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우패션과 옷수선가게
재봉틀맵 vol.2 루디아 명품옷수선
인생은 소설, 특기는 기술 루디아 명품옷수선 이혜경 사장님 [인터뷰 진행] 동네인터뷰작가단 이미숙
우선 사장님 성함과 연세를 알고 싶어요.
이혜경, (작은 소리로) 68세
정말이요. 너무 젊어 보이시는데, 예전에 손녀딸 이야기하실 때부터 연세가 궁금했어요. 너무 큰 손녀딸이 있어서(이전에 옷 수선을 맡기면서, 중3짜리
손녀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에이, 나도 시집 일찍 갔고, 우리 아저씨는 장가 일찍 갔어.그래서 손주들도 빨리 봤지. 중3짜리 애는 28인가, 둘째 아들이 28에 장가를 가서 그해에 12월에 애 낳아서, 걔가 형 보다 앞질러서 애는 낳았구, 장가는 늦게 갔지. 그리구 나도 할머니 됐구. 그 큰손녀는 몸조리할 때 내가 다 해줬어요. 그런데도 처음에 병원에서 애기 낳았다고 연락받고 갔더니 “할머니 오셨네?” 하면서 애기 붙잡고 말하는데내가 막
소름이 돋는 거야 그 할머니라는 소리에. (웃음)
(사장님은 입만 웃는다든가 하는 겉치레 웃음이 아니라, 정말 온 얼굴로 환하게 웃는다. 갑작스런 할머니 소리에 놀랐던 조금은 멋쩍은 기억과 예쁜 손녀에 대한 기억이 함께 떠오르신 것 같다.)
첫 번째 손주를 맞는 할머니 마음이 그래. 손주 보는 건 너무 좋은데 할머니
소리는 으흐흐 소름이 막 돋았어. 그래도 할머니 소리를 처음 안겨준 그 큰손녀가 정이 많이 가. 해산간을(해산구완) 내가 해줘서 그런가 몰라도.
다른 손주들은 못 해주시고?
내가 시어머닌 관계로. 며느리가 편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
편하지도, 첫째로 편하지도 않고, 큰며느리는 친정엄마가 집에 계시는 분이셔서 큰며느리 친정 처분에 맡겼지. 그런데 친정엄마도 힘이 드시니까 산후조리원으로 갔어. 우리 큰며느리는 동서는 해주고 저도 해주겠거니 했을 텐데 서운했을 거야. 그래도 내 입장에서 여름이기도 하고 내가 일이 너무 바쁜데 어쩔 수가 없었어. 그리고 큰손주는 그때 둘째 며느리 친정엄마가 교통사고가 나서 내가 해주게 된 거지. 나 그때 죽는 줄 알았어. 나 그때 무릎이 나가갖고 수술도 했잖아. 나는 무릎 연골이 닳아서 그런 12 줄 알았더니 연골이 찢어지더라구. 애기 하나 갖구 힘들어서 (웃으시면서). 나 산후조리하면서 2시간뿐이 안 잤거든요. 왜냐면 당시 백화점 수선하면서 돈도 잘 벌지만 엄-청 힘들었어요. 거기다 그 산후조리까지 할라니까 몸이 감당이 안 되나 봐. 우리 작은애 둘째 손주는 친정엄마가 건강하실 때니까 그냥 맡겼지. (사장님에겐 큰아들의 아이 하나와 둘째 아들의 아이 둘을 합해서, 총 3명의 손주가 있다.)
“지금은 다리 괜찮으세요?”
그때 수술하고는 괜찮아요. 그때 백화점 수선하시면서 많이 바쁘다고 하셨는데 , 처음부터 바느질이나 수선하는 일을 시작하시지는 않았을 텐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내가 어렸을 때는 예능에 소질이 있었어. 무용을 잘했어요. 그래서 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 무용을 했어요. 옛날에는 서울에 3 . 1절에 꽃전차가 다녀요. 전차에다가 꽃장식을 하고 퍼레이드를 하는데 그걸 보러 광화문에 구경 갔 었 어 요 . 구 경 하 고 돌 아 서 는 데 어 디 서 ‘ 덩 기 덩 덩 더 쿵 ’ 이러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그 소리에 끌려서 빌딩 안으로 올라갔어요. 광화문에. 새문안교회 그 근처야. 그랬더니 거기가 무용학원이었어요. 그게 너무 좋아 보이는 거야. 다행하게 집이 부자는 아닌데 딸이 하나고 밑으로 남동생이 둘인데 걔네들이 나보다 서너 살 어려. 내가 엄청 조르기도 했구 딸도 하나고 그러니까 엄마가 지원을 해줬어요. 아직 전공은 정한 게 아니어서, 대학을 아직 안 갔으니까, 하루는 발레, 하루는 고전 무용 이렇게 했죠. 그렇게 대학 갈 생각을 했었지. 그때는 중학교 시험도 있을 때였는데 과외 해야지, 무용학원 가야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동네에서 나 사는지도 모를 정도였어. 김자옥하고 같은 학교를 다녀서 같이 무용반이었어요. 김자옥이 나보다 2년 선배야. 와우! 그 당시에 무용을 지원하실 정도면 친정 어머님이 대단하신데요?
우리 엄마, 내가 울 엄마 얘길 해야지 내가. 우리 엄마는 이북사람이었어요.
이북 어디신데요?
평양, 1.4후퇴 때 이리로 내려왔지. 전쟁 때고 피난 와서 그렇게 어렵게 살 때도 나 유치원도 다녔어. 삼 형제 중에서 유일하게 나 하나 다녔어.
어머님이 딸인데도 그렇게 해주시는 게 당시로써는 굉장히 파격인데요?
그럼 그럼, 우리 때도 내 남동생들도 하나도 안 다녔어. 나 혼자 다녔어. 끝까지 다니지는 못했어요. 그때 우리 집에 그럴만한 일이 있었어. 유치원엘 7살 때 들어가긴 들어갔는데 바로 밑에 동생이 소아마비가 걸린 거예요. 그걸 낫군다고(낫게 한다고) 우리가 14 이북사람이니까 아무 일가친척도 없는 데다가 또 돈도 없잖아. 이북에서 가지고 나온 돈은 빨갱이라구 그럴까 봐 아궁이에다 태웠대요. 빨갱이라고 찔릴까 봐. 그러니 돈도 없고 문간방에 세 사는 사람이 애가 소아마비에 걸린 거야. 소아마비 걸려서 막 달라(높은 이자를 받는 고리대금) 얻고 이렇게 해서 애를 거의 고쳤어. 거의 고쳤는데 인제는 집도 절도 없어진 거야. 그래서 내가 유치원에 못 다니게 됐지. 그때는 돈이 없어서 못 다닌 것도 있지만, 엄마가 애 들쳐 업고 병원 다니느라고 못 다녔어. 나는 집에 혼자 있었어. 그래도 우리 엄마가 교육열이 센 사람이야. 울 엄마가 공부가 하고 싶었던 사람이 공부를 못했어. 울 엄마 여덟 살 때 우리 외할머니가 애들 열둘을 낳았는데 다 죽고 우리 엄마하고 젤 위에 오빠만 살아남았대. 근데 무당이 또 죽는다고 엄마를 무당이나 이런 집에 심어주라 그랬대요. 근데 무당한테 주기 싫어서 마침 일본에서 무슨 일로 도망 나온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 자식이 없으니까
양녀로 준 거야. 울 엄마는 그 집에 드나들며 과자 얻어먹고 사탕 얻어먹고 그랬나 봐요. 너무 맛있잖아. 울 엄마 세대 때는 얼마나 가난했어. 그런데 그 사람들이 일본에 들어가면서 엄마를 데리고 들어갔나 봐. 일본 가서 학교를 다니는데 애들이 주서온(주워온)애라고 놀려서 학교를 안 갔대요. 일본 사람들은 때리지는 않고 벌을 세운대요. 독방에 가둔대요. 그런데도 얼마나 고집이 센지 학교를 안 갔대. 공부를 안 하면 글을 모르니까 일본에서 살 수가 없다고 다시 한국으로 보냈대요. 그런데 나중에 아쉬우셨나 봐 그때 좀 공부를 할 걸 하고. 그래서 딸이어도 엄청 교육열을 가지고 가르쳤지. 지금도 초등학교 동창
만나면 내가 대개 부잣집 딸인 줄 알아요. 소아마비 걸렸던 그 동생도 다 고쳐서 걔 지금 목사하고 있잖아. 그때 우량아 선발대회가 있었어요. 목사 하는 그 동생 그 우량아 선발대회 나가서 금반지 탔어. 울 엄마가 그렇게 여러 가지로 극성맞았지 . 거기 내보낼 정도로. 아무튼 나는 여름 방학 전에 유치원 그만 다녔어. 내가 그때 새문안교회 유치원 무궁화반이었어요. 그걸 아직도 기억하셔요?
못 다닌 게 한이 돼서 호호.
그렇게 교육열 높은 엄마 덕택으로 무용을 하셨었는데 바느질은 어떻게 하시게 됐어요?
응. 그러니까 그렇게 무용을 잘하다가 중학교에서 실과 시간에 바느질을 배웠는데 내가 딴 애들보다는 잘해, 유난히 잘했어요. 지금도 중3 때 수논(수놓은) 액자가 있어요, 동양화 액자. 지금 봐도, 액자 틀은 없애버리고 둘둘 말아서 졸업장 안에다 여 놨는데(넣어놨는데) 너무 잘 놨어. 내가 지금 봐도, 어떻게 이렇게 땀 수가 고르지 이런 생각이 들어. 그래서 이제 중3 때 갑자기 이걸로 바꾼 거야. 턴을 해버린 거야. 왜냐면 바느질이 너무 재밌는 거지. 무용반이긴 했어 그때도, 16 고2까지 는 무용반 했어 . 무용을 하면서도 수예시간 이 너무 재미있어서 수예반에도 들어갔어. 수예반에 들어가고 또 수를 잘 노니까(놓으니까) 아주 우리 선생님이 수예를 주문받아서 나한테 수를 놓게 해서 용돈도 받았잖아 중3 때. 또 수예, 수예 무슨 이런
대회가 있었어요. 그 수예 선생님하고 같이 작품을 하나 냈는데 그게 3등 해서 문교부 장관상도 받았어요. 그러고 나서 고3 때 ‘야 이거 하면 되겠다.’ 생각하고 대학을 안 갔어요. 그때 바느질이나 수놓는 거로는 의상학과를 갔어야 되는데 그때는 의상학과 내가 알기로는 국민대뿐이 없었어. 어린 마음에 국민대는 창피하다고 생각했어요. 대학 빳지(뱃지)도 요기다 달고 다녔는데 최소한 이대 뺏지는 달아야지, 엄마는 그러고 있는데 국민대 간다고 그럴 수가 없었어. 그래서 대학은 안 가고 이걸로 바꿨지. 이제 대학도 안 가고 엄마가 엄청 속상하셨겠는데요?
응. 그래서 나, 무용하는 데서 우리 엄마한테 두들겨 맞았어. 돈을 너무 많이 들였잖아요 그게. 그래도 고3 때 무용 작품 하고 이러면 돈 엄청 드는데 내가 엄마한테 효도했지, 막 이래 설레발치며 엄마를 설득해 가면서 무용을 그만두게 되었지. 이렇게 무용을 그만두고 20살 무렵에 양재학원을 다녔어요. 1 년 정 도 국제 복장학원을 다 녔지 . 학원에서 어느 정도 양재기술을 익히고 양장점에 취직을 했어요. 그때는 양장점이 많았어요. 아직 기성복이 나오기 전이어서 옷을 맞추어 입을 때니까. 그때 다녔던 양장점이 이대입구, 명동, 반포, 종로 이런 곳. 그러다가 내가 의상실 차리고 나니까 이제 기성복 시대가 됐잖아요. 기성이 (기성복이) 나와서 반도패션, 논노패션, 막 이런 브랜드들이 생겨났어. 그때 명동에서 의상실하고 있는데 우리 집에서 이렇게 내려다보면, 우리 가게 바로 앞에 논노, 아 이오패션이었던가 하여간 둘 중 하나였는데, 두 개가 하여간 나란히 붙어 있었을 거야. 그런데 그 브랜드 정기세일이다 하면 문도 안 열어서 아침부터 줄이 쫙 서 있었어. 그게 언제냐면 79년도 박정희 죽던 해(작은 소리로) 80년도, 79년도 78년도 요 때쯤. 속 뒤집어지지. 가게 문도 안 여는데 물 건 사려구 줄 서 있 는 데 . 그래서 명동의상실을 80년도에 집어치웠거든요. 데모도 너무 심했고, 양장점도 기성복에 밀려서 안 되고, 난 할 수가 없었어. 지금은 그 좋은 패션들이 맛들이 갔어. 지금은 그 브랜드들이 중국에서 해오고 베트남 해오고. 사람들이 이제 안 입어. 편한 옷을. (옷을 하나 집어 들며 아마 인터넷에서 판매하는) 이런 옷을 입으니까.
아무튼 양장점 그만두고 남대문에서 제품 도매하다 동대문으로 갔다가 이태원에서 옷가게도 했다가, 망해 먹었어요. (환한 웃음과 함께 조그만 소리로) 그래도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소질을 빨리 알아보시고 방향을 결정하셨네요. 그 후에도 계속 옷하고 관련된 일을 하셨나요? 의상실도 굉장히 오래 했죠. 아무튼 장사하던 것도 망해 먹고 자본이 하나도 없으니까, ‘뭐를 해야 될까?’ 생각을 했는데 내가 디자인까지만 했지 사실은 기술은 없어요. 양재학원 다니면 기술(옷 만드는 기술, 또는 수선 기술)이 없어요. 그런 식으로 다니면 지 옷도 못 해 입어. 그래도 오랫동안 의상실을 했으니까…. 어깨너머로 배운다고 옷에 대한 느낌이 있었어요. 일단 회사에 취업을 하고 다니면서 샘플 만들어 놓으면 내가
하니까 회사에서 실장으로 있었어. 그런데 나 기술(옷 만드는 재봉질 같은 기술)은 없었거든. 그래서 그냥 기술 배우고 싶다고 그랬지. 그래서 회사 다니면서 기술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지요. 그때가 한 34살 요쯤이었을 거야. 그리고 똑같은 옷을 쫙쫙 만드는 거는 내 스타일이 아니드라구. 그거는 재미가 없어요. 그래서 좋은 조건이지만 ‘이건 못 하겠다.’ 생각하고 그만두었어요. 사실 이 이유가 둘째 이유고 첫째 이유는 애들이 내가 직장을 다니니까 딱 퇴근시간 맞춰서 애들이 집에 들어오는 거야. 그래 갖고 이거 안 되겠다 싶어서…. 기술은 어느 정도 빨리 배우죠, 왜냐면 기본이 있으니까. 그래서 수선가게를 차린 거야…. 그래 갖고 여기까지 오는 거야. 어쨌거나 옷과 관련되어서 나는 잘 넘어가는 거(수선을 선택한 것) 같아. 여기서 하기 전에는 갤러리아 알마니 꺼 수선했거든. 근데 지금은 알마니 장사가 안 되잖아. 근데 계속 그거 하고 있었음. 나 꼭지 돌구 있을 거야. 잘 했구 잘 빠져나왔지. 이것(이 가게)도 계약하기 바로 직전에 보스 꺼랑 계약하려고 했어요. 휴고보스 꺼 계약해야 하니까 기존에 핸 거(해놓은 물건) 갖다주려고 배달 왔다가 이 가게를 본 거야. 좀 무례한 손님인데 그 바로 앞집이야. 백화점에서 와서 엔간히 갑질했거든 그 여자가. 배달은 안 하는데 가게를 접고 보스랑 계약을 해야 하니까 받아놓은 거는 해서 갖다줘야 되잖아요. 그렇게 왔다가 이 가게를 본 거야. 우연치 않게. 연희, 연희동이 나랑 잘 맞는 거 같아. 수선 일은 아이들 교육 때문에 결심하신 거였네요. 아이들 키우실 때 집안 살림도 하면서 직장에 다니거나, 옷 수선 일을 하거나 이렇게 계속 일을 하셨어요?
그렇지. 홍제동에 수선가게 뒤에 이렇게 살림집 있었어요. 나는 일하면서 애들 관리했지. 큰애 같은 경우는 공부를 좀 잘했구, 둘째는 공부를 못했어. 그래서 옆에 앉혀 놓고 단어 시험 보고 그랬어. 그러더니 걔가 나중에 지네 반에서 3등 하드라, 전교 18등까지 하드라, 18등 안에 들더라구요. (웃음이 얼굴에 가득하다.)
아저씨는, 남편은 좀 안 도와주셨어요?
어휴. 내가 이 얘기 하려면 소설책 써야 해. 우리 남편은 직장생활 하면서 같은 직장에서 만났어요. 나는 바느질 일
시작하고 처음부터 의상실이 하고 싶었거든. 그래서 같은 일 하는 사람하고 결혼할 생각 했었어. 그래서 연애한 거야. 그때는 난 디자인만 하지 옷 만드는 기술이 없으니까 혼자서는 못하잖아요. 옷 만드는 기술 가진 사람과 의상실 하면 내가 만들고 싶은 옷 만들어가면서 살고 싶었지. 이대입구에서 만났어. 이대입구에서 의상실 다닐 때 만났는데 멋있더라고. 근데 그게 왜 미숙 씨도 아는지 모르지만, 그 멋있었던 거 나중에 세월이 지나니까 최고 악이더구만. 아! 멋있는 거와 반비례로 생활하는 거는 영 형편없는?
그래그래. 바로 그거야. 나 아가씨 때, 애 아빠랑 연애하면서 저기 압구정 갈 때, 뚝섬에서 배 타고 넘어가면 압구정, 바로 압구정이었어. 지금 봉은사. 뭐라 그러냐? 하여간 경기고등학교 근처 거기가 다 배밭, 포도밭이었어. 압구정도 그랬구. 그 왜 봉은사 있는 데, 코엑스 있는 데 거기. 지금은 금싸라기 땅인데 그렇게 되는 줄 알았나. 암튼 배 타고 넘어가니까 거기 절이 크다란 게 있더라구.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봉은사야. 그렇게 연애할 때는 멋있었는데 생활하면서 너무 일을 안 하고 돈 벌기를 싫어해. 그렇다고 노는 거는 아니야. 그니까 옆에 사람 아주 더 힘들었어. 사업하셨어요?
사업은 아니고 그 때 당시는 왜 6.29 공동선언 뭐 그런 어쩌구저쩌구 그런 거 있었잖아요? 맨날 데모했어요. 이한열 어쩌구저쩌구 거기도 쫓아다니구. 제사라고 검정 리본 달고 왔길래, 내가 “아버님 제사 날짜도 모르면서 무슨 검정 리본 달고 22 들어오냐”고 그랬었어. 남편이 돈 벌 생각은 안 하고, 밖으로만 다니니 생활도 안 되는데, 빚을 내서 자꾸 돈을 쓰는 거야. 빚은 나날이 늘어나는데 일하기를 싫어하니까 살길이 없었어. 내가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이 인간하고 계속 살다가는 우리 아들들 못 가르치겠더라구. 내가 어디로 가? 울 엄마 그 교육열이 나한테도 있지 고스란히. 그러니까는 내 새끼를 못 키우겠더라고.
그래서 관계를 정리할 생각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어요. 그때 내 앞으로
집 한 채 값의 빚이 있어서 그것도 갚아야 하고 아이들과 생활도 해야 하고 돈이
있어야 뭐를 해볼 텐데 돈도 없고 시대가 바뀌어 의상실은 안 되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판매직, 백화점의 판매직이 있었어. 디자이너로는 취직이 안 되기도 하고 경험이 있어서 된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학벌이 대학을 안 나왔는데 디자이너들은 유학파도 있으니, 내가 올라가는 게 한계가 있어서 망설이게 되더라구. 그런데 판매직은 나이 먹으면 안 되니까 내가 늙어서도 할 수 있는 거를 찾다 보니 기술을 배워야겠더라구. 그래서 일단 회사에 취직해서 다니면서 부지런히 배웠지. 아이들 데리고 나올 때 어머님이 걱정하셨겠는데요?
우리 엄마가 쟤네들 두고 나오라고 왜 애를 왜 맡냐고 막 우리 애들을 얼마나 구박했는지 몰라. 그래서 친정에를 가지를 못 했어. 그랬는데 나중에 커갖구 저만 할 때야. (수선실에 놓아둔 사진 액자 속, 앳된 모습의 아이들을 가리키며) 명절 때 되면 설날에 세배하러 외갓집에 갔더니 엄마가 잘 키웠다고 뿌듯해가지고 “에구 너는 인제 너무 좋겠다.” 그래서 “언제는 버리래더니!” (큰 웃음을 한바탕 웃으신다.) 그랬지요. 그런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아이들을 혼자 뒷바라지하기가 정말 힘드셨을 텐데. 안 했어요. 한 번도 안 했어요. 나는 생각이 좀 달라요. 우리 때는 애기 없애라구(산아제한) 막 그럴 때야. 안 낳으려면 안 낳을 수 있었는데 남편 상관없이 내가 낳으려구 생각을 했기 때문에 나한테 책임 많다구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도 그 시절에 혼자 나와서 아이들 키우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 처음에 아이들 데리고 나왔을 때 초등학생들이었어. 그때는, 난 살기도 어렵구, 바쁘기도 하고, 내가 중학교 때까지 놀아보지도 못해서 맘 푹 놓고 뛰어다니라 그랬어. 그리고 맨날 이 기술 배우느라고 회사 다니고 이러니까 뭐 애들 봐줄 수가 있나? 늦게 집에 들어오고 그랬는데 집주인 아줌마가 그러더라구. 애들이
엄마 퇴근시간 맞춰서 집에 들어온다고. 그래서 딱 회사 그만 접구서 수선집을 시작했지. 자기가 나보고 주체적으로 잘 살아 온 것 같다고, 그래서 인터뷰하고 싶다고 그랬지. 그렇지만 다 자기 길에는 후회가 있어요. 난 주체의식 이런 거 그런 거 생각할 시간도 없이 살았어. 24 난 내가 선택한 이 일로 돈을 벌어서 어떻게든 아이들 아빠 때문에 내 앞에 쌓여있는 빚도 갚아야 하고, 아빠 노릇 못하는 남편을 대신해서 아이들 제자리를 만들어줘야 했어. 그냥 맨 처음에 젊을 때는요. 빚 갚고, 애들 학비 나가구, 뭐 먹는 것도 남자애들 둘이라 어마어마하게 먹어서 눈이 번쩍번쩍하기 때문에 일을 안 하면은 애들한테 짐이 되고 애들이 힘드니깐 지인짜 고개도 못 돌리고, 돈 되는 거는 다했어요 그때는. 옷 수선도 지금은 솔직히 맘에 안 드는 손님은 오지 말라구 가끔 그러구. (웃음) 또 저기 뭐야 내가 수선을 했는데 그럼 그만한 값어치가 없으믄 ‘수선하지 마세요.’ 이러구 다 돌려보내는데 그때는 돈 되는 거는 다 했어. 그때는 그랬어. 무슨 주체의식 그런 거 읎어. 또, 날 뒷바라지 열심히 해줬던 우리 엄마도 마지막으로 내가 돌봐줘야 했고, 물론 동생들도 같이 거들어서 했지만, 또 동생 중에 한 명이 암으로 투 병하다 하느님 곁으로 갈 때도 나는 그 아이를 돌봐줬지. 하다못해 별로 정도 없던 시동생도 시어머니도 내 손이 갔었으니까.
엄마는 엄마니까 그렇겠지만 동생은 왜 그렇게 돌보셨어요? 한 2년 반 간병을 좀 했어. 동생을 2년 반 간병을 하셨다구요? 간병인 도움 안 받으시구요?
내 동생이 간병인 싫다 그랬어. 그러구 간병인들이 그 남의 일해준다는 거에 대해서 보호자가 있을 때만 잘해. 아~ 진짜, 그러면서 왜 남의 돈을 받아먹으려는지 모르겠어. 아무튼 그 동생 간병해야지 수선 들어온 거 일해야지, 나 거의 잠도 못자고 밤새 병원에서 진짜 똥 닦아주고, 그러고 오면 여기 와서 좀 자야 되는데 자지를 못하니까 해롱해롱하고 그랬어. 한동안 좀 약속도 못 지키고 너무 힘들어서. 수선 몇 개 못 해주기도 했어. 동생 가고 나서 나 폐렴 걸려서 열이틀 병원에 입원도 했었어. 울 엄마도 여든아홉에 돌아가셨거든. 살짝 치매끼도 있고 아주 걱정스러웠는데 돌아가시니까 동생들이 신나는 거야. 나는 그 꼬라지 비기 싫기도 하고, 신세 지고 남한테 부담 주는 것도 싫어서 엄마 장례도 아무에게도 연락을 안 했어. 그때는 동생들이 다 잘돼서 내 손님 아니어도 잘 할 수 있을 것도 같았구. 그래도 엄마 마지막 살아생전에 병원 왔다 갔다 하는 거 다 내가 했는데…. 나 치질까지 걸렸었어. 제일 힘드시고 다른 사람들이 안 하는 일은 다 하셨네요. 동생 뒷수발도 다 하셨지. 그래, 나 잘했지. 울 엄마 돌아가셨는데 걔네는 완전 잔치분위기인 거야. 너무 신나는 거야. 엄마가 돌아가시니까. 그게 자식과 부모 사이야. 혹 시동생도 장가보내셨어요? 어째 그래 보이시는데? (끄덕끄덕) 시동생이 하나야. 유복자구. 하나니까 돌봐줬지. 우리 남편이랑 사이 안 좋아지구 나니까 우리 아이들을 안 돌보더라. 우리 애들 어릴 때 부담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니까 연락을 안 하게 되더라구. 그리구 우리 남편이 계속 우리를 찾아 댕기고 찾으면 그 생활 태도가 변하지 않으니까 아이들까지 빚꾸러기로 만들게 돼서 삼촌하고도 연락을 더욱 안 하게 됐지. 한번 남편이 연락되었는데 우리 둘째 아들 군대 막 제대한 거 꼬셔갖구 델꼬 다니면서 카드를 만들었어요.
아버지라고 거절도 못 하고 만들어줬나 봐. 그래서 우리 작은아들이 신용불량자가 돼야 할 형편이었어. 부모 때문에 아이들 앞날을 망치면 안 될 것 같아서 내가 신용불량자가 됐었지. 내가 대출받을 수 있는 거 다 받고 카드에서도 좀 빌려다 아들 거를 다 막아내고 나 여기까지 와서 빚 갚았어요. 일억이야, 일억.
와, 이제 다 정리되셨어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자식들은 뭐라고 해요? 다 알고 있나? 커서 일어난 일이니까 다 알고 있겠네요?
다들 알지. 그 난리 통에도 아들 둘 장가보냈는데. (웃음)
어떻게?
큰애는 직장이 좀 좋았어. 그래서 큰애는 적금 들어서 모으고 있었는데 그 난리가 나니까 큰아들이 그거 해약해서 갚자고 그러는데 생각해보니, 만나는 여자애도 있는데 그거 해약해서 착 다 갚을 수 있으면 갚겠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어차피 빚은 빚대로 남아서 그 통장을 해약을 안 하고 아들 결혼 때 방 얻는 데 썼어. 아무튼 큰아들은 지 번(벌어 놓은) 거에다가 융자 내서 전세 얻어 주구, 형 결혼하고 열 달 만에 결혼하는 작은애는 원래 화공학과 전공이었는데 컴퓨터로 바꾸니까 배우는 입장이어서 월급이 얼마 안 돼서 모아 놓은 게 없었어요. 맘이 착해서 아빠를 거절 못 해서 신용불량 될 뻔한 거 내가 막아준 거라 더군다나 아무것도 없었거든. 그런데 큰애 결혼식에 같이 온 며느리가 참하고 내 맘에 정말 쏙 들어서 나 살던 조그마한 아파트 걔네들 주구 나 홍제동에 월세 얻어 갖구 나왔어. 500에 얼마짜리. 돈도 없이 그렇게 장가보냈어.
대단하신데요. 저, 저는… 감히… 이제 아들들은 자주 와요?
자주는 안 오고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이래저래 만나. 추석, 어버이날, 내 생일, 설날, 크리스마스.
양쪽 두 아들 다?
그때는 얼굴 보고 밥 먹고 또 같이 놀러 가서 며칠씩 같이 놀고, 뭐 잘해, 잘해요. 아들들이 잘해. 이번 코로나 때문에 힘들다고 큰애가 100만 원 보내줬는데 작은아들한테는 말을 안 했어요. 벌이가 형만큼 안되니까 괜히 부담스러울까 봐. 그런데 다음 달에 작은며느리가 200만 원을 가지고 왔더라구, 보너스 받은 거 있으니 쓰시라면서. 그래서 나 300만 원 벌었다. 호호호호. 지금 아들들한테 300 받았지만 나는 얼마가 더 들었는지도 모르는데 300이 뭐? (박장대소) 어휴, 우리 작은아들은 집 살 때 내가 또 보태줬지. 우리 작은아들이 결혼할 때 살던 그 아파트에 살면서 나갈 생각을 안 해. 그래서 돈을 좀 보태줄 테니 이사하라고 그랬더니 지금 3년 넘었는데 지금 보면 딱 좋을 때 샀죠? 그때 4,000만 원 줬어. 그거 890 빚 남았어 아직. 내가 돈 모아 놓은 게 없잖아. 이 빚도 다 청산하면 내가 떡 사줄게. 그 떡은 제가 꼭 먹으러 올게요 . 그렇게 최선을 다해서 키워준 아들들한테 서운하거나 그런 적은 없었어요?
왜 없겠어. 분통이 터져서 장가간 놈을 야구 방망이로 패준 적도 있었는데. 그리고 나서도 분이 안 풀려서 때린 게 맘이 아프지도 않을 정도로 속상한 적도 있지. 며느리한테는 내색도 못 하고 내가 그 애한테 내색하면 그게 상처가 될 거구 그럼 나 안보잖아. 그래도 시간이 지나니 저도 좀 바뀌고 하면서 살아지지. 그런데 서운한 게 아니라 가끔 며느리들이 부러울 때가 있어요. 작은 아들 은 지마누라 한테 엄청 잘하는데 거북목으로 추나요법 인가를 했었나 봐 . 해 보 니 까 좋 다 고 마 누 라 를 시켜주더라고. 오십견으로 아파서 밤에 혼자서 울었던 엄마한테는 한번 해보시라는 소리도 안 하면서. 챙기는 대상이 달라진 거지. 당연하긴 한데 좀 부럽긴 하더라. 무슨 왜 연속극 보면 시어머니와 고부갈등 이런 거 있잖아. 그때 우리 큰아들 대학 다닐 땐가 고등학교 다닐 땐가 그랬어요, 네 엄마하고 네 색시하고 좀 싸우면 그냥 네 색시 편들어. 엄마하고는 그래도 끊어지는 거 아니니까. 내가 그랬어. 진짜 그래. (웃음)
(재봉틀 한쪽에 올려놓은 사진이 있길래 여쭤보았다. 대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멋진 청년 둘이 나무 밑에서 찍은 사진이다.)
“아들들?”
응, 키 큰 친구가 큰아들.
(아이를 낳아 저렇게 장성한 어른으로 키우는 동안 엄마의 밑받침 노동과 생존 투쟁이 저들의 온전한 삶을 만들 수 있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 그때 밤
9시가 넘은 늦은 밤인데도 , 문이 열리면서 옷수선을 맡기려고 손님이 오셨다 ).
“어서 오세요, 들어오세요. 어, 내가 수선 다 됐다고 문자하지 않았어요?”
“아니요. 저 아닌데요.”
“누가 어떤 손님 거 다 됐다고 문자 넣었는데, 최선경 씨?”
“저는 김선경.”
“죄송합니다. (큰 웃음) 내가 문자 넌(넣은) 사람이 최선경이네. 강아지는 어디 있어요?”
“밖에 있어요.”
“몸 재봐야 하니까 올라오세요.” 줄자를 꺼내 어깨너비와 길이를 재어본다.
“이 옷이 큰 게 아니라 디자인이 그런 거예요. 그래도 이 단추를 이렇게 옆으로 옮겨 달고 품을 조금 줄이면 좀 나을 것 같긴 한데 그렇게 고치실래요? 단추도 다시 똑딱이로 하고. 단추가 하나, 둘, 셋, 넷, 여섯 개나 있구만.” “여섯 개나 있어요? 생각보다 많네요. 다 되면 전화주세요. 전화번호 아세요?”
“(고개를 끄덕이며) 문자 넣어 드릴게요.”
(연이어 젊은 남자 손님이 또 들어온다. 사장님은 청년을 보자마자 환한 웃음을 얼굴 가득 띄우고)
“검정색 바지 맞지?” 하며 옷 봉에서 바지를 찾아냈다.
“봉지에 넣어 줄게요.”
“아니요, 그냥 주세요. 차 가지고 왔어요.”
그때 나와 눈이 마주치자 쑥스러우신지 크게 웃으시면서 “나 돈 잘 벌죠?”
하신다.
“네, 그러시네요.”
“(청년에게)요새 엄마는 통 안 와요. 엄마 옷 고친 거 입으라고 그래요. 보고 싶다고.”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청년에게서 받은 돈을 다리미로 다리며) 내가 돈을 다 다리거든. 코로나도 있다고 그러고, 내가 일해서 받은 돈이 꾸깃하면 안될 것 같아서...
(늦은 밤, 손님을 대하는 사장님의 모습을 가까이서 처음 보았다. 처음 내가 이 가게를 왔을 때도 전화번호를 물어보셨는데 두 번째 왔을 때는 내 이름을 기억하고 계신 모습이 생각났다.)
전화기에 번호 몇 개나 가지고 계세요? 손님 이름도 다 있어요? 손님들 이름도 다 외우시던데…. 강아지 있는 것까지 알고 계시고. 사실 나는 한창 힘들 때 옷보다 보험영업을 잘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어. 왜냐면 나는 친구들이 많거든. 친구가 많으니까 보험 하면 돈은 벌 수 있을 것 같은데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거라 그게 싫어서 안 했어. 친구도 많고 유난히 아는 사람이 많아. 친분관계 형성하는 거는 자신 있어. 그게 상대에게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32 내가 할 수 있는 관심을 주면 친해지기도 하고 믿음도 줄 수 있어요. 미숙 씨 우리 집 왔을 때 이름 알아주니까 좋았잖아. 그치? 네, 깜짝 놀랐어요. 그전에 내 친구가, 양장점에서 같이 일하던 친구인데, 시골에서 올라와서 월급도 못 받고 너무 고생한 애를, 내가 느닷없이 데리고 와서 나랑 한방을 쓰면서 우리 집에서 한 3년 같이 있었지. 나 시집간 다음에도 우리 집에 있었어. 그 친구가 나중에 보험을 했어. 그래서 내가 보험을 들어줬는데 내 생일이 됐는데도 연락이 없는 거야. 그래서 친한 친구니까 전화해서 “너 보험 그만둬라.” 그러니 걔가 놀라서 “왜?” 하길래 “너는 손님 생일을 안 챙긴다는 거는 보험 할 자격이 없어.” 이렇게
말했지. 생일을 챙기건 안부를 묻건 그거는 장사하거나 인간관계를 할 때 서로에게 보내주는 관심과 진심이라고 생각해. 요즘은 돈도 안 들잖아. 카톡으로 챙겨 주면 되지. (핸드폰 생일 이모티콘 저장한 것을 보여 주시면서) 이걸 왜 갖구 있냐면 내년에도 또 똑같은 거 보낼까 봐. 아… 올해 보낸 거 내년에 또 보내면 안되니까…. (웃음) 이렇게 보내 이렇게 케잌, 꽃다발, 글씨. 지금 글씨는 내가 지웠어. 갖고 있다가 내년에 똑같은 거 안 보낼려구. 하나쯤은 갖고 있어야 돼. 그래도 손님들은 모두는 다 못 외워요. 카톡에 인상 깊은 사람만, 자기 꺼는 여기 있어. 자기 이 그림은 예뻐서 스크린샷 해놨다.
우리 딸 그림이에요.
그림을 잘 그리나 보네. 이거 내가 스크린샷 했다가 친구들한테 보내기도 했어.
괜찮아요. 저작권 없으니 마음대로 보내셔도.
내가 이렇게 진심으로 대해도, 그래도 손님 중에 싫은 손님도 있으시지요?
있죠, 말 이쁘게 안 하는 사람, 지금은 대부분 다 이뻐요. 여기 와서 무시하는 듯한 사람, 이 동네 잘 사는 사람들 있잖아. 잘 산다고 무시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좀 상스러운 사람들이 있어. 반말하는 사람?
반말은 괜찮은데, 반말은 나이 들면 할 수도 있는데. 말투가 좀 그런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나는 지금 돈하고는 별 상관없잖아요. 인제 나만 쓰면 되니까. (좀 조심스럽게) 대놓고 오지 말라고 말했어. 그런데 그래도 또 와. 와서 진상 짓 안 해? 여전 똑같지. 둘이 그랬어요. 따로따로인데 한 사람은 안 오는 거 같은데 한 사람은 여전히 와.
솔직히 내가 수선을 하고 있지만, 옷 수선할 때 소매 기장을 고 쳐 도 그 걸 홀 라 당 뒤 집 어 야 될 때 가 있 어 옷 을 . 그러면 오바로크가 안감에 대부분 안 쳐있어. 그게 비싼 옷들은 쳐있는데. 그러믄 그거 다 쳐준다 오바로크. 그 오바로크 값만 만 원이야. 소매 기장 고치는 값은 한 칠천 원뿐이 안 되는데. 오바로크 없으면 미어지거든, 왜 안감 미어지는 거…. 내가 뒤집지 않을 때까지는 그렇게까지는 안 해주는데 뒤집어지는 옷은 해줘. 그런데 그거 돈으로 따지면 나도 그렇게 못해. 왜냐면 우리는 시간이 돈이니까. 하지만 내 양심에 옷을 만지는 사람으로서도,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도 그냥 둘 수가 없거든. 아마 그 사람들도 이런 거를 알면 그렇게 진상 짓 못 하지. 그럼 진상 손님들 말고 가게 운영 하시면서 또 어떤 어려움이 있으신가요?
처음 수선을 시작했을 때 , 좀 싫은 적도 있었지 . 왜냐면 젊을 때는 의상실도 하고 옷가게도 하고 막 이러니까 돈을 잘 벌었었잖아, 그런데 아이들 돌봐줄려구 시작한 이 수선은 돈이 아냐. 돈이 안 되니까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도 지금은 좋아요. 왜냐면 아무 데도 안 쓰잖아요. 친구들 보니까 학벌 상관없이 나이가 드니까 할 수 있는 게 간병인, 요양사, 청소, 애기 돌보미 이런 일밖에 없는데 나는 이렇게 내 일을 늦게까지 일하는 거는 좋아요. 그리고 또 하나 힘든 점은 친구도 있고 손님도 있고 좀 친해지고 그러니까 사람이 너무 많이 와. 그래서 완전히 사랑방, 진짜 사랑방 돼버리더라구. 여기는 워낙 좁아서 들어와 앉아 있을 데가 없지만, 홍제동에서는 엄청 힘이 들더라구. 싸구려 믹스커피라도 하루에 한 5잔 이러면 일주일에 50개가 나가야 돼요. 사람들 있으면 일이 안 돼서 일도 못 하고 힘들어도 누워서 쉬지도 못하고, 그 커피 값도 어마어마하고 설거지에 넘 힘들어. 홍제동 동네 친구가 시간도 많고 수다도 하고 싶고 그러니 여기까지 와요. 걔가 12시쯤 오는데 오면 점심 사서 먹이고 여기서 수다 떨고 한 6시쯤에 가요. 그러면 저녁도 뭔가 좀 먹여서 보내야 돼. 근데 나는 그사이에 낮잠을 꼭 자거든. 낮잠을 자고 좀 쉬어야 내가 버틸 수 있는데 그게 안 되는 거라. 어쩌다 한 번이면 괜찮은데 너무 자주 와서 나중에는 내가 제발 좀 오지 말라고 그랬어. 그럴 정도로 가게 운영할 때 손님들 치레하는 게 힘들어. 잠깐잠깐 휴식시간을 놓치면 일도 안 되고 너무 힘든데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니까 힘들다고 생각을 못 하기도 하겠어요. 이제 아이들도 다 크고 제 몫을
잘살고 있고, 빚도 얼마 안 남았는데 앞으로 뭐가 더 하고 싶으세요? 하실 일이 또 뭐가 있어요?
노후자금이 하나도 없어. 그 지랄하느라 노후자금이 하나도 없어. 그래서 좀 해야 돼. 이제 내 노후자금 만들어야지. 노후자금으로 노후에 뭐 하고 싶으신데?
큰 꿈은 없고 친구들 오면 밥은 사줄 수 있으면 좋겠어. 잘 사는 친구들도 많지만 그래도 나 찾아서 오는 내 친구들은 내가 사줘야지. 또 가끔 영화 보는 거 좋아해서 친구들이랑 영화관에 가서 영화도 봐야 하고. 나 넷플릭스에서 <빨간머리 앤> 그거 너무 재미있게 봤어. 저도 재미있게 봤어요. 그런데 넷플릭스도 신청하셨어요. 와! 완전 신세대이신데요. 나 컴퓨터 자판도 빨라요. 우리 큰 아들이 지네 마누라보다 빠르대. 저는 종교가 기독교니까 성경 쓰는 거 한 번 다 하고 싶은데 그거 공책 남기기 싫어서 컴퓨터로 썼어요. 그렇게 성경 다 쓰고 나니까 빨라졌어요. 나 독수리 타법 아녜요. 배울 때 딱 정식으로 배웠어. 우리 막냇동생도 독수리 타법인데. 회사 다니는 애도. 걔는 두 손으로 하는 독수리 타법이던데. 뭐든지 새로운 거를 배우시는 걸 즐기시는 것 같은데요?
그런 편이에요. 새롭고 이런 거에 관심이 많아. 나랑 아무 상관이 없는 것도. 내 친구가 천문학 박사가 있어요. 걔가 어디 관장님이었는데 그때 번역한 유니버스가 뭔가 있어, 천문학책이야. 별, 너무 어려워서 뭐가 뭔지 모르는데 나 그거 읽고 있잖아. 쪼끔은 재밌어. 현직에 계셔서 돈도 버시고 새롭고 흥미로운 거 배우는 것 도 좋아하시고, 친구들도 많으시고 노후는 걱정 없으시겠어요. (웃음)
그래도 그림 같은 것도 더 배우고 싶고, 유화보다는 수채화가 더 좋은데 수채화보다는 색연필화도 괜찮드라. 데생만 하는 것도 다 괜찮은데, 그게 거기서 딱 배우고 오면 나도 시작을 할 텐 데 집에 와서 연습을 해야 되는 게 문제야. 피아노도 그러드라구(그렇더라구). 피아노도 집에 와서 연습을 해야 되는데 나는 그게 힘들어. 집에 와서 연습할 시간은 없어. 그렇게까지는 시간 못내. 그래서 시도를 안 하지. 나중에 더 시간이 많아지면 시도해 봐도 되지요. 제가 이런 거 여쭤봐도 되나. 수입이 어느 정도 되세요? 여기 수익은 좀 일정하셔요? 내가 일하는 거만큼. 수선이 안 들어오는 게 아니라 내가 많이 못 해요. 어디가 아픈 게 아니라 지쳐서 기력이 딸려서 못 일어나서 누워야 돼. 좀 자야지 못 자면 아파. 운동을 가니까 그 쑤시는 거는 좀 없어지기도 하는데 어디가 꽉 아픈 게 아니라 그냥 힘들어. 체력이 많이 약해지셨나 봐요. 응. 체력이 딸려서 많이 못 해서 수입은 총수입이 200 정도 들어오면 월세 내고 전기요금 내고 뭐 나가는 거 많잖아. 이거 저것, 그러구 나서 생활하고 쓰는 데는 아무 지장 없어. 나한테 한 120 정도. 그 옛날엔 그거 갖구 모자랐죠. 빚도 갚아야 하구. 정말 중요한 건 자기가 말한 주체적 삶 , 뭐 이런거는 모르겠지만 난 잘 살았다고 생각해. 내가 내 스스로. 내가 선택해서 시작한 거를 끝까지 마무리하려 노력했지. 그럼요 너무 멋있게 사셨지요. 그래서 제가 주체적으로 잘 사셨다고 한 거지요. 내 삶에서 내가 선택하고 책임지고 그래서 아이들도 당당히 다 잘 서게 하셨잖아요.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잘 산 거지. 지금은 행복해요. 아직 건강이 허락해서 일을 할 수 있고, 내 솜씨를 인정하는 손님들도 있고, 친구들과 피터팬 같은 데 가서 맛있는 빵이랑 커피 먹으며 지낼 수 있는 시간도 있고, 아이들도 다 무탈하고 지네들 몫을 잘 살아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