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인사이트] 아프리카를 만난 한국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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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만.한 아프리카를 만난 한국인


아프리카 국가를 만난 한국인 이야기(이하 아.만.한)는 아프리카 여러 국가 를 만난 한국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소개하기 위해 비영리민간단체 아프 리카인사이트(외교부 등록 제178호)에서 2016년 한 해 동안 진행한 프로젝트 입니다. 자신이 경험한 나라와 그곳에서의 활동을 소개하기를 원하는 분들을 공고를 통해 모집하였고 한 분 한 분이 정성스럽게 작성해주신 이야기와 사 진을 한 편 한 편 시리즈로 소개해 왔고, 이제 그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내려고 합니다. 54(55)개의 국가로 이루어진 큰 대륙임에도 아직 한국에서는 하나의 나라 처럼 인식되고 있는 아프리카, 그만큼 아직 아프리카는 우리에게 조금은 낯설 고 멀게 느껴지는 곳입니다. 하지만 여기 사업가로, NGO 활동가로, 여행으로 미디어를 통해서만 보았던 막연한 곳이 아니라 실제 삶과 경험으로 아프리카 의 여러 나라를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책을 읽으시는 독자들이 보다 생생하고 깊게 아프리카 여러 현장을 만나보는 계기 가 되었으면 합니다. 또 생각보다 아프리카 대륙이 우리와 가까운 곳에 있고 누구든 한 번쯤 가볼 수 있는 곳이라는 것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셨으면 합 니다. 이 책이 편집되기까지 정성스럽게 글을 작성해주신 한 분 한 분의 작가분 들과 그 글을 소개해준 아프리카인사이트 구성원, 또 책 편집에 애를 써주신 심균호 편집자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프리카인사이트 대표 허성용



책을 편집해보거나 디자인을 해본 경험이 전무한 사람으로서 이 프로젝트 는 저에게 매우 큰 도전이었습니다. 책의 콘텐츠를 창조하는 것도, 제가 아프 리카에서 살다 온 이야기를 푸는 것도 아니었지만 어떤 부분을 강조하고 어 떤 글을 어떻게 분류해야 할지 편집 과정 하나하나가 모두 저에게는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하지만 뿌린 대로 거둔다는 저의 신념이 증명이라도 되듯 편집 이 끝나고 이 글을 쓰는 지금 저는 많은 것을 얻었고 스스로도 몰랐던 저를 발견한 듯합니다. 이 책은 아프리카의 다양한 국가들을 몸소 경험하고 오신 분들이 그곳에 서 담아온 소중한 추억 한 방울, 우리 모두에게 나눠줄 조언과 교훈 한 방울 그리고 사진으로 남은 그곳의 모습 한 방울들이 모여서 만들어졌습니다. 편집 자인 저 또한 책을 만들기 위해 그분들의 인터뷰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읽었 고, 한 순간에는 마치 그곳에 가 있는 듯한 느낌을 받다가 한 순간에는 같이 눈물을 흘렸으며 또 한 순간에는 같이 놀라고 기뻐했습니다. 무엇보다 아프리 카 각 국가의 다양한 모습들을 접하며 비우고자 했지만 쉽게 비워지지 않았 던 제 편견 또한 더 깨끗이 쓸려 내려갔습니다. 인생에서 우리는 수많은 결정을 내리며 도전할지 그 자리에 머물지 항상 고민합니다. 할까 말까 고민할 때 지금, 이 상태에 머물기로 결정하는 게 다 반사인 오늘날 용기 내어 떠난 아만한의 주인공분들을 보면 가슴 한편에 잠 들어 있던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느낌이 듭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께 서는 어떠신가요? 예전에 펼쳤어야 할 날개를 너무 오랫동안 감추고 계신 건 아닐까요? 아프리카인사이트 활동가 심균호



서문

p3

편집자의 말

p6

탄자니아 잠깐 맛보기, 덜도 말고 딱 2%

p13

빅토리아 폭포의 고향, 잠비아의 매력에 푹 빠진 아프리카를 사랑하는 한 청년의 이야기

p23

하르툼을 아시나요? 수단의 수도 거주 3년 간의 단상

p33

Karibu Tanzania! 탄자니아에 놀러 오세요!

p41

“엄마, 나 아프리카 가게 되었어” 에티오피아와 사랑에 빠진 25살 여대생의 이야기

p51


믿을 수 없었던 잔지바르에서의 경험

p63

아프리카 해외영업 실무자의 이야기

p73

그립던 지중해의 국가를 찾아가다

p83

아프리카 청춘이다

p91

아웃 오브 수단(수단을 떠나며...)

p101

소심한 이여사의 다양한 남아공 체험기

p111

세네갈 다카르에서 한국인 노동자로 살아가기

p121

천 개의 언덕을 가진 살만한 르완다, 천 개의 추억을 가진 아만한 청년의 이야기

p133

미지의 땅 모로코에서의 생존일기

p143

아프리카 속 국제기구를 경험하다

p151

탄자니아, 해외인턴십의 모든 것

p159

아프리카를 물고 뜯고 씹고 즐기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

p169


자유롭게 노래하듯이, 모리타니와 세네갈을

p181

르완다에서 가장 유명한 빵집을 만든 청년들의 이야기

p189

가나, 1년 간의 막여행 이야기 그리고 그 이후

p199

아프리카 탐험가를 꿈꾸다

p209

세네갈에서 치유의 춤, '사바르'를 만나다

p225

Nakukosa (나쿠코사, I Miss You)

P239

나의 두 번째 고향, 우간다

p249

수치와 그래프들이 보여주지 않는 차드 이야기

p257

‘그럼에도 불구하고’ – 모잠비크 현지에서 수행하는 개발협력 사업

p269

나를 찾기 위한 끊임없는 질문, 그 속에서의 아프리카

p279

하얀 세네갈래의 이야기

P287

수단을 만나기까지

P299

°본 인터뷰는 2016년을 시점으로 작성되었음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Tanzania

공용언어 – 스와힐리어, 영어 인구 – 약 50백만 명 GDP – 약 $567억

Tanga

탄자니아를 만난 김상훈 님 탄자니아에서 2년 2개월 KOICA 봉사단원으로 컴퓨터를 가르치다 귀국한, 탄자니아를 몹시 그리워하는 한 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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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자기소개와 현재 하고 계신 일을 소개해주시겠어요? 안녕하세요. 저는 2012년 말부터 2014년 12월까지 탄자니아에서 KOICA 봉사단원으로 활동한 김상훈이라고 합니다. 탄자니아의 경제적 수도인 다르에 스살람에서 버스로 6시간 떨어져 있는 탕가시의 갈라노스 고등학교에서 컴퓨 터를 가르쳤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KOICA 및 EDCF 등이 진행하는 ICT 분야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팀에서 프로젝트 관리를 맡고 있습니다. 몽골, 탄자니아, 캄보디아, 우간다, 베트남 등의 국가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죠. 탄자니아에 가게 되면서 국제개발협력이라는 분야에 관심이 생겼고, 원래 전 공이 IT 분야다 보니 ‘둘을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외국도 자주 갔 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에 일을 시작하게 됐고, 일을 시작한 지는 대략 9개월 이 되어 가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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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니아 떠나기 전 국내교육 중 동기들과 함께

거주하셨던 탄자니아를 소개해주시겠어요? 탄자니아는 동아프리카에 위치한 국가로 케냐, 르완다, 콩고, 잠비아 등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내에서는 비교적 치안이 안전한 나라로 뽑히고 있고, 우리에게도 익숙한 세렝게티 국립공원, 킬리만자로산, 빅토리아 호수 등 뛰어난 관광자원들을 보유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2년 동안 살 았음에도 안 가본 곳이 너무나 많습니다. (매우 아쉬운 부분입니다) 또한 세계 12대 언어에 속하는 스와힐리어의 종주국으로서의 자부심이 강한 국가이지만 중학교 이후부터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나라입니다. 아무래도 영국의 식민 지였다 보니 영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이죠. 또한 많은 사람들이 아프리카의 기후를 ‘매우 덥다.’, ‘고온다습’이라고들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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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지만, 탄자니아의 동부 해안가는 7월, 8월을 제외하곤 정말 더운 반면, 내 륙으로 갈수록 고지대이다 보니 1년 내내 가을 날씨를 유지하는 곳이 매우 많습니다. 하지만 제가 있었던 탕가시는 동부 해안가 도시들 중에서도 더욱 덥고 습하기로 유명했다는 게 함정이죠. 경제는 매년 7%에 가까운 경제 성장 률 기록하며 세계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고속 성장 중이며, 경제 성장과 더불 어 동아프리카 연합 내에서 그 존재감을 더욱 뽐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속 성장의 부작용 또한 나타나고 있는데요, 급격한 도시화로 인 한 경제적 수도 다르에스살람 외곽의 슬럼가 형성, 빈부격차 상승, 치안의 악 화, 실업률 및 물가의 급상승 등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한 에이즈 및 말라 리아 등의 질병으로 인한 사망과 빈곤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금씩 개선되고 있지만, 아직도 많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재력이 많은 나라이자 저에게는 제2의 고향과도 같은 나라입니다. 몇 년 후 에 다시 가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탕가 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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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니아에서 만난 사람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면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지금 딱 떠오르는 사람은 두 명인데요. 한 명은 저희 집을 관리해줬던 카 카(형이라는 뜻)인 유스티스입니다. 다른 단원들을 보면 집주인이나 집 관리 해 주는 사람으로부터 많은 어려움을 느꼈다 하는데 저는 ‘유스티스가 없었다 면 2년 동안의 탄자니아를 어떻게 버텼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도움을 준 사 람입니다. 싱크대나 가스레인지가 고장 나면 5분 만에 와서 뚝딱 고쳐주고 심 지어 배가 너무 아파서 바늘로 손을 따려 하는데 내가 찌르면 마음이 약해져 서 몇 번 찔러야 할 것 같아서 바늘 좀 찔러 달라고 부탁했더니 바늘을 찔러 주기도 했답니다. 문제는 저보다 더 마음이 약했던 유스티스는 저의 엄지를 5 번이 넘는 바느질 끝에 실패를 선언, 결국 제 손으로 바늘을 푹 찔렀다가 피 가 철철 나서 배가 아파서가 아닌 과다 출혈로 탄자니아를 떠날 뻔했다는 것 이지만요.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갓 튀겨낸 만다지(탄 자니아에서 식사 대용으로 자주 먹는 기름에 튀긴 밀가루 빵으로 모양은 다 르지만, 도넛이라고 봐도 될 것 같네요.)를 갖다 주는 세심함을 잊을 뻔했네 요. 아직 회복하지 못한 배에 기름에 튀긴 빵을 차마 넣을 수 없었기에 마음 만 받았지만, 그 배려는 영원히 제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제가 가르쳤던 학생 중 한 명으로 엘리야 제임스 입니다. 어느 날 문득 프로그래밍 언어가 배우고 싶다고 찾아와 살짝 가르쳤 더니 이것이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은 안다’는 것인가라는 깨달음을 줬던 학 생입니다. 그 이후 매일 낮, 매주 주말, 방학 때는 집에 같이 살며 공부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지금 제일 먹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을 때, 제가 막 만들 어 준 닭볶음탕을 다시 먹고 싶다고 해서 매우 당황하게 함과 동시에 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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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 실력에 대한 자신감을 급상승하게 만들었던 기억(심지어 피자와 햄버거 를 이겼다는 사실!)도 있고, 노트북에 저장되어 있었던 노래방 프로그램에서 백 스트리트 보이즈, 비틀스 노래를 같이 불렀던 기억, 숯에 고기를 구웠는데 고기가 숯이 되어 쓴맛으로 고기를 먹었던 기억들이 다시 떠오릅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자주 페이스북 메시지를 통해 이야기를 하는데, 최근에 한국 국비 장학생에 지원했다가 떨어져서 다시 볼 기회를 놓쳐 아쉽습니다. 일이 바빠 많이 못 도와줬던 게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미안합니다.

김상훈 님이 가르쳤던 엘리야와 함프레이

우린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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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니아 내에서 가볼 만한 여행지를 추천하신다면, 어떤 곳들이 있을 까요? 1) 잔지바르: 우리가 꿈꾸는 에메랄드빛 바다가 존재하는 섬으로 다양한 워 터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또한 옛 시가지인 스톤타운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2) 세렝게티 국립공원: 너무나도 유명한 곳으로, 수많은 동물들을 감상할 수 있는 (진짜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는) 곳입니다. 3) 응고로고로 분지: 주로 세렝게티 국립공원과 패키지로 많이들 가는데 매 우 넓은 분지 안에 많은 동물들이 살고 있는 곳입니다. 4) 킬리만자로산: ‘아프리카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산으로 주로 4~5일에 걸쳐 서 트래킹하는데 밤에 보는 별이 참 아름답다고 합니다. 5) 탕가니카 호수: 예전에 정글의 법칙에도 나왔던 곳으로 아프리카에서 제 일 깊은 호수라고 합니다. 그 외로 아프리카에서 제일 큰 담수호인 빅토리아 호수, 제인 구달의 침팬 지 연구로 유명한 곰베, 아프리카에 남아 있는 야생 지역 중 가장 넓은 편에 속한다는 셀루스, 탄자니아에서 제일 큰 국립공원 루아하 등이 유명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주요로 소개한 여행지 중 제가 갔다 온 곳은 잔 지바르밖에 없네요. 그래서 사진도 잔지바르, 루아하 국립공원, 루쇼토 지역의 맘보뷰입니다.

잔지바르 능귀비치


잔지바르 스톤타운

맘보뷰


루아하 국립공원, 바오밥 나무와 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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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김상훈 님과 같이 아프리카 지역과 사람들을 만나고 알아가 고 싶어 하시는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으신가요? 아프리카에 살았던 경험은 진짜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경험이었고, 정 말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꼭 한번 가보라고 강력 추천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환상을 가지고 가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프리카에 가는 건 정말 현실이니까요. 정말 많은 준비와 굳은 마음가짐, 열린 마인드 없이 오로지 ‘힐 링, 미지의 세계, 아이들의 순수한 웃음’만 상상하고 가면 도착하자마자 후회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소매치기를 당할 수도 있고, 택 시기사의 바가지나 택시 강도, 전기는커녕 물도 없는 숙소, 사람이 미어터지 고 심지어 닭이랑 같이 앉을 수도 있는 버스 등도 생각 내지 각오하셔야 합 니다. 하지만 위의 것들을 다 잘 대처하거나 ‘특별한 경험 했다’라고 생각하며 잘 넘어가면 그때 꿈꿔왔던 것들이 눈앞에 보일 겁니다. 그리고 ‘아프리카는 정말 좋았어.’, ‘또 가고 싶다’라는 생각을 가진 채 돌아와 삶이 힘들 때 한 번 씩 그때를 추억하겠죠? 반대로 그게 아니라면 ‘역시 아프리카는…’, ‘정말 위험 하고 사람이 살지 못할 곳’이라는 부정적인 인상 혹은 생각만 가진 채 돌아갈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돌아와서 사람들한테 아프리카에 대해 부정적인 말만 늘어놓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을 봤고, 참 안타깝기만 했습니다. 저는 모두가 아프리카를 좋은 곳, 다시 가고 싶은 곳으로 기억했으면 좋겠습 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콰헤리! (안녕히 계세요!)


Zambia

공용언어 – 영어 인구 – 약 17.2백만 명 GDP – 약 $262억

Lusaka

잠비아를 만난 전하영 님 바오밥 나무에 올라가 앉아 빅토리아 폭포의 일몰을 감상하는 2015년 2월 어느 날, 지난 날 스쳐 지나가 버린 기억들을 다시 되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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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자기소개와 현재 하고 계신 일(공부)을 소개해주시겠어요? 안녕하세요. 저는 UNFPA (유엔인구기금) 잠비아 사무소에서 International UN Youth Volunteer Program을 통해 Youth Health and Development Officer로 몸담고 있는 아프리카, 특히 잠비아를 사랑하는 국제개발, 보건을 연구하고 좋아하는 29살 전하영입니다. 또한 저는 KDI(한국개발연구원) 국제 정책대학원 개발정책학 석사과정을 2016년 9월 입학, 2017년 7월 coursework를 수료한 후 Impacts of Capacity Building on Adolescents Health and Development: the case of Zambia (청소년 보건과 개발의 역량 강화적 측면의 영향: 잠비아 사례를 중심으로)를 주제로 하여 졸업 논문을 작성 중에 있습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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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총인구의 43%는 25세 이하의 청소년이며 많은 잠비아와 같은 개발 도상국에서는 해당 수치가 60%에 이릅니다. UNFPA에서는 이들의 임신 및 출산 선택이 미래의 인구 통계학적 흐름을 바꿀 것으로 예상을 함과 동시에 성과 임신 및 출산 건강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서비스를 제공받을 권리 등을 포함하는 청소년들의 기본 권리를 지지합니다. 청소년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고 정보에 입각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지식과 능력을 갖추게 된다면 본인들의 잠재력을 완전히 개발할 수 있고 또한 경제적, 사회적 변혁에 공헌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UNFPA(유엔인구기금) 잠비아 사무소에서 저는 Adolescents & Youth팀의 Youth Health and Development Officer로 전반적으로 잠비아의 아동 및 청소 년의 잠재력 개발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국가 사무소 지원 내 청소년 보건 및 개발 프로그램의 증거 기반 및 혁신적 개발 계획, 실 행, 성과관리를 위한 기술적 지원 제공하고, 프로그램 실행에 있어서 이를 실 행하는 파트너 기관들에 기술적 보좌를 하며 잠비아 정부가 주관하는 늘어난 국 내 청소년 프로그램들을 위해 증거 기반 애드보커시의 개발 프로그램 지원 및 청 소년 보건과 개발 프로그램의 효과적인 실행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청소년 프로 그램 총괄 사무관 감독하에 관련 정부기 관, UN 기구들과 기타 이해 관계자들 의 전을 하며 협력도 합니다. 또한, 유엔인구 기금 프로그램 과정 매뉴얼, 유엔개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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룹 가이드라인에 따라 총체적 성과관리 및 평가 시스템 개발에 기여를 하고 있고, 프로그램 및 재정 지원 역량 강화를 위한 UNFPA 프로젝트 실행 파트 너 기관들을 위해 역량 강화 프로그램 참여함과 동시에 청소년 프로그램을 위한 UNFPA 파트너십 지원 및 청소년 프로그램 투입의 효과성을 증진시키 는 최상의 실무와 선행연구에서 얻은 교훈들을 포함하여 국가 사무소 내 혁 신적 지식 관리 프로세스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하영 님께서 계셨던 잠비아를 소개해주시겠어요? 앞서 말했듯이, 잠비아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 3대 폭포 중 한 곳인 빅토 리아 폭포가 짐바브웨 국경과 맞닿아 있는 곳으로 여행객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한국과 다르게 사계절이 뚜렷하지 않고 건기와 우기만 크게 구분되어 있지만, 1년 내내 너무 덥지도 않고 너무 춥지도 않은 온화한 기후 입니다. 건기에는 비가 오지 않아 건조하지만, 날씨가 서늘해지기 시작하고 낮과 밤의 일교차가 커서 온도가 영하로 내려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있던 수도 루사카 지역의 겨울은 서울의 겨울보다 조금 따뜻했지만, 오리털 파카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우기 때는 비가 한 번에 집중적 으로 내리는데, 대부분 지역이 배수시설이 낙후돼 있거나 설치되지도 않아 우 기 때는 홍수가 나기도 하고 심하게 강풍이 불 때는 가로수나 벽돌이 무너져 내려 교통을 마비시키는 때도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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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기 때 빅토리아 폭포에 가면 잠비아 쪽에서도 예쁜 물보라가 피 어오르는 것과 광활한 대지 위의 자연을 만끽할 수가 있답니다. 저는 건기와 우기 시즌 모두 빅토리아 폭포에 가보았는데, 건기 때 잠비아 쪽 빅토리아 폭 포는 물이 거의 말라버려서 폭포를 보러 온 의미가 없어진 느낌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빅토리아 폭포는 잠비아와 짐바브웨 국경을 Victoria Falls Bridge (이곳은 잠비아와 짐바브웨를 이어주는 국경 다리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중앙에 111m 높이의 번지점프 대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꽃보다 청 춘 in 아프리카 편 마지막 회에서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사이에 두고 있는 유 네스코 지정 세계 3대 폭포 중 하나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케냐와 우간다 국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아프리카에서 제일, 세계에서 두 번째로 넓은 담수 호인 빅토리아 호수와 헷갈려하기도 한답니다. 이처럼 모든 방면에서 다양성을 지니고 있는 잠비아는 73개의 부족이 여 럿이 살고 있는 국가임에도 내전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아 이웃 국가인 콩고민 주공화국에서 내전으로 고통받고 있는 난민이 잠비아로 들어올 만큼 잠비아 는 외국인에게도 난민에게도 관대하고 평화로운 곳입니다. 이렇게 평화로운 잠비아마저도 가끔 싸우는 경우가 있는데, 민주주의 보통 선거에 의해 뽑힌 전직 대통령 중 3분이 임기 중 돌아가셔서 잠비아 대통령만의 징크스가 있습 니다. .

I’m happy because you’re happy.


하영 님께서 잠비아에 방문 또는 여행했던 지역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어디인가요? 저는 잠비아에서 2014년 1년간 머물면서 루사카 이외에 카푸에, 초마, 리 빙스톤을 거쳐 짐바브웨 빅토리아 시티와 보츠와나 초베 국립공원 그리고 케 냐 나이로비와 마사이 마라 국립공원 등을 여행하였습니다. 너무 많은 지역, 국가들을 다녀와서 각각 색다른 특색들을 지니고 있기에 어디가 가장 좋았다 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잠비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빅토리아 폭 포가 위치해있는 리빙스톤입니다. 빅토리아 폭포는 잠비아 현지어 중 하나인 로지어로’Mosi-o-Tunya’로 부르고 연기를 내뿜는 것처럼 천둥이 치는 것 같 은 폭포로 18세기경 포르투갈 항해자 호세 프란시스코 라세르다(Jose Fransisco de Lacerda)를 뒤이어 19세기의 제일 저명했던 항해자인 데이비드 리빙스톤 (David Livingstone)이 1855년에 잠베지강의 거대한 폭포를 처음으 로 발견한 이후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을 따서 빅토리아 폭포로 불리게 된 것 입니다. 빅토리아 폭포는 앞서 말했듯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 제3대 폭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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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로, 개인적으로 저희 가족은 세계 3대 폭포를 두 눈으로 광활한 대지 위 의 자연을 만끽하며 보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아빠는 나이아가라 폭포와 이 과수 폭포, 저는 나이아가라 폭포와 빅토리아 폭포) 나이아가라 폭포에는 캐나다 쪽에 배를 타고 가서 폭포를 맞고 오는 게 묘미라면, 빅토리아 폭포에서는 폭포 밑까지 트레킹 코스를 따라 내려가 걸어 가는 도중 음식물을 원숭이들한테 빼앗겨보는 것 그리고 잠비아와 짐바브웨 의 국경 다리에서 스트레스를 마음껏 날려버리며 111m나 되는 높이에서 하 는 번지점프와 로프스윙과 악마의 수영장이라고 불리는 폭포 절벽에서 떨어 질 것만 같은 Devil Fool에서 수영하는 것이 묘미입니다. 또한 빅토리아 폭포 를 제대로 보려면 상공에서 봐야 하는데, 저는 15분 동안 헬기를 타고 빅토 리아 폭포의 전경을 감상했습니다. 그리고 빅토리아 폭포 잠비아 쪽 게이트에 서 도로를 걷다 보면 주변에 소설 어린 왕자의 배경이 되는 바오밥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 위에 올라가 빅토리아 폭포 소리를 들으며 일몰을 바라보았 던 것도 하나의 추억이 되었습니다. 참고로 빅토리아 폭포 입장권은 외국인에 게 터무니없이 비싸지만, 저는 당시 잠비아 이민국에서 발급받은 워크퍼밋 소 지자였기에 잠비아인과 동일하게 7Kwacha(우리나라 돈 1,000원 이내)만 내 고 하루 종일 빅토리아 폭포와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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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하영 님께서 경험하셨던 잠비아에서의 일들 중 가장 힘드셨던 일 이 있었다면 무엇인가요? 제가 1년간 잠비아에 생활하면서 사람들이 너무나도 쉽게 목숨을 잃는다 는 사실에 충격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잠비아는 HIV/AIDS 감염, 사망률 또한 WHO 순위 중 상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영아 사망률, 산모 사망률이 높은 관 계로 잠비아의 평균 수명은 2012년 기준 35세밖에 되지 않습니다. 저는 2014 년 1년 간 잠비아에서 거주하면서 현지 장례식에 두 번 다녀왔습니다. 현지 동료 남자 직원의 부인이 둘째 아이를 낳던 도중 의료 사고로 갑작스럽게 하 늘나라로 가버린 것입니다. 아이는 건강하게 잘 태어났다고는 합니다. 또한 주일학교에 나오는 현지 아이들 중 한 아이도 상처를 치료할 돈이 없어 병균 이 몸속 깊이까지 파고들어 5살의 나이로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제 일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기 힘들고 가장 슬펐던 건 제가 잠비아 생활을 마무 리하기 2주 전에 평소 건강했던 동료 남자 직원이 갑자기 고혈압과 뇌출혈 증상으로 늦은 새벽에 길을 걷다가 쓰러져 잠비아 대학 병원 내 중환자실에 입원을 하였는데 의료인력 부족으로 인해 방치되어 정상적인 치료 시기를 놓 쳐 결국 목숨을 잃은 슬프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제가 잠비아 한인 교회에서 매 주일마다 현지 아이들을 위해 피아노 반주 를 하면서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어 가며 저 자신 또한 제2의 잠비아인이 되려 노력하였습니다. 그중 한 아이가 제게 말한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성합 니다. ‘Currently we don’t have an enough money to keep our normal life. Our family wants to eat delicious and nutritious food but it will takes time to get amount of money for buying a good food. Even our family is still poor but in the future, I want to be a medical doctor because I want to save my family life and take care of their health, also I want to support my younger br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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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sister’s school fees.’ (지금은 저희 집이 충분히 먹고살 돈이 없어요. 우리 가족은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고 싶지만 이런 음식을 구하기 위해서 는 돈이 필요한데 돈을 벌기 위해 많은 시간이 걸릴 거예요. 아무리 우리 가 족이 지금 가난하더라도, 저는 나중에 제 가족을 위해서 의사가 되고 싶어요. 제가 의사가 되면 저희 가족 건강도 챙길 수 있고 동생들 학비도 대줄 수 있 기 때문이에요). 이 아이의 말이 제 심금을 울렸습니다. 한참 친구들과 뛰어 놀아야 할 시기인데, 벌씨부터 가족을 챙겨야 할 걱정을 하고 있고 자신의 미 래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모습에서였습니다. 이 아이의 말처럼 대부분 잠비아 에서는 아이들이 마음 놓고 뛰어 놀지도 못하고 학교에 가고 싶어도 학비를 낼 돈이 턱없이 부족하여 집에 방치되어야 하는 경우가 많고 가벼운 상처를 치료할 돈이 없어 병원에 가지도 못하고 그대로 죽어버리는 경우가 너무 많 습니다. 또한 잠비아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 비해 평화로운 분위기이지만, 잠비아 내에서도 도시 간 계층 빈부격차가 너무나도 크고 정부와 각계 고위급 관계 자들은 선진국의 개발원조금을 수여하면 개발이 필요한 마을에 직접 투자하 지 않고 정부청사 주변 지역만 발전시켜 잠비아 수도 루사카를 로드 트립을 해보면 루사카의 빈부격차 및 개발척도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부청사가 있는 북동쪽의 루사카는 상류층 지역이나 남쪽이나 서쪽은 빈민지역입니다. 그래서 지역 간 격차가 더욱더 벌어질 수밖에 없고 교육 및 의료시설 격차도 벌어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개발 정책이 만들 어지기를 바라고 잠비아의 많은 청년 리더들이 그들 공동체를 잘 이끌어나가 앞으로 잠비아의 밝고 건강한 미래를 책임지며 훌륭한 잠비아의 리더가 나오 기를 기도합니다.


Sudan

공용언어 – 아랍어 인구 – 약 40.8백만 명 GDP – 약 $417억

Khartoum

수단을 만난 차원나 님 안녕하세요? 일 혹은 거주를 통해 9년 정도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살아왔습니다. 현재는 난민 관련 일을 하며 하르툼에서 거주하고 있는 차원나입니다.

°수단과 남수단은 별개의 국가로 남수단은 2012년 수단으로부터 독립한 국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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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자기소개와 현재 하고 계신 일을 소개해주시겠어요? 어렸을 때 아버지의 직장 발령을 계기로 케냐, 나이로비에서 4년간 지낸 것이 아프리카와의 첫 인연이었습니다. 성인이 된 후에는 선교나 영리사업과 관련 없이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갈 궁리를 하다가 한 비영리단체에 첫 사회 생활을 시작, 그 후 대학원을 졸업한 후에 탄자니아와 케냐에 각각 1여 년간 근무하였습니다. 3년 전에는 유엔 JPO(초급전문가과정)에 합격하여 수단 국제 난민기구 (UNHCR)의 하르툼 사무실에서 무국적자 대상 사업담당을 하다가, 지금으로부터 약 9개월 전에는 2013년 12월에 시작된 남수단 내전으로 인한 수단 내의 남수단 난민 지원 사업의 리포터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2년 이상 지속되어 온 남수단 내전은 2015년 8월 말, 평화협정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끊임없는 갈등이 지속되고 있으며, 현재 국제난민기구는 남수단과 국경을 접 하고 있는 백나일주에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7개의 난민캠프를 (곧 8번째 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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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가 운영될 예정) 운영 중에 있습니다. 남수단에서는 현재, 계속되는 불안과 그로 의한 농업 실패, 그에 따른 식량 부족 등을 이유로 주변 4개국 (수단, 에티오피아, 우간다, 케냐)로 난민들이 계속 발생되고 있습니다. 수단은 2015 년에 남수단 난민 중 50% 이상을 받은 주요 난민 수용 국가로, 현재 200,000 명이 넘는 남수단 난민들이 백나일 주, 수도 하르툼 및 타 주에 거주하고 있 습니다. 그 안에서 제가 하는 일은 남수단 난민들에게 수단 사무실의 지원 내용 및 소식을 정확하고 최신의 정보를 활용하여 독자에 맞게 작성 및 배포하는 것으로, 간단히 말해서는 사무실의 뉴스데스크라고 설명하는 것이 제일 간단 할 것 같습니다. 현장에서의 상황은 다각적으로 그리고 신속하게 변하기 때문 에, 상반된 보고에 대해서 추가 조사를 하거나 수치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지 원에 더 종합적인 평가가 가능하도록 돕는 일도 포함됩니다. 그런 작업을 한 달에 2번 이상 하고 있는데, 타 통신이 내가 작성한 보고서를 인용하거나, 조 금 먼 훗날, 사람들이 남수단 내전에 대한 수단에서의 대처를 조사할 때, 내 보고서도 그중 참고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더욱 글자 하나, 숫자 하나에 만전 을 기하게 되며 또한 자부심도 갖게 됩니다.


새벽의 자벨 타카

수단에서 방문 또는 여행했던 지역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어디인가요?

옛 한국의 신혼부부에게 제주도가 있듯이, 수단 사람들은 동쪽 국경 도시 케쌀라(Kassala)를 많이 찾습니다. 케쌀라 주는 국경 넘어 에리트리아와 에티 오피아 난민들이 수십 년을 통해 마을과 같은 난민 캠프를 이루고 있기도 합

니다. 명소로는 허허벌판 한가운데에 자벨 타카(타카산)이 웅장한 기운을 내 며 서 있습니다. 수단의 수줍은 신혼부부들은 이 산 밑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찻집 (수단은 무슬림 국가여서 술이 금지되어 있습니다)에서 낭만적인 분위기 를 냅니다. 하지만 동시에 수십 년에 걸쳐 많은 난민의 수를 배출하고 있는 에티오피아 및 에리트리아 인들이 국경을 넘을 때 처음으로 수단 정부 및 국 제난민기구와 난민등록을 하며, 국경을 어렵게 넘은 후에도 많은 이들이 수단 국내법에 따라 등록된 곳에서 거주하지 않고 수도 하르툼으로, 하르툼에서 잠 시 여행 경비를 준비한 후 이집트나, 리비아로 그리고 유럽을 향해 이동하게 합니다. 그중에 납치, 인신 및 장기 매매, 강간 및 그 외 다양한 폭력에 노출 될 가능성이 많아 국제법에 따른 보호가 시급합니다.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 고 매달 많게는 천 명 정도가 수단 국경을 넘어 수단 정부와 국제난민기구에 난민등록을 하는데, 하는 일이 있는지라 수단의 난민 경로 중 첫 거점지를 여 행하니 마음이 그저 즐겁지만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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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로 케쌀라를 꼽는 이유는, 조금 더 개인적인 이유입니다. 하르툼에서 는 날씨가 상당히 더워 바깥 운동을 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타카산을 보자 운동 본능이 샘솟아 아침 새벽 5시 30분부터 등산을 시작했습니다. 자벨 타 카는 사진에 보이다시피 돌산이며 수단 사람들은 등산 문화가 없는 관계로 등산로도 없어 거의 두 손과 발로 돌과 돌 사이를 기어가듯이 산을 올랐던 기억이 남습니다. 조금 과장을 보태서 락 클라이밍을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비록 정상은 아니지만, 정상(들)이라고 할 수 있는 큰 두 바위 사이의 골짜기 에서 내려다보이는 반대쪽 에리트리아의 풍경도, 왠지 에리트리아 인들이 자 기 나라를 떠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풍경이 저것과 비슷하겠구나 생 각하니 묘하더군요. 약 5시간 경의 산행을 끝내고 온몸의 근육을 쓴 후 마시 는 뜨거운 홍차 한잔은 지금도 떠올려보면 기분이 정말 좋습니다. 수단은 아

쉽게도 바로 북쪽의 이집트나 주변의 케냐, 탄자니아처럼 관광지가 개발된 곳 이 결코 아니며, 수단 정부도 외국인 관광객 유치에 그다지 열심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더욱 수단은 분명 자기만의 무심한 매력이 있는 장소이며 잘 안 알려져 있는 만큼 자신만의 특별한 추억을 쌓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 각합니다.

자벨 타카 입구의 찻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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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에서 생활했던 시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한 가지를 꼽는다면 언제일까요? 하루 수단 피라미드 근처로 하루 캠핑을 간 적이 있는데, 모래가 뜨거워지 지 않는 아침을 이용해 피라미드를 구경할 요량으로 그 근처 벌판에 매트리 스를 깔고 하늘을 이불 삼아 하룻밤을 자려고 누웠습니다. 주변에 가장 가까 운 도로는 100 미터 밖으로, 가로등도, 그리고 가끔 지나가는 차 외에는 그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 속에서 바라보는 별들은 환상적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현대 생활은 어떠한 소리나 물체가 항상 보이는 것의 연속이라는 작은 깨달음을 얻고, 화려한 수사법이라고만 생각했던 ‘별들의 속삭이는 소리’ 를 실제로 들으며 잠들던 그 순간은 평생 잊고 싶지 않습니다.

수단에서 만난 사람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면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수단에서도 한류 열풍은 대단합니다. 황금시간대에 한국 드라마를 방영하 고 있으며, 가끔 제 국적을 확인한 후 저는 듣도 보도 못한 드라마를 지금 아 주 재미있게 보고 있노라고 얘기해주는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 다. 그중에 행사를 통해 한류 팬인 소녀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이들은 히잡 을 쓴 채로 하르툼의 하나밖에 없을 듯한 오락실에서 한국 가요에 맞춰 DDR 을 밟는, 아주 귀여운 아이들입니다. 심지어는 하루 집에 초대된 적이 있었는 데, 한국 드라마에서 나오는 김치가 너무 먹어보고 싶었으나 수단에는 김치도, 고춧가루도 없어 대신 양배추와 밀가루 및 동남아산 생선 즙으로 만든 김치 를 만들어보았다고 저에게 내밀던 순간이 인상에 남습니다. 한국 대사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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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규모의 한글학교를 운영 중에 있는데, 거기서 공부도 하고 주말에는 모여서 한국 아이돌 뮤직비디오를 돌려보며 시간을 보낸다 합니다.

수단의 빅뱅 팬과 차원나 님

마지막으로 차원나 님과 같이 아프리카 지역과 사람들을 만나고 알아가 고 싶어 하시는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으신가요? 저는 사실 ‘아프리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입장 바꾸어서, 한 외국인이 중국 시골에서 짧은 기간 동안 지낸 후에 한국 사람을 만난 후 ‘너 도 아시아 사람이네, 아시아는 이렇더라’라고 하면, 기분이 어떨까요? 아프리 카는 엄청난 다양한 문화와 역사를 품은 거대한 대륙으로 한국 사람들의 평 균보다 조금 더 오래 살았다고 생각하는 저도 뭐라고 설명하기 어렵고, 또 설 명할 수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수단에 3년 동안 거주한 저도, 수도 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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툼과 지방 케쌀라는 완전히 다른 지역이었으며, 이것은 ‘아프리카에 거주한 경험’ 이 아니라 수단의 하르툼, 아니 수단 하르툼의 외국인 사회에서의 한 사람의 경험으로 세분화되어야지, 이것을 ‘아프리카’ 및 ‘아프리카 사람들’이라 고 일반화하는 순간 상당한 일반화의 폭력과 마주하게 됩니다. 물론 아프리카 대륙은 아직 한국인에게 생소하고 많은 편견이 있는 것이 사실이며 이를 접 근하기 위해서는 또다시, 한국인에게 가장 익숙한 ‘아프리카’라는 단어를 사용 할 수밖에 없는 모순을 안게 되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대륙 에 여행하거나, 거주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제가 작은 조언을 할 수 있다면, 있는 동안에 영어, 불어 등의 식민지 시대에 유입된 언어가 아닌 현지 토착어 를 최대한 많이 배우라는 것, 그리고 그 나라의 식민 시대 이전의 구전 역사 에 관심을 갖거나 전래동화 몇 개쯤은 알아가는 것을 추천합니다. 분명 그 나 라를 알아감에 있어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Tanzania

공용언어 – 스와힐리어, 영어 인구 – 약 50백만 명 GDP – 약 $567억

Dar es Salaam

탄자니아를 만난 우승훈 님 처음 비행기를 타고 도착했던 케냐에서의 2주가 인생을 바꿨습니다. 그 뒤 아프리카 '덕후'가 되어 탄자니아와 영국 그리고 지금은 르완다에서 아프리카와의 인연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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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안녕하세요. 우승훈입니다. 영국 브래드포드 대학교에서 아프리카 평화 갈 등학(African Peace and Conflict)이라는 이름의 석사과정을 하고 있습니다. 전 공 이름 좀 생소하죠? 설명하자니 어려워서 학교 홈페이지를 보니 이 전공은 ‘아프리카의 평화, 갈등, 안보, 발전, 민주화와 관련된 특징, 다양성, 복잡성을 탐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기본적으로는 기존의 아프리카학 에다 평화학이라는 학문이 결합된 과정인데… 간단히 말해서 아프리카를 ‘다 양한 관점’으로 바라보는 방법을 공부한다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아요. 영국에 온지는 이제 7개월이 넘어가고 있네요, 그동안 아프리카 국가들 출 신은 물론, 세계 각국 출신의 학생들과 함께 아프리카의 정치, 안보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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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도 듣고, 평화, 젠더, 민주주의 등에 대한 수업도 들었습니다. 배울수록 새로운 것들이 많아서 놀라고 있습니다. 지금은 학기가 다 끝나고 탄자니아의 정치에 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데요, 아마 탄자니아의 민주화와 야당의 역 할에 대한 논문이 될 것 같습니다. 대학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 블로거이기도 합니다. 여러 플랫폼을 거쳐 지금은 브런치에서 '투마'라는 이름으로 아프리카에 관련 된 다양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부족한 글을 사람들 앞에 내놓는 게 쑥스럽지 만, 아프리카에 대해선 불모지 같은 우리나라에 작은 오아시스를 만든다는 생 각으로 계속해나가고 있어요.


하늘과 바람과 태양과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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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니아에서 방문 또는 여행했던 지역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어 디인가요? 무슬림과 크리스천이 아울러 사는 탄자니아에서는 무슬림 휴일도 공휴일 이고, 크리스천 휴일도 공휴일인데요, 그중에서도 부활절은 연휴가 길어, 우리 의 명절 같은 느낌이 나는 기간입니다. 한 2주 정도 쉬었던 거로 기억해요. 이 기간엔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거나 여행을 가서 버스 값도 뛰고, 그마 저도 구하기 힘든 경우도 있을 정도인데요, 저도 이 기간에 쉬게 되어서 늘 지내던 해안지방을 떠나 내륙으로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마침 제가 일하던 사 업장의 매니저가 내륙의 고향집에 방문한다고 해서 저도 따라갔습니다. 매니저의 고향집이 있는 하우비에 가는 길은 정말 멀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다레살람에서 탄자니아의 수도인 도도마로 8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이 동해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새벽같이 콘도아라는 작은 도시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오전 내내 달려 콘도아에 도착하면, 쉴 시간도 별로 없이 하루 단 두 대 있는 하우비행 완행버스를 타고 하우비로 갑니다. 지금도 하우비행 버스는 기 억에 남는데요, 버스정류장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헐레벌떡 뛰어서 잡기도 했고, 빽빽한 3x3좌석 버스인데도 자리가 모자라 입석 손님도 있고, 닭도 있 었던 그런 엄청난 버스라서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사람 탈 자리도 없는데 짐도 당연히 자리가 없겠죠, ‘날아라 슈퍼보드’ 삼장법사님 자동차마냥 버스 위에 짐을 가득 싣고 비포장길과 포장도로를 번갈아 가며 달리는 버스 안에 서 혹시나 내 짐이 떨어지지 않을까, 누가 잘못 가져가진 않을까 조마조마했 었습니다. 탄자니아의 수도 도도마와 사파리로 유명한 아루샤 딱 중간에 있는 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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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정말 딴 세상 같았습니다. 저는 탄자니아에서도 가장 큰 도시 다레살람 에 살았기 때문에 크게 불편함이 없이 지냈었는데요, 하우비는 살면서 가본 시골 중 가장 시골이었던 같아요. 버스에서 처음 내렸을 땐, 집이라곤 안 보 이고 끝없는 옥수수밭만 펼쳐져 있었고, 제 키만 한 옥수수나무들 사이로 한 참을 걸어 마침내 도착한 매니저네 고향 집은 전선도 상수도도 안 들어오는 곳이었습니다. 집에 소를 키우고, 마당엔 닭이 뛰놀고, 할머니는 싸리 빗자루 로 마당을 쓸고, 어두컴컴한 부엌에선 화롯불이 타닥타닥 타들어 가고, 지붕 은 양철지붕! 정겨운 풍경이 떠오르지 않나요? 저녁이 되어 해가 지니 달리 할 것도 없어서 마당에 멍석 깔고 누워서 별을 보며 아이들과 놀았습니다. 마 치 동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하우비에서의 기억은 지금도 잊 히지가 않네요.

마당 쓰는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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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니아에서 만난 사람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면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어제, 탄자니아에서 알고 지내던 선생님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습 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이틀 전 다레살람 루갈로 병원에서 세상을 떠나신 마리아 루이스 선생님입니다. 마리아 루이스 선생님 은 제가 일하던 프로젝트에서 학생들에게 천 염색과 수공예를 가르치셨던 선 생님입니다. 루이스 선생님께서는 외국에서 온 경험도 없고 나이도 어린 저를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항상 존중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프로젝트에 참여 하는 학생들, 여러 어려운 환경에 배움에 집중하기 어려워하고, 한창 다른 것 들에 관심이 많아 천방지축이었던 우리 학생들을 항상 선의와 지혜로 품어주 셨습니다. 선생님 떠나시는 길에 함께하지 못하는 게 속상합니다. 한 번은 사업장에 김밥을 해갔던 적이 있었는데요, 학생들이 낯선 까만색 음식을 먹길 꺼리고, 경계하는 동안, 마리아 선생님께서는 알쏭달쏭한 표정으 로 계속 드시다가, 남아있던 수많은 김밥을 챙겨가겠다고 하셨던 일이 기억납 니다. 정말 그 김밥이 맛있어서 그러셨는지, 아니면 내가 속상할까 봐 그러셨 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 생각이 나네요. 마리아 선생님에 대한 소식은 페이스북을 통해 마리아 선생님의 조카에게 서 들었는데요, 제가 한국에 돌아온 이후 탄자니아에서 벌써 세 번째로 날아 들어온 부고 소식이었습니다. 탄자니아에서 지내면서 죽음이 참 가까이 있다 고 느꼈습니다. 교통사고도 잦고, 병원에 제때 가지 못해 세상을 떠나는 이들 도 있었고, 병원에 가도 우리나라처럼 생명을 연장해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 습니다. 저도 대중교통을 많이 이용하고, 시내와 좀 떨어진 곳에 살다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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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겠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그러다 보니 오늘 을 더 잘 사는데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죽음과 가까운 일상이 탄자 니아 사람들의 삶에 대한 태도에 영향을 미치고 있진 않을까요?

마리아 선생님


킬리만자로 중턱의 캠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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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를 공부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앞서도 말했지만, 저는 아프리카 평화갈등학이라는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원래 탄자니아에 가기 전엔 국제개발학으로 석사를 하고 싶었는데요, 탄자니 아에서의 경험이 진로를 바꾸게 했습니다. ‘내가 아프리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던 마음에서 ‘이들이 무엇을 해 내는지 지켜보고 싶다.’ 는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제 성격이 사람들 앞에 나서길 싫어하는 성격이라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변화를 만들기보다는 이미 충분한 잠재력을 가진 아프리카 사람들의, 탄자니아 사람들이 만들어나가는 역사를 지켜보는 것만으 로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에겐 국제개발협력의 사례나 경제와 관련된 일들만 많이 알려져 있지만, 탄자니아와 아프리카의 역사에 국제개발 협력과 관련된 변화는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더 많은 역사와 변화가 탄자니아 사람들에 의해서, 아프리카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있는데, 아쉽게도 그 에 대한 기록은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어떤 계기로 아프리카를 공부하고 싶어졌는지는 다들 다르겠지만, 일단 아프리카에 대한 아프리카 공부를 먼저 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Ethiopia

공용언어 – 암하라어, 영어 인구 – 약 92.7백만 명 GDP – 약 $857억

Addis Ababa

에티오피아를 만난 신윤정 님 “엄마, 나 아프리카 가게 되었어” 한마디만 남긴 채 훌쩍 에티오피아행 비행기를 탄 조금 더 행복해지고, 조금 더 즐겁게 살기 위한 여대생의 에티오피아 거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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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려도 될까요?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졸업을 앞두고 있는 경희대학교 회계, 세무학을 전 공한 25살 신윤정입니다. 회계, 세무학을 전공하는 분들 중에 저처럼 아프리 카를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이제는 학과에서도 괴짜로 통하 고 있네요. 만나는 사람들마다 졸업하면 이제는 어디로 갈 거냐고 물어요. 그 만큼 제 남다른 아프리카 사랑이 증명된 거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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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 님께서 에티오피아에 가시게 된 당시 상황에 대해서 들어볼 수 있 을까요? 에티오피아에 가기로 결심했을 당시, 저는 한 학기를 남겨둔 대학생이었어 요. 대학에 입학할 때만 해도 누구보다 뚜렷한 꿈이 있었고 그 꿈을 인정받아 서 회계, 세무학과에 자기소개서와 면접만으로 합격했었죠. 그런데 막상 들어 와 보니 제 꿈과 실제 전공이 많이 달랐어요. 전공이 제 생각보다 잘 안 맞더 라고요.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선택한 전공이었는데, 그리고 그 꿈은 아직 그대로인데 무슨 일을 해야 될지 너무 막막했어요. 아마 많은 대학생분들이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한 번쯤은 하지 않았을까요? 졸업은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갈피도 안 잡히고 주변에 서 압박은 점점 커지고…. 그러다 2014년 여름에 아프리카 잠비아에 다녀왔었어요.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의 봉사활동이었는데 다녀와서 아프리카의 매력에 빠졌어요. 그리고 더 이상 세계 빈곤 문제가 그저 추상적인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잠비아에 서 만났던 제 친구들, 제레미와 욜란타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 어요. 그래서 2015년 3월 에티오피아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어요. 1년간 직접, 제 두 손으로, 더불어 다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고 싶었거든요. 주변 사람들 이 다들 미쳤다고 했죠. “네 전공이랑 전혀 상관없는 분야에서 뭘 하겠다는 거냐.”, “갑자기 웬 아프리카냐….” 주위의 반대가 많이 심해서 마음고생도 많 이 했었는데 막상 에티오피아에 가보니 그런 고민들 대부분이 자연스럽게 해 결된 것 같아요. 저는 그냥 즐겁게 살고 싶거든요. 에티오피아에 가기로 한 결심은, 돌이켜보면 제가 행복해질 수 있던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신윤정 님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아이들


다나킬 활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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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에서 여행했던 지역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어디인가요? 저는 주어졌던 휴가를 깨알같이 다 쓰고, 될 수 있는 한 여행을 많이 다니 려고 했어요. 시골 출장 기회가 있으면 악착같이 가겠다고 하고, 여행도 되도 록 현지인들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가려고 했었던 것 같아요. 가장 인상 깊 었던 여행지는 두말할 것도 없이 ‘다나킬 지역’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11 월 즈음 휴가를 내고 3박 4일간 다나킬 투어에 참여한 적이 있었어요. ‘리틀 우유니’라고 불리는 호수, 소금사막과 활화산, 용암, 유황, 마그마 크레이터 등 을 볼 수 있는 투어였는데, 세계에서 가장 뜨겁고 낮은 곳이라고 불리더라고 요. 그뿐만이 아니라 출발하기 전부터 힘들기로 악명이 높은 곳이기도 했어요. 3박 4일간 지붕 아래에서 자는 건 딱 하루, 나머진 노숙에 제대로 씻지도 못 해 물티슈로 대충 닦고 한낮엔 50도 가까이 올라가서 입맛도 잃고 하루 종일 오프로드를 달리고, 한밤에 현무암으로 울퉁불퉁한 길을 트래킹 하는 등의 일 정이었는데, ‘이게 사서 웬 고생인가’ 싶더라고요. 그런데 세상에, 긴 트래킹 끝에 벌겋게 솟구치는 용암을 보는 순간 ‘이대 로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핑 도는 거예요. 나름 이곳저곳 많이 돌아다녔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그 엄청난 자연 앞에서 전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고 저도 모르게 겸손해지고 낮아졌어요. 두 어 시간 동안 폭 포처럼 쏟아지는 까만 별들과 시뻘겋게 튀기는 불꽃을 보면서 20여 명의 함 께 온 사람들 사이에는 그저 침묵만 흘렀어요. 너무 경이로워서 아무도 말을 잇지 못하더라고요. 그 감동을 아직도 잊을 수 없어요. 흔히 에티오피아는 다 른 아프리카 국가들에 비해 관광지가 없다고, 관광지 개발이 잘 되어 있지 않 다고 이야기하는데, 저 또한 거기에 가기 전까지는 그 말에 정말 많이 공감하 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여길 다녀오고 나서 에티오피아가 다르게 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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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한국에 돌아온 지금도 종종 그때를 떠올리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낮아 지고, 겸손해지려고 노력하게 됐어요. 그렇게 보면 여행이 참 대단한 힘을 가 진 것 같아요. 그렇지 않나요?

에티오피아에서 지내시면서 가장 좋으셨던 경험을 한 가지 꼽는다면 무엇인가요? 에티오피아에 도착하자마자 수도인 아디스아바바에서 5시간 정도 떨어진 아와사라는 중소도시에서 사정상 잠시 한 달여 정도 지냈었어요. 말이 중소도 시이지, 거리에 자동차와 마차, 소, 말, 염소가 함께 다니는, 한국인의 기준으 로는 거의 시골인 곳이나 다름없는 곳이었죠. 아와사는 유독 통신과 전기가 불안한 도시여서 단 하루도 정전이 되지 않은 날이 없었어요. 제가 머물렀던 곳은 정전이 되면 단수도 같이 되는 곳이었는데, 하루는 6번이나 전기가 나간 거예요. 그것도 밤에 전기가 나가서 저녁도 숯으로 불을 피워서 간신히 해결 했었던 날이었어요. (그 뒤로도 그런 날이 자주 있었던 것이 반전!) 워낙 작은 도시여서, 밤에 정전이 되면 도시 전체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겼어요. 한 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죠. 도시 전체에서 발전기가 있는 곳을 손에 꼽으니 정말 대부분의 집들이 어둠 속에 잠기고, 별은 쏟아질 것처럼 반짝거 리고 반딧불이도 찾아보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곤 했는데 그 순간이 정말 좋았어요.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다 똑같은 삶 을 사는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다나킬 소금사막

다나킬 유황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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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ène pastor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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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가장 좋지 않으셨던 경험도 공유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한 번은 대낮에 혼자 길을 지나가다가 아무 이유 없이 어떤 거지에게 돌 을 맞은 적이 있었어요. 한눈에 봐도 정신이 온전치 않아 보였는데, 길거리 구석에 앉아서 입으로 이상한 소리를 내기에 무심코 쳐다봤다가 그 사람이 던진 돌에 맞아서 목에 상처가 났었죠. 그 순간 너무 서러운 거예요. 아무리 대낮이어도 저는 혼자였고, 외국인이고, 여자이고. 울컥했는데 뭐라고 할 수가 없어서 아무 일 없었던 척 도망쳤어요. 부모님 생각이 제일 먼저 났는데, 많 이 걱정하실까 봐 얘기도 못 하고 그곳에 있는 한국인분들에게만 얘기해서 기분을 풀었었어요. 그 뒤로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거지들을 보면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곤 했었어요. 에티오피아에서 ‘온전히 그 사람들을 위한 마음으로 있 자’, ‘초심을 유지하자’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지냈는데, 그런 사건들이 한 번 씩 터지면 회복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아요. 스스로도 작아지고 요. 그래도 직장동료나 현지 친구들 덕분에 잘 극복할 수 있었어요.




Tanzania

공용언어 – 스와힐리어, 영어 인구 – 약 50백만 명 GDP – 약 $567억

Zanzibar

탄자니아를 만난 최선 님 끊임없이 도전하고 꿈꾸는 최선입니다. 제가 탄자니아 잔지바르에서 생활하면서 있었던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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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자기소개와 현재 하고 계신 일을 소개해주시겠어요?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인천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3년 차 초보 교사예요. 자기소개를 한마디로 하자면 꿈꾸는 사람이라고 할까요? 언제나 꿈꾸는 게 좋았어요. 부끄럽지만 저는 어렸을 때 제가 세상을 변화시 킬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요. 저는 지금 그랬던 당돌한 소녀에서 어떻게 그 꿈을 이룰 수 있을지 고민하는 성숙한 사람으로 변화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여전히 꿈을 꾸고 있고요, 제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일을 (물론 지금도 하 고 있지만) 찾아 더 나아가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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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계기로 탄자니아 잔지바르에 거주하게 되셨나요? 잔지바르에 갔었던 계기를 얘기하자면, 조금 먼 과거까지 되돌아가야 하네 요. 제가 지금 교사를 하고 있지만, 처음부터 교육에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 었어요. 고등학생 때 한비야 씨의 책을 보고 ‘이거다!’ 싶어 전 세계를 종횡무 진하는 NGO 활동가가 되고 싶었어요. 그땐 그 직업이 얼마나 혹독한(?) 일인 지도 모르고 그저 아름다운 미래를 그렸던 것 같아요. 하지만 어쩌다 보니 가 장 가기 싫었던 학교인 교육대학교에 입학하고, 3년 동안 방황하다가 제 꿈을 이렇게 져버릴 수 없을 것 같아 아프리카로 뛰어들었어요. 우연히 기아대책이 란 단체를 알게 되어서 기아봉사단의 신분으로 탄자니아 잔지바르로 나갈 수 있게 되었죠. 제가 잔지바르에서 했던 일은 이미 그곳에서 어린이결연사업 (CDP)를 하고 계셨던 기아봉사단을 도와드리는 일이었어요. 어린이결연사업 이란 일대일로 맺어져 있는 한국의 후원자와 현지의 수혜 어린이 사이의 중 간다리의 역할을 하는 거예요. 생활비, 교육비지원에서부터 방과 후 교실 같 은 활동들을 통해 아이들을 도왔죠. (당시의) 기아봉사단원 분의 연세가 많으 셨기 때문에 행정 일을 제가 도맡아 하고, 어린이결연사업 진행을 도와드렸어 요. 그 1년 동안 정말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어마어마하게 값진 것들을 배 울 수 있었습니다. CDP교실과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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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니아에서 방문 또는 여행했던 지역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어디인가요? 잔지바르에는 아름다운 곳이 정말 많지만, 그중에서도 제게 가장 특별한 곳이라 하면 단연코 DCMA라고 할 수 있어요. DCMA란 Dhow Country Music Academy의 약자이고, 잔지바르에서 유일한 음악대학기관이에요. 건물은 바다 바로 앞에 위치해서 스톤타운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발코니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요,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악기 소리가 끊이지 않는 열정이 넘치는 곳이 기도 해요. 제가 대학교에서 바이올린을 배웠었는데, 이곳에서도 악기를 배울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잔지바르에 거주한 지 7개월 만에 찾아가게 되었어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동안 알고 있던 잔지바르와는 또 다른 매력에 푹 빠지 게 되었습니다. 저는 봉사단원으로서 매일 농촌지역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아프리카 사람들이 너무 좋지만, 언어와 문화의 장벽으로 어느 정도 이 상으로는 친밀해질 수 없다는 한계를 느끼고 있었어요. 당시에 교류하고 있던 청년 단원들도 없어서 외로움을 겪고 있기도 했고요. 그러다 학원에 가보니 저랑 같은 음악을 듣고 즐기며 공감할 수 있는 문화를 지닌 젊은 친구들을 만나니 그동안의 외로움이 다 해소되는 것 같았어요. DCMA에서는 아랍음악, 아프리카음악, 퓨전 재즈 등 여러 장르를 다루고 있고 유럽 어느 국가와 잔지바르 정부의 지원을 받아 현지인에게 값싸게 레 슨을 제공하고 있어요. 잔지바르는 1년에 한 번 열리는 아프리카 재즈 페스티 벌의 정기 개최지이기도 해요. 그만큼 음악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이 있는 섬 이라고 생각해요. 학원 친구들 중에는 음악을 본업으로 하는 뮤지션들도 많지 만, 일을 하고 번 돈을 쪼개 음악을 배우러 오는 친구들도 많아요. 잔지바르 에는 외국인을 위한 식당, 호텔이 많아서 공연의 기회도 굉장히 다양하죠.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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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내에서 저녁마다 불을 밝히고 공연을 하기도 하고요. 물론 이 모든 콘텐츠 가 현지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지 않고 외국인을 상대로 한다는 점이 아쉽지 만요. 친구들을 사귀면서 잔지바르가 제주도만 한 섬이지만, 농사짓는 시골 사람과 도시 사람의 경제적, 문화적 격차가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기도 했어요. 농촌에서는 구경도 할 수 없는 아이폰을 학원 친구들이 들고 다니고, 한국 친 구들만큼이나 페이스북 등의 SNS를 활발하게 하는 것을 보고 문화충격을 받 았거든요. 지금도 SNS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는데, 자신이 할 수 있는 분야를 통해 열심히 아프리카를 세계에 알리는 친구들 덕분에 제가 아프리카를 잊지 않을 수 있는 것 같아요.

DCMA의 한 연습실에서


잔지바르의 해지는 해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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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니아의 가장 좋았던 점은 무엇이고 가장 좋지 않았던 점은 무엇이 라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음악학원뿐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만난 잔지바르 사람들의 공통점은 예술적 재능이 정말 뛰어나다는 것이었어요. 먼저, 흥과 에너지가 넘치고 춤 과 음악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모습이 너무나 매력적이었죠. 음악학원에서는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일반 사람들도 춤과 노 래를 정말 사랑하고 즐기는 모습을 볼 수가 있어요. 음악이란 것이 그 사회에 서 사람들을 묶어주고,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많이들 생각하듯이 흑인들이 확실히 예술적 재능이 남달라요. 체격 조 건부터가 달라 가창력이나 춤 실력도 뛰어나고 즉흥성, 독창성도 뛰어나서 보 는 것만으로도 저에겐 즐거움이더라고요. 하지만 이렇게 뛰어난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도 마땅한 예술교육이나 자원 이 없는 점이 아쉬워요. 공립학교에서는 미술, 음악 등의 예술교육은 이루어 지지 않고 있고 유일한 음악교육기관인 DCMA에조차 진짜 전문성을 가진 선 생님이 드물거든요. DCMA에 비치되어있는 악기도 기부받은 것들이고, 너무 낡았고, 개인이 소유하기에는 어려웠어요. 그래서 유럽에서는 DCMA에서 음 악을 가르치기 위해 봉사활동을 많이 와요. 뮤지션으로서 이 곳 사람들과 콜 라보레이션 작업을 하러 오기도 하고요. 요즘 페이스북으로 보니 학원 친구들 이 공연 차 꽤 많이 유럽으로 나가 있더라고요. 좋은 변화인 것 같아요. 하지 만 더 나아가 아프리카에 수많은 일반 시민들이 더 다양한 음악을 접하고 교 육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된다면 아프리카는 많은 뛰어난 예술가를 배 출하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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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에서 생활했던 시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한 가지를 꼽는다면 언제일까요? 제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던 새해 였어요. 한창 음악학원 친구들과 어울리던 때였는데, 저한테도 공연 제의가 들어와 몇 번 공연을 했었거든요. (실력은 지~인짜 허접하답니다. 하지만 모든 게 가능한 아프리카!) 그러던 중 해변 가에 있는 한 호텔에서 열린 New Year Party에 저도 가게 됐어요. 3시쯤 출발이라 ‘저녁까지만 공연하고 돌아오나 보 다’ 했는데, 알고 보니 새벽까지 이어지는 공연이었던 거예요. 저는 딱 한 곡 만 연주하러 간 거라 나머지 시간을 즐길 수 있었어요. 무대는 파도치는 해변 바로 옆 모래사장이었고, 머리 위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별이 떠 있었어요. 아프리카 특유의 리듬과 선율이 그곳을 계속 울렸고 연주자, 외국인들과 함께 웃고 노래 부르고 춤추며 새해를 맞았을 때, '내가 과연 이런 눈부신 순간을 다시 맞이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더랬죠. 우리 옆에서는 주민들이 불을 피워놓고 전통춤을 추며 새해를 기념하고 있었어요. 그분들하고도 새해 인사를 나누고 같이 춤을 추는데 정말 신나더라고요. 공연 이 끝나고 새벽에 악기랑 무대장비를 다 싣고 출발하려는데 버스가 또 고장 이 나서 다 같이 내려 버스를 밀었던 해프닝까지, 너무 재미있었던 공연이었 어요. 한국이었다면 제가 공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거고, 그렇게 특별한 무대도 없었을 거예요. 우리는 악기를 연주하면 완벽히 준비된 상태에서 보여 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지의 사람들에게는 그저 함께 즐기는 것이 가장 좋은 공연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시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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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공연했던 친구들과

현지를 바라보는 한국 사람들의 관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어떤 부분은 살리고 어떤 부분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아프리카에 가기 전에는 여느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똑 같이 가지고 있었어요. 저도 매체에서 본 아프리카의 모습이 전부였고, '불쌍 하니까 도와주어야 한다.'라는 생각이 강했죠. 그리고 막상 아프리카에 가서 가장 처음으로 느꼈던 것은, 미디어에 대한 분노였어요. 물론 절대빈곤지역이 지금도 존재하기는 하지만, 드넓은 아프리카 전부의 모습이 아니잖아요. 그런 데 한국 TV에서는 아프리카는 동물의 왕국, 빈곤의 나라 (사실 나라가 아니 라 거대한 대륙인데도!) 정도로만 묘사하고 있어요. 특히 수많은 NGO단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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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빈곤 포르노식 광고가 한국 사람들의 아프리카를 향한 관점에 막대한 영 향을 끼쳤다고 생각해요. 아프리카에 특별한 관심이 있지 않고서는 사람들은 매체가 전달하는 모습만 기억하니까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저 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고요. 하지만 이제는 아프리카든 어디든 ‘사람 냄새가 나고 사람 사는 곳’이라는 의식이 필요한 것 같아요.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 한 물건은 그들에게도 필요하고, 우리가 느끼는 세계의 급격한 변화와 동향은 그들도 똑같이 느끼는 것이라고요. 지구촌이라는 단어는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나왔던 단어인데 우리가 진짜 지구를 하나의 마을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 것이 마음이 아파요. 진짜 자신이 지구촌 시민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마을인 지구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살 아갈 거예요.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 누군가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상호 이해의) 출 발 아닐까요? 저는 우리가 ‘아프리카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기 전에, 함께 살아가는 ‘지구촌 안의 우리의 존재’에 대해 먼저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 다. 요즘에는 이런 걸 알리려는 좋은 단체들도 많고, NGO들도 많이 노력해주 셔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15 countries

15개국을 만난 윤준식 님 안녕하세요, 국내 제약 업체에서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 해외영업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한 곳에 오래 머문 경험은 부족하지만 여러 국가들을 방문하고 느낀 점을 공유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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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자기소개와 현재 하고 계신 일을 소개해주시겠어요? 안녕하세요? 동아ST 해외사업부에서 중동 및 아프리카 지역 해외영업을 담당하고 있는 윤준식입니다. 참고로 동아ST는 국민 피로회복제 '박카스'로 잘 알려진 기존의 동아제약에서 2013년 지주사 체제 도입에 따라 인적 분할 되었고 현재 그룹 내 전문의약품, 의료기기 및 해외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회 사입니다. 2012년 입사 이후 줄곧 아프리카 지역을 담당하고 있고 올해부터는 담당 지역을 중동으로 넓히게 되었습니다. 보통 중동 시장을 바라볼 때 업계 에서는 종교 및 문화가 유사한 북부 아프리카 국가들을 포함하며 MENA (Middle East and North Africa)의 하나의 시장으로 묶어 지역 간 시너지를 만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담당하는 주요 업무는 기존 거래처 관리를 통한 수출 증대와 함께 신규 사업 개발 업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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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느낌이 풍기는 명함꽂이

어떤 계기로 어떤 나라들에 거주 및 방문하셨나요? 입사 이전에는 아프리카에 다녀온 경험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제 생애 아 프리카 대륙을 누비면서 해외영업을 할지 전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출장을 통해 현재까지 북부 아프리카는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이집트, 서부 아프리 카는 라이베리아, 가나, 나이지리아, 코트디부아르, 동부 아프리카는 탄자니아, 케냐, 부룬디, 에티오피아, 남부 아프리카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보츠와나, 앙골 라 총 15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짧은 시간 내 많은 일을 소화해야 하는 출 장의 특성상 방문한 나라마다 보통 1주일 미만의 시간을 보냅니다. 장기 출장 을 보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약 1달을 머물렀던 적도 있습니다. 사업이 활발히 일어나는 남아공, 탄자니아, 가나, 모로코, 알제리 등은 타 지역 보다 더 자주 방문하며 각 나라에 대해 점점 더 자세히 배워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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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 및 방문하셨던 나라들을 소개해주시겠어요? 다른 분들과 다르게 한 나라에 오래 거주한 경험은 없기에 각 나라에 깊 은 소개는 어렵지만, 출장을 통해 알게 된 지역별 특징을 소개해 드리고 싶습 니다. 북부 아프리카는 지도상 아프리카 대륙에 포함되어 있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블랙 아프리카' 보다는 중동과 유럽에 더 가까운 사고방식, 종교 및 문화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에 북부 아프리카 지역은 아프리카보다는 보통 MENA 시장에 속합니다. 무슬림이지만 사우디아라비아처럼 철저한 금주 문화 가 아닌, 자유로운 음주 문화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제 경험상 대부분 젊은 이들은 유럽(특히 프랑스)을 동경하고 본인들을 아프리카인들보다는 유럽 사 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출장을 통해 다양한 현지인들을 만나는데, 서부 아프리카의 가나 현지인들 은 같은 지역의 나이지리아인들에 비해 성격이 많이 유하다는 느낌을 받았습 니다. 오히려 나이지리아인들의 경우 평균적으로 성격이 매우 공격적인 느낌 을 받았고 사업 협상에 어려움이 많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 는 인도 상인의 뛰어난 상술처럼 나이지리아인들의 상술 능력도 뛰어난 것 같습니다. 아마도 아프리카에서 단일 국가 중 최대 인구를 보유한 나라이기에, 개개인이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노력의 역사가 이 배경이 되었을 거라 생 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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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권의 경우 현지인을 제외하면 북부와 서부 아프리카 지역은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레바논 상인들이 장악해 있는 모습이고 동부와 남부는 과거 영국 식민지 역사와도 관련되어 있고 인도 본토와의 가까운 거리로 현재 인도 이 민 3세들이 상권을 이끌고 있는 모습입니다. 테이블 마운틴

자연과 문명의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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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다녀오셨던 나라들에서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민간 기업에 종사하며 아프리카 해외영업을 담당하기에 경제 현황과 전망 을 유심히 지켜봅니다. 선진국의 경기 침체 및 작년부터의 미국의 금리 인상 가능성에 따른 외국인 투자자본 이탈로 아프리카 국가들의 현지 화폐가치가 크게 절하된 상태입니다. 남아공의 경우 3년 전에 비해 $1 대비 10 Rand 정 도인데 현재는 14 Rand로 40% 절하된 상태입니다. 동부의 탄자니아와 서부 의 가나에서도 비슷한 수준으로 환율이 인상되었습니다. 환율 인상은 곧 수입 업체들을 줄도산으로 몰아넣고 있고 생필품 가격 인 상으로 가계에 많은 부담을 주고 있습니다. 현지의 파트너와 거래를 하는 수 출업체들도 매출 부진을 겪고 있습니다. 특히 석유 지하자원을 통한 수입이 정부 예산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국가들은 유가 가격 하락에 따라 외화 수입 감소, 정부 예산 감소, 경제 성장률 감소를 피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탄탄한 제조 산업 육성으로 경제 성장이 일어나야 글로벌 외풍에 견딜 수 있는 자생력이 생기는데, 이 부분에서도 아프리카 국가들은 전력 부족이라는 문제가 발전을 더디게 하는 가장 큰 요인입니다. 한 예로 경제 규모로 아프리 카 내 2위인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도 정전은 큰 문제입니다. 경제수도인 요하 네스버그에서는 평균 하루 2번 정전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기사를 통해 알게 된 사실 중에는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의 전체 전력생산 규모는 한국의 생산능력인 연 87 gigawatts와 비슷한 수준입 니다. 1억 7천만 명의 인구를 보유한 나이지리아의 전력 생산능력은 연 7 gigawatts로 북한과 비슷한 수준이라니 나이지리아에 왜 그렇게 곳곳마다 석 유발전기를 가동하고 있는지 이해가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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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원활한 전력공급과 탄탄한 제조 산업을 위한 인프라 구축을 통해 국가마다 튼튼한 경제 기초를 갖추어야 합니다. 아 프리카의 미래가 그렇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현지에서 생활했던 시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한 가지를 꼽는다면 언제일까요? 서쪽의 라이베리아의 반대편인 동부의 부룬디에서, NGO 단체인 월드비전 과 SBS 희망TV 그리고 강남구 의사회 소속 의사 선생님들과 의료 봉사 활동 에 동행하였습니다. 저는 현장에서 월드비전과 SBS 촬영 팀을 도와 현장 기 록하는 사진사 역할을 맡으며 아름다운 부룬디의 자연과 해맑은 아이들의 모 습을 렌즈에 담았습니다. 출장으로는 방문하기 힘든 부룬디는 인구 1,000만 명이며 면적은 한국에 4분의 1의 작은 규모에 1인당 국민 소득이 $286로 아 프리카 중에서도 가난한 나라에 속합니다. 현지의 월드비전 스태프들의 협조를 받아 산맥 중턱에 띄엄띄엄 위치해 있는 마을 중 한 가정에 방문한 기억이 남습니다. 진흙으로 만든 벽돌과 짚으 로 만든 지붕 아래 집이 4인 가정으로 집입니다. 놀라웠던 것은 전혀 위생 개 념이 없어 집 안에 닭과 염소 등 가축 동물을 사육하고 있으며 동물을 배설 물에 아이들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가정의 한 아이는 중이 염으로 인해 청력을 거의 상실한 상황인데, 함께 동행 했던 의사 선생님의 의 견으로는 간단한 항생제만 복용했어도 나을 수 있었지만 시기를 많이 놓친 안타까운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의약품의 해외수출을 담당하는 실무자로서 제 일에 대한 소명 의식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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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니실린의 대량 생산으로 큰돈을 번 미국 제약회사 머크(MSD)의 머크 회장은 "의약품은 환자를 위한 것이지 결코 이윤을 위한 게 아니다. 우리가 이것만 제대로 기억한다면 이윤은 저절로 따라오고 커진다."고 했습니다. 인도 산 및 중국산에 비해 품질이 확실하고 유럽산에 비해 가격이 낮은 한국산 의 약품을 필요로 하는 아프리카 현지인들이 복용하여 삶의 질이 나아질 수 있 는 환경을 조성하는데 보탬이 되고자 합니다.

부룬디 의료봉사 활동 시 마을 아이의 청력 검사


부룬디 의료봉사 활동 사진

자신의 전공이나 전문 분야의 관점에서 활동하신 국가의 현재 상황을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제가 몸담고 있는 제약 산업 관련하여 아프리카 의약품 산업에 대해 정보 공유하려 합니다. 수치로 대한민국 의약품 시장이 약 17 ~19조 원이며 약 10 억 명의 아프리카 제약시장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만큼 아직은 개개인의 구매 력이 낮기에 시장은 작지만, 인구 규모가 크기에 성장률이 높습니다. 의약품 시장은 정부 입찰 시장과 민간(Private)시장으로 나뉘는데, 전체적인 모습으로 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정부 입찰 시장 규모가 차지하는 비중이 큽니다. 사하 라 사막 이남 국가들 중에서는 경제 규모 및 인구를 고려하여 남아공과 나이 지리아 의약품 시장이 크고 북쪽에는 모로코와 알제리의 시장이 큽니다. 제약 기업들 중 남아공의 제약 기업들은 아프리카 100대 기업에 포함될 정도로 생 산 및 판매 규모가 작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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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되는 의약품의 대부분이 필수 의약품으로 말라리아, 에이즈, 결핵, 간 염에 대한 항생제 및 치료제입니다. 사하라 사막 이남 국가들 중 현지에서 의 약품 생산을 하는 업체는 소수이며 대부분 인도와 중국산 의약품을 수입하여 유통하는 모습입니다. 종종 두 국가로부터 수입된 가짜 의약품으로 문제가 생 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와 함께 아직까지는 WHO 및 국제기구들의 기부 의 약품에 의존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아프리카에 의약품을 팔기 쉽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의약품은 환자의 안 전에 직결되기에 '제품 등록'이라는 장벽이 존재합니다. 국가마다 보건복지부 산하 식품의약품안전처 (FDA)에 허가를 받아야 시장에 공급할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니까 시스템도 없고, 대충해도 금방 등록이 될 것이라 생각 할 수 있 지만 실제로는 전혀 아닙니다. 과거 유럽 국가 식민지배 영향으로, 유럽의 까 다로운 등록 기준이 기준이 됩니다. 상당히 높은 기준이 설정되어 있고 현지 기관에 훈련된 직원들은 부족해 하나의 의약품을 등록하고 판매하기까지 최 소 2년~3년이 소요됩니다.


공용언어 – 아랍어

Tunisia

인구 – 약 11.5백만 명 GDP – 약 $403억

Tunis

튀니지를 만난 송기철 님 국내 농업 관련 연구소와 사업부서에서 근무했고 대학에서 농업 과목과 대학원에서 과실주 양조를 가르쳤고, 현재 한국그린전략경영협회 및 환경품질 경영연구소에서 부회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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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철 인사이터님, 안녕하세요!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려도 될까요?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NIHHS)에서 주로 포도, 블루베리, 배, 복 숭아 등 과수의 재배 생리 연구와 와인 양조 연구, 와인스쿨과 대학에서 와인 테이스팅 강의 및 농업기술실용화재단(FACT)에서 농업 관련 프로젝트를 수 행했었습니다. 가톨릭상지대학교에서 작물학, 식품 미생물과 효소학, 포도재배 론, 재배학 원론, 도시농업론 등을 강의하였고, 현재 한국그린전략경영협회 및 환경품질경영연구소에서 부회장으로 프로젝트 개발 수행, 토명귀농아카데미에 서 과수학 강의 및 전북농업마이스터대학에서 블루베리 과목을 강의하고 있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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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방문하셨던 튀니지를 소개해주시겠어요? 기후, 교육, 물가, 의료, 정치 상황 등과 같은 현지 생활 정보에 대해서 공 유하고자 합니다. 겨울에는 지중해 해양성 기후로 거의 매일 비가 오고 바람 도 같이 부는 경우가 많아 우산을 받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3월 중순쯤 되면 봄이 왔음을 알게 되지만, 바람이 심하게 불어 추위를 느끼기 쉽습니다. 한 열흘 지속하다 4월 10일쯤 되면 신기할 정도로 잔잔해집니다. 이 기간이 지나면 여름의 초입으로 한낮은 무척 뜨거우나 아침저녁으로는 덜 더워 견딜 만합니다. 이때는 햇볕이 무척 강렬해서 모자와 선글라스가 필수입니다. 5월 초에 평년 8월 날씨에 해당하는 30℃ 이상 되는 이상기후가 며칠간 지속되나, 다시 평년 기온으로 돌아갑니다. 이후 대체로 날씨가 안정되었으나 수시로 바 람이 심하게 부는 불안정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교육의 경우에는, 교육 수준이 높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학위 과잉과 질의 저하의 느낌이 큽니다. 어학은 기본적으로 불어를 잘하지만, 영어 능력 은 대체로 부족한 편이고 무척 배우고 싶어 합니다. 전문분야에서 아는 것은 있어도 깊이 있는 지식은 부족하고, 관련 타 분야를 잘 모르는 분들의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학 수준이 높아 국제기관이나 외국 업체 근무에 아주 유리한 듯 보이는데, 거기보다 우리나라는 어학 교육에 투자는 많은 데 비해 효율성 이 현저히 낮아 국내 어학 교육의 개선이 절실하게 느껴졌었습니다. 물가는 외국인들은 기본 식∙생활비나 교통비가 적게 들어 생활하기에 좋 습니다. 하지만 현지인들은 국가에서 제어하는 빵값, 일부 대중교통비 같은 경우만 낮은 생활비를 부담하고, 다른 농산물들은 정부의 제어를 받지 않고 알제리, 리비아로 무제한 유출되기 때문에 내국인들의 지불 경비가 높다고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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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최근 리비아 난민의 유입으로 숙소 지불 경비가 무척이나 높고, 외국인 들에게는 특히 비싸게 지불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의료는 교육 수준이 높아 이용하는 데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만, 외국에서 는 무조건 다치지 않고 아프지 않게 주변 환경을 깨끗하게 하는 게 중요하겠 죠. 가능하면 산책 등을 현지에서도 계속하시면서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 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치 상황을 말씀드리자면, 튀니지의 정치는 주변 아프리카 다른 나라에 비해 좋다고들 하지만 리비아의 내전이나 지중해의 난민선 침몰, 바르도 국립 박물관 테러 등의 여파와 2011년 재스민 혁명 이후 각종 노조 단체의 데모 등으로 어수선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농식품기술연구소

자문을 수행하시면서 가장 어려웠던 경험이 있다면 들어볼 수 있을까요? 저는 코이카(KOICA) 중장기자문단의 일원으로서 튀니지 농식품기술연구 소(CTAA)에 방문해 2014년 12월 14일부터 2015년 6월 13일, 만 6개월 동안 연구 자문을 수행했는데요. 2011년 재스민 혁명을 거치면서 축적된 자료가 없 고, 그 이후의 자료도 없어서 일을 수행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현지 사람들의 경우 관련 업체나 기관들을 방문할 수 있게 (친절하게) 교통편이나 기관 소개 를 해주었고, 지금까지 친분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행동으로는 보여주 지 않고 말만 하는 등의 모습들은 다소 함께 지내기가 어려웠습니다. 또, 각 자 직장이나 사회에 대한 불만이 많고 자신들조차도 자기 국민성을 비하하고 있었던 모습도 보여 다소 아쉬웠습니다. 이와는 별개의 문제로는 업무 수행을 위해 외부업체들, 다른 연구기관, 그 리고 학교들을 방문하느라 일의 효율이 무척 떨어지고 힘들었습니다. 또, 생 활하면서 어려웠던 점들을 말씀드리자면, 도시에 카페나 식당은 많았지만, 음 식에 기름기가 너무 많아서 개인적으로는 매 끼니를 해 먹느라 힘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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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2014년에는 IS(이슬람국가)에 의한 해외 관광객을 겨냥한 테러로 치 안이 불안해지기도 했습니다.

수스의 해변 호텔 밀집 지역


시디부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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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송기철 님과 같이 아프리카 지역과 사람들을 만나고 알아가고 싶어 하시는 분들에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으신가요? 아프리카 튀니지, 알제리, 리비아 같은 지중해 국가들은 현재 권위적인 체 제에서 벗어나려는 민주화와 IS(이슬람국가)와 연계된 테러 등으로 무척 어수 선한 정치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좋은 이미지를 갖고 배우려는 자세가 있기 때문에 먼저 진정성을 갖고 대하신다면 현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실 수 있을 겁니다. 다만, 현지인들은 해주기로 약속은 하고선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기에, 현지인들과의 관계에 너무 큰 기대를 하지 말고 작아도 좋은 결과로 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엔 소통, 특히 언어 를 이용한 소통이 가장 큰 해결책 같습니다. 또, 다른 아프리카 중부나 서부 지역은 환경조건이나 생활여건이 더욱 좋지 않은 편이니 이에 대해서는 다른 접근 방법을 떠올리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Mozambique

공용언어 – 포르투갈어, 스와힐리어 인구 – 약 29.5백만 명 GDP – 약 $143억

Quelimane

모잠비크를 만난 김강산 님 아프리카의 중심에서 따봉을 외치다! 희망의 대륙 아프리카에는 나에게 ‘값진 경험’이라는 선물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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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강산 님! 자기소개와 현재 하고 계신 일이나 공부를 소 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포르투갈어와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는 김강산입니다. 브라질 어학연수 후 우연히 학교에서 포르투갈어권 아프리카에 대한 강의를 듣게 되었는데요, 그때 아프리카의 매력에 빠져서 언젠가 아프리 카를 가고 싶다는 꿈이 생겼습니다. 결국 2016년 2월부터 6개월간 모잠비크 EDCF사업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아프리카에 대한 공부와 평소 관 심 있던 금융공부를 병행하며 복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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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었던 아프리카를 직접 가보셨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계기로 어느 나라에 거주하시게 되었나요? 2015년, 학교 수업으로 김용빈 교수님의 포르투갈어 권 아프리카에 대한 수업을 들었어요. 사실 그전까지만 해도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에서 포르투갈 어를 공용어로 한다.’ 정도만 배웠지 딱히 관심이 없었어요. 대부분이 ‘설마 내가 아프리카를 갈 일이 있을까?’라고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김용빈 교수님 의 수업을 듣고 포르투갈어 전공생으로서 브라질, 포르투갈뿐 아니라 아프리 카 대륙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어요. 직접 체험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저는 그때부터 아프리카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학과 홈페이지를 통해 모잠비크 EDCF 사업 파견 채용공고가 올라왔고 저 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약 10일 후 생각지도 못했던 아프리카, 모잠비크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참여한 EDCF사업의 정식 명 칭은 ‘켈리마네 중앙병원 건설 프로젝트’입니다. 저는 그렇게 모잠비크의 동쪽 에 위치한 작은 도시 켈리마네로 가게 되었습니다.

켈리마네 공항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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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하셨던 모잠비크의 켈리마네에서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일단 모잠비크의 이슈부터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요. 현재 모잠비크는 정말 심각한 경제위기와 더불어 반군의 대대적인 활동이라는 ‘내우외환’을 겪고 있 습니다. 인프라 부족과 더불어 나라의 기반 산업이라 할 수 있는 제조업이 사 실상 존재하지 않는 모잠비크는 다른 나라에 비해 더욱 외부충격에 민감한데 요. 유가 하락으로 인하여 천연가스 개발 및 채굴이 전면 중단됨에 따라 나라 의 경제기반 자체가 흔들리는 실정입니다. 심지어 2달 전에는 공무원 급여를 중단하여 경찰들이 거리로 나와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시민들과 외국인들 로부터 돈을 챙기려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실제로 제가 처음 모잠비크에 갔을 때 환율이 1달러당 약 50메티칼 정도 였습니다. 하지만 불과 6개월이 지나고 환율은 1달러당 80메티칼로 뛰었습니 다. 제가 알아본 결과 2014년에는 1달러당 40메티칼이 채 안 되었다고 하니 현재 모잠비크가 처한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6개월 정도 거주 한 저도 피부로 느낄 정도로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켈 리마네의 경우 보통 하루 급여가 우리나라 돈으로 약 3000원이 채 안 되는 노동자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문제가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게릴라 반군의 활동이 점차 조직화되고 그 빈도가 늘고 있습 니다. 사실 모잠비크의 반군은 예전부터 있어왔지만 현재 여당이 정치적 단합 을 이유로 소규모 게릴라 반군을 방치하고 있었다는 것이 모잠비크 사람들의 생각 이였습니다. 그러나 현재 경제사정과 더불어 정치세력의 부정부패가 정 점을 찍으며 반정부 세력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한 예로 Tuna Bond라는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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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산업을 발전시키겠다는 정부의 오래된 프로젝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흐지부지 계획을 취소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지금까지 쏟아 부은 돈이 소수 권력층의 주머니로 흘러 들어가며 정부에 반감을 갖는 사람 이 더욱 많아지고 있습니다. 제가 거주하였던 켈리마네는 원래 반군의 활동지 역과는 거리가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 지역입니다. 그런데 지난 6월부터 반군 이 도로를 점거하고 차량을 납치하는 등의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심지어 켈리마네에서 가까운 곳에서 버스를 습격하여 일본인과 태국인이 사망하는 사건까지 일어났습니다. 현재 모잠비크는 이렇듯 나라 안팎으로 매우 힘든 실 정인데요. 슬기롭게 헤쳐나가길 기원합니다. 모잠비크에서 가장 힘들었거나 아팠던 경험이 있다면 알려주시겠어요? 원래 건강한 체질을 타고나서 해산물을 잘못 먹고 배탈 난 것 이외에는 크게 아팠던 경험이 없어요. 하지만...... 날씨는 정말 적응하기 힘들었습니다. 모잠비크도 계절이 있습니다. 제가 처음 갔을 때는 한여름이었는데요. 평균온 도 43도, 평균습도 80~95%에 육박하는 날씨는 정말 사람을 주저앉게 만들더 군요. 중요한 건 모잠비크 사람들도 우리만큼 덥고 힘들어해 하는 것을 보고 사람은 똑같다는 것을 느꼈답니다. 게다가 전기 사정이 안 좋아서 정전이 자주 되고 가뭄으로 인해서 단수도 굉장히 잘 일어난답니다. 물론 나중에는 노하우도 생기고 적응을 해서 괜찮았 지만,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특히 켈리마네는 가정용 전기도 충전을 해서 사용하는데요, 처음에 그걸 몰라서 이틀간 문명과의 단절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김강산님이 살던 동네

Sunset Sky


모잠비크에 대해서 더 말씀해주시고 싶으신 게 있나요? 먼저 모잠비크의 경찰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어요. 모잠비크에서 길을 가 다가 경찰을 보면 전 피하고 싶었어요. 그만큼 경찰의 공권력은 정말 부정부 패의 끝을 보여줍니다. 일단 외국인은 웬만하면 무조건 잡아요. 심지어 차를 타고 가는데 잡고서 꼬투리를 잡는데 잡을 게 없으니까 “너희 차에 방향제 설치했어? 안 했지?”하면서 돈을 요구하기도 하고요. 마푸토에서는 경찰이 저 의 핸드폰을 요구하기도 했답니다. 물론 이뿐만 아니라 경찰 관련 에피소드는 정말 끝이 없이 많아요. 하지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하나입니다. 그들과 논리적인 언쟁을 하 거나, 그들을 자극하지는 마세요. 물론 모잠비크에서도 큰소리 내는 사람이 이기는 경우가 있긴 있어요. 하지만 모잠비크에서 공권력은 굉장히 센 편입니 다. 물론 부당한 처우를 받으면 화가 나지만 일단은 부드럽게 말을 하면서 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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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적은 금액으로 그들을 입막음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해요. 실제로도 지내다 보면 그 도시의 물가를 파악하게 되잖아요? 그럼 경찰이 부당한 요구를 할 때도 싸우거나 화를 내기보다는 ‘수고가 많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등의 멘트를 날리면서 적당한 소액의 돈으로 입막음을 하는 것 이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있던 곳은 우리나라로 치면 2-3천 원 정 도면 충분했거든요. 물론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나름 유용하실 수 있다고 생각되어 말씀드립니다! 두 번째로 모잠비크로 가는 비행편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혹시 여행 이나 출장, 봉사활동 등의 이유로 한국에서 모잠비크로 가시는 분이 있다면 세 가지 루트를 소개해드리고 싶어요. •남아공 에어라인 이용: 인천, 홍콩, 남아공, 마푸토, 켈리마네 •싱가폴 에어라인 이용: 인천, 싱가폴, 남아공, 마푸토, 켈리마네 •카타르 에어라인 이용(신설): 인천, 도하, 마푸토, 켈리마네 예상하다시피 아래로 갈수록 가격이 비싸집니다. 저는 2번 루트를 이용했 고요. 사실 3번은 조금 비싼 편이에요. 하지만 출장이나 급한 일로 가시는 분 들은 3번을 추천해요. 1번과 2번에 비해 굉장히 빠르고 편하게 갈 수가 있답 니다. 특히 카타르 에어라인 비행기가 굉장히 좋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1번 과 2번의 루트는 비슷합니다. 하지만 가격 차이가 별로 안 나기 때문에 저는 2번을 추천해 드려요. 1번은 비행기도 굉장히 불편하고 루트가 2번보다 더 멀 게 느껴진다고들 하더라고요. 혹시 모잠비크로 가시는 분들은 참고해주세요!


마푸토에서 켈리마네로 들어가는 국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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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김강산 님과 같이 아프리카 지역과 사람들을 만나고 알아가 고 싶어하시는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으신가요? 주저하지 말고 떠나세요! 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저도 아프리카 의 극히 일부를 경험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조언을 한다는 것이 조금 부끄 러운데요. 한가지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분명히 배울 게 있다는 점입 니다. 물론 모든 일이 그렇지만 아프리카에서의 경험은 특히 값지다고 생각해 요. 아프리카를 만나고 알아가고 싶어 하시는 분들이라면 더더욱 주저하지 말 고 떠나세요! 저 같은 경우는 갑작스럽게 갔지만, 다시 한번 아프리카에 가고 싶을 정도 로 아프리카가 좋았어요. 하지만 아프리카를 알고 싶어 하시는 분이라도 막상 가보시면 여러 상황으로 인해 상상했던 아프리카와는 다르다고 느끼시는 분 들도 계실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이렇게 ‘아프리카가 이런 곳이구나.’

직접 경험해 보는 게 중요하다

고 생각해요. 물론 아프리카를 갈 기회가 많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찾아 보면 생각보다 한국과 아프리카가 연관되어 있는 활동이나 프로젝트가 많답 니다. 없다면? 여행으로라도 꼭 가보세요. 아프리카는 저의 삶을 변화시켜준 고 마운 선물인 만큼 여러분도 꼭 느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공용언어 – 아랍어

Sudan

인구 – 약 40.8만 명 GDP – 약 $417억

Wad Medani

수단을 만난 연윤열 님 ODA전문가(농식품 가공 분야), 식품기술사, ISO심사관, 할랄 인증 컨설턴트, NCS 전문가, 친환경 유기가공 인증 심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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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연윤열 님! 자기소개와 현재 하고 계신 일이나 공부를 소 개해주시겠어요? 학부와 대학원에서 식품공학을 전공하고 오뚜기 중앙연구소에서 오뚜기 카레 개발, 오리온 초코파이 품질팀장을 역임한 연윤열이라고 합니다. 코이카 ODA사업 참여교수단 멤버로 지난여름 아프리카 수단 무슬림들과 두 달 동안 지내며 게지라주 와드메다니라는 마을에 설립한 농식품직업전문학교에서 현 지 교사를 대상으로 제과제빵과정과 실험방법에 대해 교육하고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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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하셨던 나라인 수단을 소개 부탁드려도 될까요? 수단은 지난 2011년 남수단 독립으로 유전수입의 80%를 상실한 후 수단 실질경제성장률은 계속 감소였습니다. 환율은 변동환율제를 표방하지만, 중앙 은행의 대 달러 수단 파운드화(SDG) 환율은 사실상 확정 고시체제로서 인플 레이션은 환율과 조세 인상으로 지속적으로 상승추세를 보여 왔습니다. 미국 으로부터 경제 제재를 받고 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움을 겪고 있 으며, 도로에 운행하고 있는 자동차의 대부분은 2~30년 전 대우그룹이 진출 할 때 운행하던 자동차를 폐차수준이 되어도 그대로 타고 다니고 있는 모습 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인으로서 수단의 유일한 영주권자인 황재덕사장 이 수단 신공항 프로젝트와 로컬 군공항 프로젝트에 참여 중입니다. 수단에서 거주하셨던 도시의 특징은 어떠했나요? 게지라시 와드메다니에 한 달, 수도 하르툼에 한 달 동안 체류하였습니다. 와드메다니는 수도 하르툼에서 남쪽으로 약 3시간 떨어져 있으며 와드메다니 에 코이카에서 지원한 농식품 직업 전문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와드메다니는 나일강이 인접해 있어 농업이 발달해 땅콩, 사탕수수, 망고, 레몬 등 농산물이 풍부합니다. 하지만 전력 사정이 좋지 않아 하루에도 서너 번씩 정전이 되기 일쑤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전력난에 적응이 되어서인지 짜증을 내지 도 않을 뿐 아니라 공공기관과 모스크에는 개별 발전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수도 카름툼은 유일하게 국제공항이 있으나 비행기 이착륙이 거의 없고 심지 어 활주로 주변은 항공기 폐기물이 방치되어 있으며 포장조차 되어있지 않아 흙먼지가 날리기도 합니다.


UNESCO 세계 문화유산인 수단 북부의 Meroe 피라미드 지역

연윤열 님의 전공이나 전문 분야의 관점에서 활동하신 국가의 현재 상황을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수단의 식품시장 현황을 살펴보면 농산물에서 아라빅 검은 전 세계 1위 생산국으로 수단 북부 다푸르 지역에서 생산되며 코카콜라 등 음료에서 페인 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다양한 용도로 응용되고 있습니다. 그밖에 사탕 수수, 참깨, 땅콩, 목화, 망고, 대추야자 등이 생산되고 있으나 나일강 변의 비 옥한 토지와 대조적으로 영세성을 띠고 있으며 관개시설이 부족하고 대규모 유휴 경작지가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가공식품은 DAL그룹이 코카콜라 버틀링 사업을 비롯해서 생수, 유제품, 가공식품 등 거의 모든 식품군에 진출하고 있으며, 최근 수도 하르툼에 Ozone이라는 베이커리 카페를 운영 중입니다. 이밖에 마요네즈, 각종 소스, 사과, 냉동 딸기 등 과일 및 대부분의 2차 가공식품은 수단 인접 국가인 이집 트, UAE, 카타르 등지에서 수입, 유통되고 있습니다. 농업기술센터가 소재한 와드메다니는 하르툼에서 남쪽으로 약 3시간 거리 게질라주에 위치해 있으며 와드메다니에 비스켓, 콘칲, 참깨유 등의 제조공장이 있으며 생산설비는 수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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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설비로서 노후되고 규모는 영세합니다. 가공기술은 낮은 수준이며 품질관 리 및 위생관리 개념이 매우 희박한 상태입니다. 유통 면에서는 수도 하르툼에 SENA하이퍼마켓, AFRA mall 내에 SENA 마켓 등에서 1차 농산물 및 다양한 수입 가공식품 등이 진열, 판매되고 있습 니다. 수단의 농식품 산업수준을 고려한 와드메다니 농업기술센터의 운영 면 에서는 수단의 농업기반 시설이 취약하고 식품 가공기술 및 전문인력이 부족 한 상황이므로 농업기술센터의 식품가공시설 및 관련장비의 도입은 수단의 농식품 가공 기술을 도약시킬 수 있는 마일스톤으로 작용하여야 합니다. 특히 수단에서 재배, 수확 중인 아라빅 검, 대추야자, 망고, 수수, 참깨 등을 2차 가 공화하여 다양한 소재로 활용방안을 강구할 수 있으며, 부가 가치가 높은 가 공식품으로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아라빅 검은 항비 만 건강기능 식품(소재), 대추야자는 Sugar free 건강 잼, 시럽, 스프레드 등, 망고는 망고 페이스트, 망고 잼, 감압 후라이드 망고스낵, 동결건조 분말, 그 리고 수수, 참깨는 한국 수출로 교역을 확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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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에서 생활 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어떤 것이 있었나요? 도로에 운행 중인 대부분의 자동차가 20~30년 된 고물 대우 중고자동차 로서 경제적 물질적으로 빈곤국이지만 생활이 어렵지 않으냐고 물어보면 대 부분 수단인들은 행복하다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2016년 현재, 수단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은 20명 내외로 유일한 영주권자인 황재덕 사장 가족, 코트라 조일규 관장, 정기백 공장장 가족, 대우 인터내셔날 박대수 CFO, 신풍제약회사 조 전무 가족 등입니다. 하르툼 대우아파트로 입주한 첫날 한낮에 욕실에서 샤워를 하기 위해 샤 워기를 트는 순간 너무 뜨거워서 악! 하고 나도 모르게 순간 비명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원인을 알고 보니 아파트 옥상에 설치되어있는 물탱크가 뜨거운 햇볕으로 데워져 욕실에 설치되어있는 보일러는 사용할 필요가 없었 습니다. 물이 너무나 뜨거워서 디지털 온도계로 재어보니 47도가 넘었으며 옥상물탱크 내부온도는 50도 이상이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냉장고가 보급되지 않았던 1960년대 필자의 초등학교 시절 우리나라 길거 리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얼음 파는 모습인데 자전거 체인을 돌리는 축으로 얼음을 조각내는데 사용하고 있음을 보고 한동안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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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서 식품이라는 전문분야에서 일하시면서 인상 깊었던 일 한 가지 설명해주시겠어요? 대우가 철수하면서 대우공장을 인수한 수단 현지법인이 LG 해외 주재원 한 분을 공장장으로 영입하여 공장 안내를 받게 되었습니다. 수단 현지 공장 에서는 LG 세탁기를 조립하고 있었는데 우리나라 초기의 세탁기처럼 세탁기 내부가 둘로 나누어져 있는데 한쪽은 세탁조, 다른 한쪽은 짤순이(탈수기) 모 습을 볼 때 우리의 예전 시절을 생각나게 합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라고 한 김우중 회장의 말이 “세계는 넓고 아직도 할 일은 많다”라고 수단에 서 알게 되었습니다.




공용언어 – 영어, 아프리칸스어

South Africa

인구 – 약 56.5백만 명 GDP – 약 $3709억

Johannesburg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만난 이연희 님 저는 하루하루가 배움인 아줌마입니다. 상상하던 아프리카와 다르지만 더 다양해서 흥미로운 남아공에서 잘 살아 남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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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연희 님!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는 남아공 생활이 1 년하고 4 개월 된 마흔넷의 ‘아줌마’입니다. 동갑내기 남편과 중학교 3 학년, 6 학년의 남매를 두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청소년 지도사로 8 년간 일하다가 둘째 아이 육아 문제로 그만두고 쉬던 차에 남아공에 오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근무지가 남아공으로 결정되면서 저의 남아공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외국 생활 경험이 없었던 우리 가족은 부푼 기대와 걱정으로 2014 년 12 월 20 일에 남아공에 도착해서 2016 년 6 월 현재까지 요하네스버그의 데인펀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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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 중이신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소개해주시겠어요? 우리

가족이

지내는

요하네스버그는

남아공

산업의

중심지입니다.

(이곳에서는 요하네스버그를 조벅이라고 부릅니다.) 오기 전까지 한국에서는 각종 매체를 통해 들어왔던 위험한 치안과 다양한 질병들에 대한 정보들이 우리 가족을 걱정으로 몰았습니다. 학교는 제대로 다닐 수 있을까? 병원 진료는 가능할까? 음식은 또 어떨까? 하지만 남아공 출장 경험이 있었던 남편은 남아공은 책에서 보는 아프리카 모습과는 다르다며 기대하라고 했습니다. 물론 반만 믿었죠. 그런데 조벅 공항에 도착한 이후 나의 눈을 사로잡은 고속도로의 모습은 상상이상으로 잘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물론 고속도로를 빠져나오면서 살짝살짝 보이는 도시의 모습은 황톳빛이 강한 벌판이 보이기도 하지만 곧 멀리 높은 빌딩이 보이기도 하고 넓디넓은 물류창고가 보이기도 하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남아공은 그만큼 이방인을 바라보는 눈빛도 따뜻했습니다. 눈이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은 미소로 인사를 건넸고 음식점이나

쇼핑몰에서

기다려주며

대답해

만난

점원들은

주더라고요.

마음

나의

어눌한

한구석에

‘사람

영어에도 사는

천천히

곳은

비슷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안심이 되었습니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남아공 요하네스버그는 최대 금 생산지였지만 도착해서 본 조벅은 은행과 쇼핑몰이 밀집한

상업

도시였습니다. 근처

행정수도인

프리토리아보다

휴양지인

케이프타운보다도 많은 사람이 밀집해 있습니다. 처음엔 다양한 복합쇼핑몰 주차장을 가득 채운 차들을 보면서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빈부의 격차가 심해서 흑인들이 밀집한 다운타운은 우리가 사는 곳과 다르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조벅에 사신 분들은 위험한 치안으로 다운타운 근처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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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거기에다가 인근 국가의 불법체류자가 늘다 보니 저렴한 임금의 노동력을 가진 그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기는 경우가 늘어 결국 데모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타운에서는 외국 사람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표현하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남아공의 인구분포도를 카푸치노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카푸치노 잔 맨 아래의 커피 원액을 다수 흑인에 비유하고 가운데 우유를 중상류 백인에 그리고 그 위에 소량의 시나몬 가루를 소수 상류 흑인에 비유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아직도 남아공의 숙제인 빈부 차를 의미합니다. 물론 예전에 비해 훨씬 흑인들에게 주어지는 권리나 기회가 많아진 만큼 다양한 일자리에서 그들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흑인들은 구직이 어려워 보였습니다. 무지개 같은 남아공의 다양한 모습은 인종만큼 사회문제도 다양하게 확대되고 그 해결이 시급해 보였습니다.


Nelson Mandela의 형상을 한 예술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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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거주하시면서 느낀 가장 좋은 점은 무엇이고, 가장 좋지 않은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좋은 점은 사계절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아프리카에 사계절이 있다고 이야기하면 다들 놀라워합니다. 물론 사계절 내내 한낮은 따뜻한 햇볕으로 반팔을 입어야 하지만, 각각의 계절마다 맑은 하늘과 청명한 공기는 하늘이 준 보물과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과일도 채소도 다양하고 맛도 좋습니다. 가격도 저렴하고 상품의 질도 우수한 편이죠. 그리고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중국, 인도 등의 다양한 문화가 녹아있는 남아공은 퓨전 요리도 다양하고 전통적인 음식점도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어 먹거리가 아주 풍부합니다. 이런 다양한 음식문화가 발달하게 된 것은 과거 식민지로 인한 영향도 있겠지만 남아공을 찾는 다양한 관광객이 많아지면서 생긴 영향도 큰 것으로 보입니다. 고기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스테이크가 어떨까요? 단점이라면 남아공의 위험한 치안으로 가급적 밤 8 시 이후 외출을 삼간다는 점입니다. 이런 행동의 제약이 남아공에 살면서 불편한 점들 중에 하나죠. 늦은 시간은 한국도 그다지 안전하지는 않지만, 남아공의 다양한 사건은 우리를 더욱 자유롭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 상점도 평일 7 시. 주말이나 휴일에는 오후 4 시면 문을 닫는 곳이 많아서 계획적인 쇼핑이 필수입니다. 또 다른 불편한 점이라면 넓은 지역 간 거리로 어디든 이동 시간이 최소 30 분에서 2 시간도 걸린다는 점이죠. 얼마 전 방송된 “꽃보다 청춘” 나미비아 편을 보면 이동 거리가 멀다 보니 계속 차 안의 장면이 많았습니다. 나미비아도 아프리카인지라 남아공과 크게 다르지 않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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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구글 지도를 사용해서 현지 도로 사정이나 교통정보를 미리 알고 이동하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먼 거리는 미리 출발하지 않는다면 약속시간을 맞추기 어렵다는 점이 단점들 중 하나입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만난 사람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면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남아공에서 오랫동안 사업을 하신 교민 사업가가 있습니다. 전자제품을 판매하고 계시면서 흑인들과 한인들의 일자리 창출에 노력한 바가 커서 한국 매체에 보도도 많이 되셨던 분입니다. 길에서 구걸을 하는 흑인을 데려다가 일자리를

마련해주시고

계셨습니다.

한번은

교민

자녀를

한인바자회에

위한

곶감이

장학금 나와서

마련도 정말

앞장서시고

반갑더라고요.

남아공에서 곶감이라니 얼마나 신기하던지 말입니다. 그런데 그 곶감도 그분이

감을

깎고

말리는

작업에

현지

직원을

고용해서

일자리를

마련해주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작은 생각의 차이가 많은 흑인들에게 도움이 됐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힘을 주는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같은 한국인임이 자랑스러웠습니다.


골든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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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사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는다면 언제인가요? 남아공의 아이들 대부분은 수영과 테니스는 기본으로 운동이 생활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초등 1. 2 학년에 그만둔 수영 실력인 우리 아이들은 명함도 내밀 수 없는 실력이었습니다. 학교 내 수영장의 수심이 2m 에 길이는 25m 학교 수영팀은 A 팀, B 팀 모두 내가 보기엔 흡사 국가대표와 같았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교내 수영 도네이션(Donation)이 있었습니다. 실력과 상관없이 한 바퀴에 10 란드에서 많게는 100 란드로 정해놓고 아이가 몇 바퀴를 도느냐에 따라 기부금도 내고 아이의 성취감을 높이는 행사입니다. 기부금 전액은 아프리카 소아암 환우에게 전달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날만큼은 교장 선생님과 교사들도

우스꽝스러운

복장으로

수영을

하고

기부

행사에

참여하고

부모들도 같이 응원을 하면서 행사를 모두 즐기도록 유도합니다. 아이들보다 먼저 물에 뛰어들고 수영을 하는 모습에, 이런 광경을 처음 접한 저로서는 너무나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엄마들은 한 바퀴 한 바퀴 도는 아이들에게 격려하고 손목에 색색의 고리를 채워주며 모두 같이 참여하는 모습이 정말 정겹고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딸아이는 수영에 대한 걱정과 공포도 조금씩 줄어들고 16 바퀴를 돌게 됐습니다. 기부가 주는 기쁨과 본인을 이긴 성취감이 함께하는 좋은 기억이었습니다.


Senegal

공용언어 – 프랑스어 인구 – 약 15.9백만 명 GDP – 약 $197억

Dakar

세네갈을 만난 김유진 님 안녕하세요, 드넓은 아프리카 대륙 서쪽 끝에 자리한 아프리카 민주주의의 상징 세네갈에서 6년째 검은 머리 외국인 노동자로 생활 중인 김유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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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자기소개와 현재 하고 계신 일을 소개해주시겠어요? 안녕하세요^^ 2011년부터 세네갈에서 외국인 노동자 생활 중인 김유진입 니다. 한국 대사관을 거쳐 현재는 세네갈에 진출한 우리 기업체 S사에서 근무 중입니다. 대사관에서는 정무경제과에서 한-불 통역번역 전문직 행정원으로 2년간 근무했고, 최근 3년 전부터는 S사 현지 사무소 경영 지원팀에서 근무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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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계기로 어떤 나라들에 방문하시고 거주하시게 되었나요? 통역번역대학원 재학 시절 해외봉사단 프로그램으로 여름 방학 기간 동안 카메룬에 다녀온 게 제가 아프리카와 맺은 첫 인연입니다. 사실 대학원에 입 학할 때 불어 실력이 딱히 훌륭한 편이 아니라서 한 학기 동안 마음고생이 많이 심했던 때였어요. 과연 이 길이 나에게 맞는 길인지 의심도 들었고, 그 냥 세상만사가 다 귀찮고 우울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고민 끝에 머리도 식힐 겸, 또 불어 실력도 키울 겸 겸사겸사 봉사활동을 다녀오기로 했어요. 제가 갔던 곳은 두알라 국제공항에서 자동차로 4시간 정도 달리면 나오는 산골 마 을이었는데, 여러모로 상상 그 이상으로 힘든 환경이었습니다. 마을에 변변한 가게 하나 없어 장을 보기 위해서는 자동차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옆 마을 에 가야 했을 정도로 외딴 동네였어요. 전기 인프라가 불안정해서 툭 하면 정 전이 되는 바람에 수업이 몇 시간씩 지연되기도 했고, 비가 오는 날이면 천장 에 뚫린 구멍으로 들이치는 비바람 때문에 화들짝 대피하기도 여러 번이었고 요. 길에는 가로등도 없어서 해가 지면 달빛에 의지해 다녀야 했고, 밤에 멀 리서 옷만 둥둥 떠다니는 모습을 보고 귀신인 줄 알고 깜짝 놀랐는데 알고 보니 옆집 아줌마였던 일 등등 해프닝이 많았어요. 무엇보다 현지 코디네이터 들에게 사기당해 결국 버림받고, 미국 봉사단원들의 도움을 받아 정말 힘들게 한국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납니다. 힘들었던 카메룬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했을 때, 한동안 아프리카를 생각하면 뭔가 가슴 한편이 아릿하면서 뜨거워지는 기분이 나더라고요. 비록 마지막에는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었을지언정, 그래도 마을 주민들과 함께 보 냈던 그 시간은 제 인생에 있어 정말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거든요. 단지 몇몇 욕심 많은 사람들 때문에 내가 갖고 있는 아프리카에 대한 기억이 나쁜 쪽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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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왜곡되는 것 같아 속상했어요. 그래서 대학원 졸업 후 다시 봉사단에 지원했고, 두 번째로 파견된 곳이 바로 세네갈이었습니다. 카메룬 시절을 생각하며 잔뜩 기합 든 채로 날아왔는 데,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시골 마을이 아닌, 수도 다카르에서 생활하게 됐어 요. 다카르 생활은 카메룬 때와는 비슷하면서도 많이 달랐습니다.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인프라도 카메룬에 비해 제법 갖춰져 있었고, 사람들이나 분위기가 활기찬 것이 확실히 이곳은 ‘도시’라는 느낌이 났습니다. 그래도 역시 개발도 상국이라 인프라가 많이 부족해서 제가 생활했던 5주 중 무려 3주 동안 전기 가 들어오지 않고 물까지 끊겨 생활적인 면에서는 결코 쉽지 않았어요. 그럼 에도 불구하고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의지와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세네갈 국민들의 특성에 반했습니다. 순박 하지만 당당하고 착한 그네들의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어요. 봉사활동을 마친 뒤에도 계속 여운이 남더라고요. 덕분에 봉사활동 후에 다시 세네갈로 건너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다가, 한국 대사관에서 통역번역 행정원을 채용하는 공고를 봤고 지원하여 세네갈 로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대사관과의 계약이 종료된 후에도 한국으로 돌아오 는 대신, 세네갈에 진출한 우리 기업체 현지 사무소에 취직하게 되었어요. 대 사관에 부임했을 때가 2011년 2월이니까, 벌써 만으로 5년이 훌쩍 지나 햇수 로 6년째네요.


세네갈 다카르의 전경


세네갈 다카르의 저녁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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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네갈에서 구체적으로 거주하시던 도시는 어디이고 그곳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세네갈의 수도인 다카르에 살고 있습니다. 다카르는 3과 1/2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특이한 모양인데, 프랑스어로는 "presqu’île" 이라고 부릅니다. "Almost island", 즉 "거의 섬"이란 뜻이에요. 대부분의 땅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데다가 공항이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놓여 있기 때문에 사실 교통 은 불편한 편입니다. 면적이 딱히 넓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동을 할 때에는 공항을 빙 둘러 지나가느라 거리에 비해 소요 시간이 긴 편이에요. 또 하나 다카르의 특징이라면 북한이 지어준 것으로 유명한 르네상스 동 상입니다. 와드 대통령 집권 시절, 프랑스로부터의 독립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건축된 동상이에요. 북한이 지어줬다는 선입견 때문인지는 몰라도 실제 로 보고 있으면 조금 익숙한? 느낌도 들고, 왠지 복잡 미묘한 기분이 들게 합 니다. 사실 르네상스 동상을 건축할 때 천문학적인 비용이 소비되어서 야당을 중심으로 한 일부 국민들은 ‘economic monster’라 부르며 철거를 주장하기도 한대요. 어찌 되었든, 비행기가 착륙을 위해 하강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 오는 것이 르네상스 동상이기도 하고, 고층 건물이 적은 다카르에서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르네상스 동상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좋거나 싫거나 현재로 서는 다카르의 확실한 랜드마크인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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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에 가기 이전에는 어떤 일을 하고 계셨고, 세네갈 다카르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가요? 세네갈에 오기 전에는 한국에서 통역번역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리랜서 통 역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었어요. 인연이었는지 대부분 아프리카 고객들을 통역 하는 일을 했습니다. 처음 세네갈에 진출하게 된 것도, 대사관에 전문직 행정 원으로서 통역 번역을 위해 채용되었죠. 대사관에 근무할 당시 2년간 약 350 여 건의 통역 번역을 담당했습니다. 그 후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는 관리 업무를 맡고 있는데, 불어 실력도 있고, 또 무엇보다 현지 사정을 알고 있다 보니 업무에 도움이 많이 되더라고요. 그 밖에 본연의 업무 외 불어 실력을 살려서 한국인 직원과 현지인 직원 간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지원하기도 합 니다.

고레섬


고레섬

바오밥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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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네갈이 우리나라와 유사한 점 또는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이었나요? 그동안 세네갈에 살면서, 세네갈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며 느낀 점은, 우리 나라와 마찬가지로 ‘어른 공경’의 문화가 존재한다는 겁니다. 세네갈 사람들은 절대 부모님은 물론이고 손위 형제에게 대들지 않아요. 자신의 뜻과 맞지 않 아도 부모님이나 손윗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고, 수용하려 합니다. 따라서 아이 들에 대한 가정 교육도 엄격히 지켜지는 편이에요. 다만 이 ‘어른 공경’의 문화와 ‘지역주의’가 합쳐져서 가끔 옆에서 볼 때 웃지 못할 일도 생기더라고요.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하루는 만나기로 한 날 약속시간 직전에 갑자기 전화로 미안한데 약속 장소 를 바꿔서 자기 사무실로 와달라고 하는 거예요.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누가 찾아와서 행정 업무를 대신 진행해 달라고 부탁을 해서 그 일을 해야 되니 옆에서 잠깐 기다려 달라는 거죠. 찾아가 봤더니 나이가 지긋하신 할머니 한 분이 계셨고, 친구는 여기저기 전화하랴, 서류 뭉치를 들고 바쁘게 뛰어다니 고 있었어요.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친구는 퇴근할 수 있었고, 함께 저녁을 먹으며 물어봤죠. “너희 할머니셔?” “아니야, 모르는 사람이야.” “??? 모르는 사람 업무를 왜 대신해줘?” “우리 고향 분이시거든.” “네 업무랑 관련된 일 대신해드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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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우리 부서 말고 다른 부서 담당 업무였어.” “부모님께서 따로 부탁하신 거야?” “아니.” “근데 왜?” “고향 사람이라고 다카르까지 찾아오셨는데 내가 안 해드리면, 우리 부모님이 욕먹어.”

옆에서 지켜보면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고, 답답한 적도 많았어요.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어 친구에게 얘기를 하면 본인도 어느 정도 수긍을 하 다가도 이내 “우리는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아”라고 고개를 내젓더라고 요. 본인의 의견과 달라도 부모님의 명예와 부모님의 의사를 제일 먼저 의식 하고 챙기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재미있는 점은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결혼을 해야 진짜 어른”이라는 인식 이 있어서 아무리 나이가 젊은 청년이어도 결혼을 했으면, 그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도 절대 무시하지 않고 “grand”라 부르며 존중해줍니다. 반대로 나이가 많아도 미혼인 경우에는 “boy”라 부르며 장난치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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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김유진 님과 같이 아프리카 지역과 사람들을 만나고 알아가고 싶어 하시는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으신가요? 현지인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다가섰으면 좋겠어요. 항상 내 기준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의견과 문화, 생각을 그 자체로 인식하 고 받아들였으면 좋겠어요. 나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자라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현지인들의 의견과 내가 생각하는 것이 결코 같을 수가 없거든요.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 그들에겐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 요. 이 ‘다름’을 ‘다름’이 아닌 ‘틀림’으로 인식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마치 마른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옳고 그름을 떠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 일 준비가 되었다면, 현지인들도 우리의 의견을 기꺼이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 을 겁니다.


Rwanda

공용언어 – 프랑스어, 킨야르완다어 인구 – 약 11.8백만 명 GDP – 약 $99억

Kigali

르완다를 만난 이상혁 님 Muraho. This is ‘Kwizera’! 제 이름은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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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상혁 님, 자기소개와 현재 하고 계신 일을 소개해주시겠 어요? 무라호! 안녕하세요, 드디어 제 소개를 하게 되었네요! 저는 현재 국제개 발협력민간협의회(KCOC)에서 ODA YP로 일하고 있고, 르완다가 너무 그리워 그 새를 못 참고 ODA WATCH 시민현장감시단 일원으로 2주간 르완다를 다 녀온 르빠(르완다 빠) 이상혁이라고 합니다. (귀국 후 르완다 재방문 최단기간 기록 보유자인 건 안 비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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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하셨던 나라인 르완다를 소개해주시겠어요? ‘아프리카의 심장’, ‘천 개의 언덕을 가진 나라’ 크기는 작지만 가진 별명은 많은 나라 르완다는 아프리카 대륙 심장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크기는 우리나라 경상남북도 정도 되는 작은 나라입니다. 별명처럼 끝없이 펼쳐진 풀이 무성한 고원과 천 개의 언덕이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나라, 입가에 시원하게 번지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미소가 가득한 나 라. 이것이 바로 제가 살았던 르완다의 진짜 모습입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르완다 하면 '르완다 제노사이드 (genocide: 특정 집단 말살 목적으로 한 대량학살)' 또는 '호텔르완다'를 떠올 리는 것 같아요. 물론 르완다 대학살이 르완다에 백만 명의 무고한 사상자, 40 만 명의 고아, 3백만 명의 난민과 수만 명의 에이즈 환자를 만들었고, 불탄 건 물, 황폐해진 땅을 남긴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르완다 사람들은 협력하여 경제를 일으켰고, 살아남은 피해자의 상처를 보듬 어 주는 사회 결속력을 보여주었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의 르완다는 평화를 되찾았고 수도 키갈리는 청결함, 평 화 및 안전 측면에서 인정을 받아 아프리카 도시 중 처음으로 주거 환경 영 예 대상(Habitat Scroll of Honor)을 수상했고, ‘아프리카 국가 중 가장 낮은 범 죄율을 가진 나라’, ‘10년째 연평균 경제성장률 7%’, ‘세계에서 기업하기 좋은 나라 8위, 아프리카에서 2위’, ‘아프리카 최고의 공직청렴도’, ‘아프리카에서 치 안이 가장 잘 보장되는 나라’라는 수식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르완다가 우리나라와 유사한 점 또는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이었나요? 르완다에 있을 때 자주 든 생각은 예전 우리나라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것 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6~70년대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나라가 발전하던 때 처럼 제가 처음 르완다에 갔던 2015년 2월과 르완다를 떠나던 2016년 2월 르완다 모습은 매우 달랐습니다. 더불어 르완다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처 럼 공동체 의식이 강하고 ‘사람’을 좋아해서 정이 흘러넘칩니다. 또 흥도 아주 많고요. 이렇게 비슷한 점이 많으면서도 르완다가 한국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 것은 바로 르완다의 ‘시간관념’인데요, ‘아프리칸 타임(African Time)’이라고 들 어보셨나요? 아프리칸 타임은 사전으로 검색해보시면‘시간을 지키지 않음’이 라는 뜻이 나올 정도로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거나 약속 장소에 아예 나타나 지 않는, 아프리카의 독특한 시간 문화인데요. 이는 시간을 과거와 현재로만 인식하고 미래에 대한 관념이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시간관념은 르완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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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시간보다 한참 늦은 르완다 사람들에게 시간관념을 따지는 것은 매우 무의미한 일이에요. 미래의 약속시간보다 길 가던 중 만나는 사람과의 대화가 더 중요하니까요. 저는 약속시간이 지나 6시간 동안 기다려본 적이 있는데, 이 정도 가지곤 한인들 사이에서 명함도 못 내밉니다. 최근 빠른 경제성장에 따라 복잡해진 비즈니스 관계로 젊은 층을 기점으로 시간관념이 많이 변화하 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는… 글쎄요. 그 외에도 르완다만의 특이한 주거, 교통 문화가 있는데요. 르완다에는 거 의 모든 집에 ‘하우스 보이, 하우스 걸’이라 불리는 가정부들이 있습니다. 집 이 크든 작든, 수입이 많은 적든 말이죠. 한 현지인 친구는 월급이 적어 끼니 를 해결하기도 빠듯하다고 투정 부리면서 집에는 가정부를 두고 있었습니다. 이걸 보면서, 속으로 ‘그냥 자기가 집안일 해서 그 돈이라도 아끼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 문화는 아직도 잘 이해가 가지 않습 니다. 하하. 여러분은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돈 내고 타보신 적 있나요? 운전기사 뒷좌 석에서 말이에요. 물론 르완다에도 대형버스, 마을버스가 있지만, 르완다에 있 으면서 가장 많이 이용한 대중교통은 바로 ’자전거와 오토바이’ 였습니다. 자전거와 오토바이 기사 모두 정부 소속 정식 협동조합 조합원들이에요. 자전거는 보통 시골에서만 볼 수 있는데 기본요금 100RWF, 원화로 150원이 에요! 저는 늘 기본 200RWF를 내고 다녔답니다. (육중한 몸뚱어리)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들보다 자전거 기사들에게 인기가 매~우 좋답니다 ^^ 근데 지금 되게 슬프네요.



City never slee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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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에서 거주하시면서 느낀 가장 좋은 점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좋은 점을 나열하면 수십 가지도 넘지만, 가장 대표적인 몇 가지만 말씀드 릴게요! 첫째는 ‘쾌청한 날씨’입니다. 르완다는 나라 전체가 해발 1,500M의 고산지대에 위치해 있어 평균기온이 섭씨 19~20도 정도로 한국의 초가을 날 씨입니다. 아프리카는 무조건 대머리독수리가 날아다니는 땅이 쩍쩍 갈라진 사막일 거라고 생각했던 저의 무지와 편견이 부끄러울 정도예요. 1년 동안 땀 을 흘려 본 적은 손에 꼽고, 반팔보다 긴팔을 더 많이 입고 다녔다면 믿으실 수 있나요? 믿어주세요. 두 번째는, ‘내 몸보다 깨끗한 도로’입니다. 특히 수도 키갈리의 도로는 쓰 레기 하나 없이 깨끗하답니다. 친구들과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누가 먼저 도 로의 쓰레기를 발견하나 내기를 했다면 믿으시겠어요? 이번에도 믿어주세요. 그리고 위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르완다는 참 안전한 나라인데요. SOS International에 따르면 르완다의 치안 등급이 한국과 동일합니다. 와우. 뭐 이해하기 쉽게 말씀드리면, 한국처럼 모임 후 여자들도 밤늦게 알아서 귀가가 가능하다면 감이 오시죠? 네 번째는 바로 빠른 인터넷!! 사실 느리지 않다가 정확한 표현이긴 하지 만 와이파이가 잡히는 카페도 많고, 우리나라의 KT가 들어와 있어 4G LTE가 가능한 나라랍니다. 대단하죠? 물론 한국처럼 빠르지는 않지만, 한국에 있는 가족과 언제든 연락할 수 있고, 무엇보다 무한도전을 챙겨볼 수 있다는 건 축 복 아닌 블레싱이죠. 마지막으로, 아프리카에서 사는 인생의 낙이자 삶의 이유!!...까진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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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점이 바로 ‘커피’ 아니겠습니까!!! 또 커피로 유명한 르완다에서 1년이나 있었는데, 뭐 제가 더 설명할 필요가 있나요? 그래도 해드릴게요. 매일 아침 지저귀는 새 노랫소리에 깨어 눈 비비고 일어나 한 줄기 햇살이 보이는 커튼 을 젖히고, 드넓고 푸르른 초원을 바라보며 신선하고 향긋한 커피를 마시는 그 잠깐의 여유를 아주 저렴한 가격에 즐길 수 있다는 건 르완다가 제게 준 큰 행복 중 하나였습니다. 아 그립다. 이처럼 르완다가 가진 좋은 점이 많지만, 정말 제 마음을 사로잡은 건 역 시 ‘사람’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마음, 따뜻한 성품과 그것이 피워내 는 미소는 웃음을 잃고 바쁘게만 살아가는 한국에 오고 나서 더욱 생각이 나 네요.

Mem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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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은 르완다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 것 같나요? 어떤 부분은 잘 남기고 어떤 부분은 또 달리 보는 게 좋을 것 같은가요? 한 번은 마을 주민 중 한 분과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어요.

“너 한국 집에 돼지 몇 마리 있어?” “한 마리도 없는데요.” “그럼 소는?” “없는데요” “그럼 닭은?” “… 없어요 …” “저런, 불쌍해라.. 너 되게 가난하구나”.

과연 우리는 그들이 최신 스마트폰이 없고, 집에 TV와 에어컨이 없다고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들이라 판단할 수 있을까요? 빈부의 기준은 결국 나라마다 그 사람들마다 다른 것 같아요. 그들이 집에 가축 한 마리 못 키우는 절 가난하다 했던 것처럼요.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 야 할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절대적 빈곤에 생사를 다투는 이들을 돕기 위한 노력과 관심은 마땅한 것이지만, 모든 아프리카 국가와 사람들을 일방적 시혜 의 대상으로 바라봐서는 안 될 것 같아요. 실제 아프리카는 TV 후원 광고에 비친 죽음의 땅, 검은 대륙이 아닌 생동감 넘치고 다채로운 희망을 품은 곳이 니까요! 그들은 우리보다 가진 것이 훨씬 많고, 우리가 줘야 할 것보다 배워 야 할 것들이 훨씬 많답니다!


공용언어 – 아랍어

Morocco

인구 – 약 34.9백만 명 GDP – 약 $1210억

El Jajida

모로코를 만난 한진우 님 여자친구와 함께 모로코에 온 지 1년 6개월 되었습니다. 두 나라 간 근로문화 차이를 실감하기도 하며 하루하루 조금씩 모로코를 알아가고 있는 20대 청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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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안녕하세요. 1년 6개월째 모로코 엘자디다(El Jadida)라는 도시에 거주하며 현지에 나와 있는 한국 회사에 근무하고 있는 한진우라고 합니다. 제 전공은 음악이었으나, 모로코에 취업하게 된 여자 친구를 따라와 처음 몇 개월은 백 수 생활을 하다가 감사하게도 지금 회사에 취업이 되어 문서관리를 맡고 있 습니다. 제 여자 친구가 갑작스레 모로코에 직장을 구하게 되어 생전 들어보 지도 못했던 나라를 무작정 계획 없이 따라오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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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살고 계시는 모로코를 소개해주시겠어요? 모로코는 전통, 종교, 300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국왕체제가 여전히 국민 정서를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모로코를 양파와 공작새에 비유하 고 싶습니다. 겉은 허름하고 안이 화려한 상점들과 모로코 가정집들, 큰 기대 없었던 여행객을 조롱하는 듯한 각 지역의 다양성 및 개성 짙은 문화, 중독성 있는 향신료가 듬뿍 들어간 모로코 음식 등 매번 상상 이상을 보여주는 나라 입니다. 겉과 다르게 안은 맵고, 벗겨도 벗겨도 끝이 없는 양파와 날개 안에 아름다움을 감추고 있는 공작새가 모로코의 매력과 닮은 것 같습니다. 일할 때 빼고는 미워할 수 없는 구석이 있는 모로코인들도 이 나라에 정이 가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마라케시 메디나에서


집안 가장이 된 20대 초반 아가씨


모로코에서 거주하시면서 느낀 가장 좋은 점은 무엇이고 가장 좋지 않은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타인의 선의를 선의로 받아들일 수 있고 오고 가는 정 많은 모로코 사람 들이 보기 좋습니다. 우리나라에 비해 흉악범죄에 덜 노출된 것 같고 분노, 스트레스 지수도 낮은 것 같습니다. 그에 반해 그동안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지 못한 모로코인을 여럿 보았습 니다. 같이 일하는 한국인 직장 선배들이 모로코인들의 단점으로 그 부분을 지적할 때 저도 꼼꼼하거나 부지런한 성격은 아니라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 데 직업 특성상 그래서는 안 될 ‘의사’가 무책임한 모습을 보였을 때는 아쉬 웠습니다. 사랑니 발치를 위해 1시간이 넘는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3주 이상 수술 일정이 미뤄졌고 의료진들 사이 전달이 되지 않았다는 해명이 더 어처구니없었습니다. 저는 다행히 가벼운 수술이었지만 다른 위급한 환자들에 게는 그러지 않겠죠, 설마. 그 밖에도 종교적인 이유로 성소수자 혹은 여성에 대한 차별을 합리화시키는 몇몇 모로코인들이 바람직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알라가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라는 이슬람인들의 논리를 존중할 수는 있지 만 소외된 이들의 상처가 짐작되어 안타까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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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인과 함께 만나고 일하면서 좋았던 점 또는 애로사항이 있으셨나요? 저보다 현지 경험이 더 많은 직장 선배들만큼은 잘 모르겠지만 주로 문제 의 원인은 모로코와 우리나라 간 근로문화 차이인 것 같습니다. 일례로 업무 지시한 지 1시간도 채 안 되어 답변받았냐고 재촉하는 우리나라 상사와 업무 요청한 지 일주일이 지나도 연락 없고, 재촉하면 바쁜데 귀찮게 한다고 화내 는 모로코인들 사이에 문제가 안 생길 수가 없죠. 아 그리고 불어를 하는 제 여자 친구 말에 의하면 불어나 영어보다는 현지어를 하는 것이 모로코에서 일하고 생활하는 데 더 도움 된다고 하네요. 그래서 최근 제 여자 친구는 아 랍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불어나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현지인도 있 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고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답니다.

모로코 현지 사회의 모습을 간단하게 설명해주신다면 어떤 모습인가요? 모로코에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듯합니다. 스마트폰이 보급화 되어 있 고 한국 남자가 아니면 시집가지 않겠다는 20대 아가씨는 인터넷을 통해 한 류 및 미국문화를 접합니다. 그에 반해 저희 집 앞에는 장사꾼이 당나귀에 야 채, 과일을 싣고 다니고 문방구에서는 80년대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용하던 물건들을 발견할 수 있고 TV에서는 배우자를 부모가 정해주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는 것에 대해 청소년들이 열띤 토론을 합니다. 모로코는 여전히 제도의 변화보다는 유지 속성이 더 강하게 나타납니다. 새로 태어난 자녀 이름까지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체계, 대중의 무질서함 등 아직까지는 모로코 사 회의 변화를 더디게 하는 것들이 많아 보입니다.


모로코 전통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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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응하기 어려웠거나 아직도 적응되지 않은 모로코 문화가 있으신가요? 손으로 식사하고 볼일 보고 휴지 대신 손으로 해결하는 모로코 사람들은 아직도 적응이 안 됩니다. 친구 집 갈 때 두루마리 휴지는 1통씩 꼭 챙겨갑니 다. 친구들 집에 휴지가 없어요...

마지막으로 한진우 님과 같이 아프리카 지역과 사람들을 만나고 알아가고 싶어 하시는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으신가요? 제가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은 건 ‘모험과 도전에도 준비가 필요하다’라는 깨달음입니다. 누가 먼저 닦아 놓은 길이 없는 아프리카 특정 국가에서는 하 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하는 상황에 처해질 수도 있는데 보고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이정표 하나 세워져 있지 않은 비포장도로를 혼자 걸 어 나가는 기분이었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용언어 – 프랑스어

Cote d’Ivoire

인구 – 약 25백만 명 GDP – 약 $481억

Abidjan

코트디부아르를 만난 정혜윤 님 “Poverty is not an accident. Like Slavery and apartheid, it is man-made and can be removed by the actions of human beings.” - Nelson Mandel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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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정혜윤 님!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부탁도 될까요? 안녕하세요! 현재 ESADE 경영대학원 (ESADE Business School)에서 공공 관리론을 공부하고 있는 정혜윤입니다. 대학원 졸업 후, 7년간 한국의 사기업 및 공기업에서 국제개발 관련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국제개발 분야에 관심 을 갖게 되었습니다. 2015년까지 UNDP 동티모르에서 근무한 뒤 Public Policy and Management 분야를 이론적으로 더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 2016년 초에 아프리카 개발은행 (African Development Bank)의 Strategy and Operational Policies 부서에서 인턴십 기회를 얻어 아프리카 개발은행 본부가 있는 코트디부아르 (Côte d'Ivoire) 아비장 (Abidjan)에 거주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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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개발은행에 서있는 정혜윤님

거주하셨던 나라인 코트디부아르를 소개해주시겠어요? 코트디부아르는 아프리카 서부 대서양 연안에 있는 공화국으로서 법적 수 도는 야무수크로(Yamoussoukro) 이지만 경제 수도는 아비장(Abidjan)입니다. 공식 언어는 프랑스어이고 종교는 인구의 35% 이상이 이슬람교, 20% 이상이 기독교입니다. 주산업은 코코아, 커피 야자유 등 농산물과 원목 생산인 1차 산업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1893년 프랑스 식민지가 되었고, 1946년 프랑 스 연합을 구성하는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에 편입되었습니다. 1957년에 자치정 부를 수립하였고, 1960년에 완전히 독립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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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30년 동안 코트디부아르를 안정적으로 통치해온 초대 대통령 우푸 에부아니가 재임 중이던 1993년에 사망하면서 정국이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 습니다. 경제 위기와 정치 지도자들의 부정부패, 정쟁 등 사회적 불안이 가중 되어 2002년부터 2007년까지 내전을 겪게 되었습니다. 내전은 2007년 정부군 과 반군 간의 일단의 휴전협정이 성립되면서 공식적으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코트디부아르의 현재 생활 수준과 물가는 다른 서아프리카 국가에 비해 높은 편입니다.

구체적으로 코트디부아르에서 거주하셨던 도시는 어디이고 그곳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제가 거주했던 아비장(Abidjan)은 코트디부아르 남동부의 항만도시입니다. 인구는 약 250만 명이지만 이 중에 꽤 많은 인구가 프랑스인입니다. 아비장 은 코트디부아르의 수도였지만 1983년에 야무수크로로 수도를 이전하여 지금 은 행정수도는 아니지만, 경제수도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발견한 아비 장의 특징은 한마디로 “활기 넘치는 도시”입니다. 그리고 아비장 어디를 가든 지역마다 다른 특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회사가 있었던 곳은 여의도와 같은 금융 중심지와 비슷했지만, 집이 있었던 곳은 레스토랑이 많은 명동 같은 곳 이었습니다.


직장 동료와 함께

한국인으로서 아프리카 개발은행에서 일하면서 느낀 점이 있으신가요? 아프리카 사람들이 한국인을 보는 시선은 다양합니다. 아프리카에서 되게 먼 나라 한국에서 온 저를 신기하게 보는 사람들도 있고, 아프리카 지배 역사 가 없는 한국인을 유럽인에게 대하는 것과는 다르게 대해주는 사람들도 있었 습니다. 또한, 무엇보다 제가 한국인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는 점을 느꼈습니다. 아프리카 개발은행은 국적과 관계없이 모두 협력해서 일하는 것이 매우 중요 한 기관입니다. 이 때문에 일하면서 좀 더 유연하게 대처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게다가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있다가 보니 제가 하는 일 하나하나에 따라 한국인 전체를 바라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비장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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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인과 함께 만나고 일하면서 좋았던 점 또는 애로사항이 있으셨나요? 우선 대체적으로 밝고 유쾌한 코트디부아르 현지인과 함께 만나고 일하면 서 제 마음도 함께 밝아지는 것 같아 너무 좋았습니다. 애로사항은 바로 ‘언 어’였습니다. 코트디부아르는 영어로 “전혀” 소통을 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가기 전에는 다른 나라처럼 영어로 웬만큼 소통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가보니 불어가 아니면 의사소통을 “전혀” 할 수가 없어서 고생을 많 이 했었습니다. 혹시 다음에 코트디부아르나 프랑스어 권 아프리카 국가에 가 실 분들은 일상생활에서 쓸 수 있는 불어를 배워 가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 습니다.

현지인들과 함께 일하는 모습


아프리카 개발은행 동료들과

마지막으로 정혜윤 님과 같이 아프리카 지역과 사람들을 만나고 알아가 고 싶어 하시는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으신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프리카 에 가시기 전에 그 지역에 대해 많이 공부하고 가시는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기대했던 것과 현실이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열린 마음으로 그들의 문화, 생활습관 등을 새로 배운다는 마음으로 다가가면 훨씬 더 즐거운 아프 리카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Tanzania

공용언어 – 스와힐리어, 영어 인구 – 약 50백만 명 GDP – 약 $567억

Dar es Salaam

탄자니아를 만난 이하은 님 Penye nia pana njia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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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하은 님!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를 해주시겠어요?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동아프리카어를 전공하고 있으며, 현재 공공외교 현장 실습원으로 주탄자니아 한국대사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이하은이라고 합니다. 제 탄자니아 이름은 ‘Zawadi(선물)’인데요, 크든 작든 선물은 사람들을 기 분 좋게 하는 것처럼 저 또한 누구에게나 선물 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서 이 이름을 쓰게 되었어요. 다들 저만 보면 선물을 달라는 부작용이 있지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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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환학생 시절 친구들과 함께

아프리카에서는 어떤 계기로 어떤 나라에 거주하시게 되었나요? 중∙고등학교 때, 한비야 작가님이 한창 이슈였어요. 특히 ‘지도 밖으로 행 군하라’라는 책을 정말 감명 깊게 읽었었죠. 그때 아프리카의 이야기를 알았 고, 월드비전에서 봉사하며 꾸준히 꿈을 키워오다가 아프리카학부에 입학하게 되었어요. 전공공부를 하면서 교과서 속 아프리카보다 실제 아프리카를 경험 하고 싶은 마음이 켜졌고 전공언어인 스와힐리어의 본고장, 탄자니아를 가기 로 결심했습니다. 2015년 상반기 교환학생으로 처음 탄자니아 땅을 밟았고, 최고 국립대학 인 다레살람 대학교에서 한 학기를 보냈었습니다. 그 이후, 학생이 아닌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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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서 탄자니아를 경험해보고 싶어서 2016년 상반기에 코트라 다레살람 무 역관 인턴으로 다시 탄자니아에 돌아오게 되었고, 하반기인 현재는 주탄자니 아 한국대사관 현장 실습원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교환학생 시절, 현지 언 어와 문화를 직접 부딪치고 배우면서 적응했던 시간들이 인턴 생활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1년 반 정도 거주하고 계시는 탄자니아를 소개해주시겠어요? “아름다운 자연환경, 종교적 평화, 정치적 안정성” 이 세 가지가 다른 아프리카 국가와는 차별화된 탄자니아만의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첫 번째로 킬리만자로산, 세렝게티 국립공원, 잔지바르 등 세계적으로 유 명한 관광명소가 있어요. 한반도 4배 면적의 이 어마어마한 탄자니아에서는 에메랄드빛 바다부터 울창한 산, 드넓은 초원까지 한 번에 경험할 수 있습니 다. 두 번째로, 탄자니아 내륙에는 이슬람(30%)과 기독교(35%), 토속종교(35%) 그리고 잔지바르에는 이슬람(97%)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어요. 차별과 분리 없이 서로의 종교를 존중하고 이해하죠. 집에 있으면 평일에는 이슬람사원의 예배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주말에는 교회의 예배 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덕 분에(?) 이슬람과 기독교 휴일 모두 쉰답니다. ;) 세 번째로, 장기집권, 정치적 세습이 이루어지지 않고 민주주의를 지향하 고 있어요. 탄자니아의 정식명칭은 ‘탄자니아 연방공화국’이에요. 간략하게 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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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니아의 역사를 설명하자면 식민지 시절, 탄자니아 내륙(옛 이름, 탕가니카) 은 독일(1885-1916)에 이어 영국(1919-1961)의 식민지배를 받았었고, 잔지바 르는 1840년부터 오만의 술탄 Seyyid Said의 수도였지만 1890부터 영국 보호 령 하에 들어갔어요. 독립 이후 1963년 탕가니카 공화국과 잔지바르 공화국이 합병되었고, 1965년 초대 대통령 Julius Nyerere가 당선되고 탄자니아 합중국이 수립되었 습니다. 그래서 외교, 국방, 대외무역, 통화정책 등의 권한은 연방정부가 갖고 있지만, 잔지바르는 별도의 대통령, 행정부, 의회를 갖고 자치권을 보유하고 있어요. 한 국가에 두 명의 대통령이 있고, 여당인 탄자니아 혁명당(CCM)의 우위 체제가 견고해서 때로는 야당 세력의 저항이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안정 적인 정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므완자 지웨쿠에서


다레살람 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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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매력을 가진 다레살람에서 현재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Hapa Kazi Tu”, 2015년 11월 취임한 마구풀리 대통령은 지난 10개월간 ‘Hapa Kazi Tu(여기는 일뿐이다, 열심히 일하자)’를 외치면서 탄자니아 국가발 전과 국민들의 복리 증진을 위해서 부패한 정부를 개혁하는 데 최선을 다하 고 있어요. 이 슬로건은 거의 유행처럼 탄자니아인들 사이에서 유명해요. 지 난달 공개된 탄자니아 시민단체 TWAWEZA의 한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John Pombe Magufuli 대통령의 국정 수행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도가 96%에 달한다고 해요. 마구풀리 대통령의 여러 국정 수행 분야 중에서도 유령 공무 원(월급 지금 명부에만 존재하고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공무원)을 정리, 중 학교까지 무상교육 확대, 부패 공무원 척결에 대해 국민들의 지지도가 높다고 합니다.

이하은 님의 전공이나 전문 분야에서 볼 때 탄자니아의 현재 상황은 어떤가요? 탄자니아에서 쓰이는 언어는 영어와 스와힐리어에요. 업무를 할 때에는 영 어로도 진행이 충분히 가능하지만, 도시 중심가를 제외한 곳의 대다수 일반 사람들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영어를 잘하는 편이 아니에요. 탄자니아 에만 120개 부족이 있고, 부족어 또한 굉장히 많지만, 전체인구의 90% 이상 은 스와힐리어를 사용하고 있어요. 지난 8월 말에는 케냐, 우간다, 탄자니아, 르완다, 부룬디, 남수단이 회원국 으로 속해있는 동아프리카공동체(EAC)에서 스와힐리어를 공식 언어로 지정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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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요. 스와힐리어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정작 탄자니아에 서는 스와힐리어보다는 영어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어요(우리나라와 비슷 한 상황인 것 같아요). 현지 신문의 사설을 인용하면, ‘세계 곳곳에서 스와힐리어로 직업을 얻을 수 있는 다양한 기회가 있어도 탄자니아인들은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러 한 많은 기회들은 결국 대학교에서 정식으로 스와힐리어를 배운 다른 나라 사람들이 가져가곤 한다. 우리의 문제는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다. 스와힐리어 가 남용되고, 문법적 오류가 많아도 알지 못하고 침묵을 지키고 있다. 오늘날 탄자니아인들은 스와힐리어를 배우고 싶지 않아 한다. L과 R의 발음을 헷갈려 하는 사람들이 많아도 올바르게 발음하려고 배우려는 노력을 행하지 않는다.’ 라며 스와힐리어가 동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전체, 그리고 전 세계에 서 쓰일 수 있도록 수단과 방법을 마련해야 하며, 또한 그 중심에 스와힐리어 의 본고장인 탄자니아가 주역이 되어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어요.

코트라 다레살람 무역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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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탄자니아를 잇는 중요한 업무를 다양하게 해보셨는데, 해외인턴 이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능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무엇보다도 현지적응력과 언어능력(영어, 현지어), 그리고 글 쓰는 능력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현지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무 슨 일이든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건강관리와 안전이 해외인턴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특히나 동아프리카에서 동양인 여자에 대해서 과 한 호기심이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기분이 나쁘고 화가 나는 등 적응하기 어 려웠어요. 하지만, 마음을 내려놓고 여유를 가지니까 스트레스로 다가오지 않 더라고요. 그래도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하는 것 같아요. 다음으로는, 통번역 업무가 주로 많다 보니 언어능력이 중요한 것 같아요. 업무는 영어로 진행되지만, 탄자니아 사람들이 영어를 잘 못 하기 때문에 현 지어도 할 줄 안다면 친근감도 느끼게 하고, 훨씬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는 글쓰기 능력이에요. 해외시장뉴스 혹은 기고문을 작성하고, 바이어에게 초청 메일을 보내고, 행사 이후에 평가보고서를 쓰는 등 간결한 어휘를 사용해서 짜임 있는 글을 써야 하는 업무가 많아요. 대학교 리포트와 는 정반대의 성격인 것 같아요. 처음엔 어려우실 수도 있지만, 쓰다 보면 조 금씩 느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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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은 님과 같이 아프리카 지역과 사람들을 만나고 알아가고 싶어 하시는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으신가요? 탄자니아에서 현지인들이 외국인에게 접근하면, “Mambo(안녕)”로 시작해 서 “Omba(요구하다)”로 끝난다고 말하곤 해요. 외국인은 모두 부유할 것이라 고 생각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친근한 친구로 접근하고 친해지지만,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도와 달라고 혹은 무엇을 달라고 요구할 때가 있거든요. 저도 아직까지 진정한 친구를 만나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쉬워요.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정말 진심이 통한다면 진정한 친구로도 사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모두 아프리카에서 진정한 친구를 만나시길 바랄게요!


DR Congo

공용언어 – 프랑스어 인구 – 약 86.7백만 명 GDP – 약 $426억

Kinshasa

DR콩고를 만난 이상용 님 Vouloir, c’est pouvoir. 원하는 건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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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상용 님!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려도 될까요? 안녕하세요. 아프리카 DR콩고에서 한국 기업에서 근무 하고 있는 이상용 입니다. 대학교를 휴학한 후, 토고에서 2년 동안 근무했었고, 학업을 마친 후 에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가 현재 DR콩고에 있는 한국 기업에서 재무와 구매 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실무로만 일을 배우다 보니 이론적인 부분이 많이 부족하다고 느껴서, 퇴근 후에 회계와 무역실무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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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계기로 두 국가와 만나게 되셨나요? 저는 조금 특이한 케이스였는데요. 대학교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했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아프리카에서 근무 중인 선배가 휴가로 한국에 들어와서 같 이 당구를 쳤었어요. 그때 그 선배가 현지에서 온 전화를 받고 유창한 프랑스 어로 통화하는 걸 봤는데 그 선배가 너무 멋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선배에게 많이 물어봤었고, 그때부터 점차 그 매력에 빠져서 ‘아프리카에 가면 그 선배 처럼 될 수 있을 것 같다’라는 기대로 아프리카에 대한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군 복무를 마치고 1년간 준비해서 2학년을 마친 후, 주변의 많은 도움을 받아 토고에 있는 한국업체에 2년간 근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해 외 경험이 아프리카로 가는 것이어서 너무 설렜어요. 두바이에서 경유하는 방 법을 잘 몰라서 헤매고, 뇌물을 주지 않아서 가나 오토카공항 출입국관리소에 서 도장을 안 찍어주고, 직원에게 사기당해 경유 비자를 받는데 2배가 넘는 돈을 주고, 중국인으로 오인 받아서 공항 경찰에 한 시간 정도 잡혀있었죠. 시작부터 아주 스펙터클 했어요. 그런데 두려움보다는 ‘아 아프리카에 있으면 더욱더 재미난 일들이 많이 일어나겠다’라는 기대감이 더 컸어요. 실제로 저는 토고 가기 전에는 프랑스어로 간단한 인사밖에 할 줄 몰랐어 요. 하지만 토고 생활을 통해 프랑스어로 대화하는 데 있어서 두려움이 없어 졌고, 영업업무도 돕게 되면서 영어권 고객들과 대화하기 위해 ‘한 번 볼 때 마다 한마디씩만 더 하자’ 는 생각으로 지냈어요. 그랬더니 영어도 2년이 지 난 후에는 고객과 2시간 동안 업무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만큼 발전했 습니다. 물론, 책을 보고 공부한 것과는 달라서 저질영어이지만요. 한국에 있 었으면 절대 경험할 수 없을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제 인생의 첫 번째 터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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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인트였죠. 저도 제 인생이 이렇게 바뀔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이후 2년간 토고에서의 근무를 마치고 대학교 복학 후, 졸업한 뒤 작년 10월 DR콩고로 오게 되어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회사 차원 고아원 방문


여행 갔던 나미비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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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하고 계시는 DR 콩고와 이전에 방문하셨던 토고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려주시겠어요? 우선 토고에 대해서 설명해 드릴게요. 저는 토고에서 2011년부터 2013년 까지 2년간 한국기업에서 근무를 했었습니다. 다행히도 다른 한국기업에 대학 교 선배가 근무하고 있어서 외롭지 않게 많은 도움을 받으면서 2년간 잘 지 내다가 왔습니다. 토고는 크게 두 가지의 장점이 있는데요. 첫째는 안정된 치 안, 둘째는 종교의 자유입니다. 토고는 서아프리카에서 비교적 안정된 치안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토고는 현재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40년 이 넘는 기간 동안 권력의 세습을 통해 독재정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아 이러니하게도 독재 덕분에 안전한 치안을 유지하고 있어요. 공권력이 너무 강 력해 부정부패가 일상화되었지만, 덕분에 길거리에서 해가 뜰 때까지 술을 마 시고도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어요. 그리고 특이하게도 주변 서아프리카 국가와는 다르게, 50% 정도의 국민이 토착 종교를 믿고 그다음 기독교, 이슬람교 순서에요. 그런데 여러 종교가 밀 집되어있으면서도 아무런 종교 문제가 일어나지 않아요. 그리고 수도인 ‘로메’ 가 가나와의 국경에 붙어있어요. 그다음은 DR콩고에 대해 말씀드릴게요. 콩고는 아프리카에서 3번째로 큰 국토를 가지고 있고, 정말 특이하게도 미국 달러와 현지 화폐인 프랑세파가 동시에 통용되는 국가입니다. 그래서 2개의 화폐를 모두 사용할 수 있습니다. 특이하죠? 그래서 지속적인 유가 하락과 최근 브렉시트에 따른 경제위기에도, 다른 주변 아프리카 국가보다 영향을 적게 받았어요. 물론 악영향이 있긴 했 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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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DR콩고는 엄청난 광물자원과 인력자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체 인구가 7,000만 명을 넘고, 수도인 ‘킨샤사’에만 1,100만 명이 넘는 인구가 살 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성장을 할 잠재력이 다른 아프리카 국가보다 더 높다 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안정한 치안 때문에 아직도 유엔평화유지군이 주둔 하고 있어요. 수도 ‘킨샤사’는 조금 괜찮은 편이지만, 아직도 북동부지역은 내 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2주 전에는 50명이 넘게 학살되 는 일도 일어났어요. 그래서 차를 타고 시내를 나가면 유엔 차량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올해 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지만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아서 나라 안팎으로 시끄럽고, 세계로부터 올해 대통령선거를 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요즘은 시위도 부쩍 많이 일어나고, 한 번씩 VILLE MORTE(죽은 도시)라는 슬로건으로 ‘킨샤사’ 전체적으로 파업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이 이 정도이니 선거철인 11월, 12월이 기대되네요.

그렇다면 현재 거주하시는 ‘킨샤사’에서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은 무 엇인가요? 현재 DR콩고에서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는 아무래도 대선 문제입니 다. DR콩고 역시 토고와 마찬가지로 권력의 부자세습이 이루어졌는데요. 몇 달 전에는 선거 촉구를 위해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님도 왔다 가셨어요. 하지만 현 대통령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올해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 를 미루려고 하고 있습니다. 또한 선거구를 복잡하게 나누어서 투표와 개표를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DR콩고헌법재판소에서 다른 대선후보가 없다면 대통령 임기가 대선 후보가 나올 때까지 연장되는 판결을 내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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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가 더욱더 불안해졌습니다. 덕분에 경제도 혼란스러워졌고, 얼마 전 야당 대표가 유럽에서 콩고로 들어온 뒤, 야당을 지지하는 세력이 더욱더 많아졌어 요. 3주 전에는 저희 동네에서 시위 도중 경찰이 야당 지지자를 죽이고 야당 대표의 집 앞에 시체를 유기하는 사건이 일어나 뒤숭숭했습니다. 이 모든 상 황을 이렇게 설명을 드리면 되게 안 좋아 보이실 수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괜 찮은 것 같습니다. 하하하. 괜찮아지겠죠?

Friends Are For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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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두 국가에서 생활하시면서 가장 기쁘고 행복했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우습게도 아프리카 생활하면서 가장 기쁜 순간을 꼽자면, 토고 있을 때 가 나에 가서 돼지국밥에 소주 한 잔 마셨던 순간입니다.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요. 다들 타국에서 생활하면서 먹고 싶은 음식이 있잖아요? 저는 자장면 과 돼지국밥이었어요. 고향이 경남인데 돼지국밥은 경상남도에만 있잖아요. 제가 가나에서 일주일 정도 머물렀을 때, 가나에 있는 지인이 밥 사준다고 데 려갔는데 돼지국밥집이었어요. 아프리카에 돼지국밥집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 시나요? 들어가는 순간 국밥 냄새가 코끝을 찌르는데 너무 행복했어요. 돼지 국밥에 소주 한잔을 하는데 먹으면서 그동안의 스트레스가 다 풀리면서 제일 기분이 좋았어요. 그리고 그날 저녁은 자장면을 파는 한식당에 갔습니다. 너 무 맛있었어요. 맛도 한국 중화요릿집에서 파는 그 맛이었습니다. 먹고 싶었 던 음식들을 하루에 모두 먹었는데, 그날 밤이 제일 행복했습니다. 언젠가 가 나에 갈 기회가 생기면 다시 가보고 싶어요.

현지 사람들과도 함께하실 일이 많으실 것 같은데요, 좋았던 점이나 애로사항은 없었나요? 그들도 같은 사람인지라 좋은 점도 많고 애로사항도 많습니다. 좋은 점은 비교적 자유로운 회사 분위기에요. 한국기업이지만 한국식 기업 문화와는 다 르게 비교적 자유롭습니다. 오히려 현지인들이 저보다 실무를 잘하기 때문에 많은 도움을 받고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무를 보는 직원들이 저보다 나 이가 많지만 제가 현지 직원을 관리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서로 존중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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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현지인들과 같이 일하면서 업무에 관련해서 서로 목소리를 높일 때도 많지만 해결되면 그 자리에서 털어놓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잘 지냅니다. 반면에 늘 현지인들과 부딪히는 면도 있습니다. 여러 문제들 중에서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언어적인 문제, 그리고 두 번째는 더운 나 라의 특징인 게으른 성격입니다. 프랑스어도 잘 못 알아듣던 시절엔 현지 직 원들이 저를 욕하는지도 모르고 옆에서 실실거리면서 웃다가 저의 험담하는 걸 알고 나서부터 미친 듯이 프랑스어 공부를 했어요. 영어권 거래처 사람들 에겐 영업하는 사람이 영어를 못 하면 되냐고 혼난 적도 있었죠. 저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화가 나서 미친 듯이 공부했습니다. 지금은 괜찮아요. 그리고 프랑스어권 국가는 특히 AMI(친구) 문화가 일상화되어있어요. 양 날의 검 같은 문화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대우 를 받지만, 친구가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해줘 요. 잘해주면서도 뒤로는 금전적인 요구를 하기도 하죠. 이런 문화를 잘 이용 하면 오히려 생활하는 데 있어서 많은 혜택을 봅니다. 저는 만족하면서 지내 고 있습니다.



Deokyong GWON


Mauritania &

언어 – 아랍어 인구 – 약 3.9백만 명 GDP – 약 $54억

Senegal

서아프리카를 만난 궁성민 님 세계의 이곳저곳에 발 도장을 찍고 다니는 뚜벅이입니다. 여행을 다니며 사람 사는 내음을 찾아 떠나 여행으로부터의 자유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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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간단하게 자기소개와 현재 하고 계신 일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살람 말레쿰~! 저는 현재 길 위에서 방황 중인 궁성민입니다. 혹독한 겨울 을 이겨낸 시베리아를 넘어 스칸디나비아반도를 거쳐 까미노 순례길을 따라 걷다 보니 세상의 끝이 나왔고, 다른 세상의 끝을 향해 남쪽으로 향하다 세네 갈에서 잠시 쉼표를 가지고, 봉사를 마친 후 다시 길 위에 올라 지금은 말리 바마코에 있습니다. 서아프리카 여행을 마치면 중아프리카를 건너 남아공까지 내려간 다음 다시 이집트로 올라갈 예정입니다. 그 이후는 인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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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계기로 아프리카 종단을 결심하시게 되셨나요? 흔히 아프리카 종단이라고 하면 이집트부터 남아공까지 내려가거나 올라 가는 코스를 많이 선택합니다. 청개구리와 같은 마음을 가진 저는 에볼라, 납 치 그리고 보코하람이 설쳐대는 곳!! 어쩌면 신마저도 이곳을 버리고 떠나버 렸을지도 모르는 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정을 느껴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역시나 비자부터 숙박 모든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항상 투밥(서아프리카에 서 현지인들이 백인들을 향해 주로 부르는 말)들을 돈으로 바라보고, 하루 전 체의 이야기는 돈 얘기가 전부인 사람들. 말도 안 되는 돈으로 하루를 살아가 지만, 그래도 신을 찾아 감사하는 사람들. 세계 4대 무슬림 공화국인 모리타 니, 화교인이 90%가 넘는 세네갈을 만나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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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해 보셨던 나라들을 소개해주시겠어요? 먼저, 이름도 생소한 모리타니에 대해서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사막 한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세계 4대 이슬람 공화국 중 하나인 나라입니다. 대 서양이 바로 앞에 있어서 수자원이 풍부하고, 사하라 사막의 중심으로 들어가 면, 세계 2번째로 큰 철광석 광산, 최근 금과 다이아몬드 등 천연자원도 풍부 한 나라입니다. 예전 동서양을 이어 주던 실크로드의 끝이 모리타니의 칭궤티 란 말이 있을 정도로 무역의 요충지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막에 서 있는 나라에서 기대할 수 있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투자가치가 없기 때문 에 외국기업들뿐만 아니라 정부까지 국민들을 방관하고, 어느 누구도 이 나라 를 책임져서 다시 일으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모리타니의 수도인 누악쇼트는 해수면보다 고도가 낮아, 최근 3년 전부터 곳곳에 웅덩이가 생기기 시작했고, 최근 큰 비로 인해서 뎅기열도 돌고 있습 니다. 말리, 세네갈, 기니 등 서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아프리카 출신 의 사람들이 거쳐 가려다 돈이 부족해서 머무르는 나라였습니다. 아직도 암묵 적인 노예가 존재하고, 아랍문화와 아프리카 문화가 섞여 복잡함을 가중합니 다. 사실, 모리타니에서 가장 충격받은 건, ‘쓰레기’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수도 누악쇼트뿐만 아니라 어느 도시든 쓰레기가 가득하고 가축이 죽어 썩는 냄새 가 가득합니다. 남녀노소 쓰레기를 길거리에 버리는 게 익숙해 보입니다. 세 계에서 사람들이 길거리에 가장 많이 누워있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어딜 가도 남녀노소 할 거 없이 길에 누워서 차를 마십니다. 관광자원이라곤 사막뿐. 그 마저도 모로코에 밀려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질 않습니다. 다음은 세네갈입니다. 서아프리카 문화의 보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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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음악, 예술의 종합 예술지입니다. 사하라 사막의 최남단, 그리고 숲이 우거 진 아프리카가 시작되는 곳, 월로프, 풀라, 세레, 소세, 밤바라, 만딩가, 졸라 등 많은 종족들이 어울려 다양한 문화를 자아내는 곳, 무슬림과 크리스천의 어색한 동거가 있는 곳. 만약 모로코부터 모리타니를 통해서 아프리카를 내려 오면, 모로코 혹은 모리타니는 아프리카라는 느낌보다는 중동이라는 이미지가 더 강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세네갈부터 피부가 검은 흑인들을 만날 수 있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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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타니와 세네갈에서 구체적으로 거주하셨던 도시는 어디이고 그곳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세네갈의 본나바부터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세네갈에 크게 손꼽을 만한 관 광지가 몇 군데가 있습니다. 고레섬, 생루이, 까사망스 등 그렇지만 그중에 가 장 유명한 곳 “Lac rose”, 붉게 묽든 호수가 유명한 곳의 뒤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본나바 마을에서 지내다가 왔습니다. 보통 유명한 관광지를 떠올리면 아름다운 모습에 이면에 있는 모습은 쉽게 잊힙니다. 가령 그리스 산토리니의 아름다운 모습 하지만, 뒤편의 황량한 대지... 세네갈 Lac Rose의 아름답게 붉 은 호수 뒤편에 사막에서 사는 “풀라족” 사람들이 있기에 더 아름답다고 생 각합니다. 여행 중 “Better World”라는 NGO 단체에서 섬김의 기회가 생겨서 “Lac Rose” 뒤편에 있는 풀라족과 5개월 동안의 시간을 보내고 왔습니다. 보통 세 네갈에는 “울루프”, “세레”, “소세”족들이 주를 이루지만 이곳에는 “풀라”족들이 90%가 넘게 거주하고 있습니다. 세네갈답지 않게 사막 위에 우뚝 서 있는 마 을, 뒤로는 대서양이 앞으로는 호수… 수도 다카르까지는 30km 남짓하지만, 사막에 있어서 둘러 둘러 가서 2시간이나 걸리는 곳… 사람들의 생계는 주로 농사… 월 한화 10만 원도 채 되지 않는 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하지만 항 상 신을 찾아 “알라”에게 감사드리는 곳입니다.


세네갈 본나바 마을

현지에서 생활했던 시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한 가지를 꼽는다면 언제일까요? NGO 베터월드에서의 봉사 시간을 마치고, 교장 선생님 Ciss 가족과 함께, 동물원을 방문했습니다. 동물원을 도착한 순간 동물원 입구 앞에는 소풍을 온 다른 초등학교 학생들을 보았습니다. 순간 Ciss와 저는 눈이 맞았고 같은 생 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왜? 봉사 기간 동안 생각 하지 못했 지…. 이미 봉사 기간이 끝났기 때문에, 예산을 신청할 수 없기에, 저의 사비 를 털어서라도 CM1(5학년) 학생들을 동물원에 데리고 오고 싶었습니다. 그리 고는 저의 Facebook에 글을 올렸는데, 많은 분들이 도와주신 덕분에 그 다음 주, 저의 감비아 여행 일정을 미루고서라도 동물원을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다카르 수도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는 않지만, 많은 가정이 풍족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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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평생 동안 동물원을 가보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심지어 Ciss 교장 선 생님도 자신의 임기 기간에 학생들을 데리고 동물원을 방문하는 것이 처음이 라고 했습니다. 전날부터 다 같이 모여 음식을 만들고, 세네갈의 로컬 교통 버스인 “쟈간은쟈이”를 빌려서 40명이 넘는 인원이 동물원을 함께 떠났습니 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면, 그냥 소풍으로 통보를 했는데, 많은 학생들이 공 책을 들고 왔습니다. 각각 다른 동물들을 만날 때마다 공책을 꺼내서 필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단지 공부의 기회가 없어서 할 수 없었던 것입니 다. 동물원 투어를 마치고 다 같이 돗자리를 깔고 앉아서, 세네갈 음식 “야사 뿔레”를 함께 먹는데, 정말 여기가 천국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근 5개월 동안 함께 지내면서, 가장 해주고 싶었던 일을 공유한다는 게, 이 렇게 행복하구나!!! 점심을 끝내고, 앞에 누추하지만, 세네갈에는 하나뿐일 대 형 놀이터(?)를 갔는데, 들어가는 순간 아이들의 영혼이 떠났습니다! 사실 학 교뿐만 아니라 본나바 마을에도 간단한 놀이터조차 없습니다. 그러다가 놀이 터를 방문한 아이들은 1시간 동안 쉬지 않고 뛰어다녔습니다.


Rwanda

공용언어 – 프랑스어, 킨야르완다어 인구 – 약 11.8백만 명 GDP – 약 $99억

Kigali

르완다를 만난 신지윤 님 진짜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무엇인지 고민하는 직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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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윤 님, 안녕하세요!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려도 될까요? 안녕하세요, 저는 르완다에서 사회적 기업을 창업한 인연으로 인터뷰를 하 게 된 신지윤입니다. 지금은 한국의 한 기업에서 아프리카 사업 담당을 맡고 있습니다.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학교 친구들과 함께 사회적 기업을 창업하여 경영하였습니다. <라즈만나>(히브리어로 ‘신비한 맛’이라는 뜻)라는 베이커리 카페를 경영했고요. 저희 회사는 다국적기업, 현지 대기업 들을 제치고 총점 98.7점으로 르완다 정부에서 인정한 2014년 최고의 서비스 기업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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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들과 함께

그동안 거주하셨던 나라인 르완다를 간단하게 소개해주시겠어요? 아프리카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신 분이라면, 르완다라는 국가의 이름 을 들으셨을 때 <호텔 르완다>를 가장 먼저 떠올리실 텐데요. 르완다는 1994 년의 제노사이드로 인해 잘 알려져 있습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경제발 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쏟고 있는 나라입니다. ‘천 개의 언덕을 가진 나라’라 는 별명답게 정말 많은 언덕이 있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나라입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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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현지에서 기업을 경영하며 겪은 가장 큰 어려움은 어떤 것이 었나요? 위험 관리가 가장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한국에서라면 걱정이 없었을 정전, 단수 같은 문제가 수시로 생겼었습니다. 손님들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 고 신뢰를 얻으려면 위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 철저하게 대처해야 했습니다. 며칠 동안 정전, 단수 같은 문제가 생기더라도 정상 운영이 가능하도록 일부 러 10톤짜리 물탱크를 설치하고, 충분한 용량의 발전기를 구비하였습니다. 또, 재료 수급도 항상 문제였습니다. 물류의 이동이 원활하지 않은 아프리카다 보 니 재고를 더 많이 구매하는 등의 추가적인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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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 생활을 통해서 가장 크게 배우신 점은 무엇인가요? “모든 문제는 사람에서 시작해서 사람으로 끝난다.”라는 점을 배웠습니다. 사실, 26살의 나이에 회사를 경영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함께 창업했던 친구들과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던 점은, <라즈만나>가 르완다의 심각한 사회 적 문제인 취업난, 보건 문제 등을 해결하는 좋은 사회적 기업이 되는 것이었 습니다. 결국 저희가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는 ‘사람’ 이 겪는 문제였습니다. 근데, 이 기업 경영이 단순히 좋은 마음만 가지고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 었습니다. 사람에 대해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일들이 자꾸 생겼습니다. 30명의 직원들 중에서 좋은 직원들도 많았지만, 거짓말하고 사기를 치고, 회사의 물건을 도둑질하는 직원들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 나는 이런 나쁜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이 일을 시작한 건가?” 라고 끊임 없이 되묻곤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저에게 가장 큰 보람을 주었던 것은 나날이 올라가는 회사의 매출이 아니라 회사에서 일하면서 승진하고, 자기의 꿈을 펼치고, 결 혼하여 가정을 꾸리는 직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비록 30명의 직원들이지만 인간적인 대우를 해주고, 한 명 한 명에게 관심을 보이니 사람이 바뀌고, 회 사의 실적도 좋은 방향으로 올라가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역시 사람이 미래입 니다.


현지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한 가지를 꼽아보신다면? “당신이 우리의 인생을 바꿨다.” 가장 신뢰하던 직원에게 제가 르완다와 < 라즈만나>를 떠나기로 했다는 것을 말했을 때 그가 저에게 해 준말입니다. 20 대 중반의 청년들이 단순하게, ‘이렇게 하면 세상이 바뀌겠지?’라고 생각하고 해본 결과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직접 보고 느꼈습니다. 변화들을 지켜 보면서, ‘아, 우리가 이렇게 다른 사람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구나.’ 하 는 큰 보람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환송회 내내 함께 울며 이별을 아쉬워하던 직원들의 모습이 아직까지도 생각납니다. 직원들의 삶에 앞으로도 행복과 행 운이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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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서 사회적 기업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자질 혹은 조건이 무엇이 있을까요? 최근 많은 청년들이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뛰어들고 있습니다. NGO를 직접 설립하기도 하고, 사회적 기업을 창업하기도 합니다. 물론 다들 본인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충분한 실력이 있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잔소리라 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크게 3가지를 말씀드리자면: 1) 경영학에 대한 지식: 특히 회계와 마케팅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 큰 도 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회계만 잘할 줄 알아도 회사 경영에는 큰 도움이 되 거든요. 마케팅은 본인들의 주 고객층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빨리 파악해야 합 니다. 가령, <라즈만나>를 처음 만들면서 수많은 조언을 들었는데 그중에 가장 기억나는 것이, “SNS 마케팅을 꼭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에서라면 물론 당연히 효과가 있을 마케팅 방법이지만, SNS 사용 인구가 전체 인구의 5%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르완다에서는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었 습니다. 더군다나 저희 주 고객층은 ‘SNS를 사용하지 않는’ 상류층이었습니다. 이렇듯 마케팅에서 주 고객층을 빨리 파악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2) 현지에 대한 지식: 저는 사업을 준비하면서 한국에서 파악할 수 있는 현지에 대한 정보는 모두 파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것이 직접적으로 도움 이 되던, 되지 않던 결국에는 성공을 위해서 다 필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 다. 미리 현지의 문화를 파악하고 현지인들의 마음을 얻는 데도 큰 도움이 되 었습니다. 3) 사업 업종에 대한 전문지식: 어떤 일을 하든지 사업 업종에 대해서는 철저해야 합니다. 그 사업이 저희 같은 요식업이 되었던, 제조업이 되었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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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업종의 특징과 다른 사람들의 경영사례 등은 꼭 참고해서 파악하고 있어 야 합니다.

현지에 가기 이전에는 어떤 공부를 하셨나요? 현지에 가기 전에, 저는 취업을 위해 전전긍긍하는 복학생이었습니다. 요 즘 ‘인구론(인문계 90%가 논다)’,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표현 이 유행이죠. 이 표현들에 제가 딱 해당하는 학생이었지요. 취업에는 딱히 도 움이 되지 않는 국제관계학이 제 전공이었거든요. 그래도 전공공부를 하면서 아프리카에 관련된 공부를 많이 했었습니다. 경영학도 전공은 아니지만 경영 관련 책들을 읽은 것이 (이후 현지 진출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전공의 내 용과는 다소 동떨어진 회사 ‘경영’을 하는 동안, 기존에 쌓았던 아프리카 지역 관련 지식과 경영 지식이 많은 힘이 되었습니다.


<라즈만나> 1주년 기념행사

현지를 바라보는 한국 사람들의 관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지나친 부정론이든, 긍정론이든 어느 정도의 실체를 담고 있기에 다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르완다나 다른 아프리카 국가 특히 그 사 람들을 타자화시키는 관점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사람들은 불쌍 하니까 우리가 가서 도와줘야 해!”라는 생각은 기존 서구 제국주의 논리와 다 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행복하게 스마트폰 없이도 잘살고 있었던 사람들에 게, “너희는 스마트폰을 쓰지 않으니까 불행한 사람들이야!”라고 말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호혜적인 관점도 좋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의 중용을 지키는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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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신지윤 님과 같이 아프리카 지역과 사람들을 만나고 알아가 고 싶어 하시는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으신가요? 불쌍해하지도, 환상을 가지지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만난 많은 르 완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가난하게 살고 있지 않았습니다. 물론 비참하지도 않 고요.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행복한 것은 아니지만, 그 사람들을 불쌍하게 생 각하는 시선이 오히려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환상을 가지고 계신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도 누군가가 나의 진정한 모습을 알아주었으 면 하는 마음이 있는 것처럼, 아프리카에 대해서도 진짜 모습을 찾아가는 노 력이 있다면 그 뒤에 본인이 계획하고 있는 사업이나 프로젝트가 더 잘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Ghana

공용언어 – 영어 인구 – 약 28.3만 명 GDP – 약 $516억

Accra

가나를 만난 이정화 님 가나에서 발견한 막여행의 꿈을 서아프리카에서 실현하고 있는 막여행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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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정화 님!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해주시겠어요? 안녕하세요, 한국국제협력단 가나사무소에서 근무했던 이정화입니다. 대중 없이 막 다니는 ‘막여행’을 즐겨 해서 틈만 나면 가나 곳곳을 돌아다녔었어요. 지금은 서아프리카의 관광지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싶어서 서아프리카를 여행하고 있는 ‘막여행자’ 입니다! 한국국제협력단 9기 인턴으로 2015년 5월부터 2016년 5월까지 가나사무 소에 1년간 파견되면서, 가나에서 살아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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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1년 동안 알게 되신 가나를 소개해주시겠어요? 한국에서 가나는 샘 오취리의 고향으로서 혹은 초콜릿 브랜드로서도 유명 하죠. 또한 나이지리아, 세네갈과 함께 서아프리카의 주요 국가로 손꼽힙니다. 코코아, 금, 시아버터 등이 가나의 주요 산물이고, 선교 활동을 하시거나 수산 업에 종사하시는 한인분들이 많이 들어와 계셔서 교민 수도 총 7~800명이 된 다고 알고 있습니다. 국가면적은 한반도의 1.1배 정도 되며, 수도인 아크라를 포함하는 그레이터 아크라주를 포함하는 10개의 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앞에서 ‘막여행’ 을 좋아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가나에서 기억에 남는 여행지가 있으신가요? 가나에서 머무는 일 년이라는 시간이 아쉽지 않도록 틈만 나면 어디든 떠 나려고 노력했었습니다. 먼저, 가나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로는 유네스코 지 정 세계 문화유산인 케이프코스트와 엘미나의 성들이 있어요. 과거 노예무역 의 중심지로 기능했던 성들을 둘러보며 슬픈 역사를 반성하고 저녁엔 해변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아프리카 전통공연이나 아크로바틱 등도 볼 수 있어 기억 에 남는 곳입니다. 그리고 세계 최대의 인공호수인 볼타호와 아코솜보댐이 있 는 아코솜보에서 물놀이를 즐기거나 쏟아지는 별을 볼 수 있는 몰레 국립공 원에서 사파리를 즐길 수 있어요. 게다가, 운석이 떨어져서 형성된 호수, 보솜 취에서 하늘을 담아낸 호반을 바라보며 자연 속에 머무는 등 가나에는 즐길 만한 여러 관광지가 있습니다. 많은 곳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은 볼타 Likpe Todome 지역에서 신년 연휴를 맞이하여 처음으로 열린 패러글라이딩 축제에 간 것입니다. 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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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동쪽의 볼타지역은 가나의 다른 지역에 비해 산악지형이라서 비포장도로 가 많고 대중교통체계가 더 열악하여 접근성이 떨어집니다. 게다가 릭뻬산 꼭 대기에 리조트를 짓고 도로를 설치하던 중 재정적 문제로 공사가 중단된 산 꼭대기에서 행사가 예정되어 있어서, 뚜벅이 여행자였던 저는 엄청난 더위에 45도를 넘는 듯한 경사지고 험한 산을 등반해야 하나 좌절하고 있었죠. 그러 다가 공사장 인부의 도움으로 온 동네 청년들과 함께 굴삭기에 몸을 싣고 산 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또 처음으로 개최되는 행사여서 바람이 안전한 방향 으로 불지 않아 종일 대기하고 예정보다 하루를 더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가 져간 현금이 부족하여 숙소를 찾는 데 어려움이 있었는데, 산꼭대기에서 만난 한인분의 도움으로 안전한 호텔에 짐을 풀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관광 인 프라나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은 곳이었지만,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 고 힘든 상황 속에서 만나는 모든 가능성을 통해 배움의 기회가 열려있음을 깨달은 소중한 기억입니다.

케이프코스트 캐슬


보솜취 호수


몰레 국립공원 사파리 차량

현지인들과 만나고 일하면서 좋았거나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가요? 다른 무엇보다 제가 함께 일하거나 만났던 가나 사람들은 다 착하고 좋았 고, 어느 곳에나 다양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편견은 안 가지셨으 면 좋겠어요. 물론 언어적 어려움은 있었습니다. 제 언어의 부족함으로 인해 소통이 완벽히 되진 않았기 때문이죠. 두 번째로는 시간관념이 달라 어려움이 있었어요. 한국도 코리안 타임으로 유명하지만, 아무래도 가나는 전산처리 시 스템이 없고, 열악한 교통 사정 등의 이유로 약속 시간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 가 많았습니다. 공식행사조차도 30분에서 1시간 정도 늦게 시작하는 게 관례 화되어 있을 정도니까요. 협력업체와의 일도 제때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다반 사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무래도 인종이 다르니 튈 수밖에 없어서 성 희롱은 수시로 당했습니다. 그리고 가나 사람들은 관계를 중시하고 연락하는 것으로 그 관심을 표현하는 스타일이라 수시로 전화나 문자가 오는 것이 부 담스럽게 느껴졌었습니다. 경계심으로 인해 일부 가나 사람들과 진정성 있는 관계를 갖지 못한 것이 아쉽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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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가나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현지 사람이 있으신가요? 아크라에서 5시간 정도 떨어진 부수아비치의 Arena Lodge의 주인 Jerome 이 기억에 남습니다. Jerome은 가나인과 영국인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했는데, 하지만 “Hola!” 하며 엉덩이를 흔들고 춤추듯 와서 인사할 것 같은 스페인 혼혈의 느낌이 있었어요. 부수아비치의 해변 자체는 특별하지 않았고, 숙소도 주변 소음에 많이 노출되어 있었으나 Jerome은 특유의 유쾌함과 친절함으로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게 해주었습니다. 그 느낌이 너 무 좋아서 사무소 전 직원 워크숍 때도 그곳을 갔었는데, 워크숍 준비부터 약 20인분의 각기 다른 종류의 식사 준비 등 모든 것을 세세하게 잘 챙겨주었습 니다. 다시 가나에 간다면. 또다시 가고 싶은 곳이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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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에서의 일 년 이후 지금 하고 계신 서아프리카 여행과 그것을 통해 느끼신 것에 대해서 말씀해주시겠어요? 저는 현재 서아프리카 북단 모리타니 누아디부에 있습니다. 곧 서사하라 영토로 들어갈 것이고 이번 달 안에는 북아프리카로 분류되는 모로코에 들어 갈 예정이니 7월부터 시작된 제 서아프리카 여행은 딱 두 달 만에 막을 내리 게 되겠네요. 제 서아프리카 여행은 가나에서 시작해서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 로 작은 섬나라, 상투메프린시페를 거쳐 토고, 베냉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코 트디부아르, 말리, 세네갈, 감비아, 모리타니를 올라가는 여정이었습니다. 원래 는 유럽여행을 예정했다가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이 뭘까, 여행으로 뭘 얻고 타인에게 베풀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중 제가 사실 ‘편한 여행’ 보다는 '고생 하는 여행'을 즐겨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남아공 케이프타운 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달린 기억보다 강풍으로 케이블 카 운행이 중단되어 쪼리에 스커트를 입고 테이블 마운틴을 등반한 기억, 편 안하게 상투메프린시페 남단으로 드라이브한 기억보다 진흙 구덩이에 차가 빠져 하루 종일 땅을 파고 차를 밀었던 기억이 더 선명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귀국 후에 다시 가나로 향하는 항공권을 끊 었고 지금껏 서아프리카 길 위에서 매일매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미지의 세계, 특히 서아프리카도 관광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주변에 알리 고 싶어 여행기 ’막여행자의 막기록’ 및 블로그도 꾸준히 작성하고 있습니다. 물론 서아프리카가 관광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거나 아름다운 관광지가 많고 정보가 충분한 나라는 아닙니다. 계획이라는 것이 큰 의미가 없을 정도로 변 수가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관광의 의미를 관광지만을 둘러보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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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사람을 만나고 타인의 삶을 만나는 것으로 확장한다면 케냐, 탄자니아 등의 동아프리카나 남아공, 나미비아 등의 남아프리카뿐 아니라 서아프리카 또한 충분히 방문해 볼 가치가 있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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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이 아프리카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 나요? 여러모로 아프리카는 무관심으로 인한 무지 속에서나, 편견을 가지고 보시 는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우선 아프리카는 정말 크고 넓어서 한 단어나 이미지 등으로 정의 내려지기 힘든 큰 대륙인데 그저 못사는 대륙, 원시인들 이 살고 초원엔 동물이 뛰어다니는 그러한 나라로 인식되고 있는 것 같습니 다. 아프리카가 역사적 원인이나 기후의 영향으로 인해 타율성이 심어지고 발 전이 늦은 나라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엄청난 기회의 땅이기도 합니다.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정확하게 아프리카라는 대륙, 더 나아가 세분화된 국 가나 지역을 알고 배우고 함께하려 한다면 단순 원조의 대상으로서의 빈곤국 이 아니라 세계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 협력할 수 있는 조력자가 될 수 있 을 것입니다.


29 countries

29개국을 만난 권은정 님 아프리카, 그리고 아프리카를 넘어 세계 곳곳 소외된 곳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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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권은정 님!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안녕하세요! 저는 권은정입니다. 아프리카를 좋아해 배낭여행을 다니다가, 아프리카를 담고 싶어 영상을 배웠고, 한국과 케냐에 필름 아프리카라는 영상 제작사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20대를 온통 아프리카를 누비며 스스로 와 세상에 대해 고민하고, 다양한 것을 시도하며 보냈습니다. 현재는 아프리 카 외에도 여러 대륙을 다니며, 여러 영상을 제작하고 다양한 프로젝트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케냐에서 함께 활동한 친구들과

권은정 님은 어떤 곳을 가셨고, 어떻게 그곳들을 돌아다니게 되셨나요? 2008년부터 현재까지 아프리카 약 29개 국가에서 여행 및 체류, 취재, 취 업, 창업 등을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탐험가가 꿈이었고, 세계를 누비며 자유 롭게 살고 싶었어요.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 인터넷에서 우연히 본 사진 한 장 을 통해 아프리카에 빠져들었고, 대학 입학 후 돈을 모아 2008년도에 처음 아프리카로 배낭여행을 떠났습니다. 그 첫 여행에서 뭔지 모르겠지만, 이거라는 느낌이 있었어요. 아프리카에 서 느꼈던, 정의하지 못할 불분명함, 막연함, 무한함 이런 것들이 좋았고, 아 프리카를 계속 여행하고 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곳에서 무언가를 하고 싶었 고, 아프리카가 제 인생의 주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계속된 두 번째 아프리카 여행에서는 또 다른 아프리카의 모습들을 접하 며, 그것들을 전할 도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영상 제작을 배웠고, 그 뒤로는 캠코더를 들고 아프리카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한 번에 짧게는 2개월, 길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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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씩 주로 육로로 이동했었어요. 지금까지 가장 오래 머문 국가는 케냐와 남 아공으로, 약 6개월 정도 머물렀습니다. 케냐에서는 창업했었고, 남아공에서는 돈이 떨어져 취업도 했었습니다. 다른 국가들에서는 평균적으로 약 1개월 동 안 취재, 영상 제작을 했었고, 그중에 마음에 드는 곳에선 ‘여기서 살아볼까?’ 하는 마음으로 이런저런 시도도 하며 여행하듯 지내왔습니다. 저는 주로 현지 친구를 사귀어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조금은 더 빠르게 아프리카의 다양한 면들을 접하고 경험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부담 없이 다가가고 오며 만남과 소통의 기회를 많이 얻을 수 있었던 건, 여행자라는 정 체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첫 아프리카 여행 중, 나미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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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현지에 가기 이전에는 전공이 무엇이었고, 현지에서는 어떤 일을 하게 되셨나요? 처음 아프리카로 떠나기 전에는 생명 과학을 전공하는 학생이었어요. 콩고, 우간다, 르완다 지역에 사는 마운틴 고릴라나, 피그미 침팬지에 관심이 많았 고, 인류의 기원과 이동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그러나 학과공부를 하면서 흥 미를 느끼지 못했고, 아프리카를 여행한 이후로는 제가 봤던 아프리카를 전달 하고 싶은 욕심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다큐멘터리와 영상 제작을 배우게 되었고, 아프리카 전문 영상 제작사를 설립해서 아프리카에서 영상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사실 영상을 시작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그 길이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손 놓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지금은 영상을 너무 사랑하고, 어떤 영상을 만들어 전해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은 사업이라기보다는 자유롭게 세계 이곳저곳을 다니며 영상을 만들고 있어 요. 제 꿈은 어릴 적부터 탐험가였고, 지금은 그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이죠. 처음에는 아프리카의 진짜 모습을 전달하겠다는 명목을 자랑스럽게 말하 고 다녔지만, 사실 지금은 그렇게 말하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제가 영상을 만 드는 이유는 특별하고 거대한 사명감이 아니라, 많이 보고 접해서 깊이 있게 이해한 뒤 얻어낸 통찰을 통해 세상에 전하고 싶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사람 들이 제 영상을 통해 아프리카를 접한다면, 일반적인 시선과는 다르게 아프리 카를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동안은 제가 경험한 아프리카에 대한 자신감도 믿음도 없었어요. 그래서 많은 작품을 만들어 내지 못했는데, 이제는 정말 집중해보려고 준비하고 있습 니다.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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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은정 님의 영상에 많은 스토리가 있을 것 같아 너무 기대되는데요, 방문하셨던 국가들은 어떤 곳이었나요? 제가 방문했던 국가는 남아공, 레소토, 스와질란드, 나미비아, 보츠와나, 모 잠비크, 짐바브웨, 잠비아, 말라위, 탄자니아, 케냐, 르완다, 부룬디, 우간다, 남 수단, 수단, 에티오피아, 소말릴란드, 지부티, 이집트, 튀니지, 모로코, 서사하 라, 모리타니, 세네갈, 말리, 부르키나파소, 가나, 마다가스카르였습니다. 처음 방문한 지역은 남아프리카 지역이었습니다. 남아공, 나미비아, 보츠와나, 잠비 아 일대였는데, 벌써 8년 전이네요. 그 무엇보다 광활하고 잘 보존된 자연이 많이 기억에 남습니다. 여행 중 호주에서 온 노부부를 만났었는데, 평생 여행 했던 곳 중에서도 이곳이 제일이라고 하셨어요. 저보고 어린 나이에 벌써 여 길 오면 어떡하냐며, 다른 곳을 다 보고 봐야 하는 절경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만큼 눈에 다 담을 수 없어서 마음에 담으려고 해도 한참이 걸리는 그런 풍경들을 많이 만났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나미비아의 듄 45예요. 워낙 사막에 대한 로망이 커서, 처음 제 눈으로 사막을 보게 되는 그 순간을 정말 기다렸었거든요. 처음 보던 순간의 황홀함, 신비함이 아직도 생 생히 기억납니다. 황홀함에 관해 이야기하자니 몇 가지 이야기가 더 떠오르네요. 제 인생에 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처음 아프리 카로 향하던 비행기 안에서 일어난 일이에요. 모든 승객이 깊이 잠든 분위기 에서 저 혼자 깨어 살짝 창문 덮개를 열었는데, 빛이 너무 강하게 들어오는 거예요. 실례가 될 것 같아서 담요로 창문을 감싸서 가리고 그 안에 들어가 아래를 내다보았는데, 중동에서 홍해를 건너 아프리카 대륙으로 들어가는 바 로 그 순간이었어요. 내 힘으로 돈을 모으고, 스스로 결정해서 꿈에 그리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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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로 가고 있다는 사실이 눈 앞에 펼쳐지자 너무도 벅차게 느껴졌었어 요. 그때의 그 느낌 덕분에 지금까지 자신을 믿고 결정하며, 자주적인 삶을 살아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두 번째로 여행했던, 서아프리카 지역은 남아프리카 지역과는 사뭇 달랐어 요. 여행하기 비교적 수월했던 남아프리카와 달리 서아프리카는 여행 인프라 라고 하는 것이 없어서, 완전히 현지인처럼 이동하고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 간 나름 현지 친화적인 방식으로 여행을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서아프리카를 여행하며 정말 현지 친화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지요. 자는 것도, 먹 는 것도, 이동하는 것도 정말 힘들었고,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아, 간단한 정 보를 얻으려고 해도 한참의 시간이 걸리곤 했습니다. 덕분에 이 여행 이후로 제 여행 내공이 큰 폭으로 상승했어요.

도곤 컨트리 트래킹 중에, 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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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프리카는 인구 밀도가 높고, 크고 복잡하게 얽혀있는 도시가 많고, 삶 의 여유가 적고 다른 아프리카 지역보다도 더 빡빡하다는 느낌을 늘 받았었 어요.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지역인 이유는, 많이 부딪혔고, 많은 사람을 만났고, 또 그만큼 의외의 모습을 많이 만났기 때문이에요. 모리타니의 사하 라 사막, 세네갈의 고레섬 가는 바닷길, 말리의 도곤 컨트리 등은 정말 당장 영화의 배경으로 나와도 손색없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곳들입니다. 모든 국가를 다 말씀드릴 수는 없으니, 특별했던 곳만 더 써볼게요. 일단 케냐는 제게 너무 특별한 곳입니다. 현지에서 만난 친구들과 창업을 하며 정 말 깊이 있고 다양한 경험들을 했거든요. 케냐는 동아프리카에서 경제 규모가 가장 큰 국가이기도 하고, 크고 멋지지만, 악명 높은 도시 나이로비를 수도로 하고 있어요. 나이로비는 고지대에 위치해 일 년 내내 날씨가 너무 좋답니다. 저는 우연히 박람회에 부스를 얻어 참여했다가, 영상 제작에 뜻이 있는 친 구들을 만나 나이로비에서 함께 일을 시작했습니다.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가 그렇듯이, 꿈이 있는 청년들은 많지만, 기회가 많이 제한되어 있어요. 많은 친 구가 자기표현과 사회 참여의 수단으로 영상을 선택하곤 합니다. 저는 그 친 구들에게 영상 제작을 가르쳐 주고, 그 친구들은 저를 케냐의 곳곳으로 데려 다주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과 기회들을 만났고, 날마다 위험하다는 나이로 비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며 현지인들만 아는 정말 기상천외한 장소들도 많 이 취재할 수 있었어요. 한번은 빅토리아 호수 내에 있는 한 섬에 버스, 트럭, 오토바이, 통통 배, 소달구지 등을 타며 가는 길만 거의 일주일이 걸려 취재 를 갔던 적이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정말 큰 행복감을 느꼈었어요. 마침내 내가 꿈꾸던 아프리카에 살며, 나의 ‘일’을 해가고 있다는 느낌이 처음 들었던 순간이었거든요.


케냐 현지 친구들과 촬영 중

이집트도 인연이 많이 닿았던 국가에요. 첫 여행에서도 갔었고, 한국에서 창업했을 때 영화 프로젝트로도 방문했었어요. 두 번 모두 이집트의 곳곳을 다녔었고, 특히 두 번째 방문 때에는 전용 차량으로 사람들이 거의 가지 않는 지역에서 촬영도 많이 했었네요. 세 번째 방문 때는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제가 존경하는 피디님과 카이로에서만 한 달을 머물렀는데, 당시가 이집트 혁 명의 시기여서 민주화가 일어나는 과정을 정말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었습니 다. 그 여파로 한때 정말 위험한 국가라는 인식도 있었지만, 이집트는 관광 대국이기도 하고, 여행하기가 참 좋은 국가에요. 물가도 싸고, 교통도 편리한 편이고, 음식도 다른 중동 지역에 비해 맛있어요. 저는 쿠사리를 특히 좋아합 니다. 마카로니, 쌀, 옥수수 등을 소스와 섞어 먹는데, 먹기 간단하면서도 푸 짐하고, 저렴하고, 이집트 전역에 맛집도 많지요. 이집트는 무엇보다도 볼거리와 방문할 곳들이 많아서, 역사, 유적, 문화에 관심 있으신 분들에겐 천국일 거예요. 황무지를 달리다가도 몇천 년 된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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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덩그러니 놓여 있기도 합니다. 피라미드는 거대하고, 카이로 박물관은 정 말 위대한 역사가 고스란히 들어 있는 곳이고요. 저는 람세스의 미라를 보고, 소설 람세스에서 살아 숨 쉬던 몇천 년 전의 위대한 인물이 긴 세월 간 남아 내 앞에 있다는 사실에 정말 신비한 느낌이 들었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이렇 게 ‘시간’이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많은 것 같아요. 분명히 아주 오래전에 지난 시간이 내 앞에 그대로 놓여있다는 것에 시공간에 대한 이질 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나일강을 따라 집중된 사람들의 삶을 보는 것은 흥미롭기도 안타깝기도 하고, 흑사막, 백사막, 시와 사막 등 정말 다양한 모습의 사막을 여행할 때면 다른 별에 와 있는 듯한 느낌도 납니다. 덧붙이자면, 저는 시와 사막에서 생 애 최고의 더위를 경험했었어요. 혹시 이집트에 가신다면, 겨울철에 가시는 것이 좋습니다 ;). 그리고 후루가다, 다합 등에서는 저렴한 가격에 아름다운 홍해에서 머물며 스쿠버 다이빙 자격증을 딸 수도 있고, 바다로 나가 돌고래 랑도 놀 수 있답니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이집트는 도시와 시골의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 차이가 커요. 도시의 여성들은 오색찬란한 히잡을 쓰고 멋을 뽐 내지만, 시골의 여성들은 부르카를 쓰고 온몸을 검은 천으로 가린 채, 오직 남성과 함께일 경우에만 이동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에서도 아랍의 봄 시절에 혁명이 일어났었어요. 빈부 격차와 부의 쏠림을 더는 지켜볼 수 없었던 국민이 시위를 일으켰고, 그 와중에 한 젊은이 의 희생이 페이스북을 통해 공유되면서 시위의 규모가 커졌기 때문에 SNS 혁명이라고도 불립니다. 혁명으로 인해 정권이 두 번 바뀌었고, 그 과정에서 정말로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습니다. 지금도 이집트에 가면 많은 벽에 희생자 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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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국가를 돌아다니시면서 우리나라와 유사하다고 느끼셨던 점도 있나 요? 소말릴란드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어요. 사실 여행 금지국이라 한국인에겐 입국이 불법이고, 저는 그것을 모르고 다녀오는 바람에, 다녀온 후에 경찰서 를 좀 들락거려야 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현재 소말릴란드는 ‘여 행 금지국’이니 방문하시면 안 됩니다. 소말릴란드는 소말리아에 포함된 국가로 여겨지지만, 익히 소말리아라고 알고 있는 곳이 소말릴란드, 푼틀랜드, 소말리아 세 개로 나누어진 국가입니 다. 국경도 따로, 정부도 따로, 화폐도 따로 존재하는데 세상에는 그냥 소말리 아라고만 알려져 있습니다. 소말릴란드는 이 세 국가 중 가장 위쪽에 있어요. 국내법상 여행 금지국이어서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소말릴란드 는 접근이 좀 불편하긴 해도, 꽤 평화롭고 친절한 국가였습니다. 물론 저는 열흘 정도밖에 머물지 않았기 때문에, 소말릴란드의 진짜 모습을 많이 안다고 는 말씀드릴 수 없어요. 제가 이 국가에서 느낀 우리나라와 유사한 점은 조금 의외의 곳에 있습니 다. 말씀드리기 이전에 이해를 돕기 위해 조금 더 말씀드리면, 소말릴란드는 항공 이외의 방법으로는 접근이 어렵습니다. 저는 지부티에서 사륜구동 자동 차를 타고 반나절이 넘도록 밤새 다리 한번 못 펴보고 이동했습니다. 다른 자 동차 중에서도 사륜구동인 자동차만 갈 수 있는 이유는, 길이 없기 때문이에 요. 지부티에서 소말릴란드까지 도로가 없어요. 그야말로 태초의 자연입니다. 이렇게 자연 속을 달리다 보면 갑자기 작은 건물들이 하나둘 보이다가 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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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속처럼 갑자기 도시가 나타납니다. 그곳이 소말릴란드의 수도인 하르게 이사에요. 그래서 제가 이 국가와 도시에 대해 가장 처음 가진 이미지는 바로, 고립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땅 위에 홀로 세워진 도시의 느낌이었거든요. 길로 다니며 만나고 이야기하는 사람마다, 제가 외국인이라는 것에 매우 신기하고 즐거워했어요. 공통으로 많이 들었던 질문은, “소말릴란드를 어떻게 알았냐”, “너희 나라 사람들도 알고 있냐”, “와보니까 어떤 것 같으냐”, 제가 “좋다, 평화롭다”고 하면 크게 만족하며, 국가에 대한 자랑과 자부심을 드러내 곤 했어요. 의아스럽게도 고립된 외로움을 넘어서 알려지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보며 한국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많은 사람 속에서도 늘 외로 운 사람들, 개성이 무시되는 사회에서 자기 자신으로 알려지고 인정받고 싶은 그 발버둥이 왠지 비슷하게 느껴졌어요. 제가 이곳에 있을 때, 우리나라에서는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영문도 모르고 있다가 많은 관심과 위로를 받았었어요. 이로써 세계 지도에 없는 국가, 지구 위 어느 한 편에 조용히 자리하여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국 가의 사람들도, 우리의 아픔을 많이 걱정해 주었었다는 걸 전해드리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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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현지에서 힘들었던 순간도 있었을 텐데, 언제였나요? 아프리카를 여행할수록, 그리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겁도 늘어서 조심성도 늘고, 여러 상황에 노련해지는 것도 있지만 늘 힘든 순간들은 찾아오는 것 같 아요. 사하라 사막에서 폭풍우가 와서 밤새 침낭 아래서 벌벌 떨어야 했을 때, 불편하고 더러운 버스나 기차에서 몇십 시간을 다리 한번 못 펴고 이동해야 할 때, 살인적인 더위를 만날 때, 상식이 통하지 않고 뇌물과 권력, 게으름에 만 익숙해져서 너무 뻔뻔한 공무원들을 만날 때, 아시아인을 비하하는 사람들 이나, 외국인이라서 사기 치고 괴롭히는 사람들을 만날 때, 힘없이 당해야만 하고 해결책이 없을 때, 여자라고 무시하거나 노골적으로 들이대는 남자들을 접할 때 등등 많은 힘든 순간들이 있었어요. 하지만 가장 힘들었을 때는 실질적인 위협을 느꼈을 때인 것 같아요. 그로 인해서 제가 아프리카를 두려워하거나 미워하게 되는 것이 싫었거든요. 시내 에서 돌아와 풀려 있는 자물쇠와 열려있는 가방 뒷주머니를 볼 때마다 느낀 작은 두려움과 좌절들, 늘 의심해야 하고 조심해야 하는 상황에 대한 좌절감, 버스 강도를 당했을 때 아무리 애원해도 생필품까지 가지고 가버리는 그들을 보며 절망스럽고 야속했던 순간, 가지고 있던 모든 장비와 귀중품을 털리고 나중에 그 일이 친하게 지냈던 친구의 소행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친절하 게 다가오던 사람의 일행에게 납치 시도를 당했을 때, 여성이라 겪게 되는 불 쾌한 순간들, 길을 잘못 들었는데 반대쪽에서 돌을 던지며 위협하다 막대와 유리 조각을 가지고 길을 건너오려던 강도들을 바라보던 때, 버스에서 영상을 찍다가 버스 안의 모든 사람이 찍지 말라며 소리치고 협박했을 때 그 눈빛들, 밤늦게 외진 곳에서 숙소를 찾다가 앞에서 사람이 걸어올 때의 두려움, 그 외 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배신감을 느끼고, 두려움을 느끼고, 당장 떠나고 싶었


던 순간들이 정말 많았어요. 그렇지만 계속 아프리카로 향하는 이유는, 뻔한 이야기일지 몰라도 나쁜 일을 뛰어넘는 훨씬 좋은 사람들, 미소들, 친절들과 도움들, 이해와 교류와 평

에티오피아에서 지부티 가는 길

화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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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권은정 님과 같이 아프리카 지역과 사람들을 만나고 알아가 고 싶어 하시는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으신가요? 제가 누군가에게 조언 드릴 수 있을 만큼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 는 않아요. 두루 다니고 다양한 경험을 하기는 했지만, 깊이가 깊지는 않거든 요. 한편으로는 제 편견이나 검증되지 않은 정보들을 말씀드린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도 되네요. 그냥 편하게 거를 것은 거르시면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아프리카에 대해 그냥 다른 대륙과 같이, 편견 없이 접하 시면 좋을 것 같아요. 다만 여행이나 사업을 준비하신다면, 조심하실 부분들 은 미리 찾아보시고 주의를 기울이시면 더 뜻깊은 여러분의 아프리카를 만나 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언어를 조금이라도 배워가신다면, 훨씬 따뜻한 아프리카를 만나게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공용언어 – 프랑스어

Senegal

인구 – 약 15.9백만 명 GDP – 약 $197억

Dakar

세네갈을 만난 권이은정 님 서아프리카 춤과 사랑에 빠져 세네갈로 춤 유학을 떠난 무용수. “저와 함께 아프리칸 댄스 를 추며 해방감과 무아지경을 느껴보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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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권이은정 님!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해주시겠어요? 안녕하세요? 젬베 댄스와 사바르 댄스라는 서아프리카 춤을 추는 무용수 권이은정입니다. 세네갈의 공용어 월로프(Wolof)어로 새둥지를 의미하는 ‘따 그’라는 댄스컴퍼니를 운영하고 있으며, 주로 공연이나 워크숍을 통해 아프리 칸 댄스를 알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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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계기로 어떤 나라에 거주하시게 되었나요? 아프리카 춤을 좀 더 제대로 배워보고 싶어서 세네갈에 춤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칸 댄스를 춘 지는 3년 가까이 된 시점이었지만, 미래에 대한 비전이 불투명한 때였고 비용도 많이 들다 보니 떠나기까지 고민이 많 았습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아프리칸 댄스 강사로 일하기 시작했던 마음의 고향 은평에서 수강생을 비롯한 여러 친구들이 비행기 삯을 모아주는 등 물 심양면으로 도와주어 유학을 결심할 수 있었습니다. 올 해 초와 여름, 두 번 에 걸쳐 석 달 남짓 세네갈에 머물렀습니다. 유학을 가기 전에는 13~17세기 서아프리카 말리 제국에서 유래된 젬베(Djembe) 댄스 혹은 만뎅(Mandingue) 댄스를 주로 배우고 추곤 했는데, 서아프리카 중에서도 세네갈과 감비아에서 만 추는 ‘사바르(Sabar) 댄스’를 배우고 싶어 세네갈을 선택했어요.

투밥잘라우에서 만난 기니 친구들과 젬베 댄스를 추고 나서 한껏 신이 난 모습


세네갈 전통 배 ‘갈’이 여러 채 떠있는 다카르 응고르 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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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세네갈에서 거주하셨던 도시는 어디였나요? 첫 번째 방문 때 주로 있었던 곳은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였고 두 번째 방 문지는 워크숍이 진행된 투밥잘라우라는 어촌이라, 두 곳을 비교하며 말씀드 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카르는 수도답게 번듯한 건물도 많고 전반적으로 복잡다단합니다. 미대륙과 유럽에서 가깝기 때문에 응고르 해변과 같은 특정 휴양지역에는 관광객도 꽤 있습니다. 물론 다카르에서나 투밥잘라우에서나 저 같은 동양인은 거의 만난 적이 없지만요. 다른 지역에 비해서는 포장도로가 많이 깔려있는 편이겠지만 수많은 교통수단을 소화하기에는 역부족이라 퇴근 시간인 러시아워에는 교통체증이 어마어마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길에는 짐이나 쓰레기를 실어 나르는 말이나 당나귀가 흔 하고 길바닥에는 말똥이 널려있어서, 도시 특유의 빠른 속도와 재미있는 부조 화를 이룹니다. 인터넷도 생각보다 잘 됩니다. 형편이 나은 가정의 경우 공유 기를 쓰는 집이 많고 시내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브리오쉬 도레(Brioche Dorée) 같은 패스트푸드점에서도 무료 와이파이를 제공하며 휴대폰으로 현지 통신사의 크레딧을 사면 길거리에서도 3G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어요. 투밥잘라우는 수도인 다카르에서 4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그림같이 아 름다운 바닷가 마을이에요. 마을 전체가 휴양지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관광 객의 소비 수준에 맞춰 물건값이 오히려 다카르보다 비싼 경우도 있어요. 물 론 동네 친구들과 친해지면 현지인들만 찾는 값싸고 허름하지만, 맛 좋은 식 당도 곳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외관 자체가 예술적으로 아름다운 데 다가 다양한 예술 활동까지 체험할 수 있는 소보바데(Sobo Bade) 호텔이 관 광객들 사이에서는 유명하고, 저처럼 춤추는 사람들에게는 모래학교라는 뜻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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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꼴 데 사블(Ecole des Sables)이 있어 꿈에 그리는 곳입니다. 개발의 영향이 덜 미친 작은 시골 마을이기 때문에 주변 자연환경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무용워크숍의 일환으로 바오밥 나무가 즐비한 광활한 들판 같은 곳으 로 야외활동을 나갈 때면 그 광경에 압도당하곤 했어요. 하지만 인터넷이 거 의 안 되어서 ‘빨리빨리’에 익숙한 한국인답게 처음에는 엄청 답답해했던 기 억이 납니다.

육교 위에서 찍은 다카르 시내 도로


투밥잘라우 바닷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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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네갈에서 생활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배움이 있었다면 어떤 것 이 있으셨나요? Seize the day! 지금, 이 순간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최대한 즐기기. 세 네갈 사람들이 마치 내일은 없는 것처럼 사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편해지고 ‘어쩜 저럴 수 있을까?’라며 신기해했는데 곧 나름대로 이유를 알 수 있었습 니다. 대답은 바로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였어요. 아프리카 사람들이 저축을 하지 않는다고 한국인들이 무시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언제 죽을지도 모르 는데 죽으라고 저금을 하는 게 사실은 더 이상한 일이지요. 그곳에서는 죽음 이 일상적이었어요. 그리고 그걸 아무도 쉬쉬하거나 터부시하지 않더라고요. 저와 같은 또래인 친구들은 거의 병으로 부모님을 잃었기 때문에 기일에 맞 춰 함께 묘지에 가기도 했어요. 한국에 돌아와 보니 다들 절대 죽지 않을 것처럼 기꺼이 혹사당하면서 하 루하루를 쪼개며 살고 있는데, 좀 극단적으로 얘기하자면 마치 꼭두각시놀음 에 다 같이 놀아 나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지금 노예처럼 살면 언젠지 모 를 미래에 왕처럼 살 수 있을 것처럼 말이에요. 하지만 언제 죽을 줄 누가 아 나요? 서울 한복판에서도 아무 이유 없이 죽임당할 수 있는데.

국제무용학교 에꼴 데 사블르


Pa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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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h'Allah”라는 말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들을 수 있습니다. ‘신의 뜻 대로’라는 뜻입니다. 한 시간 뒤에 만나자고 할 때조차도 “이따 봐, 인샬라!” 라고 할 정도예요. 한 시간 뒤에 내가 너랑 만날 수 있을지는 신만이 알 수 있다는 얘기지요. 물론, 내가 너랑 한 시간 뒤에 만나지 못하고 늦거나 아예 안 나온 것은 내가 게으르거나 너와의 약속을 가벼이 여겨서가 아니라 그것 이 신이 정해놓은 만남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며 자기 편한 대로 악용을 할 수 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한 시간 뒤에 너를 만날 수 있는지는 정말 신밖에 모르는 것 아닌가요? 갑자기 심한 복통으로 바닥을 구를 수도, 너무나 좋은 기회가 생겨 다른 곳으로 급히 달려가게 될 수도, 심지어는 택시에 치여 목숨 을 잃을 수도 있는 거니까요. 한 시간 뒤도 불명확한데 하물며 우리는 3년, 5 년 계획을 비롯해 노후 계획을 꼼꼼히 세우지 못해 안달입니다. 물론 사회의 속도가 너무 다르긴 하지요. 그래도 한국에서는 늘 철이 없고 정신 못 차리는 사람으로 여겨지던 제가, 그곳에 가니 ‘정상’이 된다는 게 재미있었고,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사는 그 모습이 참 자연스럽게 여겨졌어요.

2015 캠프 아프리카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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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네갈에서 춤 유학을 하며 겪었던 문화적인 특징이 있나요? 세네갈 사람들은 춤과 음악을 정말 뼛속 깊이 사랑하는 것 같아요. 길거리 를 지나가던 드러머들이 즉흥적으로 연주를 해도 단 한 명도 시끄럽다고 뭐 라 하지 않아요. 오히려 바로 놀이판이 형성되면서 여기저기서 춤꾼이 뛰어나 오고 환호성과 웃음이 이어지며 지나가던 사람들은 잘 추는 사람의 옷이나 입에 꼬깃꼬깃한 지폐를 꽂아줍니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행복하고 부러운 장 면이기도 합니다. 사바르 음악이 삶의 모든 부분에 녹아있기 때문에 정치적인 행사든, 개인적인 잔치든, 운동경기가 열리든 간에 무조건 사바르 음악이 함 께 합니다. 음악이 함께 한다는 것은 곧 춤이 함께 한다는 뜻이니 웃음 또한 끊이지 않겠지요? 그래서 경제적으로는 어려워도 어떻게 보면 행복지수는 우 리보다 더 높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한 가지, 아름다움을 정말 중시하는 문화입니다. 금요일만 되면 주말까 지 화려한 의상을 차려입은 사람들로 온 도시가 반짝거립니다. 오늘만 살 것 처럼 현재에 충실하다고 했던 것과 맥락이 닿아있는 것 같아요. 당장 먹고 살 기가 힘들어도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름답게 빛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가 봐요. 한국에서는 아름다움을 너무 드러낼 경우에는 외모에만 치중을 한다고 비난을 받지만, 세네갈에서는 앞뒤 따지지 않고 직설적으로 아 름다움을 한껏 뽐내는 게 충격적이었어요. 처음에는 입이 떡 벌어졌지만 나중 에는 이 역시 너무나 건강하고 자연스럽게 다가오더라고요. ‘내가 예쁘고 싶다 는데, 누가 나를 말릴쏘냐? 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라는 느낌이랄까? 저 도 한국이었으면 절대 입지 않았을 옷을 많이 입고 즐기기도 했습니다. 한국 에 와서도 은근슬쩍 입고 다니고 있고요.

사자를 의미하는 심브 공연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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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네갈 사람들에게서 배워오고 싶은 점이 있다면 무엇이 있으세요? 웃음이든 칭찬이든 표현이 풍부합니다.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문화이기도 하고 상대방을 인정해주는 마음도 매우 후하기 때문에 예쁘게 치장을 한 사 람을 보면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하며 상대방의 아름다움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아요. 제가 농담으로 자존감이 떨어지고 우울한 마음이 들면 세네갈 로 가면 된다고 하는 게 여기서 나온 말이에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눈 치를 보고 나 또한 남을 평가하는 게 익숙한 문화에서 살다 보면 남이나 나 를 대하는 태도 또한 경직되고 날카로워지는데, 서로에게 날을 세우지 않고 별것도 아닌 일에 박장대소를 하며 작은 선의에도 찬사를 멈추지 않는 세네 갈 사람들의 자세에 정말 많이 치유를 받고 돌아온 것 같습니다.




Tanzania

공용언어 – 스와힐리어, 영어 인구 – 약 50백만 명 GDP – 약 $567억

Zanzibar

탄자니아를 만난 임빛나 님 Teacher Nuru로 2년간 탄자니아에서 지냈던 바둑과 수학, 수영 그리고 운동을 좋아하는 반짝반짝한 임빛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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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자기소개와 현재 하고 계신 일을 소개해주시겠어요?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의 자라나는 새싹들을 가르치는 초등교사 임빛나입 니다. 초등학교 6학년 담임을 맡아 매일 매일 정신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습 니다. 대학 시절에는, 교환학생으로 일본의 효고켄에서 1년 정도 지냈었고, 졸업 후, 중국의 하남성의 한 국제학교에서 교사로 1년 근무했었습니다. 그 후에, KOICA 봉사단으로 2년간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Zanzibar(잔지바르) 라는 섬 의 한 공립 중등학교에서 수학 교사로 2년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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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니아에서 구체적으로 거주하셨던 도시는 어디이고 그곳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저는 잔지바르에서 지냈어요. 한국으로 비교하자면 제주도 같은 곳이지요. 굉장히 관광지로 유명하고, 제가 지금까지 봤던 제일 예쁜 바다와 하늘이 있 는 곳입니다. 하지만, 무슬림이 99% 되는 곳이라 대부분의 여성들이 머리카 락을 가리고 긴치마를 입지요. 또, 본토와 다르게 조금 피부색도 밝고 이국적 인 사람들도 많이 보인답니다. 그래서 무슬림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 에, 잔지바르 섬에서는 돼지고기를 공식적으로 파는 곳이 단 한 곳도 없어요. 가끔은 돼지고기를 먹는 사람까지도 이상하게 봐요~ 학생들이 저에게 물어본 것 중 하나는 “선생님은 돼지고기 먹어요?”라는 질문. ㅋㅋ 먹지만 먹는다고 대답하기 어색한 느낌.

잔지바르의 예쁜 바다


그뿐만 아니라 탄자니아 내륙에서 비자를 받아도, 잔지바르에 들어온다면 다시 한번 더, 출입국 확인을 받아야 합니다. 같은 나라지만, 잔지바르 대통령 이 따로 있기 때문에 무언가 한나라 안의 두 명의 지도자 같은 느낌이 들기 도 하죠. 검은색 히잡 등을 가리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신비스럽기도 하고, 답답해 보이기도 하지만. 잔지바르의 고집스러움과 특유의 분위기를 느 낄 수 있을 겁니다. 특히 (잔지바르는) 문이 참 예쁜 곳이에요. 예전에는 그 섬에 코끼리가 살아서 코끼리를 방어하는 용으로 문에 뾰쪽한 가시 모양의 문양이 있습니다. 그 문양이 집집마다 다르기에 그런 문을 보는 재미도 있어 요 ^^ 물론 이 섬에 지금 코끼리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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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에서 생활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배움이 있었다면 어떤 것이 있으셨나요? Haraka haraka haina baraka. (하라카 하라카 하이나 바라카. : 빨리빨리 하 는 것은 은혜가 없다) 현지 속담 중 유명한 것 중 하나지요. 그곳의 문화가 워낙 천천히 (pole pole: 폴레폴레) 문화이어서, 처음에는 답답하기도 했고, 혼 자서 조바심을 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또 그곳의 삶을 살다 보니, 정확한 시 간에 올 수 없는 교통상황 (한국 같은 지하철, 버스 등등 교통시설 및 안내 시스템은 아직 먼 나라 이야기죠), 현지의 환경들이 이해되어갔지요. 바쁜 삶 을 살았던 저에게, 친구와 길에서 안부를 물으며 수다 떠는 것, 천천히 장을 보는 것, 해가 지는 바다를 바라보는 것, 취미를 마음껏 즐기는 것,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기 위해서 스스로 요리를 하나씩 해보는 것 (심지어, 생선 살과 오징어 등을 넣고 어묵을 직접 튀기기도 했고요, 밀가루 반죽으로 떡도 만들 어서 떡볶이도 해 먹었습니다.) 등 마음의 여유와 무엇이든 혼자서 할 수 있 다는 씩씩함을 얻었습니다.

자신의 전공이나 전문 분야의 관점에서 활동하신 국가의 현재 상황을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학교에서의 공교육이 정말 부실(?)합니다. 우선 공립학교의 교사들의 봉급 이 낮기 때문에.. (교사들 한 달 월급이 100~150$ 정도입니다) 다들 직업이 두 개가 되지요. 그러니까, 수업 시간에 잘 들어가지 않고, 수업도 그냥 칠판 에 적어 놓고 학생들에게 공책에 옮겨 적으라고 하는... 식의 수업이 정~말~ 많아요. (물론 100%는 아니겠지만, 많은 교사들이 이렇습니다. ㅠㅠ) 특히,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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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 과학 교사들의 수가 너무나 부족한 실정이죠. 그래서 수학교사였던 제가 일주일에 30시 수의 수업을 하게 되었답니다.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들을 보 면 안타까운 마음에 한 반 한 반 늘리다 보니까요. 또, 탄자니아의 공용어는 스와힐리어와 영어 이렇게 두 가지입니다. 초등학교에서는 스와힐리어로 된 교재와 스와힐리어로 공부를 하다가 중학생이 되면 갑자기 교과서도 영어로 바뀌고서, (스와힐리어 제외한) 모든 교과목을 영어로 배워야 하기 때문에 어 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임빛나님이 계시던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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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니아에서 가장 기쁘고 행복했었던 순간은 언제인지 알려주시겠어요? 돌이켜 생각하면 매 순간순간이 행복했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미화되는 걸 수도 있고요 ㅋㅋ ) 매일 가는 학교 수업에서 시수가 너 무 많아서 갔다 오면 녹초가 되긴 했지만, 한 반에 70명인 학생들과 처음에 는 어색해하며 더듬거리는 영어와 스와힐리어로 수업을 했었는데 점차 스와 힐리어도 익숙해지니 학생들도 제 수업에 적응을 하면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이니 기뻤습니다. 틈틈이 가르친 한국어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는 학생들의 사랑스러움도 있었고요. 선물이라며 예쁜 히비스커스를 꺾어다 준 학생들의 마음도 참 예뻤습니다. 숙제를 다 하고서 더 하고 싶어서 질문하는 학생들 덕분에, 교사의 보람을 마음껏 느끼고 왔습니다. 공부해서 남에게 주 는 교사가, 부족한 탄자니아에서, 보잘것없는 얕은 지식으로 아이들에게 도움 이 되었던 것도 기뻤습니다. 강한 햇볕에 검게 타고, 땀이 나서 꼬질꼬질한 모습이라도 선생님은 예쁘다고 치켜세워주는 학생들이 있어서 2년이라는 시 간이 정말 너무나 빨리 갔습니다. 언젠가는 잊힐 수도 있겠지만 그 시골 탄자 니아 학생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고 와서 행복했었습니다.

교무실 건축 세레모니를 하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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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과 함께 만나고 일하면서 좋았던 점 또는 애로사항이 있으셨나요? 제가 근무했던 학교에는 교무실이 없어서, 프로젝트 사업을 진행하였습니 다. 바로! 교무실 건축! 이었죠. 교육전공자인 제가 건축에는 문외한이었지만, 사업비를 받고 진행하기 위해서는 현지에서 집을 짓는 과정과 기술자들을 각 자 만나서 임금협상 등을 해야 했죠. 20피트*40피트의 교무실 1층 건물을 짓 는데, 위치 선정부터, 대략적인 형태까지 학교 선생님들과 상의하고 교장 선 생님, 교감 선생님의 의견을 조율 후에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중간 에, ‘좀 더 교무실을 크게 짓는 건 어떠냐’부터 애초에 계획에 없었던 전봇대 를 세우자 등 여러 가지 요구사항도 있었습니다. 정해진 예산, 그것도 미리 계획했던 부분에서의 예산밖에 없는데 자꾸 요구하는 선생님들에게 전 단호 하게 ‘안 됩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었죠. 아무리 고민해도 안 되기 때문에 갑 자기 생겨나는 부탁과 요구? 들이 힘들었었죠. 하지만, 또, 안 된다고 하면 금 방 수긍하거나, 다른 대안을 생각해보는 선생님들이 있어서 무사히 교무실 건 축을 할 수 있었답니다. 건축 자재를 사러, 나무 목재상, 시멘트 공장 등등을 찾아다닐 때면, 동양 인 여자가 와서 기웃기웃하니깐, 자꾸 더 높은 가격을 불러서 속상할 때도 있 었습니다. (바가지? 라고 하죠 ㅋㅋ) 하지만 그럴 땐, 갈고 닦은 스와힐리어로 이건 탄자니아의 미래를 위한 일을 하는 거야. 라고 하면, 대부분의 현지인 사장님들은 최대한 깎아주었습니다. 철저하지 않은 시간약속 개념으로 인해서 두 번 세 번 적은 계약서들을 앞세우며 사채업자 마냥 정해진 기한 안에 공 사를 마무리 하라고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독촉에도 묵묵히 자기 페이스를 지키는 뚝심이 있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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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임빛나 님과 같이 아프리카 지역과 사람들을 만나고 알아가 고 싶어 하시는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으신가요? 아프리카에서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고들 말합니다. 처음에 는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었지만, 너무 과다한 열정도, 그렇다고 너무 좌절하지도 말고 묵묵히 지내다 보면 조금씩 이해 가지 않을까 해요. 무 엇인가 하다 보면 안 될 것 같은 것도 될 수도 있고, 금방 될 줄 알았는데 안 되기도 하는 게 아프리카의 삶이니까요. 2년의 기간으로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지만, 탄자니아에 발을 넣는 순간 TIT. 입니다. (This is Tanzania) 조급해하 지 마세요. 한국처럼 재빠른 곳에서는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조금만 주위를 보는 마음의 여유를 갖고 할 일이 있을 때는 자꾸자꾸 반복해서 채근 한다면 계획한 대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주 아주 기본이지만, 그곳의 문 화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마음도 필요한 거 같아요. 바꾸려 하는 것보다 그 냥 거기서 같이 생활하며 지내다 보면 느끼고 알게 되는 게 더 많아질 듯!


Uganda

공용언어 – 영어, 우간다어

인구 – 약 37.7백만 명 GDP – 약 $276억

Kampala

우간다를 만난 김영일 님 안녕하세요! 세계를 품고 싶은 청년 김영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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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자기소개와 현재 하고 계신 공부를 소개해주시겠어요? 안녕하세요. 현재 연세대학교 경제학과에 재학 중인 김영일이라고 합니다. 아프리카에 가기 전까지는 그냥 학부생으로 경제학을 공부했었는데, 다녀와서 좀 더 구체적인 비전이 생겨서 현재는 석사과정 연계하고 있습니다. 저는 2015년 1월 동아프리카에 위치한 ‘우간다’라는 나라에 방문했습니다. 제가 그곳에 간 첫 번째 이유는 ‘선교’였고요. 물론 그 전에 ‘빈곤’이나 ‘국제 개발’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여러 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또 ‘우간다’ 를 가기 전에 좀 더 나의 관심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 목적도 있었지만, 첫 번째는 ‘선교’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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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하셨던 우간다를 소개해주시겠어요? 우간다를 단 몇 줄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부족하지만, 할 수 있는 만큼 소 개해드리고 싶네요. 간단히 객관적인 정보와 주관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네요. 수도는 캄팔라고 날씨는 건기와 우기가 있습니다. 언어는 영어와 스와힐리 그리고 바간다 킹덤(중앙부족)의 언어였던 ‘루간다’도 함께 사용한답 니다. 이런 객관적인 정보들은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정보들이니 여 기까지만 간단히 설명하고 좀 더 주관적인, 제가 경험한 것들에 대해서 말씀 드리고 싶어요. 우선 우간다는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심지어는 영국의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이 ‘아프리카의 진주’라고 말했답니다. 물론 직접 와서 보셔야 제대로 느 끼실 수 있겠지만, 여건상 사진으로라도 보시면 정말 그 자연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동시에 느끼실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리고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면, 정말 착하답니다. 사실, 저는 처음 우간다에 갔을 때 흑인에 대한 편 견과 두려움이 있었는데 지내고 보니 완전히 없어졌어요. ‘우간다’라는 나라 안에 45개가 넘는 부족이 있다 보니 같은 흑인이라 해도 문화와 언어가 다른 경우가 허다하답니다. 그렇기에 더욱 서로를 이해할 줄 알고 친근하게 대하더 라고요.


위와는 좀 다르게 우간다는 2가지 상처를 가지고 있어요. 물론 이 또한 저의 주관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말씀드리는 거지만, 그 2가지는 노예제도와 식민지 제도랍니다. 우선 노예제도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저와 같은 곳에 있었던 한 인류학자분이 말씀하시길 (영국이) 5천만에서 1억가까이 되는 남성 들을 (자기 나라로) 데려갔다고 하더라고요. 일을 잘할 수 있는, 힘 좋은, 건 강한 성인 남자들을… 결과적으로 남은 여성과 아이들이 경제, 생산 활동을 맡아서 한 거죠. 물 론 시대가 변화했지만 아직까지도 여성들이 밭을 갈고 일을 하는 경우를 쉽 게 볼 수 있더라고요. 다음으로는 식민지 제도, 우간다는 영국한테 식민지배 를 받았는데요.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와는 조금 다르게 우간다 사람들은 영 국을 따라 하기를 좋아하고 우리나라에서처럼 ‘반일감정’ 보다는 친근하게 생 각하더라고요. 예를 들면, 영국사람처럼 옷 입는 것을 따라 하는 것처럼요. 그 런데 아무래도 식민지배를 받다 보니 사람들이 위축되어 있더라고요. 제가 처 음 갔을 때도 저에게 먼저 다가와서 말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꽤나 있 었어요. 처음 우간다 국제공항에 내렸을 때는 굉장히 무서웠어요. 더군다나 비행기 에서 직접 내려 활주로를 걸어 공항 건물 안까지 들어가는 것이 저의 첫 번 째 충격이었죠. 하지만, 살다 보니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말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늘 푸른 우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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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간다에서 구체적으로 거주하셨던 도시는 어디이고 그곳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저는 우간다의 수도인 캄팔라에 살았었는데요. 정확히는 ‘무엔가’라는 동네 에 살았답니다. 이곳의 특징은 정말 빈부의 격차를 확실히 느낄 수 있는 곳입 니다. 우간다의 지리적 특성상 고지대이기 때문에 언덕이 굉장히 많은데요. 그 높은 언덕이 제가 살았던 동네에 걸쳐 있었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언덕을 기준으로 맨 아래로 가면 정말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고 위쪽으로 갈수록 부 유한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집의 규모나 차의 유무로 따져봤을 때 충분히 알 만한 것들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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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간다 현지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우간다에서는 여러 가지 일을 했답니다. 우선적으로 선교사님께서 세우신 학교에 필요한 일들을 도와드렸는데요. 말로는 학교지만 아직까지 학교라 칭 할만한 건물 없이 조금 큰 집에서 수업하고 시험 보고하는 식이랍니다. 특히 나 제가 있었던 사무실은 마당에 있는 컨테이너박스였어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굉장히 누추하고 볼품없지만, 저에게는 정말 좋은 추억이고 경험이 었답니다. 그곳에서 기본적인 행정사무를 보며 아프리카 친구들에게 컴퓨터를 알려주기도 했고, 음악학교 특성상 공연이 많기 때문에 포스터를 제작해서 이 리저리 돌아다니며 홍보하기도 했답니다. 또 YOAfrica (Youth Orchestra Africa)라는 프로그램 매니저를 맡아서 아이들을 돌보기도 했고 그 밖에 악기 관리 등 여러 가지 일은 다 해본 것 같네요.

현지에서 배우신 것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요? 제가 배웠던 것들 중에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소통’입니다. 처음 우간다에 갔을 때, 솔직히 영어를 잘 못 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각 방송사와 대사관 에 찾아가 제가 있는 학교를 홍보하고 초청장을 전달하는 중요한 일이 맡겨 졌는데요, 혼자 모든 것을 해야 해서 무서웠는데 영어도 잘 못 하는 저와 모 두 다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고 결과적으로는 모든 곳에 그 초청장을 잘 전달 했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단순히 내가 그들과 ‘대화’를 한 것이 아니라 ‘소통’을 했더라고요. 결과적으로 그때 그 경험으로 지금도 다른 외국인들과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고 생각의 폭이 더 넓어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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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김영일 님과 같이 아프리카 지역과 사람들을 만나고 알아가 고 싶어 하시는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으신가요? 부끄럽지만, 저의 실수를 다시 범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말씀드립 니다. 편견을 가지고 그들을 대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사실, 위에서도 말 씀드렸지만 저는 편견이 있었답니다. ‘그들은 후진국이고, 좋은 옷과 교통수단, 높은 빌딩이 없으니까 분명 불행할 거야, 도와줘야겠어’와 같은 정말 좋지 않 은 선입견이 있었어요. 그런데 전혀 아니었습니다. 전혀요. 우간다에 온 지 1달쯤 지나서 친구를 사귀게 되었는데 그 친구가 행복하 냐고 묻더군요. 저는 한국에서는 행복하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조금 행복한 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시 되물었어요. 그 친구의 대답은 정말 제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산산조각 내버렸습니다. 그 친구는 매일 좋은 공기 를 마실 수 있고, 아름다운 새소리와 푸른 나무들이 자기와 함께 있는데 왜 행복하지 않냐고 하더군요. 그때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진짜 행복이 아닌가?' 라고요. 이렇듯 그들은 그들만의 세계와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절대 로 우리가 어떠한 물질적인 것이나 현대 시대에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 을 기준 삼아 그들의 것을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것 그대로를 인정하 며 또 그들을 인정하고 같이 어울려 살아갈 때 지금 우리가 말하는 ‘지구촌’ 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공용언어 – 프랑스어, 아랍어

Chad

인구 – 약 12.2백만 명

N’Djaména

차드를 만난 엄민아 님 “저와 라포(rapport)를 공유하지 않으실래요?” 참여 관찰을 통해 다른 세계의 일상을 연구하는 문화인류학도입니다.

°저자의 요청으로 차드의 GDP관련 정보는 삭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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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엄민아 님!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려도 될까요?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 위치한 하제테페대학교에서 인류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엄민아라고 합니다! 대학원 과정 수료를 위해 1년간 터키어를 배우고 있을 때, 같은 반 친구들 중 차드에서 온 아부바카르 라는 남자아이가 있었어요. 방학이 다가와 다들 나름의 계획을 짜고 있는데, 아부바카르가 제게 “차드가 여행지로 인기 있는 나라는 아니지만, 인류학자로 서는 네게 흥미로운 것들이 많을 거야. 이번 여름에 오지 않을래?”라고 제안 했어요. 마침 논문조사를 위한 워밍업이 필요했던 때라 차드를 현지 조사 예 행연습지로 삼기로 결정했어요.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라는 점이 더 매력적으 로 다가왔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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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하셨던 나라인 차드는 어떤 곳인가요? ‘차드’를 인터넷 포털에서 검색하면 늘 따라붙는 수식어가 ‘아프리카의 죽 은 심장’이라는 표현입니다. 내전과 쿠데타가 완전히 종료된 지 벌써 7년 가 까이 되었는데도 말이죠. 아프리카 내에서는 정치 체제와 안보 측면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 중 하나로 꼽히는데, 서구사회에는 여전히 ‘죽은 심장’이라 불리 고 있으니 서구의 아프리카에 대한 언론의 편견과 왜곡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지요. 중앙아프리카에 위치하는 차드는 사방으로 리비아, 니제르, 나이지리아, 카 메룬, 중앙아프리카공화국 그리고 수단을 접하고 있을 정도로 광활한 국토를 소유한 나라입니다. 국토의 절반은 사막, 나머지는 열대우림 또는 초원으로 구성되어 있고 사바나 기후가 지배적입니다. 과거 아랍인들과의 교역을 통해 아랍어와 이슬람을 받아들였고, 이후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통해 프랑스어와 기독교도 유입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이 그렇듯이 민족구성도 매우 다양한데, 이러한 복잡한 사회구성에도 불구하고 민족, 언어, 종교를 둘 러싼 긴장감이나 분쟁이 존재하지 않는 평화로운 곳이 바로 차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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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드에서 방문 또는 여행했던 지역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어디인 가요? 수도 은자메나에서 차를 타고 40분가량 가면 ‘Gaoui’라는 작은 마을이 나 옵니다. 차드에 유통되는 도자기의 70% 이상을 생산하는 곳으로도 유명한 곳 이죠. Gaoui는 과거에는 사오(SAO) 왕국의[1] 수도로 기능하며 왕이 직접 통 치하였을 정도로 힘이 있었지만, 프랑스가 식민지배기 모든 국왕들의 권한을 강제로 해제하고 프랑스식 중앙집권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그저 평범한 한 마 을로 전락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프랑스는 차드에 민주주의 정치 체계가 자리 잡는데 기여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지역별로 민족구성이 상당히 다른 차드 같은 국가에서 중앙 에 특정 민족에 속한 단일 지도자를 두는 정치 시스템이 결코 더 민주주의적 일 수는 없지요. 그래서 오늘날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이 민족 간의 불화 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고요.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주민들은 저희가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곧장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자리에 앉으니 동네 아이들이 자연스레 집에 가 베개와 생수를 가지고 나오더군요. 차드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손님 대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강한 햇빛과 높은 습 도 탓에 짧은 이동으로도 쉬이 몸이 고단해지는 탓이지요. 한국에서는 낯선 이들 앞에서 자리에 누워 쉬는 것이 무척 부끄러운 행동 일 수 있지만, 차드에서는 물을 마시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이번에는 마을 유지께서 지나가는 꼬마 아이에게 돈을 쥐여주시더니 무어라 말씀을 하셨습니다. 5분 뒤 돌아온 아이의 손에는 슈퍼에서 사 온 미란다 네 [1] SAO 왕국은 여전히 차드인들의 자부심으로 자리하고 있는데, 이를 보여주는 한 예로 차드의 모든 스포츠 국가대표팀의 공식명칭이 SAO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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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이 들려있었죠. 우기에도 낮 기온이 35도 이상 올라가고 습도가 높은 차드 에서 시원한 음료수는 진수성찬만큼이나 훌륭한 손님 대접이 됩니다. Gaoui 마을 한가운데 규모는 작지만, 풍채 있는 성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하네요. 왕의 일가친척이라는 지역 유지 분과 박물관 관장님의 안내로 내부에 들어가 볼 수 있었는데, 과거 왕족들의 사진뿐만 아니라 왕자와 공주의 이름과 서열이 상세히 적힌 계보도, 왕가에서 사용된 장신구들과 화폐들이 전시되어 있더라고요.

사오왕국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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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여성들이 손으로 그린 벽화들

그 외에도 당시 왕국의 사람들의 일상을 추측해볼 수 있는 생활양식들도 재현되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벽을 가득 채운 멋진 벽화 들이었습니다. 누가 그린 것이냐 물어보니 옛날부터 마을의 여인들이 해마다 우기가 끝나고 다 같이 모여 새 벽화를 그리는 것이 일종의 의례이자, 왕족에 대한 존경의 의미라고 하더라고요. 아프리카를 여행하며 여러 번 느낀 것이지 만, 이들의 몸에는 정말이지 예술가의 기질이 잠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나누는 담소 소리와 사원에서 기도시간에 울리는 에잔 소리 외 에는 어떤 소음도 존재하지 않던 평화로운 마을, Gaoui는 차드 친구들에게조 차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특히 식민지배로 인해 얼마나 아름다운 것들 것 사라지게 되었는지 다시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모든 것 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왕족의 후손들과 마을 사람들이 여전히 옛 왕국에 대한 그리움과 존경심을 간직하며 성을 보존하려 애쓰는 데에 큰 감명을 받 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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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드에서 거주하시면서 느낀 가장 좋은 점은 무엇이고 가장 좋지 않은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문화인류학을 공부하다 보니 어떤 문화적인 요소를 보더라도 제가 살아온 사회의 풍경들과 비교를 하게 됩니다. 차드에서도 마찬가지였고요. 차 드의 가장 큰 특징은 가정 내에서 ‘남녀칠세부동석’이란 원칙이 지켜지고 있 다는 점인데, 이는 어렸을 적 저희 가족의 명절 풍경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겸상하는 법이 없었고, 차례가 끝나면 남자 친족들은 안방이나 거실에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는 한편 집안의 여자들은 주방을 벗어나지 못 하고 식사, 후식 준비와 설거지로 분주했지요. 그러는 중에 시댁, 남편에 대한 뒷담화나 서로의 사는 이야기들이 오가기도 했고요. 차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가정의 경우를 제외하곤 무슬림 인구가 지 배적인 은자메나에서 대부분의 주택은 남녀의 공간이 완전히 분리된 형태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마당에 있는 담이나 큰 나무를 기준으로 거실, 마당, 화장 실, 침실이 남녀로 구분되고, 단 음식 준비는 전적으로 여성의 업무이기 때문 에 주방은 여성 쪽 공간에 배치됩니다.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어요. 저는 아랍어도, 프랑스어도 모르기 때문에 누 군가 짧은 대화를 나누더라도 무조건 통역해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제 친구 아부바카르뿐이었거든요. 그런데 아부바 카르는 남자라 계속 저와 함께 있을 수가 없으니 답답한 거죠. 누나들이며 여 자 사촌들이며 먼 한국에서 손님이 왔다고 계속 방문을 하는데, 저는 질문을 해도 알아들을 수가 없고, 대답을 할 수도 없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기 일쑤 였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족이고, 친척인데 굳이 이렇게 불편하게 살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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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 뭐 있나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어요. 저는 여행을 할 때 그 지역 음식을 배우는 것이 취미인데, 아부바카르의 누나들에게서 차 드 음식을 배우는 동안 여자들만의 공간에 익숙해지다 보니 불편한 것들이 희한하게 편안함으로 여겨지기 시작하더라고요. 더우면 옷을 마음껏 벗어도 되고, 애써 조신한 척할 필요도 없었어요. 배가 고프면 남자들이 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자유롭게 먹을 것을 준비해 먹으면 그만이고요. 오늘날 한 국 사회를 생각하면 이조차도 지나치게 보수적이라 여겨질 수 있지만, 이들이 종교적 실천과 전통적 규범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행동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 찾은 최선책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국 사회는 편리함만 추구하다 우 리 자신조차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아쉬움도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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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에서 생활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배움이 있었다면 어떤 것이 있으셨나요? 제가 차드에 있는 동안 크게 감동한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친구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제게는 일종의 부끄러움과 문화충격을 동시에 안겨준 사건이었죠. 은자메나 외곽에 신설된 은자메나 대학교 제2캠퍼스에 방문한 날 이었습니다.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았는지, 곳곳에서 방학을 이용해 일하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같이 간 친구 세 명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발길이 닿는 곳마다 인부들에게 다가가 악수를 하며 일일이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 다. 나중에는 일하는 분들 중 한 분이 저희에게 캠퍼스 내부를 함께 돌며 일 일이 설명까지 해주셨고, 잠겨있는 강의실이나 부대시설까지 모두 들어가 볼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이 곱다는 말을 실감했죠. 심 지어 동행한 친구들은 공무원, 교육자, 사업가 집안의 자제들로 정말 살면서 고생 한번 해보지 않고 자란 이들이었습니다. 빈부나 지위에 상관없이 타인을 존중하는 습관이 몸에 베어 있음을 단번에 알 수 있었죠. 이웃 간에도 허물이 없습니다. 한번은 친구네 집에서 누나들과 점심식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꼬마 세 명이 그릇을 들고 대문을 들어섰습니다. 누나들 중 한 명이 그릇에 갖은 음식들을 채워주더군요. “혹시 친척이에요?”라고 물으니 아니랍니다. 집 앞에 있는 이슬람사원에서 쿠란 공부를 하기 위해 온 아이들 인데, 따로 식사를 챙겨오지 못하니 근처에 있는 아무 집에나 들어가 먹을 것 을 얻어가는 것이라 하더라고요. 일면식도 없는 사이인데 무언가를 주고받는 행위가 너무도 자연스러워 깜짝 놀랐습니다.


차드만의 매력을 지켜가며 미래에는 차드가 어떻게 변화할 것이라고 예상하시나요? 차드에서는 현대적인 정치 체제를 갖춘 오늘날에도 전통적인 가치와 관 습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를 기준으로 삼아 문제 를 해결하는 모습이 관찰되곤 합니다. 가령, 수도 은자메나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시골 마을에서 주민들 간에 큰 싸움이 일어났다고 하면 차드에서는 대 통령이 직접 마을을 찾아 당사자들을 화해시킵니다. 일례로, 지난해 한 8월 차드 북부지역에서 금을 채석하던 여러 마을 사람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때 데비 대통령은 7명의 장관들을 대 동하여 곧장 현지로 갔고, 각 마을의 이장들, 유가족들을 만나 국가재정으로 손해배상을 하고 당사자들을 화해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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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문화적으로는 이전에도 언급하였듯이 부에 대한 관념도 매우 다릅 니다. 이는 종교적 영향이 크다고 보는데, 차드에서 부의 과시는 가장 수치스 러운 행동 중 하나이며, 그 때문에 부자들은 소비나 관광행위를 위해 카메룬 이나 수단 등 인근 국가로 떠납니다. 이 때문에 주변국가들에서는 “차드 사람 들은 모두 부자”라는 편견이 있기도 하답니다. 그리고 약자를 부양하고, 재산을 나누는 것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데에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집안에 아픈 이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가 생기면 모든 일가친척이 모여 회의를 열고, 함께 힘을 보태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매우 적극적입니다. 차드 사람들의 일상세계를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회의와 토론을 거쳐 합의를 도출해내는 방식으로 이뤄지니 오히려 중앙집권화된 정 부 기관에 의존하는 서구인들의 삶보다 유연하고 민주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 다. 역사적으로 차드와 같이 척박한 환경에 다양한 부족들이 모여 사는 사 회에서는 생존과 발전을 위해 다른 어떤 것보다도 구성원들 간의 우호적인 관계가 중요했습니다. 그러니 정부 차원에서도 민간차원에서도 사람들 간의 관계가 상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차드는 식민 지배와 전쟁, 쿠데타, 자연재해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어오면서도 공동체 정 신을 잃지 않아 왔으니 앞으로도 그 가치를 잃지 않고 변화 속에서 균형을 유지해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Mozambique

언어 – 포르투갈어, 스와힐리어 인구 – 약 29.5백만 명 GDP – 약 $143억

Catandica

모잠비크를 만난 유승아 님 바다로 흘러간 냇물처럼 아프리카로 흘러간 이야기 – 모잠비크 에이즈/전염병 예방 교육사업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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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유승아 님. 유승아 님을 소개해주시겠어요?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인구보건복지협회에서 에티오피아 인구/보건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유승아라고 합니다. 고려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개발 협력을 전공했고, 올해 6월 중국의 푸단대학교에서 행정학 석사를 졸업했습니다. 현 재 맡고 있는 업무는 에티오피아의 적정출산율 달성을 목표로 하는 인구 및 생식 개선 캠페인 지원 사업입니다. 현지의 보건 관련 공무원 및 담당자들을 대상으로 인구 정책과 관련된 연수를 진행하거나 정책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미디어 활용사례를 공유하는 연수도 진행하고 있으며, 이러한 노력들 이 실제적으로 어떤 효과를 나타내는지를 측정하는 것이 주된 사업 내용입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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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계기로 아프리카의 어떤 나라에 거주하시게 되었나요? 저는 장기 해외봉사활동 프로그램으로 아프리카 모잠비크에서 6개월간 거 주하였습니다. 장기간 해외봉사를 다녀오는 것이 대학 생활의 목표 중 하나였 기 때문에 3학년을 마치고 2009년부터 2년간 휴학하며 모잠비크에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뒤에서 더 자세히 소개를 하겠지만 저는 한국에 있을 때부터 모 자보건과 에이즈에 관련되어 봉사활동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단기가 아 닌 최소한 6개월 이상의 중장기 프로그램을 찾고 있었고, 종교적 색채가 없는 기관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전공자가 아니면서도 제가 원하는 분야와 기간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기관은 국내에서 찾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해외 NGO를 통해 장기간 봉사활동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모잠비크는 어떤 나라인가요? 모잠비크라는 나라는 저 역시도 프로젝트 지역이 정해졌을 때 처음 들어 보게 된 생소한 국가 중 하나였습니다. 사실 모잠비크는 남아프리카공화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관광자원은 없는 탓에 상대적으로 친 숙한 국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쪽으로 아름다운 해변을 가지고 있으며 오랜 기간 포르투갈의 식민지배를 받은 탓에 모잠비크 곳곳에서 유럽 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식민지배를 벗어나면서 개발계획에 실 패한 탓에 사회적 인프라가 많이 취약한 편입니다. 예를 들어 수도 제반 시설 이나 도로 유지보수가 힘들어 도로 곳곳이 무너져내려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었는데, 실제로 모잠비크는 아프리카 대륙을 통틀어 가장 빈곤한 나라에 손 꼽히고 있으며, 특히 에이즈 감염률은 12%에 달할 정도로 심각합니다.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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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던 무렵에만 해도 반정부 시위가 종종 일어났었는데 최근에는 정치적 상 황이 많이 안정되면서 천연자원을 토대로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어 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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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잠비크에서는 어느 도시에 거주하셨었나요? 제가 거주했던 곳은 ‘카탄디카’라고 하는 작은 도시였습니다. 수도인 마푸 토에서 10시간정도 버스로 쉬지 않고 올라오면 짐바브웨와 국경을 맞대고 있 는 ‘마니카’라는 주가 있는데, 제가 6개월간 거주했던 카탄디카는 이 마니카에 서도 북쪽으로 3시간 정도 더 들어가는 작은 도시였습니다. 카탄디카는 가장 가까운 대도시가 차로 3시간을 나가야 할 정도로 산간지역이기에 이웃 도시 와의 교류가 상대적으로 적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잠비크에서 짐바브웨로 가거나 모잠비크에서 말라위로 가는 등 장거리 화물차 운전자들의 경유지처 럼 여겨지던 곳이었고, 대부분의 주민들은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식당, 숙박 업에 종사하였습니다. 모잠비크에 도착한 것은 2010년 5월이었는데, 5월의 모잠비크는 건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처음 아프리카를 생각하며 떠올렸던 뜨겁고 강렬한 느낌보 다는 사방이 버석하게 마른 건초들을 보며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실제로 제가 살던 지역 대부분의 산과 밭은 화전을 일구려는 듯 불에 그을린 흔적들 이 많이 보였고, 자라려다 그대로 말라비틀어진 황폐한 옥수수밭을 보면서 ‘모잠비크의 기근이 생각보다 심각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그 해 가 강수량도 적어 주된 수원지였던 잠베지강의 바닥이 드러났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어 프로젝트 시작과 동시에 마음 한쪽이 무거웠습니다. 누가 보아도 척박한 환경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젝트 활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주민들을 보며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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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신 동안 가장 기쁘고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아프리카에 있었을 때 저의 주된 업무는 프로젝트 리더와 현지 기관의 직 원들에게 질병과 보건위생에 대한 교육을 담당하고, 정기적으로 중고등학교에 방문해서 보건위생과 에이즈 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피임방법에 관한 교육을 진행하는 일이었습니다. 제일 처음으로 기뻤던 순간은, 카탄디카 지역의 프로 젝트 목표 달성률이 1위를 기록했을 때였습니다. 모잠비크에 도착하고 3개월이 지날 무렵, 위의 사건을 계기로 에이즈 환 자들의 커뮤니티를 지속적으로 방문하면서 환자들에게 지속적인 소득을 창출 해주는 방안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커뮤니티의 지속 가능한 발전은 결국 커뮤니티 구성원들이 어떤 식으로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존재해야 한 다고 생각했고, 그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 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직원들과 함께 과일 쨈을 만들어 시장에 판매, 소득을 창출하게 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도시라고는 하지만 워낙 작기도 했고, 대도시 마트 에서 파는 쨈은 수입산이라 가격도 비싸기 때문에 ‘주민들에게 희소성이 있으 면서도 만들기 쉽고 최대한 적은 자본으로 경제활동을 시작할 수 있는 방안’ 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활동했던 기관에 최소한 예산을 요청했고 저에 게 예산을 주면서도 반신반의하는 직원들과 함께 레몬 쨈을 만들었습니다. 가 난한 에이즈 환자들의 환경에 맞춰 숯으로 쨈을 만들었기에 장장 10시간 만 에 완성했지만 쨈이 완성됐을 때 모두가 얼싸안고 자기 일처럼 기뻐했던 모 습이 생생합니다. 직원들이 필드로 돌아가서 마을 단위로 파일럿 테스트를 진행할 에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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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 커뮤니티를 함께 선정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다시 한번 쨈을 만들고, 간 단하지만 경영학 수업시간에 배웠던 이론들을 떠올리며 시장의 상인에게 공 급하는 과정까지 진행하니 프로젝트 기간이 끝나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우리 지역으로 와줘서 고맙다는 배웅을 받으며 행복하게 마을을 떠날 수 있었습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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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신 지역학이나 개발협력의 관점에서 활동하신 모잠비크의 현재 상황은 어떤가요? 얼마 전, 친한 동생이 근무하던 연구원에서 모잠비크 공무원 대상으로 농 업기술 관련 초청 연수를 진행했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한참을 이야기하다 보니 모잠비크에 있었던 시절이 그리워져 최근 신문기사를 찾아 보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로 가겠다고 결심했을 무렵인 2008년도 당시에는 중국의 공격적인 대아프리카 원조기금에 관한 비판이 큰 이슈였습니다. 중국 정부 차원에서 진행했던 대규모 차관 공여에는 사실 아프리카의 자원확보 또 는 무기 수출, 중국인 이주와 같은 정치적 속내를 감춘 협력의 모습이었고, 국제사회의 거센 비판을 받으면서도 중국 정부는 그와 같은 의견들을 묵살한 채 여전히 그들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와 같은 ‘속 검은 유 대’는 불과 몇 달 전 중국 정부가 남중국해 분쟁을 둘러싼 갈등으로 동남아국 가들과 대립할 때 아프리카 대륙 국가들로부터 중국을 지지하는 공동성명을 이끌어 내기도 했습니다. 조금 뜬금없지만 오래된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우리나라 역시 그와 같은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유/무상원조사업의 방향을 점검해 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저는 더 이상 아프리카에 있지 않기 때문에 최근 상황이 어떤지 포털에 검색했더니 석유공사가 모잠비크에서 참여하고 있는 천연가스 개발사업이 성공적이라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같은 주제를 놓고 두 기사가 서 로 다른 입장을 취했는데, 한 기사에서는 모잠비크 배관공사 착수를 위해 한 국가스공사가 후원협력 하는 현지의 직업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이에 따라 지 역 주민들의 삶의 변화를 기대한다는 내용이었고, 다른 기사에서는 가스공사 가 모잠비크에서 확보한 천연가스를 국내가 아닌 해외에 되팔아 이득을 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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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비판하는 내용이 다뤄졌습니다. 이처럼 국제개발이라는 분야는 국제관계와 그 이득에 관해서 빛과 그림자 같은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기에 더더욱 우리나라 원조의 방향성에 대해 재고해야 할 필요성을 느 꼈으며, 한국과 모잠비크의 관계에서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올바른 방식의 원 조가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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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유승아 님과 같이 아프리카 지역과 사람들을 만나고 알아가 고 싶어 하시는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으신가요? 아프리카에서 지내면서 ‘아프리카도 사람 사는 곳이다’라는 생각을 가장 자주 했습니다. 아직 낯선 대륙임에는 분명하지만,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 만큼 다양한 이해의 충돌이 발생하고, 어떨 때는 우리가 다른 인종이 맞나 싶 을 정도로 사고가 일치하기도 합니다. 아프리카를 경험하고 싶다면 두려워하 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아프리카도 그냥 ‘사람 사는 동네’ 입니다.


언어 – 영어, 스와힐리어

Kenya

인구 – 약 46.7백만 명 GDP – 약 $883억

Nairobi

케냐를 만난 김이수 님 아프리카와의 첫 만남은 강렬했고, 아프리카는 지금의 제 삶에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아프리카와 함께했던 삶 속으로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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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이수 님!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려도 될까요? 안녕하세요, 김이수입니다. 학부 때는 아프리카 지역학 전공자로 스와힐리 어, 동아프리카 문학 등 아프리카 인문학에 대해 초점을 두고 배웠습니다. 아 프리카를 보다 깊이 있게 바라보고 싶은 생각에 월드프렌즈 NGO 단원으로 케냐에서 1여 년간 거주하였습니다. 또한, 한국개발연구원의 에티오피아 KSP 연구보조 활동을 하며 국가 간 정책 자문 프로세스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NGO 경험 및 정책 자문 연구 보조의 경험을 기반으로 UN 국제개발농업기금에서 인턴 업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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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계기로 아프리카 대륙과 만나게 되었고, 그 이후로 어떤 국가를 거주 및 방문하시게 되었나요? 17살, 케냐 자원봉사 공고를 보고 덜컥 지원하여 다녀오게 되는 것을 시 작으로 갈고리가 생겨 지금까지 아프리카와 끈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고등 학생 당시에는 제가 아프리카 케냐에 간다고 하니 주변 친구들은 위험하지 않냐, 병은 안 걸리냐 걱정이 많던데 저는 공고를 보고 그런 걱정이 들기보다 는 이건 꼭 가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그때는 케냐에 가야겠다는 특별한 이유가 있기보다는 보고 바로 끌려서 지원한 것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 가 살고 있는 세상을 벗어나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만남에 대한 궁 금증이 더 크지 않았나 싶습니다. 2주였지만 봉사활동 파견되기 전, 봉사활동 담당 간사님 덕분에 케냐에 가기 전에 케냐의 노래도 배우고, 케냐에 관련된 책을 읽으며 케냐에 대해서 서서히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배경지식을 쌓은 이후에 케냐에 가게 되어 더 마음에 와닿았고, 단기 봉사 활동을 계기로 아프리카학을 공부하기로 다짐하였습니다. 대학 입학 후에는 여름 방학에 엄마와 함께 우간다, 케냐에서 1달 동안 어린이 북캠프 프로그램을 진행하였습니다. 고등학생 때 단기 자원 봉사활동 이 현지의 학생들에게 어느 정도 지원은 되었겠지만 단기에 그치는 프로그램 이었고, 이보다 할 반짝 더 나아가 발전 시켜보고 싶었습니다. 관련해서 고민 을 하던 중, 꿈꾸는 아프리카 도서관 대장님을 통해 청소년 전문가로부터 직 접 북 프로그램 커리큘럼 만드는 것에 대해 조언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제가 직접 선생님을 위한 북캠프 가이드북, 학생들을 위한 북캠프 워크북을 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우간다에서 2곳, 케냐에서 1곳 (단기 봉사 로 방문했던 Komorock Primary School)에 방문하여 선생님들께 이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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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소개하고 그들과 함께 어린이 북캠프를 진행하였습니다. 현지에서 직접 진 행할 수 있도록 하였지만, 제가 한국에 돌아온 이후, 지금까지 지속이 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지금까지 했던 단기 봉사활동에 대한 고민, 그리고 학교에서 1년 동안 배운 것을 직접 아프리카 국가에 가서 느껴보고 싶다는 이유에 월드프렌즈 NGO 봉사단원을 지원하여 2013년에는 약 1년 동안 케냐 의 카지아도 주에서 거주하며 NGO 봉사단원으로 마사이 현지 주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우간다에서 현지인과 함께 북캠프를 진행하는 모습


나이로비 시내 모습

현지에서 생활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배움이 있었다면 어떤 것이 있으셨나요? 사람과 그 안에서의 관계를 통해 '존중'을 배웠습니다. 어딜 가나 사람을 만나고 사람과 함께 하는 일을 하겠지만, 케냐 현장에서 지역주민들과 직접 만나서 일을 하면서 사람과 관계를 통해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사업이 수월하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우선되어야 하 며, 이는 다름을 존중하며 이뤄질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서로 배경과 문화가 다른 사람끼리 일을 하는 현장에서는 소통과 존중을 할 수 있는 자세가 뒷받침이 되어 있어야 프로젝트도 잘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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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를 바라보는 한국 사람들의 관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프리카라는 ‘대륙’을 하나로 묶어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부분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곳 영국에서도 아프리카 경제개발 수업 매 시 간마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점이 아프리카는 하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각 국가마다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아프리카 전체는 이렇다고 일반화를 할 수 없다고 항상 강조하셨습니다. 이는 비단 경제적인 접근뿐만 아니라, 일반 인들이 아프리카를 바라볼 때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케냐만 하더라도 42개의 종족이 한 나라를 구성하여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안 에서도 다양함이 존재합니다. 다른 나라도 여러 종족이 어우러져 살고 있기 때문에 아프리카를 하나의 묶음으로 보기보다는 세부적으로 나눠서 바라본다 면 더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반대로, 아프 리카 국가 사람들도 아시아인을 바라보는 관점은 바뀌어야 하지 않나 생각합 니다. 중국이 아프리카 국가에 많은 투자 및 진출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은 아시아 대륙을 많이 차지하고 있는 국가이기 때문에 아시아인이 지나 가면 중국인으로 오해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인이 아니라고 말을 해도 칭총(중국인들을 낮춰 부르는 말)이라고 부르며 계속 중국인이라고 우기 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 또한 세계시민교육을 통해 세상을 더 넓게 바라보는 면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언어 – 프랑스어

Senegal

인구 – 약 15.9백만 명 GDP – 약 $197억

Kébémer

세네갈을 만난 김은빈 님 글쓴이. 김은빈 직업. 영감님처럼 동네 시찰 나가기 부업. 세네갈의 작은 마을 께베메르에서 아이들 요리교육을 하며 지내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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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간단히 자신을 소개하시면서, 현재 하고 계신 일이나 공부 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봉사단원으로서 세네갈 작은 시골 마을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은빈입니다. 대학 2학년 때 룸메이트 친구가 탄자니아에서 온 친구였어요. 그 친구의 소소한 아프리카 삶을 듣고 나서, 언 젠가 아프리카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키워왔었습니다. 50대 이후가 되어서야 올 줄 알았던 아프리카, 지금 이곳에서 저의 주업은 영감님처럼 동네 마실 나 가기, 부업은 기술교육원에서 아이들 요리 제과제빵 및 서비스 교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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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하시는 나라인 세네갈에 대해서도 소개 부탁드려도 될까요? 세네갈은 아프리카 대륙 중에서도 서쪽 끝자락 사하라 이남에 뾰족하게 튀어나온 부분으로 시작됩니다. 그 뾰족하게 튀어나온 부분이 수도인 다카르 입니다. 다카르 옆 엄청 작은 섬이 하나 있는데요, 그곳이 바로 노예무역으로 유명한 고레 섬입니다. 세네갈은 많은 나라에 의해 지배받았습니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 그리고 프랑스가 잠시 영국에 빌려준 후 곧 다시 돌려받았 고 이후 독립을 했답니다. 식민지라는 이유로 어떤 국가의 소유물인 것처럼 빌려주고 돌려받고 한다는 사실이 화가 나면서도, 얼마나 지독하게 지배를 받 았을지 조금은 상상해볼 수 있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프랑스 문화가 많이 지배하고 있고 공산품 역시 유럽산, 주로 프랑스산이라고 생각하 시면 될 것 같아요. 언어는 프랑스어가 국가 지정언어이지만 시골로 갈수록 프랑스어보다는 각각의 부족어를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있는 동네 만 해도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 프랑스어를 전혀 못 하는 친구들이 많답니다. 가장 큰 부족인 월로프, 뿔라, 세레 등 다양한 부족들이 있습니다. 아프리카가 땅이 나뉘면서 부족 단위가 아닌, 식민지배 받았던 구역을 위주로 나누어지다 보니 이웃 국가인 말리, 모리타니, 감비아 등 여러 나라에 비슷한 부족들이 흩어져 있답니다. 이곳 세네갈은 월로프 부족이 가장 컸던 이유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월로프어를 기본으로 각자의 부족어, 그리고 프랑스어까지 구사한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고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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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isir dĂŠlicieu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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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이 많은 탓인지 처음 도착했을 때 꼭 유럽 같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이곳에 오기 전 상상했던 아프리카의 모습이 아닌 꼭 서울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유명 프랜차이즈 카페나 레스토랑들은 아니지만, 그 이상의 버금가는 카페나 레스토랑이 즐비하답니다. 하지만 수도 를 벗어나 외국인들이 많지 않은 지방으로 가면 또 다른 세네갈의 참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 세네갈에 도착한 날 한 레바논인이 운영하는 케밥 집에 서 케밥을 사 먹었는데 한화로 약 7~8,000원 정도 되는 돈을 지불했더니 친 구가 얼른 불어와 월로프어를 익히라며 바가지 썼다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사실 7,000-8,000원 정도는 매우 저렴한 편이고 보편적으로 레스토랑에서 는 한화 10,000-20,000원 정도의 돈을 지불하는 것이 보편적이에요. 그만큼 외국인들의 삶은 비싼 물가를 자랑한답니다. 하지만 현지인들이 많이 이용하 는 레스토랑에 가게 된다면 한화 2,000-3,000원 정도의 반도 안 되는 금액의 식비를 지불할 수 있어요. 어떤 나라나 그렇듯 외국인으로서의 삶은 외국인 바가지 부가세가 붙는 거겠죠? 처음에는 비싼 택시와 비싼 레스토랑만 이용했었는데 비록 많이 청결하거 나 근사한 레스토랑은 아니지만, 현지인들이 자주 이용하는 레스토랑에서 밥 을 먹다 보면 그 세네갈 요리들이 구미가 당겨오곤 한답니다. 생선을 이용한 쩨부젼과 닭고기에 양파소스를 올린 야사뿔레, 땅콩버터를 이용한 마페, 토마 토소스로 이것저것 넣어 만든 꼭 리조토 같은 느낌의 다흰을 추천합니다. 대 부분의 일상식으로 쩨부젼을 많이 먹고 비싼 닭값 때문인지 야사뿔레 같은 닭요리들은 특별한날 많이들 먹더라고요. 월로프어로 “은데끼”는 아침 식사를 뜻하는 데요, 다양한 아침 메뉴 중 길거리에서 먹을 수 있는 바게트 사이에 끼워진 오믈렛이 있는데 그 맛이 금상첨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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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세네갈에서 거주하시는 도시는 어디이고, 그곳의 특징은 무엇인가 요? 제가 사는 지역은 께베메르라는 지역입니다. 북적대는 도시보다 작고 귀여 운 시골 마을에서 지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곳에서 지낼 수 있게 되어 얼마나 영광인지 모릅니다. 께베메르는 수도에서 북쪽(모리타니) 방향으로 올 라가다 보면 약 3~4시간 후 도착할 수 있는 마을입니다. 큰 도시가 아니기에 보통 수도에서 생루이나 모리타니 국경지대에 가기 위해 스쳐 지나가기 쉬운 마을이에요. 이곳 세네갈래들도 사실 많이 방문하기 보다 스쳐 지나가며 아는 곳 정도로 알더라고요. 하지만 의외로 외국인들의 방문이 잦은 편이랍니다. 그 이유는 께베메르를 스쳐 서쪽으로 40~50분 정도 향하다 보면 롱뿔이라는 바닷가와 사막이 나와요. 모로코나 이집트처럼 크고 웅장한 큰 사막이 아닌 아주 작은 사막이지만 사막에서 잘 수 있는 롯지도 있고 10분 거리의 낙타 투어도 있답니다. 사막의 미니어처 같은 느낌이랄까요? 그리고 사막에서 10분 정도 차를 타 고 더 들어가면 대서양이 나옵니다. 바다 이름은 “La plage de Lompoul” 입니 다. 롱뿔 바다를 처음 갔던 날 몇몇의 꼬마아이들이 낚시를 하고 있더라고요. 길게 실을 늘어뜨리고 생선 조각조각을 꿰어 바다로 뛰어 들어가 물고기를 낚는 방법이었어요. 몇 분 뒤 이내 아이들이 뛰어나오더니 큰 가오리를 잡았 다며 자랑을 하더라고요. 물고기를 팔 생각이 없냐는 저의 질문에 가족들과 함께 먹을 거라며 웃던 아이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나지 않습니다. 특히 그 아이가 떠오르는 이유는 저의 국적을 물어보곤 한국이라는 말에 “반기문”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왔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곳 세네갈래들은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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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중국에 대한 이해도가 높지가 않아요. 모든 아시아인을 “시노아”라고 칭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들도 제가 세네갈에 산다고 했더니 아프리카가 대 륙으로써 와 닿는 것이 아닌 한 나라처럼 모두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더라고 요. 그런 것처럼 이들에게도 아시아가 그저 한 나라처럼 중국이라고 생각하는 지 중국을 칭하는 신, 중국인을 칭하는 시노아를 많이 쓴답니다. 열심히 중국 인이 아니라며 설명하는 저를 보며 다른 한국인들이 안 지치냐고 묻던 것이 생각나네요.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감비아와 모리타니, 말리, 세네 갈이 다르듯, 월로프족, 뿔라족, 세레족이 다르듯 우리도 국가가 다르고 언어 가 다르다고 꾸준히 설명하고 있답니다. 적어도 제 주변의 친구들이 더 이상 시노아라고 하지않고 누군가가 시노아라고하면 오히려 나서서 설명해주는 것 을 보면 작은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또한 제 친구인 한 국인들이 오면 현지 친구들이 “안녕”, “고마워” 정도 인사를 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뿌듯한지 모른답니다.

께베메르의 일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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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에서 생활하시면서 가장 크게 배운 것은 어떤 것인가요? 매 순간순간이 배움이에요. 새롭고 낯선 곳에서 마주한 저 자신의 모습은 뿌듯하고 대견한 부분도 있지만 실망스럽고 초라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더 라고요. 여행을 워낙 좋아하는 편이라 외국인에 대한 선입견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었어요. 이곳에 왔었을 때도.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저 자신이 선 입견과 편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는 것 발견할 수 있었어요. 이것은 모두가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누가 이렇다, 저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제가 생각한 저 의 모습에 대한 이상향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런데 저 스스로 선입견이 적은 편인 사람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었더라고요. 물론 다른 문화 다른 가치관에서 는 여전히 많이 부딪히고 있지만, 누가 우월하다고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모두 기준점이 다르니까요.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인 것 같아요. 여전히 선입견과 편견에 대해 가장 고민스러워하고 아파하며 고민하는 부분 이에요. 하지만 스스로가 그것을 깨닫고 나니 제 곁에 친구들이 모여 있더라 고요. 그 친구들을 통해 배운 것이 많아요. 한국에서 저는 공동체 생활보다는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생활에 익숙한 사람이었어요. 주변의 몇 안 되는 친한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만 새로운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 에 대해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아요. 한국에서 가졌던 잦은 모임과 파티 에서 순수한 관계를 위한 모임보다 이권이나 이익을 위한 목적을 가지고 찾 아오는 사람들로 인해 공동체 생활에 대해 더욱 큰 회의감을 느꼈던 것 같아 요. 하지만 이곳에서 친구들의 순수한 관계 형성에 다시 공동체 생활에 대해 배워나가는 요즘이에요.


생루이 재즈 페스티벌

그러면 반대로, 현지인과 만나거나 함께 일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없으 셨나요? 현지인과 일하면서 가장 힘든 것은 의사소통이라고 생각하실 거예요. 하지 만 그것보다 더 힘든 것은 서로의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에요. 의사소통 은 사전, 번역기, 바디랭귀지를 통해 어떻게 해서든 소화할 수 있지만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일을 하다 보면 서운한 마음도 커지고 이해가 안 가는 부 분도 많거든요. 특히 한국인의 경우 시간약속에 대해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지만 이곳은 사실 한국만큼 약속시간이 잘 지켜지기가 어려워요. 또 인프 라가 아직 많이 부족한 탓인지 명절 전후로 출근을 하지 않거나 학교를 나오 지 않는 학생과 선생님들이 많아요. 이것은 오랫동안 전해져 온 습관이거나 이들에겐 당연한 것이지만 익숙하지 않은 저에게는 무례한 학생이 되거나 약 속을 지키지 않는 세네갈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지만 분명 우 리도 오랫동안 전해져 온 악습이라던가 우리 문화권 밖의 사람에게는 합리적 일 수 없는 습관들이 있을 거예요. 그것을 이해하기까지가 너무 힘이 들었었 어요.


세네갈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이곳에 오기 전과 후로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어떤 점이 있나요? 저는 제가 그렇게 나약하고 겁이 많은 사람인지 몰랐습니다. 항상 두려움 은 있었지만 두려움과 맞서 싸우려고 노력했다고 생각했거든요. 어느 날 옆집 꼬꼬마들이 집 앞에서 저를 엄청 부르더라고요. 거의 1년 만에 만난 우기철 초반이었어요. “빈따!!빈따!! 비가 와! 빗물에 목욕하자!!”

이 말에 왜 저는 겁이 났을까요. 한국에서는 비를 맞는다는 것은 옳지 못 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던 것 같아요. 잠시 두려움은 뒤로 한 채 아이들 과 옥상에서 비를 맞으며 줄넘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췄답니다. 언젠 가 어머니께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겁이 많아지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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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저에게 있어서 누구보다 용감하고 강인한 분이었기에 저 말이 이 해가 가지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옆집 꼬꼬마 소피의 빗물에 목욕하자는 말을 듣는 순간 저는 언제부터 비를 맞고 다니는 것에 대해 두려워했을까요? 젖은 옷은 빨면 되는 것이고 조금 꿉꿉하고 냄새가 나더라도 샤워하면 다 날아갈 부질없는 것들에 대해 열심히 도 두려워하고 고민을 하고 살았더라고요. 한국 에서 저의 삶은 대부분 소비중심의 관계 형성이었다면 이곳에서는 돈을 쓰지 않아도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을 배워나가는 중입니다. 왜, 그런 말 있잖아요. 커서 만나는 친구와 어릴 때 만난 친구는 조금 다르다고요. 어릴 때는 함께 지내는 시간에 있어서 돈이 필요하지 않았거든요. 함께 할 수 있는 것들로 추 억을 만들어나갔기에 더욱더 값진 것이 아니었을까요? 돈이나 물질적인 것이 아닌 시간을 단지 친구와 우리끼리만 만들어가는 거죠. 한국에서보다 조금 더 인간적인 냄새가 나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런 저의 향기가 너무 좋고요.


Sudan

언어 – 아랍어 인구 – 약 40.8백만 명 GDP – 약 $417억

Khartoum

수단을 만난 박수진 님 Small ways to change the world 세상을 바꾸는 작은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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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려도 될까요? 안녕하세요. 아버지의 직장 발령을 계기로 약 10년간 수단의 하르툼에서 거주하다가 연세대학교로 진학하여 국제통상학과에 재학 중인 박수진입니다. 현재는 인연이 닿아서 휴학 후에 아프리카인사이트에서 인턴으로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인사이트의 사업 중에서도 인식개선 사업에 가장 관심이 많은데, 이에는 수단에서 10 년 동안의 경험이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수단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아프리카에 대한 많은 편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마주한 아프리카는 저의 생각과는 많이 달랐고, 한국에서 접해온 아프리카가 현실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아프리카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아프리카인사이트에서 인턴을 하기까지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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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에서 생활했던 시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한 가지를 꼽는다면 언제일까요?

수단에서의 모든 순간이 소중했고 많은 추억이 있지만, 저는 초등학교 때새해에 돌산으로 등산을 하러 간 것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밤늦게 출발해서 등산 전 돌산 앞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서 본 별이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 속 사박사박하는 모래 소리와 등에 닿는 차가운 사막의 모래를 느끼면서 처음 본 은하수는 동화책에서 본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고

반짝이

가루를

쏟은 듯

펼쳐진

별들은

당장이라도 제 위로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습니다. 수단에서 생활하면서, 메로이의 사막, 나일강 근처 섬 등등에서도 별을 보았지만, 그날의 별만큼 인상적이고 기억에 남는 별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습니다. 수단은 등산 문화가 없어서 등산로가 없습니다. 그래서 현지인 가이드를 따라서 두려움에 아버지를 붙잡고 산을 기어 올라갔습니다. 결국 정상에 거의 다다를 때쯤 힘들고 무서워서 울음을 터트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정산에서 바라본 고요한 사막의 풍경은 참고 올라올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자, 아버지의 옷에 둘러싸여 동생과 손을 잡고 본 해돋이는 “해는 어디에서든 뜨는데 뭐하러 여기까지 올라와서 해를 봐”라는 저의 생각을 바꿔 놓았습니다. 고요한 사막 수평선 너머에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한 해는 서서히 보랏빛에서 주황빛으로 바꾸어 놓았고, 고요했던 사막에 색을 되찾아 주었습니다. 그때의 추억이 그리워서 정동진 등 해돋이가 유명한 명소들로 가족여행을 갔지만, 그때의 느낌을 되살릴 수는 없었습니다.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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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 누워서 본 별과 힘들게 기어서 올라갔던 등산에 해돋이를 보았던 한순간 한순간이 모여서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이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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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를 바라보는 한국 사람들의 관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수단인이

아니고

흑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차별을

경험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 사이에서 저의 별명은 ‘아프리카 띠까띠까’였습니다. 중학교 때 잠시 다닌 한국의 중학교에서 저는 1년이 넘는 시간동안 ‘아프리카에서 온 전학생’이라고 불렸습니다. 선생님마저도 저를 보시고는 “아 네가 아프리카에서 온 얘니”라고 물어보시고는 했습니다. “진흙쿠키 먹어봤어?”, “코끼리 타고 학교 다녀?”, “아프리카에도 인터넷이 있어?”, “아프리카어 할 줄 알아?”와 같은 질문들을 받는 것은 일상이었습니다. 그러다 방학을 맞이하여 흑인인 친구를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저는 더는 친구들에게 한국에 놀러 오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하철을 탈 때면 시선이

따가워

자리를

옮겨야만

했고,

친구를

“깜둥이”라고

부르며

수군거리는 사람들 때문에 싸움이 날뻔한 적도 있었으며, 택시에서 친구를 ‘N-word’를 사용해서 부르는 아저씨 때문에 목적지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내린 적도 있습니다. 저는 더는 친구들을 한국에서 만났을 때 부끄럽지 않고 싶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왔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고, 이상한 질문 공세에 어색한 웃음을 짓고 싶지도 않습니다. 더 많은 분들이 아프리카를 바로 봐주셨으면 합니다.

혹시 수진 님께서 경험하셨던 수단에서의 일들 중 가장 힘드셨던 일이 있었다면 무엇인가요? 수단에서 거주할 당시에는 수단의 발전되지 못한 모습, 뜨거운 열기,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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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한국이 너무 그리운 날들 때문에 불평불만도 많았고, 힘든 점도 많았습 니다 - 수압이 약해 졸졸 흐르는 물에 간신히 샤워를 한다든가, 샤워를 하다 가 갑자기 왈칵 터져 나오는 뜨거운 물에 살을 데인다든가, 한참 숙제를 하던 와중에 전기가 나가서 미처 저장하지 못한 에세이가 날아간다든가. 그러나, 이런 모든 힘든 일들을 뒤로하고 가장 힘들었던 일은 수단을 떠나는 것이었 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행이 결정되며 더없이 기뻤습니다. 지겨웠던 고 등학교를 졸업하고 수단을 벗어난다는 해방감에 신이 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졸업식 당일에 너무 울어서 모든 졸업식 사진에 눈 이 빨개지고 퉁퉁 부은 채로 나왔답니다. 수단을 떠나 한국에서 거주하고 있 는 지금도 종종 수단을 추억하며 그리워하고는 합니다. 저에게는 언제나 그리 운 제2의 고향 같으면서도 애증의 관계인 곳이어서, 떠나는 것이 그렇게도 아 쉽고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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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박수진 님과 같이 아프리카 지역과 사람들을 만나고 알아가 고 싶어 하시는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으신가요?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은 편견과 고정관념 없이 아프리카를 있는 그대로 봐주셨으면 합니다. 저도 처음에 아프리카와 흑인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수단 에 도착했었고, 그 때문에 적응하면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수단에서 살아가 면서 오랜 시간이 걸려 그 편견과 고정관념을 바꾸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처 음부터 열린 마음으로 다가갔으면 조금 더 빨리 적응하고 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또한 아프리카는 다양한 매력이 많은 55개국으로 이루어진 대륙입니다. 각 아프리카 국가마다 다른 매력이 있기 때문에 저의 수단에서의 경험이 ‘아 프리카’를 만나는 것에 대한 조언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느 나라에 가든 그 지역의 사람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다가가셨으면 합니다. 어린 시절 철없는 마음에 섣부른 동정으로 수단의 한 아이를 상처 입힌 적이 있습니다. 다른 분들은 제가 저질렀던 실수를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아.만.한 아프리카를 만난 한국인

발 행 인 허성용 편

심균호

박수진

한승윤

발행일

2018년 11월 1일 초판 1쇄

발행처

아프리카인사이트

서울시 서초구 언남길 15-3 신성빌딩 7층

02-6082-0801

이메일

contact@africainsight.org

홈페이지 www.africainsight.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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