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구 사람들의 마을잡지 7호
강동구 사람들의 마을잡지 7호
3
차례
우리 동네 이야기 아는 만큼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을 키워야죠
박경숙
10
강일동 새로운 주민, 원상옥님과 희망을 말하다
최은경
16
반려동물과 가족 이루며 살아요
음민서
22
금요일부터 우리집
김명국
34
누구나 한 명은 있다
김설희
37
코로나, 그리고 내 몸 성찰 일기
김인경
40
밥 푸는 사람
나성재
42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유명한
44
삼대(三代)가 부르던 노래
박경숙
47
내 인생의 노래 - 서른 즈음에(김광석)
유서향
50
나는 방탄소년단의 아미이다!
유수경
53
은방울작업실에서
음민서
56
우리들만의 여행
이미옥 60
내 인생의 명곡?
이은진 64
- 최한숙
- 가또네, 금옥이네
우리들의 소소한 이야기
내가 어쩌면 갈 수도 있었을 길 한 사람의 힘
4
천해
67
최은경
71
마을담 어린이 백일장 별윤이와 곰돌이
김서윤
82
우리 동네
김준서
83
우리 모두 힘내요
성유나
84
코로나19를 없애자
성유준
85
코로나19 백신 왕주사기
사지훈
86
사촌들과 함께 한 숲 체험
송유나
87
별캉스
이주연
88
나의 소중한 애완동물들
최해준
89
마을의 협력과 지속가능한 시민사회를 위하여
박성식
98
강동마을네트워크의 ‘환경이어달리기’
원영난 102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마을지향 평생교육 ‘반딧불’ 이야기
반준영 104
우리 동네 이모저모
편집후기
108
마을담 원고모집
111
5
6
우리 동네 이야기
7
우리 동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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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을 키워야죠 - 최한숙 (다와봉사단장 옹헤야대표) 박경숙
강일동 새로운 주민, 원상옥님과 희망을 말하다 최은경
반려동물과 가족 이루며 살아요 - 가또네, 금옥이네 음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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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을 키워야죠 - 최한숙 (다와봉사단장 옹헤야대표) -
박경숙
이름도 신명나게 발랄한 봉사 단 ‘옹헤야’의 대표를 맡고 있는 최한숙씨. 그는 장애인이 시설로 보내져 인권침해를 당하는 일을 벗어 나 탈 시설을 하는 현황, 장애 인의 특성을 바르게 이해하는 방법, 장애인이 나고 자란 고향 에 정착해 이웃과 함께 사는 방 법 등에 대해 고민하며 다양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첫 만남에서 수줍게 웃으며 명함을 건네는 이. 고운 얼굴주름 속에 담긴 세 월과 마음의 들고남이 부드럽게 정돈된 모습이다. “이젠 아들 덕분에 할 일이 더 많아졌고 내 명함도 자신 있게 갖게 되었어 요. 30년 넘게 발달장애가 있는 아들을 키워낸 경험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 내며 사회활동도 더 활발하게 하게 되었지요. 우리 이웃들에게 장애인과 더 불어 사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알리는 역할을 하느라 발걸음이 바 빠졌네요”라며 활짝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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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단계에서의 행복을 향해 걷고 있지요. “처음 아이에게 발달장애가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기가 너무나 힘들었지요. 젊은 엄마였던 저는 아이의 장애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비장애인 그룹 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부단히 애썼답니다. 아이와 함께 갖은 시행착오를 겪 어냈지요. 제가 15년 전부터 피곤하면 건강에 이상이 오는 신우신염을 주기 적으로 앓으며, 아이가 장애를 안고 살면서 행복을 느끼는 방법에 대해 더 욱 깊이 있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최한숙 씨는 장애를 안고 있는 이와 그 가족이 서로 힘들지 않게 사는 방법, 낮은 단계에서의 행복을 추구하며 마을에서 함께 사는 방법을 늘 모색 중이 다. 장애가 있는 자녀를 학습에 매진시키기보다는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교 육이 우선되어야 하고, 다른 이에게 피해를 안주면서 사는 습관을 기르도록 노력하고 있다. 꾸준하게 반복적인 과정을 거치면 장애인이 혼자 할 수 있 는 일이 하나둘씩 늘어나면서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역할도 제대로 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처음 아이의 장애를 알았을 때는 ‘끝까지 내가 책임지겠다’는 생각이 강했 었지요. 차츰 마음의 성장과 다양한 교육을 통해 나에게는 그냥 자식이지 만, 나라로 보면 국민이고, 보호해야 할 대상자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어요.” 부모는 당연히 그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하고, 장애인이 성장하며 일하고 있 는 마을과 나라가 그들을 받아들이고 비장애인과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찾 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부모 사후에는 마을과 국가가 도와줘야하는 인식의 확산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며 최한숙 씨는 공익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장애인의 권리, 다양한 성향에 대한 이해가 필요해요 “예전에는 장애인이 권리를 요구하면 사리사욕 같은 느낌이었지만 이제는 인권을 중시하고 권리를 찾는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깨닫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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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식을 위한 일뿐만 아니라 장애인 부모가 해나가야 할 일에 대한 자긍 심, 개인의 틀을 벗어나 공익을 추구하는 일에 관심을 더욱 많이 가져야 한 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장애인을 옹호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인 ‘옹심이’를 꾸리고 강동구 비영리민간단체인 ‘마을다와’와 함께 다양한 장애인 옹호활동을 펼 치고 있다. 2020년에는 장애인 지역통합사업인 ‘옹심이’ 활동을 서울시복 지재단, 시립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과 함께했다. 주민 중에 장애인을 옹호 하는 마음을 나누고자 하는 시민옹호활동가를 양성하고, 장애인과 비장애 인의 1:1 매칭을 통해 취미, 여가활동, 지역탐방, 소그룹 활동 등의 옹호활 동 역시 값진 시간이었다. 장애인 당사자가 주민 모임에 참여하여 자연스럽 게 어울리며 하고 싶은 활동을 하는 ‘스몰스파크’ 모임 역시 장애인이 보통 의 삶을 실현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올해는 서울장애인복지관과 함께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취미생활을 같이 하 는 ‘반딧불이’ 활동을 통해 마음으로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 하기도 했다. 12
“이런 활동을 통해 장애와 각 장애유형별 특성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지요. 발달장애인에 대한 의사소통 및 관계형성 방법에 대한 이해, 발달장애인의 사회 참여를 위한 바탕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월말만 되면 가게마다 돌아다니며 달력을 떼야 하는 집착을 가진 이, 동그 란 시계를 좋아해 다른 사람의 물건에도 손길이 가는 사람, 의자 정리가 안 되면 꼭 정리해야 하는 습관을 가진 성향 등 장애에 대한 다양한 특성을 이 해하면 장애인에 대한 오해 역시 줄어든다고 한다. “비장애인이 장애의 특성을 몰라 무섭고 당황했던 일들이 장애를 이해하게 되면 오히려 칭찬으로 이어지고 도움을 요청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장애인에게 편리한 세상은, 비장애인에게 더 행복한 세상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시설이나 다른 지역에 가면 그냥 장애인으로 인식되지요. 하지만 마을에서는 오픈해서 길렀기 때문에 그냥 장애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의 오빠, ○○님 아들, ○○의 동생으로 불립니다. 가장 큰 바람은 아이들이 시설이 아닌, 나고 자란 고향에 정착해서 사는 겁 니다. 장애인에게 편리하고 살기 좋은 세상은 비장애인에게는 더 윤택하고 행복한 세상이랍니다.” 13
최한숙 씨는 2년 전부터 발달장애1급인 아들을 독립시켰다. 시범사업인 서 울시 중증장애인주거지원사업을 통해 강동구에 집을 마련하여 아들을 분가 시킨 것이다. 아들이 일터로 출퇴근하는 습관, ‘내 집’이라는 인식을 갖고 자 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물론 많은 걱정이 앞섰고 여러 시행착 오를 겪어내며 차츰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밤 시간에 돌봄을 해주는 활동 지원사의 도움으로 아들과 같은 장애가 있는 친구까지, 두 명이 공동생활을 하고 있다. “장애인을 겪어보지 못한 집주인을 만나 입주 3일 만에 다시 이사한 적도 있어요. 활동지원사의 꼼꼼한 관리, 부모의 도움이 있어도 장애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을 만날 때는 벽에 부딪히는 느낌입니다. 이럴 때마다 ‘우리가 또 해야 할 일, 넘어야 할 산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장애인이 나와 ‘다름’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 장애인의 특성과 행동의 의미를 당황하지 않고 이해하는 모습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무엇보다 ‘내 아이 같아서’, ‘가족 같아서’라는 말을 슬며시 하며 서른이 넘은 성인 장 애인에게 반말을 하거나 이름을 부르며 성인 대우를 하지 않는 행동부터 고 쳐지기를 바란다. “주말은 아들과 함께 보내고 있어요. 친구와 함께 공동생활하며 형제, 동료 라는 인식을 갖는 것이 성공적인 출발입니다. 장애인들이 이웃과 함께, 마 을 속에서 ○○님 아들로 대접받으며 어울려 사는 모습을 갖기 위해 저는 또 제 할 일을 찾아 나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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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강일동 주민, 원상옥님과 희망을 말하다. 최은경
지난 5월 말, 원상옥 님은 고덕동에서 강일동으로 이사했다. 그가 독립해서 만난 두 번째 집이다. 이사 후 최근 근황이 궁금했고, 언제나 만날 때마다 짧 은 말속에서도 깊은 배움과 울림을 주시기에, 그 배움이 그리워 그를 만나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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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은경 : 이번 집이 몇 번째 집이세요? A. 상옥 : 여섯 번째 집일 거예요. 태어난 집, 큰엄마 집, 춘천 거주시설, 노 원구 거주시설, 강동구 고덕동 주택, 그리고 지금 강일동 아파트. 벌써 강동구에 산지도 27년째네요. Q. 은경 : 이번 집이 몇 번째 집이세요? A. 상옥 : 지하에서 지상으로! 그것도 14층 고층으로 올라와서 기분이 새로 워요. 아파트는 처음이에요. 아파트에는 어르신 분들이 많이 사시더라고요. 인사하며 지내요. 집이 넓고 쾌적하죠? 친구 명숙이도 근처에 사니 더 자주 볼 수 있어서 좋아요. 벌써 강동구에 산지도 27년째네요. Q. 은경 : 상옥님을 보면, 배움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다고 생각해요. 고덕평 생학습관에서 초등교육과정을 졸업하시고, 중등 교육과정으로 이어가신 이 야기 더 듣고 싶어요. A. 상옥 : 어린 시절, 강원도 살았을 때 친구들은 모두 학교에 가는데 저는 가지 못했어요. 성인이 되어서도 늘 마음 한쪽에 학교 수업을 향한 갈망이 있었죠. 어느 날 친구 명숙이가 고덕평생학습관에 수업 들으러 간다고 얘기해주었을 때 저도 다니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가슴이 뛰었죠. 그리고 평소 관계있는 복지관 선생님의 주선으로 초등교육과정 수업에 참여했어요. 졸업장도 땄고요. 작년부터 올해 초까지는 중등 교육과정을 온라인 수업으로 듣고 있는데 최근에는 오래 앉아있으니까 몸에 무리가 와서 그만두었어요.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에게 수업은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재미를 주니까요. Q. 은경 : 열정을 갖고 해오던 일을 하지 못해서 무료하진 않으신가요? 새 롭게 마음 쏟고 있는 일이 있는지 궁금해요. A. 상옥 : 요즘에는 집에서 ‘세이클럽 음악방송’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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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틀어주기, 시 낭송, 진행 등 여러 역할이 있는데, 저는 신청곡이 들어오면 그 곡을 찾아서 틀어주고 있어요. 그리고 오래전부터 꿈이 하나 있었어요. 아는 언니의 권유로 25년 전에 ‘교도소 편지’를 시작했었죠. 처음에는 교도소에 있는 수감자 한두 명과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입소문이 나면서 20여 년 동안 많은 수감자와 편지로 소통했어요. 수감자는 제가 쓴 편지로 사회의 일부와 마주하는 거예요. 그거 아세요? 수감자 중에는 너무 가난하여 배가 고파서 순간 물건을 훔친 것으로 교도소에 들어간 사람도 있고, 친구와의 싸움으로 들어간 사람도 있어요. 수감생활을 마치고 사회로 복귀해 건강하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도 있고요. 그 중에는 장애가 있는 사람과 결혼한 사람도 있어요. 정말 다양한 삶의 모습이 있답니다. 이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다 간직하고 있어요. 엄청 많아요. 이 편지와 저의 이야기를 보태서 책으로 발간하는 것이 저의 오랜 꿈이에요.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어요. Q. 은경 : 그동안 상옥님과 관계해 온 시간이 있는데, 꿈 이야기는 처음 들어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분이 있었을까요? A. 상옥 : 어느 날, 수감자와 주고받는 편지에 ‘장애인’이라는 저의 정체성을 밝혔어요. 어떤 반응이 올까? 떨렸었죠. 그런데 계속 편지에 답을 주시더라고요. 사람 대 사람으로 인격적인 관계를 맺었다고 생각해요. 8~9년 동안 관계한 사람 중에, 실제로 저를 만나려고 찾아온 분이 있었어요. 그때는 제가 거주시설에서 지냈고 바깥에 나간 터라 만나지는 못했던 기억이 나네요. Q. 은경 : 수감자분들과는 주로 어떤 이야기를 나누셨나요? A. 상옥 : ‘희망’을 얘기했어요. 평생 교도소에 계시는 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이 많잖아요. 출소한다는 희망, 다시 새롭게 삶을 가꾸어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얘기하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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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은경 : 상옥님이 생각하는 희망은 무엇일까요? A. 상옥 : 음. ‘맨 밑바닥에 있을 때 딱 하늘을 쳐다보는데, 저 멀리서 빛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 비록 지금은 어려운 환경일지라도, 하늘을 볼 수 있고 빛이 보이고. 그리고 그 빛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 제가 생각하는 희망의 모 습이에요. Q. 은경 : 제가 들어본 희망 정의 중에 가장 멋져요. 오늘도 상옥님께 배웁니다. 상옥님의 꿈을 응원하고, 도울 일 있다면 함께 하고 싶어요. 상옥님의 글도 보고 싶고요. A. 상옥 : 무더운 여름 지나가면, 조금씩 글을 써 보려고요. 응원해 주세요. Q. 은경 : 마지막으로, 새로운 곳에서 지내시는 데 소망이 있다면 듣고 싶어요. A. 상옥 : 친구 명숙이와 만나는 것처럼 사람들과 만나고 싶을 때 만나고, 카페에서 커피 한잔하며 일상의 하루를 잘 사는 것이 소망이라면 소망일까요. 뭘 더 바라나요? 소박하게 그저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삶이라고 생각해요.
‘뭘 더 바라나요?’ 무심하게 던진 한마디 속에,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대하는 그의 깊은 생각이 전해졌다. 역시, 오늘도 그를 통해 삶의 관점과 태도를 배웠다. 사람 관계에서 공감과 소통 속에서 가족애와 같은 정을 느끼기도 한다. 또, 희망을 발견한다. 누군가의 하루 일부에 함께할 수 있음에 감사함을 느낀다. 원상옥 님의 꿈과 새로운 공간에서 일상의 삶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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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원상옥 나는 강원도 시골에서 태어났다. 커 오면서 학교에 다니고 싶어서 큰 엄마에게 학교에 보내달라고 했지만, 네 몸을 보라고, 그 몸을 가지고 글 배운다고? 하지만 나는 배우고 싶었다. 텔레비전을 보고 글자를 한 자 한 자 머릿속에 심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글 배우러 다닌다고 했다. 그럼 나도 다녀볼까? 지금은 너무나 행복하다. 선생님! 하고 불러보고 싶었는데 소원이 이루어졌다. 친구들도 너무 좋다. 지금 내 마음은 천국이다. 넓은 창공을 나는 새처럼 마음이 벅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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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재미를 아시는 원상옥 님이 고덕평생학습관 초등교육과정 수업 다닐 때 작성한 시입니다. 독립을 이룬 원상옥 님의 삶의 이야기와 자유로운 마음이 담긴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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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동물과 가족 이루며 살아요. - 가또네, 금옥이네 -
음민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삶이 변화하는 경험은 누구 에게나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세상을 보는 관점을 변화시킨 두 가지 인생 의 사건이 있었는데, 첫 번째가 엄마가 된 것이고 두 번째가 최근 개를 키우 게 된 거다. 아이를 키우며 세상을 보는 관점이 넓어진 것처럼, 개를 키우며 동물권과 다양한 생명이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는 지구에 대해 생각하게 되 었다. 장기화된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가운 데, 여기 동물들과 ‘가족’을 이루며 살아가는 두 사람이 있다. 반려견 가또를 키우는 오경은과 반려묘 금옥이를 키우는 김나희를 만나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오경은은 3년 전 일을 하다 우울증을 겪었다. 사람을 대하는 일에 지쳐 있었 고 자존감 또한 낮아졌다. 갑자기 찾아온 우울감과 무력감으로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에 상담 선생님의 권유로 가또(가또쇼콜라 색과 비슷해 지은 이름) 를 만났다. “가또는 상품성 없다고 판단되어 농장에서 번식견이 될 뻔한 아이였어요. 장 모 치와와 종이라 지금은 털로 덮여 잘 안 보이지만, 어릴 때는 털이 짧아서 머리 땜빵이 잘 보였거든요. 제가 안 데려왔으면 계속 농장에서 살았을 거예 요.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짠하죠.” 경은 씨는 가또를 만나기 전 강아지를 키울 수 있을까 한 달을 고민했다. 결 심이 선 뒤에는 주양육자가 되겠다는 의지를 가족들에게 분명하게 밝히고 데려왔다. 그러나 강아지를 돌보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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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처음 온 가또는 밤잠을 잘 안 잤어요. 그리고 사람을 좋아해 잠시도 혼자 있으려고 하지 않았죠. 각오는 했지만, 그동안 개인적인 생활을 하던 제가 강아지 돌보는 게 처음에는 너무 힘들더라고요. 울기도 하고, 가족한 테 도움을 청하기도 했어요.” 경은 씨는 삼 개월 이상이 지나 서로에게 점 차 익숙해지면서 어느 정도 포기하게 될 건 포기하게 되더라는 말로 가또 와 가족이 되는 과정이 쉽지 않음을 표현했다. 김나희와 고양이 금옥이의 인연은 코로나19 사태로 외국 유학을 중단하고 잠시 들어온 한국에서 우연히 길바닥에 피 흘리고 쓰러져있는 금옥이를 발 견하면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고양이인 줄도 몰랐어요. 아직 숨을 쉬고 있는 걸 알고는 무조건 안고 동물병원으로 뛰었어요. 병원에서는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고 하더라 고요. 의사 선생님께 꼭 살리고 싶다고 울면서 말했어요. 그때 처음 이 아이 에게 가족이 되어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나희 씨는 아픈 고양이에게 금지옥엽(귀한 자손을 이르는 말)의 줄임말 금 옥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병원에 입원시키고 치료를 돌봤다. 나희 씨의 진심이 전해진 것일까. 며칠이 지나 금옥이는 기적처럼 의식을 회복하고 밥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몸의 절반이 마비되어 서지도 기지도 못 하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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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천적인 뇌의 문제였고 금옥이는 평생 장애 묘로 살아가게 될 터였다. 어떻게든 살리겠다는 생각만 했다. 금옥이의 입원비, 그리고 앞으로도 들어 갈 치료비를 벌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했다. 아직 학생인 나희 씨는 아침부 터 새벽 1시까지 치킨 집 주방에서 아르바이트했다. 오직 금옥이의 병원비 를 벌기 위해 난생처음 시작한 일이었고 힘든 줄도 몰랐다고 한다.
금옥이 처음 발견당시
현재 금옥이
“주위에서는 장애 묘를 키우려면 돈도 많이 들고 힘든데 포기하는 게 어떠 냐는 충고도 해요. 하지만 금옥이가 얼마나 강한 생의 의지를 가졌는지 안 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거예요. 하루하루 좋아지고 있고, 저한테는 가족 으로서 얻은 책임의 무게가 더없이 소중해요. 전보다 가족이 화목해지고 풍 요로워진 것도 있고, 삶을 이해하고 대하는 제 태도 자체가 달라졌어요.” 집에서 장애가 있는 금옥이를 돌보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가족들의 도움으 로 함께 하고 있다. 하루하루 상태가 좋아지는 금옥이를 보는 것도 가족들 의 큰 기쁨이고 보람이 되었다.
현재 나희 씨는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을 살려 느린 아이들을 위한 영어 선 생님을 하고 있다. 아이들을 대하는 마음 또한 금옥이를 통해 더 넓어졌다 고 나희 씨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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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옥이를 만나고 난독증 아이들을 대하는 생각이 달라졌어요. 그 아이들이 행복했었으면 좋겠고, 영어로 더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만나 요.” 경은 씨도 가또를 돌보며 새로운 삶의 도전을 시작했다. 가또라는 존재를 통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행복감을 느낀 만큼, 양육자로서 책임을 다하 기 위해 다시 사회로 나가는 준비를 시작했다. 자신에게 맞는 분야를 찾아 공예 강사가 되었고, 활발한 배움을 통해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가르치며 다양한 영역의 시도를 하고 있다. “가또에게 슬개골이 좋지 않은 문제가 있어 언젠가 수술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병원비 마련을 위해서도 더 달려야죠. 힘든 일이 있어도 가또 생각하며 하 루하루 열심히 해보려고 해요.” 경은 씨는 가또와 함께 하며 변화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참 모자란 주 인과 대단한 너>라는 독립출판물을 출간하기도 했다.
때로는 친구처럼, 가족처럼 곁을 지켜주며 안정감과 행복을 주는 반려동물 을 키우는 인구가 1,500만, 현재 대한민국 전국 가구의 4분의 1인 591만 가 구가 반려동물을 기른다고 한다. 이 추세는 앞으로 더 늘어날 전망이다. 현재 동물은 민법 98조에서 유체물, 즉 사물로 취급받고 있는데, 물건이 아 닌 법적 지위를 받게 하는 법 개정을 최근 농림축산식품부에서 추진하고 있 다. 반려동물의 법적 지위 보장과 함께 반려동물의 학대, 유기에 대한 처벌 강화의 목소리도 높아지는 만큼 현실적인 대책이 마련되기를 바란다. 또한 경은 씨와 나희 씨처럼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의 92퍼센트가 부담 을 느끼는 동물병원 진료비에 대한 부담을 줄일 수 있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의 방안도 모색된다면 더 많은 반려동물 가구의 고민을 덜 수 있지 않을까? 인간과 동물이 함께 살아가기 위한 다양한 관점과 고민이 필요한 때, 가또 네와 금옥이네 가족 모두의 건강과 안녕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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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소소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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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소소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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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부터 우리집
김명국
누구나 한 명은 있다
김설희
코로나, 그리고 내 몸 성찰 일기
김인경
밥 푸는 사람
나성재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
유명한
삼대(三代)가 부르던 노래
박경숙
내 인생의 노래 – 서른 즈음에(김광석)
유서향
나는 방탄소년단의 아미이다!
유수경
은방울작업실에서
음민서
우리들만의 여행
이미옥
내 인생의 명곡?
이은진
내가 어쩌면 갈 수도 있었을 길
한 사람의 힘
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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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부터 우리집 김명국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누구나 꿈꾸는 계획이 산속 깊은 계곡물 흐르는 산 골에 전원주택 한 채 마련해 조용히 쉬면서 텃밭 일구고 나물 캐며 도시를 떠나서 조용히 ‘자연인’ 같이 살고 싶은 마음일겁니다,. 저는 홍천에 작은 주택 한 채, 약 230평(명일동에서 1시간 거리, 약 93km)를 구입했지요. 주중에는 서울에서 반찬가게를 운영하고 금요일 오 후부터 일요일까지는 전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금요일부터 홍천집이 우리 집이지요. 전원생활을 해보니 꼭 꿈과 낭만만 있 는 것만은 아니더라고요. 전원의 아름다움의 즐거움은 낭만(30%)과 노동 (70%)의 정성이 있어야 잘 가꿔지더군요. 거의 잡초와 오랜 시간 전쟁해 도 그래도 행복합니다.
얼마 전 5월초에, 아주 어렸을 때 시골에서 봤던 제비 한 쌍이 우리 집 처마 에 둥지를 틀기 위해서인지 처마 밑을 분주히 오가더니 집을 지으려 하더라 고요. 순간 고민도 했습니다. 제비집을 지으면 벌레도 생길 거 같고 배설물 도 생기고 지저분할 것 같아서 조금 망설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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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청소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 집을 선택해서 둥지를 튼다는 생각에 왠 지 좋은 소식과 행운의 박씨 하나를 물어다 줄 것 같아 입주를 허용하기로 했어요. 제비 암수는 열심히 집을 지으려 흙과 풀을 으깨어 물어 나르는 것을 보며, 나름 정착을 잘 하고 있는 것 같아 정말 조용히 숨죽이고 생활했습니다. 비 록 처마 밑에 새끼 제비 배설물이 떨어지는 게 좀 불편하긴 하지만 자주 청 소를 해주며 편안하게 생활하도록 최대한 배려를 했습니다.
약 3주가 지나 제비가 둥지에 계속 앉아 있는 것을 보니 직감적으로 둥지에 분명 알을 낳았을 것 같았습니다. 제비가 알을 낳았는지? 낳으면 몇 개 낳 았을지? 궁금했지만, 제비 둥지 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신혼 살림집을 들여 다보는 것 같아 꾹 참았습니다. 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다가 제비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살짝 제비 침실을 살펴 사진을 찍었더니 둥지에 알을 4개 낳았더라고요. 정말 신기했어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것에 흥분이 되더라고요. 더 조심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우리 집에 둥지를 틀어 저에게 또 다른 가족을 만나게 하는 기 쁨을 주었습니다. 이제 제비 한 쌍 2마리, 알 4개(앞으로 태어날 새끼 4마 리)로 불어날 것을 기대하며 함께 대가족의 즐거움을 누릴 것에 가슴이 벅 찼습니다. 이제 제비들은 신기하게도 제가 가까이 다가가도 놀라지도 않고 나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제비가 저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함 께 공생을 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 집 주인인지는 잘 모르지만요.
주말을 지내고 서울로 올 때도 우리 제비가 집을 잘 지켜 줄 거 같아 위안이 되더라고요.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제비집이고 금요일부터는 우리 집인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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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주말엔 아침에 짖어대는 제비 소리에 잠을 깨는데, 아마 이 글을 마칠 때 쯤 몇 주만 지나면 4마리의 새끼가 건강하게 태어나서 먹이 달라고 ‘지 지배배, 짹짹’ 짖어대는 소리로 집 전체가 새 울음소리로 가득 차겠죠? 시 끄럽겠지만 좋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동물이나 사람들도) ‘삶을 공유한다’는 건 때론 불편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함께 함’으로 인해 더 큰 풍요함을 누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쩌 면 ‘공생’이라는 말로 더 잘 표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작은 제비 가 족을 잘 돌보고 살피는 것도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이 아닐까? 생각 합니다. 지금도 잠시 앉아서 지켜보고 있으면, 수도 없이 여러 번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보니 조만간 부화가 될 거 같아요. 우리 집에 둥지를 틀어 새끼까지 낳 았으니 이제 월세를 올려 받는 대신에 조금만 더 지나면 훨훨 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을 기대하며 내년에도 또 와서 둥지를 틀 수 있도록 우선 계약 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주중엔 제비집, 금요일부터는 우리 집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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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 명은 있다 김설희
누구나 한 명은 있다. 오빠가. 사춘기 시절에는 누구나 사랑을 시작하지 않는가. 그게 풋사랑이든, 짝사랑 이든, 첫사랑이든 그때는 여고생이었고 에너지 넘치던 시기였다. 넘치는 에너지를 좋아하는 이에게 쏟고 싶은 마음이 가득할 때였다. 조숙한 여고생들에게 여드름이 나 고 땀 냄새 풍기는 또래 남학생과의 사랑을 그리기는 어려웠다. 러브스토리는 안타까울수록 높은 점수가 나오는 법. 또래에게는 느낄 수 없 는 안타까움이 필요했다. 더군다나 텔레비전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아이 돌 그룹 탄생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잘 생기고, 노래 잘하고, 춤도 잘 추는 아이돌 그룹들이 여름 밤하늘에 폭죽 터지듯이 나타났다. 사랑에 빠지기 위해 준비가 된 마음과 사랑을 받기 위 해 기다렸다는 듯이 매력을 뿜어내는 아이돌과의 만남은 시너지를 발휘하여 여고 시절을 핑크빛으로 물들였다.
친구들도 예외는 아니었으니 같이 다닌 친구들 중 한 명은 김원준, 두 명은 HOT에 푹 빠져있었다. 누가 봐도 잘생긴 얼굴의 김원준과 귀엽고, 멋있 고, 그때의 대세였던 HOT는 여고생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했다. 등굣길부 터 어젯밤 텔레비전에서 본 아이돌 오빠들의 멋진 모습에 감탄하고, 그들이 나오는 프로그램 정보를 교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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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끼리 같은 그룹에서도 좋아하는 멤버의 사진과 덜 좋아하는 멤버의 사진을 교환했다. 모으는 사진 중 중복된 오빠들 사진은 친구들에게 나눠주 며 그룹 홍보를 자처하고 인심도 썼다.
지겨운 학교 자습시간은 이어폰으로 오빠들의 노래를 들으며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졸업하면 어떻게든 오빠를 만나러 갈 거라고 주문을 외우며 그 시 간을 보냈다. 우리의 일상을 함께해준 오빠. 사랑의 단계를 밟듯 친구들의 사랑도 점점 발전해갔다. 앨범과 사진, 기사 등 자료 수집이 사랑의 시작이다. 관심이 깊어지면 오빠들의 춤을 따라 한 다. 느낌이 많이 다르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사랑은 맹목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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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어울려 아이돌 멤버의 사진도 갖고 다니고 춤도 따라 했지만 지구력이 약해서인지, 반골 기질이 그때부터 있어서인지 아이돌 그룹은 나의 흥미를 오래 끌지 못했다. 이런 나와 달리 친구들은 잠실 지하상가에서 HOT의 캔 디 아이템인 벙어리장갑을 끼고 멜빵바지를 입고 오빠와 공감을 시도한다. 이래도 갈증이 해소가 안 되면 오빠들이 다니는 학교, 숙소 앞에서 기다리 기. 그렇게 사랑은 호감과 열정에서 인내심으로 단계를 밟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사랑이 영원할 수 있는가. 여고생의 뜨거운 가슴은 뜨거운 만큼 빨리 식기도 한다. 학년이 바뀌면서 사랑도 변했다. 학업에 대한 걱정이 바짝 다가오기 시작하고 마냥 좋았던 마음이 예전 같지 않다. 사랑을 진하게 했으니 새로운 사랑의 대상을 찾지 는 않지만 전 연인의 행복을 빌어주는 마음 같다고나 할까. ‘잘 살아라. 사랑했다’ 시간이 흘러 우리는 졸업을 했고, 졸업에는 오빠들의 덕이 있었다. 그 시간 이 아니었다면 시험과 성적에 짓눌린 마음을 어디에서 위로 받았을까. 뺨에 어린 홍조와 두근거림은 오빠들 아니면 어디에서 얻었을까.
‘단지 널 사랑해 이렇게 말했지 이제껏 준비했던 많은 말을 뒤로한 채 언제나 네 옆에 있을게 이렇게 약속을 하겠어 저 하늘을 바라다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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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그리고 내 몸 성찰 일기 김인경
후회 없는 삶은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후회 없는 삶을 꿈꾼다. 일주일 전, 코로나 방역이 4단계로 강화되었다. 8월쯤이 되면 저녁 늦 은 시간에도 친구들과 맥주라도 한 잔 할까 말해지고, 백신접종률이 올 라가면서 거리두기도 대폭 완화될 거라는 잠깐의 설렘과 기대감이 있 었다. 그것도 잠시 델타변이바이러 스의 등장과 함께 수도권을 중심으 로 한 코로나 확진자의 급격한 증가 와 함께 학교와 어린이집은 다시금 닫게 되고 나와 아이들은 다시 집안 그림 김릴리
에 갇혀있게 되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지금 내 상태를 보면. 마음은 답답하고 하고 싶은 것이 없고 뭔가 해도 잘 되지 않을 거라는 회색 구름이 가득 차 있다. 몸은 양쪽 귀 뒤에 물집이 잡혀 있고, 호르몬의 급격한 변화로 몸은 찌뿌듯 하고, 오른쪽 윗니는 시리다. 자주 찾아오는 비염으로 머리가 멍하고 가끔 번개가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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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나를 위해 필요한 말? 지난 코로나 팬데믹 당시 쓰려고 제목만 저장해 둔 글을 우연히 발견했다. 제목은 <조금은 후회해도 돼> 당시 코로나가 1년을 맞이하는 시점에 한정된 생활반경 안에서도 무엇인가 해보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불안했고, 뒤 처지지 않을까 조바심 내던 순간으로 기억된다. 그렇지 못한 순간에도 후회 하지 않고 싶어 하는 나를 발견했다. 그때 나의 부풀어져 있던 기대감에 아주 작은 구멍을 내야 내가 한계치를 넘 지 않고 이 시기를 잘 살아낼 수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 조그마한 구멍은 나 스스로에게 주는 마음의 여유 공간이었던 같다. 이 말을 지금 나 스스로 해줄 수 있다면 초조하고 긴장한 몸과 마음에 위안이 될 것 같았다.
코로나19 팬데믹과 함께 우리가 세워놓았던 계획들은 무산되었고, 아이들 과 한 발자국 밖에 나가는 외출을 할 때에도 안전과 위험 사이의 경계에서 불안과 걱정을 마주하게 된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선 내가 통제하고 책임질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 하루를 살아야 한다는 삶의 동기였던 열심 에너지가 지금은 오히려 독이 되고 있었다. 삶을 살아가면서 어떤 단계로 올라가려면 힘을 빼는 훈련이 필요할 때가 있 다. 노래를 부르거나 요가 수련을 하거나 악기를 연주할 때 등 힘을 주는 것보다 빼는 훈련이 필요하다. 지금이 나에게 그때인 것 같다. 계획된 것들에 힘을 좀 빼고 나를 돌보는 시간. 내 업적이 아닌 존재로도 괜찮을 수 있다고 말해줄 수 있는 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다고 말해주는 시간. 내 몸과 대화하고 더 인식하고 몸과 마음의 감각을 통일시키는 시간. 지금은 내 삶의 주체와 건강한 에너지와 동기를 리셋(reset)시키는 소중한 시간으로 만들고 싶다. encourager2020@naver.com 41
밥 푸는 사람 나성재
저녁 시간 와이프는 평소보다 더 바빴다. 저녁 준비를 하면서 한편으로 큰 아이 감은 머리 말려주느라 정신이 없다. 큰아이는 머리가 어깨를 지나서 허리까지 내려 올 만큼 길다. 게다가 머리숱이 많다. 물에 젖은 머리, 무거 운 머리를 말리느라 와이프가 씨름하고 있었다. 와이프가 둘째에게 다급하게 밥을 푸라고 말했다. 밥 먹고 첫째가 바로 학 원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밥 푸러 가야하는 둘째가 갑자기 내가 앉아 있는 소파로 와서 누웠다. 얼굴을 인형으로 가리고 숨은 거칠게 몰아쉬었다. “내가 밥 푸는 사람이야!” “항상 네가 하던 일인데 왜 그래?” 잔뜩 심통이 난 둘째에게 왜 그러냐고 물어보았다. “엄마가 빨리 밥 푸라고 나한테만 다그치고 언니 머리만 말려주잖아.” “그래서 우리 둘째가 화가 났구나” 우리 집 두 딸은 두 가지 집안일을 책임지고 있다. 첫 번째 일은 수요일과 목요일, 일주일에 두 번 분리배출을 담당한다. 두 번째 일은 저녁 식사 준비 를 도와주는데 첫째는 숟가락 젓가락을 놓고 둘째는 밥을 푼다. 난 둘째의 손을 잡으며 잠시 있다가 말을 이었다. “둘째야, 밥을 안 먹으면 사람이 살아?, 죽어?” “죽지” “둘째 너는 엄마, 아빠, 언니 우리 모두에게 생명을 주는 사람이야. 너는 가 족에게 생명과 사랑을 전달해주는 소중한 사람이야.” 거친 숨으로 들썩이던 둘째의 가슴이 순간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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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언니에게 머리 말리고 난 후 숟가락, 젓가락 꼭 놓으라며 다짐을 받고 드디어 밥을 푸러 갔다.
우리가족은 둘째가 퍼준 맛있는 밥으로 저녁을 먹었다. 엄마도 밥을 먹으며 둘째에게 생명과 사랑을 나누어 주어서 감사하다고 칭찬을 듬뿍해주었다. 이제 둘째는 밥 푸는 부엌데기에서 우리 가족에게 생명과 사랑을 나누어주 는 소중한 사람으로 거듭났다. 누군가의 존재 의미를 알아 봐주는 것, 그건 그 사람을 살맛나게 만드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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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
無PD
음악은 삶과 가까웠다. 어려운 때일수록 거리는 좁아졌다. 초등학교 5학년, 집안 사정으로 서울 동쪽 끝 구석에 있는 조용한 동네로 이사를 갔다. 마을버스 02번 종점 버스정류장 옆이 집이었다. 컨테이너를 조잡하게 개조한 곳이 거처였다. 집 옆에는 공터와 간이 화장실이 있었다. 보일러는 따로 없어서 매번 물을 끓여서 씻어야 했다. 서울이었지만 공기는 맑고 밤하늘에 별이 무수히 보였다. CD플레이어는 보물1호였다. 공터에 있는 멍멍이들과 노는 것을 빼면 음악 감상이 유일한 낙이었다. 힙합이 주류였던 당시 최신 가요보다는 팝송을 좋 아했다. 집에서 라디오나 1960~1970년대 올드팝을 자주 틀어놓은 부모님 영향이었다. 많은 노래는 아니었지만 ‘The Beatles'를 비롯한 유명 가수들 이 부른 팝송들을 접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Led Zeppelin이 부른 ‘Stairway to Heaven’을 좋아하셨다. 팝 송을 틀면 유독 이 노래를 반복해서 들으셨다. 대학생 시절 즐겨 들었던 노 래였다고 했다. 평소 말씀이 없고 점잖으신 분이라 헤비메탈을 좋아하신다 는 건 의외였다. 나중에 어머니께서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오래 전 아버 지께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셨다. 사진 속 인물은 앳된 얼굴에 곱슬거리는 장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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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살 아래였던 동생은 양손으로 두 눈을 가린 후 고통스러운 소리를 냈다. 청바지를 입고 통기타를 들고 있는 사진도 있었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통제 와 억압에 저항하고자 했던 건 모르겠다. 머리카락을 잘리기 싫어 경찰에게 서 도망 다녔던 건 확실했다. 가죽재킷을 입고 바이크 모는 것을 좋아하셨 던 것을 떠올려보면 이상할 것도 아니었다.
어머니는 팝송보다는 국내 가요를 좋아하셨다. 팝송이 아닌 라디오 소리가 들리면 십중팔구 집에 계신 건 어머니였다. 그 당시 방송에 자주 나오던 임 주리가 부른 ‘립스틱 짙게 바르고’를 좋아하셨다. 최백호가 부른 ‘낭만에 대하여’를 동생이 좋아했던 것은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나마 팝송 중에는 ‘Sealed with a Kiss’를 자주 들으셨다. 여러 가수들이 불렀지만 그 중에서 Brian Hyland가 부른 곡을 좋아하셨다. 라디오에서도 간간히 접했던 노래 였기에 어머니께서도 낯설지 않았던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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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만 나면 CD플레이어와 붙어있는 덩치 큰 초등학생은 솔로보다 그룹을 좋 아했다. 당시 유행하던 R&B가 그랬다. all-4-one이 부른 I Swear, Boyz II Men이 부른 End of the Road, I'll Make Love to You가 있었다. 가장 좋아했던 가수는 Sound of Silence, scarborough fair, Bridge Over Troubled Water를 부른 Simon & Garfunkel이었다. 포크라는 음악장르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두 가수가 만드는 화음과 감미로운 음색이 잔잔하면 서도 인상 깊은 감동을 줬다. 대학생 때 SG워너비가 우리나라에 등장하자 마자 팬이 됐던 것도 Simon & Garfunkel Wanna be 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중학생이 되고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CD플레이어는 컴퓨터가 대신하게 되 었다. 팝송보다는 최신가요를 찾게 되었다. 그나마 찾아듣던 최신 노래들도 군대를 전역한 뒤에는 점점 멀어졌다. 2011년 5월 SG워너비 리더였던 채동 하가 세상을 떠난 후, 최신 노래도 더 이상 찾아 듣지 않았다.
얼마 전 방송에서 SG워너비가 나온 것을 봤다.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난 기분 이었다. 다들 비슷한 마음인지 방송 이후로도 큰 호응이 있었다. 군 복무 중 알게 된 SG워너비가 부른 숨겨진 명곡, ‘Stay’를 시작으로 즐겨듣던 노래 들을 다시 찾았다. 장롱이나 서랍 구석 어딘가에 있는 빛바랜 사진들을 다 시 본 느낌이었다. 문득 어머니가 떠올랐다. 대학교 졸업 후 가산을 정리하고 어머니는 30년 넘게 살던 동네를 떠났다. 그날부터 어머니는 소파에 앉아 노래 프로그램 보는 게 일과가 되었다. 어지간한 노래프로그램은 다 챙겨보시는 거 같았 다. 종종 라디오도 같이 켜두신다. 전화기 벨소리까지 세 곡이 넘는 노래를 같이 들을 때도 있었다. 다음에 찾아뵈면 예전에 좋아하셨던 노래들을 찾아 드릴 생각이다. 그 때는 TV나 라디오, 둘 중 하나는 꺼놓으실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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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三代)가 부르던 노래
박경숙
작은 키에 볼록 나온 뱃구레, 앙증맞은 손발을 곧게 펴며 딸아이는 발레를 했다. 다섯 살 때 뜀뛰기하듯 시작한 발레가 여섯 살이 되면서 나름 음악에 맞춰 감정을 담아내며 재롱을 부리기에 충분했다. 아들 셋만 내리 키운 시 부모님은 끼 많은 재롱둥이 손녀 보는 일이 일상의 큰 행복이었다. 그날도 시가 거실에 모여 앉아 딸아이의 발레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 가 포즈를 취하면 시아버지는 늘 오래된 더블데크 오디오에 담긴 조용필 테 이프의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바람 속으로 걸어갔어요. 이른 아침의 그 찻집 마른 꽃 걸린 창가에 앉아 외로움을 마셔요. 아름다운 죄 사랑 때문에 홀로 지샌 긴 밤이여 뜨거운 이름 가슴에 두면 왜 한숨이 나는 걸까?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대 나의 사랑아!~
‘그 겨울의 찻집’이 흘러나왔다. 70대 중반의 노부부, 30대의 젊은 부부는 가슴 한 편을 스산하게 스치는 조용필의 노래에 맞춘 꼬맹이의 창작발레 공 연에 빠져 들었다. 한껏 끼를 발산하고 난 딸아이가 문득 “하비, 근데 왜 웃 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거야? 왜 웃는데 눈물이 나는 거지?”라는 말을 하 며 시아버지 품에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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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잠시 침묵. 뭐라 대답하기 곤란한 듯 애매한 상황에 시아버지는 “사람은 기뻐도, 슬퍼도 눈물이 나는 거야. 슬픈 일을 많이 잊고 웃으며 살아 도 또 생각나서 우는 거지.”
그날 이후 ‘그 겨울의 찻집’ 노래에 맞춘 꼬맹이의 발레는 특히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부분에서 더 감정을 넣어 춤추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가족들은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춤을 보며, ‘눈물이 나게 웃으면서’ 차 츰 그 노래를 애창곡으로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가 더 이상 가족들 앞에 서 발레를 하지 않는 나이가 되면서 ‘그 겨울의 찻집’은 조금씩 잊혀져갔다.
“조용필 노래 좀 틀어줘. ‘그 겨울의 찻집’이 듣고 싶다.” 작년 초 병원에 입원하신 시아버지께서 수술 후 조용필 노래를 찾으셨다. 세월을 고스란히 담은 조용필의 노래는 병실 안에서 ‘허공’부터 ‘꿈’을 지나 ‘바람의 노래’를 거쳐 ‘그 겨울의 찻집’에 머물렀다. “서영이가 어렸을 때, 웃고 있는데 왜 눈물이 나냐고 물었었지.” 강한 진통제를 맞으면서 까무룩 해져도 시아버지는 16년 전 일을 그대로 기 억하며 옅은 미소를 지으셨다.
혹시나 마지막 길이 아닐까 싶어 보름동안 매일 시아버지 병실에 드나들었 다. 진통으로 괴로워 간병인과 시어머니께 신경질을 많이 부리시다가도 막 내며느리가 가면 애써 태연해지려고 애쓰셨고 함께 조용필 노래 이야기로 많 은 시간을 보냈다. 남편보다 5년이나 먼저 만난 시아버지. 30년 전 학교 강 단에서 쩌렁쩌렁 울리던 목소리로 수업하시던 모습은 사라지고 뼈만 앙상하 게 남은 손과 이마를 쓰다듬다보면 영락없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렇게 그 분 은 다시 아이로, 촛불처럼 사라지셨다. 30년간 각별하게 지내던 시아버지가 떠난 자리는 너무나 헛헛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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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시아버지의 1주기가 되어 산소에 다녀왔다. 늘 좋아하시던 블랙커피 한 잔, 캬라멜 한 봉지, 그리고 ‘그 겨울의 찻집’ 노 래도 함께 곁들여 드렸다. 맞아요. 아버지. 인생은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그리움의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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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노래 – 서른 즈음에(김광석) 글·그림 유서향
20대의 끝자락 내게도 찬란했던 20대가 아스라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3으 로 시작 할쯤 그동안 미뤄 두었던 질문들에 답을 찾아야 할 것 같아 밤마다 잠자리에 불면의 밤을 보냈다 ‘그 동안 뭘 했니?, 돈은 얼마나 모았니?, 결혼은?, 회사는 얼마나 더 다닐 수 있니?, 행복하니?’ 등등. 내가 나한테 하는 질문이지만 묻는 나와 대답하는 나는 다른 이가 되어 격 렬하게 비난하고 때 늦은 후회와 변명으로 합리화하면서 끝도 답도 없는 질 문과 대답을 무한이 반복하였다.
대학 졸업 후 내가 원하는 일을 찾아 여러 회사를 전전했다. 디자이너로 뽑 아놓고 디자인보다는 시장 장보는 일꾼으로 부리는 회사도 있었고 ,디자인 영업을 시키는 회사도 있었다. 그런 곳에서는 수습이라는 기간을 한정한다 는 달콤한 약속을 했지만 지켜지지는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이 욕심이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 IMF로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회사를 찾아 구직활동을 했 다. 혼자가 아니라서 안도했지만 그만큼 더 두렵기도 했다. 여러 번의 면접 과 실기 테스트를 거쳐 드디어 원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어렵게 구한 직장에 맞춰 조금씩 적응할 때쯤 다시 나는 내 질문의 답을 찾 기 시작했다. ‘돈은? 이제부터 모아야지, 결혼은? 지금 만나는 사람은 있 지만 결혼은 글쎄, 회사는? 지금 업무에 만족은 하지만 연봉은 그렇지 않 으니 연봉협상 시 다시 이직을 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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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많았던 대학생 때 생각했던 서른 즈음은 나름의 경력과 돈이 당연히 세 트로 쌓이고 독립을 해서 멋진 싱글 라이프를 즐길 수 있으리라 상상했는 데. 서른 즈음의 난 독립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었고 멋진 싱글라이프는 드 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을 통해 간접경험을 할 뿐 찌질 하고 궁상맞은 하루 에 하루를 더해 살아가는 직장인이자 생활인이었다. 정신없이 20대의 치열함이 한차례 지나고 나니 이젠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가 올 때는 슬쩍 남의 집 담장 아래서 잠시 피해 가는 요령도 생기고 왔던 길이 아닌 것 같다 싶으면 바로 경로를 이탈하기 보단 무사히 지나온 길들 에 감사함을 챙기는 여유도 생겼다. 하지만 현실은 딱 내가 견디기 버거울 만큼 무겁게 나를 짓눌러 주저앉히곤 했다.
그럴 때 내게 위로가 되어준 노래가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다. 빛나던 20 대의 청춘과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는 나에게 그동안 살아온 삶의 상처들을 하나씩 ‘호호’ 불어주며 발라주던 소독약이 되어준 노래. 30대를 준비하던 불안하고 외로운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던 노래. 지금은 ‘쉰 즈음’으 로 개사가 되어 아직도 내 머리에서 계속 리플레이 되고 있다. ‘담배연기처 럼 작기만한 내 기억 속엔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50살이 내일 모레지만 난 아직도 모르겠다. 세상에 정답이 있는 줄 알고 누구보다 빨리 정답을 찾아야 행복할 수 있다 고 믿었던 20대의 사회인이 이젠 세상의 답은 내게 있다고 생각하고 이젠 내안에서 찾아 헤매고 있다.
세상에 정답이 있는 줄 알고 누구보다 빨리 정답을 찾아야 행복할 수 있다 고 ‘50살이 되기 전에는 어렵겠지만 눈감기 전에는 찾아지겠지’란 희망을 갖고 점점 더 멀어지는 청춘도 웃으면서 보내주고, 매일하는 이별도 반갑게 맞아주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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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내 나이도 지나고 보면 청춘이었고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이 오늘 의 꿈이었을지 모른다. 이젠 찾아도 없는 비어진 가슴 말고, 세상을 가 득 품고 채워 내 답을 열심히 찾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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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방탄소년단의 아미이다! 유수경
나는 방탄소년단의 아미이다. 타이틀은 아미이지만 실상은 에미 뻘이다. 92, 93, 94, 95, 97년생 7명이 모인 타니들과 비슷한 나이대의 우리 집 94년생은 가끔 지청구를 하고 생전 안하던 샘을 부린다. “아이고 어머니, 그 관심, 아들에게나 주소.” ‘옴마, 뭐래! 내가 그렇게 제 주위를 맴돌며 진심어린 조언(?)을 쏟아낼 땐 ‘나는 이제 성인이니 알아서 살게 놔두시고 어머니 인생을 되찾으시라' 며 가열지게 밀어내더니 이제 내가 방탄이를 만나 행복하게 살려니까 은근 뒷다리를 잡아?, 언제 한번 제대로 맞장 떠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지방에서 직장을 다니며 가끔 집에 오는 94년생 둘째의 손에 어느 날, 시커 멓지만 어쩐지 느낌이 좋은 봉투가 하나 들려 있었다. 마치 오다가 길에서 주웠다는 듯 쿨하게 내려놓고 제 방으로 사라지는 순간 하이에나처럼 포장 을 뜯었다. 제 아비의 피를 물려받았는지 당최 손에 뭘 들고 들어오는 타입 이 아니어서 궁금함이 더했다. 갤럭시 무선 이어폰 버즈. 그것도 방탄 아미 를 겨냥해 생산한, 보라색 펄 한정판이었다. 모든 액세서리를 질색하는 데다 특히 기능에 기능을 더해 쓰기 복잡한 기계 에 대한 거부와 혐오가 심한 나는, 운전하며 전화를 직접 받는 통에 94년생 으로부터 온갖 잔소리와 구박을 듣고 있었다. “운전하며 전화 받지 마요. 꼭 받아야 한다면 무선 이어폰에 블루투스를 연 결해서 써요. 제발!” 그러면서 사준 무선 이어폰을 정말 본의 아니게 차 어딘가에 두었다. 기능 이 낮아 안 쓰는 줄 알고 더 좋은 것을 사주겠다는 말에 기겁하며 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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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지 마! 안 돼. 귀에 뭘 막고 소리를 듣는다는 자체가 마음에 안 들 어. 불편해도 옛날식으로 사는 게 마음 편하다.” 아들은 블랙박스, 내비게이션, 그리고 무선 이어폰은 현대인의 기본 장비 라며 하나도 안 가지려는 나를 늘 딱하게 여겼다. 틀딱! 방탄 갤럭시 버즈 는 평소 방탄과 함께 사는 내게 유용한 미끼였다. 방탄과 관련되면 무엇이 든 수용하는 나의 치명적인 약점(?)을 영리하게 이용한 셈이다. 몸에 걸치는 거 질색하고 불편해도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자연인처럼 살겠 다더니 방탄 무선 이어폰을 보자마자 바로 귀에 꽂고 사용설명서를 뒤적이 는 엄마가 웃기면서도 재미있었나 보다. 혼자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막힌 귓 가로 흘러 들어왔다. “이제 방탄 블랙박스와 방탄 내비게이션만 나오면 되겠군.” 나는 왜 방탄소년단을 좋아하고 아미가 되었는가? 방탄 앨범과 굿즈를 사 서 쟁이고 세상 곳곳에서 열리는 콘서트를 따라다니며 열광하지는 않지만 방탄소년단의 모든 음악 활동과 철학을 지지하고 그들의 노래와 춤, 퍼포먼 스를 기꺼이 즐기며 주변에 알리고 있다. 어린데다 잘생기고 착한 녀석들이 예쁜 짓을 골라 하니 꼭 방탄소년단 아미가 아니어도 싫어할 이유는 없다. 물론 방탄의 충실한 팬덤은 당연히 그들의 음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초기 노래들은 불공정 경쟁 속에서 있는 힘을 다해야 하는 흙수저 인생의 고단함과 불안의 극복과정을 담고 있다. 그들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신자유 주의적 경쟁에 자신을 갈아 넣으라는 자기계발 논리가 아니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존감을 지키면서 미래를 향해 함께 연대하자는 것이 다. (홍석경/ ‘BTS 길 위에서’ 저자) ‘러브 유어 셀프’로 요약되는 유엔 연설은 방탄 팬덤이 나이, 성별, 인종, 국가를 넘어 전 세계로 확대하는 다이너마이트가 됐다. 이후 발표하는 곡마 다 자신들이 처한 현실과 시대 상황을 반영하며 사람들에게 용기와 에너지, 행복을 주는 메시지를 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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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의 모든 것을 좋아하고 아미로서 당당할 수 있는 배경에는 내 가수, 내 새끼들이 음악으로 보여주는 삶의 철학이 너무도 대견하고 예뻐서이다. 어 린 나이에 엄청난 명성과 부와 영예를 가졌음에도 처음 회사 근처 빌라에서 함께 뒤엉켜 북적대던 때의 순수와 감성, 열정을 놓지 않을 뿐만 아니라 7 명 각자 만들어 내는 아우라의 조화가 또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 90년대 생 일곱이 만들어가는 새로운 시대의 비전과 희망이 나를 방탄 아미로 우뚝 서게 했다. 어쩌면 90년대생을 키우고 그가 살아갈 세상이 정말 좋아지길 바라는 애미 의 마음이 아미 탈을 쓰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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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방울작업실에서
음민서
“엄마, 나 좀 학교로 데리러 오면 안 돼? 다른 엄마들은 만날 온단 말이 야.” 아이의 말이 생각나 학교 앞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바람은 조금 불어도 따 뜻한 햇볕이 기분 좋게 내리쬐는 1월 오후였다. 교문 앞에서 손 흔드는 나 를 보고 마스크 쓴 아이의 두 눈이 함빡 웃었다. “놀이터 들러도 돼?” 아이가 물었고 “그럼, 당연하지!” 내가 답했다. 놀이터에 도착하자 아이는 친구들과 미끄럼틀 주변을 뛰어다니며 웃음을 날렸다. 오랜만이었다. 같이 놀이터에 들르는 게. 어릴 때는 매일 눈 뜨면 놀이터에 가자고 조르고는 했었다. 혹시라도 넘어질까, 엄마를 찾을까 아이 옆을 지 키던 시절은 다 가고 이제 친구들과 어울려 잘 노는 아이를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기만 해도 된다. 이런저런 생각에 웃음이 났다. 그러다 옆에 다른 아 이의 어머니 한 분과 눈이 마주쳐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서윤이 엄마 김인경이에요.” 서글서글한 눈매에 차분한 목소리가 인상적인 인경 씨는 나처럼 아이가 둘 이라고 했다. 아직 어린이집 다니는 둘째가 있고 강동구에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여 오지라퍼인 내가 나섰다. 작은도서관 함께크는우리를 비롯해 마을네트워크 이야기, 강동구의 가볼 만한 곳들 소개 등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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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서로에 대해 더 알게 되었는데, 인경 씨는 현재 상담 대학원에 다니고 있고 상담사로서 다양한 돌봄 노동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집안에서 가사와 육아를 담당하는 엄마로서, 사회 변화를 바라는 여성으로서 다양한 의제로 생각의 결들을 맞추어 보며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 말이 잘 통해 즐거웠고, 나 또한 그런 마음 으로 마을 활동을 하고 있기에 공감할 수 있었다. 처음 만난 타인이지만,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친구를 만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나를 놀라게 한 한 마디는 이것이었다. “사실 글을 쓰고 싶어서 브런치에 연재하기도 하거든요. 작업실이 필요해서 얼마 전까지 친구랑 구하러 다녔어요.” 인경 씨의 말에 머릿속에 환한 불이 켜지는 것 같았다. 나 또한 얼마 전까지 친구들과 작업실을 구하러 다녔기 때문이다. 그런 이상한 욕구를 지닌 엄마 들을 또 만나게 되다니. “저도 친구들이랑 작업실 구하는 중이거든요. 이것도 인연인데 다 같이 만 나 볼래요?” 나는 전체 모임을 제안했다. 인경 씨를 만나고 돌아가던 날 나는 친구들에 게 전화해 인경 씨 소개를 하고, 마을담 활동을 같이하는 박경숙 샘께도 우 리의 만남을 알렸다. 글을 쓰고 작업실을 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만날 이유는 충분했다.
대망의 전체 모임 날, 처음 만난 자리에서 우리는 각자 소개를 하고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자, 이제 작업실 구하러 가볼까요?” 하는 내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다 같이 벌떡 일어나 부동산으 로 향했다. 조금 이상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날 바로 작업실을 보러 간 게 당시에는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질 만큼 공간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컸다. 찬바람에 꽁꽁 언 손을 호호 불어 녹이며 우리는 상일동을 헤매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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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도 웃긴 장면은 그날따라 두 친구가 똑같은 잠바를 입고 나타난 거였다. 흔치 않은 스타일의 회색 잠바였는데, 똑같은 잠바를 입은 두 사람 이 앞서서 팔짱을 끼고 걷는 모습을 보며 나머지 사람들은 뒤에서 킥킥대며 웃었다. “오늘 처음 만나 방 보러 다니는 것도 웃낀데, 옷까지.” “이거 무슨 영화 같지 않아요?” “진짜 독립영화 찍는 거 같아요.” 공간을 구할 돈도, 구체적인 계획도 없었다. 그저 뭔가에 홀린 듯 우리는 부동산 아저씨를 따라 상일동 일대를 쏘다녔다. 그러다 배가 고파져서 즉석 떡볶이 집에 들어가 떡볶이를 시켰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중, “우리 작업실 이름 지어볼까?” “레트로 느낌으로 쌍방울 이런 거 어때?” “그럼 쌍방울 말고 은방울, 은방울작업실 어때요?” 이런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네이버에서 얼른 은방울을 검색해보았다.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인 종 모양의 은방울꽃 사진이 떴고, 꽃말은 ‘다시 찾은 행복’이었다. 유럽에서 는 5월에 은방울꽃으로 만든 꽃다발을 받으면 행운이 온다고 믿어서 가장 가까운 벗에게 은방울꽃을 선물한다고 했다.
가까운 벗이자, 같은 꿈을 꾸는 창작자로서 서로 응원과 연대를 나누는 사 람들. 우리의 모임이 씨앗이 되어 돌봄을 담당하는 여성 창작자들이 널리 자기 목소리를 내는 데 조금이나마 힘이 되길 바라며 우리는 모였다. 당사 자인 우리의 일이자,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목소리가 아닐까. 은방울꽃처 럼 올망졸망 모여 각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인경 씨, 재은 씨, 또 한 명의 친구 예리 씨, 세 친구가 굳이 나를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하여 우리는 나란 히 걸었다. 찻길 앞에서 헤어지며 뒤돌아보니, 내가 길 건너는 모습을 세 친구가 든든히 지켜보고 있었다. 58
얼마 전 작업실에서 본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 다. 남들 보기에는 되는 일 하나 없는 찬실이 뒤에서 든든히 밤길을 비춰주 는 친구들, 확실히 나는 복이 많다. 받은 복은 더 크고 단단하게 만들어 다 시 굴리리라. 어두운 길을 묵묵히 비춰주는 등대처럼 우리가 서로에게 존재 만으로 힘과 응원이 되는 그런 사이가 되었으면 한다.배는 운항을 시작했 고, 2년 동안 미지의 섬을 향해 항해하게 된다. 그 길에서 친구들과 낯선 길 을 마주하고 많은 성장을 하게 될 것이다. “Catch your dream! 인생은 기다려주지 않으니.” 걱정과 두려움도 있지만 작은 꿈을 발판삼아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 우리들 을 응원한다.
꽃말처럼 우리는 다시 행복해지지 않을까.
그림 여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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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만의 여행
이미옥
동생과 나는 어찌하다 보니 그 골목의 골목대장이 되어 있었다. 동생과 나 는 놀이 엘리트로 우리 동네에서 늘 꼽히게 놀이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당 시 유행하는 놀이가 정해지면 우리 둘은 밤낮없이 집에서 서로 경쟁하며 실 력을 갈고닦았기에 우리의 좋은 실력은 늘 유지가 가능했다. 우리의 사계절은 놀이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봄, 여름, 가을, 우리는 쉼 없 이 술래잡기, 다방구, 꼼꼼이, 고무줄, 훌라후프, 공기놀이, 말뚝박기, 이 어 달리기, 숨바꼭질, 망까기, 토성에서 미끄럼 타기, 얼음 위에 썰매타기, 눈사람 만들기, 눈싸움까지. 참 셀 수 없이 많은 놀이를 했다. 겨울엔 스케이트를 타러 가기도 했지만 너무 추워 집집마다 몰려다니며 놀 았다. 패거리가 다 모이기도 했지만 몇 명 빠지거나 다른 친구들이 들어오 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 엄마는 요즘으로 치자면 공황장애 같은 질환을 갖고 계셨다. 아이로서 는 참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너무 멀쩡하시고 에너지 넘치시고 자녀들을 너 무나 사랑하는 엄마였지만 우리들 소풍엔 한 번도 함께 오실 수가 없었다. 또 때로 엄마는 누워서 아주 길고 긴 잠을 청하기도 하셨다. 언제부터인지 동생과 나는 엄마의 병을 낫게 하자며 남한산성으로 약수를 뜨러 다녔다. 주말이면 실내화를 빨아 놓고, 산에 가는 것이 우리의 일과였 다. 어릴 적 아빠랑 자주 가본 적 있는 남한산성 약수터는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1킬로 전후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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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웬일인지 동네 친구들이 모두 모여 자기들도 약수를 뜨러 함께 가겠 다고 하였다. 비가 올 것 같고 고생스러울 수 있으니 함께 안 가는 게 좋겠 다고 친구들을 만류했지만, 그날따라 우리 여자들만 노는 모임에 동네 남자 아이들까지 합류하여 꼭 가고 싶다 하여 함께 동행 하게 되었다.
우리는 강동병원 앞에서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야 했다. 버스를 타고 가 는 내내 날씨가 심상치 않더니 한 두 정거장을 남겨놓고 비가 오기 시작했 다. 7~8명의 친구들과 함께하다 보니 마음에 부담이 생기기 시작했다. 드 디어 버스 종점! 빗발이 있기는 했지만 심한 정도가 아니라 ‘그래 가보자’ 하는 마음이 앞섰다.
산의 초입에 들어서기 전 산행객을 위한 파라솔 노점들이 즐비한 구간이 있 었다. 아빠랑 다닐 땐 간식도 사 먹고 물방개 뽑기도 하곤 했던 그 장소들은 맑은 날 같으면 북적거리며 성업을 이루었을 텐데 접힌 파라솔도 많았고 아 예 장사를 하지 않는 집이 더 많아 을씨년스러웠다. 계속 진행하는 것이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빗발이 웬만했기에 우리는 우리만의 행진을 계속했다. 하지만 웬걸 산 초입에 들어선 지 100여 미터를 지나자 빗방울들은 금세 굵어지고 급기야는 폭우에 우산을 받치기도 힘들었다. 너무 심한 폭우에 앞길조차 잘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는데도 우리는 갑자기 닥쳐온 상황에 앞으로 앞으로만 갈 수밖에 없었다.
심한 폭우에 우산을 쓴다는 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저 머리 정도 보호하 기 위함인 듯도 하고 이 폭우를 심리적으로 피하게 해준다는 기능만 있을 뿐 가슴과 어깨까지 모두 흠뻑 젖어있었다. 아마도 우리 모두가 아이여서 앞으로 간다는 방법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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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으로 쏟아지는 빗소리가 너무나 시끄러워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았 다. 또 이제껏 왔는데 내가 아는 그 약수터와 그곳의 아름다운 풍경을 친구 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다. 바가지로 퍼붓는 듯한 폭우에 이젠 천둥 번개까지! 우리는 자연이 이다지 경이롭고 무서운 것인 줄 처음 알았다. 흡사 내리 퍼붓는 폭우와 우리 동네 친구들과 대결하는 느낌마저 있었지만, 우리도 여러 번 승부에 잔뼈가 굵어 서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두려움과 신비감 사이에서 마음이 널을 뛰는 사이 우리는 어느새 약수터에 도착해 있었다. 어쨌든 앞이 보이지 않는 그 빗속에서 길을 잃지 않았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는 안도감이 찾아왔다. 약수터를 둘러싼 풍경이 그날따라 몹시 낯설어 보이 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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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목적대로 가방에서 약수 병을 꺼내 서로 우산을 받쳐주고 도와가며 많은 약수를 받았고 각자의 가방에 넣었다. 약수가 얼마나 콸콸콸 나오는지 금세 약수를 뜰 수 있었다.
약수 물을 받는 사이 빗소리는 점차 잦아들다 완전히 멈추었다. 우리는 우 산을 내리고 풍경을 둘러보았다. 봄에서 여름이 되기 전의 그 숲은 새로 태어난 듯 싱그러워 보였다. 여기저 기서 알 수 없는 어떤 천둥 같은 소리와 물소리가 나는 산은 아주 커다란 짐 승이 엎드려 있는 듯했고 언제 벌떡 일어나 우리를 위협할지 모를 큰 두려 운 존재가 되어있었다. 평소 내가 아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산이었다. 게다 가 우리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산을 가득 덮고 있는 아름다운 구름과 물안 개였다. 마치 신선이라도 나올 듯한 선계의 모습을 한 산은 무척 신비로웠 다. 내려오는 길에서는 드디어 우산을 접고 싱그러운 숲을 만끽했다. 나무마다 풀잎마다 촉촉이 젖은 숲은 순정하고 산뜻했다. 내려오는 길, 어깨는 가득 담긴 약수로 무거웠지만, 마음이 몹시 가벼웠다. 우리는 그 짧은 기간 왠지 많이 성장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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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명곡?
이은진
특별하게 ‘이 음악을 좋아한다’고 말해본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 명곡이 란 이름난 악곡 또는 뛰어나게 잘된 악곡을 의미하는 말. 내 인생의 명곡이 라 함은 나의 삶 속에 한 자리를 차지하던 곡일 터인데. 내 인생의 명곡. 딱 히 떠오르는 곡이 없다. “너의 명곡은 뭐야?” 하교 후 학원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아들에게 물었다. “명곡이요? 무슨 말이에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듣고 있던 아들이 대답했다. “요즘 네가 즐겨듣는 곡을 물어보는 거야. 엄마가 글을 써야 하거든. 이번 주 숙제야. 떠오르는 것이 없네.” “주제가 어렵네요. 요즘 좋아하는 곡은 ‘니어 오토마타 OST’예요. 엄마도 들어봤을걸요? 게임 OST인데,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요. 이거 LP판도 나 왔더라고요. 요즘 탐내고 있는 거예요.” 뒷자리에 앉은 두 아들은 핸드폰에 저장된 음악을 들려주며 서로 듣고 있는 음악과 작곡가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진다. 집이었 다면 블루투스 스피커로 연결해 온 집안 가득 음악으로 채웠을 녀석들이다. 그러고 보니 최근 아들이 선곡해 준 음악을 주로 듣고 있었다. “엄마는 고등학생 때 어떤 음악을 들었어요?” 아들의 질문에 “음악? 별로 안 들었어.”라고 대답했다. 문득 노랫말, ‘바아람이 머물다간 들판에 모락 모락 피어나는 저녁연기…….’ 초등학교 5학년 때 즐겨 부르던 창작동요의 한 자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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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 속 풍경은 내 삶의 환경과 겹쳐지지 않았지만 그려지는 풍경이 아름다 워 걸으며 늘 흥얼거리던 모습이 기억났다. 중학교 1학년 때 아빠가 사주신 마이마이와 이어폰이, 이어폰을 꽂고 공부하던 모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났다. 학창 시절, 그 반짝이던 시간, 음악은 나의 삶에도 흐르고 있었다. 별밤지 기 이문세를 좋아하던 중학교 친구 진은 그를 모르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매일 밤 그를 만나는 방법을 알려주고 그가 전하는 이야기와 노래를 공유하자고 했다. 숨죽이고 기다리다 결정적인 타이밍을 선택해 라디오에 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녹음하는 기술을 알려주었던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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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 친구 훈은 015B를 모르는 내가 놀랍다며 그들의 앨범을 선물로 주었 다. 내가 듣는지 확인하고 그가 좋아하는 음악을 함께 좋아해주길 바랬던 친구였다. ‘잘 기억나지 않는데?’ 라는 반응을 보이면, 015B의 음악을 들 어야 하는 이유를 설파하던 친구의 열성이 나를 그들의 음악으로 인도했다.
신성우를 너무나 사랑했던 대학 친구 아는 TV 방송에 나온 그를 보지 못하 면 우울해했다. 방송에 나온 그의 모습을 보고 쫑알거리며 이야기해주던 모 습이 좋아 테리우스라고 불리던 신성우를 내 머릿속에 콕 박아놓았다. 집에 서 TV를 보다 그가 보이면 즉시 아에게 전화를 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 이라 친구에게 그의 소식을 전하지 못하면 내가 더 아쉬워하기도 했다. 친 구들과 함께 듣던, 함께 부르던 그 많은 노래가 오랜 시간동안 기억 저 깊은 곳에 묻혀있었다.
작가 김연수는 지금 여기에서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것만 좋아하는 것이 평 생 최고의 노래만 듣는 방법이라고 알려준다.(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 그의 말에 빗대어 생각해보니 내게 가장 좋은 음악은 친구들이 좋아하는 노 래였다. 친구를 좋아했고 그들과 항상 함께 있고 싶었던 그 시절. 그들의 노래가 내 노래였다. 지금, 이 순간 아들이 들려주는 곡에 귀를 기울인다. 아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아들이 듣고 있는 곡을 함께 듣게 만든다. 함께하는 기억을 남기는 것. 이것이 내가 곡을 선택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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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쩌면 갈 수도 있었을 길 글·그림 천해
십 대 후반을 세계문학 전집에 빠져서 지냈다. 그 당시 내가 읽었던 책은 ‘오만과 편견’,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 남녀의 사랑이 들어가 있는 소설이었다. 그 당시 잠도 안 자며 새벽까지 읽 었다. 로맨스의 시작이 세계문학 전집이었다. 상업계 고등학교를 나와서 20살부터 직장을 다녔다. 그래서 그런지 남자에 대한 환상이 일찍 깨졌다. 잔소리 많은 직장 상사, 술만 먹으면 팔 또는 다 리에 깁스하고 오는 대리, 은근슬쩍 관심을 표명하는 결혼한 과장, 맘에 안 들면 서류를 집어 던지는 상무 등 나는 백마 탄 왕자 같은 남자는 현실이 아 니라는 걸 그냥 깨달았다. 그래서 남자에게 관심이 없었다.
직장을 다니다 늦게 들어간 대학을 졸업하고 나니 내 나이는 어느덧 서른 중반을 넘었다. 그전까지는 엄마의 끊임없는 목소리를 무심하게 넘기며 잘 지냈는데, 어느 순간 나의 뇌와 심장에 심각한 스트레스로 자리 잡게 됐다. 그나마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직장이라는 도피처가 있었지만, 주말은 쉼이 되던 집이 쉼을 주지 못하자 독립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됐다. 은근슬쩍 “나가서 혼자 살까”하고 말을 던지자 엄마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결혼해서 나가!” 그렇게 독립은 물 건너갔다. 적은 나이도 아니라 고집을 부리고 행동으로 옮겼다면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그 과정에서 엄마와 겪을 갈등과 불편함이 싫었다. 또한, 혼자 잘 살 수 있을까? 혼자 살면 밤에 무 섭지 않을까? 월세를 지불하며 돈을 모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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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생각들이 나를 주저앉게 했다. 17년쯤 직장을 다니다 보니(중간에 이직하면서 잠깐씩은 쉬었다.)주기적 으로 슬럼프가 오는 거 말고 어떻게 할 수 없는 갑갑함이 훅 들어오더니 나 갈 생각을 안 했다. 늘 같은 패턴의 삶에 지치고 지겹고 의욕도 없었다. 서른다섯을 넘은 친구 들은 거의 엄마가 되어 생활이 온통 아이 중심이었다. 사회에서 만난 동생 들과 가끔 만나기는 하지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혹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결혼이었다. 그 당시 주위 사람들한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독신주의냐는 질문이었다. 그때는 비혼주의라는 말이 없었거나 내가 듣지 못할 만큼 사용하지 않는 단 어였다. 나는 결혼하고 싶지 않은 걸까? 딱히 독신주의라는 마음을 먹어 본 적은 없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아니라고 대답했다.
지금 와 보니 독신주의에 따라오는 말들이 듣기 싫었나 보다. “눈이 높은가 봐” “남들이 너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줄 알아” “결혼을 왜 안 하는데” 등 호기심 가득한 질문들이 싫었다. 그리고 어떨 때는 결혼 안 하는 내가 진짜 문제가 있나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했다. 나는 너무도 당연히 나이가 들고 때가 되면 결혼하는 게 당연시되는 사회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신주 의를 떳떳이 내보이기 쉽지 않은, 어른들은 대부분이 용납하지 않는 그런 시기에 나는 30대였다.
얼마 전에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책을 읽었다. 그 책에서 나는 주위 의 사람이 누가 있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 느꼈다. 서른다섯 내 옆에 경제 적으로 협력하고 맞추며 같이 살아갈 친구가 있었다면, 결혼 안 하는 게 부 모에 대한 불효라는 생각을 갖지 않았다면, 나 스스로 과감하게 실행할 용 기가 있었다면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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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아는 지인 3명과 맥주 한 잔씩을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웠는데 그중 에 40대 결혼 안 한 사람이 있었다. 결혼한 누군가가 말했다. “그래도 남들 하는 거 다 해 봐야지”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게 어쩌면 더 멋있는 게 아닐까. 내가 어쩌면 갈 수도 있었을 그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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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힘
글·그림 최은경
나는 언젠가부터 한 사람, 한 영혼에 관심이 생겼다. 어쩌면 사람을 향한 호 기심과 사람에게 선한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지금의 직 업을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일지 모르겠다. 지난 3월, 복지관 상담실에서 명일이와 어머니를 만났다. 명일이는 학교폭 력 피해 등의 후천적 요인으로 CRPS(복합부위통증) 증후군 판정을 받은 21살 청년이다. CRPS 증후군은 특별한 자극이 없이도 팔이나 손가락 등의 환부에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 예리한 칼에 베이는 듯한 통증, 쥐어짜는 듯한 통증을 수반한다. 통증 치료가 중요한 만큼, 명일이는 매주 3회 혜화 동과 분당 서울대병원에 다니고 있다. 명일이에게 주 3회 통증 치료는 하루 이틀에 걸친 특별한 일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다. 그런데 병원 오가는 길이 만만치 않다. 초반에는 아버지, 형과 함께 집 차로 이동했지만, 잦은 치료로 매번 가족의 돌봄으로만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 었다. 그렇다면 장애인 콜택시, 휠체어에 앉은 상태 그대로 탈 수 있는 리프 트가 탑재된 교통약자를 위한 편의시설이 희망이었다. 하지만 장애 정도에 따라 이용 조건을 달리하는데, CRPS 증후군은 ‘심하지 않은 장애’로 진단 하고 있어 명일이는 이용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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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일반 택시. 휠체어에서 잠시 내려와 좌석에 앉고 휠체어는 트렁크 에 실어야 하는 과정이 불편하고 긴 시간이 걸리지만, 일상을 보내기 위해 서 이 과정은 감수할 수 있었다. 또, 물리적 환경 너머 감수해야 할 일은 바 로 사람의 시선이었다. ‘오늘 첫 손님인데, 운이 없네.’, ‘젊은 사람이 안 되었네.’, ‘타고 내리 는 데에 너무 오래 걸리네.’ 같은 목소리와 따가운 시선이 그러했다. 물 론, 명일이와 어머니를 보통의 시민으로서 여기거나 환대하는 기사님도 만 났다. ‘우리 가족 중에도 장애인이 있어요.’, ‘휠체어는 제가 내려드릴게 요.’ ‘천천히 내리세요.’ 이런 기사님을 만날 때면, 어머님은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이고 했단다. “복지사님, 저는 우리 명일이의 삶이 누군가에게 선례가 되기를 바라요. 명 일이와 같은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 또 있으니까요. 그저 지금 제가 할 수 있 는 일은 최선을 다해 이곳저곳 문을 두드려보는 거예요. 저의 건강과 환경 이 허락될 때까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해 봐야죠.”
명일이와 함께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명일이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 같았고, 말 그대로 명일이 삶의 옹호자로 살아가고 있다. 옹호에 관해 잠시 생각해 본다. 누군가를 위해 대신 목소리를 내어주거나, 당사자가 스스로 목소리 를 낼 수 있도록 촉진하고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 옹호일 거다. 때로는 그 저 옆에서 당사자가 걷는 그 길을 함께 걸어주는 것이 옹호이다. 명일이 가족을 알게 된 날, 복지관과 나는 명일이 가족에게 ‘한 사람’이 되 고 싶었다. 명일이에게 어머니가 한 사람이고, 명일이 가족이 서로에게 그 러하듯, 또 어느 때 만났던 따뜻한 택시 기사님, 매주 통증 치료로 만나는 의사 선생님과 같이 말이다. 이후, 복지관 선후배 사회사업가와 함께, 주민 의 관계 속에서 명일이 가족과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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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한 번은 복지관 사회사업가가 명일이 가족과 함께 병원에 오가는 길을 복지관 리프트 차량 지원으로 함께한다. 여전히 장애인 콜택시를 권 리로써 마땅히 누릴 수 있는 환경은 변하지 않았지만, 명일이 가족의 환경 일부는 변했다. 마음 편히 병원까지 이동할 수 있는 날이 생겼고, 명일이 가족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또, 명일이가 좋아하는 보드게임을 함께 할 또래 친구 주민의 새로운 관계가 생겼다.
우리 사회 환경이 변화하는 일은 더디고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내가 만 나는 사람의 환경이 더 나은 삶으로 변화하는 일은 생각보다 빠르게 전개되 기도 한다. 살면서 그저 나를 존중해주고 묵묵히 함께해주는 딱 한 사람만 있어도 온 세상과 많은 사람을 다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내 삶 에, 우리 삶에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한 사람이 되어주고 있고, 되어줄 수 있는 위대한 존재이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신뢰를 전부 잃은 사람도 ‘한 사람’을 만나면 그 한 사람을 통해서 세상과 사람 전체에 대한 신뢰를 회복한다. 한 사람의 힘이 그렇게 강력한 것은 한 사람이 ‘한 우주’라서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 람은 세상 전부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정혜신, 당신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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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담 어린이 백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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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담 어린이 백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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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윤이와 곰돌이
김서윤
우리 동네
김준서
우리 모두 힘내요
성유나
코로나19를 없애자
성유준
코로나19 백신 왕주사기
사지훈
사촌들과 함께 한 숲 체험
송유나
별캉스
이주연
나의 소중한 애완동물들
최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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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윤이와 곰돌이 김서윤 고일초등학교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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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김준서 길동초등학교 2학년 내가 항상 다니는 우리 동네를 그림으로 그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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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힘내요 성유나 강덕초등학교 4학년 작가가 되고 싶은 성유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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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를 없애자 성유준 강덕초등학교 2학년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성유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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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백신 왕주사기 사지훈 푸른숲 발도르프학교 4학년 만화가가 꿈인 사지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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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들과 함께 한 숲 체험 송유나 왕북초등학교 4학년 사촌들과 숲 체험 갔던 기억을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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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캉스 이주연 6세 햇살이 좋은 날 사람들이 밖에 나와 즐겁게 노는 모습을 그렸어요. 그림 제목은 별킹스에요. 별이 그려져 있어 별킹스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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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중한 애완동물들 최해준 공릉중학교 1학년 그림 그리기와 반려동물 키우기가 취미입니다. 그림으로 그린 동물들은 집에서 키우고 있는 친구들의 일부입니다. 코로나 시국에 반려동물을 돌보며, 힘든 시기를 재미있게 보내고 있습니다. 유튜브 채널도 운영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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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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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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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협력과 지속가능한 시민사회를 위하여 박성식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마을지향 평생교육 ‘반딧불’ 이야기 반준영
강동마을네트워크의 ‘환경이어달리기’ 원영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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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협력과 지속가능한 시민사회를 위하여 박성식 (강동시민협의회 공동운영진)
‘시민사회’란 시민, 법인, 또는 단체 등 공익활동을 하는 주체와 공익활동의 영역을 말한다. 지난 10년간 마을공동체, 사회적경제, 그리고 매우 다양한 의제별 시민모임들이 등장했고 협치, 주민자치, 도시재생 등 거버넌스와 관련된 분야까지 확장되었다. 시민사회 입장에서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민과 민 또는 민과 관의 관계에서 또 다른 문제와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최근 코로나 상황과 함께 위기와 기회가 공존하게 되었다.
강동에서 작년부터 진행된 새로운 시민사회의 변화를 위한 ‘강동시민협의 회’의 창립 과정을 얘기해 보려고 한다. 우선 강동송파 지역에서는 2000년 을 전후로 하여 열린사회강동송파시민회, 위례시민연대, 송파주민회, 가락 시장 등 시민사회단체와 노동조합들이 함께하던 시협(강동송파시민사회단 체협의회)이라는 연합단체가 있었다. 대표적인 활동으로 지역에서 문제 있 는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했던 낙천낙선 운동이었다. 이후 강동에서는 2012년부터 2018년까지 ‘동동’이라고 하는 25개 풀뿌리 지역단체들이 참여한 협의체가 있었다. 그리고 현재는 강동주민자치네트워 크, 강동연대회의, 강동마을네트워크, 고덕천을지키는사람들, 작은도서관 네트워크, 마을미디어네트워크, 민주시민교육네트워크(준), 함께강동, 자 갈자갈, 정원문화포럼 등을 비롯한 50여 개 풀뿌리 단체들과 300여 개 이 상의 크고 작은 동아리 형태의 다양한 주민모임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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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발생한 강동구 녹지 훼손을 반대하는 도서관 대책위와 마을센터 직영 화 대책위 등의 문제처럼 시민사회 전체가 공론을 모아 대처할 일들이 발생 했다. 그리고 동동의 해체 이후 각종 의제별 네트워크들을 연결하여 서로를 응원하고 협력할 보다 폭넓은 시민사회 관계망이 필요하게 되었다. 여러 차 례 공론장을 거치면서 이런 상황에 대처할 포괄적 협의체가 필요하다는 공 감대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기존 네트워크를 초월하거나 의제별 경계를 넘 는 것이 현재 마을의 복잡한 상황에서는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주요 단체와 기존 리더들이 가지고 있는 보이는 않는 주도권 경쟁들도 있었 다. 그래서 새로운 방법으로 개인의 연대가 핵심인 포괄적 네트워크의 추진 이 필요하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 협의체의 준비 과정에서 단체중심의 연대나 소수의 리더가 이끌어가는 기존 방식의 협의체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추진 과정에서 변화된 시민사회의 모습을 직시하게 되었고 단체 중심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시도를 모색하게 된 것이다. 준비를 함께한 82명이 우 리 마을의 주요한 20여개 의제들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강동시민협 의회’를 창립하면서 현재 가입한 114명의 회원 중에는 기존 시민활동 경험 이 없는 주민, 주민자치회, 직능단체, 복지관, 협치 등 넓은 의미의 시민사 회로 볼 수 있는 영역의 사람들까지 함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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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시민활동의 다양한 영역에서 함께하는 개개인의 느슨하지만 폭넓은 연대를 기반으로 새로운 문제해결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에 많은 시민사 회와 공익활동가들이 공감했다고 볼 수 있다. 작년 11월부터 다양한 분야에서의 활동 경험이 있는 100여명이 강동시민협 의회 창립을 함께 준비했다. 그 준비 과정에서 진행한 20여 차례의 줌모임 과 수차례 구글폼 설문조사를 통해 모아진 의견들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개인을 기반으로 연결하고 포괄적 연대를 통해 힘을 모으자. 2. 현재 활동하는 다양한 모임을 응원하고 공익을 실천하는 협의체를 구성하자. 3. 느슨하지만 의미있는 관계망을 먼저 만들고 필요시 공동 사업을 도모하자. 4. 적극 참여하여 주권을 행사하는 직접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자. 5. 대표자를 뽑기보다는 투표와 추첨 방식을 병행하여 공동운영진을 구성하자. 6. 소수의 의견을 존중하고 가능한 집단지성의 힘을 모아 추진하자. 7. 서로에게 배우며 보람과 기쁨을 나누는 협의회를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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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었다. 물론 의료생협이나 공동사업을 힘있게 추진하자는 의견들도 있 었지만 다수는 마을의 넓은 협력 관계망을 우선적으로 구축하여 지속가능한 시민사회를 발전적으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런 공론의 과정을 거쳐 투표와 추첨을 병행하는 방법으로 7명의 공동운영 진을 구성하였다. 운영 방향은 권한을 분산하고 함께 만들어 가는 협의체를 지향하는 것이다. 기존 단체 중심의 연대 방식에서 개인들의 공익적 협력이 핵심인 협의체가 출범하였다. 이제 열매에만 관심이 있고 자기 의제만 챙기는 이기적인 자세 에 대한 반성도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행정이 싸움의 대상이 아 니라 이해와 협력을 통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강동구를 만들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
지속 가능하고 발전적인 시민사회를 위해 다양한 영역 간 경계를 넘는 포괄 적 협의체의 시도는 변화된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실험이다. 마을에서 자원 봉사 활동을 생활화하고 작은도서관 같은 생활 밀착형 공간에서 책모임과 생활문화 활동을 즐기고 다양한 시민과 함께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서로 에게 배우고 토론하고 나누는 시간들도 지속적으로 필요하다. 든든하고 유 연하며 따뜻한 관계망의 확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강동에서 위기를 기회 로 바꾸는 사례가 될 가볍고 신선하며 즐거운 시민사회를 꿈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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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마을네트워크의 ‘환경이어달리기’
원영난 (강동구 공익활동지원가)
강동마을네트워크는? 강동마을네트워크는 2020년 서울시 민민협력기반조성사업으로 시작된 민간네트워크 활동입니다. 시민 정치력을 키우는 ‘강동 생활정치’, 마을 안 작은도서관의 공간 활용을 탐구한 ‘공동체 공간연구’, 시민 간 재능을 나누는 ‘강동 이웃사람, 협치연구’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했습니다. 여성, 장애, 청소년, 독서, 문화예술, 환경, 공동체 등 다양한 관심사를 나누고, 누구나 함께하는 강동구를 위한 변화를 만듭니다.
환경이어달리기 시작 2021년 강동생활정치는 10권의 생활정치 책과 지역사회 이슈를 함께 나누 는 독서모임을 진행했습니다. 환경 이어달리기는 마을다와 정은영 대표가 제안한 이동학 작가의 ‘쓰레기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푸드쉐어링, 공 유냉장고, 환경봉사단, 제로웨이스트샵, 지역 쓰레기 매립지와 소각장 등’ 쓰레기 문제 해결방법을 함께 고민하였고, 지역 환경문제를 함께 해결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확대되었습니다. 이후 강동구 마을공동체지원센터의 마을 만들기 지원사업에 지원하며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직접적인 행동을 실천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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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이어달리기 프로그램 환경이어달리기는 마을다와, 작은도서 관 함께크는우리, 신나는여성자갈자갈, 강동청소년누리터가 함께합니다. 프로그램 구성은 ‘교육-독서모임-단체별 캠페인-영상 결과 공유회’로 이어지는 강 동구 환경 인식 변화 이어달리기 과정입 니다.
지난 7월 20일 문영란 대표의 열린 마을 강좌로 환경이어달리기가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이후 어린이 환경독서모임(7/27, 재활용쓰레기를 다시 쓰는 법)과 성인 환경독서모임(8/5, 쓰레기책)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8월 10일 에는 ‘쓰레기책’ 저자인 이동학 작가의 강연으로 지역과 쓰레기 문제 해결 방법을 배우고, 8월부터 10월까지는 참여 단체별 캠페인이 진행될 예정입 니다. 환경이어달리기 과정을 누리터 청소년들이 영상으로 기록하고, 11월 에는 활동결과 영상공유회가 개최될 예정입니다. 강동구 내 환경에 관심 있 는 사람들이 모여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배우고, 변화를 실천하는 과정에 함 께해주세요. 환경이어달리기 참여는? 강동마을네트워크 네이버 카페에서 프로그램 참여 신청과 일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교육과 캠페인 참여자들의 활동 기록도 카페에 아카이빙이 가능 합니다. 우리가 만드는 강동구의 변화를 기록해 주세요. 지역 이슈를 함께 고민하고 변화를 실천하는 강동마을네트워크 활동은 바로 여러분의 참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식 변화와 지역문제해결을 위한 활 동이 지속될 수 있게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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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마을지향 평생교육 ‘반딧불’ 이야기 반준영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사회복지사)
우리 강동구 마을에는 참 많은 평생교육기관이 있습니다. 강동·고덕평생학 습관이 있고 이마트, 홈플러스, 현대백화점 문화센터가 있으며 각종 공예품 을 만들어볼 수 있는 공방 거리도 있지요. 그 밖에도 내가 원하는 문화, 예 술, 체육, 교양 등의 활동을 선택하여 누릴 수 있는 자원이 참 많습니다. 이 렇게 잘 갖추어진 평생교육기관, 장애인 당사자가 이용하기엔 어떨까요? 여느 주민과 다름없이 편하게 이용하실 수도 있고, 아직 물리적·사회적 환 경의 제약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은 장애인 당사자의 ‘보통의 삶(Ordinary Life)’과 ‘장애가 있어도 살 만한 지역사회’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느 주민 이 누리고 있는 일반복지수단(공간, 시설, 제도, 제품, 서비스, 조직, 문화 등)을 장애인 당사자도 이용할만하게 도와드리고 있지요.
이를 바탕에 두고 마을지향 평생교육 사업을 진행합니다. 장애인 당사자가 마을 평생교육기관 이용에 물리적·사회적 어려움이 있다면 이를 당사자와 함께 살피고 지원하며 옹호합니다. 또한 평생교육에 함께 어울려 참여하실 수 있도록 이웃을 주선해드리기도 합니다. 함께 평생교육을 이루며 자연스럽게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관계가 생동하길 바라고 있지요. 이러한 마음을 담아 이웃이 서로 마을에서 평생교육을 이루는 모습을 ‘반딧불’로 표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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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우리 이야기 평생교육 ‘반딧불’ 행사에 참여하신 강동구 주민 송경숙 님의 이야기를 담 습니다. 그는 마을 플랫폼에서 반딧불 홍보지를 접하고 가까운 이웃이 생각 났다고 말씀하셨지요. 친하게 지내는 이웃 언니에게는 발달장애가 있는 아 들이 있습니다. 항상 밝고 귀여웠던 언니의 아들, 한울(가명) 씨는 어느덧 성인이 되었습니다. 언니는 한울 씨가 성인이 되고 나서 더욱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언니, 그리고 아들 한울 씨와 함께하며 장애를올바르게 이해하고 싶어 복지관에 방문하셨지요.
“처음 반딧불에 신청하며 걱정이 많았어요. 장애를 둔 엄마인 이웃 언니에 게 이런 활동에 같이 참여해보자고 하면 어떻게 생각할까? 어떻게 이야기 하면 상처가 안 될까? 고민했죠.” 송경숙 님은 이전에 장애인 당사자와 함께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 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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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당사자 두 명과 부모님이 함께 참여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나보다 나이가 적다는 이유로 아무렇지 않게 반말을 하고, 모든 체험을 도와주며 활동을 마쳤던 기억이 있어요. ‘장애인은 도와줘야 하는 사람’이라고만 생 각했었죠. 그때 당사자의 부모님은 아무 말씀 없이 그저 오늘 활동 고맙다 고만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활동이 끝난 후에 내가 했던 행동이 맞았던 걸 까? 아쉬움 속에 깊이 고민하게 되었죠.” 송경숙 님은 당시 장애인 당사자와 장애에 대해 접할 기회가 적었기에 어떻 게 이웃 언니와 한울 씨를 만나야 할지 고민이셨지요. 이런 고민을 직접 복 지관에 찾아와 말씀해주셨습니다. 함께 고민을 나누고 장애에 대한 에티켓 을 생각해보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답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 었습니다.
며칠 후, 암사동 마을 공간 상상나루래에 송경숙 님과 이웃 언니, 한울 씨, 같은 뜻이 있는 친구까지 네 분이 모였습니다. 그날은 반딧불 모임의 계획 을 정하는 날이었습니다. 모임 이름부터 활동의 주제, 활동 내용 등을 자유 롭게 의논했습니다. 송경숙 님을 포함한 주민들은 모든 과정에서 한울 씨의 의견을 묻고, 짧은 한마디, 한마디에 귀 기울였습니다. 모임에서 각자의 역할도 정해보았습니다. 여러 선택지 중, 평소 사진 찍는 것 좋아하는 한울 씨에게 사진 촬영을 맡아볼 것을 제안했습니다. 한울 씨 에게도 모임의 한 구성원으로서 역할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행복한 우리 이야기(행우리) 모임이 시작되었습니다.
“한울이와 평생교육을 하며 참 많은 인식의 변화가 생겼어요. 먼저 다가와 인사하는 한울이, 직접 고른 스티커북으로 멋지게 미술 체험을 하는 모습, 우리의 활동 모습을 예쁘게 사진에 담는 한울이를 볼 수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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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이와 거리를 걷다 보면 저와 한울이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아마 장애인이기에 보는 시선이겠지요.
근데 그 사람들의 모습이 저의 옛날 모습인 것 같아 많은 생각을 하게 돼요. 반딧불 활동을 하면서 경험하지 않으면 모를 인식의 변화를 느끼고 친한 조 카 한 명이 생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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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후기
함께 만나지 못해 아쉬운 시간이 많았다. 마을담 7호 기획과 운영에 관련된 회의도 화상으로, 7회에 걸친 마을담 특별강좌도 전면 화상수업으로 진행되며 만남에 목말랐던 시간을 보냈다. 저녁 7시가 되면 화면 속에서 만나 서로의 근황을 나누고 각자 써 온 글을 읽고 함께 합평하는 시간을 채워나갔다.
올해 7호를 맞고 있는 마을담은 특별강좌를 7회 열며 기존 마을담 회원을 비롯해 새로운 주민들의 참여도 반가이 맞이했다. 글쓰기를 좋아하지만 늘 글쓰기가 어렵다는 주민, 인터뷰 방식이나 글쓰기 방법을 익혀 마을소식지를 만들고 싶다는 주민, 마을에 이런 잡지가 있는 점이 신선하다며 발걸음한 주민이 함께 어울려 2달간 알찬 시간을 보냈다.
에세이 쓰기 4회 강의 시간에는 내 인생의 명곡, 내가 가지 못한 길 등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시간을 가졌다. 진솔한 글로 자신을 표현하며 차츰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가는 시간이었다. 각자 풀어내는 이야기보따리 속에서 함께 웃음 짓고 용기를 북돋우는 이야기가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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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취재와 인터뷰 글쓰기 시간에는 사람에 대한 이해와 그 이야기를 담아내는 방법, 일러스트 시간에는 내가 쓴 글에 어울리는 나름의 그림을 그려보는 시간을 가졌다. 오롯이 나의 솔직한 이야기가 내 손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같이 경험하며 마을담 7호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강동구는 재건축 입주가 마무리되며 마을살이에 관심 있는 주민들이 더욱 늘어나고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엮고 싶은 경력단절의 여성, 건강하게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고자하는 주민 모임이 늘어나며 마을담 7호, 하반기에 나올 마을담 8호 역시 그들과 발걸음을 함께 하고 있다.
박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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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담 활동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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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담 원고모집 원고 형식 인물 인터뷰 자유에세이 시(동시) 독후감 원고 분량 A4 1매~1.5매 글자크기 10포인트 줄 간격 160% 참여 대상 강동구 주민 누구나 어린이, 청소년의 작품도 환영합니다 연락처
010-6240-2079 kitayama47@naver.com
마을담은 강동구 주민들이 함께 만드는 마을잡지로 5년 간 꾸준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강동구 주민이면 누구나 마을담 회원으로 참가 가능합니다. 함께 글쓰기와 합평 이후, 정리된 원고를 잡지에 싣습니다. 마을담은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지원으로 발행됩니다. 2021년에는 마을담 7호와 8호(12월 발간예정)가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111
강동구 사람들의 마을잡지 7호
마을담 7호 펴낸곳
마을담
발행일
2021년 8월 25일
기획
강동 마을담 편집위원회
편집장
박경숙
디자인
일상사
일러스트
이은진
사진
박경숙
후원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장소제공
함께크는우리 작은도서관, 강일활력소, 은방울작업실
마을미디어 7호와 함께 한 이들 김명국 김설희 김인경 나성재 유명한 박경숙 유서향 유수경 음민서 이미옥 이은진 천혜 최은경 김서윤 김준서 성유나 성유준 사지훈 송유나 이주연 최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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