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할 길을 아는 황혼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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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동 어르신들의 살아가는 이야기
“할아버지 그리고 우쿨렐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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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버리셔도 괜찮아요!!! 다시 하면 되니까요 저희가 기억하고 있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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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 ~~ 함께 제주도 가실래요? 두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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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에서 신경 쓰였던 부분은 저렴하고 우리 컨셉에 맞는 숙 소를 구하는 일 이었다. 가능하 면 동선이 좋고 숙소 주변에서 걸어서 돌아볼 수 있는게 많은 곳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랜 시간 동안 돌아 다니기 쉽지 않 을 것 같아서 일찍 숙소에 들 어오더라도 주 변에 돌아볼 곳 이 많으면 간편 하게 산책할 수 있어서 그런 곳 을 찾았다. 고 민하다 중문 관광단지 내 한국콘도로 숙소를 정했다. 중문해수욕장이 인접해 있고 걸어서 이곳 저곳 돌아볼 곳이 많았고 동선도 나갔다 다시 돌아오기도 좋은 위치였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벌써 할머니들은 산책을 나가셨고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오신 어르신도 계셨다. 할머니들이 가신 산책길을 뒤따라 갔다. 중문 색달 해변 뒷편 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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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한 기회란 없다 !!! 준비하지 않아서 놓쳤을 뿐 ~~ “ 어르신들에게 다시 오지 않을 시간들을 채워가고 기록하는 미아동 어르신들의 행복한 기록 어.서.행
위에 콘도가 있었기 때문에 계단을 따라 해변까지 걸어 내려오시긴 무리였고 절벽 위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앉아서 또 바다를 내려다보고 계셨다. 바다에는 이른 시간임에도 벌써 서퍼들이 파도를 타고 있었다.
중문 색달 해변은 지난 봄에 사전 답사를 왔었는데 그때 해변은 마치 호수처럼 잔잔했다. 평소 파도가 높고 물이 깊어 서퍼들이 좋아하는 해수욕장으로 꼽히는 곳이라 이런 평온한 해변 모습은 봄철에나 볼 수 있다. 파도가 높은 이곳에 어르신들을 모시고 올 후보지로 선택한 이유는 해수욕이 목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이곳 해변은, 다른 대부분의 제주도 해변이 그렇지만 석양이 지는 6-7 시가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저 멀리 해변 끝으로 떨어지는 석양에 수평선이 붉게 물들면 그 노을을 바라보며 앉아 있어도 좋기 때문이다. 바닷가 모래 사장에 앉아 바라보는 바다 모습도 좋지만 해변 언덕에서 바라보는 해변과 수평선은 더 매력적이다. 마침 조망이 가장 좋은 해변 언덕에 더 클리프 The Cliff 카페가 생겼다. 이 해변의 매력을 이미 간파한듯 밖에는 석양을 감상하기 좋게 야외 테이블들과 소파들이 놓여져 있었다.
어르신들이 이곳 해변에서 석양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들을 떠 올릴지 궁금하다. 굳이 석양을 바라보며 인생을 생각하고,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를 바라보며 덧없이 스쳐간 관계들을 떠올리라고 어르신들을 이곳으로 모시고 오려는건 더더욱 아니다. 단지 그 순간에 그곳에서 바라보며 느껴지는 감흥만으로 어르신들 마음이 풍요로와지고 각박했던 삶에 여유를 찾을 수 있다면 족할 뿐이다. 둘째 날이 되자 어르신들은 완전 여행 모드로 준비되었다. 화사한 모자와 선글라스, 스카프로 멋을 내고 나오셨다. 오전 행선지는 서쪽 지역을 둘러볼 예정이다. 아침 식사를 하고 드라이브 겸 관광단지 내부를 죽 한바퀴 돌고 서쪽으로 향했다. 주로 해변 가까운 도로를 돌면서 바다를 볼 수 있는 노선을 잡았다. 먼저 산방산으로 갔다. 사실 이곳은 밤에 오면 더 좋은 곳이다. 여름에는 밤바다에 한치잡이 배가 가득 떠 있는 모습에 수평선이 온통 불빛으로 환하고 손에 잡힐듯 가까이 떠 있는 달빛이 바다위로 쏟아져 반짝거리는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어르신들이 피곤하지만 않으셨으면 밤에 모시고 나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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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한 기회란 없다 !!! 준비하지 않아서 놓쳤을 뿐 ~~ “ 어르신들에게 다시 오지 않을 시간들을 채워가고 기록하는 미아동 어르신들의 행복한 기록 어.서.행 요량이었으나 그게 안되어서 아쉬웠다. 하지만 낮에도 좋았다. 산방산에서 모슬포 항구 쪽으로 가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산방산을 지나오는 길에 파도치는 해변 모습에 다들 길가에 내려 한참 사진을 찍었다. 바다 바람과 파도치는 해변, 멀리 보이는 산방산의 모습이 하나의 그림처럼 다가왔다. 어르신들을 세우고 단체사진을 찍었다.
점심을 먹고 바로 다음 행선지로 가는 것보다 숙소에서 잠시 쉬고 가자고 했다. 오후에는 서귀포 쪽으로 갈 예정인데 무리해서 가기보다 여유롭게 가는게 나을 것 같아서 숙소로 돌아왔다. 일정 동안 어르신들이 약은 잘 드시는지 건강에 무리는 없으신지 늘 챙기는게 스텝들의 임무였다. 돌아와서 한숨 쉬고 오후 느즈막에 서귀포로 향했다. 지금은 잘 뚫린 새 도로가 깔려 있지만 그곳 보다 해변과 가깝고 구불 구불해도 마을 마을을 지나서 가는 구도로로 갔다. 서귀포 항구로 이어지는 도로 자체가 관광도로다. 차창으로 보이는 바다와 문섬, 서귀포 항구를 내려다 보며 구불 구불 이어지는 도로와 거리 양쪽으로 심은 야자수는 이곳을 더욱 이국적으로 보이게 한다. 바다 내음 풍기는 항구를 뒤로 하고 오후 행선지인 이중섭 거리로 향했다.
이중섭이 제주도에 머물렀던 기간은 1 년 남짓하다. 전쟁을 피해 이곳에 머무르면서 그가 남긴 족적은 이곳 풍광과 어우러져 더 돋보이는 것 같다. 가난했던 그 시절의 삶과 서귀포 포구가 바라다 보이는 단칸방에서 가족을 그리며 살았던 시간들이 그에게 특별했던 이유를 미술관을 둘러보며 느낄 수 있었다. 이중섭 생가에서 안내 선생님이 어르신들을 위해 이중섭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미술관에서 본 이중섭의 그림에는 제주도 만이 줄 수 있는 풍광과 그 시절 모습들이 원색적인 모습으로 드러나 있다. 바다, 깅이(게), 아이들, 물고기…가난했지만 결코 우울하지 않았던 순수한 그때의 모습들, 바닷가에서 발가벗고 물놀이하고 깅이 잡고 놀던 아이들의 모습은 누구나 간직하고 있음직한 순간들을 마음에 떠올리게 한다. 이중섭 화가의 삶과 중첩되는 시간이 많은 어르신들에게는 더 공감의 폭이 클 것 같았다. 점심 먹고 잠시 쉬었기 때문에 오후엔 좀더 힘을 내서 멀리 가기로 했다. 서귀포에서 516 도로를 따라 한라산에 올랐다. 이 도로에서 정점인 성판악에서 성산 일출봉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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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왔다. 짧은 일정 동안 제주도의 특징적인 것은 보고 가실 수 있게 루트를 짰다. 한라산은 올라갈수록 식물의 식생대가 달라서 다양한 식물들을 볼 수 있는 천연 식물원이다. 일출봉은 한번씩 들렀을 관광지지만 해 뜰때 뿐 아니라 해 질녘 석양도 멋있는 곳이어서 겸사 겸사 일정을 이 시간대로 맞췄다.
일출봉 근처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델레쿰다라는 성산 스튜디오에 들렀다. 다양한 테마방에서 사진을 찍으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다. 성산에서 중문까지는 꽤 먼 거리다. 어둠이 내린 일주도로를 따라 오는데 피곤하실텐데도 주무시는 분들이 많지 않았다. 새로운 힘이 생기신 걸까? 여행은 오히려 갖고 가신 약도 안드시고 돌아다니실 만큼 새로운 기운을 부어주는 활력소다. 파도소리에 막혔던 가슴이 뚫렸다는 어르신,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내 인생도 저렇게 예쁘게 져야 할텐데 수줍게 고백하시던 할머니처럼 여행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의지와 힘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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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단상(斷想) 참
고로 나는 50 대다.
<인생의
삼삼분기,
The
Third
Third
of
Life>의
저자
월터
라이트는
인생을
일삼분기(0 세~30 세), 즉 보육, 교육, 준비 기간을 보내면서 정체성과 목적이 형성되고 친밀감과 관계를 경험하는 기간으로 보고, 이삼분기(30 세~60 세)에는 자신의 핵심적인 인간관계를 규정하고 직업과 커리어에 전념하는 기간이고, 삼삼분기인 60 세에서 90 세까지는 은퇴 후에 인생의 미개척 영역에 맞닥뜨린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구분에 따르면 나는 아직 이삼분기, 그것도 한참 직업과 커리어에 집중하며 살아야 할 50 대 중반의 남자다. 아직 노년이라고 할 수 있는 삼삼분기에도 미치지 못한 내가 무슨 노년에 대한 단상을 기록할게 있을까? 살아보지도 못한 세대에 대한 글을 쓰는게 말이 안되지만 굳이 이런 제목으로 글을 써봐야겠다 생각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나에 대한 정보를 조금 더 풀어놔야 할 것 같다. 나는 대학원 졸업 후 학교 연구소에서 일을 하다 50 세를 넘기면서 흔히 말하는 퇴직을 감행했다. 퇴직의 이유는 여러가지 겠지만 그 중 하나는 연구소 일이 내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퇴직 후 어르신들을 자주 뵙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노년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고 그분들의 다양한 삶에 대해서도 숙제처럼 부담을 갖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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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는
계기가
상대하는
되었다.
우리가
어르신들은
대부분
지역에 홀로 계신 어르신들이다. 어떤
이유에
가족들이
살아
떨어져서
선지
모르지만
있어도
지내시는
홀로 분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그런 관계의 단절은
어르신들에게
여러가지
면에서
치명적인
문제들을
야기시키는데
그
중에서도
건강관리가 제대로 되지 못했다. 특히 남자 어르신들의 경우 혼자서 식사를 잘 챙겨 드시는 분들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 어르신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런
문제의식
때문에 어르신들의 건강한 한끼를 위한
식당을
만들자는
취지로
협동조합 라떼는집밥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지역 돌봄 SOS 사업을 위탁 받아 매일 긴급하게 식사가 필요한
어르신들에게
도시락을
배달하는 일을 하고 있다.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이 돌봄 SOS 도시락을 배달하면서 만난 어르신들 때문이다. 돌봄 SOS 는 말 그대로 위급한 상황에 있는 어르신들에게 일정 기간 식사를 제공함으로써 건강을 유지하거나 회복할 수 있게 하는 서울시 프로그램이다. 이 도시락 배달을 나가면서 만나게 되는 어르신들은 대부분 건강이 안 좋아서 자력으로 식사를 하시기 어려운 분들이었다. 그 중에는 정도에 따라 죽을 드셔야 할 분도 계시고 당뇨나 환자식으로 드셔야 하는 분들도 있다. 어르신들을 만나면서 충격처럼 느꼈던 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분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더 심각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삶의 질이 떨어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어려우신 분들이 의외로 많았다. 이런 분들을 위한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들이 있지만 그런 지원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은 것을 보게 되었다. 단순히 재정적으로 지원만 하면 어르신들 스스로 생활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처럼 안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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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는 없다. 그런 지원의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은 어르신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아무런 의욕이나 생각도 없이 하루 하루를 지내고 계신다는 것이다. 게다가 건강까지 안 좋아지면 늘 하시는 말씀처럼 죽지 못해 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은퇴 이후 하시던 일도 중단되고, 가족들과 사별이든 이별이든 단절을 겪게 되면 그로 인해 자신을 방치해서 이어지는 건강상의 문제로 더 힘든 노년의 시간을 보내고 계신다. 그런 어르신들의 모습을 매일 보는 것이 나에게는 더 어려운 일이었다. 배달하는 일이 육체적으로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 있는 어르신들을 보면서 이런 삶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지를 찾을 수 없다는 것과 머지않아 나에게도 이런 상황이 주어질 거라는 현실에 답을 찾을 수 없어서 답답했다.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만은 아니었다. 정부에서 제공하는 이런 어르신들을 위한 지원으로 기초적인 생활은 유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삶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을까? 이런 고민이 깊게 다가왔다. 어쩌면 내가 불과 몇 십년, 아니 몇 년 후에도 맞닥뜨릴 수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중년인 내가 이런 상황에 대한 고민에서 노년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해봤다. 어떻게 하면 나의 노년은 일정 수준의 삶의 질을 유지하며 건강하게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이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런 고민 속에 내린 결론 중 하나는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삼삼분기가 이르기 전에 그 시기를 준비하는 과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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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들의 기대연령이 늘어나면서 지금은 100 세 시대라고 할 만큼 우리 인생에서 한참 일하고 뛰어다닐 시간보다 어쩌면 더 많은 시간을 노년으로 보내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도 이 시기를 준비없이 맞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 어르신들에게는 이 시간에 대한 준비 과정이 없었다. 어쩌면 이 시기에 대해 따로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시간을 어르신들은 사셨다. 바쁘게 가족들을 위해 일터에서 보내다 때가 되어 은퇴하면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채 새로운 변화의 격랑을 마주하게 된다. 내가 여러 어르신들을 뵈면서 이런 상태에서 야기되는 문제들이 대부분 건강, 관계, 일과 관련이 있음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적어도 이 세 가지 부분에 대해 인생의 삼삼분기 이전부터 준비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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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는 건강이다. 50 대가 넘어가면 건강을 관리해야 하는 시기가 된 것을 몸이
알려준다.
시기부터라도 방치했던 조절해서
적어도
그동안
식사나 적절한
무절제하게
생활 식사와
이 습관을
운동하는
습관을 갖춰야 한다. 이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건강한 식습관과 적절한 운동이 우리의 노년에 가져다 줄 유익은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다.
두
번째는
어르신들
관계를 중
준비해야
여전히
한다.
자녀들과
왕래하고 또는 부부가 같이 지내시는 분들은 건강에 문제가 있더라도 삶의 질이
심각할
정도로
떨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다른 가족들과 왕래도 없이 온전히 혼자 지내시는 분들은 여러 문제들에 봉착하게 된다. 흔히 교제는 단절될 수 있어도 관계는 끊을 수 없다는 생각에 이것을 잘 관리해야 된다는 생각을 못할 수 있다. 관계도 준비해야 한다. 부부관계, 자녀와의 관계는 특별하다. 서로가 살며 쌓인 앙금들을 대부분 해결하지 못하고 골이 깊어지다 나중에 황혼 이혼으로 이어지거나 다 따로 살게 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이미 이런 과정을 지나 가족들과 단절되었다 하더라도 주변 이웃들이나 친구들, 또는 지역 공동체에 속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관계를 관리하는 건 중요한 일이다. 관계를 관리하고 준비하는 건 의외로 단순한 실천으로 가능하다. 내가 바쁘게 일하고 다닐 때 나를 지지해줬던 가족들,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그 관계가 정말 소중하다는 생각을 갖고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동안 서로에게 남은 앙금을 푸는 작업도 중요하다. 어르신들이 대부분 나이가 들수록 고집스러워지는게 당연하다 생각하지만 그 고집은 관계를 더 어렵게 만들 뿐이다. 오히려 생각을 바꾸고 서로를 존중하고 감사하며 사랑하는 관계를 관리하는 법을 깨우쳐야 한다. 마치 식물을 가꿀 때 매일 물을 주고 돌봐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지금 누리고 받은 것들 중 어느 것 하나 당연한 것은 없다. 누군가의 도움과 희생이 뒷받침되어 주어진 결과라고 생각할 때 감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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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는 일이다. 어르신들도 할 일이 있는 분들과 할 일이 없는
분들의
삶의
차이는
두드러진다. 대부분 어르신들은 이 나이에 뭘 할 수 있냐고 물으신다.
젊을
때
우리가
생각하는 일은 수입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노년의 일은 꼭 수입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적어도
내가
해왔던
일의
연장선에서든, 아니면 젊을 때 하고 싶었던 일이든 나만의 할 일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남자
어르신들의
경우
일은
자신의 정체성이나 자존감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은퇴
이후
일이
없다는
공허함을
할 이기지
못해
술에
의존하거나 무기력해지는 경향이 많다. 두꿈학교에서 어르신들을 위한 다양한 만들기 프로그램을 통해
취미생활을
라떼는집밥에서
회복하거나 어르신들이
참여할 수 있는 일을 하시는 분들도 계신다. 연세가 80 대이신 어르신이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서 커피를 내리시거나, 60 대 젊은 어르신은 홀서빙으로 일을 하신다.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시거나 설거지를 하시는 어르신들도 자신 만의 일을 찾으신 분들이다. 이분들의 공통된 말씀은 집에만 있으면 힘들다는 것이다. 이렇게 나와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고 하신다. 그래서 나도 생각한다. 내가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무슨 일을 하고 싶은 지, 뭘 하면 좋을지…. 젊을 때 좋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스펙을 쌓고 노력하는 것처럼 우리의 노년도 그 만큼의 수고를 해서 준비해야 할 만큼의 시기를 보내야 한다. 이 세 가지 외에도 노년을 위한 재정적인 준비나 다른 준비도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돌봄을 통해 본 어르신들의 삶을 볼 때 적어도 건강, 관계, 일에 대한 준비는 절대적이라고 생각한다. 행복한 삶은 돈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노년에 건강한 생활습관을 가지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때 행복한 노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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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양말목이다” 코로나를 극복하는 어르신들의 사랑방 모임이야기
강북구 미아동 지역에는 디자인을 받아 완제품을 만들거나 다양한 기본 손질을 해 서 다음 단계의 업체로 넘기는 중간 단계의 의류 업체들과 성인, 유아용 등으로 나뉜 양말 공장 등이 곳곳에 위치해 있다. 특히 양말 공장 앞에는 제품 완성 과정에서 나 오는 섬유 쓰레기들이 재활용 봉투에 그득그득 담겨 자주 나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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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양말목이다” 코로나를 극복하는 어르신들의 사랑방 모임이야기
우와 ~~양말목이다. 양말에서 발을 끼워 신는 입구 부분인 양말목이 쓰레기의 큰 부피를 차지하는데 두꿈 팩토리에서는 그것을 저렴하게 구입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기증을 받아 두꿈 학교 어 르신들 및 지역에서 관심을 갖고 신청하는 모든 분들과 함께 다양한 제품을 만드는 업싸이클 공예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예쁜 가방, 고양이 집, 컵 받 침, 방석 및 브로치 등 다양한 종류의 물건 등을 만들어지고 있다. 어르신들 세대에는 사랑방 문화가 있었더랬다. 작은 방에 오기종기 모여 앉아 화롯불 을 지펴놓고 약간의 간식이 있으면 좋지만 없더라도 살아오면서 힘들었던 이야기 특 히 호된 시집살이 이야기부터 남편, 자식 이야기 등을 나누며 한풀이도 하고 그러다 위로도 주고 받던 때로는 마음에 누군가가 안 들어서 휑하고 갔다가도 다시 그 자리 로 돌아와 삶을 나누던 공간이 사랑방이였다. 라떼는 집밥에 준비된 그 공간이 어르 신들께는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이다. ‘호호하하’ 웃음꽃을 피우며 공예 교실에 참여도 하시고 미디어 활용법 등에 관련된 다양한 교육도 받으신다. 그리고 혼자 먹는 밥은 맛이 없다며 언니, 동생 분들이 모여 식사도 하신다. 그 뿐이랴. 마음 이 힘들 땐 상담 선생님들과의 만남도 가능하다. 이런 공간에서 어르신들은 선생님을 통해 양말목으로 다양한 물건들을 만드는 법을 배우시고 나면 누군가가 오라고 오라고 끌지 않아도 화요일, 금요일 낮 12시 반이면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모이셔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시며 거짓말 조금 보태서 산더 미 같이 방석이며 등받이며 물건들을 만들어 놓고 가신다. “어르신~ 어깨 아프고 팔 아프시니 그만 만들고 간식 드시고 말씀만 나누다 가셔도 되요” 라고 아무리 말려도 “에휴, 선생님 그런 말씀 마세요. 하나도 안 힘들고 너무 재미있어서 잠이 안 와요.” 라며 절대로 선생님들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 이렇게 말려도 말을 들어주지 않으시니 나쁜 학생들???? 이라고 불러야 할까? 선생님들의 말을 듣지 않으시니 어르신들이 사용하시는 표현처럼 혼꾸멍이 나야겠지 만, 절대 혼을 내지 않는다. 아니 혼을 낼 수 없다. 청년들을 비롯해서 중장년시대가 다양한 어려움과 혼란의 시대를 살아내기도 했지만 일제 치하를 시작으로 6.25 전쟁, 대한민국의 고도 성장기 속에서의 다양한 격변기를 온몸으로 살아내신 어르신들보다 더 혼란스럽고 힘들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싶다. “뭔가를 하고 싶다고 할 수 있었나요. 특히 우리 같은 여자들은 그런 건 꿈도 못 꿔 보고 살았죠” “결혼 전에는 오빠나 남동생 뒷바라지 하고 결혼하면 시집 식구들, 남편 챙기고 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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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우고..그러다 보니 이 나이가 되었네요” 공부가 정말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분들도 계시고, 한글조차 배울 수 없었던 분들도 계신다. 그렇다고 남자 어르신들의 삶은 힘들지 않았을까? 그것도 아니다. 처 자식 먹여 살리고 가정을 이끌어 가느라 뭘 하고 싶은지를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살 아온 분들도 부지기수다. 나이, 성별, 가정 배경, 배움의 정도를 떠나 삶을 들여다본 다면 아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어쨌든 양말목 공예는 이런 시대를 살아온 어르신들 중 어떤 분들께는 잠이 안 올만 큼 재미나는 활력을 가져다주었다. “저희 집에 바구니를 열 개도 넘게 만들어 놨으니 까 나눠 주고 싶은 분들 있으면 갖고 가셔서 다 나눠 주세요” “선생님~ 제가 만든 양말목 발 매트를 보고 좋다고 사고 싶다고 해서 만들고 있어요” “뭘 더 만들어다 드릴지 말씀만 하세요. 아이고 얼마나 재미난지 몰라요” 양말목으로 만든 제품을 팔아서 받은 수고비를 들고 와서 어려운 분들 도시락 나갈 때 보태라며 후원하시는 분도 계신다. 버려지는 물건일 수 있지만 그 물건에 관심을 갖는 그 누군가가 있고, 거기에 전문성 이 더해지면 제품이 되고 판매가 되어 수익을 창출한다. 그리고 또 누군가에 의해 사 회적 가치가 덧입혀지면 타인을 돕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도구 를 통해 꿈을 꾸신다. 양말목을 배우며 재미를 느낀 어르신들 중에는 '토탈 공예 지도 사'라는 자격증 취득을 위해 온라인 수업을 듣는 분도 계시기 때문이다. ‘이왕 하는 거 나중에는 아이들도 가르치고 또래 어르신들도 가르쳐 드릴 수 있는 강사가 되어보 면 어떨까’ 하는 꿈을 갖게 되신 것이다. 배워서 나도 갖고 남도 주자는 삶을 꿈꾸시는 어르신들이 모여서 오늘도 이쁘고 고운 양말목이 들어왔는지 궁금해하시며 어르신들의 사랑방으로 모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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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 순례자의 길 시니어 인문학 강의
중
세시대 프랑스 내 순례자의 길은 기독교
국가인 프랑스를 관통해 지나가는 길이다. 이 프랑스 내 4 갈래의 순례자 길을 이해하려면, 중요한 2 가지의 키워드가 있는데, 프랑스와 독일의 원조격인 프랑크 왕국과 니케아 공의회(325 년) 에서 단성론을 지지하던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양성론을 체택한 아타나시우스파를 정통으로 인정한 기독교이다.
3-4 세기 중앙 아시아에서 서진하던 훈족(흉노족이라 추측) 에게 밀려, 현재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북부, 스페인등지에 밀려온 게르만 민족. 당시 세계 최강국이던 로마제국을 5 세기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한 장 본인이지만, 그들은 정통 기독교로 개종해 서유럽을 이슬람세력으로 부터 보호하고, 11 세기경에는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서방세계의 중심세력으로 우뚝서기도 한다. 게르만 민족의 이동으로 인한 서유럽의 재배치, 그 와중에 게르만족 중 하나인 작은 프랑크족이 여러 부족들을 통합해 왕국을 세우는 과정과, 또한 그들이 어떻게 기독교 국가로 변모되어 갔으며, 로마 카톨릭과는 어떤 관계를 유지했는지 등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훈족의 서진, 유럽의 재배치 기원전 2 세기경, 훈족 (흉노족) 의 근원지라 추측되어지는 지역
서로마제국이 5 세기 멸망하게 된 직간접적인 이유 및 게르만족인 프랑크왕국이 형성되어지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훈(Huns)족의 서진西進 이다.
훈족은 많은 학자들이 기원전 23 세기경 몽골, 중앙아시아 및 중국 북부지방에 살고 있던 흉노(Xiongnu)족과 같은 투르크계 민족이 아닐까 추측은 하지만, 고고학적, 역사적으로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고 한다. 이들은 주로 초원에서 살던 기마, 유목 민족으로 말과 활을 이용한 기동력이 좋고 용맹하고 잔인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아래는, 이 지역에 살고 있던 훈족 사람들의 모습이라 추정할 수 있는 기원전 3-1 세기경 만들어진 구리 조각작품으로, 동양보다는 서양인의 모습에 보다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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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기원전 3 세기 - 서기 2 세기에 걸쳐 중국 한나라의 확장과 이들과의 잦은 전쟁에 패함으로써 훈족은 점점 서쪽으로 밀려나게 된다. 이들은 이미 4 세기에 카스피해를 넘어 현재 동유럽에 훈나라의 수도를 세운다.
4 세기 유럽 지형 4 세기 훈족의 이동에 따른 유럽 민족 대 이동 훈족이 동 유럽으로 밀려오기 전, 이미 그 곳에서 살던 고트 Goths 족은 밀려나 이탈리아 북부에 동고트 Ostrogoths 족을 세우고, 이베리아 반도(스페인)까지 밀려난 고트족은 서고트 Visigoths 족을 세운다. 반달족은 동유럽에서 프랑스, 이베리아 반도를 지나 북 아프리카에 정작하게 된다. 덴마크 및 북부 독일에 살던 앵글로-색슨족은 영국으로 이주해 그곳의 켈트족을 북쪽으로 밀어낸다.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은 프랑크족으로서, 다른 민족들과는 달리 독일북부지역에서 현재 프랑스 수아송, 파리등지로 거리상으로 아주 조금 이주해 온다. 따라서, 다른 민족들과 비교해 자신들의 문화 및 자연환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곳으로 이주 한 점은 이들이 향 후 서유럽 패권을 차지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5 세기 유럽 지형, 훈족의 지도자 아틸라 아래는 훈족이 최대 영토 및 번영기를 지낸 5 세기 중엽의 지도이다. 이 시기에 훈족의 지도자 아틸라 Attila 는 434-453 년동안 나라를 다스리며 훈족 최고의 전성기를 이끈다. 특히, 동로마 여러 지방을 정복해 공물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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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상에, 오렌지색의 훈이 다스리던 지역, 노란색의 서로마, 동로마 제국, 녹색의 프랑크 족, 영국 남동쪽 한 귀퉁이의 앵글로색슨족, 파란색의 북아프리카의 반달족등이 보인다. 451 년 아틸라는 그의 연합군을 이끌고, 서로마제국의 영토였던 오를레앙지역을 침공한다. 이 곳 카탈라우니안 Catalaunian 평원에서의 전투에, 아틸라가 이끄는 군대는 서로마제국과 서고트왕국의 연합군에게 막혀 더 이상 서유럽 깊은 곳까지 침투하지는 못한다. 만약, 이 전투에서 아틸라가 승리를 했다면, 현재 유럽 역사를 통째로 다시 써야 했을 정도로 매우 중요했던 전투로서, 이 전투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기 전 벌인 중요한 마지막 전투 중 하나 였다. 옆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아틸라는 스트라스부르, 마인츠를 기점으로 두 갈래로 진격해 온다. 아미앵, 보배를, 그리고 다른 루트로는 메츠, 랭스를 정복해, 파리를 지나 오를레앙과 트루아까지 정복을 시도하지만 이 지역의 정복에 실패하고 골 Gaul 지방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그는 453 년 동로마황제 레오 1 세가 소개해 준, 일디코 Ildico 라는 동고트족의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한다. 결혼식 후 거창한 피로연을 마치고 과도한 음주로 깊은 잠에 빠져있을 때, 코피가 과도하게 흘려 그의 코와 목을 타고 넘어들어가 질식사 하고 만다. 하지만 그의 사인에 대해서는, 일디코에 의한 암살, 또는 복상사등 여러 추측들이 난무하고 있다. 469 년 아틸라 사 후, 장남인 엘라크가 왕이 되었지만, 두 동생들과의 권력 투쟁등으로 왕국이 분열되며 두 동생은 급기야 추방이 된다. 설상가상으로 내부 분열등으로 내전에 휩싸이더니, 급기야 훈족은 동고트족에 멸망당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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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가 그린 아틸라이다.
오른쪽지도는 5-6 세기경, 프랑크 왕국이 지배했던 영토들로서, 아우스트라시아 지역을 기반으로, 네스트리아 및 루아르 강변 아래로 남하해 507 년에는 서고트 왕국과의 전투에 승리해 아키텐 지역을 차지한다. 536 년에는 부르군트족을 537 년에는 동고트 족으로부터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지역을 빼았아 영토를 확장한다. 메로베우스 (메로빙거) 왕조가 다스리던 프랑크 왕국은 서고트 왕국, 동고트 왕국과 함께 당시 유럽의 3 대 패권 국가로 서로 힘의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메로베우스 왕조는 작은 부족으로 시작해 서유럽의 중심 왕국으로 우뚝 섰으며, 살리족의 관습법을 성문화한 살리카법전을 공표해 국가로서의 틀을 잡는다. 또한, 멸망한 서로마제국의 귀족들을 적극 중용함으로서, 서로마제국의 행정체계를 빠르게 도입해 국가로서 기초를 탄탄히 하기도 했다. 또한, 메로베우스 왕조 및 그의 부하들은 로마카톨릭으로 개종해, 프랑크 왕국은 로마카톨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이로서, 당시 서고트, 동고트, 부르군트 왕국등 이단인 아리우스파를 믿던 여타 다른 왕국들 보다는 프랑크 왕국이 보다 빠르게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다. 하지만, 클로도베쿠스 (프랑스 어 : 클로비스)가 보여 주었던 게르만족의 야만적이고 잔인한 성품과, 집단 개종의 부작용 등으로 인해, 프랑크 왕국은 진정한 기독교 국가로서의 품격 및 한단계 수준높은 서로마제국의 정신수준까지 오르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클로도베쿠스 (프랑스 어 : 클로비스) 사 후, 게르만 민족의 살리법 전통에 의해 4 명의 아들들에 영토를 나눠주며, 분열이 되지만 그 후 7 세기 후반 테우데리쿠스 3 세 (프랑스 어 : 띠에리) 다시 통일을 이루며 명맥을 유지한다. 하지만 왕권이 약해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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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왕궁의 업무를 담당하던 궁재 카를 마르텔의 둘째 아들 피피누스 (피핀) 3 세 에게 쿠테타를 당하며 메로베우스 왕조는 751 년 막을 내린다.
클로도베쿠스 (프랑스 어 : 클로비스) 와 프랑크 왕국의 형성 6 세기경, 프랑크 왕국이 이러한 방대한 영토를 얻게된 배경으로 프랑크 왕국의 초대왕 클로도베쿠스 (프랑스 어 : 클로비스, Clovis) (481-511 년 재위) 를 가장 먼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481 년 프랑크 살리족의 족장이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 자리를 이어 받아 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며, 단호하고 잔인한 성격으로 단숨에 군대를 장악해 그의 세력을 점차 키워나간다. 486 년, 그는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약 110Km 떨어진 수아송 근처에서 골 Gaul 지역을 다스리던 서로마의 마지막 총독 샤그리우스를 물리친 것을 시작으로, 부르군트, 서고트족을 거의 몰살시키다시피 하며 이 지역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파리에 수도를 세우며, 살리족의 관습법을 성문화한 살리카법을 공포해 메로베우스 왕조를 세워 국가로서 토대를 단단히 했다. 하지만, 그는 동고트족을 끝내 그 앞에 굴복시키지 못한채 511 년 임종을 맞이하고 만다. 메로베우스 왕조는 바다괴물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신이된 메로베치 Merovech (클로도베쿠스의 할아버지) 가 자신들의 시조이자 조상이라 주장함과 동시에, 클로비스의 고조 할머니는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의 후손으로 예수의 혈통을 물려받은 혈통이라 주장 하였다. 이로 인해, 메로베우스 왕조는 자신들이 하늘 뿐아니라, 땅에서도 가장 고귀하고 절대적 힘을가진 가문으로 자신들을 드러내고 있었다. 동시에, 사람들은 왕족의 피에는 신비한 마법의 힘이 흐르고 있어, 왕이 지나가는 들판에는 곡식이 자라며 새소리, 동물들의 소리도 알아들을 수 있으며, 머리를 자르지 않는다면 전쟁에서 지지 않는다는 속설을 믿고 있었다.
왼쪽 지도는 클로도베쿠스 (프랑스 어 : 클로비스)가 통치기간 동안 (481-511 년) 정복한 골 Gaul 지역 프랑크 왕국의 영토 및 서로마제국 멸망 후 당시 주위에 대치하고 있던 서고트 왕국 Visitoghic, 동고트 왕국 Ostrogothic, 부르군트 왕국, 알라만 왕국, 롬바르드 왕국등의 영토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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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비악 전투 (5 세기 후반?) 톨비악 전투는 클로비스가 알라만 Alamanni 왕국과 톨비악 Tolbiac (현재, 독일의 Zulpich) 에서 벌인 전투로서, 이 전투를 통해 프랑크 왕국은 알라만 왕국에 대해 주도권을 지며 북동쪽으로 영토를 더욱 확장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전투를 계기로, 클로비스는 이단인 아리우스파를 믿던 주위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정통 기독교를 믿게된다. 이로서, 프랑크 왕국은 로마교회와 보다 전략적 관계를 유지하며, 서유럽세계가 기독교 국가로 정착할 수 있는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당시 클로도베쿠스 (프랑스 어 : 클로비스)의 프랑크 왕국은 현 독일 북부에 위치한 리푸아르 프랑크 Ripuarian Franks 왕국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래 위치한 알라만 왕국은 리푸아리안 프랑크를 매우 자주 침범해 약탈을 자행한다. 496 년 리푸아리안 프랑크의 왕 시고베 더 레임 Sigobert the Lame 은 알라만 왕국이 자신들을 또다시 침범해 오자 클로도베쿠스 (프랑스 어 : 클로비스)에게 도움을 요청해 이 전투가 시작된다. 하지만, 녹녹치 않은 상대를 만난 클로도베쿠스 (프랑스 어 : 클로비스)는 많은 장수들과 군인들을 잃으며 전쟁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고 만다. 그는 이 전투에서 궁지에 몰리자, 하늘을 향해 울며 그의 두번째 부인 부르군트 왕국 출신의 클로틸드로 부터 전해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도움을 청하며 기도를 올린다. 역사학자 그레고리 Gregory of Tours 는 프랑크의 역사기록물에 클로도베쿠스 (프랑스 어 : 클로비스)의 기도문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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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예수 그리스도시여! 당신은 클로틸드가 저에게 말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십니다. 당신은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바라는 자들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저는 당신의 도움으로 기도의 영광을 구하나이다. 이 적들에게서 승리를 주시고, 사람들이 말하는 기적을 저에게도 보여주신다면, 당신을 믿고 당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겠습니다. 실로, 저는 저의 신께 간절히 구했습니다만, 제가 지금 경험하고 있듯이 그들은 저를 돕지 못하며, 저에게 힘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당신께 울며 간구하고 있습니다. 저의 적에게로 부터 저를 구원해 주실수만 있다면 저는 당신을 믿겠습니다! 클로도베쿠스 (프랑스 어 : 클로비스)가 기도를 마치자 마자, 전세가 역전되 알레만 군사들은 도망을 가고 알레만 왕국의 대장은 도끼에 맞아 죽게 된다. 결과는 클로비스의 승리였다. 프랑크족의 전통에 따르면 왕이 머리를 짧게 자르면 전쟁에서 그의 능력이 없어진다라고 사람들은 믿어왔다. 따라서, 세례를 받기위해 그의 풀어헤쳐진 긴 머리칼을 자른다는 것은 사실 프랑크 족의 전통과 단절한다는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져 있다. 하지만, 클로도베쿠스 (프랑스 어 : 클로비스)는 그의 부인 클로틸다의 강력한 권유와 톨비악전투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496 년 랭스 Reims 대성당에서 주교 레미기우스로 부터 그의 부하 3 천명과 함께 세례를 받고 크리스천이 된다. 전설에 의하면 클로도베쿠스 (프랑스 어 : 클로비스)가 세례를 받는 중, 흰 비둘기가 성유 聖油 병을 물고와 이 기름을 클로비스의 몸에 바르는 도유식을 거행했다 한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 왕들은 대부분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열고 도유식을 거행 하는 것이 전통이 되었으며, 이러한 의식으로 인해 왕으로서 권위와 정통성을 부여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 3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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