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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노라면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날도 오겠지 흐린날도 날이 새면 해가 뜨지 않더냐 새파랗게 젊다는게 한밑천인데 째째하게 굴지말고 가슴을 쫙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날도 오겠지 흐린날도 날이 새면 해가 뜨지 않더냐 새파랗게 젊다는게 한밑천인데 째째하게 굴지말고 가슴을 쫙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비가 새는 판자집에 새우잠을 잔대도 고운님 함께라면 즐거웁지 않더냐 새파랗게 젊다는게 한밑천인데 째째하게 굴지말고 가슴을 쫙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photo by 조현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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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팬저가 만난 이웃 10
변상기 창원 봉림동주민자치위원장 김경년 창원도시재생지원센터 골목해설사 이동근 경남발레단장
김경년 창원도시재생지원센터 골목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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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정 내서문화포럼회장
팬저가 만난 도시
경남 남해 조선시대 남해 이야기 도시재생 창원도시재생 과거와 미래는?
이동근 경남발레단 단장
팬저가 만난 역사적인 인물
이제마 사상의학 창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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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정 내서문화포럼 회장 표지 변상기 봉림동주민자치위원장 2020년 1호 창간호 발행일 2020년 5월 1일 발행인 조현근 발행처 조현근 기 획 조현근 디자인 조현근 편집장 조현근 기 자 조현근 사 진 조현근 동영상 조현근 편 집 조현근
매거진공감TV에 나오는 분 들에 관한 인터뷰는 유튜브 에 올라와져 있습니다. QR 코드로 링크시켜 놓았습니 다. 스마트폰으로 QR코드를 찍어보세요. 유튜브에서 생 생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 니다. 모르시는 분은 유튜브 에서 해당자 이름을 검색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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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상기 봉림동주민자치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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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봉림동주민자치위원장은 나랑 나이차이도 별 차이가 나지 않음에 도 꼭 형님이라면서 대접을 해준다. 제대로 형님 값을 잘하지 못함에도 꼭 손 위 형님을 대하는 변상기위원장은 초계 변씨이다. 초계 변씨만 그 런 것이 아니고 초계에서 태어났으며(실제로는 초계옆에 있는 적중면이 다. 적중면은 조선시대 초계현이었던 곳이며 초계분지에 있는 곳이라 초계면과는 아 주 가깝다) 초계 변씨들이 모여있는 집성촌인 합천군 적중면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먼먼 유학길에 올라 도착한 곳이 부산 동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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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소 팔아서 애 공부 시켜보겠다고 보낸 곳이 부산인데 촌놈이 부산을 오 니 모르는 것도 많고 변상기 위원장에게 관심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촌에서 는 난다 긴다했는데 부산오니 자기 만큼 하는 것은 공부 잘하는 쪽에도 안들어간다 고 후회도 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도 명문 동래고를 진학하고 나름 어깨를 펴려고 하였지만 집중은 되지 않고 부산에서 다시 경남으로 유턴한 케이스. 창원에 자리를 잡아 보려고 대학을 졸업하고 창원에 정착을 한 곳이 반지동이라고 한다. 이 반지동 에 시티세븐이 들어서면서 반대를 하여야한다면서 말로만 큰소리 치던 사람들은 어 느새 사라져 버리고 없고. 아무도 안하는 반지동발전대책반이라는 생소한 단체의 공 동 대표하라고 하고는 전부 다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온 동네 돌아다니면서 시티세 븐 반대 서명 받으러 다녔는데 아침에 한 말 틀리고 저녁에 한 말 틀리는 곳에서 1 년을 넘게 버텼다가 두 손 두 발 들고 나와 정착한 곳이 봉곡동이라고 한다. 여기에 서 봉곡동 상인회하면서 주차장과 상가시설물 개설에 참여해보니 전부 다 자기들 가 게 앞에 주차장해달라는 민원만 있고 협조는 없는 것을 보면서 이게 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주차장시설이 들어서고 나니 이런 저런 소리가 없었지만 온갖 소리란 소릴 다 듣다보니 부처가 되었다고 하는 변상기 위원장. 이제 다시 봉림동 주민자치위원장을 맡았는데 온갖 소리를 듣겠지만 임기를 무사히 채우 기를 바란다. 조현근 panzer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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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이야기1
남해의 역사 이야기를 알면 보물섬이 더 재미있다
남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순신 장군의 전몰지, 보물섬, 남해대교, 금 산, 유배지, 죽방염, 독일마을, 맥주축 제, 다랭이마을 등 많은 관광지를 찾 고 있고 많이들 기억하는 것들이 이 런 것일 것이다. 하지만 남해는 오랫동안 사람들이 살아왔고 많은 유적들이 있는 곳이다. 그중 조선시 대 남해의 이야기를 알고 남해를 방문한다면 더욱 더 재미있게 남해를 구경하지 않을까? 한다.
남
조선이 개국을 하고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남해의 경우도 읍치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였다. 1413년(태종 13) 하동과 합쳐 하남현(河南縣)이 되 었다가, 이듬해 1414년(태종 14) 하동현이 독립하 면서 진주 금양부곡(金陽部曲)과 합쳐 해양현이라 하였다. 금양현이 진주에 속하면서 남해현으로 개칭 하면서 본격적인 남해의 시대가 되었다. 남해현의 독립적인 현이 되면서 읍치를 만들었는
데 현재의 남해읍이 아니라 고현면 낮은 구릉에 읍 치를 만들고 읍성을 축성하였다. 이곳에 정착을 하 였으면 하였는데 정착을 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읍 치로서의 터가 좁을 뿐만 아니라 산세가 기울어지 고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읍치를 옮기게 된다. 얼마전 남해군에서 가장 큰 관심이 있었던 것은 남해군청을 어디로 옮기느냐? 하는 것이었다. 남해 군청 이전은 오랫전부터 추진을 해왔지만 여러 가 지 이유로 잘 지켜지지 않았다. 그러다 현 군수의 공약사업으로 남해군청을 이전하는 것이 급물살을 타면서 군민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몇 가지 안이 나왔지만 현 남해군청이 있는 곳에서 건립하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다. 당시 현 군청 주변 의 상인들의 상권이전에 관한 여러 이야기가 나오 면서 현 군청을 현재의 터에 자리하게 되었는데 조 선시대 당시에는 읍치가 옮겨가는 것에 관하여는 수월하게 진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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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치가 이전을 하고나니 고현면(古縣面)으로 사용 하게 되었다. 즉 예전에 현이 있었다는 것을 지명에 서 이야기해주고 있다. 이렇게 고현이라는 지명을 사용하는 것은 남해 말고도 여러개가 있다. 거제에 있는 고현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고 하동에 고전면 은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고현면이었다. 하동 고전 면에도 조선시대 초기 하동현의 읍치가 있었던 곳 이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고현리의 경우 고 려시대 우산현이 있었던 곳이라 고현이라는 지명을 사용한다. 전라남도 해남면의 고현리의 경우도 고려 시대 해남의 읍치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정읍의 칠 보면에 있는 고현리, 청송군 진보면 고현리, 경북 포항시 북구 청하면 고현리 등은 모두 이전에 현의 치소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렇게 고현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냥 고 (古)자를 빼고 현리, 현동으로 사용하는 것도 있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현동의 경우가 그렇다. 현동은 고려시대 구산현의 중심이었다. 조선의 개국과 함께 칠원과 합쳐지면서 현리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현동 으로 사용하고 있다. 진해에 있는 현동의 경우도 마 찬가지인데 진해의 현동은 고려시대 완포현으로 있 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를 상징하는 새로 표시하고 있다. 남해읍에 봉황과 관련이 있는 것을 보면 위에서 이야기한 봉강산·봉영산·봉황대·봉천(鳳川)·오동(梧 桐)·죽산(竹山)·봉현(鳳峴)·봉성(鳳城)이 나온다. 봉 강산, 봉영산는 산을 이야기하며 봉강산 아래편에 있는 산이 봉영산이다. 봉강산과 봉영산 사이에 있 는 곳이 봉황대이다. 봉천은 남해읍 시가지를 가로 지는 하천이다. 오동은 남해읍 오동마을을 이야기한 다. 오동은 바로 오동나무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봉 강산 위측에 자리하고 있다. 죽산은 대나무가 있는 산으로 현재 남해대학 아래편에 있는 마을이 죽산 마을이다. 오동마을과는 대각선 방향에 위치하고 있 다. 봉황이 죽산으로 날아와 대나무 열매를 먹는 것 을 알 수 있다. 봉현은 남해읍에서 이동면으로 가 는 입현리가 있는 고개가 바로 봉현 즉 봉황고개이 다. 봉성(鳳城)은 남해읍성을 부르는 이름이 봉성이 다. 봉성은 남해읍성 이외에 함안읍성을 부를 때에 도 사용하는 것이 봉성이다. 남해읍성은 평지읍성으로 정사각형에 가 까운 방식으로 축성된 읍성이다. 남해읍성 은 성문을 4개를 두었는데 동,서,남,북문이
남해는 풍수지리적으로 봉황의 자리 봉황과 관련된 지명 많아... 공간의 부족으로 옮겨온 남해현 읍치는 세종 21년 (1439)에 남해읍으로 옮겨와서 남해읍성을 다시 축 성하는데 석축으로 만들었다. 읍성의 둘레는 2876 척, 높이 10척, 넓이 13척 4촌이며, 군창고가 있고 우물 1곳과 샘 5곳이 있었다고 세종실록지리지에 적혀져 있다. 읍치를 현재의 남해읍이 있는 곳으로 옮겨 왔지만 북측이 산을 막고 있지 않고 서북측에 낮은 산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산의 지명이 봉강산이다. 봉강 산은 남해의 주산(主山)으로 진산(鎭山)이라고 볼 수 있다. 주산 아래에 남해읍이 자리하는데 그 아래 에 있는 산이 안산(案山)으로 남산(南山)이다. 봉강산이 이야기해주는 것처럼 남해의 터는 봉황 의 터임을 알려준다. 풍수적인 경남을 보았을 때 봉 황이 가장 많이 나오는데 남해 이외 진주, 사천 곤 양, 함안, 의령, 합천 초계 등이 봉황과 관련이 있다 고 봐야 할 것이다. 봉황이 먹는 음식이 대나무 열 매이며 봉황은 오동나무에만 앉는다고 한다. 봉황은 상상의 동물이지만 길조인 동시에 우리민족을 상징 하는 새이며 성군을 나타낸다. 현재 봉황은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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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군청내 느티나무
다. 북문의 위치는 현재 남해경찰서가 있는 곳인데 한양에서 올 때 가장 먼저보는 문이 북문이다. 북문 아래에 있는 것이 객사이 며 객사 터는 남해읍사무소이다. 객사와 함 께 남해현을 상징하는 것이 동헌인데 동헌 의 자리는 현재 남해군청이다. 남해군청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이 바로 노거 수인 느티나무이다. 느티나무는 수령이 대 략 500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안내판에 는 480년이라 적어 놓았는데 그 사이 세월 이 지난 것도 있고 500년을 잡으면 될 것 이다. 느티나무는 동헌이 있는 곳에 상당히 많 이 심었다. 남해 이외에 여러 곳에서 느티 나무를 동헌에 많이 심었다. 밀양, 전북 익 산군 여산, 함양, 동래, 충남 보은, 전남 해 남, 경북 포항 청하, 창원 웅천, 진해현 읍 성 등에도 느티나무를 많이 심어놓았다. 이 렇게 느티나무를 동헌에 많이 심게 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느티나무는 회화나무 와 함께 가장 많이 심어진 수종이라고 하는 데 읍성의 경계를 나타내기 위해 많이 심 었고, 동헌에 자리하고 있는 노거수는 각별 한 의미가 있는데 모든 재판에 입회는 증인 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법의 판결을 내리는 고을 수령이 증인이 보고 있으니 바른 판단 을 내리라는 이야기이다. 처음 보는 도시를 여행을 할 때 군청이나 시청 또는 지역 명 칭이 붙은 초등학교를 찾아가면 느티나무나
회화나무 등의 노거수를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동헌에 심어진 노거수 임을 알 수 있 다. 봉강산과 봉영산은 남해읍성을 둘러싸고 있지만 두 개의 산 사이에 공간이 비어져 있다. 이렇게 됨으로 인해 주산에서 내려와 좌청룡 우백호로 이어지는 명당이 위태롭게 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럴 때 허한 것을 채우는 것이 필요한데 바로 비보림이다. 즉 인공적인 비보림(裨補林)을 조성하게 되는 데 이 시기가 세종 26년(1444년)으로 남 해현감으로 부임한 현감이 심어라는 지시를 하였다고 한다. 이때 심은 나무가 버드나무 인데 선소방향으로 많이 심었다고 하며 이 때부터 남해읍을 넘어오는 고개를 유림(柳 林)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 버드나무는 보이지 않고 유림이라는 지명이 남겨져 있 는데 유림1리와 유림2리이다. 고현에서 남 해읍으로 넘어온 것이 세종21년(1439)이니 오고 나서 유림을 심게 되는 것인데 현감 이 심어라고 하였던 곳도 바로 풍수와 상관 이 있다는 것이다. 즉 허한 좌청룡을 보호 하기 위한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현재 남 해읍에 버드나무가 없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남해가 소멸도시중 하나라고 하는데 유림이 없어서 좌청룡이 허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믿거나 말거나...
조현근 panzer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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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를 늘 지키고 있던 큰 나무처럼 창동을 지키는 창동아지매 - 김경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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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동아지매라 불리는 김경년씨는 창동에서뿐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다. 작은 체구에 어찌나 부지런하게 움직이는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한다. 그러면서 창동을 살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창동을 찾아 오게하기 위해 이런 저런 아이디어을 내어서 실천하고 있다.
처음 창동상인회 간사부터 시작하여 창동과 본격적인 인연을 맺기 시작한 김경년씨 에게 날개를 달아둔 것은 바로 도시재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창동골목 에 활력을 불어 넣기 위해 3.15를 맞이하여 만든 3.15 화분으로 시작하여, 3.15 희망 나무로 이어지면서 그동안 찾지 않았던 골목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김춘수의 <꽃 >에 나오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처럼 골 목에 주목을 하고 함께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 놓으니 사람들이 주목을 하게 된 것 이다. 그녀가 느끼는 도시재생은 이야기가 있는 도시재생이다. 하드웨어로 돈을 칠갑하는 도시재생이 아니라 우리들 부모님이 살아왔던 이야기, 우리가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저런 아이디어를 가지 고 와서 창동이 문화로 더욱 더 풍성하게 되는 것이 보람이라면서 "이제 60살이 얼 마 안남았는데 더욱 더 힘을 내어서 창동 골목에 활력을 불어넣으려고 한다"면서 오 늘도 한줌의 담배 꽁초를 주우면서 창동을 누빈다. 그러다 보니 그녀을 찾는 사람들 이 많다. "오늘 부모님과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는데 어디가 좋을까요?", "오늘 한잔 하고 싶은데 고기집말고 편하게 술 한잔 할 만한 곳 있나요?" 이런 저런 주문에도 " 있어보이소 아~ 그집이 좋겠네"라면서 해답을 줄 것이다. 창동 갈때에는 꼭 창동 아 지매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뭐 먹을까? 어떻게 놀까? 에 대한 고민 끝. 조현근 panzer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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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공간으로 거듭나
떤 이는 커피에 미친다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커피공화 국이라고 하는 대한민국에서 커피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 는 음료이자 메신저일 것이다. 그러다 보 니 한 집 건너 커피숍이라고 할 정도인 커피시장에서 새로운 커피숍과 카페들이 들어서고 있다. 북카페, 스터디카페, 갤 러리카페, 공방카페, 애견카페, 키즈카페, 편의점카페, 빨레방카페, 가든카페에 이 르기까지 카페는 변화하고 무한변신하고 있다. 그중 시민들이 공간에서 커피나 차 를 마시면서 그림 작품을 감상하면서 쉬 어갈 수 있는 갤러리 카페에 관하여 알 아보고자 한다. 갤러리 카페는 각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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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다 존재하고 있으며 많은 역활을 하고 있다. 갤러리 카페는 무엇보다 미술 작품과 공연을 선보이는 예술 공간 영역이 있는 공간으로 전문미술관과 공연장보다 가 까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렇게 접근이 쉬움으로 인해 전문작가보 다는 신진작가, 아마추어 작가들의 작품 을 보다 많이 접할 수 있다. 문화회관이 나 아트센터 등 존재하는 갤러리의 비용 과 접근성 면에서 갤러리 카페는 유리한 점이 있다. 전시 중인 전문작가나 신진작 가의 작품 또는 아마추어 작품을 식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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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갤러리 카페 나는 갤러리 카페
음료를 즐기면서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 는 점도 매력적이다. 무엇보다 엄숙한 갤 러리의 느낌이 아니라 조금은 산만하지 만 자연스럽게 대화하면서 접근하는 것 이 갤러리 카페의 큰 장점일 것이다.
와 운영난으로 잇따라 폐관하거나 전시 기능을 축소하는 갤러리가 아니고 미술 계의 대안으로 등장할 수 있는 점은 무 궁한 변신이 가능한 갤러리 카페의 장점 과 기대 때문일 것이다.
기존 개러리의 전시 기간이 짧은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전시기간이 긴 부분과 미술품의 판매까지 이어지는 점도 장점 이다. 여기에 미술사, 미술읽기 강의 등 미술 전반에 관련된 이야기 공간으로서 의 역활들은 발 빠르게 변신하는 갤러리 카페의 장점이며 이를 통해 문화공간으 로의 확장은 시민들에게 문화영역의 확 대를 가져오고 있다. 또한 미술시장 침체
갤러리 카페의 성장은 커피브랜드인 커 피전문점 탐앤탐스가 2019년 3월부터 4 월 30일까지 수도권 11개 매장에서 제33 회 갤러리 탐 전시ㅡㄹㄹ 진행하였다. 탐 앤탐스는 지난 2013년부터 문화예술후원 프로젝트 갤러리탐을 진행하여 매장 전 체를 신진작가의 전시 공간으로 제공해 11개 매장을 갤러리형 카페로 재탄생시 켰다. 또한 전시 기획부터 전시 책자,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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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제작 및 배포, 온·오프라인 홍보까지 활동이 제한 받는 상태에서는 가까운 카 운영 전반을 도맡아 문화예술 발전과 신 페 등을 선호하는 고객들의 선호도 또 진작가 발굴을 위해 힘쓰고 있다. 한 갤러리 카페가 각광 받는 이유중 하 나일 것이다. 갤러리 카페 점주를 보면 창원에 있는 갤러리 카페를 살펴보면 일단 미술과 관련이 있는 분들이 운영을 용호동 카페 거리에 있는 <갤러리이강 하는 경우가 많다. 점주가 직접 그림이나 >,<MK커피엔갤러리>,<갤러리 G-an>< 공예, 서예, 사진 등을 하였거나 가족 중 카페 그리다>,<엠버브라운> 등이 들어서 한 분이 미술, 공예 등을 하고 있는 경우 있으며 사파동과 창원대 주변에 <카페팔 도 있으며 예전에 화랑을 경영하였던 분 레트>,<앤더슨> 등이 자리하고 있다. 마 들이 갤러리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갤러 산합포구를 보면 <갤러리 카페>.<추 다 리 카페에서는 가급적 중진 작가보다는 방>,<의자가 있는 카페>,<준 카페>,<카 작가 섭외, 신진작가를 발굴하는 것이 바 페 ㅁ금>,<다구미술관>,<커피 밀>등이 람직하다는 의견이 많이 있다. 무엇보다 있다. 진해구는 <갤러리 카페 느림>,<님 미술시장 확장을 위해서는 중진작가보다 효갤러리카페>,<루블갤러리앤카페> 등이 새롭게 시작하는 신진작가를 발굴하여야 시민들에게 문화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갤러리 카페의 순기능이라고 이야기하는
"갤러리 카페는 미술품 전시는 물론 판매까지 이루어져 미술품 시장을 확대해야" 작가들이 많다. 이렇게 갤러리 카페가 각광을 받는 이 유는 뭘까? 시장진입이 쉽고, 접근성이 좋은 것도 큰 부분이겠지만 무엇보다 중 요한 이유는 비용문제이다. 문화회관이나 아트센터, 갤러리 등에서 전시회를 하면 1주일 전시하는 전시비용과 팜플릿, 초 대장 등의 인쇄물과 홍보비 등 많은 비 용이 소요되는 것에 비해 갤러리 카페는 상대적으로 전시비용이 저렴하고 비용을 전혀 받지 않는 경우도 있어 신진작가들 이나 아무추어 작가들에게 각광받고 있 다.
이렇게 신진작가 발굴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 이유는 기존 갤러리에서는 중진작 가에 초점을 맞춘 것에 비해, 갤러리 카 페는 이와 반대로 신진작가에 초점을 맞 춤으로써 미술시장의 확장을 물론 새로 운 미술시장에 진입할 수 있게 만들어주 는 순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서 갤러리 카페의 큐페이팅 기능에 초점 을 두어야한다. 이는 신진작가의 화풍과 가능성, 재능을 눈 여겨 보아야 하고 신 진 작가의 작업실은 물론 작품의 풍까지 보고 결정을 하여야 한다. 또 마케팅에도 또 요즘과 같이 미세먼지 때문에 야외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기존 갤러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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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기획전을 중심으로 테마전, 소품전 등 다양한 기존 갤러리가 접근하기 힘든 전시회를 통해 참신하고 기발한 기획으 로 승부를 보아야할 것이며 또한 카페를 방문하는 분들이 부담이 되지 않는 소품 위주로 손수비게 미술품 구입이 이루어 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갤러리 카 페에서는 카페로서의 기능과 갤러리 기 능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큐레 이터와 점주의 역할이 달라야 한다. 점주 는 관리에 초점을 큐레이더는 작가의 발 굴과 작가 섭외에 초점을 두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점주가 카페에만 몰두한다면 갤러리카페의 기능이 악화 가 될 것이고 갤러리에만 초점을 둔다면 생활고에 시달릴 수 있기 때문에 가급적
분리를 하여야 하며 장기간을 보고 진행 하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이다. 갤러리 카페나 관공서 갤러리가 좀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초대전 등과 같은 기 획전에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며, 미술품 전시는 물론 판매까지 이루어져 미술품 시장을 확대 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 이다. 또한 미술품의 아카이브 기능을 강 화해 보다 작가의 예전 작품들을 비교할 수 있게 해야 할것인데 이렇게 민간 갤 러리 카페에서는 하기가 힘든 부분이 발 생하게 도니다. 이럴 때에는 행정력이 지 원을 해준다면 작가의 작품에 대한 DB는 물론 아카이브 기능이 확대되어 더 좋은 갤러리 카페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조현근 panzer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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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근 단장은 경남에서 보기 드문 발레니노이다. 경남에서 발레를 접근하 기기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마산에서 발레를 배워 대학을 가지 않고 바 로 국립발레단에 들어갔다가 중앙대학교 무용학과를 진학한 드문 케이스 의 소유자이다. 대학에서 발레를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수업을 받은후 정 착한 곳이 바로 마산이다. 자신보다 더 힘든 조건의 후배들을 위해 자신이 배웠던 발레를 좀 더 편하게 교육을 통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시작한 것이 발레학원이었 는데 이게 나중에 경남발레단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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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발레단은 경남에서 최초로 발레를 주제로 하는 무용단이다. 이후 어린이 발레 단을 비롯하여 대동백화점 발레강좌 등 다양한 수업을 통해 발레를 저변를 확대하 려고 하였다. 현재는 취미로 하시는 분들을 위한 아람숲발레단은 물론 함안 아리온 발레단도 운영하고 있다. 여기에 해마다 하는 마산국제춤제를 기획하고 공연을 하고 있다. 외국은 물론 국내에 활동하는 춤꾼들이 모여서 하는 공연으로 새로운 춤을 추 고픈 마음이라고 한다. 사실 이동근 단장은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춤꾼들의 이야기를 글로 적어서 책자로 남기는 글쟁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그가 지은 책을 보면 <춤에 살다>,<춤꾼 김해랑 >이다. <춤에 살다>는 마산이 낳은 춤꾼 이필이 선생에 관하여 지은 책이고 <춤꾼 김해랑>은 김해랑에 관한 책자이다. 앞으로 무용인이자 영화인인 최현에 관하여 책 자를 집필하려고 한다. 이동근 단장은 나이가 드신 분일 수록 발레를 접근해야 몸의 균형을 찾을 수 있다 고 한다. 배가 나온 부분도 들어가고 체형이 유기가 되어 본격적으로 시작하라고 권 유를 한다. 한 번 도전해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조현근 panzer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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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꾼이자 춤꾼인 이동근 경남발레단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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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도시재생 과거와 미래는?
난 2007년부터 도시재생이라 는 단어가 사용되면서 통합 하기전 마산시에서 부터 시작 이 되었으며 주로 간판교체 를 통한 도시재생이 시작되었다. 이후 통 합 창원시가 되면서 본격적인 도시재생 이 시작되었는데 지난 2012년 도시재생 지원센터가 만들어지고 본격적인 창원시 도시재생이 시작되었다. 도시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하고 있는 것이 창동예술촌이 며 주축은 입주한 예술작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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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촌이 아니라 점포점주라는 이야기가 나옵기도 한다. 그동안 활성화되지 못해 서 점포를 내어 놓았지만 입주하려는 사 람들이 없어서 점포세를 받지 못했는데 창동예술촌이 들어서면서 창원시에서 건 물세를 받으니까 가장 혜택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이다.
입주한 작가들은 자신의 돈을 들여서 작업실 인테리어하고 설비를 하고 있다. 초장기에는 창원시에서는 입주한 작가 들에게 "아침부터 나와서 작업실에 있어 처음 창동예술촌이 생겼을때 모 언론문 라", "실사 평가한다" 등 여러가지가 입 에서는 국내에서 유명한 작가들을 모시 주한 작가들의 발목을 잡았다. 고 오면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언론사도 있을 정도로 도시재생 차원에서 시작하 창동예술촌이 언론을 통해 많이 소개되 다보니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데 텅 는 창동예술촌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빈 상가가 있다보니 창원시에서 입주작 창동예술촌에 입주한 작가들은 자신의 가들에게 그렇게 요구를 한 것이었다. 관 작업실 임대료를 창원시가 내어주는 구 광객입장에서도 구경을 왔는데 문이 닫 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다 보니 창동예 혀져 있다면 두 번 다시 오기가 싫을 것 술촌이 들어서고 가장 신나는 것은 창동 이다. 이는 도시재생을 문화로 정착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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겠다고 하는 창원시의 의지때문이었다. 그리고 벌써 8년이 다되어 간다. 그동안 도시재생지원센터가 들어서고 창동예술 촌이 활성화되면서 예전에 비해 창동이 주목을 받고 방문객이 증가한 것은 사실 이다. 또한 창동을 중심으로 갤러리들이 들어서고 예술촌 주위로 예술촌과 관계 없이 예술가들이 몰려와서 빈 공간을 채 우고 있는 점은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봐 야할 것이다.
시민들도 더 이상 투자하지 말자는 이야 기가 나오고 있다. 물론 골목 골목의 이 야기가 있고 주차장도 많이 늘어서 예전 에 비해 불편한 점을 많이 개선하였지만 들어간 예산이 워낙 많고 창원시에서 보 여주기식의 진행이 많았다 보니 여러곳 에서 볼멘소리가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도시재생은 창동을 넘어서 노산 동, 구암동, 소계동, 의창동, 완월동, 여좌 동, 충무동 창원 전반에 걸쳐서 진행되고 또한 예술가들과 협력하여 골목에 벽 있다. 창원도시재생은 end과 아니고 ing 화를 그려놓거나 이야기를 만들어 냄으 이라는 것이다. 현재 진해 충무동사업지
"도시재생 성과는 많으나 행정편의 주의 방식도 있었다. 앞으로 창동예술촌의 활용과 이야기가 있는 도시재생으로 나아가야..." 로 예전에 비해 상당히 활력적으로 변하 였다. 또 창동에 무료 와이파이가 된다거 나 주차장이 예전보다 많이 확보함으로 인해 접근성이 쉬웠졌던 것과 오동동문 화광장과 창동문화광장 등의 하드웨어가 잘 갖추어졌다는 것은 앞으로 문화를 통 한 도시재생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희망 을 가져볼 수 있다. 하지만 오동동문화광장, 걷고싶은 길, 상상길 등을 비롯하여 많은 예산이 투입 이 되었지만 기대에 못미치는 것도 사실 이다. 도시재생을 도입한지 10년이 다 되어 가는 현실이며 아직도 퍼주냐? 하는 이 야기가 나오는 것도 현실이다. 또한 창원
구나 구암지구의 경우 진행형이고 노산 동과 의창동도 일부 완료되었거나 진행 형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아쉬운 것은 있가 마련이다. 창 동에 있는 창동예술촌의 활용방안이다. 2 차례 이상 예술가들에게 지원을 하고 있 지만 계속해서 지원을 할지 아니면 예술 가들이 자생적으로 정착을 할지가 과제 가 될 것이며 창동 도시재생의 앞으로 숙제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하드웨어 방 식의 도시재생보다 이야기가 있는 소프 트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앞으로 도시재생 2기를 맞는 것은 아닐까 생각 해본다. 무엇보다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 여가 도시재생의 핵심중 핵심이 될 것이 다. 조현근 panzer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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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은 평생 친구. 최윤정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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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 내서문화포럼 회장은 일단은 엄청 바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일단 진주교육대학교를 비롯하여 초등학교, 중학교 수업과 방과후 학교 수업 그것 뿐 아니라 내서문화포럼에서 열리는 가야금 수업까지 1주일이 그냥 화살처럼 날아가는 세상 속에서 살다보니 지금 현재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 모를 정도로 너무 바쁘게 살고 있다. 틈틈히 잡히는 공연과 공연연습은 더욱 더 자신을 바쁘게 채칙찔하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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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정 회장은 울산에서 태어나 울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서울로 진학 해 창원과 전혀 인연이 없었지만 결혼을 하여 남편의 고향에 정학한 것이 마산 내서 였다. 무엇보다 최윤정 회장은 10살때 배운 가야금이 평생함께하고 있다. 어린 유년 시절 만난 가야금을 평생을 할 것이라고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싫지도 않았다고 한 다. 무엇보다 최회장은 평생할 수 있는 소중한 친구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함께 할 수 있는 소중한 친구처럼 가야금을 평생함께하는 소중한 사람이 되어달라는 것일 것이다. 최윤정 회장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중 하나가 바로 시종음이다. 학교 수업시작과 끝에 울리는 단순한 음을 "국악과 함께하면 어떻겠느냐?"고 하면서 교장선생님을 설 득하여 광려중학교에 처음 국악음이 시종음으로 선택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내서 지역에 있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로 이어지고 있는 시종음을 좀 더 많은 학교 에서 도입하여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국악이 낯설지 않은 우리음악임을 알리고 싶다 고 하는 최윤정 회장 그녀의 또 다른 도전은 내서문화포럼을 통한 문화저변일 것이 다. 조현근 panzer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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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東武) 이제마(李濟馬, 1837~1900)는 허준(許浚)과 함께 한의학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이름을 잘 모르더라도 ‘태양인’이 나 ‘태음인’ 같은 단어는 익숙할 것이다. 20세기로 접어들던 무렵 이제마 는 체질에 따라 치료법을 달리 적용하는 ‘사상의학(四象醫學)’을 창시해 한의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그의 학설은 지금까지도 가치를 인정받으며 계승되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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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2002년 KBS에서 방영한 <태양인 이제마>로 익숙한 이름이다. 총 30부작으로 이루어진 <태양인 이제마>는 최수종씨가 열연하였으며 한 두번은 보았을 드라마였 다. 이제마는 창원과 아주 인연이 있는 인물로 이제마 나이 50인 1886년 12월 27일 에 진해현감으로 임명받게 된다. 당시 기준은 음력이며 양력기준은 1887년 1월 에 진해현감으로 임명을 받고 1887년 2월(음력)에 진해현감으로 부임을 하게 된다. 이제마는 1887년 진해현감으로 부임을하여 2년 10개월인 34개월 동안 진해현에 머무러면서 현감직을 수행한다. 진해현감을 수행하면서 많은 진해현 읍민은 물론 웅 천과 고성, 함안 등에 환자를 치료하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이제마가 진해현감으로 부임하기 전인 1880년(고종 17) 부터 격치고를 집필하기 시작하였고 1893년(고종 30)까지 집필하였다. 진해현감 당시에도 이제마는 격치고를 집필한 것으로 보이고 진해현감을 마치고 격치고를 완료하였다. 격치고는 14년 동안 유학(儒學)의 철학적 주제들을 연구하여 집필한 것이다. 총 3권이며, 부록으로 「제중신편(濟衆新編)」과 「유고초(遺稿抄)」가 있다. 각 권은 시간에 따라 순차적으로 성립된 것이 아니고, 주제에 따라 다시 편집된 것이다. 권1 「유략(儒略)」은 1890년에 완성되었고, 권 2 「반성잠(反誠箴)」은 1893년에 집필되었으며, 권3 「독행편(獨行篇)」은 1882년 작품이다. 사상의학에 관하여 기록한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은 동무 이제마가 저술한 것 으로 4권 2책으로 되어 있다. 이제마는 1893년(고종 30년)에 착수하여 1894년(고종 31년)에 《동의수세보원》상·하 3권을 완성함으로써 사상의학설을 제창하였다. 고향 인 함흥에서 의업에 종사하면서 1900년(광무 4년)에 다시 이 책에 성명론부터 태음 인론까지를 추보(追補)하였으나, 태양인 이하의 3편을 미쳐 끝내지 못하고 사망하였 다. 다음 해인 1901년(광무 5년) 6월 함흥에서 문하생들이 계를 조직하여 신구본을 합해 출판하였다. 유락 편은 바로 진해현감 재임중에 완료한 것으로 나오며 격치고가 끝나마자자 동 의수세보원을 저술하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봐서 진해현감으로 재직하면서 의술은 완료되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조현근 panzer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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