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뭉해쌀 / 이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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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골든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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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Some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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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트라우마센터 .................................................... 267 9-2. 약한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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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현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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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썸 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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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타임과 중증외상을 되새기며.. 고독한 외상전문의 최인혁과 그의 곁을 지키는 파트너, 외상코디네이터 신은아를 기억하며.. 상플 START!!
난 그날 그렇게 미친놈처럼 공항 한가운데 앉아서 한참을 웃다가, 비틀비틀 공항을 빠져나와버렸다. 그녀가 가버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병원은 여전히 예전처럼 돌아가고 있었고, 나 역시 전과 똑같이 일만하고 있다. 아니, 전보다 더, 아주 조금 미친 사람처럼 일을 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힘들어할 자격도 없었다. 실감도 나지 않았다. 이렇게 일을 하다보면, 며칠 뒤에 그녀가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올 것 같았다. 늘 그래왔듯이, 언제나 처럼, 지난 3년 동안 늘 그래왔던 것처럼, 힘들어하는 내 곁을 지켜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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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골든타임 (가장 떨리던 순간, 열정적이던 그때) ※ 추천브금 : 김광진 - 아는지
그로부터 약 10개월 후 2013년 늦가을, 외상외과 사무실, 응급수술을 마치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혁. 사무실안에서는 효은이 자리에 앉아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잠시 문을 연 채로 그 자리에 멈춰서있는 그. 효은이 앉아있는 저 자리. 은아가 있었다면... 그녀가 앉아있을 자리. 여전히 인혁은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런 행동을 했다. 그녀의 흔적이 있을만한 곳에 멈춰 서서 그 깊은 눈으로 그곳을 바라보며 아련한 표정을 짓곤 했다. 이내 그 표정을 거두고 사무실로 들어와 옷가방을 챙기며 입을 여는 그.
“ 서선생, 오늘 수고했어요. 나 먼저 퇴근할테니까. 서선생도 일 끝났으면 이만 퇴근 하세요. ” “ 아, 네! 과장님! 이것만 마치고 퇴근할게요! ” “ 아, 그럴래요? 그럼 먼저 갈게요. 내일봅시다. ” “ 네~! 들어가세요~ 과장님! ”
그는 효은의 인사에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며 말없이 고개만 까딱해주고는 사무실 밖을 빠져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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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뒤, 늦은 밤 인혁의 집,
[ 끼익- 철컹- ]
불도 켜져 있지 않은 어두운 집안으로 인혁이 들어오고 곧, 문이 닫힌다. 들어오자마자 불을 켜는 그.
[ 달칵- ]
불이 켜지자 금방 집안이 환해지고, 깔끔한 집안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온다. 인혁은 자연스럽게 짐을 탁자위에 올려놓고는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 피곤한 몸을 이끌고 욕실로 향한다.
/ 솨아아- 솨아아- /
잠시 후,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 인혁. 입고 왔던 옷들을 정리하고 가방 속에 짐들도 제자리에 정리해둔다. 그러곤 찬장에서 와인 한 병과 잔을 꺼내드는 그. 잔에 와인을 따르고 다시 병을 제자리에 넣어두더니 창밖이 보이는 책상 앞으로 와인 잔을 가져가 의자에 앉는다. 부산의 가을 밤, 창밖으로 아름다운 야경이 그의 눈앞에 펼쳐진다. 인혁은 야경을 바라보며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머금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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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음미한 뒤, 이내 삼켜버린다. 씁쓸하면서도 향긋한 그 맛. 다시 한 모금. 그가 야경을 안주삼아 몇 번 더 반복해서 홀짝이니, 와인 한잔이 금방 비워진다. 그러자 자세를 고쳐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앉는 그. 퇴근 후 이렇게 와인을 한잔하고 나니 일주일동안 쌓인 피로가 조금 풀리는 느낌이었다. 크게 한번 한숨을 내쉬는 그. 눈을 감고는 깊은 생각에 빠진다.
“ ......... 후우....... ”
요즘 나는 이렇게 그녀를 생각하며... 오래전 그녀의 부탁처럼 와인한잔을 하면서 쉬곤 한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집에 와서 잠을 잔다. 담배도 피지 않고 술도 글라스에 마시지 않는다. 이젠 제법 혼자서 정리도 잘하고, 웬만하면 밥도 잘 챙겨먹는다. 인턴들, 간호사들한테 호통도 잘 치지 않는다. 수염도 자주 깎고, 머리도 제때 자른다. 그녀가 있던 동안에 그렇게나 말해도 지키지 않았던 것들.. 이제는 모두 잘 지키고 있다.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날 이렇게 변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나를 챙겨주던 그녀가 없으니 이렇게 혼자서라도 변해보려 애를 쓴다. 아마 그녀가 있었다면 지금의 날 칭찬해주지 않았을까.. 그녀가 있었을 때는 소중한지 몰랐던 것들..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 추억들, 사소하게 지나간 얘기들 하나하나까지 다시 기억해본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미안했다. 왜 그 작은 부탁들 하나 들어주지 않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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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녀의 걱정을 덜어주고 마음 편히 일할 수 있게 해주지 못했는지, 왜 당신이 있어서 좋았다고, 앞으로도 계속 같이 일하자고.. 그런 말 한마디 해보지 못했는지. 핑계일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늘 그녀가 곁에 있었기에 소중한지 몰랐었다.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스며들어온 만큼 그녀의 존재가 어느새 내안에 이렇게 크게 자리하고 있는 줄도 몰랐었다. 그녀가 떠난 후, 아무리 태연한척 해보려 해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립다.. 아직도.. 가슴이 저리다. 그녀가 떠나가고 나서야 우리가 진짜 이별했다는 것을, 바보같이 사랑이었는지도 모르고 그녀를 사랑했었다는 것을, 시작하지 못한 사랑에도 이별이 올수 있다는 것을, 그동안 애써 부정하려 했지만 이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녀와 나. 사랑이었다는 걸 알아차리기도 전에 우린 이별을 했다. 그렇게 우린 사랑보다 이별을 먼저 했다. 다시 눈을 뜨고 창밖을 바라보는 인혁. 이사장님이 복귀하신 뒤, 트라우마센터는 확실히 정식 외상외과로써 자리잡았다. 수술실위원회의 결정으로 빼앗길 뻔 했던 수술실역시 이사장님의 도움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외상외과는 레지던트 티오가 없는 대신에 인턴 티오가 더 늘어났고, 내후년이면 외상 펠로우 티오도 가져올 수 있을 것 같다. 정부에서 3차로 지원하는 외상센터 선정대상 중에서는 우리 병원이 제일 유력하다. 그녀가 있을 때 생겼던 소방헬기는 처음에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지금은 어느새 자리를 잡고 환자를 이동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세중병원은 지역병원들과 응급의료 협력시스템을 구축할 것을 약속했고 몇 년 후면 남부지역만의 연계시스템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된다면, 적어도 남부지역 외상환자들의 골든타임은 충분히 지켜질 것이고, 지금도 헬기가 없던 전에 비하면 훨씬 잘 지켜지고 있다. ....이렇게.. 모두 다 잘되었다. 모두 잘 풀렸다. 내가 꿈꾸던 영국이나 미국만큼의 외상센터는 아니었지만, 이젠 환자들의 골든타임도 웬만큼 지켜줄 수 있게 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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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환자실도, 수술실도, 인력도, 헬기도 작게나마 모두 갖춰졌다. 모두 그녀 덕분이었다. 그녀가 나를 지금까지 버티게 해준 덕분이었다. 만약 내가 이 자리를 지키지 않았다면, 그녀가 나를 돌아오게 하지 않고, 내 꿈을 자각시켜주지 않았다면, 모두 존재하지도 못했을 것들. 꿈, 헬기를 갖춘 트라우마센터 그리고 골든타임. 그리고 그녀. 인혁은 한참을 생각에 빠져있다가 가슴이 저려오자 이내 고개를 흔들어버리고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 몸을 눕힌다. 그러나 잠을 청해보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눈을 감자 더욱 깊어지는 생각들.. 내생에 가장 열정적이었던 그때, 가장 처절했지만 꿈을 꿀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시간들, 그리고 그 소중한 시간들을 만들어준 그녀. 내 인생의 골든타임은 그때였다. 왜 그때는 몰랐을까. 지나고 보니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아무리 힘들었어도.. 외로운 내 곁을 지켜주던 그녀와 함께였으니까. 그렇게 함께 울고 웃으며 만들어온 외상센터. 그녀가 내게 심어주고 간 그 꿈들은 이렇게 순조롭게 완성되어 가고 있지만.. 정작, 내 옆에 그녀는 없다. 고독했던 내 인생에 빛을 비춰주고 떠나가 버린 사람. 나와 같은 꿈을 꿔주고 희망을 품을 수 있게 해줬던 사람. 외상센터가 생기는 기쁨을 꼭 함께 누리고 싶었던 사람. 이 순간을 꼭 함께 하길 바랐었는데, 그 누구도 아닌 그녀가 내 곁에 있어주길 간절히 바랐었는데..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붙잡았으면 좋았을 것을.. 은아를 생각하던 인혁. 감겨있는 그의 눈에서 눈물이 한줄기 흐른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눈물 같은 건 흘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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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이렇게 눈물이 흐르는걸 보니 오래도록, 그녀를 마음에서 놓아주기가 어려울 것 같다. 서서히 잠이 드는 인혁. 오늘도 꿈속에 그녀가 나올 것만 같다.
단 한 번 나에게 행운이었던 사람 그런 인연이 끝났을 뿐이야 서로를 생각하면 뛰는 가슴을 제발 잊지 말아요 혹시 그런 마음이 사랑이 아니었나요
. . . . . ( 다시 2010년 여름, 과거시점 )
※ 추천브금 : 이루마 - Dream
헬기를 날린 다음날 오후,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사무실을 옮기고 있는 인혁과 은아. 한구가 마취과 인턴들과 함께 돕겠다고 찾아왔지만 인혁은 그들을 도로 돌려보냈다. 사실, 응급실에 있는 사무실에는 쓸 수 있는 공간이 워낙 좁았기 때문에 다른 큰 가재도구들은 들어갈 곳도 없었고, 가지고 있던 책과 자료들 말고는 거의 옮길 것이 없었기 때문에 번거롭게 그들의 도움까지는 필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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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이 무거운 책들을 가지고 응급실로 내려간 사이 은아는 인혁의 책상에 있는 물건들을 옮기기 위해 상자하나를 구해 오고, 연필꽃이와 수첩, 메모지처럼 책상 위 자잘한 물건들을 상자에 담는다. 그리고 책상 서랍에 있는 물건들을 빼내기 위해 서랍을 여는데, 평소의 은아에 손이 자주 가서 깔끔히 정리 되어있는 첫째, 둘째 서랍과 달리 크기가 큰 만큼 많은 물건들이 어지럽게 처박혀있는 마지막서랍. 그러면 그렇지... 라는 생각과 함께 물건들을 빼내는 은아. 각종 외상사진 묶음들, 안 쓰는 컵, 우산에 바둑알까지 나온다. 언젠가 한번 사무실 좀 정리하시라고 핀잔을 줬던 날, 그가 그저 정리하기 귀찮으니까 여기저기 쑤셔 박아놓은 모양이었다. 살짝 한숨을 쉬며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은아.
“ 에휴.. 교수님..! 진짜로... ” “ 나 왜 부르는데요? ” “ 옴마 깜짝이야! ”
어느새 돌아온 인혁. 갑자기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나자 깜짝 놀란 은아. 쭈구려 있던 자세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버린다. 그런 은아를 왜 저러냐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책 묶음을 정리하는 인혁.
“ 뭐가 진짜로인데? ” “ 아.. 아니! 정리 좀 하라고 했더니, 여기 이렇게 다 쑤셔 박아 놓으시면 어떻게요~! 이거 외상사진이랑 바둑알, 저 처음 왔을 때 테이블에 있던 건데.. 어쩐지 안보여서 어디에 정리해놓으셨나 했더니...! ” “ 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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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말에 인혁은 속으로 아, 들켰다... 라고 생각하며 또다시 그녀가 잔소리를 시작할까봐 그녀의 시선을 피해 모른 척, 말없이 책 묶음만 정리한다. 그런 그를 살짝 째려보던 은아. 이내 고개를 돌려 서랍에 있던 물건들을 다 상자에 집어넣고, 소파 옆에 작은 테이블 밑을 살피는데,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바둑판과 파일들이 나온다. 그 파일은 은아가 그렇게 찾아 헤매다가 결국 다시 만들어야했던 심포지엄 홍보자료였다.
“ 아~ 진짜, 교수님!! ” “ 왜.. 왜 또요. ” “ 아~ 이거요!! 여기에 두셨으면 말씀을 해주셨어야죠~! 제가 얼마나 찾던건데..! ” “ 아.. 미안해요. ”
대충 대답해버리고 다시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모른 척 책들을 쌓고 있는 인혁. 은아는 그런 그를 한 번 더 째려보고는 다시 먼지 쌓인 물건들을 집어 든다.
“ 뭐, 맨날 말로만 미안하다하시고, 정리는 한~ 번도 안하시고, 이거 바둑판은 쓰지도 않으실 거 뭐 하러 갖다놓으셨어요! 괜히 먼지만 쌓이게.. ” “ 아, 그거ㄴ...크흠.. ” “ 아무튼 교수님 정리 안 하시는 건 알아줘야한다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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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미안해요.. ”
은아가 잔소리를 하며 투덜거리고, 곧, 청소에 대해선 할 말이 없는 인혁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어제 간신히 용기를 내어 병원으로 돌아온 인혁인데.. 막상 그가 너무 풀이 죽은 채로 말을 하자 그 모습이 또 안쓰러워 보이는 은아. 애써 화제를 바꾼다.
“ 뭐.. 바쁘셨으니까 어쩔 수 없죠. 아, 근데 교수님은 바둑 좋아하시나 봐요? ” “ 아, 예. ” “ 어? 근데 저는 바둑 두시는 거는 한 번 도 못 봤네요~ ” “ 아 그거, 한구 놈이 같이 하자고 가져온 건데.. 너무 바빠서 해보지도 못했네. 예전 에 연수가기 전엔 그나마 시간이 좀 있어서 가끔 뒀었거든요. ” “ 두 분이서요? ” “ 예. ”
그의 대답에 잠시 뭔가를 혼자 생각하더니 피식피식거리는 은아. 인혁은 그녀가 왜 그러나 싶어 이상하게 쳐다보는데, 은아는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피식거리고 있다.
“ 참나.. 뭐가 그리 웃겨요? ” “ 아니~ 두 분이 여기 소파에 앉아서 바둑 두고 계시면 왠지 노인정... 아, 아니. 진짜 아저씨들.... 아..아니.. 그게 아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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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뭐 노인저..ㅇ.? ” “ 아니요! 암말도 안 했어요~! 뭐하세요? 빨리 짐 옮기셔야죠~! ”
말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치미를 뚝 뗀 채로 상자를 들고 후다닥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은아. 인혁은 그녀가 간 방향을 불만스럽게 쳐다보며 혼자 투덜거린다.
“ 뭐 노인정? 차암나... 뭔 또 아저씨는 아저씨야...! 아직 ㄱ...... ”
차마 뒷말은 못하겠는 인혁. 그는 은아에 말에 왠지 억울한 생각이 들어서 짐을 들고 궁시렁대며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한 시간 뒤, 응급실 옆, 새로운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심란스러운 표정을 똑같이 하고 뒷짐을 진채로 사무실을 둘러보는 인혁과 은아. 이 좁고 어두운 방을 어떻게 또 정리해야할지 한숨만 나온다. 짐을 다 옮겨오긴 했지만, 물품창고로도 쓰이는 곳이라서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은 좁게 한정되어 있었고, 창문을 가리고 어지럽게 쌓여있는 박스들과 주사기, 수액을 비롯한 응급실에서 쓰이는 각종 물건들이 선반을 차지하고 있어서 책과 자료들을 정리해놓기도 마땅치가 않았다. 그저 나과장이 가져다놓은 작은 책상하나만 달랑 놓여있는 이곳을 앞으로 사무실로 써야한다고 생각하니 괜히 한숨만 나오는 두 사람이었다. 인혁의 표정을 살피는 은아. 그의 표정이 또 어둡게 변하는 것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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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라도 힘을 내야겠다 싶어 서둘러 박스 쪽으로 향하며 애써 밝게 말한다.
“ 교수님~ 이거 박스들은 한쪽으로 치워야겠죠? 이것만 치우면 햇빛 들어와서 생각보 다 괜찮을 거 같은데요? ” “ 아, 예.. 그, 무거우니까 이리 줘요! ”
그녀가 박스를 들어 옮기려다가 생각보다 무거운지 살짝 주춤하고, 인혁은 그녀가 넘어지기 전에 바로 박스를 받아든다. 그러고는 애써 미소를 지어보이는 인혁.
“ 무거운 박스들은 내가 벽쪽으로 옮길 테니까, 신 선생은 선반 좀 정리해서 책들이 랑 자료 넣을 공간 좀 만들어줘요. ”
그러고는 묵묵히 박스를 벽쪽으로 옮기는 그. 아직도 조금 힘들어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다시 시작하겠다 결심을 굳힌 모습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다시 힘을 내는 은아. 선반 위에 있는 각종물품들을 종류별로 모아 차곡차곡 정리하고, 가져온 자료들을 꽂아둔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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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몇 시간 후, 처음에는 볼품없게 느껴지던 곳이 어느새 꽤 깔끔해져있었다. 창가를 가리고 있던 박스들이 인혁에 의해 모두 왼쪽 벽으로 붙어 높이 쌓여지고, 박스들이 사라지자 햇빛이 들어오면서 진짜 창고 같던 방안이 전보다는 조금 환해졌 다. 여전히 선반을 정리하던 은아의 손길이 조금 더 빨라지는 동안, 박스를 모두 나른 인혁은 더해야 할 일이 뭔지 찾기 위해 방안을 살핀다.
“ 아, 이거 이대로 두면 너무 좁겠는데.. 그, 소파나 침대하나 들여놓을 자리 필요하겠 지..? ” “ 침대요? ” “ 예, 뭐.. 신 선생이야 매일 퇴근하면 되지만, 난 여기서 살잖아요. 허허... 아~ 이거 선반을 한쪽으로 몰면 되겠네! 잠깐 나와볼래요? ” “ 아아... 근데, 교수님. ” “ .....?.....왜요. ” “ 저기... 이제 그만 집에 들어가시면 안돼요? 너무 매일 병원에만 계시니까.. 사람들 이 교수님은 일만 하는 줄 알잖아요. 좀, 쉬어가시면서 하시는 게.. ” “ 아.... 그, 그, 환자들 언제 들어올지 몰라서 안돼요. 뭐,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요. ” “ 아이.. 이 병원에 교수님 혼자 있는 거 아니잖아요~! 그러지 마시고~ 여기 공간도 좁아서 소파나, 침대 놓을 데도 없어요~ 그냥, 집에 들어가서 편히 주무시는ㄱ.... ” “ 됐어요. 신경 쓰지마요. 난 여기가 편하니까. ” “ .... ” “ ..... 아무리 좁아도 접이식 침대 같은 건 들어가겠지? 집에 하나 있으니까.. 그거 갖 다놓으면 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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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녀의 말을 단번에 잘라버리는 인혁. 그러고는 자기도 무안했는지 괜히 말을 돌린다. 은아는 그런 그를 말없이 쳐다보고만 있고, 그는 자신에 대한 얘기가 길어지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를 피해버린다.
“ .... 아.... 그... 선반정리는 내일하고 이만 퇴근해요. 어차피 선반 밀어야할 거 같으 니까, 물건들 도로 다시 내려놔야 되요.. 뭐, 그 때 다시 정리하는 걸로 하고, 난 중환 자실 좀 갖다올게요. ”
그렇게 사무실을 나가버리는 인혁. 은아는 왜 그가 이상하리만큼 병원에만 있는지 다 알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조금 짐작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사람 사는 온기하나 없이 썰렁하던 그의 집과 방에서 봤던 영정사진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창고 같은 곳에서 쪼그려 자는걸 보기가 싫은 은아. 힘들게 다시 돌아온 인혁이 그가 가진 상처들을 조금 털어내버리고 이제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 그녀였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를 혼자 내버려 두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그녀. 혼자 있다 보면 안 좋은 생각들만 떠올릴게 뻔할테고, 지금 곁에 아무도 없는 인혁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나뿐인 동료인 자신이라도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한다. 물론 은아 자신도 힘들긴 했지만, 자신이라도 좀 더 밝게 인혁을 이끌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두 시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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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늦은 밤, 인혁이 중환자실과 병동을 한 바퀴 돌며 환자들을 체크한 뒤 다시 새로운 트라우마센터로 들어오는데, 어느새 깨끗하게 정리되어있는 사무실 안. 분명 아까 퇴근하라고 말하고 중환자실로 올라갔었건만, 아마도 은아가 혼자서 마무리를 해놓은 모양이었다.
“ 그.. 참... 어차피 선반 밀어야한다니까... ”
아까 마무리도 같이 안 하고 중환자실로 올라갔던 게 마음의 걸리는 인혁. 미안하니까 괜히 궁시렁 거리며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켜려는데..
“ ....어? ”
맞은편 선반에 은아의 가방이 놓여있는 게 보인다. 그녀가 아직도 퇴근을 안 한 듯하다.
‘ ... 아직도 있나..? 나..참, 이 시간까지 퇴근도 안하고... 어딜 간 거야..? ’
그때, 문을 열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은아. 그녀의 손에는 작은 피자한판과 뭔가 담겨진 비닐봉지가 들려져 있었다. 들어오자마자 책상위에 가져온 것을 올려놓는 그녀. 인혁이 도대체 이게 뭔가... 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는데, 은아가 태연한 표정으로 그를 보며 능청스럽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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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배고파 죽는 줄 알았네.. 같이 나가서 밥이나 먹으려고 그랬더니만. ” “ 이게.. 다 뭐에요? 퇴근하라니까 퇴근도 안하고... ” “ 사무실 이사했잖아요~ 뭐 일종의 기념파티 같은 거? ” “ .. 여기로 옮긴 게 뭐가 좋은 일이라고... ”
그녀의 말에 불만스럽게 변하는 그의 표정. 하지만 은아는 여전히 음식들을 펼쳐놓으며 능청스레 말을 이어간다.
“ 에이~ 사무실은 작아졌어도 교수님도 돌아오시고, 이제 새 출발해보자는 의미죠~ ” “ ..... ” “ 원래 이사하면 떡 돌리는 건데.. 헤헤.. 그런 건 갑자기 못 구하니까~ 그냥 저 먹고 싶은 걸로 이것저것 사와봤어요~! ”
이런 사무실로 쫓겨난 게 뭐가 좋은 일이라고 이렇게 하냐고 한마디 더 하고 싶었지만, 그녀도 일부로 애써 밝은 척 하는 것 같아서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한숨만 작게 내쉬는 인혁이었다.
“ ...후.... 이걸 누가 다 먹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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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다 먹어요~ 제가! 응급실에도 큰 걸로 두판 주고 왔어요. 앞으로 잘~ 좀 부탁 한다고..! 교수님이 쏘시는 거라고 그랬더니 좋아하던데요~? ” “ 참.. 나, 그 왜 쓸데없는 짓을..! 아~ 됐어요. 마음데로 해요. ” “ 네에~ 안 그래도 그러려구요. 근데 너무 늦어서 가게들이 거의 닫았더라구요. 그래 서 별로 많이 사오진 못 했어요~ ”
어느새 책상 위에 작은 피자한판과 떡볶이, 김밥이 놓여지고, 마지막으로 봉지에서 콜라와 일회용도시락을 꺼내는 그녀. 도시락을 인혁의 앞에 놓으며 말한다.
“ 교수님은 밥 드셔야될거 같아서 이거 사왔어요. 여기 떡볶이도 있으니까 같이 드세 요~ ” “ ....... ”
그러나 아무 말 없이 음식을 쳐다보기만 하고 있는 인혁. 그가 전혀 먹을 기미가 없어보이자 은아가 뾰루퉁해진 목소리로 한마디 한다.
“ 교수님, 제 성의도 있는데.. 안 드실꺼에요? ” “ .... 예, 먹을게요. 근데... 앞으로는 이런 거 하지 마요. 특히, 응급실에 왜 그런 걸 돌려요. 이게 무슨 경사라고... ” “ 말했잖아요~ 새 출발 하자는 의미라고. 뭐, 어차피 응급실에서 모르는 사람 빼고는 다 아는데.. 괜히 서로 불편한 거보다는 우리가 먼저 손 내밀면 좋죠 뭐. 그리고 앞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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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트라우마센터가 잘 굴러가려면 둘만 가지고 될 거 같아요~? 응급실에 우리 편도 만들고 그래야죠. 어제 말한 거 기억 안 나세요? 같이 자~알 해보자고 했잖아요. 이 제 혼자 짊어지시려고 하지 마시고 맛있는 거 먹고 힘내시라고 드리는 거에요~ ”
그의 눈을 바라보며 조금은 장난스럽게 말하는 은아. 인혁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인다. 그녀가 자신에게 힘을 주려 한다는 게 느껴졌다. 자기도 모르게 부드러운 미소를 띠게 되는 인혁. 그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뒤에서 수군거리게 두는 것 보다는야... 인혁 역시도 센터를 위해서라면 병원사람들과 소통이 필요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응급실에서는 인력을 비롯해 많은 도움을 받고 있으니 어쩌면 그가 먼저 다가가고 친하게 지내는 게 맞는 일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의 성격상 그동안은 절대 챙길 수 없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인혁은 어쩌면 그녀가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인혁이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들을 챙기곤 했느니 적어도 그 편이 지금 자신의 방법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다. 참.. 현명하고, 고마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무뚝뚝한 그의 성격. 그 고마운 마음을 딱히 표현할 수가 없었다. 다시 고개를 들며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인혁.
“ 알았어요. 잘 먹을게요. ” “ 잘 먹으시겠다면서! 맛있는 거 앞에 두고 왜 그렇게 힘이 없으세요~ ” “ ...... 신경써준 게 고마워서요. ” “ 알면 얼른 드세요~ 식기 전에. ” “ 저기, 잠깐, 신 선생은 의자 없어요..? 기다려 봐요. 내가 가져올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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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제가 가져오..ㅁ...”
은아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밖으로 나가는 인혁. 몇 분 후 어디선가 의자를 하나 구해 와서 은아 옆에 놓더니 다시 자리에 앉는다. 그러고는 그녀 혼자서 애쓰게 하는 게 미안했는지, 자신도 목소리를 밝게 하며 그녀에게 맞춰준다.
“ 크흐흠... 뭐해요? 앉아요! 맛있겠네요 이거. 잘 먹을게요. ” “ 아, 네~! 맛있게 드세요! ”
은아는 그가 힘을 내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에게 더욱더 밝게 대답해준다. 그녀 덕분에 이런상황에서 웃을수 있다는게 고마운 인혁. 이내 늦은 저녁식사가 시작되고, 그렇게 조촐한 이사파티를 즐기는 두 사람이었다. . . . . 몇 십분 후, 식사를 마친 두 사람. 은아가 얼른 일어나서 봉지에 쓰레기들을 주워 담고 인혁도 일어나 주섬주섬 쓰레기들을 모으며 그런 그녀를 도와준다. 곧, 쓰레기들을 다 치우고 책상을 닦으며 인혁을 슬쩍 보는 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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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맛있게 드셨어요? ” “ 예, 덕분에.. ”
은아는 무뚝뚝하게 대답하는 인혁을 보며 그러면 그렇지 라는 표정으로 뒷정리를 마저 한다. 뭔가 그녀에게 고맙다는 표시를 해야 할 것 같은 인혁. 그녀의 눈치를 살짝 보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 음... 거, 신 선생, 내일 아침에 출근하려면 이제 그만 퇴근해야죠. ” “ 네, 그래야죠. 근데, 어떻게 하실 거에요? 오늘은 소파도 없는데.. 진짜 어디서 주무 시려구요? ” “ 나는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신경 안써도 돼요. ” “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여기 잘 데도 없는데, 이 골방 같은데서... 아니, 암튼, 또 어디서 불편하게 주무실까봐 그려죠. ”
은아의 말에 그녀를 빤히 보는 인혁. 그러다 시계를 확인하고는 사무실을 나설 준비를 하며 입을 연다.
“ ... 그럼, 기다려 봐요. 버스도 끊겼을 텐데 데려다줄게요. 같이 퇴근합시다. ” “ ..?... 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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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집에가서 자라면서요! 그, 그, 집에 있는 접이식 침대도 하나 가져오고, 여기서 필요 없는 책들도 좀 갖다놓고 해야하니까. 오늘은.. 뭐... 아, 뭐하고 있어요? 준비안 하고! ” “ 네? 아아, 네! ” “ 나는 그, 수술복이나 좀 갈아입고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요. ”
자기 할 말만하고 사무실을 나가버리는 인혁. 은아는 그런 그를 보며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그래도 그가 집에 가서 잔다고 하니 다행이다 싶다. 탈의실, 인혁이 옷을 다 갈아입고 마지막으로 자켓을 입으려는데 자켓 안쪽에 빳빳한게 느껴진다. 살짝 굳는 그의 표정. 그것은 어제 그가 나과장에게 제출하려 했던 사표였다. 인혁은 주머니에서 사표를 꺼내어 그것을 한참동안 보더니, 이내 사표를 접어 다시 안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언젠가.. 언젠가는 또 이 사표를 내야하는 날이 올수도 있지만, 지금으로써는 외상센터를 만들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다시 시작해보고 싶었다. 나를 믿어주는 능력 있는 외상코디네이터, 그녀와 함께. 20분 후, 옥외 주차장, 두 손 가득 짐을 들고 걸어오는 인혁과 은아. 은아는 그의 옷가지들이 들어있는 쇼핑백을 인혁은 무거운 책 꾸러미를 안고 걸어온다. 일부로 장난스럽게 투덜대는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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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또 왠일로 데려다준다고 하시나 했네~ 짐꾼 노릇하라고 데려다주신다고 하신 거 죠? ” “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집에 가는 김에 가져다놓으면 좋잖아요. 사무실도 작아졌 는데 쓸데없이 이것저것 쌓아두기만 하면 뭐해요. 거, 무거우면 이리줘요. ” “ 농담이에요 농담! 무겁긴 뭐가 무거워요. 이건 그냥 옷가지인데, 교수님이야 말로 그거 들고 차문 여실수 있겠어요? 키주세요. 열어드릴게요. ” “ 아, 키 여기 안주머ㄴ.... 아, 아니에요! 책 바닥에 놓으면 되지. ..읏차.. ”
인혁은 차마 안주머니에서 키를 꺼내 달라 할 수 없어 그냥 자신이 꺼내기로 하고 책을 바닥에 놓는다. 그곳에는 사표도 들어있었기 때문에 은아에게 굳이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은아는 그가 무거운 책들을 힘들게 바닥에 내려놓자 또 한소리를 한다.
“ 뭘 그거를 혼자서 하려고 그러세요~ 괜히 이 무거운 거들고 허리 아프게 숙였다 폈 다 할게 뭐있어요! 그냥 꺼내달라고 하면 되지.. 아무튼 교수님은 혼자하는 거 되게 좋아하신다니까요.. ” “ 아, 거~ 참. 잔소리 좀 그만해요. 뭐 내가 이것도 못 들 까봐요? 잔말말고 얼른 타 기나 해요! ”
그녀가 계속 잔소리를 하자 인혁도 지지 않고 한소리를 한다. 은아는 그의 말에 살짝 찔리긴 찔리는지 입모양으로만 궁시렁궁시렁 대면서 차에 올라타고, 인혁도 짐을 트렁크에 실고는 바로 올라타서 시동을 건다. 곧, 차가 출발하고 두사람은 세중병원을 빠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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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잠시 후, 어색한 기운이 감도는 차 안, 사실, 이렇게 인혁이 운전하는 차를 같이 타보는 건 그녀의 첫 출근 날 이후 처음이었다. 그동안은 늘 은아가 운전하고 그는 항상 옆에서 잠만 잤기 때문에 굳이 차안에서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인혁도 깨어있고 은아도 깨어있으니 두 사람 다 막상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라 어색하기만 했다. 역시나 정적을 깨고 먼저 입을 은아.
“ 음, 교수님이 운전하시는 건 거의 처음이네요? ” “ 아, 그러게요. ” “ 뭐, 제가 운전 안하니까 편하고 좋네요~ 앞으로도 종종 교수님이 운전하시는 게 어 때요? ” “ 거, 내가 언제 운전해달라고 했나? 처음에 신 선생이 키 달라고 하면서 뺏어갔지.. ” “ 내가 언제 뺏어갔어요? 그냥 달라고 했지.. 그리고 그때는 교수님이 며칠 동안 잠도 안 주무셨다는데 불안해서 어떻게 운전을 맡겨요~! 그냥 내가하고 말죠. ” “ 크흐흠.. 그, 그러니까 앞으로도 신선생이 하면 되겠네. 내가 제대로 자는 날이 며칠 이나 있다고.. ” “ 아이고~ 이젠 대놓고 해달라시네요? ” “ 뭐, 뭐, 언제는 비서역할도 해야 한다면서요? 나 참... 하기 싫으면 말아요! 내가 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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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던 말 던 그냥 하고 다니면 되지 뭐. ” “ 참나, 누가 안 한 대요? 어차피 내가 다~ 하게 될 거! 말 한마디라도 알았어요, 라 고 하면 어디가 덧나나.. ”
은아의 말에 살짝 미안해지는 인혁. 고마운 마음에 데려다 주려고 한 건데 괜히 말싸움만 하게 된 거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다. 운전을 하다말고 살짝 눈치를 보는 인혁.
“ 흐흠, 그.. 아, 알았아요. ” “ .. 뭐가 알았는데요? ” “ 운전. ” “ 운전뭐요? ” “ 가끔 하겠다구요. ”
말을 해놓고는 민망한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는 그. 은아는 그런 그가 왠지 웃기기도 하고 얼떨결에 운전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게 좋아서 혼자 씨익- 하고 웃는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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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은아의 아파트, 두 사람이 탄 차가 주차장에 도착하고, 곧, 은아가 차에서 내린다. 그래도 그가 집 앞까지 데려다 준 게 고마운 그녀. 사실, 아까는 시간이 너무 늦었던 터라, 집에 어떻게 가나 걱정했었는데 인혁 덕분에 편하게 올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아진 은아였다. 문을 닫기 전에 인사를 하는 그녀.
“ 교수님! 데려다주셔서 고마워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 “ 예, 오늘 수고했어요. 들어가요. ” “ 네~! 그럼, 들어갈게요~ ”
[ 쾅-- ]
대답을 한 은아가 차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창문을 열고 급하게 그녀를 불러세우는 인혁.
“ 저, 신선생!! ” “ ..? 네? ” “ 오.. 오늘 고마웠다구요. 거... 신선생 말대로 앞으로 잘해봅시다. ”
[ 부우우우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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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다 끝마치지도 않고 낯간지러운 말을 했다는 민망함에 얼굴이 씨뻘게 져서는 바로 출발해버리는 인혁. 너무 순식간에 지나간 상황 때문에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벙쪄있다가 그의 말을 다시 생각해보는 은아. 그러다 뭐 저런 말을 저렇게 어렵게 하나싶어서 이내 피식- 하고 웃어버리고는 집으로 들어간다. 20분후, 인혁의 집,
[ 끼익- 철컹 ]
두 손 가득 짐을 들고 집으로 들어서는 인혁. 오자마자 현관앞에 짐을 내려놓고는 불을 켜는데, 역시나 휑한 집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하룻밤 만에 다시 돌아온 집. 다시 굳어지는 인혁의 표정. 사람 온기하나 없는 집에 이제는 익숙해져야하는데.. 이 썰렁한 기운은 전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오늘 저녁 이곳에서 자야한다고 생각 하니 막막하기만 한 그.
“ ..... 후우...... ”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들어선다. 바로 안방으로 들어가는 인혁. 역시나 그의 눈에 어머니의 모습이 담긴 영정사진이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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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다녀왔다고, 또 왔다고 말하고 인사를 드리고 싶었지만 그는 입 밖으로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또다시 슬픔에 일렁이는 가슴. 이대로 있으면 또다시 슬픔을 감당할 수가 없을 거 같은 그.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바로 안방을 나와서는 베란다 구석에 있던 접이식 침대를 꺼내서 바로 집밖으로 나가버린다. 다음날 아침, 어제 드디어 인혁도 집에 들여보내고, 기운이 빠져있던 그에게 힘도 불어넣어주고, 앞으로 같이 잘해보겠다는 약속도 받아내고, 모든 일이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 잘 풀린 거 같아서 기분 좋게 병원으로 출근을 한 은아. 간호사들에게 밝게 인사를 하고 새로운 트라우마 센터 사무실의 문을 여는데, 불이 꺼져서 어두침침한 사무실, 인혁이 좁은 간이침대에서 쪼그려 자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 뭐, 뭐꼬 이게? 하, 진짜.. 간신히 집에 들여보내놨더니..!! “
환자들이 덮는 이불 달랑 하나 가지고 침대에서 쪼그려 자고 있는 그, 침대가 얼마나 좁은지 이불이 바닥에 쓸리고 있었다. 속이 터지는 그녀. 그를 깨워서 당직실이라도 가서 편하게 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는데도 모르는걸 보면 그가 얼마나 피곤했을까 싶어 그냥 자게 내버려둬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그대로 조용히 사무실 밖을 나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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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브금 : 버벌진트 - 약한사람(Inst.)
2주일 후, 어느 늦은 밤,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혼자서 간이침대에 걸터앉아 의학책을 보고 있는 인혁. 그러다가 금새 목이 뻐근해지는 지, 고개를 들어 한 바퀴 천천히 돌려보는데, 그의 눈에 들어오는 사무실의 전경. 잠시 스트레칭을 멈추고는 사무실안을 한 바퀴 빙- 둘러보는 인혁이었다. 온갖 물품들로 가득 차있는 사무실, 그는 이내 고개를 숙이더니 피식- 하고 웃어버리고는 다시 보고 있던 책으로 눈을 돌린다. 이제는 새로운 사무실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된 두 사람. 그런데 공간이 워낙 비좁았기 때문에 두 사람이서 같이 일하기가 많이 불편했었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은아는 책상에서 업무를 하고 자연히 인혁은 늘 침대에 걸터앉아서 자료를 검토하곤 했다. 덕분에 바닥에는 항상 침대가 펼쳐져있었고 안 그래도 좁고 어두운 방이 더욱더 골방같이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들은 이 방에 들어오기를 싫어하는 눈치였다. 물론, 은아가 가끔 일도 도와주면서 응급실 식구들과 잘 지내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뭔가 밀폐되어있고 병원과는 동떨어져있는 느낌. 마치, 이 큰 병원에서 인혁과 은아 두 사람만 외딴 섬에 갇혀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이 좁은 방으로 사무실을 옮긴 뒤, 인혁은 그녀에게 늘 미안했다. 자신과 같이 일하지 않았다면 겪지 않았어도 됐을 일. 섬이 되는 것은 자기 혼자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던 그였는데, 자신 때문에 은아까지 이런 신세가 되어버린 것 같아서 인혁은 늘 그녀에게 늘 미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미안한 표정을 지을 때마다 그녀는 늘 괜찮다는 듯이 더욱더 밝은 표정을 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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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쳐져있는 그에게 다가와서 일부로 말을 걸기도하고, 때로는 인혁이 귀찮아 할 정도로 없는 일도 만들어서 그렇게 있을 거면 빨리 일이나 하라고 다그치기도 했다. 처음엔 그런 상황들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지만, 곧, 그녀의 방식에 적응해 나가면서 조금씩 밝아지고 있는 인혁이었다. 같은 시각, 늦은 밤 은아의 집, 오자마자 털썩- 하고 소파에 주저앉는 은아. 여전히 외상센터의 업무는 감당하기 어려울정도로 버거웠지만 웬일인지 요즘은 전에 비해서 일들이 별로 힘들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물론, 이제는 일이 익숙해져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좁은 방에서 둘만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인혁하고 전보다 훨씬 가까워진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마음이 편해지니 일할 때 스트레스를 덜 받는 것 같았다. 그 뿐만 아니라 인혁이 점점 가까워지려고 노력하거나, 힘을 내려 노력하는 게 눈에 보여서 그녀 역시 덩달아 힘을 낼 수 있었다. 소파에 기댄 채로 생각에 빠지는 그녀. 요즘 은아의 머릿속에는 온통, 외상센터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인혁이 돌아온 그날, 그의 꿈에 대해들은 이후로 어떻게 하면 헬기를 갖춘 외상센터를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으로 밤에 잠도 못 이룰 정도였다. 가만히 소파에 기대 있다가 슬며시 웃는 은아. 헬기를 갖춘 트라우마센터라..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로 멋있는 꿈이었다. 정말 교수님 말대로 그런 외상센터가 생긴다면 환자도 훨씬 빨리 데려올 수 있을 것이고, 수술을 한 후에도 고생을 훨씬 덜하고 회복할 수 있을 텐데.. 막연히 환자를 많이 살리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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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스템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하지는 못 했었는데.. 심포지엄에서 봤던 영국의 트라우마센터를 부산에도 만들어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냥 간호사가 아닌, 외상코디네이터 신은아. 뭔가, 내 이름을 걸고 해볼 수 있는 일이 생겼다는 게 너무 가슴 벅차게 느껴진다. 앞으로 자신이 있는 동안에 외상센터가 생길 거라고는 장담 못하지만, 정말 그런 외상센터가 생기는 일에 보탬이 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큰 보람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 그녀. 행복한 상상에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만약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캐나다생활도 분명 자신감을 갖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은아는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앞으로 못 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사실, 그녀는 그동안은 동규와 자신을 비교해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집안도 좋고, 똑똑하고, 성격도 좋고, 잘나가는 외국계 기업에 다니며 능력도 인정받았고.. 뭐하나 빠질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을 사랑해준다는 게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부담스러웠던 은아였다. 다시 생각에 잠기는 그녀. 뭐하나 내세울게 없는 나인데.. 이대로 그와 결혼을 한다면, 뭐랄까.. 신랑 잘 만난 덕분에 고생안하고 산다는 소리를 들을 것 같은 기분. 사실, 이미 주변사람들로부터 비슷한 소리는 많이 들어오기도 했고, 그런 말들이 스트레스였다. 그와 동등해지고 싶었다. 물질적으로는 어쩔 수 없이 차이가 난다고 해도, 적어도 내가 일하는 분야에서 만큼은 뭔가 이뤄놓고 가고 싶었다. 그래야지 아직까지도 어색하기만 한 그를 조금 더 편하게 대할 수도 있고, 같이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의 20대를 바쳤던 간호사생활. 7년간 일해 왔던 간호사생활의 마침표를 멋지게 한번 찍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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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잇차! ”
행복한 고민에 빠져있던 은아. 이내 천근만근인 몸을 일으키고 잠들 준비를 하기위해 욕실로 향한다. 아무래도 내일은 인혁과 함께 구체적으로 외상센터에 대해 얘기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은아였다. 다음 날 이른 아침, 트라우마 센터 사무실, 수술복 차림으로 책상에 앉아서 오늘 수술할 환자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인혁. 그때, 문이 열리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은아. 오늘따라 왠지 그녀의 기분이 좋아 보인다.
“ 교수님,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은 깨어있으시네요? ” “ 아, 예, 어제는 좀 일찍 잤어요. 신선생도 오늘은 좀 일찍 출근했네요. ” “ 네~ 할 일이 있어서요~ ”
인혁은 그녀가 오자 익숙하게 책상에서 비켜주며 노트북 선을 당기더니, 선을 길게 늘어트린 뒤 노트북을 들고 침대에 걸터앉는다. 그대로 계속하던 작업을 이어가는 그. 은아는 자연스럽게 그가 비켜준 책상에 앉으며 가지고온 파일들을 책상위에 펼쳐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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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싱글벙글인 그녀. 그런 그녀를 인혁이 슬쩍 보더니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입을 연다.
“ 무슨 좋은 일 있나봐요. ” “ 네? ” “ 아침부터 뭐 그렇게 좋은 일이 있길래. 왜 계속 웃고 있나 해서요. ” “ 아아~ 교수님 이것 좀 보실래요? ”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가져온 파일들을 그의 앞에 펼쳐보인다. 그런 그녀를 멀뚱히 보고만 있는 인혁. 은아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을 꺼낸다.
“ 외상센터요! 앞으로 제대로 만들려면 준비를 해둬야죠~! 일단은 복지부에서 눈에 보 이는 자료들만 뽑아와 봤어요. 그런데 며칠 동안 시간 나는 데로 찾아봤는데, 아직 이 렇다 할 얘기는 없더라구요. ”
그녀가 가져온 파일들을 열어보는 인혁. 잠시 진지한 표정으로 보다가 이내 피식- 하고 웃어버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은아는 갑자기 그가 뭘 하나 싶어 멀뚱히 보는데, 사무실을 나가려는 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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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보시다 말고 갑자기 어디가세요? 봤으면 뭐라고 말씀은 해주셔야지.. ” “ 거, 기다려봐요. 금방 올테니까. ”
그녀의 말은 들은 채 만 채 하고는 밖으로 나가버리는 인혁. 기껏 준비해왔더니.. 은아는 살짝 기분이 나빠지려고 했지만 일단은 그를 기다려 보기로 한다. . . . . 몇 분 후, 인혁이 다시 사무실을 들어오는데, 그의 손에 커다란 박스하나가 들려져있다. 그 박스를 책상에 쿵- 하고 내려놓는 인혁. 은아는 이게 다 뭔가 싶어서 눈이 살짝 커진 상태로 그를 보는데, 그런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고 박스를 뜯는 그.
“ 교수님, 이게 다 뭐에요? ” “ 외상센터 자료 찾는 거 아니에요? ” “ 네, 맞아요. 근데 이건..? ” “ 내가 외상을 몇 년 했는지 알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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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은 안하고 계속 질문만 하는 인혁. 은아는 그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한다. 그런 그녀를 보고 가볍게 웃는 인혁.
“ 아.. 음.. 아니요. 몇 년.. 하셨는데요? ” “ 정식으로 한건 한 6년 되가고, 레지던트 때부터 경험한 걸로 치면.. 어디보자.. 아마 한 10년은 됐을 거에요. 그동안 내가 모은 자료에요 외상센터에 관련해서.. ” “ 이.. 이거 전부 다요? ” “ 그나마도 중간 중간에 많이 버린 거지, 자료 필요하다면서요. 이거다 읽어볼래요? ” “ 아.. 그게.. 저.. 읽을 수는 있는데요. 이거 다 보려면 몇 달은 걸릴 거 같은데요..? ”
그녀의 대답이 재밌다는 듯, 다시 허허- 하고 웃어 보이는 인혁. 그러더니 그녀를 보고 다시 묻는다.
“ 정말로, 제대로 된 외상센터 생겼으면 좋겠어요? ” “ 그럼요..! 물론 지금도 외상센터긴 하고.. 이거 관리하는 것도 좋긴 하지만.. 교수님 말대로 헬기를 갖춘 트라우마센터요..! 진짜 생겼으면 좋겠어요. 딱! 제대로 교수님 이 름 걸고! ”
순간, 그녀의 말에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씁쓸한 웃음을 짓는 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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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에 하나... 센터가 생기더라도 내 이름 걸고는 못해요. 뭐, 아무튼, 이 자료 다 볼 수는 없고, 같이 얘기를 해봐야겠죠. 이것까지 준비하려면 힘들 텐데, 괜찮겠어요? ” “ 아.. 네, 해봐야죠. 그럼 매일 틈틈이 회의해야겠네요...! 근데, 교수님 이름 걸고는 못한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 병원에 외상하시는 분이 교수님 말고 또 있는 것 도 아닌데, 당연히 교수님이 하시는거아니에요..? ” “ 흠... 글쎄요. 뭐 그런 거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까. 센터만이라도 생기면 좋겠네. 뭐, 그 얘기는 나중에 고, 그럼 우선 오전회진 돌고 와서 얘기합시다. 환자 들어올지 도 모르니까, 회진부터 빨리 돌고, 나 손 좀 닦고 올 테니까. 준비 좀 해줘요. ”
그렇게 말하고는 사무실을 나가버리는 인혁. 은아는 약간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의 말대로 회진을 돌기 위한 준비를 한다. 몇 시간 후, 오전 회진을 마치고 돌아온 두 사람. 인혁이 들어오자마자 바로 박스에 있던 파일 몇 개를 골라내더니 그녀에게 내민다. 얼떨결에 파일을 받아드는 은아. 그녀에게 자료를 건네주고는 노트북을 챙기며 말하는 인혁.
“ 뭘 그렇게 멀뚱히 서있어요. 회의하자면서요? 따라와요. ”
그러고는 노트북과 나머지 파일들을 들고 먼저 나가버리는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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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나, 맨날 말만 툭! 뱉어놓고는 먼저 나가버리시고.. ”
또 그런 그를 뒤따라 나가며 입을 삐죽거리는 은아였다. 잠시 후, 응급실이 내려다보이는 2층 회의실 앞에 도착한 두 사람. 그가 잠겨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안에서 말소리가 들린다. 잠시 멈칫하는 인혁. 안에 사람이 있나보다 싶어서 이내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가려는데 최 교수가 어쩌고 하는 소리가 들린다. 다시 멈칫하는 그. 뒤따라오던 은아는 그가 멈칫하자 무슨 일인가 싶어 그에게 다가온다.
“ 왜요? 누구 있어요? ” “ 아, 예. 그런 것 같네. 다른 데로 갑시다. ”
그러나 그의 말대로 다른 곳으로 가려는 은아의 귀에도 최 교수가 어쩌고 하는 소리가 들리고, 그와 똑같이 발길을 멈추고 멈칫 하는 은아. 그때, 그 인턴들의 목소리였다. 순간, 그의 표정을 살피는 그녀. 그러나 인혁도 그녀의 표정을 살피고 있던 터라서 눈이 마주쳐 버린다. 잠시 어색한 기운이 감돌고, 그녀의 표정을 보더니 살짝 굳어지며 입을 여는 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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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그 놈들이에요? 신 선생한테 함부로 한? ” “ ㄴ.. 네? 아..아니요. 근데 교수님이 그걸 어떻게..? ” “ ..... ” “ 아, 저 인턴들은 신경 안 쓰셔도 되요. 제가 알아보니까. 응급실에서 평판도 안 좋 아요. 워낙 뺀질거리고 남 얘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라서 간호부에도 안 좋기로 소 문났어요. 그러니까, 그.. ” “ 좀 있다 얘기합시다. ”
그러더니 은아가 말릴 새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 인혁. 회의실 안에 있던 인턴 두 명이 갑자기 들어온 그를 보고 놀라서 얼어버리고, 곧, 정신을 차린 인턴 한명이 벌떡- 일어나서 그에게 인사를 한다.
“ 교..교수님!! 안녕하십니까!! ”
그러자 나머지 인턴도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나더니 같이 인사를 하더니 서둘러 회의실을 빠져나가려 한다.
“ 안..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저.. 저희는.. 김도형 선생님이 찾으셔서 이만.. ” “ 동작 그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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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인턴의 옆구리를 찌르며 나가려던 인턴. 인혁의 한마디에 그대로 행동을 멈춘다. 얼어붙은 두 인턴.
“ 차렷. ” “ ...??... ” “ 차렷!! ”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멀뚱히 서있던 두 인턴이 그가 큰소리를 내자 명령에 따라 차렷을 한다. 그러나 얼빵한 두 인턴의 자세. 인혁이 팔짱을 끼고 그들을 불만스럽게 쳐다보며 카리스마 있게 말한다.
“ 다리 붙이고, 발각도 유지하고! 어깨피고! 주먹쥐고! ”
그의 말에 따라 허둥지둥 자세를 고치는 인턴들. 다시 그들을 보며 소리치는 인혁.
“ 열중 쉬어. ”
그의 명령에 따라 다시 자세를 고치는 인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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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려, 열중쉬어, 차려, 열중쉬어, 빨리빨리 못하나? ”
인혁은 그들에게 몇 번의 얼차려를 시키더니 밖에 있던 은아를 부른다.
“ 신 선생! 들어와 봐요!! ”
인혁의 말에 망설이다가 들어오는 은아. 그런 그녀를 보고 묻는 인혁.
“ 그때 신 선생한테 막말한 놈이 누구에요? ” “ ...네? ” “ 이놈? 이놈? ”
손가락으로 한명씩 가리켜보는 인혁. 은아는 얼떨결에 왼쪽에 있는 인턴을 가리킬 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그녀의 말을 듣고는 여전히 팔짱을 낀채 나지막이 말하는 그.
“ 자네, 머리박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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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네?? ”
인턴이 멀뚱히 서있자 인혁은 들고 있던 파일을 책상위에 집어던지며 다시 소리친다.
“ 뭐해! 머리 안 박고?!! ”
그의 말에 황급히 바닥에 머리를 갔다대는 인턴. 머리를 박은 채 버텨보려고 하지만 바로 쓰러져버린다. 그런 그를 향해 다시 외치는 인혁.
“ 차려. 열중쉬어. 자네 오늘 오프야? ” “ 아.. 아닙니다. ” “ 자네는. ” “ 아..닙니다. ” “ 저 밑에 응급실, 일 손 딸려서 바쁘게 돌아가는 거 안보이나? ” “ 보.. 보입니다. ” “ 근데 여기서 이러고 노닥거리고 있어?! 제정신이야?! ” “ 죄.. 죄송합니다!! ” “ 지금 인턴시작한지가 몇 달짼데 아직도 이러고 있나? 아직 제대로 된 인턴교육을 못 받았구만.. 김도형 선생이 인턴교육 똑바로 안 시키나본데.. 앞으로 내가 대신 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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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까? ” “ ....!!!.... ” “ 병원 내 위계질서가 왜 필요한줄 아나? 죽어가는 환자 앞에 두고 자네들 같이 말 안 듣고, 뺀질거리는 의사 나올까봐 그런 거야. 그리고 자네. ” “ 네..네!! ” “ 저기 있는 신 선생 직책이 뭐야. ” “ 아.. 그.. 외.. 외상... ” “ 외상 코디네이터. 바로 내 직속이야. 인턴 선생이 함부로 할 사람은 아니라는 거지. 알겠나? ” “ ㅇ.. 예!!! 알겠습니다!! ” “ 알았으면!! 자네들 한가한 거 같으니까 일 좀 시켜도 되지? 트라우마센터에 가면 박스가 하나 있을 거야. 그 안에 자료들 내일 모레까지 전부 복사해서 내 책상 앞에 갔다 놔. 그 일 핑계로 응급실에 지장 줄 생각하지 말고, 자는 시간 쪼개서라도 다 해 놔. ” “ .....!!!.... ” “ 알아들었으면, 이만 나가봐. ” “ 아아, 네!!! ”
그렇게 두 인턴이 허둥지둥 나가버리고, 은아는 방금, 딴 사람 같았던 인혁의 모습을 보고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라서 그대로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의자에 않으며 그녀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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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하고 서있어요. 회의 시작합시다. ” “ 네? 아아, 네! ”
그렇게 그의 옆에 앉는 은아. 인혁이 자료를 펼치며 뭐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의 목소리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 ....... 신 선생..? 내말 듣고 있어요? ” “ 네? 아아... 네.. 근데 교수님, 딴사람 같으시네요. ” “ 뭐가요. ” “ 방금 인턴쌤들 한테.. 얼차려 시키신 거요. 교수님이 그럴 줄은 몰랐어요. ” “ 크흠.. 내가 이래 뵈도 군대있을 때 교관 출신이에요. ”
진지한 표정으로 인혁을 바라보다가 그의 말이 왠지 웃겨서 피식- 웃는 은아.
“ 교, 교관이요? 아.. 근데, 그렇게 안 보이는데.. ” “ 차암나.. 잔말 말고 이거나 봐요! 먼저 회의하자고 해놓고서는.. 집중도 안하고 말이 야.. ” “ 아, 알았어요. 볼게요~ 근데요 교수님! 인턴 쌤들한테 쪼끔 심하게 하신 거 아니에 요..? 아까 그 인턴말이에요. 아버지가 세중대 주요인사라고 하던데.. 나중에 문제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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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않겠죠? ” “ 뭐, 그런 거까지 신경 쓰면서 살아요. 그리고 심하게는 무슨! 쪼인트나 안 까인 게 다행이지.. 그, 그 옛날에는 더 심하게도 했어요! 뭐, 나는 몇 시간동안 엎드려뻗쳐하 고 맞기까지 했었는데 뭘.. 아, 그리고, 신선생. ” “ ...네? ” “ 그때도 말하려다가 말았는데.. 나한테 무슨 일 있으면 혼자 참지 말고 말하라면서 요. 근데 신선생은 왜 참아요. 그런 일이 있으면 나한테 먼저 말을 해야 할 거 아니 야. 내 부하직원이 욕먹으면 그게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인 줄 알아요? 내가 그렇 게 힘이 없어보였어요? 날 뭘로 보고 말이야.. ” “ 아.. 그, 그거는 아닌데.. 뭐 별로 좋은 얘기도 아니고 해서.. 그리고 그때 심포지엄 준비 때문에 한창 예민하실 땐데, 굳이 말할 필요 뭐있어요. ” “ 그런 거는 내가 판단 할 테니까.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꼭 말해요. 알았어 요? ” " 네, 알았어요.. 근데 교수님! 회의 안 할 거에요? 이거나 빨리 봐요 이거. ” “ 그, 누가먼저 말 꺼냈는데.. 알았어요! 봅시다. ”
다시 설명하던 자료로 시선을 돌리는 인혁. 그렇게 간신히 둘만의 회의가 시작되고, 장난스럽던 은아도 금방 진지해지며 집중을 한다. . . . .
“ 아,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외상이라는 개념이 생긴 지는 얼마 안됐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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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그거는 그 전에도 있었는데. 음.. 그, 다른나라 얘기는 일단 접어두고.. 우리나라 에서 얘기가 나온거는 한 20년정도 됐어요.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올림픽 할 때, 외상 환자들에대한 체계가 갖춰져야 개최를 할 수 있으니까. 배워와야 한다. 만들어야한다 말은 많았는데, 그때는 그냥 말만 나왔던 거고.. 그, 2000년도 전후로 해서 암 환자가 갑자기 늘어나고, 사회적으로 암이 많이 이슈가 됐잖아요. 그전에는 외상환자들이 큰 병원으로 가면 어느 정도 치료를 받을 수는 있어서 외상을 따로 분리하거나 할 필요 성을 못 느끼다가.. 그때부터 한 10년간 큰 병원들에 암센터에만 투자를 하니까, 외상 환자들은 갈 곳이 없어지게 됐죠. ” “ 아~ ” “ 뭐 그때부터 한 4~5년간 교통사고환자들 사망률 급속도로 늘어났고, 그게 사회적으 로 문제가 되니까, 그때부터 외상에 관한 말이 다시 조금씩 나온 거에요. 그런데 그때 도 그냥 선진국들 사례를 보고, 외상이라는 게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지, 우리나라에 서는 아무도 시작할 엄두도 못 내고 있었죠. 그러다가 나 펠로우 할때니까.. 한.. 2003~4년쯤인가? 그때부터 조금 경험 있는 의사들이랑, 의식 있는 의사들끼리 모여 서 학회도 하고, 자료도 만들어서 언론에 알리고, 그러다보니까 외상의 중요성이 조금 씩 알려지게 됐죠. 그중에 한분이 내 스승님이시자 지금 의과대 학장님이신 정만호 교수님이셨고, 덕분에 나도 병원에서 안 쫓겨나고 이 일을 할 수 있었죠. ” “ 아아.. 그래서 우리병원에 트라우마센터가 생기게 된거에요...? ” “ 아니, 트라우마센터는 나 연수 갔다 와서 생긴 거고.. 그전에는 그냥 병원에 외상전 문의 하나쯤은 있어야겠다 해가지고, 교수님이 나를 그 자리에 앉혀 주신 거죠. 그래 서 그이후로는 외상전문의라고 티오하나 받아가지고, 계속 외과 내에 있었어요. ” “ 근데 왜...? 트라우마센터가 따로 생긴거에요? 어차피 인력도 그대로 할 거면은, 외 과 내에 있는 게 다른 선생님들 도움받기도 수월할 텐데..? ” “ 음.. 신선생도 잘 알겠지만, 외상환자는 여기저기를 다 다쳐서 오잖아요. 이렇게 큰 병원에서는 각과의 역할이 나눠져 있는데..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나는 그걸 다 무시 할 수밖에 없으니까.. 신속하게 대처하려면 따로 센터가 필요하기도 했고, 음.. 그리고, 내가 수술한 외상환자들이 외과중환자실을 장기간 차지하고 있으니까.. 다른 정규수술 환자 들어오기도 어렵고,
뭐, 그렇게 자리를 차지하는 거에 비해서 수술비용도 너무
싸고, 병원에서는 계속 적자가 나고.. 눈엣가시였겠죠. 내가..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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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아무튼 한창 트러블이 심해져서 내가 쫓겨날 판이었는데, 재작년쯤에 정부에서 갑자기 발표를 하더라구요. 거기 자료에 있죠? <권역별 전문질환센터 설립사업 계획> 이거요. ” “ 아, 이거 저도 들어본 거 같은데.. 이게 뭔데요? ” “ 음.. 쉽게 말하자면.. 그, 좋은 병원들은 다 서울로 몰려있으니까. 지역에 있는 환자 들도 다 서울로 가잖아요. 그래서 그 지역차별이라는 의견이 거세지니까. 정부에서 각 지역별로 특성화된 센터를 건립해주겠다, 뭐 이런거죠. 그래서 그때 외상센터에 대한 얘기도 나왔었고, 원래는 특성화 사업이 끝나면 외상사업으로 돌려주겠다고 했었고, 그래서 내가 연수도 갈수 있었던 거고, 그, 정부 지원이란 게 당시 발표로는 몇 백억 이었으니까. 병원에서는 좋은 기회였죠. 근데 그, 다른 부분은 경쟁력이 안 되고, 대신 에 기존에 가지고 있는 외상전문의를 제대로 키워봐야겠다 싶었는지, 연수를 가보는 게 어떻겠냐 하더라고요. ” “ 몇, 몇 백억이요? 아... 아, 그래서 그때, 바로 연수를 가신거에요? ” “ 음, 사실은 안 갈 생각 이었어요. 외상 하느라 하도 시달려서.. 그때는 좀 지쳐있기 도 했고, 원래 하던 간담췌를 해야겠다싶어서, 다른 병원으로 가볼까.. 생각도 했었는 데, 교수님도 계속해서 남으라고 하시고.. 나도 외상환자들이 자꾸 눈에 밟히고.. 또, 어머니가 하신말씀도.. 음.. 아무튼 그래서 연수를 갔다 온 거에요. ” “ 아아... 근데, 생각했던 거 이상으로.. 트라우마센터는 자금이 엄청 중요한 거네요.. 아, 그러면, 지금 트라우마센터는 뭘로 유지가 되는 거에요? ”
그녀의 말에 피식- 웃으며 되묻는 인혁.
“ 하, 그게 이제야 궁금해요? ” “ 아, 아니요.. 전부터 궁금했었는데..! 이런저런 일 처리하느라 신경 쓸 틈이 없었잖아 요. 그리고 그럴 수도 있죠..! 처음에는 오래할 생각이 아니었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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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긴, 그랬지. ” “ 그래도 지금은! 있을 때만큼은 최선을 다해보고 싶다구요. 한국에서 할 수 있는 마 지막 일이니까.. 그리고 환자 더 많이 살려야죠! ” “ 뭐, 누가 뭐래요? 거, 소리는 지르고.. 아무튼, 그 2000년도 초반에 응급실에 대해서 하도 말이 많으니까. 정부에서 복지랍시고 응급의료기금을 엄청나게 늘려버렸어요. 그 후에 권역별로 권역응급센타라는걸 지정했는데, 2차? 3차? 발표 때인가..? 우리병원이 지정이 되가지고, 그중에 2억을 트라우마센터로 돌린 거에요. 3년간만 유지시켜준다는 조건으로. ” “ 3...년이요? 그러면 3년이 지나면 트라우마센터도 없어지는거에요? ” “ 음.. 그 안에 정부에서 외상센터 지원을 받게 된다면, 그때는 그 자금을 쓸 수 있으 니까. 계속 유지 될 수 있겠지만, 매년 정부에서 계속 발표를 번복하고 있으니까.. 글 쎄요. 기다려봐야겠죠. 그, 아무튼 대략적으로만 설명한 거에요. 외상센터준비하려면 우리 심포지엄 준비했던 거랑은 비교도 안 되게 해야 할 일도 많고 봐야할 자료도 많 아요. 주로 선진국 외상센터에 대한 자료들인데, 그거 다 분석해보려면 시간이 꽤 오 래 걸릴 거에요. 음, 앞으로 시간 많으니까 천천히 보다가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고 그래요. ” “ 알았어요.. 근데 교수님! 센터가 생긴다면 운영을 다른 사람이 할 수도 있다니.. 그 건 무슨 말이세요? 지금 병원에서 외상환자들 돌보는 건 교수님밖에 없잖아요. ” “ .... 센터 장을 꼭 외상전문의가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아마 과장님들이나.. 힘 있 는 다른 분들이 하시겠죠. 나는 그냥 외상환자 볼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요. 뭐, 그것도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거지만.. ” “ 무슨 소리에요! 교수님이 하셔야죠.. 제가 꼭 교수님이 하실 수 있게 도와드릴게요! ” “ 차암나.. 신선생이 무슨 수로요. 허허.. 그, 내년 봄에 떠날 거면서 너무 꿈이 큰 거 아니에요? 허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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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그녀를 타박하면서도 자꾸 웃음이 나오는 인혁. 정말, 말로만이라도 든든하고 고맙게 느껴졌다. 이래서 한 팀이란 게 좋은 거구나.. 싶기도 하다. 인혁이 웃어주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은아.
“ 아, 아직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지만.. 뜻이 있는 곳이 길이 있다 잖아요~! 한번 믿어 보세요! ” “ 허허허... 아무튼 그, 이쯤하고 이만 일어납시다! 또 환자보러 가야죠. ” “ 네! 가야죠~ 앞으로 진짜 해야 할 일 많겠네요. ” “ 허허.. ”
그렇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두 사람. 자료들을 챙긴 뒤 회의실 밖을 빠져나간다. 3주 후,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앞, 새벽부터 응급수술을 마친 인혁. 피곤한 몸을 이끌고 사무실 앞에 도착하는데, 분명 닫아놓고 갔던 사무실 문이 활짝 열려있다. 아마도 은아가 출근을 한 모양이었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는 그. 그런데 그가 들어온 것도 보지 못하고 은아가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다. 뭘 저렇게 열심히 하나싶어 옆에 가서 들여다보는데, 그제야 인기척을 느낀 은아가 깜짝 놀라며 뒤돌아본다. 그녀가 너무 놀라자 인혁도 덩달아 움찔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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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깜짝아.. 놀랐잖아요! 왜 소리도 없이 들어오세요. ” “ 소, 소리도 없이 들어오긴..! 슬리퍼 질질 끌면서 들어왔구만.. 신선생이 집중하느라 못 들은 거겠죠! 뭘 하고 있길래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몰라요? ” “ 아, 그게.. 이것 좀 봐주실래요? ” “ 뭔데요? 어디보자.. ” “ 교수님이 외상을 시작하시고 나서 지금까지 수술하신 거, 대략적으로만 파악하고 있었어요. 총 환자 수, 살려낸 환자 수, 사망한 환자 수.. 근데 6년 하셨다고 했죠..? 지금까지 수술만 하셨어요? 수술한 환자수가 엄청난데요? 아무튼 정말 대단하시네 요..! ” “ 아, 예.. 근데 이걸 혼자 다 했다구요? 저번에 준 외상자료들은요? 좀 읽어 봤구요? ” “ 네, 한 절반조금 못되게? 읽어봤어요. 근데 반 정도 읽다보니까. 나중엔 다 비슷비 슷하더라구요. ” “ 어휴.. 그래도 이 많은 거를.. ”
그녀의 말을 들은 인혁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속으로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그.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말을 이어나가는 은아.
“ 그때 인턴 쌤들이 복사해놓은 거 있잖아요~ 집에 가서도 보고했더니 어떻게 금방 보게 됐네요~ 그, 아무튼, 보다보니까. 다른 특성화센터들 선정될 때도, 이런 기록들이 중요하더라구요~! 근데 지금까지 교수님이 정리를 안 해놓으셔 가지고.. ” “ 안,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겁니다! 환자 수술하다보니까 시간이 없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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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네, 그러시겠죠~ 어쨌든 간에 지금은 대략적으로만 파악한 거고, 이걸로 프로그 램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해요. ” “ 프로그램..? ” “ 네~ 전에 일하던 병원에 있을 때, 비슷한 작업을 해본 적이 있어서요. 근데, 그때는 몇 달치 자료만 만들면 되는 거였는데, 이거는 양이 하도 많아서.. 이거 혼자하려면 거의 1년은 걸리겠는데요? ” “ 하... 그러게요. 거, 내가 도와줄테니까 천천히 해봐요.. ” “ 됐네요! 무슨 교수님이 이거를.. 그러지 말고, 교수님은 수술만 열심히 하세요! 환자 케어도 혼자하고 계신데 이것까지 언제 신경쓰시게요. 그냥 교수님은 환자 더 많이 받고, 수술하고, 치료하고, 살리시는 게 도와주시는 거에요. 뒤에서 내가 정리는 다 할 테니까.. ”
그녀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짓는 인혁. 그는 은아가 있어서 참, 든든하고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을 떨칠 수가 없었다. 기대가 너무 크면 실망도 클 것이기에.. 몇 년 전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이렇게 그녀의 넘치는 의욕들이 어느 한순간에 꺾여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씁쓸해짐을 느끼는 인혁이었다.
※ 추천브금 : 에브리싱글데이 - Cold(Isnt.)
보름 후 , 어느새 8월 중순, 늦은 아침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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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응급수술을 한 후 늦게 잠든 인혁이 여전히 골아 떨어져 있다. 이제는 그런 일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그렇게 자고 있는 그를 깨우지도 않고 책상에 앉아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는 그녀. 오전회진을 돌때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남았으니, 그때까지 그가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도록 그대로 둘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사무실문이 벌컥- 하고 열리고, 나과장이 방안으로 급히 들어오다 주춤한다. 그도 그럴 것이, 불도 켜지 않은 채로 인혁은 침대에서 자고 있고, 은아는 옆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일을 하고 있으니 조금 이상하게 보일법도 했다. 그러나 그런 나과장을 보고 태연하게 인사를 하는 그녀.
“ 과장님, 오늘은 일찍 출근하셨네요~? 근데, 아침부터 여긴 왠일이세요? ” “ 아, 어어.. 그! 소식들었나?! 정부에서 헬기 사업 준비한다는데? ” “ 네? 헬기요?! ”
나과장의 말에 눈이 휘둥그래지는 그녀. 자리에서 벌떡 하고 일어나서는 인혁을 흔들어 깨운다.
“ 교수님!! 교수님!! 일어나보세요!! " “ 으으... 아, 신선생.. 출근했네요.. 아... 지금 몇시.. ㅇ? ”
눈을 뜨기가 힘든 듯, 힘겹게 일어나는 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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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깨우는 은아를 발견하고는 인사를 건네다가 문 앞에 서있는 나과장을 발견한다. 그러고는 졸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이게 무슨 상황인가, 그가 왜 여기 있나 한참을 생각한다. 그러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자리에서 느릿느릿 일어나는 인혁.
“ 아.. 흠, 어쩐 일이십니까..? ” “ 정부에서 헬기사업을 준비한다는데요? 그쵸? 과장님! ” “ 응, 그래!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얼른 확인해보라구! ”
그러나 나과장에 말에도 별로 시답잖게 반응하는 그. 헬기사업이라는데.. 은아는 그가 왜 저렇게 태연하게 있나 싶고, 그는 잠시 머리를 굴려 생각을 하는 듯하다가 이내 나과장에게 천천히 되묻는다.
“ 음... 뭐, 이번에도 소방헬기랍니까? ” “ 아니~! 이번엔 아니라는데? 닥터헬리 프로그램이라고, 일본에 있는 프로그램을 도입 한다는 거 같은데.. 이거, 내가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게 빠를거야..! 지금 복지 부에 자료 올라와있으니까~ 확인해보라고! ” “ 아아, 예, 알겠습니다. ”
바로 문을 닫고 나가는 나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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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은아를 쳐다보는데, 역시나 그의 말을 기다리며 인혁을 쳐다보고 있던 그녀. 둘이 그렇게 잠시 동안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 순간, 둘 다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동시에 몸을 움직여 컴퓨터 앞으로 가는 두 사람. 그녀가 빠르게 복지부로 들어가서 자료를 찾아보고, 인혁도 옆에서 책상에 몸을 기댄 채로, 진지하게 화면을 쳐다보고 있다. 그런데, 다시 벌컥- 하고 열리는 문, 나과장이 방에 들어오려다가 가까이 붙어서 모니터를 보고 있는 인혁과 은아를 보고 또 잠깐 멈칫한 후에 입을 연다.
“ .... 아! 다른 게 아니고! 확실하진 않지만 그 헬기 발표관련해서 컨퍼런스 가게 될 지 모르니까! 알아보고 준비하고 있으라고~ 나는 정기학회준비 때문에 몇 달간 바쁠 꺼니까! ”
[ 쾅- ]
자기 할 말만 하고는 다시 문을 닫고 트라우마사무실에서 나오는 나과장. 문 앞에서 고개를 갸웃- 거리더니, 혼자 궁시렁 거린다.
“ 하~ 이상하네.. 이 방은 왠지 들어가기가 민망하단 말이야...? 참... ” 30분 후, 2층 회의실, 복지부발표에 관한 자료들을 인쇄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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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자료들까지 챙겨들고 회의실로 올라 온 인혁과 은아. 문을 열고 들어와서 늘 앉던 자리에 자연스럽게 앉는다. 인혁는 계속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느라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고, 그녀는 그런 그의 표정을 계속 살피며 인혁을 주시한다. 지금 그의 표정이 이해가 안되는 그녀. 당연히 정부에서 헬기사업을 시작한다는 발표가 났다면 좋아해야 할 일인데.. 도대체 그의 표정이 왜 이리 심각한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를 할 수 없는 그녀였다.
“ 교수님..? ” “ ....아! 예.. ” “ 아까부터 표정이 왜 그러세요? 정부에서 닥터헬기를 지원할 수도 있다는데.. 안 좋 으세요? ” “ 음... 아, 좋죠.. 좋긴 좋은데.. ” “ ....?... 뭐 문제 되는 거 있어요? ” “ 흠... 정말 닥터헬기를 가져올 수 있을지.. 그, 뭐, 지원 할 수도 있다는 거지, 아직 확정된 거 아무것도 없잖아요. 괜히 기대하지 말고. 좀 기다려 봅시다. 그리고.. ” “ ....?.... 그리고 뭐요? ” “ 음.. 조금 순서가 뒤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 “ 네..? 그게 무슨.. ” “ 닥터헬기는 응급환자들을 빠르게 데려오려고 있는 건데. 대부분이 중증외상환자잖아 요. 음... 내가 걱정스러운 것은 헬기가 외상센터지원하고 맞물려서 같이 돌아가야 되 는데, 이렇게 헬기사업 따로 외상센터 사업 따로 가버리면 제대로 운영하기가 힘들어 져요. 아까 봤지만 아직 외상센터에 대한 발표는 없었잖아요. ” “ 아, 그래도..? 헬기라도 먼저 생기면 환자들 빨리 데려올 수도 있고 좋은 거 아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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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 “ 뭐, 물론 그렇기야 하겠죠. 지금같이 이렇게 환자들이 제때 수술 받을 시간을 놓치 는 일도 없을 거고.. 그런데 문제는, 헬기가 아무리 빨리 환자를 데려온다고 해도, 일 반 병원에서 그 인원을 어디에 수용할 수 있냐는 거예요. 당장 우리 병원만해도 부산 에서 제일 큰 병원 중에 하나인데.. 여기도 환자 받을 수술실, 중환자실 없어서 돌려 보낼 때 많잖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헬기를 타고나갈 의료진이 필요한데, 외상센터가 생기기전에는 외상팀 인력을 확보하기가 어렵고.. 그렇게 되면 헬기가 있더라도 200% 로 능력 발휘를 못하고 돈만 들이게 되는 거니까.. ” “ 아아.. 그럼! 헬기보다 외상센터가 먼저 생겨야 효율적이겠네요. ” “ 예.. 뭐 그렇기도 한데, 반대에 경우도 문제가 있어요. 외상센터가 생겨서 인력, 중 환자실, 수술실 모두 확보가 됐는데도, 막상 환자가 제때 들어오지 못하면 환자 사망 률은 크게 줄어들지 않을 테니까.. 실패한 외상센터가 될 확률이 크죠. 그렇게 되면 사람들 관심에서 멀어지고, 앞으로 10년간은 외상분야에 지원받기 어려울 거고.. 그래 서 헬기하고 외상센터가 따로 놀면 안 되고 같이 가야되는데.. 어느 정도 규모도 있어 야하고.. ” “ 하긴, 그건 그렇죠.. 센터가 작으면 돈은 돈대로 들고, 중환자실 금방 차버리면 환자 는 환자대로 못 받을꺼니까.. 하... 앞으로 갈 길이 머네요. ” “ .... 예, 지금까지도 늘 그래왔죠. ”
시무룩한 그의 표정을 보고는 또 그가 쳐져 있는 것이 싫은 그녀. 일부로 목소리를 키우면서 그에게 힘을 준다.
“ 그래도요 교수님! 이게 어디에요~ 아직 시작단계니까..! 뭐, 교수님 말대로 아직 발 표가 난 것도 아니고, 계획 중이라는 거잖아요? 미리부터 걱정할필요가 뭐있어요! 이 럴 시간에 열심히 준비를 해봐야죠. 나과장님 말대로 앞으로 컨퍼런스도 늘어날 텐데, 희망적으로 생각을 해야죠! 힘내서 더 열심해봐요 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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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은 그녀의 말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준다. 은아도 그런 그를 마주보며 살짝 웃으며 이내 말을 이어나간다.
“ 근데, 외상센터 지으려면 필요한 게 정말 많네요! 모든 게 제대로 갖춰져야 하니까, 진짜 몇 백억씩 지원한다고 했던 게 괜히 나온 얘기는 아닌가봐요~! ” “ 그렇지, 그래서 쉬운 일이 아니죠.. 뭐, 그래도 인력이라도 좀 있으면 어떻게 해볼 만 할텐데, 외상 쪽으로 지원하는 의사들이 없으니까.. ” “ 하긴, 당장 응급실도 인력모자란다고 난리난리인데, 외상은 그보다 더 힘드니까.. 지 원하는 인턴 샘들, 레지던트 샘들이 없는 거 같아요. ” “ 뭐, 그래서 걱정이죠, 앞으로 몇 년간은 나 혼자서 어떻게 버텨본다고 하지만.. 내가 더 나이 들고, 혼자 일을 감당하기가 어려워지면.. 그때는 다시 옛날처럼 외상 환자들 을 돌려보내야겠죠. ” “ ..... 교수님! 그러니까요~ 레지던트 쌤들이나 인턴 쌤들한테 환자 볼 때는 소리 지 르고 그런다고 쳐도~ 쫌, 일끝나면 술도 한잔 사주시고, 얘기도 좀 해보시고 꼬셔야 죠~ 같이 한번 일해보자고..!
그녀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 웃어버리는 인혁. 그러고는 이내 입을 연다.
“ 허허- 참나, 꼬시긴 뭘 꼬셔요~ 외상 팀 티오는 있고요? 지금도 티오 없어서 신 선 생하고 나 둘뿐인데! 그리고 어차피 그런 식으로 시킨다고 해서 오래 못 버텨요. 매일 집에도 못 들어가고 개인생활도 없어질 텐데, 누가 시킨다고 버틸 수 있겠어요? 본인 이 열정이 있어야지.. 거, 그렇게 강요할 수는 없고, 그저, 그들 스스로 선택하길 기다 리는 수밖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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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 참, 그래도요! 쫌 친하게 지내고 그러세요~ 우리 편도 좀 만들고 해놓으면~ 다른 과랑 협진 할 때도 도움 받을 수 있고! 좋잖아요~ ”
인혁이 그녀의 말에 찔리는 게 있는 듯, 살짝 헛기침을 하더니 약간 장난스럽게 대꾸한다.
“ 크흠, 흠, 그건 뭐 신선생이 잘하고 있으니까~ 내가 갑자기 그러면 이상하게 생각해 요~ ” “ 하, 참나~ ”
그의 말에 헛웃음을 짓긴 하지만 은근한 그의 칭찬이 싫지만은 않은 은아.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입이 귀에 걸린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인혁도 기분이 좋아져서 슬며시 웃게 되는데, 그런데 그때, 조용하던 병원에 구급차 소리가 울려퍼지고, 회의를 하고 있던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치더니 동시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보고 있던 자료를 들고 회의실 밖으로 뛰어나간다. . . . . 그날 오후, 아까 들어온 응급환자의 수술을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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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센터로 들어오는 인혁과 은아. 두 사람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심란한지 창밖을 바라보고, 은아 역시 같은 표정으로 그를 지켜본다. 잠시 동안의 무거운 침묵. 은아가 그 침묵을 깨고 조심스레 입을 연다.
“ .... 살 수 있겠죠...? ” “ .... 수술 후에 또 어레스트가 났으니까.. 하... 지켜봐야지.. ”
아까 들어온 환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버스에 깔려서 개방성 골절에 장기까지 돌출된 여중생환자. 다행히도 병원과 멀지 않은 곳에서 사고가나서 사고발생 1시간 이내에 수술을 받을 수 있었지만, 워낙 크게 다쳤기 때문에 상태가 매우 위중하고 살아날 가능성이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 작은 몸뚱이 위를, 사람이 가득 탄 버스가 깔고 지나갔으니..
“ 신선생 알아서 마무리하고 퇴근해요. 나, 다시 중환자실 좀 갔다 올게요. ”
더 이상 소생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환자이긴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은 최선을 다하고 싶은 인혁. 그게 의사로써 도리라고 믿고 있기에.. 다시 사무실을 벗어나 중환자실로 발걸음을 옮기고, 은아는 퇴근하라는 그의 말은 무시한 채, 아무 말 없이 그의 뒤를 따른다. 아마도 또 한동안은 집에도 가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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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내 중환자실에서 살다시피 할 그와 그녀였지만, 두 사람에게 그런 건 전혀 문젯거리가 되지 않았다. 환자를 살려내고 싶다는 그 열망. 그렇게 언제나 같은 마음으로 병원을 지키는 두 사람이었다. 두 달 후, 세중병원 중환자실, 두 달 동안 사경을 헤매던 여중생 환자가 드디어 의식을 되찾고 깨어나던 날. 그녀는 또다시 인혁의 환한 미소를 지켜볼 수 있었다. 환자 앞에만 서면 저절로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그. 인혁은 항상 냉정하고 냉철한 모습을 하다가도 환자가 살아서 돌아갈 때면, 정말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미소를 보여주곤 했다. 그렇게 그는 매일매일 체념하고, 좌절하고, 고독해하면서도 또 이렇게 매일매일 환자를 통해 살아갈 힘을 얻곤 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덩달아 행복한 미소가 지어지는 은아. 사람들은 그에게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한다고 말하곤 하지만 그녀가 보기에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환자들이 회복하고 깨어나서 다시 살아 돌아가는 것. 그 과정 속에서 인혁은 생기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게 너무 기쁜 그녀. 어느새 그와 함께 일하기 시작한지 거의 8개월째, 그의 말대로라면 밀려서, 치여서, 어쩔 수 없이 외상을 해왔다고는 하지만 은아가 느끼기에 인혁은 누구보다도 이 일을 정말 사랑하고 있었다. 먹고, 자고, 쉬는 것보다도 이 일이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가끔은 너무 환자에만 미쳐있는 그가 걱정이 되기도 해서 제발 밥 좀 제대로 먹고 다니라고, 잠 좀 집에 가서 제대로 자라고, 와인이나 커피라도 한잔 해가면서 쉬면서 일하라고 그에게 잔소리를 해댔지만 이제는 이 일이 오히려 그를 살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은아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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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잔소리를 심하게 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인혁의 옆에 더욱더 붙어있고 그를 잘 보좌해주면서 그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려고 노력하곤 했다. 그리고 더욱더 신기한 것은, 그녀 스스로도, 점점 더 그와 닮아가고 있었다. 환자에 관련된 일이라면 퇴근도 안하고, 한 달 만에 하는 데이트도 미루고.. 예전처럼 드라마를 보며 쉰다거나, 쇼핑을 한다거나, 다른 여자들처럼 자신을 꾸미는 일 같은 것들은 어느새 그녀의 관심 밖이 되어 버렸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이 일이 너무 좋아서 그럴 수 있었다. 그렇게, 인혁과 한 팀으로써 이 일을 하는 것은 지금까지 경험한 그 어떤 일보다 더 보람된 일이었다. . . . . 그날 저녁,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 교수님! 저 약속이 있어서 이만가 볼게요~ ” “ 예, 그래요. ”
그렇게 인혁의 짧은 인사를 뒤로 하고 사무실 밖을 나서는 은아. 두 달 동안 인혁과 함께 중환자 케어 하랴, 수술 관리하랴, 두 번이나 있었던 컨퍼런스 준비 햐랴.. 제 시간에 퇴근하는 건 고사하고 집에도 자주 못 들어가다가 오랜만에 약속이 있다며 제시간에 퇴근하는 그녀였다. 인혁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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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몸을 돌려 창문 앞에 홀로 서서 생각에 잠긴다. 병원에 내려 했던 사표를 접어두고, 그녀와 일을 다시시작해보기로 결심한지 어느덧 석 달이 지났다. 나의 우려와는 다르게 그녀는 절대 지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병원에 돌아온 이후로 그녀는 내가 혼자서 쳐져있을 틈을 주질 않았다. 환자가 잘못되고 사망해서, 내가 조금 쳐져있을라 치면 일부로 일을 시키거나, 말을 시키거나, 갑자기 배고프다며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하거나, 어느 틈에 가져온 커피한잔을 내밀며 나를 쉬게 해준다. 덕분에 외롭다는 생각이나, 불안하고 암울한 기억들을 떠올릴 틈이 없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다 보니, 그녀는 병원에서 거의 항상 내 옆에 붙어있게 되었고, 어느 샌가 부터는 오전회진을 끝내고 같이 아침 회의를 하는 동안, 그녀가 가져온 커피한잔을 하며 아침을 시작하는 게 나의 당연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요즘 오전 회진이 끝나고 나면 매일같이 회의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두 사람. 이제는 꼭 외상센터에 대한 회의뿐만 아니라 경험 없는 의사들이 어떻게 외상환자들을 효과적으로 케어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의논하곤 했다. 고된 업무로 인해 몸이 피곤하긴 했었지만, 두 사람 모두, 이 시간만큼은 피곤한 줄도 모르고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희망차게 회의에 열정적으로 임했다. 물론 가끔은 현실의 벽을 느끼며 좌절도 했지만, 그래도 두 사람의 대화 끝에는 항상 새로운 대안이 나왔다. 가끔은 허무맹랑한 상상을 하기도 하고, 또 가끔은 실제로 응급실안에서나 학회에서 적용해볼 수 있는 실질적 대안이 나오기도 했다. 아마도 인혁 혼자였다면 불가능했을 일. 새로운 세계를 접하면서 나오는 은아의 설레임과 학구열, 그리고 의사가 아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색다른 접근법과 상상력. 거기에 인혁의 의학적, 전문적 지식들이 결합되면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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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렇게 회의를 하다가 가끔 인혁의 눈치를 살피며 그가 고쳐야 할 점들을 은근 슬쩍 말하고는 했고, 갑자기 툭툭 튀어나오는 그녀의 지적에 인혁은 당황하며 헛기침을 하거나 가끔은 짜증을 부렸다. 하지만 그동안 그렇게 옆에서 살펴주고 때로는 지적해주고 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는 은아의 말을 귀담아 들어보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물론, 여전히 환자가 들어오면 수술장, 중환자실을 마련하고, 또 수술하고, 정신없이 환자를 케어하고 매일매일이 전쟁의 연속이었지만, 그래도 요즘 같아서는 모든 일이 견딜만한 인혁이었다. 언제나 옆에서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주는 은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며칠 후, 트라우마 센터 사무실, 인혁이 책상에 앉아서 환자 자료를 보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리더니 은아가 사무실로 뛰어들어온다.
[ 벌컥- ]
“ 교, 교수님!!! ” “ ..?!!.... ”
갑자기 들어온 그녀 때문에 조금 놀란 인혁. 눈을 크게 뜨고 왜 그러냐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보는데, 은아가 함박웃음을 띠면서 그를 향해 소리친다.
“ 기사 보셨어요~?! 복지부에서요! 외상센터 사업을 재개한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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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 “ 거봐요~!! 제가 뭐랬어요! 희망을 갖고 기다리면 된다니까요~ ” “ 거, 차근차근히 좀 말해봐요. 무슨 외상센터요? ” “ 아, 잠시만요! 컴퓨터 좀! ”
그녀가 책상으로 오더니 컴퓨터 전원을 키려고 몸을 숙이고, 책상에 앉아 있던 인혁은 그녀의 갑작스런 행동 때문에 일어나지도 못하고 얼른 의자만 뒤로 빼준다. 곧, 컴퓨터가 켜지고 기사를 찾아주는 은아. 기사 내용인즉, 정부에서 2015년까지 6개 병원에 권역외상센터를 설립할 것이고 각 센터에 800억씩 지원한다는 내용이었다. 기사를 보고 생각에 빠지는 인혁. 만약, 이대로만 된다면 세중병원도 의욕을 가지고 외상센터를 유치하려 할 것이지만, 그러나 아직까지는 복지부 계획일 뿐이기에 좀 더 기다려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그. 게다가 이미 복지부가 여러 번 계획을 번복했었기 때문에 섣부른 판단을 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었다. 또한 만약, 세중병원이 외상센터 신청을 한다고 해도, 몇 년 전에 권역별 특성화정책에 일환으로 이미 부산에 다른 대학병원에 심뇌혈관 센터를 짓느라 많은 지원금을 쏟아 부은 상태였기 때문에, 복지부가 과연 같은 지역에 있는 세중병원에 외상센터 지원을 해줄 것인지 걱정이 되는 인혁었다. 그녀는 복잡한 그의 표정을 읽었는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그를 부른다.
“ 저, 교수님..? 이거 말고 말씀드릴 거 또 하나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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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예, 말해봐요. ” “ 그때 복지부에서 닥터헬리 사업한다고 했잖아요~ 그거 서울에서 시범운행한다는데 요? 일단은, 소방헬기로만 한 3달간 시범운행을 해보고, 성과가 좋으면 닥터헬기를 진 짜 들여올 수도 있다는데, 그렇게 되면 이번엔 도서지역에 배정한다는 거 같더라구요. ” “ 아, 그래요? ” “ 네~! 그래서 그거 발표 겸 컨퍼런스한다고 연락왔어요! ” “ 아아, 하, ”
그녀의 말에 뭐가 그리 재밌는지 고개를 돌린 채 피식- 하고 웃는 인혁. 은아는 그런 그의 반응이 나쁘진 않았지만, 잘 웃지도 않는 사람이 왜 저리 웃고 있나 싶어 물어본다.
“ 뭐가 그리 재밌으세요? ” “ 예? 아아, 아니~ 신선생, 나과장님보다도 소식이 빨라진 거 같아. 허허 ” “ 아~ 그럼요!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데요~ 시간 날 때마다 항상 찾아 본다구요~ ”
인혁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고맙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하고 해서 한참을 허허거리며 웃다가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은아를 부른다.
“ 근데, 신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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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 ” “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에요? ” “ ..??... 아.. ”
아까부터 마우스를 쥔 채로 말을 하고 있던 그녀. 덕분에 의자에 앉아서 모니터를 보고 있던 인혁과 상당히 가까운 거리였다. 그의 말에 재빨리 몸을 일으키는 은아. 조금 무안했는지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며칠 후, 서울로 1박 2일, 헬기 컨퍼런스 가는 길, 전날 새벽까지 수술을 했던 인혁은 너무 피곤한 나머지 옆 좌석에서 곯아떨어져 있고, 오늘도 역시나 운전대는 은아가 잡고 있었다. 잠시 후, 고속도로로 진입하는 차. 추석이 지난 지 얼마 안 되서 그런지 귀경 길에 오르는 차들 때문에 고속도로가 조금 막히고, 그녀 역시도 잠을 얼마 못자고 나온 터라서 장거리 운전의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조금씩 졸음이 몰려온다. 은아는 졸음을 참아보려 껌도 씹어보고 볼도 꼬집어보지만, 한번 밀려든 졸음을 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노래라도 들어야겠다 싶은 그녀. 가방에서 구워온 CD를 꺼내려는데, 뒷좌석에 놓여 진 가방이 손이 닫질 않는다. 그 와중에도 여전히 옆에서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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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아는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을 하다가 그를 조심스럽게 불러보는데, 역시나 미동도 하지 않는 인혁. 어제 수술을 하느라 잠을 못 잤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왠지 오늘은 그렇게 자고 있는 그가 조금 얄밉게 느껴지고, 이내 그를 살짝 흔들어서 깨워보기로 한다.
“ 교수님? 교수님? 잠깐만 일어나 보세요~ ”
그러자 그가 몸을 살짝 뒤척이더니 힘겹게 한쪽 눈만 뜨고 그녀를 보고 대답한다.
“ 으음... 예에.. 아, 왜요.. ” “ 저기 뒷 자석에서 가방 좀 주시면 안 돼요? ” “ 으.... 가방이요? 잠깐만요.. ”
인혁은 안전벨트를 푸르고 몸을 일으키고는 뒷 자석에 있는 가방을 집어서 그녀에게 넘겨준다. 그러고는 곧바로 다시 잠을 청하는 그. 은아는 한손으로 가방을 뒤적거려서 CD를 찾아낸 후, 이내 CD를 집어넣고 재생버튼을 누른다. 곧, 차안에 익숙한 노래가 울려 퍼지고, 그녀는 인혁이 자는데 방해가 될까봐 볼륨을 최대한으로 낮춘다. 그렇게 한 시간 후, 은아가 자기도 모르게 흥얼거리면서 노래를 아주 작게 따라 부르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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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곤히 자다가 결국 그녀 때문에 잠이 깨어버린 인혁. 눕혀져 있던 의자를 당겨서 자세를 고쳐 앉는다. 갑자기 일어난 인혁 때문에 살짝 놀란 은아. 자신 때문에 인혁이 깬거 같아 살짝 미안해진다.
“ 아, 일..어나셨어요? 저 때문에 깨신 거에요..? ” “ 아니요. ”
말로는 아니라고 하는 그였지만, 이미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하다. 그런 그 때문에 더 더욱 미안해지는 은아. 괜히 무안해져서 아무 못하고 운전만 하고 있다. 그렇게 몇 분동안 아무대화도 없이 차안에는 음악만이 흐르고, 아무래도 무슨 말을 하긴 해야 할 것 같아 입을 여는 그녀.
“ 어... 노래좋죠? ” “ .... 나는 이런 음악에 취미 없는데... “
그의 말에 또 무안해진 은아. 또다시 잠깐 동안 침묵이 흐르고, 그녀는 괜히 분위기를 돌리려 그에게 말을 시킨다.
“ 음.. 그럼, 교수님은 좋아하는 노래 없으세요? ” “ 없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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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단답형으로 짧게 돌아오는 대답. 은아는 자꾸 자신을 무안해지게 하는 그의 대답 때문에 살짝 뾰루퉁해져서는 혼잣말로 궁시렁거린다.
“ 하긴 맨날 일만하시니까.. 기계잖아요 기계~ ”
그러나 혼잣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또박또박한 뒷말. 인혁은 기계라는 그녀의 말에 살짝 욱해버린다.
“ 무슨.. 내가 기계에요, 나도 있어요..! 좋아하는 가수. ” “ 오~ 정말요? 누군데요 ” “ 배호 ” “ 배...호요? 아........ ”
그의 말에 약간 머리를 굴려 생각해보다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말하는 그녀. 그러고는 뭔가 애매한 표정을 짓는다. 인혁은 무시하려 했지만 그런 그녀의 반응이 신경쓰인다.
“ .... 뭐에요? 반응이 왜 그래요..? ” “ 네? 아아, 아니요. 교수님 연세가 그렇게 많으신가 해서요. 마흔 하나 아니셨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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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그건 주민등록상 나이고 원래는 그거보단 조금 많아요. 아, 근데..!거기서 갑자
기 나이얘기가 왜 나와요.?!
”
“ 아니~ 그 가수 우리 엄마가 어렸을 때 좋아하시던 가순데.. 교수님세대가 우리 엄마 세대인가 해서요.
”
그녀의 질문에 불만스럽게 변하는 그의 표정. 나이얘기가 나오자 갑자기 잠이 확 달아난다.
“ 참...나... 날 무슨 할아버지로 보나..
그렇게 안 많아요...! 거, 어머니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데요. ” “ 아, 쉰 여덟이세요 ” “ 거봐요! 쉰 여덟이시ㅁ.... 흐흠... ” “ 왜 말을 하다말아요. 교수님 몇 년생이신데요? ” “ 알아서 뭐해요. ” “ 배호 좋아하신다면서요. 우리 엄마세대인가 보려구 그려죠~?. ” “ 흠, 크흐흠, 그 가수는 내가 나이가 많아서 좋아하는 게 아니고. 우리 아버지, 어머 니가 좋아하시던 가수여서 아는 노래가 그 사람노래 밖에 없어요. 나는 노래를 안 찾 아들으니까... ” “ 아... ” “ .... ” “ ... 근데 교수님, 얘기 안 해주실 거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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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요 ” “ 교수님나이요 ” “ 그, 그게 뭐 중요한 거라고 뭐 쓸데없이 알려고 그래요! 그, 그, 운전이나 똑바로 해 요. ”
안 그래도 피곤해죽겠는데 졸린 것도 참아가며 운전을 하던 그녀. 운전이나 똑바로 하라는 인혁에 말에 욱! 해버린다.
“ 안 그래도 운전 똑바로 하고 있거든요? 지금 정체돼서 차 안 나가는 거 안보이세 요? 참나.. 됐어요! 말해주기 싫으면 싫다고 하시든가.. 뭐, 그래도 우리 엄마보다는 쫌 어려보이시니까 뭐 한, 마흔 여섯, 일곱 정도 되시겠죠! ” “ 무..무슨..!! 마흔 셋이에요 셋! 됐어요? 거, 참..! ” “ 아~ 마흔셋. 생각보다 젊으시네요 ” “ 거, 생각보다는 무슨!! 나 잘테니까 노래 끄고 운전이나 해요. ” “ 왜 노래는 끄래요! 일곱, 여덟 시간동안 아~ 무 것도 안하고 운전만 하라고요?! 안 그래도 저번에 창원 갈 때도 얼마나 지루했는지 아세요? 교수님은 한 번도 안하시면 서...! 정 그러시면 노래끄고! 저도 눈 좀 붙이게 교수님이 운전 하시던가요~! ” “ 그건..! 그... 흠.. 알았어요. 노래계속 듣던지 말던지.. 나 다시 잘 테니까 따라 부르 지만 마요. ” “ ..... ” “ ...... ” “ .... 근데요 교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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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요. ” “ 그러면 우리 엄마랑 15살 차이밖에 안 나시네요~? 헤헤.. ” “ 아! 쫌..! 그만 좀 말시켜요 잠 좀 잡시다! 참..그..! ” “ 알았어요. 말 안시키고, 노래만 들을게요! 주무세요~ ”
마지막까지 인혁을 놀리는 그녀. 쌤통이라는 듯 그를 슬쩍 흘겨보다가 그가 다시 화를 내며 쳐다보자 이쯤 해야겠다 싶어 다시 운전에 집중한다. ※ 추천브금 : 허각&지아 - I Need You (Inst.)
8시간 후, 장거리 운전 후에 간신히 고속도로를 빠져나온 두 사람. 거의 새벽같이 출발했는데도 불구하고 서울에 도착하니 벌써 오후 4시였다. 다행히도 헬기 컨퍼런스는 아직 3시간이나 남아있었기 때문에 가기 전에 회의도 해보고 충분히 여유롭게 준비를 할 수가 있었다. 비록 잠도 별로 못자고 운전만 하느라 피곤하긴 했지만 일찍 출발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그녀. 여유 있게 도착했으니 조금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한 30분만 잤으면 좋겠는데..라는 생각으로 그를 슬쩍 보는 은아. 인혁은 이미 잠에서 깨어 병원에서 못다 확인한 컨퍼런스 자료를 보고 있었다.
“ 저, 교수님~ 이제 곧 있으면 도착하겠는데요. 바로 서울대학병원으로 가면 되는 거 에요? ” “ 아, 예. 그러면 되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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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회의장 도착하면, 먼저 올라가 계실래요? ” “ ....?... 왜요 어디 들를 때 있어요? ” “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너무 피곤해가지고~ 이대로 올라가면 창피하게 졸고 있을 거 같아서요. 저 30분만 눈 좀 붙이고 올라갈 테니까, 아, 못 일어나겠구나, 이따가 교수님이 전화로 좀 깨워주세요~ ” “ ...?... 어디서? 차에서요? ” “ 네~ 딱히 쉴 곳도 없잖아요. ” “ 에이.. 여기는 좀 그렇지 않나..? 그, 왜, 숙소 잡혔을 거 아니에요. 아직 시간 많이 남았으니까, 나 여기 근방에 내려주고 신선생은 좀 쉬다가 오는 게 낫지. ” “ 저도 그러면 좋은데~! 숙소는 이따가 컨퍼런스 끝나고 알려준다카든데요? 그라고 뭐, 숙소 있다고 해도 들렸다 오면 늦을 거 같은데요~ 그냥, 주차시켜놓고 좀 만 쉬면 돼요. ”
그래도 차에서 쪽잠을 자겠다는 말이 좀 걸리는 인혁. 자신이야 맨날 그런 식으로 자곤 했으니 상관없다지만 왠지 은아가 그렇게 잘 거라고 하니 마음에 걸린다.
“ 거, 그래도 여긴 좀 그렇지 않아요? 많이 졸려요? 회의 3시간인데.. 못 버틸 것 같 아요? ” “ 못 버틸 거 같은데.. 저 어제 늦게 퇴근했다가 새벽같이 나오느라 3시간밖에 못 잤 잖아요~ 게다가 교수님이 하~나도 안 도와 주셔서! 운전하면서도 졸음 참느라 죽는 줄 알았네요~ 그냥 쫌만 쉴게 먼저 올라 가세요..! ” “ 흠! 크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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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리는 게 있는지 괜한 헛기침을 하는 인혁. 그래도 자신은, 그녀가 내내 운전을 해주며 올라오는 바람에 이틀 동안 못 잤던 피로를 싹- 풀 수 있었지만, 정작, 어젯밤까지도 같이 고생했던 은아는 잠도 별로 못자고 운전하느라 제대로 쉴 시간도 없었던 걸 생각하니 그녀에게 조금 미안해진다. 10분후, 서울대학병원에 도착한 두 사람. 컨퍼런스가 열릴 건물을 찾아 한 바퀴 돌다가 이내 회의장소를 찾아내고는 주차장에 차를 갖다 댄다. 문을 열고 먼저 내리는 인혁을 향해 재차 부탁하는 은아.
“ 교수님, 그럼 먼저 올라가 계세요~ 저, 못 일어날지 모르니까. 30분 지나도 안 올라 오면 꼭 깨워주셔야 되요! ” “ 그, 30분가지고 되겠어요? ” “ 네~ 그거면 충분해요! 어차피 컨퍼런스 자료도 다 못 봤는데, 그것도 좀 준비할 시 간 필요하고요. ” “ 알았어요. 그럼 쉬어요. ”
[ 탁- ]
차문을 닫고 혼자 회의장으로 향하는 그. 아직 회의시작 3시간 전인데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몇몇 사람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처럼 지방에서 온 사람들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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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국내에서는 최초로 시행되는 닥터헬리 사업인 만큼, 지방에서도 꽤 많이 참석하는 모양이었다. 늦가을이라 바람도 심하게 불고, 쌀쌀한 날씨 때문에 사람들은 저마다 손에 커피 한 잔씩을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좋은 생각이 떠오른 인혁.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30분 후, 주차장, 저 멀리서 걸어오는 그의 양손에 커피가 들려져있다. 오는 동안 내내 그녀에게 운전만 시킨 게 미안하기도 하고, 늘 은아가 커피를 사다줬으니 이번엔 자신이 사다줘야겠다 싶어서 병원 내 카페에 들려 커피를 사온 그. 그렇게 운전석으로 다가서며 차안을 들여다보니 은아가 의자를 뒤로 젖힌 채,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인혁은 그녀가 너무 피곤해 보이는 탓에 조금 더 자게 내버려 둘까 생각 하다가, 컨퍼런스 자료를 더 확인해야한다는 그녀의 말이 떠오르고, 게다가 기껏 사온 커피가 찬바람에 식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깨우기로 하고 창문을 두드린다.
[ 똑똑- 똑똑똑- ]
그러나 미동도 하지 않는 은아. 인혁은 어쩔 수 없다 싶어 차문을 열려는데, 두 손에 들려져 있는 커피 때문에 쉽지가 않다. 그래서 커피를 한손으로 간신히 붙잡은 뒤 문을 열고는 다시 두 손으로 커피를 잡는다. 그리고 은아를 다시 깨워보는 인혁.
“ 신선생..! 신선생..? 일어나봐요! 30분 지났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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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여전히 곯아떨어져 자고 있는 그녀. 인혁은 안 되겠다 싶어 팔로 은아를 툭툭치며 조금 더 큰소리로 깨워보려는데, 목소리에 너무 힘이 들어가 버렸다.
“ 신선생!!!! 일어나봐요!!!!! ”
[ 벌떡- ]
은아가 그의 큰 목소리에 놀라서 벌떡하고 일어나는데, 한 팔로 그녀를 툭툭 치고 있던 그. 너무나 갑자기 일어나는 은아를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부딪혀 커피를 놓쳐버린다.
“ ....!!!!!!.... ” “ ....?!!?!!... 앗 뜨거..!! ” “ 괜, 괜, 괜찮아요?!! 아, 이거!! 미..미안해요!! 많이 데였어요?! ” “ 이이!! 교수님!!! ” “ 미, 미안해요!! 좀 일어나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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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날아가 핸들에 부딪히며 뚜껑이 열려버린 커피. 덕분에 은아의 옷은 커피로 젖어버리고, 차안은 물론 인혁의 옷에까지 커피가 튀어버렸다. 인혁은 손을 들어 급히 그녀의 옷을 털어보려 하다가 멈칫하고, 어쩔 줄을 몰라서 그녀를 황급히 차 밖으로 나오게 한다. 갑자기 자다 일어나서 봉변을 당한 은아. 차에서 나오자마자 옷을 털어내더니 화장지를 찾는다.
“ 휴지요! 휴지!! ” “ 아아, 이, 이거라도 써요. 휴지 찾아줄게요! ”
그는 급히 외투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넘기고, 얼른 차안에서 휴지를 찾아 넘겨준다. 잠시 후 어느 정도 커피를 닦아낸 은아가 고개를 들어 인혁을 째려보고, 그는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입을 연다.
“ 아아.. 미안해요..! 만, 많이.. 데였어요? ” “ 아이, 아니요! 데이지는 않았는데 이거 어떻게 해요!! 쫌 있으면 회의 들어가야 되 는데.. ”
다행히도 커피가 조금이나마 식어있던 덕분에 덴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옷은 볼품없게 얼룩덜룩해져있었다. 게다가 커피가 인혁의 옷에도 튀었기 때문에 옷이 망가지기는 그도 마찬 가지였다. 곤란한 상황에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시계를 확인하는 인혁. 회의가 시작하기까지 2시간 조금 넘게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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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이, 어쩌지.. 우선 차에 타봐요. ” “ 차요? 어쩌시게요? ” “ 회의장에 이대로 들어갈 순 없잖아요..! 거기 휴지 좀 줘봐요. ”
그녀에게서 휴지를 건네받은 그. 운전석에 쏟아진 커피를 대충 닦아내더니 자리에 앉아 시동을 걸고는 멀뚱히 서있는 은아를 향해 소리친다.
“ 뭐해요! 빨리 타요! ” “ 아, 네! ”
은아가 서둘러서 차에 타자마자 바로 차를 출발시키는 인혁. 그렇게 다시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두 사람이었다. . . . . 잠시 후, 차안,
“ 교수님, 진짜로 어디 가시게요? 회의 들어가야 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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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시간 좀 남았으니까.. 그대로 회의장 들어갈 수 있어요? ” “ 아, 아니요. 그럼 옷? 사시려구요? ” “ 예,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 “ 아아. 그렇긴 하죠. ” “ .... 미안해요. 일부로 그런 건 아니고.. ”
자신을 보면서 말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가 정말 미안해하는 눈치였다. 꼭 그의 잘못만은 아닌데, 인혁이 너무 미안해하는 것 같아서 조금 머쓱해지는 은아. 이 상황이 황당하기는 하지만 괜히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 같아, 일부러 피식-하고 웃으며 그를 놀리듯 대꾸한다.
“ 어쩔 수 없죠. 뭐~ 교수님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근데, 옷은 교수님이 사주시 는 거죠~? ”
장난스런 그녀의 말에 조금 안심이 되는 인혁. 덩달아 슬쩍 웃으며 대답한다.
“ 아, 예, 그, 그래야죠.. ” “ 근데 교수님 옷에도 꽤 묻었는데요? 왜 연한 색을 입으셔가지고.. 이거 양복 비쌀 텐데.. ” “ 나는 그냥 입어도 될 거 같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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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아의 말에 자신의 옷 상태를 확인하는 인혁. 그냥 입는다고 말하려다가 얼룩덜룩한 옷 상태를 보고는 이내 말끝을 흐려버린다. 그런 그의 표정을 보더니 역시나라고 생각하는 은아.
“ 역시, 안 될 거 같은데요? ” “ 아, 그러네. 어쩔 수 없죠. 뭐.. 어디보자, 근데 이거 어디로 가야하나..? ” “ 교수님꺼 양복사려면 기성복매장가야할거 같은데.. 일단, 시간 많지 않으니까, 눈에 보이는 데 있으면 바로 들어가요~! ” “ 알았어요. 같이 파는 데로 가면 되겠네. ”
그렇게 창밖을 보며 들어갈 만한 가게가 있나 두리번거리는 인혁과 은아. 그러다가 문득 뭔가가 궁금해지는 그녀.
“ 근데, 교수님. ” “ 예. ” “ 아까 커피는 왜 갑자기 사오셨어요? 귀찮아서 커피 사러 잘 안가시잖아요. ” “ 아.. 그, 신선생이 졸리다고 하니까.. 잠도 얼마 못 자는데 커피라도 마셔야 할 거 같아서. 뭐, 날도 좀 춥고. ” “ 오~ 교수님이 웬일이래요? 그래도 미안하긴 하셨나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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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미안하긴.. 난 그, 밤새 수술했잖아요~! 운전이야 뭐 당연한거지.. ” “ 아~ 예~ 그러시겠ㅈ.. 어? 교수님 저기요! 저기로 가면 되겠네요! ” “ 예. 잠깐, 차 좀 세우고. ”
이내 옷가게 앞에 차를 세우고는 두 사람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데, 인사를 하다말고 둘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점원. 아마도 두 사람 모두 커피 때문에 얼룩덜룩하게 젖은 옷을 입고 있는 게 이상하게 보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바로 다시 인사를 하는 점원.
“ 아... 어서오세요! 찾으시는 거라도.. ” “ 저기, 신 선생 먼저 골라봐요. ” “ 저는 너무 많이 젖어서, 좀 씻어내고 와야 될 거 같은데.. 교수님 먼저 고르세요. 저 갔다올 테니까. 여기 화장실 좀 쓸 수 있을까요? ” “ 예, 여기 건물복도 끝에 있습니다. ”
그렇게 은아가 화장실로 가버리고, 혼자 남겨진 인혁에게 점원이 묻는다.
“ 손님은, 양복..? 찾으시려구요? ” “ 아, 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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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이쪽으로, 위아래 다 하실 거죠? 어떤 계열로 하시겠어요? ” “ 저기, 제가 알아서 고르겠습니다. ”
그러더니 잠시 둘러보다가 별 망설임 없이 잿빛이 도는 양복을 집어 드는 인혁. 그런 그에게 점원이 싸이즈를 물어보고 맞는 옷을 찾아주더니 몸에 맞는지 확인하시라며 그를 탈의실로 안내해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고 나온 그. 싸이즈도 잘 맞고 그냥 무난하게 어울렸다. 그때, 화장실에 갔던 그녀가 돌아와서는 옷을 다 갈아입은 인혁을 발견하는데, 왠지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눈치이다. 인혁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작게 말하는 은아.
“ 교수님, 그걸로 하시게요? ” “ 예, 왜요? ” “ 이왕 새로 사시는 거 좀 세련된 걸로 사시지. 그놈의 쥐색은 왜 그리 좋아하세 요..!.. ” “ 아, 뭐가 어때서요. 무난하고 좋기 만한데.. ”
은아는 그의 말에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남자 양복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린다. 그리고 점원을 부르는 그녀.
“ 저기요, 이런 거 말고~ 조금 젊어 보이는 색상 없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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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거, 신선생.. 참..! ”
그러나 인혁의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을 점원하고 이것저것 고르더니 뭔가 하나를 집어와 인혁에게 내미는 은아. 진한 블랙에 1cm정도 행커치프가 보이는 깔끔한 재킷과 블랙정장바지였다.
“ 교수님, 이걸로 갈아입어보세요~ ” “ 나참, 이런 거는 젊은 사람들이나 어울리죠. 난 그냥 지금 입고 있는 게 좋은데.. ” “ 아이, 그냥 쫌 입어보세요..! 입어본다고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어? 잠깐요, 와이셔 츠에도 커피 많이 튀었는데요? ” “ 아, 안 그래도 지금 고르려고.. ” “ 시간 안 많거든요? 여기요! ”
인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점원을 부르는 은아. 와이셔츠가 있는 쪽으로 가서 또 한참을 고르더니 깔끔한 화이트 와이셔츠와 밝은 남색계열의 넥타이를 들고 온다. 그렇게 다시 옷을 인혁에게 내밀고는 그를 강제로 탈의실로 밀어 넣는 그녀.
“ 어어? 어? 아, 알았어요! 참, 그만 좀 밀어 쫌. ” “ 알았어요~ 시간 없으니까 빨리 입고 나오세요! 저 고르고 있을 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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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인혁이 탈의실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는 자신의 옷을 고르는 은아. 여성스런 라인에 깔끔한 화이트 블라우스와 블랙계열의 세련된 정장자켓, 바지를 고른 뒤, 자신도 나머지 탈의실로 들어간다. . . . . 잠시 후, 옷을 다 갈이입고 나온 인혁. 거울이 없는 탈의실 때문에 정작 그는 보지 못했지만, 은아가 골라준 옷이 생각보다 그에게 잘 어울렸다. 젊어보이는 디자인이라 그런지, 약간 라인이 들어가 있어서 핏도 좋고, 살짝 삐져나온 행거치프 때문에 약간 세련되어 보이기까지 했다. 덕분에 그의 얼굴이 준수하다 못해 조금 잘생겨 보이면서,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에 능력 있는 사업가 같은 느낌을 풍겼다. 그런 그를 보고 조금 놀란 눈치로 칭찬을 하는 점원.
“ 어머, 손님! 이 옷이 훨씬 잘 어울리시네요!! ” “ 아아, 예.. 근데, 여기 있던 여자 어디로 갔습니까? ”
그러나 그는 듣기 좋으라고 하는 립 서비스라고 생각해버리고,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고는 은아를 먼저 찾는다.
“ 아, 탈의실에서 옷 갈아입고 계세요. 어? 저기 나오시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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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원에 말에 인혁이 뒤를 돌아보는데, 깔끔한 정장을 멋있게 소화하고 걸어 나오는 그녀. 옷이 검정계열이라 그런지 안 그래도 큰 키가 더욱더 커 보이고 몸도 늘씬해 보였다. 게다가 아까는 묶고 있던 머리를 푸르고 있어서 그런지 훨씬 여성스럽고 세련되어보였다. 그렇게 조금은 모델 같은 그녀의 모습에 인혁이 살짝 넋이 나가서 보고 있는데 그런 그에게로 다가오며 활짝 웃고 있는 은아.
“ 우와, 교수님!! 거봐요! 제 말 듣길 잘했죠? ” “ 예..? 뭐가요.. ” “ 거울 아직 안보셨어요? 지금 입고 계신 거요~ 엄청 잘 어울리세요! 아까보다 훨~씬 젊어보이시는구만!! ” “ ....?.... ”
그녀의 말에 이제야 거울을 들여다보는 인혁. 너무 젊은 스타일이라 안 어울릴 줄 알았는데..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이 조금 낯설어 보이긴 하지만, 의외로 몸에도 꼭 맞고 잘 어울려 보였다. 옷이 생각 외로 잘 어울리자 입 꼬리가 조금 올라가는 그. 은아는 그런 그의 모습이 재밌어서 옆에서 더 띄워준다.
“ 이야~ 교수님 10년은 젊어보이세요~! 이렇게 잘 어울리시는데 왜 그동안 이렇게 안 입고 다니셨을까~? 하긴 뭐, 병원에서는 만날 수술복차림이시니.. 근데, 그거 수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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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깎고 다니시면 더 젊어 보이실 거 같은데! 우리교수님, 너무 관리를 안 해주셔~ 너 무! ” “ 그, 내가 그럴 시간이 어딨어요? 수술하느라 잠잘 시간도 없는데.. 뭐, 그래도 흐 흠..! 신선생이 보기에 잘 어울린다니까 다행이네.. ”
은아의 칭찬에 기분이 더 좋아진 인혁. 그녀 앞에서 티는 안내려고 하지만, 왠지 모르게 계속 입 꼬리가 올라가는 그였다. . . . 몇 분 후, 그렇게 새로 입은 옷들을 몇 번 확인하고는, 계산대 앞으로 가는 은아.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계산해달라며 점원에게 카드를 내민다. 그러나 그런 그녀를 옆에서 툭 밀어내는 인혁.
“ 이거 다 얼마입니까? ” “ 뭐하세요? 저기, 제껀 제가 계산할게요! ” “ 아닙니다. 다 계산해주십쇼. 거, 가만있어요. 아까 내가 실수했으니까, 내가 사준다 고 했잖아요.
”
“ 아이구, 됐어요! 무슨 큰 실수나 하셨다고.. 이거 다하면 얼만 줄이나 아세요? 제 옷은 제가 계산하면 되거든요~ ” “ 아, 됐어요! 한번 사준 댔으면 사주는 거지.. 얼마입니까? ” “ 네, 할인된 가격으로 137만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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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이 벌어지는 은아. 거의 자신의 한 달 치 월급하고 맞먹는 가격에 놀라서 손사래를 치며 얼른 인혁의 카드를 뺏는다. 그러자 가격을 말한 점원의 말보다 갑자기 자신의 카드를 뺏어간 그녀 때문에 더 당황한 인혁. 점원의 눈치를 보며 그녀에게서 다시 카드를 뺏으려고 하지만 은아는 얼른 그의 카드를 숨기며 다시 자신의 카드를 내민다.
“ 저기, 제 옷은 이걸로 계산해주세요! ” “ 아, 왜이래요? 창피하게! ” “ 교수님! 저거 제 한 달 치 월급이거든요? 제가 염치없게 저걸 어떻게 받아요! ” “ 거참! 나 의사에요! 뭐, 그 정도 능력도 없을까봐 그래요? 그리고 신선생이면 이 정 도는 받아도 되요. ” “ 아이! 그게 무슨 소리..ㅅ ” “ 그, 왜, 맨날 야근에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사주는 거에요..! 앞으로도 더 고생시킬꺼니까.. 그러니까 가만히 좀 있어 봐요 쫌! 시간도 얼마 없구만.. ”
순간 진지해진 그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은 은아.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점원에게 자신의 카드를 내민다.
“ ..... 정 그러면 이렇게 해요! 여기요, 이거 와이셔츠하고 넥타이는 이걸로 계산해주 세요! 이러면 됐죠? 저도 교수님 고생시킬 거니까 각오하시라고 사드리는 거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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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아무튼 고집은.. 참.. ”
그렇게 계산대 앞에서 한참을 실랑이를 버리던 두 사람. 결국, 은아가 그의 옷 일부를 계산하는 것으로 실랑이를 끝낸다. 곧, 인혁도 계산을 끝내고 쇼핑백을 집어 들고 나가려는데, 점원이 두 사람을 다시 부른다.
“ 손님!! 잠시만요! ” “ ...?... 예? ” “ 저희 매장에서 지금 행사기간이라 100만원 넘게 구매하신 고객께는 사은품을 드리 거든요. 여기 특별히 하나 더 넣어 드릴게요. ” “ 아, 괜찮습니다. 그럼. ”
점원에 말에 인혁이 괜찮다며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데, 은아가 이게 얼마짜린데 사은품도 안 받냐며 기어이 점원이 내미는 걸 받아든다. 예쁜 포장에 쌓여진 네모난 작은 상자. 그녀가 사은품을 받는 걸 확인하자마자 시간 없으니 먼저 시동을 걸고 있겠다며 나가버리는 인혁. 은아는 그런 그를 보며 입을 잠시 삐죽거린 후, 점원에게 내용물이 뭔지 물어본다.
“ 근데 이게 뭐에요? ” “ 현재 매장에서 판매되고 있는 고급형 손수건입니다. 특별히 커플손수건으로 넣어드 렸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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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 네?? 무, 무슨.. ” “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 “ 아, 네에. 수....고하세요~! ”
은아의 마지막 물음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끝인사를 건네는 점원. 결국, 더 이상은 물어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게를 나오는 은아였다. 그러고는 서둘러 차에 올라타는 그녀. 은아가 차에 타자마자 시계를 보는 인혁. 그러더니 차를 바로 출발시킨다. 컨퍼런스에 늦을까봐 걱정되는 두 사람.
“ 저희 많이 늦었어요? ” “ 어.. 아니, 서두르면 30분 전에는 도착할 수 있을 거 같은데. ” “ 그래도 다행이네요! 역시 아침에 일찍 출발하길 잘했어요~ 제 말 들으시길 잘했죠? ” “ 하, 뭐, 그렇네요. 크흠. ”
자화자찬을 하는 그녀 때문에 피식- 웃으며 대답하는 인혁. 그런 그녀가 조금 웃기긴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에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웬일로 쉽게 인정을 해주는 그 때문에 기분이 좋아진 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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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좋네요~ 교수님 덕분에 이렇게 새 옷도 생기고 잘 입을게요~! ” “ 예, 나도 잘 입을게요. ” “ 네~ 헤.. 아! 맞다, 교수님 이거요.. ”
그에게 아까 받은 사은품을 내미는 은아. 인혁은 뭘 이런 걸 굳이 받아 오냐는 듯한 눈빛을 보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계속 운전에만 몰두한다. 그런 그의 앞에서 포장을 푸르고 두 손수건을 모두 꺼내보는 은아. 하나는 검정바탕에 진회색 사선무늬가 들어가 있었고, 다른 하나는 같은 무늬에 베이지색과 흰색계열 이었다.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손수건, 느껴지는 감촉도 부드럽고 좋았다.
“ 오오, 이거 좋은 거네요~! 근데 교수님. ” “ 왜요. ” “ 이거 주면서 점원이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 " 뭐라 했는데요. “ “ 커플손수건이래요~ 커플. 우리가 커플처럼 보였나? 헤헤~ ”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농담을 던지는 은아 때문에 운전을 하다말고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는 그. 그러다 다시 앞을 보고는 운전에 집중을 하며 입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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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크흠, 신선생 약혼자나 갖다 주면 되겠네. ” “ 됐어요~ 무슨 이걸.. 교수님이 옷사주셔서 받은 건데, 교수님이 쓰셔야죠! 이건 교수 님 갖고! 이건 제꺼! ” “ 커플 손수건이라면서요. 그걸 왜 내가 가져요. ” “ 에이, 요즘엔 앞에 이름만 갖다 붙이면 다 커플인데~ 쓰는 사람이 맘대로 쓰면 되 는 거지, 꼭 그대로 써야되요? 아무튼 융통성도.. 아, 그리고 아까 교수님 손수건 커피 때문에 망가졌잖아요~ 그냥 교수님 쓰세요! 지금은 교수님 운전하시니까, 잠깐 여기에 둘게요. 이따가 달라고 하세요~ ”
그렇게 말하고는 손수건을 자신의 가방에 챙겨 넣는 은아. 그런 그녀를 슬쩍 쳐다보는 인혁.
“ ... 흠. ”
얼떨결에 커플손수건을 나눠갖게 된 두 사람. 그녀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했지만, 아무래도 인혁은 엄연히 남자친구가 있는 그녀와 커플손수건을 나눠 갖게 된다니, 왠지 느낌이 조금 꺼림칙했다. 하지만 이내 그녀처럼 의미부여를 안 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하며, 다시 운전에 몰두한 채로 회의장으로 향하는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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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브금 : Richard Sanderson - Reality
몇 시간 뒤, 늦은 밤, 컨퍼런스가 예상보다 늦게 끝나고, 피곤에 지친 두 사람. 숙소로 가기 위해 관계자에게 참가확인증을 받은 뒤, 서둘러 주최 측이 예약해놓은 호텔로 향한다. 30분 뒤, 호텔 안으로 들어서는 인혁과 은아. 카운터에서 컨퍼런스 참여 때문에 왔다고 얘기를 하고, 회의장에서 받은 참가확인증을 내미는 그녀. 직원이 확인증을 받아들고 명단확인을 하더니, 비지니스 룸 하나를 안내해준다. 직원의 말에 살짝 당황한 은아. 왜 확인증은 두 개인데 방이 하나인지 물어보지만, 명단에 나와 있는 데로 주는 거라고 대답하는 직원. 인혁은 뒤에서 그녀가 체크인 하기를 기다리다가 은아가 뭔가 당황한 눈치로 헤매고 있자 그녀 옆으로 다가 무슨 일인지 묻는다.
“ 무슨 일 있어요? ” “ 아.. 저, 룸이 하나밖에 안 나온다는데요. ” “ ....??.... 그게 무슨.. 두 개 신청한 거 아니었어요? ” “ 네, 그거는 맞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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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하여 말끝을 흐리는 은아. 그도 조금 당황스러워 하며 직원에게 다시 물어보지만, 역시나 같은 대답만 되돌아올 뿐이었다. 당황한 두 사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난감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주최 측에 연락을 해보는 인혁. 잠시 동안 신호가 가더니 수화기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온다.
“ 예, 저기, 해운대 세중병원에서 온 최인혁입니다. 여기, 안내해주신 호텔인데요. 저 희 앞으로 배정된 방이 하나밖에 없다고 해서,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아서 연락드렸 습니다. 예, 예, 연락기다리겠습니다. ” “ 어떻게 된 거래요? ” “ 자기들도 잘 모르겠다는데.. 확인해보고 연락 준답니다. ” “ ..... ”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의 은아. 인혁도 그녀의 표정을 읽고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휴대폰만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로비에 서서 연락만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 . . . . 잠시 후, 그의 휴대폰이 다시 울리고, 인혁은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전화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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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저기, 어떻게 된 겁니까? ” “ 네, 방이 하나인건 맞는데, 베드가 둘일 텐데요. 확인 안 해보셨습니까? ” “ 아아.. 저 근데, 그게.. 그, 방을 두 개를 신청했다고 들었는데요? ” “ 아, 그건 확인 했습니다. 그런데, 같이 온 분이 의사가 아니시죠? ” “ 예, 그, 의사가 아닌 건 맞는데요. 외상코디네이터라고.. ” “ 저희는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저희가 지원받은 금액이 의사 한 분씩 기준으로 해서 책정된 거라서요. 그나마 두 분이 오신다고 해서 큰 곳으로 예약해 드린 건데요. 혹시 같이 오신분이 여자 분이십니까? ” “ 아아, 예, 맞습니다. ” “ 아이고,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아아.. 그럼 잠시만요. 혹시.. 그러면, 다른 분하고 방 을 같이 쓰셔도 괜찮으십니까? ” “ 예, 저는 상관없습니다. ” “ 그러면, 여기 관계자 분들 중에서 아직 출발 안하신 분들이 있으니까. 제가 가능한 분 알아보고 호텔 도착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 “ 예에.. 알겠습니다. 저기, 근데, 혹시 오래 기다려야합니까? ” “ 글쎄요. 그게, 여기 있는 분들끼리 회식이 있다고 해서요. 조금 늦어질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 “ 아.. 어쨌든, 연락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꼭 좀 연락 주십쇼. 예, 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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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전화를 끊는 인혁. 다행히도 방을 하나 구할 수 있을 거 같아서,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 진다. 옆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던 은아. 인혁은 그런 그녀를 보더니 살짝 웃으며 입을 연다.
“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되겠어요. 방하나 더 구할 수 있을 거 같으니까. ” “ 어떻게요? ” “ 내가 여기에 다른 관계자하고 방을 같이 쓰기로 했어요. 관계자들끼리 회식 끝나고 도착하면 연락 준다는데.. ” “ 아.. 근데 어떻게 된 거래요? 분명히 두 개 신청했었는데...? ” “ 어.. 그게... ” “ 왜요? ” “ 그게.. 의사 한명 당 기준으로 방이 배정 됐었나 봐요. ” “ 아.. 그럼 제가 의사가 아니라서 방이 없는 거에요? ” “ 아니 뭐, 꼭 그렇다기 보단.. 일단, 우리 쓰려던 방에 침대는 둘이라는데.. 그, 근데, 안 추워요? 신선생 먼저 들어가서 쉬고 있어요. 난 저기 들어가서 기다리면 되니까. ”
뭔가 계속 관련된 얘기을 끌어가기가 민망해져 애써 말을 돌리고는 호텔로비에 있는 커피숍을 가리키는 인혁. 그러나 은아는 그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 관계자를 혼자 기다리게 될 거 같아 신경이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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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님 혼자 기다리시려구요? 회식끝나면 온다고 했다면서요. 언제 올 줄알고.. 그 리고 그 방이 두 사람이서 쓰는 방 아니에요? ” “ 예, 맞죠. ” “ 그러면 거기를 교수님하고 그 관계자하고 써야죠~ 제가 방을 옮기고. ” “ 아아.. 그런가. 아무리 그래도 이거.. ”
은아의 말에 또 걱정스럽게 변하는 그의 표정. 시계를 확인하는데 벌써 밤 9시가 가까워진다. 오늘 운전하느라 얼마 쉬지도 못한 그녀가 걱정되는 인혁. 그녀가 쉬지도 못하고 같이 마냥 기다리게 될 것 같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머리를 굴려본다. 하지만 그런 그의 표정을 읽고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며 인혁을 향해 밝게 입을 여는 그녀.
“ 저는 괜찮아요. 하나도 안 피곤해요! ” “ 그, 안 피곤하기는.. 오늘 잠도 못 잤다면 서요! 내일은 어떻게 하고. 하아.. 이거 어 쩐다.. 그럼 내일은 내가 운전할 테니까. 일단 같이 기다려봅시다. ” “ 아이구 됐네요. 교수님 내일 또 가시자마자 수술하실 텐데 무슨 운전이요~! 그건 신 경 안 쓰셔도 되요. 그냥 그러지 말고~ 우리 이왕 기다릴 바에는 한강구경 갔다올래 요? ” “ 한강이요? 이 시간에 피곤하지 않겠어요? 내일 아침에 헬기 시범식도 가야되는데.. ” “ 그거는 9시에 시작하잖아요~! 병원에 있을 때는 밤새서 일하고도 잘만 깨있는데요 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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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추운데 떨다가 있는 거랑 다를 텐데.. 두꺼운 옷도 안 챙겨왔잖아요. ” “ 아이, 제가 괜찮다니까요~ 저 서울 진~짜 몇 년 만에 온 거란 말이에요~! 예전에 왔을 때도 한강구경은 별로 못했는데, 이번 아니면 또 언제 해봐요. ” “ 뭐, 구경은 무슨.. 부산에서 맨날 보는 게 바다인데, 한강은 뭐가 다른가? ” “ 그거랑은 다르죠~! 아, 갈꺼에요 말꺼에요! ” “ 거.. 참.. 가요 그러면. ”
결국 은아가 계속해서 졸라대는 터에 그녀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호텔 밖을 빠져나오는 인혁. 자신도 조금 피곤하긴 했지만, 어차피 언제 올지도 모르는 관계자를 지루하게 기다리느니 그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그렇게 다시 호텔 주차장으로 향하는 두 사람이었다. 30분 뒤, 한강에 도착한 두 사람. 인혁이 차를 몰아 다리 밑에 주차를 시키고 그 사이 창문너머로 한강산책로를 바라보는 은아. 늦은 시간,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사람들이 산책이나 야경을 즐기고 있었다. 게다가 중간중간 운치 있게 켜져 있는 조명들 때문에 차안에서 바라보기에는 꽤 분위기 있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한강에 오자 조금 마음이 들뜬 은아.
“ 교수님! 저거 봐요~ 사람들 많잖아요! 거기서 지루하게 기다리고만 있으면 뭐해요? 오랜만에 서울 왔으니 이렇게 구경도 하고 그러는 거지. 제 말 듣길 잘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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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나.. 어디 문 열고 한번 나가봐요. 그런 소리가 나오나. 이게 날씨가 장난인줄 알 아요? ”
기분도 못 맞춰주고 괜히 투덜거리는 인혁. 은아는 그런 그가 얄미워서 입을 삐죽거리고, 그가 안전벨트를 푸르려고 고개를 숙이는 사이 인혁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때리는 시늉을 하다가 딱 걸린다. 순간, 당황하여 잠시 동안 그대로 멈춰 있다가 얼른 손을 머리로 갖다 대며 머리를 긁는 척하는 은아. 인혁은 그런 그녀를 살짝 째려보고는 이내 차문을 열고 먼저 밖으로 나가고, 그녀도 얼른 그 뒤를 따라 차 밖으로 나간다. 차 밖으로 나가자마자 그녀의 몸을 때리는 밤바람. 확실히 가을은 가을이었다. 게다가 늦가을, 밤, 강가라서 불어오는 바람이 꽤나 차가웠다. 부산과는 또 다른 날씨.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에 은아가 몸을 움찔하다가 괜히 인혁에게 타박을 들을 거 같아서 일부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한다. 그런 그녀는 신경 쓰지도 않고 먼저 강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인혁. 그러다 잠깐 뒤를 돌아보더니 따라오지 않는 은아를 향해 빨리 오라며 손짓을 한다. 그런 그를 보며 혼잣말로 투덜거리는 그녀.
“ 아무튼, 병원에서나 밖에서나.. 혼자 휙- 가버리시는 데는 뭐있다니까.. 네!! 가요! 가~! ”
그렇게 인혁에게 소리를 치며 후다닥 그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는 은아. 인혁은 그녀가 내려오자마자 또 한소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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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이렇게 느려요! 날 추운데 빨리빨리 구경하고 가면되지.. 근데 여기 뭐 볼거나 있어요? ”
괜히 투덜거리며 그녀를 타박하는 그. 그러면서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던 인혁의 시선이 한 곳에 멈춘다. 은아는 그를 살짝 째려보다가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데, 살짝 놀라는 그녀. 한 젊은 커플이 어두운 곳에 앉아서 미니담요를 같이 뒤집어쓰고 진한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인혁이 괜히 민망해져서 황급히 고개를 돌리려는데, 그러다가 똑같은 곳을 보고 있던 은아와 시선이 마주친다. 순간, 당황해서 눈이 커진 채로 멈춰 있다가 다시 시선을 돌리는 그. 괜히 더 민망해져서 헛기침을 크게 한다.
“ 크흠!!! 흐흠! 참.. 아무튼 요즘 젊은 사람들이.. 그, 그, 공공장소에서 말이야.. ” “ 왜요? 괜히 그러셔~ 좋아보이는구만, 아이고 좋~을 때다~! ” " 차암..나.. 뭐, 누가 보면 나이 엄청 많은 줄 알겠네.. 신선생도 좋을 때면서 뭘 부러 워해요. “ “ ㄴ..네?? 아, 아니.. 저는.. ”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 은아. 인혁은 아무 생각 없이 뱉은 말인데 그녀가 너무 당황하자 자신도 당황스러워서 급히 말을 돌리려는데,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다리 위에서 폭포같이 물이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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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넓은 한강에 울려 퍼지는 익숙한 음악. 노래가 흘러나오자마자 음악에 취해버리는 인혁. 중학생 때인가.. 오래된 영화에서 아름다운 여자주인공이 나올 때 흘러나오던 음악. 매일 밤, 라디오에서 울려 퍼지던 오래된 팝송. 언제나, 이 노래를 듣고 있자면, 늘 마음이 설레이곤 했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시기 전까지는 늘 그 여배우의 사진으로 만든 책받침을 들고 다니며 밤마다 라디오를 끌어안고 자곤 했었다. 옛 추억들이 생각나는 인혁.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야경. 화려한 조명과 다리에서 쏟아지는 물줄기, 그리고 음악이 어우러지며 근사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의 옆에서 역시나 익숙한 노래라는 듯이 입을 여는 은아.
“ 어? 이 노래..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그 무슨.. 영화에서.. ” “ 라 붐. ” “ ... 네? 뭐라고 하셨어요? ” “ 영화요. 라 붐이라구요. 소피마르소가 나온 영화. ”
그의 말에 눈이 휘둥그래지는 은아. 인혁의 입에서 영화나 음악얘기가 나오니 조금 의외였다. 그렇게 눈이 커진 채로 그를 바라보는데, 그녀의 시선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강가만을 응시하는 그. 추억에 잠긴 듯 그의 눈빛이 촉촉해지는 게 보인다. 인혁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었나.. 싶어, 계속 시선을 그에게 두는 그녀. 하긴, 병원에서의 모습 말고는 그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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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아는 왠지 그의 추억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말없이 그를 지켜보고만 있다. 잠시 후,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은아 쪽으로 돌리는 인혁. 그렇게 눈을 마주치는 두 사람. 이번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눈을 마주친 채, 피식- 하고 웃어주는 인혁. 그가 자신을 향해 웃어주자 은아도 저절로 미소를 띠다가 다시 강가를 바라본다. 잠시 동안 서로 아무 말도 없이 물줄기만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이내 다리에서부터 내려오던 물줄기의 흐름이 멈춰버리고, 반포대교 전역을 아름답게 채워주던 오래된 노래도 끝이 나고, 촉촉해져있던 인혁의 눈이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온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묻는 은아.
“ ... 교수님, 소피마르소 좋아하셨어요? ” “ 아니, 좋아한 건 아니고.. ” “ 좋아하지도 않는데 영화에 노래까지 외워요? ” “ 흐흠.. 흠.. ”
대답은 하지 않고 괜히 헛기침을 하는 그. 은아는 그런 인혁이 재밌다는 듯, 씨익- 하고 웃다가 다시 농담조로 그에게 말을 시킨다.
“ 의외네요~ ” “ 뭐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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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님은 그런 거 없으셨을 줄 알았어요. 학창시절 동경하는 연예인 같은 거. 그래 도 배호 말고도 있네요. ” “ 차암.. 뭐,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랬나? 어렸을 때는 있었죠. 그런 거.. ” “ 에이.. 뭐, 맨날 일만하시니까 그러죠~ ”
그의 투정스런 대꾸에 불만있는 투로 말하지만, 은아는 처음보는 그의 모습이 재밌어서 내내 웃는 얼굴을 하고 있다. 그렇게 계속 그를 빤히 쳐다보는 그녀. 평소에는 무뚝뚝해 보이기만 해도.. 사실, 그는 알면 알수록 새로운 사람이었다. 처음에 그는 늘 일만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마치 수술하는 기계같이 일만하고 항상 병원 밖을 벗어나지 않던 그. 그래서 그가 늘 그 자리에만 있을 줄 알았다. 병원관계자들, 과장 단들한테 늘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도, 힘들어하는 건 그때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수술을 하고 환자를 돌보는 그를 보며, 그는 강한 사람이니까.. 아무렇지 않아 하는 줄 알았다. 괜찮은 건 줄 알았다. 하지만, 그가 한번 무너지는걸 보고, 그의 집을 가보고 그의 사생활을 알게 되고, 그 안에 깊은 아픔을 가지고 있는 것도 보고, 조금 의외였지만, 이 사람도 사람이구나.. 괜찮지 않았었구나.. 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문득 느끼는 또 새로운 모습들, 그가 따뜻한 사람이라는 사실. 물론, 환자들에게도 그렇지만, 가끔가끔 그녀에게 보내주는 따뜻한 미소, 격려의 미소, 늘 피곤의 찌든 그의 얼굴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한번씩 보여주는 그 미소만으로도 은아는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사실은 따뜻한 사람이라는 걸. 그리고 사실은 합리적이고 사려 깊은 사람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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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 간호사에 불과했던 자신의 의견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것, 같이 회의해주고 상의해주고, 같이 고민해주고, 다른 의사들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일인데..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는 항상 자신을 동등하게 대우해주었다. 그런 그였다. 그렇게 그는, 알면 알수록 새로운 사람이었다. 은아는 왠지 궁금해졌다. 그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 앞으로 또 어떤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것인지.. 참.. 좋은 사람이다. 참.. 좋은 인연이다. 이렇게 좋은 사람과 만나 좋아하는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하게 느껴졌다. 참 다행이었다. 그를 만나서.. 내 일상에 작은 행복을 가져다준 이 사람이 고맙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자기도 모르게 그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는 그녀. 인혁은 자신을 너무 빤히 바라보는 그녀 때문에 이번에는 시선을 마주치기가 부담스러워, 괜히 강가만 계속 바라보고 있다. 그런 인혁을 향해 조심히 입을 여는 은아.
“ 교수님 ” “ 예. ” “ 음..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요? ” “ 뭔데요. ” “ 어렸을 때 소피마르소 좋아하셨다고 하셨죠? ” “ 그건 왜 자꾸 물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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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음.. 그럼 소피마르소 말고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첫사랑..? 같은 거.. ”
인혁은 여전히 강가만 바라보고 있다가 은아의 질문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빤히 쳐다본다. 그가 너무 빤히 쳐다보자 실수했나 싶어 아니라고 말하려는데, 그녀보다 먼저 입을 여는 인혁.
“ 갑자기 뭐가 그렇게 궁금해요. 신선생 말마따나, 나이 많은 아저씨 첫사랑 같은 거 알아서 뭐 하려고.... ” “ 아.. 음.. 그냥요. 교수님은 표현도 잘 안하시고, 내색도 잘 안하시고, 뭔가 비밀이 많잖아요. 그냥.. 예전엔 좋아하는 배우도 있으셨다니까. 혹시.. 첫사랑도.. 아니 그냥~ 예전엔 어떤 분이셨을까 궁금해서요. ” “ .... 차암.. 싱겁기는. 그 나이 때에 소피마르소 안 좋아한 남자가 어딨어요. 그냥 다 들 좋아하니까. 나도 그냥, 예쁘잖아요. 순수해보이고. 어릴 때니까. 그래서 좋아했던 거지. 그리고 나는 뭐 첫사랑... 음.. 그런 거 없어요. 하, 첫사랑은 무슨.. 그냥, 그냥.. 살기 바빴죠. ” “ 아아.. ” “ .... 참, 궁금할 것도 없네.. 다리 안 아파요? 계속 한강구경 할 거면 어디 좀 앉던 가, 아니면 좀 걷던가, 아니면 이제 그만 차로 돌아가던가, 계속 이러고 있을 거에요? ” “ 아니요, 아니요. 쪼금만 더 있어요..! 음, 그러면 좀 걸을까요? ” “ 그러던가. 그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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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길 위를 걷기 시작하는 두 사람. 조금 빠르게 걷던 인혁. 은아가 자신의 걸음을 쫓아오기가 벅차보이자, 속도를 늦추고 그녀의 속도에 맞춰준다. 그렇게 다시 천천히 걷는 두 사람. 이제야 비로소 산책다운 산책을 즐기며 말없이 문득문득 강가를 바라보는 인혁과 은아였다. 몇 분이나 걸었을까. 안 그래도 아까부터 조금씩 추위를 느끼던 그녀. 강가를 걸으며,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계속 맞으니, 몸이 조금씩 떨려오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계속 구경은 하고 싶은 은아.
“ 저기 교수님, 우리 여기서 조금만 앉았다가 갈까요? ”
그에게 조금 쉬었다 가자고 하는 그녀. 그런데 그녀의 목소리 사이로 이빨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계속 풍경을 바라보며 걷다가 그제야 그녀를 돌아보는 인혁. 아니나 다를까, 그의 눈에 몸을 덜덜 떨고 있는 은아가 보인다.
“ 목소리가 왜 그래요. 추워요? ” “ 아, 아니요. 추운 건 아닌데.. ” “ 아닌 사람이 몸을 그렇게 떨어요? 거봐요. 내가 춥다니까. 뭐 이런 데는 오자고 해 가지고.. 감기걸려요. 빨리 돌아갑시다. ”
그가 서둘러 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 몸을 돌리는데, 은아가 자기도 모르게 황급히 그의 자켓 자락을 끌어당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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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려던 인혁이 뒤를 돌아보며 왜 그러냐는 듯 쳐다본다. 여전히 덜덜 떨며 입을 여는 은아.
“ 아직 견딜만해요~ 5분만 있다가 들어가요 네? 저희가 병원 밖에서 언제 또 이렇게 있어보겠어요~! 돌아가면 또 일만 할텐데.. 네? ” “ 아, 그.. 참.. ”
인혁은 계속해서 몸을 덜덜 떨면서도 조금 더 있자는 그녀에게 한소리 하려고 했지만, 그녀가 자신과 일을 시작하고 나서는 일하느라 데이트도 잘 못 한다는 걸 알기에, 얼마나 병원 밖으로 나오고 싶었으면 이럴까싶어서 하려던 말을 멈추고 말없이 벤치에 앉으려 한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그를 멈추게 하는 은아.
“ 잠깐만요!! ” “ ....?.... ”
그는 갑자기 은아가 자신을 부르는 터에 앉으려던 그대로 행동을 멈춰버린다. 은아는 그런 그의 앞으로 오더니 가방에서 사은품으로 받았던 손수건을 꺼내서 그에게 내민다.
“ 저기 의자 더러운 거 안보이세요~? 기껏 새 옷 샀는데 더러워지면 어떻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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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교수님 꺼에요! 깔고 앉으세요~ ”
그러더니 자신도 손수건을 꺼내서 의자에 깔고 앉는 그녀. 인혁은 그녀의 엉뚱함과 세심함에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그녀가 준 자신의 손수건을 그녀와 똑같이 벤치에 펼쳐 깔고 앉으려다가 계속 몸을 떨고 있는 은아를 보고 짦은 한숨을 내쉰다. 다시 일어서더니, 입고 있던 자켓을 벗어 그녀에게 건네는 인혁. 벤치에서 덜덜 떨며 앉아있던 그녀는 그가 자켓을 내밀자 살짝 놀라며 그를 쳐다보기만 하느라 자켓은 받을 생각도 못하고, 인혁은 그런 은아 때문에 조금 민망했는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자켓을 그녀 무릎위에 대충 뭉쳐서 놓아주며 변명을 한다.
“ 크흠.. 그 오해하지는 말고.. 내일 감기 걸려서 운전 못할까봐 주는 거에요. ” “ 아.. 근데 어디 가세요? ”
인혁이 말을 툭 던져놓고는 어디론가 가려는지 벤치 뒤쪽으로 어슬렁거리며 걸어가자, 그에게 어디에 가냐며 묻는 은아. 그러나 그녀의 물음에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만 하며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는 인혁.
“ 계속 구경하고 싶다면서요. 기다려봐요. 따뜻한 거라도 사올 테니까.. ”
그렇게 또 대답을 툭 던져버리고는 이번에는 걸음을 좀 빠르게 하며 곧 은아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인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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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의 뒷모습을 살짝 벙찐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그가 주고 간 겉옷을 바라보는 그녀. 생각도 못했던 일이라 조금 의외라고 생각하며 또 피식-하고 웃어버린다. 그러고는 그가 준 자켓을 어깨에 조심스레 둘러보는데, 그의 온기가 느껴지면서 몸이 생각 이상으로 따뜻해졌다. 게다가 자신의 옷과는 다르게 이중으로 보온기능이 되어있는 그의 옷. 덜덜 떨리던 그녀의 몸이 어느새 안정을 되찾는다. 은아는 몸이 따뜻해지자 이내 시선을 돌려 혼자서 강가를 바라본다. 잔잔한 조명. 잔잔한 물결. 파도가 몰아치는 부산의 바다를 바라볼 때와는 또 색다른 느낌이었다. 정말 좋았다. 오랜만의 휴식. 세중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한 후로, 아니, 사실 그 이전에도 매일 간호사 일을 하느라 별로 이런 여유를 가져볼 틈이 없었다. 어쩌다 휴가를 내거나 오프일 때도, 피곤한 몸을 회복시키느라 집에서 늦잠을 자기에 바빴다. 참, 정신없이 흘러온 10년이었다. 대학에 합격했을 때, 처음으로 간호사 일을 시작할 때, 그때 느꼈던 그 떨림들. 그런 떨림을 느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벌써 32살이었다. 이제는 정말 인생을 책임져야할 나이.. 결혼도 해야
하고, 가정도 꾸려야 할 나이..
그래서 선을 봤고, 그렇게 만난 게 동규였다. 그에 대한 생각이 들자 조금 마음이 무거워지는 은아. 다시 말없이 강가만 바라본다. 사실, 그와 있으면 조금 불편했다. 그가 정말 좋은 사람인건 알지만, 서로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아서일까..? 아직도 그를 편하게 대할 수가 없었다. 그저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줄 거라고 생각할 뿐. 시간이 지나고, 지금보다 좀 더 자주 보게 된다면 언젠가는 그를 편하게 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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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는 은아였다. 하지만 사실, 앞으로도 그를 만날 시간이 없다는 건 크게 달라질 것이 없었다. 그는 늘 바쁜 사람이었다. 일 년에도 몇 차례씩이나 한국과 캐나다, 그 외에 수많은 나라들을 오가며 계약을 따내서 성사시키고, 외빈들을 접대하고.. 정말 그렇게 정신없이 바쁘게 사는 그. 그런 그보다도 더욱더 바쁘게 사는 나. 그래서 우리는 정말 만날 시간이 없었다. 서로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었음에도 그 감정들을 이어갈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늘 미안해했고, 그 역시도 이런 나에게 늘 미안함을 느꼈다. 그래서 어쩌다 만나 데이트를 하는 날이면, 늘 나에게 비싸고 좋은 음식, 비싸고 좋은 데이트장소. 그가 줄 수 있는 최고로 비싸고 좋은 선물들, 늘 그런 것들을 대접해줬다. 그것이 그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가 그럴수록 나는 그에게 고마우면서도 미안해졌다. 그리고 조금은.. 그가 부담스러워졌다. 나와는 너무 다른 그. 물론, 나도 간호사일을 하면서 성실하게 모아놓은 돈도 있었고, 그에게 부끄럽거나 할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나와 차원이 달랐다. 그래서 더 그에게 다가가기가 어려웠다. 하루빨리 그와 동등해지고 싶었고 뭔가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었다.
“ ㅅ...선생. 신 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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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아가 그렇게 멍하나 강가를 바라보며 복잡한 생각에 빠져있는데, 어느새 돌아와 그녀를 부르고 있던 인혁. 그녀가 멍하니 앉아있는 채로 대답도 하지 않자 캔커피를 든 채로 그녀 눈앞에서 흔들어 보인다. 은아는 갑자기 불쑥-하고 나타난 그의 손 때문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며 그를 쳐다보고, 인혁은 그런 그녀에게 캔커피를 건네준다.
“ 받아요. 뭔 생각을 그렇게 해요? 사람이 부르는데 대답도 안하고. ” “ 아, 죄송해요. 근데 뭘 그렇게 많이 사오셨어요? ”
뭔가로 가득 찬 봉지를 손에 들고 있는 그. 은아는 그에게 캔 커피를 건네받으며 봉지에 뭐가 들었는지 쳐다보고, 인혁은 그런 그녀에게 봉지마저 건네며 손수건이 깔려있는 그녀의 옆자리에 앉으며 말한다.
“ 아까, 휴게소에서 점심 먹고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요. 저녁도 안 먹고 배고프니까 몸이 더 떨리지. ”
인혁의 말에 놀란 듯이 그를 슬쩍 쳐다보며 그가 준 봉지 안을 들여다보는 은아. 봉지 안에는 뜨거운 캔 커피 4개와 빵, 핫바 같은 것들이 들어있었다. 그것을 보고는 절로 웃음이 지어지는 그녀. 왠일로 그가 이런 걸 챙겨주나 싶어서 그를 다시 쳐다보는데, 인혁은 그녀의 시선을 모른 척하더니 강가를 바라보며 캔커피만 홀짝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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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를 보고 슬쩍 웃더니 안에 있는 핫바의 포장을 벗겨 그에게 넘기는 은아.
“ 여기요! 교수님 꺼~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 “ .... ”
인혁은 그녀를 슬쩍 쳐다보다가 자신도 배가 고프긴 고팠는지, 그녀가 건네는 핫바를 말없이 받아들고는 이내 한입, 두입 베어 문다. 추운 가을 밤, 잔잔한 파도가 일렁이는 한강을 바라보며 나란히 벤치에 앉아 조촐한 저녁을 즐기는 두 사람. 은아는 금새 마음이 편안해졌다. 인혁과 있으면 힘든 일도 많았지만 마음만은 늘 편안하고 좋았다. 늘 표현은 안하지만 이렇게 말없이 자신을 신경써주는 그. 처음에 같이 일할 땐 조금 자신을 힘들게 했었지만, 알고 보면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다 문득, 궁금증이 생기는 은아. 혼자서 잠시 고민하다가 그를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연다.
“ 저, 근데요. 교수님, 한가지 만 더 물어봐도 되요? ” “ 뭐요. ” “ 교수님은 왜 결혼 안 하세요? ” “ 풉- 켁켁켁- 켁켁 ” “ 교, 교수님!! 괜찮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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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캔커피를 목으로 넘기다가 그녀의 갑작스런 질문에 놀라 사레가 들려버린 인혁. 목을 부여잡고 한참을 켁켁거리있고, 그녀는 그가 괜찮아질 때까지 계속해서 등을 쳐준다. 잠시 후, 손을 들어 그녀에게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는 그. 은아는 그제야 등을 쳐주던 손을 멈추고 걱정스레 그를 보고, 인혁은 숨이 차서 벌게진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며 입을 연다.
“ 크흠, 그, 그, 오늘따라 왜 이렇게 궁금한 게 많아요?! 참.. 거! 바지에 또 쏟을 뻔 했네..! ” “ 아아.. 죄..송해요.. 저는 그냥 궁금해가지고.. ”
정말로 미안해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은아. 인혁은 그녀가 너무 미안해하자 왠지 조금 민망해지고, 아직도 목에 걸려있는 것 같은 커피를 빼내기 위해 잔기침을 조금 하고는 다시 강가를 바라보며 그녀가 미안하지 않게 말을 돌린다.
“ 몸은 좀 어때요. 아직도 추워요? ” “ 네? 아아. 교수님덕분에 지금은 하나도 안 추워요. 근데 교수님이 추우시지 않아요? ” “ 난 별로. 커피가 따뜻해서 괜찮은 거 같은데. ” “ 저두, 따뜻한 핫바도 먹구, 커피도 마시니까 하나도 안 춥네요. 고마워요 교수님. ” “ 예, 뭐, 그런 거 가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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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잠시 흐르는 정적. 은아도 딱히 할 말이 없어 그냥 강가만 바라보고 있는데, 그때 갑자기 그녀를 보며 입을 여는 인혁.
“ 흠, 신선생이 보기엔 어떤데요. ” “ ... 네? 뭐가요..? ” “ 결혼이요. 왜 안하냐면서요. ” “ ..?... 아아.. 결혼.. 음.. 너무 바쁘셔서..? ”
은아의 대답에 그녀를 보며 피식 웃더니 약간은 장난스럽게 대답하는 그.
“ 잘 아네~! 알면서 뭘 물어봐요 그런 걸. ” “ 아, 그래도.. 뭔가 다른 이유가 있나해서.. 근데 아무리 바빠도 교수님 나이도 많으 신데.. ” “ 참..!! 거.. 나이얘기 좀 하지마요 쫌. 저번엔 뭐, 뭐, 노인정이라고 하질 않나, 아저 씨니 어쩌니.. 그, 나 놀리려고 일부로 그러죠? ” “ 아, 아니요~! 그건 아니고.. 죄송해요. 근데 말하다보면 어쩔 수가 없어서.. 근데 헤 헤.. 교수님 반응이 재밌으니까~ 가끔 놀리고 싶을 때도 있긴 있어요. 헤헤~ ” “ 거봐요! 그, 그렇게 어른 갖다가 놀리는 거 아니에요...! 내가 나이가 몇인데.. ” “ 하, 나이얘기 하지 말라면서, 교수님, 이럴 땐 나이 많은 거 내세우시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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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건! 크흠.. 아무튼 거!! 하지 말라면 좀 하지마요!! ” “ 알았어요!! 안해요!! 안해!! 어른 놀려서 죄송하게 됐네요! 참나.. 맨날 소리는 지르 시고.. 그래도 그, 내가 그래 농담이라도 하니까 분위기도 좋아지고 하는 거지 뭐.. ”
그가 버럭 하고 소리를 치자 조금 놀란 게 억울해서 덩달아 소리치고는 혼자서 궁시렁거리며 투덜대는 은아. 인혁은 그런 그녀를 슬쩍 째려보고는 하던 말을 계속 이어나가는데,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진지해져 있었다.
“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거에요. 살다보니까. ” “ ....? ” “ 20년이라는 세월이 생각보다 금방 가더라고요. 정말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정신 차려보니까 어느새 이 나이네요. 하.. 내 기억은 아직도 20년전 그때 그대로.. 머물러 있는데.. ” “ 아... 근데 20년 전이면.. 교수님, 고등학생 때? ” “ ....아버지가 나 고등학교 졸업할 때 쯤, 돌아가셨어요. 사고로. ” “ ....!!.... ” “ ..... 아버지가 한쪽 다리를 못 쓰는 분이셨는데, 아.. 내가 중학교 다닐 땐가..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어머니가 울고 계시더라구요. 아버지가 사고가 나셨다고.. 그래서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엘 갔는데, 그 의사가 우릴 보더니 미안해하더라고. 다행 히 목숨은 건졌지만, 한쪽 다리를 잘라낼 수밖에 없었다고.. 그, 일을 하시다가 다리가 철근에 깔려 버리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다고. 미안하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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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뭐, 지금생각해보면 그 의사도 최선을 다 했던 거지. 요즘같이 장비가 좋았던 때도 아니고.. 그 상황에서 목숨 부지할 수 있게 해준 것도 사실 고마운 거였죠. ” “ ..... ”
잠시 동안 지속되는 침묵. 조금은 차가운 바람이 인혁의 몸을 때리더니 그의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 올려준다. 가을 밤, 쓸쓸한 분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오래된 노래를 들었기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 때문인지, 그녀의 조심스러운 질문이, 그를 추억에 잠기게 만들었다. 사실, 이런 얘기는 한구 외에는 해준 사람이 없었는데.. 털어놔봤자 이해해줄만한 사람도 없었고. 그는 왠지 은아에게 만큼은 자신의 오래된 얘기들을 털어놔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왠지 그녀라면 모두 이해해줄 것 같았다. 한편, 그의 이야기를 말없이 진지하게 들어주며 지그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은아. 아무렇지 않은 듯 강가를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을 이어나가는 그였지만, 그의 눈에 아직 조금 슬픔이 묻어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계속 하던 말을 이어나가는 인혁.
“ 흐음.. 뭐 아무튼, 그렇게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신 뒤로, 직장도 그만두시고.. 집안이 조금 기울었어요. 뭐, 근데 가난했어도 세 식구가 나름 오순도순 행복하게 잘 지냈었 는데.. 음.. 내가 대학 때문에 서울로 시험을 보러가는 날에, 그때 아버지가 날 배웅해 주셨거든요. 일나가셔야하니까 리어카를 끌고서, 그렇게 인사를 하고. 뒤돌아서고.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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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등을 딱, 건너가는데. 어디선가 누가 다급하게 소리를 치더라고요. 브레이크가 고장 났으니까 피하라고. 뭐, 다행히도 멀찌감치부터 소리를 치는 바람에 다른 사람은 다 피할 수 있었지. ” “ ..... ” “ 근데, 우리 아버지는 못 피했죠. 내가 피하라고 피하시라고.. 그렇게 소리를 쳤는데 도 결국, 못 피하셨죠. 아버지는 다리도 불편하셨고. 리어카도 끌고 계셨고. 그래서 그 대로 차하고 부딪히셨는데.. 몸이.. 사람 몸이 그렇게 쉽게 날아갈 수도 있더라구요. 공깃돌처럼.. 눈앞에서 아버지가.. ” “ ..... ” “ 그래도 그때까진 살아계셨거든요. 그래서 병원에 갔는데, 그 놈들이 아버지가 다리 가 없는걸 보고, 돈이 없다는 걸아니까. 다른 사람 수술을 핑계로 다른 병원으로 보내 버리더라고. 물론 그 사람은 돈이 많은 사람이었고. ” “ ..... ” “ 그렇게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가. 그런 초응급환자를 수술도 안하고 다른 병원으로 보내버렸으니.. 당연히 구급차안에서 어레스트가 났죠. 그렇게 손도 못써보고 아버지 를 보내드렸어요. 흐음.. 나한텐 충격이었죠. 그때 참, 어린나이였는데.. 눈앞에서 아버 지가 그렇게 되셨으니.. ” “ ..... ” “ 몇 달동안 꼼짝도 못했어요. 방안에만 틀어박혀서. 대학이고 뭐고 아무것도 못 하겠 더라구요. 그래서 그렇게 망가져 있다가, 어머니를 뵐 자신이 없어서.. 그냥 입대를 해 버리고. 그냥 미친놈처럼 3년동안 군대에만 박혀있었죠. 그때, 어머니도 충격이 크셨 을텐데.. 나 때문에 아무 내색도 못하시고.. 그저 날 기다려주셨어요. 근데, 제대하고 집에 돌아와보니까, 어머니가 3년 동안 참 많이 늙어버리셨더라구요. 어머니가, 나만 바라보고 계신 어머니가.. 그제서야 보이더라구요. 너무 죄송스러웠죠. ” “ ...... ” “ 그래서.. 다시 정신 차리고 공부하다가, 어떻게 하다보니.. 의대에 입학하고. 학교에 서는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 홀로 계시는 어머니생각에 딴생각 못하고 공부만 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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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고. 인턴, 레지던트, 펠로우 거치면서도 시간만 있으면 늘 집으로 갔었어요. 나이 드 신 어머니 혼자 계시게 하는 게 너무 죄송스러워서.. 딴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그냥 그냥, 그렇게 바쁘게 살았어요. 뭐, 허허.. 신선생도 알다시피 병원에서는 당연히 일만 했고.. ” “ ...... ” “ 뭐, 그렇게 하다가 교수 되면서 바로 외상을 떠맡게 됐고, 외상 시작하고 나서는 워 낙 정신이 없어서 어머니도 신경 못 써드릴 정도로 일만했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연수 갔다 오고.. 하.. 그렇게 어쩌다보니까, 살다보니까, 허허.. 그냥, 결혼 같은 거는 뭐.. 허허.. ” “ ...... ”
진지하게 말을 이어나가던 인혁. 이야기 마지막쯤엔 본인이 괜히 머쓱해지는지 그냥 허허 웃어버리고 만다. 그는 왠지 그녀에게 속을 털어놓고 나니 가슴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은아는 여전히 그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그가 살아왔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곱씹어본다. 그녀는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그의 인생이 조금.. 아주 조금, 가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그의 아픔을 감싸줄.. 좋은 사람이 나타났으면.. 하는, 그런 생각이 드는 은아. 인혁은 자신을 너무나 빤히 바라보는 은아 때문에 민망해져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있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그녀와 다시 눈을 마주치며 살짝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입을 연다.
“ 그렇게 안 봐도 되요. 말했잖아요. 나 어른이라고. 이제 혼자 사는 거.. 익숙해 질 때 됐어요. 그저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게 잊혀지잖아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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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를 향해 말하는 인혁. 은아는 그런 그의 말이 왠지 더 가슴 아프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가 불편해하지 않게 이내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밝은 표정을 지으며 그를 향해 입을 여는 그녀.
“ 교수님은 참, 효자였던 거 같아요. 저는 살아계셔도 잘 찾아뵙지도 못하는데.. " " 효자는 무슨.. 늘 걱정만 시켜드렸지.. 흠.. 그럼 신선생은 지금 부모님하고 따로 사 는 건가? “ “ 아, 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엄마는 저기 경기도 쪽에서 남동생부부하고 같이 사 세요. 나도 뭐 시집도 못가고 맨날 속만 썩혀드리죠 뭐.. ” “ 아... 그야 뭐. 신선생도 바쁘니까 그러지.. 거, 내가 괜히 미안하네. 이런 데는 남자 친구하고 같이 와야 될 텐데. 맨날 일만 시켜서.. ” “ 아니에요. 동규씨도 어차피 바쁜 사람이라서.. 제가 시간 있다고 해도 이런데 자주 못 와요. 미리 약속이나 하면 모를까.. 근데 그나저나 진짜 좋네요. 교수님하고 이런데 오니까. 교수님하고는 맨날 일만할 줄 알았는데.. 이런데도 와보고. 교수님도 좋으시 죠? 저랑 이런데 오니까~? ” “ 허허, 뭐.. 좋.. 좋네요~ 바람도 쐬고, 한강도 구경하고. ” “ 헤헤.. 아! 근데 아까는 왜 그렇게 뭐라고 하셨어요! 이렇게 좋아하실 거면서! ” “ 아, 그거는.. 신선생 감기 걸릴까봐 그랬죠. 오늘도 운전하느라 하루 종일 못 잤다면 서.. 빨리 쉬어야 할 거 같은데 못 쉴 거 같으니까.. ” “ 오~ 그럼 저 걱정해주시느라 그런 거네요? ” “ 무, 무슨.. 걱정은 무슨 걱정! 그냥, 아까도 말했잖아요! 내일 운전 할 사람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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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 그런다고.. ” “ 참.. 꼬옥! 말을 해도..! 그냥 걱정했다고 하시면 어디가 덧나나? 참...나.. 됐어요! 내 가 교수님한테 뭘바라겠어요~! ” “ 흐흠.. 흠.. 그, 내일 또 일정 있으니까, 이만 들어갑시다. ” “ 아, 맞다. 근데요 교수님! 내일 헬기 시범식 진짜 기대되지 않아요? 우리병원에도 그런 헬기 뜨면 정말 좋을텐데.. ” “ .... 뭐, 그래봤자 소방헬긴데 뭐... ” “ 그래도 이번 시범운영만 잘 끝나면! 닥터헬기 들여온다잖아요~! 우리 교수님은 어떻 게 그렇게 매사 부정적이실까~? ” “ 거.. 부정적인게 아니고 사실이 그렇다는 거에요. 됐어요! 이제 나도 춥네. 빨리 돌 아갑시다. ”
그녀의 말에 살짝 정색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인혁. 깔고 앉았던 손수건을 주머니에 챙겨 넣고는 그녀를 두고 자신의 자동차가 있는 방향으로 먼저 휙- 가버린다. 은아는 갑자기 일어나는 그 때문에 허둥지둥 자리에 짐을 챙기고는 그의 뒤를 바짝 뒤쫓아가며 장난스레 입을 연다.
“ 어..? 교수님 화나셨어요? ” “ 아니요. ” “ 에이.. 화나셨는데 뭘, 아니면 삐지신건가? ” “ 그, 그, 내가 나이가 몇인데 삐지긴 뭘 삐져요! ” “ 아~ 아니시구나. 어어? 근데 교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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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다급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자 급히 뒤를 돌아보는 인혁. 그러나 그가 고개를 돌리길 기다렸다는 듯이 손가락을 그의 어깨 위에 얹어 놓았던 은아. 덕분에 그녀의 손가락에 인혁의 볼이 찔려 버리고, 순간 뭔가 싶어 멈춰있던 그. 잠시 뒤, 상황을 알아차리고는 또다시 짜증을 부리며 가던 길을 계속 간다.
“ 참나, 나이가 몇인데 그런 장난을 쳐요! ” “ 왜요~ 저번에 교수님도 저한테 장난 치셨잖아요! ” “ 내가 언제! ” “ 그때요. 교수님 병원 뛰쳐나가셨다가 돌아오신 날, 옥상에서 헬기날리던 날, 기억안 나세요? ” “ 하, 그거는 실수라니까. ”
그녀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치는 인혁. 그러자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 그녀.
“ 어?! 웃으셨다! ” “ 뭐, 뭐, 내가 언제요. ” “ 방금 웃으셨잖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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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 내가 언제요~! ” “ 어? 방금도 웃으셨는데~ ” ‘ 허, 참.. 허허.. “
계속되는 그녀의 장난에 결국 웃어버리고 마는 인혁. 은아도 그런 그를 보며 헤헤- 거리며 웃고 있다. 왠지 계속해서 웃음이 나오는 은아. 아침부터 시작해서 계속 사건 사고가 터지던 오늘.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왠지 며칠은 지난 거 같다는 느낌이 들고,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마도 오늘 밤 그와 나눴던 대화, 그와 있었던 일들은 앞으로 인혁과 일하는 내내 정말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나란히 자동차로 돌아가는 두 사람. 한강을 비추는 은은한 조명불빛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나란히 드리워져있다. ※ 추천브금 : 김정배,한설희 - 저무는 길
몇 분 후, 다시 호텔로비로 돌아온 인혁과 은아. 돌아오는 동안 추위에 떨었던 몸을 녹이려 차에 히터를 강하게 틀어놨던 탓인지, 두 사람 다 몸이 노곤노곤해지면서 하루 동안 쌓여있던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빨리 방에 들어가서 쉬고 싶은 두 사람. 그러나 돌아오면서도 몇 번이고 휴대폰을 확인했었지만, 컨퍼런스 관계자로부터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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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를 다시 확인해보는 그. 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 자신이야 항상 잠도 안자고 수술하는 게 일이었기 때문에 아직은 버틸 만한 상태였지만, 하루 종일 쉬지도 못하고 피곤했던 그녀는 아마 지금쯤 졸음을 참기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드는 인혁. 그가 시계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그녀의 상태를 살피는데, 아니나 다를까, 몸이 얼었다 녹은 그녀의 얼굴엔 졸음이 가득해 보였다. 이거 어쩌지.. 휴대폰을 들어 혹시나 하고 관계자에게 연락을 해보지만,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말만 되돌아올 뿐. 회식을 하러 간다더니, 아마도 인혁의 부탁은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곤란한 표정으로 전화기만 붙들고 있는 그. 그때, 옆에서 간신히 졸음을 참으며 기다리던 은아. 인혁의 곤란해 보이는 표정을 발견하고는 왠지 안 좋은 예감이 들어 그에게 조심스레 묻는다.
“ ... 왜요? 전화 안 받아요? ” “ 아.. 예.. 전화기가 꺼져있다고만 하는데.. ”
그의 말에 살짝 당황하는 그녀. 곧, 인혁과 똑같이 곤란해 하는 표정으로 바뀐다. 그렇게 로비에 서서 한참을 고민하던 인혁. 은아의 상태를 다시 보지만 역시나 더 이상은 졸음을 참기 힘들어보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그녀를 향해 입을 여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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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기, 신 선생 피곤해 보이는데, 먼저 들어가서 쉬어요. “ “ 아.. 그러면 교수님은 어쩌시려구요? ” “ 난 여기서 좀 더 기다려보다가.. 음.. 난 신경쓰지 말아요. 알아서 쉴 수 있으니까. ” “ 아... 그래도.. ”
사실 인혁도 딱히 대책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저 자신보다는 그녀가 빨리 쉴 수 있게 그녀를 방으로 들어가게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인혁이 걱정되는 은아. 전화기도 꺼둔 채로 아직까지 연락이 오지 않는걸 보면 그 관계자라는 사람이 여기 나타날 거 같지도 않고, 여기서 딱히 그가 쉴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도 알기에 먼저 들어가지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같이 들어가자고 하지도 못하겠고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에 빠지는 그녀였다. 게다가 지금 서서 잘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졸음이 쏟아지고 있었기에 더 곤란해 하는 그녀. 그렇게 곤란해 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그녀의 마음을 모를 리가 없는 인혁. 고집 쎈 그녀가 말로해서는 듣지 않을 것 같고.. 그녀를 강제로라도 올려 보내야겠다 싶어서 바닥에 있는 은아의 짐 가방을 들어 엘리베이터 앞으로 들고 간다. 그리고 버튼을 누른 후, 뒤를 돌아보는 그. 그녀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 때문에 살짝 벙쪄있고, 비몽사몽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만 있는데, 그런 그녀에게 살짝 소리치는 그.
“ 뭐해요~ 빨리와요! 엘리베이터 오고있잖아요. ” “ 아아.. 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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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정신을 차리고 그의 옆으로 가는 그녀. 곧,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같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다른 사람들이 다 타자마자 인혁은 짐 가방을 그녀의 팔에 걸어주며 그녀를 슬쩍 엘리베이터 쪽으로 밀어 넣는다. 그렇게 얼떨결에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간 은아. 그가 들어올 수 있게 열림버튼을 누르고 있는데, 그는 전혀 탈 생각이 없어 보인다.
“ 뭐하세요? 교수님 안타세요? ” “ 먼저 들어가서 쉬어요. 나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뭐해요~! 사람들 기다리는데, 빨리 문 닫아요. ”
그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는 은아. 정말 사람들이 문이 닫히길 기다리며 일제히 자신만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조금 민망해져서 다시 인혁을 보는데 이미 로비 쪽을 향해 몸을 돌려 걸어가고 있는 그. 결국 어쩔 수 없이 버튼에서 손을 떼는 은아.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그의 뒷모습이 멀어져간다. 그가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 일단 자신의 몸이 너무 피곤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방으로 향하는 그녀였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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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방에 도착한 은아. 그녀는 이것저것 신경 쓸 틈도 없이 들어오자마자 가방을 아무데나 두고 그대로 침대에 털썩 주저앉는다. 그러자 바로 밀려오는 졸음. 하지만 그녀는, 미안한 마음에 침대에 바로 눕지도 못하고 아직도 로비에 있을 인혁을 생각하며 방안을 쭉- 한번 둘러본다.
“ ... 후우.... ”
방안을 둘러보자 절로 나오는 한숨. 안락해 보이는 방안. 폭신해 보이는 침대 두 개. 저렇게 편한 침대를 놔두고 로비에서 쉬지도 못하고 있을 그. 은아는 왠지 엘리베이터 문사이로 멀어지던 피곤해 보이는 그의 뒷모습이 생각난다. 그리고 그를 버려둔 채, 자신만 편한 곳에서 쉬는 것 같아서 그에게 너무 미안해지는 은아. 게다가 이 방은 의사인 교수님 덕분에 쓸 수 있는 방인데.. 이래도 되나.. 그렇다고, 같이 방을 쓰자고 먼저 말하기도 그렇고..
“ 아잇 진짜..! 하아... 진짜 어쩌노... ”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내 휴대폰을 집어 드는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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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절대 먼저 올라올 사람이 아니니.. 아무래도 그에게 아직도 잘 곳이 없다면 이곳으로 올라오라고 먼저 말해야할 것 같았다. 여자인 자신이 먼저 말해야 그가 부담을 덜 갖고 올라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전화로 말하기는 좀 그렇고 문자를 보내기로 하는데..
잠시 후, 그렇게 그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다 쓰고, 전송버튼을 누를까 말까.. 누를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에라이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전송버튼을 꾹- 누르는 그녀. 그런데 막상 보내고 나니 민망해져 미칠 것 같았다. 그래서 혼자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답답한 마음에 혼자서 성질을 내버리는 은아.
“ 아이..진짜..!! 왜 방은 하나밖에 안나와가지고..!! 하아... 진짜로... 일 때문인데.. 그 렇다고 교수님 혼자 밖에서 주무시게 할 수는 없으니까.. 뭐, 어차피 침대도 두 개고.. 교수님이 딴 생각하실 분도 아니고..! 그리고 뭐.. 병원에서도.. 하루 종..일 붙어있는... 후.... ”
하지만 아무리 합리화시켜보려고 해도 절로 나오는 한숨. 아무리 그래도.. 이 상황이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물론, 그동안 그와 단둘이 일 해오면서 남녀로써 불편한 점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사무실을 옮기고 나서는 좁은 공간에서 남녀가 같이 일하다 보니까 두 사람 다 처음에는 이래저래 걸리는 일도 많고, 모든 일이 조금 어색하고 신경 쓰였지만, 그런 걸 일일이 신경쓰다보면 불편해서 일을 못할까봐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편하게 다가가던 은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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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인혁도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그녀의 스스럼없는 행동들을 아무 말 없이 받아 주곤 했었는데.. 그러나 이번 일만큼은 쉽게 먼저 다가가기가 민망한 그녀. 정말, 남녀가 같이 일하다보면 이런 일도 생기는 구나.. 싶다. 혹시.. 동규씨가 걱정했던 게 이런 것이었을까..? 왠지 그녀는 처음 이 일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자신과 인혁, 단 둘만 한 팀이라고 말하자 조금은 걱정스러워 하던 그의 모습이 생각난다. 하지만 그동안은 동규보다도 인혁과 있는 시간이 훨씬 많을 정도로 그렇게 하루 종일 병원에서 오래 붙어있는데도, 그를 이렇게 신경 썼던 적은 거의 없는데.. 그와는 나이 차이가 조금 있으니 왠지 안심도 되고.. 인혁도 그렇게 생각했었는지, 그저 서로 터놓고 편하게 지냈었는데.. 그동안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오늘은 왠지 그와 같은 방에서 같이 잘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점잖은 인혁이 자신을 불편하게 할리는 없었지만, 한 방에서 자야할 수도 있는 상황이 발생하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 그녀. 그리고 막상 그를 남자로써 인식해버리니, 왠지 그와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지는 은아. 근데 그러고 보니.. 그동안 무슨 배짱으로, 그를 그렇게까지 편하게 대했던 걸까..? 그래도 분명 미혼에다가, 아직은 그래도 젊은 편이신데.. 물론, 나이차이가 좀 많이 나긴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아주 많이 나는 것도 아니고.. 그동안은 좀 재밌으라고 나이를 가지고 놀리기도 했었지만.. 아마 진짜로 그렇게 느꼈다면, 등을 떠밀거나 볼을 찌르는 장난은 해볼 생각도 못 했을 텐데.. 그럼 앞으로는 너무 나서지 말고.. 조심해서 대해야 하나..? 하지만 그러면 어색해 질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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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그를 너무 편하게 대했다는 생각에, 자신이 너무 사리분별 못하고 나섰던 거 같아서 갑자기 창피함이 몰려오는 그녀. 특히, 오늘은 서울로 컨퍼런스를 오는 바람에 더욱 들떠있어서 왠지 그에게 무리수를 던졌던 거 같기도 하고.. 그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손도 막 잡아끌고.. 뒤에서 허리랑 등도 막 잡아서 떠밀고.. 손가락으로 볼을 찌르는 장난도 치고.. 옷도 막 맘대로 골라 주고.. 커플손수... 미쳤네.. 미쳤어.. 정작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창피함이 가시지 않아 얼굴이 붉어지는 은아. 그러다가 문득 그녀의 머리를 스치는 기억. 하, 왜 하필 이때, 갑자기 그날의 일이 생각나는지.. 짧지만 강렬했던 그와의 첫 만남. 그는 기억하지 못 하겠지만, 그가 쓰러지면서 나의 품에 안겼던 날, 그리고 그를 품에 안았던 그 날, 그 날은 너무 놀라서 그에 품에 안기자마자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는데.. 물론,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 보는 남자가 자신을 끌어안으니, 어느 누가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날 그 순간만큼은, 분명 그를 남자로 생각했었다는 점이었다. 그가 힘을 주어 끌어안는 바람에 품안에서 빠져나갈 수도 없었던 그때, 그때 분명 자신이 처음 보는 남자였는데, 왠지 그가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지는 않았었다. 그저 그의 품이 낯설지 않고 포근했다는 기억밖에는.. 그래서 더 기억에 남았었는데.. 그렇게 살짝 얼굴이 붉어진 채로, 그와 처음 만났던 날을 생각하다가 이내 황급히 고개를 흔들어 버리는 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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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자신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왠지 자신 혼자서 너무 멀리까지 나간 것 같았다는 민망함에 또 혼잣말로 자신에게 성질을 내는 그녀.
“ .... 에이..!! 시간이 많으니까 혼자 별생각을 다 하네! 그날은 뭐.. 조금 놀라긴 했지 만, 그 남자가 교수님일지도 몰랐고..! 아이고~ 갑자기 조심히는 무슨..! 정작 교수님은 신경도 안 쓰실텐데, 나 혼자 이렇게 신경 쓰는 게 더 이상해 보이지..! 그리고 뭐.. 어차피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교수님인데, 이런 거 신경 쓰기 시작하면 앞으로 어떻게 일 하노?! 일 때문인데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거지.. “
그렇게 혼잣말로 자신에게 소리를 치더니 이젠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자신의 침대에 벌러덩 누워버리는 그녀.
“ 후.... ”
그녀가 그렇게 복잡한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가벼운 한숨을 내쉬어 보기도 하지만, 혼자 있어서 그런지, 한번 시작했던 생각은 쉽게 멈춰지질 않고, 왠지 머릿속에서 그에 대한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그 순간, 피식- 하고 웃음이 나오는 은아. 교수님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 오래했던 적은 없었는데.. 같은 방에서 같이 잘 수도 있다는 긴장감에 생전 하지도 않던 걱정을 하는 자신이 우습기만 하다. 어쨌든 정말 강렬했던, 절대 잊을 수 없는 그와의 첫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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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피식- 웃는 그녀. 하긴, 그와 두 번째로 만났을 때도, 분명 평범한 만남은 아니었었다. 함께 환자를 살리려고 한 그 날, 수술복에 피를 칠갑을 해가지고는 환자만 보며 달려왔던 그. 그때도 그 모습 때문에 정말 놀랐었는데.. 어쩌면 그 강렬했던 두 번의 만남 때문에 지금 자신이 그와 같이 일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정말 어쩌다가 묘하게 끌려 들어온 기분. 아마 첫 만남에서 그의 가장 아픈 구석을 보지 못했다면 갑자기 같이 일을 해달라는 그의 말에 공감하지도 그를 믿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간호사들과 마찬가지로 인혁의 그 날카로운 호통과 짜증들도 다 받아주지 못했을 것이었다. 왠지 눈 오던 날의 그 잊지 못할 경험이 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 것은 아닐까.. 정말 첫 만남도 그렇고, 하루도 빠짐없이 같이 호흡을 맞췄던 지난 8개월도 그렇고, 오늘 그에게 들었던 이야기도 그렇고.. 왠지 자꾸 연민의 마음이 들게끔 하는 그. 뭔가 자꾸만 더, 챙겨주고 싶게 만드는 사람. 교수님은 그냥 그런 사람인 건데.. 도대체 방금 자신이 그를 상대로 무슨 생각을 했던 건지.. 또 한 번 피식- 하고 웃음을 흘리는 은아. 이내, 이 상황들을 가볍게 웃어넘겨 버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휴대폰을 확인하는데, 여전히 그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되신 거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침대에 쭈구려 앉아있는 그녀. 한참 후, 결국 피곤한 몸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꾸벅꾸벅 졸다가 무릎에 고개를 묻고 스르르 잠이 들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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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호텔로비, 너무나도 피곤해 보이던 은아를 일단 먼저 방위로 올려 보낸 인혁. 그녀라도 쉴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막상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 지 난감하기만 하다. 만약, 관계자에게 끝까지 연락이 없다면 방을 새로 구해야 할 것 같아서 카운터로 가보는데, 이미 모든 방이 예약으로 인해 꽉 차버리고 초호화룸 말고는 새로 구할 수 있는 방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로비에 있는 의자로 돌아오는 그. 장거리 여행과 추위로 지친 몸에 피로감이 몰려왔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있는 방으로 갈수도 없고.. 그저 관계자의 연락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휴대폰만 바라보고 있는 그였다. 그때, 그의 휴대폰에서 울리는 문자음.
[ 띠링- ]
오기로 한 관계자의 연락인가 싶어서 급히 문자를 확인하는 인혁.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은아에게서 온 문자였다. 관계자에게 연락이 안 오는 거면 자기는 괜찮으니까 그냥 올라오라는 그녀. 그러나 문자를 확인하고 난감한 표정을 짓는 그. 아무래도 은아가 자신을 걱정하느라 아직까지 잠을 못자고 있는 듯 했다. 이거 답장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인혁이 그렇게 고민을 하다가 문자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그녀에게 전화를 하려는데, 갑자기 그의 휴대폰으로 오는 한통의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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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삐리리리릭- 삐리리리릭- ]
모르는 번호였지만 왠지 관계자일거 같다는 생각이 들고, 얼른 전화를 받는 인혁.
“ 예, 최인혁입니다. ” “ 아, 아까 전화하신 해운대 세중병원에서 오신 의사분이죠? ” “ 예! 맞습니다! ” “ 아이구, 이거 죄송합니다! 회식이 길어지는 바람에.. 게다가 갑자기 밧데리가 나가버 려서 연락 하신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많이 기다리셨죠..? 아직 거기 계십니까? ” “ 예, 예, 계속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 아유..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지금 거의 도착했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쇼~! ” “ 예, 오면 다시 연락주십쇼. 여기 로비에 있겠습니다. ”
전화를 끊는 인혁. 끝까지 연락이 안 오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늦게라도 연락이 와서 정말 다행이다 싶다. . . . . 잠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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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입구에서 부터 부랴부랴 뛰어오는 한 남자. 들어오자마자 로비를 두리번거리는데, 늦은 시각, 사람도 별로 없는 로비. 의자에 앉아있는 인혁을 보고는 자신과 통화했던 사람이라는 걸 금방 알아채고, 그에게 서둘러 다가온다.
“ 저기.. 혹시 최인혁선생님 이십니까? ” “ 아, 예, 제가 최인혁입니다. ” “ 아이구, 오래기다리셨죠? 정말 죄송합니다. 전화 드렸던 홍보과장 정찬영입니다! ” “ 아.. 예.. ”
악수를 청하는 남자. 인혁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악수를 받으며 서로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는다. 조금은 넉살이 좋아 보이는 그 남자. 인혁보다는 한두어살 많아보였지만, 꽤 정중하면서도 쾌활하게 그를 대해주고, 피곤 할 텐데 어서 올라가시라며 체크인을 한 후, 곧, 인혁을 데리고 엘레베이터로 향한다. 몇 십분 후, 은아의 방, 침대에 쪼그려 앉은 채로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잠들어 있던 그녀. 어느새 깊이 잠들어버린 그녀의 몸이 옆으로 살짝 기울어질락 말락 하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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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울리는, 그녀의 휴대전화벨소리.
[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
벨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드는 그녀. 비몽사몽한 눈으로 전화기를 찾아서 전화를 받는다. 방금 자다 일어난 탓에 조금 잠겨있는 그녀의 목소리.
“ 여보세요? 흠..흠.. 교수님? ” “ 예, 신선생 나에요. 혹시 자고 있었나..? 아.. 깨워서 미안해요 ” “ 아, 아니에요! 교수님은 방 어떻게 되셨어요? 아직도 로비에 계세요? 그 관계자는 아직도 연락 안되요? 그러면.. 그냥 여기로 오시는..ㄱ.. ”
인혁을 걱정하다가 잠들었던 그녀.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속사포처럼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는 자신의 방으로 오라는 말을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민망해져 말끝을 조금 흐리는 은아. 그런 그녀의 모습이 왠지 조금 귀엽게 느껴지는 그.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녀가 아직까지 잠도 안자고 자신을 걱정해주고 있는 것 같아서 내심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이 편하도록 허허- 하고 웃으며 입을 여는 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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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허허.. 연락도 됐고! 여기 관계자랑 방으로 올라왔어요. 아까 신선생 문자보냈 길래, 걱정하느라 잠못잘까봐 전화했어요. 나 잘 들어왔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오늘 피곤할텐데 어서 쉬라구요. ”
인혁의 말에 안심이 되는건지 어느새 밝아진 그녀의 목소리.
“ 아~ 정말요? 다행이네요! 그럼 교수님도 쉬시고요~! 내일뵈요~! ” “ 예, 그럼.. ” “ 아! 잠깐만요! 교수님, 그럼 내일 아침이라도 같이 먹게 로비에서 7시반에 만나는 걸로 할까요? 그리고 내일 뉴스 때문에 촬영도 한다니까, 웬만하면 좀 깔끔하게.. 아 니 아무튼, 아셨죠? ” “ 거.. 내가 언제는 안 깔끔했나.. 알았으니까. 어서 쉬어요. 예, 이만 끊어요. ”
그렇게 전화가 끊어지고, 이제는 확실히 안심이 되는 은아. 전화기를 내려놓고 이제야 살았다는 듯, 이불속으로 폭- 들어간다. 그러고는 5분도 채 되지 않아, 금세 잠이 들어버리는 그녀였다. 한편, 인혁의 방, 그녀와의 통화를 마친 인혁이 핸드폰을 내려놓으려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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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침대에서 잘 준비를 하던 관계자가 그에게 말을 건다.
“ 같이 오셨다는 간호사 인가보죠? 꽤 가까운 사이신가 봐요~? 근데 어떻게 간호사하 고 컨퍼런스를 오셨네요? ” “ 아.. 그런 건 아니고.. 근데, 그냥 간호사가 아니고, 외상코디네이터입니다. ”
그의 말에 살짝 굳어지는 인혁의 표정. 그의 표정이 굳어지자 남자는 자신이 뭔가 실수했나 싶어 바로 사과를 한다.
“ 아, 제가 실수했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그 쪽으로는 자세히 몰라서요. ” “ 예에.. 괜찮습니다. ”
어색해지는 분위기. 말로는 괜찮다고 하지만, 말도 잘 안하고 계속 굳어있는 인혁에 표정 때문에 조금 민망해지는 남자. 마침, 회식 때 마신 술도 좀 부족한 거 같고.. 이런 것도 인연인데 인혁과도 한잔 한다면, 분위기도 풀어지고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선반으로 가더니 와인 한 병을 꺼내는 남자.
“ 저기, 최 선생님? 제가 회식 도중에 나오느라, 아직 술이 좀 부족해서.. 저는 와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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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하고 자려고 하는데.. 같이 한잔 하실래요? ” “ 아, 아닙니다. 저는 그냥.. ” “ 아유~ 그러지 말고 한잔 하세요~ 이것도 호텔비에 다 포함되어있는건데~ 여기까지 오셨는데 마실 건 마셔줘야죠~! ” “ 아니, 저는.. ”
계속되는 인혁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와인한잔을 따라서 그에게 넘겨주는 남자. 인혁은 어쩔 수 없이 와인을 받아든다. 하지만 피곤함 때문에 빨리 자고 싶은 그. 이걸 마셔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관계자가 옆에서 계속해서 말을 걸어온다. 인혁이 고개를 돌려서 그의 얼굴을 보니, 얼굴에 살짝 취기가 올라와 있는 게 보이고, 그래도 이 사람 덕분에 방에 들어올 수 있었는데.. 아무래도 회식으로 인해 조금 취한상태인 것 같은 그를 보며 쉽게 거절할 수는 없어서 결국 체념하는 인혁. 피곤해서 빨리 자고 싶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의 질문을 다 받아주는 인혁이었다. 몇 분 후, 남자가 성격이 좋은 탓인지,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는 관계자와 그. 그렇게 와인을 한두 잔 주고받으며 계속 이어지는 대화. 한번 마시다 보니 계속 마시게 되는 인혁. 어느새 와인 한 병이 다 비워지고, 다른 와인을 꺼내는 남자. 곧, 두 번째 병까지 거의 비워지자, 이내 인혁도 약간 취기가 오른다. 남자도 이제 더 취하는지 아까 좀 궁금했던 은아의 얘기를 다시 꺼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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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취기가 오른 인혁은 별 거부반응 없이, 남자의 물음에 모두 대답해준다.
“ 근데 아까 전화하시는 거 보니까~ 정말 가까워 보이시던데요? 뭐 꼭 집사람이랑 통 화하는 것 같이. 하하하~ 아유 또 제가 말실수를 했나요? 허허~” “ 아아, 그냥 젊은 친구가 열정이 넘쳐서.. 저한테 편하게 대해주니까, 저도 편하게 대 하고 그럽니다. 허허.. 저야 늘 고맙죠. 그 친구 그, 실력도 있고, 사람 대하는 능력도 좋고, 무엇보다 환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정말 크고.. 저한테는 큰 도움이 됩니다. 허 허.. “ 아~ 그러시군요~! 그렇게 좋은 분이면, 교수님이 정말 잘해주시겠네요~! 허허.. ” “ 아니요, 아니요~! 저야 뭐, 매일 수술만 하느라 신경도 못써주고 항상 무뚝뚝하게 대하는데도, 제 옆에 항상 같이 있어 주면서 말 안 해도 척척 잘 도와주고.. 제가 부 족한 부분을 잘 채워주기도 하고.. 아무튼 정말 잘 도와줍니다. 그, 오늘도 그, 서울 올라오면서 운전하느라.. 진짜 고생을 많이 했거든요.. ” “ 아아~ 운전까지 해주시는 구나~? 그러면 외상코디네이터가 교수님 비서같은 건가 요? ” “ 아뇨,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저를 포함해서, 어.. 외상 팀 전체를 관리하고 외상센 터를 계획하고.. ” “ 외상 팀이요? 근데 최교수님하고 두 분 밖에 없다면서요~ 다른 의사 분도 없고~! ” “ 예에, 뭐 지금은 그렇죠. 그런데, 그 친구 능력이 워낙 출중해서 웬만한 의사들보다 낫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외상센터를 만들려면 꼭 필요한 과정이고.. 음.. 꼭 필요한 인재구요. ” “ 아하~ 허허허, 저희가 그런 분을 못 알아보고 방도 못 구해드렸네요. 허허.. 아유~ 이거 다시 한 번 사과드리겠습니다! 제대로 알아보고 배정을 했어야 하는데요. ” “ 아 예에.. 뭐 그래도 방도 알아봐주시고 하셨으니, 괜찮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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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하하.. 근데 최교수님이 그 외상코디네이터란 분을 정말 아끼긴 아끼시나 봅니 다..! ” “ ..... 예? ” “ 아니, 말씀하실 때 마다 그 코디네이터 얘기 밖에 안하시고, 그분 칭찬만 하시니까~ 하하~ ” “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요.. ” “ 아! 저희 집사람이 복지부에 있는데요. 전직간호사 출신이거든요? 그래서 그 특성화 된 간호사양성에 관심이 많은데, 언제한번 연락드릴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 “ 아아, 예, 근데 어차피 그 친구는... 아니, 아닙니다. 근데 저기.. 시간이 꽤 된 것 같 은데요..? ” “ 예~ 이만 자야겠습니다~ 허허, 아! 저는 내일 일정 때문에 일찍 나갈 거 같거든요~ 여기 키 두고 갈 테니까 편히 쉬시고! 내일 체크아웃 좀 부탁드릴게요. ” “ 예에, 예에, 그러시죠. ”
그렇게 남자와의 대화를 끝내고 곧, 잘 준비를 마친 뒤, 자리에 눕는다. 약간 취기가 돌아서 그랬는지, 잘 모르는 사람한테 괜히 말을 많이 했나 싶은 인혁. 그러나 상대가 계속 질문을 해대는 통에 말을 많이 했는지 적게 했는지.. 그런 것들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그는 괜찮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곧, 잠을 청하며 눈을 감는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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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막상 자리에 누워서 잠을 청하려니까 몸은 피곤한데 잠이 잘 오지 않는다. 하지만 옆 침대의 남자는 어느새 코까지 골며 잘 자고 있고, 조금은 시끄러운 그 소리 때문에 약간 인상을 찌푸리는 그. 어두운 방, 창문사이로 들어오는 달빛이 그의 얼굴을 비춘다. 아까만 해도 분명 피곤했었는데.. 아무리 잠을 청해도, 계속 잠이 오지 않으니.. 인혁은 어쩔 수 없이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천정만 바라보다가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떠올려본다. 차안에서.. 옷가게에서.. 한강둔치에서.. 그리고 호텔에서.. 정말 많은 일이 있었던 오늘. 병원에 있을 때는 항상 피곤한 일상만 반복 됐었는데.. 이렇게 병원을 벗어나 먼 곳으로 와서 그런지 그녀가 조금 들떠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놀러온 것도 아닌데 괜히 들뜨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녀에게 조금 툭툭대기는 했었지만, 사실 그도 오늘 일들이 좀 재밌긴 했었다. 뭐랄까.. 왠지 좀 여행을 온 기분이랄까..? 아까 은아가 골라준 옷도 그렇고.. 한강 둔치를 구경하면서 함께 오래된 노래를 들은 것도 그렇고.. 그녀에게 내 어린 시절 얘기를 해준 것도 그렇고.. 정말 오늘은 처음해보는 일 투성이였다. 그런데, 그래서 더 재밌었다. 정말 오랜만의 여유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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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피식- 웃음이 나오는 인혁. 이렇게 하루가 재미있다고 느끼는 건 올해 들어서는 거의 처음이었다. 아마 자신 혼자 왔었다면 당연히 이런 경험들도 이런 즐거운 기분도 느껴보지 못했겠지만, 그녀가 옆에 있었기 때문에 뭔가 재밌는 일도 많이 생기고 기억할 수 있는 추억도 많이 생겼던 것 같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게 사실이니까.. 그런데 갑자기, 좀 전에 남자가 했던 말이 생각나는 그.
/ 아니, 말씀하실 때 마다 그 코디네이터 얘기 밖에 안하시고, 그분 칭찬만 하시니까~ 하하~ /
그러고 보니 자신이 생각해봐도 내내 은아의 얘기만 했던 것 같긴 하다. 아마도.. 상대가 의사가 아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얘기에 제약이 많아서였을까. 일 얘기도 딱히 할 것도 없었고.. 그냥 그의 물음에 대답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녀에 대한 얘기로 흘러갔던 것 같다. 뭐, 그도 그럴 것이 연수 갔다 온 뒤로는 그녀하고만 내내 붙어있다시피 했으니.. 관심사라고는 외상센터와 환자, 일 뿐이었는데, 그렇다고 의사도 아닌 사람한테 환자나 외상센터에 대해서는 할 얘기가 별로 없었고.. 할 수 있는 얘기라면 근황얘기인데.. 근황을 설명하려면, 내가 하는 일, 그녀가 하는 일, 외상센터에 대한 이야기.. 센터를 위해 그녀와 둘이서 해오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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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가진 장점, 그녀에 대한 나의 느낌과 생각들.. 그냥 할 얘기랄 만한 게 그녀에 대한 이야기 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이라곤 그녀뿐이었으니까.. 아마 그래서 은아 얘기만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보니 왠지 그녀는.. 자신보다 어린 사람이었지만, 속도 깊고, 조금 의지도 되고.. 그동안 의지했던 만큼, 자기도 모르게 은아 생각을 많이 했던 걸까..? 왼지 그녀에 대한 생각을 하자, 자기도 모르게 슬며시 웃음이 나오는 인혁. 트라우마센터가 사라질까 걱정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연수 갔다 온 직 후, 처음 생긴 트라우마센터. 심포지엄을 준비하느라 정말 정신이 없었던 올 봄. 어머니에 대한 생각들을 지우려고 무조건 일만했던 그 때. 압박감과 스트레스 때문에 주변사람들은 돌아보지도 못하고 그저 고래고래 소리만 지르며 미친놈처럼 수술만 하는 바람에 외상코디네이터에, 응급구조사에, 응급실 간호사들까지 줄줄이 그만두게 했던 그 때. 그래서 일해 줄 사람도 없고, 스스로도 그 많은 업무를 감당할 수 없어서 트라우마센터도 없어질 판이었는데.. 어쩔 수 없이 맡게 된 심포지엄. 그 일을 마무리 할 때 까지 만이라도 버텨보자 하는 심정으로 임시로 뽑았던 외상코디네이터. 그게 바로 그녀였는데..
“ 하, ... 허허... ”
인혁은 어느새 같이 일한지 1년이 다 되간다고 생각하니, 왠지 신기해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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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있는 은아를 뽑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그. 그녀가 아무리 경력자였다지만, 정말 이렇게까지 열심히 해줄 줄은 정말 몰랐었다. 그리고 수술, 자료정리, 프로그램작업, 환자케어, 스케줄 관리까지.. 게다가 운전도 해주고 말벗도 해주고.. 참.. 대단한 여자였다. 남자도 쉽게 못할 일들을 알아서 척척. 그러면서도 불만불평 한번 안 하는 그녀. 정말 그녀가 아니었다면.. 연수 갔다 온 후로 트라우마센터가 이렇게라도 굴러갈 수 있었을까...? 아니, 아마 그녀가 없었다면, 지금 이렇게 세중병원의 이름으로 헬기 컨퍼런스에 참여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자신은 여름까지만 해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병원을 그만두려했었는데, 그런 자신을 잡아주기까지 하고, 위로해주고, 힘을 주던 그녀. 정말 새삼 다시 은아의 존재가 고맙게 느껴지는 인혁. 정말로, 정말로, 고마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잘해줘야지.. 잘해줘야지.. 생각하면서도 일을 하다보면 생각처럼 잘해주기는커녕, 무뚝뚝하게 대하거나 화를 내기에만 바빴다. 내일은 좀 더 잘해줘야지.. 헬기 시범식이 있는 내일, 잔뜩 기대하면서 헬기 시범식을 기다리던 그녀였는데.. 사실, 가끔씩 그녀의 기대와 열정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 기대와 열정이 덕분에, 인혁도 역시 희망을 가져 볼 수 있었다. 그렇게 희망으로 내일을 기대해볼 수가 있었다. 그녀가 오기 전엔 한번도, 내일이 오기를 기대해본 적이 없었는데.. 인혁은 왠지 모를 기대를 가지며 스르르 잠에 빠져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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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브금 : 허각&지아 - I Need You (Inst.)
다음날, 이른 아침,
[ 떼르르르르릉- 떼르르르르릉- ]
오늘도 늘 그녀가 일어나던 시간에 맞춰 시끄럽게 울려대는 알람소리. 은아는 너무 피곤해서 눈을 뜨지도 못한 채 손으로 베게 주변을 뒤적거리다가 핸드폰을 찾아낸다. 그리고 알람을 힘겹게 끄는데, 5분 후,
[ 떼르르르르릉- 떼르르르르릉- ]
또다시 시끄럽게 울려대는 알람. 오늘은 헬기시범식도 느즈막이 있어서 이렇게 새벽같이 일어날 필요가 없었는데, 어젯밤 너무 피곤한 탓에 알람을 다시 맞춰놓는 일을 깜빡한 그녀였다. 결국 울려대는 알람소리를 이기지 못하고 신경질난다는 듯 상체를 벌떡 일으키는 그녀. 일어나자마자 시끄러운 알람을 먼저 꺼버리고, 핸드폰을 이불에 툭 던져버린다.
“ 에이씨... 왜 이리 잠 복이 없노! 잠 복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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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대로 침대에 한참 앉아있는 채로 눈을 끔뻑끔뻑 거리는 그녀. 전날 얼마나 피곤했는지, 평소엔 잘 붓지도 않는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그렇게 여전히 비몽사몽한 상태로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 은아는 이왕 눈뜬 김에 그냥 일찌감치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무거운 몸을 이끌고 욕실로 향한다.
/ 솨아아- 솨아아- / . . . . 몇 분 후, 퉁퉁 부운 눈을 가라앉히려 오랫동안 샤워를 하던 그녀. 이내 긴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화장대 앞에 선다. 그래도 역시 샤워로 졸음을 쫓아냈더니, 비몽사몽하던 모습은 어디로 사라지고, 어느새 맑은 정신으로 돌아와있는 그녀였다. 곧, 화장을 하고, 다시 정장으로 갈아입은 은아. 시간을 확인하니 어느새 약속했던 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그녀는 일찍 일어나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가져왔던 짐을 정리하고는 이내 방을 빠져나간다. 혹시라도 인혁이 안 깨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서 그에게 전화를 하는 은아.
[ 뚜르르르- 뚜르르르- 달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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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에.. 여보세요... ”
방금 잠에서 깼는지, 낮고 허스키한 그의 목소리. 혹시나 했는데 역시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에게 다시 미안해지는 그녀. 어제 자신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방에 늦게 들어가서 인혁이 잠을 얼마 못 잤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남은 일정이 있기에 그를 깨워야겠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은아.
“ 아, 교수님, 주무시는데 깨워서 죄송해요. 근데 지금 일어나셔야 할 거 같은데.. ” “ 아아.. 신선생.. 으.. 지금이 몇시..? 아, 우리 7시반에 만나기로 했나..? 아이고 이거 늦겠네. 미안해요..! ” “ 아니에요! 괜찮아요! 교수님 피곤하실텐데.. 저 괜찮으니까 천천히 준비하셔도 되요! 준비 끝나시면 로비에 있는 카페로 내려오세요~! ” “ 아, 예에, 흐흠! 예, 알았어요! 금방 준비하고 내려갈게요. ”
그렇게 그와 전화를 끊는 은아. 시간을 보니 비록 아침은 못 먹을 것 같았지만, 그가 지금부터 준비하는 거라면 시범식에 그렇게 늦을 것 같진 않았다. 이내 엘리베이터가 로비에 도착하고 조금 여유롭게 카페로 향하는 은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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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인혁의 방, 은아의 전화를 받고 힘겹게 눈을 뜬 인혁. 안 그래도 피곤했던 몸인데 어젯밤 와인까지 꽤 마셨던 탓에 몸이 쉽게 일어나지지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그녀를 생각하며 무거운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하는 그. 일단, 시간이 없으니까 그냥 대충만 씻고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어제 통화에서 깔끔하게 하고 오라고 했던 은아의 말이 생각난다. 거울 속에 자신의 모습을 보는 그. 자신이 봐도 확실히 깔끔해 보이지는 않았다. 어제도 조금 지저분했던 수염이 오늘은 약간 산적같이 자라있었고, 머리도 지저분해 보이고.. 어제 밖에 오래있어서 몸도 별로 안 깨끗한데.. 하.. 신선생이 깔끔하게 하고 오라고 했는데.. 이렇게 내려가면 그녀에게 한소리 들을 것이 분명했다. 인혁은 조금 늦더라도 샤워도 하고, 면도도 하고, 제대로 준비하고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이내 손을 들어 선반에 있던 면도기를 집어 든다. 같은 시각, 호텔 내에 있는 카페, 그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며, 헬기 시범식 홍보자료를 보고 있는 은아. 책자를 한 장 한장 넘기며 집중을 하면서 무심결에 옆에있던 커피 잔을 들어올려 입으로 갖다 대는데, 아무리 잔을 기울여도 커피의 씁쓸한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결국, 책자만 보고있던 눈을 돌려 커파잔 안을 바라보는 그녀. 어느새 모두 비워져 있는 커피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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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도 자신이 홍보자료에 집중하다가 홀짝홀짝 조금씩 다 마셔버린 모양이었다. 조금 아쉽다는 생각을 하며 살짝 입맛을 다시고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는데, 벌써 방에서 내려온 지 1시간이나 지났다. 아직 멀었나.. 준비를 꽤 오래하시네..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책자에 집중하려는데, 누군가 그녀에게 다가온다.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는 그녀. 처음보는 남자가 부드러운 미소를 띄며 그녀에게 커피를 내민 채 서있었다. 그녀는 무슨 일인가 조금 놀라서 그저 남자를 멀뚱히 보고만 있는데, 가지고온 커피를 그녀 앞에 놓으며 말을 건네는 남자.
“ 안녕하세요. 이정록이라고 합니다.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었는데, 커피를 다 드신 것 같아서요. 너무 아름다우셔서 제가 그냥 사드리는 겁니다. 부담 갖지 말고 드세요. ” “ 네? 아아, 저, 괜찮은데... ”
그러나 그녀의 대답에 그저 눈웃음만 치며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돌아서는 남자. 이내 자신의 테이블로 돌아가 앉는다.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은 은아. 고개를 돌려 남자가 앉은 테이블을 쳐다보는데, 그 남자를 포함한 꽤 멋진 네 명의 남자가 그녀를 향해 살짝 웃으며 눈인사를 해준다. 그 네 명의 남자들과 눈이 마주치자 당황스러워서 급히 고개를 돌리는 은아. 그러자 그녀를 보고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다시 그녀에게로 다가오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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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기,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여기 앉아도 될까요? ” “ 네? 아니.. 그게.. ” “ 그럼 앉겠습니다~! ”
그녀가 허락도 안했는데, 그녀의 앞자리에 떡하니 앉는 정록. 은아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 그대로 아무 말도 못하고 벙쪄있는 채로 남자를 보는데,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은아를 관찰하더니 조금 능글맞게 그녀에게 질문을 던지는 정록.
“ 아, 일 때문에 오셨구나~? 무슨 일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아름다운분이 랑 같이 일하면 정말 하루하루가 즐거울 거 같은데요. 혹시 성함이? ” “ 아.. 저, 그게.. 저기, 제가 일 때문에 그만 일어나봐야겠네요. ”
아무래도 계속 앉아있으면 안 되겠다싶은 그녀. 자리에서 일어나려 보고 있던 책자를 접고나서 서둘러 가방에 챙겨 넣으려는데, 하필 이때, 그녀의 뱃속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
[ 꼬르르르륵- ]
순간, 흐르는 정적. 너무 창피해진 그녀가 짐을 챙기던 손을 잠시 멈칫하고, 앞에 있던 정록은 피식- 웃으면서 그녀를 향해 입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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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아침 전이신가 보네요. 어, 저도 아침 전인데, 그럼 제가 맛있는 거 대접 해드 릴테니까. 같이 식사라도? ” “ 아니요! 아니, 괜.. 괜찮아요! 저 바쁜 일이 있어서 이만 일어날게요. ”
은아는 조금 창피하기도 하고 앞에 있는 남자가 이상한 사람 같아서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고 일어서는데,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는 정록. 그녀의 앞을 살짝 가로막으며 변명을 한다.
“ 아, 저기 저기! 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냥 오늘 아 침은 이런 미인과 같이 하면 좋겠다는 마음에.. 저, 정말 같이 식사만 하셔도 되는데, 제가 맛있는 걸로 사드릴게요~! 정말 같이 안 드시겠어요? ”
그러나 은아는 빨리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만 하며, 남자에게 연신 괜찮다고 손을 내젓고, 출입구 쪽으로 뒷걸음질을 친다. 그러나 아쉬운 듯 계속 따라오는 그. 은아는 계속 뒷걸음질을 치려다 그만 발이 꼬여 버리고,
“ 어?! 어~~? ”
그렇게 그녀 몸이 뒤쪽으로 넘어가려고 하는데, 그녀를 잡아주려고 얼른 손을 뻗는 정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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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가 그녀를 잡기 전에 누군가가 오더니 넘어지려던 은아의 몸을 뒤에서 떠받치며 그녀의 어깨를 잡아준다. 자신의 몸이 뒤로 넘어가는 걸 느끼며 놀라있던 은아. 그런데, 바닥에 딱딱함 대신 등에서부터 폭신하고 따뜻한 감촉이 느껴져 오고, 자신이 누군가에게 기대있다는 걸 인지하고는 서둘러 일어나려는데,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 신선생..? 괜찮아요? ” “ ....?!.... ”
인혁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안심이 되는 그녀. 그는 그녀가 제대로 설수 있도록 부축해준다. 그렇게 은아가 몸을 바로 세우며, 자신을 받치고 인혁을 보기위해 몸을 돌리는데,
....어..? [ 철렁- ]
인혁을 보고는 놀라는 은아. 갑자기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 눈앞에 있는 인혁은 어제의 그 모습이 아니었다. 평소 그의 덥수룩한 머리와는 다르게 잘 정돈된 머리. 수염하나 없이 깨끗한 얼굴로 인해 말끔해진 인상. 그로인해 어딘지 모르게 샤프해진 그의 얼굴이 어제 새로 샀던 양복과 어우러지며 멋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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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 멋있다... ’
그녀가 그렇게 인혁을 보면서 놀라서 멍하니 있는데, 그 사이, 인혁은 그녀를 살짝 자신의 뒤로 보내며 정록의 앞에 서서 무슨 일이냐는 듯 그를 쳐다본다. 조금 무섭게 낮게 깔려있는 그의 목소리.
“ 무슨 일이신지. ” “ 아, 아,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 그럼 전 이만.. ”
눈치 빠른 정록, 눈앞에 두 사람이 왠지 아는 사이인 듯 보이자 아니라고 발뺌을 하며, 서둘러 자신의 테이블로 돌아가는 그였다. 그러자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나머지 세 남자가 창피하다는 듯, 모른 척 외면하며 정록을 밀어내버리고, 그런 그들 때문에 잠깐 넘어졌다가, 이내 다시 자리에 앉는 정록이었다. 그들 때문에 약간은 소란스러워진 카페. 그러나 카페에서 그런 상황이 벌어지던 말던 눈만 끔뻑끔뻑 거리며, 계속 멍하니 서있는 은아. 인혁은 그녀가 놀라서 그러나 싶어서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그녀에게 작게 귓속말을 한다.
“ 신선생, 정신차려요. 일단, 여기서 나갑시다. ” “ ...네 ....네? 아.. 네.. 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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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놀란 그녀가 빨리 나갈 수 있도록, 그녀의 어깨를 출입구 쪽으로 살짝 밀어주다가 잠시 멈춰 서는 인혁. 곧, 천천히 몸을 돌리더니 그 네 남자가 있는 테이블을 살짝 노려보고는 다시 몸을 돌리고 놀란 은아를 어쩔 줄 몰라 하며 이내 문 쪽을 향해 나가려 한다. 그렇게 카페 밖으로 빠져나가는 두 사람. 그런 두 사람을 쳐다보는 네 남자. 인혁과 은아가 문밖으로 나가자마자 도진, 윤, 태산 세 사람이 동시에 정록을 마구 때린다. 정록을 향해 소리치는 도진.
“ 그러게 하지말라니까!! 뭐? 바로 넘어온다며? ” “ 넘어오기는 개뿔!! 아주 우리까지 이상한 놈 보듯이 쳐다보드만!! ” “ 아유, 아유! 짜식아!! 니가 하는일이 그렇지!!! ”
그렇게 몰매를 맞다가 생명에 위협을 느끼는 듯,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정록.
“ 자, 잠깐!! 잠깐!! 야, 너네도 모델같다며!! 이쁘다며~~!! 먼저 쳐다 본 놈들이 누군 데!! 이씨!!!! ”
정록에 말에 잠시 멈춰있는 세 사람. 그러다 다시 그를 앉혀놓고 때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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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내가 이쁘다고 했지 언제 작업걸라고 했냐!! ” “ 이 자식이 어디에다가 덤터기를 씌워!!! ” “ 너 그 반지 한번만 더 빼면 내가 손가락 잘라버린다고 했지!! 그 손가락 이리 내 놔~~!! ”
세 남자에게 계속해서 맞는 정록. 그렇게 아침부터 조용하던 호텔카페가 그들 때문에 금세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잠시 후, 주차장, 그의 차로 걸어가는 두 사람. 은아는 왠일인지 아까부터 아무 말도 없었고, 인혁은 그런 그녀가 걱정 돼서 천천히 그녀의 상태를 살피며 뒤를 따라가다가 그녀를 향해 조심히 입을 연다.
“ 신선생.. 괜찮아요? 아까 그놈들이 혹시 신선생한테 무슨 짓 한 거에요? ” “ 예? 아.. 아니요. 그냥 좀 이상한 사람들이긴 한데, 그런 건 없었어요. ” “ 아... 거, 아침부터 이상한 놈들이 꼬여가지고 말이야.. 신선생 좀 놀랐겠네. ”
계속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살피는 인혁. 그런 그가 계속 신경쓰이는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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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그 남자들 때문에 이렇게 멍해진 게 아닌데.. 정작, 나를 놀라 게 한건 따로 있는데.. 은아는 자신 때문에 그가 괜한 걱정을 하는 것 같아서 그에게 괜찮다는 듯 슬쩍 웃어주며 밝게 대답을 한다.
“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 “ 진짜 괜찮아요? ” " 그럼요~ 말짱해요~! “ “ 뭐, 그럼 다행이고.. 근데, 그, 좀 조심 좀 하지.. 거, 그냥 정색하고 밖으로 나오면 되지 뭐하러 그 말을 다 받아주고 있어요. 아무래도 여기 호텔이라 이상한 놈들도 많 을 텐데.. 아무튼 괜찮다니 됐어요. 어서 타요. 이러다 정말 늦겠어요. ” “ 아.. 네! ”
먼저 운전석에 올라타는 인혁. 그녀가 타는 걸 확인하자마자 서둘러 시동을 켜고 차를 출발시킨다. 잠시 후, 인혁의 차, 분명, 괜찮다고는 말했는데.. 왠지 아까부터 계속 말이 없는 은아. 그런 그녀가 걱정되는 인혁. 운전을 하고 있으면서도, 옆에 있는 그녀를 힐끔힐끔 쳐다보는데, 그녀는 그저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면서 뭔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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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 옆에 있을 때는 그녀가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왠지 말이 없는 그녀가 낯설기 만한 그. 인혁은 정말 은아가 걱정되었지만, 왠지 그녀의 생각을 방해하면 안 될 거 같아서 그냥 잠자코 운전만 하고 있다. 한편, 창밖만 바라보며 생각에 뼈져있는 은아. 아까 전 카페에서.. 인혁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을 때, 이상하게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 ... 뭐지..? 익숙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낯설지도 않은 그 느낌. 마치 그를 처음 만났던 날의 느낌과 비슷했다. 그리고 머릿속에 남아있는 한 장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카페에서 자신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그의 멋있는 모습. 왜 자꾸 그 장면이 떠오르지.. 어디선가 바람같이 나타나서 자신을 구해준 것도 그렇고.. 갑자기 달라진 그의 모습을 보고 도저히 멋있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조금은 혼란스러운 그녀의 머릿속. 별것도 아닌데.. 별일도 아닌데.. 자신이 도대체 왜 이러나 싶어서 다시 옆에 있는 인혁을 슬쩍 돌아보는데, 운전을 하고 있는 그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상하게.. 교수님이.. 잘 생겨 보인다..? 정말 이상하게 오늘따라 은아에 눈에 딴 사람처럼 보이는 인혁. 그런데 그때, 은아를 힐끔힐끔 돌아보던 인혁과 그만 눈이 마주려 버리고, 그러자 다시 황급히 창가 쪽으로 눈을 돌리는 그녀. 그런 그녀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 인혁은 그녀의 행동이 이상하게만 느껴지고 도대체 왜 그러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왠지 지금은 아무 말도 꺼내면 안 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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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다시 운전에만 집중한다. 이어지는 긴 침묵. 그렇게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두 사람. 30분 뒤 서울대병원 건물 앞, 조금 늦게 준비한 인혁 때문에 시범식에 살짝 늦은 그와 그녀. 물론 헬기시범식이 바로 시작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헬기가 뜨는 장면을 놓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서둘러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이내 엘리베이터 앞에 선 인혁과 은아. 곧, 1층 로비에 승강기가 도착하고, 그들처럼 승강기를 기다리고 있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두 사람. 사람들이 다 올라타고 이내 문을 닫히려는데, 그때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
“ 잠깐만요!!! ”
시범식에 늦은 한 무리의 또 다른 사람들이 엘레베이터에 뒤늦게 올라탄다. 안 그래도 사람이 꽤 차있던 엘리베이터인데, 그 사람들 덕분에 밀리고 밀려 밀착되는 사람들. 덩달아 인혁과 은아마저도 뒤쪽으로 밀리고 밀리는데, 모서리 쪽에 있던 인혁. 앞에 있는 남자와 붙지 않으려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모서리 쪽 빈 공간으로 오라는 듯, 그녀를 끌어당긴다. 그렇게 나란히 모서리 벽에 붙은 두 사람. 그나마 그곳이 조금 여유있는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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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엘리베이터 문은 닫히지도 않고, 사람들은 미어터지고, 결국, 사람들에게 또 밀려서 은아와 마주보게 된 인혁. 그는 그녀와 최대한 몸이 닫지 않게 하기 위해 힘을 주어 벽을 팔로 받치고 다리에 힘을 주며 버티고 있는데, 마지막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한 사람. 그만 또다시 사람들에게 밀려 인혁의 몸이 휘청거린다. 옆으로 쓰러지려다 간신히 벽을 잡은 그. 고개를 드는데, 바로 앞에 있는 그녀의 얼굴. 그리고 그녀와 정면으로 밀착되어 버린 몸. 게다가 은아와 얼굴이 다을랑 말랑 하는 상황. 그녀도 당황했는지 어쩌지도 못하고 꼼짝 못하고 있었다. 서둘러 반대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인혁. 드디어 문이 닫히고, 헬기장이 있는 옥상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그런데 그 짧은 시간이 왜 이리 길게만 느껴지는지.. 그냥 그렇게 몸이 붙은 채로 꼼짝도 못하고 있는 두 사람. 인혁은 최대한 신경을 안 쓰려고 딴 생각을 해보지만, 그런데.. 정말 맡으려고 맡은 건 아닌데.. 자꾸 그녀의 샴푸향이 코를 자극한다. 하지만, 그건 은아도 마찬가지. 너무 가까이 있는 탓에 맡으려고 맡는 건 아니었지만, 자꾸 그의 샴푸 향과 스킨향이 풍겨온다. 어쩌다보니 서로의 향을 느끼게 되는 두 사람. 그런데 꽤 좋은 향내.. 눈만 살짝 돌려 그를 바라보는 그녀. 은아와 얼굴을 맞대지 않으려 고개를 있는 데로 돌리고 있던 그. 그녀가 눈을 돌리자마자 인혁의 목선과 옆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순간 민망해져 다시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는 은아. 그리고 다시, 그대로 멈춰서 있는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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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곧이어, 옥상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그 많던 사람들이 엘리베이터 밖으로 몰려나가자, 그제야 간신히 떨어질 수 있게 된 인혁과 은아. 두 사람도 이내 엘리베이터를 내리는데, 방금 전에 상황 때문에 조금 어색해진 분위기. 먼저 입을 여는 인혁.
“ 흠, 안.. 안가요? ” “ 아, 가.. 가요. ”
그렇게 어색해진 분위기속에서 헬기시범식을 보러 밖으로 나가는 인혁과 은아.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게다가 몇몇 취재진들 까지 몰려와 있어서 더 시끌벅적한 옥외발표장. 그때, 누군가가 멀리서부터 인혁을 부르며 걸어오는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누군가 싶어 고개를 돌리는 인혁.
“ 아유~! 최교수님 오셨네요~! ”
어제 같이 방을 썼던 홍보팀 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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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악수를 청하자 같이 악수를 하며 인사를 건네는 인혁.
“ 아, 예, 어제는 감사했습니다. ” “ 아, 이분이 혹시..? ” “ 예, 저희 병원 외상코디네이터 신은아씨입니다. ” “ 아유!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
은아를 알아보고 그녀에게도 악수를 청하는 홍보과장. 그녀는 얼떨결에 같이 악수를 하면서 인혁에게 누구냐는 듯한 눈치를 준다.
“ 아, 어제 같이 방을 써주셨던 분이에요. 인사해요. 여기는 서울대병원 정찬영홍보과 장님. ” “ 아아, 네! 안녕하세요! 신은아입니다. ” “ 네네~! 아이고~ 이거 굉장한 미인이셨네요~!! 어젠 정말 죄송했습니다. 저희가 잘 알아보고 방배정을 했어야 하는데. ” “ 아, 아니에요. 하하... ” “ 어제 최교수님이 하도~ 칭찬을 하시기에, 어떤 분인가 정말 궁금했었는데, 그렇게 일도 잘하고 능력있으시다는 분이 이렇게 얼굴마저 아름다우시니.. 최교수님은 정말 좋으시겠습니다?! 하하.. ” “ ....??.... 교수님이 제 칭찬을 하셨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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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유~ 그럼요! 어제 최교수님이랑 와인한잔하면서 대화를 좀 했었는데~ 어찌나 신 선생님 칭찬을 하시던지~ 외상코디네이터라고 했나요? 아무튼 병원에 없어서는 안 될 인재라면서~ 아주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고 그러시더라구요~ ” “ 아아... .....?!.... ”
조금은 과장스러운 홍보부장의 말에 못 믿겠다는 듯 인혁을 슬쩍 쳐다보는 그녀. 평소에 칭찬 같은 건 잘 하지도 않는 교수님이.. 그것도 처음 보는 남 앞에서.. 그렇게 나를 격하게 칭찬했을 리가 없는데..? 그러나 그녀의 짐작과는 다르게 이미 빨개지고 있는 그의 얼굴. 인혁은 갑작스럽게 어제 얘기를 꺼내는 홍보부장 때문에 괜히 민망해져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그녀의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 은아는 그의 반응을 보고 있자니 아마도 남자의 말이 진짜인 듯싶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인혁에게 인정받는 거 같아서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그녀. 그러나 그런 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렇지 않게 계속 말을 이어나가는 홍보부장.
“ 아무튼~! 두 분 다! 정말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이것도 인연인데 언제가 기회되서 다시 볼수 있다면 좋겠네요! 그럼 저는 곧 시범식이 시작될 거 같아서, 이만 가보겠습 니다~ 그럼. ”
곧, 시야에서 사라지는 홍보부장. 다시 둘 만남은 그와 그녀. 은아는 왠일이냐는 눈빛으로 그를 빤히 보고 있고, 인혁은 술김에 한 말들을 그녀에게 들켜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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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뻘쭘해지고 민망해져서 그녀의 시선을 다시 피해버린다. 그런 그를 보고 또 장난기가 발동한 은아.
“ 오호, 교수님! 제가 일을 잘하긴 잘했나봐요~? 없어서는 안 될 인재.. 라고 하셨 나..? 제가 일하는 게 그렇게 마음에 드셨어요? ” “ 아, 아니, 뭐.. 그냥 그, 잘하는 건, 잘하는 거니까.. ” “ 아아~ 근데 왜 제 앞에서는 칭찬한번 제대로 안 해주셨어요~? ” “ 크흠! 흠! 저기 그, 그, 헬기 안 볼 거예요? 좋은 자리 뺏기겠네.. 빨리 갑시다. ”
그녀의 장난스런 질문을 피하며 괜히 먼저 앞질러 가는 인혁. 은아는 왠지 음흉하게 웃으며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고는 이내 그 뒤를 졸졸 쫓아가며 말한다.
“ 교수님! 또 뭐라고 하셨는데요~ 무슨 칭찬 하셨는데요~? 아이, 같이 가요~!! ” “ 별.. 별 얘기 안했어요! 거, 알아서 따라와요..! ”
. . . . ※ 추천브금 : 에브리싱글데이 - 모래시계(Inst.)
잠시 후, 그렇게 헬기 시범식이 시작되고, 이어지는 각 대표들의 인사말과 소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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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닥터헬리 시범사업을 소개하는 사회자. 곧이어, 그 사회자의 소개가 끝나고, 드디어 헬기시범식 순서였다. 어디론가 연락하는 소방관계자. 그렇게 몇 분 후, 저 멀리 상공에서부터 날아오는 헬기. 금세 그들이 있는 곳과 가까워지며 요란한 소리를 낸다. 동시에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
[ 두두두두두두두- ]
곧, 헬기가 착륙하고, 환자복을 입은 구급대원과 서울대병원의 의사들이 헬기이송 시범훈련을 보여준다. 이내 조종사와 정비사, 구조대원, 의사와 환자 까지 총 8명의 사람들이 헬기에 오르고, 그들을 태운 헬기가 신속하게 하늘로 올라간다. 또 다시 엄청나게 부는 바람이 인혁과 은아, 두 사람의 얼굴을 때린다. 그 거센 바람을 막기 위해 팔을 들고 있다가, 이내 같은 표정으로 날아가는 헬기를 바라보는 두 사람.
[ 두두두두두두두- ]
그녀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혹시라도..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해운대 세중병원의 하늘에도 저렇게 헬기가 뜰 수 있는 날이 올까..? 외상센터도 생기고, 헬기도 생겨서.. 환자들을 저렇게 신속하게 이송시킬 수 있는 날이 과연 올까? 그의 꿈.. 헬기를 갖춘 트라우마센터. 그리고 나의 꿈.. 그런 트라우마센터의 코디네이터. 은아는 고개를 돌려 살짝 그의 표정을 살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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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살짝 찡그리고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인혁은 정확히 헬기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가 미세하게 웃고 있음을. 그때,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리는 인혁. 그렇게 서로 마주보는 두 사람. 서로의 표정을 보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주보며 활짝 웃는다. 그렇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같은 표정, 같은 모습.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그녀. 믿고 따라갈 수 있는 그. 그렇게 서로의 눈을 마주보고 웃는 두 사람. 둘은 알 수 있었다. 지금 서로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한참을 마주보다 다시 헬기로 시선을 돌리는 그와 그녀. 오늘따라 푸르른 하늘. 그런 하늘 위를 날아가는 헬기. 그 순간, 은아는 자기도 모르게 상상을 해본다. 저 헬기를 타고 인혁과 함께 날아다니는 상상을. 그리고 그렇게 상공을 누비며 환자를 데려오는 상상을. 정말 생각만으로도 가슴 설레이는, 그 상상을. . . . . 한 시간 후, 드디어 헬기컨퍼런스를 끝내고 병원으로 돌아가는 두 사람. 인혁은 아직도 그녀의 상태가 걱정됐는지 왠일로 운전을 해주겠다며 나서고, 그렇게 차에 올라탄 그와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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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탄 자동차가 곧, 고속도로에 진입한다. 그렇게 두시간정도 흘렀을까. 출발하고 나서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아까부터 말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은아. 그리고 평소답지 않은 그녀의 행동이 자꾸만 신경쓰이는 인혁. 무뚝뚝한 성격 때문에 먼저 말도 잘 안하는 그가 그녀를 걱정하는 마음에 먼저 말을 시켜 봐도 왠지 자꾸만 그녀의 어색한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물론, 아침에 그녀에게 조금 안 좋은 일이 있었다지만.. 그런 거 가지고.. 이렇게 까지 말을 안 할 이유는 없는데.. 평소의 그녀 성격을 보더라도 뭔가 다른 이유가 있어보였다. 아니, 기분 좋게 컨퍼런스 잘 마치고와서 왜 이러는거야..? 결국 답답함을 못 이기고 약간 짜증이 난 그. 하지만 자신이 이해를 해줘야겠다는 생각에 화를 누르느라 한껏 목소리를 낮추고 그녀를 부른다.
“ 신선생. ” “ 네.. 네..? ”
한편, 은아. 헬기 시범식을 보면서 다시 그가 편해지나 싶었지만, 인혁과 둘만 남게 되니 또 자기도 모르게 행동이 어색해진다. 본인도 본인이 왜 이러나 싶어 답답한 은아. 아무리 장난스레 말을 꺼내려 해도 자꾸 어색한 말투만 나와버리니.. 그냥 가는 동안은 말을 하지 않기로 하는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자꾸 말을 시키는 인혁. 평소엔 먼저 말도 잘 안하는 분이.. 오늘따라 왜 이러시노.. 괜히 멋있어보이질 않나.. 오늘따라 자상하게 챙겨주시질 않나.. 그런데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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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이 갑자기 엄청난 중저음의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자 순간, 딱 긴장을 한 은아. 목소리는 또 오늘따라 왜 저렇게.. 확실히 그의 중저음은 그녀가 듣기에도 매력적이었다. 은아는 괜히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계속 창가만 보며 대답한다. 그런 그녀가 못마땅한 인혁. 이젠 보지도 않겠다는 건가..? 이거야 원.. 도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다시 짜증을 누르느라 중저음의 목소리로 진중하게 말하는 그.
“ 신선생 참.. 사람이 말하는데.. 나 안 볼 거 에요? ” “ 아.. 아니요. ”
그러나 그녀의 귀에는 짜증을 누르는 목소리가 아니라 분위기 있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들려온다. 그 목소리 때문에 더 긴장되는 은아. 그녀가 여전히 돌아보지 않자 계속 말을 이어나가는 인혁.
“ 어제 너무 떨었나.. 혹시 어디 아파요..? ” “ 아니요.. ” “ 그럼 뭐, 내가 또 불편하게 한 거 있어요? 나한테 화난건가? ” “ 아.. 아니요..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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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너무 걱정을 해주자 조금 미안해진 은아. 창가를 보던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다가 다시 어색해지는 분위기 때문에 손가락만 만지작거린다. 은아 역시도 답답하기만 했다. 마치 처음만난 사람에게 어색하게 대하듯, 자꾸만 그에게 어색하게 대하는 자신이 이상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그녀에게 손을 내미는 인혁.
“ CD줘봐요. ” “ 네? ” “ 아, 어제 운전하면서 듣던 CD있잖아요! 그거 달라구요.. ” “ 아, 네. ”
그의 입에서 살짝 나오는 호통소리에 가방에서 CD를 얼른 꺼내서 그에게 넘기는 은아. 인혁은 그것을 받아들더니 자동차플레이어에 CD를 넣고 재생버튼을 누른다. 그러자 차안을 가득 채우는 아름다운 음악. ※ 추천브금 : 김범수 - 그대와 영원히
은아는 자신에게 익숙한 노래들이 들려오자, 자기도 모르게 노래에 집중을 한다. 잠시 후, 한결 편안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 인혁은 이제야 조금 그녀가 편안해 보이는 것 같자 그녀를 향해 무뚝뚝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듯 조심히 입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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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뭔진 모르겠지만 말해봐요, 아침에 안 좋은 일 때문에 그런건지.. 아니면 아픈건 지.. 뭐, 내가 불편하게 한 거 있으면 말을 하고. 거, 평소엔 말도 잘하던 사람이 말을 안하니까.. ” “ 아..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음.. 괜찮아질 거에요. 신경 안 쓰셔도 되요. ” “ .... 그래요.. 알았어요. ”
더 이상 신경쓰지말라는 그녀의 말에 약간 서운한 기색으로 입을 닫아버리는 인혁. 평소엔 자신에게 늘 솔직하게 다가왔던 그녀였다. 늘 먼저 다가와주고, 말 걸어주고, 자신을 스스럼없이 대해주던 그녀였기에 그동안은 인혁도 그녀를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자신도 잘해줘야겠다고 다짐까지 했는데, 왠지 지금, 조금 서운해지는 인혁. 은아가 자신에게 조금 거리감을 유지하려는 것 같아서 내심 섭섭한 마음이 드는 그였다. 그러나 계속 캐물어볼만한 사이는 아니고.. 그녀를 불편하게 하고 싶진 않았기에 그저 운전에만 몰입하려는데, 왜인지 모르게 자꾸 심통이 난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또 그녀에게 말을 시킬 꺼리를 찾는 그.
“ 거.. 흠흠.. 이 노래 제목이 뭐에요. ” “ 네? 아.. 교수님 말해드려도 모를텐데.. ” “ 참나.. 왜요? 내가 어? 아저씨라 이런 것도 모를까봐요? ” “ 네? 아, 아니.. 그게 아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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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말해주기 싫으면 관둬요..! 거, 그냥 말해주면 되지.. 뭐, 허, 참나, 또 아저씨라고 놀리는 거야 뭐야. ” “ 그대와 영원히.. ” “ 뭐.. 뭐라는 거야.. ” “ 이 노래 제목이요. 그대와 영원히.. 라구요. 원래는 이문세노래.. ” “ .... ” “ ..... 이 노래도 되게 오래된 노래에요. 저도 너무 시끄러워서 요즘노래는 못 들어요. 근데요 교수님. ” “ 예. ” “ 교수님 아직, 아저씨.. 안 같으세요. ” “ ...?... 뭐 언제는 아저씨라느니.. 노인정.. 뭐.. 그러더니.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서.. ”
그녀의 말에 살짝 기분이 좋아지는 인혁. 하지만 입꼬리가 약간 올라가려다말고 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투덜투덜거린다. 그런데 그제서야 그가 그답게 느껴지는 은아. 기분좋으면서 괜히 투덜거리는 그를 보며 슬며시 웃는다. 그리고 변명처럼 대꾸하는 그녀.
“ 그.. 그거야..! 농담이었죠.. 교수님이 하도 말을 안 하시니까. 재밌으라고.. ” “ 거, 재밌기는.. 당하는 사람은 하나도 안 재밌어요. ” “ 네.. 죄송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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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니, 그게.. 흐흠! 흠! 어느 정도는 사실이니까. 그렇게 죄송할 것 까지는.. ”
인혁은 갑자기 급 반성하는 듯한 그녀의 말투에 괜히 자신만 쪼잔해지는 것 같아서 괜찮다고 말하려는데 다시 갑자기 진지해지는 그녀의 목소리.
“ 교수님. ” “ ... 예. ” “ 오늘은 아저씨 안 같고.. 쪼금.. 멋있으시더라구요. 아까는 정말 고마웠어요. ”
멋있었다는 말에 살짝 놀라며 그녀를 돌아보는 인혁. 그런데 그녀의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그러고는 자신과 시선도 못 마주치는 그녀. 본인이 말해놓고도 무지 쑥쓰러워하는 것 같았다. 조금은 소녀같은 그녀의 표정. 오늘따라 그 모습이 예뻐보이는 건 왜일까. 처음 보는 그녀의 모습 때문에 오히려 그가 더 당황스러워 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급히 고개를 돌려 운전에만 몰두한다. 다시 조용해진 차안. 아름다운 노랫소리만이 차안을 가득 채운다. 그렇게.. 두 사람에게 조금은 특별했던 컨퍼런스가 잊지 못할 한바탕에 꿈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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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브금 : 에브리싱글데이 - Cold(Inst.)
다음 날, 어제 느꼈던 인혁에 대한 이상한 기분 때문에 잠도 별로 못 자고 아침 일찍 출근한 그녀. 이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왠지 그 순간, 오늘은 인혁을 편하게 대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걱정이 밀려오고, 일단, 그런 걱정들을 뒤로 한 채, 트라우마센터의 문을 빼꼼히 열어보는 은아. 역시나 오늘도 간이침대에서 자고 있는 그. 그러나 그녀의 걱정과는 다르게, 덥수룩하고 부스스한 머리에 하루 만에 거뭇거뭇하게 자라있는 수염. 그리고 늘 입고 있는 수술복에다가, 환자용 이불을 덮고서는, 영락없는 노숙자 포스를 풍기며 자고 있는 인혁. 하, 하하.. 하하하... 멋있기는 개뿔.. 그러면 그렇지.. 멋있기는 무슨.. 역시 교수님은 그냥 교수님이지! 자신이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구나.. 라는 생각에, 정신 차리고 빨리 일이나 해야겠다는 심정으로 책상 앞에 앉으며 노트북을 켜는 그녀. 그리고는 이내 작업을 시작하려다가 왠지 모를 마음에 다시 뒤를 돌아보는데, 늘 보던 익숙한 모습으로 자고 있는 인혁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온다. 왠지 안심이 되는 은아. 멋있게 차려입은 모습도 좋지만, 이렇게 익숙하고 친근한 인혁다운 모습. 이 모습이 더 좋았다. 순간, 입꼬리가 씨익- 하고 올라가는 그녀. 왠지 자꾸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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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그날 이후, 병원은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갔다. 여전히 외상환자들은 시도 때도 없이 몰려왔고, 중환자실과 수술실을 구하기가 어려워 그때마다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했으며, 중환자 케어, 아침 회의, 자료 정리, 외상센터 준비 등.. 두 사람은 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당연히 인혁과 은아도 예전처럼 돌아왔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변화가 하나 있다면, 그녀가 이제 그를 더 이상, 아저씨라고 느끼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뭔가 특별한 감정을 갖는 것도 아니고, 하던 대로 그를 편하게 대하곤 했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그를 신경 쓰게 되는 그녀였다. 어쩌면, 그녀도 느꼈을지 모른다. 조심하지 않으면 인혁이 어느 순간, 자신에게 남자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조금은 조심해야 할 수도 있겠다는.. 물론 그는 눈치 채지 못했겠지만.. 어쨌든 분명한건 컨퍼런스 이후, 두 사람이 더욱더 즐겁게 일한다는 사실이었다. 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가야할 길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기에.. 그리고 그 길을 함께 하는 사람이 있기에.. 그렇게 서로에 대한 믿음이 둘의 마음을 채워나갔다. 그래서 어떤 힘든 일이 닥쳐도 모든지 헤쳐 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모든지.. 모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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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Something ※ 추천브금 : 이루마 - piano
그와 나, 그녀와 나, 우리사이의 어떤 무언가... Some thing. . . . .
( 드라마상의 시점 ) 2012년 초여름, 어느 날 저녁, 한구의 차안,
[ 부우우우웅-- ]
피곤한 몸을 이끌고 퇴근 중인 한구. 따분한 표정으로 운전을 하고 있는데, 신호에 걸리는 차. 그의 차가 잠시 멈추자 입에서 절로 욕이 나온다.
“ 아이씨.. 진짜.. 병원이 어떻게 돌아가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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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도 지긋지긋했다. 병원 내의 정치세계. 의사들끼리의 자리싸움, 티오 나눠먹기.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힘없는 환자들이나 의사들.
“ 후.... ”
절로 나오는 한숨. 어제 오후, 최인혁 수술 금지령. 친구 놈이 부당하고 굴욕적인 대우를 받고 있는데도 그로써는 어떻게 해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지금 한구의 심정이 이렇게 답답한 것은, 단순히 인혁이 친구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참나.. 이 병원에 그만 한 써젼이 어디 있다고.. 정말 꼴도 보기 싫었다. 지방에 있는 신설병원인 해운대 세중병원에서 다들 과장자리들 하나씩 쥐고 있다고 으스대는 꼴들이란.. 마취과 경력만 17년째, 매일 수술 장에서 병원 내 모든 칼잡이들과 호흡을 맞춰본 그. 현장에서 그들의 실력과 정신상태를 가장 잘 알 수밖에 없는 자리. 다들 과장이나 주요직을 맡고 나서는 본인들이 편한 정규수술만 하려하며 모두들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에만 바빴을 뿐, 누구 한명 자신을 희생해서 위급한 환자를 돌보려는 의사는 아무도 없었다. 정작 수술 하고 싶어도 실력이 안 되는 펠로우, 레지던트들한테 미루기나 했지.. 이 병원에 그런 의사는 단, 한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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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혁 그놈이 유일했다. 자신의 모든 걸 희생해서라도 환자를 살리고야 마는 그놈.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한구. 같은 의사로써 인정할 수 있는 유일한 놈인데..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하.. 그런 놈에게 수술을 하지 말라니. 제 발로 병원을 나가라는 소리밖에 되질 않았다. 정말 치졸하고 옹졸하고 비겁했다. 절로 나오는 한숨. 그저 지금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은 한 가지. 어떻게 든 방법을 찾을 때까지 그놈이 조금만 더 버텨주길, 그러길 바라는 수밖에 없는 한구였다. 그러나 그때, 불안하게 울려대는 그의 휴대폰.
[ 삐리리리릭- 삐리리리릭- 삑- ]
“ 예, 여보세요. ” “ 과장님!! 큰일났습니다!! ” “ 뭐야, 무슨 일이야? ” “ 지금 5세 남아 TA환자가 실려 왔는데요. 혈압 60대에 응급수술 필요하다는데요!! ” “ 왜, 당직 어디갔어? 아유.. 오랜만에 집에 좀 들어가려고 했더니만, 잠깐만 차 좀 돌 리고.. ” “ 아니요!! 그게 아니고요!! 집도의가 최인혁교수님 이랍니다. ” “ ....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외과당직은 어쩌고? ” “ 그건 모르겠는데요!! 최인혁교수님 수술금지 아니었습니까? 어떻게 할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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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깐, 잠깐만, 일단 수술실은 준비해놓고 있어!! 대신 수술실 열어준다는 소리는 아 직 하지 말고!! 나 10분내로 들어갈테니까. 기다려!! ”
전화를 끊은 한구. 결국 우려하던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 이 자식..! 수술도 없는데 집에 들어가서 쉬라니까.. 결국에!! ’
큰일 났다. 신선생도 아직 출근 전 일 텐데.. 지금 병원에, 그놈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운전을 하며 서둘러 어디론가 전화를 하는 한구.
[ 뚜르르르르- 뚜르르르르- 삑- ]
“ 여보세요. ” “ 어! 신선생!! 나 지과장인데!! 지금 어디에요?!! ” “ 지과장님? 과장님이 무슨 일이세요? 저 지금 출근 하려고 버스 안에 있는데요? ” “ 지금 병원으로 빨리 와요!! 최교수 지금 수술 들어간다고 하니까!! 말려야 돼!! ” “ ...네?! 그게 무슨.. ” “ 자세한설명은 못하고! 지금 그놈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일단, 내가 먼저 가 있을테니까!! 빨리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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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네! 알았어요!! ”
한구는 전화를 급하게 끊어버리고는 자동차의 속도를 높인다. 빠르게 세중 병원으로 향하는 그의 차.
[ 부우우우웅-- ]
한편, 한구의 전화를 받고 불안해진 은아. 자세한 상황은 모르겠지만, 지금 그가 수술에 들어가 버린다면, 병원에서 쫓겨날 것이 분명해보였다. 멀쩡한 사람을 수술금지까지 시킨 그들이었는데.. 인혁을 쫓아내지 않을 리 만무했다. 서둘러 버스에서 내리는 그녀. 뒤에 오는 택시를 바로 잡아탄다.
“ 아저씨! 해운대세중병원으로 가주세요!! 최대한 빨리요!! ”
마음이 급한 은아. 설마, 설마 하며 우려했던 일이 결국 터져버렸다. 인혁은 그런 사람이었다. 죽어가는 환자를 모른척할 수 없는 사람. 자기가 어떤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무슨 일을 감수해서라도 환자를 살려내고야 마는 사람. 세중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그런 사람이란 걸 모를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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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수님.. 제발.. ’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 그들의 속셈이었다. 분명히 그가 환자를 지나치지 못할 거란 사실, 그래서 그들이 내린 명령을 어길 거라는 사실, 인혁이 그런 사람이란 걸 알기 때문에 그걸 역이용한 것이었다. 이건 명백히, 그를 병원에서 쫓아내기 위한 수작이었다. 문제는 그런 사실을 그도 알고 있을 거라는 것. 제발 아니길.. 제발 아니시길.. 인혁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어서 더 불안한 은아. 초조한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서둘러 병원으로 향하는 그녀였다. 잠시 후, 응급실내의 소생실, 응급실에 앞에 도착한 한구가 설마 설마하며 소생실 안 쪽을 들여다보는데, 역시나 환자를 보고 있는 인혁의 뒷모습이 보인다.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바뀌며 소생실로 들어오는 한구. 보호자가 듣지 못하게 간신히 화를 참으며 작은 소리로 입을 연다.
“ 야, 너 지금 뭐하는 거야? ” “ 어, 왔어? ”
그러나 한구를 발견하고서도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인혁. 한구는 그런 그의 모습에 더 화가 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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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보는 눈들이 없는 곳으로 가야겠다 싶어 그의 팔을 잡아끌며 말한다.
“ 야, 나와 봐.. 나와 봐! ”
인혁은 잔뜩 열 받은 듯한 한구의 표정을 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를 따라 나선다. 그런 그를 소생실과 떨어진 조용한 곳으로 데려가는 한구. 일단, 화를 삭이고 그를 설득해보려 한다.
“ .... 너 수술 금지야..! 온 병원이 다 아는 얘길 내가 또 해야 돼? ” “ ..... ” “ 내가 나병국 과장더러 콜을 하라고 하든, 외과에 직접얘기해서 어떻게든 콜할테니 까. 넌 빠져. 모른척하고 있으라고!! ” “ .... 꼭 나여야 한다는 오만은 없다..! 누구라도 저 환자 수술하겠다면 내 기꺼이 지 켜볼게! 그러니까, 수술장부터 좀 열어줘. 응? ”
역시나 설득당하지 않는 인혁. 오히려 그가 환자를 위해 수술장을 열어달라며 간절한 눈빛으로 한구를 설득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고 할 말이 없는 한구. 그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 수술만큼은 이놈을 위해 막아야했다. 그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을 찾아온 은아. 한구는 마침 잘됐다는 듯 서둘러 그녀를 부른다.
“ ...하... 어, 신선생 여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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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구의 말에 살짝 놀라 뒤를 돌아보는 인혁. 아직 출근시간 전인데.. 정말 그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눈앞에 서있었다. 아마도 한구의 연락을 받고 온 모양이었다. 그녀를 보자마자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 앉는 인혁.
“ ... 어떻게 하신데요.. ” “ 설득 좀 해봐. 나 외과에 전화 좀 해볼게. ”
답답한 듯 약간의 욕을 내뱉으며 어디론가 전화를 하는 한구. 천천히 인혁을 바라보는 은아. 그런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 있는 인혁. 그는 은아와 도저히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어제 수술금지를 당한 자신 때문에 눈물까지 흘려주며 억울해하던 그녀. 지금까지 외상센터에 닥쳐오는 풍파를 온몸으로 막아준 그녀. 그녀한테 만큼은.. 설득 당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고개를 숙인 그. 그녀가 그의 옆으로 다가와 앉으며 답답하다는 듯이 입을 연다.
“ 이 수술.. 들어가면 끝이에요 선생님... 아시잖아요..!! 이런 사태 예견하고 메일 보냈 다는 거.. ” “ ... 이런 걸 원했을까요. ” “ ...그렇죠. ” “ ...두려워서 웅크리고 있는 거, 비겁하게 환자 죽어가는 거 그냥 손 놓고 지켜보는 거, 내 자리 지키자고, 환자 모른 척 피하는 거..!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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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고개를 돌려버리는 은아. 또.. 또.. 그의 말이 가슴을 찔러온다. 또 그가.. 사람의 양심 가장 깊숙한 곳을 쥐고 흔들어버린다. 누구나 아는 얘기. 그러나 누구나 함부로 할 수 없는 얘기. 그가 또 설득하려고 하고 있었다. 환자를 위해서 라고.. 환자를 위해서 라고.. 하지만요 교수님.. 그러면 지금껏 버텨온 우리는.. 아니, 교수님은요..? 이 수술을 하고나면 그가 쫓겨날 것이 분명 했다. 도저히 이 번 만큼은 설득당해 줄 수 없는 은아. 하지만 그런 그녀를 보며 작은 미소를 머금는 인혁. 그녀가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랬다.
“ .... 내가 그런 의사 되길 바래요..?”
그러나 그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잠깐 눈만 마주치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버리는 그녀. 그가 이 세상 모든 환자를 살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모두들 그렇게 살아간다고 말하고 싶었다. 어떤 때는 양심도 팔면서.. 어떤 때는 외면해 가면서.. 세상에 그 어떤 누구도 자신의 어떤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지 않는다고.. 그게 인간의 힘에 한계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자꾸 그것을 뛰어넘으려 했다. 그래서 힘들어 했다. 그런 그를 지켜보는 게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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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런 은아를 보며 다시 입을 여는 인혁. 내 마음을 알아주는 유일한 사람. 제발.. 그녀라도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했다. 제발.. 그녀라도 내 결정을 이해해줬으면 했다.
“ ... 칼잡이가.. 죽어가는 환자 두고 수술 안 하면은 그거는.. 의사 아니에요.. ” “ 트라우마센터가 생긴다면요... ”
예상치 못한 그녀의 대답에 살짝 표정이 굳는 인혁. 이게 아니었다.. 이게 아니었다.. 우리가 함께해온 이유는 이게 아니었다..
“ ...왜 이렇게 변했어요..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요. ” “ 선생님이 여기계시길 바라니까요. 이 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니까요! 다른 병원 은!!! 그나마 외상센터를 운영하지도 않으니까요..!! ” “ 저 아이는 생명이 걸린 문제고.. 나는 자리가 걸린 문제에요. 사람목숨 걸고 지킬만 한 자리 아니에요!! ” “ .... ”
이어지는 침묵. 그저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두 사람.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서로 같으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인혁이 그녀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생길지도 모르는 외상센터 때문에,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이 의사라는 자리를 지키기 위해 눈앞에 환자를 죽어가게 내버려 둘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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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아가 그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외상센터가 생겨야지 더 많은 환자를 살릴 수 있었다. 외상센터를 위해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해온 2년이 넘는 시간. 그 시간들을 한순간에 무너지게 할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고생만 해온 그를 위해서.. 절대 그렇게 놔둘 순 없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인혁. 그를 바라보는 은아. 양보할 수 없는 두 사람. 그렇게 조금씩 멀어져 가는 우리. 우리가 함께해온 이유. 우리가 함께해온 시간. 그 시간동안 당신과 내가 쌓아온 믿음. 그 시간동안 우리가 흘린, 피보다도 진한 땀과 눈물. 그 어떤 무엇보다도 소중했던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 우리사이에 그 어떤 무언가.. Some thing.. . . . . . ( 다시 과거시점 ) 2010년 10월 중순, 서울로 헬기 컨퍼런스를 다녀온 일주일 후, 한가로운 오후,
중환자실에서 환자케어를 마친 후, 응급실로 돌아온 인혁과 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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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트라우마센터로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누가 두 사람을 부른다.
“ 어이, 최교수~!, 신선생~! "
익숙한 목소리. 오랜만에 트라우마센터로 놀러온 한구가 양 손에 커피를 든 채로,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야, 커피나 한잔 하자. 아.. 근데, 커피가 하나인데. ”
은아와 인혁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는 한구. 커피를 두 잔밖에 안 사온 터라 조금 난감해하는 그였다. 그러나 인혁의 말로 인해 바로 사라져버리는 걱정.
“ 나는 됐어. 아까 아침에 마셨어. ” “ 니가? 너 귀찮아서 커피 사러 안가잖아? ” “ 나야, 신선생이 사다주니까. ” “ 아아, 그럼, 신선생은요? 신선생도 마셨어요? ”
커피를 안 마셔도 된다는 인혁의 말에 바로 옆에 있는 은아를 향해 묻는 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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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그녀도 벌써 마신 듯한 눈치다. 그러자 김이 새버린 한구가 혼자서 궁시렁 궁시렁거린다.
“ 에이.. 오랜만에 얘기나 할까 해서 기껏 사왔더니, 그럼 남은 한잔은 어떻게 해야되 나..? ” “ 아, 그러면 주세요. 교수님 나눠마실래요? ”
또 하필 제일 큰, 라지 사이즈를 사온 한구. 은아는 그 많은 커피를 버리게 될까봐 아까워서, 그의 손에 있는 잔을 얼른 넘겨받으며 인혁에게 묻는다. 그녀의 말에 조금 고민하던 인혁. 곧,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대답에 그녀가 얼른 센터 안으로 들어가더니 머그잔 하나를 가져와 커피를 반 정도 컵에 나누어 붓는다.
“ 여기요 교수님, 이 정도는 마실 수 있으시죠? ” “ 예, 뭐 이 정도는.. ”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한구. 왠지 모를 분위기에 인혁의 표정을 슬쩍보는데, 은아와의 대화에서 조금 묻어나는 웃음기. 한구는 그런 인혁을 보며 고개를 잠시 갸웃거린다. 그러다 커피를 마시려 트라우마센터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어두운 사무실, 책상 뒤로 정신없이 쌓여진 박스들과 선반에 쌓여진 각종 응급실 물품들, 그리고 바닥에 널브러진 침대와 그 위에 쌓인 자료들. 셋이서는 앉아있기도 마땅치 않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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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무실 밖으로 나오며 투덜거리는 한구.
“ 야, 안되겠다~ 여긴 올 때마다 느끼지만.. 뭐 앉을자리도 없네! ” “ 참나.. 누가 오랬나? ” “ 하, 내가 언제는 니가 오란다고 오고, 오지 말란다고 말고 하는 놈이냐~? 뭘 새삼스 럽게. 아무튼 오랜만에, 저기 밖으로 가서 마시자, 신선생도 올라 갈거죠? ” “ 아, 저는 자료정리할 게 남아가지고.. 그냥 두 분이서 얘기 나누세요. ” “ 그래요? 음, 그럼 뭐 어쩔 수 없네. 야, 올라가자. ”
그를 툭 치며 먼저 앞장서려는 한구. 인혁은 한구를 따라나서기 전에 그녀에게 신신당부를 한다.
“ 그, 자료정리는 내가 할 건 남겨둬요. 혼자서 다하지 말고. 그리고 환자 들어오거나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콜하고요. ” “ 아이구, 알았어요~ 교수님도 잔소리는, 자료정리는 알아서 할테니까. 다녀오세요~ ” “ 거, 잔소리는 무슨 잔소리.. 또 혼자 다할까봐 그러지. 아무튼 갔다 올게요. ” “ 네~ 다녀오세요! ”
그녀의 인사를 듣고는 슬쩍 웃으며 다시 한구를 따라나서는 인혁. 한구는 그런 그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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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몇 분 후, 2층 테라스에 도착한 두 사람. 인혁이 난간에 기대자마자 같이 난간에 기대며 뭔가 음흉한 눈빛으로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한구. 인혁은 한구의 부담스런 눈빛에 왜 그러냐는 듯이 쳐다보기만 하다가 그 부담스런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연다.
“ 뭐? 왜 그렇게 쳐다봐? ” “ 음... 너 요즘 무슨 좋은 일 있냐? ” “ 좋은 일은 무슨.. 사무실 저래 된 거 안 보이나. ” “ 그러니까 내말이~ 병원까지 떠날라고 했던 놈이.. 그 구석진 사무실로 가고 나서 더 밝아진 게 이상하잖아~ 나야 니가 옛날 모습이 돌아와서 좋긴 하다만.. 사람이 갑자기 달라지니까~ ” “ 허, 달라지기는 무슨.. ” “ 아니야~ 아니야~ 맨날 무표정이었던 놈이, 별말도 안했는데 피식피식 웃지를 않나.. 확실히 달라졌어~!도대체 우리 최교수가 왜 그럴까아~? ”
요즘에 자신에게는 연락도 잘 안하는 인혁. 은아와만 너무 붙어다니는 그가 부럽기도하고 조금은 섭섭하기도 한 마음에 괜히 그를 조금 놀려주려는 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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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뭔 말이 하고 싶은데. ” “ 음.. 신선생 때문인가? ” “ ....?.... 뭔소리야. ” “ 너 요즘 니가 신선생 앞에서만 피식피식 웃는 거 알긴 아냐? 그리고 뭐? 자료정리 할걸 내버려두라고? 남들한테는 생전 안하던 걱정까지 해주고 말이야.. 내가주니까 안 마신다던 커피를 신선생이 주니까 바로 마시겠다고 하질 않나.. 도대체 최인혁이가 언 제부터 이렇게 코디네이터 말을 잘 들었나? ” “ 미친놈..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그거야 그냥 신선생이 잘 챙겨주니까 그러지. ” “ 이봐, 지금도 신선생이..! 하하, 알았어~ 알았어! 그만한다~ 그만해! ”
한구에게 지금 뭔 말을 하냐는 표정으로 살짝 노려보는 인혁. 그의 표정에 한구가 하던 말을 장난스레 멈춘다. 그리고 다시 커피를 홀짝거리다가 또 말을 꺼내는 한구.
“ 근데 신선생이 아침마다 커피도 사다주고 그래? ” “ 어, 같이 회의하느라고. ” “ 이야~ 이제 챙겨주는 사람도 있고 좋겠어어~? 그래서 그렇게 표정이 피는 구만? 이젠 내가 커피 안 가져와도 되겠네~! ” “ 야, 니가 몇 번이나 왔었다고. 참나.. ” “ 왜이래~ 적어도 너보다는 많이 샀지 내가~ ” “ 참나 허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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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구의 실없는 농담에 또 얼굴에 웃음기를 띠는 인혁. 확실히 그가 달라지긴 달라졌다고 생각하는 한구. 자신도 그동안 그를 챙겨준다고 챙겨줬지만, 이 정도로 뭔가 밝아진걸 보지는 못했었다. 역시.. 은아가 그의 옆에 딱 붙어서 챙겨주니까 뭔가 다르긴 다르구나 싶고, 그의 옆에 그녀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흐뭇한 생각을 하며 커피를 마시던 그. 원래 물어보려고 했던 일을 묻기 위해 다시 인혁을 돌아본다.
“ 야, 근데 외상센터는 어떻게 됐어? 아직도 진전없어? ” “ 글쎄, 아직은 지켜봐야겠는데, 그래도 이번에는 정부에서 진짜 만들 생각이 있긴 한 건지.. 헬기도 들여온다고 그러고, 6개 병원에 800억씩 지원해준다고도 그러고.. ” “ 800억? 이야.. 800정도만 지원 되면, 진짜 걱정이 없겠는데.. 그지? ” “ 음.. 뭐 그렇기는 한데, 조금 비현실적인거 같지 않나..? 한 번에 그렇게 많이 지원 해줄 수 없을 거 같아 보이는데, 이러다가 또 무산되고 엎어지고 그럴 수도 있고. ” “ 아.. 하긴, 한두 번이 아니니까. ” “ 그러니까. 뭐.. 나는 상관이 없는데, 신선생이 조금 걱정이야. ” “ 신선생? 왜? 열심히 잘하고 있잖아. ” “ 그래서 문제라는 거지 ...너무 열심히 해주니까. ” “ ...?... ” “ 뭐.. 지금, 신선생이 외상센터 준비한다고, 새로 프로그램도 개발하고 있고.. 우리 센 터 홍보도 잘하고 있고, 뭐 수술관리도 잘 해줘가지고.. 나는 그냥 수술만 열심히 하 면 되긴 하는데, 지금 딱히 병원에서 기대를 걸고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고, 정부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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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야 뭐.. 또 엎어질 수도 있는 거니까. 괜히 나중에 혼자 실망할까봐 그러지. 너무 열 심히 하다보면 빨리 지쳐버리잖아. 그게 걱정이지.. ” “ 음.. 그건 또 그렇네.. 야, 근데, 정부에 외상센터 신청하려면 어느 정도 갖춰져 있어 야지 지원할 수 있을텐데~ 신선생 아니었으면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유지 가능했겠냐? 그래도 유지라도 되니까 신청이라도 해볼 수가 있잖아~ ” “ 허허.. 그렇지. ” “ 그럼~! 너 혼자있었으면 절대 지금까지 못버텼지. 내가 니 상태 어땠는지 뻔히 아는 데. ” “ .... 뭐 어쨌든, 심포지엄이며, 컨퍼런스며 열심히 준비하고 있으니까.. 이젠 병원에서 지원만 좀 해주면 좋은데.. 아직은 잘 모르지. ” “ 지원이라... 흠... 근데 아직까지는 병원지원은 아무래도 힘들지 않냐..? 교수회의 때 마다 보직교수들이 외상센터 적자 걸고 넘어지는데.. 그리고 특히, 정형외과가 돈을 제일 많이 버는데 너한테 아주 적대적이야. 그건 외과도 신경외과도 흉부외과도 다 마찬가지고.. 너도 알잖아. ” “ ...그렇지... 뭐, 아무튼! 그때까지는 우리 힘으로 버텨봐야지 뭐, 그래도 만약에 정부 지원을 받아낼 수 있다는 확신만 있으면, 병원에서 어떻게 수술실이랑 중환자실은 작 게라도 확보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러면 환자도 더 많이 받을 수 있을 테니까. 그때 되면 병원에서도 좀 지원해주지 않겠나? ” “ 그지~ 아무래도 외상센터 유치하면 큰 도움이 되니까~ 그렇게만 된다면 병원에서도 어느 정도는 지원을 좀 해주겠지~ 근데 정말.. 병원 지원 하나 없이 정부 지원받는 일 이 쉬운 일이 아닌데.. 그래도 니가 버텨볼 생각 하는 거 보니까, 신 선생이 정말 잘 도와주고 있나봐~? ” “ 그러게. ”
대답을 하며 피식 웃는 인혁. 그러다가 왜 자꾸 피식거리냐는 한구의 말이 생각나 또 다시 피식-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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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생각해도 요즘 좀 자주 웃는 것 같기도 하고, 그저 일하는 게 즐거워서 그런 거 같은데.. 정말, 신 선생 때문인가..? 어찌됐든 간에 정말 그녀가 외상코디네이터로 있어줘서 다행이었다. 그동안 자존심 때문에 떠나는 사람은 미련 없이 보내주던 자신이었는데.. 그녀는 달랐다. 왠지 조금은 욕심이 나는 사람. 조금 더 오랫동안 함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날 오후, 해운대 세중병원, 오랜만에 한가한 응급실에 전화한통이 걸려온다. 데스크에 있던 간호사 한명이 전화를 받는데..
/ 따르르르르릉- 따르르르르릉- /
“ 네, 세중병원 응급실입니다. ...트렌스퍼요? "
마침, 옆에서 환자기록 데이터를 찾던 은아. 간호사의 입에서 트렌스퍼 얘기가 나오자 잠깐, 기다리라는 신호를 보내고, 서둘러 사무실로 뛰어가서 인혁을 데리고 나온다. 바로, 뛰어나와 전화기를 넘겨받은 그. 전화기너머로 다급한 의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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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전화바꿨습니다! 다시 말씀해주세요! ” “ 여기 창원병원인데요. 아침 9시경에 등산 도중 추락한 60대 여성환자입니다!! 혈압 90에 60이고 고관절 골절하고 비장파열에 간 열상까지 동반 되서 상태 심각합니다!! ” “ 예?! 아침 9시요?! 그런 초응급환자를 왜 이제야.. 아니! 뭘 하느라 그렇게 지체됐 습니까!! ” “ 아, 그게.. 진단하실 수 있는 교수님이 없으셔가지고, CT촬영이 늦어지느라.. ” “ 하.. 창원이면 여기까지 1시간 20분은 걸릴텐데, 오는 동안 환자 버틸 수 있겠습니 까?! ” “ 수액이랑 피 주면서 가보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는 지금 수 술장도 없고, 수술할 의사도 없어서요..!! ” “ 하, 알겠습니다!! 받겠습니다!! 보내세요!! 수액 풀 드립하시고 피 많이 준비하시고 요, 에피 주면서 와야합니다!! ”
곧, 전화를 끊는 인혁. 눈을 꽉감고 고개를 숙이며 빠르게 머리를 굴려본다. 그런 그에게 걱정스러운 말투로 묻는 은아.
“ 교수님, 지금 저희도 수술장 없잖아요..! 지금 정규수술 꽉 차있을 텐데.. 어쩌시려구 요? ” “ 환자오려면 아직 시간있으니까.. 어떻게든 만들어 봐야죠. 김도형선생! ” “ 예!! ” “ 정형외과에 콜하고!! 인턴시키지 말고, 자네가 직접 증환자실 좀 알아봐. 난 올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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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수술실 좀 알아볼 테니까. 신선생은 수술도구랑, 수술간호사 여력이 되는지 좀 알 아봐주고요. ” “ 알겠어요! ”
은아가 수술간호사를 알아보기 위해 수술실 쪽으로 뛰어가는데, 옆에 있던 도형이 인혁에게 걱정스럽게 묻는다.
“ 저, 교수님! 60대 여성환자라면서요, 환자가 수술을 버틸 수 있겠습니까? ” “ .. 걱정스럽긴 하지만, 손놓고 보고만 있을 순 없잖아. 환자가 도착했을 때 상태가 어떨지는 모르겠지마는, 빨리 수술을 해야 살수 있다면 최대한 빠르고 신속하게 수술 마치고 중환자실로 보낸다. 그러니까 자네 빨리 중환자실부터 알아봐. ” “ 예..예!!! ” 1시간 후, 간신히 수술장을 구한 인혁이 응급실로 뛰어내려오고, 도형과 은아가 모여있는곳으로 가며 소리친다.
“ 중환자실 어떻게 됐어?! ” “ 중환자실은.. 지금은 당장은 자리 못 내준답니다. 대신, 내일 아침에 신경외과 쪽에 서 확실히 한자리 빈답니다. 어떻게 할까요? ” “ 하... 그럼 일단 회복실에 자리 비워두라고 연락해. 신선생은요? ” “ 수술간호사, 수술도구 다 보내줄 수 있데요. 수술실은 어떻게 됐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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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6번방 30분 후면 끝난다네.. 이비인후과 수술 미루기로 했어요..” “ 그래도 다행이네요. 수술실이라도 구해가지고. ” “ 뭐.. 그렇죠, 그럼.. 어쩔 수 없으니까. 환자 수술 끝나면 일단 오늘 밤만 회복실에 두는 걸로하고, 어떻게든 내가 케어 해봐야지 뭐. 나 없을 땐 신선생이 체크 좀 잘 해 주고요. ” “ 네, 알았어요. 전 수술준비하러 올라가 볼게요! ”
인혁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해주고 은아가 다시 수술실 쪽으로 올라간다. . . . . . 20분 뒤,
[ 삐-- 뽀-- 삐-- 뽀--]
응급실에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 곧이어 구급대원들이 환자를 실어오는데, 환자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응급대원의 다급한 목소리.
“ 여기 오는 동안!! 어레스트 한번 났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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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빨리 소생구역으로 옮겨!!! ”
인혁의 지휘 하에 환자가 바로 소생실로 옮겨지고, 작은 체구의 60대 노인. 이미 수액이 달려있는 환자에 몸에 몇 개의 피와 수액이 더 연결되는 동안 인혁이 환자의 상태를 살피는 데, 추락으로 인해 성한 곳이 없는 환자의 상태. 이미 배가 심하게 부풀어 올라와있고 고관절에 정강이뼈까지 골절되어있는 상태였다. 트렌스퍼 전, 90을 밑돌았다는 환자의 혈압은 이제는 60도 채 되지 않았다. 다시 어레스트가 온다면 장담할 수 없는 환자의 생명.
“ 수술실 준비됐어요? ” “ 거의 다 끝났어요 한 10분후면 올릴 수 있을 거 같은데요. ” “ 이, 출혈이 너무 많아서 버티기 힘들텐데! 준비 끝나면 수술실로 바로 들어갈 수 있 게 일단 올립시다!! 심장마사지하고, 피 계속 짜면서 올려야 돼!! 배 먼저 열고 있을 테니까!! 정형외과 빨리 내려오라고 해줘요!! ”
그렇게 인혁이 수술준비를 위해 뛰어 올라가고, 도형과 인턴들에 의해 환자도 수술실로 올려진다. 잠시 후, 수술실, 수술을 위해 손을 씻는 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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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 과정 중 가장 긴장되는 순간, 비장한 표정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그. 침착하자.. 침착하게.. 매우 위급한 환자의 상태, 그의 손끝에 환자의 생명이 달려있었다. 인혁은 손을 씻으며 어떻게 수술해야 환자를 살릴 수 있을지 어떻게 최대한 신속하게 수술을 끝낼 수 있을지. 놓치는 부위는 없는지, 어디를 먼저 손대야 할지, 생각하고 또 생각해본다. 손을 다 씻은 후 이내 수술실로 들어서는 인혁. 서둘러서 수술복으로 갈아입는데, 그가 옷을 다 입기도 전에 환자의 심박동이 불규칙해진다.
[ 뚜뚜뚜뚜- 뚜뚜- 뚜뚜뚜뚜- 뚜뚜- ]
“ 어레스트입니다!!! ” “ 빨리 마사지해!!! 제세동기준비해줘요!! ”
어시스트를 하기위해 서있던 인턴, 바로 마사지를 시작하고 인혁은 수술복을 다 입지도 못하고 제세동기를 받아든다.
“ 200줄 챠징!! 손떼!! 하나! 둘! 셋! 샷!”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순간 공중으로 뜨는 환자의 몸. 그러나 돌아오지 않는 심장. 계속되는 심장마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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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0줄 챠징!! 손떼!! 하나! 둘! 셋! ”
순간, 다시 공중으로 뜨는 환자. 다행히도 삐- 삐- 거리던 심박측정기의 소리가 다시 안정을 되찾는다.
“ 돌아왔습니다!! ” “ 수술복 좀 다시!! 마사지 멈추지말고 계속해!! ”
다시 수술복을 입고는 제자리에 서는 인혁.
“ 교수님! 배 열면 바로 혈압 떨어질텐데요?! ” “ 다른 방법이 없잖아!! 어차피 지혈 못하면 다시 어레스트야!! 피 더 준비해주세요!! 메스!! ”
바로 시작되는 수술, 복막을 열자 엄청난 양의 피가 복부에서부터 쏟아지고, 인혁은 미친 듯이 거즈를 집어 환자의 배에 집어넣는다. 그렇게 지혈을 한 후, 환자의 피를 썩션으로 빨아들인 후, 간신히 시야를 확보하는 인혁. 그러나 다시 오는 어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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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삐------------------- ] . . . . 잠시 후, 수술실 앞, 힘없이 수술장을 나오는 인혁. 그런 그를 기다리고 있던 은아와 등산복차림에 한 노인이 그에게 다가온다. 70대 초반 쯤으로 보이는 그 노인의 머리에는 붕대가 칭칭 감싸져 있었다.
“ 의..의사선상님, ..저희 아내는 어떻게 됐습니꼬..? ”
아마도, 지금 수술실에 있는 환자의 보호자인 듯 했다. 이미 무언가를 예감하고 있다는 듯한 노인의 표정. 죄책감어린 시선으로 그 노인을 바라보는 인혁. 이내 힘겹게 입을 연다.
“ .... 환자분.. 살리지 못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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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는 노인의 눈에 초점이 흐려진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직접 들으니 충격이 더 큰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비틀거리는 노인. 그가 얼른 노인을 잡아 부축해주고는 천천히 의자에 데려가 앉혀드린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인혁. 마치, 1년 전에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이런 순간이 올까봐.. 그렇게 필사적으로 일했던 건데.. 의사 일을 하면서 가장 두려운 순간이 또다시 그의 앞에 다가와 버렸다. 고개를 숙이고는 인혁의 얼굴은 보지도 못한 채 천천히 입을 여는 노인.
“ 아내를.. 좀 만나야겠습니다.. 볼 수 있게 해주이소.. ” “ 예.. 따라오시죠.. ”
몇 분 뒤, 회복실, 인혁과 은아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회복실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노인. 눈앞에 보이는 침대와 아내의 몸에 덮여있는 하얀 천. 노인이 손을 들어 조심스레 천을 걷어내고.. 이내 자고 있는 듯한 아내의 얼굴이 그의 눈에 보인다. 실감이 나지 않아 눈물도 흘릴 수 없는 노인. 인혁은 그 모습을 보고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이내 결심을 굳히고 힘겹게 입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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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송합니다.. 최선을 다했지마는.. 살리지 못했습니다.. 이복자씨.. 10월 17일 오후 3 시 10분에 돌아가셨습니다.. ”
노인은 덤덤히 인혁의 이야기를 듣더니 말없이 아내를 바라보다가 곧, 차갑게 식어버린 얼굴을 쓰다듬어준다. 힘겹게 입을 여는 노인.
“ 17살에.. 나이 많은 놈한테 시집와가.. 몇 십 년 동안 고생만 했십니더.. 다니던 일 정리하고.. 이렇게 나이 들어서야 여유가 생겨서.. 이제야 쪼매 잘해줄라카는데.. 이렇 게 혼자 가버리면 우짜노.. ”
덤덤한 듯 말을 이어갔지만, 목소리엔 슬픔이 가득하다. 숙연해지는 회복실 안.
“ 엊그저께가 같이 산지 45년째 되던 날이었습니더.. 그날... 같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자고.. 그래 말했었는데.. ”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노인. 환자에 얼굴에 떨어지는 노인의 눈물. 노인은 환자의 얼굴에 떨어진 눈물을 슥- 하고 닦아주며 눈물을 삼키며 다시 입을 연다.
“ 임자.. 이렇게 가면 나는 우짜라고.. 나 임자 없으면 못 사는 거 알잖소.. 그동안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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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기대온 세월이 얼만데.. 이렇게 나 혼자 두고가요.. 미안해요.. 내가.. 내가 같이 산 에만 가자고 안했어도.. ”
그렇게 노인은 한참을 소리 없이 울기만 했다. 그 주름진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던 눈물이 환자의 몸을 덮고 있는 하얀 천을 축축히 적셔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이제 환자를 보내야 될 때가 되자, 슬픔을 삼킨 채 다시 담담한 표정으로 일어서는 노인. 그리고 노인의 마지막 말.
“ 그동안 정말 고마웠소. 그리고 정말 미안했소.. 정말로, 고생 많았구려.. 이젠 좀 편 안해 져야지.. 편안히 보내줄테니까.. 마음 편하게 가소.. 임자 외롭지 않게.. 곧.. 따라 가리다.. ”
그렇게 노인은 덤덤히 회복실 밖을 나선다. 남 얘기 같지 않은 노부부의 이야기.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인혁과 은아의 마음이 슬픔으로 일렁인다. 그날 저녁,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홀로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인혁.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진 듯한 얼굴. 노인의 그 마지막 말을 머릿속에서 잊을 수가 없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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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정말 고마웠소.. 그리고 정말 미안했소.. 정말로.. 고생 많았구려.. 이젠 좀 편 안해 져야지.. 편안히 보내줄테니까.. 마음 편하게 가소.. 곧.. 따라 가리다.. 곧.. 따라 가리다.. 곧.. 따라 가리다.. /
깊은 생각에 빠져있다가, 이내 몸을 돌려 달력을 보는데, 일주일 뒤가 그날이었다. 10월 22일. 어머니의 기일. 다시 생각나는 그 사망한 환자. 지금 생각해보니 어머니 연세랑 비슷했던 거 같다. 그리고 그 보호자였던 노인.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아마 비슷한 연배셨으리라. 저절로 되살아나는 기억. 절로 나오는 한숨.
“ 하아...... ”
잊을 수 없는 그 노부부의 이별모습. 가슴 한 켠이 아려온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도 저런 마음이셨을까.. 다시 몸을 돌려 창가를 바라보는 인혁. 복잡해 보이는 그의 표정. 그런 그의 뒷모습을 사무실 앞에 서서 지켜보던 그녀. 은아는 그의 표정을 보고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문득문득 느껴지는 슬픈 표정. 처음에는 그 표정의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이제는 그 표정을 확실히 구분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는..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와 일하기 시작했던 초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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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서 저 표정을 정말 많이 볼 수 있었지만, 한동안 괜찮아 보였던 그였는데.. 그녀는 아마 아까 사망한 그 환자가 그의 마음을 다시 흔들었으리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자신이 알아챘다는 걸 아는 척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기에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서며 입을 여는 그녀.
“ ... 조금만 일찍 왔다면 살수 있으셨겠죠..? ” “ ..... ” “ 후.. 갈 길이 머네요.. ”
그녀의 말에 그제야 고개를 돌리는 인혁. 은아는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며 말을 한다.
“ 아무리 우리끼리 환자 살려보려고 아등바등해도.. 다른 병원에서 늦게 오면 이렇게 소용없잖아요. ” “ ..... ” “ ....교수님 잘못 아니잖아요... 죄책감.. 갖지 마세요. ”
다시 인혁을 보며 말하는 은아. 이중적 의미였다. 환자에게도, 그의 어머니에게도, 은아는 그가 더 이상 죄책감을 갖지 않았으면 했다. 그가.. 너무 힘들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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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죄책감.... ” “ .... ” “ .....그럴지도 모르죠.. ” “ .... ”
그녀는 어떤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말없이 그를 바라보는 수밖에는..
“ 나 괜찮으니까. 이만 퇴근해요. ” “ 아니에요. 오늘은 저도.. ” “ 할 일 다 끝났잖아요. 내일 또 환자보려면 신선생이라도 쌩쌩해야지. 오늘은.. 나 혼 자 있을게요. ” “ .... 교수님, ” “ 예. ” “ 저랑 술 한 잔 안하실래요? 오늘은.. 제가 사드릴게요. ” “ ..... ”
다시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보는 인혁. 그녀가 눈을 피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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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매우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은아를 보고 고맙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띠우는 그. 조금은 예상하고 있었다. 이렇게 안 좋은 일이 있는 날엔 늘, 자신에게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하는 그녀였으니까. 인혁은 알고 있었다. 왜 그녀가 이런 날에는 꼭 같이 밥을 먹자고 하는지, 아마도 함께 밥을 먹으면서 다시 힘을 내보자고 하는 마음일 것이다. 아마 백 마디 위로의 말보다 그 편이 그에게 더 힘을 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인혁은 자신을 생각해주는 그녀의 진심을 알기에 그녀를 향해 웃어줄 수가 있었다. . . . . .
30분 후, 그의 차안, 말이 없는 두 사람. 인혁은 운전을 하며. 은아는 창밖을 바라보며, 서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언덕길을 오르는 그의 차. 창밖으로 보이는 쓸쓸한 거리. 부산에 늦가을, 불어오는 쌀쌀한 바람에 흩어지는 낙엽이 그들이 타고 있는 차창에 부딪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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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언덕 위 어느 횟집, 부산의 바다와 거대한 다리가 보이는 야경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조금은 쌀쌀한 날씨 때문에 야외 테이블에는 앉지 못하고 식당 안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 사람도 거의 없고 한적한 그 곳. 인혁이 식당 안에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은아 역시도 그를 따라 앉으며 자리를 잡는다. 그렇게 마주보고 앉은 그와 그녀. 조금은 무거운 분위기를 풀어보려 그가 먼저 말을 꺼낸다.
“ 어.. 뭐 먹을래요? 여기 회도 괜찮고 탕도 괜찮은데. ” “ 음, 날씨가 좀 추우니까. 탕으로 할까요? ” “ 아.. 그러면 회도 한 접시 시키고, 탕도 하나 시키고 합시다. 어.. 술은..? ” “ 하, 교수님은 뭐 드실 건데요. ” “ 나는 뭐.. 당연히 소주.. ” “ 그럼 저도 소주요~ ” “ 하, 괜찮겠어요? ”
그의 말에 피식 웃는 은아. 살짝 웃으며 그를 노려보더니 입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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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괜찮아요~ 교수님이나 빨리 취하시기만 해봐요! 제가 저번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 아요? ” “ ...저번에? 저번에 언제? ” “ 참나.. 그새 잊으셨어요~! 교수님 병원 뛰쳐나가신 날! 지과장님하고 두 분 다 취하 셔서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 “ 아아, 뭐 그날은.. 뭐... 흠. ” “ 발뺌하실 생각 마세요~! 또 그러기만 해보세요~! 집까지 모셔다 드리기는커녕 길거 리에 버려두고 갈 거에요! ” “ 거.. 참.. 말을 해도.. 알았어요! 그렇게 안 마시면 되지.. ”
은아의 말에 투덜대면서 주문을 하는 인혁. 나이 지긋한 주인아저씨가 오더니, 주문을 받고, 바로 기본안주와 소주를 갖다 준다. 단 둘이 함께하는 첫 술자리. 소주병을 들어 그녀의 잔을 채워주는 그. 이내 은아도 그의 잔을 채워주고, 서로를 마주보며 살짝 건배를 한 뒤, 잔을 동시에 비워버리는 두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들의 대화
“ 크... 신선생. 나 다음 주에 휴가 좀 낼게요. ” “ ....네..?! 교수님이요? ” “ 허, 허허.. 뭘 그렇게 놀라요. 내가 휴가 쓴다는 게 이상해요~? 허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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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그거는 아닌데.. 맨날 일만 하시던 분이 갑자기 쉬신다고 하니까.. 어디 가세 요? ” “ 허, 왜요. 내가 또 병원 뛰쳐나갈까봐요? ” “ 아잇!! 참.. 꼭 농담을 하셔도..! ” “ 허허허..! 걱정마요! 이렇게 신선생도 끌어들여 놨는데, 이제 내가 먼저 그만두는 일 은 없을 테니까.. ” “ 참..나.. 아시는 분이 그랬어요? 치.. 근데 그러면.. 어디 가시는데요? ” “ 음... 어머니 아버지 고향에 좀 다녀오려구요. ” “ 아.. 음.. 아까 사망한 환자.. 많이 신경쓰이세요..? ” “ 아니, 뭐.. 그것도 그렇지만.. 다음 주가 어머니 기일이거든요. ” “ 아.. 가을에 돌아가셨구나.. 겨울인줄 알았는데.. ” “ ....예...? 방금 뭐라고.. ”
인혁의 물음에 살짝 당황하는 은아. 사실 그동안 그와 같이 일하면서 그와 처음 만났던 그 날을 얘기할까도 생각해봤지만, 왠지.. 그에게 아픈 기억일 것 같아서 한 번도 얘기 하지 않은 은아였다. 언젠가 그의 아픔이 아물었다고 생각될 때, 기회가 된다면, 그때 웃으며 말하고 싶은 그녀. 그래서 오늘도 대충 얼버무려 버린다.
“ 아, 그게.. 그때요! 교수님 집에 갔을 때. 그때 교수님어머님 사진을 봤어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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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보려고 본건 아니고, 그냥 교수님하고 과장님하고 이불 덮어드리고 가려고, 이불 찾으러 들어갔다가.. 그 달력에서 본 거 같아서.. 아니에요..! 제가 잘못기억하고 있었 나봐요. ” “ 아아.. ” “ 진짜로, 일부로 본거는 아니고..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 “ 아니요. 아니요~ 기분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그냥, 우리 어머니사진.. 그거는 한구 놈만 알던 건데.. 허허허, 왠지 신선생한테는 다 들켜버리는 기분이 드네~ 허허.. 신기 하네.. 신선생이 이제 우리 어머니얘기도 알고, 아버지얘기 알고.. 그동안은 내가 누구 한테 집안 얘기해준 적이 없었거든요. ” “ 아... ”
말을 하다가 잔을 채우기 위해 다시 술병을 집어 드는 인혁. 그러자 은아가 그가 들고 있는 병을 달라는 듯 손짓한다.
“ 주세요. 제가 따라드릴테니까. 같이 와놓고 교수님 혼자드시려구요..? ”
그러면서 그의 잔을 채워주는 은아. 이내 자신의 잔도 채운 뒤, 다시 한 번 가벼운 건배를 청한다. 인혁은 그런 그녀의 행동에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잔을 넘기고. 은아도 그를 따라 원 샷을 해버린다. 그러자 살짝 놀라는 그.
“ 아, 신선생은 나 따라가지 말고 천천히 마셔요. 그러다 큰일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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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이~ 교수님 저도 술 그렇게 안 약해요~ 걱정 안하셔도 되요~! ” “ 에헤이~ 아무리 그래도.. 하긴 뭐, 그날도 신선생만 안 취했으니까~ 허허.. 아무튼 그날 정말 고생했어요! 근데 한구랑 나랑 둘 다 취했던 것 같은데, 신 선생혼자 옮겼 나? ” “ 아~니요! 지과장님이 그 와중에 정신을 붙잡고 계시더라구요~ 그래도 교수님 끝까 지 올려다놓고 바로 뻗으시던데요? 헤헤.. ” “ 허허허, 하긴! 아, 근데, 힘들게 집 청소는 왜 했어! 그냥 집에 가면되지.. 거, 괜히 사람 미안하게.. ” “ 하! 미안한건 아세요~? 저야 당연~히 나오려고 했죠!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뭐 좋다 고 계속 있어요.. 계속 있기를.. 그날 교수님 기억 안 나시죠~? ”
은아의 말에 살짝 당황하는 인혁. 사실, 그날 너무 많이 마셨던 터라 술자리 이후에 일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혹시 그녀에게 뭔가 실수한 게 있나 싶어서 조금 불안해지는 그.
“ 아.. 내가.. 흠, 혹시 내가 실수한 거 있어요? ” “ 하이고~ 말도 마세요! 제가 두 분 옮길 수도 없으니까~! 현관에서 주무시는 채로 그냥 두고, 집밖으로 나갈려고 하는데.. 교수님이 갑자기 토를 하시고, 저는 그거 치우 고.. 아유.. 그러다가 집이 하도~ 더러워 가꼬. 그냥 나갈 수가 있어야죠! 결국, 눈에 보이는 거 다 치우고, 교수님이랑 과장님 추우실까봐 이불 덮어드리고.. ” “ 아아.. 흠.. 미, 미안해요. 그런 줄은 몰랐네.. ” “ 치.. 그래도 뭐 이제는 괜찮아요~ 다 지난 일인데요~ 헤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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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다시 몇 번에 잔이 오가고 금세 비워지는 소주 한 병. 외상센터이야기, 진상 환자이야기, 응급실 간호사들 이야기, 뺀질거리는 인턴들 이야기, 병원 지원금 이야기, 한구와 있었던 일들에 대한 이야기, 그의 대학시절 이야기, 그녀의 초보 간호사시절 이야기.. 거의 다 일 얘기였지만, 그 뻔한 일 얘기들을 그렇게도 재밌게 주고받는 두 사람. 이야기가 좋아서인지, 사람이 좋아서인지.. 어느새 인혁은 자신의 잔을 글라스로 바꿔버리고,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한 병이 두 병이 되고 두 병이 세병이 되가는데, 두 사람 다 멈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냥 이 분위기가 좋은 그녀. 병원에서는 늘 외상센터에 관한 얘기가 주였는데.. 그와 이렇게까지 사소한 병원얘기를 툭 터놓고 한 적은 없었다. 얘기를 하다 보니 왠지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도 풀리는 것 같고, 점점 더 그의 새로운 모습을 알아가는 게 좋았다. 평소에는 말이 거의 없는 인혁이었지만, 분위기에 취하면 가끔씩 속 깊은 얘기를 털어놓기도 하는 그였기 때문에 왠지 그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기도 하고, 자신의 이야기도 더 들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은아가 살짝 걱정되는 인혁. 이제 그만 마시라고 조금 말려보지만, 은아는 아직까지 끄떡없다고 다시 건배를 청한다. 그렇게 계속 술자리가 이어지고, 살짝 취기가 오른 인혁과 은아. 취한 탓에 웃음도 많아지고 말도 많아진다. 게다가 평소보다 살짝 들떠있는 두 사람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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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근데요 교수님!! 정말 병원이 너무 하는 거 같아요~! 정말 수술장도 없고.. 중환 자실도 안주고.. 뭐, 그렇다고 콜을 하면 당직이 제때 내려오기를 하나! 야간당직은 죄~ 다 교수님한테 미루고..! 에휴.. 그리고 제~일! 좋은 시간대는, 다~ 정형외과같이 돈 잘 버는 과에서 가져가 버리고.. 우리는 2차수술있어도 맨~날 피곤한 시간대만 주 고.. 힘든 거는 다~ 시키면서, 맨~ 날 대우해주는 거는 찬밥신세고.. 아니, 사람 살렸 다고 욕먹는 경우가 세상천지에 어디있어요~!! ” “ 그거야 뭐.. 어쩔 수 있나.. ” “ ..후.... 하긴 저도, 솔직히 처음에는 교수님이 너무하는 거 아닌가 싶었어요. 인력도 없고~ 수술실도 없는데, 왜 저렇게 고집을 부리시나~! 응급실이야 뭐.. 이 병원이든, 저 병원이든 야간에는 인턴이나 레지던트만 있는 경우가 허다하고.. 야간에 전문의가 제대로 있는 병원이 얼마나 있겠어요오~ 그래서 대부분은 환자들을 다른 병원으로 보 내버리는데.. 근데 교수님은 무리를 해서라도 어떻게든 수술하시고야 마니까~ 다른 의 사들이나 간호사도 힘들고..! 저도 힘들고..! 뭐, 처음에는 좀 힘들었죠. 교수님 따라가 느라. ”
처음엔 자신 때문에 힘들었다는 그녀에 말에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드는 인혁. 사실, 그도 알고 있었다. 늘 무리해서 환자를 받고 그것 때문에 병원사람들과 트러블이 생긴다는 것을.. 갑자기 복잡한 생각이 들어 말이 없어지는 인혁.
“ ..... ” “ 그런데 그렇게 수술하시고 나서도 맨~날 욕먹고, 실력이 이래! 좋으신데도 대우도 못 받고, 쫓아낼라고만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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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씁쓸하게 웃는 인혁. 은아는 그런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살짝 취한 목소리로 갑자기 그를 부른다.
“ ... 교수님..! ” “ 예. ” “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교수님은 안 무서우세요..? ” “ ...뭐가요..? ” “ 그냥 다~요! 음.. 환자 수술하는 것도 그렇고.. 병원에서 망설임 없이 나가려고 했던 것도 그렇고.. 교수님은 진짜로 거침이 없으신 거 같아요. 무서워하는 것도 없고. 두려 워하는 것도 없고.. 그런 거 보면 어떨 땐 진짜 대단하시다고 생각되다가도, 어떨 땐 신기해요. 도대체 어떻게 저러실 수 있나.. 싶기도 하고, 다른 교수님들은 자기자리 잘 못될까봐. 눈치보고 주저주저하고 그러는데.. ” “ 허.. 글쎄.. 뭐.. 외상수술 시작하면서는 그런 거 다 떠나서, 일단 살려야 하니까. 환 자가 살아야 하니까. 일단은 눈앞에 환자만 보기로 했어요. 내가 그렇게 고민하고 걱 정할 시간에도, 환자는 점점 죽어가고 있는거니까. 사치였죠 그런 걱정들도... 근데 아 무리 그래도, 나도 사실 걱정은 되죠. 수술 중에 혹시라도 잘못된 판단을 하지는 않을 까.. 그런 것도 걱정되고, 신선생 말대로 병원에서 욕먹을 일들도 걱정되고.. 뭐, 나도 사람인데.. 걱정이야 되죠. 허허.. 아예 그런 걸 걱정하지 않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 “ 아... ”
인혁을 빤히 바라보던 은아. 그의 솔직한 대답을 듣고나서 고개를 잠시 끄덕이다가 이내 푹 숙여버린다. 하긴, 그도 사람인데.. 그저 지금까지 그런 걱정들을 이겨내며 버텨왔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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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생각해봐도 조금은 바보 같은 질문인 것 같았다. 그런데 다시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그의 음성. 그녀는 진지하게 들려오는 인혁에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다시 그와 눈을 마주친다. 깊은 그의 눈,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한 그의 표정. 조금은 슬퍼보이는 그의 눈.
“ 근데, 신선생. 그런 것들보다.. 내가 제일 무섭고 겁나는 게 뭔지 알아요? ” “ ..... ” “ .... 손도 한번 못써보고 환자가 죽는 거.. 허,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음... 나는 의사에요. 내 마음 속에 두려움들보다, 환자 목숨을 더 중요히 여겨야 하는 의사. 그 게 의사로써 내 일이니까..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니까.. ”
떠오르는 아픈 기억들로 인해 슬픔에 차있으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의 눈빛. 서로 눈을 마주보고 있는 두 사람. 그러나 이내 고개를 숙이며 피식 웃더니, 다시 술을 한잔 따라 마시며 입을 여는 인혁. 자신이 너무 진지했다고 느꼈는지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바꾸며 화제를 돌리려고 한다. 하지만 그를 여전히 진지하게 바라보는 은아.
“ 허.. 이거 괜히 술 마시면서, 허허... 내가 너무 재미없는 얘기들만 하는 것 같네. ” “ 정말.. 대단하시네요 교수님.. 존경스러울 정도로.. ”
정말 진지하게 진심으로 말하는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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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그녀의 진심이 어색하게만 느껴지는 인혁. 갑작스러운 그녀의 칭찬이 조금 쑥쓰러운지 살짝 얼굴이 붉어지고, 괜히 당황해서는 화제를 돌린다.
“ 조.. 존경은 무슨.. 됐어요. 이런 얘기 그만하고 술이나 받아요. ”
그런 그를 보며 살짝 미소를 띠는 은아. 그를 당황하게 하고 싶지는 않아서 분위기를 조금은 장난스럽게 바꾸며 입을 연다.
“ 뭐, 아무튼요~!! 이번에 휴가 내시면 푹~ 좀 쉬다오세요! 교수님도 좀 쉬셔야죠! 저 들어오고 나서 그동안 하루밖에 안 쉬신 거 알아요? 힘든 일 있으시면 꼬~옥! 저한테 말씀 좀 해주시고요! 맨날 힘들다고 이렇게 글라스로 소주 먹고 이런 거만 하지 말 고~!! ” “ 허허.. 이거는 그냥 버릇인데.. 뭐, 힘들어서 마실 때도 있지만, 이제 이렇게 안 먹으 면 마신 거 같지가 않아서.. ” “ 아아~ 근데 이렇게 글라스에 마시면 술이 더 맛있어요? ”
말을 하며 순식간에 그의 술잔을 들더니 취김에 소주를 꿀꺽꿀꺽 삼켜버리는 그녀.
“ 어~? 어어?!! 큰일 나!! 이 사람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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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런 은아의 돌발행동에 놀란 인혁. 얼른 그녀가 들고 있는 잔을 뺏어버린다. 그러나 가득 차있던 그의 술잔은 벌써 절반 이상 비워져 있었고, 앞에 있는 은아는 표정을 있는 데로 찡그린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오는 그. 얼른 안주를 하나 집어 그녀의 접시에 올려주고, 그녀는 여전히 찡그린 얼굴로 그 안주를 집어먹는다.
“ 으.. 으으.. 쓰다.. 이걸 어떻게 마셔요..? 크으... ” “ 참나..! 그러게 그거를 왜 마셔요..! 아유, 이거 봐요..! 얼굴에 바로 표가 나네.. 아 유.. ”
정말 금세 달아오르는 그녀의 얼굴. 은아도 자신의 몸에서 갑자기 취기가 확 올라오는 걸 느꼈다. 좀 전에 두병 조금 안되게 마셨을 때 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아무리 잘 마시는 편이라지만, 역시 글라스로 한꺼번에 마시는 건 무리였나 보다. 그런 그녀가 걱정되는 인혁. 짐들을 주섬주섬 챙기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한다.
“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진짜 큰일 나겠네. 이만 일어납시다..! ” “ 네? 아.. 조금만 더 있으면 안 돼요..? ” “ 거. 저번 주, 컨퍼런스 갔을 때도 조르더니만.. 그, 내말 안 듣다가 추워서 고생했잖 아요. 일어나요 ” “ 아직 못해드린 얘기 있는데에.. 10분만요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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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기가 많이 올라온 그녀. 목소리에 약간의 애교가 섞여있었다. 그녀도 평소에는 좀 무뚝뚝하게 말하는 편인데.. 처음 보는 은아의 모습이 당황스러운 그. 눈을 동글동글하게 뜨고 간절한 눈빛을 쏘아대는 그녀 때문에 결국, 다시 자리에 앉는 인혁.
“ 허, 참.. 그럼 10분만이에요. 그리고 신선생은 더 마시지 말고. ” “ 헤헤.. 알았어요~ ” “ 할 얘기 있다면서요. 해봐요. ” “ 음... 아직도 어머니 생각 많이 나세요? ”
갑자기 그녀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오자 조금 놀라는 인혁.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해준다.
“ .... 예, 뭐.. 조금.. 아직 그렇죠 뭐.. ” “ .... 교수님, 제가 왜 간호사가 된 줄 알아요? ” “ ...?... ” “ 저도 교수님 아버님, 어머님 얘기 들었으니까.. 특별히 말씀드리는 거에요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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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말끝을 늘어트리며 약간 애교 섞인 말투로 말하는 그녀. 간호사가 된 얘기를 해준다면서 있는 데로 뜸을 들이는데, 인혁은 그런 그녀가 재밌기도 하고 새롭기도 하다. 그리고 그녀가 왜 간호사라는 일을 시작하게 됐을지..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 허, 무슨 말이 길래.. 어디 한번 들어봅시다. 말해봐요. ” “ 음.. 제가요오~! 저희 아버지병간호만 4년을 했어요~ 그래서 헤헤.. 그래서 아픈 사 람 보살피고 돌보고 하는 일은 지겹도록 해봤거든요. ” “ 아아... ” “ 저희 아버지는 원래 건강하던 분이셨는데..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지시더니.. 자리에서 못 일어나시더라구요. 음.. 집안 형편도 별로 안 좋은 편이었는데, 아버지 그래 되시고 나니까.. 더 힘들어지더라구요. 저는 학교다닐 때니까. 돈으로 보탤 수 있는 거는 없 고, 엄마는 일 나가야 되니까.. 제가 학교 끝나고 오면, 바로 집안 일 다 하고.. 와서 간병해드리고.. 그랬죠 뭐. ” “ ..... ”
은아의 말에 살짝 놀라는 인혁. 그녀가 자신에게 이런 얘기를 해줄 줄은 몰랐다. 그동안은 그녀가 거의 사사로운 얘기들만 많이 해줬을 뿐, 사실 속 깊은 얘기는 해준 적이 없었는데.. 내가 그녀를 믿고 의지해서 속 얘기를 털어놓았던 것처럼.. 신선생도 그만큼 나를 믿고 의지하는 걸까..? 지금껏 알지 못했던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인혁
“ 후후.. 교수님은 안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저 원래 공부도 쪼매 잘했었거든요~?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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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 몇 번 해봤었는데.. 근데, 고등학교 들어와서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경쟁이 안 되더라구요. 집에 와서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공부는 안 되고 성적도 떨어지고.. 근 데 집안은 계속 기울고.. ” “ ..... “ “ 솔직히, 아버지 처음 쓰러지셨을 때는.. 너무 놀라고 슬프고 그랬었거든요? 그래서 내가 어떻게 든 아버지 일어나게 해드리겠다고.. 정말 열심히 했었는데.. 한 2년 지났 을 때였나..? 점점.. 아버지가 원망스러워지더라구요. 왜 이렇게 아프실까. 왜 아프셔 서 우리가족을 이래 힘들게 할까.. 지금 와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것도 아닌데..! 그래 원망을 했어요.. ”
아직도 죄책감이 드는 건지 술에 취해 감정이 격해지는 건지 약간은 웃고 있으면서도 울 듯한 그녀의 표정. 그런 그녀를 보며 가슴이 조금씩 아파오는 인혁. 남 일 같지 않았다. 아픈 아버지를 원망했던 건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 근데, 그러다가.. 나 고2때인가..? 결국 돌아가셨어요. 근데 정말 힘들더라구요.. 자 꾸 그동안 못해드린 거랑, 아버지 원망했던 거.. 그런 게 생각나가지고.. ” “ ..... ” “ 그러다가 이제 대학 들어갈 때가 되니까.. 어렴풋이.. 내가 할 줄 아는 거.. 내가 늘 해오던 거.. 아픈 사람 보살펴 주는 거, 사람 살리는 거.. 그거.. 한번 해보고 싶다.. 생 각했어요. 아버지한테 못했던 만큼, 다른 사람들한테라도 잘해주고 싶다.. 그래서 원래 는 의사가 되고 싶었거든요? 근데, 성적도 안 되고, 돈도 없고 하니까. 의대는 못 가 겠고.. 그래서 간호사된 거에요오~ 그래서 아직도 쪼금 부러워요. 의사쌤들이..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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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튼, 그래가지고, 우리 컨퍼런스 갔을때요~ 서울에서 한강보면서~! 교수님이 얘 기해주셨잖아요. 아버지얘기.. 그때 솔직히 교수님은 마지막에 허허 하고 웃고 계신데, 나는 솔직히 웃을 수가 없었어요~ 남일 같지 않아서.. ”
자신의 얘기를 하면서 약간 울먹이던 그녀. 이제는 그 촉촉한 눈으로 인혁을 빤히 바라본다. 진심어린 그녀의 말. 그를 바라보는 맑은 두 눈. 인혁은 순간, 그녀의 두 눈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애써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살짝 피해버리는 그. 그런 인혁을 향해 은아가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연다.
“ ..... 근데요 교수니임.. 너무 힘들어 하지는 마세요.. 너무.. 너무.. 힘들어보이셔서.. 이제 그만 힘드셨으면 좋겠어요... 이제.. 보내드려야죠.. 마음 편히 가시게.. 후우... ”
그동안 참아왔던 그녀의 진심. 어쩌면 그녀는 인혁에게 이 말을 해주기 위해서 그렇게 취하려 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에게 꼭 해주고 싶었던 또 다른 말.
“ 교수님, 부탁 한 가지만 드려도 되요오..? ” “ 아.. 예.. 말해봐요.. ” “ .... 우리아버지.. 쪼금만 병원에 일찍갔으면.. 그 정도로 침대에만 누워계시진 않았을 거에요. 장애가 남으셨겠지만, 그래도 움직일 수는 있으셨을 텐데.. 그때 헬기타고 오 셨으면 조금 나으셨을라나..? 헤헤.. 하긴 뭐, 그때는 헬기도 거의 없었겠지만.. 아무 튼, 있잖아요~ 교수님! 저 없더라두 외상센터요오... 포기하지 마세요~ 사람이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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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은 살리고 봐야죠~ 외상센터가 생겨야지, 죽어가는 환자들 한사람이라도 더 살릴 수 있잖아요~ 그거 할 수 있는 사람. 교수님 밖에 없어요오.. 그러니까요. 포기하지 마 세요오~? ” “ .... 예.. 포기 안할게요. 신선생.. ” “ 헤헤~ 약속하셨어요~ ” “ ... 그럼.. 신선생. ” “ 네에~? ” “ 외상센터요.. 자리 잡을 때까지.. 남아 줄래요? 병원에.. 내가 포기 안하려면.. 신선 생 도움이.. 조금 더 필요할거.. 같은데.. ”
잠시 흐르는 정적, 그도 그녀도 몇 초간 진지하게 서로의 눈만 바라보고 있었다. 오히려 그에게 고마운 그녀. 취해있기는 했지만 분명히 알아들었다. 그가 부탁하지 않아도 남고 싶었었는데, 존경스러운 사람.. 닮고 싶은 사람.. 인혁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다. 이내 그의 눈을 보며 베시시 웃는 은아. 그를 보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끄덕 거린다. 그런 그녀를 보고 활짝 웃는 인혁. 사실 취김에 본심이 갑자기 나와버려서 그녀가 거절하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보니 조금은 불안했던 마음이 안정되는 걸 느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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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정말 제대로 취해버린 은아. 인혁이 계산을 하겠다는데도 기어이 자신이 계산을 해야 한다며 계산대 앞에 버티고 서있다.
“ 아, 그, 내가 계산 한다니까.. ” “ 스읍! 교수님! 저 그렇게 양심 없지 않거든요오~! 항상 교수님이 밥 사주시잖아요 오~ 오늘은 제가 사드린다고 했으니까아.. 제가! 살거에요오~! ” “ 거 참.. ”
계산을 하려는 은아. 지갑을 여는데 현금이 별로 없다. 카드를 내미는 그녀. 그러자 카드는 안 받는다며, 카드사절이라는 안내판을 가리키는 가게주인.
“ 어어.. 현금이 어디 있었는데에... ”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뒤적하며 현금을 찾더니 그 곳에도 없자 가방을 뒤져보는 은아. 그런 그녀를 뒤에서 보고 있던 인혁. 피식하고 웃어버리더니 은아가 모르게 지갑에서 돈을 꺼내 그녀의 발밑에 떨어트려 놓는다. 그러다 그 모습을 보고있던 주인과 눈이 마주치고 눈감아달라는 듯 고개를 살짝 젓는다. 그리고 태연하게 은아를 부르는 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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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신선생, 여기 주머니에서 돈 빠졌네? ” “ 아? 아아~ 여기있네에~ ”
은아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 돈을 주워 가게주인에게 내민다. 인혁은 평소에 꼼꼼하고 똑부러지는 모습만 보이던 그녀가 취하니까 조금 흐트러지는 것 같아 그 모습이 새롭다. 그리고 말투에 살짝 애교도 섞이는 것 같고, 늘 씩씩해 보이기만 하던 은아도 이럴 때는 귀여운 구석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 모습이 재밌다 는 듯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보고 있는데, 그 사이 계산을 다 마친 은아. 그를 향해 따라오라는 듯 손짓하며 먼저 앞장서간다. 조금 비틀비틀하며 지그재그로 걷는 그녀. 인혁은 왠지 그런 모습이 불안불안하다는 생각을 하며 뒤를 쫓아간다. 그렇게 식당을 지나 주차장으로 내려오고 있던 두 사람. 그때, 그녀 바로 앞에 있는 주차블럭이 그의 눈에 보이고, 왠지 은아가 발견 못했을 거 같다는 생각에 얼른 그녀를 불러 세우는데,
“ 어어, 어? 신선생! 조심!! ” “ ....?..... 어...? ”
역시나 주차 턱을 발견하지 못하고 비틀비틀 걷다가 결국 거기에 발이 걸려버린 은아. 술김에 중심도 못 잡고 몸이 기우는 걸 느끼고, 어쩌지도 못하고 그대로 넘어지겠다 싶어 눈을 감아버리는 그녀. 그런데 분명 앞으로 기울던 몸이 갑자기 방향을 틀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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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얼굴이 폭신한 무언가와 부딪힌다. 어? 안넘어졌다아.. 다행이다아.. 근데.. 되게 편하다.. 안 그래도 점점 올라오는 술기운 때문에 어지럼증을 느끼던 은아. 비틀대던 몸이 어딘가 기대지니, 다른 생각은 못하고 그냥 편하다는 생각이 든다. 술김에 자신이 인혁에게 안겨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하는 그녀였다. 한편 넘어지려는 그녀의 어깨를 급하게 당긴 인혁. 너무 세게 당겨서 이번엔 그의 몸으로 쓰러지려는 그녀를 얼떨결에 몸으로 받치고 있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그녀가 자신에게 폭 안겨버린 꼴이 되버리고, 은아는 전혀 빠져나올 생각도 없어 보이는 채로 그대로 편하게 기대어있었다. 당황스러운 인혁. 얼른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자신의 몸에서 살짝 떼어낸 채로 부축을 한다.
“ 신선생..? 괜찮아요..? ” “ 네에~ 아? 교수님이셨구나아~ 잡아주셔서 고맙습니다아아~! ”
은아는 인혁의 목소리에 그제야 제자리에 똑바로 서더니 그를 보고는 허리를 굽혀 90도로 꾸벅 인사를 한다. 그러고는 또 다시 앞장서서 걸어가는 그녀. 비틀비틀 대다가 다시 넘어질 뻔하는 은아. 인혁은 또 어어? 하며 손을 뻗으려하지만 그녀가 다시 중심을 잡고 걸어간다. 그러다 또 비틀하다가 다시 중심을 잡는 그녀. 인혁은 몇 번이나 손을 뻗었다가 거뒀다가를 반복하고, 직접 잡아주지는 못하면서 불안불안하게 걸어가는 그녀 뒤를 바짝 쫓아가기만 한다. 그렇게 간신히 도착한 도로변, 은아가 택시를 잡으려고 차도로 걸어 내려가는데, 어째 조금 위험해 보인다 싶더니, 역시나 자동차 한 대가 빵빵-하고 경적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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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되겠다 싶어 얼른 은아의 팔을 끌어당기는 그.
“ 어어~?? 거, 참!! 위험하게! 여기 좀 가만히 앉아있어 봐요 쫌! 택시는 내가 잡아 줄 테니까! ”
인혁은 그렇게 소리를 치며 그녀를 인도에 앉혀버리고, 정말 어지럽긴 어지러운지 왠일로 고분고분 앉는 그녀. 메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려놓더니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치며 뭐라뭐라 중얼거린다. 그런 은아를 보며 짧게 한숨을 쉬는 그. 바닥에 있는 그녀의 가방을 들어 자신의 어깨에 메고는 서둘러 택시를 잡는다. 곧, 택시 한 대가 두 사람 앞에서고, 그는 그녀를 먼저 뒷 자석에 태우고는 아무래도 그녀를 데려다 줘야할 것 같아서 옆자리에 같이 타 버린다. 그렇게 그들을 태우고는 출발하는 택시. . . . . . 잠시 후,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로 자고 있는 은아. 인혁은 그런 그녀를 보며 어이없다는 듯 웃어버리고는 자신도 좀 술기운이 오르는 것 같아 팔짱을 낀 채로 잠시 눈을 감고 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신호를 받으려 빠르게 달리다가 급하게 커브를 도는 택시. 그 덕에 창문에 기대고 있던 그녀의 몸이 인혁 쪽으로 기운다. 그대로 인혁의 다리를 베고 누워버리게 된 은아. 잠시 졸고 있던 인혁은 갑작스러운 무거운 느낌에 눈을 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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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자신의 다리에 누워있는 것을 보고는 놀라서 당황한다. 일단은 소리를 낮춰 그녀를 깨워보는 인혁.
“ 신..신선생.. 신선생..! 일어나 봐요..! ”
그러나 그녀는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인혁은 할 수 없이 자고 있는 그녀가 깨지 않게 그녀를 아기 다루듯 조심조심 일으켜 반대쪽으로 기대게 한다.
“ 어이쿠.. 자, 자, 이렇게.. 그렇지.. ”
그렇게 간신히 그녀를 다시 창문에 기대게 하는데, 취해있는 그녀. 잠결에 방금 베고 있던 그의 다리가 편했는지 이젠 아예 인혁 쪽으로 머리를 갖다 대고 누워버린다. 다시 놀라는 그. 이번에도 조심히 그녀를 일으켜 앉히려는데,
“ 아아~ 으으~음! ”
싫다는 듯 투정하는 소리를 내더니 그의 손을 뿌리쳐버리는 은아. 그런 그녀 때문에 어쩔 줄 모르겠는 그. 앞으로 20분은 더 가야될 텐데.. 어떻게 하지.. 라고 생각 하며 다시 그녀를 일으켜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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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잠결에 그의 손을 뿌리치는 그녀였다. 아.. 아무래도 신 선생이 지금, 내 다리를 베고 있다는 생각을 못하는 것 같은데.. 아.. 어떻게 하지.. 그는 그렇게 어쩔 줄 몰라하며 다시 그녀를 일으키려 해보지만, 또다시 인혁에 손을 뿌리쳐버리는 은아. 인혁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살짝 한숨을 쉬고는 최대한 신경을 안 쓸려고 하며 다시 눈을 감는다. 하지만 어떻게 신경이 안 쓰이겠는가. 아무리 스스럼없이 편한 사이라고 해도 남녀사이인데.. 피곤해서 조금씩 몰려오던 졸음도 싹 날아가 버린 그. 조용한 택시 안, 그의 귀에 쌔근쌔근 거리며 자고 있는 그녀의 숨소리가 들린다.
[ 두근 두근.. ]
자신의 심박동이 빨라짐을 느끼는 그. 그로써는 처음이었다. 누가 이렇게 자신의 다리를 베고 누워있는 건, 그것도 여자가.. 신경을 안 쓰려 애써 다시 잠을 청해보지만, 계속 자신의 다리를 베고 있는 그녀가 신경이 쓰이는 인혁. 눈을 살짝 뜨고 은아를 바라보는데,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그녀의 얼굴. 자신의 다리를 베고 자고 있는 그녀. 인혁은 자신도 모르게 자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게 되고, 작은 얼굴, 가지런한 눈썹.. 감고 있지만 큰 눈.. 오똑한 코.. 그리고..
“ 크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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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그녀의 입술에 까지 시선이 닿자 괜히 혼자서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려버리는 인혁. 도대체 지금 신선생을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는 그렇게 애써 딴생각을 하려 창밖을 바라보다가 다시 조심스레 누워있는 은아를 쳐다본다. 술김이라서 그런가.. 원래 그녀가 예쁜 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더욱더 예뻐 보이는 것 같다. 그렇게 한참동안 그녀를 보고 있던 인혁. 조금은 천사 같은 모습..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참 아름다운 여자이다. 그리고 참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이렇게 예쁜 얼굴을 하고서 마음까지 아름다운 사람. 진짜 아름다운사람.. 동시에.. 아까운 사람이었다. 이렇게 아름답고 예쁜데.. 이 꽃다운 젊은 나이에 남들처럼 놀지도, 자기시간을 갖지도 못하고 자신과 함께 병원에서 고생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니.. 아무리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녀에게 너무 가혹한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자신의 인생을 찾아가도록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아까 그녀에게 남아달라고 한 게 정말 잘한 일인 건지.. 혹시 그녀를 부담스럽게 한건 아닐지.. 조금은 혼란스러운 인혁. 하지만 막상 그녀가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갑자기 덜컹 내려않는 그. 지금으로써는 그녀의 빈자리를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녀 덕에 이제야 비로소 트라우마센터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고, 그리고 그녀 덕에 비로소 사람답게 살게 된 인혁이었다. 만약, 앞으로 정부 발표대로 외상센터신청을 준비하게 된다면 유능한 코디네이터인 그녀의 존재가 지금보다 더 중요해질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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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제야 그녀 덕에 간신히 외로움과 슬픔에서 빠져나오고 있는데.. 그녀의 위로와 응원에 조금씩 익숙해져 가고 있는데.. 지금 또 다시 혼자가 되어버린다면, 그 고독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 한 순간에 무너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스스로 이겨낼 수 있을 때까지. 조금만, 조금만 더.. 아직은 그녀를 붙잡아 두고 싶은 인혁. 이제는 은아같은 사람과 함께 일하면서 조금은 행복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녀를 여자로써 욕심내는 건 아니었다. 맹세코, 지금까지 단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적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기엔 그녀가 너무 젊고 아름다웠다. 나에게 이 사람은 여자이기 이 전에, 잃고 싶지 않은 정말 소중한 사람이었다. 모두들 피해버리는 나 같은 놈을 끝까지 믿어주는 사람. 사람으로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이 험한 세상에서 쉽게 가질 수 없는 인연. 그렇게 든든한 존재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계속 그녀를 바라보던 인혁. 아무것도 모르는 은아는 여전히 그의 다리를 베고 곤히 자고 있었다. 조금은 아이같이, 조금은 천사 같은 모습으로.. 그런 그녀를 보며 기분 좋은 미소를 띠는 그. 이내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는 다시 눈을 감아버린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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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분 후, 은아의 아파트 앞, 곧, 두 사람을 태운 택시가 아파트 단지에 멈춰 선다. 조용히 택시비를 계산하는 인혁. 그는 자신의 다리에 누워있었다는 걸 알면 은아가 민망해 할까봐 그녀가 깨지 않게 조심히 그녀의 머리를 든 채로 문을 열고 몸을 차 밖으로 빼낸다. 그리고 그제야 은아의 어깨를 살짝 흔들어보는 인혁.
“ 신선생..! 신선생! 일어나봐요!! ” “ 으음.. ”
그러나 이미 깊이 잠이 들어버린 은아는 깨어날 생각을 안 하고, 그녀를 몇 번을 더 흔들어 깨우다가 안 되겠다 싶은 그. 은아를 일으켜 앉히며 반대편 창가 쪽으로 기대게 한다. 그리고 재빨리 반대편으로 가서 문을 여는 인혁. 그러자 창가에 기대있던 은아의 몸이 다시 그가 있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그는 얼른 그녀의 몸을 받치며 그녀의 팔 하나를 자신의 목에 걸치고는 은아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는 차문을 닫는 그. 이내 그들을 태우고 온 택시가 출발해버린다.
“ ...후... ”
일단, 은아의 집 앞까지 오기는 왔는데.. 지금부터가 걱정인 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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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빠져서 축 늘어지는 그녀의 몸이 무거웠지만 일단 계속 어깨를 부축한 채로 앞으로 걸어가 본다. 늦가을 부산의 밤, 꽤 쌀쌀한 날씨에 차가운 바람이 그들의 몸을 때리자 추위가 느껴지는지 몸을 웅크리며 그의 품으로 파고드는 은아. 인혁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멈칫하며, 다시 자신의 맥박수가 빨라지는 것을 느끼지만,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이렇게 파고드는데..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생각하며, 애써 가슴을 진정시킨 뒤, 서둘러 그녀를 깨운다.
“ 신선생? 신선생!! 쫌 일어나봐요~!! 집이 무슨 동이에요? 어?! ” “ 으음... 아... 모..ㄹ.. 요... ”
그의 계속되는 물음에 뭐라고 대답을 하긴 하는 은아. 아마도 계속 불어오는 찬바람 때문인지 그녀가 조금씩 깨는 듯 했다. 이때다 싶은 인혁. 계속해서 그녀를 깨우며 집이 어디인지 계속 물어보고, 그 덕분에 눈이 조금 떠진 은아, 대답은 안하고 손가락을 어느 한 방향으로 치켜든다.
“ 어디? 저기? ” “ 으응... 저기... ” “ 알았어요, 저기. 읏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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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은 자꾸 흘러내리려 하는 그녀를 바로 잡아 부축하며, 그녀가 가리키는 건물을 향해 천천히 걸어간다. 덕분에 술이 다 깨버린 인혁. 은아가 다시 잠들지 않도록 계속 말을 시키는 그.
” 신선생! 조금만 있다가 자요! 집에는 들어가야 할 거 아니야!! ” “ 응.. ” “ 와, 이젠 반말도 막 하네~ 읏차!” “ 응.. 아...ㄴ.. ” “ 뭐라고요? 안 들려! 크게 말해요! ” “ 아니...라.... 고..... ” “ 아니라고요? 읏차! 뭐, 반말하는 거 아니라고? 내말 알아듣는 거에요? 정신이 좀 들어요? ” “ ㄴ... 추.. ㅇ... ” “ 뭐라는 거에요?! ” “ .. 으... 추.. 워.. ”
다시 그의 품으로 파고들며 그의 양복재킷에 얼굴을 묻는 그녀. 인혁은 더욱더 파고드는 그녀 때문에 움찔하며 다시 멈춰 섰다가 아무래도 빨리 그녀를 데려다 주는 게 상책이다 싶어, 걸음을 재촉 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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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계속 그녀를 부축한 채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인혁. 그녀가 잠들지 않도록 계속 말을 시키며 온 덕택에 은아가 조금씩 잠에서 깨며 다리에 힘을 주는지 아까보단 조금 덜 무거웠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어 인혁을 보는 그녀. 풀려있는 눈으로 손가락을 들더니 인혁의 볼을 계속해서 찌른다.
“ 어? 교ㅅ..님이네에...? 교수니임~ 교수이임..! 맨날 추욱- 쳐져있는 우리 교수우니 임... ” “ 네에. 나에요 나. 맨날 쳐져있는 최교수에요. 어디보자.. 1503호.. 1503호.. ” “ 그래도오~ 외상센터 생길 수도 있다니까아~ 좋으시죠오? 저도 좋아요오~ 고생한 보람이있잖아아... 이래야 일할 맛이 나죠오.... 이뻐요 이뻐! 요즘은 말도 자알 들으시 고오~ 이뻐요오~ ” “ 고맙네요..! 이 나이에 이쁘다는 소리 듣게해줘서.. 읏차..! 아우, 무거워, 집이 왜 이 리 멀어...! 근데 신선생, 볼은 좀 그만 찌르면 안 되나, 아휴.. ”
이제는 포기했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볼을 찌르던 말던 그녀의 주정을 다 받아주는 그. 인혁은 그나마 그녀가 이만큼이라도 정신을 차린 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간신히 알아낸 은아의 집을 찾기 위해 계속해서 그녀를 부축하며 아파트 복도를 걸어간다. 그때,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이제야 조금 정신이 드는건지 자신의 집,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소리를 치는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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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어~?! 우리 집이다아~~ ” “ 그러게, 저기네. 다왔어요 신선생. ”
그렇게 은아의 집 앞에 도착한 두 사람. 제대로 보이긴 보이는지.. 도어락을 올려 익숙하게 번호를 누르는 그녀. 인혁은 옆에서 힘든지 땀만 뻘뻘 흘리고 있는데, 안 열릴 줄 알았던 문이 한 번에 열린다. 이내 인혁의 품에서 벗어나 비틀비틀 집안으로 들어가려다 훽- 하고 몸을 돌리는 그녀.
“ 교수니임~~ 고맙습니다아~ 감사합니다아아~ 안녕히가세요오~ ” “ 예, 그럼 신선생 내일ㅂ... ” [ 쾅--- ]
은아가 허리를 굽혀 인혁에게 90도로 인사를 두어번 하더니 그의 코앞에서 쾅- 하고 문을 닫고 들어간다.
“ 허... .....허. ”
황당한 상황에 헛웃음이 나오는 그. 인혁은 그렇게 잠시 동안 그 자리에서 허- 하고 헛웃음을 치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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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가.. 힘들어죽겠는데 말이야.. 그렇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이내 피식- 피식- 웃는 인혁. 참, 보면 볼수록 귀여운 구석이 있는 그녀였다. 잠시 후, 택시 안, 은아를 데려다주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녀와 했던 말들을 곱씹어본다. 정말, 몰랐었다. 너무나도 밝고 긍정적인 그녀였기 때문에 꿈에도 생각 못했었다. 그녀에게 그런 아픔이 있을 줄은.. 하긴, 세상에 아픔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모두 다 그 아픔을 감추고 세상 속에 섞여 살아갈 뿐인데. 사실, 그녀의 얘기를 들은 후, 자신이 그동안 엄살을 부렸던 것 같아서. 조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드는 그. 겉으론 여려 보이는 사람이지만, 정말 강한 여자였다. 그녀는. 나이만 많았지 홀로 서기 조차 못하는 나 같은 놈보다는 훨씬 더 강한.. 그런 사람이었다. 다시 생각나는 그녀의 말.
/ 교수님! 저 없더라두 외상센터요오... 포기하지 마세요~ 사람이요~! 사람은 살리고 봐야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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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녀의 말이 나를 고개숙이게 만든다. 사람.. 살려야죠.. 그래야죠..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 내가 의사로써 살아가는 이유니까.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는 그. 또다시 머릿속이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 찬다. . . . . . 오랜만에 오는 집.
[ 철컥- ]
이내 문이 닫히고, 곧, 어두운 방이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는 이제 더 이상 집에 들어오면서 침을 삼키지도, 심장을 졸이며 긴장을 하지도 않았다. 편안한 표정의 인혁. 그래도 그녀가 몇 번 등 떠밀어준 덕분에 집에 한 달에 한번은 들렸기 때문일까. 이젠 이런 쓸쓸한 모습이 익숙해졌다. 아니, 더 이상 쓸쓸하기만 한 곳은 아니었다. 그저, 집일뿐이었다. 그가 살던 집. 어머니와 추억이 담겨있는 공간. 따뜻했던 기억이 있는 이 곳.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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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의지할만한 곳이 생겨서 일까..? 그는 더 이상 어머니가 없는 이 곳을 보는 게 괴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 후아... ”
아직, 살짝 취기가 남은 그.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자켓을 벗어던지고는 성큼성큼 안방으로 들어가는데, 역시나 보이는 어머니의 영정 사진, 인혁은 기분이 좋은지 미소를 띠며 어머니에게 꾸벅 인사를 한 후, 벽에 몸을 기대고 앉는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어디선가 앨범하나를 가져오더니 다시 몸을 벽에 기대고 앉는 인혁. 사진을 하나하나 다시 살펴본다. 정말 몇 년 만에 꺼내보는 사진첩. 아마 어머니가 정리해두셨을 텐데.. 생각보다 어릴 적사진이 많이 없었다. 아마, 여기저기 이사를 다니고 하면서 없어지고 사라지고 했던 것 같다. 잘 좀 챙겨둘걸..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후회스럽다. 다시 사진을 자세히 보는 그. 빛바랜 사진들 속에서 지금 그의 나이보다도 젊게 보이는 아버지 얼굴, 어머니 얼굴, 천진난만하던 어릴 적 자신의 모습들, 꼬맹이었던 자신이 집에서 목욕하는 사진. 공부하는 모습을 뒤에서 찍은 사진. 가족끼리 거실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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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농사일을 하셨던 아버지 뒤를 어린 자신이 쫄래쫄래 쫓아다니는 사진. 가족끼리 꽃구경을 가서 찍은 사진, 부산으로 이사 오던 날, 중학교에 입학하던 날, 다시 사진을 넘기는 인혁. 몇 장 없는 중학교 사진을 넘기니 바로 고등학교 입학 사진이 나온다. 아마도 아버지의 사고 이후로는 이런 사진 한장 찍을 여유조차 없었을 것이다. 다시 반쯤 잘려나간 아버지에 다리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그. 그리고 다시 사진을 넘기는데, 그 중간 사진은 없고, 시간을 껑충 뛰어넘어 의대에 입학할 때 찍은 사진.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던 날, 찍은 사진밖에 없었다. 정말 그 이후로는 사진을 거의 찍지 않았다. 왜 이렇게 무심했을까. 어머니 모시고 사진이라도 제대로 한번 찍어 놓을 걸.. 사진 한번 찍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그런데 사진을 보다보니, 사진마다 자신의 모습은 꼭 들어가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이서 찍은 사진은 거의 없었다. 아마도 아들을 찍어주시느라 두 분은 찍을 생각을 못하셨던 것 같다. 스스로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이 담겨있는 사진들. 이렇게 애지중지, 늘 지켜봐주고 계셨구나.. 분명, 어머니와 아버지, 본인들만의 인생이 있었을 텐데.. 나를 위해 그런 것들은 모두 희생하셨으리라. 다시 뭔가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그. 간신히 마음을 억누르며 앨범의 마지막 장을 넘기는데, 마지막 한 장을 가득 채운 두 분의 사진. 흑백으로된 그 사진 속 어머니 아버지는 정말 젊으셨다. 연애하실 때 찍은 흑백 사진 몇 장, 결혼식 날 찍은 흑백 사진 몇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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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이후에 같이 찍으신 사진 몇 장이 전부였다. 그래도 사진 속에서 사이가 참 좋아 보이는 어머니, 아버지. 생각해보면, 두 분이서 다투시는 모습을 많이 본적이 없었다. 늘 서로 챙겨주시고 다정하신 편이었다. 정말, 서로 깊이 사랑하셨을 텐데.. 아버지를 잃고 나서 어머니의 심정이 어땠을지.. 이제야 더 뼈저리게 느껴진다. 사실, 아까부터 그 노부부의 모습이 잊히지가 않았다. 그 노인의 마지막 말.
/ 그동안 정말 고마웠소. 그리고 정말 미안했소.. 정말로, 고생 많았구려.. 이젠 좀 편 안해 져야지.. 편안히 보내줄테니까.. 마음 편하게 가소.. 임자 외롭지 않게.. 곧.. 따라 가리다.. 따라 가리다.. 따라 가리다.. /
외롭지 않게.. 곧 따라가리다.. 라.. 어쩌면, 혹시 어쩌면, 어머니도.. 아버지도.. 이제야 비로소 함께하실 수 있게 됐는데.. 자신이 어머니를 놓아드리지 못해서.. 두 분 다 마음 편히 못 떠나시는 건 아닐까. 그 노인의 마음처럼, 죽어서도.. 함께하고 싶진 않으셨을까.. 떨어져 계셔서 외롭진 않으셨을까.. 돌이켜보니 이제껏 나의 생각, 나의 슬픔만 중요했다. 부모님의 인생, 부모님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했었다. 나이가 40이 넘었는데, 아직도 어렸었나 보다. 두 분 앞에서 나는.. 끝까지 죄인이었다. 이내 앨범을 덮어 버리는 인혁. 고개를 들고 방안을 쭉 둘러본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방밖을 나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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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한가운데서 집안을 빙- 둘러본다. 평안해 보이는 얼굴. 그러나 그 표정과는 대조적으로 무언가 결심 굳힌 듯한 그의 눈. 다음 날 이른 아침, 은아의 집,
[ 떼르르르르릉- 떼르르르르릉- ]
오늘도 같은 시간에 울리는 알람. 침대에 뻗어 있던 그녀. 눈도 뜨지 못하고 손을 더듬어서 핸드폰을 찾는다. 그러나 아무리 더듬어 봐도 휴대폰은 손에 잡히질 않고, 여전히 알람소리만 요란하다.
[ 떼르르르르릉- 떼르르르르릉- ]
“ 으으... ”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그녀. 몸을 일으키려는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오자, 지끈거리는 머리에 손을 갖다 댄다.
“ 으으.. 아, 맞다.. 아.. 어제 너무 많이 마셨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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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아는 어제 술을 마셨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기억해내고, 그 상대가 인혁이었다는 것도 기억해낸다. 어제 무슨 얘기를 했더라.. 내가 뭐라고 진지하게 말했던 거 같긴 한데.. 하지만 지끈거리는 머리와 시끄러운 알람소리 때문에 정신이 없는 은아. 다시 어제 일을 기억해보려고 하지만, 필름이 끊긴 건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 떼르르르르릉- 떼르르르르릉- ]
여전히, 시끄럽게 울려대는 알람. 그녀는 일단 알람부터 어떻게 해야겠다 싶어서 침대에서 걸어 나와 휴대폰을 찾는데, 탁자에도 없고, 침대에도 없는 휴대폰.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집중하고 자세히 들어보니 바닥에 널브러진 가방 속에서 시끄럽게 울려대고 있었다. 바닥에 쭈구려 앉아 알람을 끄는 그녀. 시간을 보니 출근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오늘은 진짜 더 자고 싶은데.. 살짝 한숨을 쉬는 그녀,
“ 에휴... ”
아직 잠이 깨지 않아 비몽사몽한 눈으로 눈만 끔뻑거리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방밖을 나선다. 그리고 부엌으로 와서 물을 한잔 따라 마시려는데 또 깨질 듯이 아파오는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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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앗... ”
그녀는 쑤셔오는 머리를 부여잡고는 다시 물을 따라서 벌컥벌컥 삼키는데, 순간,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한 장면.
/ 어? 교ㅅ..님이네에...? 교수니임~ 교수이임..! 맨날 추욱- 쳐져있는 우리 교수우니 임... / / 네에. 나에요 나. 맨날 쳐져있는 최교수에요. 어디보자.. 1503호.. 1503호.. / / 그래도오~ 외상센터 생길 수도 있다니까아~ 좋으시죠오? 저도 좋아요오~ 고생한 보 람이있잖아아... 이래야 일할 맛이 나죠오..... 이뻐요 이뻐! 요즘은 말도 자알 들으시고 오~ 이뻐요오~ / / 고맙네요..! 이 나이에 이쁘다는 소리 듣게해줘서.. 아우, 무거워, 집이 왜 이리 멀 어...! 근데 신선생, 볼은 좀 그만 찌르면 안 되나, 아휴.. /
“ .....!!!!!!...... 푸우우우우웁..!!.”
갑자기 기억나버린 어제 일 때문에 물을 마시다 말고 뿜어내는 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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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켁.. 켁... ”
그녀는 목에 걸린 물 때문에 켁켁거리며, 서둘러 휴지와 걸레로 뱉어낸 물은 닦아낸다. 그런데 그녀의 머리를 스쳐가는 다른 장면.
/ 신선생! 조금만 있다가 자요! 집에는 들어가야 할 거 아니야!! / / 응.. / / 와, 이젠 반말도 막 하네~ 읏차! / / 응.. 아...ㄴ.. / / 뭐라고요? 안 들려! 크게 말해요! / / 아니...라.... 고..... / / 아니라고요? 읏차! 뭐, 반말하는 거 아니라고? 내말 알아듣는 거에요? 정신이 좀 들어요? / / ㄴ... 추.. ㅇ... / / 뭐라는 거에요?! / / .. 으... 추.. 워.. /
그 다음 일이 생각나자 바닥을 닦다 말고 벌떡 일어나는 은아. 분명 그때, 춥다고 하면서 인혁의 품을 파고들었었다. 어제 크게 실수를 했던 자신의 모습이 생각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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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을 동동구르며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는 그녀.
“ 아이고~~!!! 미칫네!!! 미칫어!!! ”
그러다 순간 행동을 멈추고는 다른 일은 없나 기억해보는데, 또 스쳐가는 파편적인 기억. 그가 자신을 집 앞까지 데려주고, 자신이 집으로 들어온 것 까지는 기억이 났다. 또 뭔가 더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는 그녀.
“ 하아.. 뭐꼬.. 뭐꼬..!! 또 뭐꼬!! ”
그러나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뿐, 아무리 생각해봐도 다른 일은 기억이 나질 않고, 기억이 나지 않자 더 불안한 은아.
‘ 도대체 앞으로 교수님 얼굴을 어떻게 보지.. 아이고.. 도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실 까.. 아이고.. ’
출근해서 인혁의 얼굴을 볼 생각에 속으로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오는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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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 후, 해운대 세중병원 응급실, 사무실 문을 빼꼼히 열어보는 은아. 창피한 마음에 인혁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서 오늘도 차라리 아직 주무시고계셨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그녀의 바람과는 다르게 자고있는 인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응..? 차라리 잘된 일인가.. 근데, 어디 가셨지..? ’
그녀가 그렇게 문앞을 서성이고 있는데,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 뭐해요? 안 들어가고? ” “ .....!!!!..... ”
순간, 화들짝 놀란 그녀가 뒤를 돌아보자, 이제 막 출근한 것처럼 보이는 인혁이 그녀를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 놀란 그녀. 당황하여 말을 더듬는다.
“ 아.. 들어가야죠..! 하하.. 하.. 교.. 교수님은.. 안 들어가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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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예. 들어가야죠. ”
그렇게 먼저 사무실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그. 그녀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최대한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는다. 하지만 이내 힐끔거리며 그의 눈치 보는 은아. 그러나 인혁은 그녀가 그러던지 말던지. 가져온 가방을 간이 침대위에 올려놓고는 챙겨온 자료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또 혼자 고민에 빠진 은아. 어제 분명히 실수를 하긴 했는데, 전부다 기억나질 않아 불안해 죽겠다. 아.. 사과를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데려다줘서 고맙다고 해야하는 건지.. 도저히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내 결심을 굳힌 은아.
“ 저.. 교수님..? ” “ 예. ” “ 저기.. 그게.. ”
자신에게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계속 주저주저하는 그녀. 그, 일부로 모른척하려고 했더니.. 은아가 무슨 말을 할지 살짝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그녀가 민망해 할까봐 일부로 모른척하고 있었던 인혁. 그런데 은아가 먼저 뭔가 말을 꺼내려 하자 일부로 선수를 치며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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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참, 속은 괜찮아요? ” “ 네? 아.. 아니요. 조금.. ” “ 거, 많이 피곤하면 회진돌때까지 시간 남았으니까. 좀 쉬어요. 나는 수술복으로 좀 갈아입고 올 테니까. ” “ 아, 네.. 근데.. 저기, 교수님! ”
그렇게 인혁이 잠시만 자리를 피해주려는데, 방을 나가려는 그를 불러서 멈춰 세우는 그녀. 차라리 지금말해야 속이 편할 거 같다는 생각에 조심스레 입을 연다.
“ 어.. 제가 어제 실수를 좀 한 거 같은데.. 그게 기억이 잘 안 나기지고.. ” “ 아.. 뭐 별일 없었어요. ” “ 별일.. 흠. 아, 아무튼 어제는 정말 죄송했어요..! 그리고 집까지 바래다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 “ 아, 예... 근데, 저기, 신선생. ” “ ....? 네..? ” “ 혹시, 어제 식당에서 한 얘기도 기억 안나요? ” “ ...무슨.. 얘기요..? 아, 죄송해요. 진짜.. 제가 어제 너무 많이 마셔가지고.. 그 교수님 술잔.. 아니, 소주를 막 마신 거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부터는 중간중간 기억 이 없어가지고.. 혹시, 제가 또 무슨 실수 했어요..? ” “ 아니요. 음.. 그냥, 별 얘기 안했어요. 아무튼 쉬어요. 나 수술복 좀 입고 오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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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 네, 다녀오세요! 아무튼 죄송해요! ”
사무실을 나가는 그의 뒤에다 대고 연신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은아.
“ 후... ”
그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일단, 그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제 했던 실수들이 다시 생각나서 창피하기만 하다. 바보같이.. 컨퍼런스 이후로는 행동을 조심해야겠다고 그렇게 생각해놓고는, 열흘밖에 안 되서 이런 실수를 하다니..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 에휴.. ”
절로 나오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책상에서 일어나려던 그녀. 갑자기 일어나려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 아까 교수님 얼굴에 언뜻 실망한 표정이 보였던 것 같은데.. 어제 식당에서 무슨 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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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를 했더라..? 도대체 뭐지.. ’
계속 생각해내 보려고 애써보지만, 기억이 날 듯 말듯하면서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자신의 실수를 모른 척해주는 그가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한 그녀. 이 미안한 마음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오늘 하루는 평소보다 더 열심히 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탈의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와이셔츠 단추를 푸르던 인혁. 그런데 어제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이 떠오른다.
‘ 아.. 그럼 그 말도 기억 못하겠지..? 외상센터에 남아달라고 어렵게 부탁했었는데.. 하긴 뭐, 기억할만한 상태는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어렵게 꺼낸 말이었는데.. ’
조금 아쉬운 인혁. 어제 그녀가 남아준다고 해서 정말 좋았었는데.. 역시나 술에 취한 사람에게 뭔가를 부탁하고 기억해주길 바란다는 게 애초에 무리였는가 싶다. 잠시 후, 오전 회진을 돌고 있는 두 사람. 중환자실 환자들의 상태를 모두 체크한 후, 두 달 전 수술했던 여중생환자의 상태를 살피러 병동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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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분 후, 이내 두 사람이 병실 안으로 들어서는데, 잠깐 자리를 비웠는지 환자가 자리에 없었다. 옆에 있던 다른 환자에게 물어봐도 잘 모르겠다고 하고, 어쩔 수 없이 다음에 와야겠다고 하며 병실을 나오려는데, 저쪽 복도에서부터 휠체어를 타고 오는 여중생 환자와 보호자. 아마도 재활치료 겸 산책 중인 모양이었다. 그런 그들을 발견하고는 동시에 마주보며 슬쩍 웃는 그와 그녀. 의식도 없이 실려 왔던 환자였는데 저렇게 회복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언제나 가슴이 뿌듯해지는 두 사람이었다. 이내 환자에게로 다가가는 인혁과 은아.
“ 이제는 많이 좋아졌나 보내요..! ” “ ...?... 아유! 선생님 오셨습니꺼! ”
갑자기 나타난 인혁을 보고는 너무 놀라서 그에게 꾸벅 인사를 하는 환자와 보호자. 인혁도 덩달아 꾸벅 인사를 하며 환자에게 다가가 여기저기 살펴보다가 보호자를 향해 입을 연다.
“ 예, 허허.. 다리, 골반, 허리는 아직은 좀 아플 겁니다. 그래도 나아지고 있는 거니까 요. 안심하시구요. 이렇게 운동하시는 게 크게 도움이 될 겁니다. 그렇다고 아직 너무 무리하게 하지는 마시고요. ” “ 예예~! 알겠십니더! 선생님 정말 감사드려예.. 정말 덕분에 우리 아가 이래 움직일 수도 있고.. 그때는 정말 하늘이 깜깜했었는데.. 선생님 덕분에 새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십니더. 정말 감사합니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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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닙니다. 환자분이 워낙 열심히 따라주시고, 여기 어머님이 이렇게 정성껏 간호를 해주시니까요. 허허.. 뭐, 이 정도 회복속도라면, 아마 특별한 문제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한 달 정도 후면, 걸을 수도 있고, 아마 퇴원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 “ 정말입니까? 아유.. 정말 감사합니더. 아! 잠깐만요. 선생님! 저희 아가 전부터 선생 님이랑 기념으로 사진 한 장찍고싶다켔는데, 한 장 찍어주실 수 있으십니꺼? ” “ 아~! 예! 그럼요! 좋습니다. ” “ 아, 근데 카메라가, 잠시만요! 핸드폰이라도.. ”
뒤에서 인혁과 보호자와의 대화를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던 은아. 보호자가 꺼내는 오래된 핸드폰을 보고는 안 되겠다 싶어서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고는 어디론가 잽싸게 뛰어간다. 인혁은 그녀가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갑자기 뛰어가 버려서 살짝 당황하다가 이내 다시 보호자와의 대화를 이어간다. . . . . 몇 분 후, 금세 다시 나타난 은아. 사무실에서 가져온 디카를 내밀며 세 사람에게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나선다. 사진을 찍기 위해 의자에 나란히 앉은 환자와 인혁과 보호자.
“ 잠깐, 세분 조금 붙어 앉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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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앉은 인혁이 약간 뻘쭘하게 있자, 조금 붙어 앉으라고 주문하는 그녀. 그러자,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앉으며, 인혁에게 슬쩍 팔짱을 끼는 여중생환자. 그러면서 자신의 어머니를 향해 속닥거린다.
“ 엄마! 엄마! 엄마도 팔짱..! ”
그러자 조금 머뭇거리다가 이내 인혁의 팔짱을 끼는 보호자. 인혁은 그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서 그저 뻣뻣하게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그런 인혁에게 뭐라고 하는 은아.
“ 에이, 교수님~! 표정 좀 피세요~ 자 그럼, 찍을게요~! 하나, 둘, 셋! ”
[ 찰칵- ]
그렇게 기념사진촬영이 끝나고, 인사를 마친 후 돌아서려는데, 두 사람을 붙잡는 여중생 환자.
“ 잠깐만요! 선생님! 저도 찍어보고 싶은데.. 한 장만 찍어보면 안 돼요? ” “ 얘는.. 한번 찍었으면 됐지~ 뭘 또 찍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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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나 말고 두 분이서! ”
휠체어에 앉은 채로 인혁과 은아를 가리키며 말하는 여중생. 그제야 알아들었는지 손뼉을 치며 말하는 보호자.
“ 아이고~ 맞네! 여기 여선생님은 아까 안 나오셨으니까~! 두 분이서라도 한번 찍으 셔야죠~ ” “ 네? 아, 아, 저는 괜찮은데.. ”
그러나 그녀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은아와 인혁의 두 팔을 잡고는 벽 쪽으로 끌어당기는 보호자. 덕분에 카메라 앞에 나란히 선 두 사람. 그동안 환자와 보호자들과는 많이 찍었지만, 막상 이렇게 두 사람만 카메라 앞에 서보기는 처음이었다. 살짝 어색해하는 그와 그녀. 그러자 그런 둘을 향해 아까 은아가 했던 얘기를 고대로 하는 여중생환자.
“ 에이~! 두 분 좀 붙으세요~! 표정도 피시고~ 팔짱도 끼셔야죠! 어~? 팔짱 안 끼시 면 안 보내드릴건데요? ”
거의 반 협박조로 얘기하는 어린환자. 살짝 당황한 인혁과 은아가 서로 조금 눈치를 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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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빨리 찍고 말아야겠다싶은 생각이 드는 인혁. 살짝 헛기침을 하면서 팔을 약간 들어 올려준다.
“ 흠, 흠.. 여기.. ”
인혁의 행동에 살짝 당황하다가 금세 살짝 미소를 띠며 그에게 팔짱을 끼는 은아. 어린 환자는 이때다 싶은 생각에 서둘러 들고 있던 카메라의 셔터를 누른다.
[ 찰칵- ]
결국 그렇게 둘만의 사진을 찍은 두 사람. 환자와 보호자와 정말로 인사를 하고 헤어진 뒤, 중환자실로 내려가기위해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왠일로 사람하나 없이 텅빈 엘리베이터. 앞만 보고 있는 두 사람. 그런데 왠지 자꾸 미소가 지어지는 은아. 그러고 보니 그와는 항상 병원에서 붙어있는데, 매일 정신없이 일하다보니 정작, 사진 한 장 찍어놓은 것도 없었다. 그나마 이번기회라도 하나 찍어서 조금 잘됐다는 생각이 드는 그녀. 정말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를 정도로 열심히 일하는데, 나중에 이때를 기억해볼 수 있는 기록 하나 없다면, 왠지 서운할거 같았다. 어..? 근데.. 병원..? 아..! 맞다! 드디어 어제의 일이 전부 기억난 은아. 아아~ 교수님이 그래서 실망한 눈치셨구나..! 그녀는 그저 어제 일을 생각해냈다는 사실이 기뻐서 서둘러 인혁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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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님!! 생각났어요! 어제 저한테 병원에 남아달라고 하셨죠? ” “ ...예? 아.. 흠.. 예. 그랬죠. 허허.. ” “ 에이~ 걱정마세요~! 제가 그런 건 안 까먹죠~! 저 기억력좋다니까ㅇ... ”
말을 하다말고 말끝을 흐리는 은아. 갑자기 얼굴이 시뻘게진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발견한 인혁. 아.. 생각났나 보군.. 민망해져 괜히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린다.
“ 흠.. 흠.. 기.. 기억력 좋아서.. 다, 다행이네요.
”
방금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인혁도 그녀 때문에 덩달아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 . . . 며칠 후, 그의 차안, 휴가를 낸 인혁.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편안한 표정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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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장도로를 달리는 그의 차.
[ 덜컹- 덜컹- 덜컹- ]
덜컹거리는 차안, 사람이 없는 조수석. 작은 나무상자 하나가 덜컹거리는 차와 함께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 지이이잉-- ]
거의 다 도착한 것 같자 창문을 내리는 인혁. 맑은 가을 하늘, 선선한 가을 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친다. 그러자 코끝을 스치는 풀내음. 잔잔히 흘러가는 강. 끝도 없이 펼쳐진 산등성이. 그의 추억 속에만 묻혀있던 아름다운 풍경들이 그를 반긴다. . . . . 가을. 인혁의 뒤로 펼쳐진 갈대 숲이 바람에 일렁인다. 한적한 강가. 깔끔한 검은 정장을 입고 검은 넥타이를 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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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장갑을 끼고 있는 그. 그리고 그의 손에 들려진 작은 나무상자. 한참동안 잔잔한 물결을 바라보고만 있던 인혁. 이내 손을 들어 상자를 열더니 뚜껑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상자 안에, 잿빛이 섞여있는 하얀 뼛가루. 인혁은 그 가루를 한 움큼 집어내더니, 천천히 강가로 걸어가서 허리를 숙이며 그 가루를 강물에 뿌린다. 그리고 다시 한 움큼. 다시 가루를 흘려보내는 그.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니 어느새 반밖에 안 남아버린 뼛가루. 조금 더 걸어 나가 강물에 발을 담그는 인혁. 상자를 약간 기울여 조금씩, 조금씩 그 골분을 강물에 흘려보낸다. . . . . 잠시 후, 다시 강가에 앉은 그. 한참동안 고개를 돌려 하늘, 산, 강 그리고 주변 풍경을 둘러보더니 이내 뼛가루를 흘려보낸 강물너머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그리고 아주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인혁.
“ .....지금쯤이면.. 서로 만나셨겠죠... 죄송해요 아버지.. 이제야.. 어머니를 놓아드려 서.. ”
그런데 그때, 마치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몸을 감싼다. 다시 주위를 둘러보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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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전, 아버지가 뿌려졌던 이 곳.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난 이 곳. 두 분의 고향. 나는 다시 이곳으로 왔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어머니를 아버지 곁으로 보내드렸다. 이제야 비로소.. 부끄럽지 않은 나의 인생을 살아보려한다. 어머니.. 아버지.. 마지막으로 한번만 불러볼게요.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 . . . . 그리고 며칠 후, 인혁은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갔다. 어머니와의 추억이 있던 정든 집. 그 집을 떠나는 게 아쉬웠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홀가분하게 어머니를 보내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더 이상 약해지지 않게 옛 기억들을 잠시 접어두고 싶었다. 이제는 정말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시작하는 홀로서기. 왠지, 그렇게 외롭지 만은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다시 며칠 후, 일주일 동안, 외상센터에는 약간에 변화가 일어났다. 800억정부지원이 가시화될 거 같다는 소문과 정부가 사업타당성조사를 시작한다는 발표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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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 있는 수많은 대학병원들이 이 사업을 지원받기 위해 물밑작업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역시나 세중병원도 마찬가지였다. 800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센터설립 지원금. 그것은 해운대세중병원으로써는 기회였다. 때문에 당연히 병원 내에 트라우마센터를 좀 더 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고, 명목상으로만 운영되왔을 뿐, 그동안 전혀 병원에 관심을 받지 못했던 트라우마센터가 갑자기 조금씩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 센터 건립에 대해서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금전적 지원들을 받을 수는 없는 상태였지만, 각과의 교수들은 인혁을 시기하면서도 병원장에 명령에 따라 수술실과 중환자실을 좀 더 양보해줄 수밖에 없었고, 외상환자들을 최대한 많이 받을 수 있도록 병원차원에서는 행정적 배려를 해주게 되었다. 처음엔 갑작스러운 변화에 어리둥절했던 은아와 인혁. 그러나 그동안 착실히 외상센터를 준비해왔던 두 사람이기에 상황에 발 빠르게 적응을 해갔다. 이제야 그동안 고생해온 것들을 보상받는 기분. 물론, 아직 아무것도 확실한 것은 없었기에 겉으로 기쁜 내색을 하지는 않는 인혁이었지만, 은아는 알 수 있었다. 그가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는 것을, 다시 희망이라는 것을 조금씩 갖기 시작했다는 것을. 행복한 두 사람. 이제는 내일이 오기를 희망해 볼 수 있었다. 이제는 그저 보람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일만 남았다고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며칠 후, 어느새 11월 초, 2층 테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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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간 앞으로 걸어오는 한구와 인혁과 은아. 모두 손에 커피한잔씩을 들고 있다. 한구는 난간에 가까워오자 마자 인혁을 향해 입을 연다.
“ 야, 너 이사했대매. 갑자기 왠 이사야? ” “ 어. 그렇게 됐어. ” “ 에이씨, 말이라도 좀 해주지~! 가서 좀 도와주게. 신선생도 들었어요? ” “ 네~ 교수님이 이사 때문에 집에 다녀온다고 말씀해주셔가꼬. ” “ 와.. 자식이 말이야 섭섭하게.. 나한테는 말도안하다가.. ”
한구는 자기만 뒤늦게 알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입이 살짝 튀어나와 혼자 투덡투덜 대고 있고, 인혁은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냐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 도와주기는 뭘.. 짐도 거의 다 버려서 옮길 것도 없었어. ” “ 그래~ 니 몸이 힘들지~ 내 몸이 힘드냐~ 도와준다고 해도 싫다네! ” “ .. 허허.. ”
계속 삐져있는 한구를 보며 그냥 웃어버리는 그. 은아도 그런 한구가 재밌다는 듯 슬쩍 미소를 띠우고, 한구는 그런 두 사람을 살짝 째려보더니 이내 말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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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그래서 지금 집은 어디 있는 건데? 이왕 이사 하는 거 좀 가까운 데로 오지. ” “ 어어, 여기 병원하고 가까워. ” “ 음, 다행이네. 근데, 집은 상태는 괜찮아? 하긴, 너야 뭐 혼자 살 꺼니까 크게 상관 은 없겠다마는. ” “ 알면서 뭘 물어! 그냥 혼자지내기 딱 좋은 데로 구했지 뭐.. ” “ 흠흠, 아, 신선생 또 남기로 했다면서요? ”
이번엔 말을 돌리며 은아에게 말을 시키는 한구. 그녀는 약간 돌발적인 그의 질문에 살짝 당황했지만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라 침착하게 대답해준다.
“ 아아, 네, 저도 그렇게 됐어요. ” “ 오오, 그럼 이번엔 얼마나 연장한 건가? ” “ 음.. 일단은 외상센터 만들어지고.. 그 센터 자리 잡을 때까지 한 1년 반..? 정도 생 각하고 있어요. 근데, 아직은 확실한 게 없어서요. ” “ 아아, 근데, 신선생 캐나다가야한다고 하지 않았나? 남자친구가 괜찮데요? ”
갑작스러운 한구의 질문의 다시 당황한 은아. 하지만 이내 조심스럽게 대답을 해준다.
“ 아.. 네.. 그래도 이해해주더라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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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 최인혁 이제 살았네~! 정말 잘됐어. 그래도 아직은 신선생이 있어야 센터가 굴러가지. 아직까지 최교수 비위맞출 사람. 신선생 말고 아~~무도 없어요. 암~ ” “ 참나.. 자식이.. 쓸데없는 소리를.. ”
그녀가 병원에 남는다는 말에 약간은 오버스럽게 축하를 해주는 한구. 인혁은 그런 그를 약간 타박하면서도 기분은 좋은지 그녀를 돌아보며 씨익 웃는데, 역시나 미소를 띠며 인혁을 보고 있던 은아. 그렇게 마주보며 눈이 마주친 두 사람. 동시에 씨익- 하고 웃는다.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있던 한구. 어..? 뭐야 방금..? 왠지 두 사람이 굉장히 다정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고, 물론, 전에도 신 선생에게만 잘해준다며 장난스럽게 인혁을 놀리긴 했었지만, 지금은 뭔가 전과는 다른 묘한 느낌을 받는다. 어느새 11월 중순, 사무실 창문 앞에서 그녀에게 전화를 거는 동규. 한참동안 가는 신호.
[ 뚜르르르르르- 뚜르르르르르- 삑- ]
“ 아, 동규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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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은아씨, 나에요. 아직 퇴근 안했어요..? ” “ 아, 그게, 갑자기 응급환자가 들어온다고 해가지고.. ” “ 아... 그럼 오늘 약속은 힘들겠네요..? ” “ 동규씨, 정말로 미안해요! 내가 이따가.. ”
그런데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익숙한 어떤 남자의 목소리.
“ 신선생!! 20분 후에 트렌스퍼 온데요!! 피신청했어요?! 빨리 수액이랑 수술준비 좀 해줘요!!! ” “ 아, 네!! 나갈게요!! 동규씨 미안해요! 끊을게요! ”
[ 뚝- ]
그렇게 전화를 끊어버리는 그녀. 정말 바빠 보였다.
“ ..... ”
늘 이런 식이었다. 전화라도 조금 할라치면, 언제나 항상 같은 목소리가 그녀를 불러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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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녀와의 짧은 통화는 늘 이어질 수 없었다. 물론 일 때문이라지만.. 언젠가부터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거슬렸다. 최인혁교수라는 그 사람. 얼굴은 한 번도 본적이 없지만, 왠지 그녀를 뺏기는 기분이 들었다. 나보다도 더.. 그녀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낼 그 남자. 그녀는 그냥 일 때문에 만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 후..... ”
절로 나오는 한숨. 자신이 자꾸 일하는 것도 이해 못 해주는 속 좁은 놈이 되는 것 같아 때로는 스스로에게 화가 났던 적도 있다. 하지만 계속 신경 쓰인다. 그 남자. . . . 며칠 전, 그녀를 만난 날. 그녀가 처음으로 제대로 된 부탁이란 걸 했다. 늘 나와 있을 때는 나에게 아무런 요구도 안하는 사람이었는데 정말 진지하게 부탁을 해왔다. 외상센터가 생기고 자리 잡을 때까지 딱 1년 6개월 정도만 더 한국에 있고 싶다고, 자신에게 꿈이 생겨버렸는데, 어쩌면 금방 이뤄질 수도 있을 거 같다고, 그래서 그 일만 마무리하고 캐나다로 가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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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간절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쉽게 대답해줄 수가 없었다. 지금껏 6개월만 기다리면 함께 캐나다로 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연락이 뜸해도, 데이트를 별로 못하더라도 행복하게 그녀를 기다려 줄 수 있었다. 그녀가 어떤 일을 하든지, 이해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만 더 한국에 남고 싶다는 그녀. 조금이라도 빨리 그녀와 함께 캐나다로 떠나고 싶은 나. 도저히 판단이 서질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내가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자격이 되는 것일지.. 우리가 서로 만난 지 1년 6개월 만에 처음으로 하는 제대로 된 부탁. 그녀의 눈을 보고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정말 설레고 행복해보였다. 그녀의 눈이 일에 대한 열정으로 넘치고 있었다. 희망에 찬 그 눈빛. 그 희망을 도저히 꺾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러자고 했다. 한번만 더.. 참아보자.. 한번만 더.. 그녀를 위해서 그래야 했다. 얼마나 일을 사랑하는지 알기 때문에, 그리고 이것이 그녀가 일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수도 있기 때문에.. 앞으로 그녀에게 미안해질 일이 많았다. 결혼을 하고 나서 캐나다로 떠나면, 내가 하고 있는 일의 특성상, 어느 지역으로 얼마나 장기 출장을 가야할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처럼 간호사 생활을 보장해줄 수가 없었다.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던 나. 그런 출장들을 다니며 그녀와 떨어져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 그녀가 정기적으로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아마 간호사생활을 계속하기는 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그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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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그녀도 알 것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한국에 있는 동안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마치고 싶어 하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미안했고, 그녀가 지금 꾸고 있는 꿈을 응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점점 기다리기가 힘들어진다. 문득문득 불안해지기도 한다. 그냥 그녀가 나만 바라봤으면 하는 마음도 들었다. 이렇게도.. 이기적인 나였다.
“ 후..... “
한숨을 쉬면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동규. 괜한 생각들이었다. 조금은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진다. 지금껏 살면서, 이렇게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적은 없었는데.. 아직, 그녀를 이해해주기엔 내가 너무 부족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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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트라우마센터 (Something) ※ 추천브금 : 에브리싱글데이 - cold(Inst.)
몇 주 후, 어느 날 오후, 수술을 마치고 응급실로 내려오는 인혁과 은아.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사무실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응급실 한쪽에서부터 큰소리가 들려온다.
“ 아 그러니까!! 우리 애 어떻게 할거냐꼬!! 이거 얼굴에 상처 덧 난거 안 보이나?!! ”
무슨 일인가 싶어 잠시 눈을 마주친 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보는 두 사람. C라인 끄트머리에 있는 침대 옆에서 무섭게 생긴 보호자 한 명과 김간호사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바로 그 옆에 겁먹은 듯한 표정으로 서있는 아이 한 명. 얼굴에 염증이 났는지 조금 흉한 상태로 상처가 덧나 있었다.
“ 저기, 보호자 분 조금만 진정하세요!! 여기서 이렇게 소란피우시면 안되거든요? ” “ 놔!! 저리 안 비켜?! 간호사가 뭘 안다꼬 나서 나서기를!!! 빨리 의사불러와!! ” “ 저기 의사선생님들 계시잖아요!! 저 분들한테 치료 받으시면 된다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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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 씨X!! 진짜!! 누굴 바보로 아나?!! 이거 제일 말단들 아니야?!! 이렇게 새파 랗게 어린놈들이 뭘 할 줄안다꼬!! 뭘 믿고 우리 애 얼굴을 맡겨!! 너 말해봐 저번에 도 이런 애들이 꼬매준거지? 그러니까 애 얼굴이 이 모양이 된 거 아니야!! ” “ 이거는 그래서 그런 게 아니구요! 흔히 생길 수 있는 염증반응이거든요! 아, 인턴 쌤 가만히 있지만 말고 어떻게 좀 해보세요!! ”
그러나 보호자가 너무 무서운 기세로 따져대는 바람에 인턴 두 명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로 강 건너 불구경하듯 쳐다보고만 있고, 경력이 있는 김 간호사가 그들을 보며 한숨을 쉬고는 다시 보호자를 향해 입을 연다.
“ 보호자 분, 자꾸 이렇게 소란피우시면 저희도 조취를 취할 수밖에 없으니까. 제발 진정 좀ㅎ... ”
[ 짜악-- ]
순식간에 벌어진 일. 씩씩거리며 간호사의 뺨을 힘껏 내리친 보호자. 뺨을 맞고 고개가 돌아간 채로 굳어버린 김 간호사. 일순간에 조용해진 응급실 안, 상황을 지켜보던 인턴들과 다른 간호사들도 다른 침대에 있던 환자들도 보호자 옆에 있던 아이도,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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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뭘 해? 조취? 무슨 조취를 취해!! 지금 애 얼굴이 이래된 것도 분통터지고 억울해 죽겠는데, 조취? 어데 해봐, 무슨 조취! 무슨 조취!! 해보라꼬!! ” “ .... ”
말을 계속 뱉어내며 화가 나는 걸 주체할 수 없는 지 간호사의 머리를 한손가락으로 계속 미는 보호자. 그런데 김간호사가 말이 없자 더욱더 화가 나는지 다시 한 번 손을 들어 올리는데,
[ 타악- ]
그 손을 낚아채는 인혁. 거칠게 보호자의 팔을 잡고 그를 복도 쪽으로 끌어낸다. 갑자기 나타난 인혁 때문에 당황한 보호자, 그의 팔을 뿌리치려해보지만, 쉽게 뿌리쳐지지가 않는다.
“ 놔라!, 니 뭔데, 이거 안놔?!! ”
그제야 멈춰서는 그. 여전히 보호자의 팔을 붙잡은 채, 무서운 표정으로 입을 연다.
“ 나가서 기다리세요. ” “ 기다리긴 뭘 기다려?! 내가 지금 얼마나 기다렸는데? 뭐 이딴 병원이 다 있노! 내 고마 확! 고소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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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소하세요. 여기도 고소 할 테니까. 뭐, 그러면 보안요원 불러서 끌려 나가실래요? 아니면 그냥 나가서 기다리실래요. 저기 애도 보고 있는데. ” “ ..... ”
남자가 그의 말에 고개를 돌려 아이를 보고 눈을 마주치는데, 자신의 아이가 겁먹은 표정으로 자신을 보며 울고 있자, 순간 애 앞에서 너무 흥분했나 싶어 아차! 싶은 생각이 든다. 다시 고개를 돌려 인혁을 보는 남자. 직급이 있어 보이는 그를 보고 함부로 말할 수가 없어 일단 화를 참아보기로 하고, 인혁은 남자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진걸 보고는 약간 타이르듯이 다시 말을 이어 나간다.
“ 아 얼굴 흉터 안 지게, 제가 직접 치료해 드릴테니까. 나가서, 기다리시고, 아, 저기 간호사한테 사과하시고요. ” “ .... ” “ ... 신선생! 여기 보안요원 좀 불러줘요. ” “ ...아, 놔보이소. 놔야지 사과를 하든지 말든지 하지.. ”
그제야 보호자의 팔을 놔주는 인혁. 그러자 보호자가 다시 제자리로 가더니, 우선 자신의 아이를 향해 입을 연다.
“ 니, 아빠 밖에 있을테니까. 치료 받고 나온나. 울지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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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고개를 돌리는 남자. 아직도 맞은 부위를 감싸 쥐고 있는 간호사 앞을 지나가면서 자존심 때문에 스쳐지나가듯 말을 한다.
“ 아까 때린 거는 미안하게 됐네.. ”
그리고는 복도를 지나 응급실을 빠져나가는 남자. 이내 상황이 종료되고, 인혁은 한숨을 몰아쉬며 다시 아이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서는 인턴들을 향해 말을 한다.
“ 김도형 선생 어디갔어? ” “ 아, 그, CT실에.. ” “ 하.. 자네는 성형외과에 콜하고, 자네는 아이 데리고 처치실로 가있어. 그리고 신선 생! ”
김 간호사의 상태를 살피다가 인혁의 부름에 얼른 고개를 돌아보는 그녀. 그가 눈짓으로 김간호사를 데리고 들어가라는 듯한 신호를 주더니, 곧, 아이가 들어간 처치실로 들어가 버린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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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시간 후, 같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인혁과 은아. 수술을 마친 뒤, 아까 일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있던 두 사람. 사무실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긴장이 풀리면서 몸에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다. 오자마자 간이침대에 벌러덩 드러눕는 인혁. 그의 입에서 곡소리가 절로 나온다.
“ 으아.. 아이고.. 미안한데 나 조금만 누워있을게요. ”
역시나 피곤한지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 은아. 뒤로 한번 고개를 젖혔다 푸르고 나서는 화가 난다는 듯이 입을 연다.
“ 아니 근데, 아까 그 보호자, 진짜 너무한 거 아니에요? 참나, 간호사들이 무슨 동네 북도 아니고! 내가 진짜, 이런 일 한두 번 있는것도 아니지만..! 이런 일 겪을 때마다 확!! 아유.. 뭐 말해봤자 뭐하겠어요. 내입만 아프지..! ” “ 하아... 그러게. 거, 김간호사는 좀 어때요? ” “ 아이고, 말도 마세요. 얼굴이 씨뻘겋게 부어올라가지고. 지금은 쪼매 괜찮아졌는데, 아까는 억울해가지고, 눈물 나오려는 거 간신히 참고 있었죠 뭐.. 에휴.. 오늘 간호부 회식있다고 했었는데.. 저 기분으로 이따가 나올 수나 있을지 모르겠네..! ” “ .... ” “ 아니 그라고! 인턴쌤들은 도대체 뭐하고 있었데요? 남자가 둘씩이나 있으면서 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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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제대로 못 막아주고! 교수님이 한 소리 좀 해주시지 그러셨어요!
”
“ ...뭐, 안 그래도 한마디 해놨어요. 의사가 처치 할 일을 왜 가만히 보고만 있느냐고. 몰라서 그랬다는데 말이 안 되지. 그 나이에 애들도 아니고. 흠.. 언제까지 애들 노릇 이나 하려는지.. ” “ 아... 그래주셨으면 다행이구요.. 아, 근데요. 교수님. ” “ 예. ”
간이침대에 누운 채로 눈을 감고 대답을 하던 인혁. 은아의 부름에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는데, 그녀가 자신을 보면서 왠지 모를 표정을 지으며 웃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또 뭔소리를 하려고 저런 표정을 짓나싶고, 그런 그를 보면서 재밌다는 듯이 입을 연다.
“ 교수님이 은근히요~! 힘이 쎄신 거 같아요. ” “ ....?.... ” “ 아니, 저번에도 그렇고.. 한손으로 딱! 막아내는 거 보면은~ 교수님이 의외로? 힘이 쎈 가 봐요~ ” “ 하, 그걸 이제 알았어요? 또 뭐, 의외는 무슨.. 거, 외과의는 아무나 하는 줄 알아 요? 맨날 환자 들었다 놨다하고, 수술실에 맨날 서있어야 하고, 근육당기고, 비버 당 기고.. 힘쓰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게 이, 보통체력으로 되는 건줄 아나? 흠흠.. ”
의외라는 그녀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발끈한 인혁. 괜히 자기자랑처럼 늘어놓고는 본인도 민망 한지 헛기침만 해대고 은아는 그런 그를 보며 재밌다는 듯이 웃어버리고는 그의 장단에 맞춰주기 위해 장난스레 농담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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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 그래서 지과장님이 마취과로 가신거구나~ ” “ 그, 그렇죠. 그..럼요. 허..허허.. ” “ 차암나~ 네~ 어련하시겠어요! 헤헤.. 아, 근데 괜찮으세요? 수술만 연달아 3번하셨 는데. ” “ 아아, 예, 괜찮아요. ” “ 에이, 안 괜찮아 보이시는데요? 얼굴에 피곤이라고 쓰여있는데. ” “ 허허. 나야 맨날 그렇죠. 그리고 환자 없을 때는 또 없잖아요. ” “ 하긴~ 체력도 좋으시다니까~ ”
몸은 피곤해보이지만 허허- 웃으며 기분 좋은 듯 말하는 그. 은아도 그를 보며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지 피식- 하고 그의 말을 웃어넘기면서 농담을 던지고, 인혁은 또 그런 그녀 때문에 피식하고 웃어버리며 다시 눈을 감는다. 그래도 내심 그가 걱정이 되는 은아. 다시 그를 타이르듯이 입을 연다.
“ 그래도요 교수님! 병원에서 수술실이랑 중환자실 잘 내준다 카니까, 환자 한명이라 도 더 살릴 수 있어서 좋기는 한데~ 교수님이 너무 수술만 하시니까.. 교수님 몸도 좀 생각해야 할 거 같은데.. ” “ 뭐, 나는 괜찮아요. 그래도 환자들 받을 수 있을 때 많이 받아야죠. ” “ 음.. 그거는 그런데.. 이번 달에 몇 명 수술하셨는지 알아요? 자료 정리하다보니까 거의 하루에 한 명 꼴로 하셨던데요. 뭐, 수술이 한번만 있는 것도 아니고 2차, 3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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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까지 있는데.. 환자 케어랑 관리도 혼자하시면서.. 남은 수술 스케줄까지 소화하시 려면 다음 주 부터는 교수님 제대로 주무실 시간도 없을 건데요? ” “ 거, 괜찮다니까요. 나보다는 신선생이 더 고생스러웠지.. 그러니까! 빨리 퇴근이나 해요! 오늘 뭐, 뭐, 그 간호선생들하고 약속있다면서. ”
그녀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괜히 말을 돌리는 그. 그걸 모를 리 없는 은아가 입을 삐죽거리며 대꾸한다.
“ 말 돌리시기는.. 그거는 뭐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이고.. 아무튼요! 3월부터는 강의 도 시작하기로 하셨으면서.. 교수님 몸상하시면 나중에 환자 받고 싶어도 못 받는 거 알죠? 그리고 강의준비도 하시려면 몸생각 좀 하셔야죠! 아 그리고.. ” “ 아유, 알았다니까요. 좀 쉽시다. 빨리 가기나 해요. ” “ 에이.. 뭐 아무튼 알았어요! 그러면 오늘을 가볼게요. ” “ 예, 내일 봐요. ”
그렇게 인혁의 인사를 뒤로한 채, 가방을 챙겨 트라우마센터 문밖으로 나온 은아. 그녀는 찌뿌둥한 몸을 풀기위해 어깨를 살짝 주무르며 탈의실이 있는 쪽으로 향하려다가 한 번 더 사무실 쪽을 뒤돌아본다.
“ 이휴.. ”
드디어 하루가 끝났다는 생각에 개운하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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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간이침대에서 쭈그려 잘 인혁 때문에 왠지 모르게 한숨이 쉬어진다. 요즘 그가 활기차게 일하는 모습은 너무 보기 좋았지만, 너무 일만하는 그가 조금 걱정되는 은아. 한 달 전, 800억짜리 외상센터에 대한 기대심리로 인해 병원차원에서 외상 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뒤로는, 윗선에서 수술을 많이 한다고 눈치를 주는 일도 없어졌고, 전보다 훨씬 수술실과 중환자실을 확보하기가 용이해진 상태였다. 이때다 싶은 마음에서였을까. 지난 한 달간 그가 수술한 환자의 수는 거의 21명 가까이 되었고 그 중에 중증외상환자만 거의 17명에 달했다. 그동안은 자리가 없어서 받지 못한 환자도 모두 받아서 수술을 해냈고, 야간에 생기는 다른 과의 응급수술까지 그가 도맡아서 할 정도였다. 숫자만 놓고 보면 별로 많아 보이지 않는 수치였지만 인혁 이외에 다른 전문의 하나 없는 상태에서 의사 한 명이 한 달 만에 17명이나 되는 중증환자를 수술해서 케어한다는 건 정말 엄청난 일이었다. 물론 중간에 사망한 환자도 있었지만, 14명이 넘는 환자가 살아났기 때문에 병원차원에서도 그의 능력을 무시할 수가 없었고, 남들이 보기에 도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나 생각될 정도로 그는 더욱더 쉬지 않고 일만했다. 그런 인혁 때문에 한 달 내내 야간을 밥 먹듯이 한 은아. 며칠 동안 집에도 들어가지 못한 적도 많고 커피한잔 마시기 어려울정도로 그와 함께 매일 수술실, 중환자실, 수술실, 중환자실을 반복적으로 왔다 갔다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나마 인혁이 행복하게 일하고 있는 것 같아서 몸은 피곤해도 마음만은 정말 행복한 요즘. 그래도 은아는 내심 걱정이 되었다. 자신이야 매일 수술실을 따라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매일 병원에서 밤을 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몸이 힘든 건 그렇다 치더라도, 인혁은 정말 매일매일을 밤새고 수술 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일만하다보면 그가 정말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다시 짧은 한숨을 내쉬는 은아. 이내 다시 탈의실 쪽으로 몸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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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트라우마센터 안, 그녀가 나간 곳을 잠시 바라보다가 기분 좋은 듯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눈을 감는 인혁. 정말 쉬지 않고 달려온 한 달. 그녀는 환자를 너무 많이 받는 다며 걱정을 하지만, 인혁이 생각하기엔 지금이 아니면 이럴 기회가 없어보였다. 사실, 지금 복지부의 사업타당성조사가 몇 년 전과 똑같이 진행되는 과정으로 봐서는 800억짜리 외상센터사업은 계속 진행될 가능성이 희박해 보였고 곧, 병원도 이 사실을 눈치 챌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렇게 될 경우에는 다시 예전처럼 각 과에서 중환자실이나 수술실을 양보 받는 일은 어려울 것이었고, 환자들을 지금처럼 받지도 못할 것이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기회가 있는 지금이라도 환자를 최대한 많이 살리고 싶었다. 의사가 된 후, 7년 가까이 되는 세월을 바쳐 온 외상. 그동안 아무리 노력해도 이뤄지지 않았던 외상. 한순간에 이뤄질 거란 기대는 하고 있지도 않았다. 다만, 이번 외상센터사업에 기대를 걸고 있는 그녀의 희망을 꺾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열심히 일 해주는 그녀와 함께 이 희망찬 느낌을 조금이나마 더 누리고 싶었다. 그저 그게 다였다.
“ 후아.... ”
하품을 하는 인혁. 눈을 감고 있자 금세 졸음이 몰려오고, 그대로 스르르 잠이 들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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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 후, 병원 근처 어느 고기 집, 해운대 세중병원 간호부 회식으로 인해 근무시간이라 병원에서 나오지 못한 간호사들을 빼놓고 꽤 많은 간호사들이 고기집 안에 모여 있다. 1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회식자리라 매우 들떠있는 간호사들.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은 터라 고기집 안이 시끌벅적하다.
“ 언니는 왜 술안드세요오? ”
은아가 있는 테이블, 옆에 있는 간호사 한명이 얼굴이 벌개져서는 그녀에게 술을 권하는데,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는 은아.
“ 아니, 아니다, 나는 당분간 술 안 마시로 했다. 니 많이 묵으라. ”
한 달 전, 인혁과의 술자리에서 실수를 한 걸 생각하면, 아직도 창피해서 고개를 못 들겠는 은아. 오늘은 기필코 술을 입에 대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회식자리에 나온 그녀였다. 그렇게 은아가 그냥 고기만 집어먹고 있는데, 고기 집 문이 열리더니 오지 않을 줄 알았던 김간호사가 들어온다. 뒤늦은 김간호사의 등장에 격하게 그녀를 반겨주는 간호사들. 김 간호사를 앉힐 자리를 찾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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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아가 있는 응급실 팀 테이블로 그녀를 데려온다.
“ 아이고~! 니 괘안나? 어디 얼굴 좀 보제이. 아유, 아직도 붓기가 안 빠졌네, 우짜노. ” “ 예에, 전 괜찮아요. ” “ 아유, 잘왔데이! 그 미친놈 그거, 괜히 어따가 화풀이고 화풀이가! 정말 욕봤데이. ” “ 그래 잘왔어! 잘왔어! 여기서 고기랑 술이나 한잔 하면서 기분 풀고가자! ”
김 간호사에게 젓가락, 수저, 그릇, 술잔 등을 챙겨주는 간호사들. 그냥 빈말로만 위로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었지만, 다들 한 두 번씩 비슷한 일을 겪어본 터라 얼마나 기분이 상하는지 알기 때문에 남 일 같지 않은 마음에 더 그녀를 챙겨주려 한다. 그런 그들이 고마운 김간호사.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는 따라주는 첫잔을 받는다.
“ 아, 근데 그 인턴선생들 정말 너무한 거 아이가? 옆에서 도와주지도 않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면서? ” “ 그러니까요! 진짜 최인혁교수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다니까요! ” “ 네, 맞아요. 최교수님 아니었으면 그 보호자한테 한 대 더 맞았을지도 몰라요. ”
인혁이의 얘기가 나오자 귀를 기울이는 은아. 일단 조용히 듣고 있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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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그 최인혁선생이 성격이 쪼매 드러버서 그러지. 그런 거는 잘 막아준다. 최 교수가 옛날에 외과에 있을 때도, 난동피우고 그런 환자 있으면은 안지나치고 막아주 고 그랬다. 다른 선생들이야 뭐, 레지던트 이상으로 올라가면 신경안쓰고 막 지나치고 그러는데, 최교수는 안 그랬지. ” “ 아아~ 진짜요? 하기야, 응급실에 있을 때, 저도 몇 번 최교수님 덕분에 위기를 모면 했던 적이 있죠. 그러고 보면 그래 안 좋은 분은 아닌 거 같은데. ”
그 말에 살짝 미소를 띠는 은아. 에이, 다들 당연한 거를 가지고.. 교수님이 알고 보면 얼마나 좋은 분인데.. 간호사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인혁에게 좋은 쪽으로 얘기가 흘러가자 살짝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며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그녀였다. 그러나 그 말에 반박을 하는 수술실 베테랑 간호사.
“ 야, 그러면 뭐하노! 말을 한마디도 안하는데! 고맙다고 인사를 하면 받아주기를 하 나? 눈도 안마주치고 대충 꾸벅 거리기만하고 휙- 가버리고! 사람이 한 두 번이라야 지 무시하는 거고 뭐꼬? ” “ 아, 그거는 그렇지만.. ” “ 뭘 그거는 그렇지만이고! 내가 와 최교수 수술실을 안 들어가는데! 아주 승질대로 안 되면 버럭버럭 소리를 얼마나 질러대는 줄 아나? 수술도 자기가 무리하게 잡아놓 고 세팅 제대로 안 되있다고 얼마나 뭐라카는데, 내가 몇 년 전에 대판 싸우고나서 다시는 최교수 수술실 안 들어간다! 하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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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괜히 자신이 살짝 찔리는 은아. 조금 억울한 면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인혁이 수술을 무리하게 하느라 주위사람이 고생하는 건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반박하지도 못하고 일단 계속 듣고만 있다. 완고한 수술실 간호사의 태도에 분위기를 맞추려 조심스레 말을 이어가는 최간호사.
“ 뭐, 그.. 그렇죠.. 저는 그렇게 싫거나 한 거는 아닌데.. 최교수님만 보면 무서워가지 고.. 평소에는 말도 없이 그냥 화난표정이시고, 응급환자 들어와서 처치하고 그럴 때 는 막 소리지르시고, 너무 무서워지시니까. 뭐 어떻게 가까워질 수가 없어요. 그래도 나과장님은 무서울 땐 무서워도 평소에는 재밌으신데. ” “ 그러게요. 인사를 해도 잘 받아주시지도 않으시고.. ” “ 아.. 그래도 요즘에는 조금 부드러워지신 거 같던데요? ”
인혁에게 고마운 마음이 드는지, 그를 조심스레 두둔하고 나서는 김간호사. 그러자 그녀에게 일제히 시선이 쏠리고, 오늘 고초를 겪었던 그녀의 말을 아무도 반박하지 못하고 있다. 은아는 속으로 다행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는데, 김간호사가 조심스럽게 계속 말을 이어나간다.
“ 아니, 하하.. 그래도 요즘에는 조금 부드러워지신 거 같아서요. 뭐 하긴, 저도 최인 혁교수님이 쪼금 무서워서, 오늘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는데도 못하기는 했어요. ”
이때다 싶은 은아. 김간호사 말에 조심스럽게 대꾸를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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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고맙다고 말해드리면은 교수님도 좋아하실낀데. ” “ ....!!!!!.... ”
그러자 일제히 은아에게로 쏠리는 시선, 다들 살짝 당황한 눈치다. 아마도 모두들 약간 취한상태로 얘기를 이어가던 탓에 은아가 옆에 있다는 걸 잠시 잊은 듯한 눈치였다. 점점 미안한 표정으로 바뀌는 간호사들.
“ 아, 하하.. 니 거기있었노.. 하하...하.. ” “ 마, 맞다 하하... 언니도 있었지.. 하하.. ”
구석자리에 앉아있던 은아. 자신이 없는 줄 알았다는 양 말하는 간호사들을 보고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살짝 표정을 굳힌 채 착- 째려보는데 평소 병원에서 불같은 그녀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살짝 당황하는 간호사들. 그러나 이내 다시 연기였다는 듯이 씨익- 하고 웃어버리는 그녀. 그러자 간호사들이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런 그들을 보고는 일부로 더 밝게 입을 여는 은아.
“ 그거는~ 같이 일을 안 해봤으니까 몰라서 하는 소리죠~! 교수님도 평소에는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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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무서우세요! 알고 보면 농담도 얼마나 잘하시고~ 사실은 얼마나 자상한 분이신데, 아마 김간호사가 고맙다고했으면 진짜로 좋아하셨을 껄요? ” “ 에이~ 최인혁선생이 농담을 한다꼬? 자상해? 그래도 그거는 아니지~ 아이고.. 최교 수가 그 정도 융통성이 있었으면! 내가 그래 싸우지도 않았지..! 내가 햇수로만 따지 면 니보다 최인혁선생을 더 오래봤는데! 농담하는건 한~번도 못 들어봤데이~ 니 지금 같은 팀이라고 편들어주는기가? ”
베테랑 수술실 간호사의 대꾸에 살짝 욱하는 은아. 하지만 인혁의 편을 들어줘야 하는 상황이라 인상을 더욱 밝게 하며 더 부드럽게 대꾸해준다.
“ 아유~ 선생님! 편이 아니고 진짜라니까요~ 사실, 수술실이나, 응급실이나~ 맨날 응 급환자 실려 올 때만 보니까 그렇죠! 한번 자세히 보세요~ 평소에는 그렇게 소리도 안 지르시고, 정말로 잘해주신다니까요~! “ “ 하유~ 얘 신선생아~ 최교수가 잘해줘봤자 얼마나 잘해주겠노~? 니도 최교수 뒷바 라지 하느라 맨날 야근에다가 시도 때도 없이 콜 받느라 등살이 휘어지는 거 같든 데~? ” “ 에이~ 선생님! 그거는 일이니까 그렇고요~ 뭐 외상팀이야 인력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야근도 많고.. 시도 때도 없이 콜 오고.. 그런 거는 좀 있지마는! 그래서 교수님 이 미안하니까, 잘 해주실라고 엄청 애써주시고, 외상코디네이터라고 남들 앞에서 인 정해주시고~! 존중해주시고! 제 얘기 다~ 들어주시고!! 아, 그리고 밥도 매일매일, 다~ 사주시고, 회식비도 다~ 쏘시고 그런다니까요~! ”
그러자 그녀를 약간 부럽다는 듯이 쳐다보는 응급실 간호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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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로요? 와.. 나과장님은 밥 좀 사달라고 하면 쏙- 빠져나가시는데 ” “ 야, 나과장님 뿐이고? 김도형쌤은 자판기 커피 한잔 뽑아주고 그래~ 생색을 부리더 만.. 최교수님은 그런 거는 안 아끼시나보네요~? ” “ 그럼~ 얼매나 챙겨주시는데! 그라고~ 내가 저번에 야간 근무할 때 피자 돌린 거~ 그거 누가 사줬는지 기억 안나나~? ” “ 아.. 그거, 그때 아마 최교수님이 사주시는 거라고 했었나? ” “ 그래~! 기억하네~ 최교수님이 말을 안하셔서 그렇지~ 얼마나 간호사들을 생각해주 시는데~! 아! 아까도~ 사무실 들어가자마자 나한테, 김간호사 괜찮냐고 그거부터 물어 보셨다니까~! ” “ 아.. 최교수님이 저를요? ”
인혁이 자신의 걱정을 해줬다는 말에 놀라는 김간호사. 은아는 이때다 싶어 더욱 인혁을 두둔하고 나선다.
“ 그렇다니까~! 아, 그라고~ 인턴 쌤들한테, 왜 가만히 보고만 있었느냐고 혼도 내셨 다는데? ” “ 아.. 진짜요로? ” “ 그럼! 진짜지~! ”
은아의 말을 들은 나머지 간호사들, 모두들 서로 눈치만보면서 못 믿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거나 정말 의외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한데, 당사자인 김간호사는 살짝 감동받은 듯한 눈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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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김간호사.
“ 아.. 아니 저는 사실.. 아까 진짜로 고마웠거든요.. 최교수님 아니었으면 진짜 큰일날 뻔 했는데.. 근데, 고맙다고 하고 싶어도. 쪼금 말시키기가 뭐해가지고.. ” “ 에이~ 그라지 말고, 나중에 한번 말씀 드려보는게 어떻나? 솔직히 누구하나 제대로 교수님한테 말 시켜본적 있노? 나 여기 처음 들어왔을 때도, 교수님한테 아~무도 말 안 걸고.. 교수님이 얼매나 외로워보이셨는데.. 사실, 조금 낯가림이 심하셔서 그렇지.. 알고 보면, 정말 하나도 안 무섭다니까. ” “ 아.. 그래요? ” “ 그러엄! 그, 표정이야 뭐.. 맨날 수술만 하셔가꼬 피곤하셔서 그러지.. 그것도 화난표 정은 아니고~ 뭐, 다들 알다시피 외상센터가 잘 안되니까.. 조금 우울하셔서 그런거 고..! 아니 그라고 그럴 때일수록! 옆에서 누가 말도 시켜드리고 해야되는데, 다들 무 섭다고 쉬쉬해버리고 피해버리고 그러니까네.. 교수님이 더 말씀이 없어지시고 그런 거 같지 않나..? 내는 그런거같은데.. ” “ 하기는.. ” “ ...그러니까 다들~ 먼저 인사도 쪼매 밝게 해주고~! 겁내지 말고 말도한번 붙여보 고~! 한번 그래 해보고나서 교수님이 이렇네 저렇네 말을 하라꼬..! 그라고 그렇게 하 면 교수님도 화도 덜내시고~ 무뚝뚝한 성격도 좀 밝아지시고! 그러실꺼라니까네.. 안 그렇나? ”
틀린 것 하나 없는 은아의 말. 간호사들은 그 말을 듣고 다들 조금씩 찔리는 게 있는지, 아무 말 못하고 그저 불 판 위에 고기만 뒤적거리고 있는데, 잠자코 있던 수술실 간호사가 그래도 뭔가 불만이 있다는 듯, 다시 한 번 은아를 향해 입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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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흠흠, 뭐, 그거는 그렇다 치더라도.. 솔직히, 최교수 때문에 힘들어 죽겠는 거는 사 실인데, 니가 최교수한테 환자 좀 적당히 받으라고 말 좀 해줄 수 없나? 이번 달만해 도 내가 최교수 때문에 거의 쉬지를 못했다꼬. 니도 알겠지마는 수술준비가 연락 온 다고 바로 뚝딱 되는 것도 아이고, 정규수술들은 느~긋하게 준비할 수 있는데, 솔직히 외상환자는 올 때마다 전쟁이다 전쟁! 갑자기 환자 들이닥치면 순식간에 수술실 세팅 해야되고, 우리 팀 간호사들 불러내야되고! 게다가 응급실에서 수술이라도 하는 날에 는, 내가 아주 더~ 정신이 없는 기라.. ”
환자 수술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살짝 긴장하는 은아. 다들 그녀가 뭐라고 할지 궁금한지 그녀만 바라보고 있는데, 은아가 조심스레 부탁하는 어조로 다시 한 번 침착하게 입을 연다.
“ 아, 그거는.. 제가 대신 뭐라 해드릴 수 있는 거는 없지만.. 선생님..! 고생하시는거 는 아는데~ 외상환자 그렇게라도 안 받으면은 살릴 가능성 희박하다는 거 선생님도 하시잖아요..! 교수님이 뭐 단순히 실적 올리려고 그라는 것도 아니고.. 여기저기서 욕 먹어가면서 왜 그렇게까지 하시겠어요. 다 사람 살려보겠다고, 본인 밥먹을 시간도 아 끼고, 주무시는 시간도 아껴가면서 그래 하는 건데.. 선생님이 쪼매 이해 좀 해주세 요.. ”
간곡하고도 진지한 은아의 부탁에 할 말이 없어진 수술실 간호사.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하는 수 없다는 듯 입을 연다.
“ 아이고.. 뭐 니라고 어쩔 수 있겠나, 그래도~! 내가 신선생 니 봐서 참는기라..! 니 잘해야된데이! ” “ 그럼요~! 당연하죠~ 제가 선생님 고마워서라도 더 열심히 뛰어다닐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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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실 간호사에 긍정적인 대답을 듣자 활짝 웃으며 대답하는 은아. 모두들 그런 그녀를 보며 잘됐다는 듯 웃어넘겨버리고, 그 덕분에 테이블에 분위기가 훨씬 좋아진다. 그때, 눈치를 살피던 최간호사와 김간호사가 살짝 은아의 편을 들어준다.
“ 하..하기는 그래도~ 최교수님이 새벽에도 응급실에 항상 계시니까 든든하고 그런거 는 있어요~ 그죠? ” “ 아, 맞아요~ 새벽에 인턴 쌤들밖에 없을 때는 불안하고 그런데~ 그래도 교수님이 항상 계시니까. 문제생겨도 바로바로 해결되고 그런 거는 있죠..! ” “ 아, 그리고! 그, 교수님이 화는 쪼매 자주 내셔도~ 또 반말은 안 쓰시잖아요~ 왠만 하면 꼬박꼬박 존대해주시고, 다른 의사쌤들처럼 함부로 무시도 안하고..! ” “ 그으..럼! 그렇지..! 그렇죠..? 하하.. ” “ 아, 그라고 이거는 아까도 말했지만, 골치아프고 난동피우는 환자있으면 나서서 도 와주시고 그러잖아요~ 저도 그, 예전에 도움 받은 일이 있었는데, 그때 정말 고마웠어 요. ”
갑자기 인혁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는 응급실에 두 간호사들. 그러자 다른 간호사들도 조금씩 수긍을 하는 것 같더니 여기저기서 간호사들이 그동안 고마웠던 일을 털어놓는다. 그러자 살짝 민망해진 수술실 베테랑 간호사.
“ 뭐야, 갑자기들..? 하이구, 최인혁교수는 좋겠네~ 이렇게 편들어주는 사람이 많아 서~ 인기 많네~ 최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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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수술실 간호사의 말을 웃어넘기는 간호사들. 그런 그들 때문에 살짝 놀라는 은아. 역시.. 그동안 대화가 단절되어 있어서 그렇지 인혁에게도 그의 편이 아예 없던 건 아니구나 싶다. 그때, 상황을 정리하려는 듯 화제를 돌리는 최간호사.
“ 아무튼, 가만보면은~ 신선생님도 정말~ 최교수님을 엄청 챙겨주신다니까요! 최교수 님에 대해서 모르는것도 없는 거 같고, 최 교수님도 신선생님 이야기는 그래도 잘 들 어주시는거 같고~! 나는 솔직히, 신선생님이 이래 오래 버틸 줄도 몰랐는데! 요즘 보 면은~ 두 분이서 엄청 사이좋게 지내시는 거 같아요~! ” “ 에이, 그거야~ 하도 오랫동안 같이 일하다 보니까 그러는 거겠지~ 원래 같이 오래 일하다보면 한 팀끼리 가족같은 느낌도 들고 그러잖아. 그렇죠 신선생님~? ” “ 응? 아아, 그렇지~ ”
옆에 있는 응급실 최간호사에 물음에 얼떨결에 대답하는 은아. 그런데 막상 대답하고 보니, 정말 괜찮은 말 같았다. 가족 같은 느낌이라.. 혼자 피식- 하고 웃음이 나오는 그녀. 정말 그래서 그런 걸까? 비록 같이 일한지는 1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그와 내내 붙어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같이 고생하면서 하도 많은 일을 함께 겪어서 그런지.. 그와 함께 진지하게 주고받았던 많은 대화들 때문에 그런 건지.. 왠지 그가 편안하기도 하고, 더 챙겨주고싶기도 하고, 그렇게 그가 조금 각별하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었다. 가족 같은 직장 동료사이.. 부담스럽지도 않고, 그렇다고 멀게 느껴지지도 않는.. 정말 딱 좋은 관계라는 생각이 드는 은아였다. 그런데 그때, 다시 그녀에게 질문을 던지는 최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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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근데, 신선생님~! 선생님은 언제 결혼하실 거에요? ”
갑작스러운 김간호사의 질문에 당황하는 은아. 당황하고 있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덩달아 당황하는 김간호사.
“ 뭐, 너는 그런 질문을 하노~ " " 아니 나는 그냥 궁금하니까~ 신선생님 처음오실 때 캐나다 가신다고 얼마 못 있으 실꺼라고 들은 거 같은데.. 선생님! 이번에 계약 연장하신 거 약혼자분이 뭐라 안하셨 어요? “ “ 아! 그러게? 그러고 보니까 신선생한테는 남자친구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 네~ 남자친구 누군지 되~게 궁금한데~ ”
갑자기 그녀의 남자친구에 대한 얘기로 대화의 주제가 바뀌어 버리고, 당황한 은아가 그냥 얼버무려 버린다.
“ 아.. 그, 동규씨는 이해해준다카는데.. ” " 오~ 동규씨래~~ “
그러나 은아가 뭐라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합창을 하듯 그녀의 말을 따라하는 간호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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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들어보는 그녀의 남자친구 이야기에 모두들 눈을 반짝거리며 귀를 기울인다. 그러자 더 부담스러워진 은아. 슬쩍 눈치를 보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하고 일어선다.
“ 저기, 나 화장실이 급해가꼬.. ” “ 에이~ 뭐에요~ 신선생님~!! 하던 얘기는 마저 해주고 가셔야죠~~~! ” “ 얘, 얘기는 무슨, 아, 이따가 해준다꼬~ ”
그렇게 은아가 재빨리 화장실쪽으로 도망쳐버리고, 간호사들은 좋다가 말았다는 듯이 아쉬워하다가 이내 다시 다른 화제를 꺼내며 수다를 이어나간다. 잠시 후, 화장실로 도망쳐 온 은아. 거울 앞에서 손을 씻으며 혼자 궁시렁거린다.
“ 아잇, 저 가시나, 쓸데없는 얘기는 꺼내가지고.. ”
그들 때문에 갑자기 떠오른 동규생각에 괜히 또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은아. 오늘 여기 온다고도 얘기 안했는데.. 워낙 지난 한 달을 바쁘게 보내는 바람에 동규와 데이트는커녕 통화도 제대로 못했던 일이 생각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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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바쁘다지만, 자꾸 그를 잊어버리고 산다는 생각에 마음 한 켠에 또다시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이 교차된다.
“ 후.... ”
절로 나오는 한숨. 결혼을 미뤄가면서 한국에 남겠다고 한 것도 미안해 죽겠는데.. 그가 별다른 말없이 이해해주겠다고 한 일이 생각나자 마음이 더 무거워진다. 정말 이해심이 많고 마음이 넓은 그. 지금까지 그의 그런 면들이 좋았던 건 사실이었다. 힘들 때는 그에게 기댈 수도 있었고,. 그 덕분에 별다른 걱정 없이 일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이해심과 넓은 마음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은아.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그런 점들이 조금 답답하게 느껴졌다. 늘 빈틈이 없는 사람. 내가 기댈 수는 있지만, 나에게 기대지는 않는 그. 늘 배려해주고, 다독여주고, 이해해주고,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그 사람인데.. 너무 완벽해 보여 서였을까. 그는 왠지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가 나를 좋아해 주고 사랑해주는 만큼.. 거기에 보답하고 싶었는데.. 그에 대한 나의 사랑과 나의 마음이 나를 향한 그의 사랑보다 한없이 작다고 느껴질 때, 나는 그의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지곤 했다. 복잡한 생각이 드는 그녀. 이내 어지러운 듯 고개를 흔들어버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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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간호사들이 있는 테이블, 모두들 한창 시끄럽게 수다를 떨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휴대폰 벨소리가 울린다.
[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
은아가 화장실 간 사이에 울리는 그녀의 휴대폰. 살짝 취한 간호사들, 병원에서 온 응급 콜인가 싶어 휴대폰을 슬쩍 확인하는 데, 핸드폰에 뜨는 ‘동규씨’ 라는 세글자. 눈이 동그래진 간호사들. 그때, 씨익- 웃으며 은아의 휴대폰을 집어드는 최간호사. 안 그래도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었는데.. 마침 잘됐다는 생각이 들고, 술도 살짝 취한 김에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손가락을 들어 통화버튼을 누르려고 한다. 그러자 옆에서 그녀를 말리는 다른 간호사들.
“ 야, 뭐하는거야..! ”
그러나 다른 간호사들이 말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통화버튼을 눌러버리고, 휴대폰을 자신의 귀에 가져다대는 최간호사였다.
“ 네, 여보세요..? ” “ .. 은아씨...? 아.. 신은아씨 휴대폰 아닙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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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목소리만 듣고도 단번에 알아차리는 동규. 최간호사의 옆에서는 나머지 간호사들이 어떻게! 어떻게!를 연발하며 난리가 나고, 계속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에 연기를 시작하는 최간호사.
“ 아~ 저기, 혹시 신선생님 약혼자분이세요..? ” “ 네, 맞는데요. 은아씨 어디 갔습니까? ” “ 그건 아니고요~ 지금 저희 간호사들 끼리 회식하고 있는데~ 신선생님이 술을 너무 많이 드셔서 걷지를 못하시거든요? 좀 데려가셔야 할 거 같은데.. ” “ 네..? 은아씨가요..? ”
최간호사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규. 한 번도 취하도록 마셔본 적이 없는 그녀인데.. 그럴 사람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지만, 일단은 그녀에 대한 걱정이 앞서는 그였다.
“ 아.. 지금, 거기 어딥니까? 제가 바로 가겠습니다. ”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이곳으로 오겠다는 그의 대답에 살짝 놀라는 간호사들. 최간호사는 성공했다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며, 동규에게 식당 위치를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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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곧 전화를 끊는 그녀. 막상 전화를 끊고 나니 후환이 두렵기는 했지만, 그래도 장난이 성공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김간호사가 미쳤다며 그녀의 팔을 때린다.
“ 야! 니 어쩌려고 그래?!! 진짜로 온다잖아! ” “ 아잇!! 아파! 그만 좀 때리라~ 그리고 뭐, 어떠노~ 신선생님 병원일 때문에 데이트 도 못하시는 거같던데~ 내덕분에 오랜만에 데이트도 하시고 그러면 좋은기지!! ” “ 미쳤어! 미쳤어! ” “ 괜찮다니까~ 음.. 근데, 있자나~ 나 부탁하나만 하자. ” “ 또 뭐를? ” “ 신선생님 오면, 모르는 척 해라이~ 나는 취해서 자고있다고 좀 말해주고 ”
그렇게 말을 뱉어놓고는 소주를 벌컥벌컥 마시는 최간호사. 장난을 쳐놓고 후환이 두렵긴 두려운 모양이었다. 잠시 후, 다시 자리로 돌아온 은아. 그런데 왠지 분위기가 이상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최간호사는 뻗어있고, 나머지 간호사들은 왠지 서로 눈치만 보고다가 그녀를 힐끔힐끔 쳐다보기만 했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차린 그녀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지만, 아무 일도 없다고만 대답하는 간호사들. 은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자리에 앉아버리고, 간호사들은 애써 다른 화제로 얘기를 돌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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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술자리가 이어나간다. . . . 몇 분 후, 이제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는 간호사들. 고기 집을 꽉 채웠던 간호사들이 어느새 절반은 사라져버리고, 은아도 이제 그만 집에 가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그때, 뒤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
“ 은아씨!! 괜찮아요? ”
눈이 휘둥그래져서 뒤를 돌아보는 은아.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동규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서있었다.
“ 동규씨..? 동규씨가 여긴 어떻게.. ” “ .....? 아까 전화했더니, 은아씨가 많이 취했다고 해서.. ” “ ...네?? ”
은아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는 듯 간호사들과 그를 번갈아 보며 쳐다보는데, 동규는 무슨 일인지 전혀 모르는 눈치고, 간호사들은 그녀의 눈을 피하며 손가락으로 최간호사를 가르킨다. 사실, 살짝 깨어있으면서도 계속 자는 척을 하는 최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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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아는 대충 상황파악이 되고, 다시 동규를 바라보며 미안한 표정으로 말한다.
“ 아.. 미안해요 동규씨.. 아무래도 이 친구들이 장난을 좀 친 거 같은데.. ”
그리고는 고개를 휙 돌려 간호사들을 째려보는 은아. 죄 없는 나머지 간호사들은 어색하게 동규에게 인사를 하더니 갑자기 빨리 집에 가야겠다며 자리를 피하려 한다. 그제야 동규도 대충 상황파악이 되고, 뭔가 어이없는 상황에 피식 웃으면서도 어쩌면 이렇게라도 그녀를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은아에게 말을 하는 그.
“ 은아씨, 우리도 가요. 내가 데려다줄게요. ” “ 네.. 정말 미안해요. 쉬어야 되는데 괜히 나 때문에 온 거 아니에요? ” “ 나는 충분히 쉬었어요~ 하하.. 자, 얼른가요~! ”
그렇게 그녀에게 손을 내미는 동규. 다 괜찮다는 듯 웃어주는 그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은아. 이런 상황도 다 이해해주고.. 여기까지 데리러 와주고.. 언제나 내 걱정만 해주는 이 남자. 평소, 그에게 느끼는 미안함과 부담스러운 마음을 떠나서 이럴 땐 동규가 참 든든하게 느껴지는 은아였다.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그녀를 바라보는 그. 그를 따라 살며시 미소를 띠우는 그녀. 이내 손을 들어 동규가 내민 손을 잡는데, 그의 손의 따뜻한 온기가 그녀에게로 전해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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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고기 집을 빠져나가는 두 사람. 몇 분 후, 동규의 차, 기분 좋은 듯 운전을 하고 있는 동규. 말없이 가만히 있는 은아를 슬쩍 보더니 뭐가 그리 좋은지 또 입이 귀에 걸릴 만큼 웃어버린다. 그러다 다시 운전을 하기 위해 앞으로 고개를 돌리는 그. 아까부터 몇 번을 그러기를 반복하는 그 때문에 민망해진 은아. 결국 조용히 타박을 해본다.
“ 왜요. 왜 자꾸 보고 웃고 그래요.. 민망하게.. ” “ 이렇게 은아씨 얼굴보니까 좋아서요. ” “ .... 그래도.. ” “ 음.. 기대도 안했는데.. 정말 신기하네요. 지금 은아씨가 내 옆에 있다는게. ” “ ....?... ” “ ..우리.. 얼마 만에 보는 건지 알아요? ” “ 아.. 음.. ”
그의 물음에 답을 하기 위해 생각을 해보는 은아. 헬기컨퍼런스 갔다오고 한번 만나고.. 그 뒤로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니.. 거의 두 달이 다 되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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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게.. 아.. 미안해요.. ” “ ... 미안하라고 한 말이 아니라.. 그만큼 보고싶었다구요. ” “ 네.. ”
그냥 네.. 라는 대답만 하는 그녀. 동규는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그 다음 대답을 기다려보지만, 그의 기대와는 다르게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는 은아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조금 씁쓸한 웃음을 짓는 동규. 이럴 때면 늘, 마음 한구석이 조금 허전해지는 걸 느낀다. 조심스레 은아를 향해 입을 여는 그.
“ ... 은아씨는.. 나 안 보고 싶었어요? ”
갑작스런 동규의 물음이 살짝 당황스럽게 느껴지는 은아.
“ 네? 아.. 아니, 보고 싶었죠.. ”
그런데 이렇게 대답을 해놓고.. 그에게 더욱 미안함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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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은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보고싶었다는 말을 더 듣고 싶은 동규.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조금 진지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연다.
“ ....은아씨.. ” “ 네.. ” “ 나 캐나다갔을 때는.. 어땠어요..? 그때도.. 보고 싶었어요..? ” “ 아.. 음.. 그때는 보고싶었어요.. 많이.. ” “ ... 미안해요.. 은아씨 혼자두고 가는 게 아니었는데.. ” “ ... 아니에요.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었잖아요. ” “ .... ”
그대로 아무 말이 없어진 은아와 동규. 두 사람 모두 깊은 생각에 빠진 듯 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오래전 기억들. 분명히 설레임을 느꼈던 그 때. 지금과는 확실히 달랐던 그 때. 짧았던 4개월의 시간. 가끔씩 그때가 그립기도 했다. . . . . 약 1년 6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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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 조금 일찍 도착한 동규가 자리에 앉아 맞선상대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심드렁해 보이는 그의 표정. 사실, 이젠 이런 맞선자리가 조금 지겹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그였다.
“ ....흐음.... ”
35살, 적지도 않고 많지도 않는 나이. 그동안 좋은 성적, 좋은 대학, 좋은 회사, 언제나 높은 것들만 바라보고 늘 앞만 보고 달려왔던 나. 직장생활 10년만에 꽤 높은 지위에 오를 정도로 내내 성공가도를 달려왔던 나였지만 원하는 것들을 어느 정도 손에 넣은 지금. 난 별로 행복하지가 않았다. 궁금했었다. 왜 모든 걸 얻었는데, 행복하지 않은 건지.. 그러다 문득,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한 가지. 사랑하는 사람.. 나의 성공을 같이 기뻐해줄 한 사람. 나를 사랑해주고 결혼도 하고 같이 살며 함께 행복을 누려줄 한 사람. 나에게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 비슷한 또래에 친구들, 동료들 모두 결혼해서 안정된 삶을 찾아가고 있는데.. 정작 나는 내가 원하는 목표지점에 도달 했을 때, 그 성공을 함께 기뻐해줄만한 사람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찾고 싶었다. 그런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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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물고 뜯기에 바쁜 냉정한 조직생활에서 이를 악물고 싸워가며 버텨오는 동안, 그동안 지쳐있던 마음, 외롭던 마음을 치유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제라도 좋은 사람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지난 1년간 바쁜 시간을 쪼개서 소개팅도 해보고.. 선도 보러 다녀보고.. 새로운 여자도 만나보고 나름대로 애써 봤었다. 하지만.. 나의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다들 배경, 능력, 재력, 집안 같은 걸 따지는 그렇고 그런 여자들 뿐.. 모두들 지금까지 봐온 사람들이랑 다를 게 없어보였고 나를 치유해줄.. 이렇다 싶은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거의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났다.
“ 저기.. 혹시 이동규..씨? “ ....?.... ”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서 은아가 도착한지도 모르고 있던 동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얼른 고개를 들어보는데, 여자인데도 훤칠한 키, 하얀 얼굴에 큰 눈, 아름다운 미소, 선한 인상을 가진 그녀가 눈앞에 서있었다.
[ 두근- ]
그녀를 보고 잠시 멍하게 있던 그.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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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인사를 한다.
“ 아! 네, 안녕하세요. 제가 이동규입니다. ” “ 네에.. 저는.. 신은아에요.. ” “ 아아.. 저기, 일단 여기 앉으세요..! ”
그녀는 정말 좋은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왠지 모르게 순수해 보이는 인상. 청순하면서도 귀여운 스타일의 옷차림. 그러면서도 애써 사투리를 감추지 않으려는 솔직해 보이는 그녀의 말투. 믿지 않았었는데.. 첫눈에 반한다는 게 이런 기분인걸까? 동규는 왠지 모를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하는 두 사람. 간호사라는 그녀. 잠시 어색하게 흐르는 침묵을 먼저 깨면서 자기가 말을 잘 못하는 스타일이라고, 할 줄 아는 얘기도 별로 없고 재밌게 말할 줄도 모른다며 이해해달란다. 그런데 쑥스러운 듯 말을 이어가는 그 모습이.. 왜 이렇게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건지.. 왠지, 그녀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녀에게 자꾸 질문을 했다. 어색하게 말을 이어나가다보니 서로 할 줄 아는 얘기가 일 얘기 밖에 없어서 자연스럽게 일 얘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얘기를 시작하던 그녀. 환자이야기와 병원이야기를 해나가면서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던 그녀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같이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신기했다. 정말 새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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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봐왔던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게.. 그녀에게서는 어떤 긍정적인 에너지와 열정이 느껴졌다. 처음 보는 여자인데, 그 모습이 낯설지가 않았다. 세상에 이런 여자도 있구나.. 왠지 나와 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이구나. 한 눈에 알아봤다. 내가 찾던 사람이.. 이 사람이구나. 그녀를 더욱더 알고 싶어졌다. . . . . 잠시 후,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식사를 시작하는데,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서 불편하고 어색하기만 한 은아. 그런데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앞에 있는 동규가 자기 앞에 스테이크는 하나도 먹지도 않고, 계속 미소를 띠며 그녀만 보고 있었다.
‘ 아.. 진짜, 뭘 저리 보노! 먹고 있는데 민망하게시리.. ’
눈치를 살짝 줘도 못 알아먹고.. 정말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는 이 남자. 결국, 그 자리가 불편해 죽겠는지 화장실을 간다며 자리를 빠져나가는 그녀. 동규는 그런 은아의 뒷모습을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짓는다. 정말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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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더욱더 알고 싶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를 어색해하는 그녀. 어떻게 하면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오로지 그 생각만 했다. 그러다.. 그녀가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자,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건지.. 혹시 내가 싫어서 도망가 버린 건지.. 걱정이 되었다. 고민 끝에.. 그녀를 소개시켜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가 일하는 병원을 알아내서 무작정 찾아갔다. 정말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 그래서 기다렸다. 1년을 내내.. 아니, 살면서 간절히 기다려왔던.. 내가 꿈꾸던 그런 사람인데, 6시간쯤이야..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래서 기다렸다. 그렇게 그녀가 다시 나오고, 그녀와 함께 포장마차에 가고, 함께 밥을 먹고, 그녀를 바래다주고, 다시 집에 돌아와서는 그날 밤 내내 잠도 못자고, 다시 연락을 하고, 데이트를 하고. 그렇게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다. 그녀와 함께하는 매일 매일이 새롭게 느껴졌다. 처음엔 날 어색해하던 그녀도 조금씩, 조금씩 마음에 문을 열어줬고, 내가 캐나다로 떠나기 전까지.. 미치도록 설레 였던 4개월, 참..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 . . . 행복한 표정으로 운전을 하며, 그 날을 회상하던 동규. 그렇게 처음 만났던 날을 추억하며 오다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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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그녀의 아파트 앞에 도착해있었다. 어두운 길을 비춰주고 있는 아파트 화단 옆에 익숙한 가로등. 동규의 차가 그 가로등 앞에 멈춰서고, 은아를 향해 입을 여는 동규.
“ 은아씨, 다 왔네요. ” “ 네, 그러네요. 동규씨, 피곤할 텐데 데려다줘서 정말 고마워요.. ” “ 고맙기는요.. 내가 데려다주는게 당연하죠.. ”
당연하다는 그의 말에 살짝 미소를 지어보이는 은아. 이내 그녀가 밖으로 나가기 위해 안전벨트를 푸르려는데, 동규가 먼저 그녀의 안전벨트를 풀어준다. 그러면서 조심스레 입을 여는 그.
“ 저기.. 은아씨. 여기 이 자리 기억나요? ” “ 네..? 아아.. 그럼요. 어떻게 잊겠어요. 하하.. ”
얼굴을 살짝 붉힌 채로 조심스럽게 묻는 그. 그런 그 때문에 살짝 당황하며 대답하는 그녀. 아파트 가로등 앞, 잊을 수 없는 이 자리. 그때를 떠올리다가 그녀의 얼굴도 살짝 붉어진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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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날의 그 첫 만남 이후,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다. 그는 거의 매일 나를 바래다주러 병원으로 찾아왔다. 병원에서 힘들었던 일이 없었는지 먼저 물어봐주고, 힘든 일이 있던 날엔 너무나도 따뜻하게 위로해주고, 힘들게 날 보러 와놓고는 내가 피곤할까봐 오래 있지도 못하고 늘 아쉬워하며 돌아서던 그.. 그런 그가 좋았다. 날 배려해주는 그가, 솔직히 설렜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두근거림, 그에게 느끼는 호감과 호기심, 동시에 느끼는 낯설음과 긴장감 그에 대한 기대, 내 미래에 대한 기대, 이런 마음들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지면서 그는 나에게 어떤 설레임으로 다가왔다. 어떤 날은 그가 오길 먼저 기다린 적도 있었고, 어떤 날은, 그가 오지 않아 섭섭했던 날도 있었다. 그렇게 처음엔 부담스럽고 어색했던 마음들이 그의 노력으로 인해 조금씩, 조금씩 사그라지는 듯 했고 그에게 느꼈던 호감이 점점, 그를 향한 신뢰와 믿음으로 변해갔다. 어차피 결혼을 전제로 나갔었던 맞선자리. 이런 사람이라면, 이런 남자라면.. 괜찮지 않을까..? 마치 내가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 들 정도로 나만을 사랑해주고 좋아해주는 사람.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이렇게 나만을 바라봐주는 사람은 없었는데.. 그 덕분에 내가 좀 더 나를 아끼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에게 느끼는 호감과 신뢰가 사랑으로 바뀌기도 전에 우리는 잠시 떨어져있어야만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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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다시 과거시점) 그를 만난 지 4개월이 조금 지난 어느 날 가을, 그의 차안,
“ 오늘 바래다줘서 정말 고마워요~! 동규씨, 저 그럼 들어가 볼게요..! ” “ 아, 잠, 잠깐만요 은아씨. ” “ ....? ” “ 그게.. 저.. 은아씨, 내가 조금 할 말이 있는데.. ” “ ....?.... ”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동규의 모습. 한참을 뜸을 들이다 말을 꺼내는 그.
“ 음.. 은아씨, 내가 다음 주부터는 못 데려다 주러 올 거 같아요. ” “
아아~ 괜찮아요~! 저는 늘 다니던 데로 다니면 되니까. 동규씨 바쁜 일 있으면, 그
런 거는 마음 안 쓰셔도 되요~! ” “ 아, 아니 그게 아니고.. 제가 다음 주부터는.. 한국에 없을 거 같아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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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 " " ... 정말 미안해요. 몇 번이나 미리 말하려고 했는데, 입이 안 떨어져서.. 갑자기 회 사에 중요한 일이 생겨가지고.. 내가.. 캐나다에 가있어야 할 거 같아요.. “ “ 아... ” “ 그렇게 되면은.. 우리 오랫동안 떨어져있어야 할거에요. 전화통화는 하겠지만.. 오랫 동안 못 만날 거에요.. ” “ 아.. 네... ”
살짝 실망한 듯한 그녀의 표정. 이제야 조금 그와 가까워지고.. 그와 같이 있는 일에 적응해나가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동규의 말이 내심 섭섭하게 느껴지는 은아.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챈건지 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동규가 다시 진지하게 말을 이어간다.
“ ... 은아씨..
”
“ .... ? ” “ 내가 은아씨를.. 오랫동안 봐온 건 아니지만.. 처음이었어요. 살면서 이런 마음은.. ” “ .... ” “ 그래서요.. 나는 은아씨를 놓치고 싶지가 않네요.. 나.. 기다려 줄 수 있어요..? 나.. 기다려줄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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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규씨.. 저는.. ”
“ 이런 얘기.. 나중에 아주 나중에.. 근사하게 하고 싶었는데.. 내가 예전에 했던 말 기 억해요..? 나는 몇 년 있다가 아예 캐나다로 떠나야 한다고.. ”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은아. 그를 처음 만났던 날부터 알고 있던 일. 사실,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그는 언젠가는 캐나다로 떠날 사람이었고, 그와 함께하려면 캐나다로 떠나야 한다는 사실. 그런데, 그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아직, 그렇게 까지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조금 혼란스러워지는 그녀의 마음. 그런 그녀에게 용기를 내어 말을 꺼내는 동규.
“ 은아씨.. 나랑.. 캐나다 가서 살래요? ” “ ....!!!..... ” “ 당연히, 지금 당장 같이 떠나자는 거 아니에요. 은아씨도 여기서 일 정리할 시간도 필요하니까.. 한.. 1년, 아니아니, 병원일 여유롭게 정리하고 나서, 그러고 1년 정도 한 국에서 정리하고 있다가.. 나한테 올래요..? ” “ .... ”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이 상황에서 그런 중요한 결정을.. 아직 쉽게 대답해줄 수 없는 은아. 마음속에 갈등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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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대답을 망설이고 있는 그녀를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동규.
“ 은아씨, 잠깐만요. ”
갑자기 차에서 내리는 동규. 트렁크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그녀가 있는 조수석 문을 연다. 자리에 앉은 채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은아를 바라보며 그 자리에서 한쪽 무릎을 굽히는 그. 등 뒤에 감춰놨던 아름다운 장미꽃한다발과 작은 상자를 그녀에게 내민다. 그가 다시 한 번 입을 열고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흔든다.
“ 은아씨,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 마음속에는 당신밖에 없어요. 이런 느낌은.. 처음이에요. 살면서 사랑 같은 거 별로 믿지 않았었는데.. 은아씨가 나에게 확신을 주 네요. 나 같은 사람도 사랑에 빠질 수 있구나.. 은아씨는 그런 사람이에요. 한순간도 빼놓지 않고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은 사람. 계속 생각나는 사람.. ” “ ....!!.... ”
갑작스런 동규의 고백에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그녀.
“ ...내가 은아씨 사랑하는 거 맞죠?.. 사랑해요. 은아씨.. 내가 많이 부족하고 모자라 겠지만.. 내 마음.. 받아줄래요? 나랑.. 캐나다 가서 같이 살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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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 처음 받아보는 프로포즈. 그 순간 너무 떨렸다. 조금 놀라서 한참동안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는 은아. 그녀의 말에 환한 미소를 보이는 동규. 긴장해서 얼어있던 마음이 한순간에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그녀가 내 프로포즈를 받아주다니.. 너무 행복했다. 그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들고 있던 꽃다발을 그녀의 품에 안겨주고, 반지를 그녀의 손에 끼워준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라는 듯이 손을 내미는 그. 은아는 그의 손을 잡고 자동차 밖으로 나오고, 동규는 진지하게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두 사람. 두 사람의 입술이 살짝 포개어진다. 어두운 밤, 그들을 비추는 가로등. 아름다운 두 사람의 모습 그것이 우리의 첫 키스였다. . . . . .
(다시 2010년 겨울.) 그때의 일을 떠올리자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은아. 그런 그녀를 부드럽게 바라보던 동규. 조심스레 손을 들어 그녀의 손을 잡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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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하게 그녀를 마주보며 입을 연다.
“ 나는 아직도.. 힘들 때마다.. 은아씨가 보고 싶을 때마다.. 그때를 떠올려보고.. ” “ .... ” “ 우리가 같이 한날들.. 우리가 앞으로 같이할 날들.. 그 날들을 행복하게 그려보곤 해 요.. ”
은아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당황하다가 진지하게 말을 이어가는 그의 눈을 바라보는데 그의 눈빛이 조금씩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 은아씨가 나 기다려줬던 거 만큼.. 나도.. 기다릴게요. 여기 이 자리에서.. 계속 기다 리고 있을게요. ” “ ..... ” “ 그런데.. 너무.. 오래기다리게만 하지말아요.. 나 너무.. 외롭게 하지 말아요... 알았 죠..? ”
힘겹게 말을 이어나가는 그. 은아는 그가 안쓰러웠다. 조금은 아파보이는 그 눈을 바라보며 알았다고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았다.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여주는 은아. 그런 그녀를 보고 안심이 되는지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동규. 조금씩 그녀에게로 다가오며 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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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로.. 정말로.. 사랑해요.. 사랑해요 은아씨.. ”
그녀에게로 한껏 기울어진 그의 몸. 동규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는다. 잠시 후, 집으로 돌아가는 동규. 그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오랜만에 하는 그녀와의 입맞춤. 심장이 꽉 차오르는 느낌. 두 달 동안에 불안했던 심정이 한 번에 녹아내리는 듯 했다. 피식 웃음이 나오는 동규. 기분 좋은 마음에 또 다시 옛일이 떠오른다. 그녀와 데이트를 하던 어느 날, 데이트를 마치고 그녀를 데려다주는데, 어디선가 아이울음소리가 났던 적이 있었다. 그 소리에 주위를 빠르게 두리번거리던 그녀. 놀이터 쪽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자 그곳으로 금새 달려가더니, 얼른, 울고 있는 한 아이를 부축해줬었다. 무릎이 까져서 울고 있는 그 아이. 그녀는 얼른 집으로 들어갔다 나오더니, 가지고 나온 구급약품으로 처음보는 그 아이를 정성스럽게 치료해줬었다. 그 모습. 아직도 잊혀 지지 않는다. 정말 천사 같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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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미래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우리의 아이에게도 저렇게 해주겠구나. 저렇게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되겠구나. 좋은 사람이구나.. 그때에 느꼈던 그 따뜻함. 아마도 그녀가 하고 있는 일을 말릴 수만은 없는 이유였던 것 같다.
“ 후아... ”
짧은 숨을 몰아쉬더니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띠는 동규. 정말 아름다운 그녀. 첫눈에 반해버렸던 그녀. 그동안 아무리 예쁜 여자를 봐도 그랬던 적은 없었다. 그녀가 단순히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녀가 주는 그 따뜻한 느낌, 포근한 느낌. 마음이 따뜻한 사람. 불쌍하고 다치고 그런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그녀. 순수하고 착하고.. 어딘지 모를 천사 같은 그 느낌. 한순간에 그녀에게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에겐 늘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언제나 그녀는 나에게 손바닥에 놓인 비눗방울 같은 존재였다. 소중하게 보고 있어야만 하는.. 함부로 건드리면 터저버려서 눈앞에서 사라질 것만 같은... 그래도 그녀는 내 사람이었다. 내 여자였다. 우리에겐 잊지 못할 추억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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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함께 만들어나갈 미래가 있으니.. 불안해할 이유 같은 건 없었다. 그녀가 먼저 내 손을 놓지만 않는다면.. 나는 언제까지나 그녀를 기다려줄 수 있다. 오늘은 정말로 기분 좋은 밤이다. 한편, 동규를 보내고 난 뒤, 집으로 돌아온 은아.
[ 달칵- ]
어두운 방에 불이 켜지고, 조금 멍한 표정의 그녀. 오랜만의 그와의 입맞춤. 그는 언제나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침대위에 털썩 주저앉는 은아. 그래.. 그랬었다. 그와도 분명 달콤했던 시간이 있었다. 아주, 아주 짧은 시간, 짧은 기억이었지만, 아마 그 시간들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그와 내가 계속 연인으로써 유지될 수 있었을까. 때론 그가 부담스럽고, 그가 불편하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 사이가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이렇게 만날 수 있는 이유. 그가 날 기다려줄 수 있는 이유. 내가 그와의 미래를 꿈꿀 수 있었던 이유. 그 시간들과 기억들이 그와 나 사이에 있었다. 그런데.. 기분이 좋아야 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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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묘하다. 왜 이런지는 모르겠지만, 뭔지 모를 걱정이 밀려온다. 침대에 살짝 몸을 기대는 그녀. 잠시 동안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다가 이내 한숨을 살짝 내쉬며 다시 반대로 돌아눕는다. 다시 그날을 회상하는 은아. 그날.. 그렇게 그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이고.. 그로부터 일주일 뒤, 그는 캐나다로 떠날 수밖에 없었고, 나는 한 달 정도 그를 그리워했었다. 서로 전화할 수 있는 시간대도 달라서 통화도 거의 못하고.. 매일매일 얼굴을 보던 사람이 사라지니까 너무 허전했다. 그래서 한 달 정도 우울했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갈 때 쯤, 그에게 느꼈던 설레임들이 사그라지기 시작하고 나는 다시 현실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못 다한 일, 내가 하고 있는 간호사라는 이 일, 막상 일을 그만둬야한다고 생각하니까 그동안 이 일을 하면서 이루고 싶었던 무언가들, 내 꿈들.. 결혼하기 전에 하고 싶었던 일들, 그런 것들이 생각났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일했다. 중환자실업무든 응급실 업무든 가리지 않고 일했고 오전 근무든 야간근무든 가리지 않았다. 그렇게 5개월이라는 시간이 다시 흘러갔지만.. 마음속에 아쉬움이 채워지지 않았다. 일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간호사로써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겐 시간이 별로 없는데.. 뭔가 다른 일을 찾고 싶었다. 뭔가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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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창 나의 인생에 대해, 나의 꿈에 대해 고민에 빠졌을 무렵. 아니, 어느 정도 체념하고 있을 무렵 지금의 이 외상코디네이터라는 일을 알게 되고 시작하게 되었다. 내안에 부족했던 것들, 내안에 갈증들과 허전함을 이 일을 해가면서 채워가기 시작했다. 일을 하다 보니 새로운 목표가 생겨버리고.. 이제는 이 일을 하고 있는 하루하루가 힘들지만 너무 즐거웠다. 동규씨.. 그를 따라 캐나다에 가겠다고 한 약속.. 그와의 그 약속을 지키는 것보다 더 하고 싶은 일이 생겨버렸다.
“ 후... ”
동규에 대한 복잡한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지는 은아. 몸을 일으키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선반서랍을 열어본다. 오래전에 넣어놨던 작은 상자. 천천히 그 상자를 열어보는 그녀. 상자 안에서 예쁜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그가 손에 껴주었던 가느다랗고 예쁜 반지. 이내 반지를 꺼내서 손가락에 껴보는 은아. 예쁘긴 하지만 왠지 어색하기만 했다. 그에게 선물 받은 뒤로, 몇 번이고 끼고 다니려 시도 해봤지만, 병원에서 일을 하느라 빼놓고 있다 보니, 언젠가 부터는 잘 끼지 않게 되었다. 그저 서랍장에 보관해두기만 했을 뿐, 그 뒤로는 한 번도, 꺼내본 일이 없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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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오후, 인혁이 중환자실에서 나와 복도를 걷고 있는데, 평소 잘 알지도 못했던 간호사가 그에게 밝게 인사를 건넨다.
“ 교수님 안녕하세요~! ” “ 아, 예.. ”
어색하게 고개를 꾸벅하며 간호사의 인사를 받아주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인혁. 오늘따라 이상하리만큼 자신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는 간호사들.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침부터 자꾸 간호사들이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듯한 느낌. 그리고 인사를 해놓고 자기들끼리 쑥스럽다는듯 웃고 지나가고.. 왠지 평소와는 다른 간호사들이 행동이 자꾸 신경쓰이는 그. 얼굴이나 옷에 뭐가 묻었나 싶어서, 평소에는 절대 들여다보지도 않던 거울을 들여다봤지만, 자신이 보기에는 그냥 평소모습 그대로였다.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고 하며 다시 일에 몰두했지만, 여전히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요즘 너무 일만했더니.. 내가 너무 지저분해 보이나..? 그런 생각에 결국 면도를 하고 머리를 정리하고 나온 그. 하지만 그런 그의 모습에 간호사들은 더욱더 쑥쓰러운 듯 웃으며 인사를 하거나 더욱더 힐끔힐끔 쳐다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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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진짜.. 왜들 저래..? ’
오늘 야간근무인 은아가 아직 출근도 안한 상태라 어디 물어볼 때도 없고..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또 왜들 저러나 싶어 그런 시선이 조금 짜증나게 느껴지는 인혁. 또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는 트라우마센터로 향한다. 몇 시간 후, 늦은 밤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요 며칠 바빴던 수술스케줄로 인해 밀려있던 자료정리를 하고 있는 두 사람. 은아는 점심도 제대로 못 먹고 저녁밥도 못 먹은 터라 슬슬 배가 고파지기 시작한다.
“ 교수님, 제가 나가서 뭐라도 사올까요? ” “ 예?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배고파요? ” “ 네, 조금.. 교수님은 안고프세요? 아까도 컵라면만 드셨다면서요. ” “ 어.. 나도 좀 출출하긴 하네. ” “ 그러면,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금방 나갔다 올게요. ”
그렇게 은아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나갈 준비를 하고 지갑을 챙기려는데, 그때, 누가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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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똑똑- ]
“ ....?... ”
누군가 싶어 서로 눈을 마주치는 두 사람. 지금은 나과장이나 한구도 퇴근했을 시간이라 찾아올 사람이 없을 텐데, 둘 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 예, 들어오세요. ”
인혁의 목소리에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더니, 응급실 김간호사가 어색한 표정으로 들어온다. 한 번도 간호사들이 먼저 특별한 일 없이 사무실에 들어온 적은 없었기에 조금 놀란 눈이 된 두 사람. 인혁은 무슨 일이냐는 듯 간호사를 쳐다보다가 간호사가 자신의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 하고 서있자, 아마 은아에게 볼일이 있어서 온 것 같다는 생각에 보고 있던 자료로 눈을 돌린다. 한편,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걱정이 된 은아.
“ 왜 무슨 일 생겼나? ” “ 네? 아니, 아니요. 그거는 아니고.. 저기.. 최교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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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아무렇지 않게 자료를 보고 있던 인혁. 간호사가 예상치 못하게 자신을 부르자, 눈이 살짝 커져서 간호사를 쳐다보는데, 김간호사는 자신이 불러놓고도 막상 그와 눈이 마주치자 움찔한다.
“ 아니, 아니, 다른 건 아니구요, 최 교수님하고 신선생님 두 분, 저녁식사 하셨나해서 요. ”
어색하게 두 사람에게 식사를 했냐고 물어보는 김간호사. 그제야 눈치를 채고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은아. 간호사에 말에 일부로 아무 대답도 안하고는 얼른 대답해주라는 듯 인혁만 보고 있다. 다른 간호사가 자신한테 밥먹었냐고 물어보는 것도 처음인데, 은아가 대답도 안해주고 자신만 쳐다보고 있자 당황한 인혁. 간호사가 자신의 대답만 기다리며 서있는 거 같아서 어색하게 입을 연다.
“ 아, 예.. 어.. 아직, 안 먹었어요. 예.. ” “ 저, 그러면 저희들, 요 앞에 식당에서 밥 시킬 건데.. 같이 시켜드릴까요? ” “ 아니요 뭐, 우리는 알아ㅅ.. ” “ 그래~? 안 그래도 우리도 막 먹으려던 참이었는데 잘됐네~ 시켜라 시켜! 교수님 뭐 드실꺼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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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눈치 없게 거절을 하려는 인혁. 그러자 은아가 그의 말을 끊고는 간호사에게 시키라고 하며, 그에게 뭘 먹을지 고르라며 재촉하고, 인혁은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 여전히 어색하게 대답을 한다.
“ 어.. 신선생은 뭐 먹을건데요? ” “ 저는 교수님 드시는 걸로요. ”
그가 음식 고르는 걸 은아에게 넘기려는데, 그녀는 또 인혁이 고르도록 유도해버린다.
“ 음.. 나는 김..김치찌개로 할게요. ” “ 에이, 그럼 나는 볶음밥으로 해야겠네. 교수님은 김치찌개 드신다는데? 나는 볶음 밥. ” “ 네! 그러면 음식 오면 저희가 갖다드릴게요. 그, 그럼. ”
자기가 말해놓고도 어색하고 민망한지, 후다닥 나가버리는 간호사. 인혁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은아를 보는데, 그녀는 그저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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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입을 연다.
“ 궁금하시죠? 갑자기 왜 저러는지? " “ 허.. 예 조금. ” “ 어제요~ 교수님이 김간호사 구해주셨잖아요. 그래서 고맙다고 그러는거에요. ” “ 어제? 아아.. 뭐 그거야... ” “ 아! 또 있어요. 어제 간호팀 회식있었잖아요. 교수님 간호사들 사이에서 은근히 인 기 많으시던데요? ” “ .... 내가요? 차암.. 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나야 맨날 소리만 지르는데 인기 는 무슨.. 싫어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 “ 그거는 아신다니 다행이네요~ 헤헤.. 뭐, 맨날 소리지르고 그러셔서 무서워하는거는 맞는데, 그래도 은근 인기 많으세요~ 골치 아픈 환자들 들어와서 난동피우거나 하면 다른 쌤들은 나서서 도와주지도 않는데 그런 사람들 막아주는거 교수님 밖에 없다고.. ” “ 그거야.. ” “ 그리고 교수님인데도 웬만하면 존대써주시고, 야간에 인턴쌤들밖에 없으면 불안한 데, 교수님은 항상 있어주시니까 좀 든든하다는데요? ” “ 참, 허허.. ”
계속되는 그녀의 칭찬에 민망한지 웃음을 터트리는 인혁. 은아는 또 그때를 놓치지 않고 그가 기분좋은 틈에 그가 고쳐야할 점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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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데 대신! 인사를 하면 쫌 받아주세요~ 인사를 해도 눈도 안 마주치고! 고개만 까 딱 하고 쌩- 지나가 버리시고! 고맙다고 해도 그냥 꾸벅 하고 대답도 없이 쌩-지나가 버리시고, 나머지 마주칠 때는 거의 다 응급환자 들어오는 때니까, 간호사들이 교수님 은 맨날 소리만 지르고 화난 표정인줄로만 알잖아요. ” “ 그, 그거는... 크흠. 흠. ”
그 부분에 있어서는 할 말이 없는 인혁. 워낙 일할 때 외에는 말을 안 하는 성격이라, 그동안 간호사들이랑 친해질 일도 없었고, 그동안은 자신을 당연히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냥 어색한 게 싫어서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가곤 했었다. 그렇게 그가 대답은 못하고 또 괜히 헛기침만 해대고 있는데, 은아는 그런 그를 보며 피식- 웃으며 입을 연다.
“ 이따가, 김 간호사오면, 또 그냥 가만히 계시지만 마시고 고맙다고 인사라도 쫌 해 주세요. ” “ 흠흠.. 뭐.. 알았어요. ” “ 그냥 알았어요가 아니고, 쫌 웃으시면서, 무표정으로 말하면 퍽이나 고마워하는구 나.. 하고 느끼겠네요. ” “ 아유, 거, 알았어요. 쫌..!! 그건 내가 알아서 해요. 참.. ”
또 살짝 짜증을 부리는 인혁. 은아가 그런 그를 또 살짝 째려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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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잠시 후, 음식이 담긴 쟁반을 하나를 들고 나타난 김 간호사. 은아는 얼른 쟁반을 받아 책상위에 놓으며 인혁에게 눈치를 준다. 결국 그녀의 성화에 못 이겨 알았다는 듯이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는 그.
“ 저기 김간호사. ” “ 네?.. ”
별로 어려운 얘기도 아닌데 약간 뜸을 들이는 그.
“ 흠,. 저기, 고마워요. 맛있게 잘 먹을게요. ” “ 아아, 네! 맛있게드세요. 저기 그리고 교수님! ” “ 예.. 예? ” “ 어제는 정말로 감사했어요. ” “ 아, 아니요. 그거는 뭐.. 별것도 아닌데.. ” “ 아니에요! 진짜 감사했어요. 인턴샘들은 눈치만 보고있는데.. 교수님 덕분에 살았어 요. 하하.. 그, 그럼 맛있게 드세요! 신선생님! 다 드시고나서 그릇만 저희 휴게실로 좀 가져다 주실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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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내 가져다 놓을게. ” “ 네, 그럼 이만, ”
그렇게 김 간호사가 후다닥 밖으로 나가버리고, 인혁은 여전히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지 벙찐표정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재밌다는 듯이 한참을 웃고 있는 은아. 인혁은 뭐가 그리 재밌냐고 그녀를 타박하면서도 왠지 이런 일이 싫지만은 않은지.. 밥 먹는 내내 웃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 . . 그날 이후, 한동안 간호사들이 인혁만 보면 굉장히 해맑게 인사를 하곤 했고, 그는 그때마다 어울리지도 않게 웃으면서 인사를 받아주느라 어색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조금.. 기분은 좋았다. 병원에서 늘 혼자라고 생각했었는데, 사람들이 나에게 다가오고 싶어 했었구나.. 라는 사실을, 그동안 마음에 벽을 쌓았던 건 사람들이 아닌 자신이란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런 그를 흐뭇하게 바라보곤 하는 그녀. 그런 은아를 슬쩍 쳐다보는 그. 또 한 번 그녀에게 신세를 지고 말았다. 혼자 있었다면 정말 상상도 못할 일인데.. 그녀덕분에 점점 주위사람들과 관계가 좋아지고 있었고, 그리고 그 덕분에 점점 병원 생활이 재밌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자꾸만 그녀덕분에 점점 웃을 일이 많아지고 있는 인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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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후, 12월 중순, 오전 회진마치고 사무실로 내려온 인혁과 은아. 그동안의 빡빡한 스케줄을 모두 소화하고 오랜만에 여유가 생긴 두 사람. 한 달 정도 제대로 하지도 못했던 밀린 회의도 할 겸, 그동안 하지 못했던 외상센터 점검도 할 겸, 커피한잔씩을 손에 들고 2층 회의실로 향하는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때, 웬일로 나 과장이 그를 부른다.
“ 어이, 최교수!! 잠깐만! ” “ ....?.... ”
인혁이 대답은 하지도 않고 무슨 일이냐는 듯 멀뚱히 서있기만 하자 나 과장이 어두운 표정으로 답답하다는 듯 그에게 빨리빨리 오라고 손짓하며 먼저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가버린다. 나 과장이 갑자기 왜 저러나 싶어 서로를 마주보는 두 사람. 그러다 문득 인혁의 머리에 스치는 무언가. 갑자기 그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진다.
“ 나 잠깐, 들렸다가 갈테니까. 먼저 올라가있어요. ” “ 아.. 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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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인혁이 커피를 은아에게 맡기고는 나과장의 사무실로 들어가버리고,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은아. 분명, 교수님 표정이 잠깐 어두웠던 것 같은데.. 무슨 일이지..? 인혁과 외상센터에 관해서는 모르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녀. 자기가 모르는 안 좋은 일이 있는 걸까싶어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잠시 후, 2층 회의실, 먼저 회의실에 올라와있던 그녀가 가져온 자료를 보고 있는데, 자꾸만 그가 무슨 일로 불려갔을까 걱정되고 궁금해서 자료가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그런데 마침 그때, 문이 열리고, 인혁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온다. 조금 어두워 보이는 그의 표정. 은아는 그런 그를 향해 조심스레 입을연다.
“ ...무슨 일.. 있어요? ” “ 아, 음.. 별일 아니에요.. ” “ 왜요..? 무슨 일인데요? ”
말로는 별일 아니라고 하지만, 계속 어두워 보이는 그의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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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피곤하다는 듯이 자리에 앉아버린다. 그리고는 그녀가 실망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애써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이 입을 여는 그.
“ ... 뭐, 별일은 아니고, 그, 우리 수술실이랑 중환자실이요. 두달 정도 병원에서 도와 주는 바람에 잘 구할 수 있었잖아요. ” “ 네. 그렇죠. ”
그의 입에서 수술실과 중환자실 얘기가 나오자, 은아는 불현 듯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 ....그것들, 예전처럼, 다시 빌리기 어려울 거 같다구요.. 뭐, 수술이야 다시 응급실에 서 하면 되니까.. 하.. 중환자실이 조금 문제긴 한데.. ” “ ....?!!.. 갑자기 왜요..? ”
역시나 예상했던대로 그녀가 놀라는 표정을 짓자, 말을 하다말고 멈칫하는 인혁. 그녀를 조금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연다.
“ ...이번에 외상센터에 800억짜리 지원해준다는 거, 아마.. 계획 무산 될 가능성 커요.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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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원에서도 그걸 알아챘으니.. 계속 우리 센터에 지원해줄 이유도 없고... 어차피 소문 때문에 임시로 시작한 지원이었어요. 예상했던 일이니까. 너무 신경쓰지말고. 회 의나 시작 합시다. ”
그러나 신경쓰지 말라는 그의 말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으로 동요하지 않을 수 없는 은아. 크게 실망한 눈치였다.
“ .... 교수님.. 그러면 외상센터는.. ” “ 뭐, 그동안에 받아왔던 기본적인 지원은 유지가 되니까. 외상센터는 지금까지 해왔 던 것처럼 운영 하면 되고, 정부지원은 뭐... ” “ .... ” “ 흠.. 아마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계속 고생을 해야되겠죠. 뭐, 어차피.. 확실한 거 없이 복지부에서 방향만 내놓았던 거잖아요. 지원해주겠다고 확실히 발표한 것도 아 니었고. 너무 신경쓰지 맙시다. ”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을 하는 그. 은아는 그런 그가 더 걱정스럽다.
“ ..교수님은.. 괜찮으세요? ” “ 나야 뭐.. 이런 일 한 두 번 있었던 거 아니니까.. 사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고. 흠.. 저기, 따로 회의할거 없으면. 이만 일어납시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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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한 그녀의 표정을 볼 수가 없어 괜히 말을 돌려버리는 인혁. 의자를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회의를 위해 가져왔던 자료들을 주섬주섬 챙긴다. 그러나 속상함을 감추지 못한 채로 자리를 뜨지 못하는 은아. 인혁은 그녀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거 같다는 생각에 자리를 피해준다.
“ ... 신선생은 천천히 내려오던가. 나는 사무실에서 좀 누워있을게요. ” “ 아.. 네.. ”
그렇게 회의실 밖으로 나가는 인혁. 그런 그의 뒷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은아. 그의 모습이 시선에서 사라지고, 회의실에 혼자 남겨진 그녀. 살짝 멍해진 표정. 온몸에 기운이 빠지는 느낌. 조금.. 충격이었다. 쉽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했었지만, 그래도 당연히 복지부에서 지원한다고 했으니.. 무슨 자신감이었는지는 몰라도 사업은 그대로 진행될 줄 알았다. 그리고 병원에서도 수술실, 중환자실을 양보해주고 점점 외상 팀을 지원해주는 듯 했으니... 그냥 당연히 그렇다고 단정지어버리고, 복지부가 공모를 시작하기 전에 외상센터후보 신청을 받기 전에 빨리 외상센터를 자리 잡게 해야겠다고 그 생각뿐이었다. 가을쯤 공모가 시작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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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상센터 신청을 하고 더 열심히 준비하고 그러면 승산이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만약 우리센터가 선정이 되면, 내년가을쯤, 센터가 자리 잡을 때까지 열심히 일하다가, 기분 좋게 그만둘 수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예 그런 기회조차 사라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순간, 아까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 나야 뭐.. 이런 일 한 두 번 있었던 거 아니니까.. 사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 고.. /
그러고 보니 처음 800억짜리 외상센터계획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그가 별로 기뻐하지 않았던 게 생각났다.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니라던 그의 말.. 항상 체념적인 어조와 표정을 지어보였던 그. 그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야 제대로 알 것 같았다.
‘ ... 교수님은 이미 예상하고 계셨구나.. ’
생각해보니.. 혼자서 가졌던 기대였다. 혼자서 들뜨고 혼자서 상상하고 그가 잘되지 않을 수 있다고 주의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설레발을 쳤던 것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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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나이가 몇인데, 어떻게 그렇게 희망적이기만 한 결과를 꿈꾸고 있었던 걸까.. 혼자 기대하고.. 혼자 실망하고.. 바보같이.. 그렇게 혼자 자책을 하던 은아. 지금까지 이런 일들을 반복적으로 겪었을 그가 떠올랐다. 혼자서.. 정말 힘드셨겠구나.. 정말 기운 빠지셨겠구나.. 상상이상으로.. 힘든 일의 연속이었겠구나.. 또다시 그가 안쓰러워진다.
“ 후..아... ”
잠시 숨을 고르는 은아. 솔직히, 힘은 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고생하며 버텨온 것들에 대해 이제야 보상받을 기회가 생긴 줄 알았는데, 이렇게 목표로 했던 게 한 번에 무너져버리니 모든 의욕이 꺾여버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를 생각하면 힘을 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이런 일을 수도 없이 겪어왔을 그. 만약, 그의 앞에서 힘 빠진 내색을 해버린다면, 그가 더욱더 지쳐버릴 것 같았다. 그에게 힘을 주기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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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내색을 할 수 없는 은아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 최대한 씩씩하게 회의실을 나서더니, 이내 그가 있을 트라우마센터 사무실로 향한다. 한편,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간이침대에 누워있는 인혁. 피곤함때문에 눈을 감고는 있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 한 두번 겪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또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마음이 씁쓸해져 오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 후.... ”
절로 나오는 한숨. 하.. 그러면 그렇지.. 또 이 지리한 싸움을 계속 해야겠구나.. 온몸에 기운이 다 빠지는 느낌. 솔직히, 지친다. 그래도 그녀가 센터로 오고난 후, 하루하루 희망을 갖고 즐겁게 일할 수 있었는데.. 막상 이렇게 되고 나니, 또 힘이 빠져버린다. 하지만, 지금 그것보다 더 걱정되는 일은 그녀가 너무 많이 실망했을까봐 그래서 기운 빠져하고 이내 지쳐 버릴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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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빨리 그만둬 버릴까봐. 그게 더 걱정이다. 많이 기대하는 눈치던데.. 내가 그 사람한테 괜한 희망을 심어준건 아닐까.. 그 사람이 좀 더 있어준다면 나야 큰 힘이 되겠지만.. 떠나야 할 사람을 괜히 붙잡은 건 아닐까. 자꾸만 걱정들이 밀려오고 아까 실망한 모습이 역력했던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 후아... 읏.. 차... ”
누워있던 침대에서 일어나는 인혁. 기운이 없었지만, 많이 실망하고 있을 그녀를 위해 자신이라도 힘을 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혼자가 아니니까.. 나의 유일한 팀원인 그녀가 있으니까.. 예전처럼 이렇게 기운 빠진 채로 체념하고만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 . . 그렇게 잠시 후, 그녀가 사무실로 다시 돌아왔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그녀는 웃는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이럴 때 일수록 힘을 내야한다고, 나를 일으켜 세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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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일이나 하자고 내 등을 떠밀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힘을 내보려 애썼다. 그러나, 그 소식 이후, 병원 측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외상환자 케어와 비용문제에 대해 압박을 해왔고, 각과 교수들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등을 돌리면서 수술장, 중환자실을 구하기가 전보다 훨씬 더 어려워졌다. 때문에 우리는 매번 응급수술을 할 때마다 수술실과 중환자실을 구하느라 전쟁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고, 매일매일 그렇게 정신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바쁜 하루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내 앞에서 더 밝게 웃어주며, 더 열심히 일하려 애쓰곤 했다. 하지만.. 인혁은 그런 그녀가 고마우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기운이 빠질 텐데.. 힘들 텐데.. 분명, 겉으로는 웃고 있으면서 힘을 내려하면서도 전과는 다르게 조금씩 지쳐가고 있는 게 눈에 보이는데, 일부로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으려는 그녀가 걱정되었다. 내가 그녀에게 위로받았던 만큼, 나도 그녀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 놈의 무뚝뚝한 성격.. 그녀를 어떻게 위로를 해줘야할지.. 어떻게 힘이 돼 줘야 하는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한 달 후, 1월 중순, 어느 날 점심시간, 중환자실에서 환자를 살피고 트라우마센터로 내려오던 인혁. 사무실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살짝 열린 문틈사이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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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유, 엄마도 참.. 알았다니까네.. 응, 응.. 아이고, 내려오기는 뭘 내려오노..! 몸도 별로 안 좋으면서, 내가 나중에 인사시켜드릴게요. 응.. 응.. ”
엄마..? 아.. 신선생 어머니신가보네.. 안에서 통화를 하고 있는 듯 한 그녀. 아무래도 조금 기다렸다가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에 인혁이 다시 반대편으로 발길을 돌리려는데, 안에서 또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 이번에 못 올라간 거는 일이 바빠가지고.. 죄송해요.. 다음에 한번 내 올라갈게. 네.. 네.. 근데 엄마, 나 일이 바빠가지고.. 이만 끊을게요. 네, 감기조심하시구요. 응.. ”
그렇게 전화를 끊는 은아. 그녀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안 좋아진 인혁. 잠시 들어갈까 말까 고민을 하더니, 조금 더 그녀를 혼자 있게 둬야할 거 같아서 다시 발길을 돌려 어디론가 향한다. 한편, 어머니와의 통화를 마친 은아. 죄송스럽고 답답한 마음에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 그녀. 왜 결혼은 미룬 건지, 결혼한사람은 왜 안 보여주는 건지, 새해인데 왜 서울로 안 올라오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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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 때는 올라올 계획이 있긴 한 건지, 도대체 무슨 일을 하기에 그렇게 바쁘게 지내는 건지, 요즘 들어 자꾸만 전화를 하셔서 꼬치꼬치 캐물으시는 어머니. 정 바빠서 못 만나겠다면 본인이 직접 부산으로 내려오겠다고 하시는 어머니를 간신히 말려놓은 은아였다.
“ .....흠..... 후우.... ”
그녀가 답답한 마음에 깊은 한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인혁이 들어온다. 그런데 그의 손에 들려있는 커피 두잔. 은아는 그가 또 웬일로 커피를 다 사왔나 싶어서 살짝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본다.
“ 흠.. 저.. 저기 신선생, 나가서 커피나 한잔 하고 옵시다. ”
이런 말을 하기 어색한지, 괜히 헛기침을 하며 말을 더듬는 인혁. 은아는 그의 어색한 모습을 보고는 재밌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트린다. 그러자 살짝 볼멘소리를 하는 그.
“ 왜.. 왜 웃어요. 차암.. 뭐, 싫으면 말고! 저기 지과장한테나 가봐야겠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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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잇..! 누가 싫데요~? 뭐, 웃지도 못해요? 흠, 괜히 그러시지 말고, 제꺼 이리 주세 요~ ”
그러고는 얼른 그의 손에 들린 커피한잔을 빼앗는 그녀. 그보다 먼저 휙- 하고 문밖으로 나가더니 그를 향해 말을 뱉는다.
“ 뭐하세요? 나가자면서요, 갑시다! ” “ 차하, 하이구.. 그럽시다! ”
인혁은 약간 새침하게 말을 뱉는 그녀를 보고 살짝 어이없다는 듯이 웃어버리더니, 대답을 툭 뱉어놓고는 그녀보다 앞질러간다. 그렇게 티격태격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두 사람이었다. 몇 분 후, 병원 내 옥상정원, 두 사람이 나란히 문을 열고 옥상 밖으로 나온다.
“ 어후.. 이거 날씨가 너무 춥네. 괜히 나왔나. ” “ 그러게요. 으으.. 근데, 또 막상 나오니까 좋은데요? 바람도 쐬고, 하늘도 보고. 참, 하늘 보는 것도 오랜만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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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허.. 그러게요. ”
밖으로 나오자 기분이 좋은지 하늘을 보며 활짝 웃으며 말을 하는 은아. 인혁도 그런 그녀를 보고 기분이 좋은지 허허- 웃어버리고 만다. 그리고는 이내 옥상 벤치에 앉는 두 사람.
“ 근데, 저한테 무슨 하실 말씀 있으세요? 왠일로 커피를 다사오시고.. ”
사실, 요즘 힘들어 보이는 그녀에게 좀 힘을 주고 싶었던 인혁. 하지만 그런 말은 쑥스럽고 민망해서 하지도 못하고 그냥 별일 아니라는 듯 말을 얼버무려버린다.
“ 할.. 할 말은 무슨.. 요즘 너무 정신없어서 일만했잖아요. 그냥, 신 선생 말대로 하늘 도 보고, 바람도 쐬고, 오랜만에 커피도 마시고 그러자는 거지.. ” “ 아아.. 에이 싱거우시기는.. 아! 맞다! 작년 여름에 여기서 헬기날리고 그랬었는데, 헤헤.. 기억나시죠? ” “ 아, 예, 기억나죠. 얼마 안 됐는데. ” “ 얼마 안됐었나? 6개월은 넘은 거 같은데요..? 하긴, 음.. 그때는 마음만 먹으면 다 될 줄 알았는데.. 헤헤.. 센터만드는 거, 참, 쉬운 일이 아닌데, 제가 좀 혼자 들떠 있 었죠? 바보같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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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보는 하늘 때문에 약간 기분 좋은 듯 말을 이어나가다 다시 생각난 외상센터 일 때문에 살짝 씁쓸한 웃음을 지어보이는 그녀. 인혁은 그녀의 기운 없어 보이는 모습을 보자 덩달아 마음이 씁쓸해진다. 그러다 그녀에게 힘을 주고 싶은 마음에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 ....흠.. 나도 처음엔 그랬어요. 예전에 처음 외상 시작했을 때, 외상은 도대체 언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걱정하고, 조금이라도 지원해준다는 계획 나오면 혼자 기대하 고, 설레고, 꿈꾸고 들뜨고.. ” “ 음... ” “ ....힘들지 않아요? 외상센터 못 만들 수도 있다니까.. 기운빠지고.. 의욕도 좀 사라 지고.. ”
갑작스럽게 정곡을 찌르는 그. 은아는 살짝 당황하며 말을 얼버무린다.
“ 아.. 저, 아니에요 그런 거.. ” “ ...아니기는.. 아닌 사람이 그렇게 쳐져있나? 평소답지 않게.. ” “ 아.. 제가 그랬어요? 하.. 하하.. ”
그의 말에 조금 찔리는지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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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은 그런 그녀를 보며 피식- 웃더니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며 허공을 바라본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그.
“ 흠.. 신 선생.. 저번에 같이 술 마실 때 했던 말 기억나요? ” “ ....?... ” “ 나한테, 사람부터 살리고 보자고.. 그러려면 외상센터 필요하니까 포기하지 말라고.. 그랬던 거. ” “ ..아.. ” “ 우리가 이일 하는 거.. 외상센터야 언제 만들어질지도 모르고.. 중환자실도 따로 없 고.. 병원에서 지원도 안 해줄 거고.. 흠.. 앞으로도 계속 힘들 거에요. 아마, 앞이 안 보이는 긴 싸움이 되겠죠. ” “ ..... ” “ 그래도 지금까지 신선생이 있으니까. 내가 수술도 하고, 환자도 돌보고, 그래서 환 자들 많이 살렸잖아요. 이 정도 유지 되는 것도 신선생이 도와주니까.. 가능했던거고. ” “ ..... ” “ 외상센터야 뭐.. 생기면 좋겠지마는, 너무 거기에 부담 갖고 그러지 말라구요. ”
당신이 여기 남아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고, 고마우니까.. 신 선생.. 무뚝뚝한 그, 쑥스럽고 민망한 마음에 마음속에 있는 말을 다하진 못하지만 그녀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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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고맙다고. 당신도 힘내라고. 그런 인혁의 마음을 알아차린 건지.. 살짝 감동받은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는 은아. 그런 그녀의 시선을 느끼는 인혁. 민망한지 여전히 허공만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간다.
“ 흠, 아무튼 그, 너무 실망하지 말고, 하던데로.. 환자 살리는 거.. 그거에만 집중합시 다. 우리. ” “ ....신기하네요. 교수님한테 위로도 다받고. ” “ 위, 위로는 아니고.. 아, 그리고.. ” “ ....?.... ” “ 다음 달에 설 휴가도 좀 내고.. 부모님한테도 다녀오고.. 그렇게 해요. ” “ ....?... 아.. 통화하는 거 들으셨어요? ” “ 뭐, 들으려고 들은 거는 아니고.. 거, 날씨가 너무 춥네요. 이제 그만 일어납시다. ”
그렇게 자기할 만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건물 안으로 휙- 하고 먼저 들어가 버리는 인혁. 은아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살짝 벙찐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얼굴에 슬며시 미소를 띤다. 왠일로 교수님이.. 이렇게 위로도 할 줄 아시고... 인혁 때문에 자꾸 입 꼬리가 올라가는 그녀.
“ 으으... 추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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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인혁이 주고 간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건물 안쪽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긴다. 그로부터 몇 주 후, 뉴스에서는 연일 석해균 선장과 아덴만 여명작전에 대한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세상은 오만으로 날아가서 석해균 선장을 치료하고 데려온 아주대 외상외과 이국종교수의 이야기로 떠들썩해졌다. 그리고 석해균선장과 이국종교수에게로 세상에 이목이 집중되면서 자연스럽게 이교수가 몸담고 있는 중증외상분야에 대해서도 관심이 급격하게 높아지기 시작했다. 물론, 최근 2~3년 사이 중증외상분야가 다큐로 만들어지고 여기저기서 한국 외상현실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키워왔던 것은 사실이나 이번 사건으로 인한 국민들의 관심도와 파급효과는 근 몇 년 사이에 쏟아졌던 기대와 관심의 정도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당연히 그러한 국민들의 관심을 제일 먼저 눈치 챈 정치인들, 사건이 일어나고 한 달 새에 수많은 정치인들이 석해균선장 병문안을 다녀가고 저마다들 꼭 중증외상센터의 지원을 위해 응급의료법 개정을 위해 힘쓰겠노라고 한마디씩 약속했다는 기사가 매일매일 올라왔다. 게다가 대통령까지 나서서 한 약속. 동요하는 전국의 대형 병원들, 세중 병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생각보다 커져버린 이슈 때문에, 다들 다시 800억짜리 외상센터사업이 부활하는 게 아니냐는 기대의 목소리가 나왔지만, 아무리 이슈가 커졌다고 해도 한번 취소된 사업이 다시 쉽게 부활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이번에는 병원에서도 상황을 지켜보려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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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동요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건 인혁과 은아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이렇게까지 외상이 주목 받았던 적은 없었기에 두 사람 모두 내심 기대를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한번 좌절을 겪었던 두 사람. 쉽게 기대하고 동요하지 않으려 애를 쓰면서 수시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러던 와중 2월 말, 지난 가을 헬기컨퍼런스와 함께 계획되었던 닥터헬리사업이 전남과 인천지역에서 시행된다는 발표가 났고, 정부에서 두 지역에 닥터헬기와 30억대의 지원을 해주겠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마, 석해균 선장 사건의 영향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헬기사업이 시행되면서, 외상센터사업도 맞물려서 다시 시작될 거라는 기대감이 높아졌고, 인혁과 은아도 다시 기대감을 가지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서로를 의지하며 더욱더 열심히 환자를 돌보는데 매진했다. 하지만 4월, 다시 그들은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외상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점점 사그러들자 복지부는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방향을 선회해 6개 지역에 최고등급의 800억짜리 외상센터를 세우겠다는 계획을 좌초시키고 20개곳에 소규모 외상센터를 짓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또한 인천과 전남 두 지역에 지급되기로 했던 닥터헬기는 원래 계획되었던 섬까지 날아갈 수 있는 대형헬기가 아닌, 소형 규모의 닥터헬기를 지급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다시 좌절하는 인혁. 그와 같이 좌절하며 점점 지쳐가는 은아. 인혁은 헬기와 외상센터 두 사업모두, 본연의 목적을 상실했다는 생각에 화가 났고, 은아는 자신이 꿈꿨던 외상센터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힘을 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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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그녀는 좌절하고 있는 인혁에게 힘을 주는 일이 외상센터를 어떻게 든 유지시키는 일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서 그를 도우려고 애썼고, 인혁은 그런 그녀가 안쓰럽고 미안하고 고마웠다. 두 사람이 그렇게 기대와 좌절을 반복하는 와중에도 계속 해서 밀려들어오는 환자들, 두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과도한 업무량, 전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의 응급수술, 체계유지와 적자에 대한 병원 측의 압박, 다른 과 교수들에 따가운 눈총 등.. 그들을 힘들게 하는 일들은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인혁은 그런 것들이 더욱더 압박해올수록 잡초처럼, 발악이라도 하듯 환자를 돌려보내지 않았고 받을 수 있는 만큼 꾸역꾸역 다 받아서 어렵게라도 수술을 해내곤 했다. 그렇게 환자를 어떻게든 살려내는 일. 그 것이 지금까지 그가 버텨온 이유이자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이 찾아오고, 또 다시 여름이 가려는 동안, 정말 처절하게 일에만 몰두하는 두 사람. 어려운 상황에서 환자를 돌려보내지 않고 무리하게라도 수술을 해내고야 마는 인혁 때문에 하루 종일 병원 안에서만 처박혀 살아가는 그녀. 누구하나 강제로 시킨 것도 아닌데 그녀스스로 어떻게든 외상센터를 살려보려고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몇 달동안 약혼자와 데이트도 한번 못하고, 마치 인혁의 모습과 닮아가듯, 미친 듯이 일에만 몰두하는 그녀.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의 앞에서는 애써 웃어 보이려 노력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일에 치여서, 점점 미소를 잃어가는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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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은 그런 은아를 봐서라도 어떻게든 버티려.. 좌절해있다가도 다시 힘을 내려.. 무너지려다가도 또다시 힘을 내려.. 버티고, 버티고, 버티고.. 또 버텼다. 하지만, 희망하나 없이. 두 사람의 의지만으로 버텨내기에는.. 둘의 노력만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힘든 상황. 점점 지쳐가는 두 사람. 결국, 그해 여름에 끝에서 일이 터져버리고야 말았다.
------------------------------- [ 인혁은아 소설 ] 너를 되뇌다. 3 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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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소장용 총7권 제작 저의 2012년 여름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셨던 배우 송선미, 이성민님께 이 글을 바칩니다. [ mirim_love@naver.com ] 2013.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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