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뭉해쌀상플]너를 되뇌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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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뭉해쌀 / 이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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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을 시작하며 ] 2012년 9월 25일, 드라마 『 골든타임 』이 끝난 후, 약 3개월이란 시간동안 드라마를 너무 사랑했던 시청자로써, 팬으로써.. 너무너무 허전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특히나 제일 사랑했던 캐릭터인 최인혁과 신은아, 중증외상에 대한 문제의식들을 가슴 속에 새겨둔 채로 일상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잊을 수도 지울 수도 없었습니다. 특히, 드라마 초기부터 응원해온 최인혁과 신은아 두 사람의 인간적 관계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채 로 드라마가 끝을 맺었기 때문에 팬으로써는 너무나 아쉬움이 남았었습니다. 이런 마음은 저뿐만 아 니라 수많은 골타 팬들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래서 드라마가 끝나기 직전부터 골든타임갤러리를 중심 으로 수많은 추측 상플( 소위 : 팬픽, 소설 )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주로 인혁과 은아의 못 다 이룬 멜로라인을 만드는 내용들이었고 그 흐름은 드라마가 끝난 지, 두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미하게나 마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드라마 속의 최인혁과 신은아는 정말로 사랑받는 캐릭터들이었습니다. 저도 그 팬들 중에 한명으로 써, 제가 상상해본 인혁과 은아의 관계에 대해 상플을 쓰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그들의 첫 만남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의사 최인혁이라면 어떻게 이 중 증외상이라는 힘든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놉시스를 써보고 구상을 해가는 와중에 최인혁만이 가지고 있는 인생의 굴곡이 있기 때문에, 그 경험들과 아픔들이 아 웃사이더같고 고독함이 느껴지는 최인혁을 만든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과거들을 찾아가기 로 했고 그 과정 속에서 당연히 외상코디네이터 신은아의 존재가 크게 느껴졌습니다. 특히, 외상센터 가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건 은아의 능력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인혁을 지탱해주는 게 외상에 대한 사명감이기 때문에 곧, 은아가 인혁을 지탱해주는 것이겠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신은 아가 외상 일을 시작하게 된 동기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둘이 함께 겪어온 수많은 어려움과 기쁨의 과정들이 있겠구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즉, 신은아와 최인혁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신뢰감 과 호흡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기 때문에, 후에 동료이상의 감정까지도 갈수 있었던 게 아닐 까 라고 생각하며 이 상플을 쓰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가 이런 글은 난생 처음 써보는 거라, 상플을 썼던 지난 두 달 동안의 경험은 저한테는 너 무나 신기하고 행복한 경험이었습니다. 말은 소설이라고 써놨지만, 초짜의 글이라 정말 부족한 면이 많고, 그냥 팬픽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만약, 바쁜 시간을 쪼개서 읽어주신다면 정말 영광일 것 같습 니다. 또한 만약 읽어주시지 못한다고 해도 제가 사랑했던 캐릭터들을 연기해주신 두 분께 ‘이만큼 좋아했습니다.’라는 기념의 의미로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읽는 것에 부담 갖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 다. 어쨌거나 이렇게 행복한 경험을 해줄 수 있게 해주신 두 배우님들께 너무너무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정말정말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앞으로 영원한 팬으로써 두 분을.응원하고 있겠 습니다.!! 화이팅!!!

◎ 주의사항 1. ※추천브금 이라고 표시된 것에 맞춰서, 해당 음악을 들으며 읽어주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2. 오타는 너그럽게 이해해주세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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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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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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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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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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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t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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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울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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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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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인혁이 영국으로 연수 갔다 온 직 후, 드라마시점으로부터 3년 전의 이야기. 골든타임과 중증외상을 되새기며.. 고독한 외상전문의 최인혁과 그의 곁을 지키는 파트너, 외상코디네이터 신은아를 기억하며.. 상플 ST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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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처 ※ 추천브금 이루마 - when the love falls

[ 뚜르르르- 뚜르르르- 뚜르르르- ]

벌써 7번째 걸고 있는 전화이다. 그러나 여전히 허무한 신호음만 들릴 뿐 휴대폰 너머로 그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인혁은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가 그렇게 애태우며 전화를 거는 상대는 바로 그의 어머니였다. 드디어 1년 6개월간의 미국연수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비행기를 타기 전에 그는, 조금 있으면 출발한다고 어머니께 확인전화를 드릴 요량이었다.

‘ 분명히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통화를 했었는데... 목소리도 괜찮으셨고... ‘

내색은 안하시지만 매일 인혁의 전화를 기다리던 어머니셨기에 전화만큼은 항상 옆에 두고 늦게 받으시는 일이 없었다.

그런 어머니가 전화를 이렇게 오랫동안이나 받지 않으시다니, 뭔가.. 이상했다. 아무 일도 아니기를... 그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떨쳐버리며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조급한 인혁의 마음도 모르고, 한참동안 이륙할 준비를 하던 비행기가 드디어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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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우우우우우우웅- / 14시간의 장시간 비행을 거쳐 한국에 도착한 인혁. 인혁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휴대폰을 집어 든다. 그리고 초조한 마음으로 다시 어머니께 전화를 걸어본다.

[ 뚜르르르- 뚜르르르- 뚜르르르- ]

여전히 신호음만 들릴 뿐, 어머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생각하기도 싫었지만.. 어머니께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는 걸 인혁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입술이 바싹 마르기 시작했다. 서둘러서 짐을 챙긴 그는 곧장 공항을 빠져나온다. 늦가을이었다. 공항을 빠져나오니 차가워진 부산의 밤 바람이 인혁의 몸을 때린다. 그러나 인혁은 바람 따위엔 아랑곳 하지 않고, 서둘러 택시를 잡아탄 뒤, 다급하게 외친다.

“ 기사님!! 봉래동으로 가주십쇼!! 빨리요!!! ”

[ 뚜르르르- 뚜르르르- 달칵- ]

택시 안에서도 계속 전화를 걸던 인혁은 휴대폰 너머, 수화기 드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 ....!!!!.. 여..여보세요? 어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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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혁아... ” “...?!.... 숙..모님? ”

전화너머로 떨리는 숙모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절하게 어머니의 음성을 기다리던 인혁은 어머니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 인혁아.... 우짜노...흑..흑.. 우짜노... 흑..으.... 니..... 남함병원으로 가야쓰겄다.... ” “ .....!!..... ”

인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연로하신 숙모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울음 때문인지 더욱 더 쉬어있었다.

철렁-

인혁의 가슴이 내려앉는다. 어지러웠다. 갑자기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느낌이었다. 아무런..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한참을 미동도 없이 수화기를 든 채로 굳어있던 인혁은 애써 다시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지금,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한다.. 아직 눈으로 확인한건 아무것도 없었다. 남...남항병원..? 그래, 숙모님이 남항병원이라고 하셨던 것 같다. 정신차리자... 최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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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기사님!! 남항병원으로 가주십쇼.!! 조금 더 서둘러서요..!! ”

인혁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병원으로 가달라는 인혁의 말에 택시기사는 속도를 높인다. “ 다 왔습니데이. ” “ 여기 있습니더!! ”

[ 쾅- ]

“ 손님!!! 손님!! 짐 가져가셔야죠!! ”

택시기사에게 만 원짜리를 대충 뭉터기로 집어주고는 인혁은 세차게 택시 문을 닫고 트렁크에 실었던 짐도 잊은 채 작은 병원 건물로 뛰어 들어갔다. 병원 안에 들어가니 응급실 저 한 구석에 나이 드신 삼촌이 처량하게 앉아있었다.

“ 사...삼촌..!! 무슨 일 입니꺼?! 저..저희 어머니가 많이.. 다치..셨습니꺼.?! ”

인혁이 온 것을 본 그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 미안타... 미안타... 인혁아.... 내가.. 좀 더 일찍 가봤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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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무슨 일인데 이러십니꺼...... 말씀 좀 해주이소! 삼촌요!! ” “ 흑.....흐흑....... 늬....늬 어머니... 떠나셨다.... ” " ........!!!!!....... "

[ 털썩- ]

자기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인혁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말.. 말도 안돼.... 어떻게...?.... 분명히 그제까지만 해도 어머니와 통화했던 인혁이었다. 잘 계시냐는 그의 질문에, 별 탈 없이 잘 있다고... 걱정하지 말고.. 몸 조심히 오라고 걱정해주시던 어머니셨다. 이럴 리가 없었다... 높으신 연세 때문에 몸이 많이 쇠하긴 하셨지만 의사 아들 걱정 안 시킨다고 연세에 비해 건강관리도 잘하시던 편이었다. 도대체 왜....

[ 벌떡- ]

“ 아...아닙니더... 아닐껍니더.... 제... 눈으로 확인해야겠습니더.... 어...어머니 어디에 계십 니꺼... ” “ 흑.. 흐으윽...... 인혁아... 인혁이.. 임마야.... 우짜노... 우짜노.....”

그의 눈이 풀려있었다.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 같았다.

“ 저...김순옥씨.. 보호자 되십니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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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누군가가 그의 어머니 이름을 불렀다 간신히 서있던 인혁은 움찔하고 뒤를 돌아본다. 응급실 레지던트쯤으로 보이는 의사한명이 그를 보고 있었다.

“ 유감스럽지만... 김순옥씨... 10월 22일 오후 1시 25분에... 사망하셨습니다.. ”

자신이 10년 넘는 시간동안 환자들에게 해오던 저 말이 이렇게도 잔인했던가..? 담당의의 조심스러운 말투에도 불구하고 인혁은 소름이 끼쳤다.

“ 어머니를...... 뵐 수 있게 해주십쇼.... ” “ 따라 오시죠.. ”

인혁은 천천히 그 의사를 따라갔다. 하얀 천, 하얀 천이 어머니의 시신 위에 덮여져 있었다. 그로써는 지난 세월동안 수없이 많이 봐왔던 광경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어머니였다. 잠시 멈칫하던 인혁은 떨리는 손으로 천을 걷어내었다. 1년 6개월 만에 뵌 어머니는 너무나도 익숙한 모습 그대로 마치 잠을 자고 계신 듯 누워계셨다. 다시 일어나서 ‘우리 인혁이 왔나...?’ 라며 그를 반겨주실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머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의사라는 게 잔인하게 느껴질 정도로 이 상황들이 너무나도 분명히 인식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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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은 어머니의 시신 앞에서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다.

“ 사인은........ 사인은... 무엇입니까.. ” “ ....?... 아, 천공성 복막염으로 인한 패혈증입니다. ”

일반인들과는 다르게 사인을 물어보는 인혁에게 잠시 의문의 눈빛을 보내던 의사가 사인을 말해준다. 그때, 병원에 막 도착하신 숙모님이 인혁을 발견하고 달려온다.

“ 아이고... 아이고... 순옥아.... 아이고...인혁아... 우짜노..우짜노... ”

나이 드신 숙모님은 한참을 인혁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신다. 갑자기 천공성복막염이라니... 패혈증이라니.... 패혈증이었다면, 엄청나게 괴로워하셨을 것이다. 분명.. 그저께 아침에 통화를 했을 때 어머니의 목소리는 정상이셨다. 인혁이 못 알아챘을 리가 없었다.

“ 숙모님... 이, 이게... 어떻게 된 일 입니꺼..? 분명히... 그저께까지만 해도 괜찮으셨는 데.... ” “ ..흑.......그기 말이다....... ”

이야기를 듣는 인혁의 눈은 초점을 잃어갔다. 그는 풀려버리려는 다리에 간신히 힘을 주고 버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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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전,

“ 예! 어무이! 인혁입니더~! ” “ 아이고.. 인혁이가? 밥은 묵었나? ”

수화기너머로 보고 싶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혁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던 어머니는 그의 입국날짜가 다가오자 한껏 들뜬 모양이셨다. 그런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은 인혁역시 기분이 좋아졌는지, 목소리 톤이 올라간다. 인혁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 허허~ 예~ 어무이, 먹었습니더! 어무이는 진지드셨습니꺼? ” “ 그라무~ 난 챙겨먹었제, 비행기는 탔나..? ”

아들이 빨리 보고 싶으셨는지 요즘 어머니는 몇 번이고 비행기얘기부터 물어보신다.

“ 아직입니더~! 비행기는 내일 밤에 타고 부산에는 모레 아침에 도착할 것 같습니더~!” “ 맞나? 아이고~ 우리 아들 볼 생각하니까 기분이 좋구마, 뭐 먹고 싶은 거 없나? ” “ 아입니더~ 어무이 다리도 안 좋으신데 아무 것도 준비하지 마이소, 제가 맛난 거 사갔 고 들어갈께예~ ” “ 아이다~ 피곤할낀데 무슨~! 니 회무침 좋아하제? 니 올 시간 맞춰서 내 매운탕이랑 회 무침 해놓을끼카네. 아무것도 사오지 말고 온나? 알았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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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허~ 예~ 알겠습니더~! 어무이요,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요. 지가 여기서 마무리할 일 이 있어가, 내일 저녁에 비행기 타기 전에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더~ 무슨 일 있으시면 꼭 전화해주이소~!”

1년하고도 반년 만에 돌아오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본인이 손수 만든 음식을 먹이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너무나도 잘 이해하는 인혁이었기에 더 이상 어머니를 말리지 않았다. 대신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하라는 당부에 말을 잊지 않는 그였다. 바쁜 의사아들한테 방해가 되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어머니는 늘 먼저 전화하지 않으셨다. 그렇기에 미국연수 내내 인혁은 하루에 한 번씩 꼭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곤 했다.

“ 내 걱정은 안 해도 된다케도~ 니야말로 먼 길오는데 조심에서 오거래이~ 알긌나? ” “ 예~ 알겠십니더~ ” “ 그래~ 전화비 많이나온다. 끊는데이~ 조심해서 오거래이~ ” “ 예~ 어무이 들어가이소~ ”

인혁과의 통화를 마친 어머니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한껏 들떠있었다.

“ 예~ 나요, 형님! ” “ 아, 순옥이가~ 웬일이고~ 인혁이는 왔나? ” “ 아이요~ 모레 온다카데예, 그래서 말인데예~ 장에 좀 나가보려구예 ” “ 장에? 모레온다카면서 뭘 벌써 사놓으려고? 안 싱싱할낀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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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고~ 장씨한테 싱싱한 놈으로다가 한 마리 부탁 좀 해놓을라 그카지. 늦게가면 다 빠지짆아~ 미리 빼놔야제~ 글고 장씨가 형님이랑 친하지않소~ ” “ 아~ 맞나? 알겄다. 그라믄 이따가 장 입구에서 보제이~ ” 기분 좋게 장보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인혁의 어머니.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비닐봉지들 속에는 과일이랑 야채 등이 담겨져 있다. 무거운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던 그녀, 그만 발을 헛딛는다. 들고 있는 짐들 때문에 균형을 잃고 그녀는 계단에 그대로 고꾸라진다. 넘어지면서 계단쇠모서리에 배가 찍힌다.

“.... !!!.......... 아,, 아이고... ”

그녀는 넘어지면서 여기저기가 쑤셨지만 그냥 멍이 들겠거니 싶어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짐들을 주워 집으로 들어가버린다. 그날 저녁,

[ 따르르릉- 따르르릉- 달칵 ]

“ 여보세요? 순옥이가~? ” “ .....예, 예.......나, 나요, ” “ 와~ 무슨 일 있나? 근디 니 목소리가 와그러노~? ”

수화너머 목소리가 아주 작게 들린다. 간신히 말을 이어나가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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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아까 계단에서 좀 넘어졌는데.. 그 후로 배가 자꾸... 아파서... ” “ 넘어져~? 니 괘안나? 병원엔 가 봤나? ” “ 병원은 무슨.... 상처 하나도 없어예... 글고 우리 아가 의산데.... 무슨... 병원.... 인혁이 오면 같이가면 되예...” “ 많이 아픈 거 같은데? 진짜 괘안겠나..? 내가 집으로 가까~? ” “ 마소~, 오늘 말고 모레 인혁이 올 때..... 그때 오라버니 데리꼬 오시라고..... 인혁이오면 반겨줄 사람이 있어야제... ” “ 아아~ 그건 걱정말거래이~ 그나저나 니 심하게 아프면 기다리지말고 병원 꼭 가보거래 이~! 또 미련하게 참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하거래이~! ” “ 아....알았소 형님.... ”

인혁의 어머니는 점점 식은땀을 흘린다. 호흡도 조금 가빠졌다. 이상하게 계속 배가 아픈 그녀였다.

‘ 아까 장에 가서 먹은 전 때문인가..? ’

그냥 배탈이겠거니 생각한 그녀는 약통에서 소화제를 찾아먹고 곧 나아지겠거니... 하고 이내 아픈 배를 부여잡고 잠을 청한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뜬 인혁의 어머니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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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이 가라앉기는커녕 어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져 있었다. 온몸에 핏기도 없이 얼굴은 파래지고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몸이 떨리도록 추워지고 점정 정신이 몽롱해져갔다. 64세의 노모가 견뎌내기에는 너무나도 버거운 고통들이... 그 몸을 덮쳐왔다.

“ 헉... 헉... 아이고..... 헉.... 헉... . ”

간신히 방을 벗어나 거실로 기어나온 그녀는 수화기를 든다. 사라져가는 정신을 붙잡고 힘겹게 전화기 버튼을 누르다가... 그만, 인혁의 어머니는 정신을 잃고 그대로 엎어진다. 다음날 아침,

/ 부우우우우웅- /

트럭을 몰고 인혁의 집으로 가던 숙모님과 삼촌. 숙모는 휴대폰을 붙잡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있다.

“ 아이고~ 야가 집에 오라케 놓고 왜 이리 전화를 안받노? ” “ 아프다 켔다매, 순옥이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이가? ” “ 괜찮다카긴 했는데... 퍼뜩 가 보입시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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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 순옥아!!!!!!!..... ”

인혁의 집으로 와보니 인혁의 어머니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 아, 아이고!!! 이게 뭔일이고... 순옥아!! 순옥아!! 일어나 보래이!! 순옥아~~~~!!! ” “ 병..병원으로..!! 당신은 여기 있거래이....!! 인혁이 올지 모르니까..! ”

삼촌은 서둘러 인혁의 어머니를 업어 차에 태우고 가까운 병원으로 갔다. 병원에 도착하니 의사들이 급하게 응급처치를 해준다. 그러나, 상태를 돌이키기엔.. 이미 너무 악화되어 있었다. 희미하게 의식이 돌아온 그녀는 인공호흡기를 낀 채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마지막 말.....

“.......인...혁.......인...혁.....아........ ”

[ 삐------------------- ]

고요함 속, 길게 늘어지는 심박측정기의 소리만이.. 그녀가 이제 이 세상을 떠났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 비틀- ] 간신히 힘을 주고 서있던 인혁은 숙모님의 말을 듣고는 다시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비틀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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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있던 간호사가 그를 부축해준다.

“ 어... 어머니... 어머니.... 저 때문입니더... 지 때문에.... ”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말렸어야했다.. 그때 어머니가 아무것도 준비 못하시게 말렸어야했다... 의사아들이 무슨 소용일까.... 정작 자신의 부모가 죽어가고 있을 때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초점을 잃어버린 인혁의 두 눈에 눈물이 차오른다. 한발짝, 두발짝, 인혁은 떨리는 손을 들어 어머니의 손을 잡는다. 어머니의 손은... 외롭게 자란 그를 늘 따뜻하게 감싸주시던 그 손의 온기는 이미 식어버렸다...

“ 흐윽... .흑.....흑........어머...니....흐으.윽....”

인혁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싸늘하게 식어버린 어머니의 주검 끌어안고는 한참을 그렇게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고 있었다. 장례식장, 어머니와 같이 일하시던 시장사람들... 그 옛날 아버지와 같이 조선업을 하시던 아버지 친구 몇 분이 조문객의 전부였다. 그나마도 숙모님과 삼촌이 내내 같이 있어주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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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러주신 분들이었다. 인혁은 그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더 이상 올 친척들도 형제들도 없었다. 사방이 적이었던 그... 올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상주복장을 한 인혁은 넋을 놓고 어머니의 영정사진 앞에 앉아있었다.

“ 인혁아..... ”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유일한 친구 지한구였다. 한구는 영정사진 앞에서 절을 하고 상주인 인혁과 맞절을 하고는 그의 앞에 마주앉는다.

“ ........ 어떻게 알고 왔어..... ” “ 너,. 입국 날짜 지났는데 병원에 나와야 할 놈이 안 나오니까!.... 휴..... 전화했더니.... 숙모님이 전화받아서 얘기해주시더라.... ” “ ........... ” “ .... 임마.... 나라도 불렀어야지.... ” “ ............... 수술하느라 바쁠 낀데.... 바쁜 사람 부담스럽게 불러서 뭐하겠나... ” “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오지 임마...!... 너 어머니랑 각별한 거 아는데.... 어떻게 안 오겠냐....” “ ....... ”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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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버팀목이셨던 어머니가 떠나신 지금, 이제 그가 의지할 곳이 어디도 없었다. 사실, 너무 무서웠다. 지금 순간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인혁은 내심, 이렇게 힘들 때마다 자신이 부탁하지 않아도 자신을 챙겨주는 한구가 고마웠다.

“ ...일단 .....선생님한테만 말씀드렸어......... 얘기 들으시더니 선생님.. 아니, 과장님께서 너 휴가처리해주셨어.... 데리고 오라시더라..... 중요한 일이라네... ” “ ........ 한구야...... 나 이제 병원 못갈 것 같다..... 의사... 못할 것 같다.. ”

중증외상.... 생과 사의 기로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 인혁의 머릿속에 어머니의 사망선고를 하던 그 의사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 유감스럽지만... 김순옥씨... 10월 22일 오후 1시 25분에... 사망하셨습니다.. ] 그리고 보호자들에게 사망선고를 하는 자신의 모습도 떠올랐다. 차갑게 주검이 되어버린 어머니의 모습도 떠올랐다. 더 이상 환자들과 보호자들을 대할 자신이 없는 그였다. 죽음이란 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의사이기 전에, 그도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 ........!!.......... 최인혁... 너, 힘든 거 아는데.... 너 같은 놈이 의사 안하면 뭐 할껀데? ” “ ............. ” “ 20년 동안 내내 도서관 아니면 병원에만 틀어박혀서 미친놈처럼 환자하나 살리겠다고 발버둥치던 놈이..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리냐고..! 이게 너희 어머니께서 바라시는 일 같아? 너 하나 의대 보내겠다고 어려운 형편에 힘들게 뒷바라지 해주셨대매!! 너희어머 니처럼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가는 사람들... 살리려고 그랬던 거 아니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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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모두 맞는 말이었다. 바닥만 쳐다보고 있던 인혁은 고개를 들어 한구를 본다. 늘 인혁이 힘들 때 다가와서 놀려주기나 했지 웬만해서는 그에게 화를 안내던 한구가 진심으로 화를 내며 그의 앞에서 씩씩거리고 있었다. 한구가 인혁을 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한다.

“ ..........선생님....아니...과장님.... 올 해 지나가면 다시 의과대 학장님으로 임명 되실 거 다.... 어차피 해운대병원 자리 잡을 동안, 임시로 맡으신 거였으니까....” “ .....!!..... ”

현 해운대세중병원의 외과과장 정만호. 세중병원의 원로교수, 그는 초창기 세중병원 설립멤버이자 인혁의 스승님이셨다.. 학생시절부터 남다른 그의 열정과 재능을 아껴주셨다. 인혁이 박사학위까지 마쳤는데도 외과 내에서 교수티오가 나지 않자, 수술을 좋아하는 인혁을 위해, 외상의학도입이 필요하다며 힘을 써서 외상교수티오를 만들어주셨다. 외과 내에서 인혁이 외상을 하며 구박받고 배척당할 때, 유일하게 그를 보호해주시던 분이셨다. 그 때문인지 그는 더욱 동료와 선배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았다. 특히나, 생소한 외상의학을 도입한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았고 중증외상의 특성상 타과의 영역까지 침범하고 어마어마한 적자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병원에서 눈엣 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렇지 않아도 그의 성격상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는데 외상을 시작한 뒤로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더 악화되었다. 스승님의 권유로 외상의학연수를 떠나기 전 3년 동안에 시간은 그에게 지독한 고독과 외로움을 안겨주는 힘겨운 나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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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커다란 병원에서 인혁은 늘 혼자였다. 마치, 망망대해에 홀로 떠있는 섬 같은 존재였다. 아무리 인혁이 수술을 좋아한다지만 외상은 그에게도 힘든 과제였다. 한국에는 외상의학에 대한 선례나 표본이 없었기 때문에 외상수술 후, 각 과로 연결되는 시스템 자체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결정과 모든 책임을 언제나 인혁 혼자 감당해야했다.

“ 너 없는 동안 너 때문에 트라우마센터 만드시려고, 선생님이 애 많이 쓰셨어... 애초부 터 그럴 생각으로 너 외상연수 보내신 것 같더라... 본인이.. 니가 힘들어 할 줄 알면서도 널 외상으로 밀어 넣었다고... 미안하다고.... 트라우마센터 생기면.. 더 이상 외과에서 눈 치보면서 외상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 “ .......... ” “ .................. 최인혁........ 교수님이 이렇게까지 하시는데.... 교수님이 이 병원 떠나시기 전에 조금이라도 자리 잡아야 될 꺼 아니야... 그렇게 매달려놓고... 너 외상 이대로 그만 둘꺼냐? ” “ .......... ”

인혁이 말이 없다. 그러자 한구는 인혁어머님의 영정 앞에 다시 한 번 고개룰 숙여 예의를 갖춘 뒤 겉옷을 챙겨 밖으로 향한다. 한구는 그렇게 그냥 밖으로 나가려다 인혁을 돌아보며 말한다.

“ ....... 휴가... 한 달이다..... 휴가 중에 교수님 한번 만나.... 병원에서보자 나 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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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은 한구를 배웅할 힘이 없었는지 고개만 까딱한다. 한구가 가고 나서 한참 있다가 인혁은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참.... 이럴 때는 한구가 형 같기도 하다고 느끼는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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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운명 이 이야기는 인혁과 은아의 첫 만남에 관한 이야기이다. 인혁은 모르고 있지만... 은아 만이 기억하고 있는 그들의 진짜 첫 만남. 2009년, 11월 10일. 그가 처음으로 내 품에 뛰어들었던 그 날, 그 순간, 어쩌면 그 순간부터... 나는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미련한 사랑은 그 짧은 마주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 그 남자의 이야기 >

대낮인데도 칠흑같이 어두운 방,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홀로 방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있는 인혁. 장례식 이후,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지 야위어버린 몸. 핼쑥하고 까칠해진 얼굴. 초점 없는 그의 눈. 인혁의 모습엔 그 어떤 희망도 살려는 의지도 없어 보였다.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틀어놓았던 라디오소리만이 온 방을 울리며 고요한 적막을 깬다.

[ 치직- 치지직- ]

/ 다음으로 전해드릴 내용은 첫눈에 관한 소식입니다. 기상 속보에 박대기 기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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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상청은 오늘 오후부터 차가운 대륙고기압이 확장하면서 기온이 큰 폭으로 떨어지며 눈발이 날릴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 낮 경기 서해안을 시작으로 밤늦 게는 대부분의 지방으로 확산될 것으로 보입니다. 내일 서울의 아침기온은 영하 6도로 올 가을 들어 가장 낮겠고, 남부지방 역시 영하 3도로 초겨울 추위가 이어질 것이라고 기상관계자는 밝혔습니다. 또한 대기불안정으로 남부내륙에도 한때 눈발이 날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내일새벽부터는 갑작스러운 눈·비로 인해 체감온도가 뚝 떨어지기 때문에... /

[ 치지직- 치직- 삑- ]

그 소리가 시끄럽게 느껴졌는지 라디오를 꺼버리는 그였다. 눈을 감아보는 인혁. 첫 눈, 첫눈이라... 어머니께서도 눈이 오는 날을 참 좋아하셨다... 의사가 된 후에도 이렇게 눈이 오는 날이면, 가끔씩 어머니를 모시고 나가 함께 거리를 거닐며 눈 구경... 사람구경.. 거리구경을 시켜드리곤 했었다. 그때 잡았던 어머니의 손은 참 따뜻했었다. 벌써,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20일이 지났다. 무섭고 고통스럽다. 더 이상.. 이 세상에 어머니가 안 계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더 이상.. 기다려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 더 이상.. 돌아올 곳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 두려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24년. 의사가 된지는 14년. 그 외롭고 힘들었던 긴 시간들을 흔들리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이었다...

고통스러운 마음에 눈을 다시 뜨는 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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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기댄 채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다. 정말로 창밖엔 하얀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울컥오늘따라, 어머니가 계시지 않은 이 집이 너무나도 넓고 허전하게 느껴지는 그였다. 그 허전함을 견디지 못해 또 그의 마음이 슬픔으로 출렁인다. 다 메말라 버린 줄로만 알았던 눈물이 다시 그의 눈에 고여 흐르려했다.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아파 오자 그는 어머니가 없는 이 곳에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었다. 지독한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인혁. 뭔가에 홀린 듯 밖으로 나가버린다. / 웅성웅성-- /

무작정 나와 발길이 닫는 데로 걷다보니 인혁은 어느새 그가 어머니와 거닐던 거리를 걷고 있었다. 눈 오는 거리를 외투도 없이 양복하나만 걸친 채로 걷고 있는 인혁 폐인이 되어버린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이상하게 보였다. 그는 자신을 향해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쓰러질 듯 쓰러질 듯 걷고 있다. 3년전, 어머니와 걸었던 이 거리. 거리를 걸으며 내리는 눈을 맞고 나서야 인혁의 찢어질 것 같던 심장이 좀 아무는 느낌이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심장이 터져버려 진짜로 죽을 것만 같았다. 어머니생각에 후회가 밀려온다. 조금 더 잘해드릴걸, 조금 더 곁에 있어드릴걸... 후회해봤자 이미 어머니는 그의 곁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그가 외상을 시작한 뒤로는 온갖 당직과 응급콜이 밀려들어왔고 집에 자주 들어올 수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를 혼자 계시게 하는 시간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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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가끔 어머니와 이런 눈 오는 거리에서의 산책도 외상을 시작한 이후론 한 번도 하지 못했다.

“ ...... 씨..... 발.......”

길을 걷다 생각에 잠긴 그의 입에서 나지막이 욕이 흘러나온다. 그놈의 외상..... 이젠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연수도 외상만 아니었으면 안 갔을 것이고 그랬다면 이렇게 허무하게 어머니를 잃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혼자계신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그에겐 안정적인 자리가 필요했다. 때문에, 그는 정규 간담췌, 간암파트에서 자리 잡고 싶어 했다. 그러나 간담췌파트의 외과티오는 한자리밖에 없었고 그 자리는 인혁의 자리가 아니었다. 실력에 관계없이 이미 누가 갈지 정해져있는 자리였다. 그래서 그는 외상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사지로 떠밀리듯이... 인혁은 모든 일이 자기 탓인 것 같았다. 어머니를 지켜드리지 못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보고 싶었다... 어머니가..... 또다시 밀려오는 슬픔 그는 맨 정신으로는 자신을 덮치는 슬픔을 이길 수가 없었다. 술이라도 마셔야했다. 의지할 곳이 필요했다. 그의 눈앞에 허름한 포장마차가 하나가 보인다. 하얀 눈이 쌓여가는 늦은 밤, 어느 포장마차 안,

/ 콸콸콸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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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부터 들어와 술을 마시던 인혁. 그는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긴 생각에 잠겼다가 술을 마시다가를 반복하고 있다. 처음엔 소주잔으로 한잔 두잔 마시더니 이내 성에 안차는지 맥주잔을 가져와 소주를 들이붓는다. 그러더니 자신의 입으로 잔을 갖다 댄다.

/ 벌컥- 벌컥- 벌컥- /

입안으로 미쳐 다 들어가지 못한 소주 액들이 그의 하얀 목을 타고 흘러내려와 와이셔츠 깃을 적셔버린다. 벌써 여섯 병째, 술을 마시는 그의 모습은 마치 자신에게 물고문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위태로운 모습으로 술을 마시는 그를 보던 포장마차 주인은 이러다 사람 잡겠다 싶어 그를 말려본다.

“ 아이고~~~ 손님요~ 그만 좀 드이소!!! 이러다 죽겠습니더!! ” “ ............ ”

그러나 자신을 말리는 소리가 들리는지 마는지 무시한 채 인혁은 연거푸 술잔을 들이킨다.

“ 아휴~!! 참!! 안되겠습니더!! 문 닫을꺼니까네 고마 가이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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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집주인이 인혁을 밀어내며 술상을 치우려하자 그때서야 그는 술잔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 휘청- ]

몇날며칠을 잠도 안자고 제대로 먹지도 않아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에 술을 들이부어서인지 저대로 보내도 되나싶을 정도로 그의 몸은 심하게 휘청거렸다. 포장마차를 나와서 또다시 위태롭게 거리를 헤매는 인혁. 집으로 향하는 길 어디쯤에서 그는 정신이 몽롱하고 심하게 어지러워짐을 느꼈다. 눈앞에 뭐가 있는지도 잘 분간이 가지 않는다. 지쳐버린 몸을 덮쳐오는 술기운 때문에 걷기도 쉽지 않았다. 지난 몇 주간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던 인혁. 갑자기 술을 마셨더니 그동안의 졸음과 피곤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그 쏟아지는 피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그리고 나무인지 벽인지 모를 곳에 등을 기댄 후 눈을 감아버리는 인혁.

한참 후, 추운 날씨 때문에 몸에서 한기가 느껴진다. 그러나 눈을 감으니 모든 것이 편안해진다. 그는 그대로,,, 스르르... 잠이 들고 있었다. 그는 꿈속으로 빠져들며 모든 게 이대로 편안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본다. 눈을 감고 편안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 한줄기 눈물이 흐른다.

영하 3도, 땅도 얼어붙은 부산의 겨울밤. 하늘에서는 여전히 하얀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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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ㅈ- ㄱ ㅣ- 요, 이 ㄹ- 어- 나- 보- 세- 요----- /

술기운에 누구의 목소린지 무슨 말인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인혁은 꿈속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누구지..? 누가... 나를 찾는 거지...? 어머니였으면 좋겠다... 한번만이라도 듣고 싶다. 어머니의 음성.... 천천히 눈을 떠보는 인혁, 날이 어두워서 인지 방금 일어나서인지 앞이 뿌옇게 잘 보이지 않는다.

“ 우리 인혁이 일어났나....? ” “ ........!!!!!!!!!!!.......... 어...어머니...? ” “ 와... 이런데서 자고 있노.... 와.. 그리 울고 있노.... ”

어머니였다... 흐릿하게 보였지만 분명히 어머니였다. 인혁은 놀란 눈으로 잠시 멍해져있다. 자신도 모르게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 이내 인혁은 눈앞에 보이는 팔을 붙잡고는 그 품에 안겨 어머니를 목놓아 부른다.

“ ......!!!!!....... 어머니!!!.. 어머니!!... 어무이....흑...... 흐윽........어...무....이...... ” “ 울지말거래이..... 인혁아.... 울지말거래이... 우얄꼬... 우리인혁이 힘들어서 우얄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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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윽.....흑..흑....어디갔다가..... 이제오십니꺼!..... 죄송합니더... 제가 죄송합니더 어 무이.... ” “ 미안타.... 내가 미안타..... 니 혼자 두고 가버려서.... 미안타 인혁아.... 자, 인혁아...

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퍼뜩... 일어나거래이..... ”

어머니의 음성에 이끌려 그는 비틀거리는 몸을 가누며 일어선다. 그때 인혁의 손사이로 스르륵 빠져나가는 팔.

“ 안,,,안돼!!! 안됩니더!! 가지마이소!!! 어무이요!! ” “ 살거래이.... 인혁아... 살아야한데이.... 절대.... 울지도말고... 꼭.... 살거래이.... " “ 어....무....이........”

[ 쿵-- !!!! ]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인혁. 간신히 손을 뻗어 무언가를 잡아채더니 그대로 의식을 잃고 쓰러져버린다. < 그녀의 이야기 > ※ 추천브금 : 이루마 - chaconne(샤콘느)

첫눈이 내리는 부산의 겨울, 깊은 밤 어느 중형 병원, 긴 머리에 아름다운 눈을 가진 한 여자가 병원 밖을 나선다. 그녀의 이름은 신 은 아. 오늘도 몸이 녹초가 된 그녀는 힘든 중환자실 업무를 마치고 퇴근하려는 중이었다.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었는지 걸음을 재촉하던 그녀. 병원 문을 나서다가 하얗게 내리는 눈을 발견하고는 작은 탄성을 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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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와..... 첫눈이네.. ”

눈을 좋아하는 그녀,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첫눈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그녀를 부른다. “ 신간호사님!! 같이 가요~! ”

그녀를 부른 사람은 동료간호사 연주. 1년후 캐나다로 떠나야하는 은아의 뒤를 이을 후임 간호사였다. 은아와는 집이 같은 방향이라 가끔 같이 퇴근하곤 했다.

“ 아휴.... 오늘 정말 너~ 무 힘들었어요. 신간호사님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니 까요?? " “ 뭘요...ㅎㅎ...... ”

연수가 은아를 띄워주며 옆에서 재잘거린다. 은아는 너무 피곤한 나머지 조용히 혼자 가고 싶었지만 차마 그런 말은 못하고 그저 간단한 응수만 해준다.

“ 인턴선생님들이 사고 쳐서 환자 잘못될 뻔했는데~~ 은아쌤이 오시니까 바로 해결됐잖 아요!~ 레지던트선생님들도 안 계셔서 얼~~ 마나 놀랐었는데요?! “ “ 저야 뭐.... 경력이 있으니까... 어떻게 할지 조금 아는 거죠... 별거 아니에요~ 연수 쌤 도 열심히 하시니까 금방 배우실 꺼예요... 그나저나... 중환자실 업무가 만만치가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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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 힘들어요.. 휴... 전에 개인병원에 있을 때는 정말 한가했었는데... 그래도 뭐! 월급 이 좀 쎄잖아요?! 헤헤~ 그래서 괜찮아요~~!! ” “ 하하.... 다행이네요. ” “ 그러고 보니 신간호사님은 정말 좋으시겠어요~!! 이제 몇 달만 있으면 병원 그만 두시 는 거죠~~!!? 그럼 바로 남자친구랑 캐나다 가시는 거에요~?!! ”

캐나다 이야기가 나오자 은아는 멈칫한다. 그녀의 얼굴에 알 수 없는 표정이 스친다.

“ 아.... 캐나다는 바로안가요. 저도 병원 그만두면... 여기서 정리를 좀해야죠.. ” “ 아~ 그렇구나! 그럼 언제 가시는 데요~? ” “ 한... 1년쯤 있다 떠날 꺼 같아요... ” “ 캐나다가면 완~~전 좋으실 거 같아요~!! 아닌가? 조금 섭섭하시려나? ”

별로 좋지 않은 은아의 표정을 본 연수가 슬쩍 묻는다.

“ 아, 아니요... 좋긴 한데... 모르겠어요... 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는데... 뭔가... 아쉽네 요 ” “ 헤헤~ 신간호사님 예비신부 우울증 아니에요? 결혼하면 모든 게 끝나버릴 것 같구~ 그런 거!? ” “ 그... 그런가? 하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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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첫눈이 내리는 날, 연수의 얘기를 한참 들어주며 집으로 향하던 은아. 이내 연수와 헤어지고 그녀는 상념에 빠져든다.. 그녀는 어느 2차병원 중환자실소속의 베테랑 간호사였다. 작은 병원이라서 응급실간호사업무도 때에 따라 겸직을 하고 있었다. 중환자실과 응급실의 업무는 매우 고달픈 일이었지만 그녀는 그녀의 일을 사랑했다. 위중했던 환자를 돌보고 환자가 쾌차하는 모습을 보는 매 순간, 그녀는 다시 삶의 의욕을 얻곤 했다. 그러나 사고로 실려와 죽어가는 환자를 받지 못하고 돌려보내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기도 했다. 그렇게 죽어가는 환자들 앞에서 그녀는 언제나 좌절감을 맛봐야했다. 사람을 살리고 보살피는 게 좋아서 시작한 간호사일 이었지만 간호사로써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늘 뭔가가 아쉬웠다. 뭔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더 찾고 싶었다. 환자들에게 필요한 사람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꿈들은 이제 소용이 없게 되었다. 그녀가 간호사일을 접고 6개월 전에 만난 동규와의 결혼을 위해 캐나다로 떠나야했기 때문이었다. 막상 결혼을 하고 난 후에 거기서도 간호사일을 계속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동규는 참 좋은 사람이었다. 무뚝뚝한 그녀를 여자로써 사랑해주는 사람. 7년 동안 간호사 일만 하느라 연애한번 제대로 못해본 은아에게 스스로 내가 여자였구나 라는 사실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 늘 일이 먼저라 데이트도 잘 못하는 그녀를 싫은 소리 한번 없이 기다려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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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믿음직하고 고마운 사람이었다. 30살. 결혼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불안감... 더 이상 결혼을 미룰 수 없이 해야만 하는 나이가 되어버린 그녀에게 그는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뭔가 아쉬웠다. 계속 여기 남아서 일을 한다고 이 아쉬움이 해결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직은... 뭔지 모를 아쉬움이 그녀의 마음을 흔든다.

“ 어?...... 어? ”

깊은 생각에 잠겨 걷고 있다가 골목길로 들어설 때 쯔음. 그녀는 자신의 몸이 기울어지는 걸 느꼈다.

[ 철푸덕- ]

무언가에 걸려 넘어진 은아. 넘어지는 순간 간신히 손을 뻗어 땅을 짚는다. 그러는 바람에 그녀의 손이 까져버렸다.

“ 아야야..!!!... 으으... 아파라.... 뭐꼬? ”

앉은 채로 자신이 무엇 때문에 넘어졌는지 확인하려고 뒤를 돌아본 순간. 은아는 너무 놀라서 짧은 비명을 지르며 다시 한 번 뒤로 자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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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꺄악!!!!!!!.... ”

한참을 놀랜 채로 주저앉아있는 은아.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쓰러져있는 사람이었다. 어두운 골목길, 외투도 입고 있지 않고 와이셔츠에 양복만 달랑 입은 채로 벽에 기대어 길게 몸을 늘어뜨려 쓰러져있는 한 남자. 이 상태로 꽤 있었는지 남자의 몸에 눈이 조금 쌓여있었다.

“ ....죽...죽은기가...?..... ”

도움을 청하려 주위를 둘러봤지만 깊은 밤 추운 골목길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놀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으나 순간 직업정신을 발휘하며 사태파악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녀였다. 수염이 제멋대로 자라있긴 해도 깔끔한 인상에 양복차림. 이상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조심.. 조심... 쓰러져있는 남자에게 다가간 그녀는 그의 어깨를 흔들며 의식이 남아있는지 확인한다. 남자의 몸에서 나는 지독한 술 냄새가 은아의 코를 찌른다.

“ 저.. 저기요..! 저기요..?! 일어나보세요!! ”

그의 몸은 이미 심하게 차가워져있었다. 급박한 상황, 환자였다.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간 저체온 증으로 생명을 잃을 것이 분명했다. 일단 체온을 높여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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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를 둘러보다가 마땅한 것이 없자 그녀는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남자의 몸을 감싸준다. 남자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 저기요!!! 아저씨!!! 일어나 보세요!! 이런데서 자면 얼어 죽어요..!!! ”

몇 번을 흔들어 깨워보지만 남자는 일어나지 않았다. 남자가 의식이 없음을 확인한 그녀는 그의 목에 손을 대어 맥박을 확인한다. 약하게 뛰고 있는 맥박. 은아는 서둘러 119에 전화를 하려 휴대폰을 찾는다. 그때, 남자의 눈이 살짝 떠진다.

“ ....?!!!..... 저..저기요!! 정신이 좀 들어요?! 제 말 들려요? 일어날 수 있겠어요?.... ”

눈은 떴지만 초점이 흐려 보이는 그의 눈. 그녀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듯했다. 빨리 병원으로 옮겨야했다. 급하게 휴대폰으로 구급차를 부르려는 은아.

[ 타악- ]

그때, 갑자기 쓰러져있던 그가 손을 들어 은아의 팔을 잡는다. 갑자기 팔을 잡히자 놀란 은아는 남자를 쳐다본다. 그의 눈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 ......!?!!?!!...... 저... 저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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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팔을 붙잡은 그가 이내 상체를 일으켜 그녀를 안아버린다. 너무 당황해서 움직일 수도 없는 은아. 갑자기 그녀의 심장이 멈춰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귓가에 떨리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어머니!... 어머니..... 어무이....흑...... 흐윽........어...무....이...... ” “ .....?!....... ” “ .......흐윽.....흑..흑....어디갔다가..... 이제오십니꺼!..... 죄송합니더... 제가 죄송합니더 어 무이.... ”

은아는 자신을 감싸고 있는 팔에서 빠져나오려 했지만 힘이 어찌나 센지 그녀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남자는 그녀를 안은 채 너무나도 슬픈 음성으로 목 놓아 어머니를 불렀다. 족히 마흔 살은 되어 보이는 그였지만 울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 같았다. 왠지... 그를 위로를 해줘야 할 것 같았다.

[ 토닥- 토닥- ]

얼떨결에 은아는 자신을 안고 있는 그의 등을 토닥여주며 조용히 입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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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저기요.... 정신 좀 차려보세요.... 일어날 수 있겠어요..? ”

은아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그가 그녀를 안았던 팔을 풀고 비틀거리는 몸을 가누며 일어선다. 은아는 남자가 일어서자 잡혀있던 팔을 뺀다. 그러자 그가 비틀거리면서 손을 뻗더니 다시 그녀의 팔을 잡아챈다. 그 찰나의 순간, 하얗게 세상을 덮는 눈송이들 사이로 그녀는 남자의 간절한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상처받은 깊은 눈동자

“ 어....무....이........”

짧은 신음 같은 말을 내뱉고는 의식을 잃고 은아 쪽으로 쓰러지는 남자. 그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들이 공중으로 흩어지다가 은아의 뺨에 닿는다. 그가 그녀의 품안으로 들어왔다. 쓰러지는 남자를 받치려던 은아는 그의 무게 때문에 균형을 잡지 못하고 두 사람의 몸이 다시 남자 쪽으로 기울어진다.

[ 쿵-- !!!! ]

결국, 두 사람은 함께 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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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지며 순간적으로 그의 가슴팍의 얼굴을 묻었던 그녀. 눈을 떠보니 쓰러져있는 그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이 엎어져있었다.

“ 저... 저기요!!!!! 괜찮으세요?!!!! ”

하얀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그는 의식이 없었다. 다음날 오후, 은아가 일하는 병원 응급실. 동료 간호사가 그녀를 찾으려 여기저기 둘러보던 차에 그녀가 보이지 않자 당직 레지던트를 발견하고 은아를 묻는다.

“신간호사님은요? 여쭤볼 꺼 있는데. 내내 안보이시네요? 오늘 오프셨나?” “ 아니~ 오프는 아닌데~ 어제 저 환자 처치하느라 눈을 많이 맞았다카네, 감기몸살이 심 하다카는데? ” “ 아~ 근데, 저 환자 의식은 아직이에요? ” “ 저 환자? 아직이다. 뭐 그래도, 환자가 건강체질에 외상도 없고, CT 찍어보니까 뇌진 탕도 아니었고, 다만, 약간 저체온 증에다 영양실조증세가 좀 있더라고, 술 때문인 것 같 으니까네, 의식은 금방 돌아올끼다. ”

귀찮다는 듯, 레지던트 의사가 대충 턱 끝으로 인혁을 가리키며 성의 없이 대꾸한다. 수액을 주렁주렁 달고 의식 없이 누워있는 인혁. 꿈을 꾸고 있는지 그의 표정이 이따금씩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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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일로 몸살이 나서 출근도 못한 은아 손가락 하나도 까딱 못할 정도로 아파죽겠다. 간신히 약만 먹고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으니 급박했던 어제일이 다시 떠오른다. 다급히 119를 부른 은아는 남자의 신원확인을 위해 그의 웃옷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찾아낸다. 최인혁..? 최인혁, 이 사람 이름이 최인혁이었구나... 현장에 구급차가 도착하고 인혁이 구급차로 옮겨진다. 구급차에 같이 올라탄 은아는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그사이 구급대원들이 인혁의 상태를 확인한다.

“ 여보세요? 응!! 박간호사!! 나 신간호사인데 지금 풀베드(full bed)아니지? ” [ 예.. 신간호사님? 무슨일이세요? ] “ 아, 내가 사정이 쪼매 생겨서. 환자랑 같이 들어가고 있거든? 5분 안에 들어가니까 빨 리 당직 쌤 좀 불러줘~! ” [ 아! 예예~ 알겠습니다! 환자 상태랑 신원은요? ]

인혁의 지갑을 다시 확인하는 은아.

“ 이름은 최인혁이고, 나이는 42세, 상태는... 잠깐만, 온도 몇 도에요? ” “ 34.5도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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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간호사! 체온 34.5도로 저체온증같고! 넘어지면서 머리를 다쳤을수도 있으니까! 당직 쌤한테 잘 말씀드리래이! ” [ 예, 알겠습니다! ]

병원에 도착한 구급차. 대기하고 있던 당직과 간호사한명이 인혁을 침대로 이동시킨다. 졸린 눈을 비비며 당직이 은아에게 묻는다.

“ 저체온증이라꼬요? ” “ 예! 올 때 체온 34.5도였고, 길가에서 의식 없이 쓰러져있었습니다. ” “ 그러네, 부정맥 올 수 있으니까네, 충격조심하고 흉간삽입해서 체온 올려야겠습니더. 신간호사님 아는 사람입니꺼? ” “ 아,, 아니요! 길가다가 우연히 마주쳐갔꼬... 그런데 잠깐 의식 돌아왔다가 넘어지면서 머리가 땅에 부딪힌 것 같아요.... ”

자기도 모르게 말끝을 흐리는 은아였다. 넘어질 때 인혁 위에 있었기 때문에 무게를 더해줬다는 미안함 때문이었다.

“ 그라믄 CT도 찍어야겠네, 근데 간호사님은 왜....?. ”

이 추운 날씨에 인혁에게 덮어주느라 외투도 입지 않고 눈밭에 구르다 온 사람 같은 은아의 몰골 때문에 당직이 그녀를 위아래로 훓어보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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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저는.. 하하........ 저.. 이만 가볼께요. 잘 좀 부탁드려요!~ ” 자기 집 침대에 누워있는 은아. 다시 생각해보니 기가찬다.

“ 하... 나 참.. 별 이상한 사람 때문에 이상한 취급이나 당하고, 생전 안 걸리던 몸살이나 걸리꼬... 이게 뭐꼬? “

그러다가 어제 자신을 갑자기 안고는 어머니를 부르던 그의 모습이 생각난다. 왠지 짠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지금쯤 그의 의식이 깨어났는지 궁금해지는 은아. 그러다가 상관도 없는 사람을 자신이 왜 궁금해하나싶어 이내 고개를 젖는다.

“ 뭐꼬... 진짜...!.. ”

딴생각 말고 자신의 몸조리나 잘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거칠게 이불을 뒤짚어쓰는 은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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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유 ※ 추천브금 : 이루마 - passing by

그날 새벽, 은아가 일하는 작은 병원. 어두운 응급실. 수액을 주렁주렁 달고 의식 없이 누워있는 인혁. 꿈을 꾸고 있는지 평온해보이던 그의 표정이 이따금씩 바뀐다. 눈을 뜬 인혁, 온통... 모든 것이 하얀 방안에 있다. 이곳이 어디인가...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바닥도, 벽도, 천장도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얗기만 하다. 머리가 지끈 거렸다.

‘ 여기가 어디지.... 꿈인가? 혹시.... 내가 죽은 것일까..? ’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기억을 되짚어보는 그. 오늘 낮.. 첫눈이 오는 것을 보고.. 어머니를 생각에 눈을 맞으며 거리를 걷다가.. ..... 술을 잔뜩 마시고 술김에 길거리어딘가에서 잠이 들며 정신을 놓았는데..... .....!!!!!!!..... 기억이 난다. 돌아가신 어머니.... 어머니를 만났다. 분명, 어머니셨다... 어머니가 부르시는 음성에 이끌려 일어났다가... 그 다음은... 그 다음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인혁. 그래, 떠나가시는 어머니를 붙잡으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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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잃고 쓰러졌었다. 기억이 난다. 그리고 어머니의 마지막 말도... 기억이... 난다.

‘ 살거래이.... 인혁아... 살아야한데이.... 절대.... 울지도말고... 꼭.... 살거래이.... ’

어머니의 눈물을 보았다. 눈물을 흘리며 얘기해주신 마지막 말까지 생각나자 그는 무릎을 꿇고 주저앉는다.

“ 어머니...... ”

말을 잇지 못하는 인혁. 마지막 가시는 길까지.. 편하게 가시지도 못하게 자신이 어머니를 붙잡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계셨을 때도 돌봐드리지 못했는데 가시는 길까지 걱정을 끼쳐드리며 어머니를 힘들게 했다는 생각에 그의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 살아가야겠죠... 살아야겠죠.. 어머니.. 이대로 무너지면.. 진짜 불효막심한 놈이죠? 저? “

그의 몸이 떨린다.

‘ 하지만요..... 이젠.... 자신이 없어요....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슨 힘으로 살아가야할 지.....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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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쩍--------------------!!! /

그때 그의 눈앞이 번쩍한다. 환하던 방이 더 환해지더니 이내 어둠으로 바뀐다. 정신을 차릴 수 없게 그의 몸이 붕- 뜨더니 어디론가 떨어진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을 질끈 감는 그. 이내 주변이 잠잠해지자 눈을 떠본다. 그의 눈앞에 아주 익숙한 풍경이 보인다. 부산의 어느 골몰 길, 아직은 어둑어둑한 새벽, 쓰러져있는 인혁의 눈에 한 소년이 보인다. 적당한 키에 까맣고 짧은 머리 진한눈썹과 똘망한 눈을 가진 한 소년이 골목길 이곳저곳을 누비며 뛰어다닌다.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그 소년이 메고 있는 가방과 양손에는 신문뭉텅이가 가득 담겨 있었다. 소년을 보더니 놀란 눈을 하는 인혁.

[ 휘익- 툭, 휘익 툭- ]

소년의 작은 손을 벗어난 신문들은 시원하게 허공을 가르며 정확히 그가 원하는 곳에 착지한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 했다. 신문이 제대로 착지할 때마다 소년의 기분이 좋아보인다. 한 삼십여 분만에 소년의 손에 들려있던 신문들이 모두 없어졌다.

“ 흐으으으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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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끝마쳤다는 상쾌함에 기분 좋은 미소를 띠던 소년은 힘 있게 기지개를 켜더니 힘찬 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한다. 인혁은 재빨리 일어나 미친 사람처럼 그 뒤를 쫓아간다. 작은 단칸방으로 소년을 따라 들어가는 인혁. 그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온다.

“ 아.. 아, 아버지....?! ”

벌써 돌아가신지 20년이 넘으신 아버지가 눈앞에 계신다. 그것도 지금 자신의 나이또래처럼 젊은 모습으로. 어느새,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 나이만큼 자라버린 인혁이었다. 비틀거리며 아버지께 다가가는 그. 조심스레 손을 뻗어 아버지의 손을 잡아보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신의 손은 아버지의 몸을 통과해버린다. 그리고 아버지와 소년은 자신을 보지 못하는 듯 했다.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인혁. 그의 눈앞에 있는 소년은 어린 인혁이었다.

“ 어무이, 아부지~ 지왔습니데이~ ” “ 오야~ 인혁이 왔나? 안 춥더노? ” “ 예~ 이제 겨울도 다갔잖아요~ 괘안습니더~ ” “ 그래도 아직 춥데이~ 따뜻하게 입고 댕기라~ 자, 손 줘보래이. ”

어린 인혁이 손을 내밀자 아버지가 그의 손을 담요 밑에 넣어준다. 담요 밑은 따뜻했다. 조금 차갑던 어린 인혁의 몸이 스르르 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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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아침, 그의 아버지는 인혁이 돌아오기 전에 연탄을 떼고 방을 따뜻하게 데워놓으셨다. 내색은 안하셨지만 어려운 집안형편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려 신문배달을 하는 인혁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셨다.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인혁은 부모님 앞에서 단 한 번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힘든 상황에서도 꿋꿋한 그가 대견스럽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아들의 모습이 오히려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 인혁이 왔나~? 학교가려면 얼른 밥부터 먹어야제 ~! ” “ 예~ 어무이! 아부지, 어무이 맛있게드이소~ ” "오야~ 니도 맜있게 묵으래이~ “

참, 소박하지만 행복한 밥상이었다. 그리고.. 행복한 아침이었다. 기분 좋게 아침밥을 먹던 어린 인혁의 시선이 어느새 반쯤 잘린 아버지의 다리로 향해있었다. 저 다리를 보고 있자면.. 늘, 가슴이 아픈 그였다.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띠며 세 식구를 바라보다가 어린인혁의 시선을 따라간 어른인혁의 표정도 따라서 굳어진다. 그의 아버지의 다리가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원래 산골마을에서 꽤 큰 규모로 농사를 지으시던 그의 부모님은 똘똘했던 그를 좀 더 큰 도시에서 공부하게 하기위해 인혁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쯔음, 부산으로 이사를 오셨다. 마침 인혁의 외삼촌이 조선소에서 일을 하시고 계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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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의 아버지는 삼촌덕분에 조선소에 쉽게 취직 할 수 있었다. 이사 온지 2년쯤 되던 어느 날, 인혁이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어머니가 울고 계셨다. 아버지의 사고소식 때문이었다. 작업을 하시던 중, 다른 인부의 실수로 무거운 철기둥이 아버지의 한쪽 다리위로 떨어졌다. 그렇게 한쪽 다리를 잃은 후, 아버지는 한동안 믿을 수 없는 현실을 술로 달래셨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강한 사람이었다.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했던 아버지는 곧, 털고 일어나시고 목발을 짚고 다니시며 할 수 있는 일은 닥치는 대로 하셨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한쪽다리가 없는 장애인이 된 그의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혼자 고군분투하는 남편을 보다 못한 어머니는 어시장에 나가 장사를 시작하셨다. 인혁이 신문배달을 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쯤이었을 것이다....

/ 번쩍--------------------!!! /

생각에 잠겨있던 그의 눈앞에 다시 번쩍하는 섬광이 보인다. 다시 그의 시야가 환하게 바뀌더니 이내 시선에 닿는 풍경들이 바뀌어있다. 이번에는 고등학생의 모습을 한 인혁이 그의 눈앞에 보인다. 그는 또다시 팔을 뻗어 자신을 만져보려 하지만 스윽- 하고 손이 통과할 뿐 눈앞에 있는 자신을 만져볼 수 없었다.

대학입학학력고사가 끝난 어느 날, 어려운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하고 드디어 그가 원하던 대학교에 원서를 넣고 대학 본고사를 보러 가는 날, 여느 때처럼 인혁은 아버지와 함께 리어카를 끌고 집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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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무이~ 지 다녀오겠습니더~! ” “ 오이야~~ 우리아들 긴장하지 말고~! 시험 잘보고 오거래이~!”

차가운 겨울 새벽공기가 인혁과 아버지를 둘러싼다. 리어카를 끌고 나란히 걷는 父子. 인혁은 아버지와 함께 길을 걸으며 어제 아버지와 했던 얘기들을 떠올린다. 어젯밤,

“ 인혁아... 니 원서 넣는 데가 어디라고 했제? ” “ 서울입니더... ” “ 거가 대핵교들 중에서 제일로 좋은 곳 맞나? ” “ 예.... ” “ ...인혁아... 니는 앞으로 뭐가 되고 싶노..? ” “ .........지는.. 법관이 되고 싶습니더... ” “ ....와?...... ” “ 법관이 되가... 열심히 공부해가.. 세상에 억울한 사람이 덜나오도록 하고 십습니더...” “ ........ 그래, 잘 생각했다.... 이 애비랑 애미는 걱정 말고...! 공부 잘~ 하고 온나! ” “ ..... 예... 저.. 아부지요...! ” “ ... 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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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송합니더.... ” “ 죄송은 무슨..!... 다 큰자식이 더 좋은 데로 가서 공부하겠다는데~! 그게 뭐이가 죄송한 일이고?..... 좋아할 일이제..... 인혁아... 훌륭한 사람이 되거래이... 그거면 된기야...... 알았제? ”

그렇게 아버지는 떠나야 하는 자식을 향해 웃음지어 주셨다. 어린 인혁의 마음이 무겁지 않도록. 다시 새벽, 아버지의 배웅을 받으며 찻길을 건너는 인혁. 그때 저 멀찌감치 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외침.

“ 피해요!!!!!!! 피해!!! 브레이크가 고장 났다고!!!! 어서 피해!!!!!! ” “ 아!!!!!! 아버지!!!!!!!!!!!!!!!!!!!!!!!!! ”

절규와 같은 외침 뒤에, 인혁이 어찌해볼 새도 없이 고통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길을 건너는 인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끝까지 배웅해주시던 아버지. 절룩거리는 다리 때문에 빠르게 다가오는 차를 피하지 못하고 그만 사고가 난다. 처음으로 실려 간 병원에서 인혁의 아버지가 장애인이며 가난하다는 얘기를 들은 의사들은 그의 아버지보다 훨씬 증상이 약함에도 불구하고 지역 유지의 아들 수술을 핑계로 인혁의 아버지를 돌려보낸다. 결국 다른 곳으로 이송되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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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흑.... 아버지... ㅇ 버...지. .... 흐으....윽.... 정신 좀...... 차려보세요..."

[ 삐------------------- ]

그러나, 제대로 된 수술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이송도중 아버지는 그만 돌아가시고 만다.. 그리고 죽어가는 아버지를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 인혁. “ 아버지!!!!!!!!! 흑...흑...흐으............ 으아!!!!!!!!!!!!!!!!!!!!!!!!!!!!!!!!!!!!!!!! ”

피의 젖은 아버지를 안고 오열하는 인혁. 그의 절규가 공중에서 흩어져버린다.

/ 번쩍--------------------!!! /

-“ ..........!!!!!!!!............ ”

[ 벌떡- ]

“헉...헉... 헉......헉.......”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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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헉... 헉.....헉... ”

그의 온몸이 땀으로 젖어있다....

“헉...헉... 헉......헉.......”

그의 얼굴이 땀과 눈물로 범벅되어있다.

“ 헉... 헉.....헉... 허...... ”

꿈... 꿈이었다. 잊고 살던 어린 시절의 일들이었다. 한참을 정신을 놓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인혁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본다. 익숙한 풍경, 어느 병원 응급실. 손목에 꽂혀있는 주사바늘과 바늘에 연결된 수액. 시계바늘은 3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다. 새벽인가... 이제..... 현실....

“ ....... 하....아.............. ”

길게 뱉는 한숨, 현실이다... 꿈속보다 더 무서운.. 현실이다. 그가 감당해야할 모든 것들이 몸 구석구석으로 밀려들어오며 그의 몸을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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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의 눈동자가 초점을 찾는다. 기억이 또렷해진다. 인혁은 너무나도 생생했던 꿈을 다시 되뇌어본다.

‘ 그래.... 그래... 그랬었지.... ’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는 자책을 했었다. 눈앞에서 돌아가시는 아버지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이 한심하여 공부도 그 어떤 일도 시작할 수 없었다. 그렇게 끊임없는 자책에 괴로워하다 자원입대 후, 3년의 군 생활. 정신을 차리고 제대를 해보니, 자신이 괴로움에 빠져 사는 동안 아들만을 바라보고 기다리시던 어머니가 계셨다. 나이가 들어가시는 어머니 자신이 떠나면 혼자계실 어머니를 위해 그는 부산에 남아 재수를 하여 이듬해 의대에 합격했다. 남들보다 늦은 입학, 술도 친구도 멀리하고 연애도 한번 안 해보고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했었다. 독종같이 공부만 하는 그의 주변에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역시 굳이 사람들에게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누구도 물어보지 않았으니까. 늘 외로웠다. 그래서 가끔 지쳐갈 때마다 그는 그를 바라보는 어머니와 돌아가시는 아버지를 무능하게 잃을 수밖에 없었던 그때를 생각하며 버텼었다. 그래서 그는 외로웠지만 뜨거울 수 있었다. 그렇게 그때의 그 마음하나로 버티며 살아온 인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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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신, 나의 생각, 나의 시간은 아직도 그때에 머물러 있는데 정신없이 살다보니 어느새 몸의 시간은 흐르고 흘러왔다. 마흔두 살, 어쩌면 인생의 반을 지나왔는지도 모른다. 20년이란 시간동안 의사라는 일이 너무 익숙해져버려서 왜 이일을 시작했는지 잊을 뻔했다. 아마도, 어머니는 이것을 알려주고 싶으셨나보다. 자신의 죽음 앞에 무너지는 자식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으셔서... 이걸 알려주시려고... 기억하라고... 눈물을 흘리시며... 그래서.... 그렇게.... 나를 찾아오셨나보다...

슬퍼보이던 인혁의 눈, 이내 뭔가 결심했다는 듯 그의 눈이 매섭게 빛난다. [ 찌익- ] 인혁은 그의 팔에 붙어있던 반창고와 꼽혀있던 주사바늘을 빼내어버리고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어디론가 향한다. 다음날 아침, 은아가 일하는 작은 병원

“ 신간호사님~! 일찍 출근하셨네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아직 안색이 안 좋으신데...? ” “아,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워둘 수 없어서요... 근데.. 제가 데려왔던 환자는요? ”

응급실을 두리번거리던 은아가 인혁을 찾으며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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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최인혁 환자요? 어제 새벽에 의식 깨더니 바로 퇴원했어요~ ” “ 아... 그랬구나... ” “ 근데 그 환자 좀 이상해요~! 자기혼자 막 라인 잡은 거 뽑아버리더니...! 아직 일어나시 면 안 된다니까~.대꾸도 없이 병원비계산만 하고 나가버렸어요~ 참.... 신간호사님 아니었 으면 얼어 죽었을 텐데 고맙단 말도 없이 가버리더라구요~? 근데 영양실조증세가 좀 겹 쳐서 아직 상태 안 좋은데 그대로 보내도 괜찮은지 모르겠어요?! ” “ 아........ 그래요?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긴 했는데.... ”

몸살기가 아직 남아있는데도 환자 인혁의 상태가 궁금해서 기껏 일찍 출근한 그녀. 퇴원해버렸다는 말을 들으니 약간 섭섭하기도 하고 왠지 걱정이 되는 은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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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섬 ※ 추천 브금 : 이루마 - painted

다음날 오후, 해운대 세중병원 앞, 11월에 쌀쌀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인혁이 서있다. 병원에 들어서는 순간 앞으로 그가 맞아야할 바람은 더 거셀 것이기에 이렇게 불어오는 바람이 차라리 그에겐 포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병원 앞에서 한참을 그렇게 서있다가 이내 병원 안으로 들어가는 인혁.

‘ 어머니... 제게.. 힘을 주세요... ’ 외과 과장실. 그 앞에 쓰여 있는 명패 - 외과과장 정만호 -

[ 똑똑- ]

노크를 했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는 인혁.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나가서 기다릴까 생각하느라 문 앞을 잠깐 서성이고 있는 그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 아, 자네왔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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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스승. 정만호. 인혁이 감사하고 존경하는 분이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제일 어려워하는 분.

“ 네... 교수님... ” “ 여기 서서 뭐하나, 들어가 앉게. ”

스승은 애써 인혁을 밝게 맞아준다. 자리에 마주보고 앉은 스승과 제자. 그러나 누구도 쉽게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의 눈앞에 초췌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인혁. 제자인 인혁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어떤 마음인지 짐작이 가는 그였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척하지만 속으론 미안함이 앞선다. 자신의 밑에서 공부한 인혁을 힘든 외상으로 몰아넣은 것에 대한 죄책감이랄까. 제자를 병원에 남겨두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혼자 남은 인혁이 어떨지 알기에 더 조심스러웠다. 그런 스승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인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 저.. 교수님.. 절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 “ 아, 그랬지.. 한구한테 얘기는 들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고... ” “ ....... ” “ .... 그리고.... 의사를 그만두려 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자네..... 정말... 이 일을 그만 둘 생각인가?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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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스러운 마음에 인혁은 고개를 숙인 채 스승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인혁의 표정을 읽었는지 그가 계속 말을 이어나간다.

“ 나는 곧, 다시 학교로 돌아가게 될 거야. 이제 세중 병원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니, 원래하던 의과대 학장직으로 돌아가는 거지. 아직 정확한 날짜는 나오지 않았지만, 올해 가 끝나는 대로 바로 떠나게 될 꺼 같아. 한 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지.” “ ....... ” “ 나는.... 자네가 이일을 계속 해줬으면 좋겠다. 내가 떠나고 나면... 아마 모든 책임을 자네 혼자 감당해야할 거야. 그래서 더 이상 내가 보호해줄 수 없지만... 그래도 자네 가.... 이일을 계속 해줬으면 좋겠어. ” “ .............. 그만두지.. 않겠습니다. 계속 하겠습니더. 외상.. ”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인혁이 결심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생각보다 쉽게 나온 대답에 조금 놀란 스승.

“ .....!!.......... 자네.. 괜찮겠나.....? ”

힘들어 보이는 인혁. 누가 보더라도 지금 인혁은 위태로워 보였다.

“ 저는... 이미 잃을게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교수님 덕분에 이 병원에 남을 수 있었습니다... 교수님께서도 제가 더 공부하고 배우고 와서 외상을 확실히 제 분야로 만들어보라고 연수도 보내주신 거 아니셨습니까.. ” “ .... 그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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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엔... 외상이 힘들기도 했지만... 꼭 필요한 분야잖습니까.. 환자들한테 없어선 안 될 분야이고.. 이젠... 제 꿈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도와주신 것만도... 너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수님.. ”

힘들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결심을 굳힌 표정. 그는 진심이었다. 그런 그를 말없이 바라보던 스승은 인혁을 향해 살짝 미소 짓는다.

“ 그래... 결심이 섰다니 다행이구만, 그래... 다행이야. 음... 한구한테 얘기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부터 자네는 응급의학과에서 일을 하게될 거야. ” “ 아, 응급의학과요..? ” “ 그렇게 됐네.. 아직 외상외과가 분과가 되긴 힘들 것 같고.. 외과내에서 티오를 만들어 줄려고 했지만... 반발이 만만치가않아. 누구도 양보를 안 하니 자리가 생길수가 없지.. ” “ 그건... 알고 있습니다만, 그럼.. 외과소속은 아닌 게 됩니꺼.. 그리고.. 응급의학과 티오 라면..? ” “ 아직, 외과소속이긴 한데.. 티오만 응급의학과티오를 쓴다고 생각하면 되네. 응급의학과 에서는 그쪽도 마침 자리가 비었고, 외과전문의가 당직을 서주게 되면 외과부분 환자는 걱정을 덜 수 있고, 번거롭게 콜을 따로 할 필요가 없으니까... 뭐, 일단은 받아들이더군. 그리고 응급의학과 과장이 내 까마득한 후배라서 걱정은 안 해도 될 걸세. ” “ 아.. ” “ 처음엔 주로 응급실에서 감당할 수 없는 외상환자들을 자네가 전담하는 형태로 가게 될 걸세. 그래서 일단, 내가 응급의학과에 임시로 트라우마센터를 만들어 놓긴 했는데, 사실.. 말이 센터지 당장 일할 수 있는 전문의는 자네 혼자가 될 거야. 미국연수 때 봐서 알겠지만 제대로 된 외상센터와는 거리가 멀어. 외상센터는 팀과 인력이 중요한데 지금 유기적인 시스템도 갖춰져 있지도 않고.. “ “ 네... ” “ 자네가 연수 가기 전과 차이가 있다면 전처럼 외과인력의 도움을 직접적으로 받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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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는 거야. 지금 응급의학과처럼 콜에 의존해야 하지.. 하지만 외과의 비난과 간섭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렇게 밖에 못 만들어줘서 미안하다.. “ 아, 아닙니다.. 각오한 일이었습니다.. ” “ 흠.... 적어도 앞으로 3년은 그 자리에서 걱정안하고 일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 이 후에 외상센터로 만들어지는 일이 앞으로 전적으로 자네 손에 달렸어. 만약 지금처럼 트 라우마 센터가 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라면, 그때도 존속을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네. 적 자문제도 그렇고....... 내가 너무 큰 짐을 맡기고 떠나는 것 같다. ” “ .... 3년이요.... 그래도... 그렇게라도 일할 수 있는게 어딥니꺼... 감사합니더.. 교수님..... ” “ 한 가지 다행인건... 이번 인사조정에서 한구를 마취과장자리에 추천해뒀어. 아마 어렵 지 않게 마취과장직은 할 수 있을 거야. 그 애도 쉽진 않겠지만, 외상 수술할 때 수술실 확보문제로 어려움이 생기면 한구가 많이 도와줄 거다. ” “ 예.. 알겠습니다. ” “ 음... 그래.. 업무에 관해 자세한건 응급의학 과장한테 듣도록 하고.. 아직 휴가 열흘정 도 남지않았나..? 남은 열흘 동안 좀 쉬다오도록 하게 “ “ 아닙니더. 내일부터 바로 출근하도록 하겠습니더. ” “ 내일부터? 뭐.... 이미 자리도 정해졌으니 상관은 없지만.. 자네가.. 힘들지 않겠나? ” “ 빨리.. 일을 시작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더. ” “ 음...... 어쩌면 그 편이 나을 수도 있지.. 그래, 그럼 그러도록 해. 아! 트라우마센터 사 무실은 별관 건물 2층에 따로 마련해 놨으니까. 앞으론 거기서 연구하면 될 거야. 응급 의학과장한테는 내가 연락해놓겠네 ” “ 예, 교수님... 감사합니더...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더. ” “ 그래, 가보게. 수고하고. ” “ 예, 교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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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과의 인사를 마친 인혁이 밖으로 나간다. 병원 밖, 돌아가는 차안,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려 어렵게 마음먹었지만 돌아가더라도 쉽지 않은 날들을 보낼 것 같다. 각오는 했지만... 스승님과 한구 외에 자신을 반겨줄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또 병원에서 필요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인가... 아니, 아니다... 더 이상 잃을게 없는 난데 뭘 더 바라겠는가. 어머니처럼.. 아버지처럼.. 죽어가는 환자들을 내몸바쳐 살릴 수 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머리가 복잡한 인혁.

“ 하아.......... 쉽지 않겠죠.. 어머니... ” 다음날, 출근한 인혁. 짐을 가득 들고 트라우마센터 사무실로 들어선다. 꽤 깨끗하고 넓은 사무실. 책상 하나에 컴퓨터 한 대. 가운데 다용도 책상하나. 그리고 책장들. 교수님이 신경을 많이 써주셨구나.. 라고 생각하는 인혁. 아직 주인이 없어서 인지 책장들은 텅텅 비어있다. 앞으로 그가 채워나가야 할 것들이었다. 부담감. 왠지 그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 이봐 최인혁선생!! ” “ 어, 왔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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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스러운 목소리. 한구였다. 오자마자 인혁의 얼굴을 살피는 그. 일부러 더 장난스럽게 그를 툭 치며 말한다.

“ 야~ 너 의사 안하겠다더니! 나 보고싶어서 돌아왔구나~! ”

그의 농담에 조금 미소짓는 인혁. 한구는 참 고마운 녀석이다.

“ 여기 넓고 좋네~ 너 진짜 나한테 고마워해야돼~ 이거 책상 이거 내가 우리과 애들 시 켜서 옮겨 놓은 거, 알고는 있냐? ” “ 그래, 고맙다. ”

인혁의 싱거운 반응에 그를 한번 째려보더니 계속 말을 이어나가는 한구

“ 뭐, 이제 트라우마센터도 생겼고.. 열심히 일만 하면 되겠네! 응급실엔 가봤냐? ” “ 아직, 짐만 놓고 내려가 보려고 ” “ 이거 짐정리 할려면 시간 좀 걸리겠다잉? 뭐 술 한잔 사주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고! ” “ 나 혼자 할 수 있어. 안 바쁘냐? ” “ 자식이 기껏 와줬더니... 간다 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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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져서 나가는 한구를 보며 피식 웃는 인혁. 그러더니 가져온 짐을 대충 책상에 올려두고는 응급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분주한 응급실, 인턴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인상쓰며 얘기하던 나과장이 인혁을 발견하고는 그를 불러 세운다.

“ 아! 최인혁선생!! ” “ 예. ”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리로 오라는 손짓을 하는 나과장. 약간 깔보는 듯한 손짓이었지만 인혁은 이젠 이런 일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차피 나 과장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기에 그의 앞으로 간다.

“ 다들 똑바로 기억해둬 여기는 앞으로 외상환자를 전담할 최인혁교수다. 외상이 뭔지 감이 잘 안 잡히겠지만 환자 들어오면 바로 알 수 있지. 그때! 여기 최인혁 교수한테 콜 하면 되는 거야 알겠지? 여기는 공포의 초톤들. ” “ 안녕하십니까!!! ”

군기가 바짝 들어있는 인턴들이 그에게 인사를 한다. 인턴들에게 고개를 까딱하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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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이만 됐으니까! 인턴선생들은 해산하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혼자판단 하지 말고! 시키는 것만 똑바로 하면 되는거야! 알았어? ” “ 네!! 알겠습니다!!! ”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리들. 이내 인턴들이 각자 할 일을 하러 흩어진다.

“ 자네는 나 좀 따라와야겠어 ”

인혁을 방으로 데려가는 나과장.

“ 뭐, 정과장님한테 설명은 좀 들었나? ” “ 예, 응급의학과 티오라는건 들었습니다. ” “ 그래... 그게 제일 중요하지... 사실말이야! 티오를 준다는 게 쉽지 않거든? 솔직히 말해 서 자네가 외과에서 쫓겨날지도 모르는거 지금 내가 구해준거야~! 정과장님이 내 선배님 이시기도 하고 하니까... 부탁하시는 걸 거절할 수 없어서 일단 들어준 거긴 한데..! 전에 외과에서 했던 것처럼 막 사람들이랑 트러블 만들고 그러면 안돼! 여긴 응급실이니까. 일손도 귀하고 환자들하고 부딪힐 일도 많은데 자네성격대로 다 하면 안 된다고. 내가 걱정이 돼서 잠이 안와 잠이. ” “ ........... 예.. 알겠습니다. ” “ 그리고, 응급의학과 티오를 주는 대신에, 자네가 당직을 좀 많이 서줘야 돼. 크흠, 여기 가 워낙 인력이 없어서 레지던트도 한명 있는 게 아직 1년차도 안되고 하니까. 특히 새 벽에 레지만 믿고 있을수가 있어야 말이지. 다른 전문의도 없고. 아, 그리고 외과에서 특 별한 부분은 제외하고 거의 모든 콜을 자네가 받게 될거야. 뭐 그렇게 되면 전보다 더 집에도 못가고 힘들 텐데 각오는 하고 있나? ” “ 예.. 각오하고 있습니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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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오로 선심 썼다는 걸 강조하면서 약간은 거만한 자세로 인혁의 기를 꺾으려던 나과장. 의외로 인혁이 순순하게 나오자 약간 멋쩍은 듯, 목소리에 힘을 풀고 얘기를 이어나간다.

“ 뭐,, 그렇다면 됐고. 아무튼 같이 일하게 됐으니까. 트러블 없이 잘 좀 지내보자고. 어? ” “ 예... ” “ 아.. 그러면 트라우마센터 인력얘기를 좀 해야 되는데.. 뭐 알다시피 분과가 된 것도 아 니고 해서, 주어진 인턴이나 레지던트 티오가 없어. 그렇다고 전처럼 외과소속도 아니니 도움 받을 수 있는 곳도 마땅치 않을 테고, 외상환자들 자료정리나 케어를 자네 혼자 하 게엔 벅차겠고... 그래서 과장님하고 생각을 해봤는데 외상코디네이터라고 아나? “ 예, 미국에 있을 때 몇 번 봤습니다.” “ 그래, 그렇겠지. 아무튼 의사티오를 또 가져오긴 어렵고 과장님이 계약직 정도는 자네 밑으로 티오를 만들어주실 수 있을 것 같아. 응급구조사는 응급실에 있으니까 갖다 쓰면 될 거고, 원래 자네 휴가가 다음 주에 끝나는 거였으니까. 다음 주부턴 내가 추천해놓은 코디네이터 한명하고 같이 일하면 될 거야 말하자면 외상교수인 자네하고 코디네이터가 한 팀이 되는거지. ” “ 아, 예.. 알겠습니다. ” “ 아, 그리고 여기도 인력이 부족하니까 응급실 일반 업무도 좀 내려와서 같이 일하고 해야 될 거야. 그러니까 응급의학과 소속 아니겠어? ” “ 네... ” “ 뭐, 이만하면 됐네. 나가서 일봐. ” “ ........ ”

[ 꾸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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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없이 나과장에게 목인사만 하고 나오는 인혁. 나과장은 방을 나가는 인혁을 못 마당한 눈초리로 쳐다본다.

다시 돌아왔지만... 나를 반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트라우마센터는 명분이며 나는 교수라는 직분을 가지고 있을 뿐, 익숙한 취급이었지만 나는 병원에서 필요 없는 존재 같았다. 환자들만이 나를 필요로 할뿐, 그러나 환자들이 수술, 중환자실을 거치며 긴 케어를 받는 동안 나는 환자들과 보호자들에게 조차 끊임없는 원망과 불신을 받는다. 중증외상, 이곳은 죽음의 경계선이다. 나는 그곳에서 위태롭게 서있다.

몇 주 후, 인혁은 미친 사람처럼 일에만 몰두한다. 일에 몰두하면 어머니를 잃은 자책감을 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환자를 대하고 죽음을 대면할 때마다 그때의 기억은 더욱더 생생해지기만 했다. 그럴수록 더 환자에게만 매달리는 인혁. 어떻게든 살려야한다는 생각뿐인 그는 닥치는 대로 수술을 했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진짜 미친 사람처럼 보인다. 계속 되는 수술에 거의 늘 피를 뒤집어 쓴 상태로 지내는 인혁. 그런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뒤에서 수군수군 대기만 한다. 같이 일하는 인턴들, 간호사들, 레지던트 누구하나 그에게 말붙이는 이가 없었다. 심지어 같은 팀이라고 할 수 있는 외상 코디네이터조차 일할 때 빼고는 그와 마주치려 하지 않았고 그와 있는 시간보다 응급실에서 간호사들과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인혁의 모습은 흡사 피를 뒤집어 쓴 저승사자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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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은 며칠씩 자지도 않고 잘 먹지도 않고 늘 일만하고 환자생각만 했기에 그의 눈에는 늘 광기가 서려있었고 누군가 자기에게 상처주기 전에 미리 밀어내기라도 하듯이. 그의 표정에는 늘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가기란 쉽지 않았다. 안 그래도 예민한 상태인 그가 특히 수술을 할 때나 환자처치를 할 때는 평소보다 더 극도로 예민해졌기 때문에 쉽게 언성을 높이는 일이 잦았다. 때문에 병원에서 그에 대한 평판은 날로 안 좋아졌다. 한구는 과장승진문제 때문에 인혁을 자주 보러 내려오지 못했고 인혁은 수많은 군중들 속에서 지독한 고독함을 느낀다. 그러다 결국 일이 터졌다.

어느 날 새벽, 갑자기 들어온 TA환자들. 외과에 콜을 했지만 당직 의는 병원을 비운상태이고 얼마 없는 레지던트들과 인턴들 모두 나머지 환자들 처치의 집중해야 하는 상황 CT검사 결과, 한 환자가 복강 내 출혈이 의심된다.

“ 김선생!!! 수술 들어와요!!!!!! ” “ 네?.. 저, 저요? ” “ 그럼 여기 김 선생 말고 또 있어?!!! 빨리 준비해!!!!!! ”

인혁의 호통의 기가 죽어 말도 못하고 서있는 코디네이터

“ 저, 저, 교수님,, 저 한번도 수술장엔 들어가본적이 없는ㄷ..... ” “ 빨리 안들어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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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속도로 나빠지는 환자 앞에서 날카롭게 예민해진 인혁. 결국 코디네이터는 수술에 들어가고 처참한 상태의 환자. 온몸의 튀기는 환자에 피. 계속 호통을 치는 인혁과 벌벌 떠는 코디네이터. 악몽 같았던 6시간에 걸친 수술을 마치고 그녀는 바로 수술 방을 뛰쳐나간다.

일주일 뒤, 출근을 하지 않은 외상코디네이터. 코디네이터가 일을 그만두자 인혁의 방은 며칠사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다. 인혁이 근무를 시작한 뒤 닥치는 대로 수술을 했던 터라 정리해야할 수술 기록지는 산더미처럼 쌓여있었고 당장 코디네이터가 없으니까 환자 기록과 사진을 정리할 사람도 없었다. 인혁조차도 일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 그런데도 인혁은 또 닥치는 대로 수술을 하고.. 그를 보다 못한 한구, 그가 힘들어하는 걸 알고 지켜보려했지만 더 이상 말리지 않으면 그가 폭주해버릴 것만 같았다. 또 한 차례의 응급수술이 끝난 후 한구는 인혁을 불러세운다. 발걸음을 멈춘 인혁은 뒤돌아선 채로 한구의 말을 듣는다.

“ 인혁아.. 너 진짜 왜그래? ” “ ....................... 뭐가.... ” “ 내가 암말도 안하려고 했는데.... 너 요즘..!.... 하... 진짜 이러다 니가 먼저 쓰러지겠 다... ” “ ..............상관없어. ”

화를 삭이며 말하는 한구. 인혁은 그에게 무성의하게 대꾸한 채 다시 발검음을 옮기는데 그의 말에 열 받은 한구가 그의 팔을 잡고 앞을 막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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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얌마!! 너 힘든 건 아는데, 너 이러다 오래 못 버텨어! 코디네이터도 그만뒀대매? 어쩌 려고 그래? 도와주는 사람 하나없이 너 혼자 이일 감당할 수 있겠어? ” “ ......... ” “ 그나마.... 트라우마센터도 간신히 생겼는데... 이렇게 사람들 빠져나가면 계속 존속하기 힘든 거 알잖아? ..... 하......예전엔 너 안 이랬잖아..... 요즘 병원사람들이 너보고 뭐라는 줄 아냐? ”

한구에 말에 욱한 인혁. 화를 참지 못하고 그의 손을 뿌리치면서 소리친다.

“ 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무슨 상관이야!!!!!! 나보고 어쩌라고!!!! 이렇게라도 하지 않 으면 미치겠는데 어쩌라고!!!!!!!! ”

고요한 복도에 쩌렁쩌렁 울리는 인혁의 목소리. 소리질러버렸다. 늘 조건 없이 인혁을 챙겨주는 한구 고맙다고 해도 모자랄 친구 놈한테. 그 때문에 놀랐는지, 한구의 눈이 흔들린다. 무뚝뚝하긴 했지만 착하기만 했던 인혁이 수술 도중도 아니고 사적인 대화로 자신한테 이렇게 까지 화내는 모습은 그도 처음 봤다.

“ .......!!!!.......... 후..... 됐다. 지금 니가 무슨 말이 들리겠냐....... ” “ ............... ”

한구의 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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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그대로 정적이 흐르고 이내 고개를 떨군 채 반대편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한구. 인혁의 다음 말을 기다리라도 하는 것처럼 그에게서 천천히, 천천히 멀어진다. 그러나 한구의 바램과 달리 인혁은 끝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인혁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러려고 그랬던 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못난 자존심 때문에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가 망설이는 동안 그의 유일한 친구인 한구마저 가벼렸다. 진짜.. 혼자가 되버렸다. 이젠 더 이상 외상 때문이 아니었다... 인혁.. 본인 스스로 만든 마음의 벽 때문에 그는 세중병원이란 큰 바다에서 스스로 작은 섬 안에 자신을 가둬버린다. ※ 추천브금 에브리싱글데이 - cold(Inst.)

다음날, 그의 스승 정만호 외과과장의 호출.

“ 교수님 찾으셨습니까. ” “ 아, 들어와 앉게. ” “ ... 어쩐일로... ” “ ...... 흠..... 요즘 트라우마센터에 대해 안 좋은 말이 많은 건 알고 있나..? ” “ ........ ” “ 정확히 말하자면 자네에 대한 시선들이 너무 안 좋아... 아마.. 자네도 알고 있을거야.. ” “ ... 죄송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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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지원해준 스승을 볼 면목이 없는 인혁. 고개를 떨군 채 눈앞에 있는 제자에게 그가 안쓰럽다는 표정을 짓는다.

“ 자네가 힘든 건 알지만....... 사람들이 자네를 통해서 트라우마센터까지 불신을 하기 시 작한다면 정말 자네의 자리가 위태로워져.... 이건 자네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국제 심포지엄이 한국에서 열리게 되었네. ” “ 국제.. 심포지엄이요? ” “ 음. 중증외상과 응급의학에 관한 심포지엄인데, 전국의사협회는 물론이고 복지부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큰 자리야. 그중에 중증외상 분야에 대한 포럼이 있을텐데. 그 발표 를 자네가 맡아줬으면 하네. ”

스승은 인혁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코디네이터도 나가고 병원 내 따가운 시선 속에서 혼자 간신히 버티고 있는 그가 이 일이 맡기에는 무리일수도 있다는 걸.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오히려 이 방법이 인혁을 지키는 길이었기에 당황하며 거절하려는 제자의 말을 끊고 말을 이어나가는 그였다.

“ 아.... 하지만.. 저는 지금...” “ 주최는 지역의사협회가 할 거고.. 아마, 이번에 부산에서 열리기로 한 모양이야.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나라에서 중증외상에 관해서 제대로 경험해본 의사가 몇이나 되나? 자네가 가장 최근에 연수도 다녀왔고 지금 센터도 운영하고 있으니까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해서 이미 추천해뒀네... 아마 조만간에 연락이 갈거야.. ” “ ..... ” “ 당황스럽겠지만, 내가.. 자네의견도 묻지 않고 급하게 추천을 해버린건.. 내가 이번 달 안으로 곧 병원을 떠나기 때문이야. 더 이상 내가 보호해줄 수도 없는데.. 병원 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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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외상센터에 대한 시선이 안 좋은 상황에서 외상센터를 계속 존속시키려면 이런 외부행사라도 성공적으로 개최해야하지 않겠나. 뭔가 보여줘야지 자네 자리를 지킬 수 있지 않나.. 그래야 윗분들이나 과장단, 보직교수들을 설득할 때도 힘을 얻을 수 있고.. ”

사태를 이렇게 만든 건 사실 인혁자신이었다. 때문에 그는 더 이상 스승의 제안을 거절 할 수가 없었다.

“ 그럼.... 심포지엄은 언제입니까? ” “ 아직 정해지진 않았지만.. 아마 5월쯤이 될거야. ” “ .....!!!.... ” “ 내가 가기 전까지는 자료들을 좀 챙겨줄수 있지만 학교로 돌아가고 나면 자네 혼자 해 야할거네. 꼭... 해야하는 일이네.. ” “ 네.. 해보겠습니다... ” 그날 저녁, 트라우마센터 인혁의 캄캄한 사무실, [ 탁- ] 불이 환하게 켜지자 정신없는 그의 사무실이 모습을 드러낸다. 인혁은 방문을 열고 멍한 눈빛으로 방안을 둘러본다. 정말 아무도 없는 사무실.. 5개월밖에 남지 않은 시간.. 지금상태에서 그가 혼자 준비하기에는 너무 촉박한 시간이었다. 같이 일하던 코디네이터는 나가버렸고, 지금 병원 내에서 그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에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 인혁도 스스로를 멈추고 싶었지만 한구마저도 소원해진 상태에서 그를 멈춰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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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만들어놓은 섬에서 어떻게 빠져나가야할지 자신도 몰랐다. 인혁은 뒤늦은 후회가 밀려옴을 느낀다. 두 달 후, 벌써 2월 중순, 어느 날 아침, 병원 내 인혁의 방, 며칠 동안 밤을 샌 인혁이 환자가 없는 아침시간을 틈을 타서 소파에 누워있다. 몸이 너무 피곤했지만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으로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불안하고 답답한 그. 일에 너무 치여서 생각할 겨를이 없어서인지 어느새..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은 조금씩 사그라지고 있었다. 다만 문득문득 그리워질 뿐.. 심포지엄은 거의 준비도 못한 채 아직도 수술에만 매달려 있던 인혁. 사실 죽어가는 환자를 제처 두고 다른 일을 한다는 자체가 그에겐 무리였다. 점점 심포지엄 날짜는 다가오고.. 수술도 포기 못하고 심포지엄도 포기할 수 없는 상황. 그 와중에 너무 일에 치여 있는 인혁에게 시달려서 일까? 그나마 코디네이터가 없는 상황에서 그를 보조하던 간호사와 응급실 응급구조사 마저 병원을 그만뒀다.

“ ...하........ ”

갈라지는 그의 목소리. 깊은 한숨.. 너무나 많은 업무량에 이젠 정말 인혁마저도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나마 지금까지 인혁을 도와주시던 정만호과장은 의과대 학장직으로 다시 돌아갔고 그를 눈엣 가시처럼 여기는 선배 김민준이 외과과장직을 맞았다. 민준은 과장이 되자 마자 대놓고 인혁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아마 민준의 스승이기도 한 정만호의 당부가 없었다면 진작에 인혁을 쫓아냈을 그였다. 사실 김민준과장과 인혁의 나이차이는 4살 정도밖에 나지 않았지만 인혁이 아버지의 사고이후 군대제대 후 조금 늦게 의대에 입학하느라 민준은 인혁에게 학번차이가 상당히 나는 대선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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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참 후배인 인혁이 나이차도 얼마 안 나고 실력도 좋은데다가 언제나 민준에게 굽히지 않았기에 민준은 학교다닐 때부터 그를 대놓고 미워했었다. 게다가 인혁이 스승의 사랑도 독차지했기 때문에 그 미움은 더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인혁에게 유일한 편이 되어준 사람이 바로 한구였는데... 벌써 두 달째, 인혁이 한구에게 화를 내며 소리친 그날 이후, 수술할 때를 제외하곤 거의 한구와 마주치지도 못했다. 아마 한구도 인혁을 피해다니는 것 같았다. 미안하다는 말을 할 기회도 찾지 못하는 인혁이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인혁. 더 이상 그의 몸이 견디지 못하고 피로가 한 번에 쏟아지자 잠깐 눈을 붙이려는데.. 그가 눈을 붙일 새도 없이 누군가 그의 잠을 방해한다.

[ 벌컥- 쾅!! ]

움찔한 인혁이 고개를 들어 문쪽을 보니 나병국 과장이 씩씩거리며 서있었다. 안 그래도 인력이 부족한 응급실에서 인혁 때문에 간호사와 응급구조사들이 줄줄이 그만두자 참다 참다 못해 화가 단단히 난 나 과장이 인혁의 방에 쳐들어온 것. 그를 보고는 몸을 일으켜 세우는 인혁.

“ 최인혁 선생!!! 잠깐 나좀 보지?!! ” “ ....... ” “ 어쩔거야? 이제!! 내가 처음에 트러블 만들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자네성격대로 다 하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했어? 어? 누군 성질이 없어서 그렇게 못 하는 줄 알아? 자 네가 돌아오고 나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잖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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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혼자 의사야? 그렇게 성질내면서 환자들, 간호사들, 다른 과 의사들하고 부딪히

면 누가 당신하고 일을 하겠어? 자꾸 그러면 자네 여기서 일 못해!!! 왜 대꾸가 없어?!! 책임을 져야할 꺼 아니야!!! 어?!! ”

그 작은 키로 펄펄뛰면서 자신에게 삿대질을 해대는 나 과장을 보자 왠지 인혁은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러나 꾹 참는 그. 진심으로 나과장에게는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까. 이상하게 나 과장이 화를 낼 때는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제대로 사과를 하려 하는 인혁. 그러나 그동안 웃을 일이 없었던 인혁의 표현력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냥 무뚝뚝한 표정으로 사과를 해버리는 그. 그런 그의 모습이 나 과장의 화를 더욱더 돋운다.

“ ........ 죄송하게 됐습니다... ” “ 이 사람아!!! 지금 죄송하다면 다야? 간신히 구해준 코디네이터도 그만두게 하더니 응 급실 간호사에 응급구조사까지 그만두게 하면 어쩌자는 거야? 경력 있는 간호사들이나 응급구조사 구하기는 뭐 쉬운 줄 알아? ” “ ........ ”

[ 휙- 탁 ]

씩씩거리던 나과장, 인혁이 미안한지 더 이상 대꾸가 없자 나과장은 가지고 온 파일을 탁자에 던져버린다.

“ 간호사랑, 응급구조사는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그 중에서 외상코디네이터 뽑아!! 알 았어? 자네하나 잘못되는 건 상관없는데 도대체가 응급실이 돌아가지가 않잖아!!! 내가 아는 후배들 병원에서 유능한 간호사들로 추린 거니까! 안한다는 말할 생각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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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당신 소문 다른 병원에도 쫙- 나서 뭐 온다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가서 업어오든 빌어서 데려오든 그건 내 알바 아니고!! 다음 주 중으로 꼭 내 눈앞에 데려와... 알았어? ”

[ 쾅- ]

허리를 숙인 채 파일을 잡으려던 자세로 벙쩌있는 인혁. 인혁이 뭐라고 대꾸를 하기도 전에 나과장이 속사포로 자기 할 말만 하고 나가버린다. 안 그래도 너무 힘들어서 다시 외상코디네이터를 뽑아야겠다고 생각 중이었던 그였다.

‘ 고.. 고맙다는 말하려고 했는데... ’

인혁이 눈을 두어번 끔뻑거리더니 내용을 확인하려 파일을 집어 든다. 그때 또다시 열리는 문,

[ 벌컥- ]

고개를 다시 돌린 인혁에 눈앞에 있는 건 한구였다. 한구도 씩씩거리고 있었다. 두 달 동안 찾아오지도 않다가 갑자기 등장한 한구 때문에 인혁은 또 벙쪄있었다. 양손에 커피를 들고 씩씩거리며 인혁에게 다가오는 한구. 한 대 칠 기세였다. 살짝 겁먹은 인혁이 긴장한 채로 있는데 한구는 들고 있던 커피를 탁자위에 내려놓고는 아무 말도 없이 다시 씩씩거리면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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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쾅- ]

‘ 뭐... 뭐지.. ’ 순식간에 일어난 일 때문에 한구를 잡지도 못하고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린 인혁이 한구가 가져온 커피를 보곤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보이더니 혼자서 중얼거린다.

“ ......미친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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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Team 나조차도 나를 어쩔 수 없었던 그때, 내가 가장 외로웠던 그때, 나를 잡아줄 수 있는, 나를 지켜줄 유일한 사람... 바로 당신이.. 나에게로 왔다. 당신이 처음 날 선택해준 그 날.. 낭자하는 피와 죽어가는 한 생명 앞에서 우린 그날 그렇게 한 Team이 되었고 당신은 그날 그렇게 나의 파트너가 되었다. 그때는 몰랐다. 우리가 영원한 파트너가 될 줄은...

그날 저녁, 병원 내의 마취과 사무실,

[ 달칵- ]

빼꼼하게 방문이 열리고 인혁이 마취과 사무실 안을 조심스럽게 열어본다. 마취과 안에 한구는 없고 레지던트들만 수다를 떨고 있다. 사과를 하려고 왔는데 한구가 없자 다시 돌아가려는 인혁.

[ 퍽- ] ......!!!??!!!!....

그때 뒤에서 누군가 인혁의 뒤통수를 후려갈긴다. 그는 엄청나게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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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아파서 울컥했지만 왠지 그를 때린 사람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자 한구가 그를 째려보면서 서있다. 아픈 건 둘째 치고 누가 이 장면을 보진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인혁. 다행이도 복도에는 그들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런 인혁을 아직도 째려보고 있는 한구가 입을 연다.

“ 뭐야, 왜왔어. ”

단단히 삐진 눈치다. 아침에 커피도 고맙고.. 자신이 잘못했는데도 먼저 손을 내밀어준 한구에게 사과를 하려고 온 인혁이었지만 자존심강한 그의 입에서 쉽게 미안하다는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저 방금 한구에게 맞은 머리를 비비며 멋쩍은 듯 입을 연다.

“ 아아아..... 그..그게... 그.. 그냥 지나가다가. ” “ 그럼 가던 길 계속 가라. ” “ 그.. 그.. 커피 안 마실래? 내가.. 사께! ” “ 아까도 먹었거든? 무슨 카페인에 빠져 죽을 일있냐! ”

그가 아직도 삐진 표정으로 인혁의 말을 비꼬자 미안해서 눈치를 보던 인혁이 괜히 목청을 가다듬더니 한구의 눈을 피한 채 먼 곳을 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한다

“ 크흐흠... 흠..! 흠!. 미...미안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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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래냐..? ” “ 아~ 화내서 미안하다고!!! ” 화내서 미안하다며 또 화를 내는 그. 그런 그를 보며 에라이~ 이 자식아 라며 그를 때리려 달려드는 한구.

“ 에라이~ 이 자식아!! 기껏 두 달 만에 와서 사과한다는 놈이!! 그게 사과하는 태도냐~! ”

그런 한구를 피해 도망가는 인혁이었다. 누가 보면 40대 남자 둘이서 뭐 저러고 노나 싶은 장면. 인혁은 도망가면서, 그에게 한구가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날 새벽, 병원 내 인혁의 방, 어느새 풀어진 인혁과 한구가 같이 나과장이 던져놓고 간 파일을 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하고 있다. 당장 다음 주까지 외상코디네이터를 뽑아야 하는데.. 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세 명의 외상코디네이터 후보. 후보 1. 박진우. 27세. 의무병 2년. 내과 간호사근무경력 1년. 후보 2. 정효진. 25세. 서울대 간호학과 졸업. 내과 간호사 경력 2년. 후보 3. 신은아. 30세. 간호사 경력 7년. 총 3개병원에서 근무. 응급실 겸 중환자실담당. 총괄간호사.

인혁이 후보 3번 은아를 가리키며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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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사람이.. 경력이 좋긴 한데.. ” “ 그지? 그래~ 외상코디네이터가 경력이 있어야지~ 그래야 환자도 알아서 케어하고 수 술실도 따라 들어오고 하겠지? ” “ 근데 6개월밖에 못한다잖아.. 오래버텨야 하는데.. ”

저번 코디네이터가 갑자기 그만두고 지난 두 달간 일에 시달린 것을 생각을 하며 안되겠는지 머리를 내젖는 인혁. 다시 손가락으로 후보 1을 가리킨다.

“ 이 사람은 맷집이 좋을 것 같긴 한데..... ” “ 그지? 그래~ 맷집이 좋아야 오래 버티지~! ” “ 아냐, 아냐.. 맷집만 좋아 보이지 경력이 너무 부족하지 않나...? ” “ 뭐.. 그래보이긴 하네.. 그럼 얘는 어때? 대학도 좋은데 나왔고, 좋네! ” “ 좋기는! 좋은 대학 나왔다고 실력도 좋겠나? 외상이나 응급실은 경험이 있어야지.. 아.... 이 사람이 경력이 좋기는 한데.... ”

아쉬운 눈빛으로 은아의 이력서를 가리키는 인혁. 계속 똑같은 고민만 하고 있는 인혁 때문에 슬슬 짜증이 나는 한구. 머리가 복잡하다는 듯 짜증스럽게 뒤통수를 비비며 말한다.

“ 아, 어차피 니맘데로 할꺼, 뭘 고민해~ 그냥 경력많고 실력좋은 사람으로 뽑아~! ” “ 아~ 참, 일을 오래 못한다잖아~ 오래 버틸 사람으로 뽑아야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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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짜식이! 야, 오래버티 건 안버티 건 일단 니 발등에 불부터 꺼야할꺼 아니야~~ 너, 당장 심포지엄 다가오는데 수술스케줄관리랑 심포지엄준비 같이하려면 이 정도 경력은 되야 버틸꺼아니야~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그 다음에 새로 뽑던가!! ” “ 허~ 거참....! ” 한구에 말을 듣고서도 한참을 고민하던 인혁. 그러다 무언가 결심했는지 바로 나과장한테 전화를 건다. 다음날 아침, 은아가 일하는 작은 병원, 그녀가 중환자실에서 환자를 체크하고 있는데 응급실장이 은아를 부른다.

“ 저기, 신간호사! 퇴근시간 거의 다됐나? ” “ 네? 네, 곧 있으면 퇴근할거에요. ” “ 아, 그럼 잠깐 나 좀 보자카이.” “ ..?.. ”

응급실장이 그녀를 따로 부를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조금 의아해하는 은아. 그를 따라가니 그가 먼저 의자에 앉으면서 맞은편 소파를 향해 손짓을 한다. 응급실장의 맞은편에 앉는 은아.

“ 저한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 “ 아, 다른게 아니꼬... 신간호사 그만둘 때 다 됐다켔지? 그 캐나다는 언제 간다켔지? ” “ 저 2주있으면 그만 두잖아요.. 뭐 캐나다는 아직 정해지진 않았는데.. 한 1년쯤 있다 떠나기로 했어요. 그건 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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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딴게 아이고... ”

잠시 망설이는 응급실장. 은아는 그가 무슨말을 할지 더 궁금해진다.

“ 저기.. 저, 내가 좀 급한 부탁을 받아서 그라는데.. 한 6개월 동안 다른 병원에서 일해 줄 수 있을까? ” “ 네?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 “ 아.. 그기.. 그 해운대 세중병원 알제? 거기서 간호사들이 갑자기 그만두는 바람에 인 력이 딸린다네.. 그.. 나한테 은인같은 선배님이 한분 계시는데, 그분이 부탁을 해와서.. ” “ 아.... ” “ 대우도 간호사로써 가는 게 아이고, 외상 코디네이터라고 한 의사만 전담해서 보조해 주면 되는 기라네? 월급도 지금보다 2~30은 더 붙을 거고, 무엇보다 간호사보다는 좀 상위개념이라서.. 이런저런 경력을 쌓을 수도 있을끼라. 여기 병원에서 일하면서 맨날 아 쉬워했었잖아.. 간호사로써 할 수 있는 게 많이 없다고... 좋은 기회 아니가?? ” “ 그렇긴... 하지만.... 너무 갑자기라서....... 한두 달도 아니고,, 6개월은 쫌.. 저도.. 캐나다 가기 전에 정리할 것도 있고... ” “ 아, 그런가.... 아무래도 그렇지?.. 흠.. 그래도 나중에 생각 바뀌면 말해주래이. 그래도 신간호사가 실력도 있고, 열정도 있으니까, 왠지 그쪽으로 맞을 꺼 같아서 추천했던긴데. 뭐.... 정 안된다면, 어쩔 수 없제. ” “ 네.... ”

은아의 표정이 복잡해진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확인하는 응급실장. 이내 미안한 듯이 말을 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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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미안타.. 내가 결혼할 사람한테 괜한 말을 꺼냈나보네, 못 들은 걸로 하래이... 시 간이 늦었네 이만 퇴근하고.. ” “ 네... 그럼 저 퇴근해볼게요... ” “ 아, 그래 욕봤데이. ”

응급실장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뜨는 은아. 병원을 나와서 퇴근하는 길.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 .... 한번.... 해보고.. 싶다. ’

그녀의 마음이 흔들린다. 워낙 실력도 있고 자신의 일에 대한 욕심과 그 일을 소중히 여겨오던 은아인지라, 좋은 기회에...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 조금만 부지런히 준비한다면.... 괜찮지.. 않을까? ’

하지만 캐나다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동규.. 결혼을 약속하고 한국에서 정리할 것도 많은 그녀.. 이내 고개를 흔들어버린다.

‘ 괜히.. 욕심부리지 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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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중병원 응급실, 나과장의 방,

“ 아... 일을 못하겠다고 했다구요...? ” “ 그래~! 뭐, 경력이 워낙 좋아서 후배한테 특별히 부탁까지 했는데~ 그.. 지원서 넣은 것도 본인이 직접한 게 아니라 내 후배가 대신 추천해서 넣은 거였고, 1년 후에 결혼 때 문에 캐나다에 가야할 사람이었다네? ” “ 아... 그래요.. 그럼, 단 6개월도 일해 줄 수 없다고 합니꺼? ” “ 뭐.. 캐나다 가기 전에 한국에서 이래저래 준비할게 많다나... 암튼! 내가 추천해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세 사람이 전부니까! 그중에서 다시 고르든지, 아니면 최인혁선생이 어 디서 구해오든지...! ” “ ........ ”

세중병원이 소속된 의대를 졸업하고 바로 세중병원에서만 일해 왔던 인혁. 안 그래도 붙임성이 없는 인혁이라서 더더욱 다른 병원에 인맥을 가지고 있을 리 없었 다. 때문에 그러한 그가 다른 곳에서 외상코디네이터를 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 정도의 경력자는 더더욱. 계속되는 수술로 쌓여가는 기록정리, 심포지엄준비, 수술 후 환자케어, 환자자료정리... 등등... 해야할 일이 산더미인 인혁. 당장 외상코디네이터가 필요하기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인혁을 다그치는 나과장.

“ 뭐, 아무튼 다음 주 내로! 응급실에 피해안가게 꼭! 외상 코디네이터 구해 와야 돼! 알 겠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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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과장님, 혹시 그 간호사 연락처 좀 알 수 있습니까? ” “ 연락처? 이력서에 없었던가? 아, 맞다. 본인이 지원한게 아니었지.. 연락처는 내가 후 배한테 연락해서 알아봐주도록 하지. ” “ 예.. 감사합니더.. ” 그날 저녁, [ 뚜르르르르- 뚜르르르르- ] 나 과장에게 은아의 연락처를 건네받은 인혁이 은아에게 전화를 걸고 있다. 한참을 걸어도 받지 않는 전화. 조금 후에 수술을 들어가야 하는지라 다음에 다시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이만 끊으려는데 핸드폰너머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여보세요..? ” “ 아, 안녕하십니까. ”

집에서 출근준비를 하다말고 전화를 받은 은아. 휴대폰에 모르는 번호가 뜨자 고개를 갸웃거린다. 전화기너머로 들려오는 점잖은 중저음의 남자목소리. 동규도 아니고... 늦은 시간에 전화기 너머로 남자목소리가 들리자 약간 어색해하는 그녀였다. 뭐가 그리 급한지 본인소개도 안하고 인사부터 하는 남자.

“ 아.. 누구시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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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저는 해운대 세중병원에 최인혁이라고 합니다. 신은아씨 맞으십니까? ”

해운대 세중병원..? 최인혁..?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아침에 응급실장한테 스쳐가듯 들은 이름이라서 기억을 못하는 은아.

“ 아, 네... 제가 신은아인데요..? 무슨 일로...? ” “ 그.. 다른 게 아니고요.... 음.. 외상코디네이터로 근무해 볼 생각 없으십니까? ”

마음이 급했던 인혁. 막상 전화를 해놓고 은아가 잘 모르는 듯하자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말이 꼬인다. 전후사정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외상코디네이터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말부터 꺼내버리는 그. 인혁이 일단 말을 뱉어놓고 당황하고 있고 그 말을 들은 은아도 조금 황당해한다. 그러다 외상코디네이터라는 말에 그제서야 아침에 응급실장한테서 들은 얘기가 생각나는 은아.

“ ...?!!...... 아~! 그 세중병원..? 아~ 외상..코디네이터? 인가? 아무튼 간호사구하시는 일 로 전화하신건가요? ” “ 아! 예!!! 맞습니다! ” “ 아아..... 저.. 죄송한데 그 일은 이미 못한다고 말씀을 드린 걸로 알고 있는데요...? ” “ 예... 저도.. 그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그... 1년 후에 캐나다를 가신다고 들었는데요.. 혹시 그 전에 6개월만이라도 일해주실 수 없나해서.. 실례를 무릅쓰고 전화하게 되었습니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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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입에서 캐나다에 관한 얘기가 나오자 조금 놀라는 은아. 아침에 응급실장한테 처음 제의를 받았을 때에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을 알기에 일을 해볼까 잠깐 고민했었지만 캐나다로 떠날 준비를 하기에도 시간이 빠듯할 것 같아 단념했던 그녀. 인혁이 다시 전화를 해서 스카웃 제의를 하자 마음이 조금 흔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때, 은아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동규의 얼굴. 역시나 다시 고개를 저으며 조심스럽게 거절하기로 하는 그녀였다.

“ 저.. 좋은 일인 건 알고 있는데요... 저도 이것저것 준비할일이 많아서요... 아무래도 일 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

말끝을 흐리는 은아. 그녀가 힘들게 거절을 하자 애가 타는 인혁. 왠지 지금 이 사람을 잡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예감이드는 그였다. 이미 트라우마 센터의 일이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에 외상 코디네이터가 꼭 필요했던 인혁.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인혁은 평소에 그답지 않게 매달려서라도 이 사람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한다.

“ 저.. 혹시 직접 만나서 얘기해볼 수 없겠습니까? 더 자세히 설명드릴 것도 있고.. 직접 만나서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

그의 갑작스러운 말에 다시 곤란해진 은아. 어차피 못하게 될 텐데... 직접 만나봤자 시간낭비일거란 생각에 다시 거절하는 그녀.

“ 아... 음.... 저..... 죄송한데... 만나서 얘기하더라도 달라질건 없을ㄱ.....” “ 저, 일단! 일단, 만나고 얘기해보면 안되겠습니까..? 한번.. 얘기를 들어보고 정안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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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거절하시는게 어떻겠습니까? 일단 만나서.. 만나서 얘기합시더! ” “ 아.......... ”

끈질기고도 간절한 부탁에 더 이상 거절하기가 곤란해진 은아. 어쩌지..? 라는 표정으로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한번 만나기로 해본다.

“ 네...;;;;;; 그, 그러면 그렇게 하세요~ ” “ .....!!!.... 아!! 예!!! 그..그러면 제가 좀 급해서.. 혹시 내일 바로 볼 수 있겠습니꺼..? ” “ 아, 그... 제가 야간근무라서 지금 출근을 해야되가지구요... 그럼.. 근무 끝나고 내일 아 침에 뵐까요? ”

아침이면 응급환자가 거의 없는 시간이라 그녀의 말이 반가운 인혁.

“ 아! 예!! 그렇게 하시죠!! 한 10시쯤 괜찮겠습니까? ” “ 10시면 괜찮아요, 그럼 장소는 어디로..? ” “ 아.... 장소요...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 “ 그... 거리가 좀 될낀데... 의사시죠? 병원 오래 비우실 수 있겠어요? 그냥 중간쯤에서 만나는 걸로 하고 자세한 장소는 내일 이침에 다시 연락 드릴게요~ ”

베테랑 간호사라서 그런가....? 약간 황당할 수도 있는 부탁이었지만 침착하게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의사인 그를 배려해주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왠지 좋은 예감이 드는 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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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그래주시겠습니까? 아,, 그..그럼 내일뵙겠습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

이내 전화가 끊기고... 끝내 그녀가거절을 할까봐 왠지 그답지 않게 계속 긴장을 하며 전화를 받았던 터라 전화를 끊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인혁. 한구는 수술준비를 마친 후, 복도에 서있는 그를 부르러 왔다가 전화를 엿듣고는 쩔쩔매는 그의 모습을 보며 의아해한다. 갑자기 나타난 한구 때문에 놀란 인혁.

“ ...........휴....... ” “ 야, 뭐하냐? 수술안할 거야? 준비 다됐어~!! ” “ ....!!!.... 아, 어.. 해야지. ”

병원에 복귀한 이후로 늘 냉혈한처럼 있었는데.. 오랜만에 보는 인혁의 당황한 모습. 얘가 왠일이야..? 라는 생각이 드는 한구는 실실 웃으며 오랜만에 그를 놀려주기로 한다.

“ 근데 무슨 전화를 그렇게 받냐? 천하의 최인혁이?? 아주 애걸복걸을 하던데~? ” “ 애걸복걸은 무슨!! 그.. 그.. 그! 외상코디네이터 뽑는 일 때문에 그렇지.. ” “ 아~ 그 신은아인가, 그 사람? 뭐, 그래서 할 수 있데?? ” “ 아직... 일단 만나서 얘기하기로 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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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천하의 최인혁이 급하긴 급했던 모양이네에? 그러게 진작 잘 좀하지...!! ” “ 거..참...! 그 쓸데없는 소릴... 준비다 됐다며 빨리 오기나해. ” “ 뭐야, 내가 할 소릴 지가 하고 있네! 같이 가 임마! ”

한구가 실실 웃으며서 자꾸 놀리자 조금 창피해진 인혁은 일부로 정색하는 시늉을 하고는 수술 장으로 급히 들어가 버리고 한구가 궁시렁대면서 그 뒤에 따라들어간다. 다음날 이른 아침, 저녁부터 이어진 두 차례의 수술을 마치고 수술복 차림 그대로 트라우마센터로 돌아온 그. 온갖 서류들과 파일들이 쌓여있어서 쉴 곳도 마땅치 않은 그곳에서 손으로 머리를 받친 뒤 소파에 기대어 보는 인혁. 너무 피곤해서 앉자마자 눈이 슬슬 감기기 시작하고.. 아.. 안되겠다. 1시간만 자야지... 혹여나 그녀와의 약속에 늦을까봐 휴대폰 알람을 맞춰놓고 좁은 소파에 기대어 쪽잠을 청해본다. [ 삐리리리릭- 삐리리리릭- ]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이미 그가 맞춰둔 알람은 한번 지나가고.. 골아떨어진 인혁은 세상모르고 자고있는데 휴대폰 벨소리가 그의 단잠을 방해한다. 잠에서 덜깬 인혁이 손을 더듬더듬거리며 휴대폰을 찾아 전화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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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최인혁입니다. ” “ 예!! 교수님!! 저 응급실 레지던트 김도형입니다!! 자전거 교통사고환자가 있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 “ 뭐? 환자상태는?!! ” “ 혈압 80에 50, 맥박 110이구요 혈압계속 떨어지고있습니다! ” “ 바로 내려갈테니까! 기도삽관하고! 라인잡고, 피부터 신청하고! 수술해야할지 모르니까 수술장부터 알아봐!! ” “ 예!! ”

급하게 방을 뛰쳐나가는 인혁. 응급실로 향한다.

“ 환자어떻게 됐어!! ” “ 외부출혈은 없는데, 혈압 계속 떨어지고 있습니다!! ” “ 바이탈 너무 불안정한데?!! 피신청했어? 수술장은?!! ” “ 그게 아직 혈액검사가 안나와서.. 수술장은 어레인지 됐습니다!!! ” “ 일단 병원에 있는 O형 피 최대한 긁어모으고!! CT못찍을꺼같으니까 수술장부터 올려!! 열면서 확인해야되! ” “ 아.... 아... 예, 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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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T검사 없이 수술장에 올린다는 말에 잠시 망설이지만 한 두번 있는 일이 아니라서 인혁의 말대로 환자를 옮기는 도형. 인혁은 수술준비를 하려 뛰어가다가 아차!싶어 시계를 확인한다. 벌써 9시10분... 이대로면 은아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 할 거같다.

“ 하... ”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인혁은 바로 수술장으로 뛰어간다. 한편, 은아는 힘든 새벽근무를 마치고 퇴근을 하기 위해 병원을 나선다.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었지만 인혁과의 약속 때문에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늦지 않기 위해 택시를 잡아탄다. 몇 분 후, 누구나 쉽게 찾을 수있을만한 지하철역 근처에서 택시가 멈추고, 택시에서 내린 은아는 눈에 쉽게 띄는 넓은 커피숍으로 들어간다. 오전시간이어서 그런지 커피숍 안에는 사람이 많이 없었다. 어디에 앉을지 두리번거리던 은아는 그가 발견하기 쉽게 창가 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주문을 마친 뒤에 시간을 확인한다. 9시 40분, 늦을 줄 알았는데 택시를 타서 그런지 여유롭게 도착한 은아. 그에게 장소를 알려주기 위해 어제 걸려온 번호로 전화를 해본다.

[ 뚜르르르르- 뚜르르르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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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몇 번째 신호음만 들리고, 전화를 받지 않는 그. 인혁이 약속시간이 다됐는데 전화도 받지 않으니 무슨 일인가 싶어 조금 의아해했지만 아직 시간이 지난 건 아니니 기다려보기로 하는 은아. 우선 장소를 알려줘야 하니 메세지라도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휴대폰을 다시 집어 인혁에게 메세지를 남긴다.

「 전화를 안 받으셔서 메시지 남깁니다. 센텀시티역, 4번 출구 앞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막상 혼자 기다리려니 할 것도 없이 뻘쭘한 그녀. 괜히 애꿎은 휴대폰만 만지작거린다.

‘ 내가 너무 일찍 왔나...? ’

한참을 기다리고 다시 시간을 확인해보니 이제 막 10시. 왠지 시간이 더디게만 가는 것 같다. 밤을 새고 일한 은아, 별로 할 일도 없이 의자에 앉아 있으려니 점점 졸음이 몰려온다. 그러나 카페에 앉아서 졸고 있을 순 없기에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써보다가 가방에서 이어폰을 찾아 음악을 듣는다. 그러나 오히려 음악을 들으니 더 졸려오는 그녀. 그대로 스르르 잠이 들어버린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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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후, 창문으로 오후의 햇살이 그녀를 비춘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어느새 카페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앉아있고 고요하던 카페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조금 시끄러워진다. 곯아떨어졌던 은아는 문득 주변이 시끄러워졌음을 느끼고 바로 눈을 뜬다.

‘ ...!!!.... 아... 내가 잠들었었구나.... ’

그녀는 입주변이 조금 축축해서 만져보니 꾸벅꾸벅 조느라 침까지 조금 흘렸나보다. 혹시 누가 본건 아닌가 하고 주위를 둘러보는 은아. 아니나 다를까 주변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은아를 보며 킥킥거리고 있다. 너무 창피해서 그녀의 얼굴이 빨개지고 상황을 어떻게 모면해야할지 고민하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얼굴은 애써 태연한 척을 하기로 한다. 그리고 드는 생각. 도대체 지금이 몇 시인데..? 급히 시간을 확인해 보니 12시 35분, 은아는 그 자리에서 거의 3시간이나 동안 졸고 있었다. 왠지 화가 나는 은아.

‘ 아니, 사람을 불러다놓고 이게 뭐꼬? 못 오면 못 온다고 미리 연락이라도 하던가!!! “

그녀는 밀려오는 화를 누르며 일단 핸드폰을 확인한다. 부재중전화 0통, 수신메세지 0개 혹시나 하고 확인한 핸드폰. 역시나 인혁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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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이런..인간이 다이ㅆ.... !!.... ”

생각으로 하던 그녀의 짜증이 자기도 모르게 육성으로 터져버렸다. 카페 안, 한 순간에 은아에게로 쏠리는 시선들. 어쩔 줄을 몰라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이는 은아. 창피함에 최대한 사람들과 눈을 안 마주치려 노력하면서 분노가 담긴 장문에 메세지를 보낸다.

「 저기요! 급한 일이 있으시면 연락이라도 주시지 좀 너무 하신 거 아니에요? 기다리다가 지쳐서 이제야 집에 갑니다. 거기서 근무하게 될 일은 없을 것 같으니까. 앞으로 연락하지 마세요! 」

다시 메세지를 확인해보는 은아.

‘ 뭐.. 이시간까지 기다린 건 조느라 그런거지만.... 어쨌든.... !!! ’

바로 전송버튼을 누르는 그녀.

「 전송되었습니다. 」

메시지가 전송된 것을 확인하고 창피함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간다. 같은시각, 해운대 세중병원, 응급수술을 마치고 나온 인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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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장을 빠져나와 보호자와의 면담을 하고 있다. 이내 면담을 마치고 시계를 보는 인혁. 벌써 12시 30분. 빨리 한다고는 했는데 그래도 거의 3시간이나 걸린 수술

‘ 하... 어쩌지.... 아까 갔겠지.....? ....사과라도 해야되는데.... ’

약속시간이 2시간 반이나 지나버린 상황이라 이미 은아가 갔을 거라 체념을 하고 미안한 마음에 핸드폰을 드는 인혁.

‘ 어...? ’

그의 핸드폰화면에 뜨는 메시지 1통 1분전에 온 메시지. 「 저기요! 급한 일이 있으시면 연락이라도 주시지 좀 너무 하신 거 아니에요? 기다리다가 지쳐서 이제야 집에 갑니다. 거기서 근무하게 될 일은 없을 것 같으니까. 앞으로 연락하지 마세요! 」

‘ 이.. 이제야갔다고? 자..잠깐!! 그러면..? ’

그의 머리에 지금가면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친다. 마음이 다급해진인혁은 두건도 풀지 않고 피 묻은 수술복을 그대로 입고 뛰어가면서 바로 은아에게 전화를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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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있던 카페 앞, 새벽근무가 끝나고 기껏 바로 왔더니 잠은 잠대로 못자고 얼굴은 얼굴대로 팔리고 짜증이 날대로 난 그녀. 카페 문을 나서고 지하철을 타고 갈 생각으로 걸어가려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

인혁의 번호였다. 홧김에 받지 말까 고민하던 은아. 그러다 문득, 뭔가 사정이 있던건 아닐가.. 하는 생각에 일단은 변명이라도 들어보기로 하고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받는 그녀.

“ 여보세요?!!! ” “ 아!!

신은아씨?! 헉헉.... 저..정말! 미안합니다!! 너무 오래기다렸죠.. 헉... 아.. 제가 아

침에 급한 응급수술을 들어가느라고요... 정말 미안합니다!!!! ” 전화기 너머로 뛰고있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가 간신히 말을 이어나가는게 들렸다.

‘ ...응급수술이라고...? 급하긴 급한 일이지만.... ’

그래도 자신이 창피를 당한게 인혁때문인 것 같아서 화가 안 풀리는 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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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못 오시면 연락이라도 하셨어야죠..!! ” “ 헉헉.. 저..정말 미안합니다.. 제..제가!! 바로 거기로 가겠습니다!!! ” “ 오실필요 없어요! 벌써 카페에서 나왔어요..! ”

화가 안 풀릴 것 같은 그녀. 하지만 이번이 아니면 외상코디네이터를 구할 기회가 없을 거라는 생각에 꼭 그녀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한다.

“ 저..저기!!!! 제가 바로 갈 테니까 거기서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꺼...! 여기 서 줄발하면! 15분안에 도착할겁니다!! 꼬..꼭!... 좀.. 부탁드립니다..!! ”

무조건 기다리라는 그의 말이 황당한 은아였지만, 지금가면 뭔가 계속 귀찮아질 것 같기도 하고 그럴 바엔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만나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다른 것도 아니고 응급수술 때문에 늦었다는데... 화는 나지만 더 이상 거절하기가 좀 그렇다고 생각하는 그녀.

“ ....하.... 그라믄..! 여기 센텀시티역 4번출구 앞에 있을 테니까... 15분내로 꼭 오셔야되 요!!” “ ...!!!!!... 예!!! 예!! 바로 가겠습니다!! ”

인혁은 급한 마음에 자신의 온 몸에 수술할 때의 피가 튄 모습 그대로라는 것도 인지 못하고 병원 밖을 뛰쳐나간다. 자신의 차가 주차되어있는 주차장으로 뛰어가던 인혁. 잠깐 멈칫하더니 또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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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응급실 레지던트 김도형입ㄴ... ” “ 어! 나 최인혁인데!! 내가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밖에 나가고 있거든?!! 빨리 중환자 실 올라가서 방금 수술한 환자상태 좀 체크해서 나한테 보고해!! 인턴 시키지 말고! 자네 가 직접 갔다와야한다! ” “ 아, 아... 예..예!!! ” “ 금방 갔다 올 거니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

뚝인혁은 본인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리고는 다시 차 쪽으로 뛰어간다. 한편, 지하철역 4번출구 앞, 다시 카페로 들어가기가 창피했던 은아가 투덜대면서 그냥 서서 인혁을 기다리고 있다. . . 한 10분쯤 기다렸을까,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날카로운 굉음.

[ 끼이이이이이익-------- 쾅!!! ]

순간, 은아의 눈앞에 슬로우 모션처럼 보이는 사고현장. 그 넓은 도로에서 빠른 속도로 달리다가 승용차와 부딪친 오토바이. 그때, 오토바이 운전자의 몸이 공중에 붕- 하고 뜨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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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땅에 추락하면서 몇 바퀴를 구르고는 멈춘다.

....!!!!!......

놀란 은아, 응급실에서 수많은 환자를 봤지만 직접 사고현장을 목격하는 건 처음이다. 끔찍한 사고, 충격을 받은 은아가 잠시 얼어붙어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와 웅성대는 사람들의 소리. 점점 사고현장으로 사람들이 몰려갔지만 다들 놀라서 지켜보기만 할 뿐 누구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다. 잠시 얼어붙은 은아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파악하며 쓰러진 운전자에게로 뛰어간다.

“ 잠시만요!!!! 비켜주세요!!! ”

사람들의 무리를 헤치고 들어가 운전자의 상태를 확인하는 은아. 추락할 때의 충격으로 외상을 입은 운전자의 몸에서 나오는 피가 그의 몸을 적셔가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과다출혈로 사망할게 뻔했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운 그녀였지만 그래도 직업정신을 발휘해 어떻게든 해봐야겠다고 생각한 은아. 재빨리 가방을 뒤져 찾은 손수건으로 일단 출혈부위부터 지혈한다. 그러고는 남은 손으로 운전자의 어깨를 치며 의식상태를 확인한다.

“ 저기요!! 눈떠보세요!! 정신 차릴 수 있겠어요?!!! ”

그러나 쓰러진 운전자는 의식이 없고... 손으로 맥박을 집어봤지만 맥박도 약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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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 역시 약한 상태.

“ 여기!!! 빨리 119좀 불러주세요!!!! ”

누군가 119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가장 큰 출혈부위는 지혈하고 있지만 다른 곳도 출혈이 계속되는 상태 이미 그녀가 잡고 있는 손수건은 피로 흥건하게 젖어있고 서둘러 다른 곳도 지혈해야만 하는 상황. 그렇다고 지금 지혈하고 있는 부위를 놓을 수도 없었다.

“ 여기요!!! 여기 누가 좀 도와주세요!! 여기 좀 잡고 있어주세요!!! ”

다급한 그녀의 외침. 하지만 낭자하는 피, 끔찍한 환자의 상태 때문에 서로 눈치만 보고 있을 뿐, 누구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다.

‘ 아... 어쩌지...!! 어쩌지...!! ’

혼자 안절부절 못하는 은아. 이대로 구급대가 오길 기다리기엔 급격한 출혈량 때문에 환자가 오래 버티기 힘들 것 같았다. 그러나 병원에서처럼 도와줄 사람도 없고, 처음 접하는 상황에 당황하는 은아. 골절과 다른 손상부위도 확인해야하는데 간호사인 그녀가 판단하기엔 무리인 상황. 죽어가는 환자를 앞에 두고 자신의 한계를 느끼는 그녀. 좌절감이 몰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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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깐만요!!! 비켜보세요!!! ”

그때, 사람들의 웅성거림. 누군가가 구름떼처럼 몰려든 사람들을 제치며 은아에게 다가온다. 고개를 든 그녀의 눈앞에 보이는 건 머리에 두른 수술두건, 피의 젖은 수술복, 피가 튀겨있는 얼굴. 그런데 왠지 낯이 익은 그 얼굴.

“ .....!!!?!!...... ”

그때, 그 사람이었다. 몇 달 전, 첫 눈 오는 날에 길 위에 쓰러져있던... 자신을 안고 하염없이 울며 어머니를 찾던... 너무나 슬퍼보이던 그 사람. 인상 깊은 만남 때문이었는지 자꾸 생각나고 걱정되던 환자였는데.. 그런데... 수술두건, 수술복을 입고 그녀의 앞에 있는 그. 게다가 피 묻은 맨발에 수술용 슬리퍼를 신고 온몸에 피칠갑을 한 모습으로....

‘ 이.. 이 사람... 의사.... 였어...? ’

그가 의사였다는 것도 놀랍고.. 이렇게 피범벅인 차림인 것도 놀랍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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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황당한 상황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하니 인혁을 바라보는 은아. 은아와 잠깐 눈이 마주치긴 했지만 인혁에게 그녀는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자신을 멍하니 보고 있는 그녀를 신경도 쓰지 않고 그는 환자의 상태부터 살핀다. ※ 추천브금 : 에브리싱글데이 - 모래시계(Inst.)

5분전,

‘ 4번출구라고 했는데.... ’

약속시간에 늦어서 은아에게 큰 실수를 한 인혁. 행여나 그녀가 마음이 바뀌어 집으로 돌아가 버릴까봐. 이번엔 늦지 않기 위해 최대한 속도를 밟는다. 지하철역 근처 사거리에 도착해서 신호를 기다리는 그.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

[ 끼이이이이이익-------- 쾅!!! ]

.....!?!!?!!!!......

‘ 뭐지..?..... 교통사고인가?!!.. ’

가까운 곳에서 사고가 난 것 같은데 소리만 들릴 뿐 사고 현장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인혁의 눈에 어디론가 뛰어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는 직감적으로 누군가 크게 다쳤을 거라는 생각이 들고, 저 정도 소리가 나는 교통사고라면 분명히 출혈이 뒤따를 것이라고 판단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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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은 급하게 차를 움직여 인도 옆에 대충 주차시킨 뒤, 황급히 차안을 둘러본다. 그때, 자동차 서랍 안에 쑤셔 박혀있는 낚시할 때 쓰던 수건이 그의 눈에 띈다. 그는 급하게 수건을 집어 들고 차문을 세차게 닫은 뒤 뛰어간다. 사고현장은 멀지않았다. 건물의 코너를 돌아보니 저 앞에 보이는 사고현장. 자동차한대가 회전을 한 상태로 멈춰서있고 좀 떨어진 곳에 오토바이 한 대가 심하게 부서져 있었다. 그리고 좀 더 떨어진 곳에는 사람들이 뭔가를 둘러싸고 무리지어 있었다. 환자가 크게 다친 것인지.. 끔찍한 것을 봤다는 듯한 사람들의 표정이 그의 눈에 들어온다. 그 순간, 그의 귀에 들려오는 한 여자의 외침.

“ 여기요!!! 여기 누가 좀 도와주세요!! 여기 좀 잡고 있어주세요!!! ”

몰려있는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에 더 속력을 내서 뛰어가는 인혁.

[ 웅성- 웅성- ]

인혁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그를 쳐다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 잠깐만요!!! 비켜보세요!!! ”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환자에게로 가던 인혁의 눈에 웬 아가씨한명이 손수건으로 환자의 머리를 지혈하고 있는 모습이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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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이 나타나는 소리에 고개를 든 그 여자는 놀란 눈으로 인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여자와 눈이 마주치고.. 그녀가 보호자라고 판단한 인혁은 바로 환자에게 눈을 돌려 환자의 상태부터 살핀다. 매우 위급해 보이는 환자의 상태 머리를 포함해 곳곳에서 보이는 출혈. 한눈에 봐도 골절된 것으로 보이는 팔과 다리. 심지어 환자의 몸에는 백미러였던 것으로 보이는 유리조각들까지 몇 개 박혀있었다. 그나마 여자가 가장 출혈이 심해보이는 머리를 지혈 하고 있어서인지 땅으로 흐르는 피의 양이 많지는 않았지만 이미 여자의 손에 쥐어진 손수건은 피로 흥건하다 못해 흘러넘치려하고 있었다.

“ 의삽니다!! ”

인혁은 보호자로 보이는 여자가 놀랄까봐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는 무릎을 굽혀 환자의 의식상태를 확인하려 한다. 그때 멍하게 인혁을 바라만 보던 은아가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설명한다.

“ 아! 의..의식상태 벌써 확인했어요! 지금 환자 의식없는 상태구요! 동공 풀려있고 호흡, 맥박 모두 약한 상태에요!! 보시다시피 두부출혈이 너무 심해서 여기는 지혈하고 있는데 다른 곳은 확인 못했어요!!

은아의 말에 이제야 그녀를 제대로 쳐다보는 인혁. 너무 소상하게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고 있는 그녀가 조금 의아하게 느껴졌지만 환자의 상태가 더 중요한 인혁은 그녀의 말에 따라 일단 능숙하게 환자의 상태부터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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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숨을 쉬기 원활하도록 환자의 상의부터 풀어헤치고 그는 신속하게 환자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이리저리 만져보면서 출혈부위와 손상부위들을 확인한다. 환자의 상태는 심각했다. 팔뼈가 부러지면서 주위에 혈관들이 손상을 받았는지 적은 양이지만 팔꿈치 밑에서도 출혈이 보였고 허벅지와 골반사이 찢어진 부위에서도 머리 못지않은 출혈이 보였다. 허벅지 안쪽에 손을 데어 맥을 짚어보니 역시나 맥이 느껴지지 않는다. 인혁은 가져온 수건으로 급하게 허벅지부위를 지혈한다. 도대체 어떻게 사고가 났기에...

“ 사고가 어떻게 났습니까?!! ” “ 오토바이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다가 승용차하고 부딪히면서 운전자가 한 3~4미터 공중으로 날랐다가 추락했어요!! “ “ 보호자십니까? 119는요?! ” “ 아, 전 보호자는 아니구요! 구급차는 4~5분전에 불렀어요!!! “

은아는 능숙하게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는 그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가. 그의 질문에 바로 대답을 해준다. 거침없이 환자를 확인하고 환자에게만 집중해있는 그 모습. 왠지 모를 아우라와 그 날카로운 눈빛. 물론 그가 의사라서 그런 거겠지만 왠지 그가 부러운 그녀. 인혁은 그녀를 한번 쳐다보더니 주위를 둘러보며 말한다.

“ 환자 상태가 심각해요! 팔이랑 대퇴동맥에 이상이 있는 거 같아요!! 지혈할 수 있는 끈 같은 게 필요한데..!” “ 저기요! 이거면 될 거 같은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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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인혁의 말에 주저 없이 자신의 가방끈을 분리시켜 인혁에게 건네준다. 그녀가 주는 가방끈을 받으면서도 그녀의 빠른 행동에 살짝 놀라는 그.

“ ...!!!... 아,, 예! 하나 더 필요합니다!!” “ 아,,! 그럼 여기 좀!! ”

인혁의 말에 은아는 인혁에게 머리부위 지혈을 맡긴다. 그러고는 그들을 구경하고 있는 무리에게 다가가서 무어라 말을 하더니 누군가에게 스카프를 얻어와 인혁에게 건넨다. 손발이 척척 맞는 두 사람. 스카프를 건네받은 인혁은 바로 환자의 허벅지 안쪽 깊숙한 곳을 감아 묶어버린다. 그리고 가방끈으로는 출혈부위 윗쪽 팔뚝을 묶는다. 그렇게 급한 응급처치가 끝나고, 구급차만 기다리면 되는 상황.

그때, 인혁의 머리에 스치는 은아와의 약속. 아차!싶은 인혁은 한손으로는 계속 지혈을 하면서 나머지 손으로 급하게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꺼낸다. 바로 은아의 번호로 전화를 걸고..

[ 뚜르르르르- 뚜르르르르- ] [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

인혁이 전화를 하자 거의 동시에 옆쪽에서 울리는 벨소리.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에 인혁의 번호가 뜨자 어쩔 수없이 급하게 전화를 받는 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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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보세요? ] “ 여보세요? ” [ 아! 최인혁입니다!!! ] “ 아! 최인혁입니다!!! ”

전화 너머와 똑같이 바로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 설마...? 하고 인혁을 쳐다보는 은아.

[ ......?..... ] “......?..... ” [ 아.... 저기.. 제가 또 일이 좀 생겨서요!! 아.... 오늘 아무래도 못 뵐 것 같습니다!! 기다리셨을텐데... 정말 죄송합니다..! ] “ 아.... 저기.. 제가 또 일이 좀 생겨서요!! 아.... 오늘 아무래도 못 뵐 것 같습니다!! 기다리셨을텐데... 정말 죄송합니다..! ”

그가 확실했다. 아까부터 설마 설마하고 생각하던 은아. 이 사람이 그 최.... 인혁? 은아는 놀라고 당황스러워 어떻게 하지..? 라고 생각하다가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살짝 톡톡거리며 말한다.

[ ....아........ 저기 옆 좀 보실래요? ] “ ....아........ 저기 옆 좀 보실래요? ”

옆......에? 옆을 돌아본 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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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자신과 같이 응급처치를 하던 그녀가 그의 어깨를 톡톡 치고 있었다.

“ 저..... 최... 인혁.... 선생님....? ” “ .......??!!!!!!!?........ ”

토끼 눈을 하고 서로를 쳐다보는 인혁과 은아. 둘 다 피 묻은 얼굴과 피 묻은 옷. 몰골이 말이 아니고... 그때 점점 가까워지는 싸이렌소리.

[ 삐-- 뽀-- 삐-- 뽀--]

바로 구급차가 도착하고 사람들은 구급차가 들어올 수 있게 비켜서준다. 차에서 내린 구급대원들이 현장을 확인하더니 수술복차림인 인혁을 보고 조금 놀라 멈칫한다. 인혁은 구급대원들이 왜 그러나 싶다가 자신이 현장을 훼손한 줄 알고 그러나 싶어 급히 입을 연다.

“ 아! 의삽니다!! 환자상태만 체크했습니다!! ”

구급대원들이 이송준비를 할 수 있도록 비켜서주는 인혁과 은아. 바로 환자를 이동시키려 준비하는 그들. 경추보호대를 착용시키고 있는 그들을 보며 인혁은 시간을 단축시키기위해 환자상태를 설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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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흡!맥박! 모두 불안정하고! 동공 풀려있습니다! 오른쪽다리와 오른쪽 팔 골절있고요! 두부출혈 심하고! 오른쪽 대퇴동맥 나가고 팔에 출혈이 심해서 지혈만 해놨습니다!! 온몸 에 유리조각들도 박혀있어서 추가로 손상부위 나올지 모겠습니다!! 병원으로 서둘러야할 껍니다!! “

서둘러 환자를 구급차로 옮기는 구급대원들 문을닫고 츌발하려는데..

“ 여기도!! 환자한명 더 있습니다!! 들것하나 가지고 와주십쇼!! ”

승용차 쪽에서 들리는 소리. 다행히 그 환자는 의식이 있었는지 차밖에 서있으면서 허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출발해야하는데 인원이 부족해 곤란한 구급대원. 상황을 보더니 인혁이 구급대원에게 묻는다.

“ 어느 병원으로 갈껍니까? 인원이 없으시면 제가 타겠습니다!! ” “ 아, 그래주시겠습니까? 병원은 효성시티병원으로 갈겁니다!! 여기서 6분거리입니다!! 아.... 환자상태가 너무 위급해서... 부탁드립니다!! 조금 있으면 다른 구급차 올 것 같으 니까 먼저 타고 이동하시죠!! 그럼 이만! ”

한시가 급한 상황, 구급대원한명은 들것을 들고 또 다른 환자에게 가버리고 나머지 한명은 구급차 문을 잡고 인혁에게 빨리 타라고 손짓한다. 그가 서둘러 구급차에 올라탄 후 밖을 보자 그의 눈에 들어오는 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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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타야할지 말아야 할지 우물쭈물 거리고 있었다. 죽어가는 환자가 눈앞에 있으면 누구 앞에 있건 말건 물불 안 가리는 인혁. 그녀에게 호통을 친다.

“ 뭐해요!!!! 빨리 안타고!!!! ”

인혁의 호통에 놀라 얼른 가방을 집어서 구급차에 오르는 그녀. 그녀가 올라타자마자 구급대원도 차에 오르고 문이 닫히고 바로 출발하는 구급차. 긴박한 구급차안, 구급대원이 환자의 혈압과 산소포화도를 체크하는 동안 은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환자를 바라보다가 구급대원을 돕는다. 인혁은 대원에게 거즈와 소독 액을 건네받고 거즈로 출혈부위를 누르며 지혈을 한다. 머리에 출혈은 어느 정도 멈췄지만 생각보다 심각한 허벅지에 출혈. 선홍빛 피와 출혈량으로 봐서는 대퇴동맥이 다친 게 확실했다. 빨리 수술이 시급해보였다. 인혁이 구급대원을 향해 소리친다.

“ 병원에는 연락 됐어요?!! ” “ 아니요! 다시 환자상태 알려야합니다! ” “ 그럼 환자 제가 처치할 테니까 연락부터 해주시고요!! 연락되면 좀 바꿔주십쇼!! 그, 청진기랑 기도삽관세트 어디 있습니까!! ” “ 아! 저 윗칸에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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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이 구급대원이 가리키는 곳에서 삽관세트를 꺼내더니 은아에게 건네며 소리친다. 영문도 모르고 삽관세트를 받는 그녀.

“ 기도삽관 할 줄 알죠?!! ” “ ....... ㄴ...네...?!! ” “ 나는 지혈하면서 병원이랑 통화를 해야되니까!! 기도삽관 좀 해줘요!! 빨리 서둘러 요!!!!! “

긴박한 그의 목소리, 거침없는 그의 행동 잠시 머뭇거리던 은아는 삽관세트를 받아들고는 얼른 자리를 옮겨 환자에게 기도삽관을 시도한다. 그사이 병원에 전화연결을 한 구급대원. 병원에 환자 신원만 알리고는 바로 인혁에게 전화기를 넘긴다. 전화를 건네받은 인혁은 급히 환자의 상태를 설명한다.

“ 예! 환자 의식 없고요! 혈압 80에 50이고!! 상태 불안정합니다!! 오른쪽 팔다리 골절 및 대퇴동맥손상 우려되고요!! 3~4미터 높이에서 추락했다니까 내부장기 손상가능성 큽니다! 외과, 신경외과, 정형외과모두 필요할 것 같은데, 수술가능한 의사 분계십니까?!!!

바로 전화기 너머에서 대답이 돌아오고 밝아지는 그의 표정.

“ 아!! 예!! 바로 수술가능하다고요?! 예! 5분안에 도착할겁니다. 아! 출혈이 많아서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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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필요할겁니다!! 피 많이 준비해주시고요!! 예!! 알겠습니다!! “

인혁이 밝은 표정으로 전화를 끊고 구급대원에게 넘겨주고는 은아를 보며 묻는다.

“ 기도삽관 끝났어요?!! ” “ 네!!! 끝났어요! 확인해주세요! ”

은아가 엠부를 짜는 동안 그가 청진기를 환자의 가슴에 대어 정상기도인지 확인하고, 이내 그의 표정이 밝아진다.

“ 어! 잘됐네!! ”

왠지 그 말에 기분이 좋은 은아. 그녀가 기도삽관을 끝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환자의 호흡과 혈압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런 환자의 상태를 보며, 인혁과 은아는 똑같은 표정으로 다행이라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작 본인들은 같은 표정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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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브금 :

몇 분 후, 구급차가 이내 병원에 도착하고 병원밖에는 인턴으로 보이는 의사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인혁이 구급대원을 도와 베드를 차 밖으로 빼내고, 구급대원과 인턴들이 병원 안으로 환자를 데려간다.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인혁은 딱 여기까지가 자신의 일임을 알았기 때문에 더 이상 환자를 따라가지 않는다. 세중병원도 아니고.. 이제는 다른 의사를 믿고 기다려야할 시간. 환자의 혈압도 안정권으로 접어들었고.. 병원도 사고 직후에 거의 바로 도착했고.. 응급처치도 적절했고... 수술도 준비되었다고 했으니까... 아마...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혁은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환자가 들어간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내 돌아서려는데..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자신과 똑같은 표정으로 환자가 들어간 곳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은아가 보인다. 희미한 미소를 띄는 인혁. 왠지.... 이 사람이라면... 좋은 팀이 될 수 있을 거 같은 예감이 든다. 인혁의 시선을 느꼈는지 은아가 인혁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다. 은아가 어색한지 살짝 미소를 지어준다. 그녀가 웃어주자 인혁 역시 어색한지 급히 고개를 돌려 못 본 척을 하며 괜한 헛기침만 한다. 참, 그러고 보니.. 오늘 만나자고 먼저 매달려놓고 3시간이나 기다리게 하지 않나.. 본의 아니게 호통을 치질 않나.. 왠지 그녀에게 미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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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cm - 어느날(Inst.)


“ 크..흠... 아... 저.... 많이.... 기다렸죠? ”

“ ... ㅇ..!... ” 그의 물음에 은아가 입을 열기도 전에 같이 왔던 응급구조사가 병원건물 안에서 서둘러 걸어 나오며 인혁을 향해 급하게 묻는다.

“ 아! 기다리셨어요? 태워다드릴까요? 아까 그 지하철역으로? ” “ 예? 아아... 예에..! ” “ 그럼 타시죠! 어차피 가는 길이니까 내려드릴게요!! 그럼 이분도..? 일행이시죠? ” “ 아, 예! 일행입니다! ”

분주하게 구급차를 소독하면서 말을 하던 구급대원이 은아를 보며 묻자 인혁이 주저 없이 대답한다. 그런 인혁을 힐끔 보는 은아.

“ 그럼 빨리 타시죠!!! 빨리 돌아가 봐야 해서..! ”

구급대원은 인혁과 은아를 향해 서두르라고 말하고는 자신도 서둘러 조수석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은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구급대원을 향해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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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기..!! 그런데... 환자는 어떻게 됐나요..? ”

자신이 물어보려했던 말을 먼저 묻는 그녀를 힐끔 쳐다보는 인혁. “ 아, 환자 바로 수술 준비하러 CT실로 올라갔습니다! 다행히 병원에도 빨리 도착하고, 응급처치도 좋아서 최악의 케이스는 아니라는데요....? 뭐.... 아무튼 오늘 도와주셔서 감 사합니다! 자! 빨리 타시죠! ”

말을 끝낸 구급대원이 바로 조수석에 올라탄다. 구급대원의 말을 듣고는 표정이 조금 밝아진 그녀도 구급차에 올라타고, 인혁이 그녀를 뒤따라 올라타며 차문을 닫는다. 바로 출발하는 구급차.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구급차 안, 구급대원 둘 다 운전석에 있고 뒤쪽 환자 처치용 공간에는 둘만 남아있는 상황. 아직 환자에 대한 걱정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해서인지 두 사람 모두, 각자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이고 구급차안에는 긴 침묵만이 흘렀다. 그 와중에 특히 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건 은아였다. 그녀는 아직도 가슴이 벌렁거리고 심장이 뛰는 것 같았다. 물론 중환자실과 응급실에서 7년이나 근무하면서 교통사고를 비롯해 수많은 케이스의 환자들을 봐왔고 수많은 처치들을 해왔지만 뭔가 이번 일은 그녀에게 좀 더 색다르게 느껴졌다. 이렇게 현장에서 교통사고 환자를 직접 본 것도 처음이고 동료의사들이나 간호사들도 없이 오직 혼자만의 판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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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위급한 환자를 맞닥트려 처치해야 하는 상황도 처음이었다. 그것도 그렇게 피가 철철 흘러넘치는 환자는... 아까는 진짜 눈앞이 깜깜했었다. 수년간 일해 온 경험으로 어찌어찌 판단하여 처치하기는 했지만 죽어가는 환자와 홀로 대면했던 그 순간은 정말 무서웠고 두려웠었다. 그리고 간호사인 자신이 더 이상의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그녀는 그 동안에 자신이 쌓아왔던 간호사로써의 경험들이 모두 허망하게 느껴졌고 그 짧은 순간에, 엄청난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찌할 줄 몰라서 좌절하던 그때에 그가 나타났었다. 그는 그녀가 봐왔던 수많은 여느 의사들과는 달라보였다. 그는 거침이 없었다. 혼자 환자를 맞닥트렸을 때에 두려움이나 자신의 처치에 대한 뒷일을 책임져야 한다는 두려움 같은 건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그에게서는 오직 환자를 살려내겠다는 그 눈빛과 의지들만 느낄 수 있었다. 은아의 눈에 그는 정말 대단한 사림인 것 같았고 그녀는 왠지 그런 그가 부럽게만 느껴졌다. 은아의 마음속에 무언가가 꿈틀댔다. 그리고 벅차올랐다. 아까 그와 함께 환자를 살리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그때에 그녀는 순간이나마 어떤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것이었을까? 7년 동안이나 간호사생활을 하면서도 계속 아쉽게만 느껴졌던 그 무언가가. 은아는.. 지금 이 감정을 잃고 싶지 않았다. 단순한 일이나 업무로써가 아닌 진짜로 사람을 살리는... 생명을... 살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녀가 벅차오르는 마음을 느끼며 골똘히 생각에 빠져있는데 옆에 있던 인혁이 그녀에게 말을 건다.

“ 저.. 저기, 이제 내려야할 것 같은데요. ” “ ......?!... 아! 네..! 내려야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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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이 먼저 구급차에서 내리고, 그녀가 뒤따라서 구급차에서 내린다. 곧, 그들은 태워다준 구급차가 가버리고 둘 사이에 잠시 동안 어색한 정적이 흐른다. 잠시 후, 정적을 깨고 먼저 입을 여는 인혁.

“저기, 어디 들어가서 얘기 좀 할래요?”

인혁이 카페가 있는 쪽을 가리키며 말을 하는데.. 그녀가 인혁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 아.... 그게... 저... 그...그 차림으로요?! ” “ ......?!......... !!!!!!!!......... ”

아...!.... 피범벅이 된...... 맨발에 수술용 슬리퍼... 수술복차림... 혹시나하고 머리를 만져보니 두건까지 두르고 있었다. 얼른 두건을 풀어버리는 인혁. 그러자 땀에 엉켜 엉망이 되어버린 그의 머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아...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쳐다봤었구나... 젠장... 설득하러 와놓고... 이게 무슨 망신인가.... 아까 수술을 끝마치고 너무 정신없이 출발하고 또 도착하자마자 응급환자를 챙기느라 자신이 입고 온 옷 같은 건 신경도 쓰지 못한 그였다. 그의 얼굴이 벌게진다. 주위를 둘러보니 역시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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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입고 온 옷이 수술복이란 걸 이제야 알아차렸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인혁을 보며 은아는 여전히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 그를 좀 덜 민망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 저.... 여기는 사람이 좀 많으니까... 조용한데로 자리를 옮길까요? ”

“ ....아!..예!!....아.....그...그게 좋겠네요... .그럼... 일단 제 차로...? ” “ 아... 네, 그러세요! ” “ 예..예... 그...그럼... 가시죠..?! ”

당황한 인혁이 말을 더듬는다. 은아는 그런 그의 모습이 거침없이 환자를 처치할 때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는 생각을 한다. 뭔가 지금은 조금 허당 같다는 생각도 들고... 어쨌든 인혁의 안내에 따라 그를 따라가는 그녀. 아까 있던 곳에서 조금 걸어 내려오니 어떤 차가 인도 옆에 아무렇게나 주차되어있었다. 인혁이 뛰어가서 그 차의 운전석에 서둘러 올라타서 시동을 걸더니 차를 은아가 있는 쪽으로 몰고 온다. 그러고는 다시 차에서 내리는 그.

“ 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단, 제 차를 타고 저희 병원으로 가서 이야기를 좀 나누 시는 게... ”

그의 말에 잠시 고민에 빠지는 은아. 사실 처음에는 우선 만나 어떻게든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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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생각이 바뀌어버렸다. 환자를 살리려 필사의 힘을 다하는 그의 모습이 그녀 안에 어떤 용기를 불어넣어줬다. 그러나 야간 근무로 잠도 제대로 못자고.. 응급환자를 이송시킨 후 갑자기 긴장이 풀려버린 탓에 너무나도 피곤이 몰려오는 그녀.. 게다가 지금 인혁과 해야 할 얘기는 앞으로 그녀가 이 일을 시작할지 말지를 결정짓는 중요한 대화일 것이기 때문에 이런 피곤하고 몽롱한 상태에서는 듣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조금 더 고민하고 판단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한편, 인혁은 은아가 어떤 말을 할까 초조하기만 하다. 이런 베테랑 간호사가 이 일을 안 한다고 하면 어쩌지...? 그런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입을 여는 은아.

“ 아....... 저...... 저는 지금가서 눈이라도 좀 붙여야 이따 저녁에 출근을 할 것 같아서 요... 상황도 별로 안 좋고... 조금 혼란스럽네요... 저.. 다음에 얘기하면 안 될까요..?

그녀의 말을 듣고 속으로 역시나... 하고 좌절하는 인혁. 그의 표정이 시무룩해진다. 그런 그의 표정을 보더니 은아가 손사레를 치며 말한다.

“ 아! 아..!!. 그렇다고 일을 안 한다는 게 아니구요...! 것도 없고... 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요...... ”

시무룩하던 인혁은 그녀의 말에 표정이 밝아지더니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그녀에게 소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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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아직... 그 일에 대해 아는


“ 아!! 저, 잠..잠시만요!!! ” “ ..... ?! .... ”

말을 마친 그가 갑자기 자신의 자동차 운전석으로 뛰어올라가서는 분주하게 뭔가를 찾는다. 그러다가 차 서랍에서 작은 디카를 찾아 꺼내는 인혁. 카메라를 켜서 뭔가를 확인하더니 기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달려 나온다. 그러고는 그의 손에 들린 디카를 은아에게 내밀며 말한다.

“ 저..! 그러면 잠깐 동안만 이.. 이 것 좀 보시겠습니까..?! ”

이게 뭐냐는 표정으로 디카를 건네받은 은아. 디카에는 한 교통사고 현장이 찍혀있었다. 처참한 사고현장, 그리고 선명한 핏자국들.. 인혁이 심포지엄 때 쓰려고 모아둔 사진들이었다.

[ 딸깍- 딸깍- 딸깍- 딸깍- ]

은아는 진지한 표정으로 사진을 바라보다가 다른 사진을 볼 수 있는 버튼을 누른다. 그녀가 계속 버튼을 누르면서 사진을 확인해보고.. 연속적으로 아까와 비슷한 처참한 교통사고 현장과 환자의 출혈부위를 자세히 찍은 사진들이 보였다. 환자의 상태들은 하나같이 최악이었고 끔찍했다. 그 사진들은 그녀가 얼굴을 찌푸리기에 충분했지만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다. 계속 버튼을 누르며 사진을 보는 그녀.. 온갖 수액과 피를 주렁주렁 달고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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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들의 사진들.. 그 환자들은 살아날 가망성이 없어보였다. 그런데, 몇 장을 더 넘기자 환자들이 회복을 하고 밥을 먹는 모습, 재활치료를 받는 모습, 걸어 다니는 모습, 기쁜 표정으로 의사들과 사진을 찍은 모습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의사들의 틈에는 조금은 젊어 보이는 인혁의 모습도 보인다. 은아는 사진만 보고 있는데도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어떻게... 이런 환자들을 살릴 수가 있는지... 그녀가 일하던 병원에서는 그런 중증환자들은 감당할 수가 없어 늘 다른 병원으로 이송시키곤 했었다. 사진을 끝까지 다보고... 그녀는 왠지 말문이 막혀서 인혁을 쳐다본다. 그런 그녀를 보더니 은아가 다급하게 말한다.

“ 이! 이런일 같이 해보지 않겠습니까?!! 방금 이송시켰던 환자처럼 눈앞에서 죽어가는 환자들..! 그런 환자들 이렇게 살릴 수 있어요!. 골든하워 안에 수술만 할 수 있더라도! 절반이상은 살릴 수 있습니다!! ” “ 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 “ 솔직히 말씀드리면... 환경이... 너무 열악한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인력도 많이 부

족하고... 사실상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은아 씨 같은 베테랑 간호사의 도 움이 절 실이 필요합니다... 그... 같이.. 한번 일해보지 않을래요..?! ”

그를 바라보는 은아. 인혁은 진심어리고도 간절하게 그녀를 설득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 그가 잡아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은아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하고 웃음이 나온다. 택시기사가 볼까봐 창피한지 바로 정색을 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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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또 피식- 웃음을 터트리는 은아. 참... 재밌는 사람이네... 오늘도 그렇고.... 그날도 그렇고... 어떻게 만날 때마다 사건사고가 터지노? 그런데 생각해보면.. 오늘처럼 이렇게 심장이 뛰었던 날이 언제인가 싶다. 환자를 대하던 거침없는 그의 모습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잊혀 지지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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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울타리 ※ 추천브금 :

이루마 - Loanna

(드라마상의 시점) 2년 6개월 후, 2012년 초여름 어느 날. 해운대 세중 병원. 응급실 옆 구석진 곳에 자리 잡은 어느 방, 방 안은 응급실에서 쓰이는 온갖 물품들로 가득 차 있었다. 물품 창고 같은 그 곳. 그리고 그곳에 있는 다른 종류의 물건들. 작은 책상하나와 간이 침대하나, 철제책꽂이 하나. 그 책꽂이에 빽빽이 꽂혀진 외상에 관련된 서류 파일들. 그 파일들마저 없었다면 아무도 그곳이 외상센터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그 방. 그곳은 해운대 세중병원의 트라우마센터였다. 트라우마센터 안에 있는 커다란 창문. 석양빛이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와 트라우마센터를 안을 비춘다. 그리고 그 앞에 서있는 인혁. 해지는 하늘의 붉은 빛이 그를 비추어 그의 얼굴에도 붉은 빛이 맴돈다. 그는 블라인드 사이로 창문 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다. 이 석양이 지고 나면... 또 다시 어둠이 찾아오고, 어둠이 찾아오면, 또 다시 삶과 죽음에 기로에 놓인 생명들을 마주해야할 시간이 다가온다. 나는 늘 그 죽음의 문턱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서있다. 운이 좋으면 그들이 그 문턱을 넘지 않도록 도와줄 수 있지만, 잠시라도 지체된다면, 힘없이 그들이 죽음의 문턱으로 넘어가는 걸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나에게는 그 순간을 지켜보는 일이 그 어떤 일 보다 괴롭다. 그래서 살리려 한다. 필사적으로.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쳐봐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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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놈에게 한 생명을 또 보내야만 했다.

어젯밤 9시쯤, 구급차소리가 온 응급실에 울려 퍼졌다. 트랜스퍼 되어 온 응급환자였다.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떨어진 그 환자는 과다출혈로 CPR도 소용없었다. 병원에서 멀지않은 곳에서 일어났던 사고. 사고 직 후 왔다면 수술을 받고 살았을지도 모를 그 환자. 그러나 환자는 사고 직후 2차병원으로 후송되었고 그곳에서 CT와 각종 검사로 시간을 지체하다가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게 되자, 그제야 세중 병원으로 후송되어왔다. 그러나 결국, 환자는 사망했다. 중증외상환자의 생존률을 높이는 골든하워는 1시간. 그러나 환자는 사고 후 2~3시간이 넘어서야 도착했다. 1시간만 더 일찍 도착했더라도 목숨을 살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그를 괴롭게 한다. 한해 발생하는 외상환자 16만명. 중증외상사망자중, 예방 가능한 사망률 32.6% 살릴 수 있는 환자 10명중 3명이 죽어가고 있다. 그렇게.. 살릴 수 있는 환자들이 죽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스템... 시스템... 외상시스템이 절실하다. 수술실, 중환자실, 인력, 그리고 빠르게 환자를 이송해올 수 있는 헬기까지. 외상을 시작한지 7년을 넘어 8년째가 되어가고 있다. 혼자 아무리 발악을 해봐도 더 이상은.. 감당할 수가 없다. 외상은 시스템이 없이 혼자 유지하기가 불가능한 분야이다. 트라우마센터가 생긴 지도 3년이 다 되어가고 있지만 스승님이 보장해주셨던 3년동안 자리를 잡기는커녕, 더 천덕꾸러기취급만 받고 있다. 병원 관계자들은 내가 빨리 3년을 채우고 나가주길 바라는 것 같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아직은, 아직은, 이렇게 어렵게라도 수술을 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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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함께 일해 주는 파트너도 있으니까... 조금만...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보자... 최인혁. 오늘도 인혁은 이렇게 허공에서만 맴도는 생각들을 해본다. 아무리 애써도 자기혼자만 매달리는 느낌.. 인혁은 고개를 떨군다. 열려있는 트라우마센터의 문, 그 문 밖에 서있는 은아. 그녀는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하고 생각에 잠긴 인혁의 뒷모습만 보고 있다. 어제 들어온 환자가 죽은 뒤로 계속 쳐져 있는 그의 어깨. 그리고 최근 들어 작은 일 에도 쉽게 예민해지는 그. 그녀가 보기에 요즘 들어 인혁은 더 쉽게, 더 빨리 지쳐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를 혼자두면 안 될 것 같다. 이미 퇴근시간이 지났지만, 오늘은 그와 함께 병원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하는 은아였다. 며칠 후, 정신없는 응급실, 교통사고 10중 추돌로 인해 엄청난 수의 외상환자들이 병원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응급실은 이미 풀베드(full bed)에 포화상태. 인혁과 은아는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응급실을 비우고 추가폭발로 인한 환자들과 뒤늦게 들어올 중증 외상환자들을 위해 베드를 확보해놓는다. 그런데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왔던 환자들 중에서 복부초음파 상에 출혈로 간 열상이 의심되는 환자가 보인다. CT도 찍을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인 환자의 상태. 그러나 수술실도 확보할 수 없고 끝내 중환자실도 없는 상황. 어쩔 수 없이 응급실에서 응급수술을 감행하는 인혁. 수술도구도 부족하고 인력도 부족했지만 간신히 수술을 마치고 환자를 응급실 베드로 데려가는 그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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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삑- 삑- 삑- 삑- ]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심박측정기의 소리. 분주한 응급실, 응급실에서 수술을 마친 인혁과 은아는 보호자 면담을 마친 뒤, 심각한 표정으로 환자상태를 확인한다. 그때, 병동과 이어지는 통로사이로 황과장이 갓 출근한 차림으로 나타난다. 그는 보는 눈이 많은 것을 의식해서인지 화를 간신히 참아내며 인혁을 불렀다.

“ 최선생!............... 나 좀 봅시다.... ” “ .......... ”

뒤를 돌아본 인혁. 지쳐있는 눈빛으로 황과장을 쳐다본다. 인혁을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던 황과장이 빨리 따라오라는 듯 눈빛을 보낸다.

“ .......휴... ”

황과장을 발견한 은아는 결국, 올 것이 왔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 상처받을 인혁이 걱정되는 그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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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 2층 복도,

“ 저 환자야?! ” “ 예. ” “ 외과 계 중환자, 최 선생이 다 볼꺼야? ”

잠시 황과장의 시선을 피했던 인혁은 비꼬는 황과장의 말에 고개를 들어 정확히 그를 응시한다. 자신에게 눈을 똑바로 뜨고 있는 인혁이 더 마음에 안 드는 그.

“ 다른 과 환자까지 일반병실로 올려라 말아라 할 것 같으면, 외상 그만두고 중환자실을 전담해서 맡던가!! ” “ 워낙에 급한 환자였습니다. ”

응급실쪽을 가리키며 말하는 황과장. 점점 그의 목소리가 상기되고 있었다.

“ 수술하고 응급실에 그냥 있잖아! ” “ 예 ” “ 그럼 애당초 응급실에 둘 걸 왜! ” “ 응급실의 간호사는 두세명의 환자만 전담해서 보는 게 아니잖습니까. 수십 명의 환자 를 보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중환자를 같이 케어하는건 불가능합니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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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선생이 직접보든가...! 그러지 못 할꺼면 다른 병원으로 보냈어야지!!” “ 보냈으면 죽었을 겁니다.” “ 어~허!! 여기가? 최선생 개인병원이야?! 수술실이나 중환자실 조건이 충분히 받쳐줘야! 환자도 받는거지!! 자리가 없어서 못 받겠다면 다른병원으로 보냈어야지!! 아니, 그것도 아니면 혼자 중환자를 다 케어 하든가!! 여기에 최인혁 당신보다 못 한 사람있어?!! 다들 자기분야에선 대가들이야!! 어떻게 꼭 본인이 받은 환자들만 중요한가?!! 너는 뭐, 과 구 분도 없고, 위아래도 없어?! 환자가 당신말대로 올라가라면 올라가고 뭐 내려가라면 내 려가야돼? 뭐 짐짝이야 뭐야!! 오죽하면 내가 공항에서 전화를 받고 이렇게 달려와!! 최 선생 뭐 일 하루 이틀해?!”

황세헌, 해운대세중병원에서 그는 실력있고 세력있는 정형외과 과장이었다. 게다가 그는 한때 인혁의 스승이기도 했다. 대학시절,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된 그의 밑에서 잠깐 동안 수업을 받았던 인혁. 그래도 한때 스승이었던 그이기에 더 이상 대꾸할 수 없는 그. 그는 지친얼굴로 팔을 모아 서서 황과장의 일방적 비난을 다 받아낸다. 응급실이 내려다보이는 2층 회의실. 황과장의 온갖 비난을 다 받아내고 전의를 상실한 인혁. 다음수술이 또 잡혀있었지만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생각에 잠겨있다. 몸이 찢어져라 수술하고 나서도 이렇게 욕을 듣는 그.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는 그의 몸. 지쳐 보이는 그의 얼굴.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그는 점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오고 놀라서 뒤돌아보는 인혁. 그를 찾아 문을 열었다가 지쳐있는 인혁의 모습을 보고는 그가 쉴 수 있게 나가주려는 은아. 인혁이 그런 그녀를 발견하고 은아를 불러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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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나.. 흠... 나, 괜찮으니까 들어와요! ”

은아가 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들어온다.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전화기. 난처한 표졍의 그녀. 뭔가 있나보다.

“ 뭐에요? ” “ QI실인데요..!. ”

여전히 난처한 표정으로 인혁의 눈치를 보며 말하는 그녀. 또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인혁은 한숨을 몰아쉬며 전화기를 건네받는다.

“ 예.. 최인혁입니다... ” “ 타임아웃 때문에 전화드렸습니다. 이 달에만 벌써 세 번입니다! 병원에서 정책적으로 인증평가 준비를 하는건데.. 이렇게 협조가 안되며..ㄴ...... ” ( ※ 타임아웃 : 정확한 환자정보, 수술부위확인, 수술실안전문제 확인. )

짜증이 치밀 대로 치민 인혁. 병원직원에 말을 끊고 대꾸한다. 은아는 가까이 와서 전화 내용을 같이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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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그, 복부출혈에 좌우가 어딨습니까~! 초 응급 상황에서 그 정도 마킹이상 어떻게 합니까! 아니 사정이 있는 건데 모든 수술을 그렇게 일률적으로 제단을 하시면..!.. ” “ 인증평가 받아야하니까~! 앞으로 누락건수 절대 없도록! 각별히 신경써주세요! 그리고 환자 신상과 이름세번이상! 반드시 확인 좀 해주시고요..“

[ 삑- ] 터지기 일보직전의 인혁. 전화를 그냥 끊어버린다. 그런 그의 표정을 놓치지 않는 은아. 그녀가보기에 이대로 가다간 인혁이 먼저 스트레스로 쓰러지게 생겼다.

“ 아니, 이 사람들이 병원직원 맞아요? 응급이 뭔지 모르나?! ”

은아는 그가 폭발하기 전에 먼저 그를 풀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던 그녀. 깍지를 끼고 손을 풀더니 뒤에 있던 접시를 바닥에 던져버린다.

[ 쨍그랑--!! ]

경쾌한 소리를 내며 깨져버리는 접시. 화를 삭이려 밖을 내다보던 인혁은 갑자기 깨지는 접시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고 은아가 접시를 깬 걸 알고는 놀라서 눈이 커져 그녀를 쳐다본다. 그가 어떻게 말려볼 새도 없이 이번엔 커피포트를 집어 들며 말하는 그녀. 인혁은 급하게 그녀를 말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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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더?! ” “ 아니! 그, 그거는 너무 비싸고... ” “ 그라믄, 어떤거요?! ”

인혁이 잠시 망설이더니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키며 나지막이 말한다. “ 저거 ” “ 요거? ” “ 아니, 저거! ” “ 요고? ”

인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본다. 은아는 그를 보더니 오케이!라고 말하며 회심의 미소와 함께 컵을 집어 아까랑 똑같이 바닥에 던져버린다. 또다시 쨍그랑 소리가 나며 컵이 깨지고. 그녀덕분에 뭔가 속이 시원해짐을 느끼는 그였다. 피식- 하고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는 인혁. 그의 얼굴에 오랜만에 환한 미소가 번진다. 인혁의 기분이 풀린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은아. 그녀역시 기분이 좋아진다.

“ 교수님~! 수술 한 건 더있으시죠~? 힘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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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아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인혁을 응원 해주고는 핸드폰을 챙겨들고 일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자신을 생각해주는 그녀가 고마워서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그. 그녀 덕분에 지치고 힘들었던 마음이 스르르 녹아 없어져 버린다. 참, 언제나 고마운 그녀였다. 늘 그보다 먼저 그의 상태를 알아채고 그가 화나거나, 슬프거나, 아플 때도 그를 대신 해서 화내주고.. 그를 대신해서 슬퍼해주고.. 그런 그녀였다. 늘 외롭고 지쳐있을 수밖에 없는 인혁에게 언제나 힘이 되어주는 그녀.

‘ 예전에도 이랬었는데.... ’

기분 좋은 생각들.. 힘을 내기 위해 고개를 젖혀서 숨을 크게 들이 마시는 그였다. 은아가 없었다면 인혁은 이미 오래전에 병원을 그만뒀었을 것이다. 아마... 이렇게 오랫동안 버티질 못했을 것이다. 은아는 그때나 지금이나 늘 그의 편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그녀와 처음 일을 시작했던 날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 . . 2년전..... 어느 날, ※ 추천브금 : 에브리싱글데이 - cold(Inst.)

( 다시 과거시점 ) 피 칠갑이었던 그를 만난 다음 날, 은아가 일하는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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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인혁과 헤어지고 나서 잠깐 눈을 붙였다 출근을 한 뒤, 하루 종일 그 일을 곰곰이 생각해본 은아. 그가 제안한 일은 분명히 해보고 싶은 일이었다. 그녀가 새로 도전하고 싶은 일... 물론, 결혼을 위해서라면 캐나다도 중요했지만.. 낯선 캐나다에서 일하는 것과 익숙하고 편안한 한국에서 일하는 것은 분명 다를 것이다. 그녀는 한국에서 새로운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은아의 두 눈이 빛난다.

‘ 이렇게 가슴 뛰는 일을 어떻게 놓칠 수 있겠노..... 어차피 캐나다는 1년 후에 가기로 했으니까... ‘

그녀의 마음은 이미 일이 하고 싶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오랜 고민 끝에 결심을 굳힌 그녀. 퇴근하기 전에 응급실장실을 찾는다.

[ 똑- 똑- 똑- ]

“ 네- ”

대답이 들리자 문을 열어보는 은아. 응급실장은 무슨 일이냐는 얼굴이다.

“ 저, 실장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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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신간호사, 퇴근준비하노? ” “ 아-, 네.. 근데.... 저.. 드릴말씀이 있는데요..! ” “ ...?.... 나한테..? 무슨..? ” “ 아,, 저, 그 일 해보려고요..! ” “ .... 일..? 무슨...? ”

머리를 굴리며 무슨일인지 생각해보는 응급실장. 은아는 조금 답답했는지 목소리를 키운다.

“ 아, 그거 있잖아요~ 외상 코디네이터인가... 그, 세중병원에서 간호사 뽑는다는 그거요! ” “ 아~~~~~ 그거! 함 해본다꼬? 그런데 저번에는 캐나다 가야한다고 안한다고 하지 않았 나?? ” “ 그게... 한번 해보고 싶어졌어요. 음.. 캐나다가기 전에... 저도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한 번 해보고 떠나야될 거같아서... ” “ 아,, 그래? 하긴, 뭐, 결혼하면 하고 싶은 일도 제대로 못하지 않겠나? 잘 생각했다~! 아, 근데 그러면 신간호사 퇴직서류 만드는 것도 앞당겨서 해야겠네~? 이야~~ 그럼 이제 신 간호사 진짜로 못 보는기가? 많이 아쉽네, 신간호사 없으면 여도 잘 돌아갈지 모르겠 네~ 진짜 고생 많이 했는데. ” “ 아휴.. 뭘요, 고생은요.. ” “ 뭘요라니~! 중환자실이랑 응급실이랑 번갈아 왔다 갔다 하면서 고생이라는 고생은 다 했제~~ 솔직히 신간호사만큼 일 잘하는 사람이 어데있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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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장이 그녀를 띄워주자 은아는 이 병원에서 보낸 지난날들이 생각나는지 추억에 젖은 표정으로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런 그녀를 보고 뿌듯하다고 느끼는 응급실장도 기분 좋게 말을 이어간다.

“뭐, 암튼 간에 내 거기 선배님한테 연락해보고~ 신간호사한테 알려주께! ” “ 아, 네..! 그래주시면 감사하고요. ”

응급실장과의 대화를 마친 그녀가 방을 나온 뒤에 기분 좋게 퇴근할 준비를 한다. 세중병원, 인혁의 사무실, 오전시간이라 수술이 없는 인혁. 잠깐이라도 좀 눈을 붙이고 싶었지만 심포지엄자료 준비에 대한 압박감으로 인해 쉬지도 못하고 소파에 앉아 자료정리를 하고 있다. 그러다 어제 은아와의 일을 생각해보는 인혁. 과연 그녀가 외상코디네이터를 하겠다고 할 것인가... 이런저런 걱정과 피곤함 때문에 오늘은 자료도 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때 누군가 힘차게 문을 열고 들어온다.

[ 벌컥- ]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인혁.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나병국과장이었다. 엄청나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들어오는 나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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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 최인혁선생!! 능력있네~ 능력있어!! ”

뜬금없이 인혁에게 능력 있다고 칭찬을 하는 나과장. 인혁은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어 또 벙찐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 이야~~ 도대체 어떻게 한거야? ” “ .......?......무슨 말씀이신지..? ” “ 어떻게 해서 안하겠다는 사람마음을 돌려놓았느냐고~~ 그때 말했던 그 간호사있지? 내 후배가 대신 추천했었는데 캐나다가야 한다고 안 하겠다고 했었던! ” “ 아! 신은아씨 말씀이십니까..? ”

은아의 얘기가 나오자 인혁의 표정이 밝아진다. 혹시나 하고 기대해보는 그.

“ 오~! 그래! 그 사람!! 방금 후배한테 연락이 왔는데~! 갑자기 하겠다고 그런다네?!! ” “ 그..! 그게 정말입니까?!!! ” “ 그래~~! 이야... 진짜, 외상코디네이터 안 구해지면 어쩌나 얼마나 고민을 했는데! 그것 도 그런 경력자를~!! 잘됐어! 암~ 잘됐지!”

신나서 말을 이어가는 나과장. 그의 말에 인혁은 얼떨떨하기만 하다. 사실 기대를 안 하고 있었던 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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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자일수록 이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 것이기에 더 지원할 이유가 없었을텐데... 라고 생각하는 그.

“ 아무튼! 다음주 월요일부터 바로 출근하라고 해놨어!! 이제 응급실도 한숨 돌릴 수 있 겠어~! 더 이상 응급실 간호사 빌려줄 필요도 없고! 자네!! 이번에 들어올 코디네이터는 도망가게 하면 안 되는 거 알지?! 어떻게 뽑은 코디네이터인데..! 알아서 잘하란 말이 야~! 만약!! 또 도망가게 하면 그땐 트라우마센터고 뭐고 자네 티오부터 도로 가져갈 줄 알아!! 진짜야~! 농담 아니야~~!! ” “ 아.... 예, 알겠습니다. ”

나과장은 인혁에게 다시 한 번 명심하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이내 다시 기분 좋다는 표정을 하며 방밖을 나간다. 나과장이 또 휙- 하고 들어왔다가 휙- 하고 나가버리자 또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인혁이었다. 잠시 생각을 하더니 피식- 하고 웃는 인혁. 드디어... 외상 코디네이터가 생겼구나, 그것도 그런 경력자를.... 아.. 이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겠구나 싶은 그였다. -

※ 추천브금 : 손승연 - 너를되뇌다(Inst.)

며칠 후, 월요일. 은아의 첫 출근 날, 그녀의 집에서 병원까지의 거리가 꽤 되었기 때문에 은아는 일찌감치 일어나 서둘러 준비를 하고 출근을 한다. 세중병원에 도착하니 6시 반. 벅찬 마음으로 응급실로 들어서는 은아. 그녀의 눈이 조금 커진다. 새로지은 지 몇 년 안 된 건물이라서 그런지 넓고 깨끗한 세중병원의 응급실. 게다가 원형의 데스크와 데스크를 중심으로 퍼져있는 응급실 침대들. 확실히 은아가 일하던 병원보다는 규모에서 차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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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바쁘게 자기할일만 하고 있던 응급실 사람들. 그녀가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서있자 한 간호사 와서 말을 건다. 다가온 간호사를 보고 이제야 아차! 싶은 은아가 밝게 인사를 건네며 자신의 소개를 한다.

“ 무슨 일로 오셨어요? ” “ 아,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외상코디네이터로 일하게 된 신은아입니다. ”

......... !!?!!!?!!!!!?!!!..........

그녀가 자신의 소개를 하자 일제히 그녀에게 쏠리는 시선. 환자들을 제외하고 응급실 내에 있는 모든 간호사와 의사들이 그녀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빛은 다양했다. 간호사들은 이제 살았다는 기쁨의 표정을, 인턴들은 그녀를 향한 동정어린 시선을, 몇몇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일제히 쏠린 시선들과 사람들의 표정 때문에 순간, 인사를 하다말고 당황하는 은아.

‘ 뭐...뭐꼬! 와 이렇게들 쳐다보노..? ’

응급실 사람들 속에 섞여 이제 살았다는 표정으로 은아를 쳐다보기만 하던 도형. 이내 정신을 차리고 인턴들에게 소리친다.

“ 니..니들 뭐하는데!! 빨리 할일 못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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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형의 목소리에 그제야 인턴들을 비롯한 응급실 사람들은 은아에게 눈인사를 한 후 각자 자기할일들을 다시 한다. 여전히 무슨 일인가 싶어 제자리에 서있던 은아에게 도형이 다가와서 인사를 건넨다.

“ 아.. 안녕하십니까! 새로 오신 외상 코디네이터시라구요? ” “ 아... 네!” “ 혹시 최인혁교수님하고는 인사하셨어요? ” “ 아... 오늘은 지금 막 출근한 거라 아직 못 뵀어요. ” “ 아.... 예, 그.. 지금은 교수님 응급수술 들어가셔 가지구요. 거의 다 끝나시긴 하셨을텐 데... 일단, 사무실에 가서 기다리셔야할 것 같거든요? 잠시만요! 김 간호사님!! ” 도형이 간호사 한명을 부르고, 제일 어려보이는 간호사 한명이 그의 부름에 대답을 한다.

“ 네~! ” “ 김 간호사님이 여기 이분, 최 교수님 사무실로 안내 좀 해주세요, 여기, 김 간호사님 따라가시면 됩니더 ”

간호사에게 안내를 부탁한 도형. 그러고는 은아에게 그 간호사를 따라가라고 한다. 은아를 향해 손짓하는 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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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선생님~! 저 따라오세요. ”

선생님..? 은아는 사람들의 행동이 이상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일단 간호사를 따라나서고.. 간호사는 별관건물 2층에 있는 사무실로 그녀를 데려간다. 사무실 앞에 도착한 두 사람. 간호사가 은아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조심스레 말한다.

“ 여기에요! 아... 저... 여기 있기 싫으시면, 주로 응급실에서 내려오셔서 저희랑 같이 일 하시면 되요.” “ ..?.... 아...네. ” “ 이제 들어가셔서 기다리시면 되구요! 그럼, 저는 바빠서, 먼저 내려가 볼게요~ 하 하....... ”

아직 상황파악이 안 되는 은아. 그녀는 간호사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지만 일단은 알겠다고 대답한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응금실로 내려가는 간호사가 그녀에게 안쓰럽다는 듯한 눈빛을 준 것 같은 기분은 그녀만의 착각이었을까..? 어찌되었건 일단 문을 열고 트라우마센터로 들어가는 은아.

.........!!!!!..........

그녀의 입이 떡하니 벌어진다. 문을 열고 들어간 그녀의 눈에 보이는 건, 난장판으로 어질러질 대로 어질러진 사무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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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이 그렇게 작은 규모도 아닌데, 온갖 서류들이 책상, 소파, 테이블 할 것 없이 널려있었고 책상위엔 노트북, 찌그러진 채 쌓여있는 자판기 종이컵들. 테이블 위에는 쌓여있는 컵라면용기들. 심지어 구석에 있는 의자위에는 빨아 놓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양말들까지... 걸려 있었다. 그녀가 들어가더라도 앉을자리하나도 없어보였다.

‘ 뭐...뭐꼬?? 이.... 이게... 사무실이라고.....? ’

당직실도 이것보단 낫겠다.... 그녀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 앞에 서있기만 했다.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사복차림으로 방금 출근한 것처럼 보이는 어떤 남자. 인혁에게 전해줄 것이 있어 잠깐 들른 한구였다. 인혁의 사무실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은아를 의아하게 쳐다보는 한구.

“ 저...누구...신지? ” “ .....?..... 아, 저는 외상코디네이터로 일하게 된 신은아입니다. ” “ ...!!!... 아~~~~ 신은아씨!! 아~ 결국 오셨네요? 근데 왜 여기서 이러고...? ” “ 아, 그게 수술을 들어가셨다고 해서.... ”

난처한 표정으로 사무실 쪽을 보며 말하는 은아. 한구도 그녀를 따라서 사무실 안쪽을 보고는 경악을 한다. 그는 사무실로 먼저 들어가면서 소파에 있는 걸 대강 치우고는 짜증 섞인 혼잣말을 내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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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이 자식이... 정리 좀 하고 살라니까... 앉을 자리가 없으셨죠? 여기 앉으셔서 기다리시면 될 꺼에요. 아.. 근데 어쩌나... 최 교수 수술 들어갔으면 한참 걸릴 텐데... ” “ 괜,, 괜찮아요.. ㅎㅎ..... ”

억지로 웃음을 지으면서 괜찮다고 하는 은아를 보며 속으로 큰일났다고 생각하는 한구.

‘ 아... 오늘이었구나... 이 미친놈.. 사람이 올 거면 정리를 좀 해놨어야지! 이건 뭐 오자 마자 도망가겠네... 아휴...‘ “ 아.. 그러면 최교수 내려올 때까지 일단 좀 쉬고계세요! 그럼 전.. 올라가봐야되서... ”

한구는 서둘러 자리를 피해버리고, 그녀는 또 하염없이 그를 기다린다. 은아는 왠지 간호사들이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앉을자리하나 없는 그곳에서 혼자 인혁을 기다리던 은아. 시계를 보니 아직 7시밖에 되지 않았다. 어렵게 내린 결정이었던 만큼 전날에 긴장하고 들떠있어서 그랬는지 자신이 조금 일찍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내가 너무 일찍 왔나.. ? ’

그녀는 한참이 지나도 인혁이 오지 않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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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일없이 마냥 그를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 있는 자료를 둘러보기 시작한다.

‘ 뭔 서류들이 이렇게 많지..?.. “

가장 가까이 있는 서류 하나를 집어 드는 은아. 자료에는 5월 초에 열릴 국제 심포지엄소개에 관한 내용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 5월? 두 달밖에 안 남았는데..? “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드는 그녀. 읽던 자료를 내려놓고 다른 자료들도 한번 씩 훑어본다. 나름대로 분류를 해놓긴 해놨었는지, 바로 앞에 있는 노트북 주변에는 각종 영어논문들과 자료들, 의학서적을 복사한 자료가 대부분이었고 테이블에는 주로 외상시스템에 관한 자료들, 그리고 책상 쪽에 쌓여있는 자료들은 환자 기록과 사진자료가 대부분이었다. 이곳이 앞으로 그녀가 일하게 될 곳, 미리 익숙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조금 정리를 해볼까 하는 생각에 사무실을 한 바퀴 둘러보던 그녀. 주로 지저분하게 널려있는 것들은 파일들과 서류들이었지만 나름대로 구분되어 있는 것들 같아서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았다. 결국, 그녀는 청소와 기본적인 정리만 해야겠다 싶어서 테이블에 놓여있는 컵라면용기부터 치우기 시작한다. 여기저기 몰입하며 치우다보니 구석구석 쓰레기와 먼지투성이고, 왠지 앞으로 힘들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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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환자실 앞, 수술 후 보호자와의 면담을 마친 인혁이 곧바로 중환자실로 와서 환자의 상태를 체크한다. 다행이 바이탈은 안정되고 있었지만 아직 배를 열어놓고 있는 상태라 안심할 수가 없었다. 간호사에게 주의할 것들을 알려주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중환자실을 나서는 인혁. 트라우마센터로 가는 길, 요즘 심포지엄준비 때문에 밤낮없이 일을 하느라 안 그래도 지쳐있던 그였는데 새벽에 응급수술 두개를 연달아서 하고 나니 인혁의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그는 피곤에 찌들어있는 모습으로 목이 뻐근한지 연신 뒷목을 치며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마침내 트라우마센터 앞에 도착하고 문을 열려는데 마침, 그때 울리는 그의 휴대폰. 설마 또 응급환자인가 싶어 급하게 전화를 받는 인혁.

/ 삐리리리릭- 삐리리리릭- 삑- /

“ 예! 최인혁입니다. ” [ 아, 최인혁교수님이십니까! 저는 지역의사협회전남지부 배천웅입니다. ]

다행이도 응급환자가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안심하고 통화를 이어나가는 그.

“ 아, 예, 그런데.. 무슨 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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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다름이 아니라 5월에 열리기로 한 심포지엄 때문에 연락드렸는데요.... ]

심포지엄이라는 말에 뜨끔하는 인혁. 사실, 인혁은 원래 일하던 외상코디네이터가 그만 둔 뒤로 거의 심포지엄 준비를 진행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혼자서 외상환자의 수술과 케어를 모두 감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심포지엄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던 그였다. 그나마 한 달 전부터 간간히 응급실에서 인력을 빌려와서 조금씩 자료를 모으고 문서화시키는 정도였다.

“ 아~ 국제심포지엄이요? 아.. 그.. 저희 쪽은 좀 빠듯하긴 하지만.. 뭐, 잘 준비되고 있습 니다 ” [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저.. 영국 트라우마 연구센터에서 박사님 한 분을 초청하기로 했잖습니까? ] “ .....?.....예, 그랬지요. ” [ 아.. 그런데, 그쪽이랑 연락을 하는 과정에서 소통상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그... 원래 5월에 오시기로 한줄 알았던 그분이, 알고 보니 4월에 오신다고 하더라구요..... 저... 그 래서 심포지엄이 한달 정도 앞당겨질 거 같아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 “ 예?!!?!!! ”

인혁의 목소리가 커진다. 한 달이라니... 말도 안되었다. 한 달 만에 저 많은 자료를 정리해서 발표를 준비한다는 건... 게다가 응급환자 수술과 케어를 혼자서 감당하고 있는 인혁에게는 더욱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커지자 수화기너머로 연신 죄송하다며 사과하는 주최 측 관계자.

[ 정말로 죄송합니다! 저희가 주최를 하는 입장인데 이런 실수가 있어서.. 정말로 죄송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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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 “ 아니!! 갑자기 이러시면...! 미리 말씀을 좀 해주셔야... ”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낀 그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거칠게 트라우마센터 문을 열고 들어간다.

/ 벌컥- /

문이 열리고, 통화를 하며 들어오다가 은아를 보고 놀라 멈추는 그. 책상 위를 닦고 있는 은아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온다.

......?!?!!.......

문소리가 나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는 은아. 역시나 오늘도 수술복차림인 인혁이 통화 중이었는지 전화기를 귀에 댄 채로 멈춰서있었다. 그를 향해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를 하는 은아. “ .......?!!!... 아! 오셨어요? ”

그녀의 모습을 보고 아차! 싶은 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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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 분명히 아침까지만 해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

연달아 응급수술에 들어가느라 정신이 없어서 은아가 출근한다는 걸 깜빡했던 그였다. 그러나 그녀에게 미안해할 새도 없이 전화기 너머로 주최 측 관계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정말로 죄송합니다! 저희도 어제 연락을 받아서요, 아.. 그리고 정말 죄송한데요. 오늘 주최자들끼리 긴급회의를 좀 해야할 것 같은데..

최 교수님 혹시 오실 수 있겠습니까..?

] “ 긴급회의요..? 아.... 이렇게 갑자기..... 저, 그런데.. 제가 병원을 비우기가 좀.. ” [ 아.. 그래요... 이거 어떡하죠.. 일정이 변경되는 바람에 몇 분이 심포지엄에 참여 못하 신다고 하시거든요, 그래서 오늘 발표하실 분들이 다 모이셔서 개최준비점검이랑 역할조 정을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오늘 말고는, 다 같이 모이실 수 있는 날이 없어서요.. 저 기 어떻게,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주실수 없겠습니까? ]

곤란한 표정의 인혁.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입을 연다.

“ 저, 그러면요. 제가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혹시 어디서 모이기로 했습니까? ” [ 아! 저녁 7시에 창원대학교에서 모이기로 했습니다! 오실 때 지금까지 준비하신 자료 가져오시면 되구요! 최 교수님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연락기다리겠습니다! ] “ 아, 일단 알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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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끊어지고, 인혁의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한다. 창원까지는 1시간이 조금 넘는 거리. 시계를 보는 인혁. 아침 8시. 앞으로 10시간이나 남았지만 회의에 가져갈 심포지엄 자료정리도 해야 하고, 방금 수술한 환자들 자료정리와 회진까지 소화하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마음이 급해지면 감정컨트롤이 잘 안 되는 인혁. 은아는 다급해보이는 그를 보며 무슨 일인가 싶어서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는데, 다짜고짜 그녀에게 일을 시키는 인혁.

“ 아, 저 미안한데요! 급해서 그러는데, 응급실 나병국과장님한테 연결 좀 해줄래요? 번 호는 저기 긴급연락망 보면 있을거에요! ” “ 아..! 예! ”

인혁의 다급한 부탁에 얼떨결에 대답해버린 은아. 덩달아 급해진다. 그녀가 긴급연락망에서 번호를 찾고 있는 사이 인혁은 테이블 위에 자료를 급하게 뒤적거리기 시작한다. 은아가 기껏 각을 잡아 정리해놨던 서류들은 금세 본래 모습대로 흩어졌다.

“ 혹시 여기 있는 서류들 만졌어요?!! ”

인혁은 파일과 서류들 사이를 뒤적거리다가 자신이 원하는 자료가 없는지 약간 짜증이 섞인 말투로 은아에게 묻는다. 조금 황당하긴 하지만 침착하게 대답해주는 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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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요! 서류 위치들은 안 건드렸어요, 그냥 차곡차곡 쌓아만 놨는..ㄷ " “ 아! 여깄네! ”

그녀의 말을 듣는건지 마는건지 인혁은 노란 파일을 하나 집어 들고는 소파 앞으로 가서 노트북을 켠다. 그 사이 은아는 나병국과장한테 연결을 하고 신호음이 들리더니 바로 나과장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예, 응급실장 나병국입니다~ ]

일단 인혁이 시키는대로 전화연결을 하긴 했는데 막상 어디라고 말해야할지 당황스러운 은아. 순간 인혁의 이름이 떠올라서 얼떨결에 대답을 한 후 얼른 그를 부른다.

“ 아... 네..네! 여기 최.. 최인혁 교수님 사무실인데요? 잠시만요! 저기! 전화연결 됐는데 요! ”

인혁은 열중하면서 자판을 두드리다가 그녀의 말에 얼른 달려와서 수화기를 건네받는다. “ 예! 과장님 저 최인혁입니다. 그, 다른 게 아니고요! 혹시 오늘 당직 좀 구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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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무슨 소리야..? 당직이라니?! ] “ 아, 제가 갑자기 급한 일이 좀 생겨서요! 그 국제 심포지엄 있잖습니까! 갑자기 일정이 앞당겨지는 바람에 창원에서 긴급회의가 있다고 해서요...! 오늘 저녁에 제가 병원을 좀 비워야할 것 같습니다...! ” [ 아, 참나, 갑자기 오늘당직을 어떻게 구해~! ] “ 아..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 [ 나, 참..... 뭐 어쨌든 알겠으니까! 일단 끊어봐! ]

전화를 끊은 인혁은 또 급하게 노트북 앞으로 가더니 서둘러 자판을 두들긴다. 은아는 이 난감한 상황에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멀뚱히 서 있었다. 사실, 그녀로써는 조금 황당한 상황이기도 했다. 출근하고 한참을 기다리다가 이 지저분한 방을 청소까지 해놨는데 인혁은 그녀가 있건 말건, 아무런 인사도 없고 아무런 설명도 없이 들어와서는 자기 할 일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에게 뭔가 급한 일이 생긴 것 같고 그가 너무나도 바빠 보였기 때문에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를 도와주기라도 하려면 무슨 일을 해야하는지 설명이라도 들어야했기에 은아는 안되겠다 싶은 마음에 인혁을 부른다.

“ 저.. 저기요?! ”

그는 은아의 목소리를 못 들었는지 고개도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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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기요!!! ”

본의아니게 목소리가 커진 은아.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인혁은 그녀를 쳐다본다. 잠시 몇 초간에 정적이 흐르고. 그제서야 상황파악이 된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 아, 저, 갑자기 일이생기는 바람에 정신이없어서... 미안합니다.. 설명도 안 해드리고.. 그, 아까는 응급수술 때문에...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 “ 아니요.. 그건 아닌데.. ”

말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녀의 표정을 보니 그를 많이 기다렸던 것 같다. 은아에게 미안한 인혁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그녀를 보다가 그녀의 손에 아직도 쥐어져있는 걸레를 발견한다. 이제야 사무실을 둘러보며 말하는 인혁.

“ 저..... 그..근데.... 청소를...? ”

이곳저곳 쌓여있던 쓰레기들은 사라지고... 어지럽게 놓여있던 서류들과 물건들은 각이 잡힌 채 놓여있었다. 방금 인혁이 또 어질러 놓은 테이블을 제외하고는 책상, 소파 모두 전보다 한결 깨끗해져있었다. 사실, 그의 사무실은 어느 순간부터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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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통만 비워줄 뿐, 포기해버리고 건드리지 않는 곳이었다. 그도 지저분하다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워낙 많은 수술과 심포지엄준비로 인해 잘 시간도 없이 일하던 그였기에 청소 같은 건 할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이래저래 은아에게 미안하고 고마워지는 인혁이었다. 인혁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자 좀 민망해진 은아.

“ 아! 그... 방이 좀.. 지저분해보여서요. 그냥 기다리는 동안 조금 치워놨어요 ” “ 조.. 조금 지저분한 게 아니었을 텐데... ”

그가 잘 들리지도 않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인혁의 말을 못 알아들은 은아가 다시 한 번 되묻는다.

“ 네? ” “ 아..! 아닙니다. 저기 일단 앉으시죠..! 그.. 그건 이리주시고... ”

그녀가 걸레를 쥔 그대로 소파에 앉으려 하자 인혁이 그녀에게 걸레를 달라는 듯 손을 내민다.

“ 아, 네! ”

바로 그에게 걸레를 건네주고는 소파에 앉는 그녀. 인혁은 건네받은 걸레를 창가구석에다 두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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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마주보며 소파에 앉는다. 잠시 둘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기운.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할지 모르겠는 인혁이 손만 만지작거리고 있고 은아는 인혁을 빤히 보며 그가 먼저 얘기를 꺼내길 기다리고있었다. 그러다 인혁이 먼저 입을 연다.

“ 아... 그... 음....

저, 우선, 따로 인수인계를 해줄 시람은 없을 겁니다. 전에 하던 코디

네이터가 갑자기 그만두게 돼서요. 그.. 알고 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외상을 다루는 의사구요, 응급의학과하고는 다른 일입니다. 여기는 트라우마센터라고 저번에 오토바이 사고가 났던 그 환자같이 중증외상 환자들을 전담하는 곳입니다. ” “ 네.. 그건 들었어요. 조금 찾아보기도 했고.. 저.. 그러면 앞으로 제가 해야할 일은...? ” “ 아! 해주셔야할 일은.. 뭐, 일단은 기존에 해왔던 응급실업무는 기본이고요, 외상환자수 술기록정리, 수술 후에 환자 케어, 일지정리, 바쁘면 수술실도 따라 들어오셔야하고.. 아, 가끔 학회나 심포지엄이 있는데 자료 찾고 정리하고, 발표자료 만들고.. 이런 것들을 도 와주시면 되고요. 음... 또, 환자가 이송되올 때 병원들이랑 연락도 해주셔야하고.. 아무 튼, 외상의가 하는 일들을 서포트해주시고... 그, 외상센터 업무에 관한 모든 일을 관리한 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

인혁이 슬쩍 그녀의 눈치를 본다. 역시나 그녀가 조금 놀란 눈치다. 미리 이것저것 찾아보고 온 터라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던 은아였지만 막상 얘기를 들으니 생각보다 일이 너무 광범위한 것 같았다.

“ 아.. 그럼, 혹시 몇 명이서 같이 일하죠? ”

그녀의 질문에 난처했는지 인혁의 표정이 살짝 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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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게.... 지금으로써는 저...랑 신은아씨 두 명입니다. 뭐, 앞으로는, 응급구조사랑 실습 학생이 충원될 수도 있습니다. 저.. 혹시 언제까지 일해주실 수 있습니까? ” “ 아, 아시겠지만 제가 결혼 때문에 캐나다에 가기로 되어있어서요, 지금은 6개월 정도 생각하고 있고.. 아마 길어도 1년 정도가 될 거 같아요. ” “ 아... 그렇군요.. ”

왠지 은아의 말을 들은 그의 얼굴에 힘이 없어보였다. 잠시 생각에 빠진 듯 한 인혁. 그런 그의 표정을 보고는 조금 걱정이 되는 은아.

“ 저.. 괜찮으세요..? 제가.. 너무 짧게 일하는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 “ 아! 예! 괜.. 괜찮습니다! 다 알고 있던 거니까요.. 그래도 신은아씨만한 경력자를 어디 서 구하겠습니까. ” “ 아.. 그런가요..? 그런데 저...

제가 최교수님이라고 불러드리면 되겠죠? 제가 너무 불

편해서요.. ”

은아는 그가 민망할까봐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묻는다. 아까부터 어떻게 부를지 몰라 계속 불편하던 참이었다. 그녀의 말에 또 아차!싶은 인혁이었다.

" 아.. 예! 뭐.. 그렇게 부르시면 될 겁니다. “ “ 그런데 교수님은 언제까지 신은아씨라고 부르실거에요~ ” “ ...?!!... 아! 네.. 그렇죠! 그... 앞으로는, 신선생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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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로 약간 장난스럽게 묻는 그녀의 말에 너무 진지하게 대답하는 인혁. 그의 말에 피식- 하고 웃음이 터지는 은아. 뭔가 굉장히 어색한 대화였다. 나이차이도 한참 나는 것 같고, 보통이면 그냥 의사들이 먼저 말을 놔버릴 텐데 뭘 이렇게 어려워하시는지... 낯가림이 심하신가..? 그가 조금 답답해 보이긴 했지만 그런 인혁의 태도가 싫게만 느껴지지는 않는 그녀였다. 한편, 인혁은 이 상황이 굉장히 민망하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먼저 부드러운 분위기를 이끌며 똑부러지게 정리를 해주는 그녀가 고마웠다. 다들 그를 무섭거나 어렵게만 느끼고 피하기만 했지 그에게 스스럼없이 이렇게 다가와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전에 있던 코디네이터랑은 이런 얘기조차 한 적이 없었다. 나병국과장이 알아서 다 설명해주고 데려온 사람이라서 이런 세세한 설명을 인혁이 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그때는 어머니를 잃은 아픔과 갓 복귀한 병원에서의 스트레스 때문에 워낙 인혁이 예민해져 있을 때였다. 때문에 전임 코디네이터는 쉽게 그에게 말을 걸지도 못했었다. 인혁이 느끼기에는 그녀가 먼저 몇 번의 대화를 시도하려고 했었던 것 같지만 그럴 때마다 그저 ‘예’, ‘아니요’ 라는 짧은 대답만 했던 그였다. 그러다가 응급환자가 들어오면 제대로 가르쳐주지도 않고 화내고 소리부터 지르고... 그래서인지 그 코디네이터는 주로 트라우마센터가 아닌 응급실에만 상주해 있었다. 그녀는 최대한 인혁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었던 것 같다. 사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좀 심하긴 했었다. 그러나 그때의 인혁은 옆에 있는 누군가를 신경써줄 여력이 전혀 없었다. 미안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그 코디네이터가 그만두고 혼자 일을 감당하기가 버거워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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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서야 조금 후회를 느꼈던 인혁이었다. 그도 바뀌어야 한다는 건 느꼈었지만 20년 넘게 그렇게 살아왔던 그였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바뀌어야 하는지 감도 잡을 수가 없었다.

“ 아, 그러면 교수님 바쁘신거 같은데 시작해볼까요? 뭐부터 하면 되죠? ” “ 예?! 아.. 우선 저 자료에서 오타부터 뽑아주면 됩니다.! ”

일부로 먼저 무뚝뚝한 인혁을 배려해주며 다가와주는 은아.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인혁이었다. 벌써 오후 4시 급한 대로 회의에 필요한 자료정리를 마쳐놓고 오전회진까지 돌고 온 인혁과 은아는 또 몇 시간동안 내내 자료만 쳐다보고 있었다. 새벽에 수술한 환자 사진과 기록정리도 해야됐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두 사람 다 몇 시간동안 내내 일만 붙잡고 있다보니 말할 기회도 별로 없다. 첫날인데도 불구하고 은아의 능력은 쉽게 알아볼 수있었다. 인혁이 주는 자료들도 아예 생소한것들 빼고는 알아서 척척 정리했고 속도도 매우 빨랐다. 중환자실 근무를 오래해서인지 회진을 도는내내 시키지 않아도 환자의 상태도 꼼꼼히 기 록하고 중환자실간호사들하고도 먼저 알아서 인사를 나눴다. 물론 내색은 안했지만 일을 시키는 인혁이 놀랄 정도 였다. 그는 속으로 너무나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점심도 먹지 못 할 정도로 바쁘게 일하던 두 사람. 은아가 밥이라도 좀 먹어야 할 것 같아서 인혁을 쳐다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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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눈꺼풀이 점점 내려오는게 보인다.

“ 저기... 교수님..? ”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다시 눈을 부릅뜨고 자료를 보는 인혁. 은아도 그제야 인혁이 새벽수술을 했던게 생각난다. 지금 그의 몰골로 봐서는 한 이틀 밤은 못 잔사람 같았다.

“ 잠을 못주무셨어요? ” “ 아.. 예. ”

역시나 단답형의 대답이 돌아온다.

“ 언제 주무셨는데요? 이따가 회의 들어가실 수 있으시겠어요? ” “ 예.. 아... 괜찮아요. 저기.. 나 세수 좀 하고 올게요. ”

은아를 한번 쳐다보더니 그도 피곤하긴 한지 고개를 뒤로 젖혔다 푼다. 자신도 안 되겠는지 괜찮다는 말만 하고는 사무실을 나가버리는 인혁. 안 괜찮아 보이는데... 잠시 후, 인혁이 다시 돌아오고 걱정이 돼서 다시한번 말을해보는 은아.

“ 교수님, 안괜찮아보이시는데.. 제가 마무리하고 있을테니까 두시간이라도 좀 주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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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니에요, 괜찮아요. ”

오자마자 노트북앞에 앉은 인혁이 바로 일에 열중하며 은아에 말에는 대충 대꾸한다.

“ 혹시... 어제 잠은 좀 주무셨어요? ” “ 아니요. ”

여전히 모니터로 가있는 그의 눈.

“ 그럼.. 그제는 주무셨어요..? ” “ 아니요. 이틀 전엔 좀 잤어요. ” “ ...... ”

자기가 무슨 동물도 아니고... 잠을 몰아서 자나?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인혁이 일하는 모습을 봐온건 아니지만 왠지 오늘 하루 같이 일하면서 본 그의 스타일로 봐서는 자기몸같은건 신경도 쓰지 않을것같았다. 그러나 더 이상 말을 해봤자 그가 들을 것 같지도 않고해서 그녀도 그냥 하던 일에 계속 열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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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 후, 회의장으로 출발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 교수님, 회의 7시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창원이면 지금쯤 출발해야할 것 같은데요? ” “ 아.. 벌써 그러네, 이제 출발해야 할 것 같은데! 서두릅시다! ”

인혁과 은아는 작업하던 자료들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인혁이 짐들을 챙긴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한다.

“ 파일은 내가 다 챙겼으니까 신 선생님은 저, 노트북이랑 사진자료 좀 챙겨서와요! ”

마음만 급한 인혁이 은아는 기다려주지도 않은 채 먼저 사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리고 그가 먼저 나가버리자 당황한 은아가 빨리 풀어져있는 노트북 선들과 짐을 챙겨 그를 쫓아가는데 문밖을 나가보니 그는 벌써 보이질 않는다. 병원구조도 모르는 은아를 남겨두고 홀랑 가버린 인혁이었다. 은아는 주차장을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우선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그런데 주차장은 지하주차장과 옥외주차장 두 곳.

“ 아, 참.. 뭐, 어디로 오란 말이고? ”

은아가 안되겠는지 인혁한테 전화를 하려는데 그때 전화벨이 울린다. 인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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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교수님, 어디ㄹ.... ” “ 아!!! 뭐해요!!! 빨리 안 오고!!!!! ”

그새를 못 참고 호통을 치는 인혁이었다. 조금 황당함을 느낀 은아의 언성도 살짝 높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침착하게 대답하는 그녀였다. “ 아, 어디로 가야 되는데요?! ” “ 주차장이요!! 옥상에 있는 거!! ” “ 알겠어요! 바로 갈게요! ”

이내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그녀는 서둘러서 엘레베이터에 탄다. 은아는 왠지 점점 아침에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평소 인혁의 성격이 어떤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해운대 세중병원 옥외주차장, 그녀가 무거운 노트북을 들고 서둘러 뛰어가보니 인혁이 이미 차에 시동을 걸고 기다리고 있었다. 은아가 차에 타려고 뒷문을 열려는데 그가 급하게 그녀를 말린다.

“ 어~! 안돼요!! 앞에 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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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아는 인혁이 왜 저러나 싶었지만 일단 조수석에 타면서 뒷좌석을 얼핏 보는데.. 각종 의학서적 묶음과 수건, 옷가지 등.. 도대체 왜 차에 저런 게 있나 싶을 정도에 갖가지 생활용품들이 정리도 안 된 채로 그냥 쌓여있었다. 도대체 이 사람은 정리라는 걸 하긴 하는 건지... 이게 뭐냐는 듯한 그녀의 표정을 보더니 인혁이 찔리는지 말끝을 흐리며 한마디 한다.

“ 그... 바..바빠서.. 곧 치울 거에요.... ” “ 전 안 물어봤는데요? ”

은아가 지나가는 듯한 그의 말을 놓치지 않고 아까 일에 복수라도 하려는 듯 일부로 퉁명스럽게 말한다. 그러자 그가 민망한 듯이 고개를 돌려 앞을 보더니 그대로 출발한다. ※ 추천브금 :

한 시간쯤 후, 창원대학교 회의실, 간신히 제시간에 회의장에 도착한 두 사람, 거의 바로 회의가 시작되는데, 뭔가 일이 이상하게 꼬여간다. 일정이 변경되면서 대부분의 의사들이 발표에서 빠져버리고 남겨진 소수인원으로 심포지엄을 준비해야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게다가 부산에서 열리기로 된 심포지엄이라 경남지부에 있었던 사람이 외부인사 초청관리와 외부보도 자료준비들을 맡았었는데 일정변경으로 인해 참여를 못하게 되고, 같은 경남권이었던 인혁이 그 일을 떠맡아야 하는 상황이 돼버린다. 인혁도 마음 같아서는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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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cm - 어느날(Inst.)


스승님이 추천해주고 가신 거라서 함부로 그만둘 수도 없고.. 게다가 병원에서 트라우마센터가 살아남으려면 외부홍보가 필수적이었기에 이번 심포지엄은 그가 어떻게든 해내야 하는 일이었다. 결국, 원래 일을 맡았던 사람이 심포지엄장소관리와 인사관리를 해준다는 조건하에 인사초청관리와 보도자료에 대한 일들을 일부 떠맡게 되는 인혁.

그렇게 회의가 끝나고... 어느새 밤 10시반, 급하게 자료준비를 하느라 전쟁 같았던 하루가 끝나고 다시 그의 차로 돌아가는 인혁과 은아. 인혁의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회의는 끝났지만 돌아가서 해야 할 일들이 태산이었다. 병원에 돌아가서도 쉴 수도 없는 그. 그녀가 그런 그의 상태를 알아채고는 인혁에게 손을 내민다.

......?......

인혁이 의아한 듯 그녀를 쳐다보고. 그런 그의 표정을 보고 은아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한다.

“ 주세요! ” “ 뭐....를요? ” “ 아, 키요! ” “ .....?.... 무슨...? ” “ 교수님 어제도 못 주무시고 그제도 못 주무셨다면서요..! 졸음운전하다 사고 날 일 있 어요? ” “ 아..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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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본인이 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였기에 괜찮다며 운전석 문을 열려는 인혁. 참.. 이 사람 쓸데없는 똥꼬집이 있네.. 라는 생각으로 은아는 그의 손에 들려있는 차키를 빼앗는다.

“ 아, 괜한 고집피우지 마시고! 옆에 타세요! ”

은아가 자신의 손에있던 차키를 빼앗으면서 그를 조수석으로 밀어내자 그는 당황하며 밀려난다. 순간 그녀의 힘이 엄청 세다고 느끼는 인혁.

“ 어! 어! 아..알았어요! 하... 거..참...! ”

그는 왜 이러냐는 듯한 눈빛으로 은아를 한번 쳐다보더니 못 이기는 척 조수석에 올라탄다. 그제야 은아는 해냈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띠며 운전석에 올라탄다. 바로 시동을 걸고 출발하는 그녀. 출발한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인혁이 그새를 참지 못하고 또 뭔가를 검토하려고 파일을 펴자 은아가 한 손으로 파일을 뺏으면서 말한다.

“ 아, 참..! 교수님! 안 졸리세요? 제가 운전하고 가는 동안이라도 좀 주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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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괜찮아요. ”

그러자 은아가 ‘참.. 나..’ 하는 표정으로 그를 보더니 피식- 하고 웃어버린다. 인혁은 그녀가 자신을 보고 웃자 왠지 민망해진다.

“ 왜... 왜 웃어요? ” “ 아니에요~ ” “ 하... 참.... ” 그가 뚱한 표정으로 앞을 돌아보자 은아는 그가 기분 나빠 할까봐 변명하듯이 그러나 여전히 웃는 표정으로 대답을 해준다.

“ 아니, 교수님이 괜찮다는 말만 계속 하시니까요~ ” “ 하... 참........ 흐흠..! ”

은아의 말에 그가 민망한지 괜한 헛기침을 한다. 사실, 인혁은 지금 상황이 조금 낯설고 당황스러웠다. 전문의가 되고 외상을 맡은 이후로는 ‘팀’이라는 개념 없이 여기저기 떠다니며 늘 혼자 일을 처리하고 혼자 다녔던 그였기에 새로운 파트너가 된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좀 고민스러웠다. 물론, 앞으로 같이 일하게 될 거라면 이 정도는 적응해야하는 일이었다. 인혁은 마음을 잘 표현하지 않는 자신에게 그녀가 먼저 손 내밀고 적극적으로 표현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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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심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현이 서툴러서 무작정 화내는 투로 말해버리는 그를 무서워하고 어려워하는 게 아니라, 차라리 같이 화를 내더라도 솔직하게 표현을 해주고 다가와주는 은아가 오히려 그에겐 더욱더 편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3주 후,

“ 아~~ 아이고! ”

퇴근을 한 은아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곡소리를 내면서 소파에 주저앉는다. 그러고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다시 숙이며 한숨을 내뱉는다. 은아는 3일만에 집에 들어왔다. 야근도 정도가 있지... 이건 뭐 야근도 아니었다. 밥 먹을 시간도 없는 건 고사하고 병원에서 밤을 새우며 일하는 게 다반사였다. 그녀는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 하이고.... 신선생님은 무슨...!!.... ”

은아의 첫근무날 그가 ‘신선생님’이라고 부르겠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물론, 그도 처음에는 약간 어색해하며 꼬박꼬박 신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눈치보며 일을 시키더니 3일도 못가서 이젠 아주 ‘신선생’ 이란 말이 입에 붙었다. 호칭이야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었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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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만 있으면 연신 ‘신선생’이란 말을 외쳐대며 은아가 잠시라도 쉴 수있게 내버려두지를 않았다. 이제는 아주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어디 그뿐이랴... 게다가 그 성질머리는....! 수술실이나 소생실에서 환자를 처치할 때 뭐가 조금이라도 자기 맘에 안 들고 수틀리면 냅다 소리부터 지르는 그였다. 그는 거의 일중독에 가까웠고. 어떤 일이든 자기 눈으로 확인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일에 있어서 지나치게 꼼꼼하게 체크하는 그 때문에 피곤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렇게 인혁과 일하는 건 보통일이 아니었다. 전에 일했던 응급실야간근무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힘들고 고단했다. 하지만 인혁 역시 그녀보다 더하면 더했지 전혀 쉬지도 않고 일을 했기 때문에 힘들다는 내색도 쉽게 할 수 없는 그녀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많은 것들을 인혁 홀로 감당했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그가 얄미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왠지 그가 안쓰러웠다. 또한 그것들이 인혁의 잘못만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수술준비, 중환자 케어, 수술 후 기록관리 등 감당해야할 일이 너무 많았고 중증외상 자체가 워낙 쉴 시간도 없고 할 일이 많은데다가 전임코디네이터가 그만둔 동안에 밀려있던 일들을 은아가 오면서 한번에 다 처리하려고 하니 일을 하는 은아는 죽을 맛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인력이라고는 인혁과 은아 둘밖에 없는데다가 3주 앞으로 다가온 심포지엄준비로 인해 그야말로 전시체제였기 때문에 더 바쁘고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그녀에게 한 가지 위로가 되는 것이 있다면 전 같았으면 병원에서 죽어나갔을 환자들이 살아나간다는 사실이었다. 피투성이로 실려온 환자들이 인혁의 손을 거치면서 목숨을 건지는 모습을 보는건 매번 그녀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 일을 하면서 몸과 마음이 아무리 지치더라도 그 경험들이 은아에게 주는 어떤 희열과 쾌감 때문에 그녀는 힘을 내며 일할 수있었다. 그리고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색다른 행복감을 느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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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해운대세중병원 트라우마센터, 인혁은 오랜만에 소파에 기대어 쉬고 있다. 다행히도 오늘은 특별히 중증인 환자가 없어서 조금 여유가 있었다. 여유라고 해봤자 10분정도밖에 안되는 짧은 휴식이었지만 요즘같아서는 그 휴식도 감지덕지였다. 그는 소파에 양팔을 걸친 채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는다. 지난 몇 주간이 정말 총알같이 지나갔다. 쉴 새 없이 일을 하고, 수술을 하고, 환자를 돌보고.. 너무 정신이 없었다. 어떻게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는데 다행히도 은아가 중간중간 차근차근히 정리를 잘해줘서 별 무리 없이 그 많은 일들을 진행시킬 수 있었다. 아마 인혁 혼자였다면 절대로 감당할 수 없었을 일들이었다. 은아의 일처리능력은 그의 기대 이상이었다. 과연 자신을 포함한 두 명의 인원만으로 해낼 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벌써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고 그덕분에 심포지엄준비는 중반 이상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은아는 5년 넘는 기간 동안 응급실과 중환자실에서만 근무해서 그런지 수술실에서 서포트하는 것은 아직 좀 서투르긴 했지만 전에 하던 기억이 있어서 금방 좋아졌다. 그리고 그녀는 특유의 붙임성과 편안함으로 응급실사람들이나 중환자실 간호사들과 급속도로 친해졌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과 가끔씩 보여주는 밝은 미소는 사람들이 그녀를 좋아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런 부드러운 평소의 모습과 달리 환자가 들어온 후에 그녀는 거침없이 간호사들을 진두지휘했다. 인혁이 말을 하기 전에 그녀가 미리 기본적인 것들을 준비시키니 간호사들은 인혁에게 싫은 소리 들을 일이 없어서 좋아했다. 은아가 그렇게 일을 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혁은 무엇이 그렇게 불안한지 그녀를 계속 닦달했다. 아마도 심포지엄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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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된 업무로 인해 쌓인 몸의 피곤함을 이기려고 신경을 더 곤두세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요즘 그의 예민함은 극에 달해있었다.

“ 후........ 하............ ”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저절로 한숨이 쉬어지는 그. 사실상 거의 처음으로 생긴 트라우마 센터의 팀원인데... 가장 힘든 시기에 와준 고마운 그녀였기에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하다가도 쉽게 조절이 되지 않는 인혁이었다. 참, 미안하고도 고마운 사람이었다.

[ 벌떡- ] 무슨 생각인지 그가 자리에서 갑자기 일어나더니 트라우마센터 문밖을 나간다. 몇 분 후, 다시 돌아온 인혁. 그의 얼굴과 앞머리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세수를 하고 온 모양이었다. 인혁은 피곤을 이기려고 고개를 왼쪽 오른쪽으로 몇 번 돌리고는 다시 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노트북 자판을 두들긴다.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 수 없다면 그녀가 할 일을 덜 수 있게 잘 시간을 아껴서 일을 조금이라도 먼저 해놔야겠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다음날 이른 아침, 해운대 세중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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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을 한 은아가 트라우마센터 사무실의 문을 연다.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인혁이 소파에서 쪽잠을 자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벌써 4월이지만 새벽에는 추운 날씨였다. 자면서 추위를 느꼈었는지 그는 그 좁은 소파에서 웅크리고 누워있었다. 노트북도 켜진 채로 그냥 있었고, 자료들도 펼쳐져있는 상태로 그냥 있는 걸로 봐서는 밤새 혼자 작업을 하다가 잠깐 잠이 든 것 같았다. 아침부터 그렇게 청승을 떨고 있는 그를 보자 괜히 화가 나기도 하고 어제 퇴근한 게 미안해지기도 하는 은아.

‘ 참... 아니 당직실 내비두고 왜 이런데서 자노...? 자려면 똑바로 자든가...! “

은아는 그에게 다가가서 흔들어 깨우려고 손을 뻗다가 이내 그 손을 거둬버린다. 그가 아주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자고 있는데 좀 편하게 자게 하려고 괜히 깨워봤자 또 괜찮다고 안 잔다고 할 그였기 때문이다. 잘 수 있을 때 자게 해줘야지.. 환자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자신이야 어떻던 말든 물불안가리고 수술을 하고야 마는 인혁이었다. 같이 일한지 아직 3주차밖에 안됐는데 요즘 그의 행동하나하나가 자꾸 거슬리는 은아. 자기 몸도 안 챙기고 주위사람도 안 챙기고 본인을 위해서라도 조금 여유를 가지고 쉬어갔으면 좋겠는데 오로지 일에만 매달리는 그를 보고있자면 같이 일하는 사람으로써 속이 터졌다. 언젠가는 한마디 해야겠다고 벼르고 있는 그녀였다. 은아는 아주 조심하며 사무실 한 켠에 있는 모포를 가져와서 그의 몸 위에 덮어준다. 그리고 그가 작업하고 있던 자료들을 챙겨서 인혁이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걸어가 사무실 불을 끈 뒤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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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 앞, 응급실 2층에 있는 회의실에서 작업을 하기위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는 은아. 그때 저쪽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소리.

“ 어~? 신선생? ”

뭔가 장난기 섞인 목소리. 그녀를 부른 건 한구였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는 은아. 그를 보고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인사한다.

“ 아, 안녕하세요! ” “ 출근을 일찍했네요? ” “ 네, 해야 할 일이 좀 많아서요. ” “ 하긴 뭐~ 최교수랑 같이 있으면 일이 좀 많죠~? ”

말해놓고 슬쩍 은아의 눈치를 보는 그. 은아가 잠시 망설이더니 솔직하게 대답을 한다.

“ 아.. 네 좀 많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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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아가 바로 솔직하게 대답을 하자 살짝 뜨끔한 한구가 슬쩍 화제를 돌린다.

“ 아... 지금 최교수 만나러 가는 길이었는데? 신선생 어디 가요? ” “ 아! 지금 가시면 안돼요! 교수님 지금 주무시고 계세요. ” “ 트라우마센터에서요? 거기 잘 데가 어딨다고? ” “ 그러게요... 소파에 누워서 주무시고 계시더라구요. ” “ 그래요...? 아휴, 잠도 얼마 못자는 놈이 이왕 잘꺼면 제대로나 눕지....! ” “ 그러니까요... 그래서 제대로 주무시라고 깨워드릴려구 했는데, 한번 일어나시면 일한다 고 안주무신다고 하실 거 같아서.. 저도 그냥 모포만 덮어드리고 나왔어요. ” “ 아... ”

은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녀를 보는 한구. 그녀가 들어오기 전 인혁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잘 알기에 인혁을 챙겨주는 그녀가 들어와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까칠하고 무뚝뚝하기만 한 인혁를 상대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를 이해해주고 챙겨주는 은아가 내심 고맙게 느껴졌다. 사실, 인혁과 같이 일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트라우마센터 사정이 어떤지도 잘 아는 한구는 제 3자임에도 불구하고 은아가 언제 그만둘지 내심 조마조마했다. 그녀가 그만두기라도 하면 또 인혁혼자 얼마나 힘들어질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쩌다 아주 가끔씩 사무실에 내려와서 일부로 은아가 보는 앞에서 인혁을 욕해주거나 그녀의 편을 들어주다가 가버리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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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이이이잉- ]

“ 과장님은 올라가실거죠? 전 응급실 쪽으로 갈꺼라서 먼저가볼게요. ”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먼저 가보겠다고 말하는 은아. 그녀의 인사에 한구도 잽싸게 같이 타면서 말한다.

“ 아, 같이 가요! 최교수한테 커피나 한잔 하자고 내려온 건데, 뭐 혼자라도 마시러 가야 죠~ 아, 같이 한잔할래요? ” “ 저야 좋죠~ 저도 얼마 못자서 졸리던 참이었는데, 잘됐네요. 과장님이 사주실꺼죠~?! ”

그냥 물어본건데 은아가 넙죽 대답을 하니까 살짝 당황하는 한구. 이런 타이밍은 절대로 안 놓치는 은아였다.

“ 아... 그..그럼요! 제가.. 사..야죠..? 하하... 아, 응급실간다고 했죠? 그럼 먼저 가있어요. 커피사올테니까. ” “ 네, 그러세요~ 응급실 2층에 회의실에 있을게요! ”

엘리베이터가 응급실이 있는 층에 도착하자마자 은아가 쿨하게 말하고는 먼저 내려버린다. 너무 빨리 내려버린 그녀 때문에 살짝 벙쩌있던 한구. 엘레이터문이 닫치자 혼자 중얼거린다.

“ 최인혁, 임자만났네~ 임자만났어. 암~ 저 정도는 돼야 인혁이를 컨트롤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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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하고나서 잠시 생각하더니 능글맞게 씨익- 하고 웃는 한구였다. ※ 추천브금 : 이루마 - painted

응급실 2층 회의실 앞에 도착한 은아. 서둘러 들어가려는데 문이 아주 살짝 열려있고 안에서는 말소리가 들려온다.

“ 에효~ 오랜만에 좀 쉬어보네! ” “ 근데 우리 이렇게 있어도 되냐? 김도형쌤알면 또 니들 뭐하는데~! 이럴텐데? ” “ 아 간만에 환자도 거의 없겠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쉬냐? 그리고 그러니까 여기있는거 아니야~ 응급실 훤히 내려다보이고 좋구만 아주. 김도형쌤 보이면 빨리 내려가면 되지. ” “ 그래~! 그때 내려가면 되지, 우리도 좀 쉬자. 아주 응급실에 있다가 내가먼저 병나겠다 병나겠어! ”

안에서는 3~4명 정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화를 조금 들어보니 인턴들인 것 같았다.

‘ 아.. 인턴쌤들 쉬고있나보네... 그럼 어디로가지? 지과장님 여기로 오신다캤는데.. ’

인턴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는 잘 아는 은아. 오랜만에 쉬는 것 같은 그들을 위해 자리를 피해주려고 돌아서는데 그들의 대화 속에서 자신의 이름이 들려온다. 가려던 걸음을 멈추는 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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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근데 새로온 코디네이터 이쁘지않냐? ” “ 아~ 신은아쌤? 그러게~ 장난아니게 이쁘던데? ” “ 야 얼굴만 이쁘냐? 간호사들한테 화낼 때 쫌 무섭긴 하지만 웃을 땐 또 얼마나 이쁜지 아냐? 참! 나랑 나이차이도 얼마 안 나던데~? ” “ 왜~ 임마, 작업이라도 걸어보게~?! ” “ 못할 것도 없지~! 4살차이 정도면 뭐.. 괜찮지 않냐? ” “ 야야~ 꿈 깨라~ 6개월인가? 1년인가? 아무튼 잠깐만 일하다가 결혼하러 캐나다로 갈 거래~ ” “ 진짜?! 아... 아깝다... ”

저, 쬐끄만 것들이... 하여간 남자들이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다시 발길을 돌리려는 그녀. 그런데 이번엔 인혁의 이름이 들려온다. 다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은아.

“ 야 근데 최 교수님하고 같이 일하기에는 좀 아깝지 않냐? ” “ 아깝다니..? 뭐가? ” “ 아~ 그렇잖아~ 최 교수님 온 병원에 진상이라고 소문 쫙 나있는데, 그 성격은 또 어떻 고! 같이 일하려면 얼마나 피곤하겠냐? ” “ 아~ 맞아, 나는 신은아쌤 처음 왔을 때 봤잖아~ 새로온 코디네이터라고 딱 인사를 하 는데~ 다들 불쌍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는거야~ 나도 참, 어쩌다 그런 진상하고 같이 일을 하게 됐나 싶더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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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듣는 은아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아무렇지도 않게 인혁에게 진상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인턴들.

“ 야 나는 제발 최교수님 딴데로 좀 갔으면 좋겠다니까~! 아주 없는 일도 만들어서 시켜 요 아주. 중환자실도 없고 수술실도 없는데 무조건 환자부터 받는거 봐라.. 뭐, 외과 레 지들이야 좋겠지만, 응급실에 있는 우리만 죽어나는거아니야~! ” “ 야 뭐.. 좀 독불장군같긴 하지만 그래도 덕분에 환자는 많이 살리잖아? 최교수님 아니 면 대한민국 어느 응급실에서 수술하는 모습을 보겠냐? 난 신기하기도 하고 좋던데? ” “ 임마! 우리가 구경만 하는 입장이면 그냥 신기하고 좋겠지~!! 수술장도 아니고 응급실 에서 수술하면 그거 뒤처리 다 간호사쌤들이랑 우리가 하잖아~! 나는 외과도 안 갈건데 쓸데없이... ” “ 하긴.. 안 그래도 응급실 업무 많아 죽겠는데 그 진상 때문에 몇 배로 바빠지긴 하지... 아주 뼛골이 빠지겠다 빠지겠어..! ” “ 그러게, 야, 저번에 보니까 간호사들도 최쌤 욕하던데? 짜증난다고? ”

은아는 더 이상 들어줄 수가 없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있자니 너무나도 화가 나는 그녀. 물론 인혁이 조금 무리하게 환자를 받긴 했었지만 다 환자를 살리려고 택한 길이었다. 지난 몇 주 동안 같이 일을 하며 지켜본 바로는, 그렇게 일한다고 그에게 어떤 득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병원에서 자꾸 적자가 누적된다며 전화가 오거나 다른 과 의사들에게 미움을 받을 뿐이었다. 그런데 인턴들에게 까지 이렇게 무시를 당하다니... 게다가 간호사들까지 인혁을 욕한다는 말을 듣고나니 은아는 뭔가 억울하게 느껴졌다. 인혁은 환자하나 살려보겠다고 잠도 줄여가며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일하는데.. 그녀의 머릿속에 지금 사무실에서 쪽잠을 자고 있을 그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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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그런데 최교수는 왜 집에도 안간데? 집에가는 모습은 한 번도 못 본 거같은데? ” “ 그러게? 나도 몇 달 동안 한번도 못 본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까 병원에 복귀했다고 했을 때부터 한 번도 집에가는 거 못 봤는데? ” “ 뭐야..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도 없나? 결혼했을 거 아니야? ” “ 야~ 아니야~~ 지금 싱글이래~ 뭐 그 성격에 어디 여자가 붙어있겠냐? 이혼 당했겠지.. ”

이제는 진짜말도 안 되는 인신공격이었다. 이대로는 그냥 못 넘어가겠다고 생각한 은아. 욱-하는 마음에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턱- 하고 잡는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커피를 사온 한구가 그녀를 보며 참으라는 눈빛을 보내며 고개를 가로로 젓고 있었다. 그의 표정을 보니 간신히 참고는 있었지만 그도 열 받을 데로 열 받은 얼굴이었다. 그사이 또 들려오는 그들의 목소리.

“ 하긴 뭐, 집에도 안 들어가고 맨날 병원에서 사는데 누가 좋아라하겠냐? 진짜 그러고 보면 의사도 할 짓이 못된다니까... 아휴~ 나는 외과가지 말아야지. 아주 징글징글하다 야. ” “ 야, 외과는 할만 해~ 외상외과가 문제지. 무슨 분과가 돼서 따로 과로 만들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외가의가 티오도 없어가지고 외과에서 버려지고 응급실 밑에 소속되어있는 거 보면 알만하지 않냐? 얘기 들어보니까 그 트라우마센터도 언제없어질지 모른데~ 그 렇게까지 병원에 붙어있고 싶나~? ”

어느 인턴의 마지막 말이 끝나자 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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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구가 더 이상 말릴 새도 없이 그녀가 회의실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갑자기 문을 열고 뛰어들어온 은아를 보더니 놀라는 인턴들.

.......!!!!!!!!.........

인턴들을 무섭게 노려보는 은아. 그들은 꼼짝도 못하고 그대로 얼어있었다. 이어지는 긴 침묵. 한참을 그들을 노려보던 그녀가 입을 연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게 깔려있었지만 무섭게 변해있었다.

“ 밖에서 좀 들었는데.... 어디 다시 한 번 얘기해볼래요? ”

은아의 무서운 표정에 기가 눌려서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돼버렸는데 한 인턴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그녀를 보며 말한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아까 제일 심하게 얘기하던 그 인턴이었다.

“ 무슨 얘기요? 아무 말도 안했는데요? ” “ 아무 말도 안했다고요? ” “ 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리고 우리끼리 무슨 말을 했든 말든 그쪽이 무슨 상관인 데요? ”

터진 입이라고 말은 잘하는 인턴. 기가 차고 억울해서 헛웃음만 나오는 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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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를 무섭게 노려본다. 그러자 그 인턴 역시 노려보면 어쩔껀데.. 라는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본다. 울컥- 하는 은아. 그녀가 무슨 말을 다시 하려는데 그 인턴이 그녀의 말을 끊는다.

“ 분며...ㅇ...” “ 아니 설령 무슨 말을 했다고 해도 왜 남의 말을 엿들어~ 기분나쁘게!! ”

오히려 목소리를 키우는 인턴. 적반하장이었다. 그는 살짝 반말까지 섞어서 대꾸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의사가 아니라고 무시하는 게 분명했다. 하긴, 인혁도 무시하는 인간이 그의 밑에서 일하는 은아를 존중해줄 리가 없었다. 그때 회의실 안으로 들어오는 한구. 말없이 그 인턴을 무섭게 노려본다.

“ 고ㅏ.. 과장님!!! 안...안녕하십니까!!! ”

은아에게 압도되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머지 인턴들이 그를 보더니 재빠르게 일어나 인사를 한다. 한구가 들어오자 움찔하던 그 인턴은 이내 고개를 숙이고 그의 눈을 피해버린다. 무섭게 인턴들을 보는 한구. 그들은 꼼짝도 못하고 서있었다. 한구는 은아에게 함부로 한 그 인턴을 향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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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들었는데.. 신 선생한테 한말 나한테 똑같이 해볼래? ” “ ........... ” “ 나한테도 똑같이 해보라고!!! ” “ 아.. 아닙니다.... ” “ 신선생님께 사과해. ”

그 인턴이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까닥하면서 은아에게 사과를 한다.

“ .....죄송합니다. ” “ ....... 똑바로 안하냐? ” “ 죄...죄송합니다!!!! ”

인턴이 은아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그를 노려보던 은아가 입을연다.

“ 저말고.... ” “ ...?....... ” “ 최교수님 욕한거 사과하세요. ” “ .... 예?... 아... 죄.. 죄송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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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대로 안하노?!!!!!!! ”

그녀는 목소리를 높이며 소리를 지른다. 무섭게 변한 그녀의 표정이 그들을 압도한다.

“ 죄... 죄송합니다!!!!!! ” “ 니들... 나이도 어린것들이... 입 함부로 놀리지 말래이.... 사람 목숨하나 살려보겠다고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사람한테... 그게 할 소리고? 간호사들한테도 똑똑히 전 하래이.... 앞으로 내 귀에 한번만 더 이런 소리 들렸다가는... 가만 안 둘끼라고... ”

화가 난 그녀의 입에서 사투리가 더 많이 나온다.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무서운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는 욕이라도 하려는 걸 간신히 참고 있는 걸로 보였다. 그녀의 말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인턴들. 그런 인턴들에게 한구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한다.

“ 똑바로 대답안하냐...... ” “ 네..네!!!!! ”

그런 인턴들을 무섭게 노려보는 은아와 한구. 잠시 침묵이 흐르고... 한구가 입을연다.

“ ....... 나가봐... ” “ ㄴ...네!!! 안녕히계십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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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들은 서둘러 회의실 밖으로 빠져나가 버린다. 그들이 나가자 또 회의실안에는 긴 정적만이 흘렀다.

“ ......어떻게.... 이렇게 까지 할 수가 있어요..? 인턴들이 교수님한테..? ”

은아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힘겹게 입을 열자 한구가 그녀에게 좀 앉으라고 권한다. 의자에 앉는 은아. 한구가 가져왔던 커피를 그녀 앞에 내려놓으면서 대답을 한다.

“ ....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 뭐, 없는 데서는 나랏님도 욕한다잖아요... 그저.. 인 턴들이 스트레스 풀려고 하는 흔한 뒷담화 정도라고 생각해요.. ” “ 이건..!!! 뒷담화 정도가 아니잖아요...인턴들한테 교수가 이렇게 까지 무시당할 수가 있 어요? ” “ ......... ” “ .......다른 교수님들이라면 이렇게 까지 안했겠죠...? “ ....... 힘이 없잖아요... 인혁이는..., 말로는 트라우마센터라고 하지만 전문의는 최교수 하나에 인력이라고는 신선생 한명. 자기 티오도 간당간당한데.. 뭐, 티오를 줄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쟤들도 아는거죠. 맨날 보고 듣는 이야기이니까... 최교수가 적자내서 병원직원한테 무시당하고, 다른 과 교수들한테 무시당하니까.... 쟤들까지도 최 교수를 만만하게 볼 수밖에 없죠... 그렇다고 인혁이가 그런 일로 대놓고 뭐라고 할 성격 도 못되고....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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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흠..... 아마 알거에요, 인혁이도. 앞에서는 무서워하지만 뒤에서는 욕하고 있는 거. 짜 식이... 학교다닐 때부터 감당할 수도 없으면서 적만 많았거든요... 이런 얘기 한두 번 듣 는 게 아니니까... 알잖아요. 최교수 성격... ”

말을 끝낸 한구가 씁쓸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본다. 은아도 언젠가는 알았어야 할 일이었다. 회의실 창밖으로 보이는 응급실, 한가로운 응급실이 조금씩 분주해지고 있었다.

“ 아, 난 이만 가봐야겠네.. 신 선생은 좀 더 있다가 갈 거죠? 나중에 봐요~ ”

한구가 무거워진 분위기를 털어버리려 애써 밝게 인사하고 회의실을 나가려 한다.

“ 아, 네... 과장님 아까는 고마웠어요..! ”

은아에 인사에 고개를 까딱하고는 문밖을 나가는 한구. 은아는 혼자남게 되자 너무나도 답답해졌다. 아직 인혁에 대해 많이 아는 건 아니지만, 몇 주 동안 같이 일하면서 그가 얼마나 환자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사람인지 느낄 수 있었다. 물론, 표현을 잘못하고 가끔 괴팍한 구석도 있긴 하지만... 그건 일할 때 모습이고 일할 때를 제외하고는 오히려 인혁이 쑥맥에 가깝다고 느끼는 은아였다. 그녀가 느끼기에 그는 나쁜 사람도 아니었고 절대 이렇게 누구에게 함부로 취급당할만한 사람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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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은아는 가끔 그가 존경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는데... 그런 그가 욕을 먹으니 억울하다는 생각이 드는 그녀. 정말 한구 이외에 병원에서 그의 편은 아무도 없어보였다. 가끔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생각만 할 뿐, 전적으로 그의 편이 돼 주려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그동안 일을 해왔었는지... 한편으로는 이해가 안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왠지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체념에 익숙해져 그동안 표현은 안했었지만 아마 그가 많이 외롭고 고독한 인생을 살아왔을 것 같았다. 또한, 그가 내색을 안했지만 속으로는 많은 상처를 받아왔을 것이다. 이 세상에... 상처받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미 수많은 상처가 쌓여서 그가 세상을 등진 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그녀. 은아는 자신이 병원에 있는 동안이라도 철저한 그의 편이 되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굳게 결심한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 밖을 나선다. 트라우마센터 앞에 도착한 은아. 사무실안에 불이 꺼져있는 걸로 봐서는 아직도 그가 잠들어있는 것 같았다. 빼꼼히 문을 열어보는 은아. 역시나 그가 소파에서 그대로 잠들어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어있는 그의 모습을 보니 아까 그 인턴들의 말이 다시 생각나 가슴이 먹먹해지는 그녀였다. 그렇게 무시당하고 욕을 얻어먹으면서... 뭣 하러 저렇게까지...

“ 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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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다시 닫고 돌아서는 은아가 얕은 한숨을 내뱉는다. 3시간 후 오전회진을 돌기 전까지 특별한 콜이 없다면 그를 깨우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는 그녀. 그가 일어나기 전까지 일을 어느 정도 맞춰나야겠다고 생각해고는 다시 자료들을 들고 어디론가 향한다. 두 시간 후,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 때문에 어느덧 환해진 사무실 안, 주위가 밝아지자 눈이 부심을 느낀 그가 얼마 후 눈을 뜬다. 눈을 끔뻑거리면서 일어나는 인혁. 창밖을 보니 이미 날이 환하게 밝아져있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는 인혁. 어제... 새벽에 작업을하다가... 잠.... 들었다?!! 자리에서 벌떡하고 일어나려는 그. 그러나 좁은 소파에서 너무 웅크린채 오래잠들어있어서그런지 그의 다리가 말을 듣질 않았다. 쥐가 난 모양이었다.

“ 스으으읍...! 아아.... ”

급하게 일어나려다 강한통증을 느끼고 다시 소파에 주저앉는그 다리를 몇 번 주무르고 있으니 그제야 다리가 조금 풀리는 느낌이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는 인혁. 벌써 10시가 다 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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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회진돌아야하는데!! ’

다시 급하게 일어나는 그. 아직도 다 풀리지 않은 다리 때문에 인혁은 인상을 찡그리고 절뚝거리면서 문밖으로 나려고 한다.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은아.

“ 아~ 교수님~! 일어나셨네요~? ”

오늘따라 은아가 밝게 웃으며 그에게 인사를 한다. 심포지엄 때문에 요즘엔 점점 불만이 쌓이고 있는지 계속 퉁명스러운 표정을 보이던 그녀였는데 왠지 오늘 그녀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인혁이었다.

“ 아... 예, 왔었네요?! 왔으면서 왜 나 안 깨웠어요?!! ”

그가 살짝 인상을 쓰며 묻는다. 평소 같았으면 똑같이 인상을 쓰며 대답했을 그녀였지만 웬일로 오늘은 상냥하게 대답을 해준다.

“ 아~ 교수님 더 주무시라고 그랬죠~! 근데 어디 안 좋으세요? ” “ 아.. 아니요. 그냥 다리가 좀 저려서... ” “ 그러게!! 크흠.... 그러게 잠을 주무시려면 당직실 가서 편하게 주무시지.. 왜 사무실에 서 주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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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화를 내려고했는지 그녀의 목소리가 잠깐 커졌다가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친절하게 물어보는 그녀였다. 인혁이 그런 그녀를 의아한눈으로 쳐다보며 말을 이어간다.

“ 그... 심포지엄 자료때문에요. 근데... 왜..... 그래요? ” “ 네? 뭐가요~? ” “ 아.. 아니... 오늘 좀 이상한 거 같아서... 왜..왜 갑자기 그렇게 상냥하게.. ” “ 저야 뭐 늘 상냥햐죠...! 그럼 이제 회진도셔야죠~ 제가 준비는 다해놨어요. 갈까요~? ” “ 아.. 예... ”

인혁이 여전히 그녀를 이상하다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중환자실로 걸음을 옮긴다. ※ 추천브금 : 에브리 싱글데이 - cold(Inst.)

며칠 후, 트라우마센터는 여전히 똑같이 정신없는 일상이 반복되고있었다. 다만 변화가 있다면 진짜 심포지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 그것 때문에 인혁이 전보다 더 예민해졌다는 사실. 아무래도 심포지엄 날짜는 다가오지.. 아직 마무리는 전혀 안됐지.. 그런데 환자는 계속 들어오고 수술은 또 해야겠지... 요 며칠간 그는 눈에 띄게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간호사들이건, 인턴이건 조금만 실수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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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럭버럭 화를 내곤 했고, 일을 잘했더라도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호통을 치고 그러니,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그런 그를 보다 못한 나과장이 응급실 간호사 한명을 심포지엄이 끝날 때가지 빌려주겠다고 할 정도였다. 응급실이 이제야 간신히 자리를 잡아가는데 인혁 때문에 은아나 다른 간호사들이 또 일을 그만둔다고 할까봐 불안해서였다. 덕분에 트라우마센터는 인력이 한명 충원되자 역할을 분담할 수 있어 일이 좀 수월해졌다. 은아는 심포지엄이 끝날 때까지 환자처치를 하지 않고 심포지엄준비를 도맡아서 하기로 했고, 새로온 간호사가 은아를 도와 자잘하고 보조적인 작업들을 도와주곤 했다. 덕분에 인혁은 자잘한 업무 대신에 핵심적인 발표준비와 수술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일을 이렇게 분담하였는데도 그는 본인이 직접 눈으로 확인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지.. 하루에도 수도 없이 수술실과 사무실을 왔다갔다하며 일이 잘됐나 안됐나 계속 확인하였고, 은아와 간호사를 달달 볶았다. 덩달아 그 때문에 은아 역시도 예민해지고 있었고, 오히려 옆에서 간간히 지켜보던 한구와 나과장이 은아가 그만둔다고 할까봐 불안해하곤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아슬아슬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일주일 후, 드디어 심포지엄이 10일 앞으로 다가온 어느 날,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은아가 아침부터 쉴 틈도 없이 간호사와 심포지엄 자료를 정리하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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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이 사무실 안으로 급하게 뛰어 들어온다. 아니나 다를까 2차 수술이 잡혀있던 그는 괜히 혼자 성급해져서 들어오자마자 은아를 향해 소리친다. 환자사진이 담긴 파일을 집어 들며 말하는 그.

“ 환자사진 거..! 다 정리했어요?!!! ” “ 네. ”

이젠 적응이 됐는지 화도 안내는 그녀. 인혁에게 침착하게 대답해준다.

“ 발표케이스 뽑아놨으니까! 그 자료 즘 챙겨줘!!

아이!!!! 썩혀둬!!!! 오래 끌어 이거를

갔다!!! 아이...참!! 커피한잔 줘~!! ”

이미 일을 하고 있는 은아에게 또 일을 시키더니 옆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던 간호사한테 괜한 호통을 치며 정리하고 있던 자료를 빼앗아가 버린다. 조금만 흥분하면 호통을 치는 그를 째려보는 은아. 참아보려고 했지만 짜증이 치솟는다.

‘ 또 시작이시네...!!! ’

그의 호통에 놀란 간호사는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고 멋모르는 간호사가 그의 말대로 커피를 타주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하자 은아가 눈치를 주며 간호사를 제지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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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만있으라....! ”

사실, 그것은 불안한 인혁의 습관 같은 거였다. 막상 진짜로 커피를 타오면 일에만 열중하느라 커피는 먹지도 않았고 결국 이럴 때 타온 커피는 다 식어서버리게 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리고 정작 인혁은 커피심부름을 시켰는지도 기억 못 하곤 했다. 슬슬 화가 나는 그녀. 호통을 쳐놓고 바로 간호사에게 커피심부름을 시키질 않나... 은아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아무리 그를 편들어주고 싶어도 인혁이 이런 식으로 나오기 때문에 그의 편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인혁은 계속 그녀에게 닦달을 한다.

“ 초청장 이메일 발송했어요?!! ” “ 네!!.... ” “ 그 그양반들 비행기표!! 그 비행기표 예약해야ㄷ...!! ” “ 선정 했어요!! ” “ 두 번!!!! 세 번을 확인해야되!!!! 두 ㅂ.. 두 번세번!!!!!!! ”

다해놨다는데도 계속 확인하라며 호통을 치는 그. 기가차서 말도 안 나오는 은아. 점점 그녀의 분노게이지가 올라간다.

“ 저! 행사장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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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됐어요~!! 그 옆에 기자간담회까지!!” “ 두 번 확인했어요?!! 두 번??! ” “ 두 번 했어요!! ” “ 브러셔 업체 그.. 선정 됐어요?!!” “ 다됐어요...! ” 이제 대꾸할 기운도 없는 은아 목소리에 힘이 빠져버렸다. 아랑곳하지 않는 인혁.

“ 아 거기 들어간 그 영문안내문!! 그거 저, 출력 좀 해봐!!! 그그, 내가지금, 저,저, 오타 좀 뽑아내게!! ”

도대체 어제도 물어보고, 그제도 물어보고 한번 물어봤던 걸 몇 번씩이나 확인하는건지.... 불안함에서 비롯된 그의 예민함들은 주변사람들까지 덩달아 불안해지게 만들었다. 때문에 그가 옆에 있으면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제대로 일도 마무리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저번처럼 또 병원사람들에게 그가 욕을 들을 것이 뻔했다. 그리고 심포지엄을 잘 치르려면 핵심 주최자인 그가 제일 건강해야하는데, 이대로라면 그의 몸도 남아나지 않을 것이었다. 일에 집중하려 노력하며 그의 말에 대꾸를 해주다가 이내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은아. 드디어 그녀가 폭발한다.

“ 교수님!!!! ” “ 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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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칼진 은아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니터만 보고 있는 인혁. 그런 그를 보고 더 화가 나는 은아는 빽-하고 소리치듯 쏘아붙인다.

“ 저녁에 두 시간만 시간 좀 내주세요..!!! ”

홧김에 쏘아붙이는 은아.. 그리고 그녀의 말을 듣고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던 모습 그대로 멈춰버린 인혁.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은 그. 아... 아직 마음에 준비가 안됐는데... 그는 은아 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한숨을 내뱉고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킨다. 몇 시간 후, 어느 외상환자의 2차 수술 후, 수술실 앞 복도, 수술하는 내내 평소보다 더 예민해보이던 그. 한구는 어려운 수술이 잘 끝났음에도 인혁의 표정이 너무 좋지 않자, 그가 왜 그러나 싶어진다. 놀리듯이 물어보는 한구.

“ 어이 최교수!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

한구를 보더니 고개를 도리질을 치며 말없이 터벅터벅 걸어가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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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야, 진짜 뭔일 있나보네? 야~ 무슨 일인데? ”

한구가 다시 한번 물어보자 인혁은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듯한 눈길을 보내며 못 이긴 척 입을 연다.

“ ..........아니,...별일은 아니....하.... 큰일났다... 신선생 그만둘지도 모르겠다. ”

인혁의 말을 듣고는 한구의 눈이 커진다. 그래도 그녀라면 인혁의 옆에서 잘 버텨줄지 알았는데... 이대로 은아가 그만둔다면, 인혁과 트라우마센터가 무너져버릴 거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한구 였다.

“ 뭐?!! 야, 지금 심포지엄 때문에 제일 바쁠 때 아니야? 지금 그만두겠데? ” “ 아니, 아직 그런 말은 안했는데... 수술끝나고 두 시간만 시간을 내달라네..... 그만둔다 는 말하려는 거 아니겠나... ” “ 아~ 참! 또 뭔 짓을 했길래 신 선생이 그래~~?! 솔직히 말해봐 너 어? 또 가서 엄청 닦달하고 소리지르고 그랬지?! ” “ 닦달!!은.... 무슨.....! .. 아,아니 난 그..그냥... 수술 들어가야 되니까... 서두르느라고... 조,,조금...?! 소리를 지르긴 했는데... ”

인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구가 그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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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니가 알아서 하라는 눈빛을 보내며 말을 이어간다..

“ 아~~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 아휴... 내가 그러니까 작작 좀 하랬지?! 신 선생같이 능력 있는 코디네이터를 또 어디서 구하냐?! 게다가 니 그 드러운 성질머리 다 맞춰주 고! 잘 견뎌주고! 신 선생 나가버리면 심포지엄은 어쩌고, 트라우마센터는 또 어떻게 유 지할건데? 그게 뭐 뭐, 의사하나가지고 되는 일이냐? 아이고.. 너 넌임마!! 신 선생이 그 만둔다고 해도 싸다 싸!!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지..! 암..!! ”

혀를 차면서 인혁을 두고 저 멀리 먼저 가버리는 한구. 한구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 지 상담을 해보려 했는데 그가 당연하다는 듯이 은아의 편을들고는 휙-하고 가버리자 인혁은 충격을 받아 멍한 상태로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했다. 왠지 그의 말을 듣고 나니 인혁은 눈앞이 더 깜깜해졌다.

‘ 하... 내가 진짜 그 정도인가..? ’

아까 은아의 표정을 보니 화가 많이 나 보였는데... 사과라도 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그건 그의 자존심에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줄 알았는데.. 역시나 나를 버텨낼 사람은 없는 것 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조금 화가 나는 그. 인혁은 머리가 복잡한지 손으로 머리를 박박 긁더니 이내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터벅터벅 걸어다가 은아에게 전화를 건다.

“ 예. 끝났어요!. 사무실에서 봅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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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끼익- ]

인혁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는 빼꼼히 얼굴을 내밀며 들어온다. 들어오며 은아의 눈치를 살피는 그. 그가 들어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는 팔짱을 끼고 앉은 채로 그를 째려보고 있었다. 인혁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움찔- 했지만 티를 안내기 위해 시선을 피하며 조용히 소파에 가서 앉는다. 말없이 계속 그를 째려보기만 하던 은아는 그가 앉자마자 차분히 입을 연다. 은아의 목소리가 가라앉아있으니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더 무서운 인혁이었다.

“ 교수님. ” “ 예.. ” “ 저 여기 들어온 지 한 달 다 되가요.. ” “ 예. ”

그건 자기도 알고 있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그. 찔리는 게 있긴 있는지 그녀의 시선을 모르는척하며 앉아있기만 한다.

“ 솔직히 내가 회식 같은 거 바라지도 않는데...! 저한테 밥 한끼 안 사주셨어요!! ” “ 미안합니다~ ”

진짜로 미안하긴 한건지... 은아와 시선은 마주치지도 않은 채 성의 없이 대꾸하는 그였다. 돌려서 말하지 말고 할 말 있으면 빨리 할 말만 하라는 그의 표정. 소파에 앉아있는 그의 모습은 정말 가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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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을 시간도, 씻을 시간도 없이 땀에 절어가지고 맨날 수술복만 입고 있는 그. 심지어 며칠 밤을 두건을 푸를 새도 없이 잠도 못자고 수술을 하느라 더 예민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오는 은아. 이젠 살짝 그를 타이르듯이 말한다.

“ 지금 교수님 몰골 좀 보세요!!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다고~! 나가서 저희들 식사도 좀 사주시고, 교수님도 와인한잔 하면서 한 두시간주무시다 오세요!! “

그녀가 왜 같이 일하자고 했냐며 따지면서 그만둔다고 할 줄 알았는데 예상 밖에 말들이 나오자 뭔 소린가 싶어 그녀를 쳐다보는 인혁. 계속 말을 이어나가는 은아.

“ 수술도 중요하고! 심포지엄도 잘 진행하고 싶어 하는 마음 내가 너무 잘 아는데!! 그렇 다고 그렇게 동동거리고!!, 채근하고!!,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그러면 저흰 너무 불안해 요!! 교수님이 릴렉스가 촥- 되있어야지!! 저희도 안정감이 들죠~!! 저희들 마음 편하게 일 좀할 수 있게~ 어디 가서 두 시간이라도 좀 주무시다오세요!!! ”

그녀가 분명 화를 내고 있긴 한데.... 자세히 들어보면 그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다. 분명히 그만둔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제일 바쁜 시기에 그녀가 그만둔다고 할까봐 긴장하고 있던 인혁. 그녀의 말에 잠시 이게 뭔 일인가 싶어 멍하게 있다가.. 이내 보일 듯 말듯 한 미소를 짓는다. 그의 머릿속은 그저 다행이라는 생각 하나 뿐이었다. 그러다가 그녀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빨리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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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안해요~.... 밥은..! 다음에 먹읍시다..! 나는 괜찮으니까..! 주...주.. 중환자실 다시 가봐야되요 나는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밥다음에 먹죠.. 예.. ”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고는 있는 건지.. 두서없이 이런저런 말을 하더니 일어나서 나가려는 그. 오늘은 기필코 그를 쉬게 하려고 벼르고 있던 은아인데 그가 또 일을 해야 한다고 나가버리자 성질이 난다. 심통이 난 은아는 나가려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일부로 들으라는 듯이 말을 한다.

“ 야~~~ 누가 보면 세상일 혼자 다하는 줄 알겠다! 교수님은 싫다니까~! 우리끼리 맛있는 거 시켜 먹자!! ” “ 네~! ”

며칠 동안 트라우마센터에서 일하면서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일했던 간호사. 드디어 밥이라도 먹는구나 싶은 마음에 은아를 동경어린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너무나도 기쁜 목소리로 대답한다. 반면, 인혁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잠시 멈칫- 했다가 다시 중환자실로 가기위해 천천히 문밖을 빠져나간다. 인혁은 문을 닫고 나와서 한참을 걷다가 트라우마센터 쪽을 한번 슬쩍 보더니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슴을 한번 쓸어내린다.. 은아의 무서운 눈빛 때문에 긴장했었던 인혁. 솔직히 좀, 무섭긴 무서웠다. 그를 딱 째려볼 때 그녀의 포스는 장난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녀가 이렇게 솔직하게 말해주는 덕분에 그는 뭔가 긴장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었다. 사실 요즘 들어, 일에 너무 치여 있고, 피곤해서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던 건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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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그녀에게 조금 고마운 그. 그녀는 정말 다른 코디네이터들하고는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능력도 그렇고, 환자에 대한 마음도 그렇고, 열정도 그렇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인혁 옆에서 그를 나름대로 잘 보조해주는 것도 그렇고... 아무튼 대단한 여자였다. 그저 인혁은 그런 인재가 너무 빨리 그만두지 않기만을 바랄뿐이었다. 그녀의 말을 곱씹어보던 그,

‘ 차암....나..!. 뭔... 와인은 무슨...! ’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피식, 피식- 하고 웃으며 중환자실로 향하는 그였다. 그날 저녁, 인혁은 중환자실에서 수술한 환자의 상태를 체크하고 시간을 벌기위해 안 해도 될 저녁회진까지 모두 마친 후, 트라우마센터 앞에 서있었다. 문만 열고 들어가면 되는데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 앞을 서성거리는 그. 안을 들여다보니 간호사는 퇴근을 했는지 없고 은아 혼자 여전히 남아서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었다. 아까 일 때문에 그녀를 보기가 조금 어색한 인혁. 조금 무섭기도 하고.... 괜히 지금 들어가면 또 한소리 들을 것 같았다.

“ 하.... ”

[ 삐리리리릭- 삐리리리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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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이 문 앞에서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며 괜한 한숨을 쉬고 있는데 갑자기 그의 전화벨이 울린다. 안 그래도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소리 때문에 놀란 인혁은 허둥지둥 전화를 받는다.

“ 예..,, 여보세요... ”

안에 있는 그녀가 들을까봐 평소처럼 최인혁이라는 이름도 밝히지 못하고 최대한 작게 전화를 받는 그. 전화를 건 사람은 한구였다.

“ 야, 신 선생하고 얘기는 끝났냐? ” “ 아이..!! 끝났는데 그건 왜? ” “ 야, 왜라니~! 어떻게 됐어.. 그만둔대? ” “ 아...아니.. 그건 아니고.. ” “ 그럼 계속하는 거야? 이야~ 다행이네?! 근데 넌 어디냐?!, 지금도 바쁘냐? ” “ 아.... 뭐.. 아직ㅇ.... ” “ 안 바쁘구만! 그럼 병원 2층 테라스로 나와봐. 커피나 한잔 하자. ”

안 그래도 지금 갈 데가 없었던 인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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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심 한구의 제안이 반갑게 느껴졌다. 그래도 튕겨보는 인혁.

“ 아.... 바빠서 안 될 거 같은데..? 뭐... 니가 사주는 거면 생각 좀 해보고... ”

그의 말에 한구는 트라우마센터 사람들은 왜 이러나 싶어서 핸드폰을 한참 째려본다. 그녀나 인혁이나 한구에게 커피를 맡겨 놓은 듯이 늘 그에게 커피를 사달라고 하니 말이다. 그가 전화기를 째려뵤며 말이 없자. 인혁이 재촉을 한다.

“ 왜 말이 없노, 싫으나? ” “ 그래~ 내가 사준다 사줘, 나 조금 있다 수술 있어서 시간 없으니까 지금 바로 내려 와..! ”

[ 삑- ]

전화를 끊은 인혁, 바로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2층 테라스, 인혁이 바깥으로 나가보니 이미 와있던 한구가 커피 두 잔을 손에 들고 있었다.

“ 야~ 뭐 이렇게 천천히와~~ 나 수술 들어가야 된다니까. 아휴...진짜..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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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이 가까이 오자 그는 들고 있던 한잔을 인혁에게 건내며 말한다. 그가 주는 커피를 건네받는 인혁.

“ 어, 고맙다, 근데 왜 불렀는데? ” “ 뭘, 왜 불러~ 궁금하니까 불렀지. 내가 외상 팀도 아닌데 신선생 그만둘까봐 아주 조마 조마해죽겠다고.. 도대체 신 선생이 뭐라고 한거야? ” “ 아니.. 뭐... 그.. 별말은안하고... 나보고 어디가서 두 시간만 좀 쉬다가 오라고..

그,,

그, 일한지 한 달이 다돼가는데 밥한번 안사준다고... 뭐 또 내가 너무 불안해하서 자기 도 불안해져서 일을 못하겠다고... 뭐... 그..그런얘기...? ” “ 그으래~~? 진짜..? 신 선생이 그랬어? 이야~~ 역시 신 선생이 대인배네 대인배, 여장 부야 아주~ ”

한구의 말에 괜히 찔린 인혁. 장난처럼 툴툴대기 시작한다.

“ 야 뭐,,대인배는 무슨,, 뭐,, 뭐,, 그러면 그만두기라도 할 줄 알았나..?! 뭐.. 다..당연한 얘기한거지... ”

그의 말에 한심하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는 한구.

“ 쯧쯧쯧...... 아휴... 짜식아~! 언제 정신차릴래.. 안되겠다~ 내가 지금 신 선생한테 가서 바로 그만두라고 해야겠다...! 신 선생이 이걸 이걸 그래도 직속상사라고 인턴들 앞에서 편이나 들어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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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를 차며 장난으로 건물 쪽으로 가는 시늉을 하는 한구. 그러나 인혁은 한구의 말을 놓치지 않고 그를 잡는다.

“ 뭔소리고... 인턴들..? 무슨 편을 들어줘? ”

한구는 그제서야 아차! 싶었다. 좋은 일도 아니고... 그에게는 끝까지 말 안하려고 했던 일이었는데.. 얼떨결에 실수로 말해버린 것이다. 안되겠는지 화제를 돌려보는 한구.

“ 아... 아니, 편은 무슨... 야..! 어휴...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나 수술 늦겠다. 들어 가 볼게...!! ” 그러나 아무리 눈치 없는 인혁이라고 해도, 그런 어설픈 연기가 통할 리가 없었다. 당황하며 들어가려는 한구를 붙잡는 인혁. 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 추천브금 : 에브리 싱글데이 - cold(Inst.)

“ 야... 지과장... 무슨 일인데.....? ”

한구는 그의 진지한 표정을 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날의 일을 말해준다. 한구 말을 듣는 그의 표정이 점점 더 일그러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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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뭐.. 그랬었다고... 근데 솔직히 나도 좀 놀랐다. 신 선생이 그렇게까지 니 편을 들 어줄지는 몰랐는데, 다른 코디네이터 같았으면 너랑 무슨 정이 있다고 니 편을 들어줬겠 냐? 같이 욕이나 안하면 다행이지... “ “ ............. 그런 걸... 왜 이제야 ........ ” “ ......너한테 뭐 좋은 얘기라고 그걸 말하냐... 너도 알고 있잖아... 뭐, 니가 대학 때부터 그런 소리 한 두 번 듣는 것도 아니고... ” “ 아니, 나 말고, 신 선생이 인턴들한테 당한 거... 왜 말 안 해줬냐고.... ” “ 아... 그것도 뭐... 굳이 신 선생이 얘기 안하는데 내가 말해봤자 뭐해.. 분란만 생기지... 아무튼 그날 신선생도 좀 충격 받은 거 같긴 하더라... 니가 병원에서 그렇게까지 혼자인 지 몰랐나보더라고... ” “ ......... ” “ 야... 너 행여나 그 인턴들한테 가서 뭐라고 할 생각 하지마라... 괜히 소문만 더 나빠 져... 오히려 신 선생한테도 더 악 영향일 꺼고... 하긴, 뭐,, 니 성격에 그런 일로 직접 따 지는 일은 없겠지만... ” “ .......... ” “ 야.. 나 이제 진짜 가봐야겠다..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진 말고~? 어? 너도 빨리 들어가~ 야! 나간다~?! ”

그가 걱정되는지 몇번이고 주의를 시커더니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한구. 한구가 들어가자 혼자 남게 된 그. 인혁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질 않았다. 조금... 충격이었다. 사실, 인턴들한테까지 그런 식으로 취급받고 있었다는 건... 그도 몰랐었다. 하지만 그런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한구의 말대로 그는 의대에 입학한 순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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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누군가에겐 적이었고 누군가에겐 험담에 대상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온 건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자기 때문에 자기와 함께 일하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취급당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에겐 더 충격이었다. 그동안은 늘 혼자 지내왔기 때문에, 욕을 듣든 말든 상관이 없었지만 이제 한 팀이 만들어지고, 팀으로 활동하게 되면서 내 몸과 같은 팀원들을 위해 짊어져야할 책임들이 분명히 생긴 것이었다. 가슴이 답답해지는 인혁. 인혁은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신선생은... 왜 내 편을 들었을까... 인턴들한테 그런 취급이나 당할 꺼 면서.... 나를 동정해서였을까...? 그래... 아마 불쌍해보였을 거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니... 욕을 들었을 때보다 더 기분이 처참해졌다. 그가 가지고 있던 마지막 자존심이.. 짓밟혀진 기분이었다. 생각에 빠져서 한참을 그곳에 서있던 인혁. 굳어있는 얼굴로 어디론가 뛰어간다. 몇 분 후, 트라우마센터, 벌써 퇴근시간이 훨씬 지났지만 은아는 여전히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울리는 그녀의 휴대폰.

[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

정신없이 일을 하던 은아 서류에 눈을 계속 둔 채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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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보세요? ” “ 은아씨?! ”

서류를 보던 은아의 눈이 살짝 커지고,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 아.. 아 동규씨..! ” “ 어떻게 된 거에요~! 요 며칠 답장도 없고.. 전화도 안 받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요? ” “ 아... 미안해요~! 일이 너무 바빠가지고.... ” “ 그러게... 내가 그랬잖아요.... 힘들거라고... 봐요~ 벌써 이렇게 전화도 잘 안받고... ”

까맣게 있고 있었다... 은아는 머리를 짚은 채 눈을 감고 전화를 받는다. 세중 병원에 온 이후로 동규와 연락을 거의 못한 게 사실이었다. 동규가 캐나다에 있어서 통화 할 시간이 제한적이었고 그녀도 병원을 옮긴 이 후 바빠졌기 때문에 서로 통화는 잘 못하더라도 메일이라도 잘 주고받기로 했었는데.. 그나마도 요즘은 심포지엄 준비 때문에 너무 바빠서 전혀 신경을 쓸 수가 없던 그녀였다.

“ 아... 진짜 미안해요... 동규씨 근데 지금 거기는 새벽 아니에요?! ” “ 맞아요, 하도 전화를 안 받으니까, 은아씨 목소리 들으려면 이렇게라도 해야죠 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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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항상 새벽에 환자 들어올 때 전화가 와가지고... 부재중 전화보고 전화해야지 해 야지 했었는데... 휴.... 나 때문에 잠도 못 자는 거에요? 앞으론 잘 받을게요.. 그러지 마 세요..! ” “ .....은아씨 바쁜거 아니까..

전화까지는 바라지도 않아요~ 아니, 안 바란다면 거짓말이

지만... 문자나 메일에 답장이라도 쫌 해줘요.. 걱정되니까.... ”

조금 농담조로 말하던 동규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은아는 그의 목소리가 가라앉자 더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불안함에 센터 안을 서성거리다가 창가 앞에 선 채로 마을 이어가는 은아.

“ 아... 알았어요... 너무 정신이 없어서... 정말 미안해요.. 동규씨 화났어요..? ” “ ......... 아니요..... 그런데..... 은아씨가 워낙 하고싶어하고... 은아씨 말대로 아직 캐나다 오려면 1년정도 남았으니까... 괜찮다고 하긴 했는데... 은아씨 새로운 일 시작한지 거의 한달 다 되가는 동안 우리 전화통화 몇 번 한 줄 알아요?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 에요... 우리 1년 후면 결혼할 사이인데... 내가.. 너무한 거에요? ” “ 아니요.. 아니... 동규씨가 뭐가 너무해요.. 내 잘못이지... ”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동규에게 너무도 미안해하는 그녀. 그런 은아의 목소리에 또다시 마음이 약해지는 동규였다.

“ 휴..... 환자살리는 일이 그렇게 좋아요? ” “ ....... 네...... 내가 그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몰 라요... 여기서 환자들 살아나가는 거 보면... 정말 기쁘고.. 보람되고.. 너무 행복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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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하면서도 벅찬 듯이 말을 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동규가 피식- 하고 웃어버리고 만다.

“ ... 알았어요... 그라믄 내가 항복 해야지 뭐.... ” “ .... 미안해요... 그래도, 지금 하고 있는 심포지엄 준비만 끝나면 지금 보다는 안 바쁠 거에요...! 그때는 제가 먼저 전화도 하고 문자도 하고 그럴게요.. ” “ 알겠어요....... 근데, 나 한 3주 뒤에 한국 들어가요...! 사실, 그 말하려고 전화했어요. ” “ 네..? 진짜요? ” “ 그럼.. 진짜죠..! 은아씨 얼굴보고싶어서... 한국에 볼 일있다는 핑계로 잠깐 들어가기로 했어요. 내가 한국 가니까 좋아요? ” “ 아... 그럼요~! 좋죠~! 그란데.. 여기 분위기가 이래서... 언제 시간이 날지는 모르겠어서 요... ” “ 그라믄... 내가 병원으로 갈까요? ” “ 아,, 아니에요~ 정확히 날짜가 언제에요? 공항으로 마중 나갈게요! ”

공항까지 마중 나가겠다는 그녀로 말을 듣자 동규의 목소리가 갑자기 밝아진다.

“ 정말이에요? 마중 나올 수 있어요? ” “ 그럼요~ 동규씨가 나 보고 싶다고 오는건데, 당연히 마중 나가야죠~ ” “ 이야~~ 꼭이에요!! 은아씨 약속 지켜야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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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걱정말아요..! 그런데 동규씨, 미안한데 바빠서 이만 끊어야할 거 같아요. ” “ 아~ 아쉽네.. 얼마 못 했는데.. 그래도 은아씨가 마중 나와 준다니까 좋네요!! 날짜는 정확해지면 내가 메일로 보내 줄게요~!! 그럼 이만 끊을게요~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 “ 네~ 알았어요.. ”

전화를 끊은 은아. 잠시 창문 앞을 서성인다. 그에게는 왜 이렇게 늘 미안한 일만 생기는지.. 어찌보면 자신이 너무 이기적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은아. 늘 일이 더 중요했던 그녀는 늘 그를 기다리게만 만들었다. 동규를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나오는 은아.

“ 하.... ”

한숨을 몰아쉬고는 다시 테이블 앞에 앉아서 서류를 보는 그녀. 그때 살짝 열려있던 트라우마센터의 문이 조심스럽게 닫힌다. 다행히도 그녀는 문이 닫히는 걸 눈치 채지 못한 듯했다. 트라우마센터 문밖, 인혁이 문을 조심스레 닫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간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으로 올라가는 그. 옥상에 도착한 그는 난간 앞에 기대어 밤바람을 쐰다.. 절로 나오는 한숨.

“ 하............ ”

그녀의 통화를 모두 들은 인혁. 솔직히 한구의 말을 들은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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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자신을 불쌍하게 여겼던 걸까봐 자존심이 상해서.... 은아에게 내가 고맙다고 생각할 줄 알았냐고...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화풀이를 하러 올라왔던 그였다. 그런데 막상 그녀가 통화하는 내용을 들으니 자신이 얼마나 한심한 생각을 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머릿속에 맴도는 은아의 한마디..

내가 그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여기

서 환자들 살아나가는 거보면... 정말 기쁘고.. 보람되고.. 너무 행복해요. ‘

그녀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이 일에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배우자가 될 사람한테 연신 일 때문에 연락을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할 만큼, 똑같이 욕을 들을 걸 무릅쓰고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같이하고 있는 동료의 편이 되어 줄 만큼. 남들은 다 싫다고 피해버리는 인혁을 도와주고 끝까지 같이 일해 줄만큼... 인혁은 그녀에게 너무 미안해진다. 그를 감당하지 못해 그만뒀던 다른 코디네이터들처럼, 그녀도 언젠가는 그만두고 스쳐지나갈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기대도 안하고 있었는 데... 그녀는 그게 아니었나보다.. 인혁을 정말로 한 팀이라고 생각해줬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일처럼 이 일을 중요하게생각하고 있었다. 트라우마센터는... 이제 더 이상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되는 밤이었다. 책임감, 이 세 글자가 오늘따라 그의 가슴 깊숙한 곳을 흔들어놓는다. 며칠 후, 그날의 일 때문이었는지, 인혁에게는 작은 변화가 생겼다. 그가 요 며칠간 별로 화를 내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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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에 조급해보이고 불안해보이던 모습은 거의 없어지고 최대한 침착하고 부드럽게 말하려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물론, 여전히 잠도 별로 안자고 밥 먹을 시간도 안주고 일을 시키는 건 그대로였지만, 버럭버럭 화를 내지 않고 말하는 인혁이라니.... 그동안에 인혁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이건 정말 큰 변화였다. 그가 화를 내지 않은 이후부터 트라우마센터의 일들은 정말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인혁의 기에 눌려 벌벌떨며 아무 일도 못하던 간호사도 트라우마센터 일에 적응을 하며 일하는 속도도 훨씬 빨라졌고 은아가 옆에서 잘 코치를 해줬기 때문에 잘 진행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평소에 인혁과 일하던 응급실사람들이나 수술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당황하며 그가 왜 이러나 하고 그를 슬슬 피해 다녔었다. 그러고는 자연스레 트라우마센터에서 일을 하고 있는 응급실 간호사에게 그가 왜 그런지 캐묻기 시작했고, 정작 인혁과 은아 두 사람은 모르고 있었지만, 은아가 인혁에게 화를 내며 쉬었다하자고 했던 일이 무용담처럼 온 병원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 이후, 병원에서 인혁의 험담은 거의 사라졌고, 대신, 은아에 대한 칭찬이 온 병원에 자자해졌다. 그리고 인혁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조금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웬일로 사람들이 친절하게 대해주니 오히려 인혁이 조금 어색해 할 정도였다. 다음 날, 이른 아침, 해운대 세중병원, 오늘도 일찍 출근한 은아. 거의 몇 주간 다른 업무는 하지도 못하고 트라우마센터에 쳐박혀 심포지엄 준비에만 매달렸던 그녀. 병원에 도는 소문 같은 건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심포지엄준비를 거의 마친 그녀는 트라우마센터에 가기 전에 오랜만에 직접 외상환자자료들을 챙겨두려 응급실부터 들러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발걸음을 재촉하며 서둘러 응급실로 들어서는 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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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그녀가 응급실에 들어서자마자 첫 출근을 했던 날처럼 일제히 시선이 그녀에게 쏠린다. 자신에게 시선이 쏠려 순간 당황한 은아는 무슨 일인가 싶어서 잠시 멈칫 한다.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모두 다 웃으면서 그녀를 보고 있었고 간간히 어떤 이들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면 엄지손가락을 살짝 치켜들어주었다. 그때 저 멀리서 은아를 보고 달려오는 나과장.

“ 이야~~ 신선생! 대단해 아주~! 응급실에 복덩이가 굴러들어왔어 복덩이가! ” “ 네..?... 그게 무슨... ”

옆에서 나 과장의 칭찬을 거드는 도형,

“ 그러니까요~! 우와... 어떻게 최 교수님을 그렇게... 정말 대단하십니더!! ”

은아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 두 사람을 번갈아보며 쳐다보고 있었다.

“ 그러니까 말이야~ 응급실 과장인 내가 암만 말해도 씨알도 안 먹혔는데... 이야~~ 능력 있어~ 신선생 정말 능력있어!! 아무튼 계속 수고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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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할 말만 하고 가버리는 기분좋은 듯 가버리는 나과장. 나과장이 가버리자 도형은 은아에게 꾸벅하고 인사를 하더니 여전히 그녀에게 쏠려있는 시선들을 향해 소리친다.

“ 신선생님 수고하십쇼!! 니들 뭐하는데~!! 신 선생님 부담스럽게 뭘 보노! 퍼뜩 일 안하 나~? ”

그제야 은아에게 쏠렸던 시선들이 하나둘씩 거둬진다. 은아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한참을 그 자리에서 벙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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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헬기 ※ 추천브금 :

에브리 싱글데이 - cold(Inst.)

( 현재 시점 ) 2012년 여름, 중환자실에서 환자의 상태를 살피고 있는 인혁. 경운기 추락사고로인해 급하게 트랜스퍼 되어 온 68세 남자환자. 좌측간이 깨져서 급하게 응급수술을 받은 후 2주째 중환자실 신세를 지고 있는 환자였다. 아무래도 환자의 나이가 많다보니 회복하는 속도도 더디고 쉽게 의식이 돌아오기 힘들어 보였다. 조금만 일찍 들어왔더라도 좀 더 쉽게 회복했을 텐데... 아쉬운 생각과 함께 환자의 상태가 걱정되는 인혁. 자리를 뜨지 못하고 환자의 이곳저곳을 다시 살피고 있다. 그때 중환자실로 들어오는 은아.

“ 출발하셔야죠. ”

인혁은 뒤돌아보지 않고도 은아의 목소리라는 걸 바로 알아챘다. 그러나 여전히 환자만 살피고 있는 그.

“ 어딜? ” “ 오늘 심포지엄있는 날입니다. ” “ 아.... 오늘이 그날이던가? ” “ 보건복지부 신임 과장님도 참석하신다니까, 늦지 마시라고 홍보팀에서 연락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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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여전히 은아에겐 눈길도주지 않은 채 대꾸도 없이 배액관만 확인하고 있었다. 매년 열리는 심포지엄이었지만 목이 터져라 외상센터에 대해 얘기해봤자 씨알도 안 먹힌다는 사실을 잘 아는 그였다. 어차피 병원에서 추진시키는 일은 대개 형식적인 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 인혁. 그런 인혁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은아의 생각은 좀 달랐다. 복지부 과장까지 참석하는 자리에서 계속 중증외상의 중요성을 알리다보면 언젠가는 외상센터를 만들 수 있을 거란 희망을 놓지 않는 그녀. 은아는 그가 반응할 때까지 인혁을 보채보기로 한다.

“ 여기서 15분 거립니다.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드릴게요...! 중환이 와도, 수술장 올 라가는 시간이면 돌아올 수 있으니까~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 “ 이, 환자 이, 확인할게 많은데... 저, 인턴이라도 붙여놔요..! 아, 출근할 때 됐ㅈ..

결국, 인혁이 그녀의 말대로 심포지엄에 갈 준비를 하러 급하게 중환자실을 나가려다 다시 그녀를 돌아보며 말하는데.. 그의 말에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은아가 보인다. 인혁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 이상한 낌새를 느낀다.

“ 뭐야 지금 그 표정은..? ” “ 그 친구.. 재활의학과 떨어졌잖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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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출근 안 해? ” “ 전화도 안 받아요~! 응급실도 처음 온 떨턴들이라서... 연락도 안 되고, 인계도 안했대 요.. ”

인혁은 그녀의 말에 잠시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바로 손사래를 치며 말한다.

“ 아~ 취소해..! ”

바로 중환자실을 나가려는 인혁. 그러다가 은아에게 팔을 붙잡힌다.

“ 제가 가 있을게요~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드릴게요~ 이거 펑크 내면 앞으로 헬기 부르기 어려워져요~! “

은아가 그를 잡아 세운 뒤 준비해온 가방, 양복을 그의 손에 쥐어주고 넥타이를 목에 걸어준다. 그녀가 넥타이까지 걸어주자 누가 봤을까봐 슬쩍 뒤를 돌아보는 그. 그러더니 이내 작은 한숨을 쉬고는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한다.

“ 저 환자 혈압 떨어지면 나한테 바로 전화하고.. ” “ 알았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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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인혁의 손과 팔을 잡아 끌어당기는 그녀. 그러자 인혁이 놀라 그녀에게 잡힌 손을 빼며 말한다.

“ 어어? 알았어요..!! ”

은아에게 잡혔던 손을 들어보이는 그. 요즘 들어 괜한 오해를 살만한 행동을 서슴치 않는 그녀의 행동이 괜히 못마땅하게 느껴지는 그였다. 휑하니 나가버리는 인혁.

“ 하... 참...! ”

문밖으로 나온 그는 중환자실을 다시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상하게도 요즘들어 은아가 자꾸 자신을 가만두지 않는 것 같았다. 좀 쳐져 있을라치면 어디선가 나타나 괜히 분위기를 띄운답시고 말을 시키며 그를 한시도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 그녀였다. 한편, 중환자실 안, 은아는 인혁을 보내고 난 뒤, 해냈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가 말한 환자의 상태를 다시 한 번 체크한다. 환자의 상태를 다 체크하고 중환자실을 나오는 그녀. 은아는 그를 보내고 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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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함께 처음으로 치러냈던 국제심포지엄이 생각난다. 병원에 출근하자마자부터 한 달 내내 일에 시달려야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몸서리가 쳐지지만,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추억이기도 했다. 은아에게 새로운 꿈이 생겼던 그때... 그리고 같은 꿈을 꿀 수 있는 동료가 생겼다는 사실이 기뻤던 그때... 아마 그 순간이 아니었다면... 은아 역시도 지금까지 버티긴 힘들었을 것이다. 아마 지금쯤, 꿈도 없이 무작정 결혼을 하고 캐나다 어딘가에서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녀였다. 추억에 잠기는 은아. . . . ( 과거 시점 ) 2010년 4월, 드디어 심포지엄 당일, 커다란 회의장, 단상 위, ‘ 응급의료센터에 관한 국제심포지엄’ 이라는 문구가 크게 적혀있다. 심포지엄의 메인 주제는 중증외상이 아니었으나 몇 해 전부터 한국의학계에서도 외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에 이번 심포지엄에서 중증외상에 관한 논의들은 비중 있는 축에 속해있었다. 비록, 아직 한국에서는 중증외상이 응급의학의 범주에 속해 분류되었으나 이렇게 심포지엄에서 비중 있게 다뤄진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1시간 전에 미리 도착한 인혁과 은아는 테이블에 앉아 발표할 자료를 미리 체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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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부교수가 된 이후 한국에서는 사실상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내건 발표였기 때문에 인혁은 자기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다. 발표문을 매우 딱딱하게 읽어 내려가는 그의 모습 때문에 그가 긴장을 했다는 걸 알아챈 은아. 어디서 가져왔는지 따뜻한 커피한잔을 그에게 내민다.

“ 교수님, 이거 드시고 천천히 하세요. ” “ 아, 고마워요. ”

향긋한 커피향이 그의 코를 자극했다. 그녀가 내민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인혁. 따뜻한 커피를 목으로 넘기자 온몸이 다 따듯해지는 느낌이었다. 덕분에 긴장이 약간 풀리는 것 같았다. 몇 분 후, 회의장에 사람들이 점점 자리를 채우고 드디어 회의가 시작되었다. 주최자인 의사협회의 대표가 인사말과 목적을 밝히고 심포지엄을 진행해나갔다. 지역별로 구분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차례대로 경기지부, 경남지부, 경북지부, 전라지부, 강원지부, 등 각 지역별로 응급센터의 현황과 문제점들이 발표되었다. 지역마다 공통된 문제점은 응급실이 제 기능을 못한다는 데에 있었다. 인력과 장비 부족으로 인해 중소형병원에 있는 응급실들은 대부분 응급실로서의 기능을 한지 못했고 전문의가 한명도 없는 병원도 상당수였다. 그러한 현상은 지역으로 갈수록 정도가 심해졌다. 경증인 환자들조차도 중소형병원에서 감당할 수 없어 대학병원으로 몰려드니 당연히 대학병원 응급실이 환자들로 넘쳐날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말기 암 환자나, 돈이 안 되는 암, 만성질환환자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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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측에서 외래진료로 돌리지 않고 응급실로 떠넘기곤 했고 그런 환자들은 장기간 응급실 베드를 차지하고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응급실은 늘 풀베드(full bed)에 포화상태일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한명의 의사가 감당해야 하는 환자수가 보통 10명 이상이었고 때문에 정작 시급한 치료가 필요한 중증환자들을 치료를 받지 못하고 몇 시간동안 방치되다가 사망하는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은아도 수년간 응급실과 중환자실에서 경험해왔던 것들이었지만 이렇게 정리되어 발표되는 것들을 보니 생각보다 더 심각해 보였다. 몇 해 전 그녀가 일하던 응급실에 복통으로 찾아왔다가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했던 환자가 생각났다. 간호사였던 그녀가 어떻게 할 수도 없이 응급실에서 치료만 기다리다가 수도 없이 죽어나갔던 환자들... 그 환자들의 얼굴과 오열하던 보호자들의 모습이 떠올라 은아의 표정이 잠시 굳어진다. 심포지엄은 점점 이런 상황에서 그런 중증환자들을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의 문제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 대안에 대한 발표로 영국 트라우마 연구센터에서 온 박사의 설명이 이어지고 그 이후, 재미교포출신에 외상전문의의 발표가 이어졌다. 그들의 발표에 따르면 영국과 미국은 응급센터와 외상센터가 아예 분리되어있었고 외상전문의를 중심으로 구성 팀이 3팀 이상으로, 3교대로 구성되어있어서 의사들의 희생이 없어도 효율적으로 환자를 케어할 수 있었다. 게다가 각 지역을 이어주는 시스템과 환자헬기 이송시스템으로 거의 99.9% 골든아워 안에 환자를 이송해오기 때문에 환자의 사망률이 1%도 채 되지 않는다는 설명이었다. 물론, 환자를 감당할만한 수술실과 장비를 갖춘 베드역시 항상 비워두고 있다고 했다. 두 박사의 발표가 이어지는 동안 좌중들은 연신 술렁대었다. 한국과는 너무나도 다른 현실이 그들에게 충격을 준 것 같았다. 은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심포지엄을 준비하면서 봐온 자료들로 인해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저렇게 까지 시스템을 갖추고 있을 줄은... 게다가 환자의 사망률이 1%도 되지 않는다니... 신세계가 따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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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저런 게 가능하기는 할까...? 가능했으면... 좋겠다.... 은아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이윽고 인혁의 차례가 오고, 진행자에 의해 국내의 몇 없는 외상전문의로써, 현재 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경험자로써 그의 이름이 소개되었다. 왠지 그가 소개되자 조금 뿌듯함을 느끼는 은아. 새삼 그와 같이하고 있는 일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이내 그가 단상에 오르고, 한국의 외상현실과 방향에 관한 발표를 이어나가는 인혁. 단상에 오르기 전 긴장했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그의 발표는 거침없이 직설적이었고 날이 선 칼날처럼 예리했다. 듣는 이들로 하여금 가끔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현실비판도 있었지만 누구하나 그의 의견을 반박하지 못 할 만큼 치밀했다. 결론에 다다를 때쯤엔 수술실, 인력, 중환자실, 그리고 헬기까지. 한국식 외상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갖춰져야 할 것들을 설명하는 그. 그의 발표가 강렬했던 만큼 질의응답시간이 길게 이어지고.. 몇몇 병원관계자와 복지부 관계자가 금전적 문제들을 들어 그를 비판했고 인혁이 다시 그 의견에 반박을 하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영국트라우마센터 연구소장이 인혁의 의견에 동조하는 듯한 표시를 보내자 꼬리를 내리고 비판을 멈추는 복지부 관계자.

‘ ... 오... 좀.... 멋있네.. ’

멀찌 감치에서 그의 발표를 지켜보던 은아. 잘 하실 거면서... 긴장하시기는... 그녀는 단상 위에 인혁의 모습이 조금 새롭게 느껴졌다. 평소에 항상 피 칠갑을 한 채로 수술복만 입고 있던 모습을 보다가 말끔히 양복을 차려입고 카리스마있게 청중을 장악하는 모습을 보니 그가 조금 딴사람처럼 느껴지는 은아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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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후, 드디어 심포지엄이 끝나고... 여러 의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뒤풀이를 하러 흩어지고 있었다. 인혁과 은아 두 사람도 가져왔던 자료를 챙기며 서둘러 일어서려는데... 그때 다가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 그중 한 사람이 인혁에게 인사를 한다.

“ 안녕하십니까 ” “ 아.. 예... 안녕하십니까 ” “ 저는 울산병원에 이원표라 캅니다. 오늘 발표 정말 인상 깊게 들었습니다. ” “ 아.. 예.. 저도 잠시만.... ”

명함을 건네주는 인혁. 그렇게 몇 명의 사람들이 그와 간단한 인사를 하고 명함을 주고받은 후, 악수를 하고 자리를 뜬다. 그 모습을 옆에서 흐뭇하게 지켜보다가 한마디 하는 그녀.

“ 교수님 이러다 팬 생기시겠네요. ” “ 무슨... ”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별 반응 없이 짐만 챙기고 있자 그를 조금 더 띄워주는 은아.

“ 오늘은 쪼~끔 멋있으시던데요. 말도 촥- 잘하시고, 뭐 이래 차려입으니 좀 젊어 보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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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하시고.. ” “ 하, 참.. ”

그녀의 칭찬이 나쁘지만은 않았는지 그가 애써 번지는 미소를 삼키며 짐을 들고 출구 쪽으로 향한다. 인혁이 휙- 하고 먼저 가버리자 은아가 피식- 하고 웃으며 그 뒤를 쫓아간다. 회의장을 벗어나 주차장으로 향하는 두 사람. 몇 달 동안 고생해서 준비했던 심포지엄이 끝나자 인혁은 긴장이 풀리면서 기운이 다 빠짐을 느낀다. 아마 은아가 오지 않았다면 이렇게 성공적으로 심포지엄을 끝낼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그.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늘어지는 몸을 이끌고 걸어가고 있는데 은아가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며 말한다.

“ 키 주세요 ”

오늘은 군소리 없이 은아에게 바로 키를 넘겨주는 그. 두 사람 모두 차에 올라타고.. 인혁은 앉자마자 자려는 듯 의자를 살짝 눕히고 팔짱을 낀 채 눈을 감는다. 은아가 시동을 걸고 출발하려는데 그가 들릴락 말락 아주 작은 목소리 말을 한다.

“ .... 수고했어요... ”

아주 작은 소리였긴 했지만 은아는 분명히 들었다. 수고했다는 그 말을. 웬일로 칭찬을 다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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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좋아진 은아가 장난조로 대꾸를 한다.

“ 알아주시니 다행이네요~ 교수님도 고생 많으셨어요. ” “ ........... ”

인혁은 쑥쓰러운지 여전히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린 채로 괜히 잠든 척을 하고 있었다. 그의 모습에 은아는 피식- 하고 웃어버리고는 바로 차를 출발시킨다. 2주 후, 트라우마센터는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심포지엄이 끝나고 조금 여유로워질 줄 알았던 일들은 오히려 그동안 발표 자료준비를 하느라 미뤄났던 일들을 처리하느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환자들은 끝도 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은아는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3일 후면 동규가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오기로 한 날이었다. 공항으로 마중 나가기로 했었는데... 이런 식이라면 오프를 내기도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인혁에게는 아무 말도 못하고 하루가 지나가 버린다. 다음날, 인혁은 하루 종일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은아가 오전 내내 평소보다 더 부지런을 떨고 그가 짜증을 내도 그냥 웃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왜 그러나 의아하게 느껴졌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는 그였다. 그날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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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센터, 응급수술을 마친 인혁이 피곤에 찌든 모습으로 수술복 그대로 소파에서 눈을 감고 누워있다.

[ 끼익- ]

그때, 응급실 문이 살짝 열리고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난다. 그러나 인혁은 너무 피곤해서 누가 왔던 간에 신경 쓰기 싫었는지, 그냥 계속 눈을 감고 있는데.. 잠시 후, 눈앞에 뭔가 휙휙-하고 지나가는 느낌이 든다. 뭔가 싶어서 눈을 살짝 떠보니 은아가 그의 얼굴 앞에서 손을 휙휙 하고 젓고 있었다. 그러다 살짝 떠진 인혁과 눈을 마주치자 깜짝 놀라며 굳어버린 은아. 잠시 동안 그러고 있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 몇 발짝 물러서는 그녀.

“ 뭐..... 에요? ” “ 아아....하하하....하하..... 주..주무시는줄 알고... 하.... 하...”

당황한 은아가 말을 더듬는다. 인혁이 그녀를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이내 자세를 고쳐 앉는다.

“ ...나한테 무슨... 할 말 있어요? ” “ 아... 아뇨... 그... 퇴..퇴근하려고... ” “ 아, 그래요... 오늘 수고했어요...! 나갈 때 불 좀 꺼주고 나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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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다시 자리를 잡고 누우려는데 은아가 나가지 않고 계속 우물쭈물하고 서있다. 뭔 말을 하려고 저러고 있나 싶은 그. 그가 다시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한다.

“ 아~ 왜요..! 할 말 있으면 해봐요! ”

인혁의 눈치를 보더니 그제야 입을 여는 은아.

“ 저... 교수님, 저 오프 좀 내도 될까요..? ” “ ......?...... ” “ 아... 그게 제가 일이 좀 있어가지고.... 저... 공항ㅇ... ” “ 아, 남자친구 마중나가요? ”

그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나오자 은아의 눈이 커진다. 그녀가 너무 놀라자 덩달아 놀라는 인혁.

“ .......?!!!...... 네.... 근데 교수님이 그걸... 어떻게..? ” “ 아, 크흠... 그.. 그때 통화하는거 들었어요. 갔다 와요~ 내가 뭐 그런 것도 못 가게 할 까봐요? 심포지엄 준비하느라 고생도 많았는데, 뭐... 하루쯤이야 어떻게 되겠지... 편하게 갔다 와 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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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인혁이 너무 흔쾌히 갔다오라고 하자 왠지 당황스러운 그녀. 재차 인혁에게 확인을 한다.

“ 진..짜죠? 저 갔다와도 되죠? 그럼 저 모레 오프 낼께요? ” “ 뭐... 속고만 살았나.... 할 말 다했죠..? 거.. 눈 좀 붙일 테니까 나갈 때 불이나 좀 꺼 줘요.. ”

다시 몸을 소파에 뉘이고 눈을 감는 인혁.

“ 아.. 네! 그럼.. 저 퇴근할게요..! ”

[ 달칵- ]

은아가 불을 끄고 나가버리고 어두운 트라우마센터에 홀로 남겨진 인혁. 잠든 줄 알았던 그가 눈을 뜬다.

“ .... 하.......... ”

한숨을 내쉬는 그. 오랜만에 남자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기뻐하는 은아의 모습을 보니 처음 오기 전에 결혼하러 캐나다에 가야 한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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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그녀도 언젠간 트라우마 센터를 그만둬야 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고.. 은아가 온지 벌써 두 달이 다되어간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마치 오랫동안 일을 같이 해온 사람처럼 그녀와는 왠지 손발이 잘 맞았다. 그녀가 오고 나서는 사무실도 깨끗해지고 일도 수월하게 처리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이렇게 인혁을 챙겨주는 사람도 없었는데... 짧으면 6개월만 일할수도 있다고 했으니까... 어쩌면 4개월 후면 그만둬야 할지도 모른다는 얘기인데... 은아가 그만두면 또 어떻게 외상 코디네이터를 구하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당장 트라우마센터 유지문제도 그렇고... 이런저런 생각에 벌써부터 걱정이 앞서는 인혁이었다.

-

이틀 후 새벽, 은아의 집,

[ 떼르르르르릉- 떼르르르르릉- ]

오랜만에 푹- 자려고 생각했던 은아. 늘 그녀가 일어나던 시간이 되니 사끄러운 알람소리가 오늘도 그녀를 깨운다. 알람소리에 놀라 잠이 깬 그녀. 급히 욕실로 뛰어 들어가서 세수를 하는데, 오늘이 쉬는 날이라는 것이 뒤늦게 떠오른다.

“ 아... 뭐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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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 잠을 청하는 은아. 그러나 이미 세수까지 한 터라 잠이 잘 오지 않는다. 아직 동규가 오려면 반나절은 더 지나야하는데.. 결국, 다시 이불을 걷어차며 일어나는 그녀였다. 몇 시간 후, 세중 병원 응급실, 인혁은 오프를 낸 은아 대신에 환자 기록을 확인하러 응급실로 내려와 있었다. 점심시간인데도 응급실은 환자들로 넘쳐났고 여기저기 앓는 소리들로 가득했다. 도형과 몇 안 되는 인턴들이 응급실 이곳저곳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때 울리는 응급실의 전화.

/ 따르르르르릉- 따르르르르릉- /

마침 옆을 지나가던 도형이 전화를 받고, 인혁은 혹시나 환자일까 싶어서 전화내용을 유심이 듣는다. 전화를 받다가 고개를 들고 인혁을 향해 말하는 도형.

“ 저, 교수님! 울산에서 풀다운 환자 한명 트렌스퍼 보낸다는데요? 어떻게 할까요? ” “ 줘봐! ”

전화를 건네받는 인혁. 환자의 상태를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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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40세 남자환자요. 혈압 70에 50이고, 10M높이에서 추락이요? 골절있고, CT상으로 는 간이요? 예, 받겠습니다! 보내세요! 사고난지는 얼마나 됐습니까.. 예... 3시간이요? 하... 빨리 보내세요. 더 이상 지체시키지 마시고! 바로 보내세요! ” “ 어떻게 할까요? ” “ 울산이니까 4~50분정도 걸릴 거야. 일단, 정형외과 연락해서 내려오라고 하고! 신경외 과도 혹시 모르니까 기다리라고 하고! 오자마자 바로 수술장 들어가야 될 꺼 같으니까. 수술장 부터 어레인지하고! 피 신청해놔!. ” “ 예! ”

인혁의 말에 도형이 인턴들에게 일을 분담해준다. 수술장을 알아보려 전화하던 인턴. 전화를 끊더니 도형과 인혁의 눈치를 보며 말한다.

“ 저, 선생님.. 수..수술장이 정규수술로 꽉차있어서... 어레인지가 불가능하다는데요... ” “ 지 과장한테 직접 연락해봐.. ” “ 지금 수술실에 계신다는데요...! 한 30분 지나야 끝나신답니다. ”

인턴의 말에 인혁은 눈을 꽉 감은 채 고개를 숙이고.. 도형은 인혁의 눈치를 본다.

“ 어.. 어떻게 할까요? ” “ 하.... 일단 응급실에라도 세팅해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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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에 바로 어디론가 전화를 하는 도형. 잠시 후, 전화를 끊은 그의 표정이 좋지 않다.

“ 저... 교.. 교수님... 수술도구는 있는데.. 수술간호사 인력이 없답니다...! ”

하필이면 이럴 때.... 은아라도 있었으면 괜찮았을 테지만, 은아도 없고 수술간호사도 없는 상황에서 수술을 진행시키긴 불가능 했다. 잠시 고민하던 인혁. 무언가 결심한 듯, 도형에게 소리친다.

“ 울산병원 연결해서 출발했는지, 언제쯤 도착하는지 다시 알아보고! 마취과 연락해서 지 과장 수술끝나는대로 연락 좀 달라고 해! ”

그렇게 도형에게 소리치고는 바로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인혁. 한편, 같은 시각 은아의 집, 오랜만에 여유를 즐기며 그동안 정리 못했던 집안정리를 끝내고도 시간이 남아서 일찍 샤워를 마치고 나온 그녀. 아직 동규가 도착하려면 3~4시간 정도 남았지만 미리 옷을 고르며 준비를 하고 있다. 그때, 울리는 그녀의 휴대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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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

휴대폰을 확인해 보는 그녀. 인혁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시지..?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 여보세요? ” “ 아! 신선생!! 나 최인혁입니다! ” “ 예.. 교수님, 무슨일이세요? ” “ 지금 병원으로 오면 몇 분이나 걸려요? ” “ ....예? 택시타고 가면 한.. 30분정도 걸릴 거에요.. 갑자기 왜요? ” “ 응급환자가 들어오기로 했는데!! 수술실도 없고 수술간호사도 없데, 지금 병원으로 좀 와줘야 되요!!! ”

응급환자라는 말에 심각해지는 은아의 표정. 다급한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 아, 아, 알았어요!! 바로 출발할게요!! ” “ 빨리요!! 빨리와야되요!!! ”

[ 삑- ]

전화를 끊자마자 은아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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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과 지갑만 챙겨들고 집밖으로 뛰쳐나간다. 같은시각 세중병원, 은아와 통화를 마친 인혁. 도형이 그에게 급하게 말한다.

“ 울산병원에서 지금 막 출발했답니다. 오는데 40분정도 걸릴 거랍니다!! ” “ 좋아! 신선생 오기로 했으니까, 응급실에 세팅해놔! ”

이제야 한숨 돌리려는데 또 응급실전화벨이 울린다.

/ 따르르르르릉- 따르르르르릉- /

“ 예, 세중병원 응급실입니다! 네? 안됩니다 자리가 없습니다!! 벌써 오고있다고요? ” “ 무슨 일이야? ” “ 교수님, 교통사고 환자라는데ㅇ.... ”

[ 삐-- 뽀-- 삐-- 뽀--]

도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병원에 구급차 소리가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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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꼬? 벌써 온기가? ”

그때, 구급대원들에 의해 환자한명이 실려 들어오고 도형과 인혁이 급하게 그들 앞으로 간다.

“ 이렇게 무작정 데려 오시면 어떡합니까?! 지금 자리가 없는데 이렇게 데려오면...! ” “ 세중병원 바로 근처에서 당하 사고라 어쩔 수 없었습니더! ” “ 환자 상태는요? ”

도형이 구급대원들에게 뭐라고 하는 사이 인혁은 환자상태를 체크한다.

“ 교통사고 환자입니더! 혈압90에 70이고, 환자 의식 살아있습니더! ” “ 환자분! 제 말 들립니까?! 여기 어딘지 아시겠어요?! ”

인혁이 환자의 어깨를 살짝 흔들면서 말하자 환자가 대답을 한다.

“ 예... 병원... ”

다행이도 환자의 상태가 별로 나쁘지 않아보였다. 구급대원을 향해 말하는 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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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처치실로 옮겨주세요 ” “ 교수님! 조금 있으면 추락 환자 오잖습니까! ” “ 어쩔 수 없잖아~! 일단 환자 올 때까지 시간있으니까. 상태부터 좀 확인하자고. ”

이내 환자가 처치실로 옮겨지고 인턴들과 간호사들이 붙어서 환자의 상태를 체크한다. 처치실로 오는 인혁.

“ 환자분 상태 좀 체크할게요! ”

인혁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환자의 상태를 체크한다. 그가 다리부위를 건드리자 환자가 고통스러워한다.

“ 여기에 골절이 좀 있는 것 같네, 환자 상태는 좀 어때? ” “ 바이탈은 비교적 안정적인데... 헤모글로빈수치가 미세하게 떨어지고 있습니다. ” “ 일단 환자 의식 괜찮으니까, CT부터 찍고, 정형외과에 콜해. ” “ 예! ”

도형이 대답을 하며 나가려는데 환자가 그를 붙잡는다. 무슨 하고싶은 말이 있는지 무어라 중얼거리는 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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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뭐라고요? ” “ 김..김민준 과장님 좀 불러주십쇼..... ” “ ....!?!!!!.... ”

환자에 입에서 민준에 이름이 나오자 모두들 의아하게 환자를 쳐다본다. 조금 힘든 듯 숨을 몰아쉬며 말하는 그.

“ 하아.... 박상원이라고 하면.... 아실 겁니다....하.... 수술이 필요하면 김민준과장님한테... 받겠습니다.... ” “ 김민준과장님 지인이신가 본데요? 근데 과장님 지금 수술실에 계실텐데... ” “ ..........일단, 연락해드려... 환자분, 연락해드릴 거고요. 손상부위를 확인해야 하니까 CT 촬영부터 하겠습니다..! CT실로 올려..! ”

인혁이 인턴을 향해 얘기하고 곧, 환자가 CT실로 옮겨진다. 환자가 떠난 곳을 응시하던 인혁의 표정이 굳는다. 기억났다... 그가 누군지... 같은 시각 정규수술실, 대장암환자를 수술하고 있는 민준. 그때, 수술방문이 열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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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던트 한명이 들어온다.

“ 무슨 일인데? ” “ 저.. 과장님, 응급실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 “ 응급실? 그런 일은 당직이 알아서 처리해야지..! 내 귀에 까지 들어오게 해야겠어? 어? ”

귀찮다는 표정으로 레지던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호통을 치는 민준. 그러자 레지던트가 곤란한 듯 말을 이어나간다.

“ 저, 그게 어떤 환자가 과장님을 찾는다고 합니다. 이름이 박상원이라고... ”

레지던트의 입에서 환자의 이름이 나오자 살짝 움찔- 하는 민준. 그제야 레지던트를 돌아보며 말한다.

“ 누구? 바.. 박상원? ” “ 예.. 저

교통사고로 실려 왔는데요... 과장님을 찾는다고 합니다. 이름 말씀드리면 아

실 꺼라고... ” “ .......... 상태는....? ” “ 그건 아직.... 지금, CT촬영 하고 있답니다. ” “ 지금 그 환자 누가 보고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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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최인혁교수가 보고있답니다. ” “ 하필이면....!..... 하... 연결해봐..... ”

레지던트가 전화를 연결하고, 수화기 너머로 인혁의 목소리가 들린다.

“ 예.... 과장님..... ”

잠시 수술실을 나와 조용한 곳으로 가는 민준.

“ 환자 상태 어때 ” “ 복부CT는 깨끗합니다. 장이 좀 멍들긴 했습니다만 심각한 정도는 아닙니다. 다만 사고 당시 압박을 받았는지 오른쪽 대퇴동맥쪽 혈관이 조금 손상을 입어서 출혈이 보입니다. ” “ 수술은? ” “ 예, 급하진 않지만 필요할 것 같습니다. 혈관외과에 연락해 두겠습니다. ”

사무적인 태도의 인혁. 민준은 그런 인혁을 향해 잠시 머뭇거리더니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며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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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인혁.... 그 환자 누군지 알지? 부탁하나만 하자... 최교수 혈관수술 가능하잖아? 자네 가 직접해줬으면 좋겠어..... 외과수술 하나 캔슬할테니까.... 그 방에서 수술하고 최대한 조용히..... ” “ 20분 뒤에 응급환자 들어오기로 했습니다. 이 환자는 비교적 경증입니다. 뭐, 정 불안 하시면, 혈관조영실에서 색전으로 막고 있다가 혈관외과 오면 넘기겠ㅅ.... ” “ 야!! 최인혁..!!! ”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는 민준. 그러다 주위를 둘러보고 다시 간신이 목소리를 낮춘다. 최대한 화를 삭이며 말하는 그.

“ .......... ” “ 야...! 응급환자는 외과에서 당직 내려 보낼테니까...!!!!... 하.... 자네가! 그 환자 수술 맡아서 하라고...!! ”

명령조인 민준의 말 때문에 덩달아 인혁의 목소리도 커진다.

“ 당직 간담췌도 가능하답니까?! 추락으로 간이 깨진환자입니다..!! 그 환자, 잘못하면 테 이블데스입니다...!! 제가 수술합니다! 이 환자는 혈관외과에 넘기겠습니다...!! ”

[ 삑- ]

“ 여보세요..?!!! 여보세요!!!!! 에이..씨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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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이 먼저 전화를 끊자 화를 참지 못한 민준이 욕을 퍼붓는다. 병원으로 직접 오지 말라고 했는데....!!! 박상원 그 자가 더 많은 사람들한테 노출될까봐 초조해 하는 민준이었다. 최인혁..... 이놈은 회유도 협박도 통하지 않는 놈이었다. 그때 병원에서 잘리게 했어야 하는데....!! 왜 하필 그런 놈한테 이런 걸 들켜서는... 약, 6년전, 인혁이 조교수가 되기 전, 민준은 그에게 들키지 말아야 할 것을 들키고 만다. 그가 리베이트를 제공받는 장면을 인혁이 목격한 것이다. 건방지게도 인혁이 민준에게 했던 말을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리는 그였다.

“ .... 의사로써... 양심을 지키십쇼.... 교수님.... ”

민준으로써는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물론 두 사람만 아는 일이었지만... 그 이후로 민준은 그가 사용할 수 있는 온갖 정치적, 권력적 수단들을 사용해서 끊임없이 인혁을 괴롭혀왔다. 사실, 인혁이 조교수가 되기 전에 그를 병원에서 내 치려고 했으나.. 민준의 스승이기도 한 정만호과장이 인혁을 보호하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외과를 못하게하고 외상으로 내쫓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병원에서... 인혁은 늘 불편한 진실 같은 존재였다. 모두 다 알고는 있지만 피해버리고 모른척하는 일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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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수면위로 드러내는 존재였다. 쉬쉬하고 덮고 넘어가려는 일들을 자꾸 끄집어 내려하니 조직체로 운영되는 병읜 내에서 그는 늘 혼자일 수밖에 없던 것이다. 외상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의사들도 환자를 살리고 싶은 건 마찬가지였지만, 외상환자는 체계적 시스템 없이 개인의 힘으로는 케어하기 어렵기 때문에 모두들 죽어가는 외상환자들을 모른 척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혁은 그들을 모른 척 하지 않았다. 잠을 조금 덜자고 밥먹는 시간을 줄여서라도 그들을 돌봤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런 그의 모습을 응원해주는 동료들은 아주 소수였다. 대개의 동료들은 그를 시기하기에 바빴다. 그런 그를 가장 미워했던 사람이 바로 김민준이었다. 민준은 과장이 된 이후 기회만 있으면 언제든지 그를 짤라버리고 싶어했다. 그러나 전임과장이었던 정만호가 트라우마센터를 3년동안 보장한다고 하고 떠나버렸기 때문에 인혁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그였다. 민준이 한참 과거를 회상하고 있던 그때, 수술실에서 나온 레지던트가 민준을 찾는다.

“ 저 과장님, 환자 혈압이 불안정합니다. 수술 다시 시작하셔야... ” “ 알았어.. 들어갈게. ”

애써 표정관리를 한 뒤, 다시 수술 방으로 들어가는 그.

한편, CT실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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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이 씩씩- 거리고 있다. 민준과 통화 이후 마음이 진정이 안 되는 그. 박상원... 그자는 제약회사 직원이었다. 인혁이 조교수가 되기 전부터 지속적으로 민준에게 리베이트를 제공했던 인물이었다. 민준은 인혁에게 리베이트의 존재를 들키고 나서 더욱더 인혁을 미워했다. 아마 그가 언제 터트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인혁은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그런 지저분한 일에 굳이 끼고 싶지 않은 그였다. 또한 병원 내에서 리베이트 사례는 수도 없이 많았기 때문에 그가 어디에 고발을 한다고 해서 해결 될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인혁이 화를 가라앉히려고 하는데, CT실에서 도형이 나온다.

“ 교수님 저 환자 어떻게 할까요? ” “ 혈관외과에 응급수술있다고 연락하고 바로 내려오라고 해, 아, 그리고 기다리는 동안 환자 출혈있으니까 혈관조영실에서 색전으로 막고있어.. 나는 환자 도착 할 때까지 응급 실에 내려가 있을테니까... ” “ 예! ”

도형이 대답과 동시에 CT실로 다시 들어가고, 인혁은 한숨을 한번 내쉰 후, 응급실을 향해 발길을 재촉한다. 한편, 해운대 세중병원 앞, 급하게 택시에서 내리는 은아. 응급실로 뛰어들어간다. 바로 데스크로 달려가는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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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가 갑자기 나타난 은아를 약간 놀란 듯이 그녀를 쳐다보고, 그런 간호사를 향해 그녀가 급히 입을 연다.

“ 환자 오기로 했다면서?! 환자는 왔나?!! ” “ 아.. 아니요! 아직이요..! 10분 후면 도착한다는데요..! ”

간호사의 말에 은아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으러 탈의실로 향한다. 잠시 후, 옷을 다 갈아입고 나온 은아. 다시 응급실로 향하며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누군가 뒤에서 그녀를 부른다. 한구였다.

“ 어?! 신 선생!! ” “ 과장님? ” “ 갑자기 응급환자 들어온다면서요..! 어떻게 된 거에요? ” “ 아.. 저도 오늘 오프인데.. 갑자기 전화 받고 오느라 상황은 잘 몰라요 ” “ 아휴... 환자는요? 도착했어요? ” “ 아니요..! 아직 도착 안했는데 금방 온데요! 빨리가봐요! ”

그녀가 서둘러 응급실을 향해 뛰어가고 한구도 그녀 뒤를 쫓아 뛰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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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중병원 응급실, 한구와 은아가 급히 응급실로 뛰어와보니 어느새 인혁이 내려와 있다. 초조하게 환자를 기다리고 있는 인혁.

“ 야, 어떻게된거야? ” “ 아.. 왔나, 울산에서 추락환자 트렌스퍼 오기로 했는데, 환자 혈압 점점 떨어지고 있다 니까.. 지금은 상태 더 안 좋을 거야. 수술실은 아직도 없지? ” “ 수술실이야.. 뭐... 이 시간엔 정규수술로 꽉차있지... 응급실에서 하려고? ” “ 어.. 그래야지.. ” “ 아휴.... 매번 전쟁이네, 암튼 기다려! 금방 애들 데리고 준비해 올 테니까. 대충 셋팅은 해놨어? ” “ 어..! 저기 처치실 옆 소수술방에 셋팅해놨어. ” “ 소수술방은 무슨... 침대하나 달랑있는 거..! 그냥 소생실이지.... 암튼, 준비할테니까! 있 다 보자고! ”

한구가 급하게 수술준비를 위해 가버리자, 그제야 인혁은 옆에 있던 은아에게 눈을 돌린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중요한날인데 괜히 불러낸 거 같아서 그녀에게 미안해진다.

“ 아.... 불러내서 미안해요. 그, 수술간호사가 부족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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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에요! 응급환자 온다는데, 당연히 와야죠. 제가 뭐 더 준비할건 없어요? 중환자실 은요? ”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은아. 그런 그녀가 고맙기 만한 인혁은 다행이라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한다.

“ 아, 중환자실은 구해 놨어요.. 그럼, 신 선생은 피 도착했나 확인 좀 해주고..! 수술도구 들 제대로 세팅됐나 확인 좀 해줘요..! ” “ 네..! ”

은아도 서둘러 수술준비를 위해 뛰어가고.. 그때, 멀리서부터 구급차소리가 들려온다. 점점 커지는 소리.

[ 삐-- 뽀-- 삐-- 뽀--]

이내 환자가 도착하고... 인혁은 구급대원들과 함께 환자를 옮긴 후, 인턴들을 향해 소리친다.

“ 인턴!! 빨리 피 가져와!!! 자네는 라인하나 더 잡고 수액연결하고 혈압, 산소포화도 다 시 체크해봐! ”

이미 수액이 달려있는 환자에 몸에 몇 개의 피와 수액이 더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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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이 인혁이 환자의 상태를 살피고, 추락으로 인해 성한 곳이 없는 환자의 상태. 이미 배가 심하게 부풀어 올라와있고, 다발성 골절과 복강 내 대량출혈이 의심되는 상황.

“ 환자 빨리 수술실로 옮겨!! ” “ 예!! ”

환자가 수술준비가 완료 된 소생실로 바로 이동되고, 인혁도 마스크를 쓰고 수술준비를 한다. 잠시 후, 매우 힘겹게 준비된 수술이 간신히 시작된다. . . . . .

몇 시간 후, 힘겨웠던 응급수술이 끝나고, 다행히도 위급한 고비는 넘긴 터라 인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멸균 복을 벗자마자 시계를 확인하는 그. 벌써 4시 다되어가고, 서두른다고 서둘렀지만 환자의 상태가 심각했던지라 수술이 꽤 오래 걸린 것 같았다. 그가 잠시 망설이더니 다른 간호사 한명과 함께 수술실을 정리하고 있는 은아를 향해 말한다.

“ 신선생, 잠깐 나 좀 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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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뱉은 뒤 바로 문밖으로 나가는 인혁. 은아는 그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다가 무슨 일인가 싶어서 그를 뒤따라 나간다.

“ .....?..... 왜요? 또 무슨 일 있어요? ” “ 그..... 남자...친구 비행기 시간 언제에요? ” “ ....네...?....그건 왜요? 4시 30분이요... ” “ 그럼, 빨리 가봐요..! 뒷정리는 다른 간호사 시킬테니까... ” “ 난 또 뭐라고... 아~ 됐어요..! 벌써 늦었어요.... 아, 그라고~ 여기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 “ 아! 오늘 원래 오프였잖아요..! 잔말 말고.. 빨리 가요! 내일부터 실컷 부려먹을테니까... ”

인혁은 자꾸 빨리 가라는 손짓을 하고, 그의 말에 혹시나 하고 시계를 보는 은아. 지금 출발하면 조금 늦긴 하겠지만, 그의 말대로 얼추 맞춰서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동규한테 못 만난다는 연락도 못한 그녀. 오늘은 꼭 마중 나가겠다고 했던 약속이 떠오르고.. 은아가 살짝 인혁의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레 입을 연다.

“ 저.... 그럼... 진짜 가요....?! ” “ 아, 몇 번을 말해요!! 빨리 가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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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참... 또 소리를 지르고 그러세요... 알았어요!! 가요 가!! 아무튼 교수님 감사해요~ 그럼, 내일 뵈요!! ”

은아가 그에게 인사를 하고 서둘러 뛰어가 버리고, 그녀가 뛰어간 방향을 한참 보더니 괜히 한숨을 내쉬는 인혁. 그녀를 다시 돌려보내면 미안한 마음이 조금 나아질 줄 알았는데... 생각처럼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은 그. 그녀가 잠시만 없어도 이렇게 위급상황이 생기니... 앞으로의 외상센터가 심히 걱정되는 그였다. 잠시 뒤, 인혁은 몸을 돌려 중환자실로 향한다. ※ 추천브금 :

윤건 - I Miss You

30분 후, 김해국제공항, 게이트를 빠져나온 동규가 사람들 사이를 두리번거리는데, 열심히 은아를 찾아보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살짝, 실망하는 동규. 장시간 비행에 지친 그는 짐을 끌고나와 빈 의자에 걸터앉는다. 의자에 앉자마자 휴대폰을 꺼내드는 그. 바로 은아에게 전화를 한다.

[ 뚜르르르르- 뚜르르르르- ]

한참을 걸어봐도 신호음만 들리고 전화를 받지 않는 은아. 설마.... 오늘도 못 만나는 건가.... 굳어버린 동규의 표정. 실망한 동규가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떼려는데, 그때, 저 멀리서 뛰어오는 은아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를 보고는 금세 풀리는 동규. 어느새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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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아씨~! ”

그녀를 향해 팔을 흔드는 동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은아가 이내 그를 발견하고, 서둘러 동규를 향해 달려온다. 오자마자 미안한 표정을 짓는 은아.

“ 헉헉... 아... 미안해요...! 갑자기, 응급환자가 생겨서... ” “ 응급환자요? 오늘 오프라고 하지 않았어요? ” “ 아... 그게, 수술 간호사인력이 부족해서... 응급 콜이 와가지고... ”

그녀의 말에 미세하게 씁쓸한 표정을 짓는 그. 다시 그녀를 보니 어쩐지 은아의 차림이 조금 편해 보이는 것 같았다. 이내 표정을 피고 밝게 말하는 동규.

“ 아이고... 급하게 오느라 고생많았겠네! ” “ 아니에요.. 아... 늦어서 진짜로 미안해요..! ” “ 괜찮아요! 왔으면 됐죠.. 아, 그러면 은아씨, 밥도 못 먹었겠네요? ” “ 아... 네.... 하하.... ”

그의 말에 어색하고 민망해하는 은아.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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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 웃는 동규.

“ 그럼 우리 식사부터 하러 갈래요?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요..! ” “ 아니에요~ 오늘은 제가 살게요~! ” “ 은아씨 맛있는 거 사주고 싶어서 캐나다에서 여까지 날아왔는데~! 내가 예약해둔데 있 으니까 거기로 가요..! ”

그의 말에 은아는 계속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짓고, 동규는 그런 그녀를 데리고 자리를 옮긴다. 두 시간 후, 어느 레스토랑, 동규와 은아는 나이프를 들고 말없이 고기만 썰고 있다. 밥을 먹느라 그런지 둘 다 아무 말도 없고, 어색한 기운이 흐른다.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여는 동규.

“ 그.. 오늘 수술은 잘 끝났어요? ” “ 아~ 네! 10미터에서 추락한 환자라 상태가 안 좋아서 위험하기는 했는데, 다행히도 수 술은 잘 끝났어요~! 그래도 아직은 잘 지켜봐야 되요. 그.... 중환자실에서 고비를 잘 넘 겨야할텐데... ”

병원얘기에 은아에 목소리 톤이 올라간다. 그녀는 동규와 있을 때면 조용한 편이었지만 병원얘기와 환자얘기를 할 때는 늘 약간 신나서 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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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동규는 병원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녀와 말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가끔 일부로 병원 일에 관해 묻곤 했다.

“ 그래도.. 응급환자수술했으면 많이 바빴을텐데, 별로 늦지 않게 왔네요? ” “ 아, 교수님이 수술 끝나자마자 보내주셨어요~ 오늘 원래 오프인데 불러냈다고 미안해 하시더라구요~ ” “ 아.. 그래요? 그래도 좋은 분인가 보네요~ 처음엔 은아씨 목소리가 하도 힘들어보여서 얼마나 고생을 시키길래 그러나~ 싶었는데... ” “ 제가 그랬어요? ” “ 네~ 처음에 목소리가 얼마나 쳐져있었는데요.. 그래도 지금은 좋아보여서 다행이네요. ” “ 처음에 많이 힘들긴 했죠~ 교수님 비위맞추기도 힘들고... 그래도 뭐, 조금... 힘들긴 해 도, 교수님 손 거쳐서 수술하고, 환자들 살아나가는 거 보면~ 절로 힘이 나요! ” “ 그렇게 좋아요? ” “ 네..! 이제야 저한테 맞는 일을 찾은 거 같아요... ”

너무 행복해하는 은아. 그녀가 행복해하는 모습에 동규는 같이 행복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걱정이 된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괜히 자신 때문에 일찍 일을 접게 되면 나중에 그녀가 자신을 원망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동규는 그동안 그녀를 만났던 날 중에 요즘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제일 행복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녀와 만난 지 8개월, 동규가 캐나다에 있는 본사와 한국에 있는 지사를 왔다 갔다하면서 사실상, 만난 시간은 3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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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다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지라 1년 후에 동규가 지내는 캐나다로 떠나 결혼하기로 약속했지만 자신이 너무 성급한 것 아닌가... 그녀에게 너무 부담을 주는 것 아닌가.. 걱정이 되는 그였다. 게다가 은아가 아직 자신을 어색해하는 거 같기도 하고... 조금 더 은아가 그를 받아들일 시간을 줘야하는게 아닌가. 싶은 동규였다.

“ 저.. 은아씨. 혹시, 일은 언제까지 할 생각이에요..? ”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란 듯 눈이 살짝 커져서 그를 쳐다보는 은아.

“ 아... 병원이요....? ” “ 네... ” “ ....음..... 1년후에 캐나다 떠나기로 했으니까.... 원래는 6개월만 하려고 했는데요... ”

은아가 말끝을 흐리며 뒷말을 잇지 못한다. 역시나 생각했던 대로였다. 그녀의 마음을 알아챈 동규.

“ ........ 은아씨, 그 일 더 해보고 싶죠...? ”

그의 말에 은아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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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 딱... 1년만 채웠으면 좋겠는데... ” “ 은아씨, 내가 그래서.... 생각을 해봤는데... 내가... 한국으로 들어올까요..? ” “ 동규씨가 한국으로요?! ” “ 네, 내가 캐나다에 계속 있으면 은아씨 얼굴 보기도 힘들고... 사실, 그동안 서로 바빠 서 많이 만나보지도 못했잖아요.. 또 은아씨도 계속 일하고 싶으니까... 한... 1년만... 한 국에 들어와 있는 건 어떨까 해서요... 사실, 이거 상의하고 싶어서 잠깐 한국에 들어온 거에요... “

동규가 그녀의 눈치를 보는데, 그녀의 표정이 밝아보인다.

“ 그러면, 저야 좋죠,,, 저도 아직 준비가 더 필요했는데... 진짜 그럴 수있어요?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 “ 아니에요~ 여기서 일하고 싶다고 신청하면 몇 달 후엔 가능해요...!! 은아씨만 좋다면... ” “ 저는 좋아요~! ”

그녀가 오랜만에 그에게 환한 웃음을 지어보인다. 그런 은아의 모습을 보자 행복해지는 동규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오랜만에 기분 좋은 저녁식사시간을 보낸다. 추천브금 : 에브리 싱글데이 - cold(Inst.)

두 달 후, 어느덧 세중병원에도 초여름이 찾아오고, 오전 회진 전 이라서 조금 여유롭게 환자자료를 정리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인혁과 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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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병원직원 두 명이 들어온다.

“ 누구십니까..? ” “ 아, 시설팀에서 나왔습니다. ”

대답을 하고는 인혁과 은아는 신경쓰지도 않고 사무실크기를 잰다. 은아는 무슨일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인혁과 직원들을 번갈아가며 쳐다보고만 있 다. 이상한 낌새를 차리고 입을 여는 인혁.

“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 “ 아, 사무실 크기측정 중입니다. ” “ 갑자기 사무실 크기는 왜..? ” “ 아, 전달 못 받으셨습니까? 이 사무실을 외과 별관 회의실로 만들기로 했는데요. ” “ 네? 그게 무슨..? 아니, 갑자기 이러시면... ” “ 갑자기라뇨? 벌써 2주전에 외과과장님께 승인 받았는데요 ” “ ....?!!.... ” “ 아무튼, 여기 다다음주부터 바로 공사들어가기로 되어있거든요? 일주일 안으로 안에있 는것들 싹 비워주셔야되요. 아직 하나도 안 비우신 거 같은데 서두르셔야 될 꺼에요. ”

......!!?!!!!?!!.......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은아는 어안이 벙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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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사무실을 비우라니.. 혹시 인혁은 이게 무슨 일인지 알지 않을까 싶어 그를 쳐다보려는데, 은아가 그를 쳐다볼 새도 없이 그가 갑자기 어디론가 뛰쳐나간다. 몇 분 후, 외과과장 사무실, 방금 출근하고 사무실에 도착한 민준.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고 느긋하게 가운을 입고 있는데 갑자기 방문이 벌컥- 하고 열린다. 놀라서 문 쪽을 바라보니 인혁이 문고리를 잡고 씩씩거리며 서있다. 민준을 노려보고 있는 인혁. 대충 무슨 일인지 짐작이 가는 민준이었지만 일부러 모른 척을 하며 오히려 인혁을 향해 호통을 친다. “ 뭐야?!! ” “ ........... ”

민준의 호통에도 인혁은 아무 말도 없이 그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사실, 병원 직원의 말을 듣자마자 아무생각도 하지 못하고 무작정 이곳으로 올라온 그였다. 그저 너무 화가 났고, 너무 억울해서 뭐라도 따져야겠다는 생각만 들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막상 자신의 앞에서 뻔뻔하게 호통을 치고 있는 민준을 보니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왜 그랬냐고 물어보기엔 그가 왜 자신을 싫어하는지도 알고 있었고 어떻게 이럴 수 있냐는 말이 통할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인혁이 할 수 있는 일은 화를 참지 못해 그를 노려보는 일 뿐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마음에 안 드는 민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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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던 가운을 마저 입고는 똑같이 그를 노려보며 말한다.

“ 이제 눈에 뵈는 게 없어?! 아침부터 뭐하는 건데 지금? ” “ ..................정말..... 몰라서 묻는 겁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

그제야 인혁이 간신히 화를 삼키면서 조용히 입을 연다. 그런 그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리는 민준. 인혁을 비웃듯 쳐다보더니 이내 입을 연다.

“ 왜, 사무실에서 쫓겨나기라도 했나? ”

“ ......!!!!...... "

역시 민준의 짓이었다. 너무도 화가 나는 인혁. 너무 뻔뻔스러운 민준에 모습에 도대체 어떻게 대꾸를 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을 노려보고만 있자 다시 그를 비웃는 민준. 곧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인혁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여유롭게 책상위에 있는 서류를 펼치며 말을 이어나간다.

“ 그, 트라우마센터야~ 인력이라곤 두 명밖에 없는데 그렇게 큰 공간을 쓸 필요가 있나? 전체를 위해서 좀 희생을 해야지~! 자네가 외과회의실 따로 만들어줄 수 있는 거 아니잖 아, 그래서 그렇게 했어. 뭐 문제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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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에 인혁은 고개를 돌리며 어이가 없다는 듯한 한숨을 내뱉는다. 그러다가 민준을 향해 소리치는 그.

“ 그래서 공지도 하나 없이 이렇게 나가라는 게 말이나 됩니까!!!! 외과 회의실이요?!! 하, 이러는 진짜이유가 뭡니까..? 그 일 때문에 이러는 겁니까?!! ”

인혁의 말에 바로 표정이 굳으며 다시 그를 노려보는 민준. 뭔가 찔리는 게 있는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진다.

“ 드디어 본심이 나오는구만, 왜? 협박이라도 하려고? 어~?! ” “ 그게 무슨..!!.. ” “ 최인혁!! 아직도 주제파악이 안되나 본데? 어? 너는 자리도 없어서 응급실로 쫓겨난 몸이고!!! 난 외과과장이야!!!! 너, 뭔가 착각하고 있나본데, 너 아직 외과야..!! 알아? 과 장이 하라면 하지 뭐 그렇게 잔말이 많아!!!!!! ” “ 하, 그래서 이렇게 유치하게 나오시는 겁니까!! 과장이면 과장답게 행동하십쇼!! ”

민준은 상식적인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었다. 참아보려던 인혁. 결국 가슴에 쌓아두고 있던 말이 터트려 버리고 만다. 감정이 주체가 되질 않았다. 인혁의 말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지며 흥분하는 민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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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라고?!! 하... 니가 진짜 맛을 봐야....!!! 그나마 응급실에라도 남아있게 해준 걸 고맙 게 알아야지!!! 어??!! 새로 코디네이터 한명 들어왔다고 이제 좀 편해졌나본데!! 왜.... 그나마도 못하게 해주까? 외상센터?! 너 말고도 할 사람 많아!!! ”

이젠 아예 대놓고 협박하는 그. 외상센터얘기가 나오자 인혁은 말문이 막힌다. 더 내뱉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참아야했다. 이제 외상센터는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기에, 이제는 그가 책임져야 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계속 민준을 노려보는 그. 인혁의 주먹이 부르르 떨린다. 그의 모습을 본 민준이 한쪽 입 꼬리를 올리면서 말을 이어나간다.

“ 아유~ 한 대 치겠네? 어?! 눈 안 내리깔아?!!!! ” “ .......... " " 억울해?!!! 억울하면 사표 쓰고 나가든가 그러면!!!!! “

민준의 목소리가 복도에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인혁은 주먹을 꽉 쥐고, 여전히 말없이 그를 노려보고 있다. 진짜 그냥 다 엎어버리고 그의 말대로 사표를 내던지고 나가버리고 싶었다. 그때, 눈치를 보면서 들어오는 외과 펠로우 한명.

“ 저, 저.... 과..과장님. 수술.. 스케줄때문에... 회..회진도셔야하는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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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을 노려보며 서있던 민준, 펠로우를 한번 쳐다보더니 다시 그를 노려보며 입을 연다.

“ ....... 그러면 그래 까불어놓고 무사할 줄 알았나..?... ”

인혁만 들릴 수 있게 나지막이 말하더니 그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쳐 가버린다. 민준이 나간 뒤, 서있던 자리에서 움직일 수도 없는 인혁. 그의 주먹이 멈추지 않고 계속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있는 그. 결국, 이렇게 될 거였다. 결국 이렇게... 병원으로 다시 돌아오기로 결심했을 때,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쉽지 않을 거란 걸.. 어쩐지... 일이 너무 쉽게 풀린다 싶었다. 하긴, 번듯한 트라우마센터 사무실이 생겼다는 사실도 그로써는 너무 예상 밖에 일이었다. 스승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 그 마저도 갖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 일 줄은 몰랐다. 이런 식으로 갑자기... 이렇게 쫓겨날 줄은 생각치도 못했다. 게다가 지금은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닌데... 더 이상 트라우마센터는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인혁이 설득하여 끌어들인 은아. 그만큼이나 중증외상과 환자에 열정을 가지고 있는 그녀가 있었다. 그가 책임져야할 팀원이 생긴 상태에서, 이렇게 쫓겨날 수는 없었다. 정말 이런 식일 줄은 몰랐다. 인혁이 한참을 그렇게 충격에 빠져 서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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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휴대폰이 울린다.

[ 삐리리리릭- 삐리리리릭- 삑- ]

“ 예.... 최인혁입니다....... ” “ 아, 최인혁 선생!! 나 나병국인데!! 지금 좀 내방으로 내려와야겠어!! ” “ 예.... 알겠습니다. ”

[ 삑- ]

전화를 끊은 그가 간신히 자리에서 발을 떼고 응급실로 향한다.

잠시 후 응급실, 나 과장의 사무실 앞,

[ 똑똑- ]

노크를 한 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인혁. 사무실안에서는 나 과장이 화가 단단히 난 듯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최인혁 선생!!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자네! 사무실 없어지는 거 알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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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좀 전에 알았습니다. ”

딱 봐도 어두운 표정의 인혁.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그를 떠안게 돼서 화가나있던 나과장은 막상 그의 얼굴을 보자 그에게 직접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사실 그의 잘못이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응급실이 늘 무시당하며 이런 일들을 떠맡게 된다는 사실에 화를 주체할 수가 없는 그는 어디에라도 화를 풀어야했다.

“ 하긴, 알고 있었으면 그동안 그렇게 못 있었겠지...! 아니, 그래도 이건! 하... 참..!!! 아 니 어젯밤에 갑자기 원장님한테 연락이 와가지고는! 최교수 사무실 없어지니까 응급실에 서 받아주라고! 응급실 티오 쓰고 있으니까~!! 아니 이게 말이 되나? 어? 티오 뺏기는 것도 서러운데 내가?!! 참..!” “ ....... ” “ 아니, 응급실에서 뭘 어쩌라는 거야~! 공간도 없는데!! 그러게 내가 분란 좀 만들지 말 라고 몇 번을 말하나?! 어? “

“ ........ ”

인혁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응급실 티오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나 과장에게 귀찮은 존재인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뿐만 아니라 늘 인혁에게 짜증을 내고 화를 내긴하지만 그동안 그가 어렵게나마 수술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응급실 인력과 나과장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지금 너무나 지쳐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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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인혁에게 화풀이를 하던 나과장. 그의 표정을 보더니 한숨을 쉬며 말을 멈춘다.

“ 하... 됐어 됐어, 자네한테 이렇게 말한다고 뾰족한 수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어쩔 거야? 이제..?! ” “ ......... ” “ 그렇게 답답하게만 있지 말고...! 대책을 좀 내놔봐 이 사람아!! 자네도 알다시피 사무 실로 쓸 만한 방이 없잖아?! 넘치는 환자들 때문에 공간이 다 포화상태라서! ” “ ...... 주시는 데로 쓰겠습니다.... ” “ 아.. 이거 참...! 아무튼... 머리아프니까...! 일단 나가봐..! 내가 나중에 연락 줄 테니까..! ”

나과장에 말에 인혁은 꾸벅 인사를 하고, 그의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그. 도저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의사가 되고 외상을 하게 된 후 닥쳤던 온갖 시련과 멸시들을 지금까지 잘 버티고 잘 참고 견뎌온 그였지만 사실 속으로는 그동안 너무나도 힘들었었다. 시련과 고독과 아픔과 외로움.. 끝도 보이지 않는 그 기나긴 터널을 도대체 언제쯤 벗어나볼 수 있을까. 고통을 겪으면 겪을수록 익숙해진 척을 해왔지만 사실은 마음속에 두려움이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기에, 한번 아픔을 겪었던 사람이 또다시 똑같은 아픔을 겪을까봐 몸을 사리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었다. 그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신을 보호하겠다는 본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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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두려움 앞에서 작아지고 싶은 건 인혁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눈앞에서 죽어가는 환자들 앞에서 그는 남들처럼 몸을 사릴 수도 없었다. 겪었던 괴로움을 똑같이 겪게 될 줄 알면서도 그 터널 속으로 스스로 뛰어들어야 했다. 인혁에겐 죽어가는 생명을 떠나보내는 일이 그 어떤 일보다 가장 고통스러웠으므로.. 하지만, 그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그도 사람이었다. 다시 다가온 괴로움에 익숙해지기보다는.. 같은 곳에 또 상처를 입게 될까봐 두려웠다. 앞으로의 자신의 모습이 두려웠다. 과연, 또 버텨낼 수 있을지.

“ 하............ ”

※ 추천브금 :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한숨. 병원에...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나보다. 결국 이런 식으로 매달려 있다가 스승님이 보장해주신 3년을 채우고 나면, 아니, 어쩌면 그 3년을 채우기도 전에 어떤 식으로든 쫓겨날 것이다. 민준이 그를 가만히 내버려둘 리 없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뻔한 일이었다. 터덜터덜 걷다보니 어느덧,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근처에 다다랐다. 땅만 보며 걷던 그. 그의 눈에 익숙한 하얀 신발이 보인다. 인혁의 앞을 가로막고 비키지 않는 그 두발. 고개를 드는 인혁. 역시나, 은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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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cm - 어느날(Inst.)


그녀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 “ ........ ”

인혁이 아무 말도 없이 그녀를 지나쳐 트라우마센터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의 뒷모습이 너무나도 쳐져있었다. 은아는 너무 불안했다. 진짜 그 병원직원에 말대로 사무실을 비워야 되는 것인지, 혹시, 트라우마센터가 없어지는 것인지, 도대체 무슨 일 이기에... 인혁의 어깨가 저렇게도 쳐져있는 것인지.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제발 아무 일도 아니기를..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그가 먼저 들어간 트라우마센터 안으로 들어간다. 문을 열어보니 그가 창가 쪽 소파에 앉아있었다. 은아가 들어오는 걸 확인하더니 그가 그녀를 부른다.

“ 이리와서 앉아봐요. ”

그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인혁의 말대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그의 맞은편으로 가서 앉는 은아. 몇 초 간의 정적을 참지 못하고 그녀가 먼저 입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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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대체.... 무슨 일인데 이러세요? ” “ ..... 신 선생.. 일주일안에 사무실 비워야 될 꺼에요. ” “ ..!!!.... 그게 무슨... ” “ 아마 응급실 어디론가 가게 될 거고. 적당한 곳을 찾지 못하면.. 사무실 없이 지내야 할 수도 있어요. ” “ .....그럼... 어떻게 해요? ” “ 만약에.. 그렇게 되면 아마, 지금보다 더 힘들어 질 거에요. 지금처럼 간간히 쉴 수 있 는 곳도 없고, 자료도 여기저기 옮겨가면서 힘들게 정리해야 할 거고.. 아, 참... 신 선 생... 캐나다 가야한다고 했지..? 하긴... 어차피 떠날 거니까... 원래 6개월만 한다고 했었 죠.. 그거 조금 앞당기면 되겠네.. 계약기간 안 채워도 되요. 신 선생 그만두고 싶으면 언 제든지 말해요... ” “ 하, 지금..! 그게 무슨 소리세요...! 제가 언제 그만둔다고 했어요? 왜 교수님 혼자 그러 세요!! 그리고..! 도대체 이유라도 말씀을 해주셔야죠. 왜 사무실에서 나가야하는지 이유 라도 알아야지 될 꺼 아니에요!! ”

그가 또 두서없이 초점을 흐리며 이런저런 말을 내뱉는다. 또 혼자 괴로워하고 있었다. 은아는 너무나도 답답했다. 같이 알면 위로라도 해 줄 텐데, 같이 고민이라도 해 줄 텐데, 저런 식으로 혼자 앓는 인혁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저러다 금방이라도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아주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그를 처음 만났던 그때, 눈 속에 쓰러져 있던 인혁. 어떤 이유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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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어떤 식으로 무너져 내리는지를 목격했었다.

“ 이유는... 이유는.... 묻지 마요. 그냥... 병원에서.. 외상을 별로 안 좋아하니까. 돈도 많 이 들고. 아니, 아니, 그것도 아니고 그냥... 내가 능력이 없어서 그래요.. 능력이 없어서.. ” “ 교수님!!!! ” “ .......... ”

답답함에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버리는 은아. 그녀의 목소리에 인혁이 말을 멈추고 그녀를 한참 쳐다본다.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듯한 그 눈빛. 그의 눈이 너무 위태로워보였다. 도대체 그의 상처의 깊이는 어디까지일까. 더 캐묻는다면 다시 그의 아픈 곳을 건드리게 되는 것일까. 더 이상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인혁은 그녀와 마주치던 눈을 피하며 고개를 숙이고는 잠시 침묵하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다.

“ 어디가세요..? ” “ 회진... 회진가야죠. 너무 늦었어요. 빨리 갑시다.. ” “ .......... 교수님.... ”

은아는 그를 조심스럽게 부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상황에 무슨 회진이냐고 그를 붙잡아두고 더 얘기를 듣고 싶었지만 그를 지금 멈추게 하면 영영 멈춰버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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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은 아무 대답도 없이 천천히 사무실 밖으로 사라진다. 그렇게 그날 인혁은 내내 중환자실과 응급실을 돌아다니며 말도 없이 주구장창 환자만 봤다. 은아도 내내 그의 옆에 붙어 다니며 그를 말없이 보조해줬다. 뭔가 하나 풀려있는 듯한 그의 모습이 너무 불안해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어쩔 새도 없이 그날 새벽, 결국 일이 터져버렸다. 그날 새벽,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왠지 오늘은 그를 혼자두면 안 될 것 같아서 그와 함께 병원에 남아있던 은아. 내내 인혁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여전히 아무 말도 없이 의학서적만 보고있는 그. 그러나 그가 보고 있는 책의 책장이 평소와는 달리 쉽게 넘어가질 않았다. 은아가 보기에 그는 책을 보고있는 게 아니었다. 책을 보다가 문득문득 깊은 생각에 잠겨, 표정이 일그러졌다가, 슬퍼졌다가, 멍해졌다가, 그러다 다시 책을 보기를 반복하는 인혁이었다. 오늘 하루 종일 아무 것도 안 먹은 그. 그가 걱정되는 은아였다. 그때 책에 계속 시선을 둔 채 입을 여는 인혁.

“ ............... 나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할 일 다 끝났으면 퇴근해요... ” “ 아.. 아니에요! 아직 할 일 남았어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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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그런데... 교수님, 나가서 김밥이라도 좀 사올까요..? 오늘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드셨는데.... ” “ ..... 괜찮아요.. 신 선생, 배고프면 나가서 먹고 와요... ”

자신이 배고파서가 아니라 인혁이 걱정되서 물어본 건데,, 그의 반응에 은아는 또 복장이 터진다.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지는 그녀.

“ 저는 아까 간호사 쌤들이랑 먹었잖아요....! 교수님이 걱정이죠.. 밥을 먹고 힘을 내야! 대책이라도 세우죠..!! 제가 요 앞에서 뭐라도 좀 사올테니까..! 꼭 드세요! 교수님 다 드 시면 퇴근 할 테니까... ”

그렇게 쏘아붙이듯 말을 뱉어버리고는 지갑을 챙겨들고 사무실을 나가는 은아였다. 그러나 여전히 책에서 눈을 떼지 않는 그.

“ ........ ”

인혁 역시, 그녀가 지금 자신을 걱정해준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고맙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 그는 자신의 내면에 괴로움 때문에 그녀의 걱정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꾸만 자신이 무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팀하나 책임질 여력도 없으니.. 그렇게 또 생각에 잠겨있는 인혁. 그때, 그의 전화벨이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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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삐리리리릭- 삐리리리릭- ]

“ 예..... 최인혁입니다..... ” “ 예!! 교수님!! 저 레지던트 김도형입니다!! 자상환자가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 “ 환자상태는? ” “ 의식 점점 사라지고 있고요! 혈압 90에 60, 맥박 110이구요 혈압계속 떨어지고있습니 다! ” “ 엑스레이는?! ” “ 예!! 포터블엑스레이 불렀습니다! 곧 올 겁니다!! ” “ 알았어, 찔린자국 제대로 확인하고 있어!! 바로 내려갈 테니까! ” “ 예!! ”

힘없는 몸을 이끌고 급하게 방을 뛰쳐나가는 인혁. 응급실로 향한다. ※추천브금 : 에브리 싱글데이 - 모래시계(Inst.)

잠시 후 응급실, 급히 소생실로 들어온 인혁. 덩치가 좋아 보이고 전신에 문신을 한 남자환자가 베드에 누워있었다. 언뜻 환자의 몸을 보니 온몸이 피 범벅이었다.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해보였다.

“ 환자상태 어때?!! 상처 깊이 체크했어? 몇 군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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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혈이 너무 많아서 혈압 계속 떨어지고 있습니다!! 상처는 복부 중앙에 제일 깊게 한 군데 있고, 나머지는 어깨부터 시작해서 다리까지 베인 것들로 총 14군데입니다!! 다른 건 문제가 안 되는데, 복부에 있는 상처가 너무 깊습니다!!! ” “ 뭐해!! 빨리 눌러서 지혈해!!! CT랑 엑스레이는? 뭐에 찔렸데?!! ” “ 상처부위로 봐서는 꽤 깊은 칼로 찔리고, 베이고 한거 같은데요..! 그, 아직 CT는 못 찍었습니다! 근데 엑스레이 사진보니까 기흉, 혈흉 보입니다!! ” “ 빨리 피 더 가져오고!!! 나 수술 준비하는 동안 흉관삽입해!! 수술장은?!! ” “ 예!!! 수술장은 어레인지 됐습니다!!! ” “ 출혈이 너무 심해서 CT찍을 시간 없으니까!!! 바로 수술 장으로 올려!! 흉부외과, 혈관 외과는 연락됐어? ” “ 그게, 새벽이라.. 온콜이지 않습니까?! 오려면 30분은 넘게 걸린답니다....! ” “ 후..... 됐어 그럼! 오는 동안에 내가 할 테니까!! 빨리 수술장으로 옮겨!!! 자네 어시스 트 준비해!! ” “ 예?! 그럼 응급실은 비워둡니까? ” “ 환자가 이렇게 심각한데!! 어시스트 중에 레지던트 한명은 있어야 될 거 아니야!!! 빨 리 준비해!!! ” “ 아, 예..예!!! ”

도형과 인턴들이 급하게 환자를 수술 방으로 옮기기 위해 준비고, 인혁은 서둘러 수술준비를 하기 위해 뛰어간다. 갑자기 들이닥친 환자. 환자야 늘, 언제나 갑자기 들이닥치지만 오늘따라 왠지 수술준비가 더 버겁게 느껴지는 그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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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시각,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김밥과 라면을 사가지고 돌아온 은아.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지만 인혁이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펼쳐져 있는 책들과 급하게 나간 흔적들. 그녀는 직감적으로 응급환자가 왔다는 생각이 들고, 서둘러 응급실로 뛰어 내려간다. 잠시 후 응급실, 은아가 급하게 뛰어내려와 보니 흉관 삽입을 비롯한 간단한 처치를 마친 피투성이의 환자가 수술실로 올려 지려고 있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그녀의 눈에 인혁은 보이지 않고 수술복차림의 도형이 보인다. 도형에게 달려가는 은아.

“ 선생님! 어떻게 된 거에요? 응급환자에요? 최교수님은요?!” “ 그, 자상환자가 들어와서 수술방으로 옮기는 중입니다. 최교수님은 수술준비하러 가셨 습니다! ” “ 어시스트는요? 김도형쌤이 직접 가려구요? 그라믄 응급실은 어쩌고요? ” “ 아, 새벽이라 인턴들도 거의 없어서.. 어쩔 수 없죠 뭐. 그럼 올라가보겠습니다! ” “ 자..잠깐만요..! 오늘 교수님 좀 안 좋으신데... 그냥 제가 들어갈게요!! 응급실도 비워두 면 안좋아요!! 선생님은 여기계세요!!! ” “ 네?! 아... 예!!! 그래주시면 감사하죠!!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 환자 먼저 올려놓겠습 니다!!! ” “ 네!! ”

엘리베이터로 환자를 데리고 올라가는 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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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아도 바로 수술준비를 하기위해 따라 올라간다.

몇 분 후 수술실, 모든 수술준비가 완료되고 어느새 수술준비를 끝낸 은아는 멸균복으로 갈아입고 인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힘들어 보이지만 비장한 표정을 한 인혁이 수술실로 들어온다. 은아를 발견한 그의 눈이 살짝 커지고, 그녀에게 왜 여기 있냐는 듯한 눈빛을 보낸다. 그러나 그런 그의 모습에 아랑곳 하지 않고 그녀는 인혁의 앞에 멸균수건을 갖다 댄다. 잠시 멈칫하며 그녀를 의아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더니 바로 수건을 받아들고 손과 팔에 물기를 닦는다. 그러자 바로 멸균복을 들이미는 은아. 인혁은 살짝 그녀를 쳐다보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팔을 벌린다. 그녀가 인혁에 팔에 멸균복을 끼워넣고 뒤로 넘겨주자 뒤에 있던 보조간호사가 수술복을 받아서 매듭을 묶어준다. 그 사이 그에게 장갑을 대어주는 은아. 인혁은 그녀가 잡아주는 장갑에 손을 쑥- 집어넣어 장갑을 끼고는 좀 있다 보자는 듯 그녀를 살짝 째려본다. 그러나 여전히 그가 어떤 눈치를 주던 말던 아랑곳하지 않는 은아였다. 잠시 뒤, 드디어 시작되는 응급수술. 수술대 앞으로 온 인혁은 재빨리 손을 소독거즈로 닦은 뒤 마취과를 향해 소리친다.

“ 마취과 선생님, 피 얼마나 준비됐습니까? ” “ 각각 8개씩 준비됐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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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여기에 대량 출혈 때문에, 수혈로 유지시켜야 합니다! 피 5개씩 더 준비해주십 쇼!! 시작하겠습니다!! ” “ 거즈, 포셉! ” “ 메스 ”

인혁이 수술을 시작하려 하자 미리 알아서 거즈를 대는 은아. 그 다음 바로 인혁의 손에 메스가 쥐어지고, 긴박한 수술이 진행된다. 이내 복막과 복벽이 열리고, 갑자기 쏟아져 내려오는 엄청난 양의 출혈.

“ 꺼즈!!! ”

수술간호사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점점 빨라지는 인혁의 손.

“ .....빨리!!! 빨리빨리빨리!! ”

그렇게 거즈를 뱃속에 잔뜩 채워넣은 다음 지혈과 피 흡수를 위해 잠시 기다리는 인혁. 잠시 후, 집어넣었던 거즈를 빠르게 모두 빼내버린다. 그 와중에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고, 그의 얼굴도, 은아의 얼굴도 온통 피범벅이 되버렸으나 아무도 그런 것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 거즈가 모두 밖으로 나오자, 은아가 바로 썩션(Suction)으로 피를빨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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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리게이션! ”

여러 차례 이리게이션을 부어 뱃속을 세척하고 썩션으로 시야를 확보하는 인혁. 곧, 시야가 확보되고... 그의 눈에 들어온 환자의 뱃속상태는 엉망이었다. 꽤 긴 칼이 복부 중앙을 뚫고 들어갔다가 그냥 한 번에 뽑힌 게 아니라 꽂혀져 있는 채로 안에서 한 바퀴 돈 것 같았다. 위는 물론이고 간에 비장에 횡경막까지 손상 받은 것 같았다. 이 정도라면 아까 그 엄청난 대량출혈과 혈흉과 기흉이 모두 설명 가능했다. 어쩌면 환자가 지금까지 버틴 게 용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손상 받은 간과 비장 일부를 절제하고 위를 봉합하는 인혁.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마취과를 향해 묻는다.

“ 마취과! 환자 혈압 어때요? ” “ 예, 혈압 오르고 있습니다. ” “ 어, 이제 됐네. 흉관 색깔은요? ” “ 약간 붉은색이긴 한데, 거의 물입니다 ” “ 그 정도는 튜브로 견딜 수 있으니까, 마무리합시다. 슈쳐! 그, 나머지 자잘한 상처들이 많으니까 그것들만 마저 봉합하고 내려가면 되겠네! 아까 총 몇 군데였죠? ” “ 제일 깊은 상처까지 합하면 14군데라고 했어요..! ” “ 참, 많이도 찔렸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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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과 다리에 있는 깊이 베인 상처들과 조금씩 손상 받은 혈관들을 확인하는 인혁. 환자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다쳤는지는 모르겠으나 상처의 깊이나 모양이 모두 다 다른 것으로 보아 칼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무기로 찔린 것 같았다. 베인 상처들과 혈관들을 봉합하는 인혁. 그렇게 어려운 수술은 아니었지만 찔린 곳이 많아 수술이 길어진다. 무려 4시간에 걸친 수술이 잘 마무리되고, 어느새 아침이 밝았다. 잠시 후, 수술실 앞 보호자 대기실, 수술을 마치고 나온 인혁과 은아가 환자의 보호자들을 찾는다. 그러자 그의 앞에 우르르 몰려드는 부산조폭들. 하나같이 덩치들도 좋고 무섭게 생긴 사람들이었다. 은아는 살짝 긴장을 하고 얼어있는데, 너무 지쳐있어서 어떤 일에도 신경 쓸 여력이 없던 인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환자상태에 대해 설명을 하고는 그곳을 빠져나온다. 언제나 처럼 수술직후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러 중환자실로 향하는 인혁. 그의 뒤를 은아가 졸졸 쫓아온다. 어제 아침부터 내내 아무것도 안 먹은 대다가 장시간의 수술을 끝내고 난 뒤라서 그의 어깨가 어제보다 더욱더 쳐져보였기 때문이었다. 마음이 안 좋을 땐 몸이라도 건강해야하는데, 은아는 계속 쉬지도 못하는 인혁이.. 아니, 일부로 쉬지도 않고 일하는 그가 너무 안쓰러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그의 뒤에 바싹 붙어서 쫓아가고 있는데 잘 걸어가던 인혁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선다. 그 바람에 그의 등에 부딪히는 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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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야....! ” “ ..........퇴근하라는데... 퇴근도 안하고 수술실엔 왜 들어와요?! 오늘이나 내일, 사무실 옮길 수도 있으니까 좀 쉬고 오라는 건데. ” “ 아...... 그게... 걱정되니까 그랬죠..! ” “ 내가 괜찮다잖아요..! 신경쓰지 말라니까 왜 말을 안 들어요? 어차피 그만 둘 사람이... ” “ 누가 교수님 걱정한데요? 응..응급실에 김도형쌤이라도 없으면 어떡할 뻔했어요!! 다른 응급환자 들어오면 어쩌려고... ” “ ............알았으니까. 가서 볼일 봐요. 난 수술한 환자 상태보고 들어갈 테니까... ” “ 아, 같이 가요..! 저 외상코디네이터거든요? 교수님 보좌하는 게 제 일이에요! ” “ ................ ”

그녀에 말에 아무 대꾸도 못하고 그저 은아를 쳐다보기만 하는 인혁. 그러더니 이내 시선을 거두고 다시 중환자실로 걸음을 옮기는데, 또 다시 울리는 그의 전화벨.

[ 삐리리리릭- 삐리리리릭- 삑- ]

“ 예, 최인혁입니다. ” “ 어! 최인혁선생, 나 나병국인데, 지금 좀 내방으로 내려 와봐. ” “ 아... 지금 말입니까? 그.. 수술한 환자 상태 좀 확인해야되서요.. 좀 있다가 내려가면 안되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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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참! 수술 이미 끝낸 환자면 좀 있다 아침 회진할 때 봐도 되잖아! 자네 사무실 어디로 쓸지 상의해야 되니까 빨리 내려와 봐! 질질 끌기 싫어서 그러니까.. ” “ ...... 예, 그럼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

전화를 끊은 인혁의 표정이 안 좋아 보이자 또 무슨 일인가 싶어서 걱정이 되는 은아.

“ 무슨 일인데요? ” “ ........ 나, 저 사무실 때문에... 좀 내려갔다올게요. ” “ 사무실이요? 아, 그럼 저도 같이 가요! ” “ 거...참, 외상코디네이터라면서요? 외상환자 돌보는 것도 신 선생 일이에요! 그, 그, 중 환자실에 가서 환자 어떤지 좀 봐주고 있어요. 금방 갔다 올 테니까.. ”

그렇게 말을 뱉어버리고 휙- 하고 가버리는 인혁. 은아는 그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그의 말대로 외상환자를 돌보는 것도 그녀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기에 한숨을 살짝 내쉬며 바로 중환자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잠시후 응급실, 인혁이 병동과 이어지는 복도에서 나와 보니 나 과장이 자신의 사무실 밖에서 인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오라고 그에게 손짓하는 나과장. 인혁이 서둘러 그의 앞으로 간다. 나과장은 그가 다가오자 머리를 긁적이며 좀 곤란한 듯 입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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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흠... 그... 내가 어제 잠도 못자고 하루 종일 고민해봤는데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공간이 안 나와..! 공간이...! 근데, 그렇다고 사무실 없이 지낼 수는 없잖아? 신선생도 있 는데.. ” “ ......... ” “ 그래서 그... 생각을 해봤는데. 딱 한군데 여유 공간이 있는 방이 있긴 한데.... ” “ .......?!.... ” “ 그... 저기... 지금 물품창고로 쓰는 방이 생각보다 면적이 좀 넓어서 여유 공간이 좀 있거든? 뭐 외상팀이 인력이 많은 것도 아니니까~ 그래서 거기 한쪽에 자리를 만들어서 사무실로 쓰면 될 거 같긴 한데..... 음, 문제는 거기에 있는 물건들을 어디 치워둘 데가 없다는 거야... ” “ ......... ”

내심, 나 과장도 말을 꺼내기가 조금 미안하긴 했다. 그래도 인혁의 직책이 교수인데, 물품창고를 사무실로 쓰라는 건 좀 심하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공간이 없으니 그로써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골치 아픈 그에 대한 문제로 머리가 지끈거리는 나 과장. 인혁이 아무 말이 없자 잠깐 그의 표정을 살피더니 이내 될 대로 되라는 듯이 손을 내젓는다.

“ 아 뭐 싫으면 어쩔 수 없고..!! 다른 데는 공간이 없는 걸 어쩌겠어! 사무실 없이 지내 야지..! ” “ ............. 아닙니다..... 쓰겠습니다.... 어딥니까? 거기가. ” “ 어..어? ...... 아..! 그..그래, 여기야 따라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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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그가 너무 쉽게 대답하자. 오히려 살짝 당황하는 나과장. 그의 표정을 보니 어떤 의욕도 없어보였다. 그래도 별 반발이 없으니까 일단 안심이 되고, 바로 인혁을 물품창고 앞으로 데려가더니 문을 열어준다. 구석방이라서 그런지 아침인데도 어두워 보이는 창고, 먼저 들어가더니 불을 켜주는 나 과장. 그제야 환해진 방안이 모습을 드러낸다. 평소에 관리가 잘 안되던 창고는 상당히 어수선했다. 한쪽 구석에는 간호사들이 쉴 때 쓰던 작은 소파가 하나있었고 철제선반들 위에는 응급실에서 쓰는 각종 도구들이 쌓여있었다. 게다가 햇빛이 들어올 수 없게 창문을 가리고 어지럽게 쌓여있는 박스들 덕분에 방안은 한층 더 음침해보였다. “ ............ ” “ 아, 참, 사..사무실이니까~ 여기 이 소파 치우고 나면 책상하나 정도는 들어올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조금만 정리하면! 나름대로 괜찮은 곳이야 여기가. 그럼, 난 이만! ” “ ........... ”

그를 보기가 민망한 나 과장이 황급히 자리를 피해버리고, 창고에 인혁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진다. 그는 할 말을 잃은 채 그냥 멍하니 서있었다. 응급실 한 귀퉁이에 물품창고.. 아무리 힘이 없다지만 그래도 명색이 교수인데 응급실창고를 사무실로 쓰라니.. 그것은 어쩌면, 병원 밖으로 쫓아내는 것보다 더 그를 비참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누구든 이런 취급을 받고 견디기 쉬운 사람이 있을까? 인혁의 자존심이 무너져 내린다. 정말 이대로 계속 가야하는 것일까..? 만약에 병원을 그만둔다면... 그러나 그런 생각이 드는 동시에 한동안 잊으려 노력했던 어머니의 얼굴이 다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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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버지의 얼굴도 떠오른다. 병원을 그만둔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에겐 돌아갈 곳이 없었다. 이제 그를 기다려주고 반겨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병원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도 없는 인혁. 사실 그는 병원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한 번도 집에 들어가질 않았었다. 집으로 가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늘 어머니가 계시던 집에 들어갔을 때 이제는 아무도 반겨줄 사람이 없다는 걸 느끼게 될 그 순간. 그 순간이 너무 두려웠다. 이제 진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시실을 받아들여야 할 것만 같아서 이제 진짜 세상에 혼자만 남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것만 같아서 그렇게 실감을 하고나면 진짜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무너질 수는 없었다.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살아야만 했다. 그렇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드릴 순 없었기에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병원에 다시 돌아올 때 굳게 결심했었다. 더 이상 그런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하겠노라고 아버지나 어머니같이 방치되어서 허무하게 죽어가는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며 살겠노라고. 그런 의사로 살겠노라고.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보자.. 조금만... 깊은 한숨을 쉬는 인혁. 다시 중환자실로 가기위해 방밖을 나간다. 중환자실로 향하는 복도, 인혁이 힘없이 걸어가고 있는데 저 앞에서 한구가 그를 부르며 뛰어온다. 금새 인혁의 앞에 도착하고는 숨을 헐떡거리는 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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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헉..헉... 야... 어떻게 된거야?! ”

그는 한구가 숨을 헐떡거리며 왜 여기까지 이렇게 뛰어 왔는지 짐작은 갔지만 일부러 모른척한다.

“ ...왠일이야 여기까지....... ”

“ 너...!! 하... 잠깐 조용한데 가서 얘기 좀 하자.. 아, 빨리 와 봐! ”

그런 인혁이 답답한 한구. 큰소리가 나올 거 같아 중환자실 앞이란 걸 의식하며 그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긴다. 몇 분 후, 늘 커피를 마시는 테라스에 도착한 두 사람. 앞질러가던 한구가 그를 향해 돌아보며 흥분하며 묻는데, 인혁은 그저 한숨만 쉬며 난간에 기대선다.

“ 야, 어떻게 된거야?! 어제 김 과장이랑 방에서 소리지르고 난리도 아니었다며? 그리고! 트라우마 센터 사무실이 없어진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 “ 하.... 그냥 그렇게 됐어.... ”

언제나 그렇듯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는 인혁. 또 혼자 모든 걸 짊어지려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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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구는 축 처져있는 인혁의 모습이 안쓰러워 괜히 인혁보다 더 열이 받는다.

“ 아... 진짜...!!! 김민준 그 인간은 도대체 왜 너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 학교 다닐 때부터 그러더니 아주!! 병원 오니까 더 심해 졌어!! ” “ ...... ” “ 아휴... 그래서 사무실은.. 이대로 뺏기는 거야?! ” “ 뭐.... 당장 다음 주부터 공사라는데.. 나갈 수밖에.. ” “ 아이씨.... 그래서, 어디로 가기로 했는데? ” “ 응급실. ” “ 응급실?! 야 거기 사무실로 쓸데가 어디 있다고..?! ” “ ........ ”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테지만 인혁은 차마 한구에게 물품창고로 가게 됐다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그가 그렇게 난간에 기댄 채 아무 말도 없이 서있자 그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인거 같아서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하는 한구. 또 커다란 시련 앞에 놓인 친구에게 그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그저 같이 한숨을 쉬어주는 일밖에 없었다.

“ 하......... 괜찮냐? ” “ ..... 괜찮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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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괜찮을 리가 없었다. 간신히 병원으로 돌아와서 자리 잡고 있던 인혁이었는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한구는 생각할수록 화가 나고 답답하다. 자신도 그런데 인혁의 심정은 오죽할까 싶은 그.

“ ....... 괜찮기는...!... 아휴.... 이따가 끝나고나가서 술이나 한잔하자. 내가 살테니까... ” “ ... 됐어. 사무실 옮기려면 시간 빠듯해... ” “ 아~ 그건 내일 도와줄테니까 그때 같이하고~! 사준다고 할 때 마셔 임마...!! ” “ .......... ”

[ 삐리리리릭- 삐리리리릭- ]

그때, 울리는 인혁의 전화벨. 전화를 확인하는 그. 은아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 삑- ]

" 여보세요 “ “ 교수님!! 전데요!! 환자 혈압이 자꾸 떨어지는데요?! 헤모글로빈수치도 계속 내려가고 있어요!!!! ” “ 무슨 소리에요? 방금 수술한 환자요? 자세히 좀 말해봐요! ” “ 네! 자상환자요! 1시간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다른 환자 보고 다시와보니까 혈압 이..!! 아무튼 이상해요!! 얼른 와보셔야 될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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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았어요!! 금방갈테니까 환자 모니터링 잘하고있어요!! ”

전화를 끊는 인혁.

“ 나 중환자실 좀 가봐야겠다! ” “ 무슨 일인데 그래? ”

대답도 없이 인혁이 뛰어가 버리고,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인지 한구가 그런 인혁을 뒤쫓아간다. 중환자실, 인혁과 한구가 뛰어들어 오는데, 도착해보니 은아가 정신없이 간호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어느새 벤틸레이터를 달고 있는 환자.

“ 환자상태는요?!! ” “ 혈압 더 떨어졌어요! 헤모글로빈수치도 계속 떨어져서 일단 피 가져오라고 하긴 했는 데..”

수술부위를 확인하는 인혁. 14군데 모두 확인했지만 이상이 있는 곳은 없었고, 그런데도 환자의 혈압은 점점 급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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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모글로빈수치가 떨어지는걸 보면 분명 어딘가 출혈점이 있다는 얘긴데.. 내부출혈이 남아있던 것일까. 하지만 아까 분명히 다 막고 나왔던 인혁. 이해는 안 가지만 확인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 환자 CT실로 옮겨요! ” “ CT실이요? 아.. 알았어요!!! ”

이내 환자가 CT실로 옮겨지고 인혁과 한구가 뒤따라가려고 중환자실을 나오는데, 보호자대기석에서 기다리고 있던 조폭들이 놀라며 그들에게 다가온다.

“ 무슨 일 입니꺼?!! 저희 형님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겁니꺼? ” “ 아.. 환자 혈압이 떨어져서요. 검사가 좀 필요합니다! 지금 시간이 없어서, 일단 검사부 터 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

서둘러 인혁과 한구가 CT실로 뛰어간다. CT실, 전신촬영을 하고 있는 환자. 곧, 촬영사진이 모니터에 뜨고 사진을 확인하는 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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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깐만! 뭐야, 이거 기포잖아? 기흉 있는 것 같은데?! ” “ .........!!!!..... ” “ 교수님! 저희 아까 흉관삽입해서 빼냈었잖아요! 이게 어떻게 ...? ”

인혁의 눈이 커지고,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빠르게 생각을 해보는데, 그때, 안에서 들러오는 목소리.

“ 선생님!!! 여기 환자 피가!! ”

촬영실 문을 열고 뛰어 들어가는 인혁. 환자 밑에 깔려있는 시트에서 피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인혁이 다급하게 환자의 몸을 들어보는데, 환자 오른쪽 등에 있는 송곳에 찔린 것 같은 작은 구멍에서 피가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 ......!!!...... ”

아차!싶은 인혁. 복부에 맞은 칼 때문에 횡경막이 뚫리면서 피가 올라가며 기흉과 혈흉이 생긴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의 착각이었다. 뒤쪽에 있던 상처 때문에 폐가 직접적으로 뚫린 모양이었다. CT를 찍고 올라왔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테지만 아까는 워낙 상황이 급해서 CT를 찍을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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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되짚어보니 아까 소생실에서 도형에게 뒷면에 있는 상처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었다. 그가 직접 한 번 더 확인을 했어야하는데.. 대량출혈이 있던 복부의 상처만 신경 쓰다가 정신없는 틈에 확인하는 것을 놓쳐버린 그였다. 시계를 확인하는 인혁. 아침 7시 30분, 벌써 환자가 들어온 지 5시간이 넘게 지난 상황. 이대로 두면 쇼크에 빠질 것이 분명하다. 시간이 촉박했다. 바로 한구를 향해 소리치는 그.

“ 지금 수술실 있나?!! ” “ 야 지금 갑자기 수술실이 어딨어!! 조금 있으면 정규수술 시작하는데!! “ 이 환자 이대로 두면 쇼크야!!! 빨리 수술해야 되니까 수술실 좀 열어줘!! ”

잠시 망설이던 한구.

“ 에이씨... 일단 옮겨!! 신선생! 환자 3번 수술방으로 좀 옮겨줘요...!! ” “ 네!! ”

한구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인혁을 도와 환자를 옮기는 은아. 한구는 어디론가 계속 연락을 하며 수술을 미뤄야겠다고 알리고 곧 환자가 수술장으로 옮겨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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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 후, 드디어 수술을 마치고 나온 인혁. 은아가 그를 뒤따라 나오는데 보호자석에서 기다리던 서너 명의 조폭들이 그를 발견하고는 우르르 몰려와 에워싼다.

“ 어떻게 된깁니꺼?!! 아까는 수술 잘 마쳤다면서요!! ” “ ......... 죄송합니다. 등 뒤에 있던 자상하나를 놓치는 바람에 환자 혈압이 떨어지고 쇼 크가 올 것 같아서 재수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단, 재수술은 잘 마친 상태고... ” “ 장난합니꺼?! 의사가 상처를 놓친다는게 말이나 됩니꺼!!! ” “ ......... 죄송합니다. ” “ 이런!!!! ”

그때 뒤에 있던 조폭하나가 순식간에 인혁의 멱살을 쥐어잡는다. 옆에 있던 은아는 너무 놀랐지만 이대로 두면 큰일 날 것 같다는 생각에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보안요원을 다급히 부른다.

“ 지금 우리형님이 당신 때문에 죽을 뻔 했다는 거 아니야?!!! 그냥 죄송하다면 다야?!! ” “ .......... ”

조폭이 그를 잡고 흔드는데 그는 그냥 흔들려줄 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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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의욕을 상실한 것 같은 표정의 인혁.

“ 왜 아무 말도 안하는데?!! 어?!! 지금 무시하는 기가!!! ” “ ........... ”

다급한 상황, 은아는 그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평소에 인혁이라면 그냥 물러서지 않았을 텐데 왜 이렇게 당하고만 있는 건지. 이 상황이 무서웠지만 지금은 그녀라도 나서서 말려야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은아가 어떻게 해볼 새도 없이 조폭의 주먹이 인혁의 얼굴로 향한다.

“ 아니 이 새끼가 근데!!!! ”

[ 퍽- ]

인혁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고 조폭은 쓰러져있는 그의 멱살을 다시 잡는다. 다시 멱살을 잡혀 흔들려지는 인혁. 아무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맞은 곳이 아팠다. 하지만 마음은 그보다 더했다. 사무실도 그렇고... 그저 자신의 처지가 한심했다. 이제 더 이상 버려질 자존심도 없었다. 자신 때문에 환자가 죽을 뻔했다. 조폭의 말대로 의사로써 해서는 안 될 실수였다. 이제는 화가 났다. 모든 상황이.. 버티고, 버티고, 또 버텨보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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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 니 지금 가방끈 길다고 무시하나? 왜 아무 대답도 없는데?! ” “ .......... ” “ 야, 병원인데 그만 좀 해라 이 새끼야.. ” “ 아, 형님! 가만 좀 있어보이소! 이 새끼가 지금 절 무시하잖아예!! 야 너 끝까지 말 안 할 끼가? 어?! ” “ .......... ” “ 이게 진짜!! ”

다시 인혁을 향해 날아오는 주먹. 은아는 차마 볼 수가 없어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데, 이상하게 퍽- 소리가 나지 않는다. 눈을 살짝 떠본 그녀의 눈앞에서 인혁이 주먹을 한손으로 잡아 막고 있었다. 흔들리는 조폭의 주먹. “ 그만 하시죠.... 어디까지 참아드리면 됩니까. ”

조폭에 주먹을 막아낸 채 입을 여는 인혁. 그는 말을 꺼내놓고서도 그 말이 조폭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맞는 건 상관없었으나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늘 괴로움뿐인 자신의 인생을. 이젠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충동이 든다. 일촉즉발의 상황인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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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서 보안요원들이 달려온다. 그러자 지켜만 보며 서있던 다른 조폭이 인혁의 멱살을 쥐고 있는 조폭을 끌어내며 인혁에게 말한다.

“ 그만해라.... 선생님, 저희 형님 안 깨어나면.. 그땐 이정도로 안 끝납니다.. ”

그렇게 조폭들은 중환자실 쪽으로 사라지고.. 곧 상황이 종료된다. 여전히 쓰러져 있는 인혁. 그녀가 그에게 다가간다.

“ ........괜찮으세요...? ” “ ...........아니요 ”

갑자기 인혁이 벌떡 일어나더니 어디론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긴다. 놀란 은아가 잠시 그가 가던 방향을 쳐다보다가 서둘러 일어나서 그를 따라간다.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 쾅-!!!!!! ]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혁. 쓰고 있던 수술두건과 마스크를 벗더니 아무 곳에나 집어던진다. 그러더니 책상에 있던 차키를 집어 들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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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소파 옆에 있던 그의 옷이 담겨있던 쇼핑백을 집어든다. 그때, 사무실로 들어오는 은아. 그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다.

“ 교수님... 어디... 가세요? ”

그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소핑백에 몇 가지 물건들을 챙겨 넣더니 문밖으로 나가려 하는데, 왠지 지금 잡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에 은아가 서둘러 두 손으로 그의 팔을 잡는다.

“ ......... 놔요 이거.... ” “ 대체 어디가시는 건데요?!!! ”

은아의 물음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는 인혁. 그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하지만 다시 결심이 선 듯한 그의 눈빛

“ ...........신 선생한테는 미안하지만, 나 기다리지 마요. ”

그가 은아의 팔을 뿌리치더니 사무실 밖을 나가버린다. 기다리지 말라니...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이지..? 멍해져 버린 은아.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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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밖으로 나가 그를 찾아보지만 이미 그는 사라지고 보이질 않는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은아는 너무나도 불안했다. 다시 떠오르는 인혁의 마지막 모습. 왠지 그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해운대 세중병원, 옥외 주차장, 성큼성큼 자신의 차를 향해 다가오는 인혁.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짐을 뒷 자석으로 던지더니 차키를 꽂고 시동을 걸고는 바로 주차장을 빠져나간다. 이런 식으로 손가락질 당하다가 쫓겨날 바엔.. 차라리... 그래... 더 감당하지 못할 일이 늘어나기 전에 차라리 지금... 내 손으로 그만두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더 서러운 생각이 든다. 이젠 정말 기댈 곳도 없는데.. 아버지도, 어머니도, 스승님도 없는데... 인혁은 오늘따라... 어머니가 더욱더 그리워진다. -

한편 응급실, 응급실을 두리번 거리며 인혁을 찾는 은아. 아무리 전화를 해봐도 그는 받질 않았고, 중환자실이며 당직실이며 회의실이며.... 그가 있을 만한 곳은 모두 가서 찾아봤지만 허탕이었다. 마지막으로 들른 응급실. 저 앞에 인턴들을 혼내고 있는 도형이 보인다. 서둘러 도형을 향해 뛰어가는 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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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도형 선생님!! 혹시 최인혁 교수님 여기 안 오셨어요?!! ” “ 아.. 아까 수술 들어가신 이후로 못 봤는데요? ”

갑자기 나타난 은아 때문에 놀란 도형. 인턴들을 혼내다 말고 대답한다. 그의 대답 때문에 더 초조해진 은아. 간호사들을 다 붙잡고 인혁의 행방을 물어보지만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때 옆을 지나가던 나 과장이 은아의 말을 듣는다.

“ 왜?! 최인혁선생 없어졌어?! ” “ 아... 그... 아니 없어진 건 아니고요. 급하게 말씀드릴 일이 있는데 안보이셔서.... ” “ 아~ 아! 최인혁 선생 찾으면~ 내가 안 쓰는 책상하나 있어서 소파 치우고 거기에 갖다 놓을 거라고 전해줘~ 그쪽에 인력도 없을 텐데 내가 도와줘야지 뭐. ”

말을 끝내고 가버리려는 나과장. 은아는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 다시 나 과장을 잡는다.

“ 잠.. 잠시만요 과장님!! 창고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 “ 아직 못 들었어? 트라우마 팀 사무실 없어져서 응급실로 오기로 했잖아~ ” “ 아니 그거는 아는데, 창고요..? ” “ 아, 신 선생 못 들었구나... 그.... 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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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하기가 미안해 망설이는 나과장. 은아는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데..

“ .......?..... ” “ 그, 사무실말이야... 응급실에 공간이 없어서 저 물품창고를 사무실로 써야되는데... ” “ ........!!!!...... ” “ 아~ 이 사람은 이런 것도 말 안 하고 말이야.. 사람 곤란하게... 아, 암튼 그렇게 됐어~ 그럼 난 일이좀 있어서.. ”

나 과장이 서둘러 자리를 피해버리고, 충격을 받은 은아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하고 서있었다. 창고를 사무실로 쓰라니... 도대체가... 아무리 공간이 없다고 해도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은 그녀. 그의 자존심이 얼마나 상했을지, 얼마나 그가 혼자 힘들었을 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래서 교수님표정이 그렇게 안 좋았구나... 그래서 그렇게 갑자기... ......!!!!..... 이제야 상황이 이해가 되는 은아. 갑자기 어디론가 뛰어간다. 옥외주차장, 헉헉거리며 뛰어오는 은아. 인혁의 차가 있던 자리를 확인해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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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그의 차는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음을 느끼는 그녀. 그가 어딜 간 것일까... 집으로 간 것일까...? 하지만 늘 병원에만 있던 그... 은아가 들어온 지 벌써 4개월이 지났지만 한 번도 인혁이 집에 가는 모습을 보질 못했던 그녀였다. 처음에는 심포지엄 때문에 너무 바빴으니까 어쩔 수 없었고 그 다음에는 정신없이 들어오는 환자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 그는 너무 오랫동안 집에 가질 않았었다. 게다가 그의 자동차며 사무실이며 온통 생활용품들로 가득했었다. 그녀가 이 병원에 오기 전부터 그는 전혀 집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그런 사람이 도대체 어딜 간 것일까? 왠지 안 좋은 예감이 드는 은아. 잠시 후, 마취과 사무실 앞, 은아가 문 앞을 서성거린다. 괜히 오버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지만 지금 도움을 청할 사람이 한구 밖에 없어서 무작정 한구를 찾아온 그녀. 하자만 막상 들어가려니 망설여진다. 그때, 정규수술을 마치고 돌아온 한구가 피곤한 얼굴을 하며 사무실쪽으로 향하다가 걱정가득한 표정의 은아를 발견한다.

“ 어? 신선생..! 왜 또 자상환자 문제 생겼어요?! ” “ 아, 과장님..! 저.... 그게 아니라요... ” “ ....?... 왜요..? 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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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그게.. 교수님이.... 없어지신 거 같아서요..! ” “ ....?!... 없어지다뇨? ” “ 아, 사실은... 아까 자상환자 재수술마치시고요.... ” . . . . 수술을 마친 뒤에 상황과 트라우마센터의 사무실이 응급실 창고로 옮겨질 거라는 얘기를 해주는 은아. 그녀의 얘기를 듣던 한구의 표정이 점점 심각하게 변한다. . . . “ 그래서, 교수님이 어디로 가셨는지 걱정이 되서... ” “ 하...... 일단, 내가 연락해 볼 테니까. 신 선생은 사무실에 가서 좀 기다리고 있어요. 만 약, 연락 안 받으면... 좀 기다려보다가 이따가 내가 퇴근하고 다시 연락할게요. ” “ 어쩌시려구요..? ” “ 인혁이 한테 같이 가봐야지 뭐... 그 자식 그대로 두면 사고 칠 거 같은데... ” “ .... 네... ” “ 아! 그리고! 인혁이 그런 식으로 나간 거라면 아마 병원 다시 돌아오기 힘들 거에요.. 어떻게 설득은 해보겠지만... 일단,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최교수 이름으로 휴가신청 좀 해줄래요? 원래 미리 내야 하는 건데.. 아마 나 과장한테 좀 잘 말해봐야 할거에요. ” “ 네... 그건 걱정 마세요. 아! 그럼 지금 바로 가서 휴가신청부터 해야겠어요. 이따뵈 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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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아가 한구에게 인사를 한 뒤 서둘러 엘리베이터 쪽으로 뛰어간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는 한구. 끝까지 인혁을 놓지 않는 그녀에게 왠지 고마운 마음이 든다.

‘ 멍청한 자식... 아무한테도 의지안하고 혼자 풀려니까 일이 풀리나? 그렇게 뛰쳐나가버 리면 어쩌자는거야.... 신선생이 저렇게 걱정하는데 말이야.... ‘

그래도 신선생과 함께 간다면 어쩌면 인혁을 설득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한구였다. ※추천브금 : 이루마 - when the love falls

한편, 인혁의 아파트, 빠르게 들어와서 한 번에 주차되는 그의 차. 차를 주차시키자마자 한숨을 쉬며 등받이에 털썩 몸을 기대는 인혁. 멍하니 차창 밖 하늘만 바라본다.

“ ....하........... ”

결국, 와버렸다.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와버렸다. 누구에게라도 기대고 싶었지만 아무에게도 기댈 수 없기에 어머니가 계시던 이 곳에라도 오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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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결심을 했었는데... 버티고 버텨보겠다고 참고 또 참았었는데 결국 터져버렸다. 고개를 돌려 아파트 쪽을 보는 그. 저기에 그가 어머니와 함께 살던 집이 보인다. 벌써부터 가슴이 아려온다. 6개월 전 병원에 돌아오기 전, 슬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버리려 했던 그때가 떠오른다. 집에 발을 들어놓을 수 있을까..? 이제는... 그 슬픔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 무너지지 않고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감당해야했다. 언젠가는... 이겨내야 할 일이었다. 다시 결심을 하는 인혁. 이내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린 뒤 아파트 안으로 향한다. [ 덜컥- ] 손잡이가 돌아가고 아주 조심스럽게 문이 열린다. 살짝 열린 문틈사이로 집안을 들여다보는 인혁.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라도 있었나보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 집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인혁이 문을 더 열고 집안으로 발을 들여놓는데, 휑한 집, 썰렁하다. 집안의 모습은 6개월 전 모습 그대로였다. 싱크대에는 쌓여있는 설거지 감들, 널려있는 옷가지와 책들, 연수 갔다 온 후에 미처 풀지도 못했던 짐 꾸러미들, 휴지쪼가리 하나까지도 6개월 전 모습 그대로였다. 헛웃음만 나오는 인혁. 반년이 지나고 세상은 변해 가는데 어떻게 휴지쪼가리 하나까지도 그대로일수가 있을까. 6개월 동안 아무도 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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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당연한 사실이 새삼 인혁을 무너져 버리게 한다. 이제 진짜... 아무도 없었다. 지금 너무나도 괴로워서 의지할 곳이 필요했지만 아무도.. 아무도 없었다. 힘들게 병원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자상하게 그의 이름을 불러주던 목소리도 따뜻하게 그의 손을 잡아주던 그 온기도 가끔 힘든 세상의 무게를 덜어주시던 그 넓은 품도 이제는 없었다. 그동안은 그래서 버틸 수 있었다. 더럽고 치사하고 억울한 병원 일들을 어머니가 계셨었기에 그랬기에 버틸 수가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난.. 이제 어디에 기대야 하지....? 가슴이 내려앉는다. 그렇게 한참을 서있던 인혁. 발걸음을 옮겨 안방으로 들어가본다. 어머니가 주무시던 이곳, 어지러운 거실과는 다르게 이불이며 베게며 깔끔하게 정리되어있었다. 인혁이 그렇게 했었다. 병원으로 돌아가기 전, 거의 먹지도 않고 잠도 안자고 괴로워하던 그때, 이 방만큼은 하루에도 몇 번씩 청소를 했었다. 그의 눈에 보이는 이불 위에 얹어진 어머니의 영정사진. 밤마다 저 사진을 끌어안고 오열을 했던 그였다. 멍하니 영정사진만 바라보던 인혁. 무릎을 꿇고 앉더니 영정사진을 집어 든다. 액자 안 유리너머로 비치는 어머니의 얼굴. 손을 들어 그 얼굴을 쓸어내린다. 그러나 그의 손에 느껴지는 건 차가운 유리의 표면일 뿐이었다. 참고 있었는데.. 참으려고 했는데..

[ 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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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들고 있던 영정사진 위로 커다란 눈방울이 하나 떨어진다. 손으로 그 눈물방울을 닦아내는 인혁.

[ 툭- ]

그러나 또 눈물이 떨어지고, 다시 닦아내는 인혁.

[ 투둑- ]

다시 떨어지는 눈물, 닦아내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영정사진을 끌어안는 인혁. 넋이 빠진 그의 표정. 그 표정위로 굻은 눈물줄기가 계속 흘러내린다. 이러면 안 되는 데... 이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침을 삼키고 마음을 가라앉히며 멈춰보려 했으나 눈물은 멈춰지질 않는다.

“ .......흐윽... ‘

결국, 설움과 그리움을 참지 못하고 울음소리를 내뱉는 그.

“ 흑.... 흑......... 흐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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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그 울음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그의 나이 마흔 셋. 이렇게 울면 안 될 것 같았다. 모든 걸 감당해내야 할 나이니까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참으려하면 참을수록 더 크게 울음이 새어나왔다. 가슴이 찢어진다.

“ ....흑.......흐으윽...... 어머니.... 어.... 머니... 아아...... 아아아..... ”

그가 울음을 참지 못하고 오열을 한다. 눈물이 미친 듯이 흘러내려 그의 목을 적신다. 곧 영정사진을 끌어안은 그의 허리가 숙여지고 그렇게 인혁은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그렇게 그의 울음소리가 온 집을 가득 메운다. 몇 시간 후, 트라우마 센터사무실, 나 과장을 간신히 설득해서 인혁의 이름으로 3일의 휴가신청서를 작성하고 온 그녀. 항상 이곳엔 인혁이 있었는데.. 그가 없으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은아는 불안하기만 하다. 이런저런 걱정을 하며 소파에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창가를 거닐었다가를 반복하는 그녀였다. 그러다 문득 그가 있었다면 했어야 할 일이 떠오른다. 환자의 수술, 수술 후 환자 케어, 환자 기록정리, 학회 자료준비, 강의준비.... 해야 할 일이 태산 같았다. 수술이야 휴가를 냈으니 상관없다 쳐도 지금까지 그가 담당했던 외상환자들의 케어가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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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없는 동안 환자들에게 어떤 문제라도 발생한다면 인혁이 돌아왔을 때 또 그를 괴롭게 할 일이 생길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은 환자를 위해서나 그를 위해서나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다시 마음을 굳게 다잡는 은아. 외상코디네이터, 외상코디네이터, 본분을 잊지 말자... 그런데 환자 케어는 어떻게 감당하지...? 그녀가 직접 오더를 내릴 수 없으니 환자를 임시로 맡아줄 의사가 필요했지만 인혁이 워낙 인맥이 없었기 때문에 마땅히 부탁할 사람이 없었다. 고민을 하던 그녀, 아무래도 한구에게 부탁해 다른 과 의사들의 도움을 받거나 응급실 레지던트들에게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인맥을 활용해서 중환자실간호사들에게 특별히 더 잘 살펴달라고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급해지는 은아. 서둘러 사무실을 나와 중환자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몇 시간 후, 인혁의 집, 어머니의 방, 울다가 지쳐서 영정사진을 끌어안은 채로 방안에 쓰러져있는 인혁. 이제 더 이상 울음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여전히 그의 눈엔 눈물이 그득했다. 어제 병원에 있을 때부터 아무것도 못 먹고 수술 때문에 잠도 잘 수 없었던 그. 슬픔에 지친 그의 몸에 피로감이 몰려온다. 또 다시 고요하게 흐르는 눈물. 이럴까봐... 이럴까봐 집에 올수가 없었다. 이렇게 무너져 버릴까봐... 외로웠다. 어디에라도 기대고 싶었다. 이 깊은 슬픔에서 헤어 나오고 싶었다. 하지만 도저히 혼자서는 이 슬픔 속에서 빠져나올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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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누군가가 손내밀어줬으면 좋겠다. 내 손을 잡고 나를 이 슬픔의 늪에서 꺼내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헛된 생각이었다. 그 누구도 내손을 잡아줄 리가 없다. 그런 생각을 하니 더 서러워지는 인혁. 눈물한줄기가 또 흐른다. 그는 그렇게 흐르는 눈물을 참기위해 눈을 감고, 몰려드는 피로감과 지친 몸 때문에 그렇게 스르르... 잠이 들어 버린다. 한 시간 후, 트라우마센터, 인혁이 없는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더 바쁘게 일을 하고 있는 은아. 그가 없는 동안 일이 밀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간다면 인혁이 돌아왔을 때 또 욕을 먹을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밥도 먹지 않고 열심히 일만하는 그녀였다. 그때, 문이 열리고 사복차림의 한구가 들어오고,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자마자 인혁의 행방부터 묻는다.

[ 덜컥- ]

“ 아, 과장님 빨리 오셨네요? 교수님께 연락은 해보셨어요? ”

그러나 말없이 고개를 내젓는 한구. 한숨을 쉬며 말한다.

“ 아휴... 말도 마요. 몇 십 통을 해봤는데 한통을 안 받아요. 신 선생은요? ” “ 저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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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 아무래도.. 집으로 찾아가봐야 할 거 같은데.... 혹시 인혁이 집 주소 알아요? ” “ 네?? 아.. 아니요.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 “ 하긴... 나도 모르는데... 음... 어쩌지... 아! 잠시만요. ”

한구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전화상대에게 인혁의 집주소를 묻는다. 은아는 그가 뭘 하고 있나 의아하기만 한데.. 잠시후,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끊는 그.

“ 찾았어요! 인혁이 집 주소. ” “ 어떻게 하신 거 에요..? ” “ 인사과에 전화해서~ 알아봤죠. ” “ 그렇게 하면 알 수 있어요? ” “ 아무나 안 알려 주죠~ 나 이래봬도 과장이잖아요. 마취과과장. 급한 환자 있다는데 연 락이 안 된다고 그러면 되지. ” “ 아아... 저... 과장님..! 근데 교수님 집으로 가는 건데 제가 가도 될까요? 별로 안 좋아 하실 거 같은데... ” “ 어때요~! 신 선생 그렇게 걱정시키고 도망간 놈인데 잡아와야죠! ” “ 아니... 그래도... 과장님은 친구시니까 상관없겠지만... 저는 좀... ” “ 아, 뭘 그런 걸 신경 써요~ 그냥 가면 되지... ”

그러나 계속 고민하고 있는 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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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안 되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 아..... 아무래도 좀 그럴 거 같아요. 저는 그냥 여기서 기다릴게요. 교수님대신 해야 할 일도 많고.. 환자들도 걱정되고.... 그냥 찾으면 연락만 좀 주세요. 걱정되니까.. ” “ 음...... 그래도 신 선생이 가야지 잡아올 수 있을 거 같은데... 뭐, 정 그러면 어쩔 수 없죠... 아! 혹시 그러면..! 이따가 인혁이 꼬드겨서 술 마시러 갈수도 있으니까~ 그땐 꼭 나와야 되요! 나 혼자 그놈 설득 못 할 거 같으니까.. ” “ 아, 네. 그건 알겠어요. 저도 드릴말씀도 있고 하니까... ” “ 인혁이 한테? 뭔데요? 나는 알면 안 되는 건가? ” “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그게, 저 1년 채울 때까지 더 일할 수 있게 돼서요. 외상 일도 더 해보고 싶고... ” “ 어유~ 좋은 소식이네~!! 그런 걸 말해줘야 하는데.. 알았어요! 접수했으니까 바로 데려 올게요. 그럼 이따가 꼭 연락 할 테니까~ 준비하고 있어요! ” “ 네..! ”

이내 한구가 사무실을 나가버리고,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은아는 하던 일을 마저 끝내기 위해 다시 테이블 앞에 앉는다. 1시간 후, 인혁이 사는 아파트 앞, 길을 찾지 못해 조금 헤매던 한구가 드디어 인혁의 집을 발견하고는 차에서 내린다. 혹시나 해서 주차장을 둘러보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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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멀지않은 곳에 인혁에 차가 주차되어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한구. 인혁이 다른 곳에 있으면 내심 걱정했는데 예상대로 이곳으로 왔다니 다행이었다. 이내 그가 아파트 안으로 들어서며 계단을 오른다.

“ 뭐 여긴 엘리베이터도 없어? 아이 힘들어... ”

5층, 드디어 도착한 인혁의 집. 초인종을 누르는 한구.

[ 띵동- 띵동- ]

....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안에 없을 리가 없는데... 그가 문을 두드리며 인혁을 불러본다.

[ 쾅쾅쾅- ]

“ 야! 최인혁! 안에 있는 거 다 알고 왔어~! 문 좀 열어봐!! ” ....

여전히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고.. 한구는 그가 집에 없나 싶어서 돌아가려다가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리며 문손잡이를 돌려 당겨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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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겨있는 줄 알았던 문이 열린다.

‘ ... 뭐야?....’

그래도 남의 집인데.. 들어가도 되나싶어서 잠시망설이다가 그냥 들어가 버리는 한구. 들어가면서 조심스레 인혁을 부른다. “ 인혁아..! 나 들어간다..? 최인...혁~? ” 집안은 썰렁했다. 여기저기 책들과 옷가지들이 정리가 안 된 채 쌓여있었고 싱크대에는 도대체 언제 먹었는지 모를 그릇들도 쌓여있었다. 게다가 방금 여행을 갔다 온 것처럼 여행갈 때에나 쓰는 큰 짐 가방 두 개가 정리도 안 된 채 그대로 거실구석에 놓여있었다.

“ 아이고, 이거 이거 지저분한 거봐.. 이 자식은 병원에서나 집에서나 똑같구먼..! 야 최 인혁~! 진짜 없냐? ”

아무래도 집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아서 그냥 나가려던 한구가 살짝 열려있는 방문을 보고는 무심결에 방문을 열어젖히는데, 그의 눈앞에서 수술복 차림으로 쓰러져 있는 인혁.

“ ...!!!!?!! 야!! 최인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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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 한구가 서둘러 그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치며 깨워본다. 그러자 힘겹게 눈을 뜨는 인혁. 퉁퉁부은 눈으로 한구를 올려다본다. 그러더니 몸을 일으키며 눈을 비비는 그.

“ ...... 뭐야... 어떻게 들어왔어... ” “ 에이씨!!! 야!!! ” “ 뭐? 왜? 오자마자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고..... ” “ 아휴 이거...!!! 이 자식아!! 놀랐잖아!!! 쓰러진 줄 알고!! 아이... 진짜...!! ” “ 쓰러지긴 왜 쓰러지노.. 잠든 기제.. ” “ 잠들었단 놈이 그렇게 부르는데도 못 듣고 있냐? 저 현관문은 그냥 열려있고! 아주 도 둑이 들어 와도 모르겠네..!! ” “ ... 그랬나..? 아... 내가 아까 들어올 때 안 잠갔나보네. 괜찮아.. 뭐 가져갈 것도 없으 니까... 근데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 “ 여기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알거 없고~! 너야말로 뭐하자는 건데? 사무실이건 조폭들이 건 그걸 왜 당하고만 있냐고~! 문제가 생겼으면 얘기를 해야 될 거 아니야 얘기를! 입뒀 다 뭐할래? 혼자 그렇게 싸매고 있다가 이렇게 뛰쳐나오면 어쩌자는거냐고..!! 니가 무슨 인턴이냐? 무슨 교수씩이나 되는 놈이..! 어휴... 이런 답답한 놈한테 말해서뭐하냐 내입 만 아프지.. ” “ 인턴은..무슨.... 뭐 그런얘기 할라고 왔나? ” “ 그래 이런 얘기 할라고 왔다~! 너 때문에 지금 애꿋은 신선생만 발을 동동 구르고 있 으니까 내가 보다못해서 왔다~ 왜? ”

한구에 입에서 은에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찔리는 게 있어서 할 말이 없는 인혁. 그런 인혁의 마음을 아는 한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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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로 더, 은아의 대한 얘기를 꺼낸다.

“ ........... ” “ 신선생이 무슨 잘못이냐고~ 너 같은 상사 만나가지고... 아까 나한테 찾아왔더라..! 너 뛰쳐나가고 나서, 온 병원을 헤메면서 찾아다니다가~ 나과장한테 사무실 얘기 듣고 느낌 이 안 좋아서 나가보니까 진짜 니 차가 없더라고.. 너 없어진 거 같은데 어디 갔는지 모 르냐고~~ 어디라도 가서 찾아 봐야 되지 않겠냐고.. ! 아휴.. 진짜 그런 코디네이터도 없 지.. 아니 이건 코디네이터문제가 아니야! 너 그만큼 챙겨주는 사람이 어딨냐? 좀 잘 좀 해줘라 좀!. ” “ ..... 뭐 어차피 그만 둘 꺼잖아... 사무실도 그렇게 됐는데... 차라리 일찍 그만두게 하는 게 낫지 않겠나.. 어차피 외상센터야 가망도 없는 거.... ” “ 그만두기는~!! 1년 채울 때까지 더하고 싶다 든데? 외상도 더 해보고 싶다고.. 너한테 그 말 해주려던 모양인데..? ” “ .......?!...... 뭔소리야 그게? ” “ 몰라~ 뭔 소린지는 신 선생한테 직접 물어보고! 어떡할 거야? 이제.. 병원은...? 외상센 터야 당장은 가망 없다고 쳐도... 일단 버티면서 기다려봐야 하지 않겠냐..? 뭐 요즘 소식 들어보니까 정부에서 이것저것 센터지원 한다고 준비하는 거 같던데... ” “ 그거야 대통령 바뀌었으니까 잠깐 쇼하는거고... 작년에도 그랬고 몇 년 전에도 그랬잖 아... 그러다 그냥 흐지부지 되버리고... 정부에서 외상 같은 거 지원할 리가 없다...! 그 사람들이야 뭐 환자들 죽어나가던 말던 돈 들이는거 무서워서 벌벌떨기나하지... ”

그의 말에 대꾸할 수 없는 한구. 그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외상센터에 희망을 걸고 있으라고 계속 말해주기엔 인혁이 너무 지쳐보였다. 지금 그의 상황을 너무 잘 알기에 할 말이 없어진 한구가 괜히 화제를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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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뭐, 그래서 병원은 다시 올 거야? 말거야? ” “ ............... 모르겠다. 가야하는건지... 이쯤에서 포기해야하는건지... 이젠 나도 하..... 자 신이 없다. ” “ ..........아휴.... ” “ 뭐... 그래 놔와 놓고 어떻게 다시 들어 가겠노.... 하.... 환자들이랑 인수인계라도 해놓 고 나올걸... 환자상태 안 좋은데... 휴...... ”

이런 상황에서까지 자기보다 환자를 더 걱정하고 있는 인혁. 한구는 그런 그가 안쓰럽고 답답하다.

“ 니 걱정이나 해~! 지 코가 석자인 놈이 무슨 환자걱정을 하고 있냐~! 그리고 벌써 신 선생이 다 처리해놨어...! 나한테 부탁하더라. 중환자실에 있는 외상환자들 임시로 맡아줄 의사 좀 알아봐달라고, 그리고 벌써 응급실 레지던트한테도 다 부탁해놨데~ 너 없는 동 안 외상환자들 좀 잘 봐달라고.. 자기가 몇 번이고 더 체크 할 테니까~ 너 대신 오더 좀 내려달라고. ”

한구의 말을 듣고 괜히 은아에게 짐만 지어주고 나온 거 같아 미안해지는 인혁. 또다시 나온 그녀얘기에 너무나 미안한 나머지 할 말을 잃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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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찔리냐? 신선생이 그렇게 환자 어떻게 되서 너한테 피해 갈까봐, 사방팔방에 아쉬 운 소리해가면서 애쓰고 있는데... 다시 나와 병원...! 내가 너 일단 휴가 처리해 놓으라고 해서... 3일 휴가처리 돼있으니까...! 조금만 쉬다가 나와. ” “ .......... ” “ 이 독한 놈 진짜... 끝까지 대답안하지 끝까지. 아휴..... ”

한구는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리는데 그러다 인혁의 뒤에 있는 영정사진을 발견한다. 그의 눈이 퉁퉁 부어있는 걸로 봐서는 또 인혁이 영정사진을 끌어안고 울기라도 한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가 병원에 돌아오기 전 어머니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얼마나 폐인이었는지 잘 알기 때문에 또 다시 걱정이 되는 한구였다.

“ 뭐야.... 너.... 아직도냐....? ..... 야 임마...... 이제 그만 보내드려....! ” “ ........... ” “ 흠..... 안되겠다! 빨리 나갈준비해 ! ”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는 한구 뭔가를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말을 하고, 인혁은 그런 그를 의아하다는 듯 쳐다본다.

“ ....무슨 나갈 준비......? ” “ 너 여기있으면 혼자서 또 청승 떨고 있을 거 아니야~! 나와! 아까 술 한 잔 사준 댔잖 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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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됐어.... 술은 무슨.... ” “ 아~~ 말 좀 들어~!!! 병원으로 돌아오는 일이야 나중에 생각해본다고 쳐도! 신선생걱정 은 시키지 말아야할 거 아니야~! 신선생도 나온댔으니까 빨리 옷이나 입어!! 무슨 병원 나오겠다는 놈이 수술복을 입고 뛰쳐나와? ” “ ......?.... 아..... ”

한구의 말에 그제야 인혁은 자신이 아직도 수술복 차림이라는 걸 인지한다. 그나저나 은아가 그렇게 걱정을 하고있다니... 아까 너무 심하게 뿌리치고 나왔나 싶은 인혁. 안 그래도 미안한 은아에게 더욱더 미안해진다. 일 안하겠다는 사람을 기껏 꼬드겨서 같이 일하게 만들어놓고 이렇게 갑자기 먼저 나가도 되나 싶기도 하다. 걱정스러운 인혁의 표정. 한구는 그런 그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더니 거실에 있던 인혁의 여행가방을 열어 뒤적거린다.

“ 암튼 수술복 되게좋아해요~! 나는 지긋지긋해죽겠구만, 야 근데, 니 옷 어딨냐? " “ ......... 됐어. 내가 알아서 챙겨입을게... 근데.... 신 선생이... 그래 많이 걱정하고있나? ”

인혁의 입에서 은아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드디어 그가 걸려들었다고 생각하는 한구. 인혁이 볼 수 없게 씨익-하고 웃더니 이내 표정을 굳히고 일부로 살짝 오버스럽게 말을 한다.

“ 아유~ 야! 그걸 말이라고하냐?! 너 안돌아오면 아주 울겠더라 울겠어! 니가 신선생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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훽하고 뿌리치고 나갔대메? 아유... 매정한 놈! ” “ ........ 뭐.... 울기까지야... ” “ 암튼 그럼 나 나가서 시동걸고 있을테니까!! 빨리나와라~!! 어?! 알았지? ” “ ..... 알았으니까. 빨 리가~ 쫌만 정리하고 금방 나갈테니까.... ” “ 어~! 빨리나와~! ”

한구가 그렇게 나가버리고 잠시 멍하게 있던 인혁은 이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머니의 영정사진을 다시 제자리에 놓고 방안을 정리하고 거실로 나오는 인혁. 한구가 옷을 찾는답시고 연수 갔다 온 후에 풀지 못한 여행 집을 다 헤집어놔서 집안이 더 엉망이 되어버렸다. 한숨을 쉬는 인혁. 도저히 지금 치울 수 없을 거 같아서 옷만 갈아입고 현관 밖으로 나가버린다. ※추천브금 : 이루마 - Love Me

한편, 세중병원 중환자실, 이미 퇴근할 시간은 훨씬 지나고 날이 저물어 어두워져가고 있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인혁이 케어 했어야 할 외상환자들의 상태를 체크하고 있었다. 벌써 몇 번째 사무실과 중환자실을 왔다갔다 거리며 쉬지도 않고 환자의 상태를 살피는 그녀였다.

[ 꼬르르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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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은아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사실, 그녀는 오늘 인혁 대신에 바쁘게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한 끼도 못 먹은 상태인데다, 어제 인혁과 같이 수술을 들어가느라 한숨도 잘 수 없었던 그녀. 몸에 피곤이 몰려옴을 느꼈다. 하지만, 인혁에 대한 걱정과 환자걱정 때문에 그녀는 도저히 쉴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히 은아의 간절한 부탁을 듣고 도형을 비롯한 응급실 의사들과 중환자실 담당의들이 번갈아가며 환자상태를 체크하고 오더를 내려준 덕분에 환자들은 특별한 이상 징후 없이 하루를 잘 넘기고 있었다.

잠시 후, 은아가 다시 중환자실을 벗어나려는데 그녀의 핸드폰이 울린다.

[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

시끄러운 휴대폰소리 때문에 얼른 중환자실을 빠져나오며 전화를 받는 그녀.

“ 네. 여보세요? ” “ 아~ 신선생! 난데요~ 지금 인혁이 나오고 있거든요? 아직 병원이죠? ” “ 네, 아직 병원이에요..! ” “ 음, 그러면, 우리가 먼저 가서 자리 잡아놓을 테니까~ 신선생 마저 정리하고 얼른 와 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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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네, 알겠어요..! 그런데.. 교수님은 좀 어떠세요? ” “ 뭐.. 별로 좋지는 않아요. 병원 다시 나오라고 그렇게 말을 해도 끝까지 대답도 없고.. 설득해 봐야죠. 그러니까 신 선생이 얼른와야되요~ 그래도 술 마시러 안 간다고 버티더 니 신선생 얘기하니까 그나마 나오는거같은데~! ”

한구의 말에 은아는 더 걱정 어린 표정을 짓고, 인혁이 진짜로 병원을 그만두기라도 하면 어쩌나싶어 왠지 더 불안해지는 그녀였다.

“ 아... 그래도 어떻게 나오신다니까 다행이네요... 저, 과장님..! 그러면 어디로 가면 되 요? ” “ 병원에서 좀 멀어요~! 여기가 부산대교 지나서 있는 곳인데... 봉래동이라고 알아요? ” “ 봉래동이요? 당연히 알죠~ 거기 남포역 지나서 다리건너 있는 거 아니에요? 저희 집 이 남포 역 근처라 거기랑 가까워요! ” “ 아~! 잘됐네! 그럼 남포역 근처에서 자리 잡고 있을 테니까~ 남포역으로 와요! 어? 저 기 인혁이 내려오네. 그럼 끊을 테니까, 이따가 도착하면 연락해요~! ” “ 아, 네..! ”

이내 전화가 끊어지고, 인혁을 어떻게 설득해야하나 고민되는 은아. 그녀는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하며 사무실로 향한다. 잠시 후, 트라우마센터 사무실에 도착한 은아가 서둘러서 작업하다만 자료들을 대충 정리해놓고 그의 책상위에 올려놓는데, 책상 한 귀퉁이에 놓여있는 카메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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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눈에 들어온다. 그 순간, 이거다! 싶은 은아. 카메라를 자신의 가방에 넣고 정리를 마친 뒤,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한편, 인혁의 집앞, 아파트를 빠져나온 그가 한구의 차를 향해 다가오더니 이내 문을 열고 보조석에 탄다. 그가 타자마자 일부로 오버스럽게 인혁을 반기는 한구.

“ 생각보다 금방 나왔네~! 그래도 술이 땡기긴 하나보지~? ” “ 하... 참나, 빨리나오랄 땐 언제고... ”

인혁은 한구에 말에 투덜거리면서도 피식- 웃는다. 사실, 집에 돌아온 직후부터 짧은 시간이었지만 너무 많이 외롭고 무서웠다. 영영 혼자가 되어버릴 것만 같아서.. 집으로 누가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그런데 막상 한구가 찾아와주니 내심 반가웠다. 애써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인혁은 이렇게 자신이 무너지려 할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나 힘이 되어주는 한구가 사실 무척이나 고마웠다. 하지만, 그에게 고마운 동시에 조금 슬퍼지는 인혁. 이제 병원을 그만두면.. 이놈도 볼 수 없겠구나.. 라는 생각에 다시 씁쓸한 표정을 짓는 그였다. 20분후, 한구와 그가 어느 호프집 안으로 들어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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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의 표정이 별로 좋지가 않다. 생각해보니.. 정말 오랜만이었다... 지난겨울, 술을 먹고 응급실에 실려 갔던 그날, 힘겹게 꿈속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뵈었던 그날, 술을 먹었던 건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그날 이후, 병원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전혀 그럴만한 시간도, 정신적 여유도 없었다. 막상 이렇게 병원을 나와서 생각해보니 자신이 지난 6개월을 어떻게 버텼나 싶은 인혁. 아무리 외상이 힘들다고 해도.. 어머니를 잃은 슬픔도.. 남들처럼 술 한 잔하고 제대로 풀기만 했더라도 이 정도까지 극으로 치닫진 않았을 거였다. 사실, 한구가 여러 번 제안을 하긴 했었지만 항상 거절하기만 하던 그. 그때 그는, 정말 아무런 여유도 없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람답게 산다는 것. 그것은 그에게 사치였다. 술 한 잔이 들어가 버리면 그대로 거기에 의지해버릴 것 같아서, 애써 밀어두고 있던 기억들이다시 떠오를 것만 같아서, 간신히 버티고 있던 마음이 물렁해져서 자신이 더 이상 외상을 안 하겠다고 할 것만 같아서. 그래서 그랬었다. 그래서 그렇게 술 한 잔의 여유도 없이 미친 듯이 일만했던 그였다. 하지만 이제는 병원을 떠나왔으니, 모두 다 소용없는 일이 되어버렸으니.. 인혁의 머릿속이 점점 더 복잡해진다. 그가 그렇게 생각에 빠져 멍하니 서있었더니 한구가 그를 재촉한다.

“ 야, 뭘 그렇게 멀뚱히 서있어~? 빨리 앉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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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은 한구의 부름에 이내 정신을 차리고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는다. 그들이 그렇게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바로 종업원 한명이 그들에게 다가온다. 메뉴판을 내밀며 뭘 시킬 건지 묻는 종업원.

“ 야, 뭘로 할래? 근데 너 밥은 먹었냐? “ 아니, 아직.... ” “ 아유~ 그러면 그렇지, 또 웬 종일 굶었구만?! 뭐 하긴.. 나도 저녁 아직 전이니까~? 여 기, 그러면, 공기밥 두 개랑 병맥주 3개주시구요.. ” “ 아니요, 저기 맥주 말고, 소주로 주세요. ”

그가 한구의 말을 가로막으며 종업원에게 소주를 주문한다. 그러자 미쳤구먼.. 이라는 표정으로 인혁을 보며 그에게 타박을 주는 한구.

“ 야, 너 빈속에 무슨 소주야~~! 안 마신다더니.. 아주 취하려고 작정을 했구만! 어휴.. 저기요, 그러면 소주 1병에 맥주 2병 주시고요, 안주는 어디보자... 야, 밥에 소주도 있으 니까 국물도 시킨다? 여기 B세트로 주세요. ”

주문을 받은 종업원이 바로 자리를 뜨고, 인혁은 여전히 복잡한 표정으로 멍하니 있다. 그러다가 잠시 후 나지막이 입을 여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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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구야... 담배있나...? ” “ 나 담배끊은지 1년이 다 되가는데 내가 무슨 담배가아아~~ 있지..! 크흐흠... 그게 아직 미련을 못 버려서... 맨날 가지고 다니는..ㄷ... 너 근데 어떻게 알았냐? 이야... 이거 귀신 이구만~! ”

그를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며 안주머니에서 포장도 안 뜯긴 담배 한 갑과 라이터를 꺼내주는 한구. 인혁은 그 담배를 받아들더니 바로 포장을 벗겨버린다.

“ ........ ” “ 야, 근데 너 담배 끊은 거 아니었냐? 한동안 안 피더니만.... 뭐 하긴, 오늘은 좀 땡기 긴 하겠지.. ”

아무 말 없이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는 인혁. 연기를 가슴 깊은 곳까지 빨아들이더니 이내 길게 내뿜는다. “ ....... 후우.............. ”

그 순간 인혁은, 자신이 왜 이렇게 미련하게 살고 있나 싶었다. 중증외상.. 왜 이렇게 힘든 길로 들어섰는지.. 차라리 그때 다른 병원이라도 가서 외과 간담췌 전문의로 눌러앉았다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쉽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편안했을까..? 아니.. 아니었겠지... 죽어가는 환자들을 뻔히 지켜보면서 나 혼자 편하자고 외면해버리는 일은 아마 절대 못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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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더 괴로웠을 테니까. 아마 같은 상황이 와도.. 또다시 똑같은 결정을 내렸을 인혁. 그래... 후회는 없다. 그동안 늘 하늘에서 지켜보실 아버지를 생각하며 맹세코 의사로써 부끄러운 짓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자부하니까. 그래... 차라리 후련했다. 그저 이 지긋지긋한 피라미드 같은 병원 속에서 이제야 벗어나는 것일 뿐이니까. 후회할 필요도,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 어디라도 나를 받아주는 곳이 있다면 나를 필요로 하는 그곳에서 또 다른 죽어가는 생명들을 살릴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것이다.. 그걸로... 하지만 인혁, 20년 평생을 바쳐온 곳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와야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쓰려오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그의 표정이 씁쓸하게 변한다. 그래도 그나마 그런 문제들은 그냥 어쩔 수 없다고 치고, 미련 없이 술 한 잔 마시며 털어버리면 그만이었지만,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가 끌어들인 한 사람. 신 선생.. 비록 4개월 조금 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름대로의 열정을 가지고 나를 믿고.. 이 일을 시작해준 그녀. 그동안의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정말 열심히 일 해준 그녀.. 이렇게 제멋대로인 내가 그래도 파트너라고 남들 앞에서 처음으로 내편이 되어주던 그녀. 그저 그녀에게 미안할 뿐. 이런 식으로 안 좋게 끝내고 싶진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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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은아에겐 직접 말해야할 것 같았다. 잘해주지도 못했는데 정말 미안하다고 그동안 열심히 일해준거 정말 고마웠다고 이제는 원래대로 신 선생 갈길 가라고 나는 이쯤에서 포기해야할 것 같다고.. 그녀의 입장에서는 영문도 모르고 갑자기 그만두게 되는 것 일 텐데 이 정도는 직접얼굴을 보고 말해줘야 할 것 같았다. 그게 도리인 것 같았다. 사실, 그래서 한구를 따라 나왔다. 그녀에게 작별인사라도 하고 그만둬야할 것 같아서.. 그리고 겸사겸사 이 복잡한 마음을 술로라도 풀고 싶어서, 그렇게 털어버려야 할 것 같아서.. 아무 말도 없이 생각에 빠져 줄담배를 태우던 인혁. 결국, 한구가 준 담배 한 갑을 그 자리에서 거의 다 비워버렸다. 한구는 너무나 복잡해 보이는 인혁의 표정 때문에 그에게 아무런 말도 시키지 못하고, 그저 이 놈을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팔짱만 끼고 인상을 쓰며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마침, 종업원이 술과 기본안주들을 가져오고, 술잔을 받아 인혁 앞에 놓아주는 한구. 그는 소주를 인혁의 잔에 붓고 나서 자신의 잔에도 맥주를 채우며 말한다.

“ 생각 너무 복잡하게 하지 말고~ 자, 일단 마시자고.... 캬.... 아~ 좋다!! ”

한구가 먼저 맥주를 들이키자 담배만 연신 피어대던 인혁도 한 손으로 소주잔을 잡아 그대로 원 샷 한다.

“ 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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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마시는 술. 역시나 쓰다. 조금은 뜨거운 목 넘김.. 쓰디쓴 소주가 식도를 타고 가슴으로 내려가니 씁쓸한 그의 마음이 소주와 섞이는 듯, 모든 게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일처럼 느껴진다. 그는 안주도 하나 먹지 않고 바로 소주병을 집어 자신의 잔을 채운다. 또 한 번의 뜨거운 목 넘김. 다시 채워지는 술잔. 또 다시 잔을 들어 입으로 갖다 대는 인혁. 그렇게 그는 빈속에 쓰디쓴 소주만 채워 넣는다. 인혁이 다시 잔을 채워 넘기려는데 그를 보다 못한 한구가 그의 팔을 잡고 뜯어말린다.

“ 야! 뭐 이렇게 빨리 마셔~! 얘가 진짜... 너 훅- 가버리면 버려두고 간다~? 누가 쫓아 오는 것도 아닌데 좀 천천히 마셔라..! ”

한구의 만류 때문에 인혁은 잡고 있던 소주잔을 다시 내려놓고 손에 있던 마지막 한 개비에 불을 붙인다. 한구는 그런 인혁을 보며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다. 막상 이렇게 괴로워하는 친구 놈을 보니 병원으로 돌아가라고 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돌아가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의 사정을 뻔히 다 알고 있었기에.. 한구는 그저 묵묵히 그의 옆에서 인혁이 너무 많이 망가지지 않도록 잡아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친구 놈을 보고 있자니 한구 역시 절로 술이 땡겨서 말없이 자신의 맥주잔만 채운다. 그렇게 인혁과 한구가 말없이 술만 마시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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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종업원이 주문했던 안주를 들고 오고, 한구는 오늘만은 같이 취해보자는 생각에 술을 더 시킨다.

“ 여기 맥주두병하고 소주두병 더 갖다 주세요. ”

그렇게 종업원이 다시 자리를 뜨자마자 갑자기 인혁이 한구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한다.

“ 한구야.. 나 눈 많이 부었냐? ” “ 어, 좀 많이... 뭐야, 갑지기 눈은 왜? ”

한구의 말에 고개를 내젓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는 인혁. 한구는 그가 왜 그러나 싶어서 멀뚱히 그를 쳐다본다.

“ ........ 나 세수 좀 하고올게. ” “ 무슨, 뜬금없이 세수야~? 벌써 취했냐? ” “ 아, 신선생 오면..! 하... 뭐.. 굳이 티낼 필요 없잖아~! 찬물로 좀 가라앉히기라도 해야 지... ”

그렇게 말하고는 화장실 쪽으로 가버리는 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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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구는 그런 그를 보며 혀를 차더니 이내 맥주를 들이 키고 안주를 집어먹으며 투덜거린다.

“ 어이그... 짜식이 쪽팔린 건 아나보지..?! 참 나.. ” 화장실, 찬물로 몇 번이고 세수를 한 인혁이 눈앞에 거울을 들여다보는데, 눈은 여전히 부어있고 입술은 조금 터져있었다. 낮에 조폭에게 맞은 일 때문에 작은 상처가 생긴 모양이었다.

‘ 참... 그거 한 대 맞았다고.. ’

세면대를 잡고 기대있는 인혁. 낮에 일을 생각하니 또다시 표정이 굳어진다. 사실, 조폭에게 한 대맞은 건 별로 억울하지 않았다. 다만 그 상황에서 폭발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자신 때문이었다. 그는 개인적인 일들 때문에 괴로워하다 응급상황에서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 것 같아서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상황이 너무 억울했다. 사무실도, 김민준도, 외상센터도, 병원에서의 자신의 처지도,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모든 것들이 너무 버겁게 느껴졌다. 인혁을 괴롭히는 그 고질적인 문제들.. 계속해서 아무리 버텨본다고 해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그저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너무 억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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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동안 참아왔던 게 폭발하면서 그는 병원을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이 괴로운 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지금까지 당할 만큼 당했으니 지금 이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하지... 않는다... 그렇게 그는 세면대에 기대어 거울 속에 자신을 노려보며 몇 번이고 후회하지 않는다는 그 말을 되뇌어본다. 사실은.. 정말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지 자신이 없는 인혁이었다. 호프집 안, 한구, 인혁을 기다리는데 한참이 지나도 그가 나오지 않자 슬슬 뭔일이 있나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 얜 왜이렇게 안나와..? ” [ 삐리리리링- 삐리리리링- ]

그런데 그때 한구의 휴대폰이 울리고, 휴대폰을 확인하는 한구. 은아의 전화였다. 아마도 나오기로 한 장소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전화를 받는 그. “ 아, 신선생! 도착했어요? ” “ 네, 어디로가면 되요..? ” “ 거기서, 그 길 건너가지고 호프집 많은 골목으로 들어오면..! 그.... 아, 아니다.. 여길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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떻게 설명해야되나..? 아니 그러면~ 거기서 잠깐만 기다려요, 내가 마중 나가야겠네 ” . . . .

한참동안 생각을 마치고 돌아온 인혁. 그런데 한구가 자리에 없었다. 겉옷은 그대로 있는데... 아마도 은아를 데리러 갔나보다 생각하고, 그는 다시 자리에 앉는다.

“ 흐읍......하..... ”

어느새 테이블에는 한구가 시켜놓고 간 소주와 맥주가 놓여있었다. 그는 한숨을 크게 한번 내쉬고는 다시 앞에 있는 소주를 들이킨다.

한잔, 두잔,

멍하니 술잔만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는 인혁.

세잔, 네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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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연거푸 술잔을 들이키던 인혁은 그 걸로도 성에 안차는지 앞에 있던 한구가 마시던 맥주잔을 집어 들고, 거기에 소주를 들이붓는다.

/ 벌컥- 벌컥- 벌컥- /

글라스에 꽉 채워진 소주를 한 번에 다 마셔버리는 인혁. 그 많은 소주를 다 마시고 나니 온몸에 열이 오른다. 그러나 인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글라스에 소주를 붓는다. ※추천브금 : 손승연 - 너를되뇌다(inst)

잠시 후, 호프집으로 들어오는 한구와 은아. 한구가 인혁이 앉아있는 테이블 앞으로 그녀를 데려 오는데.. 테이블을 보고 입이 벌어지는 한구. 어느새 자신이 시켜놨던 소주들은 모두 빈병이 되어버리고 인혁이 새로 시킨 듯 보이는 소주3병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 야~!! 이 미친놈이거..! 이걸 그새 다 마셨어? ” “ ..... 어... 왔나.... ”

인혁이 고개를 들어 한구에게 인사를 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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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뒤에 있던 은아를 말없이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한다. 그녀도 덩달아 인혁에게 시선을 두는데, 살짝 풀려있는 인혁의 눈. 터져있는 입술. 그녀는 그런 그의 모습이 낯설기만 하다. 게다가 자세히 보니 그의 눈이 조금 부어있는 것 같고.. 은아는 그런 인혁의 모습을 보고 그가 혼자 얼마나 괴로워했을지 대충이나마 짐작 해볼 수 있었다. 그녀를 뚫어져라 보던 인혁이 곧, 고개를 숙여 그녀의 시선을 피해버리고 한구는 은아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려다가 인혁 옆에 앉으라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인혁의 맞은편에 앉으라고 해야 하는지 잠시 고민한다.

“ 신선생 어디 앉을래요? 여기? 여기? 아, 아니다. 내가 여기로 옮기면 되겠네! ”

그렇게 한구가 자리를 옮겨 인혁의 옆에 앉고 은아는 인혁을 마주보며 앉게 된다. 그는 여전히 은아의 시선을 피한 채, 고개를 숙여 술잔만 바라보고 있었다.

“ 신선생은 맥주한잔 할거죠? ” “ 아, 네 그럴게요. ” “ 그럼 맥주하나 더 시키고, 아유~! 너는 너! 이거 언제 다 마실래? 어? 이걸 혼자 다 마시려고 시켰냐? 안주도하나 안 먹고 말이야~ 밥도 안 먹어서 빈속이라는 놈이..! 아휴, 미쳤네 미쳤어, 뭐.. 이거 어쩔 수 없이 같이 마셔야겠네. 내일 출근 때문에 소주 안 마 시려고 했더니만...! 여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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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구의 부름에 종업원이 달려오고, 다시 주문을 하는 한구. 곧, 그의 주문에 따라 맥주 한 병이 더 나오고 은아 앞에도 잔이 놓여진다.

“ 자, 신 선생 받아요. ”

한구가 은아의 잔에 맥주를 채워주더니 자신의 잔에도 소주를 채운다.

“ 자자, 이 놈은 이거, 상태 안 좋으니까~ 우리끼리 건배합시다!. ”

한구는 은아가 왔는데도 분위기가 썰렁하자, 아저씨 둘 사이에서 그녀가 어색해하지 않도록 괜히 분위기를 좀 띄워보려 한다. 은아가 한구의 장단에 맞춰주며 살짝 건배를 하고 맥주 한 모금을 마신 뒤 잔을 내려놓는다. 인혁은 그제야 다시 고개를 들어 은아를 보고는 잔을 들며 은아에게 말없이 건배를 하자는 시늉을 한다. 갑작스런 인혁의 행동 때문에 한구가 슬쩍 두 사람의 눈치를 보더니 은아를 향해 장난스럽게 말한다.

“ ...... ”

“ 뭐 이놈은 신 선생 왔는데 인사도 안하더니, 갑자기 무슨..! 신 선생, 얘가 원래 좀 이 래요~ 이해 좀 해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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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괜찮아요, 그럼, 셋이서 건배나 할까요? ” “ 그래요~ 셋이서 이렇게 술 먹는 것도 처음인데~! 자, 건배~! ”

은아가 인혁과의 어색한 분위기를 좀 풀기 위해 부드러운 미소를 띠우며 먼저 건배를 제안하고, 계속 들려져 있던 인혁에 잔에 두 사람의 잔이 부딪힌다. 자신을 위해 애쓰는 은아와 한구의 모습에 인혁이 피식- 하고 웃더니 들고 있던 글라스에 있는 소주를 다시 원 샷 해버린다.

/ 벌컥- 벌컥- 벌컥- /

그가 너무 급하게 마셔버리는 바람에 소주가 그의 입 밖으로 조금 흘러나오는데 인혁은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소매를 들어 입을 슥- 하고 닦아버린다. 한구는 그런 인혁을 슬쩍 보더니 다시 은아에게 말을 시킨다.

“ 신선생, 최 교수가 그동안 맛있는 것 좀 사줬어요? 회식은 뭐 몇 번이나 했을라나? ”

한구의 질문에 은아가 고개를 숙여 살짝 웃더니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듯 대답하고

“ 에이.. 회식은 무슨 회식이요..! 회식은커녕 밥도 같이 안 먹어봤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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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말에 살짝 찔리는 인혁. 헛기침을 하며 애꿎은 잔만 다시 들이키고 한구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한다.

“ 에? 뭐야, 외상 팀 아직 한 번도 회식한적 없어? 너 그동안 뭐 한 거야~ 벌써 신 선생 들어온 지가 언젠데 아직 밥도 같이 안 먹어봤다고? ” “ 크흐흠... 흠.... 뭐, 어쩌다보니... ”

인혁이 궁지에 몰리며 살짝 당황하자 굳어있던 분위기가 살짝 풀어지고, 은아는 이때다 싶어서 한구에게 그동안의 일을 장난스럽게 다 말해버린다.

“ 네~! 맨날 굶으시지를 안나, 좀 같이 먹을라치면 벌써 혼자 컵라면이나 드시고 있고, 아니면 어디 가서 일하다가 자기혼자 홀랑 먹고 오고! 그래서 저는 맨날 간호사 쌤들이 랑 먹게 되요~ ”

장난스런 미소를 띠며 말하는 은아. 장난으로 꺼낸 말이지만 왠지 속이 시원해지는 그녀. 사실, 그동안 좀 서운하긴 했었다.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4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마음만 먹으면 밥 한번 같이 먹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물론, 그동안의 상황이 워낙 바빴으니까, 그동안 그가 일부로 그랬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서운했던 건 어쩔 수 없었나보다. 인혁은 은아의 말에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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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구가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은아의 편을 들어준다.

“ 아유, 신선생, 그동안 얘랑 어떻게 같이 일했어요~?! 야, 너는 그렇게 고생을 시켰으면 회식한번 거하게 했어야지~!! 암튼~ 우리 최교수 눈에는 환자밖에 안보이지? 이거, 이 거~! 너 병원 돌아가면, 신선생한테 크게 한턱 쏴야겠다!! 신선생~! 얘한테 막 비싼 거 얻어먹어요~!! 신선생이 있으니까 외상팀이 그나마 그렇게 돌아간 건데~ 충분히 얻어먹 어도 되요~ 충분히~ ”

한구가 일부로 인혁의 등을 퍽퍽 치면서 그를 타박하더니 바로 은아를 띄워준다. 인혁은 등짝이 아픈지 얼굴을 찡그리며 한구를 째려보고, 은아는 그렇게 투덕거리는 두 사람이 재밌는지 입을 가린 채 소리를 내며 웃는다. 다행히도 그런 오버스러운 한구의 행동 덕분에 분위기가 훨씬 화기애애해진다. 그때, 울리는 한구의 전화벨.

[ 삐리리리링- 삐리리리링- ]

“ 어? 야, 병원이다. 나 전화좀 받고 올게! 신선생, 이놈이랑 지루해도 잠깐 얘기 좀 하 고있어요~! ”

그렇게 한구가 전화를 받으러 나가버리고, 이제 둘만 남게 된 인혁과 은아. 다시 테이블에는 조금 어색한 기운이 감돈다. 잠시 흐르는 정적, 그러다 은아가 먼저 입을 연다.

“ 이렇게 병원 밖에서 뵈니까 뭔가 신기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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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 예, 뭐... ” “ 일단, 교수님 앞으로 3일동안 휴가 신청해놨어요.. ” “ 예, 들었어요. ”

다시 이어지는 침묵. 인혁은 말없이 잔만 바라보고있고, 은아는 그의 눈치를 보더니 다시 조심스래 입을 연다.

“ 다시... 휴가 끝나고 출근 하시는 거죠..? ” “ ......... ” “ .......... 다시, 안 오실 거에요? ” “ ............... 환자들은 좀 어때요. ”

인혁이 자신의 질문에는 일부로 대답도 안하고 괜히 말을 돌리며 환자에 대해 물어보자 은아는 조금 화가 나서 목소리가 높아진다.

“ 아니, 환자상태 걱정되시는 분이 어떻게 그렇게 병원을 나오셨어요?! ” “ ........ 다른 의사들한테 외상환자 봐달라고 부탁하고 다녔다면서요.. 신선생이 고생했겠 네, ..... 미안해요. ” “ 미안하시면..... 병원 돌아오시면 되잖아요. 교수님, 아직 하루도 안 지났어요~ 지금이라 도 하루만 푹 쉬시고 돌아오시..ㅁ.... ” “ 신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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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은아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너무 진지하게 그녀를 부르는 바람에 은아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그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 .... 미안해요... 이렇게 먼저 그만두게 돼서. 신선생 말한 대로 밥도 한번 못 사주고 너 무 고생만 시킨거 같아서... 정말로 미안해요. 그동안 정말 열심히 일해줬는데.. .... 정 말... 미안해요.. ” “ .......... ”

무언가 말을 하려다 머뭇거리는 인혁. 은아는 그런 그를 보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왠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내가 설득했을 때 여기로 와준 것도 고맙고, 심포지엄 잘끝 나게 해준것도 고맙고,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을 텐데 별 내색안하고 묵묵히 일해준 것 도 고맙고... 전부 다 너무 고마운데... 이제는 원래대로 신선생 갈 길 가요. 결혼하러 캐 나다 가려고 했다면서요.. 원래 하려던대로 결혼준비도 하고.. 남자친구도 만나고... 그렇 게 원래대로 돌아가요. ...내가 책임도 못질 거면서 괜히 일 같이하자고 해서 미안해요.. 미안한데... 나는... 나는 이쯤에서 포기해야할 것.. 같ㅇ.... ”

힘겹게 말을 이어가던 인혁의 입에서 포기라는 단어가 나오자, 은아가 그의 말을 가로챈다.

“ 저 여기서 더 일하고 싶어서~ 캐나다 가는 거 벌써 미뤘어요~!! 벌써 두 달 전부터 상 의해가지고..! 동규씨가 한국으로 오기로 했다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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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은 은아에 말에 눈이 살짝 커진다. 은아가 더 일하려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 일 때문에 그녀의 남자친구까지 한국에 오기로 했다는 건 처음 아는 사실이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인혁. 은아를 외상 일에 끌어들여서 결혼까지 미루게 하다니, 자신이 생각했던 것 보다 너무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생각이 든다. 그 실수가 한사람의 인생의 중요한 일을 망칠 수 있다는 생각에 갑자기 엄청난 부담감이 몰려오면서 그런 일을 미리 말하지 않았던 은아에게 화가 나고 술기운에 언성이 높아진다.

“ ....!!... 아니, 그걸 왜 이제야 말해요..!! 진작 상의했으면 이런 일 없잖아요!!! ” “ 저도 확실히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랬죠..!!! 그리고 교수님이 언제 그런 얘기 할 시 간이나 주셨어요? ” “ 그거는..... ” “ 이번일도 그래요!!! 교수님 혼자 외상센터 하는 거 아니잖아요!! 사무실문제건 무슨 문 제건 왜 혼자만 아시는데요? 저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 처음 왔을 때 뭐라고 하셨어 요..!! 외상센터 일에 관한 건 전부 관리해줘야 한다면서요? 그런데 제가 모르는 게 말이 나 되요?! 저 외상코디네이터라면서요!! 저 무시하시는 거에요? 왜 교수님 혼자 판단하 고 혼자 결정하시는데요!!!! ” “ 아니!!! 무시하는 게 아니라....!!! 하..... 됐어요. 하.... 내가 미안해요. 신선생 무시해서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그냥... ”

은아가 화를 참으려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말을 잇지 못하는 인혁. 그녀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녀를 무시하건 아니었지만.. 같이 상의하거나 해서 센터 일을 결정했던 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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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없었다. 그동안 은아가 표현을 안 해서 몰랐었는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은아에게 다시 미안해지는 인혁. 단지, 그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외상센터일은 자신만이 감당해야할 일이라고.. 이미 팀원이 생겼는데도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해왔었나 보다. 너무 미안한 나머지 인혁은 그녀를 바라보던 시선을 다시 떨구고는 술잔을 들이킨다. 그런 그가 답답하게 느껴지는 은아. 차라리 말이라도 하고 끝까지 화라도 내고,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면 되는데 아무표현도 안하고 저렇게 혼자 삭혀버리는 인혁이 그저 안쓰럽기만 하다. 이제는 그를 타이르듯 말하는 은아.

“ 교수님..! 교수님, 힘드신 거 아는데.. 조금만, 저를 믿어주시면 안 돼요? 조금만... 저랑 상의하시고, 걱정거리 있으면 얘기해주시고.. 그렇게 같이 고민하다보면 해결될 수도 있 잖아요..! 왜 교수님 혼자 다 짊어지려고 하세요.... 제가 그렇게 못미더우세요? 제가 그렇 게 능력이 없어 보여요? ” “ 아니요... 아니에요 그런 거.. ”

여전히 인혁은 미안함에 고개를 못 들고 있었다. 그런 그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은아. 그러다 무엇이 생각난 듯 자신의 가방 속을 뒤진다. 곧, 그녀의 가방에서 카메라가 나오고, 은아는 그 카메라를 켜서 인혁 앞에 내민다.

“ 교수님, 이거 기억나시죠? 교수님이 저한테 이거 내밀면서 이런 외상환자들 같이 살려 보지 않겠나고.. 그러셨던 거 기억나시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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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가방에서 나온 카메라를 조금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인혁. 이내 고개를 들어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는데, 그녀는 무언가 확신에 찬 눈빛을 하고 있었다. 반면, 취기가 올라 풀려버린 인혁의 눈.

“ ....... ” “ 교수님, 제가 왜 교수님 따라서 이 병원에 왔는지 아세요?! ” “ .......... ” “ 그때 오토바이사고 나서, 환자는 피가 철철 나는데...! 간호사 일을 7년씩이나 했으면서 도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데.. 살려야하는 데..! 나는 당황해서 지혈 외에는 혼자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없고, 환자는 계속 피 흘리 고 있고, 아무리 도움을 청해도 사람들은 그냥 지켜만 보고 있고...... 정말.... 그때, 무서 웠어요.. ” “ ........... ” “ 그런데, 교수님이 갑자기 나타나서는 어떤 망설임도 없이 바로 환자 처치하고 지혈하 고... 솔직히 그때 좀 충격이었어요. 그때, 그 확신에 차있던 교수님 눈빛을 잊을 수가 없 었어요. ” “ 후... 그런 거는.... 다른 의사들도 다 똑같아요.. ”

그녀의 말에 인혁은 고개를 저으며 누구나 다 그렇다고 대답을 하지만, 은아는 다시 확신의 찬 눈빛으로 단호하게 그의 말을 부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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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요..! 수많은 의사들을 봐왔지만... 다들 그렇게 크게 다친 환자 앞에서는 환자 잘 못될까봐 두려워하고 나중에 책임질 일 있을까봐 우물쭈물하고 그러는데...! 교수님을 분 명히 달라보였어요...! 그리고 지난 몇 달 동안 같이 일하면서 느꼈어요, 내가 잘 못 본 게 아니었구나... ” “ ......... ” “ 교수님...! 우리나라 어느 병원에서 그런 환자들을 그렇게 살려낼 수 있겠어요?! 다들 자기 과만 중요하고, 아무리 환자가 죽어가도 자기 과 아니면 볼 생각도 안하고..!! 제가 7년 넘게 응급실, 중환자실에서 일하면서 수도 없이 봐온 거에요..!! 이거는... 교수님만 할 수 있는 거에요..!! 제가 아무리 간호사라지만 알건 다 알아요!! 이렇게 여기저기 다친 환자들 한 번에 다 수술할 수 있는 의사가 몇이나 되겠어요? ”

말없이 은아의 말을 들으며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던 인혁의 눈빛이 흔들린다. 그는 그녀에게 고마웠다. 그렇게 말해줘서.. 정말로 고마웠다. 모두들 그가 가지고 있던 그 어떤 신념과 자부심을 부정하고 짓밟기에만 바빴는데... 이렇게 일일이 다 따지면서 그에게 힘을 줬던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명도 없었다.

“ 그 환자들한테는 다른 어떤 누구도 아닌 교수님이 필요해요..!! 아시잖아요! 그리고.. 저한테도 교수님이 필요해요..!! ” “ ....!!!?..... ” “ 오랫동안 간호사 일만 하면서 느낄 수 없었던 그런 거... 이 일하면서 느끼고 있단 말 이에요..! 나도 저런 위급한 환자들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구나... 그게 뭔지 아세 요? 외상센터가 잘~ 돌아갈 수 있게 관리하는 거랑..! 교수님이 그런 환자들 잘~ 볼 수 있게!! 옆에서 도와드리는 거에요..! 이젠 이게 내 일이고, 내 꿈이에요!!! 이제야 간신히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너무 행복해하고 있었는데.... 왜 교수님이 그거 뺏어 가시려고 하는 거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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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아 역시도 술이 들어간 김에 그동안 못했던 모든 말을 그에게 쏟아 붓고 있었다. 그렇게 진심으로 소리치는 은아에 말 때문에 취해있던 인혁의 눈이 조금씩 또렷해지고 있었다. 꿈... 꿈이라... 그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도대체 꿈이란 걸 꿨던 게 언제 적인지.. 그동안은 그저 슬픔에 치여, 책임감과 사명감에 치여 그저 어떻게, 어떻게 흘러왔을 뿐이었다. 사실, 처음 의사를 시작할 때도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과 어머니에 대한 책임감이 그를 의사의 길로 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20년 동안 수련을 거쳐 전문의가 되는 동안에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 환자에 대한 책임감이 그가 계속 이 길을 걷게 만들었었다. 뭔가 꿈이 있어서 외상을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한번 발을 들여놓은 곳이니까.. 죽어가는 환자들을 보고 있자면 다른 곳은 볼 수가 없었다. 그냥 그렇게 걸어왔었다. 하루하루 치여가면서.. 버텨가면서.. 아주 어릴 적을 제외한다면.. 그는 꿈같은 걸 가져볼 여유도 없었다. 꿈... 꿈이라... 다시 은아의 말을 되뇌어보는 인혁. 한편, 테이블 뒤에 서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한구. 너무 진지하게 오가는 얘기들 때문에 언제 끼어들어야할지 타이밍을 계속 놓치고 있었다. 그러다 긴 침묵이 이어지자 이때다 싶은 한구가 다시 인혁의 옆 자리에 앉는다. 굳어버린 분위기, 뭔가 수습해야 했다. 일부로 목소리를 키우며 오버스럽게 말하는 한구.

“ 아~~~! 두 사람 얘기는 좀 많이 나눴어요? 아, 당직한테 전화가 와가지고~ 내가 없으 니까 병원이 안돌아간다네? 하하..... 어... 그... 신선생 한잔 더 해야겠죠? 야, 너도 한잔 더해라 야... 하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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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구가 인혁과 은아에 잔에 서둘러 술을 채워주고 억지로, 억지로 건배를 시킨다. 인혁에게 화를 내느라 흥분해있던 은아가 맥주한잔을 원샷해버린다. 인혁은 또 그런 그녀를 보면서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과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는 복잡한마음에 연거푸 맥주잔에 소주를 들이부어 마신다. 이미 취할 만큼 취한 인혁의 몸에 술이 계속 들어가고, 한구는 이 분위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수습해보려고 계속해서 애쓰다가 수습이 안 되자, 할 말도 없는데, 에라 모르겠다하는 심정으로 인혁의 소주를 뺏어서 연속으로 마신다. 그렇게 이어지는 세 사람의 술자리, 냉랭한 분위기속에서 시간이 흘러간다. 어느새 늦은 밤, 혼자서 소주를 5병도 넘게 마신 인혁은 이미 몸을 가눌 수 없을 지경으로 취해있었다. 한구는 그에 비해서는 덜 취해있었지만, 그 역시 소주를 계속해서 마셔댔기 때문에 꽤나 취해 있는 상태였다. 그나마 맥주를 마시고 있던 은아 만이 술이 별로 안취해서 제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 그녀는 이 두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한숨만 나온다.

“ 교수님!! 과장님!! 정신이 좀 드세요? 이제 집에 가셔야죠~~!!! ” “ 아아... 예... 신선생..! 집에 가야죠? 집에 가야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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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은 아예 뻗어버린 상태였고, 그나마 술이 덜 취한 한구가 은아에 말을 듣더니 살짝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 야!! 임마~~! 일어나봐.. 아~ 일어나봐~~! ” “ 으음.... 음... ”

한구가 그를 거세게 흔들어 깨우자 뻗어있던 그가 조금씩 몸을 움직이며 일어난다. 휘청거리는 인혁이 넘어지려하면서 한구 쪽으로 엎어지고 한구가 그런 그를 간신히 부축하면서 자신도 비틀거린다. 이내 한구와 인혁이 테이블 밖으로 나와 출입문 쪽으로 향하고.. 은아는 두 사람이 놓고 가는 핸드폰과 지갑들을 챙겨서 그들을 뒤따라간다. . . . . 잠시 후, 택시 승강장, 한구가 인혁을 간신히 부축하고 있고 은아는 택시를 잡으려 손을 흔들다가 한구를 향해 묻는다.

“ 참! 두 분 집이 어디세요? ” “ 아... 나는 여기서 좀 멀어~ 병원 근처인데~! 난 이 놈 데려다주고 가야지~ ” “ 괜찮으세요? 혼자 데려다주실 수 있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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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괜찮아요~ 신선생님 걱정하지마시고!! 먼저 들어가요오~ ”

한구는 괜찮다고 은아를 보내려했지만 그녀가 보기에는 둘 다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이대로 둘만 보냈다가는 어디 길거리에서 엎어져 자거나 무슨 사고라도 날 거 같았다. 그들이 못 미더운 그녀는 결국, 한구와 같이 인혁을 데려다줘야겠다고 생각한다. 서둘러 택시를 잡는 은아. 곧, 택시 한 대가 그들 앞에 서고, 은아가 한구와 인혁을 뒷 자석으로 밀어 넣으며 말한다.

“ 저는 집이 근처여서 금방 가니까! 저도 같이 모시고 가요! ” “ 아~ 괜찮은데~~~~ ”

인혁과 한구가 택시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은아도 보조석에 따라탄다.

“ 과장님, 교수님 집이 어데에요? ” “ 예? 아~ 어... 봉래동, 한진아파트.... ” “ 기사님, 봉래동, 한진아파트로 가주세요..! ”

인혁과 한구는 뒷 자석에 앉자마자 그대로 뻗어버리고, 곧, 그들을 태운 택시가 출발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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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브금 : 자전거탄 풍경 - 그댄아나요(inst.)

인혁의 집 앞, 그나마 정신이 조금 들어있던 한구가 인혁을 부축하며 간신히 그의 집 앞으로 올라왔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아파트라 땀을 뻘뻘 흘리며 인혁을 옮겨온 한구.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인혁을 바닥에 던져놓고는 그대로 뻗어버린다. 뒤따라온 은아는 현관 앞에 뻗어있는 두 사람을 보고 어떻게 해야 하나 한숨만 푹푹 내쉬다가 조심스레 인혁의 집으로 들어와서 한구를 깨워본다.

“ 과장님!! 과장니임!! 집에 가셔야 한다면서요~!! 일어나셔야죠~~!! ” “ 음...냐.... ” 소용없는 짓이었다. 이미 한구도 완전히 뻗어버린상태. 그가 어떻게 여기까지 인혁을 데려왔나 신기할 정도였다. 은아는 한구도 그냥 이대로 냅둬야 할 것 같아서 체념하고 돌아서려는데.. 그때 등뒤에서 들리는 소리.

“ 우~~ 웩!!! 우웩!!! ”

은아가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인혁이 바닥에다 토를 하고 있었다. 놀란 그녀가 뛰어가서 그의 등을 쳐주고, 인혁은 한참을 계속 그러더니 잠시 후, 다시 뻗어버린다. 난감한 상황에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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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두고 갔다가는 인혁이나 한구가 굴러다니다 이 것을 온몸에 묻혀 버릴 것만 같았다. 당황스러워서 헛웃음만 나오는 은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고 소매를 걷어 올린 뒤, 인혁이 게워낸 음식물들을 치우기 시작한다. . . . . 잠시 후, 뒤처리를 끝낸 은아. 사실, 어제 내내 한숨도 못자고 술을 마신 뒤라서 그녀도 피곤하긴 마찬가지. 잠시 한숨 돌리려 바닥에 주저앉아버린다. 그녀는 바닥에 앉은 채로 천천히 집안을 둘러보는데 커다란 여행 짐 두 개가 풀어헤쳐져있고 옷이며 책이며 여기저기 지저분하게 널려있었다. 게다가 주방에는 언제 먹었는지 모를 설거지감이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도대체가 인혁은 청소라는 걸 하고 살긴 하는 건지.. 썰렁하고 어수선한 집안, 왠지 사람 사는 집 같지 않아보였다. 이런 집에서 인혁 혼자 산 것일까..? 진짜 노총각은 노총각인가보네...

“ 에휴..... ”

[ 벌떡- ]

왠지 그가 안쓰럽게 느껴지는 은아.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하고 일어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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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에 있는 것들을 주섬주섬 치우기 시작한다. 잠시 후, 훨씬 깔끔해진 거실. 옷가지들이 한쪽에 차곡차곡 접혀 쌓여있고 책들도 한쪽으로 가지런히 옮겨져 있었다. 여행 가방에있던 짐들도 보기 좋고 깔끔하게 한쪽으로 정리해놓은 그녀. 은아는 거실을 쭉- 둘러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그때, 여행가방 뒤쪽, 그녀의 눈에 들어온 적당한 크기의 상자. 약간 특이한 모양의 케이스. 저게 뭘까 싶어 살짝 확인해보는데 안에는 장난감처럼 생긴 모형헬기가 들어있었다.

‘ 뭐꼬 이게... 이런 거 좋아하시나..? 그렇게 안 봤는데, 애들 같은 면이 있으시네.. ’

은아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이번엔 주방으로 향한다. 설거지를 시작하려다가 경악을 하는 그녀. 몇몇 그릇에 곰팡이가 쓸어있었다. 6개월 넘게 집에 들어오지 않은 채, 그릇들을 담가 놓고 방치해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은아가 비닐봉지를 찾아서 심하게 곰팡이 난 그릇들을 버리고, 나머지는 깨끗하게 씻어놓는다. 곧, 설거지를 모두 마친 은아. 안 그래도 힘든 몸인데 청소랑 설거지까지 했더니 여기저기 안 쑤시는 데가 없다. 그녀는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서둘러 가방을 챙겨 집밖을 벗어나려다가 현관에 뻗어있는 한구와 인혁을 보고는 다시 한숨을 쉰다. 시계를 확인하는 은아. 벌써 새벽 2시반, 새벽이라 날씨가 꽤 쌀쌀한데, 두 사람 모두 이대로 뒀다간 감기에 걸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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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망설이던 그녀의 눈에 살짝 열려있는 방문이 보이고 은아는 그곳에 이불이라도 있을까 싶어 방안으로 들어간다.

‘ 여기는 왜....? ’

곧, 방안에 들어선 은아의 눈이 살짝 커진다. 거실과는 대조적으로 너무나 깔끔한 방안. 빨리 이불이나 찾고 나가야겠다 싶어서 방안을 둘러보는데, 영정사진하나가 그녀의 눈에 들어온다. 60대쯤으로 보이는 한 여인. 아무래도.. 인혁의 어머니인 것 같았다.

“ ............ ”

할 말을 잃은 은아. 그녀의 머릿속에 아주 오래 전 일이 스쳐지나간다. 인혁을 처음 만났던 그 날, 술에 취한 채로 눈 속에 쓰러져있던 그. 그리고 자신을 부둥켜 앉으며 목 놓아 어머니를 부르던 그 모습. 그때 그가 왜 그랬는지.. 이제야 모든 게 이해되는 은아. 그래서 그렇게... 은아는 아마도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게. 그때쯤 이었을 거라고 추측해본다. 그렇다면 인혁은 지금까지..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그렇게 미친 듯이 일을 했다는 것일까..? 그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그녀에 머릿속에서 그동안의 인혁의 모습들이 스쳐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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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의 날카롭고 쓸쓸한 모습들도.. 괜히 그가 성격이 나빠서 그런 게 아니었다. 아마도 그는 의지할 곳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다. 그 외로움이.. 그가 스스로를 자기 만에 세계에 가두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동안 그가 성질을 부리면 그냥 그러려니 했었는데.. 어쩌면, 그가 나를 좀 봐달라고, 외롭다고 말하는 대신에 그렇게 조급해하고 성질을 부렸던 건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보니 왠지.. 은아의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한사람이 이렇게도 여러 괴로운 일들을 한 번에 겪으면서 지금까지 그렇게 버텨낼 수 있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그녀는 그가 너무나도 안쓰러웠다.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 이내 뭔가 결심한 표정을 하더니 방안에 있던 이불을 들고나가 한구와 인혁에게 덮어준다. 그러고는 한참동안 인혁을 바라보더니 이내 조용히 짐을 챙겨 그의 집밖을 나선다. 몇 시간 후, 어느새 아침이 되고, 창문사이로 햇빛이 들어온다. 잠결에 뒤척이던 인혁은 타는 듯한 갈증 때문에 눈을 뜨고 일어나는데, 자신의 옆에 누워있는 한구를 보고 깜짝 놀라는 그.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는 인혁. 곧, 자신이 현관 앞에서 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이상하게 집안이 깔끔해보였다. 분명히, 집안을 안치우고 나갔었는데.. 그때, 갑자기 그의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온다. 게다가 속도 심하게 쓰려옴을 느끼는 인혁. 아마도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먹은 탓에 숙취가 밀려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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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여기까지 어떻게 들어왔지? 어제 셋이서 술을 먹던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은 전혀 기억이 나질 않고.. 시계를 확인하는 인혁. 벌써 9시가 넘어있었다. 시계를 보고 놀란 그가 서둘러 한구를 깨우고, 눈을 비비며 뒤척이며 일어나는 한구.

“ 야! 지한구!! 너 오늘 출근한다고 하지 않았나? 빨리 일어나봐!! ” “ 으음... 뭐야... 아 진짜... 무슨 일이야.....! ” “ 지금 9시다 임마! 빨리 일어나봐!! ” “ 뭐.. 무슨 9ㅅ.... 9시?!! ”

인혁의 말에 갑자기 눈을 크게 뜨더니 벌떡 일어나는 한구.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더니 곧, 자신이 인혁의 집에 있다는 걸 깨닫는다.

“ 야!!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아이씨.. 오늘 아침 수술 있는데!!! ”

서둘러 핸드폰을 확인하지만 이미 꺼져있는 그의 휴대폰. 그가 잠시 충격 받은 얼굴로 벙쪄있더니, 서둘러 외투와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뛰쳐나가며 인혁을 향해 소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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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인혁아 나간다? 어? 너 병원에서보자!! 어?! 꼭 나와야되!!! 안 나오기만 해봐!!! ”

한구는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끝까지 그에게 병원을 나오라고 소리친다. 우당탕 소리가 나더니 곧 조용해지는 복도. 인혁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 하...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

기억을 되짚어보는 그. 어제 병원을 뛰쳐나와 집으로 왔다가 한구와 술을 마시러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렇게 곰곰이 생각을 하더니 잠시 후, 머리를 탁-하고 짚는 인혁. 그의 집안을 이렇게 까지 정리해놓고 갈 사람은 은아 밖에는 없었다.

“ 후........... ”

한숨을 쉬는 인혁. 도대체 어디까지 은아에게 미안해져야 하는 건지.. 인혁이 다시 한 번 거실을 쭉 둘러보는데, 옷이며, 책이며 모두 가지런히 정리되어있고, 한구가 어질러놓고 간 여행가방마저 차곡차곡 정리되어있었으며, 심지어 주방까지 깔끔해져 있었다. 그는 자꾸 은아에게 미안한 일만 생기니 이 신세를 어떻게 다 갚아야 하나싶다.

[ 꼬르르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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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인혁의 뱃속에서 들리는 소리. 3일동안 내내 아무것도 안 먹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빈속에 어제 술까지 들이부었더니, 배가 고프다 못해 쓰려왔다. 주방으로 가는 인혁. 무심결에 냉장고를 열어보지만 당연히 먹을 만 한 건 전혀 없었다. 심지어 물도 없는 냉장고.. 인혁은 그 텅빈 냉장고를 한참동안 멍하니 바라보더니 이내 쑵쓸한 표정으로 집을 나선다. 집밖으로 나온 그는 입에서 아직도 술맛이 나는 거 같아서 해장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는 해장국집으로 향한다.

같은시각, 해운대 세중병원,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어젯밤의 일로 몸이 너무 피곤했던 은아는 잠도 얼마 못자고 출근한 탓에 환자의 자료를 정리하다 말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렇게 고개가 책상에 닿을락 말락하다가. 움찔- 하고 잠에서 깨는 은아. 그새 또 졸았구나.. 그녀는 졸린 눈을 비비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려고 자신의 볼을 두 손바닥으로 찰싹찰싹- 때려본다. 그녀는 아무리 피곤해도 쉴 수가 없었다. 벌써 사무실을 비우라고 한지 3일이 자났다. 한구가 마취과 인턴들을 시켜서 도와준다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모든 걸 도와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단, 지금은 인혁이 없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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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혼자 옮겨야할 자료들을 검토해야 해서 시간이 너무나 빠듯했다 그렇게 한참동안 일만 하던 그녀. 그러다 은아는 문득, 어제 인혁의 집에서 봤던 영정사진 속 얼굴이 떠올랐다. 둥글둥글한 얼굴에 선한 눈빛을 가지고 계시던 그 얼굴. 인혁이 그렇게 목 놓아 부르던 어머니, 아... 그 분이 그 분이었구나... 다시 인혁의 힘든 시절을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은 은아. 그동안 그가 혼자서 얼마나 외롭고 괴로웠을까... 그를 그동안 일적으로만 대하고, 파트너로써 그의 마음의 짐을 덜어주거나 이해해주지지 못했던 것 같아 왠지 그에게 미안해진다. 원래, 사적인 대화를 해야지 사이가 돈독해지는 건데.. 서로 의지하지는 못 할망정 그동안 그에게 짜증을 부렸던 걸 생각하니 정말 더 그에게 미안해지는 은아였다. 1시간 뒤, 홀로 해장국을 먹고 온 인혁.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의 눈에 그동안은 보이지 않았던 주변의 풍경들이 보인다. 어느덧 6월 말, 점점 다가오는 더위 때문인지 사람들의 옷차림이 모두 가벼워보인다. 지나는 곳마다 나무들은 초록의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었고 파란 하늘에는 하얀색의 조각구름들이 아름답게 걸려있었다. 헛웃음이 나오는 인혁. 세상은 이렇게나 많이 변해있는데, 그의 마음만 아직 겨울에 머물렀었나 보다. 계속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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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앞 놀이터 벤치에 앉아 쉬면서 주변 풍경들을 더 감상하는 인혁. 그의 눈에 해맑게 뛰어노는 아이들이 보인다. 저 아이들도 언젠가는 이렇게 커서 세상에 무게를 감당하며 힘겹게 살아가겠지.. 저 아이들에게 물려줄 세상은 지금보다는 조금 덜 힘들었으면 좋겠다... 참, 내가 이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계속 아이들을 보는 인혁. 하긴, 그동안 늘 병원에만 처박혀 있었으니 그가 이런 소소한 풍경들을 볼 수 있었을 리가 없었다. 병원을 생각하니 다시 굳어지는 그의 표정. 이런 풍경하나 볼 수 없도록 그를 옭아매던 그 곳. 그래... 그만 둬야한다. 이제 미련을 버리고...

“ 하........... ”

다시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인혁. 막상 집에 들어가려니까 왠지 가기가 싫어진다. 아침 겸 점심은 어떻게 해장국으로 때웠지만 이따가 저녁은 어떻게 해야 하지..? 그는 장을 보러가고 뭔가를 만들기엔 너무 귀찮고, 그냥 편의점에서 대충 때워야겠다고 생각하며 이내 발길을 돌린다. . . . . 아파트 근방의 편의점, 역시나 들어오자마자 컵라면이 있는 곳으로 가는 그. 내일이나 모레 또 나오기가 귀찮아질 거 같아서 컵라면을 한 아름 안고 계산대로 향하려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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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컵라면 맞은편에 문구코너에 있는 흰 편지봉투가 눈에 띈다. 잠시 망설이던 인혁. 이내 그 봉투 하나를 집어 들더니 바로 계산대로 향한다. 잠시 후, 인혁의 집,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햇반 따위들을 잔뜩 사온 인혁. 양손에 들린 큰 봉지를 대충 식탁에 올려놓고 봉지 안에 있던 흰 봉투를 꺼낸다. 그러고는 작은방으로 들어가 책상앞에 앉는다. 잠시 동안 흰 봉투를 노려보던 그. 이내 굵은 네임펜 하나를 집어 들고는 글자를 써내려간다. . . . 사 직 서 . . . . . . 한참 후, 장문에 사직서를 써내려가던 인혁이 쓰고 있던 사직서를 찢어버린다. 지신도 모르게 뭔가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하듯 적어 내려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자신의 괴로움을 알아주길 바라는 듯. 그러나 은아나 한구 외에 병원 내에서 그의 사직서를 보고 그를 동정해줄만한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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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헛된 바람일 뿐이었다. 그래서 길게 쓴 사직서를 찢어버린 그. 다시 다른 종이에 사직서를 써내려가는 인혁. 이번에는 짧게 단문으로, 간단한 사실들만 적어 내려간다. 몇 시간 후, 어느새 저녁, 컵라면으로 대충 저녁을 때우고, 샤워를 하고 면도를 마친 뒤, 깔끔한 양복차림으로 갈아입은 인혁. 아까 써두었던 사직서를 안주머니에 챙겨 넣고는 외출할 준비를 한다. 아직, 나과장은 병원에 있을 테니까.. 그의 티오를 쥐고 있는 나 과장에게 사표를 제출하고, 은아와 한구에게 작별인사를 한 뒤, 바로 병원을 빠져나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가려니까 왠지 발걸음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나가기 전 집안을 다시한번 둘러보는 그. 은아가 깔끔히 정리해준 집안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온다. 인혁은 다시 그녀에게 너무 미안하고 고마워지고.. 그때, 그녀가 차곡차곡 쌓아놓고 간, 책들과 옷가지들이 눈에 띈다. 나가기 전에 그것들을 제자리에 갖다놓으려 그가 몸을 움직이는 데, 가방 옆에 있는 특이한 상자 하나가 그의 눈에 들어온다. 저게 뭐였지..? 상자를 들춰보는 인혁. 그 안에는 그가 미국에 연수 갔을 때 사왔던 모형헬기가 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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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모형헬기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어제 술자리에서 은아가 했던 말들이 떠오른다.

/ 이젠 이게 내 일이고, 내 꿈이에요!!! 이제야 간신히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너무 행복 해하고 있었는데.... 왜 교수님이 그거 뺏어 가시려고 하는 거에요..?! /

꿈이라.. 그걸 꿈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도 꼭 이루고 싶은 일이 하나 있긴 있었다. 증증 외상을 시작하고 나서 늘 좌절만 맛보고 있던 그에게 영국에서의 연수경험은 정말 값진 시간들이었다. 외상환자의 사망률이 1%도 안 되는 그곳. 국가로부터 받는 탄탄한 재정적 뒷받침과 외상환자를 위해 항상 비워두는 베드, 중환자실, 각종 의료장비들, 그리고 수많은 인력으로 이루어진 중증외상센터, 그 중심에는 지역과 지역, 병원과 병원을 연결해주는 의료헬기 시스템이 있었다. 헬기를 갖춘 트라우마센터, 늘 환상처럼 가슴에 품고 있던 일.

그러나, 너무나도 환경이 열악한 한국에서는 절대로 실현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 그래서 포기하고 잊고 있었는데... 모형헬기와 은아 덕분에 다시 가슴속에 묻고 있던 그 환상이 생각났다. 그가 외상을 하면서 늘 바꾸고 싶었던 건 시스템이었다. 재정적 지원도 지원이지만 한국에는 그보다 효율적 시스템이 더 필요했다. 지금처럼 모든 병원이 개인플레이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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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내에 있는 각 과들 역시 자신의 영역만 보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지원이 된다고 해봤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고, 1시간도 버티기 힘든 중증외상환자들에게 이런 한국의 시스템은 정말 최악이었다. 그래서 한국에는 현재의 분과적 구조에 영향을 받지 않고 빠른 시간 내에 외상환자를 수술하고, 케어해서 각과로 연결해주는 병원 내의 허브역할을 하는 독립된 중증외상센터가 정말 꼭 필요했다. 그걸 바꿔보고자, 바꾸는 법을 배워보고자. 고민 끝에 연수를 갔던 것인데...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어머니의 죽음을 맞닥트리는 바람에 그때 했던 그 결심들과 구상들을 전혀 떠올릴 수가 없던 인혁이었다. 어쩌면 불가능한 환상일지도 모르지만, 그가 꿀 수 있는 가장 큰 꿈, 헬기를 갖춘 트라우마센터. 갑자기, 인혁은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병원을 나온다면 모두 날아가 버리는 그 꿈.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20년 평생 의사로써 이런저런 일들을 경험해오며 조금씩, 조금씩 남몰래 가슴속에 품어왔던 꿈인데.. 이렇게 놓치게 돼 버린다면.. 지난 20년이 모두 헛된 노력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다시 떠오르는 은아의 말.

/ 이젠 이게 내 일이고, 내 꿈이에요!!! 이제야 간신히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너무 행복 해하고 있었는데.... 왜 교수님이 그거 뺏어 가시려고 하는 거에요..?! / 캐나다로 떠나는 것까지 미루며 병원에 남아주겠다는 그녀. 외상센터를 관리하는 일이 이젠 꿈이 되어버렸다는 그녀. 이제야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며, 왜 그 꿈을 뺏어가려 하는 거냐며 소리치던 그녀. 나의 꿈은 어쩔 수 없다 쳐도, 내가 그녀의 꿈을 빼앗아가도 되는 것일까..? 결혼이라는 인생의 중요한 결정까지 미뤄가며 열정적으로 내게 손을 내밀던 그녀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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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그녀라면.. 그녀라면.. 지금까지는 그런 사람을 만난 적은 없었으니까, 나와 같은 꿈을 꾸고 있을 그녀라면, 함께 일해 볼만 한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어차피 다른 병원으로 가느니.. 한명이라도 환자를 더 살릴 수 있는 그곳에서 그나마 외상센터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제일 높은 그곳에서, 지금 제일 원망스러워하는 곳이지만, 내가 의사로써 20년동안 꿈을 키워온 그 곳에서... 아무리 불가능하더라도... 나와 같은 꿈을 꾸고 있을 그녀라면, 그녀와 함께라면... 갑자기 숙였던 몸을 일으키는 인혁. 잡고 있던 모형헬기를 제대로 집어 들고는 황급히 집밖을 뛰쳐나간다. 한 시간 후, 해운대 세중병원, 트라우마센터 사무실, 어젯밤의 일로 몸이 너무 피곤한 은아는 오늘 하루 온종일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사무실로 옮길 자료를 정리하다 말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때, 사무실 앞에 도착한 인혁. 막상 들어가려니까 창피함이 밀려온다. 문을 빼꼼히 열어보는 인혁. 다행인지 불행인지 은아가 졸고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그는 그녀가 깨지 않게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가고, 은아는 그가 들어오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여전히 졸고 있다. 그런 그녀를 조심스럽게 불러보는 인혁.

“ 저... 신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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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은아는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여전히 졸고 있고, 인혁은 그런 그녀를 깨우기 위해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살짝 흔든다. 그러자 은아가 잠에서 깨어, 놀라서 뒤를 돌아보다가 손을 치우려던 그의 손가락에 볼을 찔린다. 그대로 굳어버린 인혁. 은아 역시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그대로 굳어버리고, 곧, 상황을 인식한 그가 황급히 그녀의 볼을 찌르고 있는 자신의 손가락을 뒤로 뺀다. 그리고 뭔가 변명을 해야할 것같아 입을 열어보지만 너무 당황한 나머지 계속 말만 더듬게 된다.

“ 아... 그..그게... 저.. 그... ” “ 교.. 교수님 돌아오신 거에요?! ”

그러나 방금전에 일 때문에 당황하고 있는 인혁과는 달리 은아는 그가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에 놀라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자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인혁.

“ 아... 예.... 그, 뭐.. 어제 신선생이... 다시 나오라고.... ”

은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어제 일 이후로 인혁이 얼마나 괴로운지 알았기 때문에 그가 쉽게 병원에 나오지 않을 거 같아서 다시 그의 집을 찾아가보려고 생각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사무실에서 그를 보게 되다니.. 은아는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인혁의 손을 잡아올리는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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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님!!! 정말 잘 오셨어요~!! 교수님 나가신지 하루밖에 안됐는데, 내가 얼마나 힘들 었는지 알아요?! 이리 뛰어다니고, 저리 뛰어다니면서 환자도 보고, 자료도 찾고, 응급실 도 도와주고..!!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정말 잘 오셨어요!! 너무 힘드셔서... 정말로 안 오시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진짜로 고마워요 교수님!! ”

인혁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잡고 연신 고맙다고 말하고 있는 그녀. 그녀는 일부로 인혁을 더 반갑게 맞아줘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혁은 그녀가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자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하고..

“ 크흠.. 흠... 저..저..기... 신선생..? 이거 손.... ” “ 네..? 아! 손이요? 헤헤. 아무튼 정말 잘 오셨어요~! 고마워요 교수님... ”

그가 당황하면서 손을 가리키는데도 은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넘기며 다시 인혁에게 고맙다는 말만 반복한다. 그녀가 너무 고맙다고 하자 오히려 민망해지는 인혁.

“ 아.. 그.. 아니에요, 신선생 내가 고맙죠.. 어젠 정말 미안했어요... ” “ 오... 정말로 미안하긴 하세요..? ”

갑자기 진지해지는 인혁의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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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아가 장난스럽게 받아넘긴다. 그러자 더 진지하게 말하는 인혁.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그를 한층 더 진지해 보이게 했다.

“ ... 예, 트라우마센터가 나 혼자 것도 아닌데... 내가 좀 경솔했네요.. 근데, 그.. 신선생, 저녁밥은 먹었어요..? ” “ 네..? 아.. 아니요, 아직 안 먹었어요. "

은아는 자신이 장난스럽게 대꾸해도 인혁이 너무 진지하게 나오자 이번에는 그녀가 조금 당황하며 대답한다.

“ 흠흠.. 그럼 밥 먹으러 갑시다. 나도 아직 안 먹었으니까.. 내가 사줄게요. ”

인혁의 말에 은아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고, 한번도 그가 먼저 밥 먹으러 가자고 했던 적이 없었기에 그저 그의 말이 놀랍기만 한 그녀였다.

“ 진...짜요? 밥 사주신다고요? 교수님이? ” “ 뭐, 그럼 내가 이런 거 갖고 농담할까봐요..? 얼른 나와요. 갑시다. ”

그렇게 인혁이 헬기를 테이블위에 놓고 휙- 하고 먼저 나가버리고, 은아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잠시 벙쪄있다가 그를 부르며 뒤를 쫓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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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교수님!! 같이가요~ 맨날 혼자 가버리셔..! ”

가끔은 저렇게 무뚝뚝하게 말하는 인혁이 얄밉다가도 왠지 자신이 어제 한 말을 그가 조금 생각해준 거 같아서 자기도 모르게 입이 귀에 걸린 은아였다.

잠시 후, 저녁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두 사람. 트라우마센터로 다시 들어선다. 여전히 사복차림의 인혁.

“ 아, 저기 나 수술복으로 좀 갈아입고 올게요. 그, 휴가 반납도 해야 되니까.. 응급실도 좀 들렸다 올게요. ” “ 아, 교수님 잠시만요..! ”

인혁이 옷을 갈아입기 위해 사무실을 나서려는데 은아가 그를 불러 세운다. 빠르게 나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는 인혁. 그녀에게 무슨 일이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는데, 그에게 다가오는 은아.

“ ......?.... ” “ 응급실은 제가 이따가 갔다 올 테니까, 이제는 교수님 그런 거 직접 가시지 마세요. 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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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네이터 뒀다 뭐 하시게요? 제가 하는 일 중에 교수님 비서역할도 있잖아요. 이제는 행 정실에서 오는 전화건, 사무실이 옮겨졌다는 소식이건.. 이제 모두 저 통해서 하셔야 되 요. 아셨죠? ” “ 아, 나 괜찮은데, 그냥 갈아입는 김에 내가 갖다 올게요. ” “ 안돼요! 교수님 또 저 무시하시는 거에요? 제 일이에요! 제 일! ” “ 아, 아니에요. 신선생 하고 싶은 대로 해요. 그러면 나 옷이나 좀 갈아입고 올게요. ”

그녀가 완강하게 나오며 표정을 살짝 굳히려하자 인혁은 바로 손사레를 치며 알았다고 하고는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그제야 살짝 미소 짓는 은아. 이제는 더 이상 그가 병원에서 그런 대우를 받지 않도록 자신이 잘 보조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도 그를 교수로써 존중해 줄 테니까. 인혁이 다른 교수들과 다르게 맨날 병원 안에만 있고 힘든 외상 일을 하면서 경계도 없이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수술을 하니까 사람들이 그를 무시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은아. 그녀는 다른 건 몰라도 이런 행정적인 업무 같은 잡다한 일은 절대 그가 손대지 못하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그가 나간 방향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그녀. 아까 하던 자료정리를 마치기 위해 몸을 돌려 테이블로 오는데, 웬 상자가 하나 놓여있다. 어디서 본거 같은 상자. 안을 열어보니 어제 인혁의 집에서 봤던 헬기가 들어있었다. 아마 그가 집에서 가져온 모양이었다. 왜 아까는 못봤지..?싶은 은아. 아마도 인혁이 왔다는 사실에 너무 들떠서 그가 상자를 들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나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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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게 그저 장난감 헬기라고 생각하던 그녀. 도대체 이걸 왜 가져오셨지..? 라는 생각과 함께 상자 안에서 헬기를 꺼내보는 은아. 그렇게 큰 사이즈는 아니었지만 안에 리모콘까지 들어있었다. 아마도 이 리모콘으로 조종이 가능한 듯 했다. 이런 모형헬기가 익숙하지 않은 은아. 헬기가 신기한 듯 여기저기 만져본다. 그러다 왠지 한번 헬기를 날려보고 싶은 마음이 들고, 그녀는 동봉되어있던 건전지를 끼워 넣고 리모콘을 잡는다. 이내 그녀가 ON버튼을 누르고 살짝 위쪽 버튼을 눌러보는데,

[ 위이이잉- ]

헬기가 소리를 내며 움직이려고 하자 급히 손을 떼는 은아. 막상 헬기가 날아가려고 하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망가질까봐 무섭기도 한 그녀였다. 그리고 생각보다 헬기의 소리가 요란했다. 하지만 왠지 한 번 더 해보고 싶은 은아. 이번엔 버튼을 좀 길게 눌러보는데,

[ 위이이이이이잉----- ]

이번엔 살짝 바닥에서 떴다. 놀라서 다시 손을 떼는 은아. 막상 하다보니 재밌어서 한 번 더 눌러본다.

[ 위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툭- ]

이번엔 헬기가 조금 높이 뜨려 하는데, 그때, 인혁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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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가려 하고 있는 헬기를 발견한다. 놀라서 황급히 손을 떼는 은아. 그 바람에 조금 높이 오르려던 헬기가 바닥으로 떨어져버린다. 그래봤자 무릎정도의 높이였지만 인혁의 물건이었기 때문에 헬기가 떨어지자 망가져 버릴까봐 놀라는 그녀였다.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온 인혁. 그녀가 지금 뭐하는 건가 싶어서 잠깐 벙찐 표정으로 그녀를 보다가 이내 살짝 웃음이 터진다. 왠지 일부로 그녀를 놀려주고 싶어지는 인혁.

“ 뭐... 하고 있었어요.? ” “ 아, 그게.. 그.. 장난ㄱ... 이거 근데 왜 가져오셨어요? ”

인혁의 질문에 말을 얼버무리더니 황급히 말을 돌려버리는 그녀. 그는 그런 그녀를 가재미눈을 뜨며 쳐다보더니 잠깐 따라오라 손짓한다. 그러고는 헬기를 들고 먼저 사무실을 나가는 그. 은아는 그가 헬기를 가져가며 따라오라고 하자 얼떨결에 리모콘을 들고 그 뒤를 쫓아간다. ★★※추천브금 : 이정 - 그댈 위한 사랑 병원옥상정원, 늦은 밤이라 그런지 사람이 거의 없다. 정원 난간에 촘촘히 달려있는 조명들이 어둡긴 하지만 옥상정원을 은은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먼저 문을 열고 옥상 밖으로 나오는 인혁. 곧, 그 뒤를 은아가 쫓아 나오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를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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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님, 여긴 갑자기 왜...? ”

그녀의 질문에 인혁은 들고 있던 헬기를 옥상 중앙에 가져다 놓으며 대답한다. 조금 거리가 있어서 크게 말하는 그.

“ 헬기를 사무실에서 날리는 사람이 어딨어요!! 이왕 날릴거면 제대로 날려야지. 자, 날 려봐요! ” “ 네?! 갑자기 무슨.. ” “ 뭐해요!! 빨리 날려 보라니까~! 나도 아직 안 날려봤어요!! 시험 삼아 해보게 빨리 날 려 봐요~! 이거 난간 밖으로 나가면 큰일 나니까 안 나가게 조심해야 되요!! ” “ 아.... 네! 알았어요! 해볼게요~! ”

갑자기 옥상에 헬기를 가져와 큰소리로 대화하는 두 사람을 주변에 있던 얼마 안 되는 환자들이 힐끔힐끔 쳐다본다. 은아는 잠시 망설이더니 아까처럼 버튼을 눌러본다.

[ 위이이이이이이이잉- 위이이이이이이이잉- ]

모형헬기라고 만만하게 봤는데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공중으로 올라가는 모형헬기. 조금씩, 조금씩, 뜨더니 어느새 꽤 높은 곳까지 가서 떠있었다. 그녀가 헬기를 조종하는데 점점 집중하고, 어느새 그녀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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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아는 이렇게 밖으로 나와 진짜 하늘아래서 헬기를 날려보니 어릴 적 새로 산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왠지 설렜다. 그녀가 방향키를 움직이지 않아 한곳에만 머무르고 있는 헬기.

“ 신선생~! 앞뒤로 좀 움직여봐요~!! ”

은아는 그의 말에 따라 앞뒤로 헬기를 움직여 보고, 이제는 자유자재로 움직여 보고 싶은 마음에 다른 방향으로 헬기를 틀어보지만 헬기가 같은자리에서 원을 그릴뿐 생각처럼 잘 되지 않는다.

“ 교수님! 이거 잘 안되는데요...! ” “ 잠깐만요! ”

그녀가 자꾸 버벅 거리자 그녀를 향해 달려오는 인혁. 은아의 옆에서 리모콘을 어떻게 조종하는지 코치해주고, 이내 헬기가 자유자재로 잘 날아다니자 그의 입가에도 환한 미소가 번진다.

‘ 어? 웃었다? ’

옆을 돌아보다가 인혁의 미소를 발견한 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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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었다. 그가 그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본건. 웃으니까 훨씬 젋어 보이는구만... 쫌 웃고 다니시지... 왠지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은아도 덩달아 흐뭇해진다.

“ 뭐하고 있어요! 헬기 떨어지겠네~! ”

은아는 멍하게 인혁을 쳐다보다가 그의 말에 살짝 놀라서 다시 표정을 바꾼다. 다시 헬기를 조정하는데 집중하는 그녀. 헬기가 잘 날아다니자 기분이 좋아진 은아도 아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감탄사를 내뱉는다.

“ 우와.... ”

인혁도 그런 그녀를 보더니 덩달아 흐뭇해지는지 미소를 짓는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헬기. 어느새 옥상에 있던 환자들 모두 그 헬기를 바라보고 있다. 하나같이 신기하고 재밌어하는 눈빛들. 헬기를 바라보는 인혁의 눈빛이 촉촉해진다.

‘ 진짜 헬기를 저렇게 하늘에 띄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늦은 밤에 병원옥상, 하늘을 날아다니는 헬기를 바라보는 인혁과 은아. 두 사람이 입가의 똑같이 환한 미소를 걸려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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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얼마 후, 헬기 조종을 멈추고 벤치에 앉은 두 사람. 은아의 목소리가 잔뜩 들떠있었다.

“ 왜 교수님은 안 해보세요~~? 얼마나 재밌는데~!! ” “ 됐어요. 내가 뭐 애에요? ” “ 하, 그럼 전 애에요? ” “ 아니 뭐, 꼭 그런 말은 아니지만...”

은아의 물음에 말을 얼버무리는 인혁. 아까 헬기를 날리고 있던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는 아이 같았기 때문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은아와의 나이차를 계산을 해보는 인혁. 아.. 띠동갑이구나.. 사실, 나이로만 따지고 보면 있지도 않은 막내동생뻘 보다도 밑인 그녀였다. 인혁은 그런 생각을 하니 피식- 하고 웃음이 나온다. 그런 그를 보더니 은아가 덩달아 따라 웃으며 묻는다.

“ 참나, 왜 웃으세요? ” “ 아니에요 아무것도. ” “ 쳇, 싱거우시기는... 근데 진짜 장난감을 왜 가져오신 거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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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아가 진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며 묻자 그가 살짝 미소를 띠며 되묻는다.

“ 저게 장난감으로 보여요? ” “ ....?.... 장난감 아니면요..? ” “ 외상환자를 위한 헬기에요. 닥터헬기. ” “ .....네?? ” “ 미국 연수 갔을 때 사온 거 에요. 저래 뵈도 실제 모델을 축소시켜 놓은 거에요 저게. ” “ 닥터.. 헬기요..? ”

닥터헬기, 독립된 외상센터, 지금으로써는 너무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 그런 생각들 때문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인혁.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모형헬기를 한참 만지작거리고 있다. 왠지 그의 얼굴에 깔린 씁쓸함의 의미를 알 것 같은 은아. 아무 말 하지 않고 그가 입을 열 때 까지 기다려준다. 잠시 후, 그가 자조걱인 미소를 띠며 은아를 향해 묻는다.

“ 신선생.... 진짜 내가 환자들한테 필요한 의사라고 생각해요..? ” “ 네..? 아.. 네, 당연하죠...! 저 환자들 살릴 수 있는 거는, 교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 니까요. ”

은아는 그가 갑자기 어제 자신이 했던 얘기를 꺼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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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당황하지만 바로 대답해준다. 그녀에 대답을 듣고 무언가를 한참 생각하다가 이내 매우 진지하게 말을 꺼내는 인혁. 그런 그 때문에 덩달아서 진지해지는 은아.

“ ........ 어제 나한테 그랬죠? 외상센터가 잘 돌아갈 수 있게 관리 하는 게, 내가 환자를 잘 돌 볼 수 있게 도와주는 게, 이제 신선생 꿈이고, 신선생 일이라고... 왜 뺏어가려고 하냐고.. 그 말... 진심이에요..? ” “ ...... 네, 진심이에요. 환자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는 거... 오래전부터 그게 꿈이었어 요. 그런데 이제 저한테는 이 일이 그런 일이 됐어요.” “ 그렇다면... 신선생 말대로 그 꿈 뺏어가려고 한건, 사실이에요.... 정말 미안해요.... 내 가, 지쳐있었나봐요. 외상센터는 말로만 센터지, 중환자실도 없고.. 다른 지원도 없고.. 사 람도 별로 없는데, 사무실에서 나가라고 하질 않나... 그런데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게 아 무것도 없고... 이제 더 이상 희망도 없고... 그래서 그랬어요... 그런데도 남아주겠다고 해 서 고마워요.. ” “ .......... ”

고개를 숙이며 힘겹게 말을 이어가더니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그녀를 보는 인혁. 그런 그를, 은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본다.

“ ......어제는... 정말 미안했어요. 그렇게 손 뿌리치고 나간 것도 미안하고.. 나 걱정해서 하는 말에 자꾸 화내고.. 사무실 정해진 거, 얘기 안 한 것도 미안하고... 근데 내가, 신 선생 무시해서 그런 건 아니에요.. ” “ ...... 네... 알아요.. 어제 제가 한말은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교수님 힘드신 거 뻔히 알면서.. 그냥 화가 나서... 근데...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희망이 없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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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이라... 은아의 물음에 다시 침묵하는 그. 또 혼자 깊은 생각에 빠지더니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은아를 위해 입을 열어 속내를 털어놓는다.

“ ........ 우리 심포지엄할 때... 영국에서 온 박사가 했던 말 기억해요..? 거기는 외상사망 률이 1%도 안된다고... 사실이에요, 거기는 저런 덕터헬기도 있고... 아무리 멀더라도 헬 기가 뜨면 20분만에 어디든 도착 할 수 있으니까, 아무리 큰 사고를 당해도... 죽는 사람 이 거의 없어요. 또 외상 팀도 한 병원에 최소 3팀씩은 있으니까. 이렇게 우리처럼 고생 도안해요 번갈아가면서 하니까.. 집에도 갈 수 있고.. 개인 시간도 많고.. 가족들도 덜 힘 들고.. 물론 그래도 다른 과보다는 좀 힘들기야 하겠지마는.... “ “ ......... ” “ ..... 정말 신세계가 따로 없었어요. 가슴이 너무 벅찬데.... 화가 났어요. 왜 저 나라 사 람들은 사고를 당해도 안 죽는데, 왜 여기에서는 사고를 당하면 대부분 죽게 되는 건지. 지난 20년간 의사를 해오면서 늘 하던 고민이요.. 왜 환자가 죽어나갈 수밖에 없는지.... 근데 거기서 알았어요, 여기가 바뀌어야 하겠구나. 지금처럼 따로 노는 게 아니라, 협력 해서 빠르게 환자를 대처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그러려면 독립된 외상센터가 꼭 필요 한 거죠... ”

인혁은 진지하고 조근조근하게 그동안의 생각들을 말로 풀어내고 있었다. 은아는 그의 그 말들을 그저 말없이 들어줘야겠다고 생각한다. 계속 말을 이어가는 인혁.

“ 우리나라는 면적이 좁아서, 저런 닥터헬기 한두 대하고, 그런 트라우마센터 한두 개만 제대로 있어도 웬만한 외상환자는 거의 살릴 수 있겠더라구요. 그래서 사왔어요. 저 헬 기... 하지만 지금 현실에서는 돈이 너무 많이 드니까... 정작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힘 을 가진 사람들은 지금 같은 환경을 바꿀 의지들이 없으니까.... 그 모든 게 그저 환상 같았어요. 그래서 희망... 가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포기하려고 그랬어요.. 흐음.... 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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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이 계속 일 안한다고 했으면, 아마... 그냥.. 뭐, 그랬다구요.. ”

그녀 때문에 돌아오게 됐다는... 그래서 고맙다는... 그 말을 하기가 쑥스러운지 말끝을 얼버무리는 인혁. 그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진지하고도 부드러운 은아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는다.

“ 꿈이네요 그거.. ” “ .....?!.... ” “ 그게요. 교수님 꿈이라구요...! 희망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면서요. 근데 있잖아요 이렇 게 큰 꿈이.. ”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는 인혁. 헬기를 갖춘 트라우마센터.. 꿈이라.. 가슴에 품고는 있었지만 그동안 그게 자신의 꿈이라고 생각해보진 않았다. 힘이 없어서 늘 치이고, 사무실에서 쫓겨나기 까지 하는 신세인데.. 그런 자신의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어마어마한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애써 부정하려 해보지만, 꿈이라는 단어를 듣자 두근거리는 심장. 그렇게 꿈꿔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는 건 그도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말 그건 너무 엄청난 일이었다. 은아를 바라보던 인혁의 눈빛이 조금 흔들린다.

“ ...... 혼자 상상 많이 하잖아요. 어렸을 적에는 누구든지 대통령이 되고 싶다. 스타가 되고 싶다. 말도 안 되는 꿈꾸잖아요. 나한테는 외상센터가 그런 거 였어요.. 그냥 내 주 제에 감당할 수 도 없고, 이뤄질 수 없는 건데, 억지로, 억지로 나 혼자만 우기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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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 “ 어떻게 이게 어렸을 적에 한번 생각해보는 거랑 같아요! 이미 다른 나라에서는 하고 있다면서요, 우리나라에서는 왜 못해요..!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지금 교수님이 하시고 계시잖아요..! ” “ ....... ” “ 교수님 아니었으면, 그 수많은 외상환자들 그대로 구급차안에서 어디로 갈지 헤메다가 끝났겠죠. 이 큰 병원에서 교수님 혼자 막고 계시잖아요!! 벌써 이뤄놓은 거 많네요~! 우 린 트라우마센터도 있고. 작지만 사무실 없어진 거 아니잖아요! 그리고 이렇게 능력 있 는 외상코디네이터도 있고! ”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녀의 말 중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이제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열변을 토하는 은아. 그런 그녀를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그녀의 마지막말에 피식- 하고 웃어버리는 인혁. 그가 살짝 미소를 띄우자, 은아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부드럽게 말을 이어나간다.

“ 지금은 이렇게 규모도 작고, 무시당하고 그러지만 그건 당연한 거에요~ 우리나라에 없 던 분야를 개척하고 있는 거잖아요~ 이제 막 시작하고 있는 거니까... 처음부터 센터 딱 세워지고! 지원 팍팍 들어오고! 그러길 바라면 그건 욕심이죠~! ” “ ....... ” “ 그러니까 제말은~! 지금까지 그렇게 혼자 버텨 오신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라구요~! 이 젠 걱정마세요! 이렇게 든든한 파트너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세요? 이제 시작인거에요 이 제~! 지금 교수님 말은 막 옹알이하는 애한테 인생은 힘드니까 일찌감치 포기해라! 이거 하고 뭐가 달라요? 이제 시작한거니까! 같이 잘~해봅시다! ”

그에게 힘을 주기 위해 이제는 약간 장난스럽게 말하고 있는 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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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허... 참.. ” “ 어? 웃으셨어요? 잘 해볼 거 에요 말거에요~! ” “ 허허.... ”

인혁은 허허- 웃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지금 그녀가 말하는 건 환상 속 이야기 같았다. 하지만... 진짜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리 환상속이라 해도.. 다시 한번 눈 질끈 감고 그녀의 말대로 다시 시작해보고 싶었다. 이 일... 내 한 몸 바쳐서 진짜 완성시켜볼 수 있을까? 계속 헛된 꿈이라는 생각을 해보지만 이미 그의 마음속에는 희망의 싹 하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인혁은 이상한 기분이 들고 신기했다. 늘 혼자서 속으로만 품고 있던 생각을 이렇게 누군가에게 제대로 털어놓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그의 말을 이렇게 들어주고 이렇게 진지하게 위로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물론, 그녀의 위로가 조금 쑥스럽고 오글거리기는 했지만 이렇게 털어놓고 나니 조금 후련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혼자만 지고 있던 짐을 조금 나눠 가지는 기분이 들었다.

“ 참나... 뭐 웃기만 하노.. 그래도 뭐, 웃으니까 좋네요... 헤헤헤.. ”

인혁이 자꾸 허허-하고 웃기만 하자 투덜대던 은아. 그러다 이내 같이 웃어버리고 만다.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 웃는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근데... 신 선생이 좀 이쁜 편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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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네... 참... 근데 내가 지금 뭔 생각을... 그렇게 인혁이 웃고 있는 그녀를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에게 아까 일을 물어보는 은아.

“ 헤헤.... 아, 근데 교수님! 아까 저한테 장난거신 거 맞죠? ” “ ..예?... 내가 언제.. ” “ 어~? 발뺌하시려구요? 아까 제 볼 찌르시면서 장난치셨잖아요~! 그, 이렇게 손가락 뻗 고 있다가 뒤돌아보라고 한 다음에 찔리게 만들어서 장난치는... " " 무..무슨..!! 쓸데없는 소릴... 아..아까는 신선생 깨우려다가 실수로 그런거죠.. 내가 무슨 애에요? 그런 장난이나 치게.. “ “ 음... 아닌 거 같은데요? 솔직하게 말해도 흉 안봐요~ 저한테 장난거신 거 맞죠? 맞 죠? ” “ 참..!! 거 아니라니까.. 됐어요! 일어나요~! 환자 보러 가야죠... ” “ 환자보러가는 건, 가는 건데~ 아까 그냥 들어오기 미안하니까 장난거신 거 맞잖아요~! ” “ 아, 아니라니까요~!! ”

계속 인혁을 놀리는 은아. 인혁은 자꾸 그러는 그녀 때문에 말을 돌리며 서둘러 옥상을 빠져나가려고 하고, 은아는 그 뒤를 졸졸 쫓아가며 계속 인혁을 놀린다. 말로는 아니라며 짜증을 내고 있지만 얼굴은 웃고 있는 그. 왠지 그녀와 한층 더 가까워진 거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건 그만의 착각이었을까. 어쨋거나 이렇게 일부로 웃게 해주며 자신을 위로해주는 은아가 고맙기만 한 인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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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브금 ★★ 포맨 - 다시 사랑할수 있을까 (feat.다비치) . 미련하게도.. 그때는 몰랐었다. 그날의 그 위로가 내 인생의 전부가 될 줄은.. 결국 그날 이후, 그녀는 3년 가까이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었고 그렇게 내 고독했던 삶에 조금씩, 조금씩 스며들어왔다. 그 3년의 시간동안, 그 어두운 터널 속에서 한줄기 희망의 빛을 비춰준 그녀덕분에,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의지하며..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그 기나긴 터널들을 무던하게 견디며 지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그랬던 그녀가 이제 나를 떠나가려 한다. 늘 비겁함 뒤에 숨어있던 내가 그렇게 그녀를 등 떠밀었기 때문에.. 나의 긴 침묵을 한없이 기다려주던 그녀는 결국, 나를 이렇게 떠나가려 한다.

2012년 12월, 어디론가 미친 듯이 뛰어가고 있는 인혁.

“ 헉... 헉... 헉... ”

어리석게도, 너무 늦게 깨달아버렸다. 그녀가 진짜 떠나려하는 이 순간이 돼서야 그녀를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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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그녀에게 가고 있다. 전속력으로 그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달려가며 다시 그녀에게 전화를 거는 인혁. 여전히 은아의 전화기는 꺼져있었다. 제발.. 제발.. 조금만 기다려주기를... 그녀도 지금 나와 같은 마음이기를... 해줘야할 말이 있었다. 꼭 그녀에게 해줘야 할...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정말 미안하다고.. 혼자 괴로워하는 거 알면서 외면하고 밀어내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고맙다고.. 이런 나를 그동안 지켜줘서 고맙다고.. 그리고.. 그리고.. 진짜로 해주고 싶은 그 말...

“ 헉... 헉... ”

숨이 차다.. 폐도. 심장도 이대로 터져버릴 것만 같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 그.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린다. 바보처럼... 어리석게도 이제야 알았다. 내 인생의 마지막 행복이 되어줄 그녀. 이대로, 놓칠 수가 없다. 인혁은 손에 있는 편지를 더욱더 꽉 움켜쥔다. 왜.. 이제야 알았을까. 왜.. 자존심이나 세웠을까. 왜 그렇게.. 그녀를 향하는 내 마음을 애써 부정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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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많다는 건, 잘해줄 자신이 없다는 건, 책임져줄 자신이 없다는 건 모두 나를 위한 핑계였다. 그녀가 나를 위해 먼저 손 내밀어 줬을 때도, 상처받을게 두려워서... 겁쟁이같이 그 손을 잡지도 못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후회에 울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후회에 빠져 괴로워 할 틈도 없이 미친 사람처럼 뛰어가는 인혁. 지금은 그녀를 잡아야 하는 일이 최우선이다. 드디어.. 드디어.. 그의 눈에 공항이 보인다.. 다리가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았지만 인혁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뛰고, 뛰고 또 뛰었다.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하는 인혁. 비행기 이륙 20분전이다. 제발 그녀가.. 기다려주길.. 나와.. 같은 마음이길.. 이기적이게도 그러길 바라는 그였다. . . .

드디어 공항으로 들어서는 인혁. 공항 안, 어디로... 어디로 가야하지... 어디로...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정신차리자...!! 정신.. 정신차리자 그렇게 간신히 정신을 붙든 그의 앞에 안내소가 보인다. 1km가 넘는 거리를 쉬지도 않고 뛰어온 다리가 이젠 정말 말을 듣질 않는다. 마비가 올 지경이다. 절뚝거리며 간신히 그곳으로 가는 인혁. 그의 눈에 안내데스크직원이 보인다. 입을 열고 말을 하려는데 침이 흐를 것 같았다. 숨이 너무 차서 말은 나오지 않고 입안에는 신맛이 가득하다. 간신히 데스크를 손으로 짚어 몸을 지탱하고 한손으로는 가슴을 부여잡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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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헉...헉....헉......헉........헉..........헉... ” 직원이 눈이 커져서 인혁을 쳐다본다.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환자 같았다. “ 고... 고객님? 어디 불편하신데ㄹ..ㄷ..?!. ”

직원이 그를 부축하려 나오고 도와줄 것이 있나 물어보려는데 직원의 말을 막고 소리치는 그.

“ 헉...헉.... ㅎ.. ㄹ..런던행!!.. 아, 아니..아니!!!... ㄷ..도쿄경유해서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 어디로 가면 됩니까!!!! ” “ 네, 2층으로 가시면..... ”

아직도 뛰어갈 힘이 남았는지, 인혁은 직원에 말에 끝나기도 전에 가슴을 부여잡고 넘어질 듯, 넘어질 듯, 눈에 보이는 에스컬레이터를 향해 뛰어간다.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뛰어올라가는 그. 쓰러질 것 같았다... 이제는 거의 걷는 속도였지만 멈추지 않고 한발 한발 내딛는다. 드디어 2층, 시계를 보는 인혁. 비행기 이륙 10분전.. 그녀가 이미 비행기를 타러 들어갔을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 그는 미친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그러나 너무나도 넓은 공항... 그녀가 보일 리가 없었다.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았다... 이대로, 놓칠 순 없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녀를 부르고 있는 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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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신!!! 신선생....!!!!!!!!! 신선생!!!!!!!!!!!! 신선생!!!!!!!!!!!!!! ”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순간, 공항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놀라서 미친 사람 보듯이 그를 쳐다본다. 그러나 인혁은 사람들이 쳐다보던 말든, 수군거리던 말든 전혀 개의치 않고 계속 그녀를 부르며 눈앞에 보이는 출국카운터와 대기석 사이를 뛰어다닌다.

“ 신선생!!!!!!!!!!!! 신선생!!!!!!!!!!!!!!!!!!!!!!!!!!!!!!! ”

하지만, 아무리 불러도...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디를 둘러 봐도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했지만, 이미.. 들어가 버린 것 같았다. 가슴이 덜컹- 하고 내려앉는 것 같은 인혁. 그의 눈앞에 보이는 출국카운터. 저 게이트만 지난다면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갈수 있을 텐데... 저 문 하나를 사이를 두고.. 결국,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간신히 버텨왔던 다리에 힘이 풀려버리고, 버티려 애써봤지만 인혁은 그대로 한쪽 무릎을 꺾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허탈함에 풀려버린 그의 눈. 한참을 그렇게 그 자세로 허공만을 멍하니 바라본다. 가슴이... 뻥, 뚫려 버린 것 같았다. 그 사이로 시린 바람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저 허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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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허탈하게.. 이렇게도 무력하게.. 또 나에게 소중한 한 사람을 보내버렸다. 한심하게도.. 난 왜 이렇게 늘.. 소중한사람들을 힘없이 보내버리고야 마는지 왜 지켜주지 못하는지 왜 보내고 나서야... 이렇게 후회하는지... 아버지도, 어머니도, 하나뿐인 제자도, 하나뿐인 친구도, 그리고 신선생도.... 왜 이렇게 병신 같기만 한 건지 너무 허탈해서, 너무 병신 같아서, 웃음이 나온다. 가슴은 울고 있는데, 웃음이 나온다. 웃음이..... 나온다......

난 그날 그렇게 미친놈처럼 공항 한가운데 앉아서 한참을 웃다가, 비틀비틀 공항을 빠져나와버렸다. 그녀가 가버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병원은 여전히 예전처럼 돌아가고 있었고, 나 역시 전과 똑같이 일만하고 있다. 아니, 전보다 더, 아주 조금 미친 사람처럼 일을 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힘들어할 자격도 없었다. 실감도 나지 않았다. 이렇게 일을 하다보면, 며칠 뒤에 그녀가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올 것 같았다. 늘 그래왔듯이, 언제나 처럼, 지난 3년 동안 늘 그래왔던 것처럼, 힘들어하는 내 곁을 지켜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 [ 인혁은아 소설 ] 너를 되뇌다. 2 로 이어집니다. 383


- 개인소장용 총7권 제작 저의 2012년 여름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셨던 배우 송선미, 이성민님께 이 글을 바칩니다. [ mirim_love@naver.com ] 2012. 12.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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