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호
2020. 05. 15.
02 12-16
이문동 지도 편집자의 글
03
동네에서 놀고, 즐기고, 배울 곳
동네 에세이
17-18
04-05 동네이슈, 잇슈
철길, 라일락향기, 정(情)이 만들어낸 우리 읍내
당신이 몰랐던 이문동의 소소한 역사
19
06-11
모이고, 움지이고 달라지다
이문동 돈키호테
이문동 里門洞
02
5호 2020. 05. 15.
철길, 라일락향기, 정이 만들어낸 우리 읍내
이문동
편집자의 글 안녕 세상이여… 우리읍내… 학교… 우리 집… 안녕히 계세요 엄마 아빠… 째깍거리던 시계도
이문동을 취재하며 손톤 와일더의 희곡 '우리읍내'가 생각났다.
‘우리읍내’는 총 3막으로 이뤄진 작품인데, 에밀리가 자라고 결혼하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지금을 잘 살아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엄마가 가꾸던 해바라기도… 맛있는 음식과 아침에 침대 위에 놓여진 다려놓은 원피스… 잠을 자고 아침에 눈을 뜨고…
에밀리의 독백은 이문동을 떠오르게 했고, 취재하는 내내 이문동 이미지는 우
모든 게 너무나 아름다워 그 참가치를 아무도 모르고 있었어.
리읍내였다. 사라지는 동네에서 고양이를 구조하고, 사라지는 동네를 기억하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자신들이 사는 세상을 얼마나 깨달을까요?
고, 다양한 문화 활동 만들어보며 즐기고, 생활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제안하
기 위해 기록을 남기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로하며 서로 배우고, 이야기하
자신이 사는 1분 1초를 말이에요.
고 만들고, 약자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하며 산다. 그렇게 1분 1초를
<손톤 와일더 作 '우리읍내'中 에밀리의 독백>
행복한 시간이었다. 동네 살이의 가치를 알려준 이문동 이웃들께 감사드린다.
가치 있게 사는 이문동 사람들을 취재했던 두 달, 함께 할 수 있어 즐거웠고
2020년 4월 인터뷰, 마을이음 편집자 심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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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2020. 05. 15.
동네에세이
이문의 골목을 여행하다 나는 골목여행가다.
마치 영화 [아이다호]의 ‘도로감식가’ 리버 피닉스처럼, 나는 골목여행가다. 이문(里 門)에는 골목이 많다. 재개발로 상처 입고 쫓겨난 채 버려진 이 골목들, 무너진 담벼락 과 어지러운 세간살이로 뒤덮힌 이 골목도 이제 곧 화려한 귀향을 맞는 영웅의 행진처 럼 화려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새로운 주민을 맞이할 것이다. 이 상처의 기억들도 언젠 가는 마치 없었던 기억처럼 잊혀질 것이다.
글 민노씨
그렇게 인터넷을 골목 삼아 돌아다니다 만난 여러 기록자들 가운데 소개하고 싶은 첫 번째 친구는 ‘좀좀이의 여행’이라는 블로그다. 약 1년 전 오늘의 이문동, 그중에서도 재개발이 진행 중인 ‘달동네’를 꼼꼼하게 기록한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천장산 달동 네 골목길 - 이문1재정비촉진구역”이라는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제목의 글에는 하 지만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이문동의 골목들이 담겨 있다. 제주도에서 서울에 올라온 학생의 눈으로 본 이문동 달동네는 “처절”이라는 말로 함 축된다. 하지만 이 처절한 골목도 이제 곧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면 어쩐지 그리울 것 같다. 사라지는 모든 것들에는 그리움이 마치 세월의 흔적처럼 남는 것 같다. 특히 골 목은 더 그렇다. 나에게도 그렇게 사라져간 많은 골목들이 있다.
두 번째로 소개하고 싶은 이문의 여행자는 ‘이문 소사이어티’다. ‘이문 소사이어티’에 는 한국 외국어대학교 문화컨텐츠 연계 전공 학생들이 기록한 이문의 이모저모가 화 려하지는 않지만, 마음 따뜻한 농부의 곳간 처럼 충실하게 쌓여 있다. 나는 ‘이문의 숨겨진 보물’(지도)이라고 학생들이 명명한, 지도 위의 지명을 하나씩 맛 있는 반찬이길 바라면서 맛보다는 식당 손님처럼 따라가다 ‘귀일만두’에 눈길이 머물 렀다. 귀일만두의 맛은 어떤 맛일까. 한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만둣가게가 별로 없는 이문동에서 저같이 타지에서 온 학생들은 사람의 따뜻함이나 그런 게 그리울 때가 있는데, 귀일만두 이모 님께서 (제가) 가면 막 사소한 것들도 챙겨 주신단 말이예요.”
이문동 재개발 지구 골목① *사진: 김수진 외국어대 스페인어과_방송영상뉴미디어 수업 중
이제 곧 사라질 골목은 마치 세상의 달콤함과 쓸쓸함에 관한 훌륭한 메타포 같다. 그 골목의 맛은 흑당아이스라떼를 마시는 것처럼 쓰지만 달콤하다. 골목을 돌 때마다 다 시는 돌아갈 수 없는 유년의 아이들이 여전히 골목을 뛰어논다. 그 하얀 그림자들은 뿌 옇게 뿌려진 설탕 가루 같은 골목의 시공간을 마치 하늘이 바다인 것처럼 헤엄친다.
이문에 가보지 못한 이방인인 나는, 이문의 골목을 돌아다니는 것처럼, 이문의 이모저 모를 검색한다. 태어나서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는 이문동을 알기 위해 나는 인터넷을 헤맨다. 그렇게 만난 이문의 모습은 환하게 빛나기도 하고, 어둡게 가라앉기 도 한다. 아이에게 골목이 유년의 왕국, 온갖 모험이 가득한 거대하고 찬란한 궁전이지만 동시 에 친구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고, 골목 가득 풍성한 빛들이 사라지면 오직 수은등 만이 유일하게 이 거대한 악마의 아가리 끝에 희미하게 매달려 있는 어둠의 심연인 것 처럼. 이문동 재개발지구 골목②
나는 이문을 잘 모른다. 이 글을 쓰면서 난생처음, 이문(里門)이 조선시대 ‘방범초소’ 를 뜻한다는 걸 알았다. ‘이문’은 또 다른 골목이나 큰길로 이어지는 마을 어귀에 세워 진 마을문이라고 한다. 그 동네 이름의 유래를 알고 나니 아주 조금 더 이문이 친숙해 졌다. “막 사소한 것들도 챙겨주는” 아직 한번도 만나지 못한 귀일만두의 이모님처럼.
글 참조사이트
좀좀이의 여행,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천장산 달동네 골목길 - 이문1재정비촉진구역' https://zomzom.tistory.com/3655 이문소사이어티 ‘이문동의 숨겨진 보물’ (지도): https://alertsky3.wixsite.com/imun 귀일만두 in 이무너 (유튜브) https://youtu.be/-fSWOnTGvvU 이문동의 두 얼굴, https://brunch.co.kr/@imun-society/12 이문소사이어티(브런치) https://brunch.co.kr/@imun-society#art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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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2020. 05. 15.
당신이 몰랐던 이문동의 소소한 역사
서울의 방범초소, 이문동 이야기
윤덕환(문화플랫폼시민나루 시민기자) / 문화심리학박사
얼마 전부터 시작한 TV광고. 배우 최불암과 김승우가 나오는 이 잇몸 약 광고에는 한 설렁탕집이 등장한다. 뽀얀 국물에 잘 익은 깍두기를 하나 얹어서 똵. 어후. 밥 때 보면 참기 힘든 광고다. 아예 약 광고가 아니라 맛집 광고로 기억하는 사람도 많다. 약 이름 은 전혀 기억이 안 나도 그 설렁탕 집은 강렬하게 각인된다. 이문(里門)설렁탕. 어라? 이번에 취재할 곳이 이문동(里門洞)인데 잘됐다. 취재를 빙자해서 꼭 한번 설렁탕 한 그릇을 맛보리라. 그런데 모바일을 열고 지도를 아무리 검색해도 ‘이문(里門)설렁탕’ 은 이문동에 없다. 지도는 종각역 인사동 근처를 가리킨다. 셜록홈즈의 열혈독자 실력 으로 추리를 시작한다. ‘이문설렁탕은 아마도 이문동 어딘가에 가게를 했다가 장사가 잘되니 종로 쪽으로 이사 간 것 일거야’. 예상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현재의 이문설렁 탕은 그 근처에서 장사한지가 100년이 넘은(1904년부터 116년째) 대표적인 노포(老 鋪)식당의 하나다. 그럼 도대체 왜 이문동도 아닌 종로에서 장사를 하면서, ‘이문설렁 탕’이라는 이름을 지었던 것일까? ‘이문’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였다.
이문설렁탕, 출처: 네이버블로그<공대이끼>
이문터(里門址), 출처: 네이버블로그<길거리 인문학도, 우리동네이야기>
이문설렁탕이 종로의 인사동 근처에 있는 것은 ‘이문’이라는 이름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이문(里門). 도둑을 단속하기 위해 전국의 마을 입구에 세운 문1. 이문(里門)은 의미상 성문(城門)과 대비된다. 성과 외부를 구분하는 문을 성문(城門)이라고 한다면, 마을과 그 마을의 외부를 임의로 구분하는 기준점이 바로 ‘이문(里門)’이 되는 것이다. ‘이문터(里門址2)’로 검색하면 정확히 유사한 장소(종로 근처)가 검색이 되는데 지금 도 그 이문이 있었음을 기록하기 위한 표석이 남겨져 있다. 그런데, 왜 ‘설렁탕집’이 이문과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몇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실마 리는 이 ‘이문’의 생김새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실제 이문은 기둥 두 개에 문이 달린, 울타리도 아주 허술하게 이루어져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림만 보면, ‘사극에 나 오는 국밥집 앞에 있던 있으나 마나한 문’ 비슷한 이미지다. 이문의 역할은 실제로는 물리적 경계를 나누거나 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크고, 일종의 방범초소 역할 정도였 을 것이다. 당시 이문터가 있던 종로의 ‘피맛골’ 근처에는 유동인구가 많았고 당연히 허기를 달랠 식당도 많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렇게 추론해 보면, 이문설렁탕의 오랜 역사는 사람들 이 오고가는 ‘경계지’ 또는 ‘정거장’의 역사와 닿아있어 보인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 에는 허기를 달랠 곳도 많이 필요했던 것이다. 기록에 나타난 이 이문의 최초 역사는 세조11년, 146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조 는 자신의 조카 단종이 즉위한 이듬해(1453년) 한명회 등과 함께 폭력적인 ‘쿠데타’를 감행(계유정난), 집권한다. 세조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해박한 유학자들의 사변과 논리 에 의해 운영되는 나라가 아니라 왕의 신하에게 직접적으로 지시하고, 이에 복종하는 강력한 ‘상명하달(上命下達)’의 국가가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이런 강력한 통치력이 자신의 집권시기 이후에도 지속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자신의 건강이 쇠하기 시작했 던 제위11년(세조의 집권은 14년밖에 되지 않는다), 야간의 치안을 도모한다는 이유 로 방범초소인 ‘이문’을 전국적인 요지에 설치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찾 아보면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222번지(여기가 정확히 과거의 피맛골이다), 중구 남대문로 조선호텔 입구, 중구 태평로 태평관 동쪽, 성동구 상왕십리 현인동, 마 포구 염리동 서울여자중학교 부근 등 우리나라 전역에 이문의 터가 있었다고 전해진 다.3 그리고 그 수많은 ‘이문’중 하나가, 1936년 4월 1일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이문정 (里門町)이 되고, 1943년 동대문구에 속하게 되었고,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이문 정은 이문동으로 되었다고 전해진다.4 이문동에서 ‘이문’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 명사’였던 것이다. 하늘(天)이 숨겨놓은(藏) 산, 천장산(天藏山). 그리고 중앙정보부.
이문의 이전에 짓던 형문, 출처: 네이버블로그<길거리 인문학도, 우리동네이야기>
‘방범’과 감시의 역사적 전통(?)을 이어받은 탓일까. 이문동에는 동네사람들만 알고 외 부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산이 하나 있다. ‘하늘이 숨겨놓은 산’이라는 뜻의 한자를 가진, 천장산(天藏山)이다. 해발이 140미터밖에 안 되는, 아담해서 산책하기 딱 좋은 산. 이 산은 인근의 석관동, 회기동, 청량리동과 연결되어 있지만 ‘천장산로’라는 이름 을 가진 거리는 이문동에만 존재한다. 그래서 이문동 사람들은 이 천장산을 ‘자신들의 구역’(여기에 딱 맞는 단어가 있는데 일본어라서 참는다 ^^;)에 넣는 것을 서슴치 않는다. 그런데, 거창한 등산장비가 전혀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2 址(지)는 ‘터’라는 뜻을 가진 한자.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에서 ‘이문’ 검색결과에서 일부 인용 4 동대문문화원(http://dongdaemun.kcc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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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2020. 05. 15.
동대문구 사람들에게 이문동은 필요한 것을 내어주지만 ‘배려를 드러내지 않는’, 편안하지만 ‘인위적이지 않은’, 따뜻하지 만 ‘잘 보이지 않는’ 그런 동네였다.
천장산 위치, 출처: 네이버 지도에서 캡쳐
필요 없는 포근하고 예쁜 이 산에는 비밀이 하나 있다. 천장산은 40년 이상 사람들에 게 접근이 허용되지 않던 산 이었다.5 천장산은 2005년 5월1일, 43년간의 베일을 벗고 일반인에게 등장한다. ‘없던 걸로 했던 산’이 갑자기 등장한 것이다. 당연히 원래 산은 있었다. 그런데 1962년 중앙정보부 건물이 들어서면서 이 천장산은 ‘없는 산’이 된다 (실제로 중앙정보부는 주소도 없다). 중앙정보부가 국가안전기획부가 되고도 상당기간 이 곳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이곳에 관한 생생한 에피소드를 들려준 사람이 한 명 있었 다. 한국외대에 1992년 학부에 입학해서 박사학위까지 계속 공부했고, 지금까지 동네 에 거주하고 있는 김동원 박사는 국가안전기획부 시절의 섬뜩한 에피소드하나를 전한 다. “저는 기억나는 게 대학교 2학년 때 외대 후문에서 술먹고 있었거든요. 그때가 한창 뭐 학생운동많이 하고 그럴 때였어요. ..(중략).. 선배들이 담배랑 술사오라 그래서 외 대 후문앞 슈퍼를 갔는데 슈퍼아저씨가 우리 학생회장이 좀 전에 잡혀갔더라는 거예 요. (중략).. 담배사러왔다가 잠복해있던 형사들이 체포를 해서 바로 저기 후문으로. 저 기가 그때 안기부였으니까.” 그리고, 이어서 안기부입장에서의 천장산의 ‘효용’도 이렇게 전한다. “그 산이 사실은 군사보호구역으로 되었어 가지고 지금도 가보면 철조망이 쳐져있는 데 외대에서 보여요. 초소가 있거든요. 그 소초가 안기부초소였고, 그 위에서 보면 뭐 외대에서 무슨 집회하는지 경희대가 뭐하는지 다 보이죠. 사람들 몇 명 안 보이고 그래 도 다 보일테니까.” 섬뜩하다. 이런 등골 오싹한 시대를 거쳐, 민주화시대를 지나고, 2003년 문화재청은 중앙정보부 건물을 철거하고 인근의 의릉 전체와 천장산을 일반시민들에게 공개하기 로 결정했다. 지금의 성북구 석관동에 걸쳐있는 한국예술종합대학교의 일부 건물은 사실 ‘남산의 부장’님들이 정치공작과 국민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모의했던 장소였 다. 천장산은 하늘이 숨겨놓은 것이 아니라, 개발독재 시대의 권위주의 정부가 숨겨놓 았던 것이다. 이문동에 숨겨진 ‘서민의 연료’ 공장, 삼천리이앤이.
삼륜차, 출처: 특별했던 기아마스타 삼륜차(2018.05.21.), 모토야(www.motoya.co.kr)기사자료
삼천리이앤이 외부, 출처: 네이버 지도에서 캡쳐
이문동의 끝자락. 석관동과의 경계에 있는 한천로의 끝부분에 한 공장이 있다. 밝은 하 늘색 슬래트 지붕을 한 낮고 깔끔한 건물이다. 그냥 슥 지나가면 공장인지도 잘 모른 다. 이문동에는 한 때는 서민들에게 따뜻함을 저렴하게 공급했던 이 공장이 ‘숨겨져’ 있다. 삼천리이앤이, 연탄공장이다. ‘연탄’이 던지는 선입견과는 완전 딴판으로 공장의 외관은 깔끔했다. 1960년대 전국적으로 400여곳에 달하던 연탄공장은 서울에 이곳 이문동과 시흥동 딱 2곳만 남아있다고 알려져 있다. 한때는 이문동의 일자리와 경제가 돌아가는 중요한 원동력이기도 했다. 신이문역부터 석계역까지가 모두 연탄공장이었고 이곳에서 일하 는 인력도 상당했다고 전한다. 이 삼천리이앤이(구, 삼천리 연탄)는 1968년 서울에서 가동되던 연탄공장 17개중 9개 공장이 합쳐지면서 현재의 이문동으로 이사했으며 당 시 서울시민이 하루에 사용하던 연탄이 800~1,000만장이었는데 이곳에서 200만장(1 일)을 생산했다고 하니6 규모는 상당했던 것 같다. ‘연탄의 전성시대’에 관한 에피소드 가 하나있다. 연배가 좀 있으신 분들은 기억하는 차가 있다. 바퀴가 세 개 달린 삼륜차 (자전거 아니고, 자동차 맞다. 이런 게 진짜 있었다). 이 삼륜차에는 히터가 없다. 왜냐. 차안에는 히터를 대신해서 ‘연탄’을 땔 수 있었기 때문이다.7 헐. 친환경 트렌드라는 시대적 강풍과 인근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주민들의 민원이 라는 어려움에 이 연탄공장은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다. 정부의 지원도 끊어지거나 줄 어들어 현재는 명맥만 유지되고 있고, 연탄공장을 검색해보면 10여년의 신문기사에 도 ‘곧 없어질 산업’으로 지목되었었다. 하지만, 여전히 서민들에게 연탄은 가장 저렴 하게 겨울을 나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다. 그리고 또 여전히 동대문구의 일부지역은 연 탄의 중요한 소비처로 존재한다. 그래서 이제는 서글픈 은퇴준비를 하는 이 ‘연탄 공 장’의 오래된 노고를 고맙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동대문구 사람들에게 이문동은 필요한 것을 내어주지만 ‘배려를 드러내지 않는’, 편안 하지만 ‘인위적이지 않은’, 따뜻하지만 ‘잘 보이지 않는’ 그런 동네였다. 5 ‘43년만에 열린 천장산’ (2005년 4월26일자 SBS뉴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0311746569) 6 서울의 연탄공장 ‘삼천리이앤이’에 가보니… (2012.11.19.), 농민신문 7 삼천리이앤이 연탄공장 배달원(2015.01.15.), 경기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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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2020. 05. 15.
모이고, 움직이고 달라지다
심소영(취재&글), 박혜진(사진)
이문동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내가 거기 있어서, 또 네가 거기 있어서 특별해지는 이문동. 그래서 특별한 ‘이문모아’ “밥때가 되면 솔솔 밥 짓는 냄새가 온 동네에 퍼져요. 그럼 밥을 올리고 아이손 잡고 골목 어귀로 나가면 해가 뉘엿뉘 엿 넘어가고 있어요.” 2019년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김 혜자 님이 가장 행복했던 때를 회상하며 했던 대사다. 어릴 때 놀던 골목과 엄마를 떠올리게 해주어 눈물이 툭 터졌던 기억이 있다. 내가 나이기 때문에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걸 너무 진하게 느끼게 되었어요.
들 모두에게 모이세요. 사람들과 만나세요, 할 수 없을 것 같 지만, 어…. 그래도 사람들이 앞으로 조금 더 사람들과 닿는 순간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문모아’ 활동에도 많 은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고, 이문동의 사는 사람들이 이문동을 집 같은 공간으로 느껴지실 수 있도록 하고 싶었 어요.”
등굣길 라일락 향도 생각나고, 아침에 앞집 된장찌개 냄새 도 생각나고 그런 게 별거 아니지만 내게 아직 남아있는 이 문동의 느낌
이문동 사진전 입구
이문모아 김보경님
뜬금없이 드라마 대사가 등장한 이유는 오늘 만난 주인공이 그 기억을 재소환했기 때문이다. 그는 놀랍게도 20대 청년 이고, 이문동을 기반으로 문화예술 활동단체 ‘이문모아’ 회 원 김보경님이다. 그는 경희대에서 사회학과 지리학을 공부 하고 있다. 게다가 청량초, 청량중, 휘봉고등학교를 나와 모 두 동대문구 소재 학교에 다녔다. 동대문구 오랜 주민으로 서 너무 반가워 집 옆에 있는 휘봉고등학교에 관해 물었다. 그랬더니 눈이 반짝인다. “고등학교 때 인생이 많이 바뀌었 어요. 거기서는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잘해서 사랑을 받 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이기 때문에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걸 너무 진하게 느끼게 되었어요.” 누가 무엇을 잘해서가 아 니라 내가 ‘나’ 라서 사랑받을 수 있었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남은 인터뷰가 기대된다. 내가 사는 동네가 좀 더 따듯하고 외롭지 않은 동네였으면 좋겠었어서.
그럼 지역 활동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일단 개인적인 문제에서 시작된 것 같아요. 제가 외로움을 많이 타요. 도시 생활하면서 너무 외로웠거든요. 친구 관계와는 별개로 너무 삭막하게 느껴지고 사람들이 타인에게 관심을 잘 안 두는 것 같고, 나는 내가 사는 동네가 좀 더 따듯했으면 좋겠고, 사람과 사람이 좀 더 만났으면 좋겠고, 뭔가 했으면 좋겠다 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외롭지 않은 그런 동네였으면 좋겠 다는 바람이 점점 커졌어요. 특히 어렸을 때 잠시 독일에서 살았는데, 한인사회가 따로 있다 보니 같이 모여서 밥 먹고 이사할 때 도와주고 그런 서로 도움이 일상적이었는데, 한 국오니까 너무 대비되더라고요. 특히 서울이 더 심한 것 같 은데, 전 항상 사람과의 연결을 갈망해온 것 같아요. 예전에 는 마음은 있어도 어디서 뭘 할지 몰랐는데, 학교생활을 계 속 이 근처에서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이문모아’로 연결 되었고, 그래서 오랜 바람을 실천해보자 했습니다. ” ‘이문모아’는 그렇게 혼자 하기 힘든 무언가를 해 볼 수 있 는 곳이에요.
‘외로움’에서 만들어진 활동의 동기가 너무나 공감된다. 나 도 외롭고 서로서로 비빌 언덕이 되어주면 어떨까 생각했었 다. 그렇지만 대학 4학년 스펙쌓기에 전념해도 부족할 시간 인데, 따듯한 사회가 되면 외롭지 않은 동네가 미래에 대한 고민을 덜어주기는 힘들 텐데, 직접행동으로 옮긴 이유를 물었다. “현대사회가 너무 각박하다 보니까 연결되었다는 느낌도 없고, 혼자 부유하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주변 친구들 얘기 들어봐도 너무 공허하고 무력하고 마을이나 뭐 사회에 불만 이 있거나 바꾸고 싶거나 해도 나 혼자는 아무것도 못 할 것 같고, 그런 무력감이 느껴지거든요. ‘이문모아’는 그렇게 혼 자 하기 힘든 무언가를 해 볼 수 있는 곳이에요. 모여서 무 언가를 하며 뭔가 조금씩 변화를 만들어가죠. 그래서 사람 들과 만나고 모여서 뭔가 해 보려고 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뭔가 할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동네 사람
라고요. 무기력한 수용보다는 아. 이 사람이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 하는 게 그냥 완 전히 이해가 되는 경험. 제게는 큰 변화였어요.” 아무나 할 수 없는 경험이다. 나도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 은 모임이나 회의를 피하고, 말을 줄이거나 하는데, 김보경 씨는 충분히 듣고 완전히 이해하려 한다니…. 특별한 사람 임이 분명하다.
이문동 사진전 실내
김보경 씨에게 이문동은 어떤 느낌으로 남아있을까? “그렇게 특별하진 않아요. 이문동에서 청량초까지 가는 등 굣길이 있었는데, 외대에서 청량리 쪽으로 가는 큰길이랑 그 뒤쪽 골목길이 있는데, 되게 조용했어요. 친구랑 만나서 지나가다 보면 개들도 돌아다니고, 교회도 있어서 돌아다 니는 사람도 많고, 자연스러운 풍경이죠. 그리고 작은 골목 에 한약방이 있는데, 학교 가는 길에 지나면, 한약 냄새가 엄 청나게 진하게 났어요. 거기 살 때는 한약 냄새가 참 싫었는 데, 이사 후에 이 동네 와서 다시 냄새를 맡으니 되게 정겹 게 느껴졌어요. 또 학교 가는 길에 라일락 핀 집이 있었는 데, 라일락 향도 생각나고, 아침에 앞집 된장찌개 냄새도 생 각나고, 그런 게 별거 아니지만 내게 아직 남아있는 이문동 의 느낌이에요.” 얘기하다 보니, 향기롭다. 길을 걷다 어디 에서 나는지 모를 꽃향기를 맡고 둘러보면 어느 집 담장 넘 어 흘러나온 라일락을 발견하고 나도 모르게 그 꽃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 경험이 있는데, 김보경 씨가 그 라일락 같다 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과 청년예술가들의 만남 ‘이문동 비엔날레’ 많이 기대 해 주세요.
“이문모아의 활동 중 하나는 이문동이 재개발되기 전부터 과정을 기록하는 일인데, 사라지는 동네의 마지막 장면을 포착했고, 그걸 기록물로 남겼어요. 사람들이 그 기록물을 통해서 사라진 동네를 다시 만날 수 있겠구나…. 하는 것에 서 뿌듯함을 느껴요. 그리고 올해는 ‘이문동 비엔날레’를 준 비하고 있어요. 그냥 단순히 청년예술가들이 작품을 던져놓 는 것이 아니고요. 초상화도 그려주고, 이문동 탐사대 같은 이름으로 작품전시를 한곳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 여 러 곳에서 하면서 작품 구경과 마을 구경을 같이 할 수 있게 하는 거죠. 마을이랑 청년예술가들이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기획 중이에요.” 말 만 들어도 기대된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떻게 기록물과 비엔날레를 만날 수 있을까? “코로나19로 멤버들이 못 만나는데 화상회의 하면서 차근차근 준비 중 이에요. 우선 사진집을 발간했어요. 곧 코로나19가 잠잠해 지면 동네 여기저기 배포할 예정이고, 예전에 서울대드론팀 과 이문동 전체를 촬영해서 3D맵으로 만든 게 있는데, 아직 온라인 서버에는 못 올렸어요. 곧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문동 비엔날레’는 2020년 9월 경 외대역 앞 광장이나 외대 후문과 경희대 후문 골목에서 주민들을 만날 예정인데, 많이 기대해 주세요.” 무기력한 수용보다는 아. 이 사람이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 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 하는 게 그냥 완전히 이 해가 되는 경험.
사람들과 뭔가를 모의하고 만든다는 것이 외롭지 않게 했다 니, 다행이다. 그럼 ‘이문모아’ 활동의 성과로 느끼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어떤 변화를 봤을까? “예전에는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만 얘기했던 것 같아요. 서로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모이게 되니까 나랑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배제하게 되고 안 들으려고 하게 되 더라고요. ‘이문모아’는 뭔가 정해진 정치적 성향이나 이념 등이 따로 없고, 다만 그 동네에서 뭔가 해 보고 싶은 사람 들이 모이다 보니, 과도 다르고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도 다 르고, 사실 재개발을 바라보는 견해도 하나로 수렴된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사람도, 부정적인 사람들도 있어요. 저도 처음엔 아주 낯설었는데, 계속 활동하다 보니까 나랑 생각 이 다르다고 해서 그게 뭔가 잘못된 게 아니라는 것을 느꼈 어요. 이문모아에서는 회의를 자주하고 긴 시간 의견을 나 누는데, 충분히 들으면 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더
이문동 정마트
재개발로 사라지는 이문동 풍경
평범한 삶도 기록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요.
마지막으로 ‘인터뷰, 마을이음’ 이라는 마을잡지가 해주었 으면 하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지 물었다. “내가 이상한 것인지 모르겠는데, 저는 항상 사람들의 구체적인 생애사가 궁금했어요. 그래서 뭔가 이문동에서 생활하고 있고, 나는 이 사람은 모르지만, 잘 몰라도 누군가의 생애사에 대해 알 았으면 좋겠어요. 생애사를 읽으면 아 이런 사람도 마을에 살고 있구나. 그럼 괜히 아는 사람처럼 느껴지고, 좀 더 가까 워진 것 같고 그럴 것 같아요. 사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되게 다이나믹하고 한 편의 소설인데, 그게 기록되지 않는 게 너무 슬프더라고요. 평범한 삶도 기록될만한 가치가 있 다고 생각해서요. 그렇게 인터뷰를 마쳤다. 김보경 씨를 만난 오늘이 나에게 도 잊을 수 없는 풍경이 되었고, 특별한 날이 된듯하다. “이 문동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내가 거기 있어서, 또 네가 거기 있어서 특별해지는 이문동. 그리고 ‘이문모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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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2020. 05. 15.
모이고, 움직이고 달라지다
취재&글 : 박혜진
연탄 한 장의 의미
만난 사람_ 삼천리이앤이 김두용 전무이사 (이문2동 전 주민자치위원장)
아직 연탄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다. (2019년 기준 전국 연탄사용 가구 수는 10만 347이다.) 김용두 이사 말처럼 당장 연탄공장을 없애는 것보다 우리 주변에 에너지 빈곤층,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다른 에너지로 전환을 지원해야 할 것이다. 연탄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는 그의 인생에서 김두용 이사는 이문동 주민이 연탄공장 이야기를 반기지 않을 것이라며 인터뷰 내내 조심스러워했다.
연탄공장의 새로운 시도 “무조건 있는 걸 없애고 개발하고 아파트 짓고 하기보다는, 제 개인적인 생각은 연탄을 만 드는 것도 상당한 기술과 노하우가 필요하거든요,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필요한 곳에서 활 용할 수 있는 방법도 있고. 역사적인 공간이 다 없어져 버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고 끝나는 건데 나중에 다시 만들 수 있겠어요? 실제 사용했던 것을 보존하고 후세대를 위해 전시관 등으로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나라가 그냥 잘 사는 게 아니고 우리도 옛날에 는 60년대에는 못 살아서 이렇게 연탄을 연료로 사용했고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 발전했 다는 것을 교육할 수 있는 공간, 또 관광자원으로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삼천리 이앤이 김두용이사
동대문구 이문동에는 한때 아시아 최대의 연탄 생산지였던 연탄공장이 있다. 1968년부터 지금까지 반세기 넘게 지키고 있다니 놀랍다. 연탄을 아직 사용하는 곳이 있을까? 정말 연 탄공장이 존재하고 있을까? 내 기억 속에 흐릿하게 남아있는 연탄을 직접 볼 수 있을지 궁 금해졌다. 성북구와 경계하고 있는 이문동 끝자락에 위치한 삼천리이앤이를 찾았다. 김두용이사는 이문2동 전 주민자치위원장으로 10년 넘게 활동하며 이문동 구석구석에 애 정 어린 관심으로 변화를 이끌어왔다.
연탄과 함께한 시간 “저는 서민들이 애용하는 연탄을 생산하 는 사업을 하고 있고, 금년에 연탄, 석탄사 업 일을 한 지 한 50년 됐어요. 삼천리에 오 기 전 대한석탄공사에서 한 9년 정도 있었 고, 지금 여기에서 일한 지 40년이 지났어 요. 옛날에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초석이 연 탄이었죠. 요즘은 경제발전이 되다 보니까 연탄의 필요성을 못 느껴서 없어지는 추세 입니다. …(중략)… 만약에 석탄, 연탄이 없었다면 우리나라 경제발전이 상당히 더 디지 않았을까……. 참 옛날이야기지만 여 기 이문동에 연탄공장이 68년도부터 있었 어요. 이문동에서 서울시내 전체 연탄 공 급했죠. 그 당시만 해도 서울 시내에 연탄 사용 가구 수는 한 95% 이상 됐어요. … (중략)… 연탄이 필요한 옛날에는, 태백에 서 석탄을 싣고 오는 열차가 있지 않습니 까? 제일 처음에 석탄 실은 열차가 올라오 고, 그 다음 시멘트 실은 열차가 뒤따라오 고, 맨 마지막에 여객열차가 올라오고 그랬 었죠. 그때는 여객열차는 연착될 수 있지만 석탄열차는 연착이란 게 없었어요.”
빛바랜 사진 속에 주인공들이 활기를 띠며 되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 시대를 살아 가는 소시민의 삶이 바삐 움직인다. 한평생 연탄과 함께하며 느낀 희로애락을 물었다. 시대가 변하면서 연탄의 소중함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가졌지만, 또 시대가 변하면서 어쩔 수 없기에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경향신문 1977.5.11. 어마어마한 규모의 1970년대 이문동일대 연탄공장 *출처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어려운 시절에 연탄으로 아주 따뜻했고, 이제는 필요 없다고 하는데 실제 서민들은 아직도 연탄 구하기 힘듭니다. 그 사람들은 연탄 한 장 아끼려고 불 끄고 꽁꽁 모여 놓습니다. 그래 서 제가 공무원들 보면 연탄공장 나가라고만 하지 말고, 연탄 때는 가구를 없애라고 해요. 연탄 때는 분들이 없으면 자연스럽게 연탄 쓸 곳이 없으니 자동으로 연탄공장도 없어질 겁 니다.” 삼천리 이앤이 연탄공장 내부
주민들이 함께 이용할수 있는 교육 공간, 우리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는 그의 생각에 공감한다. 연탄공장은 언젠가 사라지겠지만, 과거 시대를 기억 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주민과 함께하길 희망한다.
이문동의 홍반장 이문동 주민으로, 주민자치위원장으로 많은 일을 하셨을 텐데 몇 가지 소개해 달라고 부탁 하니 또 별거 없다 한다. 김두용 이사는 사람이 다니면서 주변에 관심을 두고 문제의식을 느끼고 자꾸 들여다보면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지 않겠냐며, 이야기를 들려준다. “신이문역 에서 내려서 의릉 쪽을 보면 그곳이 꽉 막혀있어서 주민들이 답답함을 많이 느꼈죠. 철거민 원을 제기하고 지금은 펜스치고 철거단계에 있어요. 또 외대로 나가는 이문동 고개 있잖아 요. 고개 맨 위에 횡단보도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그쪽에 사는 사람들이 맨날 버스에서 내 려서 횡단보도 건너려고 내려갔다 다시 돌아오는 게 불편하다보니 무단횡단 사고도 자주 난다고. 그랬더니 횡단보도가 밑에도 있고, 마트 앞에도 있다고 안 만들어준다는데 ‘한번 당신들이 해보란 말이야. 저 밑에 버스정류장에서 내려서 횡단보도 건너려고 내려갔다 다 시 그 언덕배기를 올라와 보란 말이야.’ 그 더워빠지는 여름철에 누가 하겠느냐고? 그래서 만들어졌어요.” 불편함을 느끼고 불평하고 안 되나 보다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는 일이 되게 한다. 모 두에게 불편함이 해소되고 지역이 발전되게 하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값지다. 주민생활의 시 야 확보를 위한 일, 불편한 신호와 횡단보도를 보완하는 일, 주민안전을 위해 CCTV 설치하 는 일, 육교 철거 등이다.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는 홍 반장처럼.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 안도현 시인의 <연탄 한 장> 중에서*이미지출처 밥상공동체 연탄은행
연탄 한 장 마지막으로 동네에 살면서 꼭 바꿔야 하는 것은 없었냐고 여쭤보니 이문동 재개발과 더불 어 주변이 매우 깨끗해질 것이고, 신이문전철역도 재건축되면서 좋아질 것이고 많은 발전 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문동에는 한국철도 차량기지도 있고, 연탄공장도 있으니 이것이 어 떻게 변화되어 발전할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곳이라고 했다. 동네를 사랑하는 만큼 이문 동에 대한 기대도 크신 것 같다. 김두용 이사를 만나면서 안도현의 시 <연탄 한 장>이 생각 났다. 사람마다 연탄 한 장의 의미는 서로 다를 것이다. 제 몸에 불이 옮겨붙어 하염없이 뜨 거워지고 온몸으로 사랑해서 한 덩이 재로 남는 연탄도, 전성기를 누리다 역사 속으로 사라 지는 연탄의 인생도,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의 삶도, 옛 모습은 기억 속에 묻고 새롭게 변 하는 이문동의 모습도. 모두 쓸쓸하고 두렵지 않도록 기억하고 싶다. 잊히는 것. 사라지는 것. 변하는 것. 역사 속에서, 시간 속에서 누구나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냥 잊히고, 그냥 사라지고, 그냥 변한 것이 아닌 애정 어린 마음으로, 보듬어주는 눈길로, 부단히 노력하고 살아온 한평생을 서로가 알아주는 날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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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2020. 05. 15.
모이고, 움직이고 달라지다
서툰 이야기를 들어주는 마음손공방
취재&기사: 오은형 / 사진: 박혜진
만난 사람_ 박진수
2020년의 봄은 코로나19로 사람들은 집에서 안 나가고, 나가더라도 마스크하고, 거리 두기 를 실천하며 생활한다. 봄은 왔지만 답답한 4월 어느 날 외대 후문을 지나 한적한 아파트 모 퉁이에 목공작품과 정성을 들인 예쁜 꽃과 나무 화분이 즐비한 공간이 보인다. 어! 혹시 내 가 찾는 곳이 여기인가? 하지만 그 어디에도 간판이 보이지 않는다. 식물이 많아서 화원인 가? 하고 들여다보면 목공작품들이 보인다. 목공 공방인가? 하고 둘러보니 책도 있는 카페 다. 이곳은 박진수 대표 부부와 상담사 그리고 교육학박사님 네 분이 시작했다는 ‘마음손공 방’이다.
홍보 등 많은 사업제안이 있지만, 여전히 서툴러서 안 하고 있어요. 또 바쁘게 안 살려고 합 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 만날 때마다 저 자신 안에서 그 사람을 위해서 시간을 조절합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소수의 사람을 만나더라도 잘 만나고 싶어요. 누군가 ’여기 이런 곳이 있었네’ 하고 서툰 느낌으로 이곳에 오고, 저도 저답게 삶과 사랑의 서툰 이야기 들어 드립니다.”
그는 크게 감사하는 것이 있는데, 이렇게 공간을 운영하며 살 수 있는 건 자신의 능력이 아 닌 더불어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가 마시는 커피, 공간, 전기세, 인테리어, 집기, 기계, 컵, 책까지도 모두 후원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 어떤 분은 상담에 필요한 책을 매월 3만 원씩 수년간 후원하는데, 놀랍게도 지금 책이 600권이 되었다고 한 다. 해마다 그분께 올해 ‘후원해주신 책이 200권, 300권이 되었습니다’라고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며, 더불어 살면서 나누는 보이지 않는 특별한 후원자들께 감사를 전했다.
가정의학과를 닮은 동네상담소 주치의의 마을에서 행복하기 그는 과거 도서관, 협동조합, 사회단체에서 간사 등 다양한 일을 해보았는데, 앞으로도 마 을에서 행복에 대해 많이 연구하고 싶어 했다. “가장 나답고, 아내와 인생을 담는 일 그러니 까 부부가 행복하게 살고, 자녀가 행복할 수 있는 것들, 나라는 사람을 깊이 알고 좀 더 나은 내 삶을 준비하는 수업을 마을과 연결해서 계속하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그는 가끔 자전 거를 타고 동네를 다니면서 헌 나무도 주워오고 헌화분도 주워온다. 누구의 집이든 필요한 곳에 가서 망치질도 하고, 살림을 고쳐주는 일도 한다. 또 자신의 보편성과 가장 인간다운 모습에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내 전문성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 동네 가정의학과 주 치의 같은 동네상담소를 하면서 적절하게 독립하며 자기 생활을 유지하고 자기가 가진 능 력들을 나누는 게 좋다고 한다. “저는 ‘배워서 남주자’ 라는 말을 참 좋아해요. 그런 삶이 참 즐거운 것 같아요.”하며 웃는다. 마음손공방 박진수 대표. 마음손공방 실내
2013년에 휘경동 삼육병원 쪽에서 상담센터를 시작해서 2년 정도 같이 활동을 하고, 그 후 엔 부부만 이문동으로 옮겨와서 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사람을 회복시키는 일 에 가치를 두고 목공수업도 하고 부인이 원예치료, 미술치료를 한다. 자연소재를 만지는 자 체가 우리 안에 내적 변화를 일으키고 삶의 편안함을 주기 때문에 공방으로 컨셉을 잡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는 아이들 대상 프로그램을 많이 했는데, 요즘은 어르신 미술치 료까지 진행하고 있다. 부부는 아이 네 명을 키우며 그들 부부가 겪었던 문제를 후배 부부 들과 부부간의 문제 또는 부모·자녀 간의 문제를 함께 나누고 있다. 그는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후배 부모들에게 특별한 것을 나누기보다는 그냥 있는 삶을 풀어내서 약간의 전문적 프로세스를 넣어 쉽게 풀어서 넘어갈 수 있도록 이야기해요.” ‘우리가 경험한 것을 함께 나 누자.’라고 부부가 합의하고 무료로 상담하는 이 일을 함께하게 된 동기를 전한다.
책 읽기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모임 “모임에 오시는 분들은 이 책모임을 아주 좋아해요. 요즘은 노인에 관한 책을 읽고 있는데, 시어머니 이야기며, 내가 노인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나눠요. 저의 역할은 책 내용을 조금 정리하는 정도이고 나머지는 모인 사람들의 힘든 이야기들을 나누어요. 사람들은 책모임 에 책을 못 읽고 오면 죄책감을 가지는데 꼭 책을 읽지 않아도 되요. 유창하고 논리정연하 고 비판적으로 반박하는 모임은 안해요. 실수와 실패도 많이 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이야 기들도 하는데 그래야 그분들이 서로 위로 받고 가죠. 살아있는 모임은 그런 것 같아요. 서 로를 잘 안다고 하더라도 자기의 가장 내밀한 영역을 보이기 싫다면, 당신들에게 아직은 내 마음을 보이는 게 어려워요 라고 표현했다면 우리 모임은 아직 더 가야 할 길이 많은 거예 요. 저는 이 부분을 세밀하게 보고 있는 거죠. 말을 하지 않는 화초가 나에게 무슨 메시지를 전하는지 계속 관찰하고 보는 것과 같아요.” 그의 세심함은 화초에서 사람에게로 이어진다. 인터뷰 내내 반기던 밝은 표정이 마칠 때까지 그대로이다.
동대문구에서만 10년 가까이 활동하면서 동력이 되었던 가장 마음에 남은 에피소드를 부 탁드렸다. 처음 2년간 함께 시작했던 두 분이 각자의 길을 떠난 뒤, 즐겁게 하는 일이지만 현실의 삶은 괴리가 있어 이 일을 하는 것에 고민이 많았다고 했다. 그러다 주민센터에서 미술치료를 하던 중, 세 명의 아이들이 있는 한 가정을 만났다. 처음엔 자기 몸을 물어뜯고 피가 나고 상황이 심각한 이 아이들을 감당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엄마만 꾸준히 몇 개월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아이들이 눈을 맞추고 자리에 앉는 모습을 본 후 에야 ‘아~ 이 일을 계속해야겠구나!’ 하는 동력이 생겼다고 한다.
혼자가 아니라 동행하고 당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요. “제가 한 일은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고 동행하는 것뿐이었어요. ‘당신이 아이들과 함께 살 아가는데 혼자가 아니라 동행하고 격려하고 당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였던 거 죠. 그 결과는 아이들을 대하는 양육 태도, 사랑의 질이 높아지자 아이들이 달라진 거예요. 불과 몇 개월 만에… 주 양육자가 힘들면 좋은 양육할 수가 없어요. 사랑은 내 안에 흘러들 어와 자녀들에게 흘러넘쳐야 해요. 사랑은 내가 받은 만큼 아이에게도 줄 수가 있고 계속 채워 주는 거죠. 상담의 특별한 핵심적인 기술이기보다 인생의 순리죠.” 하며 지금도 그 가 정을 만나고 있다며 감동을 전했다. “한부모 모임을 한 적이 있었어요. 한 2년이 안 됐는데, 참 다양한 분들이 오십니다. 그분들 의 생활은 직접 개입해서 삶이 유지되도록 하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아이들을 돌봐 주고 엄 마들이 일하면서 자립하고 아이를 잘 키우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하는데, 가장 힘든 점은 이 분들께 내가 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삶은 생존인데 생존을 위해 지원할 수 있는 것이 없 었죠. 그래서 그 모임을 꾸준히 못 한 것이 제 마음의 어려움으로 있죠. 그 이후로 생각한 것 은 공동체를 꾸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룹홈 같이 아이들을 봐 주고 엄마들에게는 독 립가정을 살면서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활동의 시간을 내어주는 거죠. 저의 관점에서 공동 체 주택은 정상가정과 결손가정이 만나서 아이들을 누군가가 돌보고, 그들이 함께 살아가 며 공동체 안에서 어려운 점을 관계 안에서 해결을 하고 자립하는 모델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며 가장 상처받았고, 힘들었던 지난 시간도 들려주었다.
삶도 사랑도 서툰 이야기를 들어 드립니다. “제가 살아보니 인생은 참 서툴더라고요. 지난 과거도 현재도 멋지거나 화려하거나 누가 인 정해주는 느낌이 아니고, 하는 것마다 매번 서툴렀어요. 제가 화초를 키우며 느끼는 것이 있는데 화초는 섬세하고 깊이 보지 않으면 화초가 나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들을 수 없어요. 그래서 화초를 키우면서 섬세하게 깊이 들여다보며 배웁니다. 마음손공방에 간판이나 교육
마음손 공방 실내
햇빛 잘 들어오는 창가에 옹기종기 화분들이 예쁘게 자리 잡고 있다. 자연은 우리가 만지는 손길에도 편안함과 치유를 전해준다. 요즘 초록 식물을 키우면서 green life 생활을 즐기며 스스로 힐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식물에게 물을 주고, 빛과 바람을 쐬어주고 들여 다 보면, 식물이 전하는 향기와 색감은 우리에게 자연의 아름다움과 건강함으로 선물한다. 바쁜 일상 속에서 아니면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두기 실천의 현장인 집에서, 직장에서 개인 적인 생활의 연속인 요즘 심신(心身)의 건강함을 얻을 수 있는 초록식물을 가까이 해보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편안하게 치유될 것 같다. 그리고 ‘사람을 회복시키는 사람이 음’의 마음손공방도 계속 주민들의 따듯한 공간으로 운영되기를 기대한다. P.S : 서툰 이야기를 들어주는 마음손공방 이용시간 10시30분~6시 꼭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사전 예약하시고 가볍게 오시는 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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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2020. 05. 15.
모이고, 움직이고 달라지다
이원주 이문1동 주민자치위원&통장 한국외국어대학교 후문 쪽 갈림길에서 가벼운 등산복 차림의 이원주 님을 만났다. 인터뷰 장소 추천 부탁했더니, 좋은 곳이 있다며 앞장선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야외 벤치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완벽한 장소다. 이문동에 대해 모든 것을 알려주실 것 같은 포스다. 따스한 봄 볕을 쏘이며 이원주 통장님의 이문동 이야기를 들어본다.
취재&기사 임정희 / 사진 박혜진
의 어린이집과 상점들이 모두 비어 있고 유기동물들이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닌다고 한다. 재개발이 과연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며 씁쓸함을 뒤로한 채 발길을 옮겼다. 동대문구와 성북구의 경계에 있는 의릉안에 7.4 남북공동성명을 한 역사적 장소
예전 의릉안에 있었던 (구) 중앙정보부는 1962년 지어진 강당과 10년 뒤 지어진 회의실이 다. 1972년 7월 4일, 박정희 제3공화국 당시의 대한민국과 김일성의 북한이 발표한 공동성 명이다. 분단 이후 남북이 처음으로 합의한 것이다. 자주, 평화, 민족적 대단결이라는 평화 통일 3대 원칙을 설정하였다. 그곳이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의릉 (구) 중앙정보부 강당(懿陵 舊 中央情報部 講堂)은 조선 경종의 왕릉인 의릉 구역에 있고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다. 또한, 2004년 9월 4일 대한민국의 국가 등록문화재 제92호로 지 정되었다. 주변에 뜻깊은 문화재와 역사적인 성명이 있던 장소가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 었고 다시 한번 관심을 두게 되었다.
이원주 이문1동 통장
“저는 1948년생 충남 보령 출신이고 광천 상고를 졸업했어요. 1968년도에 군대에 갔고, 1971년도에 제대하고 이문동으로 와서 네 번 이사했어요. 50여 년을 이문동에서 살고 있고 지금은 26통 통장을 맡고 있어요. 이문동에 살게 된 계기는 내 동생이 서울 상고를 나와 창 신동에 살았는데, 근처에 자리 잡다 보니 이문동에 집을 사서 이곳에 살게 되었어요. 공직 생활 33년 퇴직하고 쭉 살고 있어요. 아들, 딸이 동대문구 이문동에서 다 성장했어요.” 이문동을 추억하다.
“여기 한국외국어대학교가 많이 발전했어요. 그전에는 건물이 하나밖에 없었어요. 이문 시 장 뒤가 다 초가집이었고 철길 옆에서 휘경동까지 미나리꽝이었어요. 신이문역 근처에 연 탄공장이 대략 15개 정도 있었고, 엄청나게 컸죠. 아직도 한 곳 있어요.” 이야기 속에서 통 장님의 연륜을 느낄 수 있었고 이문동의 변화를 몸소 느끼며 살아온 시간에 빠져든다. 이문 동에서 긴 시간을 보내고 아는 사람만 안다는, 관심을 두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수밖에 없는 동네의 숨은 보물 같은 곳을 함께 돌아보기로 했다. 주민들의 안녕과 마을과 지역의 발 전을 위해 제를 지내는 곳, 이문동 당 집.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이문동 당집 이다. 아직 개관 전인 외대의 명품도 서관 옆길로 돌아가니 한국외국어 대학교 담장 안에 있는 당집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이곳은 이문동에서 태 어나고 자란 사람만 회원으로 들어 갈 수 있어요.” 이곳은 약 150여 년 전 이문동 동네 주민들의 안녕과 마 을발전을 위해 산신에게 제를 지내는 곳이다. 산신제는 매년 추수가 끝나 는 10월 상달 초하루에 지냈고, 떡살 을 담그고 소를 재물로 하고 마을에 서 선택된 덕을 갖춘 제관이 정성을 다해 제를 지냈다고 한다. 삼각산 줄 기인 먹동산(현 천장산) 산신에게 제 를 올리는데 150여 년이 지난 현재에 도 그 풍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고 한다. 마을의 안전과 발전을 갈망 하는 것은 모든 이의 바람인 것 같다. 이문동 재개발현장
타지에서 이사 온 사람이나 오래전 부터 이문동에서 살아온 이들의 이 구동성은 “이곳은 옛날하고 똑같다.”이다. 그러나 낙후되어있던 이문동이 3년 전부터 재개 발사업이 시작되면서 이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이주하고 있다. 재개발로 인 해 주거환경이 많이 바뀔 거로 생각하지만 기존 살던 주민은 많이 떠나고, 다른 지역주민들 의 인입으로 기존주민보다 다른 지역주민들이 수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마을 입구 이문동 당집
끝으로 이문동에 사시면서 가장 좋은 점과 안 좋은 점이 있나 물었다. “예전에 낙후되어 있 을 때는 이웃 간에 서로 오가며 정감이 좋았어요. 또 동대문구는 다른 지역에 비해 대학교 는 많으나 공과대학이 없다는 것이 아쉬워요. 있어도 지방으로 내려가 있잖아요. 그리고 대 중교통에서는 마을버스 노선이 길지 않고, 이문동은 도로가 차선이 좁다는 거예요. 1호선 지하철역 중 외대역, 신이문역이 제일 오래되어 낡아서 새로 지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주 거환경이 좋아져서 젊은 사람들도 오래 살 수 있도록 하려면 보육 시설과 기타 기반시설이 잘 갖춰져야 해요.” 마을을 살피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이문동 안심 보안관 이원주 통장
젊은 사람들이 여기 오래 살 수 있도록 하려면 보육 시설과 기반시설이 확충되어 이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에는 내심 통장님 자녀들과 이곳에서 같이 생활할 수 있는 육아 및 교 육 시설이 확충되기를 바라시는 마음인 것 같다. 이문동에 마음을 두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오래도록 생활할 수 있는 안정되고 정이 있는 마을이 되길 기대한다. 앞으로도 마을의 구석 구석을 보살피시고 안전한 마을이 되도록 오래 힘써주시기 바란다. 인터뷰, 마을이음에 “나 쁜 소식은 올리지 마시고, 좋은 글 많이 실어 주세요.”라며 인자하게 웃으시는 모습에서 이 곳 이문동을 사랑하시는 마음이 느껴졌다.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출처 https://news.joins.com/article/20921629
의릉내 구) 중앙정보부 강당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 국가 등록문화재 제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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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2020. 05. 15.
모이고, 움직이고 달라지다
주민들이 만나서 서로 연대할 수 있는 사업들이 많아져야 해요.
취재&글: 심소영 / 사진: 박혜진
만난 사람_ 박승구 이문2동 주민자치위원장 & 동대문신문사 대표 이문동은 1, 2동으로 나뉜다. 주민을 대표하는 분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주민자치회 관계 자를 수소문했다. 이문2동은 동대문신문사 대표인 박승구 님이 맡고 있었다. 동대문신문은 동대문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구와 기관들이 전하는 소식을 주민에게 알리는 지역신문 이다. 반가웠다. 지역 언론으로서 대선배 지역 언론 사이기 때문이다. 박승구 동대문신문사 대표는 부인과 딸 세 식구가 이문동에 2001년부터 거주하며, 이문2동 주민자치위원장을 맡고 있다.
박승구 대표
지방자치가 잘 되기 위해서는 지역 언론이 살아있어야 한다. 동대문신문사는 1989년에 창간되었다. 무려 3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지역 언론사다. 1987 년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지역신문들이 창간되던 시기에 만들어졌다. 그 시기 창간된 지역 언론 중에서도 가장 빠르게 창간된 편이라 한다. 박승구 대표는 지방자치가 잘 되기 위해서 는 지역 언론이 살아있어야 하고, 그래서 지방자치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활동 이었다고 강조한다. 또 언론으로서뿐 아니라 지방자치가 시작되던 시기 지방 자치학교를 진행하며 지방자치 발전과 활성화하는 데 노력했다. “그 당시 한양대 조창연 교수가 지방자 치의 일인자였는데, 그때 조창연 교수와 지방 자치학교를 운영했고, 동대문 여성 정보대학 을 했어요. 손숙 선생님이 학장으로 3기까지 운영했는데, 당시 유명했어요. 300명의 여성 을 키워냈죠. 우리나라 가장 유명하신 분들이 와서 강의했어요. 정동영, 천정배, 손숙, 우성 구 선생님까지.” 들어보니 지금도 중앙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사람들이다. 동대문신문사의 그 당시 권위가 느껴졌다. 어떤 직함을 달고 있건 간에 동네 살면서 필요한 일을 만들어서 했어요. 초기 동대문구 지방자치의 중심에 동대문신문사가 있었고, 그의 지방자치에 대한 갈망으 로 활동을 꾸준하게 해서 그런지 그의 동대문에서 이력 또한 화려했다. 당시 동대문구 국회 의원 보좌관과 구의원으로 일했다. 현재에는 더 주민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이문2동 주민 자치위원장을 맡아하며 지역에 필요한 일을 찾고 만들어 내는 활동을 꾸준하게 한다. “제가 구의원 하기 전에 김희선 국회의원 보좌관을 한 7년 했죠. 이문동 경우만 말하자면, 신이문 역 남문 출구를 주민들 서명을 받아 제안하고 추진했어요. 또 휘봉고 설립도 도왔지요. 정 보화도서관도 담당했었고요. 그때 가장 애쓴 과장이 담당 공무원이 지역경제 홍상준과장입 니다. 그 담당 공무원이랑 같이 추진했는데, 구의원을 짧게 해서 그 일을 많이 못 했지만, 어 떤 직함을 달고 있건 간에 동네 살면서 필요한 일을 만들어서 했어요. 이문동에서는 이문동 노래자랑을 했는데, 이문3동일 때, 처음에는 사람들이 안 올 줄 알았거든요. 근데 이문초등 학교가 꽉 찼어요. 그렇게 호응이 좋을 거라 생각 못 했는데, 동네 분들이 너무 좋아하시더 라고요. 그리고 주민자치위원회 하면서는 ‘마실 축제’를 3회 했는데, 동대문에서 가장 잘하 는 축제라고들 해요. 그래서 2회하고 서울시장 표창장도 받았어요.”
스스로 만들어 내는 자치활동이 거의 안 보여요. 초기 지방자치를 이끌던 사람으로서 인재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 당시 시민 중심으 로 만들어 가려던 노력을 지금은 관 중심으로 끌고 나가는 것 아닌가 생각해요. 마을공동 체, 마을기업, 찾아가는 동주민센터, 주민자치회 등 주민참여를 위한 사업들은 많아졌는데, 주민들이 주체적으로 활동한다기보다는 관에서 끌어가는 느낌이에요. 시민단체도 각종 공 모사업에 끌려다니다 보니 인재양성이 안 되고 있거든요. 시민들도 먹고살기 바쁘니, 남보 다는 내 삶이 우선되고요. 스스로 만들어 내는 자치활동이 거의 안 보여요.” 인재양성을 위 해서는 자발적인 시민들의 자치학교와 활동이 전재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지방자치에 대한 기대가 컸던 그때와 달리 정치에 대한 혐오가 만연한 지금이 스 스로 만들기 더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지금도 꾸준하게 지역에 필요한 일들을 해내는 사 람들이 있다. 그러나 현실 정치와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잘 알려지지 않는다. 시민들의 생 활 정치, 시민 자치활동을 알리고, 더 많은 시민의 자치활동 추동을 위한 지역 언론의 역할
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했다.
주민들이 만나서 서로 연대할 수 있는 사업들이 많아져야 해요. 그는 동대문신문사뿐 아니라 지역 주민자치위원장으로서 활동도 많다. “우리가 꽃길 사업 으로 100만 원을 구에서 받아 동네 골목길을 가꿨어요. 일요일마다 새마을, 주민자치회 등 주민협의체 사람들하고 나왔어요. 이런 것들이 주민들과 관계를 만드는 것으로 생각해요. 마실 축제와 꽃길 사업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그렇게 주민들이 만나서 서로 연대할 수 있 는 사업들이 많아져야 해요.”
지역주민들을 위한 놀이와 교육, 정보제공 이 모든 것이 지역 언론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 다. “또 우리 신문이 특이한 게 박훈 초대 사장이 있었고, 유덕열 구청장이 초대 운영위원장, 전 철수 전 시의원도 부사장이었고, 백금산 위원장도 부사장을 했고, 김봉건, 김창주 의장도 감사였죠. 지방자치 초창기에 지방자치가 자리 잡게 하는 인재를 발굴하고 키우려고 노력 했습니다. 그래서 시·구의원들을 많이 배출하게 되었죠. 당시 민주당 구의원 10명 중 9명이 동대문신문사 출신이었을 정도에요. 또 지역 어르신을 위해 윷놀이 대회를 13회까지 했고, 학생들을 위해서 독후감 대회를 했어요. 그리고 네팔 학생 도와주기로 올 2월에 다녀왔죠. 2012~2014년까지 3년하고 쉬었다가 올해 또 갔다 왔어요. 이처럼 지역주민들을 위한 놀 이와 교육, 정보제공 이 모든 것이 지역 언론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역 언론으로서 지역주민에게 필요한 정보와 문화를 제공하고 시민학교를 통해 민주시민 으로서 역량을 키워내는 일.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다. 먼저 한 선배 지역 언론이 있었다 니, 고마운 일이다. ‘인터뷰, 마을이음’도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조언을 부탁했다. “제가 지난번 회기동 것을 읽어봤어요. 우리를 찾아주는 일을 계속해줬으면 좋겠어요. 도 읍지 식당 글처럼 우리 것을 지키는 사람들 같은 우리 이야기를 실어줬으면 합니다. 신문도 그래야겠지만, 제가 처음 신문을 만들 때 우리 이웃집 사람도 신문에 나오는 그런 것이었거 든요. 마을이음도 그랬으면 좋겠다. 따듯한 미담을 많이 전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자기 일을 묵묵히 하며 동네를 지켜내는 우리의 일상을 기록하고 공유하고 소중히 하는 것 그가 동대문에서 한 일이 너무나 많고 크다. 주민으로서 고맙다. 그리고 ‘우리 이야기를 꾸 준하게 실어달라’는 말이 자기 자리에서 자기 일을 묵묵히 하며 동네를 지켜내는 우리의 일 상을 기록하고 공유하고 소중히 하는 활동에 힘을 준다.
왼쪽부터 동대문신문, 동대문신문사
2019년 이문동 마실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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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고, 움직이고 달라지다
더불어 존중받고 보호받는 사회로. 만난 사람_ 김명순 동길사 대표 취재&글 : 심소영
이문동은 재개발 중. 동네재개발이 시작되면서 폐허가 된 곳에서 건물더미와 사라지지 않게 길고양이 이주를 진행 중 인 동길사(동대문구길고양이보호협회 길고양이 사랑) 대표 김명순님을 만났다. 2016년 이문동 길고양이 자원봉사단을 만들었고, 2017년 동대문구 길고양이 모임을, 2019년 동길 사 비영리 단체를 만들었다. 준비 기간부터 5년여의 활동으 로 함께하는 회원이 무려 400여 명이라 한다. 와~~~ 지역사 회에 필요한 일을 만들고 활동력을 키우는 데 있어 ‘타의 추 종을 불허한다.’ 안되더라도 추종하고 싶은 마음 굴뚝같다. 그러니 따라가 보자. 하나라도 배우겠지. 철학, 근본적이고 구조적으로 문제를 잘 캐치하고 방향성을 만들 수 있었다.
김명순 대표는 철학을 공부했다. 주로 연구하고 강의하는 일을 하는데, 최근에는 동물복지와 환경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 철학 공부가 활동에도 플러스가 된다고 한다.
“철학 공부를 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표면적으로 드 러나는 문제의 바탕에 깔린 근본적인 구조적인 문제를 잘 캐치를 하고 거기에 대한 방향성을 만들어 갈 수 있었어요.” 철학이 어렵다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겠다. 어마어마한 활동력의 바닥에는 철학에서 오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 제를 잘 파악해 방향을 정하고 추진하는 데 있었다. 밑줄 긋 고 별표! 길고양이는 이주를 못 하면 굶어서 죽거나 건물이 무너질 때 깔려 죽는 경우가 많거든요.
사회 공익활동에서도 사람이 먼저라는 이유로 동물보호 활 동은 우선순위에 빠진다. 활동에 큰 벽이 되어 어려울 텐데, 그의 생각을 물었다.
“나도 사람이 우선이라 생각해요. 동시에 길고양이도 보호 해야 한다 생각하죠. 사람도 존중받고 길고양이도 보호받는 사회가 살만한 사회 아닐까요? 우선순위를 정할 수는 있지 만, 우선순위가 완전히 보호된 다음 차순위를 보호하는 것 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해요. 더불어 존중받고 보호받는 사 회가 좋은 사회라는 거죠. 우선순위인 사람들의 복지에 관 해 관심과 실천이 진행되고 있는 만큼, 사람들 틈바구니에 낀 길고양이의 현실도 외면하지 말고 관심 갖고 실천하자는 거에요. 재개발로 뿔뿔이 흩어지는 주민들의 아픔도, 재개 발 지역 길고양이가 살려면 여기저기 흩어져야 하는 아픔도 공감했으면 합니다. 길고양이는 이주를 못 하면 굶어서 죽 거나 건물이 무너질 때 깔려 죽는 경우가 많거든요.”
단지 활동의 어려움이 아니라, 길고양이는 죽고 사는 문제 라는 말에 안타까움과 무력감이 머리를 꽉 채웠다. 나도 동 물보호는 반려견이나 반려묘를 키우며 동물에 애정이 남다 른 사람들의 일이라 생각했고, 간혹 나오는 동물 학대 보도 에 손가락질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 문이다. 김명순 대표는 반려묘도 아닌 길고양이에게 언제부 터 어떻게 관심을 갖고 이런 실천을 하게 된 것일까? 어느 날 고양이가 제게 보였어요. 13~14년을 사는 동안 보 이지 않았던 고양이가.
5호 2020. 05. 15.
“거창하진 않아요. 어느 한 여름에 너무 예쁘고 깨끗한 고양 이가 너무너무 지저분한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뜯는 모습을 봤어요. 그 모습이 안타까워서 밥을 줘보자 했고, 그렇게 시 작했어요. 그러니까 아주 사소한 사건인데 어느 날 고양이 가 제게 보였어요. 제가 이문동에서 2001년부터 살았는데, 고양이 밥을 처음 준 게 2014년이에요. 그사이 한 13~14 년을 이문동에 살면서 고양이를 보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2014년 여름에 그렇게 고양이가 한 마리가 눈에 띄어서 밥 을 주게 되고, 그때부터 고양이가 되게 많이 보였죠. 놀라웠 어요. 그때부터 길고양이의 문제가 보였고, 내가 밥을 주는 것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고, 그 문제점 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밥을 주는 사람이나 애호하는 사람 들 사이에 뭔가 단결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서 커뮤니티를 만들었어요. 커뮤니티는 이문동에 벽보를 붙여서 같이 길고 양이 분변 청소할 사람 모이자 했는데, 그때 몇 사람들이 연 락을 해왔고, 이문동 길고양이 자원봉사단이 꾸려진 거죠. 개인번호를 노출해야 해서 고민했었는데 그만큼 절실했고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
정말 놀라운 일이다. 어느 날 목격한 음식물 쓰레기와 길고 양이 한 컷에 길고양이를 보호하는 사람들과의 단결과 커뮤 니티까지 이어진다. 게다가 인터뷰 때도 개인 사진 공개하 지 말 것을 주문할 정도로 개인정보보호에 투철한 사람인 데, 자기 번호를 올려 커뮤니티를 만들다니. 이 또한 철학의 힘인가? 그런데 철학은 자기 철학을 만드는 것이라던데, 커 뮤니티를 만들기 어렵지 않았을까? ‘고양이로 인해서 세계가 열렸다’고 생각해요.
“외대나 경희대 학생들이 이문동에 살지만, 이문동 주민으 로서 소속감을 느끼지 않듯. 나도 10년여 동안 그렇게 지냈 어요. 근데 고양이를 계기로 해서, 주위에 어떤 사람들이 사 는지 관심 가지게 되고, 어떤 사람이 고양이를 싫어하는지, 우호적인지 관찰하기 시작했죠. 그래서 ‘고양이로 인해서 세계가 열렸다’고 생각해요. 고마운 일이죠. 그때부터 주위 어르신들한테 인사도 하고 음식도 서로 나눠 먹고 서로 필 요하면 도움도 주고 그렇게 이문동의 일원이 되었어요.”
그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이문동 길고양이 세계에 점점 빠 져드는 것 같다. 감동의 에피소드도 많겠고, 상처도 많을 것 같다. 활동하면서 길에서 죽어가는 길고양이를 보는 것보다 더 큰 상처는 없을 것 같아 보람을 느낀 이야기나 감동의 에 피소드를 물었다. 길고양이를 싫어하셨던 할머니와 친분이 생겼어요.
“사람의 변화 같은 것을 목격할 때? 어떤 할머니가 계셨는 데, 길고양이를 싫어하셨어요. 그 할머니에게 가서 여기 주 변에 고양이들이 많은데, 고양이 밥을 주시면 제가 중성화 수술을 책임지고 하겠다고 말씀드리면서 고양이 밥을 드렸 더니, 밥을 챙겨주셨어요. 할머니가 개를 키우시는 분이라 중성화 수술의 중요성을 아시더라고요. 그렇게 중성화 수술 을 가을에 시작했고, 밥도 두 달만 주시기로 하셨는데, 두 달 이 넘었는데 추운 날씨에 사료가 다 떨어졌으니까 사료를 좀 더 달라고 연락하셨어요. 애들이 눈에 밟혀서 안 줄 수가 없다 하시면서요. 그런데 그분이 거기서 끝난 게 아니라 때 때로 저를 불러서 반찬도 나눠주시고, 밥도 해주시고 친분 이 생겼어요. 혼자 사는 어르신이었는데, 그렇게 가끔 방문 해서 말벗도 하며 지냈죠. 그런 변화에 보람을 느껴요.”
길고양이가 사람들을 잇고 있었다. 고양이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난 김명순 대표는 새로운 사람들이 자기 관심의 영역에 들어오는 그런 기쁨, 그리고 동네 사람들과 배타적 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 이해해 주는 관계가 생기면서 본인 도 바뀌고, 동네 사람들도 본인으로 인해서 바뀌는 변화의 경험을 쌓는 중이었다. 너무 아름다운 변화와 성장 아닌가. 하지만 길고양이 현실은 전혀 아름답지 않고 암담하다. 현 재 재개발지역 고양이 이주상황과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이문동. 재개발 규모는 크고, 실제 활동하는 사람들은 소수 여서 관심과 도움이 절실합니다. “재개발 지역 같은 경우에는 철거가 임박한 때만 활동하는 게 아니라 그 전, 1, 2년 전부터 꾸준히 활동하는데, 첫 번째
로는 새끼 고양이가 늘지 않도록 일단 중성화 수술을 해 줘 야 해요. 그렇게 하려면 문제는 돈이죠. 돈과 인력의 문제인 데 인력은 자원봉사자들이 자기 시간을 들여 봉사한다고 쳐 도 돈 문제는 해결되기 어려워요. 그래서 재개발 지역에서 의 그런 문제는 행정개입이 필요한데, 재개발, 재건축한다 고 하면 구청이 허가를 내줄 때 동물보호 관련해서 협력을 이끌 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그래서 작년에 동대문구 구 의원님들을 만난서 조례를 만들었어요. 조례에는 재개발 시 에 길고양이를 보호할 수 있도록 구청, 조합, 그리고 주민들, 동물단체 이렇게 협의체를 만들 수 있는 조항이 있어요. 그 런데 실제로 강제조항이 아니라서 조합에서는 참여하지 않 았어요. 그래서 조례를 열심히 만들어 놓은 게 보람이 없었 어요. 이제 국회의원들에 의해 법을 만드는 작업이 필요합 니다. 그리고 일단 재개발이 시작되면 살아있는 것은 살 수 없는 동네가 돼요. 고양이들은 굶어 죽고 무너지는 건물에 깔려 죽죠. 더군다나 이문동은 1, 3구역이 동시에 대규모로 재개발이 진행돼요. 공사는 임박했는데, 길고양이 이주는 초반에 있는 상황이라 아주 초조합니다. 재개발 규모는 크 고, 실제 활동하는 사람들은 소수여서 관심과 도움이 절실 합니다.”
그렇게 인터뷰를 마치며 뭐라 말할 수 없는 길고양이에 미 안함을 느꼈다. 그런 내게 김명순 대표는 인간도 고양이도 자연 일부이니, 자연과 함께 하는 계기를 만드는 것을 추천 했다. 곱씹어 생각해 볼 일이다. 어쩜 전 세계적으로 창궐한 코로나19도 인간이 자연의 일부임을 잊어버리면서 나타난 자연현상 아닐까? 그럼 인간도 자연 일부임을 잊지 않고 사 는 일이 요즘 창궐한 전염병의 위험도 극복할 수 있는 하나 의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염원대로 더불 어 존중받고 보호받는 사회로 한 걸음씩이라도 걸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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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2020. 05. 15.
동네에서 놀고, 즐기고, 배울 곳
문화상점 이문일공칠
취재&글 : 박혜진
만난 사람_ 현소영, 유태준
회기역 앞 사거리에서 한국외국어대학교까지 이문로를 따 라 걷다 보면 짙은 초록색의 못 보던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외대서림이 있던 곳이다. 짙은 초록색의 건물 벽과 갈색 문, 금색 문고리까지 주변 공간과는 다른 분위기다. 이 문(門)으 로 들어가면 어떤 공간이 펼쳐질지 기대하며 문을 열었다. 확 트인 넓은 공간에 자리 잡은 많은 책이 먼저 눈에 들어온 다. 그리고 은은한 커피 향이 느껴졌다. ‘서점인가? 카페인 가?’ 높은 천장과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커다란 창 덕분에 코로나19로 마음은 바쁜데 몸은 묶여 있어서 혼란스럽고 답답했던 기분이 이문일공칠로 들어오는 순간 차분해진다. 공간소개를 부탁드리기 위해 현소영님, 유태준님 운영진 두 분을 만났다. 현소영님은 이문일공칠 프로그램 담당이고, 유태준님은 총괄 매니저라 소개했다.
학과 관련된 교육프로그램을 지역 주민과 공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외대와 1분거리에 살아도 지역주민은 대학 강의 에 직접 참여하지 못해요. 어떻게 보면 지역주민과 대학과 의 단절이죠. 대학자원을 조금이라도 지역주민과 나누자는 것이 기본 취지입니다.
이문일공칠의 강연과 공연을 즐기고 다양한 프로그램에 함 께해 주세요. 이문일공칠의 다양한 프로그램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고, 지역주민이 공간에서 직접공연이나 강연을 하고 싶다 면, 먼저 전화하고, 간단한 신청서를 작성하면 된다. 신청서 작성이 어려운 분들은 담당자가 직접 만나서 이문일공칠과 취지가 맞으면 일정을 잡고 준비를 도와준다하니 관심있다 면 전화해 보자. Q. 우수한 인프라를 주민들과 공유하는 공간으로 이문일공 칠이 쓰였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지역주민이 이 문일공칠을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까요?
한국외국어대학교 캠퍼스타운사업단 왼쪽부터 유태준, 현소영
대학과 지역의 만남, 캠퍼스타운사업. Q. 이문일공칠을 운영하는 캠퍼스타운조성사업은 무엇인 가요? 유태준(이하 유) : 캠퍼스타운조성사업은 대학의 인프라를 활용해 지역을 활성화시킴으로써 지역주민과 이익을 공유 하는 것을 기본 취지로 설립된 사업입니다. 다른 학교의 사 업은 취·창업을 위주로 추진되고 있는데, 저희는 초반부터 문화 사업중심으로 설계되었습니다. 캠퍼스타운조성사업 의 방향성을 문화에 두고 문화 창업과, 시민들에게 문화 사 업을 알리는 쪽으로 사업을 진행 중입니다.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복합문화공간 & 교육프로그램 나눔 Q. 사업의 방향성이 문화에 있다고 했는데, 그 구체적인 내 용은 무엇인가요?
현소영(이하 현) : 이문일공칠을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했 어요. 대형 콘서트홀 같은 공연장은 아니지만, 홀에 작은 무 대와 피아노를 갖추고 있어서 시민들이 작은 버스킹, 음악 공연을 즐길 수 있습니다. 때로는 저녁에 북 콘서트나 강연 을 열기도 하고요. 기본적으로 서점이기 때문에 학생들과 시민들이 독서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독서 문화를 형성하고, 그 안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랑방 같은 공간을 만들자는 취지로 조성했어요. 유 : 학교 내부 자원, 학교의 공간과 문화, 언어학이나 인문
현 : 저는 개인적으로, 그냥 편하게 오셔서 책도 읽고, 이야 기도 나누시면 좋겠어요. 저희가 점심때 클래식 공연을 했 었는데, 소프라노, 테너 성악가, 피아니스트 분들이 오셨거 든요. 그런데 이런 것이 문화라는 이름하에 높은 벽으로 작 용한 것 같아요. ‘내가 향유하거나 가져도 되는 시간인가, 프 로그램인가’ 하는 편견을 갖지 마시고, ‘아, 나도 이 공간에 서는 동등한 입장과 위치에서 강연과 공연을 즐길 수 있구 나’ 하는 생각을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덧붙여, 저희가 문화 외에도 관련 창업 프로그램도 준비하고 있는데요, 그중에서 도 독립 출판, 작곡, 커피 분야에 주력하고 있어요. 이번 학 기에는 출판과 커피 학교를 중점적으로 활성화시키려 하니 많이 참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지역 주민과 소통하기 위해 실험하고 조율하며 다양한 방면 으로 노력하고 있어요. Q. 이문일공칠을 학교 건물로 인식하거나, 마치 학생들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오해해서 주민들이 쉽게 들어오지 못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 지역주민이 쉽게 다가올 수 있게 하는 방책이 있을까요?
현 : 초반에는 더 심했던 것 같아요. 궁금해하시는데 못 들어 오시더라고요. 그래서 최근에 이문체육문화센터랑 업무 협 약을 맺었어요. 외대 학생, 교수, 교직원에게 홍보할 수 있는 인프라는 충분한데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한 홍보에는 한계 가 많았거든요. 이문체육문화센터와 협업으로 체육문화센 터를 이용하시는 주민께 저희 포스터나 팜플렛을 나눠 드리 고, SNS를 통한 홍보도 진행하려고 합니다.
유 : 문턱을 낮추기 위해 여러 실험적인 시도를 해 오고 있 어요. 2019년 11월 오픈 이후, 강의실에서 진행했던 교양 수업, 음악 수업을 이곳에서 진행해 보기도 했어요. 강의실 에서 진행할 때에는 일반 주민이 못 들어오셨지만, 이곳에 서 진행하면 입장하시는 분들은 모두 수업을 보실 수 있으 니까요. 올해도 여기서 진행할 예정입니다. 또 다른 새로운 시도로, 지역의 은퇴하신 음악가를 모셔서 이곳에서 공연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여러 실험적인 시도를 해보 고, 평가가 좋은 것은 반영해 나가려고 합니다.
이문일공칠 = 문화 + 상점 = 바쁜 일상에서 잠시 멈춰 나와 주변을 돌아보고 함께 소통할 수 있는 공간 Q. 이문일공칠이라는 공간을 정의한다면 복합문화공간인 가요? 현 : 문화 상점. 저는 이문일공칠을 ‘문화+상점’이라고 생각 해요. 제 나름대로 정의를 내리면, 문화란 바쁜 일상에서 잠 깐 멈춰서 자기를 재발견하고 내 옆에 있는 사람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것으로 생각해요. 한편 이문일공칠은 ‘상점’이에요. 상점은 여기저기 살펴보면서 원하는 물건을 찾는 곳이죠. ‘문화 상점’은 강연과 책을 보면서 자신의 새로 운 면을 찾는 곳이고요. 그렇게 자신에 대해 알게 되면 옆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도 알게 되고, 또 그러다 보면 그들 을 이해하게 되고, 내가 사는 지역도 이해하게 되는. 이문일 공칠은 그런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문화상점 이문일공칠은 한국외국어대학교의 주소인 ‘이 문로 107’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 (중략) …… ‘문화상 점 이문일공칠’은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에서 시간이 흘러 도 변치 않는 가치를 발견하고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을 지 향합니다.』 - 이문일공칠 홈페이지 인사말에서 -
인터뷰 내내 새로운 공간을 알아 가는 신선함과 그 공간이 한국외대와 이문동의 다양한 자원들이 함께 어우러져 오래 오래 살아 숨 쉬는 공간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겼다. 위 글처럼, 앞으로 이문일공칠이 바쁜 일상에서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나와 내 주변, 우리 동네 이문동을 돌아보게 하는 공 간,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 가 잊지 말고 꼭 기억해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나누는 공간 이 되길 희망한다. 주소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이문로 107 (우 02450) 전화번호 : 02-2173-2212 팩스번호 : 02-2173-3363 영업시간 : 평일 08:00~20:00 / 토 10:00~19:00 / 일요 일 휴무 홈페이지 : http://www.imun107.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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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2020. 05. 15.
동네 쉼터_ 우리동네연구소
취재&글 : 임정희 / 사진: 박혜진
동네에서 놀고, 즐기고, 배울 곳
만난 사람_ 오정빈 소장
이문동 래미안 2차 아파트 단지와 건물들 샛길로 들어서면 마을의 수호신인 보호수와 큰 통창으로 비추는 따스한 햇볕이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시키는 곳이 나타난다. 어디선가 낯 익은 분이 우리를 먼저 알아보고 연구소 안으로 친절하게 안내한다. 낯이 익었던 이유는 4 년 전 선거 후보였기 때문이었다. 현재는 동네 사람들을 위한 활동을 계획하고 연구하며 실 행하는 우리동네연구소 오정빈 소장이다.
우리동네연구소장 오정빈, 우리동네연구소 외관
우리동네연구소는 동네 주민들을 위한 쉼터에요. “저는 우리동네연구소 소장 오정빈입니다. 연구소에서 3분 거리에 살고 있고 결혼을 해서 둘이 살며 오전 9시~10시쯤에 나와서 저녁 10시쯤 들어갑니다. 이곳은 동네 주민들을 위한 쉼터에요. 동네 주민 누구나 오셔서 이용하실 수 있고 모임 활동이 있을 때는 시간당 5천 원 정도 공간대여료를 받고 있는데, 대여료는 공과금으로 사용됩니다. 또 우리동네연구소 회 원을 연구원이라고 부르며 연구원들이 모여서 봉사활동을 하고 동네를 위한 활동을 계획하 고 연구하며 실행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연구소라고 짓게 되었습니다. 이 연구소 공간이 생 긴 지는 2년 조금 넘었고 연구소 회원은 27명이며 주민 회원 반, 지인 회원 반으로 구성되 어 있고 20대~30대 청년들이 대부분입니다.” 와~ 막힘없는 자기소개 멋지다.
담배꽁초와 쓰레기 쌓인 곳에 재떨이와 화단설치 현재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지금은 대표적으로 걷고 싶은 길이라고 해서 동네 화단 조성하는 일을 한다며 “시간 되시면 이따 보러 가요. 바로 앞이에요” 말 한마디로 느 껴지는 활동력 ‘갑’ 오정빈소장이다. 그는 ‘우리동네 정화대 봉사단’ 활동으로 골목에 무단 투기 쓰레기를 줍는 봉사활동을 한다. 이 활동은 연구소 만들기 전부터 오정빈소장이 개인 적으로 동네를 돌면서 시작한 활동이다. 3년 넘게 계속 활동하다 보니 회원들이 모여서 정 화대 봉사단이 만들어졌는데, ‘쌓인 것만 치우지 말고 시설을 해보자’해서 재떨이와 게시판 을 설치했다. 설치 후 실제 무단투기가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우리동네 골목 1호 점’이라고 이름 짓고, ‘2호점’도 만들었다. 또 다른 무단투기가 많은 곳에 화단을 만들었다. 담배꽁초가 많이 버려진 곳에 설치했고, 무단투기가 심한 곳에는 화단을 조성해보니 주민 들에게 인기도 있고 반응도 좋았다고 한다. “쓰레기보다는 식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몇 개 더 만든 화단이 소문이 나서 마을사업 제의도 받고, 철길 화단을 만드는 작 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철길은 삭막하고 무단투기가 심한 곳이었는데, 지금은 1차 완료되 었습니다. 또 다른 활동으로는 동네 주민들과 동물복지 활동으로 유기견, 유기묘센터에 한 달에 한 번 가서 봉사활동을 같이 하고 있고, 작년에는 잡지를 만들어 동네에 배포하는 활 동을 했습니다.”
빨리 결과를 내는 것보다 사람들과 천천히 이루어 나간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연구소라는 이름답게 선한 행동을 빨리 알리고 확산할 방법도 있을 것 같다는 말에 빨리는 정답이 아닌 것 같다 한다. “우리연구소 작품에는 이름과 SNS 주소를 조그맣게 한쪽에 써 놓아요.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어요. 골목 1호점, 2호점으로 좋은 일을 체인점화 하는 것으 로 생각합니다. 또 상징 같은 것을 조금씩 남겨놓으면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연구소를 방문 해서 대화하고 연구원이 되기도 합니다. 이번 화단은 3개월 정도 수작업으로 사무실에서 시멘트로 벽돌을 만들어서 철길로 운반하고 조적, 미장해서 달고, 흙을 퍼서 붓고 하는 과 정들을 동네 사람들과 같이했습니다. 동네 사람들 반응은 ‘좋다, 잘한다.’ 칭찬을 해주시는 분도 있고, ‘길 좁아지는 거 아니냐, 위험하지 않으냐’는 걱정도 듣습니다. 그런 사이 정이 들고 입소문이 나기도 합니다. 이런 활동들이 상징을 나타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간과 인 간 간에 호흡이 중요한 거 같아요. 시간 안에 결과를 빨리 내는 것보다 사람들과 대화를 하 면서 천천히 이루어 나간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화단을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인 간과 인간 간의 관계, 인간과 자연 간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라며, 식물을 좋아하는 이유 가 식물을 보고 희망을 느낄 수 있고, 식물에 대해 애정을 품고 사랑하게 되면 사회나 우리 의 삶이 깨끗해지리라 여긴다고 한다. “식물을 사랑하지 않아서 사회가 이렇게 삭막해졌다 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내식대로 풀어보면 자연과의 대화가 인간과의 대화로 이어지 고, 대화들이 애정으로 쌓이며 사랑이 넘치면 우리 삶이 깨끗해지리라 생각한다는 얘기다. “이 화단이 소중한 것은 재개발지역 폐벽돌을 이용해서 인간의 노동, 수작업으로 자원을 재
생하고 언제든지 쓰레기도 좋은 것으로 바뀔 수 있다는 가치, 식물이 아무것도 우리에게 얻 지 못하지만 주는 기쁨, 식물은 자체만으로 우리에게 주는 자연의 소중함이고 모든 관계회 복 측면에서 화단을 철학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빠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요. 관계회복이 더 중요하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이런 일이 사람과 사람 사이 자연스럽게 전해지고, 파생되는 거죠. 오히려 너무 빠르게 하려다 보니, 사회적으로 문제가 생긴다고 봅니다.” 개인 공원, 텃밭과 녹지를 집 앞으로 가져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같은 의미로 이곳에 온 지 4년 정도 됐는데, 이문동에 가장 절실한 것은 녹지라고 생각해 서 화단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요즘 현대인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의 안정, 여유와 쉼이라 고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문동은 녹지가 부족해요. 그래서 녹지를 집 앞으로 다가오 게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도시화 현상은 한 공간에 대형화(큰 빌딩, 큰 공원 등)를 만드는 게 큰 주류의 흐름이었잖아요. 지금은 마을에 개인 공원, 텃밭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릴 때부터 흙을 만지고 사는 환경, 뛰어놀 수 있는 환경이 되 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녹지가 있으면 벤치 하나 놓으면 쉼터가 되고 잔디를 만들면 놀이터 가 되는데 놀지 못하는 것은 녹지가 없어서이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앞에 있는 비술나무 두 그루가 너무 소중하고요. 보호수, 수호신이라서 우리 마을을 지켜줄 거로 생각하니 더 그렇 습니다.” 우리동네연구소는 우리 동네를 필요한 일을 찾고 만드는 사람들이 언제나 자유롭게 모여서 기획하고 휴식하며, 소통하는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모임과 활동이 이루어지는 쉼 터로 동네 사람 누구나 오가는 공간이 되고자 한다. 또 푸르른 녹지를 집 앞으로, 꽃과 나무 를 주민들에게 안겨드리고 싶어 하는 오정빈소장을 인터뷰한 후 나부터라도 작은 실천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인터뷰, 마을이음에 한마디를 부탁드렸더니 상생하는 언론으로 마음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미디어로 성장하시길 바란다고 한다. 지역주민 의 상생이 우리동네연구소의 푸르름과 함께 쭉 나아가길 바란다. 그 상생의 현장에 인터뷰, 마을이음도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동네연구소 주소 :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로 16길 21 지층 open.kakao.com/o/sUGulhJ (카톡 오픈채팅 ‘우리동네 연구소’검색) www.facebook.com/wooridongnelab 개방시간 : 오전 10시 ~ 오후 10시
우리동네 골목1·2호점과 철길 화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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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서 놀고, 즐기고, 배울 곳
서울서점협동조합 &한우리문고 김의수 대표 취재&기사 : 오은형, 심소영 / 사진 : 박혜진
외대 정문 길 건너 많은 상점이 즐비하게 들어선 건물 중 2층에 ‘책 한우리문고’가 있다. 좁지도 넓지도 않은 공간 인데, 넉넉한 느낌이다. 아마도 벽면과 홀에 있는 책장들 에 꽂힌 책들 때문인 듯하다. 문제집을 고르며 웃는 여학 생들과 한쪽 세미나실에서 책 이야기를 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요즘 동네 서점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학교 가 많은 동네에 서점 하나 정도 보이지만 문제집이 주류 다. 스마트폰 시대에 책 읽는 사람들이 많이 줄어든 현실 에서도 ‘한우리문고’ 김의수 대표는 40년 가까이 서점을 운영해 왔다.
전국적으로 퍼져서 지금은 제주도까지 만들어졌으니 큰 성과죠. 서초동 국립중앙도서관 안에서 5년째 한우리 문 고를 운영하고 있고, 서울시청 시민청에서 서울책방을 운영했어요. 우리 서울을 알리자는 취지였고 제가 맡아 서 3년을 운영했어요. 오래되었지요.” 그는 한곳에 한정 되지 않고, 여러 곳, 여러 형태의 서점을 운영하면서, 지 역서점을 연결하고 확산하는 데에서 대안을 찾은 것 같 다.
형님 나 서점 더 못하겠어요. 폐업해야겠어요. “제가 처음 서점을 할 때 동대문구에 58개 서점이 있었 어요. 그래서 야유회를 가면 관광버스를 2대에 타고 갈 정도로 번성했던 시기가 있었어요. 지금은 다섯 개밖에 없으니 많이 쇠퇴했죠. 서점협동조합을 설립한 계기는 배봉로터리에서 한 15년 서점을 하는 지인이 어느 날 내 손을 잡으면서 ‘형님 나 서점 더 못하겠어요. 폐업해야 겠어요.’ 하더라고요. 동네 문화를 이끌어 나가는 서점이 점점 사라진다는 것은 너무 안타깝고, 그때 내가 뭔가 해 야겠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지역 서점협동조합을 전국 에서 두 번째로 만들었어요. 30년~40년 해 온 지역 서점 친목 모임이 지역협동조합을 만든 계기가 되었죠.” 그의 이야기에서 네트워크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서점 하는 사람들끼리 상황과 문제를 공유하고 대안을 만들어나가 는 네트워크. 그러한 네트워크가 ‘깨어있는 시민의 힘’이 아닐까? 동네 책방은 사람들과 책 또는 다양한 문화 커뮤니티가 가능한 소중한 공간이라 나 또한 동네에서 하고 싶은 일 이다. 김의수 대표는 동네 책방이 지역에 애정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이상일 텐데, 이상과 현실이 많이 달라 실 현하기 어렵지만, 주민 문화공간이 되려는 노력을 꾸준 히 하고 있다.
서점도 책만 팔아서는 안 돼요. 주민들과 소통하는 공간 이자 문화에 관련된 많은 것들을 해야 해요. “시대가 변하고 인터넷이 발전해서, 휴대폰 보는 구조지 책 읽는 구조는 아니죠. 제일 중요한 것은 동네 주민과의 소통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에요. 이제는 서점도 책만 팔 아서는 안 돼요. 주민들과 소통하는 공간이자 문화와 관 련된 많은 것들을 해야 해요. 그래서 한우리 문고의 역사 를 살려가면서 지역에서 같이 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자 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요즘은 도서관에서 책을 많이 빌 려보니 서점이 책을 많이 꽂는다거나 굳이 책을 보유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지역배달 구조도 만들고 싶고요. 책을 주문하면 우리는 당일 배달도 가능케 하고요. 잘하 면 지역 서점이 아주 유리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서점 규모는 축소되더라도 지역주민과 함께 커피도 팔고, 사 랑방 모임도 하고 주민모임 공간으로 하고 싶어요. 주민 들과 소통 공간은 늘리고, 책도 쉽게 살 수 있고, 그 수입 이 동네 주민에게 돌아가면 더 좋죠. 같이 연구해 봐요.”
5호 2020. 05. 15. 이라 서점 자체가 늘지 않으니, 조합원 확보도 어려워 협동 조합 운영도 어렵다 한다. 그래서 동네 서점을 아끼는 분들 도 회원으로 할 수 있도록 협동조합 구조를 변경하여 서점 협동조합 지속적인 운영도 고민하고 있다. 책을 훔친 초등학생…. 몇십 년 뒤 기자가 되어 찾아왔어요. “예전에 경희대 쪽에서 서점을 할 때 초2~3학년쯤 되는 아 이가 배에다가 책을 넣더라고요. ‘너 이거 뭐야?’ 하니까 ‘잘 못했습니다’ 해서 잠깐 손들고 있으라고 하고 ‘집에 가서 이 책 열 번 보고 너의 책을 만들어 봐!’ 하면서 나한테 독후감 을 써오라고 책을 줬어요. 그 친구가 그때 독후감을 써오지 않았지만, 몇십 년이 지난 뒤에 기자가 되어 찾아왔어요. 너 무 좋더라고요. 그리고 그 친구는 우리 직원이랑 결혼까지 했어요. (웃음) 사실 서점 오래 하면서 그런 게 보람이에요.”
책을 읽는 국민은 절대 망하지 않아요. “책 읽는 국민은 절 때 망하지 않아요. 지금 자녀들이 한두 명이다 보니 부모들은 굉장히 애착을 둬요. 우리 아이가 어 떻게 성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공부를 잘할 수 있을까? 고 민을 많이 하는 데 앞으로 서점이 감당해줘야 합니다. 10여 년 전에 경희대 서점을 하면서 아침에 엄마들 커피타임을 가졌어요. 그 커피타임을 가진 동기는 우리 아이가 일반 중· 고를 나와서 의대를 갔어요. 엄마들이 노하우를 알려 달라 고 해서 아침 9시에 커피타임을 만들어서 어떻게 비전을 이 야기하고, 어떤 책을 읽었는지 이야기했어요. 젊은 엄마들 과 소통을 한 거죠. 그처럼 책 냄새가 나는 서점에 와서 소 통하는 구조를 만들어, 그 지역에 경험 있는 분들과 서로 배 우는 장소가 되는 거예요. 지역의 마을 활동을 하시는 분들 은 적어도 우리 동네에 덕망이 있고 마을 일을 할 수 있는 분들이 누가 있을까 찾아내고 연결하는 활동이 필요해요.” 코로나 19로 어려운 지역사회를 위해 서울서점협동조합 1 천만 원 기부 그는 동대문구 사회적경제 네트워크 초대 회장을 맡아 회원 들과 일주일에 3번씩 새벽 조찬 스터디를 진행하며 현재 동 대문구 사회적 네트워크의 디딤돌을 놓았고, 현재는 회기동 에서 희망복지위원장을 맡고 있는데 회원들과 동네의 어려 우신 분들을 위해 도시락을 챙기고, 점심도 드리고, 생일 때 나 명절에 선물을 지원한다. 또 이번 코로나19로 어려운 지 역사회를 위해 서울서점협동조합에서 1천만 원을 구청에 기부했다. 동대문의 ‘홍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체력을 키우 고 면역력을 높이는 홍삼처럼, 네트워크로 사람들 연대 체 력을 키우고, 지역 서점 지원 조례로 경영위기의 지역 서점 에 면역력을 보강하니 말이다.
서점의 장인이 주민과 동네 책방과 동네 사랑방을 함께 운영할 계획을 하고 있다니, 너무 반갑고 든든하다. 머릿
한우리문고 외부, 내부
1980년부터 서점을 했어요. “저는 동대문구에서 자랐어요. 저희 집이 중랑교 건너 중화동이었는데 예전에는 거기도 동대문구였어요. 그곳 에서 나고 자랐고 1980년부터 서점을 했어요. 휘경여고 앞에서 하다가 경희대 앞에서 30년 그리고 외대 앞 한 우리가 이제 4년 되었으니, 한 40년 정도 되었네요.” (웃 음) 서점 40년이라니 서점장인이다. 책을 안 읽는 세태가 하 루 이틀에 만들어진 게 아닌데, 어떻게 40년 동안 지역 서점을 운영하고 있을까?
“서울시 서점연합회장을 3년 동안 하면서 ‘서울특별시 지역 서점 활성화에 관한 조례’를 만들었어요. 조례에는 사라져가는 지역 서점을 위해 우리 구 도서관은 우리 구 에 있는 지역 서점에서, 서울시는 서울시에 있는 서점에 서 책을 사자는 취지에서 시작했어요. 그것이 서울부터
속에 동네 책방에서 커피를 내리고, 삼삼오오 책을 보며 이 야기하는 그림이 그려진다. 그림이 현실이 되도록 서점장인 의 말을 따라보자.
조례제정으로 시나 구에서 사는 책을 지역 서점에서 사는 근거가 마련된 거죠. 서점협동조합을 만들어 동네 책방에 생긴 변화는 무엇일 까? “많이 변화되었죠, 서울시 지역 서점 활성화 조례를 근거로 해서 동대문구 조례가 재작년에 통과됐어요. 시나 구에서 사는 책을 지역 서점에서 사는 근거가 마련된 거죠. 교보문 고처럼 큰 대형서점이 아닌 지역 서점을 통해 사는 거예요. 또 도서정가제에도 참여하고 통과시켰어요. 도서정가제는 원래 도서의 정가를 받는 것인데, 인터넷 서점과 절충하는 과정에서 할인하게 된 거예요. 사실 할인제이지 도서정가제 는 아니죠. 10% 할인에, 5% 마일리지에요. 그렇게 전국 똑 같은 가격이죠. 도서정가제가 시행되기 전에는 대형서점 같 은 더 많이 할인되는 곳에서 샀지만, 이젠 모두 가격이 같으 니 지역 서점에서 사는 게 낫죠. 도서구매비는 구비 1억 정 도, 시비 1~2억 정도 됩니다. (큰 금액은 아닌데,) 서점이 생 계를 이을 정도의 수단은 아니지만, 마중물 정도는 되었죠.” 서점협동조합의 성과가 크지만, 서점 하는 사람들이 조합원
서울서점협동조합&한우리문고 김의수대표 코로나 위기극복을 위한 기부
“동네 책방 서점 주인들이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어 요. 그런데도 평상시 모아 놓았던 거를 자발적으로 모으자 했어요. 제가 거기에 절반 보태어 후원했어요.” 김의수 대표는 어렵지만, 서점을 삶의 수단으로 선택한 것 을 후회하지 않았다. ‘나’에서 ‘우리’라는 협동조합의 가치를 만들어 내었듯, 지역사회에서 책과 사람이 함께 하는 일들 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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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서 놀고, 즐기고, 배울 곳
5호 2020. 05. 15. 취재&글: 임정희, 심소영 / 사진: 박혜진
‘도꼬마리’ 마을에 필요하 고 나에게 필요한 일을 직 접 만들어 해 보는 곳 ‘도꼬마리’ 무슨 뜻일까? 일본말인가? 찾아보니 국화과의 한해살이 풀 이름이다. 삐죽삐죽한 도 꼬마리의 열매는 비염이나 축농증, 노화 방지, 갑 성선, 두통 등에 좋은 약초로도 쓰인다고 한다. 음…. 그럼 ‘도꼬마리’로 이름 지은 건, 이 약초처 럼 사람살이에 뭔가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이름 을 지었겠구나…. 추측이 가능했다. 2013년 독구 말길(독구말길에 도꼬마리가 많았단다.)에 만든 도꼬마리는 현재는 재개발로 막힌 독구말길에서 나와 외대앞역 바로 앞에 있다. 오늘 만난 두 운영 진은 마을에 필요하고 나에게 필요한 일을 직접 도꼬마리, 하천 둑이나 산기슭에서 흔히 볼 수 만드는 곳이라 소개한다. 있는 일명 도깨비방망이라 불리는 한해살이풀 *출처: 데일리저널 2016.7.24. 기사 중 발췌 http://m.dailyjn.com/
‘도꼬마리’는 2013년 8명의 청년이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모두 청년이었을~^^)
99명의 후원자의 도움으로 이사 가능했다
2013년부터 운영한 지 벌써 7년이다. 수익사업을 하는 자영업도 1년~3년 버티기 힘든 현 실에 어떻게 7년 동안 운영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현재는 40여 명의 후원하는 회원이 있 고, 2명의 메인 공간 지기와 3명의 보조 공간 지기가 공간 관련 업무를 하고, 12명의 운영진 이 사업내용에 대해 논의하여 결정하는데, 서로 필요한 일을 알아서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 라한다. 물론 그때도 지금도 쉽지 않다. 이선화 씨는 “그래서 올해는 회원을 적극적으로 늘 리자는 의견도 있고, 모임이 있을 때 음료를 판매하고 장터를 정기적으로 운영해서 공간을 알리고 새로운 주민과 같이할 수 있도록 했어요. 그리고 다양한 모임이 생기면 대관도 활발 해져서 대관사업을 정비했고요. 이런 대안들을 계속 만들지만 늘 고민이에요. 최근 2년 재 개발로 인해서 공간 이전문제가 컸었는데, 이곳으로 이사할 수 있었던 것은 99명의 후원자 의 도움으로 가능했어요. 지속가능하려면 사람마다 관심사와 취향들이 다르므로 계속 여기 서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하고, 다양한 활동들로 함께 하는 것이 최선인 것 같아요.” 처음에는 같이 얘기하고 놀 수 있는 사랑방 같았는데, 지금은 여러 동아리가 뭉쳐있는 집합 체
예전에는 골목이지만, 1층에 있어서 오고 가는 사람들이 들러 얘기 나눌 수 있는 사랑방 같 았지만, 지금은 지하에 있어 그런 이미지는 사라지고 다양한 세대, 사람들이 나이와 관계없 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보는 지향이 더 커진 것 같다고 한다. “지금은 동아리 형식의 활동이 많은 것 같아요. 책모임, 영화모임, 팟캐스트 제작, 여행 이야기, 그림 그리기, 마스 크 만들기, 세월호 관련 바느질을 한다던가 그런 동아리 형태의 집합체 같은 성격에 가까워 지는 것 같습니다.”(박재영) 2019년 마을전시회 준비
왼쪽부터 도꼬마리 운영진 이선화, 박재영
창립멤버 그리고 상근활동가 이선화 씨는 외국어대학교와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 강사와 대학원생, 대학생 등 8명이 동네에서 머물만한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도꼬마 리가 생기게 되었다고 했다. “저는 동아리를 같이 하던 친구의 소개로 공동체 공간을 만들 려고 한다고 해서 이 공간에 오게 되었어요. 저는 예술 쪽 전공인데 사회 관련된 활동을 하 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고, 공동체를 만든다고 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해 서 시작하게 되었어요. 지금은 홍보물도 만들고, SNS를 맡아 운영합니다.” 또 다른 멤버 박 재영 씨는 동네 좋은 친구들과 놀고, 지역에 필요한 일을 할 수 있어 함께 했다고 한다. “얼 마 전까지는 회원으로 참여하다가 작년부터 활동가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리랜서 영 상제작자라서 마을 활동을 기록하거나, 팟캐스트를 운영하는데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죠. 지금은 회계를 맡아가고 있습니다.” 지역의 작은 목소리를 기억하고, 품을 나눌 수 있는 장소
2020년 봄, 코로나 19로 모일 수 없고, 거리 두기를 실천해야 해 함께하기 힘든 시기였다. 그런데도 도꼬마리에는 동네 사람들과 함께하는 무엇이 있었다. 동네에서 마스크 구하기 힘든 이들을 위해 천마스크를 만들어 기부하고,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기 위해 걸개를 바느 질하고, 관련 다큐멘터리(부재의 기억)를 함께 보았다. 이선화 씨는 “저희는 지역의 작은 목 소리를 기억하고, 품을 나눌 수 있는 장소가 되기를 늘 바라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사 오기 전 도꼬마리라면 불가능했겠지만, 지하로 오면서 넓어진 덕에 널찍하게 거리를 유지 하며 활동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넓어지다 보니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었고, 또 책방 이 있어 페미니즘, 기후위기, 비거니즘 등의 카테고리의 책들, 대형서점에서는 다뤄지지 않 는 책들을 판매하고 책모임, 반찬 판매, 자원 재사용 활동으로 장터까지 운영한다. (년 3회 정도)
2020년 여성의날 공동체 상영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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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2020. 05. 15.
2014년 ‘주성치 영화제’ 때는 부산 등 전국에서
동네 사랑방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욕구에 맞는 동네동아리 집합체. 그런 동네동아리는 이 미 2014년부터 시작되었다. 가장 인상 깊은 활동이나 모임에 관해 물었더니 “주성치 영화 제를 할 때 부산 등 전국에서 올라오셨어요. 그때 저는 세상에는 내가 알 수 없는 취향들이 많다는 걸 알았어요(웃음). ”(이선화) “저는 주말에 마을 밥상 활동이 좋았어요. 밥 먹으면 서 즐겁게 얘기해보자는 취지로 직접 밥을 지어 먹으며 얘기 나눈 것이 개인적으로 인상에 남습니다. 영화제, 야단법석, 세월호 관련 프로그램 등으로 도꼬마리에서 했던 다양한 활동 들로 꾸준히 좋은 기억들을 쌓아가는 것 같습니다.”(박재영) 다양한 사람들과 더 많이 연결되어서, 지역사회에 필요한 역할을 나누어서 했으면 좋겠어 요.
마지막으로 알리고 싶거나 집중하는 활동에 관해 물었다. “오래된 활동 중 지역에서 성평등 관련 활동한 지가 꽤 오래됐습니다. 동대문구 정책 모니터링을 2016년부터 해왔습니다. 처 음에는 페미니즘 영화 보기, 초등학교에서 성교육실태조사 등 이런 활동들을 알리고 싶어 요. 다양한 주민을 만나고 싶어서 교육을 열었는데, 많은 주민이 기다리셨다는 듯 참여해주 셔서 이런 활동이 확대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과 연결되면 다양한 사람들이 경험하고 역할을 분담해서 활동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야 시민사회도 성장하고 공공기관도 민간과 파트너쉽을 성장시킬 수 있을 것이고요.”(이선화) 마치 열매 ‘도꼬마리’처럼.
2014년 주성치 영화제 포스터
공동체 도꼬마리 주소 : 서울시 동대문구 휘경로7길 3 지하층 열려 있는 시간 : 오전 10시~밤 10시, 토, 일 비정기적 운영. 연락처 : 070-8615-4080, dokko0427@gmail.com SNS : 페이스북 www.facebook.com/dokkomali, 인스타그램 www.instagram.com/dokkomarii
도꼬마리는 하나의 목적을 정하고, 그 목적달성을 위한 활동이라기보다는 각자 지역사회의 필요를 얘기해보고, 만들어보고, 함께 해 보는 무언가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생명체인 듯하다. 마치 열매 ‘도꼬마리’처럼. 그렇게 ‘도꼬마리’의 이문동 살이는 재미있다. 재미나게 내가 해 보고 싶은 방식으로 존재의 의무와 책임을 얘기할 수 있고 만들어 볼 수 있고 함께 할 수 있는 곳이다. 인터뷰를 마치며 동네마다 ‘도꼬마리’ 생기는 그날을 상상한다. 공감하 시는 분들은 두드려보시라 누구에게든 문은 활짝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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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2020. 05. 15.
동네이슈, 있슈
이문동의 외대, 32년 변화의 기억 나는 35년째 하드록(Hard Rock)을 듣는다. 레드제플린, 딥퍼플, 블랙사바스, 스콜피온스, 본조비, AC/DC, 메탈리카, 그리고 임재범 시절의 시나위까지. 듣고 또 듣고. 가족들은 정신 사납다고 당장 볼륨을 줄이라고 난리 치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머리 속이 복잡할 때 나는 자동적으로 하드록의 볼륨을 높인다. 긴 머리 흔들어대며 무대에서 발광하는 뮤지션들의 이런 불안정한 음악들이 내 심신에 역설적인 안정감을 주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만큼 익숙 해서다. 이 취향은 내 청년 시절의 몸에 각인된 것이다. 그리고 이 몸의 기억은 2020년 현재 내 문화적 취향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만큼 청년 시절의 기억은 상당 기간 개인 의 일생을 지배한다. 그래서, 청년기에 무엇을 느꼈고, 무엇에 열광했으며, 무엇에 결핍을 느꼈는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은 이후의 삶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문동에는 강력한 랜드마크가 하나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다. 외국어 능력이 권력인 시 대가 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세계화에 대한 급증하는 사회적 관심을 고스란히 흡수해 위 상이 급팽창한 대학이 바로 한국외대다. 외국어를 전문으로 하는 단과대학에서 출발해 미 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방문한 한국의 유일한 대학이 되기까지. 외대에는 많은 변화가 있 어왔다. 최소한 뉴스로 검색되는 외대에 대해서는 그렇다. 그런데, 외대를 품고 있는 이문 동의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그럴까. 매일 보는 일상에서 외대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뉴 스로 검색되는 외대가 아니라, 일상에서 관찰되는 ‘이문동 외대’의 변화를 추적해보기로 했 다. 우리는 수능 수시등급의 변화나 뉴스기사로 알려지는 밖에서 보는 외대 화려한 변화가 아니라 ‘이문동에 대한 기억 속 외대’의 변화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32년 차이의 외대 선 후배’들의 기억을 소환해보기로 했다. 세 사람을 만났다. 최준영(무역 80학번), 김동원(신방 과 92학번), 최정윤(영문과 12학번)이다. 이들은 ‘강렬한 기억을 가지게 되는 20대 초반의 청년기’를 이문동에서 보냈다.
윤덕환(문화플랫폼시민나루 시민기자) / 문화심리학박사
더라니까.” 거절을 못하는 사람 좋은 20대 초반의 대학 새내기 최준영은, 존경하고 좋아했던 같은 서예 반의 4학년 여자선배에게 이끌려 야학에 선생님으로 초대받는다. 그리고 이 경험은 이후의 최준영대표의 삶에 대한 태도를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외대가 ‘그냥 작다’에 서 ‘특별함’으로 변화한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역의 아이들을 만나고, 공감하고, 타인의 인생에 들어가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신과 자신의 주변에 관계와 경험을 통해 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 을 확장해 나간다. 이런 차원에서 교사인 부모님과 중산층 가정에서 비교적 큰 걱정 없이 살아온 스물 한 살의 청년 최준영의 인생에 ‘야학교사’로서의 경험은 큰 파문을 일으켰던 것 같다. “야학 생활을 통해서 내 인생관 내지는 이런 것들이 새롭게 정립되어 가는 그런 과정을 (겪었어). 결손가정이니 뭐 이런 건 난 생각도 못했어. ‘어떻게 중학교를 졸업을 못하지?’ 이랬으니까. ..(중략).. 그래도 중고등학교는 나와야 되는데 왜 못나오지 이런 식으로 생각 하다가 와 엄청난 세계가 있더라고. ..(중략).. 세계관이 흔들렸지. 내 젊은 시절에 상당히 중요한 경험.. 아버님 돌아가시고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다 그 힘이야. 얘네들도 이겨 냈는데.. 얘네들은 초등학교부터 이렇게 컸는데.. 왜냐면 고아들도 있거든.. 이거는 뭐.. 이 길 수 있겠더라고. 거기서 내가 야학 애들하고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고 그랬겠니.” ‘사람 좋은 최준영’의 인생관은 이시기에 완성된 것 같다. 자신의 세계에 갇혀있던 최준영 은 외대에서 전공보다는 서예반 활동을 통해, 그리고 이문동 상록야학에서 지역의 아이들 을 만나면서 타인의 인생에 들어가는 법, 공감하는 법을 배운다. 가르침과 배움이 공존하던 최준영대표에게 이문동은 학교와 동네가 분리되지 않는 ‘공존하는 하나의 공간’이었다. “우리 학교에 좋은 점이 뭐냐면, 대학이 좁다 그랬잖아. 강의실에 늦지 않아. 절대로, 교 문에서부터 들어가는데 5분도 안 걸리니까. 어느 전공이나. ..(중략).. 학교와 주변 이문동 과의 경계가 없는 거야. 이문동 주위가 전부 다 하나의 상권이 하나의 공동체. 외대 사람 들하고 같이 움직여지는 거지. ..(중략).. 다 외대의 부속 건물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 당 시엔 그랬어. 이문동하고 외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동의어’야. 이문동하면, 그냥 외대의 문화촌, 이런 느낌? 거기서 꿈을 키웠고, 그 다음에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나는 그러한 문화와 그런 하숙집 아줌마의 온정. ..(중략).. 나중에 어떤 놈은 취직하고 그 하숙 집 찾아가고 선물꾸러미 들고. 그런 정이 있었어.”
최준영대표, 출처, 중앙시사매거진 2020년 3월9일자 사진
‘작다’의 이미지에서 시작한, 팔공학번 최준영에게 외대는 ‘딴딴함’과, ‘특별함’으로 진화 했다 현대상선에서 임원(상무)으로 은퇴하고, 지금은 코칭 회사(코칭으로 아름다운 동행)를 운 영하고 있는 최준영대표는 1980년 외대에 입학했다. 그에서 외대의 첫인상은 그다지 긍정 적인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가 애초에 원했던 대학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외대에서의 첫 느낌은 그냥 ‘작다’였다. 하지만, 상황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학교를 제대 로 다녀보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학교에 대한 이미지는 변하기 시작했다.
이문동은 자신의 20대초반의 최준영에게는 잊을 수 없는 공간인 것 같았다. 그리고 이 결정 적 시기의 경험은 평생의 자산으로 최준영대표의 현재의 인생으로까지 이어진다. 자 그럼 꼭 32년뒤의 ‘이문동 외대’는 어떤 모습으로 변화했을까.
1980년의 ‘작다’는, 32년 뒤 ‘편안함’의 이유가 된다. 한국외대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입학한다는 영어영문학과 외대 일이(12)학번. 심지어 여기서도 매학기 장학금을 받고 조기졸업까지 한방에 해버린(실화냐) 최정윤 선생님(국제 학교영어교사)과 전화인터뷰를 했다. 최준영대표의 딸이다. 아빠와 살가운 교류(?)도 없고, 따로 살고있는 덕분에 ‘다행히’ 이전 인터뷰에 영향은 전혀 없었다.
“첫 번째는 ‘작다’라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좋은 쪽으로 얹어지면서 딴딴하다. ..(중략).. 아 우리는 정말 작지만 탄탄한 대학이고 좋은 대학이다...(중략).. 이 ‘외대는 그냥 특별한 대 학이다’라는 그 특별성 차별성 이런 것이 내가 4년간을 버틸 수 있었던 어떤 그런 자존감 이었던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들고 그렇게 행동을 했어.”1 무엇이 20대 초반 청년의 대학에 대한 정체성의 이미지를 급격하게 바꾸었는지가 궁금했 다. 그래서 대학시절 특별히 기억나는 활동이 있는지를 물었다. 최준영대표는 자신의 대학 생활은 딱 두 가지 활동, 서예반과 야학활동으로 대변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 상록야 학에서의 교사생활은 최준영대표에게 운명처럼 다가온다. “이 대학을 가긴 했는데 뭐가 되고 싶다 이런 꿈이 없었어. ..(중략).. 그거를 야학생활과 서예활동을 통해서 한거지...(중략)... 야학은 난 아무 생각없이 시작했어. 그 인연이 내가 1학년 때 서예반을 들어갔는데 5.18때 학교 휴교를 할 때였잖아. 그 당시에 4학년 선배가 있었는데 졸업을 하시면서 ‘준영아 너한테 딱 맞는 좋은 데를 좀 소개시켜 주고 싶은데 같이 갈래?’ ..(중략).. 난 그 선배가 좋았으니까.. 가면서 얘기하더라고 야학이라고. 난 야 학이 뭔지도 몰랐어. ..(중략).. 그래서 내가 ‘어어..’ 하는데 거기서 애들이 눈빛이.. 뭔가 끌 리는 거야. 뭔가 첫 인상에서 애들하고 뭔가 같은 운명을 같이하고 싶다는 생각이 딱 들 1 참고로, 최준영대표는 필자(윤덕환)의 삼촌이다. 그래서 인터뷰는 ‘부드러운 반말(?)’로 진행되었다.
최정윤, 영어영문학과 12학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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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에 입학한 최정윤에게 외대의 첫 느낌은 ‘편안함’이었는데, 이 편안함은 역설적으로 ‘작아서 편안한 것’이었다. 외대앞에서 나오자마자 학교가 보여서 ‘편안’했고, 주변에 돌아 다기기가 가깝고 해서 ‘편안’했다. 1980년의 ‘작다’라는 이미지는 32년 뒤 외대 새내기에게 ‘편안함’의 이유가 된 것이다.
5호 2020. 05. 15.
과 연애의 감정을 기록했다. 92학번 김동원은 철길 건너 ‘또와식당’을 자신의 ‘격렬한 토론 과 울분의 연애담을 기억하는 음주의 일기장’으로 기록했으며, 12학번 최정윤은 외대역앞 ‘고등어 김치조림’집 사장님의 따뜻함을 반찬으로 기억했다. 그리고 이 세 사람 모두는 호 프집 ‘비스마르크’를 ‘즐거운 외대의 살아있는 역사’로 기억하고 있었다.
“역이름이 ‘외대앞’역인데 나오자마자 바로 외대가 있기도하고 가깝고 돌아다니기 작고 하니까 되게 편안 했던거 같아요.” 그런데, 이 32년전의 부정적인 느낌의 ‘그냥 작음’에서 긍정적인 느낌의 ‘작아서 편안함’으 로의 전환은 역설적이게도 ‘다양한 활동’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무엇이 ‘작음’을 긍정적으 로 받아들이게 된 것일까. ‘일이 학번’ 최정윤은 누가봐도 모범적인의 학교생활을 했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알바도 하 면서, 수업시간에 하는 발표 그룹과제에는 항상 열심이었고, 교내 인간관계를 맺는 것도 그 폭이 넓어, 셰익스피어 동아리활동, 학과 학생회활동, 단과대 학생회 총무까지. 단과대 학 생회활동 시절에는 학내 한 교수의 제자 성추행 사건을 대응하느라 몸과 마음이 바쁜 시간 도 보냈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한 것이 없었는데도 장학생이었고, 7학기에 조기졸업을 했 다. 후배들이 보는 최정윤은 그저 완벽한 선배였을 것이다. 그래서, 최정윤에게 ‘아담한 크 기의 학교’는 역설적이게도 단점이 아니라 굉장한 장점과 편안함을 주는 이미지였던 것 같 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활동을 하고, 시간을 아껴서 공부하고, 아르바이트까지. 이 모든 것을 다 하기에 이 ‘외대의 아담함(작음)’은 12학번 최정윤에게 최적의 동선(動線) 을 제공한 것이다. 한편, 최정윤의 효율적인 학교생활에서 외대의 공간은 외대앞역의 ‘철길’까지 인 것 같다. 그 ‘철길너머’는 외대 바깥의 세상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최정윤은 철길을 넘어갈 수 있다 는 것도 졸업할 때쯤 처음 알았다고 한다. “(철길에)가본적이 한번도 없어요. 저는 거기 지나갈 수 있는지도 사실... 마지막 4학년때 알았어요. 친구가 그쪽에 살아서. 저는 철길 넘어서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요.” 이 세대에는 학교생활과 개인생활의 구분이 비교적 엄격한 세대다. 예를 들어, 최준영대표 (80학번)가 40년전 활동했던 서예반과 아직까지 교류의 끈을 이어가고 있던 것에 비해 최 정윤(12학번)은 굉장히 열심히 한 동아리활동(셰익스피어 동아리)은 2학년까지로 딱 끝내 고 별다른 연결고리는 없다고 얘기하는데, 이런 특징은 이 세대에게는 특별한 예는 아니다. 그리고 그 ‘생활공간과 학습공간’의 명확한 구분만큼이나, ‘이문동과 외대’의 생활공간도 명확하게 구분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20년이 넘게 생활한 이문동의 터줏대 감 김동원박사(신문방송학과 92학번)의 전언에 의하면, 인근 이문동 주민의 인식도 2000 년대 들어서 급격하게 바뀌었다고 전한다. 외대축제의 변천. ‘하숙집 아주머니와 함께하는 노래마당’에서 ‘소음 민원’이 들어오는 행 사로.
김동원박사가 학교생활을 하던 90년 말까지. 외대의 축제는 인근의 이문동 주민들과 함께 하는 공동체의 행사였던 것 같다. 그러던 것이 2012년에는 민원이 들어오는 동네로 변한 다. “제가 기억나는게 학교에서 축제를 하는데 하숙집에서 아주머니들을 모시고 와가지고 노래자랑을 하는데 상도 주고 그랬으니까”(김동원박사,92학번) “저희 축제 때, 동네 사람들이 시끄럽다... 고 그런 민원이 조금 들어왔어요. 1학년때. 그래 서 2학년때부터 저희 학교가 술 금지 축제를 하기 시작했거든요.”(최정윤선생,12학번) 김동원박사는 외대와 이문동간의 공동체적인 유대감이 붕괴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반에 재개발 이슈가 부각되면서라고 생각한다. 김동원박사는 90년대초까지만 해도 이문 동은 비교적 큰 공장(삼천리이앤이)과 작은 봉제공장들과 가내수공업을 중심으로 한 지역 경제가 잘 돌아가던 곳이었다고 전한다. 다만, 사양산업(연탄과 가내수공업)이 전환을 적절 하게 하지 못하고, 재개발이슈가 급격하게 올라오면서 이문동의 경제는 ‘외대 의존적’이 되 었다고 분석한다. 그래서, 김동원박사가 가장 강하게 떠올리는 이문동의 이미지 키워드가 바로 이 ‘재개발’이었다. “일단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재개발. 재개발은 지금도 그렇지만 2000, 2001, 2002년부 터 끊임없이 얘기가되던 거라. 사실은 재개발이나 뉴타운이 한 지역을 낙후시키는가를.. 재개발이 된다고 하니까. 집주인이 집을 고쳐주지도 않고 관리도 허술 하잖아요. ..(중 략).. 재개발 뉴타운을 한다 이러면서 계속 끌어오다 보니까 집주인들이 사라지는 거죠. 집주인들이 빠져나가면서 상가들도 그렇고 이분들은 재개발만 기다리고 있으니까, 건물 보수를 하거나 수리를 하지도 않으시고 재개발만 기다리고 있으니까..” 2020년 현재에도 이문동은 재개발은 진행 중이다. 이 과정에서 ‘날선 재산권 다툼’과 잇권 이 부딪힌다. 이 과정에서 한국외대 축제의 기억은 동네사람들과 왁자하게 떠들던 ‘마을 잔 치’에서 ‘민원이 들어오는 행사’로 인식이 전환 된다. 빈대 붙어 자던 외대 청년들을 품어주 던 하숙집 어머니의 손은 임대료를 따지는 원룸텔 주인의 돈 세는 손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 다.
언젠가는 이 재개발은 끝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외대역 주변은 새집, 깨끗한 거리, 새건물 로 단장하게 될 것이다. 외대청년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더욱 많아질 것이 다. 그럼 지역경제의 ‘외대의존성’은 더욱 커지게 될 것 같다. 그럼에도 꼭 하나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생각났다. 80학번 최준영의 기억 속 외대는 새건물이 아니라 ‘철길’을 따라 야학
김동원박사_한국외국어대 신문방송학과 92학번, 검정 마스크 한 사람이 필자
질풍노도의 청년시기 감정의 기억은 ‘깨끗한 동네’를 남기는 것이 아니라, 동네사람들과의 교감을 남긴다. 그리고 이 기억이 이후의 인생을 움직이게 한다. 그 따뜻함의 기억은 인생 을 살아내게 하는 평생의 동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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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2020. 05. 15.
이문동의 돈키호테
K-POP과 한류에 대한 관심이 한국외국어대·이문동으로 이어지다. 2018년 12월경부터 이문동에 살던 지인들의 이사 소식이 들려왔다. 이문동 1, 3구역 재개 발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가장 먼저 안부가 궁금해 떠오른 얼굴이 바로 이문동 주민이자 팔레스타인 한국 유학생 1호로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재학 중인 ‘안젤리나’ 다. 이미 중앙일보 및 KBS 아랍어 방송 인터뷰 경력이 있으나, 작년 시민나루 마을미디어 교육 프로그램 보조 강사로 활동한 그녀를 여전히 이문동 주민으로 소개할 수 있다는 기쁜 마음 에 서둘러 인터뷰를 진행했다.
취재&기사 : 정담희
당이 있다면?
이문동에서 가장 소개하고 싶은 곳은 “Moon Leaf”라는 카페입니다. 거기서 다양한 과일로 만들어진 메뉴와 따뜻한 차를 즐기며, 친구들과 자주 이야기 나눕니다. 동네에서 애용하는 식당은 ‘커리146’입니다. 인도 음식을 파는데, 음식에 들어가는 향신료가 아랍 음식 맛과 비슷해서인지 저에게 아주 맛있게 느껴집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약 5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온 안젤리나라고 합니다. 지금은 한국 외국어 대 마지막 학기로, 전공은 경영학, 이중 전공으로는 방송영상 뉴미디어 학부에서 공부 중입 니다. 저는 아랍인이기에 아랍어를 모국어로 하고, 여기서는 한국어와 영어를 사용합니다. 취미로는 음악, 운동, 어학 공부를 좋아하는데, 특히 예술 분야를 배우는 것이 무척 즐겁습 니다. 또한, 저한테 가장 소중한 가족들과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즐깁니다. 한국에서 공부 하게 된 계기는 고등학생 시절 K-POP과 한국 드라마를 알게 되면서 한류에 관심을 갖게 되 어서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만들고 싶습니다.”
안젤리나_동그라미, 2019년 여름 마을미디어 수업 후
왼쪽부터 한국 외국어대 안젤리나, 안젤리나&친구(학사모 쓴)와 동생
그동안 타국 생활을 하면서 팔레스타인과 달라서 낯설었던 점이나 의외로 비슷하다고 느껴 진 점 등에 관해 이야기한다면?
제 생각에 가장 큰 차이점은 한국에서 느껴지는 자유로움입니다. 다른 도시에 가고 싶을 때 자유롭게 가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지요. 하지만 팔레스타인에서는 이스라엘이 점 령하고 있어서 쉽게 이동할 수 없습니다. 또 인사나 먹는 방식 등의 문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제가 큰 차이를 느끼는 것은 사회생활입니다. 제 생각에 한국 사회는 계 층에 대한 의식이 큰 것 같고 그것으로 인해 사회생활이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교육에서는 한국 사람들이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열심히 준비하고 경제 상황이 좋기에 더 우수하다고 생각합니다. 종교가 팔레스타인 사회와 문화를 지배한다는 점도 한국과 다릅니 다. 아랍사람들은 한국인들보다 대지와 가족 중심의 사람들입니다. 이 점은 한국의 ‘정’문 화와 비슷하다고도 생각됩니다. 또한, 저희 부모님 세대는 한국이든 아랍이든 모두 가진 것 을 나누려고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느낍니다. 세대에 관한 얘기가 나오게 되니, 팔레스타인의 20대가 어떤지 궁금하네요.
한국의 20대와 큰 차이가 느껴지지는 않으나, 차이가 있다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한국 사 람보다 결혼을 더 빨리한다는 점입니다. 한국의 20대는 졸업 후 일자리를 가장 먼저 생각하 는데, 팔레스타인 20대는 취직, 결혼 및 출산을 동시에 생각합니다. 대화 내용에서도 팔레 스타인 20대는 친구나 가족들과 경제, 정치, 사회 이슈에 관해 많이 얘기하는 편인데, 한국 20대는 연애, 학교와 학원, 인턴십 등에 대해 더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양국 20대의 공통점 에 관해 말한다면, 휴대폰을 들고 생활한다는 점입니다. 그건 디지털시대에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이문동에서는 어떤 느낌을 받나요?
이문동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느낌은 안전함입니다. 이문동은 저희 고향과 마찬가지로 작고, 주변에 지인들이 많아서 좋습니다. 집에서 멀리 나가서 일하고 이문동으로 돌아올 때 마다 편안합니다. 이문동에서 본인이 소개하고 싶은 장소가 있다면? 그리고 본인 입맛에 맞아 자주 가는 식
작년 여름 시민나루 마을미디어 교육과정에서 마을활동가이자 보조 강사로 참여하면서 느 낀 점을 듣고 싶습니다. 비디오 만드는 방법을 가르치는 일이었는데,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다양한 연령대의 주민 들과 미디어 지식을 나누는 일이라서 보람 있었습니다. 무언가를 배우고 난 후 사람들의 얼 굴에 퍼진 미소를 보면서 기뻤습니다. 그동안 제가 미디어 공부를 했던 시간이 더욱 가치 있게 느껴진 순간이었습니다. 새로운 분들과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즐거웠고, 저도 그분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뜻깊은 경험이었기에, 기회가 있으면 다시 할 것입니 다. 팔레스타인에도 시민나루와 같이 마을 활동을 하는 단체들이 있다면, 그 조직들과 활동내 용이 궁금합니다. 팔레스타인에도 지역 활동을 하는 단체들이 있는데, 주로 활동내용이 지역 개발에 관한 것 입니다. 상수도와 하수도 개발 및 위생 관련 사업이나, 집수리, 농업 교육, 여행 관련 활동 등을 하는 지역 단체들이 있는데, ActionAid, US AID, Oxfam, Austria Aid, GIZ, Spanish Aid, Italian Aid와 같은 국제개발 협력단체들의 재정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마을 활동단체 들이 재정적인 형편이 어려워 그다지 활발한 활동은 하지 못하나, 충분한 수행능력을 갖추 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인을 통해 알게 된 안젤리나를 아이와 함께 처음 만났던 기억이 종종 떠오른다. 갈색 머 리에 안경을 낀 아담한 체구의 그녀는 현재 활동이나 미래의 계획을 이야기할 때면 넘치는 열정에 말이 점점 빨라지는데, 한국어 구사 속도가 열정을 따르지 못할 때쯤부터 영어로 대 화를 이어갔다. 당시 공룡에 사로잡혀있던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팔레스타인의 아이들은 주로 총이나 칼 같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이 안타깝다며 표정이 흐려진 순간이 있었다. 팔레스타인에도 한국의 남과 북에도, 빨리 장벽이 사라졌으면 하는 염원으로 유학 초기에 ‘피스코리아(통일 한국)’란 곡을 만들기도 한 그녀가 앞으로 어디서든 사람들의 평화와 행 복을 위해 일하리라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