다른 책방들에도 피해가 가지
비싸더라도 양질의 컨텐츠를 제공하는 게 중요하다고요.
않을까 싶어 걱정이 많았어요. 최근까지도 그게 고민이고요.
그래서 그렇게 진행을 했는데, 알고 보니 지원금을 받아
지원금 사용에 대한 규정을 미리 알았다면, 홍보가 될 만한
수업을 만들었을 땐 수강료를 받으면 안 되더라고요.
세미나를 무료로 하고 워크숍은 지원금을 받지 않는 걸로
수강료를 올려서 판을 키운 건데 갑자기 그걸 못 받는다고
했을 텐데, 잘못한 거죠.
생각하니, 제가 인건비를 못 받거나 대관비를 못 받거나 하게 되는 거예요.
극복 일단 수강료를 무료로 바꾸어 수업은 진행되고 있으니 극복 아닌 극복은 한 것 같아요. 그래도 2기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고 생각하고, 이 결과물을 활용해 다음 3기도 오픈을 해서 그때 수강생이 충분히 모이면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현재 중학교 2학년 정도일 거예요. 약간 ‘중2병’ 걸린 것 같이, 난 남들과 다르다는 걸 보여 주고 싶어하는 느낌이요. 초등학교 땐 아무것도 모르고 시간이 지나버리잖아요. 그렇게 이제
청년업
그냥 중학생이 된 사람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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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 팀과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K | 안녕하세요, 저는 ‘그 다음에 대해,
후후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실험을 하고 있는 김소정입니다. 관악구에서 ‘엠프티폴더스’라는 작은 책방을 운영하면서 교육 기획과 독립 출판에 도전하고 있어요. '엠프티폴더스’는 작년 5월에 오픈했어요. 처음엔 운영이 잘되고 있나 어떤가 잘 몰랐는데, 그래도 이제 1년 조금 넘게 운영하고 있다 보니 감이 조금 오는 것 같아요.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바쁜 일들도 많아졌고요.
O | 서점 운영 외엔 어떤 일들을
하시는지? K | 원래 교육 프로그램 기획 일을
했었는데 책방 운영과 맞물리면서, 외부 강의를 나가거나 원고 청탁을 받아서 하기도 해요. 고등학교 때부터 기획 일이 하고 싶었는데, 그때는 공부를 워낙 열심히 안 했었기 때문에 어머니께서 문화 컨텐츠 학과라는 데 가면 네가 좋아하는 만화나 공연이나 연예인들 보는 일들을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저를 설득하셨거든요. 그렇게 감화가 돼서 공부 열심히 해 대학에 들어갔고 졸업 전에 취직이 돼서 연극 등을 기획하는 일들을 했었어요. O | 공연 기획은 연극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활동이었나요? K | 아무래도 그렇죠. 일하던 회사가
K | 난타를 미취학 청소년들에게
K | 해서 한 것도 있지만, 관악구가
가르치고 공연으로 결과 발표를
도서관이나 다른 책 관련 인프라가
하는 프로젝트였는데 적성에
잘 돼 있는 동네라서 지금은 잘
맞더라고요.
됐다고 생각해요.
저는 연극영화과를 나오진 않았고
예전 구청장이 과거에
문화인류학과니까 인문학적인
국회도서관을 담당한 사람이었다고
감성이 더 제게 맞고, 누군가랑
하더라고요. 그 영향 때문에
수업을 같이 하는 것이 더
동네 분들도 서점을 상대적으로
의미있다고 느꼈어요. 그렇게
익숙하게 느낄 만한 환경이고요.
퇴사를 하고 상상마당의 교육
또한 지금은 서점이 하는 일을
프로그램 만드는 부서에 지원하게
넘어서서 제가 기획자로서
됐는데 처음엔 문과생을 우대해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는 공간도
주는 몇 안 되는 곳인 데다
되어 주고 있어요.
인문학과 글쓰기 수업을 할 수 있는 게 좋았어요. 하지만 일을 열심히 해도 그게 제 이름이라기보다는 KT&G 상상마당의 무언가로만 남기도 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하고 싶어도 결재 라인도 너무 많고 하다 보니, 더 작게 하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걸 내 공간에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거기서도 퇴사했어요.
문화 행사 같은 것들을 제안하고, 입찰 받으면 행사를 만드는 곳이었는데 거기서 작은 교육 프로그램 하나를 맡게 됐어요.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O | 서점의 위치가 관악구인 이유는요? K | 1차적으론 그쪽으로 이사를 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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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 기업이나 기관에서 할 때와 본인의
K | 상상마당에 있을 때는 유명한
K | 짧게 보더라도 1~2년 안에 다시
공간에서 하는 기획의 차이는
분들을 강사로 섭외해 대규모로
생계를 위해 회사로 돌아가지는
무엇인가요?
강의를 했었고, 그게 기쁘고
않아도 될 거라고 예상은 해요.
즐겁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이제
지금 서점에서 책을 만드는 수업은
서점으로 와서 20대 초반의
다른 작가님들이 진행해 주시고
작가님이나 처음 책을 출판한
기획과 관련한 수업은 제가 하고
사람이라든지, 강의 경력이 전혀
있는데, 1기 때 했던 사람들이 다른
없는 분들을 제가 도울 수 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저를 찾아
부분들을 도와가면서 일할 수 있게
주시거나 아니면 그들끼리 무언가
되었고요. 그게 강의든 책 판매든
기획하거나 하는 식으로 일이 계속
그분들의 어떤 첫 창구가 되는
만들어지는 것 같아서, 이 ‘후후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게 뿌듯하게
프로젝트’가 만든 네트워크가
느껴져서, 기획 일을 한다는 것의
일종의 커뮤니티처럼 된다면 점점
만족도가 훨씬 더 높아졌어요.
외부 기관의 힘을 빌리지 않고
또 이전에는 회사원으로서 김소정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게 되지
매니저입니다, 혹은 김소정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상상마당
대리입니다, 소개되던 것이 지금은
쪽에서도 연락이 와서 서점 창업을
‘엠프티폴더스’의 대표 김소정
한 내용과 동네에서 다른 서점들과
기획자입니다, 표현할 수 있게 된
모여 축제를 기획하는 경험 등에
것이 만족스럽기도 해요.
대해 강의를 하게 됐는데, 제가
K | 아무래도 교육 기획 분야가
다른 공연이나 관련한 일들보다 상대적으로 정해진 틀이 있고 세부적인 것 같아요. 강의실 공간이라는 제한도 있고, 매 회마다 같은 수강생들이 오기도 하고요. 서점에서 일을 할 때와 상상마당에서 일을 했을 때가 진행은 비슷한데, 기관에서 일을 할 땐 강사비 기준이 따로 책정이 돼 있고 서류 관련한 일들도 회계팀에서 처리가 되어서 저는 기획을 하고 좋은 강의를 만들고 수강생들을 만족시키는 것에 더 집중할 수 있었죠. 지금은 수업이 좋아도 예산의 문제로 충분히 강사비 등이 나오지 않아서 실행이 되지 않거나, 제가 회계와 총무부터
O | 그럼에도 직업은 생계 유지를 위한
청소라든지 잡다한 일도 다 해야
활동이란 의미가 큰데 그 부분에
한다는 거? 그래도 이번에는
대한 불안은 없으셨나요?
지원금 받은 걸로 인건비도 충당이 되고 프로젝트를 더 크게 키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O | 회사 안에서 기획을 하면 기획에
다니던 회사에 역으로 강의를 하러 가게 됐다는 것이 개인적으로 의미가 커요. O | 퇴사 이후 서점을 내고, 그
K | 서점을 시작할 땐 책과 음료를
안에서 업을 창작하는 것과
팔고 수업도 만들어서 하면 유지가
같은 일을 본인이 아닌 다른
될 거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사람들이 하는 것도 가능할 거라고
나아지겠지 하는 생각이었는데,
생각하시나요?
수월한 부분이 분명 많았을 텐데
현실은 그렇게 쉽게 무언가가
왜 퇴사를 결정하셨나요?
쌓이는 구조가 아니었어요. 서점을
작가 분들에 비해 저는 회사 밖의
유지하는 비용 외의 제 인건비는
것으로 돈을 번 경험이 적고 기간도
외부 강의 등의 수입으로 해결을
짧아서 잘 모르겠어요. 도리어
하고 있는 것 같고요. 그래서 ‘후후
제가 그분들의 조언이 필요하지
프로젝트’를 신청할 때의 취지도
않나 싶긴 한데… 주변을 돌아보면
서점의 일 외에 김소정 개인으로서
본인의 인건비를 챙겨가면서
돈 버는 것을 해 보고 싶다는
자신의 일을 하는 창작자 분들이
것이었어요. 그런데 나 자신의
많지는 않은 것 같아요. 저는 아직
인건비를 챙겨주는 게 쉽지 않고,
제 활동을 이제 시작하는 과정이라
확실히 가장 밀리는 것 같아요.
뭔가가 없긴 하지만, 그런 분들이
K | 다른 프리랜서 창작자, 디자이너,
꼭 강의를 하거나 책을 만들거나 O | 직업을 실험하는 것으로
업을 삼아 살아갈 수 있을까요?
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런 결과물이 있으면 기관이나 기업과 뭔가 하게 될 때 확실히 과정이 달라지는 것 같아서요.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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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VEY.
김소정 Q. 당신에게 업(직업)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A. 직업으로의 업도 있지만 '생업'에 더 가깝다고 느낍니다. 생계를 유지해 나가기 위한 '직업'도, 살아가기 위해 하는 '생업'도 둘 다 제겐 가슴을 뛰게 하는 단어입니다. 회사를 다닐 때는 업이 '주어지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회사 밖에 있는 지금은 '내가 만드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Q. 어린 시절의 꿈은(직업으로서) 무엇이었나요? A. 초등학생 때는 선생님, 중학생 때는 꿈이 없었고 고등학생 때부터 기획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Q. 현재의 일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에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이전에 대학로에서 했던 공연 기획 일이 저의 첫 직업이었는데요. 공연기획사에서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일을 맡게 되었을 때, 내가 좋아하는 공연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교육 기획 일이 더 좋다고 느꼈어요. 그리고 뭔가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게 좋아서 강의 콘텐츠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Q. 직업 실험에 꼭 하나 필요한 요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일 수도 공간일 수도 자금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사람을 얻는 것이 가장 큽니다. 강의를 통해 만나게 되는 사람들, 그리고 책방에서 만나는 사람들, 인스타그램을 통해 응원해 주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라 생각합니다.
Q. 직업 실험을 통해 실제로 자신의 직업으로서 현재의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월급을 책정한다면 얼마입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A. 100만 원입니다. 강의를 월 4-5회 진행하고 원고를 쓰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강사료와 원고비를 기준으로 책정하였습니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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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성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5년 후의 본인을 상상한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A. 지금 하고 있는 공간에서 책방을 계속하거나 혹은 더 크고 좋은 공간으로 이사가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아이를 낳고 키우며 프리랜서로 강의를 하거나 기획과 큐레이터 일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편집 일을 하고 있다면 좋겠습니다. 무엇이든 책과 관련된 일을 쭉 해 나가고 싶습니다.
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장렬하게 실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직업 실험의 경험이 남았습니다. 실패의 경험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A. 실험이기 때문에 당연히 실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패를 통해 성장할 수 있는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좋을 텐데 솔직히 조금 쓰라릴 것 같긴 합니다. 하지만 이내 훌훌 털어버리겠죠. 덕분에 그 다음 실험 때는 좀 더 과감하게, 새로운 것들에 도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Q.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 본인의 작업에 새롭게 도전하고자 하는 청년에게 해주고 싶은 말, 혹은 조언이 있다면? A. 멋져요. 응원하고 지지합니다.
Q. 본인이 청년업을 통해 경험한 ‘업’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면, 당신의 직업은 어떤 명칭을 갖게 될까요? 자유롭게 직업의 명칭을 상상해 주세요. (여러 개를 작성해 주셔도 좋습니다.) A. 북콘텐츠 디렉터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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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당신의 물건’은 팟캐스트를 좋아하고 이야기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피디, 디자이너,
당신의물건
작가, 프리랜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라디오를 하고 싶었던 어떤 피디와 세상과 소통하고 싶었던 디자이너, 그리고 재밌는 것을 좋아하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제작하고 있습니다.
김민규
‘당신의 물건’은 물건을 주제로 사람을 인터뷰하는 팟캐스트 프로젝트
당신의 물건
입니다. 약 4년 동안의 제작 과정 중에 저희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들어 보면 어떨지에 대해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영상으로 제작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많은 게스트를 모시고 질문을 만들고 이야기를 들었지만 스스로 질문을 만들어 내는 능력은 무엇일지 그것을 확인하고 시행해 보기 위해 OBJECT HUMAN - YOUR SELF라는 프로젝트로 청년업에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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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물건의 연대기
프로젝트의 시작
마음먹기의 시작
지금부터 4년 전이니까, 2015년 12월에
2014년 정도, 대학 시절에 하기로 한 거죠.
‘당신의 물건’이 시작됐어요.
‘나꼼수’가 불을 지폈어요. 정확하게는 아이튠즈가 팟캐스트 서비스를 제공하면서예요.
만남 지금의 프로그램을 하다가 만나서 “같이 멤버로 해볼래?”
시즌 3은 노래도 부르고 디자인도 하고 성우이기도 한
물어서 온 사람들이에요. 출연자가 소개를 해 준 케이스기도
친구가 붙어서 5명 정도가 함께했어요. 이 과정에선 인원이
하고요. 국립극장에서 10년 정도 일한 분이 저희 프로그램에
많아서 너무 힘들었고, 시즌 4를 할 땐 그래서 다 그만두고
참여를 해주셨어요. 그때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지지 않게
저 혼자 시작했거든요. 그러다가 시즌 3때 같이 했던 멤버
‘드립’ 날려줄 사람이 필요하다 말씀드렸더니 그분이
두 명에게 제가 사업을 할 거고 이런 거를 할 건데 같이
“이 사람 재밌어” 하면서 데리고 온 거예요. 시즌 1은 2명이서
도와주면서 해 보지 않을래 제안했죠. 지금은 3명이 남아
했고, 시즌 2는 시즌 1에 나왔던 게스트 중 2명이 합류해서
있어요.
4명이 했고요.
위기 ‘청년업’ 하기 직전이요. 솔직히 그만두려고 했었어요. 그냥
저의 생활이 너무 불안하다 보니 사람들한테도 얘기하고
취직하고 평범하게 살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작년 12월까지
취업 면접도 보러 다녔는데, 그때 마침 ‘청년업’이 되고
회사에 다니다가 올해부터 프리랜서 생활을 하는데 일도
큰 건의 일도 들어와서 몇 개월 또 살 수 있게 되었어요.
들쭉날쭉 들어오고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해 보기로 한 거예요.
극복 극복을 ‘청년업’으로 하게 된 거라고 봐야죠. 약간 ‘아 마지막으로 한 번 해보라는 뜻인가 봐’ 같은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현재 청년기 정도가 아닐까… 아기라고 보기엔 꽤 했고, 중년이라고 보기엔
단단하거나 안정적인 중년이라면 계속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그렇게까지 관록이 있지 않아서요. 여전히 기분파에 위태롭고, 이번
대한 고민은 안 할 것 같아요. 계속 마음이 왔다갔다한다는 것은
주 기분 좋게 하고 있지만 다음 주에도 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을 하는
내가 청년이기 때문이고, 사실 청년기는 그렇게 선택권이 많지도
청년업 중이죠. 약간 비틀비틀하는 게 딱 청년쯤 되는 것 같아요.
않고, 뭔가 주어졌다가도 뺐기고 하는 시기가 아닌가 싶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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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 팀과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D | 저는 김민규입니다. ‘당신의 물건
D | 원래는 시사 프로그램 같은 걸
D | 그리고 저는 타과 수업을 많이 듣는
생각해서 ‘나꼼수(*나는 꼼수다)’
편이었거든요. 음향 제작과 수업을
같은 거 생각했는데 ‘나꼼수’가
듣다 보니 이 친구들이 과제도 너무
- OBJECT HUMAN’이라는
먼저 터진 거죠. 많은 팟캐스트들이
열심히 하고 너무 다 잘하는 거죠.
프로젝트로 ‘청년업’에 참여하고
생기면서 저도 하나의 프로그램을
‘얘네들하고 공부하고 싶다’ 해서
있어요. ‘당신의 물건’은 원래
시작하게 된 거고요. 아는 사람이
전과를 했어요. 그 중에 제가 제일
'물건'을 주제로 사람을 인터뷰하는
많다거나 네트워크가 좋은 편이
잘 했던 건 공연 기획이었고요.
프로그램이었는데, 매개가 되는
아니라, 인터뷰를 대할 관계가
그런데 공연 기획사에 들어가서는
물건을 놓고 인터뷰를 하다가
부유하지는 않아요. 그럼에도 좋은
술을 너무 많이 먹어 되게 고생을
사람도 하나의 오브제일 수
사람들이 되게 많고, (팟캐스트가)
해서, 못 하겠다고 했어요.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만한
그래서 지금은 공간 사업을 하게
그래서 조금 더 사람에 포인트를
구실이 되어 주고 있어요.
되었습니다.
O | 혹시 전공이 어떻게 되세요?
O | 공간 사업이요?
O | 인간에 대한 호기심이 깔려 있다는
D | 음향 제작과입니다. 그래서 라디오
D | 공간 매니저나 커뮤니티 매니저
생각이 드는데, 그게 원동력이라고
관련 기기들을 좀 다루긴 편했어요.
등의 일을 하면서 카페나 살롱 같은
봐도 될까요?
제가 오른쪽 귀가 안 들려서 사실
공간을 만드는 일이에요. 구상하고
음향 제작과를 가면 안 되는 건데,
펀딩해서 결국 스튜디오를 지었고,
그 과의 면학 분위기가 너무
녹음도 몇 번 했어요. 크고 작은
좋았어요. 교수님들과의 관계도
녹음들을 할 때 공간 담당이나
너무 좋고 학생들끼리도 뭔가
프로듀서로 참여했고 그러다가
공부로 승부하자는 그런 분위기가
‘당신의 물건’을 하게 되었죠.
갖고 지켜보고 있었어요. 제가
있었어요. 원래 전공은 디지털
이 활동이 커다란 취미 생활인데
또 신해철 씨 팬이라, 사전 녹음
컨텐츠 관련한 쪽이었는데,
어떨 때는 생업의 수준이기도 해요.
방식으로 하는 라디오를 좀 알고
신설 과라서 시스템이 잘 잡혀
있었거든요.
있지 않았어요.
맞춘 인터뷰를 해 볼까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D | 글쎄요, 원래 라디오를 하고 싶었기
때문에 마음 속에 욕구가 있었던 것 같아요. 대학 때부터 팟캐스트를 하고 싶어 했고, 아이튠즈에서 팟캐스트가 나올 때에도 관심을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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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 팟캐스트의 첫 시작도 취미였죠?
D | 그 회차 이름을 그 케이크
D | 네. 단순히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팟캐스트 방송이 두 개가 있다는
이름으로 정했어요. 다행히
것도 의미있지만 ‘청년업’ 사전
걸 봤는데 하나는 ‘당신의
그 회차의 주제들이 케이크랑도
인터뷰를 할 때 사업화에 대한
물건’이고 하나는 ‘케이크’잖아요,
잘 맞아떨어졌었고요. ‘케이크’는
피드백을 많이 받았고 스스로도
두 개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당신의 물건’에서 파생되고
먹고사는 지점에 대한 성과를 어느
업그레이드 된 프로그램이라고
정도 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보시면 될 것 같아요. 다음 시즌은
굉장히 시네마틱한 인터뷰
연말쯤 돼서 시작하게 될 것
프로그램이 국내에는 아직 없고,
같습니다.
그런 걸 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D | ‘당신의 물건’은 사전 인터뷰 2시간,
본 녹음 2시간으로 녹음만 2시간 정도를 해요. 그런데 2시간 하면 마지막에 입이 좀 풀려 이제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끝났구나 싶은 거예요. 그래서 좀 오래 하는 인터뷰를 기획해 볼까 했죠. 처음에는 한 번 만나서 8~10시간을 녹음하는 인터뷰를 기획했었어요. 그런데 프로그램 자체도 8시간 업데이트가 불가능 하고, 8시간 녹음을 할 때 드는 배터리나 데이터 감당을 할 수 없을 것 같더라고요. 결국, 한 사람을 선정해서 2시간 타임으로 12번 정도 만나는 방식으로 변경했어요. O | 거의 한 인간을 해부하는 거네요.
O | ‘당신의 물건’에 나오는 사람들은
어떻게 섭외하시나요? D | 매 회 바뀌는 방식인데, 자기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거의 그냥
파티셰를 섭외했어요. 우리가 괜찮은 페이먼트를 드릴 순 없으니까 매 회 새로운 케이크를 드리겠다 했지요. 그 과정에서 빵 굽는 친구도 멤버로 참가를 하게 되었고요. ‘케이크’는 거의 최초의 기억부터 질문을 시작했어요. 당신이 기억하는 최초의 기억부터 시작하자 해서 유아기부터 학생 시절, 연애, 결혼과 정치 사회 이슈까지... 정말 차장님을 12번
차원이었는데, 심사위원 분들은
심지어 단순히 운동을 하나 해도 가시적이게 본인을 잘 드러내서 한다면, 할 얘기들이 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O | 아까 수익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라고 하신 거 치곤 엄청나게 본업은 무엇인가요?
어떻게 볼 거냐 해서, 빵 굽는
하겠다고 ‘청년업’에 지원한 건 그런
프로젝트가 있거나 하다면요.
제가 섭외했어요. 페이스북에서
분이었거든요. 이분을 12번을
약간 ‘멘붕’이 온 상태예요. 영상을
있거나, 사이드 잡이 있거나, 어떤
밀도 있는 취미인데,
잘 쓰시고 자기 주관이 뚜렷한
정말 어렵다는걸 깨달아서 지금은
들이댑니다. 어떤 일을 현재 하고
D | 네. 제일기획의 어떤 여성 차장님을
알게 된 분이었는데 워낙 글도
실제로 사전 촬영을 해 보니까 그게
D | 공간이랑 문화 예술 기획 쪽
일들을 했어요. ‘씽크 카페’라는 곳에서 일을 했었는데, 카페 성격을 띠고 있지만 시민 사회 단체가 와서 행사를 많이 하는 살롱 같은 공간이었거든요. 홍대 상상마당 근처에 있었는데 지금은
D | '살짝 팟캐스트로 가치를 창출하는
없어졌어요. 저는 소개를 받아서
지점까지 가 보지' 하는 말씀을
매니저로 갔고, 스튜디오도 담당
하셨거든요.
하게 되면서 주선자 같은 역할을 했었어요. 최근엔 ‘로컬스티치’에 있으면서 연수동의 혁신파크 매니저도 제가 했었고요. O | 지원서 상에서 ‘제대로 된 비디오
O | 팟캐스트로 가치 창출은 어떻게
하나요? 광고 수익인가요? D | 광고가 붙기도 하고, 유명해지면
오프라인 행사를 만들거나 해서
만나면서 24시간, 편집된 부분과
컨텐츠와 인터넷 프로그램을 제작,
발전하는 형태예요. 그런데
오버 타임까지 합치면 26시간
실험해 보고 싶다’는 문구를 봤어요.
사업화는 원래도 생각에 없었고
정도를 대화한 거죠. 형식적으로는
어떤 프로덕션으로서의 가능성을
그렇게 치밀하게 구성하거나
매번 새로운 케이크를 가져왔고
타진해 보겠다는 의미인가요?
하지도 않았었어요.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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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그래서 심사위원 분들하고도
D | 제가 인터뷰를 한 분이 100분
대화를 하다가 '나는 팟캐스트는
가까이 되는데 전부 직접 했거든요.
다 한 것 같고, 영상 프로덕션
어떻게 보면 다 하는 일이죠.
쪽으로 해서 시네마틱한 인터뷰
팟캐스트도 사실 많이들 하는
영상 찍을 거다' 이렇게 얘기했던
일이고 인터뷰도 그런데, 이게
거죠. 장비도 막 빌리고 테스트하고,
어려운 사람이 있고 그 와중에
드론 날려 가면서요. “와 이거
'나는 이게 좀 되나봐' 정도만
큰일났다 어떡하지” 이런 상태죠 지금. O | 이 프로덕션은 완전히 새로운
걸 제작하는 거라기보다는 기록 남기는 것을 어떻게 업으로 풀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는 인상을 받아요. ‘인간에 대한 아카이빙’
생각하고 있어요. 이제 벌어먹고 살 수 있고 밸류가 올라가고, 사람들한테 사랑받을 수 있으면 더 좋은 거고요. O | 직업으로서의 최종 도달점 같은
것이 있나요? D | 인터뷰어는 돈을 못 버는
같은 느낌인데 사업화하실 의지가
직업이거든요. 인터뷰가 남의
있으신 거죠?
이야기를 들어서 가공하는 일이라면 결국 자기 것이 아니라는
D | 의지는 있지만 지금은 취직 자리를
알아보고 있어요. 어떤 것이든 제 프로젝트를 위해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좀 더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어떤 것을 할 때 꼭 누군가에게 배워서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장비도 사용해 보고 얘기도 좀 나누면서 어떤 튜토리얼은 필요할 거라는 생각도 들었고… 영상은 혼자 할 수 없으니까 이걸 같이 하기 위한 사람과 팀원을 만나러 어딘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다 싶기도 해서, 프로덕션이나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곳으로 들어가서 일해 볼까 하고 있어요. O | 그럼 장기적으로 보면 결과적으로
오명을 쓰기도 하고요. 이런 부분들에 대한 가치가 생긴다면 저도 같이 올라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가령 서점 안에 인터뷰 섹션이 하나 생기면 그런 가치가 상승하는 거고요. 어떤 인터뷰어로서 영원하지는 않아도 되니까 불꽃처럼 타오르는 족적을 남길 수 있을 정도면 좋겠고, 요즘 유명한 유튜버가 ‘드웨인 존슨’을 인터뷰한다거나 해서 방송으로만 만날 수 있던 사람들이 일반인의 영역으로 넘어오고 있어요. 그게 신선하니까요. 제가 갑자기 막 ‘오바마’를 인터뷰하거나 하진 않아도 되니까
어떻게든 이 프로젝트는
2~3년동안 그래도 불꽃처럼
프로덕션이 되는 건가요?
타오르는 인터뷰를 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해요.
D | 맞아요. 의지를 가지고 있다기보다
살면서 가장 꾸준하게 한 일 중 하나고, 조금 쉬더라도 제 힘으로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인 거예요. 월급이 없어도 이건 했었고, 섭외나 이런 부분을 누가 도와준 것이 아니고요. 제가 인터뷰를 세어 보니 160회 정도가 들어갔고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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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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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VEY.
당신의물건 Q. 당신에게 업(직업)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A. 먹게 하는 것, 자게 하는 것, 살게 하는 것.
Q. 어린 시절의 꿈은(직업으로서) 무엇이었나요? A. 라디오 디제이였습니다.
Q. 현재의 일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에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요즘 단어로는 크리에이터라고 많이 부르는데요. 무에서 유를 만드는 과정. 새롭게 시작하고 새롭게 만나고 끝없이 컨텐츠를 만드는 일입니다.
Q. 직업 실험에 꼭 하나 필요한 요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일 수도 공간일 수도 자금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사람입니다. 공간이나 일은 변화가 가능하고 또 대체할 수 있는 요소들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대체할 수도 없고 예상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함께할 사람을 찾고 만난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죠.
Q. 직업 실험을 통해 실제로 자신의 직업으로서 현재의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월급을 책정한다면 얼마입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A. 300만 원은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죠, 하하. 새롭게 무언갈 만들어 나가는 사람에겐 지금의 시장보다 훨씬 많은 값을 쳐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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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성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5년 후의 본인을 상상한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A. 잘나가는 크리에이터나 기획자가 되어 있지 않을까요? 지금보다 5배 큰 규모를 제작하는 제작자가 되면 좋겠네요.
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장렬하게 실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직업 실험의 경험이 남았습니다. 실패의 경험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A. 자비로 진행할 때 느끼지 못했던 시도들을 한 것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또 하나의 일로서 인정받으며 1년이 조금 안 되는 시기를 지났습니다. 정말 일종의 직업 실험 혹은 직업 체험을 한 것입니다.
Q.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 본인의 작업에 새롭게 도전하고자 하는 청년에게 해주고 싶은 말, 혹은 조언이 있다면? A. 그냥 하세요. 저도 잘 안되는데요. 안되거나 못 하는 이유를 찾지 마세요. 그건 나 말고도 너무 많이 알 거예요. 안되는 이유가 있지만 그냥 하세요. 그리고 자책하지 마세요. 잘되든, 안되든 당신 탓이 아니에요.
Q. 본인이 청년업을 통해 경험한 ‘업’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면, 당신의 직업은 어떤 명칭을 갖게 될까요? 자유롭게 직업의 명칭을 상상해 주세요. (여러 개를 작성해 주셔도 좋습니다.) A. 라디오 기획자, 오디오 컨텐츠 PD, 팟캐스트 방송국 사장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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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동그란자취는 예술창작그룹으로서, 창작활동을 통해 사회에 참여하는 방법으로서의
동그란자취
교육 프로그램 개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팀원들이 미술과 음악을 전공하다 보니, 미술과 음악 장르간 협업을 통해 문화 예술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실험하고자 모인 팀입니다.
모정후
<DIYL>프로젝트는 DIY와 LIVE의 합성어로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동그란 자취
활동과 그것을 반영한 미술 공예 장식품 등을 제작하는 활동입니다. 요즘 활성화되고 있는 원데이 클래스를 보면 힐링을 빙자한 소비성 일회용 프로그램이라고 판단되었습니다. <동그란자취>의 힐링은 '어떻게'라는 방법론적이라기보단 '왜'라는, 보다 본질적인 접근입니다. 그래서 '나만의 시간, 제대로 보내기' 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합니다.
이번 <DIYL>프로젝트는 장르 융복합 키트 상품 제작으로, 그 가능성을 확인하는 프로젝트 입니다. 첫 번째 키트상품은 'Naekalimba(내칼림바) 만들기' 입니다. 칼림바는 아프리카 악기로 손가락 피아노라고도 하며, 엄지손가락으로 철판을 튕겨 멜로디를 내는 악기입니다. 나의 인생 그래프가 악보가 되어, 칼림바를 제작하고 연주해 보는 키트 상품 입니다.
두번째 키트 상품은 'Life catcher(라이프 캐쳐) 만들기' 입니다. 나의 관계도를 그려 보며 라이프 캐쳐로 만들어 보는 키트 상품입니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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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그란 자취의 연대기
마음먹기의 시작
프로젝트의 시작
2017년 1월쯤 어느 카페에 모였을 때 시작됐어요.
우리 만남이 단순한 모임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계속
동생이자 졸업 동기인 친구한테 전화가 와서, “언니 너무
뭔가 지원해 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서울 청년
무료해” 했어요. 이 친구는 졸업하자마자 개인전을 했는데,
예술단이라든지 이것저것 지원을 해 보고 떨어지고 그랬죠.
다 쏟아내고 보니 다음이 없다는 거였죠. 뭔가 해야
그러면서 팀명도 정했고, 결성 후 계속 이런 식으로 갔던 것
되겠고 그런 마음으로 제게 전화를 해 봤는데, 마침 같은
같아요.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만남 제가 대학교 2학년 때 그 친구가 1학년으로 들어왔어요.
또 다른 한 멤버는 다른 친구의 친구예요. 홍대에 친한
사적으로는 제 친한 오빠의 여자친구였죠. 그래서 같이
언니가 어떤 공연을 보러 오라 해서 갔는데, 거기 웬 머리
술을 계속 먹다 보니, 그녀는 약간 강단도 있고 조금 날
긴 남자가 혼자 심취해서 베이스를 연주하고 있었죠.
서 있는, 세상에 분노가 많은 사람이었거든요. 옆에서
그 모습이 찌질하면서도 매력 있어 보여서 친해지게 됐어요.
계속 튀니까 지켜보게 되었던 것 같아요.
위기 작년이요. 새로운 일을 하게 돼 그만두게 된 친구가 저와 트러블이 생겨 위기였어요. 팀 활동과 관련된 것보단 관계 문제였죠. 또 제가 불교 쪽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또 다른 친구가 그러는 거예요. 불교 쪽에서 활동을 하든 아예 거길 벗어나든 방향을 정해야 할 것 같다고요. 당시엔 조금 고민했는데 제가 절에서 활동한 건 아이들 때문이었거든요. 제가 교인도 아니었고요. 그래서 그쪽 일을 줄이고 관심 가는 다른 일을 많이 신청해 봤어요.
극복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동생 친구 덕분이에요. 저희가 작년에도 ‘청년참’을 했고 올해도 신청해서 됐는데, 같은 내용이라 지금의 사업과 중복 활동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그쪽을 포기하고 ‘청년업’만 신청했어요.
현재
청년업
아직 초등학교 4학년 정도인 것 같아요. 아이들을
학생들이 3학년 때부터 슬슬 자기 의견을
가르치다 보니 저는 초등학교 5학년 정도부터는 그냥
표출하고 4학년은 자기 취향이 어느 정도
중학생과 비슷하게 취급하거든요. 그들 중에 사춘기도
생기는 것 같아요.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있고, 본인들도 초등학생 취급 받기를 싫어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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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 팀 소개 부탁드립니다. D | 안녕하세요. ’동그란 자취’입니다.
D | 답일 수 있고, 휴일 없이 열심히
지내는 것도 한 방법일 거라고
중에 ‘힐링’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요.
여기시는 것 같다고 느꼈고,
미술과 연극을 하는 친구들이 모여서 예술 활동 외에 생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다가 문화 예술 교육과 관련 프로그램 개발을 시도하기 위해 결성된 팀이에요. ‘자취’라는 말에 여러 의미가 있잖아요. ‘자취를 남기다’의 자취와 ‘먹고사는 문제’로서의 자취가 있는데, 어떻게 자취하며 자취를 남길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담긴 이름이에요. 동그랗다는 말을 붙였는데, 둥글게 평등하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고요. 저는 대표인 모정후라고 합니다. O | 예술하는 사람으로서 생계 해결을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D | 미술하는 친구들이 보통
작업으로만 먹고살 수 없으니까 예술인 복지라든가 지원을 많이 하고 교육 쪽 활동을 하거나 다른 외주 일을 받아서 하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하나의 정답은 없다는
O | 지원서를 읽어 볼 때 파악한 내용
O | 문화 예술 교육사는 언제
되셨어요? D | 대학교 때예요. 수업을 들으면서
취득할 수 있는 게 있어서 일단
예술가로서 줄 수 있는 힐링이 좀 다를 것이다 라는 기획도 있는 것 같아요. 왜 그게 필요하다고 느끼셨죠? D | 예술하는 사람들은 직업이랑
들어 놓자 하는 생각에 들었어요.
취미의 구분이 희미하잖아요.
원래 개인적인 작업만 하다가 그
그 외의 사람들은 그래서 더
2014년의 큰 사건 이후에 모든
취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게 약간 바뀌었어요. 그 이후로
취미 활동을 통해 힐링을 할 수
내가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있다고 생각했어요.
뭐가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고,
힐링이 왜 필요하냐는 질문은
문화예술 분야 안에서 그런 활동을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데, 그런
해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해소가 되는 부분이 항상 필요하기
진로를 조금 수정했어요.
때문에 사람들이 계속 방법을
사실 다른 데서 물어 보면 이렇게
찾아 나선다고 생각하거든요.
말하기 조금 부끄러운데, 저랑
요즘 어른들을 위한 ‘빨간펜’도
연관도 없는 친구들이긴 하지만
나와요. 누군가 나한테 정답이라고
어른들이 잘못한 일로 큰 불행을
동그라미 쳐주는 그걸 위해서…
겪게 된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바른 글씨 쓰기’ 같은 활동도
사건이 제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있고요. 단순하고 소소한 행복을
갖고 있습니다. 마침 또 문화 예술
느낄 수 있는 키트 같은 것들이
교육사가 붙어서, 잘됐다 싶었죠.
굉장히 많더라고요.
생각이 듭니다. 한 가지 직업만
다들 힐링을 원하는데 시간은
고수하려고 하지 않는 것도
없으니까, 더 단순한 형태의 것들에 수요가 있지 않나 생각했어요. O | 이 안에서 예술의 역할을
찾으면서, 직업이나 수익으로도 연결이 된다면 정말 베스트겠네요. 이 프로젝트로 가능성을 보고 계신가요? D | 사실 저희는 이 프로젝트에
프로그램 개발 위주의 계획을 해서 왔는데, 그것보다 상품을 만들고 그것으로 이익을 내는 것을 중시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강의나 워크숍을 준비하고 있는데 거기 들어갈 키트 상품을 제작할 생각을 했었어요. 생각했던 것과 다르긴 하지만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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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 그만둘 수는 없고, 또 진정성 있게
뭔가 남기고 가려면 프로그램이 우선이긴 하지만 그 안에서 필요한 키트 상품을 제작해 보자고 얘길 했죠. 그런데 사실 상품보다는 프로그램을 파는 거고, 저희의 강의를 파는 개념인 거예요. O | 이 프로그램 외에 다른 활동도
많이 하시나요? D | 제작년에 여기 ‘청년참’ 지원을
받았고 그 결과로 전시랑 스터디, 프로그램 개발 등의 활동을 했었어요. 그리고 ‘동그란 자취’ 이름으로는 아닌데, 친구들이랑 인천에서 주로 활동을 하고 있거든요. 돌아다니면서 동아리들 모니터링 같은 일도 하고, 개인이나
O | 이런 프로젝트 팀의 필요성은
D | 연주하는 거죠. 그런데 다들
팀으로 하는 활동들이 있죠. 그런데
무엇일까요? 대표로서 어려운
“왜 하필 칼림바인가?” 하고
공식적으로 이력에 남을 만한
일도 굉장히 많을 것 같아요.
질문하거든요. 이런 질문 자체를 굉장히 좋아하기는 하는데, 사실
‘동그란 자취’의 활동은 올해는 지금 이 프로젝트 하나입니다. O | 이 팀의 가장 이상적인 목표는
계속 ‘자취’를 남겨서 ‘자취’가 가능해지는 상태겠죠? 본인의 자취는 지금 어떻게 해결하고 계신가요? D | ‘생계’의 자취 말씀이시죠?
D | 어릴 때부터 ‘원피스’ 만화책을
답은 상황에 맞춰서 할 수밖에 없는
너무 좋아했는데, 그걸 통해서
것 같아요. 재료비 등 여러 가지
우정을 배웠어요. ‘루피’를 보면서
조건들을 고려하다 보니 나온 게
나도 내 배에 누군가를 태우고
칼림바였기 때문인 거죠.
싶다고 생각했고, 목적지는 모르겠지만 어딘가 가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었죠. 어떤 사람이 어딘가에 도달하려면
O | 다른 활동도 하는 와중에 추가로
지금의 프로젝트가 시작된 건데, 이미 하는 일이 많았던 상태에서 그래야 했던 이유가 있다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창의
혼자서는 힘들잖아요. 제 성격도 '모
미술이라든지, 교육 쪽에 집중이
아니면 도'인 부분들이 있어서, 비는
돼 있어요. 이 작업 방식이 저의
부분들을 다른 친구들이 채워주고
예술과도 연결되는 부분들이
있어요. 그 친구들에게 저도
만들어져서 이제 많이 배우는
있고요. 작년에는 거의 제가 들이는
마찬가지인 존재고요.
단계거든요. 프로그램을 저희가
품의 90%가 교육이었는데, 점점 저 자신이 사라진다는 느낌을
O | 프로젝트에서 진행되는 강의의
내용은 어떻게 되나요?
D | ‘동그란 자취’라는 팀은 막
익혀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하는 활동들을 하다 보니 진짜 우리가 만들어 낸 프로그램은 아직 하나도
받아요. 내년부터는 6:4 정도 비율까지 개인 작업의 비중을
무엇일까요?
D | ‘칼림바’라고 작은 아프리카 악기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올려 보려고 해요. 그래도 ‘동그란
있는데, 손가락으로 튕겨서 연주를
그 동안은 활동하면서 배워서 하고,
자취’가 있어 작년에 전시라도
해요. 소리도 좋고, 아무 생각없이
아이디어를 얻어서 하기도 하고
한 번은 했던 것 같고, 또 직업이랑
연주하기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했는데 지금 이 프로젝트는 우리가
작업, 제 삶의 방식이 다 맞물려
악기를 만들면서 사전에 워크숍을
만들어서 하는 첫 작업이라 더
돌아가고 있어서 저는 행복지수가
해서 ‘인생 그래프’를 만들고,
의미가 있어요.
꽤 높은 편인 것 같아요.
그 그래프를 악보 위에 그려서 보고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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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VEY.
동그란 자취 Q. 당신에게 업(직업)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A. 직업에 생계를 빼면 직업 의식이 남습니다. 미래에 선악의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이 된다고 하는 업.. 나의 적성과 능력, 가치관에 따라 모든 직업은 모든 사람에게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Q. 어린 시절의 꿈은(직업으로서) 무엇이었나요? A. 화가.
Q. 현재의 일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에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실천하는 몽상가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Q. 직업 실험에 꼭 하나 필요한 요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일 수도 공간일 수도 자금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자금 확보와 손익을 계산하는 방법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프로그램 기획만 해 보니 손익 계산에 약한 편인데,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예산을 쓰는 방법, 홈텍스 사용법 등 사업 진행 관련 경제적인 부분에 대해 많이 배워 가는 것 같습니다.
Q. 직업 실험을 통해 실제로 자신의 직업으로서 현재의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월급을 책정한다면 얼마입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A. 200만 원. 키트 상품 판매비 + 프로그램 강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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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성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5년 후의 본인을 상상한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A. 키트 상품을 만드는 동시에 관련 교육 프로그램 개발자로, 좀 더 다양한 예술 분야를 넘나드는 모습이 상상됩니다.
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장렬하게 실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직업 실험의 경험이 남았습니다. 실패의 경험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A. 현실 가능성에 대해 배울 것 같습니다.
Q.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 본인의 작업에 새롭게 도전하고자 하는 청년에게 해주고 싶은 말, 혹은 조언이 있다면? A. 절대적인 실패는 없으니, 해 볼 수 있는 건 다 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Q. 본인이 청년업을 통해 경험한 ‘업’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면, 당신의 직업은 어떤 명칭을 갖게 될까요? 자유롭게 직업의 명칭을 상상해 주세요. (여러 개를 작성해 주셔도 좋습니다.) A. 경계 탐험가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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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멋질
팀 ‘멋질’은 2018년, 안소라, 이정형 2명의 ‘신당 창작 아케이드 9기 입주 작가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안소라 작가는 우리나라의 전통 공예기법인 ‘옻칠’을 국가 무형 문화재로부터 전수 중인 동시에 개인적으로 옻칠 작품을 선보이고 있고, 이정형 작가는 금속 공예를 전공하고 새로운 형식의 ‘전자 기타’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정형
완전히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옛것을 지켜
멋질
내며, 그것이 현대 사회와 어우러지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수 세기를 내려오며 민족의 정서를 북돋우고, 우리의 정신적 위로가 되어주었던 전통 악기의 형식과 방식을 새로이 해석하여 젊은 방식으로 ‘우리만의 악기’가 탄생 가능한지 여부를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멋질’은 오래전부터 ‘옻칠’이 우리나라 전통의 악기 마감재로서 사용되어 왔지만 현대의 악기에 대중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착안, 단순히 ‘전자 기타’라는 현존하는 악기에 적용하는 것을 넘어 온전한 하나의 작품이자 상품을 기획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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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질의 연대기
마음먹기의 시작 2017년 4월쯤이에요. ‘1자형 기타’를 독일에 전시 보내고
큰 회사들에서 옻칠하는 장인 분들과 협력해서 전시용으로
돌아왔을 때 악기 옻칠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처음
만든 경우가 종종 있었고, 저는 상품화를 할 때에도 이걸로
했거든요. 동양적인 느낌을 가미하고 싶어서요. 물론 옻칠로
하면 효과가 있겠다 하는 생각을 했던 거죠.
완성되는 기타가 저희가 최초는 아니에요.
프로젝트의 시작 2018년 2월이요. ‘신당 창작 아케이드’에서 안소라 작가님과 합류했을 때죠. 제안을 누가 먼저 했다기보다는 둘 다 같이 해 보면 좋겠다고 서로 얘기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잘 맞아떨어졌던 것 같습니다.
위기 악기 만드는 과정에서 칠하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전체
작년에 ‘공예 트렌드 페어’에서 ‘청년예술단’ 결과 발표를
과정의 50% 정도라고 봐도 무방하죠. 이게 한달 반이라는
했어요. 전시는 11월 말이었는데 지원금이 늦게 나와서,
시간에서 후반기에 해당되는 일인데, 전시가 잡혀 있다거나
8월 말쯤 첫 프로토 타입이 나왔거든요. 전시 때까지
할 때 제가 빨리 앞 과정을 마치고 넘겨주지 못하면 서로
많이 만들어야 두 대를 더 만들 수 있는 상황이라,
부담이 가중되더라고요.
보여줄 게 많이 없어지지 않나 하는 고민을 했었죠.
극복 그 전시 때는 새로 만든 악기를 3대 출품하고 원래
지금은 제가 수정할 것들을 다 마치고, 우레탄으로
가지고 있던 악기들을 더해서 전시했어요. 그러다보니
1차적인 마무리를 해서 넘기는 것으로 과정을 조금
약간 중구난방이 돼서 극복이 잘 안되었던 것 같아요.
바꿨어요. 작업 절차가 정리되면서 이런 부분들이
아직 고치고 있는 부분이 남은 상태에서 제가 악기를
나아지는 것 같아요.
전해줘 버리면, 그 사람의 손을 타고 나서는 이미 작품이 되어 버리니 말이죠.
현재
청년업
중학생 정도인 것 같아요.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있고,
중학생 때 자신의 가치관을 형성해 나가다가
무엇을 정확히 보여주고 싶은지 구체화가 되지 않았다는
그것으로 인해 내가 무엇이 되고 싶어하는지
생각이 들거든요.
결정하고 실행해 나가는, 대학생이나 사회 초년생의 시기를 앞두고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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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 팀과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O | 그 이전에 하던 본인의 작업은
무엇이었죠?
M | 악기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전공을 선택하게 됐습니다.
M | 저는 ‘멋질’이라는 팀을 하고 있는
이정형입니다. 악기를 만드는 저와 거기에 옻칠을 하는 안소라 작가로 구성되어 있고요. 특별한 악기를 만드는 팀이에요. 멋질은 ‘멋있는 짓거리’의 줄임말입니다.
M | 기타 만드는 일이었어요. 저는
금속 공예를 전공했습니다. 일렉 기타를 만들기 위해 금속 공예를 선택했거든요. 처음 기타를 배운 건 오래 전인데 초등학교 4학년 때예요. ‘가을동화’라는 드라마를
O | 어떻게 시작하게 된 작업인가요?
보다가 ‘로망스’라는 곡이 나오는 걸 듣고 너무 좋아서 그 곡을
M | 작가 두 명이 협업으로서 하는
프로젝트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신당 창작 아케이드’ 라는 곳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데, 서울문화재단 산하의 레지던시예요. 이제 10주년이 됐는데 저랑 안소라 작가님이 9기에 거기서 같이 만나서 함께하게 되었어요. 저는 기타를 만들고 있었고 안소라 작가님은 옻칠 문화재 전수자신데, 마침 저는 악기에 칠을 한다면 옻칠로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어디서 배울지까지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안 작가님도 마찬가지로 옻칠을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악기에다 옻칠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치고 싶어 클래식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중고등학교 때는 록 음악에 빠져서 록을 들었고요. 원래는 미대 진학을 생각했다가 재수를 하게 되었는데, 음악이랑 미술을 병행하면서 살면 좋겠다는 고민을 갖고 있었죠. 그러다 우연히 ‘It Might Get Loud’라는
O | 그렇다면 대학 시절부터 업으로서
기타를 만들었던 건가요? M | 처음부터 그렇진 않았는데, 첫 번째
악기를 만들고 나서 업으로 삼아도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대학교 2학년 1학기 여름방학 때예요. O | 그 전에는 왜 기타가 만들어지지
않았나요? M | 그럴 만한 실력을 갖추지
못해서였죠. 목재랑 금속을 다뤄서 악기 하나를 만들어 낸다는 것까지가, 저는 악기를 만드는 걸 배워 본 적이 없어서 그 부분은 책이랑 인터넷을 보고 극복해야 했어요.
다큐멘터리를 봤어요. 그 다큐의 첫 시작이, 어떤 악기도 아닌 이상한 통나무에 일렉트릭 기타 픽업이랑 스트링을 연결해서 악기로 만들어
O | 일렉 기타 만드는 게 독학으로
가능한 일인가요? M | 사실 직접 기타를 만드는
연주하는 퍼포먼스였거든요. 그걸
사람들은 상당히 많아요. ‘퀸’의
보고 망치로 머릴 맞은 것 같고
기타리스트인 ‘브라이언 메이’도
너무 큰 매력을 느껴서 어떻게
직접 본인의 기타를 만들었다고
하면 저걸 나도 잘할 수 있을까
하고요. 사실 악기를 만들게 된
고민하다가, 목재랑 금속을 다루면
이유 중 하나는 제가 연주를 잘 못해서예요. 너무 좋고 잘하고 싶은데 잘 안돼서… 이걸 제가 누릴 수 있는 방법도 찾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O | 그럼 이 첫 악기를 만들고 나서
업으로 해도 되겠다는 확신이 든 건가요? M | 조금 순간적인 생각이었는데,
일렉 기타는 통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 전자 앰프에 꽂아서 소리를 내잖아요. 전기라는 어떤 에너지가 전해졌을 때 나무와 금속 덩어리에 불과한 이 악기가 약간 살아있는 생명이 된 것처럼 소리를 뿜어내는데 굉장히 큰 전율이 있었어요.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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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 ‘이거는 내가 정말 오래 할 수
있겠다, 오랫동안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죠. O | 그럼 그때부터는 흔들리지 않고
쭉 악기 만드는 일에 매진하게 되었나요? M | 계속 흔들렸는데, 어떻게 이렇게
하고 있네요. O | 뭣 때문에 흔들리셨나요? M | 다른 재밌는 일도 많이 경험하게
되고요. 디자인과 관련된 과는 기본적으로 장신구 분야도 배우게 되고 목재를 이용한 디자인 같은 것들도 배우다 보니 여러 곳에 흥미가 생겨요. 일에 관해서 좋은 제안도 많이 받게 되고요. 제안을 받았을 때 수익도 그렇고, 특히
M | 그러느라 7년 만에 졸업을 했고,
O | 작품을 판 거네요?
패션 분야의 경우 순환이 빠르다
원래는 그러면서 그 기간 동안 하던
보니 흥미로운 파도 속에 휩쓸리는
오랜 싸움 같은 것을 끝마치자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더라고요. 좋은
생각이었죠. 졸업 작품으로 만든
브랜드에서 일을 했었거든요.
한 기타가 ‘1자형 기타’였거든요.
O | 그리고 나서 ‘신당 창작 아케이드’
친구들이랑 ‘1자형 기타’ 기획을
에 가면서 ‘청년예술단’도 같이
더 하게 되었어요. 기타 만드는
하게 된 거죠?
O | 어떤 브랜드였나요? M | 에르메스 산하 디자인 브랜드에서
기술이 있는 건 저뿐이어서 거의
M | 저에겐 작품이지만 그들에겐
상품이었죠.
M | 네. 지원 사업이 되고 장비들을
있었어요. 에르메스는 대한민국에
기획을 제가 도맡아 하고, 학교
있는 회사나 디자이너에게 외주를
창업 지원단에서도 좋게 봐 주어서
주고 있거든요. 거기서 3D 잘하고,
펀딩까지 하게 됐어요. 실패하겠지
제작까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을 몇
하는 생각이었는데 그게
명 구하길래 저는 학생 때였는데
팔리더라고요. 여섯 대가 팔렸는데,
포트폴리오를 내서 하게 되었어요.
대당 70만 원 정도씩이었어요.
그게 3학년 때였는데 1년 가까이
사실 남기려고 했던 게 아니라 남는
안 만났다면 본인이 배워서
하다가, 제게는 너무 순환이 빠른
것도 없었어요.
했을까요?
일이라 감당하기 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만둘 생각을 하던 차에 마침 그 회사 쪽에서도
O | 어떤 사람들이 샀어요?
사람들보다는 이미 연주자거나,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졸업 준비로
무명 가수거나, 밴드의 기타
넘어갔어요.
리스트거나 한 사람들이었어요. 아무래도 ‘1자형 기타’니까 자기 메인 기타로 사용한다기보다는
M | 기타를 3대 만들어서 냈어요.
군대도 다녀오고 휴학도 하고
청년업
거였어요. 열악하지만 어느 정도 여건에서 기타를 만들 수 있게 되었어요. O | 기타에 옻칠하는 일은 안 작가님을
M | 그랬을 거예요.
옻칠을 해 보면 어떨까 생각했던 건, M | 생각한 것과 다르게, 처음 사는
그 일을 그만두게 되어서, 잘됐다
O | 졸업 작품은 어떤 걸 내셨나요?
구축하기 시작했는데 공간도 생긴
퍼포먼스 용도나 여행갈 때 들고 다니려는 용도로 샀던 것 같아요.
제가 만든 ‘1자형 기타’를 ‘한국 공예 문화 진흥원’의 한 디렉터 분이 흥미롭게 보시고 해외 전시에 소개를 해준 뒤부터였어요. 그때 해외 반응도 그랬고 제 작업을 봐 주시던 학교 교수님들도 기타 형태를 보고 약간 가야금이나 전통 악기의 이미지를 느끼시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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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그래서 동양적인 느낌을 살려
M | 일반 사람들에게 그저 시각적으로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좋아 보이는 것 이상으로
또 악기에 칠을 하는 다양한 재료
기타리스트들에게도 받아들여져야
들을 써 봤는데 다 화학 재료에
하거든요. 또 저는 악기가 오래
밀폐된 공간에서 쓰기 너무
지속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괴롭더라고요. 작업자의 건강과
1~2년 치다가 고장나거나
환경적인 요소를 고려하자는
버려지는 그런 악기가 아니라,
측면도 있어서 선택하게
집에 가만히 서 있어도 만지고
됐습니다.
싶어야 되고요.이런 부분들에 대한
O | ‘청년예술단’에 이어 프로젝트가
보완을 계속 하고 있어요.
지속되고 있는데 이 일을 본업으로 해야겠다는 확신이 있는 건가요? M | ‘청년예술단’에서는 걱정 어린
말씀도 많이 들었어요. 이게 음향적으로도 좋을지, 상품으로 전환됐을 때 가격적인 고려는 어떻게 할지 같은 피드백들을 받았고요. 이제 1년 동안 그런 고민을 해 왔던 거고, 여기저기서 좋은 반응도 많이 온 상태인데 악기를 만들어서 판매한다는 건 자본이 많이 필요하고 사실 시간도 많이 드는 일이거든요. 올해는 심사위원 같은 분들도 그 간 해 온 걸 보셨기 때문에, 평가나 준비보다는 ‘너네는 빨리 팔아야 되겠다’는 반응을 많이 보이셔요. 그런데 저는 걱정이 많은 사람이고 조심조심 작업을 해 나가는 타입이라 아직 더 알을 품고 싶은 거죠. ‘청년업 멘토링’에서는 제가 빨리 수익을 내길 바라긴 하지만, 저는 올해까지 준비를 잘하고 싶은 마음이 사실 있어요. O | 그 ‘잘 판다’라는 건 어떤
요소요소가 있을까요? M | 이미 서양의 악기인 기타에
한국식 칠을 해서 흥미로운 형식을 갖췄고 보기에도 너무 멋있어 보이긴 하는데 이게 정말 좋은 악기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개인적으로 고민을 더 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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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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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VEY.
멋질 Q. 당신에게 업(직업)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A. 우리가 무엇을 만드는지 생각해 보게 하는 것.
Q. 어린 시절의 꿈은(직업으로서) 무엇이었나요? A.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을 하고 싶었고, 아주 어렸을 적부터 정해져 있었지만, 무엇을 정확히 만들어 보고 싶다라고 생각한 건 20살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Q. 현재의 일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에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It Might Get Loud'라는 다큐멘터리의 오프닝은 'Jack White'라는 기타리스트가 통나무에 픽업(기타용 마이크)과 기타줄을 달아 연주를 시작하는 모습입니다. 그 장면을 보고 '나도 기타를 만들어 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후 대학에서 공예를 전공을 하게 되었고, 처음으로 기타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첫 기타를 앰프에 꽂아 소리를 들었던 순간에 '이 일을 오랫동안 하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Q. 직업 실험에 꼭 하나 필요한 요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일 수도 공간일 수도 자금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저희가 하는 일은 많은 자본과 노동 그리고 재료가 필요하며 크고 눈치보지 않을 만한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모두 다 필요하지만 현재는 '공간'이 가장 필요합니다. 오랜 기간 동안 레지던스와 메이커 스페이스, 학교를 돌아다니며 마치 '노마드'처럼 작업을 이어왔기 때문입니다. 꽤나 지쳐 있는 상태입니다.
Q. 직업 실험을 통해 실제로 자신의 직업으로서 현재의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월급을 책정한다면 얼마입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A. 하루 10시간 정도의 노동. 주 6일 동안의 근무. 시간당 10,000원의 시급이라고 생각하였을 때 월 2,400,000원을 책정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저희는 '공예가'로 오랫동안 활동해 왔기 때문에 월급과는 거리가 멉니다. 물건을 만들어 판매하고, 그 이윤으로 생활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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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성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5년 후의 본인을 상상한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A. 새로운 악기를 계속 실험하고 만들어 내고 있을 것 같습니다. 시각적인 이미지뿐만 아니라 다양한 범위로 크로스 오버를 해 나가고 있으면 좋겠어요.
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장렬하게 실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직업 실험의 경험이 남았습니다. 실패의 경험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A. 엄밀히 말하면 저희는 '공예가'로서는 오랜 기간 동안 이미 실패를 경험해 오고 있습니다. 실패의 역사에 새로운 페이지를 써 내려 가는 것 뿐이지요. 지금보다 더 '잘'해야 한다는 충고 아닐까요?
Q.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 본인의 작업에 새롭게 도전하고자 하는 청년에게 해주고 싶은 말, 혹은 조언이 있다면? A. 지속적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겠다는 도전이 필요합니다.
Q. 본인이 청년업을 통해 경험한 ‘업’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면, 당신의 직업은 어떤 명칭을 갖게 될까요? 자유롭게 직업의 명칭을 상상해 주세요. (여러 개를 작성해 주셔도 좋습니다.) A. 악기 창작가? / 문화 교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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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무치
무치는 제품을 디자인하는 원빈과 기획하고 홍보하는 보령으로 이루어진 2인 팀입니다. 반려동물을 키우면서 동물을 죽여 만들어진 가죽으로 제품을 생산한다는 제작자 원빈의 모순과, 비건이지만 가죽을 좋아하는 기획자 보령의 고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손보령
무치는 제작하는 과정에서 ‘부끄러움 없는 것’과 ‘누구도 다치지 않는
무치
것’을 1차 목표로 하는 비건 가죽 프로젝트입니다. 가죽의 특성은 살리면서 누군가를 착취하지 않는, 최대한 오래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비건 가죽 제품을 지속 가능한 방법으로 생산하려 합니다.
지금은 한지로 만든 가죽인 하운지로 다양한 제품을 연구하고 개발하고 있습니다. 이 가죽의 특징을 어떻게 제품에 잘 녹여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제품을 연습하고 실험해 기본 틀이 될 제품을 제작 해본 뒤 직접 문의를 받아, 가능한 한 사용자가 오래 사용할 수 있도록 기본 제품을 변형해 사용자의 취향과 편의에 맞춘 제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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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치의 연대기
마음먹기의 시작 2018년에 식사를 하다가, 나의 식사로 인해 음식물 쓰레기가 발생하고 그것을 다른 동물이 섭취하고 그 동물이 또 나의 식탁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껄끄럽게 느껴졌어요.
만남
프로젝트의 시작
팀원과는 연극을 하면서 가까워졌어요.
지원 사업 공고가 난 3월에서 4월 사이에
원래는 청소년 단체 같은 곳에서 연극을 함께 하고
팀을 만들어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있었는데 2015년도에 떨어져 나와, ‘사이에서’라는 팀을 만들게 되었죠. 제 이름이 걸린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건 2017년도가 되어서예요.
위기 이미 자부담으로도 많은 금액이 들어간 프로젝트인데, 저희 팀이 선택한 제품을 소비자들이 원할지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는 상태에요. 그래서 위기는 지금이라고 생각합니다.
극복 이 지원 사업이 끝나는 시점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요.
현재 신생아기인 것 같아요. 저희 창작 집단도 같은 시기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제 막 이런저런 것들을 배우기 시작한 단계라고 느끼거든요.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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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M | 저는 ‘무치’에서 기획을 맡고 있는
손보령입니다. 프로젝트에서는 강보령, 손보령이라는 이름을 함께 쓰고 있어요. ‘무치’는 가죽 제품을 좋아하지만 동물을 죽이기는 싫은 저의 고민과, 자신은 동물을 키우는 사람이면서 다른 동물을 죽여 만들어진 가죽 으로 제품을 생산한다는 고민을 가진 제작자 이원빈의 고민이 모여 만들어진 팀이에요. 지금 저희 팀에서 준비 중인 제품은 한지로 만든 가죽인 ‘하운지’로 제작된 이어폰 줄감개와 책갈피입니다. O | 제가 알기로 연극을 하신다고…? M | 네. 원빈이라는 친구와 저 둘 다
O | 많은 것 같아요. 그런 것들도
다 직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M | 고등학교 때 연극을 시작하면서도
M |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다고
말하거든요. O | 그렇다면 생계를 책임져 주지
같은 창작극단에서 작품을 만드는
‘과연 연극이 내 직업이 될 수
못하는 일인데도 왜 연극과 ‘무치’
팀원이에요. ‘사이에서’라는
있을까?’라고 질문했었어요.
활동을 하시는 걸까요?
팀이고, 저는 대표 겸 기획,
네이버에 ‘직업’을 검색해 보면,
M | 그냥 저의 필요에 의해서, 하고
그 친구는 배우 겸 연출을 맡고
그것으로 내 삶이 지속돼야 하고
싶어서 하고 있어요. 연극을
있어요.
소득 활동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
하면서도, 저는 제가 보고 싶은
사실 여기서 둘 다 직업이라고 할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런 의미에서는
컨텐츠를 만드는 것이 1순위
만큼 소득을 내고 있진 않지만,
주변 선배들을 봐도 연극을 직업이
목적이거든요. 또는 내 안의 어떤
본업이 연극이니까 '무치'는
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단
것을 해소하기 위해서 만드는 것?
부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생각이 들어요.
O | 연극도 하고 이 일도 하고 있는데,
O | 소득이 되지 않아서요?
둘 다 등가를 갖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M | 네. 사실 저도 잘 모르겠지만…
옛날의 직업이라고 하면 M | 저희가 이 프로젝트에 들이고 있는
한 가지 일로 소득을 다 채울 수
품을 생각해 보면 부업이라는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단어를 쓰기에 조금 애매하기는
저는 한 가지 일로 제 모든 생계를
해요. 일단은 청년업에서 잡은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닌 것
카테고리가 부업 개발이어서
같아서요. 그래서 이제 직업이라는
그렇게 얘기하기는 하지만,
게 다른 의미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제게는 비슷한 위치예요.
다른 단어로 불려야 하지 않을까
O | 요즘은 평생 하는 하나의 일로서
싶어요. 어떤 소득 활동을 하고
직업을 선택한다기보다
있느냐가 직업을 말한다면 저는
여러 가지 일을 프로젝트의
엄마, 딸 혹은 알바생 정도겠지만
성격으로 해 나가는 사람들이
저는 직업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연극 기획을 하고, 비건 가죽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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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 ‘무치’ 프로젝트도 연극을 할 때처럼
O | 그 가치가 이 팀이 주문 제작
나 스스로가 갖고 싶었던 제품을
방식을 선택한 것과도 연관이
내가 가질 수 있는 게 가장
있겠네요?
우선이에요. M | 네 맞아요. 저희가 크라우드 O | 그렇다면, 윤리적인 또는 환경의
M | 점점 더 늘어난다면 안정적일 수
있지 않을까요. O | 그렇다면 앞으로 5년이나 10년
후, 생계 유지와 좋아하는 일의
펀딩을 준비 중인데, 지원금으로
갈등이 없는 상태를 상상해 본다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받은 액수로는 완전히 원하던
어떤 모습일까요?
무엇인가요?
방식의 주문 생산 형태를 만들
M | 어느 순간 채식을 해야겠다고
소소하게 시작하게 됐는데, 단순히 어떤 생물이 죽는다는 게 싫어서였어요. 작년에 밥을 하고 있는데 음식물
수 없었거든요. 책갈피와 이어폰 줄감개는 크라우드 펀딩 기한을 맞출 수 있는 제품으로 준비하기 위해 선택된 품목입니다. O | 차후에 투자 규모를 판단하는
쓰레기가 나오는 걸 보면서, 그게
지표로서의 기능을 이 사업이
다른 동물의 사료 등으로 쓰일
해줬으면 좋겠다는 문장도 봤는데,
거라는 사실과 그 동물을 다시 제가
이 제품들로 그 가능성을 타진해
소비하게 될 거라는 게 껄끄럽게
보고 싶은 마음이 있으신가요?
뭐가 됐든 200만 원이 되었으면 좋겠고, 연극이나 ‘무치’ 활동으로 안정적인 수익이 나면 좋겠어요. 연극을 하면서도 사람들이 노동한 가치에 맞게 소득을 가져갔으면 하는데, 내가 가진 자본이 없어서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게 가장 슬프거든요. 내가 노동한 가치를 돈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환경이 저에게 주어지는 것이 가장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내가 버린 쓰레기가 나한테
M | 수치적으로 말한다면, 소득이
M | 멘토링 때 그 부분에 대해
이상적인 것 같아요.
돌아온다는 것도 그렇고, 술을 먹을
질문을 드리고 왔는데, 저희가
때나 밥을 먹을 때
준비하고 있는 사업 규모로 봤을 때
내가 무언가를 계속 죽이고 있다는
이 사업의 지속 가능성을
생각이 들었고요. ‘그러지 말아
이 일로 평가하기보다는 또 다른
볼까?’ 하고 살다 보니, 동물을 안
기준이 필요하겠다는 말씀을
먹은 지가 꽤 되었더라고요.
해 주시더라고요. 그런데 멘토링을
되고 싶었어요. 부모님이나 집에
받고 인터뷰에 임하면서 계속
종속되지 않고, 다른 사람 밑에서
드는 생각은, 의미 있는 물건을
월급을 받으면서 일하지 않고, 내가
생산하자는 건 결국 소규모로
중요시하지 않는 일을 안 하는게
할 수밖에 없는 일이잖아요.
중요했고 그 결이 이어져 온 것
필요한 만큼만 생산해서 다른
같아요. 자유롭고 싶은 마음 때문에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고, 큰
내가 하는 일의 가치를 우선하게 된
소득을 얻겠다는 목표보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O | ‘가치’라는 개념이 왜 이렇게
중요한 직업의 선택 기준이 되었을까요? M | 저는 어릴 때부터 독립적인 사람이
다른 목표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O | 그렇다면 본인이 그 충돌 지점을
잘 만나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자신에 더해서 어떤 부분들을 길러야 할까요? M | 제가 좋아하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그런 부분의 해결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지금 하고 있는 연극이나 ‘무치’의 작업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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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VEY.
무치 Q. 당신에게 업(직업)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A.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만큼 벌이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 중 무엇이 직업일지, 또는 무엇이 직업이 될 수 있을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Q. 어린 시절의 꿈은(직업으로서) 무엇이었나요? A. 경제적으로 독립적일 수 있다면 뭐든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흔히 말하는 ‘돈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되려 했습니다.
Q. 현재의 일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에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저는 어느 날 운동화를 하나 사려다가, 발뒤꿈치 쪽에 있는 작은 소가죽 장식 때문에 구매를 못했습니다. 그 외에도 동물성 소재로 만들어졌다는 이유로 제품 구매를 포기하기도 하고, 왜 쓸데없이 이런 걸 만들어 동물을 죽이냐며 화를 낸 적도 잦았어요. 그러면서 저는 아무도 다치지 않으면서 예쁘고, 최대한 오래 사용할 수 있는 가죽 제품을 만들고 싶어졌죠. 내가 사용하고 싶은 좋은 제품을 만들면서도 누군가를 착취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어요.
Q. 직업 실험에 꼭 하나 필요한 요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일 수도 공간일 수도 자금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사람입니다. 인력이 부족할 걸 알면서도 두 명으로 시작했지만, 누군가 더 있었다면 좀 더 허둥지둥하지 않고 실험을 진행할 수 있었을 것 같아요. 또한 실험을 진행하면서 생긴 아이디어들, 고민들을 누군가와 더 나누고 싶습니다.
Q. 직업 실험을 통해 실제로 자신의 직업으로서 현재의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월급을 책정한다면 얼마입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A. 200만 원입니다. 지금 전 200만 원의 월급이라면 다른 벌이 없이 이 일만으로 작은 제 삶을 지속할 수 있을 것 같아요.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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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성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5년 후의 본인을 상상한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A. 규모가 크지 않더라도 지속적으로 문구, 패션 등 다양한 분야에서 비건 가죽 제품을 생산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사업을 시작할 때 떠올렸던 제품들을 만들고 있을 것 같아요. 그때는 좀 더 제 삶이 안정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장렬하게 실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직업 실험의 경험이 남았습니다. 실패의 경험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A. 언젠가 또 다른 분야에서 비슷한 일을 해 보는 원동력이 될 것 같습니다. 망한 연극들을 경험하면서 이렇게 다른 분야의 기획을 하고 있는 것처럼요. 작게 실패한 경험이 쿠션이 되어 다음 실패 땐 크게 아프진 않듯, ‘저번에도 망했지만 난 괜찮았어!’ 라는 생각을 갖게 하지 않을까요?
Q.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 본인의 작업에 새롭게 도전하고자 하는 청년에게 해주고 싶은 말, 혹은 조언이 있다면? A.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조언을 해줄 수 있을 정도로 제가 아직 많이 성장한 것 같지는 않아요.
Q. 본인이 청년업을 통해 경험한 ‘업’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면, 당신의 직업은 어떤 명칭을 갖게 될까요? 자유롭게 직업의 명칭을 상상해 주세요. (여러 개를 작성해 주셔도 좋습니다.) A. 많이 고민해 봤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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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반반몬스터는 두 명의 팀원이 캐릭터를 통해 밀레니얼 세대를 만나 소통하며
반반몬스터
캠페인을 진행하는 브랜드입니다. 브랜드 마케터이자 동화작가인 멤버와 청년 교육 및 활동을 지원해 주는 매니저가 함께 있는 단체입니다.
강경호, 함금실
처음 지원 당시 프로젝트 소개 : 서로 다른 머리와 몸이 만나 하나의
반반몬스터
캐릭터가 탄생하는 컨셉의 ‘반반 몬스터’ 캐릭터를 만들고, 밀레니얼 세대의 다름을 응원하는 캠페인을 실행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 진행 과정 속 변화된 프로젝트 내용 : 반반몬스터 캐릭터 2개를 만들었고, 하나는 몬스터‘텅’, 하나는 몬스터‘듬’입니다. ● 몬스터 텅과 듬에 자신의 텅한 감정과 듬한 감정을 표현해 보는 캠페인을 진행했습니다. 몬스터 텅과 듬의 원형에 밀레니얼 세대가 가지고 있는 자신만의 감정과 고민을 담은 캐릭터를 만들어 보게 했습니다. 더불어, 밀레니얼 세대를 인터뷰해, 각자의 고민과 관심사, 감정을 몬스터 텅과 듬이 소개하여 알리는 작업으로 ‘책자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처음에는 서로 다른 머리와 몸이 만나 하나의 캐릭터로 탄생하는 독특한 컨셉으로 캐릭터를 만들어 보려 했지만, 청년들이 가장 많이 느끼는 2가지 감정을 표현한 캐릭터를 제작해, 그 캐릭터로 소통하는 캠페인을 진행하는 것으로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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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반몬스터의 연대기
프로젝트의 시작
마음먹기의 시작
‘청년업’을 지원하면서부터예요.
올해 초입니다. 연초가 되면 아무래도
지원 사업을 기회 삼아 도전해 보자는 것이 계기였습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해 봐야겠다'고 생각이 드는 것 같아요.
만남 친구 소개로 만났는데, 프로젝트를 같이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건 첫 번째 프로젝트를 함께 기획하면서였어요. 커플들 중에 공통의 관심사나 취미를 가지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런 맥락에서 진행되었는데, 저는 생각이 많고 실행력이 부족한 반면 이 분은 행동력이 있는 사람이라 그게 잘 맞아떨어진 것 같아요.
위기 ‘청년업’ 합격 이후, 이번에 처음 냈던 기획서가 별로라는 것을 확인하게 됐어요. 지원을 위해 급히 만들다 보니 검증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했거든요. 실제로 밀레니얼 세대를 만나 보니 수정해야 할 내용이 많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극복 지금 극복해 나가는 중입니다. ‘텅’, ‘듬’의 캐릭터 디자인이 나오기도 했고요, 실질적으로 상품을 만들면서 좀 더 직접적으로 사람들을 만나 보는 쪽으로 진행하고 있어요.
현재 청소년기인 것 같아요. 해 보고 싶은 건 있는데 뭔지는 정확하게 모르고, 불안하기도 하지만 두근거림도 가장 큰 그런 시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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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K | 저희는 ‘반반몬스터’고요.
O | 의미와 가치를 전달하는 매체가,
K | 브랜드 마케터를 계속하고 있고,
'말'이나 '글'이 아니라 '캐릭터'라는
동화는 취미로 쓰고 있는 상황
부분이 좋다고 생각했어요.
이에요. 제가 표현하고 싶은
밀레니얼 세대의 다양한 에너지를
욕구의 매개체 정도로 생각합니다.
표현하는 캐릭터를 기획하고
제가 하는 일을 통해 단순히 돈을
제작하는 단체입니다.
버는 것보다는, 제가 만들고 있는
저는 스토리와 캐릭터 기획을
브랜드나 컨설팅하고 있는 기업이
맡고 있는 강경호라고 합니다.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늘 갖고 있어요.
H | 저도 함께 캐릭터 기획을 하고
상품 제작 등 업무를 하고 있는
하고 있는 일에서 그게 모두 채워
함금실이라고 합니다.
지지 않다 보니 동화를 쓰게 되었던
저희는 연인으로 만났는데,
것 같아요.
둘 다 캐릭터 분야에 관심이 많아서
O | 혹시 어떤 브랜드의 마케팅을
프로젝트를 같이 하게 됐어요.
하고 계시나요?
캐릭터로 뭔가 해 보려고 했던 K | 기술 사업화라고, 어떤 기술이
건 올해 1월부터예요. 캐릭터로
K | 처음보다 많이 바뀌기도 했어요.
이모티콘을 만들어 보자고 해서
밀레니얼 세대가 어떤 감정을
사업이 되는 데까지 많은 절차들을
진행하다가, ‘청년업’ 관련한
가지고 있을까 고민하는 과정에서,
거쳐야 해요. 투자도 받아야 하고,
소식을 듣고 상품도 만들어 보고
그들이 희망차고 꿈이 넘치는
창업을 해서 조직도 갖춰야 하고요.
다양한 실험도 해 보자 해서,
감정과 뭘 해도 안될 것 같고
그런 여러 단계를 통해 그 기술이
‘청년업’ 지원을 받기 시작하면서
공허한 감정을 양가적으로 가지고
사업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마케팅
본격적으로 진행 중입니다.
있고 그게 컨텐츠로 만들어져
부분의 컨설팅을 해 주는 일을 하고
소비되고 있다는 걸 발견했거든요.
있어요. 저는 브랜드가 사회적으로
그래서 그런 감정들에 대해
많은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해요.
이야기해 보는 캐릭터로서 ‘텅’과
스타벅스나 탐스 슈즈 같은
‘듬’을 만들게 됐고, 각각 ‘텅’은
브랜드들은 단순히 ‘우리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것 같은
이렇게 좋은 제품을 판다’
감정을, ‘듬’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이상으로, 누군가의 삶 자체를
활동하고 있는데 그 활동을 하면서
것 같은 감정을 담아 구체화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킨다는
느끼는 욕구가 있어요. 제 다음
시켰어요. 그 이후에 인터뷰를
생각이 들죠. 그런 브랜드에 많이
세대의 친구들에게 제가 살아온
했더니 처음에 그랬을 때보다
열광했고, 더 많아지고 잘돼야
인생을 통해 어떤 에너지나
좋은 반응이 생겼어요.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O | 지원서에 밀레니얼 세대를
응원하고 싶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그 세대를 응원하고 싶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K | 저는 제 본업 말고도 동화 작가로
가치를 전달해 주고 싶은 마음이 강하거든요. 또 동화책을 쓰면서 캐릭터라는 것에도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됐고 그걸 통해 사람들에게 뭔가 전달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들을 시도해 보려던 찰나에 이 친구를 만나게 됐어요. 이 친구는 지금 청년 활동을
O | 두 분이 참 다양한 일들을
해오셨더라고요. 브랜드 마케터, 남아프리카 공화국 프로젝트 매니저, 또 동화 작가시기도
지금까지 해 오고 있습니다. O | 이전 세대의 직업관에 비해 요즘은
직업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다고
기획이나 무중력지대 프로젝트
생각하세요?
등 많은 활동을 하셨는데, 이렇게 다양한 이력을 남기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K | 예전에는 업이라는 게 한 가지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일을 하다 보니 다양한 작업을 통해
K | 브랜드 마케터를 하다가 전업 동화
작가가 된 건 아니고요. 본업으로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하고요. 다른 분은 청년 관련
지원하는 곳에서 일을 하고 있어 그게 접점이 되었죠.
그런 것들에 영향을 미칠 수
내가 이런 가치의 일을 하고 있다는 테두리를 만들 수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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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 요즘은 내가 추구하는 가치들이
H | 사람 입장에서 겪게 되는 다양한
K | 열겠다는 게 전체 기획이었는데,
어떤 한 직업에서 다 충족이
문제들 안에서 외로워하던 와중에
너무 꿈이 거창했던 것 같아요.
되기는 어려운 것 같은데 그 대신
우연히 ‘청년 허브’라는 곳을 알게
또 청각 장애에 대한 저희의
여러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기회도
됐어요. 거기서 대기업이라든지
공감대나 이해도가 부족했고요.
많아지고 있어서, 내 역량 안에서
안정된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이
하지만 락 페스티벌을 열기 위한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는 과정에서
아니라, ‘우리가 다른 삶을 살
초기 금액을 펀딩 목표 금액으로
업을 보는 관점 자체도 넓어지고
순 없을까’, ‘대기업만이 답일까’
잡았었는데, 그게 우선 달성이 안
있는 게 아닌가 개인적으로
하는 문제들을 고민하는 청년들을
되다 보니까 당연히 다음 단계들도
생각합니다.
만나게 되었고 내가 가지고 있는
진행이 되지 않아서 멈출 수밖에
고민을 그들과 공유하면서 어떤
없었어요.
H | 최근에 ’N잡러’라는 얘기가 많이
들리잖아요. 한 사람이 매일 같은 회사를 다니는 게 아니라 일주일 중 이틀은 여기, 삼일은 저기 다니는 식의 업무가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우리 모두가 사실 한 직업만을 갖고 생을 살아가기엔
해결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 거죠. 그래서 현재의 제 관심 대상은 청년 세대이고, 아직 저도 청년 세대를 살고 있어서 더 공감대를 많이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요.
O | 지원을 받아서 한 사업이었나요? K | 아뇨, 순수하게 저희 자금으로
했습니다. 관련 지원 사업이 없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하기 전에 스스로
너무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고, 직장이 먹여줘서 사는 시대가 이미 끝났기 때문에, 여러 가지 갈래를 가지고 내가 하는 일을 고려하고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 같아요. 제 주변을 봐도 자기 본업이 있지만 그것이 내 급여를 정기적으로 줄 수 있는 안정적인 수단일 뿐이고, 그 사이드 프로젝트로 계속 어떤 충족감을 얻기 위한 자그마한 시도들을 많이 하더라고요. O | 청년 관련 프로젝트 기획과
운영을 많이 하셨더라고요. 동기가 무엇이었나요? H | 20대 때, 모든 20대가 그렇지만
불안한 나이였거든요. 서울에 오면 뭔가 다 이뤄질 것 같은 동경이 있어서 상경을 했는데, 막상 서울에서 내가 있게 된 곳은 그냥
O | 두 분이 처음 함께한 프로젝트는
‘청각 장애인 인식 개선을 위한 캐릭터’였던 거죠? 실패했다고 적혀 있는데, 왜 실패했다고 생각하시나요? K | 병아리가 락스타라는 컨셉을
1평짜리 집에, 이 안에서 하루하루
가진 캐릭터였는데, 그 캐릭터가
지내는 건 너무 불안했어요.
조금 귀가 안 들리는데 락스타의
아무런 연고 없이 올라왔기 때문에
꿈을 이뤄가는 스토리를 가지고
작은 일자리를 구하려고 해도 아는
있는 거죠. 이 캐릭터 상품을
사람이나, 경험을 들어 볼 만한
만들고 수익금의 일부분으로
사람도 없어서 지방에서 올라온
청각 장애인들을 위한 락 콘서트를
청년업
K | 뭔가 시도해 보는 것이 1차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O | 성공했다는 뿌듯함보다 아쉬움이
많이 남았을 텐데, 어떤 에너지로 또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되신 건지? K | 말씀대로 그 피로도가 상당히
높아서, 당분간 캐릭터 생각도 안 했었어요. 그런데 연애랑 상당히 비슷하게, 사랑을 하다가 헤어지면 아무 생각도 안 나다가 어느 순간 무언가 다시 시작하고 싶은 것처럼 또 해 보자 하는 얘기를 하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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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 네. 또 그때부터 바로 캐릭터를
K | 우선, 이 프로젝트를 계속 존속할
H |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생산성이
하자, 했던 건 아니고 비슷한
수 있는 정도의 수익을 만들고
생기길 기대는 하고 있어요.
관심사 안에서 이걸 해 볼까 저걸
싶어요. 저희 인건비까지는
해 볼까 의논했어요. 그게 지난
안 나오더라도, 지금 직업이
프로젝트 이후 2~3년이 지난
있는 상태니까 이 프로젝트만
시점이었는데, ‘청년업’ 포스터를
지속할 수 있게 된다면
보고 여기서 프로젝트를 진행해
계속해서 하고 싶거든요.
보면 이전의 실패했던 경험과는 다른 이야기들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도전하게 됐어요.
O | 왜 본인들의 인건비가 없어도
지속을 하고 싶어 하시는지?
K | 저에게는 꼭 인건비까지 벌리지
않아도 괜찮은 일이에요. 제가 잘하는 일을 하면서 수익을 만들 수 있고, 이 안정성을 통해 좋아하는 일을 계속해서 시도할 수 있다면 이런 방식으로 병행을 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H | 인건비가 나오면 물론 좋지만, O | 그럼 이제 캐릭터가 출시되고
굿즈도 나오는 건가요? K | 지금 기획하고 있는 것 중
좋아하는 마음으로 무언가 시작했을 때 그게 성공하기 쉽지 않다는 걸 기본적으로 알고
메인은 인형이고 그 다음은
있잖아요. 그래서 안전
배지(badge)입니다. 엽서나
베이스로서 직업을 가지고
스티커 등 기본적으로 하고 있는
있으면서, 해소되지 않는 것들을
것들은 있지만 대표 상품은
채우려고 실험을 조금씩 하다가
인형이 될 거예요.
나중에는 캐릭터 사업으로 급여를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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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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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VEY.
반반몬스터 Q. 당신에게 업(직업)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A.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인 동시에 돈을 뛰어넘는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활동입니다.
Q. 어린 시절의 꿈은(직업으로서) 무엇이었나요? A. 패션 잡지 기자였습니다.
Q. 현재의 일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에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캐릭터를 좋아했고, 캐릭터가 보여주는 이야기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팀원 각자가 서로 좋아하는 캐릭터가 분명했고, 그 캐릭터가 세상에 보여주는 스토리에 반해, 피규어를 모으며 캐릭터를 사랑하고 있었기에, 그걸 만들어보는 사람은 어떨까?에 대한 호기심과 흥미 때문에 이 일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단순히 캐릭터를 좋아하고, 소비하는 입장이 아니라, 우리만의 캐릭터를 만들어서 사람들과 소통하면 어떨까? 에 대한 고민을 시작으로, 청년업 프로젝트를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각자의 본업이 있기에 좋아하는 것을 일로써 만들어가기에 실험해 볼 수 있는 시간과 장이 필요했고, 캐릭터 기획자로의 가능성을 실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그 마음 때문에 현재의 프로젝트에 매력을 느껴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Q. 직업 실험에 꼭 하나 필요한 요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일 수도 공간일 수도 자금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캐릭터 디자이너를 필요한 요소로 넣고 싶습니다. 캐릭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있어, 캐릭터를 디자인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팀원은 필수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부에 기획자만 두 명 있다 보니, 외부 디자이너와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캐릭터의 디자인들이 잘 나오기는 했지만, 그때그때 필요한 캐릭터를 제작하는데 시간과 과정을 설명 하는 데의 품이 많이 들었습니다. 진행해 보면서 느낀 건, 기획자와 디자이너가 함께 캐릭터에 대해 고민하고, 이해해 나가며, 결과물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가장 이상적이고, 건강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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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직업 실험을 통해 실제로 자신의 직업으로서 현재의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월급을 책정한다면 얼마입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A. 최저 시급의 급여를 책정할 것 같습니다. 현재의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지만, 정말 ‘업’이 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소통하는 캐릭터가 되기 위한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캐릭터 기획자로서의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스스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급여는 최저 시급 기준으로 받으며, 활동을 이어 나가게 될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성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5년 후의 본인을 상상한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A. 저희가 만든 캐릭터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캐릭터를 소개하는 상상을 합니다. 더불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이 되는 다양한 스토리를 만들어 내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상품들과 캐릭터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캐릭터 기획자의 모습을 상상합니다.
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장렬하게 실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직업 실험의 경험이 남았습니다. 실패의 경험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A. 멋진 시도가 있던 실험이었어! 라며 말할 수 있는 제 소중한 경험 자산이라고 생각해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낼 수 있었던 시간에 ‘나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남기고, 경험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청년업이기에 한 번 마음껏 시도해 볼 수 있었고, 그만큼의 경험을 몇 배로 받았습니다. 오히려, 실패했기에 우리가 어떤 것이부족했고 아쉬웠는지, 발전해야 되는 것은 무엇인지 알기에 너무도 충분하고 고마운 시간이었습니다.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지만) 더 잦은 실패들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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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VEY.
반반몬스터 Q.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 본인의 작업에 새롭게 도전하고자 하는 청년에게 해주고 싶은 말, 혹은 조언이 있다면? A. 단시간에 어떤 성과를 낼 것을 바라기 보다, 다양한 경험들을 해 보는 시간으로 삼고, 이것저것 말도 안 되는 실험을 적극적으로 하시기를 바랍니다. 캐릭터에 대한 프로젝트를 하신다면 캐릭터 관련 종사하시는 분들을 만나 뵙고 여러 조언을 얻으며, 아이디어에 대한 생각들을 나누면 좋을 것 같습니다.
Q. 본인이 청년업을 통해 경험한 ‘업’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면, 당신의 직업은 어떤 명칭을 갖게 될까요? 자유롭게 직업의 명칭을 상상해 주세요. (여러 개를 작성해 주셔도 좋습니다.) A. 캐릭터 메신저(Character Messenger) - 캐릭터를 통해 메세지를 전달하는 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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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반스웍스는 보드게임과 소설을 통해 문화 컨텐츠를 생산하는 팀입니다.
반스웍스
시나리오 라이터 문윤아(캐리), 보드게임 디자이너 정이삭(제시), 그래픽 디자이너 김형승(마크), 마케팅 디렉터 김현정(헤일리), 일러스트레이터 신은비(자넷), 프로그래머 김영민(빅슨) 이렇게 6의 구성원이 함께합니다.
문윤아
프로젝트 이름은 Over the boardgame으로, 보드게임을 할 때 조금
반스웍스
더 현실감을 느낄 수 있도록 다양한 악세사리를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지원 당시에는 스피커 기능과 동작 인식 기능이 있는 카드 홀더를 구상하였고, 카드가 꼽히거나 제거되는 행동을 감지하여 특정 사운드를 출력하는 카드 홀더를 개발하고자 했습니다.
이 아이템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아예 다양한 배경음과 효과음을 쓰기 편한 사운드 어플의 기획도 추가되었습니다. 그리고 보드게임에서 많이 사용하는 일반적인 정육면체 주사위보다 보드게임의 테마에 어울리는 독특한 디자인의 주사위를 개발하고자 합니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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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스웍스의 연대기
마음먹기의 시작
프로젝트의 시작
‘몽당연필’이라는 대학 동아리로 시작했어요.
2017년에, ‘내가 이 일을 하고 싶다’는 공표를 했어요.
2014년에서 2015년 사이였습니다.
그리고 저희의 보드게임을 가지고 보드게임 개발자들이 모여서 서로 피드백을 나누는 자리가 있었는데, 게임을 본 개발자들에게서 한국 시장에 이런 게임도 필요하다는 피드백을 받았어요. 그때 확신을 많이 얻었습니다.
만남 일러스트레이터인 친구와 프로그래머로 새로 들어온 친구를 제외하고, 저와 게임 디자이너, 그래픽 디자이너, 마케팅 디렉터 이렇게 네 명은 모두 2013년에 동아리에서 만났어요. 일러스트레이터인 친구는 동아리 후배고, 프로그래머로 영입된 친구는 그래픽 디자이너 쪽의 지인이었어요.
위기 사실 2018년 전까지 그런 마음이 드는 일이 되게 잦았어요. 특히 지난 7월엔 청년업에서 세무 교육을 받아야 했는데 다른 멤버들 없이 저 혼자 왔거든요. 꼭 알아야 하는 내용인데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지나가니, 왜 전혀 흥미 없는 분야를 여기까지 와서 나혼자 공부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다른 팀원들에게 어쩔 수 없이 섭섭해지고 화가 많이 나기도 했었죠.
극복 저는 이게 아직 극복되지는 않았어요. 그냥 익숙해진 것 같아요. 꾸준히 팀원들에게나 저 자신에게 화가 나고, 그게 또 다스려지고 하면서요. 하지만 이 과정 자체에는 계속 익숙해질 것 같다는 생각을 막연히 갖고 있어요.
현재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 된 것 같아요. 아직 많이 부족하고 더 배울 게 많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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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 처음엔 보드게임 동아리에서
만든 그 게임을 파는 것으로 시작하셨는데 이번에 지원한 사업 내용은 게임을 판매하는 게 아니라 보드게임에 전반적으로 사용되는 굿즈 제작이더라고요. 그 전환 과정과 이유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B | 오늘은 같이 오지 못한 마케팅
담당 팀원이 원래 이런 지원 사업에 관심이 많아요. 저희 프로젝트 ‘반스웍스’가 하는 일이 과연 먹고살 수 있는 업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던 시기였어요. 저는 본업을 항상 작가라고 생각하고 있기 O | ‘반스웍스’와 본인의 소개를
부탁드릴게요. B | 안녕하세요, 저는 문윤아입니다.
‘반스웍스’에서 시나리오 작가와 대표직을 맡고 있습니다. ‘반스웍스’는 보드게임과 소설을 통해 문화 컨텐츠를 생산하는 팀으로서, 그 둘을 연결시켜 세계관을 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는 보드게임이라고
B | 네. 원래 문예창작을 전공했고
소설을 쓰고 있어요. 보드게임 제작에 관한 일은 다행스럽게도 팀원이 많이 해주고 있어서, 소설이 80% 정도에, 이 팀이나 보드게임에 대해서 에너지를 쏟는 건 20~30% 정도예요.
때문에 ‘이거 안되면 다시 글 써야지’ 생각하고 있는데, 이 친구는 이 팀 자체가 먹고살 수 있는 사업이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보드게임만 만들어 파는 건 경쟁력이 떨어지지만 요즘 보드게임 시장이 커지고 있기도 하고, 보드게임은 시각적인 면과 촉각적인 면이 플레이어들에게 매력을
O | 왜 보드게임 제작을 시작하게
됐나요?
느끼게 만드는 면이 강하다고 생각해, 그런 포인트로 접근해 보면 먹고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B | 저희 팀에서 제작 중인
팀원들이 각자 하는 일들은 다르지만,
하면 부루마블, 인생게임, 젠가,
‘이계의 문’이라는 게임은 원래
이 ‘이계의 문’이라는 세계관 자체가
이런 것들이 있을 텐데요. 유럽
친구가 20대 초반에 취미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기를 바란다는
시장에서도 그렇고, 최근에는
만든 게임이에요.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보드게임 내에
저는 같은 동아리였기 때문에
스토리를 가미해서 유저들이 즐길
그 게임을 해 보게 됐는데 너무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어요.
재밌었어요.
온라인 게임들이 차츰
그 친구는 상품화할 생각은 없이
스토리라인과 큰 세계관을
자기가 취미로 이거 만들었다고
구축하며 발전해 온 것처럼
어디서 자랑할 수 있는 정도로만
중 하나는 게임에 등장하는
보드게임도 그렇게 발전하고
생각했는데, 저는 그게 너무
캐릭터들의 뒷이야기나 그 캐릭터
있다고 볼 수 있고, 저희는 마블이나
아깝더라고요. 그래서 사업을
들이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DC 같은 회사들처럼 거대한
해 보자고 제안하긴 했는데 많이
이야기를 제공하는 일이에요. 이런
세계관을 구축하려 하고 있어요.
힘들었어요. 말씀드렸다시피
걸 작업할 때는 온전히 제가 원하는
저는 문예창작과라서, 창업이나
소설이 아닌 글을 쓰게 될 때가
경영적인 부분에 대해선 전혀
있어서, 완성을 해도 만족스럽지
생각을 못 하고 있었어요.
않다거나 의구심이 들 때가 있어요.
O | 원래 전공은 글 쓰는 거죠?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O | 보드게임 제작자와 작가라는
두 개의 직업이 서로 충돌하진 않나요? B | 제가 이 팀에서 하는 업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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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저는 원래 장르소설, 그중에서도
B | 역시 법률적인 부분이 가장
B | 보드게임을 사업화하자는 가장
판타지나 대체 역사 쪽에 관심이
어려워요. 정말 고민해 본 적
큰 동기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데 이 게임은 SF에 많은
없었던 세무, 정산, 인건비,
보여주고 싶다는 거였기 때문에,
기반을 두고 있고 결이 조금 다른
업체와의 피드백까지... 낯선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부분들이 있어서 그만둘까 하는
사람과 만나는 걸 좋아하는
보여주고 싶다는 포부가 있는 거죠.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대표라는
성격이 아니라 그런 면에서 많이
갈 길은 아직 멀지만요.
말이 무겁게 다가와서, 다른 친구들
힘들었는데, 팀이란 게 좋은 점이
역시 자기가 20대 초반에 꿈꿨던
제가 그런 게 어렵다 못하겠다 하면
일과 조금 다른 일을 하면서 공동의
“알았어, 내가 할게” 하면서 나서
목표를 향해 가는 와중에 나는
주는 팀원들이 있거든요.
힘들다고 도망칠 수가 없더라고요.
의지가 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O | 처음엔 동아리에서 순수하게
좋아서 게임을 만들다가 자본을 투입해서 업으로 시작해 보자
그렇게까지 힘들진 않아요. O | 해외 진출 생각도 하신다고 알고
있어요.
하는 시점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의 느낌은 어땠나요? B | 무언가가 흐지부지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시작하게 된 것 같거든요. 보통 사업을 하자는 얘기를 할 땐 그런 꿈을 꾸잖아요. 보드게임 시장에 빛나는 유성처럼
B | 국내의 보드게임 시장이 많이
O | ‘재미’라는 게 이 팀이 추구하는
큰 가치인 것 같은데, 소설을 하고 있는 것의 이유도 '재미'일까요? B | 어렸을 때 엄마한테 상상으로 하는
얘기들을 많이 했어요. “내가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데, 갑자기 나무도 막 쓰러지고…” 이런 식으로 얘길 하면, 엄마가 '딸이 상상력이 재밌네' 하시면서
커졌다고 해도 정말 탐이 나는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그런
시장은 유럽 시장이에요.
공감을 해주는 모습에 중독이 된
정말 크기도 하고, 특히 독일 같은
것 같아요. 소설을 쓰는 것도 그
경우엔 색다른 보드게임들이
원동력으로 하고 있어요.
많아요. 그들은 책 읽는 듯이
내가 쓴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어떤
보드게임을 즐긴다고 하거든요.
사람은 재밌다, 나도 이런 상상 해
파장을 일으키는 생각들을 하는데,
본 적 있다 하며 호응해주는 과정이
취미로만 만들고 끝나게 되면
너무 즐거워서요.
처음의 포부와 완전히 달라지는 거죠. 그러면서 나 스스로에게 실망도 하게 될 거고, 그래서 ‘할 거면 제대로 하자’라는 생각을 했어요. 사실 그때까진 부모님께 지원을 받거나 폐를 끼칠 생각이 없었는데, 어쩔 수 없이 사업 자금을 요청 드렸을 때 부모님께서 무조건적인 지지를 해주신 것이 정말 큰 도움이 됐어요. O | 글을 쓰는 것과 사업을 하는 것에
쓰이는 에너지는 많이 다르잖아요. 어떤 게 가장 큰 어려움인가요?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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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VEY.
반스웍스 Q. 당신에게 업(직업)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A. 저에게 업이란, 제가 가진 정체성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Q. 어린 시절의 꿈은(직업으로서) 무엇이었나요? A. 어릴 때 꿈은 천문학자였습니다.
Q. 현재의 일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에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보드게임에 재미를 느낀 것이 가장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Q. 직업 실험에 꼭 하나 필요한 요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일 수도 공간일 수도 자금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자존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저는 청년업에 선정되었을 때 제가 좋아하는 것을 지지받았다는 생각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마다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에 더 큰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Q. 직업 실험을 통해 실제로 자신의 직업으로서 현재의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월급을 책정한다면 얼마입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A. 300만 원. 제가 가진 재능과 의욕에 대한 값이며,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로 책정했습니다. 그리고 연말마다 연봉 협상도 하고 싶습니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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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성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5년 후의 본인을 상상한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A. 시나리오 작가로서 저는 제 글을 좋아하는 분들과 다양한 형태로 소통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것이 소설이든 게임 규칙 설명서이든 상관없이 계속 글을 쓰고 있을 것 같습니다.
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장렬하게 실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직업 실험의 경험이 남았습니다. 실패의 경험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A. 한동안 자신에게 실망스럽겠지만 그 경험으로 또 글을 쓸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소재를 얻었다고 생각하겠죠.
Q.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 본인의 작업에 새롭게 도전하고자 하는 청년에게 해주고 싶은 말, 혹은 조언이 있다면? A. 당신의 작품의 팬이 되고 싶습니다. 다양하고 멋진 작품들을 만들어 주세요.
Q. 본인이 청년업을 통해 경험한 ‘업’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면, 당신의 직업은 어떤 명칭을 갖게 될까요? 자유롭게 직업의 명칭을 상상해 주세요. (여러 개를 작성해 주셔도 좋습니다.) A. 저는 새로운 명칭보다 그저 '작가'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제가 하는 일을 통해 작가의 범위가 넓어지길 소망합니다.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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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방앗간
방앗간
방앗간은 사내 다양한 부서의 직원들끼리 야심한 밤에 연애 상담을 시작으로 떡담회를 매주 개최하였고,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연애와 성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콘텐츠 제작을 기획하는 집단입니다.
처음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는 글과 사진으로 성과 관련한 다양한 콘텐츠를 소개하고 떡담회에서 나온 재미있거나 유익한 정보를 다른 사람들과도 공유하고자 잡지 제작을 기획했으나 청년업에서 제공한 피드백과 상담을 통해서 잡지에 한정 짓기보다는 다양한 루트와 채널을 통해서 정보를 공유 해보는 프로젝트로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설문지, 인스타, 팟캐스트 등 다양한 채널에 어울리는 콘텐츠를 기획하고 정보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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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앗간의 연대기
마음먹기의 시작
프로젝트의 시작
작년 12월 정도예요. 저는 이런 주제의 이야기를 계속
1월 22일이었어요. 첫 모임은 비건 빵집에서 했었는데
하고 다니는데 그걸 회사 사람들이랑 나눌 수 있는 게
회사 근처 떡집이 마땅한 데가 없어서 비건 베이커리를
너무 좋았어요. 지금까지 없던 방식의 섹스 컨텐츠이지
찾아서 가게 되었어요.
않을까 싶었고 나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컨텐츠에 대한 갈증이 늘 있었기도 해서, 그런 가능성을 보고 1회 ‘떡담회’를 만들게 되었어요.
만남 다 회사 사람들인데, 야근을 같이 하면 사무실 중앙에 큰 테이블이 있어서 거기서 야식 먹으면서 많은 얘기들을 나눴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모임이 만들어졌고요. 작년 12월 쯤이었어요.
위기 텀블벅 심의에 걸린 거였죠. 이 프로젝트를 봤을 때 외설적인 의도가 보인다는 식의 피드백이 있었고 원래 그런 우려가 있어서 담당자 분과 미리 만나서 상담도 했었는데 만들어져 봐야 알 수 있다는 대답을 들었어요. 그래서 페이지를 만들어 올렸더니 누가 봐도 성인물 같아 보이기 때문에 성인인증 프로그램이 없는 본 플랫폼에서는 진행이 어렵겠다는 답변이 왔어요.
극복 우선 저희끼리 대화를 많이 해야 했어요. 이 프로젝트가
이때 부산으로 여행을 갔는데 여행도 가고 회의도 많이 하면서
선정적인 쪽으로만 비춰질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도 하고
서로 납득하게 되었어요. 저희가 회의는 ‘떡담회’라고 하고
타인에게 우리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 납득시키지 않은 채
워크샵이나 여행 같은 건 ‘떡 부흥회’라고 해요. 7월 27~28일에
급진적으로만 표현하는 건 아닌지 의논을 했죠.
다녀왔는데 원래는 컨텐츠 취재하려고 갔던 거였죠.
현재 초등학교 3학년? 10살 정도요. 애매하게 세상을 알게 된 것 같긴 한데 다 모르고 있고, 기댈 곳도 필요한 느낌이라서요.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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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 팀 소개 부탁드립니다. B | 안녕하세요. 저희는 ‘방앗간’이라는
B | 그렇게 커뮤니티 아트의 성격과
책을 만드는 성격 반반 해서 하고
쓰는 것에 관심이 많아서 학보사에
있습니다.
들어갔는데, 기자 일이 힘들다는
팀입니다. 멤버마다 떡 이름이 있는데 저는 ‘망개떡’이에요. 저희는 회사에서 만나서 모였는데 저는 마케팅 직무를 맡고 있고, 팀에서도 마케팅 관련한 일을 하고 있어요. J | 저는 ‘방앗간’에서 ‘찹쌀 경단’을
맡고 있어요. 경단은 뜨거운 물에 넣으면 가라앉고 다 익고 나야 물에 뜨거든요. 이런 점이 제 연애관이랑 비슷해서 정하게
O | 지금 다니는 회사는 어떤 일을
하나요? 또 어떻게 들어가게 되셨는지? Y | 소셜 벤처 쪽이고 컨텐츠를 만드는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죠. 그런
소개하고 사회 혁신의 상을 같이
하다 보니까 기자 생활이랑
그려 나가는 미디어를 만든다거나
뭐가 다른지도 잘 모르겠고,
교육을 하는 곳입니다.
‘까칠남녀’라는 프로그램을 6개월
B | 저는 불문과를 나왔는데 학교
만들고 기사를 쓰거나, 뭔가
센터에 들어오게 된 계기는 ‘청년
작성하는 것과 관련한 일들을
허브’에서 하는 ‘청년 학교’에
하고 있어요.
대학생 때 참가하게 된 것이에요.
B | 저희는 ‘떡책’이라는 잡지 만드는
갔는데, 제가 사람 얘기를 듣는 건
방송 막내작가로 들어갔는데
열심히 하지 않았어요. 소셜
‘떡네임’은 ‘쪼랭이떡’입니다.
도피성으로 1년 휴학하고 여행을
임팩트를 만드는 솔루션들을
일하고 있어서 팀에서는 컨텐츠를
만화를 그리려고 참여하게 됐어요.
삼고 싶지는 않더라고요. 그래서
직업을 찾다가 EBS에 다큐멘터리
다니면서 전공 공부는 그다지
있고 ‘방앗간’에는 그냥 그림이나
얘기를 많이 들어서 직업으로
회사예요. 사회적 기업인데, 소셜
됐어요. 회사에서 저는 에디터로
Y | 저는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고
J | 저는 사회학과 졸업했어요. 글
‘청년 학교’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식생, 도시 재생 등 4가지 주제를 바탕으로 50인 정도의 참가자가 1년 동안 함께 수업을
정도 했는데 그 프로그램이 없어졌거든요. 일을 2년 반을 했는데 어느 순간 무직이 된다거나 프로그램이 사라진다거나 하는 걸 경험하니까, 안정적이기도 하고 내 욕구도 충족할 수 있는 새로운 것을 찾게 되었어요. 그러던 와중 이 회사의 비전이 제가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Y | 저는 어릴 때부터 막연히 그림 그리는
듣는 프로젝트였어요. 직업인을
것을 좋아해서 영상 애니메이션
양성한다기보다 삶의 태도에 대해,
디자인과에 들어갔어요. 졸업하고
일을 하고 있어요. 떡은 저희가
문화 예술 또는 대안적인 삶에 대한
직장을 구하는데 내 그림을 그리는
먹는 떡이랑 치는 떡 이야기를
입문 과정이 되는 프로젝트였죠.
작가가 되기엔 자신이 없었고 지금
하자 해서 전체적인 컨셉트가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수업을
회사에서 일러스트레이터 구한다는
되었고, 그냥 떡이 아니라 맛있는
통해 경제학도 배우고, 농사도
얘기를 듣고 입사하게 됐어요.
떡을 치고 싶은 매거진을 만드는
짓고, 도시 재생에 대해서도
그런데 요즘 들어 제가 어떤 그림을
것이 목표예요. 처음부터 잡지를
배웠어요. 그때 이렇게 대안적인
그리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이 들었고
만들자고 시작한 건 아니었고
삶을 사는 사람들의 세계가 있다는
‘떡책’ 프로젝트에서 약간 제가
자연스럽게 회사에서 각자 고민을
걸 알게 되었고 저도 프로젝트를
해보고 싶은 시도를 할 수 있을 것
나누는 모임 정도로 시작됐어요.
진행했었죠. 진로 고민도 함께
같아서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O | 야근으로 물든 밤에?
했는데 전부터 광고 쪽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B | 맞아요. 그래서 ‘떡담회’라는
학교 다닐 때 광고 회사에서
O | ‘떡담회’가 올해 1월에 시작해서
이제는 ‘청년업’ 사업으로 크게 확장이 되었잖아요. 이 전환의
모임도 정기적으로 하고, 키우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앞으로 뭘 할지
있어요. 지난 주에 29회 ‘떡담회’를
고민중이었는데 ‘청년 학교’에서
했죠. 첫 모임은 1월이었어요.
만난 언니에게서, '이런 회사가
1월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전원이
있는데 일해 보지 않겠냐'는 연락이
지금과는 다르지만, ‘먹는 떡
모였던 건 아니지만 직업상 모였던
와서 마케팅 부서에 입사하게
하나에 에피소드 하나 매칭’
것들을 기록을 해 두려는 편이고,
됐어요.
이런 식의 가벼운 감각으로
계기가 있었을까요? B | 아이디어 정도는 있었던 것 같아요.
생각해서 시작했어요.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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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그런데 회사 영향이 컸던 부분이,
B | ‘떡담회’는 그걸 가장 편하게
J | 저는 형태로 따지자면 출판사보다
모인 사람들의 직무가 각각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의
유연한 조직이 있을 수 있겠다고
다르다 보니 일을 진행하면서
모임이에요. 섹스에 대한 관점도
생각해요. 예를 들어 저희가 콘돔에
분담이 굉장히 자연스럽게
예전과 다르고 더 좋은 섹스를 만들
관련된 컨텐츠를 기획 중인데 그
이뤄지더라고요.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얘길 하다 보면 새로운 컨텐츠로
되었죠.
생각이 이어지기도 하고 상품에
O | 첫 ‘떡담회’ 주제는 뭐였나요? B | ‘성욕 차로 인한 이별’이 메인
이슈였어요. 성욕이란 게 무엇인지 얘기도 했고요. 그때부터 잡지로 만들자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어요. 구체적인 계획이라기보다는 우리 컨셉이 재밌으니까 하면 좋겠다 하면서 초반에 얘기가 되었죠. O | 본업이 있는 상태에서 이렇게
품이 많이 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해야겠다는 의지가 어디서 나왔을까요? J | 이 일은 '해야 된다'는 일보다는
'하고 싶은' 일에 가까운 것 같아서, 회사 일이 힘들 때도 ‘아 빨리 떡담회 하고싶다’ 하는 식으로 도피처가 되어 줘요. 재밌는 주제이고 이 얘기를 통해 서로 치유되는 것도 있고요. 얘기를 계속해도 새로운 것이 나오고, 그 이야기들이 쌓이니까 빨리 모아서 뭔가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도 들고요. O | 이 일에서 생긴 에너지가 많은
도움을 주는 것 같네요. Y | 저 같은 경우 예전에는 섹스는 그냥
O | ‘방앗간’은 앞으로 어떤 형태의
J | 대한 아이디어도 많이 나오거든요.
커뮤니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좋은 성생활 문화와 그것을
생각하시나요?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을
B | 각자가 바라는 것이 조금씩 다
제공할 수 있는 회사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사귀면 하는 것, 하면 좋고 안 해도
다르기 때문에 제 개인적으로는
좋고 그런 거였는데 이제 연애에서
‘기회를 주는 출판사’가 되었으면
내가 어떤 섹스를 하기를 원하는지
좋겠어요. 저희 얘기만 다루는
방식이잖아요. 저희는 그거보다,
구체적으로 생각한다거나 어떤
출판사가 아니라 출판을 하기
어떤 관계를 내가 맺었고 어떤
이상적인 상 같은 것도 생긴 것
위한 과정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부분이 좋았는지 명확하게 알고
같아요.
성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자리를
싫은 게 있었으면 반복되지 않도록
많이 마련해, 일상에서 성에 대한
알아차릴 수 있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얘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식으로
생각해요. 감정들이 응축된 짧은
발전시키는 거죠.
시간이라, 그런 것들을 풀어내는
B | 저는 ‘딴짓’으로서의 매력도 느끼고
있고 제가 워낙 이런 주제를 좋아하거든요. 평소에도 이런 얘기를 너무 많이 하고 다니는데
청년업
Y | 음담패설은 상대를 소비하는
경험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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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 지금 이 일이 회사 다니는 것만큼
수익이 된다면 본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B | 그렇죠. 저희가 이상한 짓을
많이 하긴 하는데 현실적인 사람들이기도 해요. 아까 ‘떡책’이나 여러 아이디어들이 실험을 통해 검증이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죠. ‘청년업’에 지원한 것도 그런 실험을 위해서였어요. 저는 돈을 벌기 위한 업과 하고 싶은 업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긴 해요. 사람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이런저런 일들을 해 왔지만 그게 제 욕구를 명확히 충족시킨 적은 없었거든요. 그래서 본업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의 30% 정도를 충족하고, 그 외에 안정적인 것들을 취하면서 부업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맞지 않나 생각하고 있어요. Y | 저는 일과 생활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일 자체로 삶을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일을 하다 보니 남의 일을 하는 거라, 제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하는 작업도 생기거든요. 그래서 일 말고도 내가 재밌게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하나 정도 있으면 좋지 않을까 싶었죠. 지금은 ‘방앗간’의 일이 그래요. J | 저도 회사 다니면서 고민을 많이
했는데, 하고 싶어서 하는 일과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을 명확히 분리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직업인으로서 전문성을 가지려면 그 방식에서는 한계가 보이더라고요. 저는 그 두 가지 일의 경계선에서 애쓰고 있다고 보는게 맞을 것 같아요.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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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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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VEY.
방앗간 Q. 당신에게 업(직업)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A. 업은 나의 생계를 유지해 주는 수단인 동시에 내가 이 사회에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Q. 어린 시절의 꿈은(직업으로서) 무엇이었나요? A. 가수, 소방관, 경찰, 선생님, 의사, 대통령 등 쉽게 접하고 듣는 직업이였습니다.
Q. 현재의 일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에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작고 무의미해 보였던 나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크고 의미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Q. 직업 실험에 꼭 하나 필요한 요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일 수도 공간일 수도 자금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사람입니다. 각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이야기와 가치관, 그리고 경험이 모여 풍요롭게 만듭니다.
Q. 직업 실험을 통해 실제로 자신의 직업으로서 현재의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월급을 책정한다면 얼마입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A. 월급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콘텐츠를 기획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더 많은 자금이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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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성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5년 후의 본인을 상상한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A. 새로운 성 콘텐츠 선도자 및 기획자로서 인정받을 것 같습니다. 부끄럽거나 기회가 없었거나 몰랐거나 하는 다양한 이유로 공유하기 어려웠던 성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다양하고 더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장렬하게 실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직업 실험의 경험이 남았습니다. 실패의 경험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A. 실패는 또 다른 성공의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실패한 원인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롭게 도전하는 원동력이 될 것 같습니다.
Q.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 본인의 작업에 새롭게 도전하고자 하는 청년에게 해주고 싶은 말, 혹은 조언이 있다면? A.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나면 이미 당신은 반은 성공한 것입니다. 혹시 당신의 도전이 기대한 바와 다르게 흘러가거나 실패하여도 당신 다음의 도전자의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이기에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세요.
Q. 본인이 청년업을 통해 경험한 ‘업’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면, 당신의 직업은 어떤 명칭을 갖게 될까요? 자유롭게 직업의 명칭을 상상해 주세요. (여러 개를 작성해 주셔도 좋습니다.) A. 방앗간 조작단, 섹슈얼 컬쳐 메이커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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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붐
여성주의 자기방어 훈련을 가르치는 강사로서 성장하고 있는 ‘붐’입니다. 저희 팀은 이신율, 정진아, 이경은 세 명의 여성주의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신율은 한국에서 시도된 여성주의 자기방어 훈련에 2006년부터 참여하였고 현재 강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정진아는 오랫동안 태권도를 수련해서 현재 사범 자격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경은은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하였고 여성 청년에 관한 연구를 하였습니다.
이경은
여성주의 자기방어 훈련 워크숍을 기획하고 실행하기 위한
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여성주의 자기방어 훈련이란, 여성들이 살아오면서 몸과 마음에 익히게 된 ‘여성적’인 태도가 위협적인 상황에서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도록 하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여기에서 벗어나 다른 방식의 행동과 대응을 함께 훈련하는 과정입니다.
세미나를 통해 여성주의 자기방어에 대한 여러 관점의 텍스트를 접하고 정리하여 저희의 관점을 세우고, 또한 국내외에서 진행되고 있는 자기방어 프로그램을 직접 이수하면서 연구와 비교를 통해 저희의 방향성을 정립하고 또 각자의 역량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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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붐의 연대기
마음먹기의 시작
프로젝트의 시작
‘붐’ 때문에 마음먹었다고 봐야죠. ‘청년업’에 지원하기
여성주의 자기방어 훈련의 시작은 아마 2018년으로
위해서요. 그 전엔 막연하게 언젠가 어떤 작업을 할 수도
잡아야 할 것 같네요.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었다면, 이 사업에 지원한 것이 고민의 강도나 이 일이 업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질문들을 시작하게 만든 지점인 것 같아요. 2019년 2월이었을 거예요.
만남 이것도 ‘청년업’ 지원하면서예요. 저랑 진아가 그때 처음 만났어요. 신율과는 2010년에 만났고요. 대학생 때 제가 총여학생회 선거를 나갔었어요. 그때 저는 후보자였고 신율은 선본원이었어요.
위기 지금이 제일 힘든 것 같은데… ‘청년업’에서 활동하다 보니 저희가 서로 어느 정도의 에너지를 투여하고 어떤 정도의 집중력을 가지고 갈 것인가에 대한 감각이 서로 좀 달랐던 것 같아요. 이걸 맞춰나가는 일에 대해 지금 고민하는 중이에요. 또 저 같은 경우는 너무 잘 모르고 이 일을 시작하게 돼서, 이제 와서야 '내가 쫓아가지 못하고 있었구나' 하는 느낌을 받기도 하고요.
극복 지금까지 역할에 있어서 서로 간의 이해가 미흡했던 거니까
그럴 때 또 결국은 여성주의에 의지해서 다시 신뢰를 만들어
대화도 하고 서로 간의 기대를 조금 조정해야겠죠. 여성주의
나갈 수밖에 없고요.저희 팀도 여성주의의 언어를 공유하는
사업을 하고 싶은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 깨짐’을 경험하게
사람들로서, 이 언어는 개인의 경험을 넘어서는 언어이기
될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여성주의가 늘 힘을 주기만 하는
때문에 그 안에서 어떤 공감과 이해를 찾아낼 수
건 아니고, 날카로운 언어이기도 하기 때문에 자신을 향하게
있지 않을까, 모두가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아요.
되는 경우가 있다고 믿어요.
현재 미운 다섯 살인 것 같아요. 소통에 대한 기대가 생기는 때인 것 같아서요. 하지만 잘 되지 않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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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 공격을 여성들이 효과적으로
방어하는 방법을 몸으로 배우는 일이고, 그것과 여성주의 자기방어 훈련이 크게 다르지는 않아요. 여성들이 왜 성폭력을 당하게 되고, 방어하는 게 왜 그리 어렵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것을 방어할 수 있는 것인가? 혹은 이게 정말 개인이 수련을 해야 되는 문제인가? 이런 질문들에서 시작해서 여성주의의 관점에서 우리가 여성으로서 겪어온 경험들을 얘기하고, 문제 제기하고, 어떻게 경험과 인식 또는 몸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배우는 거죠. 그래서 이 워크샵을 하면 자신의 삶의 경험에 대해 얘기를 많이 나누게 돼요. 그리고 내가 어떤 O |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L | 저는 이경은이라고 하고, 여성주의
L | 강사 양성 과정에 들어가게 됐어요.
그리고 같이 예방 교육 강사로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 얘기하고
활동했죠.
어떨 때에 몸을 자유롭게 쓸
자기방어 훈련 워크샵을 개발 중인 ‘붐’ 팀의 멤버입니다. 저희 팀은 신율, 정진아, 저 이렇게 셋으로 구성돼 있어요. 대표인
침해의 경험과 무력감, 신체의
O | 그 친구분 덕분에 관심이
생긴 걸까요?
수 있고 그것을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와 같은 이야기들을 많이 나누죠. 신체를 방어하는 것도 물론
L | 저는 대학원에서 여성학 공부를
중요한 프로그램이에요. 타격을
신율은 2006년부터 ‘한국 성폭력
했고, 그저께 졸업했어요. 논문도
하거나, 걷어차고 도망간다거나
상담소’에서 진행하는 여성주의
여성 청년들에 대해서 썼고요.
하는 훈련들을 하게 되는데,
자기방어 훈련 프로그램에 꾸준히
주제는 농촌에서 활동하는 여성
이것들을 실전에서 사용 가능할
참여해 왔어요. 저는 친구였기
청년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수 있는 수준까지 훈련하는 것이
때문에 얘기도 많이 들었고 참
그 과정에서 6개월간 농촌에서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좋다고 생각했지만 저도 언어에
‘필드워크’하면서 살기도 했어요.
해도 훈련을 받는 과정에서 ‘내가
갇혀 있는 사람이라, 몸으로 뭔가
충남 금산이었습니다. 거기서
이런 걸 할 수 있구나’ 하는 감각을
하는 것이 제 일이 될 거라고
페미니즘 동아리도 운영했는데
주는 게 만족감을 줘요. 저도 한 번
상상하지 못했거든요.그런데
그 친구들이 자기방어 훈련을 해
배웠을 뿐이지만 밤거리에 대한
신율이 자기방어 훈련을 재밌게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의 감각이 바뀐 걸 느꼈거든요.
했다가 잊어버리고, 직장 생활하고
신율을 불러서 한 워크샵이 이
그런 좋다는 느낌만 가지고 있다가
살다가 어느 날 “내가 이걸 일로
팀이 처음으로 함께 하게 됐던
저랑 진아가 세미나를 시작하게
해 보고 싶다” 이런 이야기를 제게
프로젝트에요.
되었고, 책도 읽고 하면서 어떤
하더라고요. O | 혹시 어떤 직장이었나요? L | 신율이요? 그냥 일반 회사
O | 자기방어 훈련 프로그램에 대해
좀더 소개해 주세요 L | 자기방어 훈련이라고 할 수 있는 건
관점에서 이 프로젝트를 진행할지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O | 세 분의 공통 관심사가 자연스럽게
다녔어요. 그러다가 저희가 비슷한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호신술이라고
모인 거군요.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시기에 우연히 ‘양성 평등 교육
말하는 게 대표적일 거예요.
공부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진흥원’이란 곳에서 성폭력 예방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86
L | 정확히는 여성학은 아니고 문화
O | 그럼 여기 안 계시지만 정진아 님도
인류학을 전공했는데 그중에서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신
여성학과 관련된 젠더 스터디를
건가요?
했어요. 물론 여성학을 배우고 싶어서 간 것은 맞고요. 처음으로 이 분야를 공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은 대학생 때 여성주의자 교수님의 수업을 들으면서 갖게 되었어요.여성주의를 통해 세상을 보는 관점이 바뀔 수 있고, 그랬을 때 내가 갖게 되는 힘이 달라진다 하는 것을 배웠었죠. O | 여성주의 자기방어 훈련은, 석사
졸업도 했고 자유인의 상태에서 업으로 삼기 위해 접근하신 건지? L | 성폭력 예방 교육을 계속 하고
싶었는데 한계를 많이 느꼈어요. 사실 이 교육은 ‘가해를 하지 말아라’라는 메시지 를 주는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런 일이 가해이고, 하면 안된다, 조직이 그걸 막으려면 이렇게 변화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사실 가해를 할 만한 사람들은 그 얘길 안 듣거든요. 지금은 초보지만 앞으로 그런 것들을 겪으면서 소진된다는 느낌이 커질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 이야기를 가장 열심히 듣는 건 피해자들이고 교육이 정말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는 또 아닌 괴리가 있는 거죠. 그래서 그들을 위한 이야기도 내가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기방어 훈련이라는 걸 같이 해 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받게 됐어요. O | 신율 님의 제안이었던 거죠?? L | 네. 꼭 같이 하는 게 아니더라도
제가 강의를 계속한다고 했을 때 분명 성폭력 예방이라는 것에 포함되는 내용이기도 하잖아요.
L | 진아는 원래 신율 친구였는데
O | 지금은 그 혼란이 조금 정리가
되었나요? L | 지금이 최고인 것 같고요. 그래도
그 중에 가장 좋은 부분은 가르치는
서로 소개를 시켜줘서 만나게
분들을 만나게 되는 일이에요.
됐어요. 진아는 태권도 사범이자
그분들에게서 느껴지는 에너지가
변호사인데, 이 프로젝트를 같이
좋고, 여성이 저런 에너지를 낼 수
하게 된 데엔 태권도 사범이라는
있구나, 다른 여성들에게 전달해 줄
부분이 많이 작용했어요. 몸을
수 있구나 하는 것을 보고 느끼죠.
움직여서 하는 훈련이다 보니 그렇게 몸을 잘 사용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크죠. O | 여성주의 자기방어 훈련은 다른
두 분도 계속 받고 계시죠? L | 맞아요. ‘청년업’을 통해 여러
교육을 받을 수 있잖아요. 기존의 호신술이나 여성 셀프 디펜스를 가르치고 계신 분들이 있는데 국내와 미국의 프로그램을 수강하면서 서로 비교도 해 보고 그렇게 하고 있어요. 그런데 저한테는 단순히 기술을 배우는 것 이상으로 혼란스러웠어요.
O | ‘청년업’에서 이 프로그램을
단단하게 만든 이후에는 어떤 식으로 운영할 계획이세요? L |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우선 강사로
성장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고, 빨리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는 중이에요. O | 많은 경우 그 과정에서 경제적인
안정 등 다른 가치를 포기하게 되더라고요. 혹시 그런 것들이 있을까요? L | 저희의 경우는 포기를 했다기보다
일상에서 내가 겪는 침해에 대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요.
감각이 굉장히 높아졌거든요. 관계를
‘청년업’에서도 이 프로젝트를
어떤 식으로 맺는 것이 나를 지키는
사업화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서
멘토링에서도 ‘다이어트에 접목을
일상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어요.
해 보라’라든지 그런 방향의 제안을
가령, 어떤 연인 관계에서 있는
해 주세요. 물론 그게 나쁘다고
일들에서 이전이라면 그냥 연애의
생각하진 않는데 그 방식으로 이
한 과정이고, 소통이거나 조율해야
팀이 지속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할 부분이라고 생각했을 것도
저희는 그렇게 해서 떼돈을 벌어보자
‘이건 침해인데?’ 하고 느끼게 되는
하면서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지점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참지
아닌 것 같아요.
않게 되고 표현하게 되고 하면서,
만약 저희 멤버들 중에 경영적인
관계를 맺는 과정이 바뀌게 되었죠.
마인드가 있고 그런 사람이 있다면
저에게 되게 큰 힘을 주기도 하지만
시도해 볼 수 있는 부분이었겠지만
동시에 혼란스럽기도 한 일이에요.
현재 상태에선 그렇지 않아요.
이걸 배우는 것이 제게는 ‘내가 어떤 태도를 갖고 어떤 에너지를 뿜는 사람이 되는 것인가’에 대한 것이거든요. 이 과정이 여러 가지를 변화시키는 것 같아요.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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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VEY.
붐
Q. 당신에게 업(직업)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A. 하루를 단단하게 살아가기 위한 노력. 단단한 하루하루가 모여야 삶이 흩어지지 않을 수 있겠죠.
Q. 어린 시절의 꿈은(직업으로서) 무엇이었나요? A. 막연하게 뭔가를 연구하는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과학자를 꽤 오래 꿈꾸었네요.
Q. 현재의 일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에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친구이자 팀원인 신율이 진행하는 강의에 참가했는데, 말로만 듣던 것과는 무척 달랐어요. 실제 제 몸을 이전과는 다르게 사용해 보는 경험이 강렬했고, 세상에 꼭 필요하고 더욱 많아지면 좋을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신율이 같이 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 주었을 때, 저도 할 수 있다면 그런 일을 해 보고 싶다고 느꼈습니다.
Q. 직업 실험에 꼭 하나 필요한 요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일 수도 공간일 수도 자금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저희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이 프로젝트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인데요, 아마도 자금이 시간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 같네요.
Q. 직업 실험을 통해 실제로 자신의 직업으로서 현재의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월급을 책정한다면 얼마입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A. 붐 팀의 멤버로서 자기방어 훈련을 꾸준히 진행할 수 있게 된다면 월 100만 원을 책정하고 싶어요. 제가 한 달을 생활하기 위해 현재 200만 원 정도가 필요한데, 붐이 제 업의 절반 정도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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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성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5년 후의 본인을 상상한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A. 제가 자기방어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무척 의미 있는 일이에요. 현재는 저 역시 침해를 당하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방어해야 할지 충분히 알지 못하니까요. 하지만 5년 동안 여기에 집중하고, 다른 사람들과 워크숍을 하며 함께 성장하는 경험을 지속할 수 있다면 저는 아마 지금보다 훨씬 힘있고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겠죠. 그리고 제가 가지게 된 그런 힘이 다른 여성들에게 의지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청년업을 통해 만난 다른 자기방어 훈련 강사들에게 받은 느낌이 바로 그런 것이었거든요. 나도 저 여성처럼 강해질 수 있고, 변할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얻었어요.
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장렬하게 실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직업 실험의 경험이 남았습니다. 실패의 경험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A. 그냥 결과물이 기대에 차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장렬한 실패를 하게 된다면 그것 역시 무척 특별한 일이죠. 아마 오랫동안 저를 괴롭히고 반복해서 머릿속에서 재생될 거예요. 하지만 삶을 돌아보면, 좋든 나쁘든 그렇게 이정표처럼 자리 잡은 기억들을 통해 제가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 알 수 있고, 그걸 통해서 삶을 보다 현명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 같아요. 실패의 경험은 제가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알려줄 거고, 그걸 통해서 저는 앞으로 어떤 길을 가야 할지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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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VEY.
붐
Q.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 본인의 작업에 새롭게 도전하고자 하는 청년에게 해주고 싶은 말, 혹은 조언이 있다면? A. 여성주의 자기방어 훈련 강사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강의 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일상과 내가 맺는 관계를 폭넓게 성찰하고 재정립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받는 침해뿐 아니라 제가 누군가를 침해하는 것에 대해서도 성찰하게 되는데, 그게 무척 고통스럽고 답을 알기 어려워요. 그러한 과정에서 제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여성주의입니다. 여성주의는 항상 제 편을 들어 주거나 항상 저를 임파워링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스스로를 때리는 채찍이 되고 때로는 저를 찌르는 무기가 되기도 해요. 하지만 그럴 때조차 여성주의가 저에게 힘을 줄 수 있는 이유는 신뢰의 도구가 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스스로를 믿지 못하게 되어 조각이 날 때 그 깨짐을 나와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기회로 삼기 위해서는 자신이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나의 경험을 넘어서는 언어가 꼭 필요해요. 그래서 자기방어 훈련 뿐 아니라 여성주의 관점에서 무엇인가 작업을 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그러한 깨짐의 과정을 맞이할 각오를 하고, 그걸 여성주의적으로 살필 수 있는 힘을 기르기를 조언해 드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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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본인이 청년업을 통해 경험한 ‘업’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면, 당신의 직업은 어떤 명칭을 갖게 될까요? 자유롭게 직업의 명칭을 상상해 주세요. (여러 개를 작성해 주셔도 좋습니다.) A. 여성주의 자기방어 훈련 강사.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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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시바견
국문학도 4명과 공학도 1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시바견'은 시를 발견하고, 시를 바라보는 행위를 보다 발칙하고 유쾌한 방식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를 하는 팀입니다. 시바견 팀은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합리적으로 협업할 수 있는 공동체를 꿈꿉니다. 그 공동체의 중심에 예술을 두고, 창작에 대한 열정을 원동으로 뭉쳐 삶을 예술로 물들일 소소한 프로젝트를 이어가자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향도 취향도 다른 팀원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문학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 사랑을 더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다는 의지로 함께 가치를 발전시켜 가는 중입니다.
서은지
‘우리는 모두 언어라는 기호로 소통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모든
시바견
언어는 일종의 상징이며 따라서 우리의 표현과 소통은 시와 연결되어 있음을 주장합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시를 창작하고 감상하는 것을 동경하는 한편 무척 먼 일로 느끼고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시를 쉽게 접하고 창작하고 공유하는 커뮤니티를 만드는 데 목적을 둡니다. 기존의 시 창작 프로그램이 시적인 사고를 구축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데 반해, 이를 역으로 뒤집어 시적인 언어가 시적인 사고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성 시인들의 시구를 재조합하여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시퍼즐’ 프로그램을 기획하였습니다. 이번 청년업 사업 안에서는 칵테일부터 꼴라주, 꽃갈피, 그리고 테라리움까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재료들 간의 낯선 조합을 시 창작과 연계하여 실험을 진행하였는데, 어울리거나 혹은 어울리지 않는 언어와 재료들의 조합들을 통해 낯설지만 동시에 역설적으로 ‘나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소통하는 장을 구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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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바견의 연대기
마음먹기의 시작
프로젝트의 시작
대학원 졸업하면서요. 2018년이었는데
2018년 9월 정도인 것 같아요. 지금은 아크릴
내가 무슨 일을 해야할지 더 고민하기 시작하면서예요.
인쇄를 해서 퍼즐을 만들고 있는데 그때는 시트지에 막 그려서 했었어요. ‘무중력지대’에서 지원금도 받았었는데, 프로그램을 운영을 위한 지원금 정도였습니다.
만남 2013년도부터 교류하게 됐는데 시작은 스터디였어요. “우리 책이나 좀 같이 읽는 게 어때?” 하면서, 이 친구랑 다른 참여자 3명이 다 책을 읽으니까 저랑 또 다른 2명을 더해서 6명이 모였어요. 그런데 그 스터디 외에도 놀기도 많이 놀았고, 제가 졸업하는 걸 기점으로 졸업 여행까지 갔어요. 졸업식 끝나자마자 캐리어 들고 그대로 진안이란 곳으로 갔는데 그때 같이 간 다섯 명이 지금 다섯 명이에요.
위기 지금인 것 같은데요. 이전까진 일정이 명확하게 일을 하지 않았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사업이 된 거고, 서로 일하는 스타일에 대한 이해를 해 나가는 와중이에요.
극복 저희는 1명의 리더가 없고, 모두가 리더고 대표인데 이게 사실 망하는 지름길이잖아요. 지난 프로젝트에선 제가 95% 정도의 일을 했기 때문에 발언권이 다 비슷하든 어떻든 의견 충돌 이외의 큰 문제는 없었는데 이제 맡겨진 일도 다 비슷한 비중이고, 삐걱삐걱하는 게 있는 거죠. 아직 조율해 나가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청년업
컨텐츠는 좋은데 컨텐츠를 굴려야 하고, 활동도 정돈이 돼야
컨텐츠는 있지만 프로젝트 전체적으로는 준비 단계라는
하고 총대를 멜 사람도 정해야 하고, 문제들이 많아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지금 뒤집기를 막 하는 단계인 것
수익 창출 관련해서도 여기저기 다 쓸 수 있다는 생각에
같아요.
아직 하나를 못 정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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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 소개 부탁드립니다. Y | 저는 유진선이고요. 저희 ‘시바견’
S | 저는 서은지입니다. 현대시
Y | 저는 국문학에 대한 심취보다는
전공생이에요. 저는 시를 읽은
국어를 가르치는 교사가 되기
일이 너무 즐겁고 위로 받는
위해 전공을 선택한 거예요. 국어
팀은 문예 창작과 졸업생 2명,
일인데 보통 사람들은 그렇지
교육과를 갈 수 있었으면 그랬을
국어 국문학과 졸업생 2명과 화학
않다는 것이 마음이 안 좋아서
텐데 거길 떨어지고 국문학과로
공학과, 공대를 졸업한 1명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어요. 왜
오게 되었죠. 결과적으로 더 좋은
구성되어 있는데 모두 문학을
문학을 어렵게 느낄까 고민하다가,
일이었던 것 같아요. 국어 교육과와
사랑하고 문학 언어와 친숙한
공부할 때 주로 접했던 거라 그렇지
국어 국문학과가 전공을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않을까 싶어서 퍼즐이나 놀이처럼
느낌이 서로 많이 다르거든요.
사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또 제가
이 친구의 생각에 많은 동의가
술을 좋아하는데 어떻게 술이랑
있지만 저는 문학을 대단히
관련지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사랑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이
프로젝트를 만들어 가고 있어요.
놀이를 하니까 확실히 재미가
O | 지원서 상에 성함이 안 들어가
있네요? Y | 제가 나중에 추가되었거든요.
학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는데 일이 너무 바빠서 준비는 같이 못 하고 활동을 하는 것부터 같이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O | 두분 다 국어 국문학과예요? 해당
전공을 선택한 이유가 뭔가요? S | 저는 입학할 때 교육 쪽으로
프레젠테이션이나 진행 등 MC를
입학했는데, 학생들보다 성인들과
보는 역할을 제가 하고, 시 읽고
소통하는 게 더 재밌더라고요. 원래
해석하고 함께 얘기하고 하는
책 읽는 걸 좋아하긴 했지만 국문학
활동을 저는 ‘안내견’이라고
수업에 들어갔더니 너무 재미있고
칭하는데 다른 4명이 그 역할을
매일 수업이 기다려져서, ‘이게
해 주죠.
내가 가야 할 길이다’ 싶었고 복수 전공을 하게 됐어요.
있고 허들이 낮아진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사람들이 접근하기에도 좋고, 문학에 애착을 갖지 않은 입장이어도 흥미를 느낄 수 있을 것 같고요. O | 이 프로젝트의 시작점은 언제인가요? S | 작년 겨울에 서울시 ‘무중력 지대’
에서 문화 크리에이터를 모집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게 시의 재미를 알릴 기회라고 생각하게 돼서 그때부터 구상하고 진행했어요. O | 그전에는 같이 활동하진 않았었나요? Y | ‘삼성 투모로우 솔루션’이라는
공모전 1회를 같이 나갔었어요. 2등 상을 탔는데 그 때는 아까 얘기한 중학교 때 친구, 얘, 저, 다른 어떤 저의 친구 4명이 멤버였죠. ‘청년 대회 진로 탐색’이라는 프로젝트였어요. 당시에는 청소년들의 진로 탐색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교육 프로그램들이 있었는데 20대가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부분들에 대한 건 많이 다뤄지지 않았었어요. 그때도 퍼즐을 사용했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일들을 성취도와 만족도 기준으로 배치를 해보는 방식이었죠. 그 퍼즐 조각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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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 | 동아리 활동일 수도 있고
수강했던 과목일 수도 있는, 여태껏 자기가 그려 온 모든 자취를 볼 수 있게끔이요. 문과만 4명이 모여서 이런 걸 기획하고 개발자를 못 찾아서 끝이 났는데, 이 퍼즐로 나온 결과를 가지고 서로 성향이 맞는 사람을 찾아 주고 연락처도 주고 받을 수 있는 네트워크도 만들면 어떨까 하는 구상까지도 있었어요. 이후로도 프로그램을 더 진행해 나가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개발자가 잘 안 찾아지더라고요. 저희 상상을 구현해 주기도 하면서 가치도 맞고 의사소통도 잘 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거의 '친군데 우연히 걔가 개발자였어' 정도 상황이 되어야 맞아떨어지는 일이었거든요.
Y | 있다 보니까 이들이 하는 일은
Y | 그러다 보니 공허하다거나
개발자를 찾는 과정 중에 멤버
늘 창의적이라고 생각했죠. 저는
힘든데 왜 힘든지 모르겠다 싶어
중 1명과 분열이 생겨서 와해가
그것을 돕고 실행하는 조력 역할을
도움을 구하고, ‘말하는 대로’ 같은
일어났고, 그 1명이 저작권을
하는 쪽으로 역할을 잡고 있었고요.
프로그램에서 ‘힐링’을 구하기도
주장하면서 분란이 생긴 거였는데
다른 3명보다는 제가 취향 같은
하고요. 그런 식으로 타인에게서
'그냥 너 다 가져라' 하고 다른
게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쪽에 더
‘힐링’을 구하는 상황이 왜 생기는지
3명이 나왔어요.
가깝거든요. 그래서 그 간극을
생각해 보면, 저는 그런 부분은
어떻게 잇고 전달하면 좋을까 하는
예술적인 영감을 받아서 자기
고민을 갖고 있어요.
자신을 성찰하고 끄집어 내 봐야
O | 문화컨텐츠를 기획하는 일을
처음부터 업으로 진행한 게 아니라 재미를 주로 시작한 일
O | 문학에 심취해서 국문을
같은데 왜 같이 하게 되었다고
전공했다가 지금 관심사가 문화
생각하시나요?
기획의 방향으로 이동하는 과정으로 보이는데 이유가
S | 정말 재밌어서 시작했던 거라
많은 고민을 하진 않았는데, 되짚어 보니까 각자 목적은 조금씩
뭘까요? Y | 이 친구를 옆에서 보면 문학을
무언가 채워지는 느낌을 받는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문화를 향유해야 한다고 느끼고요. 사람들이 저희 팀 활동을 와서 해 보면 꼭 문학에 조예가 없어도 많이들 재밌다고 해요. 시 조각들이 워낙 좋은 시구로 만들어져 있어서
다르지만 세상에 바꾸고 싶은
향유하는 걸 즐기는 사람이에요.
다 붙이고 나면 그럴듯하기도
부분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어떤 '향유'라는 활동을 하는 것의
하고 내가 말하고 싶었던 감성을
저 자신에 대한 탐색과 시에 대한
허들이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낮지
이 언어가 해 준다는 느낌을 받을
애정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않은 것 같아요. 전시회도 그렇고,
거예요. 그런데 사실 그 조각들은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굉장히 여유있어야 하는 활동처럼
원래의 시 맥락에선 전혀 다른
느껴져서요. 인스타그램 꾸미려고
말들이었을 거고, 자신의 맥락으로
카테고리가 정확하지 않은 채로
사진 찍어서 올려놓고 하는 방식
가지고 왔으니까 본인 스스로가
시작했어요. 저의 경우엔 4명이
말고, 정말 자기 것으로 만드는
뭔가 멋진 걸 만들었다는 것도
모인다는 것만으로 좋았고 이
시간을 갖는 것을 사람들이
되는 거죠.
사람들이 하는 일에 대한 신뢰가
못 하는 거죠.
Y | 첫 작업을 할 때는 시, 술, 이런
청년업
95
Y | 활동을 돕는 여러 요소들도 있는데,
Y | 맞아요. 저희도 진출로가 그쪽인
S | 그 친구는 유튜브 영상 만드는
내부에서는 익명성을 중요하게
것 같다는 생각은 하는데 아직 직접
회사에서도 일하고 출판 기획 쪽
생각해서 필명으로 부르도록
해 보기 전에 바깥에서 바라보기엔
일도 하고, 다양한 경험을
하고, 친구라는 얘기를 미리 들은
크게 감흥이 없는 것 같아요.
한 사람입니다.
참여자들은 좀 찢어놓기도 하고
우선은 자산이나 네트워크가 아직
그래요. 친구에게 못할 얘기를
없다 보니까 그런 쪽의 침투는
합리적으로 협업할 수 있는
남한테는 할 수 있는 경우도
되지 않고 있어요.
공동체를 꿈꾼다’는 내용을
있잖아요. O | 기획서를 보니 굉장히
다양한 곳에서 쓰일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학교에도 갈 수 있고 기업에서도 활용될 수 있을 것 같은데…
O | 지금 오신 두 분 제외한 다른
3명은 본업이 있으신가요? S | 한 친구는 인천문화재단에서
O | 지원서 상에서 ‘개성을 존중하면서
봤어요. 이 일을 직업으로 발전시킬 의지도 있으신 건지? Y | 아직 팀이 생긴 지 1년이 안 돼서
문화 기획 일을 하고 있는데,
의사소통이나 협업 과정은
결과적으로 이 일을 하고 싶어서
만들어 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배우려고 들어간 거예요.
그 공대 졸업한 친구는 지금
또 다른 친구는 회사에 들어갔는데
반도체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곳도 창의적인 일을 하는 곳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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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 | 이 프로젝트가 빨리 돈이 돼서
하루라도 일찍 퇴사하고 싶다는 얘기를 하고 있어요. O | 이게 사업이 되려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요? S | 특허도 내야 하고요. 그런데
특허는 아이디어만 가지고는 받을 수 없고, 프로그램을 증명하는 물질적인 제품이 필요하더라고요.
O | ‘청년업’ 사업을 통해 도움을 받은
부분도 있을까요? Y | 멘토링 받을 때, 프로그램 자체는
좋은데 팀을 어떻게 할지 논의를 해보는 게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팀 빌딩이 아직 진행 중인 게 보인다고, 이런 건 정말 중요한 부분이고 이렇게 조언 받을 수 있는 건 큰 도움이죠.
약간의 기술이 접목돼야 특허가 가능하다고 해서, ‘청년업’ 활동 이후에 개발자를 찾아 지원해 보려고 해요. 또 저희 공간도 필요하고요.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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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VEY.
시바견 Q. 당신에게 업(직업)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A.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사람마다 모두 다르며, 직업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도 매일 신도림 역을 지나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할 것이다. 그럼에도 공통적인 것은 우리가 살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친구와의 만남도, 전시회장도, 여행지도 아닌 직업 현장이라는 사실이다. 시바견 팀은 ‘나'를 구성하는 것은 내가 경험한 것과 내가 보낸 시간들의 누적에서 온다고 믿는다. 따라서 시바견 팀에게 직업이란 우리가 삶에서 가장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일이자 내가 즐거울 수 있는 일로서 의미를 가진다. 처음 프로젝트를 시작한 계기 역시, 문학을 하나의 놀이처럼 즐기며 이 과정에서 얻는 위로와 즐거움을 보다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의지였으므로 앞으로도 시바견 팀이 우리의 프로그램을 직업으로 구현해 나가는 동력은 ’즐거움‘에서 비롯될 것이다.
Q. 어린 시절의 꿈은(직업으로서) 무엇이었나요? A. 누구나 그렇듯 시바견 팀에게도 어린 시절의 장래 희망은 두 가지로 분류된다. 생활 기록부 기록용 꿈과 마음 속에 품은 꿈. 앞의 것이 사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그럴듯한 지위와 부를 동반한 직업인 반면, 마음 속 꿈은 그와는 대칭점에 있었다. 예컨대 시바견 팀의 일원인 ‘반‘은 어린 시절에 사진 작가가 되고 싶었다. 스스로가 느끼는 아름다운 순간의 감각을 기록해 둘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은 지금 사진 작가가 되지는 않았지만 생각해 보면 순간과 감각을 자기만의 방식대로 기록한다는 점에서 사진이 시와 무척 닮아 있다고 느낀다.(그리고 실제로 ’반‘은 사진을 무척 잘 찍어서 팀 내에서 촬영을 도맡고 있다.)
Q. 현재의 일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에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시는 시험을 위해 공부해야 하는 영역이었거나 혹은 자신의 방에서 조용히 골몰하며 감상하는 대상이었을 것이다. 언어 영역 시험에서 19번 문제로 마주하는 시는 답이 정해져 있고 알 수 없는 옛말로 쓰여져 있으며, 혼자 읽는 시는 어딘가 난해하고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는 경우가 많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시를 접하기 때문에 시가 어렵다는 고정 관념을 품고 관심을 끊게 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한 번쯤 나의 괴로움을 일기에 적어 본 적이 있고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를 써 본 적이 있다. 시바견팀은 전자와 후자가 모두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과서를 통해 배운 시가 문학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끼리만 알고 낄낄거리는 시시한 농담이나 설거지를 하며 흥얼거리는 애창곡의 가사도 시일 수 있음을 알려주고 싶었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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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그래서 우리는 시를 보다 재미있고 익숙한 방식으로 소개할 방식을 골몰했고, 그 과정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시퍼즐’과 다른 생활 예술 활동의 연계였다. 낯선 언어를 조합하여 시를 만들고 서로 다른 활동을 엮어 창작을 행하며, 문학에 대한 사람들의 인상을 새롭게 구축하는 것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시퍼즐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참가자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피드백은 ‘처음 보는 시구가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바를 나보다 잘 표현해 준다’는 거였다. 시퍼즐은 가족이나 친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지 못하는 내밀한 감정과 느낌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털어놓게 만드는 마법 같은 힘을 가졌다. 언어는 사람 사이의 소통을 전제로 하여 탄생하고 이를 경유하여 계속 형태를 바꿔 나간다. 우리는 시를 쉽게 즐기는 방식을 나누려고 출발했지만 실제로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그와 더불어 시를 통한 깊은 상호 작용과 서로에 대해 이해와 공감을 나누는 경험을 하였다. 언어와 문학을 매개로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 경험은 우리에게 큰 힘인 동시에 재미가 되었다.
Q. 직업 실험에 꼭 하나 필요한 요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일 수도 공간일 수도 자금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A. 공간. 아직은 시바견팀의 프로그램이 직업보다는 프로젝트에 가깝기 때문에 시바견 팀의 팀원들은 다른 본업을 수행하며 동시에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다. 우리만의 공간이 따로 마련되지 않았으므로 프로그램에 필요한 도구도 각자의 집에 분산되어 있으며, 타인의 개성이 묻은 공간에서 작업하는 것도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진다. 우리 프로젝트의 핵심인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원하는 분위기를 구현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상시적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들으러 올 사람이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 절실하다.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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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VEY.
시바견 Q. 직업 실험을 통해 실제로 자신의 직업으로서 현재의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월급을 책정한다면 얼마입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A. 얼마 전 기사에 따르면 시인의 평균 연봉은 1000만 원이라고 한다. 시바견 팀은 시가 어렵다는 대중의 고정 관념을 깨고 ‘문학 놀이’를 통해 이를 문학적으로, 또 상업적으로 보편화하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작업이 직업으로 이어질 경우, 그 월급은 대기업 신입사원의 초봉 정도를 목표로 하고 싶다. 사실 직업 실험 중에는 예산 안에서 실험을 이어 나가는 데 급급했기 때문에, 직업 실험이 종료되고 시바견 팀의 자체 예산으로 작업을 이어 나가기 시작할 때는 보다 면밀한 수익 구조에 대한 계산과 방안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대기업 신입 사원 초봉이라는 목표는 현재까지는 상징적인 금액인데, 시를 콘텐츠로 한 예술 활동을 하면서도 안정된 삶을 살고 싶다는 목표를 담고 있다. 시바견 팀은 우리의 작업이 결코 한 번의 도전이나 단순히 취지에만 의의를 둔 즐거운 무보수 활동으로 남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시인은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하며 일반적인 삶과 멀리 동떨어져 그들만의 이상적인 세계에 머물러야 한다는 사회적 고정 관념을 거부하고, 재미있는 것이 현실적 가치로 이어질 수 있다는 또 하나의 사회적 목표를 이루고 싶다.
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성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5년 후의 본인을 상상한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A. 시바견 팀은 5년 후, ‘문학’ 장르를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 예술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전용 공간을 소유하여 그곳에서 자유롭게 프로그램은 운영하는 것을 꿈꾼다. 이번 지원 사업을 통해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것 중 하나가 바로 ‘공간’의 중요성이었다. 이번에는 <지구와 사람>이라는 단체를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했기 때문에 그 단체가 소유한 공간을 대여할 수 있었는데, 언제든 마음이 맞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고 프로그램에 사용되는 재료들을 보관할 수 있는 그들만의 공간이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때문에 현재로서는 시바견 팀원 각자가 공간 마련을 위해 노력하면서, 우리에게 적합한 공간에 대한 많은 연구와 조사를 이어 나가고자 한다. 우리의 프로그램을 계속 계발해 나가는 한편, 다양한 독립 서점 및 문화 예술 교육 공간을 탐방하고 또 기회가 된다면 공간을 지원해 주는 사업에 참여하여 공간 소유의 장단점을 면밀히 파악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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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장렬하게 실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직업 실험의 경험이 남았습니다. 실패의 경험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A. 만약 시바견 팀의 직업 실험이 실패한다면, 이는 다음 작업의 성공을 위한 밑거름으로서 의미를 가질 거라고 생각한다. 시바견 팀의 구성원 5명은 각자 개성이 매우 강한데 그럼에도 공통적인 것은, 문학을 매우 사랑하며 문학을 활용한 문화 예술 콘텐츠에 대한 아이디어와 실현 욕구가 풍부하다는 것이다. 시바견 팀이 시퍼즐 프로그램을 기획 및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오직 우리의 아이디어와 개성을 구현해 보자는 팀 스스로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각자 직장 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퇴근 후 시간과 주말을 활용하여 사업을 진행한 것은 마치 예술가가 창작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시바견 팀원들이 스스로의 역량을 바탕으로 실험에 도전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인 것 같다. 때문에 이번 실험에 실패하더라도 시바견 팀은 이 과정에서 깨달은 것을 활용하여 다시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찾아 실험을 계속해 나갈 것 같다.
Q.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 본인의 작업에 새롭게 도전하고자 하는 청년에게 해주고 싶은 말, 혹은 조언이 있다면? A. 문학을 콘텐츠로 다양한 문화 예술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 및 운영하고자 하는 청년이 있다면, '더 발칙하게 더 감성적으로' 사람들에게 문학의 매력을 알리자고 말하고 싶다. 문학은 심오하고 난해하고, 재주 있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뿌리 깊은 통념을 부수고, 더 사소하고 개인적인 것들을 더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표현하는 문학 놀이를 함께하자고 이야기하고 싶다. 아직은 이러한 시도가 적은 상황이기 때문에 함께 힘을 모으고 아이디어를 모아 각자의 영역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결의 활동을 연대하자고 전하고 싶다.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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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VEY.
시바견 Q. 본인이 청년업을 통해 경험한 ‘업’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면, 당신의 직업은 어떤 명칭을 갖게 될까요? 자유롭게 직업의 명칭을 상상해 주세요. (여러 개를 작성해 주셔도 좋습니다.) A. 이번 실험 과정에서 시바견 팀이 진행한 프로그램 이름인 ‘시로 시작하거나, 시로 끝나거나’를 시바견 팀의 직업명으로 정하고 싶다. 청년업을 통해 시바견 팀은 총 4주차의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는데, 시퍼즐을 조합하여 나만의 시를 창작하는 것을 기본으로 매주 새로운 장르의 예술 활동을 그와 연계하여 진행하였다. 꼴라주, 꽃 책갈피, 테라리움, 칵테일 등 다양한 생활 예술을 시퍼즐과 '연계'함으로써, 이 과정에서 참가자들이 자연스럽게 우리 생활의 많은 것들에 '시적인 요소'가 깃들어 있음을 느끼게 하였다. 시퍼즐 프로그램의 특징 중 하나는 어떠한 사유를 바탕으로 그에 걸맞은 표현을 구현하는 기존의 시쓰기 방식과 반대로, 주어진 표현으로부터 나와 타인, 세계에 깃든 사유를 발견하는 것에 있다. 그 어떤 것도 시로 시작할 수 있고 그 어떤 것도 시로 마무리 될 수 있다는 것. 표현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우리는 언제나 시 안에 살고 있다는 것. '시'는 '발견'의 대상이라는 것. 시바견 팀이 시퍼즐 프로그램을 통해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므로 우리의 프로그램명인 '시로 시작하거나, 시로 끝나거나'를 하나의 직업으로 정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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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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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문화 예술 좋아하는 청년들이 모인 청년 문화 단체 '아야어여' 입니다. 자음을 뒷받침하는
아야어여
'모음(母音)'의 의미처럼, 사회 문제 또는 소외된 문화를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해결하고 뒷받침하는 단체가 되고자 합니다.
장화신
법과 제도로 해결하지 못하는 사회적 이슈ㆍ문제를 이색 대회로
아야어여
풀어보자는 미션을 가지고 2018 밥상 뒤집기 대회를 진행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밥상 뒤집는 행위가 가부장제의 부정적인 전유물이었지만 이러한 금기에 도전하고 현대 사회에서 겪는 스트레스를 이색적으로 풀어 보자는 의미에서 자부담으로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대회 진행 직후 언론 매체와 SNS를 통해 많은 대중들에게 주목을 받았습니다. 밥상 뒤집기 대회가 대외적으로 많이 알려지자 다양한 기관 및 단체에서 밥상 뒤집기 대회를 찾아 주고 다양한 기회와 예산이 창출되었습니다. 자부담으로 진행했던 이색 대회가 다양한 기회로 이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이색 대회 전문가라는 업을 지속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었고 작년에 진행하였던 '붕붕카 경주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을 계기로 청년업에 지원하게 되었지만, 행정상 문제로 '안경 쓰고 라면 먹기 대회'로 변경하여 준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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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야어여의 연대기
마음먹기의 시작 2018년 1월이에요. ‘작은따옴표’에서의 4년을 정리하면서 그들과 다른 저만의 방향이 생겼거든요. ‘작은따옴표’는 이제 공간 위주로 운영을 하게 되었고 저는 프로젝트 위주로 활동해 보고 싶었어요. 지금의 제 목표는 관악구에 예술가들이 ‘존버’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드는 것입니다.
프로젝트의 시작 1월에 결심하고 1월 31일에 ‘비영리 단체증’을
충당했죠. 처음부터 '나는 정기적인 급여를 줄 수
만들고 2월부터 동료를 모으면서, 그렇게
없지만 프로젝트를 따면 하나씩 맡겨서 거기서
2~4월까지 공모 사업들에 지원하면서 시작됐죠.
발생하는 수익을 가져가라'고 얘기하고 모은
근데 다 떨어졌어요. 그래서 우선, 4년 동안
사람들이라, 그 이후로는 프로젝트가 하나씩 생겨서
‘작은따옴표’ 하면서 제가 1000만 원 정도를 모아
한 사람씩 맡길 수 있게 됐어요.
놨었는데 그걸로 동료들 밥 먹이고 제 생활비도
만남
위기
제 SNS를 통해서요.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연말이 가장 위기인 것 같아요. 첫째로, 1년이 끝나는 날이다
원래 알던 사람들이 많은 편이었어요. 4년간
보니 느낌상 동료들도 자연스레 고민하게 되는 듯해요.
활동하면서 만났던 3000명의 청년들 중에서
내년에도 이어갈지 말지에 대해서요. 그래서인지 많이들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처음 지원은
떠나요. ‘작은따옴표’ 때도 매년 10명씩 운영진이 있었는데 해가
약 20명 가까이 했는데 그중 10명만 뽑아서
바뀌면 1~2명 남고 다들 그만두었어요. 물론 완전히 떠나는
같이 시작했어요.
건 아니고 크루로 남긴 하지만요. 올해 ‘아야어여’의 운영진도 다들 떠나거나 크루로 남고, 저랑 다른 1명이 남았어요. 2명이 2019년을 시작하는데 다행히 다시 4명이 늘었죠.
극복 그 1명의 친구가 남아 줘서예요. 그 친구 안 남았으면 저도 안 했을 것 같아요. 내가 대표로서 1년 동안 그렇게 못했나 생각도 했어요. 너무 감사하죠. 이 친구는 기획과 운영 모두 다 해요. 원래는 서툴었는데 그 친구뿐만 아니라 모두 문화 기획 경험이 없다 보니까, 다들 서로 답답해하다가 이제 1년이 지나니까 든든하게 ‘다 큰’ 거죠.
현재
청년업
초등학교 입학하는 정도예요. 이제 정말 본격적으로
그렇지만 내년엔 예비 스타트업의 느낌으로 접근할 거고
시작하는 느낌이죠. 어느 정도는 이렇게 설계를 했어요. 1년
육성 사업을 꼭 하겠다고 얘기했어요. 이제 육성 사업도
동안은, 우리는 이제 다시 신생 단체니까 동아리처럼 해서
돼서 진행하고 있죠.
이것저것 다 해 보자, 비전이나 미션도 없고 활동하면서 만들어 가는 식으로요.
105
O |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J | 홍대, 합정, 망원, 문래부터
O | 어떻게 활동의 초점이 맞춰지게
점점 관악구까지… 저도 서울에
되었는지 궁금하네요. 전공이
J | 저는 서울시 관악구에서 주로
기회가 많다고 해서 6년 전에
어떻게 되시나요?
활동하는 문화 기획자 장화신
울산에서 올라왔는데, 어디서
입니다. 장화신은 예명이고요. 같이
지낼까 하고 보니까 관악구가
온 서현이라는 친구는 ‘아야어여’의
가장 저렴하더라고요. 그래서 6년
운영진입니다. 저희는 문화 예술을
동안 활동해 오면서 아쉬웠던 것
좋아하는 청년들이 모여서 다양한
중 하나가, 제 주변 예술가들이
활동을 하는 단체입니다. 아직은
엄청 많았는데 지금은 다 없다는
우리가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을
거예요. 대부분 2년 이상 유지하고
더 많이 찾아 보고 싶고 그 수단
버티지 못하는 거죠. 나는 여기서
중에서도 이런 청년 단체 활동이
1년이라도, 조금이라도 더 버티고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해요. 한
싶다, 끝까지 버티고 싶다는
가지 일만 하는 게 아니라, 활동을
생각에, 그러기 위해서 어떤 장치가
하면서 다양한 일을 경험하게
필요할까 고민하고 있어요. 그와
되어서요.
관련한 프로젝트들도 진행하고요.
O | 그럼 ‘청년업’에 신청한 사업은
O | 어떤 프로젝트요?
어떤 건가요? J | 예를 들어 방금 얘기했던 축제 J | 저희가 모인 건 작년 초인데 모여서
같은… 축제를 하나라도 더
1년간 이것저것 다 해 봤어요. 그
하고, 예산을 끌어서 관악구에서
중에 대중들에게 가장 주목받았던
열게 되면 그 축제를 기획하는
프로젝트가 이색 대회였거든요.
사람이 있을 거고, 연출가가 있고,
‘밥상 뒤집기 대회’라는 거였는데,
영상이나 사진을 하는 사람들도
그거 말고도 ‘붕붕카 경주
설 자리가 생겨요. 그리고 관악구에
대회’라든지 이런 것들로 확장해
청소년들도 많이 살고 있는데,
가고 있는 과정이에요. 또 이런
지역에서 마을 공동체 활동을
이색 대회들의 전문가라는 것이
하면서 학교에 찾아가 방과후
과연 직업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수업이나 진로 교육, 컨설팅도
실험도 해 보고 있어요. 다른
맡아서 해 왔어요. 저희가
활동으로는 주로 축제 운영을
작년부터 서울문화재단의 지원
많이 해 왔어요. 마을 축제부터
사업들도 많이 지원했었는데 다
서울시에서 개최하는 축제의
떨어졌었거든요. 그런데 최근에
일부를 맡아 진행하기도 했고요.
오히려 재단 쪽에서 연락이
관악구는 청년 예술인이 많이
와서 ‘청년 예술단’이 매월 부대
밀집되어 있다는 특성을 가지고
프로그램을 체험하는데 그 운영
있어서 관악구 위주로 우선
지원을 맡아 달라고 요청하는
활동하고 있습니다.
거예요. 너무 영광이었죠. MBC
O | 왜 관악구에 청년 예술인들이
밀집되어 있을까요? J | 홍대가 1위, 그 다음이 대학로고
3위가 관악구거든요. 홍대로부터 조금씩 밀려나고 있는 거더라고요.
J | 전공은 디자인인데 대학을
1학년만 다니고 자퇴를 했어요. 꿈이 예술가여서 예술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고 물었더니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라고 하고, 가서 또 물어 봤더니 성적 관리 해서 대학을 잘 가라 하고, 대학을 가서 ‘아 이제 성인이니까 좀 다르겠지’ 하고 교수님께 여쭤 봤더니 성적 관리 잘해서 졸업하고 취업을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이번에는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성인이니까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어요. 그래서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왔는데, 전시하고 싶어서 전시장을 가도, 공연을 하고 싶어서 공연장에 가도 받아 주는 곳이 없었거든요. 단순히 공간을 찾아가면 뭔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공도 없었고 경력도 없었던 거죠.
‘마리텔’ 팀에서도 연락이 와서 이번에 촬영하고 왔어요. O | 활동의 맥락을 보면, 지역을
기반으로 청년 예술가들이 같이 살아남는 방법을 모색하자는 방향성을 가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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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 어떻게 하지 고민하다가, 같이
올라온 4명의 고향 친구들이랑 “이럴 바엔 우리가 공간을 직접 만들자” 해서 관악구에 둥지를 틀었어요. 2년 동안 쓰지 않은 PC방 공간이었는데 보증금이랑 월세를 내고 들어가서 같이 지냈죠. 공간을 꾸미기도 하고 눈 뜰 때부터 눈 감을 때까지 내가 하고 싶었던 예술, 자작곡 만들어서 공연도 열어 보고 전시도 해 보면서 나같은 처지의 사람이 더 많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다 불러서 놀아야지’ 하면서 대관비 같은 거 받는 것도 없이 다 같이 놀았어요. O | 그럼 생계는 어떻게 해결했어요? J | 초반에는 다들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문화 공간이라는 개념이 있었던 게 아니라 그냥 같이 지내는 집이었거든요. 낮에는
J | 정도의 청년들을 만났죠. 그들의
O | 이색 대회와 같은 활동들을 통해
‘니즈’도 알게 되고, 차츰 그런
‘법과 제도로 해결할 수 없는 사회
활동들이 소문이 나 동네의 공무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분들, 교사 분들이 저희를 찾아오게
싶어서 라고요. 이런 사회 문제들
되더라고요. 그러다 정보를 얻어서
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거죠?
첫 지원 사업도 하게 되었어요.
아르바이트하고 저녁에 돌아와 술 먹고 놀면서 4년을 보냈어요.
O | 어떤 사업이었나요?
그러면서 그동안 50개 정도의
J | 관악구 마을 공동체 사업이었어요.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3,000명
100만 원 지원받는 사업이었는데 얼마나 신났었는지… 그 이후로는, 제가 디자인도 할 줄 알고 공연도 할 수 있으니까 외주가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는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되었죠. 그 생활을 4년 동안 쭉 했고, 그때 속한 단체이자 공간의 이름이 ‘작은따옴표’예요. 그리고 현재 대표로 있는 친구가 저와 고향에서 가장 친한 친구입니다. 작년부터는 그 ‘작은따옴표’가 공간 위주로만 활동하겠다고 선언을 했고, 저는 축제나 프로젝트 같은 활발한 일들을 하고 싶어서 나왔죠.
J | ‘작은따옴표’ 활동하는 동안
세월호나 위안부 할머니 분들을 위한 활동들도 진행했었어요. 처음부터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닌데요, 사람들이 많이 모이다 보니 그중에서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고 프로젝트를 하자고 해서 따라서 하다 보니 저도 문제 의식을 느끼게 되었거든요. 높은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것들이기도 한데 왜 우리만 하고 있나 생각했었는데, 우리가 하다 보면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저 또한 관심 없다가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되고 문제 의식도 갖게 된 것처럼요.
O | 지원서상에서는 이색 대회
전문가를 양성하고 싶은 이유를 이렇게 봤어요.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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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 ‘작은따옴표’에서 했던 프로젝트 중
J | 원래 그러면 안 되는 건데도
‘아트래쉬(Artrash)’라는 활동이
'원래 그래'라고 대답할 뻔했네
있었는데, 외국인 친구들이랑 놀던
하면서, 한 번 해결해 보자 생각을
중 길거리에 버려진 쓰레기를 보고
했죠. 저희가 공연을 많이 하니까
그들이 왜 저런거 냐고 묻더라고요.
길거리에서 버스킹을 할 때 팁 박스
담 같은 데도 테이크아웃 잔이 쌓여
대신 쓰레기통 두는 것으로 시작을
있고 그렇잖아요. 저도 가끔씩
했다가 ‘월드 DJ 페스티벌’에까지
올려 두기도 했고, 문제 의식도
‘아트래쉬’ 프로젝트를 도입하게
없었는데 친구들이 ‘왜 그래?’하고
되었어요. 그때 실제로 쓰레기
물어봤을 때 ‘원래 그래’라는 답이
문제가 90% 이상 줄었고요.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답을 내놓기 애매하더라고요.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O | 이 일을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조언을 해줄 것이 있을까요? J |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어려워요.
솔직히 말하면 다 운인 것 같아요. 차이라고 하면 저희는 ‘이런 활동을 가지고 있다’ 하는 것 때문에 연락이 오는 거겠죠. 다만 ‘아트래쉬’, 이색 대회 같은 프로젝트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뻔한 답변일 수도 있지만 머릿속에 있는 것을 추진했다는 그 자체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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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 우선 적든 많든 수익을 창출해
J | 대표가 정말 힘들고 이 기획이라는
보는 것이 목표예요. 목표가 크게
일로 돈을 벌어 동료들 급여도 주고
두 가지인데요. ‘아야어여’에서
한다는 게 정말 어렵구나 하면서
작년하고 올해 이색 대회를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거든요.
진행하면서 어느 정도 시스템이
그러나 여전히 저는 하고 싶은 게
갖춰진 상태예요. 그래서 이건
너무 많아요. 화가도 되고 싶고,
누군가에게 쉽게 가이드를 할
가수도 되고 싶고, 아직 세계
수 있고 다른 청년들이 원한다면
여행도 안 해 봤고… 앞으로 하고
이걸 경험해 볼 수 있도록 만들
싶은 게 너무 많은데, 다 해 봐야죠.
수 있겠다고 생각해요. 우선은 이 이색 대회라는 걸 경험하는 게 이색 대회 전문가의 양성 과정이라고 보고 있어요. 그들이 뭔가 창출해 내는 정도까지 바라는 건 아니고, 이색 대회라는 것의 가치를 좀 알게 됐으면 좋겠고 어떤 궁금증이나 갈증을 해소하게 되길 바라죠. 다른 하나는, 여태까지 이색 대회는 모두 무료로 진행되었는데 이제 티켓팅을 한 번 해 보고 싶어요. ‘댕댕이 페스티벌’이 한강에서 열렸는데 굉장히 잘 됐더라고요. 그 행사도 3 만원 가량의 티켓 비용을 받았었는데 저희도 한 번 그렇게 해 보고 싶어요. O | 당신에게 직업이란 무엇인가요? J | 저는 업을 ‘옷’이라고 생각해요.
문화 기획자 또는 대표라는 일도 작년에 처음 공식적으로 해 봤어요. 시도를 해 본 거죠. 그러면서 ‘이게 내 꿈이야, 난 찾았어’ 이런 느낌이 J | 내 머릿속에 있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지금은 이 옷을 한 번 입어
특별한 것이었다기보다, 언제든지
보고, 실험을 해 보고 싶은 거예요.
누구에게서나 나올 수 있는 건데
해 봐야만 ‘이게 나한테 맞는
그걸 추진하고 실행했느냐 하는
일이구나, 좋아하는 일이구나’ 알
문제고 또 그게 저의 힘으로만
수 있으니까요. 안 맞는다 싶으면
이뤄진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또 벗고 다른 걸 입어 보고요.
저는 동료들과 공동체의 힘을 믿고
O | 지금 입은 옷이 잘 맞나요?
그래서 늘 동료들과 함께 활동을 추진하려 해요.
J | 조금 쪼이네요. ‘작은따옴표’ 할 때,
대표가 정말 친한 친구고 하니까 O | ‘청년업’ 안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 중 이색 대회 전문가 양성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청년업
맨날 욕하고 그랬었어요. 그런데 이제 그 친구를 이해하고 있죠.
109
SURVEY.
아야어여 Q. 당신에게 업(직업)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A. 옷이다. 나에게 맞는 옷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나는 누구인지 모르겠다. 다만, 입어 봐야 알 수 있기 때문에 나에게 어울리는지, 적합한 사이즈인지 입어 보고 있다.
Q. 어린 시절의 꿈은(직업으로서) 무엇이었나요? A. 호기심과 창작 욕구가 강했다. 과학자 > 화가 > 디자이너였다. 우리나라에 '디자인'이라는 말이 처음 들어왔을 때 '응용 미술'이었다고 한다. 과학자와 화가를 섞는다면 얼추 맞다.
Q. 현재의 일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에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음악, 전시 등 플레이어로서 활동으로 하다가, 창작 욕구가 과했는지 더 큰 무대와 기회를 직접 만들고 싶어서 문화 기획자라는 옷을 입어 보았다.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문화 예술 프로젝트로 세상에 선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과 문화를 창조한다는 것은 여태 느껴 보지 못한 창작 욕구의 최고 지점인 것 같다.
Q. 직업 실험에 꼭 하나 필요한 요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일 수도 공간일 수도 자금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자립 구조. 실험 전 활동을 통해 대중들에게 많은 주목과 관심을 받았고 다양한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되었지만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큰 자금이 아니더라도 유지될 수 있는) 기본 자금이 필요했고, 청년업을 통해 자립 구조를 만들 수 있는 실험을 하고 싶었다.
Q. 직업 실험을 통해 실제로 자신의 직업으로서 현재의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월급을 책정한다면 얼마입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A. (대표라는 가정 하에) 100만 원이다. 한 달에 100만 원으로 문제 없이 살아온 지 6년, 대표로서 바라는 건 함께 하는 동료들이 대표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직업 특성상 월급 외 급여가 월급보다 클 것이라 생각한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110
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성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5년 후의 본인을 상상한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A. 성공한들 나에게 맞는 옷인지는 모른다. 1년 하고 나서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이라 생각이 들면 미련 없이 과감하게 옷을 벗고 다른 옷을 입어 보고 싶다. 다만, 그렇다고 대충 하겠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만큼 더 악착같이 하겠다는 뜻이다. 5년 후 나의 모습은, 그 시절에 내가 하고 싶은 가장 설레는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장렬하게 실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직업 실험의 경험이 남았습니다. 실패의 경험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A. 4번, 7번 답에 내용처럼 '예상한' 실패다. 맞지 않은 옷일 수도 있고, 내가 무엇을 잘하고 좋아하는지 조금 더 깊게 알게 되었고 나에게 조금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Q.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 본인의 작업에 새롭게 도전하고자 하는 청년에게 해주고 싶은 말, 혹은 조언이 있다면? A. 10년 전, 5년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다양한 지원들이 매해 확장되고 있다. 내가 하고 싶고 도전하고 싶은 무언가가 생긴다면 주변의 지원들을 적극 활용하자. 성공 또는 실패 등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나를 찾고 나에게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Q. 본인이 청년업을 통해 경험한 ‘업’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면, 당신의 직업은 어떤 명칭을 갖게 될까요? 자유롭게 직업의 명칭을 상상해 주세요. (여러 개를 작성해 주셔도 좋습니다.) A. 기존 '문화 기획자'라는 이름이 있지만 나는 '문화 창조자'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싶다.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 '이색대회 전문가가 업이 될 수 있을까'의 실험 제목처럼 '이색대회 전문가'라는 이름보다는 다른 이름을 사용하고 싶다. 이색적이고 장난스럽지만 나름 진지하고 전문성을 요한다. 그래서 그냥 평범하고 진지한 이름이고 싶다. 감독, 디자이너, 크리에이터 등.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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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여기공
여기공
여성 기술자를 양성하는 '여기공'입니다. 여성 기술자 양성과 관련된 교육, 공간,네트워킹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여성,기술,생태 라는 3가지 키워드에 공감하는 5명의 여성들로 이루어진 팀입니다. 하자작업장학교 청년 과정에서 만난 3명이 ‘여기공’이라는 팀을 만들게 되었고 이어 그 3명의 친구 둘이 합류하여 현재 5명이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여성 기술자 지도 그리기'는 전국의 여성 기술자들을 인터뷰해 기록하는 작업입니다. 이 진을 통해 선배 여성 기술자, 청년 여성 기술자, 예비 여성 기술자들을 발견하고 연결하고자 합니다. 또한 '여성,기술,생태' 세 가지 키워드를 주제로 하는 글들을 실어 기술과 기술을 둘러싼 문화에 대해서 새로운 담론을 제안하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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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공의 연대기
마음먹기의 시작
프로젝트의 시작
작년 6월에 ‘청년-이랑’이라는 지원을 받으면서
그 이후엔 삼림청의 삼림 일자리 발전소에서 ‘예비
꾸려졌어요. 여성들을 위한 용접 워크숍이었고,
그루 경영체’에 지원했어요. 당시에는 다른 생업이
홈페이지도 만들고 관련해서 기록도 해 봤었죠.
있었지만 지금 이 일이 수익이 나면 직업으로 삼고 싶다고 생각해서 지원해서 된 거였죠. 말 그대로 ‘예비 경영 체제’이기 때문에 경영체가 되어야 했고 그래서 법인화를 하게 됐어요.
만남 2017년 3월이었어요. ‘하자 작업장 학교’의 청년 과정에서 만났습니다.
위기 어떤 하나의 큰 위기가 왔다기보다, 가장 많이 논의한
그래서 각자의 방향성을 존중하면서 일을 할 수 있는
부분은 있어요. 지금 저희가 생각하는 직업에선 각자의
회사가 될 수 있는가가 큰 고민이고, 또 그런 방향을
삶의 방향성 안에서 수익을 내는 것과 노동을 하는 것이
가진 채로 인사를 조정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요.
중요해요. ‘여기공’이라는 협동조합이 얼마나 나의 생계를 책임져 줄 수 있는가, 그로 인해 나와 내 동료가 얼마나 이 회사에 품을 들일 수 있는지 같은 것들이 문제였고요.
극복 위기는 지금 극복해 가는 중이에요. 이 고민과 대화가 오랫동안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여기공’의 아이덴티티일 것 같아요. 계속 관계망을 안전하게 만드는 가운데 돈을 벌고, 어떻게 서로 비빌 언덕이 되어줄 것이냐 하는 것이요.
현재
청년업
‘아기’인 것 같습니다. 아까 얘기 나눈 내용 중에 ‘과정이
그런 부분들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야 하는 최소한의
지속돼야 한다’는 게 있었잖아요. 이게 정리가 돼야
장치들이 만들어져야 할 텐데 이 부분이 해결돼야 우리가
청소년이나 청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기보다는,
지켜야 할 약속이나 고민거리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113
P | 저는 박소연이고, ‘자베’라고도
합니다. 학교에서 디자인 공부를 했는데, 제품 분야라서 상업적인 분야에 대한 교육을 많이 받았어요. 이후에 실질적이고 자립이 필요한 기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돼서, 내가 여성 제작자 혹은 기술자로서 어떤 포지션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가 생각해 보고 싶었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 일을 해 나가고 있는지 궁금해 ‘여기공’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팀에서 디자인과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어요. O | 이 팀의 프로젝트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L | 저희는 ‘여기공 협동조합’이고요.
여성 기술자를 육성하는 것이 기본 목표입니다. 한 여성 기술자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단순히 기술을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그 기술을 둘러싸고 있는 문화와 생태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걸 위한 플랫폼 형태의 회사를 만들어 가고 있어요. 저희에게 중요한 세 가지 키워드는 '여성', '기술', '생태' 세 단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청년업’ O | 소개 부탁드립니다. L | 저는 이현숙입니다. ‘인다’라고
하고요. ‘여기공’은 현재 법인화를 앞두고 있어서, ‘여기공 협동조합’ 으로 이름을 바꾸려는 중이에요. 저는 철학과 미술을 공부했고 인권, 여성학 등 인권에 대한 이슈에 관심이 많아서, 제가 공부했던 내용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길을 고민하고 있습니다.이 팀에서는 대표 역할을 하고 있고 경영과 전체적인 기획을 담당합니다.
M | 저는 민재희라고 하고요. 별명은
‘세모’라고 사용하고 있어요. 저는 자립, 지속 가능성, 생태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이고, 지금 하는 일도 누군가 자립이나 지속 가능성을 꿈꾸는 사람들이 제 활동을 통해 도움을 받으며 자신의 일을 꿈꿨으면 하는 바람으로 하고 있어요. 또 저는 농사에 관심이 많고 지역에 내려가고 싶은 희망을 갖고 있어서, ‘여기공’이라는 팀 안에서 그런 일들을 만들어 내 보고 싶은 고민이 있습니다.
안에서는 네트워킹에 힘을 쏟고 있어요. 앞서 필드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 기술자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가 우선 너무 궁금했고요. 왜 눈에 띄지 않을까 하는 고민도 하게 되었어요.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교육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앞 세대 여성 기술자들과 연결해, 이미 이뤄지고 있던 활동이나 그 안에서 그분들이 느낀 불편을 나누고 그걸 또 다른 여성 기술자들과 공유하여 해결하거나 하는 네트워킹의 장을 만들면서 다음 세대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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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 여성 기술자들을 인터뷰하고 관련
워크숍을 진행한 후엔 그 자료들을 모아 ‘그리고’라는 잡지로 만들고 있습니다. O | 지금까지 많은 여성 기술자 분들을
만나셨나요? M | 네 분 정도 돼요. 한 분은 의류
L | 어떻게 드러나는지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O | 농부, 봉제하시는 분, 목수가
계셨고 또 한 분은? P | 용접공이요. 만났던 분 중에 자전거
프레임 빌더 분이 계셨어요. 한국에 이 직업을 가진 사람도 많지
제작자이시고, 직접 디자인에서
않다는데 우연한 기회에 부부가
봉제까지 다 하시는 분이에요.
운영하는 빌딩 스튜디오에 가게
봉제 산업의 분절화나 가격에
되었었거든요. 그분은 되려 남성과
대한 이슈 등에 고민을 가지고
여성의 격차가 크지 않은 것 같다고
있는 개인 작업자였죠. 또 저는
하셨어요. 여성 기술자 분들을 찾고
농업 쪽에 관심이 많은데, 지역
만나게 되면 기본적으로 차이를
내에서 생활하면서 농민으로서의
발견하려 하다 보니 그 방향으로
삶도 사는 여성이 많지는 않아요.
질문을 던지게 되는데, 성별의
남성이 중심이 된 사회기도 하고,
차이 없이 개인의 역량과 능력으로
유통 문제와도 관련이 있죠. 그래서
기술을 다루고 있는 분들도
페미니즘 그룹을 만들어, 농민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L | 저희는 어쩌다 보니 ‘하자 작업장
학교’의 청년 과정에서 만났습니다. M | 저는 대학 졸업하고 회사를
다니다가 퇴사하고 들어갔는데, ‘하자 작업장 학교’ 이전에는 영재들을 교육하는 일을 했었어요. 제 원래 전공은 중국어였고, 맥락이 많이 다르긴 한데 서울에서 자립과 지속 가능성을 꿈꿀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어요. 영재 교육을 하는 교사로 일하고 있는데 정작 저 자신은 좋은 교육을 한 번도 받아본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지금 용기를 내지 않으면 앞으로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 ‘내가 내게 좋은 교육의 기회를 줘 보자’라는 생각으로 대안 학교에 들어가게 됐죠.
활동을 하는 지역에서 어떻게 하면 생계를 남성 손에 맡기지 않고 꾸려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들도 만나고 있어요. L | 목수하시는 분도 있었어요. 작업
관련해 여성 기술자들을 만나다 보면, 당장 작업대나 작업 도구에 대한 불편함을 얘기하게 되는데요. 그분의 경우는 출산 이후 자기 몸이 완전히 변화했다고 말씀하셨어요. 원래 등산도 많이 다니고 바이크도 타고 하는 활동적인 분이었는데, 출산을 하고 산을 타다가 갑자기 골반이 빠져서 사람한테 거의 들려서 내려온 적이 있대요. 그런 정도로 출산이 엄청난 신체 변화를 수반하는 일이라, 지금 그분이 목공에 사용하는 도구도 많이
O | ‘여기’의 세 분은 어떻게
만나셨나요?
바뀌었죠. 또 직접적으로 힘을 사용하는 일보다는, 목공 기술을
L | 저는 ‘어쩌다 보니’라는 단어를
O | 다른 한 분은요? P | 소개드리면서 살짝 말씀드리긴
했는데요. 저는 '자립할 수 있는
사용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좋아하는데요. 우연성에 기반한
디자인'이라는 키워드에 관심을
일하게 되셨더라고요. 출산은
말처럼 보이지만 그 ‘어쩌다
가지고 있고, 학교에서 들을 수
여성에겐 굉장히 중요한 이슈인데,
보니’라는 이유로 많은 중요한
있는 조언이나 교육 안에서 그것에
그것이 여성 기술자의 삶에서
일들이 일어난다고 생각해요.
대한 제 고민이 해결되지 않았다고 느꼈어요.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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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 그래서 비슷한 고민을 하는
M | 저는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사람들과 일을 해 보면 어떨까
외부에 얘기하고 다닐 생각도
싶어 찾아 보다가, ‘여기공’이 기술
없었고 그런 문제에 대해서 일부러
대안과 생태에 대해 고민하면서
외면하려고도 했는데, '여성'은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해서
제게 주어진 상태잖아요. 그래서
합류하게 됐어요.
외면할수록 더 발이 걸리더라고요.
O | 지금의 이 프로젝트가 직업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계신 거죠? L | 가능성과 절박함이 양손에
또 저희가 하는 기술에 대한 논의는, 그 구조 안에서보다 아예 새롭게 어떤 섬 같은 곳에서 논의를 다시 시작해 보자는 거예요.
동시에 있는 것 같아요. 다른
그래서 성별에 대한 문제와 서로
사람들이 한 적 없는 프로젝트이기
잘 어우러졌다고 생각해요. 여성이
때문에, 우리가 하면 많은
저희 '상태'라면 기술은 (자립을
사람들에게 환영받을 거란
위한) 저희 '도구'인 거죠.
가능성을 갖고 있어요. 저희의 첫 프로젝트가 여성들을 위한 용접 워크숍이었는데 그때 피드백도 나쁘지 않았거든요. 또 내가
O | ‘적정 기술’에 대해 살짝만
위해서는 수익이 나야 하는데 그
방향이에요. 개도국에 필요한
방향에 대한 절박함을 가지고
의료 내지는 물과 같은 생활에
있어요. '업이고 싶지만 업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되어야만 하는' 과정에 있는 것
원조하되, 하이 테크놀로지를
같아요.
통해 작고 가볍고 저렴한 것들을
분모를 갖고 계신 것 같아요. L | 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가치와
이슈 중 하나는 작업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신체 사이즈가 고려되지 않은 작업대와 작업 도구 때문에 산재가 일어나는 경우도 많거든요. 그래서 이후에는 몸의 크기가 작은 사람이나 너무 큰 사람을 위한 작업 공간 사업과 도구 개발을 꼭 하고 싶어요.
건데요. 기본적으로 도구를 만들 기본적인 기술을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도구로 만드는 방향이죠. O | 내 삶에서 쓸 수 있는 기술을
내 안에 탑재하는 거네요? L | 지속 가능성에 대한 이슈도 그
직업이라는 걸 넓은 시야에서
안에서 중요하게 여겨져요. 기존의
고민하게 되고, 좋은 가치와
기술 사용 방식에 대한 문제 의식이
기본적인 권리들이 존중되는
있기 때문에, 그 기술을 나 혼자
일자리를 우리가 만들어야겠다는
독점한다거나 그걸 통해 어떤
생각도 가지게 됐어요.
생태의 순환을 끊지 않는 것이
O | ‘여성’이라는 키워드는 왜 팀에게
것이요. 여성 기술자들에게 중요한
필요한 순간에 쓸 수 있도록하는
졸업한 다른 친구들 중에도 정말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일자리와
현재의 기술 문화를 개선해 나가는
삶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들을
수 있는 용접이나 목공, 직조 같은,
등 아르바이트 외의 일을 하기도
교육과, 그것을 지속하게 하기 위해
주목하는 다른 갈래는 내가 내
사람들인 것 같아요. 대안 학교를
사회에 나오면 편의점이나 음식점
교육이에요. 여성들에게 하는 기술
개발하는 것입니다. 또 저희가
다른 일을 할 때 견디기 힘든
훌륭하고 멋진 친구들이 많은데,
L | 우선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건
L | 두 가지 갈래가 있는데요.
한 갈래는 제 3세계 원조 기술의
직업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공통
대해서 간단히 소개해 주시겠어요?
설명해 주시겠어요?
좋아하는 이 일을 업으로 만들기
O | 내 인생에 중요한 가치를 반드시
O |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일들에
중요합니다.
중요했을까요?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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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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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VEY.
여기공 Q. 당신에게 업(직업)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A. 나의 자립을 위한 도구이자 안전하게 비빌 언덕입니다. 나를 위해 내가 스스로 설 수 있도록 하는 '업'으로서의 의미와 함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꾸준히 해 나갈 수 있도록 나의 능력을 성장시킬 수 있는 안전한 영토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Q. 어린 시절의 꿈은(직업으로서) 무엇이었나요? A. 어린 시절엔 예술가가 되고 싶을 때도 있었고 사업을 하고 싶을 때도 있었고 대통령이 되고 싶을 때도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떤 직업을 가져야겠다는 고민보다는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을 오랫동안 했던 것 같고요. 무엇을 공부 해야겠다고 결정한 이후에는 공부한 것들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 것 같아요.
Q. 현재의 일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에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우선은 제가 일상에서 친구들과 하는 고민을 담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제가 하고 있는 일의 가장 큰 매력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저희의 문제 의식에 공감하거나 저희가 '기술' 워크숍을 통해 느꼈던 감정들을 저희의 워크숍을 통해 느끼시는 것을 볼 때, "아! 이 일을 하길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이 일을 통해서 여기공의 멤버들이 각자 하고 싶던 일이나 작업들을 선보이고, 그것에 대한 피드백을 사람들 혹은 동료들에게 받을 때 참 기쁘다고 느껴요.
Q. 직업 실험에 꼭 하나 필요한 요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일 수도 공간일 수도 자금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A. 공간입니다. 기술 교육을 하는 회사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작업'에 필요한 메이커 스페이스가 필요합니다. 쉽게 공간을 구하지 못하는 이유는 금전적인 문제도 있지만 저희는 기존의 메이커 스페이스를 코워킹해서 사용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메이커 스페이스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사용하기 위해 작업대의 높이, 다양한 크기의 공구, 다양한 크기의 안전 장비가 갖춰진 공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현재 하자 센터 커뮤니티 목공방을 주로 이용하고 있지만(이런 것들이 많은 부분 갖춰져 있습니다) 저희만의 메이커 스페이스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이런 공간을 구하기 위해 시도해 보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서울에서 쉽지 않습니다. 금전적인 문제도 있고 공감의 문제도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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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여성들이 안전하게 작업할 수 있는 메이커 스페이스가 생긴다면 그 공간은 비단 여성뿐만 아니라 기술에 관심을 가지는 많은 이들이 함께할 수 있는 작업 공간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성인뿐 아니라 어린이와 청소년들까지도요. 물론 '사람'도 필요하지만 공간이 생긴다면 그 공간에 저희가 만나고 싶은 많은 분들이 올 수 있다고 생각해, 우선순위로 공간을 선택했습니다
Q. 직업 실험을 통해 실제로 자신의 직업으로서 현재의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월급을 책정한다면 얼마입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A. '월급'에 대한 질문이 있어서 참 반갑습니다. 월급은 저희 회사에서 아주 중요한 이슈입니다. 기존의 인사 제도로는 저희의 임금을 도저히 책정할 수 없어서요. 하하. 저희는 그래서 월급을 정하는 것을 하나의 워크숍으로 진행하고 있는데요.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아서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아마 '월급을 정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많은 청년들이 공감할 것이라 생각해요. 직업, 자신의 커리어를 설명하는 방식이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곤란함에 대해 기존의 기업에게 물어봤을 때, 월급은 원래 사장이 정하는 것이고 직원들끼리는 몰라야 한다는 대답을 듣는 경우가 종종 있었어요. 저는 이제 월급과 둘러싼 논의들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얼마만큼 일하고 얼마를 받을 것인가는 그 조직의 문화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모두 동의할 수 있는 합리적인 구조였으면 좋겠어요. 그것이 조직을 대표하는 사장이더라도요. 이런 논의들이 더 활발해져서, 다양한 조직의 다양한 월급들이 사례로 모아지길 바랍니다. 저희는 내년 상반기에 이런 논의를 하는 자리를 만들 예정입니다.
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성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5년 후의 본인을 상상한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A. 5년 후! 아마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들이 조금 더 다듬어져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 봅니다. 아직까지는 저희가 하고 있는 이야기들에 대해서 쑥스러울 때가 종종 있어요. 물론 자신은 있지만요. 시간이 많이 쌓이지 않아서 오는 쑥쓰러움이라고 생각하고, 5년 후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회사에 관련한 이야기들을 할 때 쑥쓰러움이 지금보다 덜어진다면 기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이 회사를 통해서 생계를 해결하고, 함께 일하는 분들의 생계도 이 회사가 해결해 주고 있어야 한단 거예요. 또한 회사의 규모가 커지면서 양질의 일자리를 더 만들어 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듭니다.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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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VEY.
여기공 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장렬하게 실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직업 실험의 경험이 남았습니다. 실패의 경험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A. 아마 실패의 경험은 지금 하고 있는 작업, 혹은 일에서 빈틈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중요한 징표일 것 같아요. 이 징표를 통해서, 더 크게 다치거나 더 큰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멈출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발견할 거라는 점에 큰 의미를 둘 것 같습니다. 어느 때는 오히려 '빨리 실패해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더라고요. 이른 단계에서 멈추었을 때 수정 가능성이 더 높으니까요. 아직 저희는 오래된 회사가 아니기 때문에, 실험이 실패한다면 " 오 이 단계에서 실패해서 다행이다"라고 할 것 같아요.
Q.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 본인의 작업에 새롭게 도전하고자 하는 청년에게 해주고 싶은 말, 혹은 조언이 있다면? A. 현실적으로 정말 고민한다면 저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고 하고 싶어요. 큰 조언을 해줄 만한 것은 없을 것 같고요. 다만 저희의 장점은 다정함과 안전함이기 때문에, 저희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와 네트워킹을 들려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만약 정말 고민하는 청년들이 있다면 저희의 문을 두드려 주세요.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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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본인이 청년업을 통해 경험한 ‘업’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면, 당신의 직업은 어떤 명칭을 갖게 될까요? 자유롭게 직업의 명칭을 상상해 주세요. (여러 개를 작성해 주셔도 좋습니다.) A. 지도 제작자(map maker). 여성 기술자들을 인터뷰하면서 여성 기술자들의 삶의 궤적을 기록하고 이들을 하나의 지도로 엮는 작업을 하는 직업.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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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InterV는 영상IN 팀의 '슬로우 미디어' 프로젝트입니다. 자문, 멘토링, 교육을 담당하는 영상IN 김나리 대표는 다큐/영화 에디터를 수십 년간 한 베테랑입니다. 김화정 매니저는 InterV의
영상IN
각종 사무일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기획, 촬영, 편집의 총대를 멘 InterV 강혜련 감독은 2015년부터 외신에 종사한 기자 출신의 영상 입문자입니다.
강혜련
지원 당시 "여성들의 일상을 깊이 있게 관찰하는 미디어 플랫폼을
영상IN
개발"하고 싶다고 적었습니다. 지난 몇 개월간 청년업 사업의 도움으로 각종 영상을 제작하며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고, 최근에서야 이 문장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InterV의 핵심 축이 되는 아이디어는 "너와 나의 영화 같은 이야기"와 "프로타고니스트에 대한 사랑"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영화처럼 조명하며, 인터뷰이에 대한 애정을 따뜻한 시각으로 드러내는 단편 다큐형 웹영상을 만들고자 합니다. 인물들의 리듬에 맞춰 보다 천천히 오래, 그들의 표정과 움직임을 담는 슬로우 미디어입니다. 의도적으로 대다수의 주인공들을 여성으로 선정하나, 드러나게 "여성 콘텐츠"로 브랜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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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IN의 연대기
마음먹기의 시작
프로젝트의 시작
사실, 지난주인 것 같아요. ‘인터브이’는 4월에 들어왔고
4월 중순일 거예요. 나리님이 제안한 촬영을 했는데,
‘청년업’도 지원 받아서 하고 있지만 오랫동안 나리님의
마민지라는 감독의 인터뷰였죠.
아이디어였던 일을 하는 거고, 어떻게 실행해 나가야 하나 하는 부담감에 시달렸어요. 그러다 지난주에 촬영본 하나를 팀원들이랑 공유했는데 반응이 너무 좋았고 그 이후로 자신감이 생겼어요. ‘내가 이걸 정말 하고 싶어서 하는 거구나' 싶었습니다.
만남 2016년 10월쯤이에요. ‘메디아티’라는 회사에서 투자를 받는 제가 나리님의 영상 워크샵에 참여하면서 친해지게 되었어요.
위기 사실 저는 2~3주 전인가 청년업 멘토링 1차 했을
마음에 드는 게 없어서, 멘토랑 대화할 때 제가 하는 표현
때가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저는 그 멘토링에 대한
방식이나 얘기들을 스스로 들으며 정말 내가 즐겁게 일하지
부담감이 많이 컸거든요. 지원금을 받았는데 성과가 아직
않고 있구나 생각했어요. 그 이후로는 많이 나아졌어요.
없는 거예요. 편집한 촬영본도 있고 일도 많이 했지만
멘토 분께서도 좋은 말씀을 해주셨고 바로 그 다음주에 촬영본에 대한 반응도 너무 좋았거든요.
극복 저희는 ‘인터브이’ 영상을 보고 나서 사람들이 ‘단편 영화 하나 본 것 같아’ 하고 느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팀원 한 명이 보자마자 ‘영화 본 거 같아’ 말하더라고요. 너무 기분 좋았어요.
현재 당연히 유아기죠. 하고 싶다는 마음이 몇 주 전에 처음
그래도 몇 주 전에 멘토랑 얘기했을 때는 걷지도 못할 줄
들었으니까요. 컨텐츠도 3편이 제작 중이고 완성은
알았는데 2주 만에 말도 할 수 있게 됐어요.
9~10월쯤 되겠지만…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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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K | 안녕하세요. ‘영상IN’이라는
회사에서 ‘인터브이’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강혜련이라고 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영화 같은 이야기, 특히 여성들의 일상을 관찰하고 숏다큐 형식의, 웹으로 발행하는 미디어 플랫폼을 만들려 하고 있어요. 저는 기획, 촬영, 편집을 맡고 있습니다. O | 본업이 따로 있으신가요? K | 프리랜서예요. 외신 기자입니다.
주로 저는 문화나 페미니즘 쪽을 많이 다루고,‘영상IN’을 하기 전엔 ‘코리아 엑스포제’라는 독립 영문 매체에서 2년 정도 편집장을 했어요. 외신 생활은 4~5년 전부터 했고요. O | 어릴 때부터 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나요?
K | 별로 직업에 대한 대책이나
K | 살게 되겠다는 생각에 그냥
상상력이 풍부하진 않았거든요.
한국에 살게 되었어요. 무슨
뭘 하고 싶은지 심각하게 고민
대단한 깨달음이 아니라 제가
안 하다가 대학 때 재미 삼아
한국인으로서 가지고 싶었던
인턴을 하면서 시작했어요.
자세가 있고, 부모님에게서 배운
O | 혹시 전공이 어떻게 되세요? K | 독일어 전공입니다.
대학은 미국에서 다녔어요. O | 졸업 이후에 왜 한국으로
오셨어요? K | 솔직히 별 생각 없이 왔어요.
비자도 필요 없으니 와서 뭐라도 해 보자 했었고 나중에 독일의 대학원도 합격을 했어요. 다시 떠날 수 있는 기회가 몇 차례 있었지만 전 남아 있었어요. 이유는 유학
것 말고 나만의 한국인이 되는 것, 그런 걸 만들고 싶었어요. 유학 생활을 하다 보면 그런 면에서 외부 영향을 받기 굉장히 쉽거든요. O | 그럼 한국에서는 언제 유학을
가셨어요? K | 중학교 때 가서 중고등학교는
중국에서 다녔어요. O | 기자 일은 어떤 계기로 하게
되셨는지? K | 원래 글 쓰는 걸 좋아했고 이야기를
생활을 오래 하면서 한국인이라는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태도나 컨셉이 저에게 풀리지 않는
이십 대 중반의 상상력으로는
실마리였기 때문이에요. 여길
기자가 제일 쉽겠다고 생각했죠.
떠나면, 이게 풀리지 않은 상태로
O | 어떤 일들을 해오셨나요? K | 다양한 일들을 했어요. 다큐,
인터넷 방송, 라디오, ‘코리아 엑스포제’에선 스타트업이니까 영상, 라디오, 글, 사진 모두 에디팅을 했었고 지금은 주로 영상을 하고 있어요. O | 지금 영상의 기획, 촬영, 편집을
다 한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일하는 과정 속에서 배워 오신 거네요. K | 네. 영상은 작년에 시작했는데
‘영상IN’ 워크샵을 통해서 나리님이 제 영상에 대한 애정을 알아보고 ‘인터브이’로 스카우트를 하셨어요. 아직 시작한지 얼마 안 돼서 기술적으로 배워야 할 부분이 많은데, ‘청년업’ 덕분에 그걸 충족할 수 있는 시간과 돈을 벌었죠. O | 나리님과 본인의 관계는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요?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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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 1년 동안 이걸 더 많이 쌓으면서
하나씩 실험용으로 내 보고 이게 축적이 되면 본격적으로 미디어로 성장시키려고 해요. O | 공개될 채널은 어디를 생각하고
계시는지? K | 유튜브랑 페이스북으로 우선
시작할 생각이에요. 그런데 이게 숏다큐와 웹영상을 접목한, 포맷이 불분명한 영상물이거든요. 그래서 웹에 올릴 수도 있고 독립영화제에 출품할 수도 있고, 사실 유통 경로는 다양해요. 이 K | 팀원이자 제 대표입니다. O | 그럼 본인은 소속 직원인
느낌일까요? K | 네 직원이긴 한데, 장기적으로는
파트너로 성장했으면 좋겠다는 말씀도 들었어요. ‘인터브이’는 ‘영상IN’과는 별개의 사업인데 여기서는 또 제가 주도적인 위치에 있어요. ‘영상IN’이라는 큰 우산
O | 본인이 사회적인 문제라고 생각한
이슈이기 때문인가요?
부분에 대한 건 컨텐츠의 방향이 뚜렷하게 잡히면 고민해 보려 하고 올해까지는 아마 유튜브에만
K | 물론이죠. O |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시작됐나요? K | 그렇게 오래되진 않았어요.
2015년에 MPR이라는 미국 라디오 방송에서 일했는데 그때
발행할 것 같습니다. O | 저널리스트로서 굉장히 다양한
경험을 하셨는데 본인이 기자로서 업을 어떻게 이어 나갈 것인지에 대한 확신을 갖고 계시나요? K | 오히려 더 불분명해진 것 같아요.
시작됐어요. 외신 사무국은 규모가
미디어계에 있고 싶다는 욕심은
작아서 제 상사 한 분과만 일을
커졌는데 외신 기자로서 일을 계속
같이 했는데, ‘앨리스 후’라는
이어 나갈지는 잘 모르겠고요. 처음
드려 볼게요. 여성들의 삶을 주로
분이었어요. 저랑 일하는 2~3년간
기자 일을 시작할 때는, 명함에
다루는 다큐멘터리 영화, 뉴미디어
임신을 두 번 하셨는데 그 상태로
기자라고 되어 있고 그 자존심을
저널리즘이 합쳐진 복합적인
사무국장으로서 굉장히 많은 일을
걸고 열심히 해야지 하는 욕심이
컨텐츠를 만들고 있다고 하는데
하셨고, 페미니즘에 굉장히 깨어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별로 그런
왜 여성에 집중하게 되셨나요?
있는 분이라 제가 영향을 많이
느낌을 안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안에서는 제가 직원이고요. O | ‘인터브이’에 국한해서 질문을
K | 아직 방향은 갈고 닦는 중이지만,
수많은 미디어 플랫폼에서 영상의
받았죠. O | 그분을 만난 것이 큰 전환점
주인공이 되는 인물들은 남성인
이었군요. 그래서 페미니즘에
경우가 대부분이고 여성에 대한
대한 관심을 갖고 짧은 다큐멘터리
영상이 나오면 그게 '여성' 기자나
인터뷰들을 만들게 되었고,
'여성' 주인공의 삶, 이런 식으로
시리즈로 만들어지는 건가요?
딱지가 붙잖아요. 저희는 여성만을 주인공으로 잡자는 건 아닌데 그 딱지를 생략해 버린 채로 그래도 여성 주인공을 더 많이 조명하고 싶어요.
청년업
O | 왜 그렇죠? K | 다양한 포맷을 접하다 보니 기자가
쓸 수 있는 글이나 영상 외의 이야기 형식들에 대한 욕심이 생겨서, 스펙트럼을 넓히고 싶었어요.
K | 네 맞아요. O | 몇 편 정도에요? K | 촬영 시작한 거랑 편집한 거 합해서
지금 3편 정도 돼요.
125
O |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K | 기사의 형식이 재미가 없어진 것
외신 기자로서 버는 돈과
같아요. 외신을 하다 보면
‘인터브이’에서 오는 수입의
잘 팔리는 뉴스의 형태가 있고
비율은 어느 정도인가요?
그런 내러티브에 맞추는 것도
K | 풀타임으로 외신에서 일할 때에
비해 월급이 많이 줄었어요. 우선
조금 지겨워졌고요. O | 안정적인 수입보다 더 흥미 있는
그래도 ‘영상IN’ 월급으로 최소한의
일을 찾아서 지금까지 오신
생계는 유지가 가능하고, 굉장히
거네요. 김나리님과는 어떻게
페미니스트답지 못한 말이지만
처음 만나셨나요?
남편이 이직을 해서 월급이 올라갔어요. 이 부분이 정말 많은 도움이 되죠. O | 월급이 확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K | ‘코리아 엑스포제’에서 일할 때
투자사가 있었는데 나리님이 그곳 직원이었고 영상 담당이었어요. ‘메디아티’의 영상 워크샵을
투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들으면서 친해지게 됐죠.
무식하게, 재밌으면 하고 재미없으면 안 하는데 외신 기자 일이 좀 재미가 없어졌어요. O | 몇 년 정도 하신 거죠? K | 5년 정도요. O | 재미가 없어졌다는 건
어떤 뜻인가요?
K | 네, 정말 좋은 선생님이에요. O | 그 영상 워크샵을 들으면서 진로가
완전히 달라지진 않았지만 방향이 많이 수정되었다고 할 수 있나요? K | 맞아요. 그 영향이 컸죠. O | 나리님이 먼저 합류 제안을
하셨나요? K | 네. 올해 4월에요.
‘메디아티’라는 미디어 스타트업
외신 일을 안 하고 이것에
K | 저는 항상 일을 할 때 단순
O | 훌륭한 선생님이네요.
O | 그게 언제죠?
O | ‘인터브이’의 기획은
같이 하시는 건가요? K | ‘인터브이’의 존재 자체는 나리님이
먼저 생각을 하셨는데 그 안의 컨텐츠나 브랜드 아이덴티티 등의 요소는 제가 만들어 가고 있어요.
K | 2016년이요. O |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 프로젝트가 O | 학생이 많았을 텐데 어떤 부분이
특히 잘 맞았어요? K | 그 워크샵 규모가 원래 작아서
10명 정도 인원이 수업을 들어요. 나리님은 이야기를 굉장히 잘 끌어 내는 분이고, 질문도 날카롭고 친절 하게 잘하세요. 사람들도 수업을 듣고 나서 영상에 대한 기술적인 면보다도 '정신적인 감각을 길렀다',
가져야 할 이상적인 모습은 어떤 형태인가요? K | 제가 생각하는 장기적인 성공은
앞으로 2~3년 안에는 힘들 거라고 보고 있어요. 미디어 스타트업에서 2년 정도 일해 보면 오래 일해 봤다고 하는데, 정말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그게 경력이 쌓인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힐링 됐다'는 얘기를 많이 해요.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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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 ‘코리아 엑스포제’랑 ‘메디아티’에서
K | .대학 졸업하고 첫 4개월간은
대부분의 사례들이 실패하니까
토플 학원에서 일했고 이후에는
왜 그렇게 되는지 봐 왔고, 이
2년간 농촌 마을에서 생활 지도
매체를 돈 되는 매체로 보고
교사라는 걸로 일했고, 그리고
시작하기보다 앞으로 2~3년간은
서울 올라와서는 기자 생활을
컨텐츠와 커뮤니티를 기르는 데
하면서 프리랜서 생활도 많이
주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했지만 외신이다 보니 외국
2~3년 후에 제가 생각하는
회사랑만 일을 했거든요.
이상적인 모습은 컨텐츠가 1주일에 서너 번, 주기적으로 나올 수 있을 만큼의 어떤 네트워크가
O | 정말 다양한 일을 하셨네요. K | 그런데 우리가 부정적으로
형성되는 것이에요. 주로 여성
얘기하는 한국스러운 기업문화는
크리에이터들의 네트워크가
그 중에 농촌에서 일했을 때
형성되고 그걸 받쳐줄 수 있는
가장 많이 겪었어요.
멤버십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굉장히 보수적이었거든요.
‘닷페이스’랑 좀 친하게 지내는데, 거기도 ‘메디아티’ 투자자 중
O | 어떻던가요?
하나거든요. 그곳도 멤버십으로
K | 가족 기업이었고 직원들에 대한
돈을 벌기까지 굉장히 긴 시간이
처우가 굉장히 안 좋았어요.
걸렸다고 하더라고요.
사회적 기업인데 지원금을 받아서
O | 2~3년을 버텨야 하는 거네요. K | 그렇죠. 그렇게 하지 않고 처음부터
투자자를 찾아서 시작하면 거기 너무 휩쓸리게 되더라고요. K | 그러지 않기 위해선 당분간은
좀 힘들더라도 ‘영상IN’ 수익으로 좀 살아남으면서 2~3년 후에는 자생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보자고 얘기하고 있죠. O | 해외에서 일을 한 경험도
있으신가요? K | 인턴 기자로 독일에서
한 달간 일했어요. O | 한 달이지만 직업으로서 일을
했을 때 한국과는 어떻게 느낌이 달랐나요? K | 저는 한국에서도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진 않았어요
운영하고, 돈이 늘 부족하니까 직원들은 주말 없이 일했죠. 애들을 보면서 농사도 지어야 하니까 노동 시간도 과중했고요. O | 그 일은 어떻게 하게 된 거예요? K | 서울에서 학원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같은데… K | 자기 학대는 아니고, 제가 가지고
있었던 고정 관념이 저를 학대하고 있었던 거라고 생각해요. 그 외의 이유들도 있었는데, 저는 항상 책상에서 공부하고 성인이 돼서도 사무실에서 일을 해 왔어요. 그래서 몸을 쓰는 일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해 보고 싶었어요. 근데 막상 일을 하게 되니까 당연히 영어 교사 이외에 천만 가지 일을 더 해 달라고 하면서(웃음).. 원래 그렇다고 말하더라고요. O | 거기서 얼마나 일하셨어요? K | 2년이요. O | 상당히 오래 하셨네요. K | 재미가 있었어요. 그래도 1년 정도
일하니까 구조적인 한계가 보이게 되고, 그 안에서 내가 성장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제가 추구하는 가치관과 그곳의 문화가 너무 다르기도 했고요. O | 다양한 직업 경험을 쌓아온 것이
부모님은 공채를 보길 원하셨어요.
‘인터브이’의 활동에도 도움이
유학도 했고 영어, 독어를 하는데
되나요?
당연히 대기업을 가야 된다 하는 말씀이었죠. ‘우프’ 농촌 활동을 경험하던 중 ‘이거 끝나면 공채하러 가야지’라고 생각하다가 동시에 ‘왜 내가 부모님의 고정 관념에 놀아나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O | ‘우프’는 어디서 하셨나요? K | 그때 그 마을에서요. 마침 영어
교사를 찾고 있었거든요. 처음에 난, 이런 데서 일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동시에 그 생각을 깨부수려면 여기서 일을 해야겠다 싶어서요.
청년업
O | 살짝 자기 학대의 느낌도 있는 것
K | 네. 큰 도움이 되죠. 가장
직접적으로는 제가 농촌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지금도 농촌 페미니즘을 주제로 여성 농민 한 분을 촬영 중이거든요. 다른 면으로는 세상을 보는 시각? 촌스러운 얘기긴 하지만 이야기꾼이 되고 싶어 한다는 건 다양한 이야기에 열려 있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고, 사람들의 이야기가 내게 고통스럽거나 기분이 나빠도 들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능력을 조금 기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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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VEY.
영상IN Q. 당신에게 업(직업)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A. (1) 나의 다양한 정체성들이 긍정적으로 풍만해지는 기회 (2) 나와 수많은 타인들을 이롭게 이어주는 기회 (3) 그러면서 밥벌이도 해주는 기회
* (3)이 포인트겠죠 ㅋㅋㅋ
Q. 어린 시절의 꿈은(직업으로서) 무엇이었나요? A. 고딩 시절까진 꽤 많았어요. 소설가, 연기자, 통일부 장관, 대통령... 대학을 진학하고 나선 부모님 없는 자유가 너무나도 좋고 현재에 빠져 있는 것이 정말 행복해서 4년간 미래에 대한 꿈을 꾸지 않으면서 살았어요. 대학 졸업 후엔 업을 강요하는 사회 때문에 '명함 없음'에 대한 불안에 떨었고요. 몇 년간 방황하다가 "그래 기자가 되어 보자"라고 해서 2015년부터 기자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업이 제게 주는 사회적 정체성보다는 일하는 행위 자체에 대한 고민을 더 많이 하려고 합니다. 저를 "감독" "기자" "작가"로 부르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조금은 중요합니다, 저도 솔직히 인정 욕구가 강하니 ^^)
Q. 현재의 일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에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작년 11월, 김나리 대표가 가르치는 영상 워크샵에서 편집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영상 제작을 업으로 삼고 싶었고, 제 '졸업' 영상을 마음에 들어한 나리님이 올 4월 저를 팀에 합류시켰습니다.
Q. 직업 실험에 꼭 하나 필요한 요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일 수도 공간일 수도 자금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자금!!! InterV는 장기적으로 천천히 성장시키려는 플랫폼이고, 단기적인 수익이 나지 않을 거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꼼꼼히 성장하며 콘텐츠와 팬층을 축적할 시간인데, 시간은 돈입니다 ㅠㅠ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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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직업 실험을 통해 실제로 자신의 직업으로서 현재의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월급을 책정한다면 얼마입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A. '헛.. 참 어려운 질문이네요. 일단은 300만 원. 제 취재 경력, 노동 시간, 촬영/편집이 주는 노동의 강도 등을 고려해 보면 300만 원은 낮은 금액이지만... 수익 내기 정말 쉽지 않은 미디어 산업에서, 특히 지금 시작하는 영상IN팀의 상황들을 현실적으로 고려해 보면 당분간은 300만 원도 받기 어려울 거 같습니다.
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성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5년 후의 본인을 상상한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A. 우선은 월급을 훨씬 많이 받고 있겠지요? 5년 후에는 InterV를 저만의 실험이 아닌 다양한 크리에이터들, 특히 여성들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커뮤니티를 형성해 지금처럼 한 달에 한 번이 아닌, 매일 좋은 영상 콘텐츠가 올라올 수 있는 미디어로 키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지금보다 훠얼씬 나은 촬영 감독이 되어 후반 작업할때 지금처럼 욕하지 않으며 지금보다 훠얼씬 아름다운 영상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영화에 대한 내공도 많이 쌓여서 용감하고 당차게 실험을 하고, 지금의 내가 두려워하는 주제들을 감싸 안고 타인의 삶에 귀기울일 줄 아는 연륜 있는, 따뜻한 스토리텔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장렬하게 실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직업 실험의 경험이 남았습니다. 실패의 경험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A. 정말 충실하게 영상에 대해 고민할 수 있었던 시간. 나리님 같은 좋은 멘토를 만나 내 잠재력을 알아볼 수 있었던 시간. 기술적으로, 예술적으로 많이 성장할 수 있었던 시간. 직업 실험이 실패해도 앞으로 계속될 나의 영상'업'에 영양분과 기초가 되었던 시간.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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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VEY.
영상IN Q.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 본인의 작업에 새롭게 도전하고자 하는 청년에게 해주고 싶은 말, 혹은 조언이 있다면? A. 없습니다.
Q. 본인이 청년업을 통해 경험한 ‘업’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면, 당신의 직업은 어떤 명칭을 갖게 될까요? 자유롭게 직업의 명칭을 상상해 주세요. (여러 개를 작성해 주셔도 좋습니다.) A. 이야기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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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유선아
유선아
섬유 공예 기법을 활용한 커스텀 웨딩 슈즈를 실험하고 있는 유선아입니다. 패션에 대한 전공 지식과 회사에서 쌓아 왔던 경험을 활용하여 제가 그리는 커스텀 웨딩 슈즈가 업으로서도 인정받을 수 있도록 고군분투 중입니다.
공예품은 예로부터 전해 오는 전통의 방식 그대로 수작업을 통해 제작 되고 있어, 과잉 생산을 할 수 없으며 그로 인해 고부가 가치를 지닙니다. 최근에는 젊은 작가와 신진 디자이너들이 전통기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다양한 제품을 시장에 선보이고 있으나, 이러한 고부가 가치 공예 산업은 국가적 관심에도 불구하고 아직 침체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2030대를 타깃으로 셀프 웨딩에 적합한 웨딩 슈즈를 개발하여 공예를 일반 소비자들도 쉽고 트렌디하게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서울의 제화 산업의 메카인 성동구 성수동의 구두 공방 장인 분들과 협업하여 섬유 공예 커스텀 웨딩 슈즈 제품 개발을 시도합니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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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선아의 연대기
마음먹기의 시작
프로젝트의 시작
2009년 정도예요. 그때 처음으로 작은 브랜드 하나를 런칭하는
2019년 초예요. 막연히 생각만 하고 있던 일인데
TF Task Force 에 들어갔었어요. 회사의 기존 브랜드에서 파생되는
‘청년업’에서 자금 지원 조건도 확인했고, 적극적으로 움직일
라인을, 유통을 조금 다르게 해서 브랜드로 독립시키는 일이었는데
수 있는 자극제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브랜드를 런칭하는 과정과 같거든요.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일을 경험해 보면서 재미도 느끼고, '나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계기가 됐어요.
만남 아마도 신발 공장 사장님이 가장 큰 동료인 것
트러블이 생기고, 예산에서도 기준으로 잡았던 것에
같아요. 회사일 때문에 5년 정도 전에 처음 뵈었지요.
비해 더 금액이 드는 식의 차질이 생기더라고요. 그런데
처음 사업을 계획하면서는 아는 사람에게 개인적인
성수동 업계가 상당히 좁아요. 그래서 제가 이런 일을 하고
도움을 요청하기가 미안해서, 전혀 모르는 신규
다닌다는 걸 이분이 소문으로 들으시고는, “왜 거기서
업체들을 찾아다녔거든요. 그러다 보니,
그러고 있어? 궁금한 거나 문제가 있으면 부탁을 하거라”
작은 문제가 발생해도 그걸 해결하는 과정에서
말씀하셔서 지금까지 오게 되었죠.
위기 저는 지금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소비자들도 제가 만든 상품에 매력을 느끼도록 해야 하잖아요. 이것을 잘 짚고 가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어요. 힘들게 샘플을 만들고 제품을 제작해서 판매가 막상 시작됐는데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아서 안 팔리면 큰일이니까요.
극복 아까 멘토링 과정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어요. 소비자
그런데 그 질문을 받고 나니 저도 기존의 다른
반응 같은 피드백을 미리 받아서 적극적으로 제품 개발에
브랜드들처럼, 제품을 다 개발한 이후에 소비자들에게
반영하고 있는지 말이에요. 저는 회사에서 일하면서 상품
선보이지 않았나 싶었어요. 판매하는 순서도 안에 갇혀
개발을 하는 과정 중에 SNS 위주의 활동이나 소비자들과의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고요. 그래서 지금은 제품 개발의
소통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고 스스로 생각했었어요.
방향성에 수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현재 아직 엄마 뱃속? 태아기인 것 같아요. 저는 제품을 런칭하는 순간을 탄생의 순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런칭은 11월 말이고, 그때부터 어떻게 변화해 나갈지가
청년업
중요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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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 본인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Y | 네, 저는 유선아라고 하고요. 웨딩
슈즈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원래 직업은 상품 기획자(MD)예요. PUMA나 BLACKYAK 같은 아웃도어 브랜드에서 일해 왔고 이제 MD로서 근무한 지 약 10년 정도가 되었어요. 그러다 보니 지금 하는 일이 진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맞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어서, 정말 나 스스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카테고리의 일을 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전부터 너무 도전해 보고 싶었던 분야인 남성 드레스 슈즈 쪽으로 옮겼고 지금은 브랜드 런칭도 했어요. O | 패션 쪽 MD로 일하셨던데, 학생
때 전공한 분야와 연계가 된 일이었나요? Y | 네. 패션 디자인 전공을 했어요.
원래는 전공이 정보통신 전자공학,
Y | 잡지 어시스턴트, MD 등 패션 쪽에
Y | 얼마를 쓸지, 바지에 얼마를 쓸
관계된 인턴을 많이 해 봤어요. 그
지, 그 한 분야에 얼마의 금액이
중에 저랑 제일 잘 맞았던 게 상품
배정되면 또 그 안에서 몇 가지
기획 일이었고요.
스타일을 어떻게 만들어 낼지
O | 학생 때 이미 많은 업무를
경험하셨네요.
계속 계산을 해야 하거든요. 제게 딱 맞는 일이었죠. 그래서 재밌게 했었는데, 쭉 하다 보니까
공대였어요. 아버지께서 사업을
Y | 네. 제가 학교를 두 번 다닌 거나
하시는데, 경기 영향도 많이 받고
마찬가지잖아요? 3학년까지
원했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하다 보니 공무원처럼 안정된 직업
다녔으니까 거의 졸업만 안 한
시작했어요.
중에서도 전문직 같은 공무원이
거였는데, 그래서 짧은 시간 안에
되기를 바라셨거든요. 그래서
내가 맞는 직업을 선택해서 빨리
관제사가 되길 원하셨는데,
자리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3학년이 되었을 때 정말 제가 하고
컸어요. 그래서 우선 인턴으로
싶은 일은 패션이라는 생각이
다양한 경험을 해 보려고 노력했고,
들었어요. 그전부터 패션이나
제가 이과 공부를 계속 했다 보니
그림에 관심은 가지고 있었기
디자이너보다도 패션에 수학적인
때문에, 부모님 몰래 학교를
요소까지 가미된 MD가 저에게 잘
자퇴하고 수능을 다시 봤어요.
맞고 업무도 잘 해낼 수 있겠다는
O | 부모님께선 뭐라고 하셨어요?
생각이 들었죠. O | 패션 분야에서 수학적인 게
Y | 엄마는 되게 좋아하셨는데, 아빠는
가미된다는 건 어떤 건가요?
다시 예전 학교로 돌아가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도 1학년
Y | MD 일을 하려면 물량을 계획하는
때부터 패션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일 같은 걸 해야 돼요. 예를 들어,
생각으로 쭉 공부해서 4학년이
회사의 시즌 예산이 100억이면
되었고, 디자이너나 패션 마케터,
그 100억을 쪼개서 아우터에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초심과는 마음이 달라지고 내가
O | 계속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맞나?”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시는 것 같네요. 학교를 그만두고, 회사도 다니다가 하고 싶은 일이 이건가 질문이 들어 퇴사하고, 이제 ‘청년업’ 사업을 통해 웨딩 슈즈에도 도전을 하시게 되었는데, 그러면 지금 이 일은 진짜 하고 싶은 일인 것 같으세요? Y | 지금까지는요. 시간이 부족해
쫓기는 거 외엔 재밌게 잘하고 있어요. 고민이 되는 부분이라면, 저는 지금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잘하고 있는데 제가 만든 상품을 구매하는 소비자들도 함께 매력을 느끼도록 만들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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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 | 하기 때문에, 이것을 잘 짚고 가고
Y | 네. 시기는 최대한 빨리…?
Y | 그래서 꼭 해야 하는 일은 할 만큼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
친구들한테도 한 번 보여 주고
한 것 같으니, 내가 좋아하는 일의
시작하는 단계예요. 제품의 샘플이
싶거든요. 여러 회사에서 디자이너
부분을 키워 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나가 나왔는데, 그것을 가지고
또는 MD로 근무하는 친구들이
된 거죠.
예비 소비자들에게 설문 등의
있는데, 패션도 전공했고 진심으로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좋아하시는
옷이나 신발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분들도 있지만 그게 아닌 분들도
많아요. 하지만 막상 회사에서
계시거든요. 그래서 이런 균형을
업무를 보는 과정에서는 내가
맞추는 작업을 하면서 다음 샘플을
좋아서 하는 결정보다 매출을
만들 생각인데, 걱정도 되고요.
위한 결정이나 제작을 해야 해서,
O | 그런 결정에는 본인에 대한
믿음이 작용했다고 봐도 될까요? 근거라고 할 만한 부분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Y | 맞아요. 주변 사람들에게
패션에 흥미가 없는 사람들보다도
언젠가부터 나는 이런 걸 한 번
오히려 흥미를 잃기도 하거든요.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조금씩
그런 점 때문에 업계에서 이탈하는
내비쳐 보았어요. 신발 공장을
사람도 많고요. 그래도 제 경우에는
하시는 분이나 디자이너 친구들,
10년을 일하고 버텼기 때문에,
또 다른 관련 업계 사람들에게요.
정해진 자본으로 많은 샘플을 그
경력과 노하우가 쌓인 상태에서
생각보다 많은 지지를 받았어요.
샘플들 자체도 많은 수정을 거쳐서
제가 좋아하는 어떤 것까지 잘 섞어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내가 도움을
완성도 높게 만들어 내고 싶어지죠.
소비자들에게도 인정받는 브랜드를
주겠다” 라는 정도로요. 잘할
그러려면 제품을 제조하는 공장의
만들고 싶어요.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O | MD 일을 하면서 쌓은 노하우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도 많이 도움이 되나요? Y | 많이 도움이 돼요. 예를 들어,
공인 분들과 협의도 원만하게 할 수 있어야 하고, 단가나 제품을 확인해 볼 수 있는 시기 같은 것들 또한 협의가 필요해요.
O |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있습니다.
것을 한다는 게 왜 중요할까요? '직업'이란 건 사전적인 의미에서는 생계를 위해 꾸준히 하는 일이라고 해요. 그런데 본인의 진로를 정하면서 항상 이 단순한 의미 위에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얹어서, ‘생계만을 위한 반복적인 일’이란 뜻에서는 점점 멀어지고 계신 것 같아요. Y | 저도 어제 오늘에 걸쳐 인터뷰 지를
쓰며 생각을 해 봤는데, 직업이란 Y | 이런 일들은 제가 MD로 일하면서
것이 물론 생계를 해결한다는
경험이 쌓인 부분이거든요. 그래서
의미를 크게 갖지만 평생 내가 해야
제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는
하는 일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의사소통을 하는 데 있어 도움을
자아 실현이나 명예욕, 행복감이나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만족도 등이 같이 충족돼야 한다고
O | 웨딩 슈즈에 관련해 본인의
사업성이 증명된다면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 일은 그만두게 될 수도 있는 건가요? 만약 그런 부분에 대해 시기 또는 다른 어떤 부분을 계획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청년업
생각해요. 직업이란 개념 안에서요. 그렇다면 내가 좋아하는 일과 좋아하진 않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이 모두 해결돼야 하겠죠. 회사를 다니면서는 후자 쪽 비중이 점점 커져서 균형이 깨진다고 느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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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VEY.
유선아 Q. 당신에게 업(직업)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A. 생활에 필요한 경제적인 보상을 주고, 그 외에 만족감, 명예 등 자아실현의 중요한 기반이 되는 거라 생각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해야만 하는 일이 공존하기에 그 균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 어린 시절의 꿈은(직업으로서) 무엇이었나요? A. 어린 시절의 꿈은 사업가였습니다. 어릴 때 사업하는 아빠의 모습을 보고 막연하게 꿈을 꾼 것 같습니다.
Q. 현재의 일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에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제가 키가 작아서요, 대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하이힐을 매일 신고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슈즈에 관심을 갖게 된 것 같아요.
Q. 직업 실험에 꼭 하나 필요한 요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일 수도 공간일 수도 자금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사람입니다. 사실 패션의 다른 영역보다 제화, 신발은 조금 더 보수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청년업을 통해 관계된 많은 분들을 만나 문제 해결을 하면서 그게 편견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히려 '도전'에 힘을 실어주시는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Q. 직업 실험을 통해 실제로 자신의 직업으로서 현재의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월급을 책정한다면 얼마입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A. 경제적인 부분은 사실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현재의 작업이 직업이 된다 해도 적정한 수준의 경제적 보상이 없다면 그 지속성에 대해서는 장담하기 힘듭니다. 스스로 월급을 책정한다면, 좋아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만족도가 높으니 현재 회사에서 받는 연봉의 80%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할애하는 시간은 2배 정도? 더 투입됩니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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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성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5년 후의 본인을 상상한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A. 직업 실험에 꼭 하나를 얻는다면 사람이라고 대답했듯이 그때쯤에는 협력 업체들과 함께 지속 가능한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가 공세와 대기업 압력에 못 이겨 공장을 접을까도 고민하셨던 사장님과 한국에서는 수공예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며 저를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말리셨던 사장님들. 이분들과 함께 좋은 마음으로 좋은 날 함께 할 수 있는 좋은 제품을 만드는 공동체가 되어 있었으면 합니다.
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장렬하게 실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직업 실험의 경험이 남았습니다. 실패의 경험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A. 실패 경험은 제가 나아가는 궁극적인 목표를 바꿀 수는 없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 보다 시장이 원하는 쪽으로 맞출 수 있게 해줄 것 같습니다.
Q.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 본인의 작업에 새롭게 도전하고자 하는 청년에게 해주고 싶은 말, 혹은 조언이 있다면? A. 저는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많은 것들을 얻었고, 저의 도전에 힘을 실어 주시는 분들을 만나 ‘업’에 대한 재정의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앞으로 본인의 작업에 새롭게 도전하고자 하는 청년들에게 ‛완벽한 타이밍이라는 것은 없다.’ ‛우연같은 기회로 ‘업’이 생길 수도, 즐길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습니다.
Q. 본인이 청년업을 통해 경험한 ‘업’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면, 당신의 직업은 어떤 명칭을 갖게 될까요? 자유롭게 직업의 명칭을 상상해 주세요. (여러 개를 작성해 주셔도 좋습니다.) A. 슈즈 플래너? 좋은 날 함께하고 싶은 슈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에 적합한 소재와 컬러를 개발하고 협력업체 분들과 함께 완성하는 모든 과정이, 디자이너라는 명칭보다는 조금 특별하게 불렸으면 좋겠습니다.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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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윤지수
디저트를 만들고, 선물하고, 맛보고, 즐거움을 나누고. 이 모든 과정에는 누군가를 위한 예쁜 마음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 소망 1g을 손 끝에 담는 시간을 나누고 싶은 HOPE 1g입니다.
윤지수
홈베이킹 4년 차. 디저트를 만드는 순간을 공유합니다.
HOPE 1g
가장 편안한 장소인 집에서 원데이 베이킹 클래스를 진행합니다. 눈으로 보기에 알록달록 예쁜 디저트들 속에 들어간 식용 색소들.. (타르, 중금속 등) 과거 연구실 근무할 당시 생필품에 들어간 유해물질을 분석하는 업무를 하며 누구보다 경계하며 살고 있습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은은하게 다가오는 천연 가루의 색으로 맛과 멋 그리고 건강을 더합니다.관심도가 높은 마카롱으로 클래스를 시작하여 다쿠아즈, 쿠키 등으로 넓히고 있습니다. 주부로서 '집'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할 수 있는 방안으로 SNS 포스팅, 유튜브 제작 등으로 활동도 넓히고 있습니다. 청년업 멘토링을 통한 전략적 판매 또한 고려하고 있습니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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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지수의 연대기
마음먹기의 시작 사실 전 취미라는 게 없고 회사만 어영부영 다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베이킹을 하면서 내 손으로 뭔가 만들고 그걸 누군가에게 줬을 때 내가 그 사람에게 기쁨을 주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점이 좋았던 거거든요. 아마도 2016년 5월 1일…? 제 수술 날짜였어요.
프로젝트의 시작 올해 3월 한 달 동안 고민을 했어요. 이런 사업을
처음엔 이름도 웃긴 게 많았어요. ‘쁨빵’이라고,
처음 해 보고, 학교만 다니고 회사만 다녔던
'기쁨맛 빵' 이런 것부터 시작을 해서… 이후에 내가
사람이라 그런지 이과적인 것 외에 머리를 굴리는
베이킹하면서 생기는 이 즐거운 감정이 타인에게도
게 너무 힘들어서 이름 짓고 하는 데에 1달여가
전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HOPE 1g’를 이름으로
걸렸거든요.
정했죠. 1g이냐 몇 g이냐 정하는 데도 몇 주 걸렸던 것 같아요.
위기 지난 달이요. 너무 더워서 작업이 용이하지 않았거든요. 집도 너무 언덕 위 같은 곳에 있어서 사람들 부르기도 미안하고, ‘청년업’에서 지원해주는 금액을 쓰는 것도 함부로 쓸 수 있는게 아니란 생각에 조금 겁을 먹어 가지고… 더위 핑계 삼아 좀 쉬고 했던 것 같아요.
극복 아직 극복하는 중이에요. ‘청년업’에서 자꾸 뭘 시키셔서(웃음), 그래도 감사한 기회인데 정신차리고 해야지 생각한 것도 있고요. 저희 집주인이 집을 갑자기 매매한다고 하는데, 집주인이 바뀌면 아마도 실거주를 할 것 같아서 ‘여기서 클래스 할 날이 얼마 안 남았구나’ 하는 생각에서도 열심히 해 나가려 하고 있어요.
현재
청년업
고등학교 3학년 정도요. 내 꿈을 찾고 싶지만 성적이나 혹은
전략적 판매 같은 얘길 듣고 오면 ‘어 그게 맞는 것 같아’
부모님의 요구, 친구들 로부터 현실적인 영향을 받고, 여러
싶다가도 또 홈 베이킹 클래스 중에 ‘이게 내가 잘하는 것
가지 선택지 중에 흔들리는 시기잖아요. 저도 멘토링에서
맞나, 전공자도 아닌데’ 하는 식으로 갈팡질팡하고 있어요. 그런 점이 고3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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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H | 저는 윤지수라고 하고, ‘HOPE
1g’라는 이름으로 ‘청년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과를 하고 있어요. 디저트를 만들 때는 내가 맛있게 먹고 싶은 마음도 생기고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은 마음도 들고, 여러 가지 기대하는 마음들이 생긴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마음은 1g만 들어가도 굉장히 큰 영향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름을 그렇게 지었습니다. ‘청년업’에서는 건강한 디저트를 만드는 베이킹 홈 클래스 방식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어요.
H | 또, 오징어 먹물 가루, 카카오
O | 연구소 일은 대학 졸업하고 바로
가루까지 이렇게 색 표현을 해서
시작하셨나요? 다양한 화학
좀 더 건강하게 먹을 수 있도록
물질을 접하셨겠어요.
만들고 있습니다. 저는 원래 화학 전공자로, 연구소에서 일을 하면서 우리가 이슈로 많이 접한 생리대나 가습기, 살균제 등 제품들의 유해물질을 분석하고 성적서를 발급해 주는 일을 했었어요. 퇴사를 한 이유는 몸이 좋지 않아서였는데, 회사에서 그런 물질들을 접한 게 전혀 영향이 없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이후에 회복기를 거치면서 취미로 홈 베이킹을 하다가 집 근처 개인 디저트 샵에서 일을 하게 됐는데 아기들이나 임산부들이 굉장히 많이 오더라고요.
H | 대학 졸업한 후에 제약 회사에서
1년 정도 품질 관리 부서에서 일하다가 연구소로 옮겼고, 3년 조금 넘게 일했어요. 일하면서는 화학물질도 그렇고, 특히 저희 연구소는 샘플군을 다양하게 받았었어요. 재밌는 건, 완제품도 들어오고 부속품도 들어오는 와중에 냉장고나 세탁기 같은 게 왔을 때예요. 그런 것들이 오면 하나하나 부숴서 부품을 다 분해하고 전처리를 해서 실험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거든요. 그래서 뭐 중금속을 보고 싶다고 하면, 중금속을 추출하는 처리나 테스트를 하고 성적서를 내주죠. O | 3년 동안의 직장 생활이 건강 악화에
영향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H | 전혀 없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가장
큰 요인은 사회 초년생으로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저 자신 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것들은 부수적으로 따라왔고요. O | 치료 과정은 얼마 정도
걸리셨나요? H | 암이긴 하지만 갑상선 암이었고,
처음엔 가볍게 생각했어요. O | 마카롱 색이, 천연 염색을 한 것
같은 색이에요. H | 일반적인 마카롱의 쨍한 색상은
식용 색소에서 나오는 것이거든요. 저는 식용 색소 대신 주변에서 찾을 수 있는 천연 재료를 넣어서 색이 더 은은해요. 이건 쑥 가루로 만든 거고, 각각 얼그레이 파우더, 치자, 홍국 쌀가루(쌀가루 중 빨간 것)가 들어갔어요.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H | 그런데 하루는 아주 어린 친구가
‘착한 암이다’라고도 하는데 세포
들어오면서 “이모, 저 칼라 똥
종류마다 다르더라고요. 세포가
쌌어요!” 하는 거예요. 충격을
크다고 무조건 수술하는 것도
받았죠. 체외로 나가는 것도 많지만
아니고, 작더라도 종류가 위험한
체내에 쌓이는 건 얼마나 많을
것이면 치료가 달라지는 거죠. 저는
거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얼마나 큰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해서 수술로
영향을 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거하면 괜찮겠지 했는데 갑상선
이런 부분이 이슈가 되어서 국내에
전체를 들어내는 일이다보니
있는 마카롱 가게들 중 천연
활동이 어렵더라고요. 또 수술하고
재료를 이용하는 곳이 늘고 있고
나서 괜찮았다가도 전이 흔적이
저도 동참하고 싶어서 이 품목을
있어서 방사선 치료를 받았는데
선택하게 됐죠.
그게 타격이 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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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 방사선 치료 다음날 아침에 온
H | 이전 직업은 사람 때문에
H | 그 과정 밟고 자격증 시험도 세
세상 중력을 내가 다 받고 있는
힘들어서 그만두게 됐지만 일은
번 정도 쳤는데 다 떨어졌어요.
느낌이 들더라고요. 두렵기도
재밌었거든요. 지금은 0.5g, 1g
제가 만든 제품이 1등이라는
하고, 몸이 힘들어서 일을 1개월
단위의 계량이지만 전 회사에서
확신을 갖고 냈는데도 그러길래
정도 쉬었는데 그러면서 회사
일할 때는 0.001mg 정도
제도상의 문제가 있지 않나 싶어
사람들에게도 상처를 많이
단위에서 실험을 했었어요. 정말
자격증 생각은 접었는데, 그 때
받았어요. 첫 수술할 때부터
100만분의 1 하는 식의 단위가
결혼을 하게 되고 집도 이사를
실장님이 “너 이 날 수술해서 이 날
들어가고, 그 절차가 저는 정말
하게 되었죠. 마카롱 가게는 문을
복귀해” 하는 식으로 말씀하시고,
재밌었어요. 재밌었는데 그만두게
항상 열지 않고 사전에 제품을
방사선 치료 마치고 복귀하면 몸이
된 거죠. 그런데 베이킹이 상당히
만드는 시간들이 또 필요한데 마침
힘들어 칼퇴근을 하니 동네북 같은
유사하더라고요. 기존의 일을 하지
알바생을 구하는 가게가 있었고
입장이 되더라고요. 일보다 사람
않게 되면서 생긴 갈증을 베이킹이
일하는 시간도 체력적으로 지치지
때문에 무너지니까 퇴사를 결정할
해소해주는 역할을 해줘서 매력을
않을 만큼이라서 약 10개월 간
수밖에 없었죠.
느낀 것 같아요.
일했어요.
O | 그런 일이 없었다면 계속 회사를
다녔을까요?
O | 제과 과정을 듣고 나서 디저트
가게에 일하러 가신 건가요?
H | 네. 주말에 같이 등산도 할 정도로
친밀한 관계였어요. 제가 지금 베이킹 클래스를 하게 된 이유도 연관이 있어요. 사람들이 회사에서 지치거나 다른 어떤 곳에서 상처받는 일이 있어도 자기가 뭔가 새로운 걸 배우는 시간이 있으면 힐링된다는 느낌을 받잖아요. 그런 걸 느끼고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원래는 중간에 인터뷰도 해서 연재까지 하는게 목표였는데 개인 단위로 할 수 있는 분량이 아니더라고요. O | 서울시 ‘청년 수당’을 통해 베이킹
수업을 받으셨죠? H | 네. 청년들에게 월 50만 원씩 취업
비용 혹은 지원금을 제공하는 거예요. 퇴사 후 집에서 요양하면서 지내다 혼자 사부작거리는데 뜻대로 되지 않아서 ‘청년수당’으로 뭔가 배워 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제과 자격증 코스를 들었어요. O | 많은 가능성 중에 왜 베이킹을
선택하셨나요?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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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 가게에서 일하면서 손님 응대하는
건 그 가게에서가 처음이었나요? H | 아뇨, 대학교 때도 알바는 했었는데
그때랑 다른 점은 사장님이랑 단둘이 일한다는 점이었어요. 사장님 멘탈 잡아주는 역할이 주된 업무 중 하나였죠. 사장님은 저랑 동갑이셨는데, 아이도 키우시고 가게도 갑자기 시작하게 된 거여서 사업을 한다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으셨어요. 또 저는 1인 사장이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아요. 가게를 하는 것도 제 목표 중 하나였거든요. O | 그럼 가게 일을 안 하게 되면서
H | 건조 과정도 있고, 굽고 나서 식히는
과정도 있죠. 손이 많이 가서 오래 걸릴 수 밖에 없어요. O | 혹시 수강료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H | 그걸 책정하는 게 ‘청년업’을
진행하는 최종 목표 중 하나이긴 해요. 수강생 분들한테 수강 만족도 조사를 해서 피드백을 받고 있는데, 정말 유명한 베이킹 스튜디오 같은 경우에 15~20만 원 이상도 받고 있고 일반적인 원데이 클래스는 서울에서는 8~10만원 정도인 것 같아요.‘청년업’ 기간에는 수익 사업을 하면 안되기 때문에 지금은 무료로 하고 있어요.
자연스럽게 홈 베이킹으로 시선이 옮겨간 건가요? H | 네. 당장 투자 없이 집에서 할 수
있고 동네 사람들도 알아가고 싶다는 생각에 시작했는데, 4월부터 준비를 하는 중에 ‘청년업’이 맞물리게 됐어요. 그래서 갑자기 사업 계획서부터 준비해야 했고, 불을 지펴준 거죠. O | 타이밍이 좋았네요. 지금까지
몇 회 정도 클래스를 하셨나요? H | 7월부터 시작해서 한 26명 정도?
횟수로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회당 2~3명, 적게는 1명에서 많게는 3명까지 총 26명 정도예요. 테스트 겸해 본 것까지 합하면 30명 정도는 한 것 같아요. O | 한 회당 시간은 몇 시간 정도인가요? H | 처음 오시면 왜 마카롱이 이렇게
비싼지 모르겠다는 말씀들을 하는데, 집에 갈 땐 알게 돼요. 넉넉하게 3시간 반 정도 걸리거든요. 25개~30개를 만들 때 겉부분 만드는 데만 1시간이 걸리고 안에 내용물 채우는 것도 숙달된 사람이 아니면 쉽지 않아 하시더라고요.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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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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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VEY.
윤지수 Q. 당신에게 업(직업)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A. [진행형] 어릴 땐 30대가 되면 한 분야에서 스페셜리스트로 완성될 줄 알았습니다.(짠~) 하지만 이제 제가 생각하는 업의 의미는 한 직무만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 뻗어나가고 계속해서 경험치를 쌓아가는 과정입니다.
Q. 어린 시절의 꿈은(직업으로서) 무엇이었나요? A. [간호사] 단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가 되고 싶어서
Q. 현재의 일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에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화학과를 졸업하고 연구소에 근무한지 4년 차. 일이 익숙해질 무렵 암 수술로 퇴사하게 되었습니다. 업무로 담당했던 실험과 비슷한 베이킹 과정이, 익숙하고 재미있게 다가왔습니다. 일을 하지 못하는 저의 갈증도 해소해 주었습니다.
Q. 직업 실험에 꼭 하나 필요한 요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일 수도 공간일 수도 자금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A. [공간] 집은 편안하지만 클래스나 판매를 진행하기에는 제한된 장소입니다. 소품으로 어느 정도 분위기를 낼 수 있지만 천공, 조명 등 한계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Q. 직업 실험을 통해 실제로 자신의 직업으로서 현재의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월급을 책정한다면 얼마입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A. [300만 원] 직업은 쌓아가는 거니까.. 월급도 이전보다 쌓아가야 해요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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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성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5년 후의 본인을 상상한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A. 조금은 자신감이 붙은 모습. 여전히 현실에 흔들리지만 부러지지 않는 견고한 모습.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모습.
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장렬하게 실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직업 실험의 경험이 남았습니다. 실패의 경험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A. 도전이요. 처음으로 도전한 사업이었기에, 그리고 준비와 진행을 하는 과정에서 좋은 인연들과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또 선영향을 끼치길 바랍니다.
Q.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 본인의 작업에 새롭게 도전하고자 하는 청년에게 해주고 싶은 말, 혹은 조언이 있다면? A. 초심을 기억하세요!
Q. 본인이 청년업을 통해 경험한 ‘업’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면, 당신의 직업은 어떤 명칭을 갖게 될까요? 자유롭게 직업의 명칭을 상상해 주세요. (여러 개를 작성해 주셔도 좋습니다.) A. [스텝업] 혼자서 한 걸음, 한 걸음 떼는 게 쉽지 않네요. 그래도 청년업을 통해 반가운 인연, 따뜻한 응원으로 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에, 느려도 주저 앉지 않고 STEP UP!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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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영화와 사람을 좋아하던 사람들이 알음알음 모여 느슨한 공동체를
일요일의 사람들
이룬지 어언 3년. 일요일마다 모여 영화를 보고, 만들고, 상영을 하는 일요일의 사람들입니다. '청년업' 사업에는 멤버 중 3명이 참여했습니다. 감독 장재원, 배우 박나진, 배우 박준성이 그들입니다.
장재원
치유 영화관은 (젠더), (일탈), (웃음), (연대), (독립), (장인) 총 6개의
일요일의 사람들
주제로 6주간 펼쳐지는 단편 영화 상영과 인문학 토크를 함께 하는 예술 치유 프로젝트입니다.이를 '예술 치유'로 명명한 이유는, 대화와 사유 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인문학적 텍스트로서 영화를 바라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1,000만 관객을 타겟으로 한 상업 영화들이 범람하는 시대에 10명 남짓의 관객을 두고 단편 영화를 상영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를 고민합니다. 먼저, 영화의 완성은 결국 관객의 몫이라는 생각입니다. 영화 GV(관객과의 대화)에 참석하면 흥미로운 현상을 목격하게 됩니다. 관객은 자신의 해석이 옳은지를 제작진에게 묻고, 그게 맞으면 기뻐합니다. 또 관객은 자신의 궁금증을 제작진에게 묻고, 그것이 해소되면 기뻐합니다. 과연 그래야 할까? 영화의 해석권마저 제작진에게 넘긴다면 영화를 본 관객에겐 무엇이 남을까? 우린 본 프로젝트를 통해 관객의 주체적인 해석과 사유의 가능성을 믿어보기로 합니다. 우리는 독립 단편 영화를 만들어 왔고, 만들고 있습니다. 단체에서 개최한 상영회에선 늘 우리가 만든 영화가 틀어지곤 했습니다. 이번엔 시야를 조금 확장해, 독립 단편 영화를 제작 중인 동시대 청년들을 만나 보기로 합니다. 그렇게 독립영화 배급사 '센트럴파크'와 협업하여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12명의 감독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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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사람들의 연대기
마음먹기의 시작
프로젝트의 시작
저만의 애도의 작업으로
2016년 10월입니다. 다큐를 9월에 마무리하고
동아리가 사라지는 어떤 트라우마 같은 것이
만들었던 다큐멘터리가
처음에는 그냥 이름 없이, 제가 믿고 의지할 수
남아 있었거든요. 그때 봤던 문구 중에 ‘모든
시작이라고 해도 될 것 같아요.
있는 동료들을 불러 모았어요. 일요일마다요.
것은 명명되는 순간 죽음을 향해 간다’ 는 내용이
모여서 영화 얘기를 하지도 않았고 당시 정치나
마음에 들어 그렇게 정했어요. 그런데 ‘이름
사는 얘기하면서 놀다가 “뭔가 찍어 볼까?”
없는 모임’도 이름이잖아요? 그래서 철학적
하면서 지속하게 되었고요. 처음에는 모임 이름도
말장난은 관두고 이름을 짓자고 한 게 ‘일요일의
‘이름 없는 모임’이었어요.
사람들’이에요. 일요일에 보니까.
만남 그때 다섯 명 정도 모였어요. 연극을 제가 처음 시작할 때 동기처럼 만난 배우, 연극하다 만났는데 지금은 직장인이 된 사람, 영화를 같이 하다 알게 된 사람, 저랑 동아리 같이 했던 친구, 그리고 저까지 이렇게 다양한 경우였어요. 대학 때보다는 대학로나 다른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이 더 많았죠.
위기 의외로 사람이 가장 많이 들던 시기가 위기였어요. 상영회를 개최하다 보니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확 유입되던 적이 있어요. 매주 15명 정도씩 오는데, 그냥 “우리 이제 뭐 할까요?” 하기에는 많은 숫자잖아요. 그러니, 수평적인 소통을 지향하면서도 (모든 모임이 그렇듯) 총대를 멜 사람이 필요하고 의사 소통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도 생겼죠. 당시는 모두 무방비 상태였던 것 같아요.
극복 17년부터는 멤버 구분이 지어진 것 같아요. 지원 사업을
그 이후에는 모임에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지점을
위주로 활동하는 소수 멤버와 단순히 모임을 계속
빼고, 그런 의견들도 걸러 내게 됐어요. 공동체가 지향하는
나오는 멤버로요. 원래 모임의 취지는 '영화에 대한
목표 없이 막연한 상태에서 누군가의 의견만으로 활동을
관심만 가지고도 편하게 있을 수 있는 집단을 만들자'는
좌지우지한다는 게 너무 유토피아적인 결정일 수 있다고
거였는데, 그 요소가 흐지부지될 수 있다는 게 위기였다고
생각하게 됐으니까요.
생각하거든요.
현재 청소년기 정도라고 생각해요. 청소년기의 특징이 '종잡을 수 없다'는 거잖아요. 이 집단의 모습이 여전히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청소년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청년일 수도 있을 것
청년업
같아요. 우리가 어떠해야 한다는 정의를 계속 유보하고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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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 전공은 러시아어인데 어쩌다
영화 일을 하게 되셨나요? I | 연극 동아리를 들어갔는데, 저는
‘잘못 들어갔다’고 우스갯소리로 얘기하거든요. 동아리를 정말 열심히 했어요. 미군 부대에서 복무했는데 일병 때도 공연에 참여할 정도로요. 동아리 할 때는 배우도 하고 연출도 하고 했는데, 단순하게 '졸업하고도 이거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독립영화 제작도 경험을 하게 됐고, 연극 판에서 지내다가, 경제적인 계산을 해 보니까 연봉이 약 200만 원 정도밖에 안 되는 거죠. 나머지 부분은 아르바이트 등으로 메꾸고 있었고요. 물론 이런 충돌을 타개하려고 영화를 했던 건 아니에요. 영화도 그런 부분은 유사하잖아요. 동아리에서의 사건이 제게 큰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O | 어떤 일이었나요? I | 제가 있던 동아리는 ‘러시아 연극
연구회’였고요. 여름마다 공연을 하는데 연출 기획이 안 나와 버려서 공연을 못하게 된 거죠. 동아리가 공연을 못하는 건 이제 망할 거라는 의미고, 사실 대학교 1~2학년생이
I |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냥 “어, 이제 공연 못하게 됐대” 하는 얘기 정도 듣고, 모여서 끝맺음을 하는게 아니라 그냥 각자의 생활 속에 흩어지더라고요. 누구의 책임도 아닌데 모두의 결과물이 돼 버린 거죠. 그래서 말로 할 수도 있지만, 저는 이걸 기록물로 남겨서 또 이에 대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마중물’이 됐으면 좋겠다는 의도가 있었어요. 무슨 애도를 하고 그랬던 건 아닌데, 제 나름대로는 제 활동에 대한 한 장의 정리가 됐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이제 나는 뭘 하지?’하는 질문에서,
I | 또 그에 대한 공공 기관의
지원이나 수요가 넉넉한 것 같아서 ‘치유 영화관’이라는 사업도 이런 부분을 구체화하는 작업의 일환이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어요. O | 영화를 만드는 것만으로
그때 이제 연극을 풀타임으로는
생계 유지가 될 거라는
하기 어렵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기대도 하고 계신가요?
찰나라 ‘일요일의 사람들’을 만들게 됐어요. ‘일요일의 사람들’은 동아리 같기도 하고, 제작사라고 할 수도 있고, 예술 집단이라고 하면 그럴 수도 있는 곳 같아요. 제가 믿는 사람들이 있고 또 친하거나 안 친하거나 다양한 구성원들이 있는데, 저는 어쨌든 커뮤니티가 없이는 어떤 예술 활동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인정하고, 절실하게 느끼고 있기도 해요. O | 연극 동아리에서 이제 영화로
I | 지금은 내가 하는 일 안에서의
차별은 스스로 두지 않으려고 해요. 일을 ‘메인’과 ‘사이드’로 나누다 보면 제가 괴롭더라고요. 사이드가 늘어나면 불안해지고, 메인이 너무 적을 땐 '내가 이걸 원하는 게 아닌데' 생각하게 되고, 이런 충돌을 계속 겪다 보니 단련이 된다고 할까요? 20대 때 접근했던 예술은 그냥 내가 원하는 것과 내 생각을 구현하고 땡이었다면, 이제 이런 것을 하려면 이만큼의 책임을 갖게
연극을 하는 것 자체가 너무 큰
넘어와서 팀도 만들었는데,
되는 게 예술이란 거구나 생각해요.
의미처럼 돼 버렸어요. 또 동아리
영화는 업이 될 수 있을까요?
지속적으로 나의 활동을 하려면
내부에서 쌓여온 문제도 있었고요. 남성 선배 위주의 적폐 같은, 술 문화나 여 후배들에 관련된 그런 것들이 어떤 큰 사건으로 터져 나온 건 아닌데 얘기가 나왔던 거죠. 이 시기에 처음으로 저의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됐어요. O | 동아리가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다큐였나요? I | 네. 동아리가 사라지는 것
자체보다 그 구성원들이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I | 범위가 좀 넓다고 생각하지만,
충분히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시점에서는 영화 교육과 관련 프로그램을 운영할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사실 가장 메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영화를 창작하고 배급하는 일인데, 이것만으로 업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은 100%는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우선 교육 관련한 일이 성격적으로 잘 맞는 것 같고,
함께 중요한 것들이 있겠다는 생각도 하고요. 구조적으로는, 가끔 이게 시장성이 없다는 이해가 와닿는 순간이 있잖아요. 왜 늘 지인 관객으로 채워지는지 같은…? O | 아무래도 그렇죠? I | 네. 그래서 이번 제 실험의 목표
중 하나는 일반 관객 비율 80%를 채우자는 거예요. 늘 80%가 지인 관객으로 구성돼 왔기 때문에, 공금을 받아서 프로젝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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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 수행하는 의미가 퇴색되지
O | 지원서 내용 중 여쭤 보고 싶었던
O | 영화들의 선정 기준이 여성, 젠더,
않기를 바라고 있어요. 최근에
게 있는데, 영화는 세상을 치유할
가치, 개인, 치유 같은 것들인데
동료 감독님이 ‘불빛 아래서’라는
수 있을까요? 꼭 영화라기보다,
어떻게 정해진 건가요?
다큐멘터리를 연출하셨는데,
예술일 수도 있고… 어떤 ‘이야기’가
‘웨이스티드 쟈니스’, ‘로큰롤
세상을 치유할 수 있을까요?
라디오’ 같은 세 팀의 홍대 인디 락밴드의 7년간의 활동을 담은
I | 제 생각엔 사실 백 프로예요.
I | 팀원이 3명인데 각자 고르자고
얘기를 하면서, 딱 하나 주장했어요. 우리가 어떤 단어를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에 그냥 영화
얘기해도 그것으로 영화를
두 편 보고 이야기를 만드는 것의
찾아내고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프로젝트 이름을 ‘치유 영화관’
있도록? 주제 당 두 작품 선별해서
이라고, 말도 안 되게 과감하게
총 12작품을 골랐는데,
붙여 버린 거고요. 사람들이
사실 젠더의 관점으로 그 작품들
자기 시간을 내서 무언가를
전체를 얘기할 수 있을 거예요.
보고 수용하고 혹은 털어내고
이런 점 때문에 특히 우리가 지금
지나가면서, 저는 어떤 화학 작용을
이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시점에서
일으킨다고 생각해요. 그런 것을
가장 관심이 많거나 고민을 많이
만들어 주는 시간이라고 생각을
가지고 있는 주제를 꺼내 놔야 우리
했고, 이 ‘치유 영화관’에 한정해서
스스로도 활동을 하면서 사유도 더
영화를 보고 나가는 과정이라든지,
많이 하고 준비도 열심히 하게 될
이걸 보고 다음의 어떤 활동에서
것 같다는 생각이었어요.
다른 영화를 보고도 자신과의
작품을 배급사에 요청하는
연결을 할 수 있고 스스로의
과정에서도 굉장히 그쪽에서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다는
사려깊게 의중을 물어오고
그런 구조가 사실 하나도
믿음을 가져갈 수 있다면 그게 제가
데이터베이스도 많이 있어서,
없었던 거네요.
그리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에요.
원래 최근 3년 내의 작품들을
저는 영화가 그런 텍스트의 하나가
모으려고 했다가 확장해서 5년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이내의 작품을 선별하게 됐어요.
내용이에요. 인디 씬에서 좀 버텼고 팬층도 있고, 그런데도 생활은 쉽지 않고 자괴감을 표현하면서, 그런데 공연이라는 것이 너무 강렬하고 자신에게 핵심이 되는 활동이라 멈출 수가 없는… 그 와중에 제가 공통적으로 느끼게 되는 이분들의 의식은 홍대 인디 씬이라는 게 있다고 믿어 왔고 그 안에서 열심히 하면 생계를 해결하게 되거나 유명해질 수 있다고 믿어 왔는데, 7년이 지나고 보니 그 씬이 실재하느냐에 대한 질문이 남더라고요. O | 생태계가 있다고 믿었는데
I | 네, 공연은 늘 있고 팀도
넘쳐나지만, 이제 어느 라디오 방송의 프로그램 라인업을 봐도 예전에는 있던 팝이나 락을 다루는 채널들을 찾기가 쉽지 않게 되었고, 듣는 사람들의 취향도 편중돼 있다는 점도 있지만 그들만의 문제는 아니잖아요. 사회 전체적인 흐름이 돈 되는 것,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것, 빠른 것의 방향을 좇다 보니 저의 얘기와도 겹치지 않을 수 없더라고요. 홍대 인디 씬의 경우는 저와 다른 분야의 사람들 얘기지만, 나도 각오해야겠다, 내가 지금 이 상태로 앞으로 5년을 산다면 무슨 의미를 찾을지, 나를 강하게 만들 수 있는 건 무엇일지 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 거죠.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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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 본인에게 직업이란 무엇인가요? I | ‘복잡다단한 것’인 것 같아요.
살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아붓는 것인데, 생활을 유지하는 원동력이기도 하고 생활을 벗어나게 만들고 싶은 스트레스일 수도 있는 거고요. 그리고 저는 평소에 일이 없을 때도 최소 세 가지의 일은 제 주변에서 진행되고 있더라고요. 많을 때는 일곱 가지 정도의 일을 하면서 하나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조바심도 들고, 그래도 일단 주어진 거고 어떻게든 내가 이것들을 해내 보자 하는 마음으로 하다 보니 매달 매주 제가 업이라고 볼 수 있는 활동이 카멜레온처럼 조금씩 달라지는 게 느껴졌어요.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I | 지금은 그게 재밌는 거라고
예전엔 제가 하고 있는 일을
생각하지만, 프리랜서는 누구나
설명하는 게 되게 힘들었거든요.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이게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를 보면, 나는
내년에도 지속될 수 있을까?
이거도 하고 저거도 하고 있고.....
아니면 다음 달엔?
해야 삶이 설명이 되는데 그걸
O | 부담이 생기죠. I | 네. 이 바쁜 와중에도 다음 스텝을
다른 친구한테 반복하는 과정이 좀 고단하게 느껴졌어요. ‘왜 내 삶은 이렇게 복잡할까’ 하는 생각도
생각하고 있는, 복잡다단함이 있죠.
들었고요. 그런데 요즘에는 ‘내가
또 세 번째 복잡다단함은 저와
이걸 다 설명할 필요가 있나?’
저의 방향을 공유하는 팀원들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굳이 모든 걸
서로에게 에너지가 되고 동력이
얘기하려고 하지 않고 내가 만나는
되는데, 그 외의 외부 세계와의
사람들과 나의 교집합을 만들 수
소통을 하고 있으니까… 가족이나
있는,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을
여자친구도 그렇고요. 이 세계를
골라서 꺼내 놓는 재미를 느끼고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내 말로만
있어요.
접하는 사람들은 늘 어긋남이나 오해가 생길 여지를 가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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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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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VEY.
일요일의 사람들 Q. 당신에게 업(직업)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A. 복잡한 것. 매일 현재와 다음 달, 내년을 걱정하게 만드는 어떤 것. 돌아보면, 돈벌이와 예술 창작 작업 간의 간극을 조금이라도 좁히기 위해 지금껏 발버둥쳤다. 그 사이 타협도 늘었고 요령도 많이 늘었다. 생각해 보면 복잡한 건 복잡하게 풀어야 하는 것이 맞다. 세상은 늘 복잡하며, 산다는 건 누구에게나 복잡한 거니까.
Q. 어린 시절의 꿈은(직업으로서) 무엇이었나요? A. 의사.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로 진료해 주고 싶었다. 조금 더 커서는 선생님. 분필을 색깔별로 모으며, 자기만의 세계관을 칠판에 펼쳐가는 선생님들의 세계를 동경했다.
Q. 현재의 일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에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대학 시절 연극 동아리에서 예술을 배우고, 졸업 후에도 예술 활동을 지속하겠다는 결심을 했었다. 그러던 중 어쩌다 영화를 만나게 돼서 지금은 영화를 매개로 제작, 상영, 프로그램 운영, 강의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예전만큼 즐겁지는 않다. 예전만큼 뜨겁지도 않다. 하지만 외부 환경에 적응하면서 나름대로 적응해 나가고 있다. 계기는 거창한 것이 아니었는데, 다시 돌아가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Q. 직업 실험에 꼭 하나 필요한 요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일 수도 공간일 수도 자금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A. 꼭 하나만 얻을 수 있다면 그건 상영 공간. 사람도 있고 공간도, 자금도 현재는 충분하지만, 작업실 외의 커뮤니티 공간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 현재는 외부 공간을 이곳저곳 활용하여 활동을 이어 가고 있지만, 누군가의 공간을 잠시 쓰는 데에는 늘 제약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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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직업 실험을 통해 실제로 자신의 직업으로서 현재의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월급을 책정한다면 얼마입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A. 300만 원. 지금 한달 생활을 유지하는데 250만 원 가량이 든다. 저축을 좀 늘린다는 가정 하에 50만 원 더해서 300만 원.
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성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5년 후의 본인을 상상한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A. 독립 영화계에서는 나름의 활동으로 이름을 좀 알렸을 것이고, 여전히 힘겹게 창작 활동에 임하고 있을 것 같다. 창작 활동은 여유가 있든 없든 늘 힘들다.
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장렬하게 실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직업 실험의 경험이 남았습니다. 실패의 경험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A. 자신의 신념이 꺾이는 경험은 보통 스스로를 두 갈래 길로 안내한다. 그 신념을 강화하거나 혹은 약화하거나. 나의 경우는 되려 그 신념을 강화할 것이다. (이 말은 즉 실패에서 어떻게든 의미를 추출해 내어 스스로를 보호한다는 의미다.) 스스로 믿는 가치에 대한 고집이 곧 나의 신념인데 이건 정말 누구도 바꾸지 못하는, 나란 인간의 코어(핵심) 인 것만 같다. 그래서 통렬한 실패를 즐기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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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VEY.
일요일의 사람들 Q.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 본인의 작업에 새롭게 도전하고자 하는 청년에게 해주고 싶은 말, 혹은 조언이 있다면? A. 당신의 분야에서,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을 너무 자주 바라보지 마세요. 그냥 방에 포스터 한장 붙여 놓고, (스마트폰에 사진 몇 장 저장해 두고) 동경만 하세요. 지나치게 동일시를 하거나 부러워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비하나 자조로 이어질 수 있답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나는 이런 사람이니까'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가두지 마시고. 보통 사람들은 스스로는 답을 잘 알면서 주위 사람들 눈치 보느라 결정을 쉽게 못 내린답니다. 마음 속에서 하라는 대로 한 걸음만 걸어 보세요. 딱 한 걸음만. 선을 넘어야만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지점이 분명 있습니다. 그런 경험이 쌓이면 자신이 걷는 길에 대한 자신감이 생길 거예요. 외부 세계와는 조금 불화하더라도요.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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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본인이 청년업을 통해 경험한 ‘업’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면, 당신의 직업은 어떤 명칭을 갖게 될까요? 자유롭게 직업의 명칭을 상상해 주세요. (여러 개를 작성해 주셔도 좋습니다.) A. 영화 토론가, 영화 치유사, 씨네마 힐링 프로그래머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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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일이삼컬렉터는 2015년 결성된 팀으로 한복, 가죽, 가구 등 버려진
일이삼컬렉터
일이삼컬렉터
물건을 수집하고, 재가공하여 오브제를 전시하거나 제품을 제작하여 판매하는 일, 리사이클링 교육 컨텐츠를 개발하여 워크숍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활동을 해왔습니다.
지난해 팀원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작업실을 운영하면서 ‘안정적인 수익 구조’에 대한 본격적인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버려진 물건을 수집하고 업사이클링 제품을 제작-판매하는 일이 안정적인 수익 구조를 갖게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실험으로, 이번 사업을 통해 숙련된 기술자와 디자이너 등 지원 체계를 구축하여 업사이클링 사업 모델의 지속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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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이삼컬렉터의 연대기
프로젝트의 시작 2016년 6월에 사업자를 내면서 시작되었고, 2018년 10월에 작업 공간을 구하면서 더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남 팀원 중 한 사람은 제 중학교 선배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제가 학교에서 만났는데 알고 보니 중학교 후배였어요. 그렇게 알고 지내다가 처음 한복을 얻게 되었을 때 연락을 돌렸고, 모여서 팀이 만들어진 거죠. 2015년 초였을 거예요.
위기 작업실 구하기 직전이요. 이 일을 지속해야 할지 끝내야 할지에 대해 얘기할 때였어요.
극복 아마도 졸업을 하게 되면서 각자의 상황이 변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미래에 대한 얘기를 나누게 된 것 같습니다. 지금은 잘 정리가 돼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현재 저는 이 팀이 유아기로부터 시작해 노년기까지 흘러가는 팀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계속 청년기에 머물러 있지 않을까요? 아니, 청년기가 아니라 청소년기. 청소년기에
청년업
머물러 있는 팀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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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해 보고, 이 과정에서 데이터들을
축적해 현재 가지고 있는 제작 부분에서의 한계를 뛰어넘어 보는 것이 저희가 보는 이 사업의 핵심이에요. O | 원래 의류 관련된 일을 안 하신 것
같은데, 왜 한복이었나요? C | 제가 아는 분이, 한복이 엄청 많이
버려지는데 그걸 얻었다고 관심 있느냐고 물어 왔어요. 그렇게 해서 지인 분이 컨테이너에 넣어 놨다는 것을 찾으러 갔는데 탁 열어 보니 한복이 쏟아지더라고요. 버려지는 한복이 컨테이너 하나 분량 만큼 있었어요. 그런데 너무 예쁘더라고요. 그게 2015년 초였어요. 그 당시 저랑 같이 살던 중학교 동창인 친구가 전통의상학과 졸업생이었어요. 이제 전통의상 O | 팀 소개 부탁드릴게요. C | 저희는 ‘일이삼컬렉터’라고
하는 팀입니다. 2015년 말부터 시작되었고, 실질적인 활동은 2016년부터였는데 그래도 더
O | 생각해야 할 텐데, 업사이클링
모델의 지속 가능성과 수익성이 양립 가능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C | 업사이클링의 특성상 사람 손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 건 작업
필요한 부분이 아주 많아요.
공간을 얻으면서부터인 것 같아요.
해체며 제작이며, 단순히 버려지는
2018년 10월에 저희가 작업실을
물건을 재사용한다는 개념을
구했거든요. 그 전에 우리가
넘어 그 자체의 특성을 가진
이걸 계속 할지 말지, 한다면 좀
제품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선
본격적으로 할 것인지에 대한
많은 손 기술자들이 필요하다고
논의를 했어요. 결정 당시 저희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지속이
팀원은 총 4명이었는데, 그중
가능하려면 이 재생산의 과정을
2명이 학교를 졸업하게 되면서
안정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자연스럽게 이제 어떻게 할까를
미션이 있어요. 그런데 이걸
고민하는 시기였거든요.
내부에서 다 해결할 수는 없어서,
'그래도 이왕 시작한 거, 끝까지
이번 사업에서 저희가 나름대로
해 보는 게 어때' 하는 얘기를 많이
실험해 보고 싶은 건 ‘동네
했죠.
기술자들을 찾는다’예요. 그래서
O | 업사이클링 모델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문구를 지원서에서 봤어요. 직업으로 삼으려면 수익성도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학과가 많이 없어지고 있잖아요? 원래 그 친구에게 주겠다고 해서 같이 가서 봤는데 정작 그 친구는 열악한 환경에서 오래 일한 것이 트라우마가 돼서, 이제 한복 건드리기도 싫다며 영 관심이 없더라고요.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작업실 주변으로 ‘ㅇㅇ수선’ 등 업체들을 찾아서 맡겨 보고, 커뮤니케이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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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 그때도 여기까지 올 거라고
예상하셨나요? C | 예상은 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저희 팀의 모토 같은 게 있는데, 버려진 물건을 매번 같은 물건을 찾아서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게 있어요. 한복을 소진하면 유유히 다른 걸 찾아서 떠날 생각이에요. 그래서 처음부터 한복 자체에 큰 의미를 두고 시작한 건 아닌데,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고, 한복이라는 소재가 워낙 까다롭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산자나 기술자들을 찾게 된 것도 있고요. 또 한복이라고 하는 걸 중심으로 이 생태계에 좀 많이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광장시장에 주단한복부라고 한복 주단을 파는 가게가 있어요. 버려진
C | 수입이 없는 상태예요. 그런데
저는 정당에서 일을 하거나 영상 프리랜서로 오래 활동을 해 왔고, 지금 시대에는 어떤 하나의 직업을 계속해서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게
편인 듯해요. O | '사람들이 찾는 사람'이신 거네요? C | 아마도 기술이 있기 때문이겠죠.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되는대로 계속했던 것
지금 제가 하는 일들이 일이삼
같아요. 선거 캠프에 있을 때도
컬렉터 안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는
슬로건을 정하고, 시각물과 SNS로
일이라고도 생각하고요. 지금은
캠프의 이미지를 목적에 맡게
기반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
전파하는 일들을 해 왔는데 이런
때문에 다른 곳에서도 일을 하고
일들이 어떤 직업이라고 불려야
있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능력들이 있는데 이걸 여기서는
드는 생각은, '이렇게 살다가 내가
이걸 쓰고 저기서는 저걸 쓰고
아프거나 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것보다 내가 운영하고 싶은
하는 걱정이죠. 몸을 많이 써야
팀 안에서 프로젝트에 따라 능력
하는 일들을 하고 있어서, 당장
들이 다르게 적용되는 그림이 제가
세 달 정도 일을 못 하게 되면
가장 바라는 모습인 것 같아요.
모아둔 돈도 많지 않고 생활비도
O | 지금 본인이 지속 중인 다양한
한복들을 작게 잘라서 스와치 북을
분야의 일들은 대체로 어떤 계기로
만들었고, 그곳에 찾아갔었어요.
시작된 일들인가요?
거기서 일하시는 분께서 보시고
C | 누군가가 제게 제안을 많이 하는
나갈 텐데, 이런 고민을 하면서 암담해지기는 해요. 개인적으론 바쁘기도 하고 이런 고민을 하는 시간이 아까워서, '어떻게든 되겠지'
C | 단순히 말하면, 저는 설득하는 일을
더이상 이렇게 퀄리티가 좋은 한복
좋아하는 것 같아요. 가령 누군가
천은 생산하지 않게 되었다고
내게 어떤 목적을 가지고 뭘 시켰을
하시더라고요. ‘색동’은 국내에는
때, 제가 느끼기엔 그 목적이 정말
이제 대구 공장 하나가 남았고 다
달성되려면 그 시키는 대로 해선 안
문을 닫았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된다고 느낄 수 있잖아요?
대부분 다른 나라에서 수입해서
그러면 그 사람을 설득시켜서,
쓰고, 처음부터 끝까지 국산으로
처음 합의한 목표에 도달하도록
제작되는 색동은 대구에
하는 게 중요해요. 목표를 잘
한 곳에서도 나오지 않아요.
달성하기 위해서 과정을 수정할
별 생각 없이 시작했던 일인데
수도 있는 거니까요. 저는 조금
이런 것들을 알게 되는 거죠.
일찍이 영상 기술을 배워서 그걸로
하고 있지만요.
O | 그런 와중에 ‘일이삼컬렉터’를
계속하게 되는 동력은 뭘까요? C | 저는 동료들이라고 생각해요.
경제 활동을 해 왔는데요. 우연한
지금 세 명의 다른 동료들과
많이 갖고 계신 것 같고, 컨텐츠
기회에 지방에서 어린이들이나
일하고 있는데, 합이 너무 잘
제작도 사업 내에 포함돼 있는 것
노인 분들과 영화를 만들기도 하고,
맞고 오랫동안 맞춰 왔기 때문에
같은데 기획자의 일에 가깝다는
문화 예술 교육 일을 했었거든요.
서로의 결을 많이 알고 있어요.
생각이 들었거든요. 지금 하는
그러다가 뭔가 좀 새로운 것을
이런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이 일로 직업을 삼을 수 있다고
배워 보고 싶다는 생각에 학교에
생각이 들어서 지금 우리 셋이
생각하시나요?
입학했고, 또 거기서 우연히
뭔가를 잘 해낼 수 있으면 너무
서울시장에 출마한다는 친구가
좋겠다라는 생각이 지속적으로
있어서 그 일에 관련된 영상 만드는
들어요. 그래서 청년업 같은 지원
걸 돕다가 선거 캠프에서 홍보국장
사업에도 도전하는 거죠.
O | 전시, 기획, 네트워킹에도 관심을
C | 팀명에 컬렉터가 있는 것이 그런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일이삼컬렉터는 현재 상황에선
청년업
일도 하게 됐었어요. 어떻게 보면 159
SURVEY.
일이삼컬렉터 Q. 당신에게 업(직업)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A. 요즘 내가 가장 오랜 시간 신경써서 하는 일. 그리고 그 일의 대가로 돈을 받는 것.
Q. 어린 시절의 꿈은(직업으로서) 무엇이었나요? A. 어떤 직업을 꿈꾸진 않았다. 하고 싶은 일로 먹고 살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Q. 현재의 일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에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나는 버려진 고물을 그냥 지나치지 못 하고 한 번 꼭 돌아본다. 내가 고쳐서 쓸 수 있진 않을까? 값어치를 못 알아본 사람들이 혹시 버렸다면? 하는 생각 때문에. 이 일을 하며 계속 주울 수 있어서 좋다.
Q. 직업 실험에 꼭 하나 필요한 요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일 수도 공간일 수도 자금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안정적인 작업실. 일이삼컬렉터는 짐이 많다. 그리고 뭔가를 만드는 데 많은 도구 실험을 한다. 거기에 필수 조건이 바로 공간이다. 편하게 맘껏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 너무 중요하다.
Q. 직업 실험을 통해 실제로 자신의 직업으로서 현재의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월급을 책정한다면 얼마입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A. 최소한 한달에 100만 원은 드는 것 같다. 100만 원? 차라리 일은 일주일에 3일만 하고 100만 원 정도 받고 싶다. 나는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것보다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것이 좋다. 그런 직업이 있다면, 돈을 적게 벌더라도 그렇게 먹고살고 싶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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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성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5년 후의 본인을 상상한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A. 엄청 큰 창고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부피가 큰 물건도 줍고 싶다.
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장렬하게 실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직업 실험의 경험이 남았습니다. 실패의 경험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A. '직업이란 과연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통렬하게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
Q.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 본인의 작업에 새롭게 도전하고자 하는 청년에게 해주고 싶은 말, 혹은 조언이 있다면? A. 현재 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한달 생활비를 고정 수입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 그걸 고민하여 역으로 직업을 설계해 보면 어떨까? (지금 나에게 필요한 조언인 것도 같다)
Q. 본인이 청년업을 통해 경험한 ‘업’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면, 당신의 직업은 어떤 명칭을 갖게 될까요? 자유롭게 직업의 명칭을 상상해 주세요. (여러 개를 작성해 주셔도 좋습니다.) A. 잡(job), 잡업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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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시민단체 (사)전국귀농운동본부의 청년학교 3기를 통한 만남으로
젊은연구자들 모임
탄생한 팀입니다. 서로를 만나게 된 청년학교가 생태적이고 자립적인 삶, 지속 가능한 삶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배우는 장이었기에 앞으로의 삶에 대한 고민과 관심사 등 공통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후속 모임을 이어 가기로 하고, 2018년 7월, '젊은 연구자들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윤성은, 정순문
농사라는 ‘덕업’을 통하여 도시와 지역(농촌)에 사는 사람들의 생태적이고
젊은연구자들 모임
대안적인 삶, 공동체적 자립에 ‘구체적 역할’을 해 나가고자 합니다. 이 일을 토대로 저희의 경제적 자립 기반도 만들어 도시에서의 생태적 삶을 실현시키고 싶다는 마음과 의지로, CSA의 한 형태인 '농산물 꾸러미 사업' 을 준비하고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농산물 꾸러미 사업'은 우리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기존 꾸러미 사업들의 한계들, 도시 생활인들과 농부가 상생하고 교류하기보다, 서로의 관계가 건강한 먹을거리를 생산하여 제공하고 소비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점, 포장하고 택배로 배달되는 과정에서 많은 쓰레기가 발생한다는 점, 사 먹는 것에 익숙하고 제철 재료로 요리를 해 먹는 일이 쉽지 않아 버려지는 꾸러미 농산물이 있다는 점 등을 개선, 극복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하여, 먼저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하여 모든 꾸러미를 제로 웨이스트 꾸러미로 구성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직접 꾸러미 사업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CSA의 중간 지원 기관으로 발돋움하여 다른 생산자들과 함께 '거점형 로컬푸드 배송' 모델을 개발하고자 합니다. 택배를 이용하는 기존 꾸러미 모델은 배송료를 줄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서로 얼굴을 보기 어려운 도시 생활인과 농부의 관계가 단절되기 쉽습니다. 이를 위해 각 지역의 생산자 연대와 함께 사전에 꾸러미 주문을 받아 각 지역 오프라인 거점에서 직접 소비자들을 만나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꾸러미를 전달하고 소통하는 기회를 만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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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연구자들 모임의 연대기
마음먹기의 시작
프로젝트의 시작
‘청년업’ 하면서요. 최근이에요. 한 달 이내인 것 같아요.
공모 사업 지원서 쓰면서예요. 2019년 4월 말부터였던 것 같아요.
만남 2018년 6월 13일인가, 그랬던 것 같은데 청년학교에서 첫 수업을 한 날이었어요.
위기 이 프로젝트의 목표 중 하나가 ‘직접 꾸러미 농부가 되어 보자’는
그런데 논밭에서 농부들이랑 소통하는 제 입장에서는 그게
것이었어요. 그래서 저희가 농사지은 것으로 다섯 가정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거였거든요. 잎채소를 2~3일 전에 따놓을 수
꾸러미를 보내고 있어요. 7월 30일쯤 첫 꾸러미를 보내는데
없는 것이고, 현장의 사정은 잘 모른 채 얘기하는 것에 마음에
이게 너무 힘들었던 거예요. 왜냐하면 원래 26일에 보내기로
상처도 받았어요. 그 친구 입장에서도 제가 현장에 좀 와야 알지
했는데 그날 비가 왔거든요. 비가 오는데 채소를 따면 다 물러서
하는 식으로 얘기하니까 스트레스를 받고, 이게 서로 소통이
간대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한 친구가 이렇게 얘기한 거죠.
온라인 메신저로 되는 것의 안 좋은 점인 것 같아요. 나중에 알고
우리가 약속을 했는데 어떻게든 보내야 하지 않느냐, 비가
보니 선우도 오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당시 직장에서
올 건 미리 알았는데 왜 미리 따지 않았느냐 하는 식으로요.
굉장히 힘들었던 시기를 보냈더라고요.
극복 만나서 풀었죠. 만나서 얘기하고 진심도 알게 되었고, 아무튼 그래서 첫 번째 꾸러미를 보내고 두 번째 꾸러미를 보내기 직전이 위기였어요. 사실 꾸러미를 보낼 때마다 위기인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저희가 농사의 베테랑이 아니다 보니 그렇겠죠.
현재 유아기입니다. 팀이 생긴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이제 꾸러미는 막 해 보고 있는 단계에 CSA는 아직 시도하려는 중인 거니까 그 정도가 맞는 것 같아요.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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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Y | 저는 윤성은이고요. 저희는
‘사단법인 전국 귀농 운동 본부’라는 곳의 ‘청년학교’ 3기에서 만났어요. 서로 가치관도 비슷하고 통하는
Y | 너무 의미 없다는 생각도
Y | 귀농에 꽂혔고 또 영화는 잠시
들고, 도시에서의 삶도 그와
뒤로 밀어두게 되었죠. 제가 찾고
마찬가지였죠. 그래서 한 살이라도
있던 거는 꼭 농사나 영화 그런
젊을 때 그냥 하고 싶은 일부터
게 아니라 대안적인 삶이었던 것
하자 싶어서 퇴사를 했어요.
같아요. 내가 옳다고 믿는 삶을
면이 많아서, 짧았던 청년학교 활동 기간 이후에도 모임을 이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우리 이 활동만으로 끝내지 말고 많은 친구들과 나누고 사회적으로 확대를 해 보자 합의한 후 여러 공모 사업을 알아보다가 ‘청년업’ 지원서를 내게 됐어요. 팀명은 사실 앞에 괄호가 있는데 ‘(농사와 농부와 농촌을 생각하는) 젊은 연구자들 모임’이라는 이름이에요. 너무 길어서 앞을 생략한 건데 그래서 이름에 대한 질문이 많죠. J | 저는 정순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청년학교 같이 하다가 함께 지원하게 되었어요. 사업의 형태이다 보니 제가 약간 몸담고 있었던 시민운동의 성격과 닮아서 어떻게 엮어 볼까 하다가, 청년 농민의 활로 지원이라든지 이런 부분에 착안해서 유통 쪽으로 아이디어를 잡고 프로젝트를 기획했습니다. O | 어떤 경위로 청년학교에 가게 되신
거예요? Y | 일반적인 영리 목적의 회사를
다녔었어요. 저는 국어 국문학과를 나와서 우선 하고 싶은 일은 뒤로 미루고 돈을 모으자는 생각으로 편집 회사에 들어간 거죠. 회사 사보도 만들어주고 기업 홍보물도 만들어주는 그런 곳이었는데 사주의 마음에 드는 홍보지를 만든다는 게 그렇게 공익적이지도 않고, 쓰레기만 만드는 것 같았어요. 내가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서 하는 일인데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O | 혹시 그때 나이가 어느
정도였나요? Y | 스물여덟? 스물아홉 정도
되었어요. 그리고 저는 원래 환경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농사 짓고 살고 싶다는 막연한 로망도 있었고요. 예전부터 제대로 된 인생의 진리를 알려면 농사를 지어 봐야 할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귀농 운동 본부에서 하는 귀농 학교에 가게 됐던 거죠. 교육장이 경기도 군포에 있어요. 사실 저는 영화 연출도 꿈이었는데, 원래 ‘돈 벌어서 하고 싶은 일 하자’의 하고 싶은 일이 영화였거든요. 그런데 돈을 벌든 아니든 ‘그냥 영화가 만들어지는 게 아니네’ 하는 와중에
Y | 찾아가야겠다 생각하다 보니
귀농 학교도 가고, 소농 학교도 가고 했던 것 같아요. O | 순문 님은 청년학교에 가게 된
경위가 어떻게 되나요? J | 저는 누나처럼 농사를 좋아해서
거기 간 건 아니고요. 2~30대도 남들과 비슷하게 공부하면서 보냈어요. 제 본업은 변호사인데 로펌에서 30대 초반부터 2년간 일을 하다가, 소위 ‘현타’가 왔어요. 이건 아닌데 하면서… 원래 성향이 소비하는 것을 좋아한다면, 그냥 일해서 돈 벌고 소비하면서 살면 되는데 제가 그렇지 않거든요. 소비하는 취미도 없고 딱히 좋아하는 게 없는 성격이다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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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 굳이 이 과중한 업무를 왜 내가
O | 청년학교 3기에서 만나서 같이
Y |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유통에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죠.
활동을 하자고 했을 때 어떤
초점이 맞추어졌고, 그게 청년
저는 원래 사회적인 일을 하고
것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오게
농부들이 귀농을 할 때 가장 장애가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되었나요?
되는 부분이었기 때문이에요.
대안을 찾다가 비영리단체에 취업을 했고 공익 변호사로 진로를 바꿨습니다. 지금 제가 하는 일은 사회 취약 계층에 대한 변호를 지원하고 사회적 기업이나 사회적 경제 조직에 대한 법률 자문을 하는 일이에요. 업무적으로는 만족스럽게 일하고 있지만 아직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은 고민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고민하던 차에 ‘청년학교’라는 프로그램을 듣게 된 거죠. 이 프로그램은 꼭 농사를 가르치는 게 목적은 아니고, 대안적인 삶을 모색하고자 하는 청년들의 모임 같은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곳에서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친구들을 만날 수 있겠다
Y | 청년학교 활동이 어떤 마중물이
되었던 것 같아요. 이후에는 이 활동이 지속되어야 의미 있는 시간이 만들어질 테니까 한 달에 한 번씩 만나서 책을 읽든, 지역을 방문해 사람을 만나든 세미나나 모임을 가졌어요. 그리고 얼마나 자급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농사를 같이 짓자 해서 작년 8월부터 김장 농사부터 시작했거든요. ‘고추는 지금 못 심어서 고춧가루는 자급 못하니까 백김치를 담자’ 이런 목표로 농사도 같이 짓고, 이런 활동들을 해 오고 있었어요. O | 그럼 이 사업의 시작은 어떻게
하게 되셨나요?
기존 유통조직들과 어떻게 차별화를 시키지 하는 고민에서 CSA 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 유통 모델을 보고 이걸 우리가 국내에 도입해 보자는 프로젝트로 기획하게 되었고, 이 CSA는 간단히 얘기하면 농산물을 마트 등의 유통을 통해 상품으로 거래하는 게 아니라 도시에 있는 소비자와 농부를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서 그 안에서 교환을 하는 형태의 농업을 하자는 이념이에요. 철학적 이념은 그렇고, 실제로 나타나는 모습은 ‘거점 배송’이라는 형태인데, 농사를 지어서 택배를 보내는 방식이 아니라 사전에 농사를 주문 받아서 어떤 거점에
싶어서 지원을 했고, 공부하면서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됐습니다. 두 달 만에 많은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더 같이 이야기를 해 보면 인생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친구들을 만나서 이후 활동을 같이 해 오고 있고요. O | 성은 님은 본업이 어떻게 되세요? Y | 저는 흔히 말하는 백수고, 프로젝트
시작할 때는 ‘이만 쉬었으면 됐다’ 싶어서 구직 활동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 프로젝트에서 농사를 맡고 매일매일 논밭에 가서 일하다 보니 이게 너무 즐겁더라고요. 이런 일은 ‘9 to 6’ 일하게 되는 직업을 갖게 되면 할 수가 없으니까… 지금은 농사를 주 활동으로 하고 그때그때 필요한 비용은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구직 활동은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 스스로는 저 자신을 ‘독립 활동가’라고 정의하고 싶어요.
청년업
Y | 여러 공모 사업에 도전하는
Y | 도시 소비자와 농촌 생산자들이
과정에서 ‘청년업’ 공고를 보고,
모여서 교환하고 식사도 하고
우리가 기존에 하는 활동을
하면서 일종의 이벤트 같은 기획을
비즈니스의 관점에서 풀어서
하는 거죠.
지원해 보면 어떨까 하는 논의를 했어요.
165
Y | 국내에서는 어떨지 아직 모르지만
Y | 또 도시 생활인들도 지역 단위로
Y | 젊은 세대로서 지역 소농들의
선진국에서는 이 모델이 잘 굴러
묶어서 그 지역의 커뮤니티와 서로
경제적 자립을 돕는 역할을 했으면
가고 있고 일정한 이익이 나고
교류할 수 있도록 지역 거점들을
좋겠다고 먼저 아이디어를 냈어요.
있다고 해서, 이 프로젝트에서
만드는 것까지 여러 사람들과
그 얘길 들었을 때 제가 선우나
한 번 실험을 해 보자고 하게
만나서 해 보고 싶은데, 우선
순문보다 이 판에서 조금 더
되었어요.
제대로 된 모델을 하나 만들어
오래 있었던 사람이니까 저에게
내야 해요. 우선 경기도 군포에
있는 네트워크를 가지고 이걸
이런 식으로 생태적 농사를 짓는
도와야겠다 생각하게 되었어요.
농부님들이 많은 걸 알고 있는데
또 제로 웨이스트라는 게 굉장히
그 연대가 쉽지 않아서, 그 부분의
생태적 삶을 실천하는 일이잖아요.
역할을 저희가 해서 농부 연대를
이 프로젝트 하면서 대화를 나눴던
‘꾸러미’라는 방식이 국내에서도
만든 뒤 도시 생활인들의 묶음과
농부 분들이 가장 눈이 뜨이는
이뤄지고 있어요. 근데 이거는 거의
이어서 이 중간 도움 역할을 하는
부분이 이거였어요. 이분들은
택배 방식을 통해 유통이 되거든요.
청년들 또한 경제적 자립을 이룰 수
생태적인 고민을 하면서 귀농을
‘언니네 텃밭’에서 주로 하는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예요.
하고, 혹은 어렸을 때부터 농사를
사업이 바로 이 사업인데 거기 계신
5년 뒤엔 어떤 모습을 상상하냐는
지어온 분들인데 경제활동을
분이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사실
질문도 서면에 있었던 것 같은데,
위해서는 택배로 농산물을
꾸러미는 CSA 사업의 기형적인
다른 지역에 또 이 모델을 만들고
보내야 유리한 상황인 거거든요.
모습이고, 진정한 CSA의 철학을
있고, 또 이것이 잘 굴러가면 전국
그래서 일회용품 사용 등에 대한
실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거점들끼리 연대하는 연락망을 또
고민을 항상 하고 계셨더라고요.
말씀하시면서 저희의 실험 내용을
만들고 하는 것을 상상하고 있어요.
이분들로부터 특히 응원의 말씀을
O | 페스티벌처럼 만들게 되면
굉장히 잘 될 것 같은데요? 언제로 예정하고 계시나요? Y | 이 CSA의 비슷한 형태로 사실
굉장히 지지해 주셨죠. 우선 택배를 이용하면 쓰레기가 많이 나오잖아요. 일회용품을
O | 순문 님은 어떠세요? J | 저는 누나가 이렇게 열심히 하면
포함해 많은 포장재를 쓰게 되고,
옆에서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
농산물이 도시 생활인들에게 갔을
되겠죠. 일종의 사회적 경제 사업
때 그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모델이잖아요. 원래 제가 하는
냉장고에 넣어 뒀다가 버려지는
일이 이런 모델에 대한 법률적인
것들도 많이 있고요. 그래서 저희가
지원을 하는 일이고, 제가 볼 때
하려고 하는 방식은 제로 웨이스트
이런 사업은 협동조합 모델로 하면
CSA예요. 유통과정에서 쓰레기가
딱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거의 안 나오거나 그 안에서 자원이 순환될 수 있도록 해서 아이디어를 내고 있습니다. O | 이 사업이 잘 되면 본업으로
전환하실 건가요? Y | 네. 저는 이 시스템을 국내에
많이 들었고 많은 동기부여가 되었어요. O | ‘청년업’ 사업이 큰 지지가
되었겠네요. Y | 이 일을 할 수 있게 한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O | 이 활동 안에서
‘내 인생은 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계신 건가요? Y | 사실 제가 상상한 제 삶이랑은
거리가 좀 먼 일을 하고 있어요. 저는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일이
제대로 소개하고 확대시켜 나갈 수
농사짓고 사는 거거든요. 그런데
있는 일을 해 보고 싶어요. 서울에
이 활동을 하면서 순문, 선우 두
있는 사람이 경상도에 있는 농부랑
친구가 유통 쪽에 관심을 두고 한
CSA를 맺는 게 아니라, 내가
번 같이 해 보자고 했고, 선우가
집에서 두 시간 내로 갈 수 있는
농사의 중요성을 알게 된
거리의 농부님들과 잇고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166
청년업
167
SURVEY.
젊은연구자들 모임 Q. 당신에게 업(직업)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성은. 하고 싶은 일. 내 인생에 많은 시간과 나의 중심 에너지를 쏟아 하고 싶은 일.
Q. 어린 시절의 꿈은(직업으로서) 무엇이었나요? 순문. 어린 시절, 직업이라는 것은 오로지 돈을 버는 수단으로만 인식하였습니다. 때문에 제 어린 시절 꿈은 돈을 버는 것을 직접적 목적으로 하는 ‘사업가’였습니다. 성은. 영화 연출, 통일 운동가, 환경 운동가
Q. 현재의 일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에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생태적 위기와 지속 가능한 삶’이라는 주제로 더 나은 변화를 위해 고민과 실천을 모색 중인 친구들과의 만남. 꼭 필요한 일이고 해 보고 싶은 일이라고 생각하게 됨.
Q. 직업 실험에 꼭 하나 필요한 요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일 수도 공간일 수도 자금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A1. 무슨 일이든 그 일이 가능케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과 의지라고 생각함. A2. 또한,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이 낫고, 두 사람보다는 세 사람이 더 좋으며, 세 사람보다는 네 사람이 더욱 더 낫다! 어떤 일이든 여럿이 함께하는 것이 더 풍요롭고 재밌고 신나며, 일을 제대로 할수 있다는 것을 격하게 깨닫는 요즘이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168
Q. 직업 실험을 통해 실제로 자신의 직업으로서 현재의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월급을 책정한다면 얼마입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A. 100~150만 원 A. 자급과 자족의 기준을 먼저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한 달 동안 필요한 돈을 계산해 보았다. 150만 원 이상은 필요치 않다. 경험상 많이 벌면 그만큼 쓸데없이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게 된다.
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성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5년 후의 본인을 상상한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A. 5년 동안 진정한 공동체 지원 농업(CSA)의 가치를 실현하는 이 프로젝트(사업)의 희망 씨앗을 발견하고, 5년 즈음에는 이 프로젝트 특성상 (처음에 그러했듯이) 지속적으로 함께할 사람들을 많이 만나 연대해 나가고 있을 것 같다. A. 그러면서, 농사를 계속 짓고 있기를 바란다.
청년업
169
SURVEY.
젊은연구자들 모임 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장렬하게 실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직업 실험의 경험이 남았습니다. 실패의 경험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순문. 저희의 사업은 단순히 영리적 목적으로 하는 수익 사업이 아닌, 새로운 시대의 농민 운동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거점 배송 모델이 대중적으로 친숙하지 않고 꾸러미나 마트 구매보다는 불편한 방식의 유통이기 때문에, 호응이 그다지 좋지 않을 수 있다는 점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를 기반으로 농민들에게 안정적인 판로를 확보해 주고 도시 생활인들에게 안전한 먹거리를 제공한다는 저희의 목표는 사업의 단기적 성과보다는 장기적 사회 운동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프로젝트가 실패한다면 문제의 원인을 철저히 분석해서 장기적 목표로 접근하는 방식을 수정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은. 프로젝트를 업으로 지속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이 경험이 무슨 의미로 남을까? (질문 살짝 바꾸기) 다시 시도해 볼 수 있는 밑거름. 경험과 사람들이 남아, 같은 프로젝트를 언제든 좋은 때와 사람을 만나 다시 시작하게 되거나, 다른 어떤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었을 때 더 나은 시도를 하고, 일을 잘 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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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 본인의 작업에 새롭게 도전하고자 하는 청년에게 해주고 싶은 말, 혹은 조언이 있다면? 순문. 단순히 회사에 취업을 하는 형태가 아닌 자신의 직업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그 직업을 선택한 동기가 자신의 삶에 튼튼히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자신이 돈을 좇는 사람이라면 정말 돈을 잘 벌 수 있는 사업을 해야 하고, 환경보호를 위해 삶을 투신하겠다는 결정이 있어야 직업으로 환경 운동가를 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동기를 찾기 위해서는 직업을 생각하기에 앞서 자신이 언제 행복한지, 삶에선 무엇이 중요한지, 어떤 삶을 만들어나갈 것인지에 대하여 많은 시간을 들여 고민을 하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행복한 직업 생활을 위해서는 최소한 젊음의 일부는 그러한 고민으로 채워 나가야 하지 않을까합니다. 성은. 내가 옳다고 믿는 일을 (세상이 뭐라 하든) 도전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마음에 함께 응원의 마음을 보냅니다!
Q. 본인이 청년업을 통해 경험한 ‘업’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면, 당신의 직업은 어떤 명칭을 갖게 될까요? 자유롭게 직업의 명칭을 상상해 주세요. (여러 개를 작성해 주셔도 좋습니다.) A. (새로운 이름은 아닌 것 같은데) 공동체 지원 농업(CSA) 코디네이터
청년업
171
INTERVIEW.
쪽프레스는 아름다운 문학의 감동을 가벼운 그릇에 담아 내놓는
쪽프레스
출판사입니다. 하나의 완결된 생각이나 감정의 묶음이라면 크기와 무게에 상관없이 책이라는 믿음으로, 책의 하드웨어에 대한 관념을 깨는 실험을 벌입니다. 기획자와 에디터, 디자이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김미래
한쪽 만화를 아코디언북과 두루마리(롤) 형태로 양분하여,
쪽프레스
저가 도서와 고가 도서(아트북) 전략을 취합니다. 아코디언북은 기존의 형태에서 가공 등을 조금 더 절약하고, 처음 시도하는 아트북은 관련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실험해가는 중입니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172
⊙ 쪽프레스의 연대기
마음먹기의 시작
프로젝트의 시작
2014년 봄에 ‘북 소사이어티’라든지 특이한
2014년 봄에 생각한 이후, 가을에 프린터를
저도 거기 후원도 하고 교정도 참여하고
서점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어요. 재밌고
빌려 직접 인쇄하고 접어서 ‘한쪽 책’을 15부
했는데 그 활동이 재밌더라고요. 그래서
신선하다고 생각하다가 회사 동료들이랑
정도 만들었어요. 어떤 페어에 가서 팔았는데
이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뭘 한다는
우리도 해 보자고 해서 시작하게 됐죠.
약 200권 정도를 하루만에 다 판 거에요.
약속만으로도 그걸 믿고 기다려주고, 돈을
밤도 새고, 프린터 대여에 종이도 직접 하고
낸다고 해주는 그런 응원해주는 분위기가
해서 남는 건 별로 없었지만 너무 재밌었어요.
있구나 하고 그 프로젝트를 준비했죠.
그러던 와중 동료 친구가 텀블벅으로
그게 2015년 봄일 거예요.
‘뒤로’라는 게이 잡지를 만들었는데,
만남 제게는 다 회사 동룐데, 제가 이직을 몇 번 했어요. 그래서 전 직장 동료, 전전 직장 동료 이런 식으로 섞여 있죠. 2011년부터 제가 만나온 동료들 중에서 최적의 동료들만을 제가 ‘어벤져스’로 구성했달까요? 사실은 제 감언이설에 속아 줄 만한 친구들만 남은 거겠죠.
위기 한쪽지 형식으로 기업의 새로운 제품에 대한 캠페인을
그렇게 수정이 요청되면, 저는 순수 문학가에게 수정을
문학으로 풀어내는 작업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는 저도
요청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라고 생각했고요. 그래도
아무런 야망이 없었던 나머지 이걸 성사시켜야 한다는
제가 조율을 잘 했으면 됐을 텐데 너무 어려웠어요. 어차피
프로페셔널한 마인드가 없었고요. 원하는 소재가
좋자고 하는 건데 얼굴 붉히고 울어가면서 할 필요 있나
컵이라고 하면 컵에 대한 시나 소설을 받고, 그림도
싶어서 프로젝트 중단하겠다고 얘기할 정도였어요. 그렇게
그리도록 했는데 광고주는 원하는 분위기가 있잖아요.
힘들었던 게, 2016년이었을 거예요.
극복 어찌저찌 잘 마무리가 됐어요. 힘든 경험으로 남았지만
그 클라이언트 분과 얘기를 나누는 시점에 저는 2주간 양양으로
어떤 영리적인 조직이 우리의 결에 맞아서 가치를
장기 휴가를 가 있었거든요. 서핑도 하고 녹초가 된 채, 숙소에서
알아주고, 뭔가 실무를 함께한다는 경험 자체가 되게
만난 사람들이랑 얘기도 하고 그랬는데 거기 하필 광고
귀한 거더라고요. 그 일 하면서 많이 배우고 저희가
에이전시에서 오래 일한 여자분이 계셨던 거예요. 그래서 그분이
닿지 못하는 독자들과도 만나고, 광고도 하고요.
많이 상담해 주셨어요. 입맛에 안 맞는 사람이랑 맞춰가는 것도
특이하고 아날로그적이니까 상도 받고 하면서 굉장히
경험이고 좋은 자산인데 왜 포기하려고 하니, 하면서 계약서
좋은 경험이 생겼죠.
쓰는 방법부터 되게 많이 알려주셨어요. 은인을 만난 거죠.
현재
청년업
장년기? 조금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는 얘긴데, 지금
실제로는 지금이 가진 퍼포먼스를 낼 수 있는 장년기고,
떠오르는 신진 활동가들한테는 이제 꼰대가 되는 게
신선한 무언가를 창조하고 만들어 가면서 누군가 끌어줄
순식간이더라고요. 제가 꼰대가 되는 시점이 이제 10년도
수 있는 게 길어야 10년이겠다 하는 생각을 해요. 여기도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까 또 엄청 촉박한 거죠. 저는 지금이
좁은 분야니까, 편한 것도 있지만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청년일 줄 알았는데 그건 사회적인 의미일 뿐이고,
있습니다.
173
O | 팀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K | ‘쪽프레스’의 편집장 김미래라고
합니다. 저희는 ‘한쪽 책’을 만들어왔는데 이번 ‘청년업’에서는 ‘아코디언 북’ 말고 다른 형태로 만화 섹션을 만들어 보는 실험을 하고 있어요. 아코디언 북은 병풍 같은 형태의 낱장 출판물로 하나의 단편을 담아내는 것인데, 편의상 '책'이라고 불러요. 개별적으로는 페이지가 있지만 이렇게 펼치면 긴 낱장이 돼요. 여기에 단편 소설이나 만화를 양면 인쇄해서 접고 봉투에 넣어서 판매하고 있어요. O | 받으면 편지 같은 느낌이
들겠어요.
K | 아직 완성은 되지 않았고,
K | 막연히 어렸을 때부터, 책 읽고
두루마리 형태의 만화를 만들어
문장 다듬으면서 돈 받으면
보는 중이에요. 이렇게 했을 때
행복하겠다 하는 생각이 있었어요.
책이라는 한자가 '여러 장의 종이를
만화는 연출이나 구성이 달라질
언어 영역 같은 거 공부할 때도
철했다'는 상형 문자인데 이런
수 있고, 좀더 애니메이션 같은
읽기 자료를 너무 재밌게 읽었죠.
하드웨어적인 정의를 생략했어요.
효과도 낼 수 있어 많은 효과를
막 밤새고 그런 건 아니지만요.
대신 소프트웨어에 맞춘 정의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아마 그냥 제 생각이긴 한데 제가
'감정이나 지식들을 전한다'는
만화가들을 섭외해서 작업하고
상상력이 좀 부족해서 그때그때
의미를 유지하면서, 철할 필요가
있어요.
마주하는 것들 중 재밌는 거에 더
K | 봉투가 표지 역할을 하기도 해요.
없는 단편을 출간하고 있어요.
O | 작가의 선정 기준이 혹시 있다면?
특히 본드랑 실을 쓰지 않는 게 저희 책의 상징이라고 생각하고
K | 온라인이나 오프라인에서 출판
익숙해지고, 또 그걸 더 공부하고 싶어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어린 시절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있습니다. 지금까지 약 100종
만화를 하는 분들이나, 아직 출판을
예를 들어 파일럿이나 마술사가
정도의 소설과 만화를 아코디언 북
경험하지 않았지만 일러스트레이션
된다든지 하는 꿈은 가지지
형식으로 출간했어요.
등 분야에서 독해력과 구상력이
않았어요. 뭐든 교과 과정에 있는
돋보이는 작가 분들을 찾아서
그 안에서 상상을 했던 것 같은데,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모국어를 배우고 쓰고
꼭 연이 없어도 직접 컨택해서
있으니까 모국어로 만들어진 글을
만나 보고 있어요.
읽는 게 가장 편하고 좋았던 거죠.
O | 판매는 주로 어디서 하시나요? K | ‘유어마인드’ 같은 동네 서점,
독립 서점 약 서른 군데에서 하고 있어요. 지방에도 거점들이 있고요.
O | 꽤 이름 있는 출판사 편집부에서도
이렇게 실이나 본드를 쓰지 않은
편집자로 활동하셨는데 전공도
낱장 형태면, 담을 수 있는 형식이
관련이 있나요?
자유롭잖아요. 아코디언 북으로 하는 건 플랫한 형태가 편의성이 좋기 때문에 그런 거고, 말아서 주거나 포스터 형태로 크게 줄 수도
K | 네, 국문과 졸업했어요. O | 예전부터 출판이나 문학의
영역에서 일하는 게 꿈이었나요?
O | 그래서 자연스럽게 전공도
선택하게 된 거예요? K | 전공은 친구들 중에도 잡지사나
출판사 쪽으로 전공을 살려서 온 친구가 저 외에는 없어요. 보통 일반 기업에 입사하고 그래서, 사실 복지나
있는 거라 이번에 스크롤 형태를
그런 거는 안 좋다고 주변에서 겁을
도전해 보려고 하는 거죠.
주긴 했는데 저는 별 생각없이 전공 살리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174
O | 큰 출판사의 편집자로서 일하면
어떤 일을 하게 되나요? K | 무슨 책을 만드느냐에 따라서
O | 회사라는 건 안전한 울타리라고
볼 수도 있을 텐데 어떤 마음으로 퇴사를 결심하셨는지?
O | 그래도 회사를 나와서 내 출판사를
차리겠다는 건 큰 결심이었겠죠? K | 큰 배포가 있어서 한 일은
일이 다를 수도 있는데, 가령 국내
K | 제가 입사할 때도 다들 '요즘
기획서의 경우에 어떤 아이디어를
출판업계가 옛날 같지 않다',
돈 되고 익숙하고 잘하는 방식이
내고 나면 그곳에 어울리는 저자를
'어렵다' 하긴 했어요. 제가 나오기
아닌 다른 출판을 해 보고 싶어서
맞춰서 찾는 느낌이고 순문학 같은
직전에는 거의 붕괴라고까지
동료들과 시작했던 거였고, 완전히
경우는 해외든 국내든 저자의
느껴졌는데 지금은 기성 사업이
사이드 잡으로 취미처럼 사비
스케줄이나 발표, 포트폴리오에
사영화되고 침체됐을 때 인디 쪽이
들여서 했었어요. 그런데 그런
따라 편집자가 필요한 도움을
크는 흐름 같은 거라고 보거든요.
조직의 안정성에 대한 환상이 깨진
주는 역할이죠. 예를 들어 저자를
기술도 보편화, 자동화가 되었고
이후에는 제가 뭘 하더라도 내
섭외하는 것부터, 전체 데이터를
사실 습득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기
길을 알아서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만들기까지 소통을 해요. 저자의
때문에 예전의 공고했던 카르텔이
들었고 그간 해 온 편집이란 일
글을 받기로 해도 한 권 만들
무너지는 거죠. 처음 출판사를
자체가 숙련되기도 했기 때문에,
분량이 다 있는 상태가 아닐 수
다닐 땐 텃세도 있고 선배들이
어느 공간에서 어느 때에 이걸
있으니까요. 같이 기획을 하고
무섭기도 하지만 배우면서 성장해
해도 스스로 마무리할 수 있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이때 이 정도
간다는 느낌이 좋았고, 선배들도
생각이 들었어요. 본업과 병행할 수
주시고’, 이런 식으로 주고받는
2~30년 한 곳에서 일하거나
있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거죠. 안 좋게 말하면 독촉이고
출판계 경력 자체가 3~40년 된
좋게 말하면 안부를 묻는 그런
선배들도 많았는데, 최근 몇 년간
관계로 지내면서, 그분의 글이나
그런 선배들이 이직을 하거나
그림에 어울리는 또다른 자료들,
자발적으로든 타의로든 업계를
표지 그림 혹은 삽화 등을
떠나게 되었어요. 이곳이 안정적인
매칭하기도 하고, 그러는 과정에서
일터라는 환상이 깨지게 되었죠.
아니에요. 회사를 다니던 중에
일러스트레이터를 섭외하게 되기도 하고요. O | 7년 정도 일하면서 몇 권 정도의
책을 편집하셨나요? K | 40권에서 50권 정도 한 것 같아요. O | 그럼 그 프로세스에 이제 굉장히
익숙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K | 그런데 하는 일의 범위가 약간
좁아요. 지금은 아예 제 회사처럼 일을 하다 보니 인쇄나 제작에 대해서도 제가 모르고, 영업이나 마케팅도 마찬가지죠.. 저자나 일러스트레이터 등과 계약하고 관계를 맺고, 문장을 다듬는 기술적인 부분들 같은 건 잘 알지만 그 외의 전반적인 영역에선 아직 익힐 것이 많아요.
청년업
175
O | ‘쪽프레스’가 책을 만드는 방식은
K | 문학이라고 하고 우리가 어떤
전통적인 것과 굉장히 다르잖아요.
공통된 감성을 느낄 수 있다면
이런 것에 흥미를 가지게 된
형식에 상관 없이 문학이라고
계기가 있나요?
볼 수도 있는데 실질적으로
K | 본업을 하면서 과외로 하는 재밌는
활동으로 시작한 일이다 보니 실험다운 요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죠. 당시에 동료들이랑 했던 얘기는 이야기라는 게 어디까지 짧아질 수 있을 것인가,‘하이쿠’나 ‘에즈라 파운드’의 시 같은 것도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단편집이라고 하는 건 대표작의 이름으로만 기억되잖아요. 그림자 속에 가려지는 단편도 많고, 제가 좋아하는 단편들 중에 유명하지 않은 단편들도 많았어요. 그래서 그런 단편 하나가 책 하나가 되어서 그 자체로 주인공이 돼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O | 문학계의 ‘디지털 싱글’ 같은 거네요. K | 그렇죠. 그런데 또 물리적인
요소로는, 우리는 촌스러운 일을 하는 사람들이니까… 질감도 있어야 하고, 아코디언 식으로 접은 종이를 또 번거롭게 포장한 다음 독자는 그걸 또 찢어서 빼서 읽으면서 물리적인 형태의 변형이 일어나고, 그렇게 어떤 아날로그적인 경험을 얻을 수 있겠다고 봐요.
176
K | 사실 저렴한 방식이긴 했죠. 가령
3~400쪽 짜리 책을 보통 책이라고 하는데 30,000장 짜리 책은 잘 못 보잖아요. ‘팔만대장경’ 같은 걸 만들 순 없는 노릇이니까, 가벼운 캐리어를 생각하게 된 거예요. O | 이제 꽤 오래 활동해 왔는데
사업적인 가능성도 보고 계신가요? K | 처음 상상을 했을 때는, 뭔가 막
찢겨져 있지만 완결된 이야기가 있고 표지 그림도 큐레이션이 잘 돼 있고, 정성이 가득 든 종이를 만들면 정말 잘될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그런데 실질적인 벽에 많이 부딪혔죠. 유통을 하기 위해 바코드도 따야 하고, 업체도 뚫어야 하고, SCN도 다 적용해서 가입하고 이런 활동들을 해야 했는데 저희는 사업자도 내 본 적이 없었고 좌절이 많이 됐었어요. 그러다 텀블벅도 전혀 기반 없이 시작했는데 그래도 몇 백 명씩 후원해 주시고, 응원의 메시지도 많이 받았어요. 그게 벌써 몇 년 전이네요. O | 아코디언 제본에서 두루마리
형태로 변화를 꾀하는 실험을 하고 계시다고 했죠? K | 네. 아코디언 북은 이제 저희도
과정을 익힌 상태인데 두루마리는 K | 사실 문학이라는 것도 읽혔을 때
온전히 전해질지 어떨지 모르는 거고, 텍스트가 변형이 되기도 하고 그렇잖아요. 그런데 책에 낙서를 하면 안된다든지, 종이에 잉크가 그냥 뿌려진 것일지도 모르는데 의미 부여는 많이 되고… 그래서
어떤 폭과 재질로, 또 어떻게 보관함을 만들어야 더 소장 가치가 느껴질지 이런 부분들에 대한 고민이 아직 부족한 단계에요. 전문가 분들에게 말씀도 더 듣고, 앞으로 노력해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책이란 걸 아무렇게나 대하거나, 반대로 아무렇게나 취급받던 걸 되게 중요한 것처럼 포장하는 실험을 해 보고 싶었어요.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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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VEY.
쪽프레스 Q. 당신에게 업(직업)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A. ‘업’은 사전적으로는 생계를 위한 주된 일을 의미하지만, 요즘 시대에는 딱 한 가지 일만을 벌이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본인이 벌이고 있는 일 중 가장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맞고, 가치 판단에서 상위에 해당하는 지속적인 일이 업이지 않을까 합니다.
Q. 어린 시절의 꿈은(직업으로서) 무엇이었나요? A. 어린 시절 예술가가 꿈이었는데, 어느 정도 실현해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Q. 현재의 일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에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기존에 없던 시장의 새로운 영역을 넓히는 재미가 있습니다. 독특한 출판물에 독자 분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반응들이 흥미롭습니다.
Q. 직업 실험에 꼭 하나 필요한 요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일 수도 공간일 수도 자금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지금 부족한 요소는 유능한 마케터입니다. 모든 상품은 기본적인 수준을 지닙니다. 이걸 대중에게 구매할 가치가 있다고 믿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Q. 직업 실험을 통해 실제로 자신의 직업으로서 현재의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월급을 책정한다면 얼마입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A. 500만 원. 아직 복지 후생이 탄탄하지 않은 스타트업으로서의 불안정을 감안해 잡아 보았습니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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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성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5년 후의 본인을 상상한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A. 지금은 책의 물성을 바꾸는 시도를 하고 있다면, 5년 뒤에는 출판업 자체의 성격을 바꾸어 사업 분야 자체를 조금 더 유연하게 확장하고 있지 않을까 합니다.
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장렬하게 실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직업 실험의 경험이 남았습니다. 실패의 경험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A. 가설 중 어떤 부분이 실패했는지 해부하고, 그 부분을 도려내고, 성공률을 높일 수 있는 방향으로 틀어 조금 더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을 높인 실험을 벌일 것입니다.
Q.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 본인의 작업에 새롭게 도전하고자 하는 청년에게 해주고 싶은 말, 혹은 조언이 있다면? A. 본인만의 작업을 하고 있다면 이미 도전이겠지만, 위험한 도전을 비교적 안전하고 든든하게 진행할 수 있는 기회 아래에 있으니, 조금 더 적극적으로 우리 의지를 펼쳐 나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Q. 본인이 청년업을 통해 경험한 ‘업’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면, 당신의 직업은 어떤 명칭을 갖게 될까요? 자유롭게 직업의 명칭을 상상해 주세요. (여러 개를 작성해 주셔도 좋습니다.) A. 출판업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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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세상에 가치 있는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능력자들이 모인 팀.(수영) 재능도 성격도 꿈도
타나크라프트
가지각색이지만 뭉쳐 놓으면 엄청나게 잘 굴러가는 팀.(승지) 기획의 신 은선, 추진력 왕 승지, 완성도 갑 수영, 그리고 저 승혜! 장사도 하고 싶고 좋은 일도 하고 싶은 사람 4명으로 이뤄진 팀.(승혜)네팔 덕후이자 크라우드 펀딩 마니아들의 모임! 내 인생에서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실천력 있는 사람들.(은선)우리는 ‘타나크라프트’입니다.
김승혜
네팔 수공예품으로 크라우드 펀딩을 합니다.
타나크라프트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모인 기금은 국제 NGO와 협력하여 네팔 아동들을 위해 사용합니다. 공정 무역과 네팔 아동 장학 기금 조성을 통해 선순환을 이루는 프로젝트입니다. 멤버 중 3명은 4년을 함께 네팔 아동 교육 지원 사업을 해 왔습니다. 긴 삽질과 고생 끝에 어찌저찌 형태를 만든 소셜 비즈니스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사업자 등록을 마쳤습니다. 새로운 팀원도 생기고, 장학 사업도 곧 시작될 것 같고. 작은 목표였던 누적 매출 1억도 올해 안에 달성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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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나크라프트의 연대기
마음먹기의 시작
프로젝트의 시작
‘타나크라프트’의 시작을 ‘네꿈내꿈’부터라고
2018년에 ‘네꿈내꿈’에서 크라우드 펀딩으로 처음 가방을
한다면, 2016년 2월 일 거예요. 그때 처음 셋이
들여왔고요, ‘타나크라프트’ 팀으로 활동을 시작한 건
네팔에 갔거든요. 2주 정도 ‘다딩’이라는 산골
2018년 11월쯤이었어요. ‘네꿈내꿈’은 NGO의 성격을
지역에 가서 며칠 정도 있다가 카트만두에
유지하면서 직접적으로 후원 대상이 되는 아이들과
돌아와서, 승지가 지진 직후 방문했던 마을에
소통하는 걸 중요시했는데, 저희가 가지고 있는 방향성과
찾아갔어요.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서 따로 팀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만남 승지가 구심점인데, 저랑 승지는 과 선후배 사이고 은선이는 승지랑 교양 수업에서 만난 친구예요. 2015년에 처음 만났고요.
위기 ‘타나크라프트’는 저희가 이미 오래 함께 호흡을 맞춰 온 뒤에 만들어진 팀이다 보니, ‘네꿈내꿈’ 활동 초기 네팔에 처음 갔었을 때 위기가 좀 있었어요. 협업을 한다는 것과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낸다는 목표, 그 두 우선 순위가 충돌했던 게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극복 그 문제에 대해 회의도 자주 하고, 지금까지 계속 만나 오면서 극복이 됐어요. 팀원들끼리 문제가 있으면 묻어 두지 않고 바로바로 각자 원하는 걸 얘기하고, 최선을 선택하자는 합의가 생긴 것 같아요.
현재 청소년기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 성장은 했지만 아직 어른이 되지는 못한 상태인 것 같아요. 정말 본업으로서 이 일에 뛰어들 결단과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길 때 어른이
청년업
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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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 팀 소개와 본인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T | ‘타나크라프트’는 네팔 수공예품을
국내에 팔고 그 수익금을 네팔에 있는 아이들에게 장학금으로 쓰는, 선순환을 지향하는 브랜드예요. 저는 공동 대표를 맡고 있는 김승혜입니다. 대학생 때 함께 네팔에 갔던 것이 계기가 되어 팀을 만들게 됐어요. 당시 네팔에 지진이 있었고, 별 생각없이 ‘지진 피해 지역 학교에 책이 없다니까 책을 갖다 주자’ 하는 대학생들의 치기 어린 프로젝트 같은 것으로 시작되었죠. O | 그 프로젝트의 금액은 어떻게
마련하셨나요? T | 크라우드 펀딩을 했어요. 100만 원
정도 모여서 책을 가져갔는데 처음 경험은 대실패였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영어책을 사서 갔어요. 네팔 사람들이 영어를 잘한다 들었거든요. 막상 산 속에 있는 그런 학교들은 영어를 잘 못하고, 저희가 너무 다짜고짜 찾아간 것도 문제였죠. 안일한 시선과 태도로 무턱대고 다가가면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걸 깨닫는 계기가 되었어요. O | 셋이서 그런 일을 같이 하게 된
이유는? T | 아무래도 셋 다 그런 분야의 일에
관심이 있었어요. 저랑 승지는 정치외교학과 학생이고, 은선이는 경영학과지만 정치외교학과에 원래 가고 싶어했던 친구였어요. 또 어렸을 때부터 한창 반기문, 한비야 이런 인물들을 보고 자랐으니 ‘대학교에 가면 이런 거 해야지’ 하는 욕망도 있었죠. 대학생 때 행동하는 시민의식을
O | 처음에 그렇게 대실패했는데
T | 일을 했다 보니 큰 금액을 모으거나
그만두지 않고 계속 시도하신
큰일을 하지는 못했는데, 이 일에서
건가요?
손을 놓고 싶진 않았고 더 효과가
T | 한 번 그렇게 인연 맺고 손 터는
게 아니라, 조금씩이라도 매년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해서 네팔어로 된 서적을 가져다 주자고 얘기해서 바뀌게 되었거든요. 매년 펀딩을 해서 네팔에 갔고 그 학교 사람들과 계속 만났어요.
있는 일을 해 보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사람들에게 선의를 구하는 방법은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어서 NGO 모델 말고 사회적 경제 모델로 팀을 움직여 보자고 바꿨어요.
학교 다닐 땐 비영리단체 명목으로
강조하는 수업들을 많이 수강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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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 집행할 수 있는 NGO를 아직
정하지 못했어요. 또 유의미한 수익이 나려면 매월, 상시 판매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아직 직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부업으로 하고 있는 일이라 시간 자원 등의 한계 때문에 상시 판매를 하기는 어려운 상황이고요. O | 부모님들께선 이 일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갖고 계신가요? T | 부모님은 이런 일은 그만두고
취직에 올인하라고 하시죠. 아무래도 수입이 안정적으로 생기는지의 여부를 중요하게 여기시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저희는 단순히 수입이 얼마냐의 문제를 넘어서, 일할 때 스스로 성장한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껴요. 즐겁기도 하고 O | 팀의 이름은 작년 말에 생긴
거네요? T | 네. 그 전에는 ‘네꿈내꿈’이라는
대학생 동아리로 활동했었어요. 처음엔 우리가 이 일을 한 번 잘해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성취감도 있기 때문에 이 일을
O | 부업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T | 전업으로 돈 벌고, 부업으로 재밌게
살자? 전업으로도 가능하면 즐거운 일을 하고 싶지만, 성취감이 오는 경우는 적은 편이니까요. 부업으로 내가 무언가 한다는 느낌을 받고 싶은 것 같아요. O | 적어도 얼마 정도의 돈을 벌어야
부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T | 멘토링에서 멘토님이 하신 말씀이,
전업으로 할 경우 최저 임금을 받는다 쳤을 때 200만 원은 받아야 할 거라고 하셨어요. 만약 부업으로 한다고 하면 최소 100만 원에서 200만 원 사이를 받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더 가능성이 보이면 여기에 더 많은 투자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계속하고 싶습니다. O | 이 일을 하면서 가장 벅찼던
경험이 있다면?
보자는 마음이었는데, 청년업을 신청하면서 가능성이 보이면 업으로 전환해 보자는 마음을 갖고 있기는 해요. 저희가 이 일을 하는 게 되게 재밌거든요. 남이 시키는 일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직접 기획하고 거기서 성과를 얻는 게 재미있어서, 이 일로 먹고살 수 있으면 그래도 괜찮겠다 싶어요.
T | 제품 구매자들이 좋은 후기를
남겨 줬을 때 그랬고, 또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블로그 포스팅들이 많이 남겨져 있는 걸 봤을 때 그런 기분이 들었어요. 네팔 아이들을 만날 때도 그런 감정들이 생기는데, ‘타나크래프트’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에는 네팔 아이들을 만난 적은 없거든요. ‘네꿈내꿈’에서 활동할
O | 이 프로젝트가 업으로 지속되려면
때 네팔에 가서 본 학교들의 환경은
어떤 것들이 더 필요할까요?
말도 못하게 열악했어요. 그런데
T | 우선 체계화가 필요할 것 같아요.
그 학교의 책장이 우리가 전달한
제품을 판매하는 절차부터 생각해
책으로 채워져 있는 걸 봤을 때
보면 판매할 물품을 수입할
아주 벅찬 기분이 들었어요. 그쪽
네팔의 공장은 정해져 있는데,
사람들이 우리를 반긴다는 느낌을
‘타나크라프트’가 판매를 진행하고
받았을 때도요.
나서 발생한 수익금을 기부금으로
O | 지금 프로젝트를 부업으로 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본업과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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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VEY.
타나크라프트 Q. 어린 시절의 꿈은(직업으로서) 무엇이었나요? 수영. 어린 시절에는 그저 누군가의 삶에 변화와 영향을 줄 수 있는 '교육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이 좋기도 했고요!) 20대가 된 이후로는 그 영역이 더 확대되어, 교육 분야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가치'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습니다. 승지. 아나운서가 꿈이었으나, 중학생 이후로 키가 자라지 않아 포기했습니다. 승혜. 탐정. 은선. 꿈이 참 많았는데, 20대 이후로부터는 부자 되기. 내가 돈을 많이 끌어모으고 있는 게 중요하다기보단, 가치있는 일을 많이 하려면 그래도 돈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Q. 현재의 일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에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수영. 네팔에 선순환을 만들어 줌과 동시에 국내 소비자들에게는 원하는 제품을 제공해 줄 수 있어요. 또 팀원들은 그 안에서 BM을 실험하면서 다양한 업무 스킬을 배울 수 있죠. 모두에게 윈윈(Win-Win)이라는 점이 저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왔습니다. 승지. 아이들의 조혼과 고교 중퇴를 막기 위해 장학금을 만들고 싶었어요. 절실하게 수익 구조와 자본이 필요했고, 사회적 기업 모델에서 실마리를 찾은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승혜. 대학교 막학기, 사회적 경제 수업에서 사회적 기업을 조사하고 현업자들을 만났습니다. 젊은 기업가들이 말하는 가치에 동의했고, 그들의 도전 정신에 영감을 받았습니다. 은선. 국제 개발, 아동 교육 등에 관심이 많아 네팔 아동 교육 지원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자금 부족에 따른 한계를 절실히 느끼고,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해 비즈니스 모델을 찾게 되었습니다. (마침 패션도 좋아하고 장사도 좋아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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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직업 실험에 꼭 하나 필요한 요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일 수도 공간일 수도 자금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수영. 무조건 사람입니다.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치는 무궁무진하기 때문이죠. 그게 공간이든 자금이든요. 승지. 사람! 사람이 있어야 돈도 만들고, 땅도 만들고... 승혜. 토지와 자본은 유한하지만 노동(사람)은 무한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요. 은선. 사람. 인사는 만사입니다. 다른 것은 조금 부족하더라도 구성원이 좋으면 차차 채워 나갈 수 있습니다.
Q. 직업 실험을 통해 실제로 자신의 직업으로서 현재의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월급을 책정한다면 얼마입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수영. 소비자들에게 얼마만큼의 호응을 이끌어 내느냐에 따라 다르고, 네팔에 지원하는 장학 사업 규모에 따라 가변적이겠지만 팀원들의 열정과 업무 강도 등을 따져 보았을 때 적어도 3-400만 원 수준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승지. 일단 실수령 월 200만 원에 4대보험이 되면 좋겠네요. 승혜. 300만 원. 한국에서 근근히 살아가며 집도 사고 차도 사고 애도 키우려면, 이 정도도 부족하지 않나 생각해요. 은선. 현재 본업이 따로 있기 때문에, 부업이 본업을 이기려면 월급은 비슷한 수준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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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VEY.
타나크라프트 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성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5년 후의 본인을 상상한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수영. 사업을 확장하여 패션 및 유통 브랜드를 이끌어 가는 CEO가 되어 있지 않을까! 승지. 네팔에 학교를 짓는다.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아동 인권 활동가로 일하면서 보람을 느끼지만, 열악한 노동 조건 속에서 근근이 밥줄을 걱정하는 제 모습이 보여요. 승혜. 글쎄요. 은선. 사회적 기업가 (그날이 올까요?)
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장렬하게 실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직업 실험의 경험이 남았습니다. 실패의 경험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수영. 실패 속에서도 분명히 배우고 성장한 부분들이 있기에, 값진 경험이 될 것 같습니다. 승지. 미숙하고 무모했기에 가치 있었던 도전, 하지만 처음부터 다시 하라면 못할 것 같은 삽질과 고생의 시간들. 승혜.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이 뿜뿜했던 도전. 주체적으로 일하는 법과 함께 일하는 법을 배웠던 경험. 은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절이 아니면 할 수 없었던, 무모하지만 아름답고 의미 있는 도전이었던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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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 본인의 작업에 새롭게 도전하고자 하는 청년에게 해주고 싶은 말, 혹은 조언이 있다면? 수영. '사회적 경제'라는 개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제 기업들은 사회, 환경 문제 등을 제쳐두고 자신의 이윤만을 추구해서는 살아남지 못 하는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어요. 그런 점에서 이러한 가치 있는 도전은 매우 유의미하며, 많은 부분들을 미리 경험해 보고 배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잃을 것이 없는 지금!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젊음의 패기로 자신만의 가치를 만들어 나가길 응원합니다! 승지.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하고 후회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래서 전 맨날 하고 후회하나 봐요. 승혜. 한 번 뿐인 인생, 하고 싶은 거 다 합시다! 은선. 지금 아님 언제? 내가 아님 누가? 가즈아!
Q. 본인이 청년업을 통해 경험한 ‘업’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면, 당신의 직업은 어떤 명칭을 갖게 될까요? 자유롭게 직업의 명칭을 상상해 주세요. (여러 개를 작성해 주셔도 좋습니다.) 수영. 체인지 메이커 승지. ... 승혜. Aㅏ... 은선. (음 너무 어렵네요..)
청년업
187
INTERVIEW.
세리세라의 한세리입니다. 도자 공예 상품의 사업화를 꿈꾸면서 세리세라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도자 작업을 이어 나가고 그 작업을 대중에게 선보일 수 있는 기회를
한세리
얻는 것이 최종 목적입니다. 세리세라의 도자기들은 일상 생활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기 보다는 조금 미관적인 목적이 가미된 상품들로 작업을 하고 있으며, 색감이나 형태에서 고급스러움을 주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세리
프로젝트 처음 지원할 때는 저의 도자 작품을 판매하는 인터넷
세리세라
사이트를 구축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습니다. 인터넷 사이트를 구축하는 것은 현 시점에서 아직 이른 감이 있는 듯 합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기존 사이트에 입점하는 것이 더욱 유리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멘토링과 교육들을 소화하며 깨달은 것은 사업화를 위해 현재는 조금 더 준비 단계에 힘써야겠다는 생각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오히려 판매보다는 홍보에 더 힘을 쏟고 있으며, 작업 결과물의 종류를 더 많이 늘리고 다양한 실험을 진행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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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세리의 연대기
마음먹기의 시작 2015년이에요. 그 학부 3학년 때 인간관계 때문에 힘든 와중에 공모전 수상을 해서 성취감이 컸어요. 그걸 도예를 하면서 아무 생각 없어지는 게 좋았어요.
프로젝트의 시작 상품을 만들어야겠다 생각한 건 작년인 거 같아요. 2018년 대학원 때 작품을 팔기 싫고 그런데 돈을 벌려고 생각하다보니까 그 때부터 상품을 여러 개 만들어서 판매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거 같아요. 대학원을 다닐 때의 일이에요.
위기 힘들었던 때는 알바하던 때인 거 같아요. 16년에 작업량 자체가 적었기 때문에 했던 거죠. 주3,4 일을 나갔으니까 시간도 없었고, 알바를 하는 게 재밌기도 하고 그랬어요.
극복 대학원 교수님도 작업하는 걸 권유하셨고 대학원 가야지 생각하고 작업을 더 했어요. 그래서 17년에 졸업하자마자 대학원에 들어갔죠.
현재 고등학생 정도일 것 같아요. 아직은 좀 대학생이나 성인까지는 못 온 거 같고 이제 정확히 이걸로 가자고 마음먹은지 얼마 안 됐으니까요.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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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H | 안녕하세요. 저는 혼자 작업을 하는
도예가인데, 작업을 계속 하려다 보니 우선 수입이 있어야 지속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사업화를
O | 졸업을 하고 나서도 대학원까지
도예로 가게 되었다면 도예라는
3학년 때였어요. 제게 대단히 힘든
것이 내 업이 될 거라는 확신이
시기가 있었거든요. 대인관계에서
있으셨던 것 같아요.
회의감을 많이 느낄 때였는데
H | 이게 성취감이 생각보다
계획하게 되었어요. 원래 목표는
크더라고요. 사실 영상 그래픽하는
큰 돈을 벌겠다 이런 건 아니었고
친구들은 모든 과정을 본인이
계속 작업을 할 수 있는 정도만
다 하기는 힘들잖아요. 협업을
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해야 하는데 공예는 처음부터 제
사업 안에서의 목표는 인터넷
손에서 시작하고 끝나는 거라 좀 더
판매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취감이 컸고, 확실히 무에서
저는 일상생활에 쓰이는
유를 만든다는 감각이 있어요.
제품보다는 멋내고 싶을 때, 다소
그리고 흙의 가장 큰 성질 중
사치스럽게 구매되기도 하는
하나가 가소성이에요. 누르면
작품성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그대로 눌려 있다, 꼬집으면
아이템 위주의 작업을 하고 있어요.
꼬집힌 상태로 있다, 이런 거
제가 현대 미술에서 신비성에
거든요. 제가 만들면 만져진
경외심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상태 그대로 있다는 게 매력인 거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작업을
같아요.
진행하고 있어요.
O |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도예의
H | 다들 그런 거 아닐까요? 성적
맞춰서 전공을 선택하니까 안 맞는 사람들도 있고, 취직으로 연결되기는 또 힘들고요. 또 만약 취직을 하려 해도 도자기 업체에서 O | 원래 그림을 자주 그리셨어요?
생산 과정의 기술자는 다 따로
H | 그렇게 자주 그렸던 건 아닌데,
있고, 거기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문득 고등학교 때 하고 싶어져서
그래픽 디자인을 했던 사람을 써
혼자 고민도 많이 하다가 엄마한테
버릴 수도 있는 거고요.
학과들에도 지원했는데, 운명처럼 도예과를 들어가게 됐고 그렇게
내 마음도 다듬어지는 것 같았어요. 꼭 청소할 때 기분 좋아지는 것처럼요. 그래서 빠진 것 같아요. 그때 그렇게 만든 결과물을 공모전에 내 봤는데 결과도 좋았거든요. O | 당선이 된건 가요? H | 네. 서울 현대 도예 공모전이요.
지금은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예술의 전당에서 하고 그랬거든요. 솔직히 학부생이면 입문한 지 얼마 안 됐잖아요. 그래서 더 성취감도 컸죠. 결심한 건 그때부터인 것 더 기억에 남네요.
O | 왜 그럴까요?
관심이 많아서 영상을 공부하는
하다 보니 흙을 다듬으면서
도예과를 졸업한 다른 분들은
일 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해요.
하게 되었죠. 원래는 영상 쪽에도
느낌도 있고, 수련하는 느낌으로
같아요. 처음 공모전이고, 그래서
T | 아뇨, 한 70퍼센트는 아예 다른
흔쾌히 ‘그래, 해라’ 하고 말하셔서
작업을 하면 아무 생각이 없어지는
매력을 느끼게 된 거네요. 주변에 지금 비슷한 일을 하시나요?
미술하고 싶다고 솔직히 말했어요.
H | 이걸 딱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학부
O | 청년업을 통해 수익을 만들어서
O | 대학원에 가겠다는 결심은 어떻게
하신 건가요? H | 사실 조금은 도피성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회로 나가야 한다는 것에 대한 도피의 의미도 있었고 학부 출신 동 대학원을 가게 되면 학비가 많이 절감되거든요. 그런데 공방 얻는 돈도 어차피 비슷한 수준으로 들어가니까 이럴 바에는 공부를 더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어요. 제게 대학원 시절은 현실과 단절돼서 꿈만 바라보는 시간 같았어요. 학교 다니는 거니까 애들도 같은 꿈을 갖고 있고, 학교에서도 ‘꿈을 찾아
계속해서 도예가로서 살아남고
가라’는 식의 말을 많이 듣게 되고.
싶으신 거죠? 그 의지는 어떤
덕분에 다른 생각 아무것도 안 하고
계기로 생겼나요?
작업만 했던 거 같아요. 작업량이 제일 많았던 시기였죠.
계속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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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 이 일을 하면서 보이는 주변의
반응은 어떤가요? H | 부모님께는 늘 호언장담하듯이
얘기하거든요. ‘내가 진짜 세계적인 작가가 될거다’ 이런 식으로요. 사실 일부러 안심시켜 드리려고 하는 거죠. 직접적으로 얘기하면 불안해 하실 테니까요. 그래도 제가 대충대충 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믿고 계신 것 같아요. 친구들은 제가 학부 때도 좀 작업에 많이 미쳐 살았기 때문에 O | 혹시 지금까지의 경험에서 본인
작품을 팔아본 적 있나요? H | 제가 작품도 하고 상품으로 팔 수
있는 작업을 하기도 하거든요.
O | ‘청년업’을 통해서 이걸 진행하는
중에도 뭔가를 판매하신 적이 있으세요? H | 네. 팝업 스토어에 참여하거나
작품을 판 건 대학교 때 했던 게
입점시켜서 하기도 하고
끝이고, 대학원 때 작업들은 뭔가
‘아이디어스’에도 입점하려고
팔기가 아까워서 제가 다 갖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수량을
있어요. 지금 집이 가평 시골이어서
잘 못 맞추고 있는 것 같아요.
거기 다 쌓여 있어요.
수량이 많아야 사업화를 할 텐데
O | 도예를 플리 마켓, 편집 샵 또는
온라인 마켓에서 팔아서 성공한 사례가 또 있나요? H | 우선 제가 아는 사람 중에는
주문이 오는 것에 제가 못 맞추는 상황이에요. 또 인스타그램으로 연락이 많이 오는데 다 거절하고 있어요. 체계가 갖춰진 후에 팔고 싶기도 하고 DM으로 팔기에는
‘그럴 줄 알았다’ 이런 느낌이고요. O | 왜 그렇게 도예가 좋았을까요? H | 작업할 때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가
‘적당할 때’거든요. 적당할 때에 유약을 발라줘야 하고, 적당할 때에 불을 올려줘야 하고. 계속 간을 보면서 언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봐야 해요. 습도에도 영향을 많이 받고, 계속 갓난아기 보듯 지켜봐야 하는데 오히려 이런 부분 때문에 더 빠져들었던 것 같아요. 계속 지켜보면서요. O | 사업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그렇듯
없어요. 그런데 다른 작업자 분들
제가 너무 아마추어인가 싶은
당분간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될
보면 대부분 온라인으로 판매를
느낌이 들기도 해서요.
수도 있겠어요. 어떤 각오도 되어
하더라고요. 흔히 말하는 ‘인스타
수량도 부족하고요.
있으신가요?
감성’을 건드릴 수 있는 상품을 많이 팔고 있고요. 그래서 저도 상품과 작업을 조금 나눠서 두 가지 갈래의 작업을 하고 있거든요.
O | 체계가 갖춰진다는 건 어떤 상태를
말하는 걸까요? H | 공식 판매 사이트가 있고, 팝업
상품은 아무래도 사람들 얘기에
스토어는 기간이 정해져 있잖아요.
귀를 기울여야 하고, 거기에 맞춘
상시 판매할 수 있는 오프라인 샵도
작업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사실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렇게
제 입장에선 그렇게 작업하면서
공간이나 채널이 갖춰졌을 때 이게
‘차악’을 선택하는 경우도 없지
내 직업이다라는 느낌이 분명히
않아요. 하지만 작업을 아예 하지
생길 것 같아요.
않는 상태보다는 구매자의 요구를 맞춰주기 위해 계속 작업을 하는 상태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H | 사실 도예를 배울 때부터, 교수님과
상담을 할 때 ‘취업하고 싶다’ 고 하면 ‘그러면 도예하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셨어요. 작업을 하겠다고 하면 못해도 10년은 보고 버텨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각오는 하고 있었어요. 또 사실 학교를 나와서 처음 하는 시도잖아요. 근데 아예 돈을 못 버는 것도 아니고 간간히 돈은 벌리니까요. 이런 지원 사업도 있고, 지원 받게 되면 재료비나 상품화 하는 돈은 적게 들고 아예 현금으로 주는 지원 사업도 있고요. 그러면서 판매 수익도 생기고요.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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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 청년업이 끝난 이후의 그림은
어떻게 그리고 계신가요? H | 그냥 지금처럼 일을 계속해 나갈
생각이에요. 좋은 것 하나를 잘 찾아서 들어가는 게 낫지 않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멘토링 때 멘토님이 일단 이것저것 다 시도해 보고 결정하는 게 낫지 않겠나 하셔서 저도 그 방향으로 동의하게 됐거든요. 내년도 내후년도 지금처럼 도예 작업을 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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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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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VEY.
한세리 Q. 당신에게 업(직업)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A.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어떻게든 돈을 버는것
Q. 어린 시절의 꿈은(직업으로서) 무엇이었나요? A. 저의 꿈은 항상 바뀌었던것 같습니다. 뭔가 하나로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
Q. 현재의 일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에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조금씩 홍보도 하고 여러 번의 노출을 통해 조금씩 피드백이 오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소한 관심들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고, 구매 의사를 밝혀 주신 분들도 꽤 많아서 오히려 더욱 이 직업에 빠지게 된것 같습니다.
Q. 직업 실험에 꼭 하나 필요한 요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일 수도 공간일 수도 자금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A. 공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사람도 중요하지만 꿈을 펼 칠수 있는 기본적인 공간과 기자재들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공예여서 더 그런 것도 있는 것 같아요.
Q. 직업 실험을 통해 실제로 자신의 직업으로서 현재의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월급을 책정한다면 얼마입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A. 제가 현재 입주해 있는 공간에서 지문으로 나온 시간을 책정하고 있는데, 평균적으로 월별 280시간을 작업실에서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일과 노동을 생각했을 때 시급 만 원 정도라고 가정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월급은 280만 원 정도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기본 급여가 280만 원이고 보너스는 판매 수익이겠네요^^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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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성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5년 후의 본인을 상상한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A. 넓은 작업장을 소유하고, 많은 사람들이 저의 제품을 알아봐 주시고 , 구매율이 좋은 상품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모습입니다.
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장렬하게 실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직업 실험의 경험이 남았습니다. 실패의 경험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A. 실패를 한다고 해서 이 직업을 관둘 것 같진 않고, 다시 도전할 것 같습니다. 오히려 실패 원인을 생각해 보고 재도전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Q.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 본인의 작업에 새롭게 도전하고자 하는 청년에게 해주고 싶은 말, 혹은 조언이 있다면? A. 단기간 안에 얻을 수 있는 건 적다. 천천히 커 가는 것이 이 직업의 매력이다.
Q. 본인이 청년업을 통해 경험한 ‘업’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면, 당신의 직업은 어떤 명칭을 갖게 될까요? 자유롭게 직업의 명칭을 상상해 주세요. (여러 개를 작성해 주셔도 좋습니다.) A. 고통, 노동, 실패 끝에 오는 성공, 행복, 재력?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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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한주희
한주희
외국어 전공자 자립 실험을 진행하고 있는 한주희입니다. 직업 전공 일치율 꼴지인 프랑스어를 전공했습니다. 만들어진 자리에 더이상 나를 구겨 넣고 싶지 않아 직접 일을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새로운 걸 배워 일하는 것도 좋지만, 갖고 있는 것을 활용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전공의 재활용입니다.
외국어 전공에 대한 사회적 인정 수준이 낮고 그 잠재력을 다들 몰라줘 보다 못해 직접 알려주는 프로젝트, <외국어 전공자 자립 실험>입니다. '자립'은 저를 포함한 외국어 전공자를 향한 외침입니다. 우리 스스로 이런 것도 할 수 있다는 의미지만 그것으로 생존이 가능한지는 의문이라 실험의 영역에 있습니다. 워크숍도 진행하고, 다른 전공자들과 원탁 회의도 열어보고, 책도 냅니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은 확인했는데, 역시나 돈이 문제라는 고민이 있습니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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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주희의 연대기
마음먹기의 시작
프로젝트의 시작
올해 초까지 팀에서 활동하며 집단 내에서
청년업 지원 및 심사과정 중 하나 였던 사전인터뷰
채워지지 않던 갈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터입니다. 물론 프로젝트 기획안은 이미 완성된 후
팀에서 잠시 독립하여 다양한 개인 프로젝트를
였지만, 당시 심사위원님이 프로젝트와 그 기획자인 저를
구상했습니다. 그러다 청년업 사업공고를 보고
꿰뚫는 값진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최종인터뷰
머릿속 여기저기 퍼져있던 기획들을 모아
전까지 지원서와 마음가짐을 재정비 하는 시간을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가졌습니다.
만남 중국어 전공자이자 중학생 때 만난 가장 친한 친구가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직장에 다니고 있어 프로젝트의 구성원으로는 함께하지 못했지만, 외국어 전공자로서 공감대를 형성하며 행사 마다 참여해주어 큰 힘이 되었습니다.
위기 프로젝트 중반에 접어들 때, 핵심 콘텐츠였던 '잡지' 기획을 엎어야 했습니다. 수요 조사나 잠재 고객 인터뷰를 진행해보니 기획의 의도, 콘셉트, 목표 타겟이 어딘가 계속 어긋났습니다. 그래서 위험부담을 안고 불안한 마음으로 프로젝트를 다시 기획했습니다.
극복 다양한 사람을 만나 조언을 구했습니다. 시간과 재정적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것을 기획하기 보단 이미 무엇을 갖고 있는지 돌아봤습니다. 동시에 혼자서 다 해내려는 욕심을 버리고 협업의 길을 택하니 훌륭하고 열정적인 청년들을 만나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현재 청소년기입니다. 개인적으로만 갖고 있던 프로젝트는 유아기였고, 청년업 사업기간 동안 아동기를 보냈습니다. 조금은 어설프고 미숙했지만 결과물을 만들어냈고 함께 할 수
청년업
있는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청소년기엔 친구가 제일 중요하듯, 사업기간 동안 만난 친구들과 함께 성장하고 싶습니다.
197
O | 외국어를 애정하게 된 계기나
O | 프랑스 노부부와 주고받은
O | 문과생으로서, 언어전공자로서
이유가 있을까요? 언어에 대한
수많은 편지를 번역하는
취업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사랑이 남다르셨던 것 같습니다.
작업을 : 번역문학가 로서의
절감하신것으로 생각됩니다.
어린시절부터, 대학전공을
직업실험으로 삼으셨습니다.
직업으로 이어지기 힘든 전공을
정하기까지, 개인적인 경험을
프랑스 노부부는 누구신지,
선택함으로서 느낀 안타까운
담아, 외국어를 사랑하게 된
어떤 편지를 주고받으셨는지,
부분이 있으실까요. 학문에 열중한
계기, 전공을 정하게 된 이유를
어떤 관계이길래 이토록
대학시절이 직업으로 이어지지
알려주세요.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는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어떻게
궁금합니다. 번역문학으로서
생각하시는지요.
H | 15살, 방에서 바느질을 하며 주한
미군 라디오 방송으로 팝송을 들었습니다. 영어를 시작으로 일본어, 중국어, 스페인어에 관심을
서간문으로 시작하게 된 이유 역시 궁금합니다. H | 마리엘과 르네는 은퇴한 7·80대
H | 저는 대학을 지식의 상아탑이자
진리탐구의 현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냉정한
가졌고, 대학교 자율전공학부를
프랑스 노부부입니다. 우리는
사회에서 살아 남아야 하는 것이
거쳐 프랑스어에 정착했습니다.
닮은점 보다 다른점이 많지만
현실입니다. 학문에 열중한
저는 매번 외국어를 통해 새로운
우정을 쌓는데 전혀 문제되지
대학시절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면
세상을 만나기에 외국어를
않습니다.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구직이 아닌 창직을 해야합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상, 예술, 정치, 진로, 여행,
정형화된 직업의 틀에서
사랑 등 모든 주제로 편지를
벗어난다면 전공을 더욱 발휘할 수
주고 받았습니다. 다방면으로
있습니다.
O | 프랑스 파리에서 가발 영업사원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외국어 전공을 살리는 일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결심을 하셨다고 하셨는데 프랑스에서 어떤 경험을 하셨는지, 그 경험이 어째서 전공을 살리고자 하는 큰 결심으로 이어졌는지 알려주세요.
문화적 소양을 쌓은 마리엘과 르네 덕분에 편지의 수준이 높았고, 지극히 사적이고 생생한 편지글은 흥미로울 수 밖에 없기에 번역문학의 재료로 택했습니다. O | 단순 번역이 아닌, 문학의 한
갈래로서 번역을 대하는 실험은 H | 영업직이었기 때문에 불어를
굉장히 새롭고 또 도전적으로
잘 할수록 성과가 좋았습니다.
느껴집니다. 그 과정에서 발견한
한국에서는 불어를 뽐낼 기회도,
신선한 경험이 있었나요? 또한
그걸로 칭찬을 받을 일도 흔치
문학으로서 번역의 가능성을
않았는데 말이죠. 처음엔
어떻게 생각하게 되셨는지요.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기도 어려웠지만, 맹연습과 실전에서 고군분투하며 실력이 늘었습니다. 언어엔 그 언어만의 사고방식이 따르기 마련이라 저 역시 불어를 할 땐 한국어를 할 때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불어를 하는 제가 꽤 마음에 들기도 했어요.
O | 외국어전공자 원탁회의는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요. 준비과정의 어려움은 없었는지, 어떤 즐거움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H | 외국어 전공자 중, 저와 비슷한
고민과 소망을 지닌 사람을 모았습니다. 프랑스어, 중국어, 일본어, 포르투갈어 전공자 그리고 한국어를 전공하는 러시아인이 만나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며 공감에서 공감으로 끝나는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통해도 너무 잘
H | 제가 불어로 쓴 글을 한국어로
통하는 5명이 한국시를 5개국어로
역번역하며 느낀점은, 번역은
번역하고 5개국어로 초단편영화를
(재)창조의 작업이자 의심의 여지
찍었습니다. 집단/연대의 개념으로
없이 문학하는 일입니다. 제게
계속 이어가고 싶습니다.
있었던 일을 불어로 전하고 다시 한국어로 전할 때 이야기 속 제가 같이 변함을 느꼈습니다. 제 글을 직접 번역했기 때문에, 게다가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이 글의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아직 끝나지 않고 살아있는 문학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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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 외국어전공자 원탁회의 같은 경우,
O | 이번 실험이 ‘업’으로서의
한주희님과 같은 고민을 하고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있는 분들이 많이 참여하셨으리라
생각하시는지요?
짐작됩니다. 전공을 업으로 이어가기 어려운 현실에 처한 분들이 들려준 새로운 이야기, 혹은 서로 나눈 공감대가 있다면 어떤것입니까. H | 외국어전공자 집단에서 흥미로운
점은 '언어전공자'로서의 공통점과
H | 기존 직업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유형의 '업'이자 '일'로써 가능합니다. 다만 언제나처럼 경제적 자립이 관건입니다. 이 장벽을 넘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수입(전통적인 월급)'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각기 다른 '전공외국어'에서 오는 개성이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외국어가 좋아서 시작했고 여전히 좋아서 계속하고 싶은 마음은 모두 같았습니다. H | 모두 각자의 외국어를 갖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길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 몹시 대단하고 자랑스러웠습니다.
청년업
199
SURVEY.
한주희 Q. 당신에게 업(직업)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A. 나의 모든 것을 바치며 온 삶으로 헌신해도 후회 없는, 단 하나의 길을 찾는 것입니다. 그 길을 찾는 것이 어려울지라도 저는 이번 생에서 꼭 찾고 싶어요. 자아 실현, 생계를 유지하는 것, 타인의 인정을 받는 것 모두 중요하지만, 제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나와 내 삶에 어울리는 일을 찾는 거예요. 제 개인적인 삶은 소멸되는 일도 해 보고, 퇴근 후 완벽한 여가 생활이 가능했던 직장도 다녀 보고, 자아 실현을 해 보기도, 돈을 벌기 위해서만 일하기도 했습니다. 깨달은 것은 언제나 균형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제가 찾는 단 하나의 길은, 지나치게 이상적일지 모르지만 영원히 꺼지지 않은 불꽃처럼 제 삶을 비춰줄 것입니다.
Q. 어린 시절의 꿈은(직업으로서) 무엇이었나요? A. (시간 순서대로 나열) 미스코리아, 시인, 수의사, 뇌과학자, 패션잡지 에디터, 외교관 등
Q. 현재의 일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에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어른이 되어가며 순수한 애정을 갖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런 애정의 대상을 발견하면 소중히 여깁니다. 외국어에 대한 제 애정은 순수한 지적 호기심과 조건 없는 열정이 함께 합니다. 여기에, 다른 사람을 통해 세상을 보길 좋아하는 제 취향이 반영되었습니다. 프랑스어를 구사함으로써 저는 새로운 3억 명(프랑스어 사용자)과 의사소통이 가능해지고 3억 개의 다른 세계를 만날 수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영업 사원으로 일하며 외국어의 힘으로 모든 가능성을 확인하며 그 즐거움을 만끽했습니다. 다른 일들은 그만큼 즐겁지 않아 계속 이 길을 가보려고 합니다.
Q. 직업 실험에 꼭 하나 필요한 요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일 수도 공간일 수도 자금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실험에는 초조함과 의구심이 따릅니다. 물론 대단한 성취감과 짜릿한 희열, 환희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험은 미확인된 어떤 것을 시도하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타인의 관심과 인정입니다. 나만의 관심과 열정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도 동의하고 함께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는 실험에 확신을 주고 실험의 결과가 어떻든 유의미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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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직업 실험을 통해 실제로 자신의 직업으로서 현재의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월급을 책정한다면 얼마입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A. 150만 원. 직업 실험에 전념하기엔 제 생계를 위해 놓을 수 없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해당 분야는 기술 만능 주의인 현대 사회에서 고소득 직업군에 속하지 않고, 제가 실제로 실험 내용과 비슷한 일을 하는 회사에서 일을 한다 해도 분야 특성상 역시 월급이 높지 않을 것이기에 이렇게 책정했습니다.
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성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5년 후의 본인을 상상한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A. 외국에서 해당 나라의 언어, 사람들, 경제, 산업 분야 등에 정통한 한국인(한국어 사용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입니다. 반대로 제가 한국에 정통하므로 제가 구사하는 외국어권 기업들이 한국에서 기회를 찾을 때 가교를 놓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다. 5년 후면 30대입니다. 제가 길을 찾기 위해 방황하며 모든 것을 다 해 볼 기세로 도전하는 것은 20대까지라고 스스로 결심했기에 위와 같이 명료한 그림을 상상했습니다.
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장렬하게 실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직업 실험의 경험이 남았습니다. 실패의 경험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A. 직업 실험으로서 실패를 확인했다면 아주 다행입니다. 실험을 거치지 않은 실전이었다면 잃는 것이 더 많았겠죠. 실패는 아프고 쓰라리지만 언제나 성공보다 유익합니다. 실패라는 결과를 통해 제겐 선택지가 주어질 것입니다. 실패의 원인을 파악하고 보완하여 다시 시도를 할 것인지, 실패를 납득하고 인정하며 다른 길을 새로 모색할지 두 갈래가 있습니다. 어떤 선택을 할 지는 아직 모르지만, 저는 최선을 다했고 꿈꾸는 그림을 이뤄 내기 위해 모든 가능성을 검토해 시도했으므로 그 어떤 후회도 미련도 없습니다.
청년업
201
SURVEY.
한주희 Q.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 본인의 작업에 새롭게 도전하고자 하는 청년에게 해주고 싶은 말, 혹은 조언이 있다면? A. 출판이라는 키워드와 외국어라는 키워드로 구분해 말씀드립니다. -출판업으로는 돈을 벌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콘텐츠 생산, 홍보 차원에서 어떤 수단이 되어야지, 출판업으로 돈을 번다는 게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당신이 이미 수만 명의 독자를 확보한 유명인이라면 시도해볼만은 합니다. -반면 외국어로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합니다. 당신에겐 온 세상이 무대이고 가능성입니다. 문제는, 보이지 않는 틀(경계)을 깨어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 틀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해 보여 우리는 갇혀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특히 우리 외국어 전공자는 자유롭게 도전하고 시도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잠재력은 발휘됩니다. 기존에 만들어진 자리와 길은 우리가 타고난 성질과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험가이며 개척자입니다. 잊지 마세요.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202
Q. 본인이 청년업을 통해 경험한 ‘업’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면, 당신의 직업은 어떤 명칭을 갖게 될까요? 자유롭게 직업의 명칭을 상상해 주세요. (여러 개를 작성해 주셔도 좋습니다.) A. 프로젝터, 외국어 콘텐트 크리에이터 -외국어 구사를 통해 크고 작은 다양한 주제의 프로젝트를 하며 콘텐츠를 생산합니다.
청년업
203
INTERVIEW.
Fromto
2016년부터 도시의 기록을 아카이빙하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결성한 팀입니다. 전체적인 프로젝트 기획과 진행을 담당하는 황자양과,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사진, 영상 등의 기록화 작업을 담당하는 시전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황자양
지역에서 살아가거나 살았거나, 생활하거나 생활했던 이들이 해당
Fromto
지역에 대한 본인의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한 사적인 지도를 제작하는 프로젝트입니다. 개인의 작업을 진행함과 동시에 신청자들이 함께 모여 지역에 대해 이야기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후 그 결과를 전시와 책자로 제작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각자가 지역에 대한 사적인 지도를 만들어 보며 개인 삶의 기록, 지역의 기록, 지역의 변화와 문제점을 발견하는 일들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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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to의 연대기
마음먹기의 시작
프로젝트의 시작
2016년 초, 2013년부터 지도 회사 다니다가
청년업이 계기였어요.. 청년업 지원 포스터를 본 순간
2016년 초에 개인적으로 내 지도를 처음 만들기
시작되었습니다. 4월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마음에
시작했어요. 내 포트폴리오가 처음 생긴 시점입니다.
드는 공고였어요. 거기에 3가지 지원 분야가 있었어요.
지도를 좋아하는데도 일을 일로서만 하고 있는
덕업, 가업, 부업이었는데 정확하게 나의 상황과 맞아
내 모습을 보고, 일 외에 좀더 재밌는 다른 걸 하고
떨어진다고 느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일로 돈 버는
싶다고 시작한 것이 2016년 초입니다.
것을 지원해 주는 사업이니까. 공고를 늦게 봐서 마감 이틀 전에 알았거든요. 밤을 새서 지원서를 썼습니다.
만남 팀원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운상가 프로젝트 때부터 함께 활동을 한 20년지기 친구입니다. 20년 전이 첫 만남이 되겠네요. 전주에서부터 친구였던 사람입니다. 항상 함께 일하는 팀원이라기보다, 프로젝트가 생기면 협업하는 방식입니다. 그 친구도 문화 재단에서 공연 대관 업무나 공연 음향 장비 관리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위기 “생계와 프로젝트가 맞을 수 있을까?”를 늘 고민하고 있어요. 세운상가 프로젝트 때도 정확하게 이런 어려움이 있었어요. 돈벌기와 프로젝트를 병행하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내가 원하는 일을 지속하는 데 돈 버는 일을 확보해야 하나 딜레마에 빠졌죠. 위기는 지금입니다.
극복 위기는 자연스럽게 극복되지 않을까요? 위기는 분명히 올 거라고 생각하고요. 극복이 될 수도 있고, 둘 중에 하나를 포기할 수도 있겠죠. 하고 싶은 일을 지속할 수 있고, 혹은 도시 재생 코디네이터 일만 할 수도 있고요. 둘 중 하나가 되겠지요.
현재 “지금 하고자 하는 일들의 시작이다.” 라는 의미에서 대학 입학한 정도의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을 모아서 주체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전시를 하는 것은 이번이
청년업
처음이라,주도적이고 본격적으로 나에게 맞고 잘 할수 있는 것을 선택했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느꼈습니다.
205
O | 자기소개와 청년업의 프로젝트
소개 부탁드립니다. H | 'Fromto'라는 단체의 황자양입니다.
H | 청년업 사업에 선정되면서 실현
가능하게 된 거죠. O | 청년업으로 하는 이번 프로젝트가
도시와 관련된 일을 하고
'개인의 기억에 관한 지도
있습니다. 이번에 청년업에
만들기'의 최초 버전이자 첫
지원한 프로젝트는 홍대, 합정,
시도일까요?
망원 일대를 사는 주민들이 각자 개인적인 기억과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지도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O | 지도 만들기를 결심한 계기가
있을까요? H | 어렸을 때부터 지도를 좋아했어요.
H | 사람들 모아서 하는 것으로는
처음이 맞아요. 하지만 개인적으로도 혼자서 작업을 이어 가고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 살던 동네가 전주 동서학동 이었는데, 그때의 기억이 담긴
함께하는 참여자가 잘 모였어요. 디자이너도 있고 일러스트를 그리시는 분도 있어서, 자연스럽게 분업이 되고 있습니다. O | 앞으로 이것이 본인의 업이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덕업으로서 프로젝트를 시작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H | 좋아하는 일이 업이 되는 것은
다른 방향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전주에서 서울 올라와 살기
점점 들어요.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는, 회사를 다니며
지도 보는 걸 유난히 좋아했다고
살았던 동네인 불광동의 지도를
하더라고요. 사회과 부도, 지리
만들었어요. 그렇게 혼자 만든
부도 같은 것들을요. 그것이
지도들을 SNS에 올리고 하다
이어져서 지도 만드는 회사를
보니까 여러 가지 조언과 제안을
4년 정도 다녔어요. 회사를
많이 듣게 되더라고요. 자연스럽게
다니면서 내가 원하는 일들을
사람들과 함께해 보고 싶다는
여기서 다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마음이 생겼어요.
들더라고요. ‘내가 만들고 싶은걸 지역에서 개인의 생각이나 경험을,
많아요. 하지만 프로젝트를 꾸준히
나만의 지도를 제작했습니다. 주변 어른들이, 어렸을 때 제가
혼자 작업해 내고 싶다. 한
H | 홍보가 잘 안 돼서 힘든 부분이
O | 해 보니 어떠신가요? H | 힘은 들어요. 각자의 지도를 제작하고
말하자면 경험과 추억에 관한
전시한다는 거대한 목표를 설정하고
지도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출발했기 때문에 굉장히 힘든데,
들었어요. 그 마음을 벼르고 있다가
보람은 많이 있습니다.
진행하며 최종적으로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까를 계속 고민하고 있습니다. 지금 하는 활동은 기초 작업이 아닐까 싶어요. 우리 단체의 포트폴리오이기도 하고, 지역과 관련된 지도 제작의 정체성을 다지는 초기 작업이기도 해요. 나아가서는 오프라인 활동과 개인적 경험을 기록하는 '기록 어플리케이션'도 기획하고 있어요. 개인이 갖고 있는 지역에 대한 데이터를, 지도에 기록하는 어플리케이션인데요. 이것이 나중에는 그 지역을 여행하는 여행객 또는 초행자에게 정보 제공을 하거나 공공 기관의 사업 개발 백데이터로 활용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O | 청년업 사업을 통해 멘토링을 받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도움이 되었던 부분이 있었나요? H | 멘토링을 받는다고 하니까 처음엔
단순하게 ‘내가 잘 몰랐던 부분을 배워야지’ 라는 접근을 했어요. 그런데 뜻밖의 말을 들었습니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206
H |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추구하거나 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을 하든 그런 부분은 생기기 마련이니까요. O | 도시 재생에 몸담게 된 계기는? H | 지도 회사에서 쌓인 피로와 약간의
불만 때문에, 도시와 관련된 공모 사업에 지원해서 몇 개의 프로젝트를 했었어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 초기의 의도대로, 기금을 받아 할 수 있다 보니 보람이 있었습니다. 세운상가에서 진행된 ‘다시 세운 H | 멘토님이 공공, 공익적인 일을
H | ‘넥스트 로컬’을 통해 계속 만나게
하는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었으면
될 지역은 강경이에요. 강경은 근대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어째서
문화 유적이 많은데, 사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시느냐 물었더니
잘 몰라요. 도시 재생 사업도
나쁜 방법으로 돈 버는 사람이
관에서는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많은 게 아니라 정직한 방법으로
있는 것 같은데 시민들 사이에서는
혹은 공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직 활성화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돈을 많이 벌어야 된다, 그게
강경의 여행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가능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하고, 서점 겸 게스트 하우스도
하시더라고요. 돈버는 게 나쁜 게
만들어 볼 계획입니다
아니라는, 혹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았어요. ‘공공이든 공익이든 사람이 하는 일이라면,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 꼭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 공감되는 말씀이었죠. O | 지금의 업을 완전히 접고서,
본인이 좋아하고 원하는 일인 이 프로젝트가 자신의 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H | 지금 몸담고 있는 곳의 계약 기간이
O | 그렇다면 본인은 지도를 만드는
사람에서 서서히 기획자가 되고 있는 과정인 걸까요? H |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사실
정말 하고 싶은 일은, 지역의 기억을 모으는 지도 만들기예요. 이유는 그냥 어렸을 때부터 어째서인지 지도가 막연히 좋았다는 것밖에 떠오르지가 않네요. 지도 회사에 다녔다는 것을 겉에서 보면,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올해 말까지여서 이곳에서 이
된 걸로 생각할 수 있는데 내막은
직업을 계속 가질지 말지를 고민
그렇지 않았고요. 클라이언트가
중이에요. 청년업을 통한 프로젝트
대부분 공무원이었고, 어떤
말고 다른 프로젝트도 계획
결정권이나 아이디어를 고르는
중이거든요. ‘넥스트 로컬’이라는
일은 다 발주 부서에서 했어요.
프로젝트인데, 서울의 청년들이
저는 그들의 취향에 맞춰서 일을
지방으로 내려가서 하는 사업에
해야 했고, 제 마음에 들지 않아도
자금을 지원해 주는, 서울시의
어쩔 수 없었어요. 무리한 일정도
프로젝트예요.
감수해야 하고요.
청년업
프로젝트’에 ‘오래된 도시의 미래, 세운상가를 말하다’ 라는 제목으로 음악가들을 섭외해서 음반을 만들었어요. 음악가들이 각자 생각하는 세운상가를 노래로 만들어 음반을 제작하고 전시하는 프로젝트였습니다. 전시 타이틀은 ‘타임라인’이었어요. 생각해 보면, 지속적으로 도시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전공이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요. O | 당신에게 직업이란? H | 물론 직업이 돈을 벌고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것인데, 저는 그것보다 내가 관심 있고 하고 싶은 일에 능력을 발휘하는 게 우선이었어요. 그래서인지 돈을 못 벌 때도 많았고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잘, 재밌게 할 수 있는 것. 직업은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저런 직업들을 보다 보면, ‘저걸 내가 하면 좋겠다’ 싶은 게 꽤 있지만, 전공을 해야 하거나 석사까지 해야 하는 일들이 있었어요. 지금으로선 나에게 가능한 분야에서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에 몰두하고 있어서 만족스럽습니다.
207
SURVEY.
Fromto Q. 당신에게 업(직업)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A. 내게 즐거움을 주는 것, 지속적으로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것, 업무 시간이 아닐 때에도 늘 생각하고 있을 만큼 내게 동기 부여가 되는 것, 이윤을 남기고 돈을 버는 것보다는 공익에 도움이 되는 것
Q. 어린 시절의 꿈은(직업으로서) 무엇이었나요? A. 언론인
Q. 현재의 일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에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어렸을 때부터 사회과 부도를 끼고 살았고, 지도 회사에서 실제 일을 했을 만큼 지도에 관심이 많고 좋아했습니다. 도시와 관계된 각종 공모전과 공모 사업에 참여하며 도시와 관련된 각종 기록을 가장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매체가 지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청년업을 통해 이 일을 하면서, 참여자들이 갖고 있는 지역에 기반한 기억과 경험을 접하는 일이 몹시 즐거운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공감과 공유가 일어나는 지점이 가장 특별합니다.
Q. 직업 실험에 꼭 하나 필요한 요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일 수도 공간일 수도 자금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일단은 자금입니다. 이 직업 실험을 위해 제가 하고자 하는 형태에 꼭 알맞는 어플리케이션을 개발하고 홈페이지를 구축해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 직업 실험에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커뮤니티, 혹은 홍보 채널도 필요합니다.
Q. 직업 실험을 통해 실제로 자신의 직업으로서 현재의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월급을 책정한다면 얼마입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A. 300만 원입니다. 현재 제가 무리 없이 한 달을 살아갈 수 있는 돈의 양입니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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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성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5년 후의 본인을 상상한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A. 지역에서 개인의 경험과 기억을 보존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한 사람들, 커뮤니티가 많아져서 더욱 많은 지역에서 해당 사업을 진행하였습니다. 사업을 진행하며 만들어진 데이터는 많은 지역의 관공서에서 도시와 관계된 사업을 진행할 때 기초 자료로 쓰이고 있습니다. 지역에서 본인의 경험과 기억을 손쉽게 담을 수 있는 어플리케이션을 개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사용하며 지역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고 포인트를 얻어 지역의 가게에서 쿠폰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많은 지역에서 가게들과 주민들이 결합한 커뮤니티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일을 하며 얻었던 정도의 수익을 얻으며 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장렬하게 실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직업 실험의 경험이 남았습니다. 실패의 경험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A. 실패의 이유를 분석하고 다시 시도할 직업 실험에 반영하겠습니다.
Q.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 본인의 작업에 새롭게 도전하고자 하는 청년에게 해주고 싶은 말, 혹은 조언이 있다면? A. 원하는 일을 하세요.
Q. 본인이 청년업을 통해 경험한 ‘업’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면, 당신의 직업은 어떤 명칭을 갖게 될까요? 자유롭게 직업의 명칭을 상상해 주세요. (여러 개를 작성해 주셔도 좋습니다.) A. 지역 기억 기록자, 도시 기억 보존자 등
청년업
209
INTERVIEW.
필룸은 공간에 대한 스스로 자립성과 감수성을 키우기 위한 팀입니다.
FEEL ROOM
건축 전공자로, 공간과 주민 참여를 기반으로 하는 도시 재생과 사회적 경제 관련 일을 하는 팀장 송효웅과 건축 전공자로 설계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는 김초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송효웅
지원 당시 프로그램은 6주 동안 청년들이 스스로 공간을 기획하고
FEEL ROOM
디자인해볼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레고블럭을 이용한 워크숍과 스케치업 교육을 통한 직접적인 공간 디자인을 체험해 보는 과정으로 커리큘럼을 정했습니다. 사업 후에 진행하고 싶었던 타기관 연계 사업 개발과 제품 개발에 대해 프로젝트 진행 중, 발전된 부분이 있었습니다. 운이 좋게 경기 교육청 율곡 연수원과 경남 교육청에서 교육 공간 혁신 사업의 강사로 레고 워크숍을 이용해 보며 새롭게 창의 교육 관점의 공간 디자인 워크숍 프로그램을 개발하였고, 멘토링을 진행하면서 레고로 만드는 상품 자체의 가치를 좀더 끌어올리는 방안을 추가로 구상하고 있습니다. 청년들을 위한 워크숍에 플러스로 학교 공간에 대한 워크숍, 상품으로서 레고 툴킷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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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 FEEL ROOM의 연대기
마음먹기의 시작
프로젝트의 시작
올해 2월의 프로젝트요. ‘청춘 여가 연구소’에서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거 했으면 좋겠다 얘길 듣고
‘월세 유목민’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에서, 내 개인
'개발해야겠다' 생각만 하고 있던 차에 ‘청년업’을
컨텐츠이면서 사람들도 관심 가질 만한 컨텐츠를
신청하면서죠.
고민하던 게 지금의 프로젝트가 됐죠.
만남 학교 후배예요. 5년 전에 학교에서 만났어요. 건축 학과에서 답사 동아리를 했는데 거기서 만났어요. 제게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입니다.
위기 제가 회사 일이 많아진 게 위기라면 위기겠네요. ‘청년업’에 에너지를 많이 쓰지 못하고 있어서, 조만간 휴가를 한 달에 몇 번씩 내서 그날을 이 작업하는 날로 정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극복 네. 시간 확보는 어떻게 하며, 머릿속에 그린 것들은 어떻게 실행할지를 고민하고 있어요. 원래 올해 5월까지는 대학원에 다녀서 주말에도 항상 뭘 하고 있었는데, 이제 주말이 자유로워진 지도 3달쯤 됐어요. 다시 뭔가에 힘을 쏟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예쁘게 잘 자란 떡잎 정도? 태아기까진 아닌데, 왜 애기들 태어나면 영재 소리 많이 듣잖아요. 1+1 할 줄 알면 수학 영재라 하고요. 이때쯤엔 다들 칭찬받고 있지 않을까요?
청년업
211
O | 자기소개와 팀 소개 부탁드립니다. F | 저는 송효웅이고요, 청년업에서
‘필룸’이란 팀 이름으로 ‘나만의 낭만 공간 만들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건축을 전공했고 지금은 건축 일이 아닌, 공간 기획과 도시 재생, 도시 디자인 및 기획 일을 주로 해요. 그러다 보니 건축에 대해 이루지 못한 꿈 같은 게 있어서, 만약 이걸 개인 프로젝트로 만든다면 어떤 걸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제가 지역 주민들을 만나 진행하던 워크숍의 내용과 제가 전공했던 분야를 합쳐서 만들어 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올해
F | 그래서 이 워크숍은 따로 경남
목표를 개인 프로젝트 만들기로
교육청, 경기도 율곡 연수원 같은
잡고 계획하다가 ‘청년업’ 공고를
곳에서 교사들 대상으로 진행을
보고 신청하게 됐습니다. ‘나만의
했어요. 이번에 멘토링 받으면서는,
낭만 공간 만들기’의 첫 시작은
상품에 대한 툴키트룰 더 개발해서
올 초에 고민하던 차, 아는 분이
레고를 대체할 수 있는 상품으로서
‘삶은 인문학’이라는 청년 주거
판매하는 것도 좋겠다는 말씀도
공유 시설이란 공간에서 ‘월세
들었죠. 해야 할 일이 많네요.
유목민’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해 보자고 제의했거든요. 그때 제가 생각해 낸 기획이 원룸 만들기
O | 왜 건축을 전공하셨나요? F | 입시 준비를 하면서 아주대학교
O | 운명이네요. 건축과를 가서
힘들었던 부분은 없었나요? F | 대부분의 건축학과 1학년생은
도면이나 선을 계속 그려야 해요. 근데 1학년 때 저는 밴드 동아리나 다른 활동을 하면서 '그 활동은 왜 해야 되지…?' 하는 회의감을 갖고 있었고, 재수해서 더 좋은 학교로 옮겨야 하나 하는 생각도 했었어요. 그런데 1학년 2학기 때부터는 아이디어도 필요하고, 공간을
워크숍이었어요. 레고를 이용해
수시를 보게 됐는데 거기는
사람들이 원룸 인테리어를 하고
서류를 통과하면, 강의를 하나
결과물을 가져갈 수 있도록 진행이
듣고 그것에 대한 시험을 보는
됐고요. 워크숍을 하러 온 사람들의
강의 테스트라는 게 있었어요.
만족도도 좋았고, 이후에 교육부나
그때 ‘바우하우스’라는 개념도
마을 만들기 하시는 분들이 학교
처음 접했는데, 보다 보니까
근무하시다가 도시 재생도
교실용으로, 또는 마을로 범위를
건축이 인문학적이기도 하면서
하고, 어딘가의 담임 멘토로도
넓혀서 했으면 좋겠다는 피드백을
이과스럽기도 하다는 느낌을
활동하셨네요. 도시 재생 쪽으로
해 주셨죠.
받았거든요. 그때 수시는
관심을 둔 이유는 무엇인가요?
O | 확장중인 작업이네요.
떨어졌지만, 시험을 보면서 저한테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F | 네, 여러 제의를 받은 이후에 더
개발을 해 보기 위해 ‘청년업’에 지원한 거죠. 처음의 계획은 원룸을 집 또는 청년들의 창업 공간으로 확장하는 것으로 잡았고, 그 후에는
됐고, 대학 지원할 때 세 개 군 중에 하나만 ‘내 맘대로 하겠다’ 해서 건축과를 썼는데 그것만 붙어 버렸어요.
새로 만드는 프로젝트 같은 것들이 진행되는데 그때부터 재미를 좀 붙인 것 같아요. O | 경력을 보니 종합 건축 사무소에서
F | 처음 설계 사무소를 가서 회의감을
많이 느꼈어요. 앉아서 캐드만 치고 있고, 회사에서 말을 험하게 하거나 권위적인 분위기도 있었고요. 아파트 분야에 대한 회의감이 특히 컸어요. 회사 다니면서, 나는 앞으로
교실 기반으로 하는 워크숍 방식에
어떤 건축을 해야 할까 고민하고
대한 제의도 받았어요.
여러 세미나를 다녔는데요.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212
F | 그때 들었던 생각이, 커뮤니티가
만들어지고 거기 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집이 지어지고, 그 곳에 사람들이 모여서 살게 되면 좋은 건축이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커뮤니티에 관한 걸 공부 하기 위해 유학 준비를 하다가 제가 다닌 회사의 대표님을 알게 됐는데, 유학이나 학위는 나중에 그게
O | ‘소셜 디자이너’라는 게 뭘까요?
O | 부모님의 의견도 비슷할까요?
F | 글쎄요. 박원순 시장님께서도
F | 처음엔 많이 싫어하셨어요. 전에
자신의 직업을 ‘소셜 디자이너’라고
다니던 회사에서 성과가 좋게
표현했다고 하더라고요.
나왔거든요. 그런데 제가 참여해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하는
제안서 썼던 게 당선이 되고 또
사람들을 통틀어 그렇게 부르는 것
쓰면 또 당선되고 하는 경우들이
같아요.
있었고요, 회사 옮긴 이후엔 진급도
O | 대학 친구들은 일반적인 건축
필요할 때 받는 거지, 그 목표를
사무소를 다니나요? 본인의
위해선 한국에서 실무를 쌓는 게
활동에 대한 친구들의 반응이
맞지 않느냐는 말씀을 들었고 그때
궁금하네요
그 회사에 들어가게 됐어요. O | 본인이 주도해서 기획도 할 수
있는 환경이었나요? F | 네. 3개월 만에 혼자 진행한
프로젝트가 있었거든요. 송파구 마천동에 안전 마을을 만드는 프로젝트였는데, 간단히 시설물 등을 디자인하고 시공을 마을 주민 협동조합에 맡겨, 지역에 계속 일도 만들 수 있는 거였죠. 이런 사업은 유지 관리가 가장 중요한데, 마을 사람들이 만든 거니까 이 사람들이 계속해 나갈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봤어요. 첫 프로젝트로서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죠. O | 올해 초에 ‘개인 프로젝트
F | 친구들 중엔 ‘너는 정말 너처럼
사는구나, 재밌게 산다, 부럽다’ 하는 사람들도 있고, 선배들은 오랜만에 만나면 ‘이제 다시
또래에 비해 빠르게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월급은 적을지 모르지만 그냥 '잘 하고 있나 보네' 하고 생각해 주시는 것 같아요. O |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의
본질을 얘기해 본다면? 재미일까요, 혹은 가치일까요? F | 둘 다라고 생각해요. 제 직업관에서
설계해야 하지 않아? 결혼도
가장 높은 목표 지점은 ‘나로
하고 돈 벌려면?’ 이런 식으로
인해서 뭐든지 더 좋아졌으면
얘기하기도 해요. 월급은 제가
좋겠다’라는 건데, 학생 때도 그런
좀 적겠죠, 실제로. 건축 분야는
게 뭐가 있을까 싶어서 교수님
정년도 없고 월급이 연차로
찾아가 “교수님 되려면 어떻게
올라가는 게 어느 정도 정해져
해야 할까요” 여쭤도 보고…
있어서 안정적이라고 느낄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이랑 얘기하다
그쪽 사람들이 봤을 땐 제가 뭘
보니까 “난 교수 될 거야” 하는
하는지도 모르고, 무슨 일인지
사람들이 교수가 되는 경우는
모르니 장래도 없는 것 같다고
별로 없더라고요. 내가 하고 싶은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거 열심히 하고 최대한 그걸 다 이뤄가다 보면 되려 교수 될 기회가 생기는 거 아니냐, 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만들기’를 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F | 작년에 어떤 세미나에서 누가
제게 직업이 뭐냐고 물었는데, 명함에는 ‘소셜 디자이너’라고 써 있는데 이게 맞을까란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나는 뭘 하는 사람이지? 뭘 할 수 있는 사람이지?’하는 게 작년 하반기의 최대 고민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내 컨텐츠를 만들어 보자라는 생각과 그 고민이 연결돼, 올해 초에 결심을 하게 됐죠.
청년업
213
SURVEY.
FEEL ROOM Q. 당신에게 업(직업)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A. 뭐 해 먹고살지? 라는 질문이 대학생 때부터 꾸준히 있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있어서 업은 뭐 해(어떤 활동) 먹고(벌이) 살지(삶)로 분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어떤 활동을 해서 얼마만큼의 돈벌이를 만들면서 삶을 이어갈지, 단순히 월급의 개념도 아니고, 단순한 활동의 개념도 아닌 것 같아요.
Q. 어린 시절의 꿈은(직업으로서) 무엇이었나요? A. 초등학교 때까지는 하루에 한 번씩 꿈이 바뀌었는데, 중학교 때부터 대학생 중반까지는 꿈이 없이 지냈던 것 같아요. 뭘 하고 싶은지,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지내다 대학생 때 고민하다 보니, '남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걸 좋아하는구나,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 생각했죠. 그게 제 꿈이었습니다.
Q. 현재의 일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에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제가 공간에 대한 욕심같은 게 있었어요.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공간을 꿈꾸고 있고요. 이런 고민들을 어떻게 사람들과 나눌까 하다가 워크숍 하나를 기획했습니다. 단순하게 우리가 사는 원룸에 대한 이야기와 블럭으로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 보는 워크숍에서, 청년들에게 공간에 대한 감수성을 불어넣는 것으로 말이죠. 그렇게 하면, 더 좋은 공간에 대한 수요와 그에 따르는 공급이 만나 더 나은 주거 공간이 만들어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첫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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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직업 실험에 꼭 하나 필요한 요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일 수도 공간일 수도 자금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생각'인 것 같아요. 머릿속에만 있는 걸 실현시킬 땐 여러 문제들과 시간 등 망설이게 하는 요소들이 너무 많았거든요. 하지만 어느 정도 가이드에 따라 생각을 하고, 다른 생각을 들으며 점점 발전시켜 나가는 게 가장 좋은 것 같아요.
Q. 직업 실험을 통해 실제로 자신의 직업으로서 현재의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월급을 책정한다면 얼마입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A. 워크숍 프로그램은 수익성과 별개예요. 그래서 타기관 연계 사업과 제품 사업이 꾸준하게 잘 되었다고 가정해 말씀드리자면, 조심스럽게 300만 원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이 작업을 하게 된 목표가, 언젠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세후 300만 원씩 다같이 나눠 갖는 회사를 만드는 겁니다.
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성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5년 후의 본인을 상상한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A. 적당한 워크숍 프로그램 운영, 타기관에 맞는 툴키트 개발, 제품 판매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는 사람. 하지만 너무 바빠서 보기 힘든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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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VEY.
FEEL ROOM 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장렬하게 실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직업 실험의 경험이 남았습니다. 실패의 경험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A. 머릿속에 있는 걸 현실로 끌어 내는 작업이 주는 경험. 막연한 꿈이 현실이 됐을 때 만날 어려움의 예행 연습. 내가 잘하는 부분, 못하는 부분에 대한 이해 등
Q.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 본인의 작업에 새롭게 도전하고자 하는 청년에게 해주고 싶은 말, 혹은 조언이 있다면? A.'실험'입니다. 위키에서 '실험'은, 가설이나 이론이 실제로 들어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다양한 조건 아래에서 여러 가지 측정을 실시하는 일이고 지식을 얻기 위한 방법의 하나라고 말합니다. 새로운 실험을 준비하고 시도해 보는 게 가장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2019 청년직업실험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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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본인이 청년업을 통해 경험한 ‘업’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면, 당신의 직업은 어떤 명칭을 갖게 될까요? 자유롭게 직업의 명칭을 상상해 주세요. (여러 개를 작성해 주셔도 좋습니다.) A. 공간 퍼실리테이터, 공간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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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일과 작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투리 자재를 생산하는 인테리어
Piece of peace
디자이너와 설치미술작가가 만나 작업실 한편에 자투리 잡화점을 운영합니다. 제로 웨이스트를 목표로 물품 가공 단계에서 파생된 자투리가 자투리로 남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미 남겨진 자투리가 있다면 쓸 만한 무언가로 탄생시켜 사람들이 소비할 수 있게 만듭니다.
천근성, 이석희
Piece of peace의 첫 번째 수요자는 목재, 페인트, 철물 등 규모에
Piece of peace
맞게 소량으로 필요한 만큼만 구매하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면 조그마한 가게 입간판을 만든다고 했을 때 목재상에 가면 4X8 합판 한 장, 각재 1단(12개), 못 한 상자를 구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투리 잡화점에 들른다면 필요한 크기의 나무를 구입하고, 못도 필요한 만큼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비용도 감축할 수 있고 또 다시 자투리를 발생시키지 않아도 됩니다. 두 번째 수요자는 폐기물 처리 비용을 아끼고자 하는 잉여의 자투리 보유자들입니다. 피스오브피스는 이 두 수요자를 매개하는 플랫폼 역할을 하여 제로 웨이스트를 지향하는 문화를 확산시키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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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ece of peace의 연대기
마음먹기의 시작
프로젝트의 시작
청년업 마감 하루 전인가요? 하루 전에 공고를 보고
청년업 선정자 발표가 나고 나서. 사실 그 지원서를
다음 날 마감 전에 썼어요. 마감 하루 전에 공고를
썼을 때 이미 됐다고 생각했어요. 이건 안 될 리가
보고 이걸 하면 어떨까 하고 저녁에 술 마시면서
없다고 생각했고 만에 하나 안 되더라도 이건 해야겠다
'그래, 한 번 해 봐요' 했고, 어차피 안돼도 뭐, 그래서
하고 마음먹고 있었어요. 그래서 두려움이 없었어요
그 다음날 지원서를 썼어요. 그 피스오브피스라는 말도 그날 그냥 툭하고 술 마시다가 나왔어요.
만남 형이 대구에서 15년도에 전시를 했었는데 저와 형의 공통 지인인 작가님과 대구에 전시를 같이 보러 가서 처음 만났어요.
위기 공사하면서 더울 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프로젝트에 맞추기 위한 한 방향으로, 그때 에어컨을 거의 틀지 않았었거든요.
극복 그걸 결국 못 이겨서 조금씩은 틀었어요. 이제 더운 시기는 지났으니까 자연스럽게 위기는 지나간 거죠.
현재 유아기? 일단 저희가 직업 실험에 참여하고 있고 오프닝을 9월 초에 진행하게 되잖아요. 관심이 많이 필요한 시기라서요.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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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 소개 부탁드립니다. C | 안녕하세요. 천근성이라고
합니다. 문래동에서 미술 작가로
O | 업사이클링을 주제로 마켓을
준비하고 계시군요. 시각
상당히 큰 결정인 것 같아요.
미술가로서는 어떤 작업을
그게 언제쯤이었나요?
하시나요?
일하고 있어요. 저희는 미술 작가와 상업 인테리어를 하는 두 사람이 결성한 팀이고 이름은 ‘피스오브피스’입니다. 둘 다 어떠한 물질을 다루는 사람들이고, 일을 하면서 쓰레기를 많이 만들어 내는 쓰레기 유발자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쓰레기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항상 해 왔는데,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없을 것 같아서 방법을 연구하게 된 거죠. 지금은 그 방법 중 하나가 쓰레기를 잘 보관하고 필요한 사람에게 다시 재분배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무를 사서 용도 변경을 할 때 자투리가 나오잖아요? 그 자투리들을 잘 보관하고 다시 분배하고,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려주면 그게 쓰레기가 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 자투리를 보관하고 다시 판매하는 자투리 마켓을 청년업을 통해 열게 되었습니다.
O | ‘채식주의자가 되겠다’ 같은
C | 비슷한 맥락인 것 같아요. 시각
C | 한 3년 전? 그래도 너무 필요한
게 있으면 사기는 해요. 얼마 전엔
작업도 키워드 위주로 얘기하는데,
산에 올라가려고 등산 용품 새것을
생태나 환경 같은 것들이에요.
하나 샀고요. 3년 전이라고 하기
아무래도 졸업 전부터 이런 것들에
보다 세계 여행을 갔을 때라고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아요.
하는 게 정확할 수도 있겠어요.
버려지는 것들이 많이 아쉬웠어요.
여행을 가서 경험을 해 보니
잘 줍는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책으로나 다큐로만 접했던 쓰레기
넝마쟁이라고 해야 하나? 원래
문제가 정말 심각하더라고요. 예를
좀 이것저것 잘 줍는 성향이었고,
들면 쿠바 남부에 가면 바다에
그걸 통해 뭘 만들어 내다 보면
마이애미나 도미니카에서 몰려온
업사이클링이니 정크 아트니, 상도
쓰레기가 있거든요. 그래서 해안이
받고 전시도 많이 하고 그랬어요.
다 망가지고 관광객이 거의 다
내가 하는 일이 이런 건가 보다
끊겼어요. 심지어 남의 나라 쓰레기
하고, 또 하면서 환경에 대해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는 거죠.
관심도 더 갖게 됐죠. 주변에서
당연히 식수 오염도 따라 오고,
불러 주기도 하고 스스로 각성도
관광 자원은 다 파괴되고… 그런데
되는 활동이라서, 그때는 그냥 그런
또 그 사람들은 그 쓰레기에서
줄 알고 살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나온 것들 주워서 생활하거든요.
업사이클링이라는 것도 또 다른
아이러니하죠.
쓰레기를 만든다는 걸 깨닫게 된 거죠. 이 문제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다가 새 물건을 아예 사지 않는게 가장 핵심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O | 지금의 동료와는 어떻게
의기투합을 하게 되었나요? C | 작가로서 계속 경제 활동을 하다
보니 인테리어, 가구,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들을 계속 접하게 돼요. 석희는 그 분야에서 저보다 더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인 거죠. 서로 일이 있을 때 도와주다가 팀이 되었어요. O | 마켓을 오픈할 예정이신데 어떤
물건들이 채워지게 되나요? C | 제 주변에서 다뤄지는 소재 중엔
나무 자투리가 가장 많이 나와요. 판재나 각재가 있고, 또 페인트가 있어요. 인테리어를 하다 보면 페인트는 조금 사서 쓰고 모자라면 또 사서 쓰고 하는 식으로 할 수가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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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한 번에 대량으로 사서 남은 것들은
소분해 컬러 별로 분류해 뒀고, 그 밖에 타일 같은 것도 박스 단위로 팔기 때문에 조금씩 자투리가 남아요. 또 건축이나 제작에 필요한 못이나 피스 같은 부품들도 500개, 1000개 단위로 팔거든요. 그런 것들을 소분해 놨죠. 그런데 이런 것들만 진열해놓으면 다 건축 자재잖아요. 그러면 타겟이 너무 좁아지니까, 청년업 사업을 하면서 타겟층을 더 넓히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생각하다 만들어 낸 것이 ‘자투리 자’였어요. 나무 자 크기로 된 나무들을 많이 발견했는데 이걸 실크 스크린으로 찍기만 하면 바로 자가 되겠더라고요. 마켓의 디스플레이 방식도 자투리 나무나 철로 꾸몄고, 조명 갓 같은 것들도 다 자투리로 만든 거예요. 또 처음에는 제작자만 타겟으로 삼았었는데, 이염이 돼서 헤지거나 한 옷은 버려지는 경우가 많지만 작업복으로는 충분히 입을 수 있거든요. 그런데 그냥 작업복으로
O | 어떤 공간이었고 어떻게 하셨는지
얘기해 주세요. C | 중구청에서 유수 공간을 지역
상인이나 예술가한테 임대해 주는 거예요. 청년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들한테 그 공간을 내어주는 사업이었거든요. 그래서 약간
C | 일단은 경험을 파는 것 위주로
생각해요. ‘자투리를 사는 경험을 파는’. 그리고 이걸 통해서 파생되는 무언가가 있을 것 같아요. 그게 돈이 될 수도 있겠죠. 그 파생되는 무언가로 인한 간접적인 수입이 발생할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공유 오피스라고 해야 하나? 신당동 신당시장 옆에 화학동 아크로타워라는 건물이 있고 거기에 청년 창업을 하는 사람들의 공유 오피스를 디자인하는
O | 어떤 게 있을까요? C | 예를 들면 저희가 공간을 꾸미거나
자투리를 응용해서 아트월 같은 것들을 제작하고 있는데,
작업이었죠. 그때 한 번 실험을
신당동에 그 공간을 만들었을 때도
해 봤어요. 제로 웨이스트로 한
지나가시다가 이 테이블 얼마냐고
번 인테리어를 해 보자고. 하지만
문의주신 분들이 있었거든요. 근데
클라이언트의 요구 사항도 있고
그때는 저희가 현장에서 제작한
저희 공간이 아니다 보니까 온전히
부분이었기 때문에 판매를 할 수는
자투리로 공간을 꾸밀 수는 없었죠.
없었어요. 그리고 아트월 같은
재료는 우선 살 수밖에 없으니
것도 자투리를 이용해서 해 놓으면
자투리나, 쓰레기를 최소한으로
그런 집을 꾸며야 하는 분들은 그걸
배출하지 않게 하자 하고 첫 실험을
보고 문의를 하세요. 그런 방식으로
한 거예요. 그때 진짜로 100리터
만들어 가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짜리 쓰레기 봉지 두 개 나왔어요. 성공이었죠.
O | 수익을 낼 수 있다는 가능성과
입으면 사람들이 안 살 것 같고.
상관없이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그래서 이거는 저희의 사업을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알리는 취지에서, 오래되고
C | 일단 재미가 있어서예요. 자투리
낡았지만 입을 수는 있는 옷에
가게라는 걸 본 적이 없거든요.
‘피스오브피스’ 디자인 로고를
그래서 일단 해 보면서, 판매해서
리프린팅 해서 그런 작업복으로
대단한 수익이 나지 않는다는 걸
사용할 수 있게 했습니다.
알지만 다른 파생되는 일들이 많을
O | 두 분 다 이 일은 부업으로 하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물질을 순환시켜서 저희 마켓에서 무언가
계시는 건가요?
판매되고, 그것이 사용되는 것
C | 처음엔 부업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체로도 의미가 있고요. 이런
이젠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식의 운동을 저희가 계속 해
생각이 들더라고요. 부업이라고만
나가면 사람들의 인식이 다시
생각한다면 일은 일대로 하고 이건 이거대로 하는 형태일 거예요.
O | ‘청년업’을 통해서 하는 실험은 이
그런데 청년업을 하는 와중에
마켓을 운영하는 것인데, 여기에서
인테리어가 들어와서 했었는데,
수익을 낸다는 가능성도 보고 계신
그걸 그냥 할 수가 없더라고요.
거죠?
쓰일 수 있겠죠. 이 마켓 규모에서 환경을 바꿀 수는 없지만, 인식을 바꿔나간다는 것이 굉장히 의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최소한 제로 웨이스트 방식으로 했습니다. 인테리어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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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VEY.
Piece of peace Q. 당신에게 업(직업)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A. 나에게 직업이란 최소한의 생계유지 수단이자 나를 대변하는 또 다른 자아실현이다.
Q. 어린 시절의 꿈은(직업으로서) 무엇이었나요? A. 만들기를 좋아했다. 직업을 선택하라면, 누군가에게 필요한 걸 만들어주는 사람.
Q. 현재의 일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에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중지하지 않은 상태에서, 진짜 하고 싶은 일이지만 선뜻 시도하지 못하는 것을 실험할 수 있다는 점.
Q. 직업 실험에 꼭 하나 필요한 요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일 수도 공간일 수도 자금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이번 청년업 지원 사업을 계기로 뜻을 같이 하는 사람과 팀을 이루게 되었다. 직업 실험이 실패로 끝나더라도 팀은 계속 될 것이다.
Q. 직업 실험을 통해 실제로 자신의 직업으로서 현재의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월급을 책정한다면 얼마입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A. 150만 원. 현재 벌이보다 적더라도 더 행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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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성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5년 후의 본인을 상상한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A. 성공 사례 스토리를 들고 전국 순회 강연을 할 것 같다.(바람)
Q. 본인의 직업 실험이 장렬하게 실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직업으로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직업 실험의 경험이 남았습니다. 실패의 경험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A. 마켓을 만든다는 것, 상점의 주인이 된다는 것, 물건을 사고 파는 행위를 한 번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시도하지 않았더라면 앞으로 영영 못 했을 것 같다.
Q. (청년업을 통해 진행 중인) 본인의 작업에 새롭게 도전하고자 하는 청년에게 해주고 싶은 말, 혹은 조언이 있다면? A. 법적 청년 나이 만 39세는 인생에 절반도 살지 않았다는 증거다. 하고 싶은 거 다 해!
Q. 본인이 청년업을 통해 경험한 ‘업’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면, 당신의 직업은 어떤 명칭을 갖게 될까요? 자유롭게 직업의 명칭을 상상해 주세요. (여러 개를 작성해 주셔도 좋습니다.) A. 쓰레기 비유발자, 자투리커, 그린 힙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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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 오뚝이 지수 자가 진단 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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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PLEMENT.
당신의 직업실험을 점검할 수 있는 ‘오뚝이 지수’입니다.
오뚝이 지수
새로운 직업에 대한 실험은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각오는 어떻습니까? 실패 이후에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재도전할 각오의 크기는 얼마만큼 입니까?
오뚝이 지수 측정 방식 각 항목 당 10점 만점입니다. 최고점(또는 매우 그렇다.)10점, 최저점(또는 전혀 그렇지 않다.) 0점으로 계산하시면 됩니다. 합산 100점이라면 당신은 오뚝이 그 자체로 평가됩니다.
(오뚝이 지수의 과학적 근거를 원하신다면 조용히 책을 덮으시면 됩니다.)
1 지금 나 자신의 직업실험의 성과를 몇 점 정도로 생각하나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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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금 나의 일을 돕고 있는 믿을 수 있는 동료가 얼마만큼 충분하다고 생각하나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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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족과 친구들에게 나의 직업실험에 대해 자신 있게, 솔직하게 소개할 수 있으신가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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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장기적으로 지금의 직업실험을 지속할 각오가 있으신가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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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끼는 지인에게 나의 직업실험을 권할 마음이 있으신가요? “함께하자!” 혹은 “강추야! 너도 한번 해 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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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지금 나 자신의 직업실험에 수익이 발생하지 않고 있습니다. 적어도 1년은 버텨볼 작정인가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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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실패했을 경우, 이후에도 나는 지금과 같은 분야의 일을 할 생각인가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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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내가 재도전을 한다고 했을 때, 현재의 동료들 중 몇 퍼센트 정도가 또다시 함께해 줄 것이라고 생각되나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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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직업실험의 성공이 금전적 보상과 직결되지 않는다면 지속할 결심이 있으신가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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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직업실험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들에게 당신의 직업실험을 권할 생각이 있으신가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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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오뚝이 지수 : (
청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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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청년허브 2019 청년 직업실험 지원사업 청년업
발행일 2019년 11월 22일 발행인 서울특별시 청년허브 제작 삼오워크룸 기획 옥민아 편집 조승엽 교정,교열 손지애 디자인 김대희 (그래피카) 사진 조승엽 Ⓒ 2019 서울특별시 청년허브 본 제작물의 저작권은 서울특별시 청년허브에 있습니다. 사용 허가 없는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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