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잡지 <pape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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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축제의 배경과 회 아카이빙 축제가 가진 의미

주민주도 민관협력 세대화합 마을축제! 어린이, 청소년, 성인, 어르신 그리고 직능단체, 시민단체, 주민센터까지 이렇게 다양한 주민들이 함께 모여 지금까지 이런 축제는 없었다. 주민주도 민관협력 세대화합 마을축제! 지금까지 이런 축제는 없었다.

협력하고 직접 공연과 참여부스를 운영하며 즐기는 마을축제를 상상했다. 주최 단체가 보여주고 주민은 구

게내마을축제의 배경과 제8회 아카이빙 축제가 가진 의미

주민주도 민관협력 세대화합 마을축제! 어린이, 청소년, 성인, 어르신 그리고 직능단체, 시민단체, 주민센터까지… 다양한 주민들이 함께 모여 협력하고 직접 공

경하는 그간의 축제와는 완전히 다른 축제를 꿈꾼 것이다.

어린이, 청소년, 성인, 어르신 직능단체, 시민단체, 주민센터까지 이렇게 주민들이 함께 모여 연과 참여부스를 운영하며 즐기는 그리고 마을축제를 상상했다. 주최 단체가 보여주고 주민은 구 다양한 경만하는 그간의 축제와는 완 협력하고 직접 공연과 참여부스를 운영하며 즐기는 마을축제를 상상했다. 주최 단체가 보여주고 주민은 구

전히 다른 축제를 꿈꾼 것이다.

게내마을축제를 시작하기 전 “축제의 주인은 주민”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자연’, ‘함께’, ‘소통’을 경하는 그간의 축제와는 완전히 다른 축제를 꿈꾼 것이다. 게내마을축제를 시작하기 전 “축제의 주인은 주민”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자연, 함께, 소통’을 축제의 3대 키워

축제의 3대 키워드로 제안했다. 물론 그 3대 키워드의 중심은 사람이었다. 드로 제안했다. 물론 그 3대 키워드의 중심은 사람이었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듯이 게내마을축제도 어느 날 갑자기 뚝딱 생겨난 것이‘함께’, 아니다. 2011 게내마을축제를 시작하기 전 “축제의 주인은 주민”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자연’, ‘소통’을 세상의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듯이 게내마을축제도 어느 날 갑자기 뚝딱 생겨난 것이 아니다. 서울에 마을공동체 년 서울에 마을공동체 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 함께크는우리가 축제의 3대 키워드로 제안했다. 물론 그 3대 작은도서관 키워드의 중심은 사람이었다. 상일동산에서 ‘평화를 나누는 불기 시작할 2011년 무렵, 작은도서관 &lt;함께 크는 우리&gt;가 ‘평화를 도서관 작은음악회’를 세상의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듯이 게내마을축제도 어느 날 갑자기 뚝딱나누는 생겨난 것이 아니다. 2011 도서관바람이 작은음악회’를 열었다. 도서관 책잔치에 청소년 동아리 상일동산에서 몇 팀이 함께 참여하여 만든 행사였는데 그 열었다. 도서관 책 잔치에 청소년 동아리 몇 팀이 함께 참여해 만든 행사였는데 그것이 지금의 게내마을축제의 씨앗이 될 년 서울에 마을공동체 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 작은도서관 함께크는우리가 상일동산에서 ‘평화를 나누는 것이 지금의 게내마을축제의 씨앗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도서관 사실을 작은음악회’를 열었다. 도서관 책잔치에 청소년 동아리발굴사업을 몇 팀이 함께 참여하여 만든 행사였는데 그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2012년것이라는 열린사회시민연합에서 지역주민들과 함께하는 마을의제 상일동 주민센터, 주민자치위 것이 지금의 게내마을축제의 씨앗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미처상일동 알지 못했다. 2012년 열린사회시민연합에서 지역주민들과 함께하는 발굴사업을 주민센터, 주민자치위원회 등과의 원회 등과의 협력 속에서 진행했다. 그 후 여러 협의와마을의제 논의 과정에서 지역구의원, 상일동장, 주민자치위원 2012년 열린사회시민연합에서 지역주민들과 함께하는 마을의제 발굴사업을 상일동 주민센터, 주민자치위

협력 열린사회라는 속에서 진행했다.지역 그 후시민회가 여러 협의와 논의 과정에서 마을축제를 지역구의원, 상일동장, 주민자치위원장, 그리고된 열린사회라는 장, 그리고 의기투합하여 열게 되면서 오늘에 이르게 것이다.

원회 등과의 협력 속에서 진행했다. 그 후 여러 협의와 논의 과정에서 지역구의원, 상일동장, 주민자치위원

지역 시민회가 의기투합하여 마을축제를 열게 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장, 그리고 열린사회라는 지역 시민회가 의기투합하여 마을축제를 열게 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게내마을축제를 준비해야 하는데 하는데 전 세계를 뒤덮은 코로나가 좀처럼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축 올해는올해는 제8회제8회 게내마을축제를 준비해야 전세계를 뒤덮은 코로나가 좀처럼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제를 축제를 못할있겠다는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방법으로 지난 7년간의 게내마을축제 못할 수도 생각이 들었다. 여러들었다. 방법으로여러 고민하다가 지난고민하다가 7년간의 게내마을축제를 돌아보고 기록하는 작 올해는 제8회 게내마을축제를 준비해야 하는데 전세계를 뒤덮은 코로나가 좀처럼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를 돌아보고 기록하는 작업이 오히려 더있겠다는 의미 있는 일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축제준비위원장 업이 오히려 더 의미못할 있는수도 일이 될 수도 생각이 들었다. 축제준비위원장님과 위원님들께 사진전, 기록영상제작, 않았다. 축제를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방법으로 고민하다가 지난 7년간의 게내마을축제 님과 위원님들께 사진전, 기록영상제작, 아카이빙 책발간을 제안했다. 모두들 흔쾌히 동의해 주셨고온전히 하나 아카이빙 책 발간을 제안했다. 모두들 흔쾌히 주셨고, 하나 된수도 마음으로 제8회생각이 아카이빙 게내마을축제를 를 돌아보고 기록하는 작업이 오히려 더동의해 의미 있는 일이 될 있겠다는 들었다. 축제준비위원장 된 마음으로 게내마을축제를 온전히 치룰 수 있었다. 이번모두들 기획을 통해 게내마을축제는 이 님과 위원님들께 기록영상제작, 아카이빙 책발간을 제안했다. 흔쾌히 동의해 주셨고 치룰 수제8회 있었다.아카이빙 이번 사진전, 기획을 통해 게내마을축제는 즐기는 축제에서 기록을 더한 축제로 한발 더 성장했다. 2021년, 하나 아홉 제 즐기는 기록하는 축제가 되었다. 된 축제에서 마음으로 제8회 게내마을축제를 번째 게내마을축제는 또아카이빙 어떤 모습일지 기대해본다 온전히 치룰 수 있었다. 이번 기획을 통해 게내마을축제는 이 제 즐기는 축제에서 기록하는 축제가 되었다.

글. 박성식 / 사진. 이희원 강문채 조기옥 글_박성식(게내마을축제준비위원회 공동대표) / 사진_이희원 강문채 조기옥 글. 박성식 / 사진. 이희원 강문채 조기옥

8회 제8회 아카이빙 게내마을축제는 8회 아카이빙 축제 스케치

8회기록영상, 아카이빙 축제 스케치 사진전, 아카이빙 책 발간을 통해 지난 7년간의 게내 설명설명설명설명설명설명 설명설명설명설명설명설명 마을축제를 돌아봄으로써 즐기 설명설명설명설명설명설명 는 축제에서 기록을 더한 축제로 설명설명설명설명설명설명 한발 더 성장했다. 설명 설명

자연, 함께, 소통 그 중심은 사람인 축제

6회

명실 공히 축제의 주요 프로그램이 된 ‘참게 찹이’ 를 두고 논란이 빚어졌다. 살아있는 게를 마을 축제의 놀잇감으로 사용하는 모습이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었 다. 열띤 논쟁이 벌어졌지만,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양보하며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1회 2013년 5월 25일. 첫 번째 게 내마을축제가 열렸다. 청소년 들과 시민단체, 직능단체가 힘을 합치고 거기에 주민센터 의 든든한 뒷받침이 더해지며 그야말로 마을 축제의 새 길을 열었다.

5회 故 나덕찬 통장협의회 회장님의 시낭송을 모두가 기억한다. 2012 년 서울시 마을공동체사업을 진 행할 때부터 게내마을축제가 5회 에 다다를 때까지 울고 웃으며 함 께 일했던 나덕찬 회장님. 이 무 대에 선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운 명을 달리하셨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든든하고 따뜻했던 상 일동의 일꾼 ‘나덕찬’을 그리워하 고 있다.

4회

‘게내’는 상일동의 옛 지명으로 맑고 깨끗한 여울에 참게가 많아 불 리어진 이름이다. 주민들에게 게내마을축제를 좀 더 확실히 각인 시키기 위해 ‘참게 잡이’ 체험이 준비되었다. 식용으로 양식하는 참 게를 공수해 와 꾸려진 특별부스. 기다리는 줄이 너무 길어 모두 걱 정했을 만큼 인기가 굉장했다.

7회

7회의 하이라이트는 폐막식이었다. 사실 축제의 마무리는 주최 측 의 오랜 고민거리였다. 마을 축제답게 모두가 하나가 되는 마무리 를 하고 싶은데 계속 무언가 부족한 느낌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그 런데 7회에 이르러 온 관객을 사로잡는 공연이 탄생한 것이다. 서 로의 손을 잡고 모두가 함께한 강강술래 대동놀이! 마침내 ‘제대로’ 축제가 완성된 순간이었다.

2회 더 많은 주민들이 설 수 있는 무대를 만들 기 위해 전야제가 꾸려졌다. 전야제에선 다 양한 공연과 더불어 청소년들이 직접 만든 영상들이 공개됐다. 본 축제 역시 성황리에 치러졌는데, 특히 1회에 이어 진행된 &lt;나도 스타 선발대회&gt;가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 냈다.

3회

3회 역시 전야제가 계획되었다. 전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콘텐츠 를 고심하다 ‘무성영화’를 선택했다. 마을의 인재들과 활동가들, 거 기에 일반 주민들이 함께 반년을 넘게 준비했다. 물론 그만큼 반응 도 뜨거웠다. 세대 공감 축제가 무엇인지 보여준 상징적 무대였다 할 수 있다.


천호동 구사거리. 왼쪽은 성내동, 오른쪽 상단은 광진교, 하단은 구천면길. 1970년

강동마을기록관이 가야하는 길 올해 초, 코로나로 불리는 바이러스 때문에 듣도 보도 못한 세상이 우리 앞에 펼쳐질 때만 해도 에볼라

최초의 천호동 본당 성당 모습. 1959년

나 메르스 때처럼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거라고 믿었는데...우리 모두가 힘들고 고달팠던 2020년이 이 제 달력 끝자락에 남았다. 지난 10월, 천호 마을활력소와 함께 문을 연 강동마을기록관 역시 코로나 때문에 출발부터 쉽지 않았 다. 개소식이 미뤄지고 사람들이 모이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서울시내 자치구 가운데 단독공간을 가진 몇 안 되는 마을기록관의 의미와 역할을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강동마을기록관 개관 기획전

그곳에 사람이 있었네

광나루를 지나는 뗏목과 돛단배. 1961년

개관기념으로 기획했던 &lt;그곳에 사람이 있었네&gt;는 사진기록을 중심으로 강동구, 그중에서도 마을기 록관이 자리 잡은 천호동 구천면로 주변의 과거모습을 집중적으로 조망하는 전시였다. 기록관을 둘러 본 주민들의 반응은 예상을 뛰어 넘었다. 특히 자신의 추억이나 경험이 연결되는 전시물 앞에서 오랫 동안 머물며 낯선 마을사람들과 관계를 트는 이야기 거리로 삼기도 했다. 지금과 다르지만 어쩐지 많 이 본 것 같은 친밀한 사진 속 풍경에 넋을 놓고 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짧은 시간 집중적으로 기획 하고 자료를 모아 공간을 꾸몄음에도 강동마을기록관 개관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어느 정도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천호동 버스 종점 모습. 1970년

강동마을기록 활동가로 일을 시작할 때부터 독립된 기록공간을 계속 꿈꿔왔는지도 모르겠다. 마을기 록찾기를 숙제처럼 안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며 기록을 쌓아갈수록 더 막막해지기도 했다. 다른 마을 활동처럼 공간이 있다면 유령처럼 떠도는 마을기록을 끌어 앉힐 수 있지 않을까! 공간에서 마을기록과 관련한 기획이나 일을 무엇이든 하다보면 그 실체가 점점 드러나지 않을까! 마을활력소 1층에 번듯하게 들어선 강동마을기록관을 보고 있자니 이모저모 생각이 많아진다. 마을기 록은 개인이나 한 두 개 단체가 하는 일이 아니다. 아니 할 수 있어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마을을 사는

광진교 백사장으로 소풍 나온 구천보통학교 (현 상일초등학교) 학생들. 1937년도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모조리 기억하고 기록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따뜻하고 주관적인 판단 과 서늘하고 객관적인 시각이 조화로운 마을기록의 위상을 정립할 때가 됐다. 유수경(강동마을기록 활동가) / 사진_강동구청 제공

과거를 그리워하며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 최근 ‘레트로’

데리고 오던 엄마들이 할머니가 되어 손주를 데리고 오면 아는 얼굴이 남아 있어 반갑단다.

가 열풍이다. LP판 제작이 크게 늘어났는가 하면, 추억의 맛 ‘달고나’와 커

물론 이경숙 원장도 그 사이 할머니가 됐다. “젊은 시절엔 힘드니까 애들을 그냥 환자로만 봤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

피가 만나 최신 디저트로 탄생하기도 했다. 우리는 왜 새로운 것에 열광하

젠 모두 제 손주 같아요. 하나 하나 너무 예쁘고, 우는 아이들의 심정도 진심으로 보게 되고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면서도 레트로 감성을 놓지 못하는 걸까.

아이들의 건강을 다루는 만큼 마지막까지 항상 신중하고 정확하게 진료를 보려고 노력해야죠.”

우리 동네 작은 소아과는 그야말로 레트로의 전형이다. 처음 이 병원을 찾

드라마 속에나 있을 법한 장소가 이렇게 버젓이 우리 동네에 있다. 모든 게 숨 가쁘게 변할 때, 누군가에겐 답답하게 느껴

았다면 나무로 꾸며진 다소 허름한 내부에 당황할 수 있다. 하지만 어릴

질 수 있는 종이차트를 일상으로 쓰는 병원이 아직도 곁에 있다는 게 놀랍고 또 반갑다. 엄마들의 바람처럼 우리 아이들

적 한번쯤은 가봄직한 익숙한 구조에 이내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든다. 암사

이 다 클 때까지 조금만 더 그 자리를 지켜주기를, 누군가에겐 그 자체만으로도 위안이고 치유일 것임에 분명하다.

3동에 자리한 ‘이소아과의원’의 이야기다. 이곳은 1982년에 개원했다. 당시 시영아파트 단지가 옆에 있어 언제나 붐

글.사진_강문채(작가. 강동구마을공동체지원센터 활동가)

비는 병원이었다고 한다. 같은 자리에서 어느새 39년, 물론 지금도 알 사

이 기사는 강동마을공동체지원센터에서 발행하는 ‘소담소란’ 웹진 1호에 실린 글을 추가 취재하여 수정, 보완하였습니다.

paper.N

우리 동네 레트로, 이소아과의원

람은 다 아는 동네의 명의원이다. 몇몇 엄마들은 ‘이소아과’에 가는 날을 “외할머니네 가는 날”이라고 표현

온마을N은 마을공동체영상 및 paper.N을 발행합니다.

한다. 단정하고 자상한 의사, 간호사 선생님들 덕에 그런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요즘 병원에선 보기 드물게 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해 불러주는 것

그녀는 아직도 생생하게 그 시절을 기억한다. “병원에 오면 가장 먼저 수

발행일 2020년 12월 25일

은 물론,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보곤 친구들까지 다 파악해 아이와 대화

은 체온계를 겨드랑이에 꽂아줬었어요. 아이들이 하도 떨어뜨리니까 나

발행 온마을N

를 이끌어가는 능력자들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병원이라면 질색팔색 하

중엔 체온계에 실을 달고, 그 실을 빨래집게에 연결해 옷깃에 찝어주셨었

글 박성식, 유수경, 강문채

는 꼬마들도 여기선 순한 양이 된다.

죠. 그리고 간호사 선생님도 엄청 젊으셨었어요.” 그녀의 기억 속 싱그러

이 병원에 8살, 5살 두 아이의 치료를 맡기는 안나심(38)씨는 좀 더 특별

웠던 간호사 선생님은 39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이 병원에 근무 중이다.

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7살부터 청소년 시절까지 본인이 바로 이소아과

한 곳에 오래 터를 잡고 있다 보니 치료를 받던 아이들이 성인이 돼서 인

에서 진료를 받았었던 것이다. “우리 삼남매가 다 이 병원을 다녔었어요.

사를 하러 들르는 경우도 왕왕 있다. 하지만 쑥쑥 자란 아이들의 얼굴은

제 아이를 데리고 다시 오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었죠.”

쉽게 알아보기가 어려워 안타깝다는 이경숙 원장. 오히려 본인의 아이를

편집 조기옥

이 페이퍼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의 지원으로 제작하였습니다.

지난 어린이날 선물을 받고 즐거워하는 아이.

손으로 기록한 오래된 진료 차트.

이 페이퍼는 전주페이퍼 그린라이트 100그램 재생종이를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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