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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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간추린 이스라엘 역사 유대인의 고향은 이스라엘 땅(에레츠 이스라엘)이다. 오랜 역사의 중요한 부분이 이곳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가운데 초기 몇 천 년의 역사는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그들의 땅에서 쫓겨났던 수 세기 동안에도 문화적 종교적 민족적 동질성을 유지하며 그들의 명맥을 이어갔다. 결국 1948년 이스라 엘 국가의 성립으로 2000년 전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땅을 다시 찾게 되었다. 1. 성서시대 2. 외국의 지배 3. 현대 이스라엘 4. 역사 연표
1. 성서시대 유대인의 역사는 약 4000년 전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메소포타미 아에서 발굴된 기원전 2000년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기록으로 그들의 유목생활의 양상이 창세기에 기록 된 것과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여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민족의 시조로, 또한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신앙의 종으로 부름 받았는지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기근이 나라를 덮치자 야곱과 열 두 명의 아들과 그 가족들은 이집트의 나일강 삼각주 동쪽 지방인 고센에 정착했다. 그들의 후 손은 노예로 전락하여 강제 노역을 했다. ■ 출애굽과 정착 400년 동안의 노예 생활 후에 이스라엘은 모세에 의해 자유를 찾았다. 성서의 기록에 의하면 모세는 하나 님께 선택 받아 그의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그들의 조상에게 약속한 땅 (에레츠 이스라엘)으로 인도(기원 전 12~13세기)했다고 한다. 출애굽(기원전 1300년)은 유대인들의 국가에 대한 기억 속에 유일신에 대한 신념을 담은 위대한 흔적을 남겼으며 자유와 독립의 상징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해마다 유월절과 율법을 받은 날, 그리고 광야의 방황을 기념하는 날을 경축하고 있다. 다음 두 세기 동안 이스라엘인들은 그 땅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유목 생활을 청산하고, 농민과 장인으로서 경제적, 사회적으로 다소 기반을 잡았다.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가 마감된 것은 사람들이‘사사’로 알려진 지도자들의 전쟁의 시대가 시작 되면서 부터였다. 사사들은 신앙심을 고취시키는 능력과 함께 정치적, 군사적으로 역량을 발휘하여 이러한 지위 로 추대되었으며, 적을 정복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기간 동안만 헌신하였다. 이어서 블레셋(해 안에 터를 잡은 소아시아 민족)의 위협에 직면하자 부족들 간의 통합과 영구적이고 세습적인 왕권의 지위 를 가진 지도자를 갈망하게 되었다. ■ 왕국 시대 (기원전 1020년) 초대 왕 사울은 흐트러진 부족 시대와, 그의 후계자 다윗에 의해 정비된 완전한 군주 시대를 잇는 다리 역 할을 하였다. 다윗 왕 (기원전 1004~965년경)은 블레셋 정복을 끝으로 군사 원정에 성공하고 주위 나라들 과 우호 동맹을 조직하여 이스라엘을 강대국의 대열에 올려놓았다. 이어서 그의 왕권은 이집트 변경과 홍 해에서 유프라테스 강 유역까지 확장되었다. 대내적으로는 새로운 행정 제도를 확립했으며,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고 12부족을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하여 예루살렘과 국왕이 국민 생활의 중심이 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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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 (기원전 965~930년경)은 부왕 다윗이 세운 제국을 계승하여 그의 능력을 왕국의 부흥에 쏟았 다. 정략 결혼을 하여 힘을 증강한 후 이웃 나라들과 조약을 체결하여 왕국 내부의 평정을 유지하고 당시 의 열강들과 평등한 관계를 유지했다. 솔로몬은 외국과의 통상을 강화하고 동을 채광, 철을 제련하는 등 주요 사업을 발달시켜 경제를 부흥 시켰다. 솔로몬 왕은 전략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도시들을 요새화하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 솔로몬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왕궁과 예루살렘 신전의 건축인데, 신전은 국민의 국가적 종교의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 왕국의 분열 솔로몬이 죽자(기원전 930년) 반란이 일어나 북쪽의 지파들이 떨어져나가 나라는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 과 남쪽의 유다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10개의 이스라엘 지파의 영토로 둘러싸인 북 이스라엘 왕국은 수도 를 사마리아로 정하고 19대 왕까지 200년 동안 이어졌다. 남쪽의 유다와 베냐민 지파로 구성된 유다 왕국 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고 다윗의 대를 이어 같은 수의 왕에 의해 350년 동안 이어졌다. 앗시리아의 확장과 바빌로니아 제국의 영토확장으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차례로 정복되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앗시리아 제국에게 점령되었고(기원전 722년), 백성들은 유배당하거나 노예가 되었다. 그로부터 백년 후 에 바빌로니아는 유다 왕국을 점령하고 신전을 파괴하였으며 (기원전 586년), 이스라엘 백성의 대부분은 유배당하였다. ■ 바벨론 유수 (기원전 586 ~ 538년) 바빌로니아의 정복으로 제 1 유대왕국은 망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정복이 유대인들의 땅에 대한 애착은 끊지 못했다. 그들은 바빌론 강가에 앉아 밤낮으로 고향을 기억하자고 언약했다.“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말라 버릴 것이다. 네 생각 내 기억에서 잊혀진다면, 내 만일 너보다 좋아하는 다 른 것이 있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 것이다.”(시편 137장 5~6절) 1차 성전 파괴(기원전586년)후에 바 벨론의 유수가 시작되었다. 그곳에서 독특한 이상의 체계와 이스라엘 땅 밖에서 유대교의 체계가 발전하 기 시작하여 궁극적으로 민족의 생존과 정신적인 동질성이 확고해 지고 한 국가로서 민족의 장래를 보장 하였다. 2. 외국의 지배 ■ 페르시아와 그리스 시대 (기원전 538 ~ 142년)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왕 고레스의 칙령에 따라 일부 유태인들은 그들의 땅으로 돌아왔다. 제1차 귀환 때(기원전 538년) 이들은 다윗의 직계 후손인 스룹바벨에게 인도되었으며, 1세기가 채 못되어 행해 진 제2차 귀환은 에스라에 의해 인도되었다. 그 후 4세기가 넘도록 유태인들은 페르시아 제국 (기원전 538 ~ 333년)과 후의 그리스 시대 (톨레미와 셀레우코스 왕국 시대)의 대군주(기원전 332 ~ 142년) 밑에 여러 가지 계급으로 나뉘어 자치하는 법을 배웠다. 페르시아 제국 안에서는 유다는 예루살렘이 중심인 국 가가 되고 대제사장과 장로 회의에 지도력을 위임하였다. 그리스 시대를 거치는 동안 시리아에 본거지를 둔 셀레우코스 왕은 그의 백성들에게 그리스 문화와 관습을 강요하기 위해 유태교 행사를 금지하고 성전 을 모독하며, 제우스 신을 믿을 것을 강요하였다. 그 반발로 거대한 항거 운동이 일어나고(기원전 166년) 강한 전투력이 생겼다. 이 항거 운동은 처음에 하스모니안 왕조의 성직자인 마타티아스에 의해 주도되었 고, 그가 죽자 그의 아들 유다(마카비)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그는 셀레우스코군에 대항하여 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며 성전을 정화하였다(기원전 164년). 이 성전 탈환을 매년 하누카 축제 동안 경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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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스모니안 왕조 (기원전 142 ~ 63년) 하스모니안의 승리가 잇따르자 셀레우코스는 유다 왕국(이때 이스라엘 땅으로 불리었다) 에게 정치적, 종교적인 자치권을 부여하였고(기원전 147년), 셀레우코스 왕국의 붕괴로(기원전 129년)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졌다. 하스모니안 왕들은 세습하여 왕이 되었는데, 솔로몬 시대의 영토에 버금가는 영토를 차지하 였다. 약 80년간 지속된 하스모니안 왕조 시대동안 유태인의 생활은 풍요로웠다. ■ 로마의 지배 (기원전 63 ~ 서기 313년) 로마인들은 그 지역의 강한 지도자로서 셀레우코스를 그곳의 지도자로 대체하고 하스모니안 왕 히르카 누스 2세에게 다마스쿠스의 로마 총통의 지배 아래 제한적인 왕권을 부여하였다. 유태인들은 새로운 정 부를 선뜻 받아들이지 않고 자주 반란을 일으켰다. 이전의 하스모니안 왕조의 영광을 회복하려는 마지막 노력이 마타티아스 안티고누스에 의해 시도되었으나 로마에게 패하고 사망(기원전 40년)함으로써 이 땅 은 로마 제국에 예속된 한 주가 되었다. 기원전 37년에 로마는 히르카누스 2세 고문의 아들이자 히르카누 스 2세의 딸과 혼인한 헤롯을 유다왕에 임명하였다. 헤롯은 외교에서는 아무런 힘을 갖지 못했지만 국내 일에 대해서는 대부분 무제한적인 자치권을 부여 받았으며, 로마제국의 동부에서 가장 강력한 왕 중의 하 나였다. 그레코로만 문화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헤롯은 거대한 건축 계획을 세워 가이사랴와 세바스테스 의 도시들, 헤로디움과 마사다의 요새를 세웠고, 당시의 가장 웅장한 건축물인 성전을 재건했다. 이러한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헤롯은 유태 백성들의 신임과 지지를 받지 못했다. 헤롯이 사망한 후 (기원전4 년), 헤롯 왕조에 대한 대중들의 반대로 인해 그의 후계자들의 권위는 점차 소멸되었고 유다는 로마가 직 접 지배하게 되었다(6년) 점점 가혹해지고 이성을 잃은 로마의 지배를 견디다 못한 유태인들은 로마 황제 네로의 지배 후기에는 항거 운동을 시작했다. 그 항거 운동은 예루살렘의 완전한 함락(70년)과 유다의 마 지막 요새였던 마사다의 붕괴로 막을 내렸다. 로마군의 대장 티투스에 의해 함락된(70년) 예루살렘과 성 전은 유태 민족에게 중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마지막의 짧은 유대인 군주 시대는 시몬 바르 코크바의 반 란(132년) 후에 이어졌는데, 이 기간 동안 유다와 예루살렘이 수복되었다. 그러나 로마군의 막강한 힘 앞 에서는 역부족이었다. 성전이 파괴되고 예루살렘이 모두 불타버렸지만, 유태인들과 유태정신은 로마와 만남으로써 살아 남았다. 작은 유대인 공동체는 점차 힘을 회복하고 망명에서 돌아오면서 때때로 힘을 길 렀다. 할라카(종교법)는 유태인들을 맺어주는 공통의 끈으로 대대로 전해 내려왔다. ■ 비잔틴의 지배 (313년 ~ 636년) 4세기 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313년)과 비잔틴 제국 건설에 이어 이스라엘 땅은 범 기독교 의 나라가 되었다. 예루살렘, 베들레헴, 갈릴리 등 기독교의 성지에는 교회가 세워졌으며 도처에 수도원 이 설립되었다. 유태인들은 이전에 가졌던 자치권을 빼앗기고 공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권리를 상실 했으며, 단지 일 년 중 하루만 성전 파괴를 애도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었다. 614년 페르시아 가 침입해 오자 유태인들은 석방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이를 지지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페르시아 는 예루살렘 정부를 승인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3년밖에 지탱되지 않았다. 곧 이어 비잔틴 군은 예루살렘 에 재 입성하여(629년) 다시 유대인들을 축출하였다. ■ 아랍의 지배 (636년 ~ 1099년) 무하마드가 죽은(632년) 지 4년 후부터 아랍의 지배가 4세기 이상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다마스쿠스에서 다음에는 바그다드와 이집트로부터 칼리프들의 지배를 받았다. 이슬람 지배 초기에는 유태인의 예루살 렘 거주권이 회복되고 유태인 공동체는‘보호’아래 사는 것이 승인되었는데, 이것은 특별 선거와 지세의 납부에 대한 보상으로 생명과 재산, 예배의 자유를 보장 받는 보호막으로서 이슬람의 지배를 받는 비 회 교도들에 대한 관례적인 지위였다. 그러나 지속적인 비 회교도에 대한 제한법의 도입(717년)으로 유태인 의 공적인 행동, 종교 의식, 법적 지위 등은 제한을 받았다. 그 와중에 내려진 경작지에 대한 세금의 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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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그들 대부분은 시골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였으나 생활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사회적, 경제적인 차 별 대우가 심해지자 많은 유태인들은 이 땅을 떠남으로써 11세 말경 이스라엘 땅의 유태인 집단은 상당수 가 사라지고, 유기적이고 종교적인 응집력이 점차 상실되어 갔다. ■ 십자군 시대 (1099년 ~ 1291년) 다음 200년 동안 교황 우르만 2세의 호소에 따라 성지 예루살렘을 이교도의 손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유 럽 각 국의 십자군의 지배를 받았다. 5주간의 포위 후 1099년 7월 제 1차 십자군 원정의 기사들은 예루살 렘을 점령하고 라틴 왕국을 세웠다. 도시의 비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학살당했다. 이스라엘 땅은 기독교 의 지배 아래 들어갔지만 기독교 국가가 되지는 않았다. 십자군이 쿠르드 살라딘에게 격파 당하자(1187 년), 유태인들은 예루살렘에 정착할 수 있는 권리를 비롯하여 어느 정도 자유를 되찾았지만, 그들의 거주 는 요새화 된 몇몇 성에 한정되었다. 마지막으로 이집트에서 권력을 잡은 이슬람 군의 엘리트 계급인 마 므룩에게 패하자 이 땅의 십자군 지배는 종말을 맞게 되었다. ■ 마므룩의 지배 (1291년 ~ 1516년) 마므룩의 지배아래 이 땅은 다마스쿠스의 지배를 받는 벽지가 되었다. 악고, 욥바, 그 밖의 항구들은 새로 운 십자군의 침입으로 파괴되고 무역은 단절되었다. 중세 말에는 이 나라 도시의 중심은 파괴되고 예루살 렘의 대부분은 황폐해졌으며, 유대인들은 궁핍해졌다. 마므룩의 쇠퇴기는 정치적, 경제적인 격동과 질병, 탐욕스러운 자들의 침입과 지진 등으로 암울한 시기였다. ■ 오스만 제국의 지배 (1517 ~ 1917년) 다음의 4세기 동안 이스라엘 땅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지배를 받았다. 이스라엘 땅은 네 부분으로 분할되고 행정적으로는 다마스쿠스의 한 지방으로 예속되었다. 오스만제국의 지배가 소홀해지 면서 18세기 말에는 많은 토지가 부재 지주의 소유가 되어 가난한 소작 농민들에게 일괄성 없는 세제로 임차되었다. 갈릴리의 대삼림과 카르멜 산맥은 벌목 되고, 늪지와 사막이 경작지를 침식하였다. 19세기 에 서양 세계의 진출이 시작되자 유럽 열강들은 선교활동을 통해 그들의 지위를 획득했다. 정기 기선이 이 땅과 유럽 사이를 왕래하고 우편과 전신이 개설되었다. 예루살렘과 욥바를 연결하는 도로가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세 개의 대륙을 연결하는 전통적인 교두보로서 이 땅의 재 탄생은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가속화되었다. 따라서 이 나라의 유태인들의 생활 조건은 서서히 개선되고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 다. 농지가 이스라엘 전역에 걸쳐 매입되고 시골 정착민들이 새로 생겼다. 오랫동안 예배의식과 문학에 서만 제한적으로 사용해오던 히브리어가 다시 부활되었다. 아울러 시온주의의 토대를 위한 발판이 마련 되었다. 시온주의에 고무된 두 개의 이주 집단이 19세기 말기와 20세기 초에 동유럽으로부터 이땅에 도착 했다. 땅을 일구어 그들의 고향을 다시 찾으려는 희망으로 이들 개척자들은 수세기 동안 버려진 척박한 땅을 개간하여 새로운 정착지를 세우고, 나중에 꽃피우게 된 농업경제의 기반을 다졌다. 이전 1500년대에 5000 명에 불과했던 유태인의 수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1914년) 때 85,000명에 이르렀다. 1917년 12월에 알렌비 장군의 지휘아래 영국군이 예루살렘에 입성함으로써 4세기에 걸친 오스만제국의 지배는 끝나고 말았다. 영국군에는 수천명의 유대인 의용군이 포함된 3개의 대대의 유태인 여단이 있었다. ■ 영국의 지배 (1918 ~ 1949년) 1922년 7월에 국제 연맹(UN)은 영국에게 팔레스타인에 대한 위임통치를 수락하고‘유대 민족과 팔레스 타인의 역사적 연결’을 인정하고 유대국가 건설을 촉진했다. (1) 이주 : 시온주의와 벨푸어 선언(1917년)에 고무되어 1919년과 1939년 사이에 많은 유대인들이 이주하 여 유대인 공동체를 다른 양상으로 발전시켰다. 1919년에서 1923년 사이에 주로 러시아에서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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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 5천 명의 이주민들은 몇 년 동안 공동체의 성격과 조직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이들 개척자 들은 포괄적인 사회적, 경제적 구조의 토대를 세웠으며 농업을 발전시키고 키부츠와 모샤브를 설립했으며, 집을 짓고 도로를 건설하였다. 1924년에서 1932년 사이에 주로 폴란드에서 온 약 6 만 명의 이주민들은 도시 생활을 발달시키고 풍요롭게 하였다. 이들은 주로 텔아비브, 하이파, 예루살렘에 정착했는데, 그곳에서 소규모의 사업체와 건축회사 경공업체를 설립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의 1930년대에 히틀러의 등장으로 독일로부터의 마지막 중요한 이주 의 물결이 일어났는데, 약 16만 5천명 정도 된다. 이들 중에는 전문가들과 학자들이 많이 있었 다. 그들의 학력과 기술, 경험은 비즈니스의 수준을 높이고 도시와 농촌의 생활 환경을 개선하였 으며, 유대인 공동체의 문화생활을 더욱 풍부하게 했다. (2) 행정 : 영국의 위임 통치 당국은 유태인과 아랍 집단 사회에 그 집단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자치 권을 부여했다. 이러한 권한을 이용하여 유태 사회는 정당 기구를 선출했다(1920년). 지방의 자 원과 세계각지의 유태인이 보낸 기금을 재원으로 이 기구들은 전국의 유태인을 위한 교육, 종교, 보건, 사회 복지 시설을 위한 조직망을 발전시키고 유지해 나갔다. (3) 경제발전 : 30년의 영국 위임 통치기간 동안 이스라엘의 발전은 박차를 가했다. 농업은 괄목할 만하게 성장하였고 공장들이 세워졌으며, 요르단 강의 물을 이용해 전력을 공급하고, 세 도로가 전 역에 건설되고 사해의 광물자원이 개발되었다. 유태인 노동 총연맹인 히스타드루트가 설립 되어(1920년) 산업 부문에서 공동 농업의 주민들을 위해 복지를 증진시키고 일자리를 제공 했다. (4) 문화 : 유태 공동체의 독특한 문화 생활은 날이 갈수록 더욱 활기를 띠게 되어 미술·음악·무용 활동 이 전문 학교와 스튜디오의 설립과 함께 점점 발전되었다. 화랑과 음악당이 세워져 각종 전시회 와 연주회가 열렸다. 히브리어는 영어와 아랍어와 함께 이 나라의 세 가지 공용어로 인정되었으며, 출판이 증가하고 이 땅은 당시의 히브리 문학 활동의 유력한 중심지로 떠올랐다. (5) 아랍의 반대와 영국의 통제 유대 국가를 재건하려는 유대인 공동체의 노력은 극단의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반대에 부닥쳤다. 그들 의 강한 적개심은 격렬한 폭동으로 분출되어 유대인 거주지 또는 개인에 대한 이유 없는 공격이 시작 되었다. 아랍인들과 대화를 이끌어내려는 시온주의자의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그리하여 시온주의와 아랍 민족주의는 양극으로 치달아 폭발 직전의 상태에 있었다. 그리하여 영국은 요르단 강 서쪽 땅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유대 국가로, 다른 하나는 아랍국가로 분할할 것을 권유했다(1937년). 유태인 지 도층은 분할 권유를 받아들였지만, 아랍인들은 어떠한 분할 계획에도 강경하게 반대했다. 계속되는 아랍의 대규모 반 유대 폭동으로 유럽의 유대인들에게 나치의 박해에 대한 피난처 제공을 부정한다는 결론임에도 불구하고 유태인의 이주에 단호한 제한을 가하는 백서를 제출했다(1939년 5월). 이러한 정 책 때문에 후에 이스라엘의 초대 수상이 된 다비드 벤 구리온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는 백서가 없더라도 전쟁을 하고, 전쟁이 없더라도 백서와 싸울 것이다.” (6) 2차 대전 동안의 유대인 지원병들 이스라엘 내 유대인 공동체 26,000명이 넘는 남.녀 유대인들이 영국군의 육군, 해군, 공군등에 자원입 대 하여 나치와 독일, 이탈리아, 일본 동맹국에 맞서 싸웠다. 유대인 기구와 해외의 시온주의 단체는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이 전쟁에 참가했던 노력을 인정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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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에 유대인여단을 두게 되었고, 유대인여단은 자체 깃발과 휘장을 가졌다. 약 5,000명으로 구성 된 이 부대는 이집트, 북 이탈리아, 북서 유럽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45년 연합군의 승리 후에 많은 부대원들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귀환 시키는 일에 참가하였다. (8) 홀로코스트 (holocaust 대학살)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나치 정부는 유럽의 유태인 사회를 말살하려는 세부적인 계획을 치밀하고 체계 적으로 수행했다. 그 계획 아래 그들은 150만 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600만 명의 유태인을 살해했다. 결 국, 한때 세계에서 가장 활기찬 유태인 사회를 구성한 약 9백만 명의 인구 중 전쟁 전에 유럽으로 떠난 사람들을 포함하여 3분의 1만이 살아 남았다. (9) 독립으로 가는 길 유태와 아랍 사회의 상충된 요구를 조정하지 못한 영국 정부는 유엔 총회에‘팔레스타인 문제’를 의제 로 상정할 것을 요구했다. 총회는 투표로서 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 (1947년 11월 29일) 요르단 강 서쪽 지역에 세우도록 제안했다. 유태인 사회는 그 분할 계획을 받아들였지만 아랍인들은 거절했다. 유엔의 투표에 이어 주로 아랍 국가들로부터 비정규적인 지원군의 지원을 받는 지역의 아랍 전투병들 은 유태인 사회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개시하여 그 분할 결정을 좌절 시키고 유태 국가의 수립을 방해 하려고 애썼다. 여러 번의 후퇴 끝에 유태 방위 단체는 공격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유태 국가에 할당 된 지역을 모두 되찾았다.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땅)에 대한 영국의 위임 통치가 끝난 후(1948년 5월 14 일)에 약 65만 명의 유대인은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이미 충분히 기반을 이룬 조직적인 사회로써의 이 스라엘 국가를 찾게 되었다.
3. 현대 이스라엘 ■ 독립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건국이 선포되자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아랍 국가들은 곧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독립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스라엘 방위군은 이 독립 전쟁 기간 동안에 조직되어 매우 빈약하였으나 15개월 동안 지속된 맹렬한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1949년 수개월간 유엔의 후원으로 이라크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과 여러 차례의 협상을 거쳐서 종전 상황을 반영한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 다. 해안 평야 지대인 갈릴리와 네게브 지역은 이스라엘의 영토가 되었다.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은 요르 단이 통치하게 되었고, 가자지구는 이집트의 행정권 아래 편입되었다. 예루살렘은 양분되어 요르단이 구 시가지가 포함된 동부를 관할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이 서부를 관할하게 되었다. ■ 정부 수립 전쟁이 끝나고, 오랫동안 힘겨운 투쟁으로 되찾은 국가의 건설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유권자의 85%가 참가한 총선(1949년 1월 25일)으로 초대 의회인 제1회 크네셋이 개원하였다. 이스라엘 독립의 주역이 되 어온 두 명이 국가의 지도자가 되었다. 유태인 사무국의 사무총장 다비드 벤 구리온이 초대 총리로, 세계 시온주의자 협회 의장 하임 와이즈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국회에서 선출되었다. 미국의 원조와 미국 은행 들의 차관, 재외거주 유태인들의 기부금, 전후 독일의 배상금 등은 주택 건설, 농업의 기계화, 상선대 제 작, 국영항공사 설립, 자원 개발, 산업 발전, 도로, 전기, 통신망의 구축 등에 사용되었다. 세계 각지에서 이주해온 유태인들이 자손 대대로 거주해오던 국가의 각 분야의 문화와 함께 그들 공동체 의 독특한 전통을 가지고 옴에 따라 문화·예술 활동이 중동, 북아프리카, 서유럽의 여러 요소들과 혼합 되어 다양한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건국 10주년 무렵에는 인구는 2백만 명 이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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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역사 연표 ■ 기원 전 17세기~6세기
성서 시대
17세기경 족장
(아브라함, 이삭, 야곱)시대
13세기경
모세의 주도 하에 출애굽이 이루어짐
13-12세기
히브리인(고대 이스라엘인)의 팔레스타인 정착
1020
군주제 성립 : 초대 왕 사울
1000
다윗 왕국의 수도로 예루살렘이 건설됨
960
유대 민족의 국가적, 정신적 중심인 첫 번째 성전이 솔로몬 왕에 의해 예루살렘에 세워짐
930 722-720 586
남 유다 왕국과 북 이스라엘왕국으로 분열됨 앗시리아에 의해 이스라엘 왕국 멸망: 10개 지파가 흩어짐 유다 왕국이 바벨론에게 정복됨. 예루살렘과 첫 번째 성전이 파괴됨. 유대인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감(바빌론 유수)
538-142
페르시아와 그리스 시대
538-515
바벨론으로부터 제 1 차 귀환: 성전 재건
5세기 중엽
제 2 차 귀환: 에스라와 느헤미야
332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당함; 그리스의 지배
166-160
하스모니안의 마카비가의 반란
142-129
하스모니안 왕조 지배 아래 유대인 자주권 획득
129-63
하스모니안 왕국 안에서 유대인 독립
63 -313
로마제국의 지배
37 -4
헤롯 왕이 통치
■ 기원 후 66
유대인 로마에 항거
70
예루살렘과 두 번째 성전 파괴됨
73
마사다에서 유대인 최후 항전
132 - 135
바르 코크바 로마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킴
210
미쉬나(구전법 모음집) 완성
313 - 636
비잔틴 지배
390
예루살렘 탈무드 (미쉬나의 주해서) 완성
614
페르시아의 침입
636 - 1099
아랍 지배
1099 - 1291
십자군의 통치 ; 라틴계 예루살렘 왕국
1291 - 1516
마므룩 지배
1517 - 1917
오스만 제국 지배
1860
예루살렘 성곽밖에 최초의 유대인 마을이 생겨남 400년 동안의 오스만제국의 팔레스타인 지배를 영국이 종식시킴.
1917
영국, 벨푸어 선언을 통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조국 건설을 보장’한다고 약속함
1948
이스라엘 독립선언
1973
욤 키푸르 전쟁
1975
이스라엘, 유럽 공동시장(E.C.M)의 회원국에 가입
1977
리쿠르당 승리, 노동당 집권 종료.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 예루살렘 방문함.
1978
캠프 데이비드 협정 조인
1979
이스라엘과 이집트, 평화조약 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