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잡지 [인터뷰, 마을이음] 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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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

2020. 09. 18.

02 11-16

편집인의 글

03

동네에서 놀고, 즐기고, 배울 곳

동네 에세이

17-18

04-05

당신이 몰랐던 제기동의 소소한 역사

06-10

모이고, 움직이고 달라지다

제기동 돈키호테

무궁한 가능성과 유서깊은 "보물을 품은" 상인들의 메카

제기동


02

6호 2020. 09.

선농단과 제기동

편집인의 글

글: 심소영, 정담희

제기동이야기는 선농단에서 시작한다.

내렸는데, 이를 ‘선농탕’이라 했으며, 오늘날

제기동에서 만난 대부분의 인터뷰이가

‘설렁탕’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선농단이 지역의 자랑이자 뿌리임을 이야기한 이유도 있었지만, 동대문구의

동대문구는 2015년 ‘선농단 역사문화관’을

소중한 역사와 문화를 동대문구 사람이 잘

개관하여 선농단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모른다는 안타까움도 있었기 때문이다.

활동을 하고 있다. 이곳을 관리하는 동대문 문화재단 김동호 주임은 선농단의 역사와

선농단은 조선 태조이래 임금이 친히

의미에 대해 하늘과 임금과 백성이 연결되어

풍년을 기원하는 선농대제를 지낸 곳이다.

지금도 행해지는 거의 유일한 문화유산임을

선농대제는 경칩 뒤 길한 해일에 제삿날을

강조했다. “선농단의 역사 중 꼭 말하고 싶은

선농단 일원이 국유화되면서 제향이

정해 임금이 직접 지낸 제례다. 제례 후 근처

것은 애민사상입니다. 선농대제는 제례 5일

폐지되었다. 이후 일제는 선농단이 위치한

친경지에서 왕이 직접 농사의 시범을 보이는

전부터 백성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임금은

친경례를 지냈다고 한다. 이때 수고한

제례 후 십여 일을 더 머물렀다고 합니다.

경성여자사범학교를 세워 선농제의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소를 잡아 국밥을

이때, 근처 친경지에서 친경례를 하면서

역사·문화적 의미를 말살하였다. 폐지된

백성들과 농사를 짓고 같이 나눠 먹는

제향 행사는 1979년에 지역주민으로 구성된

설렁탕 문화가 생겼고요. 애민문화가 온전히

‘선농단친목회’에 의해 비로소 재개되었으며,

잘 녹아들어 선농대제가 이뤄졌다고 봐요.

1992년부터는 정부가 주관하여 매년

왕이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도 왕과 같이

선농대제를 지낸다. (출처:https://namu.

어울릴 수 있는 문화였어요.”

wiki/w/선농단)

선농대제가 일제강점기 직전인 순종

이렇듯 하늘과 임금과 백성이 맞닿아 있는 제

3년(1909)에 사직단으로 위패가 옮겨지고,

기동 선농단에서 제기동 사람들 이야기를 시

<2017 선농단, 선농대제/사적 제436호/ 조선 시대 제단/출처: 동대문구청>

<동대문 문화재단 김동호 주임>

곳에 청량대(凊凉臺) 공원을 조성하고,

작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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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세이

이어진, 이어질, 우리들의 소소한 역사, 제기동 성당에서 글: 이연두

“여기에 오래된 제터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성당을 짓기 시작한 거지.”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래 전해져온 이야기. 1942년에 제기동성당이 혜화동 성당에서 분당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왔으니 올해로 78년째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이어질 제기동 성당 이야기다. 나는 지금 제기동 성당으로 가고 있다. 기도의 때와 영성으로 가득한 동네 성당의 풍경은 어느 동네에서 만나더라도 언제나 마음을 푸근하게 해준다. 그리고 동네의 풍경만큼이나 성당의 모습도 다양한 외양들을 가지고 있다. 제기동 성당 앞, 종탑이 있는 성곽이 보인다. 가파른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어서 계단에 올라서야 성당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해온다. 언덕 위에 견고하게 세워진 요새 같다랄까. 다부지고 단단해 보이는 빛바랜 석조건물 외양이 인상적이다. 화강암으로 밀도 있게 싸인 외벽을 따라 대성전으로 간다. 성문의 푸근한 황토색 나뭇결을 만지니 이 문을 지나간 많은 사람의 시간과 기억들이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만 같다. 대성전 안으로 들어서니 외관과는 다르게 목재로 지어져 있다. 대성전 안에서만 본다면 숲속에 호젓하게 지어진 목조 성당 같은 느낌이다.

<제기동성당 외부·내부>

안과 밖의 대조적인 모습이 마치 다른 건물 같다. 성당관계자의 말을 빌리면 이렇게 전형적이지 않은 모습이 보이는 건 전문 건축가에게 설계를 맡기지 않고 신자들이 스스로 설계를 하고 건축해서라고 한다. 아~ 이제야 이해가 가면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리고 이 말에 더욱 반갑고 정감이 넘친다. 오랜 시간 전에 성전을 짓기 위해 애쓰던 이웃들의 모습이 보인다. 누구는 설계를 맡고 누구는 자재를 구하기에 바빴을 것이다. 긴 시간에 걸쳐서 시행착오를 거치며 이리도 단단하고 튼튼하게 성전을 완성해 갔을 것이다.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의심하면서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돌 하나하나를 직접 고르고 쌓았던 사람들을 상상하니, 평범한 이웃들의 성의와 정성이 성당 구석구석에 묻어있어 그 아름다움의 가치가 향기롭게 피어오르는 것만 같다. “평범해도 괜찮아. 이렇게 단단하게 살아내고 있잖아. 무엇이 되지 않아도 돼. 너의 존재 그대로 아름다워.” 성당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대단하지 않은 우리네 소소한 역사에 긍지를 가지라고. 모든 존재의 평범한 아름다움을 사랑하라고. 이 오래된 성당은 이미 성전 자체로 미사가 되고 말씀이 되어 제기동의 역사가 되어 있었다. “모든 꽃이 아름답다는 것과 장미의 화려함이나 백합의 순결함 때문에 작은 오랑캐꽃의 향기나 들국화의 순박한 매력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성녀 소화 데레사 자서전

<사진출처: 제기동본당 5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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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몰랐던 제기동의 소소한 역사

'성동역이' 만들어낸 600년 동네의 현대적 정체성, 제기동 이야기

윤덕환(문화플랫폼시민나루 시민기자) / 문화심리학박사

낭만적 여행을 부르는 말랑한 세편의 로맨틱 영화. 맥 라이언의 ‘프렌치 키스’, 소피 마르소의 ‘유 콜 잇 러브’, 그리고 줄리 델피가 각본, 감독, 주연까지 한 ‘뉴욕에서 온 남자, 파리에서 온 여자’. 이 세 편의 영화에는 공통의 공간이 하나 등장한다. 뭔가 클래식세련달콤샤랄라한 느낌의 기차역이다. 파리-리옹역(Paris-Gare de Lyon)이다. 이 역은 120년 전인 1900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엑스포를 맞이해 지어졌다. 고풍스러움과 현대적인 느낌을 동시에 가진 이 기차역은 니스, 보르도, 이탈리아, 스위스 방면으로 나가는 열차의 시발점이기도 하고, 반대로 그쪽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의 종착역이기도 한, 연간 9천만 명의 사람들이 들고나는 역이다.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 역에는 무려 32개의 플랫폼이 있다(선로 기준으로 서울역은 10여 개 밖에 안된다. 다만 개별 승강장 크기는 서울역보다는 작다). 파리의 한복판도 아니고, 외곽에 있는 한 역에 기차가 들고나는 플랫폼이 32개나 필요했던 이유는 (그림1. 파리-리옹역, 이미지 출처, 네이버블로그 (세상 속 풍경을 전시한다, https://m.blog.naver.com/PostList.nhn?blogId=nph400))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이 역이 ‘두단식(頭端式)승강장’ 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단식 승강장이란, 기차의 머리(頭, 머리 두)쪽이 막혀있는(端, 끝 단), 즉 선로가 끊어진 맨 끝 정거장(최종 목적지)이란 뜻이다. 들어온 열차는 승객을 하차시키고 잠시 후 다른 승객을 새로 태워 새로운 목적지로 출발한다. 최종 목적지인 이곳에 많은 기차가 머무르려면(지나가는게 아니라) 당연히 플랫폼이 많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독특한 느낌의 기차역이 80여년 전 동대문구에도 있었다. 바로 ‘성동역’이다.

성동역이 ‘두단식 승강장’이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그림2. 두단식 승강장, 이미지 출처, 나무위키(https://namuwiki))

두단식 승강장의 장점은 무엇일까? 분명한 장점은 ‘유동인구’의 원활한 이동에 있다. 두단식 승강장역 근처에는 육교나 지하도 없이도 역주변에 이동이 원활하다. 이동을 위해 철도를 넘나들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무거운 짐을 운반해야 하는 경우 수레 등으로 짐을 운반하는 상황에서 철로가 구역을 나누고 있는 곳은 서로 소통에 어려움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이 구분선이 없는 것이다. (앞선 이문동 편에 나온) 외대앞역의 선로를 생각하면 외대쪽과 철길 건너편은 상권도 다를 정도로 영역 구분이 되는데 이렇게 공간을 갈라 치는 경계선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통상 두단식 승강장을 갖춘 역은 대체로 상권이 매우 발달한 곳에서나 가능하다. 파리, 런던, 로마, 베이징 같이 도심에 특히 상권이 모여 있는 곳에 이 두단식 승강장역이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80여년전 성동역이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사라진(현재는 인천역과

(그림3. 성동역, 이미지 출처, 서울스토리(http://seoulstory.kr))

여수역 2곳 밖에는 없다) ‘두단식 승강장역’이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핵심은 이곳이 매우 큰 상권이 존재 했었다는(또는 기획되었었다는) 반증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제기동의 현대적 기원을 설명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1930년대, 조선식산은행 관계자들은 동북권의 삼척 공업지대와 경성부간의 원활한 물류가 필요하며, 여기에 큰 수요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곧바로 당시까지 지속적으로 사업화를 꿈꾸던 경춘철도 기성회와 함께 ‘경춘철도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이후 몇 명의 조선 자본가들을 끌어들인다. 경춘철도는 1937년 5월 경성부 성동역과 춘천역을 잇는 93.5㎞의 철로 부설에 착수해서 1939년 7월 개통했다고 전해진다1). 독특하게도 경춘철도는 개통이후 단순히 삼척 공업지대의 (강원지역의 댐공사에 필요한)대규모 물류이동 목적 이외에 강원도를 포함한 지역 개발의 성격을 겸한다. 그래서 경춘철도는 철도 운수업만이 아니라, 자동차 운수업, 주택건축업, 임업, 서비스업(유원지, 호텔, 지하철, 백화점)의 다각적 경영을 특징으로 했다는 것이다(그래서, 최초의 경춘선 철도는 국가소유의 철도가 아니라 사유철도로 출범한다)2). 정리하면, 성동역은 기획부터 운영까지 상당부분 ‘상업적 목적의 대규모의 물류, 유통’을 목적으로 기획된 기차역이었다. 그래서, 실제로 1960년 6월4일에 공설시장 형태로 출발한 ‘경동시장’은 성동역 바로 앞에 만들어졌었다3). 성동역이 이미 대규모의 상거래를 염두해두고 기획된 역이었다면, 그 인근(현재는 제기동역 인근)의 대형 시장의

(그림4. 성동역터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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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과 도시재생을 꿈꾸는 2020년의 제기동은 선비들의 유서(由緖)깊음과 상인의 왁자함이, 무한한 미래 가능성과 무정한 회한(悔恨)이 공존하는 동네다.

(그림6. 70년대 부흥주택, 이미지 출처, 한국내셔널트러스트), (그림7. 현재 부흥주택, 이미지 출저,

존재는 자연스럽게 그 기원에 대한 설명이 된다. 경동시장(약령시장)을 제외하면, 현재

설렁탕의 기원이 된 동네, 제기동은 원래부터 유서깊은 동네였다.

‘청량리’라는 이름으로 시작하는 시장들 많지만(청량리 도매시장, 청량리 종합시장, 청량리 농수산물시장 등), 행정구역상 이 대형의 시장들(경동시장 등)은 모두 다 예외

여러 포탈에서 ‘제기동’이라는 키워드로 이미지를 검색해보면 몇 개의 공통된 단어와

없이 ‘제기동’ 소속이고, 60년 이상된 오래된 시장이기 때문이다. 성동역이 있던 옛날

이미지가 나온다. 오래된 구옥들, 재래시장, 도시재생지역, 재개발 등의 이미지다.

제기동은 대규모 시장이 모여있는 상인들의 천국이었다.

이런 이미지에 노인들의 홍대라는 이미지까지 있어서 지금의 제기동은 뭔가 오래되고 낙후되었다는 느낌의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제기동은 엄연히 왕이 친히 제사를 올리던 유서가 깊은 동네다. 제기(祭基)는 조선시대 왕이 제사를 지내던 터를 뜻한다(선농단 부분 참고). 왕이 행차하여 제사를 지내던 장소의 기운이 영향을 준 듯, 지금도 제기역 1번 출구 쪽 선농단공원이 있는 지역의 주택가는 매우 아늑하고 조용하다. 일제시대 경성여자사범학교(한국전쟁 후 서울사대)와 고려대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의 하숙집이 있던 곳도 이 근처였다. 선농단 근처의 제기동은 지척에 있는 재래시장의 왁자함을 뒤로하고 다소 곳하고 아늑한 공부하기 딱 좋은 쾌적함이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제기동은 가난의 기억이 많은 동네다. 한때 전태일가족이

(그림5. 선농단, 이미지 출처, 미디어뉴스 (http://www.mediadaily.kr/news/articleView.html?idxno=1363))

제기역이 ‘노인들의 홍대’가 된 이유

생활했다고 알려진 제기동을 가로지르는 정릉천변에는 판자촌이 즐비했었다6). 그래서, 한국전쟁이후 50년대에 전후 ‘부흥’을 위해 우선적으로 주거를 개선한 곳도 제기동이었다(부흥주택 등). 제기동은 유서깊은 구휼의 전통을 가진 곳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여행자에 대한 무료숙박과 무의탁 병자에 대한 치료를 담당하던

성동역은 1970년에 서울 도심 개발이 확장되면서 노선이 폐지되고, 그 역할은 제기역과

보제원(普濟院)이 가까운 곳에 있었다(보제원 표지석은 안암역에 있으나, 보제원터는

청량리역으로 분산되기에 이른다. 성동역이 폐지된 지 50년. 성동역의 전성기를

현재의 약령시장안에 있다)7). 이런 맥락에서 보면, 경동한약상가가 보제원 근처에 있게

기억하는 노년세대들은 이 제기동에 대해 어떤 기억을 갖고 있을까.

된 것은 우연은 아닌 듯하다.

성동역은 1939년 7월20일에 영업을 개시하기 시작해, 1971년까지 존재했었다. 당시 성동역은 경춘선의 시발역이었다. 그러니까, 흔히 ‘청춘들의 낭만적 추억을 떠올리게

왕이 직접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600년 제례의 역사와 현대식 상업적 거래가 시작된

하는 경춘선열차’의 시작은 청량리역이 아니라, 실은 바로 이 성동역이었던 것이다.

60년 시장의 역사가 공존하는 서민의 거리. 소설 ‘운수 좋은날’속 주인공 김첨지의

만약 ‘1960년대’에 청춘을 보낸 어르신들(주로 30,40년대 생)에게 ‘서울에서 춘천가는

아내가 마지막으로 먹고 싶어 했던 ‘설렁탕’의 기원이 되었던 동네. 그리고 그 운수

청춘열차’의 이미지는 바로 이 성동역에서 출발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노년세대에게

좋은날의 작가 현진건이 절필을 하고 가산을 탕진한 뒤 최후를 맞았던 동네. 재개발과

이 ‘청춘’의 기억은 현재에도 고스란히 이어지는 듯 보인다. 우리나라 수도권 전철역

도시재생을 꿈꾸는 2020년의 제기동은 선비들의 유서(由緖)깊음과 상인의

중 노인 무임승차비율(만65세 이상)이 가장 높은 역 중 하나가, 바로 성동역의 바통을

왁자함이, 무한한 미래 가능성과 무정한 회한(悔恨)이 공존하는 동네다.

이어받은 제기동역이었다. 2019년 기준 무임승차 비율이 55.64%로, 무임승차자가 유임승차자 보다 더 많았다4). 그래서 제기역은 이른바 ‘노인들의 홍대’로 불리운다5). 언론에서는 다양하고, 저렴한 가격의 ‘노인전용 즐길거리(인근의 콜라텍이나 노인전용 카페 등)’를 꼽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의 몸의 기억이다. 이 몸의 기억은 불안한 시절이 오면 어김없이 자신의 ‘즐거웠던 기억’을 소환한다. 복고의 법칙이다. 가볍게 떠날 수 있는 여행의 출발지. 삶은계란, 사이다와 함께 여행 출발을 준비하며, 친구를 기다리던 설레임의 역전(驛前). 저렴한 상품과 풍성한 먹거리가 널려있었던 몸의 기억이, 노년세대를 지금도 여전히 저렴하고 서민적인 즐길거리가 있는 제기동으로 불러모으고 있는 것이다. 1) 한민족문화대백화사전(http://encykorea.aks.ac.kr), <경춘철도주식회사>

5)‘노인들의 홍대’, 1호선 제기동역을 가다. 주간조선(2015.12.07.), ‘노인들이 홍대’ 제기동에서 물었

2) 위와 같은 자료

다 “졸혼 어때요”. 국민일보(2019.05.25.)

3) 한민족문화대백화사전(http://encykorea.aks.ac.kr), <서울경동시장>

6) 역사문제연구소(http://www.kistory.or.kr)

4) 나무위키(www.namu.wiki) <제기동역>

7) 서울한방진흥센터(http://kmedi.dd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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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고, 움직이고 달라지다

희망동네 제기동을 소개합니다 만난이: 임종만 제기동 주민자치회장 취재: 임정희, 심소영, 박혜진 / 기사: 임정희

선농단이에요. 그곳에 있는 향나무가 역사예요. 그리고

했는데, 구청장님과 국회의원, 시구 위원들이 주걱을

한의학 역사가 바로 한의학박물관(한방진흥센터)에

들고 같이 밥을 비비고, 동네 주민들이 나와서, 그

있어요. 거기에는 보제원 역사를 포함해서, 우리나라

비빔밥을 나눠 드시고 좋다고 하시고 기억에 많이

500년 한의학 역사가 허준을 기점으로 쓰이는 한약이

남아 있어요.” 그가 말하는 세 번째는 좋은 마을

허준식 처방을 쓰고 있잖아요. 또 옛날 미도파 자리에

사람들 덕분에 행복한 동네였다. 주민들과 같이 녹지를

성동역이라는 전차 역이 있었고, 그 개천 변으로 쭉

조성하고, 축제를 만들고, 비빔밥을 나눠 먹으며,

새마을 동네(부흥주택)가 있었어요. 그리고 제기동에는

서로에게 희망을 느끼는 제기동 주민이라면 정말 살만한

선농단보존회가 있어요. 그전에는 우리 제기동에서

동네임이 분명하다.

제를 다 지냈어요. 지금은 문화재청으로 넘어가서 나라 <임종만 제기동 주민자치회장>

행사가 돼 있는 거죠. 이게 동대문구에서는 제일 큰

젊은 층과 교류해야 해요 별도로 청소년 주민자치모임을 하려고 해요.

인터뷰, 마을이음 기획 회의할 때마다 섭외 1순위는

행사였어요. 선농단보존회와 주민자치회의가 화합해서

그 동네 주민자치위원장이다. 주민자치위원장만큼

역사와 제기동을 알리는 활동을 같이했으면 좋겠다고

동네를 잘 아는 사람은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생각해요.” 두 번째 이유는 왕이 와서 제사를 지내고

하고, 동네를 위하는 일이라면 절대 마다하지 않기

백성들과 설렁탕을 나누던 유서 깊은 동네라서였다. 왕이

제기동 살이 힘든 점은 없나요? “참여예산이라는 게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첫 인터뷰도 임종만(64세) 제기동

사라진 시대에도 그 제사를 주민들이 힘을 모아 다시

불합리하다고 생각해요. 제기동은 어르신들의 비중이

주민자치회장이다. 주변에 수소문해보니 일과를 제기동

지냈고, 그 덕분에 지금은 나라에서 잇고 동네 가장 큰

엄청 높은데 핸드폰을 조작할지 모르고, 온라인

곳곳을 돌며 시작하고, 만날 때마다 항상 눈가에 미소를

축제로 만든 자부심이 있었다.

접속도 어려운 사람들한테, 불합리한 거라고, 그냥 보여주기식이지. 그 정보를 충분히 알고, 그걸 토론할

띠고 있고, 동네 사람들과 같이 호흡하는 사람이라 한다.

기회들이 마련이 되어서 서로 같이 공유하고 서로

그의 제기동 살이와 자랑을 들어보자. “직업은 상업이고요. 제기동에선 한 30년 살았어요.

제기동이 살맛 나는 세 번째, 좋은 마을 사람들 덕분에 행복한 동네

소통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또 바람이 있다면 지역에 의욕 있으신 분들이 들어오셔서 봉사도 하고 우리 자치회의 일을 같이했으면 좋겠고, 지금 정릉천을

생업 외에 여러 직능단체장을 맡았었고, 현재는 주민자치회장을 2년째 하고 있습니다. 우리 동네가

“주민자치회로 가면서 완전히 민주적인 방법으로

살리자고 해서 용역에서 설계가 들어가 있어요.

살맛 나는 동네라는 것을 소개해 드리려고 이 자리에

주민자치회가 진행되기 때문에 상당히 보람을 많이

이게 빨리 결정이 돼서 주민들한테 좋은 휴식공간이

앉았습니다.”

느낍니다. 지금은 다양한 주민들이 모여서 함께

되었으면 해요. 주민들이 행복한 힐링 공간으로 빨리

만들어 가는데 큰 의미가 있죠. 주민들 의식을 좀 많이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또 젊은 층과 교류해야 해요.

바뀌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 동에는 공원녹지가

청소년 주민자치를 우리 모임에 분과를 만들든지 아니면

전혀 없는데, 정릉천에서 꽃 심기와 국화꽃 축제를

별도로 청소년 주민자치모임을 하려고 해요. 우리도

하면서 동네 주민들이 상당히 행복해하더라고요.

나이가 많이 들어가니까 어려워지고 우리 후배들이

주민자치회에서 이렇게 활동도 하고 같이 걸어가는 것이

한다면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싶어요. 젊은 후배들이 같이

“경동시장 같은 경우는 주 고객층이 60대에서

실질적으로 보이더라고요. 그런 부분들을 해나가면서

참여하고 나서서 활동해 준다면 그야말로 우리가 하고자

80대까지예요. 좀 안타까운 점은 젊은 사람들이 와서

상당히 뿌듯함을 느꼈고 행복한 동을 만들기 위해서

하는 ‘동네 자치’ 아니겠어요?

왕성하게 활동하고 사업도 같이하는 시장이 됐으면

노력을 많이 했죠.”

제기동이 살맛 나는 첫 번째 이유, 먹고 살기 좋은 동네

더 보탤 말이 없다. 임종만 회장 말대로 동네에서 만남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 우리 제기동에 많은 시장은 약령시에서부터 여기까지 서울시 특구여서 서울시에서

“제가 자치위원장 하면서 내건 슬로건이 희망동네

이어지고, 세대별 관계도 연결되어, 주민들이 이뤄내는

관리해요. 현재는 재래시장이 쇠퇴하고, 생업도

제기동입니다. 늘 희망이 보이고 좋은사람들이 모여

동네 자치가 실현되고, 제기동의 살맛 나는 희망이

저조해지고, 또 코로나까지 겹쳐서 상당한 어려움이

사는 동네라고 생각해서 희망동네 제기동이라고

곳곳에 전달되어, 동대문구 전체가 살맛 나는 동네로

많죠. 말 그대로 한파. 그러나 지금은 청량리나 제기동이

슬로건을 내걸었어요. 우리 동은 ‘한마음 대잔치’라고

거듭날 수 있기를.

상당히 발전 가능성이 있는 게 동북선이나 GTX 등

아주 큰 행사를 합니다. 우리 동네 주민들이 거의 다

교통편이 활성화되면서 상권으로 끌어올 수 있는

참여해서 도로를 통제하고 행사하는데 주민들이 너무

인프라가 구축되고 있다고 생각해요.” 임종만 회장의

좋아하시더라고요. 첫해는 우리가 비빔밥을 천명분을

이 생각하는 제기동이 살맛이 나는 첫 번째 이유는 먹고 살기 좋은 동네라서였다. 개발 후의 모습이 그의 생각과 같을진 모르겠지만, 일단 동의! 지난번 청량리 편 취재 때부터 느낀 것이지만, 제기동과 청량리 일대 시장만큼 싸고, 질 좋고, 없는 것 없는 시장을 보지 못했으니.

제기동이 살맛 나는 두 번째 이유, 왕이 와서 제사를 지내고 백성들과 설렁탕을 나누던 동네 “제기동은 그 유래가 선농단에서부터 시작된 거예요. 선농제례가 임금께서 친경의식을 직접 하시는 행사였었고, 또 의식이 끝나고 먹던 그 국밥이 설렁탕이었어요. 지금도 그 제사를 지내는 곳이

<제기동 한마음대잔치 비빔밥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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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즐거운인생 Yeah!" 만난이: 차영덕 제기동 감초마을 주민협의체 대표 취재: 임정희, 이연두, 박혜진, 심소영 / 글: 심소영 참고 기다리면 나한테 어떤 보석이 주어지더라 “사람들은 이렇게 갈등이 생기면 그거를 극복하는 게 아니라 외면해버리고 상처를 보려고 하지 않잖아요. 제가 좀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이었거든요. 사업하다 2번 실패를 하고, 이제 이렇게 세상 살다 보니까 성질이 많이 바뀌었어요. 지금은 무슨 일이 생기면 ‘참자’ 그 왜 책 같은 거 봐도 그냥 직설적으로 하는 거보다 하룻밤 자고 생각하면 또 생각이 달라지고 그러잖아요. 저 그런 생각을 해요. 참고 기다리면 나한테 어떤 보석이 주어지더라, 지금은 제가 되게 삶에 보람을 느끼고 살아요.”

<제기동 감초마을 도시재생 활성화 계획>

제기동 감초마을은 서울시의 도시재생 뉴딜사업 대상지다. 주로 소규모 주택정비, 주민공공이용시설, 생활환경개선, 청년과 노인화합 프로그램 등을 운영한다. 3년에 걸쳐 135억원이 투입되는 사업이라고 하니, 작은 동네에 큰 변화의 바람이 예상된다. 그 변화의 중심에 있는 주민협의체 대표 차영덕님(67세)을 만났다.

갈등상황을 극복하는 득도를 하신 것일까? 사업하기 전에 새마을부녀회에서 동네일을 하다, 사업으로 중단했고, 동네 돌아와 다시 시작한 이야기를 한다. 너무나 바쁜 일과를 보낸다. 여가생활로 수채화를 배워 어느 미술전에서 입상도 했고, 서예, 캘리그라피도 배운다. 그리고 운동을 정기적으로 하고, 손주를 돌보고, 몸아 안좋은 배우자를 돌본다. 또 감초마을 주민협의체 대표로서 동네에 필요한 것들을 살펴보고 의논하고, 대안을 찾는 일까지. 말 그대로 에너자이저 같다. 그런 힘을 가져다 주는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소통이 많아졌어요. 그런 반응들이 좋아요. “음...주민들과의 관계? 많이 좋아졌어요. 인사 잘 안하던 분들도 서로 인사하고, 소통이 많아졌어요. 그런 반응들이 좋아요. 또 제가 제기동에 산지 50년 정도 됐는데, 저희가 작년에 주민공모 사업을 하면서 뭘 할까 하다가 ‘방아다리’라는 책을 만들었어요. 처음에는 굉장히 힘들고 이걸 어떻게 만드나 생각했는데, 제기동 역사 흘러간 거, 인제 없어진 것도 많아요. 이 동네 약국도 없지, 목욕탕도 없지. <차영덕 제기동 감초마을주민협의체 대표>

근데 2년 8개월 만에 망했어

그리고 옛날에 ‘제기시장’ 이라는 곳이 있었거든요. 그것도 없어졌지. 근데 그런 발자취를 제가 알고 있는거, 또 여기저기 찾아 다니면서 구청 도움도 좀 받고 해서 옛날부터 현재까지를 만들었는데 굉장히 좋아하시더라고요. 저도 굉장히 보람도 느끼고 좋았어요.”

“남편이 귀금속 오래 해서 지금까지 돈 조금 나온 게 있어서, 그걸로 그냥 생활 해요. 있는거 먹고 살아요 (웃음) 저도 예전에 큰 사업을 했어요. 그니까 한 15년 전, 부평에 이북 음식하는 사람을 알았는데, 그분이 3개월을 하고 문을 닫은 게 있었어요. 근데 인테리어를 너무 예쁘게 잘 해놓은 거에요 내가 거기에 인테리어를 더 해가지고 정말 내가 꿈에 그리던 그럼 음식점을 했어요. 150평이 되는 식당을 했어요. ...중략... 근데 2년 8개월 만에 망했어 (웃음) 그 당시 구제역 이라는게 들어오고, 15년 전에 월세 250만원이면 인건비하고 엄청 나잖아요. 그런 아픔도 있어요. 그게 유일한 생업이었으면 다 망했잖아요. 어쩔뻔 했어요. 제가 천만 원 빚을 져서 집에 왔어요. 또 몇 년 후에 시누이가 종로 국일관 13층에서 패밀리레스토랑을 했는데, 같이 동업을 하자 해서 또 거기에서 1년을 했어요. (웃음) 1년 정도 하니까 시누이랑 트러블이 자꾸 생겨서 그냥 1년 만에 나왔어요.” 예사 활동력이 아니다. 150평의 식당, 패밀리 레스토랑까지. 활력뿐 아니라

<감초마을 주민협의체 총회>

서로 다 같이 웃으면서 밝은 내일의 꿈을 키우며 살아요

스케일도 남다른 분이다. 그렇다면 큰 음식점을 했었던 차영덕님은 어떻게 도시재생 주민협의체와의 인연이 궁금하다.

엄청난 활동에 비해 그가 느끼는 보람은 생각보다 큰게 아니었다. 행복, 보람, 즐거움....그런 것이 돈을 많이 벌고 사회에서 성공하는 그런 것보다는 작은

한동안은 나 지나가면은 벌레 보듯이 이렇게 사람들이 그랬거든

일상의 즐거움, 보람에서 행복을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 내년에 방아다리 근처에

“사업 접고 인제 집에 있는데, 친구가 ‘야 재개발에 한 번 나와 봐라’ 해서, 그래서

프로그램들도 구상 중이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차영덕대표가 부르고 있던 것

‘뭐 하는 건데?’ 그랬더니 동의서 도장 받는 거래요. 그래서 ‘나 안 해 그런 거’

같은 노랫가사가 생각났다. 서로 다 같이 웃으면서 밝은 내일의 꿈을 키우며

저는 성격이 좀 명랑 하잖아요. 그러니까 뭐 다단계, 보험, 이런 업계 권유 엄청

살아요~~오!즐거운 인생 Yeah!”

주민시설이 오픈되면, 남녀노소 다양한 주민들과 함께 할 여러 가지 수익사업과

많이 받았는데, 한 번도 안 해 봤어요. 그런데 그걸 하자고 그래서 ‘나 그거 못 해’ 했죠. 그래도 나오라 해서 ‘그걸 어떻게’ 하면서 나갔는데, 어찌하다 보니까

“파란하늘 맴도는 비둘기 날개처럼 우리들의 마음은 하늘을 날아가요

부위원장까지 하게 됐어요. 재개발도 안 되고, 욕도 많이 먹고, 동네 사람들한테 별

서로 다 같이 웃으면서 밝은 내일의 꿈을 키우며 살아요

흉한 욕도 많이 먹었어요. 근데 지금은 반대하신 분들과도 같이 임원으로 있으면서

오!영원한 친구

잘 지내고 있어요.” 이런 일을 겪은 사람이라면, 우울증에 빠지고 극복하기

오!행복한 마음

어려웠을것이라 생각했는데, 차영덕 대표는 달랐다.

오!즐거운 인생 Yeah!”

<나미-영원한 친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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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덕분에 이 한 많고 질곡 많은 삶을 잘 마무리했네. 고마워.” 만난이: 남궁청완 사회적협동조합 혜민서 이사장 취재: 심소영, 박혜진, 이연두 / 기사: 이연두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해 이 일을 합니다. 연고 없이 홀로 돌아가신 분과 행려 사자 분을 정성 다해 장례 치러드리고, 한 줌 가루가 되신 분을 내 손으로 유택동산에 모 셔드리고 돌아오면 등이 후끈해 지면서 잔잔한 울림이 와요. ‘아, 그래. 잘했어.’” 인 터뷰한 지 한참 지났지만, 남궁청완 이사장의 말은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있었다. 혜민서는 제기동에 있는 사회적협동조합으로, 홀로 사시는 어르신들의 복지를 위해 서 도시락 밑반찬 나눔과 문화적인 삶의 질의 향상, 그리고 자기 삶을 정리할 수 있는 엔딩노트 작성, 그리고 무연고사망자와 행려 사자의 장례를 치른다. ‘인생을 참으로 이해하면서 화술에도 뛰어난 사람'(출처: 생활의 발견/저자:임어당 /번역:김병철/범우사) 작가 임어당이 바로 그를 두고 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남 궁청완 이사장은 능변이었으며 열정적이고 확신에 차 있었다. 그는 노인복지와 죽 <혜민서 남궁청완 이사장>

은 자의 인권까지 돌보는 일상을 넘어, 본인 사후에는 시신을 기증까지 결정해 놓은 상태다. 나눔으로 점철된 그의 삶의 태도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타인의 고통에

시고 있어요. 엔딩노트 작성 사업도 존엄하게 살다가 존엄하게 내 문제를 마무리하

대한 이해와 그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삶은 어떻게 시작하고 지속할 수 있게 되었을

려고 하는 거예요. 혹시 한 번 생각해보셨나요? 사전장례식. 동부시립병원에서 김○

까?

○ 어르신이 사전장례식을 했어요. 자기 이름으로 직접 부고를 다 냈습니다. 단, 조건 이 있었죠. 나를 만나거든 울지 마라. 검정 옷 대신에 화려한 옷을 입고 와라. 죽기 전

그가 제기동에 오게 된 것은 80년대이다. 종로에서 피아노사를 운영하던 그는 형님

에 나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하고, 나와 같이 저녁 한 끼 하자. 그렇게 사전장례식을

의 권유로 한약 업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18년 동안 약령시 협회 일을 하면서 약

치르고 2개월 만에 돌아가셨어요. 사후 결정권을 행사하신 거지요. 불필요한 연명치

령시 한방문화축제를 처음 도입해 18년동안 쉼없이 계속했고, 지중화(전선과 전봇

료를 거부할 수도 있고요. 나아가 시신 기부를 한다든지. 사후에 나를 어떻게 하라는

대를 지하로 매설하여 없애는) 사업, 약령시 상징문 등 약령시의 골간을 만들어낸다.

사후결정권을 행사하는 이런 일을 하는 것을 우리는 ‘아모르 파티’라고 이름 붙였어

신용협동조합에서 협동조합운동을 시작하고, JC 라이온스 같은 NGO 단체에서 봉

요.

사활동을 꾸준히 한다. 또 협동조합인답게 사회적협동조합 혜민서를 설립하여 지역 어르신들을 위한 활동과 제기동의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제기동 역사를 알리 는 일도 함께 하고 있다. 그렇게 일과 봉사와 시민운동 등 엄청난 일을 동시에 진행 하고 있음에도, 마라톤 풀코스를 46번이나 완주한 러너이기도 하다. 그의 살아온 이 야기를 들으며 어른을 만나고 싶다는 오래된 갈증을 풀 수 있었다. 그 갈증은 책에서

Q. 혜민서 활동들은 SNS상으로만 봐도 그 가치가 눈에 띕니다. 그런 부분에서 앞서가는 협동조합이 뒤따라가는 협동조합에 어떤 조언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깨달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 살아내어 체득한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어른을 만나

협동조합이 좋은 일이긴 하지만 너무 리더 위주라면 성공 못 합니다. 그래서 협동조

고 싶다는 갈증이었다. 마른 목을 축여준 그와의 대화를 축약하기에 내 실력도 부족

합 선구자들은 이렇게 강조합니다. 첫 번째도 교육, 두 번째도 교육, 그리고 민주적인

하지만, 내가 그와의 대화에서 느낀 감동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어 이제 그의 말을 옮

토론 절차를 통해 부지런히 가꾸고 만들어나가는 거죠. 저희 혜민서 수혜자가 봉사

겨보려 한다.

자로 전환된 분이 두 분 있어요. 이분들의 삶이 바뀌었어요. 자포자기했던 분이 함께 나누고 봉사하는 분으로요.

Q. 약령시 협회장 이외에 지금도 다른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신데요. 혜민서 이외 활동을 소개해주신다면 어떤 활동들이 있을까요?

나는 미더덕으로 만든 장아찌를 먹고 맛이 기가 막히더라 그러면 그 사람이 뭐라 그 러겠어요. ‘그래, 너는 잘 먹고 잘사는구나.’ 서로 동떨어지잖아요. 미더덕 장아찌를

신용협동조합 관련 일을 하고 있습니다. 신협 운동의 정체성, 협동조합 정신 이런 것 들을 강조하는데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그 협동조합의 가치를 찾고 정 신을 잊지 않게 하려고 신협 직원들을 독려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Q. 협동조합의 가치와 정신은 어디에 있다고 보시나요? 협동조합의 가치와 정신은 나눔이에요. 1인은 만인을 위해 만인은 1인을 위해 그렇 게 협동하는 것이 협동조합이죠. 나 혼자는 어렵잖아요. 나 혼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근데 함께하면 그것을 넘고 이룰 수가 있어요.

Q. 지난 5년간 혜민서 활동을 하시면서 어떤 변화를 눈으로 확인하시 는지 궁금합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변화는 없어요. 수치로 나오는 것도 없어요. 협동조합 운동은 수치가 아닙니다. 가치죠. 우리가 동대문구에 계시는 어른들을 찾아내고 그 마지막 에 문화적인 삶의 질을 향상해드리는 그 일을 하고 싶어서 육십구 분의 부모님을 모

<마라토너 남궁청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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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내 삶에 깊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주고 내 삶에 들어와서 나를 이해하는 거죠. 함께 먹으면서 ‘어때 바다 향기가 퍼지지?’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 서로 같은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때 그 사람이 확 바뀌게 되죠. 원주협동조합을 이끈 장일순 선생님께 서도 당신 집에 온 사람을 한 번도 마루에서 밥을 먹인 적이 없다고 해요. 언제나 당 신 방으로, 문을 활짝 열어주고, 그렇게 다가가야 해요. 그렇게 내 삶에 깊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주고 내 삶에 들어와서 나를 이해하는 거죠. 그렇게 했을 때 진정한 동지애 이런 것이 생겨나요.

Q. 그렇게 일해오실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타고 나는 것 같습니다. (웃음) 나대는 성질, 남을 위해서 뭔가 하지 않으면 못 사는 성질 이런 게 타고 난 것 같아요.

<어르신 잔치>

Q. 그래도 일을 해오시다 보면 사람에 대해 여러 가지 안 좋은 면들도 보시게 되고 문제들도 생기곤 할 텐데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니까요. 그럴 때 개인적인 상처를 받지 않으시는지 어떻게 극복을 하시는지 알 고 싶습니다. 저처럼 협동조합을 이끄시는 분들과 만나면 가장 크게 공감하는 것이 ‘아. 얼마나 힘 드십니까.’에요. 내가 힘들지 않으면 그분들이 힘들 거라는 걸 몰라요. 모든 일에 사 람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제일 상처를 많이 주는 사람이 가장 가까운 동료이고 동지 에요. 같이 협동조합을 이끌어 가시는 분들이 방긋방긋 웃는다고 ‘아 저 사람 아무 걱정 없겠구나’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 저 사람도 속이 썩어 문드러질 텐데도

<매주 목요일 독거어르신 반찬 봉사 봉사자들과>

날 보며 웃어주는구나’ 하는 거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교육 또 교육, 토론 이 런 그것밖에 없어요. 그런데도 사람들이 속을 썩이죠. 그럴 때는 어제 장례를 모셨던 그분을 떠올립니다. 그분은 하느님 품에 잘 도착했을까. 그분이 위에서 나를 보실 거 아니에요. 그리고 이렇게 말씀해주시죠. "자네 덕분에 이 한 많고 질곡 많은 삶을 잘 마무리했네. 고마워.” 남궁청완 이사장은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고인의 삶을 돌아보고, 추모하고, 명복을 빌며 인간으로서 마지막 예를 갖춰 올린다. 선농단이있는 제기동이라서인가? 하늘에 예를 올리고 백성과 설렁탕을 나누던 임금의 마음이 이곳에 깃든 것 같다. <작은 마을 장례식>

<엔딩노트 강좌/함께 한 주민 그리고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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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고, 움직이고 달라지다

“정릉천 변의 워터파크를 보신 적 있나요?”

만난이: 남궁명화 와락 재기발랄 맘스대표 취재, 글: 심소영

몇 해 전 제기동을 지나다 다리 밑 워터파크를 보았다.

2017·2018년 서울시 시민 누리 공간 사업선정

이름하여 ‘와락 워터파크!’ 누가 만들었나 했더니 제기동 엄마들 모임인 ‘와락 제기발랄 맘스’였다.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운영되지 않았지만, 플리마켓, 전래놀이, 버스킹 공연 등 주민들의 다양한 놀이터로

“그리고 2017·2018년도에 서울시 시민 누리 공간

변신하는 정릉천은 제기동 주민들의 재미난 쉼터다.

사업에 선정되었어요. 공간이 아닌 밖에 천에서 하는 거는 저희가 아마 첫 번째였던 거 같아요. 시민 누리

제기동의 감초! 남궁명화 와락 제기발랄 맘스 대표 남궁명화(51)님은 약령시에서 한약 유통회사를 하면서 한약 재료로 만든 다양한 친환경 생활 세제와 화장품을 만드는 강사다.

공간 예산을 받아서 거기서 이제 수영장도 만들어 <남궁명화_인터뷰 중>

제기동 약령시장이 천연생활 세제와 화장품의 클러스터가 될지도~

여기는 1980년대 그때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거든요. 제가 여기서는 젊은 축에 속해요. 개인적으로는 젊은 사람들이 좀 유입되고 활성화할 수 있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일상으로 연결되는 먹고, 바르고, 향기 나고, 닦아내는 것으로 접목하는 쪽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변화를 함께 만들고자 했으나, 그 변화의 바람을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온갖 인간 생활에 편리한 것들 덕분에 생존의 위험을 느끼고 무얼 해야 할지 찾는 이들이 있다. 모이고 움직이면 달라진다. 곧 약령시장이 천연생활 동네 감초. 어감이 좋다. 제기동 동네 감초의 역할을

세제와 화장품의 클러스터가 될지도 모르겠다.

물으니, 한약재를 이용한 천연비누 & 천연화장품 제조 강사를 14년동안 하면서 동대문구 여기저기를 누빈다. 거기다 학교 학부모회, 와락! 제기발랄맘스 대표,

플리마켓부터 워트파크까지 매년 여름 한때 멀티플렉스 놀이터가 되는 그곳 어떻게 만들게

2015년 동대문 사회적 경제 한방재료를 이용한 주방세제 공모, 우수상 수상!

정릉천 변 놀이터는 말 그대로 동네 사람이 만든 동네

2020 코로나로 지치고 힘든 주민을 위해 버스킹 공연 다시 하고파요. 2020년 여름. 정릉천 놀이터는 개장하지 않았다. 코로나 너무 원망스럽다. 남궁명화님은 이제 제기동 주민자치회 마을 교육 분과에서 지속해서 놀이터를 운영할 방법을 찾고 있다. “저번에 JTBC 방송사에서 코로나로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비긴 어게인’ 공연했잖아요. 정릉천 변에서 저희가 먼저 했었어요. 올해 힘든 동네 사람들을 위해 정릉천 버스킹을 다시 하고 싶어요.”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습만 상상해도 행복할 것 같다는 그는 계속 주민들의 놀 거리를 만들기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을 것 같다.

2015년 마을 예술창작소 지원사업에서 떨어지고, 우리 힘으로 놀아보자 했어요.

제기동 주민자치회 위원, 동대문 협치 위원 등 가히 제기동의 감초라 할만하다.

나와서 즐길 수 있는 정릉천 놀이터의 시작이었죠.”

그런데 왜 이런 좋은 사업 아이템을 추진하지 못했을까? “세상은 정말 급속도로변하고 있는데,

<남궁명화_천연세제 만들기 강의 중>

해보면서 마을에 어린아이부터 남녀노소 주민이 모두

쉼터였다.

동네 거주기간은 32년, 동네에서는 약방의 감초처럼 온 동네 돌아다니면서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보고, 오락실도 만들어 보고, 버스킹도 해보고 전시회도

되었을까? “제기동은 대부분이 상업지구인 특수한 곳이에요. 그래서 아이들이 놀 수 있거나 공간적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게 너무 열악해요. 아이들한테

한약상을 한다고 모두 한약 재료를 이용한 천연제품

놀 거리 볼거리를 좀 제공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강사가 되는 건 아닐 텐데, 관심을 갖게 된 계기나

정릉천 변에 제 작업실이 있었는데, 2015년에 초등학교

오랜 시간 활동하게 된 동기가 궁금했다. “천연 DIY

엄마들이랑 의기투합해서 마을 예술창작소를

제품들이 2007년부터 조금씩 붐이 일어나서, 그런

지원했죠. 심사받으면서 힘들었어요. 장소가 적합하지

약재 재료를 비누에다 접목한다고 한약 상가 쪽으로

않다는 얘기, 예산의 효율성에 관한 얘기, 같이

찾으러 나오시는 손님들이 있었어요. 그때 제 피부도

준비한 엄마들이 언짢아 한 부분이 있었어요. 결국은

되게 예민했거든요. 그런 찰나에 그 손님들한테

탈락하고, 그 엄마들이 우리 힘으로 놀아보자 했어요.

설명을 좀 해야 하고, 저도 쓰고 싶어서 준비했던

그래서 2015년에 처음으로 아나바다 플리마켓을

게 지금까지 이어졌어요. 대부분 허브 같은 재료를

열었어요. 그런데 호응이 좋은 거예요. 2016년도에

쓰는데, 제 경우는 한약 재료와 접목해서 만들어요.

좀 더 크게. 2017년도에는 동대문사회복지관과 같이

2015년도에 동대문 사회적 경제에서 한방재료를

축제를 계획하면서 정릉천에서 플리마켓으로 커진

이용한 주방세제를 공모했는데, 그때 우수상을 탔어요.

거죠.” 제기동 엄마들에게 마을 예술창작소 탈락은 더

그때를 계기로 이 사업을 좀 활성화하고 싶었고,

힘을 모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쭉 몇 년간

제기동에서 뿌리내리고 싶었는데, 시기상조였는지

놀이터가 작은 공간을 넘어서 정릉천 변까지 확장된

제품화하지는 못했어요, 또 화장품법도 바뀌고….

것을 보면 말 그대로 전화위복이라 해야 하나.

동네 사람들 활동들을 연결할 거점 공간이 너무나 절실하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물으니, 이런 동네 사람들 활동을 연결할 거점 공간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사재를 털어 만든 작업공간에서의 커뮤니티를 운영하면서 작은 공간이나마 공간이 있을 때와 없을 때는 너무나 큰 차이가 난다고 했다. 이제까지 취재한 다른 동네에서도 들었던 말들이다. 주민들이 편하게 활용할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남궁명화님의 이야기를 정리하며 마을에서 커뮤니티 공간도 만들고, 한약재를 이용한 친환경 생활재를 만들어 유통하는 마을사업도 하고, 이런 성공의 열매로 남녀노소 누구나의 재미난 놀이터도 만들어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상상을 한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계속 공부하고, 기후위기와 관련돼서 천연제품을 생산할 수 있도록 하면 방향성이 맞지 않을까 생각해요.” 굉장히 귀가 솔깃해진다. <와락 워터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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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고, 움직이고 달라지다

제기동을 예술동으로 만난이: 공혜진 제기동 마을예술창작소 대표 취재: 임정희, 박혜진 / 기사: 임정희

업혀져 있던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가고, 악기를 같이 배 우며 연습하던 장소는 사랑방이 됐네요. 지금까지의 활 동이 동화같이 연주했고 그런 음악이 마을로 스며들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였던 계기가 된 것 같아 요.” 연주실력은 문제가 안되었다. 하겠다는 마음만 있다면 함께 할 수 있고, 배울 수 있고, 연주할 수 있었다. 문제 는 다른 곳에 있었다. 역시 가장 힘들었던 점은 공간. 차

<공혜진 조이풀챔버콰이어 지휘자>

<필리핀 봉사활동>

를 타고 멀리 가서 연습하기도 하고, 어린이집이나, 교

고 춤추는 팀을 국내 최초로 내가 한번 디자인 해보자

회, 학교 등 연습실로 빌려 쓸 수 있는 곳은 다 빌려 써

하고, 막 죽어라 연습했죠. 그래서 가진 첫 번째 무대가

봤다 한다. 그렇게 꾸준하게 활동하니, 창작소라는 우

악기와 합창 안무로 편곡한 라데츠키행진곡이에요.”

리만의 공간도 생겼고, 마을 활동을 함께 하면서 동대

많은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악기 하나쯤은 연주하고 싶

문종합사회복지관에서 소강당을 연습실로 지원해주고,

어 한다. 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여유가 없어서, 자신이

합창, 합주 모두 조화로운 화음이 필수다. 전문가가 아

여러 단체와 함께 공유하니, 그런 어려움도 조금씩 풀

없어서, 대부분 마음만 가지고 산다. 그런 마을사람들

닌 평범한 주민들이니 만큼 실력 이전에 멤버들의 관계

려간다고 했다.

도 꽤 좋아야 할 것 같다. 15년이 넘게 관계를 유지하며

과 모이고, 배우고, 마을 곳곳에서 연주하고, 앙상블로 함께하는 이가 제기동에 있다. 마을예술창작소 운영자

조직을 운영할 수 있었던 비결을 물었다.

이자 ‘조이풀챔버콰이어’의 지휘자인 공혜진씨다.

마을예술창작소 활동으로 우리끼리만 한다는 오명을 벗고

다 같이 이루어낸 작은 공동체라고 생각해요.

“저는 음악강사 겸 오케스트라 지휘자입니다. 제가 처

“우리는 15년 동안 함께해서 관계가 끈끈했고 실력도

음 동대문에 입성한 게 올해로 17년이고 그동안 동네에

“제가 인복이 많아요. 마음이 따뜻하고, 희생하면서 헌

늘었어요. 그래서 잘하는 사람만 하고, 그들끼리만 한

서 사람들과 함께 음악을 나누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신하는 제기동 사람들을 만나서 여기까지 온 거죠. 우리

다는 선입견이 있었죠. 마을사업이 가장 중요한 게 다

는 서로 대화를 많이 해요. 저뿐 아이라 다 같이 이루어

같이 하는 공공성 지속성 연속성 자율성이 중요하잖아

낸 작은 공동체라고 생각해요. 제가 무남독녀 외동딸이

요. 마을예술창작소 활동으로 우리끼리만 한다는 오명

라, 모난 부분도 있었고, 음악 하는 사람 특유의 고집도

을 벗고, 지금은 시니어, 대학생 연령층이 다양해지면서

있었을 텐데, 이해하며 감싸주시고, 서로 의견을 내면서

좀 뿌듯함을 느꼈죠.” 무려 15년 동안 함께 만든 음악 “처음에는 아는 언니가 스튜디오를 차렸다고 해서 구경

음악외에도 함께 할 것을 찾아봤어요. 그래서 함께 쪽

공동체 ‘조이풀챔버콰이어’는 마을예술창작소를 통해

왔었는데, 개인적인 이유로 운영이 어려워져서 제가 덜

방촌 가서 배식하고 설거지하고, 그해 남은 예산은 한

동네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고, 올해 3년 차에는

컥 인수하게 되었어요. 거기서 저 혼자 악기연습을 했는

겨울에 연탄배달도 같이했어요.”

손을 잡아준 주민들과 함께 음악을 만들어 가며, 음악

데, 아기를 업은 한 엄마가 3개월 동안 계속 가르쳐 달

의 즐거움을 공유하고 있다.

그럼 악기사 오세요. 그러면 제가 가르쳐드릴 게요.

라고 오시는 거예요. 그래서 악기는 있냐고 했더니 악기 도 없다 해서 제가 ‘그럼 악기 사 오세요. 그러면 가르쳐

고, 아이들 가르쳐주는 활동으로 필리핀만 여섯 일곱 번

한국의 ‘앨 시스테마’인가?

드릴게요.’ 했더니 진짜로 사 온 거예요. 그런데 단둘이

같이갔다 왔어요. 다 자비로. 또 지금은 발달장애인 프 로그램을 토요일마다 해요. 이번에 처음으로 강사비지

연습하니까 부담스러웠는지 친구도 관심 있어 한다고

‘조이챔버콰이어’를 검색해보니, 다양한 공연과 문화잡

데려오시면서 인원이 갑자기 4명, 5명, 7명이 되었어요.

지 인터뷰 등 활동이 아주 많은 팀이었다. 마을에서 출

발한 공연하는 팀이 이렇게 많은 공연과 입소문 나기 쉽지 않았을 텐데, 그만큼 실력이 출중한 것인가? “실력

음악이 마을로 스며들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였던 계기

“저희가 리코더와 오카리나 몇백 개씩 가져가 선물주

원도 받고요”

나에게 제기동이란 예술동이다.

이란게 아예 없었을 때 한국합창연합회 회장님이 연습

“그저 이 복잡하고 험한 세상에 서 있는 지역 주민들이

실을 방문하신 적이 있어요. 동네사람들이...(웃음) 정

구분없이 스스럼없이 창작소에 모여 공감하고 나누며

말 좁은데 다닥다닥 붙어서...기가막히셨나봐요. 한국 “그렇게 함께하는 분들이 부업을 하시기에 형편 때문인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힘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잠

의 ‘앨 시스테마’인가? 하시면서. 그때가 5년 전인데, 제

가 해서 이유를 물었더니, ‘무언가 헛헛해서 한다.’라고

깐만 왔다가도 다 쏟아 놓을 수 있는 치유의 공간으로

가 바이올린, 첼로, 노래 다 가르치면서 했거든요. ...중

하더라고요. ‘그러면 나랑 근처 실버케어센터 가서 우리

오래 남길 바래요. 그리고 청소년들이 쉴 수 있는 공유

략...그 교수님이 협회 패스티벌에 초대해주셨어요. 엄

연주를 한번 들려 드리자.’ 제안했어요. 그렇게 봉사연

공간도 만들고 싶어요. 현재 제기동이 도시재생사업이

청난 팀들이 초대된다고 할 수 있겠냐 걱정하시면서 기

주가 시작됐죠. 처음에는 플룻앙상블로 시작했고, 그때

진행되고 있는데, 저는 주민들의 마음을 예술로 꽃피우

획해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악기 연주하면서 노래하

게 하도록 디자인하는 것도 도시재생이라 생각해요. 그 래서 나에게 제기동이란 예술동이다. 예술로 디자인하 는 도시의 음악은 앙상블이니까, 조화를 이루어내는 화 음처럼 멋진 제기 앙상블 예술동이 될 거에요.” 건물이나 골목 디자인을 넘어서, 사람이 힐링할 수 있는 골목과 건물과 동네를 디자인하는 도시재생, 그가 꿈꾸 는 동네가 동대문구 전체로 퍼져 사람들의 마음을 힐링 시켜주고 예술로 디자인되어 음악으로 함께하고 즐기 며, 성장하는 마을예술동이 되기를.

<죠이플챔버콰이어 공연> 1) 엘 시스테마(El Sistema)는 베네수엘라의 국립 음악 교육 재단이다. 마약과 범죄, 포르노, 총기범죄에 노출된 빈민가 아이들의 삶을 음악으로 바꿔놓은 엘 시스테마는 아이들에게 악기를 주고 음악을 가르쳐 오케스트라 활동을 지원하는 무 상 음악 예술 교육이다. 경제학자인 동시에 피아니스트, 오케스트라 지휘자, 교육학자, 정치가인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José Antonio Abreu)는 베네수엘라의 열악한 교육 환경과 사회를 바꾸는 방법으로 정부의 지원을 받아 엘 시스테마를 설립한다. 출처: https://froma.co.kr/320 [fromA 프럼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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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서 놀고, 즐기고, 배울 곳

“언택트 시대지만 커뮤니티는 계속됩니다” 만난이: 동대문종합사회복지관 진태진 관장, 서민정 사회복지사 취재: 심소영, 박혜진, 이연두 / 기사: 심소영

수년전 동대문구 볼거리, 즐길 거리를 소개해보자며 탐방다닐 때 제기동에서는 정릉천변, 선농단, 제기성당을 찾았었다. 그 주변을 거닐다 수영장도 있는 아주 큰 사회복지관 만났다. 동대문종합사회복지관(줄임_동사복)이다. 놀랐다. 이곳에 이렇게 큰 복지관이 떠억하니... 외관에서 한 번, 내부 시설에서 두 번 놀랐었다. 2000년 7월 개관하여 올해 20살이 된 동대문종합사회복지관, 긴 집중호우와 코로나로 지쳐있던 2020년 8월 다시 찾았다. “앞뒤가 똑같은 진태진 입니다.” 동대문종합사회복지관 관장의 자기소개다. 정해진 멘트같았지만 큰 웃음으로 인터뷰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질문하려는 순간, 진택진 관장은 주민들이 충분히 즐길만한 꺼리가 많다는 점을 알리고 싶다며 제기동에 대해 크게 세 가지 역사가 자랑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첫째는 선농단, 두 번째는 한약상가와 한방진흥센터, 세 번째는 의외(마지막도 복지관이 아니었다.)로 예전에 고대 앞에 있던 민박촌이다. 역사적 의미를 물었다. “고대와 연접하면서 민주화 때 여러 가지 투쟁했을 때 도망다녔던, 물론 공부도하는 민박촌이었어요. 근방에 제기동에 재개발 대한 욕구들도 많았지만, 여기 계시는

<진택진 동대문구종합사회복지관장>

분들이 그럼 학생민박해서 여태 살았는데, 그런 생활공간 없어지고 집만 있으면 뭐

있지요. 마을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함께 못하는 것에 소외감을 느끼지만,

하냐는 반대가 많아서 고대와 근접한 요~근처 재개발이 지연되었지요.” 이렇게 미리

부담스러워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마을 공동체 사랑방들이 많이 사라지고

인터뷰를 준비해주시니 인터뷰 장인을 만난 것 같다.

있어요.” 복지관은 이런 사랑방이 없어지는 시대에 사랑방 역할을 자청한다.

마을 공동체 사랑방들이 많이 사라지고 있어요.

“무엇보다 종합사회복지관은 지역사회 욕구가 무엇인지 파악이 필요한데요. 현재는 세 가지 큰 욕구들로 파악됩니다. 그 첫 번째가 이제 문화·여가적인 욕구가

복지관 소개를 부탁하니, 마을사랑방이 사라지고 있음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많이 증대되고 있어요. 그다음 교육, 그다음은 경제적 서비스지원이죠. 독거어르신

“우리가 4차 산업혁명, 코로나 사태를 경험하면서, 비대면 사회로 점점 변모하고

식사배달이라던지 경제적 일자리지원 등 이런 세 가지 꼭짓점이 있고 이런 지역

<찾아가는 복지관 서비스와 관내 행사에 참여한 주민들>

<찾아가는 복지관 서비스와 관내 행사에 참여한 주민들>

<동대문종합사회복지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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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분들께 적절한 도움이 충분히 닿도록 해서 소외받는 분들이 없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 욕구에 부응하기 위해서 저희가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운영하고 있어요.” 이곳의 특장점으로 유아체능단과 수영장, 체육관 등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의

언택트 시대지만 연결되는 동대문구를 만들고 있는 동대문종합사회복지관

체력단련을 지원하는 동시에 교육과 지역주민의 모임이 가능한 멀티플랙스 공간임을 자처한다. “저희가 대관 사업을 하고 있고요. 마을 총회나 큰 행사가

이외에도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학교밖 청소년과 만나는 활동도 꾸준히

있을 때 여기서, 또 선거 때는 여기를 투표장으로 활용하고 있고요. 지역에 함께 할

하고 있고, 복지관이 지역사회와 맺고 있는 네트워크는 상당해 보였다. 서민정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없는데, 여러 집회 같은 상황이나 문화활동 등 저희 기관해서

사회복지사에게 다양한 사회사업 소개와 동네사람 활동소개를 부탁했다.

많이 해요.” 그래서 동대문종합사회복지관은 영문명이 social welfare center가 아닌 community center인가보다. “코로나가 없었을 때 수영장 일평균 이용객들이

“복지관에는 놀이, 안전, 나눔, 여성리더 등 제기동의 마을의제와 관련한 주민모임을

2,500명입니다. 그만큼 많은 분들이 오셔서 이런 네트워크 커뮤니티센터 이용에

육성하고, 맞춤형으로 지원하는 함께가요 통통마을로 라는 사업이 있어요. 그중

만족하고 가십니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운영이 안 되다 보니까, 운영에 큰 애로

‘제잘제잘’이라는 모임은 아이들이 안전하게 뛰어놀 수 있는 마을과 마을활동에

사항이 있죠. 그런데 지금도 계속해서 문의가 와요. 왜 수영장 빨리 안 하냐고,

대해 고민하고 있는 제기동의 어머님들로 구성된 모임인데, ‘제기동에서 잘 놀아야

그런데 아직까지 미정입니다.”

제기동에서 잘 자라요’라는 모임 명도 어머님들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졌어요. ‘제잘제잘’은 방치되어 아이들이 찾지 않는 제기동의 방아다리놀이터라는 곳을

“2000년 7월에 개관했을 때는 규모상으로서는 강남에 있는 태화복지관과 우리

중심으로 동네 아이들이 다 함께 놀고, 돌볼 수 있는 놀이 활동을 작년부터

복지관이 규모면에서 1,2위를 다퉜어요. 제기동에 위치 하게 된 것은 조금 재미난

펼쳐가고 있어요. 또 하나 소개해드리고 싶은 주민모임은 맘딩클럽이란 모임인데요,

얘기지만 당시 건축부지를 매입하는데 있어서 여러가지 가격, 진입로 부분이나 이런

맘딩클럽은 한부모 여성가장 어머님들이 만들어가는 모임이예요. 이 모임에서

것들을 볼 때 나름 편안했었데요. 그래서 이 곳에 자리를 하게 되었다고 해요.”

어머니들은 스스로 컴퓨터를 배우고, 배운 것을 도움이 필요한 경계선 지능

동대문구 전체를 두고 봤을 때는 한참 왼쪽에 있어 동대문 주민들이 이용하기

청소년들에게 가르치시는 활동을 하고 있어요. 우리 복지관은 복지서비스의

어렵다 생각했는데...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도심과 가깝고, 제기역이 가까워

수혜자나 대상자처럼 사회적 약자도 더욱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어가는데 기여하는

접근이 쉬웠을 수 있었겠구나 싶다.

건강한 주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많이 노력하고 있어요.” “그리고 앞서 관장님도 말씀하셨지만 우리 복지관은 지역의 사랑방으로 커뮤니티센터, 허브의 역할을 다하고자 노력하고 있어요. 그 일환 중에 하나가 주민이 있는 곳에 복지관이 찾아가는 것으로 운영방식을 변화시키는 거예요. 예를 들어 학교를 중간에 그만두는 청소년들은 아무리 복지관에서 좋은 프로그램과 재미있는 활동을 한다고 해도 절대 복지관으로 찾아오지 않아요. 그래서 과거처럼 무조건 복지관으로 오시라는 것은 능사는 아니다 해서 필요한 분들께 적절한 도움이 충분히 닿도록 해서 소외받는 분들이 없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짝짝짝!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있었다. 사회복지관이 일이 많고 고되기로 이름난 곳이기에 찾아다니는 서비스하기 힘들텐데,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닿게하여 소외받지 않게하는 것, 그리하여 언택트 시대지만 연결되는 동대문구를 만들고 있는 동대문종합사회복지관의 미션이 성공하여 널리널리 퍼지길 기원한다.

<서민정 사회복지사>

복지관 프로그램 소개 [아동·청소년 사업] 1. 다같이가가치 : 학업중단(학교밖) 및 중단위기 청소년을 대상으로 맞춤형 사례관리를 통해 학교 안팎구분없이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 2. 더불어더블업: 경계선지능(IQ 71~84) 및 경계선 지능 의심 아동을 대상으로 개별화된 교육과 훈련으로 성공적인 자립과 사회적응, 사회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 3. 한울타리: 경계선지능 초·중학생을 대상으로 방과후 야간보호(오후 4시~10시) 및 생애주기별 맞춤형 프로그램

[성인] 청년숲: 경계선지능 청년을 대상으로 맞춤형 직업훈련를 제공하여 사회구성원으로써 당당히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자립지원 프로젝트 함께가요 통통마을로 : 마을돌봄, 놀거리, 여성리더와 같은 공익성을 가진 제기동 내 주민모임들의 활동과 성장 지원 및 연대의 장 제공 그 외 자활근로사업, 어르신 급식, 노인활동서비스등 취약계층을 위한 다양한 사회사업이 미련되어 있다.

고려대 정문 앞 “고대앞마을”은 2019년 10월에 국토부 ‘우리동네살리기’형 도시재생 뉴딜사업지로 선정되었습니다. 주민들의 희망지사업 활동을 통해 선정되었고, 우리 마을을 다시 살기 좋고, 살고 싶은 마을로 만들고자 합니다. 2022년까지 주민공동체 형성, 주민커뮤니티시설 조성, 상생거리 조성, 집수리 등 주거환경개선사업을 진행할 계획입니다.

사업을 수행하는 “고대앞마을 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는 고려대 정문 정면, 버스 정류장 옆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현재 마을의 미래상을 그려보는 “고대앞 마을학교”, 주민공모사업, 주민협의체 회원 가입 등을 받고 있습니다. 평일 09-18시에 열려 있으며, 주민사랑방의 역할 또한 하고 있으니 주민 여러분의 많은 방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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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서 놀고, 즐기고, 배울 곳

코로나 위기 시대 건강과 힐링의 서울약령시 & 서울 한방진흥센터 만난이:서보영, 위원범, 윤성준 취재: 오은형, 심소영, 박혜진 / 기사: 오은형 제기역 2번 출구로 나와 밀집한 상점들을 따라 걸으면 ‘서울약령시’ 현판을 건 전통 미를 담은 커다란 문을 만난다. 약령중앙로라는 이 길을 따라 들어가니 옆으로 뻗은 골목까지 한약 냄새가 가득하고 크고 작은 한약재 상가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 오래된 한약 상가들 사이에 2017년 설립된 서울 한방진흥센터가 있다. 코로나 19로 이곳 또한 운영이 중단되고 부분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가운데 인터뷰, 마을이음 제 기동편에서는 우리 동네에서 모이고, 즐기고, 배울 곳으로 서울 한방진흥센터의 한방 문화체험공간을 담아 보았다.

한방복합문화센터 서울 한방진흥센터 이곳은 서울약령시의 공영주차장을 만들면서 편의시설을 건립하려고 했는데, 한방 산업 활성화를 위해 복합문화센터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한의약박물관이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동대문구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서보영 주무관] 밖에서 시장의 모습을 보다가 안쪽으로 들어오면 웅장하고 아름다운 한옥이 보인 다. 시장 안에 있어서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에 주는 <서울 한방진흥센터 전경>

2018년 국토 대전 대통령상을 받았다. 마치 경주에 와있는 것 같은 낯선 웅장함으로 만나지만, 몰랐던 한의학 역사 그리고 어디선가 본 것 같은 한방재료들, 또 다양한 한방체험과 만나면 누군가는 이제야 알게 된 것이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한방진흥센터 1층에서 보제원과 약령시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 체험장과 기념품 상 점이 있는데, 상시적으로는 대장금 드라마에서 내의원 사람들이 입었던 것과 비슷한 전통의상체험을 할 수 있다. 2층으로 올라가면 한의약박물관(한의약 의서와 의약 기 기의 유물 → 한의약 약재 전시 → 약초마을 → 음식궁합과 한방차 레시피 →약초 향주머니 체험)이 있고, 밖에는 힐링 족욕체험과 약초 텃밭이 있다. 3층으로 가면 약 선요리 체험관 보제원 한방이동진료실과 한방체험실이 있다. 한방진흥센터 입구에 있는 한방카페(연잎밥과 전통차와 다양한 음료)를 보태면 한방 멀티플렉스 관이라 할만하다. 개관준비부터 현재까지 활동하는 서보영 주무관은 이곳에서 일하면서 느끼는 가장 큰 보람으로 센터의 성장을 꼽았다. 그런데 개인적 보람도 다르지 않았다. “개인적인 보람은 일반 회사에서 경험하지 못한 특수한 한방이라는 것과 시장 안에서 힘들지만 해내고 있다는 것이 스스로 성장하고 있다 느끼는 것입니다. 관공서 경력은 없어서 틀도 모르고 헤매었는데, 성장이 빠르다고 센터장님께서 칭찬을 들었습니다. 오히

<왼쪽부터 기자와 서보영 주무관>

려 저는 말도 느리고, 생각도 느리고 적응도 느린 사람인데….” 도전에 두려움을 느끼 는 성격임에도, 여기서 늘 새로운 과제에 도전하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는 그녀는 센 터와 개인의 성장을 따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곳에 오면 늘 볼 것만 같다.

서울 한방진흥센터와 상인들의 한방플리마켓 한방플리마켓이 전국에 없었는데 2017년 10월 27일에 센터가 개관하고, 11월 초에 한방진흥센터 마당에서 플리마켓을 열었습니다. 그때는 상인분들도 마켓 문화를 잘 몰라서 다섯 업체를 선정하고, 한방체험 11개 부스로 시작했는데, 2019년 작년에는 80여 개 업소가 참여하고, 약령시 중앙로 끝까지 확대되면서, 매니페스토에서 ‘한방 에 놀장’ 플리마켓이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결과 공유회에서도 계속 토론했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상인들도 더 참여하고 싶어 했지만, 2020년에 코로나로 못하게 되 어 모두 안타까워 합니다.[서보영 주무관]

한방진흥센터와 주민들 주민들을 위한 프로그램으로는 '한방 북토크', '오후의 한방 수다'가 있습니다. 주민 들이 오셔서 강연을 듣거나, 체험하는데 상인뿐만 아니라 관내 주민들 대상으로 확 <전통의상 체험실>

<서울약령시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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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곳의 자원봉사자는 예전 한의약박물관에 서부터 오랫동안 근무하셨던 선생님들이 지속해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데 전시 도 슨트를 비롯해 안내를 하시는데 저희보다 더 전문가이십니다. (엄지 척! 웃음) [서보 영 주무관]

보제원과 서울약령시의 역사 보제원은 조선 시대에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던 기관으로 구제활동과 의료적 기관 으로 환자를 수용하고 의원까지 들였습니다. 구휼성격을 띤 이유는 도성 안에 밀려 드는 환자들의 전염병이 퍼지지 않도록 차단하고 혼란과 전염병 예방을 위한 통제기 관이었습니다. 약령시는 한약재 수집과 유통을 관리하고자 조선 효종의 명으로 설립 된 시장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60년대 후반부터 지방과 교통이 원활해지면서 한약 재 전문시장으로 이곳이 발달했는데, 종로 근처에 있는 약재상과 한의원들이 이곳으 로 이전하면서 커진 것이라고 합니다. 1980년대에는 시장근대화사업을 통해서 오늘

<한방 족욕 체험실>

날과 비슷한 시장의 모습을 갖추었고, 1990년대에는 ’서울약령시’로 정식명칭을 부 여받았는데 우리나라 한약재의 70%가 여기서 유통되는, 제일 큰 한약재 중심시장 으로 보시면 됩니다. [서보영 주무관]

언택트시대, 비대면으로 즐기는 '한방' 2월부터 휴관을 하면서 원래하고 있던 프로그램들 대부분을 비대면프로그램으로 운 영하고 있다. 유튜브, 페이스북, 블로그, 인스타그램을 활용하여 ▶면역력 강화와 증 진 프로그램▶약초 공방▶생활한방 포스팅▶한방상식으로 한의사의 건강칼럼▶ 한 방 이야기▶생활 속의 한방상식 등 다양한 이야기 소재로 비대면 시대 콘텐츠를 제 공한다. 센터의 뷰티숍과 한방상품홍보관의 한 상품을 정해서 10%~30%까지 할인 하는 이달의 한방상품 행사도 진행하고 있다. 윤성준 학예연구사와 한의학박물관에서

도심 속의 아름다운 한옥에서 즐기는 힐링 ‘한방’ 동대문구의 랜드마크로 도심 속에 있는 아름다운 한옥 건물에서 ’한방’을 주제로 다 양하고 유익한 교육과 재미있는 체험을 즐기며 힐링할 수 있는 한방복합문화체험 공간입니다. [위원범 주무관]

한의학박물관 자세히 보면 재미있다. 한의학 서적과 서류, 전통 의약 기구, 자료의 유물과 약재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유물은 주로 기증유물과 구청에서 공고하여 구매하기도 합니다. 서울약령시 상인과 협회 여러 기증자가 기증한 유물과 자료는 전통한의약 역사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것은 은제 침통인데 침통 육 면에 소나무와 대나무, 사슴, 학의 건강과 장수의 문 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다른 작은 침통들의 그림을 확대한 작품들이 여럿 있습니다. <보제원 유래>

1963년 당시 약사국가시험 합격증서와 한약업사 시험문제, 대한민국 최초의 의학잡 지 등 서류들도 한의학 역사 유물입니다.[윤성준 학예연구사] 큰 전염병으로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있는 이때 한방진흥센터는 시민들이 자신의 건 강 살피며 심신의 안정을 찾도록 도울 수 있는 기관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 크게 유행했던 신종플루의 치료제의 주원료가 한방재료인 팔각이었다고 하는데, 이곳에 서 하는 면역력 강화와 증진을 위한 프로그램과 약선음식으로 시민들이 건강을 스스 로 지킬 수 있도록 지원하고 이 시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 었다. 인터뷰 마치고 8월 15일 이후 서울지역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코로나 19 확진자가 연 일 세 자릿수를 기록하며 증가하고 있다. 공공기관을 비롯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이 는 곳은 잠정적으로 휴관에 들어갔다. 한방진흥센터에서 옛사람들의 지혜가 담긴 한방의학 역사와 일상에 적용하는 지혜로움을 엿보았다. 우리의 일상도 점차 회복 하여 한방의학을 발전시킨 조상들의 지혜를 받아 우리의 일상도 점차 회복하여 건강 과 힐링의 시간을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고대해 본다.

은제육각십장생 침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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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서 놀고, 즐기고, 배울 곳

경동시장 청년몰 서울훼미리 전통시장계의 스타필드로 오세요 만난이:무든(mooden) 오다빈, 고집쎈강정, 봉차우 정봉우, 청산제과 이지은, 밀그린 윤선화, 맘대롱 김해리, 어반파머 김경수 취재: 심소영, 박혜진, 이연두, 임정희 / 기사: 박혜진 추적추적, 후드득후드득 다양한 비가 내리던 7월, 청년몰로 향했다. 쏟아지는 비를 아랑곳하지 않고 장 보는 어르신들로 시장통은 왁자지껄하다. 과일전과 채소전을 지나 건어물과 약재를 파는 경동시장 건물로 들어서면 2층으로 바로 연결되는 계단을 통해 새로운 공간을 만날 수 있다. ‘경동시장에 이런 곳이 있었나?’ 의아스러울 정도로 노브랜드 매장과 작은 도서관, 키즈까페 등과 함께 청년몰이 있다. 시장과는 전혀 다른 세련되고 조용한 분위기라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만 같다.

<청년몰 공사 전후 입구 /사진 https://brunch.co.kr/@blankin/35>

일찍 꿈을 찾아 그 길을 연마하고 수련하는 프로들이었다. “솔직히 전국에 청년몰은 많아요. 예전 외식사업을 도와주는 방송에 준비 안 된 청년 상인이 나오면서, 많은 질타를 받아서 ‘청년몰’하면 안 좋은 인식이 생긴 것 같아요. 그런데 서울 경동시장 청년몰은 20개 팀 전부가 전문성 있게 배우고, 오랜 시간 익혀서 기술이 숙련된 상인들이라 안심하고 오셨으면 좋겠어요. 저도 솔직히 고등학교 때부터 학원 다니고, 대학도 요리 학교 다니고, 호텔에서 조리도 하고 이렇게 쭉 요리 인생만 걸어가고 있습니다.” [중화요리전문점 봉차우 정봉우 대표] 와... 누가 감히 아마추어라고 할 수 있겠나? 여기 경동시장 청년몰 사장님들은 일찍 꿈을 찾아 그 길을 연마하고 계속 수련하는 프로들이었다.

<정봉우 중국요리전문점 봉차우 대표 사진 인스타그램 @bong_chawoo>

상생을 위한 협력을 고민한다. “공방팀, 외식팀, 디저트 팀이 있는데 제가 공방 팀의 대표를 맞게 됐어요. 외식분야의 봉차우 오빠랑 청산제과 언니가 디저트 대표 언니예요. 초반에는 전체 회의를 했어요.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근데 요새 각자의 분야에서 바쁘다 보니까 전체 회의는 자주 못 하는데, 저희 셋이서는 소통을 계속하고 나름대로 교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가죽공방 무든 오다빈 대표] “다들 분야가 다르거든요. 아이템들이 다 달라서 저는 딱 제 것만 관심 있고, 알고 있는데 (청년몰에 들어오면서) 제가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고 생각지 못했던 방향성 같은 것들을 얻기도 하고요. 아무래도 같이 합숙도 하고 이러다 보니까 좀 친해져서 서로 지원 사업 정보를 알려주기도 하고 매장 운영에 관한 좋은

<오다빈 가죽공방 무든 대표>

의견이 있으면 공유할 수 있다는 게 여기의 장점인 것 같아요.” [곡물가공품전문점 어반파머 김경수 대표] “우선 청년몰에 다 같이 교육을 받고 들어온 친구들하고 지금 한 20팀이 운영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다들 처음 가게를 오픈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혼자라는 느낌보다 뭔가 같이 한다는 느낌이 많고요. 그래서 그 친구들한테 내가 잘하는 부분이 있고, 저 친구들도 잘하는 것이 있잖아요. 그래서 조금씩 물어보고 도움도 받고 그렇게 운영을 하다 보니까 혼자 하는 거보다 조금 더 수월한 것 같아요.” [베이커리 전문점 밀그린 윤선화 대표] “일단 젊은 사람들끼리 이런 공간에서 도움을 주고받고 정보도 교환하고 이렇게 상생할 수 있다는 거, 그리고 여러 가지 제품들을 보면서 조금 더 업그레이드시키게 되더라고요. 이제 자꾸자꾸 업그레이드되고 다른 친구들도 자기 상품들 소개하는 부분이나 이런 것들이 서로 보면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도 알게 되고, 함께 상생하면서 발전할 수 있는 것이 좋은 것 같아요.” [고집센 강정의 대표 어머님]

<김경수 곡물가공품 어반파머 대표>

‘상생을 위한 소통’ 가장 어렵고도 힘든 과정이다. 그럼에도 사업 초기부터 분야별 대표를 선임하여 소통구조를 만들었다. 서로 경쟁하기보다는 서로 보고 배우며 상생하고 있는 청년몰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해서 이곳, 경동시장 청년몰에서 사업을 하게 되었을까?

서울에서는 유일하게 경동시장만 청년몰을 모집 “스무 명이 다 똑같을 거예요. 어떤 계기보다는 청년몰이 생각보다 지원이 많아요. 근데 서울에서는 유일하게 경동시장만 청년몰을 모집했어요. 경동시장에 지원하려고 처음 경동시장에 와봤더니 정말 핫한 거예요. ‘아 여기가 이렇게 핫 해. 정말 사람 많다. 여기 50대, 60대 홍대 같아.’ 이러면서 지원해놓고도 결과 나오기 전에 <윤선화 베이커리 밀그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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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은 청산제과 대표/청년몰 상인대표>

6호 2020. 09.

<고집센강정 대표 어머니>

<김해리 맘대롱 스튜디오 대표>

1월에, 명절 전이잖아요? 정말(한껏 몸을 웅크리며)

하면서 이제 반대가 됐어요. 디저트 쪽은 이제 막 택배

“지금 코로나 때문에 모든 분들이 힘들지만, 저희

이러고 왔어요. 그래서 ‘여기서 뭘 해도 되겠구나.’

보내느라 정신이 없고, 여기는 점심 지나면 손님이

청년몰도 힘든 만큼 코로나 극복을 위해서 더 열심히

그냥 다들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스무 명 다

아예 없으니까 한산하고, 근데 외식 쪽도 택배나 이런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희 경동시장 청년몰 많이

똑같았어요.” [청산제과 이지은 대표]

거 하는 거 보고, 배달도 시도하고, 택배 서비스도

오셔서, 저희 중국집을 포함한 외식 부분 뿐만 아니라,

시도하고, 레트로 식품처럼 만들어볼까 고민도 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공방과 디저트까지 있으니까, 다 한

점점 이게 맞춰 가고 있어요.” [청산제과 이지은 대표]

번씩 둘러보시면서 체험 한번 해 보세요. 감사합니다.”

서울의 유일한 청년몰이었고, 또 명절 전에 경동시장에 와봤다니, 발 디딜 틈도 없었을 텐데, 정말 놓칠 수 없는

[봉차우 정봉우 대표]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겠다. 하지만 취재 나간 날 청년몰

코로나는 여기에서도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안은 한산 하다. 생각한 대로 사업이 잘 되나?

흩어져야 사는 사회 환경에 맞게 청년몰 사장님들은

“제가 바라는 점은 ‘또 오고 싶은 공간이다.’라고

재빠르게 사업 구조를 변경시키며 몸을 맞추고 있다.

생각을 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그냥 편하게 언제든

“저희 제품 같은 경우에는 여기에다가 그

그들에게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아 이용할 수 있도록

방문할 수 있는, 저도 공방이 생기고 나서 오프라인

유자청이라던가 홍삼청 같은 것을 저희가 직접

한마디를 부탁했다.

단골분들이 몇 분 생겼어요. 그러니까 제품이 출시되면

희석해서 넣어서 만들고 있기 때문에 약간 그런

와서 구매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분들은 편하게

부분들에서 조금 더 퀄리티가 높아요. 처음에는 장사가

“하고 싶은 말이요? 일단 저도 어쨌든 제 브랜드고

방문 하시거든요. 그런 것처럼. 제가 봐도 여기에

너무 안돼서 다들 힘들어했어요. 정말 홍보도 안 되고,

제 매장이기 때문에 사실 애정이 많거든요. 요새는

이런 공간 있나 싶은데, 들어오시면 놀라시는 분들이

장사도 안되고, 근데 다들 정말 자기 길들을 열심히

진짜 감사하게도 저희 제품을 쓰겠다는 연락도 많이

많으시거든요. 이렇게 깔끔하고 쾌적한 공간이 있는지

찾아서 나름대로 뭐 인터넷, 인스타그램이라던가, 뭐

받고, 뭐 저희 제품을 납품받고 싶다는 연락도 받고

몰랐다고 하세요. 한번 방문하시면 또 오고 싶은

아이디어스? 이런 쪽으로 본인들이 찾아서 광고도

있어서, 사업을 만드는 과정인데, 이제 좀 더 여기가

공간으로 기억하셨으면 좋겠어요.” [가죽공방 무든

하고 스스로 이제 노력을 하다 보니까, 조금 조금씩

활성화되고 저희 매장도 좀 더 잘됐으면 좋겠다고

오다빈 대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거 같아서 솔직히 엄마 된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기 위해서 저도 꾸준히 노력하고

입장으로 보기가 참 좋습니다.”

있고요. 사실 여기 오시는 분들도 ‘그래놀라’가 뭐냐고

“청년들이 하면 어설프고, 오래 안 해봤고, 그런

[고집센 강정 대표의 어머님]

물어보세요. 이제 아시는 분들은 찾아서 드시는데

이미지가 강하시더라고요. 일 년 동안 피드백을 많이

사실은 낯선 아이템이기 때문에 좀 아까 말씀드렸던

들어보고 이분들 저분들 자기들은 청년들이 하는 건 안

“좀 올라가려다가, 코로나 때문에 지금 많이

것처럼 미숫가루, 강정 이런 거보다 더 맛있고 건강한

먹는다. 청년들이 하면 어설프다 막 이런 이야기 많이

하락세라서, 청년 상인들이 많이 힘들어하고 있어요.

제품들도 많이 있고, 저도 개발하고 있어서 관심 가져

하시는데, 솔직히 서울 청년몰은 뽑을 때 경쟁률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경로로 인터넷 판매, 배달

주시면 좋겠어요.” [어반파머 김경수 대표]

한 20:1 정도 됐거든요. 그래서 여기 사장님들 다

판매도 열심히는 하고 있는데, 그래도 아직은 잘

경력자들이에요. 실력을 갖춘 경력자들이 서로 양보해

안되는 게 맞아요. 좀 안타까워요. 물론 모든 요리사가

가면서 청년몰을 꾸려가고 있어요. 새내기 장사꾼,

가족이 드신다는 생각으로 음식을 만들 거예요.

예쁘게 봐주셨으면 해요. 그리고 코로나로 다들

저 또한 당연히 기본적으로 그런 마음가짐을 하고

힘드셔도 맛있는 거 많이 드시고 건강하시면 좋겠어요.”

있고요. 저는 주문 즉시 조리를 해서 탕수육, 제

[청산제과 이지은 대표]

시그니처 메뉴가 탕수육이에요. 마늘소스로 튀겨낸 건데 꿔바로우식으로 만들어서 정말 맛있고요, 또

“그냥 한번 딱 시장에 장 볼 겸 들리셨다가 ‘경동시장

여기서 이제 밀고 있는 거 쟁반 짜장, 전날에 술 드시고

청년몰 서울훼미리’ 간판 보시고 들어오시면 스타필드

해장하기 딱 좋은 해장용 짬뽕. 이 세 가지는 어느

못지않게, 문화부터 외식, 디저트까지 다 있으니까요.

중국집과 비교해서 드셔 보셔도 반하실 거예요. 솔직히

한 번 오시면 없는 거 빼고 다 있으니까 오시면 후회 안

안 드셔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 드셔 본 사람 없어요.

하실 거예요.” [맘대롱 김해리 대표]

(하하하하) 정말이에요.” [봉차우 정봉우 대표] <경동시장 청년몰 서울훼밀리 >

청년몰의 상인들은 제기동, 경동시장의 가능성을 보고

“맘대롱 스튜디오는 설탕을 가장 최소한으로 사용해서

온 ‘준비된 사람’이다. 청년(靑年)은 사전적 의미로

달지 않은 마카롱을 추구하고 이름처럼 고객님

‘신체적·정신적으로 한창 성장하거나 무르익은 시기에

마음대로, 원하시는 대로 디자인해 드리는 마카롱

있는 사람’을 뜻한다. 어리고 부족한 청년이 아닌 이미

집입니다. 인스타그램 하고 있고, 아이디어스를 통해서

사전적으로도, 청년몰의 대표들은 ‘한창 성장하거나

많이 주문하고 계세요. 그래서 저는 바빠지다 보니까

무르익은 시기’로 준비되어있다. 패기 넘치고 도전하고

이제 맨날 밤새고 제대로 밥 못 먹고 그러니까 몸이

새로운 것을 꿈꾸는 청년들이 서로 상생하며 열심히

많이 안 좋아지긴 하는데 (웃음) 감당해야죠...”

고군분투하는 곳, ‘경동시장 청년몰 서울훼미리’가

[맘대롱 김해리 대표]

‘제기동 핫플레이스’가 되길 기대해 본다. 마을과 지역 상인이 서로 북돋우며 잘 살아가는 곳, 제기동을

“청산제과는 우리 전통 재료를 가지고 현대 과자를

대표하는 놀고, 배우고, 즐길 곳인 ‘청년몰’로 찾아가

만드는 곳이에요. 서양 재료가 아니라 국내 재료

보시길.

가지고, 현대랑 접목해서 옛스럽지만 약간 유니크하고 이런 느낌이 나게 하고 싶은.... 중략... 초반에는 외식은 너무 잘 잘되는데, 디저트 쪽은 손님이 없어서 그래서 너무 힘들어했는데, 코로나도 터지고 손님들도 안 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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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 2020. 09.

제기동 돈키호테

나를 찾아줘! 만난이: 나주봉 (사)전국미아·실종가족찾기 시민의모임 대표 취재: 임정희, 박혜진, 심소영, 이연두 / 기사: 임정희, 심소영

어머님을 너무 어렸을 때 여의고, 남의 집 살이를 하며, 어린 시절 엄마 품이 그립고 서러웠던 마음이 개구리 소년들을 꼭 찾아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힘들게 삶을 끌어가고 있으면서도, 앞뒤 가리지 않고, 실종 어린이를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 의 활동에 사람들이 감읍했을까? 여느때와 다름없이 시장에서 공연하고 전단을 돌 리는데, 어느 기자가 그걸 찍었고, 신문에 본인 얘기가 소개되더니, ‘MBC 생방송 저 녁’이라는 프로그램으로 방송을 타게 된다. “그게 91년 8월 며칠이죠. 한선교하고 김연주라는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프로였는 데, 생방송이었어요. 청량리역에서 이원방송으로 제가 공연을 하고 여기 수백 명이 모여 있고, 실종아이들 아버지들은 서울역에서, 생방송을 했죠.” 그 이후로는 전국적으로 실종아이들을 찾는 유명인이 된다. 지역에서는 동대문구청 장, 경찰서장 등은 먼저 도움을 주겠다 연락해와 전단지 제작을 도와주고, 이후에도 평화방송 등의 종교방송뿐만 아니라 영국 BBC, 일본NHK 등에서도 취재하며, 실종 <(사)전국미아·실종가족찾기 시민의 모임 사무실과 나주봉 대표>

어린이 찾기에 홍보가 이뤄진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어린이들을 위해 트럭 을 마련해 소년들의 아버님들과 3년 10개월 동안 전국을 돌았다.

청량리역 앞 복잡한 버스 정류장을 넘어, 기업은행 앞 자그마한 컨테이너 사무실이 보인다. 이곳은 ‘(사)전국미아·실종가족찾기 시민의 모임’(이하 전미찾모) 사무실이

“제가 언론에 소개가 되고 그러다 보니까 장사가 안되는 거야. 왜냐하면, 저희가 이

다. 셀 수 없이 오갔던 곳인데, 이 컨테이너를 인지한 것도 처음이고, 이런 단체가 있

제 나갈 때마다 목에다가 이 아이들 크게 해서 전단을 걸고 세 명이 그렇게 하다 보

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아주 크고 유명한 거리에 있음에도 모르고 지나친 이곳, 공간

니까. ‘어 맞아 저희 어제 뭐 뉴스에 나왔어.’ 이러고 전단만 받아가고 물건을 안 팔

마저 ‘나를 찾아줘!’ 말하는 듯하다.

아 주는 거예요. 테이프가 팔려야 수입이 생기는데, 그렇다고 아이들 찾기를 빙자해 서 테이프를 팔 수는 없으니까. 함께하던 두 친구가 ‘형 나는 이거 저거 안 맞으니까,

나주봉 님은 (사)전국미아·실종가족찾기 시민의 모임’의 설립 때부터 지금까지 대표

나는 다른 거 할래’ 그렇게 하나하나 떠나게 되더라고요.”

다. 그가 실종아동에 관심 두게 된 시절의 직업은 ‘각설이’였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품바 공연을 하고, 신나는 노래가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팔았다.

그렇게 혼자남은 나 대표는 의기소침해지기보다는 더 적극적으로 아이들 찾는 일에 뛰어든다. 마련한 트럭으로 대구 수사본부의 지원도 받고, 실종 아이들 아버님들과

“80년도 5월에 서울에 왔어요. 노점을 했는데, 88올림픽 전후로 해서 정부에서 노 점상 대단속이 이루어졌어요. 그래서 제가 삶의 터전을 잃고 전국을 다니면서 품바 공연을 하면서 카세트를 팔았었죠.” 품바로 전국을 누비며, 시민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 이 좋았고, 수입도 괜찮았다. 그러다 만난 대구실종 어린이 부모님들은 그가 남다른 인생을 사는데 기폭제가 된 듯하다. “그렇게 다니다가 91년 7월이죠. 인천 월미도에서 공연을 하고 있는데 덥잖아요. 7 월에 합바지입고 분장하고 뛰어봐요. 힘들죠. 그래서 벙거지 뒤집어쓰고 공연하고 나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있는데, 저쪽에 아버지들이 트럭을 대놓고 전단을 나눠 주 고 있어요. 한 중년여성이 전단을 받아 가지고 가다가 하이힐에 껌이 붙었어요. 쭉 늘어지잖아요, 여름이니까 더워서 그때는 바닥에 껌이 많았거든요. 근데 그 전단으 로 늘어진 껌을 닦아서 버리는 거야. 그쪽에 아버지들이 뻔히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렇다고 내가 아무 관련 없는 사람한테 뭐라고 할 수도 없고, 그 광경을

<나주봉 대표 실종사건 설명>

보고선 뚜벅뚜벅 걸어가서 아버지들한테 아유 고생 많으시다고 인사를 하고…. 중 략…. 그렇게 헤어지고서 전단 한 다발을 얻어서 리어카에 싣고 다니면서 공연할 때 마다 도와달라 부탁하고, 전단도 나눠 주고, 전단 다 떨어지면 제가 이만(20,000) 부를 제작해서 또 나눠주고 했어요.” “제가 원래 고향은 강원도 홍천이에요. 주민등록상으로는 경기도로 돼 있는데, 강 원도 홍천에서 삼 형제 중 맏이로 태어나 제가 아홉 살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 때 바로 밑에 동생이 6살 막내가 4살 이렇게 삼 형제를 남겨놓고 돌아가셨죠. 그래 서 제가 초등학교 2학년을 끝으로 학교를 못 다녔어요. 동생들 봐야 하니까. 아버지 는 땅이 없으니까 산에다 밭을 일궈 사는 화전민이었어요. 그렇게 살다가 열다섯에 제 친구네 집에 가서 이제 남의 집 머슴을 살았어요. 2년을 머슴 살고 친척분의 소개 로 서울에 올라와 중국집 생활을 했어요. 월급 없이 먹고자는 것만, 몇 년 있다가 중 국집 사장이 제가 믿을만하다고 월급을 주기 시작했는데, 짜장면이 50원 하던 시절 에 첫 월급이 500원이었네요. 그렇게 11년을 중국집에서 살았어요.”

<나주봉 대표의 대구 실종 어린이 찾기 위한 트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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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 2020. 09.

실종사건은 어느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국가와 사회가 풀어가야 할 공동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울증이 생긴 거야. 그렇게 컴컴한 방에 앉아 앉아서,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고, 자기 신체를 학대하고, 그래서 정신병원에 집어넣었어요. 그래 정신 병원에 넣었다가 명절을 앞두고 데려왔는데, 엄마가 싫다고 2만 원을 가지고 사라 져 버렸어요. 추석 무렵에, 그래서 경찰한테 찾아갔는데 찾아 줄 수 있는 법적 근거 가 없어요. 조울증은 장애가 아니에요. 우리나라 현재 법률상 장애가 아니야. 그래 서 저 전단을 만들어 갖고 와서 제가 트위터에다 올렸더니 70 몇 시간 만에 인천공 항에서 저한테 연락이 왔어요. 확인해보니 맞아. 그래서 제 아버지하고 연락해서 찾 고 잘 살아요. 그래서 내가 만든 법률인데 반쪽짜리 법이다. 사각지대가 있다. 의미 없다. 그래서 내가 없어지면 과연 경찰이 나를 찾아 줄까, 그렇게 생각을 갖고 혼자 시나리오를 써서 내 실종사건을 만들기도 했어요. 경각심을 주려고….” 본인이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용산역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렸는데, 가족들과 동대 문경찰서에서 찾고 난리가 났다. 긴급하게 연락이 닿아 30시간 해프닝으로 끝났지 만, 주변인들은 ‘미친놈이라 그래. 제 마누라하고 새끼들 울려가면서 저런 짓 왜 하 냐고 그러지.’ 이런 말을 들으면서도 ‘내가 특수관계자라 서장의 지시로 수사가 시작 되었지만, 관계없는 사람이 그냥 사라지면 찾았겠냐' 하며 법 사각지대를 보완해야 한다 주장한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켜주지 않기 때문에 공권력을 우롱했다며 큰 질책을 받았다. 하지만 제도를 보완하려면 어떨 수 없었다 한다.' “실종사건은 어느 한 개인의 문제 가 아니고 국가와 사회가 풀어가야 할 공동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제도가 있어도 관심이 없으면 성공을 할 수도 없고, 잃어버린 우리 아이를 찾을 수도 없어요. 그래서 전 국민 또는 제기동 주민 여러분이 경찰관의 눈으로 주변을 이 렇게 살펴봐 주실 때만이 실종된 우리 아이들을 찾고 사랑하는 우리 가족들 이웃을 범죄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내내 그의 모든 삶의 기준과 목표는 실종 가족을 찾아 가족의 품으로 돌려주

<2018.3.26. 경향신문 ‘오래전 이날’ 보도기사>

기 위함으로 보인다. 그의 귓가엔 늘 '나를 찾아달라'는 실종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 와룡산 현장답사도 하고, 지역을 정해서 전국을 돌았다. 그렇게 오랜시간을 지내며

는 듯하다. 돈키호테 책 서평 중에서 이런 나주봉 대표와 딱 맞는 문구를 발견했다.

실종 가족들도 하나둘씩 생업으로 돌아가는데도 혼자 계속 일을 이어오며 10년이라

“『돈키호테』는 흔히 ‘인류의 바이블’이라고 불린다. 바이블이라는 건 가장 모범적인

는 세월을 훌쩍 넘겼다.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준다는 의미다. 내가 생각하는 『돈키호테』의 메시지는 ‘인간은 자기 생의 창조자’라는 것이다. 남이 하므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그렇게 하면서 10년이라는 세월을 훌쩍 넘기게 돼요. 그 과정에 저는 이 일을 계속

것을 하는 삶, 육체는 망가져도 정신은 펄펄 나는 삶, 이런 삶을 사는 이에게는 좌절

하게 되면서 개구리 소년들 뿐만 아니라 한 280명의 실종 아이들을 찾으러 다녔어

도 경쟁도 상대적 박탈감도 없다.”[안영옥 (고려대학교 스페인어 문학과 교수)]

요. 전단을 나눠주면 제보가 오잖아요. 그럼 전국 아이들 보호시설을 찾아다니고, 이 전단만이 아니라 여기 있는 실종된 아이들 전단까지 다 나눠 주다 보니까 제보가

나주봉 대표는 수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고, 수렁에 빠지지만, 결코 그만둘 수 없었고,

오면 제가 시설을 방문해서 ‘이제 이런 제보를 받고 왔는데 여기 아이들 좀 보고 갑

지금까지도 그만두지 않는 ‘실종 가족 찾기 캠페인 30년 활동가’이다. 사적 이익 없이

시다.’ 그러면 대부분 안 보여 주는 거예요”

누가 시켜서가 아닌 본인이 선택한 삶을 사는 그는 돈키호테이며, 가장 모범적인 삶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어려움을 애써 설명하며, 가족이 실종된 사람들이 얼마나 큰

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주는 ‘자기 생의 창조자’ 다.

고통을 겪는지 얘기한다. 수많은 헛수고 끝에 가족을 찾은 사람들 얘기까지, 또 근본 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실종 가족 찾기 법률제정 활동에도 앞장선다. “정말 안전한 대한민국이 되려면은 아직도 많이 바뀌어야 할 제도가 많습니다. 그 건 뭐냐면은 2005년 국회에서 통과돼서, 몇 차례 개정되고 시행된 실종아동 관련법 이 있는데, 그 법률은 반쪽짜리 법이에요. 왜냐하면, 18세 미만의 아동 치매 환자 정 신장애인만 해당 돼요. 우리 네 명이 여기 같이 있다가 실종이 돼도 경찰이 수사본부 를 차려서, 즉각적으로 수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거죠. 여성은 조금 더 관심 을 두고 하지만, 남성 경우 더 어렵죠. 단순 가출로 처리되고. 제가 만들었지만….” 본인이 캠페인도 하고 적극적으로 제안해 만들었지만, 반쪽의 자리 법안이라 개정을 위한 활동도 하는데, 자신이 거의 미친 사람이라며, 제기동에서 일어난 사건을 얘기 한다. “제기동에 소문이 파다하게 났던 사건이죠. 젊은 친구가 아들만 둘인데, 군대에서

발 행 일 2020.09.18 발 행 처 문화플랫폼 시민나루 취재기자 임정희 , 심소영 , 이연두 , 박혜진 , 오은형 , 정담희 , 윤덕환

디 자 인 총 괄 전 화

<품바 공연 중 실종 아이들 찾기 나선 나주봉 대표>

청년협동조합 몽땅 심소영 02-2245-9623( 문자수신 가능 )

다음카페 http://cafe.daum.net/ddmplf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ddmplf 이 메 일 ddmpl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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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 2020.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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