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잡지 <성수동쓰다> (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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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골목」

펴낸곳.  (사)서울문화네트워크 발행일.  2020년 11월 9일 기획.  소소한마을공동체 디렉터.  박성진 아트디렉터.  방정인 기록가.  이순주, 유성호, 차도연, 홍정화 디자인.  홍지선 사진.  김영문 인쇄제작.  퍼스트경일

[비매품]

ⓒ서울문화네트워크 이 책에 대한 내용 및 구성에 대한 저작권은 (사)서울문화네트워크에 있음으로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이 책은 2020년 마을미디어활성화사업으로 지원받아 제작하였습니다.


Vol.3 2020

ROAD

Ric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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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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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장수회관, 오래도록 하고 싶은 장수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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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터국수, 쌀은 엄마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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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어묵, 빨간 떡볶이 맛의 비밀

32

신락원, 쌀은 삶, 다른 의미 부여가 불필요

38

신흥방아간, 오래된 방앗간의 깊은 추억

44

한입김밥&amp;컵밥, “쌀은 에너지, 힘, 그리고 정(情)”

52

Recipe 다섯가지 맛 쌀떡볶이

58

Survey 쌀에 관한 흥미로운 질문들

REGION

62

History 동대문 밖 선농단 선농제와 적전친경

68

쌀 아닌 사도를 가둔 뒤주, 세자를 품은 동교 배봉산

76

Report 새해를 맞이하는 동대문구 해맞이 떡국나눔 행사

CITY

82

Report 궁궐 쌀농사는 ‘권농과 애민농본’ 정신 상징

88

‘서울의 술’ 삼해주 명맥을 잇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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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동네, 정미소 황의충 대표 인터뷰

100

Contrib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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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t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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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AD 서울시 동대문구 전농동 골목길 상인 6명의 인터뷰를 통해 ‘쌀’이라는 주제에 얽힌 그들만의 경험이나 추억, 레시피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첫 번째 챕터 ‘전농동’에서는 마을 주민들과 전농동 골목길에 담긴 이야기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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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 Sur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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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Inter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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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AD 전농동  Jeonnong-d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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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계속 하고 싶은 장수회관

회관 장수 장 환 사 한경

“밥장사는 양심으로 하는 거라고, 왜냐하면 쌀은 우리 영혼의 보석이니까, 돈만 생각하지 말고 고귀한 마음으로 장사하라고, 킬리만자로의 눈이 녹기 전에, 무릎이 허락하면 다음 목표를 이루고 싶다”

1952년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난 청년은 24세가 되던 1976년에 중매로 만난 서울 아가씨와 결혼을 했다. 서울 전농동에 살던 아가씨가 강원도까지 시집을 온 데에는 청년의 준수한 외모가 결정적이지 않았을까? 그런 상상을 할 만큼 청년은 준수한 미모를 지녔다. 게다가 청년은 안정적인 직장까지 있었다.(대림건설, 지금의 대림산업에 다녔다)

잘생긴 미남 신랑은 성실했으며 아내만 사랑하는 로맨스 가이였다. 딸하나, 아들 하나를 단란하게 두고 살던 결혼 5년째 되던 해, 부부는 처가가 있는 서울 전농동으로 올라왔다. 젊은 가장은 뜻한 바 있어 해외 근무를 자원했다. 그렇게 말레이시아 현지로 떠난 남편은 아내와 어린 자식들이 처가에서 잘 지내길 바라며 생이별을 견뎌냈다. 3년이 조금 안되어 그는 목표한 만큼의 목돈을 벌고서야 귀국했다. 대학 대신 취직을 해야했던 회한을 마음에 새기며 젊은 장수회관 서울 동대문구 전농로16길 16

02-2243-5678

가장은 경제적인 성공을 이루겠다는 확실한 목표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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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장수회관의 메인메뉴인 돌솥밥.

무엇을 할 것인가?

아내는 어린 새댁답지 않은 능숙한 손맛을 자랑했다. 담근 장맛도 일품이었다. 처가가 한동네에 있었으니 아이들을 키우며 믿고 의지할 곳도 예비되어 있었다. 서른을 갓 넘긴 젊은 부부는 1983년, 전농1동에서 ‘청실’ 이라는 이름의 식당을 열었다. 그렇게 그는 음식점 ‘사장’이 되었다. 음식솜씨가 좋은 것과 음식 장사를 하는 일은 별개의 일이었다. 부부는 곧 전문 주방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첫 주방장은 부부와 비슷한 또래였다. 사장은 고된 일이 끝나는 밤마다 주방장과 술을 주고 받았다. 친분을 쌓으며 사장은 주방장에게 레시피를 물었다. 믿음과 정이 쌓이자 주방장은 소중한 자신의 레시피를 기꺼이 공유했다. 5년 정도 그가 한 가족처럼 일하고 떠났다. 두번째 주방장으로 온 사람은 첫번째 주방장과 막역한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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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AD 전농동  Jeonnong-dong

돌솥밥 뚜껑을 열면 단호박, 새송이버섯, 여러가지 콩들이 밥 위에 놓여있다.

부부는 이렇게 두 주방장들의 레시피를 전수 받고 많은 주방의 기초들을 익혔다. 주변에 학교가

많았으므로 점심에는 배달주문이 폭주했다. (전농

2동에는 지금도 초중고 7개학교와 시립대까지

오래전부터 학교가 많은 지역이다.) 점심 배달로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식당 안에는 각종 계모임이 성행했다. 그 시대의 진풍경이었다. 계모임에 온 부인들은 메뉴에 없는 요리들도 부탁했다. 육개장, 갈비탕은 기본이었고 단골들이 요구하는 메뉴와 반찬들이 메뉴판에 더해졌다. 저녁이면 식당은 각종 회식들로 만석을 이루었다. 주로 학교 교직원과 교사, 교수들의 모임이었다. 10년의 세월이 미친듯이 흘렀다. 단내나는 노동의 시간이었다. 당시에 식당을 찾던 교사들과 계모임의 부인들은 학교가 없어지고 계모임이 사라진 지금도 찾아오는 단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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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10년만에 부부는 전농2동 골목 한 가운데에 있는 작은 건물 하나를 살 수 있었다. 사들인 건물을 수리하고 ‘장수회관’ 이라는 새 간판을 달았다. 장사를 오래하고 싶다는 소망에서 붙인 이름이었다.

1994년의 일이다. 주방은 2층에 설치했다. 소란한 주방의 풍경이 손님들 식사에 방해가 될까해서다. 그때부터 돌솥밥을 메인으로 하는 지금의 메뉴로 간소화했다. 간소화 했다고는 하지만 기본 반찬들에 들어가는 품들을 생각하면 한식당을 경영하는 일은 여전히 고된 노역이다. 오늘날까지 큰 변화없이 지내다가 작년 2019년에 좌식에서 입식으로 전면적인 변화를 꾀했다. 함께 나이들어 가는 오랜 단골들이 바닥에 앉는게 어렵다고 하소연을 한 까닭이다. 1983년 ‘청실’에서 지금의 ‘장수회관’에 이르기까지 동행한 단골들이니 40년에서 몇 해 빠지는 인연들이다. 그 정도 의견은 당연히 들어 주어야 한다.

한경환 사장의 집 마당에 있는 장독대들, 집에서 직접 담그는 장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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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AD

오래도록 계속 하고 싶은 장수회관

전농동  Jeonnong-dong

사장님이 처음 장사를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 지키는 원칙이 하나 있다. 모든 재료를 국내산으로 고집하고 최고품질로 고르는 것이 그것이다. 쌀부터 소고기, 돼지고기, 나물 하나, 모든 양념재료까지 단 한번도 이 원칙을 어겨본 일이 없다. 이것이 장수회관의 자존심이다. 재료를 속이지 않고 좋은 것을 쓰는 일만이 손님의 신뢰를 얻는 유일한 열쇠다. 신뢰는 이 직업의 가장 신성한 윤리라고 사장님은 말했다. 맛있다고 싹싹 비운 밥그릇을 보는 즐거움에 고된 일을 잊는다. 젊은 날, 건설회사의 측량일을 했던 전력이 말하듯 그는 천성적으로 무엇이든 정리되지 않은 것들을 싫어한다.초창기부터 그는 한결같은 맛을 보장할 레시피의 계량화를 실행했다. 지금은 장성한 아들 딸이 함께 일하는 말그대로 가족경영의 사업이 되었다. 가업을 천직처럼 일하는 자식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든든하다. 저녁엔 아들에게

장수회관의 영양돌솥밥 정식 상차림.

마감을 맡기고 9시면 귀가한다. 늦은밤까지 글씨를 쓰거나 기타 익히는 일에 집중한다. 무엇에든 전념할 일이 필요하다. 슬픔 속에 남은 생의 시간을 잠식당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왜냐하면 인생은 때로 지독하기 때문이다. 영원을 약속했으니 그러하리라 믿었다. 어리석어서가 아니다. 실제로 그에게 그녀는 영원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수십년을 자기 살같이 살았다. 그 연이 말 그대로 끊어졌을 때, 갑자기 시간은 너무 잔인하고 지독한 것이 되었다. 삶의 전부를 나눈 동지, 새벽마다 함께 체력을 다지려 오르던 배봉산의 산행이 유일한 여가시간이었던, 모든 걸 같이했던 삶의 전 역사가 갑자기 뚝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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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2014년, 예기치 않은 폐암으로 아내를 보냈다. 남편은 삶이 정지된 채 넋이 나간 세월을 허위허위 보내야했다. 그렇게 한 3년이 흘렀을 때, 그는 뭔가 집중할 수 있는 게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때 캘리그라피와 통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광화문 연가’를 연주하며 초로의 낭만주의자는 헤아릴 수 없는 그리움을 기타줄로 튕겨본다.

2012년이었다. 1년이나 준비해서 올라간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해발 5500미터의 목표를 달성했던 감격의 그 순간.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고 가장 뜨거운 감동의 순간이었다고 말하는 그는 붉어지는 눈시울에서 스며나오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그해, 감격에 취해 돌아온 서울, 벅찬 가슴을 모두 쏟아 백번도 더 넘게 한말을 또 하고 또 할 수 있었는데... 그래도 질리지 않고 들어줄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말들을 모두 목구멍으로 삼켜야 했다.폐암이라니... 아내가 아픈 줄도 모르고 떠났던 여행. 그 감격의 시간이 공유되지 못한 채 체기처럼 가슴에 걸려있다. 평생을 그럴 것 같다. 자학하는 마음으로 러시아의 5000미터 산행을, 이어 말레이시아의 험준한 산 키나발루 정상도 오르고 내렸다. 그러나 어떤 고행도 아내를 그리는 깊은 절망에서 그를 건져주지 못했다. “밥장사는 양심으로 하는 거라고, 왜냐하면 쌀은 우리 영혼의 보석이니까, 돈만 생각하지 말고 고귀한 마음으로 장사하라고, 킬리만자로의 눈이 녹기 전에, 무릎이 허락하면 다음 목표를 이루고 싶다” 고 그가 말했다.

2020년 8월 기록 차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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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계속 하고 싶은 장수회관

전농동  Jeonnong-dong

집 마당 장독대 앞에서 한경환 사장과 그의 집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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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라 마 엄 쌀은 생각해요 샛터국 수

박상길 사장

“쌀은 엄마라고 생각해요. 엄마가 젖을 줘야 자식들이 크잖아요. 그것처럼 엄마가 쌀로 해주는 밥을 먹고 애들이 자라니까요.”

배봉꿈마루 청소년독서실 맞은편으로 골목을 조금만 올라가면 ‘맛과 행복을 만드는 마을, 샛터국수’라는 자그마한 식당이 있다. 외관이 화려하지 않고, 내부 또한 우리네 동네에서 마주칠 수 있는 정겨움이 곳곳에 묻어난다. 국숫집이라는 간판과는 달리 이곳의 주 메뉴는 찌개와 백반, 갈치조림 그리고 계절 메뉴는 국수와 떡만둣국이다. 여기에 오면 11년째 이 자리를 지키며 식당을 운영해 온 박상길 사장과 솜씨 좋은 그녀의 음식을 만날 수 있다. 유래 없는 긴 장마로 세찬 소나기가 내리고 그치기를 반복하는 8월 초,

샛터국수 서울 동대문구 사가정로13길 7

02-2217-8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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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봤다.


ROAD

전농동  Jeonnong-d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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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식당에서 가장 잘나가는 메뉴는 순두부찌개, 갈치조림, 김치찌개다.

본인 소개와 가게 소개를 한다면.

본인 소개, 가게 소개랄 게 뭐 있어요?(웃음)

이름은 박상길이고 올해 환갑이 됐어요. 고향은 충청남도 예산이에요. 이곳에서 식당을 한지 올해로

11년이 되었고요. 돌아다니지 않고 여기서만 했고, 집도 근처예요. 결혼해서 서울로 올라온 지가 거의

40년이 되어가요. 장안동, 면목동에서도 식당을 했었고, 동대문구청 옆에서도 하다가 여기로 왔죠. 우리 집은 밥이 주 메뉴고 면은 여름에만 해요. 백반이 주 메뉴인데 왜 가게 이름을 국숫집으로 지었는지.

이곳에서 식당을 처음 할 때는 국수와 김밥만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유동인구가 많지 샛터국수의 갈치조림.

않아서 백반으로 주 메뉴 변경을 했지만 상호는 그대로 뒀어요. 원래 이 자리에는 네일아트가 있었고요. 샛터국수 이름은 새로운 보금자리라는 뜻인데 구청직원이 지어줬습니다. 계속 식당을 하신 거 보면 음식 솜씨가 있으신가 보다.

음식 솜씨가 있어서는 아니고, 먹고살려고 한 거죠. 열심히 살려고, 그냥 노력을 하는 거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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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은 엄마라고 생각해요

전농동  Jeonnong-dong

이 골목에서 11년이면 이 곳의 변화를 실감하시겠다.

많이 변했죠. 11년 전과는 많이 변했어요. 지금 배봉꿈마루 청소년독서실 자리에 원래는 동사무소가 있었어요. 그때는 다가구, 일반주택들이 다닥다닥 많이 있었거든요. 장사는 그때가 더 잘되었죠. 그때는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지금 아파트가 들어서고 차는 많이 다니는데 사람들은 줄었어요. 사람하고 차하고 바뀌었어요. 또 젊은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니까요. 큰 마트도 밖에 많이 있고요. 샛터국수만의 추천 메뉴나 자신이 있는 메뉴가 있다면.

우리 집은 순두부찌개, 갈치조림, 김치찌개가 많이 나가요. 이건 사계절 늘 있는 메뉴예요. 그리고 거의 단골손님이 오시거든요. 오늘 아침에도 동네 아주머니 대여섯 명이 와서 맛있다고 먹고 갔어요. 항상 오시는 손님들이 주로 오시고 다들 맛있다고 해요. 우리는 술은 팔지 않아요.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비법이 따로 있는지.

(잠시 생각하다가) 그런 건 별로 없는데요? 그냥 나 먹는 대로, 집에서 하듯이 그렇게 만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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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이번 골목 매거진 주제가 쌀이다. 이곳은 밥을 주로 파는 곳, 쌀에 대한 생각이 궁금하다.

쌀? 쌀이 뭐가 있을까요… 쌀은 엄마다? 나는 쌀은 엄마라고 생각해요. 엄마가 젖을 줘야 자식들이 크잖아요. 그것처럼 엄마가 쌀로 해주는 밥을 먹고 애들이 자라니까요. 나는 손님들한테도 쌀로 밥을 해서 팔고요. 지금은 밥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지만 우리 어릴 때는 밥 아니면 먹을 게 뭐 있었어요? 밥 밖에 없었죠. 배고프면 우선 밥부터 생각이 나니까요. 그리고 우리 어려서 시골에서는 쌀이 없어서 보리밥, 밀가루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먹을 것이 많지도 않았고요. 어릴 때는 쌀밥이 제일 좋았죠. 흰쌀밥. 지금은 쌀밥에 대한 개념들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밥을 좋아서 먹는 사람도 있겠지만 한 끼 &#39;맛과 행복을 만드는 마을, 샛터국수&#39; 점포 앞에서 박상길 사장과 주변 풍경.

때우려고 먹는 사람도 많고요. 11년을 함께한 이 골목의 의미.

골목이요? 이 골목은 사는 곳, 내 삶의 터전이죠. 생활의 터전이죠. 올해 이루고 싶은 소망이나 바람.

속된 말로 로또나 하나 되면 좋겠어요.(웃음)

코로나19로 손님이 1/5 수준으로 줄었어요. 장사가 잘되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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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식사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에 인터뷰를 진행하였으나 중간중간 식사 손님들이 오간다.

전농동  Jeonnong-dong

식사를 마치고 나간 손님이 되돌아와 박 사장에게 음료수를 건네주고 간다. 이 손님은 6~7 년 전 손님인데 오늘 밥을 먹으러 왔다며 때때로 단골손님들이 음료수며 맥주도 주고 간다고 알려준다. 올해 환갑이 되었다는 박상길 사장은 손님들의 식사를 준비하며 인터뷰 질문에 기억을 더듬으며, 때로는 과거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해준다. 식당 한편에 앉아있는 동안, 노력으로 오늘을 살아내는 우리 시대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기억에 남는 손님을 물으니 맛있게 밥을 먹고 가는 손님들도 많았지만, 개인사적으로 힘들었던 손님이 밥을 먹으러 왔을 때 이야기를 함께 나눈 적이 있었다며 말을 아낀다. 집에서 식구들에게 해주는 마음으로 만든 반찬, 그 반찬으로 구성된 ‘맛과 행복을 만드는 마을, 샛터국수’ 모든 메뉴 가격은 6천원이다.

2020년 8월 기록 홍정화

&#39;맛과 행복을 만드는 마을, 샛터국수&#39; 모든 메뉴 가격은 6천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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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AD 전농동  Jeonnong-d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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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떡볶이 맛의 비밀

어묵 부산 장 순 사 박상

박 사장에게 있어 어묵이 중요한 것은 그가

빨간오뎅이라는 상호는 한번 들으면 잊어버릴 수

애정을 기울이는 떡볶이 맛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없는 인상적인 이름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빨간

그는 날마다 부산에서 공수하는 어묵에 무, 황태머리 등 여러 가지 양념을 넣어 푹 끓여낸

오뎅이 부산어묵으로 바뀌었다. 사람은 바뀌지 않고 간판만 바꾸어 단 것이다. 동대문구 사가정로

국물을 떡볶이 육수로 쓴다. 그래야 떡볶이가

13길에 자리 잡은지 11년, 11년의 세월은 한 가지 일을

맛이 부드럽고 깊어지기 때문이다.

하면서 지내오기에는 만만치 않은 세월이다. 그렇게 같은 자리에서 빨간오뎅이라는 간판과 함께 나이 들어가다 최근에 부산어묵으로 바꾼 사연이 궁금했다. 전에 왔을 때 언뜻 체인점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것과 관련이 있나 생각했는데 사실 상호명을 바꾼 이유는 그것 말고도 고집스레 지켜가는 음식에 대한 소신과도 관련이 있었다. 단출한 가게의 메뉴지만 자신의 가치가 들어간 음식의 맛을 이어가기 위해 재료를 고르는 과정에서 필요한 선택이었다고. 바뀐 상호 때문인지 이미 약속된 점심을 먹고

부산어묵 서울 동대문구 사가정로 13길 7

간 뒤였음에도 앞에 있는 어묵에서 구수한 냄새가 올라와 침샘을 자극했다. 박상순 사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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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어묵사용에 유난스런 고집을 가지고 있었다. 좋은 어묵의 맛을 내는 것이 바로 박 사장 자신의 생각하는 맛을 내는 철학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날마다 쉽지 않은 어묵 유통을 부산에서 가져오면서까지 과감하게 사용해 온 이유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묵이 맛있다고 하면서도 부산에서 직접 공수해 온다고 하면 그것을 믿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자신의 음식철학이 믿음을 받지 못하는 것 같아 속상했는데 그 때문에 어묵 중에서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재료명이 들어간 부산어묵으로 바꾸는 것에 아쉬움은 없었다고 한다.

금방 빼온 가래떡을 반으로 잘라 나란히 놓고 깻잎과 콩나물을 얹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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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듣고 있다. 부산 어묵에서 쌀로 만든 음식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면?

그는 두말하지 않고 빨갛게 버무려진 떡볶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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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에 있는 가게마다 쌀로 만든 음식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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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떡볶이 맛의 비밀

가리켰다. 순쌀로 만들어진 떡볶이는 언젠가 먹어본 적이 있었는데 두 개만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로 크고 굵어서 보이는 것부터가 여타 떡볶이 집과는 달랐다. 떡볶이는 가래떡을 길게 뽑아서 쓰는데 거기에 자신이 생각하고 만든 갖가지 고추장 양념과 어묵국물을 낸 육수로 만든다. 금방 빼온 가래떡을 반으로 잘라 붉은 고추장 양념을 해서 나란히 놓아둔 모양으로 버무려지면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고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먹기 좋게 잘라서 나오기 때문에 잘 몰랐는데 먹기 전의 비주얼이 훨씬 더 먹음직스럽다. 박 사장에게 있어 어묵이 중요한 것은 그가 애정을 기울이는 떡볶이 맛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그는 날마다 부산에서 공수하는 어묵에 무, 황태머리 등 여러 가지 양념을 넣어 푹 끓여낸 국물을 떡볶이 육수로 쓴다. 그래야 떡볶이가 맛이 부드럽고 깊어지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어묵 얘기를 꺼내고 어묵 재료를 이야기 한 것은 떡볶이 맛의 비밀을 어묵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 체인점은 맛이 다 같아야 정상 아닌가? 여기는 좀 다른 것 같다.

사실 이곳이 체인점이라 같은 상호를 가진 곳은 어디에서나 똑같은 맛을 내는 것이 정답이다. 하지만 떡볶이가 조금 더 특별하도록 맛을 빛내주는 조연을 첨가한다. 자극적이지 않도록 설탕이나 다른 당은 쓰지 않고 양파를 갈아서 쓰거나 하는 방법으로 자연 단맛을 쓰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표준화된 자극적인 단맛이 아니라 건강한 단맛을 추구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씩 자신의 양념을 만들어 쓰고 있다. 사람들도 자신의 떡볶이를 먹으면서 예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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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맛, 처음 떡볶이를 먹었을 때의 맛, 혹은 시골에서 엄마가 만들어주던 그런 구수한 맛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고 한다. 그렇게 그의 떡볶이의 맛은 지속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가끔씩 손님이 들르면서 인터뷰가 중단되곤 했는데 손님이 순대를 주문하기 전까지 순대도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만큼 잡내가 나지 않았다는 뜻 일것이다. 순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또 한 없이 자랑거리가 나올 것 같아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지금 떡볶이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떡볶이가 쌀 떡볶이라는 것과 다른 집들과 다르게 건강한 맛을 추구한다는 것도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쌀이란?

쌀이란 꼭 먹어야 되는 것이다. 지금처럼 그가 가진 신념으로 만든 떡볶이, 순대, 가게에서 떡볶이와 순대를 접시에 담아내고 있는 박상순 사장의 모습.

어묵이 11년간 골목에서 그를 생활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최근에는 엽기 떡볶이부터 시작해서 누군가를 동원해서 맛을 강요하는 떡볶이 집들이 많다. 그렇지만 체인점이면서도 박 사장처럼 자신만의 것을 녹여내는 양념이 있어 문득 생각나게 하는 맛을 갖출 수 있는 곳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2020년 8월 기록 이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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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농동  Jeonnong-d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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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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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은 삶, 요 필 불 가 여 부 미 의 다른 신락원 왕기명 오너셰 프

왕 셰프는 한 치 망설임 없이 “쌀은 삶이다”라고 답했다. 왜 그런 생각을 가졌는지 묻는 우문에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란 현답을 내 놨다. 삶은 생(生), 목숨, 생명이란 단어와 연결되어 있다 보니 그의 간결한 답이 금세 와 닿았다.

동대문구 전농동에 위치한 서울시동부교육지원청에 접해 있는 중식당 ‘신락원’. 이곳은 흔히

화상(華商)이라 불리는 화교가 운영하는 중화요리 전문점이다. 신락원이 다른 화상과 대별되는 것은 한 집안 3대가 전통과 맛을 잇는 집이란 것이다. 지금은 3대인 왕기명 오너셰프가 5년 전부터 주방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1대는 왕 셰프의 작은 할아버지가 1965년 현 자리에서 식당을 시작했다. 위치가 전농로라는 왕복 4차선 제법 큰길가지만 당시만 해도 주변이 대부분 논밭이었던 곳이다. 다만 서울시립대가 인근에 있어서 교직원과 학생들 수요가 있어서 운영에 어려움은 없었다. 1918년 문을 연 서울시립대의 최초 교명은 경성공립농업학교다. 신락원이 문을 열 당시는

서울농업대(56년), 74년에 농업계열을 없애고 도시 관련 학과로 개편하면서 서울산업대로 변경했다가 신락원 서울 동대문구 전농로20길 2

02-2244-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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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년에 비로소 서울시립대란 이름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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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왕기명 오너셰프와 장경지 직원, 신락원의 메뉴판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신락원의 2대는 왕 셰프의 아버지가 숙부로부터 가업을 이었다. 부친이 몸이 불편해지고 왕 셰프가 호텔에 취업했을 동안에는 잠시 세를 주기도 했지만

40여년 이상 왕 씨 집안에서 꾸준하게 일궈낸 역사성을 가진 곳이다. 왕 셰프는 슬하에 두 아들이 있는데 이들 중 누구에게든 가업이 이어지면 우리나라 중식 역사에서 흔치 않은 4대 대물림 식당이 된다. 지난 8월 10일 기나긴 장마 중에 비가 잠시 멈칫한 날 신락원을 찾았다. 점심 장사를 마치고 브레이크 타임인 때라 마침 왕 셰프가 홀에서 맥북으로 뭔가를 보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는 쉴 때면 중국 드라마를 즐겨 본다고 했다. 지난해 처음 신락원을 알게 된 후부터 십여 차례 이상 찾았지만 왕 셰프와 따로 인사를 나누진 않았다. 그러다가 이번 골목 매거진 주제가 ‘쌀’인데다가 인근 대부분의 외식업소와 방앗간을 다루기로 했기 때문에 비록 밀가루가 주재료인 중식당이지만 인터뷰를 진행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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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지난해 큰 아들과 마을매거진 작업을 같이 한 인연과 한성화교학교 동기, 선배들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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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반갑고 흔쾌히 맞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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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은 삶, 다른 의미 부여가 불필요

한편 이번 매거진의 주제인 쌀을 두고 인터뷰이에게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모두에게 공통질문을 통해 서문을 열기로 했다. 그것은 바로 쌀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 ‘쌀은 ◯◯◯이다’로 답해 달라고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왕 셰프는 한 치 망설임 없이 “쌀은 삶이다”라고 답했다. 왜 그런 생각을 가졌는지 묻는 우문에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란 현답을 내 놨다. 삶은

생(生), 목숨, 생명이란 단어와 연결돼 있다 보니 그의 간결한 답이 금세 와 닿았다.

우리나라 화교 역사를 돌이켜보면 쌀은 그들에게 고마운 존재다. 그들이 이 땅에서 살 수 있었던 이유가 다름 아닌 쌀에 있었다. 동남아 거의 모든 지역과 세계 곳곳에서 화교들이 상권을 쥐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만은 예외다. 개항 초기에는 상권을 쥐락펴락했지만 청일전쟁 패배, 일본의 조선 강제합병, 한국전쟁, 대만과 국교단절 등의 역사를 거치면서 정체성 혼란과 극도의 차별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한국 화교의 시초는 1882년(고종19년)

임오군란 때 한국에 파견된 광둥성 수사제독 우창칭(吳長慶) 휘하 군대를 따라 들어온

40여명의 군역 상인이다. 이들은 ‘사농공상’으로 상업을 천시했던 조선의 상권을 손쉽게 파고들어 짧은 시간에 거대 화교 자본으로 성장했다. 우리나라 화교의 90%가 대만이 아닌 중국 산둥성 출신이다. 처음 들어온 상인들은 남방지역이었지만, 이후로는 1894년 청일전쟁과 1899년 의화단의 난, 국공내전 등 중국내 정변을 피해 산둥성 사람들이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피난지인 한국, 그것도 인천 쪽으로 대거 유입됐다. 왕 세프 집안도 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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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출신으로 국공내전 때 공산당을 피해 인천으로 통해 들어왔다.

1970년대 우리나라 인구가 3,000만 명일 때 화교 수가 3만 명에 이를 정도로 많았다. 화교상권이 커지자 정부는 동남아처럼 시장경제가 잠식당할까봐 각종 차별과 규제정책을 펼치면서 이들의 돈줄을 옥좼다. 정부는 외국인의 외국환

사용금지, 창고 봉쇄령(1950), 외국인토지법(1961), 외국인토지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률(1970) 등을 차례로 시행하면서 화교들의 경제활동을 위축시키고 숨겨 놨던 재산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이때 상당수 화교가 본국으로 떠났고 남은 이들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조그만 중국음식점이라도 열어야 했다. 그들이 그나마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음식 장사뿐이었다. 때마침 박정희 정부의 혼분식장려운동과 맞물려 중국집이 의외로 호황을 누리면서 화상들이 부활했다. 이 시기는 왕 셰프의 작은 할아버지가 신락원을 열 때와 정확이 맞물린다. 혼분식장려운동은 쌀 생산량이 소비량을 따라가지 못하자 고육지책으로 만든 절미(節米)운동이다. 이 운동 때문에 국내 화교들이 살 수 있었으니 ‘쌀은 곧 삶’이란 왕 셰프의 말이 기막히게 맞아 떨어지는 셈이다. 신락원의 볶음밥과 고추잡채밥, 메뉴와 어울리는 계란국을 함께 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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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은 삶, 다른 의미 부여가 불필요

전농동  Jeonnong-dong

한국 중화요리는 20세기 초 산둥성 요리의 원형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산둥 요리는 1920년 대 전성기를 이뤘다. 이 때 자리를 잡은 산둥 요리가 화교들에 의해 국내로 유입된 후 중국 본토와의 정치·문화적 단절로 인해 큰 변화 없이 머물러 있는 것이다. 청나라 말기에 유행했던 식재료인 해삼, 죽순, 청경채 등이 지금도 중화요리에 많이 쓰이고 있다. 우리가 중국요리를 ‘청요리’라고 부르는

주방에서 요리하고 있는 왕기명 오너셰프의 모습과 완성 된 고추잡채밥.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신락원에서 쌀을 이용한 요리는 덮밥과 볶음밥 류다. 그 외는 밀가루와 채소, 닭고기, 돼지고기, 소고기가 주재료로 쓰인다. 왕 셰프가 가장 자신 있는 요리는 불도장, 만두와 같은 찜 종류다. 5성급호텔에서 갈고 닦은 솜씨다. 그는 어려서부터 어깨너머로 보고 요리를 배웠다. 12살에 일찍이 주방 보조를 하면서 중식을 익혔고 화교 가문의 숙명인 가업을 자연스레 이었다. 프라자호텔, 조선호텔 호경전, 아워홈 싱카이, 세종호텔 황궁 등에서 자타공인 최고의 중식을 배우고 선보였다. 고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재임 기간 일주일에 한번은 청와대에 들어가 만찬을 준비했다. 특히 김 대통령이 중식을 좋아했기 때문에 다른 때보다 많이 출입했을 것으로 보인다. 화교 중식 고수들이 분류한 중화요리 4대 문파로 호화대반점파, 팔선파, 아서원파, 홍보석파 등이 있다. 왕 셰프는 목란의 이연복 셰프와 함께 호화대반점파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신락원은 왕 셰프의 제2의 요리인생이 있는 곳이다. 서울시립대 학생들이 손꼽는 맛집으로 유니짜장과 자체 개발한 신락면, 탕수육이 인기다. 후식으로 나오는 직접 만든 푸딩이 은근히 매력적이다.

2020년 8월 기록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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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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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간 앗 방 된 래 오 억 추 은 깊 신흥방아간 유휘상 사장

“우리가 문을 닫으면 분명히 서운해 할 사람들이

손잡이를 돌리면 고춧가루 빻는 기계가 ‘탈탈탈’

있을 거고 우리 떡 맛을 찾는 사람도 있을 거다.

움직일 것 같아 보이는 방앗간 앞에 섰다. 문은 활짝

시대가 변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인데 일이 있는 것만으로 즐거움이고 복이라고 생각하면 서운하기는 해도 크게 걱정하지는 않는다.”

열려 있지만 인적은 없었다. 작고 오밀조밀한 방앗간을 둘러보며 기침 소리도 내보고 나무틀도 두드려 봤지만, 한참이 지나도 기계들만 나를 쳐다볼 뿐 가게는 조용했다. 옛날식 나무판에 붉은 글씨체로 적힌 전화번호를 계속 쳐다보다가 11자리 전화번호를 누르고 나서야 기계의 주인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하긴 전에 몇 번을 와서 헛기침만 하고 돌아갔고 방앗간 일로 불러낸 것도 아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사장님은 조금 멋쩍은

신흥방아간 서울 동대문구 사가정로13가길 3

02-2215-0517

표정으로 내가 왜 뜬금없이 방앗간에 나타났는지 몹시 궁금한 눈치였지만 덤덤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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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웃는 모습이 묵직하게 가게를 지키고 있는 기계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아까부터 와 있었는데 누가 가게를 업어 가도 모르겠어요. 지금이 방앗간이 비수기인 거죠?” “그렇죠” 하며 허허 웃는 모습이 묵직하게 가게를 지키고 있는 기계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대가 시대이니 어쩔 수 없는 것도 있을 테고요” 내가 시대 이야기를 보태는 말에 사장님은 긍정적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를 권했다. 그렇게 별 시답지 않은 대화 한 토막을 던지며 나는 어떻게 이 방앗간을 서성이게 됐고 왜 사장님을 호출을 했는지 대강 설명을 끝내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방앗간은 작고 소박했다. 앞에 놓여 있는 기계들은 익숙한 듯 낯설었고 기계와 마주 앉은 형태로 자리 잡은 두 사람은 어색했다. 질문할 것은 많았지만 주제가 쌀이고 방앗간은 쌀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쌀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해보리라 생각하고 왔지만 선뜻 목적인 이야기를 꺼내기는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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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방앗간의 깊은 추억

전농동  Jeonnong-dong

차라리 나중에 시간을 내달라고 요란한 기계 소리에 묻히지 않게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더 나을 뻔했다. 그렇다고 다른 이야기를 하자니 방앗간과 이 골목에서는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내가 뭘 궁금해 하고 무슨 이야기들을 할 수 있는지 더 고민이 필요했다. 더구나 방앗간은 기계만 있을 뿐 기름병이나 미숫가루나 고춧가루 같은 전시용품이 하나도 없었다. 그야말로 기계만이 지키는 방앗간. 하지만 잠시의 생각 뒤에도 뾰족한 수가 없어서 나는 가장 보편적인 그러면서도 공감할 수 있는 시대적인 이야기부터 해보기로 했다. 방앗간 하면 옛날 방앗간의 전성시대밖에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히 이 사장님에게도 방앗간을 지나가면 하얀 김을 뽀얗게 뿜어내며 가래떡이 빨간 함지박의 물속으로 떨어지고, 멀리서부터 고소한 들기름 참기름 냄새로 골목을 가득 채우던 그런 시절도 있었으리라.

방앗간은 작고 소박했다. 앞에 놓여 있는 기계들은 익숙한 듯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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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앗간은 몇 년 동안 한 건가?

“올해로 30년째다.” 그럴 줄 알았다. 비록 지금은 점점 규모가 줄어서 썰렁하지만 화려했던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니까. 예전에 쌀과 관련된 곳은 방앗간을 걸치지 않고는 안 되는 곳이었다. 쌀을 빻는 일부터 명절 때마다 몇 말씩 하는 다양한 떡들과 참기름, 신흥방아간의 맞춤떡류 가격표,

들기름, 고추를 들고 찾아와서 고추를 빻아가던

바람떡이나 꿀떡 같이 따로 기계가 필요한 것은 제외하고

풍성한 시절이 분명히 오랫동안 있었다.

주문하는 떡 종류는 다 할 수 있다고 보면 된다.

방앗간이 잘나가던 때 얘기 좀 해 달라.

“지금은 흔적도 없이 고요하지만, 출입문을 기준으로 저 밖까지 광주리와 함지박에 쌀을 이고 지고 와서 줄이 끝도 없이 길게 늘어서 있었던 때가 있었다. 명절이면 일찍 쌀을 빻으려고 줄을 섰는데 사람들이 줄 서 있다가 자리에서 밀려날까 싸움도 많이 나던 그런 시절도 있었고. 아마 90년대가 제일 그랬던 것 같다. 그때는 송편을 가정집에서 빚지 않고 방앗간에 주문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요즈음은 먹는 사람들이 줄어서 송편도 사가지 않는 시대이긴 하다.” 방앗간은 참기름 들기름 짜는 것부터 고춧가루를 많이 빻거나 최근에는 미숫가루 같은 것도 한다. 그런데 여기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주로 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우리 방앗간에서 하는 것은 주로 떡 종류다. 떡집에서 하는 것처럼 다양하게 모양을 내거나 하는 것은 아니고 주문을 받아서 떡을 만든다. 다만 떡 종류 중에 바람떡이나 꿀떡 같이 따로 기계가 필요한 것은 제외하고 주문하는 떡 종류는 다 할 수 있다고 보면 된다.” 역시 방앗간은 쌀과 관련이 없을 수가 없지. 하지만 주문 떡만 한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것에 대한 수요가 없다는 뜻일 것이다. 예전에는 들깨는 빈대떡 부치려고, 참깨는 송편에 바르려고 기름이 필요했기 때문에 제사나 명절의 방앗간은 필수였는데 이제는 마트에서 완성품을 살만큼 편리한 시대가 된 것이다. 방앗간이 마트에 밀려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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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때가 아닌 평소 때 쌀을 가지고 떡을 하러 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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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얼마나 되나?

“많지는 않다. 하지만 대부분은 옛날처럼 제사나 생일 때 떡을 해 먹으려고 쌀을 가지고 오는 경우는 드물고 오래된 쌀이나 묵은쌀을 가지고 온다. 그런 쌀은 밥을 하면 맛이 없으니까 떡을 해서 나눠 먹으려고 가져오는 것이다. 그런데 떡도 쌀이 좋아야 맛있는 거다.” 저 대답 속에 함축된 말은 슬프다. 방앗간의 오늘 같은 적막한 현실을 대변하는 것 같아서다. 사실 쌀이 묵었거나, 오래됐다는 것은 쌀을 먹는 사람이던, 양이던 그만큼 쌀 소비가 줄었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니 밥으로 해먹는 쌀이 묵을 정도면 떡은 더 그럴 가능성이 있지 않겠는가. 그럼 떡에 따라 쌀 종류를 다르게 쓰기도 하나? 어떤 쌀로 하면 떡이 더 쫄깃거리고 맛있다든가 어떤 종류의 떡은 잘 안 된다든가 하는 것이 있는지?

“떡을 만드는데 쌀을 특별히 가리지는 않는다. 떡도 찹쌀과 쌀을 구분할지언정 쌀을 가리지 않는다. 나는 시골에서 부모님이 농사짓는 쌀을 가져다 쓰는데 떡을 만드는 것은 주문하는 분의 요구에 맞춰서 한다. 주문 들어오면 그때 그때 하는 편인데 주로 쌀과 찹쌀의 비율을 조정하는 방법으로 떡을 쪄낸다. 찹쌀만 하거나 쌀만 하거나 반반씩 하기도

저울로 찹쌀의 무게를 측정하고 있다, 오래된 저울에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하고 찹쌀이 많이 들어가고 쌀을 조금 섞거나 그런 식이다. 떡에는 쌀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들어가는 고명 같은 재료도 중요해서 그것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답. 떡이 하얗게 쌀과 소금만으로 만드는 가래떡만 있는 것도 아닐 테고 팥이며 콩이며 밤 같은 과일이며 쌀과 어울리는 것들을 넣어 떡을 만들게 될 것이다. 무엇을 넣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기호도 달라질 것이고 때로는 쌀보다 그런 부재료들이 더 중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떡은 바탕이 쌀이지만 거기에 무엇을 넣고 만드냐에 따라 그 재료의 이름을 넣은 떡이 될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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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 말고 부수적인 것들을 하는 비중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방앗간이 다양한 것들을 빻고 찧고 짜고 하지 않나?

“우리는 떡이 중심이고 고춧가루는 고추를 가져오면 가루로 빻아주는 것만 가능하다. 참기름이나 들기름 같은 것은 기계를 따로 써야 하고 그러려면 공간도 있어야 하고 요즈음은 직접 짜 먹는 사람도 드물다. 마트 같은 곳에 가면 손쉽게 참기름 들기름을 구할 수 있기 때문에 판매를 하기에도 안 맞는 부분이 많다. 옛날의 방앗간은 멀리서부터 나던 고소한 냄새, 연신 빨간 고춧가루를 쏟아내느라 탈탈 소리를 내며 돌아가던 기계. 콩볶는 소리를 배경 삼아 할머니 아주머니들이 자신들이 가져온 재료가 변신되어 나올 동안 봉지 커피나 종이컵을

50개씩이나 소비할 만큼 많은 이야기 들이 방앗간에서 오고 갔다. 꼭 볼일이 없어도 지나가다 앉아서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떨거나 이 얘기 저 얘기 하던 곳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 젊은 세대는 방앗간에 오는 일도 없다. 온다고 해도 떡을 주문해도 딱 떡만 주문하고 기름을 짜면 딱 기름만 짜 가지고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지 않는다. 앉아서 이야기하는 동안 열어놓은 문밖으로 어르신들은 방앗간과 눈 마주치며 안을 향해 보고 지나갔지만 아이들 손을 잡은 젊은 엄마들은 무심코 지나가는 것을 종종 볼 수가 있었다. 방앗간에 대한 시선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 시대가 변했음을 등 뒤로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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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방앗간의 깊은 추억

전농동  Jeonnong-dong

마지막으로 방앗간은 쌀고 가장 연관이 많은 곳이다. 그리고 지금도 쌀로 떡을 만드는 것을 하고 있는데 나에게 쌀이란? 하고 누가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 줄 것인가.

쌀은 우리나라의 주식이다. 떡으로, 다른 것으로 다양하게 변신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쌀 없이 먹고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쌀은 우리나라의 주식이다. 떡으로, 다른 것으로 다양하 게 변신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쌀 없이 먹고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쌀과 관련하여 방앗간은 마을마다 있었던

쌀 항아리 같은 곳이었다. 가장 많은 쌀이 있었고 쌀의 변신이 갖가지로 이루어졌던 곳. 설에는

가래떡, 추석에는 참기름 들기름 짜고 송편 찌고,

김장하는 가을과 고추장 담그는 봄에는 고춧가루 빻느라 일 년 내내 쉴 틈이 없었던 방앗간. 하지만 지금은 다들 공장에서 만든 떡을 사먹고

방앗간에 쌀가루 가지고 와서 뽑아 먹는 경우는 시대가 그러니만큼 사정이 좋지 못하다는 알지만 그래도 방앗간을 하면서 제일 어려운 것이 있다면?

“손님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그렇다고

우리가 문을 닫으면 분명히 서운해 할 사람들이 있을 거고 우리 떡 맛을 찾는 사람도 있을 거다.

시대가 변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인데... 일이 있는 것만으로 즐거움이고 복이라고 생각하면

서운하기는 해도 크게 걱정하지는 않는다.”

무엇인가 허를 찔리는 기분. 그리고 격하게

거의 사라졌다. 좋게 발전한 것인지 아니면

삭막해졌는지는 아직 판단하기 어렵다. 명절

말고도 제사나 잔치를 치르기 위한 쌀수요도

제법 됐었는데 시대에 맞게 간소하게 합리적으로 살아야 하지만 명절 특유의 그 북적북적하고

들뜬 분위기가 사라져 가는 것은 왜 자꾸 아쉬운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다. 쌀, 그것이 문제다.

가장 중요하지만 대체재가 많아지면서 소중하게 취급받지 못하는 그것 쌀, 말이다.

공감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방앗간이 한산하게 변한 것이 아마도 기다림, 그리고 맞춤 생산

비표준화 원초적인 날것들이 좀 더 편한 것들로 대체되고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2020년 8월 기록 이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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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은

전농동  Jeonnong-d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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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리 그 , 힘 , 지 너 에 정(情)

한입김밥&amp;컵 밥 이정화 사장

“가격이 삼천원인데 올리지를 못하고 있어요.

이름은 이정화, 동대문구 토박이, 세 아이의 엄마.

남편도 올리지 말라고 하고요.

저는 이정화고, 동대문구 답십리에서 태어나서

쌀값이 올라도 가격을 올리지 않고 있어요.

성장했고, 결혼하고 전농동에 정착한 세 아이의

학생들이 맛있게 먹고 행복해하면서 “너무 맛있어요. 잘먹었습니다.”라고 인사를 하면 기분이 너무 좋거든요.”

엄마예요. 초‧중‧고 아이 셋을 키우죠. 애들을

키우면서 전농동 엄마들과 교류를 하며 전농동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그러다 보니 가게까지 하게 되었고, 집도 근처고요. 김밥을 사랑한 그녀, 한입김밥&amp;컵밥 사장이 되다.

배봉꿈마루 청소년독서실에서 활동하는 중에 이 가게가 나왔어요. 아이들의 동선과 나의 활동 동선을 생각했을 때 아주 딱이더라고요. 처음부터 김밥집을 하려는 의도는 없었는데 제가 김밥을 되게 좋아해요. 그래서 일주일 만에 뚝딱 문을 열게 되었죠. 일반김밥도 좋아하지만 꼬마김밥을 좋아합니다. 제가 어릴 때 동네에 꼬마김밥집이 있었고 애용을 했었는데 없어졌어요. 그래서 제가 이어서 하는 거죠. 벌써 오픈한 지 만 3년이 되었네요.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갈지 몰랐어요. 한입에 쏙 들어가라고 한입김밥이라고 지었고, 당초 이곳은 컵밥집이었어요. 학생들이 컵밥을 한입김밥&amp;컵밥 서울 동대문구 전농로 150-1

010-9469-7607

좋아해서 유지하고 있어요. 컵밥이 한 끼 식사가 되거든요. 저렴하면서 애들 배고플 때 좋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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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한입김밥&amp;컵밥의 메뉴판. 김밥류는 700원, 컵밥류는 3000원이다.

살짝 미치면 인생이 즐겁다고 생각해요.

기타에 살짝 미쳐 있어요.(웃음) 인생이 즐거워요.

제가 가만히 있는 것을 잘 못하고, 새로운 것, 다른 것 하고 싶어 해요. 직장을 들어가서 몇 달 지나면 재미가 없어요. 처음에 이 가게를 한다고 했을 때 형부가 매여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할 수 있겠냐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기타를 치잖아요. 그리고 사람들이 오가잖아요. 함께 기타 치는 사람들, 동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장소는 고정이지만 매일 다른 일상이에요. 시간이 남으면 기타를 치고요. 제가 3년을 한 것이

신기해요. 기타가 한몫하죠.(웃음) 손님이 없는 그 시간에 기타를 연습하면 되거든요. 그것도 지루할 수 있는데, 곡을 완성하고 나면 다른 곡을 연습하고요. 매일 도전하는 뭔가가 계속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저 같은 사람한테는 되게 활력이죠. 자꾸 새로운 것을 요구하는 저한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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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은 에너지고, 힘이고, 정(情).

쌀값이 처음 가게를 오픈할 때보다 너무 많이 전농동  Jeonnong-dong

올랐어요. 처음에 20kg이 3만원대였는데 지금은

5만원이 넘어요. 저는 이쌀 저쌀 바꾸지 않고 하나를 쓰는데, 거래하는 분이 단가를 맞춘다고 중간에 바꿔서 온 거예요. 그래서 그곳을 끊었어요. 김도 마찬가지고요. 제가 쓰고 있는 재료보다 나쁜 것 쓰는 것을 안 좋아해요. 쓰는 쌀은 ‘황금 신동진쌀’인데 밥이 촉촉하고 맛이 있어요. 쌀알이 크고, 김밥을 싸기 좋고요. 가게를 하면서 쌀을 받아보던 중에 이 쌀이 제일 좋더라고요. 내 입에 맛이 있어야 손님들도 맛있게 먹으니까요. 쌀은 에너지고 힘이고 정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컵밥 가격을 올리지 못하는 이유가 주변

중‧고등학생들이 컵밥을 먹는데, 그 아이들은 엄청 배고파해요. 가격이 삼천원인데 올리지를 못하고 있어요. 남편도 올리지 말라고 하고요. 쌀값이 올라도 가격을 올리지 않고 있어요. 학생들이 맛있게 먹고 행복해하면서 “너무 맛있어요. 잘먹었습니다.”라고 인사를 하면 기분이 너무 좋거든요. 아이들이 우리 애들과 또래여서 잘먹는 게 너무 좋아요. 컵밥을 아이들이 남기지 않고 다 먹어서 잔반도 없어요. 너무 예뻐요. 한입김밥을 만들고 있는 이정화 사장의 모습과 완성된 모듬김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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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듬김밥과 치킨참치 컵밥 구성, 학생들을 위해 쌀값이 올라도 가격을 올리지 않고 있다.

기억에 남는 손님은 귀여운 꼬마 아이.

기억에 남는 손님은 많죠. 지금 기억나는 손님은 꼬마 손님인데요. 초등 1학년 꼬마애가 “아줌마! 부자죠?”라고 물어요. “어? 왜?” 아줌마 부자일 것 같다는 거예요. “여기 음식 맛있잖아요? 장사가 잘되면 돈 많이 벌 거니까 부자죠.”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너무 웃기고 귀여웠어요. 김밥집 운영 3년 차, 이 골목을 말하면.

활기차서 좋아요. 이 근처에서 장사하시는 분들도 좋으시고. 우리 아이들도 이 골목을 좋아해요. 배봉꿈마루 청소년독서실이 있어서 활동도 할 수 있고요. 매력은 차와 함께 하는 유동인구? 많은 사람들이 오가니까 많은 일들이 벌어지겠죠. 배봉꿈마루에 오면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요. 많이 오세요. 올해 이루고 싶은 소망이나 바람.

돈 벌고 싶어요. 돈 많이 벌면 봉사활동 많이 할걸요. 물론 가격도 절대 안 올리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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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은 에너지, 힘, 그리고 정(情)

전농동  Jeonnong-dong

현재 사용하고 있는 재료보다 나쁜 재료는 사용하지 않는다. 쓰는 쌀은 ‘황금 신동진쌀’인데 밥이 촉촉하고 맛있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

에스라인 모집합니다. 기타를 사랑하는 분들

오세요. (에스라인은 마을 음악동아리로 ‘클래식

기타’를 함께 배우고 연주하는 모임으로 올해 3기 모집 중이다.)

가게 운영 3년 차, 코로나19로 손님이 많이 줄어든 지금 그녀는 운영을 계속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고 한다. 동네 주민들이 지나는 길에 들러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김밥도 사가는 이곳 맛의 비법은 사랑과 정성, 숙련된 기술이라고 짧고 확신 있는 목소리로 말해준다. 한입김밥과 컵밥도 맛있는 ‘한입김밥&amp;컵밥’이 오래도록 이 자리 지키기를 기대해 본다.

2020년 8월 기록 홍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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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볶 이는 가볍 하나 게가 로자 정에 리잡 서해 해먹 고있 먹을 을수 다. 전 수있 있는 세계 는한 떡볶 인 류음 들이 이레 식의 입맛 시피 대로 다섯 골라 가지 서 를소 개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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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IPE

ROAD

다섯가지 맛 쌀떡볶이 Five-flavored Rice Tteokbokki

궁중떡볶이

Ingredients 가래떡500g, 애호박1/2개,

1

떡은 끓는 물에 데쳐서 준비한다.

2

채소는 4cm길이로 썰어 놓는다.

3

쇠고기, 표고버섯은 얇게 썰어 양념에 재우고, 목이버섯은

당근70g, 양파1/3개, 쇠고기전감100g, 불린표고버섯3장, 느타리버섯100g, 목이버섯2장, 참기름1t, 참깨

불린 후 손으로 뜯어 양념에 재운다.

간장2T, 설탕1T, 다진마늘2t, 다진파1T, 깨소금1t, 참기름2t, 후추

4

팬에 고기를 볶고 채소와 떡을 순차적으로 볶다가 양념을 넣고 끓여 간을 보고 국물있게 접시에 담아낸다.

다시물1.5컵, 간장1T, 설탕1t, 소금

크림소스떡볶이

Ingredients 가래떡500g, 애호박1/2개,

1

떡은 끓는 물에 데쳐서 준비한다.

2

베이컨은 1cm로 썰고, 새우는 내장 제거하고 소금물에

당근70g, 양파1/3개, 쇠고기전감100g, 불린표고버섯3장,

헹궈둔다.

느타리버섯100g, 목이버섯2장, 참기름1t, 참깨

3

느타리버섯은 가늘게 찢어두고, 브로콜리는 작은송이로 잘라 끓는 물에 소금을 넣고 데쳐낸다.

간장2T, 설탕1T, 다진마늘2t, 다진파1T, 깨소금1t, 참기름2t, 후추

다시물1.5컵, 간장1T, 설탕1t, 소금

4

팬에 다진양파, 다진마늘, 건고추를 볶다가 베이컨, 새우를 넣고 볶아 준 후 느타리버섯을 볶고 우유를 넣고 끓어오르면 떡과 생크림을 넣고 한소큼 더 끓여 간을 하고 국물있게 접시에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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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에서 최근 해 남아 볶이가 떡 에 미국 · 동 · 중 해 일본 공식품 다. 올 가 쌀 와 끌 해 이 었 든 수출을 쌀로 만 다. 지난 있 류 떡 고 서 해 게 팔리 아지면 대를 위 불티나 기가 높 . 수출 확 문이다 으로 인 공식품 때 심 가 기 중 쌀 했 가 등을 극 지원 식품부 적 산 고 축 림 로 정하 이는 농 품목’으 를 ‘스타 떡볶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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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IPE

ROAD

깐풍소스떡볶이

Ingredients 1

떡은 바삭하게 볶거나 끓는 물에 데쳐서 준비한다.

청양고추2개, 식용유, 통깨

2

파, 마늘, 생강, 홍고추, 풋고추는 다진다.

간장3T, 청주3T, 육수3T,

3

팬에 향신채소 볶다가 양념 넣고 충분히 끓으면 떡, 어묵을

가래떡500g, 대파1/3대, 마늘3개, 생강5g, 홍고추2개,

식초1.5T, 설탕3T, 참기름

순차적으로 넣고 볶아 간을 보고 접시에 담고 통깨 뿌려 낸다.

토마토케찹소스떡볶이

Ingredients 가래떡500g, 어묵100g,

1

가래떡, 어묵은 끓는 물에 데친다.

2

양파, 마늘, 베이컨(소세지)는 곱게 다진 후 5분 정도 볶는다.

3

2를 볶은 팬에 양념을 넣고 끓어오르면 떡, 어묵 넣고 양념이

베이컨3장, 식용유2T, 양파1/2개, 마늘2개, 땅콩다진것 토마토케찹8T, 마요네즈1.5T, 고춧가루2T, 간장1T, 다시물1컵,

베이도록 끓여 간을 보고 땅콩다진것을 올려낸다.

설탕3T, 물엿3T, 소금, 후추

단호박된장떡볶이

Ingredients 가래떡500g, 어묵100g,

1

떡은 끓는 물에 데쳐서 준비한다.

2

채소는 볶아서 믹서에 갈아둔다.

3

팬에 소스, 떡 넣고 5분간 더 끓여 농도가 나면 소금,

파마산치즈 식용유2T, 양파1/2개, 당근70g, 감자1개, 사과1/2개, 마늘2개, 건고추3개, 단호박400g, 된장1T~2T, 소금, 후추,

후추간해서 파마산치즈 뿌려낸다.

다시물1컵, 물전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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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구 주민들에게 쌀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다 사직의 기곡제와 선농제, 친경을 논하기 전에 먼저 기곡 의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기곡 의례는 한 해 농사에 대한 의례를 통칭한다. 농사가 주요 생산 수단인 농업사 회에서 풍년을 비는 것은 중요한 의례였다. 때문에 어느 한 곳의 제장이 아니라 사직, 선농단 등 다양한 곳에서 거행됐다. 이번 글에서는 동대문 지역에 한정시켜 선농단에서의 선농제와 적전 친경례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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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VEY

쌀에 관한 흥미로운 질문들 서울시 동대문구 50명의 주민을 대상으로 쌀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들어보았다.

성별이 어떻게 되시나요?

연령이 어떻게 되시나요? 54.7% 25% 34.6%

73.1% 5.8%

여자

남자

30~40대

기타

50~60대

10~20대

1.9% 70~80대

살고 계신 지역이 어딘가요? (ex. 동대문구 전농동) 동대문구 전농동

53.8%

동대문구 이문동

5.8%

동대문구 휘경동

5.8%

동대문구 제기동

3.8%

동대문구 답십리동

1.9%

기타

28.9%

63


ROAD

SURVEY

쌀로 만든 가공품 중 즐겨먹거나 좋아하는 식품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1

누룽지

37.3%

2

식혜

19.6%

3

쌀과자

13.7%

4

11.8%

5

막걸리

7.8%

6

기타

9.8%

가족과 일주일에 얼마나 집밥을 먹나요?

1~2회

3~4회

5~6회

7회 이상

누룽지

식혜

쌀과자

막걸리

기타

가족과 함께 먹은 쌀 요리 중 가장 반응이 좋았던 음식이 있다면? 쌀떡볶이

19.6%

볶음밥

15.7%

김밥

31.4%

월남쌈

15.7%

삼계탕

7.8%

기타

10%

거의 먹지 않음

밥을 지을 때 주로 어떤 수단을 사용하시나요?

선호하는 밥솥 브랜드가 있다면 어느 브랜드인가요?

83.7%

8.2%

4.1%

4%

쿠쿠

쿠첸

풍년

기타

선호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64

전기밥솥

54.9%

압력밥솥

37.3%

냄비

5.9%

기타

2%

브랜드 평판이 좋아서

밥 맛이 좋아서

가성비가 좋아서

디자인이 예뻐서

기타


SURVEY

즉석밥의 맛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즉석밥, 일주일에 몇 번 정도 이용하시나요? 19.6%

1~2개

3.9%

2%

3~4개

ROAD

74.5%

6개 이상

거의 먹지 않음

매우만족

19.6%

만족

31.4%

보통

33.3%

불만족

0%

매우불만족

2%

별 생각없음

13.7%

백미

54.9%

현미

21.6%

흑미

15.7%

잡곡

5.9%

찹쌀

2%

선호하는 쌀이 있나요? 1 백미

4 잡곡

2 현미

3 흑미

5 찹쌀

쌀 요리에 도전한다면 어떤 음식에 도전해보고 싶으신가요?

8월 18일이 ‘쌀의 날’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나요?

쌀베이킹

31.5%

쌀국수

27.5%

쌀아이스크림

21.6%

쌀떡

13.7%

쌀음료

5.9%

전혀 몰랐다

88.2%

오늘인지는 몰랐다

7.8%

알고 있었다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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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

문구 역사 History

리포트 Repor

t

u g n u m e a d g n Do 66


2

REGION 전농동이 위치한 동대문구는 예로부터 쌀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전농동 동명은 조선 시대 초기부터 왕이 직접 농사를 지어 보였던 논인 적전이 있던 데서 비롯됐다. 두 번째 챕터 ‘동대문구’에서는 쌀이라는 주제와 지역의 정체성을 연관해서 살펴볼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나 이슈를 아티클 형식으로 다룬다.

67


68


HISTORY

동대문 밖 선농단 선농제와 적전 친경

권농 장려와 한해 풍작 기원하기 위한 ‘로열 퍼포먼스’ 사직의 기곡제와 선농제, 친경을 논하기 전에 먼저 기곡 의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기곡 의례는 한 해 농사에 대한 의례를 통칭한다. 농사가 주요 생산 수단인 농업사회에서 풍년을 비는 것은 중요한 의례였다. 때문에 어느 한 곳의 제장이 아니라 사직, 선농단 등 다양한 곳에서 거행됐다. 이번 글에서는 동대문 지역에 한정시켜 선농단에서의 선농제와 적전 친경례를 다룬다.

1.


REGION

HISTORY

선농(先農)의 기원 한 왕조가 새로 만들어지면 수도를 정하고 다음으로 할 일은 궁을 짓는 것 이 아니라 종묘와 사직을 두는 일이다. 종묘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후, 추존 된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이다. 조선은 개국 초기 고려의 수도인 개 경에서 머물렀으나 3년 만에 한양으로 천도 했다. 법궁인 경복궁의 위치를 백 악산 아래 정하고 좌묘우사, 즉 좌측에 종묘 , 우측에 사직을 뒀다. 경복궁 과 종묘, 사직이 지금도 잘 보존돼 있어 역사적 사실을 직접 접할 수 있다. 선 농제와 친경례는 중국 농경의례에서 시작됐다. 삼국사기에 선농제에 대한 기 록이 최초로 등장한다. 이후 고려와 조선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통

서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선농단에서 선농제를 지냈고 적전(籍田, 지금의 시험 장과 같은 곳)을 두어 임금이 직접 농사짓는 친경(親耕) 모범을 보였다. 이 는 백성들이 농사에 전념할 수 있는 긍지와 책임을 동시에 갖도록 하는 최 고 지존의 ‘로열 퍼포먼스’였다.

성종이 좋아한 선농제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고 무엇보다 농업 을 중시했기 때문에 국가제례 중에는 농경과 관 련된 것이 특히 많았다. 기곡제, 사직제, 선농제, 영성제는 직접 농사에 관련된 것이고 풍운뇌우제, 기우제, 기설제 등은 농경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의 례들이다. 선농제는 사직과 중묘 보다 아래 단계인 중사

(中祀)였지만 백성과 관료에게 권농 의지를 드러냄으로써 왕

실의 권위를 높일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에 제향 등급과 관계없 이 중요한 의례로 다뤄졌다. 선농단에서는 농사짓는 법을 인간에게 가르쳤다 고 전해지는 고대 중국의 농사의 신(신농씨)과 곡식의 신(후직씨)을 모시

는 제를 올렸다. 조정과 문무백관은 권농을 강조했지만 실제 선농제와 친경례 를 직접 한 것은 성종에 이르러서였다. 성종은 사직제보다 선농제에 더 큰 관 심을 보였다. 이유는 엄숙한 제례 과정만 이어지는 사직제와 달리 선농제

70

선농단에서는 농사짓는 법을

로 뒀다. 먹고 입는 것이 삶의 전부나 마찬가지인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인간에게 가르쳤다.

과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조선은 농업과 길쌈을 중시해 권농을 최우선정책으


HISTORY

REGION

다. 성종은 재위 6년(1475)만에 몸소 제례와 친경을 실천했다. 당시 기록에 의 나눠 마시는 농주례 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순종이 농사를 권하는 친경식 후 술을 함께

는 제사 후 친경례로 이어져 ‘친만민(親萬民)’ 이념을 구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 하면 선농제와 친경례 과정이 하나의 큰 축제 차원으로 진행된 것을 알 수 있 는 데, 이는 백성과 함께 하는 큰 행사였음을 뒷받침한다.

큰 변화 속에도 살아남은 선농단 기록에 따르면 선농제를 지내는 선농단은 4대문 중 하나인 흥인지문(동대문)

동쪽 외곽(현 제기동)에 위치했다. 선농단 서쪽엔 성북천, 동쪽엔 정릉천, 남

쪽엔 청계천이 흐르고 있어 비옥한 지대다. 옛 지도를 보면 일대가 적전 의 중심지로 보인다. 선농단의 현 위치는 종암초등학교(옛 숭인보통학교)

앞이다. 엄밀히 따지면 선농단에 종암초등학교 가 들어섰다고 표현하

는 게 맞지만 일대 지형이 극심하게 변한 나머지 땅의 주체를 잃은 결과다. 일 제 강점기 일본은 동양척식회사를 통해 정부 출자 명목으로 이 지역 땅을 강 제 수용해 청량대공원으로 조성했다. 지하철 1호선 제기역 1번 출구로 나와 함 경면옥이란 대형음식점을 끼고 우회전해 접어들면 작은 갈래길 가운데 표지 석 하나가 눈에 띈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터’를 나타내는 표지석으로 1954 선농단만은 그대로 남아서 현존하고 있다.

다행이 청량대공원 조성 때부터

년 12월부터 75년 2월까지 서울사대가 있었다고 적어 놨다. 서울사대뿐만 아니 라 사대부중고도 함께 있었다. 서울사대는 경성사범학교와 경성여자사범학교 가 국립 서울대로 통합개편 되면서 만들어졌다. 원래는 중구 을지로5가에 있 었던 경성사범학교를 사용했다. 서울사대는 한국전쟁 후 부산피난 학교를 거 쳐 서울로 돌아왔지만 학교는 미군(현 미 극동공병단)이 사용 하고 있었다. 그 래서 부득이 선농단 일대에 용두동 캠퍼스를 짓고 관악캠퍼스로 옮기기 전 인 75년까지 자리한 것이다. 서울사대가 들어서면서 일대 지형이 다시 한 번 변 한다. 다행이 청량대공원 조성 때부터 선농단만은 그대로 남아서 현존하고 있 다. 당시 대학신문에 실린 서울사대 뒷동산에 대한 묘사를 보자. “...해묵은 측백나무 사이로 시야가 노오란 개나리꽃에 파묻힐 무 렵이면 청량대는 철을 만난 피서지처럼 원색의 짙은 빛깔로 꾸 며진다. 소근 거리는 여학생들의 상기한 귀밑과 호탕하 게 떠들어대는 남학생들의 웃음소리에 청량대는 언제 나 활기에 넘친다. 그 옛날 지존의 왕이 친히 백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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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GION

HISTORY

의 농사짓는 것을 바라보았다는 유래를 지니고 있는 곳. 그러나 지금은 기와집 이 총총하게 엎드려 있는 도시의 일각. 경춘선을 달리는 디젤차의 기적이 한가 로이 퍼지기도 한다. 휴지가 멋대로 버려진 청량대. 그러나 사대생은 청량대 를 빼놓고 대학생활을 말할 수 없으리라.”(대학신문, 1961.4.27.) 이 글 속에

서 몇 가지 재미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은 천연기념물인 수령이 약 600

은 관경대(觀耕臺)의 존재를 의미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성종 7 년

(1476년)에 선농단 남쪽 10보쯤 관경대를 쌓았다는 기록이 이를 입증한다. 관 경대는 임금이 농사일 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는 대를 말한다. 1973년 선농단

이 서울시 지방문화재로 지정될 당시까지 있던 것으로 전해지지만 현재는 남 아 있지 않다. ‘지금은 기와집이 총총하게 엎드려 있는 도시의 일각’은 이 지역 의 거주 환경을 묘사하고 있다. 60년대 초기만 해도 조그맣고 키 작은 ‘도시 형 한옥’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모습을 그리고 있다. 지금도 제기동 경동시장 일 대에는 1930년대부터 60년대까지 지어진 도시형 한옥이 많이 남아서 당시 의 정취를 일부 느낄 수 있다. ‘경춘선을 달리는 디젤차의 기적’이란 표현은 생 소할 수 있다. 현재 제기역 앞에 있는 한솔 동의보감(옛 성동백화점이었으 나 이후 미도파백화점 인수) 자리가 성동역이란 경춘선 시종역이 있었 기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 경춘선은 청량리역으로 가지 않고 지금 의 광운대, 월곡 쪽으로 선로가 놓였다. 국철이 아닌 경춘철도주식회 사가 운영하는 사철이었다.

복원 후 ‘서울 선농단’으로 탈바꿈 한편 선농단은 일제강점기와 근대화를 거치며 주택가와 공원 형성에 따른 규 모 축소, 지형 변형 등 물리적 변화를 겪으면서 역사적 의미가 퇴색하자 문화 적 가치를 찾기 위한 복원 결정을 하기 이른다. 2001년 선농단이 사적 제436호 로 지정되면서 복원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2009년 선농단 정비 및 역사공원 조성 기본계획이 수립되고 이듬해 선농단 문화재 발굴조사를 시작했다. 2011년

에는 선농단 위치를 고증했고 이듬해 도시계획시설(공원) 변경을 통해 어린이 공원에서 역사공원으로 만들기로 결정하고 문화재위원회 및 도시공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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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문화재연구소

‘왕이 백성들의 농사짓는 것을 바라보았다는 유래를 지닌 곳’이란 표현

되는데 현재 국내에서 자라고 있는 향나무 중 크고 오래된 것에 속한다.

에 측백나무가 꽤 있었던 모양이다.

선농단의 향나무 높이는 약 10m, 줄기의 가슴높이 둘레는 2m 정도

년 된 곧고 키가 큰 향나무 한그루가 선농단을 지키듯 서 있지만 옛날엔 주변


REGION

회 심의를 통과했다. 2013년 선농단역사 문화관 공사를 착공해 2015년 개관에 이른 다. 역사관은 선농단 아래 연면적 1614㎡ 지 하 2 층 규모 로 조성됐다. 이 곳에는 제례의식 과 친경의식에 관련된 유물을 전시하고 궁중의 제례 와 친경문화를 배우는 교육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2014 년에는 선농제 제례형식 고증과 복원 및 공간 확보를 위한 학술

옛 지도를 보면 일대가 적전의 중심지로 보인다

남쪽엔 청계천이 흐르고 있어 비옥한 지대다.

연구를 실시해 1979년부터 선농대제를 민간 형식으로 봉행해 오다가 99 년부터는 농림식품부와 동대문구가 공동으로 매년 4월 20일 동대문 구민 의 날 행사에 맞춰 열고 있다. 한편 2011년에는 선농단 명칭을 ‘서울 선농단’으 로 변경했다.

의례용 토지 적전은 어디? 적전은 국왕이 농경의 시범을 보이기 위한 의례용 토지다. 기록에 따르면 적전 은 개성 동쪽 20리에 있는 서적전과 서울 동대문 밖 10리에 있는 동적전이 있

홍인지문(동대문) 동쪽 외곽(현 제기동)에 위치했다.

선농제를 지내는 선농단은 4대문 중 하나인

었다. 한성의 적전을 동적전이라 하는 것은 태종 때 한성에 적전을 설치하면 서 한성의 서쪽에 있는 개성 적전을 서적전이라 부른데 따른 것이다. 조선시 대 임금의 친경례가 거행된 장소는 동적전이었다. 동적전 설치시기는 정확하

게 명시된 바가 없다. 그러나 태종 5년(1405) 새로 옮긴 도성에 원단을 축조하 고 그 이듬해 원단·적전· 사직· 산천단·성황당의 단장 (壇場)을 수리하게 했다

는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태종 5년과 6년 사이에는 동적전과 선농단이 존재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위치는 대체로 한성부 동부 인창방 일부 지역으로 특 정된다. ‘경조오부도’를 비롯한 대부분의 고지도에는 동적전을 안암천과 정릉 천 사이에 표기하고 있다. 동적전 관리부서인 필분각 (苾芬閣)이 있 던 텃골(基谷)과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던 창마을(倉村) 이 현재 서울시립대 앞 전농로 일대에 있었다는 사실 을 감안하면 동적전은 배봉산 아래 전농리를 포함 한 정릉천 동쪽 지역까지 아우른다. 서울역사박물 관은 ‘조선지형도집성’(1921)에 나타난 행정체계 를 바탕으로 동적전의 지도를 만들었다.

조선 개국 초 적전이 설치될 당시 동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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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GION

HISTORY

은 100결이었다. 1결이 5000평이었다고 하니 대략 165만㎡(50만평)에 달한다. 이곳에는 기장(黍)·피(稷)·차조(秫)·벼(稻)·삼(麻)·콩(大豆)·팥(小豆)·보리(大麥)· 밀(小麥)의 아홉 가지 곡식이 재배됐다. 면적만큼이나 수확량도 상당했다는 기

록이 남아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동적전에서 수확하는 멥쌀만으로도

1년 동안 제향 소용으로는 풍족하며, 서적전에서 매년 수확하는 벼도 5080석 이 충분히 되어서 유후사(留後司) 국고에 수송합니다.’라고 전해진다. 이렇듯 동 적전에서 재배된 작물은 종묘, 사직 등 제사용으로 충당됐다. 또 더 나은 종자 를 국가 차원에서 나눠줄 수 있도록 종자 개량을 연구하는 목적으로 일부 활용 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동적전뿐만 아니라 궁궐 내 후원에도 적전이 설치됐다. 궁궐 내 적전 친경 행사는 ‘창덕궁 후원 청의정’ 편에서 다루기로 한다.

왕이 쟁기질 직접 한 친경례 선농제와 친경례는 고대 국가 때부터 거행돼 온 중국의 제례를 이어받은 것이 다. 고려시대 983년(성종 2)에 처음으로 왕이 나선 친경 의례가 시작됐다. 조선

이 건국된 이후에도 이러한 적전 친경례는 그대로 계승됐다. 사농시(司農寺) 가 업무를 담당했는데 전농시(典農寺)로 명칭을 번갈아 쓰면서 지금의 전 농동 지명으로 남아있다.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총 19번의 친경례 가 거행됐다. 친경례는 왕이 직접 ‘오퇴례’를 행해 쟁기질을 하는 모 습을 보이는 상징적 행위다. 이를 통해 나라의 근간이 되고 경제 의 모든 것이 되었던 농사를 권장하기 위한 강력한 의도가 담겨 져 있었다. 선농제 보다 왕이 직접 쟁기질을 하는 상징적 퍼포먼스

음 친경을 행한 성종의 기록을 보면 ‘임금이 쟁기를 잡고 친경하시니, 반열 에 있는 신하, 군교, 기노와 도인사녀, 기순의 백성으로서 보는 자는 바라보 고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심지어 눈물을 홀리는 자도 있었다.’고 적 고 있다. 이렇듯 왕이 직접 친경하는 것은 백성들에게 매우 감동적이고 감탄스 러운 일로 여겨졌다. 왕이 관경대에 오르면 다음으로 종친과 재신이 7 번 밀 고 이어서 판서와 대간이 9번을 민다. 왕과 신하가 쟁기 미는 일이 끝나면 봉상 시부정이 서인을 인솔해 나머지 100이랑을 마저 간다. 의례가 끝나면 노인,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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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구청

데 가장 먼저 쟁기를 잡고 ‘5번 미는 예’를 행한 뒤 관경대로 간다. 조선시대 처

취타대의 흥겨운 연주에 맞춰, 초헌관을 비롯한 제관,

은 적전으로 자리를 옮겨 관포로 갈아입고 헌가의 음악이 울리는 가운

금군 등 총 130여 명이 임금의 행차를 재연한 선농대제.

가 가장 극적인 효과를 나타냈을 것으로 보인다. 선농제를 마친 왕


HISTORY

REGION

생, 기생들이 풍년가를 부르고 그동안 봉상시정이 곡물의 씨앗을 파종한 다. 이 때 파종하는 것은 미리 지방에 선별해 올린 아홉 가지 곡식이다. 성종 때 최초로 시행된 이후 친경례는 규칙적으로 거행되지 못했다. 친 경을 전후해 베푸는 노주연, 기로연 등 행사로 인해 축제 성격이 짙어지 는 등 여러 가지 폐단과 전쟁, 흉년 등 악조건이 겹치면서 간헐적으로 불 규칙하게 거행됐다. 명맥은 대한제국 순종 때 마지막 친경례가 거행될 때 까지 유지됐다. 한편 친경례가 거행되는 적전은 궁궐에서 멀리 떨어져 있 고 행차 의례 때 복잡하게 갖출 것이 많아서 자주 친행하기에는 번거로움이 있

서적전과 서울 동대문 밖 10리에 있는 동적전이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적전은 개성 동쪽 20리에 있는

었다. 친경례 목적은 풍흉 작황보다는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보이는 퍼포먼스 다 보니 민폐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군주의 의지나 과시보다 실용성 을 강조하는 실학사상과 맞물려 궁궐 후원에 농경지를 조영하게 되는 특유 의 궁내 친경으로 이어지게 된다.

궁내 친경으로 연결 도시농업의 시작 조선왕실의 권농 정책 중 특징적인 하나로 주목할 것은 사대문 안에서는 일 반 백성들의 농사행위를 제한했는데, 왕가에서는 장원서, 사포서, 내수사, 봉상 시 등 권농 부서 소속 농지를 설치해 운영해 왔다는 것이다. 또한 왕의 친경이 이루어졌던 동적전을 포함해 도성과 근교에 운영됐 던 조선왕실 관영 농지는 국가 기조인 권농 행보의 일환이자 도시 차원에서 보 면 최초 도시농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일면에서는 궁에서 사용하는 곡식 과 채소 조달 목적과 제수용 이외에 풍수의 비보 목적과 권농, 종묘 시험 장 등 여러 기능을 가진 복합적 도시녹지체계 측면으로도 들여다 볼 수도 있 다. 옛 사람들이 하는 일에는 참 많은 합당한 이유와 명분이 존재하는 것을 적 전 친경례를 통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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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HISTORY

쌀 아닌 사도를 가둔 뒤주, 세자를 품은 동교 배봉산

임오화변으로 27세 횡사… 정조·고종에 의해 화려한 부활 극심한 붕당정치에 시대 그는 당파와 대리청정의 극심한 스트레스로 결국 정신적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다. 패악에 대한 친모의 밀고와 역모로 몰려 영조의 분노를 산 나머지 뒤주에 갇혀 죽었다. 쌀과 뒤주에 연결된 그의 죽음은 그가 묻혔던 무덤과 배봉산, 지금은 골목 매거진과 동대문 밖 적전의 끝으로 이어진다. 이 매거진에 사도세자가 등장한 이유다.

2.


REGION

HISTORY

동대문구에 묻혔던 사도세자 뒤주는 곡식을 담는 나무로 만든 궤다. 지금은 거의 쓰지 않지만 예부터 각 가 정에서 쌀을 주로 담았다. 쌀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옷, 집과 함께 생명과 직결 되는 필수 요소다. 그래서 옛 군주들은 농상(農桑)을 치국의 근본으로 삼았다. 사람을 살리는 쌀을 보관하던 뒤주는 삶과 연결돼 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

변이란 생소한 이름보다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기억한다. 사도세자(1735~1762)

에게는 늘 ‘비운’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그는 조선 제21대 영조의 왕세 자이자 22대 정조의 아버지이다. 영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0살에 요절한 이 복형 효장세자의 뒤를 이어 1736년 2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됐다. 국왕이 되 는 건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러나 극심한 붕당정치에 시대 그는 당파와 대리청정의 극심한 스트레 스로 결국 정신적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다. 패악에 대한 친모의 밀 고와 역모로 몰려 영조의 분노를 산 나머지 뒤주에 갇혀 죽 었다. 쌀과 뒤주에 연결된 그의 죽음은 그가 묻혔던 무 덤과 배봉산, 지금은 골목 매거진과 동대문 밖 적전 의 끝으로 이어진다. 이 매거진에 사도세자가 등장 한 이유다.

양력 7월 ‘그날’ 뒤주서 8일 만에 훙거 ‘그날’ 영조는 자신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세자를 뒤주 속에 가뒀다. 세자가 갇힌 음력 윤5월은 양력으로 7월이다. 조선의 궁에는 나무가 거의 없다. 따라서 그늘도 있을 리 만무하다. 세 자는 땡볕을 온전히 받아낸 뜨거운 뒤주 속에서 몸도 제대로 못 가누다가 8일 만인 윤5월 20일 훙거한다. 세자에서 서인으로 강등된 그의 나이 27세 때다. 조선 역사상 가장 비극 적인 사건으로 기록된 임오화변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영조는 아들이 죽자 다 음날 서인에서 왕세자로 복위시키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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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우원(永祐園)으로 고쳐 불렀다.

38년) 음력 윤5월13일 일어난 ‘임오화변’(壬午禍變)이 그것이다. 우리는 임오화

정확한 위치를 알 수는 없으나 당시 수은묘(垂恩墓)라

실록과 목격자들의 일기 등 여러 기록이 남아서 후세에 전해진다. 1762년(영조

불리우다 정조 즉위년(1776)에 무덤의 봉호를

뒤주가 삶이 아닌 죽음과 연결된 사건이 있었다. 그것도 궁궐 안에서 있었으니


REGION

영조는 재위기간 동안 임오화변과 관련된 논의 나 기록을 엄격히 금했다. 임오화변 당시 사관이 었던 윤숙이 ‘그날’의 일을 전파했다는 혐의를 받아 제주도에 유배됐다. 영조는 사건을 마무리하면서 “추

후에 이 사건(임오화변)을 다시 제기하는 자는 마땅히

역률(대역죄)로 다스릴 것”이라고 공표했다. 이후에도 영

조는 ‘승정원일기’에서 그날의 기록을 지워달라는 왕세손(정

조)의 청을 수용하면서 “그 내용을 문자로 옮기는 자가 있으면 역률

정조 역시 영조의 이러한 유훈을 적극적으로 받들었다. 정조는 “차마 들 을 수 없고, 차마 볼 수 없는 말이 세상에 전파되어 사람들의 이목을 더럽히고 그대로 남아서 현존하고 있다.

다행이 청량대공원 조성 때부터 선농단만은

로 엄하게 논죄할 것”이라는 엄명을 내렸다.

있다”며 승정원일기에서 그날의 기록을 세초(洗草)하기도 했다. 그날의 기록이 정사에 몇 줄 남아 있지 않은 이유다.

배봉산 아래 현 삼육서울병원 자리에 묻혀 영조는 사도세자의 묘호를 수은묘라 짓고 당시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장례했 다. ‘사도세자묘소도감의궤’에 따르면 영조는 아들을 왕세자 신분으로 복위시 켰지만 장례 절차나 묘를 쓰는 과정에서 격을 다하지 않고 축소시켰다. 사망 당 일 묘소도감이 설치 돼 오릉(지금의 동구릉) 내 영릉(효종의 초장지)의 옛 자 리로 정했다. 그러나 영조가 오릉은 안 된다고 해서 다시 한 번 회의를 거쳐 양 주 배봉산 아래로 최종 윤허를 받는다. 영우원 위치는 의궤에 “중랑포에 새로 정한 갑좌경향의 언덕에”라고 표현 돼 있다. 정조의 개인문집 홍재전서에는 “배봉산 아래 기슭에 썼다”고만 해서 정확한 위치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많은 연구자들이 서울시립대 뒷산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특정하지 못하고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삼육서울병원 위치가 동고서저 지형으로 서향을 하기 에 적합하고 청량산과 인왕산 아래 봉우리와 마주하면서 풍수 조건을 만족시 킨다. 그 가운데서도 병원 추모관 자리 부근으로 추정된다는 결과를 얻었지만 풍수를 기반한 것이기 때문에 논거가 부족하다. 동대문구청에서는 배봉산 남쪽 전농초 뒤편 영우원 표지판을 설치했다. 그러나 그곳은 암반위에 정자가 있고 경사가 심해 능원으로 쓰기가 어려운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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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GION

HISTORY

대다. 따라서 구청 표지판은 어림짐작으로 영우원의 과거 존재를 알려주는 알 림판이라고 보여 진다.

영조는 사도세자 묘의 규모를 장손인 의소세손(정조의 친형) 묘보다는 약간

크게, 여타 세자들의 묘보다는 작게 만들도록 지시했다. 각종 부장품이나 묘 끝까지 ‘뒷끝’을 보였다. 물론 정조가 즉위하면서 영조의 뒷끝을 대부분 격에 맞게 바로잡았다.

1776년 3월 영조가 서거하고 즉위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당인 수 은묘를 설치하고 수봉관을 두었다. 이어 시호를 장헌으로 올리고 수은묘를 원 (園)으로 격상해 영우원(永祐園)이라 하고 사당을 경모궁(현 서울대병원 내)이

라 개명했다.

왕과 왕비의 묘는 릉(陵), 왕의 생모 묘는 원(園)이라 한다. 왕자나 공주,

옹주 등 왕실에서 직접 관리하는 왕실의 묘소는 묘(墓)라 한다. 왕세자 의 묘를 원으로 칭한 것은 영우원이 처음이었다. 영우원에 대해 정조가 비좁고 풍수적으로도 못마땅했다는 기록 이 있다. 정조는 영우원이 여러 가지 부족하다 여기고 마음속으로 묘 를 옮기는 것을 계획했지만 신중을 거듭한 나머지 시간만 끌게 됐다.

이후 1789년 영우원의 묘역이 매우 비좁고 초라해서 서둘러 옮겨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자 정조는 기다렸다는 듯이 수원도호부 화산을 낙점

했다. 이렇게 1789년(정조13년) 영우원은 현륭원으로 격상돼 구 수원읍 자리 로 옮겼다. 1899년 사도세자는 장종으로 추존돼 무덤도 융릉이란 능호를 받았

다. 지금 수원은 그 때 이전한 주민들이 이전해 살면서 만들어진 도시다. 수원 화성 역시 정조와 사도세자의 부자지정이 녹아 있는 역사적인 문화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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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19대 임금 숙종의 아들이다.

주변에 세우는 석물 등도 새로 만들지 말고 ‘재활용’을 꼼꼼하게 지시하는 등

이복형 경종의 후계자로 왕위에 올라 약 52년 동안 재위했다.

부왕한테 홀대받은 사도… 아들이 추존 복위


REGION

영조와 사도, 친경례 날 후원서 나눈 부자지정 정상 전망대.

전망으로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배봉산

배봉산 동남쪽에서 용마산, 남한산을

HISTORY

영조 22년(1746년) 봄, 왕은 창경궁 후원 내농포에 벼를 심는 날 11살 사도세자 를 데리고 관풍각에 나아가 농사의 어려움을 알게 했다는 기록이 실록

에 있다. 이날 영조와 사도는 시를 나누며 부자지정을 쌓았다. 영조는 세조의 시를 보고 “가뭄을 걱정해 비가 내리기를 바라는 뜻이 있고 한편으론 짐에게 덕을 닦도록 면려 하는 뜻이 있다. 내 나이 50이 넘어 어린 아들에게 더 면려하란 말을 들으니 부끄럽고 또한 가상하 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그리고 농사를 권면하는 칙교를 내렸다. 이들이 서 있는 후원 농경지는 왕이 틈틈 이 농사의 흉을 가늠하는 곳이다. 조선의 왕들은 때때로 선농단에 올라 선농제를 지내고 적전에서 몸 소 소를 몰아 쟁기질을 하는 친경례를 했다. 동대문 밖 동교의 적전은 성북천에서부터 배봉산 아래까지 넓은 지역 이다. 친경을 통해 권농 애민정신을 영조에게 배웠던 사도세자는 부자의 정이 끊어지면서 자신이 돌봐야 할 땅, 적전에 묻혔다.

©국립문화재연구소

구 수원읍 자리로 옮겼다.

영우원은 현륭원으로 격상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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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

1.

새해를 맞이하는 동대문구 해맞이 떡국나눔 행사

주민들이 직접 만드는 떡국 한 그릇의 나눔

새해 새 각오로 해맞이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해 매년 구는 따뜻한 핫팩과 함께 ‘새해 복(福) 떡국 나눔’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특히, 동대문구의 떡국나눔 행사는 모든 과정 을 고되지만 주민이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만든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REGION

REPORT

‘새해 복(福) 떡국 나눔 행사’ 동대문구를 대표하는 배봉산은 108m 높이에 산세가 완만하여 남녀노소 누구 나 쉽게 오를 수 있고, 서울시립대학교와 아파트 등이 밀집한 도심에 위치해 접 근성이 뛰어나다. ‘2020년 대한민국 국토대전’에서 한국경관학회장상을 수상 할 만큼 &#39;도심 속 힐링 숲 배봉산&#39;은 동대문구에서 가장 의미 있는 녹지공간이 자 주민의 휴식공간이다. 특히 배봉산은 동서남북 사방으로 시야가 탁 트여 있 어 동쪽 산 너머로 떠오르는 해를 아무런 방해 없이 한눈에 오롯이 담을 수 있 어, 구는 매년 1월 1일 이곳 정상부 근린공원에서 ‘해맞이 행사’를 개최한다. 본 행사는 오전 7시 30분부터 시작되지만 이른 새벽부터 많은 사람들이 추위를

고 있다. 특히, 동대문구의 떡국나눔 행사는 모든 과정을 고되지만 주민이 하 나부터 열까지 직접 만든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전농동 주민들과 전농제2 동 주민센터 직원들이 함께하는 ‘전농2동 마을행사추진위원회’의 떡국 나눔행 사는 해맞이 행사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많은데, 덕분에 준비 과정도 만만치 않다. 뜨끈한 떡국 7,000인분을 현장에서 바로 조리·제공해야 하는 만큼 야외 행사장에 천막을 치고 주변 청소와 음식조리 도구 설치, 재료 준비를 하느 라 행사 전날 밤은 거의 뜬 눈으로 보내게 된다. 이렇듯 정성을 담아 만 들어진 떡국 나눔은 희망찬 새해의 첫날을 맞이하고자 배봉산을 찾 은 주민들이 추위를 녹일 수 있도록 돕는다. 주민들은 함께 떡국을 나눠먹고 덕담도 주고 받으며 어느새 추위는 모두 잊고 해맞이를 기

다린다. 구는 ‘새해 복(福) 떡국 나눔’을 “한 그릇의 떡국이 배봉산을 찾는 모든 구민에게 훈훈한 정을 나누고 새로운 한해의 희망과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해맞이 행사는 새해를 축하하는 식전행사(타악 연주)에 이어

타징으로 본격 시작된다. 희망찬 출발을 다짐하는 이색 공연과 함께 △새해 띠 별 캐릭터 인형과 함께하는 ‘포토존’ △새해 소망과 덕담 ‘캘리그래피 이벤트’ 등 다양한 부대행사는 배봉산을 찾는 주민들에게 색다른 새해 추억을 선물하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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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부터 추위를 뚫고

을 위해 매년 구는 따뜻한 핫팩과 함께 ‘새해 복(福) 떡국 나눔 행사’를 진행하

해맞이 떡국나눔행사에 모인 주민들.

뚫고 하나 둘 배봉산에 모여든다. 새해 새 각오로 해맞이를 준비하는 사람들


REGION

Tip. 동대문구 배봉산 이야기 배봉산은 사도세자의 묘소인 영우원이 있었 던 곳으로, 정조가 평생에 못 다한 효를 한다며

아무런 방해 없이 한눈에 담을 수 있다.

탁 트여 있어 동쪽 산 너머로 떠오르는 해를

는 산 &#39;이란 뜻으로 배봉산이라 불리게 됐다. ‘ 2018 대한민 국 공공디자인 대상’에서 진흥원장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바 있는 배봉산 둘레 길은 따라 걷다보면 숲을 한 바퀴 돌 수 있다. 총 코스는 4.5km로 배봉산숲속 도서관에서 출발해 서울시립대, 삼육서울병원, 휘경여자고등학교 뒤로 놓인 순환길을 걸으면 출발지인 배봉산숲속도서관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 둘레길은 무장애 숲길로 조성되어 휠체어를 타고 왔거나 유모차를 끌고 온 시민들도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데크로 길을 만들었다. 데크를 따라 숲을 천천히 돌아도 1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 해가 진 이후에도 산책할 수 있도록

LED 가로등을 설치하여 산뜻한 밤공기를 마시며 걸을 수도 있다. 한편 배봉산 초입에는 배봉산 숲속도서관이 있다. 숲과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이곳은 유리 창으로 이루어진 벽면이 배봉산의 나무 바람을 느끼며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해 떡국을 만들고 있는 자원봉사자들.

준다. 내부에 카페도 있어 간단하게 커피와 함께 간식을 즐기며 허기를 달래기 해맞이 떡국나눔행사에서

배봉산은 동서남북 사방으로 시야가

날마다 부친의 묘소를 향해 배례하게 되면서 ‘절하

도 좋다. 다만, 최근 수도권에 코로나19가 다시 기승을 부리면서 휴관 중이다.

출처: 동대문구청 (www.dd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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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ITY 서울시 탐방과 인터뷰를 통해 생산지는 아니지만 쌀이 가장 활발하게 가공되고 유통 되는 도시의 이야기를 다룬다. 세 번째 챕터에서는 서울이라는 도시적 차원에서 우리 의 주요한 식재료가 어떻게 가공되고 유통되는지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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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87


창덕궁과 창경궁 일대를 세밀하게 그린 동궐도(東闕圖)를 보면 창경궁 춘당지 자리에 열한 배미의 논자리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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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

CITY

조선 임금은 도시농업 선구자

궁궐 쌀농사는 ‘권농과 애민농본’ 정신 상징

경복궁·창경궁 등에 왕 친경 공간… 우리만의 독특한 궁궐문화

청의정은 ‘맑고 잔잔한 물결’이란 뜻을 담은 창덕궁 내 유일한 초정이다. 초정이란 기와지붕이 아닌 초가지붕을 의미한다. 청의정 앞에서는 해마다 모내기와 벼베기, 이엉만들기 등 쌀(벼)과 관련된 행사가 열린다. 조선시대 임금의 친경을 재현한다는 취지에서다. 결론부터 말하면 청의정과 친경은 관련이 없다. 그러나 이번 매거진의 주제가 ‘쌀’이고 주제와 연결된 도시농업 사례를 찾다보니 조선시대 궁궐 내 조성된 농경지와 친경례 행사까지 이르게 됐다. 궁내 농경지 조성과 친경례의 역사적 사실과 함께 현대에 이르러 재현된 청의정 벼농사 행사에 대해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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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

REPORT

청의정은 창덕궁 후원 가장 안쪽인 옥류천 권역에 속해 있는 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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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

CITY

조선시대 궁궐 내 조성된 농경지는 유교적 농본 중심

경복궁의 북쪽 영역이 임금의 중심 공간이 됐다. 이에

사상을 극명하게 드러낸 공간이다. 궁이란 특수한

따라 신무문 밖이 새로운 후원으로 조성된 것으로

공간을 강력한 권농의 공간으로 활용함으로써

보인다. 고종은 이곳에 작은 논을 만들어 놓고 한

애민농본 사상을 극대화시킨 것이다. 조선은 임진왜란

해 농사의 풍흉을 가늠했다고 한다. 이 터는 현재

전 경복궁 취로정과 서현정 앞의 논밭, 창덕궁과

청와대 일원으로 개발됐다. 옛 국왕이 몸소 쟁기를

창경궁 후원의 내농포,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 등에

밀며 권농과 풍년을 비는 모습을 현재의 대통령에게

궁내 농경지를 만들었다.

바란다면 무리일까. 이미지 정치 시대 재미난

궁궐 후원 농경지는 ‘농사직설’을 편찬하고 친경례와

퍼포먼스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기곡제로 대변되는 권농정책의 연장선상이다. 임금이 자신의 거주지인 궁궐 안에 한 해 농사의 풍흉을 가늠할 농지를 조성했다는 것은 백성들에게 상당한 정책효과가 있는 통치행위로도 해석된다.

조선 성종 친경 적극적으로 실천한 군주

여러 문헌에서 성종이 유달리 농사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실제 성종은 동대문 밖 적전 경복궁 향원정 권역이 옛 친경 농경지

친경례 행사를 가장 많이 한 조선 군주다. 성종실록에 보면 창덕궁과 창경궁 후원 친경에 관한 기사가

조선시대 후원 농경지는 왜란과 화재, 일제 강점기를

있다. ‘임금이 영사 신숙주 등에게 이르기를 “인군이

거치면서 큰 변화를 맞는다. 세종 연간에 만들어진

가색의 간난(艱難)을 알지 않을 수가 없다. 내 후원에

최초 궁내 농경지는 경복궁 후원 취로정 앞에

곡식을 심어 그것을 관찰해 보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만들어졌다. 이곳은 농사직설의 농법과 작물을

하니 신숙주가 대답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진실로

시험재배하기 위한 장소로 조성됐다. 임진왜란 전까지

지당합니다. 세종께서 경복궁 후원에 종자를 심고

일대에는 충순당, 서현정, 취로정, 접송정 등 용도를

세조로 하여금 관장하게 하니 세조께서 이따금

달리하는 전각들이 있었다. 경복궁 중건 때 이들

친히 수고 하셨습니다. 가색은 천하의 큰 이익인데

전각과 농경지가 함께 사라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근래에 농토를 개간한 것이 비록 많기는 하나, 백성이

연구에 따르면 현 경복궁에서 후원 농경지 위치는

그래도 먹고 살기 어려운 것은 힘써서 농사하지 않은

향원지 내부 공간으로 판단된다.

까닭입니다. 만약 후원에 곡식을 심고 경가(耕稼)의 괴로움을 관찰해 보시어 백성으로 하여금 주상의 향하는 뜻을 알게 하면 백성이 스스로 감화하여 농사에 다투어 힘쓸 것입니다.” (성종실록 3년 임진 2월1일

고종은 경복궁 신무문 밖에 작은 논 조성

무진)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 농경지는 경복궁 중건 시 만들어졌다. 경복궁이 1, 2차 화재로 인해 내전 일곽의 복구공사가 지연되면서 과거 후원지역이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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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

REPORT

동궐 열한 배미 논자리 춘당지에 수몰

하고 있다. 가장 큰 특징은 지붕이 초가라는 것과 사람이 의도적으로 만든 무논 안에 정자를 지어 다리를

창덕궁과 창경궁 일대를 세밀하게 그린

건너 정자로 들어가도록 했다는 점이다. 청의정 앞 작은

동궐도(東闕圖)를 보면 창경궁 춘당지 자리에 열한

논에서 매년 왕의 친경을 본 따 시민들이 참여하는

배미의 논자리가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 농경지는

모내기, 벼베기, 이엉만들기 등 퍼포먼스가 문화재청과

일제가 1907년에서 1909년 사이에 창경궁을

창덕궁관리소 주관으로 재연된다.

창경원으로 만들면서 사라지게 된다. 원래 춘당지는

창덕궁관리소는 ‘청의정은 바닥은 사각형이고

창덕궁 쪽 절벽인 춘당대와 짝을 이룬 연못이었다.

지붕은 둥글게 지어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우주관을

지금은 담장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이 나뉘어 있는데

보여주는 창덕궁 내 유일한 초정(草亭)으로서 조선시대

현재 소춘당지가 원래 옛날에 춘당지로 불린 곳이고

청의정 주변 약 20㎡의 작은 논에 벼를 심어 궁에

대춘당지는 일제가 내농포에 속한 11개 논을 하나의

있는 임금이 그해 농사의 풍흉을 가늠했다고 하며

연못으로 만들면서 생겨난 것이다.

해마다 모내기철이면 임금이 발을 벗고 몸소 모내기를

일제는 이곳에 놀잇배를 띄우고 주변 경관을

하고 가을이면 벼를 베 볏짚으로 초가지붕을 이었던

사쿠라(벚꽃)로 채웠다. 해방 후에도 온갖 놀이 시설이

장소’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동궐도의 청의정

들어섰고 1980년 대 들어서야 복원에 들어가 주변을

앞 지당 남쪽 변에 설치된 석수(石獸) 형상을 보면

버드나무와 소나무 등 전통 수목으로 바꿨다. 그러나

자라나 거북 형상을 하고 있는 데, 이는 신선사상에

여전히 내농포는 춘당지 속에 수몰 돼 있다. 언젠가는

따른 부재다. 우리 조경의 특징 중 하나인 삼신산과

춘당지도 복원돼 옛 성군의 애민정신이 녹아 있는

십장생, 연못 내 섬 설치는 모두 신선사상과 연계된

내농포 열 한 배미 논이 천하에 드러날 것을 기대한다.

것으로 보고 있다. 자라상은 동해에서 삼신산을 등에

한편 궁궐 후원에 논과 밭을 조성하고 군주가 친경의

업고 산다는 큰 자라를 상징하는 것으로 신선사상에

모습을 보인 역사는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기 어려운

의한 산신의 강림을 기다리는 천일합일을 의미한다.

사례다. 이는 조선의 독자적인 궁궐문화로 애민농본의

거북은 실제로 존재하는 신령스러운 동물로 옛

전형이다. 아울러 이미 오래전부터 궁궐에서 왕실의

사람들은 십장생의 하나로 여겼다. 지금은 청의정 지당

주도로 다양한 농업 활동이 전개됐다는 점은 현대

규모도 축소되고 석수도 사라졌다. 그러나 석수가

도시농업의 효시라고도 할 수 있다.

있었던 만큼은 신선사상이 적용된 조경이란 해석이 지배적이다. 또 다른 설명에서는 청의당을 ‘옥류천 지역에는 다섯 채의 정자가 있다. 청의정이라는 모정(茅亭)은 네모의 못 안에 있는 네모의 섬에

청의정은 논이 아닌 신선사상 반영한 연못

세워졌으며 낚시질을 하면서 즐기는 곳’이라고 적고 있다. 이는 낚시라는 도교적 색채를 의미하는 동시에

청의정은 창덕궁 후원 가장 안쪽인 옥류천 권역에

청의정 주변이 물로 채워진 못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속해 있는 정자다. ‘궁궐지(宮闕志)’에 의하면 ‘청의정은

왕이 친경을 할 만한 농지가 아니란 것으로 해석된다.

태극정 서쪽에 있는데 물을 저장하여 못을 만들고 못

따라서 창의정에서 벌어지는 모내기 퍼포먼스는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었다. 인조 14년 병자에 세웠다’고

창경궁 내농포를 일부라도 복원해서 그곳에서

기록돼 있다. 청의정이 다른 궁궐 정자와는 다른 모습을

시연하는 것이 합당하단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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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

사진 출처: 정책브리핑 (http://www.korea.kr)

CITY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가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과 함께 창덕궁 옥류천 청의정에서 모내기 행사를 하고 있다. 올해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관람객 없이 진행됐다.

동궐도의 청의정 앞 지당 남쪽 변에 설치된 석수(石獸) 형상을 보면 자라나 거북 형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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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정책브리핑

(http://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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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

CITY

삼해소주가 탐방

‘서울의 술’ 삼해주 명맥을 잇는 곳

세(三) 돼지(亥)날 덧술 하는 삼양주(酒)… 쌀 사용 많아 고가

예부터 삼해주는 서울 술로 공덕동에서 빚은 것을 최고로 쳤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소주(燒酒)는 공덕(孔德) 옹막(甕幕)에서 삼해주를 빚어내는 술독에서 빚어진 천백 독의 술이 가장 이름이 있다’고 했다. 공덕은 지금의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으로 과거 옹기를 굽던 가마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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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

REPORT

삼해주(三亥酒)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서울 지역 대표

각각 무형문화재로 지정했지만 지정번호는 같은 8호다.

가양주이자 시양주, 삼양주다. 가양주(家釀酒)란 집에서

약주는 권희자 씨가 기능을 보유하고 있고 소주는 모친

빚은 술이란 의미고 시양주는 담는 시기가 정해진

이동복 여사에 이어 김 명인이 지정돼 있다. 김 명인은

세시주란 뜻이다. 정월 첫 해일(亥日, 돼지날)에 시작해

농림축산식품부의 전통식품명인(69호)으로도 지정된

매월 해일마다 세 번에 걸쳐 빚는다고 해서 삼양주이자

삼해주 장인이다. 김 명인은 삼해주와 어떻게 인연을

삼해주란 이름이 붙었다. 삼해주는 특정 브랜드 명이

맺었는지 정리해 본다.

아니다. 예부터 삼해주는 서울 술로 공덕동에서 빚은

것을 최고로 쳤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소주(燒酒)는

인물에 대한 정확한 고증은 없다. 다만 증조부인

김 명인 집안에서 최초로 삼해주를 빚은 시기와

공덕(孔德) 옹막(甕幕)에서 삼해주를 빚어내는 술독에서

김윤환이 조선 말 호조참판을 지낸 집안인 점을

빚어진 천백 독의 술이 가장 이름이 있다’고 했다.

감안하면 제사와 손님 접대가 많았고 이를 위해

공덕은 지금의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으로 과거 옹기를

가양주를 빚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집안 삼해주에

굽던 가마터가 있었다.

대한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서울시무형문화재

지정보고서’가 있다. 이 보고서는 김 명인의 증조모인

당시 삼해주는 정월에 첫 술을 빚었고 한

겨울에는 가마를 사용하지 않아 이곳을 이용한 것으로

정부인 이 씨부터 모친인 이동복 여사(삼해주

보인다. 또 지방서 올라오는 세곡선이 마포에 쌀을

명예기능보유자)까지 전승계보를 기록했다.

부려 놓기 때문에 재료 확보가 용이한 점도 한몫했을

보고서에 따르면 1927년 충남 한산에서 출생한 이

것으로 추정된다. ‘천 백독’이라고 묘사 할 만큼의 많은

여사는 17세 때 보령 남포의 김영옥에게 출가했다.

양의 삼해주를 빚어 약주와 소주로 만들었고 그만큼

당시 김영옥 가문은 조부 김윤환이 호조참판을

수요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내 참판댁이라 불렀다. 따라서 평시에 찾아오는 손님들이 빈번해 항시 술을 담갔으며 그런 이유로 김 씨 가문으로 출가한 후 시할머니와 시어머니로부터 음식과 술 빚기를 배웠다고 한다. 서울의 삼해주가

삼해소주 김택상 명인이 명맥 이어가

보령의 김 참판댁에서 담게 된 이유는 당시 참판공인 김윤환이 을사늑약 이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남포에

우리 쌀과 관련된 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삼해주가

터를 잡았기 때문이다. 이 때 삼해주도 정부인을 통해

생각나 관련 기능보유자인 김택상 명인을 만나기 위해

서울에서 남포로 내려왔으리라 추측된다.

광복절에 삼해소주가를 찾았다. 그 와는 지난 2017년

남포에 거주하던 이 여사는 자녀 교육을 위해서

겨울 삼해주 강의와 소줏고리 증류 시연회에서 인연을

상경해 노량진에 거주하면서 삼해주를 빚었으며

맺은 바 있다.

1993년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8호 삼해주(소주)

기능 보유자로 지정됐다. 당시 무형문화재

서울시는 문화재청과 별도로 시 무형문화재를

지정하고 있다. 2020년 4월 현재 52개 종목. 보유자

지정조사보고서를 보면 ‘민속주인 삼해주는 양조

50명, 명예보유자 8명, 보유단체는 13곳을 지정했다.

장소, 시설, 사용기구, 양조용수의 수질 및 보존상태,

이 중 전통주와 관련해서는 서울송설주(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의 전수 상태 등이 매우 만족할만큼 잘

2호), 삼해주(8호), 향온주(9호) 등 3개 종목에 4명의

되어 있었으며, 특히 사용하고 있는 각종 원재료와

기능보유자가 있다. 삼해주의 경우 소주와 약주로 나눠

부재료가 독특할 뿐만 아니라 주질을 관능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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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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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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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


REPORT

CITY

시음 평가한 결과 주질의 평가 대상이 되는 색, 향,

병행했지만 결국 그만두고 삼해주 전승에 몰두하게

맛 및 주도가 매우 독특하고 고고하여 우리나라

된다. 그 결과 2003년 4월 정식으로 삼해주(소주)

전통 민속주로서의 주질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고

전수교육조교로 지정된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판단됨’이라고 적고 있다.

삼해주 보급 활성화를 위해 팔을 걷어 부친다.

어머니 이어 삼해주 무형문화재 지정

북촌에 있는 삼해주 공방 ‘삼해소주가’

김 명인은 1951년 충남 보령군 남포에서 6형제 중

김 명인은 먼저 북촌에 한옥을 임대해 공방을 운영하고

3남으로 출생했다. 모친은 삼해주를 빚고 부친은

관광객을 대상으로 삼해주 시음과 체험행사를 열었다.

양조업을 했다. 6형제 모두 서울서 대학 교육을

또 아카데미 과정을 개설해 일반인들이 가양주를 쉽게

시킬 정도로 교육열이 높았고 경제적으로 유복한

접하고 만들 수 있게 했다. 김 명인은 그간의 공로를

집안이었다. 삼해주는 김 명인 집안에서 대대로

인정받아 2017년 기능보유자로 지정됐고 이 여사는

내려오는 술이다. 술을 만드는 부모 일손을 도우면서

명예기능보유자로 올라섰다.

자연스럽게 술 빚는 법을 어깨너머로 배우고 익히며

성장했다. 중학교 진학을 위해 형제들이 거주하는 서울

밑술을 만들고 12일이나 매월 초 돌아오는 해일에

노량진으로 오게 됐다. 모친도 아들들 뒷바라지를 위해

덧술을 3번 담가 삼해주라 했다. 봄철에 마시는 술이라

상경했고 서울에서 삼해주 빚기를 이어갔다.

춘주 또는 삼양주라 부르기도 했다. 삼해주는 여러

대부분의 가양주가 그렇듯 삼해주도 집안 며느리를

문헌을 통해 고려시대부터 제조하기 시작한 것으로

통해 제법이 전해졌다. 그러나 1980년대 말 김

알려졌다. 원래는 궁에서 행사나 의식 때 사용한 것을

명인 집안 삼해주는 며느리로 전수되지 못했다.

사대부 집안 가양주로 전파됐다. 다른 곡주에 비해

대신 김 명인이 이어받았다. 이에 대해 김 명인은

변하지 않아 조선시대에는 일반 서민들도 널리 빚어

“양조장에서는 아버지를 비롯해서 대부분 남자들이

마셨다고 한다. 삼해주는 지방보다 서울에서 더

일을 합니다. 많은 양을 빚기 때문에 체력적으로

활성화돼서 결국 서울 술로 자리 잡았다. 쌀을 3차까지

힘쓰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그러고 보면 형수님들이

덧술을 하는 데 막대한 양의 쌀이 필요함에 따라 값이

아닌 힘 잘 쓰는 남자인 제가 물려받았기 때문에

비쌌다. 그래서 지방보다는 서울 사대부 위주로 인기가

지금까지 유지되지 않았나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역성을 갖는 이유가 금전적

되짚어보면 며느리들의 전수가 여의치 않았음을

이유 때문이라는 독특한 특성을 갖는 술이다.

알 수 있다. 1980년대 말 이동복 여사의 삼해주를

계승하려는 며느리가 없어 전승이 끊길 위기에 처하자

‘추관지(秋官志)’에는 ‘형조판서 김동필이 삼해주의

김 명인이 자원한 것이다. 1993년에 삼해주가 서울시

인기가 높아짐에 따라 서울로 들어오는 쌀이 삼해주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이 여사는 삼해주(소주)

만드는 데로 쏠려 들어가니, 이를 막아달라고

기능보유자, 김 명인은 전수장학생이 됐다.

진언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쌀이 많이 쓰일 뿐

아니라 술 인기도 좋았던 모양이다.

이때 까지만도 김 명인은 직장을 다니면서

김 명인에 따르면 삼해주는 정월 첫 해일에

형조좌랑을 지낸 박일원이 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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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

INTERVIEW

동네, 정미소 황의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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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동네정미소를 오픈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CITY

동네정미소는 농민들과 각 지역 정미소, 미곡종합처리장과의 협력을 통해 쌀 품종 고유의

시작은 단순했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 중에 가장

맛을 느낄 수 있는 단일품종만을 유통하고 있습니다.

자주, 많이 먹는 것이 밥인데 이걸 좀 더 맛있게 먹을

여기에 우리나라 전래의 토종쌀은 경기도 고양시의

수는 없을까 하는 궁리가 시작이었습니다. 그렇게

우보농장을 대표로 전국의 토종쌀 농사를 짓는

쌀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고 공부하게 되었는데

농민들과 협업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필요한 정보를 거의 얻을 수 없었습니다. 쌀에 대한 대부분의 정보는 볍씨 파종, 물관리, 병충해 관리, 수확 등등 농사에 대한 정보 위주여서 도시의

한국의 쌀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기 위해서

소비자들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전문적인 농업용어여서 이해하기도 너무 어려운 것뿐이더군요. 그래서 쌀에 대한 정보를 좀 더

공동체의 축적된 경험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쉽게 풀어보기로 했습니다. 소비자 입장에서 꼭

모색해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필요한 쌀의 품종별 맛과 향에 대한 정보나, 쌀을

옛날에는 마을이 모내기에서 추수까지 함께해 모든

더 맛있게 즐길 수 있는 방법 같은 것들을 정리하기

사람이 경험하고 공감할 수 있는 중요한 문화가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예전에 마을에 있었던

있었지요. 하지만 산업사회에서는 농촌과 도시가

방앗간, 정미소 같이 먹거리를 공유하던 공간에서

분리되고, 도시에서는 개인과 개인이 분리되어

경험하도록 해보자는 생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

있으니 이러한 문화가 유지되기 힘들어진 것이

동네정미소를 오픈하게 된 계기입니다.

아닐까 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도시에 사니 이 문제를 어떻게 할까 싶은데, 외국의 사례로 ‘푸드 에셈블리’ 운동 같은 것도 고민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동네정미소는 ‘골목길 쌀축제’ 를 매년

다양한 품종의 쌀을 판매하고 계신데

해오고 있는데 호응이 좋습니다. 가을마다 마을의

유통구조가 궁금합니다.

골목에서 햅쌀이 나오는 것을 축하하고 떡메치기도 하며 함께 즐기고 노는 행사인데, 참여하시는 분들이

현재 일반적인 유통에서 쌀은 단일품종과 혼합품종

너무 즐거워하십니다. 이처럼 작지만, 쌀과 관련된

2가지로 분류되어 판매됩니다. 단일품종은 말

경험들이 곳곳에서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대로 한가지 품종의 쌀을 도정해 포장한 것이고, 혼합품종은 두가지 이상 품종의 쌀이 섞여 있는 것입니다. 단일품종의 유통 비율은 약 36%, 혼합품종이 오히려 주를 이루는데 약 64%에

다른 지역에서도 찾아오시는 분들이 계신가요?

달합니다. 단일품종은 쌀 품종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의 맛과 향, 식감 등이 살아 있지만 두 가지

오픈하고부터 많은 분들이 방문을 해주셔서 정말

이상 섞게 되면 아무래도 품종 고유의 특징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일을 하시는

사라지게 됩니다.

분들이 찾아주셨습니다. 대안학교에서 학생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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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

INTERVIEW

농사지은 토종벼가 너무 소량이어서 도정할 곳을

동네정미소를 운영하면서 겪었던 어려움이

찾지 못하시다가 저희 매장 오픈 소식을 듣고

무엇인가요?

벼를 도정하기 위해 찾아주시기도 했고, 고향에서 부모님이 농사지어 보내주신 쌀이 현미 상태여서 다

처음에는 전국의 쌀을 품종별로 수급하는 것이

드시지 못하고 가지고만 계시다가 백미로 재정미하기

힘들었습니다. 어떤 지역에서 어떤 품종의 쌀들이

위해 택시를 타고 찾아오신 분도 기억에 남습니다.

자라고 있는지 잘 모르고, 이것을 품종별로 가져와

비용으로 따지면 차비가 더 들은 것이지만 농사지은

도정하고 특징을 알아내는 데 꽤 큰 노력이 있었지요.

부모님의 정성과 고마움을 생각해 찾아주신 거라는

이후에는 다들 아시는 자영업자, 소상공인들이

생각이 들었습니다.

느끼는 어려움이 저희에게도 다가왔습니다. 매장운영,

또 공간을 견학하기 위해 찾아주시는

고객관리, 인건비, 임대료 등등이죠, 또 지금의 코로나

분들이 계셨는데요. 처음에는 광주광역시의

19 같은 예상치 못한 어려움도 있습니다.

‘청소년삶디자인센터’에서 방문해 주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청소년들과 다양한 활동을 하시다가 텃밭 농사, 텃논에서 벼농사 경험을 좀 더 재미있게 확장할 방안을 고민하시다가 찾아주셨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시거나 추천해주고 싶은

도시재생지역의 여러 활동가분들도 찾아주셨고,

쌀 품종이 있을까요?

지역에서 쌀이나 곡물을 이용한 공간을 계획하시는 분들도 많이 찾아주셨습니다.

먼저 본인이 드시는 쌀 포장을 보시고 혼합인지 단일품종인지를 확인해 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또 보통 쌀을 구매하실 때 지역브랜드명을 따지는 경우가 더 많은데 사실 같은 브랜드라도 여러 개의

지역 커뮤니티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신대

품종의 쌀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자신의 입맛에

이유가 있나요?

맞는 쌀을 찾아가는 것이죠. 전통적인 식사로 국이나 찌개, 반찬으로 구성된 식탁을 좋아하신다면 ‘추청’,

옛날의 방앗간, 정미소가 마을의 소통공간으로

‘참드림’, ‘영호진미’를, 덮밥이나 볶음밥 같은 소스와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곡물을 도정하거나

같이 먹는 밥을 선호하신다면 ‘신동진’, ‘오대’, ‘맛드림’

가루를 내거나 하는 기능도 있었지만, 농사에 대한

을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찰기가 강한 식감을

정보도 교환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듣고,

좋아하신다면 ‘진상’ 이나 ‘백진주’ 가 입맛에 맞으실

서로의 안부도 묻는 장소였습니다. 동네정미소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가을 겨울에는

처음 준비할 때부터 이런 공간을 꿈꿔왔습니다.

‘삼광’’, 봄 여름에는 ‘신동진’을 자주 먹습니다.

그래서 ‘골목 쌀축제’나 ‘밥상 마실’, 막걸리 만들기 체험 등 조금씩이지만 꾸준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또 지역의 행사나 지역화페, 사회적경제 활동에도 함께 참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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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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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

INTERVIEW

도전하고 싶은 분야나 협업하고 싶은 분야가

도시와 농촌이 서로 이해하고 교류하는 실질적인

있나요?

도농상생으로 발전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제조업에 관심이 많습니다. 특히 쌀과 여러 곡물을 이용해 가공하는 부분이 도전해 보고 싶고, 또 협업해 보고 싶은 분야입니다. 보통 6차 산업 하면 1차 농업생산 + 2차 가공 +

코로나 사태로 오프라인의 비중이 줄어들었는데

3차 서비스 = 6차산업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앞으로 동네정미소의 방향성이나 계획이 있을까요?

이것을 도시와 농촌이 서로의 역할을 나눠서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누룽지, 참기름, 수제

기존에는 매장을 중심으로 품종별 쌀도 판매하고

씨리얼이나 그레놀라, 그리고 여러가지 밀키트 등

식사도 즐길수 있도록하고 ‘두런두런 밥상마실’

다양한 농산물 이용한 가공품을 도시에 존재하는

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여러 사업단, 마을기업, 사회적 기업들이 2차로

자리메김하고 있었는데 코로나 이후로는 이런게 참

가공해 생산농가와 가공조직이 공동으로 3차

어렵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오프라인 매장은 우리가

서비스 진행하는 것입니다. 다양한 조직과 협업을

전달하려는 가치인 쌀의 다양한 모습을 경험해

한다면 아주 좋은 아이디어들이 나올 수 있으리라

볼수 있는 곳으로 자리메김하고 비즈니스의 영역은

기대됩니다. 동네정미소가 그 연결고리가 될 수

온라인을 중심으로 하게 될것입니다. 이를 위해 더욱

있으면 좋겠습니다.

더 다양한 쌀과 곡물, 그리고 이를 소비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한 콘텐츠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도시농업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인데 앞으로의 농업은 어떤 형태로 변화할까요?

지금도 빠른 변화를 보여주고 있지만, 먹거리의 생산이라는 기본적인 기능 외에 다양한 사회적 가치로 농업의 범위나 내용은 확대될 것입니다. 특히 도시농업은 지금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생태환경교육이 더욱 강화될 것이고 텃밭, 공유부엌이 연계된 먹거리 공동체도 더욱 확장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녹색커튼이나 옥상텃밭이 가지는 환경문제에 대응하는 방향으로도 꽤 성과를 거두고 있으니 이런 분야 역시 주목해야 합니다. 또 도시농업을 경험한 도시농부들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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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동네정미소


INTERVIEW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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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RIBUTION

김경규 전 농촌진흥청장 기고문

“우리 땅에서 나는 우리 쌀 사랑해주세요”

전통적으로 우리 농업에 있어 식량산업은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쌀 산업은 국가의 지속적인 투자에 힘입어 자급기반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 외 밀·보리·콩·수수 등은 작은 재배면적이 말해주듯 상당히 위축돼 있습니다. 1970년대 녹색혁명의 주인공 ‘통일벼’는 우리나라 쌀 자급자족 달성의 일등공신이었지만 밥맛은 떨어졌습니다. 1969년 도입된

‘추청(아키바레)’이 틈새를 파고 들어와 이른바 ‘밥맛 좋은 쌀’이란 인식이 생겼고, 이후 오랜 기간 지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현재,

농촌진흥청을 비롯한 농촌 진흥기관들이 지역의 토양과 기후에 맞춰 개발한 품질 좋은 쌀 품종이 많이 있습니다. 외래품종보다 맛있는 국산품종을 소개합니다. 농촌진흥청에서는 2003년부터 최고품질 벼 품종을 개발해 농가에 보급해 오고 있습니다.

2003년 삼광을 시작으로 운광, 고품, 호품, 칠보, 하이아미, 진수미, 영호진미, 미품, 수광, 대보, 현품, 해품, 해담쌀, 청품, 진광, 예찬 그리고 해들까지

18품종에 이릅니다. 이들 최고품질 벼 품종은 밥맛이 추청보다 좋아야 합니다. 내재해성(병해충저항성)도 우수하여 병충해에 약하고 잘 쓰러져 재배하기 어려운 외래품종과 달리 재배하기 쉽고 수량도 많습니다. 이 때문에

외래품종과 비교했을 때 쌀 외관과 도정특성은 비슷하지만, 밥맛과 내재해성이 앞섭니다. 최고품질 벼 재배면적은 2019년 기준 18만1013ha 로, 전체의 24.8%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2027 년에는 40% 까지 끌어올릴 계획입니다. 그리고 최근 외래품종을 국산품종으로 대체하기 위해 지방자치단체·농협

미곡종합처리장(RPC)·민간육종업체 등과 협력해 지역별로 좋은 품질의 쌀

품종을 선발·보급하고 있습니다. 2019년 기준 추청(5만 2527ha) · 고시히카리

(1만1266ha) · 히토메보레(1846ha) 등 외래품종의 재배면적은 6만5974ha입니다. 국내 전체 벼 재배면적(72만 9814ha)의 약 9%가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농촌진흥청에서는 이 면적을 2024년까지 상업적으로 의미 없는 수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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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규 전 청장

1964년 경기도 화성 출생 경동고, 고려대 경영학과 졸업


CONTRIBUTION

RICE

줄여나갈 계획입니다. 이를 위해 추청은 국산품종 삼광, 알찬미, 참드림, 진수미, 새일미, 골든퀸3호, 진상 등으로 대체 중입니다. 고시히카리와 히토메보레는 해들, 진광, 해담쌀, 맛드림, 새봉황 등으로 바꿔나가고 있습니다. 이들 품종 중 참드림과 맛드림은 농촌진흥청이 경기도가 함께, 그리고 알찬미와 해들은 이천시와 함께 육성한 품종입니다. 추청과 고시히카리가 경기지역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만큼 이들 품종으로 경기지역을 우선 대체하고 다른 지역으로 확대할 계획입니다. 민간육종업체에서 개발한 골든퀸3호와 진상도 외래품종을 대체하는데 한몫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농협RPC와 연계해 외래품종을 대체할 최고품질 쌀 생산·유통 거점단지도 조성합니다. ’20년 11개소 2700ha, ’21년 21개소 4500ha, ’22년 31개소 6500ha 등 개소수와 면적을 매년 늘려나갈 계획입니다. 최근 이러한 노력으로 외래품종 재배면적은 매년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추청은

(’17)6만9064ha → (’18)6만0005ha → (’19)5만3911ha로 줄어들었습니다. 올해는 지난해보다 약 7000ha 줄어든 4만6000ha 정도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농촌진흥에서는 앞으로도 고품질의 밥맛 좋은 우리 쌀 품종 개발 · 보급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리 땅에서 나는 우리 쌀 많이 사랑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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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골목」 Local Culture Magazine 2020 Vol.3

쌀 R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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