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잡지 [마장동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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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보고 느끼는 우리

소 돼지

도시의

축산물

시 장

동네

고기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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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글

마장동 마장동은 어메이징한 곳입니다. 서울을 서에서 동으로 흘러온 개천 청계천이 활처럼 감싸는 동네 입니다. 1936년, 봉준호의 외할아버지 박태원의 <천변풍경>에서 보면, 청계천 이쪽은 치열한 삶 의 터전이었습니다. 지금은 동명초가 있는 왕좌봉은 우뚝한 언덕이었습니다. 한양대와 접한 동쪽 언덕에는 치마바위가 우뚝합니다. 마장천이 흘렀던 이 동네에선 산으로 언덕으로 다니며 가재를 잡고, 물놀이를 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경원선이 동네를 가로질러 갈 때, 그 동네 아이가 기관사 에게 따졌답니다. “왜, 우리집 앞 마당을 지나간대요?” 그 기개를 가진 아이는 커서 지금 마장동의 주인이 되었을까요? 축산물 하루 매출 200억, 연관 작업자 2만4천 명. 오로지 소와 돼지라는 단일 품목만이 거래되는 거대한 시장. 우시장이 섰던 땅, 한국 최초의 현대식 도축장이 운영되었던 곳. 그 장소들이 모두 폐쇄된 뒤 에도 마장동의 축산물 관련 작업장과 판매업소들은 여전히 번성하고 있습니다. 고기를 먹는다는 일은 여전히 즐거운 회식과 사랑이 깃든 영양의 섭취 과정입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엔 고기를 대 하는 태도 역시 변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환경오염에서의 메탄을 피하기 위해서든, 산업이 된 축산업에 질려서든 채식을 택하고도 있습니다. 단순하지 않은 그 이야기도 함께 나누어봅니다. 시장 이전 사람들은 수산물은 노량진서, 건어물은 중부시장서, 야채는 경동시장서 샀습니다. 고기 시장 은 단연 마장축산물시장이었습니다. 시장은 사람이 모이는, 도시의 공간입니다. 그곳서 물산이 서 로 교환되고 혹은 생산됩니다. 마장축산물시장은 작업장이기도 하고, 도매와 소매시장이기도 합니 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기술과 영업장이 인수되는 곳이자, 정형이 끝난 지육이 부분육으로 서로 유 통되는 곳이기도 하죠. 그건 이곳 시장 사람들의 창의력, 단결력, 끈끈한 인정 그리고 시대와 사람 들과 소통하고 변화해온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고기를 사랑해 지극히 찾아 먹으면서도 고기를 다루는 이들과 그 장소를 마뜩찮아 한 역사는 오래 되었습니다. 그 모순되고 상반된 현실과 법의 틈새 속에서도 마장동의 축산물 시장은 꾸준히 성장 해왔습니다. 그들에게 존경과 우애의 마음을 표합니다. 그리고 함께 머리 맞대고 문제를 풀어가자 고 하고 싶습니다. 우리 동네 마장동 이야기, 소와 돼지들과 고기 이야기 그리고 시장 이야기부터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마장동을 쓰다 원동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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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린 순서

마장동 06

일일시호일-아주 작은 역사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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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연 그림책 작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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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장동 하숙집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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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의 주역들, 디제이로 외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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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 자라고 일터 잡고 결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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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장다움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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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로 안 태어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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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준 살라미랩 대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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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페르디난도 & 댐 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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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지방과 착한 단백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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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식당: 간판 없는 갈비탕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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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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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와 함께한 우리 인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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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줏간 노정기

46

코로나로 저기압이야? 그렇다면 고기앞으로!

48

최종현 통의도시연구소장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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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장동 축산물 시장 VS 성수동 수제화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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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점 옆 과일가게

56

산소리 회장 이영언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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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축-도살장, 지역 랜드마크로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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탬플 그랜딘 ; 자비로운 도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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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이 지인에게 소개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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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장천변 곤충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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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담벽화 마을 동화 속으로 쏘옥

76

벽화는 이쁘긴한데, 보고 가면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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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 굽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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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마장동에 가보지 못했나

축산물

시장

부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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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마장동 동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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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장동 신동호

마장동에서는 네 발로 걸어도 된다 간혹 소처럼 우우 울어도 뭐라 안 한다 소가 흘린 만큼 눈물을 쏟아내도 한숨을 주워 담는 어머니들이 있다 죽음을 담아 삶으로 내놓기를 반복해서 달구지 구르듯 고기 굽는 소리 들린다 인생도 굴러가다보면 깨닫는 게 있고 삶도 닳아 삐걱거리다 보면 익숙해지는 법 때로 꿈이 흔들거릴 땐 그곳에 가자 마장동에서는 꿈이 고소하고 쫄깃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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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시호일

日日是好日

아주 작은 역사로부터 살펴보는 마장 ​임규리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날마다 좋은 날, 날마다 즐겁고 기쁜 날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우 리의 일상은 초여름 날씨처럼 비가 오면 젖고,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고, 햇볕에 기분 좋아하다가 그을리기도 하며, 갑자기 차가워지는 밤공기에 움츠러듭니다. 아무 변덕 없는 날씨가 아니라, 뜻밖 에도 그런 천방지축의 날씨가 더 기억에 오래 남는 건 왜일까요. 그 짧은 순간이 지나고 나면 초여 름의 싱그러운 변덕이 그립기까지 합니다. 마장동에서 삼 년이라는 짧다면 짧은 시간을 보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 기억을 소중히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이 인터뷰는 마장동과 얽힌 아주 소소한 개인의 기억을 나눈 대화입니다. 마장동에 쌓인 시간이 거대한 역사라면, 이 이야기는 아주아주 작은 역사 일 뿐이겠죠. 하지만 굳이 이 작은 누군가의 기억을 나누고 싶은 이유는, 그 순간 속에 지금의 ‘자신’을 만든 동네에서의 맑고 궂은 모든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이런 나날들이 지금도 마장동에는 차곡차곡 쌓이고 있겠죠. 그 누군가의 일상이 모여 지역이 가진 공공의 기억이 되고, 그 기억은 다시 개인에게 흘러 들어갑니다. 모쪼록 이 인터뷰도, 마장동의 아주 작은 역사를 함께 들여다보며 ‘일일시호일’의 의미를 우리 모두의 일상에서도 찾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록해보았습니다.

*인터뷰이: 김현승 (20세부터 3년간 마장동에 거주했다. 지금은 28세로, 경기도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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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장동의 첫인상 “저는 아버지의 직장과 어머니의 교육열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이사를 자주 다녔어요. 마장동은 제가 막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이사를 왔어요. 마장동에 이사를 오게 된 이유도 동생을 조금 더 좋은 고등학교에 보내기 위해서였어요. 동생이 중학교를 졸업할 때쯤 한 양대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가 교육 분위기가 좋다는 소문을 어머니가 들으셨던 거예요. 어머니는 전직 교사셨고, 저는 3남매이기 때문에 가족 중 누군가의 이유로 이사를 하는 것은 특별하기보다 익숙한 일이었어요. 마장동에 대한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어요. 한양대학교가 근처에 있다 보니 동네는 대학가 의 분위기도 띠고 있었어요. 이제 막 성인이 되었던 터라 그때의 저와 비슷한 또래들이 좋 아할 만한 트렌디한 맛집도 많았고, 술집도 많았어요. 먹자골목과 마장동 축산물 시장도 있었기 때문에 정말 남녀노소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모인 동네라고 생각했어요. 교통 도 편했고 그만큼 낮이든 밤이든 사람들이 많았어요. 어쩔 수 없이 소음과 탁한 공기가 공 존했지만, 그런 활기가 가득한 도심의 분위기가 좋았어요. 이전에 살던 동네는 경기도 외 곽 쪽이라서 마장동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거든요. 그래서 이전보다 동네라는 곳이 그저 집이 있는 곳이라기보다 그 동네를 돌아다니고 움직였던 게 많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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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장소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는 마장동과 맞닿아 있는 청계천이에요. 물론 청계천이 마장동만 의 것은 아니지만 그 풍경이 너무 좋아서 기억에 남아요. 지금도 마장동 쪽 청계천을 지나 갈 때가 있는데 그때 생각도 많이 나고요. 큰 다리들이 많이 보였고, 그 위를 지나가는 지 하철이나 계절마다 바뀌는 잘 조성된 자연 풍경들이 생각나요. 특히 지금과 같은 초여름 에 많이 갔었던 것 같아요. 종로나 다른 곳과 다르게 산책로도 널찍하고 큰 공간들이 많았 거든요. 학교 수업이 없는 날에는 산책도 많이 했었는데 어떨 때는 어느 한 곳에서 노래를 크게 틀어 놓고 지나가는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합류해서 같이 체조를 했던 적도 있었어 요. 기분이 안 좋을 때 기분을 전환하거나, 좋은 기분을 더하기에 참 좋았던 곳이에요. 가 족들, 친구들, 연인과 함께 시간을 자주 보내서 추억이 많아요.”

내가 아는 마장동 전설, 마장동 축산물 시장 “이거는 친구에게 들었던 소문이라 유명한 이야기인 것 같아요. 마장동으로 이사 가기 전 에 친구가 해준 얘기인데 마장동 축산물시장에 관한 소문이었어요. 오래전에 조폭들이 시 장 상인들을 무력으로 괴롭히던 시절이 있었대요. 보호비나 자릿세로 협박을 했대요. 지 금도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특히 더 심했나 봐요. 예전에는 마장동에 도축장도 있었다나 봐요. 지금은 작업이 전기충격 같은 거로 이루어진 다고 하는데 그때는 장 칼을 사용해서 했었대요. 워낙 칼에 익숙한 분들이다 보니 조폭들 이 협박하러 왔을 때 그 칼을 이용해서 조폭들을 제압해 조폭들이 건들지 못한 유일한 축 산물 시장이었다는... 그런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사 오기 전에는 그 시장에 대한 이미지에 두려움도 있었는데 막상 가보니까, (당 연한 얘기겠지만) 그런 분위기는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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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장동을 떠나던 날 “마장동을 떠난 이유는 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더는 살 이유가 없어진 것도 있었 지만, 어머니가 아프셔서 공기가 좋은 곳으로 이사를 해야 했어요. 그래서 지금 사는 경 기도 외곽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바로 전 동네라 그런지 마장동 생각이 더 자주 나고 비교도 하게 되고 그래요. 그때와 다르게 지금은 인적이 드물고 조용하고 자연들이 많이 보이는 곳이에요. 지금은 어머니가 그때보다 몸이 많이 안 좋아지셔서 걷는 것도 힘든 편 이시거든요. 같이 청계천 거리를 산책했던 것도 생각나고, 사람들이 많이 몰렸던 거리나 동네를 걸으 며 식료품을 샀던 것들도 생각나요.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지금은 할 수 없는 일들이라 그때 생각이 더 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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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푸줏간 마장동展 그린 일러스트레이터 이지연

“아! 여기는 우리 가게잖아.” 하셨으면 했다 정서와 정보 깃든 동네지도 더 많아졌으면

이지연 그림책 작가는 마장동축산물시장 전도를 그렸다. 2014 년 서울청계천박물관에서 진행한 <서울의 푸줏간 마장동展>의 안내 자료에 게재된 이 지도는 쉽게 길을 잃고 마는 많은 이들에 게 친절한 정보를 제공한다. 동시에 그의 그림은 어떤 감정들을 불러일으킨다. 마장동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담뿍 담아 그렸기 때 문이다. 실제로 지도를 보면서 “아, 여기는 우리 집이잖아!” 할 수 도 있게끔 꼼꼼하고 세세하게 그렸다. 돋보기를 들고 찬찬히 들여 다보면 비닐 파는 아저씨와 칼 가는 작업, 소와 돼지를 파는 곳이 다르다는 점도 모두 볼 수 있다. 이 지도는 2018년 마장리본 6인6색 투어에서도 재발행되면서 사 람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지도를 그린 이지연은 2013년 2015년 볼로냐 국제아동그림책도서전에서 두 번이나 ‘올해의 일러스트레 이터’로 선정된 실력 있는 작가. 당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개관 기념 그림책을 그리면서 주목받아 마장동 지도까지 맡게 되 었다. 서울의 서울광장 70년사를 10장의 그림에 그리고, 제주에 서부터 서울 독산동까지 꼼꼼하게 땅과 공간을 표현해 온 작가 이 지연. 예술인 레지던시로 6개월여간 제주에 살면서 진행했던 제주 거로 마을의 작업과 서울 마장동축산물시장의 작업은 너무나 달랐다 고. 늘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에 대해서 그리지만, 정작 그녀는 조 용히 집안에서 작업하는 것을 즐긴다. 현재는 거처와 작업장을 아 예 고향 가까운 경남 함양으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직접 그녀의 작업과 마장동 작업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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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장동 지도 작업을 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부분에 대한 체크를 해주셨어요. 설명이 들어갈 자리였

2013년께 당시 저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그림

죠. 나머지는 제가 채우는 거였고. 시장 안은 장소마다

책 작업을 하고 있었어요. 개관에 맞춘 그림책이었어요.

분위기도, 파는 물건도 달라요. 소머리 파는 곳, 돼지머

디디피는 동선이 복잡해, 지도의 도움이 꼭 필요한 곳이

리 파는 곳도 다르죠. 물류센터 공간들도 있고. 저는 철

었거든요. 제 작업을 보셨던 교수님께서 <서울의 푸줏

길을 따라 형성돼 있던 작은 상점들에 눈길이 가던데요.

간 마장동展> 지도 작업에도 제 포트폴리오를 보내셨던

지나치다 제가 보았던 분들도 그려넣었죠. 봉지만 파는

거죠. 마장동축산물시장도 처음 보기엔 길이 굉장히 복

분도 있고, 칼 가시는 분도 있고.

잡한 곳이었어요. - 다른 여러 지역에서도 지도 작업을 하셨어요. 그 지역 - 지도작업은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죠?

들 이야기도 해주세요.

그곳의 과거와 현재, 중요한 지점에 대한 이야기들을

제주도 제주시내에 거로마을이 있어요. 4.3 당시 마을

함께 먼저 이야기 나눠요. 이번 마장동같은 경우엔 연구

이 온통 사라지다시피한 곳이었죠. 그곳에 살던 분들,

원들과 답사를 함께 갔어요. 그분들이 연구를 진행하셨

그러니까 자기 마을을 잃어버렸던 노인분이 제 지도작

던 분들이니까. 물론 지도와 로드뷰 같은 것을 통해서

업에 크게 도움을 주셨어요. 지도를 통해 옛 기억, 추억

전체도 다 확인하죠. 그리고 다시 현장에서 확인하고.

을 되살리는 기회였던 거죠. 독산동은 철도가 인근에 다

스케치하고 채색할 때도 다시 보고. 확인하고 또 확인하

녀요. 그 이면도로를 모두 가봤죠. 거기선 1경부터 6경

고. 정말 많이 했어요.

까지를 그렸어요. 가볼만한 거리를 그린 작업이었어요. 지도는 정서와 정보를 함께 전달하니까, 많은 분들에게

- 마장동 작업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있다면?

사랑받아요.

연구자들이 이미 상세한 탐구를 마친 상태였죠. 책도 나와서 그 부분도 큰 도움이 됐어요. 연구자들이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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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진들도 마장동축산물시장 작업은 꽤 어려웠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지도를 보고 감명 받았 거든요. 애정을 갖고 그린 그림인 걸 금방 알아챘어요.

제주에서 작업할 때, 마을분들이 작가들에게 굉장히 호의적이었어요. 왜 그런가 봤더니, 이전에 마을서 정착해 작업을 해오신 분들이 터를 그렇게 닦아놓으신 거였어요. 제주문화재단에서 지원하 는 ‘문화공간 양’이라는 곳이 있거든요. 저희 예술가 레지던스도 운영하고 계셨고요. 마을 행사가 있으면 같이 참여해서 음식도 만들고 동네 청소도 같이 하고, 체육대회도 뛰고……, 그런 걸 자연 스레 같이 할 수 있도록 해 오신 거죠. 마장동에선 연구진께서 ‘시장분들 사진을 찍지 마세요.’ 그랬 어요. 그게 아쉬웠죠. - 지도 작업을 오랜 동안 해오시면서 드신 생각은요?

제주서 레지던스 6개월, 개인적으로 6개월을 더 머물렀죠. 거기서 해산물 농산물 같은 먹거리 지 도도 본 적이 있어요. 지방 소도시들은 그런 일들이 더 필요하죠. 아무도 시키지는 않지만…….(웃 음) 그런 정보들은 되게 유용하고, 사람들도 원하시거든요. 예술가들이 거기 참여하는 거죠. 일을 기획하는 분들께도 합당한 적절한 보상을 하고.

이지연 작가를 가르치던 교수님이 그랬단다. 그의 일러스트 작업들을 보면서 “너는 언제나 어딜 가 고 있다”고. 그의 그림책 제목 또한 “우리 집에 갈래?”이다. 거창서 나고, 서울서 오래 활동했던 이 지연 작가는 현재 함양에 산다. 거창보다 더 작은 도시라 그리로 옮겼다. 작은 마당이 있는 조용하 고 아늑한 집이다. 공간과 공간, 마을과 마을을 찾아 거듭 작업을 해온 터이지만, 집에서의 한가함 에 더할나위 없이 만족해하고 있다. 그에게는 마을 또한 길 위의 집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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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장동 하숙집의 추억 어효은

강원도에서 생활하다 서울 도심 지역에 발을 내디뎠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5 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흘렀다. 고등학생 때 부터 연극동아리 활동을 했고 연극영화과 전공을 마쳤다. 지방에서 극단 생활을 해오 던 나는 4년여간 활동을 마무리하고 이름만 들어도 친숙한 대학로 고시원에서 지내게 되었다. 고시원에서 8개월 정도 생활하던 차에 당시 만나던 애인이 제안을 해왔다. 본 인이 지내고 있는 하숙집으로 이사를 오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이었다. 고시원보다 환경도 괜찮고 하숙집 아주머 니가 해주시는 아침, 저녁을 먹을 수 있다는 특혜까지 있었다. 잘 챙겨 먹다 보면 지금 보다 건강도 더 좋아질 것 같다고 했다. 좋 은 의견이었지만 고시원에서의 생활도 적응 이 되어가는 것 같았고 함께 어우러져 살아 야 하는 하숙집에서의 생활이 자신이 없었 다. 몇 번 거절 의사를 밝히고, 들어온 고시 원 방에 누워 좁은 천장을 쳐다보았다. 5만 원을 아끼기 위해 창도 없는 1평 남짓한 방 안에 누워 밀려오는 처절한 외로움을 느꼈 다. 순간 ‘그래 가보자’, 는 다짐이 갑작스레 올라왔다. 더 나은 곳으로 가는 거지만 변화 가 두려웠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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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은 많지 않았다. 정리를 금방 마치고 고시원을 나 왔다. 정든 이모와 주변 방 동료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고시원에서 생활하며 혼자만의 공간이 생긴 것이 좋았지만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것을 인 정한다. 이틀이 멀다 하고 술을 마셨고 밥도 잘 챙 겨 먹지 않아서 살은 점점 빠지고 있었다. 방안은 어둡고 비좁았고 통풍도 잘 안 됐다. 지독히도 외로 웠다. 성동구 마장동 하숙집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즐거 웠다. 매일 차려져 있는 아침밥을 맛있게 먹었고 먹 고 나면 든든했다. 수요일 저녁에는 늘 고기반찬이 나왔다. 감자탕, 불고기, 제육볶음, 돼지고기를 직 접 구워주기도 했다. 채식하기로 다짐한 지 2주 만 에 아주머니의 감자탕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고생 해서 요리한 음식을 먹지 않을 수 없다는 반 핑계를 댔다. 그도 그럴 것이 더운 날 몇 시간을 푹 끓여 만 든 얼큰한 감자탕 맛은 일품이었다. 하숙집에서 재미난 모임도 했다. 방에 스크린을 설 치해서 하숙집 동료들과 영화를 함께 보기도 했다. 같이 아침 체조도 했다. 나는 3층에 애인과 살았고 옆 방에는 애인의 동료가 지냈다. 머지않아 언니도 그 옆 방으로 이사를 왔다. 2층에는 중국인 동료가 있었는데 동료는 자주 3층으로 올라와 방문을 두드 리며 내 이름을 부르곤 했다. 한국어를 가르쳐달라 고 부탁했다. 밝고 개방적인 친구였다. 가끔 너무 자주 찾아오는 날엔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지금 떠 올리면 재미난 기억이다. 덕분에 나도 중국어를 조 금 배웠다. 친구는 내 발음이 아주 좋다고 칭찬해주 었다. 근처에는 마장국민체육센터가 있어서 오전 시간에 수영을 배우기도 하고 필라테스, 기타 등 평소에 관 심 있었던 운동과 문화활동을 할 수 있었다. 센터 옆에 자리한 아담한 놀이터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 며 그네를 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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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숙집 근처에는 편의점이 있었고 정말 맛있는 닭 강정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근처에만 가도 냄새가 기가 막혔다. 유혹을 이겨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 다. 애인과 시원한 맥주와 닭강정 3천 원어치를 사 서 맛있게 먹곤 했다. 하숙집 바로 밑에 있는 1층 건물은 꽤 오래된 떡볶이 맛집이다. 쫄깃쫄깃한 떡 과 맛있게 매운 양념에 라면 사리와 쫄면을 넣고 튀 김만두와 국물을 함께 먹으면 환상의 맛이다. 국물 을 조금 남겨두고 치즈를 뿌린 밥을 볶아 먹으면 딱 알맞은 양에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다. 응봉동 으로 이사를 온 지금도 가끔 생각나면 떡볶이집을 방문한다. 사장님과 어머니께서 밝은 미소로 맞아 주신다. 지금 돌이켜보면 고시원에서 하숙집으로 이사 가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건강도 많이 회복 됐고 정서적으로도 많이 안정된 시기였다. 비록 에 어컨이 없어서 여름엔 수건을 찬물에 적셔서 몸에 두르고 잘 때도 있었고 겨울에는 적당히 따듯하지 않아서 난로를 틀어놓고 자다가 전기세가 많이 나 와 아주머니에게 한소리 듣기도 했지만 나는 나답 게 잘 지냈다. 잠깐의 시기에 함께 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 다. 그 시간은 지나갔다. 쭈욱 그렇게 하숙집에서 살아갈 것 같았는데 지금은 다른 곳에서 마장동 하 숙집에서의 추억을 떠올리며 글을 쓰고 있다. 잠깐 의 인연이지만 그래서 더 소중한 날들이었음을 느 낀다. 마장동 하숙집에서 따듯한 기억을 선물해준 인연들에 고맙다. 어디에선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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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편부터 서영탄 통통라디오, 시장사람들 변정연, 소혜정, 이영자

시장의 주역들, 디제이로 외도 중 세 명이 통통마을라디오[대표 서영탄, 성동종합장애인복지관]에서 진행하는 마장축산물시장 라 디오 디제이가 된 것은 ‘자의’가 아니었다. 해보면 되게 재밌을 일이지만, 언제나 그들에게 일이 먼 저 아닌가. 디제이로 연습을 하는 중간에도 전화기는 끊임없이 번갈아 울려댔다. 더구나 그들은 마 장동축산물시장상점가진흥사업협동조합이라는 긴 이름의 이사들 아닌가. 43명 중 여자는 10여명. 그중 세 명이 ‘총대’를 메고, 상인들을 위한 라디오 디제이를 맡았다. 전주 사람 이영자 님은 덕진축산서 주로 소를 가공하고 도소매를 진행한다. 변정연 님은 아성축산 의 대표고, 돼지 담당이다. 소해정 님은 조금 특별하다. 그의 업소 21세기 패키징에서 하는 일은 소 와 돼지의 진공포장 필름 수입 판매다. 아주 옛날에는 고기를 썰어 신문지에도 싸주고, 광주리에도 담아가고, 좀 세월이 흐른 뒤에는 비닐봉지에 넣었다. 하지만 이제는 멀리 오래 운반이 필요하기도 하고, 냉동실에 넣어 보관했다가 풀어도 고기의 질을 상당 부분 보존해 줄 수 있는 필름도 개발돼 있 다. 어쨌든 이 모든 부분들의 총합, 그보다 더 큰 곳이 마장동축산물시장이다. 통통라디오는 2016년에 첫 녹음을 한 뒤, 지금껏 5년여를 성실하게 방송을 만들어왔다. 녹음후 파 일을 팟방에 올리는 방식을 고수하지만, 첫방송은 용감하게도 보이는 라디오였다. 모기관이 청계천 변 마장동에 위치한 복지관이지만, 통통라디오 서영탄 PD 겸 진행자 겸 교육자는 늘 라디오 자체의 전문성 혹은 독자성을 중한 가치 지향으로 삼아왔다. 통통라디오 팟방에는 4년여의 시간 동안 성실 하게 만들어온 성동 사람들과의 인터뷰, 마장동 6인6색 마장투어, 마장미식회 요리프로 토크방송 등 각종 자료들이 고스란히 남아 청취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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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과 김창호 인터뷰

나고 자라고 일터 잡고 결혼해 애를 낳았다 책 내고 마을일도 맡는 건, 내가 사는 땅이니까!

원동업

김영진은 <수도권 최대 축산물 단일시장 마장동> 책자의 제 5권 ‘마장동, 그 리고 민초들의 식육 이야기’ 1편을 장식했다. 3세대 김영진은 당시 2세대 김용득 과 같이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그 만큼 그의 가족은 마장동의 살아있는 역사이기 도 하다. 1세대 김한길은 1937년 하왕십리에서 살다가 마장동으로 이사를 했다. 그러니 벌써 83년여, 4세대가 고스란히 이 땅에서 살아왔다. 김영진은 마장동서 나고, 자라고, 결혼하고, 일터를 만들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다.

부인 김창호는 남편 김영진과 같은 초등학교 동명을 나왔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얼굴을 본 적도 없더라는데, 그 만큼 학교엔 아이들도 많았었다. 두 사람은 지금 세성디자인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둘은 함께 마을의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글을 쓰고, 편집 디자인까지 해서 세상에 내놓는다. 마장동이야기 뿐만이 아니라, 행당 동도 왕십리도 그렇게 손길이 닿았다. 이런 점은 아마 부모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인지 모른다. 영진의 어머니 김순기 여사는 특히 서류니 사진이니 하는 것 을 하나도 버리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남을 수 있었던 것이 ‘간송 김형필에게 소 작료를 지급한 영수증’이다. 그런 자료들이 모두 위 <마장동> 책자에도 남았고, <서울의 푸줏간 마장동>展에서도 특별 전시관을 이루는 계기가 됐다.

김영진은 지금 마장동주민자치위원회 위원장이다. 주민의 입장에서 마장축산물시장 상인 들과 때로 긴장하면서, 때로 협력하면서 마장동의 일들을 맡고 있다. 마장동은 산과 강과 들 그리고 경원선 같은 다양한 자연적 지리적 환경을 갖고있는 곳이다. 최대 단일 축산물 시장은 마을에 큰 자산이면서, 한편으로는 부담이다. 토박이의 사명감으로 혹은 땅과 가 족에 대한 사랑으로 지금의 일들을 헤쳐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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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장다움은 무엇인가? 질문에 답하고 싶다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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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장동 큰대문집 차남 김영진 인사드립니다. 지금은 매우 작은 대문이지만 옛날에는 우리 집 문이 크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큰대문집에서 태어나 지금껏 마장동에서 생활하며 사업도 하고 있습니다. 회사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서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아내도 나와 같은 동명초등학교 후 배이고 장인어른은 우리 초등학교 대선배님 되십니다. 저희 애들 역시 동명을 나왔습니다. 이렇듯 저는 마장과 인연이 깊습니다. 김영진이 마장과 관련된 일이라고 하면 오지랖을 발 휘하는 원천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제가 동명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오전반 오후반까지 있을 정도의 콩나물교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 반 이십 명이 채 안 되는 인원에 세 반 정도라고 합니다. 마장의 서쪽에 있다해서 ‘서마’라 불리는 마을의 현재 상황을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도시재생은 '공공의 예산으로 조사하고 발굴된 문화자원으로 지역을 고급화시키는 전략 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조사·발굴된 자원 중 가치 있는 것들을 계승·복원 해서 보존·관리하고 이를 잘 활용하는 것입니다. 2018년 ‘마장의 휴일’이라는 컨셉으로 축제를 했습니다. 그때 6인 6색의 마장 투어가 열 렸습니다. 그다지 대박이 난 프로그램은 아니었지만 나름 긍정의 효과가 있었습니다. 마장 동에서 나름 토박이라는 마장의 주민들이 각기 다른 코스의 투어를 만들어서 해설과 함께 마장을 여행하는 형태의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마장의 역사, 문화, 부동산, 교육, 예술 등의 폭넓은 이야기로 투어가 진행되었습니다. 투어를 통해 마장에도 ‘갈 곳이 있고 볼 곳이 있 다’라는 이미지를 심어준 것이 최고의 소득이라 하겠습니다. 마장 투어는 지역의 문화자원 에 공감되는 스토리를 엮어 창조적인 문화 콘텐츠를 만든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번 도시재생을 통해서 마장은 무엇인가? 마장다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답을 하 고 싶습니다. 자연문화자원인 청계천과 예술문화자원, 생활문화자원인 마장축산물시장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드라마, 영화,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마장동의 인물들은 서민이라는 것입니다. 가끔씩 사람들은 저에게 이야기 하곤 합니다. 마장동을 벗어나서 생활도 해보고 생각도 해 보라고 말입니다. 마장동 안에 갇힌 이미지가 있다고 말입니다. 십 몇 년 전 돌아가신 어머 님의 평생 꿈은 우리 동네 주변의 공유지 분할이었습니다. 200명 이상이 15필지를 소유하 고 있는 기형적인 부동산입니다. 그래서 도선사거리를 중심으로 1970년대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변화가 전혀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도시재생에서 소통할 수 있는 ‘친구’를 찾고 그것이 마을의 조그마한 변화로 이어져서 늘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공유지 분할에도 힘이 되는 그런 마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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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축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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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소 기 돼지 이야


독박 씌우기 ​제페토

칼에 베이고도

더는 딱지지지 않는 생살 몇 덩이가

치지직, 불판 위에서 탔다

이모님과 유통업자는 이문을 남겼고

도축업자와 옛 주인도 이문을 남겼다

우리 또한 삶의 노고에 대한 얼마간의 보상을

(엉뚱하게도)

너의 살점에 청구하기로 했다

회식의 취지대로

웃고 떠들며 단합과 영양을 보충하다가

문득 너도

도축장으로 실려가던 그저께

고속도로 트럭 밖의 생경한 외계 풍경을

기왕에 소풍 삼아 즐겼기를 바랐으나

사실 우리는 그런 식의 소풍을 떠나지 않는다

미안하다만

우리는 돈을 치렀고

이문을 남겼고

오롯이 너만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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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로 안 태어나서

권경덕

고기를 달리 보기 시작한 건 집을 나온 후부터다.

1주차 - 노인 : 삶을 똑바로 마주하고 (최현숙, 글항아리)

그전까진 집 안에서든 집 밖에서든 차려진 밥상 앞에

2주차 - 엄마 : 정치하는 엄마가 이긴다 (정치하는엄마들,

앉아 고기가 있으면 맛있게 먹고 고기가 없으면…,

생각의 힘)

없어도 군말 없이 먹지만 주방장(어쩌면 엄마)에게 섭섭한 마음(어쩌면 불만)을 조금 갖는, 고작 그 정도

3주차 - 장애 :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사계절) 4주차 - 동물 : 고기로 태어나서 (한승태, 시대의 창)

의 인간이었다. 당시 나의 음식 세계관은 이랬다.

1.음식은 고기가 들어간 메인메뉴와 고기 이외의 서브 메뉴(나물, 장아찌, 김치, 과일 등)로 나뉜다. 2.서브메뉴는 메인메뉴의 맛을 돋우는 주변부 음식이다. 3.고로 육류는 과채류보다 우월하다! (나는 밥상 위의 종 차별주의자였나?)

자취를 시작하고부터 나는 먹기만 하는 사람에서 장 을 보는 사람, 요리를 하는 사람, 상을 차리는 사람으 로 몇 단계 진화했다. 내 손으로 음식을 차리면 반찬 하나하나가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식당에서 별생각 없이 리필하는 장아찌 하나도 뚝딱 나오지 않는다는 걸 몸소 체험하고, 음식에 관여하는 시간이 길어질수 록 중심(고기)과 주변부(고기 외 음식)의 경계는 점점

<고기로 태어나서>는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었다. 저

흐려졌다. 어느 절에서 먹은, 채소와 나물만으로 차

자인 한승태는 서울을 떠날 핑곗거리를 찾다가 직업

려진 사찰음식도 (허기가 반찬이긴 했지만) 아주 맛

소개소장이 추천해 준 옥수수 농장과 양계장 중에 덜

있었다. 그럼에도 고기와 비(非)고기의 관계가 완전

지루할 것 같은 양계장에 취업한다. 양계장은 실제로

평등해지거나 역전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

지루하지 않았지만, 한승태는 한 달을 못 채우고

다. 맛있는 채식도 좋지만 맛있는 육식이 조금 더 좋

도망쳐 나왔다.

았기 때문이었다. 고기가 조금 더 맛있으니까. 내 미

"돈을 달라는 말은 꺼내지도 않았다. 내가 원한 것은

각은 그렇게 굳어졌으니까.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싶

악몽에나 나올 법한 그 닭들에게서 멀어지는 것뿐이

었는데, <고기로 태어나서 / 한승태>를 읽게 되었다.

었다." <고기로 태어나서 / 한승태>

<고기로 태어나서 / 한승태>는 독서모임에서 읽었

한승태는 충격을 받고 서울로 돌아가다가 고기를 위

다. 모임의 주제는 '목소리들'이었고 노인, 장애,

해 길러지는 동물들이 어떻게 먹고 살고 있는지, 작

엄마, 동물 네 개의 키워드로 네 권의 책을 선정했다.

정하고 보기로 마음 먹었다. 그 이후로 금산, 정읍, 이

"이번 북살롱 주제는 '목소리들'입니다. 말하고 싶어

천, 강경, 횡성, 포천, 그 외 미공개 지역에 있는 식용

도 말할 수 없고, 말해도 잘 듣지 않았던 목소리를 듣

동물 농장에서 일했고, 그렇게 돌아다니며 몸소 경험

습니다."라고 시작하는 자못 진지한 모임 소개 글을

한 것들을 적었다. 농장에서 사육되는 돼지, 닭, 개의

올렸다. 6명 정도의 사람이 모였다.

삶은 처참했고, 처참한 현장을 목격한 한승태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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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 귀도 처참해졌다. 책을 함께 읽은 우리들의 마음

/ 김한민>에서는 동물의 극심한 고통을 보고 도 닦는

도 처참해졌다. 이 책을 보기 전에도 공장식 축산 시

심정으로 비건이 된 김한민의 이야기를 읽었다. 디카

스템으로 인한 전염병, 살처분 등의 문제를 뉴스로

프리오가 출연하는 환경 다큐 <비포더플러드>에서는

접하긴 했지만, 한승태가 현장을 클로즈업으로 찍은

기후 변화의 큰 요인 중 하나로 '소'를 꼽았다. 소의

듯한 글을 읽고 훨씬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모임

트름과 방귀가 지구를 망치고 있다는 사실은 농담 같

원 J는 독후감에 이렇게 썼다.

은 실화여서 놀랍다.

"특히, 병에 걸린 (돈이 되지 않는) 자돈들이 어떻게

책과 영화를 볼 때마다 위기감과 처참함을 재확인한

죽는 지가 내겐 너무 충격적이었는데, 그냥 바닥에

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 3분 동안 데워 먹는 소고기

패대기쳐서 죽인다는 것이다. 그런 자돈의 얼굴은 온

카레를 먹었다. 며칠 전에는 함께 잡지를 만드는 원

통 피범벅이 된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자돈은 분뇨

주부가 데리고 간 마장동 축산물 시장 앞 동네, 간판

장에서 버려져 배고픔과 추위에 허덕이다 목숨을 잃

없는 갈비탕 집에서 갈비탕도 먹었는걸. 아무래도 이

는다. 나는 그런 아기 돼지들의 모습들이 머릿속에

따 저녁에는 채식 재료로 만든 고추장 비빔밥을 먹어

선명하게 그려져 괴로웠다."

야겠다. 최근 신간으로 <매일 한끼 비건 집밥 / 이윤

J는 앞으로 돼지고기는 못 먹겠다고 생각했지만 얼

서>란 책이 나왔던데 사봐야지. 그럼 내일은 뭘 먹을

마 후에 친구와 먹은 김치찌개에도 돼지고기가 들어

까. 육식을 만류하고 채식을 독려하는 마음의 소리를

있었다. 어느 저녁에 엄마가 목살을 구워줄 때는 별

들으면서도 또, 고기를 먹게 될까.

로 먹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저항했지만, 잠시 후에 부드러움과 짜증이 뒤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J야, 가끔씩 고기는 먹어줘야 돼." 고기로 태어나서를 읽은 후에도 나는 고기를 먹었다. 그런데 고기를 볼 때마다 마음 한 쪽에서(어쩌면 위 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건 아니지. 그 래 이건 아닌데. 아무래도 아닌데. 내 안의 목소리가 반복해서 들릴수록 조금씩 변화가 있기도 했다. 채식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되고, 친구와 가끔씩 비건 식당 에 가며 채소와 과일 위주의 음식과 조금씩 가까워졌 다. 그러면서도 고기는 먹었다. 채식과 육식을 둘러싼 논쟁들도 관심 있게 찾아봤다. 채식을 했다가 건강을 잃었다는 사람의 이야기, 그 사람이 건강을 잃은 건 채식 때문이 아니라 편식 때 문이라는 이야기, 1인분의 고기를 생산하려면 3인분

채식과 육식의 경계에서 방황하고 모순된 생활을 이

의 곡물이 필요하기에 육식은 효율 면에서도 좋지 않

어가는 중에도, 목소리는 계속 들려온다. 이건 아닌

다는 이야기, 단백질은 식물성으로 섭취할 수 있고

데. 아무래도 아닌데. 귀를 막고 되는 대로 먹고 싶은

개인에게 맞는 채식 식단을 체계적으로 조절하면 대

마음이 들면서도, 무언가를 계속 찾아 읽고, 보게 되

부분 괜찮다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을 꽤 신뢰하

지 않을까. 비건을 선언한 김한민처럼 극적이진 않지

면서도 고기는 계속 먹었다.

만, 미세하게 달라지는 순간이 쌓이다 보면 고작 이

이후에 <사랑할까 먹을까 / 황윤>에서 소규모 농장

정도 인간에서,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지 않을까. 아

의 돼지 가족 '십순이와 돈수'를 만나 정이 든 사람 가

무래도 변화가 더딘 건, 고기로 안 태어났기 때문은

족 '황윤과 도영이'의 이야기를 읽었고, <아무튼 비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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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준 살라미랩 대표 인터뷰

솔트 살, 고기 라미, 살라미 만드는 구례 사람 살라미를 김치 만들 듯 이탈리아 신부…, 내게 살라미는 관계다 원동업

이상준 대표와 인터뷰를 하고 싶었던 것은 마장동축산물시장 때문이었다. 현재 시장에서 팔리고 있는 것은 정육. 즉 소와 돼지에서 발골(뼈를 발라내고)후, 정형(고기를 이리저리 저며내는 일)을 통해 생성된 고기를 파는 것이 아시아최대단일축산물 시장이라는 마장동의 현실이었다. 족발과 순대 정도의 전통적 음식을 빼고는 충분히 다양하게 고기를 가공하지 못하고 있지 않나? 하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이상준 대표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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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미의 살은 솔트(salt), 즉

두 가지를 준비하고 있었다. 살라

다음엔 그저 심심하니까, 혼자 사

소금이다. 라미는 육(肉) 즉 고기

미와 와인이었다. 마장동축산물

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포트럭 파

다. 염장육, 소금에 절인 고기가

시장서 고기를 사가 직접 한남동

티를 하자고 했는데, 거기서 차츰

살라미다. 물론 저장을 위해서이

수도원서 작업을 하는 모습을 옆

인연이 되었을라나요? 여기 영삼

지만, 이 과정은 한국의 김치 발

에서 지켜보았다. 그 생활의 음식

이 형을 포함해서 여섯 가구 10여

효 만큼이나 정성이 깃든 과정이

을 구례의 친구들과 나눠먹고 싶

명이 참여했어요.(상준)

필요하다. 이상준 대표를 처음 만

었다. 그의 살라미 그리고 그레빠

모이는 때 컨셉이 있었어요. 예를

난 것은 혜화동에서였다. 규모를

(와인 만든 찌꺼기로 만드는 증류

들면 봄에는 봄나물. 옷도 노란

크게 해서 열렸던 이전의 농부시

주. 상준네는 이를 구례빠라 부른

색으로 드레스 코드를 맞춰서 오

장 마르쉐가 코로나19로 인해 열

다)를 만드는 전 과정은 곧, 사람

자. 그런 재미를 찾은 거지. 각자

리지 못하다가, 지난 6월 14일 일

들과의 관계를 확장한 역사이기

음식 하나와 술도 하나씩 갖고 오

요일 열렸던 것이다. 살라미 랩은

도 하다.

기. 대개 비건(채식주의)이 많은데 반발해서 육식도 주제로 넣고. 나

그 수많은 농부들 중에서 흔치 않 은 사냥꾼-축산인-이었다. 실제

- 구례에 인연은 언제? 자기 소개

는 양고기랑 동파육을 만들어 왔

그날은 그만 유일하게 고기류를

를 해 주세요.

고. 여기 상준이네는 살라미, 소시

팔았다.

2013년 서른네 살 때 들어왔어

지를 만들어 온 거예요. (영삼)

살라미 랩이 자리한 곳은 지리산

요. 계절의 변화를 알고 싶은 데

자락 전남 구례였다. 유배당하고,

서 살고 싶었어요. 그런데 강원은

- 살라미를 만들어 왔다는 거잖아

도망하고, 피해 사는 사람이 많았

좀 추워서 제외했고, 제주 고흥

요? 살라미는 어떻게 만들어요?

다는 이 구례는 여전히 도시와 산

장흥 순천 여러 곳도 찾아가 봤지

건염 방법하고 수염 방법이 있어

업사회에 지친 현대인들의 도피

만 역시나…. 구례는 오자마자 마

요. 건염은 마른 소금을 고기에

처요 안식처였다. 그가 살라미를

음에 들어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

문질러요. 염분이 충분히 고기 속

만들고자 했던 연유와 이유는 사

었어요.

까지 스며들게요. 수염은 소금물 에 담그는 거죠. 제 방식은 수염.

람들이었다. 한때 신학 공부를 오 래 하고, 수사로 서품 받기 전, 그

- 원래부터 요리와 관계가 있던

정확한 비율이 중요해요. 너무 많

는 홀연 속세로 돌아온다. 그리고

사람이었는지.

으면 짜고, 적으면 충분히 보존이

선택한 곳이 이곳 구례.

전혀. 구례에 와서 처음 한 것은

안 될 상황이 올 수 있으니까. 심

살라미를 처음 본 것은 한국서 청

구례의 개천 서시천에다 차 조명

부온도를 71도가 되도록 온도를

춘과 중년을 모두 보낸 이탈리아

과 트렁크를 이용해 영화를 보는

쌓는 거죠. 균을 살려야 하는 거

신부들의 수도원에서였다. 그들

거였어요. <양들의 침묵>을 처음

니까, 더 높은 온도여도 곤란하죠.

은 겨울을 나기위하여 저장음식

봤어요. (음, 양은 고기잖아!)

그런 다음 농장 헛간 같은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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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미랩 이상준 대표

걸어놔요. 효모균이 잘 붙고 숙성

돼지를 쓰려고 노력하죠. 여러 곳

상준의 친구이자 형이자 지역의

되도록.

을 찾다가 지금은 무안의 정은농

멘토인 영삼도 구례에 새로 이주

장에서 고기를 받아 사용해요. 자

해 정착한 케이스다. “도시라는

- 소세지도 만들고 있죠? 그것도

연양돈에, 사료도 주변에 보리를

오류”를 벗어나 “모든 것을 단절

오래 보관하는 방법이죠? 맛도 더

키워 주거든요.

하고, 투쟁하는 삶”의 터로 구례

좋고.

를 택했다. 그는 상준이 얼마나

그렇죠. 저는 돼지고기 앞뒷다리

- 혜화동 마르쉐에도 참여했잖아

열심히 고기를 공부하고 있는지

를 써요. 지방과 목살도 섞죠. 고

요.

알려주었다. 시골서 소외된 어린

기를 잘 갈아서 고춧가루, 팬넬(향

여기 영삼 형이 제 정착을 많이

이를 위해 매해 어린이날 만드는

신료), 후추, 소금도 넣어서 반죽

도와줬죠. 여기 작업장 설치할 때

‘고기 끼운 빵’ 이야기도 들려주었

해요. 그런 다음, 예전에는 내장

도 크게 역할을 해줬고. 마르쉐에

다. 신학을 공부하고, 수사 수업도

을 썼는데 요즘은 식용 케이싱에

영삼형 지인이 있었어요. 형은 선

받았던 그는 신을 삶의 확장과 종

도 끼우기도 해요. 역시 농장 다

비고사리를 넣으려다 ‘보류’ 당했

교적 각성을 다른 방향서 찾았다.

락 등에서 잘 건조하고, 한 달 뒤

는데, 저는 입점할 수 있었어요.

사람간의 관계와 그를 이어주는

에 꺼내어 내놓죠.

거기가 깐깐하게 심사도 하고, 투

살라미가 그에겐 ‘삶에서의 신’일

어나 견학을 통해서 공부도 해야

지 모른다.

- 고기를 찾아서 봉화에도 가고,

하고, 파일럿 팀으로 참여해서 잘

무안에도 가고, 구례에서도 헤맸

맞고 충분히 경쟁력이 있는지도

다고 하던대요.

보거든요. 더 밸로랑 허브뜯는 베

마장동서도 고기를 받아봤죠. 거

짱이농부랑 산양치즈 ‘상남치즈’

기서 고속버스를 이용해서 보내

등과 함께 협업으로 샌드위치도

주기도 하는데, 여러 측면서 어려

만들어 팔기도 했는데, 할 일이

운 점이 있었어요. 지역 가까운

오히려 많아지면서, 지금은 제 작

곳에서 찾아보자 생각했어요. 그

업에 집중하고 있어요.

리고 유기농인증 혹은 동물복지 한남동 수도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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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대에 삶의 챔피언이 되는 방법

사람보다 낫다! 소 페르디난도와 돼지 댐키퍼 애니와 그림책으로 읽는 소 돼지 이야기

이상국

서울에서 독립을 하기 전까지 가족은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한 사람들이었다. 청소 년 시기부터 농번기면 부모님의 일을 도와왔고, 농사 짓는 부모님을 가장 가까이서 바라보며 자랐 다.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사람이 가족이기에 부모님의 일이 대를 이어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치 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마장동축산물시장에 방문했을 때 거리를 빼곡하게 채운 작은 가게들 곳곳에서 함께 일하는 가족의 모습을 쉽게 마주했다. TV 방송을 통해 만난 마장동축산물시장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초보 정형 사 청년에게는 정형 기술로 최고 수준의 경지에 오른 정형사 아버지가 계셨고, 내가 부모님의 일을 가장 가까이에서 봐왔듯 그도 어깨 너머 아버지의 일을 보고 자랐을 수 있다. 그런 경험이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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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 밖으로 모험 떠나는 소, 페르디난드! 애니메이션 <페르디난드>는 주인공인 어린 송아지가 울타리를 탈출하여 자신의 꿈을 쫓는 모험 스토리다. 이러한 스토리는 자식이 부모의 직업을 대를 이어 이어오 는 것과는 반대다. <페르디난드>에서 다른 어린 송아지들은 덩치 큰 아빠 황소를 우 러러 보고 커서 투우 경기에 나가는 모습을 상상하지만, 투우 경기에 나서는 아빠를 지켜보던 주인공 페르디난드는 투우 경기 출전을 전혀 꿈꾸지 않았다. “아빠, 꼭 가셔야 돼요?” “전 그런 꿈 안 꿔도 돼요?” 페르디난드는 다른 어린 송아지들과도 싸움을 해본 적도 관심도 없다. 사실 그가 가 장 좋아하는 것은 꽃이다. 그런 그에게 아빠 황소는 크면 꿈이 바뀔 거라며 단호히 말 한다. “하나는 확실히 해. 네가 나보다 강해질 거라는 거야.” “너는 투우 경기에 나가 챔피언이 될 거야.” 페르디난드는 좁은 마굿간을 탈출하여 남들과는 다른 운명을 선택한다. 모두가 당 연하다고 여겼던 익숙한 방식에 페르디난드는 의문을 품고 더 자유로운 세상을 향해 새로운 모험을 떠난 것이다. 물론 페르디난드도 투우 경기에 출전하는 운명을 거스 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페르디난드>에서 투우 경기 장면이 흥미로웠던 것은 서로 다른 결과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가 마주한 투우 경기 장면은 챔피언에 오르는 방 식으로서 아빠 소와는 다른 결말을 보여준다. 어쩌면 새로운 세상에서 챔피언이 되는 과정은 울타리 안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경쟁 해서 이겨야 하는 기존의 방식을 따를 필요는 없지 않을까. 경쟁하지 않고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개척하는 길도 충분히 챔피언으로 인정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제작사 블루스카이 스튜디오가 <페르디난드>를 통해 전하는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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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지키는 꼬마 영웅 피그, 댐키퍼! 소를 캐릭터화한 애니메이션 작품 <페르디난드>의 플롯이 탈출과 모험의 유형이라면, 돼지를 캐릭터화한 그림책 <댐키퍼>는 어둠으로부 터 마을을 지키는 구출형의 플롯을 지녔다. <댐키퍼>는 픽사 스튜디오 애니메이터들이 독립하여 만든 톤코하우스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그림책 으로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댐키퍼>의 주인공 피그(Pig)는 ‘어둠’으로부터 마을을 지키는 댐 지기 다. 피그는 댐 위에 있는 풍차에 혼자 살며 풍차를 돌려 마을을 삼키려는 어둠을 몰아내지만, 마을 사람들은 피그가 하는 일을 고마워하지 않고 당연하게 여긴다. 학교 친구들의 놀림과 마을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도 피그는 마을 사람 들을 구하기 위해 열심히 풍차 돌리는 일을 계속한다. 피그의 모습은 사 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일터에서 묵묵히 일하는 우리들 가족 의 모습과 닮았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가족은 모두 어둠을 막는 용감 한 키퍼(Keeper)다. 울타리 밖으로 모험 떠나는 소, 그리고 마을을 지키는 댐키퍼 돼지도 결 국 모두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용기가 극적인 순간에 빛을 발휘한다. 삶 에는 스스로의 진로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온다. 소와 돼지의 이 야기처럼 그 과정은 우리 모두 다를지라도 빛나는 꿈을 잃지 않고 앞으 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31


나쁜 지방과 착한 단백질?

서성원

소고기 부위별 100g 당 지방량 목심

등심

채끝

4.97g 11.3g 2.26g

안심

우둔

앞다리

6.3g

4.5g

7.61g 24.4g

갈비

양지 8.1g

사태

설도

4.47g 9.72g

돼지고기 부위별 100g 당 지방량 목심 9.5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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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심

안심

앞다리 뒷다리

갈비

삼겹살

19.9g 13.2g 12.3g 16.5g 13.9g 28.4g

* 이미지 출처: 구글


©임소진

출처: 네이버

(단백질의 4차 구조 헤모글로빈)

오늘날에는 비만을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잘 아는 것처럼 탄수화물과 지방을 많이 섭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백질은 사정이 다르다. 우리가 건강한 몸을 유지하려면 단백질이 꼭 필요하다. 단백질은 근육과 같이 몸을 구성하는 역할을 한다. 면역에 중요한 항체도 단백질이다. DNA의 유전정보를 저장하는 것도 단백질이다. 연골, 피부, 가죽, 털, 비늘 등도 단백질 이다. 거기다 몇몇 호르몬까지도 단백질이다. 생명의 정수이자 필수 요소라고 할 수 있 다. 생명체의 거의 모든 것으로 작용하는 물질이 단백질이다. 자연에 존재하는 단백질은 대략 20개의 아미노산으로 구성된다. 우리는 이것을 식품 으로 섭취하게 된다. 단백질이 많은 대표 식품을 골라보았다. · 육류 :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등 · 어패류 : 생선, 조개, 굴 등 · 기타 : 콩류(예: 두부, 콩, 두유), 견과류(예: 호두, 땅콩, 잣), 달걀, 유제품(예: 우유, 치즈) 등 여기서 문제는 육류다. 고기에는 지방이 함께 있다. 그렇다고 어떤 사람들처럼 닭가슴 살만 먹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았던 과거에는 지방이 중요한 영양소였다. 현재 지방은 나쁜 놈이 되었다. 그런데 그 나쁜 놈이 착한 놈과 함께 붙어 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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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경엄마_금호식당에서 칼콩갈까지

멋쟁이 일본 처자가 새벽에 그랜저를 타고 왔어! 마장동 고기가 멈추는 곳, 간판 없는 갈비탕집

원동업

그가 집이요, 동시에 점포로도 쓰고 있는 이 집은 50여년 동안 그의 거처였다. 당 시에는 청게천은 복개도 되기 전이고, 그의 집인 이곳도 리어카가 다니지 못할 만큼 좁은 길만 하나 있었다. 개천쪽으로는 루핑으로 집을 잇거나 판자로 지은 하꼬방들 이 즐비했다. 그래도 40여 평이나 되고, 당시에는 여러 채의 방을 갖고, 마당이 깊은 이 집은 꽤나 번듯한 집이었다. “내 운기가 없으면 이 집은 곧 무너진다카요.” 그 현 경엄마의 건강한 기운이 있어 이 집은 아직도 건재하게 갈비탕을 팔고 있다. 이 집은 간판이 없다. 40여 년 전, 장사를 처음 시작한 곳은 그의 동생이자 동료였던 요리사였다. 요리 솜씨가 최고였던 그 동생은, 자존심이 강해 옛 직장-중앙우체국-으 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던 그녀 현경엄마에게 제안했다. “내가 앞에서 다 할테니 그저 옆에서 돕기만 해달라!”고. 그렇게 시작한 음식장사였다. 15년여를 함께 일하다, 그 녀마저 세상을 떠나자 이 도도한 아주머니는 드디어 전면에 나선다. 동네 도사에게 얻은 이름은 금호식당이었다. 이 집안의 뜰에서 그녀는 삼계탕도 끓이고, 갈비탕도 했다. 칼국수의 육수도 만들고, 콩도 갈았다. 지금은 여름엔 콩국수를, 겨울엔 칼국수를 내면서 갈비탕을 주력으로 한다. 딱 세 가지 메뉴만, 4시까지 판다. 더구나 준비해둔 재료가 동나면 장사도 마친 다. 어느날은 멋쟁이 아가씨들이 찾아와 갈비탕 만드는 비법을 가르쳐 달란다. 일본 에서는 갈비탕을 잘하는 셰프가 없다고. 다음날 새벽 4시에 오라고, 장난처럼 말했 다. 그녀들은 다음날 검은색 그랜저를 타고 그의 집 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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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장동이면 다 좋지!" 새벽 4시부터 9시까지 다섯 시간 동안 이어진 ‘갈비탕 만드는 법’을 그녀는 꼼꼼 히 배웠다. 중간 중간 그 처자는 자주 무언가 일을 달랬다. “그럼, 파나 썰어요!” 주인 장의 한마디에 그녀가 칼을 잡았다. 이전에는 그렇게나 칼을 잘 쓰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대단한 실력가였다. 갈비탕 한 그릇도 사양하고, 그녀가 떠났다. 떠난 후 보 니, 놓여있는 봉투 하나. 말하자면 수업료였다. 삼십만 원. 얼마나 지났을까? 그 처자 가 전화를 해왔다. “배운 대로 하니, 정말 장사가 잘 된다”고. “꼭 한번 일본에 오시라 고.” 그럴 일이 없을 것같아, 주소도 제대로 적어놓지 않았다. 비법을 배우겠다고 현경엄마를 찾아오는 이들 중엔, 고기를 어디서 대느냐는 이들도 있다. “마장동이면 다 좋지!” 그녀의 대답은 한결같다. 그래도 비법이 있다면, 정성을 다해 고기를 씻고, 적당하게 세상의 레시피를 쓰고, 고만큼의 고기만, 고만큼의 솥에 서 삶는 ‘루틴’을 지키는 일이다. 한우를 쓰고서는 7천원 갈비탕을 맞출 수 없으니, 금 호식당이 쓰는 고기는 육우다. “우리 고기로 이런 맛을 내다니….” 공급처 사장도 감 탄을 하고 갔다나? 꼬박꼬박 대금도 바로 치루는 신용을 40여년 지켜왔다. 간판 없는 갈비탕집, 실은 금호식당은 청계천변에 있다. 청계천박물관 뒤편 마장동 의 언저리다. 청계천변에 좁은 길, 판잣집이 다닥다닥하던 때도 이 집은 있었다. 청 계천이 덮혔다가 다시 드러났을 때도, 이 집은 여전하다. 집을 현경엄마가 지키고 있 는 탓이다. 우시장도 도축장도 떠났지만 마장동축산물시장이 남아있는 것이 이곳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 덕분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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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행복

어효은

오늘 염소고기를 만들었어요. 놀러와요!

생일이면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불고기를 만들어주곤 하셨다. 엄마만의 레시피로 짭짤하고 달짝지근한 양념을 한 불고기는 부드러웠다. 밥과 함께 비벼 먹으면 한 그 릇 뚝딱이었다. 나중에 커서 엄마가 양념 만드는 방법을 알려줬다. 우선 찬물로 고기 의 핏물을 빼고 양파와 배를 갈아 넣는 것이 핵심이었다. 잘 만든 양념에 고기를 재우 고 냉장고에 숙성을 시키는 것도 중요했다. 아빠는 특별한 날이 있을 때 소고기를 사 왔다. 가령 우리가 대학교 생활을 하다가 시 골집에 내려가 가족들이 다 모이는 날이면 같이 고기를 구워 먹었다. 집 앞 텃밭에 있 는 상추와 깻잎을 따와서 같이 싸 먹었다. 명절에는 작은댁에서 갈비를 요리해왔다. 가족, 친척들이 모두 둘러앉아 뜨끈뜨끈한 갈비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대학 엠 티에 빠지지 않는 것은 바비큐 파티다. 지금도 한여름 후덥지근한 온도, 흙과 풀 냄 새, 숯과 고기 타는 냄새를 맡으면 풋풋하고 설렘 가득했던 시절이 떠오른다. 그 시간 은 내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부모님 생신이 되면 언니와 일찍 일어나 미역국을 끓였다. 먼저 미역을 불리는 동안 냉장고에서 소고기를 꺼낸다. 미역은 늘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불어난다. 미역을 잘 다듬어 들기름에 볶다가 물을 넣고 끓이기 시작한다. 소고기는 핏물을 제거하고 들 기름에 달달 볶은 다음 끓고 있는 미역국에 퐁당 넣는다. 어쩐지 소고기가 꼭 들어가 야 만족스럽다. 뭔가 대접하는 느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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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 음식에 얽힌 추억이 많은 나이지만 이런 내가 육식을 줄이게 된 이유는 여러 가 지가 있다. 자라면서 특히 돼지고기가 몸에 받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먹고 나면 소화가 잘 되지 않고 배가 자주 아팠다. 또 다른 이유는 환경과 동물들을 생각해서다. 우리는 너무 지나치게 많은 육류를 소비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끼니마다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됐다. 영화 ‘잡식가족의 딜레마’, 책 ‘고기로 태어나서’ 등을 읽으며 사고 에 변화가 생겼다. 동물들이 불쌍했다. 끔찍한 환경에서 고통받으며 자라는 동물들 의 처참한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동물들의 권리는 무참히 짓밟히고 있었다. 비단 식습관 문제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롯된 지나친 소비문 화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동물들은 온갖 질병에 시달려 죽어가고 있다. 죽음의 바 람은 돌고 돌아 인간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지금 우리는 그 바람을 맞고 있다. 모든 사람이 육식을 금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동물과 인간 모두의 건강을 위해 다 른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다양한 음식으로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다. 동물과 인간 모두 건강한 환경을 만들어 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전체적인 시스템을 함께 변화시켜나가야 한다. 쾌적하고 자유로운 곳에서 조금이라도 더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얼마 전 건지라는 영화를 보면서 인상 깊었던 장면이 있다. 유럽 어느 섬마을 주민은 전쟁 당시 몰래 키우던 염소를 잡아 구이를 해 먹었다. 모든 가축을 몰수당하고 몰래 숨겨둔 하나 남은 가축을 요리한 것이다. 언제 목숨을 빼앗길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 이라 마을의 모든 창은 두꺼운 커튼이 덮이고 대문은 꼭꼭 닫혀 있었고 실내는 어두 웠다. 주민은 방에 촛불을 켜고 근처 이웃집에 쪽지를 남겼다. ‘오늘 염소 요리를 만들었어요. 저녁 식사 함께해요.’ 저녁 시간이 되자 굳게 걸어 잠 근 문이 하나둘 열리기 시작하고 쪽지를 받은 이웃들이 한 두 명씩 모여들기 시작했 다. 그들은 각자 집에 있는 채소로 감자 파이 등 요리를 만들어왔다. 위스키를 가져 온 사람도 있었다. 촛불이 켜진 식탁이 둘러앉아 그들은 따듯하고 맛있는 고기를 먹 고 위스키를 들이켰다. 따듯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갔다. 아주 오랜만에 웃음소리 가 들려왔다. 그들은 서로의 근황을 물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 순간만큼은 그 공간 안에 전쟁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없었다. 생기와 활력, 온기가 채워졌다. ‘살아가는 데 무엇이 중요할까.’ 생각해보았다. 염소고기와 촛불, 위스키일까? 그보 다 중요한 건 그 안에 담긴 서로의 안부를 묻는 마음이다. 엄마의 불고기를 먹으면서 기분이 좋았던 이유는 맛 때문만이 아니었다. 미역국에 소고기가 꼭 들어가야 만족 스러운 이유는 누군가를 생각하는 소중한 감정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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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와 함께한 우리 인간들

서성원

소들의 조상 우리 인간에게 조상이 있듯이 소에게도 조상이 있다. 야생의 소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초승달과 비슷한 뿔이 1미터에 달하는 소였다. 옛날 서양에서 풍요를 기원하 며 달에게 제사를 지낼 때 제물이 필요했다. 이 야생소가 가장 좋은 제물이었다. 뿔이 초승달과 닮았기 때문이다. 그 야생의 소는 ‘오록스’로 약 9천 년 전 고대인들은 이 동물을 잡아서 소라는 가축으로 만든다. 오록스를 인간이 그림으로 묘사한 것은 지 금부터 약 1만 5천 년 전인 빙하기의 프랑스 라스코 벽화다.

왼쪽_약 2만 5천년 전 얄타미라 동굴벽화

오른쪽_ 약 1만5000년 전 그려진 라스코(Lascaux) 동굴의 벽화

기원전 58년 유럽원정에서 시저는 오록스를 처음으로 보고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 다. ‘코끼리보다는 적으나, 모습, 형태, 색깔은 소와 같다. 그것들은 매우 강하고 민첩 해 상대가 사람이든지 동물이든지 보이는 대로 공격을 한다’ 그리고 ‘게르만족은 그 동물의 뿔로 만든 술잔을 가장 성대한 잔치에 사용한다’. 시저의 눈에도 그 초승달 모 양의 거대한 뿔이 인상적이었다. 오록스는 흑색 혹은 짙은 갈색이었고 어깨높이가 180cm, 무게는 1000kg에 달했으 며 뿔 길이만 80cm 정도였다. 빙하기 시대 오록스의 서식지는 잉글랜드에서 한반도 에 이르렀다. 이들은 장거리 헤엄을 치지 못했기에 일본, 아일랜드, 샤르데냐, 크레타 등지에서는 살지 않았다. 한반도에서는 창원의 구석기 유적지에서 오록스의 뼈가 발 견된 적이 있다. 빙하기가 끝나고 오록스들은 시련을 맞았다. 빙하기가 끝날 무렵 수많은 동물들이 인간의 사냥, 질병, 기후 변화 등으로 인해 그 수가 줄어들거나 멸종당했는데 오록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인도와 북아프리카, 아시아에서 오록스는 빠르게 자취를 감 추었으며 유럽의 오록스들만이 겨우 살아남게 되었다. 그러나 유럽에 살던 종들도 점차 다가오는 멸종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유는 서식지의 파괴였다. 1620년에는 마지막 숫소가 죽었고 7년 후에는 마지막 암소가 죽었다. 오록스가 멸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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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과 프랑스인 한국과 일본이 앙숙이듯이 영국인과 프랑스인들도 그렇다고 한다. 영국에서는 프랑 스 사람을 '프로그'(frog·개구리), ‘개구리고기를 먹는 사람’이라고 놀린다. 프랑스에 서는 영국 사람을 '로스비프'(rosbif)라고 놀린다. 영국인들은 유럽에서 가장 쇠고기를 탐하는 민족이었다. 그들의 켈트족 선조들은 기 원전부터 영국 섬들에 소 사육 문화를 구축했으며, 로마인들도 서기 43년 브리튼 섬 을 침공하면서 소 떼를 이끌고 왔다. 켈트족의 소 사육 문화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 드 북부 및 서부에까지 뿌리를 내렸다. 유럽은 육식을 즐기는 대륙으로 알려져 있지 만, 영국사람들은 이웃 대륙인들보다 훨씬 더 많은 쇠고기를 소비했다. 쇠고기를 대 량으로 섭취하는 것은 엄청난 힘과 남성다움을 획득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미국 독립 전쟁 전, 영국의 군사력이 사실상 전세계 모든 대륙에 뻗치고 있을 무렵 한 영국인은 이렇게 적었다고 한다. '고기를 마음껏 먹는 사람들이 좀 더 가벼운 음식을 먹는 사람들보다 더 용감하다는 사실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고기는 각 군주의 만찬에 초대된 손님들의 적절한 지위와 신분을 명확히 구분해 주 는 정치적, 사회적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주빈석은 언제나 가장 윗사람에게 제공되 었으며, 그 옆으로 지위를 따라 차례차례 자리가 정해졌다. 최고 부위의 고기는 가장 윗사람 몫이었고, 질이 좀 떨어지는 부위는 아랫사람 차지였다.

소의 사용 범위가 넓은 우리 나라 소는 버릴 게 없다. 일본이 소를 150여 부위로, 영국이 200여 부위로 도살한다. 이에 비해 한국에서는 소의 부위를 300개가 넘는 부위로 구분하여 도살한다. 세계적으로 도 이렇게 세세하게 분류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고 한다. 살코기 부위만 먹는 게 아니다. 곱창, 막창, 간 등의 내장도 먹는다. 피는 선지를 만드 는 데 쓰이며 배설물은 비료로 활용한다. 심지어 소의 담낭에 생긴 병적인 응결물은 약으로 쓴다. 흔히 담이라 부르는 그것이다. 이것이 아주 유명한 신경안정제인 우황 청심환의 재료 '우황'이다. 소뿔도 버리지 않고 갈아서 약이나 국궁의 소재, 또는 아 교, 화각 공예품을 만드는 데 쓴다. 뼈란 뼈는 사골 국물 확정이고 끓이고 남은 뼈는 갈아서 거름으로 쓴다. 가죽은 의류 재료나 기타 가죽제품(가죽가방, 구두 등)의 재료 로 아주 요긴하게 쓰인다. 심지어 소시지에 쓰이는 케이싱의 주 원료인 콜라겐을 추 출하는 데도 쓰인다. 또한 말랑말랑한 소프트겔 형태의 영양제(건강보조식품) 외피 재료로도 우피 성분이 사용되었으나 한국에서는 몇 년 전부터 광우병 우려를 이유로 우피 성분이 함유된 소프트겔 제품은 모두 통관이 금지되었다. 이렇게 우리는 소와 함께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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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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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삼가시장 모습

시기(市記)

삼가시장 풍경 봉성문여(鳳城文餘)에 경남 합천 삼가면의 '삼가시장(삼가장터)'을 다룬 글 '시기(市記)'가 있다. 이 글을 쓴 문무자 이옥(文無子 李鈺, 1760~1815)은 정조의 ‘문체반정’에 몰려 큰 고초를 겪게 된다. '봉성'은 '삼가'의 옛 이름이다.

(전략) 소와 송아지를 몰고 오는 사람, 소 두 마리를 몰고 오는 사람, 닭을 안고 오는 사람, 문 어를 들고 오는 사람, 멧돼지 네 다리를 묶어 짊어지고 오는 사람, 청어를 묶어 들고 오 는 사람, 청어를 엮어 주렁주렁 드리운 채 오는 사람, 북어를 안고 오는 사람, 대구를 가 지고 오는 사람, 북어를 안고 대구나 문어를 가지고 오는 사람, 잎담배를 끼고 오는 사 람, 미역을 끌고 오는 사람, 섶과 땔나무를 매고 오는 사람, 누룩을 지거나 이고 오는 사 람, 쌀자루를 짊어지고 오는 사람, 곶감을 안고 오는 사람, 종이 한 권을 끼고 오는 사 람, 짚신을 들고 오는 사람, 미투리를 가지고 오는 사람, 큰 노끈을 끌고 오는 사람, 동 이와 시루를 짊어지고 오는 사람, 돗자리를 끼고 오는 사람, 나뭇가지에 돼지고기를 꿰 어 오는 사람, 강정과 떡을 들고 먹고 있는 어린아이를 업고 오는 사람, 병 주둥이를 묶 어 휴대하고 오는 사람, 짚으로 물건을 묶어 끌고 오는 사람, 버드나무 상자를 지고 오 는 사람, 광주리를 이고 오는 사람, 바가지에 두부를 담아 오는 사람, 사발에 술과 국을 담아 조심스럽게 오는 사람, 머리에 인 채 등에 지고 오는 여자, 어깨에 무엇을 얹은 채 어린아이를 이고 오거나 머리에 이고 다시 왼쪽에 물건을 낀 남자, 치마에 물건을 담고 옷섶을 잡고 오는 여자, 서로 만나 허리를 굽혀 절하는 사람,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 람, 서로 화를 내며 발끈하는 사람, 손을 잡아끌어 장난치는 남녀, 갔다가 다시 오는 사 람, 왔다가 다시 가는 사람, 갔다가 또 다시 바삐 돌아오는 사람, 넓은 소매에 자락이 긴 옷을 입을 사람, 저고리와 치마를 입은 사람, 좁은 소매에 자락이 긴 옷을 입는 사람, 소 매가 좁고 짧으며 자락이 없는 옷을 입는 사람, 방갓에 상복을 입은 사람, 승포와 승립 을 한 중, 패랭이를 쓴 사람 등이 보인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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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줏간 노정기

서성원

사람은 다양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래야 건강하단다. 정상적인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다양한 영양소가 필요한 것이다. 다양한 것 중에 오늘은 고기 얘기를 해보려 한다. 제목을 붙여 보자면 우리집 ‘푸줏간 노정기’쯤 되겠다. 얘기하자면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

노원구 공원 성수동 마장동 세영축산 장수한우 중계동

양평 개군면 중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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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 개군농협 정육점을 만나다 우리는 한때 중계동 사람이었다. 21년쯤 살았다. 은행사거리다. 학원만 많은 곳. 상권은 빈약했다. 추 석을 앞둔 어느 해 가을, 노원구청서 주관한 지역 농 산물 직거래 장터가 열렸다. 이런저런 농산물을 둘 러봤다. 무엇인가 샀을 것이다. 농산물을 사는 게 쉽 지 않은 동네였으니까. 여기서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야겠다. 나는 지 리산서 나고 자란 시골 출신이다. 한데 아내는 도시 에서 나고 자랐다. 그런데 취향은 반대다. 아내는 재 래시장을 그렇게 좋아한다. 특히 농수산물 같은 것 은 재래시장에서 사고 싶어 했다. 중계동에는 재래 시장이 없었고 가려고 해도 멀리 있었다. 그러니 아 내에게 직거래 장터는 축제였다. 고기 파는 부스에 발길이 닿았다. 양평 개군농협이었다. 고기를 샀다. 그 후, 그곳 고기를 가끔 먹게 되었다. 아내가 고기 의 질에 대해 평가했다. 우수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격까지 착하다는 것이다. “고깃집 갔어 봐. 이렇게 먹을 수 있겠어?”

"고기가 싫다"고 하신 어머니

더구나 위생적이고 질 좋은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긴 했다. 하지만 사실 집에서 고기 먹는

내 어머니는 체질이 약한 분이다. 평생 농사일을 놓

건 번거롭기 짝이 없다. 그러함에도 아내가 하겠다

지 않았다. 농부의 아내였다. 손목에 무리가 갔다.

고 하니 딴말을 할 수 없었다. 고기 살 일이 있으면

불편하니까 진주의 한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한

운전기사가 되어야 했고 충직한 포터가 되어야 했

데 낫지 않았다. 서울로 모셔서 고려대병원 수지외

다. 이게 양평 개군농협 푸줏간과 인연의 시작이었

과 의사에게 재수술을 받았다. 허약해진 몸을 보충

다. 문제는 거리였다. 우리 집에서 양평 개군면까지

해야 했다. 뼈에 발병한 결핵이라는 진단을 받았던

가려면 35분쯤 걸렸다. 우리는 명절이나 집안 행사

것이다. 고기를 사기 위해 개군농협으로 갔다. 그때

가 있을 때 그곳 정육점을 찾았다. 우리 집에서 고기

가 용문산산나물축제 기간이었다. 개군농협 한우 판

를 먹어본 이들 역시 반응이 좋았다. 그리고 양평을

촉 행사도 했다. 어머니를 모시고 축제장으로 갔다.

지나칠 일이 있을 때 그곳을 들렀다.

현장서 고기를 먹고 샀다. 등급이 좋은 한우였다. 집에 오신 어머니는 고기 드시는 걸 달가워하지 않 으셨다. 아들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을 생각했을 것 이다. 평소에도 고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 주일쯤 지났을까. 어머니는 집으로 가셨다. 아버지 밥 챙겨 드려야 한다면서. 부기가 빠지지 않아서 퉁퉁 부은 그 손목을 하고서…. 한 달만 계시라고 그렇게 말씀 드렸건만. 그런 어머니는 지금, 산에 누워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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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동업

이건 고기가 아니라 약이야!

장수한우 정육점과 질긴 인연

2014년이다. 아내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했다. 복

앞서도 말했지만 개군농협 고기가 좋아도 멀어서 탈

통이 아주 심했다. 을지병원 응급실로 갔다. 급히 수

이었다. 택배로 고기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술해야 한다고 했다. 아내는 큰 병원을 원했다. 구급

가끔이었다. 그렇게 단골 정육점이 멀리 있어서 안

차를 타고 서울대병원으로 출발했다. 출발 전에 의

타까워하던 그즈음, 동네에 정육점이 들어왔다. 장

사가 했던 말이 귓속에서 맴돌았다.

수한우였다. 집에서 아주 가까웠다. 어느 날부턴가

“가는 길에 물혹이 터지면 죽을 수도 있어요.”

아내는 이 집만 다녔다. 왜 그러냐 물었다.

딴 병원으로 간다니까 의사가 했던 말이었다. 아, 그

“특수 부위까지 살 수 있어. 고기 맛이 달라.”

냥 을지병원에 있을걸. 어렵게 서울대병원에 도착했

사장님이 발골한다고 했다. 통째로 들여와서 발골하

다. 복도와 로비까지 환자들이 누워있는 게 아닌가.

니까 필요 부위가 모두 있다는 것이다. 덕분에 우리

기가 막혔다. 의사들의 파업 때문이었다. 의약 분업

집은 입맛대로 골라 먹을 수 있었다. 부위에 따라 맛

에 불만을 가졌던 의사협회가 단체 행동을 했던 시

이 다르다는 것을 입으로 느꼈다. 입이 즐거웠다. 장

기였다. 타고 갔던 구급차로 되돌아가야 했다. 다음

수한우가 우리 집의 푸줏간으로 장수를 누리고 있

날인가 긴급 수술을 했다. 전에도 큰 수술했던 적이

었다. 그러다 일이 벌어졌다. 우리가 이사한 것이다.

있었다. 그때는 몸조리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몸이

2017년의 일. 아내의 장수한우에 대한 믿음은 변하

부실했다.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했다. 아내는

지 않았다. 거기만 갔다. 나는 여전히 운전기사와 포

채식을 좋아한다. 내가 말했다.

터를 맡아야 했다.

“이건 고기가 아냐, 약이야.”

집은 성수동으로 옮겨왔지만 푸줏간은 여전히 중계

한우를 자주 먹었다. 식당에 가서도 먹고 집에서 먹

동 사람이었다. 그럴 때마다 말했다. 마장동 다시 가

기도 했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그렇게 아내의 입맛

보자고. 그런데 마장축산물시장에 문제가 있었다.

이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후에 몸이 회복되었다. 수

가게가 너무 많았다. 가게마다 고기가 엄청났다. 고

술 전보다 건강 상태가 좋아졌다. 어떤 음식을 어떻

르기가 쉽지 않았다. 그 때문에 아내는 마장동을 내

게 먹느냐에 따라서 몸이 달라진다는 것을 생생하게

키지 않는다고 했다.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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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장축산물시장 세영과 만나다 2019년 겨울, 누군가 세영축산을 소개해줬다. 고기

5월 어느 날, 세영으로 갔다. 좋은 고기를 샀다. 하지

가 달랐다. 가격도 착했다. 아내 마음이 조금씩 흔들

만 아내는 고기를 먹지 못했다. 아내는 지금 손목까

리고 있었다. 하긴 아내 마음도 이해한다. 수년간 믿

지 아프다. 손목 부위의 피부를 떼어냈기 때문이다.

고 거래했던 장수한우였다.

아내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가여워한다. 어머니가 손

올해 3월 30일이었다. 아내와 나는 역삼역 근처 의

목 수술 후에 고생했다. 그리고 또 하나, 어머니가

원을 갔다. 곧바로 큰 병원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서

돌아가시기 전 병원에 계실 때 콧줄 때문에 고통스

울대병원에서 조직검사를 받았다. 결과가 나오기 전

러워하셨다. 아내는 그 때문에 눈물을 훔치곤 했다.

에 또 다른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검사 하나를

본인이 콧줄로 연명을 해보니 역시 생각이 난다고

끝내고 아내가 쓰러졌다. 검사약물 부작용이었다.

했다.

몸이 쇠약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검사를 진행하려면

아내는 수술 후에 병원에서 또 쓰러졌었다. 사는 게

먹어야 했다. 몸이 수술을 견뎌낼 정도가 되어야 했

참 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 있으니까

다. 세영으로 갔다.

그랬다. 숨 잘 쉬면서 밥 먹고 물 마시고 똥 잘 싸면

“살치도 좋고 안심도 부드러워요.”

그것만 할 수 있어도 다행이고 행복이었다. 다행스

구이용으로 얇게 저민 살치를 먹었다. 일주일 만

럽게도 지금은 병원에서 퇴원했다. 다른 부위로 전

에 몸무게 1Kg을 늘렸다. 조직검사 결과가 나왔다.

이가 되지 않았다. 언젠가 수술 후에 그랬듯이 좋은

PET-CT, MRI 검사가 이어졌다. 그렇게 4월은 불안

고기를 먹고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회복을 하고 있

하고 무서운 날이었다. 살아남을 수 있을까. 입원해

다. 그렇게 되려면 이번에도 우리 집 단골 푸줏간의

서 수술을 받았다. 장기간 입원해야 할 것이라고 했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다.

다. 모든 치료는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것으로 집중 되었다. 생각보다 상처가 빨리 아물었다. 퇴원해도 좋다고 했다. 집으로 왔지만 아내는 침대를 벗어나 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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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비드19로 저기압이야? 그렇다면 고기앞으로!

정소원 코로나 19 사태로 일상이 바뀌었다. 개학은 언제 할 것이며, 사회적 거리두기 는 언제나 끝날까? 코로나19 우려와 각종 불안으로 ‘안 먹던 집밥’을 먹게 되 는 세상이 되었다. ‘집밥’의 영양소도 고르게 챙기는 것이 중요해졌다. 물론 밥, 채소, 과일 등을 고루 먹어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영양소는 고기, 생 선, 달걀, 우유 등에 풍부한 단백질임은 말할 것도 없다. 특히, 고기는 코로나 19로 인한 스트레스를 해소해주고 행복을 선사해줄 으뜸 음식이다. 행복호 르몬으로 알려진 세로토닌과 도파민을 생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단백질은 육류 중 돼지고기에 많이 포함되어 있다.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을 주는 마그네슘, 피로를 해소해줄 비타민 B군도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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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성비 좋은 고기를 온라인 주문도 가능 효율적인 영양소 섭취를 위해서는 한번에 많이 먹기보다는, 매끼니 부족하지 않게 챙 겨먹어야 한다. 고기를 먹는 데 신경 쓰이는 건 ‘고기 가격’일 터. 그렇다면 좋은 가성비 의 품질 좋은 고기를 사고,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정녕 없는 것일까? 마장동 축산물 시장은 연간 약 200만 명이 찾는 국내 최대 축산물 재래시장이다. 가성 비 높은 좋은 품질 고기를 판매하기로 단골들에게는 명성이 자자한 곳이다. 돼지고기 가격은 1kg 당 6200원 선, 소고기 가격은 최고 등급인 투플러스(1++) 한우등심 100g 이 8500원~9000원 수준이다. 현재 이마트와 롯데마트 등에서 파는 1++ 한우 등심 100g은 약 1만원~1만3000원임을 감안할 때 훌륭한 가성비이다. 온라인으로 샀을 때 도 가격은 동일하다. 이왕 외출했다면, 고기 굽는 마을에 가보시라. 1층에서 사서 2층서 먹을 수도 있다. 1인당 차림비만 내면 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인기 메뉴는 한우 등심에 치마살, 살 치살, 안창살, 토시살, 제비추리 등을 섞은 모듬 세트. 1인당 200g씩 3~4인분에 대략 5~6만원 대다. 5~6인분은 8~10만원 수준이다. 시내 중심가에서 삼겹살 먹을 돈이면 고가의 모듬세트를 먹을 수 있다.

공영주차장까지 저렴한 가격으로 시장 근처에 주차장이 없을까봐 걱정한다면 안심해도 된다. 마장 축산물 시장 서문쪽 에는 공영 주차장이 자리하고 있다. 북문쪽에도 공영주차장이 있다. 물론 대중교통으 로도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 왕십리역에서 내려 경원선 철도길을 따라 내려오는 산책 길은 특별한 도시 풍경을 보여준다. 마장역에서 내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쳐 가는 길도 있고, 청계천을 따라 올라가는 산책길과 자전거 길도 마장동축산물시장으로 통한 다. 이렇게 가다보면 왕십리 곱창거리도 만날 수 있다. 소중한 외출 기회를 <마장 축산 물 시장>에 투자해보는 것은 어떨까? 건강도, 맛도, 행복도 챙길 수 있는 일석삼조의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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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현 통의도시연구소장 인터뷰

미래는 아직 미완, 스스로 자긍 갖는 주민이 희망 마장동축산물시장의 기원과 역사 현실에 대한 모든 것

원동업

이 책은 서울역사박물관 홈페이지 (http://museum.seoul.go.kr)를 통해 이북(e-book)으로 볼 수 있고, 다운로드도 가능합니다. 통의도시연구소 홈페이지(http://www.turi.re.kr)에도 마장동 생활사자료를 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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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현 교수는 한국의 대표적인 도시 건축 학자다. 세계도시사를 가르쳤고, 30여 년 동안 전국을 다니며 답사 를 진행했다. 서울역사박물관 개관 및 서울학연구소 개설을 기획하고 진행했고, 그 자신이 사는 도시 서울의 생성에 대한 연구를 비롯, 서울의 종로구, 성북구, 중랑구, 성동구 등지에서 지역을 탐사하고 책을 썼다. 1982 년에 서울시 간선도로변 도시설계를 할 때는 1년 3개월 동안 ‘성곽안 도로를 싸그리 뒤져서’ 550여쪽짜리 신문 지 크기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도시와 도시인의 삶을 역사문화적으로 복원하려는 염원을 갖고 있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통의도시연구소에서 기획하고 진행해 지난 2013년 12월 발행한 책이 <수도권 최대 축산 물 단일시장 마장동馬場洞>이다. 서울역사박물관이 주관한 480쪽 저서다. 총 6장인 이 책은 마장동의 역사적 형성과 그 작동의 과정, 도시건축학적으로 본 마장동축산물 시장의 개요와 세부, 마장동 사람들의 작업과 삶에 대한 총체적 자료를 담았다. 이 책은 이후 진행된 <마장동; 서울 최대의 푸줏간展>의 토대가 되었다. 이후 국 내외의 수많은 예술가와 기획자들이 이 책을 기반으로 하여 마장동에 대한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최종현 교수는 당시 마장동 식당에서 밥을 먹고, 수많은 사람들을 직접 인터뷰하고, 그가 가진 자료들과 해박 한 지식에 기초해 연구진을 이끌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곳 마장동축산물시장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지 에 대해서도 생각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이 책은 상황 보고서만으로 끝맺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아직 미완으로 남은 이곳 시장의 청사진은 어떤 것일까? 최종현 교수를 직접 만나 그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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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과 도시에 대해 평생을 천착해 오셨습니다. 내가 서울대 기계과 떨어지고, 한양대 건축과가 공학이라 입학했는데, 실은 다니기가 싫어 남대문 시장 향린미술학원 에서 생활했어. 유화도 하고 조각도 하고 구성도 하고. 독일 유학을 가려고 독어는 열심히 하고. 군은 자원해 갔는데, 김 신조 때문에 3년을 꼬박했지. 제대후 서양건축사 연구실 있 다가 박학재 교수님 방에 갔는데 한쪽 빼고 전부 책이야, 원 서로. 내가 깜짝 놀라서 이걸 해야겠다 했던 거야. - 학교 밖에서 오랜 동안 계셨죠. 아버지가 용돈을 많이 줬는데, 책을 사서 봤어. 유학 안 갈 거니까. 인도책인데 한 천오백만원짜리도 샀거든. 그리고 한 30여 년 전국을 방방곡곡 다녔어. 댐 수몰된다 그러면 거 기도 가고. 쿠데타하고 살인한 전두환 때문에 화가나 죽겠 는데, 알티한테 학점을 주라 총장이 그래. 못 준다 그랬더 니, 너 돌았냐? 그래 내가 그랬지. 니가 돌았지! 그러곤 사퇴 하고. 잘 됐다. 공부나 해보자 그렇게 강사생활만 하다, 한 양대로 가서 은퇴했어요. - 책을 여러 권 쓰셨습니다. 서울은 내가 사는 데니까. 나는 저기 궁정동 효자동, 여기 통의동서 평생 살았어. 서울 정도 600년 기획위원이기도 하 니까, 썼지. 답사책도 후배들이 쓰라해서 두어 권 쓰고. 서 울학연구소 만들어서 한 10년 서비스도 하고. 서울역사박 물관 관장이 후배인데, 어렵고 연구 고약한 일만 줘요. 책 < 마장동> 보셨다 하는데, 용역비만 갖고는 그 정도 안 나와 요. 할 때마다 한 4,5천 깨져. 제대로 할려면. - 어떤 점에 역점을 두고 연구를 하셨는지요? 나는 세계도시사를 공부했어. 정치 경제는 빼고 내가 거의 모든 분야를 공부했어. 도시와 질병 이런 것도 20여년 전 에 강의했어요. 코로나 사태 겪고 그 이야기를 제자들이 해 요. 소중한 공부였다고. 도시계획사는 도시만 하면 되지만, 그거는 의미가 없지 않나? 도시사가 되어야지. 시민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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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장동> 연구는 어떠셨습니까? 내 선배들을 포함해 도시론자들이 그러거든. '도시부적격 시설' 그런 이야기를 해. 나는 그런 견해에 반대해. 도시 시 설이고 유지, 관리가 중요한 거지. 시장 연구를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연구가 훨씬 더 어려웠어. 뚫리지가 않아. 그러다 우리 연구진 중 하나가 거기 비닐포장 장사하는 이랑 연결 하고, 그때부터 소개가 연속되면서 수월해졌지. 한전땅이 공유지라 내 머릿 속에서 뭐가 되겠다 해서 설계를 하려했 는데 결과적으로 그건 못 냈어. - 네. 미래 전망 제안 이런 부분이 없더군요. 대략적 청사진 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경원선이 연결되니까, 소를 기차로 실어와 거기서 소를 잡 아 가공 판매하고, 식당까지 연결하는 코스를 만들고. 거기 서 나오는 오수 이런 것들도 모두 정화시켜 생태 환경 교육 도 하고. 내가 환경공부도 70년대부터 했으니까. 그런 올인 원 시스템이면 뭔가 되겠다 싶었지. 시장 사람들 직주근린 할 여건도 만들고. 갈등도 점증할 텐데 그런 부분도 해소하 고. 그런데 서울시고 구청이고 조합이고… 협조가 안 되니 까. 그걸 짜는 것도 다 공력과 시간과 돈이니까. - 서울은 계속 공사중입니다. 성동구도, 성수동도 역시 작고 큰 전면적 개발에 직면해 있습니다. 서울은 너무 대규모야. 건설회사가 어마어마하지. 개발이 득이 지역보다 먼저니까. 지역 사람들 자긍심이 바닥이야. 왜 사람들이 서울로 몰리나? 먹고 쓰고 헤헤거리는 건대. 독일인 슈마커란 사람이 <스몰 이즈 뷰티풀>이란 책을 쓴 적 있어요. 민간에서 동네 골목길도 지정하자 내가 그랬어. 거기 역사문화가 있거든. 근데 안 해. 지역 사람들이 자기 사는 지역에 자긍심을 먼저 가져야해요. 자기 지역을 잘 알 아야 그런 것도 생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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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장동축산물시장과 성수동 수제화거리는 닮은 꼴

이상국 마장동 축산물 시장에 방문했을 때 인상 깊었던 점은 시장 내 점포에서 축산물 작업을 하는 모습이었다. 시장 내 마련된 다양한 점포의 작업장에서 각종 부산 물을 세척하거나 고기를 직접 손질하고 정형하는 작업의 과정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광경은 분명 낯설었지만, 익숙한 기분도 들었다. 마장동 축산물 시 장 방문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익숙함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떠오른 곳 이 성수동 수제화 거리다. 도시재생의 중심지인 두 곳은 커뮤니티로서 많은 부 분이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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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화 구두의 중심지, 성수동 성수동은 현재 한국 수제화 구두의 중심지로 불린다. 특히 수제화 구두 제작 공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가죽이다. 성수동에서 수제화 구두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죽 확보가 필수적으로 필요했다. 그 런 의미에서 마장동 축산물 시장 도축장은 성수동 인근에 위치해 지리 적으로 가죽 공급처로 큰 이점이 있었다. 1990년 이후 성수동에 수제 화 공장이 밀집 형성된 배경으로 마장동 축산물 시장 도축장 관련설이 꽤나 설득력 있는 이유다. 성수동 수제화 거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때론 복잡해 보여도 수제화 구 두에 대한 질서가 잡혀 있는 걸 알 수 있다. 수제화 부자재 판매상, 중 간 가공업체, 완제품 공장 등 각자 분야는 다르지만, 구두 하나로 소통 하고 교류한다. 이들은 ‘수제화’라는 공통의 목표를 향해 다 같이 한 방 향으로 달려 나간다. 유기적으로 일사 분란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모 여 한 켤레의 수제화 구두가 만들어 지는 것이다. 수제화 구두는 가죽과 실만 있다고 해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만약 완제 품 수제화 공장에 가죽과 액세서리를 공급하는 부자재 판매상이 없었 다면 성수동의 수제화 산업은 완성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성수동 수제화 거리는 작은 마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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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화 장인이 만드는 구두에는 신발을 신는 사람의 개성과 특징이 고 스란히 담겨져 있다. 성수동 하람공방은 무지외반증, 족저근막염 등 발 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한 맞춤형 교정 신발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영 부인 김정숙 여사의 버선코 구두를 제작하여 유명세를 탔던 JS슈즈연 구소의 전태수 수제화 장인은 여성 수제화 전문인이다. 이들의 신발이 수제화로서 특별한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단 하나뿐인 신발을 만드는 것 이상으로,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특색 있는 사람이 만든 가치가 더 크기 때문 아닐까? 나만의 특별한 구두를 찾아 사람들이 지금도 성수 동 수제화 거리를 찾는 이유다.

축산물 산업의 중심지, 마장동 성수동 수제화 거리를 걷다보면 하루에도 수없이 왕래하는 자전거와 오토바이의 모습을 발견한다. 마찬가지로 마장동 축산물 시장도 신발 이 고기로만 바뀌었을 뿐 그 모습은 성수동 수제화 거리와 매우 유사하 다. 고기를 실은 트럭이 시장 골목을 누비고 소·돼지의 각종 부산물을 옮기는 오토바이와 수레의 움직임도 마장동 축산물 시장에서 일상적으 로 만나는 풍경이다. 마장동 축산물 시장에서 운송 수단은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일을 하 는 사람들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도축된 소·돼지에서 나오는 정육과 부산물을 작업하는 작업자들, 축산물을 운반하는 사람 들, 축산물 판매를 담당하는 상인들 등 시장이라는 커뮤니티 안에서 모 두가 합쳐져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상호 의존하는 그 모습도 성수동 수 제화 거리와 참 많이 닮아 있었다. 특히 소상공인 상인 위주로 독립된 주체가 모여 큰 커뮤니티 공동체 관 계망을 형성한 점도 성수동 수제화 거리와 유사점이 지니고 있다. 마장 동 축산물 시장에서 독립된 사업자로 점포를 운영하는 상인들은 같은 공간에서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함께 협력해야 하는 동료들이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 19로 유례없는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다. 특히 사 회적 거리 두기로 오프라인 공간 활동이 자제되면서 그 영향은 고스란 히 오프라인 공간을 중심으로 영업하는 상인들에게 전해진다. 성수동 수제화거리도 마장동 축산물 시장도 모두 힘든 시기다. 이럴 때 일수록 ‘따로 또 같이’ 움직이는 모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축산물 산업 생 태계 내에서 독립적인 주체로 개인이 가진 특별함을 계속 발전시켜 나 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들이 긴밀한 협력 체계를 갖추고 공 존하여 시대적 위기도 함께 극복하여 더 나은 미래를 그려나가길 소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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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점 옆 과일가게

원동업

고기에도 반대말이 있다면 그건 채소 혹은 과일일 것이다. 둘의 운명은 매우 다르다. 고기는 크게 와서 분할과 정형 과정을 거쳐 차츰차츰 작아진다. 과일은 나무에서 떼어진 고대로 와서, 고 대로 팔려나가야 한다. 마장축산물시장엔 두 가지 고기만 있다. 소와 돼지. 물론 소에도 한우와 젖 소와 육우가 있고, 그 한우도 누렁소 칡소 꺼멍소로 나뉜다. 돼지는 랜드레이스, 요크셔와 듀록 그 리고 버크셔 종이 사육된다고 이른다. 이런 방식으로 치면 이곳 오자 씨의 가게는 복숭아만도 서너 종에 이른다. 오자네 과일가게는 다양한 종류의 과일을 판다. 여름엔 당연히 여름과일, 수박과 참외, 자두와 복 숭아가 많이 나온다. 어느 새부터인가 우리는 비닐하우스 재배에 익숙해져서 겨울에도 딸기를 먹 을 수 있다. 겨울이면 남반구 여름의 땅에서 포도가 수입돼 우리에게 선보인다. 머스캣처럼 다양한 포도를, 새로운 포도도 연속해 만나기도 한다. 소도 계절을 탄다. 대개 추운 지방서 자라는 소가 더 맛나다 한다. 정선과 영월의 나무가 단단하고 찰진 것과 비슷한 원리다. 평창 횡성 소가 맛나다는 이유다. 예전 우리는 소 하나를 많게는 300여 부분으로 나눴다고 한다. 소도 다양한 부위를 골라, 각기 다른 맛을 즐길 수 있다. 과일은 그 한 맛이지만. 주인 이오자 씨에게 지금도 가장 가장 어려운 일은, 맛난 과일을 고르는 일이다. 싸게 사서 많이 파 는 방법이 노점상의 일반적인 판매방법인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그녀는 좋은 과일 사는 일을 우선 으로 둔다. 그러려면 자연스레 가격이 내려갈 수는 없다. 이곳 마장동 축산물 시장이 소를, 그중에 서도 우리나라 한우를 가장 주력상품으로 하고 있듯, 그녀도 맛난 과일을 내놓고 제값을 받으려 한 다. 그녀의 가게에는 마장동축산물시장 사람들도, 지나는 이들도, 시장에 고기를 사러온 이들도 많 이 들른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고기는 과일과 궁합이 잘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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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장동 시장 생활예술모임 ‘산소리’

마장동서 고기 안 사주면 좀 그렇잖아! 문제 있다 없애? 공간 만들어 모이게 해야 옳겠지! 정소원

여기, 마장동축산물시장 상권 활성화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정기 버스킹을 5년간 지속적으로 해오신 상인 분들 모임이 있다. 이름하여 산소리. 시장을 돌아다니던 고객들은 산에서 들려오는 소리마냥 자연스럽게 자신의 마음 속을 파고드는 색소폰 소리, 반주소리에 홀려 한번쯤은 쳐다보기라도 하 게 된다고. 처음 보는 사람들을 춤추게도 하고, 노래 자랑도 하게 해서 같이 어 우러지는 행복을 선사하는 생활예술동아리, 산소리 회장님을 통해 어떻게 지 금까지 자발적으로 산소리를 운영해오셨는지, 마장동이 더 행복한 동네, 더 좋 은 동네가 되기 위해 도시재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인지 에 대해 여쭤보고 들어보았다.

-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마장동을 30대 중반에 들어와서, 40년 넘게 산 이영언입니다. -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올해 몇 살이더라..44년생이니까... 77살이네요.(웃음) - 산소리에 담긴 뜻이 있을까요? 글자 그대로 산소리. 이게 우리가 활동하는 사람들이 보니까 산들을 다 좋아 해. 산은 정기적으로 갔었단 말이에요? 내가 원래 바람소리라는 음악 그거 학 원, 연습실이 있었어요. 거기 나가서 내가 연습을 했지. 모여 같이 활동하는 사 람들이 산을 다니기 시작한 거야. 산에 가면 왜 식당들이 있잖아요. 거기 무대 시설이 돼있는 곳들이 있어. 군데군데. 그럼 거기 들려서 연주하고. 산에 가면 바람소리, 새소리, 개울소리도 나고. 자연스럽고 좋잖아. 그 소리가 너무 좋아 서, 산소리 연주단체로 이름 정하자. 계속 산소리야 자연스러워서.(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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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 비용부담하시면서 5년간 하시기 힘드셨을 텐데 그럼에도 계속 산소리 활동을 지속해 오실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내가 여기 온 지 42년 됐어요. 3월까지 인생한우 건물 지어서 32년 했지. 이 동네 덕분에 생활할 수 있었고, 내가 받은 것들을 돌려주고 싶다, 이 생각 들어 서 옛날에 색소폰 불던 거 살려서 어느 정도 공연을 할 수 있는 수준이 되니까 재능기부 겸 해서 아는 사람 데려와서 공연을 했지. 원래 한 달에 2번 했어. 근 데 너무 빨리 돌아오더라고. 자기 경비도 경비지만은 끝나고 나면 식사를 한 번 꼭 대접해줘야 하잖아. 근데 우리 마장동 시장에서 괜히 고기 안 사주고 딴 거 사주면 그렇잖아. 그래서 돈이 꽤 많이 들어가.(웃음) 본래는 5년 동안 공연했었고 그 중 최근 3년을 조합장이 조금씩 지원해줬지. 3년 동안 활동을 했었잖아요, 본래는 문화관광 그쪽에 시설이나 지원을 하기 로 하고. 기한이 끝나서 없어졌지. 마침 도시재생지역으로 마장동이 선정되는 바람에 거기서 와서 보니까, 우리같은 공연이 있으면 사람들 정서상 오는 고 객들도 볼거리가 있고 즐길거리가 있으니까 향후 3년은 도시재생에서 조금씩 지원해주지. 코로나 때문에 전반기는 아무것도 없고 하반기부터 하려고 신청 한 상태야. 도시재생 사업 중에 주민공모사업 있잖아. 주민들이 내가 이런 사 업을 하겠다고 신청하면 심사해서 지원해주는 거. - 지원금은 얼마나 되나요? 지원금 1회당 장비 20여만 원, 팀당 27만 5천 원, 그렇게 하고 그게 회당 그 렇게 되고, 거기 10%를 자부담해야 돼. - 참여하고 계신 주민으로서 마장동 도시재생의 어떤 점이 개선되면 좋으시겠 어요? 다들 열심히들 하긴 하는데, 코디네이터들이 아-이게 사회경험이나 직장경험 이 별로 없는 사람들로 처음엔 구성돼 있었다구. 상인들, 주민들과의 대화 이 런 것도 안 되고 그랬었어. 지금은 많이 이 코디네이터들이 경험을 통해서 소 통을 잘하게 되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도시가 바뀌는 걸 해야 하는데, 벌써 3년 되는데 솔직히 아직은 뭐, 그렇게 바뀌는 게 없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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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소리가 제가 생각하기에 상인분들이 발벗고 자발적으로 도시재생을 위해 나선 희소한 사례이고, 부족한 지원 속에서도 사실은 지자체에서 해주셔야 할 것을 해주신 것 같이 생각됩니다. 혹시 지자체가 바람직한 도시재생을 위해서 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게 있으신가요? 우선, 주민들을 위한 홍보가 부족해. 주민들이 하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아. 그리고 무대가 없는 게 아쉽지. 아차산 같은 데 가면 사람들이 쉬는 장소 군데 군데 상설무대가 설치되어 있다고. 거기는 이틀을 공연할 사람을 신청받는 거 야. 거기 산에 등산하러 온 사람들이, 관객들이 많잖아요. 서로 공연을 하려 그 래. 그럼 2시간씩 잘라서 배정을 해주고 한 팀당 얼마씩 비용을 준단 말이야. 다른 데도 마찬가지야. 노원구도 녹천교 밑에 수락산 밑에 이런 데 장소를 지 정해가지고 비용을 줘서 돈을 시켜요. 일부러. 근데 성동구는 보니까 오히려 여기 명문 다리, 거기 밑에서 어떤 사람들이 자 기 돈 비용으로 자발적으로 하는 게 있었는데 거기 사람들이 구경하다가 쓰레 기 버려서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그걸 없애버렸더라구. 허허. 근데 무대가 따 로 없다 보니까 우리끼리 알아서 하는데. 사실 거기 시장 가보면 알겠지만 오 토바이 계속 다녀서 연주 계속 못하고 중단되고 위험도 하거든. 땅값이 비싼 데니까(웃음). 저기 기찻길 옆에 지방 업자들을 내쫓아서 거기 공터가 꽤 넓게 돼 있거든? ‘거기 상설무대 해줘라.’ 상설무대 해준다고 돈이 뭐 많이 들어가 는 것도 아니고 그냥 바닥에 깔아주고 지붕 씌워주고 쇠파이프 몇 개만 고정 으로 해놓고 스피커 앰프 전기 코드만 꼽으면 되게 해주면 되잖아. 근데 이 시 장에 그런 게 없어. 그래서 내가 요청은 하는데, 안 먹혀. 구청장이 온다, 특별 히 상인들에게 직접 메세지를 전달할 필요 있을 때 그때 그 무대를 써도 되고 여러 가지가 필요한 거거든 그게.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신가요. 마장동 40년 주민으로서 마장동에 참 애착이 많고, 마장동이 항상 잘됐으면 좋겠고 뭔가 보답을 해주고 싶어서 공연을 해오고는 있는데. 아무래도 동네가 더 발전되기 위해서 이뤄줘야 할 부분은 많지 뭐. 아시아 최대 시장이라는 타 이틀 있는데 그 이름에 비해서는 지원을 너무 못 받아서. 신경 좀 써주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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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마치고 회장님의 환한 미소를 뒤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기존보다 주 민 도시재생사업의 분야가 다양해진 것은 맞으나 인터뷰를 하면서 아직까지 도 실질적으로 마장 도시재생에 기여할 수 있는 정책이 이뤄지지 못했다는 생 각은 지울 수 없었다. 아주 간단한 발상과 비용으로 구성될 수 있는 무대, 장비 같은 것들 없이 5년간 약 30만원의 적은 돈으로 프로분들을 직접 초빙하여 시 장에서 도시재생에 기여한다고 생각하며 공연을 했을 산소리에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산소리의 공연이 아시아 최대 고기 천국 시장인 마장축산물시장에 서 유일하게 하는 공연으로 인식될 정도라면, 지자체에서 진정 도시재생을 위 한 어떤 주민과 예술인들을 어떻게 지원해야 할 건지 보다 실효성 있는 정책 을 실현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마장동 도시재생예산이 타 지역에 비해서 적 지 않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이 도시재생을 위한 공연이나 행사가 있는 지의 존재 자체를 모른다면 마장동 도시재생은 아직도 갈 길이 먼 것이다. 그 러나 결국 이런 주민분들, 상인분들이 있기에 도시재생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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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도축·도살장, 지역 랜드마크로 부활

이상국

마장동 도시재생의 핵심시설인 ‘마장청계플랫폼 거점복합시설’이 곧 조성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미래에 조성될 마장청계플랫폼이 마장동 축 산물 시장의 축산물을 새롭게 발견하고 만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어떤 기능 을 할 수 있을까? 명심보감 성심편(省心篇)에는 ‘욕지미래(慾知未來) 선찰이연(先察已然)’이라는 말이 나온다. “미래를 알려면 과거를 보라”라는 뜻처럼 미래는 과거의 역사 속 에서 배울 수 있다. 도축·도살장이 복합문화공간으로 변화한 해외 도시재생 사례를 살펴보며, 마장동 축산물 시장의 미래를 준비해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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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 일상 문화예술공간, 스페인 마타데로 마드리드 스페인 마타데로 복합문화공간은 수도 마드리드에 위치해 있다. 마타데로란 스페인어 로 ‘죽이다’라는 뜻으로 ‘도축장’을 의미한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도시 내 도축 수 요가 줄고, 도축 시설이 교외 지방으로 이전하며 마타데로 도축장은 1996년 폐쇄되었 다. 방치된 도축장이 복합문화공간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2007년부터다. 마드리드 시가 올림픽 유치를 위해 도축장을 문화·예술공간으로 탈바꿈시키기로 착수한 것. 이 후, 옛 마타데로 도축장은 전시, 극장, 축제, 라이브 음악, 영화 및 시청각 프로젝트, 컨 퍼런스, 토크 및 워크샵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열리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냉장창고는 문화·예술인들의 작업실 등으로 내부 시설 공간을 재구성했다. 마타데로 마드리드는 시민들이 일상에서 문화예술을 발견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 여할 수 있는 개방된 문화 공간이다. 도시의 시민들이 문화예술 활동을 통해 문화의 즐 거움을 느끼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다양한 커뮤니티를 위한 예술적 실험과 창의적인 실 행을 지원하여 문화의 다양성을 촉진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홈페이지 https://www.mataderomadrid.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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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의 상상력을 담아내는 복합문화공간, 중국 1933 라오창팡 중국 상해에 위치한 1933 라오창팡(老场坊 늙은 공장)은 영국 건축가 스테이블포드 의 설계로 1933년 지어졌다. 라오창팡은 당시 중국 최대 규모의 도살장이었다. 상하이 에서 소비하는 육류의 대부분을 공급했던 도축시설이었지만, 1970년대 도축 관련 시설 이 교외로 이전하면서 도살장은 문을 닫았다. 오랜 시간 유휴공간으로 방치된 도살장이 새단장을 시작한 것은 2006년부터다. 기업 투자로 문화 예술 관련 업체들이 입주했고, 작가들의 예술 전시회와 웨딩 촬영 등이 열리는 상하이 대표 복합 문화공간으로 탈바꿈 했다. 1933 라오창팡 건축물은 도살장의 구조를 유지한 채로 외부를 연결하는 26개의 브릿 지가 미로처럼 엉켜 있다. 건물 내에 소들이 지나 다니던 길이 구불구불한 미로로 복잡 하게 이어지는 공간적 특성이 아직까지 보존되어 있는 1933 라오창팡은 현재 젊은이 들의 힙플레이스로 유명하다. 현재 방치된 도살장 폐건물은 젊은이들에게 상상력과 꿈 을 담아낼 수 있는 상업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홈페이지 : http://www.1933shangha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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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개방된 현대식 도시공원, 프랑스 파리 라 빌레트 라 빌레트 공원(Le Parc de la Villette)은 프랑스 파리 북동쪽 19구에 위치해 있다. 1867년에 세워진 도축장이 있었으나, 1970년대 가축시장을 파리 교외로 옮기면서 남 겨진 도축장 시설을 시민에게 개방하여 녹지공원과 과학산업관으로 재탄생시켰다. 낙 후된 파리의 외곽 지역을 과학과 음악, 체육, 문화, 생태 등이 어우러진 21세기 현대식 도시공원으로 변모시킨 파리 최대 복합문화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라 빌레트 공원은 개방된 공간으로 시민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휴식과 놀이, 음악, 영 화, 과학, 기술, 운동, 원예, 생태, 미술품 관람, 텃밭체험 다양한 활동이 가능하다. 홈페이지 https://lavillet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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탬플 그랜딘이 꿈꾼 도살장

동물 사랑했던 자폐 소녀 탬플 그랜딘 소 특성 맞춘 자비로운 도살장 설계

원동업

탬플 그랜딘은 1947년 8월 29, 미국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두 살이 됐을 때, 자폐증 진단을 받는다. 의사는 그녀가 ‘평생 보호시설에서 보낼 것이고, 말 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랜딘의 어머니는 그 말을 거부했다. 가정 교사의 도움을 받아 언어와 예절을 가르쳤다. 선생은 경험이 많은 사람이었으 며, 실제 사물을 통해 그녀의 학습을 도왔다. 언어를 배운 뒤 그랜딘은 일반 초 등학교에 입학한다. 아이들의 좋은 점을 찾아내는 좋은 교사를 만났으나, 중학 교에선 그녀를 놀리는 애와 다퉈 자퇴한다. 1960년대 뉴햄프셔주 린지의 기 숙학교 햄프리 컨트리 스쿨에 들어갈 때, 엄마는 ‘보호시설에 아이를 팽개쳐 놓는 일’ 아닌가 하는 자책으로 괴로워 한다. 그 곳의 과학선생 월리엄 칼록은 그녀가 “다를 뿐, 모자란 것이 아니다.”라며 그녀를 학교에 맡길 것을 요청한 다. 탬플 그랜딘은 언어가 아니라 시각으로 보는 아이였으며, 본 모든 것을 기 억하고 사고한다. 이후 탬플은 애리조나 주립대에서 동물학 석사를, 일리노이 대학에서 동물학 박사 과정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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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딘은 동물들을 좋아했다. 자폐아인 자신을 구한 것이 동물이라고 생각하 기 때문이다. 그녀는 방학마다 이모의 목장에서의 생활하며 소들과 함께 하고 관찰도 했다. 그녀는 소들이 둥글게 도는 방식을 좋아하고, 무리 안에서 사람 이 경계에 들어오지 않으면 얌전하다는 점을 파악했다. 소들이 자연스럽게 물 에 들어가 편안하게 목욕을 하면 축사 입장에서도 ‘비용절감’이 될 것임을 이 해시켰다. 그가 이미지로 사고하는 능력은 공간설계로 이어졌다. 그녀가 설계 한 ‘소에게 최대한 자비로운 도축장’ 디자인은 현재 북미 도살장 60% 가량에 서 적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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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부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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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이 지인에게 소개하는

우리동네 마장동 자박자박 여행

송경민

내 삶에 '큰 이사'는 결혼을 통한 신혼집으로의 이사이다. 결혼 전까지 동대문구 소재지에서 살다가 결혼 후 성동구 마장동으로 이사를 왔다. 25년 전, 처음 왔던 마장동 4번 출구, 현재 썬더치킨과 동물병원 사잇길로 들 어오면 재개발되지 않은 낮은 상가들…. 마치 시골 동네 7일장보다도 열악한 듯 상가 몇 채들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바로 그 끝에 24년간 살아온 나의 주 거지인 세림아파트가 재건축을 앞두고 있다. 세림아파트는 과거 한영중고등학교 부지였다고 한다. 학교가 강동구로 이전 을 하고, 세림건설이 안전하게 건축을 하여 30년이 넘게 마장동을 지키고 있 다. 허나 90년대 폭우로 제2마장교가 범람하여 침수가 되어 주민들이 대피하 는 등 당시 배를 타고 이동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들은 기억이 난다. 지하주 차장이 없어서 주차에 다소 난항을 겪지만 살기에 조용하고 마장역과도 5분 거리, 게다가 교통의 요지인 왕십리 부근에 있어 살기에 좋다. 무엇보다도 서 울 역세권에 있으면서도 서울시 아파트 집 값 같지 않은 착한 가격으로 살 수 있어 서울에 살면서 혜택을 받고 있는 듯하다. 허나, 요즘에는 재건축으로 집 값이 많이 상승했다. 세림아파트 8동 앞에는 마장동과 사근동 사이에 작은 언덕, 동산이 있다. 서울 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 동 주민들 중 어떤 이들은 그곳에 작은 텃밭을 일구어 각종 채소와 식물들을 심기도 한다. 텃밭 가꾸는 지인은 그곳에서 나는 채소 들을 한 소쿠리씩, 그 곳을 지나가는 지인에게 건네주기도 한다. 농약도 뿌리 지 않은 유기농 채소를 얻어 가는 발걸음이 신난다. 그 텃밭 한 쪽에는 땅을 파 서 김치를 묻는 김칫독도 있다. 김치들이 맛있게 익는 저장고! 그러나, 그곳 주 인을 몰라 김치는 얻어먹지 못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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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장동과 사근동을 이어주는 그 언덕에 사계절이 지나간다. 매년, 눈 오는 날 새벽기도를 갈 때면, 그 언덕계단을 나보다 더 먼저 다녀가신 이가 계신다. 누 군가 와서 비질을 해 놓고 가신다. 바닥에 가지런한 비질 자국들! 그 언덕계단 을 지나갈 때면 가슴이 뭉클하다. 또, 여름 내내 동산을 푸르게 한 나무들은 여름 장마와 강풍으로 인해 쓰러져 언덕계단에 바리케이트를 만든다. 하지만 어느 순간 다녀갔는지도 모르는 강 풍처럼 흔적도 없이 정리가 되어 있다. 또 누군가는 쓰러진 나무를 정리하여 길을 내주신 것이다. 사람 사는 냄새! 배려하는 향기가 풍겨나는 마장동 마을 이다. 그 언덕을 지나 우측으로 70미터 정도 가면 55년 된 홍익교회가 언덕 위에 세 워져 있다. 외부인이 오면 찾기도 어려운 홍익교회! 그 홍익교회에는 이웃사랑 회가 있다. 1997년 외환위기가 왔을 때, 어르신들에게도 여파가 왔다. 홀로 계 신 어르신들, 자녀들에게 용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힘들게 사는 어르신들, 지역 어르신들에게 힘과 위로, 삶의 활력을 드리고자 한 달에 두 번, 매 주 수 요일마다 국수를 대접해 드렸다. 그렇게 해서 처음에는 12명, 20명, 30명씩 늘어나 70~80명의 어르신들에게 식사대접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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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만 드리는 마음이 미안하여 더 대접하고자 교인들은 십시일반씩 후원을 하면서 밥과 반찬을 준비해 대접했다. 6-7년이 지난 어느 날, 격주로 하다 보 니 잊어버리고 못 드신 분들을 위하여 일주일에 한 번씩 대접하게 되었다. 식 사 후에는 노래, 유머, 레크레이션, 스트레칭, 치매예방 운동 등 다양한 재미로 소화에 도움을 주었고, 2017년, 청춘대학으로 승격, 교회지원과 개인후원을 통해 운영해 나가고 있다.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수 없는 교회 건물 상황이어서 1층에서 본당 2층으로 가 려면 관절이 좋지 않은 70세에서 90세 어르신들은 난관에 봉착하신다. 계단 손잡이를 잡으면서 히말라야 산맥을 오르듯 쉬엄쉬엄 어렵게 계단을 오르내 리신다. 그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지만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청춘대학의 친 구들과 선생님들, 주방의 섬김이들을 만나기 위해 어르신들은 매주 찾아오신 다. 매달 100여 명의 회원들은 생일잔치와 게임, 노래, 실버스트레칭, 미술활 동, 지압법, 특강, 동아리 활동 등 다양한 활동과 식사를 하시며 노년을 즐겁게 보내고 계신다. 이 정도가 마장동에서의 나의 활동 영역이다. 마장역에서 세림 아파트 반대쪽에 진출한 것은 불과 몇 년 되지 않는다. 몇 년 사이 도시재생이니 마을공동체니 등 구나 시에서 여러 사업을 통해 내가 사는 마을, 주변 마을에 대해서도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마장초등학교 바로 옆에는 못생긴 나무가 숲을 지킨다는 의미의 북까페 못생 긴 나무(못.나.숲)이 있다. 마장동의 도서관을 로망하는 맘스들의 모임인 ‘마도 로스’를 통해 어바웃엠 협동조합을 결성하여 일반 까페의 기능뿐만 아니라 1 층은 엄마들의 힐링 공간으로 공방 등의 각 종 동아리 활동을 할 수 있고, 공간 대여를 통해 각종 잔치를 할 수도 있다. 주민들의 필요를 즉각즉각 반영한 ‘주 민이 주인이 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2층에는 마더센터 위탁사업인 ‘우리동네 키움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초등학생들을 돌보는 돌봄 공간으로 여 러 가지 프로그램을 통해 질 높은 교육과 케어를 하는 공간으로 아동과 학부 모의 커뮤니티 공간으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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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나숲을 지나면 신성아파트 그리고 현대 아파트가 줄지어 있다. 현대아파트 옆에는 수도권 축산물 유통의 70%를 담당하는 축산물 전문 도소매시장인 마 장동 축산물 시장이 있다. 1963년 종로구에 있던 우성산업 도축장이 마장동 으로 옮겨오면서 자연스럽게 도축장 주변에 소의 내장과 돼지의 부산물을 판 매하는 상점들이 늘어나면서 우시장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1998년에 도시개 발로 인해 이 일대에 아파트와 초등학교가 들어서면서부터 35년간 운영되었 던 도축장이 문을 닫게 되었다. 허나 주변에 육류를 팔던 축산물시장은 계속 남아 오늘에 축산물 시장이 되었다. 2002년에 시장의 환경과 시설들을 개선 하여 쇼핑하기에 편리한 공간이 되었다. 결혼 후 지금까지 줄곧 이곳서 생활했지만, 축산물 시장이 가깝게 있어도 마 트나 정육점을 이용하기에 별로 찾을 일이 없었다. 냄새도 나고, 분위기도 왠 지 좀 낯설고……. 허나 요즘엔 깔끔하게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맛있는 고기 를 저렴하게 사기에 유익하다. 게다가 축산물 시장 입구에는 순대와 족발 등 을 판매하는 가게가 있는데, 사장님들의 마음이 넉넉하시다. 이용해 보시면 완 전 대만족! 대식가들에게 좋을 듯하다. 축산물시장과 함께 있는 우시장 먹자골목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고기의 원하는 부위를 사서 식당에 가면 상차림 대금만 내면 맛난 식사를 할 수 있다

현대아파트 맞은편에는 청계천이 흐르고 있다. 과거, 판자촌이 있었던 곳이었 으나 지금은 청계천 복원공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문화, 힐링공간이 되었다. 성수동에 서울숲이 있다면, 마장동에는 청계천이 있다. “마장동에 살아요!”하고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시장을 이야기하 며 터부시하는 경우들이 있다. 하지만 도시재생과 마을 주민들의 노력으로 살 기좋은 마장동으로 거듭 변모해 가고 있다. 마장동에 사는 것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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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장천변 곤충호텔

민선희(@sunhee_min91)

검정색 보트가 둥둥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응봉동 달동네에서는 아랫마을에 보이는 다리와 강변이 잘 보였다. 언덕에서 내려다본 아랫동네는 골목이 구불구 불하게 보여서 흡사 미로처럼 보여서 골목에 들어서면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 다. 비가 많이 오던 어느 날에 검정색 고무보트 가 둥둥 떠다니는 모습도 보게 되었고 학교에 가지 못하는 일이 생겼다. 그때도 저 멀리 다리 밑에서 헤엄치던 사람과 보트는 그저 신기하기 만 했다. 몇 년이 지나서 그 동네를 떠났다가 다 시 돌아온 곳은 바로 언덕 아래 동네였다. 그 동 네에 살면서도 그 후로도 오랫동안 비만 오면 사이렌이 울려서 강변은 내게 편안함보다는 여 름장마에 범람하는 공간이자 어린 시절 반복적 으로 듣던 각종 사건사고의 장소였다.

장소였지 생활의 장소로 내게 인식되지 않았 다. 그저 여윳돈이 생겨 고기를 먹고 싶을 때 일 부러 싸게 사러 가기 위해 가는 정도의 의미였 다. 그런 면에서 마장동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 마 장동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 각해보면 우시장이 다였다. 이제는 마트를 이 용하다보니 더 이상 가게 되지 않는 곳. 어느덧 마장동 축산물시장이라는 어엿한 이름을 갖고 있어도 내게 마장동은 우시장이었다. 그러던 내게 우연히 마장2교 아래의 청계천을 가게 된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늘 청계천은 종로나 동대문쯤에 위치해있는 나들이 공간이었다. 그 런 청계천이 점심 먹고 산책하기에 좋은 거리 에 있다는 것은 내게 생활의 쉼표를 제공하는 의미였다.

늘 동네에서 강변을 걸어 다니면서도 살곶이 다리까지가 내 걸음의 한계였다. 그 너머의 공

물의 기운 서늘한 산책길

간은 가보고 싶어도 돌아오기에는 먼 그런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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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었다. 이름과 존재는 알아도 익숙하지 않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사람을 만나는 것이 망

은 곳이었다. 그런 곳이 바로 이웃동네 마장동

설여지고 답답하던 일상에 언덕아래 피어있던

이다. 마장동은 우시장이 있다는 이야기만 들

개망초꽃은 숲속에 와있는 기분을 들게 했다.

었고 몇 번 시장은 가보기는 했어도 소비의

다리 아래로 부는 바람은 강의 기운을 받았는


지 유난히 서늘했다. 군데군데 자전거를 타는 사람, 벤치에 앉아서 쉬는 사람도 있었지만 걷 는 동안은 누구의 시선을 받지 않아서 좋다. 혼 자 하는 산책은 누구를 배려하기 위해 말을 해 야 하거나 걸음속도를 맞추지 않아서 편하다. 생각보다 호젓한 산책길은 나 혼자 있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모퉁이를 돌아서 만난 곤충호텔 은 이 공간이 인간만의 공간이 아닌 것을 보여 주는 듯 했다. 곤충호텔은 작은 책꽂이 같은 형 태에 나무조각들과 갈대 등이 끼워져 있어서 그 안에 곤충들이 들어와서 서식하는 듯 했다. 주위에는 풀과 나무들이 많은데 굳이 이런 공 간이 왜 필요할까 주위를 살펴보니 작은 연못 과 수생식물들도 보였다. 또한 [뱀 조심]이라는 간판도 눈에 띄였다. 산책 후 사무실로 돌아온 내게 마장동에서 오 래살고 있던 동료는 ‘그곳은 사람들이 애완동물 을 버리기로 유명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연못에는 사람들이 기르던 각종 물고기와 거북 이, 자라 등이 살고 있고 심지어는 뱀과 이구아

자연과 관계 맺는 첫 시도 이제는 애완동물이라기보다는 ‘반려동물’이라 는 호칭을 쓰면서 사람과 함께 하는 동물(곤충, 식물도 포함해서)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곳 이지만, 청계천변에 동물을 버리는 사람들은 정말 ‘애완’의 개념으로 인식했던 듯하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신기했던 곤충호텔이 더 이상 신기하지 않았다. 무심코 뿌리는 살충 제,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밟아버리는 사람들의 행동에서 곤충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호텔]이 라는 편안함이라는 용어 아래 흡사 [보호소]같 은 공간이 필요할 것이라 예상해 본다. 일상의 산책이 더 이상 혼자만의 사색이 되지 않고 내 가 살고 있는 공간이 얼마나 많은 생명들로 둘 러싸여 있는지 인간의 무심함에 고통받는 존재 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책임과 에너지가 수반되는 것이다. 산책은 자연과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첫 단계인 듯하다.

나까지 버려서 산책하는 사람들에게 주의 표지 판이 설치되었다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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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장동 꽃담 벽화마을, 동화 속으로 쏘옥~!

어효은

아는 사람만 아는 이곳 마장동 꽃담 벽화마을을 탐험했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가 벌써 4년 전이 다. 마장동에서 생활할 무렵 익숙한 곳만 다니고 새로운 곳을 알지 못했다. 당시 만나던 애인은 사 근동, 마장동 동네를 산책하다가 안 가본 골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벽화마을이 있다는 정보조차 알지 못하고 발견을 하곤 ‘이런 곳이 있었나.’ 싶었다고 한다. 나에게 새로운 곳을 발견했다고 하면 서 같이 가자고 이야기했다. 많이 들뜬 모습이었다. 나도 무척이나 궁금했다. 마장동에 벽화마을이 있다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 곳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계절은 겨울이었다. 찬 바람에 두꺼운 패딩을 입고 친구에게 선물 받은 빨간 모자를 쓰고 함께 벽 화마을로 향했다. 골목길을 걸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곳에 정말 벽화가 그려져 있을까 싶었다. 그 런데 조금씩 아기자기하고 알록달록한 그림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오르막길을 오르며 호흡이 가 빠졌다. 심장이 빠르게 뛰니 활력이 생기면서 추위가 가셨다. 작고 귀여운 그림부터 거대한 고래까 지 다양한 그림이 골목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거대한 고래가 눈에 들어올 때는 탄성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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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고래의 등을 타고 어디든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어보기도 했다. 무지개 꽃과 아름다운 나비 배경 가운데 그려져 있는 하얀 의자에 걸터앉아 보기도 했다. 우리는 서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마음이 상쾌해졌다. 그곳은 마치 동화 같았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가보지 않은 곳을 탐험하다 보면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 아주 넓은 곳은 아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그림이 있었다. 골목은 조금 숨이 찰 정도로 오른 뒤 다시 내리막 길로 이어진다. 전 코스를 돌았을 때 30분도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함께 가는 사람과 이야기꽃을 피우고 서로 사진을 찍어주면서 걷다 보면 시간은 마법처럼 흘러간다. 서울 성동구 마장동 30통 지역의 낙후된 환경과 주거 환경개선을 위해 벽화마을 조성작업이 시작 되었다. 2014년 9월에 시작해 2016년 11월에 마무리되었다고 하는데 딱 그 시점에 방문하게 된 것이다. 이 프로젝트에는 35명의 작가와 1,400여 명의 자원봉사자가 참여했고 가옥 벽면과 골목 길 담장에 150여 개의 벽화를 완성했다. 진작 알았다면 나도 참여해서 골목 귀퉁이에 귀여운 그림 을 하나 그렸을 텐데 싶었다. 그 뒤 어느 여름, 혼자 마장동 벽화마을을 다시 방문했다. 여름에 보는 벽화는 겨울의 벽화와는 또 다르게 보였다. 휴대폰을 벽에 기대어 타이머를 설정해놓고 사진을 찍었다. 어쩐지 혼자 예쁜 그림 들을 보고 있자니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예쁘고 아름다운 장면을 함께 보고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 소중한 일이라는 걸 느꼈다. 그 사이 전에는 못 봤던 새 그림도 있었다. 청년 봉사자들이 그린 그림 같았는데 작고 귀여웠다. 골목이 담고 있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 지금 그곳을 다시 가면 어떤 마음일지 궁금하 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고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느낄 수도 있겠지. 꼭 한 번쯤은 이 곳 마장동 꽃담 벽화마을 탐방을 해보길 바란다. 소담스러운 벽화를 보고 천진한 웃음과 미소를 찾 아가면 좋겠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라면 더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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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는 이쁘긴한데 보고 가면 그만

정소원

성동구는 2014년부터 2017년까지 총 19회에 걸쳐 35명의 작가, 1400여명의 봉사자 가 참여해 가옥벽면과 골목길 담장 등에 150여개 벽화를 그린 장기프로젝트를 실시한 바 있다. 이후 프로젝트가 마무리 된 2017년 11월 18일에는 꽃담벽화마을 안내도 제막 식을 마장동 벽화마을에서 열고, 지역주민, 자원봉사자 100명이 참여한 가운데 골목길 도보 여행을 주최했었다. 이러한 프로젝트와 행사의 취지는 마장동 벽화마을이 지역의 명소로 자리매김하게끔 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안내도에는 주민들을 배려해 방문객 이 벽화 마을 도보 여행길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면서도 실거주민들을 위해 방문객이 지 켜야 할 에티켓도 담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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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담벽화마을프로젝트에서 제외된 집들. 벽화 없이 세월의 흔적이 가득하다.

프로젝트가 마을사람들에게 가져다 준 것은 희망이었다. 그리고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자원봉사자와 성동구의 희망이기도 했다. 벽화로 인한 볼거리의 풍성함으로써 모여든 방문객들로 인한 지역상권 활성화, 도시 재생 등의 희망을 품었을 것이다. 분명 벽화마 을 조성사업으로 인해 관광지처럼 된 곳이 존재하고, 동네풍경이 기존보다 밝아지면서 주민들의 정서적 안정감에 긍정적 영향을 끼친 사례가 있었다. 순기능은 분명히 있었 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주민들의 삶은 달라졌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물음표만 쌓이고 쌓여간다. 오히려 벽화마을프로젝트를 실시한 후 동네 분위기가 조금 더 밝아지면서 근 본적인 문제인 집 건물 개선은 덮여졌고, 꽃담벽화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빈곤도 가 려졌다. 분명히 벽화마을 조성사업은 의미있는 사업이었다. 그렇지만 벽화가 그려진 벽 너머,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근본적으로 개선되었는지는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다. ‘벽화마을 잘 조성하면 구경하러 사람들이 몰려온다’는 것은 확실히 밝혀졌으니, 이제 이 사실을 바탕으로 거주민들이 실질적인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게 같이 방안을 찾아봐야 할 때가 아닐까? 그 소망이 주민분들이 무심코 툭 던진 말 한마디 에 담겨 있다고,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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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 굽는 꿈

임규리

78 성협의 풍속화첩, 27×28.3㎝,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꿈은 무의식을 반영한다. 그리고 무의식은 우리의 가장 깊은 곳과 연결 되어있다. 사람들이 해몽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나도 모르는 나 자신을 이해하고 그와 깊이 연결되고 싶 은 욕망인지도 모른다. 물론 완전히 객관적인 해몽은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의 상황, 심리 상태, 꿈에 등 장하는 것이 개인에게 주는 의미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은 부정적으로 쓰이 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은 정말 맞는 말인 셈이다. 해몽하지 않으면 꿈은 우리의 속 깊은 이야기로 이어 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고기 굽는 꿈’은 어떤 꿈일까? 모두에게 절대적으로 같지 않겠지만, 흔히 ‘고기 굽는 날’이라고 하 면 ‘좋은 일이 생겨 축하하는 날’을 의미한다. 왜 고기는 특별한 날에만 먹었을까? 예로부터 소는 농경사 회에서 밭을 매는 든든한 일꾼 역할을 했기에 소고기는 함부로 먹을 수 없었다. 그러니 소고기를 먹는 날 이란 정말 큰 경사가 있는 날이었다. 요즘은 소로 농사를 짓는 경우가 드물지만, 그 의미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래서 큰일을 치렀거나 경사가 있는 날에는 ‘소고기 먹자’라는 말로 위로, 기념 또는 축하를 한다. 돼지고기는 어떤가. 돼지는 ‘복(福)’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돼지머리가 고사상에 올라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배부르게 먹는 행위 자체가 축제이자 복을 비는 행위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돼지고기를 먹는다 는 것 역시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원기를 충전하며, 복을 비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이렇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고기를 성취, 즐거움, 축제와 연결한다. 그러니 고기 굽는 꿈을 꾼다면 당연 히 길몽이다. 예언적인 의미를 빼더라도, 우리가 무언가 뿌듯하게 여기거나, 기대하는 일이 있거나, 만족 스러운 일이 있을 때 꾸는 꿈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둘러앉아 고기를 구워 먹는 꿈이라면 더 말할 것 없이 좋은 꿈이다. 특히 ‘먹을’뿐 아니라 먹기 전 ‘굽는’ 꿈이라면, 기존에 열심히 하고 있던 일이 만족 스러운 결과로 연결된다는 무의식의 신호라고 한다. 다만 날고기를 먹는 꿈은 어려움이 생기거나, 할 일 이 더 남아있다는 의미라고 한다. 어쨌든 언제까지나 일반적인 해몽이라고 해도, 고기 굽는 꿈은 분명 기 분 좋은 꿈이다. 만일 당신이 고기 굽는 꿈을 꿨다면, 그 꿈의 의미처럼 앞으로 좋은 일들만 가득하기를 바란다. 실제로 도 소중한 사람들과 고기를 구워 먹으며 지금까지 이룬 일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고, 당당히 축하받 고, 더 좋은 미래의 일들을 꿈꾸길 바란다. 반대로 아직 스스로 이룬 일이 없고 초라하게 느껴진다면, 지 금까지 열심히 노력한 일을 먼저 축하하고, 스스로 격려하며, 앞으로 나아갈 힘을 위해 든든히 먹어뒀으 면 좋겠다. 그 맛깔스러운 상차림과 분위기를 꼭 기억해뒀으면 좋겠다. 그러면 언젠가 당신만의 ‘고기 굽 는 꿈’을 꾸게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잊지 말자, 꿈보다 해몽이다. 그리고 해몽에는 언제나 희망이 담 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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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마장동을 가보지 못했나?

홍효정

'육류가 없으면 알류라도 달라!' 고기를 너무 좋아해서 풀만 있는 식탁을 견딜 수 없고 단백질을 채워야 하는 고기러버. 회식 때면 배가 터지더라도 내 앞의 고기만은 놓치지 않겠다는 집념. 고기 라면 부위, 조리방법, 종류를 가리지 않고 새로운 종류를 접하는 걸 매우 즐기는 나. 그런 나도 범접하지 못한 곳이 있었으니, '마장동 축산시장'이 그랬다. 여행가면 그 동네 유명 고 깃집, 정육점 식당을 검색해서 방문할 정도로 신선하고 맛있는 고기를 찾아다니던 내게 어떤 걸림 돌이 있었을까. 마장동 시장은 서울 한복판, 교통이 사통팔달 뚫린 성동구 왕십리 근처에 있어 왕십리 역에서 버 스를 타면 금방 갈 수 있었다. 청계천 산보하다가 동대문 홈플러스 쯤에서 올라왔더니 다리 맞은편 이 마장동 축산시장이라 당황하기도 했다. 이토록 대중교통이나 걷기 여행에 들르기 좋은 곳이지 만 차를 가지고 가기에는 조심스러운 동네이다. 입구가 좁아보이고 주차가 될지 몰라서 정작 외식 하러 갈 때는 그 곳을 스쳐지나가곤 했다. 이제 걷기를 일상화하고 있으니 바람이 선선해지고 화창 한 어느 가을날 걷기여행의 끝을 마장동으로 해도 되지 않을까. 다큐멘터리 3일에서 알게 된 마장동 축산시장은 매력적이라서 당장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신혼 때는 고기를 보고 자제력을 잃은 내가 특수부위를 고르는 모습을 남편이 보면 아주 기겁을 할 거 같아 시도해보지 못했다. 고기는 모두 옳지만 생고기를 구워먹는 걸 제일 선호하는 나와 달리 남 편은 꽃등심과 갈빗살 등 일반적인 부위, 양념이 센 불고기를 더 좋아했다. 그동안 우리의 타협점 은 일반적인 부위를 양념없이 먹는 거였다. 그런데 요즘 냉동식품의 발달로 나를 위한 고기 한 상, 남편을 위한 고기 한 상이 동시에 가능해졌다. 이제 둘이 같은 것만 시킬 필요는 없고, 나의 취향과 너의 취향을 각자 인정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되면서 축산시장에 다시 도전할 마음이 생겼다. 마지막으로 몇 번 그 앞을 지나치면서도 '가볼까?' '다음에~' 라고 여운을 남긴 건 묘하게 펑키한 핑크 정육점 불빛과 어둑어둑한 천장이 있는 시장의 세기말적인 분위기 때문이랄까. 이 시장을 지 나면 클럽이 나올 것 같이 묘하게 들뜬 분위기. 마장동 시장이 너무 '핫'해 보여서, 나 같은 일반인 이 가도 될까하는 망설임이 있었다. 오직 고기를 위한 시장은 나를 위한 성지나 마찬가지인데 어렵 게만 생각했던 거 같다. 내 마음 속의 빗장이 모두 풀렸으니 올해는 꼭 가보고자 한다. 모듬세트는 남편을 위해 구매하고 내가 먹고 싶은 부위를 고른 세트를 하나 더 만들어서 상차림 식당에서 맛있게 먹는 인증샷을 찍고 싶다. 동네여행이 유행이라는데, 코비드19는 팬데믹인데, 올해에는 비행기 경비 아끼고, 꼭 소고기를 먹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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