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잡지 [인터뷰, 마을이음] (3호 전농동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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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 2019. 06. 30.

인터뷰,마을이음 ㅣ 발행처 시민나루 ㅣ 발행인 심소영 ㅣ 디자인 청년협동조합 몽땅 ㅣ 서울시 동대문구 사가정로 23길 102-502 ㅣ T. 02-2245-9623 ㅣ cafe.daum.net/ddmplf ㅣ facebook.com/ddmplf

01 11-14

전농동�마을지도 편집인의�글

동네에서�놀고, 즐기고, 배울�곳

02-06 15-16

당신이�몰랐던 우리동네�소소한�역사 전농동 돈키호테

07-10 17-18

모이고, 많아지고, 달라지다. 동네이슈, 있슈~

세번째�이야기,

임금의�경작지 ‘전농(적전)’ 주민들이�만들어가는 ‘전농동’으로�일군다 *적전 [籍田] 예전에, 임금이�몸소�농민을 두고�농사를�짓는�논밭을�이르던�말


인터뷰,마을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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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농동�마을지도

전농동 어디어디 가봤니?

서울시립대 권영미통장님동네 (전농9구역)

리역

청량

청량 리역

해성국제컨벤션고

전농중

아름숲문고 전곡초

배봉산 근린공원

전농초 신락원 배봉꿈마루 500원파전 전농서점

전농1동 주민센터

뜨락도서관 배봉숲속도서관 꿈틀어린이도서관 전농2동 (해뜨는집) 주민센터

전농로터리 전농동우체국

동아아파트 박수근화백 옛집터

전농초 동대문중

편집인의�글 <전농동편을�마치며>

임금의�경작지 ‘전농(적전)’, 주민들이�직접�일구는 ‘전농동’으로�바꾼다. ‘전농동’ 취재를�시작할�때부터�궁금했다. 이�동네는�왜�이렇게�활기가�넘칠까. 마을계획단도 주민자치회도�성황이고, 주민들이�참여해서�만든�여러�가지�사업도�더�활기차게�추진되고 있는�이유가�있을까? 많은�이유�중�하나일�수�있겠지만, 안정된�생활권에�방점이�찍힌다. ‘인터뷰_마을이음’을 3호까지�제작하며�만난�동대문사람�들은�하나�같이�모두�동네를�아끼고 선했다. 휘경동�사람들도�그랬고, 청량리동�사람들도�그랬다. 그런데�전농동은�다른�두�동과는 또�다른�활기가�느껴졌다. 그�차이를�유추해보니�전농2동은 10여�년�전에�재개발이�끝나�크고 작은� 아파트들이� 들어서� 주민들이 10년� 이상� 거주한� 사람들이� 많은� 동네이고, 전농1동은 재개발�계획이�아직�뚜렷하지�않아�오랫동안�산�주민들이�많은�지역이라는�점이었다. 학교가 많으니�주민들의�연령층도�다양하고, 편의시설�또한�다양하게�갖춰진�지역이라�더�활기가 느껴졌나�보다. 전농2동은�서울형�주민자치�우선�지역에�선정되어 3년�전부터�주민들이�마을에�필요한�것을 알아보고, 의제를�정하고�실행계획을�세워�실행까지�하니�활기가�느껴질�수밖에. 그래서인지 주민자치회에서� 활동하는� 주민, 도서관을� 운영하시는� 주민� 모두� 동네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들의�이야기를�들으며�우리�동네에서도�이렇게�해보자는�마음, 또�한편으로는 이사�오고�싶다는�마음이�들�정도였다. 2019년 7월 13일(토) 주민� 활동의� 내용과� 결과를� 확인하는� 자리가� 마련된다. 걷기대회와 다양한�부스�그리고�주민들이�직접 2020년�동네�의제를�정하는 ‘주민총회’ 준비가�한창이다. ‘주민들의�주민들에�의한�주민들을�위한’ 주민자치�활동이�계속되고, 이�분위기가�전�동에 퍼지기를�바라며�이번�인터뷰, 마을이음�전농동�편을�발행한다. 2019.6.30. 심소영

배봉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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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몰랐던�전농동의�소소한�역사

임금님이�농사지은�땅 , ‘전농’동의�소소한�역사 문화플랫폼시민나루�시민기자�정담희

전농동은�그�명칭에�담긴�의미처럼, 국왕의�친경지인�적전, 일명�전농이 있었던� 곳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 연혁을� 살펴보면� 조선� 시대에는 한성부� 동부� 인창방에� 속했고,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에는�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전농리, 1936년� 경기도� 경성부� 전농정, 구제가� 실시된 1943년에는�동대문구�전농정, 광복�후�동제가�실시된 1946년에�지금의 이름인�동대문구�전농동이�되었다. 이후�전농3,4동이�분동, 신설되는�등 몇�차례�분동과�통합이�이뤄진�후, 2009년에�만들어진�전농1, 2동�체계가 지금까지�이어지고�있다. 전농1동에는�청량리역이�있고, 6번�출구�앞에는�가톨릭대학교�의과대학 성바오로병원이�있었으나, 지금은�영업이�종료되고�건물만�남아있다. 그 자리에는�고층�주상복합�건물들이�들어설�예정이다. 청량리역�뒤편으로는 청량정보고가�있고, 전농초가�래미안전농크레시티�건너편에�있다. 그리고 부근에�서울시�민속문화재�제35호로�지정된�전농동�부군당이�있으며, 좀 더�전농사거리�쪽에�전농�시장이�있다. 전농2동에는� 학교가� 많이� 있는데, 서울시립대학교, 전곡초, 전동초, 전일중, 전농중, 해성국제컨벤션고, 해성여고가� 있다. 그리고 동부교육지원청�있으며, 해발 105m쯤�되는�배봉산이�위치한다. 왕실농업문화가�담긴�마을당, 전농동�부군당

전농동�부군당

요즘� 전농동은� 청량리역� 주변� 개발과� 관련하여�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핫플레이스�중�한�곳이�되었다. 오랫동안�청량리역�및�올해�초�문을�닫은 가톨릭�성바오로병원�등 (현재�은평구로�이전) 등�전농동�소재의�몇몇�유명 공공기관들은�청량리동�소속으로�많은�이들에게�오인돼�왔었다. 지금의 청량리역세권�개발은�엄밀히�따져�전농동�일대의�개발이�핵심이�된다. 이러한�부동산�호재에도�불구하고, 전농동의�이미지가�여전히�나에게는, 1980년대� 초중반� 전농사거리� 버스정류장의� 일상에서� 출발한다. 전곡초와� 동부교육청에서� 전농사거리� 방향으로� 몇� 걸음� 내디디면 해성여고, 해성컨벤션고로� 들어가는� 넓은� 길이� 나온다. 이� 지점 버스정류장은� 등하교� 시간� 한� 무리씩� 오르내리는� 학생들로� 엄청나게 붐볐다. 아침에�버스에서�내린�여학생들(당시�전농�여중�학생들은�당시 해성여중, 여상� 입구� 길을� 함께� 이용했으나, 전농� 여중� 바로� 옆� 전농중 남학생들은� 거의� 예외� 없이� 다른� 길을� 이용했다. 지금� 전농중은 남녀공학이� 되었다. 그리고� 인문계고인� 해성여고가 2008년 3월 1일 개교되면서, 해성여중은 2010년 2월 28일� 폐교되었다.)의� 행렬은� 당시 해성여중·여상�입구�길가에�대�여섯�군데�자리�잡고�있던�문구점�앞에서 흩어진다. 많은� 학생을� 소화하기� 위해� 문구점� 주인들은� 아예� 가게� 앞 평상에�그�날의�준비물을�잔뜩�쌓아�놓고�판매했다. 아침�시간�분주하게 문구점을�훑고�간�여학생들이�하교�시간이�되면, 긴장이�풀린�자유분방한 모습으로� 분식집을� 점령한다. 그다지� 긴� 길이� 아니었음에도� 약� 십여 군데의�분식집들이�나름대로�특징을�갖고�있었던�것�같다. 특히�떡볶이 또는�쫄면이�맛있거나�다양한�빙수로�인기�있었던�집, 그리고�여전히�주변 여러분들의� 기억에� 추억의� 맛으로� 기억되고� 있는 ‘할머니� 냉면’ 등이 학생들을�반겼다. (당시�초등학생이던�내가�중학생�언니와�함께�그�맵던 냉면을� 물을� 들이키며� 먹고� 있을� 때, 가게로� 들어온� 한� 무리의 여학생들에게�이북이�고향이신�주인�할머니께서�배가�다�떨어져�더는�그 날�냉면을�팔�수�없다는�말씀을�하셨다. 지금도�냉면�안에�든�시원한�배 조각을� 집어� 들� 때면, 당시 500원짜리� 분식집� 냉면에도� 배를� 빠뜨리지 않으셨던�실향민, 주인�할머니에�대한�기억이�스친다.) 임금님이�농사지은�땅 , ‘전농’동

약 35년�전�초등학생�시절, 한�친구가�청량리역에서�전농�시장�가는�길에 아주�큰�나무가�있는데, 그�옆에�이상한�그림들이�많이�걸린�제사�지내는 집이� 있다고� 했다. 며칠� 뒤� 궁금한� 마음에, 동네� 친구� 한� 명과� 동생을 데리고� 친구가� 말한� 그� 길을� 따라가� 보았다. 가다� 보니, 다른� 의심의 여지가�필요�없는�바로�그�큰�나무가�있었는데, 이미�나무의�위엄에�겁을 먹어�옆에�있는�집은�찾아보지도�않고�곧장�발걸음을�돌렸다. 이제�생각해 보니� 그� 집이� 부군당이었다. 전농동� 부군당은 2017년 4월 13일 서울특별시의�민속문화재�제35호로�지정되었다. 지정�사유는�조선�시대 전농동� 일대가� 농사와� 친경의식과� 그� 행렬� 등으로� 대변되는� 왕실 농업문화의�중심지에�해당하는�지역이어서, 전농동�부군당�무신도�또한 서울지역�농악�관련�풍속화로서�미술�사적�가치가�뛰어나다는�점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 가치를� 인정받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 느낌이다. 그리고� 어릴� 적� 본� 그� 아름드리나무가� 물푸레나무란� 걸� 이번에� 알게 되었고, 그�나무는 2000년 12월 20일�보호수로�지정되었다. 현재� 전농동� 부군당에는 11점의� 무신도가� 봉안되어� 있는데, 무신도의 도상과�이름을�바탕으로�두�유형으로�구분하여�그�의미를�살필�수�있다. 무신도의� 한� 유형은� 전형적인� 무속의� 신령들을� 봉안한� 것으로� 이는 전농동� 부군당이� 마을당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 유형은� 조선� 시대 국왕의�거동�행차를�그림으로�그린�것으로, 행차의�앞과�뒤에�따르는�여러 행렬의� 모습을� 담았는데, 처음에는� 부군당의� 배경� 역할을� 하다가� 어느 순간�무신도로�받들어지게�된�것으로�보았다. 그리고�전농동�부군당에는 조반이�부군�신령으로�봉안되어�있는데, 전농동에�전농시(典農寺)가�있어 국왕의� 농사� 행사를� 감당했고, 이러한� 성격이� 조선� 시대� 토지� 개혁과 관련이�있는�조반을�부군�신령으로�모셨다고�본다. 현재�전농동�부군당은 공원으로�꾸며져�있다. (홍태한. (2016). 서울�전농동�부군당의�향방. 서울민속학, (3), 113-133.) 정문�없는�시립대, 주민들의�여유로운�휴식처 시립대생들에게�맛집�등을�소개해�달라고�하면, 예외�없이�듣는�대답이 “ 잘�아시겠지만�우리�학교�앞은�특별히�갈�데�없어요.”이다. 서울�소재�대학 중�상권이�제대로�이뤄지지�않은�곳으로�너무나�잘�알려진�대학이지만, 정문�없는�시립대는�인근�주민들에게�자연과�문화공간으로�잘�활용되고 있다. 하지만�최근�자원봉사�장소에서�만난�한�시립대�학생으로부터�학교 정문에�관한�논란이�있었다는�사실을�알게�되었다. 그래서�시민들의�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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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침가루를�넣지�않고�밀가루만�사용하기�때문이라신다. 절로�흐뭇해지는 고소한�기름내�그리고�옛�모습�가득한�시장을�뒤로하며�아쉬운�발걸음을 돌렸다.

1965.5.6. 동아일보 7면

<출처: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시립대�입구

공간�이용에�초점을�맞춰, 도시공학부 3학년�윤�모�군과�세무학과 3학년�김 모�군과�인터뷰를�했다. “시립대의�취지나�재원�등을�고려할�때, 시민들이�여유롭게�즐기는�모습을 보면� 참� 좋아요. 하지만� 시민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은� 확실히 삼가셨으면�합니다. 시립대를�잘�이용할�수�있는�팁으로는�음악회�등의 행사가� 있을� 때� 꼭� 참관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저는 학교에서� 배봉산� 정상에� 오르는� 것이� 참� 좋아요. 학교� 내� 예쁜� 연못을 지나서�배봉산�정상에�오르면�남산�정상�못지않게�아주�시원해요.”라고 윤군이� 문화와�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즐거움을� 그� 느낌까지� 함께 이야기했다. 그리고� 김군이� 말을� 이었다. “주민분들이� 저녁� 시간이나 주말에� 산책� 공간으로� 많이� 이용하시는� 모습이� 저는� 보기� 좋습니다. 그렇지만� 가끔� 애완동물� 배설물을� 치우지� 않으시는� 분들을� 볼� 때, 또 동행한�애완동물�소리에�수업시간�집중이�안�될�때, 그런�부분만�주의해 주셨으면�좋겠다는�생각이�들어요. 그리고�저는�시립대�명소로 100주년 기념도서관을�말씀드리고�싶네요. 시설과�프로그램이�아주�훌륭합니다.” 전농사거리의�변함없는�명소, 전농로터리�시장

현재까지�남아있는�옛�전농로터리�시장간판

화가�박수근의�마지막�터전 : 현재�전농동�동아아파트�자리

화가� 이중섭과� 함께� 한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미술가인� 박수근 (1914-1965)은�일평생�가난과�함께했다. 창신동에�어렵게�마련한�집을 소송으로�잃고�그의�가족은 1963년�전농동으로�옮겨�왔다. 바로�그�집터가 청량리역�뒤편의�전농동�동아아파트�자리이다. 지금�동아아파트�정문�옆 작은�화단에는�화가�박수근을�기념하는�안내판이�세워져�있다. 얼마�전, 동아아파트에서�약 20년을�사신�지인으로부터�몇�년�전에�아파트�부녀회 주최로� 화가� 박수근을� 기리며� 그의� 고향� 양구로� 여행을� 갔었다는 이야기를�들었다. 1965년 4월초�간경화와�응혈증이�악화돼�약�한�달간 위생병원(현재�서울삼육병원)에�입원했다가, 퇴원�다음�날�새벽�전농동 집에서�생을�마감한�박수근�화백의�자취가�그리고�그�존재감이�앞으로 지역에서�더�크게�느껴졌으면�한다. 따뜻한�인정과�생동감으로�충만한�전농동

동대문구청� 홈페이지� 각� 동네� 소개를 살펴보면, 전농1동의�특징으로�다음과�같이 적혀�있다. ‘장기�거주자들이�많은�정이�담겨 있는� 지역’이라고. 공공기관� 자료에� 적혀 있기에는� 다소� 주관적이지� 않나� 싶지만, 전농동을�표현하기에�아주�적합한�문구라는 생각에� 바로� 눈에� 들어왔다. 정이� 많은 지역은� 따뜻하고� 평화롭지만, 자칫� 정체된 느낌으로� 와닿을� 수� 있다. 하지만, 학교가 많은� 전농동은� 초등학교� 어린� 새싹들부터 중고등학교를� 오가는� 청소년들, 그리고 시립대� 청년들로� 동네에� 활력이� 넘친다. 거기에� 마을을� 사랑하는� 주민들의� 따뜻한 마음이�합쳐져�전농동은�항상�인정과�활기로 넘치는�것�같다.

새로�설치된�전농로터리�시장간판

전농사거리에서�전농1동�방향으로�여러�개의�길이�전농�시장과�만난다. 전농� 시장� 취재를� 위해� 박� 이비인후과� 간판을� 보면서� 옆에� 있는� 좁은 입구로�들어서는데�많이�설레었다. 내�기억의�출발점인�약 40년�전과�거의 동일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박� 이비인후과도� 그대로이고, 시장� 안 상인들의�자리�배치도�거의�비슷해�보였다. 지영갈비란�상호도�낯익었다. 그�입구에서�시장�안으로�들어서면�바로�중앙�노점에�부침개를�파시는 아주머니가�계신다. 500원�부침개로�이미�유명하신�아주머니와�부침개를 사�먹으며�잠시�이야기�나눴다. 거의�시장�모습이�변함없는�것�같다는�내 소감에 “이�전�굽는�판이며, 아래�솥이며�다�전�주인�할머니가�몇십�년�쓰신 거�그대로야. 나는�세�번째�사장이에요. 할머니가�딴�사람한테�넘겼었는데, 두�번째�사장�할머니(1년�운영)께서�오래�못하고�내가�엉덩이가�무거워 오래� 하고� 있어요. (약 18년째� 운영)” 가격이� 너무� 싸서� 남지� 않을� 것 같다는� 질문에는� 전화� 주문을� 받아� 포장이� 많아서� 많이� 팔면� 남길�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인기의� 비결인� 부침개의� 부드러운� 식감은 전농시장�내 500원�파전집

박경자�사장님

전농동�동아아파트�내에�있는 박수근화백�집터�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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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몰랐던�전농동의�소소한�역사

전농1동�어디선가 누군가의�무슨�일이�생기면�달려간다.

[인터뷰] 전농1동�권영미�통장�인터뷰 & 서남순할머니, 고남순반장님 문화플랫폼�시민나루�심소영, 임정희�기자

주민�사업으로�가꾸는�꽃밭

통장님이� 보내주신� 주소를� 내비게이터에� 찍고� 가니� 청량리에서 회기역으로� 가는� 기찻길� 옆집들이� 즐비한� 골목길� 끝� 집이다. 올망졸망 모여� 있는� 집들은� 색바랜� 벽화가� 있고, 기찻길을� 구분하는� 회색� 담장, 누구네� 작은� 앞마당� 같은� 공원이� 있다. 오래된� 동네면서도� 아름다운 골목이�꽃밭으로�이어지는�골목에서 권영미�통장님을�만났다. Q: 안녕하세요. 인터뷰�마을이음입니다. 전농1동�마을담당�주임님께서 추천해주셔서� 연락드렸는데, 흔쾌히� 인터뷰� 허락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현재�어떤�일을�하시는지를�포함해서�자기소개�부탁드립니다. A: 전농1동에� 사는� 권영미입니다. 전2장학회� 회장, 통친회� 회장대행 그리고� 전농1동� 주민자치위원, 희망복지위원으로� 활동� 등� 주로� 봉사 활동을� 합니다. 우리� 동네가� 옛날� 동네라� 공중화장실이� 있는데, 청량리 노숙자분들이�이�화장실로�씻으러�와서�좀�무섭고�그랬어요. 그래서�동네 환경을� 변화시키고자� 주민� 사업을� 시작했어요. 어제도� 어버이날이라 어르신들� 앞마당에� 모셔서� 꽃� 달아드리고� 부침개� 해서� 나눠� 먹었어요. 제가�부모님이�안계서서�제�부모님께�한다고�생각하고�하면�마음도�좋고 그럽니다. 저희� 동네가� 토속적이다� 보니까� 아파트와� 달리� 대문� 열고 나가면�이웃을�만나니까�잘�어울리게�되고�그럽니다. Q: 생활이�거의�봉사�활동으로�채워져�있는�것�같습니다. 봉사활동을�하루 얼마나�하시나요? A: 매일은�아니고, 정해진�날이�있어서�그리�많지는�않아요. 오늘�자원봉사 시간을�떼어보니 500시간은�넘었더라고요. Q: 생업과�가족, 그리고�생활하시는�주변을�소개하여�주신다면? A: 가족은 1남 1녀를�두고�있어요. 딸은�결혼했고, 아들까지�모두�독립은 했어요, 그래서�남편이랑�둘이�살아요. 생업이라기보다는�커피는�제가�사 먹을�수�있는�정도의�수입이�있는�요양보호사�활동을�하고�있어요. Q: 회장으로�활동하시는�전2장학회는�어떤�단체인가요?

권영미�통장님

전농1동�기차길옆�골목

A: 전2장학회는�동네�어르신들이�만든�장학회인데요. 제가 3대�회장인�것 같아요. 92년도에� 시작된� 장학회입니다. 한 19년� 정도� 되었어요. 장학회에서는�불우이웃돕기로�쌀�나눔도�하고�그랬는데, 지금은�학생들에 연 700만�원을�장학금으로�기부합니다. 대상은�고등학생이고 1년에 10명 정도� 어려움을� 학생을� 선발해서� 줍니다. 1인당 72만� 원� 정도� 되지요. 회원들께� 어려운� 가정� 추천� 받아서� 지급했어요. 처음에는� 출자금을 모아서�이자로�장학금을�줬는데, 이자가�거의�없으니, 월 2만�원�회비와 맹주옥� 회장님이� 두� 사람분의� 장학금� 후원을� 해주셔서 1년� 후원금을 지급합니다. 지금� 회원은 36명� 정도입니다. 회원들� 모여서� 밥은� 한� 달 건너뛰더라도�후원금은�모아서�지원합니다. 친목계와�비슷하지만�모여서 의미�있는�일을�하자는�모임이에요. 저�혼자�할�수�없는�일이고�회원들이 도와줘서�할�수�있는�거죠. 더불어�사는�세상이어야�하니까요. Q: 돈은�늘�부족하기�마련인데, 잘�사는�동네도�아니고�유지할�수�있는 비결이�특별한�원동력이�있으신지요? A: 저는�제가�회장을�해도�적극적으로�권유는�못�하겠더라고요. 그래도 우리가�술�한�잔�먹어도�몇�만�원씩�줘야�하는데, 좋은�일로�써보자면서 가끔�부탁하면�들어주시더라고요. 1년에 700만�원�후원금�만들기도�쉽지 않아요. 회원� 만날� 때� 나가는� 찻값� 등은� 자비로� 쓰면서� 계속� 모으면서 이어가고� 있습니다. 또� 저희는� 법인은� 아니지만, 세무서에� 소득공제가 가능한� 비영리재단으로� 소득공제� 영수증은� 발급� 가능한� 단체입니다. 그리고�장학회의�맹주옥�회장님이�자랑스럽습니다. 존경하는�분입니다. 이솝어패럴� 사장님이세요. 우리� 장학회를� 이끌어주시는� 분입니다. 이 동네서� 어렵게� 사시다가� 브랜드를� 만드셔서� 잘� 되면서� 성수동� 쪽에서 사업하시는데� 지금까지� 계속� 지원해주고� 계십니다. 그렇게� 맹주옥 회장님을�비롯한�전2장학회�자체가�자랑스럽고�보람�있어요. Q: 동대문구�전농동에서�이런�봉사�활동을�하시게�된�계기가�무엇인가요? A: 언니� 따라� 왔어요. 30년� 정도� 살았네요. 호적상으로는 58세인데요. 원래는 60년�쥐띠에요. 충북�단양이�고향인데, 지금은�동생이�고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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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운탕� 집을� 해서� 주말마다� 내려가� 동생을 도와요. 80년대에�언니�따라�이�동네에�왔어요. 한 30년�산�것�같네요. 경기도�부천으로�딸 5살 때�이사�와서�딸 3학년 10살�때�서울로�왔어요. 지하�월세�방에서�시작했어요. 왔더니�언니가 지금� 저처럼� 어르신들께� 잘� 하며� 살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언니가� 소개해� 준 어르신들께� 배우고� 시키시면� 뭐든� 하고 그랬어요. 어떤�때는�내가�뭐하나�회의를�느낄 때도�있지만, 나를�위해서�한다고�생각합니다. 지금� 동네� 어르신들이� 내가� 이사한다면 본인들도�데리고�가라�하세요. 주민� 사업을� 시작한� 이유는� 동네� 있던 빈집들이� 헐렸는데, 쓰레기장으로� 변하더라 고요. 그래서�주변�환경�관리를�시작해봤어요. 텃밭을� 먼저� 해봤는데, 쓰레기� 관리가�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나무도� 심고� 꽃밭으로 가꾸기� 시작했어요. 어르신들과� 같이� 물을 주고� 가꾸는데, 함께� 가꾸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어르신도� 이웃� 동생들도� 함께해요. 가진� 것을� 나누어야� 작은� 것도� 소중해지고 보람� 있더라고요. 내� 욕심만� 채우려� 하면 뭐든지�더�힘들고요. Q: 전농동에� 사시면서� 가장� 살기� 불편하다 거나�안�좋았던�점은�무엇이�있을까요? 공중회장실이� 있어서� 저녁에� 골목� 다니기가 무서워요. 빈집도� 많거든요. 빈집도� 그렇지만 재개발되기� 전까지� 빈방� 싸게� 얻어서� 사는 분들이�많은�데�무섭기도�해요. 옷도�안�걸치고 문도� 열어놓고� 계시는� 분들이� 있어요. 정말 민망하고. 또�돌봐줄�이�없이�방치된�어르신도 계시고, 노숙자도� 있어서� 어떻게� 손쓸� 수가 없어요. 시장이나� 구청장님이� 직접� 방문해서 봐�주셨으면�좋겠습니다. 재개발이�빨리�돼서 무섭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재개발 9 구역인데요. 어떤� 방식으로든� 환경개선이� 꼭 필요합니다. Q: 살기� 불편한� 부분에� 대해� 주민들이� 또는 공직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A: 제가�몸이�불편한�동네�어르신을 4개월�동안 차로�병원에�모셔다드렸어요. 월수금. 또�요즘 3~4분이�목욕�가시는데, 로터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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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셔다드려요. 그래서� 이사� 가지� 말라고, 어르신들�사시기�힘든�동네라�누군가�돌보지 않으면� 어렵거든요. 이� 동네는� 모든� 것이 불편하니�빨리�재개발하는�것이�방법�아닐까 생각합니다. Q: 이� 동네에서� 잊히거나� 사라지면� 아쉬운 소소한�역사가�있을까요? A: 이�동네�역사는�제가 30년�정도밖에�안�돼서 잘� 몰라요. 오래� 사신� 할머니를� 소개해 드릴게요. 바로� 다음� 날� 권� 통장님이� 서순남� 어르신을 소개해� 주셨다. 그래서� 전농동에서만 70여 년을�사셨다는�그분을�만나러�갔다. 또� 구불구불� 골목길, 벽에는� 알록달록� 벽화, 나지막한� 지붕, 어르신을� 뵈러� 가는� 골목길 걷다�만난�풍경들이다. 시간을�훌쩍�뛰어넘어 80년대의�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놀았던 골목길이� 떠오른다. 서순남어르신� 댁은� 그 골목�깊숙한�곳, 문�앞에�작은�꽃밭이�그리고 형광색�문발이�걸린�문. 그�발을�걷으니�바로 방이� 나왔고, 나지막한� 앵글� 침대에� 걸쳐 앉아계신�서순남�어르신을�만날�수�있었다. Q : 여든이� 넘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언제 태어나시고, 여기서는� 언제부터� 서셨는지 소개�부탁드립니다. 서순남� 어르신(이하� 서): 태어나긴� 충북 영동에서�태어났지. 6살�먹어�어머니가�돌아 가셔서� 하나도� 잘� 몰라. (갑자기� 방� 벽의 서랍장으로� 가시더니� 주민증을� 꺼내주신다) 맞는지는� 모르지만 37년생으로� 되어있더 라고. Q : 결혼해서�이곳으로�오셨어요? 서 : 아니� 거서� 좀� 살다가� 벌어� 먹고살기 힘들어서�왔는데, 여기도�먹고살기�어렵기는 마찬가지였어. Q : 할아버지는요? 서 : 같은�고향�사람이야. 그�양반은�보은. 벌써 죽었어. 한 10년�되었네. 노동일을�하는�사람인데�일�하려고�왔지. 배운 것이�없으니까. 별거�다�해봤어. 청량리시장서

서순남�어르신�댁�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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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장사도�해보고. Q : 이�동네에서�만은요? 서 : 이�동네서만 70년을�살았어. 부르꾸(시멘트 블록의� 일본식� 발음) 찍은� 그것� 영감이랑� 같이 했어. 큰�거�구멍�뚫린. 영감이 9년�전에�죽고. 4 남매� 뒀는데, 큰놈� 둘은� 먼저� 죽었고. 남매만 있어. 이� 동네는� 안� 변하고� 그대로야. 변한� 게 있다면�요�앞�기찻길�담도�없이�철도�보며�살았지. 아주�시끄러웠어. Q : 시립대가�농업학교�시절�기억은�있으세요? 서 : 농업학교라�했던�기억만�있어. 권영미�통장님(이하�권): 떡전교가�떡�팔고�했던 곳인데, 배봉산에� 장군들� 묘지도� 많았었다고 들었어요. 터가�좋아서. Q : 그럼�이�동네서�사시면서�가장�좋았던�것은 뭐가�있어요? 서 : 뭐가�있나? 인심�좋은�거지�뭐. 친하게�지내는 사람은� 많이� 이사했지만, 자녀들도� 휘경초, 중 전농중학교�나오고�그랬어. Q : 인심�좋은�것�말고�좋은�장소나�자주�간�곳은 없으신가요? 자랑하고�싶은�장소나. 서 : 자랑할� 만� 게� 뭐가� 있어. 그전에는� 배봉산 다녔는데, 지금은�풍이�와서�못�다녀. Q : 동네�불편하신�것이�있다면? 서 : 저기� 있는� 공중화장실이� 진짜� 불편했지. 옛날에는� 옆에서� 일보는� 사람이� 다� 보였거든. 그래도�지금은�싹�고쳐서. 그래도�노숙자도�많고 해서�무서워. (어느�순간�고남순�반장님이�들어오셔서�이�동네 염원은�재개발임을�얘기하신다.) 고 : 너무� 춥고� 집이� 허술하니� 이런� 노인네들만 살아. 벽도� 자꾸� 허물어지니까� 임시방편밖에 못살아. 서 : 그때� 내가� 부르꾸를� 만들� 때� 시멘트� 끼가 거의�없이�만들었어, 시멘트�한�포대에 100장씩 뽑았으니까�말�다�했지�뭐. 고 : 그러니까�집들이�다�이�모양이지. 재개발밖에 답이�없어. Q : 재개발이� 시작되면� 이사하셔야� 하고, 다 뿔뿔이�흩어지실�텐데�괜찮으세요? 고 : 뭐�결정이�나면�땅값이�오르면�팔고�이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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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그럼�이�지역에서�그런�안�좋은�사례가�있다면? 권 : 제가� 선거하는� 날� 일찍� 선거하러� 가려고� 문을� 열었는데, 노숙자가�공중화장실인�줄�알고�우리�집으로�들어와서�우리�집 아저씨가� 쫓아내도� 안� 나가고� 다� 씻고� 간� 예도� 있어요. 또 공중화장실에서도� 벗고� 서� 있고. 옛날에� 노숙자� 단속할� 때는 없어졌었는데, 이제는� 안� 하니까� 또� 많아져서� 그래서� 동네가 무섭지.

왼쪽부터�고남순�반장, 서순남�어르신, 권영미�통장

가든, 임대아파트� 들어가든� 어떡하든� 결론이� 나겠지. 결정이� 안� 되니까� 계속� 이 상태로만�있더라니까. 아무것도�안�된다니까. 권 : 난�이사하고�싶은데�어르신들이�못�가게�해요. 고 : 이�양반�없으면�안�돼. 재개발에�대해서는�할�말이�진짜�많아. 나는 90년도�넘어서 왔어요. 그전에는�옛날�전농1동�동아아파트�쪽. 계속�이�동네�살았어요. 그래서�아는 것은�별로�없어. Q : 그러면�이�동네�산�것�까기�하면? 고 : 한 40년�가까이�살았지. Q : 동네에서�가장�좋은�것이�있다면……. 고 : 못�느끼니까�재개발을�원하겠지. Q : 동네�재개발을�하고�싶은�이유? 고남순�반장님: 땅값도�안�오르고, 병원도�없고, 마트도, 목욕탕도�없고…. Q : 그래도�오래�사신�이유가�있지�않을까요? 고 : 마지못해�돈이�없어서�여기�사는�거예요. 돈만�있으면�벌써�이사하였지. 나이는 76. 딸이랑, 남편이랑�살아요. 돈이�없으니까�이사도�못가. 이�통장님이�젊어서�다 엮어주고�지원해주니까�그렇지, 안�계시면�여기사는�노인네들�아무것도�못�해. 또�이 형님이�솜씨가�좋으셔서�같이�밥도�같이�먹고�하는�거지. 노인정은�텃새도�있고�돈도 들어가고, 회비�외에도�돈�들어가는�것이�많더라고. Q : 이리�지내시다�흩어지시게�되면�외로우실까�봐. 고 : 우리도�모여앉아�얘기하지. 뿔뿔이�흩어지지�말고�지하방이라도�얻어�살아보자 얘기도� 하고� 걱정� 해. 그때� 되면� 어떨지� 모르지만. 그래도� 재개발� 결정이� 되어야 땅값이� 오르던가� 하고� 땅� 팔고� 이사를� 하든� 임대아파트를� 가든� 먼� 수를� 내지, 집주인들은�다�나가버리고�노인네들하고�뜨내기들만�사니�동네가�이렇지. 그러니까 이�동네�숙원은�첫째도�재개발, 둘째도�재개발, 셋째도�재개발이여. 아이고�사람들�술 먹고�소리�지르고, 벗고�살기도�하고…. 그래서�화장실�칸마다�비상벨이�있어. 말해 뭐해. 하여튼� 그� 근처에서� 별일이� 다� 있어. 통장님이� 많이� 도와주고� 하니까� 여기 조금이라도� 살지. 여기� 어르신들은� 거의� 세� 사는� 것이에요. 재개발되면� 임대나 이렇게�가겠지. Q : 여기�걸어오다�보니까�조감도�있던데, 진행되고�있는�것�아닌가요? 권 : 진행하고�있는데, 반대하는�분들도�계셔서�지지부진해요. 고 : 우리는�유명한�곳이나�얘기할�만한�것은�없지만�할머니들이�많이�살아서�제일 낙후되고�못사는�곳이라�재개발이�꼭�필요하다�의견을�써줘요. 옛날에는 8통인데, 지금은 21통이라. 진짜�사람�살�곳이�못돼요. 통장님�덕분에�화합하고�따듯하고�함께 이것저것하고�토속적인�면은�있지만, 생활�자체가�너무�어려워.

Q : 서순남�할머님은�행복한�기억이나�자랑하실�것은�없으세요? 고 : 음식을� 잘하세요. 나물을� 잘� 만드시고, 한식은� 다� 잘해. 손맛이� 그렇게� 좋아. 형님� 친구가� 형님� 편찮으실� 때� 죽더라도 손맛은�나�주고�가라고�그랬데, 많이�웃었네. 그래서�같이�밥�자주 먹고�그래요. 권 : 안�움직이면�우울증�생기니까�자꾸�움직이시고, 청소하시고, 꽃밭에� 물� 주시고� 동네� 사람들이랑� 밥� 먹고� 목욕탕이랑 경동시장도�가시고. 서 : 그래� 시장은� 경동시장이� 좋지� 싸고� 많고. 어떨� 때 행복했냐고? 행복한�것�모르고�살았네. 너무�고생하고�살아서. 나쁜�기억만�머릿속에�있지, 좋은�기억은�없어. 지금은�아픈�것만 빼면�편하지! 옛날에는�회기역�근처는�다�미나리꽝이었고, 주유소�있는�곳도 산이랑�미나리꽝이었고�집�하나도�없었어. 기찻길�담도�없어서 무연탄� 훔쳐가는� 사람들도� 많았고, 이� 동네� 사람들� 다� 거기서 먹고살았어. 짐도� 날라주고� 청량리역에서� 먹고� 살았지. 한창때는�우리�할아버지가�집�진다고�터도�잡았었는데, 30살에 군대�가면서�집터도�다�잃어버렸어. 출생신고�늦게�해서�군대를 늦게� 갔지. 환경미화원을� 하셨는데, 퇴직금만� 탔어도� 지금 이렇진� 않았을� 텐데, 주변� 사람들� 뭐� 다� 사주느라고. 다 없어졌어. 옛날에�공중화장실�옆집 2천�달라�했었는데, 퇴직금도 다�써버려서�못�샀어. 고 : 여기�같은데는�없어. 서울시에서�이렇게�살기�힘든�동네는�이 동네밖에�없어. 권 : 재개발 15~6년� 전에�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한� 번 구역지정까지� 났다가� 서류� 미비로� 취소된� 적이� 있어요. 그때 서둘러서�해야�했는데, 다시�시작한�것이 7, 8년�되었어요. 고 : 통장님이�젊어서�뭐든�다�도와주니까�사는�거야. 이�동네�큰 인물이여. 없으면�이�동네�안�돌아가지. 나도�딸이�자꾸�나가자 해. 어떤�화두에도�계속�재개발문제로�이어져�오래된�동네�이야기는 더�들을�수�없었다. 어르신들은�옛날이야기가�뭐가�중요하냐며 미래가�더�중요하다�하신다. 너무�힘든�동네니까�제발�재개발이 꼭� 좀� 추진되게� 해달라고� 말씀하신다. 어르신들의� 바람이 이뤄지기를� 기원하면서도� 이렇게� 서로� 의지하고� 사시는 어르신들이� 뿔뿔이� 흩어진다� 생각하니� 마음이� 짠하다. 또 알록달록�시간을�간직한�골목이�사라진다는�것도�아쉽다. 재개발� 진행� 여부를� 떠나� 너무� 고생만� 해서� 이야깃거리가� 안 된다�하시는�서순남�할머니의�전농동의 70년�역사를�따로�들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리된다면� 청량리역� 기찻길� 주변� 우리 부모님, 조부모님의�그�시절을�어렴풋이�그릴�수�있을�것이다. 역사는�그릴�수�없었지만, 삶의�고단함을�느낄�수�있었던�시간�그 고단한�삶을�담기�위해�후속취재를�기약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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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고, 움직이고, 달라지다

[인터뷰] 해뜨는집�단장�김상일�전�단장, 박명철�현�단장

“움직이고, 찾아보고, 문�두드려�보고, 참여해보면, 즐거움은�따라오는�것�같아요” 문화플랫폼시민나루�시민기자�오은형, 심소영

동대문구�전농동에는�무료�집수리�봉사단 ‘해뜨는집’ 이�있다. 봉사단�회원들은�매월�둘째�주�일요일�독거 어르신이나� 환경개선이� 필요한� 어려운� 가구를� 찾아 도배·장판·전등·싱크대� 등을� 교체하고, 청소하여 깨끗한�환경을�개선해�주는�활동을�한다. 이�해뜨는집 봉사단의 前·現 두� 단장님을� 서문건설� 사무실에서 만났다.

Q: 안녕하세요. 인터뷰, 마을이음은� 동네� 사람들 이야기를� 만드는� 마을잡지입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시는� 일을� 포함하여 자기소개�부탁드립니다. 김상일 前 단장(이하� 김) : ‘해뜨는집’ 전� 단장이고요. 지금은� 주방팀장을� 맡고� 있고, 가끔� 현장지원을 나가고�있습니다. 생업은 ‘서문건설’ 대표입니다.

박명철 現 단장(이하�박) : 저는�박명철이라고�합니다. 現 해뜨는집� 단장입니다. 생업은 ‘다인스케치’ 주방 인테리어업체�대표입니다. Q: ‘해뜨는집’과의�인연은�어떻게�시작되셨나요?

김 : 저는� 원래� 이문동에서� 인테리어사업을� 했는데, 97~98년쯤� 이문동� 일대에� 큰� 홍수가� 난� 적이 있었어요. 그때는� 저도� 자금상� 어려운� 시기라 홍수피해를� 겪으신� 분들께� 집수리에� 필요한� 자재를 무상으로�드리진�못했고, 대신�필요한�자재를�원가로 준�적이�있었어요. 그게�늘�마음에�남았었어요. 그�후 결혼하고 2004년� 큰아이가� 태어나면서� 인테리어· 건축으로�밥�벌어�먹고사니, 이�일로�의미�있는�일을 해야겠다는�마음이�있었어요. 그러던�중�우연히�외대 근처 ‘해뜨는집’ 자원봉사자� 모집� 현수막을� 보고 참여하기�시작했어요. OT 참석해�교육도�받고, 그렇게 2004년 3월부터�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아이에게� 내 욕심만을�위한�일이�아닌, 좋은�일을�하며�사는�아빠가 되고�싶었거든요. 박 : 저는�활동을�한�지는 10년�차�되었고, 단장을�맡은 지는 4년� 차입니다. ‘해뜨는집’을� 시작한� 특별한 계기가�있었던�것은�아니고요. 중학교�때부터�가졌던 마음이었습니다. 사람을� 돕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겠다는�생각을�했었거든요. 실천에�옮긴�건 15 년� 전� 같이� 일하던� 사람들과� 동사무소를� 찾아갔던 겁니다. 그런데� 사회복지사가� 집수리� 봉사� 활동은 없다고� 하더라고요. 일회성을� 끝날� 것� 같아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을� 뒤져보고, 동네에서�가장�가까운�동대문 ‘해뜨는집’을�찾았어요. 그래서� 봉사하는� 당일에� 그냥� 찾아왔어요. 그렇게 참여하게�되었는데�지금까지�하고�있네요.

김상일 前 단장

박명철 現 단장

Q: 두� 분� 모두� 꽤� 오랜� 시간� 봉사� 활동을� 이어오셨네요. 그렇게� 지속할� 수� 있었던� 동기와 보람을�말씀해�주신다면?

김 : 전�원래�이문동에서�같이하던�동료인�설비�분야의�정한수�선배, 전기분야의�김은주�선배와 함께�봉사�활동을�시작했어요. 동료들과�함께�일�이외�목적으로�정기적으로�만나고, 활동하고, 연락해서� 동네에서도� 만나는� 관계가� 만들어졌죠. 그래서 ‘해뜨는집’에서� 사람을� 얻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해뜨는집’ 사람들이� 절반이� 되는� 것� 같아요. 우리가�꾸준히�연락하고, 밥�같이�먹고�연락하는�사람이�얼마나�많은가�생각해�보니�생각보다 많지�않더라고요. 부모님께도�정기적으로�못�가고, 내�아이하고도�정기적인�활동�약속을�못 지키지만, ‘해뜨는집’ 한� 달에� 한� 번� 봉사� 활동은� 정기적으로� 지키고� 있거든요. 또� 우리가 여기서�봉사�활동을�하면서�얻은�것이�더�많은�것�같아요. 대상�가구�집수리를�하며�느끼는 하루도� 보람� 있지만, 여기서� 봉사� 활동으로�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내� 인생의� 영역이 확장되었어요. 인테리어하던�사람이�이곳에서�만난�사람들과�긴�시간을�봉사�활동을�하면서 건축을�하는�사람으로�성장했어요. 해뜨는집�사람들의�사업적인�영역이�아닌�사람이�중심으로 성장할�수�있었던�영역이었어요.

박 : 저는�누군가의�이야기를�들어주고, 함께�살아가야겠다는�생각을�중학교�때부터�했었는데, 봉사하면서�선배님들을�만나고�많은�사람을�만나고�친해지면서�내�생각이�맞았다는�생각이 듭니다. 10년이�넘는�시간을 했고�앞으로�계속�반복한다�해도�계속할�것�같아요. 한�달에�한�번 집수리�봉사를�하지�않으면�허전할�것�같거든요. 봉사하는�날은�내가�그�자리에�꼭�있어야 해요. 봉사�활동이�꼭�성취감과�뿌듯함을�주기�때문은�아니에요. 그런�뿌듯함이�없을�때도 있거든요. 그런데도�계속할�수�있는�것은�나�자신과의�약속인�것�같습니다. 그래서�집수리 하기로�한�가구에�최대한�편리하고�깨끗하게�해�주고�싶어서�동동거릴�때도�많고요. 어차피�할 것이면�대상자가�편하고�깨끗하게�살�수�있도록�최대한�해야�하기에�우리는 ‘봉사했다’라는 누군가와� 나에게� 보여주기식� 활동보다는� 내가� 한� 약속� 그리고� 대상� 가구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100% 다하고�싶은�마음이�지금까지�이어오게�한�것�같습니다. Q : 두�분�말씀해�주신�내용이�다른�것�같지만, 의미가�통하는�것�같습니다. 함께한�이들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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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와�봉사�활동을�통한�성장. 그리고�함께�살아가기�위한�자신의�약속과 책임. 그렇게�두�분이�이�봉사단을�이끌어주시니�지금까지�이어지는�것 같습니다. 그런데� 회원들도� 모두� 같은� 마음은� 아니실� 텐데, 회원들과 관계는�어떻게�유지하시나요? 김 : 관계를� 잘� 형성해야지요. 관계가� 돈독해지려면� 어떤� 조직이든, 모임이든� 늘� 새로운� 아이템도� 있어야� 하고, 관계가� 좋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새로운�아이템은�한계가�있고, 물릴�수밖에�없어요. 큰 열정과� 보람을� 느끼려고� 왔다가� 어느� 순간에� 지쳐� 버리고, 발걸음이 멈추면�다시�오기가�더�어려운�것�같아요. 다시�시작하려면�더�큰마음을 먹어야�하고요. 그래서�저는�요즘�밥으로�유혹합니다. 해�뜨는�집에�오는 사람들이�함께�밥을�맛있게�먹고, 좋은�관계�속에서�좋은�자원봉사자로 활동하는�것이지요.

박 : 상일이�형�말이�동의해요. 중학교�때부터�가졌던�생각에서�시작한�이 봉사� 활동으로� 저에겐� 너무나� 소중한� 관계가� 생겼거든요. 해뜨는집 회원들이�또하나의�가족으로�제�생활�일부가�되었고, 10년이�넘게�하는 이유이기도�하죠. 아마�회원들도�그리�생각하실�겁니다.

Q : 그래도�해뜨는집�활동을�하면서�힘들고�고민되었던�일들이�많으셨을 것�같은데, 풀어나갔던�일을�말씀해�주신다면?

김 : 그� 날� 우리가� 할� 하루의� 일은� 꼭� 완수해야� 합니다. 봉사� 활동을 계획하고�마무리를�하려면�인력배치, 활동�등�생각보다�크게�계획을�못 잡을�때도�있어요. 수시로�회원�참석을�확인하고, 참석�여부에�따라�공사의 범위를�정해야�할�때도�있거든요. 그런�의미에서�해뜨는집�회원�확대가 필요합니다. 오랜� 시간� 활동해온� 봉사이니만큼� 나한테는� 익숙하지만, 새로운� 사람들에게는� 이벤트이고, 새로운� 활동이며, 새로운� 아이템 이거든요. 나는� 이것이� 업인� 사람이라� 일의� 결과물에� 대해� 바라보는 시각이�회원들과�다를�수밖에�없었어요. 초창기�때�모�대학의�건축학과 학생들과� 같이했는데, 모든� 재료� 제공하고� 간섭� 대신� 스스로� 완성할 기회를� 주었지요. 아주� 즐겁게� 웃고, 즐기면서� 하더라고요. 그런데 결과물은�엉망이었어요. 풀칠을�벽에다�하고, 그러니�벽지도�잘�안�붙고 이래저래� 엉망이었어요. 그� 현장을� 못� 보겠더라고요. 결국은� 잔소리를 하게�되었죠. “우리�봉사�활동은�단�하루이지만, 대상�가구의�사람들은�이 집에서� 일� 년, 몇� 년을� 이� 집에서� 살아야� 한다. 건축한다면� 여기서� 살 사람들을� 생각하고� 사소한� 것부터� 신중해라. 모르면� 물어보고� 하라” 하고는� 다� 뜯고� 새로� 작업을� 했어요. 그� 날� 저녁� 늦게야� 마무리되었고, 학생들은� 멘붕� 상태였죠. 지금도� 가끔� 여러상황이� 발생하지만, 어쩔� 수 없이�받아들이면서�하고�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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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로�남고�싶거든요. 사회적�활동을�하고�있다는�것, 뭔가를�하고�있다는 것은�늙지�않는�것으로�생각해요. 편향되지�않으면서�지역�내에서�좋은 활동을� 만들어가고, 그런� 활동을� 계속� 지지하면서� 활동한다면� 핵심적 역할을� 해도� 좋고, 뒷� 선에서� 형편껏� 밀어줘도� 좋다고� 생각해요. 선배님들을�보면�모임이나�조직을�만들면서�활동하시지만, 지금은�활동 때마다� 얼굴보기� 힘들죠. 저는� 꾸준히� 참여하는� 선배로� 인정받고 싶습니다. 박 : 간혹�회원들�중에�할�일을�찾지�못해�어려워하는�분도�있는데, 저도 처음�와서�뭘�해야�할지�몰랐어요. 어깨너머로�배우고, 공구를�사서�연습도 해보고. 앞으로도 ‘해뜨는집’을�계속하겠지만, 누구나�혼자서라도�할�수 있을�때까지�계속�하려합니다. 이�해뜨는집�활동이�그렇게�일회성�봉사가 아닌�계속�참여하는�활동으로�만들도록�돕고�싶습니다.

Q : 해�뜨는�집�활동을�하면서�힘이�되었던�사례, 나누고�싶은�사례�또는 우리를�찾아올�누군가를�위해�나누고�싶은�이야기가�있다면?

김 : 해뜨는집이나, 다양한�사회적�활동은�결국�나�자신을�위한�것입니다. 본질적인� 것은� 나� 자신을� 위하면서도� 결국은� 보람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마음먹었을� 때� 움직여� 봐라, 찾아와라, 문� 두드려� 봐라, 참여해�봐라, 안에�있는�사람들이�함께할�것이다”라고�얘기하고�싶어요. 봉사시간� 때문에� 오는� 아이들� 문제는� 우리가� 시스템과� 이야기를� 잘 만들어� 주면� 됩니다. 결국, 아이들이� 봉사시간� 때문에� 왔을지언정 차곡차곡�쌓이는�시간�속에�의미�있는�봉사�활동으로�남을�것입니다.

박 : 아까�말한�것처럼�해뜨는집이�일회성으로�끝나지�않은�봉사였으면 좋겠어요. 설�떡국�나눔, 이불�나눔은�해뜨는집�집수리�봉사가�끝났어도 대상�가구�분들이�잘�계시는지�한�더�찾아뵐�수�기회를�만드는�것도�이런 이유�때문입니다. 저는�집수리�공사로�한�번으로�끝나는�것이�아닌�그�공간 속에서�삶을�찾아갈�수�있도록�돕고�싶어요. 그래서�설�떡국�나눔과�이불 나눔�또한�앞으로도�계속하려고요. 우리가�집수리했던�대상�가구�분들은 생각보다�더�크게�고마워하고, 말을�많이�하고�싶어�합니다. 자신의�삶을 이야기하고�싶어�하죠. 그렇게�그분들과�함께�살아가고�싶어요. 해뜨는집을�봉사단으로만�부르기에는�뭔가�부족했다. 곰곰이�생각해�보니 모� 기업이� 사용해서� 유명해진� 말이긴� 하지만,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생각이�번쩍�들었다. 전농동에는�사회를�좀�더�밝고�따듯하게�만들려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 배우며� 성장하고, 그렇게� 배운� 것과� 이룬� 것을 고스란히�사회에�돌려주려�노력하는�또�하나의�가족 ‘해뜨는집’이�있다.

박 : 단장직을�제안받았을�때, 이왕�할�거면�제대로�해�보자�생각했어요. 단장을�맡고�생긴�고비는�갈등이었어요. 단장은�회원과�현장�상황�등�여러 가지를�고려하지�않으면�안�되는데, 서로의�의견을�주장할�때�어려움이 있었어요. 그래도�단장은�회원들을�최우선으로�생각하고�결정할�수밖에 없어요. 지금은�그�고비를�넘기고�나서는�괜찮아졌어요. 또�새로운�아이템 즉�회원들이�즐겁게�참여할�방법을�찾기는�어려운�것�같아요. 동대문�경우 재개발, 재건축�등으로�봉사할�대상자들이�줄어들고�있고, 정말�집수리가 필요한�새로운�대상�가구를�찾는�방법을�모색해야�하죠. 집수리�방법�또한 기존의�도배, 장판, 싱크대�교체, 전등�교체, 랩핑, 청소�등의�주�업무에서 새롭게� 폼블럭(단열� 벽지) 방법도� 도입했습니다. 또� 업이� 다른� 일반 회원들은�잘라�놓은�벽지에�풀칠밖에�못�하는�경우가�많아요. 집수리의 종목을�바꾸는�것보다는�생업이�연결된�회원들이�생업이�다른�회원들에게 도배학교를� 운영하여� 회원들의� 참여와� 활동� 구성원으로서� 성장하도록 돕는�것이�새로운�아이템이�아닌가�생각합니다. 그런데�도배학교를�맡아 줘야�할�분이�주방을�맡고�있네요. (웃음) 김상일�단장님은�일이�완벽하게�끝나지�않을�때�만족스럽지�않아�힘들다 하시면서도, 지금은�벽지�끝을�다�맞추지�않았어도�그런�마음이�조금은 누그러진다는� 말에, 박명철� 단장이� 형이� 나이� 들어� 그렇다는� 너스레에 모두�한바탕�웃는다. Q : 개인적으로 ‘해뜨는집’에서�하고�싶은�것�또는�바람이�있다면?

김: 저는 ‘해뜨는집’의�원로가�되고�싶어요. 봉사를�오랫동안�하면서�좋은

2019년 6월�해뜨는집�활동사진 해뜨는집�참여문의 : 02-2243-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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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고, 움직이고, 달라지다 주민자치회�박용범회장, 조규남부회장, 김종석감사�인터뷰

주인으로서�전농2동을�일구는�주민들 문화플랫폼시민나루�시민기자�임정희, 심소영

분과별�활동내용

전농2동� 주민센터. 유난히� 활기차고� 분위기가� 좋다. 방문했을� 때� 마침 노래교실이�열렸기�때문인�줄�알았는데, 며칠�뒤�방문했을�때도�똑같다. 주민센터가� 말� 그대로� 주민들의� 센터로� 느껴진다. 첫� 방문� 때는 주민자치회� 회장님과� 간사님을� 뵙고, 두� 번째는� 회장님, 부회장님, 감사님을� 만났다. 주민센터가� 진정한� 주민들의� 센터가� 되기까지� 뭔가 특별한�방법이�있었을�것�같은데. 그�방법에�대해�인터뷰를�진행했다.

Q: 안녕하세요. ‘인터뷰� 마을이음’입니다. 전농2동� 주민센터� 들어오는 순간부터�주민들의�활력이�느껴집니다. 그리고�마을계획단과�주민자치회 시범�동으로서�훌륭한�성과를�내고�있다고�듣고�있는데, 관련하여�본인 소개와�활동에�관해�소개�부탁드립니다. 박용범� 주민자치회장(이하� 박회장) : 전농동에� 산지 30여� 년이 되었습니다. 19년째�봉사를�하면서�주민자치회�간사 6년, 부회장 2년�일을 오래� 하다� 보니� 좀� 알고� 화합도� 잘되고� 있습니다. 또� 위원장을 6년째 하면서� 전체적으로� 그대로� 이어지면서� 할� 수� 있었던� 이유도� 있는� 것 같습니다.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고� 있고요. 그래서� 주민들과� 아이들의 생활하기�좋은�환경을�만드는데�관심이�많습니다. 전농2동은�아파트가 많아� 환경은� 좋아요. 지금� 주민� 사업으로� 하우스� 스토리� 뒤� 어둑한 골목길에� 벽화를� 그렸고, 또� 다른� 숙원이� 있다면� 전동초에서 배봉꿈마루에�이르기까지�안전한�통학�길로�만들어�차들이�천천히�다녀 상인들에게도� 더� 좋은� 길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배봉산� 근린공원 리모델링� 공사를� 하고� 있는데, 그곳에� 청소년들의�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는�무대가�설치되면�좋겠어요. 설명회�때�보도블록을�깐다고�해서�크게 반대했어요. 그래서� 변경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무대도� 설치되는지는 결과를� 봐야� 할� 것� 같아요. 우리� 동네는� 학교가� 많아요. 그래서� 학교와 협의하여�서로�돕고�함께�만들어가려고�합니다. 올해는�마을총회가 7월 13일에�있고요. 어울림�총회�때�동네�한�바퀴�축제와�가족�단위�배봉산 걷기대회가�함께�진행됩니다. 총회는�선포식이�끝나고�의제를�투표하여 선정하고, 게임�부스, 포토존, 학교�홍보부스�등을�설치합니다. 걷기대회 2 시간을� 하고� 나면� 주민자치회를� 알리는� 큰� 기회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시작을�힘들었지만�누군가가�목소리를�내주는�것이�나쁘다고�생각하지 않아요. 의견을� 낸다는� 것은� 관심� 있다는� 것이니까요? 주민들의� 작은 소리도� 마을의� 발전으로�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전농2동은 공부하기� 좋은� 여건, 환경이�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을� 모토로� 삼고

주민자치회�박용범회장

있습니다.

조규남� 주민자치회� 부회장(이하� 조부회장): 외국에� 나갔다� 온� 것을 제외하면�한 30년�이상�살았어요. 원래는�외국에서�돌아와서�강남이나�분당 신도시로� 가려고� 했어요. 그러던� 중� 내가� 살았던� 고향의� 변화된� 모습을 보러왔다가� 정착하게� 되었네요. 이곳에� 거주한� 지 10년이� 넘었네요. 그 과정에서�결정이�후회스럽지�않은�것은�박용범�회장님과�김종석�감사님을 만났다는�것입니다. 가장�큰�보람이죠. 싱가포르에서�영어학원을 3년�정도 하던�때�큰아들과�고등학교를�입학하는�두�아들의�군대�입영문제로�다시 이곳으로�들어오게�되었어요. 현재�이곳에서�영어학원을�하고�있고, 아내는 음악학원을�운영하고�있습니다. 이�활동을�하는�것은�동네가�발전하는데 뭔가가�할�수�있는�것이에요. 동네가�좋아지면�다�좋아지는�거잖아요. 또한, 삶이�윤택해지는�것이니까요. 김종석� 주민자치회� 감사(이하� 김감사). 전농1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장안동에서�초등학교�때부터 30년을�살다가�강남�청담동에서 3년�정도, 그 이후� 다시� 전농2동으로� 이사와 3년� 반� 정도� 되었어요. 생업은� 온라인 여행사를� 운영합니다. 또� 마을계획단� 간사로� 일하면서� 마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민자치위원, 아파트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을� 하고 있습니다. 전농동이�특별한�고향입니다. 30~40년�가족처럼�오래�거주하신 분들이�많이�모여�사는�전농동이라서�이웃들이�너무�좋습니다. Q: 마을이�화합하는�과정에서�에피소드나�힘들었던�것은�무엇인가요?

조부회장: 마을이� 변화하는� 데는� 주민들의� 생각들이� 행정적� 측면과 물리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주민의� 동참은� 정신적인� 측면이� 있는데 행정적인�면에�서도�시/구를�이끌어주시는�주민의�지원이�있었고�물리적인 면에서는�아름숲이�만들어져서�변화의�기폭제가�되지�않았나�생각하고요. 또�아름숲�김종석�감사님이�아파트입주자대표회장님인데, 젊으신�분이라 젊은�층과�중장년층이�자주�모이는�계기가�되어�파릇파릇한�생동감으로 영향력을�주게�된�것�같습니다. 이러한�활동이�지역주민들에게�전파되어서 나이� 드신� 분들도� 움직이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합니다. 그래서� 행정과 물리, 정신적인�면이�같이�갈�수�있었던�것�같습니다. 마을계획단을�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사람을� 설득하고� 모으는� 것입니다. 모이기는� 많이 모이지만�실행자인지, 구경꾼인지가�구별되는�것�같아요. 구경꾼은�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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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김종석감사, 박용범회장, 조규남부회장

돌아서서�갈�수�있지만, 실행자는�어떤�상황에서도�이끌어�가야�하는데, 실행자를�모으는�일이�어려웠던�것�같습니다.

김감사: 저도�그렇게�생각합니다. 사람들은�돈이나�직업적으로�모이면�다 모이게�되지만, 마을계획단이나�주민자치회는�활동하다가�자신과�생각이 다르다고�중단하기가�쉬운�것이�자유로우니까요. 일하는�것은�돈을�벌어 나와� 가족을� 부양하는� 목적이� 있는데, 마을� 활동은� 하나로� 표현하자면 이런� 활동이� 생업과는� 별개로� 활동을� 해야� 하니까요. 그런데도 환경안전분과, 배봉어울림분과가� 강릉� 꽃마을� 조성워크숍을� 가는데 갑작스러운�결정이었고�다음�주에�가는데도�참여율이�높습니다. (20명�중 16명이�참가)

박회장: 주민자치위원 50명� 중 40명이� 참여하고� 분과회의도� 참여율이 높아요. 6시간� 교육이� 짧은� 것� 같지만� 자발적으로� 받고� 오신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주인이라는� 의식으로� 생업이� 아니라도� 책임감 있으시거든요. 오전�회의에도�참여율이�높아요. 책임감은�내가�주민이야. 내가�주민이었네. 주민�되었네! 라는�생각으로�주민자치회가�마을계획단 때�보다�더�발전된�모습으로�커가는�것�같습니다. 조부회장: 전체�워크숍�탐방이�놀러�가는�것�같지만�다녀오고, 안�갔다�오고 차이가�커요. 강릉�꽃피는�마을�탐방은�숲�해설도�듣고�벽화마을�견학�등 분과별로�사업과�연관�지어서�활동을�계획했어요. 워크숍과�같은�활동은 눈사람을�만들�때�연탄재�같은�역할을�하는�것�같아요. 연탄재위에�눈을 묻혀�굴리면�커다란�눈사람을�만드는�것처럼요.

김감사: 주변인을�주인으로�만드는�가장�중요한�역할을�하는�것�같아요. 또 시립대� 원예학과� 교수님이신� 이성준� 박사님을� 초대해서� 무엇을� 심고, 어떻게�꾸밀�것인가? 10년, 20년을�연구한�전문가의�강의를�듣고�주민이 결정해서�워크숍�갔다�와서�조성하는�것으로�프로그램을�짰어요. Q: 그렇게� 말씀으로만� 들으면�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과정은� 엄청 어려웠을�것�같습니다. 특별한�비결이�있나요?

하우스스토리�뒤�주민자치회의�벽화사업

처음에는� 공여자였는데� 하다� 보면� 수혜자로� 바뀌는� 것� 같아요. 도움을 누군가에게� 준다고� 들어왔지만, 심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도움을� 받게 되거든요. 그런� 반복이� 나중에는� 중독되는� 것� 같아요. 결국의� 수혜자는 참여자가�되는�것이죠. 집안일을�생각해�보면�처음에는�부인을�도와주는 거로� 생각하지만� 나중에는� 깨끗한� 공간을� 공유하고� 있잖아요. 저도 고백하자면� 제왕적인� 삶을� 살았죠. 집안일에� 대해서는� 손도� 안� 대고 넘어갔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함께� 하며� 공유하는� 우리� 집을� 함께 즐기거든요. 고비를� 넘겨야� 자연스럽게� 내가� 주인이라는� 마음으로 활동하게� 된다고� 생각하고� 지금은� 이� 과정을� 넘어가는� 중이라고 생각해요. Q: 그렇다면�동네에서�공유하고�싶은�것이나�행복감을�느끼게�한�것들을 계기, 사람, 사례를�한가지씩만�말씀해�주신다면?

김감사: 저는�문고나�봉사하시는�분들이�영향력이�있었다고�생각합니다. 특히�정고은감사, 여성�담당이었는데�사람�모으는�일을�참�잘했습니다.

조부회장: 먼저�지원관으로�있었던�김명선�씨가�저에게는�계기가�되었던 것�같습니다. 처음에는�익숙하지�않은�활동이라�뒤로�빠지고�숨어버리곤 했는데�찾아오고, 격려해주셨어요. 약간에�거룩한�부담감이었으나�늦은 시간까지�일하는�것을�보면서�저도�참여자가�된�것�같습니다. 그분이 2~3 년� 있으면서� 땀을� 흘렸던� 성과가� 큰� 것� 같습니다. 지역활동하시던 어공이었기� 때문에� 조율해서� 잘� 하셨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분은 갈현동에서�주민자치위원으로�조용히�활동하고�있다고�합니다. (웃음) 마을의� 주인으로서� 마을� 일을� 찾아서� 하는� 주민자치회. 곧� 주민총회를 앞두고�분주함에도�전농2동�주민들의�활약상을�알리는데�적극이다. 전농 2동의� 활력이� 동대문구� 전동으로� 퍼져나가며� 마을의� 주인으로� 사는 주민들이�더�많아지기를�바란다.

조부회장: 흔히�끊기�어려운�것을�마약�같다�하잖아요. 비유하자면�그래요. 옛� 두레� 공동체처럼� 사람과� 사람이� 모여서� 한마음으로� 일하는� 것.

하우스토리�뒤�주민자치회의�벽화사업_별을�담은�무지개�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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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서�놀고, 즐기고, 배울�곳

참교육학부모회�서울동부지회�발대식을�찾아서.

“학력과�학벌보다는 사람됨과�능력으로�평가하는 사회를�위해�노력한다.” 문화플랫폼시민나루�시민기자�심소영

하유진�서울동부지회�참교육학부모회�준비위원/동대문구�혁신�교육�학부모분과�운영위원

2019년 5월 16일�참교육학부모회�서울동부지회�준비위원회�발대식에 초대받았다. 서울� 시립대� 앞� 글터� 문고 7층� 카페. 아이들과� 어머님들, 그리고�선생님이�어울려�좀�더�행복한�교육환경을�만드는데�무언가를 시작하는�기대감이�바람떡에도�아이들, 어머님들�눈빛에도�엿보였다. 그 바람을�마을이음에�담고�싶어�발대식에서�인터뷰를�요청했더니, 하유진 총무님이� 인터뷰� 약속을� 해주셨고� 며칠� 뒤� 휘경동� 인근� 카페에서 만났다. Q: 저도� 이� 동네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는� 학부모로서� 발대식을� 보고 그동안의� 작은� 움직임들이� 이제� 구체적인� 연결체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여, 엄청�기대되는�단체의�발대식이었습니다. 발대식�축하드리고�저도 함께하겠습니다. 이� 활동을� 시작하시게� 된� 계기를� 포함해�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A: 저는� 참교육학부모회와� 인연이� 닿은� 것은 2년� 전이었어요. 아이 학교에서�학부모회�임원으로�활동하면서, 학부모연수�때�선생님�말씀�중 아이들을�비하하시는�것�같은�부분이�있었어요. 그때�참가한�학부모들은 놀라기도� 했고,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은 있었지만, 그� 자리에서는� 아무� 말도� 못� 했었어요. 이후에� 어떡하나 생각하던� 차에� 지인이� 참교육학부모회� 활동하시는� 선생님을 소개해주셔서� 어떻게� 선생님을� 뵙고� 어떻게�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지 말씀을� 해주셨어요. 코치도� 해주시고, 학부모회� 운영에� 대해� 연수를 해주시고, 그런�계기로�학부모회의�역할에�대해�생각하게�되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학교� 아이들과� 학부모님들이� 역사기행을� 하게 되었어요. 그게� 작년입니다. 그런� 활동이� 이어져� 준비위원회까지 왔네요. 학부모님들이� 필수로� 학부모회� 활동을� 해야� 하는데, 문제가 생겼을�때�감정으로�대하지�않고�의견을�제시할�방법을�같이�공유하고 알아가는� 차원에서� 도움이� 될만한� 단체들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그런�면에서�혁신�교육�학부모분과�도움도�많이�받고�있어요. 그래서�준비위원�하자�했을�때�망설이지�않고�할�수�있었던�것�같아요. Q: 학부모회�활동에�뜻을�두시게�된�중요한�계기가�있었네요. 개인적인 활동과도�연계되는지요?

A: 수학교육을� 전공했어요. 학원에서는� 수학� 강사이고� 마을에서는 진로�마을�교사를�하고�있습니다. 휘경동에�살고�있는데, 결혼�전에는 회기동, 이후�지금까지�휘경동�살아요. 학교�때문에�회기역에서�살게�된 것이� 쭉� 이곳에서� 살게� 되었어요. 대학� 때� 만난� 신랑이� 이쪽이라서 대학원을� 이쪽으로� 오게� 돼서. 아이는� 넷이에요. 고1, 중2, 초6, 초4. 많죠? 낳기�전에는�좋은지�몰랐는데, 키우다�보니�좋아지더라고요. 그�당시�학부모회�임원을�하고�있었기�때문에�개인적인�대처보다�단체를 통해�말씀드리는�것이�좋다고�판단했고, 그때�학부모회�함께�하신�분들이 뜻이� 맞아서� 할� 수� 있었던� 같아요. 개인이었으면� 못했을� 것� 같아요. 학부모회�활동이�아이들에게도�도움�되는�것�같아요. 아이들�학교생활에 대해서�알게�되고�소통할�수�있고요. Q: 발대식을�보니�기대감이�생깁니다. 동부지회를�어떻게�운영하고자 하시는지? A: 작년에�역사기행하면서�도움도�받고�동대문지회도�만들어보자면서

2019.5.16. 서울동부지회�참교육학부모회�발대식�단체�사진

여기까지�오게�된�거라�구체적으로�고민해보지는�못했어요. 교육정책이나 교육프로그램이나� 모두� 확실하게� 이것을� 해야겠다는� 아직� 없고요. 아이들과� 부모님들, 선생님들까지� 행복한� 학교생활이� 되도록� 무언가를 하고자�하는�마음만�가득합니다.

Q: 선생님들도�어디에서도�존중받지�못하고�너무�많은�일에�시달리시는데, 학원에서� 수업받으면� 된다고� 학교수업을� 존중하지� 않은� 분위기도� 있고. 어디선가는� 이� 악순환을� 끝내야� 하지� 않을까요? 학부모는� 이고리를 끝내는데�할�수�있는�것은�무엇일까요? 선생님들께만�맡길�수는�없을�것 같아서요. A: 아이들이� 중고등학교에� 가면서� 학교에� 대해� 버거움을� 많이� 느끼고 하니까. 아이들이� 지나가는� 말로� 자퇴�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이렇게 힘들다는데�보내야�하나�하는�고민도�해요. 예전에는�그래도�아이들에게는 처음� 접하는� 작은� 사회라고� 생각하고� 학교에서� 배움을� 중요시했는데, 요새는�아이만�보고�생각을�하는�것도�중요하다는�생각도�합니다. 아이가 힘들다고�하면�굳이�계속해야�하나�생각이�들기�시작했거든요. 아이들이 즐겁게�학교생활�할�수�있는�문화가�생기면�얼마나�좋을까. 공부를�못해도 즐겁게�살�수�있다면�분위기가�있으면�좋겠어요.

학교에서�자기�특성을�잘�살릴�수�있도록�했으면�좋겠어요. 진짜�제도가 어떤� 기준으로� 바뀌는지� 모르겠어요. 아이들도� 부모님들도� 좀� 편하게 학교생활을�할�수�있도록�바뀌었으면�좋겠어요. 학부모회는�서로�어깨를 빌려주며�나�혼자만�이렇게�생각하는�게�아니라�이렇게�생각하는�사람들이 많음을�확인하고�함께�갈�수�있도록�하는�것이�아닐까�생각해�봅니다. 학벌이� 최우선시되는� 사회에서� 교육정책이� 크게�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부모님들이�변하기�시작하면�제도는�따라올�수밖에�없다는�생각이 든다. 쉽지� 않은� 길이기에� 참교육학부모회를 응원하며, 함께하기를 다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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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서�놀고, 즐기고, 배울�곳

‘숲해설가와�함께하는�배봉산�지킴이�자원봉사’ 활동을�통해�본

자연과�역사와�문화가�있는�배봉산, 제대로�알고 1.5배�즐기기 문화플랫폼시민나루�시민기자�정담희

숲해설가�선생님들과의�만남

배봉산�히어리�쉼터

전농동과�휘경동에�걸쳐�있는�배봉산은�녹지공간이�부족한�동대문구에서 아기자기한�자연환경과�생태�문화�활동을�체험할�수�있는�해발 105미터의 소중한� 공간이다. 이러한� 배봉산을� 주민들이� 더� 잘� 즐기기� 위해서는, 배봉산에�대해�제대로�아는�것이�우선이라고�생각하여, 5월 25일�토요일 10 시, ’숲해설가와� 함께하는� 배봉산지킴이� 자원봉사‘에� 동행해� 보았다. 취재는� 봉사자들과� 함께� 산을� 오르면서, 숲해설가이신� 박정희 선생님으로부터�배봉산�해설을�듣는�방식으로�진행되었다. 첫� 만남은� 휘경동� 삼육병원� 앞에서� 이뤄졌다. 다섯� 분의� 숲해설가 선생님들께서� 봉사자들을� 인솔했다. 대부분� 중고등학생들이었고, 아이들과�함께�참여하신�학부모님들이�간간이�눈에�띄었다. 상쾌한�토요일 오전, 자연�속에서�이뤄지는�봉사활동의�기쁨을�참가자들의�환한�얼굴에서 읽을�수�있었다.

3대가�함께한�배봉산�자원봉사활동�참가가족

배봉산보루

개의�잔가지를�사용하는지�아느냐�물으셨다. 500개�정도가�아닐까�라는 대답에, 책에서는� 보통 3500개� 정도로� 잡는데, 예전에� 아차산에서 태풍으로� 떨어진� 큰� 새집의� 가지� 수를� 직접� 세어보니 6500개� 정도나 되었다고�하신다. 배봉산�둘레길은 ‘순환형�무장애숲길’로�장애인�등의�보행약자와�유모차 이용이� 가능하게� 조성돼, 가족� 단위� 산책이� 가능하다. 그리고� 곳곳에 주변�식물의�이름을�가진�쉼터가�눈에�띄었다. 예를�들면, 우리나라�특산 나무인� 히어리� 나무� 옆에, 예쁜� 이름 ‘히어리� 쉼터’가� 있었다. 길을 걸으며, 팥대나무, 상수리나무, 잣나무�등을�보는�것도�큰�즐거움이었다.

숲해설가와�함께하는�배봉산지킴이�자원봉사’ 활동에�대한�소개를�박정희 선생님께� 부탁드렸다. “활동내용은� 배봉산� 둘레길을� 걸으며, 버려진 쓰레기를�줍고, 생태교란�식물들을�제거하는�것입니다. 그리고�봉사활동 중에� 저희와� 같은� 숲해설가로부터� 배봉산의� 자연과� 역사� 및� 문화� 관련 사항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덧붙여� 박선생님께서� 특별히� 숲해설가로 활동하시는�계기에�관해�여쭈었다. “제가 3살�때�지방에서�시립대�앞으로 이사� 와서, 전농동� 로터리, 휘경동� 이렇게 60년� 동안� 배봉산을� 끼고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나이가�들고�사회에�뜻깊은�일을�하고�싶다는�생각이 든� 순간, 자연스레� 숲해설가의� 길로� 들어선� 것� 같습니다. 저희는 배봉산뿐만�아니라�전국�각지의�숲에서�활동하고�있습니다.”

자연을�어느�정도�감상하자, 배봉산�명칭의�유래에�관한�역사�이야기가 진행되었다. 배봉산에는� 조선시대� 비운의� 사도세자가� 수원으로 이장되기�전에�묻혔었는데, 이에�어린�시절�정조는�아버지가�묻혀�있는 동쪽을�향해�절을�했고, 또�지나가던�백성들이�절을�하면서�배봉(拜峯 )이란�이름을�갖게�되었다고�한다. 마지막으로� 배봉산� 정상에서� 발견된� 삼국시대� 보루에� 관한� 이야기로 자연스레�넘어갔다. 그것은 2015년까지�주둔하던�군부대가�이전하면서 2016년�정상부�생태공원�조성을�위한�사전조사�과정에서�발견된�뒤, 약 10개월� 만에�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42호로� 지정되었다. 고구려식 축성기법이�잘�나타나�있으며, 중랑천�서쪽에서�확인된�최초의�삼국시대 관방유적(군인� 경계초소)이라는� 점이� 지정� 사유이다. 보루가� 있는 정상부는�봉사활동�코스는�아니었으나, 역사와�문화적으로�큰�시사점을 가지기에�소개되었다.

봉사자들이� 쓰레기를� 줍는� 동안, 숲해설가� 선생님들은� 눈에� 띄는 자연현상을� 설명한다. 나무가� 서� 있는� 자리에, 바람에� 의해� 떨어졌다고 보기에는�너무나도�많은�잔가지들이�쌓여�있었다. 그건�놀랍게도�나무들이 생존전략으로써� 스스로� 가지치기를� 한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박 선생님께서�나무�위에�지어진�까치집을�보시며, 집을�짓기�위해�까치가�몇

숲해설가와�함께한�배봉산지킴이�자원봉사를�통해�배봉산이�얼마나�큰 가치를�지닌�자연�및�역사�그리고�문화공간인지�더�절실히�깨달을�수 있었고, 외지� 여행객들에게도� 동대문구의� 핵심� 투어코스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거란� 확신을� 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동행을� 기꺼이 허락하신�숲해설가�선생님들과�자원봉사자님들께�큰�감사를�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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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서�놀고, 즐기고, 배울�곳

전농동, ‘책�읽는�거리’를�탐방하다. 문화플랫폼시민나루�시민기자�심소영

전농동은�동대문구의�교육�중심�동이다. 그�근거로�우선�동부교육청이�그�자리에�위치하고�배봉초, 전곡초, 전농초, 전동초, 전일중, 전농중, 동대문중, 해성여고, 해성국제컨벤션고, 서울시립대까지�무려 10개의�초·중·고·대학교가�위치한다. 그래서인지�배봉산�공원부터�꿈틀�어린이�도서관, 아름숲 아파트, 전농2동�주민센터, 배봉꿈마루에�이르기까지�도서관은�짓고�있는�것과�북카페를�포함해 6개나�있었다. 정말�부러운�환경이다. 그�부러움의 내용을�자세하게�알아보려�일명 ‘책�읽는�거리’를�찾았다.

1. 배봉산�자연드림�작은도서관

1. 배봉산�자연드림�작은도서관은 2014년 5월에�문을�연�작은도서관이다. 산자락에�있다�보니�맑은�공기를�마시며�책을�읽을�수�있는�자연환경을 자랑한다. 장서는 1800여�권이�있으며�그중 700여�권은�어린이�책이다. 작지만�알찬�도서관이라�할�수�있겠다. 이용시간 개�관�일 월~수, 토, 일

개관시간 10:00 ~ 18:00 (점심시간 13:00~14:00)

휴�관�일 매주�목요일/금요일, 법정�공휴일

2. 배봉산숲속도서관(건축�중)

숲속도서관은�동대문구가�야심�차게�준비하는�배봉산�구립도서관이다. 조감도만�봐도�자연�친화적인�건물과�시설이�기대하게�한다. 2019년 7월�개관이라 한다. 예정대로만�진행된다면, 얼마�안�남았다. 두둥!

3. 꿈틀�어린이�도서관

꿈틀도서관은�이�동네에서 15년의�역사를�가진�가장�오래된 ‘책�읽는�거리’의 원조�도서관이다. 오래된�만큼�시설�보강을�위해�지하에�도서관�이용자들이 독서모임�등을�할�수�있는�커뮤니티실도�만들었고, 올해�외벽공사도�막�마쳤다. Q: 꿈틀도서관을�소개�해�주세요. 안녕하세요. 꿈틀어린이도서관� 관장� 정윤영입니다. 제가� 전농동에서� 나고 자랐어요. 그래서�그런지�동네가�참�좋습니다. 이곳은 30대에�아이�책�읽어주려 찾았다가�인연을�맺게�되었어요. 인연을�맺은�지도 10여�년이�다되었네요. 꿈틀은� 올해 15년� 된� 사립도서관입니다. 동네에서� 유일무이했던� 도서관 그리고�커뮤니티�공간으로서의�거점이�확실했어요. 그런데�주변에�주민센터 도서관� 뜨락도� 있고, 배봉꿈마루, 래미안� 아름숲� 도서관� 등� 도서관이 많아졌어요. 꿈틀�회원들도�여기만�이용하시는�것은�아니에요. 또�곧�배봉산에 숲속도서관도� 생겨요. 말그대로 ‘책� 읽는� 거리’가� 되었죠. 꿈틀은� 책을 중심으로�한�기획전, 모임�등�책�읽기�문화�활동을�중점적으로�합니다. Q: 이�공간을�이용하시려는�분들께�도움말을�주신다면? 우리� 꿈틀도서관은� 책이� 가지고� 있는� 권수에� 비교해� 너무� 좋아요. 주민 커뮤니티� 공간으로� 만들어� 대관이� 가능한� 열린� 공간이며, 주민들의� 많은 이야기가� 있는� 공간입니다. 또� 꿈틀은� 어린이� 전문� 도서관답게� 학년별 권장도서, 중학교까지� 그리고� 개인에게� 맞춘� 책� 추천도� 가능하니� 함께 해주세요. 독서를� 시작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신다면� 꿈틀에서 시작하세요.

이용시간 개�관�일 월~금, 토 개관시간 평일 10:00~17:00 토 10:00~16:00 (점심시간 13:00~14:00) 휴�관�일 매주�일요일, 법정�공휴일 대관문의 02-2243-2315

꿈틀어린이도서관

4. 전농2동�뜨락�작은도서관

뜨락도서관은� 전농2동� 주민센터 3층에� 위치한다. 작은도서관치고는� 꽤� 크다. 키즈� 존도� 있고, 열람실도� 넉넉하다. 주민센터에서� 직접� 운영하는 도서관이다�보니, 구립도서관을�축소해�놓은�듯�잘�정리되어있고, 동대문�구립도서관�통합회원증으로�누구나�이용할�수�있다. 이용시간 개�관�일 월~일

개관시간 평일 09:00~20:00 토, 일 10:00~18:00

휴�관�일 법정�공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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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름숲�문고

꿈틀과� 전농2동� 주민센터� 뜨락도서관� 사이� 아름숲� 래미안� 아파트� 단지가� 있다. 이곳에� 또� 주민들이 운영하는�아름숲�도서관이�있다�하여�찾아가�보았다. 배봉산�자락에�산보다�높지�않은�아파트�동과�동 사이에�예쁜�꽃밭과�나무들이�적당히�그늘을�만들고�있고, 휘트니스�센터와�마을연회장, 커뮤니티를�겸한 도서관�아름숲�문고까지�처음�들어가�본�아름숲�아파트는�안정감이라는�것은�이런�느낌인가�생각이�들 정도로�편안한�기분이�되었다.

Q: 갑작스레�부탁드린�취재에�응해주셔서�감사합니다. 아름숲�도서관과�선생님�소개�부탁드립니다. 저는�방소영입니다. 얼마�전까지는�제가�책임자였지만�지금은�바뀌었어요. 문고는 2012년에�열었어요. 저는 2015년부터�활동하고�있습니다. 문고는�단지에�있지만, 누구나�이용�가능한�문고입니다. 그런데 반납문제로�대출은�입주민들에게만�하고�있어요. 운영은 100% 자원봉사로�운영하고�있습니다. 주민 30 여�명이�매일�돌아가며�도서관�지기를�하시고, 청소년들도�봉사�활동에�참여해서�함께하고�있습니다. 그리고�많지�않지만, 주민�커뮤니티�공간으로서�프로그램도�운영하는데�현재는�종이접기, 코바늘뜨기 그리고�독서동아리, 매달�독서대회로�달�최고를�뽑아�상도�주고�있어요.

아름숲�문고

Q: 아름숲� 아파트� 단지에� 처음� 들어와� 보는데, 상당히� 아늑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배산임수~중� 배산이잖아요. 아파트가� 배봉산에� 있어서� 공기도� 좋고� 아늑하죠. 그리고� 사람들이� 참 좋아요. 또�아름숲�하면�아름숲�문고가�빠질�수�없죠. 입주자대표회의�회장님도�여기�자주�오셔서�아파트 관련해�여러�가지�사항을�논의하고�가세요. 문고에서�활동하시는�주민들이�아파트�공동체�활동도�많이 하시고요. 동�대표님들도�많이�계세요. Q: 이�공간에서�하고자�하시는�것을�말씀해�주신다면? 지금까지�해온�것처럼�아이들이�여기�있으면�부모님들이�안심할�수�있는�곳. 그렇게�아이들과�부모님들이 편안하게�이용하며�책�읽는�문화를�만들어가는�곳, 그리고�동네�사람들의�즐거운�만남이�반복되어�동네 사람들이�친해지는�곳으로�계속되었으면�하는�바람입니다. 가실�때�주민들이�가꾸는�꽃밭도�보셨으면 좋겠네요.

방소영�아름숲�문고�선생님

이용시간 개�관�일 월~토 개관시간 평일 10:00~18:00 토 10:00~14:00 휴�관�일 일요일, 법정�공휴일

6. 배봉꿈마루

마지막으로�배봉꿈마루를�찾았다. 2013년�개관한�이곳은 2층�청소년독서실이�있다. 좌석�수 51개이고, 하루 500원으로�이용할�수�있다. 1층�북카페에서�좌석을�골라�입실�표를�받아�사용할�수�있다. 1층�북카페는�평일�오후인데, 가득�찬�사람들이�이곳이�얼마나�주민들의�사랑을�받는�곳인지�설명해주는 듯하다. 보드게임을�하는�어린이와�청소년, 아이와�책을�읽는�엄마. 노트북으로�무언가를�열렬히�시청하는 청년, 그리고�누군가를�기다리는�듯�책이나�핸드폰을�보는�아버님들까지. 또�특별하게 1층�북카페에서�매월�셋째주�금요일�오후 6시�마다 ‘청소년�쉼카페�휴데이’로�바뀐다. 전농동 주민들과� 다양한� 청소년� 관련� 기관들이� 청소년(12~20세)에게� 무료로� 식사와� 간식, 놀� 거리� 등을 제공하면서�청소년의�안락한�커뮤니티�공간이�된다.

배봉꿈마루

이러한�주민들의�자유로운�분위기는�여타의�다른�북카페와는�다른�것�같다. 주민�누구나�무료로�이용할 수�있는�공간이다. 전농동 ‘책�읽는�거리’의�종합판인�것�같다는�느낌이다. 지하에�세미나실도�갖추고�있어 대관도�가능하니, 전농동�주민들의�커뮤니티�공간은�걱정할�필요�없겠다.

이용시간 개�관�일 화~일 개관시간 1층� 골목� 안� 서재 10:00~18:30, 2층� 청소년독서실� 평일 09:00~23:00 토/일� 공휴일 10:00~23:00, 지하 1층�아지트�몽 10:00~22:00 (대관�문의 02-2212-0012) 휴�관�일 : 월요일

배봉꿈마루�청소년�쉼까페�휴데이

배봉꿈마루까지�다녀보니 ‘책�읽는�거리’답다는�생각이�절로�든다. 배봉꿈마루를�나와�전농동�로터리에�이르니�요즘�보기�드문�동네서점도�있다. ‘전농�서적’ 은�역사가 50년�이상이라�하니, 이�동네가�교육�중심이�된�이유가�계속되는�주민들의�책을�사랑하는�힘과�사람을�사랑하는�힘이�근본이�된�것�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책을�살�곳도�볼�곳도�빌릴�곳도�많은�전농동. 부럽기를�넘어서�동대문구�모든�동이�이렇게�주민들의�책�공간, 모임�공간이�충분한�동이�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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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농동�돈키호테

전농동�돈키호테? 에스라인�이정화

“저는�확실하게�마을의�주체가�된�것�같아요. 그래서�다른�분들도�취미든�일이든�마을에서�함께�무언가�해보셨으면�좋겠어요.” 문화플랫폼시민나루�시민기자�심소영

에스라인 2기와�이정화�님

휘경여고�기타동아리 12기�임경란�선배와 13기�이정화�님

전농동은�주민들이�이용할�수�있는�다양한�커뮤니티�공간들이�많다. 특히�배봉꿈마루는�어린이, 청소년, 어른들까지�소통, 놀이, 배움, 다양한�활동을�할�수 있는�주민들의�공간으로�자리매김하고�있다. 이�공간의�주민동아리이며, 대표적인�음악동아리인�에스라인�대표�이정화�님을�만났다. 에스라인은�주민들과 클래식�기타를�배우고, 공연하며�음악으로�소통하는�클래식�기타동아리이다. 에스라인 2기�모임이�진행되는�시간에�맞춰�그를�찾았다. 배봉꿈마루�지하 아트몽. 연습�중인�세�명의�회원과�아이와�함께�온�이정화�님의�여고�기타동아리�선배님과�아이가�함께�하고�있었다. 이정화�님. 와~ 멋있다. 첫인상이�그랬다. 키도�목소리도�크다. 그런데�몸은�가볍고�목소리는�리듬감이�있어�방안을�채우고�있는�기타선율과�묘하게�어울린다. Q1. 안녕하세요. 현재�어떤�일을�하고�계시는지를�포함하셔서�자기소개�부탁드립니다. 이정화입니다. 75년생, 자녀는�셋, 남편은�동갑. 28살에�결혼했어요. 현재�전농1동에�살고�있고�배봉꿈마루�청소년독서실�앞에서�한입�김밥 & 컵밥�집을 운영합니다. 벌써�만2년�되었네요. 2017년 5월에�개업했거든요. 제�꿈은�웃기다고들�하는데�초등학교 6학년�때�분식집�사장이었어요. 분식집�사장이�꿈이라 하면�사람들이�웃었어요. 왜�웃을�일인가�싶었어요. 저는�나름�꿈이�구체적이라�생각했었거든요. 그림을�좋아했고�재능도�좀�있었던�것�같은데, 집에서 지원받기�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또� 여고� 때� 클래식� 기타를� 전공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지원받기� 어려운� 형편이라서� 포기했었거든요. 그런데 전농동에�살면서�좋은�선생님도�만나고�콩쿠르에�나가�상도�받으면서�기타를�전공한�기분이�들어요. 분식집도�하고�클래식�기타로�콩쿠르에서�상도�받고, 꿈을�이뤘어요. Q2. 동대문구�전농동에서�이제까지�사시게(또는�종사하고�계시는�사업을�하시게) 된�계기가�무엇인가요? 태어난�곳은�답십리예요. 쭉�거기서�자랐어요. 지금은�답십리�위브�아파트가�있는�답십리 16구역인데요. 큰�부처상이�있었고, 절이�있었어요. 그�옆에�제가 다니던�교회가�있었고요. 높은�곳이라�남산타워도�엄청�잘�보였고요. 우리�집이�가장�꼭대기라, 만약�홍수�나서�우리�집이�잠긴다면�서울이�다�잠긴�거라�봐도 무방할�만큼�높았어요. 그러다�보니�어느�방향으로�오르든�우리�집은�나와요. 무조건. 그런데�제가�답십리초, 동대문중, 휘경여고를�나왔거든요. 휘경여고 다닐� 때� 전농동� 사는� 사람들이� 부러웠어요. 학교에� 바로� 가는� 버스가� 없어서� 배봉사거리에서� 내려� 뛰어가는데, 언덕이� 아니라서� 너무� 좋더라고요. 부러웠어요. 그때부터� 전농동� 살고� 싶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때� 전농동에는� 지금� 다이소� 근처에� 경양식집도� 있었고요. 지금� 배스킨라빈스� 자리에 롯데리아도�있었어요. 전농동은�번화가로�느껴졌었어요. Q3. 에스라인은�어떻게�탄생하였나요? 배봉꿈마루�정정애관장님을�만나게�된�것이�에스라인의�시작이었어요. 제가�동대문에서�보육�반장 1기를�시작하게�되었고, 전농동을�맡아서�물적�자원조사 중에�관장님을�만났어요. 그때�배봉꿈마루�독서실�개관할�때였거든요. 보육�반장을�할�때�알게�된�다른�엄마가�책�모임을�하고�있었는데, 제가�적극적으로 돕던� 중, 제가� 기타에� 관심이� 있다는� 말을� 그� 엄마에게� 전해� 들으시고� 저를� 만나자� 하셨어요. 관장님이� 여기서� 소소한� 마을공동체� 활동을� 할� 건데, 음악동아리를�만들어보면�어떠냐는�제안을�해주셔서�에스라인이�탄생하게�되었어요. 그렇게 2015년 1월에�에스라인을�만들게�되었습니다. 2014년�겨울에�관장님과�얘기�할�당시�마침�종로�기타동아리를�시작해서�교습도�가능했거든요. 초기에�엄마들이�들어오기만�하면�취업이�됐다고�하는�바람에�멤버가�바뀌기는�했지만, 서울시�평생학습지원으로 35만�원�지원금도�받아보고, 서울시의 다른� 지원도� 받아� 받아보고. 그렇게 2년� 넘게� 레슨도� 받고, 정식으로� 레슨받기� 전에는� 제� 수준으로� 가르치고� 배우고� 엉망이었는데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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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조공연으로� 구청장� 동정� 보고회, 마을계획단행사에도� 나가서 공연했어요. 지금�생각하면�엉망이었지만�행복한�시간이었어요. 그래도 레슨받으면서는�확�성장했어요. 그렇게 1기�활동을�했습니다. 그리고�작년에는�세종문화회관�공연도�했어요. 종로�메아리�동호회에서 인원이�부족해서�에스라인�멤버�두�명이�지원해서�함께해서�좋을�결과를 얻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 팀이�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할� 때 에스라인만의� 중주의� 기회가� 만들어져�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할� 수 있었어요. 너무�기뻤어요. 호기심으로�시작해서�취미가�되고, 지속하면서 레슨도� 받게� 되고, 좋은� 무대도� 서보고, 각자� 나름의� 취미로� 자리� 잡고 이제�개인별로�레슨을�받기도�하면서�엄청�성장했죠. 처음에는�모든�주민에�열린�강좌였는데, 레슨이�시작되면서는�우리만의 동아리로�운영되다가�그분들이�떠나니�에스라인이�없어지더라고요. 너무 속상했어요. 그래서�다시�열린�강좌로�남녀노소�직장인�모두�참여하실�수 있도록�한�달에�두�번�화요일�저녁에�이렇게�모여서�연습을�하고�있습니다. 올해 4월에�모집해서 5월부터�이렇게�다시�모이고�있어요. Q4. 생업도�따로�있는데, 이렇게�끊임없이�활동하실�수�있는�원동력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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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더라고요. 너무�아까워요. 중·고등학교�학생들이�기타를�배우고�싶다면 무슨�수를�내서든�시간을�내어�가르쳐�주고�싶어요. 또�마을에서�봉사�활동을 하니, 제가�가게�차린�후에�큰�도움이�되더라고요. 소문도�내주고�긍정적인 시선으로�봐주시고, 대박집은�아니지만, 동네에서�제게�신뢰를�보여주시니 좋아요. 이렇게�확실하게�마을의�주체가�된�것�같아요. 그래서�다른�분들도 취미든�일이든�마을에서�함께�무언가�해보셨으면�좋겠어요. Q. 전농동에� 사시면서� 가장� 살기� 불편하다거나� 안� 좋았던� 점은� 무엇이 있을까요? 여기서�회기동�휘경동�이문동�가는�것이�너무�어려워요. 같은�동대문구인데, 나눠진�느낌이에요. 뭔가�마을버스라도�있어서�회기동, 이문동, 휘경동하고 연결되면�좋겠습니다. Q. 마지막으로�꼭�동네�사람들과�나누고�싶은�이야기가�있다면? 우연히� 김미경의� 유튜브� 강의를� 들으니� 결단하라는� 얘기를� 하더라고요. 지금�시작하고�고민은�나중에�하라는�것인데, 나이가�들수록�점점�준비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져요. 일단� 시작하고� 하면서� 완벽해지려고� 하면 된다고�생각해도�된다고�하는�데�공감이�되었어요.

제가�휘경여고�클래식�기타동아리 13기인데, 저기�계신�임경란�선배님이 12 기세요. 최근에 2기� 선배님도� 연락� 와서� 함께� 하시기로� 했어요. 휘경여고� 기타동아리가 18기를� 끝으로� 마감되었다고� 하는데� 너무 아쉬웠습니다. 고등학교의�기억은�동아리�활동이�전부인데, 없어졌다고 하니까요. 아마�내�삶을�지탱해준�것이�휘경여고�기타반인�것�같아요. 저기 계신� 임경란� 선배님(병원근무에서� 일하시는� 초음파� 전문가라� 귀띔)이 에스라인 2기를�추천한�이유�중�하나는�평생�살면서�기타�소리도�못�듣고 돌아가시는� 분들도� 있는데, 우리가� 세상의� 따듯한� 소리를� 들려드리면 좋겠다� 했어요. 저도� 공감하고요. 2기도� 연습� 잘해서� 실력이� 갖춰지면 기타�소리�듣기�힘든�곳을�찾아다니며�봉사�활동�다니고�싶어요. 그런�꿈이 원동력이� 된� 것� 같고요. 배봉꿈마루� 정정애관장님과� 레슨해주시는 배광수�선생님�그리고�남편, 가족의�적극적인�지원이�제가�꿈을�이룬�힘이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큰딸이� 엄마처럼� 살고� 싶다고� 했을� 때� 너무 기뻤어요.

제가�아는�언니�중�한�분이�보육교사�이력서를�내놓고도�자격증도�없고, 하기 힘든�이런저런�이유로�안�될�것만�얘기하며�면접을�안�보려고�하기에�무조건 면접을�보고�된�다음에�생각하라고�해보라고�했던�적이�있어요. 그렇게�면접 후� 일하게� 되었고, 이후에� 보육교사� 자격증도� 따서� 보조부터� 시작해서 지금은�초등학교�돌봄�교사로�무기계약직으로�일하세요. 엄마들�경력단절로 일할�수�있는�자리가�마트나�식당�등의�아르바이트자리�밖에�없는데, 할�수 있을� 때� 준비해서� 하고, 기회가� 있을� 때� 저지르면� 도와주는� 이도� 생기고, 실패하더라도� 배우는� 것이� 있더라고요. 꼭� 저질러� 보시라� 말씀드리고 싶어요.

Q5. 정말�꿈을�이루셨습니다. 그�에너지와�작은�소망을�하나씩�하나씩 채워가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우십니다. 그렇다면� 꿈을� 이룬� 현재의 소망은�무엇인지? 50대에는� 기타� 앙상블� 만들어서� 공연� 다니고� 싶어요. 학교와� 악기를 거래했던� 곳을� 알고� 있는데, 해성여고� 기타 30대도� 놀고� 있다고

에스라인 1기의�성장과�해체. 2기의�새로운�시작. 그리고�마을에서�다양한 활동을�하면서�주체가�되었다는�이정화님. 또�나는�꿈을�이뤘다는�얘기를 들으며, 꿈이라는� 것은� 정말� 결과가� 아닌� 과정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깨우쳐준�이정화�님께�감사드린다.

단, 정말� 중요한� 것은� 억울하고� 속상하고� 실패하더라도� 관계를� 소홀히 끝내지는� 마시라� 말씀드리고� 싶네요. 관계는� 실낱같은� 끈이라도 남겨놓으셔야�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나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나쁜�기억은�쉬�사라지지�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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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이슈, 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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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서마루치, 정수지

시대생들의�첫�서울, 전농동 그리고, ‘지속가능한�자봉’의�비밀 윤덕환(문화플랫폼시민나루�시민기자) / 문화심리학박사

‘아이폰보다� 싼� 등록금’으로� 유명한� 대학. 전농동의� 나름(?) 랜드마크, 서울시립대. 등록금이�도대체�얼마나�쌀까. 대략�한�학기�기준�인문계가 102 만� 원, 공학계가 135만� 원, 미술계가 144만� 원, 음악계가 161만� 원 가량(2019년� 기준). 이게� 얼마나� 낮은� 건가� 하면, 일반� 사립대학의� 전체 평균� 등록금이� 한� 학기당 359만� 원(2018년� 기준, 전� 계열� 평균) 정도니, 이와�비교하면�절반에도�훨씬�못�미치는�수준이라는�뜻. 더�놀라운�것은 이게�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서울시립대에는 ‘3대� 바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있는데�그중�하나가 ‘졸업할�때까지�장학금을�한�번도�못�받는 사람’이란다. 장학금� 지급률이� 약 70%에� 달하기� 때문에 3명� 중 2명은 장학금을� 받으면서� 학교에� 다닌다는� 뜻이다. 등록금의� 스트레스가 덜하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생활에� 집중할� 수� 있는 ‘일상생활에� 대한 선택지’가�늘어난다는�것을�뜻한다. ‘시대생’의�일상생활은�무엇이�다를까. 이들의� 일상생활이� 궁금했다. 그래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시대생(갓 졸업한) 남녀� 두� 명을� 각각� 섭외했다. 세무학과를� 졸업한 11학번� 동기, 서마루치�씨와�정수지�씨를�일주일�간격으로�만났다(이하�존칭�생략). 서마루치에게�전농동은 ‘서울스럽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살만했다.

서마루치. 이름이� 독특하다. 이름에� 얽힌�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려달라고�했다. 학교�다닐�때�다른�친구들�이름이�세�글자니까�출석부에 ‘서마루’까지만�나오는�경우가�많은데, 이때�애들이 ‘서마루’ 이름�옆에 ‘치’ 까지�출석부에�썼단다. 그런데�선생님이 ‘왜�친구�이름에�장난쳐놨냐고’ 혼냈다고� 한다(이렇게� 이야기하고� 혼자� 막� 웃는다). ‘음. 별로 재미없는데….’ 이런� 에피소드를� 재밌다고� 이야기하는� 서마루치와의 남은� 인터뷰가� 심하게� 걱정됐다. 지금은� 자신의� 이름에� 만족도 200%. 취업준비를�하는�현재, 이름�자체가�주는�강렬함�때문인지�최근에�보는 취업시험은� 대부분� 최종면접까지는� 간다고� 한다(실제로� 최근에, 들어가기가�그�어렵다는 ‘공사’에�떡하니�취업했다). 전농동�편에�걸맞은�본격적인�첫�질문, ‘전농동’의�첫�이미지는�어땠는지 물었다. 서마루치에게�전농동은 ‘서울스럽지�않은’ 이미지였다. “생각보다 뭔가�서울스럽지�않다…? 지방에서�왔을�때�서울에�있는�대학가라는�그런 환상이�있잖아요. 근데�뭐�아무것도�없는�거예요. 일단�기본적으로�사람도 그렇게� 많은� 것� 같진� 않고…. 청량리� 미주� 상가� 그쪽도� 오래된� 건물 위주잖아요.” 서마루치에게 ‘서울스러움’은� 뭔가� 대학가의� 왁자함이었던� 듯하다. 하지만�역설적이게도, 시립대가�자리하고�있는�전농동은�이런�왁자함이 없어서�오히려�편안함을�느꼈던�것�같았다고�회상한다. 2011년�대학입학 이후 8년� 동안� 계속� 전농동의� 같은� 집에서� 자취했던(최근에� 취업에 성공해서� 회사가� 있는� 대구로� 내려갔다) 서마루치는� 지나보니 북적거리지�않기�때문에�오히려�살만하다고�느꼈다고�회고한다. 서울의 홍대나� 강남, 연남동� 같은� 곳도� 많이� 다녀봤지만� 그다지� 적성에� 맞는 동네는�아니었단다. 게다가�최근�취업면접을�여기저기�다녀보면서�알게 된�것은, 청량리를�중심으로�한�교통편이�너무�좋다는�사실을�몸으로�알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서울에서� 근무하게� 되는� 여건이라면 여기(전농동)에서� 계속� 살기를� 원했다. 다만, 현재의� 전농동의� 높은 집값은�서마루치의�정주(定住) 의사를�비현실적인�꿈으로만�이야기하게 하는�것�같았다. 자원봉사, 시작은�학교�술친구. 지속할�수�있게�한�것은? 마을�친구!

서마루치가�전농동에�애착을�갖게�된�것은�그가�동네(전농동)에서�가까운 곳에서� 시작한� 봉사� 활동과도� 관계가� 깊어� 보인다. 대학� 입학한� 이후 동아리�활동(서울시립대, 그린두메�동아리)의�인연으로�시작된�자원봉사 활동의� 근거지가� 바로� 이곳� 전농동(꿈틀� 도서관, 해뜨는집)에� 있었기 때문이다. 중간에�군대도�다녀오고�동아리�활동의�내용이�약간�변하면서 다른� 활동으로� 전환되기도� 했지만, 서마루치는 2011년� 이후� 대학을 졸업한�지금까지 8년째�꾸준하게�나가고�있다고�한다. 뭐든 1년씩�하는�활동을�지속하기도�힘든�경박단소(輕薄短小)의�시대. 8 년씩이나�지속하게�된�이유가�궁금했다(이�기간은�그가�전농동에�거주한 기간과�일치한다). 그런데 8년이라는�시간의�무게감에�비교해�서마루치가 얘기하는 ‘자봉’ 시작의�동기는�좀�허무했다. 같은�과�동기�한�놈이�친한 친구들을 ‘우루루’ 몰고�같이�들어왔다고�하고(뒤에서�나오는 ‘정수지’도 이 ‘우루루’에�포함된다) 이때부터�서마루치도�함께�하게�되었다고�한다. “동아리�처음�들어올�때�나는�봉사�활동�열심히�해야지�하고�들어오는 친구들은�아무도�없어요. 봉사�활동�자체는�매일�하는�게�아니니까�결국 이제�활동�이외의�시간은�보통�동아리방에서�같이�보내거나�친구들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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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술�한잔하거나�그런�게�주가�되니까” 헐. 사실은�봉사�활동을�빙자한 술모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학도� 졸업하고� 친구들은� 회사로 지방으로�뿔뿔이�흩어진�지금. 무엇이�이런�활동을�지속�가능하게�하는 동력이�되는�걸까? 가장�직접적인�동기의�단서는 8년�동안�함께�하면서 ‘만들어온�이웃’에 있었다. “이게� 만약에� 저� 혼자� 매번� 모르는� 사람들이랑� 하는� 거면은 이렇게� 안� 됐을� 것� 같아요. 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하고� 같이� 한다는 거죠.” 8년이라는�시간은�서마루치에게�새로운 ‘이웃’을�만들어주었고, 그 이웃들은�또다시�자원봉사하게�하는�새로운�동력의�선순환을�만들어내고 있었다. 정수지의 ‘첫�서울’, 전농동. 그리고, ‘같은�이유’의�동아리�활동.

서마루치의�술친구이자, 같은�과�동기, 여자�사람�친구. 정수지를�일주일 간격으로� 인터뷰했다. 경북과� 일산에서� 살았던� 정수지에게도� 전농동은 서울의� 첫� 이미지였다. 다만, 정수지에게� 전농동은� 처음의� 강렬한 이미지보다는� 시간이� 지나보니� 좋았던, ‘뒷심’이� 좋은� 이미지였다. “(첫 이미지는)‘불편하다’였어요. 제가� 문화생활을� 하고� 싶어도� 할� 수도 없고…. 그런데, 지금� 막� 다른� 동네에서� 살다� 보니까� 여기만큼� 그렇게 접근성이�좋은�데가�없더라고요. 여기서�접근성이라고�하는�건�주로�강남, 종로(예요).” 그리고, 정수지의� 자원봉사� 동아리(그린두메) 활동의� 시작� 동기도 마루치씨의� 그것과� 매우� 유사했다. “봉사동아리� 들어간� 것도� 그냥 동기들이�많이�들어가서�너�할래? 해서�들어간�거였지�내가�뭐�여기는�이런 집수리� 봉사를� 한데…. 무슨� 봉사를� 한데…. 이래가지고� 들어간� 건 아니었어요. 근데� 막상� 들어왔는데� 보니까� 제가� 제일� 열심히� 하고 있더라고요.” 결국은�정수지도�사람들이�좋았고, ‘술’이�좋았던�것이다(헐).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친해졌던� 애들이� 다� 거기(동아리)로� 들어가 있었어요. 그래가지고�그냥�아무렇지도�않게…. 대학교�들어가면�동아리 하나는�해야�할�거�아니냐. 이�생각으로�들어왔거든요. 제가�무슨�특별한 취미가� 있거나� 그렇지는� 않았거든요. 다� 이걸(술)로� 맺어진…. (웃음)” 정수지와�서마루치�두�사람을�인터뷰하면서, 내가�지금까지�가지고�있던 ‘ 서울시립대생 ≒ 명문대생, 반듯하고� 스마트한� 이미지’는 초토화됐다(이건�뭐). 서마루치와�정수지의 ‘첫�서울, 전농동’은�화려하고�왁자한�첫�느낌은�주지 못했다. 하지만, ‘지나보니, 전농동’은�두�사람에게 ‘따뜻하고�아늑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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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 2019. 06. 30.

동네’의�느낌을�남겨주고�있었다. 그리고, 전농동이�준�그�따뜻한�동네의 느낌은�정수지가�앞으로�살고�싶어�하는 ‘우리�동네’의�이상향이기도�했다. 정수지의 ‘우리�동네’는�물리적�공간이�아니라, ‘따뜻한�사람’이�많은�곳.

“한�동네에�오래�살고�싶어요. (한동네에�오래�산다는�건) 내가�그�동네 일원이� 되는� 거잖아요…. (중략)…. 그냥� 내가� 퇴근하고� 아니면� 학교 갔다가� 집에� 딱� 들어오면� 그냥� 버스� 내리자마자� 아…. 내� 집에� 왔다. 동네로만�딱�버스가�들어서도�여기�내친구집, 저기�아는�아줌마�집, 저기는 누구집.. 이런.. 내가�잘�알고�친하게�지냈던�사람들, 내가�부르면�나올�수 있고�그런�데서�살고�싶어요. 저는.” 정수지에게� 동네의� 이미지는� 물리적� 공간의� 느낌이� 아니었다. 관계의 공간이고 ‘좋은� 사람’을� 기억하게� 하는� 공간이었다. 정수지에게� 이런 ‘따뜻한�동네’의�이미지가�이상향처럼�떠올려지는�건, 어린�시절�그가�겪은 ‘오래된�동네�친구’에�대한�결핍�때문인�것�같다. 그는�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계속�동네를�바꿔서�이사를�했었다. 문득, 이�경험이�비단 20대�후반의�청년�정수지의�경험에만�국한되지�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잊을� 만하면 70, 80년대의� 기억이�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재소환되는� 것을� 보면, ‘동네’를� 잃어버린� 사람들� 공통의 결핍이�그만큼�크다는�것을�방증하는�것�같기도�하다. 1970년대�본격적인�부동산개발이�시작된�이후 50여�년�동안 ‘대한민국 부동산� 공화국’에� 살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이 ‘정주’를� 하지� 못하고, 집값을�따라, 학군을�따라, 지하철역을�따라, 회사를�따라�이사를�다녔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동네’는� 쾌적해지고 있었지만, ‘따뜻한�동네’에�대한�느낌은�거대한�결핍으로�남았다. 그리고 이�결핍은 20대�청년의�경험에도�고스란히�남아있었던�것이다. 비교적�짧은�거주�경험을�가진�두�명의�시립대�졸업생들에게�전농동은 화려함보다는 ‘따뜻함’을� 남겨준� 것� 같다. 그리고� 이� 짧은� 인터뷰는� 몇 가지�곱씹어볼�만한�생각을�하게�했다. 자원봉사는�사실, ‘좋은�일’을�하러�가는�게�아니라, ‘좋은�사람’을�만나러 가는�것이라는�사실이다. 그래서, 알고�보면, ‘지속가능한�자봉’은�그�일 자체가� 얼마나 ‘거창한� 의미가� 있는� 일인가’가� 아니라 ‘지속가능한 관계(쉽게�말하면�내가�거기�갔을�때�술�한잔할�친구가�거기�있는가)’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좋은� 동네’는 ‘좋은� 사람에� 대한� 기억’을 말한다는�사실이다.


인터뷰, 마을이음�세�번째�이야기, 임금의� 경작지 ‘전농(전농)’ 주민이 만들어가는 ‘전농동’으로�일군다 전농동�이야기를�마칩니다.

'인터뷰, 마을이음'은�계쩔마다�발행하는�우리동네�사람들�이야기가�있는�잡지입니다. 나와 이웃이� 사는� 동네소식을� 취재하고, 마을잡지와� 영상, 팟캐스트� 등으로� 제작합니다. 함께하실�시민기자를�모집하오니, 관심있는�분은�연락바랍니다. 가입양식_ http://bitly.kr/hrpA

발 행 일 2019.06.30.

디 자 인 청년협동조합�몽땅

취재기자 오은형, 임정희, 윤덕환, 심소영, 정담희

발 행 처 문화플랫폼�시민나루

전화_ 02-2245-9623

※이 잡지는 2019 서울시마을미디어지원사업 복합형에 선정되어, 마을미디어지원금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괄 심소영

화 02-2245-9623(문자수신�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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