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 정 기
2020 12월
부정기 마을잡지
마 을 잡 지
성 수 동 쓰 다
vol.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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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은 많은 예술가, 프리랜서, 사업주들에게 힘든 한 해였어요. 포기하지 마세요. 새로운 문제는 새로운 기회와 함께 옵니다!
Thank you! from Benja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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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실패에도 뒤통수에도, 삶은 지속된다
수없이 많은 실패를 했다. 대학시험에서 떨어졌다. 학력고사 시대였고, 대학을 정한 뒤 시험을 보는 것이었는데, 실패했다. 대학원에서 퇴학을 당했다. 나는 지금도 내가 그 당시에 했던 여러 일들을 후회하지 않는다. 교정되거나 교화되지 않은 것이다. 해서 징 계를 가한 그들이 내게 행한 행위는 그저 ‘괘씸한 놈 벌주기’였다고 생각한다. 직장에서 는 두어 번쯤, 더 솔직하게 따져보자면 세 번 쯤 잘렸다. 어떤 때는 능력이 모자라서, 어 떤 때는 내가 다른 생각이 있어서, 어떤 때는 그들의 뜻에 거슬려서, 혹은 그런 모든 것 들이 병합되어서 그런 일들이 생겼을 것이다. 아버지가 평생에 네 번째 쯤 병원에 입원을 했을 때, 아버지는 황망히 우리 곁을 떠났 다. 어쩌면 우리 자식들의 그릇된 판단 때문에 그리 되었을지 모른다. 심정지가 온 아 버지는 23일간 중환자실에서 누워만 계셨더랬다. 가족으로부터 공격도 당했다. 직장을 살림과 육아로 택하고, 별나게 살아가는 삶에 대한 질타였을 것이다. 학교 선생님에게 ‘기함을 했다’며 모멸의 눈초리를 받은 일도 있다. 나중 생각해보니, 그게 일종의 ‘집단 이지메’같은 것이겠구나 하는 경험도 했다. 마을 안에서 함께 했던 ‘팀’이 깨져버리기도 했다. 그걸 ‘중재’해 달라고 했다가, 두루 배척을 당하기도 했다. 몇 년째나 하고 있는 이 마을미디어의 배포처 같은 것도 고정하지 못했다.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는 것 같은데, 팀의 구성은 매번 바뀐다. 성격은 모나고, 식견은 좁고 얕아서일 것이다. 그런데 실패가 꼭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그 대학을 떨어져서 후기로 들어간 이 대학에 서 만난 이들이 나의 지금 삶을 온전히 채워주고 있다. 퇴학을 당한 뒤, 교정 민주광장 에서 138일간의 천막농성을 했다. 그 때가 어쩌면 내 삶의 화양연화일 수 있겠다 생각 했다. 뜨겁게 ‘동지들’과 결합했다. 응원을 해준 학생들, 선생들, 친구들의 서명록을 나 는 아직 간직하고 있다. 아내를 만나게 된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아버지 일로 2년여 쯤을 뛰어다녔다. 대학원때 쓰지 못한 논문을 ‘아버지보고서’로 대체했다고 나는 믿는 다. 논리적으로 실증적으로 증명이 필요했고, 그걸 그들이 논박하지 않았거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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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과 뒤통수 그리고 억울함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엔 이면의 이야기들이 있다. 세상 은 정말로 단순하고, 그리고 때로 그 단순함으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실제적 진실들이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내가 느끼고 겪는 것을 그도 똑같이 느끼고 경험한다. 나도 똑 같이 배신해왔고, 뒤통수를 쳐왔다는 것도 비로소 통감하게 됐다. 내가 세상에서 배운 것 들이 있다면 이런 것일 게다. 그들에게 깊은 사과와 미안함을 전하고 싶다. 아주 작은 범 위에서지만 조금 내주기도 하고, 손해도 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또 그러려 힘껏 노력하 기도 한다. 약속한 부분이 있다면 그걸 지키려고도 노력한다. 화해의 손길을 먼저 내밀고, 그가 내미는 손이라면 기꺼이 잡아야지 생각한다. 물론 그냥 묻고 갈 수밖에 없는 일들도 있다. 삶과 세상이란 것은 나보다는 말도 못하게 더 크고 길고 복합적이니까. 2012년에 책읽는엄마책읽는아이 작은도서관에서 처음 마을과 접속했다. 그곳은 아직도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이다. 어쩌면 과하게 마을활동을 해왔는데, 어쩌면 그런 활동 속에서 만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마을, 사람, 문화의 풍경도 본 것 같다.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만 난 한 사람 한 사람이 내 삶의 목표나 비중 만큼 커졌다. 그런 점도 내가 나머지 생을 살아 가는 동안 잊히거나 지워지지 않고 연결돼 있을 것이다. 주제가 있는 부정기 동네잡지 <성수동 쓰다>가 12호를 낸다. 정말 멋졌던 우리 동네 잡지 <오! 성수>의 김희정 편집장에게 늘 감사한다. 그는 그 잡지로, 그 활동으로 내게 영감과 파장을 전달해 주었다. 2015년 겨울, 그곳서 마련된 작은 글쓰기 모임 ‘성수동 쓰다’가 오 늘의 <성수동 쓰다>로 나아왔다. 지역에서 만들어졌던, 만들어지고 있는 많은 지역 잡지 들과 미디어들, 서울의 마을미디어들의 ‘동지’들을 떠올린다. 내 곁은 사람들에겐 물론, 그 들에게도 깊은 우애와 감사를 느낀다. 실패도 성공도 결국 그건 그저 일일 뿐이다. 오늘의 감사와 공감을 떠올리며 푹 자고, 우리는 다시 내일의 내 일, 우리의 일을 다시 시작할 것 이다. Life Goes On. 삶은 지속된다.
성수동쓰다 편집장
원동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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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2020. 12월호
발행인 publisher
원동업
편집장 editor in chief 원동업 편집위원 editor 이상국, 서성원, 채수원, 어효은, 권경덕, 이서연 디자이너 designer 강민경 일러스트 illustrator 벤자민, 임소진, 강민경 사진 photographer 서성원 기고 contributing writer 이유상, 조나무, 정윤주, 민선희, 김건록, 김재홍, 서수아, 허지원, 민경서, 안지우, 이서연, 홍효정
일 08
용돈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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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와 AI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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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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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사와 미싱사
동네잡지 <성수동쓰다>는 2020 서울마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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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크플러스+엘리
http://sdgo.kr
08
어효은
발간 성수동쓰다 편집위원회 마디마디[마을디스커버리 마을디자인] 마을미디어 빅픽처-세 개의 풍경 후원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이 책에 실린 원고의 내용은 <성수동쓰다>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표지 벤자민 [비추이는 높은 산에서]
서울숲 컨서버시 김나연(왼편), 신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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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32
마을에서 일하기
08
명랑한 은둔생활
08
파도
08
사소한 일의 가치
08
강물의 불꽃같이
집 32
사진 에세이 건축과 건축인
08
성수역
08
책사랑꾼들의 또다른 집
08
바리스타 되기
성수동 08
그에게 고생은 사치였다
08
피초코
08
성수지앵
08
그랑이야기
08
뚝도작은학교 이야기
서울숲에서 개와 산책 ⓒ임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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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7
용돈 빼기 안지우
오늘 용돈 벌려고 상 차리고 엄마 도와 빨래도 갰다. 엄마를 도와 줄 때마다 엄마는 “지우 덕분에 할 일이 없어지네.”하고 웃으신다. 그런데 엄마가 오늘 잔돈이 없어서 용돈을 못 주겠다 하셨다. 저녁엔 엄마랑 공부할 때 태도가 바르지 않다고 내 남았던 용돈도 압수했다. 이제 내 지갑엔 운 좋게 살아남은 용돈 650원 밖에 없다. 아빠보다 돈 벌기 더 힘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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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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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과 코로나의 시대를 산다는 것
김재홍
코로나 시대 겨울에 접어들면서 코로나가 다시 유행이다. 이글을 쓰고 있는 현재 코로나 확진자는 386명 으로(11월 21일), 8월 유행 이후 300명대로 접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대한민국 확진자 수는 현재 3만 명에 이르고 있고, 전세계적으로는 5,500만에 이른다. 이제는 모두가 이 상황이 내 년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 마스크를 쓰고, 사람이 많은 곳을 조심해야 하 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우리의 삶의 스타일이 바뀌고 있다. 그에 따라서 비즈니스와 일자리의 지형도 달라지고 있다. 여행업, 문화예술, 음식점 등 코로나로 직격탄을 받는 업종이 있고 또 반면에 배달서비스, 인터넷 플랫폼, 스마트워크 관련 서비스 등 언택트와 관련된 업종은 오 히려 활기를 띠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나의 일자리를 선택하고 고민하는 것은 당연히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사람이든, 기존에 일을 하고 있던 사람이든 모두에게 말이다. 코로나는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을까?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주로 오프라인으로 진행되는 교육업을 하고 있었다. 코로나의 여파로 예정되었던 사업이 취소되거나 지연되는 등 많은 피해를 입었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코로 나 상황과 거리두기 단계의 조정으로 교육 운영에 어려움도 크다. 한 예로 최근에 진행한 행 사는 갑자기 코로나 방역 상황이 악화되면서 목요일에 오프라인으로 진행하기로 한 행사가 월요일에 온라인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갑자기 결정되었다. 또 상황이 안 좋을 때 온라인으로 진행하기로 했던 행사가, 상황이 완화되었던 때 오프라인으로 진행하자고 담당기관에서 갑 자기 통보한 적도 있었다. 다행히 팀원들의 노력으로 행사는 무사히 마쳤지만 코로나가 계속 되는 한 이런 일은 반복될 것이다. 새롭게 일자리를 찾는 구직자들도 피해가 크다. 코로나 때문에 상황이 어려워진 기업들이 채 용 규모를 줄이거나 채용 자체를 취소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동아일보가 취업준비생 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중복응답 허용) 42%가 연봉과 눈높이를 낮추고 있고, 28%는 자신의 직무도 변경하면서 준비하고 있다고 답했다. 일자리에 진입하는 구직자들은 코로나의 영향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진로도 바꾸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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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상황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 사업가로서, 진로/취업 교육을 업으로 삼는 직업인으로서, 지금의 상황은 너무 힘들고 안타깝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필자도 ‘코로나’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 헤쳐나가야 할지 고민과 걱정이 많다. 미래의 일 자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우리는 무엇을 알고 준비해야 할까? 앞으로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할 수 있을까?
기술발전의 역설 “13살 바둑 천재소녀의 반전..알고 보니 AI커닝” 11월 20일자 MBC뉴스 기사다. 지난 9월 온 라인 바둑대회에서 ‘천재 바둑소녀’라고 불리는 김양이 국내 랭킹 7위의 최정상급 기사를 불 계승으로 이기는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김양이 둔 수가 인공지능 바둑프로그램이 추천한 수 와 92%가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결국 김양은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을 켜놓고 참고했다고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2016년 ‘알파고’가 이세돌을 4승 1패로 이긴 뒤, 4년이 흐 른 지금 인공지능의 실력은 사람의 실력을 월등히 앞지르고 있고, 지금은 컴퓨터 한 대씩 장 만하여 AI로 공부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지금은 코로나 이슈가 모든 것을 덮어버렸지만, 미래 일자리 관련해서는 인공지능의 발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다양한 산업현장에서는 인공지능이 활발하게 도입되고 있고, 위의 기사에서 보듯이 특정한 분야에서는 이미 인간의 지능을 넘어 인간을 가르치는 수준까 지 이른 상황이다. 인공지능과 로봇기술의 발전으로 대체될 직업들은 분명 존재할 것이다. 다양한 연구기관에서 조사한 자료들이 조금씩 다르지만 최근에 본 기사에는 위기에 처할 10 대 직업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텔레마케터와 안내원, 섬유산업계 재봉인력, 법률 보조 원, 경비원, 관리인, 대중교통 운전사, 물류 노동자, 의사, 요리사, 바텐더, 포커 딜러. 필자는 이것을 보면서 한 가지 눈에 띄는 직업이 있었다. 바로 ‘물류 노동자’. 인터넷 쇼핑의 발달로 (물류 산업은 원래 성장하고 있었지만) 코로나 시대에 물류산업은 그야말로 폭증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거리에는 배달을 하는 라이더들이 넘쳐나고 있다. 자체 물류직원을 둔 쿠 팡에서는 연일 ‘월 400만원, 1년 최대 4800만원(인센티브 포함 시)’이라는 조건으로 배달직 원을 채용하고 있다. 수요는 점점 늘어나지만 고된 노동과 힘든 일정 때문에 많은 사람이 지 원하지 않기 때문에 높은 급여로 광고하는 것이리라. 동아일보가 취업준비생 500명을 대상 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서 원하는 취업 ‘초봉’의 평균이 3,300만원 정도였다는 것을 생각하 면 얼마나 높은 금액인지를 알 수 있다. 고도의 머리를 써야 하는 바둑에서는 인공지능이 인간을 앞지르고 있지만, 머리보다는 몸을 많이 써야 하는 물류 일에는 로봇 기술이 아직 대체하지 못하여 인력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정말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한국의 교육의 수준이 점점 높아지면서 구직자 들은 점점 똑똑해지고 그 어느 때보다 능력이 출중한 상황이다. 하지만 그 능력은 모두 정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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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고 학습하고 적절하게 처리하는 지적능력에 편중되어 있다. 그리고 그 지적능력은 인 공지능이 그 어느 인간보다 뛰어날 가능성이 크다. 앞으로 점점 다양한 지적 분야에서 인간 을 대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4차 산업혁명의 진짜 무서운 점이다. 인간의 육체를 모 방하는 로봇기술이 발전되기 전까지 미래의 일자리에서 가장 귀중한 자원은 인간의 ‘두뇌’가 아닌 인간의 ‘몸’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만들어갈 사회 그럼 만약 로봇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육체도 완벽하게 모방할 수 있다면? 인공지능이 그렇 듯이 그 기술은 모방을 넘어서 인간을 뛰어넘게 될 것이다. 그럼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 엇이 남게 될까? 대량의 실업자들이 발생하게 될까? 아니 그렇게 놔두어선 안 되는 것 아닌 가? 국가에서 전국민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일자리를 보장해주어야 하는 것 아닐까? 시장에 일자리가 없다면 뭐라도 만들어서 제공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 더 나아가서 일을 하지 않 더라도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돈을 주어야 하는 것 아닐까? 일을 하지 않더라도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일을 꼭 해야 하는가? 그냥 편하게 살면 안 되나? 인공지능과 코로나의 시대에는 뉴딜일자리, 기본소득, 일자리 보장제 등의 정책들에 대해 많 은 토론이 이어질 것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경험과 가치관에 따라 그에 대한 의견을 가질 것 이고 그것은 투표로 이어져 실질적으로 정책들이 입안되고 만들어질 것이다. 평범하게 ‘먹고 사는’ 것조차 힘들고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점점 불확실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미래는 우리 에게 우리의 삶에서 ‘일’이란 무엇인지, ‘국가’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우리가 살아가고 싶은 ‘사회’는 어떤 사회인지 근본적으로 물어오고 있다.
지금 당신에게 ‘일’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가?
10월부터 시작한 진로/일자리에 관한 3부작의 글을 마칩니다. 지금까지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 합니다. 진로 고민, 일자리 문제, 미래 일자리에 대해 편하게 논의하고 싶거나 궁금한 점이 있으 신 분들은 메일로 연락주시면 답변드리겠습니다. ceo@careertou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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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잡다한 그러나 소중한 내 일들을 뒤돌아보다
서성원
봄에는 아내가 하던 일이 내게로 넘어왔다. 아내가 아팠기 때문이다. 꽤 길게 입원했었다. 퇴원한 뒤에 집안일이 몽땅 내가 맡아야 했다. 그중에 음식을 준비하 는 게 가장 어려웠다. 히말라야였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있었다. 그래서 깨달았 다. 음식 만들기가 생존이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 내가 하는 일을 생각해본다. 자잘하다. 얼마나 자잘한가. 자잘한 게 아니라 잡다하다고 해야 하나? 일하는 곳을 알아보면 되겠다. 일하는 장소를 ‘일 터’라고 하겠지. 한자로는 직장(職場)인데 다른 의미로 쓴다. 내 일터는 동네다. 성 수동. 그리고 조금 더 넓혀도 성동구다. 먼저 성수동에서 하는 일이다. 아파트 입주자대표를 처음 맡았다. 매월 입주자대 표회의에 참석해서 안건을 의결한다. 내가 주관해서 하는 사업이 없어 부담은 없 다. <성수동쓰다> 동네 잡지 만들기에 참여한다. 지난해까지는 필자로만 참여했 다. 그런데 원동업 씨는 잡지 만드는 것에서 한발 나아가려 한다. 영상 컨텐츠 만 들기.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뚝도작은학교>에서 자주 만나야 했다. 모임에 참여 하는 것, 그게 일이고 어떤 영상을 만들지 고민을 해야 했다. 사계절공정여행사에 서 ‘뚝도채널e’ 이야기 기자단으로 일했다. 성수동이 여행지가 될 수 있는 지 살펴 보는 기회였다. 내가 알지 못하는 곳이 많았다. 나는 성수동 사진을 찍고 있다. 앞으로 다른 동네로 이사갈 일은 없다. 내 동네를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 상반기에는 아내가 아파서 못 시간 낼 생각을 못 했고 하 반기에는 일이 많아서 나가지 못했다. 12월에 한가하면 다시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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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동쓰다> 팀이 마장도시재생 공모사업에 참여했다. 상반기에 책 한 권을 냈 다. 일터가 마장동이 된 셈이다. 마장도시재생 소식지 기자를 삼 년째 하고 있다. 올해는 일이 없다. 회의에 한 번 참석했다. 올해부터 성동구청 구민 기자를 하고 있다. 현재 내가 하는 일에서 열에 아홉은 이런 시민기자 활동이다. 성동구청 일 을 홍보한다. 10월부터 참여해서 세 번 기사를 썼다. 성동구 협치지원단에서 ‘성 동히어로’ 책을 만든다. 인터뷰한 뒤에 글 쓰는 일을 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 는 성동문화재단 홍보단이다. 연극과 뮤지컬 같은 공연을 보는 게 내 목적이다. 올해는 공연이 적어서 재미가 없다. 성동문화재단 성동별곡 프로젝트에 참여했 다. 상반기에는 금호동 문화예술인을 만나서 인터뷰하고 ‘숨바꼭질’이란 책을 만 드는 데 같이 일했다. 하반기에는 ‘행당동1번지’인데 책이 곧 나올 것이다. 성동구 도시관리공단 홍보단이다. 연임인데 성실하게 활동하지 못했다. <성동신문>에 연재를 맡았다. 주된 기사는 <서성원의 엉뚱 발랄 성동 이야기>다. 성동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글이다. 그리고 ‘성동의 노포’를 몇 번 썼다. 인터뷰 기 사도 한 번 썼다. 그런데 이건 최소한의 수고비도 없다. 일종의 ‘재능기부’다. 한 달에 두 번 원고를 내야 한다. 부담이 크다. 이것 때문에 적은 돈이지만 돈 되는 일을 놓아야 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만둘 수 없었다.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기 때 문이다. 나는 이 글을 내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성동에 대해 공부가 된다. 나중에 책으로 묶고 싶다. 서울까지 이런 방식으로 쓸까 싶다. 돈이 아니라 내 꿈을 펼치 는 일이다. 다음은 대한민국정책 기자단 활동이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주관한다. 기사는 상 반기에 세 번 냈다. 부지런히 하면 용돈이 되는 일이다. <창작과 비평> 리뷰단을 하고 있다. 리뷰를 작성하려면 계간지 창작과 비평에 실린 글을 모조리 읽어야 한 다. 꼼꼼하게 읽는다. 공부가 된다. 창작 공부 방법을 비로소 깨달았다. 어쨌거나 이 일은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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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대해서 글을 쓰려니까 한 해를 뒤돌아보게 되었다. 일 때문에 만난 건 아니 지만 한양대 최수묵 교수를 빼놓을 수 없다. 내 글쓰기에 이 만큼 영향을 준 사람 은 지금까지 없었다. 행운이었다. 고마웠다. 그래서 한양대 앞 술집에서 자주 마 셨다. 사람과 만남이 일과 연결된다. 동업 씨를 만나 동네에서 일을 하게 된 것, 내게는 큰 행운이었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최수묵, 이기호 씨도 그렇다. 새로운 일로 이어질 것 같다. 에너자이저 동업 씨가 안식년을 갖겠다고 해서 21년 <성수 동 쓰다>는 안개 속에 있다. 사람은 살아있는 한 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일의 결과가 모조리 돈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우리, 우리는 자본주의의 자식들 이다. 그래서 일은 고되기만 했다. 돈이 아니라 보람을 얻기 위해 일한다면, 얘기 가 달라진다. 성동 히어로 인터뷰하면서 그런 사람을 만났다. 올해는 동네를 많이 쏘다녔다. 그리고 사람을 만났다. 마냥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즐거웠다. 보람이 있었다. 그것으로 만족한다. 내년에는 소설 쓰는 일도 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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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사 안철수와 미싱사 주선덕의 일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그 끝은 미약하였도다!
원동업
두 사람은 모두 공통점이 있다. 협동조합의 이사장들이다. 봉제업에 종사한다. 봉제를 업으 로 했던 이들은 아니다.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물론 조금 다르기도 하다. 안 철수는 ‘뜯었다가 다시 미싱질하는 것을 불량’이라고 판단한다. 주선덕은 ‘잘못 됐으면 다시 해야지. 그걸 버려?’ 이런 입장이다. 내 손에서 떠났으면, 그게 얼마를 받든 상관하지 마! 이게 안철수의 입장이라면, 주선덕은 많이 받으면 우리도 좀 더 주지! 하는 생각이 든다. 둘은 자주 투닥투닥하지만, 서로의 자리에 굳건히 설 수 있도록 힘껏 돕는다. 무엇보다 같은 처지 라는 동지애가 우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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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선덕은 꿈한타래협동조합을 맡고 있다. 주선덕이 ‘봉제’를 배운 것은 (농담처럼 했는데) ‘자신의 옷을 만들어 입기 위해서’였다. 맞을까하고 옷을 사서 집에 와 입어보면, 거짓말처럼 팔뚝도 배도 허벅지도 들어가지 않았다. 몸 사이즈가 좀 큰데, 봉제를 하면 얼마든 자유롭게 옷을 만들 수 있으리라는 ‘꿈’이었다. 성동구청과 한양여대 그리고 한국사회적패션협동조합 이 협업을 통해 공방을 만들고, 이곳에서 행한 봉제수업 3기 졸업생이 주선덕 이사장이다. 4기까지 졸업생 중 한 열 명 정도를 모아 시작한 협동조합이었다. 부지를 댄 한양여대와 건물 과 기계구입 등에 자본을 댄 한양대 등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그 시작은 창대하였다’. 그리고 ‘그 끝은 미약하였노라’고 주 대표는 자조적으로 말했다. 착한 꿈이었다. ‘장애인들 중에는 다 리 하나가 부은 사람도 있잖아. 그 사람들한테 딱 맞는 옷을 해주는 거야.’ 기억도 할 수 없는 많은 꿈들은 어느덧 자기 길을 찾아 떠난 동료들처럼 찾을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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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서기를 못 했어!” 그게 대표로서 주선덕이 갖는 회한이다. 왜 그랬을까? 일단 ‘비전’이 충분히 세심했다고 할 수 없었다. 주민들에게 봉제 교육을 해서, 이들이 물건을 만들게 하고, 이를 지역 내에서 파는 선순환 구조를 그런 건 ‘그들’이었다. 그러나 3개월 반짝 교육으로, 사람들이 원하는 수준의 물건을 만드는 일은 ‘어림도 없었’다. 더 많은 교육과 지원을 요구하는 주대표 등에게 돌아온 답은 한결같았다. “왜 자꾸 지원을 받으려고 하세요? 홀로서기를 하세요!” 이제 겨우 뒤집기를 성공한 아기에게 걸어! 뛰어!를 강요하는 것 같았다. 박원순 시장님을 만 난 자리서 ‘지랄’을 했다. 목소릴 높였다. 그게 생방송으로 중계가 되고 있는 줄 몰랐다. 중급 반이 생겼다.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커리큘럼이 초급반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적합한 수업내용도 아니었다. 초보들은 스판이 없는 ‘직기’ 직물로 해야는데, “아무거나 가져 오세요!” 했다. 선생에게 또 ‘지랄’을 했다. “어디서 선생한테 대드느냐! 그냥 따라만 와!” 답변 이 왔다. “재미를 찾아요! 우리가 이걸로 돈 벌려는 거 아니잖아!” 이렇게 말하는 이들과 “무슨 소리 야! 돈이 안 벌리면 무슨 재미야!” 하는 입장이 갈라졌다. 그러다 어~ 어~ 하는 사이에 낙엽이 떨어지고, 바람이 쓸어가듯 그들이 사라졌다. 이건 꿈한타래협동조합이야기다. 물레마실은 ‘존버’ -존나 버텨- 정신으로 버티고 있다. 이사들이 똘똘 뭉쳐있다. 2년쯤 운영해 보니 감이 왔다. 현실적으로, 실용적으로 방향 전환을 했다. 옷은 자본과 집중적 노동을 하는 이들이 많아 경쟁이 될 수가 없었다. 가방, 앞치마, 파우치 등 소품에 집중하고 마을 안에서 수요자들을 찾았다. 축제가 있을 때마다, 벼룩시장이 열릴 때마다 매대를 놓고 팔았다. 교육 에도 집중했다. 여러 학교에도 미싱을 주어가며 반을 열었다. 희망이 보였다. 안정적으로 갈 수 있는 자본들이 물레마실에도 준비돼 있었다. 꿈한태래와 비슷한 경로였다. 그런데 2020 년 코로나19가 터졌다. 교육이 끊겼다. 축제를 열 수가 없었다. 존버 존버! 두 사람은 사람인 처럼 서로를 버텨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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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크플러스, 일하는 사람들에게 집중하는 공간
이서연
과거 성수동은 구두 제조업이 발달한 곳으로 구두 제조업체가 많이 자리잡고 있었지만 현재는 IT, 패션, 예술, 엔터테인먼트 등 다양한 업종의 기업들이 활동하는 무대가 되었다. 지 리적 이점 때문에 성수동에 사무실을 얻기를 희망하는 기업들도 많다. 3~4년 전부터 화두가 된 것이 바로 ‘공유오피스’이다. 공유오피스는 책상, 사무기기 등이 갖 춰진 오피스 공간을 일정액을 내고 일정 기간 사용하는 회원제 개념의 사무실(조선비즈)이 다. ‘스파크플러스’는 국내 토종 공유 오피스 기업으로, ‘당신에게 집중하는 오피스’라는 모토 로 일하는 사람들이 열심히 집중 근무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한다. 스파크플러스는 올 해 성수동에만 두 개 지점을 오픈했으며 이 두 지점에는 무역, 패션, 디자 인, 유통 관련 기업들이 비교적 많다. 성수점(1호점)에는 유명 실내 인테리어 스타트업이, 성 수2호점에는 청년층에서 인기가 많은 패션 브랜드 M사가 입주해 있다. 성수동은 다양한 세 대가 즐길 수 있는 문화와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는데, 스파크플러스 2호점 또한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인물들이 근무하는 공간으로 성수동과 비슷한 느낌을 지녔다. 스파크플러스에서 성수동에 지점을 선보이기로 결정한 이유는 성수동이 강남과 강북 모두 이동하기 좋은 곳에 위치하여 서울 전역에서 사업을 하고자 하는 고객에게 유익한 오피스를 꾸릴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어서였단다. 당시 성수동은 수제화, 의류 공장을 비롯하여 여러 건물들을 리모델링하는 추세였고, 성수점이 위치한 ‘에스팩토리’도 과거 스웨터 공장으로 이 용되었던 곳. 스파크플러스는 지역적 특성을 반영하는 오피스를 만들고, 공장의 건물적 특성 은 유지하면서도 사용자가 근무하기 편한 오피스 공간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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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크플러스가 입주사에 집중하는 오피스인 만큼 지점마다 특성화된 공간을 갖추고 있는 데, 성수점에는 탁 트인 라운지가, 성수2호점에는 모델이나 제품을 촬영할 수 있는 스튜디오 공간이 있다. 특별히 성수2호점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공간은 라운지. 각 층마다 인테리어가 다른 라운지가 갖추어져 있다. [라운지는 고객의 니즈에 맞추어 활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휴 식, 간단한 미팅을 진행하는 장소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스파크플러스는 현재 다른 기관과 함께 입주사들을 적극 지원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 다. 현재 우리금융지주와 협력하여 성수점에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센터를 설립했고, 성수2 호점은 한양대학교, 성동구청과 MOU를 맺어 사무실 공간을 제공하며 한양대학교 출신 창업 자들을 적극 지원한다. 성수동에 다양한 기업이 진출하면서 공유오피스라는 새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공유오피스의 장점은 청소, 보안 등의 잡무에 신경쓰지 않아도 되며, 입주한 다양한 기업들과 교류할 수 있 다는 점이다. 성수동에 위치한 두 개의 스파크플러스 지점에서 열심히 일하시는 분들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업무에 집중하여 성수동에서 각자의 커리어를 탄탄하게 쌓아나가시길 응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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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이들 위해 일하는 사람, 매니저 엘리 인터뷰 ‘엘리’ 매니저는 스파크플러스 성수 2호점의 입주사를 위해 일하는 커 뮤니티 매니저다. 과거 여행사에서 일했던 엘리는 사람들과 마주하고 소통하는 일을 좋아했는데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스파크플 러스의 ‘커뮤니티 매니저’ 직무를 알게 되었다. 스파크플러스 또한 커 뮤니티 조성과 커뮤니케이션을 중요시하였고, 서로의 니즈가 일치하 여 엘리는 스파크플러스에서 입주사 고객이 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공간, 서비스, 커뮤니티를 적극 지원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엘리 매니 저를 만났다.
Q: 본인과 업무 소개 부탁드려요. A: 스파크플러스 성수 2호점의 커뮤니티 매니저 엘리입니다. 스파크플러스는 올해 성수동에 1호점과 2호점을 오픈했습니다. 2호점에 입주한 다양한 기업들에게 쾌적한 공간과 커뮤니티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레일라, 로키 매니저와 함께 근무하고 있어요. 처음 스파크플러스에 입사했을 땐 서울로점에서 근무했는데, 올해 1월부터 성수점 오픈 멤버가 되면서 성수 권역 으로 오게 되었어요. 저는 입주사들의 총무 역할을 담당한다 할 수 있어요. 주 역할은 입주사 고객 분들과의 커뮤 니케이션. 입주 문의부터, 스파크플러스 서비스 이용, 협업 제안 등 다양한 소재로 소통하고 있습니다. 지점의 분위기, 지점 관리 상황에 대해서 본사와 소통하기도 해요. 더불어 입주하 고 싶다는 분들이 찾아오면 부동산 중개인처럼 공간 소개와 세일즈를 담당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스파크플러스에서 ‘스플모닝’과 이벤트를 개최하는 일도 해요. 스플모닝은 간단하게 아침에 조식을 제공하는 건데 원래는 매일 제공하다가 코로나19 이후로 현재는 매주 수요일 마다 아침 9시 30분에 제공하고 있어요. 입주사 분들의 피드백을 받으면 그에 맞게 반영합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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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성수동에서 근무하시면서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었나요? 있으시다면 설명 부탁드립니다. A: 성수동에서 근무하는 동안에는 코로나로 제약되는 부분이 많아서 아직 특별한 경험을 해 보진 못했어요. 코로나19 사태 이전에는 한 달에 한 번씩 험프데이(매주 수요일 진행하는 힐 링 및 네트워킹 이벤트), 스플 매점과 같은 이벤트 진행을 통해 입주사들과 가까이서 커뮤니 케이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는데요. 지난 1월에는 연초 이벤트로 타로카드, 윷놀이와 같이 다같이 모여서 즐길 수 있는 이벤트를 진행하면서 입주사 고객분들과 가까워졌고, 지 점을 옮겼음에도 성수2호점으로 찾아와 주시는 타 지점 회원 분들도 계시거든요. 이렇게 관 계가 형성되는 일이 특별한 경험이지 않나 싶어요. Q: 코로나로 인해서 이벤트 개최를 못한 건 정말 안타깝네요. 언제 가장 보람을 느끼시나요? A: 입주 회원 분들의 필요한 부분을 채워드리고 해결할 때인 것 같아요. 입주하신 분들께서 일에 집중하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그 분들과 소통합니다. 최근에 있었던 일인데, 스파 크플러스 성수2호점 반대편 건물 실외기에서 엄청난 소음이 들려왔습니다. 확인 및 수리 부 탁드린다는 내용의 공문을 발송했죠. 입주사 고객 분들이 불편을 겪을 수 있다고 판단해서 발빠르게 움직인 거죠. 그쪽 건물서 확인 후 적절한 조치를 취해 주셨지요. 네트워크 관련된 경험도 있어요. 스파크플러스 성수2호점에선 특정 네트워크망을 이용하는 데 성수동 일부 건물에서 해당 네트워크가 전체적으로 느려지게 되었고 당장 입주사 업무에 도 영향이 미치는 상황이었어요. 이런 이슈가 생길 때마다 즉각적으로 커뮤니티팀이 연락을 취하고 대처해요. 이런 과정을 거쳐 저 스스로도 많이 성장하는 것 같아요. 능동적으로 일을 찾아서 해결하는 자세도 갖춰지게 되고요. Q: 역시 일하면서 발전하셨던 거군요. 마지막으로 엘리에게 성수동은 어떤 곳인가요? A: 저에게 성수동이란 ‘에너지를 주는 공간’이에요. 근처에 예쁜 카페와 맛집도 많아서 점심 시간에 뭘 먹어야 할 지 행복한 고민을 하기도 합니다. 날씨 좋은 저녁엔 서울숲에 가서 산 책, 달리기를 하고요. 업무 외적으로 저에게 많은 에너지를 주는 곳입니다. 성수점이 위치한 에스팩토리도 문화복합 공간인데요. 1층에 흑백사진관이 있기도 하고 종종 다양한 전시회가 열려서 볼거리가 많아요. 점심시간을 활용해서 전시회를 둘러보며 기분 전 환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합니다. 서울로점에서 근무할 때는 누릴 수 없던 혜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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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마치며 작가 생택쥐페리는 이런 말을 남겼다. “누군가는 성공하고 누군가는 실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차이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타 인과 함께, 타인을 통해서 협력할 때에야 비로소 위대한 것이 탄생한다.” 과거 성수동에 사무실은 흔치 않았지만, 이제는 공유오피스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성 수동의 풍경뿐만아니라 근로자들의 일하는 모습 또한 세상의 흐름에 맞게 다양해지고 있다. 인터뷰를 진행하며, 성과를 내고 무언가를 창출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뒤에서 묵묵히 두 발로 뛰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하는 모두가 동반성장하여 훌륭한 가치를 만들어 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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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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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일하기
일과 삶의 균형 잡기 민선희 @sunhee_min91
가드닝하는 필자 26
대학을 졸업하고 20여 년 동안 교육 관련 회사를 다니면서 주로 신촌, 강남 등지에서 회사생활을 했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저녁 늦게 귀가하다보니 집은 그저 잠을 해결하는 의 미만 있었고 대부분의 생활은 회사 근처에서 진행되었다. 게다가 회사일로 인한 스트레스를 풀고자 선택했던 취미가 공연을 보는 것이어서 대학로 및 강남의 공연장들 주변이 동네보다 더 익숙했다. 그러다가 회사를 퇴직하고 다른 길을 찾기 위해 잠시 쉬어가다가 만난 서울숲 은 내게 다른 삶에 눈을 뜨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람들과 같이 정원을 가꾸고 그림을 그리 게 되면서 취향이 같은 사람들과 함께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다. 특히 2019년도에 참여하게 된 성동문화재단의 청년기획단 프로젝트 [혈연, 지연, 학연]은 단 순히 동네사람들을 만나고 싶다던 내게 새로운 자극이 되었다. 청년은 아니지만 청년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도전가능하다는 홍보문구에 반해서 신청했는데 정말 나 말고는 모두 20~30 대였다. 처음 만나서 낯선데다가 세대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영상을 만들고 책을 기획하 고 글을 쓰는 일련의 과정들은 회사를 다닐 때와는 다른 성취감을 주었다. 청년기획단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시기에 막 이직을 해서 새로운 회사에 적응하면서 짬을 내 어 활동을 했는데, 일과 활동을 병행하면서 과연 일을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어떤 인생을 살 아가야할 지 고민하게 되었다. 함께 팀을 이뤘던 친구들이 미래에 대해 고민하던 사회초년생 들이어서 그런 사람들과 대화하다보니 그저 회사시스템에 익숙해져서 늘 하던 직무를 수행 하던 내게 남은 인생을 그저 일만 하고 살 것인가 하는 회의를 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취미로 시작한 가드닝은 서울숲과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갖게 했고, 내 삶이 그동 안 너무 일에 집중되고 있음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 결국에는 몇 달 지나지 않아서 그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고, 2020년 봄에 우연하게 마을에서 일하는 기회를 잡게 되어서 현재는 주민자치회를 지원하는 업무를 하고 있다. 그동안 내가 익숙했던 일-교육 콘텐츠를 만들고 교재를 집필하고 남을 가르치던 일-은 20여 년간 해왔기 에 그저 습관처럼 잘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라서 좋아하기는 했지만 조금은 무감각해져 가던 때였다. 그런데 내가 잘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빠른 일처리보다 는 여러 사람의 의견을 구하고 모으는 일련의 과정을 겪다보니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 지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내가 잘 아는 분야가 아닌 모르는 분야라서 순간순간이 새롭고 때로는 고민이 되어서 흡사 20대 사회초년생 시절을 다시 겪는 느낌이었다. 마침 일하는 곳에 옥상텃밭도 있어서 상추, 수세미, 오이들을 가꿀 기회가 있었는데 일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식물들도 보고 기획을 하고 사업을 수행하는 일을 하게 되어 좋았다. 그렇지만 일과 환경에 익숙해지면서 뭔가 변화를 바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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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마을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주민자치와 마을사업에 대한 여러 보고서나 지침들을 보면서 이런 제안, 규정들이 오히려 지역주민의 문화를 고려하지 않고 한 방향으로만 성장을 몰아가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예전 이태리에 있는 소도시 레지오 에밀 리아로 연수를 갔던 추억이 떠올랐다. 그 마을은 학교와 지역주민, 공공기관이 협력하여 아 동들에게 스스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레지오 접근법이라는 교육의 혁신을 가져온 곳이다. 많은 분들이 레지오 접근법을 배워서 한국에 도입하려고 했는데 쉽지 않았던 것이 그 지역의 문화를 고려하지 않고 시스템이나 도구만을 도입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변화를 바라고 성장을 바란다고 제안했던 것들이 외부자의 시선에서 피상적으로 접근 했을 수도 있겠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진정한 교육은 강의장에서 교재를 통해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부딪히면서 가치를 나누고 갈등하기도 하고 서로 협력도 하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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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의 직업 경험이 정말 개인의 일자리로서의 성취감과 만족도를 높이는 것이었다면 현 재 하고있는 직업 경험은 내가 만나고 생활하는 공간과 사람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라고 본 다. 일의 성과를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일을 통해 사람들이 행복해하고 또 일을 함께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들어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 지금은 주중에는 일을 하고 주말에는 서울숲에서 정원을 가꾸는 삶을 영위하고 있다. 또한 짬을 내서 그림을 그리고 고양이를 돌보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더 이상 성공과 성취가 타인 의 잣대에 의해 평가되는 인생이 아닌 내 스스로의 즐거움과 행복,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찾 게 된 듯하다. 어쩌면 한쪽으로 치우쳐있던 인생의 균형을 찾기 위해 지난 2~3년간 방황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매일매일 하늘을 보고 마당의 꽃을 보고 고양이를 만지고 정원에 물주고 사진을 찍 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지금의 인생은 더할 나위 없다. 흡사 어린 시절 하루하루 순간이 채워지는 듯한 느낌을 다시금 경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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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은둔 생활
권경덕
자고 일어났는데 몸살 기운이 느껴졌다. 집에 있던 비접촉 체온계로 이마 열을 재보니 37.5도 근처를 오르내렸다. 앞머리를 위로 후-익 까고 체온계를 옮겨 가며 지반 탐사하듯 이마 구석 구석의 온도를 측정하는데, 관자놀이 근처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37.8도. 에이 그래도 기침은 안 하니까. 아닐 거야 아닐 거야 아닐 거야, 하며 독백인지 주문인지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도, 그동안 미디어에서 보고 들어온 확진 이후에 펼쳐지는 스펙타 클한 일들이 머릿속에 저절로 그려지는 건 어찌하지 못하였다. 열은 다행히 하루만에 내렸다. 최근에 잠을 잘 못 자고 마감에 쫓기며 일을 하는 바람에 몸 에 무리가 온 걸까. 그래, 잠을 잘 자야지. 이참에 코로나 수칙도 더 잘 지켜야겠어. 손을 더 자주 씻어야지. 마스크를 밀착해서 써야지. 밀집 장소는 가지 말아야지. 아니, 그냥 밖에 나가지 말아야지!
코로나 이후의 검색어들 확진자 숫자, 사회적 거리두기 몇 단계, 긴급재난문자 소리, 코로나 큐알코드, 코로나 증상, 비접촉 체온계, 보건소 영업시간, 마스크 미착용 신고, kf94, 재난지원금, 자가격리 기준, 확 진자 동선, 코로나 라이브, 정은경 본부장, 언택트여행, 배달음식추천……. 서로의 비말과 온도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시대. 이제는 어딜 가든 출입명부를 작성하고, 체온을 측정하는 일이 익숙하다. 나는 아직 확진 판정을 받은 적이 없고 앞으로도 별 일 없 으면 좋겠지만, 완전히 격리된 생활은 어려우니까 또 모를 일이다. 그런 이유로 가끔씩 스 스로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코로나가 아니어도 열이 나거나 기침이 나오기도 하니까. 그럴 때마다 혹시? 설마? 하며 최근에 방문한 장소를 되뇌이고, 접촉한 사람들을 떠올리고, 앞으 로 펼쳐질지도 모를 미래를 상상하겠지. 아니 무증상 확진자도 많다고 하니까 멀쩡한 것 같 은 날에도 아주 안심하긴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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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처럼 한 곳에 가만히 뿌리 내리고 사는 일상은 어떨까. 가만히 앉아서, 혹은 누워서 넷 플릭스 드라마를 정주행하고, 유튜브 알고리즘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인스타를 들락거 리며 아래에서 위로 몰아치는 이미지의 파도에 휩쓸리는 일상. 그러다보면 나의 신체도 ‘0’ 과 ‘1’의 디지털 신호로 점점 변환되어 형체가 모호해지고 흐물흐물해지다가 순식간에 화 면 속으로 전송되는 거지. 화면 밖으로 가까스로 탈출해도 계속 누워 지내다 보면 단단한 줄 알았던 바닥이 점점 물렁해지고 그 속에 살던 콘크리트 괴물에 의해 급기야 장판 밑으 로 흡수될지도 몰라. 바닥으로 흡수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스마트폰을 놓지 않고 화면을 계 속 응시하다 보면 화면 뒤로 보이는 천장이 갑자기 윈도우 바탕화면이 되어 시스템 종료하겠습니다, 하는 소리가 나오고 그 순간 나는 눈을 번쩍 뜨며 아 시발 꿈이었네, 하고 깰지도 몰라. 그래도 마음만 먹으면 벌떡 일어나 집 안을 걸으며 어슬렁거릴 수 있고, 산책하듯 창가를 오가며 볕도 쬐고 물도 마시고 창문을 열어 바람도 쐬는, 반-식물적인 일상을 보낼 수 있으 니 다행일까. 방(room) <-> 방(zoom)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격상된 이후부터 독서모임 강사 일도 온라인으로 전환되었다. 모 임이 있는 날이면 내 방(room)에서 온라인 방(zoom)으로 출근 준비를 한다. 어차피 보이지 않을 하반신은 내버려둔다. 화면에 보일 상반신의 옷 매무새만 가다듬고 뒷배경의 공간도 어느 정도 정돈한 후에야 온라인 방(zoom)으로 입장할 준비를 마친다. 방(zoom)에 들어가 모임 시간을 예약하고 참여자 분들에게 접속 링크를 보낸다. 정각에 가 까워지면 사람들이 한두 명씩 입장한다. 들어온 인원수 만큼 화면은 분할되고 각각의 프레 임 속에 익숙한 얼굴이 ‘반짝!’ 하고 등장한다. 잘 지내셨어요? 오늘 배경이 예쁘세요! 목소리 잘 들리세요? 납짝하고 텅 빈 공간에 반짝! 반짝! 하고 반가운 얼굴들이 나타나 인사를 주고 받으며 화면 과 오디오를 채우면 그날의 모임 공간이 만들어진다. 모임이 끝나고 다음의 만남을 기약하 며 모두가 방(zoom)을 나가면 그날의 모임 공간도 그 즉시 사라진다. 온라인 방에서는 비대면 모임의 답답함과 편리함을 동시에 경험한다. 그런 납짝하고 분할 된 만남도 대화가 풍성한 날에는 대면 모임 못지 않은 입체감을 느낄 수 있다. 온라인에서만 만나다가 코로나가 조금 잠잠해져서 오프라인으로 처음 만나는 날에는 서로 가 마냥 신기하다. 어쩜, 방금 화면을 뚫고 나온 것처럼 똑같아서. 화면에선 못 보던 의외의 모습을 보아서. 점잖은 줄 알았는데 개그 욕심이 대단해서. 평면으로 보다가 앞뒤좌우로 만 나니까 신기해서. 실물을 영접하는 느낌이 묘해서. 현실이 꿈 같아서. 꿈인 듯 꿈은 아니어서. 31
명랑한 은둔 생활 <성수동 쓰다>의 편집장 원주부가 물었다. 경덕씨는 내년 계획이 어떻게 돼요? 글쎄요, 지금은 별 생각이 없네요. 저는 보통 연초에 계획이 세워지더라고요. 라고 조금 성의없이 말했는데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고 정말 계획이 없어서. 그런데 글을 쓰며 정말 없나? 자문하다가 조금 덧붙여본 추신. "그러니까 아마 당분간은 이런 반-식물적인 생활을 이어가지 않을까요? 사회적 거리두기 2 단계로 카페도 테이크아웃만 되고 밖에서 딱히 머무를 곳도 없으니 방에서 더 잘 지내야겠 네요. 돈도 벌긴 벌어야 하니까 기회가 또 된다면 방(room)과 방(zoom) 사이를 오가며 출퇴 근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파트타임 알바 자리를 알아볼 수도 있고요. 재난 지원금을 또 받을 수 있을까요? 집 밖에는 안 나간다고 했지만, 그래도 ‘자가격리대상자’가 아니라면 해 떠있을 때 동네 산 책도 하며 우이천 오리도 보고 길고양이들 안부도 확인하면 좋겠어요. 일주일에 며칠은 근 처 재래 시장에 가서 반찬이랑 간식도 좀 사고, 그러면서 씩씩한 상인들 목소리도 듣고요. 집밥도 살뜰히 차려 먹고 과일도 일부러 챙겨 먹어야겠어요. 방문 사이에 달려 있는 철봉에 도 오다 가다 매달리면서 안 쓰는 근육도 종종 깨워주고요. 어제는 마트에 가서 우드트레이도 샀어요. 왜, 직사각형 트레이 위에 예쁜 그릇 올리고, 그 위에 정갈하게 차린 레스토랑 1인 세트 메뉴처럼, 집에서도 비슷하게 차려 먹으면 치우기 도 편하고 마음도 괜히 고양되고 그러더라고요. 그렇게 나름 스스로를 챙기며 생활하다가 또 어떤 이유로 몸에 열이 날 수 있겠죠. 기침까지 하면 좀 더 위축될 수도 있겠지만 미래의 위축됨을 미리 생각할 만큼 현재의 나는 상상력이 뛰어나지 않습니다. 다행일까요? 내일의 확실성을 부여잡아야겠다는 절실함도 부족해서 아직은 계획이랄 게 없네요. 문득 생각하는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1층에 자주 오는 길고양이 미료가 올 겨울에도 무사 하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 친구 집사도 아니고 고양이 밥 주는 캣OO도 아니지만 햇수로 3 년째 이웃으로 지내다 보니 애정하게 되었습니다. 올 겨울도 저와 미료 둘 다 무사해서 내 년 봄을 같이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스스로를 잘 돌볼 수 있는 의욕이 명랑하게 지속되길 바라면서, <명랑한 은둔자>에 나오는 한 구절을 나누고 싶습니다.
혼자 있는다는 것, 그 모든 다양한 형태는 연습이 필요한 기술이다. 고독은 어려운 일이다. 자신을 돌볼 의욕이 있어야 하고, 자신을 달래고 즐겁게 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명랑한 은둔자> 캐럴라인 냅 지음, 24p
여전히 내년 계획은 모르겠고 연말이니까, 명랑하게 은둔하며, 연말을 잘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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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정윤주
나는 바다에 있는 돌멩이다. 이곳저곳 삐죽삐죽한 못난 돌멩이다. 나는 파도가 칠 때마다 엎어지고 굴러진다. 다른 돌멩이와 부딪치고 부서지기도 한다. 한 숨 돌리려고 하면 다시 매서운 파도가 나를 덮친다. 굴러지고, 덮치고, 굴러지고, 덮치고 친구들과 함께 햇빛을 보고 싶어 했던 내 소망은 파도와 함께 투명하게 부서져 간다. 파도에 치일 때마다 나는 바다의 밑 부분을 본다. 거기에는 하늘위에 있는 달이 내려 앉아있다. 나와는 달리 그들은 어디 하나 모난 데가 없어 밤하늘에 비칠 때마다 은은하게 빛을 발한다. 눈앞이 시커먼 바닷물로 차있는 나에게 저들은 눈부신 태양과 같이 찬란하게 빛난다. 저 달들도 나처럼 파도와 싸웠겠지 그렇게 해서 지금의 우주가 된 거겠지 파도에서 탈출하고 싶을 때마다 속으로 되새긴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이 물보라에 몸을 던지면 미웠던 데도 슬펐던 데도 실망스러웠던 데도 다 무뎌지고 매끈해져 저들처럼 빛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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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게 된 계기 올해 처음으로 고등학생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입시에 임하게 되며 느꼈던 숨 막히는 기분 과 너무 힘이 들어 그냥 다 놓아버리고 싶을 때마다 미래에 제가 원하는 삶이나 제 행복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은 분들을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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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숲공원 산책로
일상을 채우는 사소한 일들의 가치
이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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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와 산책
분주하게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던 출근길을 대신하여 퇴사 후에는 아침저녁으로 강아지를 데리고 서울숲 공원을 자주 걸었다. 출근 대신 선택한 서울숲 공원 산책은 평소 알지 못했던 새로운 즐거움으로 하루를 채운 특별한 기억이다. 강아지와 함께 길을 나서면서 새로운 시선 으로 세상을 관찰하는 일상의 사소한 재미를 느끼게 되었고, 산책이 늘면서 강아지가 움직이 는 걸음에 발맞춰 움직이는 여유도 생겨났다. 일상의 사소한 일이 주는 기쁨일까? 강아지의 걸음에 맞춰 천천히 산책을 다니면서 새로운 시 선으로 일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아침에는 공원 잔디밭에서 마음껏 뛰어 노는 아이들의 미소 와 마주했고, 어두운 저녁에는 공원을 달리는 러너들이 내뿜는 뜨거운 온기를 전달 받았다. 공원에서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에너지는 어느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코로나 19로 답답한 일상생활이 지속되는 요즘, 사소한 일상에서 만난 따뜻한 온기가 참 그립다. 스쳐 지 나가는 가을의 따뜻한 햇살만큼이나 사소한 일상의 모든 순간을 비추는 빛은 밝았다. 어쩌면 우리의 일상을 채우는 다양한 이야기는 사소한 일들로 만들어지는 건 아닐까? 우리는 일상에서 표현하는 사소한 말에 기뻐하고, 때론 마음의 상처도 받는다. 서툴러 생긴 사소한 실수에 후회하기도 뜻밖의 사소한 배려에 감동하기도 한다. 앞으로도 나는 사소한 일의 재미와 즐거움을 계속 찾을 것이다. 발로 움직이며 계속 새로운 도전을 하고, 끊임없이 배우는 일을 손에서 놓지 않고 싶다. 내가 일을 통해 실현하고 창출하 는 사소한 이야기들이 나만의 만족이나 행복이 아닌, 내 곁의 사람들에게 사소한 일상의 행복 으로 전해지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 그리고 글 쓰는 사람으로 바람이 있다면 내 곁에 존재하 는 사소한 경험을 모아 한 사람을 표현하는 작품을 만들고, 사소한 이야기를 모아 한 권의 책 을 탄생 시키고 싶다. 내가 일상의 사소한 경험을 소홀히 하기 어려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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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강물에 피어난 불꽃
서수아
일이란 내게 불꽃같은 것이다. 사그라들지 않고 불꽃처럼 피어오르는 무엇.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강물같기도 하다. 강물 위에서 피어난 불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는 강물과 불꽃이 어울리지 않고 함께 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내게 있어서는 일과 관련 된 가장 적합한 수식어라는 생각이 든다. 늘 어떠한 흐름 위에서 나의 열정이 꽃피어 나기 때문이다. 강물의 길은 그때 그때 다르게 이어지고 나의 열정의 꽃은 크고 작게 피어나지 만 잘 꺼지진 않는다. 성수동에서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나의 직장은 늘 강남 인근에 위치해 있었다. 치열한 경 쟁의 중심에서 한국의 기술력에 예술이란 옷을 입혀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했었고 사업을 시작하고 나서는 그 예술을 만드는 작가 개개인의 이야기가 더 잘 펼쳐질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맡아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배를 탔다. 서로 아예 다른 일 같지만 ‘한국의 예술 적, 기술적 가치를 세계로 알린다’는 면에서는 방향성이 같다. 그 역할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성수동은 특별한 곳이다. 성수동은 예술이 조금 더 자유로 운 캔버스에서 춤출 수 있도록 돕는 동네라는 생각이 든다. 현재 직접 운영하고 있는 스페 이스 오매는 공간이 주는 날것 그대로의 컨셉을 최대한 살려 냈기에 ‘울퉁불퉁 세월의 흔 적이 있지만 한번 써 보고 싶은 독특한 질감의 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저마다의 관점, 시 각, 심미안으로 꾸며진 여러 공간들이 모인 성수동이 좋다. 성수동에 앞으로도 다양한 가 치들이 빛나는 공간들이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고 그 공간들에서 신나는 기획, 창작들이 이 어지면 좋겠다. 어쩌면 사막처럼 느껴지는 코로나 시대에 새로운 강물이 흐르고 곳곳에 다 양한 열정의 불꽃들이 생겨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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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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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선 글, 사진 이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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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은 선(線)이다. 선과 선이 만나 면을 이루고, 면과 면이 만나 공간을 구성한다. 그 공간들의 집합 구성 행위가 건축이다. 건축은 만남이다. 선과 선의 만남. 면과 면의 만남. 공간과 공간의 만남. 그 만남의 조율과 조정이 건축이다. 주거공간으로서의 건축은 우리들에게 많은 기능을 제공한다.
솔라노건축가의사진여행 http://blog.naver.com/uslee3232. 이유상 / 성동여행SNS서포터즈로 활동하는 사진가 겸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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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역 아침시간 출근 그리고 슈스팟 전시장
서성원
성수동에는 지하철역이 세 곳이다. 시민에게 널리 알려진 건 성수역이지 싶다. 동네 이름이 성수이고 역명이 성수역이니까. 내가 거주하는 곳은 서울숲역 생활권이다. 2호 선은 뚝섬역으로 다닌다. 성수역을 이용할 일 이 많지 않다. 그래서 구경삼아 성수역을 가보 았다. 뚝섬역이나 서울숲역보다는 볼거리가 많 았다. 이왕이면 활기차게 출근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아침 시간에 갔다. 성수동 수제구두는 유명하다. 성수동을 수제구 두 명소로 만들기 위해 서울시나 성동구에서 지 원했다. 장인들 스스로 노력을 했다. 성수역 2 층 대합실에 슈스팟이라는 전시장이 있다. 전 시물을 천천히 살펴본다면 누구나 ‘구두박사’가 될 수 있다. 구두 제작 과정을 알 수 있다. 구두 에 대한 지식을 폭넓게 얻을 수 있다. 내용이 다 양하고 전시물도 구체적이었다. 어디서 전시장 을 만들었나 봤다. 서울시 디자인정책과, 경제 정책과, (사)서울디자인재단이다. 성수동 수제 구두가 세계적인 명품 구두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가끔 방송에 나오는 뉴스는 어두운 얘기였다. 구두 장인의 피땀으로 일궈온 성수동 구두가 헛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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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직장으로 출근하려고 성수역을 나오는 직장인들, 분주한 발걸음만큼 활 기가 넘친다. 개인은 가족과 나를 위해서 일을 하지만 대한민국의 기둥인 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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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역 지상부 모습, 성수역에 내려서 마을버스를 타려고 줄을 선 모습, 구두 판 매 광고 입간판, 수제화의 거리 안내판, 구두공동판매장(수제화의 거리) 입구의 광고설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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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역 내부, 출근하는 이들, 3번 출 구, 끼니를 놓친 이들의 배를 채워주는 곳(어묵집, 빵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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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스팟 전시장 수제 구두가 만들어지기까지 공정을 알 수 있다. 구두 장인들이 사용하는 도구와 수제구두 제작에 사용되는 기계가 전시되어 있다. 구두와 관 련된 이야기도 소개한다. 50
성수동의 시간, 성수동의 공간, 성수동의 사람 (이 세 전시물은 성수동 수제 구두 전체를 압축해서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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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사랑꾼들의 또다른 집
원동업
피스북스 김소희 만 리의 평화여행, 만 권의 평화책
피스북스 김소희 대표는 대학생 때부터 시사주간지 <말>지에 ‘학생운동코너’를 썼다. 환경운동연합 공채1기 활동가로 <함께 사는 길> 잡지를 맡아 오래 일했다. 아이가 생기면서 진로가 바뀌었다. ‘아이를 데리고 있으면서, 창작도 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았다. 그게 2000년에 세운 작은도서관 책읽는 엄마 책읽 는 아이’였다. ‘사서를 두고, 80평이 넘어야 하고…’, 그런저런 규제와 장벽들을 무시하고 열었던 그 도서 관은 ‘업계’에 작지 않은 사건이었다. 2003년 도서관으로서는 첫 비영리기구(NGO)로의 전환도 그런 사 건의 하나였다. 좋은 사람들 좋은 책들이 가득한 그곳에서 엄마들과 아이들은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며 새 삶의 지평을 열어나갔다. 2016년 전세비를 돌려받지 못한 채 그곳을 떠나야했다. 우여곡절 끝에 성동구가 땅을 내준 곳에 여러 도 움을 받아 새 둥지를 꾸렸다. 그리고 많은 것들이 변해있었다. ‘책읽는 아이’는 컸고, 김소희는 마을에 살 지 않는 마을공간 대표였다. 버리고, 다시 새롭게 시작하자 했을 때, 시원하게 울었다. 그리고 한베평화재 단서 손짓이 왔다. ‘평화의 공간’을 한번 마음껏 꾸려보라! 힘껏 돕겠다는 거였다. “돈 가는 데 마음이 가는 것. 평화에도 돈을 쓰게 해보자!” 그렇게 해서 2019년 (주)피스북스가 생겨났다. 여행하는 평화책방, 평화활동가들을 키우는 대안의 학습 공간이기도 하다. 베를린으로 베트남으로, 미얀마로, 우리 삶과 밀접한 평화공간으로 부지런히 다니며 ‘사업’을 확장해 왔다. 그리고 코로나. 제천, 평창, 괴산, 고창에 다시 길을 뚫었다. 거점 문화 근거지를 갖 춘 곳들이었다. <참 좋은 엄마의 참 좋은 책읽기> <콘크리트 바닥에 꽃심기> <엄마랑 씨앗을 심었어요> <작은 도서관이 아름답다> 같은 책들을 쓴 김소희 작가는 이제 새 글을 쓰고 또 책을 낼 것이다. 그건 어 떤 내용일까? “평화는 팽팽한 긴장이래요!” 김소희 대표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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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아이 장세이 나무의 숲과 글들의 숲 사이에서
장세이 작가는 김해평야서 나고 자랐다. 워낙 지천에 깔린 것이 ‘자연’이었으므로, 자연은 오히려 삶의 중심은 아니었다. 장세이는 편집자였다. 죽어간 나무가 부활해 다시 현존하는 ‘종이’와 상징의 기호 ‘활자’ 가 그녀의 삶터요 일터였다. 이름도 세이(世耳)로 썼다. 그렇게 17년여의 기간 동안 장세이 편집장은 성실 하게 글의 씨앗을 심고 틔우고, 밭에 뿌리고 경작해, 잘 먹고 잘 살았다. 그러다 어느날 자연이 고파졌다. 오래 잊고 살았으므로, 자연은 더 절실해졌고, 몸은 그걸 심히 마려워했다. ‘먹물’의 자연스러운 길이었을까? 장세이는 숲해설사 과정을 듣고, 숲해설사가 된다. 겨울에 배웠는데, 나 무를 알아보는 데, 가장 적확해질 수 있는 때가 겨울이란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눈’이 나무의 고갱이였 다. 직장 가까운 곳에 삼청공원이 있었다. 서울서도 오래 살았으므로 처음 낸 책은 <서울사는 나무>였다. 편집자로 오래 살아온 촉과 필력은 이후에도 꾸준히 힘을 발휘했다. 생태놀이를 담은 <엄마는 숲해설가> 도 냈고, <오롯한글(글맛, 글씨맛 나는 한 글자의 세계), <후 불어 꿀떡(처음 맛보는 의성의태어 이야기)> 도 썼다. 목수책방을 전은정 편집장과 함께 운영하다가 옥수책빵으로 바꾸었다가, 산책아이로 이름을 바꾸고, 여 기 성수동 서울숲길로 이사를 왔다. 책을 잘 읽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것 같으면서, 책방을 그저 사 진찍는 배경 정도로만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아서 입을 쩍 벌렸다. 그러다 사람들 기호에도 맞게 소품을 갖다놓기도 했다. 자연 서울숲과 무수히 공사가 벌어지고 있는 서울숲길 사이서, 산책아이는 여러분을 위 한 책들과 이야기를 마련해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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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서재 권오준 최아론 어쩌면 더 깊게, 더 성스럽게
옥수서재는 당연히 옥수동에 있다. 피스북스와 멀지 않은 곳이다. 산책아이의 전신인 옥수책빵이 있던 곳도 걸어서 채 5분여가 되지 않는다. 금호동의 책방들은 <푸르스트의 서재>와 <카모메 그림책방> 그리 고 <클래식책방>이 트라이앵글을 이루고 있는데, 여기도 그럴 뻔했었다. 느닷없이, 옥수동에 있었던 동 호독서당이 생각났다. 이 책방들은 모두 그 여운과 기운을 받고 자라났으리라…. 각설하고. 옥수서재를 지키고 있는 이는 두 명의 남자다. 최아론은 책을 ‘무척’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따지고 보면 권 오준 역시 뒤지지 않는다. 둘은 교회 사역을 하던 이들이다. ‘담임목사 지원’ 등 중요한 결정을 할 시기에, 엉뚱하게도 책방을 여는 쪽으로 마음이 갔다. 조금 다른 방식의 일을 해보자 마음먹었다. 주민을 만나고, 사상이 다르지 않다면 그게 큰 고민일 수 없었다. 뮤지컬 연습실로 있던 이곳 지하공간이 났다. 20여 년 동안 지속해오던 일들에서, 그들 극단도 일부 방향전환을 한 탓이었다. 역이 가깝고, 공간이 넓고, 층고도 높고, 그다지 지하같지 않은 곳이라 선택했다. 근처에 있었던 동빙고가 꼭 이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저장 고 혹은 씨앗 보관소 같은 느낌이다. 종교서적은 가져다 놓지 않았다. 대신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꽂아두었다. ‘책방’이라는 지향이 아니라, ‘서 재’라는 컨셉으로 시작한 곳이었다. 다만 누구에게나 열린 서재, 특히나 청소년들에게 마음은 준 내용들 이 적지 않다. 지역주민들의 공간으로, 이곳은 전시가 열리고, 음악을 연주한다. 책모임은 당연하다. 책에 대해 물었다. 아무튼 시리즈와 <아픈 몸을 살다>, <야밤의 공대생 만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등 의 책 제목이 들렸다. “책을 읽다보면 상위 클라스가 있어요. 자연스럽게 넘어가게 되죠.” “사회적 아픔에 대한 책, 독립출판의 공간도 넓어졌어요.” 술자리가 아니라, 책의 자리로 그들의 친구들이 찾아온다고, 자신의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고, 둘은 나지 막히 이야기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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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으로 그린 그림
바리스타가 되는 일
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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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과기능사, 제빵기능사 자격증을 받고 나서 이제 뭘 해볼까 생각하다가 자연스럽게 커피를 떠올리게 되었다. 학원 등록을 하고 <커피학개론>을 배운다. 예를 들어, 커피의 기원은 에티 오피아 고원지대인 카파지역에서 시작되었다는 역사나 커피의 전파 경로, 재배 지역, 품종, 가 공법, 스페셜티 기준, 향미 평가 등.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에스프레소 머신 추출법외 추출용 기에 분쇄된 커피가루를 넣고 물을 붓고 가열하여 커피 성분을 뽑아내는 방식으로 가장 오래 된 방법인 여과하지 않는 터키식 커피 추출법과 분쇄된 커피가루가 담긴 필터에 물을 통과시 켜 커피성분을 뽑아내는 방식인 페이퍼 필터드립, 융드립, 모카포트 등에 대해서도 배운다. 사 이폰을 이용한 추출법이나 더치커피로 불리는 찬물로 장시간 추출하는 콜드부르 추출법도 배 운다. 추출 기구에 따라 커피가루 입자의 크기가 달라져야 하므로 그라인더 사용법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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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기시험 합격 후 실기시험은 에스프레소 머신을 이용하여 치러진다. 정해진 시간(15분)안에 에스프레소와 카푸치노 각 2잔을 만들어 내고 감독관에게 전달하고 정리정돈하고 나오면 된 다. 기술적 평가와 감각적 평가에서 60점 이상을 받으면 된다. 시험 전, 마치 마임 연기를 하 듯 에스프레소 머신을 사용하는 방법을 여러 번 연습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바리스타2급 자격증을 손에 넣었다.
제과제빵과 커피를 모두 배워본 사람으로서 비교하자면, 제과제빵에서도 기계와 도구를 사 용하지만 사람의 기술이 더 중요한 반면 커피는 도구가 더 중요한 분야다. 제과제빵은 장기간 에 걸친 숙련시간이 필요한 반면 커피는 단기간에 습득이 가능하다. 제품도 제과제빵은 기본 에 충실하여 만드는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커피는 에소프레소와 카푸치노를 응용하여 만들어 진 것들이 훨씬 더 많다. 에소프레소 머신을 이용한 커피는 3~5가지 정도의 원두를 섞어서 내 려준다. 요즈음 커피 전문점은 사이드 메뉴로 스콘이나 쿠키를 같이 팔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제과점도 빵과 과자에 커피를 곁들이고 있다. 각자 만들어 팔지 말고 가까운 지역에 있는 매 장은 서로 협력하여 서로의 제품을 공급한다면 훨씬 더 효율적일 것 같다. 다음엔 어떤 일에 도전을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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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수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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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이란 그에게 사치였다
채수원
해골을 만나러 간다. 내년이면 이 녀석을 알게 된 지 52년째가 된다. 이 놈은 만원 버스에 허덕이는 우리와 달리 입학 첫 날부터 자가용을 타고 등교했다. 학용품도 일제만 썼다. 그래서 배가 아팠다. 그 는 재수를 하고 중학교에 입학해서 우리를 애 취급했다. 호의를 가지고 대하는 친구는 별로 없었다. 한 녀석이 큰 머리에 바싹 마른 얼굴을 한 그를 해골같이 스산하다고 말했다. 우리는 아니꼽게 보인 그에게 이 별명을 붙여주었다.
2학년에 올라가며 결석이 잦고, 공납금 미납자 명단에 자주 등장했다. 폭력 써클에 들어가 물주 노릇 을 하며 못된 짓을 하는 줄 알았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담임이 나를 교무실로 불렀다. 시험을 엉망으로 보았기에 교복 안에 체육복 바지 두 벌을 빌려 입고 몽둥이에 대비했다. 교무실 문을 열었다. 책상에 몽둥이가 없어 일단 안심은 했지 만 긴장을 늦추지는 않았다. 장기 결석을 하고 있는 해골을 잡아오라는 것이 담임이 나에게 준 임무였다. 그의 집이 고급 주택지인 장충동으로 알았는데, 담임이 준 주소는 성수동이었다. 그는 만화를 좋아하니 집에 없으면 뚝도 시장 주변의 만화가게도 훑어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첫날 물어물어 찾아간 그의 집에는 빨간 딱지가 붙어있었다. 집이 비어있어 포로 호송에 실패했다. 다 음 날에는 담임의 말대로 동네 만화가게 한 구석에 앉아있는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나를 보자 분노에 찬 눈빛으로 쏘아붙였다. “공납금을 못 내는데 어떻게 학교에 가니? 우리 집 부도나서 차압이 들어왔으니 더 이상 집도 없어! 찾아오지 마. 담임에게 나를 잘라 버리라고 해.”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가 가지는 않았다. 잠시 무슨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말을 이었다. “밀린 공납금은 안 떼어먹고, 돈 벌어 갚겠다고 전해줘.” 그는 횡하니 가버렸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멍하니 바라보는 것 이외에는 없었다. 다음번에 만 나던 날, ‘공납금은 담임이 해결할 테니 등교하라’는 말은 전했지만, 그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담임 의 부탁으로 동사무소에 들렀다가 도중에 가재도구를 챙겨 나오는 그의여동생을 만났다. 아버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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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실패로 장충동에서 성수동으로 이사했는데 그 집마저 경매로 넘어갔다고 했다. 가족들은 친척집 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어머니는 오랜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의 형은 그 해 S대 공대 에 입학하며 해골에게 공납금을 대줄 형편이 안 되었다. 하지만 그 형도 결국 2학기 등록은 포기한 채 다음해 입대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 일 년 후 우연히 길에서 그를 만났다. 전보다 볼은 더 파여 해골처럼 변해 못 알아보고 그냥 스칠 뻔했 다. 그도 못 본 척 피해가려는 것 같았지만, 전달해 줄 말이 있어 그를 가로 막았다. 담임이 그를 만나 보고 싶어 했고 타교로 전근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나를 포장마차로 밀어 넣었다. 떡볶이를 시켰다. “공납금까지 해결해 주신다던 담임에게 너무 미안해. 혹시 연락이 되면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 줘.” 그러면서 지난 일 년간 일어난 일들을 털어 놓았다. 어머님 장례를 치르고, 얼마 후 피해 다니던 아버 지마저 뇌졸중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거동이 힘들어졌다. 형은 휴학하고 과외 아르바이트를, 자기는 막노동으로 생활비를 벌었다. 그 후 형의 입대로 생계를 혼자 맡았다. 다행히 뚝섬의 통신장비부품 공 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보조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휴일이면 막노동으로 돈을 좀 더 벌 수 있어 좀 나아질 거라고도 했다.
아버지와 초교생인 남동생 둘은 자기와 함께 살고, 여동생 둘은 아직 친척집에 맡기고 있단다. 열심히 일해 돈을 좀 모으면 큰방 한 칸을 얻어 함께 살겠다는 의지가 굳어 보였다. 일 년 전 보았던 분노가 서린 반항아가 더 이상 아니었다. 부모 잘 만나 등록금 걱정 안 하면서도 항상 불평만 하는 내가 부끄러워졌다. 떡볶이 값을 치르려 하 자 학생이 무슨 돈이 있냐며 돈벌이하는 자기가 값을 내겠다는데 마음이 울컥해졌다. 고교에 입학하던 해 해골이 우리 집에 찾아왔다. 광주 대단지로 이사하며 흩어졌던 가족이 함께 살게 되었다고 활짝 웃었다. 두 번째 일요일에는 집에 있으니 자기 집으로 놀라오라고도 했다. 이제 일 년 만 더 버티면 형이 제대를 하고, 그러면 생활이 필 거라며 그의 야윈 얼굴은 많이 밝아져 있었다. 1971년 광주 대단지에 폭동이 일어났다. 판자촌 철거민들을 미사여구로 꾀어 지금 성남시인 변두리 로 몰아냈다. 정부에서 했던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땅 투기꾼들에게만 배를 불린 불만과, 생존을 위 한 폭동이었다. 혹시 욱하는 성격의 그가 여기에 말려들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의 이름은 없 었다.
그도 군대에 갔다. 생계는 형이 맡고 있어 걱정이 없다며, 자기는 군대 생활이 가장 편하다고 했다. 우 리는 군대를 3년을 썩으러 간다고 하는데 그에게는 가장 편한 시기였단다. 군대에서 고교 검정고시를 통과했고, 기사 2급 자격시험도 통과한 맷집이 강한 놈이다. 막노동에 굵은 잔뼈는 이제 무릎 물렁뼈 도 삼켰다. 그는 절뚝거리며 걷는다. 65세의 나이에 방송통신대학 졸업장을 나에게 불쑥 내밀었다. 그 의 앞에 서면 나는 왜소함을 느낀다. 그는 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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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쌀해지면 생각나는 달콤한 초콜릿
빈투바 싱글 오리진 초콜렛의 명가, 피초코 feat. 사장님과의 전화 인터뷰
시민기자단 홍효정
rinahong1@naver.com
한적한 서울숲길 한 모퉁이에 자리잡은 지 어언 6년차. 존과 댄 형제는 오토바이 수리소와 공구 수입판매상이 자리했던 건물 1층을 빌려 베네수엘라 의 El Rey 싱글오리진 커버춰 초콜렛을 수입해서 수제 초콜릿을 만드는 ‘공간-사무실’을 시작했다. 3년 만에 1층은 매장 겸 쇼룸으로, 지하 공간은 작업실로 확장하고 직접 프리미엄 농장에서 카 카오빈을 수입 및 가공하여 현재 대부분의 제품 라인업에 빈투바 초콜렛(Bean-To-Bar, 한 곳에 서 카카오 생두에서부터 초콜렛까지 제조과정을 소화한 결과물)을 내놓고 있다. 2019년 수요미 식회에서는 품질을 인정받았고, 언제나 성실한 태도로 인기제품 제조와 세미나, 신제품 개발에 쉴 새 없이 바쁘다. 초콜렛 메이커 댄님과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성수동에서의 일상을 엿보고자 한다. 66
- 안녕하세요~ 댄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 9월에는 가게에서 잠시 인터뷰 했었는데 11월은 더 많 이 바쁘신 거 같아요. 오후 1시인데 점심식사는 하셨어요? “인터뷰 끝나고 식사하려구요~ 날이 쌀쌀해지니 초콜릿을 찾으시는 분이 많아져서 바쁘게 지내고 있어요.”
마침 인터뷰한 날이 빼빼로데이였기에, 선물용으로 안성맞춤인 피초코 초콜렛이 더 많이 나가지 않았 을까. 나도 인터뷰 직전 토요일에 카카오닙스 초콜릿을 2개 사서 하나는 내가 먹고, 하나는 선물했다. 피초코는 다양한 맛의 초콜렛이 있고, 각 초콜렛의 포장과 쇼핑백 자체가 이미 고급스러워 따로 포장 할 필요가 없다. 바라 초콜렛은 4개, 트리오바라 초콜렛은 6개 구매 시 각 구성별 맞춤 케이스도 준비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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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수동에서 5년 넘게 지내고 계신데요, 이 곳의 좋은 점과 불편한 점은 어떤 부분이 있을까요? “좋은 점은 주위에 장인 정신으로 수공업을 하는 이웃들이 많은 거에요. 피초코 쇼룸의 가구들을 근 처 목공방에서 제작했구요, 까페 메뉴를 정하거나 궁금한 점이 있을 때 서로 공유하고 함께 해결할 수 있어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정기모임까지는 아니지만 친한 분들과 자주 연락하며 지내고 있어요. 처음엔 장점이라고 생각했다가 단점이 된 부분은 동네가 주거지역에 가까워서 다니는 사람이 적고 조 용하다는 거에요. 사무실을 낼 때만 해도 언제든지 산책할 수 있는 거리에 서울숲이 있고 한적한 거리 가 마음에 들었는데 2년 전에 쇼룸을 열고 나니 유동인구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죠. 다니는 사람이 너 무 없을 때는 매장을 유지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어요. 최근엔 이 거리에 음식점, 까페들이 많이 들어 서면서 사람들도 많이 오고 있어 다행이에요. 그리고 가끔 고객님이 차를 갖고 방문하실 때 도로가 좁 고 주차장이 따로 없어 주차에 대한 편의를 봐드리기가 어려운 점도 불편한 부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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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무시간이나 주5일제는 어떻게 운영하고 계세요? “아침 9시 출근하고 저녁 6시 정도에 퇴근해요. 직원들은 비시즌 때는 주5일, 요즘 같이 바쁜 시즌에 는 주6일 근무를 하고 있어요. 저랑 매니저는 주6일 근무구요. 일요일에 푹 쉬고 월요일에는 초콜렛 제조에만 하루종일 집중해요.”
쇼룸 오픈시간은 화요일~토요일 11~17시이고 시기에 따라 변동이 있을 수 있으니 인스타그램을 참 조하면 좋다. 쇼룸 방문하기 어려운 분들은 온라인으로 초콜렛을 만나보자. [인스타그램 @p.chokko, 모바일쇼핑몰: m.pchokko.co.kr]
- 서울숲에 자주 가시나요? 주로 어떻게 시간을 보내세요? “매장을 오픈하기 전에는 서울숲에 머리를 식힐 겸 산책하러 자주 갔었는데, 지금은 바빠서 자주는 못 가봤네요.”
베네수엘라 출신 교포인 형제는 도시 속의 녹지에 익숙하여 한국에서도 자연스럽게 공원 가까이에 사 무실을 구할 정도였다. 5분 거리의 공원에 자주 가보지 못한다는 그의 말 속에서 보통 한국인과 같은 바쁜 일상 속에 치이는 모습이 느껴져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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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N님이 성수동에서 추천하고 싶은 점심 메뉴는 뭔가요? “밀도 옆 골목에 있는 비사벌 전주콩나물국밥집을 강력 추천해요. 외국인 친구들이 올 때면 꼭 데 려가곤 하는데 다들 좋아하거든요. 길 건너편 다로베 피자리아도 단골이고, 옆집 매쉬커피(Mash Coffee)에서 후식으로 한 잔의 커피를 즐기는 걸 좋아하죠. 잠시라도 나갔다 오면 여유로운 점심시간 을 보낸 느낌이 들어서 아무리 바빠도 일주일에 하루, 매장을 닫고 초콜릿 제작에만 집중하는 월요일 만큼은 동네 산책 겸 주위 식당에 나가려고 노력합니다.”
주변에 맛집이 많지만 쇼룸을 비우기 어려워 주로 배달 도시락을 드신다는 얘기는 안타까웠다. 성수 동에서 일하는 DAN님의 일상을 살피며 잘나가는 수제공방도 여유로울 때는 불안하고 바쁘면 정신없 는 자영업의 애환이 있음을 여실히 느꼈다. 피초코를 서울숲길에서 오래오래 보고 싶기에, DAN님이 성수동을 즐기는 여유도 갖고 꾸준한 단골로 번창하시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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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동 이색 공간 ③
성수지앵 협동조합
서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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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동은 도시재생사업으로 유명하다. 2015년에 시작해서 2018년에 사업이 끝났다. ‘근 린재생 일반형 활성화지역’이다. 말이 어렵다. 아주 단순화 해보자. 사업명처럼 성수동은 재생이 되었을까. 사업이 끝나고 무슨 변화가 있을까. 여기에 대한 답이 있다. 성수지앵협동조합이다. 성수1가 2동 복합청사에 나란히 하는 건물이 있다. 붉은벽돌을 연상시키는 건물 외관이 다. 여기에 성수지앵이 운영하는 카페가 있다. 건물 바깥에 그렇게 표시해놨다. 오다가다 본적이 있었다. 전에는 이 자리에 경로당이 있었다. 경로당을 헐고 지금의 건물이 들어섰다. 하지만 안으 로 들어가 보진 않았다. 약간은 궁금했다. 11월 24일, 일이 있어 근처를 지나가던 참이었다. 들어가 볼까 싶었다. 건물 외관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때 중년 부인이 내게 물었다. 어떻게 왔느냐고. 나는 느낌이 왔다. 관계자 구나. 그분과 같이 카페 안으로 같이 들어갔다. 카페는 아담했다. 탁자에 마주 앉았다. 설명을 듣는데 카페 매니저가 싸인을 보냈다. 방역 2단계여서 앉으면 안 된다고. 마침 그날이 방역 2단계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설명은 그것 으로 끝났다. 어떤 건물인지만 알게 되었다. 그 건물은 성수도시재생 사업의 하나로 지은 건물이었다. 성수나눔공유센터던가. 앵커 시 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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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성수지앵협동조합은? 성수도시재생 사업을 할 때 주민협의체가 있었다. 도시새생사업이 끝난 뒤에는 협동조합 으로 바뀌었다. 이게 성수지앵협동조합이다. 이 조합에서 성수나눔공유센터 건물을 이용 하겠다고 공모에 지원했다. 공모에서 지정을 받아 경로당 5,6층을 제외하고 성수지앵이 쓰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자세한 설명을 듣지 못해서 자료를 찾아보았다. 성수지앵은 도시재생기업이다. 도시재생 기업은 서울시에서 지정한다. 도시재생기업은 다양한 지역자원을 결합 · 활용해 지역문제 를 해결하고 선순환 경제 생태계를 구축하는 지역 기반 기업이 되는 것이다. 기업의 형태 는 사회적협동조합, 마을기업 등 법인인데 성수지앵은 사회적협동조합이다. 서울시에서 3 년간 최대 2억8500만원을 지원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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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지앵은 2017년부터 나눔공유센터 앵커시설을 운영하기 위해 공간기획단을 조직하여 준비했다. 성수지앵은 앵커시설 성수나눔공유센터를 활용해서 마을카페 성수지앵, 공동육 아, 어린이 실내놀이터와 세대 돌봄 및 주민, 직장인, 공동체가 소통하는 커뮤니티 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2층으로 올라갔다. 업무 공간 외에는 모두 닫혀 있었다. 하필이면 방역 2단계여서 그랬다. 도시재생 사업의 최종 목적은 무엇인가. 주민의 자생력을 길러주는 것이다. 그러려면 주민 들이 운영하는 조직을 갖춰야 한다. 그 주민 조직이 사업을 해서 수익을 내야 한다. 그래야 자생이 가능하다. 이게 도시재생의 목적이라면 성수도시재생사업은 정해진 길을 가고 있다. 성수도시재생은 전국적으로 볼 때 모범사례에 든다고 알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겠지만 성수동 이색 공간으로서 성수나눔공유센터에 입주하고 있는 성수지앵은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성수지앵의 사업이 잘 돼서 성수동이 사람 살기 좋은 동네가 되었으면 좋겠다. 참, 설명해 주던 분이 물었다. “원동업 씨는 뭐해요. 얼굴 한 번 못 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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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과 봉사가 새겨진
성수동 아이들 그랑 1999년 밀레니엄 이브해의 아이들의 성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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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동업
영범이와 도윤이 그리고 보선이는 친구다. 성수동 친구들! 이 이름들은 너무 오래지도 않 고, 너무 앳되지도 않은 시대의 이름이다. 이 친구들은 1999년에 세상에 태어났다. 그 시대는 새천년의 밀레니엄을 맞이하는 시대였으므로, 설레고 또 동시에 알 듯 모를 듯 불안감이 감 돌던 시대이기도 했다. 한국에 불어닥친 1998년 외환위기의 시대 이후에도 그네들의 부모는 사랑과 희망을 담아 아이를 세상에 내보내 주었다. 그들은 이 시대를 어떻게 헤쳐 왔을까?
노영범: 이제 스물두 살이다. 친구들 중 군대를 1등으로 다녀왔다. 성수공고 전교회장이었다. 우리 학교에는 한국에 하나밖에 없는 에코바이크학과가 있다. 이들 친구들, 자동차학과 그리 고 선생님들과 함께 국토종주 자전거여행을 했다. 서울서 부산까지 4박5일 여행. 어땠냐고? 사타구니가 다 까졌다. 탈수도 왔다. 클릿슈즈를 신고 미친 듯이 언덕을 오르던 친구를 죽자 고 따라갔다. 다시 가자고 하면? 콜! 김도윤: 아빠가 정육점 식당을 했다. 친구들이 많이 몰려서 가곤 했다. 아빠가 어떤 때는 아이 들에게 돈을 받지 말라고 했다. 친구들은 내 계좌로 돈을 보내주곤 했다. 군대를 나도 다녀왔 다. 그 뒤 에어컨 설치 알바를 했다. 그 일을 하다 보니, 무거운 걸 많이 들게 되고, 그래서 근 육이 되게 세졌다. 집집을 많이 들어가 보게 됐는데, 집들마다 정말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강보선: 경일초 전교회장이었다. 성수중에서는 부회장을 했다. 우리 가족 중 어머니는 성수 여중을 나오셨다. 지금은 성원중으로 바뀐 곳이다. 나는 삼촌과 이모와 할머니까지 성수중을 나왔다. 재미있는 건 할아버지 이야기다. 할아버지는 한양대로 공부하러 시골서 올라오셨던 분이셨는데, 2014번을 타고 다니는 할머니(물론 그 당시는 여학생)를 보고 반해서 성수동까 지 버스를 같이 타고 들어갔다고 한다. 당시의 성수동은 온통 밭이었다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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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세 친구는 ‘그랑’이라는 이름의 자원봉사 동아리 회원들이다. 그랑이라는 이름이 정확 히 어떤 뜻인지는 이들 자신도 명확히 합의된 바는 없다. 회장을 맡고있는 보선이 해석을 해 줬다. “둥글게 둥글게 어울려 살아가자는 뜻”이라고 했다. 시작은 단순했다. 중학생이 되면서 ‘자원봉사’ 시간이 필요했고, 이왕 하는 김에 재미와 의미를 함께 찾고자 했다. 학교에서 시 키는 청소, 안내 같은 것만 하지 말자고 약속했다. 고교생이 되면서는 상급학교를 서로 흩어 져 가야했으므로 ‘연합동아리’ 형식을 갖게 되었다. 대학생 혹은 청년이 된 지금껏 모여 자원 봉사를 하고 있는 그랑의 ‘자원봉사’ 이야기를 들었다. “성동구청 봉사프로젝트 평가에서 1등을 했어요. 지원금을 받았는데, 이걸로 성수동에 대 한 가이드북을 만들어보자고 했었어요. 이게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데, 성수아카이브를 하는 거죠. 성수동쓰다에 올린 내용들이 그 결과물들이기도 하죠. 처음 시작 때는 ‘우동소(우리 동 네를 소개합니다)’ 프로젝트를 했어요. 당시 성수동의 변화가 컸어요. 친구네 집이 카페로 변 하기도 하고요. 해서 조사해서 기록으로 남기자고 했었죠. 디자인을 잘 모를 때니까, 그림판 으로 그림도 그리고, 소박하지만 의미있는 일이었어요. 청소년을 위한 가이드맵이었으니까!” “용답동에 있는 재활용선별장에 가서 함께 일한 적도 있어요. 재활용이 얼마나 중요한 일 인지 다시 느꼈죠. 음식물이 묻어있으면 무조건 폐기를 하거든요. 다시 여름이었는데, 되고 덥고 냄새나고 습했어요. 종일 했는데, 부모님은 멀리서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드렸죠. ‘해보셔야 합니다.’ 그날 먹었던 아이스크림이 제일 맛있는 아이스크림이었어요.” “성수1가1동 주민자치센터에서는 음식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이 있어요. 거기서 추석 무렵에 송편 만들기를 했어요. 노인정 세 군데를 돌면서 안마를 해드리기도 하고, 함께 윷놀이도 해 드렸어요. 송편도 물론 드리고. 우리들의 재롱잔치를 정말 재미나게 봐 주셔서 감사했어요. 플리마켓 근처에서 캠페인에 참여하기도 하구요.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분들까지 찾아서 혜 택을 누리게 하자는 내용이었어요.” 이들은 현재 공부를 하고, 쉴 때면 아르바이트를 진행한다. 바쁜 청춘들인데, 연애도 열심 이고 자원봉사도 꾸준히 하려한다. 봉사는 특히 자신들이 전공하고 있는 부분과 연결이 되었 으면 한다. 코로나19의 시대가 지속되면서 비대면 자원봉사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를 지속적 으로 생각하고도 있다. 그래서 이들의 이후 모습은 약간씩 다를 것이다. 그런데 공통의 기억 도 있다. 서울숲! 1가1동서 살다 성수중을 다녔던 이들은 서울숲을 관통해 학교를 다녔다. 봄 에 꽃들과 여름의 소나기와 가을의 낙엽들이 깔린 길을 오갔다. 그 기억이 이들의 몸에 깊숙 이 각인돼 남아있다. 이들은 성수동의 아이들, 서울숲의 아이들이었다. “지역주민으로서, 성수동에서 잘 가는 최애 장소가 있다면? 하고 물었다. (‘우리만 알아야 하는데…!’ 하면서 일러준 이름은) 대장포차! 아, 이들은 어느새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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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으로 들여다보는 서울의 마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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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가 보여주는 서울의 동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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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정 기
마 을 잡 지
성 수 동 쓰 다
vol.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