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호
2020. 12. 18.
02-03
동네 에세이
04-06
10-16
동네에서 놀고, 즐기고, 배울 곳
17
당신이 몰랐던 용신동의 소소한 역사
용신동 돈키호테
07-09 18-19
한지붕 두동네 용신동 이야기
용
두
신
설
동
모이고, 움직이고 달라지다
동네 이슈, 잇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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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 2020. 12. 18.
한지붕 두동네 용신동 나들목가족도서관
용두동집
대광중학교
제기동역
대광고등학교 아주좋은꿈터
우이 신설
신설동역 신설동역 �
신설동
신설동역
서울용두초등학교
백운당한의원
용두어린이영어도서관
용두동
동대문문화원
용신동주민센터 기능성속옷집 김경옥사장님
동부시립병원
�
동대문도서관
용두역
동아제약빌딩
우산각�공원
서울풍물시장
동대문구청
동대문건강가족다문화 가족지원센터
비우당교
동네에세이
글: 박내현(마을기록활동가)
오래된 골목에는 어딜 가나 빈 의자가 놓여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환영하는 듯, 때로는 쓸쓸해 보이는 빈 의자. 누가 놓았는지, 누가 앉길 기대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의자를 볼 때면 이 골목에도 누군가를 위해 마음을 쓰는 사람이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용신동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은 서울시동부병원이다. 몇 년 전 몸이 좀 안 좋았는데, 병원에 가는 걸 꺼리는 나에게 누군가 이곳을 추천했고 우 리 지역에 있는 공공의료기관이라는 말을 듣고 궁금한 마음에 찾아갔 다. 가정의학과에 접수를 마치고 기다리는데 사람이 없는 것치고는 너 무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내 앞에 대기자도 많지 않은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리지?”라고 생각하며 한참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진료를 받으면서 나 의 궁금증이 풀렸다.
가지 선택지를 설명하고 환자인 나의 의견을 묻기도 했다. 그런 방식이 낯설기도 하고 다정하기도 해서 묘한 마음으로 진료실을 나서는데, 다 음 순서를 기다리던 한 할아버지가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섰다. 조금 횡 설수설하는 그분에게도 의사는 친절하게 자리를 권하고 한동안 고개를 끄덕이며 귀를 기울이다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네며 소통했다. 검사를 받으러 이동하지 않고 한참을 진료실 밖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봤던 기 억이 난다. 이상하리만치 고요하고, 허름한 차림의 노숙인들이 대기실 에 드문드문 앉아있어도 낯설지 않던 그 풍경, 병원이라고 하면 흔히 떠 오르는 속도감도 없이 모든 것이 이용자를 배려하는 듯 낮고 느린 그 병 원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보통 병원에 가면 기다린 시간에 비해 허무하리만치 짧은 진료를 받지 만, 이곳은 기다린 시간보다 더 긴 진료를 제공했다. 꼼꼼히 묻고 여러
서울시동부병원은 ‘공공의료팀’을 별도로 두고 사회적 약자, 취약계층 을 위한 진료를 시행하고 있다. 사회복지실이나 시민공감응급실을 통해 단순한 ‘치료’를 넘어 그 후의 삶에 대한 사회적 지원망을 만들고 보살 피는 역할을 담당하는 병원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다.
▲서울시동부병원
▲용두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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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공사현장에 용두6구역의 옛 모습이 담긴 영상을 상영하는 모습(사진제공:소영)
▲좁은 골목과 작은 집
올해 코로나19로 인해 공공의료기관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다시 한번 서울시동부병원이 생각났다. 올해를 어떻게 지났을까, 많은 사람이 그 때처럼 도움을 받았겠지 생각하며 검색해봤는데, 최근 코로나 확산으로 인해 서울시동부병원도 코로나 전담병원이 되면서 이곳에 입원해있던 노숙인들이 퇴원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무료진료 등도 더는 진행하 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기사를 접했다.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 공공의료 기관으로서의 무게를 더 많이 느끼고 계시겠구나 싶어 닫힌 병원 문 앞 을 한동안 바라보다 돌아섰다.
민들이 그 앞을 지나가는 모습을 또 기록했다. 사람들은 사라진 골목의 풍경이 새롭게 지어질 공간에 투영되는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봤다고 한다. 소영의 기록에는 골목 사진만이 아니라 그 동네를 지나가는 아이 들, 할머니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이미 사라진 골목의 풍경 위로 그 곳에 있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오버랩되는 영상은 모든 사라진 것들에 게 안부를 묻는 것만 같았다.
그다음으로 용신동하면 떠오르는 것은, ‘재개발’이다. 용신동에서 길고 양이에게 밥을 주던 한 주민이 재작년 겨울쯤 재개발 지역의 고양이를 이주방사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고양이는 영역 동물이라서 사람 이 다 떠나고 주변 건물이 허물어져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오히려 추운 날에는 무너질 건물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위험천만이라는 얘기 였다. 지금쯤이면 모두 떠나고 새로운 건물이 지어지고 있을 그곳. 8살 에 용신동으로 이사 와서 17년을 살았다는 소영(25)의 안내를 받아 그 곳을 돌아볼 수 있었다. “제가 처음 용신동에 오게 된 것도 재개발 때문이었거든요. 사직동에서 살았는데, 그곳이 재개발되면서 이사 왔어요. 성북구에 있는 고등학교 에 다녔는데, 거기도 재개발 지역이었어요. 어쩌다 보니 사는 내내 재개 발이 저를 따라다닌 것 같아요.”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컸어요. 제가 기록하면서 만났던 할머 니가 계신데, 뭐랄까 이곳의 증거라고 해야 하나요. 이 동네의 흔적을 모두 안고 살아가는 그런 존재를 담아내고 싶었어요. 지어질 때까지, 지 어지고 나서도 한동안은 기록할 것 같아요. 그래서 일부러 자주 와봐요. 매일 지나다니는 길이기도 하지만 자꾸만 마음이 쓰여서 또 쳐다보게 돼요.” 펜스를 따라 한 바퀴를 돌자 작은 공원이 나왔다. “여기 아주 작잖아요. 그런데 전에는 이 자리에 100세대 넘는 쪽방이 있었어요. 저 어렸을 때 세발자전거 타고 골목으로 들어가면 좌우로 자 전거가 기울 때마다 벽에 닿을 정도로 좁은 골목이었거든요. 그땐 잘 몰 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쪽방이었고 2005년에 모두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지금 공원이 들어선 거죠.”
소영이 처음 이곳에 이사왔을 때부터 이미 용두6구역은 재개발 예정지 였다. 십 수년을 재개발이 되네 마네, 하는 동네였고 마침내 확정되었 을 때는 온 동네가 술렁이는 게 느껴졌다고 한다. “진짜 이상했어요. 제 가 어렸을 때 바이엘을 배웠던 피아노학원, 학교 앞 문방구 이런 게 전 부 사라지는 거잖아요. 여기가 원래 사거리였어요. 그런데 어느날 펜스 가 생기고 절반이 막혀버린 거죠. 저에게는 학창시절 매일 다니고 뭐 사 먹고 그러던 동네였는데 지금은 상권이 완전히 죽어있고 2년 후면 완성 된다고, 그때 가면 다시 괜찮아질 거라고 하는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면 이런 전통시장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싶기는 해요.”
용신동에는 아직 좁은 골목과 쪽방이 남아있다. 동대문구에서도 노인 인구 비율이 가장 높은 곳, 고시원과 쪽방, 모텔 장기 투숙자가 많은 동 네지만 행정과 지역 주민들이 또 그들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 곳이 기도 하다. 세월이 지나 건물이 지어지고 새로운 사람들이 오면 동네의 풍경은 변하기 마련이다. 안타깝지만 낡고 오래된 것은 기록이나 기억 으로만 남고 사라지는 것이 순리일 수도 있다. 그래도 사람 사는 것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지 모른다. 모두가 떠난 후에도 그 자리를 매일 찾아 가 기록하는 소영같은 사람이 있고, 밥을 주던 이가 이사를 가도 그 동 네를 떠나지 못하는 길고양이에게도 누군가 새로운 이가 밥을 줄 것이 며, 코로나가 잦아들면 서울시동부병원은 다시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문을 열 것이다.
안타까운 마음에 동네 사진을 찍기 시작했던 소영은 본격적으로 재개발 이 시작되자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래서 더 열심히 기록했고, 대학 4학 년이던 지난 학기에는 그동안 찍은 사진을 영상으로 제작해서, 용신동 골목에서 상영했다. 재개발 지역의 펜스에 영상을 비추고 지나가는 주
세상 누구나 자신이 있을 자리 하나쯤은 가져야 하니까, 골목에 빈 의자 를 놓아두듯 새롭게 변해가는 용신동에도 누군가 분명 그런 자리들을 만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지친 몸을 기대고 쉬어갈 ‘이웃’을 기다릴 것 이다. 그곳, 용신동에서.
▲철거 중 골목의 풍경(사진제공:소영)
▲골목 안 누군가를 기다리는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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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 2020. 12. 18.
당신이 몰랐던 용신동의 소소한 역사
양극단의 완전히 다른 정체성을 품은 동네, 용신동 이야기
글: 윤덕환(문화플랫폼시민나루 시민기자, 문화심리학박사)
동대문에는 추억과 역사가 없는 동이 있다. 용신동이다. 서울의 역사에 대한 대부분의 기록물을 저장하고 있는 서울역사박물관에 서 ‘용신동’을 입력하면 검색되는 기록이 없다. 현재 용신동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용신동이 과거 어떤 역사를 품고 있었는지, 어떤 사람들이 머물렀었는지에 대한 공통의 기억이 없는 것이다. 2009년 5월4일 탄생한 동대문구 용신동은 용두동과 신설동이라는 두 개의 정체성을 강제로 합쳐놓은 동네였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홈페이지, 용신동]
그런데, 일상에서 용신동, 용두동, 신설동의 관계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분명히 ‘용신동주민센터’는 있는데, 용두동과 신설동에는 별도 의 주민센터가 없고, ‘용신동’지하철역은 없지만, ‘용두역’과 ‘신설동’역은 분명 존재하며, 주민등록등본에는 용신동으로 나오지만, 재 산권과 관련된 서류에는 용두동과 신설동으로 분리해서 서류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 동네 명칭의 혼란스러움을 이해하려면, ‘법정동’ 과 ‘행정동’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법정동은 모든 법적 업무에 사용되는 행정구역의 공식 명칭이다. 반면, 행정동은 행정기관들이 주 민수, 면적 등을 고려해 단순히 편의를 위해 설정한 행정구역이다. 그래서, 한 행정동에 여러 법정동이 묶일 수 있고, 한 법정동이 여러 행정동으로 나뉘어 있을 수도 있다1). 용신동은 행정동이고, 신설동과 용두동은 용신동의 법정동 명칭이다. 정리해보면, 현재의 용신동은 인구나 면적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행정적 편의에 따라 신설동과 용두동을 묶은 새로운 동의 명칭임 을 알 수 있다. 다만, 과거 토지 재산권 등의 역사적 근원을 현재의 주소와 연동해서 확인하기 위해 법정동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 다는 뜻이다. 이것이 용신동이라는 하나의 동네에 두 개 지역의 역사적 정체성이 공존하는 이유다. 신설동과 용두동은 각각 어떤 기억 을 품은 동네였을까. 신설동은 구한말, 종로 연장선의 의미로 세워진 ‘신도시’였다 신설동의 한자는 ‘新設’로, ‘새롭게 만들어진’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새로울 신(新)’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장소는 추가적인 해석이 필 요하다. 이 ‘새로움’이라는 용어의 상대성 때문에 언제 그 명칭을 사용했느냐에 따라 그 지역의 역사성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 1) '한 동네, 두 이름'…헷갈리는 행정동·법정동. 연합뉴스(2018.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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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동의 역사를 찾아보면, 자료에는 ‘숭신방’이라는 지역과 자주 겹친다. 즉, 숭신방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신설동으로 언제 바뀌었나를 추론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조선왕조의 시작과 함께 시작한 한성부(한양)의 행정구역은 5부( 部)(동,서,남,북,중) 52개 방(坊)으로 나뉘어졌었다. 여기서 한성부 동쪽인 동부에 소속된 12개 방중 현재의 동대문구에 해당하는 곳 은 2개의 방이 있었는데(숭신방과 인창방), 이 중 하나가 숭신방 이다. 이곳이 바로 현재의 신설동 지역이다. 이 지역은 1910년 한 일합병 이후까지 그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다가 1943년 경성부의 구(區)제도가 실시되면서 동대문구에 속한 신설동이라는 동네의 명칭을 얻는다2). 이때 숭신방의 지명이 그냥 신설동이라는 명칭 으로 대체된 것은 아니다. 이미 사람들이 그 동네를 ‘새로운 동네’ 라는 개념인 ‘새말’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1943년보다 훨씬 이전인 갑오개혁(1895년)시기 이전부터 이미 사람들은 ‘신 설계(新設契)’ 또는 ‘새말’, ‘신리(新里)’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3). 지금의 신설동은 ‘1890년대의 사람들의 생활개념에서 탄생한 새동네’였던 것이다. 왜 그 시대의 사람들은 이 지역에 ‘새로운’동 네를 형성해야 했을까. 지금과 같이 시대의 행정적인 필요가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본 래 대부분의 신도시는 전통적인 중심지역이 그 수요를 감당하지 못할 때 생겨나는 파생적인 공간이다(강남의 시작이 그랬고, 분당 이나 일산 신도시도 모두 이런 대중적 요구에서 시작됐다). 이 전 제에 더해 현재의 신설동의위치를 더듬어 생각해보면 신설동에 모여든 사람들의 욕망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신설동의 위치는 당시 왕이 제사를 지내던 선농단이 있던 제기동 과 종로의 동쪽 끝자락인 숭인동 중간에서 종로 쪽으로 좀 더 치 우쳐 걸쳐있다(현재의 종로구 창신동, 숭인동의 일부 지역은 신설 동에서 분리된 동네다). 실제로 조선 후기부터 일제 강점기에 걸 쳐 1975년에 이르기까지 몇 차례의 행정구역 재편과정에서 ‘숭신
▲[이미지 출처:열살이의 블로그, 서울개발 변천사]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jsworlarltn&logNo=202887632&prox 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방(신설동)’의 지역 일부는 종로에 편입되었다가, 동대문구로 재 편입되기를 반복한다4). 즉, 구한말 신설동에 모여든 사람들은 대체로 당시 종로에 모여 살던 양반들의 주거지가 확대되는 지점에 절묘하게 위치해 있었 고, 이런 동네의 형성과정에 대한 신설동의 정체성은 다분히 ‘종 로’라고 하는 중앙권력을 지향하거나 이와 관계된 영향력에서 파 생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19세기말과 20세기초, 다양한 경 로를 활용해 신분 상승을 위해 모여든 사람들에게 한양·경성의 종 로는 그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좁았고, 이때의 사람들에게 신설 동은 ‘종로가 확장된’ 신도시였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 2012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청량리 – 일탈과 일상, 서울역사박물관(2012.12, 비매품)]
2) 동대문문화원/역사 (http://dongdaemun.kccf.or.kr/home/main/history.php) 3) 위키백과사전/신설동 (https://ko.wikipedia.org/wiki/신설동) 4) 동대문문화원/역사 (http://dongdaemun.kccf.or.kr/home/main/history.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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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곳이지만, 잠시 머물다 삶의 다른 기회가 생기면 옮기기 쉬운 동네, 용두동. 신설동 바로 옆에 붙어있지만, 청계천변과 가까이 있었던 용두동 은 전혀 다른 정체성이 있었다. 용두동의 동명은 마을 뒷산의 산 세가 용의 머리와 같다고 해서 ‘용머리’ 또는 ‘용두리’라고 불리웠 던 것에서 기원한다5). 하지만, 동네에 대한 이런 근사한 비유와 는 달리,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진 지역이나 사건이 거의 없는 이 지역은 사람들에게 6.25 이후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판자촌으로서의 기억이 강하다. 청년 전태일의 이리저리 옮 겨 다닌 판자촌 중의 한 곳도 청계천변 근처 이곳 용두동이었다. 이런 용두동의 어려웠던 삶의 기억을 고스란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기록을 서울역사박물관 생애사 인터뷰자료에서 찾을 수 있었다. 56년생으로 용두동에서 태어나 2012년 인터뷰 당시까지 용두동 에 살고 있던 양의식 씨다. 용두동 토박이가 기억하는 용두동은 어떤 곳이었을까.
▲[노무라 모토유키의사진 - 청계천변 판자촌, 1970년대] [이미지 출처: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http://blog.daum.net/japan114/4282)
56년생 양의식 씨가 기억하는 용두동은 그가 고등학교를 다닐
없는 곳을 머물던 사람들은 새로운 경험과 미래를 원한다. 하지
때인 1970년대 초반까지도 자신의 가족을 포함해 80%이상이 북
만, 한 줌의 유산이라도 기억해야 할 것들이 있다면, 사람들은 과
한에서 내려온 피난민이었다. 공동체의식이 강했으며, 그 동네에
거는 복원되거나 기록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정착한 2세들은 대부분 마을 어른들의 보살핌 속에서 따뜻한 유
90년대 초, 용두동을 ‘주꾸미의 동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
년기를 보냈다고 기억한다6). 그래서 동네는 가난했지만, 끼니때
다8). 실제로 한 주꾸미 식당이 성공한 후 20곳이 넘게 있었다고
가 되면 어떤 집이라도 들어가서 밥을 먹을 수가 있었다고 전한
전해진다. 전혀 주꾸미와는 맥락이 닿지 않는 용두동의 정체성이
다. 다만, 용두동은 60~70년대를 거치면서 반복적인 개발이슈와
엉뚱하게 연결된 사례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성업중인 주꾸미 집
판자촌 철거이슈가 겹쳐서 지역 토박이들을 가질 수 없는 환경이
은 5개 안팍으로 그다지 많지 않다. 쭈구미의 동네라고 하기엔 뭔
조성된다. 실제로 양의식 씨도 해당 인터뷰에서 자신의 국민학교
가 애매하다. 단서는 주꾸미의 가격이다. 과거 주꾸미는 낙지나
(초등학교) 동창 95%가 다 이 동네를 떴다고 언급한다. 양의식의
오징어에 비해 훨씬 저렴하고, 푸짐하다(현재는 기후 온난화 때문
인터뷰를 통해서 나타난 바로 용두동은 그 이후에도 정주를 하는
에 오징어보다 더 비싼 경우도 있지만, 90년대 주꾸미 가격은 매
사람들이 많지는 않다고 전한다. 용두동의 정체성 자체가 저렴하
우 저렴했다). 이 음식은 사실 용두동이 품고 있었던 가난의 이미
게 잠시 머물다가 삶의 또 다른 기회가 생기면 옮기기 쉬운 정거
지, 그래서 소박할 수 밖에 없는 안주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동네
장 같은 곳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용두동의 정체성은
의 정체성은 그 동네에 오랫동안 머문 사람들의 공간과의 관계와
서울의 동부권 교통과 대형시장의 중심지인 청량리와 제기동을
시간을 쌓아온 기억이다. 가난의 기억을 가슴 아프게 담고 있는
빼놓고 논할 수가 없다. 이렇게 보면, 서민들에게 용두동은 청량
‘주꾸미 동네’ 용두동과 종로의 연장선을 품고 ‘새로운 꿈’을 꾸었
리와 제기동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저렴한 ‘베드타운
던 신설동의 역사는 이제 더 이상 기록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앞
(bed town)’이었던 것이다.
으로의 모든 기억은 용신동의 이름으로 기록될 것이다. 가난의 기 억도 전통의 유산도 없는 용신동, 쾌적한 공원과 쭉뻗은 대단지
재개발 동상이몽(同床異夢)의 신설동과 용두동, 그리고 용신동이
아파트가 들어선 ‘새동네’ 용신동이 담아낼 ‘관계와 시간’은 무엇
기록할 미래의 정체성
이 될까.
이처럼, 용두동과 신설동은 완전히 다른 동네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을 극명하게 대비해서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오래된 도심의 재정비를 이유로 과거 정부들에서 재개발 이슈가 있었을 때 용두동과 신설동은 입장이 갈렸다. 가난의 기억을 빨리 뭍어버 리고 싶어 하듯 많은 용두동 사람들이 재개발에 찬성을 했고, 현 재까지 활발히 추가 논의와 진행이 되고 있지만, 처음부터 동네의 정체성을 의심하지 않았던 신설동 사람들은 많은 이들이 2009년 시작된 재개발에 반대해서, 2012년 결국 신설2구역 사람들은 재 개발 구역해제 요청을 했고, 재개발은 중단되었다7). 추억할 것이 5) 동대문문화원/역사 (http://dongdaemun.kccf.or.kr/home/main/history.php) 6) 2012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청량리 – 일탈과 일상, 450p, 서울역사박물관 (2012.12, 비매품)
▲[이미지 출처: 네이버지도, 용신동이미지]
7) 신설2구역(신설동89번지 일대) 행위제한 해제. 도시개발신문(2012.05.23.) 8) ‘용의 머리’마을이 주꾸미 동네로 변한 황당한 사연. 중앙일보(2019.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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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 2020. 12. 18.
모이고, 움직이고 달라지다
용신동은 용머리 지형으로 사람도 동네도 너무 좋습니다
만난이: 김홍산(용신동주민자치위원장) 취재: 임정희, 심소영, 박혜진 / 글: 임정희, 심소영
인터뷰, 마을이음 첫 번째 취재는 거의 주민자치회나 통장협의회 등 동에서 주민회를 대표하시는 분을 만난다. 용신동은 김홍산 주민자 치위원장이 인터뷰에 응해주어 만나러 갔다. 용신동주민센터에 들어 서니 김칠태 용신동장님이 반겨준다. 김홍산 위원장도 4층에서 벌써 기다리고 있단다. 마을이음 소문을 들으셨나? (어깨 으쓱) 경계 없이 반겨주신 두 분께 감사한 마음으로 인터뷰를 시작한다. “원래 인터뷰는 용신동을 첫 번째로 해야 하는데, (웃음) 우리가 주 민자치회 월례회 가도 꼭 용신동이 제일 먼저 하고 그랬는데, 여기 용 신동이 상당히 커서, 용두1동, 용두2동 또 신설동까지 세 개 동이 합 쳐진 동이예요. 용신동은 용신동에 용자를 따고 신설동에서 신자를 따서 용신동이 됐어요.” 김위원장은 건설업, 무역업, 임대사업 이렇게 세 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1988년 여기서 사업을 시작하면서 거주도 시작되었다. 특별히 용신동에 자리 잡은 이유가 있을 듯하여 물었다. “제가 청계천에서 근무했었는데, 청계천에서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 다 보니까 그때는 실질적으로 자금이 좀 모자라 이쪽 용신동이 나름 한적하고, 해서 자리를 잡게 되었어요. 또 제가 지금 하는 일을 오랫 동안 했었어요. 88년 전부터 그 계통에 상당히 오래 근무 했었거든 요. 그래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좀 잘 되지 않을까 해서 용신동에 자 리를 잡게 되었는데, 마을마다 고유의 특성이 있겠지만 용신동에 사 시는 주민분들은 상당히 정감이 있고,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고 그래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상당히 호응도가 높고 좋습니다. 사 람도 지형도 다 좋습니다. 여기가 용머리 지형인데, 고려대부터 안암 동까지 쭉 내려와서 여기가 합수머리 즉 용의 머리가 되거든요. 청계 천에서 내려오는 물 또 정릉천에서 내려가는 물이 합수되는 곳입니 다. 그래서 상당히 풍수지리적으로 용신동이 좋습니다. ” 이 동네에서 시작한 사업이 아주 잘되었나 보다. 용신동에 대한 오랜 정과 자부심이 느껴진다. 그래도 살면서 불편한 것도 있을 텐데, 사 건·사고, 또는 바꾸고 싶다거나 하는 불편사항들도 물었다. “용신동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지역이어서 큰 재난 같은 게 없었고 참 평범해서 기억에 남는 것은 딱히 없습니다. 그러나 제게 한가지 바람이 있다면 용신동에 꽃길을 조성해서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즐겁게 걸을 수 있는 길을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서 저도 노력을 하고 있고 또 찾고 있습니다.” 의외다. 용신동 ‘꽃길 조성’이라니. 감성이 풍부하시다. 머지않아 용신 동 꽃길을 걷는 상상을 해본다. 그리고 용신동 조사하면서 보니, 용 두공원 지하에 있는 쓰레기 처리장 주민들 불편이 상당한 것으로 알 고 있는데, 주민들께 당부하고픈 것이 없는지 물었다. “용두공원이 여기 있는 것은 참 좋은데, (중략) 우리 생활에 필요한 것은 쓰고 나머지가 이제 쓰레기가 되는데 그걸 처분하려고 용두공 원 지하에다 설치해놨잖아요. 해놓고 보니까 거기에서 나오는 매연,
▲<김홍산 용신동 주민자치위원장>
악취가 나고 특히 날이 흐렸을 때는 많이 발생해서 주민들이 불쾌감 을 호소하고 있어요. (중략) 아까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가 생활하 는데 나오는 폐기물은 님비현상이면 다른 데 가서는 해야 하는데, 안 하고 외부 것들도 받아들이는 거로 알고 있어요. 이것으로 인해 조금 문제가 발생이 되더라도 참으며 쾌적한 삶이 될 수 있게끔 하는 만큼, 모든 시민들이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 쓰레기도 덜 버리고 최소화해 서 쓰레기가 많이 배출이 안 되게끔 해주면 좋지 않겠나 하는 마음 을 가져봅니다.” 님비로 우리 동네에서도 거부할 수 있지만, 불편을 감수하는 만큼 다 른 지역 주민께서도 쓰레기 최소화에 힘써 달라 말한다. 조심스레 이 야기하는 그의 말에 고심이 전해져 온다. 위원장의 말처럼 버리면 끝 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환경을 헤치는 위협적인 요소로 되돌아오는 만큼 소비하고 버리는 것에 우리 모두 엄중한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용신동 주민들과 함께 하픈 것이 있는지 물었다. “내년 2021년 1월 1일부터 주민자치회로 회원이 50명이 되면은 주 민자치위원회보다 배로 회원이 늘어가고, 참여 인원이 많아지므로 앞 으로는 주민자치위원들한테 여러 가지로 홍보해서 주민들이 많이 참 여할 수 있게 하고, 용신동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구민이 같이할 수 있는 행사나 축제가 될 수 있게끔 노력 해보려고요. 또 제가 주민 자치위원을 14년, 15년부터 희망복지 위원장을 3년을 했어요. 희망 복지위원장을 할 때 어르신분들을 찾아가 보니까 쪽방에서 한여름 에 문을 못 열어놓고 지내시고, 선풍기도 없이 사시는 분들이 상당히 많이 계셨어요. 그때 저는 선풍기를 전해드리며 그분들의 삶에 있어 서 좀 편히 쉴 수 있게끔 해 드린 적도 있습니다. 앞으로도 쪽방촌이 라든가 어려운 분들한테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지원을 많이 해서 우리 용신동 어르신분들이 삶의 질이 좀 나아질 수 있도록 하는 게 제 목표입니다.” 2021년 주민자치회 출범과 함께 회장에 출마하신다니 그의 염원인 용신동 꽃길 조성과 어르신들 삶이 좀 더 나아지도록 하며, 청룡문화 제를 모든 동대문구민 축제로 잘 운영하실 수 있도록 시민나루도 응 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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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고, 움직이고 달라지다
용신동의 자랑, 청룡문화제를 아시나요?
만난이: 김영섭(백운당한의원 원장) 취재: 임정희, 심소영, 박혜진/ 글: 임정희, 심소영
▲<백운당 한의원 김영섭 원장>
▲<김영섭 원장의 다양한 수상 사진과 보도사진>
용두동에는 유명한 축제가 있다. 동대문구 주민이라면 한 번이 라도 들어봤을 ‘청룡문화제’이다. 나도 들어봤지만, 어떤 축제인 지, 어디에서 주최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취재해 공유하면 좋 겠다고 생각해 취재에 돌입했다. 당연히 구청에서 진행하는 행 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청룡문화 제 보존위원회와 동대문문화원에서 주최하는 행사였다. 두 곳 모두 민간이 만든 단체이다. 서둘러 인터뷰해줄 사람을 찾는다.
래노니깐 옛날 노인네들은, 지금도 그렇잖아요. 자기 말 잘 들으 면 좋아하지…. 싫다고 하면 누가 좋아해요? 근데 그러지도 못 하고 맨날 할아버지 밑에서 그냥 약 짓고 손 다 잘라버리고, ( 중략) 옛날 안암동 쪽에 동양의학대학이라고 있었어요. 그곳이 한의사를 배출하는 유일한 대학이었어요. 4년제입니다. 그때 한의사는 별게 아니니깐….”
동대문문화원에서는 김영섭 초대 동대문 문화원장을 추천했 다. 찾아보니 현직 한의원 원장이었다. 한의원을 검색해보니 엄 청 유명한 곳이다. ‘백운당한의원’ 각종 매스컴에 인터뷰 기사 가 쏟아진다. 13대째 운영해온 한의원이라 한다. 또 신장 분야 소문난 한의원이다. 한의원 특유의 약재 냄새를 맡으며 한의원으로 들어서니, 한의 원 간호사 선생님들이 “원장님 곧 내려오실 거에요. 여기서 잠 시만 기다려주세요.” 하시면서 방역에 필요한 여러 가지를 도 와준다. 기다리면서 본 한의원 내부는 무엇을 상상했던 그 이 상이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표창장, 노벨 화학 상 후보로 추천되었다는 신문기사, 수많은 매스컴과 인터뷰한 사진, 다양한 수상 사진 등 한눈에 헤아리기 힘들 만큼 빼곡하 다. 이렇게 유명한 한의사가 청룡문화제와는 어떻게 인연이 닿은 걸까? 13대째 한의학을 하는 집안에서 학부는 왜 경제학을 전 공하고 한의학은 나중에 했을까? “한참 사춘기 때 이럴 때는 좀 놀러 다녀야 되잖아요. 근데 할 아버지가 한의사를 하니까 그 밑에 사람이 있어야 되잖아요. 물론 다른 사람도 있는데 어려서부터 내가 순종력이 있었어요. 어른들 잘 살피고, 좀 하라고 그러면은 속으로는 싫어도 겉으 로는 전혀 표현 안 하고 너무 잘하는 것처럼 했단 말이에요. 그
그에게 순종은 순종적인 것이 아니라 순종력, 순종하는 힘이었 나보다. 그 힘을 사춘기의 힘이 누른 것으로 봐야 하나? 어르신 의 반항이 너무 흥미롭다. “그래서 거기 가라고 하는 거를 거기 간다고 대답을 해 놓고 입 학은 나 혼자 건국대학교 가서 경제학을 했어. 1960년대에는 은행 행원이라고 하면 최고로 알았어요. 그때 돈이 어려웠잖아 요. 은행하면 그냥 괜히 돈이 많은 거로 알아. 그래서 그쪽으로 갈까 해서, 경제학과를 갔어요. 한의학책은 사다가 책상 위에 할아버지 보라고 갖다 놓고 내가 공부하는 거는 숨겨 놓고, (중 략) 4년을 속인 거지 할아버지를 감히…. 그래 놓고 이제 졸업 졸업식이 내일이라 할아버지한테 얘기해야 될 것 아니에요. 그 러니깐 졸업식을 오신다는 거예요. 우와! 난리가 나버렸잖아요. 그래서 얻어터지는 각오하고 앞에 가서 무릎 딱 꿇고 빌었어. 빈 게 아니라 고백을 한 거지. ‘사실은 이러이러해서 거기 안가 고 거기에 갔습니다.’ 그러니까 아무 말씀을 안 하시는 거예요.” “들통이 났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러면 경제학을 나와서 은행을 갔느냐? 못 갔어요. 또 다른 걸 하게 됐어. 여러 가지. 그러다가 몇 년 지나서 가정을 가지게 됐어.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때는 동양의학대학을 경희대학에서 흡수해서 6년제를 만들어 버린 거라. 그래서 인제 그때서부터 한의과 대학을 최고로 만든다고 해서 시험점수가 좋은 대학가는 점수가 아니면은 거의 못 들어 갔어요. (중략) 건국대 졸업이 65년 정도인데, 그때 영어교육이 빈약했거든, 한국에 영어 실력이 그때 대학교 나와봐야 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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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도 할 줄 몰라, 근데 (한의대) 본과 1, 2년생들은 양방과 학 생들하고 같은 교실에서 같은 커리큘럼 가지고 공부해야 돼. 그 게 전부 원서야, 그게 우리 같은 영어 실력에 그게 되냐고, 의과 라는 게 다른 거보다 더 세밀하잖아요. 그러니 영어 단어 가지 고 외울라. 그거 할라 그때 머리 빠져 버렸어.” “신장병은 내가 자랑이 아니라 그대로 얘기할께요. 신장병은 전 세계적으로 못 고쳐요. 약도 없어요. 그런데 저한테서는 증 상이 많이 나와요, 지금도. 그래서 국내는 뭐 전반적으로 신장 병 하면은 제가 이제 돼 있고…. 그래도 벽이 두껍습니다. 아직 도 양방 쪽에서 약이 없으니까 한방에서도 더 어렵다는 생각을 해서 한방을 못 하게 얘기해 버리죠. 한약을 먹지 마라. 그래서 그것 때문에 제가 언젠가 내가 텔레비 방송 한 번 해서 얘기를 한 예가 있어요. (중략) 그래도 양방에서 안 된다고 하니깐, 한 방으로 해 보겠다는 생각을 가져요.” 옛날이야기를 바로 어제 이야기처럼 한다. 젊었을 때 가업인 한 의학을 뿌리친 패기, 또 가정을 이루고 돌아온 용기, 그리고 너 무 힘들어 중간에 포기할뻔했음에도 끝까지 해서 지금까지 푹 빠져 있는 한의학에 대한 자랑스러움까지 느낄 수 있었다. 최근 에 직접 저술한 ‘이것이 침향이다’ 라는 책에 친필 사인을 더해 주었다. 양귀비가 몸에 꼭 지녔다는 ‘침향’에 대해 설명해주실 때에는 한번도 접해보지 못한 한방 재료의 신비한 효능에 매료 되었다. “우리 동대문 문화원 설립도 스토리가 있어요. (중략) 제가 행 정 쪽에도 관심이 있고, 역사문화 쪽에 다른 사람보다 관심이 많아서 이 지역에 있던 아까 말하는 청룡 계통 있잖아요. 그 계 통은 이미 지역에서 뭐 조그마한 단체장 같은 거 하면서 봉사 활동도 하겠다 이미 머릿속에 제가 정리를 해 놨었어요. 제가 1991년에 초대 의원이 됐거든요. 2대까지 하고 내가 스스로 접 었는데, 그때 1991년도 5월인가 지방 자치의원이라는 신분이 들면서 그때 주민들한테 공약이라는 걸 하잖아요. 내가 이 지 역에 역사 발굴해서 주민들과 같이 호흡하면서 우리 지역에 있 는 역사를 스스로 자각하면서, 후손들한테 역사적인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공약을 넣었어요. 그해 당선이 되고, 노 하우는 이미 다 있으니까 바로 그 해에 ‘용두제’라는 걸 했어 요. 지금은 청룡문화제고, 주민들과 했죠. 그대로 재현했어요. 근데 그때는 예산이 없잖아요. 근데 저는 한번 결정을 지어서 해야되겠다 하면 제 사비 쓰는 걸 욕심을 안내요. 얼마든지 쓰 더라도 일만 되도록 만들자는 성격이 있어요. 제가 매년 했거든 요. 근데 금년에 30회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10월에 해야되는 데 못했어요.”
▲<‘이것이 침향이다’ 친필 사인 중인 김영섭 원장>
“내가 오방토룡계라는 걸 연구를 한 거예요. 텔레비전에서도 오방색 나왔잖아요. 그 오방 이라는게 뭐냐, 동서남북 중앙 그 게 오방이란 말이야. 우리 서울에서는 동서남북이 여기가 동쪽 이쟎아요. 서대문, 남대문 있죠. 북쪽에 또 무슨 문(숙정문)인 가 있죠. 그리고 중앙이 어디냐면 종각이예요. 그게 오방토룡 계 라는 말이예요. 그러니까 기간이 되면 5군데서 나름대로 농 사 잘되라는 기우제를 지내왔어요. 청, 홍, 백, 흑, 황 오색이 있 죠? 동쪽은 항상 청색이요. 그래서 청이 들어가는 거야. 그래서 청이라고 하는 거는 뭐냐, 시작이라는 말이예요. 그래서 사람도 젊은 사람 ‘청’년과 같은 맥락이예요.” 아~ 그런 깊은 뜻이 있었구나 싶었다. 김영섭원장의 말은 빠르 기도 했지만, 옛 서당 훈장님께 세상의 이치와 그 시대를 듣고 배우는 것 같았다. 겪어보지 못한 시대를 당사자의 목소리로 생 생하게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 같다. 지금을 사는 우리에 게 해주고픈 말은 없을까? “생각의 변화입니다. 다른 거 하나 없습니다. 생각의 변화는 자 기 스스로 해야되기 때문에, 그러니까 몸소 보여줘 가면서 해 야된다는 거죠. 근데 그거는 누가 먼저하냐하면, 유지들이나 지도자들이 먼저 해야됩니다. 품격있게. 제가 하동이 고향인데, 하동군수가 제가 큰상 받았다고 보내준 편지가 있어요.” 그가 보여준 편지는 사극에 나오는 서찰이었다. 하동군수의 축 하편지였는데, 시대를 거슬러 올라온 듯한 서찰은 너무 빠르게 변하는 문화와 시대에 잠깐 멈춰 주위를 둘러보라 말하는 것 같았다. 품격있는 정치, 품격있는 행정, 품격있는 지역문화, 내 가 보기엔 아직 멀었지만, 김영섭 원장이 그 당시 주민들과 몇 걸음을 옮겨주었으니, 지금 주민들과 행정가, 정치가들은 몇 걸 음을 옮길 수 있을지 함께하며 지켜볼 일이다.
그는 초대 기초의원을 시작으로 초대 동대문화원장을 맡고 20 년간 이어오다 2019년에야 다음 원장에게 바통을 넘긴다. 사 비를 털어 만든 동대문화원을 자식처럼 키워 온 것처럼 느껴졌 다. 그러나 김영섭 원장이 퇴임한 이후 공간도 답십리 동대문체 육관에서 용신동 불로장생 빌딩으로 옮겼다. 그는 문화원이 지 하에 있다는 것이 마땅치 않지만, 불평은 안 했다며 말을 아낀 다. 분위기를 바꿔 용두제는 왜 청룡문화제가 되었는지 물었다. ▲<청룡문화제> 발췌: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swpiano&logNo=22168391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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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서 놀고, 즐기고, 배울 곳
아주 좋은 꿈터 & 나들목 가족도서관
만난이: 이동희(아주좋은꿈터매니저), 장영두(나들목가족도서관사서) 취재: 오은형, 심소영, 박혜진 / 글: 오은형, 심소영
용두동 사거리에서 주꾸미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오래된 건물 사이로 새로 지 은 디자인이 독특한 건물이 있다. 건물 주변에는 한옥 기와가 켜켜이 쌓여있고,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면 옛 기와집 대문문양이 현관에 꾸며져 있다. 오래된 건 축재료와 현대적인 디자인이 어울려 있는 이곳은 아주좋은꿈터 도서관이다. 코 로나로 모두 힘든 시기인데, 작은도서관은 어떻게 운영되는지, 용신동의 작은도 서관 운영담당자 두 분을 아주좋은꿈터에서 만났다. “저는 아주좋은꿈터 도서관 운영을 담당하고 있는 아주복지재단 이동희 매니저 입니다. 본 재단은 아주의 계열사로부터 출연받은 기금으로 설립된 재단이며, 아동.청소년.장애인 등을 대상으로 다양한 사회공헌 사업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도서관 사서가 아닌 사회복지사로 근무하고 있지만, 이용자들이 편리 하게 도서관을 이용하실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이동희_아주좋은꿈터) “나들목 가족도서관은 사립도서관인데, 여러 기관과 개인의 후원으로 운영되는 도서관이에요. 먼저 ‘더불어함께 교회’에서 가장 큰 후원을 하고 있구요. 그리고 도서관 이용자들이나 소규모 그룹으로 CMS로 후원금을 보내 주신 분들이 계 세요. 우리 도서관은 대광고등학교 정문 왼쪽 30m 거리에 있습니다. 관장님과 사서 두 명이 일하고 있는데 대외업무는 제가 담당을 하고 있어요. 저는 동대문 구 지역에서 일하게 된 지 12년 차 되었고, 5년 전부터는 동대문구 혁신교육지 구사업도 연계해서 지금은 동대문구도서관 네트워크에서 대표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장영두_나들목가족도서관) 사립도서관은 공립도서관과 달리 그야말로 사적인 예산으로 운영된다. 설립부 터 운영까지 어떻게 운영하는지 궁금했는데, 장영두 사서는 자기소개에 도서관 ▲<아주좋은꿈터 외관> 제공: 아주복지재단
운영소개까지 시원하게 얘기해준다. 아주좋은꿈터 도서관도 어떻게 운영되는 지 궁금해진다. “원래 이 꿈터가 있었던 공간은 아주 낡은 한옥이었는데, ‘아주’ 창업주 故 문 태식 회장님이 거주했던 생가였어요. 창업주께서 평소 사회공헌활동에 관심이 많으셨던 만큼 생가터를 활용하여 아동, 청소년은 물론 지역주민들에게 도움 이 되는 방안을 고민하셨습니다. 그리고, 2014년에 타계하시면서 생가터와 재 산을 재단으로 기부하고, 지금의 아주좋은꿈터를 건립하게 되었어요. ...(중략)... 이 공간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대지 평수는 정말 작아요. 면적이 작아도 알차게 공간을 만들어보자고 의견이 모아져서, 세계적인 건축가인 이타미 준의 장녀이 자 유명 건축가인 유이화씨가 직접 건축 디자인을 했어요. (참고로 이타미 준은 제주도 ‘방주교회’와 ‘포도호텔’을 설계하신 것으로 유명한 재일 한국인 건축가 입니다.) 그래서 1층 왼편에 보시면 세계적 권위의 국제디자인공모전인 ‘독일 iF 디자인어워드’에 아주좋은꿈터가 18년, 19년 연속 수상한 이력도 가지고 있
처럼 설립 취지 자체가 지역주민들 그리고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언제든지 편하 게 와서 쉬고 책도 읽고 배울 수 있도록 만든 교육문화 공간입니다. ...(중략)... 나만의 숨겨진 아지트 같은 공간으로 여기를 계속 활용해 주시고, 쉽게 언제든 지 방문해서 잠깐이라도 머물다 갈 수 있는, 내 집처럼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는 그런 공간으로 계속 이 지역에 남아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이동희_아주좋 은꿈터) 아주복지재단의 아주좋은꿈터는 도서관의 기능도 있지만, 기업의 사회공헌으로 서 지역주민들의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는 목표가 있었다. 운영시간이 근무 시간 한정이라 아쉽지만, 주민독서회 네트워크 등과 잘 연계하여 운영시간도 확 대되고, 용신동 주민뿐 아니라 책 읽는 동대문구 주민 모두의 아지트가 되었으 면 좋겠다.
습니다. ...(중략)... 꿈터에 오시면 생가에 있었던 자재들을 보존해놓을 것을 보 실 수 있는데, 생가에 있던 기와로 담장을 만들어놓았고 또 1층 문에 있는 문양 이 생가 대문에 있었던 문양이에요. 그리고 한옥은 위에 지붕을 형성할 때 대들 보가 받쳐주잖아요? 그 나무 대들보를 재활용해서 벤치로 다시 만든 거예요.”( 이동희_아주좋은꿈터) 어쩐지 현관의 한옥식 문양을 한 대문도 심상치 않았고, 건물 주변 기와를 쌓아 올린 벽도 예사롭지 않아 생각했는데, 생가를 해체하고 모아놓은 것들이라니. ‘좋은 결실을 맺기 위해서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메시지와 창업주의 염원이 담 겨 있는 생가 대들보 벤치에 살포시 앉아본다. “저희가 2017년 8월 1일 자로 개관을 했어요. 주택가 안에 있다 보니까 처음 방문하시는 분들은 헤매기도 합니다. 반면에 디자인적으로 주변 경관과 비교하 면 눈에 띄는 건물이다 보니 많은 분들이 지나가시면서 신기하게 보시기도 하 고, 한번 방문하시면 꾸준하게 이용하시죠. ...(중략)... 그리고 앞서 말씀 드린 것
▲<故 문태식 창업주의 생가터에 세워진 아주좋은꿈터 설립 이야기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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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목가족도서관> 발췌: 나들목가족도서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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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아주좋은꿈터매니저 이동희>, 오-<나들목가족도서관사서 장영두>
험할 수 있듯이 재미도 같이 담아낼 수 있는 도서관이 되면 좋겠습니다. 도서관 나들목가족도서관은 교회와 개인들의 후원으로 운영되는 도서관이다. 장영두
네트워크 회의를 하면서 아이디어가 나오고, 북 페스티벌이 만들어졌던 것처럼
사서는 기자가 몇 년 전 동대문구 도서관 담당자들이 함께 모여 네트워크를 준
어떤 지역 사회 문화를 바꿀 힘은 그런 소통과 협력에 있다고 봅니다.”(장영두_
비할 때, 젊고 의욕적이던 사서 선생님으로 만난 적 있었다. 그래서 반갑기도 했
나들목 가족도서관)
지만, 현재 도서관 네트워크는 어떻게 운영되는지도 궁금했다. 와~ 역시 동대문구 도서관 네트워크 대표님이다. 동네에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 “나들목 가족도서관은 문화를 누릴 수 있는 도서관, 참교육이 이루어지는 도서
로서 도서관이 교육, 문화, 지식 격차를 해소할 수 있고, 다양한 미디어소통플랫
관, 지역 사회에 사랑방과 같은 공간입니다. 도서관에서 가장 보람있을 때는, 도
폼도 지원하는 공간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게다가 지역의 도서관들
서관의 교육 및 문화 프로그램을 충분히 경험하고 만끽하는 아이들과 부모님,
이 네트워크로 묶여있어 연대하면서 이런 일을 도모한다니, 지역주민으로서 너
이용자분들을 볼 때, 그리고 재미있고 교육적인 콘텐츠를 실험적으로 개발하
무나 고마운 일이다. 여기에 많은 지역주민의 관심과 참여가 뒤따른다면 진짜
고 적용할때였어요. 도서관에서 일을 벌이는 타입이라서(웃음) 다양한 일을 하
‘책 읽는 동대문구’가 될지도 모르겠다.
며 업무가 많아 힘들 때도 있는데 보람 있는 순간들을 생각하며 재미있게 일하 려고 합니다. ...(중략)... 사립작은도서관이다보니 지역분들의 인력적・재정적 지
이런 책 읽는 문화조성을 위해 많은 도서관 담당자들은 고민한다. 나에게도 아
원을 받을 때가 있는데, 시의적절하게 도움을 받을 때마다 참 감사한 마음이 들
이들과 그림책을 함께 읽고 나눈 정서 경험은 시간이 지나도 매우 큰 자산으로
어요. ...(중략)... 코로나 19로 인해 정보격차가 커지고 있는 지금 상황 속에서
남아 있다. 지금도 여전히 독서모임에서 책 읽는 모임을 하고 있다. 책 읽기를
너무 밀집되지 않은 가까운 공간에 정보와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공간 그리고
통해서 도서관 가는 즐거움을 깨달았는데, 얼른 코로나 상황이 끝나 생활 밀착
여유를 가지고 소통할 수 있는 공간, 문화공연 프로그램 등을 통해서 삶의 질을
형 작은 도서관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날들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앞으
좀 높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도서관이 전
로도 동대문구 도서관들의 다양한 책 읽기 캠페인에 지역주민들이 많은 관심과
통적인 도서관 역할을 담당하는 것뿐 아니라 그 이상으로 지역 사회의 문화교
참여로 함께 해 보자.
육 플랫폼 같은 역할을 하면 좋겠어요. 온라인 플랫폼 뿐 아니라 여전히 지역사 회에서는 오프라인 플랫폼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플랫폼 공간이 우리 도서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고요.”(장영두_나들목 가족도서 관) “그동안 네트워크로 활동했던 것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채널 생기면서 도서 관들이 서로 더 알게 되었고, 또 협력해서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았어 요. 그 대표적인 예가 제1회 북 페스티벌 같은 거고요. 마을도서관 프로젝트 경 우에는 아주좋은꿈터처럼 예쁘게 잘 세워졌지만 지역 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도서관들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역할이 크거든요. 또 교육격차가 심해진 환경 속에서도 가까운 곳에서 정보를 손쉽게 습득할 수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 고 생각해요. 정서적인 지원뿐 아니라, 지식적인 정보도 제공해 줄 수 있는 공간 으로 작은 도서관이 활용되면 좋겠어요. 지역 사회에서 쉽게 이용할 수 있는 플 랫폼 같은 도서관에서 교육과 정보, 문화를 누릴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거라 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선 이런 미디어와 디지털 매체를 활용한 도구들이 저는 중요한 이슈라고 봅니다. 전통적인 아날로그적인 가치를 가지고 가면서, 미디어 적인 요소를 같이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도서관에 가서 다른 활동들을 체 ▲<동대문구 도서관네트워크_마을도서관 탐방프로젝트>
아주좋은꿈터 이용 안내
나들목 가족도서관 이용 안내
이용시간
이용 시간
월요일~금요일: 오전 10시 ~ 오후 6시 점심시간: 정오 ~ 오후 13시 30분 휴관일: 주말 및 공휴일, 기타 도서관에서 안내하는 일자 주소와 연락처 [02584]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16가길 7 TEL 02-927-1270 FAX 02-927-1271 홈페이지 https://aju.egentouch.com/main.do?action=main
화, 수, 목 : 오전 10시 30분 ~ 오후 8시 금, 토 : 오전 10시 30분 ~ 오후 6시 일 : 오후 1시~6시 *매주 월요일과 공휴일은 쉬어요. 주소와 연락처 [02581] 서울 동대문구 안암로 6 TEL 02-921-4085 FAX 02-921-4086 홈페이지 https://nadulmok.egentouch.com/main.do?action=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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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 2020. 12. 18.
동네에서 놀고, 즐기고, 배울 곳
도심공동체 즐거운家 용두동 집
만난이: 김선규(용두동 집 대표), 조윤진(마술소 운영자) 취재&글: 박혜진
가을이 무르익은 10월 ‘용두동 집’을 찾아 나섰다. 노랗게 예쁘게 물든 나뭇잎이 반겨주고 성북천의 갈대가 가을임을 더 느끼게 한다. 용두동 의 ‘용두동 집’은 대광고등학교에서 성북천을 건너 맞은편 골목에 있다. 골목길 안에 용두동 집은 아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게 어느 빌라의 1층 동네 책방과 연결된다. 용두동 집이라고 하면 옛 모습의 기와집이 생각 나는데 외관이 독특한 빌라이다. 외관은 통유리로 되어 있고 여기가 맞 나 생각하게 하는 문을 넘으면 아늑한 아지트 공간인 동네 책방이 나온 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동네 책방은 작년에도 몇 번 들린 적이 있었다. 그때는 주변도 조용하고 카페 안도 한적해서 말하기가 조심스 러웠는데, 이번에 방문한 동네 책방은 작년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열 띠게 대화하는 사람, 그림을 그리는 사람, 카페 벽면에는 사람을 모으 고, 모임에 참여하길 기다리는 포스터로 가득했다. 기운 넘치는 모습에
▲<사진 왼쪽 김선규 대표, 오른쪽 조윤진 활동가>
아주 반가운 마음이 든다.
시도하며 프로젝트로 만든 건물이다. 김선규 대표는 그 프로젝트에 활 용두동 집의 대표 김선규 님과 용두동 집에서 활동가로 계신 조윤진 님
동하며 용두동집이 완성되면서 같이 들어오고 함께 살고 있다. 건물에
을 만났다. 본인소개와 함께 공간에서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지 여쭈었
대한 운영은 정림건축 문화재단에서 하고 있고 내부로 들어가는 프로그
다.
램, 공동체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실제 운영을 김선규 대표가 맡고 있다.
김선규(이하 김): 김선규고요. 공동체에 관심이 많습니다. 저희 법인이
조윤진(이하 조): 안녕하세요. 저는 조윤진이고요. 이 동네에서 태어나
크게 두 가지 사업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요, 하나는 주거공동체, 같이
고 자라고, 지금은 아이도 있어요. 아이가 동네 어린이집을 다니고 있고
사는 거. 셰어하우스로 한 건물에 다 같이 사는 쪽 분야가 있고, 또 하나
요. 맨날 지역주민으로 살고 있다가 우연히 동네 책방과 연이 닿아서 마
는 현재 동네 책방 같은 공유공간을 만들어서 지역 공동체를 활성화하
을공동체 사업과 마술소(마을 예술창작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는 사업입니다. 지역주민으로 살다가 어떤 계기로 동네 책방을 만나게 되었는지, 오며 용두동 집은 정림건축의 정림건축 문화재단이 도심 속의 생활공동체를
가며 이 공간이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봤을 텐데 실제 공간에서 활동하
▲지하1층 동네극장
▲1층 동네 책방
▲2층 공유 주방
▲용두동집 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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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활동가로 감회가 새로울 것 같다.
7호 2020.12. 18.
닌 공동체의 꿈을 꾸고 같은 뜻을 가진 타인과 함께 사는 것. 수많은 이 해관계 속에서 첨예하게 대립하며 제일 지키고 함께 가져가야 할 가치
조: 대표님(김선규) 아이 어린이집과 저희 아이 어린이집이 같아요.
를 남겨 용두동 집이 탄생했을 것이다. 용두동 집에서 잘 살기 위해 서
그리고 제가 커피에 관심이 좀 있었는데 배우기 겁나니까 일단 이렇
로 지켜야 할 규칙에 대해 1년 정도 논의를 했다고 한다. 꿈에 대해서,
게 편한 곳에서 배우고 싶어서 연이 닿았어요. 그때까진 마을 사업을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서, 실질적인 규칙에 대해서.
할 줄 몰랐죠.(웃음) 이 지역에 오래 살았지만 마을에 대한 애착이 있
김: 근데 실제로는 규칙이 거의 없어요. 뭐 청소 이런 얘기도 한 3주 이
지는 않았어요. 작년 3월부터 활동했는데, 마을 지원 사업은 올해 하
야기하고 그랬었거든요. 같이 쓰니까 청소나 냉장고를 어떻게 쓰느냐가
게 되었어요. 작년에는 동네 책방에서 자체적으로 진행했던 이웃 학
굉장한 이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그냥 ‘용납’해요. 저 사람이 저렇다
교 프로그램을 진행했고요, 올해는 조금 더 마을 성격을 띠는 걸 하려
고 인정하는 것. 대신 제는 요리를 잘한다든가… 요리를 못 하는데 대신
고 지원 사업을 내서 두 개 모두 감사하게도 돼서 운영하게 되었어요.
에 청소를 잘한다든가… 이런 것이 받아들여지면서 갈등은 사라지는 것
그전에 있던 사철탕 건물 자체가 앞마당이 넓은 이층집이었거든요.
같아요.
그래서 이 동네에서 그 건물이 유독 눈에 띄고 나름 유명한 집이었는 데 어느 날 문을 닫고 ‘어, 없어지나 봐’ 생각했는데 이렇게 올라오더
활동가인 조윤진 님은 동네 책방을 운영하며 어려운 부분이나 그것을
라고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여기랑 관련이 없었으니까 ‘저긴 뭘까?
어떻게 극복하고 해결하고 있는지 여쭤보았다.
창문이 통유리니까 사무실이겠지?’ (웃음) 그런데 아니었더라고요. 조: 동네 책방 문 입구가 특이하잖아요. 문으로만 봐도 넘어오기 어려 용두동 집은 지하 동네극장, 1층 동네 책방, 2층 공용 주방, 사무실로
운 공간인 건 맞아요. 그래서 계속 사람들에게 ‘우리 열려 있어요.’ 이것
이루어졌고, 3층부터는 공동체 여섯 가정의 공용 서재, 공용 세탁실,
을 계속 알리려고 하고 있어요. 지역주민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주택으로 이루어져 있다. 공동체를 이루고 함께 살면서 가장 좋은 점
진행하는 이유도 그중 하나예요. ‘우리 이런 거 하니까 같이 해요. 들어
은 무엇일까?
와도 돼요.’ 들어오면 그분들이 마음을 아니까 또 친구를 데려오고 저희 는 그런 방법으로 지금 하고 있어요. 또 저는 오래 살았으니깐 그냥 말
김: 아무래도 안전감이 있죠. 코로나로 아무 데도 못 가도 재밌게 있
을 걸어 봐요. 몇 번 오신 손님한테 ‘맛은 어떠세요?’ 이렇게 물어보면
을 수 있고요. 책방이나 극장 같은 공간이 있어도 사실상 혼자 운영한
서 관계를 쌓아가고 있어요.
다고 하면 어려운데 운영을 제가 하지만 그래도 여기 있는 입주자들 이 함께 도와주고, 공간이 열려 있다 보니 입주자들은 나랑 관련 없는
동네 책방에서 하는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로 소개하고 싶은 활동은 매주
공간이라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훨씬 더 힘을 낼 수 있죠. 혼자
화요일마다 지역 청년들과 함께하는 ‘청년 밥상’이라고 한다.
하는 게 아니라 여럿이 같이한다고 생각하니까… 조: 음식을 같이 해서 나눠 먹고 집에 반찬을 조금씩 싸 갈 수 있게 프로 공동체 안에서 거주하거나 이 공동체 관련 있는 분들은 안정감 있고
젝트를 기획했어요. ‘이게 과연 될까? 매주 다른 사람이 오지 않을까?’
언제든지 찾아도 편안한 공간이다. 외부에서 봤을 때 이 공동체에 속
그랬는데 혼자 사는 청년들이 처음에는 요리를 배울 수 있을 거라는 마
하지 않아 문을 두드리거나, 넘기 어려운 선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음에서 왔는데, 저희도 집에서 해 먹는 거와 같이하는 정도거든요. 오신
들었다. 그런 부분은 운영하는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방안을 마
분들이 우리의 마음을 읽은 거 같아요. 그냥 우리가 뭘 전달하고 싶었는
련하는지 궁금했다.
지를 아니까 그냥 와서 같이 먹고 그 시간이 좋아서, 함께 있고 싶어서 오더라고요. 그런 마음을 읽어 주니깐 고맙죠.
김: 공동체라는 것이 배타성을 안 가질 수가 없거든요. 왜냐하면 멤버 십 자체가 여기 사는 사람들로 정해져 버리니까… 그건 어쩔 수 없지
많은 지역주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용두동 집, 동네 책방에 들르면 따
만, 대신 1층 공간과 지하 1층 극장을 통해서 많은 사람이 여기 와서
듯한 온기가 전해진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꾸준히 먼저 손 내밀고,
사람들과 친해지고 친구가 되고 이것저것 해 볼 수 있는 공간이면 참
마음속에 노크하는 활동으로 이웃과 공감하고 함께 할 수 있다. 동네 책
좋을 것 같아요. 같이 사는 것까지는 부담스럽지만 ‘아! 이런 삶도 가
방에서 차 한 잔을 즐기며 함께 사는 공동체를 엿보는 것은 어떨까? 도
능하구나’ 하는 다양한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심 속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용두동 집의 걸음이 기대된다.
그렇다면 공동체 생활을 꿈꾸는 사람들한테 시도할 방법, 좋은 팁을
즐거운家 용두동 집: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안암로6길 19 (용두동)
이야기해 줄 수 있을지 물어보았다. 김: 그런 요청을 자주 받는데 기본적으로 할 사람들이 모여 있어야 해 요. 혼자서는 할 수가 없고, 근데 할 사람이 모여도 어렵죠. 저도 두 번 실패하고 뜻이 맞는 사람들이랑 세 번째 시도거든요. 되게 친하고 오 랫동안 계획하고 고민했는데 실제로 딱 땅 사는 단계에 가면 굉장히 어려워요. 그래서 같이 꿈꿀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어야 하고, 땅을 사고 건물을 짓고 하는데 20억~25억이 넘어가니까 그런 프로젝트를 혼자 할 수도 없고 모아야 하는데 이해관계가 되게 다르거든요. 직장, 아이들 교육 문제도 실제로 같이 살다 보면 굉장히 첨예해요. 왜냐하 면 옆에 살기 때문에 이 사람이 추구하는 바가 굉장히 잘 보이거든요. 그러니까 일단 같이 할 수 있는 사람들과 구체적으로 내가 꿈꾸는 삶 이 무엇인가에 대한 세밀한 생각의 정리가 필요하죠. 맞다.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그런 꿈을 꾼 적이 있다. 집을 지어 친한 친구와 한집에 살거나 부모님과 같이 사는 꿈. 가족과 친한 친구가 아
▲청년 밥상 모집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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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 2020. 12. 18.
동네에서 놀고, 즐기고, 배울 곳
청계천 따라 풍물기행
만난이: 송은범(역사문화해설사) 취재&글: 박혜진
용신동편을 준비하다 동대문문화재단의 관광 문화 프로그램 ‘2020 테마별 관광코 스’를 알게 되어 신청했다. 무심코 지나쳐 다니던 곳을 자세하게 들여다보거나 알려 고 한 적이 없었는데 ‘이때다, 잘 되었다.’ 싶었다. 다행히 날도 춥지 않고 따듯한 가 을날이었다. 가는 곳이 모두 가깝게 있어 편안하게 산책하는 마음으로 걸어서 탐방 할 수 있다.
청렴한 마음을 담은 비우당교 “저는 동대문구 해설사 송은범이고요. 오늘 가는 코스는 지금 있는 비우당교에서 출 발해서 밑에 내려가 청계천 잠시 보시고요, 서울풍물시장, 우산각 공원 그리고 마지 막으로 동묘 벼룩시장까지 가는 코스에요. 지금 서 계신 이 다리는 비우당이에요. 비 ▲청계천에서 송은범 해설사님과 함께
우당교는 ‘겨우 비를 피하는 집이다, 비를 가릴만한 집이다.’라는 뜻입니다.”
지금은 청계천을 따라 광화문광장까지 연결되는 모습이 당연한데 고가도로를 허물 조선 세종 때 청백리1) 하정 류관의 집 우산각은 비 오는 날 방안에서 우산을 펴고
고 물이 흐르는 천으로 복원한다고 했을 때 ‘그게 과연 가능할까?’ 놀랐던 기억이 있
비를 피할 정도였다. 그의 6대 외손인 지봉 이수광은 하정 류관의 청빈한 삶을 이어
다. 자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니 좋다. 맑은 물 아래 유유히 물고기가 노니는 것이 보
받아 ‘비만 피한다.’는 의미의 ‘비우당(庇雨堂)’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인다. 소풍을 나온 어린아이처럼 해설사의 뒤를 따라 비우당교 아래 청계천으로 내 려갔다. 흐르는 물이 있고, 흔들리는 나뭇잎이 있고 코로나로, 마스크로 답답한 마음
“…… (중략) 조선 젊은이들이 한양에 과거 시험을 보러 올라오면 꼭 들려야 하는 두
이 풀리는 기분이다.
집이 있었대요. …… (중략) 바로 이수광 선생의 비우당이었어요. 지봉 이수광 선생 의 집에 가서 뭘 보냐 하면 선생의 청백한 마음, 청백리를 배우고자 해서 그곳에 들
청계천
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관 선생에 대한 얘기는 우산각 어린이 공원에 가서 다시
“청계천은 조선 역사가 시작되면서 주목을 받게 됐죠. 원래 조선 시대에는 ‘물길을
말씀을 드릴 거고요.”
연다.’라는 뜻의 열 개(開) 자의 개천이었어요. 그러다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청계천 으로 불립니다. 조선 시대 한양으로 도읍이 정해지면서 청계천이 중심지가 되는데,
청계고가 도로의 흔적, 존치 교각
지금의 서울과는 아주 다르지요. 도성 안에 흐르는 물은 개천밖에 없었어요. 우리가
비우당교에서 용두 공원 쪽으로 바라보니 우뚝 솟은 다리 기둥이 보인다. 고가도로
알고 있는 한강은 도성 밖으로 흐르기 때문에 주로 세금을 운반하는 교통로로 사용
는 없지만 남겨진 세 개의 기둥을 보니 과거의 고가도로가 되살아난다. 고가도로라
하게 되었죠.”
비나 눈을 걱정하지 않고 주말이면 그 밑에 이것저것 신기한 물건을 내놓고 파는 것 을 어린 눈으로 구경했었다.
청계천 변엔 누가 살았을까?
“지금 앞에 보이는 것이 존치교각으로 2003년에 청계고가 도로를 뜯어내면서 기념
해설사는 조선 시대부터 청계천 변의 사람들이 눈앞에 살아 움직이며 생활하는 것
적으로 세 개 다리를 남겨 둔 거예요. 청계천 복원과 서울개발에 대한 역사적인 상
처럼 생생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조선시대 중인3)이 살았던 것부터 개
징으로 남겨 두었고요, 존치 교각은 청계천 10경 중 하나예요. 내려가서 청계천에
천이 범람해서 하천 바닥을 퍼낸 흙을 다리 주위에 놓으며 가산4)이 생긴 것. 그 가
대해서 이야기 잠깐 나눌게요.”
산에 땅굴을 파고 경형5)을 받은 사람들이 생활하며 나중에는 걸인들의 근거지가 되었다는 것. 조정에서는 가산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뱀을 잡는 독점권을 주고, 뱀 잡는 사람을 땅꾼이라고 부르게 된 유래. 일제강점기, 청계천 변에 가난한 걸인이 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복개 공사가 시작된 것까지. 변화무쌍한 청계천 변의 모 습에 각 시대의 생활상이 떠오른다.
▲비우당교
▲청계고가 도로2)
▲존치 교각
▲조선 시대 개천의 모습
1) 청백리[淸白吏] 조선 시대 선정을 위해 청렴결백한 관리를 양성하고 장려할 목적으로 실시한 관리 표창 제도, 또는 염근리(廉謹吏: 청렴하고 근면한 관리)와 청백리에 선정된 사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 청계고가도로 성동구 마장동에서 남산 1호 터널을 잇는 도로 / 사진 「평화시장과 청계고가도로」 서울역사아카이브 제공 3) 중인(中人) 조선 시대에 양반(兩班)과 양인(良人)의 중간신분계급층.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가산(假山) 또는 조산(造山)은 산 모양으로 쌓아 놓은 정원의 조경물, 또는 인공적으로 흙을 쌓아 이룬 산을 의미한다.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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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변 판자촌6)
청계천의 변화 복개와 복원
7호 2020.12. 18.
▲서울 풍물시장
가 한 바퀴 보고 우산각 공원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중략)…마지막으로 복개 공사가 된 거는 77년도인데 여기서 좀 내려가다 보면 신 답역 철도, 철교 있죠? 거기까지 복개 공사가 다 완성이 돼요. 그런데 1950년 한국
서울 풍물시장의 2층 ‘청춘 1번가’에는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체험존으로 꾸며져
전쟁 일어났죠.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이곳에 더 많은 사람이 모여 와 살아요. 폭격
있다. 다방, 만화방, 오락실, 문방구, 복덕방 등. 함께 탐방하는 분들이 이곳에서 가장
맞아서 집이 없는 사람, 북에서부터 내려온 사람들 또 살기가 힘든 사람이 와서 만들
열띠게 반응하고 추억들을 쏟아냈다. 옛 기억을 머금고 동대문도서관 앞 우산각 공
어낸 풍경이 무엇이냐면 판자촌이에요. 판자촌을 겹겹이 쌓아서 살 게 되는데… (중
원으로 향했다.
략) … 여기 있는 사람들이 뭔가 먹고 살아야 되니까 생계수단으로 고물상, 노점 이 런 것을 하게 되고 특히 이곳에 뭐가 많았냐면 염색 공장이 많았어요. 염색하면서 나
하정 류관의 우산각공원
오는 폐수, 악취로 주변 환경이 안 좋아지면서 복개 공사가 점점 더 시급하게 되죠.”
“혹시 그런 거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하정 청백리상’ 서울시 공무원들 대상으로 청렴결백한 공무원들에게 시상하는 ‘하정 청백리상’이라는 게 있어요. 하정이란 분
다시 복원해야겠다는 생각은 우리가 잘 아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이 되면
이 아까 비우당교에서 말했던 조선 세종 시대 청백리 유관 선생의 호예요. …(중략)
서가 아니라 그 전부터 복원에 대한 필요와 움직임이 있었다. 환경문제에 심각성을
… 유관 선생에 가장 유명한 일화는 여름 장마철이 되면 비가 많이 오잖아요. 어느
느낀 시민들과 청계천을 되살리는 꿈을 가지고 있던 노수홍 교수(연세대 원주캠퍼
날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유관 선생님 집 천장에서 비가 새는 거예요. 그래서 유관 선
스 환경학과), 박경리 작가(소설가), 청계천 살리기 연구회 등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생이 우산을 들고 책을 읽고 있는데 그 옆에 부인이 ‘아 우리는 이렇게 우산이라도
이루어졌다.
있지만, 우산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이 비를 피할까?’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그 말을 듣고 유관 선생님이 바로 이웃에게 우산을 줬다고 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
청계천을 되살리자는 꿈은 1991년 여름 서울과 원주를 오가는 통근버스에서 시작
람들이 이 유관 선생 집을 우산각이라고 부르게 됐고요. 그 일대 동네를 우산각골이
된다. 연세대 이희덕 교수(한국사)는 동료 노수홍 교수(환경공학과)와 환경문제에
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우산각골은 지금의 창신동과 숭인동 그리고 보문동, 신설
관해 대화를 나누다가 문득 “청계천을 복원한다면 물을 흐르게 할 수 있을까”하고
동 일대를 말해요.”
물었다. 물 전문가인 노 교수의 대답은 “기술적으로 충분히 가능하다”였다7). ‘집에서 우산으로 비를 피할 게 아니라 지붕을 고쳐야지’ 답답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복원된 청계천에는 22개의 다리가 있고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있는데 해설사님의
류관 선생의 부인도 대단하다. 나 같으면 우산을 받치고 책보는 모습에 책상을 뒤집
재미있는 이야기를 지면 관계상 다 싣지 못해서 아쉽다. 2021년 봄이 오면 탐방하
었을 것 같은데. 그만큼 청렴하다는 뜻일 것이다. 우산각 공원에는 류관 선생의 청렴
시길 추천 해 드린다.
과 관련된 어록이 남아있다. 한쪽에는 ‘청백리 명예의 벽’에 수상한 공무원의 이름도 새겨있는데, 2019년은 수상자가 없다. 올해 제12회를 맞이하는 하정 청백리상에는
도깨비시장, 개미 시장, 서울 풍물시장.
하정 류관의 뜻을 기리고 이웃을 생각하는 참된 수상자가 나오길 기대한다.
“이제 풍물시장으로 이동할게요. 서울 풍물시장은 옛날에 황학동 벼룩시장이라고 불렀어요. 사대문 밖, 동대문 주변 논과 밭에 황학들이 날아온다고 해서 황학동이라 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 (중략) … 황학동 일대가 크게 그 변하게 된 계기 는 한국 전쟁 때예요.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판잣집 사람들이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 고물상을 시작했어요. 점점 그 범위가 넓어져 노점상도 많아지고 미국 물품을 파는 곳도 있고 뭐 되게 복잡했어요. 그러다 1970년대 황학동에 조선 시대 도자기라든가 책, 옛날 물건들을 가져와 팔게 되면서 골동품 시장으로 바뀌게 되죠. 이때부터 사람 들이 ‘도깨비시장이다, 개미 시장이다’ 하면서 별칭이 생기게 됩니다. 도깨비시장이 라고 한 것은 ‘못 쓰는 물건을 가져다 새로 고쳐서 새것처럼 해서 판다’는 그런 의미 도 있고 ‘낮에는 사람이 엄청 많아 인산인해를 이루다가 밤만 되면 싹 사라진다’는 뜻도 있어요. 개미 시장이라고 부른 것은 ‘시장 사람들이 개미처럼 일한다’, ‘개미처 럼 전국 방방곡곡에서 물건을 버리지 않고, 버리는 물건 없이 다 가져다가 판다.’ 그 런 의미라고 해요. 그래서 ‘황학동에 가면 못 구할 물건이 없다’라는 말도 생겨나죠.” ▲우산각 공원
모 방송프로그램에서 유명 연예인이 이곳과 동묘시장을 다녀가서 많이 알려졌는데 탐방하는 날은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많이 한적했다. 코로나의 여파도 무시하지 못
마지막 코스인 동묘로 이동하면서 신설동 가죽 시장도 볼 수 있었고 동묘, 동묘 벼룩
하는 것 같다. 재미있는 시장 구경을 맘껏 하는 날이 어서 오길 바란다.
시장까지 탐방했다. 항상 지나면서 가깝다고 생각한 곳이 새롭게 다가왔다. 짧은 시 간이지만 여행을 한 기분이다. 코로나로 갇혀 지내고 여행도 맘껏 할 수 없어 속상했
“2008년에 신설동 숭인여자중학교 자리에 지금의 건물을 지으면서 바로 서울 풍물
는데 내가 사는 지역을 깊이 알아보고 탐방할 수 있는 시간이 참 흡족하다. 올해 진
시장이 만들어지게 돼요. 800가구 800여 개 점포가 입주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행한 동대문문화재단의 관광 문화 프로그램 ‘2020 테마별 관광코스’는 11월로 끝
안에 들어가서 보시면 청색동, 주황동 등으로 색깔별로 나누어져 있어요. 색깔 따라
났지만, 내년에도 진행할 예정이다. 동대문구 지역의 가까운 여행지로 선택하고 참
서 판매하는 품목이 다른 거죠. …(중략)… 2층에 올라가서 옛날에 있었던 청춘 1번
여해보심을 강력~!! 추천한다.
5) 자자형(刺字刑), 경면형: 죄인의 얼굴이나 팔에 죄명을 문신하는 형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 1950, 1960년대 청계천변의 판자촌 /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제공 7) 한겨레 기사 발췌 <한 학자의 소박한 꿈, 서울에 생명의 물길 뚫다> / 2005-09-26, 19:09 / 이찬영 기자 원문보기:http://www.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66981.html#csidx881cbafc2ee64efbf0997834585f55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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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 2020. 12. 18.
동네에서 놀고, 즐기고, 배울 곳 동대문구 건강가정 다문화가족지원센터
“독박 육아, 군대 육아는 사라졌으면 해요.”
인터뷰이: 엄지혜(동대문구건강가정·다문화가족지원센터 직원), 권미성(이용자) 서면 인터뷰&글 : 심소영
인터뷰, 마을이음 용신동편 기획을 위해 조사하던
소개 부탁드립니다.
센터의 공동육아 나눔터가 용신동의 끝쪽에 있어
중 동대문구 건강가정·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있
안녕하세요? 두 딸아이를 키우며 용신동에 사는,
서 동대문구의 다른 동에 계신 분들이 직접 찾아오
다는 걸 알았다. 이름이 길다. 알고 보니 두 시설이
지혜로운 엄마이자 여성이 되고픈 권미성입니다.
기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공동육
합쳐져서 그렇다고 한다. 이름만으로도 주민들 이
회사에 다니다 육아휴직의 사용 이유로 권고사직
아 나눔터가 영유아에서 초등학생까지 이용 가능
용시설임이 분명한데, 누가 어떻게 이용하고, 이용
을 받고 두 아이가 초등학생이 될 때까지라도 육아
한 것으로 아는데 추가로 생겨서 영유아와 초등학
할 수 있는지 알아 보았다. 아쉽게도 코로나로 인
에 매진해보자며 지내다, 일하고 싶어 아이들을 가
생이 나뉘어 나이 때에 맞는 놀잇감과 프로그램으
해 휴관 중이라 대면 인터뷰는 어려웠다. 해서 서
르치며 함께할 수 있는 강사의 일을 하다 코로나로
로 운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네요. 아이들과
면 인터뷰를 처음으로 시도했다.
인해 다시 집중 육아를 하고 있답니다.
부모가 마음 놓고 뛰어놀고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더 생긴다면 아이들과 함께 보낼 장소로 고민은 하
Q. 건강가정·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역사를 설명
지 않을 것 같아요.
해주신다면? 2004년도에 동대문구건강가정지원센터, 2006년
Q. 동네에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은 활동이
도에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개소했습니다. 그리고
있다면 자유롭게 말씀해 주십시오.
2018년도부터 건강가정지원센터와 다문화가족지
가족 품앗이 활동이 더 커지고 더 넓혀져 갔으면
원센터가 통합하여 동대문구건강가정·다문화가족
좋겠어요. 품앗이로 이뤄진 속에서라도 모든 아이
지원센터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간혹 기관 명칭을
가 내 아이처럼 생각하고 관심을 가질 기회가 될
보고 “다문화가족”만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기관으
듯해요. 회원 요건 및 기준을 낮춰 아이들과 엄마
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지만, 동대문구건강가정·다
▲<권미성 님과 아이들>
문화가족지원센터는 다양한 가족의 특성에 맞춰
가 소속감을 느끼고 마을 사람들이 동네가 정말 같 이 아이들을 키우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가지며 독
생애주기별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입니
Q. 이곳에서 활동하는 이유(내게 어떤 의미인지)
박 육아, 군대 육아의 느낌이 사라졌으면 하네요.
다.
는 무엇인가요?
또한, 경력이 단절되고 육아만 했던 엄마에서 다른
처음에는 무엇을 하는 곳인지 어떠한 곳인지 모르
아이들도 돌보고 교육을 나눌 수도 있는 엄마 선생
Q. 이용하는 분들은 주로 누구이며, 그들에게 건강
고 아이들과 함께 놀 수 있는 공간이 있다고 해서
님 활동을 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전문적인
가정·다문화가족지원센터는 어떤 의미일까요? 더
공동육아 나눔터를 방문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아
강사의 교육도 좋지만, 동네의 마을 사람이 자기가
불어 배울 거리, 볼거리, 즐길 거리에 대해 소개 부
이들의 육아를 나 혼자가 아닌 나와 비슷한 상황의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 교육을 받고
탁드립니다.
육아를 하는 가정이 같이 모여 가족 품앗이 활동을
다듬어져서 관련된 일도 마을 안에서 해 보고 마을
센터의 이용자들은 1인 가구부터 시작해서, 다문
하게 되었어요. 힘든 일을 서로 거들어 주면서 품
사람들과 나누다 보면 언젠간 전문가가 되어 우리
화가족, 한부모가족, 부모-자녀 가족 등 다양한 형
을 지고 갚고 하는 일이라는 “품앗이”의 뜻처럼 힘
동네를 위해 일할 기회도 생길 수 있지 않을까요?
태의 가족들이 센터를 이용합니다. 센터는 가족관
들다고 생각했던 육아를 같이 거들면서 서로에게
세상은 혼자만 살아갈 수 없으니깐요.
계 증진, 가족 기능 강화, 가정문제 예방 및 해결
힘이 되어주고 엄마라는 타이틀에서 저의 존재를
등 가족 복지사업에 있어 전달 체계의 컨트롤 타워
찾을 기회가 되었던 것 같아요.
권미성 님의 서면 인터뷰 회신 글을 보며, 대면 인 터뷰를 할 수 없다고 포기했다면 어쩔뻔했나 싶다.
기능과 가족복지 공동체 기능을 수행해오고 있습 니다. 본 센터에서는 가족교육·문화, 가족상담, 자
Q.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건강가정·다문화가
그만큼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고, 이 난관을 같이
녀언어발달지원사업, 아이돌봄지원사업, 통·번역
족지원센터의 자랑거리가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극복할 수 있는 기재를 마련해야 한다는 의지도 갖
지원사업, 한국어교육, 방문교육 등의 사업을 운영
제가 활동하고 있는 것은 센터 전체사업에서 ‘빙산
게 했다. 많은 엄마가 일하고 싶지만, 반강제로 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년 센터 대형 행사인 세
의 일각’이더라고요. 가족의 관계향상이나 가족 내
이를 잘 키워 좋은 엄마가 되어야만 하는 환경에
계문화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문제, 가족 구성원의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가족
놓이게 되고, 선택의 순간이 오면 대부분 아이를
상담과 가족 교육이 이뤄지고 있고 다문화가족, 북
잘 키우는 좋은 엄마의 길을 선택한다. 권미성 님
역시 서면 인터뷰는 딱딱하다. 그래도 센터에 1인
한이탈주민가족, 한부모가족, 1인 가구, 일탈 청소
은 다행히 바슷한 상황의 부모님들과 공동육아를
가구를 포함한 모든 가구와 가족이 이용 가능하니
년 가족 등 다양한 가족 유형에 따라 맞춤형 서비
하며 조금이나마 위로를 얻고 힘을 덜 수 있었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는 것과 다양한 프로그램을
스가 제공되고 있어요. 또한, 가정의 아이 돌봄을
만, 대부분 부모는 육아의 늪에서 잠시라도 빠져나
알게 되었다. 성실하게 답변해주신 엄지혜 선생님
지원하고 경제, 양육, 심리 등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오기 어렵다. 권미성님의 생각처럼 함께 아이를 키
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센터를 이용하시는 주민들
취약가족, 위기 가족 등을 위해 가족 기능을 회복
우며 할 수 있는 일도 만들고, 서로에게 기회를 주
의 이야기도 들어보고자 섭외를 부탁하니, 센터에
하고 역량을 강화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고, 경험을 쌓으면 동네에서 필요한 일을 잘 해내
공동육아 품앗이를 하는 권미성님의 인터뷰 회신 을 보내주었다. Q.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먼저 본인
는 전문가로서의 영역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코 Q. 혹시 센터를 이용하시면서, 이 동네(용신동)에
로나가 조금 잠잠해지면 권미성 님을 만나 이런저
생겼으면 좋겠다 했던 것이나, 바뀌어야 할 제도가
런 생각을 나누는 상상을 한다. 권미성님~ 우리 꼭
있다면 자유롭게 말씀해 주십시오.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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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 2020. 12. 18.
용신동 돈키호테
“노숙자를 위한 동네 목욕탕을 만드는 것이 소원이에요.”
만난이: 김경옥 박철랑(사장) 취재&글: 심소영
11월 어느 토요일 오후 취재가 있었다. 만난 사람은 용두역 1번 출구 바
좋았어요.”(박철랑사장)
로 앞 기능성 속옷집 김경옥 사장님이다. 김경옥 사장이 오랫동안 목욕 봉
도시개발과 마을공동체는 서로 상극이 아닐 텐데, 아파트가 들어서고, 용
사를 하신다는 제보로 찾게 된 곳이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알록달록 예
두공원과 환경자원센터가 생기며 동네 사람들 간 생겼던 갈등과 헤어진 이
쁜 속옷만큼이나 화려한 사장님이 반겨준다. "아~ 오셨어요? 어디서 하면
웃 등 속상함도 많았다 한다. 현재까지도 새벽에 올라오는 냄새로 힘듦을
될까요? 남편이 옆에서 부동산 하는데, 같이해도 될까요? 저랑 같이 활동
토로한다.
했어요." 박철랑(75)과 김경옥(70) 사장은 여기서 아들 둘 낳고 잘 살았다 며, 교회 권사 활동, 봉사단 활동, 부녀회 활동 등 동네에서 했던 일, 하는
“큰 사고가 한번 났었거든요. 내가 사고 났는데 (묻지마 강도 만나서 수술
일이 쉼 없이 흘러나온다. 질문 없이도 가능했던 인터뷰 중간 즈음 연예인
을 4번 했어요. 지갑 다 뺏기고, 병 다 걸리고….) 그렇지 다 뺏기고 그냥
활동 중이라는 아들과 친구도 합류한다. (엇! 미스터 트롯 임영웅인 줄…
보냈어요. 여기 커브 도는데, 반사등 있잖아요. 거울 양쪽에서 볼 수 있는
.^^)
거 그렇게 저쪽에 하나 달아달라고 해도 안 돼.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이 거든요. (그게 없어) 여기도 그렇게 하고 CCTV를 골목에 한꺼번에 달아야 하는데 안 달아줘요. (15년도에 즉사할 뻔했다는 거야)”_박철랑(김경옥)사 장 그렇게 큰일을 겪고도 마을에서 여성자율방범대도 만들고 동네 청소에, 기 부에 목욕 봉사까지 계속 봉사하는 이유를 물었다. “나는 사람들이 이 세 상에 머무는 동안은 우리가 힘든 그 사람들 케어해주면 좋겠다 생각하는 데, 정치인들도 보면 자기 라인 만드는 거만 하니까 이 세상이 안 돌아가는 거야. (자기 이해 관계만 생각하니까~~) 근본적인 거는 그 노숙자들 젊은 사람들 일주일만 케어해주면 돌아와요. 그러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 돌봐야 한다니까.”(김경옥사장)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 물었다. 김경옥 사장은 “나는 노숙 ▲<박철랑 김영옥 사장님 그리고 아드님과 친구>
자를 위한 동네 목욕탕을 만드는 것이 소원이에요.” 깨끗하게 씻고 나면
이렇게 김경옥, 박철랑 사장님 두 분과 화기애애한 인터뷰를 시작했다. 봉
다시 지저분해지고 싶어 하지 않아 노숙자 생활을 청산한 사람도 봤다고
사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우리 광석교회가 66년 됐어요.
한다. 그리고 이웃들과 함께할 수 있는 반상회라든지 주민 모임이 활성화
저도 40년 섬겼죠. 김동찬 목사님이 너무 훌륭하신 분이세요. 저는 권사를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소원대로 동네 목욕탕도 생기고, 반상회나 마
하고 있는데, 70이 되니 곧 은퇴해요. [중략] 정말 쪽방에서 밥도 못 먹고
을 모임도 활성화되기를 간절하게 기원한다.
굶는 분들이 자식 있다는 이유로 못 먹고 못 쓰고 그분들을 제가 케어했어 요. 크게는 아니지만 쌀 한 말씩 팔아서 장사 잘되면 고기도 하고, 과일도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나서는데, 사장님이 테이블에 있던 홍시와 옛날 과자
하고 그런 분들께 많이 했는데. 그분들 자녀들이 변화되더라고요. 남도 저
를 주섬주섬 싸주신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들이 말한다. “여기 들
렇게 하는데, 김장 때면 김장 조금씩 해서 갖다 주고 하니깐 자식들이 부모
어올 땐 그냥 들어오셔도 나가실 땐 뭔가 받아가지 않으심 못 나가실 거에
님 모셔 가는 사람도 있고, 그렇게 하더라고 그래서 그게 참 즐겁더라고요.
요.” 자녀들에게 어떤 부모였는지 알 수 있는 한마디였다.
이렇게 막 즐거워하고 기뻐할 때 거기서 ‘아~~ 이게 봉사구나’ 했어요. 우 리 남편이 수발 다 들고, 그렇게 하다가 교회에 이야기하고, 사랑의 봉사단 을 만들게 되었죠. 이번에도 보건소에 박카스 300병 사서 보냈어요. 너무 욕보잖아. 너무 수고하더라고.”(김경옥 사장) 장사가 잘되면 잘 되는대로 안되면 안되는 대로 지역에 어려운 분들을 찾아 봉사하며 행복했다는 얘길 들으니, 봉사활동으로 만들어진 행복이라서 그런가, 두 분 모두 고희를 맞 이하시거나, 훌쩍 넘기셨음에도 넘치는 활력을 느낄 수 있었다. 용두동에 자리를 잡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서울에 올라와 취직할 수 있 는 길이 열려서 집을 알아보는데, 여기가 좀 쌌어요. 옛날에 여기 동마장터 미널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이 동네 경기가 상당히 좋았어요. 아파트 생기 기 전에 전부 단독주택 한옥 그런 촌이었었거든요. 그때만 해도 사람들이 참 전부 인정 많고, 그냥 서로 대문만 열면 아침에 서로 인사하고 그랬는 데, 아파트 새로 지은 다음에는 그런 부분은 아주 없어져 버리고, 이제 원 주민도 거의 다 한 70% 이상이 이사 가버렸어요. 그러니까 이제 외지에서 사람들이 와서…. 그래도 이제 오래되니까, 자주 얼굴 뵙고 눈 자주 맞추다 보니까 이제 서로 아는 면도 생겼는데 그래도 그 전만 못하죠. 옛날이 참
▲<동네 청소 봉사활동 중인 박철랑 사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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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 2020. 12. 18.
동네이슈, 있슈
“우리의 가장 큰 사회공헌은 신약개발이다.”
만난이: 김경태(동아제약 CSR팀 부장) 취재: 박혜진, 심소영 / 글: 심소영
동대문구에는 ‘보제원’(조선시대 굶주린 백성
분 좋았습니다.” 기분 좋게 반겨주니, 어깨춤이
을 진휼하고 의술을 베푼 곳)이 있었고, 현재까
절로 난다. 기분에 취해 오늘 왜 왔는지 잊어버
지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한약재 시장인 약
리기 전에 동아제약 역사부터 서둘러 묻는다.
령시장이 있는 동네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우 리나라 제약회사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뽑힐만
동아제약은 1932년 12월 강중희 선대회장
한 큰 회사가 동대문구 천호대로 64 (용두동)
의 ‘강중희 상점’ 창업으로 시작되었다. 1958
에 있다. 바로 ‘박카스’로 유명한 ‘동아제약’이
년 5월 동대문구 용두동에 항생물질 생산공
다.
장이 준공되며, 동아제약 용두동 역사가 시작 된다. 들은 바에 의하면 그 당시 용두동은 배
나는 아직도 생각나는 옛날 박카스 광고문구가 있다. ‘사는 게 피로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
▲<1958년 용두동 공장 준공식_가운데 故 강중희 선대회장>
추밭 천지였단다. 배추밭이라 땅값이 싼 이 유도 있었겠지만, 성동역이나, 약령시장이 가
광고를 처음 보고 매 순간 느끼는 삶의 피로감
까운 위치라 유통에 유리한 부분도 없지 않
을 알아줘 위로받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지
았을까 생각했으나, 선대회장님 명예회장
금까지 시민들 가까이 있는 제품들을 생산하는
님 모두 특별한 이유는 확인할 수는 없었다.
우리 동네 기업 ‘동아제약’을 꼭 취재하고 싶었 다. 하지만 내 주변에는 동아제약과 연결된 사
용두동시대가 열리고, 1959년 독일에서 강신
람들이 없어 무작정 홍보팀으로 전화했다.
호 명예회장의 귀국과 함께 동아제약이 비약 적으로 발전한다. 새로운 마케팅기업(DSC_
“안녕하세요. 저희는 동대문구에서 마을잡지를
Dong-A Sales Circle): 동아제약만의 유통 관
발행하고 있는 협동조합입니다. 이번에 용신동
리 마케팅)으로 유통업체와 상생 구조를 만들
편 발행을 위해 취재 중인데, 동아제약이 용신
어 유통 불균형을 해결한다. 60년대 주력제품
동에 본사가 있어 취재 가능할지 여쭙니다.”
‘생명수’라는 소화제가 이 당시 사람들의 마음
“아~ 예. 제가 지금은 자세하게 말씀 듣기는 어
이 담겨있는 것 같다. 옛 신문검색을 해보니 경
렵고요. 메일로 취재내용 보내주시면 논의해
향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1958년부터
연락드리겠습니다.”
1960년까지 꾸준하게 광고가 게재되어 있었
“예~ 그럼 저희가 이제까지 발행한 잡지와 취
다.
재하고 싶은 내용 간단하게 정리해 보내드리겠 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보내진 메일은 주
국민드링크라 할 수 있는 ‘박카스’의 역사는 어
말 지나고 사회공헌팀 부장님이 인터뷰하시기
떤가. 1963년 8월 박카스D가 발매된다. ‘술과
로 했으니 일정 잡자는 회신이 왔다. ‘오~역시
▲<독일 체류 당시 강신호 명예회장>
담배 그리고 피로로부터 간장을 보호한다.’ 당 시 광고문구다. 동아제약 80년사 자료집에서
박카스 회사는 마을잡지라고 거부하지 않을 줄
박카스가 앰플, 알약으로도 생산되었던 사진을
알았어.’ 그렇게 속으로 뿌듯해하며, 인터뷰 일
발견했다. 80년 기업의 역사를 한 명, 두 명,
정을 잡고 며칠 후 인터뷰를 위해 동아제약 본
열 명, 백 명, 천명의 80년이 모여 만들어진 결
사 웰컴센터를 방문했다.
사체이자, 조직이라는 느낌이 들이었다. 그럼 8만 년쯤의 역사가 되려나.
동아제약 주변은 수도 없이 다닌 길이다. 그런 데도 모두 승용차로, 버스로, 택시로만 다녀서 ▲<동아제약 CSR팀 김경태 부장>
그런지, 굉장히 낯설었다. 그런데 웰컴센터 들 어서니 입구에서 오늘 만날 인터뷰이가 반겨주 며, 방역에 필요한 여러 가지를 도와준다. 바로 동아제약 커뮤니케이션실 CSR팀 김경태 부장 이다. “동아제약이 올해 88주년입니다. 그리고 저는 근속 20년 상을 받아요. 알고 연락해주신 거 아닌가 싶을 만큼 인터뷰지 보내주셨을 때 기
▲<용두동 동아제약 본사 웰컴센터>
▲<1960.3.31. 조선일보 신문광고>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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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동아제약은 1987 년 수석장학회를 만들고, 1993년 수석문화재 단이 출범하여 다양한 문화 및 장학사업을 하 고 있었다. 또 경북 상주에 상주학원 법인이 상 주고등학교를 운영한다. 게다가 강신호 명예 회장은 동대문구사회복지협의회 1대~3대까지 회장을 지냈다. 김 부장의 회사에 대한 자랑스 러움은 감출 길 없어 보인다. (나중에 기사 쓰 며 찾아보니 동대문사회복지협의회 4대 회장
▲<아동복지시설 장학금 지원>
님까지 동아제약 사장님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힘든 일상을 얘기하며 제약회사 니 만큼 현재를 바라보는 다른 시선이 있겠기 에 한참 보도 중인 코로나 치료제나, 백신에 관 한 생각을 물었다. “제약회사의 가장 큰 사회공 ▲<사진으로 보는 동아제약 80년 광고사진>
직원으로 김경태 부장(이하 김 부장)의 동아제 약은 어떨 곳일까? 20대 대학을 갓 졸업한 김 부장은 용두동에 있는 동아제약으로 면접 보러 왔었다고 한다. 친구랑 둘이 와서 혼자만 붙었
헌은 신약개발입니다.” 신약개발을 위해 최초 로 연구소를 설립한 제약회사이니만큼 신약에 대한 열망 그리고 신약개발이 얼마나 어려운지
▲<저소득가정 여성청소년 생리대 지원>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강신호 명예회장의 사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말이다. 곰곰이 생
명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각해보니 인류에 있는 수천수만 가지의 병, 그
다는 깨알 자랑도 잊지 않는다. 사회공헌팀이
리고도 계속 생겨나는 새로운 병을 치료할 수
별도 부서로 조직된 것도 2014년인데, 제약회
있는 신약개발은 제약회사의 숙명이자 가장 큰
사 중 가장 먼저 생겼을 것이라며, 회사의 사명
사회공헌이 맞는 것 같다. 동아제약의 사명은
과 가치를 온몸에 담고 있다는 듯 진행했거나,
그 자체로 사회공헌이었고, 회사의 정체성이었
진행하고 있거나, 진행할 사회공헌들을 끝없이
다. 개인으로서 가족의 일원으로서 한 조직의
쏟아냈다.
책임자로서 지역과 국가로 묶인 사회의 구성원 으로서 더 크게 지구사회 구성원으로서 공헌은
평화(레바논 평화유지단 파병 장병지원 등)와
무엇일까 생각하게 했다. 웃프지만, 동아제약
환경(청소년 환경 사랑·생명 사랑 교실 운영,
처럼 큰 사회공헌은 못하더라도 사회에 해로운
서울시 도시 숲 조성사업, 평화의 숲 조성 등)
▲<대학생 국토대장정>
사람이 되지는 말자! 다짐해본다.
을 위한 활동과 청년에게 도전기회(대학생 국 토대장정)를 제공하고, 청소년에게 학습(장학
마지막으로 지역주민에게 하고픈 말을 물었다.
사업) 기회를 제공한다. 취약계층을 위한 사회
“박카스, 가그린…. 늘 곁에 두시고, 동아제약
공헌활동(여성청소년생리대 후원, 저소득 암환
생각해주시면 좋죠. 저희도 계속 노력하고 있
자 약제비 지원 등)뿐 아니라, 지역사회(아침머
으니, 지역사회와 함께할 일이 있다면 제안도
꼬 조식 지원사업, 밥퍼봉사활동, 사랑나눔 바
좋아요.” 인터뷰 내내 어려운 말도 대기업 부
자회, 박수데이_노인복지관 매주 수요일 박카
장스러운 으스대기도 없었지만, 기업으로서 경
스 무료 나눔, 편평한 세상 만들기_약국 경사로
쟁보다는 상생을 사회공헌을 생각하는 기업의
설치 등)를 위한 봉사활동과 정기적인 기부 행
일원으로서 자랑스러움이 인터뷰하는 내내 느
사를 꾸준히 하고 있다. 더불어 다양한 문화활
껴졌다. 이런 기업이 우리 동네에 있어서 더 좋
동(여성백일장대회, 지역사회 청년·청소년 아
다. 동아제약의 선한 영향력은 지역을 넘어 광
마추어 오케스트라_메리투게더 등)지원까지
역, 광역을 넘어 나라, 나라를 넘어 전 세계에
다 쓰기 어려울 만큼 끝이 없다. 사훈이 ‘창의·
뻗쳐지기를, 그리고 선한 영향력을 확산시킴과
혁신·봉사’로 되어있기에 비영리재단의 사훈
▲<아침머꼬 조식 지원사업 구강 청결 용품 지원>
동시에 동아제약의 가장 큰 사회공헌 ‘신약개 발’이 꾸준히 이어지길 기원한다.
발 행 일 발 행 처 취재기자 녹 취 록
2020.12.18 문화플랫폼 시민나루 협동조합 임정희 , 심소영 , 박혜진 , 오은형 , 박내현 , 윤덕환 지혜수
디 자 인 총 괄 전 화
청년협동조합 몽땅 심소영 02-2245-9623( 문자수신 가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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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 2020. 12.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